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1화 (1/102)

1. 로보트야?2017.05.21.

띠띠. 띠띠. 띠띠. 띡.

아흠.

온통 하얀 침대.

불쑥 하얀 팔이 나와 조심 조심 이불을 젖혔다.

한강이 보이는 창으로부터 빛이 들어왔고, 그 빛이 한 아름다운 육체를 비쳤다.

그리스 시대의 조각 같은, 알맞게 잡힌 근육, 그리고 그 완성인 듯한 수려한 이목구비.

짙은 눈썹 아래 쭉 뻗은 콧날, 날렵한 턱선과 붉고 도톰한 입술.

준서는 길고 곧은 손가락을 뻗어 가볍게 눈을 비볐다. 곧 눈썹 아래 까맣고 큰 두 개의 눈이 반짝 뜨여졌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한 듯 두 눈은 태양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그는 다시 이불로 몸을 가렸다. 문이 빠끔 열리고, 앞치마를 입은 미혜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준서는, 어제 새로 가사도우미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식사 준비해 놨어요.”

그 말에 준서는 눈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이맛살이 살짝 찌뿌려졌다.

“계속 못 일어나시더라고요.”

미혜가 뒤이어 말했다. 준서의 시선이 찌뿌려진 그대로 미혜를 향했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세요.”

미혜가 나가자 준서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젖혔다. 딱 달라붙는 드로즈만 입은 채 옆에 있는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그는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잠시 후, 준서는 정장 차림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 앞에는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양상추 샐러드가 놓여 있었다.

“첫 출근이죠? 어젯밤에도 사모님이 전화 왔었는데...... 그냥 주무신다고 했어요.”

“잘하셨습니다.”

준서는 미혜를 보지도 않은 채 대꾸하고는, 준비한 음식은 먹지도 않고 옆에 있는 커피만 들어 마셨다.

“아휴, 늘 작은 도련님 걱정이 많으셔서...... 오늘도 잘 챙겨야 한다고 어찌나 신신당부를 하든지.”

“네.”

준서의 무심한 표정에도 미혜는 말을 그칠 줄을 몰랐다.

“어머, 하나도 안 드세요? 왜요? 계란도 그 뭐냐, 유기농으로 제가 특별히 주문해서 사다 놓은 건데......”

준서의 시선이 그제서야 미혜를 향했다. 아무 생각도 읽어낼 수 없는 표정. 그러나 미혜는 그제서야 상대의 생각을 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커피잔을 조용히 들었다 놓으며, 준서는 태블릿 PC를 켜서 오늘자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주요 뉴스부터 심층 취재까지 빠르게 훑는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찰, 신영 고등학교 하철균 전 교장 소환 조사......’

준서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혜는 묵묵히 남자의 찌뿌려진 미간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근무한 지 이틀째였다. 젊은 주인과 말을 트기는 쉽지 않았다. 이 근방의 학교에 근무를 하게 되었고, 한 달 전에 급히 입주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 전에 있던 사람은 한 달도 안 되어 짤렸다고.

이러다 나도 짤리게 되는 건 아닐까.

준서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신 후에 천천히 일어섰다. 여전히 음식은 건드리지 않은 채로.

태블릿 PC는 그대로 내려놓은 채 그는 벗어두었던 재킷을 입고 시계를 확인한 후 미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혜는 놀란 눈으로 준서를 마주했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힐 것 같다.

“저는 아침을 많이 먹지 않습니다. 아메리카노 하고 버터 바른 토스트 하나면 됩니다.”

잠시 머뭇대다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그리고 조용한 걸 좋아합니다.”

그는 할 말을 다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몸을 돌려 현관으로 나갔다. 미혜는 긴장한 숨을 내쉬며 그를 급히 따라 현관까지 걸어 갔다.

“잘...... 다녀오세요.”

현관문이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실내에 들어찼다.

“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문을 닫았다.

“아니, 등 뒤에 태엽있는 거 아니야? 로보트야?”

미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가 사라진 현관을 보고 중얼거렸다.

유정은 급히 정장 치마를 벗어 내렸다. 방학 기간이라 수업은 없었지만 새로운 교장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라고 정장을 꼭 입으라는 윗사람의 지시가 있었다.

그것도 유정에게는 특별히 치마 정장이었다. 아마도 오늘도 교장 선생님 개인 비서 노릇을 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일이었지만, 학교 문화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가 뜻밖에 떨어진 줄 알았던 정교사에 덜컥 합격하고 나니 이제는 정장이 아니라 거적데기를 입으라고 해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로운 기분으로 출근을 하니 온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랜만에 입은 치마 정장은 너무 갑갑했다. 게다가 긴 겨울 방학 끝이라 교무실은 먼지가 가득 쌓여 매우 지저분해져 있었다.

자기 자리 주변이라도 정리를 해야 겠다 싶은데 아무래도 치마 정장은 불편했다. 유정은 학생들이 버려두고 간 체육복 중에 깨끗한 것을 골라서 교직원 화장실로 들어갔다.

입고 보니 정장 상의에 체육복 바지는 지금 당장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좋을 만큼 우스꽝스러웠다. 내친 김에 윗도리까지 체육복으로 갈아 입은 유정은, 1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혼자 거울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장은 쇼핑백에 잘 넣어서 자리에 놓고, 유정은 먼지 쌓인 책상부터 물티슈로 닦았다.

깨끗해진 책상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내친 김에, 유정은 옆자리 책상도 닦기 시작했다. 까맣게 묻어나는 먼지를 보니 뿌듯했다.

그래, 오늘 정교사 된 기념으로 막내 노릇 좀 해볼까.

창문까지 모두 열어 젖힌 유정은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 붙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다른 선생님들 책상은 물건은 그대로 두고 유리로 된 책상 위만 닦았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얼굴 볼 사람들인데.

유정은 아직도 기적 같은 그 일이 떠올라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신영 고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온 것은 작년, 스물 일곱 살 때였다. 그 전에는 다른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재직했었다.

정교사 자리는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어떻게든 마음에 들기 위해 시키지 않은 일까지 열심히 찾아서 했다.

그러나 연말이 되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장 친구 아들이라고 했나. 지금 막 학교를 졸업했는데 공교롭게도 유정과 같은 국어과란다.

설마 친구 아들에게 자리를 주겠어, 하는 생각에 유정은 더 열심히 했다. 그 겨울에 신영 고등학교 정교사 채용이 있었고, 유정은 모두가 될 거라는 말 속에서 지원을 했다.

유정은 모두의 말을 증명하듯이 1차 필기 시험과 2차 수업 시연까지 모두 통과했다. 이제 3차 면접만 통과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면접을 바로 ‘교장 친구 아들’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정이 정교사 채용에서 떨어진 후에.

정교사는 소문이 무성하던 ‘교장 친구 아들’이 되었고, 채용 과정에서 상당한 금액을 학교에, 아니 교장에게 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을.

사립학교 채용이 원래 그런 거라고, 유정을 아꼈던 부장 교사가 술자리에서 쓸쓸히 말하며 그녀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 술을 꼴깍 꼴깍 마시고 나서 유정은 그대로 신영 고등학교를 마음에 지웠다. 임용고시 공부를 위해 수험서를 사고 고시원까지 알아보았다.

대학을 졸업했을 때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바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 계약직 교사를 하며 경력만 쌓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뜻밖의 연락을 받은 것은 유정이 고시원에 들어간 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신영 고등학교 정교사 임용이 취소되어, 재임용을 위해 시험을 다시 본다고 했다. 처음에는 장난하는 건가 싶어서 거절하려다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시험을 봤고 이번에는 놀랍게도 바로 채용되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그 동안 학교 운영비를 횡령하는 등의 각종 비리를 저지른 교장 하철균이 그 비리가 발각되어 해임되었고, 그래서 이번에 뇌물을 주고 임용된 교사도 자동으로 임용 취소가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내부의 누군가가 이 사실을 찔렀다고 벌써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유정의 입장에서는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새 교장이 온다는데......”

유정은 선배 교사이자 그녀와 가장 친하기도 한 수연과 만나 밤새 떠든 내용을 복기해 보았다.

“야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이번에는 재단 이사장 손자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놈이래. 나보다 어릴 걸? 결국 자기 사람으로 또 채우는 거지.”

유정은 치킨무를 우적 우적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저는 또 비서 노릇을 해야 한다는 거죠?”

“어쩔 수 없지, 뭐. 너랑 같이 임용된 영어 선생님은 남자잖아.”

“정장 이쁜 거 입고 오래요.”

유정은 교감 선생님이 특별히 지시한 사항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대체 날 교사로 아는 거야 여자로 아는 거야. 여성부에 찔러 버리고 싶지만 갓 임용된 처지에 그럴 수도 없고.

“다른 학교에서 평교사로 좀 있었다곤 하는데, 그래도 뭘 알겠냐? 그냥 전 교장처럼 혼자 바둑 두면서 놀다 가겠지.”

“아, 그러게요. 결재판 들고 가면 맨날 그 바둑만 두고 있어.”

“그러니까. 전에는 아침 드라마 보면서 낄낄대고 있더라니까.”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것은 뒷담화이고, 더 재미있는 것은 바로 직장 상사 뒷담화이다. 수연과 밤새 떠들다가 유정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개학은 3월이지만, 교사들은 2월 마지막 주에 정상 출근을 해서 미리 개학 준비를 하게 되어 있었다. 내일은 바로 그 정상 출근 날이었다.

정교사가 된 후 첫 출근이라고 생각하니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유정은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조금 눈을 붙였다.

준서는 중앙 교무실 문을 열었다. 이 학교는 독특하게 교무실이 하나였다. 보통은 학년 교무실은 그 학년이 있는 층 옆에 있는데. 문을 열자 다닥 다닥 붙어 있는 책상이 한 눈에 들어왔다.

왜 이렇게 실내가 춥지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창문을 다 열어 놓았다. 설마 창문을 열고 퇴근한 건가, 이렇게 관리를 엉망으로 하나.

준서는 얼굴을 찌뿌리며 창가로 다가갔고, 막 창문을 닫으려다가 빗자루를 들고 있는 여학생을 보았다.

체육복을 입은 채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새벽에 선생님도 없는 교무실에 난입하여 혼자 뭘하고 있는 건지.

“야.”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어라, 화장도 지독하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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