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샌드위치가 먹고 싶은데2017.05.24.
“아, 저, 그렇긴 한데, 저......”
“그럼 가시는 김에 저 샌드위치 하나만 사다 주십시오.”
아니다. 아니야. 유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유정 앞에 은빛의 카드가 내밀어졌다.
“아무래도 밥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이건 제가 서유정 선생님을 비서로 부리는 게 아니라, 어, 그러니까 동기 사랑 정도로 생각해 주십시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동기 사랑’을 이야기하는 상대의 눈을, 유정이 미간을 좁힌 채 마주했다.
“저, 도, 동기는 아니죠, 그건 제가 잘 모르고......”
“저도 오늘 첫 근무입니다. 그러니 동기는 맞죠. 종류는, 서유정 선생님 감각을 믿어보겠습니다.”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책상 위에 펼친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유정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손에 들린 카드와 준서만 번갈아 보았다.
동기 사랑이라니. 내가 왜 아까 그런 말을 해서.
“저, 커피는 안 드세요?”
“아메리카노요.”
준서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이게 비서지 뭐야. 동기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유정은 마음 속으로 씩씩대며 교장실을 나왔다.
뭔가 앞으로의 인생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엄청 잘생겼다는 거지?”
수연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교장의 모습을 상상하며 손뼉을 쳤다. 오후 4시에 전체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때에는 아마 볼 수 있을 것이다.
“잘생긴 게 문제가 아니라요, 진짜 싸가지, 아니 이걸 뭐랄까...... 인간이 아닌 거 같아요. 벰파이어 아닐까? 아휴 진짜 곁에만 가도 추워요.”
“그렇겠지. 그 나이 많은 부장들이 왜 다들 벌벌 떨면서 나왔겠어. 근데 난 카리스마남이 좋거든.”
올해 서른 넷, 수연은 미혼이었다. 작년까지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지금은 잠시 솔로를 즐기는 중이라고 했다.
“그럼 이따가 보시고 잘해보시든가요. 난 영 아니던데.”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좀 그러네. 와, 나왔다, 나왔다!”
수연과 유정은 인근에 있는 파스타 전문점 안에 앉아 있었다.
봉골레 파스타와 닭안심 리조또. 돌돌 말려있는 파스타는 고소하고 짭쪼름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진짜 나 정부장 그렇게 썩은 표정인 거 첨봤어. 그리고 가져갔던 쇼핑백도 도로 가져온 거 봐. 예전에는 절대 그런 일 없었지.”
인기는 여기 저기 선물을 해대는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수연과 유정과 같은 평교사들에게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다. 선물은 같은 부장급이나, 교감 교장 선생님에게만 해당했다. 심지어 발렌타인 데이에도 인기는 남자인 교장과 교감에게만 초콜렛을 선물했었다.
“엄청 해먹은 거 딱 들킨 거지. 작년에 내가 A4용지 1000만원어치 기안한 것도 딱 걸렸을 걸?”
수연의 말에 유정은 입을 딱 벌렸다.
“뭐, A4용지를 1000만원이요? 아니 얼마나 사야 그만큼을 사요?”
“실제 사는 게 아니지. 돈을 그렇게 썼다고 올리고 영수증 첨부하는 거야. 영수증이야 거래하는 업체에서 해달라고 하면 해 주니까. 그런데 거기도 1000만원이라고 하니까 좀 놀라더라고. 그렇게 서류상에는 올려놓고 그 1000만원은 그냥 다른 데 쓰는 거지. 뭐 예를 들면 정부장 작년에 시계 바뀐 거 알아?”
“아, 그 자랑하던......”
“애들 지금 호주인가 어디 유학 중이라는데 돈이 어디 있겠냐? 다 그런데서 꼬불쳐서 시계도 사고 그런 거지.”
“그런데 왜 A4용지에요?”
“소모품이잖아. 다 썼다고 하면 누가 확인해. 프린터기나 컴퓨터 같은 건 실제 그 물건이 있어야 하는 거지만 A4용지는 아니잖아.”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는 처음 학교에 적응하던 시절이라 다른 것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했다. 수연도 신입인 유정에게 이 정도까지 깊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었다.
“유정쌤도 이제 정직원이니까 이런 얘기 해주는 거야. 어쩌면 나도 불려갈 지도 몰라. 어쨌든 기안자는 나니까. 근데 뭐, 내 손으로 들어온 돈은 한 푼도 없었는데.”
유정은 기안자라는 말에 조금 전에 준서가 딱딱한 목소리로 한 말을 떠올렸다. 가정통신문 하나 가지고 잔소리를 하던.
“정부장 저렇게 된 건 고소하지만 그래도 난 그 교장이란 사람 너무 꼬장꼬장해서 싫어요. 우리 딴 얘기 해요. 갑자기 체할 거 같아요.”
수연은 유정의 우그러진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쉬운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유정은 편의점 봉지를 들고 고민이 깃든 표정으로 교장실 앞에 서 있었다.
노크를 하니, 건조한 목소리로 ‘들어오세요’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서류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준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은 아까보다 더 씨뻘갰다.
“고맙습니다. 거기 두고 가세요.”
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으나 유정은 봉지와 카드를 내려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저어, 샌드위치가 없어서요.”
준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냥 삼각 김밥 샀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봉지 안을 살핀 준서는 아메리카노만 옆에 두고 봉지는 도로 유정에게 내밀었다.
“삼각 김밥은 안 먹어서. 커피만 마실게요.”
“아, 전혀 안 드세요? 그래도 점심 안 먹으면 속이 쓰릴 텐데.”
“샌드위치가 먹고 싶은데.”
이런 입맛 까다로운 양반 같으니. 주는 대로 먹지 뭘 가려.
“다시 사올까요?”
“아뇨. 점심 시간도 끝났고. 괜찮아요.”
말로는 괜찮다고 했으나 굉장히 불쾌한 낯빛이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한가해지면 도로 사올......”
“괜찮다고 했는데.”
준서의 고개가 들렸다. 서늘한 시선. 유정은 침을 꿀꺽 삼켰다.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합니다. 안 먹을 거면 그냥 두고 가세요.”
다시 그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유정은 잠시 그런 준서의 머리를 노려보다가 삼각 김밥이 든 봉지를 잡아 챘다.
진짜 내가 비서인 줄 아는 거야 뭐야. 사줬더니 고맙다는 기색은 없고.
걸어나오는 발소리가 평소보다 좀 컸다. 문이 바람 때문이라고 변명을 대기 어렵게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유정은 일일이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봉지를 달랑거리며 교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아휴, 진짜 내가 그 새끼......”
인기는 아직도 교장 욕이었다. 이 쪽이나 그 쪽이나 싫기는 마찬가지라, 유정은 잠시 인기를 노려보다가 가져온 삼각 김밥을 내밀었다.
“뭐야?”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교장 돈으로 산 거지, 뭐긴 뭐야.
“기분 상하신 거 같아서요. 속 상할 땐 먹어야 풀리죠. 입 심심할 때 드세요.”
“나 사주는 거야? 웬일이래? 이것 봐, 신입이 자세가 됐어, 자세가.”
단순한 인기는 금세 입이 헤 벌어져서 봉지를 펼쳤다.
“참치 마요네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네. 아주 센스 있어, 신입.”
“네, 맛있게 드세요.”
유정은 입 속으로 쿡쿡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 앉았다가 얼굴을 구겼다. 젠장, 공문이 또 왔다. 공문 좀 보내지 말라고. 뭐 이렇게 교육청에서 조사하는 건 많아.
이러다가 신학기 준비는 하나도 못하게 생겼네. 연구부 소속이 되었을 때부터 예상은 했던 일이었지만.
정신 없이 공문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교과서가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교과서 담당은 수연이었지만, 그 많은 교과서를 분류하고 과목별로 담당 선생님에게 교과서를 챙겨 주는 일은 수연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개는, 신입 교사들이 함께 가서 돕곤 했다.
“수연쌤하고 유정쌤 가고, 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하고 같이 가.”
책상에 발까지 올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내내 학교 전화기로 통화를 하던 인기는 교과서가 왔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그렇게 말하고 통화를 계속했다.
“갈까?”
수연이 목장갑을 끼며 말했다. 유정도 웃으며 장갑을 꼈다.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상우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교과서 뭐 하라고 하셔서......”
유정은 웃으며 상우에게 목장갑을 건넸다.
“새 교과서라 잘못하면 손 다치거든요.”
“아 예에,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허리까지 굽히는 상우는, 그 깐깐한 교장보다 인성 면에서는 백 번 나은 듯했다.
“참, 아깐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했네요. 서유정이에요. 나이는 스물 여덟이고요.”
“저는 올해 서른 살입니다. 윤상우입니다.”
창고로 걸어가면서, 유정과 상우는 아까 못한 통성명을 했다.
상우는 그 희고 번질한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눈은 조금 작고 코는 뭉툭했다. 아주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귀여운 상이었다.
“여기 있기 전에 다른 데 있었어요?”
“아뇨. 직장 다니다가 교육대학원 졸업하고 바로 왔습니다.”
“아, 그래요? 처음 학교 오시니까 어떠세요?”
상우와 유정은 금세 친해진 것처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보며 자기도 모를 흐뭇한 미소를 짓던 수연은, 교과서가 배달되어 온 창고로 먼저 들어가는 그림자를 보며 걸음을 우뚝 멈췄다.
“뭐지?”
“왜요?”
한창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유정은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교과서를 훔쳐가는 사람은 없을 테고.”
수연은 놀란 가슴을 다스리며 창고에 천천히 들어섰다. 유정과 상우도 긴장한 채 창고 안에 발을 들였다.
책이 곳곳에 쌓인 창고는 먼지로 자욱했다. 그리고 그 속에 분명히 뚜벅 뚜벅 걷는 소리가 울렸다.
“저, 누구......”
수연은 자신의 앞에 드디어 걸어온 남자를 보며 눈을 치떴다. 빈 교실을 개조한 창고라 유리창 너머 비친 해가 남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수연 선생님이십니까?”
유정은 벌써 그가 누군지 알아채고 뒷걸음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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