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이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오?”
장수가 소리쳤다. 서생은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됐네. 일단 저쪽으로 가 보지. 어차피 크지 않은 곳이니, 마땅히 도망갈 곳도 없을 걸세.”
서생이 대답하지 않자, 장수가 외쳤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서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수와 병사들은 재빨리 사냥개가 달려간 방향을 쫓아갔다.
그러나 한바탕 추격이 끝난 뒤, 멀리서 사냥개 무리가 토끼 한 마리를 입에 문 채로 돌아왔다. 장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말머리를 돌리려던 찰나, 갑자기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이런, 경성에 무슨 일이 났구나.”
장수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장수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가자. 지금 당장 강주부로 돌아간다.”
장수의 호령과 함께, 사냥개와 사람들은 허둥대며 왔던 길을 따라 달려갔다. 황량한 들판 위로 횃불과 말굽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늪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자, 벌레와 새가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동이 트면서 어둠이 걷히자, 하늘이 차츰 쪽빛으로 물들었다.
그때, 늪의 어딘가에서 띠풀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한 사내가 풀숲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그의 옷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온몸에는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차디찬 겨울의 바람이 불어오자, 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하지만 그는 몸을 따뜻하게 할 겨를도 없이 냅다 겉옷을 벗어 품에서 이불 보자기를 꺼냈다.
늪에 숨어 있던 여인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진흙탕 속에서 기어 나왔다. 진이 다 빠졌는지, 여인은 풀숲으로 올라오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도련님은 어찌 되셨습니까?”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여인이 물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아기는 여전히 발그레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편히 잠들었는지, 아기는 입에서 조그마한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사내가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어서 가세. 어서.”
사내가 표정을 가다듬고는, 재빨리 아기를 다시 품에 넣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부축하면서 어딘가로 뛰어갔다.
하늘이 점차 밝아지더니, 동쪽에서 붉은 해가 떠올랐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번외. 진(陳)씨 가문-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잠에서 깼다.
아니, 지금은 진소 부인이 아니라 진아리(陳阿李)라고 불린다. 죄가 있는 사람의 부인은 속칭으로 불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성이 진씨고, 친정의 성이 이(李)씨이니, 그녀는 진아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화로에 있던 숯은 진작 타서 재로 변해 있었다. 텅 빈 침상 옆자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진아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랑.”
진아리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조정이 진소의 죄를 묻고자 삼족의 가산을 몰수하고 벌을 내릴 때, 진씨 가문 여인 중 몇 명은 집안의 변고를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단랑은 줄곧 침착한 모습으로 자신을 잘 따랐지만, 그래도 그녀는 불안하기만 했다. 혹여라도 단랑이…….
진아리가 고개를 들고 벽을 올려다보았다. 거친 회백색 벽에 장궁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
문밖에서 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문이 열리고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낡은 솜옷을 입은 진단랑이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한 모습으로 말했다.
“눈이 와요!”
눈을 치우는 소리가 저택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깨웠다. 잠에서 깬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서 진아리와 진단랑이 눈을 치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밤새 두껍게 쌓인 눈 때문에 모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셋째 형수님, 제가 하겠습니다.”
한 사내가 나서서 모녀를 도우려던 찰나, 옆에 서 있던 그의 아내가 그를 흘겨보면서 말렸다.
“어제 짊어지고 온 장작도 다 안 팼잖아요. 어서 가서 장작이나 패요.”
사내가 민망한 듯 나지막이 대꾸했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니잖소.”
여인이 눈을 부라리며 다 들으라는 듯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평생 장작이나 패야 되는 처지가 된 게, 누가 지은 죄 때문인데요!”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커다란 저택 안, 여러 방의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다들 모녀가 눈을 치우는 모습을 흘끔 보기만 할 뿐, 두 사람을 도우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아리 모녀는 사람들의 냉랭한 태도를 보지 못한 듯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쓸기만 했다. 문 앞, 마당 안, 담벼락 구석까지 빠짐없이 치웠다.
“단랑, 힘들면 잠시 쉬거라.”
진아리가 말했다.
진단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나무 아래로 눈을 힘껏 밀어 쌓았다. 눈더미를 잠시 바라보던 진단랑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홱 돌리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단랑? 손으로 눈 만지지 마라. 그러다 동상 걸려.”
진아리가 소리쳤다.
“괜찮아요.”
진단랑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굴리기 시작했다.
“십구 누이.”
문밖에서 누군가가 진단랑을 불렀다.
진아리가 고개를 돌렸다. 젊은 사내 하나가 삽을 든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십육낭이구나.”
진아리가 미소 띤 얼굴로 진십육낭을 맞이했다. 진십육낭이 진아리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리고 손에 든 삽을 고쳐 들었다.
“백모님, 누이와 함께 잠시 쉬시지요. 여기 있는 눈은 제가 마저 치우겠습니다.”
진아리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옆으로 가서 잠시 쉬었다.
“너희 집에 쌓인 눈은 다 치웠니? 어머니 병세는 좀 어떻고?”
진십육낭은 진아리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동시에 능숙하게 삽을 다루면서 마당 곳곳에 남은 눈을 깨끗하게 치웠다.
“십육 오라버니, 눈덩이 하나만 뭉쳐 줘요.”
진단랑이 옆에서 소리쳤다.
“괜히 네 오라비 귀찮게 하지 말아라.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진아리가 얼른 진단랑을 나무랐지만, 진십육낭은 벌써 진단랑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진단랑에게 눈사람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진단랑과 함께 무 꼬리와 나뭇가지 등을 주워와 눈사람을 장식했다.
“진짜 예쁘다!”
진단랑이 손뼉을 치면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 다 만들었으니, 그만 들어가 봐.”
추워서 새빨개진 진단랑의 두 손과 볼을 보자 마음이 아팠는지 진십육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단랑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마당 앞을 지나가면서 진단랑과 진십육낭이 만든 눈사람을 보고는 입술을 삐쭉였다.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됐는데, 어쩜 저렇게 즐거워할 수가 있담. 정말 뻔뻔하고 양심도 없지.”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진십육낭이 미간을 팍 찌푸리면서 따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진단랑이 재빨리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라버니, 이거 동상 연고예요. 경성의 이춘당에서 만든 거고요.”
진단랑이 진십육낭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면서 말했다.
이춘당의 동상 연고는 서북 군영에만 납품하는 약이었다. 군인이 아닌 사람이 이춘당의 동상 연고를 사려면 엄청난 값을 내야 하기에, 경성에서도 쉬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십육낭이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알겠다는 눈빛을 보였다.
“누가 선물해 준 거예요.”
진단랑은 설명을 덧붙이면서도, 누가 선물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진십육낭은 무언가 눈치챈 듯 더는 묻지 않고 동상 연고를 다시 진단랑에게 돌려주었다.
“오라버니는 추위 안 타니까, 남겨 뒀다가 너 써.”
“그럼, 사촌 언니들은 평소 손 씻을 때 동상 걸리기 쉬우니까, 언니들한테 줘요.”
진단랑이 말했다.
진십육낭이 더는 거절하지 않고 웃으면서 진아리를 향해 예를 표했다.
“백모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육 오라버니, 돌아가면 조부님께 말해 줘요. 밥 먹고 나서 활쏘기 연습하러 조부님께 갈 거라고요.”
진단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십육낭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삽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떠났다.
날씨가 춥다 보니, 둔보(屯堡: 파병된 군대가 강제 이주된 민간인과 함께 자급자족하는 군사적 취락)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사내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언짢은 기색으로 걸어 나왔다.
“이 빌어먹을 날씨에도 밭에 나가야 한다니, 이게 무슨 고생이람.”
사내들은 진십육낭을 보자, 그를 흘겨보면서 핀잔을 줬다.
“십육, 뭐하러 그 모녀를 챙겨 주고 있어?”
“그래.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건데.”
다른 사내가 맞장구치면서 발을 굴렀다.
진십육낭이 그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친족이라는 게 뭔가요. 영광이 있다면 함께 누리고, 손해를 본다면 함께 봐야지요. 다들 함께 영광을 누릴 때는 불평 한마디 없더니, 손해를 보게 되니 어찌 이리 원망하십니까.”
사내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가문 전체가 이렇게 되었는데, 불평 한마디도 못 하나? 그리고 진씨 가문의 영광을 그자 혼자서 일궈 낸 것도 아니잖아. 결국엔 그자 손으로 짓밟아 버렸지만.”
“맞아. 죄인의 처지가 되어 우리 가문 자제들의 앞길이 전부 막혔어. 그런데도 우리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넙죽 큰절을 올려야 하나?”
“다른 건 제쳐 두고, 십육낭, 너만 봐도 그렇잖아. 네 혼사도 신부 쪽에서 물렀어. 글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네 두 손으로 이렇게 곡괭이 들고 밭이나 일구는 게 억울하지도 않아? 여태 공부한 게 다 무용지물이 됐는데?”
사내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한마디씩 얹었다.
진십육낭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꼭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니니, 무용지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진십육낭이 고개를 들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백부님께서 잘못하신 게 있다면, 그건 백부님의 잘못일 뿐입니다. 무고한 백모님과 단랑에게 화풀이하고 그들을 원망하는 게 과연 응당한 일일까요?”
사내들이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휴, 됐다. 우리가 너만큼 아량이 넓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진십육낭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몇 걸음 옮기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더구나 백모님과 단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살 수도 없었습니다.”
진소가 저지른 죄는 역모의 대죄였다. 삼족이 연루되는 중죄이므로, 집안 사내들은 영남 지역이나 서북 군영으로 보내져 병졸이 되거나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고능준의 집안이 그러했다. 조정에서는 태후의 체면을 봐서 고능준의 삼족을 벌하지는 않고, 고능준의 일족만 벌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문의 실세였던 고능준의 일족을 벌한다는 건, 고씨 가문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맥을 끊어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반해 진씨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둔보의 농토를 가꾸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가문 전체를 구주(衢州)로 보내 한곳에 모여 살게 하여, 죄를 지은 여느 집안들처럼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사실상 진씨 가문은 과거의 호화로운 대저택, 비옥한 농토, 저잣거리의 점포, 그리고 비단옷과 화려한 장신구를 잃었을 뿐이지, 둔보의 농토를 가꾸며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지낼 수 있었다. 최전방에 보내져 죽음만을 기다리는 경우와는 천지 차이였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건가?
사내들이 멈칫하며 진십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녀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라고?
진십육낭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
진십육낭의 가족들이 사는 거처 앞은 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마당 안에서는 진 노태야가 권법을 수련 중이었다.
“네 아비는 대나무 구하러 산에 갔다.”
진 노태야의 말에, 진십육낭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삽을 내려놓았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밥부터 먹고 가거라.”
진 사부인이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진 사부인의 딸들도 진십육낭의 밥을 차려 주려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 이건 단랑이 준 동상 연고예요.”
진십육낭이 진 사부인에게 연고를 건네며 말했다. 그는 자리에 앉는 대신 접시에 올려진 전병 하나를 집어 들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랑 교대하고 올게요.”
진 사부인이 몇 걸음 쫓아가면서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진십육낭은 벌써 문밖을 나간 후였다.
“어디서 난 연고래?”
진 사부인이 손 위에 놓인 동상 연고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춘당 거예요. 어머니, 이제 손에 동상 걸릴 걱정은 없겠어요.”
진 사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온 딸 하나가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과거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는 귀한 규수로 자라던 딸들이 지금은 부엌에서 칼질을 하고, 탕을 끓이고, 뜯어진 옷을 꿰매느라 십여 년간 깨끗하게 관리해 오던 손이 불과 달포 만에 몹시도 거칠어졌다. 날이 추워지자 손은 더욱 빨갛게 부르트거나 갈라지곤 했다.
이춘당 세 글자에 흠칫 놀란 진 사부인이 동상 연고를 딸들에게 건넨 뒤, 진 노태야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진 사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이춘당이 강주 정씨 가문의 가업이라고들 하지만, 일찍이 황후마마의 소유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동상 연고를 날이 추워지는 이때 때맞춰 보냈다는 건, 필시 황후마마의 뜻일 거라고 진 사부인은 생각했다.
“좋은 뜻이지. 그분은 단랑 모녀를 늘 그렇게 대했지 않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그럼 셋째 형님댁은 이제 안심해도 되겠네요.”
진 사부인이 말했다. 수련을 마친 진 노태야가 허리를 곧추세우자, 진 사부인이 손수건을 건넸다.
“셋째가 죽을 마음을 먹었던 것도, 어쩌면 자신의 뒤를 봐줄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서였겠지.”
진 노태야가 말하자, 진 사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탄식했다.
“조부님!”
문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사부인이 고개를 돌리자, 진단랑이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헤헤 웃고 있었다.
“단랑, 어서 오렴. 오늘 네 언니가 양고기 탕을 끓였어. 한 그릇 먹고 몸 좀 녹이거라.”
진 사부인이 활짝 웃으면서 진단랑을 향해 손짓했다.
진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소의 처자식을 싫어하고 냉대했지만, 진 사부인 내외는 진소가 원망스럽긴 해도 그의 처자식에게는 따뜻하게 대했다.
진단랑이 고개를 저었다.
“숙모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미 밥을 먹고 왔어요. 저는 조부님을 뵈러 온 거예요.”
진단랑이 손에 쥔 장궁을 흔들면서 말했다. 진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겉옷을 챙겨 문가로 다가갔다.
“단랑, 참 기특하구나. 하루도 빠짐없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말이야.”
진 노태야가 칭찬하자, 진단랑이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요.”
“옆 마을에 노장이 한 명 살고 있대서, 사람을 시켜 네게 활쏘기를 가르쳐 주십사 부탁해 두었다.”
“우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조부님.”
진 노태야와 진단랑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지자,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 사부인의 딸이 입을 열었다.
“진단랑은 하나도 변한 게 없네요.”
진 사부인이 고개를 돌려보자, 딸들이 일제히 문밖을 내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단랑이 저렇게 잘 지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곧 태자비가 될 아이였는데, 그리 엄청난 변고가 생기다니.
갑자기 닥친 큰일에 집안의 다른 몇몇 여인들은 목을 매달고 자결하기도 했어. 그런데 정작 이 일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인 진단랑은 모든 걸 받아들인 듯 담담한 모습이야. 끼니도 거르지 않고, 예전처럼 쾌활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야.
“속상한 것을 꼭 남에게 보여줘야 속상한 게 아니잖아.”
진 사부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도 억지로 웃는 건 티가 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단랑의 모습을 보면, 정말로 괜찮아 보여요.”
딸들이 대꾸했다.
“정말로 괜찮을 리가 있나. 일생이 망가져 버렸는데.”
진 사부인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길이 끊긴 건, 비단 단랑뿐만이 아니야. 진씨 가문의 자제들이라면 모두, 심지어 내 아들딸들의 앞길도 영영 막혀 버렸지. 황후마마께서 좋은 뜻으로 우리를 챙겨 주신다고 해도, 인생이라는 게 꼭 배불리 먹고 자는 것만이 다는 아니잖아.
어디 자식들뿐인가. 후손은 또 어떻고.
진씨 가문의 후손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 사부인은 더욱 슬퍼졌다.
아들딸의 혼삿길이 다 막혔으니, 이제 진씨 가문에 후손은 없겠지.
슬픔에 잠긴 진 사부인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리던 찰나, 문밖에서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했다.
“여기가 진 사노야 댁입니까?”
깜짝 놀란 진 사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두 사내와 두 여인이 진 사부인을 향해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저희는 태주(泰州) 유(劉)씨 가문에서 온 사람입니다.”
태주 유씨?
진 사부인이 놀란 모습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태주 유씨가 어느 집안이지? 왜 우리를 찾아온 거야?
“다름이 아니라, 댁의 진십육 공자에게 혼담을 넣으러 왔습니다.”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혼담이라니!
진 사부인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길 가는 행인조차 우리 진씨 가문을 피해 가려고들 하는데, 먼저 우리 집에 찾아와 혼담을 넣는다고?
게다가 옷차림과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결코 보통 집안의 사람들 같진 않은데.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태주 유씨?”
산에서 불려온 진 사노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태주 유씨라면 무장 집안이오. 지금 태주로의 수비를 담당하는 유년춘(劉年春)이 바로 그 가문의 사람이지.”
진 사노야의 말에 진 사부인이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꽤 괜찮은 가문이네요.”
태주 유씨 가문은 나름대로 좋은 가문이었다. 진소가 생전에 있을 때였다면 진소의 자녀에게 혼담을 넣을 정도는 아니지만, 진 사노야의 자녀들에게는 혼담을 넣을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 처지에서 태주 유씨 가문은 진 사노야 가족이 꿈에도 넘볼 수 없는 가문이었다.
“유씨 가문의 유규라는 사람의 딸이래요. 유규는 이번에 서북로의 도감(都監)이 된 사람이고요.”
진 사부인이 손에 쥔 명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 사노야가 깜짝 놀라 물었다.
“혹시, 그 사람 딸이 장님이라고 하오?”
진 사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벙어리라거나, 바보? 아니면, 품행에 무슨 문제가 있다든지?”
진 사노야가 연달아 묻자, 진 사부인이 실소를 터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 아니에요. 올해 열일곱이고, 문무에 재능이 출중하대요. 그 사람들이 그 낭자의 초상화도 가져왔어요.”
진 사부인이 옆에 놓인 두루마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초상화라고 다 믿을 건 못 되지.”
진 사노야가 말했다. 진 사부인이 그를 쳐다보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 대꾸했다.
“보아하니, 경성 범(范) 대가의 화풍이 느껴지던데요.”
진 사노야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범 대가!
범 대가라면, 미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유명한 화공인데.
정말 범 대가라면 아무나 모실 수 있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누구와 짜고 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 진십육과 혼담을 넣으려고 범 대가까지 초청해 초상화를 그렸다고?
물론 예전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은…….
“유씨 가문에서 온 사람들 말로는, 유 노야가 경성에서 우연히 십육낭과 마주쳤대요. 그때 십육낭이 마음에 들어서 혼담을 넣고 싶었는데, 그때는 유 노야가 신분이 낮았던지라 감히 우리 가문에 혼담을 넣을 수가 없었다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우리 십육낭한테 미련이 있던 차에, 십육낭이 퇴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서둘러 혼담을 넣으러 온 거라던데요?”
정, 정말 그렇게 된 거라고? 그런데 어째 잘 짜인 연극을 보는 느낌이지?
진 사노야가 경악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오.”
진 사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친께 여쭤보고 오리다.”
눈이 내린 겨울의 마을에는 지나다니는 행인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화살이 날아가자 나뭇가지 위에서 쉬고 있던 새들이 지저귀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진단랑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진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진 노태야는 진 사노야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단랑이 장난스럽게 혀를 날름거리고는 다시 활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조준하며 화살을 쏘았다.
진 노태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낭, 정말 이상한 일이긴 하구나.”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진 사노야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당장 가서 혼담을 거절하고 오겠습니다. 우리 대답을 들으려고 아랫마을에 묵으면서 기다리고 있다더라고요.”
“그래, 그럼 당장 가서 만나 봐야지. 하지만 이 혼담을 거절할 게 아니라, 수락해야 한다.”
진 노태야의 말에 진 사노야는 크게 놀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낭.”
진 노태야가 웃음기를 거두고 진 사노야를 불렀다. 진 노태야는 진지한 얼굴로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눈가에 스치는 감격을 숨기지는 못했다.
“앞으로 우리 진씨 가문의 앞날은 십육낭에게 달렸구나.”
이 혼사로 십육낭의 앞길이 트인다는 뜻인가?
하지만 역모의 대죄를 저지른 자의 후손이기에, 관리 가문과 사돈을 맺는다고 해도 진씨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을 텐데?
“사낭, 유규가 누구인지 아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태주 유…….”
진 노태야가 진 사노야의 말을 끊었다.
“당초 네 형이 생전에 있었을 때 말이다. 네 형이 고능준과 서북 군정을 놓고 다투게 된 계기인 서북 탈영병 사건을 기억하느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진 사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었던 것이 생각난 그는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 그 탈영병들이 바로 황후마마의 의형제였지요.”
진 사노야가 말했다.
“유규라는 자는 바로 황후마마의 의형제를 붙잡아 이 사건을 조정에 올렸던 사람이야.”
진 노태야가 말했다.
그 사람이, 유규라고?
진 사노야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유규라는 자는 바로, 무원산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목숨을 걸고 무원산 형제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 증인이었지.”
진 노태야가 이어서 말했다.
그럴 수가!
진 사노야가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유규라는 사람이 황, 황후마마와…….”
진 사노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지만,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다.
황후마마께서 의형제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그 의형제들과 관계가 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설마 이 일도…….
더는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진 노태야를 보자, 확신이 든 진 사노야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거로구나.
유씨 가문과 혼인을 맺는다는 것은, 단순히 처가의 도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황후마마의 든든한 지지까지 받는다는 뜻이지. 십육낭에게는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의 아들딸에게는 분명히 새로운 기회가 있을 거야.
황후마마께서 우리 진씨 가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신 거로구나!
역모죄를 저지른 셋째 형님네는 다시 재기하기 힘들겠지만, 진씨 가문에는 아직 우리 집안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진씨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겠어.
죄를 저지른 집안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잘 수 있게 해 주신 황후마마의 배려에 감사했는데, 진정한 배려는 바로 여기에 있었어!
진 사노야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왜, 왜 이렇게까지…….”
진 사노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후는 진씨 가문의 은인이기도 하고, 진 노태야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조정에서도 항상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진씨 가문을 도와 고능준과 대적했다. 그런데 진씨 가문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탈영병 때도 그렇고, 양자 입적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도 그렇고. 진씨 가문은 언제나 황후와 같은 편에 서지 않았다. 심지어 황후와 대립각을 세우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중에도 너의 셋째 형수 일가를 잘 챙기면 되느니라.”
진 노태야가 더는 말하지 않고 웃음 띤 얼굴로 단랑을 불렀다.
단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단랑이 장궁을 높이 들면서 외쳤다. 차디찬 바람에 피부가 튼 진단랑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저도 이제 과녁 중앙을 맞출 수 있어요!”
진 사노야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진단랑을 쳐다보다가 이내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육낭의 혼사는 금세 결정되었다. 중매인을 보내 신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고, 길일을 택해 신부 집안에 알린 다음 육례(六禮) 절차를 순조롭고 마쳤다. 두 번째 큰 눈이 내릴 무렵 신부가 가마를 타고 진씨 가문에 들어왔다.
친영 행렬이 둔보에 나타나자, 둔보 인근의 마을이 시끌벅적해졌다.
“어서 구경하러 가세! 진씨 가문에 신부가 들어왔다네.”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저었다.
“진씨 가문의 신부라면, 볼 게 뭐 있겠어. 어디서 몇 푼 쥐여 주고 사 온 가난한 신부겠지.”
“무슨 소리요. 돈이 엄청 많은 신부가 시집왔어. 혼수 행렬이 얼마나 긴지, 이 둔보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니까!”
둔보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고?
그럼 혼수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십만 관은 족히 넘는다던데?”
다른 사람이 외쳤다.
십만 관!
에구머니나! 미친 거 아니야?
세상에. 혼수를 십만 관이나 해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부 대인 댁에도 혼담을 넣을 수 있을 텐데, 누가 제 딸을 죄지은 관리 집안으로 시집보내?
사람들이 우르르 둔보 쪽으로 몰려갔다.
북과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붉은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혼례를 알리는 폭죽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하늘에는 오색찬란한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입을 떡 벌린 채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고개를 치켜들고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어머니, 저거 봐요. 정 언니, 아니, 경성에서 봤던 불꽃놀이랑 똑같은 거예요!”
진 사노야의 집 앞, 진단랑이 신이 나서 외쳤다.
그때 누군가가 진단랑과 진아리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면서 지나갔다.
“어이, 좀 비켜 봐요. 이따 새 신부가 들어오면 셋째 형님은 어디 가서 좀 숨어 있고요.”
두 사람을 밀친 아낙이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진아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어색하게 웃고는 진단랑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했다.
신부의 가마가 마당 안에 들어오고, 모두가 진 사노야의 거처로 들어가 마당 가득 놓인 혼수를 구경했다.
“단랑, 우리는 그만 돌아가자.”
진아리가 단랑의 손을 잡고 말하자, 진단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몸을 돌리던 찰나, 누군가가 진아리를 불렀다.
“셋째 형님, 어서 이리 와 봐요. 어서요.”
자신을 급하게 부르는 진 사부인을 본 진아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진 사부인은 다짜고짜 진아리의 소매를 붙잡고 사람들을 비집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란 기색으로 진아리 모녀를 쳐다보았다.
진아리를 끌고 들어온 진 사부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진아리 모녀를 혼수 앞으로 데리고 갔다.
“형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것 좀 보시라고요.”
진 사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혼수?
진아리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혼수를 쳐다보았다. 붉은 상자에 오색 비단 끈과 비단으로 만든 공이 묶여 있었다. 진아리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것들은…….
단랑을 위해 준비해 뒀던 혼수를 내일 다 정씨 저택으로 보내려고요.
내가 꼭 정 낭자의 체면이 제대로 설 수 있게 시집보낼 거예요.
붉은 상자들 위에는 진씨 가문의 표식이 뜯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아리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시야가 흐릿해졌다.
뭐하러 이렇게 마음을 써 가면서 돌려주는 거예요!
뭐하러!
바보 같은 정 낭자!
“셋째 형님, 형님이 우리 진씨 가문을 살려 주신 거예요.”
진아리의 귓가에 울먹이는 진 사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한 방울의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갚고, 단 한 번의 배려도 마른 나무에 꽃이 피도록 되돌려주다니.
진아리는 경성을 떠난 뒤로 꾹꾹 눌러 담았던 설움을 토해내듯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쏟았다.
마을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산 아래에 있는 도관에서 경서를 읊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러워?”
어린 도동이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대답했다.
“십팔랑 아씨, 오늘은 아씨 집에 혼례가 있는 날이잖아요. 모르셨어요?”
도동의 대답을 듣자, 눈빛에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던 여도사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집? 난 집 같은 거 없어.”
도동이 입술을 삐쭉였다.
진씨 가문은 삼족이 벌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진씨 가문과 연을 맺은 집안의 사람들까지 그 화를 당하게 됐다. 그래서 진씨 가문의 여식인 진십팔랑과 혼례를 올렸던 그녀의 남편은 화를 피하고자 소식을 들은 즉시 진십팔랑과 이혼했다. 하지만 진씨 가문에서도 진십팔랑을 다시 받아주지는 않았다. 진씨 가문은 그녀의 혼수를 모두 도관에 보내 도관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
얼마나 불길한 사람이길래 가족에게도 버림을 받은 걸까?
도동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진십팔랑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집이 어딨어? 나라도 없고, 하느님도 없는데, 누가 집이 있어! 이 세상 누구도 집 같은 건 없어!”
진십팔랑이 점점 더 흥분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하느님도 없다고! 하느님은 눈이 없어!”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도동이 밖으로 한걸음 물러나 잽싸게 문을 걸어 잠갔다. 도동이 문을 잠그자마자, 안에서 큰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방 안의 사람은 광기에 휩싸인 사람 같았다.
“천도가 이리도 불공평할 수가 있습니까! 하느님, 참으로 불공평하십니다!”
“전 이렇게 포기 못 해요! 도저히 마음이 안 내킨다고요!”
세상에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원하는 대로 일이 술술 풀린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지.
도동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소매 안에 손을 넣고 방 안의 정신 나간 사람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도동은 고개를 들고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어제의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진 사노야의 대청 안에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진소가 죽은 뒤, 친척들은 진 노태야 일가를 피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오늘처럼 다 같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좋은 혼인을 맺을 줄은 몰랐네.”
“외가가 서북로의 도감이라잖아. 대대로 무장만 하는 집안이라서 앞길이 창창해.”
“그 일이 생긴 뒤로는 우리 집안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귀한 집에서 혼담을 넣을 줄이야. 유씨 가문은 앞길이 막히는 게 두렵지도 않나?”
“듣기로는 유씨 가문의 노야가 십육낭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서 계속 벼르고 있었대. 이 인연으로 삼생의 운을 다 끌어다 쓴 거 아니야? 이제 진씨 가문 사람들도 어깨 펴고 살 수 있겠네.”
“참나.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유씨 가문 노야가 친필로 쓴 서신에 쓰인 내용이라니까?”
친척들은 대청 안에서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혼부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신부 쪽에서 진씨 가문을 무시해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건 아닌지 추측하던 그때, 진 사부인이 두 사람을 데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진 사부인이 데리고 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진아리와 진단랑이었다.
“셋째 형님, 여기에 앉으세요.”
진 사부인은 사람들의 언짢은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길을 터주었다.
진아리가 진 사부인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러지 마요. 그분의 선의도 알고 동서의 좋은 뜻도 알지만, 난 죄지은 몸이에요. 천자께서 벌을 내렸고 나라의 국법이 지엄한데, 이리 잘해 줬다가는 또 무슨 유언비어가 돌지 몰라요. 그건 그분께나 우리 진씨 가문에게나 좋을 게 없어요.”
진 사부인이 진아리의 손을 다독였다.
“형님, 형님이 이 자리에 안 나온다고 해서, 남들이 모를 거 같아요? 이 혼사가 왜 이렇게 떠들썩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는지는 다들 거울 보듯 훤히 알고 있을 거예요.”
진 사부인은 진아리에게 바짝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형님이 그분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분이 언제 유언비어 같은 걸 무서워한 적 있나요?”
하긴, 그 여인의 행실을 보면 꼭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단 말이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남의 시선이라고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아.
그 여인이 이렇게까지 해 줬다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게 그 여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이겠지.
진아리가 살짝 미소짓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십육낭더러 들어오라고 해요.”
진 사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여태 저 모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십육낭이야 항상 두 모녀에게 잘해줬다지만, 신부는?
저 두 사람이 무려 진소의 처자식이라는 건 알고 있을까?
사람들의 시선이 천천히 대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신랑 신부에게 향했다.
신부의 나이는 올해 열여덟이고,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지만, 걸음걸이에서 무장 가문 특유의 호방함이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신부는 위축되거나 어색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긴, 위축될 게 뭐 있겠어? 십만 관의 혼수가 든든한 뒷배처럼 버티고 있는데. 아마 이 집에서 안하무인으로 군다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걸?
항렬에 따라 차례로 문안 인사를 올리던 신부는 금세 진아리의 앞까지 왔다.
실내가 다시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신부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을지 궁금해했다.
“백모님을 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신부는 웃으면서 진아리를 향해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진아리가 서둘러 신부를 부축하여 일으키고, 진단랑이 건네는 버선을 받아 손에 쥐여 주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 마땅치 않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건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진아리가 따뜻한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며 웃었다. 유씨 가문의 낭자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버선을 받으며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백모님의 솜씨가 대단하세요.”
신부는 버선을 진지한 얼굴로 꼼꼼히 살펴보고는 진심 가득한 미소와 칭찬으로 화답했다. 그러고는 진아리의 옆에 선 딸들을 바라보았다.
“형님들을 뵙겠습니다.”
신부가 예를 표하자, 진아리의 딸들이 서둘러 답례했다.
“이쪽은 동생이구나.”
유씨 낭자가 진단랑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진단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가볍게 답례하며 ‘새언니’라고 불렀다.
유씨 낭자가 진단랑에게 첫 만남 선물을 건넸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 자그마한 등롱이었다. 다른 이들은 십만 관의 혼수를 들고 시집온 사람답지 않게 소소한 선물을 줬다고 생각했지만, 진단랑은 눈빛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새언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바로 등롱이에요!”
유씨 낭자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진아리는 속으로 무언가 집히는 게 있는 듯했다.
문안 인사를 마친 뒤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 음식은 풍성했다. 맛있는 요리가 끝도 없이 펼쳐지자, 배에 기름칠을 못 한 지 몇 달이 넘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으로 잘 됐구나. 십만 관 혼수 덕에 앞으로 살림이 많이 나아지겠어.”
“에이, 그 혼수는 우리 집 것도 아니잖아.”
“넷째 집안에 희망이 생겼으니까, 우리도 점점 나아지겠지.”
“유씨 가문 장인어른이 십육낭에게 서북 일자리를 알아봐 줬대.”
“무관직인가?”
“무관이면 뭐 어때서. 나중에 문관으로 바꾸면 되지.”
안팎으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에 집안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한편 진단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유 낭자의 신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는 지낼 만해요?”
진단랑이 물었다.
유씨 가문의 딸이라면, 이렇게 높이가 낮고 황토로 지어진 누추한 집은 처음이겠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서북에서 지내곤 했어. 아주 외진 둔보에서도 살아 봤고, 땅을 파서 나무판자만 대충 씌워 만든 집에서도 지내 봤지. 넌 그런 곳에서 살아 본 적 있니?”
유 낭자가 웃으면서 물었다.
그런 집이 있다고? 난생처음 듣는 집인데?
진단랑이 고개를 저었다.
“동생은 여기서 지낼 만해?”
유 낭자가 진단랑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유 낭자는 자신이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서북 곳곳을 돌며 힘든 생활을 했다지만, 자신 앞에 서 있는 앳된 어린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화려한 비단옷과 귀한 음식들만 먹고 자라다가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귀한 집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바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엎어지듯 황량한 벌판으로 내몰려 가난한 사람이 되는 거겠지. 몸도 힘들겠지만, 마음이 더 힘들 거야.
진단랑이 웃었다. 진단랑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지낼 만해요. 어떻게 되든 다 적응할 수 있어요. 나는 여전히 나니까요.”
무슨 뜻이지?
유 낭자가 의아한 눈빛으로 진단랑을 쳐다보았다.
“정 언니에게 이렇게만 전해 주시면 돼요.”
진단랑이 눈웃음을 지었다. 유 낭자는 흠칫 놀랐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게 아니야. 내,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진단랑은 말없이 유 낭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새언니는 내가 말한 정 언니가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네요?”
유 낭자가 정말 몰랐다면 정 언니가 누구인지 반문해야 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부인할 게 아니라.
유 낭자가 잠시 할 말을 잃고 진단랑을 바라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역시 학자 집안의 사람은 다르다니까. 나보다 어리긴 해도, 눈치가 나보다 백배는 더 빠르네. 난 못 당하겠으니까, 이 얘긴 그만할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 화제를 넘기고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유 낭자가 더는 말하지 않겠다고 하자, 진단랑도 더는 묻지 않았다.
“새언니도 활쏘기를 할 줄 알겠네요?”
진단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유 낭자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는 화살을 연달아 열 발을 쏘아 내실 수 있는 분이셔. 나도 그런 아버지에 뒤지지 않지.”
진단랑이 기뻐하면서 손뼉을 쳤다.
“그거 참 잘됐네요! 앞으로 새언니가 나한테 활쏘기를 가르쳐 준다면, 굳이 할아버지를 귀찮게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유 낭자가 웃으면서 진단랑을 바라보았다. 유 낭자의 귓가에 궁녀 소심의 말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낭자가 그 사람들을 잘 돌봐 주길 바라요. 단랑이 기뻐할 수 있게.”
유 낭자가 진씨 가문에 시집을 간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워하는 한편 유 낭자를 측은하게 여겼다. 역모의 대죄를 지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도 모자라 머나먼 구주까지 가는 것이니, 얼핏 보면 유 낭자가 죄를 짓고 유배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놈들이 알긴 뭘 안다고! 황후마마께서 언제 사람을 잘못 보신 적이 있느냐. 진씨 가문이 원래부터 보통 집안이 아니긴 하지만, 설령 보통 집안이라고 해도 마마의 손을 거치면 돌멩이도 금덩이가 되는 법이야.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사근 숙부를 봐라. 원래는 별 볼 일 없는 탈영병이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느냐? 그저 말을 키우는 사람일 뿐인데, 네 아비는 얼굴 한번 보려면 큰절까지 올려야 해.”
유규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유규, 말 좀 가려서 하게. 탈영병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서사근이 유규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유 낭자에게 말했다.
“얘야, 너무 섭섭히 여기지는 마라. 네 아버지가 마땅한 신랑감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너를 그 집안에 시집 보내려는 게 아니다. 황후마마께서 절대로 사람을 잘못 보실 리가 없어. 네 부군이 될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기억을 떠올리던 유 낭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젯밤에 처음으로 자신의 낭군을 보게 된 유 낭자는, 자기보다 몇 살 많은 낭군이 준수한 외모에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사내라고 생각했다. 유 낭자는 십육낭이 교양 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긴, 진씨 가문이 역모의 대죄를 짓긴 했지만,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자식들이라면 결코 평범하지는 않겠지. 지금 같은 처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디 가서 이렇게 빼어난 신랑감을 구할 수 있었겠어.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 내가 진씨 가문으로 시집왔으니, 이 집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 줄지는 눈 감고도 상상할 수 있지. 혼수를 바리바리 챙겨오기도 했고, 살림살이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혼사가 아니면 뭐겠어.
“좋아.”
유 낭자가 진단랑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십육낭이 혼사를 치른 뒤, 진씨 가문은 마치 액막이라도 한 듯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진씨 가문에 찾아온 변화는 바로 혼담을 넣으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혼기가 찬 진씨 가문 낭자들에게 혼담을 넣으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심지어는 진아리의 자녀들에게도 혼담이 들어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혼담을 넣으러 온 사람들이 더는 예전의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리 집안이거나 거상, 부호의 집안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혼담을 넣으러 오니, 진씨 가문 사람들은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게 다 십육낭의 복 덕분이야.”
사람들은 진 사노야 집안의 사람들을 더욱 살뜰하게 챙겼다.
사실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
“혼담을 넣은 곳 중에 괜찮은 집안이 몇 군데 있더라고요.”
진아리와 진 사부인이 같이 앉아서 자녀의 혼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무 먼 곳으로 시집가지 않았으면 해. 대낭과 이낭이 집에 없기도 하고, 형제들도 없이 이런 으리으리한 집안에 시집 보내는 건 너무 마음이 안 놓여.”
진 사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까운 데로 하죠. 십육낭은 사돈댁에서 챙겨 주고 있으니까, 십육낭을 서북으로 보내죠. 대낭과 이낭은 병영 일을 관두고 이리 돌아와 십육낭 대신 농사를 지으라고 하고요.”
진 사부인이 진아리에게 말했듯, 사람들은 진십육낭의 혼사에 관해 말을 아꼈지만, 이 일의 내막을 거울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 처지에 아들들의 앞길을 챙기기보다는, 집안 자녀들이 혼사를 치를 수 있다는 희망에 기뻐했다.
진아리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바로 한숨을 쉬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만, 진단랑은…….
역모의 대죄를 지은 대신의 딸인 데다가, 태자비가 될 뻔했던 신분인지라 진단랑은 과부나 다름없게 됐다. 아니, 과부보다도 못한 신세였다. 과부라면 적어도 개가는 뜻대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아리가 방 안에 앉아서 마당을 내다보았다. 곧 열세 살이 되는 진단랑이 마침 마당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단랑.”
진아리가 저도 모르게 단랑을 불렀다. 고개를 돌린 진단랑은 진아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시킬 일이라도 있으세요? 방은 다 청소해 놨어요. 책도 한 권 읽었고, 글씨 연습도 좀 하다가 지금은 활쏘기 연습하러 나가려고요”
단랑이 한 손에는 장궁을, 다른 한 손에는 화살통을 들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진아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진단랑을 바라보던 진아리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오늘도 네 새언니와 같이 가는 거니?”
“새언니는 십육 오라버니랑 같이 출타했어요. 새언니가 얼추 다 가르쳐 주어서, 이젠 저 혼자 연습할 일만 남았어요.”
진단랑이 대답하자, 진아리가 몸을 일으켰다.
“네 숙모네 가려던 참인데, 잠깐 같이 걸을까?”
두 모녀가 나란히 대문을 나섰다.
연말이 다가오는지라 주위에서는 이따금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지나다니는 이들의 얼굴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우중충하기만 했던 둔보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잘 지낼 수 있어요. 어머니, 그때 우리가 목숨을 끊지 않아서 참 다행이에요.”
단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진아리는 마음이 먹먹해져 진단랑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단랑, 속상한데 굳이 꾹 참고 있을 것 없어.”
진아리가 울먹였다.
이 아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울지 않았어. 차라리 울면 모를까, 울지도 않으니 마음이 더 쓰이네.
“어머니, 속상하긴 해도, 참아야 하는 그런 속상함은 아니에요.”
참아야 하는 그런 속상함이 아니라고?
진아리가 단랑을 바라보았다. 진소가 죽은 뒤로, 모녀가 이 일을 입에 올린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버지께서 잘못하셨고, 그 잘못을 인정하셨어요. 저는 아버지의 딸이니까 아버지를 대신해 죗값을 치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이 속상함은 내가 원해서 속상한 거니까, 참아야 하는 속상함이 아니에요.”
진단랑이 앳된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진아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었다.
“착한 우리 딸.”
진단랑이 또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다 알아요.”
진단랑이 고개를 돌리고 티끌 없이 맑은 눈빛으로 진아리를 쳐다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이건 아버지께서 저지르신 잘못이고, 우리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거잖아요. 저도, 어머니도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까 남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남을 보기에 창피하다고 느낄 필요도 없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를 어떻게 보든, 그건 그들의 일이이에요. 우리 스스로 양심에 떳떳하게 살면 그만이에요.”
진아리가 놀란 기색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된다고?
하긴, 맞는 말이긴 하지. 그 여인도 그랬었잖아?
“활쏘기 연습을 하더니 꼭 그분을 닮아가네.”
진아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아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진단랑은 다 안다는 듯 잠자코 웃었다.
“단랑, 그분이 너를 이렇게나 잘 챙겨 주시는데, 너,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진아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진소가 저지른 죄는 황실에서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중죄였다. 하지만 황후는 두 사람을 내치긴커녕, 예전보다 더욱 잘 챙겨 주었다. 진아리는 이토록 부친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진단랑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아버지가 무고하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그 여인이 위선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불쌍히 여겨 동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나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죠.”
진단랑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편히 대답하자 진아리가 멈칫했다.
“나도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도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분에게 잘 대해 줬으니까, 그분도 나를 잘 대해 주는 게 뭐 이상한가요? 당연한 일이잖아요.”
진단랑이 어깨에 둘러멘 장궁을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그렇구나.
진아리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그렇지. 그게 다지.
진아리가 힘없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분을 좋아하니까, 그분 같은 사람이 될래요.”
이어지는 진단랑의 말에, 진아리는 웃음이 어색하게 굳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 낭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비단 진단랑뿐만이 아니야. 저 산 아래 도관에 갇혀 있는 정신 나간 아이도 정 낭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었어.
“단랑, 정 낭자 같은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정 낭자는 우연히 아주 고명한 스승님을 만나서 신기한 기술들과 신의의 비술을 얻은 거야. 그건 평범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비할 바가 못…….”
진단랑이 웃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하게 말하던 진아리의 말을 끊었다. 진단랑이 진아리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어머니, 잘못 생각하셨어요. 저는 정 낭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진단랑이 ‘사람’이라는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그런 명성이나 기술을 얻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정 언니처럼 무서울 것도 없이 담담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래요. 남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속에 세상을 품은 사람이 될래요.”
진단랑이 이어서 말했다.
진아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진단랑을 쳐다보았다. 진단랑은 그런 진아리를 보고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숙모네 다 왔구나.”
진아리가 진단랑을 바라보면서 따뜻하게 웃고는 진단랑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제 가서 활쏘기 연습하려무나.”
진단랑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고는 민망한 듯 웃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진아리는 씩씩한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걱정으로 어둡기만 하던 진아리의 눈빛은 차츰 구름이 걷히는 듯 평온해졌다.
이래서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르고, 저마다 하는 선택 또한 다르다는 거겠지.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화살이 과녁의 중앙을 맞히고, 화살 끝에 달린 깃털이 미세하게 떨렸다.
진단랑이 고개를 들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슥슥 닦았다.
진단랑이 활을 내리던 사이, 길가의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단랑은 재빨리 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꺼내 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진단랑의 귓가에는 개가 내는 깨갱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진단랑이 깜짝 놀라서 길가로 달려갔다. 나무 밑, 작은 언덕 아래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단랑과 비슷한 나이대의 열두세 살쯤 된 소년이었다. 비단옷을 두르고, 겨울용 방한모를 쓴 소년은 백옥같이 뽀얀 피부와 봉황을 닮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엉거주춤하게 바지를 붙잡고 있는 소년을 보아하니, 나무 아래에서…….
허공에서 두 시선이 마주치고,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단랑이 몸을 홱 돌리고 달아났다.
“여봐라! 저기 호색한……이 아니라 호색녀가 있다!”
언덕 아래의 소년이 당황한 목소리로 힘껏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진단랑은 귀가 웅웅 울릴 정도였다.
“마을 어귀에 사는 커다란 누렁이인 줄 알았어요. 늘 거기 숨어 있다가 내가 활쏘기 연습하는 틈을 타서 나를 물려고 튀어나온단 말이에요.”
달아난 줄 알았던 진단랑은 넓은 공터에 서서, 소년의 외침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가노들을 향해 얼굴을 붉히며 설명했다.
“그리고 화살촉도 안 달려 있는 화살이라, 사람이 다칠 염려는 없어요.”
진단랑이 소리쳤다.
“헛소리, 다 헛소리야! 호색녀! 네가 나를 몰래 훔쳐봤잖아!”
가노의 뒤로 쪼르르 달려가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민 소년이 자신의 두봉을 꽁꽁 싸매면서 외쳤다.
진단랑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아니거든요?”
진단랑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세를 낮추고 먼저 사과했다.
“공자님께 실례했습니다.”
가노는 진단랑을 잠시 훑어보았다. 낡은 솜옷을 입고, 새하얀 치마를 입은 진단랑은 누가 봐도 가난한 집 아이 같았지만, 영리한 눈빛과 행동거지는 영락없는 귀한 집 자제였다.
“당장 저걸 잡아서 관아로 보내 버려!”
소년이 소리를 빽 질렀다.
사과를 먼저 하긴 했지만, 진단랑은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기만 했다. 예전에 어떤 호색한이 여인을 몰래 훔쳐봤다는 이유로 관아에 보내져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여인이 호색녀라는 죄목으로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노들도 이 상황이 우스웠는지, 웃음을 참지 못하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예, 예, 관아로 보내야지요.”
가노들이 일부러 목청을 높이면서 진단랑을 향해 어서 가라고 눈짓하자, 가노들의 의중을 알아차린 진단랑이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갔다.
“어, 어? 도망간다!”
소년이 외쳤다. 가노들이 진단랑의 뒤를 몇 걸음 따라가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멈춰 섰다.
“쫓아가야지! 왜 안 쫓는 거야!”
소년이 답답한 듯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일단 길을 재촉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가노들이 되돌아와서 말했다. 소년이 뭐라고 더 대꾸하려던 찰나, 한쪽에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십구낭!”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잽싸게 사내를 향해 달려가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십칠 형님! 십칠 형님! 어서 이리 좀 와 보세요! 어떤 호색녀가 나를 몰래 훔쳐봤다니까요!”
마차에 앉은 젊은 사내가 언덕 아래에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비단옷을 입고 있는, 새하얀 피부에 호리호리하고 곱상하게 생긴 사내였다.
소년의 외침을 들은 사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손에 쥔 부채를 촤락 하고 펼쳤다. 부채 위에는 커다랗게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지극히 정상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원래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거든. 이십구, 넌 이제야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됐으니 아직 적응이 덜 돼서 그래.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차차 익숙해질 거야.”
사내가 부채를 다시 접고 몸을 기울이면서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댔다.
“생긴 건 어떻디?”
소년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조금 전에 본 애가 어떻게 생겼더라.
“다른 건 모르겠는데, 눈이 참 예쁘긴 했어요.”
소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씩 웃었다.
“그럼 예쁘다는 거네. 사람은 자고로 눈이 예뻐야 전체가 예뻐 보이는 법이야. 생각해 봐. 이십구 네 눈도 태생부터 예뻤잖아.”
소년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아, 하고 대꾸했다.
“그런데 진짜 사나운 애였어요. 손에 활을 들고 있다가, 화살로 나를 쐈다니까요?”
소년이 조금 전에 주운 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손에 쥐면서 말했다.
한껏 여유롭게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활을 쏠 줄 안다고?”
사내가 목청을 높이고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넘치던 풍류 공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어딘가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의 사내만 남았다.
사내가 소년을 마차 위로 끌어 올렸다.
“어서 가자, 어서!”
소년이 의아한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십칠 형님, 아직 그 호색녀를 못 잡았어요! 어서 가서 잡아야 해요!”
“뭐라고? 제 발로 그 여인을 찾아가겠다고? 어휴, 안 돼, 안 돼. 그런 여인은 아무리 예뻐도 근처에 얼씬도 하면 안 돼. 이십구, 너는 모르겠지만, 왕년에 이 십칠 형님이 그런 여인을 떨쳐내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내 몸이 상하는 일까지 하고서야, 그 여인이 날 놔줬어. 그때 내가 그 여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왕십칠이 두려움에 떨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야기를 늘어놓던 때, 옆에 있던 가노가 마른기침을 했다.
“십칠공자님, 노야와 부인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잊으신 건 아니지요?”
그 여인과의 일은 다시는 입에 올리면 안 될 금기가 되었다.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렸다가는, 또 무슨 끔찍할 화를 당하게 될지 몰랐다.
왕십칠이 몸을 살짝 떨고는 정신을 차렸다.
“어, 어서 가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노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마차를 호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소년이 마차 휘장을 걷고는 언덕 위를 내다보며, 화살을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씩씩댔다.
“날 엿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울화가 치밀어 오른 소년이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냐! 그 호색녀가 어디로 도망쳤냐고! 어디 사람이더냐!”
가노들이 고개를 돌려보고는 대답했다.
“도련님, 여기는 구주의 국유지입니다. 저쪽도 마을도 모두 둔보와 둔전(屯田)뿐이니, 아마 둔전의 농사를 짓는 사람일 겁니다.”
둔전의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훨씬 찾기 쉽겠네.
죄를 지었던 집안의 사람이거나, 이주민이겠지. 관부에 명단이 있을 테니, 금방 찾아낼 수 있겠어.
소년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다시 언덕 위를 내다보았다.
네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는지 보자! 감히 이 몸을 몰래 훔쳐봐? 내가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구주부 성 밖, 진십육낭 부부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아버님, 살펴 가세요.”
유규가 어색한 기색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오신 줄 몰랐다면 몰라도, 왔다 가시는 걸 알면서 배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십육낭이 말하면서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괜히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라.”
유규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딸을 시집보내면서 사돈댁 코앞까지 따라오는 아비가 어디 있누.
“사근 숙부가 고향에 간다기에 바래다주러 왔다가, 온 김에 이 아이도 데려다준 것뿐이야.”
유규가 한마디 덧붙였다. 옆에 있던 서사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유규가 그를 흘겨보았다.
“맞잖아?”
서사근이 웃으면서 유규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으로 유규를 바라보는 유 낭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새해가 밝고, 봄이 될 때쯤이면 네 낭군과 함께 서북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서사근의 말에 유 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님, 우리 아버지 잘 감시해 주세요. 술 좀 그만 마시도록요. 걸핏하면 상관한테 맞서며 소란 피우지도 마시고요.”
딸에게 한 소리 듣자, 유규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이놈의 계집애가 뭘 안다고.”
유규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서사근이 웃으면서 유규의 팔을 붙잡고 유 낭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마. 날이 추우니 너희도 어서 들어가 보아라.”
서사근의 시선이 진십육낭에게로 옮겨갔다.
조금 전부터 계속 서사근을 몰래 쳐다보고 있던 진십육낭의 시선이 서사근의 시선과 마주쳤다. 당황한 진십육낭은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고 예를 표했다.
“어서 가자. 아직 갈 길이 멀어. 새해 전에는 집에 도착해야지.”
말에 올라탄 유규가 서사근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자, 유 낭자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쳤다.
“색시,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새해만 지나면 뵐 수 있을 테니까.”
진십육낭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유 낭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음을 그쳤다.
“이제 우리도 돌아가요. 날씨가 꽤 춥네요.”
진십육낭이 말하면서 유 낭자의 손을 잡았다.
“내가 따뜻하게 해 줄게요.”
성 밖에 오가는 행인이 있어서 그런지, 유 낭자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홱 빼고 마차에 올라탔다. 진십육낭도 멋쩍어하며 마차에 올라 유규와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흘끔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숨길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지는 저 사람이, 바로 그분의 의형제로구나. 서북로 목사(牧司)의 제거(提擧: 관직명)에 봉해졌다는 그 국구(國舅: 황후나 귀비의 형제)시고.
“전에 황후마마를 뵌 적 있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진십육낭의 몸이 살짝 굳었다.
“듣기로는 당초 황후마마께서 경성에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이 바로 진씨 가문이라던데요?”
유 낭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맞아요. 마마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은인이셨죠.”
진십육낭이 대답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진십육낭이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뱉었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를 비추면서 얼굴에 얼룩덜룩 그늘이 진 여인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세 명이어서가 아니라, 이 공자가 대단한 거예요.
차정사에 있는 비석에 관한 얘기 잘 들었어요.
여인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하던 모습.
본 적 있을 뿐만 아니라, 혼담을 넣으려 했었지요. 그 여인의 원칙 때문에 혼담을 넣을 엄두도 못 내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요.
물론 어디 가서 감히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당신, 그리고 당신 집안의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유 낭자가 말했다. 진십육낭이 고개를 돌리고 유 낭자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혼례를 올린 자신의 신부가 웃음꽃이 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땐 황후마마께서 아직 바보의 병이 완치되지 않아 챙겨 주는 가족도 없을 때인데, 그래도 당신 집안의 사람들은 황후마마를 잘 대해 줬잖아요.”
유 낭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신분과 지위의 차는 엄연한 것이었다.
“마마께서 좋은 분이시니 그랬지요. 그리고 우리는 항상 마마께 신세만 지고 살았는걸요.”
진십육낭이 대답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가 유 낭자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유 낭자는 순식간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마차 안이잖아요.”
진십육낭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유 낭자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세게 잡았다.
유규는 한참을 달리다가 꽤 멀리 왔다고 생각할 때쯤 고개를 돌렸다. 당나귀가 끄는 마차가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말이 끄는 마차를 사지 않고 당나귀를 쓰는 거야? 저 삐쩍 곯은 당나귀로 퍽이나 잘 다니겠다.”
유규가 씩씩대며 말하자, 서사근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괜한 데 신경을 쓰고 그러네. 지금 같은 시기에 진씨 가문이 값비싼 말과 마차를 끌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는 없잖나. 저들을 지켜보는 눈들이 얼마나 많은데.”
유규가 눈을 부릅뜨며 말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서사근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마마께서 자네에게 물어보신 거지. 생각해 보라고. 남들이 만든 유언비어를 무서워하지 않는 자네 같은 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나?”
그건 맞는 말이지.
“나 유규는 두려울 게 없으니까!”
유규가 곧바로 득의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
“당초 네놈들은 태평거의 주인장이고, 돈도 많았고, 그리고 네놈들의 누이는 진 상공과도 교류하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네놈들이 아무리 권력이 있고, 돈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야? 내 눈에는, 네놈들도 한낱 탈영병으로밖에 안 보였는데. 탈영병은 당연히 감옥에 잡아 처넣어야지!”
서사근이 유규의 말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거, 몇 번을 말하나? 탈영병이 아니라, 모함에 빠진 거였다니까.”
유규가 눈을 부라리면서 대꾸했다.
“모함이든 뭐든, 어쨌든 네놈들은 도망쳤잖아!”
두 사람이 눈싸움을 하듯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사근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꼭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사오 년이나 지났네.”
모든 게 여전한데, 눈 깜빡하는 사이에 사람만 달라졌어.
“사근.”
서사근의 말 한마디에 김이 빠지고 풀이 죽은 듯한 유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너희들, 나를 원망하나?”
서사근이 고개를 돌리고 조금 놀란 눈치로 유규에게 되물었다.
“무슨 원망?”
“그때 내가 네놈들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유규가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말을 탄 무원산 형제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황량한 겨울 벌판 위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듯했다.
위주(渭州) 개석보 수비군 소속 갑대(甲隊) 감용 범강림, 서무수, 범석두, 서봉추, 기병 서사근, 서납월, 교용 범삼축은 명을 받들라!
못난 놈들아! 탈영할 배짱도 있고, 형제를 방패로 삼을 배짱도 있다면, 이리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감용이란 무엇이더냐?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장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자 아니더냐! 너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아라.
유규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는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목이 멨다.
만약 그때 내가 아니었다면, 무원산 일곱 형제는 경성에서 부족한 것 없이, 원하는 걸 하고 살며, 관직을 얻어서 가정을 꾸리고, 자기들을 쏙 빼닮은 자식들이 자라나는 걸 지켜봤겠지.
만약 내가 그놈들을 잡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경성 밖 황무지에 쓸쓸히 묻혀 있진 않았을 텐데.
유규는 같은 꿈을 무수히 많이 꾸곤 했다. 서무수 등 다섯 형제들의 시체를 수레에 싣고, 맨발로 끌고 또 끌면서 하염없이 걷는 꿈이었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해가 뜰 때까지 멍하니 휘장만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유규는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고 후회스러웠다. 정말 가슴이 사무칠 정도로 후회했다.
“그래. 내가 탈영병을 싫어하긴 하지.”
유규가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때 네놈들을 잡았던 건, 탈영병이 증오스러워서가 아니라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였어. 내가 서북에서 쫓겨난 게 화가 났고, 최전방에서 적장의 목을 벨 수 없는 게 한스러웠거든. 나는 오매불망 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네놈들은 그 귀한 기회를 버리고 도망쳤다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더라고. 그래서 이를 악물고 일을 크게 만들었지.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 소용 없는 일이더군. 네놈들이 정말 탈영병이었다면, 내가 무슨 난리를 치든 상관하지 않았겠지. 내가 그 난리를 친 게 신경 쓰였다면, 그건 탈영병이 아니라 진정한 호걸들인 거고.”
그래서 무원산 형제들은 공성전의 마지막까지 버텼던 거겠지. 도망칠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도,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 보려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거니까.
탈영병이라는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결국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뿐이야.
나는 그놈들에게 상처를 줬지만, 나와 그놈들이 바라는 건 결국 똑같은 거였어.
서사근이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해 놓고, 무슨 만약 타령이야? 자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우리는 서북으로 떠날 예정이었어.”
서사근이 자랑스러운 미소를 보이면서 유규를 쳐다보았다.
“그때는 누이가 벌써 우리를 위해 준비를 마쳤던 때였어. 그런데 우연찮은 계기로 자네를 맞닥뜨린 거지. 자네가 그때 우리를 잡았든, 잡지 않았든, 어쨌거나 우리는 서북으로 갔을 거야.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는 자네와 무관한 일이라고.”
말하던 서사근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만약 그때 형제들이 죽기 직전까지 성문을 막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그 빌어먹을 장수 놈이 먼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서사근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 세상에 만약 따위는 없어.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담담히 받아들여야지. 늘 전장에서 죽기를 바라는 이들이었으니, 죽음에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이야.
“자네 안사람이 딸내미 때문에 집에서 허구한 날 울고불고한다더니, 내가 보기엔 자네가 자네 안사람보다 더 찡얼대는 거 같은데?”
서사근이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자신의 말을 향해 채찍질했다.
“웬 말이 그리 많아?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통쾌하게 살다가 통쾌하게 가야지. 이미 저지른 일이라면, 저지른 대로 살면 그만이야. ‘만약’이니 ‘하지만’이니 거 참 말 많네.”
서사근이 소리치면서 먼저 달려가자, 유규는 입을 벌려 씩 웃고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서사근의 뒤를 쫓아갔다.
두 사람이 열심히 달려오긴 했지만, 용곡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벌써 정월 초열흘이 됐을 때였다. 거리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정월 대보름에 시작될 꽃등 놀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집 앞에 알록달록한 꽃등이 달리기 시작했다.
용곡성이 이토록 평온하게 새해를 맞이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용곡성뿐만 아니라, 주위의 작은 둔보나 전방과 가까운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건, 각 성의 성문 앞에 설치된 벽력포(霹靂砲) 덕분이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굉음을 내는 벽력포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눈앞을 피바다로 물들게 했다.
연말에 한 번 벽력포를 쓴 적이 있는데, 난생처음 겪는 포화의 위력에 서쪽 오랑캐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다. 겨울 중에서도 특히 연말에 자주 쳐들어와 말썽을 피우곤 하던 오랑캐들이 올해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 네놈 집에 있는 아궁이와 솥은 차게 식었을 테니.”
성문 앞에 도착한 유규가 서사근을 향해 손짓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몸은 제거 대인일세. 큼지막한 저택에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하인이 있는데, 고작 집을 한 달 비웠다고, 뭐? 아궁이와 솥이 식어?”
서사근이 웃으며 대꾸하고는 유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달려 자리를 떴다.
“그래도, 여인이 없는 집이니 적적할 텐데.”
유규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집 앞에 도착한 서사근이 대문을 넘어서기도 전에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사근이 활짝 웃으며 문턱을 넘어섰다.
“형님이 오셨느냐?”
서사근을 마중 나온 문지기와 하인들이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연말부터 와 계셨습니다. 대노야와 대부인 모두 오셨어요.”
형수님도 오셨다고?
“형수님께서는 회임을 하여 거동이 불편하실 텐데, 이렇게 먼 길을 오셨다고?”
깜짝 놀란 서사근이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하지 마. 황후마마께 여쭤보고 나서 출발한 거니까.”
범강림이 웃으면서 말했다.
누이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서사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사근이 마당 안으로 들어올 때, 범강림은 소보아를 따라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소보아는 아직 어렸지만 동작이 꽤 그럴싸해 보였다.
서사근이 조금 낯설었는지, 소보아가 쑥스러움을 타며 머뭇거렸다.
“네가 여길 떠날 때만 해도 엄청 작았는데, 이제는 넷째 숙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구나.”
서사근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보아가 부끄러워하면서 살짝 웃고는 마당 밖으로 나오는 황씨의 몸 뒤로 쪼르르 달려가 숨었다.
황씨의 옆에 있던 여종이 재빨리 소보아를 붙잡았다. 여종은 소보아가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온 황씨와 부딪힐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번에 같이 지내다 보면 친해질 거예요.”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 이제 경성에서 지내지 않으시려고요?”
서사근이 황씨의 의중을 알아듣고 물었다.
“벽력포와 신비궁의 공급과 정비가 안정되었으니, 서북 군감의 제거 자리로 왔다.”
범강림이 대답했다.
“그럼 경성 쪽에는…….”
서사근이 곧바로 물었다.
“이무가 있잖아. 이무만으로도 충분해.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걸.”
범강림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
서사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은, 누이 혼자 경성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범강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 노야 가족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조귀는 무관이 되면서 경성을 떠나게 됐지만, 그 대신 강주에 있던 금가아 가족이 경성으로 올라왔지. 정 대노야가 금가아에게 경성의 가업을 맡겼거든. 반근도 금위군한테 시집가서 경성에 살고 있고. 찬찬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꽤 많이 남아 있으니까, 누이가 경성에서 혼자 쓸쓸하다고 느끼진 않을 거다.”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나저나,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은데, 장가갈 생각을 좀 해 봐야지 않겠어?”
서사근은 범강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안다.”
범강림이 자리에 앉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형제들이 차가운 땅 아래에 쓸쓸히 묻혀 있으니, 넌 지금 숨 쉬며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대로 지내서는 안 돼.”
서사근이 웃으면서 범강림을 향해 예를 표했다.
“예, 형님. 그래서 형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형님과 형수님께서 제가 장가갈 준비를 도와주시겠군요.”
범강림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아 참, 주 노야 가족이 경성으로 돌아갔다면, 주 공자도 경성에 한번 들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서사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주 공자는 황후 책봉식이 끝난 뒤에 곧바로 경성을 떠났어. 내가 보기엔, 주 공자는 별로 경성에 가고 싶지 않은 거 같던데.”
-번외. 그놈-
골도(骨刀) 한 자루가 상자에 던져지면서 챙, 하는 소리가 났다.
주복이 손을 털고 상자 뚜껑을 닫았다.
“선물이다.”
주복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사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공자님, 저희는 경성으로 안 돌아갑니까? 노야께서 재촉하는 서신을 보내오셨어요. 그리고 여기 서북 군영에는 삼노야 등이 계신데, 공자님까지 이곳에 계시면 서북 군영은 주씨 가문이 다 해 먹는다는 소문이 돌지도 몰라요. 그러면 황후마마께 안 좋은 영향이…….”
사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복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 온 게냐? 감히 마마를 들먹이면서 나를 협박하려 들다니.”
사환이 머쓱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다 챙겼으니, 그만 가자.”
주복이 말했다. 사환은 흠칫 놀랐다가 곧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자님, 드디어 돌아가실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사환이 소리쳤다. 주복이 뒷짐을 지고 사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왜 내가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당연히 공자님이 황후마마께 마음이 있어서…….
사환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주복은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 여인을 못 볼 게 뭐 있다고. 이번 생에 그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해서? 그 여인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게 보기 싫어서?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여인은 내게 목숨까지 내주는 사람인데, 내가 무얼 더 바랄 수 있겠어?
주복이 고개를 숙이고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상서, 상남 지역을 유랑 중인 이 태의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무왕축은 사람을 살리는 주술이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주술이기도 합니다. 남을 살리고, 자신을 죽이는 주술이지요.’
주복은 그 여인이 어떻게 마지막 숨을 남길 수 있었는지, 그 여인이 깨어날 수 있었던 비밀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주술을 쓴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기간은 단 석 달이며, 석 달이 지나도록 주술의 저주를 깨지 못한다면 필시 죽게 됩니다.’
이 태의가 서신에 쓴 내용이었다.
그때 그 자식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무리 그 여인을 황후로 책봉한다고 해도, 그 여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주복이 걸음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 아니야?
그 자식이 아무리 그 여인에게 푹 빠져 있다지만, 황제가 깨어난다는 건 어떻게 장담하고, 깨어난다고 한들 제위를 그 자식에게 물려줄 거라는 장담은 어떻게 해?
그리고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않고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잖아?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이 석 달 안에 해결될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고.
고약한 여인 같으니라고.
주복이 고개를 홱 돌렸다.
“저 상자도 챙기거라.”
사환이 멈칫했다.
“마마께 드릴 선물이다. 이만큼 모았으니, 한 번 가져다드릴 때가 됐어.”
사환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자님, 괜찮으신 거 맞죠?”
사환보다 주복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건 상자가 넘치도록 가득 담긴, 말할 수 없는 주복의 진심이었다.
“그래. 아주 괜찮다. 왜.”
주복이 웃으면서 대꾸하고는 몸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떤 진심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어.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 뭐가 중요해? 그런 사람이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충분히 의미 있어.
먼지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길을 떠난 주복의 시야에 시끌벅적한 마을이 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북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매섭기만 했던 바람이 한결 따스해졌다.
“보름만 더 가면, 경성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사환이 뒤에서 외쳤다. 행장을 단단하게 여민 주복이 고개를 들고 성문을 내다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묵자. 재미난 물건이 있는지도 좀 보고.”
놀란 사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공자님, 뭘 더 사시려고요? 지나가는 곳마다 그렇게 물건을 사시면, 마차가 곧 터지겠습니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사환에게 뭐라 꾸중을 하려던 찰나, 주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복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길가에 있는 찻집에 사람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주복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꽂혔다.
주복의 표정에서 서서히 놀라움이 드러났다.
그놈, 인가?
몹시 간소한 찻집이었다. 나무 막대기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차양막이 불어오는 눈바람을 막았고, 커다란 솥이 바로 그 옆에 있었다. 솥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은 한겨울에 길을 재촉하는 행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웠다.
찻집에 앉은 사람은 꽤 많았다. 대부분은 길을 재촉하는 보따리 상인이거나 성안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알아보려는 평민이었다. 짐꾸러미와 보따리, 수레와 말이 찻집 밖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사람들은 큰소리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참으로 어지럽기도, 시끄럽기도 한 찻집이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한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손에 쥔 종이 몇 장을 보고 있었다. 청색 장포를 입고, 나무 비녀 하나로 머리를 묶고 있는 사내였다. 그의 곁에서는 보따리 상인 서너 명이 침을 튀겨 가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공자님?”
사환이 주복을 불렀다.
주복이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가, 다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주복이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는, 보따리 상인들이 무언가를 보려는 듯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손을 휘젓고 있던 통에 안에 앉은 사람이 시야에서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앞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면서 성문을 지키는 위병들이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관리 하나가 주복을 향해 질주해왔다.
“공자님.”
사환이 주복을 작게 불렀다.
“저들은 어쩌다 또 알게 된 거야?”
주복이 달려오는 관리를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공자님, 지금 공자님의 신분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눈에 띄지 않게 다닌다 해도, 공자님께서 용곡성을 나온 순간부터 소식이 쫙 퍼졌습니다. 오는 내내 저희를 지켜보는 눈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저 사람들이 국구에게 아부 떨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요.
“다른 일에도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참 좋겠네.”
주복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사환이 헤헤 웃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으시면 곤란합니다.”
주복이 눈을 부릅뜨고 사환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알려 주지 않아도 안다.”
사환이 헤헤 웃었다.
“주 대인.”
주복을 향해 달려오던 관리와 병사들이 말에서 내려와 주복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복이 말에서 내려 공수의 예로 답례했다.
살갑게 그를 맞이하던 사람들은 겉치레 말들을 늘어놓으며 주복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말 위로 올라탄 주복이 저도 모르게 다시 찻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찻집에 있던 사람들이 주복 일행을 구경하느라 죄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안쪽에 있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놈이 왜 여기 있지?
아냐, 내가 잘못 본 거겠지. 허풍 떨기 좋아하고, 깔끔한 걸 따지는 그놈이 저런 모습으로 저런 찻집에 앉아 있을 리가 없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뒤 조정에는 큰 변동이 있었다. 물론 진(秦)씨 가문도 당연히 그 안에 속해 있었지만, 최근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가세가 기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진 시강이 먼저 사직을 청했고, 황제는 그의 청을 윤허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천중(川中)에 있는 관직을 하사하여 온 가족이 함께 귀향했다고 들었다.
비록 조정에서의 벼슬길은 끝이 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간 진씨 가문은 여전히 명망 있는 귀족 집안인지라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주복이 시선을 거두었다. 큰길가에서 시끌벅적하게 주복을 에워싼 사람들이 말을 타고 그에게 길을 안내했다.
“저건 누구길래 추관 대인께서 직접 나와 마중하시는 거야?”
“나이도 젊고, 딱히 눈에 띄진 않던데.”
“어느 귀한 집 자식이겠지.”
길을 터주느라 물러났던 사람들이 다시 큰길 위에 몰려와서는 떠나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수군댔다. 찻집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각자 자리로 돌아가거나 갈 길을 재촉했다.
“잠시만요. 길 좀 비켜주시오.”
주인장이 큰 소리로 외치며 따뜻한 차가 담긴 그릇을 들고 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의 얼굴을 가렸다.
“고맙소.”
김이 사라지자, 사내의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사내가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릇을 들었다.
같은 탁자에 앉아 있던 보따리 상인은 사내의 가느다랗고 고운 손과 투박한 그릇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너무 대비된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세심한 동작을 본 상인은 모르게 숨소리가 작아졌다.
지극히 평범한 청색 장포를 두르고 대나무 가지로 만든 비녀를 한 사내였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서는 점잖고 온화한 기품이 풍겼다.
상인은 어쩐지 사내가 그리 투박한 그릇에 담긴 차를 마시게 하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그 사내는 고개를 젖혀 가며 그릇에 든 차를 단숨에 비우고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쥔 종이들을 들여다보았다.
“젊은이, 그건 집에서 온 서신인가 보오?”
상인이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자리에 앉을 때부터, 사내는 계속 손에 쥔 서신을 보면서 이따금 웃음 지었다.
“공부하러 외지에 나온 거요?”
상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상인의 등을 팔꿈치로 툭툭 쳤다. 상인이 화가 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를 찔렀던 사람이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왜?
언짢은 표정의 상인이 입 모양으로 묻고는 그 사람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뒤에 지팡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 절름발이구나.
저, 저렇게 준수한 젊은이가 절름발이라니.
상인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절름발이라면 공부하러 외지에 나온 게 아니겠군. 어차피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할 테니.
이때, 사내가 고개를 들고 웃으며 상인에게 대답했다.
“네.”
상인은 순간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주인장, 한 그릇 더…….”
사내가 손에 쥔 그릇을 높이 들고 외쳤다. 사내가 말하던 도중, 상인이 갑자기 사내의 그릇을 낚아채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져다주겠소. 지금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주인장을 불러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거요. 내가 가서 받아오리다.”
사내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빙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네, 고맙습니다.”
남에게 신임을 얻고 호의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상인은 웃으며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주인장을 재촉해서 차를 한 그릇 가득 받아왔다.
“대충 끓인 거긴 해도, 길을 재촉하는 행인들에게는 이런 차가 제일이지. 몸도 녹일 수 있고 말이오.”
상인이 말했다. 사내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혼자 나온 것이오? 부모님께서 걱정하지는 않으시고?”
상인이 이어서 물었다.
“예,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상인은 또 무슨 말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이어서 읽는 바람에 물어보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조금 전에 그를 팔꿈치로 쳤던 사람이 또 그를 치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자네, 말이 왜 이렇게 많은가? 괜히 몸도 안 좋은 사람 붙잡고 늘어지지 말게나. 저런 사람들은 자기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걸 꺼리거든.”
하긴, 그렇겠지.
상인이 민망한 듯 미소 짓고는 더는 사내에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차를 마시며 사내를 훑어보았다.
이런 사람이 혼자 외지에 나오는 걸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는다고? 사환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보아하니 가난한 집안의 자식은 아닌 거 같은데,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는 자식인가?
진호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종이 한 장을 넘기고 다음 장을 펼쳤다.
지금쯤이면, 부모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계시겠군. 보아하니 아버지의 기분도 꽤 괜찮으신 것 같네.
‘물론 폐하께서 인자하여 내려 주신 관직은 아니다.’
진 부인이 서신에서 말했다.
당연하겠지. 사실 그는 인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줄곧 흉악무도한 자였으니까.
황제는 아버지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악하게 웃으며 아버지를 경성에 묶어 두고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아버지의 숨통을 천천히 조이려고 했겠지.
‘황후마마께서 우리를 보내 주신 거야.’
‘황후마마’라는 단어에 진호의 시선이 멈칫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천천히 서신을 읽었다.
‘나도 나중에서야 알고, 황후마마를 뵈러 입궐했다. 마마께서는 황후의 침궁에 앉아 계셨어. 옷차림이며 장식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야.’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고.
진호의 눈앞에 정방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 같은 겨울이었지. 눈이 내리던 주씨 가문의 마당 안, 나는 주복이 친 사고를 수습하려고 일부러 취한 척하며 그 여인과 술잔을 기울였어.
천지가 새하얗게 뒤덮였고, 소매가 넓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던 여인이 어깨 아래로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리고 나를 쳐다보았지.
어떨 땐,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누군가와 단 한 번의 눈 맞춤을 위해, 단 한 번의 만남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진호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더욱 진해졌다. 그는 다시 서신에 집중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신 분이 황후마마냐고 여쭤봤더니, 황후마마께서 그렇다고 하셨어.
그때 나는 많이 놀랐단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의 말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거야. 어사대에 탄핵당하여 관직을 빼앗기고, 네 아버지가 하옥되어 죗값을 치르고, 네 어미는 체면을 지키고자 목을 매달고 자결했겠지. 그리고 너희는 아마 지금쯤 변방의 군영으로 보내졌을 테고.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야. 이렇게 될 거라고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니?
폐하께서 우리 가문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때 우리가 연평 군왕을 태자로 옹립하려 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사실, 그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아.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신하로서 각자 자신이 택한 주군에게 충성을 바칠 권리가 있으니 비난할 바가 못 되지. 기껏해야 우리를 경성에서 내쫓고 억압하는 정도에 그쳤을 거야.
하지만 황후마마께서는, 사실 우리를 단순히 싫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셨을 게다.’
진호가 손에 쥔 서신을 잠시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고 진호의 얼굴을 가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주복이 제 손에 거의 죽을 뻔했으니까요. 아니, 죽을 뻔한 게 아니라, 죽었었죠.
그 여인은 이미 죽은 주복을 살려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았어요.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그날, 저는 마음속에서 이미 그 둘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지요.
생사의 원한은 단순히 염증을 느끼거나 누가 누구를 싫어하는 감정처럼 단순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여인은 왜 그랬을까요?
혹시…….
추측하려던 찰나, 진호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뇌리에 스친 생각을 떨쳐냈다.
그 여인의 말이 곧 그 여인의 생각이야. 내가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일 뿐이지. 그 여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진호가 그릇을 내려놓고 서신을 바라보았다.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에게 물을 먹여 줬던 은혜에 보답한 거라고 해.’
물을 먹여 줘?
진호가 흠칫 놀랐다.
어머니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먹여 준 적이 있었나?
아, 혹시 그때인가? 진소가 건넨 서신에 적힌 ‘넌 누구지’라는 한 마디에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때.
보름 가까이 누워만 있던 병자라면 더럽거나 냄새가 난다고 싫어할 법도 한데, 평생을 귀하게 살아온 부인이 그 여인을 일으키고 물을 먹여 주었다.
당시 진 부인은 마치 자신의 아이에게 물을 한 모금이라도 더 먹이고자 어르고 달래는 어머니 같았다. 사실 진 부인 같은 귀부인들은 친자식일지라도 이렇게 가까이서 다정하게 챙겨 줄 일이 없었다. 아이를 살뜰히 챙겨 주는 유모가 따로 있으니까.
진호의 코끝이 찡해졌다.
그 여인은 그런 사소한 호의까지도 잊지 않고 보답하는 건가?
진호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서신을 바라보던 시야가 흐릿해졌다.
서신 위에 눈물이 번진 흔적이 있었다. 서신을 쓰던 사람이 이 대목에서 잠시 붓을 멈추고 눈물을 흘린 듯했다.
‘이런 황후마마께서 계시거늘, 진씨 가문이 무슨 걱정을 하겠느냐. 그러니 네 아버지도 마음이 놓이신 게지.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마음 편히 살아보려 한단다.’
‘참, 작별을 고할 때, 황후마마께서 내게 웃긴 이야기를 하나 해 달라고 하시더구나.’
진호가 다음 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드디어 웃어 주셨어.’
진호가 빙긋 웃었다.
박장대소였을지 언제나 보이는 그 희미한 미소였을지 궁금하네.
“젊은이.”
귓가에 상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진호의 생각이 끊겼다. 진호가 고개를 들고 옆에 앉은 상인을 쳐다보았다.
“차를 좀 더 가져다줄까?”
상인이 다정하게 물었다. 진호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잘 접어서 품에 넣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성으로 들어가야죠.”
진호가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좁디좁은 공간에 사람까지 많다 보니, 상인은 진호가 넘어질까 봐 걱정되어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그를 부축했다.
진호가 힘겹게 일어나서 양쪽 겨드랑이 아래로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진호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괜찮소. 괜찮아.”
상인이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불구인 게 가엾어서 도와주시는 거지요?”
진호가 미소 띤 얼굴로 상인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허를 찌르는 질문에 상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곧이어 그는 민망한 듯 웃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 절름발인 게 가엾어서.
하지만 장애가 있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가여워하는 건지, 경멸하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겠지.
이 젊은이가 괜히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나?
상인이 어색해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던 그때, 사내가 그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가엾이 여겨 주시는 것 또한 선량한 마음이지요. 소생,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상인이 멈칫하고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유, 아니오, 아니외다. 사소한 것이오. 이런 사소한 것에 어찌 감사 인사를 받는단 말이오.”
상인이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 진호를 위해 길을 터줬다.
“잠시 비켜 주시오. 길 좀 비켜 주시오.”
사소한 수고보다 얻기 힘든 것은, 남을 믿고, 그 사소한 수고를 받아들여 주는 것이리라.
사실 사소한 수고를 받아들이고, 남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일 수도 있다. 남을 믿는 일이 꼭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니니까.
진호는 자신이 이렇게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지내온 나날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진호가 웃으면서 지팡이를 짚고 상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진호는 차양막 아래에서 상인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안의 큰길 위에서 다급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두 사람이 성 안쪽에서 성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주복 일행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벌써 다 흩어진 터라, 사람들은 말을 탄 두 사람이 바로 조금 전에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성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공자님,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진 공자님이 왜 이곳에 계시겠어요?”
사환이 소리쳤다. 주복은 사환의 말을 무시한 채, 성문을 나가 찻집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어. 절대로 잘못 봤을 리가 없다고.
성안으로 들어가 관리들이 준비해 둔 연회석에 앉았던 주복은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동시에 성문 앞에서 잠시 스치듯 봤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그놈이야! 그놈이라고!
그놈은 사람이 가득 찬 진흙탕 안에서도 가장 눈에 띌 놈이야.
“공자님, 뭘 좀 드시겠…….”
주인장이 찻집을 향해 달려온 주복을 보고는 서둘러 그를 친절하게 맞이했다. 그런데 주복은 주인장을 그대로 지나쳐서 차양막 아래로 들어갔다.
찻집에 앉아 웃고 떠들던 사람들의 소리가 순식간에 멈추고, 용맹해 보이는 사내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금 전에 여기 앉아 있던 사람은 어디 있소? 젊은 사내이고, 천중 지역의 말씨를 가지고 있소만.”
주복이 한 탁자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조금 전, 진호를 부축해줬던 상인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나섰다.
“그 다리가 불편한 공자를 찾는 것이오?”
그러게 그 젊은이는 절대로 혼자 외지에 나올 사람이 아니라니까. 곳곳에 이렇게 친구들이 있으니 혼자 다닐 수 있는 거겠지.
주복이 흠칫 놀라고는 되물었다.
“다리가 불편하다고요?”
“그렇소. 지팡이를 짚고 있던데? 방금 막…….”
절름발이라는 말에, 찻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주복은 사람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다리가 불편하다는 말만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럴 리가 없잖아!
“공자님, 관아에 도움을 청해서 같이 찾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진 공자님께서 이 성에 들어오셨다면, 아직은 떠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곳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일단 성문을 닫으면 좀 더 빨리 찾으실 수 있겠지요.”
사환이 큰 소리로 외치며 눈 깜빡할 사이에 말을 타고 달려가는 주복을 뒤쫓았다. 주복이 갑자기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말을 멈춰 세웠다.
“찾을 필요 없다.”
주복이 한 방향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저렇게 가면, 얼마 못 가니까.”
사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복의 시선을 따라가자,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신을 대필해 주기도 하고, 서신을 쓰기 위한 종이와 붓을 대여해 주기도 하는 노점에 젊은이 하나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발치에는 화폭 두루마리 한 개와 장궁 한 개가 놓여 있었고, 지팡이 두 개가 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의 두 지팡이는 다른 그 무엇보다 훨씬 눈에 띄었다.
지팡이를 짚으면 빨리 걷지 못하니, 멀리 가지도 못하는구나.
사환의 시선이 다시 자리에 앉은 사내에게 향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내는 몸을 앞으로 살짝 굽히고 고개를 숙인 채 붓을 들고 종이 위에 글을 쓰고 있었다.
사환이 무언가에 집중한 사내의 준수한 옆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진 공자님이시네.”
정말 저놈이로구나! 그런데 저놈이 여긴 왜 온 거야?
주복이 앞으로 몇 걸음 가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저놈을 봐, 말아?
“공자님, 글씨가 참으로 예술입니다.”
노점의 주인인 중년 사내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는 진호가 서신에 쓰는 내용을 감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흘깃 보기만 해도 정갈한 진호의 글씨가 명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진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과찬이십니다. 좋은 글씨라고 할 수는 없지요.”
중년의 사내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진호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겸손 떠는 게 아니라, 저보다 훨씬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있거든요. 저는 그 사람과 비교한 겁니다.”
중년의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산 너머에 또 산이 있다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이지요.”
중년 사내가 말했다. 진호는 말없이 웃고는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이어 써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호는 서신을 곱게 접어서 봉투 안에 넣었다.
중년의 사내는 종이 위에 쓰인 ‘부친’ 두 글자를 보고 그가 아버지에게 서신을 썼음을 알아차렸다.
그럼 이번에는 어머니께 쓰려나?
“공자님, 참 다정하시구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내에게 각각 한 장씩 써 주는 거로군요.”
‘아내’라는 말에, 진호가 붓을 멈췄다.
“저는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흠칫 놀랐다가 진호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중년의 사내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장가갈 생각도 없고요.”
진호가 이어서 말했다.
“장가는 가셔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혼자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하겠습니까.”
중년의 사내가 진심 담긴 말을 하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진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분명히 좋은 처자가 나타날 겁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진호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고독하고 쓸쓸한 것은 부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년의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 진호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바로,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마주치는 것이지요. 어떤 이들은 삶이 다하는 날까지도 그런 사람과 마주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을 마주칠 수 있다면, 그건 크나큰 행운이에요. 마음속에 그 사람이 있다면, 인연이 되지 못해도, 매일 아침을 같이 맞이할 수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마음속에 그 사람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그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왜 고독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인연을 맺어 매일 아침을 함께한다고 해도, 결국 쓸쓸하고 외롭기 마련인걸요.”
진호가 웃으면서 말하고는 손에 쥔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서신을 잘 접어서 품에 넣고 중년의 사내에게 큰돈을 주어 값을 치렀다. 진호는 가장 먼저 두루마리를 등 뒤로 메고, 장궁을 한쪽 어깨에 짊어진 뒤, 두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중년의 사내는 진호의 말을 듣고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넋을 놓았다.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라.
지기(知己)?
인생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것이 바로 지기와 미인이라지 않던가.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다면, 주위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오간다고 해도, 마음은 언제나 고독하고 쓸쓸할 테지.
중년의 사내가 멍하니 넋을 놓는 사이, 주복도 넋을 놓은 채 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호가 몸을 일으키고, 능숙하게 지팡이를 짚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주복은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진호가 지팡이를 짚으면서 걷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저놈이 왜 다시…….
그때 네놈이 쐈던 화살 때문이냐?
그 화살 한 발로 내가 쓰러졌을 때, 네놈도 무너져 버렸던 거야?
이 빌어먹을 놈! 쓸모없는 자식! 화살을 쏘아서 나를 맞힌 사람은 넌데, 어째서 쏠 용기는 있고, 결과를 받아들일 용기는 없는 거야!
네놈이 이런다고 해서 내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거 같아? 이런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다고!
나약한 자식. 내가 네놈을 제대로 잘못 봤구나. 내 눈이 삐었어!
주복이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에서 까드득 소리가 났다.
그때, 누군가가 말을 탄 채 길을 비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길 위를 질주했다.
오후 무렵인지라 성 안팎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말 때문에 주위가 시끌벅적해지자, 사람들은 서둘러 길 가장자리로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어느 집 아이인지 모를 어린아이가 큰길 중앙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어린아이는 멀뚱멀뚱 제자리에 서 있었다.
주복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누군가가 주복보다 한발 빨리 달려가, 어린아이를 껴안고 몸을 돌리면서 가까스로 말을 피했다.
주복이 달려오는 말의 고삐를 홱 낚아채고, 온몸의 힘을 다해 말을 멈춰 세웠다. 말에 타 있던 사람은 갑작스럽게 멈춰 버린 말 때문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주복은 바닥에 나뒹굴면서 악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무시한 채, 어린아이가 무사한지 앞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본 그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호가 어린아이를 놓아 주고, 자세를 낮춘 채 어린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끼워져 있던 지팡이는 저 멀리 내팽개쳐져 있었다.
저, 저 자식이 진짜!
지나가던 행인들도 놀라서 넋을 잃었다. 가까스로 말을 피한 어린아이 때문이기도 하고, 분명히 절름발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순식간에 멀쩡해진 게 놀라워서였다.
“공자님, 정,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의 가족이 몰려와서 감격스러운 얼굴로 진호를 향해 예를 표했다. 진호는 그저 웃기만 하고는 멈춰 선 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진호가 흠칫 놀랐다.
너는!
“공자님, 공자님 죄송합니다. 말이 갑자기 놀라는 바람에.”
말에서 굴러떨어진 사람이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치고 있을 때, 뒤늦게 달려온 그의 시종들이 서둘러 말에서 내려 주복을 향해 연신 사죄했다. 주복을 에워싼 시종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주복은 그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죽을 듯이 앞을 노려보았다. 사람의 형체가 주복의 시야를 가렸다가 사라지자, 진호가 다시 주복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진호 또한 어린아이의 가족들에게 에워싸인 채, 미소 띤 얼굴로 주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
지나가던 행인이 머뭇거리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진 지팡이를 진호에게 건넸다.
진호가 지팡이를 건네받고는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양쪽 겨드랑이 아래에 넣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진호의 모습을 보고 더욱 놀랐다.
지금 저건 뭐 하는 거래?
절름발이 행세를 하는 거야? 사지가 멀쩡해 보이는데 절름발이 행세는 왜 해?
사기를 치는 놈인가? 저 젊은이의 생김새와 행동을 보면, 사기로 돈을 벌어먹는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행인들의 표정을 읽은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다니면 자유로워요. 아주 천천히 갈 수 있고,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람들은 미친 사람을 보듯이 눈을 크게 뜨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진호는 더는 말하지 않고, 지팡이를 짚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팡이를 짚고 두어 걸음 내디뎠다. 주위의 시선과 더불어 자신을 뚫을 기세로 쳐다보는 등 뒤의 시선이 느껴진 진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 있던 주복이 시종일관 진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진호가 소리 없이 입술로 말하고는 빙긋 웃었다. 그는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주복을 향해 긴 작별 인사를 한 뒤, 다시 고개를 들고 성안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늙은 나무꾼이 장작을 패러 가누나. 푸른 소나무 가지를 묶고, 회화나무를 짊어졌다네. 망망한 들판 위, 늦가을의 붉은 산 너머, 위대한 비석은 황량한 무덤이 되고, 드높고 화려했던 과거의 것들은 모두 이끼와 함께 누워 있다네.”
진호의 노랫소리가 거리 위에 울려 퍼졌다. 그의 어깨에 있는 장궁이 지팡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박자감 있게 들려오면서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절뚝거리면서 걷는 진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사람들의 눈초리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공자님.”
사환이 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복을 불렀다. 주복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웃음을 짓고 몸을 돌렸다.
“가자.”
“공자님, 진 공자님을 따라가지 않으시고요? 그럼 다시 관아로 돌아가시나요?”
사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주복이 말 위로 몸을 날리고는 성 밖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떠날 것이다.”
경성 성문에 가까워질 때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에서 어린 초록빛이 싹트는 것이 보였다.
주복이 말을 멈춰 세웠다.
“공자님, 잠시 쉬다 가시려고요?”
사환이 재빨리 물었다. 이곳은 성 동쪽으로, 성문 앞에 당도하려면 조금 더 가야 했다. 주복은 말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초시(草市:도성 밖에 열리던 시장)가 있었다. 다만 다른 초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노점상들이 목청을 높이며 파는 물건이 붓, 먹, 종이, 벼루 등이라는 사실이었다.
주복과 사환이 가까이 다가가자, 상인들이 분주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관인, 여기 무원산 글씨의 새로운 탁본이 있습니다.”
“관인, 질 좋은 먹과 붓을 팔고 있고, 물건을 사면 작은 의자도 하나 증정해 드립니다.”
주복은 상인들을 제치고 무덤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무덤 가까이 가지 못하고, 울타리 앞에 멈춰 서야 했다.
새로 지어진 듯한 울타리 근처에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물론 무덤을 지키는 사람은 관부의 병사들이 아니라, 늙은 가노들이었다.
“잠시 길 좀…….”
사환이 앞을 막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 달라고 부탁하려던 찰나, 주복이 그를 제지했다. 주복은 더는 앞으로 다가서지 않고, 무덤 앞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너머를 쳐다보았다.
“글씨가 더해졌네.”
주복이 작게 읊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관인, 저쪽 정문유(程文兪) 공자의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작년 연말에 새겨진 것입니다. 힘찬 예서체로 쓰여 있지요!”
옆에 있던 사람이 주복의 혼잣말을 듣고는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황후가 되고서도 이렇게 자유로이 성을 드나들어도 되는 거야?
주복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몸을 돌렸다. 주복에게 일장 연설을 놓으려던 옆 사람이 풀이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성문에 가까워지자, 말을 타고 달려온 젊은 사내들과 가노가 주복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행인들은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진 않았어?”
“더 튼튼해졌네.”
젊은 사내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면서 반가움을 표현했다.
“어서 가자. 부모님께서 보름 내내 네 생각만 하셨다. 하루가 멀다고 사람을 시켜 재촉하시더라고.”
주복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서둘러 말에 올라타서 갈 길을 재촉했다. 큰길 위로 먼지가 휘날리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자, 행인들이 눈을 흘기며 손가락질을 하려고 했다.
무리를 이끌고 가던 사람이 손을 들고 눈썹을 치켜뜬 채 조용히 말했다.
“다들 점잖게 가자.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남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체면 떨구는 일은 하지 말자고.”
그의 뒤를 따르던 사내들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한껏 신이 났던 가노들도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시끄럽던 일행이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주복이 조금 의외라는 눈빛으로 앞장선 사내를 쳐다보았다.
“형님, 이건 형님답지 않은데요.”
주복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씨 가문의 사람들은 원래 집을 나설 때마다 온 경성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을 쳐다봐 주길 내심 바랐다. 아무 일이 없더라도, 그들은 소란 따위를 피워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욕하든 비웃든 상관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뿐이니까.
앞장선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이젠 옛날 같지 않잖아.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주씨 가문은 이제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이미 온 경성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또 기억하고 있다고 하셨다.”
황후를 배출한 집안이니, 황량한 산골짜기에 숨어 지낸다 해도 누군가는 주씨 가문의 사람들을 기억하리라.
주씨 저택 안에 들어서자, 부모 자식, 형제자매가 모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시끌벅적한 연회를 열고 한창 회포를 풀던 그때, 사환이 누군가가 인사를 하러 왔다고 고했다.
“아버지, 저는 잠시 가족들을 보러 온 것뿐이니,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하자 주 노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남이 아니라, 네 고모부인 정씨 가문의 사람이다.”
고모부? 정씨 가문?
주복이 경악했다. 정씨 가문을 정겹게 부르는 말이 부친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복이 놀라는 사이, 문밖에 있던 사람이 대청을 향해 걸어왔다.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던 열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내가 회랑 아래에 멈춰 서서 큰절을 올렸다.
“소인 금가아가 육공자를 뵈옵니다.”
금가아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금가아구나.
주복이 웃었다.
“다시 돌아온 게냐? 너희 집 대노야께서 너 혼자 경성에 오는 걸 걱정하지는 않으셨고?”
금가아가 고개를 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소인은 벌써 혼례를 올려서 아이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대노야께서도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하셨고요. 그리고 소인이 능력이 없다 해도, 경성에 계신 사돈댁에서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고 계시잖습니까.”
금가아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제는 사람 구실을 하나 보네. 경성에서 길을 잃고 엉엉 울던 예전의 그놈이 아니야.”
주복이 말했다. 금가아가 헤헤 웃으면서 큰절을 올렸다.
“소인이 아직 육공자님께 감사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그때 사람들을 데리고 소인을 찾아주셨잖아요.”
감사 인사? 그때는 나를 아주 원수 보듯이 봤으면서, 오육 년이 지난 뒤에야 감사 인사가 생각난 거야?
정말로 사람이 됐나 보네. 능구렁이같이 능청을 떠는 모습이라니. 꽤 대단해졌어.
주복이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주 노야는 금가아가 준비한 선물을 받고는 주복이 가져온 선물 중 몇 개를 골라 정 대노야에게 보내라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언제부터 정씨 가문과 저렇게 사이가 좋아지셨대?”
주복이 옆에 있던 형제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예전에는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싫어하는 사이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은 나 같은 손아랫사람이 집에 돌아왔는데도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하네?
“아버지께서는 애초에 두 집안 사이가 안 좋았던 적이 없다고 하시던데?”
형제가 작게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황후마마를 낳아 키운 집안이니, 둘 다 평범한 집안은 아니잖아.”
그 여인 덕분이로구나.
두 집안이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다며 난리를 친 계기도 그 여인이었고, 가족보다도 더 친한 사이가 된 계기도 그 여인이라니.
“정말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주복이 말했다.
연회가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씻고 잘 준비를 마친 주복이 자신의 방 안에 앉아서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공자님, 알아보고 왔습니다.”
사환이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복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사환을 쳐다보았다.
“진 공자께서 얼마 전에 다리를 정말 다치긴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줄곧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다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다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냥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걸 좋아하신대요.”
좋아한다고?
주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옛날부터 그러고 다니는 걸 좋아했던 건가? 그렇게 지팡이가 좋으면, 뭐하러 누이한테 다리를 고쳐 달라고 한 거야? 차라리 쭉 절름발이로 살지.
이 생각이 주복의 뇌리를 스치던 찰나, 주복의 표정이 굳어졌다.
차라리 쭉 절름발이로 살지, 예전 그때처럼.
주복이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진 대인과 진 부인께서는 일가를 이끌고 천중 지역으로 돌아가셨고, 진 공자께서는 외지에서 배움의 길을 찾고 싶다며 천중으로 같이 가시지 않았대요.”
사환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그때 그놈을 마주친 거로구나.
배움의 길이라. 썩 제대로 배운 거 같긴 하던데? 지팡이를 짚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과는 달라 보였어.
자유롭고, 무언가에 얽매여 있지 않은 분위기는 겉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뼛속부터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공자님, 내일 입궐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시녀 한 명이 잰걸음으로 들어와 말했다. 주복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고개를 들고 피식 웃었다.
“그래. 넌 가서 내일 필요한 물건을 챙기거라.”
주복이 사환에게 말했다. 사환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무언가 생각난 듯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듣기로는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화가 나셨다고 하던데요.”
화가 나?
주복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놈이 감히 그 여인한테 화가 났다고?
황궁 안.
등불이 바람에 일렁이고, 발걸음 소리가 황후궁의 정적을 깨트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내시가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고했다.
내시의 말과 함께 황후궁 안의 궁녀들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전각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초봄의 쌀쌀한 바람과 함께 궁녀들의 앞을 지나갔다.
“폐하.”
소심이 궁녀들을 데리고 방백종을 맞이했다. 아직 조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방백종을 보고, 소심은 궁녀들에게 그의 옷을 갈아입히라고 명령했다.
“물러가거라.”
방백종이 말하자, 소심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경 공공이 손을 뻗어서 전각의 문을 닫고, 회랑 아래에 당직을 서는 금위군과 궁녀들을 훑어보았다.
“저러신 지 얼마나 됐느냐?”
경 공공이 묻자, 소심이 웃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루요.”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 이번엔 꽤 오래 가시는군.”
경 공공이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지난번에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화나셨을 때가 청원 역참에 있을 때였지?”
말도 없이 사라져서는, 혼자서 비바람을 뚫고 고십사를 죽이러 갔을 때, 낡은 사찰에 남아서 멀뚱히 정방을 기다려야만 했던 방백종은 몹시 화가 났었다. 하지만 그때는 차 한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두 사람이 화해했다.
“이번엔 달라.”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사실 매번 다 황후마마께서 잘못하시는 거지, 폐하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으시다. 지난번은 황후마마께서 말도 없이 홀로 위험을 무릅쓰러 가셨고, 이번에는 이 태의가 폐하께 보내온 서신을 마마께서 가로채셨으니.”
경 공공이 고개를 들고 소심을 바라보았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신단 말이냐.”
소심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헤헤 웃었다.
“마마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꼭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쯧쯧쯧. 경 공공이 혀를 차면서 소심을 흘겨보았다.
불쌍한 우리 폐하. 이곳 황후궁에서는 천자의 위엄을 전혀 떨치지 못하시는군요.
-번외. 좋아요-
그러니 애초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법도를 고치는 게 아니었어. 폐하께서 거처를 황후궁으로 옮기시다니. 이곳은 황후마마의 천하이니, 당연히 폐하의 침궁만큼 기세를 펼칠 수 없는 거겠지.
“여봐라.”
생각할수록 속이 답답해진 경 공공이 내시 한 명을 불렀다.
“어서 폐하의 밤참을 대령하거라.”
“마마 것도요.”
소심이 재빨리 말했다.
그건 폐하를 위해 특별히 만든 밤참이라고!
경 공공이 총채를 손에 쥐고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정말!
침전 안, 정방이 자신의 반대편에 앉은 방백종을 바라보았다.
“이 태의가 아는 것은 일부에 불과해요. 그 사람이 들은 건 전체적인 게 아니라, 남들이 자극적인 것만 골라서 말해 준 내용이라, 당신이 보면 괜히 속상해할까 봐 못 보게 한 거예요. 나는 당신이 속상해하는 걸 원치 않아요.”
정방이 말하자, 방백종이 곧바로 소리쳤다.
“거짓말! 내가 당신 말을 믿을 거 같아요?”
“나를 안 믿고, 이 태의를 믿겠다는 건가요?”
정방이 웃으면서 말했다. 방백종이 무표정한 얼굴로 정방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말 죽으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원래 무슨 일을 할 때는, 죽을 각오로 달려들어야 해요.”
정방이 웃으면서 방백종의 말을 받아쳤다.
“아방!”
방백종이 목청을 높이고 정방의 말을 끊었다.
정방이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다시 웃음을 지었다. 정방이 손을 뻗어 방백종의 소매를 잡으려고 하자, 방백종은 몸을 홱 돌리고 정방의 손을 피했다.
“당신이 있으면,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정방이 말하면서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정방이 빠르게 손을 뻗었기에, 방백종의 소매를 붙잡을 수 있었다.
“또 달콤한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요. 내가 있다는 건, 당신이 떠난 다음에 수습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거잖아요.”
‘떠난 다음’이라는 말을 할 때, 방백종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니. 이 여인을 황후에 책봉해 주는 것만으로 무사해지는 게 아니라, 석 달이라는 시간의 제한이 있었어. 그 시간이 지났다면, 이 여인이 황제로 책봉됐다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고. 이 거짓말쟁이!
그때 만약 며칠만 더 늦었더라면, 이 여인은 영영 내 눈앞에서 사라졌을 거야. 그 미약하던 숨결조차 없어진 채로.
늘 근면 성실하게 국정을 돌보던 방백종은 평소와 달리 정사를 뒤로하고 대신들을 물러가게 했다. 그는 종일 혼자서 근정전 안을 서성이다가, 결국 황후궁으로 가는 걸음을 뗀 것이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서 뒷일을 수습해 줄 테니까, 근심 걱정이 없었던 건 맞아요.”
정방이 웃으면서 방백종의 소매를 자기 쪽으로 끌었다.
“사람이라면 언젠가 죽게 되잖아요. 다만, 근심 걱정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인 거고요.”
“또 이상한 소리.”
방백종이 대꾸하고는 자신의 소매를 정방의 손에서 빼냈다.
“당신은 왜 항상 죽는 것만 생각하고, 살 생각은 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에게 화가 난 건 바로 이런 거예요. 왜 당신은 항상 자기 생각은 하지 않고, 남 생각만 하냐고요.”
방백종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상체만 일으키고 정방을 바라보았다.
“아방, 제발 자기 자신을 더 아끼고 소중히 대하면 안 돼요?”
부드러운 등불 아래, 정방이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방은 아예 두 팔을 뻗어서 방백종을 껴안았다.
“당신이 있으니까, 앞으로는 나 자신을 더 챙길게요.”
정방이 말했다.
“듣기 좋은 말만 하지 말고요.”
방백종이 정방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정방은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그의 품에 안긴 채 웃었다.
“앞으로는 나한테만 잘해 줄게요.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나는 방백종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이미 두 번이나 죽어 봤으니까, 앞으로는 잘 살고 싶어요. 방백종이랑 오래오래.”
방백종은 정방을 밀어내려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차마 밀어내지는 못했다.
“거짓말쟁이. 맨날 나한테 거짓말만 하고.”
정방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속이고 싶은 사람은 당신뿐이거든요.”
등불에 비쳐 반짝이는 정방의 커다란 두 눈 때문에 방백종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방백종.”
정방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방백종을 부르면서 그의 옷깃에 손을 올렸다.
“내가 옷 갈아입혀 줄게요.”
침전 안에서 들릴 듯 말 듯한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전각 문 앞에 바짝 기대고 서 있던 경 공공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 보거라.”
경 공공이 밤참을 들고 온 내시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잠시 뒤에 다시 가져올까요?”
앞에 서 있던 내시가 물었다. 경 공공이 입술을 삐쭉이면서 찬합을 쳐다보았다.
“됐다. 이걸 드실 겨를이나 있으실까.”
내시들이 줄지어 물러나자, 황후의 침궁 앞이 조용해졌다.
경 공공은 편전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손을 꼽으며 무언가를 계산했다.
“하루 종일 화가 나셨다고는 했는데, 얼굴을 보면 그게 싹 풀리시는 건가? 도리어 지난번보다 못하네. 이제는 차 한 잔을 비울 시간도 필요 없으신가 봐.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지셔.”
경 공공이 혼잣말을 했다.
어둑한 실내,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공기에서 은은한 봄내음이 느껴졌다.
“물 마실래요?”
방백종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방이 나른한 목소리로 응, 하고 대꾸했다.
휘장이 걷히고, 기다란 그림자가 침상 아래로 늘어져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주전자에서 물을 한 잔 따르고는 얼른 침상으로 돌아갔다.
방백종은 정방을 반쯤 품에 안아서 물을 반 잔 정도 먹이고는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물잔을 침상 아래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자지 마요.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방백종이 품에 안은 정방을 살짝 흔들면서 말했다.
정방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방백종을 꼭 끌어안았다. 정방이 아직도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방백종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럼 이어서 말해 봐요.”
정방이 말했다.
“나 만지지 말고, 저기 가서 돌아누워 자요.”
방백종이 말했다. 정방이 풉 하고 웃으면서 방백종의 허리춤에 올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안 돼요. 나는 누구 안고 자는 거 좋아한단 말이에요.”
정방이 잠시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예전에는 안을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있잖아요.”
정방의 말을 들은 방백종은 정방을 밀어내려던 손으로 저도 모르게 정방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그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또 주제에서 벗어났잖아요!”
방백종이 품에 안긴 사람을 흔들었다.
“어서 말해요. 앞으로 또 그렇게 할 거예요? 마음대로 서신을 가로채다니요. 당신이 정말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왜 그런 짓을 했겠어요?”
“앞으론 안 그럴게요.”
방백종의 품에 안겨있던 정방이 그의 가슴팍에 코끝을 살짝 비비면서 고개를 저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코끝이 방백종의 가슴을 간지럽히자, 방백종은 순식간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정작 불을 붙인 정방은 방백종의 품에서 벗어나, 침상 위를 데굴데굴 굴러 이불을 몸에 칭칭 감쌌다.
“어서 자요. 오늘 일을 하나도 못 했다면서요. 내일 조회에 일찍 나가지 않았다간, 괜히 나만 욕먹겠어요.”
정방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 거짓말쟁이!
방백종이 이불을 감싸고 누운 정방의 위로 올라탔다.
“일부러 이러는 거 맞죠!”
방백종이 이를 악물고 정방의 작은 귓불을 살짝 깨물며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양 말하는데, 내일 못 일어나는 사람이 누구일지 어디 두고 보죠.”
휘장에 비친 햇빛에 눈을 뜬 방백종이 한 손으로 목을 받치고 옆에 누운 정방을 바라보았다.
정방은 평온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비단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린 탓에 가녀린 쇄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직 날씨가 추운지라, 방백종은 이불을 끌어다 정방의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그의 손이 정방의 목을 스칠 때, 방백종은 몸이 살짝 굳었다.
과거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이 휘몰아치면서, 방백종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방.”
방백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방을 불렀다. 그러나 곤히 잠든 정방이 방백종의 말에 대꾸할 리가 없었다.
말할 필요 없잖아. 다 지나간 일인데.
방백종이 손을 거두려고 하던 찰나,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게 되나? 아무도 모르면 다야?
아니지. 하늘과 땅이 알고, 나도 아는 일인데, 어떻게 아무도 모른다고 할 수가 있겠어.
“아방.”
방백종이 손에 힘을 실어서 정방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가 조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한테 말할 게 있어요.”
정방이 몸을 뒤척이면서 나른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못 일어난 사람은 나예요.”
방백종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정하게 정방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얘기가 아니에요.”
방백종이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방, 당신은 혼수상태일 때도 바깥세상의 일들을 느낄 수 있어요?”
정방이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잠에 취한 모습으로 슬며시 눈을 떴다.
“뭐라고요?”
“그때 내가 당신에게 물을 먹이고, 약도 먹이고, 당신을 데리고 정원을 거닐며 꽃구경도 하고, 아침마다 활쏘기 연습도 했는데, 설마 다 알고 있어요?”
방백종이 웃으면서 정방에게 다가갔다. 정방은 골똘한 모습으로 방백종을 빤히 바라보다가 베개 위에서 고개를 저었다.
“혼수상태인데 어떻게 알겠어요.”
정방이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내게 말해 줬으니까, 이젠 알게 됐네요.”
방백종이 정방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것도 거짓말이죠? 당신이라면, 분명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
방백종이 자세를 고쳐앉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잘 대해 줬던 것도 다 알고 있을 거고, 내가 당신의…….”
내가 당신의 목에 두 손을 올려서, 당신의 미약한 숨결을 없앨 생각을 했었어요. 아주 조금만 힘을 줘도, 모든 게 다 없어질 테니까요. 지금 이 모든 게 말이에요.
나는 그때,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없애고 싶었어요.
그게 바로 나예요. 추악하고 흉한 모습을 숨길 곳조차 없는 못난 사람이요.
그때, 정방이 팔을 뻗어서 방백종의 손을 잡았다.
“방백종, 나는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보는 건, 남이 어떻게 행동했냐는 것뿐이에요.”
방백종이 정방을 바라보았다. 베개 위에 누운 정방의 몸 아래로 푸른 비단이 깔려 있었다. 정방이 담담한 모습으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사낭 오라버니와 당신이 같은 시간에 해를 입었을 때, 내가 누굴 먼저 구할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방백종이 정방의 손을 꼭 잡았다.
누가 누굴 속이고, 누가 누구에게 등을 돌렸든, 방백종은 끝내 정방을 놓지 못했고, 정방에게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그는 정방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안심이 되고 즐거웠다.
다쳐도 상관없고, 늦어도 상관없고, 아무렴 상관없었다.
세상살이가 이토록 고단하고 무정하니,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휘장 밖으로 방백종이 떠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침전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정방은 안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미 당신이 머리로만 생각했던 일을 저질렀던 사람을 만나 봤어요. 그리고 지금은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당신을 만났네요. 이게 바로 하늘이 내게 준 보상과 은혜겠죠.
정방은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이불에 얼굴을 비비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근래에 정방은 부쩍 잠이 늘었다. 정방은 아마 지금처럼 마음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던 적이 없었기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태후가 방백종의 손에서 약 그릇을 건네받은 뒤, 궁녀에게 차를 내어 오라고 손짓했다.
“폐하, 고생하셨습니다.”
침상 위에 있던 태상황이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너, 혼자, 알아서, 하거라.”
태상황이 힘겹게 말을 뱉었다. 방백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아직 아바마마의 가르침을 얻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태상황의 허약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오냐.”
깨어나긴 했지만, 말 한마디조차 간신히 할 수 있었던 태상황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는 약을 먹은 뒤 곧바로 잠이 들었다.
태후와 방백종이 밖으로 물러났다.
“황상, 태의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소.”
태후의 말에 방백종이 슬픔에 잠겼다.
“황상은 충분히 잘하고 있으시오.”
태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할 게 하나 있소.”
태후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황궁과 조당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듯하고, 곧 봄이 될 테니 후궁에 사람을 들일 때가 됐지.”
방백종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상황께서 만에 하나…….”
태후가 안쪽을 힐끔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삼년상을 치르게 될 때가 되어서야 비빈의 일을 준비할 수는 없잖소. 황상도 어린 나이가 아니기도 하고, 궁에도 사람을 더 뽑아야 할 때가 됐소. 아이들을 볼 때가 되기도 했고.”
태후가 말을 마치자, 방백종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마, 후궁에 사람을 들일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태후가 흠칫 놀랐다.
“황상, 그럴 수는 없소이다.”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궁에 떠도는 소문이 태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후한테는 이 늙은이가 가서 얘기하리다. 이런 자질구레한 후궁의 일은 황상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방백종이 웃었다.
“아닙니다. 후궁의 일은 집안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마, 소자가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소자를 위한 게 아니오라, 선문 태자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태후가 또 한 번 놀랐다.
방백종이 제위에 오른 것은, 그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 다른 이라면 이 말을 믿지 않겠지만, 태후는 방백종의 말을 믿었다.
그런데 비빈과 그 일이 무슨 상관이지?
“소자는 선문 태자를 대신해 천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니, 향락을 즐기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는 부부 두 식구로 충분하니, 선문 태자의 집에 괜한 사람을 더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뜻이었구나.
태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던 찰나, 문밖에서 내시가 급보를 알린다며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폐하, 마마께서, 마마께서…….”
내시의 말 한마디에, 방백종과 태후가 일순간 혼비백산했다.
“마마께서 몰래 태의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구토까지 하셨고요. 소심이 이 사실을 밖에 알리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내시가 이어서 말했다.
이 여인이 진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번에도 달콤한 말로 나를 어르고 달랜 거였어!
방백종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서 따라가 보거라.”
태후가 옆에 있던 내시를 재촉했다.
“지난번의 일만 해도 얼마나 놀랐는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나게 둘 수는 없다.”
태후궁의 내시가 서둘러 방백종의 뒤를 쫓아갔다.
태후는 불안한 마음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서성였다. 다행히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후가 보냈던 내시가 돌아왔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내시가 활짝 웃으면서 태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경하?
태후가 멈칫했다.
“어머나! 알겠어요!”
옆에 있던 안비가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신 거예요!”
구토를 하고, 태의를 불렀다면…….
태후는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고 내시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사실이더냐?”
내시가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예, 마마. 태의가 조금 전에 진맥한 후, 태맥이 잡힌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태후는 공중에 붕 떠 있던 심장이 드디어 내려앉는 듯하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천지신명께 감사드립니다! 부처님의 보우에 감사드립니다!”
태후가 합장하고 중얼거렸다.
“마마, 그게 아니라, 도조의 보우에 감사드려야죠.”
안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태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자네는 여태 여기 서서 뭐 하는 게야? 어서 축하 인사를 전하러 가야지.”
안비가 헤헤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은전을 두둑이 챙겨 가거라. 후궁의 일을 오래 관장해 왔으니, 입에 기름칠은 충분히 했을 테지? 두둑이 챙겨서 성의를 보이거라.”
안비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마, 억울하옵니다. 신첩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신첩이 얼마나 가난한데요.”
후궁에 사람이 많지 않아, 태비(太妃)들은 축하의 말을 전한 뒤, 곧바로 물러났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황후의 침궁 안에는 정방과 방백종 둘만이 남아 있었다.
방백종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아이는 괜찮은 거 맞죠?”
방백종이 재차 물었다.
어젯밤이 그렇게 격했는데, 정, 정말 괜찮은 걸까?
방백종은 어젯밤이 마냥 후회스럽기만 했다.
“지금 열 몇 번째 물어보고 있거든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내가 그걸 모를까.”
정방이 말했다. 하지만 방백종은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당신 못 믿거든요.”
방백종이 또 서두르며 태의를 부르라고 명했다.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상히 물어봐야겠다.”
“폐하께서 너무 조심스러우시네요.”
소심이 입을 가리고 쿡 하고 웃었다. 방백종은 소심의 말을 무시하고 아예 직접 태의를 보러 가겠다고 문을 나섰다.
침전에 남은 정방이 넋이 나간 모습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회임을 하다니.
깊은 밤, 방백종이 또 한 번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서둘러 옆을 더듬었지만,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 악몽에서 깼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방이 옆에 없다는 걸 알아챈 방백종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창가에 서 있는 정방을 찾아냈다.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방백종은 발을 헛디딘 통에 휘청거리면서 침상 위에서 내려왔다. 정방이 고개를 돌리고 방백종을 향해 웃었다.
“아니요.”
봄밤의 달빛 아래, 잠이 덜 깬 방백종은 정방의 미소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또 누굴 속이려고 그래요.”
방백종이 정방의 손을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종일 마음이 딴 데 가 있네.”
정방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거짓말을 했어요.”
방백종이 흠칫 놀랐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줄 모르는 건, 시를 쓰는 것밖에 없다고 했었죠.”
정방이 말하면서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사실,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는, 배운 적이 없어요.”
방백종이 정방을 바라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또 웃던 중 코끝이 찡해졌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그 많은 비술을 알아야 했다는 건 어떤 걸까.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란 그토록 힘든 것이어서, 어쩌면 살아가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니 자식을 낳는 건 더더욱 생각도 안 해 봤을 테고.
방백종이 정방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아방,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할 줄 아니까.”
정방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아이를 키울 줄 안다고요?”
방백종이 빙긋 웃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해요. 회혜왕, 선문 태자, 그리고 공주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옆에서 보았고, 그들을 직접 돌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은 남의 아이라 그런지, 내 손길을 별로 반기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먼 발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제는 우리의 아이가 생길 테니, 내가 그 아이를 직접 돌보고, 아이를 돌보는 방법을 당신에게 알려 줄게요.”
방백종을 바라보던 정방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정방이 방백종을 꼭 껴안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 <교랑의경>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