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75)

작가의 말:

남송 시대의 사경인(謝景仁)이라는 관리는 청결을 따지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번 침이나 가래를 뱉을 때 타구를 쓰지 않고 자신의 시중을 드는 하인의 옷에 뱉는 대신 그 하인에게 하루 치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은 휴가를 얻기 위해 사경인의 타구를 앞다투어 자처했다고 합니다.

-마적-

“몹시도 악랄한 마적들이로구나.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어!”

이 일에 대해 미리 귀띔을 들은 관졸들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의분에 차서 소리쳤다.

“아니다, 아니야!”

청원 현령이 갑자기 다급하게 외쳤다.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매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 하는 자들이오!”

질서를 유지하던 관졸이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어 허공에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오던 열댓 명의 사람은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왔다.

무리 중 가장 선두를 달리던 사람이 길을 막는 관졸을 향해 채찍을 세게 휘둘렀다. 관졸이 악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나자빠졌다.

“청원현!”

가장 앞서 있던 사람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불안에 떨고 있는 청원 현령을 가리켰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것이냐! 누가 여길 오라고 했어!”

누가 나더러 여길 오라고 했냐고? 당신들이 오라고 했잖아!

청원 현령이 막연한 표정으로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북과 징이 울리는 소리와 관졸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관부에서 살인을 저지른 마적을 소탕하고자 하오니, 관계없는 자들은 자리를 피하시오.”

북과 징이 울리는 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푸르른 새벽빛이 걷히며 환한 아침이 찾아왔다.

말 위에 타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청원현!”

말에 타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채찍을 매섭게 내리쳤다.

“당초 우리가 네놈에게 뭐라고 했느냐! 부르지 않는 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우리 관인께서는 원수에게 죽임을 당하신 거지, 마적에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란 말이다!”

채찍을 맞은 청원 현령이 뒤로 고꾸라졌다. 주위에 있던 관졸들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뜰 뿐, 아무도 앞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인, 대인.”

청원 현령이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말 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며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오늘 새벽에 대인 쪽 사람이 와서 제게 소식을 알렸습니다. 바로 여기 있…….”

청원 현령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의 가노와 시종, 그리고 관아에서 데려온 관졸들뿐이었다.

오늘 새벽에 고씨 가문의 문양이 찍힌 서신을 들고 자신의 집에 찾아와 소식을 알렸던 남자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언제 자신의 곁에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큰일 났구나. 내가 계략에 빠져들었어!

떼죽음을 당하는 사람 중에는 고 관인과 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거였어!

청원 현령이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큰일 났구나.”

청원 현령이 한 방향을 가리키며 관졸들에게 지시했다.

“어, 어서 쫓아라.”

어서 경조부로 소식을 전하러 간 사람을 쫓아라!

어서 쫓아라! 빨리! 못 가게 막아야 한다!

말 한 필이 큰길 위를 질주하며 사방으로 흙탕물을 튀겼다.

이때 쉭 소리가 들려왔다. 말 위에 있던 사람은 목에 화살이 꽂힌 채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말이 울부짖으면서 방향을 틀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길가 큰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세 사람이 재빨리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말에서 떨어진 관졸의 옷을 벗겨 자신의 몸에 걸치고, 그의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어둑한 빛에 서신을 비춰보자, 그 위에는 청원현의 붉은 관인이 찍혀 있었다. 관졸의 옷으로 갈아입은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재빨리 말 위로 몸을 날려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관졸의 시체를 길가로 끌고 가서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던지고 잽싸게 흙을 덮은 뒤 말을 타고 앞서간 사람을 따라갔다.

동쪽 하늘이 밝아질 무렵, 경성의 거대한 성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일찌감치 나와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이 앞뒤를 다투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서로를 재촉했다.

“밀치지 마시오!”

수문장과 위병들이 호통을 치면서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들을 골라내 검문했다. 주복은 병사들을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 앞에는 따뜻한 탕을 파는 점포가 있었지만, 이제 막 야간 장사를 마친 터라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주복이 노점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저기, 나리.”

“주 대인?”

노점의 주인장과 병사들이 의아한 얼굴로 주복을 불렀다.

“다른 건 필요 없으니, 탕 한 그릇만 주시오.”

주복이 주인장에게 말하고는 병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들 먹어라. 다 먹은 뒤에는 집으로 가거나,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즉시 군영으로 복귀하고.”

병사들이 헤헤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찾아 흩어졌다.

손님이 벌써 자리에 앉은 이상, 주인장으로서는 차마 내쫓을 수 없었다. 게다가 성을 순찰하는 관병을 상대로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는 골치만 아파진다는 생각에 주인장은 군말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행여 잘못 건드리면, 무슨 구실이든 갖다 붙여 노점을 뒤엎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장이 점원에게 따뜻한 탕 한 그릇과 소금에 절인 생선 요리 한 접시를 내오라고 시켰다.

“이건 삼치입니다. 진 상공 댁의 참새 요리 비법으로 만든 것이니, 한번 맛보시지요.”

주인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 상공 댁의 참새 요리라…….

주복이 접시 위에 놓인 생선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과로신선, 낙득자재, 참새, 삼치.

경성의 새로운 먹거리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냈네.

주복이 젓가락을 들고 생선 살코기를 조금 떼어내 한 입 먹고는 무의식적으로 성문 쪽을 내다보았다.

소 떼와 양 떼가 안으로 들어오던 참이라, 성문 앞은 다소 소란스러웠다.

“급보입니다. 급보!”

누군가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성문을 향해 달려왔다. 급보라는 말과 말을 탄 사람의 관졸 복장을 본 위병들은 재빨리 길을 터주었다.

“청원현에서 온 급보요!”

관졸이 가축들로 인해 왁자지껄한 성문을 지나며 큰소리로 외쳤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관졸을 쳐다보았다.

“마적 떼가 재물을 약탈하고 살인을 저질렀소!”

주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길가를 따라 질주하는 관졸을 바라보았다. 행인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마적?”

노점 주인이 몸을 일으키고 관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근래에 마적이 판을 친다고 들었는데, 역시 일이 났나 보구먼.”

주인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주복은 말을 타고 떠나갔다.

“나리, 아직 계산 안 하셨는데요.”

주인장이 서둘러 주복의 뒤를 몇 걸음 따라가며 외쳤지만, 주복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진 후였다. 주인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투덜댔다.

이른 아침부터 길가에 울려 퍼진 관졸의 외침은 금세 경성 곳곳으로 흩어졌다.

“급보요! 청원현에서 온 급보! 마적이 재물을 약탈하고 살인을 저질렀소!”

유흥가에서 걸어 나온 사내들이 깜짝 놀라 몸을 살짝 떨었다. 밤새 질펀하게 논 터라, 사내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마적이라니!

멜대를 메고 음식을 팔러 다니는 장수들이 서둘러 길을 피하다가, 관졸이 외친 소리 때문에 놀라서 멜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말로 마적이 있나 보네!

관졸이 곳곳을 누비며 외치자, 조용했던 경성의 아침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무슨 일이냐? 새벽 댓바람부터 관아 앞이 소란스럽다니.”

야간 당직을 끝낸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리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대인, 청원현에서 온 급보입니다. 청원현에 마적이 나타나 재물을 약탈하고 살인을 저질렀답니다.”

마차 앞에 있던 시종이 서둘러 관리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적? 산적과 마적이 있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호들갑은. 청원현은 마적 따위에 저리 겁을 먹었단 말이냐?”

관리가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대인, 책임을 피하려고 저러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마적이 대단한 인물을 죽여서, 괜히 꾸물거렸다가는 자기들도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을 수도 있고요. 어찌 됐든, 사건이 발생한 곳이 청원현이니까요.”

시종이 말했다.

하급 관리들은 이래서 안 돼. 무슨 일이 났다 하면 사건을 은폐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고만 하니, 쯧.

관리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젓다가 멈칫했다.

청원현, 그리고 대단한 인물?

날짜를 꼽아 보자면, 지금 이 시기에 청원현을 지나갈 만한 대단한 인물은…….

“큰일 났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관리가 소리쳤다.

관졸이 급보를 외치며 문 앞을 지나가자, 세 막료는 오금이 저려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완벽한 계획이었고, 얼마나 대단한 수완인가. 머리털 하나만 건드려도 온몸을 움직일 수 있다더니, 손만 갖다 대도 줄줄이 풀릴 일이었군.

청원현에서 온 관졸이 급보를 외치는 광경을 일찌감치 상상한 그들이었지만, 상상 속 자신들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상상 속에서 그들은 기쁨의 환호를 하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모든 게 다 바라던 대로 이뤄졌군.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상대의 바람대로 말이야.

“대단하구나. 대단해!”

막료들의 등 뒤에서 갑자기 고능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자, 언제 나왔는지 모를 고능준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참으로 대단한 진안 군왕이로다!

자기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듣는 아비보다 더 비통한 사람이 있으랴?

게다가 아들의 죽음을 밝힐 진상을 제 손으로 덮어 버린 아비의 절망감은, 대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갑자기 고능준은 지난번 일이 떠올랐다.

이 태의에게서 몰래 훔쳐 온 향 때문에 자기 사람들을 몇 명씩이나 잃었지만,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누군가에게 맞아 어금니가 깨져도 그 어금니를 목구멍으로 삼킬 수밖에 없는 꼴이 된 것이다.

대단하구나! 진안 군왕, 참으로 대단해!

아니지, 아니야.

진안 군왕은 절대 이 정도까진 못 할 거야. 이렇게 깔끔하고 철두철미한 수법을 쓰는 자는, 오직 그 여인밖에 없지!

정! 씨!

갑자기 고능준은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그가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마당에 날카로운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 토해진 붉은 색의 선혈을 보며, 막료들의 표정 또한 복잡해졌다.

또 피를 토하셨군.

지난번에 피를 토하셨을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그럼, 또 세 번째로 피를 토하실 날도 올까?

막료들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체,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정오가 될 무렵, 집으로 황급히 돌아온 황씨가 안아 달라며 떼를 쓰는 소보아를 뒤로하고 대청 쪽으로 뛰어갔다.

“여보, 여보.”

치마를 살짝 들고 뛰어가던 황씨가 문턱을 채 넘어서기도 전에 소리쳤다. 문 앞에 있던 시녀들이 서둘러 황씨를 향해 예를 올렸다.

“노야께선 지금…….”

시녀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청 안으로 들어선 황씨가 소리쳤다.

“여보, 큰일 났어요. 지금…….”

대청 안에 있던 범강림과 젊은 사내가 황씨를 쳐다보았다. 손에 든 술잔을 보아하니,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있던 참인 듯했다.

황씨가 멈칫하고는 민망해하며 서둘러 예를 표했다.

“주 공자님.”

주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하고는 손에 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먼저 가 보겠소.”

주복이 말했다. 범강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복을 배웅하자, 주복은 황씨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여보, 방금 거리에서 들었는데, 청원현에 마적 떼가 나타나 사람들을 죽였대요. 어찌나 시끌벅적하던지, 오성병마사의 병사들까지 나섰더라니까요? 날짜를 셈해 보니, 시누이도 그쯤 갔을 텐데, 사람을 시켜서 한번 알아보는 게 어때요?”

황씨가 범강림에게 다가가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범강림이 밖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주 공자가 이미 가서 물어봤소. 성문에서 급보를 전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어, 경조부로 가 알아봤다더군.”

“정말로 마적이 난리를 친 거래요?”

황씨가 서둘러 물었다. 범강림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어.”

범강림의 대답을 들은 황씨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혹여 정교랑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주복이 여기까지 찾아와 범강림과 술을 마시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황씨는 주복이 정교랑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주복이 있을 때를 피해 이 일을 물어보았다. 주복이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눈이 뒤집혀 칼을 들고 쫓아갈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우리도 알고 있는 자들이오. 누구인지 한번 맞혀 보겠소?”

범강림이 술잔에 술을 채운 뒤, 황씨를 향해 물었다.

황씨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요?”

우린 경성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고.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황씨가 긴장한 기색으로 범강림에게 물었다.

“누군데요?”

범강림이 여유롭게 술잔을 들어 올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고 관인.”

놀란 황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라고요?”

황씨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고능준의 셋째 아들이자 고씨 집안의 열넷째, 정사낭과 기루에서 화괴 다툼을 했던 그 고십사 말이오.”

범강림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확실한 설명을 들은 황씨는 더욱 놀란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정말이에요? 설마, 그럴 리가 있어요?”

마적 따위가 어떻게 고씨 가문의 자제인 고 관인을 죽일 수 있지? 아니다. 고십사가 어쩌다 마적의 손에 죽임을 당한 거야?

값비싼 수레를 끌고 장사를 하러 다니는 거상도 아니고, 호위도 없이 혼자 다니는 서생도 아니고, 무려 고 관인인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성씨를 가진 그 고씨 가문의 고 관인이?

“그럴 리가 없기는. 당초 아우들이 죽었을 때, 그 빌어먹을 놈들은 공로와 명예까지 빼앗아 갔소. 그때 당신은 아우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명예를 회복할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이나 했소? 걸음마도 안 뗀 소보아가 관직을 얻을 거라는 예상은? 무원산 형제들의 미담이 경성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거라는 예상은? 그렇게 많은 서생이 우리 형제의 이름을 수없이 외쳐대며 글씨 연습을 할 날이 올 줄 알았냔 말이오.”

범강림의 말에 황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죠. 그럴 날이 올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요. 우리처럼 미천한 사람들은 죽으면 죽는 거고, 죽고 나면 먼지처럼 사라지는 게 당연지사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형제들의 미담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문인들의 글귀에 쓰이고, 비석에도 새겨졌어요. 자신의 이름을 청사에 길이 남기겠다는 포부도, 그런 걸 말하는 거겠죠.

“그러니, 이 세상에 그럴 리 없는 일은 없소.”

그 여인이 있는 한.

범강림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히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공주부 진(秦)씨 저택.

진 부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서재로 향했다. 하지만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문 앞에 여종이나 사환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 부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서재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진 시강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진 부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무슨 일이오?”

“십삼은 어디로 뭘 하러 간 거예요?”

진 부인의 얼굴에서는 평소 같은 웃음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했잖소. 오표(吳彪)의 생일을 맞아 나 대신 축하를 하러 갔다고.”

진 시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 부인이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십삼한테 미안해요. 내가 십삼을 불구로 낳아서요. 십삼을 그렇게 낳은 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잘못이에요.”

진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 시강이 몸을 일으켜 진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게 어떻게 당신의 잘못이라는 것이오? 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당연히 나의 잘못이거늘.”

진 시강이 다정하게 진 부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하자, 진 부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그의 손을 피했다.

“만에 하나 십삼이 죽게 된다면, 진칠낭, 당신은 평생 속죄해도 그 죄를 못 씻을 거예요.”

진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진 시강을 쳐다보았다. 진 시강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괜한 생각 마시오. 멀쩡히 살아 있는 애를 두고 왜 죽느니 사느니 하는 말을 하는지, 원.”

진 시강이 다시 진 부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진 부인이 진 시강의 손을 홱 내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서 고십사가 죽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바로 십삼이에요! 십삼은 정교랑을 좋아하는 만큼, 고십사를 증오한다고요! 자기 목숨을 고십사의 목숨과 맞바꾸라고 해도, 십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큼 그렇게 하겠다고 할 아이예요.”

진 부인이 진 시강의 옷깃을 잡았다.

“십삼은 이미 미쳤어요. 그런데 당신까지 같이 미치면 어떡해요? 그리고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이 어떻게 십삼한테 그리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있냐고요! 빨리 내 아들 십삼을 돌려놔요. 빨리 돌아오라고 하란 말이에요!”

진 시강이 진 부인을 품에 와락 끌어안고 토닥이려고 할 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렸다.

진 시강은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진 부인도 소리치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이곳은 진씨 저택 안이었다.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는 중에 이렇게 인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들이닥친다는 것은…….

“아이쿠.”

문가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가 실내의 정적을 깨트렸다. 젊은 사내가 몸을 돌리면서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자고로 예에 어긋난 것은 보지 말아야 하는데, 소자가 결례를 보였습니다.”

진 시강이 목구멍을 꽉 막는 듯한 숨을 드디어 토해냈다. 진 부인이 진 시강을 밀쳐내고 한달음에 진호에게 달려가 그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 못난 녀석아. 그 여인을 위해서라면, 이 어미도 필요 없다는 게냐? 이 불효막심한 것.”

진호가 헤헤 웃으면서 진 부인을 토닥였다.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아들의 마음을 쿡 찌르는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소자에게 무슨 여인이 있다고요. 소자에게 여인이란 오직 어머니뿐입니다.”

진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제게 무슨 여인이 있다고요. 저한테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진 부인은 그 한 마디가 더욱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진 부인이 목놓아 울면서 진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이 바보 아들아.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고십사가 죽었다고?”

같은 시각, 소식을 들은 진소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고십사가 마적에게 살해됐다니? 그럴 리가 있나?”

진소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마적의 소행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청원현에서 보내온 사람의 말로는 마적의 소행이라는데, 고씨 가문에서는 절대로 마적에게 당한 게 아니라고,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십사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이지요.”

수하가 대답했다. 진소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정말로 고십사가 죽었다고? 게다가 마적의 손에? 그것도 귀향길에서?”

진소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너무 공교롭…….”

공교롭다는 단어가 나오자, 진소는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마적! 청원현!”

지금 청원현을 지나는 사람은 고씨 가문뿐만이 아니야!

진안 군왕도 있잖아.

아니지, 아니지. 진안 군왕뿐만 아니라, 진안 군왕과 함께 송평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

진소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병풍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설명되는군.

고능준이 깔끔하게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던 건, 가는 길에 진안 군왕을 해치우기 위함이었어. 며칠 전부터 경성에 소문이 자자하던 청원현 마적 이야기도 고씨 가문에서 지어낸 이야기일 테고.

이래서 세상에 공교로운 일이란 없다는 것이야. 모든 게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긴 하나, 다 어느 한순간을 위해 미리 짜 둔 계획인 게지!

“언제 일어난 일이냐?”

진소가 물었다.

“어젯밤입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어젯밤이라면, 비바람이 있던 평범한 밤이었는데, 그리 큰일이 벌어졌었다니.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을지.

진소가 방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하지만 결국 죽게 된 건 다른 사람이군.

진소가 병풍 앞에 멈춰 서서 그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능준이 깔끔하게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던 건, 가는 길에 진안 군왕을 해치우기 위함이었다지만, 그 여인과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겠다고 했던 건 무엇 때문이지?

그 생각이 스치자, 진소는 눈앞이 번쩍 뜨였다.

정교랑이 진씨 저택을 찾아와 소란을 피운 탓에, 진소는 결국 굳은 결심을 하고 진안 군왕과 정교랑에게 경성 밖으로 떠날 기회를 주었다.

정교랑이 경성을 떠나는 일에 동의했으니, 고능준으로서는 진안 군왕을 해치울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고능준에게 상대를 해치울 기회가 주어짐과 동시에 정교랑에게도 상대를 해치울 기회가 주어졌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니까.

“고능준이 계획을 세우고, 나도 계획을 세웠지만, 이 모든 건 결국 그 여인의 계획 안에 들었던 것이로구나.”

진소가 병풍을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붓에 먹물을 찍고 병풍 위에 진한 동그라미 하나를 천천히 그려 넣었다.

“부인께서 일찍이 계획하셨던 거로군요.”

마차 안, 고 선생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번에 진소가 군왕 전하를 탄핵하여 경성 밖으로 내쫓은 것 또한, 부인께서 진소와 미리 상의하신 일이었습니까?”

고 선생이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정말로 경성을 떠나고 싶었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진 상공과 생각이 같았던 거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어 성공할 수 있었던 일이로군.”

진안 군왕이 끼어들어 말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 선생을 흘깃 쳐다보았다. 고 선생은 진안 군왕의 성가시다는 표정을 못 본 척하고 계속해서 정교랑에게 물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 그렇다면 말이 되는군요. 부인께서는 진 상공이 원했던 것과 고씨 가문이 원했던 것을 모두 알고 계셨기에, 이번 일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그, 무슨 창 같은 걸 준비하여 매복에 대비하셨던 거고요.”

고 선생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고 관인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신 겁니까?”

고 선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이게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야. 당시 매복 현장에서 고 관인은 보이지 않았거든.

“화약 안에 향료를 하나 섞어 넣었어요. 도망친 사람들이 제 주인을 찾아가 보고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넝쿨을 더듬다 보면 참외를 따기도 하는 법이니 단서를 줘야죠.”

고 선생이 아, 하고 감탄했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그래서 부인께서 저희더러 그자들을 쫓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거였습니다!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 그 소굴을 찾아내신 겁니다.”

정교랑이 잠자코 있자, 진안 군왕이 마른기침했다.

“전하, 경 공공이 특별히 두 분을 위해 심신 안정에 좋은 차를 달였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지요.”

고 선생이 얼른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고 있네. 그런데 조금 잠이 오는군.”

졸리다고까지 말했으면, 제발 말귀를 좀 알아들었으면 하네만.

고 선생은 애써 진안 군왕의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이번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자들이 제 주인을 찾아가지 않았다면요?”

고 선생의 물음에 정교랑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항상 운이 따르던 편이라, 이번에도 운이 좋겠거니 싶었죠.”

운?

조금 전까지 철저한 계획하에 움직였다고 생각한 정교랑이 갑자기 운 이야기를 꺼내자, 심각하기 그지없던 일이 한순간에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운을 얕보면 안 돼요.”

정교랑이 고 선생의 표정을 읽은 듯 손끝을 살짝 비볐다. 정교랑의 손 안에 든 대전(大錢: 동전의 일종) 세 개가 어지러이 섞였다.

“운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정교랑이 말했다.

“그자들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부인도 무탈히 돌아와 다음 기회를 기다렸겠지. 그들 또한 다음 기회를 노리며 또 나를 해치려 들었을 테니까. 그러니 굳이 그런 걸 생각해서 뭐하나? 기회가 없어졌으면 없어진 거지, 다음번을 노리면 되는 일이 아닌가.”

진안 군왕이 괜한 걸 묻는다는 듯이 고 선생에게 눈을 흘겼다.

하긴, 그건 그렇지.

고 선생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번 일의 마무리는 확실히 하셨는지요? 혹 다른 사람이 발견하게 된다면…….”

계속해서 말을 잇던 고 선생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내쫓을 기세인 진안 군왕을 보고는 말하는 속도를 높였다.

“아,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증거가 있든 없든, 고씨 가문에서는 분명 우리가 한 일이라고 확신하겠지요. 그러니까 제 말씀은, 그들이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명백한 증거를 남겨 둬서는 절대…….”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무리는 내가 하지 않았어요.”

정교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멈췄다.

“전하, 역참에 도착하였습니다.”

문밖의 시종이 말했다.

고 선생이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와 밖에서 마차 휘장을 걷어 올렸다. 역참의 역승과 역졸들이 멀리서부터 진안 군왕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전하께서 무사히 도착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신 등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청원현에서 마적이 소란을 피웠다는 말에 어찌나 놀랐던지요.”

마적?

고 선생이 멈칫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돌아보았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난 운이 따르는 편이라고 했잖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청원 역참은 경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관로 근처에 위치했기에 경성의 호화로운 객잔만큼은 아니어도 큼직하게 지어진 데다가 기둥에 정밀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꽤나 근사하게 보였다.

게다가 역승이 미리 후원 건물을 통째로 비워 둔 덕에, 진안 군왕 일행은 편히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마적이 나타났다는 소문 때문에 길을 재촉하려던 사람들이 겁을 먹고 역참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진안 군왕을 구경하려고 마당 안에 빽빽하게 서 있었다.

“마적? 그야 당연히 알지.”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진안 군왕의 시위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우리도 오는 길에 마주쳤소.”

시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더욱 큰 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것과는 달리 직접 마적을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마적에 관한 소문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몇몇 사람들은 신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들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묻기도 했다.

마당 안이 왁자지껄해지자, 경 공공이 고개를 돌렸다.

“다친 병사들을 돌볼 수 있도록, 뛰어난 의원을 데려오게.”

경 공공이 목청을 높여 외치고는 고개를 돌려 작은 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무슨 활로 쏘았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의원으로다가.”

불러온 의원이 병사들이 신비궁에 맞아 다쳤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마적을 마주쳤다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야.

수하가 경 공공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게 바로 돌덩이를 들어 제 발등을 찍는다는 상황이로군.”

고 선생이 웃으며 마당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며칠 더 묵다 가야겠네. 주위가 흉흉하기도 하고, 우리도 크게 놀랐으니, 잠시 머물러서 요양 좀 하다 가지.”

진안 군왕이 고 선생에게 말했다.

며칠 요양 좀 하다가 가겠다고? 하루 이틀도 요양이고, 보름이나 한 달을 쉬어도 요양인데. 경성에서 지방으로 좌천된 관리들이 종종 이런 변명을 하면서 외직으로 가는 길에 시간을 끌기도 하지.

하지만 전하께서 길을 재촉하지 않으시겠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야. 살인을 자행하는 마적을 마주쳤으니, 당장 경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어.

게다가 우리가 이렇게 벌건 대낮에 평민 백성들이 섞여 있는 역참에 머무른다면, 아무리 화가 나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고능준이라고 해도 미처 손을 쓸 수 없을 것이야.

저만 남을 괴롭힐 줄 아는 줄 아나.

고 선생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마적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은 금세 경성까지 퍼져서, 경성이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이번 일로 고씨 가문의 십사 관인이 죽었다. 고 관인이 마적에게 죽임을 당한 것만으로도 경성이 떠들썩해졌는데, 비단 고십사뿐 아니라 진안 군왕까지 마적의 습격을 당했다고 하니, 온 경성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다행히도 진안 군왕 일행 중에는 마적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없고, 부상병만 몇 나왔다고 했다. 진안 군왕은 금군 병사들을 많이 데리고 갔으니, 아무리 겁 없는 마적이라고 해도 금군 병사들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십사는 시종들만 데리고 길을 떠났으니, 마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게 이해가 가기도 했다.

마적이 황실 외척의 아들을 죽이고, 황실 종친을 습격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적이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흉포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와전되어 갔다.

마적은 난적(亂賊)이 되고, 난적은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 마적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청원 지역에 침투한 서쪽 오랑캐가 마적을 가장하여 종친을 습격하고, 곧 경성까지 치고 들어올 거라는 소문으로 번졌다.

대로에 있던 사람들은 곧 불안에 휩싸여 왁자지껄하게 떠들었고, 어떤 이들은 짐을 싸서 경성을 떠날 준비를 했다. 관부와 금군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북과 징을 울려 괴소문을 잠재웠다.

“청원 현령은 끝장났군.”

북을 치면서 마적이 경성에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외치는 관부 관졸들이 지나가자, 노점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다 그자가 자처한 일이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면, 가장 먼저 처단해야 할 사람은 바로 청원 지역 관리를 소홀히 한 현령 아니겠나.”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

지글지글 맛있게 구워진 고기가 상에 올라오자,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술잔을 기울이며 고기를 집어 먹었다.

“자네 생각에는 어떤가? 정말로 마적이 나타난 걸까?”

가만히 고기가 익는 소리를 듣던 사내가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반대편에 앉아 젓가락질을 하던 사내가 멈칫했다.

“정말 마적이 나타났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얘기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관부가 알아서 결론을 내리겠지.”

사내가 말하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오직 관부에서만 결론지을 수 있는 일이니.”

하지만 관부에서도 이 일을 쉽사리 결론짓지는 못하리라. 마적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기에는 고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다른 결론을 내리기엔…….

사내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정말로 마적이 나타났어. 내가 뜀박질이 빨라 다행이지, 재빨리 숨지 못했으면 나도 십사 관인처럼 시체로 돌아왔을 거야.”

“그래, 그래. 나도 며칠 전부터 마적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긴 했어. 그래도 여기는 천자께서 계신 경성이라 망정이지, 마적들이 그렇게 사람까지 죽여 가면서 겁 없이 활개 치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나?”

길가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침을 튀기면서 열띤 대화를 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엿듣다가 하나둘씩 자기 일인 양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내는군.”

사내가 시선을 거두고 고기 한 점을 집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렵네, 어려워.”

새까만 밤하늘이 드리워진 황궁 안, 태후궁은 등불로 실내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태후가 씩씩대며 상소문을 집어 던졌다. 진안 군왕이 청원에 남아 며칠 더 요양하겠다는 내용의 상소문이었다.

“거기에 남아서 요양을 하겠다고? 정말 요양하겠다는 거야, 또 누굴 죽이겠다는 거야?”

태후가 격노하며 소리쳤다. 내시가 불안해하며 태후에게 말했다.

“마마, 중서문하성에서 비준한 일입니다. 게다가 군왕 전하를 경성으로 모셔 오라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고요.”

황족 종친에게 큰일이 났으니, 조정 관리들이 위문차 진안 군왕을 만나러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태후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내시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마마, 군왕 전하께서는 중서문하성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내시는 조금만 더 늦게 말했다가는 태후가 또 노발대발할까 봐 두려웠다. 역시나 내시의 말을 들은 태후는 더욱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약아빠진 놈! 억울한 척까지 하겠다 이거지? 고십사를 죽인 사람은 바로 그놈이다. 당장 가서 그놈을 경성으로 압송해라!”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내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태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증거도 없이 단순한 추측만으로 이를 사실로 만들 수 없다.

“마마, 증거가 없습니다.”

내시가 말했다.

“증거? 그놈이 살인을 저지를 때는 증거가 필요 없다가, 애가가 그놈을 죽이겠다니까 증거를 운운하는 것이냐!”

태후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소리쳤다. 홧김에 뱉은 말이지만, 생각할수록 자신의 말이 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이 놀라서 더는 길을 재촉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아예 경성으로 데려오면 될 거 아니냐. 애가가 직접 진안 군왕의 놀란 가슴을 다독여 줘야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후는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그 정도로 놀랐다면, 필시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할 것이고, 그 행동은 애가도 놀랄 만한……. 아니지, 그놈이 눈이 뒤집혀 태자를 놀라게 했고, 태자를 해치려 했다고 하면 된다. 그렇다면 한낱 종친 나부랭이인 그놈은 죽은 목숨이 될 테지.”

당장 궁에서 그놈을 때려죽인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야.

뭐라고 하려거든, 그러라지. 어차피 그놈을 때려죽인 뒤일 텐데, 애가를 욕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그래, 이 일은 그렇게 되어야 해.

태후가 손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내시를 향해 말했다.

“서둘러라. 애가가 말한 대로 처리해라. 당장 움직여!”

애들 장난도 아니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내시는 경악했지만, 차마 속에 있는 말을 태후에게 하지는 못했다. 권력을 오래 쥐고 있을수록, 태후의 성격은 점점 괴팍해져 갔다.

“마마, 말로는 쉬워 보이나, 실제로 처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니면 고 대인께 한번 여쭤보심이 어떠신지요?”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고 대인 세 글자를 듣자, 태후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지금 고 대인이 얼마나 속상해 하겠느냐. 그 와중에 아들을 보낼 준비까지 하고 있으니, 필시 속이 말이 아닐 게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아비가 새파랗게 어린 아들을 보내는 심정이 얼마나 비통한지는 애가도 잘 알고 있느니라. 무려 고십사가 죽었어. 아이고, 불쌍한 십사야, 아직 혼사도 치르지 못하고 후손도 보지 못했는데.”

고 관인은 혼사를 치르진 않았지만, 그가 낳은 아이는 벌써 여럿이 있었다.

내시는 속으로 태후의 말을 정정하면서도,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태후를 따라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십사는 애가를 위해서 직접 나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십사가 놈들의 손에 죽었고, 증거 없이는 범인을 잡지 못한다고 하니, 애가가 십사를 대신해서 진상을 밝히고 원수를 죽여야겠다!”

돌연 울음을 그친 태후가 고개를 들고 매서운 눈초리로 이를 부득 갈았다.

“고 대인은 할 수 없지만, 애가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어차피 체면은 바닥까지 내려놓았어. 군주가 신하에게 죽으라고 한다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이니라. 애가가 기필코 그놈을 죽이겠다는데, 누가 내 앞을 막을쏘냐!”

-이런 것밖에-

청원 역참 안. 밤바람이 불어오자 회랑 아래 걸려 있던 등롱들이 흔들거렸다.

“전하, 전하.”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이 소식들을 부인께도 알려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부인께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여쭤보는 게 좋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 선생이 기뻐하면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성에 남겨 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들 요직에 배치해뒀습니다. 이번 일로 혼란한 틈을 타 몇 명 더 꽂아 넣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태자 전하와 관련된 소식을 전하께서 더 빨리 아실 수 있을 테지요. 원래 이 일들은 부인께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부인께서 아시는 게 많을수록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주절주절 떠들어대던 고 선생은 자신의 앞에 있어야 할 진안 군왕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 선생이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흔들리는 등롱 때문에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진안 군왕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전하?”

고 선생이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 진안 군왕을 불렀다.

“뭐 하러 가는 겐가?”

진안 군왕이 물었다.

“가서, 왕비를 뵈어야지요.”

고 선생이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왕비 전하께 경성의 반응과 우리 사람들의 배치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한다고요.”

진안 군왕이 고 선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하에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고 선생 하나뿐이던가?”

고 선생이 멈칫했다.

무슨 뜻이지?

옆에 서 있던 경 공공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향해 말했다.

“전하, 어서 가서 쉬시지요. 잠을 못 주무신 지 너무 오래되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엇?”

고 선생이 재빨리 진안 군왕을 따라가려고 하자, 경 공공이 그를 제지했다.

“하룻밤하고도 반나절 내내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습니까? 나머지는 전하께 맡기시지요.”

경 공공이 웃으면서 말하자, 고 선생이 콧방귀를 뀌었다.

“두 분이 정작 중요한 얘기는 안 하실까 걱정되어 그러지.”

하늘빛이 점점 더 어두워질수록, 역참 안은 차츰 조용해져 갔다. 달빛이 밝아 별은 드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자, 위층 회랑 아래 정교랑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가을의 밤바람은 서늘했다. 정교랑이 걸치고 있던 붉은색 두봉이 가을바람에 휘날리자, 달빛을 길 삼아 바람을 타고 떠나려는 신선처럼 보였다.

“뭘 보고 있어요?”

진안 군왕이 위층으로 올라가 물었다. 정교랑이 대답하기 전에, 진안 군왕이 또 물었다.

“식사는 좀 했고요? 잠은 좀 잤어요? 여기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아요?”

그는 정교랑의 대답을 원하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관심의 표현이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고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하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갔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새까만 하늘 위에 별들이 보석처럼 콕콕 박혀 있었다.

“밥은 한 그릇 먹었고, 목욕한 뒤에는 잠시 눈을 좀 붙였어요. 이부자리는 다 내가 가져온 거라, 불편하지 않았고요.”

정교랑이 진지하게 진안 군왕의 질문에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품에 안고 말했다.

“나도요. 나도 한 그릇 먹었어요. 처소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대화하는 틈을 타 몰래 졸기도 했죠.”

정교랑이 미소 지었다.

“아 참, 소식이 그새 경성까지 닿아서, 경성 사람들이 난리도 아니래요. 이것도 당신이 준비해 뒀던 건가요?”

진안 군왕이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진안 군왕이 놀란 기색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얼마 전부터 전해진 마적이 나타난다는 소문은 고씨 가문에서 만든 거예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고능준의 수법이라면, 그리 치밀할 법도 하지.

“그리고 그 뒤의 일은 진호가 처리했을 거예요. 죽은 건 우리가 아니지만, 어쨌든 죽은 사람이 있잖아요. 모든 건 계획에 따라 진행됐어요. 다만 누군가가 결정적인 시기에 활시위를 당겨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게끔 도왔어야 했죠. 그러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다 고씨 가문이 계획을 잘 짜둔 덕을 본 셈이에요.”

계획을 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게 바로 제일 환장할 노릇이겠지.

진안 군왕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진안 군왕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누구라고 했어요?”

진안 군왕이 뭔가를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상한 이름을 하나 들은 거 같은데?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진호. 진 시강의 아들이자 진씨 가문 열셋째 공자요.”

아니, 아니. 진호가 누군지는 나도 당연히 알지.

“아니, 내 말은, 진호가 그랬다고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거기서 진호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이 일이 그 사람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어젯밤에 당신 혼자 간 게 아니었어요?”

진안 군왕이 재차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마주쳤어요.”

우연히?

진안 군왕이 경악했다.

길가에서 술을 마시며 연극을 보거나, 타지로 가는 길에 역참이나 객잔에 머무를 때는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일에도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가 있나?

그게 무슨 우연이야?

사전에 논의된 거였겠지? 하지만 사전에 논의한 거라면, 이 여인이 우연이라는 말을 쓰진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정말로 사전에 논의가 되지 않았던 일이라는 말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아니야. 사실 왜 그런 우연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해.

진호라는 사람, 나도 잘 알고 있지. 그 이름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진안 군왕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뱃머리에 여유롭게 서서 정교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던 소년.

진안 군왕은 여러 사람을 부러워했다. 새해 인사를 올리러 입궐한 관리들과 부인들이 부럽기도 했다. 언제든 황궁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또 하늘을 나는 새들이 부럽기도 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릴 때의 일이고,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더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남이 되고 싶다고 한들, 자신이 군왕이라는 사실은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군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를 타고 강가를 지나가던 그때, 진안 군왕은 뱃머리에 서 있던 소년이 뼈저리게 부러웠다. 언제든 정교랑과 함께 나들이를 갈 수 있고, 정교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고, 정교랑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그 소년이.

다리를 고친 후로 정교랑과 가장 많이 교류했던 사람 또한 진호였다.

어가에서 정교랑과 함께 꽃등 놀이를 구경하고, 과거에 급제했을 때는 정교랑이 직접 빚은 관인양을 마셨던 사람.

심지어 진안 군왕은, 중독으로 혼수상태가 된 채 정씨 저택에 실려 갔을 때도 진호라는 이름을 들었었다.

  • 아씨께서 진 공자님과 같이 계세요.

  • 연꽃을 보러 간다고 하셨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팔을 가볍게 치자, 진안 군왕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진안 군왕의 눈앞에 밤하늘의 별보다 반짝이는 두 눈이 보였다.

“왜 그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그 사람, 당신을 위해 온 거였죠?”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서 난간을 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물었다.

“아니요. 그 사람은 고 관인 때문에 왔던 거예요. 그래서 우연히 마주친 거고요.”

그 사람도 고 관인 때문에 온 거였고, 이 여인 또한 고 관인을 찾아간 거였으니,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여인과 고 관인은 형제를 죽인 원수지간이라지만, 그 사람은 고 관인에게 무슨 원수를 졌길래?

그리고, 진호라는 자는 고 관인과 한패가 아니었나? 공주부 진씨 가문은 늘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봉지로 내보내려고 혈안이었어.

그리고 지난번 일도, 내가 정교랑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고 할 줄 알고 진호를 시켜서 연꽃을 보러 가게 했고. 그 일은 분명히 진씨와 고씨 가문이 같이 꾸민 짓이었을 텐데.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바보.

진호는 자신을 위해 고 관인을 죽이러 간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간 거예요.

진호가 그 계략에 동참한 이유는 나를 상대하기 위함이었지, 당신을 상대하기 위함이 아니었어요. 진호라면 절대 당신이나 정사낭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보면, 진호도 고씨 가문의 계략에 넘어간 거네요. 정사낭의 죽음이, 진호와 당신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 버렸어요.

내가 진호였어도,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죽음으로 몬 놈들을 평생 원수로 삼고 살아갔을 거예요. 그놈을 기필코 죽이고 말겠다고 매일 밤 이를 갈면서요.

하지만 정사낭의 죽음은, 진호뿐만 아니라 나도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걸 몰랐다면, 고씨 가문이 당신을 계략에 빠트리지는 않았겠죠.

진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고 관인을 죽이러 쫓아왔다지만, 나는요?

당신이 돌화창으로 만들어 낸 안전한 사찰에 서서 당신을 기다렸어요. 당신이 홀로 수많은 적을 상대하며 살벌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당신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죠.

생각을 멈춘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등불 하나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어둡기만 했다.

진안 군왕과 정교랑은 어느새 잠자리에 든 후였다. 바깥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정교랑은 고른 숨을 내쉬면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작은 소리로 정교랑을 불렀지만, 정교랑은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려는 거야! 돕지 못하면 가만히 있기나 해야지, 괜히 피곤해서 자는 사람을 깨워서 성가시게 할 필요가 뭐 있다고.

진안 군왕은 조심스럽게 다시 자리에 눕고, 머리 뒤로 손을 받치며 어둑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세수와 양치를 하는 이른 아침이었다. 경 공공은 거뭇거뭇한 진안 군왕의 눈 밑을 보고는 조용히 내시들에게 명했다.

“가서 보양탕 한 그릇 끓여 오너라.”

어젯밤에는 또 얼마나 난리였길래.

경 공공이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마당에 들어온 고 선생이 밖으로 걸어 나오는 진안 군왕과 마주쳤다.

“전하, 전하.”

고 선생이 다급하게 진안 군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떻게 됐습니까? 어제 왕비께 말씀드리셨습니까? 왕비께서는 뭐라고…….”

고 선생이 왕비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정교랑이 후원에서 활을 들고 돌아왔다.

“정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머쓱해진 고 선생은 문밖에 멈춰 섰다.

“왜요?”

정교랑이 물으면서 활을 반근에게 건넸다.

“내가…….”

일단 입은 열었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진안 군왕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머리 감겨 줄게요.”

반근과 소심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따뜻한 물을 떠낸 진안 군왕은 다소 난감한 눈치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정교랑의 긴 머리카락 위로 물을 끼얹으며 물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깨끗하게 씻기기만 하면 돼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의 동작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반근과 소심이 시선을 거두고 서로를 마주 보면서 쿡 하고 웃었다.

“아침 준비하자.”

반근이 조용히 말했다. 소심은 팔이 고장 난 듯 움직이는 진안 군왕을 흘깃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이런 거밖에 없네요. 다른 사람은 당신을 도와서 사람도 죽이는데, 나는 당신 머리를 감겨 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어요.”

진안 군왕이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

정교랑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첫째, 진호는 나를 도우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도우려던 거였어요. 둘째, 당신은 나를 돕는다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요. 나를 도우려면, 내가 하기 벅찬 일을 도와야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당신 생각에 날 돕는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건, 나를 돕는 게 아니에요.”

“위로 안 해 줘도 되거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정교랑의 머리를 감겼다.

“위로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위로해 줄 필요가 있나요?”

정교랑이 눈을 뜨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굳이 도움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나한테는 가장 큰 도움이에요.”

또 달콤한 말로 나를 달래려는군.

진안 군왕이 속으로 투덜댔지만,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고 관인 쪽에서 사람을 보내오지 않았겠죠. 덕분에 내가 고 관인을 죽였는걸요.”

정교랑이 말했다.

“아.”

진안 군왕이 물바가지를 내려놓고 말했다.

“내가 미끼라는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이 손끝으로 정교랑의 코를 살짝 집었다.

“그럼 이 미끼가 굳이 머리를 감겨 줄 필요는 없겠네요.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렇게 가다가는 아침이 아니라 점심을 먹어야 할 판이에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여봐라.”

문밖에 서 있던 소심과 반근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의 머리를 감겨드려라.”

반근과 소심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가는 진안 군왕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시선을 거두고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아씨께서는 늘 전하를 기쁘게 하시네.

“아씨, 아씨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내예요.”

반근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내라…….

정교랑이 목욕통 안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담갔다.

“가장 좋은 아내인지 아닌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건 소용없어. 낭군만이 말할 수 있지.”

“전하.”

드디어 밖으로 나온 진안 군왕이 기분까지 좋아 보이자, 고 선생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고 선생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정말로 기분이 좋으시네!

고 선생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하, 어제 부인과 이야기는 나누셨는지요? 부인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저희가 더 처리해야 할 게 있다고 하십니까?”

“무슨 이야기?”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밥상을 차린 시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과 시녀들이 욕실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진안 군왕은 손을 들어 고 선생의 말을 제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있거든, 밥부터 먹은 뒤에 이야기하지.”

무슨 이야기냐고?

고 선생이 눈을 부릅뜨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어. 결국 제대로 된 일 얘기를 하지 않을 줄 알았다고!”

고 선생이 옆에서 낄낄대는 경 공공을 향해 말했다.

“틀리셨습니다.”

경 공공이 말했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눈짓을 하며 덧붙였다.

“전하와 왕비께서는 제대로 된 일 얘기보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할 때입니다.”

고 선생이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마당 밖에서 시위가 다급하게 걸어 들어왔다.

“태후마마의 교지입니다.”

시종이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외쳤다.

태후마마의 교지?

고 선생과 경 공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진안 군왕과 정교랑도 밖으로 나왔다. 마당 밖에서 역승이 허리를 굽힌 채, 태후의 교지를 전달하러 온 내시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모습이 보였다.

“신은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바닥에서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그의 뒤에 있던 정교랑도 진안 군왕을 따라 큰절을 올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쳐다보던 내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 이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마마께서는 전하가 걱정되어 이리하시는 겁니다.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돌아가시지요.”

“마마께서 신을 아끼신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신은 더더욱 마마의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 채 말했다. 내시가 다시 교지를 돌돌 말았다.

“그럼, 소인은 돌아가서 전하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뭐라? 원래 경성에서 영영 죽치고 있으려던 놈이 아니냐! 그런데 왜 갑자기 싫다는 게야?”

태후가 냉소를 지었다.

“나 참, 일곱 번이고 여덟 번이고 성지를 거부하며 고결한 척하는 대신들을 따라 하기라도 하려고?”

태후가 소매를 홱 털고 또 말했다.

“다시 교지를 전달하거라!”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역참은 여느 때와 달리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다. 역참 주위에는 금군 병사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고,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는 가을 햇볕 아래에 선 역승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역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역참 밖을 내다보았다.

“세 번째입니다.”

역졸이 불안해하며 대답했다.

역졸의 말이 끝나자마자, 멀리서 어지러운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전갈을 가져온 내시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역참 앞에 멈춰 섰다.

“이제 네 번째네요.”

역졸이 손가락 네 개를 펴면서 말했다.

“나라의 재상을 모셔오는 것도 서너 번이면 족할 텐데.”

역승이 중얼거렸다.

문밖에서 태후의 교지를 외치는 내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안 군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태후마마를 두려워해서 되겠습니까! 가면 가는 거지. 궁에서 날 때려죽이실 수 있나 어디 한번 봐야겠습니다! 태후마마께서도 체면을 버리셨는데, 난들 체면을 지킬 필요가 있느냔 말입니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정교랑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안 돼요. 태후마마께서는 체면을 버리실 수 있어도,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는 군주고, 당신은 신하예요. 체면을 따지자면, 당신의 체면이 더 중요하죠. 그리고 미친 사람을 상대로 도박을 해선 안 돼요. 그럴 가치도 없으니까.”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태후마마의 교지입니다.”

문밖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지금 당신이 명을 거절하는 데는,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티끌만큼의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황궁으로 들어가 명을 받들지 않겠다고 하면, 그 티끌만큼의 이유조차 사라지게 돼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손을 다독였다.

“당신은 나올 필요 없어요.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으니 몸이 힘들 텐데, 나머지는 내가 할게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밖으로 나가는 진안 군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내시들이 또 자리를 떠났지만,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제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로 다음 교지를 기다렸다.

어디 몇 번이나 남았는지 한번 봐야겠다.

역참 문 앞에 서 있던 역승은 다리가 저려 왔다. 그가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까 온 사람들이 떠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역승이 물었다.

“한 시진 되었습니다”

역졸이 대답했다.

앞선 몇 번은 다 반 시진에 한 번씩 오던데, 이제는 더 안 오려나?

역승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길의 끝을 내다보았다.

“제 발로 오지 않겠다면, 밧줄로 묶어서라도 데려올 수 있느니라!”

황궁 안, 태후가 격노하여 소리쳤다.

“이번에는 그놈에게 교지를 내리지 않고, 금군에게 교지를 내려야겠다.”

태후가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대전 밖에서 고능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시들이 고능준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기도 전에, 고능준은 두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와 큰절을 올렸다.

본디 흰머리가 많지 않았던 고능준이지만,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센 듯 부쩍 늙어 보였다. 더구나 내시의 부축을 받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던 그였다.

순간 태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서 일어나게나. 여긴 무슨 일로 온 게야? 집에서 몸 추스르며 요양하지 않고.”

고능준이 내시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고 태후를 바라보았다.

“마마, 마마께서 연달아 여덟 번이나 교지를 전달하셨는데, 신이 어찌 마음 편히 앉아만 있겠습니까.”

고능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능준의 말에는 질책과 탄식이 섞여 있었다. 태후는 꾸중을 들은 어린 소녀처럼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애가는 도저히 이 울분을 삭이지를 못하겠네.”

이 울분을 삼켜내지 못하시겠다고요? 삼킬 수 없는 울분이라면, 제가 훨씬 클 겁니다.

고능준이 긴 한숨을 뱉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기대를 걸었던 평왕이 죽고, 그나마 의지하던 황제는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늙어 가는 태후와 천지 분간 못 하는 바보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젠 아들마저 죽었다.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누구인지 빤히 아는데도 범인의 사지를 찢어버릴 수 없다.

이 울분을 삼키지 못하면 어쩔 건데? 토해낼 수 없으니 삼킬 수밖에. 울분 좀 삼켰다고 숨 막혀 죽을 일은 없을 터.

“마마, 이 일은 제가 잘못한 겁니다. 십사는 결국 제 손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요.”

남에게는 관대하되, 스스로에게는 엄격하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

태후가 놀란 눈으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겪은 사람이 어찌? 아니면, 충격이 너무 커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무모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너무 무모했어요.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렸다시피, 진안 군왕이든, 그 정씨 여인이든, 다 차후에 처리해도 될 사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난다는 말에, 순간 마음이 급해져 그만…….”

내가 저들을 이리 급히 죽이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십사도 저들 손에 죽지 않았겠지요.

아니면, 저들이 조금 더 멀리 간 뒤에 처리해도 됐을 겁니다. 경성 인근에서 벌어진 일인지라 치밀한 준비 끝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조차 못 하는 처지가 되지는 않았겠지요.

가엾은 우리 십사.

고능준은 소매로 눈물을 훔쳤고, 태후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무모한 게 아니었어. 일이 이렇게 된 건, 우리가 너무 늦어서 그런 게야. 일찍이 그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호랑이 새끼를 키워서 결국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꼴이 되었어.”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당장 그놈을 잡아들여라!”

“마마!”

고능준이 분노 섞인 표정으로 목청을 높였다.

“호랑이라니요! 그놈은 호랑이가 아니라 원숭이 새끼에 불과합니다! 산에 호랑이가 없어져야만 왕이 될 수 있는 원숭이요! 호랑이가 산에 있는 한, 제아무리 재간을 부리고 날뛴다 해도, 원숭이는 절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고능준이 윗전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인지라, 태후는 깜짝 놀라 몸을 살짝 떨었다.

“마마.”

고능준이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들끓는 화를 간신히 참아냈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말했다.

“마마와 태자 전하야말로 호랑이지요. 두 분이 건재하신다면, 그놈은 뭣도 아닙니다.”

“그럼 이대로 가만 손 놓고만 있을 작정인가? 십사의 죽음은 어찌하고? 그놈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청원 역참에 죽치고 있는 꼴을 보고만 있겠다는 겐가?”

태후가 울면서 말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러나 때로는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더 좋은 법입니다. 저들은 지금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패를 쓰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 저들의 바람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지요.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 정도야 청원 역참에 머무를 구실이 있다지만, 저들이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 구실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풍이 서풍을 누르는 날이 있다면, 서풍이 동풍을 누르는 날도 있는 것이지요. 급할 것 없습니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마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자 전하의 국혼입니다. 그리고 태자 전하께서 후손을 보는 것이 급선무지요. 태자 전하께서 아들을 낳는다면, 조정 또한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

고능준이 말을 이어 갔다.

민심이 안정을 찾으면 강산 또한 태평할 테고, 강산이 태평하면 고씨 가문의 입지 또한 탄탄해질 테지요.

그 빌어먹을 부부를 며칠만 더 살려두는 것뿐입니다.

“물론, 이대로 그들이 마음 놓고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고능준이 천천히 말했다.

깊은 밤, 야시장과 술집이 즐비한 곳 외에는 경성 전체가 단잠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한 저택의 주위에서 시커먼 그림자 몇 개가 움직였다. 그들이 손에 쥔 것을 담벼락 너머로 힘껏 던지자,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마당 안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불이야! 불이야!”

불꽃이 튀는 동시에 저택 안에서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그림자들이 멈칫했다. 한편 멀리 길가에서도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 불이 났소!”

누군가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흘러들어왔다.

“젠장, 지금쯤이면 순찰 도는 병사들도 술 퍼마시면서 농땡이 피울 시간 아닌가? 왜 하필 지금 이쪽 순찰을 도는 거야?”

그림자 중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냈다.

“거 쓸데없는 소리는. 정말로 누구를 태워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이렇게 겁준 정도로 충분하니까. 어서 가자고.”

다른 사람이 조용히 대꾸했다. 그림자들이 저택 근처에서 사라졌다.

마당 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여보.”

황급히 밖으로 나온 황씨는 겉옷을 걸친 채 회랑 아래 서 있었다. 황씨가 마당에서 시종들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리는 범강림을 불렀다. 회랑의 흔들리는 등롱에 비친 황씨의 얼굴에는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시종들이 범강림을 향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불을 끄러 뛰어갔다.

범강림이 회랑 아래로 걸어왔다.

“괜찮소. 다시 가서 눈 좀 붙이시오.”

황씨가 범강림의 소매를 붙잡았다.

“차라리 우리 다시 서북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요?”

황씨가 말했다.

누이가 떠났고, 고십사가 죽었다. 경성 인근에 마적이 나타났다는 소문까지 퍼진 것을 보니, 지금 경성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벽에 갑자기 집에 불이 붙은 건, 절대로 날씨가 건조한 탓이 아니었다.

범강림이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황씨가 곧바로 물었다.

“우리가 떠나야 할 때.”

범강림이 에둘러 말했다.

황씨가 이어 물으려고 하던 찰나, 후원 쪽에서 화르르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씨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저기엔 또 왜 불이 붙은 거예요?”

황씨가 다급하게 사람을 부르려고 하자, 범강림이 황씨를 제지했다.

“괜찮소. 기왕 누가 불을 질렀다면, 이참에 태워 버리지 뭐.”

뭐라고?

황씨가 경악했다.

이참에 태워 버리자고? 이참에?

황씨가 고개를 들고 후원을 내다보았다. 불이 난 곳은 후원의 고방이었다.

다행히도 고방에는 중요한 물건이 없었지만, 범강림이 소보아를 위해 만들던 대나무 집과 거죽들, 그리고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대나무 집.

황씨가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일렁이는 불길에 비친 범강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진호가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수군거리고 있던 두 시녀는 깜짝 놀라며, 내의만 입은 채로 소매를 걷어붙인 진호를 쳐다보았다.

“공자님.”

시녀들이 서둘러 예를 표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냐?”

진호가 물었다.

“공자님, 저쪽 거리에 불이 났대요.”

시녀가 대답했다.

“불길이 우리 집까지 번질 정도더냐?”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묻자, 시녀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들 그러고 있어?”

진호의 물음에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공자님, 그게, 정 낭자 댁에 불이 났습니다.”

진호가 흠칫 놀랐다가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진씨 저택과 정씨 저택은 정반대인 동쪽과 서쪽 거리에 있어서, 아무리 목을 빼고 본다 한들 보일 리 없었다.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순찰을 돌던 병사들이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간 덕에, 불길은 금세 잡혔대요. 다친 사람은 없고, 그냥 집이 조금 탔다고 들었어요.”

시녀의 말에 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진호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기네 사람들이 아직 덜 죽었다고 생각하나 보군. 더 빨리 죽여 달라고 이리 애원을 하다니.”

지금 누굴 말씀하시는 거지?

시녀들이 의아해하던 사이, 진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깊은 밤인데도, 진호의 방 안은 등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방바닥에는 온갖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진호가 바닥에 놓여 있던 단도 한 자루를 집어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등불에 비친 단도에 서늘한 빛이 반짝였다.

“아니지.”

진호가 멈칫하고는 허리를 펴고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칼을 쓸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아니야.”

진호가 혼잣말을 하면서 다시 단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진호는 무기들을 한번 쭉 훑어보고 단창을 집어 들었다.

“지금 이 정도 거리라면 이걸 써야지.”

진호가 또 허공을 향해 무언가 찌르는 시늉을 했다.

눈앞에 빗속의 여인이 스치자, 진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화살을 쏘고, 장창과 호두창(虎頭槍)을 날려서 가장 앞선 놈을 찔러 죽였다.

빗속의 여인은 단창을 채찍 삼아 말에 박차를 가하고, 끝이 날카로운 장창으로 앞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의 목을 베어 말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대나무와 강철을 엮어 만든 채찍을 휘둘러 상대를 근거리로 끌어온 뒤 도끼로 머리와 심장을 쪼갰고, 양쪽으로 삼지창이 달린 탁천차(托天叉)와 눈썹 높이의 나무 봉인 제미곤(齊眉棍)을 각각 한 손에 들고 순식간에 빈틈을 찾아내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환한 방 안, 진호가 날렵하게 무기를 휘두르면서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에 쥔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등불을 흔들리게 했다. 벽과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쉼 없이 움직였다.

같은 시간, 아직 잠들지 못한 사람은 여럿이었다.

황궁 안, 태후의 침궁에서 연이어 큰소리가 들려왔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태후가 휘장을 홱 젖히며 호통쳤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궁녀가 서둘러 이마를 땅에 찧었다.

“잠을 자라는 게냐, 자지 말라는 게냐? 시중 하나도 제대로 들 줄 몰라?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태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밖에 서 있던 상궁과 내시들이 서둘러 후전에 있는 태자의 처소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사람들이 몰려오자, 후전에 있던 내시들이 불안에 떨며 예를 올렸다.

“연유는 모르겠으나, 태자 전하께서 잠을 주무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태후의 상궁과 내시들이 전각 안을 들여다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밤바람이 코를 찌르는 악취를 고스란히 문가로 전달했다.

태자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니, 아무리 자주 옷을 갈아입혀 주어도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궁과 내시들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태후마마께서는 정사를 돌보느라 고단하시네.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겐가? 자네들이 전하를 잘 보필해야 태후마마께서 편히 주무시지!”

내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태자의 내시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계속 시끄럽게 해서 태후마마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바로 목숨이 달아날 것이야.”

상궁이 경고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내시들은 태후의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태자의 궁 안에서 또다시 괴이한 소리가 들려오자, 내시들이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태자는 침상에 밧줄로 손발이 묶인 채 천장을 보며 악을 쓰고 있었다.

“정말 성가셔 죽겠네. 도대체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왜 날이 가면 갈수록 잠을 거부하시느냔 말입니다!”

내시가 고개를 저으며 윽박질렀다.

“일단 입부터 막자고.”

다른 내시가 재빨리 방법을 생각해 냈지만, 다른 내시들이 곧바로 그를 제지했다.

“태의가 말했지 않은가. 태자가 너무 뚱뚱하다 보니 입을 막아버리면 숨을 제대로 못 쉬어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나?”

내시들이 방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럼 여인들을 다시 불러오게. 몸에 있는 화를 좀 내보내면, 조용해지시겠지.”

한 내시가 태자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시가 곁방에서 자고 있던 여인을 불러왔다. 여인은 내키지 않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전하께서 요 며칠 힘드십니다. 한 번 하면 끝나 버린다고요.”

내시들 앞인지라, 여인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하품을 해대며 말했다.

“다 제가 움직여야 하는 거라지만, 전하께서 그걸 세우기라도 하셔야지요.”

내시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거야 쉽지. 보약 한 그릇 더 들이켜시면 될 일 아닌가.”

여인이 눈을 흘겼다.

“공공들이 드시고 싶은 건 아니고요?”

여인이 웃음기 서린 눈으로 말했다.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시시덕거리며 떠드는 사이, 얼마 안 가 다른 내시가 보약을 들고 들어왔다.

밤이 더욱 깊어질 때쯤, 태후의 침전 밖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내시가 손을 비비며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태자의 괴성이 들리지 않자, 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모르겠군.”

달이 지고 해가 뜨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범강림의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도 오후 경에는 청원 역참으로 전해졌다.

반근과 소심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진안 군왕도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되겠어요. 우리 경성으로 돌아갑시다. 복수를 하든 뭘 하든, 하려던 대로 해야겠어요. 고씨 가문은 이미 미쳤습니다. 당신도 말했잖아요. 미친 사람과 내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요.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정사낭에게 일어났던 비극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돼.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지금은 아직 돌아갈 수 없어요.”

“정방,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경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들이 나를 죽이고 싶다고 해도, 저들 뜻대로 쉽게 죽이지는 못할 거예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당신이 걱정되어서가 아니에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요. 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할 거예요. 큰 오라버니 내외가 소보아를 데리고 군감사로 거처를 옮겼거든요. 고씨 가문이 아무리 미쳐 날뛴다고 해도, 군감사에 불을 지르고 살인을 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영원히 숨어 살 수는 없잖아요. 그들 내외를 경성 밖 안전한 곳으로 먼저 보내 놨어야 하는 건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경성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이었다면, 진안 군왕도 지금에서야 경성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범강림 내외는 비록 진안 군왕과 같은 종친 신분이 아니었지만, 정교랑의 가족이었다. 따라서 정교랑이 경성에 있는 한, 그들 역시 어딘가를 자유롭게 오가는 건 힘들었다.

진안 군왕이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멀리 가면 갈수록, 그들은 안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정교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폭죽이 도착했습니다.”

문밖에서 내시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활짝 웃고는 정교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나랑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요.”

“불꽃놀이요?”

정교랑이 물었다.

“모레가 태자의 국혼일이에요. 경성에서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서 불꽃놀이로 축하해 주려고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손을 잡자,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을 잡아끌었다.

문이 열리자, 병사들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누굽니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딜 아무렇게나 쳐들어…….”

하인들이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장수가 허리춤에서 명패를 흔들었다.

“군감사에서 나왔다.”

하인들이 흠칫 놀랐다.

“분실된 무기를 찾아오라는 명을 받았다. 군감사 소속의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가택 수사에 응해야 한다. 이 일은 범 군감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다.”

장수의 말에, 하인들은 더는 막아서지 못하고 길을 비켰다.

“한 곳도 빠짐없이 꼼꼼히 조사해라. 우리 사람이라고 대충대충 하지 말고. 우리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범 군감의 결백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을 테니.”

장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병졸들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일사불란하게 마당 안으로 흩어졌다.

“이곳은 어떻게 된 것이냐?”

새카맣게 탄 후원의 담벼락과 다 허물어진 고방을 본 장수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정말로 증거를 인멸하려 했던 건가? 흔적조차 남지 않게?

-야변(夜變)-

“나리, 어젯밤에 갑자기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하인 한 명이 겁먹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하자, 장수가 그의 말을 끊고 호통쳤다.

“불이 나? 그런 우연이 있단 말이냐? 하필 어젯밤에 불이 났다고?”

장수가 눈을 부릅뜨고 하인을 향해 윽박질렀다.

“바른대로 고하거라! 네놈들이 일부러 불을 지른 게 아니더냐!”

하인들은 억울하다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엄히 조사하라! 하필 어젯밤에 불이 났다는 것이 참으로 수상쩍구나!”

장수가 병졸들을 향해 소리치자, 하인이 놀란 눈으로 장수를 쳐다보았다.

“나리, 나리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하인이 감격스러워하면서 눈치도 없이 말을 덧붙였다.

“저희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분명 며칠 전에 큰비가 내려서 건조한 날씨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왜 갑자기 불이 났을까요?”

하인은 장수를 향해 연신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부디 나리께서 잘 좀 조사해 주십시오. 방 두 개가 불에 타버렸고, 귀중한 물건들을 두었던 고방도 다 타 버렸습니다.”

“조사하기는 개뿔!”

따귀를 후려치는 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한 사내가 장수의 얼굴을 매섭게 내리쳤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맞은 장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썩 꺼지거라!”

장수는 아픈 뺨을 매만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둘러 밖으로 물러났다. 대청 안에 서 있던 사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냐?”

“예. 화약이나 탄약을 만든 흔적 따위는 일절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대인, 군감에서도 분실된 물품이 전혀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정 낭자가 직접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범강림이나 이무 모두, 다 정 낭자의 가르침으로 그 무기들을 만들어 낸 거잖습니까.”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도 안다. 범강림과 이무가 정 낭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어. 내가 알고 싶은 건, 지금 정 낭자의 손에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며, 그게 얼마나 더 있는지다.

보아하니 경성에서는 조사할 만한 게 없는 것 같군. 너희들은 청원 역참을 더욱 예의주시하거라.”

사내의 말에 다들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인, 그럼 고 관인의 일은 일단 조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한 사람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당분간만이다. 지금은 내일모레 거행될 태자의 국혼이 무엇보다 중요해.”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 대인이 경성에 오래도록 머무를 구실이 만들어진 셈이군요. 고 노부인께서 앓아누우신 데다가, 이젠 본인까지 병들었으니, 더더욱 경성을 떠나기가 힘들겠습니다.”

진(陳)씨 저택 안에서 한 막료가 말했다. 그러나 진소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했다.

진소는 내일모레 있을 국혼 준비를 마치고, 오후에 궁에서 돌아온 뒤로 계속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내일모레 있을 태자의 국혼이 무엇 때문에 성사되었는지,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어쨌거나 딸자식이 출가하게 되었으니 대인께서도 마음이 심란하시겠지.

“대인, 시간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막료들이 말했다.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가는 막료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진소는 몸을 일으켜 후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에는 국혼을 위한 화려한 장식들이 하나둘씩 걸리기 시작했다. 경사스러운 장식품 때문에 어스름한 초저녁의 마당이 한층 더 알록달록해 보였다.

진소가 나오자, 하인들이 서둘러 예를 표하면서 길을 비켰다. 진소는 안팎으로 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후원의 문 앞까지 다가갔다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진단랑의 혼사를 결정한 뒤로, 진소 부인은 진소가 후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 이렇게 입는 건 어때요? 예뻐요?”

진단랑의 맑은 목소리가 후원에서 들려왔다.

진소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안쪽을 들여다보자, 대청 안에서 붉은 혼례복을 입은 진단랑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런데 제가 입으니까, 정 언니가 입었을 때처럼 예쁘진 않은 거 같아요.”

“어머, 아씨, 농담하시는 거죠? 아씨께서 입으신 건 태자비의 옷과 장신구들이에요. 정 낭자가 입은 건 군왕비의…….”

대청 안에서 여종들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진소가 돌아서서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 왜 우시는 거예요?”

“이 어미는 기뻐서 그러지.”

등 뒤로 들려오는 대화를 더는 들을 수 없었던 진소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황궁 안. 태후궁의 침전은 등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시끌벅적했다.

“육가아, 육가아. 이리 와서 앉아 보렴, 어서.”

태후가 말했다. 하지만 태자는 태후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해맑게 웃는 얼굴로 괴성을 내지르며 기둥을 붙잡고 있었다.

“마마, 그만 부르시지요. 전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십니다.”

태후의 측근 내시가 말하고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손을 들었다.

“어서 가서 태자 전하를 앉혀 드리거라. 밤새 뛰어다니셨으니 조금 쉬셔야지.”

내시들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태자에게 우르르 몰려가 그를 힘으로 눌러 자리에 앉혔다. 전각 안에 태자의 짜증 섞인 괴성이 울려 퍼졌다.

태후가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태자의 국혼이니 어찌 됐든 태자가 직접 나서긴 해야 할 텐데, 지금 저 꼴 좀 봐라. 저래서야 태자를 어찌 붙잡고 있겠느냐?”

태후의 말에 내시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전하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렇게 난리를 피우신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태자의 괴성에 심란해진 태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먹이지 않았더냐? 그 탕약이나 좀 가져다 먹이거라.”

태후의 물음에 내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태의가 그 탕약은 너무 많이 쓰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태후가 언짢은 기색으로 내시를 노려보았다.

“딱 요 며칠만 쓰자는 거지. 국혼을 치르는데 체통은 지켜야 할 것 아니냐.”

태후의 말에 내시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오늘 밤에도 시침을 명할까요?”

내시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시 서너 명이 붙었는데도 태자 하나를 제대로 붙잡고 있지 못하자, 태후가 태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넘치는 힘을 뒀다 어디에 쓰려고?”

내시가 태후의 뜻을 이해하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만 가 보거라. 하루 종일 저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일찍 재워야지.”

태후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예를 표하고 태자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밤이었다. 태자의 궁에서 여인의 짤막한 신음이 들려오더니, 곧 다시 조용해졌다.

바깥에 서 있던 내시가 하품을 했다.

“오늘은 그래도 좀 길었네.”

맞은편에 서 있던 내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여인이 옷을 반쯤 걸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于) 낭자, 보아하니 장차 황태손의 생모가 될 사람은 바로 낭자겠습니다.”

내시들이 예를 표하면서 웃었다. 여인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황태손의 모친은 황후마마신걸요.”

“우 낭자도 피곤할 텐데, 그냥 여기서 쉬는 건 어떻겠습니까? 귀찮게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고요.”

내시들이 말했다.

여인의 눈가에 경멸의 눈빛이 스쳤다.

저런 바보랑 같이 자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저리 더러운 냄새까지 풍기는데.

“아니에요. 소인이 어찌 감히 태자 전하와 한 침상을 쓸 수 있겠습니까.”

여인이 나풀거리는 걸음걸이로 자리를 떠났다.

내시들이 막 잠을 자러 들어가려던 그때, 안쪽에서 태자의 괴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이고, 왜 또 저러시는지.”

한 내시가 말했다.

“그냥 탕약을 먹여 버리자고.”

다른 내시가 말했다.

내시들이 탕약을 먹이자, 태자는 금세 조용해졌다. 내시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지러운 침상 위를 바라보던 내시가 침상을 정리하려고 손을 뻗자, 다른 내시가 그를 제지했다.

“치우다가 괜히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더러워도 그냥 내버려 두게. 누가 이런 걸 신경이나 쓰겠어? 내일 아침에 한꺼번에 정리하면 되는걸.”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뒀다. 내시들은 방을 나가기 전,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향을 피운 다음 휘장을 내리고 밖으로 나갔다.

야간 당직을 서는 내시를 제외한 나머지 내시들이 모두 태자궁을 빠져나왔다.

한 내시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내일은 날씨가 좋겠군.”

가을밤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역참이 고요해졌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 며칠은 날씨가 좋네요. 사천대가 쓸모 있을 때도 있다니 놀랍군요. 적어도 국혼을 치를 때만큼은 비가 내리지 않겠어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웃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다 각자의 재능이 있으니까요.”

“당신 같은 천재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 평범해 보일 줄 알았는데요.”

진안 군왕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 불과해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별빛에 비친 정교랑의 미소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참, 잠깐만 기다려요.”

진안 군왕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가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당직을 서던 내시들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내시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인, 바람이 차요.”

반근이 두봉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정교랑이 몸을 돌려서 반근이 들고 나온 두봉을 어깨에 걸쳤다. 정교랑이 다시 몸을 돌릴 때쯤, 진안 군왕이 마당 안에 서서 정교랑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봐요.”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린 내시 두 명이 폭죽 두 개에 불을 붙였다.

하늘에서 펑펑 소리를 내며 불꽃이 터지더니, 오색빛깔의 구름 두 점이 역참의 하늘을 밝혔다. 앞쪽 마당에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 선생이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입술을 삐죽였다.

“허구한 날 저런 것에만 신경 쓰시지.”

고 선생이 나지막이 투덜거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경성에서 전해 온 소식들을 읽었다.

반근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때요? 예뻐요? 우리가 혼례를 올리던 날에 비하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을 향해 묻자,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정교랑의 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니 곧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난간을 붙잡았다.

정교랑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반근이 재빨리 다가가 정교랑을 부축했다.

“부인, 왜 그러세요?”

마당에 서 있던 진안 군왕도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는지, 의아하다는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왔다.

불꽃이 사라지던 그 순간, 정교랑의 경악한 표정이 불빛에 비쳤다.

“오성취두우(五星聚斗牛: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다섯 개의 별이 북두성과 견우성 자리에 모이는 천상).”

정교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성취두우라니.”

“정방?”

진안 군왕이 위층에 올라와서 정교랑을 부르자마자, 정교랑은 몸을 홱 돌려 진안 군왕을 향해 돌진했다. 진안 군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붙잡았다.

정교랑이 자신을 잡은 진안 군왕의 팔을 덥석 붙잡고 말했다.

“방백종, 지금, 당장, 경성으로 돌아가야 해요.”

지금 당장, 경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진안 군왕이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의 진지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꽈당 하는 소리가 야밤의 정적을 깨트렸다.

휘장을 걷고 침상 위로 시선을 옮기던 내시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옆에 있던 의자를 쓰러트렸다. 내시는 엉덩이가 아픈 줄도 모른 채, 몸을 덜덜 떨며 침상 위를 바라보았다.

침상 위에 누운 태자는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뜬 채,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내시가 소리를 내질렀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서 사람을 불러오너라! 어서!”

“무슨 일이 생겼느냐?”

황후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침상 옆에 무릎을 꿇어앉은 내시를 바라보았다. 등불에 비친 내시의 표정이 어두웠다.

“태의들이 모두 그리로 갔습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태자더냐, 태후더냐?”

황후의 물음에 내시가 고개를 저었다.

“태후의 침전은 경계가 삼엄하여, 저희 쪽 사람이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내시가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황후가 침상에서 내려와 칠흑같이 어두운 밖을 내다보았다.

밤바람이 황궁 안에 휘몰아쳤다.

태후의 침궁은 등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수십 개의 초가 켜져 있어 실내는 대낮보다 더 밝았지만, 촛불이 가을밤의 스산함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안색은 도리어 점점 창백해졌다.

“태의, 태자의 상태는 어떠하던가?”

머리도 묶지 못하고 달려온 태후가 다급하게 물었다.

안쪽에는 일고여덟 명의 태의가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중 한 태의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 등의 힘으로는 태자 전하의 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의의 말을 들은 태후는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귀가 웅웅 울렸다. 곧 태후의 몸이 휘청이더니, 뒤에 있던 궁녀들의 품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하루에 세 번씩 태자의 상태를 살피면서도 태자는 멀쩡하며 건강하다고 했잖아! 어째서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야!”

태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치자, 태의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들이 태자 전하께 무엇을 먹였는지부터 물어봐야 합니다.”

한 태의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 서 있던 내시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마, 소인들이 어찌 태자 전하께 아무 음식이나 올리겠습니까. 전하께서 드시고 마신 음식은 모두 태의의 허락을 받은 것들이옵니다.”

내시들이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말했다.

책임을 전가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괘씸한 놈들. 참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이로구나!

태후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궁녀들을 밀쳐내고 몸을 휘청이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의 태자가 침상 위에 누워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입과 코에서 흘러나온 피는 모두 닦아냈지만, 베개와 이불에는 아직 혈흔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태자의 육중한 몸은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모습이었다.

가망이 없어. 끝났구나.

태후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태후는 발밑이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지긋한 태후는 태자의 상태만 흘깃 보았는데도 그가 곧 죽을 거라는 직감이 왔다. 태후가 힘없이 침상 옆으로 주저앉았다.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면 좋아?

태후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마마, 마마, 어서 고 대인을 부르시지요.”

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 대인을 궁으로 들인다면, 태자 전하의 상태를 더는 숨길 수 없게 됩니다.”

다른 내시가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 새벽에 굳게 잠겨 있던 황궁의 문을 열어 고능준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신속하게, 그리고 은밀히 이루어진다 해도 그 의미가 뻔한 일이었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태자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숨길 수 있다는 게냐!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지게 될 일이니, 다른 사람보다는 고 대인에게 먼저 알려야겠다.”

태후가 호통쳤다.

조정 대신들은 하나같이 태후를 늙은 할망구로 여기고 무시했다. 지금 태후가 기댈 곳은 친정 사람뿐이었다.

“어서, 어서 고 대인을 모셔 오게.”

내시가 서둘러 말했다.

황궁의 문이 열리고, 내시 몇 명이 말을 타고 황궁을 빠져나왔다. 말굽 소리가 고요한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자, 어둠 속에서 무수히 많은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자의 침궁 안.

황궁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게 된 황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고 대인 댁의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태후마마께서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태후마마의 전갈이 없는 한 아무도 황궁으로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며, 명을 어길 시에는 그 자리에서 즉살하라는 교지입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의 생사는?”

황후가 묻자, 내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안비마마.”

내시와 궁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뛰어 들어오는 사람을 조용히 제지했다.

황후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내시와 궁녀들이 길을 비켰다.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못한 안비가 두 손에 보따리를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안비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 무슨 일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신첩이 마마를 지켜드리려고 달려왔어요.”

황후는 안비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여봐라, 본궁의 황후 조복과 인장을 가져오너라.”

내시와 궁녀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같은 시각, 마당에 서 있는 내시들을 본 고능준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인, 어서 궁으로 드시지요.”

내시들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다 일어난 고능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흩날렸다.

하늘이시여, 어찌 이렇게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

고능준은 깊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소식을 듣고 잠시 흐릿해졌던 고능준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당장 진 상공에게 알리거라.”

고능준의 말에 내시들이 흠칫 놀라면서 되물었다.

“진 상공이요?”

지금 이 일을 진 상공에게 알리겠다고?

“하지만 태후마마께서…….”

내시들이 불안해하며 말끝을 흐리자, 고능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마께서는 지금 너무 놀라 경황이 없으신 것이다. 그렇다고 측근에서 마마를 보필하는 자네들까지 덩달아 행동하면 어쩌자는 게야? 지금 같은 비상사태에 보정 대신을 부르지 않으면, 나중에 사람들이 마마를 어찌 생각하겠어?”

멈칫하던 내시들이 고능준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럼 진 상공께는 뭐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내시가 복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물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진 상공은 절대로 새벽에 입궁할 사람이 아닌데.

“사실대로 말해야지. 보정 대신에게 숨길 게 뭐 있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던 고능준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더구나, 진 상공이 남도 아니고.”

공주부 진(秦)씨 가문의 서재 안.

등불이 밝혀졌다. 진 시강과 진호가 내의 차림으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소식을 들어 보니, 지금 고능준이 입궁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진 상공 댁으로 갔다고 하더구나.”

진 시강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태후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니면, 태자한테?”

진호가 물었다.

“태자 쪽이다.”

진 시강이 대답했다. 진호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십삼, 황궁의 문은 경비가 삼엄해서 태후의 전갈이 없는 한 들어갈 수 없다. 지금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돼.”

진 시강이 다급하게 말했다. 진호가 고개를 돌리고 진 시강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지금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지금 저희가 해야 할 일은, 황궁 바깥의 일입니다.”

진 시강이 흠칫 놀랐다.

“벌써 사람이 도착했느냐?”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경성 밖까지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천만다행이지요.”

진 시강이 천천히 긴 한숨을 뱉어냈다.

“가 보거라.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진호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 상공의 저택 안.

내시들이 조용히 마당에 서 있었다. 태자의 위험을 알리자, 마당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설마 충격이 너무 커서 혼절하는 건 아니겠지?

“진 대인, 서두르셔야 합니다.”

참다못한 내시들이 말했다. 내시들의 재촉을 듣자, 진소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자네들이 나온 지 얼마나 됐지?”

진소가 갑자기 물었다.

“곧 반 시진이 되어갑니다.”

내시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무언가 알아차린 듯, 진소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뒤늦게 대답을 잘못했다는 것을 감지한 내시는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큰일 났군. 우리의 속셈을 알아챘어!

눈치챈 모양이야. 태후가 직접 전갈을 보낸 게 아니라, 고 대인이 물귀신처럼 자신을 끌어들였다는 것을!

이를 어쩌지?

내시가 불안에 떨던 사이, 진소가 걸음을 옮겼다.

“가세.”

내시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멈칫했다.

고 대인이 자신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고도 가겠다는 건가?

“노야.”

마당에서 진소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소가 걸음을 멈췄다.

근래에 저 말을 통 듣지 못했는데, 이렇게 걱정 섞인 목소리로 부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로구나.

진소가 고개를 돌리자, 진소 부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가시면 안 돼요. 조상님들의 일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진소 부인이 진소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

제위가 바뀌고, 강산이 바뀔 때마다, 조정에는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졌다. 그 일에 휘말렸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조정 대신들의 수는 수없이 많았다.

“오늘의 일은, 나 때문이기도 하오.”

진소가 부인의 손을 다정하게 다독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군자가 되어서, 어찌 위험을 두려워하겠소?”

말을 끝낸 진소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노야.”

진소 부인이 다시 진소의 소매를 붙잡았다. 진소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 생은, 내가 당신과 단랑에게 무척이나 큰 빚을 지었소.”

진소가 부인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진소 부인은 내시들과 함께 멀어져가는 진소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말굽 소리가 야밤의 정적을 깨트리자, 길가의 나무 위에 있던 새들이 놀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왜 갑자기 경성으로 돌아가시는 거지?”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고 선생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성은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어. 낮에는 절대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해놓고, 이 새벽에 왜 갑자기 돌아가야 한다고 하시는 걸까? 게다가 이 몇 명만 데리고?”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이 새벽에 경성으로 돌아가면서 그 많은 금군 병사들을 죄다 데리고 가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경 공공이 반문했다.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역모죄로 붙잡혀 현장에서 즉살을 당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고 선생이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분명히 경성에 무슨 일이 생긴 게야.”

고 선생이 문득 멈칫하고는,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말을 타고 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마차와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어떻게 아신 거지?”

황궁 문 앞에서 마차를 세운 진소가 마차에서 내렸다. 밤이 드리운 황궁은 몹시 어둑해 보였고, 그 속에서 점처럼 빛나는 등불들은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진소가 황궁 문 앞을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금위군 병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고, 다들 서늘한 빛을 내뿜는 무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진소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내시가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호랑이 입 같은 커다란 궁문이 천천히 닫혔다.

진소가 태후의 침궁 안에 들어서자, 미리 도착해 있던 고능준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진소가 물었다.

“태자 전하의 병세가 위태롭소이다.”

고능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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