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디 쓰셨습니까?2017.05.22.
“어?”
학생이 준서의 얼굴과 복장을 살폈다. 누군지 가늠해 보는 듯.
“너 여기서......”
“새로 오신 선생님이세요?”
학생이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화장을 하니 엄청 노안으로 보였다. 준서와 몇 살 차이 안날 것처럼.
“넌 뭐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몇 학년 몇 반이야?”
“아, 저요.”
학생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답했다.
“2학년 3반이요.”
“근데 왜 여깄어?”
“지금 방학이잖아요.”
학생은 금세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이 얼굴 근육을 꿈틀 꿈틀하며 답했다.
“그런데 왜 지금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서......”
“선생님은 누구신데요? 영어 선생님이신가? 새로 오신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엄청 잘생겼네요. 인기 많겠다.”
학생은 눈을 번쩍 치켜뜨며 말했다.
“뭐, 뭐야?”
준서는 실소하며 학생을 정면으로 보았다. 역시 어린 학생이라 이렇게 맹랑한 건가. 그래도 잘생겼다는 말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학생도 보니 꽤 예쁜 얼굴이었다. 화장을 지독하게 해서 지우면 어떻게 될지 또 모르겠지만.
“반가워요.”
학생은 이제 손까지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선선한 태도에 첫 출근을 앞두고 잔뜩 긴장했던 준서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재밌는 학생이군. 준서는 학생을 잠시 노려보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맹랑한 녀석. 이름이 뭐야?”
“저요? 서유정이요.”
“서유정. 2학년 3반?”
“네.”
학생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준서는 웃지 않고 잠시 미간을 좁히고 서 있다가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눈을 허공으로 보냈다.
“2학년 3반 담임 선생님 성함이 서유정이었는데.”
“네에?”
학생의 눈이 커졌다. 입술이 달달 떨리는 것을 보는 준서의 눈에 점차 확신이 짙어졌다.
“하, 서유정 선생님, 교무실에서 체육복 입고 뭐하시는 겁니까?”
젠장.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첫 만남이라 좀 놀려주고 싶었는데.
영어 교사 채용은 따로 이루어져서 유정은 이번에 신규로 온다는 영어 교사를 따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해야 하나. 조각처럼 매끈한 얼굴이 텔레비전 속이 아닌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단정한 슈트와 은은한 향기까지. 내가 동기 복은 좀 있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학교 근무가 외롭거나 힘들 것 같진 않았다.
유정은 애써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정식으로 다시 인사 드릴게요. 이번에 국어 교사로 새로 임용된 서유정이에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그러나 준서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그런데, 그게 혹시 그럼 출근 복장입니까?”
“아, 이거, 서, 설마! 제가 이러고 출근을 하겠어요? 청소하려고 갈아 입은 거예요. 그 새로 오신다는 교장 선생님인가 뭔가 제가 오늘 비서 노릇을 좀 해야 해서...... 예쁜 치마 정장을 입고 오라셔서요.”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 이라는 말에 준서의 눈이 살짝 찌뿌려졌다.
“비서 노릇이라뇨.”
“에이, 조직 생활 해보셨으면서. 그렇잖아요. 작년에도 제가 다 했어요. 새로 교장 선생님 오시면 인사 드리고 커피 대접해 드리고. 그것도 외모가 받쳐줘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요.”
“외모도 딱히......”
준서의 말에 생글 생글 웃던 눈이 찌뿌려졌다.
“뭐라고요?”
“외모는 둘째치고 참 시대착오적인 문화군요. 교장인지 뭔지 커피는 직접 타 드시라고 하시죠. 여기 학생 가르치러 왔지 교장 커피 타러 왔습니까.”
준서의 냉랭한 말에 유정의 눈이 도로 밝아졌다.
“와아, 멋있다. 말이 통하는 분이 오셨네요. 그쵸, 그쵸! 백 번 옳으신 말씀. 우리 꽤 잘 지낼 것 같은데요? 하하,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그러네요. 동기 맞군요.”
준서는 밝게 웃는 유정을 보면서 처음으로 픽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옷은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시간이......”
유정은 놀란 표정으로 시계를 보았다. 곧 출근 시간이었다.
“아아, 그러네. 감사합니다. 이따 또 뵈요!”
유정은 준서에게 손을 흔들어 준 후 쇼핑백을 들고 교직원 화장실로 급히 걸어갔다. 준서를 앞서 걸어가는 모양을, 준서의 눈이 가만히 훑었다.
맞아, 이번에 새로 채용됐다고 했었지. 저 선생님이었나.
어제 밤새 들여다 본 서류에서 다시 한 번 여자의 이름을 떠올린 준서의 입가에 아까보다도 더 진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정인기 연구부장은 아침부터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젊은 놈이 교장으로 와서는.
전 교장은 인기를 특별히 아꼈다. 인기와 많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 2년만 자리 잘 지키고 있으면 교감으로 올려준다는 말도 했었는데.
갑자기 태풍이 휘몰아치더니 어디서 저런 젊은 놈이 나타나서.
인기는 처음에 준서와 편하게 지내려는 생각에, 출근도 하기 전에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따로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준서는 상대가 인기라는 것을 알자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딱딱하게 한 마디 하고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 인사는 직접 만나서 하시죠.
그러더니 첫 출근 날부터 교장실에 틀어박힌 채, 부장들만 차례로 호출해서 일대 일 면담을 시작했다.
교무실은 아침부터 냉기가 몰아쳤다. 면담을 끝내고 온 부장들의 얼굴은 시든 배추처럼 죽어 있었다.
“직접 가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냐고 물어도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인기는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서유정 선생, 기안 아직 안됐어?”
답답한 마음에, 인기는 다짜고짜 신입부터 까기 시작했다.
“아, 다 됐습니다.”
유정은 아침부터 새로 맡겨진 업무에 정신이 없었다. 올해는 연구부 소속이었고, 방과 후 보충수업 관리 업무를 하게 되었다. 지금 하는 일은 3월에 당장 배부해야 할 보충수업과 관련된 가정통신문 작성이었다.
담임에, 업무 폭탄이라고 불리는 연구부 소속에, 올해도 일복이 터졌구나.
유정은 가정통신문을 첨부한 기안을 작성하고 전자 결제 시스템으로 올렸다.
“다 됐습니다.”
유정이 환히 웃으며 말했을 때 인기의 자리에 있는 전화기가 울었다. 이번 타자인가 보다. 전화를 받는 인기의 얼굴에 애써 짓는 웃음이 어렸다.
“아, 네, 곧, 가겠습니다.”
인기는 망설이다가 책상 밑에서 쇼핑백 하나를 집어 들고는 일어섰다.
준서는 접대용 테이블 앞에 앉아서 문서를 넘겨보고 있었다. 옆에는 직접 탄 커피가 있었다. 아침에 행정실 말단 직원이 커피를 가져왔길래, 남이 탄 커피는 마시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더니 그 후부터 커피를 가져다 주는 이는 없었다.
문이 열리고 인기가 들어섰다.
“아이고, 교장 선생님.”
인기는 허리를 구십도로 굽혔다. 그러나 준서는 자리에서 일어서기만 했을 뿐 인기가 허리를 도로 펼 때까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이고, 젊으신 분이 이렇게.”
“앉으시죠.”
준서는 그렇게만 말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인기는 불룩 불룩한 얼굴을 애써 좋게 바꾸고 맞은편에 앉았다.
“저, 일단은 술 한잔 하면서 안면을 트는 게......”
“학생들 보충수업비 내는 계좌는 어느 계좌입니까?”
준서의 말에 인기의 입이 다물어졌다.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인기는 잠시 준서를 바라 보았다.
“어느 계좌로 내냐고 물었습니다. 모르십니까?”
“아, 저...... 그게 다 보셨으면 아실 텐데......”
“숫자가 봐도 봐도 안 맞아서 말이죠.”
준서가 인기 앞에 서류를 좌르륵 펼쳐 보여 주었다.
“분명 보충수업비는 한 과목당 15만원으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계좌로 들어온 돈은 없어요. 그런데 교사들 수당은 또 제대로 나갔단 말입니다.”
인기의 입이 딱 벌어졌다. 뭐 이런 것까지 다 조사를 하셨나.
“그래서 제가 모르는 계좌가 있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저, 그게......”
“아니면 현금으로 받기라도 하신 겁니까?”
준서가 나직하게 뇌까리듯 말하고는 옆에 있는 커피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인기의 몸이 움찔 떨렸다.
“현금으로 받기도 하죠. 아니, 현금으로 가지고 온 돈을 도로 돌려보내기도 뭐하니까......”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전원이 이렇게 현금으로 내기도 어려울 텐데......”
“저, 전원이 냈습니까?”
인기가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준서는 다리를 꼰 채 그런 인기를 묵묵히 내려다 보았다.
“현금, 받아서 어디 쓰셨습니까?”
교장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네?”
“장부에도 없는 돈 받아서 어디 쓰셨냐고요.”
인기는 냉랭한 준서의 눈을 마주했다.
“저, 그건......”
“제가 확인한 결과 보충수업비는 실제 20만원씩 받았다고 하던데요. 여긴 15만원으로 되어 있지만.”
인기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 교장도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장부에는 15만원이라고 하고 실제로는 과목당 20만원을 받았는데, 계좌를 통해서 받으면 티가 나서 현금으로 받아 차액은 교장과 나누었다.
“그리고.”
준서는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보면 분명 보충수업을 신청한 후 한 회만 수강하고 변경하거나 취소하면, 돈을 전액 돌려주도록 되어 있던데요. 분명 서류상에는 돌려줬다고 되어 있는데, 따로 알아봤더니 돌려받았다는 학생은 없었고 그런 규정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더군요.”
물론 돌려줬다고 기록한 그 금액도 인기와 전 교장 선생님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인기는 그제서야 왜 부장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썩은 얼굴만 했는지 알았다. 준서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말을 하면 자기 살을 깎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 교장 밑에서 그런 것 한 두 번 안해 먹은 것이 바보였다. 교장부터가 그랬었고.
“그리고 이건.”
준서의 얼굴은 아예 구겨져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데요, A4용지를 무려 1000만원 어치를 쓰셨네요.”
준서는 손에 든 서류를 가지고 탁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인기는 이제 할 말이 없었다.
“A4용지로 집이라도 지으셨습니까?”
준서의 눈이 인기를 향했다. 지독히 차가운 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 인기는 고개를 숙였다.
침묵 속에 초침 소리만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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