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태자비께서 정사낭의 비석에 글씨를 하나 새기셨다고?”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추측한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게 내가 일찍이 말하지 않았나. 태자비께서 참 고명하시다고 말이야.”
경 공공의 이야기를 들은 고 선생이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시 여인네들이란. 태자비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긴 하지만, 그간 맺어온 원수가 너무 많아. 다들 태자비의 행실을 잘 알기에 그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예의주시하고 있을 텐데, 그렇게 갑자기 비석에 글씨를 새기시면 어떡하나? 남들이 일찌감치 눈치채는 바람에 계획한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분풀이나 하자고 성급하게 그런 일을 벌이다니 태자비께서 너무 경솔하셨어.”
“태자비께서는 단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신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일부러 숨기거나 음지에서 행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남에게 들키기를 두려워하시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신 것이지요.”
경 공공의 말에 고 선생이 경 공공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럴 수도 있고. 뭐가 어찌 됐든, 지금은 모든 게 뜻대로 이뤄졌잖나.”
“태자비께서는 바라던 바를 이루셨을지 모르겠으나, 우리 전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를 보십시오.”
경 공공이 탄식했다.
“전하께서는 황태자가 되셨지. 자네가 이렇게 우거지상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고 선생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경 공공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자, 고 선생이 입술을 삐쭉였다.
“어떤 일은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되네. 태자비가 걱정되어 그러는 게지? 이대로 가다간, 얼마 못 버티실 것 같아서?”
경 공공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낮췄다.
“황제 폐하께서도 몇 달을 저리 버티고 계십니다.”
그러니 태자비께서도 당연히 버티실 수 있지요.
“그러게 말이오. 황제 폐하께서는 천수(天壽)를 다하실 때까지 평온하게 침상에 누워 계시다가 임종을 맞이하실 걸세. 그러니 태자비께서도 그러실 수 있지.”
고 선생이 경 공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경 공공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태자비가 이렇게 큰 공을 세웠으니, 전하께서는 분명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실 걸세.”
고 선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꼭 황후로 추봉하실 것이야.”
경 공공의 안색이 새하얘지더니, 고 선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요! 추봉이라니요!”
경 공공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는 경 공공의 멱살을 똑같이 쥐어 잡았다.
“추봉이 아니면? 그럼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산송장을 황후로 책봉하기라도 하겠다는 겐가? 아경, 제발 정신 좀 차리게!”
고 선생이 경 공공의 손을 내치고 옷매무시를 정돈했다.
“그게 바로 가장 좋은 결과이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야.”
방백종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손을 잡았다. 본디 따뜻했던 정교랑의 손이었는데, 이제는 이불 안에 있어도, 방백종이 아무리 두 손을 꼭 쥐어도, 도통 따뜻해지지 않았다.
정교랑의 몸은 심장 박동도 없고, 맥도 잡히지 않고, 미약한 호흡만 남아 있었다.
“도대체 주복의 목숨과 무엇을 맞바꾼 거예요? 난 더 이상 단 하루도 그자의 얼굴을 못 보겠습니다. 당신을 보다가 다시 주복의 얼굴을 보면, 내가 여태 그자의 사지를 찢어버리지 않은 것에 감탄할 정도예요.”
방백종이 조용히 말했다. 그가 혼자 피식 웃고는 한숨을 쉬었다.
방백종이 한 손으로 정교랑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정교랑의 팔을 천천히 안마했다.
어쩌면, 그런 기이한 비술 덕에 몸이 부패하지 않은 건가? 살이 썩는 냄새가 나지도 않고, 피부의 색이 변하지도 않았어. 몸에 났던 자상도 평범한 사람처럼 서서히 아물고 있고.
정교랑의 팔을 주무르던 그의 손은 어깨를 지나며 정교랑의 목을 향해 차츰 위로 올라갔다. 방백종의 손끝이 정교랑의 가녀린 쇄골 위에 닿았다.
너무 야위었어.
방백종의 손은 천천히 정교랑의 목덜미로 향했고, 그는 정교랑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을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정방, 육가아가 언제 죽었는지 알아요?”
“정방, 오늘까지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대답해주는 이 하나 없는 질문을 쏟아내던 방백종이 자신의 손끝을 정교랑의 코 아래에 놓았다. 정교랑의 얼굴을 감싼 손에서 미약한 호흡이 가까스로 느껴졌다.
이게 이 여인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겠지.
이 미약한 호흡마저 없어진다면, 몸은 서서히 굳고, 얼음보다 더 차가워지겠지.
육가아처럼, 주위에 아무리 많은 얼음을 갖다 놓아도 몸이 썩어 가는 고약한 냄새가 날 거고, 육가아처럼, 관곽에 넣어져 깊디깊은 땅속에 묻힐 거야.
이 세상에 다시는 이 사람이 존재하지 않겠지.
방백종이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의 목을 끌어안은 채 허리를 숙였다.
“정방, 어서 일어나요.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당신이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난 너무 견디기 힘들 거 같아요. 지금도 너무 견디기 힘들다고요.”
방백종이 흐느끼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맴돌았다.
“어서 일어나요. 어서 깨어나라고요.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요.”
이보다 더 긴 밤은 없었다.
반근과 소심은 서로 등을 맞댄 채로 밧줄에 묶여 있었다. 면포에 입을 틀어막힌 두 사람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소심과 반근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창밖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사라지자 깊은 어둠이 내렸다가, 어둠이 차츰 걷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공포와 절망감이 두 사람의 온몸을 덮쳤다.
새벽녘의 푸른빛이 하늘을 덮을 때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인 상태의 몸종 두 명을 보고 있자니, 경 공공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태자비께서는 이미 가셨다.”
경 공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몸종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고는 죽을 각오로 벽을 향해 머리를 박으려 했다.
다행히도 경 공공이 한발 빠르게 두 사람을 붙잡았다.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이 가녀린 두 몸종에게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온 건지, 둘은 경 공공의 손을 벗어나 그대로 벽에 부딪힐 뻔했다. 죽고자 하는 결심이 얼마나 결연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태자비께서 이곳을 떠나 태자 전하와 함께 동궁으로 가셨다는 뜻이다.”
경 공공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반근과 소심이 고개를 들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경 공공을 쳐다보았다. 경 공공은 두 사람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경 공공이 몸을 낮추고, 자리에 주저앉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를 속이려는 게 아니니, 소리 지르지도 말고, 소란 피우지도 말거라. 정말로 태자 전하께서 태자비를 모시고 동궁으로 가신 것이야. 거기에 계신다면, 태자비를 더 편하게 돌보실 것이다. 매일같이 이리저리 오가실 필요도 없을 테고.”
반근과 소심이 쿵쿵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궁에 태자비를 극진히 모실 사람들이 있으니.”
경 공공이 말하면서 두 사람의 입을 막아둔 면포를 빼 주었다.
“저희가 아씨를 모실 수 있어요. 저희가 아씨를 모시게 해 주세요.”
두 몸종은 목이 쉴 정도로 울부짖으며 쉴 새 없이 큰절을 올렸다.
“전하께서는 너희에게 태자비를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경 공공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반근과 소심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개를 들어 경 공공을 올려다보았다.
경 공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래. 바로 이런 눈빛이야.”
경 공공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바로 이런 눈빛, 이런 표정이 참 보기 불편하단 말이지. 전하께서 더는 그런 표정들을 보고 싶지 않으신 게야.”
“공공, 공공, 앞으로는 말을 잘 들을게요. 더는 울지도 않고요.”
소심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전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전하께서 시키시는 대로만 할게요. 제발요, 전하께 이렇게 빌게요. 아씨께서는 저희가 없으면 안 돼요.”
경 공공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자비는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으나, 너희가 태자비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하셨다.”
소심이 고개를 저으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태자비를 다시 뵙고 싶다면,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너희가 한 가지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말이야.”
경 공공이 이어서 말했다.
“저희는 뭐든 할 수 있어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제발 시켜만 주세요. 저희더러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좋아요.”
반근과 소심이 울며 애원했다. 경 공공이 고개를 저었다.
“이거 봐라, 이거 봐.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을 왜 해? 너희 눈에는, 전하께서 너희를 죽음으로 내몰 분으로 보이더냐? 툭하면 울고, 툭하면 죽겠다고 하니까 전하께서 너희를 곁에 남겨두지 않으려고 하시는 게야.”
반근과 소심이 눈물을 흘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경 공공을 올려다보았다.
“죽을 필요도 없고, 여러 일을 할 것도 없다. 딱 한 가지 일만 잘 해내면 돼.”
경 공공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반근과 소심은 눈빛을 반짝이면서 경 공공의 분부를 기다렸다.
“걱정하지 말아라.”
경 공공이 또 말했다. 반근과 소심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경 공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는 게, 바로 너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반근과 소심이 경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너희가 태자비를 다시 뵐 수 있을 그 날까지, 걱정하지 말고 잘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제 이곳을 떠나거라. 태자비의 친정으로 가도 되고, 태자비의 점포로 가도 된다. 무얼 하든 상관없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잠자코 기다리면 되느니라.”
경 공공이 말했다.
그래도 결국 우리를 내쫓겠다는 말이잖아!
반근과 소심이 큰절을 올리며 울음을 터트리자, 경 공공이 갑자기 목청을 높이며 호통쳤다.
“뚝 그치거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뼈마디를 찌르는 듯한 느낌에, 소심과 반근은 몸을 흠칫 떨며 울음을 삼켰다.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한 번만 더 울었다가는, 다시는 너희 아씨를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아라.”
경 공공이 눈썹을 치켜뜨고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아씨만 사람을 죽일 줄 안다고 여기느냐?”
동궁은 황궁의 북쪽에 있었다.
황제의 손이 귀했던지라 황궁에는 수십 년간 태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황자, 즉 회혜황이 죽을 때에도 태자에 책봉되지 않았고, 선문 태자는 바보인지라 스스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할 수 없던 탓에 태후궁에서 지냈다. 따라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동궁은 몹시 낡고 볼품없어 보였다.
방백종이 갑자기 동궁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공부(工部)에서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동궁을 보수했다. 원래는 건물을 점검하고 수리할 수 있도록 며칠 말미를 달라고 하려 했지만,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번복하는 법이 없는 태자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공부에서는 최대한 빠르고 간략하게 동궁을 손보고 정리했다.
경 공공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내시들과 궁녀들은 전각 안을 분주하게 청소하는 중이었다. 태자의 침궁 청소가 가장 먼저 끝났기에, 경 공공은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경 공공이 예를 올렸다. 내실 안에서 탁자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던 방백종이 음, 하고 대꾸했다.
“다 처리했습니다. 주 공자는 가둬 두었고, 몸종 둘은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범 군감 댁이 아니라 신선거와 태평거로 간다고 하더군요.”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 보거라.”
경 공공이 예를 표하고 곧바로 밖으로 물러났다.
실내가 다시 조용해지자, 방백종은 책을 내려놓고 미인탑(美人榻: 여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사용하던 좁고 긴 평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인탑 위에는 두봉을 돌돌 말아 품에 안고 편히 누워 있는 정교랑이 있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방백종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9월의 경성은 한 해 중 가장 활기가 넘치는 때였다.
황제의 침궁 안에서는 궁녀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마, 이건 여기에 두는 게 어떨까요?”
안비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침상 앞에 앉은 황후는 궁녀에게서 수건을 받아 황제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래.”
“마마, 보시지도 않으셨잖아요.”
투덜대던 안비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신첩이 태후마마께도 하나 보내드렸는데, 태후마마께서 신첩이 보낸 국화꽃 화병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깨트리셨지 뭐예요.”
“조용히 요양 중이시니 굳이 찾아가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느냐.”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마마, 마마께서 신첩에게 후궁을 관리하라고 하셨잖아요. 신첩이 어째 태후마마를 소홀히 하겠어요.”
안비가 헤헤 웃었다.
부귀영화를 남몰래 누릴 수야 없지. 지금은 내가 후궁의 실세를 쥐고 있는 거니까,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려야겠어.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내시의 말에 안비가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편전으로 물러났다.
전각 안으로 들어온 방백종이 황후와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조회는 끝났느냐? 여기서 폐하와 정사를 논하려고?”
황후가 묻자,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거라. 본궁이 폐하께 약만 먹여 드리고 일어나마.”
황후가 말하면서 침상에 앉았다.
“소자가 하겠습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먼저 식사부터 하고 오거라. 효심을 표할 기회가 지금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
황후가 따뜻한 미소를 보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효심을 표하기 전에, 본궁도 아내의 본분을 다해야 하고.”
방백종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한 뒤, 옆으로 물러나며 내시들에게 식사를 들이라고 명했다.
“대신들한테 따뜻한 보양탕 한 그릇씩 대접하거라. 날도 추운데 꼭두새벽부터 줄곧 서 있었으니, 몸이나 좀 녹일 겸.”
방백종이 내시들에게 조용히 당부하는 말을 들은 황후가 옆에 있던 내시에게 말했다.
“태자의 성격이 괴팍하다고들 하는데, 태자만큼 선량한 사람은 또 없을 것이야.”
내시가 아첨의 웃음을 보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노신이 조회에 참석할 땐, 태자 전하께서 조당에 노신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주십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인자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태자가 태조의 성격을 물려받았다고 말하면, 태종의 혈통인 황제와 황후가 듣기 거북할 게 뻔했다.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는 태자를 참으로 예뻐하셨지. 예전에는 태자와 함께 정사를 논하시기도 했어. 친아들은 아니라고 하나, 태자는 폐하의 곁에서 자란 아이야. 보고 들은 게 많으니, 자연스레 폐하를 닮아가는 것이지.”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내시들이 웃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궁녀에게서 탕약 그릇을 받자 내시들은 황제를 부축해 앉히고 학취호를 가져왔다.
“마마, 수왕비께서 아직 떠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선문 태자의 장례가 끝나고, 종친과 황족들은 모두 경성을 떠났지만, 수왕비는 병이 났다며 경성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요양을 한 달씩이나 하다니요.”
내시가 말을 덧붙였다. 황후가 수저로 탕약을 천천히 저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일 년을 요양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제 선문 태자가 없으니 말이다.”
선문 태자가 없다는 게, 태자 전하나 수왕비와 무슨 상관이지?
내시가 속으로 의아해했다.
“선문 태자에게 일이 생겼던 그해에, 위 태자가 방에 있던 선물을 모두 깨부쉈던 일을 그새 잊은 게냐?”
내시들은 한참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그 일을 생각해냈다. 워낙 사소한 일이라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 태자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러니 당연히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겠지.”
황후가 탕약을 한 숟갈 뜨고는 조심스럽게 후후 불어 식혔다.
“태자에게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태자의 성격이 괴팍하다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게다.”
남이사 기분이 좋든 말든 태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다만 누가 자기의 기분을 상하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
내시들이 황후의 말을 알아듣고 웃음을 보였다.
“사실 태자께서는 정이 참 많으신 분입니다.”
내시 하나가 말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내시들이 서둘러 황제를 똑바로 부축하고는 황후가 황제에게 약을 먹이도록 도왔다.
황제는 아직 혼수상태인지라 탕약을 스스로 삼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자그마한 탕약 한 그릇을 비우는 데에는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을 족히 들여야 했다.
“마마,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런 일은 소인들한테 맡기시지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황후를 보면서, 내시가 공손하게 말했다.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손수건으로 황제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누가 하든 똑같다. 다만, 마음을 쓰고자 하는 정도가 다른 것이지.”
“이제 그 정도로 마음을 쓰는 사람은 마마뿐이십니다.”
내시가 감탄했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예전에 내가 폐하께 마음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자. 중요한 정사를 지체할 수 없지.”
황후가 천자의 침궁에서 나왔다. 황후는 고개를 돌리고 전각 안으로 차례로 들어가는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비가 서둘러 황후를 맞이했다. 안비가 황후를 부축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마마, 폐하께서 다 들으실 수 있을까요?”
안비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황제가 조회에 참석할 수 없는 탓에, 태자는 조회를 진행하는 시간 외에는 줄곧 천자의 침궁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침전에서 상소문을 검토하면서 옆에 있는 황제에게 상소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바깥에서는 태자의 효심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태자를 은근히 조롱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태자가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젠 대놓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명성을 추구한다, 간악하기 그지없다 등의 말까지 나왔다.
“때로는 무슨 일을 하는 게, 꼭 남에게 들려주거나 보여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황후가 말했다.
“그럼 무엇을 위한 건데요?”
안비가 곧바로 물었다.
여인이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하는 건 인지상정인걸요.
“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니지.”
황후가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안비가 속으로 외쳤다. 물론 바보는 아니기에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바보 하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네.
“마마, 태자비는 한번 보셨는지요?”
안비가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걸음을 옮기던 황후가 멈칫했다.
황궁의 변이 지나간 뒤로, 정교랑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진안 군왕부가 태자부가 될 때까지, 정교랑은 계속 안채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탓에 태자비가 병들었다는 소문이 차츰 경성에 퍼지기 시작했다.
태자비에게 병이 있다고 하나, 태의가 한 번도 태자부에 방문하지 않기도 했거니와 태자비 본인이 갖고 있는 신의 낭자라는 신분 때문에 소문은 점점 더 왜곡되어 갔다.
하지만 황후는 태자비가 병이 난 게 아니라, 황궁의 변이 일어났던 밤에 다친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당시 황후는 태자비가 그렇게 심하게 다친 줄은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태자에게 태자비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지만, 태자는 황후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도대체 태자비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오후가 되자, 정적이 흐르던 동궁이 시끌벅적해졌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마당에 서 있던 내시와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
방백종이 뒷짐을 지고 빠르게 마당을 지나쳤다.
문 앞에 서 있던 시녀가 문을 열자, 실내에 있던 시녀들이 방백종과 함께 욕실로 들어가 그의 시중을 들었다. 태자 예복을 벗고 새하얀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방백종은 허리띠도 하지 않고, 나무 비녀로 머리를 묶지도 않은 채 편안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갔다.
“오늘은 무얼 먹었느냐?”
방백종이 묻자, 두 시녀가 서둘러 예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태자비께서 인삼죽을 한 그릇 드셨습니다.”
“식사하신 뒤에는 정원에서 일각 정도 산보를 하셨고요.”
“그 뒤로는 이 태의께서 우린 보양탕을 드시고 잠시 쉬고 계세요.”
“지금 막 태자비께 책 한 장을 읽어드렸고요.”
시녀 두 명이 서로 말을 이어가면서 번갈아 말했다.
이때, 시녀 하나가 개완(蓋椀: 뚜껑 있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태자비께서 드실 배즙이 다 만들어졌습니다.”
시녀의 말에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뻗었다. 시녀는 재빨리 방백종 가까이로 다가가 두 손으로 개완을 건넸다.
두 시녀가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정교랑을 일으켜 앉히고 허리 뒤로 베개를 받친 뒤,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방백종은 침상 위에 앉아 개완에 담겨 있는 배즙을 정교랑에게 조심스레 떠먹여 주었다.
“찬 게 맛있어요, 아니면 따뜻한 게 맛있어요?”
방백종은 정교랑이 입을 닫을 수 있도록 턱을 살짝 받쳤다. 하지만 역시나 배즙은 정교랑의 입가로 흘러나왔다. 방백종이 손수건으로 정교랑의 입과 턱을 닦아 주었다.
방백종은 배즙을 한 숟갈 떠서 정교랑에게 먹이고, 턱을 살짝 받쳐 삼키는 것을 도운 뒤, 다시 손수건으로 정교랑의 입가를 닦아 주는 동작을 순식간에 해냈다. 그는 서툴거나 허둥대지 않는 모습으로 이 행동을 자연스럽게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둘 다 먹어 봤는데, 찬 게 더 입맛에 맞더라고요. 그런데 당신은 어떤 걸 더 좋아할지 누가 알겠어요?”
방백종이 정교랑을 바라보면서 설핏 웃었다.
“당신은 별난 사람이잖아요.”
방백종이 수저를 들고 또 배즙 한 모금을 정교랑의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턱을 받치고 손수건으로 정교랑의 입가를 닦아 주면서 말을 이어 갔다.
“이 태의는 상남(湘南: 호남성 남부)에 도착했대요. 그런데 찾으려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방백종이 작게 탄식했다.
“내가 묻지 않으면, 당신은 나와 이런 일들을 얘기하지 않잖아요. 이거 봐요. 당신이 말해 주지 않아서 이렇게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찾고 싶어도 어디서 뭘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누굴 붙잡고 묻고 싶어도 누구한테 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방백종이 손끝으로 정교랑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당신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군요. 두 눈 딱 감고 모든 일을 내게 떠넘겨 버렸잖아요. 내가 괴롭히기 쉬운 사람이라 그러는 거죠?”
방 안에는 대화가 오가는 듯이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시종일관 방백종 한 사람뿐이었다.
문밖에 서 있던 시녀 두 명이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마주쳤다.
“전에 선문 태자와 함께 계실 때도 이러셨어.”
한 시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예전에 선문 태자와 함께 계실 때도 지금처럼 늘 혼잣말을 하셨지. 상대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도 모르고, 대화한다는 것 자체도 전혀 모르는데.
선문 태자께서 떠나시자마자 이젠 태자비께서 저리되셨으니.
“전하께서 참 불쌍도 하시지.”
시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원래는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다른 시녀들도 ‘불쌍’이라는 단어를 듣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시녀들은 왠지 모르게 짠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저리 자문자답하는 게 좀 불쌍하긴 하지.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자, 시녀들이 구슬발 사이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침상 위에 앉아 있던 방백종은 어느새 몸을 옆으로 돌려 눕고 정교랑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 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까치발을 들며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동궁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정자와 누각이 찬란하게 밝혀졌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흐드러지게 핀 국화꽃이었다.
“저기 좀 봐요.”
방백종이 먼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건 누가 공물로 바친 건데, 황실에 딱 세 그루만 있어요. 폐하께 한 그루 남겨 드리고, 나머지는 황후마마께서 다 이쪽으로 보내 주셨어요.”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네 명의 내시들이 짊어지고 있는 가마 위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황후마마께서 당신이 저걸 보고 그림을 그려 줬으면 하신대요.”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방백종이 국화꽃밭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내시들은 그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가마를 들고 걸었다.
“당신이 글씨를 잘 쓰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림까지 그렇게 잘 그릴 줄은 몰랐어요. 주복 그 녀석이 딴 건 다 필요 없다며, 화폭 두루마리 한 개만 가지고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씩 웃었다.
“그런데, 안 줬어요. 그 녀석을 일부러 골려 주려고요.”
붉은 두봉을 걸친 정교랑의 표정은 한없이 온화했다. 늦가을의 밤바람이 불어오자, 두모가 펄럭이며 정교랑의 얼굴을 가렸다.
방백종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두모를 바로 씌워 주었다.
“요즘은 일이 너무 바빠서, 오늘에서야 당신과 이렇게 바람을 쐬네요. 당신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하겠지만, 난 신경이 쓰여요.”
길가에 서서 방백종과 내시들을 바라보던 경 공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경 공공의 옆에 서 있던 내시가 한숨을 쉬었다.
“대인, 이대로는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자비는 정상인이 아닌데, 태자 전하께서 태자비를 정상인 대하듯이 대하시다니.
밤에는 같은 침상에서 잠을 청하고, 식사도 함께 하고, 심지어는 아침 수련을 할 때도 태자비를 모시고 나가셔. 태자 전하께서 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실 때마다, 태자비의 가마를 옆에 두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시는 건지.
태자 전하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우리 같은 내시들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린단 말이지.
“최소한 태자부에 새로운 사람들을 좀 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근거리에서 전하의 시중을 들 수 있는 궁녀도 없을뿐더러, 이제 전하의 춘추도 적지 않으시니…….”
내시가 이어서 말하려던 찰나,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하라고 시켰느냐?”
내시가 멈칫했다.
“누가 시킨 건 아니고, 소인의 생각이옵니다. 대인, 저도 몇 년 동안 태자 전하의 시중을 들지 않았습니까. 다른 뜻은 없습니다.”
내시의 대답에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 괜히 남한테 불똥 튀게 하지 말고.”
경 공공의 말에 깜짝 놀란 내시는 그 말뜻을 뒤늦게 이해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따귀를 내리쳤다.
경 공공은 더는 내시를 쳐다보지 않고, 정교랑의 가마가 왔던 길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그들을 맞이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켰다. 그는 침전을 향해 가는 방백종 일행이 멀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시간문제일 텐데. 폐하께서도 자손이 몇 없었기 때문에 양자 입적을 하신 거잖아. 그러니 태자 전하도 당연히 자손 문제에 신경을 쓰셔야지. 지금은 그렇다 쳐도, 나중에 제위에 오른 뒤에는 어쩌시려고?”
9월 말, 어느새 밤바람이 서늘해지고 북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천자의 침궁 안에 있던 등불이 바람에 일렁였다.
편전에 있던 황후는 내의로 갈아입고 머리를 푼 채 등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바람 소리가 들려오자,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 이불을 더 가져다드렸느냐? 태의가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오랜 시간 병석에 누워 계신지라 한기가 들면 안 된다고 하였다.”
문밖에 서 있던 내시가 대답했다.
“예, 이미 가져다드렸습니다.”
황후가 고개를 숙이고 이어서 책장을 넘겼다.
“마마.”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궁녀가 문을 열자, 황제의 시중을 드는 내시가 당황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누군가가 문을 살짝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의 정적을 깨트렸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방백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흐릿한 실내의 등불을 확인하던 방백종은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문가를 쳐다보았다.
“전하, 전하.”
경 공공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방백종이 물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젖혀진 이불을 다시 정교랑의 어깨까지 끌어다 덮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경 공공이 잰걸음으로 방백종에게 다가갔다.
“전하, 황후마마께서 지금 잠시 입궐하실 수 있겠냐고 하문하셨습니다.”
방백종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입궐하라는 전갈이 아니라, 잠시 입궐할 수 있겠냐고 하문하신다는 것은…….
황궁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입궐을 명하신 게 아니라, 입궐할 수 있냐고 하문하신다는 것은, 궁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뜻인데.
황제 폐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치자, 방백종은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왔다.
“전하.”
경 공공이 서두르는 방백종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냉큼 달려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방백종은 양자로 들어온 태자였다. 게다가 선문 태자가 죽던 날, 방백종이 병사들을 이끌고 경성에 입성하고 궁문을 부순 일로, 세간에 떠도는 말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곁에 있었다는 소식이 밖으로 전해진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한 소문이 퍼질 것이 자명했다. 이는 황후가 방백종에게 은밀히 소식을 전한 연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곁에 없었다면, 그 또한 각종 유언비어를 양산할 터였다. 물론 그런 소문은 근본이 없어서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유형의 것이었다.
방백종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마차를 준비해라.”
나 방백종은, 단 한 번도 세간의 말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천자의 침궁 안에 켜져 있던 등불이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문밖에는 당직을 서는 금위군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내시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자의 침궁 주위는 더욱 스산해 보였다.
“태자가 왔다고?”
내시의 말을 들은 황후가 조금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침상 앞에 앉아 있던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침상에 누워있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등불이 황제를 바라보는 황후의 얼굴을 비추었다. 다소 복잡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곧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과 함께 방백종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가 휘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폐하께서 어찌 되셨습니까?”
방백종이 예를 올릴 겨를도 없이 물었다. 황후가 잠시 방백종을 쳐다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술을 꾹 닫았다.
옆에 시립해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문밖으로 물러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는 어쩜 아직도 선문 태자 때와 똑같은 것이냐.”
황후의 말에 방백종이 멈칫했다.
육가아가 매화를 따다 변을 당한 게 아니라 회혜왕의 음해에 당한 것이라고 따져 물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 아니면 육가아를 그만 놓아주고 경성을 떠나라고 한 말을 거절했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
전자는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진상을 밝히려 했을 때였고, 후자는 의리를 지키고자 굳이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선택했을 때였다.
어쨌든 황후는 내심 방백종이 입궐하지 않기를 바랐다.
“마마께서도 여전하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소자를 보호해 주려 하시지 않습니까.”
당초 육가아가 매화를 따다 벼랑에서 떨어졌을 때, 황후는 방백종을 지켜 주고자 아픈 몸을 이끌고 달려와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황후가 아니었더라면, 방백종은 그때 뭇사람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다만, 소자는 신하의 마음으로 본분을 지킬 뿐이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방백종이 이어서 말하고는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이 아이가 입궐하지 않은 채로 폐하께서 붕어하신다 한들, 세간의 소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그런 유언비어야 늘 있는 것인데, 굳이 그런 것들을 일일이 신경 쓰며 살 필요는 없지.
황후가 방백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다.”
방백종이 경악한 얼굴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붕어하신 게 아니라, 깨어나셨다고?
그건 정말 좋은 일인데, 황후마마께서는 왜…….
어두운 등불에 비친 황후의 복잡한 표정을 잠시 쳐다보던 방백종은 이내 숙연해졌다.
애초에 폐하께서 앓아누우신 이유가 뭐였지?
귀비가 안비를 음해하고, 회혜왕이 빗속에서 사죄한다는 명목으로 폐하를 협박하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 뒤로 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나. 귀비는 미쳐 버렸고 고능준과 진소도 죽었으며 육가아도 죽었다. 태후마마는 연금되셨고, 후궁의 모든 권력은 황후마마의 손에 들어갔다. 게다가 과거의 진안 군왕이 지금 태자 자리에 앉았는데, 이 수많은 변화를, 폐하께서는 과연 감당하실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폐하께서 아직 제위를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황후마마든, 태자든, 그게 누구여도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시면 그에 따라야만 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황제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그 황제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면 모든 게 달라질 수밖에.
“폐하께서 조금 전에 눈을 뜨셨다.”
황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방백종을 향해 말했다.
“본궁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방백종이 말없이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의 말뜻은 이러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한다면, 황제는 깨어나지 않은 셈이 된다는 것.
방백종이 천천히 전각 안을 둘러보았다. 천자의 침궁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이곳은 황후의 침궁이나 다름없었다.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후궁 전체는 황후의 손아귀에 있었다. 궁문을 닫는 순간, 누가 죽고 사는 문제는 모두 황후 한 사람이 결정했다.
사실 지금 황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수상태인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맑은 정신으로 깨어난 황제는 더더욱 그러했다. 다시 깨어난 황제는 모든 이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쥔 막강한 권력의 황제니까.
깨어난 황제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 득세하고 있는 황후와 태자를 가만두지 않는다면?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권력을 태자와 황후가 나눠 가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세간에 떠도는 온갖 낭설의 충격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황제가 깨어난 후에 벌어질, 너무도 많은 불확실한 일들에 황후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중 단 한 가지라도 현실로 이어진다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황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층층의 휘장 너머로 황제가 누워있는 침상이 보였다.
그러니 가장 좋은 건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게야. 그래야만 본궁이 생각하는 만일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촉광부영이라는 말을 듣는 게 뭐 어때서…….”
황후가 말을 이어가면서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네가 연의왕이 되고자 하는 건 아니잖느냐?”
전각 안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안 그래도 어둑했던 등불이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구석에 남아 있던 내시들은 자신들의 몸을 어둠 속에 숨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소자,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황후가 말없이 방백종을 쳐다보자, 방백종도 황후를 바라보았다.
“생각을 끝낸 것이냐? 안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방백종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자, 황후가 옆으로 비켜섰다.
등불이 없는 휘장 안은 더욱 깜깜했다. 방백종이 침상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황제를 가려 황제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등불을 가져오너라.”
방백종의 말에, 내시 한 명이 등불을 들고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더.”
두 개, 세 개의 등불이 휘장 안을 비추자, 드디어 침상 앞이 환해졌다. 방백종이 몸을 숙여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병색이 완연하여 안색이 누렇게 뜬 황제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폐하.”
방백종이 황제를 불렀다. 황제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이윽고 그가 두 눈을 떴다.
“폐하!”
방백종이 침상에 바짝 다가가서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하지만 황제의 눈은 다시 감겼다.
“등불을 조금 치우거라.”
방백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두 내시가 서둘러 휘장 밖으로 물러나자, 침상 앞이 다소 어두워졌다.
황제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방백종에게 시선을 두었다.
“폐하.”
방백종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눈을 뜬 황제의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쉰 소리를 냈다.
“폐하, 위낭입니다.”
방백종이 황제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폐하, 위낭이라고요.”
흐리멍덩했던 황제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잡고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것은 여전히 의미 없는 신음뿐이었다.
“폐하!”
놀란 방백종이 소리치면서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팔을 아주 천천히 움직이면서 자신을 향해 손을 뻗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황제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황제의 손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마르고 주름져 보였다.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아 힘없이 떨리는 주름진 손이 방백종의 손을 꼭 쥐었다.
“아!”
황제가 드디어 토해내듯 소리를 냈다. 방백종이 두 손으로 황제의 손을 감싸고, 그의 손을 뺨에 가져다 대며 울먹였다.
“여봐라.”
방백종이 고개를 홱 돌리고 소리쳤다.
“어서 태의를 불러라!”
휘장 밖에 서 있던 황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당장 태의를 부르고, 중서문하성의 장순, 엄소(嚴昭), 임택(林澤), 그리고 당직을 서는 한림들을 부르거라.”
방백종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실내가 갑자기 환해지는 듯했다. 침상 앞에 내려져 있던 휘장을 모두 걷자, 그 앞에 서 있는 방백종의 그림자가 더욱 길게 늘어졌다.
황후가 나지막이 한숨을 토하고 서둘러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폐하.”
무릎을 꿇은 황후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먹였다.
장 노태야의 방 안에 등불이 밝혀졌다.
잰걸음으로 들어온 노복이 옷을 걸치고 있는 장 노태야를 향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노태야, 궁에서 온 사람입니다.”
이 꼭두새벽에 장씨 저택의 대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궁에서 나온 사람들뿐이었다. 장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나긴 했으니.”
장 노태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 노태야와 노복이 깜짝 놀라서 문가를 쳐다보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허둥지둥 옷을 주워 입은 듯한 몸종이 서 있었다. 문 위에 달린 등불 때문인지, 몸종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노태야.”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근, 네 아씨의 일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노복이 서둘러 말했다. 몸종은 그제야 문틀을 붙잡고 온몸에 힘이 빠진 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장 노태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그러나 폐하께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네 아씨한테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몸종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몸종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무릎걸음으로 장 노태야 앞으로 기어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닙니다. 노태야, 폐하께서 깨어나셨답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다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장 노태야가 노복을 쳐다보았다.
“정말입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노복이 재차 말했다. 표정이 다시 평온해진 장 노태야가 몸종을 향해 말했다.
“그럼, 네 아씨는 한동안 무사하겠구나.”
장 노태야는 다시 시선을 거두고 밖을 내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자에게는 썩 좋은 일이 못 되겠지.”
첫마디는 아씨를 뜻하는 거고, 뒤에 말씀하신 ‘그자’는 누구를 뜻하시는 거지?
몸종이 눈물을 쓱쓱 훔치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장 노태야를 바라보았다.
동이 틀 무렵, 황궁을 지키는 금군 병사들은 조회에 참석하는 관리들이 평소보다 훨씬 일찍 궁문 앞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젯밤엔 궁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내시 몇 명이 드나들었고, 오늘은 새벽부터 조정 중신들이 입궐했으니, 황궁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떠신가?”
한 관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붕어하신 게 아닐까 싶소만.”
다른 관리가 작게 대답했다.
“붕어하셨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소. 벌써 북과 징을 울렸을 텐데.”
또 다른 관리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왜 꼭두새벽부터 그리 어수선했던 거요? 대신 일고여덟 명이 새벽부터 불려 갔다던데.”
“설마 황후마마나 태자 전하께서?”
“웃기는 소리. 그럴 리가 있겠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폐하의 병세가 급하게 위독해지신 거지. 밤에 알리기가 좀 그러니, 낮에 공포하려는 게 아닐까 싶군.”
한밤중에 이미 붕어하셨어도, 해가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포하는 게 낫긴 하지.
대신들과 관리들이 수군거리며 갖가지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며 궁문이 열렸다.
오늘은 대조회가 열리는 날인지라, 문무백관이 대전에 모였다.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어사대 관리들이 대전 안을 거닐고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를 막지는 못했다.
태자가 나타나야 할 시간이 지나자,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같은 시각, 장순 등의 조정 중신들은 천자의 침궁 안에 있었다. 그들은 피곤한 기색으로 방백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겠습니까?”
한 대신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방백종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을 기다렸소.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고.”
방백종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가마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가마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 황제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폐하께 조당에 나가시기를 청하옵니다.”
방백종이 허리를 숙이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 조당에 나가시기를 청하옵니다.”
다른 중신들도 허리를 숙이고 방백종을 따라 외쳤다.
궁중 악단의 연주와 함께 가마에 실린 황제가 조당에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라는 관리들도 있었고,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 관리들도 있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게 아닌가 보네.
관리들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제가 대조회에 모습을 보인 이유가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기 위해 잠시 얼굴만 비추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태자가 예전처럼 조당 위로 올라가지 않고 대신들의 대열 앞쪽에 멈춰 서자, 관리들은 그제야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조차 태자가 황제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태자가 황제에게 상소문을 한 장 한 장 읽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의식이 혼미한 황제를 존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태자가 허리를 숙이고 대신들과 함께 황제를 향해 예를 올리자, 궁중 악단의 연주 소리가 그쳤다. 황제의 건강을 축원하며 예를 올린 후, 대신들은 몸을 일으키라는 내시의 말을 기다렸다. 그때, 대신들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시오.”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듯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약한 목소리였지만, 대신들은 정적이 흐르던 대전에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는 헉 소리를 내기도, 누군가는 결례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의 이목은 조당의 가장 높은 곳, 가마 위에서 눈을 뜬 채 반쯤 누워 있는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어! 폐하께서 깨어나셨어!
대전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어사대 관리들이 호통을 치며 정숙하라고 호통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던 사람들이 종국에는 일제히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대전 안을 가득 메우자, 사람들은 온몸이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바로 천자의 권력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천자의 권력.
저 자리에 앉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절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 맛을 봤다면, 저 자리를 어찌 쉬이 포기할 수 있을까.
무릎을 꿇고 있던 대신들은 흥분을 가라앉힌 뒤 흐릿한 시선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모든 대신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자리에서 혼자 우뚝 서 허리를 숙이고 예를 올리는 태자의 모습과 높은 조당 중앙에 있는 황제의 모습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황제가 천천히 손짓하자, 옆에 있던 내시가 서둘러 허리를 숙이고 다가갔다.
“말.”
황제가 한 글자를 내뱉었다.
대신들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황제를 바라보았다. 깨어나긴 했지만, 온몸이 뻣뻣하여 간신히 손을 까딱이고, 힘겹게 눈을 깜박이고, 토해내듯이 한 글자씩 내뱉는 황제의 모습을, 대신들은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폐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시가 목청을 높이며 황제의 뜻을 전했다. 대신들이 다시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짐(朕)은…….”
“병(病)…….”
대신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황제가 뱉은 두 글자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비록 두 글자일 뿐이지만, 대신들은 황제가 무얼 말하려는 건지 잘 알 수 있었다.
술에 진탕 취한 사람은 자신이 취했다는 것을 모르고, 미치거나 바보가 된 사람들은 자신이 미치거나 바보가 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병자이긴 하나 정신이 또렷한 병자였다.
정신이 또렷하다면,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다 알고 계시는 걸까? 하늘과 땅을 뒤엎는 일련의 일들을.
대신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직접 책봉하지 않은 태자.
정신이 맑은 황제는 저 태자를 어떻게 대할까?
어수선하던 조당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천자의 침궁 안, 황후는 표정 없는 얼굴로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전각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안비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일이 있든 없든, 어차피 한 번 죽는 목숨이다. 다만, 본궁은 이런 기분을 썩 좋아하지 않아.”
“무슨 기분이요?”
안비가 물었다.
“기다리는 기분.”
황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내시 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황후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폐하께서 옥새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가 혼수상태라 태자가 정사를 돌보는 동안에도, 옥새는 여전히 황후의 손에 있었다.
이제 황제가 깨어났으니, 이 옥새는 진정한 주인에게 돌아가야 하겠구나.
황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뜬 뒤, 옆에 있던 내시에게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간 내시가 옥새를 두 손으로 받치며 나왔다.
옥새를 가지러 온 내시가 두 손으로 옥새를 건네받은 뒤, 예를 표하고 즉시 자리를 떠났다.
안비는 저도 모르게 내시를 두어 걸음 쫓아가다가, 결국 문틀을 붙잡고 멀어져가는 내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높이 들어 올려진 옥새가 대신들의 주시 하에 천천히 황제의 앞에 놓였다. 황제가 옥새를 바라보았다.
“짐은…….”
황제가 또 입을 열었다.
“병…….”
“폐하의 옥체는 필시 완쾌될 것입니다.”
황제가 힘겹게 두 글자를 내뱉자, 대신 하나가 큰소리로 외치며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조용하던 조당 곳곳에서 또 한 번 황제의 건강을 기원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신들의 목소리가 차츰 줄어들자, 황제가 손을 올렸다.
내시가 재빨리 옥새를 황제의 손에 가져다주자, 황제가 옥새를 꼭 쥐었다.
드디어 천자가 자신의 권력을 되찾았군.
대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자신의 권력을 되찾은 천자가 가장 먼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일까?
모두의 시선이 황제의 손에 꽂혔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찰나의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던 그때, 황제의 손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면서 한 사람을 가리켰다. 대신들의 시선이 황제가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태자가 서 있었다. 황제의 손은 분명 태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라.”
황제가 말했다. 방백종이 황제를 쳐다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예를 표하고, 황제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오라.”
황제가 다시 말했다.
방백종이 멈칫하고는 황제의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황제와 삼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예를 올렸다.
“오라.”
황제가 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방백종은 두어 걸음 내디디고 옷을 턴 다음 황제의 앞에 꿇어앉았다.
“가지거라.”
황제가 손에 쥐고 있던 옥새를 방백종 앞으로 밀어 주었다.
가지거라!
대전 안에서 헙, 하며 숨을 들이마시는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이건 내선(內禪: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일)이다! 내선이야! 내선!
방백종이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놀람과 흥분, 그리고 믿기 힘든 감정이 드러났다.
황제는 방백종을 바라보며, 뻣뻣하게 굳은 손으로 옥새를 다시금 밀어 주었다.
“위.”
“낭.”
황제가 힘겹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잘.”
“가지고 있거라.”
방백종이 떨리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황제 앞에 납작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태상황(太上皇) 폐하, 영명하십니다!”
장순이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장순이 무릎을 꿇자, 대신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태자와 태상황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태상황 폐하, 영명하십니다!”
“태상황 폐하, 영명하십니다!”
대신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방백종의 높이 든 손에 옥새가 들려 있었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내선?”
소식은 바람처럼 빠르게 경성 전역으로 퍼졌다. 소식을 전달하는 전령병이 각지를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로군. 폐하께서 내선을 하시다니.”
경성의 주점과 찻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이 일에 관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태자가 정말 운이 좋았네. 이번 일로 명분을 바로 세웠으니 말이야.”
“태자가 폐하를 모시고 대조회에 참가할 배짱이 있는 줄 몰랐어. 난 또 어젯밤에 폐하께서…….”
만약 황제가 붕어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황제가 깨어난 지금, 그런 말은 절대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실소를 터트렸다.
“배짱? 그자가 못 할 이유가 있겠나.”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두봉을 걸치고 있던 한 젊은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두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는 지팡이 두 개는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젊은 사내는 그 말만 남긴 채 몸을 돌려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금세 시선을 거두고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등극 날짜는 정해졌나?”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새해가 오기 전에 즉위하실 거야.”
딱딱 울리는 지팡이 소리 때문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는 차츰 멀게 느껴졌다. 지팡이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럴 배짱이야 당연히 있겠지. 판세가 자기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테니.”
젊은 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고는, 고개를 돌려 찻집 안을 쳐다보았다.
“폐하께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폐하께선 바보가 아니시다. 필사적으로 싸우다 양쪽 다 망할 바에는, 차라리 평온한 여생을 보내는 게 낫다고 여기셨겠지.”
젊은 사내가 시선을 돌리고 큰길을 내다보자, 각자 갈 길을 재촉하는 행인들이 보였다.
“황제가 될 배짱이 있는 게 무슨 대수야. 황후 책봉을 감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짱이 아니겠어?”
병석에 앓아누워 허약한 황제를 모시고 대조회에 참여할 배짱은 있다지만,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산송장을 황후로 책봉할 배짱이 있을까?
그럴 배짱이 있느냐고!
지팡이를 쥐고 있던 젊은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푸른 핏줄이 툭 불거졌다.
네놈에게 그럴 배짱이 있느냔 말이다!
영화 4년 9월 27일, 건원제(乾元帝)가 퇴위하고 태자 위에게 선위했다.
하지만 태자가 곧바로 등극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칙을 따르자면, 태자는 제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며 울면서 극구 사양하고, 황제는 거듭 고집을 부린 후에야 정식으로 연호를 바꾸고 등극할 수 있었다.
물론 새 황제의 등극에 관한 준비는 이미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진안 군왕 옹립의 일등공신인 장순의 저택에는 사람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다. 그 덕분에 장씨 가문 문지기와 하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다행히도 대부분은 명첩이나 선물만 전달한 뒤에 자리를 떠났다. 장씨 가문의 사람들과 아주 가까운 친지들이나 지인들만 문턱을 넘고 들어와 차를 한 잔 대접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 손님은 장순의 장남이 맞이하고, 부녀자들은 장순의 부인이 맞이했다.
“강주 선생께서는 어디 가시고?”
새로 즉위하실 황제 폐하를 위해 뭘 준비하시려나?
“서원에 가셨습니다. 아직 수업해야 할 책이 남기도 했고, 글을 써야 한다고 하셔서요.”
장순의 장남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하자 손님이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같은 때에도 서원에 가서 수업을 한다고?
“백성을 살리는 일은 이미 행하였으나, 역대 성자들의 가르침을 독파하고 널리 알리는 일은 아직도 그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 하셨습니다. 결코 이를 게을리하실 수 없다고 하셨지요.”
장순의 장자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조정의 일보다 우선이라는 건가? 진소의 재상 자리를 꿰차는 것보다 한림원의 책을 감수하고 편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왜 그렇게까지?
하지만 사람들은 곧 장순의 의중을 깨달았다. 재상이 되지 않더라도, 장순은 태후의 목숨을 구하고, 새 황제의 옹립에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조정에서 그의 지위는 그 누구보다 탄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청 안은 더욱 시끌벅적해졌고, 후원에서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여기 남아서 밥 먹고 가요.”
부인 하나가 웃으면서 다른 부인들을 향해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장순의 부인을 쳐다보았다.
“부인네 찬모를 청하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요. 모처럼 부인 댁으로 온 김에, 요리 한번 맛보고 가도 되죠?”
다른 부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심지어 어떤 이는 무슨 요리를 해 달라고 할지 고르기 시작했다.
장 부인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죠. 이렇게 와 줬는데, 오늘 찬모를 보기는 힘들겠어요.”
모두가 놀란 눈으로 장 부인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찬모가 집에 없어서요. 일이 생겨서 잠시 집을 비웠어요.”
장 부인이 이어서 말했다.
아랫것이 일이 생겨 나갔다 해도, 안주인의 말 한마디면 냉큼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아랫것 주제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주인어른의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거늘.
“장씨 가문의 찬모는 정말 남다르네요.”
“당연히 남다르겠죠. 다들 잊었어요? 장씨 댁에 있는 반근 찬모가 본디 누구의 사람이었는지?”
장씨 저택을 나온 부인들이 조용히 말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부인들은 반근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 그제야 기억해 냈다.
태자비!
아니, 생각해 보니 장씨 가문의 반근뿐만이 아니야. 경성의 유명한 가문 몇 집에서도 자기네 찬모가 태자비의 수제자라면서 동네방네 자랑하기도 했지.
그런데 다른 집안의 찬모들은 자기네 하인들을 직접 보내 태자비의 가르침을 얻은 거지만, 장씨 가문의 반근은 달라. 저 반근은 진정한 정씨 가문의 사람이고, 태자비가 강주에서 데려와 장씨 가문에 선물했던 몸종이니까.
게다가 태자비는 곧 황후가 될 텐데, 과거에 황후의 시중을 들었던 몸종이라면 남다르긴 하겠지. 장씨 가문에서도 그 몸종을 평범한 하인 대하듯 이래라저래라하며 부리지는 못할 테고.
“다만.”
부인 하나가 무언가 생각난 듯 목소리를 낮췄다.
“태자비께서 황후가 되실 수 있을까요?”
부부는 한 몸이나 다름없기에, 남편이 출세하면 부인도 자연스럽게 지위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태자가 등극한다면, 일반적으로는 태자비 또한 황후로 책봉되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지금의 태자비는 조금 달랐다.
“병이 꽤 위중하대요. 태상황 폐하 때처럼, 아예 혼수상태시라고 들었어요. 그 상태로 병석에 누워서 지낸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고요.”
그럴 수가!
놀란 부인들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몹쓸 병에 걸렸다는 거잖아. 평범한 집안이라 해도 벌써 별채로 보내졌을 거야. 칠거지악을 범했으니 내쫓겼을 수도 있고.
“태상황 폐하께서도 깨어나셨잖아요.”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태상황 폐하께선 말씀도 제대로 못 하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신대요. 깨어나나 안 깨어나나 다를 게 없죠. 그렇게 아픈 사람을 어떻게 황후로 책봉하겠어요?”
고개를 저으며 말하던 다른 부인이 멈칫했다.
“아, 추봉할 수는 있겠네요. 듣자니 태후마마께서는 벌써 비빈들을 물색하고 계시다던데요? 그리고 수왕비도 젊은 여인들을 여럿 데리고 와서 태후마마께 알현을 청했대요. 다른 건 몰라도, 황제의 자손 문제에서는 수왕비나 태후마마나 같은 마음일 거예요.”
정오 무렵은 태평거의 장사가 가장 잘되는 시간이었다. 문 앞에는 자리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고, 마당에는 차양막과 탁자, 그리고 따뜻한 차와 간식이 놓여 있었다.
“아예 바깥에도 자리를 만드는 게 좋을 텐데. 여름에는 냉두부로 더위를 식힐 수 있고, 겨울에는 뜨끈한 낙득자재가 있으니 추위가 두렵지 않잖나.”
누군가가 차양막 아래에서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치켜들고 편액에 쓰인 글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정 낭자께서 직접 새긴 글씨라네.”
“무원산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는 다른 필체인걸.”
“에이, 아직도 정 낭자라고 하면 어떡하나? 지금은 태자비이시고, 곧 황후가 되실 분인데.”
“태자비나 황후는 천 명, 만 명도 넘게 있지만, 정 낭자는 유일무이하다고.”
“태평, 태평. 정 낭자가 있으니 진정한 태평이로구나.”
사람들이 문 앞에서 담소를 나누던 사이, 다급하게 뛰어온 누군가가 긴 줄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허, 줄을 서야지!”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줄을 비집고 들어온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옷과 장신구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반근 아가씨께서 오셨군요.”
문 앞에 서 있던 점원이 서둘러 여인을 향해 손짓했다.
밥 먹으러 온 사람이 아닌가 보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더는 여인을 향해 야유를 보내지 않고, 그저 여인이 층계를 올라가는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반근 아가씨.”
한 점원이 방 앞에 멈춰 서서 문을 두드렸다.
“반근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같은 반근이지만, 점원이 부른 문 너머의 반근과 그가 길을 안내해 준 반근은 다른 사람이었다.
문이 열리자, 몸종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몸종을 본 반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로?”
몸종을 본 반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반근 언니, 걱정하지 마. 아씨 소식이 있어서 온 건 아니야.”
몸종이 말했다.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반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자신이 없어서 경성에 남아 있지 못했어. 도저히 못 참고 황궁으로 달려가서 아씨를 찾을 것 같아서. 그래도 성 밖에 있는 태평거에 있으니 좀 나아.”
반근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태자 전하께 제위를 물려주셨어. 태자 전하께서는 곧 즉위하실 거고.”
몸종의 말에 반근이 고개를 들고 몸종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도 이제 아씨를 뵐 수 있는 거야?”
반근이 다급하게 물었다. 황제가 깨어나든, 태자가 즉위하든, 경성 사람들이 입이 아플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들은 반근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반근의 마음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몸종이 웃음을 짜내며 대답했다.
“응, 곧 그렇게 될 거야.”
반근이 몹시 기뻐하면서 몸을 돌리고 옆에 놓인 관음보살을 향해 정성스럽게 절을 올렸다. 그런 반근의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던 몸종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깨어나다-
신선거.
장부를 보며 산가지를 놓고 셈하던 소심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노태야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몸종이 슬픔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태평거에서 간신히 쥐어 짜내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긴.”
소심이 중얼거리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 황후를 용납할 수는 없겠지. 황후로 추봉하는 정도만 간신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황실의 체면과 위상도 지킬 수 있고,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것도 지체되지 않을 테니.”
“소심 언니, 내가 노야께 한번 빌어 보려고.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씨께서 황후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으니, 제발 아씨를 우리에게 돌려달라고 할래. 그럼 우리가 아씨를 모시고 멀리멀리 숨어서 살면 되잖아. 그렇게 빌어 볼래.”
몸종이 눈물을 떨궜다.
“원하면 뭐 어때. 그리고 아씨가 황후로 추봉되셔도 괜찮아. 그들에게 인정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추봉된 황후쯤이야 우리가 모시도록 눈감아주겠지.”
소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나도 노야께 가서 빌어야겠어.”
몸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심을 따라 서둘러 문을 나섰다.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노야께서는 아예 다른 곳으로 피신하셨어. 지금쯤 아마 서원에 계실 거야. 얼른 가자.”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서원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나 서원 어디에서도 장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노야께 말씀 좀 전해 줘. 반근이라고. 반근이 노야를 뵙고 싶어 한다고.”
몸종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두 손을 비비며 빌었다. 어린 문지기가 한숨을 쉬었다.
“반근 누나, 나도 누나가 누군지 알아. 내가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야. 노야는 정말 출타하셨어.”
정말 서원에 안 계신다고?
“그럼 어디로 가셨는데?”
소심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문지기는 고개를 저었다.
“노야의 성정이 어떠한지는 반근 누나도 잘 알잖아.”
어린 문지기가 두 반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숨었네, 숨었어.
집까지 찾아와 아첨을 떠는 손님들도, 우리도 피하시려는 거겠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장강주 선생께서는 우리가 찾아오리라는 걸 진작 알고 계셨던 거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소심이 천천히 눈을 감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씨께서는 절대로 남에게 부탁하신 적이 없어. 아무리 큰일을 맞닥뜨릴지라도.”
중얼거리던 소심이 무덤덤한 정교랑의 얼굴을 떠올렸다.
필요 없어. 아직은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잖아.
난 희망을, 남에게 거는 게, 내키지 않아. 그뿐이야.
아씨, 그럼 지금은요?
혼수상태에 빠져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막다른 길에 들어섰을 때, 아씨께서는 어디에 희망을 거실 건가요?
향불을 올리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보수사가 산 아래에서부터 입구를 굳게 막아놓았다. 마당 안은 정적이 흘렀으며, 오가는 승려들의 표정은 엄숙하기만 했다.
사찰 안에 맑은 종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어린 내시가 조심스럽게 방백종의 앞으로 다가갔다. 방백종이 내시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고 방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황께서 옥체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부처님께서도 전하의 진심을 보셨을 것입니다.”
장순이 말했다.
두 사람은 예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방백종은 흰색 장포 위에 청색 겉옷을 걸치고 있었고, 장순은 낡은 유삼(儒衫)을 입고 있었다.
법당을 나간 방백종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장순은 방백종과 몇 걸음 거리를 두면서 그를 따라갔고, 주변에 있던 내시들이 양옆으로 흩어지면서 장순에게 길을 터주었다.
“조정의 일들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 잠시 나와서 조용히 걷고 싶었습니다.”
방백종이 웃으면서 말했다.
천자의 즉위식에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 조정이 밤낮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 또한 천자의 즉위식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명단을 받기는 했는데, 무려 일만일천삼백 명이나 참가한다고 쓰여 있더군요.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방백종의 말에 장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정화(貞和) 초기의 방식일 겁니다. 다만 건흥(建興) 때는 육천팔백 명으로 줄였지요.”
“좀 더 줄이고 싶습니다. 폐하의 병세가 아직 위중하시기도 하고, 선문 태자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되기도 했으니, 지나치게 성대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삼천삼백 명 정도면 족할 것 같습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던 경 공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갑작스럽게 보수사까지 와서 은밀히 장순을 불러온 이유가, 설마 즉위식 의장대의 규모를 정하시기 위해서였나?
사람이 얼마나 필요할지, 마차는 어떻게 준비할지, 궁중 영인들과 악대가 무슨 곡을 부르고 분야별로 어떤 인사를 초청할지와 같은 사소한 일은 천자와 조정 중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닐 텐데?
도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지?
“황태후와 황후의 행렬은 예에 따라…….”
앞쪽에서 장순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경 공공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무언가를 퍼뜩 깨달았다.
이 얘기를 하시려고 만난 거로군.
경 공공이 몇 걸음 다가가서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황후에게 책봉 조서를 내리실 때는 황휘장(皇麾仗: 황제의 휘장)과 중적거(重翟車)가 있어야 하며, 자신전(紫宸殿)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아야 합니다.”
장순이 이어서 말했다. 방백종이 걸음을 멈추고 장순의 말을 끊었다.
“강주 선생께서 오늘 나를 사사로이 만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전하께서 신을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장순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폐하의 건강을 기원하며 향을 올리고 싶다고 했더니, 강주 선생께서 보수사에서 만나자고 하셨지요.”
방백종이 고개를 돌려서 장순을 쳐다보았다.
“선생께선 늘 말씀을 아끼셨습니다. 입을 연다 한들, 절대로 쓸데없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요.”
장순이 웃으며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 낭자가 강주 선생 부친의 목숨을 구해 준 적 있다지요?”
방백종이 불쑥 물었다.
“우연히 알게 된 인연입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은혜를 입었지요.”
장순이 대답했다.
“물 한 방울의 은혜를 넘치는 샘물로 갚는 것을 몸소 실천하다니, 선생께서는 참으로 덕행이 뛰어나십니다. 선생의 보은에 덕을 보게 된 사람이 비단 정 낭자뿐만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요. 무원산 형제도 있고, 나도 있으니까요.”
방백종이 장순을 쳐다보았다.
“은인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보은일 겁니다.”
방백종이 말을 끝내자, 장순이 웃으면서 서둘러 예를 표했다.
“별말씀을요. 당치도 않습니다. 신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본심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방백종은 설핏 웃기만 하고 아무런 말 없이 걸음을 멈추고 앞을 내다보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관음전 뒤편의 석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석탑에 달린 구리 방울이 맑은 소리를 냈다.
“누구에게나 본심이 있지요, 나 역시 마찬가지고요. 다들 믿지 않겠지만.”
방백종이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장순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방백종이 석탑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이 탑은 처음 세워질 때부터 서북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장순이 멈칫했다가,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경성에서 오래 지낸 장순이 보수사의 석탑에 관한 유래를 모를 리 없었다.
“그 당시에 누군가가 연유를 물었더니, 이 탑을 만든 장인은 백 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바로 세워질 거라고 대답했죠.”
잠시 머뭇거리던 방백종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장순을 쳐다보았다.
“내년이면 딱 백 년이 되니, 참으로 거의 바로 세워졌겠지요.”
방백종이 눈빛을 반짝이며 목청을 높였다. 장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먼 게 아니라면, 보일 겁니다. 아니, 설령 눈이 먼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방백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방백종을 빤히 바라보던 장순은 이윽고 미소를 보이며 예를 표했다.
영화 4년 10월 초열흘, 건원제가 퇴위했다. 제위를 이어받은 태자 위는 연호를 천성(天聖)으로 정했다.
10월 열하루, 천성제가 등극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근정전에 있던 방백종이 내시가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책봉 조서를 바라보았다.
“황상, 정말 이리해야겠소?”
옆에 앉아 있던 태후가 입을 열고 물었다. 방백종의 시선은 여전히 책봉 조서에 머물러 있었다.
“황후 책봉은 조금 늦어져도 상관없소.”
태후가 이어서 말했다. 태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백종이 고개를 돌려서 태후를 쳐다보았다.
즉위식을 마친 후, 방백종에게서는 차츰 천자의 위엄이 생기고 있었다. 태후가 방백종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황상, 다른 뜻은 없소. 지금 정 낭자가 병이 나서 저리 누워 있는데, 황후 책봉식을 강행하다가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오. 이렇게 하는 게 꼭 좋은 일인가 싶기도 하고, 그 몸으로 어떻게 책봉을 받겠소?”
태후의 말에 방백종이 웃음을 지었다.
“짐이 황후를 들고 책봉을 받게 하겠습니다.”
방백종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옥새를 들어 책봉 조서 위에 찍었다.
오늘부로 성 정, 명 방에게 책봉 조서인 금책과 인장을 하사하고, 황후의 존귀를 누리게 하겠노라. 황후는 짐과 한 몸으로 종묘를 받들고, 나라의 국모로서 백성들과 함께할지어다.
두 무리의 내시들이 대열을 맞추고 미소 띤 얼굴로 성지, 금책, 황후 인장, 예복, 봉관을 받들며 궁문을 나갔다. 그들은 어가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황후 책봉을 만천하에 알렸다.
신선거 위층에서는 소심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쏟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자. 걱정할 것 없어.
그때, 문이 열리고 어린 환관 한 명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와 소심을 향해 예를 표했다.
“소심 아가씨, 동궁으로 돌아가시지요.”
그 말을 들은 소심은 고개를 돌리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아서, 소심은 뛰어가는 내내 어린 환관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 관리인, 이대작 등과 연신 부딪혔다. 소심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조심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제치고 계단을 구르다시피 내려갔다.
아씨, 아씨!
동궁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내시와 시녀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서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조서를 전달하러 온 내시들은 그들이 터준 길의 중앙을 걸으며 태자의 침전으로 향했다.
태자의 침전 안, 문이 열리고 안채의 구슬발이 걷혔다.
방 안의 시녀들이 꿇어앉아 금책, 봉인, 예복, 봉관을 차례로 건네받고, 성은에 감사하다는 큰절을 올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실로 들어갔다.
침상 앞의 휘장이 걷히자, 비단이불을 덮고 있는 말끔한 용모의 여인이 보였다. 여인은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하게 누워 있었다.
“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금책, 봉인, 예복, 봉관을 든 시녀들이 무릎을 꿇고 합창했다.
세 번의 큰절 이후 몸을 일으킨 시녀들은 품에 안고 있던 것들을 정교랑의 옆에 내려놓고, 내일 거행될 황후 책봉식에서 입을 예복과 봉관을 침상 옆의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정교랑의 측근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시녀들이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밖으로 물러났다.
“오늘도 산책을 모시고 나가야 하나?”
한 시녀가 창가를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당연히 가야지. 폐하께서 마마의 일상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하셨어.”
다른 시녀가 대꾸했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잖아.”
앞선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이 정도 경사에는 끄떡도 없지. 당초 마마께서는 폐하와 혼사를 치른 이튿날 아침에도 활쏘기 연습을 하러 가셨잖아.”
다른 시녀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가서 가마를 준비해.”
한 시녀가 말하고는 정교랑을 부축하기 위해 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시녀가 가마를 준비하라고 말하려 문가를 향해 걸어가던 찰나, 갑작스럽게 안쪽에서 비명 소리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가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침상을 향해 갔던 시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시녀는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내내 악 소리를 질러댔다.
“왜 그래?”
문가로 향하던 시녀가 재빨리 다가와서 침상 위를 쳐다보고는, 똑같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도 없어요? 빨리 좀 와 봐요!”
아직 자리를 뜨지 않고 마당 안에 줄지어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비명을 듣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태자비가 어떤 상태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두 달 넘게 병석에 누워만 있다가 결국 숨을 거두는 건가?
왜 하필 황후 책봉식이 코앞인 지금에 그렇게 된 거지?
복을 누릴 팔자가 못 되는 사람이라는 게 더 확실해지는구나.
황후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겠군.
다급하게 내실로 뛰어 들어왔던 사람들은 구슬발 너머의 광경을 보고 흠칫 놀라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여인은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려 일어나고 있었다.
여인의 동작은 무척이나 뻣뻣했다. 아주 더디게 조금씩 조금씩 몸을 일으킨 여인은 백옥보다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항상 감겨 있던 두 눈이 서서히 떠지자, 여인의 눈이 보였다. 여인의 눈동자는 흰자위로 가득했으며, 동공은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문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시녀들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어떤 사람들은 겁에 질린 모습으로 휘청거리면서 밖으로 뛰쳐나갔고, 문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거나 다리가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내실을 가득 메웠다.
정신없는 혼란 속에서 침상 위의 여인이 눈동자를 움직였다. 흰자위가 차츰 작아지고, 동공에 서서히 초점이 잡혔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은 움직여지지 않는 몸만큼이나 생기가 없었다.
“난…… 누구지?”
여인이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황궁에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덕경전 앞.
천자의 즉위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슬슬 발걸음을 돌릴 때, 누군가가 덕경전 앞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 발걸음 소리는 황궁의 적막을 깨트리고, 만인을 수용할 수 있는 넓디넓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선덕문 앞에 서 있던 금위군들이 깜짝 놀라 광장을 향해 뛰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뛰어오는 사람은 키가 훤칠한 사내였는데, 놀랍게도 황제의 조복을 입고 있었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그는 넓은 보폭으로 광장을 금세 가로질러 뛰어갔다.
예복을 펄럭이며 성큼성큼 뛰어가는 사내의 뒤로, 한 무리의 내시들이 그를 따라 작은 보폭으로 종종거리며 뛰어가고 있었다. 무리의 끝자락에는 황제의 가마를 들고 있는 내시들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뒤따르는 것이 보였다.
누가 황제의 조복을 훔친 건가?
금위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굉장히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감히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황궁은 예의와 법도가 엄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천자의 몸가짐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사내와 내시들이 덕경전 앞을 스쳐 지나갈 때, 뛰어가는 사람을 가까이서 보게 된 금위군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늘의 일이 기거주에 기록되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숨을 몰아쉬던 내시가 본분을 잊지 않고 옆에 있던 어린 내시에게 당부했다.
“어서 가서 아까 같이 있었던 시강에게 알리거라.”
조금 전, 황제는 대신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전해 온 소식을 귓속말로 듣고는 벌떡 일어나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낮은 탁자를 폴짝 뛰어넘으며 문가로 달려나갔다.
어린 내시는 당시 자리에 있었던 대신들이 주먹 하나가 전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것을 보았다.
대신들의 입은 안 그래도 몹시 큰 편인데, 폐하께서 그리 추태를 보이시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그들은 분명 이 일을 안팎으로 소문낼 거야.
폐하께서 즉위하시자마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셔서는 안 돼!
어린 내시가 즉시 몸을 돌리고 왔던 길로 뛰어갔다.
“폐하, 폐하.”
소식을 듣고 다급하게 쫓아온 경 공공이 방백종을 따라 뛰는 내시들을 제치고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가마를 타십시오. 가마요.”
하지만 방백종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큰 보폭으로 뛰어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 불어오는 서늘한 북풍이 방백종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혔다.
방백종은 가슴에서부터 느껴지던 통증이 차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거운 것을 들지도, 무거운 검을 쓰지도 말라고 했던 정교랑의 충고가 떠올랐다.
근정전에서 궁문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거야. 어째서 아직도 동궁에 도착하지 못한 거냐고.
동궁이 이렇게 먼 줄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네.
방백종이 서둘러 거처를 동궁으로 옮긴 이유는 단 하나, 가까워서였다. 정사가 바쁜 시기에도 최대한 빨리 정교랑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안 되겠어. 동궁도 멀어. 아예 거처를 궁 안으로 옮겨야겠다.
황궁의 법도에 맞지는 않지만, 법도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그 여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 여인의 곁으로 더 빨리 갈 수만 있다면 아무렴 상관없지.
그때, 누군가가 방백종의 팔을 붙잡았다.
“폐하, 더는 뛰시면 안 됩니다!”
경 공공이 결례를 무릅쓰고 방백종의 팔을 덥석 잡으며 소리쳤다. 방백종은 곧바로 경 공공의 손을 뿌리쳤다. 경 공공은 답답했지만, 감히 황제의 앞을 강제로 막을 수는 없었다.
혹여나 황제의 다친 몸이 덧나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웠던 경 공공은 하는 수 없이 방백종을 보호하며 그의 뒤를 따라 뛰었다.
방백종의 시야 저 멀리 동궁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황후마마께서 어찌 되셨다고?”
방백종의 앞을 넘어선 경 공공이 문가에 서 있던 내시를 향해 물었다.
내시가 대답하기 전에, 방백종은 문턱을 넘어섰다. 그가 하도 빠르게 문을 넘는 바람에, 방백종을 향해 예를 표하던 내시들은 순간 매서운 바람이 불어온 줄 알았다.
황후마마께서 어찌 되셨다고?
황후마마께서, 깨어나신 것 같습니다.
깨어난 거면 깨어난 거고, 깨어나지 않은 거면 깨어나지 않은 거지, 깨어난 것 같다는 말은 도대체 뭐야!
방백종은 침전을 향해 가는 길에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예를 표하는 것을 미처 보지도 못한 채 침궁 앞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문 앞에서 다급하게 멈춰 섰다.
또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방백종은 종종 그런 꿈을 꾸곤 했다. 자신이 침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열면, 팔걸이의자에 기대어 있는 여인이 평온하게 책장을 넘기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짓는 꿈. 그러나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모든 게 하얀 연기처럼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그는 같은 꿈을 꿀 때마다 매번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그러고는 미약한 숨을 내뱉으며 옆에 누워 있는 정교랑을 동이 틀 때까지 품에 안고 있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이 사라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여인이 숨 쉬지 않고 차갑게 굳어버린 시체가 되어, 깊은 땅속에 묻히고 차차 썩어 가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그는 무척이나 두려웠다.
그는 몇 번이고 되뇌며 기도했다. 이 여인이 자신을 영영 신경 쓰지 않아도 좋고, 자신을 미끼로 이용해도 좋고, 설령 자신을 떠난다고 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게 해 달라고.
“폐하.”
마당 안에 서 있던 내시와 시녀들이 방백종을 향해 예를 올리자, 잠시 넋이 나갔던 방백종이 정신을 차렸다.
꿈이어도 괜찮아. 그래도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방백종이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궁녀들이 차례로 문을 열고 구슬발을 걷었다. 침상 앞의 휘장은 묶여 있었고, 침상 위에는 옆으로 돌려 누운 한 여인이 있었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올린 여인은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여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런 여인에게서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방백종은 입술만 움찔거릴 뿐, 무언가가 목을 꽉 막은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방.”
방백종이 입을 열고 갈라진 목소리로 여인을 불렀다.
여인이 방백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멍하던 여인의 눈빛이 차츰 반짝이기 시작했다.
“정방.”
여인이 말했다.
여인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기도, 물어보는 것 같기도, 혹은 그의 말을 단순히 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방!”
방백종이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여인이 그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느린 동작이었지만, 얼핏 보면 느긋하고 여유로운 몸짓인 것 같기도 했다.
“정방.”
여인이 또 말했다.
실내에 울려 퍼지는 단조롭고 반복되는 말에, 바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목을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큰 병을 앓다가 깨어난 기쁨도, 다시 만난 부부가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장면도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 중 한 명은 침상에 앉아서, 다른 한 명은 문가에 멀찍이 서서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기만 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처럼 서로를 대하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하네.
시녀 하나가 갑자기 엇, 하는 소리를 냈다.
“마마께서 조금 전보다 훨씬 좋아지셨어요.”
시녀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 전? 조금 전엔 어떠셨는데?”
경 공공이 물었다.
“조금 전에는, 몸도 못 일으켰고 동작도 지금보다 훨씬 더디셨어요.”
다른 시녀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소심은 마차가 멈춰 서기도 전에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소심 언니.”
소심이 고개를 돌리자, 다른 마차 한 대가 급하게 멈춰 섰다. 마차 안에 타 있던 반근이 재빨리 뛰어내리고는 소심을 향해 손짓했다.
“아이고, 드디어 오셨군요!”
소심과 반근이 동궁 문을 넘어서자, 한 내시가 다급하게 달려오더니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가서 마마를 뵈시지요.”
불안한 마음이 든 반근은 순간 다리가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씨께서 어떻게 되셨어요?”
소심이 소리쳐 물으며 반근의 손을 꼭 잡았다.
방백종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침상 위의 여인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서인지, 여인의 동작이 너무나 느렸기 때문인지, 방백종은 아주 더디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녀들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사람은 정방이 아니라 방백종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방.”
방백종이 여인을 불렀다. 여인은 여전히 방백종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방백종의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태의를 불러올까요?”
방백종이 물었다. 여인이 채 대답하기 전에, 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아씨!”
들려오던 목소리가 문 앞에서 막혔다.
“안으로 들이거라.”
방백종이 말했다.
가장 먼저 안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반근이었다. 반근은 침상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인을 향해 돌진했다.
“아씨, 아씨!”
반근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씨.”
잰걸음으로 옆에 다가온 소심이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실내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침상 위에 단정하게 앉아 고개만 돌린 채로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웃는 반근과 소심을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이셨어요!”
밖에 서 있던 시녀가 갑자기 소리쳤다.
무슨 말을 그렇게!
경 공공이 시녀를 흘겨보았다.
깨어났으니 당연히 움직이시는 게지.
소리친 시녀가 황공한 표정으로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투덜댔다.
저희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시는 마마의 시중을 들었잖아요.
쳇, 잠시 적응이 안 돼서 그런 것뿐인데.
여인이 침상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겨서 걸터앉았다.
계속 병석에 누워있었던지라, 여인의 발에는 신발이 아닌 하얀 버선만 신겨져 있었다. 여인의 조그마한 발이 침상 아래로 내려왔다.
반근과 소심이 서둘러 눈물을 닦고 얼른 정방의 신발을 찾아 신겨 주었다.
“당장 태의를 부르거라.”
방백종이 말했다. 밖에 서 있던 시녀들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시녀들이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동자를 굴리는 데 한참이 걸리고,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움직이던 여인이 자기 힘으로 바닥을 디디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인은 천천히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옷소매를 아래로 내려뜨렸다. 그러고는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몸 앞으로 모았다.
여인이 동작을 멈추자, 아래로 쫙 펴진 넓은 소매에서는 미세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방, 깨어난 거예요?”
방백종이 정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깨어난 거냐고? 당연히 깨어나신 거 아닌가?
반근과 소심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올려다보았다. 정방이 방백종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깨어났어요.”
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을 덧붙였다.
“방백종.”
방백종!
방백종!
방백종은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방이 발을 떼고 첫걸음을 내디뎠다. 정방의 첫 걸음은 아주 더디고 위태로워 보여서, 반근과 소심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방을 부축했다.
하지만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딜 때부터, 정방은 균형을 잡고 안정적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반근과 소심을 살짝 옆으로 밀쳐냈다.
“깨어났으면 됐어요.”
방백종이 자리에 멈춰선 정방을 보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방백종의 갈라진 목소리로 다 말하기도 전에, 정방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두 걸음.
세 걸음.
정방이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온몸이 굳어 버린 방백종은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방백종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정방이 두 팔을 벌리고 방백종을 덮쳐왔다.
방백종은 반사적으로 두 팔을 뻗었고, 정방은 그의 품에 안겨 방백종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방백종.”
정방이 말했다.
침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멈칫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정신없이 나가느라 다른 사람의 발을 밟기도 하고, 장식품 선반을 건드리기도, 문틀에 몸이 부딪히기도 했다. 온갖 소리를 내며 우르르 몰려나갔다.
“잠깐 놓아 줘요. 물어볼 게 있다니까요. 이래도 소용…….”
방백종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경 공공은 재빨리 몸을 돌리고 문을 닫아서 말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차단했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밖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물러가거라.”
경 공공이 손짓했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또 우르르 문밖까지 몰려나갔다.
“그리고, 태의를 불러오너라.”
경 공공이 말하고는, 조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깨어나시긴 했나 보네. 이렇게 벌건 대낮부터 저러고 계시니 원.”
경 공공이 작게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몸이 자신을 꽉 껴안자, 두꺼운 옷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품에 안고 있어도, 이불로 꽁꽁 싸매도 늘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던 예전의 몸과는 달랐다.
방백종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그가 정방의 허리를 붙잡고 정방을 앞으로 살짝 밀어냈다.
“또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마요. 물어볼 게 있으니까, 똑바로 대답해 줘요.”
방백종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밀쳐진 정방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게 웃던 정방이 입을 열었다.
“방백종.”
정방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또 손을 내밀었다.
“이래도 소용없어요! 매번 이런 식으로 나를 달래고 넘어가려 하지 마요.”
방백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환한 미소와 애틋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면서 두 손을 내밀고 있는 정방을 바라보았다.
“방백종.”
정방이 다시 한번 방백종을 불렀다. 달처럼 휘어진 정방의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다.
방백종이 정방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방!
정방!
정방!
정방의 허리 위에 있던 방백종의 큰 손이 정방을 확 끌어당겼다. 그는 정방을 더욱 세게,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정방!
정방!
정방!
드디어 돌아왔군요.
드디어 돌아왔어요.
방 안이 조용해지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창가 가까이 선 두 사람의 몸에 노을빛이 드리워졌다.
“정방.”
방백종이 이름을 부르자, 정방이 대답했다.
정방은 새하얀 연기가 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체온이 느껴지는 따뜻한 몸으로 자신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방백종이 말했다.
정방이 그를 놓아주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갑자기 품 안이 허전해진 방백종은 뭔가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정방에 허리에 올려두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덕분에 방백종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으려던 정방이 다시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육가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거, 당신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거죠?”
방백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정방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일찍이라면, 얼마나 일찍이요?”
방백종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정방이 진지하게 물었다.
일찍이라면, 얼마나 일찍이냐고?
아냐. 육가아가 다치게 된 건 평왕 때문이고, 육가아가 입궐하게 된 건 태후 때문이고, 육가아가 죽은 건 고능준 때문이었어.
방백종이 심호흡을 하고는 손에서 힘을 살짝 뺐다.
“혹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거예요?”
방백종이 묻자, 정방이 웃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있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죠.”
정방은 방백종을 두 손으로 꼭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요. 하지만 육가아한테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에요. 나도 할 수 있고, 당신도 할 수 있죠. 육가아 같은 사람이 남의 손에 도구처럼 쥐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예요.”
방백종은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정방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경성에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청원 역참에서 당신이 불꽃놀이를 보여 준 그날, 천상을 보았거든요.”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했던 것처럼, 정방은 하늘을 읽고 길흉화복을 예측할 수 있다.
“육가아가 죽을 거라는 천상이었어요?”
방백종이 물었다. 정방이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젓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방백종의 턱을 간지럽혔다.
“천상은 무언가를 예고할 뿐이에요. 그게 누구인지, 누가 어떻게 될지는 알려 주지 않아요. 오성이 모인다는 건 천자에 관한 일이 생긴다는 뜻인데, 어떤 일이 생길지, 누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죠.”
정방이 작게 탄식했다.
“우리는 예전에 이 이치를 잊고, 천도를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우니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天道遠, 人道邇, 非所及也) 걸 망각했죠.”
그때의 세상에서도 정씨 가문은 천상을 읽고, 왕조의 종말을 예감했죠. 그래서 우리가 인정한 황제를 자발적으로 택했어요.
“우리가 성문 밖에 발이 묶여 있을 때, 경성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지는 않았나요?”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자세를 바로 하고 방백종을 쳐다보며 물었다.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秦)씨 가문에서 연평 군왕을 데리고 먼저 경성으로 들어와 있더군요.”
“연평 군왕이요?”
살짝 놀란 듯한 정방이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복건(福建)의 연평 군왕이라…….”
“연평 군왕이 왜요?”
방백종이 물었다.
“천상을 보는 사람이 나 하나뿐만은 아니에요. 다른 고수도, 두우 별자리가 나타나는 땅에서 새로운 천자가 나오리라 생각했겠죠.”
그때 정씨 가문이 양씨를 새로운 군주로 모시겠다고 결정했던 것처럼요.
사실 제성(帝星)이 나타나는 지역에 양씨 가문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정씨 가문은 천도(天道)를 이겼으나 인도(人道)에 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연평 군왕과 마찬가지로 오월 지역에서 태어난 진안 군왕은 사실 기회를 선점했다고 보기 힘들었다. 정방은 진안 군왕이 유리한 조건을 선점할 수 있도록 경성으로 달려간 게 아니라, 진심으로 육가아가 걱정되어서, 혹여나 그를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급히 달려간 것뿐이었다. 하지만,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어요.”
정방이 조용히 말하고는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육가아를 살리지 못했어요.”
방백종이 정방을 다시 품에 안았다.
“아니에요.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방백종이 정방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방, 당신이 미안해할 게 아니라, 내가 미안해요. 내가.”
“정방, 미안해요.”
“정방, 내가 당신에게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어요.”
정방이 웃었다.
“묻지 말아야 할 건 또 뭐예요. 알고 싶은 게 있거나, 이해하기 힘든 게 있다면, 나한테 꼭 물어봐 줘요.”
나한테 묻지 않고 혼자 생각하지 마요. 혼자 추측하지도 말고, 자문자답하지도 말고요.
양산, 당신은 내게 말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고, 무서워하는지를.
정방이 방백종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방백종, 내게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내게 묻는 걸 겁내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요.
“또 묻고 싶은 게 있나요?”
정방이 물었다.
“없어요. 없어.”
방백종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정방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주 오라버니를 살릴 수 있었던 건, 아직 오라버니에게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태자 전하는 이미 생기와 혼이 없을 때여서, 난…….”
말하지 마요. 해명하지도 말고요. 알겠어요. 이젠 다 알겠어요.
방백종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방의 말을 끊고 싶었지만, 정방을 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하고 있는 정방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달콤하고 은은한 연지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때문에 방백종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는, 나는 단지 그만 말하게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러려던 게 아니라.
엉큼한 생각이 방백종의 뇌리를 스쳤다.
이러려던 게 아니라?
“폐하!”
갑자기 문밖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방백종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정방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귀까지 새빨개진 방백종은 곧장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무슨 일이냐!”
문이 벌컥 열리면서 격노한 방백종의 호통이 들려오자, 경 공공은 깜짝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폐하.”
자신을 산 채로 잡아먹을 듯한 얼굴의 방백종을 보자, 경 공공은 말을 더듬었다.
“태, 태의를 불러왔습니다.”
혼수상태로 몇 달을 보내셨으니, 태의를 불러 마마의 봉체를 살피셔야지요.
방백종이 요동치는 민망함을 가라앉히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약상자를 들고 있던 태의는 방백종의 기세에 놀라 종아리에 경련이 일었다. 경 공공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낀 태의가 하는 수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이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됐어요. 난 괜찮으니까.”
정방이 문가로 다가와서 말했다.
“그래도 한 번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당신의 말도, 썩 미더운 건 아니던데.”
방백종이 정방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짓말쟁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방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방백종, 이리 와요.”
정방이 몸을 돌리고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보여 줄게요.”
정방의 말을 들은 방백종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정방을 따라갔다.
경 공공과 태의는 넋을 놓은 채 문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폐하의 존함을 저리 함부로 부르시다니!
경악한 태의의 놀란 가슴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목덜미를 확 붙잡았다.
“무얼 보았습니까?”
경 공공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태의는 두려움에 몸을 살짝 떨었다.
“아, 아, 아니요.”
“무얼 들었습니까?”
경 공공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또 물었다. 태의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만 물러가십시오.”
경 공공은 그제야 태의를 놓아주었다. 태의는 재빨리 약상자를 고쳐 들고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뭘 보여 주시겠다는 거지?
경 공공이 속으로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목을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욕실로 들어간 후였다.
보여 준다고? 굳이 욕실에서 뭘 보여주겠다는 거지?
그나저나, 조금 전에 문을 부수듯이 열어젖힌 폐하의 모습이 영 낯설지만은 않은데.
맞아. 지난번에도 그런 표정과 화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어. 청원 역참으로 가던 길이었지. 꼭 마차 안에서 무언가를 하시다가 끊긴 것 같은.
경 공공이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그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했다고 여기며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리도 급하십니까.
마마께서 이제야 깨어나셨는데, 살살 좀 하시지.
하지만 방백종은 욕실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정방은 스스로 치마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풀고, 몸을 둘러싼 겹겹의 옷들을 하나하나 벗으며 새하얀 내의 한 장만 남겨두었다. 정방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얀 내의를 어깨 아래로 내렸다.
내의를 내리자, 가슴을 겨우 가리는 붉은 배두렁이(肚兜: 고대 중국 여인들이 입는 등과 어깨가 완전히 노출되어 있고, 목에 끈을 묶어 가슴과 배만 가리는 붉은 천)와 새하얀 어깨, 그리고 정방의 가녀린 쇄골이 드러났다. 실내는 어둑했지만, 붉은빛의 배두렁이는 단연 돋보였다.
방백종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방백종이 정방의 몸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정방이 혼수상태에 빠진 뒤, 방백종은 손수 정방의 몸을 씻기면서 옷을 갈아입혔고, 정방의 몸에 자상이 생겼던 곳에 직접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어떻게 보면, 볼 꼴 못 볼 꼴을 모두 지켜본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몸은 자신이 돌봤던 그 몸이 아닌 듯했다.
정방의 몸은 마치 거대한 불덩이 같았다. 방백종은 갑자기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허둥대면서 정교랑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상의를 여며 주었다.
“추, 추워요. 장난치지 마요.”
방백종이 말했다.
“방백종, 잘 좀 봐요.”
정방이 옷을 여미는 방백종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고, 상의를 더 아래로 끌어내려 아예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리고 방백종의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광채가 느껴질 정도로 매끈한 어깨와 새하얀 피부가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에 빛나고, 붉은 천 아래로 솟은 봉긋한 가슴이 정방의 몸짓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잘록한 허리와 일자로 쭉 펴진 쇄골을 보던 방백종은 갑자기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 호흡이 가빠오던 방백종은 결국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봐요. 상처가 다 나았어요.”
한 바퀴를 다 돈 정방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 맞다. 상처!
방백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서 정방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곳곳에 생겼던 자상이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물어 있었다.
며칠 전에 약을 바꿀 때까지만 해도, 울퉁불퉁한 흉터가 남아있었는데.
하긴, 이렇게 아무는 게 오히려 정상이겠지. 주복을 봐. 그렇게 심했던 상처도 반나절 사이에 거의 아물었으니까. 아주 놀라 까무러칠 정도로 빠른 속도였어.
그를 치료할 수도 있었으니까, 정방은 당연히 자기 자신의 상처도 치료할 수 있겠지.
정방은 방백종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살린 거예요.”
흠칫 놀란 방백종이 정방을 바라보았다.
“내가 쓴 건, 무왕축(巫王祝)이라는 주술이에요. 난 왕이 아니라 왕축을 쓰면 안 됐는데, 다른 방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무왕축을 썼어요. 결국 왕축의 저주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죠.”
방백종이 정방을 쳐다보았다. 죽어갔다는 말을 들은 방백종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구나. 정말로 죽음의 문턱 앞까지 갔던 거였어.
“그런데 방백종, 당신이 나를 책봉했어요. 당신이 나를 황후로 책봉해 줘서, 내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깨어난 거예요.”
정방이 웃음기 서린 얼굴로 방백종을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방백종.”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렇게 된 거였어.
그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정방이 내민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갈라진 목소리로 탓하듯이 말했다.
“왜 그런 걸 미리 알려 주지 않았어요. 일찍이 말했으면 좋았잖아요.”
그깟 황후가 무슨 대수라고. 황후로 책봉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당신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도 무왕축을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정방이 말하고는,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다시 손을 내밀었다.
“방백종.”
방백종이 정방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몰랐다고요? 당신이 몰랐던 게 있기는 해요? 거짓말쟁이.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을 달랠 줄만 알지. 이제 난 절대 당신 안 믿어요.”
그가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을 모조리 쓸어 버렸으리라. 깨끗하게 쓸어 버리고, 그녀를 황후로 책봉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추악한 수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사람의 도리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
그가 그녀를 위해 사람의 도리를 내던지고 그 자리를 쟁취할까 봐, 그가 올바른 명분 없이 황위에 올라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그가 역사서에 추한 이름으로 기록될까 봐,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절대로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그를 믿고 있었다. 언제나 그를 믿었다.
“방백종.”
정방이 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방백종은 그제야 정방을 쳐다보면서 정방이 내민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또.”
정방이 초승달처럼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방백종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얹은 뒤, 심장이 뛰는 가슴 위로 그의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여기도 만져 봐요.”
얇은 천 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정방의 가슴께는 더 이상 딱딱하고 차갑지 않았다. 정방의 가슴에서는 쿵쾅대는 심장 박동과 따스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
방백종이 퍼뜩 고개를 들어 정방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여 걸리적거리는 붉은 천을 황급히 걷어내고는 아예 두 손으로 정방의 가슴을 매만졌다.
방백종은 한 손을 정방의 가슴에 올려둔 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옷을 풀어헤치고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정말이야. 정말로 나와 똑같은 온기가 느껴져!
“이게 돌아왔어요.”
남에게 빼앗기고, 구속되고, 도려내진 심장이 다시 내게 돌아왔어요.
“방백종, 당신이 날 도와 찾아준 거예요.”
정방이 말했다.
방백종은 정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정방의 표정이, 지금 그녀가 얼마나 기쁜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방백종의 손이 워낙 크다 보니, 정방의 심장 위에 놓았던 손안에는 다른 것도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정방이 숨을 쉴 때마다, 그의 손안에서 위아래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방백종이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천천히 움직였다. 눈처럼 하얀 피부는 두부처럼 매끄러웠다. 한 손으로는 다 잡히지 않는 정방의 풍만한 가슴을 만지던 방백종이 갑자기 다른 손으로 자신의 옷을 급하게 벗어 던졌다.
“정방.”
방백종이 목소리를 낮추고 정방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몸속에서 용솟음치는 무언가를 막으려는 듯 떨렸고, 동시에 다급하기도 했다.
“당신도 봐요, 나를.”
정방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정방이 그의 손을 몸에서 떼어내려고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내가 당신의 몸을 봐서 뭐해요. 당신 몸에 상처가 났던 것도 아닌데. 별로 걱정되지도 않아요.”
정방이 태연하게 말하던 그때, 방백종이 정방에게 바짝 다가갔다. 머리 위에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방백종이 고개를 숙이고 정방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한번 봐요. 나도 당신의 몸을 봤으니까, 당신도 내 몸을 보는 거죠.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정방이 피식 웃고는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정방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며 뒤에서 정방을 들어 올린 방백종의 품에 폭 안겼다.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침전에 울려 퍼지고, 곧이어 방백종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가요. 나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어요.”
정방이 말했다. 방백종은 정방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무언가 웅얼거리듯 읊조렸다.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겨우 침상까지 간 두 남녀는 그 위로 쓰러지듯이 함께 엎어졌다. 방백종이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휘장을 치고 창가를 통해 스며드는 노을을 가렸다.
거친 숨소리가 휘장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밤에 해요.”
정방이 담담하게 말했다.
“밤에 할 건, 밤에 또 하는 거고.”
방백종이 평소와는 다른 거친 말투로 성급하게 대꾸했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그런데 흔들리던 휘장이 갑자기 젖혀지더니, 방백종이 나체로 침상에서 내려와 민망한 표정으로 탁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가 다급하게 서랍을 뒤적거렸다.
“어디 뒀지?”
그가 중얼거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이 그의 건장하고 탄탄한 몸을 훤하게 비췄다. 볼이 벌겋게 상기되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그의 모습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뭘 찾아요?”
정방이 휘장을 걷으며 옆으로 돌아눕고 방백종을 향해 물었다. 정방의 몸 위로 반쯤 덮여 있는 비단 이불이 팔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정방의 굴곡진 몸매를 드러냈다.
“그거…….”
방백종이 말을 하다 말고 아예 서랍을 통째로 뽑아 안에 들어 있던 것을 바닥으로 쏟아 버렸다.
그가 혼례를 치렀던 당시에는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다 보니, 사람들은 그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터라 따로 그에게 남녀 간의 일을 알려 주지 않았다.
나중에 몸이 나아진 방백종은 남몰래 은밀히 춘화 서적을 몇 권 구해 서랍 속에 숨겼다. 그러나 그 후로 춘화를 볼 상황이 오지 않았기도 했고, 혹여라도 남에게 들킬까 봐 걱정되었던 방백종은 그 춘화 서적들을 자기도 모르는 곳에 꼭꼭 숨겨 두었었다.
이를 어쩐다. 나는 아직, 할 줄 모르는데!
귓가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그는 더욱 긴장되어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요.”
정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그걸 어디에 뒀는지 알고 있다고요?”
방백종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침상 위에 옆으로 돌려 누운 정방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리 와요.”
비단 이불을 덮고 있던 손을 올리자, 이불이 아래로 스르륵 떨어지면서 정방의 나체가 훤히 드러났다.
성큼성큼 다가온 방백종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어디 있어요?”
정방이 손을 뻗어 가까이 다가온 방백종의 허리를 껴안고 자기 쪽으로 힘을 주어 당겼다. 방백종이 구르듯이 침상 위로 엎어지자, 푸른 휘장이 내려지면서 위아래로 몸이 밀착된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렸다.
정방이 나지막이 무슨 말을 하자, 방백종이 깜짝 놀라며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할 줄 안다고요? 당신이 왜 할 줄 알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방백종의 모습에 정방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은, 시를 쓰는 것밖에 없어요.”
하, 하지만, 이건,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거예요? 아니, 이런 걸 누가 당신에게 가르쳐 주죠? 당, 당신, 읍…….”
중얼거리던 방백종의 입이 무언가에 막힌 듯, 말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방 안에 울리는 숨소리는 점점 더 빠르고 거칠어졌다. 흔들리는 푸른 휘장이 창가로 스며드는 노을빛을 더욱 흐드러지게 만들었다.
어둠이 내린 후에도 천자의 침궁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마당 밖에 서 있던 경 공공이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그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반근과 소심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가서 쉬거라. 오늘 우리가 폐하와 마마를 보긴 글렀구나.”
경 공공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반근과 소심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침전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예전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더니, 이제는 상황도 가리지 않으시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잊으신 건가. 길시를 놓치면 안 될 텐데.”
-마지막-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만천하를 비췄다. 선덕문 앞에는 문무백관과 명부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의장용 쇠뇌, 의장대, 꽃과 의장용 차양이 가장 앞에서 첫 번째 행렬을 이끌었다. 의장 행렬이 시작되자, 문무백관과 명부들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행렬이 다가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행렬 뒤로, 청의외장(靑衣外杖)에 지휘봉인 차복(車輻)과 고지번(告止幡), 전교번(傳敎幡), 신번(信幡) 등의 깃발이 따랐고, 의도(儀刀), 극(戟), 궁시(弓矢) 부대가 엄숙한 표정으로 행렬의 뒤를 질서정연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궁중 악대의 연주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절고(節鼓), 징, 깃털이 달린 북이 힘차게 박자를 맞췄고, 그 위로 퉁소, 가(笳), 피리 소리가 맑고 흥겨운 곡조를 만들어냈다.
이어서 백 명의 사람들이 황휘장(黃麾仗)을 들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고, 백 개의 황휘장 뒤로는 단극(短戟: 짧은 창) 한 줄, 오색깃발 한 줄, 과(戈: 창) 한 줄, 오색깃발 한 줄, 의굉창(儀鍠氅: 나무 도끼에 새털을 단 의장) 한 줄, 오색깃발 한 줄이 알록달록하게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말굽 소리가 들려오면서, 군위(軍衛), 위위(威衛), 무위(武衛), 효위(驍衛) 병사들 스무 명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진호가 고개를 들고 의장 대열을 쳐다보았다. 그는 체격과 용모를 까다롭게 선별하여 고르는 스무 명의 의장 대열 속에서 주복의 모습을 한눈에 찾아냈다.
주복은 내내 엄숙한 표정으로 다른 곳에 눈길을 두지 않고 계속 앞만 내다보며 어마(御馬)를 타고 점잖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의장 대열이 지나가자, 그 뒤에 있던 황후의 마차가 사람들의 시야에 서서히 들어왔다.
그 주위로 청마(靑馬) 여섯 필과 스물네 명의 가사(駕士: 황제의 탈것을 지휘하는 사람)들이 황후의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뒤 양옆으로 뭉텅이로 된 치미선(雉尾扇: 꿩의 깃으로 부채 모양으로 만든 의장) 두 묶음, 커다란 우산 의장대 네 개, 그리고 거대한 치미선과 금화개(錦花蓋), 금곡개(錦曲蓋), 금육주(錦六株)가 여덟 개씩 행렬을 감싸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자, 황후의 마차는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번쩍였다. 문무백관과 명부들이 양쪽에서 일제히 무릎을 꿇고 황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진호가 몸을 돌리고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닥에 부딪히는 지팡이 소리는 궁중 악대의 화려한 연주 소리에 묻혔다.
진호는 아주 오래전, 정방이 마차를 타고 주복과 자신의 앞을 지나가던 광경을 떠올렸다.
- 거들먹거리기는.
진호의 옆에 있던 소년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냉철한 거겠지.
진호가 씩 웃으면서 대꾸했다.
- 오히려 내가 떨리는군.
진호의 눈길이 마차를 쫓았다.
그래, 대체 어떤 여인이지?
빠르게 성문으로 들어간 마차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진호가 발걸음을 멈추자, 궁중 악대의 연주는 서서히 귓가에서 멀어졌다.
“공자님.”
진호의 뒤를 따라오던 사환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진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옆으로 손을 뻗었다.
“공자님.”
사환은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두 손으로 물건을 꼭 쥔 채 진호에게 건네주지 않았다. 하지만 진호는 여전히 물건을 달라는 듯 손을 뻗고 있었다.
사환이 울상을 지으면서 그에게 낡은 장궁과 화폭이 담겨 있는 두루마리를 건넸다.
진호가 고개를 숙이고 건네받은 두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장면이 눈앞에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진호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 진십삼, 이거 내가 제일 아끼는 활이다.
소년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진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웃으면서 공손하게 두 손을 높이 들며 포권의 예를 표했다.
이 관인양은 관인들께서 선대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리기 위해 빚은 술인지라 관인들의 흥취를 살짝 돋울 뿐, 신선대에 오르시는 발걸음을 어지럽힐 정도는 아닙니다.
축하드립니다, 진 공자님.
진 부인이 진호를 재촉하며 서재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 건 내일 봐도 되지만, 정 낭자가 무슨 선물을 했을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
공자님, 안으로 드시지요.
하나, 둘, 세 개의 등불이 차례로 켜지고, 대청 안이 차츰 밝아졌다. 만개한 꽃, 반쯤 핀 꽃, 봉오리가 생겨 막 피어나려는 모란까지!
진호가 고개를 젖히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장궁과 두루마리를 양쪽 어깨에 메고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게는 미인이 그려 준 그림 한 폭이 있네.”
“향기로운 포도주로 축하해 주었지.”
“어떤 미인이 있었다네. 한 번만 봐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지.”
내시가 책봉식의 진행을 외치자, 거대한 대전 앞에 빽빽하게 서 있던 문무백관과 명부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황제가 대전 안에서 한 걸음씩 밖으로 걸어 나와, 마차에서 내리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궁중 악대가 연주하던 곡조가 바뀌고, 방백종이 입을 열었다.
“금책을 전하라.”
내시가 금책을 높이 들고, 커다란 우선(羽扇) 앞으로 다가가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정방이 천천히 걸음을 내딛자, 옆에 있던 시녀가 금책을 받들었다. 우선이 양옆으로 치워지면서, 방백종이 손을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정방이 그가 내민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살짝 올렸다.
“황후마마께서 대전에 오르십니다.”
내시가 목청을 높여 고하자, 방백종은 정방을 바라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먼저 몸을 돌리고 앞서서 걷자, 정방도 미소 띤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웅장한 대전 앞, 두 사람의 뒤로 문무백관과 명부들이 네 번의 큰절을 올렸다.
대량(大梁) 소명(昭明) 원년, 강주, 겨울밤.
새카만 어두움이 드리운 황야 위로 두 사람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곧 낮은 신음이 들려오고, 두어 걸음 정도 뒤처져 있던 사람이 무언가에 발이 걸린 듯 바닥으로 엎어졌다.
앞선 사람이 재빨리 되돌아와 쓰러진 사람을 부축했다.
“괜찮소?”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냥 넘어진 거예요.”
여인이 말하고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어떻소?”
사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칙 소리가 들리고, 작은 불씨가 남녀의 얼굴을 비쳤다.
언뜻 보기에는 남루한 차림의 평민 같았지만, 흐릿한 불빛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에서는 숨길 수 없는 귀태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여인의 품속을 쳐다보았다.
여인이 꽁꽁 싸매 둔 이불을 살짝 걷어내자, 그 안에는 발그레한 얼굴로 곤히 잠든 아기가 드러났다. 갑작스럽게 비친 불빛 때문인지, 차가운 바람이 잠을 방해했는지, 아기는 고개를 움직이며 올망졸망한 주먹을 귀에 비볐다.
여인이 얼른 이불을 다시 꽁꽁 싸맸다.
“괜찮아요. 도련님께서는 무사하세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인의 품에서 아기를 건네받았다.
“내가 안으리다. 서두르세나.”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던 찰나,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여인의 등 뒤로 횃불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큰일 났군. 벌써 쫓아왔어.”
여인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인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희미한 불씨를 흔들어 껐다.
“이렇게 빨리 따라온 걸 보면, 필시 누군가가 길을 짚어 준 것이야.”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어떡하죠? 도망치기엔 이미 늦은 걸까요?”
여인이 울먹였다.
“잡히지 않는 한, 계속 도망치면 될 거요.”
사내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아이를 등에 업었다.
“우리 정씨 가문의 혈맥이 이대로 끊기지는 않을 것이오.”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말굽 소리와 개가 짖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갑옷 차림에 군마를 타고 있었다. 서늘한 빛을 내뿜는 병기를 쥔 사람들은 허허벌판 위에서 더없이 눈에 띄었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장수가 말고삐를 잡고 멈춰 섰다.
“어느 방향인가?”
장수가 호통치듯 묻자, 서생 차림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그가 나침반을 손에 쥐고 나침반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손끝으로 셈을 했다.
“저쪽입니다.”
서생이 조금 전 두 사람이 도망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때 장수가 말 안장에서 무언가를 떼어냈다. 횃불의 불빛이 물건의 정체를 밝혔다. 바로 대나무 통에 쇠로 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폐하께서는 정씨 일족을 발견하면 생포할 필요 없이 즉살하라 명하셨다. 목숨 하나에 절도사 자리가 하나씩 달렸다. 오늘 밤 우리가 이 돌화창으로 절도사 자리를 몇 개나 얻어낼지 한번 해 보자꾸나!”
장수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그의 뒤에 있던 병사들이 환호하면서 자신들의 돌화창을 꺼내어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장수가 힘찬 기합과 함께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병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말굽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같은 시간, 대량 경성, 사천(司天) 천문대.
거대한 문이 열리자, 커다란 몸집의 금군 병사들이 두봉을 걸친 사내를 호위하며 천문대 안으로 들어섰다. 두봉을 걸친 사내는 층계를 따라 위로 올라가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옆에 서 있던 시위들이 벽의 한쪽을 힘껏 밀자, 벽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지하로 향하는 층계를 드러냈다. 숨겨진 층계를 한 걸음씩 내려가자, 넓디넓은 지하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내를 따라 들어온 시위들이 들고 있던 횃불로 지하실 안을 낮보다 더 환하게 비췄다.
지하실의 벽면에는 쇠사슬에 네 손발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상처투성이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쇠사슬에 어깨와 다리가 뚫린 채, 손발이 꽉 묶여 있는 남자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의 흉측한 몰골이 횃불에 비치자, 시위들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손수 만든 곳에서 지내는 게, 감옥에서 지내는 것보다 훨씬 편하시지요?”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지금 이 순간 ‘아버님’이라는 단어는 잔인하고 소름 끼치게 들렸다. 서서히 고개를 든 중년 남자의 창백하고 야윈 얼굴에 미소가 설핏 번졌다.
“폐하께서 오셨군요.”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멈춰 선 사내가 두모와 두봉을 벗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붉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횃불 아래 비친 그의 모습은 타오르는 듯 눈부셨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용모는 준수했으나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었고, 눈빛은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아버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대량이 누구의 손에 멸합니까?”
사내의 말에 중년의 남자가 실소를 터트렸다.
“아사(阿四).”
시위들이 눈썹을 치켜뜨면서 중년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태상시(太常寺)의 정준(程隼). 역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저런 몰골이 되었는데도 폐하의 아명을 입에 담다니.
양산이 서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버님, 한평생 계산을 하며 살아오셨는데, 아버님의 마지막이 어떨지 계산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정준이 웃었다.
“폐하, 우리 아방이 어떠셨습니까?”
그는 양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양산은 ‘아방’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아방.”
양산이 읊조리듯이 말했다.
“좋은 여인이지요. 아름답고, 총명하고, 지극한 미인이니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정준이 미소 짓는 양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버님.”
양산이 정준을 쳐다보면서 뒷짐을 지었다.
“짐은 이미 아방을 효소(孝昭) 황후로 추봉했습니다. 아방은 짐에게 최고의 황후이지요. 아버님께서 짐과 대량을 위해 이렇게 천하에 유일무이한 황후를 길러내 주시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정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폐하께서는 우리 정씨 가문이, 단지 폐하를 위해서 그렇게 훌륭한 황후를 키워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준이 말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쇠사슬이 철그렁철그렁 흔들리는 듣기 거북한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시위들이 재빨리 양산의 앞을 막아섰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시위들이 경계를 담은 눈빛으로 정준을 쳐다보았다.
정준은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정씨 일족이 기묘한 술수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던 시위들은 그가 폐인이 됐음에도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양산이 시위들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하고는 정준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방은 태생이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무엇이든 한 번만 보면 외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방은 우리 일족이 모든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아이이며, 우리 일족의 모든 능력을 익힌 사람이지요.”
정준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우리 가문이 그런 아방을 키워낸 것이, 단지 네 살이 되던 해에 폐하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양산이 정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버님, 대량이 누구의 손에 멸합니까? 정씨 가문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비술은 어디에 숨겨져 있고요?”
정준은 양산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우리 아방은 참 착한 아이지요.”
정준의 창백한 얼굴에 슬픔이 서렸다.
“우리 아방은 참으로 가엾은 아이예요.”
‘가엾은 아이’라는 말을 들은 양산의 눈빛이 순간 암담해졌다가 금세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정씨 가문은 결코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한 적 없습니다.”
정준이 갑자기 목청을 높이고 눈빛을 반짝이면서 소리쳤다.
“우리 아방은 필시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으며, 비통함이나 슬픔도 없을 겁니다. 우리 아방은 절대로 정씨 가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점점 더 흥분하는 정준을 보자, 양산이 고개를 돌리고 탄식했다.
“폐하, 물어 봤자입니다. 이미 미친 사람입니다.”
시위가 조용히 말했다.
정준은 시위의 말을 증명하듯, 아방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늘의 도움을 잃고 신령의 노여움을 사, 죽어가는 시체들이 들판에 가득 버려져 있구나. 전장에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하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의 길이 아득히도 멀구나. 장검을 차고 활을 든 채로 머리와 몸이 잘리더라도 후회는 없으리. 진실로 용감하고 무예 또한 뛰어나니, 끝내 굳세고 강하여 가히 범할 수 없다네(天時墜兮威靈怒, 嚴殺盡兮棄原野. 出不入兮往不反, 平原忽兮路超遠. 帶長劍兮挾秦弓, 首身離兮心不懲. 誠旣勇兮又以武, 終剛强兮不可凌. <구가 국상(九歌 國殤)>).”
발음하기 까다로운 초나라 말에 기괴한 곡조였다. 게다가 정준이 쇠사슬에 뚫린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기이한 자세를 보이자, 안 그래도 음산한 지하실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횃불로 환히 밝혔음에도, 시위들은 시야가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양산이 정준을 슬쩍 보고는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떴다. 양산이 층계를 올라서 밖으로 나오자, 벽은 다시 회전하여 닫혔고, 정준의 기괴한 곡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량의 후궁에는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의장 행렬이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자, 천자의 침궁 밖에서 황제를 기다리던 황후가 자세를 낮추고 양산을 맞이했다.
“황후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시오?”
양산이 눈앞의 여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물었다.
“폐하, 지난번에 신첩이 만들어 드린 양갱이 맛있다고 하셔서, 신첩이 특별히 밤참으로 만들었습니다.”
황후가 예를 표하며 말했다.
“맛있던 것은 그때이기에 맛있었던 것이오. 이번에는 짐이 양갱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양산이 말하고는 황후를 지나쳐서 침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후는 민망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자리를 떠났다.
“다들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부리기 바빠서야 원.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해대니 더욱 싫증이 나지.”
침궁 안에서 양산이 겉옷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아방은 달랐어.
“당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었는데도, 맛이 없을 것 같아요?”
양산의 눈앞에 팔걸이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교태를 부리는 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양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가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걸음을 옮겼다. 내시들이 휘장을 들어 올리자, 양산은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침궁 안의 장식과 가구들은 간소했다. 내시들이 모두 물러나자, 따뜻하게 불이 지펴진 겨울밤의 침전 안은 더없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양산이 침상 앞에 서서 옆에 놓인 탁자를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검은 비단이 씌워져 있었다.
“아방,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야.”
양산이 검은 비단을 걷어냈다. 그 아래로 작은 수정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일렁이는 등불에 비치는 수정함은 영롱하고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수정함의 중앙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의 심장이었다. 그 심장은 금방 사람의 몸에서 도려낸 것처럼 새빨간 빛깔을 띠고 있었다.
양산이 손을 뻗어서 수정함을 매만졌다.
“아방, 여기서 종일 혼자 있느라 지겨웠지?”
양산이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무서울 거 없어. 이젠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까.”
양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너도 내 곁에서 함께 하고.”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할 테니, 너도 영원히 내 곁을 지켜 줘.”
“이러니까 얼마나 좋아.”
수정함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던 양산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두 손으로 수정함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더니 무언가를 확인했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양산이 고개를 홱 돌리고 소리쳤다.
내시들이 서둘러 침전에 등불을 밝혔다. 수정함 주위로 몇 개의 등불이 몰려들었다.
허약하고 야위어 보이는 사내가 수정함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어떠하냐?”
양산이 물었다.
“폐하, 정말로 부패하고 있습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양산이 발길질을 하자, 사내는 단번에 뒤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는 감히 양산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빌어먹을 놈!”
양산이 이를 부득 갈면서 사내를 욕했다.
“부패하다니! 어떻게 부패할 수 있느냐! 썩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떻게 아방의 심장이 썩어! 어떻게! 아방은 짐과 함께 평생을 보내야 하느니라!”
침전 안의 내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두려움에 떨었다.
“혹시 수정함이 망가진 게 아닐지요.”
내시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다른 내시를 향해 말했다.
“어서 새것을 가져오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가 이마를 땅에 찧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수정함은 절대로 망가질 리가 없습니다.”
양산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준수했던 양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우리 아방의 심장이 도대체 왜 썩고 있냐고!”
사내가 이를 악물고 하려던 말을 내뱉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마의 심장은 이미 폐(廢)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폐했다고?
사람이 죽었으니, 심장도 폐하는 게 당연지사지.
술수를 쓰는 술사(術士)들은 꼭 말을 저리 괴상하게 한다니까.
고개를 숙인 내시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방의 심장이 폐하다니? 남궁(南宮), 잊지 마라. 짐은 정씨 가문의 사위니라.”
정씨 가문의 재능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곁에서 보고 들은 게 있는 만큼 양산은 일개 술사의 거짓말에 놀아날 사람이 아니었다.
사내가 서둘러 큰절을 올렸다.
“폐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내가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의 말씀은, 이것은 이제 마마의 심장이 아니기에 폐했다는 뜻이옵니다.”
양산이 실소를 터트렸다.
“이게 아방의 심장이 아니라고? 이건 짐이 두 손으로 직접 아방의 몸에서 떼어낸 것이다. 짐이 아방의 심장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게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이치대로라면 절대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왜 지금 저 심장이 썩고 있냔 말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심장이 갑자기 바뀔 수가 있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수정함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부패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던 사이, 새빨갛던 심장은 금세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양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빨리 수정함을 품에 안았다.
“아방, 아방!”
너무 흥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양산의 걸음이 휘청이더니 곧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폐하, 폐하!”
내시들이 소리치면서 우르르 몰려갔다. 편전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태의, 태의를 불러라!”
이미 고개가 꺾인 채 바닥에 쓰러진 양산은 흡사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처럼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다른 한 손은 수정함을 꼭 쥔 채로 천천히 굳어갔다.
수정함에 들어 있던 심장은 결국 말라비틀어져 새까맣게 썩은 고깃덩이가 되었다.
아방! 아방!
돌아와!
돌아와!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고, 동이 트기 직전의 암흑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덮었다. 어둠 속에 넓게 펼쳐진 늪에서 벌레와 새가 지저귀던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붉은 점처럼 보이는 횃불과 사냥개가 거칠게 숨을 내뿜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사냥개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의 냄새를 킁킁 맡으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냥개가 한 곳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고 경계하는 모습으로 한 방향을 내다보았다. 그 뒤로 말굽 소리와 횃불이 점점 가까워졌다.
냄새를 맡던 사냥개들이 맹렬하게 짖으며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사냥개가 달리면서 만들어낸 바람에 무성하게 자란 띠풀들이 흔들거렸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토끼가 바람을 가르는 화살처럼 빠르게 뛰어갔다.
사냥개들이 급하게 멈춰서고는, 고개를 틀어 토끼가 튀어나온 방향을 향해 짖으며 달려갔다. 진흙이 뒤섞인 늪의 물이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에 난 풀들 위로 쏟아졌다.
“저쪽이다!”
사냥개들을 뒤따라온 사람들이 사냥개가 달려가는 방향을 향해 외치며 말을 재촉했다.
“그쪽이 아닙니다!”
나침반을 들고 있던 서생이 다급하게 외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서생의 얼굴에 횃불이 드리워졌다. 그가 머뭇거리면서 손끝으로 무언가를 계산했다.
“저쪽이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