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75)

앞뒤로 선 두 사람은 진안 군왕부의 연무장 안을 벌써 몇 바퀴나 돌았다. 소심은 벌써 군왕부의 일을 처리하러 갔고, 홀로 남은 반근은 더 이상 걷기는 무리라는 생각에 다른 시녀들과 함께 한쪽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정교랑을 밖으로 끌고 나온 진안 군왕은 막상 연무장을 돌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걷기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기이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진씨 가문에서 이러는 게 가소로워 보여요?”

정교랑이 불쑥 질문을 던지자, 진안 군왕은 멈칫하여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니.

“가소롭다니요?”

딸자식이 바보한테 시집가는 일인데…….

“가엾다고 해야겠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가엾다라…….

정교랑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고개를 들고 똑바로 직시할 수밖에 없다. 함정에 빠진 걸 알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내해야 하니 가엾은 건 사실이지.

정교랑의 걸음걸이가 갑자기 빨라졌다.

그래도 가엾다고 하긴 또 좀 그렇네.

걸음걸이가 다시 느려졌다.

“막다른 길에 몰린 건 또 아니잖아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을 뿐이죠. 원하던 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진안 군왕도 걸음을 늦추었다.

“그렇다면, 존경할 만하네요.”

존경?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도의를 위해 의연히 나아가는 게 존경스럽다는 말인데, 만약 그 도의가 옳지 않은 거라면?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도가 어떻게 옳지 않을 수 있죠?”

진안 군왕이 따스한 어조로 물었다. 정교랑이 놀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이.

요 며칠간 정교랑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담담해 보였지만, 소식을 들은 후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곤 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진안 군왕은 그녀가 홀로 멍하니 있지 않도록 귀찮게 말을 걸고, 함께 걷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 혼자 쓸쓸하게 넋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서.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요. 당신 옆엔 내가 있어요.

군주에게 충성하는 도를 옳지 않다고 볼 순 없지.

정교랑은 다시 침묵을 지키며 걸음을 옮겼다.

우리 정씨 가문에서 굳게 믿은 천도처럼, 틀림이 없어.

대경 말엽 사방이 혼란에 빠졌을 때, 즉위할 만큼 정통성 있는 황족은 네 갈래로 나뉘었다. 그중 세간 사람들의 눈에 가장 유능하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순왕(順王)과 녕왕(寧王)이었는데, 정씨 가문은 황실 혈통과 전혀 상관없는 양국공을 택했고, 모반과 찬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 가며 새 황제를 옹립했다.

그건 천도가 선택한 군주고, 정씨 가문에서 인정한 군주였으니까.

오명을 뒤집어쓰고 전장을 누비며 십 년간 분투한 끝에, 마침내 새 황제가 등극하며 천도를 이행하게 되었지만, 정씨 가문에 돌아온 건 멸문지화였다.

존경해야 하나? 가엾어해야 하나? 가소로워해야 하나?

진 노태야의 마당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진소가 고개를 들자, 대청 안으로 돌아가는 진 노태야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진소가 부친을 부르며 비통한 심정으로 다시 엎드렸다. 진소의 귓가에 되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며느리와 단랑은 준비를 마쳤느냐?”

진 노태야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소는 몸을 움찔했다. 한쪽 옆에서 노복의 대답 소리가 들렸다.

“그럼 마차에 오르고 출발하자. 그래야 날이 저물 때쯤 역참에 당도할 게야.”

“아버지!”

진소가 고개를 들고 목멘 목소리로 외쳤다. 순간 진 노태야의 손에 들린 검이 보였다. 진 노태야는 진소가 고개를 들자마자 손을 휘둘렀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진소의 앞으로 장검이 떨어졌다.

“충과 효를 함께 이룰 수 없는 거라면, 넌 충을 다하고 나서 효를 다하거라. 그럼 네 바람대로 될 게야. 넌 군주께 충성을 바쳤다는 명성을 지킬 수 있겠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오명은 내가 짊어지마.”

진소가 화들짝 놀라 쳐다봤지만, 진 노태야는 더 이상 진소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층계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을 잘 계산해라. 우리가 나갔다 돌아올 시간 말이다.”

진 노태야가 진소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한 말이건만, 오늘 날씨를 말하듯 가벼운 말투였다.

“노태야!”

노복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진소가 부친을 부르며 부복하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오열했지만, 진 노태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는 남고 싶으면 남거라. 누구든 남고 싶은 자는 남아도 좋다.”

진 노태야가 느릿느릿 말했다. 오열하던 진소가 일어나 손을 뻗어 장검을 집어 들었다.

“노야!”

노복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진소를 막았다.

“나는 아들을 넷 두었다. 하나는 죽었고 셋만 남았는데, 세 아들 모두 자질이 평범하다지만 상관없어. 내게는 손자도 있거든.”

진 노태야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손자들도 별 볼 일 없다 치면, 증손자도 있지. 이번 대에 안 되면, 다음 대가 있기 마련이야. 청렴결백하게 지내면, 언젠가는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를 자손이 나오겠지.”

진소는 검을 쥔 채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조부님!”

밖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마당에 있던 세 사람은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자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진단랑이 보였다.

진단랑은 벌써 떠날 준비를 마친 차림이었는데, 급히 달려온 터라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단랑, 여긴 왜 왔느냐?”

진 노태야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할아비랑 가자.”

진단랑은 진 노태야의 손을 잡는 대신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조부님, 전 남고 싶어요.”

진단랑이 들어오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진소가 그 말에 복잡한 심경으로 돌아보았다.

“단랑…….”

진소가 중얼거렸다.

진단랑은 고개를 들고 진 노태야를 보며 생긋 웃었다.

“조부님, 저 남을게요.”

진 노태야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단랑, 네가 남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알아요. 다들 쉬쉬했지만, 전 다 들었어요. 제가 태자한테 시집가는 거잖아요.”

진 노태야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진단랑이 손을 뻗어 진 노태야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할아버지, 저 태자한테 시집가고 싶어요.”

진 단랑이 커다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전 태자가 좋아요.”

그 말에 진소는 다시 얼굴을 가렸고, 진 노태야는 고개를 내저으며 단랑의 손을 붙잡았다.

“단랑, 너는 태자를 좋아하지 않잖느냐. 그런 말로 할아비 기분을 맞춰 줄 것 없다. 자, 할아비 말 들어. 할아비랑 같이 가자. 가면서 얘기하자꾸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전 정말로 태자를 좋아해요. 태자는 좋은 사람이에요. 무섭지도 않고요. 제가 웃어 주면, 태자도 저한테 웃어 줘요.”

진단랑이 큰 소리로 말하는데도, 진 노태야는 잠자코 진단랑을 잡아끌었다.

“고얀 것들, 너희는 대체 단랑을 어떻게 돌본 것이야!”

진 노태야가 이번에는 밖에서 불안에 떨며 들어온 여종들에게 소리쳤다. 여종들은 얼른 단랑을 안고 나가려 했지만, 진단랑은 여종들의 손을 뿌리치고 진 노태야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조부님, 조부님은 단랑을 가장 아끼시잖아요. 조부님은 제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죄를 평생 짊어지고 살길 바라세요? 정말 저한테 그러실 거예요, 조부님?”

진 노태야의 몸이 굳어졌다.

“조부님, 전 태자한테 시집가고 싶어요.”

진단랑은 고개를 들고 진 노태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부님, 정말로 제가 원하는 일이에요. 억울하지 않아요.”

샘물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보고 있던 진 노태야가 처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단랑, 너는 모른다. 말이 쉽지, 장차 얼마나 힘겨운 나날들을 견뎌야 할지 넌 몰라.”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몰라요. 하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진 노태야는 고개를 흔들며, 손을 뻗어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리석은 것, 넌 후회하게 될 거야.”

진 노태야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나중에 후회하고 말고는 나중 일이에요. 어쨌든 지금 후회하지 않으면 돼요.”

진단랑은 진지하게 말하고 나서, 다시 한번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지금 이 선택, 전 후회하지 않아요.”

진 노태야는 그런 진단랑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한쪽 옆에 있던 진소는 벌써 꺽꺽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마당 문 밖에 있던 진소 부인은 몸을 휘청이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된 진소 부인이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했다.

대청에 등불을 밝힌 후, 반근은 시녀들과 함께 물러갔다.

“그게 다더냐?”

진안 군왕의 물음에 경 공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진 대인이 오후에 입궁했으나, 오래 머물진 않고 금방 나오셨습니다.”

진안 군왕의 시선이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한쪽 옆에 앉은 정교랑은 이들의 대화를 못 들었다는 듯 등불 아래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다른 소식은 없었습니다.”

경 공공이 나지막이 말하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진 대인이 교지를 거역한 상황이니, 곧바로 동의하고 나설 순 없겠지. 진 대인이 이만큼 양보를 했으면, 태후도 체면을 세워 주실 거야.”

“네, 다만 오래 끌지는 않을 겁니다. 이틀이나 사흘 내로 정해지겠죠.”

진안 군왕은 눈을 떨구며 음 하고 대꾸한 후, 찻잔을 쥔 채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태자 전하께서는 혼인을 하게 되셨군요. 진씨 가문의 여식이면 다른 이보다 훨씬 낫…….”

진안 군왕이 찻잔을 쾅 내려놓았다.

“그만 물러가라. 쉬어야겠다.”

경 공공은 머쓱해하며 알았다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대청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일찍 자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저녁땐 책 보지 마요.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눈 아파요.”

정교랑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진안 군왕이 다가와 웃으며 정교랑의 팔을 쿡쿡 찔렀다.

“그만 보라니까요. 나 머리 감겨 줘요.”

“난 머리 감길 줄 몰라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내가 감겨 줄게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밖에 있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숱이 참 풍성하네요.”

“……물 안 차가워요? 따뜻한 물을 좀 더 섞을까요?”

안에서는 여전히 진안 군왕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전하께서 머리를 참 잘 감겨 주시네.”

소심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근은 조금 전 구리 대야가 엎질러지던 소리를 떠올리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반근이 막 뭐라 대꾸하려는데, 안에서 나오는 진안 군왕이 보였다.

“부인이 씻도록 도와드려라.”

진안 군왕의 말에 반근이 얼른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안 군왕이 씻고 나왔을 무렵, 정교랑은 벌써 침상에 누워 있었다. 몸종이며 시녀도 전부 물러간 터라, 진안 군왕은 한쪽 옆에 따라 둔 물을 들고 편히 마셨다.

“물 마실래요?”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은 물잔을 내려놓고 등불을 끈 다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교랑을 타넘고 침상 안쪽으로 들어가 누웠다.

“정말 당신이 말한 그대로네요.”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사람을 툭툭 치며 말했다.

“뭐가요?”

귓가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진안 군왕은 몸을 틀어 옆으로 누워,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휘장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같은 침상에서 자는 거 습관 되면 괜찮다고요.”

진안 군왕이 웃자 정교랑도 웃음을 보였다.

“방백종.”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부르자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난 괜찮아요. 진 대인이 수락할 거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요.”

진작 예상했던 일이죠. 이렇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뭐든 다 알았다. 그녀에게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라 해도, 슬프잖아요.”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베개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다가, 또 얼른 손을 거두었다.

“내가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보며 물었다. 캄캄한 어둠 아래 두 눈만이 반짝반짝 빛났다.

“난 슬프지 않아요. 내 일도 아닌걸요.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子非魚, 安知魚之樂 - 장자). 남의 일에 내가 뭐하러 괴로워해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내가 괜한 생각을 했네요.”

진안 군왕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단랑은 착한 아이인데, 이런 일을 겪다니, 많이 슬프겠어요.”

정교랑이 베개 위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슬프지 않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몸을 받친 채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으응?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죠?”

“실은 나도 물고기거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하늘빛이 서서히 밝아오고, 이제 막 성문을 연 위병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청소 준비를 할 무렵, 마차 한 대가 흔들흔들 성문을 빠져나갔다.

이런 꼭두새벽부터 누구지?

위병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고생스레 돈벌이하러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때 성안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위병들이 고개를 돌리자, 말에 탄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진 상공!”

위병 중 하나가 대번에 알아보고 놀라 외쳤다. 위병들이 미처 예를 올리기도 전에, 진소의 말은 쏜살같이 성문을 빠져나갔다.

“아버지!”

마차 옆에서 말고삐를 당긴 진소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진소는 창백한 안색에 두 눈이 붉은 채로,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연신 땅에 머리를 찧었다.

“막을 것 없다.”

진 노태야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네 자식은 네 뜻대로 하게 둘 테니, 내 자식은 내 뜻대로 하게 해 다오. 진소, 오늘부로 난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다. 네가 정녕 충과 효를 다하고 싶다면, 더는 성가시게 굴지 마라.”

진소가 아버지를 불러대며 오열했다.

“왜 이러느냐. 날 이리 압박하는 것도 너의 대의를 따르는 일이더냐? 널 용서하지 않고, 네 뜻을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이 내 잘못이란 말이냐?”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진소가 고개를 들었다. 진소의 이마에는 벌써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아니면 됐다. 그럼 길을 열거라.”

진소가 다시 땅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마차를 몰던 노복이 더는 못 보겠는지, 나지막이 말했다.

“노야, 그만하시지요. 노태야를 놓아 주십시오.”

놓아 달라…….

진소가 몸을 움찔하더니, 납작 엎드리며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고는 무릎걸음으로 두어 걸음 물러나 길가로 비켜섰다.

마차는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고, 다시 휘장을 내린 진 노태야는 더 이상 진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차가 차츰 멀어지면서 길을 오가는 사람도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길가에 엎드린 진소는 지나가던 행인들이 놀라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리는데도 시종일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저 뒤에 있는 진소가 자그마한 점만큼 작아지자, 노복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가을인데도 하늘은 높고 푸르르지 않고, 어두컴컴했다.

“비가 오려나 보네.”

노복이 중얼거렸다. 진 노태야도 휘장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더니 멈칫했다.

“음, 솜구름이 몰려드는 것이 곧 비가 오겠구나.”

진 노태야는 추억에 잠긴 듯 말을 이었다.

“기억하느냐. 우리가 처음으로 정 낭자를 만났던 때도, 이런 날씨였지.”

노복은 멈칫했다. 어느덧 육 년 전 일인지라 이미 흐릿해진 기억이었다.

“그때 정 낭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벌써 몇 년 전에 죽었을 게야.”

웃음을 짓던 진 노태야는 거기서 돌연 말을 멈추었다가 잠시 후 다시 이었다.

“그때 낭자의 말을 믿었다면, 경성으로 오지도 않았을 텐데.”

경성으로 오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같은 일도 없었겠지.

노복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태야.”

진 노태야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 병은 정 낭자가 고쳐 줬다지만 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그래서 병은 고쳐도 명은 못 고친다는 말이 있는 게야. 운명은 자기한테 달린 것이니, 남 탓을 할 수는 없는 법이지.”

진소가 무릎을 꿇은 채 경성을 떠나는 진 노태야를 배웅했다는 소식이 경성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기도 전인 사흘 후, 진씨 가문의 십구랑을 태자비로 책봉한다는 조서가 만천하에 반포되었다.

정교랑은 그 소식을 연무장에서 활쏘기를 하다가 들었다. 진안 군왕이 직접 와서 이야기해 주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고, 화살 끝에 달린 궁깃은 햇빛 아래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지금은 출타하기 어려운 처지지만, 그래도 진 상공 댁엔 내가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방문한 일로 탄핵 상소가 몇 개 더 올라오고 조롱하는 말 몇 마디 더 듣는다고 해서, 진 상공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정교랑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손에 든 활을 내린 채 잠자코 있었다. 그때 소심이 멀리서 급히 다가왔다.

“부인, 부인, 조 집사가 왔어요.”

소심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조 집사?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소식을 들은 반근도 반색을 했다.

드디어 왔구나. 왜 이렇게 늦었담. 날짜를 꼽아 보니 이틀 전에는 당도했어야 하는데.

소심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정평도 같이 왔어요.”

정평?

진안 군왕이 그 이름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활과 화살을 내던진 채 밖으로 급히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달려가고 있어!

정교랑이 예를 잊은 채 이토록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진안 군왕이었다.

놀라운 광경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교랑은 빠르게 걷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교랑의 저고리와 긴 소매, 옷자락이 새벽빛을 받으며 펄럭였다.

누구야, 대체!

진안 군왕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누군데 이래!

대청 안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이쪽으로 오던 진안 군왕이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울다니!

저 여인을 알고 지낸 사오 년 동안, 저렇게 우는 건 처음 봐. 그것도 아주 대성통곡을 하고 있어.

대체 누구기에 저 앞에서 목놓아 우는 거지?

진안 군왕은 조심스레 고개를 빼고 안쪽을 쳐다보았다.

대청의 문은 열려 있었고, 휘장 너머로 두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등을 지고 있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중 몸을 살짝 굽히고 있는 사내는 진안 군왕도 만난 적 있는 조 집사였다.

다른 사내는 입성이 남루하고 빼빼 말랐지만,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여인은 그 사내를 향해 바닥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저자구나. 대체 누구지?

“집안사람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화들짝 놀란 진안 군왕이 얼른 몸을 펴고 고개를 돌리자 경 공공이 보였다.

“수상쩍게 무슨 짓이냐.”

진안 군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지금 수상쩍게 구는 게 누군데…….

경 공공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여긴 전하의 저택이 아닙니까. 전하의 아내가 외간 사내를 만나는데,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 서서 훔쳐보시다니요.

“전하, 강주에서 온 자라고 합니다. 왕비 전하의 친정 사람이라니, 전하께서도 만나 보셔야지요.”

경 공공이 말했다. 대청 안에서는 여전히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울 수 있는 것도 행복이지.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편히 이야기 나누게 둬라. 얘기가 끝나면 자연히 날 만나러 올 테니. 난 외서재로 가겠다.”

진안 군왕이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경 공공은 대청 쪽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지만, 여인은 여전히 엎드려 울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 친정 사람을 만나서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잖아. 아직도 친정 사람 중에 저리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사람이 남아 있었단 말이야?

한편 같은 시각 대청에 앉아 있던 정평과 조귀의 표정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귀는 하인 신분이라 몸을 살짝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정평은 팔짱을 낀 채 대청을 둘러보며 막막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대청에서 울음소리가 차차 잦아들더니, 이내 몸을 일으킨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옆에서 함께 눈물을 훔치고 있던 반근도 얼른 일어났다. 반근은 정교랑을 따라 욕실로 들어가 정교랑이 씻도록 도와주었다.

조귀와 정평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례를 올릴 때도 친정 사람이 없었잖나. 손윗사람을 만나니 아씨께서 설움이 복받치셨겠지.”

조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조귀와 정평은 본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 후 외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정교랑이 직접 달려왔다. 그러더니 보자마자 대뜸 큰절을 올리고 대성통곡을 하는 게 아닌가.

놀란 정평은 그 자리에서 달아나려고 했지만, 일찍이 비슷한 광경을 목도한 바 있는 조귀가 기지를 발휘해 정평을 붙잡아 앉혔다.

손윗사람은 무슨? 당초 강주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정씨 성을 가진 손윗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때도 내 앞에서만 눈물을 쏟았잖아.

역시 이 얼굴 때문인가.

정평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게 벌써 언제 적인데, 여전히 이러네.

“항렬로 따지자면, 내 고모님뻘이 되시는데요.”

정평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조귀에게 나지막이 말하자, 조귀가 눈을 부라렸다.

“시끄럽다. 손윗사람으로 띄워 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이럴 줄 알았으면 데려오지도 않았어.”

아씨께서 혼인도 하고 가정도 이루셨으니 예전과 달리 잘 지내시는 줄 알았는데, 어찌…….

조귀는 순간 자신이 정평을 데려온 게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알 수 없어 막막해졌다.

아씨께서 정평을 남달리 대하시는 모습을 보니 잘한 일 같기도 하고, 정평을 보기만 하면 이상하게 변하시니 잘못한 일 같기도 했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세수를 하고 새롭게 단장을 마친 정교랑이 걸어왔다. 조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바로 앉았다.

대청 안은 침묵에 빠졌다.

“본디 일찌감치 출발했는데, 정평이 또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되돌아가 다시 데려오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었지요.”

조 집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내가 무슨 사고를 쳐?”

정평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그러자 조 집사도 고개를 돌리고 눈을 부라렸다.

“사람이 자네 앞에서 죽었는데, 자네가 사고를 친 게 아니면 뭐야? 수명이 다했느니 뭐니 떠들어대니까, 분통이 터져 죽었잖아!”

당초 우리 아씨 앞에서도 목숨이 없느니 어쩌니 하며 떠들어댔지. 세상에 우리 아씨 같은 분이 몇이나 된다고, 걸핏하면 헛소리를 지껄이며 사고를 쳐?

“그자가 내 앞에서 죽은 것은 그자의 수명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어찌 나 때문에 분통이 터져 죽었다고 합니까.”

정평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조 집사가 눈을 부라리며 더 호통을 치려는데,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자의 수명이 다한 것이니, 대인 때문에 분통이 터져 죽었다 해도 천명을 따른 것이겠지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평은 멈칫했다.

“아닙니다.”

정평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나 때문에 분통 터져 죽은 게 아니에요. 그자의 수명이 다한 것은 천명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자를 분통 터트려 죽게 할 순 없죠.”

“천명이 그러한데, 왜 안 된단 거죠?”

정교랑이 물었다.

왜 안 되냐고?

이건 정평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조 집사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원한도 없는데, 아무리 죽을 사람이라 해도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거 봐, 이거 봐. 정평 이놈을 아씨 앞으로 데려올 게 아니라, 그냥 정 대노야한테 맡기고 왔어야 했어. 괜히 아씨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잖아.

“그 얘기였군요.”

정평은 대답 대신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

조 집사가 멈칫하여 정평을 쳐다보았다.

“물론 안 되지요. 세상 만물에는 제각기 길(道)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 역시 타고난 자신의 길이 있고요.”

정평이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전하,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마십시오.”

경 공공이 말했다. 그러고는 진안 군왕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바짝 다가와 말을 덧붙였다.

“전하, 건강이 이제 막 좋아지셨으니, 마음을 편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어차피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괜히 책을 들었다 놨다 하며 속을 끓이면, 마음이 편하시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책을 내던지며 물었다.

“연회석 준비는 잘 됐고?”

“염려 마십시오, 전하. 다 준비됐습니다. 부인의 친정에서 모처럼 중요한 친지분이 오셨는데, 전하의 체면을 떨어뜨릴 수야 없지요.”

모처럼 마음을 쓰는 사람이 왔으니…….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다시 가로저었다.

“남이 챙겨 주는 체면 따위 신경 쓸 사람이 아니다.”

진안 군왕은 그래도 호기심이 이는 눈치였다.

“그 사람은 뭐 하는 자라더냐?”

뒷모습으로 봤을 땐 젊어 보이던데. 정교랑과 몇 살 차이 안 날 것 같았어.

“자세히 본 건 아니지만, 조 집사가 이래라저래라하기에 부인의 사환인 줄 알았지 뭡니까. 스물셋에서 넷쯤 되어 보이고 허여멀건 얼굴에 몸도 빼빼 마른 것이…….”

경 공공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그때, 어린 내시가 들어왔다.

“왕비께서 전하를 뵈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됐군. 그래도 어느 정도 법도는 아시는 분이야.

경 공공이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진안 군왕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심이 정평을 데리고 들어왔다. 조 집사는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서 절을 올렸다.

역시 곱상한 젊은이로군. 딱히 특별한 건 없어 보여. 정사낭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정사낭보다는 훨씬 명석해 보여. 딱 봐도 산전수전 다 겪고 이런저런 경험도 많이 해 본 것 같군.

“항렬로 따지자면 부인께서 제 고모님뻘입니다.”

정평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항렬로 따지자면!

항렬이면 항렬이지, 굳이 항렬로 ‘따지자면’이라고 하는 건 항렬로 따지지 않는단 말이잖아.

아, 남정 사람이라고 했지.

진안 군왕은 순간 이해가 됐다.

남정과 북정은 갈라진 지 오래라고 들었어. 그런데 정교랑이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할 사람이 남아 있었다니. 정사낭 앞에서는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건만, 남정의 먼 친척 앞에서…….

“연회석은 어디에 준비했느냐?”

진안 군왕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억누르고 물었다.

“부인께서 외원에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이 같이 가면 될 거라고 하셨고요.”

소심이 얼른 대답했다.

내가 같이 안 가도 된단 말이지? 왕비도 같이 안 가고?

진안 군왕은 다소 놀란 눈치였지만, 정교랑의 말이었기에 긴말 덧붙이지 않고 정평이 물러가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경 공공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먼 친척이었구먼. 그렇다면 전하께서 친히 연회까지 함께하실 필요는 없지. 먼 친척은 관두고 정씨 가문에서도 정 이노야나 정 대노야 정도는 와야 군왕 전하와 연회를 함께할 자격이 될 테니까.

몹시 중히 여기는 친척은 아닌가 보군.

“전하, 여기서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경 공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은 벌써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묻긴 뭘 물어. 한시라도 더 붙어 있지 못해 한인 것을.

경 공공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삐죽거리며 얼른 구슬발을 들어 올렸다.

내원으로 돌아온 진안 군왕은 반근조차 정교랑의 곁에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내가 연회에 동석할 필요가 없다는 건, 다시 말해 정평이 나와 함께 연회를 즐길 필요가 없단 뜻이기도 하지. 역시 보통 중히 여기는 게 아니었어.

“난 또 아씨께서 직접 대접하실 줄 알았지 뭐야.”

반근이 객청 안을 쳐다보며 속삭였다. 외원의 객청에는 연회석이 준비되어 있었고, 시녀들이며 내시들이 줄줄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넓디넓은 객청 안에는 정평 한 사람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 좋은 연회를 나 혼자 즐기다니.”

정평은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조 집사는 저쪽에 있어요. 감히 동석할 수 없어서요.”

소심이 미소를 짓고 직접 술을 따라 올리며 말했다. 정평은 웃으며 술잔을 받고 입을 열었다.

“나도 혼자 편히 먹고 좋지, 뭐. 그 사람은 너무 수다스러워서.”

정평이 헤헤 웃었다. 황공해하거나 우쭐해하는 기색 없이, 편안한 태도였다. 소심은 웃으며 한쪽 옆으로 물러났다.

“부인께서 왜 몸소 대접하지 않으시는 줄 알아?”

소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반근에게 묻자,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께 동석하시라고 하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그럴 용기가 없으신 거야. 부인께서 정평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거 못 봤어? 연회를 함께 즐기는 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

소심이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의 시선이 다시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울고 난 얼굴은 세수를 하고 새로이 단장을 마쳤음에도 티가 났다. 정교랑이 운 건 진안 군왕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보다는 정교랑의 정신이 딴 데 가 있다는 점이 더 의아했다.

“어릴 때부터 아는 사람이에요?”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질문을 제대로 못 들은 눈치였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다시 한번 말해 준 다음, 금세 후회했다.

그녀에 관한 일을 잘 아는 진안 군왕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바보였고 어릴 때 집을 떠나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아는 사람이라니…….

어릴 때부터 알았냐고?

정교랑이 멈칫하는 표정을 짓고는 대답했다.

“네.”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부친의 품에 안겨 사당에 있던 초상화를 봤더랬다.

“아방, 저게 바로 선조 대인이시다.”

초상화 속 선조 대인은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니라, 온화하게 생긴 노인의 모습이었다.

정교랑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한편 그 대답에 멈칫하던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저 입꼬리에 걸린 미소와 따스하게 반짝이는 눈…….

말이 안 되잖아? 어릴 때부터 알았다니!

“부인, 식사를 마쳤으니, 작별 인사를 하겠대요.”

종종걸음으로 들어온 반근이 고하자, 정교랑이 즉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잠시 기다리시라고 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반근이 얼른 네, 하고 대답하며 발을 들어 올렸다. 정교랑이 얼른 입을 헹구며 양치를 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청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진안 군왕은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젓가락을 든 채 탁자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그 여인도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니!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 때가 있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 대체 누구야!

“네가 누군지 명심해야 한다.”

문밖에서는 조 집사가 정평을 끌어당겨 당부하고 있었다.

“우리 아씨 앞에서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

정평이 조 집사의 손을 뿌리쳤다.

“난들 그 댁 아씨랑 얘기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시오?”

정평은 손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그 댁 아씨를 보니까, 아무래도 전보다…….”

거기까지 말한 정평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전보다 뭐?”

조 집사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교랑과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며 수많은 일을 서신을 통해 접한 조 집사였다. 종이에 쓰인 글은 직접 목도하며 느끼는 감상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았던 여자가 이제는 군왕비가 되었다. 유심히 살피며 이런저런 말을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낯설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조 집사 역시 아씨가 달라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평은 몸을 옆으로 틀고 손을 들며 조 집사가 가까이 못 오도록 막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조 집사가 퉤 하고 침을 뱉으며 정평의 따귀를 후려치려고 손을 높이 들었다.

“그거야 네놈이 이상하니까 그렇지!”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정교랑이 반근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왔다. 조 집사는 얼른 예를 표하면서도, 정평에게 경고의 눈빛을 날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정평과 정교랑은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무슨 일이 있어서 경성에 온 건 아닙니다만, 기왕 왔으니 하던 일을 계속할까 합니다.”

정평이 헤헤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경성은 사람이 많으니 백 문을 벌기 더 쉬울 것 같아요. 그러면 나도 책 볼 시간이 더 많이 생길 테고요.”

다시 말해 진안 군왕부에 몸을 의탁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다.

“네, 편한 대로 하셔요.”

“왕비도 편하게 해요.”

정평은 태연하게 정교랑의 예를 받았다. 그러고는 공손한 태도로 앉은 여인을 보며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요?”

정교랑이 눈을 깔고 예를 올렸다.

“이제 막 상경하셨는데, 혹시 진 상공 댁 여식이 태자비로 책봉된 일은 들으셨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평은 멈칫했다. 옆에 앉아 있던 반근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을 묻다니?

“조금 듣기는 했습니다. 이제 막 상경해서 말이죠. 태자비가 결정됐는데, 그 진 상공 댁의 여식이라고 하더군요. 어쨌거나 혼사는 좋은 일이지요. 좋은 일이에요.”

“이 일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순 없어요.”

정교랑은 정평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일의 자초지종을 쭉 들려주었다. 정평은 눈빛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조정의 비사에 대해 듣게 되니 놀랍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는 눈치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평이 감탄하며 말했다.

“누구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평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에게 쉽지 않지요, 모두에게.”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정평을 바라보았다.

“진 상공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옳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정평이 다시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경 공공이 내원에서 소개를 숙이고 말했다.

“전하, 들어 볼까요?”

이곳은 진안 군왕부였기에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대청에서 이야기하는 거라면, 굳이 자리를 피해 나눌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비밀 얘기도 아닌데 굳이 엿들을 필요 있겠느냐.”

진안 군왕은 책을 탁자로 던진 후, 냉랭한 눈으로 경 공공을 힐끔 쳐다보았다.

“네놈들은 본왕이 안중에도 없지?”

경 공공은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알면 됐다. 명심해라. 나를 대하는 그대로 왕비를 대해야 할 것이야.”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경 공공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일어나 물러갔다.

어린 내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경 공공에게 말했다.

“진 상공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진 상공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물었더니…….”

어린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 공공이 팔을 들어 막았다.

“철수해라, 어서.”

철수하라고?

잠시 멈칫하던 어린 내시가 얼른 알았다고 대답한 후 돌아섰다. 어린 내시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경 공공이 불러세웠다.

“주변을 깨끗이 치워라.”

경 공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당부하자, 어린 내시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고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자리를 뜨는 어린 내시를 보며, 경 공공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놈과 진소의 일을 논하다니. 게다가 진 상공의 행동이 옳았는지 물었다고?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데.

그런데, 진 상공의 행동에 대해 그자는 뭐라고 평가했을까?

“타인의 옳고 그름을 논해선 안 되지요. 타인의 옳고 그름을 논해선 안 됩니다.”

정평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더군다나 진 상공의 일인데, 어찌 다른 이가 가타부타 논하겠습니까.”

“네. 그럼, 대인이 진 상공이라면, 그렇게 하셨을까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평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요.”

정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번에는 정교랑이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죠? 진 상공이 그리 행동한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도를 위한 것이었어요. 신하의 도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정의롭게 움직였죠. 도를 향한 마음은 본디 그런 것이 아니던가요?”

정평은 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무릎을 구부리며 팔걸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걸 어찌 도라고 하겠습니까. 도를 위해 그리한 것도 아니고요.”

도라고 할 수 없다고? 도를 위한 것도 아니고?

“어째서 아니죠?”

정교랑이 정평을 쳐다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정교랑의 태도에 정평은 머쓱한 듯 웃음을 지었다.

“아, 그냥 해 본 말입니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대인의 생각이 곧 우리의 생각이에요.

그 사람은 태자한테 천도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 천도를 위해, 우리는 기꺼이 무슨 일이든 하고자 했고, 죽음을 불사했죠.”

우리?

지금 같은 일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 진 상공의 일이 하나고, 우리의 일은 또 다른 별개야.

정평은 ‘우리’라는 단어를 흘려보내고, 다시 웃으며 정교랑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태자는 그 사람의 도가 아닙니다. 그런 도는 천도가 아니죠. 이건 태자를 위한 일도 아니고, 그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닙니다.”

정평은 그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니라는 말을 얼버무리듯 재빨리 내뱉은 후, 말을 이었다.

“자신을 위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자신의 바람을 위해서 한 일을, 어찌 천도라 하겠습니까?”

정교랑은 초조하고 막막한 표정으로 정평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서라고요? 대인, 아니에요. 우린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교랑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니야. 우리 정씨 가문이 용감하게 나아간 게, 우리 자신을 위해서였다고?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였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고요? 그런데 어찌 그리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린 일을 하지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렸는데, 무슨 천도를 논합니까.”

정평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뭡니까?”

정평이 돌연 목청을 높이며 물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정신(精神)이 있기 때문이지요.”

정교랑이 말을 이어받자, 정평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멈칫했다.

“정신이 나에게 남을 수 있는 것은, 도가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정평의 목소리와 함께 정교랑의 목소리도 계속됐다.

“도를 붙잡고 정신을 머물게 하려면, 맑고 깨끗함을 바탕으로 모든 게 덧없음을 알아야 하지요.”

말이 끝나자 실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깨달음이 대단하십니다, 부인.”

정평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깨달음은 무슨요.

정교랑이 정평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정신이 있어야, 천도를 구하고, 천도에 순응할 일념이 생기겠지요.”

“천도요?”

정평은 다시금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뿌리 없이 태어나고, 문 없이 드나드는 게 도입니다. 들리기는 하나 또렷이 드러나지는 않고, 보이기는 하나 말로 설명할 수 없지요. 얻을 수 있으나 전할 수 없고, 쓸 수는 있으나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한다’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이미 대도(大道)라 할 수 없어요.”

“‘구한다(求)’라고요?”

정교랑이 정평을 보며 물었다.

“천도는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지요.”

정평은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탁탁 쳤다.

“명성을 위해, 권력을 위해, 이익을 위해, 욕망을 위해 구하는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정평이 헤헤 웃었다.

“무언가를 구하고자 한다면 득실이 있기 마련이에요. 당연한 이치지요. 자기 자신을 위해 구하면서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너무 떠받들 필요 또한 없지요. 자신을 과도하게 치켜세우며 도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들이대 봤자, 그건 스스로를 달래는 말일 뿐입니다.”

정교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에요.”

소리치는 정교랑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니라고요! 우리는 천도를 따랐어요. 천도에 순응했다고요. 천도는 그래야 하니까, 그래서 우린 그렇게 행한 거예요.”

반근이 놀라 일어섰다. 위로를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평이 웃음기를 거두고 느릿느릿 말했다.

“천도를 따라서 그랬다고요? 어째서요? 천도를 간파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서요? 그건 도가 아닙니다. 술수지요!”

도가 아니라, 술수다!

정평을 쳐다보는 정교랑의 귓가에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술수다! 도가 아니라고!

  • 우리 정씨 가문은 대대로 명문가였다. 그야 당연하지. 우리 정씨 가문은 천도에 순응했거든.

우리 정씨 가문은 천도에 순응했기에, 천도를 간파했기에, 도를 따라 움직였어. 그래서 명예와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명성이 드높아지고 가문이 번성한 거야.

명성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천도에 순응하고, 천도를 간파했기에 명성을 지키고 쇠락하지 않은 거야. 명성을 위해, 권력을 위해, 이익을 위해, 대대손손 번영할 정씨 가문을 위해, 새 황제를 따르기로 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

천도를 간파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어. 권모술수도 마다하지 않았지. 천도에 순응하며 천도를 밀고 나갔다고.

그런데 그게 도가 아니라, 술수였다니! 도가 아니라, 술수였다고!

아버지! 틀렸어요!

정교랑이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얼굴을 가린 채 통곡했다.

아버지! 우리가 틀렸어요!

정평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이거 봐, 또 시작이야. 더 이상해졌다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듣지 않았으나, 정평과 작별한 후 정교랑이 내실로 돌아오지 않고 연무장으로 갔다는 사실 정도는 진안 군왕도 알았다.

“또 우셨답니다. 연무장을 걷고 계시고요.”

경 공공이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안 군왕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조용히 있게 둬라.”

정교랑은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홀로 있다가, 연무장에서 곧장 서재로 향한 후 저녁상을 차릴 때까지도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

“부인께서 안 드시겠대요.”

반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했다. 진안 군왕은 밥상이 차려진 식탁과 반근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도 말려 본 적 없지?”

진안 군왕이 흥미가 생기는 듯 물었다.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반근이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아씨께서는 늘 말씀하시는 대로 하세요. 말려도 소용없어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부엌에 준비해 둬라. 언제든 먹고 싶으면 다시 차리도록.”

진안 군왕이 말했다.

깊은 밤, 진안 군왕은 눈을 비비며 손에 든 책을 훅 던져 놓고, 내실을 둘러보았다. 텅 빈 내실은 어쩐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서재로 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문발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교랑이 들어왔다.

“왜 아직 안 잤어요?”

침상 머리맡에 앉은 진안 군왕을 보고, 정교랑이 물었다.

잠긴 목소리는 아니었다. 낯빛이 다소 창백하긴 했지만, 언뜻 보면 평소와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별다르지 않다는 게 더 안 좋아. 또 자신을 숨긴단 거잖아.

진안 군왕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기다렸죠.”

진안 군왕이 웃으며 침상에 누웠다.

“얼른 씻어요.”

정교랑은 별다른 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마지막 하나 남은 등잔불마저 끄자, 실내는 어둠에 휩싸였다. 누군가가 옆자리에 눕자 진안 군왕은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배고프면 말해요. 참지 말고요.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게 제일 중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이가 몸을 뒤척이며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끌어안았어!

순간 진안 군왕은 몸이 뻣뻣해지며 머리까지 멍해졌다. 얇은 내의로 전해지는 열기와 습도에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괜찮아.”

진안 군왕이 옆에 기댄 이를 경직된 손으로 토닥여 주며 말했다. 정교랑은 품에 안긴 채 움직이지도 않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껴안고 있었다.

더운 여름인데도 가슴께의 차가운 느낌이 또렷하게 전해졌다. 진안 군왕은 손을 들어 정교랑을 가슴팍으로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괜찮아.”

진안 군왕이 계속해서 토닥여 주며 말했다. 가볍게 토닥이는 동작이 차츰 능숙해졌다. 진안 군왕은 걱정이 드는 동시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상처를 받으면 남 앞에 보이지 않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처 입은 야수처럼, 다치지 않았을 때보다 더 긴장하고 경계하며 자신의 상처를 결코 남 앞에 드러내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 홀로 치유하는 길을 택한다. 그와 그녀처럼.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상처받은 이 여인은 그를 끌어안고 그와 슬픔을 공유하려 하고 있다.

이게 다 그 정평이란 자 때문이겠지?

꽤나 마음에 드는 자로군.

어느덧 서늘함이 느껴지는 초가을 밤, 창을 통해 들어온 밤바람에 휘장이 나부꼈다.

“나도 전에 운 적 있어요.”

진안 군왕이 품에 안긴 이를 가벼이 토닥여 주며 말했다.

“누구 앞에서 울었는지 맞혀 볼래요?”

진안 군왕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그런 질문을 던지고, 또 홀로 대답했다.

“이 태의예요.”

진안 군왕은 웃음을 지었지만, 가슴팍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나 때문에 깜짝 놀랐을 거예요.”

웃고 난 진안 군왕은 또 한참을 침묵하며, 품에 안긴 이를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엉엉 울 수 있다면, 그건 일종의 행복이죠.”

품속에서 가볍게 음, 하고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진안 군왕의 귀에는 벼락이 치는 소리 같았다.

“그래요, 그래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말했다.

“우린 비참하지만, 그래도 불행한 건 아니에요. 고난 속에도 즐거움이 있죠.”

고개를 숙인 채 여인을 보고 있노라니 몽글몽글한 기분이 든 진안 군왕은 턱 끝을 대고 살짝 문질러 보다가, 또 얼른 턱을 치웠다.

품속에 안긴 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비참하네요.”

울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했어요, 틀렸다니. 그 많은 일을 했는데, 전부 틀린 거였다니요.”

“틀렸다는 걸 아는 건 좋은 일이에요. 틀렸다는 걸 영원히 모르는 사람도 있잖아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또 조심스레 턱을 밑으로 내리고, 품속에 안긴 이의 머리에 가벼이 문질렀다.

턱이 머리에 닿자 품속에 안긴 이가 움찔했다. 진안 군왕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침상 아래로 걷어차진 않았잖아.

품속에 안긴 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들은 영원히 몰랐어요.”

정교랑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 모르죠. 전부 죽었으니까요. 영원히 알 수가 없어요.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래도 당신은 알잖아요. 그래도 당신이 아니까 됐어요. 당신이 아는 거잖아요.”

그래, 난 알았어. 내가 알게 되어 다행이야. 아버지께선 그걸 물어보라고 날 보내신 거야. 이제 물어봤고, 알아냈어.

눈물을 비 오듯 쏟던 정교랑은 다시 진안 군왕의 품에 고개를 박고 그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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