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이 나간듯한 진안 군왕의 모습에 반근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물러났다.
정교랑은 눈짓 한 번과 말 한마디를 던진 후, 다시 책을 읽으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정교랑의 옆자리로 다가가 정교랑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헤헤 웃었다.
“그러게요. 내가 틀렸어요. 당신이 내게 준 선물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에요.”
그 선물은 내 목숨이었으니까요.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이어서 책을 펼쳤다.
정교랑은 자신의 옆에서 몸을 비비적대던 진안 군왕이 천천히 자신의 팔을 잡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눈을 피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정방, 당신은 정말 예뻐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그는 정교랑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하하 웃었다.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정말 모를걸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은 더는 진안 군왕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의 품에 기댄 채 책을 마저 읽었다.
그런 정교랑의 모습에 진안 군왕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깨지고, 동시에 손발이 갑자기 자유로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을 오후의 따스한 햇볕이 창가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끌어안은 대로 품에 기댄 채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간은 언제나 이렇게 여유로웠으며, 격식 없고 자유로웠던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들은 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예요?”
“하긴, 오래 가야 하니까, 다 챙기는 것도 좋겠죠.”
“그런데 마차에 탈 때는 최대한 책을 덜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눈 아프잖아요.”
“혹시 모레 출발하는 건 너무 이르진 않아요?”
“아니다. 이왕 갈 거라면 일찍 출발하는 게 더 좋으니까, 내일 떠나는 건 어때요?”
진안 군왕이 주절주절 말을 걸었지만, 정교랑은 가끔 음, 하고 대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정방, 나도 꽤 잘생겼어요. 나 좀 봐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손을 잡았다.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근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부인, 큰 도련님께서 보낸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왔어요.”
진안 군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놓자,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가서 보고 올게요.”
정교랑이 범강림 부부를 보러 간 날, 주복도 그 집에 갔겠지? 그럼 범강림 부부와 주복은 우리가 떠난다는 걸 알고 있었겠군.
“그래도 큰처남과 주육한테 경성을 떠나 있으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그들은 경성에 남아 있는 게 더 좋을 테니까.”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괜찮다면 자신도 괜찮은 듯, 더는 말하지 않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밖으로 나가자, 진안 군왕도 외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떠나는 길이다 보니, 진안 군왕도 정리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한참을 서재에 있던 진안 군왕이 다시 내실로 돌아왔을 무렵, 정교랑이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잠시 출타하셨어요.”
소심이 말했다.
지금 시간에?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밖을 쳐다보았다. 슬슬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처남네 집에 간 것이냐?”
진안 군왕이 묻자, 소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부인께서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그럼 어딜 간 거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들판의 무덤 앞에 누군가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었다. 짙어진 하늘빛이 그녀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자 그녀는 주위의 풍경과 일체가 된 듯했다.
늦은 시간인지라, 지나가는 행인은 얼마 없었다. 간혹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쇠와 돌이 부딪히는 맑은소리에 무덤 쪽을 흘깃 쳐다보기만 하고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갈 길을 재촉했다.
사흘 뒤, 금군 병사와 의장대의 호위 속에 진안 군왕의 마차가 성문을 나섰다. 길 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던 행인들도 서서히 흩어지고, 진안 군왕의 의장 행렬도 차츰 멀어져 작은 점으로 변했다.
성문 위에 서 있던 주복은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행렬이 떠난 방향을 내다보았다.
다시 이틀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진안 군왕이 떠났던 성문을 지나쳤다. 가장 앞서 달리던 사람이 급하게 말을 멈췄다. 그 뒤를 따르던 사람들도 서둘러 말고삐를 당겼지만, 이미 그 사람보다 앞서 나간 후였다.
“먼저들 가.”
앞서 있던 사람이 말하고는 말 머리를 틀어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가던 방향으로 말을 이끌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자, 다른 쪽으로 간 사람이 무덤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 공자님 댁 무덤이 있었나?”
누군가가 놀란 눈치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의아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는데.”
무리 중 한 명이 아, 하면서 무언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알겠다. 저기는 무원산 무덤이네.”
사람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저기는 정 낭자가 세운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이지. 노제 때 무원산 술을 뿌렸고, 저 비석 위에 새긴 글씨로 천하제일 행서라는 명성을 얻었어. 글씨와 무원산 형제들의 이야기 덕에, 무원산 무덤은 경성에서도 손에 꼽는 명소 중 하나가 되기도 했고.
“그나저나, 공자님께서 왜 갑자기 저 무덤에 가시는 거지?”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른 사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왜긴 왜야. 쏟은 감정이 많으니, 아쉬움도 배가 되는 게지.”
하인들이 보니, 여인에 대한 미련에 쓸쓸한 마음을 안고 무덤 앞을 서성이는 듯 보이던 공자가 갑자기 흥분하면서 두모를 벗었다. 그는 자신 앞에 세워진 무덤의 비석을 바라보면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비석 위를 더듬거렸다. 그는 흥분한 건지, 감격한 건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글자.”
사내가 중얼거리면서 비석을 바라보았다.
원래 텅 비었던 비석 위에 ‘정(程)’이라는 글자가 하나 새겨졌다.
“한 글자가, 나타났어.”
사내는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사내가 읊조렸다.
한 글자가 나타났어!
한 글자가!
해가 뜰 무렵, 푸른 새벽빛이 이슬이 되어 땅에 내려앉았다. 경성의 큰길에는 평소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범강림이 우의를 걸치고 어디론가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큰길 위로 갑자기 어지러운 말굽 소리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급하게 범강림의 옆을 지나갔다. 범강림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래도 말굽에 밟혀 튄 빗물이 범강림의 우의 한쪽을 적셨다.
범강림이 삿갓을 손으로 들추고 앞을 내다보자, 옆을 지나치던 사람 중 한 명이 말 위에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과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범강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말을 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그대로 달려갔다.
“저게 누구지?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날에, 꼭 온 가족을 데리고 어딜 가는 거 같네.”
“고 관인 같던데? 고씨 가문이 곧 경성을 뜨잖소. 이미 며칠 전에도 한 무리가 떠났어.”
“이번에 정말 떠나는 건가?”
“그럼 가짜로 떠나게? 진 상공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 집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잖소. 마음 같아서는 관졸들을 보내 꽁꽁 묶어 성 밖으로 내치고 싶을걸?”
행인들이 말을 탄 사람들이 떠난 방향을 보면서 수군댔다.
범강림이 고개를 들고 멀어져가는 마차와 말을 쳐다보았다. 그때, 조금 전 범강림과 눈이 마주쳤던 사람이 또 고개를 돌렸다. 범강림은 서둘러 삿갓을 눌러쓰고 갈 길을 재촉했다.
“조금 전에 그 사람, 신비궁을 바쳤던 범강림 아닌가?”
고 관인이 시선을 거두고 옆에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시종이 잠시 뒤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 자식은 아직도 군감에 있는 거냐? 왜 아직도 저놈을 내치지 않았지? 무기를 만드는 곳인데, 괜히 저런 놈이 껴 있다가 또 무슨 일을 그르치려고.”
고 관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범강림이 군감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망치를 두드리면서 무기를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다른 일에는 일절 끼어들지도 못하고요. 대인께서도 계속 범강림을 예의주시하고 계십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범강림이 없어도 무기를 차질없이 만들 수 있을 때쯤이면 그자를 내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별 볼일도 없는 놈인데, 정 낭자가 전수한 기술 하나 가지고 버티는 중이라고요.”
시종의 말에 고 관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앞쪽의 마차 행렬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문을 지나갔다. 성문 옆에는 미리 설치된 차일막이 늘어서 있었고, 그 아래로 고능준을 배웅하려고 나온 관리들이 서 있었다.
말에서 내린 고 관인이 뒤쪽으로 가서, 마차에서 내리려는 고능준을 부축했다. 차일막 아래 서 있던 사람들이 고능준을 에워싸고 작별인사를 전했다.
“이렇게 많이들 나와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오늘은 내 안사람과 자식놈을 배웅하려고 나왔소이다.”
고능준이 답례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그럼 고 대인은 가지 않는다는 소린가?
찰나의 정적이 지나간 후, 다들 재빨리 입을 모아 아첨했다.
“비 오는 날에 급하게 가라는 법이 있습니까? 이리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인.”
“그럼요, 그럼요.”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이십 년이 지났소이다. 아예 돌아가지 않는다면 모를까, 돌아가겠노라 말하고 나니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구려. 안타깝게도 경성에 계신 노모께서 몸이 편찮으신지라 며칠만 더 머무르다가, 곧바로 뒤따라가려고 하외다.”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던 고 관인이 고능준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비도 오고 하니 여기까지만 배웅하시지요.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 관인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더 거세질 듯합니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거라.”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누군가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고 관인, 조심히 가십시오. 참, 되도록 청원(淸遠) 지역으로는 지나가지 마시고요. 듣자니 근래 들어 그쪽에 산적과 마적이 활개를 친다고 합니다.”
“산적이 청원 지역에서 활개를 친다고요? 관부는 그런 것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뭐 하는 겁니까?”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배웅 나온 사람들은 고 관인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아닙니다. 이젠 관리도 아닌데, 그런 걸 신경 써서 뭐 하겠습니까.”
고 관인이 콧방귀를 뀌고는 고능준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다들 좋은 마음으로 해주는 말이다. 어쨌든 외지로 가는 것이니,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고능준이 말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무탈히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고 관인이 다시 한번 사람들을 향해 예를 표하고 성문을 나갔다. 마차 행렬은 사람들의 배웅 속에 차츰 멀어졌다.
비가 점점 거세지자, 고능준도 사람들을 향해 예를 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나저나, 정말로 산적이 그렇게 활개를 친다고?”
“듣기로는 그렇다던데.”
“그거 혹시,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신호 아니요?”
“쉿! 왜 허튼소리를 하고 그러시오!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 같은 때에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합니까? 누굴 비웃는 것도 아니고.”
고능준이 마차 휘장을 내리자, 바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차단되었다. 그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돌아가자.”
“고능준은 떠나지 않았다고?”
진소가 물었다.
“예, 가구도 모두 정리했고 처자식도 다 출발했는데, 고능준만 아직 혼자 경성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모친의 요양과 약 처방 때문에 며칠이 지난 후에야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막료의 말에 진소가 냉소를 지었다.
“무슨 꿍꿍이기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한 번 지켜보고 가려는 게지. 역시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줄 알았느니.”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 집 노모가 언제 좋아지실 줄도 모르고, 모친께 효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버티는데 억지로 내쫓을 수는 없잖습니까.”
막료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네. 어차피 조당에는 들어오지 못하잖나. 고능준이 떠나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표명했으니, 뭘 하려고 해도 예전만큼 쉽게 하지는 못할 걸세.”
진소는 말하다 말고 또 냉소를 보였다.
“허구한 날 모친의 건강을 핑계로 저주를 해대다니, 그러다 천벌을 받는 게 두렵지도 않나.”
진소가 말을 끝내자,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비가 더 거세졌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장 노태야가 말했다.
“가을비가 내리고 나면 더 쌀쌀해지겠지.”
“노태야, 옷을 더 걸치시지요.”
뒤에 있던 몸종이 두봉을 건네며 말했다. 장 노태야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몸종도 장 노태야 옆에 서서 비 오는 것을 구경했다.
“아씨께서는 비를 피하셨으려나 모르겠네요.”
몸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장 노태야가 실소를 터트렸다.
“이것아, 너는 참 걱정도 팔자구나.”
몸종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노태야, 아씨께서 급하게 가셨잖아요. 제가 배웅해 드릴 겨를도 없이 떠나셨다고요. 이번에 이렇게 가시면, 언제 또 뵐 수 있을지 모르는데.”
몸종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장 노태야가 몸종을 놀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몸종이 훌쩍이다가 손을 내리고 장 노태야를 슬쩍 쳐다보았다.
장 노태야는 내리는 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만큼이나 어두웠다.
몸종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동시에 불안함이 마음속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관로 위, 마차 행렬은 빗속에서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우비와 삿갓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말 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비에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비 때문에 의장 깃발을 모두 거둬들여 그런지, 행렬은 다소 초라해 보였다.
“안 되겠어.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잖아. 아무래도 해가 질 때까지 안 그칠 것 같은데. 이러다가 앞쪽에 있는 역참에 도착하지도 못하겠어.”
반근이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소심도 머리를 빼꼼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전에 거기서 쉬다 갈걸, 괜히 다음 역참까지 간다고 했네. 앞뒤로 마을이나 역참 같은 게 하나도 안 보여.”
소심이 말하다가 멈칫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상하다.”
소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근을 쳐다보았다.
“부인께서는 비가 올 거라는 걸 모르셨나?”
반근도 멈칫했다.
비가 올지 안 올지는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 아씨께서 가장 잘 아실 텐데, 이번엔 어째서…….
빗방울이 마차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이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빼앗자, 정교랑의 얼굴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잠깐 스쳤다.
“어둡잖아요. 글씨도 잘 안 보일 텐데, 그만 봐요. 계속 책만 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진안 군왕이 말하자,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았다.
“바둑 둘까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하수와 바둑 두는 게 재미가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당신도 자꾸 이기기만 하면 재미없을 텐데.”
“그럼 뭘 하고 싶은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우리 얘기해요. 가는 길도 멀 텐데.”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얘기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는 건, 내가 잘 못 하는데.”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고 정교랑의 어깨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당신이 말을 잘 못 한다고요? 그럼 황제의 말문을 막히게 하고, 논쟁 한 번으로 귀판관 풍림을 경성 밖으로 내쫓은 건 누구죠?”
진안 군왕의 손에 밀린 정교랑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그들 자신이죠.”
정교랑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이렇게 말할 때가 제일 재밌어요.”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고는 정교랑을 품에 안았다.
“그 사람들은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고도 왜 그렇게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걸까요? 당신이 무슨 금강 야차니 뭐니 하면서.”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자신을 끌어안아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가 궁으로 보내라고 했던 폭죽은 보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냈어요. 국혼을 치르는 날, 육가아에게 우리의 마음이 잘 전달됐으면 좋겠네요.”
진안 군왕은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도 태자를 보기는커녕 궁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던 날, 이씨 가문에서는 폭죽을 한가득 싣고 와서 그들을 배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폭죽에 불을 붙이기 직전, 고 선생과 다른 막료들이 그들을 제지했다.
경성을 떠나는 건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거니와, 태후가 마지못해 동의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불꽃놀이를 한바탕 시끌벅적하게 했다가는 또 누구의 심기를 건드려 떠나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무척이나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교랑은 태자의 국혼이 치러지는 날 밤, 하늘에 폭죽을 쏘아 올려 불꽃놀이로 축하할 수 있도록 이씨 가문에서 보내온 폭죽을 선물로 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진안 군왕은 그중 몇 개를 골라 황후에게 보내도록 지시했다. 진안 군왕이 보낸 폭죽이라고 하면, 절대로 태자에게 선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혼례를 치렀던 날보다 더 예쁠지도 모르겠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 주제를 이야기하는 게 껄끄러운가? 태자가 국혼을 치른다는 것은 곧 진단랑이 혼례를 치른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진안 군왕이 퍼뜩 깨닫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정방, 송평 그쪽의 저택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으면서 또 혼자 대답했다.
“분명 안 좋을 거예요. 아마 우리가 가서 한 번 싹 다 갈아엎어야 할걸요? 당신은 어떤 저택이 좋아요? 가는 길에 한번 그려볼까요?”
정교랑이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서 정교랑의 손가락 하나를 잡고 조금씩 무언가를 그렸다.
“그럼 내가 그릴게요.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 집을 어떻게 꾸밀지 생각해 뒀거든요.”
정교랑의 손가락은 가느다랗고 손톱은 매끄러웠다. 손톱에 물을 들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정교랑의 손톱은 너무도 깨끗해서 진안 군왕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은은한 광채가 빛에 반사되었다.
정교랑의 손가락을 매만지던 진안 군왕은 어쩐지 마음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쪽은 경성이나 강주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 익숙하지 않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게 되어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더니 입술이 거의 귓불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그럼 나는 익숙해졌어요?”
진안 군왕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면서, 이제는 손가락이 아닌 정교랑의 손을 붙잡았다. 정교랑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정교랑의 귓불이 진안 군왕의 입가에서 멀어졌다.
“오늘은 비가 오고 있어서, 마차가 쉬지 않고 계속 달리기는 힘들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정교랑의 맑은 두 눈과 빨간 입술을 바라보다가 정교랑의 허리를 지그시 누르면서 자기 쪽으로 당겼다.
“계속 못 달릴 이유가 뭐 있겠어요. 계속 가라고 하면 멈추지 않고 갈 텐데.”
진안 군왕이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마차를 쿵쿵 두드렸다. 진안 군왕이 깜짝 놀라서 펄쩍 뛰어오르자 머리가 마차 천장에 부딪히면서 쿵 소리를 냈다.
밖에 있던 경 공공이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진안 군왕을 불렀다.
“전하?”
“뭐냐!”
마차 안에서 언짢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곧 질 텐데, 앞쪽에 있는 역참까지 가기에는 무리일 듯합니다. 길을 살피러 갔던 금군 병사가 돌아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낡은 사찰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하룻밤 묵은 뒤에 내일 다시 길을 재촉하는 건 어떠실지요?”
경 공공이 서둘러 큰 소리로 마차 안을 향해 외쳤다. 마차 문이 열리고,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얼마나 먼 곳에 있는데? 누가 가서 본 것이냐?”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일단은 묻는 말에 대답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두어 리 정도만 더 가면 되고, 우리 쪽 사람이 다녀온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드디어 쉬어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자, 앞쪽에서 마차 행렬을 이끄는 사람들이 속도를 높였다.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마차 안에까지 전해져 왔다.
하지만 마차 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앞쪽에서 쉬어갈 곳을 찾았대요. 먼 길을 떠날 땐 늘 이렇잖아요. 일단 발길 닿는 데까지 가 보는 거요.”
진안 군왕이 민망한 듯 눈을 다른 데 두고 말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아, 당연한 소리를 또. 이 여인이 먼 길을 안 가본 것도 아니잖아. 당초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도 황량한 산골짜기였는데.
진안 군왕의 귀가 새빨개졌다.
“왜 그렇게 가구를 많이 챙기나 했어요.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런 거였군요.”
“그럼요.”
정교랑이 또 대답했다.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고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이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내밀자마자,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으며 그를 뒤로 밀었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전방에 매복이 있습니다!”
매복!
진안 군왕의 얼굴에 어두운 냉소가 드리워졌다.
“이럴 줄 알았다. 가는 길이 순조로웠다면, 분명 귀신의 농간이라고 생각했을 게야.”
진안 군왕이 말하면서 자신의 앞을 막아선 호위를 비키게 했다. 앞을 내다보았지만, 해가 지고 어두워진 하늘에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데다가, 앞쪽으로는 금군 병사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탓에 적수가 몇이나 되는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길 위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라고 날 그리 깔끔하게 경성 밖으로 내보내 줬겠지. 이런 예기치 못한 사고라면 어렸을 때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당했어. 내 앞길에 이런 함정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쪽에 있던 금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신비궁입니다!”
누군가가 외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진안 군왕의 눈빛 또한 한층 더 어두워졌다.
태후가 동의한 거라면, 군용 무기를 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신비궁은 평범한 활과 달라서, 죽은 자의 몸에 박힌 화살의 흔적을 보면 신비궁을 썼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텐데.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든 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거로군.
“어서 진을 쳐라!”
신비궁의 위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금군 병사들은 재빨리 말에서 방패를 떼어 진을 쳤다. 마차들은 힘겹게 말 머리를 돌려 한곳으로 모였고, 방패를 든 금군 병사들은 마차 주위를 겹겹으로 에워쌌다.
빗속에서 신비궁이 장전되고 쏘아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가장 앞쪽에 있던 병사들은 신비궁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둘씩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방패가 없어진 자리를 재빨리 메꾸기 위해 병사들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지만, 적군들로서는 그 틈으로 금군 병사들의 진열을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반격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겁니다!”
경 공공이 소리쳤다.
“이제야 막 경성에서 나왔을 뿐인데! 저놈들은 뭘 믿고 저렇게 겁 없이 날뛰는 거야!”
경 공공이 새빨개진 눈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마차 안에 있던 반근과 소심은 서로를 꼭 부둥켜안았다. 지금 상황이 두려운 두 사람이었지만, 혼비백산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씨께서 계시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소심이 말했다.
“아씨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어도 다 괜찮아.”
반근이 맞장구쳤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손을 잡았다.
“언니, 옛날에 늑대 떼를 마주쳤을 때도 이랬어?”
반근이 조용히 물었다. 소심이 반근을 쳐다보다가 미소 지었다.
“응. 너도 이제 아씨와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게 됐네.”
“전하, 어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고 선생이 외쳤다. 마차에서 잠깐 내린 사이, 그는 온몸이 빗물로 젖어 버렸다.
“저들이 신비궁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죽기로 돌파하면 빠져나갈 틈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를 이렇게 많이 데리고 온 건, 보이기 위한 겉치레 때문이 아니야.
경성에서 나올 때는 의장 행렬이 길지 않았지만, 경성을 떠나오면서 곳곳에 있던 전하의 사람들이 행렬에 합류하게 되어, 지금은 전하의 사람들이 금군 병사들보다도 더 많아졌어.
진안 군왕은 여전히 마차의 문을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고 선생이 또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마차 안에서 나왔다.
“정방.”
진안 군왕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손을 뻗어 정교랑을 제지했다.
“비 맞으니까 어서 들어가요.”
정교랑이 괜찮다는 듯이 그의 팔을 손으로 살짝 밀었다.
“괜찮아요.”
정교랑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정방!”
진안 군왕이 다급하게 정교랑을 불렀다. 깜짝 놀란 고 선생도 발을 구르고 소리쳤다.
“왕비 전하, 어서 들어가십시오!”
괜히 나와서 뭘 하겠다고.
“조귀.”
정교랑이 조 집사를 불렀다. 다른 마차에 타 있던 조귀가 쏜살같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정교랑 쪽으로 다가왔다.
“자네들이 나서게.”
정교랑이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멈칫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구지?
모든 사람의 이목이 조귀에게 집중되었다.
덩치와 살집이 있는 중년 사내는 평범한 집사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교랑의 재산을 관리하는 총 관리인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산가지를 늘어놓으며 장부 관리를 하는 것 외에, 저 사내가 또 다른 걸 할 줄 아나?
주위의 시선을 느낀 조귀는 감격에 차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지.
강주에서 돈이나 뿌려대며 아첨을 받는 것보다는, 이런 시선이 몇백, 몇천 배는 더 좋아!
한 번 사는 인생, 득의양양하게 살다 가야지!
“예.”
조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의 그는 몇 년 전 정교랑에게 붙여진 주씨 가문의 풋내기 집사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칭찬이나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우쭐한 눈빛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한 집사가 되어 있었다.
“여봐라, 마차를 밀어라.”
조귀의 말 한마디에, 정교랑의 호위들이 어느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차 안에 있던 물건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 내려놓고, 무언가 담겨있는 마차를 끌고 왔다.
“비키시오. 비키라고.”
조귀가 소리쳤다. 방패를 들고 진을 치고 있던 금군 병사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자리를 비켰다.
“지금 뭐 하는 건가?”
경 공공이 소리치며 조귀에게 다가가 그를 제지했다.
“지금 마차 한 대를 방패 삼아 저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저들 손에 있는 건 신비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이래 봤자 우리의 대열을 망칠 뿐이야.”
경 공공의 말을 들은 조귀는 입을 벌리며 히죽 웃었다.
“신비궁? 공공, 신비궁이 뭐 대단한 거라고요. 명심하십시오. 신비궁의 조상님이 여기 있잖습니까.”
신비궁의 조상님?
경 공공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방패들이 길을 터주자, 마차는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갔다. 주위에서는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함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마차를 위해 길을 터주느라 양쪽으로 갈라진 대열 때문에 중앙은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더 많은 시선이 조귀의 일행과 마차에 꽂혔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마차였지만, 어딘가 다른 마차들과 다르게도 보였다.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간 마차는 신비궁의 화살을 맞을 정도의 거리까지 나아갔다. 두 호위가 재빨리 마차 양쪽의 문을 열고 그 문을 방패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갔다. 쉼 없이 날아오는 화살들이 마차의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서 더 크게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 보니, 그 소리는 빗소리가 아니었다. 화살들이 무언가에 맞아 튕겨 나가는 소리였다.
저 마차는 평범한 동판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주위 사람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거센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차의 열린 문 사이로 이상하게 생긴 쇠뇌가 일렬로 놓인 것이 보였다.
“쇠뇌인가?”
마차를 따라온 경 공공이 놀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아냐, 쇠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원통이 하늘을 향해 조준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활시위도 없었고, 화살도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저건 또 무슨 괴상한 물건이래?
앞으로 나아가던 마차가 자리를 잡고 멈췄다.
마차와 방패 뒤로 몸을 숨기고 있어도, 반대편에 새까맣게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나 신비궁을 들고 있던 이들은 전부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주변 환경이 어두웠기에 사람의 형체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적군 쪽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더욱 매섭게 화살을 쏘아댔다.
그때 횃불 하나가 갑자기 켜지자, 어두컴컴한 곳에서 환한 불빛을 본 탓에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에라이!”
경 공공이 욕을 내뱉었다.
횃불은 왜 밝히는 거야! 적군이 우리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할까 봐서 저러는 거야?
경 공공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땅이 울릴 정도의 굉음과 함께 마차에서 솟아난 불길이 반대편으로 쏘아져 나갔다. 귀가 웅웅 울렸다.
경 공공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반대편에서 불길이 화르르 타오르더니, 사방에서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빗속임에도 불구하고, 불덩이가 된 사람들이 발버둥을 치며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세상에나.”
경 공공이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엄청난 굉음이 지나가고,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신비궁으로 쏘아대던 화살들이 사라지자, 금군 병사들은 말을 타고 돌격하여 적군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칼과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은 금세 사라졌다.
알 수 없는 불길이 가져온 공포가 금군 병사들의 공격보다 두려웠는지, 반대편에 빽빽하게 서 있던 적군들은 굉음이 들린 순간부터 사방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전하, 마적들이었습니다. 의장대 깃발이 보이지 않아서 군왕의 행렬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길을 지나던 거상인 줄 알고 재물을 도적질하려고 했답니다.”
수하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보고했지만, 진안 군왕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거 쓸데없는 소리! 언제부터 마적들이 신비궁을 가지고 있다더냐? 아무것도 물을 필요 없다. 전부 죽여 버려라.”
경 공공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수하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앞쪽으로 달려갔다.
경 공공이 마차로 다가갔다.
“한 번 쓰고 망가진 건가?”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나무 통으로 만든 거라서 튼튼하지는 않네. 망가지는 게 정상이지.”
경 공공의 혼잣말을 들은 정교랑이 말했다.
대나무!
경 공공과 고 선생은 마차 앞으로 다가가서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마차에 실려 있던 쇠뇌 같은 물건은 이미 부서졌고, 빗물에 씻겨 바닥으로 흘러내린 화약 냄새는 더욱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조 집사와 시위들이 부서진 나무토막과 대나무 통을 마차에서 떼어냈다. 정교랑의 말대로 마차에 실린 것은 거대한 대나무 통이었다.
“거죽(巨竹)이오.”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경 공공에게 말했다.
“마차는 태워 버리게.”
정교랑이 말했다. 조 집사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시종들과 함께 여기저기 흩어진 대나무 통을 모아서 다른 마차에 실었다.
경 공공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시종들을 따라갔다.
조 집사와 정교랑의 호위들이 끌고 온 마차는 총 세 대였다. 짐을 참 많이도 챙겼다며 은근히 비웃던 진안 군왕부 사람들은, 이제 반대로 이렇게 엄청난 무기를 너무 적게 챙긴 게 아닌가 하고 아쉬워했다.
경 공공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조귀와 시종들이 짐을 싣고 있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무기들과 물을 담을 수 있는 병 같은 것들이 실려 있었다.
그런 거죽은 없는데…….
조 집사가 술동이 한 개를 가져와 이미 망가진 마차 위로 힘껏 던졌다. 술동이가 깨지고 술 냄새가 진동하자, 조 집사는 시종의 손에서 횃불을 건네받고는 그 위로 내던졌다.
마차 행렬이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말 위에 올라탄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자,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곳곳에서 활활 타고 있는 불길이 보였다. 어둑한 하늘 아래로 타오르는 불길은 더없이 선명했다.
이렇게 끝난 건가?
목숨 걸고 싸우지도 않고,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매복을 물리쳤다고?
경 공공은 허탈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또 속으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진안 군왕이 타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조상님이라…….
밤이 되자, 빗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좀 전에 그건 뭐였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당신도 가지고 있는 거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이 마차 안에 풀어 둔 향낭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이 놀란 눈으로 향낭을 바라보았다.
“좀 더 크게 만든 거예요. 원리는 같아요.”
정교랑이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당신이 웬 짐을 그렇게 많이 챙겼나 싶었어요. 역시 다 쓸데가 있었군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럼요.”
휘장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횃불의 빛이 정교랑의 미소를 비추자, 진안 군왕은 또 한 번 정교랑의 다채로운 표정을 보게 되었다.
“말해 봐요. 나한테 숨긴 게 또 뭐가 있는지.”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품에 확 끌어안고는 장난스럽게 협박하듯 말했다. 진안 군왕의 손끝이 자연스럽게 정교랑의 겨드랑이와 허리를 스쳤다.
정교랑이 몸을 비틀어 진안 군왕의 손을 꾹 눌렀다.
“장난치지 마요.”
정교랑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진안 군왕은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듯이 하, 하고 감탄했다.
“간지럼도 타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옆구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교랑이 재빨리 그의 손을 막아냈다.
“장난치지 말라니까요.”
정교랑이 조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의 손은 정교랑의 손보다 더 빨라서, 정교랑은 말하던 도중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방백종.”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손을 꼭 잡고 눈썹을 꿈틀댔다.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마음속은 펄펄 끓는 물처럼 끓어 올랐다.
진안 군왕이 팔로 정교랑의 허리를 감고는 정교랑을 바닥에 눕혔다.
“정방, 내가 정말 못 이길 거 같아요?”
진안 군왕도 눈썹을 꿈틀대면서 웃었다.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웃고 떠드는 소리에 경 공공이 입술을 삐쭉였다. 고 선생이 앞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젊잖습니까. 위험한 고비를 한 차례 넘겼으니, 잠시 여유를 가질 만도 하지요.”
경 공공이 헛기침을 하며 말하자, 고 선생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저 사찰을 끼고 몇 바퀴 도는 건 어떻겠나?”
고 선생이 눈을 장난스레 찡긋거리며 말했다.
바닥에 눕혀진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내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일어나요. 안 그러면 내가…….”
정교랑이 말하면서 다리를 들려고 하자, 진안 군왕의 긴 다리가 정교랑의 종아리를 지그시 눌렀다. 동시에, 진안 군왕은 자신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정교랑의 손목을 잡고 두 손을 몸 옆으로 고정했다.
“또 나를 침상 아래로 걷어차려고요? 그런데 아쉽게도 여기에는 침상이 없네요. 아니면 나를 마차 밖으로 차 버리든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발로 찬다는 얘기가 나오자 진안 군왕은 또다시 지난번 일이 떠올랐다.
시작도 제대로 못 하고 끝나버렸던 그때…….
진안 군왕이 멈칫하면서 정교랑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불빛 때문인지, 정교랑의 얼굴은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동시에 정교랑이 숨을 쉴 때마다 진안 군왕의 가슴팍에 느껴지는 말랑한 두 개의 봉우리가 그를 자극했다.
조금 전 조 집사가 망가진 마차에 횃불을 던졌던 것처럼, 진안 군왕의 마음속에 심어졌던 불씨가 화르르 불타올랐다.
“정방.”
진안 군왕의 낮은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가 몸을 더욱 숙이고 말했다.
“한 번만 만져 보게 해 줘요.”
진안 군왕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교랑의 한쪽 손목을 풀고, 한 손을 정교랑의 저고리 사이로 쑥 집어넣어 그 속에 있던 말랑한 것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마차 문을 두드리면서 크게 헛기침했다.
진안 군왕은 누군가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느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냐!”
진안 군왕이 잠시 멈칫한 사이, 정교랑은 벌써 그를 밀쳐내고 자리에 앉았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내려서 쉬시지요.”
경 공공이 민망한 듯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 일행이 낡은 사찰을 등불로 환하게 밝히고,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제 할 일을 했다. 조금 전 다친 병사들은 벽 쪽에 기대게 해서 치료를 했고, 다른 쪽에서는 식사를 준비했다.
조 집사 등은 한 마차에서 정교랑의 가구들을 내리고 있었다. 병풍, 깔개, 탁자, 의자 등이 내려지고, 금세 작은 거처가 마련되었다.
“부인께서 참으로 준비성이 철저하십니다.”
경 공공이 과장된 칭찬을 하며 진안 군왕을 향해 아첨을 떨었다. 입꼬리가 바닥까지 내려온 진안 군왕은 말없이 그를 흘겨보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 선생이 웃음을 참으면서 경 공공을 팔로 툭툭 쳤다.
“남의 좋은 일을 망쳤나 보군. 아주 자네를 산 채로 잡아먹을 눈빛이야.”
고 선생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경 공공은 콧방귀를 뀌며 턱을 치켜들고 고 선생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진안 군왕의 옷을 갈아입혀 주기 위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오자, 진안 군왕은 경 공공을 향해 손을 휘휘 젓고는 그의 손에 쥐여 있던 허리끈을 빼앗았다.
“어서 옷 갈아입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경 공공이 눈치껏 물러나자,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곁을 지나쳐 뒤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갈아입어요.”
정교랑이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려서 진안 군왕을 향해 빙긋 웃었다.
“난 잠시 나갔다 올게요.”
웃었어! 웃었어! 날 보고 웃었어!
진안 군왕은 눈앞에 불꽃이 팡팡 터지는 듯 황홀해졌다.
나 때문에 화나지 않았나 봐! 화나지 않았어! 화나지 않았다고!
“다녀와요. 다녀와요.”
진안 군왕이 서둘러 대꾸했다.
정교랑이 다시 몸을 돌리고는 다 허물어진 불상 뒤쪽으로 걸어갔다. 반근과 소심이 고개를 숙인 채 정교랑의 뒤를 따라갔다.
“주위는 다 살펴봤나? 깨끗하게 정리했고?”
진안 군왕이 팔을 양옆으로 벌리며 묻자,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깨끗합니다. 삼중으로 사람을 배치해뒀고요.”
조금 전의 그 어마어마한 불길을 본 이상, 적어도 얼마간은 전하를 해치려는 사람이 없겠지.
미소 짓던 진안 군왕이 또 고개를 돌려서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허리띠! 멍하니 서서 뭐 해? 놀라서 바보라도 됐어? 눈치는 어디에 두고 온 거야?”
진안 군왕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예, 예. 어차피 눈치는 없는 놈이니 욕하려면 실컷 욕하시지요. 비 오는 날 길을 재촉하는 것도 모자라서, 역참 하나 제대로 못 찾아 이 낡아빠진 사찰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시다니, 화가 잔뜩 나실 만도 합니다.
경 공공이 고개를 숙이고 진안 군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허리띠를 묶어 주었다.
의자 위에 축 늘어진 진안 군왕은 손에 든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책 뒤로 얼굴을 숨기고 바보같이 헤벌쭉 웃다가, 어느 순간 시녀들이 음식을 차려온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벌써 밥이 다 됐느냐?”
진안 군왕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시간이 그렇게나 오래 지났다고?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측간을 이리 오래 쓰지는 않을 텐데?
“전하?”
두 시녀가 안으로 들어오자, 두 사람을 본 진안 군왕의 안색이 급변했다.
“너희 아씨는?”
진안 군왕이 호통쳤다. 반근이 울먹이는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씨께서 말씀드렸잖아요. 잠시 나갔다 오신다고요.”
소심이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진안 군왕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 난 잠시 나갔다 올게요.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게, 정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이었어?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 공공은 서둘러 우산을 펼치며 진안 군왕을 씌워 주려고 따라갔지만, 진안 군왕의 걸음걸이가 워낙 빠르다 보니 뜀박질을 해서야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진안 군왕이 밖으로 나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멈췄다.
진안 군왕은 누군가를 찾는 듯 재빠르게 눈을 돌리다가, 조 집사 등 열댓 명이 한쪽에 모여 있는 걸 찾아냈다.
하나, 둘, 셋, 넷…….
사람 수를 세던 진안 군왕은 어쩐지 눈이 어지러워졌다.
그 여인을 호위하는 사람들은 항상 저 열다섯 명이었어. 경성에서 강주까지, 강주에서 다시 경성까지, 정씨 저택에서 군왕부까지.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조 집사까지 열여섯!
“전하.”
조 집사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도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 집사를 지나쳐서 덮개를 씌워둔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그 여인은 마차 세 대를 가지고 왔어. 거죽으로 만든 포화가 실려 있던 마차는 조금 전에 망가졌고, 다른 한 대에는 이런저런 가구들이 실려 있었고, 또 다른 한 대에는…….
왜 그렇게 가구를 많이 챙기나 했어요.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런 거였군요.
그럼요.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서 덮개를 홱 걷었다. 덮개가 밧줄로 고정되어 있던 터라, 진안 군왕이 다시 한번 힘을 주고 나서야 덮개가 들춰졌다.
“전하!”
조 집사와 경 공공이 소리쳤다. 두 사람은 재빨리 마차에 다가가 진안 군왕을 도와 밧줄을 풀고 덮개를 걷어냈다.
소식을 들은 고 선생도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
진안 군왕이 마차 문을 세게 열자, 안에 둔 물건들이 횃불에 환하게 비쳤다. 그 안에는 조금 전에 봤던 망가진 대나무 통들과 뭐가 담겨 있는지 모를 병들이 놓여 있었다.
“없어졌습니다!”
경 공공이 소리치면서 손가락으로 마차 안을 가리켰다.
조금 전 경 공공이 봤을 때는 마차 안에 무기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무슨 무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긴 것, 짧은 것, 쇠로 만든 것, 구리로 만든 것 등등 온갖 무기들이 서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없어, 단 하나도!
진안 군왕이 다시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뱉었다.
“어디로 갔느냐?”
진안 군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로 갔냐고!”
진안 군왕이 몸을 돌리고 소리를 질렀다.
조 집사는 송자동자라는 별명을 가진 진안 군왕이 낯설지 않았다.
주씨 가문에 몸담고 있을 때, 그는 여느 경성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밤이면 술을 마시거나 마작을 하며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송자동자에 대해서도 떠들곤 했다. 늑대 떼를 물리치며 마주쳤을 땐, 무례하지만 귀한 집 아드님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강주까지 쫓아와서 경왕을 치료해 달라고 했을 때는 그런 진안 군왕이 가엾은 한편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들었다.
그 후로는 진안 군왕과 일절 교류가 없었으나, 정교랑이 군왕에게 시집가게 되면서 조 집사도 자연스럽게 군왕부의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지금까지, 조 집사의 마음속에는 진안 군왕을 향한 일말의 경외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횃불 아래에 비친 젊은 사내의 모습은 달랐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준수한 외모에 냉랭한 눈빛을 쏘아대며 포효했다. 사내가 몸을 홱 돌리자 당장 이 자리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듯한 살벌한 기운이 엄습했다.
조 집사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바닥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래, 이 사람은 군왕이었지. 언제나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는 황족이고 종친이야.
게다가 양자 입적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고, 태자가 될 수도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지.
“전하.”
조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어서 말씀을 올리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이 야밤에, 왕비가 그 많은 무기를 들고 어딜 갔는지!”
경 공공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씨께서는 잠깐 처리할 일이 있다고만 하셨습니다.”
조 집사가 대답했다.
“무슨 일? 아이고, 답답해 죽겠네.”
경 공공이 조 집사의 팔을 덥석 잡았다.
조 집사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허약해 보이기만 하던 태감이었는데, 팔을 잡는 힘이 어찌나 센지, 잡힌 부분이 저릿했다.
“저희 아씨의 성격이 어떤지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씨께서 일이 있다면 있는 겁니다. 저희 같은 아랫것이 물어볼 수는 없습니다.”
조 집사는 더는 거만하게 굴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정말 모르나 보네.
“그럼 왜 따라가지 않고!”
경 공공이 소리를 질렀다.
“아씨께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조 집사도 목청을 높였다.
난들 안 따라가고 싶었겠느냐고요! 좀 전에 아씨의 기세만 봐도, 분명히 엄청난 일을 하러 가신다는 걸 알겠는데!
말 위에 실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은 무기를 싣던 정교랑의 모습을 본 조 집사는 모골이 송연했었다. 정교랑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칼산을 넘고 불바다로 뛰어드는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 그런데도 안 따라갔어? 따라오지 말라 했다고 정말로 안 따라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호위 한 번 속 편하게 하네. 빌어먹을!”
빌어먹을?
조 집사가 콧방귀를 뀌면서 눈을 옆으로 흘겼다.
꼭 자기는 따라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하네.
-야살(夜殺)-
경 공공은 더는 조 집사를 상대하지 않고 그를 발로 차서 바닥에 넘어트렸다.
“전하, 소인이 사람을 데리고 쫓아가겠습니다.”
경 공공이 몸을 돌려서 진안 군왕에게 말했다.
“쫓아가?”
진안 군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로 쫓아가겠다는 것이냐?”
사방은 이미 어두컴컴하고, 심지어 비까지 내리고 있는데.
“안 됩니다. 저희 아씨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던 조 집사가 조금 전에 발로 차인 곳을 어루만지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 빌어먹을 태감 놈은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자네는, 자네 아씨가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는 겐가?”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던 고 선생이 입을 열었다. 조 집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씨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 더는 따라가겠다고 애원하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아씨는, 신과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저희 아씨께서 무사하게 돌아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만약, 아씨께서 죽, 죽는다면, 죽을 운명이었으니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옆에 서 있던 반근과 소심이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진안 군왕이 한숨을 토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경 공공이 이미 우산을 바닥에 내팽개친 지 오래인지라 진안 군왕의 얼굴에 빗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신경 쓰지 말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죽으면 죽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정방, 정말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큰길 위, 빗소리가 모든 것을 뒤덮고, 멀리서 횃불이 보이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울창한 대나무숲을 지나가자, 멀리 밝혀져 있는 등불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불빛을 따라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니 작은 오두막 한 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관부에서 대나무숲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초소였다. 초소 안에서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사내 세 명은 얼굴의 상처를 매만질 새도 없이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대인, 대인, 저희는 정말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쾅 소리가 들리고, 벼락이 쳐서 불이 났습니다!”
“형제들이 반 이상은 죽어 나갔습니다.”
세 사람은 아직도 조금 전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듯 떨리는 눈으로 말했다.
한 사내가 그들의 얼굴을 냅다 발로 차버렸다.
“닥쳐라!”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을 향해 소리친 다음 말했다.
“관인, 혹시 돌포탄이 아닐까요? 하지만 경성의 군감에서는 무기에 대한 감시가 몹시 삼엄합니다. 돌포탄은커녕 발석거를 옮기는 것조차 힘들 겁니다.”
횃불 아래 비친 고 관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건 군감의 돌포탄이다. 잊지 마라. 군감의 돌포탄이 어디서 온 건지! 그걸 만든 조상이 바로 정씨 년이야!”
초소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걸 잠시 잊었습니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해서 몰랐는데, 또 그새 살인 병기를 하나 만들어 내다니.”
한 사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그 여인의 손에 또 뭐가 있을지 누가 알아! 일단 철저히 조사한 뒤에 다시 손을 써야겠다. 경성에서 송평까지는 아직 길이 많이 남았어.”
고 관인이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초소 안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관인, 이곳에 오래 머무르시면 안 됩니다. 나머지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일단 돌아가시지요.”
사내가 말하고는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세 사람을 죽 훑어보았다.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알겠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고 관인이 오두막을 나오자, 시종들이 서둘러 그에게 우의를 걸쳐주었다. 그의 등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태워라.”
고 관인이 말했다. 그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조심하십시오!”
옆에 있던 시종이 그를 확 밀치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고꾸라졌다.
고 관인이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보니, 화살 한 개가 시종의 목을 관통하고 오두막에 꽂혀있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시종이 재빨리 소리쳤다.
“횃불을 꺼라!”
횃불이 꺼지고, 오두막 주위는 새카만 어둠 속에 잠겼다.
“이런 젠장! 어떤 새끼가 나를 죽이려는 거야?”
고 관인이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그런 꼴인가? 내 뒤에 서 있는 참새를 보지 못하고 매미를 잡아먹으려던 사마귀 꼴?
“사람을 불러라!”
시종이 소리쳤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비 내리는 하늘을 갈랐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과 함께, 곳곳에서 쉭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더는 버티지 못할 듯합니다. 놈들이 앞쪽의 포위를 뚫고 나갔습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소리쳤다.
비탈 아래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섰다.
“말을 타고 쫓아라. 고십사에게는 이제 사람이 얼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님, 저희도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종이 말고삐를 잡고 외쳤다. 빗물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상황인지라, 말을 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아직 내가 있지 않느냐.”
공자님이라고 불리는 공자가 말 위로 몸을 날리고 채찍을 휘둘렀다. 일고여덟 명의 시종들이 그의 뒤를 재빨리 쫓아갔다.
앞쪽에서 질주하는 말굽 소리가 들려오고, 간간이 휘파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설마 지원군이 있는 건가? 공자님, 섣불리 나서시는 건 안 됩니다. 돌아가시지요!”
시종이 소리쳤다. 하지만 공자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말에 박차를 가하며 활을 들어 올렸다.
“몇 명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아직 살아있으면 충분하다.”
앞쪽과 점점 더 가까워지자, 사람과 말 몇이 흐릿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스무 명이 넘잖아!
앞쪽에 있던 사람들도 공자 일행을 발견했는지, 누군가가 먼저 말고삐를 틀고 공자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화살을 쏘았다.
“관인, 고작 일곱입니다.”
시종이 말했다. 고 관인이 헛웃음을 보이면서 고개를 돌렸다.
“일곱 명? 모조리 죽여 버려라. 누구인지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구나.”
앞쪽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말 머리를 돌리자, 공자 일행의 시종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공자님, 말에서 내리십시오!”
시종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그의 옆에 있던 공자는 벌써 앞으로 질주하여 시종과 거리를 벌렸다.
“죽여라!”
“포위해라, 생포한다!”
욕하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기합 소리가 그를 향해 정면으로 덮쳐왔다.
말 위에 있던 공자는 몸을 옆으로 틀어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하고, 활시위를 놓아 반대편에 있던 사람 하나를 쓰러트렸다.
양쪽의 거리가 금세 가까워졌다. 말 위에 탄 사람들이 하나둘씩 장창과 칼을 꺼내 들었다.
“공자님, 안 됩니다. 쪽수가 너무 많습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큰일이라도 나면 안 된다고요!”
시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끝장나는 건 비단 나 하나가 아닐 거야!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공자의 두모가 위로 걷혔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그의 두 눈이 반짝였다.
내가 아직 여기 있다.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이렇게나 가까운데, 이렇게나 좋은 기회가 왔는데, 절대 놓칠 수 없어!
공자의 시야에 고 관인이 들어왔다. 하지만 금세 다른 사람들이 공자의 시야를 가로막고, 고 관인은 사람들 뒤로 종적을 감췄다.
에라이!
공자가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때, 공자가 활시위를 놓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우수수 쓰러지기 시작했다. 멈칫하던 공자가 재빨리 활시위를 놓았다.
“뒤쪽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경황없는 목소리가 산길에 울려 퍼졌다.
또 있다고?
고 관인이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말과 함께 환한 불빛이 보였다.
사람들은 눈이 부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눈을 게슴츠레 뜨는 사이, 불빛 아래에 있던 이가 연달아 세 발을 쏘았다.
펑, 펑,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놀란 말들이 울부짖으며 말을 타고 있던 사람들을 떨어트리고는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불씨가 꺼지자, 말을 타고 오던 사람이 활을 내던지고 칼을 뽑아 들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공자님.”
공자가 잠시 멈칫한 사이, 시종들이 재빨리 공자를 따라잡아 호위했다.
“누굽니까?”
시종들은 흡사 늑대 한 마리가 양 떼에 달려든 듯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 자신들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지만, 둔탁한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은 탓에 시종들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공자가 활을 내던지고, 칼을 뽑아 들며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또 한 번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불길이 화르르 타올랐다.
공자와 시종들은 그제야 불길 속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불길이 타오르던 그 순간, 불길 너머로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짧디짧은 대나무 통을 들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정 낭자!”
공격을 당하던 고 관인의 사람들과 공자 일행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교랑의 앞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뒤로 쓰러졌다. 정교랑은 손에 쥐고 있던 대나무 통을 버리고 다른 손으로 단도를 꺼내 힘껏 내리쳤다.
불길이 꺼지고, 다시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사람들의 귓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참혹한 신음뿐이었다.
정 낭자가 왔어. 정 낭자가 왔다고! 역시 정 낭자가 올 줄 알았어!
진호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공에 대고 포효했다. 그때, 말을 탄 사람 세 명이 진호를 향해 달려왔다.
“잘 왔다, 이놈들아.”
진호가 칼을 들고 세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진호가 세 사람과 채 가까워지기도 전에, 뒤에서 또 한 번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혼잡하게 섞여 있었지만, 고 관인은 그 날카로운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고 관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유성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순식간에 날아왔다.
여인의 입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순간 반짝이는 불빛이 정교랑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저 여인…….
얼굴과 몸이 온통 피로 물들었어. 바람에 휘날리는 장발이 꼭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 (羅刹: 야차와 함께 비사문천毘沙門天의 권속이라 하며 또는 지옥에 있는 귀신) 같단 말이야.
저 여인…….
내가 일찍이 죽였어야 했는데, 그때 덕승루에서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고 관인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차가운 무언가가 목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 관인은 재빨리 목을 붙잡고자 손을 들었지만, 손이 목에 채 닿기도 전에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내가 일찍이 죽였어야 했는데.
빗소리, 바람 소리, 비명 소리.
진호가 날렵하게 칼을 휘두르자, 고 관인을 지나쳐 달려오던 두 시종이 악 소리를 지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진호의 시선은 시종일관 반대편을 향해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들 위로 불길이 타오르자, 말에 타 있던 정교랑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자신이 쏘아낸 것이 틀림없이 고 관인의 목을 관통하리라 생각했는지, 정교랑은 제자리에서 말을 탄 채 한 바퀴 쭉 돌아보기만 하고 이쪽으로 달려오지는 않았다.
지금 가려는 거야!
진호가 재빨리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정교랑이 갑자기 진호를 향해 손짓하며 주위를 가리켰다.
비바람을 맞으며 달려가던 진호는 온몸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정교랑의 손짓을 보자, 불바다에 빠진 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진호가 말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손짓을 했다. 정교랑은 진호의 손짓을 본 뒤, 곧바로 말고삐를 틀어서 왔던 방향으로 질주했다.
진호는 몇 걸음 더 쫓아갔지만, 이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큰길 위에 보이던 말이 새카맣게 드리워진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말굽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질 때쯤,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호는 조금 전의 상황이 꼭 환각인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을 못 본 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멀리서 잠깐 본 거긴 하지만 아무렴 어때. 그 여인을 봤다는 게 중요하지.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또 한 번 그 여인과 함께 힘을 합쳐 누군가를 무찔렀으니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곳에서 마주쳤어. 그 여인은 내가 이곳에 나타난 게 놀랍지도 않아 보였고, 단지 말없이 나를 향해 손짓을 한 번 하고, 내게 마무리를 맡겼지.
내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묻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 설명하지도 않았어.
예전 그때처럼.
정 낭자가 날 믿는 거야. 정 낭자는 날 믿는다고!
진호가 고개를 젖히자, 빗물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그가 하늘을 향해 힘껏 포효했다.
마지막 비명이 들려오고, 더 이상 바닥에서 움찔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큰길 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졌다.
쉼 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와당에 부딪혀 울리는 소리가 사찰 안을 가득 메웠다.
낡은 사찰 주위로 횃불들이 환하게 밝혀져 있어 비가 오는 밤인데도 대낮처럼 밝아 보였다. 사찰 안팎으로 시위와 금군 병사들이 바짝 경계하며 서 있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자, 사찰 입구를 밝히고 있던 횃불 두 개가 격하게 일렁이며 바닥에 늘어진 그림자를 더욱 길게 만들었다.
“전하,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빗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진안 군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뒷짐을 지고 먼 곳을 내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경 공공이 우산 한 개를 가지고 와 진안 군왕의 옆에 서서 우산을 펼쳤다. 하지만 그가 우산을 다 펼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그를 홱 밀쳤다.
“걸리적거린다.”
진안 군왕이 호통쳤다. 경 공공이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고 선생이 그를 향해 다가가 고개를 저었다.
빗속에서 어렴풋하게 말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자, 진안 군왕은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경 공공은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째 잘못 들으시는 건지. 마음이 평온하질 못하니 자꾸 환청을 듣는 게지.
이런 생각이 경 공공의 뇌리에 스칠 때, 옆에 서 있던 고 선생이 갑자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다!”
고 선생이 소리쳤다.
모두의 이목이 캄캄한 빗속으로 향했다. 말 한 필이 쏜살같이 달려왔지만, 말을 탄 이를 알아본 사람들은 다들 실망한 표정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고 달려온 사람은 주변을 수색하러 갔던 시종이었다. 사방으로 정탐을 나간 시종들은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자리로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왕비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대답만 몇 번이고 되풀이하던 시종이 이번에는 큰 소리로 다른 말을 외쳤다.
사람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 시위의 뒤로 또 다른 말 한 필이 질주해 왔다.
“아씨!”
반근과 소심이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숨 막히는 적막으로 채워졌던 사찰 안이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했다.
정교랑을 향해 달려나간 이들은 모두 정교랑의 사람들이었다. 진안 군왕의 사람들은 제자리에 서서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 위에 탄 여인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말 위에 앉은 정교랑은 온몸이 젖어 있었다. 암청색의 옷이 비에 젖어 색이 더욱 짙어진 듯했으나, 횃불에 비친 정교랑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옷 색이 짙어진 것은 빗물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피가 온몸에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정교랑의 몸이나 말 안장 어디에도 무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기를 엄청 많이 챙겨갔다고 하지 않았나?
“아씨, 아씨.”
반근과 소심이 목놓아 울었다. 정교랑은 말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울지 마라. 어서 아씨의 목욕 시중을 들고, 옷도 갈아입혀 드려야지.”
조 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던 반근과 소심은 입구에서 잠시 멈칫했다.
진안 군왕은 조금 전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내리는 비가 사찰의 열기를 차갑게 식혔다. 사찰 안팎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왕비 전하, 어딜 가셨던 겁니까?”
고 선생이 갑자기 큰 소리로 물으면서 정적을 깨트렸다. 경 공공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왕비 전하, 어떻게 혼자 나가실 생각을 하신 겁니까? 너무 위험하잖습니까! 다들 초조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서, 어서 들어와서 말씀을 좀 해 보시지요.”
경 공공이 정교랑과 진안 군왕을 향해 안쪽으로 가자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상황을 무마해 보려던 경 공공만 민망해졌다.
그런데 그때, 반대편에 서 있던 정교랑이 돌연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의 걸음걸이가 차츰 빨라지더니, 이윽고 뜀박질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에 온몸이 피로 물든 정교랑은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를 풍겼다.
대낮보다 환하게 밝혀진 횃불이 있고, 무기를 든 시위들이 사방을 호위하고 있었지만, 진안 군왕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설마 저대로 돌진해 오겠다는 건가?
군왕 전하의 몸으로는 저 여인의 살벌한 박치기를 감당해낼 수 없을 텐데.
경 공공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정교랑을 막아낼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내밀려던 찰나, 정교랑은 그를 지나쳐 진안 군왕을 향해 훌쩍 뛰어올라 그의 목을 팔로 감싸며 그에게 매달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정교랑의 행동에 다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안 군왕도 갑작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진안 군왕은 뒤로 한 걸음 밀려나면서 자연스럽게 손으로 정교랑의 허리를 받쳤다.
“고십사가 죽었어요.”
정교랑이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뭐라고?
주위 사람들이 경악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정교랑은 사람들이 더욱 놀랄만한 행동을 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꼭 끌어안은 채 그의 얼굴에 진한 입맞춤을 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러나 정교랑은 자신이 한 행동이 아무렇지 않은 듯 팔을 풀고 유유히 안쪽으로 걸어갔다.
정교랑의 웃음소리가 사찰에 울려 퍼졌다.
“어서 아씨를 모셔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조 집사가 외쳤다.
반근과 소심은 우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다가, 조 집사의 말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안쪽으로 뛰어갔다. 사찰 안팎으로 빗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조용함은 조금 전의 숙연함과는 사뭇 달랐다. 사람들은 애써 시선을 피하거나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하곤 했다.
진안 군왕은 조금 전 정교랑이 안겼던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서 서 있었다. 하지만 정교랑이 오기 전까지 내뿜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어진 듯했다.
“전, 전…….”
경 공공이 말을 더듬으면서 입을 열자, 진안 군왕은 몸을 홱 돌리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횃불에 비친 그의 귀는 이미 새빨개져 있었다.
부인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마음 졸이며 그리 오래도록 기다리셨는데, 오자마자 남들 앞에서 전하를 놀리기나 하시고, 정말이지…….
정말 너무하네!
경 공공이 속으로 생각하며 동정과 분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어두컴컴한 밤길, 누군가가 화절자로 불을 켜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비췄다. 불씨를 피운 사내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는 재빠르게 불씨를 껐다.
사방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공자님, 다 처리했습니다.”
시종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의 뒤에서 쇠로 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조금 전에 주운 무기들입니다.”
“이렇게나 많다고?”
다른 시종이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칼, 장창, 검, 칼, 활과 입으로 불어 발사하는 표창,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대나무 통입니다. 여기 있는 열다섯 명 모두 정 낭자의 치명타 한 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종이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이 냉기를 들이마셨다.
무기 하나만 들고 싸운 건 아니라지만, 여인이 혼자 말을 타고 와서 순식간에 열다섯 명의 사내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소름 끼쳤다.
신선이 사람을 죽이는 법도 가르쳤나?
“그런데 정 낭자는 왜 굳이 고씨 가문의 사람들을 쫓아와 죽인 거죠? 설마 고씨 가문에서 매복을 해 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요?”
시종이 진호에게 물었다.
영혼을 앗아가는 붓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석 위에 한 글자가 새겨졌다.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기회. 고씨 가문은 진안 군왕과 정 낭자를 한 방에 보내 버릴 기회라고 생각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는 정 낭자가 그들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정 낭자가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할 때는, 그 누구도 정 낭자를 내쫓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정 낭자를 내쫓으며, 순순히 떠나는 낭자를 보고 내쫓긴다고 믿다니.
순진하군. 낭자는 쫓겨나는 게 아니라, 떠날 이유가 생겼기 때문에 떠나는 것뿐이야.
이 멍청한 놈들아. 아직도 정 낭자가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일찍이 말했잖아. 정 낭자는 아주 속이 좁은 여인이라고. 아주 아주 속 좁은 여인.
진호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점차 굳어졌다.
다만, 정 낭자는 좋은, 정말 좋은 여인이야.
진호가 삿갓을 쓰고 말 위로 몸을 날렸다.
“가자. 고 대인을 찾아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위로해 드리는 걸 놓쳐서는 안 되지.”
두 시녀가 찬합을 들고 물러났다.
“하나도 드시지 않은 것이냐?”
고 선생이 조용히 묻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서 말씀을 올리는 건 괜찮지?”
고 선생이 다급한 듯 중얼거렸다. 경 공공이 손을 들고 고 선생을 제지했다.
“거 참 눈치도 없으십니다. 안에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괜히 가서 싸움 부추기지 마십시오.”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부부간의 사소한 일과 고십사를 죽인 일을 어찌 비하겠나!”
고 선생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고십사를 죽였어! 아니, 어떻게 고십사를 죽인 거지?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섞였다. 이해가 갈 것 같다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하.”
참다 못 한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불렀다.
“썩 꺼지래도.”
칸막이 병풍 너머로 호통이 들려왔다. 고 선생이 민망한 듯 입을 다물자, 경 공공은 고소하다는 듯 낄낄 웃었다.
“그러게 내 뭐라고 했습니까. 전하의 마음속에서는 부부간의 사소한 일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다니까요.”
칸막이 안, 의자에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목욕을 마친 뒤, 깨끗하고 향기로운 내의로 갈아입은 정교랑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늘어뜨린 채 베개에 기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정교랑은 조금 전 피비린내를 풍기며 달려오던 여인과는 딴사람처럼 보였다.
“정방, 정말로 나한테 할 이야기가 없어요?”
진안 군왕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두 사람은 안쪽으로 들어온 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교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정방!”
진안 군왕이 손으로 정교랑의 어깨를 확 붙잡자, 정교랑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떨구어졌다.
안색이 살짝 발그레한 정교랑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정교랑의 숨을 쉴 때마다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들었나? 이 상황에서 잠이 온다고?
진안 군왕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정교랑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정교랑을 깨우려 했지만, 결국에는 손을 떼고 입술 끝까지 차올랐던 말도 삼켰다.
무기를 잔뜩 실어 떠났다가, 온몸을 피로 적신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위험천만한 싸움을 치르고 왔으니, 지쳐 잠드는 게 당연하겠지.
이곳으로 돌아왔으니 긴장을 풀고 마음 편히 잠든 거야.
진안 군왕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허공을 향해 소매를 홱 휘둘렀다. 탁자 위에 켜져 있던 촛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아직도 밖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고 선생은 안쪽의 촛불이 꺼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잔다고?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잠이 온다고?”
“못 잘 건 또 뭡니까? 왕비께서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오늘 밤 잠들지 못할 사람들은 우리가 아닐 겁니다.”
경 공공이 나지막이 말했다.
같은 시간, 경성에는 먹구름이 차츰 걷히고 비가 그쳤다.
주위가 조용해지던 무렵, 황씨가 갑자기 잠에서 깼다. 황씨는 등 뒤가 허전한 느낌에 몸을 뒤척였다. 당연히 옆에 누워있어야 할 사람이 없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평소 방 안에 야간 당직을 하는 몸종을 두지 않는 황씨였다. 황씨는 침상에서 내려오와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비가 그치고 밤하늘이 맑게 개어, 황씨는 등불도 켜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회랑 아래에 섰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황씨는 몸을 살짝 떨었다.
마당 안은 무척 고요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자, 어디선가 팍, 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원에 있는 고방에 등불이 켜져 있었고, 사람의 커다란 그림자가 창가에 비쳤다. 그 그림자는 물건을 높이 들었다가 세게 내리치는 동작을 반복했다.
대나무 대가 반으로 쩍 갈라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내의 차림의 범강림은 또 다른 대나무 대를 집어 들려다가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손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리고 문가를 쳐다보자, 문 앞에 서 있는 황씨가 보였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황씨가 놀란 눈으로 사방에 널브러진 대나무 대를 보면서 물었다.
“날이 점점 더 추워지니까, 조금 더 서둘러 만들어야 소보아가 가지고 놀 수 있을 거요.”
범강림이 다시 도끼를 들어 올렸다. 팍 소리가 들리고, 대나무 대가 두 쪽으로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며칠 전, 범강림은 소보아를 데리고 한 막료의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 집에 대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을 본 소보아가 똑같은 것을 갖고 싶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범강림이 거죽을 사서 소보아에게 같은 모양을 만들어 주려던 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야밤에 잠도 안 자고 만들 필요까진 없잖아요. 더구나 하인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황씨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말했다. 범강림이 머쓱하게 웃고는 도끼를 내려놓았다.
“잠이 안 와서 잠깐 밖으로 나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곳에 있었소. 시간이 많아서 그냥…….”
황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또 잠을 못 잤구나. 시누이가 경성을 떠난 뒤로, 저이가 벌써 며칠째 밤잠을 설치는 건지.
“너무 걱정하지 마요.”
황씨가 안으로 들어가 옆에 걸려 있던 옷을 범강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사람도 많이 데리고 갔잖아요. 한 지역을 지나갈 때마다 관부 사람들이 나와 영접하고 배웅할 거예요. 송평까지 갈 길이 멀긴 해도 가난하고 이름 없는 집안의 사람들이 떠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황씨가 주절주절 떠들어댔지만, 범강림은 부인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떠난 지가 오늘로 며칠째지?”
범강림이 불쑥 물었다.
“이제야 이틀 됐어요. 내일이면 사흘째고요. 누이를 그렇게 신경 쓰면서 떠난 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몰라요?”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범강림은 깊은 심호흡을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가서 좀 더 눈 붙이세.”
범강림이 말했다.
“곧 해가 뜰 시간이거든요?”
황씨가 탓하듯 대꾸했다. 두 사람이 고방을 떠나자, 저택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성 밖의 금군 군영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은 성을 순찰하고 돌아온 순성갑기와 마주쳤다.
“주 대인, 또 당직이십니까?”
순성갑기 대열을 이끌던 사람이 깜짝 놀라서 주복을 불렀다.
“다른 이를 대신해 야간 당직으로 바꿨소.”
주복이 대답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으로 주복을 배웅했다.
“일부러 괴롭히는 거네.”
병사 중 한 명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주 대인은 진안 군왕비의 사촌 오라비잖나. 진안 군왕이 경성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고, 군왕비는 고씨 가문과 악연이 있기도 하니, 주 대인이 경성에 편하게 계시기는 글렀지.”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
“하지만 고씨 가문도 경성 밖으로 쫓겨나지 않았나?”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주위에서 야유가 들려왔다.
“고씨 가문이 경성에서 쫓겨났다고는 하나, 경성에서 가장 존귀한 성씨가 무엇인지 잊어선 안 되지.”
병사들의 수군거림은 밤바람을 타고 경성 곳곳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 수군거림이 주복의 귓가까지 닿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굳이 듣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경성에 남아 이곳 위수영(衛戍營)에 소속되기로 한 그날부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뭐라 떠들고 다니는지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주복이 앞쪽을 내다보자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비가 그치다니, 참 재수도 없네. 비를 피해 어디 들어가서 잠깐 쉬다 보면 금방 날이 밝을 텐데.”
병사 하나가 작은 소리로 투덜댔다.
“이런 시간일수록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주복이 말했다.
“이런 시간은 무슨 시간입니까?”
병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주복을 쳐다보았다. 횃불에 비친 주복의 표정은 어두웠다.
새벽이 지나 동이 틀 무렵은, 가장 졸리고 깨어 있기 버거운 시간이었다.
“태자의 국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성의 수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 경계를 게을리 해선 안 돼.”
주복이 말했다.
태자의 국혼?
아, 그 바보 태자? 태자비가 될 사람이 진 상공 댁 딸이라던데, 걱정할 게 뭐 있다고.
병사들은 주복의 말에 알겠다고 대꾸한 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순찰했다.
주복이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온 뒤의 하늘은 푸른 빛을 띠며 조용하고 평온했다. 그는 다시 앞쪽을 내다보며 병사들을 앞질러서 가장 선두로 달려갔다.
네 개의 성문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차츰 날이 밝기 시작했다. 밤을 꼬박 새운 병사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이따 성문이 열리면, 가서 뜨끈한 탕이나 한 사발 먹어야겠어.”
“좋지. 서쪽 거리에 있는 그 집으로 가자고. 거기가 제일 잘해.”
말을 탄 병사들이 웃고 떠들면서 북문을 향해 갔다. 성문 가까이서 기다리다가, 성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갈 요량이었다.
가장 선두에 있는 주복은 병사들의 잡담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런데 주복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를 뒤따라오던 병사들은 하마터면 그와 부딪힐 뻔했다.
“주 대인?”
병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주복이 앞을 내다보며 말했다.
“누가 온다.”
병사들이 주복의 시선을 따라 앞을 내다보자, 멀리서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말 한 필이 보였다.
“성문이 열리길 기다릴 거라면, 너무 이른 듯한데.”
병사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매일 아침 성문이 열리기 전이면, 각지에서 길을 재촉해 온 사람들이 성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시간은 너무 일렀다.
병사들이 다가오는 사람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을 탄 사람은 일상복 차림으로, 급보를 전하는 역졸이나 전령병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병사들은 안심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병사들은 조금 전 화제를 이어 계속해서 잡담을 나누며 여유롭게 말을 몰았다.
그러나 주복은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말을 탄 사람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주복은 성문을 향해 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렸다. 성문 위에 있던 수문장이 아래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성문을 열었다.
“들어갔네?”
병사들이 웃고 떠들던 것을 멈추고는 놀란 눈으로 성 안으로 달려가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전령병도 아니고, 급보도 아닌데, 어떻게 바로 성문을 지난 거지?
“도대체 누구길래?”
사찰 안의 모닥불이 꺼지자, 푸른 하늘색에 비친 사찰이 어둑하게 느껴졌다.
몸을 옆으로 돌리던 정교랑의 팔이 누군가에게 부딪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교랑의 팔을 옆으로 밀어냈다.
정교랑이 눈을 뜨자,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는 게 보였다.
“정방, 어떻게 잠이 와요?”
정교랑이 눈을 뜬 것을 본 진안 군왕이 즉시 소리쳤다. 정교랑은 다시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진안 군왕의 다리를 다독였다.
“아직 이르니까 좀 자요.”
정교랑의 목소리에서 잠기운이 묻어났다. 진안 군왕이 이를 악물고 정교랑의 어깨를 잡았다.
“곧 해가 뜰 시간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밤새 잤으니까, 충분히 잔 거 아니에요?”
베개를 베고 누워 있던 정교랑이 눈을 뜨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아직 더 자고 싶어요.”
정교랑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하자, 진안 군왕은 순간적으로 가엽다는 생각이 들면서 손에 힘이 빠졌다.
그리 무모한 일을 벌였으니, 당연히 힘들겠지. 생각해 보면 밤새 잔 것도 아니야. 몇 시진 못 잤으니 아직 더 자고 싶을 만도 해.
방 안이 조용해졌다. 어스름한 푸른 빛 속에 망설이는 진안 군왕의 표정이 보이자, 정교랑은 실눈을 뜨고 웃음을 터트렸다.
또 나를 놀린 거야?
진안 군왕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까 내게 입맞춤을 했던 것처럼, 지금도 나를 놀리는 거야! 다른 게 있다면, 아까는 사람들 앞이었고, 지금은 단둘이 있다는 것뿐.
진안 군왕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정교랑의 어깨를 세게 쥐어 잡아당겼다.
“정방! 내가 정말 당신한테는 화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진안 군왕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고함쳤다.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던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의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다.
“깨어나셨소! 어서, 어서 일어나게나. 지금은 여쭤볼 수 있겠지?”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옆에 있던 경 공공을 부축해 몸을 일으키게 했다. 경 공공이 눈을 감은 채 고 선생을 붙잡았다.
“괜한 짓 하지 마십시오. 부부 사이의 대화는 이제야 시작이니.”
고 선생이 고개를 저으면서 불만을 표했다.
“대화를 하려면 어젯밤에 했어야지, 왜 지금까지 끌었겠나? 딱 봐도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인 상황이 아니란 말일세. 차라리 공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낫지.”
고 선생이 투덜댔다.
진안 군왕의 손에 붙들려 앉게 된 정교랑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중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화내지 않을 거잖아요.”
정교랑의 웃음은 예전처럼 담담했지만, 진안 군왕은 화가 난 탓인지, 오늘따라 정교랑의 웃음 서린 눈이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진안 군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정교랑의 어깨를 놓았다.
“화는 안 나지만, 속상해요. 당신이 나를 믿어 주지 않는 게 속상하고,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속상하다고요.”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이 자세를 고쳐앉고 진안 군왕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이 정방이 실례했습니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정교랑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를 신경 쓴다는 걸 알기에 당신한테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번 일은 눈 깜빡할 사이에 적기를 놓칠 수도 있어서, 충분히 설명해 줄 시간이 없기도 했고요.”
정교랑이 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방백종, 부디 용서해 줘요.”
“당신에게 당신만의 도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나 또한 그 도리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방, 만에 하나, 당신이 실패하게 될 경우를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진안 군왕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실패했다고 해도,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을 거예요.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걸 쓰면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나요. 내 온몸에 불이 붙어서 내가 누구인지도…….”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이면서 대답했다. 정교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조용히 해요!”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방백종.”
정교랑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안 군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휙 나가 버리자, 정교랑은 옆에 있던 두봉을 걸치고 그를 쫓아갔다.
바깥에 서 있던 고 선생과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을 붙잡으려 했지만, 진안 군왕은 그들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왕비 전하.”
고 선생과 경 공공이 밖으로 나오는 정교랑을 보고는 서둘러 예를 표했다.
“전하께서 어젯밤 왕비의 걱정을 너무 많이 하셔서 저러시는 겝니다. 그러니 왕비께서 전하와 잘 화해하…….”
경 공공이 은근히 타박하듯 말했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 선생이 그를 옆으로 밀쳤다.
“왕비 전하, 고 관인이 여기에 있을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리고 그자를 어떻게 죽였습니까? 정말로 죽은 걸 확인하셨습니까? 혹시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는지요? 아니면 남겨 둔…….”
고 선생이 숨도 안 쉬고 묻자, 경 공공이 눈을 부릅뜨면서 그를 향해 소리쳤다.
“거 사람 참. 지금 그런 걸 물을 때입니까!”
정교랑은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이 일이라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거늘, 구체적인 상황이 어떤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대처하려고 그러나!”
고 선생도 목청을 높였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정교랑은 두 사람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왕비 전하.”
고 선생이 뒤늦게 정교랑을 불렀지만, 경 공공에게 붙잡힌 탓에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서서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 빨리 해결해 주십시오.”
빨리 전하를 잘 어르고 달랜 뒤에, 제대로 된 얘기 좀 해 봅시다.
경 공공이 고 선생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그 말 무슨 뜻입니까? 지금 전하께서 무작정 떼쓰고 있다고 여기는 거요?”
정교랑은 경 공공과 고 선생의 말싸움을 뒤로 한 채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진안 군왕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밖에 서 있던 시종들이 정교랑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음식을 하고 있던 반근과 소심도 몸을 일으키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 집사는 말없이 정교랑을 향해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정교랑이 벽을 지나 사찰 뒤쪽으로 방향을 틀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진안 군왕이 보였다. 정교랑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갔다.
-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걸 쓰면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나요. 내 온몸에 불이 붙어서 내가 누구인지도…….
온몸에 불이 붙어서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나서, 온몸에 불이 붙는다고. 온몸에 불이…….
진안 군왕은 떨려오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뒤로 바짝 따라온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을 붙잡았다.
“방백종,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정교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괴로워하지 않을 이유를 단 하나라도 말해 줄 수 있어요?”
고개를 돌린 진안 군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속상해하지 않을 이유는요?”
진안 군왕이 또 물었다. 그는 정교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내가 괴로워하지 않거나, 속상해하지 않을 이유가 있기는 해요. 내가 당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당신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당신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거나 속상해하지 않겠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속상해하지 않는 이유가, 그런 이유이길 바라요?”
진안 군왕이 말하다 말고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이번 일의 이유는 딱 하나뿐이에요.”
고개를 든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죠.”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죠.
진안 군왕이 뱉은 말은 흡사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리는 우스운 말이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웃지 않고 자신 앞에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는 사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오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그는 과거 소년 시절의 풋풋함 대신 성숙한 사내의 진중함을 가지게 되었다.
“벌써 오 년이네요.”
정교랑이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오 년?
아, 우리가 알게 된 지 벌써 오 년이 지났구나.
진안 군왕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때 산골짜기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지금 같은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 번의 만남 후에 영영 재회의 기약도 없이 지낼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 번 만난 인연으로 서로에게 영원을 약속할까.
내가 원하는 건, 이 여인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담소를 나누다가도 돌아서면 다시는 못 볼 사이가 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죽는다면 그저 죽을 운명이었으니 피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이 여인의 마음속에, 나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이 여인 때문에 기뻐하든, 죽을 만큼 괴로워하든, 나의 그런 감정들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진안 군왕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걸음을 옮겼다.
“방백종.”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소매를 붙잡았다. 진안 군왕은 걸음을 멈추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교랑도 진안 군왕을 부른 뒤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새벽녘의 푸른 빛을 두른 사찰 밖,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적막한 공기가 흘렀다.
이 여인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
입을 다문 정교랑을 바라보던 진안 군왕의 눈가에 슬픔이 비쳤다.
“됐어요.”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고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정교랑의 손을 다독였다.
“내가 너무 놀라서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실언을 했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새벽빛을 등지고 서 있는 진안 군왕의 준수한 용모가 보였다. 하지만 그 용모와 대조되는, 살짝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거뭇한 이빨은 다소 보기 흉했다.
정교랑이 찬찬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진안 군왕을 훑어보았다. 최근 몇 번에 걸쳐 계속 몸이 상해서 그런지, 원체 키가 큰 진안 군왕의 모습은 보다 더 핼쑥해 보였다.
조금만 더 살집이 있거나, 더 건장하다면 참 좋을 텐데.
정교랑이 다시 시선을 떨구자, 진안 군왕이 또 웃었다.
“나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이런 일들은 사소한 거라고요. 이렇게 내 감정만 앞세우며 당신이 나처럼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는데.”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쨌든, 괜찮아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왔으니까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괜히 고민하며 괴로워하지 않을게요. 이제 우리 슬슬 돌아가 볼까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야기해 봐야죠.”
진안 군왕이 손을 거두고 정교랑을 지나쳐서 사찰 쪽으로 걸어갔다.
진안 군왕이 두어 걸음 앞으로 나아갔을 때, 정교랑이 뒤에서 그를 와락 껴안았다.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내가 그때 했던 생각은, 만일 내가 죽는다 해도 당신이 있으니까…….”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죽어도, 당신이 나 대신 마무리를 해줄 테니까…….
내가 죽어도, 당신은 스스로를 잘 지켜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죽어도, 당신이 나 대신 복수해 줄 테니까…….”
정교랑은 손에 힘을 주며 진안 군왕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등 뒤에 있던 정교랑이 자신에게 더 가까이 밀착한 것이 느껴졌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죽기를 각오할 수 있었어요.”
진안 군왕은 누군가에게 가슴팍을 세게 걷어차인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분명히 슬픈 말들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거지? 이런 것도 사랑을 속삭이는 말의 일종인가? 그런 말을,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는 건가?
이 여인, 생각보다 사람을 너무 잘 달래잖아. 이렇게는 넘어가서는 안 돼. 이런 두어 마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진안 군왕이 심호흡을 하고 몸을 돌리려 했지만, 정교랑은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뒤돌아서지 못하게 했다.
“다들 ‘살아야 한다, 잘 살아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다’라고 말하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꼭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누군가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어떤 일들이 있고,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잘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요.
방백종, 나도 당신과 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어요.
당신에게도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존재하듯, 나 또한 그래요. 내가 당신을 신경 쓰지 않아서, 당신을 믿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내 목숨을 내놓는 게 아니에요. 꼭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 일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서 정교랑을 품에 안았다.
“혹 당신이 죽는 날이 온다면,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아무런 걱정도 염려도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다 갔으면 해요. 내 걱정은 하지 않고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신의 처지가 나보다 훨씬 더 처참하니, 나는 당신이 홀로 고통과 복수심을 떠안고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아요.”
정교랑이 눈을 감자,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의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가을 아침, 눈물에 젖은 진안 군왕의 가슴이 더없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이런 식으로 한 번 죽었던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보다 더 비참하죠.”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진안 군왕이 풉 하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정교랑의 얼굴을 손으로 받치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정방, 우리 지금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게 맞나요?”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쩜 누가 누굴 더 좋아하느니 마느니 이야기할 때조차 누가 더 비참한지를 겨루는 거 같죠?”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이마에 또 입을 맞췄다.
“자, 이제 돌아가요. 그 일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해 봐야 하니까.”
그러나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놓아주지 않았다.
“급할 거 없어요. 이미 누가 해 줬거든요.”
누가?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도, 더는 묻지 않고 빙긋 웃으면서 정교랑을 꽉 끌어안았다.
“그럼, 조금만 더 이렇게 안고 있을게요.”
걷지도 않고 이야기도 나누지 않으면서 부둥켜안은 채 제자리에 선 두 사람을 보며, 경 공공과 고 선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젠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을 셈이시로군.”
경 공공이 작게 투덜거렸다.
“곧 해가 뜰 텐데.”
고 선생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흠, 화창한 대낮인데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경 공공이 맞장구쳤다. 고 선생은 마음이 급해져 벽을 잡고 투덜댔다.
“아니 내 말은, 곧 해가 뜰 텐데 이제 제발 일 이야기 좀 하면 안 되겠냐는 거지! 이대로 해가 뜨면, 그때는 우리가 손써 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도대체 뭣들 하시는 거야? 답답해 죽겠네!”
같은 시각, 진안 군왕 일행이 머무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청원 지역의 현령(縣令)은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다.
아직 등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현령이 탁자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침상에 누워 있던 미인이 휘장을 살짝 걷고 나른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야?”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오만상을 찌푸리고며 다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노야, 차를 드시려고요? 소첩이 우려 드릴게요.”
미인이 침상에서 내려와 현령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현령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미인을 침상으로 밀쳤다.
“됐다, 가. 다시 가서 자라.”
현령이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미인이 침상 위로 쓰러졌다.
“노야, 왜 그러세요? 요 며칠은 계속 딴생각만 하시는 거 같고.”
미인이 억울한 듯 투덜대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혹시 또 부인께서 뭐라고 하신 거예요?”
현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머릿속에 든 거라고는 그런 생각밖에 없지?”
현령이 손끝으로 미인의 이마를 툭툭 밀었다.
“네 노야가 무슨 큰일을 할 건지는 알고 있느냐?”
“저야 모르죠.”
미인이 대답했다.
“모르면 가서 잠이나 자라. 괜히 방해하지 말고. 더 방해했다가는 확 팔아 버릴 테다.”
현령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미인은 분한 표정으로 씩씩대다가 소매를 홱 털고 침상 안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현령이 탁자에 손을 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던 중, 차를 마시고 싶냐는 미인의 말이 생각나자 어쩐지 목이 말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주전자를 들어서 차를 따르고, 차를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야, 노야, 큰일 났습니다!”
차를 마시던 현령은 사레가 들려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방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새벽부터 왜 소리를 지르고 이래요? 노야께서 깜짝 놀라 돌아가실 뻔했잖아요!”
미인이 재빨리 현령의 등을 토닥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현령은 미인의 손길을 거부하며 그녀를 옆으로 밀쳤다. 그러고는 기침이 멈추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밖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현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큰일 났습니다.”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현령은 일순간 심장이 멈춘 듯했다. 그가 기침을 멈추려고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성공했느냐?”
그가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새벽에 소식을 전해 온 사람이 있어서, 소인이 먼저 가 보았는데…….”
조금 전에 목격한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른 남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노야, 곧 해가 뜰 테니, 서두르시지요.”
현령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가? 말아? 해? 말아?
이건, 목이 날아갈 대죄를 짓는 일인데…….
그렇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을 공부에 매달린 끝에 어렵게 얻어낸 문관 자리야. 이젠 높은 관직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
“노야, 시간이 없습니다. 노야께서 안 가셔도 어차피 저쪽에서 사람을 보내올 겁니다. 그럴 바에야 그분들께 잘 보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현령의 고민을 눈치챈 듯 말했다.
“썩 내키지 않는 소문이 도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그보다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거머쥘 기회이지 않습니까. 소문이나 유명세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권력은 노야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십여 년을 공부만 해서 얻어낸 문관이야. 이젠 더 높은 관직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어.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현령이 무언가를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다리를 탁 쳤다.
“가자.”
그는 관복도 챙겨 입지 않은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서 가서 사람을 불러오너라. 북과 징을 울리고, 병사들을 모아 마적을 소탕해라!”
남자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성, 고능준의 저택.
잠을 자던 고능준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터라, 어둑한 휘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휘장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놓던 고능준이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악몽을 꾼 것 같은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
흉조인가?
뇌리에 이 생각이 스치자, 고능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난 징조 같은 걸 믿지 않는 사람이야. 아무래도 긴장이 되니 악몽을 꾼 거겠지.
그 일이 성공한다면 곧바로 다음 단계에 착수할 수 있도록, 혹 실패한다면 말끔하게 꼬리를 자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만, 아직 소식이 전해지기 전이니 마음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군.
고능준이 휘장을 걷자, 푸른 새벽빛이 침상 안으로 들어왔다.
곧 해가 뜰 테니, 이제 곧 소식이 들려오겠지.
“여봐라.”
고능준이 입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시녀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는 꿇어앉았다. 한 명은 고능준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고, 다른 한 명은 고능준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고능준이 찻잔을 받아 차로 입가심을 한 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있던 시녀에게 차를 뱉었다. 고능준은 타구에 냄새가 나는 것을 싫어해 타구를 따로 쓰지 않고, 시녀를 타구로 쓰고 있었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고능준이 회랑 아래로 나왔다.
어제 큰비가 내렸던 터라, 마당 바닥이 깨끗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능준은 마당 대신에 회랑 아래서 한바탕 권법을 연마했다.
새들이 지저귀고, 마당에 있던 시종들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청소를 시작했다.
공수도를 끝낸 고능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때,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마당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다급하게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고능준을 보자마자 회랑 아래로 다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능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의 손에 쥐여 있던 얇은 대오리는 살짝씩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일이 잘 안 풀렸느냐?”
고능준이 물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이 바닥에서 큰절을 올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대인, 관인께서, 가셨습니다.”
마당 안에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종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관인께서, 가셨다고? 어딜 갔다는 거야?
고능준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인, 대인.”
울고 있던 사람이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면서 말했다.
“십사 관인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관인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처량한 새 울음소리가 들려오다가 돌연 잦아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롱 안에서 지저귀던 새가 목에 대오리가 꽂힌 채 날개를 파들거리고 있었다.
마당 안에 정적이 흐르고,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고능준이 고개를 돌리고 무릎을 꿇은 사내를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을 뱉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고능준은 놀란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받은 사내는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 십사 관인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사내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울먹였다.
고능준이 천천히 회랑 아래로 내려왔다.
“십사 관인? 어느 십사 관인 말이더냐. 경성에 관리가 그렇게 많은데, 어느 십사를 말하는지를 제대로 고해야 할 것 아니냐?”
어느새 무릎을 꿇은 사내의 바로 앞까지 온 고능준이 그를 내려다보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빛이 사내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사내는 차마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능준이 거대한 산처럼 온몸을 억누르는 듯한 느낌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인!”
사내의 뒤를 따라 들어온 막료들도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중 한 막료가 침통하고 황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디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사내의 뒤를 따라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본 고능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슬픔을 거두라고? 내가 거둘 슬픔이 무엇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설마 우리 십사가 죽었다고 말하는 게냐? 나 고능준의 아들이 죽을 리가 있느냔 말이다!”
고능준이 무릎을 꿇은 사내를 향해 돌연 발길질을 했다.
“나 고능준의 아들이, 어떻게 죽겠느냐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고능준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내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흐느끼는 소리가 대청 안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하늘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고씨 저택 안에 내려앉은 듯했다.
“대인, 부인들께서는 모두 무사하시다고 합니다. 사직하신 송 대인 댁을 지나가다가, 그쪽에서 하루 묵고 가라고 청하여 그곳에 머무르셨다고 합니다.”
한 막료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의자에 앉아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눈물을 흘리던 고능준이 대꾸했다.
“그렇다면 십사는 왜 따라간 것인가?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분을 이기지 못한 고능준이 탁자를 뒤엎자, 대청 안에 서 있던 막료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 많던 놈들은? 십사를 따라다니며 호위하던 놈들 말이다. 그놈들은 대체 어떻게 호위를 한 것이냐? 십사가 죽는 꼴을 멀뚱히 서서 보고만 있었다고 하더냐!”
고능준이 소리쳤다.
“대인, 십사 관인께서는 매복 지점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대인께서 분부하신 대로만 움직였습니다. 예전에 알던 지인을 잠시 보고 온다고 하신 뒤, 매복 지역이 아니라 다른 길가로 가 잠자코 기다리셨습니다.”
한 막료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 우리 십사가 가끔은 황당한 일을 벌일 때도 있지만, 일을 할 땐 내 말을 참 잘 들었거든.”
고능준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십사야, 나의 십사야.
“대인, 대인, 십사 관인께서는 떼죽음을 당하신 겁니다.”
막료가 말했다.
“소인이 도착했을 때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한곳에 죽어 있었습니다. 그때 소인이 본 바로는, 한 명이 모두를 죽인 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쫓겨 죽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각자 입은 치명상이 전부 달랐고, 관인께서는 표창에 목이 뚫려 돌아가셨습니다. 상대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어서, 소인 또한 그 자리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하고 서둘러 소식을 전하러 돌아왔습니다.”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이 바닥에 꿇어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뚫려서…….
자기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듣는 아비보다 더 비통한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고능준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누구의 소행인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막료가 조용히 말했다.
“조사할 필요 없다. 조사할 게 뭐 있느냐? 딱 봐도 빤히 보이는 것을.”
내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나를 죽이고 싶어 했겠지.
이번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는 나의 것이기도 했고, 상대의 것이기도 했어.
고능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큰일이다!”
비통했던 고능준의 표정이 급변했다.
청원 현령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서서히 밝아지는 아침 햇살이 간밤의 스산함을 덮었지만, 눈앞의 광경을 본 현령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체들은 모두 길가로 치워졌고, 한 사람이 시체 위로 하얀 천이나 덮개를 하나씩 덮어 주었다.
단순한 마적의 습격이라면 관부가 이렇게까지 나서서 시신을 수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자신이 마주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던 현령은 성의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직접 사람을 대동하여 수습에 나섰다.
지금 그의 눈앞에 놓인 시신 위에는 아직 덮개가 덮이지 않았다. 난도질당한 시체의 옷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굵은 목 위로 보이는 험하게 일그러진 표정은 죽기 직전의 고통을 고스란히 말해 주고 있었다.
“고, 고…….”
현령이 턱을 떨면서 간신히 한 글자를 내뱉었다.
“노야?”
옆에 있던 시종이 의아한 얼굴로 현령을 불렀다.
노야께서 왜 갑자기 놀라시지? 너무 많은 시신을 한꺼번에 봐서 겁먹으셨나?
음, 그럴 수도 있지. 여기에 오신 이후로 노야께서는 계속 시선을 피하고 계셨어. 보고 싶긴 한데,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시겠지. 봐야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슬쩍 보셨겠지만, 워낙 처참한 광경이라 충분히 놀라실 만도 해.
현령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자신 앞에 놓인 시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발바닥을 핥아 주겠다며 줄을 섰을까? 저들이 지금처럼 하찮은 눈빛으로 이 사람을 내려다보는 일은 결코 없었을 텐데. 절대로.
게다가, 저들은 이게 누구 시신인지도 알아보지도 못해. 하긴, 닿을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분을 잡일이나 하는 관졸들이 알아볼 리가 있나? 이분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향불을 피우며 조상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기도 바빴을 테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분이라.
그렇지, 나도 이분을 한 번 뵙고자 몇 번이나 거금을 건넸어.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잠시 결원이 생겼던 현령 자리를 꿰차게 되었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시신이 되어 버린 거지?
아닌데, 이게 아닌데? 전에 이야기했던 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