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75)

작가의 말:

진안 군왕의 봉호는 복주(福州) 진안입니다. 복주는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땅에 있으므로 진안 군왕은 두우 자리인 셈입니다. 그래서 정교랑이 본 천상, 즉 다섯 개의 별이 두우 자리에 모인 것은 제성(帝星)이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뜻합니다.

지난번에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는 천상에서, 자미원(紫微垣) 별자리는 황제궁을, 북극성은 왕후의 침궁을, 구진육성(勾陳六星)은 왕비궁을 뜻했습니다. 따라서 태백성이 나타났을 때, 객성이 구진 자리에 나타났기 때문에 귀비는 안비가 하늘이 점지한 천자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급해졌던 것입니다.

-기다리다-

진소는 고능준이 뭐라 더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태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상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태자를 보자, 진소는 코끝이 시려왔다.

영리하고 활발했던 과거의 그 어린아이가, 결국 이런 날을 맞이했구나.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분이 왜 갑자기 위태로워지신 게요?”

진소가 고능준을 향해 말하다가,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던 태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능준이 실소를 터트렸다.

“진 대인, 그런 눈빛으로 날 볼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외다.”

진소의 눈빛이 암담해졌다.

태의 하나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환절기인지라 일교차가 심하고 기온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날씨가 건조하기까지 하여, 살이 찐 전하께서 몸이 몹시 허약해지셨지요. 기와 혈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주무시기 직전에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드셨고요. 그런데 그 탕약 때문인지, 뭉쳐 있던 혈기가 더욱 막혀 버려 입과 코를 통해 피를 쏟고 맥이 어지러워지셨습니다.”

태의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태자 전하의 몸은 자네들이 매일같이 살피지 않았던가? 이리 심각한 병증을 어찌 몰랐을 수 있단 말인가? 날씨가 건조한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태자 전하께서 살이 찌고 몸이 허약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거늘!”

진소가 호통쳤다.

“대인, 말씀드린 것처럼 이 병은 정말 심각한 병입니다. 저희가 최상급 약재로 탕약을 달여 올리고 있으나, 때로는 좋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 있기 마련입니다. 대인, 이건 태자 전하의 본래 몸 상태 때문이지, 소인들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찌 됐든, 태자가 이렇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사고라는 뜻인 게지?

이런 빌어먹을. 그 예상치 못한 일은, 왜 항상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거야?

침궁 안에 정적이 흘렀다.

“살릴 수 있겠는가?”

진소의 물음에 태의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신 등이 무능하여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죽을병에 걸리셨습니다.”

죽을병이라고?

진소가 흠칫 놀랐다.

“당장 정 낭자를 입궁시키거라. 진안 군왕비를 불러라!”

진소가 소리쳤다.

“진소, 정녕 미친 게요? 그 여인을 궁으로 들여서 뭘 어쩌려고?”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그 여인만이 태자 전하를 살릴 수 있습니다. 마마, 어서 교지를 내리시지요.”

진소가 단호하게 말했다.

“애가가 어제 종일 그들에게 교지를 보냈소. 그런데 대역무도한 그들은 애가의 명을 거절했어! 그 여인이 태자를 살릴 수 있다고? 정녕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황상부터 진작 깨어났겠지, 오늘 같은 일이 생겼겠느냔 말이오!”

태후가 말하면서 통곡했다.

“마마,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 봐야지요. 태자 전하를 이대로 둘 수는…….”

진소가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침상 위를 쳐다보았다. 침상 위에 누워있는 소년은 마치 뭍으로 떠밀려온 물고기 같았다.

이대로 태자가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참으로 가엾은 아이로구나. 차라리 그때 매화를 꺾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면, 지금 같은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교지를 내리거라.”

고능준의 말에 태후가 흠칫 놀랐다.

“태자 전하께서 이대로 돌아가시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여인이 태자 전하를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요.”

고능준이 태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마, 진안 군왕비를 궁으로 들이시지요.”

고능준이 진안 군왕비 다섯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치료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치료할 수 없다면,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태자 전하와 함께 순장해 버리면 그만이야.

태후가 내시를 향해 손짓하자, 내시가 서둘러 교지를 작성하러 갔다.

“소식을 전하고 그 여인이 입궁하기까지 적어도 하루는 걸릴 텐데, 그때까지 태자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태후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진소가 태의를 바라보았다. 태의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태의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 등은 감히 약을 더 쓸 수 없습니다. 지금 약을 더 썼다가는 전하의 몸이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태자 스스로의 힘으로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인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태후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궁문을 열고, 보정 대신들과 한림들을 궁 안으로 들이거라.”

진소가 말했다. 하지만 고능준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안 됩니다.”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게요!”

고능준이 침착하게 진소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일이 바로 태자 전하의 국혼입니다.”

순간 진소가 경악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국혼을 강행하겠다는 거요?”

딸을 바보에게 시집 보내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곧 숨을 거둘 사람에게까지 시집을 보내라는 말인가!

“진 대인.”

고능준이 진소의 팔을 붙잡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근래에 태자궁에서 시침한 여인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중에 혹시 누가 회임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진소가 격노하며 고능준의 옷깃을 붙잡고 소리쳤다.

“고능준! 도대체 태자 전하에게 무슨 약을 쓴 것이오!”

날씨가 건조해? 기와 혈이 몸에서 빠져나가질 못 한다고? 피를 토하고 맥이 어지러워져? 최상급의 약재?

허튼소리!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이 지경이 됐다면 필경 연유가 있겠지!

고능준이 진소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약이냐고요? 전하께서 태자이신 한, 언젠가는 필히 써야 할 약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뭘 합니까? 태자 전하의 병세를 숨기고, 예정대로 국혼을 강행해야 합니다. 태자비가 입궁하고, 태자의 첩이 회임을 하게 된다면, 태자가 죽더라도 황태손은 태어날 테고, 태자비도 예정대로 황후가 될 것입니다!”

고능준도 목청을 높이고 말했다.

“만약 회임을 하지 않았다면 어쩔 것이오?”

눈썹을 치켜세운 진소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회임을 하지 않았다면, 종친 중에서 하나 데려오면 그만이지요. 그렇게 태자비는 황후가 될 것이고, 장차 태후가 될 겁니다! 지금껏 해 온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껏 판을 다 깔아 놓고 남 좋은 일만 시키려는 겁니까? 우리는 더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진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결국 고능준의 옷깃을 스르르 놓아 버렸다.

졸고 있던 안비가 고개를 꾸벅거리다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에 안비는 악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 칼!”

안비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귀신이라도 본 게냐.”

황후가 침상 위에서 안비를 쳐다보았다. 안비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자신의 목을 매만지더니, 눈을 비비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불로 환하게 밝힌 전각 안에는 내시와 궁녀들이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칼을 든 금위군 병사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휴, 다행이다. 아직 죽지는 않았네.”

안비가 중얼거리고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마마, 아직 다른 소식은 없는지요?”

황후가 손에 쥔 책을 내려놓았다.

“괜히 호들갑을 떤 게야. 태자가 고뿔에 걸렸다더군.”

안비가 눈을 부릅떴다.

고뿔?

“고뿔 한번 걸렸다고 이렇게 크게 난리를 칠 일이에요? 누군 놀라 기절할 뻔했는데.”

황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그래. 별일 아니니 그만 돌아가거라.”

안비가 민망해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서둘러 보따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안비가 멈칫하면서 몸을 돌렸다.

“마마, 설마 그 소식을 믿으세요?”

“그 소식을 믿는 자가 있겠느냐?”

황후가 반문했다. 안비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황후 앞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황후의 소매를 붙잡았다.

“마마, 그럼 어쩌면 좋죠?”

안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황후가 몸을 고쳐앉고 탁자 위에 놓인 황후 인장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자, 경성 곳곳에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대한 성벽 너머는 어둑하기만 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졸리기 시작할 시간이자, 하늘과 땅이 고요해지는 시간이었다.

다그닥거리는 말굽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손에 횃불을 들고 성벽을 돌던 금군이 느릿느릿 걸어오는 소리였다.

“주 대인, 이렇게 매일 밤을 새우다가는 몸이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병사 한 명이 가장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던 주복을 향해 말했다.

“당직을 정 미룰 수 없으시다면, 휴가라도 이틀 정도 쓰심이 어떻겠습니까?”

“힘들지 않다. 이게 뭐가 힘들다고. 서북에서는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지내는 게 당연한 일이었어.”

주복은 종승포의 총애를 받는 장수였다. 그런 주복이 서북으로 떠나는 대신 경성의 성문을 지키겠다고 하자, 종승포는 격노하여 주복을 흠씬 두드려 패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주복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패기 없고 변변치 못한 놈이라고 욕했던 종승포였지만, 그는 떠나기 전에 주복을 금군 병영으로 배치했다. 하는 일은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금군 병영 소속이라는 신분은 훨씬 위상이 높았다.

병사들은 그런 주복이 의아할 뿐이었다. 주복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경성에 남은 거라면, 중 장군이 이토록 그를 총애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죽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면, 주복은 왜 굳이 경성에 남기를 고집한 걸까?

주복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짤막한 대화를 할 때마다 서북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주복도 서북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앞서 있던 주복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말했다.

“잠시 쉬었다 가지.”

또 북쪽 성문이네.

주복은 매일 밤 순찰을 돌 때마다 북쪽 성문 앞에서 잠시 쉬었다 갔다. 병사들은 그런 주복이 익숙한 듯 말에서 내려와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병사들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이 멈칫하며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들의 옆에 있던 주복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마차와 말 한 필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야밤에 길을 재촉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앞을 내다보자, 새카만 두봉과 커다란 두모를 쓴 사람이 말 위에서 멈칫하는 게 보였다. 말 위에 타 있던 사람이 주복을 알아본 듯 말고삐를 당기며 외쳤다.

“주육.”

사내가 두모를 벗자, 횃불 아래로 진호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네가…….”

주복도 진호만큼 놀란 눈치였다. 진호가 주복을 향해 빙긋 웃다가 곧 미간을 찌푸렸다.

“순찰 중인가?”

진호가 묻자, 주복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의 뒤에 있던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아, 친척을 한 분 모셔 왔어.”

진호가 짤막하게 말하고는 성문을 향해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성문 위에서 수문 병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진호가 붉은 인장이 찍힌 서신을 펼쳐 흔들었다.

성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경성의 성문은 참 쉽게도 열린단 말이야. 여기 있으며 보니까, 이 성문은 낮보다 밤이 더 시끌벅적한 것 같아.”

주복이 비아냥대며 말했다. 진호가 웃으며 주복에게 물었다.

“지금 내게 먼저 말을 거는 건가?”

주복이 표정을 굳혔다.

“친척을 데려왔다고? 이렇게 야심한 밤에 데려온 것을 보니, 무척이나 친한가 보군.”

주복은 여전히 진호를 쳐다보지 않고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차는 단출하다 못해 볼품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별다른 호위도 없이 마부 한 명만 마차 앞에 타고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왔지만 아래로 무겁게 드리워진 마차 휘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호가 웃었다.

“주 대인, 한 번 검문해 보시겠습니까?”

주복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진호가 손을 들었다. 진호의 뜻을 눈치챈 마부가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주복은 거침없이 말을 타고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마차 안에 한 여인이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춰진 휘장에 놀랐는지, 주복이 횃불로 마차 안을 비추자 여인은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차에서 내리라고 할까?”

진호가 물었다. 주복이 냉소를 짓고는 마차에서 시선을 거두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내가 너를 모를까.”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야 행동하는 진호라는 사실을 잘 아는 주복은, 진호가 이미 모든 대비를 끝냈기에 마차 안을 들여다보라는 말을 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진호가 웃었다.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군.”

주복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진호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오밤중이니, 시간 끌지 않고 들어가겠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그럼 이만.”

주복이 길을 비키자, 진호와 마차는 그의 옆을 지나쳐서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을 지키는 위병들은 마차를 검문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낸 뒤 성문을 닫았다.

성문을 지나던 진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이런 우연이 있나. 여기서 주육을 마주칠 줄이야.

주육이 금군 병영에서 눈칫밥을 먹느라 밤마다 성벽 순찰을 돈다는 말이 진짜였나 보군. 저놈 성질머리로 그런 괴롭힘을 참고 있다니.

참고 있다고?

순간 진호의 웃음이 굳어졌다. 곧이어 그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마차가 급히 정차했다.

“공자님?”

마부가 조용히 물었다.

진호가 고개를 돌리고 성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성문이 성 밖의 풍경을 차단했다. 마차에 달린 등불과 성문의 횃불에 비친 진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우연이라고? 이 세상에 단순한 우연 따위는 없지.

성문 밖에 있던 병사들은 말을 탈 준비를 했다. 그때, 병사 한 명이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면서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신기하네. 이 시간에 누가 또 오나 봅니다.”

주복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내다보자, 말굽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한두 명이 아닌가 본데요?”

병사가 중얼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횃불에 비친 사람들은 금세 성문 앞까지 달려왔다. 말을 탄 사람은 총 일곱 명이었고, 가장 앞선 사람은 뒤쪽 무리와 거리가 꽤 벌어져 있었다. 두봉이 바람에 흩날리고, 두모 아래로 말을 탄 사람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어라, 여인이잖아?”

귓가에 병사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왔구나!

말과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주복은 말을 이끌고 앞으로 다가갔다.

“성문 열어요.”

정교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뒤따라오던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옆에 멈춰 섰다. 두모 아래로 굳어지는 주복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이 여인, 경성에도 자신의 사람을 남겨 두었군.

“성문을 열어라.”

주복이 말했다.

고 선생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던 찰나, 주복이 고개를 치켜들고 성문 위에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한발 늦긴 했지만, 고 선생도 이름 하나를 뱉어냈다.

성문 위에서 동시에 이름이 불린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자기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재빨리 성문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부(付) 낭중(郞中).”

성문에서 뛰어 내려온 두 사람이 위병들에게 문을 열라고 지시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뒤에서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이 흠칫 놀라며 몸을 살짝 떨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성안으로 들어갔던 진호가 다시 성문 앞으로 되돌아왔다. 진호의 뒤로 그가 불러온 순성갑기 병사들이 보였다.

“진 대인, 진안 군왕께서 경성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감문관(監門官) 부 낭중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진호가 천천히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횃불에 비친 진호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진안 군왕이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태후마마의 교지가 있었던 것이오? 아니면, 중서문하성에서 군왕을 모셔 오라고 했소?”

진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 대인, 바로 엊그제 태후마마의 교지가 있었습니다.”

부 낭중과 함께 성문 아래로 내려온 사내가 말했다.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태후마마께서 교지를 내리셨지만, 진안 군왕이 태후마마의 명을 거역했네. 그때는 명을 거역해 놓고, 지금에서야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다니, 저의가 뭐지?”

진호가 두 사내를 가리키며 호통쳤다.

“저 둘을 체포하라!”

진호의 뒤에 서 있던 순성갑기 병사들이 재빨리 두 사내를 체포했다. 성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들은 주복 등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성문을 열어라!”

주복이 말을 끌고 앞으로 나아가서 소리쳤다.

“주복, 이 사람아. 지금 성문을 여는 건 적절치 못해.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게나.”

익숙한 목소리가 성문 안쪽에서 새어 나왔다. 진호의 말을 들은 주복은 온몸이 굳어 버렸다.

“큰일이다. 진호에게 발각되었어.”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향해 말했다.

“진호가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정교랑이 물었다.

“조금 전에 마차 한 대를 끌고 성안으로 들어갔어. 어딘가 수상해 보이기도 했고.”

주복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성문 위를 올려보았다. 두모가 바람에 날려 벗겨지자, 정교랑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횃불이 비쳤다.

“어떡하죠? 누군가가 일부러 성문을 막는다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고 선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쳐들어갈까?”

주복이 정교랑에게 물었다. 주복의 말을 들은 고 선생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왕비 전하, 경성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저희에게 지금 무엇을 숨기고 계시는 겁니까? 말할 수 없는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저희는 부인을 믿습니다. 부인께서 쳐들어가겠다고 하신다면, 저희도 응당 쳐들어가겠으나, 최소한 저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알려 주셔야지요. 통행 허가도 없이 이대로 새벽에 쳐들어갔다가는, 종친 신분인 진안 군왕 전하께 역모의 대죄가 씌워질 것이 뻔합니다!”

고 선생이 다급하게 말했다.

“내 생각엔, 경성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아서요.”

정교랑이 말했다.

“부인의 생각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아서라고요? 왕비 전하! 지금 무슨 농담을 하시는 겝니까!”

“내 누이는 농담을 하지 않습니다!”

주복이 소리쳤다.

“주 대인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것 또한, 우리가 오리라 추측해서입니까?”

고 대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추측치고는 꽤 정확하십니다.”

성문 앞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정교랑은 고 선생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않고 말을 탄 채 뒤쪽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정교랑이 성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벽 위에 한 사람이 나타나고, 횃불 두 개가 위에서 정교랑의 얼굴을 비췄다. 진호가 두봉을 휘날리며 정교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진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다시 정교랑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정말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진안 군왕비, 성벽을 넘어서라도 성안으로 들어오려 하신다면, 신 등은 무례함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벽 위에 있던 위병들이 정교랑 일행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진호, 네놈이 감히!”

주복이 재빨리 정교랑의 앞을 막아서고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성문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진호가 쓴웃음을 보이고 천천히 말했다.

“감히 그렇게 하신다면, 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문 안팎으로 정적이 흘렀다. 매섭게 불어오는 밤바람에 횃불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라!”

성문 안쪽에서 다급한 말굽 소리와 외침이 들려왔다.

“태후마마께서 급히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지금 시간에 태후마마께서 급하게 교지를?

진호가 경악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두 내시가 말을 타고 성문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교지란 말입니까?”

진호가 물었다.

내시들은 성문 앞에 선 진호와 한쪽 옆에서 병사들의 손에 붙잡혀 있는 두 감문관을 보고는 놀란 기색으로 다시 진호를 쳐다보았다.

“공공, 저 두 사람이 이 시간에 멋대로 성문을 열려 하기에, 신이 부윤 대인의 명을 받아 체포했습니다.”

진호가 문서 한 장을 꺼내어 내시들을 향해 펼쳤다.

일을 할 땐 철두철미하게 해야지. 원칙을 어긴단 말은 남들이나 듣는 소리지.

그러나 두 내시는 진호를 무시하고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어서, 어서 성문을 열어라!”

“공공들께서는 이 야심한 시각에 대체 무슨 교지를 전달하시는 건지요?”

진호가 자리를 비키지 않고 재차 물었다. 격노한 두 내시가 진호를 향해 호통쳤다.

“진 관인, 그건 진 관인이 함부로 물을 질문이 아닐 텐데요?”

성문 밖에서는 성문 안쪽의 소란이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말을 탄 채 조용히 뒤로 물러난 정교랑은, 말고삐를 세게 움켜쥐고 성문을 노려보았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정교랑이 뭘 하려는지 단번에 눈치챈 주복이 재빨리 정교랑을 말렸다.

“정 낭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냔 말입니다!”

고 선생이 정교랑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며 말을 끌고 달려왔다. 고 선생은 부인이나 왕비가 아니라, 정 낭자라고 외쳤다.

주복과 정교랑이 동시에 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정교랑과 주복, 그리고 고 선생은 어느새 진안 군왕 등과 일정한 거리가 벌어졌다. 그리고 진안 군왕은 어둠 속에 서서 잠자코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청원 역참에서 떠난 뒤로부터, 진안 군왕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복이 정교랑과 무슨 대화를 하든, 고 선생이 정교랑을 뭐라고 다그치든, 진안 군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성문 안쪽에서 정 낭자라는 세 글자를 들은 내시들이 흠칫 놀랐다.

“정 낭자?”

내시 한 명이 크게 기뻐하면서 성문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 소리쳤다.

“밖에 계신 분이 진안 군왕비십니까?”

“그렇네.”

정교랑이 곧바로 대답했다.

“성문을 열어라! 진안 군왕비를 궁으로 들이라는 태후마마의 교지이니라!”

내시가 손에 쥔 교지를 높이 펼쳐 들었다. 내시가 정말로 교지를 펼쳐 들자, 위병들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성문을 열었다.

“잠깐.”

진호가 말했다.

“진호, 감히 태후마마의 명을 막는 것인가!”

참다못한 내시가 고함을 질렀다.

“당치 않습니다. 하온데, 태후마마의 교지에는 진안 군왕비만 궁으로 들이라고 적혀 있는지요?”

진호의 물음에 내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가 내시들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병사들이 성문 앞에 일렬로 서서 활시위를 당겼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인가!”

내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밖에는 진안 군왕비만 있는 게 아니라, 진안 군왕 또한 함께 있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태후마마께서는 지금 같은 시기에 진안 군왕까지 궁에 난입하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을 듯싶은데요?”

진호가 두 내시를 쳐다보며 ‘지금 같은 시기’와 ‘난입’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두 내시가 흠칫 놀랐다.

새벽에 황궁 문이 열리고, 고능준과 진소를 갑자기 궁에 들였다는 것만으로도, 황궁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 종친까지 황궁에 난입한다면, 이 일은 걷잡을 수 없어.

두 내시가 더는 반박하지 않고, 침묵으로 진호의 말에 동의했다.

“성문이 열렸습니다!”

고 선생이 소리쳤다.

뒤에 있던 마차와 사람들이 서둘러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성문 안쪽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대열을 맞추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병사들이 진안 군왕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횃불에 비쳤다.

두 내시가 병사들의 뒤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성문 앞에 있는 여인이 정말로 정교랑임을 알아보고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교지를 높이 들며 말했다.

“진안 군왕비, 태후마마께서 입궁하라는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내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교랑이 말을 이끌고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교랑!”

주복이 외치면서 정교랑의 앞을 막았다.

“지금 같은 때에, 안으로 들어가면 어떡해!”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주복이 어두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고 선생이 말을 몰며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자, 진호가 손짓했다.

“쏴라.”

명령과 동시에 매섭게 날아간 화살들이 고 선생의 앞쪽에 박히며 바닥에 선을 그려냈다. 놀란 말들이 앞발을 높이 들었다.

“진호!”

주복이 소리쳤다. 진호는 병사들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주복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군왕 전하, 태후마마께서 내리신 교지가 어떤 내용인지 알아들으셨겠지요? 교지에는 진안 군왕비에 대해서만 쓰여 있지, 그 외의 다른 사람은 언급이 없었습니다.”

진호가 말했다.

“그래, 본왕은 잘 알아들었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이는 오늘 밤, 진안 군왕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두모를 푹 눌러 쓰고 있었기에,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말을 앞으로 몰았다. 정교랑은 활을 든 병사들과 그 뒤에 서 있던 진호를 지나쳐 두 내시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복이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깊은 밤, 장 노태야의 방 안에 등불이 켜졌다. 장 노태야가 내의 차림으로 밖에 나오자, 문 앞에서 당직을 서던 시녀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노태야?”

놀란 시녀가 장 노태야를 불렀다. 장 노태야가 밖을 내다보았다.

“곧 해가 뜰 시간이냐?”

“아니요.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시녀의 대답에 장 노태야가 음, 하고 대꾸했다.

“말굽 소리가 끊이질 않네. 밖이 시끄럽구나.”

장 노태야가 말했다. 그러자 시녀가 놀란 기색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시끄러운가?

장씨 저택이 저잣거리 한가운데에 있긴 하지만, 지금은 노점과 야시장도 다 파했을 시간인데, 아직도 시끄럽다고?

장 노태야가 창가에 서서 어두운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태야, 소인이 사람을 시켜 대문 앞으로 지나다니는 마차와 사람들이 다른 길로 돌아서 가게 할게요.”

시녀가 말했다.

장 노태야가 괜한 횡포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장순 정도의 신분이라면 그 정도 횡포는 부릴 수 있었다.

장 노태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괜찮아. 괜찮아.”

“마마, 마마.”

태의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궁녀들의 품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던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있던 진소가 태후보다 한발 빨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그러는가?”

진소가 물었다. 태의가 침상 위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곧 숨이 끊어질 듯합니다.”

진소가 태의를 밀쳐내고는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태자는 더 이상 숨을 헐떡이지 않았다. 대신 코와 입으로 피를 쏟기 시작했다.

진소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전하, 전하.”

진소가 애타게 태자를 불렀다. 진소의 뒤에 서 있던 태후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고능준은 이런 결과를 진작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서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슬퍼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침착하게 차후의 일을 계획해야 해.

“마마, 마마, 진안 군왕비가 당도했습니다.”

문밖에서 내시들의 외침이 들려오자, 방 안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진안 군왕비가 벌써 도착했다고?

“그럴 리가 있느냐!”

태후가 소리쳤다.

시간이 고작해야 얼마나 지났다고? 여기서 청원 역참까지만 해도 족히 반나절은 걸릴 텐데. 게다가 거기까지 오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꼬박 하루는 걸려.

그런데 반 시진도 안 돼서 그 여인이 도착했다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온 것처럼?

아니야. 신선이라고 해도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어.

“정 낭자를 어디서 본 것이냐?”

태후가 물었다.

“성문 밖에서 마주쳤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성문 밖!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랐다.

“거참 잘 됐습니다. 진안 군왕비가 일찍이 준비했나 봅니다.”

고능준이 냉소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나.

그런데 어떻게 준비한 거지? 태자 전하께 일이 생긴 건 바로 오늘 밤의 일이다. 궁문이 열렸으니 경성에 있는 사람 중 몇 명은 이 사실을 알게 됐을 수도 있겠지만, 이 소식이 경성 밖까지 닿았을 리는 없는데.

반나절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청원 역참에서 이리 달려왔다고?

“염라대왕!”

태후가 갑자기 불안해하면서 소리쳤다.

“그 여인은 염라대왕과 알고 지내는 사이 아닌가! 그러니 알게 된 게지!”

진소와 고능준이 멈칫했다.

“그 여인을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 당장 내쫓거라!”

태후가 정신없이 소리치면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 여인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온 것이 틀림없다. 그 여인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온 것이야!”

“마마, 이곳은 황궁입니다. 이곳은 하늘이 점지한 천자가 있는 곳이니, 염라대왕이 온다고 해도 별수 없는 곳이라고요.”

고능준이 목청을 높이며 태후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조용히 말했다.

“오늘 들어오면, 다시는 나가지 못할 겁니다.”

진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일단은 태자 전하를 살리는 게 급선무입니다. 어서 정 낭자를 안으로 들이게.”

진소가 내시를 향해 손짓했다.

정교랑은 태후의 침궁 밖에 조용히 서 있었다. 침전의 사방에는 각종 무기를 손에 든 위병들이 즐비해 있었다. 침궁 앞은 몹시 적막했으나, 어둠 속에는 침궁 쪽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숨어 있었다.

침궁 안에서 정교랑을 안으로 들이라는 내시들의 말이 들리자, 정교랑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 있던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침궁 안으로 들어간 정교랑의 눈에 가장 먼저 진소가 들어왔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정교랑이 먼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왕비, 이쪽으로 오시지요.”

고능준이 옆에서 말했다.

“왕비 전하께서 아시다시피, 태자 전하께서 갑작스럽게 병이 도지셨습니다.”

정교랑은 고능준의 말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태의들이 길을 비키면서 휘장을 걷어 올려 태자를 보여 주었다.

정교랑이 침상 위를 쓱 쳐다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뜨거운 물, 불에 데운 금침, 그리고…….”

정교랑이 필요한 도구들을 술술 말하자, 태의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여인이 정말로 치료를 하려는 건가? 하지만 태자 전하께서는 조금 전에 이미…….

진소가 크게 기뻐하며 내시들을 재촉했다.

“어서, 어서 왕비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전부 가져오너라.”

진소에 반해 고능준은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로 치료할 수 있다고? 정말로 태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이 여인을 믿어도 될까?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믿지 못할 건 또 뭐 있겠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태자 전하를 살릴 수 있든 없든, 어차피 이 여인은 죽은 목숨일 테니까.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미덥고 못 미덥고가 무슨 대수라고.

“어서 가져오너라.”

고능준이 손짓했다. 태자의 침전 안에 있던 내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 낭자가 입궁했다고?”

소식을 들은 황후가 놀라서 반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도착했다더냐?”

“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정 낭자가 왔다는 것을 확인하기만 했을 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습니다. 태후의 침궁 주위로 경계가 삼엄합니다.”

어린 내시가 말했다.

“마마, 정 낭자가 왔다면, 진안 군왕도 같이 오지 않았을까요?”

안비가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황후가 전각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정 낭자가 왔다면, 일이 잘 풀리겠군. 고능준과 태후가 뭐라 변명을 늘어놓든 정 낭자가 증인이 되어줄 수 있어. 한데, 가장 결정적인 한 수를 어떻게 둬야 할까?”

황후가 중얼거렸다. 안비가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마마, 뭘 하시려고요?”

황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뭘 하려는지는, 움직이기 시작한 다음에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늘, 하려는 일을 어찌 먼저 입 밖으로 뱉을 수 있겠느냐.”

안비는 혀를 내두르면서 더는 묻지 않았다. 황후가 구석에 놓인 모래시계를 쳐다보았다.

곧 밤이 지나고, 해가 뜰 텐데. 이대로 해가 뜬다면, 조정 대신들은 조회를 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번 일을 반전시킬 여지가 없어져.

전각 안에 정적이 흘렀다.

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소등(小鄧)입니다.”

소등!

소등은 황후가 태후의 궁에 심어 놓은 내시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자이기도 했다.

황후는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렴풋하게 떠올랐던 생각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마.”

문밖에서 어린 내시가 구르다시피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손을 앞으로 뻗으며 황후를 향해 돌진했다.

황후의 옆에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깜짝 놀라며 소등의 앞을 막고 그를 붙잡았다. 소등은 붙잡히는 와중에도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쥐여 있었다.

“마마, 마마.”

어린 내시가 흥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면서 말을 더듬었다.

“정 낭자, 소인이 정 낭자를 봤습니다. 정 낭자가 태자의 병을 고치겠다며 이것저것 갖다 달라고 해서, 태후의 궁이 잠시 어지러워졌습니다. 다행히도 소인은 뜨겁게 달군 솥을 정 낭자께 가져다드렸고, 용기를 내어 정 낭자를 몇 번 더 쳐다보았습니다. 정 낭자는 손을 뻗어 소인이 들고 있던 솥을 받아가면서, 소인의 손에 이것을 쥐여 주었습니다.”

황후가 몹시 기뻐하면서 소등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고 재빨리 펼쳐보았다.

“불꽃놀이?”

황후가 종이 위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불꽃놀이? 무슨 뜻이지?

이게 무슨 뜻이야?

전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했다.

정교랑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태자의 얼굴과 몸을 깨끗이 닦아내고, 향을 한 대 피웠다. 그러더니 태자의 침상 옆에서 눈을 감은 채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정 낭자가 사람의 병을 고칠 때는 주위에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다고 했는데. 게다가 치료 중이라기에는 뭔가 너무 이상해 보이는걸?

“욕(欲), 색(色), 무(無)의 세계를 초월하여 옥청성경(玉淸聖境)에 달하고, 진정한 육신이 몸에서 빠져나와 천지신명이 되어 옥청성경에서 만신의 칭송을 받으며 살아갈지어다.”

침상 가까이 서서 정교랑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던 태의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태의가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다른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도가에서 초도(超度)용으로 쓰이는 설구고발죄묘경(說救苦拔罪妙經)의 구절인 것 같소만.”

두 태의가 서로를 마주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가서 깨끗한 옷을 가져와요.”

정교랑의 말에 진소와 고능준이 흠칫 놀랐다.

“옷을 가져오라고요?”

고능준이 물었다.

“전하의 육신은 이제 깨끗해졌으니, 수의를 입히고 입관해도 됩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진소와 고능준이 크게 놀라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진소가 물었다.

육신이 깨끗해져? 입관해도 된다니?

“지금 치료하고 있던 게 아니었단 말입니까?”

진소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차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소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니지요. 내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훙서하셨습니다.”

정교랑의 시선이 태의들에게로 향했다.

“몰랐던 건 아닐 텐데요?”

태의들도 놀라움에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낭자는 죽을병을 고치는 신의가 아닙니까? 한참을 앉아서 하고 있던 것이 고작 초도 법사를 읊는 거였습니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게 무슨!

“전하께서는 이미 마음도, 지각도, 넋도, 영혼도 없어지셨는데,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을병을 치료하는 것은, 일단 그 대상이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지요.”

정교랑이 침상 위의 태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태자를 깨끗하게 닦아내서인지, 태자의 얼굴은 발그레 홍조를 띠고 있었고, 표정 또한 편안해 보였다. 태자의 얼굴에는 과거 육가아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이곳에서의 죄를 모두 사하였으니, 모든 것들로부터 해탈하소서. 어두운 긴 밤에 모든 걸 묻어 두고 편히 떠나소서.

정교랑이 속으로 읊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각 안에 정적이 흘렀다. 고능준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큰일 났군!”

고능준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내가 틀렸어! 내가 또 틀렸어!

  • 믿지 못할 건 또 뭐 있겠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태자 전하를 살릴 수 있든, 없든, 어차피 이 여인은 죽은 목숨일 테니까.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미덥고 못 미덥고가 무슨 대수라고.

아니야, 아니야! 이 여인을 믿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어!

이 여인은 시간을 끌면서 기회를 만들고 있었던 거야! 이 소식을 밖으로 내보낼 기회를!

“여봐라! 조금 전에 태후궁을 드나든 자들을 전부 잡아들여라!”

고능준이 몸을 돌리고 소리쳤다. 그리고 정교랑을 가리키면서 눈을 부릅떴다.

“태자 전하를 음해한 저 여인도 잡아들여라!”

아니지, 아니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황후!

“여봐라! 황후를 잡아들여라!”

밤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황궁의 적막을 깨트렸다.

“누구냐!”

앞쪽 궁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위병들이 횃불을 밝히며 소리쳤다.

화려한 조복을 입은 여인이 열댓 명의 내시와 궁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의 시야로 들어왔다. 여인은 작은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건, 황후마마잖아!

병을 앓은 탓에 오랜 시간 자신의 궁 밖으로 나오지 않은 황후였지만, 병사들은 조복과 봉관을 보고 단번에 황후임을 알아보았다.

“황후마마의 행차시다. 궁문을 열어라!”

한 내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당직을 서던 위병들은 머뭇거렸다.

“태후마마의 허락이 없는 한, 그 누구도 궁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위병 중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그때 뒤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횃불을 든 병사들이 달려왔다.

“게 섰거라! 황후를 잡아라!”

살벌한 외침이 들려오자, 내시와 궁녀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마마! 소인들이 마마를 지키겠사옵니다!”

흩어져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일제히 황후를 에워싸고 궁문을 향해 돌진했다.

“황후마마,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화살을 쏘겠습니다!”

맨 앞에 서 있던 당직 위병이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쪽에 있던 금위군 병사들이 활시위를 겨누고 황후를 조준했다. 하지만 내시와 궁녀들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결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네놈들이 감히 황후마마를 해하려는 것이냐! 황후마마를 해하는 것은 역모의 대죄이니라!”

내시와 궁녀들이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활시위를 당기던 금위군 중 일부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 저분은 황후마마신데.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저분이 황후마마라고는 하나, 황실에는 태후마마도 계신다!”

금위군 중 우두머리가 목청을 높이며 일그러진 눈빛으로 황후를 쏘아보았다.

궁문을 엄히 단속하라는 태후의 명을 받자마자, 병사들은 궁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가 관건이야.

태후마마께서 연로하셨다고는 하나, 고씨 가문의 뿌리는 황실 깊은 곳까지 자리하고 있어. 그리고 보정 대신으로 진소를 세웠으니, 황후는 태후마마에 비할 바가 안 되지.

무엇보다도 궁 안에서 일어난 일은, 궁 안에서 사라져야만 해.

당초 선황께서도 야밤에 태감들의 습격을 받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셨지만, 결국 주동자를 찾아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어 버렸어. 그러니 이 소식이 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설령 이 자리에서 황후를 죽인다 하더라도 사건을 은폐할 이유를 만들면 그만이야.

부딪쳐 보자!

“화살을 쏴라!”

금위군 우두머리가 목청을 높이며 솔선수범하여 화살을 한 발 쏘았다. 최전방에 있던 내시 하나가 악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곧이어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고, 인간 방패가 되어 황후와 한 몸으로 움직이며 돌진하던 내시와 궁녀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하지만 그들은 걸음을 멈추기는커녕,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의연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마마, 충분히 가까워졌습니다.”

내시 하나가 소리쳤다.

궁문과의 거리가 몇 걸음에 불과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황후의 근처에는 겨우 일고여덟 명의 궁녀와 내시들밖에 남지 않았다.

황후가 품에 꼭 안고 있던 상자를 내시에게 건넸다. 내시는 치지직 소리와 함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을 재빨리 상자 안에 넣었다.

“마마를 호위하라!”

상자를 들고 있던 내시가 소리치면서 손에 든 상자를 궁문 앞을 막아선 위병과 금위군 병사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펑 소리가 나고, 산산조각이 나면서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슝 피슝 소리와 폭발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면서, 무수히 많은 불꽃이 사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궁문 앞과 하늘에 현란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궁문 앞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으로 튄 불꽃은 불똥이 되어 방패와 활을 들고 있던 금위군 병사들에게로 떨어져 옷에 불을 붙였다.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바닥에 뒹굴며 비명을 지르자, 금세 흐트러졌다.

황후를 보호하던 내시와 궁녀들은, 바닥에서 사방으로 쏘아져 나가는 불꽃과 옷자락에 붙은 불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궁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온 힘을 쥐어짜 궁문에 몸을 부딪치자, 드디어 궁문이 열렸다.

“마마를 보호하라! 마마를 보호하라!”

옷에 불이 붙은 채로 자신을 지켜 주는 내시와 궁녀들을 데리고, 황후는 궁 밖으로 달려나갔다. 다급하게 뛰어나오는 황후의 손에는 인장이 들려져 있었다.

궁 밖으로 뛰어나온 궁녀와 내시들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다.

“고능준과 진소가 태자를 음해했습니다! 고능준과 진소가 태자를 음해했습니다!”

내시와 궁녀들의 목소리가 돌포탄이 터지는 소리보다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궁문 앞, 구층탑을 넘어서는 높이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면서 경성의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창가에 서 있던 시녀가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냈다.

“노태야, 저기 좀 보세요. 저게 뭐죠?”

장 노태야는 멀리서 피어오르는 불꽃놀이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구나. 천만다행이야.”

장 노태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남은 내시와 궁녀들, 그리고 황후는 고막을 때리는 폭발음을 등에 지고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내달렸다. 그때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궁문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마.”

황후를 보호하던 내시들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죽을 각오로 황후를 에워싸고 밖으로 달려 나온 그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목숨을 거는 것 또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저 앞에 또 호랑이와 늑대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맞은편에서 황후를 발견한 병사들이 서늘한 빛을 내뿜는 무기를 꺼내 들고 황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황후를 잡아라!”

“화살을 쏘아라!”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살을 쏘아라!”

마주 오던 병사들 또한 소리쳤다.

내시와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빈틈없이 황후를 에워쌌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황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앞쪽에서 쏘아낸 화살은 내시와 궁녀들을 지나쳐서 뒤쪽으로 향했다. 곧이어 뒤쪽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퍼뜩 든 황후의 얼굴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스쳤다. 황후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후를 향해 달려오던 병사들이 황후를 그냥 지나쳐 가더니 궁문 앞을 막아섰다.

진안이 궁문에 우리 사람을 남겨 두었다더니, 이들이었나?

황후가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어가에서 또 한 무리가 달려왔다.

“황후마마.”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가 앞을 내다보자, 장순이 보였다. 장순을 비롯해 수많은 대신이 잰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살았구나.

다리에 힘이 풀린 황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지키던 열댓 명의 내시와 궁녀들은 어느새 네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만신창이가 된 채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경, 경들이 어떻게…….”

필사의 각오로 궁을 빠져나온 황후였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입술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마, 불꽃놀이를 보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왔습니다.”

장순이 황후에게 말했다. 황후와 바닥에 주저앉은 내시와 궁녀들은 흠칫 놀랐다.

불꽃놀이? 불꽃놀이는 궁문을 나오기 직전에 터졌는데?

그 불꽃을 보고 달려왔다고? 날개를 달고 날아와도 이렇게 빨리 오지는 못할 텐데?

물론 이렇게 말해야 앞뒤가 들어맞겠지.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누군가가 이들을 의심할 거야. 왜 이 시간에 궁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느냐고.

역시 장강주야. 조당에서는 거침없이 욕을 내뱉더니, 궁문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네.

“마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다른 대신들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면서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가 깊이 심호흡하고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고능준과 진소가 태자를 음해하고, 궁문을 폐쇄했소. 태후마마께서 아직 그 두 사람에게 붙잡혀 있으니, 어서 서두르시오.”

황후가 울음을 터트렸다.

“태후마마를 지켜야 하오!”

문이 닫히는 쾅 소리에 화들짝 놀란 황씨가 잠에서 깼다. 잠결에 옆을 만져보자, 역시나 범강림은 옆에 없었다.

“여보.”

황씨가 서둘러 범강림을 부르면서 침상에서 내려왔다. 문을 열자, 범강림이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우리가 거처를 군감사로 옮겼는데도, 또 누가 와서 난리를 피우는 건가?

황씨가 범강림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새카만 밤하늘 위로 폭죽의 불꽃이 팡팡 터졌다.

“세상에나, 누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꽃놀이를 한대요?”

드디어 왔구나.

범강림은 불안한 표정으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같은 시각, 이무도 이씨 저택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무가 고개를 돌리자, 불안에 떨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땅굴로 피신해 있으라고 하지 않았소. 어서 가시오.”

이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대인도 같이 가요.”

아내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마 괜찮을 거요.”

이무가 조용히 말하고는 웃었다.

“만일을 대비하는 것이오. 우리 이씨 가문의 폭죽이 워낙 대단하잖소. 저들이 나를 조사하러 온다 해도, 예상치 못한 사고라고 하면 될 일이오.”

이무가 아내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어서 가시오. 난 경성이 혼란스러워지는 게 걱정될 뿐이오.”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무는 다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교랑과 나눈 대화가 귓가에 울렸다.

“스승님, 제가 처음으로 스승님의 불꽃놀이를 봤을 때 했던 생각이 있습니다. 폭죽의 방향이 위로 향하지 않고 직사를 한다면, 돌포탄과 비슷한 위력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쪽 집안에서 만든 두더지 폭죽처럼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 그렇지. 두더지 폭죽도 땅에서 빙빙 돌면서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폭죽이었어.

정교랑의 말 한마디에, 이무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물었다.

“그럼, 정말로 그런 게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당연히 있죠. 폭죽에 유황석회를 추가하면 돼요. 다만, 폭죽의 이름은 두더지가 아니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이무가 호기심과 흥분이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짓고 무언가를 던지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진천뢰(震天雷).”

정교랑이 또 웃으면서 물었다.

“진천뢰의 위력을 직접 보고 싶지 않나요?”

이무가 하늘에서 차츰 사라져 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높이는 충분한 것 같은데, 직사할 때 어떤 모습인지 보지 못한 게 정말로 아쉽네.”

이무가 중얼거렸다.

궁문 위를 수놓은 불꽃은 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였다. 팡팡 터지는 불꽃이 사색이 된 고능준의 얼굴을 비추었다.

“마마, 마마.”

금위군 병사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황후는?”

고능준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 황후마마께서 폭죽으로 궁문을 뚫, 뚫고 나가셨습니다. 그 때문에 어가에 있는 전전사(殿前司) 시위들이 움직였고, 조정 대신들도 몰려왔습니다. 소인들은 궁문을 닫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요.”

금위군 병사가 말했다.

폭죽?

“폭죽 따위로 어찌 궁문을 뚫는단 말이냐!”

격노한 고능준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소인들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무튼 엄청난 위력을 가진 폭죽이었습니다. 땅바닥 여기저기로 어지러이 흩어지며, 불도 붙고 폭발도 있었습니다.”

금위군 병사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도 공포가 가시지 않은 듯했다.

폭죽이라…….

고능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매복 때도 폭발이 있는 무기를 썼다고 했어. 그 여인은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준비해 놓았던 것이 분명해.

고능준의 눈가에 불안이 스쳤다.

그렇게 일찍이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거야? 전전사 시위들을 동원하고, 조정 대신들까지 움직일 정도로?

조정 대신들은 죄다 여우같이 교활한 놈들뿐이라 황실에 무슨 일이 났다고 하면 다들 숨기 바쁠 텐데, 어쩌다가 다들 이렇게 궁문 앞까지 몰려온 거지?

고능준이 고개를 홱 돌리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궁문이 닫혔으니, 그놈들이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할 게다. 천 명 가까이 되는 황성사의 금위군 병력이 문을 지키고 있으니, 금군 병사들이라 해도 궁 안으로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이야. 금군 병사를 움직이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닐 테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신경 쓸 것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고능준이 이를 부득 갈고 손으로 정교랑을 가리켰다.

“태자를 음해한 저 여인을 잡아라!”

줄곧 침묵을 지키던 진소가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황후와 대신들은 분명히 진 대인과 내가 태자 전하를 음해했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태자 전하를 음해했다는 것보다는, 명이 내리기도 전에 급작스레 경성으로 돌아온 진안 군왕비가 태자 전하를 음해했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겠지요.”

고능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저 여인이 불순한 저의를 품었다는 의심을 받기엔 충분해. 그러니 저 여인이 아직 궁에 있는 틈을 타 당장 저 여인을 죽여버려야지. 그리고 모든 죄를 저 여인에게 전부 뒤집어씌워야 해.

“뭣들 하느냐, 죽여라.”

고능준이 전각 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문가에 서 있던 금위군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안쪽으로 들이닥쳤다.

금위군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내시와 궁녀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안쪽에서 병사들이 바깥으로 내던져졌다.

깜짝 놀란 고능준이 시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유유히 걸어 나오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고 대인, 당신의 아들 고십사가 죽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갑옷을 입은 금위군 병사들이 고능준을 엄호하며 정교랑을 향해 도끼를 쥐어 들었다. 병사들은 정교랑의 기세에 압도된 건지, 고능준의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저 여인의 짓이었어.

고능준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그건 정 낭자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려 주려는 게 아니에요. 고십사를 죽인 건 나고, 나 혼자서 죽인 거라는 걸 알려 주려는 거죠.”

정교랑은 손가락 하나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나 혼자서, 고십사와 나머지 열일곱 명을 죽였어요. 한 놈당 하나씩, 총 열여덟 개의 무기로요. 고십사는 내 표창에 맞아 죽었죠. 표창이 목을 관통했거든요.”

정교랑이 말하자, 고능준은 눈앞에 아들이 죽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 고능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 낭자,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면 안 됐어요.”

고능준이 말했다.

“네, 고 대인. 우리는 이러면 안 됐죠. 당신이 이러면 안 됐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하는 듯했지만, 두 사람이 내포한 의미는 확연하게 달랐다.

“죽여라.”

고능준이 손짓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위군 병사들이 정교랑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병사들을 피하기는커녕, 고능준을 향해 돌진했다.

“고 대인, 나 혼자서 고십사를 포함한 열여덟 명을 죽였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날 죽이는 게, 생각만큼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정교랑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정교랑은 맨손으로 금위 병사들의 도끼를 막아냈다. 그러고는 칠 척 장신의 사내 둘이서 힘을 실어 내리찍는 도끼를 한 손에 하나씩 붙잡고 고능준을 향해 돌진했다.

고능준의 안색이 급변했다.

저 여인은 지금 허풍을 떠는 게 아니야. 저 여인의 흉악무도함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증거가 있어.

고능준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금위군 병사들도 그를 따라 뒤로 밀려났다. 문가 앞에 작은 빈틈이 생기자, 정교랑은 몸을 홱 돌리며 포위망을 뚫고 밖으로 도망쳤다.

도망쳐?

저 뻔뻔스러운 년이!

고능준이 격노했다.

“화살과 쇠뇌를 써서 죽여라.”

태후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삼 대대 금위군 병사들이 활과 쇠뇌를 겨누었다. 다만 깊은 밤인지라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정교랑을 정확히 조준하지 못한 채로 화살을 쏠 수밖에 없었다.

정교랑은 나는 듯이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사이에 구중궁궐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궁 안에 있는 한, 독 안에 든 쥐다. 쫓아라!”

“비빈들과 공주들의 처소도 샅샅이 뒤지거라!”

죽여야 해. 죽여야 한다고. 저년을 죽여야만,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어.

일찍이 죽였어야 했는데!

고능준이 몸을 떨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늘 평온하던 고능준의 표정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일찍이 저년을 죽였어야 오늘 같은 화를 보지 않는 건데!

밤하늘에 불꽃이 터질 때, 진호는 성문 위에 서서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은 진안 군왕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청원 역참으로 가서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일 마마께 청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경성으로 들어오시지요.”

진호가 말했다. 진안 군왕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진호.”

주복이 말을 탄 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말을 돌렸다. 그러고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궁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진호가 고개를 숙이고 주복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언제든 성문을 열 수 있도록 네가 밤마다 성을 지키게 할 만한 일이지.”

주복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왜 그 여인을 홀로 경성으로 들여보낸 건데!”

“정 낭자는 무사할 테니까.”

진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진안 군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다른 이도 같이 궁에 들어갔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수가 있거든.”

이를 악물고 또 무슨 말을 하려 고개를 들던 주복의 표정이 굳어졌다.

“관인, 보십시오!”

성문 위에 있던 위병이 밤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진호가 고개를 돌리고 위병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 위에 수놓아지고 있었다.

“전하!”

고 선생도 깜짝 놀라서 하늘을 가리켰다. 진안 군왕이 두모를 살짝 올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예쁜 불꽃이네.”

횃불에 비친 진안 군왕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육가아, 잘 봐라. 저건 특별히 너를 위해서 준비한 불꽃놀이다.”

불꽃놀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 사람은 또 있었다. 진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가 말했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정 낭자는 무사해. 꼭 너만 정 낭자를 안 믿더라.”

진호가 성문 아래의 주복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불꽃이 하늘을 밝혔으니, 궁 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곧 온 경성에 퍼지겠군. 일찍이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던 조정 대신들에게 드디어 입궁할 구실이 생겼겠어.

그러니, 더는 궁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간사한 자들이 무슨 짓을 꾸몄는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고, 정 낭자는 무사하겠지.

그러게 왜 정 낭자를 안 믿느냔 말이야.

부아가 치밀어 오른 주복이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진호, 당장 문 열어! 교랑이 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당장 이 문 열라고!”

주복이 활을 들고 진호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성문 위에 서 있던 위병들이 재빨리 진호를 보호하며 주복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주복.”

진호가 웃음기를 거뒀다.

“나는 절대로 성문을 열 수 없어. 이건 정 낭자의 목숨을 위한 일이거든. 저들을 경성 안으로 들이는 순간, 정 낭자는 역모의 대죄를 일으킨 죄인이 되겠지.”

진호가 뒤에서 활을 꺼내더니 주복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주복, 남들이 하는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

“진호! 다리가 나으니까, 이제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면서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 하나가 매서운 기세로 성문을 향해 날아갔다.

“공자님!”

진호 옆에 있던 수하가 재빨리 진호를 밀어냈다. 성벽을 넘은 화살이 바닥에 쓸리면서 작은 불씨를 만들었다.

주복이 화살을 쏘자, 성문 위에 있던 위병들도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물러나시오!”

위병들이 소리쳤다.

일순간 바닥에 먼지가 일면서 진안 군왕 일행의 앞으로 화살들이 가지런히 박혔다. 바닥에 꽂힌 채 흔들리는 화살들은 흡사 밤에 피는 꽃처럼 보였다.

주복과 진안 군왕 등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주복, 네가 이러는 게 다 정 낭자를 위한 마음이라는 거, 나도 알아. 난 아니까 굳이 따지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른단 말이지.”

진호는 주복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진안 군왕에게 향해 있었다.

“괜히 오해할라. 진안 군왕 전하께서 반역을 일으켜 경성을 치려는 속셈인 줄 알면 어떡하려고.”

주복이 뭐라 대꾸하려던 찰나, 줄곧 조용했던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오해라고 생각하게 둬서는 안 되지.”

진안 군왕이 허리춤의 향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가 경 공공을 향해 다른 손을 뻗자,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의 동작과 거의 동시에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직 소리가 들려오고, 진안 군왕의 손에서 폭죽 하나가 하늘로 쏘아지며 아름다운 꽃구름을 만들어냈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하늘에 핀 꽃을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이건, 이 형이 특별히 너를 위해 준비한 거야. 이걸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차라리, 평생 쓰지 않기를 바랐는데.

진안 군왕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자, 커다란 두모가 그의 얼굴을 가렸다.

“시작하게.”

갑작스럽게 쏘아 올린 폭죽의 불꽃이 성문의 하늘 위로 펼쳐졌다. 성문 안팎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황궁 방향에서 보이던 오색찬란하고 화려한 불꽃놀이에 비하면, 지금의 불꽃놀이는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불꽃놀이가 더 예쁜지 비교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진호의 표정이 급변했다.

“화살을 쏴라!”

진호가 소리쳤다.

성문의 위병들이 망설였다. 그중 한 명이 진호에게 다가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진 관인, 저분은 진안 군왕이십니다.”

“반역을 도모하는 놈이다. 네놈 눈에는 진안 군왕이 성문을 부수고 쳐들어오려는 게 보이지 않느냐!”

성문을 부숴? 어떻게 부순다는 거지?

위병의 뇌리에 이 생각이 스치던 찰나였다. 성안에서 질주하는 말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성벽 위에서도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이쪽을 향해 모여드는 소리였다.

“늑대 새끼는 거둬 키우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군. 저 늑대 새끼가 일찍이 황성 방위군에도 사람을 심어뒀었다니!”

진호가 냉소를 보였다. 그가 두려운 기색도 없이 호통쳤다.

“어서 전전사 송 대인께 알리거라. 경성의 수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저 역당들에게 똑똑히 알려줘야겠다. 네놈들이 성문을 부순다 한들, 성안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시종들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성문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성문의 위병들도 더는 주저하지 않고 아래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그들이 잠시 주저하는 사이에, 성문 앞까지 바짝 다가온 진안 군왕 일행은 쏟아지는 화살들을 모두 피했다.

진안 군왕 일행은 성문에 바짝 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전하께서…….”

주복이 먼저 정적을 깨트렸다. 고 선생과 경 공공이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이 성문을 부술 수 있으시다면, 제가 황궁까지 가는 길을 호송해 드리겠습니다.”

주복이 말했다.

호송해 주겠다고?

고 선생 등이 놀란 눈으로 주복을 쳐다보았다.

성문 앞으로 몸을 바짝 붙이던 순간, 진안 군왕 일행은 재빨리 손에 든 횃불을 껐다. 시야가 어둑해지긴 했지만, 경 공공과 고 선생은 주복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의 경악한 표정을 똑똑히 보였다.

저 병사들은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아마 알고 싶지도 않을 거야. 재수 옴 붙었다며 속으로 얼마나 욕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해. 저놈들은 성문이 부서지자마자, 전하를 호송하기는커녕 가장 먼저 도망칠 놈들이야. 아니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 상황을 역적을 체포했다는 공으로 바꾸려 들지도 몰라.

고 선생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복은 갑옷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고, 사람들은 주복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피슝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또 한 번의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또 불꽃놀이가 보입니다!”

성문 위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쳤다.

“오늘 도대체 무슨 날이야?”

정월 대보름도 아니고, 중추절 꽃등 놀이도 아닌데, 왜 이리 불꽃놀이가 끊이질 않는 거야!

-배짱-

같은 시각, 경성 밖의 위수(衛戍) 금군 병영 안.

누군가가 헉 소리를 냈다.

“도우후(都虞候: 무관 관직명)! 불꽃놀이가 또 보였습니다!”

군영 앞, 검은 두봉을 걸친 채 회랑 아래 서 있던 한 사내가 수하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주위에 서 있던 병사 일고여덟 명도 불꽃놀이가 펼쳐진 방향을 내다보았다.

“저희가 기다리던 그 불꽃놀이가 맞습니까?”

“벌써 세 번째입니다. 오늘 밤 경성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요?”

“어떻게 저런 방법을 생각해 냈는지.”

“하늘 높이 쏘아 올리는 폭죽은 신호를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방법이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하면서, 화제가 점점 딴 곳으로 흘러갔다.

“조용!”

검은 두봉을 걸친 사내가 호통쳤다. 모두가 일제히 입을 다물자, 불꽃도 서서히 사라졌다. 밤하늘은 다시 고요해지고 동쪽 하늘에서는 푸른빛이 어렴풋하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사내가 호통을 친 마당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대인, 혹시, 그 신호입니까?”

누군가가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도우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내가 그때 보았던 불꽃놀이가 맞아.

도우후는 일전에도 그런 불꽃놀이를 본 적이 있었다. 정찰과 탐색이 주된 업무인 척후로 오랜 세월을 지낸 도우후에게는 한 번 본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도우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대인, 경성에 정말 무슨 일이 난 걸까요?”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우후가 다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승포 장군이 서북으로 떠나기 직전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자네 말은, 경성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건가?”

주복은 함께 서북으로 돌아가자는 종 장군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경성에 큰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누이의 신변에 위협이 있을 테니 자신은 누이를 지키기 위해 경성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종 장군은 젊은 나이이지만, 과감한 행동력과 특출난 결단력으로 서북의 경략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릴 적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과거가 있는 사람인지라, 눈치가 빠르고 영민하며 용맹하기도 했다. 처음 주복이 경성에 남겠다는 이유를 들었을 때, 도우후는 그가 죽기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사내라며 비웃었지만, 종 장군은 단번에 요점을 짚어 주복에게 되물었다.

“바보 군주에 힘없는 노파, 권력이 막강한 외척과 보정 대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난세가 되지 않는 나라가 몇이나 있었습니까? 사실 다들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자기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여겨 안일하게 보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누이는 진안 군왕과 혼인했습니다. 만에 하나 조정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성에 있는 종친인 진안 군왕은 필시 벼랑 끝으로 내몰릴 겁니다. 그러니 저는 누이가 경성에 있는 한, 경성에 남아 누이를 지켜야만 합니다. 누이가 안전하게 경성을 떠나면, 소인은 그때 장군의 뒤를 따라 서북으로 가겠습니다.”

주복이 말했다.

“두 사람의 정이 참으로 애틋하구나.”

종 장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멀쩡한 사내대장부가 공을 세우고 포부를 펼치기도 전에 사랑 타령 먼저 하고 있다니.”

종 장군이 주복을 비웃었지만, 주복은 창피하거나 화가 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인, 미안하다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주복이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물었다.

“미안하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 한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후회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일을 겪었고, 그 후회스럽고 괴로운 감정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러니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을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주복이 스스로 대답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랑 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군. 좋아하던 사촌 누이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게 뼈저리게 괴롭다는 말이겠지.

도우후는 비웃는 표정을 드러냈지만, 종 장군은 웃지 않았다.

“자네의 누이가 진안 군왕에게 시집간 그 정 낭자인가?”

종 장군이 묻자, 주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앞에서 사람들에게 글씨 연습하는 것을 보여 준 그 정 낭자?”

“무원산 술을 빚어 무원산 형제들을 유명하게 만든 그 정 낭자?”

“불꽃놀이 하나로 이무에게 돌포탄을 만들 영감을 준 그 정 낭자?”

“폐하께 신비궁을 바쳤던 범 군감의 누이인 그 정 낭자?”

종 장군이 묻는 말마다, 주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후는 놀라움에 입이 떡 벌어졌다.

종 장군께서 주복의 사촌 누이를 이렇게 잘 알고 계시다니. 이다음엔 또 뭘 물으실까?

종 장군은 더는 묻지 않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경성에 남아라.”

그렇게 주복은 종 장군의 허락을 받아냈다. 게다가 종 장군은 주복에게 경성 방위 부대를 움직일 수 있는 병부(兵符)와 도우후를 주복에게 남겨 주었다.

“방청(龐靑), 주복이 자네를 필요로 할 때 꼭 좀 도와주게나.”

종 장군이 웃으면서 도우후의 어깨를 세게 쳤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도우후는 어깨가 아파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회상하던 도우후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잡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 바로 종 장군께서 말씀하신, 내가 필요한 때로구나.

경성에 무슨 일이 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야밤에 불꽃놀이가 연달아 세 번이나 벌어질 리 없어.

경성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는 수하의 질문에 도우후가 말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마당 안의 사람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도우후와 함께 있는 이들은 모두 오랜 시간 병사들을 이끌었던 노장이었다. 수년간 경성을 방위한 그들은, 경성에 무슨 일이 났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그럼, 대인, 하실 겁니까, 하지 않으실 겁니까?”

누군가가 이 질문을 꺼내어 정적을 깨트렸다.

이 일을 하느냐, 마느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처자식이 있고, 관직에 있는 몸이었다. 성공하면 공신이 되지만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이러한 일은 결코 애들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질 경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자신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가족들, 친지들, 주위 사람들까지 한 번에 역적으로 몰릴 게 자명했다.

이 일을 해, 말아?

도우후는 종 장군의 힘에 밀려 옆으로 쓰러질 뻔했다.

“대인.”

아픔에 오만상을 찌푸리던 도우후가 종 장군에게 물었다.

“소생은 장군을 따라 여기까지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당연히 주저하지 않고 합니다. 그러나 소생에게 남을 도우라고 하신다면, 소생이 그 사람을 도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으면 합니다.”

종 장군께서 언제부터 진안 군왕의 사람이 된 거지? 설마 진안 군왕이 정말로 뭔가를 도모하고 있는 건가?

진안 군왕을 탄핵하자는 유림과 언관들의 말이 나온 것도, 정말 뭔가 있어서인가?

“진안 군왕?”

종 장군이 웃음을 터트렸다.

“군영에 그의 사람이 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진안 군왕의 일이지, 나와는 무관한 일일세. 나 종승포는 그 누구의 사람도 아니야. 단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중 하나일 뿐이지. 나는 나라에 목숨을 바쳤으니, 당연히 나의 본분 또한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야.”

종 장군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종씨 가문은 대대손손 전장의 장수로 살아왔네. 살아도 전장에서 살고, 죽어도 전장에서 죽었지. 그런 우리의 목표는 오직 단 하나뿐이었어. 나라를 위해, 나라를 지키는 것. 말이 쉽지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지. 우리처럼 최전방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는 자들만이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어.

방청, 말편자 하나로 우리 서북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해졌는지는 자네가 누구보다 더 잘 알 거라 믿네. 신비궁 덕분에 우리 병사 한 명이 열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도 아주 잘 알 것이야. 그리고 돌포탄. 비록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발석거 열 대를 서북으로 보냈고, 아직 실전에 쓰이지 않았기에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군감에서 봤던 돌포탄 시연을 떠올려보게. 돌포탄 한 대로 얼마나 살벌한 광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자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잖나.

방청,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절대 그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되네.

그러니 그 사람은, 우리가 꼭 지켜내야만 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뭐 있겠어?

도우후는 심호흡을 깊게 한 번 한 뒤, 마당에 서 있는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경성에 일이 생겼으니, 당연히 가 봐야지.”

도우후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비장하게 말했다.

결국 하기로 마음먹었군.

다들 도우후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주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선 줄이 잘못되었다가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텐데.

“우리가 누구인가?”

도우후가 마당 안의 사람들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멈칫했다.

“위수군입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위수군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바로 경성을 지키기 위해서지. 경성에 일이 생겼으니, 우리는 당연히 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야.”

우리는 위수군의 사명과 본분을 지키기 위해서 가는 것이지, 어떤 개인의 사사로운 일을 해결하려고 가는 게 아니다. 본분에 충실한 게, 질책받을 일은 아니잖나?

“명을 따르겠습니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늑대 새끼를 잘못 키웠구나.”

진호가 냉소를 지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불꽃놀이를 신호로 써서 성문 안팎으로 지원군을 요청하다니.”

“공자님, 그 자식들이 도망쳤습니다!”

수하가 외쳤다.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문을 쳐다보았다.

성문을 막는 나무 지지대가 막 세워지자마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병들에게 붙잡혀 있던 감문관 두 명이 발버둥을 치면서 위병들을 밀쳐냈다. 나무 지지대를 설치하느라 부산스러워진 틈을 타, 감문관 중 한 명이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죽어라.”

진호가 활시위를 당겨서 감문관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문을 열어라!”

감문관이 있는 힘껏 소리치면서 성문 빗장에 손을 걸쳤다. 그때, 진호가 쏘아낸 화살이 날아오더니 그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바로 그때, 거대한 무언가가 성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문관의 손에 걸쳐져 있던 빗장이 거대한 진동 때문에 더욱 옆으로 밀려났다.

“제기랄! 저놈들이 사전에 손을 쓴 탓에 성문이 굳게 닫혀 있지 않았어!”

진호가 소리쳤다.

경성의 성문은 다른 곳들보다 방위 업무의 강도가 낮았다.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검문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어쩔 땐 문을 잠글 때도 대충 닫는 시늉만 할 때도 있었다. 경성은 일 년 내내 사람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고, 천자의 황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경성 안팎으로 금군 병사 이십만 대군과 순성갑기, 관아 관졸 등 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경성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호는 조금 전 자신이 빠르고 쉽게 성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올 때를 생각했다. 그건 자신의 사람이 준비해 둔 덕이었다. 자신에게 가능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공자님, 누군가가 성문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수가 적지 않습니다.”

뒤쪽 큰길가를 돌아보던 수하가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동시에, 멀리서 북과 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가 적지 않다고? 부윤 대인께서 가지고 계신 병력도 만만치 않다. 누가 누굴 겁낼지 어디 한번 해 보자!”

진호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위병들을 데리고 성문 아래로 내려갔다. 이때, 문이 부서질 듯한 쾅 소리가 들리면서 성문이 열렸다.

고 선생의 예상대로, 주복과 함께 있던 병사들은 성문이 열리는 순간 잽싸게 말을 타고 다른 쪽으로 도망쳤다.

도망갈 테면 도망가라지. 우리 사람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등에 칼이 꽂히는 것보다는 나아.

그때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화살 소리가 들려오면서, 성문을 힘껏 밀던 진안 군왕의 시종 두 명이 바닥에 쓰러졌다. 총 여덟 명이었던 진안 군왕 일행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여섯 명으로 줄었다. 주복까지 합하면 지금은 총 일곱 명의 사람들이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문틈 사이를 들여다보니, 족히 열 대는 넘는 쇠뇌가 바닥에 설치된 것이 보였다. 지금 억지로 성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죽음을 자초하는 꼴이 될 터였다.

“전하, 잠시 뒤로 물러나 계시지요.”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의 앞을 막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때, 누군가가 성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두 시종이 열어낸 문틈 사이에 멈춰 섰다.

그는 거대한 바위처럼 성문 안팎의 시야를 차단하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힘껏 활시위를 당겨서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조준했다.

“주복, 물러나라.”

진호가 말했다. 주복 또한 진호를 쳐다보면서 똑같이 말했다.

“진호, 물러나라.”

두 사람은 누구 하나 비켜서지 않고, 활시위를 당기며 서로를 조준하고 있었다. 진호의 등 뒤에서 말에 박차를 가하는 소리와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옆에 있던 수하가 고개를 돌려서 상황을 살피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진안 군왕 일행을 성문 밖으로 몰아내지 않는다면, 뒤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성문 앞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성문이 뚫리는 건 한순간이리라.

“주복! 물러나라고!”

진호가 목청을 높였다. 주복 또한 뒤지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진호! 네가 물러나라!”

짧은 숨을 뱉는 찰나, 두 개의 활시위가 동시에 떨렸다. 서늘한 빛을 내뿜는 화살 두 개가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내 다리 두 개가 네 다리 하나만 못할까!”

거리에서 먼저 부딪혀 놓고,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년이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쳤다.

“활쏘기를 겨뤄서 지는 사람이 손자 노릇 하기다!”

공주부 진씨 가문의 절름발이는 어릴 때부터 경성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그래서 진호는 경성에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은 진호가 공주부 진씨의 절름발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지, 씩씩대면서 죽어도 사과하지 않겠다고 우기고 있었다.

진호가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어디 한 번 겨뤄 보지. 괜히 나랑 친해지려고 일부러 져주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진호가 지팡이를 짚으면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서서 승부욕이 불타는 얼굴로 힘껏 활시위를 당기는 소년을 웃으며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화살이 진호의 귀를 스치고 그의 두모에 꽂혔다. 화살의 힘이 어찌나 셌는지, 진호는 고개는 물론이고 몸까지 뒤로 밀릴 뻔했다.

똑바로 서야 해!

나는 예전에 지팡이를 짚고 있던 그 절름발이가 아니야. 이제 혼자서도 똑바로 설 수 있다고.

진호가 몸을 살짝 휘청이고는 재빨리 중심을 잡고 서서 주복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거대한 바위 같던 사내가 뒤로 쓰러졌다.

쓰러졌어?

바위가 땅에 떨어지는 듯한 쿵 소리가 들리고, 땅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쓰러졌어?

저 자식이, 쓰러졌다고?

쓰러졌어?

성문 앞을 막아서는 거대한 바위 같던 그 사내가 쓰러졌어?

진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시공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주복이 쓰러지던 찰나, 진호 주위에 서 있던 위병들은 그런 진호를 뒤로하고 성문을 닫기 위해 우르르 몰려갔다.

진안 군왕 일행은 쓰러진 주복을 재빨리 성문 밖으로 끌어내고, 바닥에 있던 시종 두 명의 시체를 성문 틈 사이로 끼워 넣었다. 진안 군왕의 시종 두 명이 틈 사이로 활을 들고 연이어 화살 몇 발을 쏘아내자, 성문을 향해 달려오던 위병들이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공자님.”

진호는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수하가 진안 군왕 일행이 쏘아내는 화살을 피하고자 진호를 뒤로 끌어냈다. 수하가 너무 세게 당기는 바람에 진호는 뒤로 넘어지다시피 몸을 휘청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호의 귓가에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공자님, 저들이 이쪽으로 치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공자님, 부윤 대인의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수하들의 외침과 말소리는 진호의 귓가를 스치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성문을 향해 있었다.

진안 군왕 일행은 이때다 싶어서 성문을 활짝 열지 않고, 두 시종의 시체를 성문 사이에 낀 채 두 사람이 겨우 설 정도로 좁게 열린 틈 사이로 번갈아 가면서 쉼 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진호의 위병들이 쉽사리 성문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던 차에, 성 안쪽에서 달려온 진안 군왕의 지원군이 성문 앞에 도착해 진호의 사람들과 대치 상황을 이루었다.

“가자.”

진안 군왕이 말했다.

사람들이 주복을 끌어다 진안 군왕의 말 위에 태우고, 화살이 꽂힌 곳을 피해서 두봉 두 개로 주복을 진안 군왕의 앞에 단단히 묶었다.

“전하, 성 밖의 지원군이 도착한 뒤에 가심은 어떠신지요?”

고 선생이 물었다.

지금 성문 안쪽에 일부 지원군이 도착하긴 했지만, 사방에 깔린 경성의 순성갑기에 비하면 그 수는 현저히 적었다. 이대로 전진했다가는 다시 오지 못할 길을 가는 꼴이 될 게 분명했다.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네.”

진안 군왕이 말했다.

“그럼 주 공자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지요.”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차피 지금의 내 몸으로는 활을 쏠 수도, 무거운 검을 들 수도 없다. 그러니 괜히 다른 사람의 멀쩡한 손을 낭비할 거 없이, 내가 주복을 보호하도록 하지.”

진안 군왕이 이미 말 위에 올라탄 경 공공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가자.”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칼을 뽑아 들고 앞장서서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성문 틈 사이에서 화살을 쏘던 두 시위가 재빨리 자리를 비키자, 경 공공이 먼저 성문을 뚫고 들어갔다. 두 시위는 눈 깜빡할 사이에 말 위로 몸을 날리고 진안 군왕의 양옆에서 그를 호위하며 성안으로 돌진했다.

성문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성문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선두로 달리는 사람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며 앞쪽에 있던 병사들의 목을 베자, 주위에 있던 위병들은 깜짝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공자님!”

시종이 진호의 어깨를 세게 잡고 그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병사들의 피가 그대로 묻어 있는 칼날이 진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성문을 뚫고 들어온 진안 군왕 일행은 금세 성문 안쪽의 지원군과 합류하여 더욱 맹렬한 기세로 위병들의 포위를 뚫고 거리 위를 달려나갔다.

“저들이 성문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진호의 귓가에 수하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자식이 지나갔어.

진호가 손에 쥐고 있던 활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진안 군왕의 앞에 묶인 채로 자신의 눈앞을 지나가는 주복을 쳐다보았다.

그 자식이 지나갔어. 너무 빨리 지나가기도 했고, 사람들이 내 앞을 가려서 자세히 보질 못했어.

그 자식, 그 자식은 어떻게 된 거지?

주복!

“공자님?”

수하가 잠깐 고개를 돌리는 사이, 진호는 말 위로 몸을 날리고 진안 군왕 일행을 뒤쫓아 갔다.

“어서, 어서 공자님을 쫓아가라!”

수하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저쪽이다!”

성문 앞의 소란에 비해 황궁 안은 조용했다. 이따금 어딘가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외침이 들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렁이는 횃불이 궁전 주위를 환하게 밝혔고, 칼과 창, 그리고 활을 손에 든 금위군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 있다는 거야?”

“조금 전에 분명히 보았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서로를 쳐다보던 병사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귀신도 아니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그것도 궁에 몇 번 온 적도 없는 여인이 수년간 황궁을 호위한 금위군의 수색을 피해 가다니.

자객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황궁에는 큰 나무나 바위 같은 것들을 일절 두지 않는데, 그 여인은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정말 이상하네.

“다시 샅샅이 찾아보아라! 날개가 달리지 않는 한,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금위군이 소리쳤다.

깊은 황궁 안의 하늘색은 경성의 다른 곳보다 더욱 어두워 보였다. 이때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가, 재빨리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 끝을 맞대며 무언가를 계산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별빛이 희미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곧 밝아질 시간이었다.

세상은 하나의 풍수진(風水陣)과 다름없다. 산과 강은 저마다 향하는 곳이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정해진 자신의 위치가 있다. 더욱이 황궁은 풍수가 모여 대성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다. 풍수에는 눈이 있고, 눈이 있기에 물이 끊이지 않는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정교랑이 손가락을 움직인 다음, 고개를 들고 속으로 이 생각을 읊는 데는 아주 찰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교랑은 곧바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려 소리 없이 뛰어갔다.

정교랑이 떠난 자리에 곧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횃불이 밝혀졌다.

“여기에도 없다니!”

“다시 찾아라! 다시!”

황궁 밖, 말을 타고 달려온 금군 병사들이 황궁 벽을 따라 차례로 멈춰 섰다. 금군 병사들은 황궁의 사방을 모두 포위하고 무기를 들어 경계 태세를 갖췄다.

선덕문 앞에서는 수하의 보고를 받은 경조 부윤이 몸을 돌려 조정 대신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대인.”

부윤이 외쳤다. 대신들 사이에 있던 진 시강이 고개를 돌려 부윤을 쳐다보았다.

“황성을 포위했습니다.”

부윤이 말하고는 다른 대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부윤의 지위는 진 시강보다 낮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진 시강에게 가장 먼저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보고, 주위에 있던 대신들은 부윤과 진 시강이 어떠한 관계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고능준 쪽에 서 있던 부윤은 지금 진 시강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진 시강이 무슨 말로 부윤을 설득했는지 모르겠군.

경성의 방위는 두 곳에서 담당하고 있다. 한 곳은 황성사고, 다른 한 곳은 경조부였다. 이 두 곳은 본디 고능준이 장악하고 있던 터라, 고능준은 경성에서 겁 없이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금은 경조부의 부윤이 진 시강 쪽으로 붙게 되어 오늘의 상황이 더 위험해지지는 않은 터였다.

조정 대신들이 큰마음 먹고 오밤중에 달려 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진 대인께서 미리 방비하신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몇몇 대신들이 말했다. 진 시강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이런 일은 다행이라 할 게 못 되지요.”

부윤도 서둘러 진 시강을 따라 탄식했다. 과거 고능준의 사람이었다는 낙인이 찍혀있기 때문에, 그는 대신들이 자기를 치켜세워주는 상황이 아직 부담스럽기만 했다.

“결국엔 역적놈들의 바람대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부윤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부윤의 말을 들은 주위 대신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황후마마.”

진 시강이 황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황후는 체면을 내던진 채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었다. 황후의 예복은 불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정갈하게 올려 묶었던 머리카락도 흐트러져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후의 궁녀도 심한 부상 때문에 황후의 예복과 머리를 손질해 줄 겨를이 없었다.

장순 등이 황후에게 관저로 가서 쉬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황후는 관저로 가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태후마마와 폐하께서 아직 역적놈들의 손에 잡혀 있는데, 본궁이 어찌 쉴 수가 있단 말이오?”

진 시강이 다가오자, 인장을 손에 꼭 쥐고 있던 황후가 그를 쳐다보았다.

“마마, 태자 전하는 어떠신지요?”

진 시강의 물음에 황후가 비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씨와 진씨가 태후마마의 침궁을 밤낮으로 지키고 있어서, 본궁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오. 다만, 가장 마지막으로 전해 온 소식에 의하면 태자가 칠규(七竅: 사람의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에서 피를 쏟았다고 하더군.”

칠규에서 피를 쏟다니! 그럼 지금쯤이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을 텐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대신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이 야밤에 괜히 목숨을 거는 무모한 짓을 한 게 아니니까.

태자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고능준과 진소에게 무슨 죄를 씌워야 할지도 막막했을 테니.

“이런 빌어먹을 놈들. 어찌 우리의 군주를 해칠 수가 있단 말인가!”

한 대신이 가슴팍을 세게 치면서 발을 구르더니 씩씩대면서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신이 이 궁문을 부수고 들어가야겠습니다!”

그 대신이 보란 듯이 연기를 펼치자, 주위의 다른 대신들이 서둘러 제지하며 진정하라고 다독였다.

“황성은 이미 포위됐으니, 곧 성문을 치고 들어갈 거요. 고정하시오.”

어수선한 궁 문 앞에서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요? 태자 형님께서 해를 입으셨다고요?”

맑고 명랑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온 사람 중에 어린아이도 있었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던 사이, 진 시강은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진 시강의 걸음이 멈춘 곳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누군가가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연평(延平) 군왕,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진 시강이 예를 표하면서 공손하게 물었다.

연평 군왕!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크게 놀라며 마차에서 내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역대 황제들이 황실의 종친을 경계한 탓에, 친왕이나 군왕은 경성에 자주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들은 연평 군왕을 한참을 빤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가 황제와 연배가 비슷한 연평 군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대인.”

서둘러 진 시강의 옆으로 다가간 부윤이 그와 대신들에게 설명했다.

“연평 군왕과 장태(長泰) 국공야께서는 어젯밤에 경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너무 늦은 시간이다 보니, 경성에 왔다는 소식을 전하러 입궐하지는 못하셨지요. 그래서 일단은 역참에서 밤을 보내신 뒤, 날이 밝는 대로 입궐하려 하셨습니다.”

태자의 국혼이 곧 거행될 예정인지라, 조정과 황실은 외지에 있는 종친들을 초청하고 경성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한데 연평 군왕께서 당도하신 시간이 너무 딱 들어맞지 않나? 게다가 아들까지 데리고 오시고.

“거리가 워낙 시끄럽기에, 본왕이 걱정스러워 와 보았소.”

연평 군왕이 대신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궁문 앞의 횃불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만약 주복이 연평 군왕의 지금 모습을 보았더라면, 분명히 그를 알아봤을 것이다. 화려한 색의 비단옷을 입고 옥관을 쓴 중년의 사내에게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존귀한 종친의 기품이 느껴졌다. 하지만 주복이 성문 앞에서 검문할 때만 해도, 연평 군왕은 초라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수염도 제대로 다듬지도 않은 채 누추한 옷을 입은 마부로 변장한 터였다.

“거리가 시끄러웠다고요?”

부윤이 연평 군왕의 말에 대꾸하면서 죄스러운 표정으로 예를 표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이 경성 방위의 경계를 강화했으니, 역적놈들이 거리에서 활개를 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순찰을 돌고 있는 제 병사들이 군왕 전하를 신경 쓰시게 했나 봅니다.”

연평 군왕과 부윤의 막힘없는 질문과 대답을 들은 대신들은 마음속으로 지금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연평 군왕이 경성에 들어온 건 진 시강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경성의 방위가 안정되었고, 성문을 막았으니 다른 종친이 경성 안으로 들어올 리는 만무했다. 이제 남은 일은, 황궁 안에 남은 고능준과 진소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에 성문 위에서 쏘아진 불꽃놀이 두 개는 누군가가 진씨 가문에 보내는 신호였겠지. 고명한 고능준이 진소마저 그의 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이제 모든 게 순식간에 뒤바뀌겠군.

태자는 죽고, 황후는 야밤에 황궁에서 도망쳐 나와 고능준과 진소가 역모를 꾀하여 황제의 유일한 혈통을 시해했다고 증언했다. 태자가 죽은 마당에 황제는 여전히 병석에 누워 있다. 군주의 자리는 단 하루라 해도 비워 둘 수 없는 법, 서둘러 제위를 이어받을 사람에 대해 논해야 했다.

이번엔 다른 선택지가 없어.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는 수밖에는. 어쩐지 공주부 진씨 가문에서 장순을 앞세워 황후마마를 맞이한다 했네.

일이 이렇게 된다면 황후는 장순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 되니, 분명 장순의 말을 따를 것이다. 장순은 본디 양자 입적을 주장해 왔고, 이 자리에 있는 대신 중 대다수도 당초 장순을 따라 양자 입적을 주장한 자들이었다.

놀란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빠른 시일 내로 조정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장차 제위에 오르게 될 군주의 마음속에 탄탄히 자리 잡기 위해, 모든 종친이 경성에 도착한 뒤에 그들을 한 명씩 후보로 거론하기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서 황궁의 변고에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평 군왕의 아들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리라. 오늘 밤의 인연이 군주와 신하 간의 끈끈한 연대를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굴 양자로 입적시킬지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군.

궁 안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후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상할 수 있겠어.

이게 바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참새를 보지 못하고 눈앞의 매미를 잡는 사마귀의 최후구나. 고능준은 피땀을 흘리면서 지금의 모든 것을 계획했겠지만, 그가 했던 치밀한 계획들은 모두 역적이 반란을 도모한 증거가 되어버렸고, 공주부 진씨 가문이 모든 걸 얻게 되었어.

아니지. 진씨 가문이 모든 걸 얻게 되었다기보다는, 이 자리에 있는 대신들 모두에게 공로가 있는 셈이야. 얻을 게 없으면 일찍 일어나지 않는 법이고, 부귀영화는 위험 속으로 몸을 던져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각자 원하는 것을 얻게 될 테지.

연평 군왕과 부윤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각자 마음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연평 군왕이 아들의 손을 잡고 황후에게 다가갔다.

“마마.”

연평 군왕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황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어리지만 영리한 국공야도 서둘러 군왕을 따라 바닥에 꿇어앉아 눈물을 보였다.

“마마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황후가 몸을 일으키고 복잡한 표정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들이 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인데. 지금 이 순간, 종친이 하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이 일을 치밀하게 계획한 자라면 다른 사람이 나타날 기회를 원천차단했을 거야.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사람의 예상을 벗어날 때가 있지.

그 여인이 왔는데, 과연 진안 군왕이 멀리 있을까? 진안 군왕은 이대로 성문 밖에 막힌 채 들어오지 못할까?

궁 앞이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황후에게 향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건 황후의 한마디였다. 지극히 평범한 말 한마디면 충분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황후는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연평 군왕은 어색하게 허리를 굽힌 채로 가만히 있었다.

“군왕 전하, 마마께서 조금 전에 많이 놀라셔서…….”

부윤이 정적을 깨고 재빨리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누가 나서서 수습해줬으니 됐어. 마마께서 조금 전에 많이 놀라셨긴 했을 테니.

연평 군왕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또 한 번 예를 표하려고 허리를 숙였다. 바로 그때,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던 말굽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궁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바닥의 진동과 함께 천군만마가 달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서 어가 위를 내다보자, 연평 군왕도 허리를 펴고 서서 고개를 돌렸다.

횃불을 밝힌 채 달려오는 사람들은 갑옷으로 무장한 차림이었다.

“위수군이오!”

누군가가 외쳤다. 부윤과 진 시강의 안색이 급변했다.

어떻게 위수군까지 움직인 거지?

어떻게 경성 밖에 있던 위수군까지 움직이게 할 수 있냐고!

위수군의 대열이 천천히 양쪽으로 갈라지자, 그 사이에서 말을 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말을 탄 이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진안 군왕께서 위험에 처한 군주를 구하러 오셨소!”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대신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잰걸음으로 나서며 진안 군왕의 앞으로 가서 예를 표했다.

또 장순이잖아?

아, 잘못 짚었군. 공주부 진씨 가문에서 장순까지 설득하지는 못했어. 다들 양자 입적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입적을 염두에 둔 종친은 저마다 다 달라.

진씨 가문과 장순은 같은 파벌이 아닌데, 오늘 밤에만 잠시 협력한 건가? 아니면, 잠시 서로를 이용한 건가?

하여튼 이제는 고능준과 진소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지만, 각자 다시 새로운 줄에 서야 할 때야.

정말 어지러워 죽겠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하느냔 말이다.

대신들이 머뭇거리던 사이, 황후가 진안 군왕을 향해 달려왔다.

“진안, 어서 구해 다오!”

황후가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머뭇거리던 대신들 몇 명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황후를 따라 소리쳤다.

“진안 군왕 전하, 어서 구해 주시옵소서!”

궁 문 앞에서 간간이 대신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 몇몇 대신들은 주저하기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태자를 구한다고? 이 새벽에 위수군을 이끌고 경성을 쳐들어온 것만 해도 충분히 딴마음을 품었다는 의심을 살 만해. 한없이 다정하고 진심 어린 걱정을 하는 연평 군왕이 진안 군왕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데 더욱 적합할 텐데.

진안 군왕은 여전히 주복을 앞에 묶어 두고 있었다. 주복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진안 군왕은 자리에 있던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거대한 선덕문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와 황제 폐하, 그리고 태자 전하께서 간신에게 해를 입으셨다 하여, 본왕이 구해 드리고자 달려왔습니다.”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하고는 손을 들었다 내리는 손짓을 했다.

“공성(攻城)하라.”

공성?

이게, 무슨 뜻이야?

놀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뒤를 따라온 위수군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언가 커다란 것을 앞으로 끌고 나왔다. 사람들이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쾅 소리가 나며 불길이 일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들려왔고, 발에서는 땅의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대한 선덕문에 새카만 연기가 타오르고 불길이 번졌다.

세상에나!

자리에 있던 대신들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저렇게 사나운 기세라니!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더 하지 않고?

굉음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또 한 번 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 전하, 어서 구해 주시옵소서! 진안 군왕 전하, 어서 구해 주시옵소서!”

사람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누군가를 따라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진 시강은 귓가가 웅웅 울렸지만, 몸을 살짝 휘청이고는 중심을 잡고 올곧게 서서 진안 군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진 시강의 안색이 차츰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십삼은 어디 있지?”

진 시강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물었다.

십삼은? 우리 십삼은 어떻게 되었지?

쾅쾅 울리는 굉음은 경성을 진동케 했고, 황궁 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는 조금 전 성문에서 터진 폭죽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금위군 병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다리를 후들거렸고, 궁녀와 내시들은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게 뭐지?”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란 사람들이 소리쳤다.

회랑 아래 서 있던 고능준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이게 바로 군감에서 새로 만들어 낸 돌포탄이라지요.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몇 번을 제작하고 폐기하고를 반복하다가, 끝내 열 대를 만들어서 서북으로 보냈답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이 돌포탄의 위력을 처음 맛보게 되는 게, 황궁에서일 줄이야. 그것도 그대와 내가.”

진소가 고능준의 말을 이었다. 고능준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장순이 사람들을 이끌고 와 황궁을 포위하고, 연평 군왕이 아들을 데리고 야밤에 상경하여 황후를 위로하고, 위수군이 돌포탄으로 황궁을 공격하다니.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황당한 일을 우리가 겪게 되었군요. 분명 역사서에 굵직한 한 획을 그을 겁니다.”

진소가 힘없이 웃었다. 횃불들은 여전히 밝게 황궁을 비추고 있었지만, 불안한 기운이 황궁의 하늘을 엄습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먹을 갈아 준 역적 간신 꼴이 되었군.”

진소의 말에, 고능준이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사서에 어떻게 남을지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지요.”

고능준이 웃음을 거두고 간악한 얼굴로 이를 부득 갈았다.

“누가 누구를 위해 먹을 갈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진소가 실소를 터트렸다.

“고 대인, 대세는 기울어진 것 같소만.”

“아직이외다.”

고능준이 고개를 돌리고 진소를 쳐다보았다. 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입니다. 끝까지 가 보기 전까진, 아직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능준이 앞을 가리키면서 목청을 높였다.

“황후라고 해서, 헛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황후가 평소 태후마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태자 전하를 음해했다고 황후가 주장하면, 우리가 음해한 게 됩니까? 황후가 태자를 음해하고 도망친 거면요?

세 치 혀가 있는데 누군들 말을 못 한답니까?”

고능준이 다시 진소를 쳐다보았다. 진소는 잠시 넋이 나간 얼굴로 고능준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고 대인.”

진소가 고능준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하고 한숨을 쉬었다.

“늘 고 대인을 무시해 왔는데, 지금 보아하니 내가 단단히 틀린 것 같소. 나는 정말로 고 대인보다 못한 사람이오”

고능준이 진소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비꼬고 계신다는 거 잘 압니다. 그러면 뭐 어떻습니까? 체면이요? 남의 시선에 연연하며 체면만 쥐고 살다가는, 결국 자신의 체면도 지키지 못하게 될 겁니다. 자신의 체면을 남의 손에 맡기는 꼴이니까요.”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암, 맞는 말이고말고.

“그 점에선 내가 고 대인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지. 그러니 나머지 일은 고 대인에게 맡기겠소.”

진소가 피곤한 기색으로 몸을 돌려서 전각 안으로 향했다.

“나는 태자 전하와 함께 있겠소. 고 대인은 태후마마를 모시고 나오시구려. 궁문이 뚫렸으니, 괜히 저항하지는 마시오. 기어코 황궁을 피로 물들여야 직성이 풀리겠소?”

진소의 말을 들은 고능준은 힘없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황궁을 피로 물들이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무기를 손에 쥐고 천자가 계신 곳에 쳐들어온 저놈들이지요. 오늘은, 그 누구의 손도 깨끗하지 못할 겁니다.”

맞소. 그 누구도 깨끗할 수 없지. 다 더럽혀졌어. 모두가 다.

진소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의 돌포탄 소리에 놀란 내시와 궁녀들이 모조리 밖으로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바깥에서 누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였다. 태자의 시중을 들던 자들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삽시간에 태자는 홀로 남겨졌다.

침상 위에는, 새 옷을 입은 태자가 깨끗한 얼굴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아직 발그레한 볼 때문에 태자는 곤히 잠든 어린아이 같았다.

그 여인은 태자를 치료한 게 아니라, 태자를 위해 상례(喪禮)를 치른 거였어. 태자의 얼굴과 몸을 닦고, 일곱 구멍을 닫은 뒤, 향을 피워 영혼을 기렸군.

진소는 침상 옆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세 번 했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황제의 침궁이 있는 곳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신은 무능하옵니다.”

진소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내시가 재빨리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떴다.

“안에서 울고 계셨습니다.”

어린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자, 고능준은 같잖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강직하다는 문신들은 꼭 저렇게 콩알만 한 배짱을 가지고 있지 뭡니까.”

“그자를 상관할 때가 아니야. 이제 어떡하면 좋겠나?”

태후가 울면서 말했다.

“마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바깥에 있는 놈들이 청군측(淸君側: 군주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숙청한다)이라는 명목을 들이대면서 궁문을 부쉈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울다 만 태후가 눈을 부릅뜨고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고 대인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돌포탄 소리 두 번 울리고 나자, 선덕문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우후의 힘찬 호령과 함께, 선덕문을 향해 돌진한 위수군이 부서진 성문을 활짝 열었다.

자리에 있던 대신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횃불과 불길에 둘러싸인 황궁을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게 결정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다.

현장에서 격변을 목도한 대신들은 앞으로 역사서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바로 오늘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깊이 심호흡을 한 뒤,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대신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황후를 에워싸고 황궁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말에서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진안 군왕이 대신들과 황후를 지나쳐 황궁 안으로 달려갔다.

진안 군왕이 먼저 움직이자, 그의 뒤에 있던 위수군들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진안 군왕의 뒤를 따랐다. 무기를 든 무장과 병사들이 자신들을 제치고 먼저 황궁 안으로 달려가자, 조정 대신들은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러면 안 좋을 텐데.

“황후마마!”

장순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황후에게 다가갔다.

“황궁 안에 있는 역적들을 조심하십시오! 군왕 전하께 먼저 현장 정리를 맡기시지요!”

장순이 외쳤다.

또 저놈이 한발 빨랐네.

“황후마마를 보호하라!”

“황후마마, 천천히 가시옵소서!”

궁문 앞에서 대신들의 외침이 일사불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궁 안으로 몰려 들어간 탓에, 궁문 앞에는 어느새 몇 사람밖에 안 남아 있었다. 진 시강, 부윤, 그리고 연평 군왕 부자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들이 갑옷으로 무장한 위수군의 앞에 서 있는 모습은 더없이 괴이해 보였다.

다행히도 위수군은 진 시강, 부윤, 그리고 연평 군왕 부자를 체포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부윤이 천천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우리가 체포될 이유는 없지!

경성의 방위를 담당하는 경조부 부윤으로서, 시기적절하게 궁문 앞으로 달려와 황후를 보호했을 뿐이고, 진안 군왕도 왔는데 다른 군왕이라고 못 올 이유는 없었다.

“이곳을 단단히 지키거라!”

부윤이 주위에 있던 자신의 포졸들을 향해 호통쳤다. 포졸들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인, 군왕, 우리도 서둘러 들어가야 합니다.”

부윤의 말에 연평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평 군왕이 표정을 가다듬더니 아들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갑자기 진 시강이 몸을 돌리고 궁문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부윤이 잽싸게 진 시강의 소매를 붙잡았다.

“진 대인,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부윤이 새하얘진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이렇게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경우가 어딨어? 지금 여기서 달아나 버리면, 도둑이 제 발 저려서 도망친 꼴이 되잖아!

퉤, 퉤! 아니야. 제 발 저릴 게 뭐 있다고!

감히 누가 우리에게 도둑 같다고 할 수 있겠어? 양자 입적을 할 종친이, 꼭 진안 군왕이어야만 해?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정해진 것도 없는데, 왜들 벌써부터 진안 군왕을 군주로 섬기는 거야?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도둑놈이지!

“십삼, 나는 십삼을 찾으러 가야겠소.”

진 시강이 부윤의 손을 힘껏 내치고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십삼?

진호는 연평 군왕 부자의 마중을 나가 경성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연평 군왕 부자만 안으로 들여보내 놓고, 진호는 성문 앞으로 지원군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내왔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자신이 직접 성문을 지키겠노라면서.

그리고 진호가 우려하던 그 무슨 일이 기어코 벌어졌다.

혹시, 성문을 지키고 있던 진호가 잘못됐나?

“대인, 대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일단 궁으로 들어가서 이번 일에 대해 확실하게 결단을 내리는 일입니다. 이대로 자리를 비우시는 것은, 훗날 누군가에게 공격당할 칼자루를 남겨 두는 셈입니다. 십삼공자는 한 사람이지만, 진 대인께서 책임지고 계신 건 공주부 진씨 가문이지 않습니까. 대인께 진십삼 하나만 달린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진씨 가문뿐이 아니라, 자칫하면 진씨 일족 전체가 멸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돌아가는 낌새를 보아하니 진안 군왕이 황자로 양자 입적되고 곧 태자로 책봉된 후 제위에 오르는 것은 기정사실인 듯했다. 이런 때에 조심성 없이 행동했다가는 앞으로 진씨 가문의 나날은 결단코 순탄치 않으리라.

진 시강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부윤을 쳐다보았다. 밝은 횃불 아래, 진 시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칼자루? 칼자루가 뭐가 중요하다고. 꼭 칼자루를 쥐고 있어야만 가문이 유지되는 건 아니오. 이 일을 감행할 배짱이 우리 진씨 가문에 있었으니,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배짱도 있어야겠지.”

진 시강이 말을 마친 뒤,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문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나중 일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다.

부윤이 경악하여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내 안도감이 스쳤다.

거 잘됐군.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든 잘못을 진씨 가문이 떠안으면 되겠어.

“황후마마를 보필하라!”

부윤이 소리치며 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궁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위수군이 돌포탄에 놀라 혼비백산하는 금위군을 상대하는 모습은 흡사 양 떼 안으로 뛰어든 호랑이와도 같았다.

금위군 중 저항하는 자는 즉살하고, 머리를 감싸 안은 채 투항하겠다는 자들은 옆으로 줄을 세웠다. 사방으로 도망치는 금위군은 모두 위수군에게 쫓기고 있었다.

홍수처럼 밀려든 위수군이 금세 황궁의 곳곳을 장악하고, 양쪽으로 갈라져 진안 군왕에게 길을 터주었다.

“정방!”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뛰어오던 진안 군왕이 소리치자,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의 뒤를 바짝 따르던 고 선생은 깜짝 놀랐다.

궁 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고 선생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난생처음으로 황궁에 발을 들인 게 감격스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 선생은 오늘 황궁 안으로 디딘 첫 발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의 뒤를 따라서 궁으로 들어오고 있는 대신들도 오늘 밤이 어떤 날인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도 오늘 같은 날을 상상하고 꿈꿔 오긴 했지만, 감히 그런 생각을 내비칠 수도, 발설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고 선생은 머리가 어질해졌지만, 살아평생 오늘만큼 정신이 맑은 적은 없다고 느꼈다.

지금 이 순간, 한 걸음도 놓쳐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의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야.

고 선생이 그런 생각을 하며 힘껏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숨을 내뱉으려던 찰나였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이름을 외쳤다.

정방? 정방이 누구지?

정이라면……. 아, 왕비를 찾는 건가?

아니, 지금은 ‘황제 폐하, 태후마마, 태자 전하, 신이 구해 드리고자 달려왔습니다’와 같은 말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왕비를 찾아? 여기가 신방이야 뭐야?

숨을 내뱉던 고 선생이 연신 기침을 해댔다.

고 선생이 서둘러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 그에게 상황 파악을 해야 한다고 충언하려던 차에, 진안 군왕은 아예 두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더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정방! 정방, 어서 이리 와요!”

진안 군왕의 외침을 듣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갈라진 목소리로 있는 힘껏 소리치는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황궁 안에 울려 퍼졌다.

정방?

대신들의 표정도 고 선생만큼 이상해졌다.

“진안 군왕비가 고능준과 진소의 허위 전갈로 인해 궁에 들어와 있소. 지금은 군왕비의 생사조차 알 수 없고.”

황후가 눈물을 훔치며 설명했다.

아, 그 신의 낭자를 부르는 거구나.

부부의 정이 깊은 건 이해할 수 있겠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부인을 찾는 건 좀 아니지. 사랑 타령보다 충효가 더 중요할 때인데.

“소리쳐 부르거라.”

진안 군왕이 좌우에 있던 위수군을 향해 명령했다.

“정방, 어서 이리 와서 목숨을 구해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해 크게 외쳤다.

“정방, 이리 와서 목숨을 구하십시오!”

위수군이 일제히 진안 군왕을 따라 소리쳤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황후는 그 외침을 듣자 코끝이 찡해졌다. 곧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왜 눈물이 나는 거지? 조금 전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는데.

갈라진 목소리로 있는 힘껏 왕비의 이름을 외치는 진안 군왕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흐르다니.

이토록 마음이 쓰라린 이유를, 눈물이 나오는 이유를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구나.

“정방, 이리 와서 목숨을 구하십시오!”

점점 더 커지는 위수군의 목소리가 들리던 찰나, 앞쪽에서 도망치는 금위군 사이로 누군가가 돌연 나타나더니, 금위군을 쫓는 위수군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오셨습니다!”

앞을 내다보던 경 공공이 소리치면서 손으로 달려오는 사람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경 공공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일렁이는 횃불 아래, 도망치는 금위군과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추격하는 위수군 사이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 하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여인은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재빠르게 무리를 뚫고 나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안 군왕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여인이 튀어나오자, 위수군들은 깜짝 놀랐다. 진안 군왕을 따라 한 이름을 쉼 없이 외치긴 했지만, 정말로 누군가가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빠르게 위수군의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고능준 쪽의 사람이라면 분명 어딘가로 도망치기 바빴을 테고, 우리 쪽 사람이라면 필시 내궁에 갇혀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몇 번 불렀다고 해서 저리도 멀쩡하게 걸어 나올 수 있는 거지? 궁에 있는 금위군이 한두 명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곳을 자유롭게 거니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넋이 나간 위수군이 앞을 내다보던 사이, 여인은 벌써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은 저 여인이 어떻게 병사들을 뚫고 이곳까지 온 건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주복.”

진안 군왕이 주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가슴에 화살을 맞았습니다. 호흡은 있지만, 몸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어요.”

진안 군왕의 뒤를 바짝 따라온 시종들이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주복을 꽁꽁 묶은 두봉을 풀었다. 정교랑이 손을 뻗자, 시종들은 조심스럽게 주복을 부축해서 말에서 내려오게 했다.

말에서 내린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몸 옆에 내려놓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정교랑은 아무런 표정 없이 몸을 홱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따라와.”

주복을 부축하고 있던 두 시종이 망설임 없이 정교랑을 따라갔다.

“몇 사람 더 데려가는 건 어때요?”

진안 군왕이 소리쳤다. 정교랑은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젓고는 광장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진안 군왕은 제자리에 선 채로 정교랑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도망치던 금위군들이 더는 보이지 않자, 광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진안 군왕에게 향했다.

“성에 들어올 때 다쳤습니다.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황후 등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황후 등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상식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지 않나?

이렇게 다급하게 황궁 안으로 쳐들어온 이유가, 저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사람들이 속으로 의아해하던 찰나, 진안 군왕이 입을 열었다.

“황궁에 들어왔으니, 속히 황실을 구해야지요.”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진안 군왕께서 무엇을 위해 황궁 안으로 들어왔는지를 잊지 않으셨군요.

“간신을 벌하고, 황실을 구하시옵소서!”

“태후마마.”

“황제 폐하, 태자 전하!”

대신들이 제각각 흥분하거나, 비통해하거나, 혹은 분개하며 외쳤다. 그들은 황후와 진안 군왕을 에워싸고 태후궁을 향해 달려갔다.

대신들이 몰려가기 전부터 이미 태후궁 앞에 도착해 있던 위수군은 태후궁의 금위군과 대치 중이었다. 위수군이 궁 안으로 쳐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본 대신들이 앞뒤를 다투며 소리쳤다.

“다들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간신을 끌어내고 태후마마를 보호하라!”

위수군이 황후와 진안 군왕을 위해 길을 터주었다.

“황후마마, 태후마마께서 태후궁 전각 앞에 계십니다.”

위수군의 수령이 황후에게 다가가서 예를 올렸다. 황후가 멈칫했다.

황후는 조금 전 황궁을 뛰쳐나가면서 고능준과 진소 두 사람이 반역을 꾀하여 태자를 해치고 태후를 협박하고 있다고 외쳤다. 하지만 다들 내심 속으로는 태후도 이 사태에 관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간신이 역모를 꾀하여 태후를 협박한 일과 태후가 역모에 가담한 일의 파급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들 속으로는 뻔히 아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황궁에서 가장 존귀한 이는 태후여야 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 내가 아까 태후가 역모를 꾀했다고 외쳤다면, 대신들 또한 이리 빠르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테니까.

더구나 지금 태후의 존엄을 지켜 준다 한들 고능준을 제거하고 나면, 태후는 허울뿐인 칭호로 남을 것이야.

“마마.”

황후가 흥분한 표정으로 태후를 부르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장순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가자, 대신들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은 맨 뒤에서 따라갔다.

태후궁 안은 환히 밝혀져 있었다. 남아 있던 금위군은 모두 이곳으로 집결하여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노려보았다.

회랑 아래로 낮은 의자가 놓여 있고, 조복을 갖춰 입은 태후가 담담한 표정으로 그 위에 단정히 앉은 모습이 보였다. 고능준은 태연한 모습으로 태후의 뒤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황후와 대신들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황후였구려.”

태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이 늙은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게 그리도 힘들어서 이렇게 대신들과 금군들까지 대동했는가? 이 늙은이를 그리도 급히 황천길로 보내고 싶으셨는가?”

황후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마마, 고능준과 진소는 왜 야밤에 입궐한 것인지요? 궁문은 왜 굳게 걸어 잠그셨고요?”

황후는 태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황후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가 위독하여 그랬네. 태자의 안위는 이 나라의 사직과 직결되니, 사직이 위태로우면 당연히 재상이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태후가 말하다가 황후를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궁문을 왜 걸어 잠갔냐고?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을 보게. 왜 궁문을 봉쇄해야만 했는지 모르겠나?”

태후가 손가락으로 황후와 대신들을 쭉 가리키다가 연평 군왕에게서 손을 멈췄다.

“보았느냐! 태자 전하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이 궁 밖으로 전해지자마자 누가 쳐들어왔는지? 감히 이 새벽에 포화로 궁문을 깨부수다니, 대체 뭘 하려던 게야? 이 늙은이와 황상을 불태워 죽이고, 옥좌를 찬탈할 속셈이 아니더냐!”

그런 대역무도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던 연평 군왕은 서둘러 아니라며 무릎을 꿇었다.

“신은 억울하옵니다. 마마, 신은 마마와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온 것입니다.”

연평 군왕이 무릎을 꿇자, 그의 뒤에 있던 대신들도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사나운 기세로 태후궁까지 쳐들어왔던 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자, 황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이를 지켜본 고능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나.

세 치 혀가 달려 있는 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할 배짱만 있다면, 누가 어떻게 말하든, 그 말이 가장 옳은 것이 될 수 있어. 말할 배짱만 있다면 말이지.

“황후, 아무리 황후가 애가와 불화가 있다지만, 감히 태자가 위독한 틈을 타서 대신들을 현혹하고 반란을 일으키다니.”

태후가 호통을 치면서 몸을 일으키고 황후를 향해 삿대질했다.

“여봐라, 황후를 잡아라!”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가만있자, 태후가 말한 ‘현혹’이라는 말이 좀 묘하군. 황후가 주동했고, 우리 대신들은 그저 황후의 말에 현혹된 것이란 뜻인데.

태후궁 앞에 정적이 흘렀다.

이때, 갑자기 대신들 뒤에서 누군가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날카로운 검이 잔잔한 물 위를 가르듯 정적을 깨트리자, 대신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네 이놈, 지금 뭘 하려는 것이냐!”

태후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태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청년을 보자마자 애써 억누르던 감정이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태후의 몸이 떨리더니, 눈에서 불이 쏘아져 나오는 듯했다. 태후의 눈빛에는 분노와 공포가 혼재되어 있었다.

“여봐라, 당장 저놈을 끌어내라! 당장!”

금위군이 우르르 몰려왔으나, 진안 군왕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태후와 고능준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들을 끌어내라.”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고능준과 태후뿐 아니라, 황후와 대신들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끌어내라고? 태후마마를 끌어내라고?

그런 말은, 설령 황제 폐하라 하더라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을 텐데.

진안 군왕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나?

“어서 가지 않고 뭣들 하느냐! 당장 고능준을 끌어내라!”

황후가 재빨리 소리쳤다.

다행히도 황후가 한마디 덧붙인 덕에, 위수군은 망설임 없이 고능준과 태후를 포위했다. 그리고 나머지 위수군은 진안 군왕을 향해 몰려온 금위군과 대치했다.

“역적! 역적이다! 어서 끌어내라!”

태후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자, 전각 앞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누굴 역적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태자가 간신의 손에 죽은 것이 누구의 소행입니까? 마마, 아직도 만천하를 속이려 하십니까? 진안 군왕은 청군측을 행하는 겁니다!”

황후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청군측? 헛소리하지 말아라! 태자는 누군가의 음해로 죽은 것이 아니다. 태자가 원래 병을 달고 살던 아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더냐!”

태후가 자신을 둘러싼 위수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삿대질했다.

“세상 사람들더러 보라고 해라! 태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세상 사람들이 태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는 것을 애가가 두려워할 줄 아느냐! 어서 태의들을 불러와라. 약을 어떻게 썼는지도 속속들이 공개해라! 세상 사람들에게 다 보여 주란 말이다!”

그래. 어디 한번 보라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부 내보이는 것을 두려워할쏘냐.

위수군에게 포위된 고능준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태자는 병세가 위독해져 죽은 것이야. 태자에게 쓴 약은 모두 최고급 약재들이고, 태자는 매일같이 보양탕을 마셨어. 태의들이 하루에 세 번씩 태자를 살폈는데, 누가 태자를 음해했다는 말이냐? 우리가 무슨 연유로 태자를 음해해!

이놈들아, 어디 한번 이유를 대 보거라. 아무런 이유도, 증거도 없이 감히 나를 벌하려 들어? 결코 네놈들의 바람대로 그리 쉽게 되진 않을 것이다!”

“이리 와서 보시오!”

태후가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던 도중,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리 와서 보시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더니 태후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덮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진안 군왕이 태자의 침전 문밖에 서서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이리 와서 보시오.”

진안 군왕이 또 말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태후를 쳐다보았다. 횃불 아래, 진안 군왕의 표정은 더없이 냉랭했다. 태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무서울 게 뭐 있다고? 태자가 죽은 걸 볼 테면 보라지. 태자는 병으로 죽었으니까!

“다들 가서 보게나!”

태후가 소리치면서 진안 군왕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황후가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장순이 황후를 뒤따라갔다. 머뭇거리던 대신들도 서둘러 몸을 일으켜 태자의 침전으로 향했다.

가장 앞장섰던 황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뒤이어 무언가를 본 장순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곧이어 더 많은 사람이 태자의 침전 앞에서 무언가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왜들 저러는 거야?

그나저나 진소가 아직 안에 있지 않나? 밖이 이리도 소란스러운데, 왜 나와보지도 않지?

진소가 내 편에 서서 도움이 되는 말을 늘어놓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나와서 자리는 지켜야지.

설마…….

고능준이 흠칫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든 그는 몸을 홱 돌리고 태자의 침전을 향해 달려갔다. 위수군이 재빨리 그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고능준이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옥대를 풀어 높이 쳐들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는 천자께서 호국 대신으로 임명한 사람이다. 누가 감히 내 앞을 막는 게냐!”

위수군이 주저하는 사이, 고능준이 틈을 비집고 달려갔다. 그는 우악스럽게 대신들을 밀치고 태자의 침전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대청 안. 태자의 침전을 향하는 곳에 있던 월동문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새하얀 내의를 입은 진소가 문에 목을 매단 채로 죽어 있었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혀를 길게 내밀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목을 매달아 죽었어?

이 괘씸한 놈! 이 괘씸한 놈!

그런데, 저놈이 목을 매달아 죽었으면 죽은 거지. 죽은 사람이 뭐 무섭다고. 죽은 사람은 침전 안에도 하나 더 있는걸.

하지만 고능준을 두려움에 떨게 한 건, 진소의 새하얀 내의 위로 적힌 혈서였다.

  • 소인에게 죄가 있습니다. 소인의 부덕으로 결국 태자 전하를 해하였고, 폐하의 혈통을 끊었습니다. 통탄하고 후회스러운 일이나 되돌릴 길이 없기에 관복을 벗고 머리를 풀어 자결로 천하에 죄를 고합니다.

죄가 있어? 태자를 해했다고?

고능준의 손에 들려 있던 옥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끌어내라!”

진안 군왕이 말했다. 위수군은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단번에 고능준을 제압했다.

“뭐 하는 것이냐? 지금 뭘 하는 것이야! 반역이야! 반역이야!”

태후가 소리를 지르면서 진안 군왕을 가리켰다.

“저놈을 잡아라! 저놈을!”

하지만 태후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회랑 아래 홀로 서 있었다.

“진소에게 죄가 있는 건, 진소 자신만의 일이오!”

고능준이 있는 힘껏 외치며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저놈이 진안 군왕비를 끌어들여 태자를 음해한 거요! 감히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할 수 있소? 감히 누가 나를 끌어내! 내게는 폐하께서 하사하신…….”

고능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바로 옆에 있던 장순의 관모를 낚아채 고능준에게로 힘껏 던졌다. 곧이어 진안 군왕의 손을 떠난 관모가 고능준의 얼굴을 명중했다.

보기에는 가벼워 보이는 관모였지만,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고능준은 악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얼굴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표독하게 소리치던 고능준의 목소리가 없어지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본왕이 감히 그러겠다는데, 어쩔 텐가?”

진안 군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자리에 있던 대신들을 훑어보자, 문 앞에 서 있던 대신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전하께서는 감히 그러실 수 있지요. 궁문도 포격하고, 태후를 끌어내라 명하기도 하고, 고능준의 얼굴을 박살 내기까지 하시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요. 암요.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관모에 얼굴이 찍힌 고능준은 쓰러지면서 혼절하였고, 진소는 목을 매달아 죽었으니, 대세는 확정된 바나 다름없었다.

“역적이다! 역적이야! 어서 저 역적놈을 잡아라!”

태후는 아직도 뒤에서 소리치고 있었지만, 회랑 아래에 홀로 서 있는 태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적을 잡았으니, 태후마마께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어서 궁으로 모시고 가거라.”

황후가 말했다.

궁인들이 재빨리 태후에게 다가가 태후를 다짜고짜 양쪽에서 들어 올렸다. 황실에 오래 있었던 궁인들은 추태를 보이는 사람의 입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성을 잃고 소리를 내지르던 태후는 갑작스럽게 입을 틀어막자,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태후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른 궁인들이 서둘러 태자의 침전으로 들어가 월동문에 걸려 있던 진소를 내려서 밖으로 들고 나왔다.

“장 대인께 결례를 보였습니다. 허락도 없이 장 대인의 관모를 빌렸네요.”

진안 군왕이 장순을 쳐다보며 말했다. 장순은 엄숙한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향해 공수의 예를 올렸다.

“전하, 관모로 간악한 역적을 때려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관모의 영광이지요.”

간악한 역적. 이제 고능준은 간악한 역적이 된 거로군.

하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고능준이 제아무리 세 치 혀로 연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해도 아무 소용 없어. 병사들을 이끌고 돌포탄으로 성문을 부수고 들어올 배짱이 진안 군왕에게 있으니, 기세는 완전히 진안 군왕 쪽으로 기울었고.

진안 군왕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관모로 고능준을 기절시켜 입을 막은 거겠지.

“태자.”

황후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면서 태자의 침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신들도 울먹이거나 흐느끼면서 황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태자의 침전은 몹시 협소했다. 단출한 데다 장식도 간소하고, 침상과 의자, 그리고 탁자 외에는 어떠한 가구도 놓여있지 않았다.

조금 전의 어수선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실내는 전혀 정돈되어 있지 않고 어지러웠다. 바닥에는 무언가 더러운 것이 묻은 흔적이 있었고,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이는 분명 오물의 냄새였다.

어엿한 태자 전하의 거처에서 이런 악취가 풍기다니. 이자들이 도대체 태자 전하의 시중을 어떻게 든 거야?

태자 전하께서 바보라 지각도 없고 말도 못 하신다고, 이렇게 막 대할 수가 있나?

긴병에 효자 없다지만, 바보는 아무리 태자라 해도 저리 비천한 노비들에게까지 홀대를 받는구나.

대신들이 고개를 들고 침상을 쳐다보았다. 침상 위에는 뚱뚱한 태자가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사실 대신들은 평소 태자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태자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에 없었다. 대신들이 기억하는 태자의 모습은, 바보가 되기 전의 모습이었다.

영리하고 활발했던 이황자는 궁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대신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였다. 대신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자신의 간식을 가져와서 기다리는 대신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었다. 대신들의 기억 속 어린 이황자는 집안의 어른을 대하는 손아랫사람처럼 언제나 공손하고 다정했다.

태자께서 생전 얼마나 선량하고 영리한 아이셨는지.

“전하께서는 매일 최음제를 복용하셔야만 했습니다.”

“전하께서 몸에 열이 많아 짜증을 내며 침수에 들지 못하시자, 그자들은 또 전하께 심신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먹였습니다. 시끄럽게 하지 못하게, 말썽도 피우지 못하게, 그저 조용히 잠들게 만들기 위해서요.”

바닥에 엎드린 두 내시가 울면서 말했다.

세상에나. 최음제라니, 저리 어린아이에게 어찌…….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던 대신들이 정말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태자를 잃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가엾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제왕가에서 태어난 아이인 게 가엾고, 다친 것도 모자라 끝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아이인 게 가엾어서.

대신들의 울음소리가 침전 안을 가득 메웠다.

진안 군왕은 침전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진소가 목을 매달았던 월동문 앞에 서서 침상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육가아, 이 형이 너를 보러 왔어.

육가아, 이 형은, 후회되는구나.

참으로 후회돼.

“마마,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태자의 침전 안.

한바탕 울고 난 대신들이 하나둘씩 황후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궁인들도 황후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위로를 전했다.

황후가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훔치자, 대신들도 모두 눈물을 닦았다. 한바탕 울고 나니, 모두가 후련한 기분이 들면서 침전 안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태자의 장례는 황실의 법도대로 진행하시오.”

황후가 말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대신들이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황후가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흘렸다.

대신들은 더는 황후를 따라 울지 않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침전 안에 오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마, 곧 해가 뜰 시간입니다. 오늘 밤의 일을 어찌 처리할지에 대해 논하시지요.”

장순이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마마, 부디 자리를 옮기시지요.”

대신들이 서둘러 장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태자의 침전은 정사를 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긴 했다.

“자리를 어디로 옮기지?”

황후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폐하께서 아직 계십니다.”

누군가가 천천히 말했다.

대신들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월동문 앞에서 여전히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서 있는 진안 군왕이 보였다.

“폐하께서 아직 혼수상태이긴 하나, 궁에 이렇게 큰일이 났으니 응당 폐하께 알려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진안 군왕이 말을 이으며 침상 위의 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후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대신들은 반대하지 않고 서둘러 몸을 일으켜서 황후를 에워싸고 걸음을 옮겼다.

대신들을 따라 문을 나서던 황후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진안 군왕이 황후를 따라가지 않고, 태자의 침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진안 군왕, 같이 가자.”

황후가 말했다.

고능준과 진소, 태후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둘째 문제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다음 태자 자리를 채울 사람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지금 이럴 때, 진안 군왕이 자리에 없으면 좀 곤란한데.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집안일이기도, 나랏일이기도 합니다. 집안일은 황후마마께서 장관하실 테고, 나랏일은 조정 대신들이 결정할 일이니,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침상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저는, 육가아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습니다.”

태자라고 하지 않고, 육가아라고 했다.

우리가 태자를 위해 눈물을 흘렸으니, 이제부터 저 아이는 육가아다. 황자도, 태자도 아닌, 진안 군왕의 형제 육가아.

황후가 잠시 주춤하다가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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