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기 문화입니까?2017.05.23.
인기는 입술을 짓씹었다. 망할 놈. 다 알면서 사람을 이렇게 망신을 주고. 너네 작은 아버지가 다 벌인 일 아니야. 왜 나보고 이러는 건데.
“소, 솔직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저, 진짜 제가 독단적으로 한 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저, 그게, 하철균 교장 선생님, 그 선생님이 시키신 일이라......”
“시킨 일이라면 그게 구린 것이든 가리지 않고 교사 양심도 다 버린 채 함부로 행동해도 되는 것이군요. 덩달아 콩고물도 좀 드셨겠고요.”
준서는 숙였던 상체를 세웠다. 인기는 몸을 떨면서 준서를 마주 보았다.
“하철균 교장 선생님은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을 겁니다. 아마 거기에서 법의 심판을 받겠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정인기 선생님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단 내일까지 기회 드리겠습니다. 어떤 일을 하셨고 거기에서 각각 얼마나 받았는지 작성해서 가져오십시오. 물론 그 받은 것은 도로 다 토해내셔야 합니다.”
“네, 네?”
인기는 입을 딱 벌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싫으시면 하철균 교장 선생님하고 나란히 조사 받으시든가요.”
“저, 그,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제가 학교에 한 노력이 있는데.”
“두 번 얘기 않겠습니다.”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 교장 선생님!”
인기도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몸이 떨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준서의 눈이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말을 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나이도 한참 어린 게. 인기는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가져온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준서의 눈이 차갑게 쇼핑백을 훑었다.
“뭐 약소한 거지만......”
“가져가시죠.”
준서의 미간이 구겨졌다.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배인 얼굴로 인기를 말없이 쏘아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니, 교장 선생, 이러지 말고 다시......”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합니다. 그만 나가 주십시오.”
준서는 책상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앞에 있는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얼굴이 울그락풀그락해진 채 준서의 뒷모습을 훑던 인기가 책상 앞에 서는 그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너...... 이 새끼......”
인기도 지금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분노가 몸을 조각 조각 잘라먹는 것을 느끼며, 인기는 부르쥔 주먹을 떨었다.
“니가 할아버지 빽으로...... 날 무시하고......”
준서는 무심한 눈으로 인기를 보았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눈빛에, 인기의 손힘이 도리어 풀어지고 말았다.
“왜, 저를 쳐서 조사 항목 하나 더 넣고 싶으신 겁니까?”
인기는 준서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욕설을 씹어 뱉고는 몸을 돌려 쇼핑백을 챙겨 들고 문으로 걸어갔다.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 버리는 인기의 모습 뒤로 문이 쾅 닫혔다. 준서는 그제서야 눈에 힘을 풀고 피곤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학교는 완전히 엉망으로 관리 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관리자가 없었으니 당연한 것인가. 교장은 자기 배 부풀리기 바빴고 교감은 허수아비였다. 교장이 입맛대로 꽃아 놓은 부장은 교장의 입의 혀처럼 굴면서 콩고물을 얻어 먹고 있었다.
준서는 입술을 씹으며 책상 앞의 의자에 몸을 부렸다.
정인기의 부정은 준서가 말한 것 뿐만이 아니었다. 원칙대로라면 여기 있을 것이 아니라 철균과 함께 검찰 소환 조사를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재단 설립자이자 준서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하윤택은 준서를 이리로 보내면서, 철균이 이제까지 저지른 일은 이전 일로 마무리하라고 말했다. 더 이상 옛일은 들추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라고.
그것은 철균의 소환 조사로 나머지는 다 덮겠다는 윤택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렇게 결정했고 그 뜻이 통했다면 준서가 아무리 건드려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정재계에 발이 넓은 윤택이었다. 일가 친척이나 혈연 관계로 맺어져 있는 법조인과 정치인, 언론인도 무수했다.
그래도 준서는 이대로 지난 일을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면 앞으로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기가 돈을 그대로 토해낼 것이라고는 준서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충격은 받고 반성 정도는 하게 되기를 바랐다.
“민윤성 환경부장님, 교장실로 와 주십시오.”
전화기를 든 준서는 아파오는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 놈이......”
교장실에 다녀온 후로 인기는 벌써 두 시간이 넘게 교장 욕을 하고 있었다. 유정은 그런 인기를 곁눈질로 보며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저 밉상을 혼내준 것을 보니 꽤나 쓸만한 사람인가 보다. 작년까지 하는 것 하나도 없으면서 기세등등하게 굴어서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아효, 내가 그냥 그만 두든가 해야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시고요, 밥이나 먹으러 가시죠.”
어느새 인기 옆에 다가온 환경부장 윤성이 인기를 잡아 끌었다.
“선생님은 무슨 말 안 들었어?”
“안 듣긴요. 아휴, 무슨 학생부 끌려왔는 줄 알았다니까요. 진땀이 확 났네.”
“가자, 가자고. 가서 얘기 하자고.”
곧 몇몇 부장들이 더 그들과 합류했다.
학생들이 오지 않는 날이라 급식이 따로 준비되지는 않았다. 이런 날은 교사들끼리 근처 식당에서 알아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그들이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뻔했다. 유정은 부장이 교무실로 나가는 것을 보고는 양 팔을 펴고 기지개를 켰다.
“아휴, 살겠네.”
“그러게. 근데 그 새로 온 교장이라는 사람, 좀 이상한가봐. 아침부터 부장들만 깨고 있고.”
옆자리에 앉은 수연이 속삭이자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봐요. 나이도 새파랗게 젊다는데. 설립자 빽이라 기세등등한 건지.”
“참, 옷 그렇게 빼입고 왔는데 커피 심부름도 없었다면서.”
“그러게요. 커피 달라는 소리도 안하고. 참, 나 오늘 아침에 새로 오신 영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유정은 말을 하다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크고 희끄무레한 남자가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이번에 영어 담당으로 새로 온 윤상우라고 합니다.”
유정의 얼굴이 찌뿌려졌다. 뭐지. 하루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건가. 아깐 분명 이 사람이 아니었는데.
“저, 서유정 선생님이시죠? 저하고 같이 이번에......”
“저희, 혹시 지금 처음 인사하는 건가요?”
유정은 벼락을 만난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어떤 아찔한 깨달음이 머리에 쑤셔 박혔다.
“네.”
상우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대답했다.
“하, 그럼, 아까......”
“왜?”
수연이 말을 꺼내는 동시에 연구부장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유정의 눈이 찌뿌려졌다. 수연이 눈짓을 하자 유정은 슬금 슬금 전화기로 다가가 집어 들었다.
“정인기 연구부장님 지금 식사 중이......”
“연구부 소속 서유정 선생님 계십니까?”
유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익숙한 목소리. 그는 새로 온 영어 선생님이 아니었던 거다.
왜 말을 안하고. 주먹으로 머리를 콩콩 찧으며 유정은 눈을 꽉 감았다.
“네, 접니다.”
“지금 교장실로 오십시오.”
“지금요?”
유정은 눈을 들었다. 열 두 시.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네, 지금요.”
그러나 상대는 단호하다.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은 유정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인기를 한 방에 보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었다. 더 지독한 놈이 기다리고 있었어.
“왜?”
수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유정을 보고 있었다.
“교장실 호출이요. 저 늦으면 먼저 식사하세요.”
유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상우와도 눈인사를 하고 얼른 교무실을 걸어 나갔다.
준서는 전자결재로 올라온 서류를 보고 있었다. 기안 작성은 많이 해본 것 같은데. 손 끝으로 턱밑을 쓰다듬으며 준서는 다시 한 번 기안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서유정’
환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던 여자. 날 새로 온 선생님으로 알았었지. 하긴 나도 처음엔 그녀를 학생으로 알았으니까, 마찬가지인가.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유정은 아까와 달리 경직된 얼굴로 천천히 교장실에 들어섰다.
“그게 원래 출근 복장이었군요.”
준서가 먼저 말을 꺼냈고 유정은 얼굴이 확 붉어지고 말았다.
“그러게, 왜, 선생님인 척을 하고......”
“난 내가 누군지 말한 적 없는데.”
“그러니까 왜 말을 안하고......”
“일단 좀 가까이 오시죠.”
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차가운 얼굴을 마주한 유정은 살짝 몸을 떨며 준서가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갔다.
“오늘 기안 올린 걸 봤는데.”
준서가 컴퓨터를 유정에게로 돌려 주었다.
“가정통신문, 직접 작성한 겁니까?”
“아, 그게, 작년 것 찾아보고......”
유정은 뒷머리를 살짝 긁었다.
“작년 것 그대로 한 겁니까?”
“네에......”
준서는 잠시 유정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었다.
“찾아보니 토씨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더군요. 심지어 오타까지.”
유정은 긴장한 침을 삼켰다.
“그게, 연구부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유정은 화살처럼 꽃힌 준서의 눈에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나.
아침에 만났을 때는 동료 교사라는 생각이어서 그런지 이 정도로 불편하진 않았는데.
“여기 문화입니까?”
준서의 목소리가 공간을 쨍하고 울렸다. 유정은 몸을 파르르 떨며 반문했다.
“네?”
“자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 말입니다. 여기 오는 사람이 줄줄이 다 그 말 뿐이군요.”
“아니, 저는, 그냥 있는 사실을......”
“그럼 기안자 이름도 그냥 정인기 선생님으로 하시죠. 본인 이름은 왜 씁니까?”
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준서는 다시 눈을 화면으로 돌렸다.
“기안자라는 건 그 문서에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누가 시켰더래도, 결국 책임은 기안자가 지는 겁니다.”
유정은 고개를 숙였다.
“네.”
“내일까지 다시 작성하세요. 작년 것 그대로 하지 말고, 참고했어도 서유정 선생님 말로 고쳐서 말입니다. 첫인사하고 끝인사까지 똑같으니 매번 같은 가정통신문 받는 사람은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래도 그거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는데......”
유정은 고개를 들었다가 준서의 서늘한 눈과 마주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뭐란 말인가. 유정은 긴장하며 준서를 마주 보았다.
“혹시 지금 식사하러 가실 생각입니까?”
유정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하는 건가. 설마 같이 먹자고 뭐 그 따위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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