소설리스트

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5화 (5/102)

5. 상식이 통하는 학교2017.05.25.

“이수연 선생님이십니까?”

유정은 벌써 그가 누군지 알아채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 네, 맞는데요.”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볼을 살짝 붉히며 답했다. 무단 침입을 하긴 했지만, 남자의 얼굴은 그것을 다 잊게 해줄 만큼 멋있었다.

짙은 눈썹과 맑게 뜨여진 두 눈, 쭉 뻗은 코와 날렵한 턱선. 인위적으로 조각을 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은 비현실적인 외모.

“죄송합니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안 받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 기다리다니......”

유정은 자기 휴대폰은 집어 넣고 내내 교무실 전화기만 써대던 인기를 떠올렸다. 교무실로 전화를 해도 계속 통화중이기만 했을 것이다.

“교과서 확인 좀 같이 하려고요.”

“그, 그러니까, 누구신데......”

수연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가, 자신이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상대를 보았다.

“서, 설마.”

“조금 후에 정식으로 인사하게 되겠지만, 먼저 인사해도 상관 없겠죠. 교장 하준서입니다.”

수연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지는 손을 보고 다시 입을 벌렸다. 수연은 얼른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준서는 수연의 손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 당당하면서도 예의 바른 태도. 마치 대통령 선거에라도 나가는 듯이 정중하면서 군더더기가 없는 태도였다.

“이번에 영어과 새로 오신 선생님이시죠? 윤상우 선생님.”

준서의 눈이 이번에는 상우를 향했다. 상우는 입도 벌리지 않았는데 상대가 자신을 다 꿰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듯 눈만 꿈벅 꿈벅 움직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준서는 아까와 같은 태도로 손을 내밀었고, 상우는 허리까지 숙이며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준서의 눈이 유정에게 향했다. 또 악수를 해야 하는 건가. 유정은 파들 파들 떨리는 손에서 장갑을 벗었다. 손에 벌써부터 땀이 가득했다.

정말 나는 이 남자를 하루에 몇 번을 보는 거야.

그러나 살짝 숙여진 유정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 말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우린 아까 인사 했으니까.”

준서는 몸을 돌려 다시 수연에게로 걸어갔다. 장부를 보이면서 교과서에 대해 묻는 것이, 본격적으로 일을 파악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유정은 악수도 하지 않은 손에 도로 장갑을 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자식, 사람 저렇게 무안하게 할 줄 알았어.

“그런데 교과서 정리하려고 온 사람이 겨우 세 사람입니까? 이 많은 걸요?”

준서는 약간 기가 막히다는 듯이 수연과 유정, 상우를 보며 물었다.

“그래왔던 거라...... 괜찮아요. 별로 시간 안 걸려요.”

수연은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걸...... 참......”

이런 거 하려고 2월에 출근한 거 아닌가. 대체 일은 다 이 어린 교사들을 시키고 나이 든 교사들은 뭘하고 있는 것인가.

준서는 장부를 탁 덮고는 수연에게 다가섰다.

“같이 합시다.”

“네에?”

잠시 확인만 하고 갈 줄 알았던 수연은 교장의 뜻밖의 태도에 다시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어차피 업무 파악을 해야 하고요. 이쪽 업무는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이수연 선생님이 작년부터 계속 담당이셔서 잘 아실 것 같은데, 뭐부터 해야 하죠?”

“아니, 교장 선생님, 이러지 않으셔도......”

수연은 두 손을 내저었으나 준서는 절대로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수량 확인하는 것부터 해야 합니까? 그럼 제가 저기 과학과 쪽으로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교, 교장 선생님, 저어......”

수연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하더니 자기 멋대로 장부를 들고 준서는 구석으로 걸어 갔다. 그 모양을 보던 유정이 급히 그를 따랐다.

“저, 일 하실 땐 하시더라도 장갑은 끼셔야 해요. 새 책이라 손 다쳐요.”

별로 말해주고 싶진 않았으나 그의 몸에 달린 손은 무슨 죄냐는 생각에,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난 참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아까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 또 이렇게 챙겨주기까지 하다니.

그런데, 유정의 손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가벼워졌다. 아니, 시원해졌다고 해야 하나.

놀라 자신의 손을 살핀 유정은, 방금 전까지 끼고 있던 자신의 장갑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유정의 손에서 빼앗은 장갑을 태연히 자신의 손에 끼우며 준서는 대답했다.

“하나 더 가지고 오십시오.”

“교, 교장 선생님!”

왜 이래, 왜 나한테만 이래, 전생에 웬수 졌냐, 유정은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며 차마 말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장부를 들여다 보았다.

“왜, 뭐?”

수연이 잔뜩 언 얼굴로 유정에게 걸어왔다. 유정은 가만히 준서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창고를 나가 버렸다.

“일단 과학 교과서는 확인했고 이상은 없습니다.”

준서가 수연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수연은 얼른 당혹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아, 네에.”

“그럼 전 이 쪽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네에.”

빠르다. 금세 하네. 수연은 준서가 일을 하는 모양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도 그냥 놀고 먹는 교장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야.

“어, 유정쌤은 그럼 이거 명단 보고 선생님들 책 좀 챙겨.”

“알았어요.”

장갑을 새로 끼고 창고에 들어선 유정에게 수연이 말하자, 수량 확인을 하던 준서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들 책을 챙기다니요. 설마 그것까지 하는 겁니까?”

“아, 네.”

수연이 어색하게 대답했고 준서는 뭐가 불만인지 잠시 미간을 좁히고 서 있었다.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네에?”

수연의 심장이 턱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설마.

“제가 챙겨서 직접 배달도 해 드리죠. 그렇게 하면 되죠?”

“아, 아니, 그건 교장 선생님이 하실 일이......”

“바쁜데 일 가릴 거 있습니까. 서유정 선생님은 제가 하던 이 일 맡아서 해주세요.”

수연의 얼굴이 희어졌다. 이 사태를 어찌하면 좋나. 이건 연구부 소속의 일이었다. 교장이 멋대로 이렇게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신이 인기에게 작살이 날 지도 몰랐다.

“걱정 마십시오. 이수연 선생님이 혼날 일은 없을 겁니다.”

벌써 장부를 들여다보며 선생님 별로 책을 챙기기 시작한 준서가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수연 선생님은 하시던 일 계속 하시면 됩니다.”

준서는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 보이고는 창고에 굴러다니는 종이를 찢어 선생님별로 교과서를 묶으며 분류를 시작했다.

교사는 70명이 조금 넘었다. 각자 알아서 자신의 책을 창고에서 챙겨가면 훨씬 간편해질 일을, 일이 많은 세 명의 젊은 교사에게 일을 몰아주는 문화가 준서는 마음에 차지 않았다.

“왔어?”

책상 위에 발을 얹은 채 한잠 늘어지게 자다 일어난 인기는, 책상 위에 놓아지는 책을 보고 입을 뗐다. 벌써 다 정리를 했다니 빠르네.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결에 위를 올려다 본 인기는, 묵묵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에 얼어 붙어서 슬그머니 발을 내렸다.

“여긴......”

“맞는지 확인해 보세요.”

무뚝뚝하게 내뱉은 준서는 리어카를 끌고 옆 책상으로 걸어 갔다.

“아, 아니, 교장 선생님, 저, 왜 여길......”

인기는 그제서야 교무실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 붙은 것을 알았다. 부장들은 모두 만나본 준서였다. 조금 전까지 무섭게 질책하던 그 사람이, 이제는 신입 교사가 된 것처럼 교과서를 나누어 주니 미칠 노릇이었다.

“왜, 왜 저래?”

인기는 옆 라인의 진학지도부장을 보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그러나 상대도 영문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준서는 별 말 없이 모든 교사들 자리에 교과서를 얹어주고는 문 앞에 섰다. 얼어붙은 시선을 느끼며 준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제 업무는 선생님들께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행정 업무니까요. 제가 자청해서 한 일입니다. 신학기 준비 잘하시길 바랍니다.”

준서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교무실을 나갔다. 그제서야 곳곳에서 참았던 숨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신입만 시킨다고 우리 대놓고 까는 거 아냐!”

“순 미친놈 아냐!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성토 대회가 한창일 즈음, 죄인처럼 몸을 오그라고 세 명의 교사가 교무실로 기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오셔서 본인이 하시겠다고......”

수연은 인기에게 쪼르르 다가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말을 뱉었다.

“아휴! 내가 진짜! 회의 가자, 회의!”

인기는 수연 쪽은 보지도 않고 교무수첩을 책상 위에 내던지며 말했다. 벌써 4시였다. 전체 교사 회의 시간. 아마 준서도 이제 정식으로 인사를 할 거였다. 이미 인사를 한 것과 다름이 없지만.

“수연쌤, 미안해요. 끝까지 내가 한다고 했어야 했는데.”

“어떻게 그래. 이래저래 터지는 건 우리지. 얼른 챙겨 가자.”

수연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는 유정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수연이 교무수첩을 들었다. 어느새 같이 일하느라 친해진 상우도 그들의 곁으로 왔다.

“교장 선생님이...... 좀 독특하신 거 같아요. 저렇게 젊은 분도 처음인데......”

상우가 머뭇대며 하는 말에 유정이 한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독특하신 정도가 아니죠, 저 정도면 싸이코......”

“우리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걸?”

수연이 유정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회의실에 금세 교사들이 찼다. 유정은 자리에 교무수첩을 내려놓자마자 교장과 교감의 생수와 종이컵을 챙겼다. 전체 회의 때마다 하는 일이었으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 컵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선 준서는 유정을 내려다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이러실 거 없습니다. 자리로 가서 준비하세요.”

“네, 네?”

“앞으로 제가 마실 건 제가 챙기겠다는 뜻입니다. 교감 선생님도 그러실 거죠?”

교장보다 스무 살은 훨씬 넘어 보이는 교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네, 물론이죠. 서선생님 앞으로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줏대 없이 그저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준서는 그런 교감을 눈으로 한 번 흘긋 보고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정은 자리로 기어 들어와서 더운 숨을 삼켰다.

교감은 단상으로 올라가서 전체 회의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 후에 교장을 살짝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모두 아시겠지만 오늘 새 교장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한국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시고 스탠포드 대학에서......”

“잠깐만요.”

앉아 있던 준서가 몸을 일으켰다.

“말씀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시간도 없는데 제가 직접 소개하겠습니다.”

예의바르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교감은 약간 무안해진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찬물을 끼얹은 듯이 장내는 얼어 붙어 있었다.

“하준서입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학교를 만들어 봅시다. 감사합니다.”

준서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단상을 내려갔다. 유정은 입을 비틀어 올리며 조금 전에 준서가 한 말을 곱씹었다.

상식이 통하는 학교. 마치 이제까지 학교가 돌아가는 모양을 전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대체 무슨 폭풍이 불려고 이러나. 불안이 깃든 눈으로 수연을 돌아보자, 같은 마음인 듯 수연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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