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생각했지. 오늘 정 낭자와 혼례를 올렸다니. 신혼 첫날밤이면 동방화촉을 밝혀야지, 신부 혼자 독수공방하게 할 수는 없지, 하고.
그래서 난 일부러 괴롭다고, 아파서 죽을 거 같다고 말고, 이 태의와 아경이 나를 신방으로 옮겨야겠다고 통 사정한 덕에 고 선생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웠는지 그러라고 말했어.
그 뒤로는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온몸이 아팠고,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어. 나는 엄살이 심한 편도 아니고, 아픈 것도 꽤 잘 참는 편인데, 그때는 정말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아팠어. 그랬더니 내 입에 하얀 천 같은 무언가를 쑤셔 넣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네.
아니, 그런데 감히 내 입에 천을 쑤셔 넣어?
진안 군왕이 옆에 누운 정교랑을 보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용케도 그런 생각을 했네.
웃고 또 웃던 진안 군왕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놈들은 정 낭자를 계략에 빠트리고, 정 낭자의 가족을 죽였어. 그리고 태후는 정 낭자에게 액막이를 이유로 들며 나와 강제 혼사를 치르게 했지. 하지만 액막이는 그저 빌미일 뿐이었어. 실은 내가 죽으면 같이 순장시키려고, 내 죽음을 핑계로 정 낭자를 같이 죽이려고 혼사를 치르게 한 거야.
물론,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 그놈들의 바람대로 정 낭자가 나와 혼례를 올렸지만, 일은 그놈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니까.
이 또한 결국 그 어떤 것도 정 낭자를 불편하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낭자는 태후마마의 교지를 거역하고, 이번 혼사를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일은 순조롭게 풀렸고. 정 낭자를 계략에 빠트렸던 사람들은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했고, 나도 정 낭자 덕분에 살아남았어.
그럼, 이렇게 된 것이 결국엔 좋은 일인가?
하긴, 만약 그놈들이 바라던 대로 이뤄졌다면, 이 혼인 자체가 성사되지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진안 군왕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 괜히 내가 잠을 깨우는 건 아닐까.
진안 군왕이 손을 재빨리 거뒀다.
그래도, 머리카락 조금 만진다고 해서 깨지는 않겠지? 머리가 엄청 길잖아. 여기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만져도 아무 느낌 없을 테니 괜찮을 거야.
진안 군왕이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뻗었다. 정자세로 누워 정교랑을 만지기에는 불편했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정교랑이 누운 쪽으로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두 사람의 베개는 바짝 붙어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진안 군왕의 자세 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코끝을 스치던 은은한 향이 더욱 진해졌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정교랑의 옆으로 베개를 더욱 가까이 옮기고, 베개 아래로 손을 넣어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진안 군왕의 머릿속에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내일은 무얼 해야 할지, 정교랑이 이 방에서 지내기가 불편하진 않을지, 왕부 내에 조금 더 큰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건 어떨지 같은 것들을 신나게 생각하다가, 다시금 이 모든 것들이 괜히 정교랑을 번거롭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안 군왕의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지더니, 결국 눈이 감겼다. 그는 정교랑의 뒤통수에 머리를 대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까무룩 잠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깊이 잠들기도, 가장 졸리기도 할 동이 틀 무렵의 시간. 이때, 누군가가 이 태의가 묵는 거처 앞을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마당 안에서 소리 내며 울던 벌레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가 다시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귓가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금세 멈췄다. 진안 군왕은 몸을 뒤척이고 또다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의 손을 가벼이 쓰다듬다가 무언가에 걸린 듯 미끄러졌다. 순간 눈을 번쩍 뜬 진안 군왕은 정교랑과 눈이 마주쳤다. 새벽빛 속에 반짝이는 검은 두 눈이 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벌떡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정교랑이 손으로 진안 군왕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그의 몸 아래로 깔린 머리카락을 빼냈다.
“아직 새벽이에요. 좀 더 자요.”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으로 진안 군왕의 얼굴을 쓸어 보았다.
“역시 아프니까 좀 조용히 자네요.”
검고 반짝이는 두 눈이 밝게 빛났다.
또 나를 놀리고 있어!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른 진안 군왕은 손을 탁 풀고 도로 누웠다.
“혼자 자야 조용히 자죠. 시끄럽게 하지 마요.”
정교랑은 말없이 미소를 짓고는 침상에서 내려와 휘장을 내려 주었다.
밖에서 시녀가 나지막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자, 진안 군왕은 귀를 쫑긋 세웠다. 정교랑이 욕실에 들어가 간단히 몸을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바깥에 있던 시녀는 벌써 맞은편 대청 벽에서 장궁을 꺼내 들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고요해졌다.
침상 위에서 몸을 뒤척이던 진안 군왕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날이 훤히 밝았을 무렵이었다. 휘장을 들어 올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경 공공이 보였다.
“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전하께서 고단하실 거라며 더 주무시랍니다.”
경 공공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눈으로 진안 군왕의 몸을 이리저리 훑었다.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딘지 모르게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한, 아무튼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눈빛이었다.
진안 군왕은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이고, 조심하셔야죠.”
경 공공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진안 군왕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눈은 여전히 뻑뻑한 감이 있었다.
경 공공이 진안 군왕 앞으로 약차를 올렸다.
이것도 그 여인이 특별히 날 위해 우린 거겠지?
진안 군왕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았다.
“전하.”
경 공공이 바짝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이 밤새 달였사옵니다.”
거무스름한 진안 군왕의 눈가를 보자 경 공공은 마음이 아팠다.
“원기를 보하는 것이니, 어서 쭉 들이켜시지요.”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 손에 든 찻잔을 보며 물었다.
“네가 달였다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하기만 한데 무슨 원기를 보한다고.”
진안 군왕은 손에 든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난 아무거나 안 먹는다.”
이게 어떻게 아무거나란 말씀입니까.
경 공공은 초조해졌다.
“전하, 전하는 아직 춘추 미령하여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 일에 젊음만 믿고 몸 생각을 안 하며 제때 원기를 보하지 않으면 큰일 나십니다.”
도통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원.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데, 마당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부인, 큰일 났어요.”
정교랑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시녀 하나가 황급히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진안 군왕은 즉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에는 이 태의가 울상을 짓고 서 있었다.
“늙었구먼, 늙었어. 약을 달이다가도 깜박 잠이 들다니.”
이 태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린 내시들이 물통에 있는 물을 끼얹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연기마저 사그라들었다.
“부뚜막이 좀 탔을 뿐인걸요. 사람만 무사하면 됐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건 단순한 부뚜막 문제가 아닙니다.”
집사 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군왕부의 안마당이고, 바로 옆에 진안 군왕의 대청이 있었다. 오늘 부뚜막이 탔다면, 내일은 마당 전체가 탈지 모를 일이었다.
“이만한 일은, 딱히 큰일이라 할 수도 없지.”
뒤쪽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황급히 몸을 돌리고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여전히 손에 활을 들고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서 정리들 해라.”
진안 군왕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일을 덮겠다고 했으니, 정교랑도 굳이 따지려 들지 않았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따라 들어가 씻고 옷을 갈아입자, 아침상이 준비되었다.
“내 왕부는 이래요.”
진안 군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놓고 진안 군왕을 보며 귀를 기울였다.
“여기뿐 아니라 예전에도 그랬어요. 어디서나 똑같았죠. 이런저런 사람들이 곁에 섞여 있었어요.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가고 싶은 사람은 갔죠.
내 옆에는 바람이 새는 벽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무슨 색깔 내의를 입는지조차 밖에서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 알아낼 수 있어요.”
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서 있던 반근이 웃음을 터트리다 말고 얼른 입을 가렸다. 정교랑도 따라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폐하께서는 경성 밖에 있는 친왕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빠짐없이 소상히 알고 계세요. 황궁에서 자란 데다 친왕의 아들이기도 한 당신한테야 오죽하겠어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 여인과 이야기하면 늘 이렇게 가볍고 마음이 편했어.
“남 앞에 떳떳하게 공개하지 못할 일은 없으니, 드러내요. 보고 싶으면 보라죠.”
정교랑이 말했다.
보여 주고 말고는 내 일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을지는 내 소관이 아니지.
진안 군왕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어서 먹어요. 난 경왕이랑 같이 지내느라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안 그럼 경왕이 잠시도 제대로 앉아 있질 못하거든요.”
정교랑이 내려놓은 젓가락을 보며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입을 열 때부터 정교랑은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다.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작에서 그녀의 예법이 드러났다. 의식하고 행동하는 게 아닌, 자연스러우면서도 편안한 움직임이었다.
“난 앉아 있을 수 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도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반근은 웃음기를 감출 수 없는 눈으로, 머리를 맞대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밥을 먹고 나니 경 공공이 이 태의와 함께 들어왔다.
“몇이던가?”
진안 군왕은 두 사람을 힐끔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경 공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왕부의 안마당까지 들어 올 수 있으면서 이 태의 곁을 지킬 수 있는 내시라면 전부 고르고 고른 자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나씩 줄고 또 줄었기에,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매번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분노가 이는 동시에 가슴 아픈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본왕을 노렸으면서 약을 태우다니 아둔하군. 약을 더 넣었어야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의 약 때문이 아닌 듯합니다.”
이 태의가 소매 속에서 함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저건?
진안 군왕과 경 공공이 놀란 눈빛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부인, 제가 몸에 늘 지니고 다녔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았지요.”
이 태의가 말했다. 정교랑이 손을 뻗자 소심이 이 태의의 손에서 함을 받아 정교랑에게 건넸다.
“열어서 세어 봤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이 태의의 안색이 싹 변했다. 탁 소리와 함께 정교랑이 함을 열었다.
“두 개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자, 이 태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청 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넓고 환한 대청 안.
고능준은 손수건으로 감싼 가느다란 암홍색 향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햇빛에 대고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이거란 말이지?”
“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군왕을 해독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고능준의 물음에 막료가 대답했다.
“향으로 해독을 한다?”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종이 연 하나로 벼락도 불러오지 않습니까.”
하긴. 기괴한 방법을 많이도 아는 여인이니까.
“물건을 보내온 자가 경 공공의 분부로 신방의 향내를 확인하는 일에 직접 참여했다고 합니다. 향을 입수한 후 냄새를 맡아 보고는 이 향이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었고요.”
측근이 말을 덧붙였다. 냄새를 맡아 보았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코를 가져다 대던 고능준은 코 앞에서 얼른 동작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향인지 알아내라.”
고능준은 함에 향을 도로 담고, 손수건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알아내면, 약을 가감할 방법도 논의하고.”
막료가 멈칫했다.
“대인, 그 약을 계속 쓰시겠단 말씀입니까? 저쪽에서도, 대비를 할 텐데요?”
“그러니 이 향이 무엇인지 알아내라는 걸세. 상극에 맞춰 약을 가감해야지.”
막료는 고능준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상대방은 대응 방식을 바꿔 대비할 텐데,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공격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상대방의 새 대응 방식은 통하지 않을 테고, 옛 방식을 다시 쓴다 한들 상극에 맞춰 가감했으니 그 또한 통하지 않겠지.
“네.”
대답을 마친 막료는 향 두 개를 들고 물러났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고능준도 회랑 아래로 나왔다. 눈부신 햇빛 아래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서늘하기만 했다.
내가 너무 방심한 탓에 성공을 눈앞에 두고 어그러졌구나. 무언가를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그때 사환 하나가 황망한 표정으로 급히 달려왔다.
“대인, 노부인께서 또 기침이 심해지셨습니다.”
사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하자, 고능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능준의 부친은 진작 세상을 하직했다. 그때만 해도 고능준의 관직은 중요하다고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기에 집에서 마음 편히 삼년상을 치르며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모친은 늘 정정했지만, 아무리 정정하다 해도 여든 노인이었다.
좀 더 일찍도 아니고, 좀 더 늦게도 아닌, 하필 지금 같은 때에…….
말하자면 운이 안 좋았다. 월식 때 진소의 함정에 빠진 후로는 뜻대로 풀린 일이 하나도 없었다.
황제, 평왕, 귀비, 태후에게 연달아 일이 터졌고, 매번 그 규모가 커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중 한 가지 일만 겪어도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랐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재수가 너무 안 좋은데.
모친의 건강만 해도 그랬다. 본디 정정한 분이었는데, 모친의 병환을 핑계로 대며 부임지에서 경성으로 돌아온 후부터 차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래서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기가 무섭게 고능준은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운이니 예언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일을 성사시키는 것 또한 사람일 뿐. 그 어린 여인이 괴상한 짓을 많이 저지른다고 해서, 아둔한 이들처럼 덩달아 허튼 생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하면 행동에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야. 나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위축되는 부분이 생긴다면 이는 곧 큰 화로 이어질 공산이 커.
이 모든 건 사람의 계산으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계산할 수 있다. 누가 더 계산을 잘하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어느 태의를 불렀느냐?”
심호흡을 하고 난 고능준은 표정을 수습하고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고능준이 막 발을 떼던 그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아버지,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고 관인이 소리쳤다. 고능준은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아 옆에 있던 사환을 확 붙잡았다. 고 관인 역시 부친의 안색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숨을 고른 고능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고씨 저택의 서쪽에 위치한 건물 앞에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 움직임도 없이 저렇게 죽어 있었습니다.”
고 관인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안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는 사람 서너 명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엎어져 죽은 사람 주위로는 바닥에 피가 흥건했고, 천장을 보며 누워 죽은 사람은 푸르뎅뎅한 얼굴에 두 눈을 부릅뜬 채 일곱 구멍에서 피를 쏟은 상태였다.
고능준이 곁눈질로 힐끔 보며 손에 든 손수건을 내리려 할 때였다.
“대인, 안 됩니다.”
옆에 있던 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황급히 말렸다.
“벌써 반나절이나 지났는데, 일이 생길 거였으면 자네들도 지금 이 자리에 못 서 있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능준은 더 이상 손수건을 내리지 않았다.
“향 한 개를 빻았는데, 너무 잘게 빻은 탓에 한 가지 약밖에 못 알아냈습니다. 그러자 고(古) 선생이 불을 붙여 향을 맡아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야 더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다면서요.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만…….”
“독인가?”
고 관인이 코와 입을 가린 채 물었다. 이미 고능준의 서재로 돌아온 후인데도, 고 관인의 손수건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무슨 향인지 알아내고자 이리저리 살필 때, 고 관인도 구경 삼아 그 자리에 있었다. 사환이 와서 차를 다 우렸다고 하지 않았다면, 마침 새로 배합한 차가 아니었다면, 혹 냄새가 섞이진 않을까 염려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차를 그리로 가져오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고 관인 자신 또한…….
이리저리 널브러져 죽어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자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죽음을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집안 아랫것들을 아무렇게나 패 죽인 일도 많았고, 밖에서도 심기를 건드리거나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은밀히 자객을 고용해 해치운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죽음일 뿐, 고 관인 자신의 죽음과는 무관했다.
고 관인은 죽음이 자신과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것도 이토록 소리 없이 다가와 있을 줄은.
그 생각만 떠올리면 고 관인은 온몸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향내가 어렴풋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도 앞으로 바짝 다가가 가루가 된 향을 들여다봤잖아. 혹시 내 몸에도 이미 독이…….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고 관인이 갑자기 격렬한 기침을 시작했다.
“못난 놈!”
고능준은 고 관인을 향해 찻잔을 집어 던지며 썩 나가라고 했다. 고 관인 역시 그 자리에 멍하니 있기보다는 서둘러 태의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지라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잠깐. 감히 태의를 찾아갔다간,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주마.”
고능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얼어붙은 고 관인은 울상을 지으며 뒤돌아 애처로운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관인, 지금 저들은 누가 향을 가져갔는지 모릅니다. 관인께서 태의를 찾아가시면, 이는 곧 우리 소행임을…….”
막료 하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방 먹었는데 꾹 참기까지 하라고? 우는소리도 못 내고?
고 관인이 분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의라 해서 안다는 보장도 없잖습니까. 이런 약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 보시지요.”
막료가 타이르듯 말했다.
약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고씨 저택에도 있었다. 지금은 죄다 저쪽 건물에 죽어 있지만.
고능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 보거라.”
그 말이 곧 부친의 동의를 뜻함을 잘 아는 고 관인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물론 여전히 초조한 표정이었다.
약초를 잘 아는 사람을 당장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찾는다 한들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마음이 급해진 고 관인은 허둥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사환이 얼른 부축해 주었지만, 열이 받은 고 관인은 사환에게 발길질을 하며 분을 풀었다.
대청에 있는 고능준 역시 부아가 치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쉽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고의로 독을 썼다고 단언할 순 없습니다. 고 선생도 유심히 살펴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반응이 오자 고 선생은 버둥거리며 우리가 군왕에게 썼던 약을 드셨죠.”
독으로 독을 치료하는 이독치독(以毒治毒). 독이 든 향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쓴 약을 해독하는 기능이 있다면, 역으로 이 향에 중독됐을 때 우리가 쓴 약으로 해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급히 들어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 선생은 힘들 것 같습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역시 안 되는군요.”
한숨을 쉬던 막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너무 늦게 써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더 시험을…….”
시험해 보자고? 진안 군왕 쪽에 가서 향을 더 가져오라고?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가져가도록 저들이 고의로 내준 게 아니라 해도, 고의로 내준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고의로 향을 가져가게 하고, 고의로 향에 불을 붙이게 해서, 고의로 화를 자초하도록 했다는…….
고능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몇이나 죽었지?”
고능준의 물음에 막료들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다섯입니다. 상 선생까지요.”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 선생은 고능준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막료 중 하나였다. 향을 살펴보겠다고 굳이 들어갔다가…….
약초를 다루는 이들 또한 고씨 가문에서 여러 해 동안 길러 온 고수들인데 이번 일로 한꺼번에 넷이나 죽고 말았다. 네 명이 많다고 볼 순 없지만, 그중엔 나머지 고수들의 스승 격인 고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 선생은 가히 일당십의 능력을 가진 숙련가였다.
어디 그뿐인가. 진안 군왕부에 심은 밀정 셋도 이번 일로 더 이상 못쓰게 될 것이다.
고능준의 말이 맞았다. 이 향이 정말 해독용이든 아니면 진안 군왕부 사람들이 이들을 속여 고의로 넘겼든 간에 이제 고씨 가문 사람들로서는 후자라고 잡아떼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에게 음모를 간파당하고 무서운 경고까지 받은 이상,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모든 계획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은 참으로…….
“물러들 가게. 별일 아니야. 상대가 나를 알고 나 역시 상대를 아는 상태였어. 망사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있었을 뿐이지. 그렇다면 찢어져도 그만 아닌가. 호들갑 떨 것도 없네. 어차피 시간문제였으니.”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고능준을 보며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게. 다른 건 서두를 필요 없어. 하나씩 해 나가면 돼. 우선 상 선생 등의 장례부터 잘 치르고 수습해야지. 노모와 자식들이 걱정 없이 살도록 잘 챙겨 주고. 상대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고 해서 당황하여 허둥대서는 안 될 것이야.”
막료들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입단속 잘하게.”
고능준이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남의 물건을 훔쳤다가 독살당한 건 떠벌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아직 누가 훔쳤는지 모를 수도 있는데, 괜히 소란을 키웠다간 스스로 정체를 폭로하는 꼴이 아닌가.
이번 일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막료들은 다시 한번 알았다고 대답하고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대청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고능준은 팔걸이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고능준은 한참 만에 심호흡을 하고 눈을 번쩍 떴다. 탁자를 짚고 일어서려는데 손이 저린 느낌이 들었다.
고능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순간 자신의 손가락으로 향을 집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손수건을 덧대고 잡긴 했으나, 고능준 자신 또한 냄새를 맡아 보려 하지 않았던가.
얘기를 들어 보니, 향을 들고 냄새를 맡는 것까진 문제가 없으나 불을 붙이고 나면 죽는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 여인은 독하고 잔인한 수법을 쓰는 사람이었다. 갑작스레 중풍을 얻은 유 교리에게 그 여인이 무언가 약을 쓰지 않았다고 단언하긴 힘들었다.
고능준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저린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 듯싶더니, 힘을 주려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똑바로 서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고능준은 늘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고능준 자신마저 당황하여 허둥대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를 테니까.
고능준은 심호흡을 하고, 어떻게든 몸을 지탱해 일어서려 애썼다.
“대인! 대인, 큰일 났습니다!”
급히 달려오며 자신을 불러대는 사환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순간 고능준의 몸이 굳어졌다.
“진안 군왕부에서 우리가 전에 말을 키우는 데 쓰라고 보낸 사환 몇 명을 돌려보냈습니다.”
그 일이었군.
고능준은 다시 긴장을 풀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전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고능준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을 제대로 못 했으니 쫓겨온 게지. 우리 가문의 체면을 떨어뜨렸으니 마구간으로 데려가 패 죽여라.”
고능준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사환은 얼른 대답하지 않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인, 이미 맞아 죽었습니다.”
뭐가 어째?
고능준은 멈칫했다.
“벌써 패 죽였습니다. 수레로 실어와 대문 앞에 버려두고 갔어요.”
사환이 우물쭈물하며 고했다.
패 죽이고, 대문 앞에 버려뒀다고?
이런 빌어먹을 놈을 봤나! 네놈이 감히!
고능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호흡이 가빠졌다.
“대인.”
막료 하나가 급히 다가왔다. 그 역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집 대문 앞에 버려졌답니다. 그뿐 아니라…….”
막료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말을 삼켰다.
“그뿐 아니라 뭔가?”
고능준이 물었다.
“황궁으로도 보냈답니다.”
막료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황궁으로?
“내시 넷인데, 다리에서부터 허리까지 뼈 마디마디를 분질러 놨습니다. 간신히 숨만 붙은 상태로 수레에 실려 황궁으로 들여보냈는데, 마침 문을 나서던 태후마마께서 뜻하지 않게 그 광경을 목격하는 바람에 충격으로 쓰러지셨답니다.”
고능준은 몸을 떨었다.
“어찌 이런 일이!”
고능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렇게 된 내시를 어떻게 궁으로 들여보냈단 말인가! 게다가 뜻하지 않게 태후마마께서 그 광경을 목격하시다니! 이건 무슨 의미지?
“내궁의 황 공공이 죄를 시인하는 글을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습니다. 자신이 엄히 단속하지 못해 아랫것들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다면서요.”
황 공공은 내궁에서 어린 내시들의 출입을 관리하는 태감이었다.
고능준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엄히 단속하지 못한 죄를 시인하고 자결했다? 진안 군왕과 짜고 태후마마를 겁박한 일은 죽을죄에 해당하는 걸 알고 깔끔하게 선수를 친 게 아니고?
대총관 위치에 있는 태감까지 목숨을 바쳐 진안 군왕에게 충성하다니!
내시가 매질을 당해 초주검이 된 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놀라운 건 초주검이 된 내시가 태후 앞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엔 내시 몇 명이 보내졌다지만 다음번엔 무엇이 보내질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고능준은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츰 호흡이 가빠지면서 목에 무언가가 걸린 기분이 들어 기침을 하자 가래가 나왔다.
귓가에 놀라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래 좀 뱉은 걸 가지고 호들갑은!
부아가 치민 채로 시선을 돌리던 고능준은 순간 멈칫했다. 바닥의 청석판 위로 핏덩이가 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 피를 토하다니!
고능준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몸이 휘청였다.
“대인!”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은 손에 든 함을 도로 닫았다.
“정말 안타깝네요. 겨우 두 개 가져갔어요.”
정말 안타깝다고? 그런데 ‘겨우’란 말은 또 뭐지?
반근은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향 두 개를 훔쳐 간 일이 안타까운 게 아니라, 겨우 두 개밖에 안 훔쳐 가 안타깝다는 말 같잖아.
“이 태의 쪽에 두는 게 안전하지 않다면, 반근, 우리가 간수하는 게 낫겠어.”
말을 마친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근은 얼른 대답하며 조심스레 함을 챙겼다.
황제의 침궁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또 금세 잦아들었다. 문밖에 선 내시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이.
“마마, 정말이에요. 그때 태후가 어땠는지 못 보셨죠?”
안비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웃음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눈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황후가 안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본인이 직접 본 것처럼 말하네.”
안비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만 해도 훤히 보이죠, 뭐.”
거기까지 말한 안비는 또 무언가 떠오른 듯 긴장한 채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제, 마마께서 태후가 되실지도 모르겠어요.”
황후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리 쉽다던가.
평왕이 죽고, 귀비가 미치고, 황제가 병을 얻는 충격을 받으면서도 죽지 않은 태후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시들 몇 명을 보았다고 설마 그 충격에 죽을까 봐?
“태후께선 이미 깨어나셨네. 태후마마가 어떻든 본궁은 관심 없어. 본궁이 기쁜 것은, 진안 군왕의 병이 진짜로 좋아져서지.”
황후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좋아지면 좋아진 거지, 가짜로 좋아지는 것도 있나?
안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맞장구를 쳐 주었다.
“네, 맞아요. 정 낭자가 있는 한, 이제 군왕이 병을 앓는 일은 없을 거예요.”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왕의 곁에 정 낭자가 있으니, 본궁은 이제 안심이야. 마음 푹 놓고 기다려도 되겠어.”
“뭘 기다려요?”
안비가 물었다. 그러자 황후가 안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죽음을 기다려야지.”
진안 군왕의 병세가 좋아졌다는 소식은 금세 경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직접 혼례까지 올린 걸 보면, 당연히 좋아진 거지.”
“신선의 제자인 정 낭자로 병자의 액막이를 했으니, 염라대왕께서도 한 수 접어 주신 게야.”
아래층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실에 있던 이가 손을 뻗어 창문을 닫자, 바로 소리가 차단되며 조용해졌다.
“그럼 그때 태후께서 진안 군왕부에 왔을 땐 진안 군왕이 정말 죽었던 건가?”
별실 안에 있던 누군가가 물었다.
별실 안에는 네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전부 소탈한 평복 차림이었지만 말투에서 느껴지는 기품이며 행동거지로 보아 관리 신분이 분명했다.
“그렇다니까. 옷까지 갈아입히려 했다더군.”
다른 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옷이라면 당연히 수의를 말함이렷다.
“죽은 지 그리 오래됐는데도, 정 낭자가 살려냈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죽은 척한 게 틀림없네.”
“범죄 혐의를 피하고자 미친 척하는 종친이 어디 한둘이던가. 죽은 척을 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
모두가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가운데 누군가가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죽은 지 한 시진 만에 살려낸 건 놀라운 일도 아니지.”
죽은 지 한 시진 만에 살려냈는데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모두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연 사람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는 죽은 지 한나절이나 된 사람을 살려낸 일도 있거든.”
한원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나절!
다들 놀란 표정으로 한원조를 쳐다보았다.
“그럼 원조 자네가 봤다는 말인가?”
누군가의 물음에 한원조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모님 일일세. 오 년 전 내 고모님은 안장하기 직전이었는데, 정 낭자가 살려냈어.”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기에 다들 멍한 표정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편작도 죽은 지 한나절이나 된 괵국(虢國) 태자를 살려내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 세상엔 오만 가지 병이 있으니 병을 치료하는 희한한 방법 또한 셀 수 없이 많을 거야.
“괵국 태자는 시궐(尸厥: 정신이 아찔하여 갑자기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는 위급한 증상)이었고, 진안 군왕은 중독이잖나.”
“그래서 그게 뭐? 병을 치료할 수 있는데, 독인들 해독 못 할까?”
별실 안은 이런저런 논쟁으로 시끄러워졌다. 한원조는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들으며 술을 음미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이가 바짝 다가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원조 형, 그럼 정 낭자와 오 년 전부터 알고 지낸 건가?”
한원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아닐세. 그땐 아직 정 낭자를 모를 때였어.”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순간 멈칫하여 한원조의 팔을 확 붙잡았다.
“그때는 아직 모를 때였다고?”
상대는 한원조의 말을 따라 하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 말인즉, 나중엔 정 낭자를 알게 됐고?”
나중엔…….
한원조는 술잔을 손에 쥔 채로 굳어졌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알게 됐지.”
한원조가 고개를 들었다.
“정씨는 만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나?”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다급히 들어왔다. 별실에 있던 이들은 들어온 사람을 보고 환호했다.
“자네 늦었구먼. 어서 이리 앉아. 벌주 석 잔부터 마시게.”
별실로 들어온 사람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만들 마시라고. 큰일 났어. 진안 군왕이 종복 열댓 명을 장살(杖殺)하여 관리들 저택의 대문 앞에 던져 놨대.”
장살!
종복을 때려죽이면 문책을 받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열댓 명이나 때려죽이다니!
별실 안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한원조가 술잔을 든 손을 움찔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살인이라…….
“황당하군!”
진소가 찻잔을 탁자 위로 내던지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안에 있던 시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고, 회랑 아래에 있던 시녀들과 여종들도 얼른 물러났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진소는 분이 가시지 않는 듯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니 그럴 만도 하죠. 강요를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마신 건데, 그게 독주였으니…….”
거기까지 말한 진소 부인은 가엾어 못 견디겠다는 듯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 누구라 해도 견디기 힘들 거예요.”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오.
아랫것을 벌하려거든 율법을 따라야지, 멋대로 사람들을 장살하면 군왕을 해치려 했던 자들과 다를 게 뭐 있소? 국법을 무시하고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초주검이 된 내시들을 황궁으로 보내 태후마마를 놀라게 하다니! 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진안 군왕이 그리 잔악무도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늘 공손하고 예의 바른 분이었어요. 늘 친절하고 온화한 분인 걸 문무백관이 다 알죠. 어릴 때부터 귀여움을 받고 자랐잖아요. 이번 일은 분명 군왕의 뜻이 아닐 거예요.”
그 말에 진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군왕의 뜻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렇지. 진안 군왕답지 않은 행동이긴 했어. 내 앞을 막는 자에게는 죽음뿐이라며 그리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건 분명…….
또 그 여인인가?
진 노태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병풍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손을 써 진안 군왕이 중독된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있다. 이를테면 정사낭의 죽음이라든가.
진 노태야는 손을 뻗어 탁자를 쓸어 보았다.
같은 날 일어난 일이야. 사람이 죽는 건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게 하필 정 낭자의 가족이었다면…….
역시 그랬던 게로군.
진안 군왕이 중독되면서 피해를 입은 건 진안 군왕 한 사람만이 아니었어. 무고하게 연루된 정사낭도 포함해야겠지.
정사낭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어. 정 낭자가 천금을 주어서라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가족이었고.
진 노태야는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이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군.”
진 노태야는 느릿느릿 말하고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문 밖에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가 있는 걸 잊어선 안 되지.”
늦여름의 경성은 뜨거운 열기로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이번 화제의 중심은 정교랑 혼자가 아니었고, 진안 군왕이 더해졌다.
두 사람의 혼사에서 시작해 진안 군왕이 죽다 살아난 것도 모자라 정상으로 회복됐다는 소식이 다 전해지기도 전에 진안 군왕의 중독은 누군가의 음모였고, 진안 군왕이 종복 열댓 명을 죽여 대신들의 집 앞에 뿌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본왕은 누가 본왕을 해치려 했는지 모르기에, 깔끔하게 죽여 버린 것이다. 어쨌든 본왕의 시중을 제대로 들지 않았으니 죽여 마땅한 놈들이지.
소문에 의하면 진안 군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억울하게 죽는 이가 나올지언정 의심이 가는 놈은 단 한 놈도 살려 둘 수 없다며 죄다 죽이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남몰래 집에서 처리할 일인데, 시신을 남의 집 앞에 뿌려대기까지 했으니 그 잔악무도하고 오만방자한 행실에 모두가 혀를 내두를 수밖에.
노신 중 여럿은 황궁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폐하를 부르며 울부짖기까지 했다. 조당이 시끄러워지고 온 경성이 들썩이면서 태후 앞에는 불과 하루 만에 탄핵 상소가 수북이 쌓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고능준이 침상에서 내려오려 하자, 침상을 지키고 있던 제국 부인과 첩실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노야, 어서 누우세요.”
고능준은 성가시다는 듯 이들을 밀쳐 냈다.
“괜찮다.”
방 안에 있던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휘장 밖에 있던 막료들도 고능준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태후마마께서 급히 대인을 뵙자고 하십니다. 겸사겸사 진안 군왕에 관한 대책도 물으시겠다면서요. 그냥 내시들에게 말씀을 전하시지요.”
막료의 말에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게 어디 말을 전해서 될 일인가? 상대는 태후란 말이다. 귀비가 아니라!
귀비는 고집 세고 자부심 강한 성격에 머리도 좋았다. 하지만 태후는 지금껏 순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안으로는 선황의 보호와 황제의 존경을 받았고, 밖으로는 고씨 가문이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었으니, 지금과 같은 곤경에 처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누가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위로가 될 리 없었다.
“난 괜찮네. 태의도 말하지 않았던가. 열화가 치밀어 의식을 잃었으나, 피를 토했으니 별일 없을 거라고.”
제국 부인이 통곡을 했다.
“태의 말을 어떻게 믿어요. 상대는 정 낭자라고요. 십사도 지금 병석에 누웠어요!”
열이 받은 고능준은 하마터면 또 피를 토할 뻔했다.
신선의 제자로 명망을 얻은 그 여인을 두고, 조만간 큰코다칠 일이 있을 거라며 비웃곤 했다. 그래서 제재를 가하기보다는 어떻게 나오나 은근히 부추겼는데, 그 여인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명성으로 인해 큰코다칠 일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십사 그 녀석은 멀쩡하오. 태의며 의원도 다들 괜찮다는데, 그 녀석 혼자 끙끙 앓고 죽는소리를 하는 게야.”
고능준은 노기를 숨기지 않으며 호통을 쳤다.
“그놈을 당장 방에서 끌어내라. 어디 죽나 사나 내 눈으로 봐야겠다.”
고능준이 울고불고하는 여인들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마차를 준비해라. 입궐하겠다!”
소란스러운 바깥에 비에 이 모든 소란의 근원지인 진안 군왕부는 여느 때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대청 안에서 진안 군왕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회랑 아래에서 여종과 이야기를 나누던 소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보았다. 소심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왕비 전하를 맞으신 후로, 전하께서 건강만 좋아지신 게 아니라 웃음도 많이 느셨네.”
집사 부인 중 하나가 말했다.
“맞아요. 왕비 전하는 마음을 활짝 열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죠.”
소심이 눈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가? 냉랭하고 말수도 적은 데다 활 쏘고 글씨 쓰고 책 읽는 것밖에 모르는 듯한 왕비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어떻게 마음을 열게 하는지 궁금하네.
집사 부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때 경 공공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소심은 얼른 안에 대고 통보한 후, 안으로 들어가는 경 공공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또다시 진안 군왕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경 공공의 목소리도 들렸다.
“왕비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눈짓을 주고받은 집사 부인들은 소심과의 대화를 끝내고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소심이 휘장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동쪽에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 공공은 신이 난 표정으로 떠들고 있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람을 보내 예의주시했더니, 다른 집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데 고씨 저택에서만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쉬쉬하며 숨기긴 했지만 어젯밤에 매장한 시체의 수가 우리가 보낸 시체보다 몇 구 더 많답니다.
그뿐 아니라 어제와 오늘 사이에 태의를 여러 번 불렀고 밖에서도 의원을 불러 갔답니다. 말로는 노부인의 병세 때문이라는데, 듣자니 고 관인과 고 대인의 몸도 편치 않다고 하더군요.”
경 공공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고 대인과 고 관인의 효심이 참으로 지극합니다. 듣자니 노부인께서 병을 얻으시자 근심하다가 병으로 쓰러졌다는군요. 가히 미담이라 할 수 있지요.”
진맥을 마친 후 아직 나가지 않았던 이 태의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싱글벙글한 표정의 경 공공과 미소를 머금고 있는 진안 군왕에 비해, 천천히 차를 음미하는 정교랑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정교랑은 웃지 않고 있었지만, 이 태의의 눈앞엔 어렴풋이 미소가 번지던 정교랑의 그날 모습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그래. 전하께서 저들 손에 죽지 않으셨으니,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순 없지.
“이런 게 보이지 않는 손해군요.”
이 태의가 중얼거렸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늦여름 오후였지만, 마당에는 매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반근은 대청에서 조심스레 총채를 휘두르며 있지도 않은 모기와 벌레를 쫓았다. 그때 마당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경 공공과 고 선생 등이 물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문밖에 시립해 있던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휘장을 들어 올렸다.
“전하.”
반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얼른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주춤하며 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인께서는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반근의 말에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대청 안으로 들어온 걸 후회하는 듯했다.
“그럼…….”
진안 군왕이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반근은 벌써 내실의 구슬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전하도 들어가서 좀 쉬세요.”
진안 군왕은 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상 주변에는 휘장이 내려져 있지 않았다. 담청색 내의 차림의 정교랑은 안쪽을 보며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고,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다. 잠깐 쉬는 터라 머리를 완전히 풀지 않은 채 크게 하나로 묶어 뒤로 넘긴 탓에 한결 나른해 보였다.
옆에 있는 탁자 위에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한 잔은 반쯤 남았고, 한 잔은 가득 차 있는 게 진안 군왕의 눈에 들어왔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 진안 군왕이 가득 찬 잔을 들어 마시려 할 때였다. 정교랑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가 스르르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진안 군왕은 황급히 손을 뻗어 부채를 받았다.
백우(白牛)의 뿔로 만든 부채인지라 바닥에 떨어지면 소리가 날 게 분명했다. 소리가 나면 당연히 잠에서 깰 테고.
부채를 잡은 진안 군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잠시 침상 곁에 서서, 잠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깊이 잠들었는지 맑고 보드라운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옆에 앉아 부채질을 해 주었다. 곤히 잠든 여인은 이따금 콧방울을 움직이고, 머리를 뒤척이기도 했다. 기분 좋은 편안함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간드러지는 자태를 보일 때도 있다니.
진안 군왕은 흥미로운 듯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부채질하는 손동작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때 정교랑이 눈을 떴다.
“돌아왔네요.”
잠기운이 남아 있는 나른한 목소리였다.
잠에서 막 깬 여인의 두 볼은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아른아른한 눈빛은 촉촉해 보였다. 그 또한 진안 군왕이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진안 군왕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방금 들어왔어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부채질이 더욱 빨라졌다. 흡사 무언가를 쫓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안 군왕이 물었다.
“물 마실래요?”
정교랑은 베개를 베고 누운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도 한숨 자요.”
진안 군왕의 마음이 순간 움찔했다.
“좋아요.”
물을 들어 단숨에 비운 진안 군왕은 한 손으로 침상 머리맡에 있는 탁자를 짚으며 다른 한 손에 든 부채로 정교랑을 쿡쿡 찔렀다.
“안으로 들어가요.”
정교랑은 살짝 멈칫하면서도 별다른 대꾸 없이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신을 벗고 침상에 반듯이 누웠다.
푹신하고 향기로운 베개를 베고 있노라니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손에 힘을 주어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침상에 걸린 휘장이 그 부채질에 마구 펄럭였다.
“더워요? 얼음을 더 가져오라고 할게요.”
정교랑이 일어나려 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방금 봤는데 아직 남아 있었어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은 아, 하고 대꾸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로 누웠다.
“내일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돼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입궐하는 거 거절당했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옆으로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의 눈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당연히 거절당했죠. 아마 당분간은, 마마께서 날 보려고 하지 않으실 거예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앞으로는 쭉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걸요.”
부드러운 목소리, 미소를 머금은 얼굴, 향긋한 숨결, 이토록 가까운 거리…….
진안 군왕은 또다시 후끈 열기가 올라 손에 쥔 부채를 힘주어 부쳤다.
이 여인과 함께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있을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진안 군왕은 경성을 떠나 무평으로 가기 전 작별 인사를 하러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정교랑의 집에서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대청에 앉아 시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무평에 있던 동안 수시로 반복해서 떠올랐다.
집이라는 게 뭘까? 사랑하고 아껴 주는 가족들이 있는 곳이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가족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인지 경성에서 정교랑의 혼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태후가 직접 나섰다는 말까지 듣자 그는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앞으로 그 여인은 다른 이의 가족이 되겠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런 생각을 하자 진안 군왕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최대한 빨리.
부랴부랴 돌아와 정확히 뭘 할 건지는 계획조차 없었지만, 돌아와 여인의 얼굴을 보자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거기까지 생각한 진안 군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족이 되었네. 내 가족이자 내 아내, 훗날엔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될 사람…….
아이!
뭐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진안 군왕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쉭쉭 소리가 날 정도로 마구 부채질을 하자, 손 하나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그의 손은 가늘고 긴 손에 붙잡혀 있었다.
“마구 부친다고 해서 바람이 센 건 아니에요.”
정교랑이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말하자, 부드러운 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왔다. 진안 군왕은 멋쩍어하며 똑바로 누웠다.
“보기 싫으면 보지 말라죠. 고 선생은 죄를 반성하는 글을 써 올리거나 해명을 하라는데, 그런 시늉도 귀찮아요.”
진안 군왕은 아까 이야기하던 화제를 이어 말했다.
“당신이 기분 좋으면 됐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당신이 기분 좋으면 됐다고?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렇던가.
진안 군왕은 웃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기분만 좋으면 뭘 해도 다 괜찮아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그야 당연하죠.”
정교랑도 고개를 돌리며 진안 군왕을 보고 미소 지었다.
“나쁜 일을 하면, 당신 기분이 좋을 리 없잖아요.”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에 있는 작고 오뚝한 코를 보고 있노라니 손을 뻗어 쥐어 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은 입만 열면 남을 속이잖아요. 뭐라고 하든 늘 당신만 옳죠.”
손을 잡자 보드랍고 매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꼭 태평거에서 사 온 두부 같았다. 진안 군왕은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두 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부채질을 하던 정교랑의 손동작도 돌연 멈췄다. 방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눈이 마주치자, 진안 군왕의 눈이 점점 커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정교랑의 손에 들린 부채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은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방 안의 경직된 분위기를 깼다. 진안 군왕도 정신을 차리고 손을 확 풀며 뒤로 물러났다.
“조심해요.”
정교랑이 붙잡아 주려고 손을 뻗으며 일어났지만, 진안 군왕은 이미 침상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던 그 순간, 진안 군왕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정교랑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아씨!”
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반근의 눈에 들어온 건 침상 위에 꼭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비록 자세는 좀 야릇했지만.
순간 얼굴이 새빨개진 반근은 얼른 뒤돌아 밖으로 뛰어나가면서도 내실의 문을 꼭 닫는 일을 잊지 않았다. 마침 안으로 들어가려던 소심이 놀라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반근이 손을 내저으며 소심을 밖으로 몰았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들 물러가.”
반근이 새빨개진 얼굴로 말하자, 시녀들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인데 그래?”
소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근은 여전히 붉은 얼굴로 내실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하와 아씨께서…… 낮잠을 주무셔.”
반근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말뜻을 알아들은 소심도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 이런 대낮에도…….
신혼이라 그러시겠지. 이제 막 그 맛에 눈을 뜨게 된 젊은 부부이니, 아마도…….
이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집안에 웃어른이 안 계시니…….
소심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언제 기회를 봐서 황씨 부인한테 물어봐야겠다.
밖에서 몸종들이 이런저런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안에 있던 정교랑은 벌써 진안 군왕이 일어나도록 붙잡아 주고 있었다.
“침상이 너무 작네요.”
진안 군왕은 어색함을 떨치고자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엔 나도 잘 몰랐거든요.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전부 아랫것들이 고른 거예요.”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침상을 쳐다보았다.
“바꿔야겠네. 지금 당장 바꾸라고 해야겠어요.”
그러더니 그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거처를 바꾸는 게 낫겠다.”
진안 군왕은 허리를 붙잡고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이며 말을 이었다.
“원래 내가 생각했던 신방은 여기가 아니었어요. 내가 지내고 있는 저쪽이죠. 이제 입궐할 필요도 없고, 일이 이 지경이 되기도 했으니, 출타하긴 힘들 거예요. 집에서 할 일도 없는데, 짐을 옮기고 있으면 되겠네요.”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동안, 화끈거리던 진안 군왕의 얼굴도 차츰 원상태를 회복했다. 진안 군왕은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른 다음 고개를 젖혀 가며 벌컥벌컥 마시고, 정교랑에게도 한 잔 따라 주었다.
“어때요?”
진안 군왕이 물잔을 건네며 물었다. 정교랑은 중얼중얼 떠들어대는 진안 군왕의 말을 들으며 침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다가 물잔을 받았다.
“좋아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난 정교랑이 다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곧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진안 군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죠. 아마 이번엔 내쫓길 테니까.”
진안 군왕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요. 날 내쫓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이번엔 아마 떠나고 싶어도 그리 쉽진 않을 거예요.”
-적합한-
“어서 내쫓게. 아주 멀리 내쫓아 버려.”
황궁 안. 태후는 고능준을 앞에 두고 울며 하소연했다.
“그 애는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거기까지 말한 태후가 돌연 말을 멈췄다.
“아니지, 미친 게 아니야.”
태후는 불안에 떨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애는 이제 위낭이 아니야. 그 여인이 불러들인 야차가 몸에 들러붙었어.”
고능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마, 틀렸습니다. 이게 바로 진짜 위낭입니다. 예전의 그 아이는 폐하와 마마의 비위를 맞추고자 연극을 한 것뿐이었고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무거운 어조였다.
“그러니 이제 절대 경성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태후가 멈칫했다.
“왜 또 보내지 말라는 게야? 빨리 경성에서 내보내라며 재촉할 땐 언제고? 그리 말 잘 듣고 온순할 땐 쫓아 보내려 하더니, 이제 저 꼴로 변하니까 남겨 두라는 게야?”
“전에는 그나마 연극이라도 했잖습니까. 기꺼이 연극을 한다는 건 본분을 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연극도 안 하겠답니다. 다시 말해 본분을 내팽개치겠단 거죠. 본분조차 내팽개친 사람입니다. 마마, 그런 자를 풀어 주어 경성에서 멀리 떠나게 하는 건, 호랑이를 키우는 꼴입니다.”
“그, 그 애가 뭘 할 수 있는데? 모반이라도 꾀한단 말인가?”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반’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태후는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치기도 했다.
“어서 죽여 버리게. 죽여 버려.”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버리려고 경성에 남겨 두겠단 겁니다. 경성에서 내보내면 죽일 기회는 더 줄어듭니다. 그런 일을 벌여 조당을 시끄럽게 하고 유림이 원성을 쏟아내게 했으니, 경성에 남겨 두는 건 우리에 가둬 두는 꼴과 다름없지요. 죄를 묻기도 더 쉬워지고요.”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더구나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진안 군왕 그 대역무도한 놈을 처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보다 시급한 게 있다고?
“애가를 해치려 든 아이야. 황후의 양자로 들어가 태자가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태후가 초조한 듯 탁자를 치자 고능준이 웃음을 지었다.
“양자로 들어가 태자가 되기엔, 아직 그만한 수완이 없습니다. 우선 스스로 명성을 땅에 떨어뜨렸으니 양자 입적을 하더라도 진안 군왕에게로 차례가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태자가 있는 한, 그 누구를 양자로 들이더라도 명분이 서지 않지요.
그러니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태자의 국혼입니다. 서둘러 황태손을 봐야 폐하의 혈통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딴마음을 품는 이들도 그만 단념할 테고요.”
그렇지. 태자의 국혼을 깜빡했군.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조한 투로 물었다.
“그럼 태자비 자리에 적당한 인선은? 우리 집안에 적당한 여식이 있는가?”
고능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 우리 집안은 그 어느 가문보다 적절치 않습니다. 하오나 염려 마십시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 적합한 사람?
태후가 멈칫하며 물었다.
“그게 누군데?”
고능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의사를 물어보고 있는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소식이 오거든 마마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태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두르시게. 하루라도 빨리 정해져야 마음이 놓이지. 요즘은 이게 사는 건지 뭔지도 모르겠어.”
태후는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마, 염려 놓으십시오. 복과 화는 붙어 있다지 않습니까. 곧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고능준은 웃으며 태후를 위로한 후, 작별을 고하고 물러갔다.
같은 시각, 측전.
오늘은 진십팔랑이 닷새에 한 번씩 입궐해 공주들에게 글씨를 가르치는 날이었다.
“진 낭자,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나이가 가장 어린 사공주가 앳된 목소리로 묻자, 진십팔랑이 다가가 몸을 낮추고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잘 쓰셨어요, 공주님.”
진십팔랑이 웃으며 칭찬하자, 예닐곱 살쯤 된 공주는 기쁜 얼굴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붓을 들어 글씨를 더욱 열심히 따라 썼다. 진십팔랑은 한쪽 옆에 꿇어앉아 사공주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한편 나이가 좀 더 많은 이공주는 글씨 쓰기에 전념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진단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십구랑, 글씨를 정말 잘 쓰네요.”
진단랑이 미소를 지으며 이공주를 향해 예를 표했다.
“진 낭자한테 오래 배웠나 보네.”
진단랑과 동갑인 삼공주가 질 수 없다는 듯 끼어들자, 진단랑은 고개를 가로젓고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언니한테 배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 정 언니한테 더 오래 배웠죠.”
정 언니?
시선을 주고받은 두 공주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글씨를 잘 쓰는 언니가 또 있어요?”
이공주가 물었다.
“아니요, 정 낭자요. 아, 아니지, 진안 군왕비 말이에요.”
진단랑은 절로 싱글벙글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안 군왕비가 대문 앞에서 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자 이를 견학하려는 이들이 몰려든 건 아시죠?”
두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에 관한 일은 황궁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음으로 양으로 끝도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럼, 정 낭자를 스승으로 모신 거예요?”
“그때 그 광경을 직접 봤어요? 어떤 광경이었는지 빨리 얘기해 봐요.”
신분의 차가 있고 처음 만난 사이라 다소 서먹하긴 했지만, 열한두 살 남짓한 아이들은 금세 어울려 떠들기 마련이었다. 특히 공동의 화제가 있을 땐 더더욱 그랬다.
누군가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서로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모여 있던 셋은 얼른 떨어져 단정히 앉았다.
진십팔랑이 엄숙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배울 땐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단랑, 넌 공주님들과 함께 글씨 쓰라고 데려온 거야. 함께 어울려 떠들라고 데려온 게 아니라.”
진단랑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면서도 공주들과 눈웃음을 교환하는 걸 잊지 않았다. 두 공주도 고개를 숙이며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문밖에서 궁녀 하나가 웃으며 들어왔다.
“진 낭자, 태후마마께서 부르세요.”
진십팔랑은 얼른 알았다고 대답하고, 공주들에게도 예를 표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세 공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절로 답례했다.
“단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진십팔랑의 당부에 진단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녀들과 함께 나가는 진십팔랑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십구랑, 우리랑 같이 가서 놀아요.”
이공주가 말했다.
“맞아요. 정 낭자랑 같이 글씨 공부한 얘기 좀 들려줘요.”
삼공주도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지만 진단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요.”
“진 낭자는 정말 엄격하네요.”
삼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진단랑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추고 덧붙였다.
“언니가 혼인한 후로 점점 더 엄격해져요.”
뒤에서 남 이야기를 하는 데다 그 상대가 자신의 언니다 보니, 진단랑은 민망한 듯 혀를 날름거렸다. 하지만 세 공주는 그 말 덕분에 진단랑과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우리랑 같이 가서 우리 궁에서 놀아요. 진 낭자한테는 우리랑 같이 글씨 연습하러 갔었다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이공주가 말했다.
“맞아요. 지금쯤이면 새로운 다과를 가져왔을 거예요. 싱싱한 과일도 들여오고요. 십구랑, 같이 가서 먹어요.”
대공주도 거들었다.
또래가 보이는 선의에 진단랑도 마음이 흔들렸지만, 어머니와 언니의 당부가 생각났다. 진단랑은 결국 고개를 가로저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앞으로는 언니와 자주 올 거예요. 다음에 갈게요.”
이공주와 삼공주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켰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공주가 진단랑 옆으로 오더니 손을 뻗어 진단랑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찡긋거렸다.
“십구랑.”
앳된 목소리의 사공주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태후마마한테는 가지 마요. 거긴 태자가 있거든요. 엄청 무서…….”
사공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이공주와 삼공주가 동시에 사공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바람에 사공주는 말을 끝맺지 못하게 됐다.
“그럼 십구랑은 여기서 기다려요. 우린 이만 갈게요.”
이공주는 그 말만 남긴 채 진단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공주를 잡아끌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숙녕, 손 상궁이 말한 거 잊었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니까.”
“숙혜 언니가 왜 현비마마께 보내져 자란 건지 잊은 거야?”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태후의 침궁을 떠나자, 측전은 고요를 되찾았다.
“낭자, 앉아서 차 드세요.”
두 궁녀가 미소를 지으며 차와 간식을 올렸다.
“고마워요, 언니.”
진단랑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두 궁녀는 더 밝게 웃으며 곁에 꿇어앉아 진단랑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 뒤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에 쾅 하고 부딪히다시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가 가죽으로 만든 공을 손에 든 채 와아 하는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측전에 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비명을 질렀고, 진단랑 역시 얼른 두 궁녀의 뒤로 숨었다.
“겁내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궁녀들이 진단랑을 안아 주며 말했다. 그중 한 궁녀가 기둥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서 잡아라, 어서!”
“전하는 왜 나온 거야?”
전하?
‘전하’라는 말을 들은 진단랑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궁녀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제 황궁에 ‘전하’는 한 분뿐인데.
그 전하라는 분은 신체 건장하고 힘센 내시 둘에게 허리가 붙잡혀 있었다. 달리기가 워낙 빠르다 보니 우악스럽게 붙잡은 통에 태자는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에 진단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몸을 떨었다. 측전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면 안 돼요. 울면 안 됩니다.”
바보는 울음소리 또한 정상인과 달라 괴이하게 들렸다. 진단랑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태자를 내시 몇 명이 마구 잡아끌며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태자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측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데려가라니까. 못 나오게 문단속 단단히 하라고 했잖아.”
진단랑 옆에 있던 궁녀가 진단랑을 다독인 후, 짜증을 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후마마는 조용히 쉬셔야 한다니까.”
“전하가 비명 못 지르게 해.”
“그 약 안 먹였어? 왜 또 멋대로 뛰어다니는 거야?”
두 궁녀가 툴툴거렸다. 순간 태자의 울음소리가 뚝 그치더니 웁웁 하는 소리만 났다. 진단랑이 고개를 돌리자, 내시가 태자의 입에 헝겊을 마구 욱여넣은 모습이 보였다. 궁녀들의 재촉 때문인지 발버둥 치는 태자 때문에 인내심이 극에 달한 탓인지, 내시들은 거칠고 우악스러운 동작으로 태자를 뒤로 끌어냈다.
뚱뚱한 태자는 웁웁 하는 소리를 내고 발버둥 치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화가 난 건지 답답한 건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더욱 무서워 보였다.
함부로 끌려나가다가 손까지 밟히고…….
진단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바보인 사람은 통증도 못 느끼나?
두 궁녀도 앞으로 다가가 함께 거들었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데 누군가가 공을 건네주었다.
“전, 전하, 이거, 말씀하시는 거죠?”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 가까이 다가온 건지 겁먹은 표정의 진단랑이 보였다.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내시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태자가 진단랑에게 확 달려들었다. 진단랑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고개를 돌리면서도 여전히 앞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손이 확 잡아 당겨지나 싶더니, 누군가가 공을 낚아챘다. 예상한 바와는 달리 때리는 등의 행동은 전혀 없었다. 상대는 하하 웃고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진단랑은 천천히 일어나 허리를 곧게 펴고, 저쪽으로 달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공처럼 둥글둥글하면서도 뒤룩뒤룩한 사람이 전각에서 기쁘게 뛰어놀고 있었다. 손에 든 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줍고, 다시 떨어뜨렸다가 또 주우면서.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야?”
이쪽의 소란을 들은 태후가 진십팔랑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 다가왔다. 측전 문 앞에 선 태후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안을 쳐다보았다.
내시들과 궁녀들은 전부 서 있고, 놀랍게도 도통 제대로 앉아 있질 못하던 태자는 앉아 있었다. 몸을 배배 꼬고 뒤틀긴 했지만, 앉아 있는 건 분명했다.
그때 옆에서 공 하나가 굴러왔다. 전각에 괴성이 울려 퍼지더니, 바보가 손을 뻗어 공을 잡았다.
“전하, 이리 다시 주세요.”
진단랑이 태자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손짓을 하며 이쪽으로 던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맞은편에 앉은 태자가 손에 든 공을 밀어 주었다. 공이 이리저리 삐뚤빼뚤 굴러가자 진단랑이 얼른 손을 뻗어 잡았다.
“전하, 정말 대단하세요!”
진단랑이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맞은편에 있는 바보 태자도 따라서 박수를 치며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그 바람에 침은 더 많이 흘러내렸지만.
“아이고.”
태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 아니, 저게 누구네 집 아이지? 태자와 어울려 놀 수 있다니.”
낯선 사람은 관두고 궁에서 늘 함께 지내는 내시와 궁녀조차도 저렇게 태자와 함께 논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열두세 살 남짓한 어린 낭자가 바보와 함께 놀다니 놀랄 수밖에. 무서워하지도 않고.
태후 뒤에 선 진십팔랑이 눈을 살짝 내리깔고, 서글픈 눈빛을 숨기며 대답했다.
“제 동생, 십구랑이옵니다.”
탄핵을 하든 다른 벌을 내리든 진안 군왕으로서는 관심 밖이었다. 경성에 한바탕 거대한 풍랑을 일으킨 진안 군왕이지만, 진안 군왕부는 조용하기만 했다.
오늘 아침은 다소 시끄러웠지만.
“정말 옮기신대?”
반근이 소심에게 물었다.
“바로 옮기는 건 아니고.”
소심은 군왕부의 장부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칠도 새로 하고, 칸막이도 설치하고, 새 가구도 들이고 하려면 못 돼도 중추절은 돼야 할걸.”
반근은 아, 하고 대꾸한 후 옆에 있는 쟁반에 놓인 해바라기 씨를 먹기 시작했다.
“한가해 보이네?”
소심이 물었다.
“아씨는 글씨 연습 중이고, 전하는 대청에서 쉬고 계시니, 나도 자유를 즐겨야지.”
반근이 대답했다. 그러자 소심이 장부 한 권을 던져 주었다.
“할 일 없으면 이거나 대조해 줘.”
반근은 피식 웃고 장부에 손도 대지 않은 채 해바라기 씨만 깠다.
“자유를 즐기겠다고 했잖아. 난 언니랑 달리 이런 일 못 해.”
두 사람이 한창 웃고 떠드는데, 어린 몸종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부인께서 전하를 급히 찾으세요.”
반근과 소심이 놀라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있는 어린 몸종들은 벌써 우왕좌왕하며 군왕을 찾으러 뛰어다니고 있었다.
“전하께선 잠깐 누워 있다 나가셨어.”
“같이 간 사람이 있긴 해. 어디 가시는지는 안 여쭤봤고.”
나지막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무슨 일이야?”
소심이 시녀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씨께서 글씨 연습을 마치고 나오셨는데, 전하가 안 보이자 찾으셨어요.”
붙잡힌 시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심과 반근이 멈칫하며 회랑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회랑에 선 정교랑이 문밖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매불망…….
소심의 뇌리에 불현듯 ‘오매불망’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무슨 일이냐?”
소식을 들은 진안 군왕이 원래 지내던 처소 쪽에서 급히 달려오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왕비께서 전하를 찾는다고만 하셨어요.”
시녀가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방금 찾은 나무 조각을 품에 넣어 고이 간직한 후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오래 기다린 듯한 모습에 진안 군왕은 걸음을 재촉했다.
“무슨 일이에요?”
진안 군왕의 목소리엔 본인도 미처 감지하지 못한 긴장이 묻어났다.
“어디 갔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저쪽 대청에 갔었어요. 정리가 잘 되고 있나 보려고.”
진안 군왕의 대답에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어디 갔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진안 군왕뿐 아니라 마당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멈칫했다. 정교랑은 벌써 뒤돌아 대청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뭐야! 하루를 못 봤는데도 삼 년이나 떨어진 것 같다더니, 한시만 눈에 안 보여도 저리 당황하나?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리고, 직전의 긴장을 훌훌 털어 버린 채 가벼운 걸음으로 층계를 올랐다.
경 공공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나는 중요한 일을 논할 때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다가 빨리 말하라고 다그친 후 내쫓아 버리질 않나, 다른 하나는 잠시만 눈에 안 보여도 큰일 난 것처럼 굴지 않나,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다.
“됐다. 그만 일들 보거라.”
경 공공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고 손을 휘휘 내젓자, 시녀가 얼른 자리에서 물러났다.
“잠이 안 와서 저쪽에 가 봤어요. 당신은 글씨를 쓰고 있으니까 방해 안 하려고 했죠.”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해도, 몸종들에게 언질 한마디는 해 줄 수 있었다. 다만 그 나무 조각을 찾으러 간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슬쩍 간 것이었다.
“갑자기 가 보고 싶어서요. 다음부턴 꼭 말할게요.”
규모가 큰 왕부가 아니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물어보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진안 군왕은 끊임없이 해명을 늘어놓았다.
어쩌면 아씨는 정말 군왕을 찾으려던 게 아닐지 몰라. 아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별 뜻 없이, 그냥 어디 갔는지 물어보신 것일지도.
다만, 아씨의 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니, 듣는 사람의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왕비께서 군왕 전하에 대해 물으셨어. 왕비께서 군왕 전하를 찾으시는 거야.
군왕 전하는 어디 계시지? 어서 전하를 찾아봐. 왕비께서 지금 당장 군왕 전하를 만나시겠대.
반근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그래요. 그래야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을 빨리 찾을 수 있잖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날 걱정하고 있었네.
순간 진안 군왕은 마음이 따스해졌다.
생각해 보니 처음 만난 후로, 이 여인은 늘 자신을 걱정하며 도와주었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것도 다 이 여인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난 이 여인 앞에서 늘 위험에 처하고 궁지에 빠진 모습만 보여 줬네. 기뻐할 만한 일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아.
이런 날 싫어하지 않기도 쉽지 않을 텐데.
“난 참 쓸모없는 놈이에요.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안 놓이게 하다니.”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아주 쓸모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더 조심해야죠. 쓸모없는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당신을 해치려 애쓰지도 않을 거예요.”
사람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공을 들이는 법이다. 그게 잘해 주는 것이든 해치려 하는 것이든 간에. 누군가를 해치고자 한다면, 사랑할 때보다 배로 공을 들여야 하지 않던가.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도 칭찬할 줄을 아네요.”
아씨께서도 칭찬할 줄 아신다고?
반근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돌려 소심을 쳐다보았다. 소심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 웃음을 보였다.
“정방, 이리 와요.”
진안 군왕이 동쪽 곁채 쪽으로 걸어가며 손짓하자, 정교랑이 따라갔다. 소심은 반근을 향해 눈짓하고, 함께 물러났다.
“방금 보니까 내가 지금 지내는 건물도 별로 안 좋은 거 같아요. 그냥 새로 짓는 게 낫겠어요. 이쪽에 가림벽을 치면 어떨까요?”
진안 군왕은 벌써 탁자 앞에 앉아 붓을 들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교랑은 옆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며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밝은 햇살 아래 젊은 남녀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리따운 여인과 준수한 사내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소심의 입가에 번진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아씨께서 사람 마음을 저렇게 잘 달래시는지 미처 몰랐네.”
소심이 소곤거리자, 반근이 소심을 힐끔 보며 혀를 찼다.
“아씨는 원래 그 누구보다 배려심 많은 분이야.”
배려심이 많아서, 무언가를 설득하거나 강권하지 않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따지거나 해명하지 않으시지.
그런 종류의 배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아씨께서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아씨의 좋은 점을 느낄 수 있지.”
소심이 웃으며 반근의 코를 톡 쳐 주었다.
반근과 소심이 휘장을 들고 문밖의 회랑 아래로 나왔다. 안에서는 진안 군왕의 낭랑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정교랑이 짤막하게 대답하는 소리도 이따금 들려왔다. 그래도 진안 군왕은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같은 시각 진 노태야의 방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할아버지, 이것도요. 그리고 이것도 태후마마께서 상으로 주셨어요.”
진단랑이 홍마노를 내려놓고 다른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싱싱한 과일이며 간식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공주님들의 말씀으로는 새로 진상한 거래요. 저더러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셨는데, 어머니 말씀이 기억났어요. 예의 바르게 초청한다고 해서 무조건 가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참, 태후마마께서 이것도 상으로 주셨어요.”
진단랑의 맑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여기 수정병도 있어요.”
진 노태야는 진단랑의 말을 흐뭇한 표정으로 들었다. 이따금 맞장구를 치며 칭찬도 해 주고, 태후마마께 감사 인사는 올렸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감사 인사도 올렸죠. 큰절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렸어요.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며 언니도 칭찬해 줬는걸요.”
진단랑이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단랑이 그리 열심히 배웠으니, 실수할 리가 있나.”
진 노태야도 칭찬을 해 주자 진단랑은 헤헤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있던 시녀가 꿇어앉으며 물었다.
“아씨, 이것들을 정리할까요?”
진단랑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단랑이 돌연 손을 뻗어 붙잡았다.
“조부님.”
진단랑은 고개를 들어 진 노태야를 보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네 물건이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진 노태야는 진단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번에 알겠다는 듯 자애롭게 웃어 주었다. 진단랑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간식과 과일이 든 함을 가리켰다.
“그럼 이것들은 정 언니한테 보낼래요. 정 언니는 간식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먹는 것도 좋아할 거예요.”
그러던 진단랑이 돌연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은 익살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쩐지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다.
“언니한테 들었는데, 군왕께서 태후마마의 심기를 건드렸다면서요. 태후께서 군왕 부부는 입궐도 하지 말라고 하셨대요.”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 언니 쪽에선 그런 거 신경도 안 쓸 게다.”
옆에 있던 노복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무리 집 안이라 해도 아이 앞에서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입에 올리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주고 싶으면 갖다 주려무나.”
잠시 후 진 노태야가 말했다.
기뻐하며 시녀에게 어서 포장하라고 명하던 진단랑은 또다시 손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조부님, 이래도 괜찮을까요? 태후마마의 물건을 정 언니한테 줬다고, 언니가 기뻐하지 않으면요?”
진 노태야가 진단랑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께서 네게 상으로 주셨으니, 이젠 네 것이지 않느냐. 네 물건을 정 언니한테 주는 거야. 대답해 봐라. 정 언니가 기뻐하겠느냐, 기뻐하지 않겠느냐?”
진단랑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기뻐하죠!”
진단랑이 시녀의 손에서 빼앗으려던 함을 얼른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정교랑에게 줄 선물을 진지하게 골랐다.
“이게 좋겠다. 이것도 좋고…….”
진 노태야는 그런 진단랑의 모습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 다음, 노복을 시켜 진단랑이 심사숙고 끝에 고른 선물을 진단랑의 시녀와 함께 가서 직접 전하도록 했다.
노복이 자리를 떴는데도 진단랑은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언니는 저한테 어떤 맛있는 걸 줄지 모르겠네요.”
진 노태야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일부러 놀리듯 말했다.
“이제 보니 언니의 답례가 탐났던 게로구나.”
“그야 당연하죠. 제가 정 언니한테 잘해 주면, 정 언니도 저한테 잘해 주는걸요.”
진단랑이 헤헤 웃으며 대답하자 진 노태야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진단랑이 또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궁-
“할아버지, 정 언니가 전에는 정말 가엾었겠죠? 바보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바보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존귀한 신분의 태자인데도 내시들과 궁녀들이 무시하고 깔봤어. 발로 밟기까지 하고. 어쨌든 바보는 통증도, 수치도 못 느끼고, 말할 줄도 모르니까.
하물며 정 언니는 그때 아무 신분도 아니었던 데다 가족들한테 버림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가엾은 나날을 보내 왔을지.
누군가의 손이 진단랑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진 노태야의 놀란 표정이 보였다.
“단랑, 오늘 태자 전하도 뵌 게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단랑이 입궁했었니?”
정교랑이 앞에 있는 진씨 가문의 시녀를 보고 물었다.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시녀가 예를 표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십팔랑 아씨가 궁에서 공주님들께 글씨를 가르치는데, 태후마마께서 사람이 너무 적다며 글동무를 찾아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십팔랑 아씨께서 십구랑 아씨를 데려가셨고요.”
공주나 황자의 글동무가 되는 건 좋은 일이었다.
“태후마마께서 십구랑 아씨를 보고는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상도 많이 주셨고요. 십구랑 아씨께서 특별히 골라 이리로 보내신 거예요.”
시녀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놓인 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근, 내 대청에 있는 장궁을 가져와.”
반근은 멈칫했고, 안에서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보고 있던 진안 군왕도 멈칫했다.
장궁?
진안 군왕은 반근이 들어와 벽에서 장궁을 꺼내 객청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건 내가 단랑에게 주는 거야.”
앞에 놓인 장궁을 보고 진씨 가문의 시녀도 순간 어리둥절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반근이 눈치를 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예를 표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당황하며 장궁을 들고 물러갔다.
진안 군왕은 마당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 시녀의 모습을 창문으로 확인하고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반나절 내내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책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다 되도록 정교랑이 들어오지 않자, 결국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교랑은 여전히 객청에 앉아 있었다. 팔걸이 의자에 기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진안 군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객청으로 나갔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어요.”
진안 군왕이 월동문(月洞門: 보름달 모양으로 둥글게 구멍을 낸 문)에 기대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보통 영웅에겐 보검을, 미인에겐 연지분을 주잖아요. 진씨 가문의 어린 낭자한테 왜 장궁을 줄 생각을 한 거예요?”
“왜냐면…….”
정교랑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더니, 침묵에 잠겼다. 묻는 말엔 늘 바로바로 대답하던 정교랑이었다. 이렇게 중간에 말을 그만두는 일은 처음이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로 다가왔다. 정교랑은 표정도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였다. 착잡한 것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런 복잡한 표정이 정교랑의 얼굴에 드러나는 건 드물고 기이한 일이었다.
“정방, 왜 그래요?”
진안 군왕이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어쩐지, 조금…… 익숙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익숙해서?
진안 군왕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익숙하다니 뭐가요?”
익숙하다니 뭐가?
“양국공 댁에서 즐겁게 놀았느냐?”
“즐거웠어요. 아버지, 양국공께서 선물도 많이 주셨어요. 이것 좀 보세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사내는 해맑게 웃는 여자아이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활을 꺼냈다.
“이 아비도 아방에게 줄 게 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안쪽을 바라보았다. 벽은 텅 비어 있었다.
“아방, 이제부터는 활쏘기를 열심히 익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어째서요? 아버지께서 계시잖아요. 아버지가 절 지켜 주시면 되죠.”
“언젠가는, 아비한테 그럴 겨를이 없을지도 몰라.”
“아방!”
누군가가 목청 높여 소리치며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려 했다. 그런데 누가 한발 먼저 그녀의 가슴을 쓸어 주었다.
“왜 그래요? 여기가 안 좋아요?”
진안 군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얇은 옷을 입는 여름날, 보드라운 가슴께에 손이 닿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진안 군왕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왜 이렇게 차가워요!”
진안 군왕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밖에 있던 반근도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이 태의를 불러라.”
진안 군왕이 반근을 향해 소리쳤다.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반근이 얼른 뒤돌아 나가려 했다.
“필요 없어.”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근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부축하며 초조한 목소리로 불렀다.
“날 아방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말을 끊으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난 괜찮아요. 여긴, 언제나 늘 차가웠어요.”
언제나 늘 차가웠다고?
말이 안 되잖아. 사람의 명치께가 어떻게 차가울 수가 있지?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멀쩡하다가, 갑자기 왜 그래요?”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디가 멀쩡해요? 언제나 늘 안 좋았어요. 지금은 더 안 좋고요.”
“장궁을 줬다고?”
시녀가 내민 장궁을 보며 진 노태야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정 언니가 나한테 주는 거야?”
진단랑은 도리어 기쁜 표정이었다. 막상 활을 보자 다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긴 했지만.
세워 놓으면 진단랑의 키만 한 활이었다.
“정 언니가 나더러 활쏘기 연습하라는 건가?”
진단랑은 다시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어 진 노태야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활쏘기 할래요. 저도 정 언니처럼 훌륭한 궁술을 익힐 거예요.”
진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언니처럼 하거라, 언니처럼.”
진 노태야의 시선은 장궁을 향해 있었다.
평소의 그 여인이라면 답례로 먹을 걸 주었을 텐데, 왜 갑자기 장궁을 보냈을까? 정말 단랑이 활쏘기를 익히게 하려고?
그런데 왜 갑자기 단랑한테 활쏘기를 익히라는 거지? 보아하니 평소에도 자주 쓰던 활 같은데…….
진 노태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한쪽 옆에 있는 병풍을 쳐다보았다.
이 활은 사람의 목숨을 취해 본 적 있을까? 이 병풍에 있는 죽음 가운데 이 활 아래 목숨을 잃은 혼령도 있으려나?
반근은 정교랑이 일어나 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그 자리에 한쪽만 무릎을 꿇은 채로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정교랑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뜬 게 뜻밖이었는지, 손도 여전히 앞으로 뻗은 상태라 다소 어색한 자세였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 머뭇거렸다.
“전하, 저희 아씨는…… 아씨의 말씀에 다른 뜻은 없어요.”
반근이 앞으로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반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도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 태의의 진맥이 필요 없으면, 약차라도 마시는 게 어때요?”
진안 군왕은 반근의 말을 전혀 못 들은 듯 정교랑에게 물었다. 반근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내실로 들어간 두 사람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살짝 안도가 되면서도 눈썹이 찌푸려졌다.
문밖에서 안의 동정을 들은 시녀에게 말을 전해 들은 소심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소심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반근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하기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고, 아무 일 없었다고 하기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 전하께서 약차를 달여 오라고 하셨어.”
반근이 소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전하께서 시키셨다고? 아씨가 아니라?
소심은 놀란 눈으로 반근을 쳐다보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반근의 표정에 얼른 따라 나왔다.
“그게 다야?”
반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소심은 더욱 놀란 눈치였다.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싸운 거라고 봐야 하나?”
반근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도 싸운 건가?
“그건 아니지. 아씨께서 그러셨잖아. 전하께서 아방이라고 부르는 게 싫으시다고. 전에도 말씀하신 적 있고.”
소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는 반근을 토닥여 주었다.
“괜한 생각 마. 아씨께서 어떤 분인지 아직도 몰라? 아씨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야.”
반근은 다소 안도가 되는 듯 고개를 돌려 안쪽을 바라보았다.
부디, 군왕 전하께서도 괜한 생각을 안 하셔야 할 텐데.
방 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지만, 분위기는 다소 달랐다. 진안 군왕이 침상에 앉은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난…….”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말을 제대로 끝내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다가가 자리에 베개를 놓아 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누워요.”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힐끔 본 후 자리에 누웠다.
“난 내가…….”
정교랑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진안 군왕이 먼저 말했다.
“정방, 난, 당신을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침상 근처에 앉은 진안 군왕이 미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혼인도 했는데,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건, 좀 결례 같아서요.”
그렇다면 아명인 교랑도 있는데.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부채를 들며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이름으로 당신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고 난 진안 군왕은 부채를 들고 똑바로 앉아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기억해 둘게요.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을 마치고 난 진안 군왕은 정교랑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그런 진안 군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그냥 호칭일 뿐이에요.”
호칭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호칭하는 사람이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양산이 아니야. 공연한 트집을 잡아 억지를 부려서는 안 돼.
“나도 앞으론 안 그럴게요. 당신 좋을 대로 불러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웃어 주었다. 진안 군왕의 눈 속에 놀라움이 스쳤다. 아니, 놀라움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앞으론 안 그럴게요.
이거 사과 맞지? 이 여인이 사과도 할 줄 아네?
무조건 하자는 대로 하진 않아도 되네. 조용히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그냥 가 버렸다면, 이 일은 이대로 지나갔겠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을 테고, 이런 말도 안 했을 거야.
웃음꽃이 활짝 핀 진안 군왕의 부채질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옳지 않아요.”
진안 군왕은 손으로 정교랑을 살짝 밀며 편안히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요. 나 좀 앉게.”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정교랑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누구도 감히 이 여인을 이렇게 귀찮게 할 수는 없단 생각을 하니, 진안 군왕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이 여인의 성격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리라.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체하고,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속해서 부채질을 해 주었다.
“어떻게 나 좋을 대로 하라고 해요? 내가 나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그런 것도 같네.”
진안 군왕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아니라면 때려죽인 사람을 남의 집 문 앞에 던져두진 않았겠지. 태후가 놀라도록 고의로 겁주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니 내가 좋으면, 남이사 좋아하든 말든 신경 안 쓴다고 하지.
“내가 나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고, 당신은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에요?”
진안 군왕이 말을 바꾸어 물었다. 멈칫하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던 정교랑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뚝뚝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걷히고, 커다랗고 검은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가 누군가로 인해 웃음을 터트리는 일은 드물었다. 이렇듯 그녀를 웃게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정방, 기분 상해 있지 마요. 당신 기분 나빠 하면, 난 좀 겁이 나요.”
정교랑의 몸이 살짝 경직되면서 얼굴에 있던 웃음도 굳어졌다가, 곧 원상태로 회복됐다. 사내의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기분 나쁜 거 아니에요. 난 다만…….”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이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것 또한 그녀에게는 전에 없던 일이었다.
진안 군왕은 부채를 내려놓고, 나머지 한 손을 마저 뻗어 두 손으로 정교랑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다만 뭐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동작은 다소 기이했지만, 그의 질문은 진지했다.
“난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다…….
그녀의 삶이 자신보다 더 비참했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불평이나 원망이라 할 수도 없는 간단한 말 한마디에, 진안 군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동시에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릴 적 육가아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앳된 목소리로 형님이라고 불러 주었던 때 받았던 느낌이었다.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
진안 군왕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긴 눈썹, 반짝이는 눈, 작고 오뚝한 코를 바라보던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기울여 앞으로 다가갔다. 어린 육가아를 껴안아 주었을 때처럼, 입을 맞춰 주고 싶었다.
촉촉한 입술을 볼에 갖다 대면서 부드러운 피부와 탄탄한 피부가 서로 맞닿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순간 몸이 경직됐다.
이, 이, 이건, 육가아한테 뽀뽀해 주던 느낌과 달라.
온몸에 기름을 끼얹은 후 불을 붙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르르 불타오르듯 들끓는 피가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제대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문득 그녀를 처음 껴안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깊은 밤이면 절로 그 순간이 기억나 밤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았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은 선 채로 그녀를 껴안을 때와는 또 달랐다. 몸 아래 눌린 몸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진안 군왕의 목구멍에서는 꿀꺽하는 소리가 났고, 입에서는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났다. 손을 뻗어 몸 아래 깔린 허리를 끌어안자, 볼에 갖다 댔던 입술이 그대로 미끄러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창 아래 쪼그려 앉아 있던 반근과 소심 또한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뒤로 넘어갔다. 둘은 허둥지둥 일어나 도망치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지만, 반근과 소심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나무 아래로 도망친 둘이 눈을 마주쳤다. 둘 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두 분은 부부잖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반근은 뭐라 맞장구를 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새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이런 일에 나 끌어들이지 마.”
소심이 반근을 째려보며 말했다. 반근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소심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막 웃고 있는데, 마당 문 밖에서 경 공공이 허둥지둥 들어오며 소리쳤다.
“전하, 전하.”
반근과 소심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뻗어 막았다.
“중요한 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경 공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하와 부인께서는…… 바쁘세요.”
반근이 새빨개진 얼굴로 대꾸했다.
두 분이 바쁠 일이 뭐가 있다고!
경 공공이 발을 굴렀다.
“성가시게 굴지 마라. 정말 중요한 일이야.”
경 공공이 앞을 막아서는 반근을 밀치며 말했다. 어릴 때 입궁하여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무공까지 잃은 건 아니었기에 여자 둘의 힘으로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경 공공은 둘을 가볍게 제치고 층계를 올랐다.
소심과 반근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다행히 경 공공은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서 예를 표했다.
“전하, 전하.”
전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낭패인 모습으로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얼른 몸을 일으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내실을 빠져나온 진안 군왕은 금세 후회가 됐다.
얼굴이 어떤지 모르겠네. 옷매무새는 가지런한가? 욕실에 들어가 정리를 좀 하고 나오는 게 낫겠어.
경 공공은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 잘도 떠드는 사람이잖아. 에라, 모르겠다. 물어보면 호통을 쳐 입을 막아 버리지 뭐. 내 집에서 내 옷이 좀 흐트러진 게 무슨 대수라고…….
진안 군왕이 이런저런 생각에 정신이 없던 그때, 경 공공이 휘장 너머에서 힐끔 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에 진안 군왕은 욕실로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하.”
경 공공은 평소와 달리 진안 군왕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큰일 났습니다.”
같은 시각, 귀가한 진소는 찻잔을 탁자 위로 내동댕이치며 불쾌함을 토로했다.
“안 좋을 게 뭐 있냐고?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시오?”
진소 부인이 억울한 듯 따졌다.
“글동무를 하러 입궐하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노야께서 싫으시다니, 십팔랑한테 십구랑을 데려가지 말라고 할게요.”
진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글동무를 하러 입궐하는 건 나쁠 게 없지. 내 말은, 지금은 시기가 안 좋다는 뜻이오.”
진소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태후마마께서 태자비를 고르고 계시오. 단랑의 나이라면 피하는 게 좋아.”
무슨 말인지 퍼뜩 깨달은 진소 부인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걱정하셨군요, 노야.”
진소 부인은 다시 차를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태후께서 단랑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해도, 우리 쪽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태후께 그런 마음이 있다면, 자연히 노야한테 물으시겠죠. 노야가 어디 태후의 말에 감히 반박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던가요?”
태후는 관두고 황제의 말에 반박하고 나선 것도 한두 번이 아닌 진소였다. 진소는 찻잔을 받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만 만에 하나…….”
진소가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시녀가 급히 들어왔다.
“노야, 노태야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며 부르세요.”
진소가 말을 멈추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옷 갈아입고 가려던 참이다.”
진소가 말했다. 진소 부인이 태후가 단랑에게 상을 하사한 일을 말하면서 잠시 시간이 지체된 터였다.
진소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집사가 급히 달려왔다.
“노야, 궁에서 조서가 내려왔습니다.”
진씨 저택에서 황궁의 조서를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허둥댈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서가 내려오다니?
보통의 경우 조서를 내리는 건 형식적인 일에 불과했다. 조서를 내리고 그 조서를 받는 건 전부 사전에 어느 정도 소통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었다.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연통도 없이 무슨 일로 갑자기 조서를 내리지?
“큰일이라니?”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경 공공은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후께서 태자비를 정하여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누구더냐?”
진안 군왕이 긴장하며 물었다. 그때 누군가가 진안 군왕보다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의 목소리였다. 어느샌가 정교랑이 나와 있었다. 진안 군왕은 하던 말도 잊은 채 몸을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태후가 태자비를 정하면서,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이 경 공공을 보며 재차 물었다.
부군의 말을 끊기까지 하고…… 너무 무례하시네.
경 공공은 못마땅한 듯 속으로 투덜대며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태후마마께서 진소 상공 가문의 십구랑 낭자를 태자비로 간택했다며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의 질문에 관한 내용에 더 힘을 실어 대답했다.
진소 상공 가문!
진안 군왕은 놀란 표정이었고, 정교랑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이 천천히 되뇌었다.
대청에 선 진 노태야가 손을 놓자, 손에 들려 있던 장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다랗고 무거운 활이 지면에 닿으면서 육중한 소리를 냈다. 안팎에 있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진 노태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서라…….”
진 노태야가 중얼거렸다.
“진 상공 댁 십구랑 낭자가 틀림없습니다.”
반근과 소심은 문밖에 서서, 대청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홍조를 띠고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진 상태였다.
진단랑이! 태자비가 된다고!
태자비가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경사였으나, 지금의 태자는 바보이니……. 바보에게 시집가는 건 결코 경사라 할 수 없었다.
어쩌다 진단랑이?
“단랑이 오늘 황궁에 갔었지?”
“네. 오전에 갔었습니다.”
경 공공이 정교랑의 물음에 대답했다.
정교랑은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휘장 너머로 마당을 물들인 노을빛이 보였다.
“하룻밤도 안 지났는데, 참 빠르네.”
정교랑이 말했다.
“당연히 서둘러야지. 이런 일은 지체하면 안 되거든. 시간을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
같은 시각 고능준은 회랑 아래에 서서,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첩실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오늘 처한 상황은 달랐으리라.
“진소 부자의 기민함이라면 분명 진 낭자의 입궁이 석연치 않음을 눈치챌 거야. 태자와 놀아 준 덕에 태후께서 상을 내리신 걸 알면, 분명 대책을 세우겠지.”
그래서 지금이어야 해. 저들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선수를 쳐서 기선 제압을 하면 저들은 수동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거든.
진소도 이런 맛을 느껴 봐야지. 월식 사건 이후로, 내가 화를 아주 오래 참았단 말이다. 속 좁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맛이지.
“조서는 진작 작성해 놨었습니다. 오늘을 기다렸지요. 이렇게 빨리 쓸모가 생길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막료 하나가 웃으며 말하자 고능준도 웃음을 터트렸다.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고능준이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진씨 가문의 십팔랑이 아주 과단성 있더군.”
“무엇보다 태후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시잖습니까.”
막료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단순히 태후께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고능준이 손을 휘휘 젓자, 한쪽 옆에 있던 시녀가 얼른 부축하여 의자에 앉게 해 주었다.
“진소가 어떤 자던가.”
늦여름 저녁 무렵의 마당엔 바람이 머물고 있었다. 고능준은 한숨을 토하고 홀가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치는 이해관계를 따져야지, 어찌 좋고 싫음으로 결정한단 말인가. 마음에 드는 일이 여러 개라 한들 전부 다 할 수는 있고? 당초 폐하도 그자의 질책과 반박으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해 못마땅해하셨던 게 한두 번이 아니야. 그렇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그자 또한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밖에.
나라와 정치에 얼마나 이로운 일인지 봐야지.
진 상공은 충신이야. 나는 그자와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 점은 부인하지 않아.”
막료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고능준을 치켜세웠다.
“대인은 포용력이 뛰어나십니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진 대인으로서는 꽤 뜻밖일 겁니다.”
어디 뜻밖 정도겠는가. 놀라고 분노하다 못해, 필경 반대하고 나서겠지.
“세상사가 어디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던가.”
고능준은 미소를 지은 채 다리를 흔들며 흡족한 속마음을 표현했다.
“딸자식도 이치를 깨닫고 결단을 내렸으니, 아비도 응당 그리하겠지.”
“어쩌다 단랑 아씨께서?”
반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심은 반근과 별다를 게 없는 표정으로 반근을 향해 쉿 하는 동작을 하고는 계속해서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근자에, 태후께서 여러 가문의 부인들을 그 여식과 함께 궁으로 부르셨습니다.”
경 공공이 말했다.
태자를 책봉하면서 국혼에 관한 일도 자연스레 궤도에 올랐다. 태후의 부름을 받은 부인들이 무슨 일로 궁에 드나드는지는 모두가 훤히 아는 일이었다.
다만 부인들 중 대다수는 권세 있는 황족일 뿐, 조정 중신의 부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진소 가문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런데 뜻밖에도 진소 부인은 입궁하지 않은 상황에 진단랑이 입궁하여 태후에게 상까지 받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진 상공 댁 낭자만이 상을 받았답니다.”
경 공공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태자비의 인선이 명확해졌군. 그 말인즉, 얘기가 끝난 일이란 말인데…….”
진안 군왕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시기에 진단랑이 입궁할 리가 없지 않은가.
“진씨 가문 낭자가 태자 전하와 함께 공놀이도 했답니다.”
경 공공이 덧붙였다. 그러자 진안 군왕이 반가워하며 웃음을 지었다.
“진 낭자는 육가…… 아니, 태자를 무서워하지 않나?”
그러더니 긴장되면서도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같이 놀았다더냐? 아니면…….”
아니면, 시늉만 한 건가?
태자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진안 군왕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은 고사하고, 피를 나눈 황궁 누이들도 무서워하며 피하는 상대인데…….
그 누구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
태후는 그 아이를 돌볼 마음조차 없어 내시들과 궁녀들에게 맡겨 버렸어. 내시들과 궁녀들은 점점 더 무성의하게 대하고 있지.
어쨌거나 바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말도 못 하고.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게 하고자 전각 안에 가둬 둔 채 밖으로 나와 놀지도 못하게 하고, 가만히 앉아 있게 하고자 시도 때도 없이 먹을 걸 주는 바람에 점점 살만 찌게 할 텐데.
당초 이 태의는 태자가 배고픔과 배부름을 모르는지라 살이 찌기 쉽다며 많이 뛰어놀게 하고, 먹는 걸 관리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안 군왕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우리 육가아를 무서워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어떤 목적을 위해 시늉만 하는 게 아닌 사람이 있다면…….
“아닙니다.”
그런 진안 군왕의 마음을 잘 아는 경 공공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소인이 직접 물어보고 거듭 확인했습니다. 태자 전하를 처음 뵈었을 당시엔 진 낭자도 겁을 먹었는데, 나중엔 자발적으로 태자 전하의 공을 주워 건네며 태자 전하와 함께 공놀이를 했답니다. 귀찮아하거나 일부러 무섭지 않은 척하는 일은 전혀 없었고요.”
혼자서, 그것도 아직 열한두 살 남짓한 어린 소녀가, 자신의 진실된 감정을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리라. 특히 남의 눈치를 살피는 데엔 도가 튼 황궁 사람들의 눈까지 속여 가면서.
“정말 착한 아이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진씨 가문의 어린 낭자가 당신이랑 아주 일찍부터 알았죠? 그 낭자가 아니었다면, 그때 진 노태야는 어느 의원을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진안 군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안 군왕과 경 공공은 멈칫하여 놀란 표정을 지었고, 곧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경 공공은 부아가 치밀었다.
어찌 저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해도 너무하는군!
밖으로 나오는 정교랑을 보며, 문밖에 있던 반근과 소심 역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감히 막아서거나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서재로 들어가는 정교랑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반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교랑을 따라갔고, 소심은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저희 아씨께서는…… 그, 글씨를 쓰셔야 해서요.”
소심이 웃음을 쥐어짜며 해명했다.
“너희 아씨?”
경 공공은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며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소심의 웃는 얼굴이 더욱 어색해졌다.
“소인이 말실수를 했…….”
소심이 바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심이 무릎을 제대로 꿇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말을 끊었다.
“알고 있다. 말 안 해도 돼.”
‘알았다’가 아니라, ‘알고 있다’고 했다. 한 끗 차이지만 엄연히 다른 말이었다. 게다가 말할 필요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고.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은 소심은 용기를 내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딱히 다른 정서가 드러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소심은 담벼락에 기대 몸을 앞으로 쭉 빼고 아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소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 참.”
담벼락 위의 소년이 기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긴 길이 나 있었고, 영리한 늑대 떼도 먹이를 구할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길에 오래 머물 리 없었어요. 타고난 천성이 후천적인 관성을 덮지 않는 한.”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피였어요. 그놈들이 뒤에서 말의 피로 유인했더라고요. 우린 밤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어둠에 덮여 눈치채지 못했지만요.”
“난 <밀림재사록(密林齋事錄)>을 봤는데, 낭자는 무슨 책에서 봤어요?”
눈앞의 소년에게선 이제 풋풋함을 찾아볼 수 없었고, 얼굴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동시에 전혀 변한 게 없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소심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네.”
짤막하게 대답하면서도, 소심은 큰절을 올렸다.
“장씨 집안에서 가르친 아이라 그런지 예의가 바르군요.”
물러가는 소심을 보며 경 공공이 말했다.
장씨 집안 아이다. 정교랑의 시녀가 아니라.
진안 군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남이 예의 바른지 아닌지는, 결국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예의 있고 말고는 자신의 느낌일 뿐이거든. 평가할 자격 같은 건 없어.”
어리둥절해 하던 경 공공은 곧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저 여인을 감싸 주시는 거잖아.
“아경, 사실, 내가 무례했던 거다.”
진안 군왕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난 내 마음을 따른 거야. 저 여인의 마음은, 또 다르겠지.”
잠시 멈칫하던 경 공공은 곧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태자를 싫어하지 않고 잘 대해 주는 태자비를 얻는 건, 진안 군왕에게 안심이 되고 흡족한 일이다. 태자의 가족으로서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태자비 쪽 가족으로서는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이 바보에게 시집가는 일이 아니던가. 상대의 신분이 제아무리 고귀하다 해도 결코 기쁜 일이라 할 순 없었다.
정교랑으로서는 태자에 비해 진단랑 쪽이 더 가까운 게 사실이었다.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도 아니잖습니까.”
경 공공이 억울한 투로 말했다.
전하는 저 여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주시는데, 저 여인은 왜 그러지 못하지? 그리 정색을 하며 가 버릴 것까지야.
그것도 아랫것까지 있는 자리에서. 전하의 체면은 조금도 챙겨 주지 않다니, 해도 너무하잖아.
“그리고, 전하께서 좀 좋아하시면 안 된답니까?”
“나야 당연히 좋아할 수 있지. 그렇다면 그 여인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야박하게 굴 건 없잖아?”
서재 안.
정교랑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정교랑이 써 내려간 글씨의 먹물은 평소보다 진했다.
한쪽 옆에 꿇어앉은 반근은 멍하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따금 눈물을 떨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누가 볼세라 황급히 닦기도 했다.
“울고 싶은데 울지도 못하면, 그것도 집이라 할 수 있겠니?”
정교랑의 말에 반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씨, 진 대인께서 어떻게 단랑 아씨를 태자 전하께 시집보내실 수 있죠?”
반근이 울며 묻자, 정교랑이 손에 든 붓을 멈추었다.
“진 대인이 동의한 것 같진 않아.”
반근이 멈칫하여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동의한 게 아니라고?
경 공공 말로는 태자비 간택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진씨 가문에서 단랑을 궁으로 들여보냈다고 했어. 그렇다면 당연히 그럴 의사가 있다는 뜻인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야?
반근이 환해진 얼굴로 기대에 차 물었다.
“그럼, 단랑 아씨께서 시집가지 않으셔도 되는 거예요? 진 대인께선 절대 동의하지 않으시겠죠?”
정교랑은 반근을 쳐다보지 않은 채, 종이 위의 글씨를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내 생각엔, 동의할 것 같아.”
반근은 어리둥절했다.
진 상공이 동의한 건 아니라더니, 이젠 또 진 상공이 동의할 거라고?
진 대인께서 동의하실 리가 있나? 단랑 아씨의 일인데!
반근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손을 꽉 쥐었다. 금세 또 눈물이 차올랐다.
진씨 저택의 마당.
향로를 올려놓는 탁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석양빛이 땅을 붉게 물들였다.
손에 조서를 들고 있는 내시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내시는 자신의 앞에 오래도록 꿇어앉아 있는 진소를 바라보았다.
“진 대인, 이게 무슨 뜻입니까? 뭐라고 말씀이라도 하셔야지요. 이리 시간만 허비하지 말고, 체통을 지키십시오.”
진소가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지고 난 후 석양도 그 빛을 다한 때였지만, 진소는 여전히 눈이 부시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진소는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결단을 내린 듯한 표정이었다.
“용서하십시오, 태후마마. 신은 받들 수 없습니다.”
진소가 납작 엎드렸다.
뒤쪽에 꿇어앉아 있던 진소 부인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막았다. 그러면서 안간힘을 다해 엎드렸다.
조서를 가져온 내시는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예상한 듯했다.
“그러하십니까?”
내시는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빼며 눈썹을 꿈틀거리고, 납작 엎드린 진소를 내려다보았다.
“진 대인, 잘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어둠이 내렸을 무렵, 조서를 가져온 태감들이 진씨 저택을 줄줄이 빠져나갔다. 화려한 복장과 등에 진 황금색 보따리에서 그들의 신분과 방문 목적이 드러났다. 거리를 오가던 행인들은 자연스레 이들의 행렬을 주목하며 수군거렸다.
“진 상공 댁에 다녀가는군.”
“진 상공의 작위를 더 높여 준 건가?”
진 상공 댁에서 황궁의 조서를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백성들은 그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조서를 가져왔던 태감들이 황궁으로 돌아간 후 얼마 되지 않아, 황궁을 빠져나온 수많은 사람이 어둠을 헤치며 경성 곳곳으로 달려갔다.
고씨 저택의 안마당은 여느 때처럼 등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고, 다정한 말들이 오갔다. 사치를 좋아하는 고능준은 밖에서 자신의 권세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몸을 낮추고 검소하게 지내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을 피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느니 자유롭게 즐기는 게 낫지.”
대청에서는 가희들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방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웃고 떠들며 장난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황제가 병석에 누운지라 영업을 하는 점포에서 주안상을 곁들여 노는 것은 중단된 상태였으나, 저택 안에서의 유희는 차츰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급히 마당으로 달려 들어왔지만, 곧 회랑 아래에서 막혔다.
“대인께서 한창 기분이 좋으시니, 흥 깨지 마라. 무슨 일이냐?”
문밖에 있던 고능준의 측근이 물었다. 달려 들어온 사람이 초조한 투로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궁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진 상공이 조서를 거부했답니다.”
그 말에 측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이 일은 보고할 필요 없다.”
달려온 사람이 멈칫했다.
“진 상공이 수락했다면, 그건 보고할 만한 일이지.”
측근은 시시덕거리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안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때마침 시녀 하나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옆을 지나가자, 측근은 시녀를 살짝 꼬집어 주었다. 시녀는 간드러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됐으니 자네도 가서 술이나 한잔하게. 이건 우리가 고민할 일이 아니야. 고민할 사람은 진 상공이지.”
측근이 소식을 가져온 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무슨 대수-
같은 시각 경 공공도 대청으로 들어와 식사 중인 진안 군왕과 정교랑에게 같은 소식을 전했다. 옆에 있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가슴을 쓸었다. 부처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는 듯 입술을 달싹이기도 했다.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경 공공이 말을 하는 동안 잠시 젓가락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알았다.”
진안 군왕은 간단하게 대꾸한 후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먹기 시작했다. 정교랑 역시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대청 안은 고요했고, 젓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경 공공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반근 역시 밖으로 나와 회랑 아래에 있던 소심에게 눈짓을 하며 웃었다.
“거 봐, 자식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
반근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소심이 쿡 웃었다.
“거 있잖아, 왜.”
반근은 멈칫하다가 부정 타는 소리 말라는 듯 퉤 침을 뱉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거나 아랫것인 두 사람이 정교랑의 손윗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예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지만, 그래도…….”
반근이 아까 이야기하던 화제를 이어 갔다.
그래도 바보잖아.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평생을 바보와 함께하길 바라겠어.
소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감정 기복이 너무나도 컸던 하루를 보내고 마침내 안도하게 된 반근이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씨는 진 대인이 동의할 거라고 하셨는데, 이번엔 아씨께서 틀리셨네.”
반근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소심의 웃음은 다소 어색하게 굳었다.
아씨의 말씀이, 언제 틀린 적 있어?
하지만 웃으며 기뻐하는 반근을 보고 있노라니 차마 그렇게 대꾸할 수는 없어 소심은 말을 삼켰다.
“부인과 전하께서는 괜찮으시지?”
소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의 집 일은 어찌 됐든 남의 일이고, 두 사람이 신경 써야 할 건 어디까지나 아씨의 일이었다.
진씨 가문에 관한 생각을 내려놓은 반근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청 안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은 것처럼 보이기는 한데, 기분이 영 그래.”
둘이 함께 앉아 밥을 먹은 것은 두세 번밖에 안 되지만, 지난번에 같이 먹었을 때는 진안 군왕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대청 안을 가득 메웠다. 그에 비해 오늘의 고요한 식사 자리는 답답한 기분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소심 역시 대청 안을 힐끔 쳐다보았다. 등불을 환히 밝힌 대청 안에 있는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식사 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시녀들이 뒷정리를 시작하자, 진안 군왕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 쓸 거예요?”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고 대답했다.
“여기서 책 읽으려고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일을 논하러 서재로 갈게요.”
정교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시녀가 문발을 들어 올리자 진안 군왕이 대청을 나섰다. 어둠이 내린 마당을 보고 있노라니, 등롱을 든 내시가 막료들을 인도해 걸어왔다.
오늘 밤 서재엔 몇 명이나 모였을지 모르겠네.
진안 군왕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등잔불이 또 하나 켜졌다. 시녀는 등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소리 없이 물러갔다.
진 노태야는 등불 아래에서 조서를 필사한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폐하께서 내리신 조서는 아니야.”
진 노태야의 말에도 진소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딱히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황제의 성지든 태후의 교지든 조서가 내린 건 분명했고, 공개적인 선언인 만큼 모두가 알게 됐다. 중요한 건 조서의 규격이 아니라 조서를 내렸다는 행동 그 자체였다.
“별일 아니다.”
진 노태야는 손에 든 종이를 내려놓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식들의 혼사가 아니냐. 충분히 상의할 여지가 있는 일이야. 저쪽에서 원할 수 있는 만큼 우리도 거절할 수 있어. 떳떳지 못하거나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진소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평범한 집안이었다면 당연히 별일 아닐 것이고, 황실의 황자라 해도 별다를 건 없었다. 혼사란 본디 양측이 서로 원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화목하지 않은 부부를 맺어 주고 싶어 하는 이는 없으니까.
다만 문제는 지금 이 황실의 황자가 바보라는 데 있었다.
“태후께서 단랑을 마음에 들어 하시니…….”
진소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 노태야가 말을 끊었다.
“아니다. 태후께서 단랑을 마음에 들어 하신 것이었다면, 이렇게 빨리 조서가 내려오진 않았을 게야.”
진 노태야의 말투는 단호하고 명확했다. 오전에 진단랑을 봤는데 오후에 조서를 내렸다면, 그건 절대 태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태후의 성격은 진소 부자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러우며 주견이 없는 데다, 신분이 존귀한 탓에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단랑이 마음에 든 것이라면 거듭 고민하며 재고 따졌을 터였다. 하룻밤도 넘기지 않고 결단을 내릴 리 만무했다.
“이 조서는, 누군가가 사전에 작성해 놓은 것이다. 단랑이 입궐하길 기다렸던 게지.”
진소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데, 입안을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뭐라고 욕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이건 틀림없이 고씨 가문의 뜻일 거다.”
진 노태야의 목소리에 진소는 정신을 차렸다.
“누구의 뜻이든, 네 마음 또한 분명하지 않느냐. 상대가 쓴 방법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
외척이라는 이유로 고씨 가문을 조당에서 축출하고 태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했으니, 그렇다면 진소 너도 외척이 되어 봐라?
“우리는 외척이 되고 싶지 않으니, 헛된 소란을 벌인 셈이지. 교지야 거역하면 그만이다. 태후의 심기는 좀 불편하겠지만서도.”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태후는 본디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니, 너 때문에 한 번 더 불편해졌다고 그 무슨 대수겠느냐.”
진 노태야의 농담 섞인 말에 진소가 부친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다소 억지스러운 웃음이긴 했지만.
“그래, 이미 거절 의사를 밝혔으니, 이 일은 이제 지나간 거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고씨 가문을 절대 경성에 둘 수 없다는 것이야.”
진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내일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고씨 가문이 고의로 이 일을 벌인 걸 우리가 알았다면, 다른 이들도 분명 알 겁니다. 이렇게 버젓이 태자의 혼사에 간여하며 천자의 집안일을 좌지우지하려 들다니, 더는 경성에 남겨 둘 수 없지요.”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도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일찍 쉬십시오.”
진소가 예를 표했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가는 진소를 바라보았다.
사환이 등롱을 들고 진소를 인도해 마당에서 사라지자, 대청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 노태야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천천히 돌아선 진 노태야는 병풍 앞에 놓인 장궁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긴 칼을 차고 진나라 활을 낀 채로, 머리와 몸 떨어져도 이내 마음은 후회하지 않으리(帶長劍兮挾秦弓, 首身離兮心不懲 - 굴원, <국상(國殤)>).”
회랑 아래에 선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어라 말하자, 순간 반근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네, 알겠어요.”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뒤돌아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씻고 나와 내의로 갈아입은 정교랑은 내실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어린 시녀가 정교랑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다가갔다.
“부인, 전하께서 잠시 나가신대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왕부 밖으로 나가시는 건 아니고, 이쪽 마당을 잠시 벗어나신다네요. 누가 와서 보러 가신대요. 아씨께 말씀드리라고 하셨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도 반근은 바로 나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부인, 전하께 다녀오시라고 할까요?”
정교랑이 반근을 힐끔 보며 웃었다.
“응. 집이잖아. 괜찮아.”
반근은 그제야 네, 하고 대답한 후 자리를 떴다. 내시는 여전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근이 말을 전하자 내시는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 서재로 돌아갔다. 얼마 안 가 진안 군왕이 여러 사람과 함께 서재에서 나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본디 서재 안에는 사람이 꽤 여럿 있었지만 별로 소란스럽지 않았다. 대화 소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들이 자리를 뜨자 반근은 어쩐지 이쪽 마당이 전보다 훨씬 조용해진 기분이 들었다. 너무 고요하여 울적할 정도였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마당에서 당직을 서던 시녀는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소심이 다가왔을 무렵, 내실은 마지막 하나 남은 등잔불마저 꺼진 후였고, 객청에 남은 등잔 하나만이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아무 말 없었어?”
소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등롱에 비친 눈에서는 눈물이 어른거리며 반짝이는 듯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어.”
반근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근은 다른 시녀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전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른다고 했다.
“저희도 마당을 벗어나지 않아서요.”
반근이 시녀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자, 시녀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한, 아랫것이 먼저 가서 물어보면 안 되는 게 이곳 규율이에요.”
시녀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한…….
이곳은 진안 군왕부지 정교랑의 저택이 아니었다.
반근의 눈가가 더욱 붉어졌다. 소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근을 쿡 찔렀다.
“괜히 의심만 많아서 지레짐작하고 있네. 전하와 부인께서 그리 서먹한 사이야? 내가 가서 물어볼게.”
소심이 뒤돌아 자리를 뜨자, 반근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소심을 바라보았다. 얼마 안 가 소심이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반근이 얼른 다가서며 서둘러 물었다. 소심이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외서재에서 쉬신대.”
그 말인즉, 돌아오지 않는단 거잖아. 아씨와 동침하지 않으시겠단 거고.
반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것 봐. 괜찮은 것처럼 보여도, 실은 아니었어!
깊은 밤, 진소는 몸을 씻은 후 피곤하고 지친 기색으로 들어왔다. 진소 부인이 진소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등불에 비친 눈가는 여전히 부어 있었고, 얼굴에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단랑은 모르지?”
진소의 물음에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요. 내가 이 이야기는 함구하라고 단속을 해 두었어요.”
얘기가 나오자 진소 부인은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죠?”
진소 부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갑작스레 무슨 봉변인지…….”
진소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소가 벌컥 화를 냈다.
“봉변이라니? 태자 전하와 혼담이 오가는 게 봉변이란 말이오?”
그 말에 진소 부인은 화들짝 놀라 진소를 쳐다보았고, 진소 본인도 멈칫했다.
“노야.”
진소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진소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캄캄한 밤에 돌연 목청을 높이자, 그 소리는 더욱 귀를 자극했다. 밖에서 숙직하던 몸종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황급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소 부인은 찻잔을 손에 꽉 쥔 채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럼 이 일이 대단한 경사란 말이에요?”
진소 부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등잔 아래에 비친 진소의 낯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더러 어떻게 말하란 거요? 누구 편에서 말할까?”
태자가 혼인하여 황실의 핏줄을 잇는 건 엄청난 경사였다. 동시에 진소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딸자식을 바보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진소 부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했다.
“세상에 태자와 혼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잖아요. 꼭 우리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당신이 할 일은 태자를 보필하여 폐하의 강산을 지키는 것이지, 태자의 혼사를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요. 노야, 군자의 도마저 잊은 거예요?”
진소는 한숨을 쉬고, 흐느껴 우는 아내를 토닥여 주었다.
“알고 있소. 난 그저 이 일을 말한 것이었소.”
“이 일은 더 이상 논할 여지도 없어요! 노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잊으면 안 돼요. 노야는 고능준 같은 작자와 다르잖아요. 태후의 뜻을 거역하고, 태자가 불구의 몸이라고 꺼리는 게 어때서요? 나라와 군주를 위한 마음만 변치 않고, 올곧게 행동하면 되는 거예요.”
진소가 웃음을 지었다.
“그래, 알고 있소. 난 단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 일을 얘기하는 거요.
이 일이 알려지면, 또 한바탕 풍파가 일겠지. 당신과 단랑은 한동안 다른 곳에 머무는 게 좋겠소.”
진소 부인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눈물을 닦았다.
“당신만 단랑을 아끼는 줄 아시오? 나도 아비인데, 난들 왜 안 그렇겠소.”
진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소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다 내 잘못이에요. 단랑을 궁으로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방심했어요.”
태후가 그런 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진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씨 가문에서 작정한 이상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수를 썼겠지.”
진소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십팔랑도 소식을 들었을 거요. 십팔랑도 많이 속상해할 테지.”
태후가 혼인을 명한 건 진단랑을 본 후의 일이었고, 진단랑은 진십팔랑을 따라 궁으로 들어가 태후를 만난 터였다.
진소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사람을 시켜 말을 전했어요. 오늘은 올 필요 없으니,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요.”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군. 그만 쉽시다.”
“내일도, 많이 바쁘겠죠.”
방에 있는 등불이 꺼졌다.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던 몸종들은 불이 꺼지는 모습을 보고도 한참 후에야 발소리를 죽이며 숙직하는 방으로 돌아왔다.
진소가 몸을 계속 뒤척이는 동안, 진소 부인은 어둠 속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마 진소도 마찬가지리라. 이런 때에 잠이 올 리 없지 않은가. 위로하는 말도 소용없을 테고.
진소 부인은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며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진안 군왕이 침상에서 몸을 뒤척였다.
외서재는 평소 그가 쉬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잠을 자지 않은 건 이제 열흘도 채 안 된 때였다.
이불도 새것이고, 휘장까지 새것으로 전부 바꾸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벌레 소리는 기분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진안 군왕은 다시 몸을 뒤척이며 팔을 베개 삼아 베고,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휘장을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나? 이거 참…….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때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순간 침상에 누운 정교랑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희고 고운 얼굴, 붉은 입술, 검은 머리, 반짝이는 눈.
평소엔 다소 창백해 보이던 얼굴이 손으로 만지니 어찌나 보드랍던지. 게다가 얼굴보다 부드러운…….
진안 군왕은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혼인한 사이라고는 하나, 혼사의 시기가 적절치 않았다. 부득이한 상황에 치른 혼사인데, 어찌 거리낌 없이 그리 대했단 말인가. 아무리 부부라 해도, 이런 시기에 그리 경박한 행동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인데.
경성에서 정교랑과 잘 아는 이는 본디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 가장 친숙하고 왕래가 빈번한 게 진 상공 가문이었다. 혼례 때도 진소 부인은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던가.
단랑에게 그런 일이 생겼으니, 그 여인의 마음도 말이 아니겠지. 그런데 내가 그리 반색을 하고, 멋대로 그런 짓까지 저질렀으니…….
발로 차 침상 아래로 떨어뜨린 건 그나마 애교겠지. 평소 그녀의 성격이라면 목을 비틀어 버렸다 해도 지나치지 않았을 테니.
분명 후회되는 일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때를 떠올리자 진안 군왕은 쿡 웃음이 나왔다. 생각할수록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진안 군왕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웃었다.
“전하?”
경 공공이 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한참이나 잠을 못 이루고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던 사람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다니, 그것도 이 오밤중에…….
안에서 진안 군왕의 대답 소리 대신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칸막이를 돌아 나왔다.
어둠 속에 비친 형체는 크고 우람했다.
“전하?”
경 공공이 놀라 소리치며 얼른 등롱을 들고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경 공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는 바람을 일으키며 경 공공의 옆을 훅 지나쳐 갔다.
“돌아가야겠다.”
돌아간다고? 어디로?
벌써 저만치 걸어간 진안 군왕을 바라보며, 멈칫하던 경 공공은 발을 굴렀다.
뭐야, 대체!
“여봐라, 등롱을 밝혀라.”
경 공공이 얼른 뒤따라가며 소리쳤다.
소심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옆에 있던 반근도 벌떡 일어났다.
“뭐지?”
소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문밖에서는 시녀의 놀란 목소리도 들려왔다.
전하라니!
소심과 반근은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침상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신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나왔다.
밝은 등롱 불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소심은 얼른 불빛을 피했다. 반근이 대청으로 들어가 등불을 밝히려 했다.
“됐다. 깨우지 마라.”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내실로 들어갔다.
소심과 반근은 대청에 멍하니 선 채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욕실이 잠시 환해지는가 싶더니 곧 불이 꺼졌다. 실내는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어두운 실내의 불빛에 적응한 진안 군왕이 조심스레 문발을 들어 올렸다. 침상 위의 여인은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전처럼 안쪽을 비워 둔 채 바깥쪽에서 자고 있었다.
진안 군왕의 긴 다리라면, 정교랑을 가볍게 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진안 군왕이 다리를 들어 올렸다.
문밖에 있던 반근과 소심은 이미 방으로 돌아와, 덮고 있던 이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계속 여기서 숙직하는 거야?”
반근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심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내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아래에 깔린 이가 손을 뻗어 막았지만, 진안 군왕의 몸은 여전히 반쯤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몸이 불에 닿은 듯 화끈거리자 진안 군왕은 다시 몸을 훅 돌려 내려오려고 했다. 순간 발이 침상을 차면서 텅 하는 소리를 냈다.
실내의 분위기가 굳어졌다.
“이제, 막 나아서…… 몸이 아직 허약해요.”
진안 군왕이 머쓱한 듯 말하자, 정교랑은 바깥쪽으로 몸을 옮기며 진안 군왕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이내 자리에 똑바로 눕게 된 진안 군왕이 숨을 골랐다.
“나 때문에 깼네요.”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안 자고 있었어요.”
안 자고 있었다고…….
진안 군왕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날 귀찮아할까 봐 겁나서, 밖에서 자려고 했어요.”
이불을 들고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나가던 반근과 소심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회랑의 등롱이 비추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여 있었다.
소심이 고개를 내젓자 반근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린 소심은 기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반근의 얼굴을 보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사서 걱정하지 말라니까.”
소심이 타박하는데도 반근은 웃기만 했다. 소심은 고개를 돌려 안쪽을 힐끔 보고, 마음이 놓이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든 터놓고 말하면, 아무 일 없어.”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어둠 사이로 정교랑도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겁 안 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겁나요.”
진안 군왕이 베개 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쿡 찔렀다.
“이게 겁나는 거예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진 채로 말하는 터라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이번에는 한 손가락이 아니라 두 손가락으로 어깨를 쿡쿡 찔렀다.
“방백종.”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째려보고 있겠지.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진안 군왕은 손을 치우고 다시 베개를 베고 누워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네?”
진안 군왕은 대답하고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진안 군왕은 베개 위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놓아 보고, 몸도 이리저리 뒤척이며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네.”
진안 군왕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날 발로 차서 떨어뜨려 봐요. 다시 누워야 좀 편해질 것 같아요.”
옆에 있던 정교랑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짧은 찰나의 웃음이었지만. 깊은 밤이라 사방이 고요하지 않았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만큼 작은 웃음이었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웃음을 지으며 팔꿈치로 정교랑의 등을 쿡쿡 찔렀다.
“당신 생각도 그렇죠?”
진안 군왕이 물었다.
“난 쭉 그렇게 생각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자 진안 군왕이 헤헤 웃으며 대꾸했다.
“첫 혼인이라 그래요.”
순간 옆에 있던 몸이 움찔하며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진안 군왕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말실수를 했네요.”
진안 군왕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농담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첫 혼인이라니. 두 번째 혼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아직 신혼인 데다 전혀 경사스럽지 않은 분위기 속에 올린 혼례였다. 실로 해서는 안 될 농담이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가 싶더니, 정교랑이 몸을 움직여 돌아누웠다.
“아니에요.”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말실수한 거 아니에요. 내가 잘못 생각한 거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 여인은 늘 이랬어. 항상 남부터 생각하고, 남 탓을 하는 법이 없지. 무슨 일이든 자기 책임으로 돌려.
진안 군왕은 마음이 뻐근해졌다.
“정방, 알겠어요.”
진안 군왕이 손을 들어 정교랑의 팔을 쓸어 주다가, 얼른 손을 거두며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웃어 주었다.
“어서 자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맑고 은은한 향, 편안하고 따스한 분위기. 여기가 바로 내게 익숙한 곳이야. 옆에 누군가가 생긴 지 며칠도 채 안 됐는데, 왜 벌써 습관처럼 익숙해진 거지?
베개가 살짝 움직였다. 긴장이 풀리며 안도하자 순간 졸음이 엄습했다. 막 잠 속으로 빠져들려던 진안 군왕이 돌연 눈을 번쩍 떴다.
방 안은 고요했고, 옆에 있는 사람도 조용히 누워 있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며 팔로 몸을 받치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잠 안 오면, 나랑 얘기해요.”
정교랑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전엔 나도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삭였어요. 말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 많지만, 그 당시엔 또 그렇지 않잖아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좀 나아질지 몰라요.”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물론, 말을 할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내 말은 뭐? 왜 이렇게 주절주절 떠드는 거야?
상대는 정방이야. 육가아가 아니라고.
“당신이 답답해할까 봐요.”
본디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내가 이러면 성격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꼴이잖아. 누군가에게 강요당하는 기분은 별로인데.
진안 군왕은 또 후회스러웠다.
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싫어할 짓만 하지? 남이사 날 싫어하든 말든 상관없다지만, 어떻게 이 여인이 날 싫어하게 해?
진안 군왕은 손을 들어 코를 문지르고 다시 누웠다.
“단랑의 일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잠이 안 오네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진안 군왕의 마음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진안 군왕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너무 걱정 마요.”
진안 군왕은 심호흡을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 대인이 교지를 받들지 않았으니 좀 성가셔지긴 하겠으나, 이 악물고 버티면 될 일이에요. 참고 견디면 지나갈 거예요. 단랑이 장차 혼사를 치를 때 다소 껄끄럽긴 하겠지만, 지금에 비하면 훨씬 낫죠.”
이번 일로 진단랑의 혼삿길이 험난해질 것은 자명했다. 분명 경성에 있는 부모를 떠나 먼 곳으로 시집갈 터였다.
그래도 신체 건강하고 정신이 온전한 남편에게 시집갈 수 있으니, 바보인 육가아와 혼인하는 것보단 낫겠지.
우리 육가아는 평생 좋은 일과는 인연이 없을 거야. 잔혹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인걸.
좋은 여자와 혼인하든 나쁜 여자와 혼인하든, 사실 육가아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정작 육가아 본인은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 쓰지도 않으니까.
“그럼, 당신은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
“나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웃었다.
“솔직히 대답할게요. 어떤 여인을 맞이하든 태자에겐 다 똑같다는 걸 알지만, 난 그래도 좋은 아내가 태자의 짝이 되었으면 해요. 태자비가 진씨 가문의 여식이라면, 무척 기쁠 거예요.”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정교랑의 시선이 진안 군왕의 얼굴을 맴도는 것 같았다.
“당신은, 태자가 정말 태자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교랑이 불쑥 붇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며 낯빛이 변하는가 싶더니, 곧 원상태를 회복했다. 물론 캄캄한 어둠 속이라 티가 나진 않았다.
“당연하죠.”
진안 군왕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자는 폐하의 자손이잖아요. 유일한 혈육이요. 그러니 당연히 태자여야 하죠.”
“하지만, 적합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도 자리에서 일어나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방,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진안 군왕이 완곡한 어조로 말했다.
혈통과 출신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늘이 정하는 거라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정하는 거라면, 우리 같은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죠. 하늘이 정하길 기다려 보죠. 그렇다면 더더욱 고민할 것도 없겠네요.”
기다린다?
“천도는 순응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천도를 따라 움직여야 하기도 해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난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뿐이죠. 천도라……. 천도는 너무 높고 멀리 있어요.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우니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죠(天道遠, 人道邇, 非所及也).”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우니,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린 알잖아요.”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알고 있으니, 천도를 따르는 것이 소임이리라.
손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면서도, 그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손이 정교랑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자, 정교랑도 몸의 긴장을 풀었다.
도(道)를 얻으려면,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 더없이 분명한 이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괴로웠다. 진단랑이 바보 태자에게 시집가기 때문일까?
바보에게 시집가는 건 분명 슬픈 일이겠지만, 죽음에 비한다면?
예를 들어 누군가와 혼인하면 죽음뿐인 걸 알면서도, 결국 딸을 그리로 시집보낸 부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정교랑은 천천히 몸을 눕혔다.
대화를 멈춘 방 안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좀 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사뭇 편안해진 분위기였다. 정교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몸 위에 무언가 무거운 게 얹힌 느낌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누군가의 팔뚝에 손이 닿자, 정교랑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 바짝 붙어 있는 진안 군왕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한 손은 그녀의 몸에 얹은 채.
두 사람은 꼭 껴안은 듯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교랑의 움직임에 진안 군왕이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를 보고 진안 군왕도 놀랐는지 얼른 뒤로 물러났다가, 곧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에요. 좀 더 자요.”
진안 군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휘장 밖을 쳐다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반사적으로 정교랑을 토닥여 주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정교랑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가만히 치웠다. 그러면서도 일어나지는 않고 몸을 돌려 바깥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눈을 감았다.
그녀 뒤에 있는 진안 군왕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은 눈을 뜨지 않고, 정교랑의 몸 위로 다시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 베개만 정교랑 쪽으로 살짝 움직여서, 풀어헤친 정교랑의 긴 머리로 바짝 다가가 다시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시각, 밤새 한숨도 못 잔 진소 부부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씻고 나서 막 아침 식사를 하려다가, 진십팔랑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십팔랑.”
문 안으로 들어서는 진십팔랑을 보자, 진소 부인은 퉁퉁 부은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진십팔랑의 얼굴도 진소 부인과 비슷한 걸 보니 밤새 한숨도 못 잔 눈치였다.
진십팔랑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 앉으며 예를 표했다.
“사위는?”
“소식을 알아보러 갔어요.”
진소의 물음에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어제 조서가 내려왔다는 소식은 하룻밤 사이에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오늘은 온 조당과 경성이 이 일로 소란스러울 터였다.
“알아볼 것도 없다. 뭐라고 말할지, 내게 생각이 있느니라.”
진소의 말에 진십팔랑은 침묵을 지켰다.
“십팔랑, 난 단랑을 데리고 잠시 집을 비울 생각이야. 너도 네 남편이랑 그만 가 봐.”
진소 부인의 말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단랑의 일에 대해 결단을 내리셨어요?”
진십팔랑이 물었다. 진소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진소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십팔랑, 걱정 말거라.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도 괜한 생각 안 해도 돼. 단랑이 입궁했던 일은, 그저 뜻밖의…….”
진소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끊었다.
“아버지, 어머니.”
진십팔랑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힘주어 쥐며, 고개를 들어 진소를 바라보았다.
“단랑의 입궁은 뜻밖의 일이 아니에요.”
진소 부부가 멈칫하며 진십팔랑을 바라보았다.
“제가 태후께 단랑을 천거하려고 데려간 거예요.”
진십팔랑은 심호흡을 하고,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풀며 또박또박 말했다.
뭐라고?
진소 부부의 안색이 싹 변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진십팔랑의 목이 돌아갔다. 머리의 떨잠에 있는 진주가 새벽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들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물러났다.
“십팔랑! 다시 한번 말해 봐!”
진소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소 부인의 손에 힘이 실려 있었기에, 따귀를 맞은 진십팔랑의 새하얀 볼에는 붉은 자국이 생겨 있었다. 하지만 진십팔랑의 표정은 더없이 침착했다. 분노로 몸을 떠는 진소 부인의 시선 앞에서도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색이었다.
“제가 단랑을 태후께 천거했다고요.”
진소 부인이 다시 손을 높이 쳐들자, 진소가 입을 열어 제지했다.
“그만하시오. 지금 때려 봐야 무슨 소용이오?”
하지만 진소 부인의 손은 그대로 진십팔랑을 향했고, 따귀를 후려치고 난 후 진소 부인 본인도 그대로 주저앉았다.
“대체 왜 그랬어?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해!”
진소 부인이 또 분을 못 이기며 소리쳤다. 진십팔랑의 얼굴에 난 붉은 자국이 더 짙어졌지만, 진십팔랑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줄곧 차분하기만 한 진십팔랑의 표정은 놀란 진소와 분노를 참지 못하는 진소 부인의 모습과 더 확연한 대비를 이루었다.
“전 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그래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십팔랑, 네 동생의 손을 잡아끌고 궁으로 들어가면서, 조금도 괴롭지 않았느냐?”
진소가 진십팔랑을 보며 물었다.
진소의 말을 듣자 진소 부인은 어제 진단랑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진십팔랑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게 자신의 딸을 진흙탕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일 줄 누가 알았으랴.
진십팔랑은 붉어진 눈으로 엎드려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사전에 이 일을 고하지 못함은 소녀의 불효예요. 송구합니다.”
진십팔랑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넌 송구한 게 아니다.”
진소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어찌 송구할 수 있겠느냐? 네가 사전에 고하지 않고 이 일을 행한 것은, 사전에 고했다면 우리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 아니더냐?”
납작 엎드린 진십팔랑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누가 너더러 이리하라고 시켰느냐?”
진소가 불쑥 물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딸이 혼자서 이런 일을 생각해 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십팔랑, 네가 저지른 일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이건 아비의 퇴로를 끊어 버리는 일이야.”
진소가 비통함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실에서 명한 이번 혼사에서 진씨 가문은 불리한 국면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태후의 교지가 내려온 것은 진단랑을 본 후의 일이기에, 남들 눈엔 진씨 가문에서 먼저 혼사 의중이 있었던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세간의 추측에 불과했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 한, 진씨 가문은 당당하게 교지를 거역할 수 있었고, 한동안 시끄럽긴 하겠지만 종국에는 잠잠해질 일이었다.
그런데 진십팔랑의 말로 그 추측은 더 이상 추측이 아닌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 일은 더 이상 교지를 거역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군주를 기만한 죄를 지은 게 된다.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며 황실을 농락했으니, 모든 잘못은 진씨 가문에 있었다. 진씨 가문은 신의를 잃을 것이고, 황실만 웃음거리로 만든 게 아니라 진씨 가문 역시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신의가 없는 자는 군자라 할 수 없는데, 군자도 아닌 자가 어찌 태자를 보필하여 강산을 안정시키고 문무백관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중임을 맡을 수 있으랴.
진소로서는 분노보다 비통함이 더 컸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이것저것 다 재고 따지며 계산했건만, 그의 몸 깊숙이 칼을 찔러 넣은 건 다름 아닌 그의 딸이었다.
진십팔랑이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그럼 아버지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으세요?”
진십팔랑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십팔랑, 넌 어째서 이 아비가 그리하길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진소가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물었다. 그러자 진십팔랑이 모친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머니, 언니로서, 왜 이런 일을 하면 안 되는지 알아요. 또 아버지자 어머니로서, 두 분이 왜 이 일을 원치 않으시는지도 알고요. 하지만…….”
진십팔랑의 시선이 다시 진소에게로 향했다.
“폐하의 신임을 받는 중신이자 성은에 부응해야 할 보정대신으로서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
-대도-
“할아버지, 십팔랑 언니가 왔어요? 가서 보고 올게요.”
노복의 말을 들은 진단랑이 장궁을 조심스레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
“정 언니가 답례로 준 선물을 보여 줄래요.”
진 노태야가 웃으며 손을 뻗어 막았다.
“좀 있다 가거라. 네 언니는 아직 아버지, 어머니와 이야기 중이야.”
진단랑이 네, 하고 대답했다.
“단랑, 뒷마당에 네가 쓸 과녁을 설치하라고 했다. 네게 활쏘기를 가르쳐 줄 사람도 수소문 중이고. 한번 가 보련?”
진 노태야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하자, 진단랑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진 노태야는 웃으며 여종들에게 진단랑을 데려가도록 했다.
“조심하거라. 손 다치지 않게.”
“할아버지도 약 꼭 챙겨 드세요.”
진 노태야의 당부에 진단랑도 당부로 화답했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여종들과 함께 자리를 뜨는 진단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단랑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진 노태야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진 노태야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우리 십팔랑이, 그리 변할 줄이야. 어쩌다 그런 짓을 저지른 겐지.”
“노태야, 십팔랑 아씨께선, 누군가에게 미혹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노복의 말에 진 노태야는 웃음을 지었다. 비웃음이 담긴 웃음이었다.
“미혹되었다? 이 세상에 누군가에게 미혹되는 일 따위는 없느니라. 자신을 미혹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지. 본디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마음이 동했겠느냐?”
노복은 눈을 내리깐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십팔랑 아씨가 한 일일 뿐, 노야는 아니잖습니까.”
진 노태야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침묵이 이어졌다.
“후회되는구나.”
잠시 후 진 노태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더위가 물러가면서 한층 높고 푸르러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초 단랑을 데리고 경성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후회라고? 무릇 후회라 함은 결론이 난 후에야 예전 일을 더듬으며 하는 것인데.
노복이 퍼뜩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노태야! 이 일은 아직…….”
노복은 다급한 목소리였지만, 진 노태야는 홱 돌아서며 그의 말을 끊었다.
“가서 짐을 정리해라.”
노복은 멈칫한 채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진 노태야는 발을 들어 대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백해진 얼굴로 진십팔랑을 보던 진소 부인은 순간 아득해졌다.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은 누구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은데?
“아버지께서 이리하기 원치 않으시는 건, 태자가 바보기 때문인가요?”
진십팔랑은 진소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것 때문은 아니실 거라고 믿어요.”
진십팔랑의 표정은 엄숙하고 차분했다.
“그분은 태자니까요. 아버지께서 태자가 바보인 게 마음에 걸리셨다면, 그분이 지금의 태자가 되지도 않았겠죠. 아버지는 경왕을 태자로 세우는 일에 동의하셨어요. 태자가 황손을 낳으면, 그 황손을 등극시켜 제위를 이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하신 거죠. 아버지의 눈에 태자는 바보가 아니라 군주예요. 공경하고 충성을 다해야 할 군주요.”
진소의 낯빛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어디서 들어 본 말 같은데.
진소 부인은 어젯밤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봉변이라니? 태자 전하와 혼담이 오가는 게 봉변이란 말이오?
진소 부인의 귓가에 진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진십팔랑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버지께서 태자가 바보라는 이유로 혼인할 수 없다 여기신다면, 이는 표리부동한 태도 아닌가요? 아버지께서도 업신여기는 이인데, 다른 사람이라고 혼인을 원하겠어요? 그럼 대체 누가 태자와 혼인하죠? 태자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그런 일을, 아버지께서는 결코 하실 수 없을 거예요.”
“태자와의 혼인으로 얻으려는 게 뭔지는, 그 사람들이 더 잘 알 거야.”
진소 부인은 속에서 열불이 나는 듯 진십팔랑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그건 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다. 동시에 네 아버지는 그런 바람을 품은 다른 이를 비웃으시지도 않으실 거고.”
“그럼 아버지는 청렴한 명성을 원하시는 건가요?”
진십팔랑은 목청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외척이 되고 싶지 않아서, 단랑을 태자비로 삼을 수 없으시단 거예요?”
“십팔랑, 아둔한 게냐, 아둔한 척하는 게냐?”
진소 부인 역시 목청을 높였다.
“외척이라는 이유로 고능준을 축출한 네 아버지더러 외척이 되라고 하다니, 이건 자기모순이잖아!”
진소 부인의 말에 진십팔랑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진십팔랑은 모친을 보지 않고 진소를 보며 말했다.
“아, 그럼 아버지는, 그 이유로 외척이 되지 않으려 하시는 거였어요?”
진소 부인이 멈칫했다
뭐 때문이라고?
진소는 복잡한 표정으로 진십팔랑을 바라보았다.
“고능준은 권세를 휘두르기 위해 외척이 되려 했어요.”
진십팔랑은 진지한 표정으로 부친을 똑바로 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럼 아버지는 권세를 휘두르기 위해 외척이 되지 않으려 하시는 거네요.”
권세를 휘두르기 위해!
그 말에 진소의 표정이 확 변했다. 동시에 진소 부인은 손을 들어 진십팔랑의 따귀를 후려쳤다.
“불효막심한 것!”
진소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아버지께 그 무슨 말버릇이야!”
이번 따귀는 아까 전 따귀보다 훨씬 힘이 실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따귀에 진십팔랑은 그대로 몸이 돌아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가에선 피가 흘러나왔지만 진십팔랑은 도리어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진십팔랑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지 않고,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말했다.
“사람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진십팔랑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외척이라……. 외척이 되면 어떤 처지에 놓일지 저도 당연히 알죠.
유림은 환관과 외척을 가장 꺼리죠. 외척이 권력을 잡으면 국정을 농단한다는 비난을 받고, 어사와 언관도 외척을 예의주시할 거예요. 관직에 올라갈 수도 없고 중임을 맡을 수도 없으며,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탄핵이 빗발치겠죠.
그런데도 외척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것 또한 알아요. 그건 고능준처럼 권세를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서겠죠. 저들에게 외척은 이익을 꾀할 수 있는 수단일 뿐, 조정과 정사가 어떻게 되는지는 애초에 관심 밖이거든요.
네, 맞아요. 태자 전하와 혼인하고 싶어 하는 태자비가 적진 않을 거예요. 꼭 단랑이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누구나 가능하다면, 왜 단랑은 안 된다는 거죠?
외척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바라는 게 있지만, 아버지께서는 외척이 되고 싶지도 않고 바라는 것 또한 없다면, 태자와 조당의 입장에서는 바라는 게 없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행운이에요.
아버지는 늘 나라를 위한 일인데 어찌 몸을 아끼겠느냐고 하셨으면서, 소위 청렴하다는 명성을 위해, 조당에 남기 위해, 외척이라는 신분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 태자를 곤경에서 구해 주려 하지 않으시는군요.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아버지 말씀은, 그저 말뿐이었어요. 그걸 진심으로 믿은 소녀가 아둔했네요. 소녀의 잘못이에요.”
진십팔랑은 자세를 단정히 앉은 후, 진소를 향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당장 태후마마 앞으로 가 사죄하겠습니다. 이 일은 소녀로 인한 일이니, 소녀가 아버지의 결백을 밝혀 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진십팔랑은 머리를 세 번 조아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십팔랑, 대도(大道)만 알고, 인간의 도리는 잊은 것이냐? 네 동생더러 바보한테 시집가라고? 이건 평생이 걸린 일이야.”
맥이 탁 풀린 진소 부인이 진십팔랑을 보며 말하자, 진십팔랑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상대는 바보예요. 동시에 태자기도 하고요. 태자에게 시집가면 태자비가 돼요. 존귀한 황실 여성이자 장차 국모가 되는 일인데, 어머니께서는 어찌 평범한 부부의 도리만 논하세요?
태자비는 그저 태자에게 시집가는 게 아니에요. 장차 황제가 될 분과 혼인하는 것이고 이 나라와 혼인하는 거예요. 태자와 태자비는 부부지만, 평범한 부부와는 달라요. 태자가 지켜야 할 건 가정이 아니라 이 나라예요. 태자비가 보필해야 할 남편은 태자고, 훈육해야 할 자식은 황손이라고요. 장차 이 나라의 군주가 될 사람이죠.”
거기까지 말한 진십팔랑은 부친과 모친을 보며 심호흡을 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어찌 몸을 아끼며 어찌 사사로운 정을 논하겠습니까.”
난리통인 진씨 가문과 달리, 진안 군왕부는 여느 때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내원으로 아침 식사를 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외원에 있던 고 선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을 참 일찍도 드시는군.”
“간밤에 전하께선 늦게까지 바쁘셨습니다. 이제 막 건강을 회복하셨으니, 고단하여 늦게 일어나실 만도 하지요.”
경 공공의 말에 고 선생은 콧방귀를 뀌었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가 중하지.”
그러자 경 공공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 때문에 바쁘냐면 말입니다. 젊은 부부가 말다툼을 하고 나서 해가 중천에 뜨도록 안 일어나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바쁠지…….
경 공공의 웃음을 본 고 선생은 퍼뜩 정신이 드는지 멋쩍어하다가 곧 분통을 터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주군의 내실에 관해 일에 담는 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경 공공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전하의 혈통을 잇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이 또한 모두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 전하께 자손이 생겨 진안 군왕의 혈통이 이어진다는 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 진안 군왕으로서는 더 없는 경사지. 혈통을 잇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무엇이 있으랴.
다른 이였다면 그래도 걱정에 가슴을 졸였겠지만, 그 여인의 아이라면 분명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거야. 전하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닌, 부부가 한마음으로 지키는 아이일 테니까.
고 선생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고 선생과 경 공공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급히 들어왔다.
“경 공공, 장궁을 구했습니다.”
들어온 자가 고하는 말에 고 선생은 멈칫했다.
“장궁을 뭐에 쓰려고?”
고 선생이 들어온 자의 손에 들린 장궁을 보며 물었다. 경 공공은 벌써 장궁을 건네받으며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훌륭하구나. 그래, 이리 생긴 거였어.”
경 공공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장궁을 들고 자리를 뜨자, 고 선생은 뒤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진 상공 댁 사람들이 왔다 가면서 장궁을 들고 나가던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그랬구나. 왕비께서 자신의 장궁을 선물하자, 경 공공이 얼른 활을 새로 구한 거였어.
이상한 일이로군. 내시라고는 하나, 경 공공이 비위를 맞춰야 하는 윗전은 한 분뿐이야. 그런 경 공공이 왕비를 위해 자발적으로 활을 구하다니? 진안 군왕의 분부라면 몰라도.
보아하니 정말 마음이 동하여 좋아하게 되신 게로군.
고 선생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래.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귀하고 소중한 일이지. 다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고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역으로 저 여인이 온 마음을 다해 전하를 좋아한다면 더 좋을 텐데.
경 공공이 직접 장궁을 벽에 걸자, 진안 군왕이 무심한 듯 말했다.
“기예는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조예가 깊어지는 법이니, 하루도 거를 수 없지요. 대충 하나 고른 겁니다. 일단 이걸 쓰고 있다가, 마음에 드는 걸 찾아봐요.”
대충 하나 고른 거라니…….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여차하면 진 상공 댁으로 쳐들어가 장궁을 도로 갖고 나올 기세로 점포를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찾아낸 활을 두고 대충 하나 고른 거라고?
화장을 마치고 낭군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며, 눈썹 그린 것이 잘 어울리냐고 묻는다더니(粧罷低聲問夫壻, 畵眉深淺入時無 - 주경여).
경 공공이 입술을 삐죽였다.
“제나라의 흰 비단은 이제 귀하지 않아도, 채릉가 한 곡은 만금을 쳐주지요(齊紈未足時人貴, 一曲菱歌敵萬金 - 장적). 대충 하나 고른 건데도, 마음에 쏙 드네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경 공공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젓가락을 들고 느릿느릿 밥을 먹는 여인의 입가로 미소가 번지는 모습이 보였다. 여인은 맞은편에 앉은 진안 군왕을 보고 있었다.
진안 군왕의 손에도 젓가락이 들려 있었으나, 진안 군왕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보였다.
전하께서 마음 쓰신 걸 알고 정확하게 짚어 주었어. 게다가 마음에 든다는 말까지 하고.
마음에 든다?
이거, 전하를 놀리는 말인가?
경 공공의 시선이 진안 군왕에게로 향했다. 군왕은 어느새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그렇긴 하죠.”
군왕은 부러 털털하게 말하며 팔을 살짝 벌렸다.
“보잘것없는 선물이지만 마음이 담겨 있잖아요.”
정교랑은 빙긋 웃고,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진안 군왕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사를 계속했다. 다만 국을 먹느라 소매로 입을 가리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는데, 이쪽에 서 있는 경 공공의 눈엔 그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낑낑거리던 경 공공이 결국 못 참고 웃음을 터트리자, 진안 군왕은 머쓱한 듯 그릇을 내려놓고 경 공공을 노려보았다.
“난 작은 서재를 쓸게요.”
식사를 마친 진안 군왕이 말했다.
“바깥에 있는 걸 쓰겠다고요. 이제 군왕부 내에서 돌아다니는 건 괜찮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금은 당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예요.”
지금은 다들 온 신경이 태자의 혼례에 가 있으니까.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는 뭐라고들 얘기하나 들어 볼게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과 함께 나가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정교랑이 서재에서 이제 막 글씨 한 장을 썼을 무렵, 진안 군왕이 돌아왔다.
“뭐라고들 해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의 안색은 어두웠다.
“뭐라고 하겠어요. 밀고 당기고, 불을 붙이고 기름을 붓고 난리죠. 아무튼 들들 볶이는 건 진 상공이에요. 당신은 고능준 그자의 수완을 모를 거예요. 명석하고 유능한 데다 고생도 해 봤고 복도 누려 봤죠. 욕도 먹어 봤고, 칭찬도 받아 봤고요. 군자라고 하기엔 소인배처럼 굴고, 소인배라고 하기엔 또 군자의 면모를 갖추기도 했죠.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인물이지만,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진안 군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깥에선 다들 그러더라고요. 진 상공이 먼저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했는데, 집안에서 아내가 반대하여 번복하게 됐다나요.
참, 황궁 소식도 들었는데, 태후가 병이 나서 태의원이 난리인가 봐요.”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가, 정교랑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태자비 간택에 뜻이 있어 입궁했던 집안들은 딸의 혼사를 정하느라 바쁘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남들이 괜한 추측을 할까 봐, 자신들에겐 사심이 없었다고 증명하려는 거죠.”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 상공도 태자가 바보라며 딸을 보내지 않으려 하는데, 여식을 태자에게 시집보낸다면 진 상공 눈에 어떻게 보일까.
진 상공은 권력을 휘두르는 외척이 되고 싶지 않다는데, 여식을 태자에게 시집보내는 건 마음이 올곧지 못하단 뜻이잖아.
상황이 그러하니, 그 누구도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고자 하는 이가 없게 되었지.
“그래도 그럴 사람이 있을 거예요. 기다려 보면 알겠죠.”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었다.
“진 상공은 군자예요. 군자는 홀로 있을 때도 몸가짐을 바로 하죠(君子愼獨). 그럴듯한 말로는 속일 수 있어도, 도에 어긋나는 말로는 속이기 어려워요(君子可欺以其方).”
이제 진소의 마음에 뽑을 수 없는 가시가 박혔다. 다른 이가 더 이상 이 일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이 관문을 통과하기 힘들 것이다.
원체 말수가 적은 정교랑은 더욱 말을 아꼈고, 대청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팔을 툭툭 치며 불평하듯 말했다.
“우리 나가서 좀 걸어요. 종일 안에만 갇혀 있으려니 따분하네요. 처가에 다녀올 때 거리 구경도 좀 했어야 하는데.”
“그러게 그날 좀 크게 돌지 그랬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경 공공이 마차를 세울 수도 없고 아무 곳이나 마구 돌아다닐 수도 없어, 잔머리를 굴린 끝에 군왕부를 빙빙 돌던 그날 일이 떠올랐다.
우리가 마차에서 그런 행각을 벌이는 줄로 오해하다니,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그 생각을 떠올리자 진안 군왕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또 날 놀리는군요.”
진안 군왕의 말에도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아니에요.”
정교랑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정색하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자니 진안 군왕은 쿡 웃음이 나왔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어요.”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우리 마당이라도 좀 걸어요.”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거절할까 봐 겁난다는 듯, 손을 뻗어 정교랑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직도 몸이 별로 안 좋아서, 혼자 걷기엔 마음이 안 놓여요. 이 태의도 출타해서 집에 없고요.”
두 사람이 차례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반근과 소심은 얼른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먼저 걸어가게 한 후, 멀찌감치 떨어져 뒤따랐다.
“언니, 전하께서 아씨더러 정말 재미있는 분이라고 하시는데, 아씨가 정말 재미있는 분이야?”
반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소심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하는 사람의 눈엔, 당연히 재미있겠지.”
좋아한다라…….
좋아하는 건 좋은 거지.
반근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도 군왕이 말한 진소의 일을 떠올리자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씨의 말씀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다니까. 잔인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잖아.
“경성에 막 올라왔을 때, 아씨께서 날 데리고 마차로 거리를 지나가신 일이 있어.”
소심이 갑자기 옛일을 이야기하자, 반근이 영문을 몰라 하며 쳐다보았다.
“아씨께서 나보고 밖을 보라고 하셨는데, 마침 신선거 옆을 지날 때였지. 그때의 신선거는 아직 우리의 신선거가 되기 전이었어. 아씨께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셔서 인기가 예전만 못해 보인다고 대답했어.
그랬더니 아씨께서 또 뭐가 보이냐고 하시는 거야. 그땐 아씨의 심기를 건드린 두칠 때문에 아씨께서 낙득자재를 만드셨을 무렵이라 신선거의 손님이 확 줄어들 때였지. 아씨는 두칠이 과로신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도 개의치 않아 하셨지만, 두칠 그자는 믿지 않았지. 끊임없이 의심하다가 결국 스스로 화를 초래한 거야.”
반근도 그때 일이 생각나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난 사람은 됨됨이가 훌륭해야 한다고 대답했어. 남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잖아. 남을 속이는 건 곧 자신을 속이는 거기도 하니까.
그런데 아씨께서 또 뭐가 보이느냐고 물으시지 뭐야.”
가만히 듣고 있던 반근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씨께서 그렇게나 많이 물으셨구나. 나였다면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을 텐데. 아니지, 아씨는 함부로 말씀하시는 법이 없잖아. 아씨는 분명 반근 언니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걸 알고 물으셨을 거야. 그러니 나한텐 이런 질문을 던지실 리가 없지. 내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던지셔.
반근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소심의 팔짱을 꼈다.
“한 번 본 건데, 그렇게 많은 문제가 보인단 말이야?”
반근의 물음에 소심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문제는 하나였어.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아씨께서 알려 주셨지. 힘겨움이라고.”
“힘겨움?”
“일을 하나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고, 자리를 잡으려면 제대로 잡아야 하는데, 그건 힘겹고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어.”
선악과 상관없이 천도는 무정하고 세상살이는 힘겨운 법이다.
그래, 세상살이는 정말 힘겹지. 진소가 이런 일을 맞닥뜨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반근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단랑 아씨께서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지 모르겠네.”
단랑은 이제 겨우 열한 살이었다. 이번 일로 혼사가 결정되면, 이성을 동경하는 소녀의 마음을 품어 보기도 전에 혼례를 치를 것이다.
이성을 동경하는 소녀가 꿈꾸는 낭군은 결코 바보일 리 없었다.
“그게 차라리 낫지.”
소심이 눈을 내리깔며 대꾸했다.
희망이 없으면, 절망도 없으니까.
진 노태야의 마당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전에도 종복이 얼마 없었지만, 오늘처럼 한 사람도 없는 날은 없었다. 얼핏 보기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보일 정도였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대청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그는 마당에 꿇어앉은 진소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야, 어서 일어나십시오. 노태야의 성정을 아시잖습니까.”
노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처연한 표정의 진소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뭐 하자는 게냐. 네 자식의 거취는 네가 결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아비의 거취까지 네가 결정할 수 있을 성싶으냐?”
대청 안에서 진 노태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진 노태야가 걸어 나와 노복을 보며 말했다.
“마차에 짐은 다 실었느냐?”
노복이 고개를 숙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진소가 땅에 머리를 쿵쿵 찧었지만, 진 노태야의 목소리는 냉담하기만 했다.
“내게 머리를 조아릴 것 없다. 우리 부자는 서로를 잘 알지 않느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너 또한 내 생각을 잘 알 테니, 위선적인 빈말은 집어치워라.
내 다시 한번 물으마. 신하의 도리를 따르겠느냐, 사람의 도리를 따르겠느냐?”
“아버지.”
진소는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고,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자가 처한 상황을 아버지도 잘 아시잖습니까. 소자가 이런 결정을 내리면 장차 어떻게 될지, 소자가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아버지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이 혼사에 동의하지 않는 게, 이 혼사에 동의하는 것보다 더 쉽다는 사실도 알겠지?”
진 노태야의 물음에 진소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자, 알고 있습니다.”
다들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욕하고 조롱하겠지만, 이 악물고 버티면 지나갈 일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의 이 지위와 권세를 포기하는 게 정녕 그리도 아쉽단 말이더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진소는 다시 머리를 조아린 뒤, 고개를 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아버지.”
진소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가 정녕 권세를 탐하였다면, 당초 경왕을 보필하여 태자로 세우는 일에 동의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바보를 보필하여 태자로 세우고 고씨 가문을 축출하며, 태후를 압박하여 물러나게 하는 일들을 벌이는 동안, 진소는 오만방자하게 횡포를 부린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한 말들은 그의 권세와 지위를 보장해 줄 수 없었고, 조정 대신들에게 눈엣가시가 될 뿐이었다. 이제 진소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할 것이고, 그가 얼마나 큰 위험과 압박을 맞닥뜨릴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에 비해 장강주 등 유림과 손잡고 종친을 양자로 들여 대통을 잇게 했다면, 황제를 옹립한 공으로 새 황제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관운이 트이는 건 물론이고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으리라.
“폐하께서 중병으로 쓰러지신 후, 소자는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습니다.
소자는 폐하께서 소자와 무릎을 맞대고 앉아 고금을 논하던 때를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폐하께서 큰 포부를 펼치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요.
소자는 이대로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진소는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꼭 단랑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좀 더 기다리고, 참아 보자. 고능준을 처리하고 나면, 모든 게 쉬워질 게야.”
진 노태야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자, 진소가 부복한 채 대답을 올렸다.
“아버지, 소자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못 기다리십니다.”
멈칫하던 진 노태야는 곧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내년에도 태자의 혼사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정말 아수라장이 될 겁니다.”
내년이라…….
내년에 폐하께서 붕어하시고 바보 태자의 국혼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황손조차 없으면, 조당은 또다시 시끄러워지겠지. 지금은 잠시 물러나 있는 양자 입적 찬성파도 다시 앞으로 나올 테고.
그때쯤이면 폐하께서 병석에 누우신 지도 오래이니 그나마 남아 있는 경외감마저 전부 소진될 터. 딴마음을 품는 작자들이 얼마나 많을지 안 봐도 훤하지.
진 노태야는 진소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 일에서, 가장 초조한 건 네가 아닐 것이다. 조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자가 따라야 할 건, 실상 군자의 도가 아니니라.”
태자가 황제로 등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초조해야 할 사람은 고능준이었다. 앞으로 나와 대책을 내놓아야 할 사람도 고능준이지, 진소가 아니었다.
이 일은 고능준이 권세를 이용해 음해한 것이 자명했다. 진소의 충정과 염치, 군자의 도를 능욕하며 오물을 끼얹고, 명성을 짓밟은 일이었다.
만백성과 문무백관에게 욕을 들으면서도 새 황제가 등극하여 강산을 안정시키도록 도와야 하되, 강산이 안정을 찾으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사람이 바로 진소였다.
소인배의 간계에 당했음을 알면서도 군자의 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막다른 길밖에 없었다. 지금 취해야 할 태도는 군자의 도를 버리고, 상대가 썼던 방법을 그대로 써서 반격하는 것이리라.
군자의 도를 버리라…….
진소는 고개를 들고, 결연한 표정으로 부친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스스로 돌이켜보아 의롭지 아니하면 상대가 보잘것없고 비천한 사람이라 해도 두려워하겠지만, 스스로 돌이켜보아 의롭다면 천만이 가로막아도 나는 나아가리라(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증자의 약조를, 소자는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