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75)

작가의 말:

옛날에 합환주를 마실 때는 본문에 묘사한 것처럼 마시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애틋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각색한 것이니,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속상해하지 말고-

“전하, 그만 돌아가셔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기다리다 못한 내시가 재빨리 진안 군왕을 재촉했다.

진안 군왕이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내시가 다급하게 진안 군왕을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게 했다.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이 휘청이자, 내시가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여봐라.”

문밖에서 내시 두 명이 들어왔다.

“가마는 밖에 있느냐?”

내시가 묻자, 방으로 들어온 내시들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를 모시고 가거라.”

내시의 명에, 두 내시가 빠르게 진안 군왕의 좌우를 부축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킨 뒤,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가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부인,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내시가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시는 그제야 공손하게 물러났다.

방 안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 그럼 부인도 편히 쉬세요.”

전복인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혼인을 축복하는 말 몇 마디를 건네고는 우르르 밖으로 물러났다.

“다 나은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있나. 내시 한 명이 부축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던데. 그래도 신랑 노릇을 하겠다고 사람들을 다 불렀네.”

“아까 그때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그러니까요. 다들 봤죠? 전하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을 때, 나는 전하께서 그 자리에서 쓰러지시는 줄 알았다니까? 하마터면 혼례도 못다 치르고 상을 치르는 줄 알았잖아요.”

“아, 퉤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입에 올려!”

문밖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와 반근은 여인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대면서 방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놀라 서로를 마주 보고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정교랑은 구리거울 앞에 서서 혼자 봉관을 벗으려고 하고 있었다.

“아씨, 저희가 해 드릴게요.”

시녀와 반근이 서둘러 다가갔다. 정교랑이 자리에 앉아서 두 사람에게 머리를 맡겼다.

“아씨, 군왕께서 직접 맞절하러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반근이 머뭇거리다가 기대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다 나으신 거 아닐까요?”

진안 군왕이 혼례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반근은 기쁘다 못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진안 군왕은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리고 내시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신부 가마를 향해 걸어왔고, 두 내시의 부축을 받으면서 정교랑을 이끌고 절을 올리는 곳까지 왔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인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드디어 원만하게 끝났네.

“아니.”

정교랑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반근의 눈가에 기대가 사라지면서, 정교랑의 머리에서 장신구를 떼어내던 손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아씨께서 계시는 한, 분명 차차 나아지실 거예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반근이 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군왕부의 시녀가 연회석을 차리러 들어왔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세 사람은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다. 반근과 시녀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종일 가슴을 졸이며 전전긍긍하느라 배고픔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혼례가 원만하게 끝난 지금은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와 눈앞에 별이 보이는 듯했다.

“다른 건 일단 내려놓자. 지금은 밥 먹는 게 가장 중요해.”

시녀의 말에 반근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밥부터 먹고 아씨의 목욕을 도와드릴게.”

“그리고 우리가 늘 지니고 다니는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 줘. 아씨께서 평소 쓰시는 물건들을 꺼내 놓자.”

“아, 어디 있는지 알아. 사람들이 동쪽 곁방에 두는 걸 봤어.”

시녀와 반근이 들뜬 모습으로 말했다.

밤하늘이 짙어지고, 활짝 열린 창문과 문 사이로 여름밤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방 안에서 간간이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안 군왕이 대청에 마련한 연회가 끝나자,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군왕부 밖에서 말에 올라타려던 주복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군왕부를 바라보았다.

“주 공자.”

진소 부인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내가 정씨 저택에 들렀다 갈게요”

주복이 서둘러 진소 부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부인께서 며칠을 고생하셨는데, 괜찮습니다. 어서 가서 편히 쉬십시오. 여기 일은 제가 돌아가서 범 형님과 형수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진소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찌 됐든 간에, 전하께서 직접 맞절을 하러 나오실 정도면 분명히 몸이 많이 나아지셨다는 거겠지.”

주복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가마를 타고 나타났을 때는 주복도 꽤 놀랐다. 진안 군왕의 안색은 누가 봐도 안 좋아 보였지만, 그래도 내시의 부축을 받으면서 두 발로 걸어 다닐 수는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연회석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들려오는 말들로 인해 주복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연회 음식을 먹는 사람도 몇 없었을뿐더러, 다들 고개를 숙이고 수군대기 바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는 진안 군왕이 신방에서 혼절했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주복은 나중에 사람을 시켜 반근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반근은 직접 주복을 만나러 와서 그런 일은 없었다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반근의 대답을 들은 주복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공자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교랑이 곁에 있으면 전하의 몸도 차차 나아지겠죠. 그리고 전하께서는 병이 든 것도 아니니.”

주복의 안색을 살피던 진소 부인이 위로를 건넸다.

병이 아닌 게 더 두렵습니다. 병이면 고치기라도 할 텐데, 명줄은 어찌할 수가 없으니.

주복이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소란스러웠던 군왕부 앞은 마차와 말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평소와 같은 조용함을 되찾았다.

주복 등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씨 저택이 시끌벅적해졌다.

“낮에 혼례 행렬이 얼마나 떠들썩했는지. 그 사람들이 족히 백 장은 되어 보이는 종이를 글씨로 가득 채워서 진왕 군왕부에 보냈대요.”

“엄청난 명필은 아니라고 해도, 그 많은 사람이 전부 붓을 들고 아씨의 혼사를 축하하는 게, 꼭 백성들이 만민산(萬民傘: 선행을 많이 베푼 관리에게 백성이 바치는 우산. 커다란 우산에 수많은 비단 조각을 붙여 백성의 이름을 수놓았기에 붙은 이름)을 바치는 광경 같았다니까요.”

“그러게요.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글씨 구경을 하느라, 아씨의 혼수 구경도 잊을 정도였어요.”

방 안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혼수를 볼 일이 뭐 있어. 우리 교랑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인데.”

황씨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아씨, 군왕 전하께서도 직접 나와서 맞절을 하셨어요. 직접이요! 게다가 아씨를 모시고 가마에서 내리는 것부터, 신방에 들어가 붉은 천을 걷고 합환주를 마시는 것까지 모두 다 직접 하셨어요.”

여종 두 명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범강림은 기뻐하면서 고개를 젖혀 술잔을 비웠다. 그가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얼굴로 반대편에 앉은 주복을 쳐다보았다. 주복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주 공자님.”

범강림이 불렀지만, 주복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 공자님?”

범강림이 목청을 높여서 다시 한번 주복을 불렀다. 주복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범강림을 바라보았다.

“주 공자님도 며칠 내내 고생했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십시오.”

범강림이 무언가 생각난 듯 주복에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여기서 하룻밤 묵는 건 어떻습니까? 집으로 돌아가도 혼자일 텐데.”

주복이 고개를 젓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가 보겠소.”

범강림과 황씨가 서둘러 주복을 배웅하러 나갔다. 주복은 홀로 말을 타고 짙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래도, 좀 불쌍하네. 저 아이도 참 괜찮은 아이인데.”

황씨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범강림은 부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주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문지기에게 술동이를 하나 가져오라고 명했다.

“왜요?”

황씨가 물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범강림의 말에 황씨가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날도 어두워졌고, 당신도 며칠 동안 고단했을 텐데, 이 시간에 어딜 간다는 거예요?”

범강림은 황씨의 물음을 뒤로하고 술동이를 품에 안은 채 말을 타고 집을 떠났다.

한여름 밤의 경성은 무더운 대낮보다 더욱 떠들썩했다. 큰길로 가던 범강림은 강가를 따라 동쪽 성문으로 쭉 나갔다. 성문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더는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도,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지도 않았다. 망망한 어둠이 사방에 드리워지고, 여름벌레들과 올빼미 소리가 주위에서 들려왔다.

범강림이 옷을 정리하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가 술동이 뚜껑을 열더니 무덤에 대고 말했다.

“아우들아, 내 술이 좀 늦었지? 형님인 내가 먼저 벌주 석 잔을 마시마.”

말을 마친 범강림이 고개를 젖혀 가며 술을 꿀떡꿀떡 몇 입 마셨다.

“자, 이제 너희들이 마셔라. 나는 셋째 아우랑 이야기 좀 해야겠다.”

범강림이 웃으면서 손에 쥔 술동이를 무덤 위로 깨트렸다. 독한 술 냄새가 번지면서, 형제들이 자기가 먼저 술을 마시겠다며 술동이를 들고 장난치는 모습이 범강림의 눈앞에 떠올랐다.

범강림이 헤벌쭉 웃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비석을 바라보았다.

“셋째야. 누이는 속상해하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범강림의 말이 끝나자, 무덤 앞에 정적이 흘렀다.

“너도 속상해하지 말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범강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밤하늘이 더욱 어두워지자, 거리에 있던 사람들도 차츰 흩어졌다. 야식을 파는 점포들 외에, 길가의 노점들도 전부 철수했다.

두 다리가 저려 더는 못 걷겠다고 생각한 사환이 주복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자님,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가고 있잖아.”

주복이 언짢은 기색으로 사환을 노려보자 사환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데 경성을 족히 반 바퀴는 넘게 돌고 있으시면서.

“공자님, 속상하신 건 알겠는데요. 공자님께서도 며칠 내내 고생하셨잖아요.”

“누가 속상하대?”

주복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더욱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사환을 노려보았다.

“그냥 좀 걷고 싶어서 그런 거야!”

사환은 머쓱해져서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주복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 여기가 어디냐는 듯 막막한 표정이 드러났다.

“돌아가자.”

주복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한 뒤, 몸을 날려서 말에 올라탔다.

멀리서 주씨 저택의 대문이 보이자, 사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돌아왔네.

사환이 기뻐하던 찰나, 주복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사환이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는 곧장 길가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낮은 신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진호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주복이 또 주먹을 휘두르려고 손을 들자, 진호는 주복의 손을 피하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진호가 손에 쥔 술동이를 주복에게 보여줬다. 술동이를 본 주복은 이를 악물고 진호에게 주먹을 몇 번 더 휘두르고는, 바닥에 누워 웃고 있는 진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주복이 화를 냈다. 진호가 손에 쥔 술동이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흔들었다.

“술 마시려는 거지.”

진호가 빙긋 웃으면서 술동이를 기울였다. 술이 얼굴 위로 쏟아지면서 진호의 앞섶을 흠뻑 적셨다.

주복은 진호를 내려다보다가 발로 세게 걷어차고는 몸을 홱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육낭.”

진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주복의 걸음이 멈칫했다.

“나와 같이 마시지 않겠나?”

진호는 바닥에 누워 주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자신을 향해 술동이를 흔드는 주복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인이, 네 말을 믿는다고 했어.”

주복이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진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알아. 그 여인이 내 말을 믿는다는 걸.”

진호의 얼굴에서 술인지 눈물인지 모를 촉촉한 물기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주복이 진호를 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믿는 거지, 널 믿는 게 아니야.”

주복이 말을 끝낸 뒤,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뗐다.

“주육! 술 마시는 것도 안 돼?”

진호가 주복의 뒤에서 외쳤다. 하지만 주복의 발걸음은 다시는 멈추지 않았고, 주복은 그대로 대문을 넘어섰다. 사환이 서둘러 주복의 말을 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주씨 저택의 대문이 잠시 열렸다가 닫히고, 어두컴컴한 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진호가 바닥에 누워서 또 술동이를 들고 자신의 얼굴에 술을 부었다.

“술 마시는 것도 안 돼? 축하 선물도 주면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이젠 더는, 아무것도?

진짜 꿈 같네. 이 모든 건, 다 꿈이겠지.”

꿈일 거야! 분명 꿈일 거야!

술이 바닥났다. 술동이를 두어 번 흔들던 진호는 술이 더 없는 것에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가 손에 있던 술동이를 세게 던지자, 술동이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내게는 미인이 그려준 그림 한 폭이 있네, 향기로운 포도주로 축하를 해야지. 어떤 미인이 있었다네. 한 번만 봐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흐느끼는 듯한 노랫소리와 간간이 섞인 웃음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번졌다.

마당에 있던 주복이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고는 술을 동이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하루만 보지 않아도, 미칠 듯한 그리움이 사무치네. 기나긴 그리움은 영원한 추억이 되고, 짧은 그리움 또한 한이 없구나.”

깊은 밤, 욕실을 나온 반근은 정교랑의 시중을 들겠다는 군왕부 시녀들을 재차 사양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반근은 잠시 어리둥절하여 멈칫했다.

등불은 방 안에 놓여 있던 여덟 개 중 두 개만 남아 있었고, 휘황찬란하고 화려한 장식품은 모두 치워져 있었다. 창가 앞에는 탁자와 방석이 놓여 있고, 벽에는 정교랑이 매일 쓰는 활이 걸려 있었다. 익숙한 향로와 낮은 의자 등도 놓여 있었다.

반근이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자, 탁자 앞에서 팔걸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던 여인이 반근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반근이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아씨, 제가 꿈꾸고 있는 줄 알았어요.”

반근이 미소 띤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우리 집에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우리 집이지.”

정교랑은 가볍게 대꾸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집…….

하긴, 앞으로는 여기가 아씨의 집이지. 아씨가 계신 곳이 바로 우리 집이고, 집이라면 다 똑같으니까.

반근의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렸다. 반근은 재빨리 정교랑 옆으로 다가가 따뜻한 차를 따랐다.

“아씨, 정말 책을 읽으시려고요? 종일 힘드셨을 텐데, 일찍 주무시는 건 어떠세요?”

정교랑이 음, 하고 대꾸했다.

“이 한 장만 다 보고.”

반근이 침상으로 가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붉은색 이불과 베개가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반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사람이 쓸 베개와 이불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개켰다.

이때,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반근이 깜짝 놀랐다.

정씨 가문의 시위들은 자연스럽게 정교랑과 함께 군왕부로 들어와 정교랑의 하인을 자처했지만, 군왕의 내원까지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군왕부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도, 반근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씨.”

시녀가 문을 열고 다소 당황한 기색으로 들어왔다.

“전하께서 오셨어요.”

이 시간에 오셨다고?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침상 옆에 서 있던 반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반근의 귓가에 전복인과 여인들이 방을 나오며 수군대던 목소리가 맴돌았다.

게다가 아씨께서는 전하께서 나아지신 게 아니라고 하셨어. 설마 정말로 몸이 더 안 좋아져서, 아씨께 목숨을 구해 달라고 오시는 건가?

반근은 다리에 힘이 풀려 침상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반근이 품에 안고 있던 베개가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

방 안에 등불 한 개가 더 밝혀지고, 가마와 함께 사람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을 뵙습니다.”

휘장을 사이에 두고, 바깥 대청에서 이 태의가 감격에 찬 얼굴로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정교랑이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스승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태의가 또 한 번 예를 올리자, 정교랑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서 예를 피했다.

“부인, 당초 진 노태야의 병을 고칠 때, 제가 옆에서 침놓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잖습니까. 이번에 제가 전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침술을 쓴 덕분이었습니다. 아니, 제가 구한 게 아닙니다. 부인께서 군왕 전하의 목숨을 또 한 번 살려주신 겁니다.”

이 태의가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하자, 옆에서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했다.

“이 태의, 시간이 늦었으니, 다른 날을 골라 회포를 푸시지요.”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 그렇지, 그렇지. 오늘은 정 낭자의 신혼 초야잖아. 아무래도 신부이니, 종일 신경이 곤두서서 피곤하기도 할 테고.

이 태의가 민망한 듯 손을 비비고는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실은 이렇습니다. 전하의 상태가 갑자기 급격하게 나빠지셔서요.”

이 태의의 말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반근의 다리가 또다시 후들거렸다. 옆에 있던 시녀가 반근을 부축하자, 반근이 손을 떨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갑자기 휘장이 펄럭이면서, 정교랑이 밖으로 나갔다. 반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시녀도 재빨리 정교랑을 따라 휘장 밖으로 나갔다.

바깥 대청에 있던 사람들과 몇몇 막료들도 정교랑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밖으로 나올 줄 몰랐는지, 깜짝 놀라 옆으로 몸을 돌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막료들이 어색해하며 속으로 정교랑을 원망했다.

흠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산발해서는 그대로 나오다니. 여인의 몸으로 어딜.

막료들과 달리 이 태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정교랑을 가마 앞으로 데리고 갔다. 시녀가 등불 한 개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여름용 겉옷을 걸친 진안 군왕은 굳은 표정으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얼핏 보면 깨어있는 건지, 잠든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정교랑이 잠시 진안 군왕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상태는 괜찮아요.”

이 태의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더 나빠지진 않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영 안심이 되질 않습니다. 저녁에는 약도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이 태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 선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자네들이 허튼짓을 해서 그런 것 아닌가!”

저 사람의 허튼짓이라는 말은, 아마 군왕 전하께서 직접 맞절하러 나오신 걸 뜻하는 거겠지.

시녀가 곁눈질로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고 선생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침상에서 내려오지도 못하시던 분인데, 대체 전하께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렇게 오래 서 계시게 한 것도 모자라서, 그 먼 길을 직접 걸으시게 하다니!”

그랬구나. 하긴, 침상에 오래 누워 있던 사람은 병이 다 낫더라도 갑작스럽게 많이 걷게 해서는 안 되지. 군왕 전하께서도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많이 걸으셨으니. 그래서 합환주를 마신 뒤에, 내시 한 명으로 전하를 부축하기 버거웠구나.

“이 태의, 이 태의까지 이럴 줄은 몰랐소이다. 저들과 짜고 날 따돌리기까지 하다니. 존경하는 스승을 위해서라면, 전하의 건강도 내팽개치는 건가!”

고 선생은 말할수록 부아가 치미는지, 결례를 따지지도 않고 고개를 치켜들며 방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맞절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까짓 맞절 한 번 안 했다고 해서, 뭐가 잘못되기라도 하냔 말이오!”

고 선생의 말에, 내시와 이 태의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잠자코 고 선생의 꾸짖음을 듣고만 있었다. 방 안에는 고 선생의 목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떠들 거면 나가서 해요.”

고 선생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난 쉬어야겠으니까.”

나는 노비도 아니고, 막료이자 식객인데, 나를 이렇게 무례하게 내쫓다니!

고 선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태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풉 하고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 여인이 말을 저런 식으로 해서 사람을 당황시키는 것은, 나도 익히 겪었지.

“제 불찰입니다. 제 불찰로 군왕 전하께서 이렇게 된 것이니, 부디 부인께서 전하를 하룻밤만 돌봐 주십시오. 그래야 저희가 안심이 되어서요.”

이 태의가 상황을 수습하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음, 하고 대꾸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서 전하를 부축해서 안으로 모셔라.”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진안 군왕의 측근 내시였다. 나머지 사람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시녀들이 서둘러 휘장을 걷었다. 내시 네 명이 진안 군왕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어서 이부자리를 깔아 놓자.”

시녀가 아직도 멍한 표정의 반근을 재촉하면서 다급하게 침상 쪽으로 갔다.

반근은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허둥지둥 주워 들고 시녀와 함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진안 군왕이 아직도 혼례복을 입고 있었던 터라, 시녀와 내시들이 서둘러 그의 옷을 갈아입혔다.

방 안에 등불이 두어 개쯤 더 밝혀질 무렵, 창밖은 이미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부인, 밤사이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두 명 정도 더 남겨 드릴까 싶은데, 어떠신지요?”

내시가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괜찮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저희 아씨, 아니, 부인께서는 밤새 시중드는 사람이 있는 걸 불편해하세요. 그러니 공공,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쉬셔도 됩니다.”

바깥 대청에 있던 고 선생은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진안 군왕이 걱정되어 차마 발걸음을 떼지는 못했다. 시녀의 말을 듣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래서야 쓰나? 전하께서 저 지경이 되셨는데.”

“저 지경이 되었는데, 당신들이 곁에 있다고 해서 나아질 수가 있나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이 태의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얼굴이 새파래진 고 선생의 소매를 붙잡고 조용히 다독였다.

“갑시다. 고 선생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정 낭자는 치료할 때 주변에 누가 있는 걸 허락하지 않소.”

“맞습니다. 정 낭자 한 사람이 우리 열 사람보다도 강할 테니, 우리는 그만 자리를 비켜 드리지요.”

내시도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회랑 아래로 나온 고 선생의 얼굴은 붉은 등롱에 비쳐 더욱 새빨갛게 보였다.

“다들 아주 마음이 편하신가 봅니다.”

고 선생이 비꼬면서 눈을 흘겼다. 내시가 마당을 돌아보고는 작은 한숨을 토했다.

“선생, 때로는 운명을 따라야만 합니다.”

운명을 따라?

“정 낭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믿지 못할 사람인지조차도 다 전하의 운명이라는 말이지요.”

내시가 조용히 말하고는 손을 몸 옆으로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층계를 내려갔다.

그게 다 무슨 소리요! 분명히 피할 수 있는 일들인데, 어째서 이게 운명을 따라야만 하는 일이 되는 게야?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태의가 고 선생의 옆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선생,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낭자가 못 미더울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

고 선생은 방에서 차례로 나오는 시녀들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미 문가에 다다른 내시와 이 태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좋게 말할 때 들으시오. 나를 속일 생각은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고 선생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고 선생을 등지고 걸어가던 이 태의와 내시가 겁이 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시녀는 등불 두 개를 끄고, 탁자 앞에 앉아 책을 읽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차를 더 드릴까요?”

“괜찮아.”

정교랑이 대꾸하고는 잠시 책을 내려놓고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향을 피워 봐.”

시녀가 흠칫 놀랐다.

“아씨께서 직접 만드신 그 향이요?”

반근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향을 찾으러 동쪽 곁채로 걸어갔다.

“아씨께서 향도 만드셨어?”

시녀가 서둘러 반근의 뒤를 쫓아왔다.

동쪽 측방의 짐 상자들을 뒤적이던 반근이 기쁜 기색으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응. 사공자님께서 안 계시던 며칠간, 아씨께서 매일 조금씩 만드셨어.”

반근이 대답했다. 시녀는 점포 일들로 바빠서 자주 집에 없다 보니, 당연히 이런 사소한 일들을 알지 못했다. 시녀가 아쉬워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엄청 좋은 향이죠?”

시녀가 불을 붙인 향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씨께서 만드신 거니까 당연히 좋은 향이죠.”

시녀의 말에 정교랑이 웃었다.

“그건 맞아. 내가 잘 만들긴 하지. 너희도 이제 그만 가서 쉬어.”

정교랑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와 반근이 예를 표했다.

“아씨, 저희는 바로 바깥쪽에 있을게요.”

방 안이 조용해지자, 정교랑은 마지막 한 글자를 읽은 뒤 책을 내려놓았다. 밖에서 들려오던 시녀와 반근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간간이 코 고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종일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던 반근과 시녀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침상을 바라보았다. 사내 역시 침상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침상 가까이 다가가, 그 위에 걸터앉고 젊은 사내의 그늘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기, 물 좀 마실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긴 속눈썹을 살짝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진안 군왕이 정신을 못 차리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며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당신이네요.”

진안 군왕은 짤막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지금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빠르게 생각했다. 그가 베개에 머리를 댄 채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인 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침상 옆의 등불을 껐다.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방 안이었지만, 진안 군왕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침상에 걸터앉은 여인이 자신의 옆에서 휘장을 내리고 얇은 이불을 덮으며 눕는 모습이.

가뜩이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여름밤, 두 사람은 거의 팔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향기롭고 부드러운 여인의 내음이 진안 군왕의 코끝을 스쳤다.

진안 군왕이 두 눈을 뜬 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까 저녁에 침상에 잠깐 앉았을 때, 천장에 향낭 같은 게 걸려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누가 치웠나? 침상 위에는 말린 과일이 뿌려져 있었는데, 누운 자리가 부드럽고 편한 걸 보니 그것도 같이 치웠나 보네. 휘장까지 내렸으니 더울 텐데, 방 안에 얼음 대야를 몇 개나 갖다 놨지? 그걸로 충분하려나?

진안 군왕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찰나, 여인의 손이 그의 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진안 군왕은 일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의 몸에서 손이 잠시 떨어지고,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다시 그의 몸에 손이 닿았다. 여인의 손은 진안 군왕의 몸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닿았다가 또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진안 군왕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이 느낌은…….

“자요.”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며, 동시에 진안 군왕의 몸에 닿아 있던 손이 거둬졌다. 진안 군왕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그의 곁에 누워 있던 여인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 밖을 보고 누웠다. 곧이어 여인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참다못한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교랑을 불렀다.

“정방.”

정교랑이 음, 하고 대꾸했다.

“난, 견디기 힘들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을 등지고 누워있던 여인이 그의 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런 일에, 견디기 힘들지 않은 게 더 이상하죠.”

잠에 취한 반근의 귀에 방에서 어떤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애써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잠이 쏟아져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생겼나?

어서 일어나, 어서 잠에서 깨야 해!

힘껏 눈을 떴지만, 눈앞엔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반근이 깜짝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쉬었다. 만물이 조용해진 시간, 방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없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반근은 조금 전에 자신이 들은 목소리를 다시 들으려고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꿈이 아니었어!

반근의 움직임 때문에 시녀도 잠에서 깼다. 시녀가 잠에 취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안쪽에서…….”

반근이 안채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반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채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파요.”

반근과 시녀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반근은 다급하게 맨발로 땅을 디뎠고, 시녀도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말했잖아요. 이런 일은 힘든 게 당연하다고. 조금만 참아 봐요.”

작은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 뒤로, 안채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낮은 신음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시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이 굳어졌다.

설마…….

시녀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추측하면서도, 서둘러 손을 뻗어 반근을 제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미 바닥에 발을 내리고 걸음을 옮기려던 반근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붙잡는 시녀 때문에 몸이 휘청였다.

“언니?”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녀가 반근의 소매를 꼭 잡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별일 아니야. 정말 별일 아니니까, 어서 이리 와서 자자.”

반근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마, 신혼 초야라면 응당 있어야 할 움직임 때문이겠지.

시녀는 예전에 나이든 여종들과 모여 몰래 잡담을 나눌 때, 신혼 첫날밤에는 꼭 저런 소리가 난다고, 그리고 조금 아플 거라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얼굴이 귀까지 빨개진 시녀가 반근의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이자, 반근도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군왕 전하께서 여기 오신 건, 몸이 안 좋아서였잖아? 그,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을?

“우리는 직접 맞절하러 오실 줄도 몰랐었잖아.”

시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긴, 오늘 예상치 못한 일이 참 많기는 했지. 그, 그래도 초야까지 치르실 줄은…….

“아씨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으니까, 우, 우리도 상관하지 말자.”

시녀가 조용히 말하고는 재빨리 자리에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시녀의 모습을 보자 반근은 얼굴이 더욱 화끈거렸다. 반근은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싶지만, 차마 그럴 엄두는 나지 않아 서둘러 시녀의 옆에 누워 눈을 꼭 감았다.

여름밤이 점점 더 깊어지면서, 방 안에서는 간간이 무슨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 같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머릿속에 드는 온갖 생각을 떨치던 반근과 시녀가 잠들면서, 실내는 다시 고요해졌다.

어제, 시녀와 반근은 자신들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밤새 꿈을 꾼 터라 버둥거리며 깨어났을 땐 다소 어리둥절했다. 눈에 들어오는 낯선 환경을 보며 반근은 정신을 차렸다.

“언니?”

반근이 몸을 일으키고 시녀를 깨우자, 잠에서 깬 시녀는 파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창밖을 보고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때,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씨?”

시녀가 문밖에서 정교랑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안에서 정교랑이 응, 하고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시녀는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반근이 팔꿈치로 시녀를 쿡 찌르고 나서야 시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편한 일상복 차림으로 간단하게 머리를 올려 묶고 덧옷을 걸치고 있었다. 시녀와 반근이 반사적으로 침상을 쳐다보았다.

휘장이 아직 내려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침상 위에 있는 사내는 아직 잠들어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침상 아래로 향하자, 반근과 시녀는 뜨거운 무언가에 덴 듯이 홱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휘장 아래로 삐져나온 것은 다름 아닌 연두색 내의였다.

아씨께는 저런 색의 내의가 없는데, 그럼 저건…….

“부인, 일어나셨는지요?”

문밖에서 낯선 아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소리에 시녀와 반근은 깜짝 놀라 문가를 쳐다보았다.

아낙은 정교랑의 시중을 들라고 궁에서 보낸 시녀였다. 정교랑이 밤새 당직을 서며 시중드는 것을 거절한 탓에, 시녀들과 여종들은 모두 마당 옆의 곁채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동이 틀 무렵인데도 벌써 마당에서는 발자국 소리와 비질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벽에 걸린 활을 집어 들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시녀와 반근은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정교랑을 따라나섰다.

반근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시녀의 팔을 붙잡고 휘장 아래로 보이는 옷자락을 가리켰다. 시녀가 발을 구르고는 내의를 재빨리 끄집어내서 옆에 있던 옷걸이로 휙 던졌다. 그러고는 잰걸음으로 정교랑을 따라갔다.

문이 열리고, 정교랑이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본 내시와 궁녀들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으니, 들어가 보게.”

정교랑의 말에 내시가 몹시 기뻐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정교랑은 내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활을 든 채 내시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정교랑의 손에 들린 활을 본 궁녀와 시녀들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부인, 무엇을 하시려는 건지요?”

내시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희 아씨, 아니, 저희 부인께서는 아침마다 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세요.”

시녀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호칭으로 정교랑을 칭하며 내시에게 대답했다.

활쏘기 연습?

내시와 궁녀들이 일제히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궁술이 몹시 뛰어나고, 팔 힘과 악력이 센 여인이란 말은 익히 들었어. 그 실력이 부단한 노력과 연습의 결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신혼 첫날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줄이야.

“예, 알겠습니다. 여봐라.”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 한 명을 불러와 정교랑에게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전에 여기 계시던 경왕 전하께서 워낙 뛰노는 것을 좋아하시다 보니, 본디 연못이었던 곳을 흙으로 메꾸고 넓은 연무장으로 만들라는 군왕 전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 거기구나. 알겠네.”

내시가 멈칫했다.

하긴, 전하께서 정 낭자를 데리고 왕부 곳곳을 돌아다니셨던 적이 있었지. 연무장 옆에 있던 꽃밭도 정 낭자가 제안한 음양도로 바꿨었고.

시녀도 정교랑을 따라 연무장에 가고 싶었지만, 반근이 한발 빠르게 말했다.

“언니는 여기 남아서, 부인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씻으시게 준비해 줘.”

반근이 속사포로 말하고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발을 구르며 반근의 뒤를 쫓아가려던 시녀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내시와 궁녀들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반근 낭자, 저희는 부인의 입맛을 잘 모르는데, 아침 식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내시가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말하자, 시녀가 기뻐하면서 얼른 대답했다.

“내가 알아요. 내가 가 볼게요.”

시녀의 말에, 내시가 얼른 다른 이를 시켜 시녀를 부엌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시녀는 다른 궁녀에게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후 부엌으로 떠났고, 내시 등은 그제야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뒤늦게 도착한 이 태의가 내시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내시가 조심스럽게 휘장을 들어 올렸다. 아침 햇살이 침상을 비추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실눈을 뜨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내시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전하께서 간밤에 숙면을 취하셨는……. 악!”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던 내시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내시의 비명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태의, 태의!”

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뒤를 향해 손짓하자, 한달음에 다가온 이 태의가 휘장을 홱 걷었다.

“왜 그러는가?”

황급하게 묻던 이 태의가 내시를 따라 침상 위를 바라보았다. 침상 위로 펼쳐진 광경에 태의 또한 내시만큼 놀란 얼굴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문밖에서 시녀 한 명이 들어오더니 내시를 향해 말했다.

“부인께서 침상 정리를 명하셨습니다.”

침상을 정리하라고 했다고?

방 안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침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내시와 이 태의가 각자 좌우로 휘장을 활짝 열어젖힌 덕에, 휘장 너머의 광경이 훤히 보였다.

진안 군왕의 상반신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고, 그의 허리 아래로 이불이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세상에! 어젯밤 여기에 들어오실 땐 저런 모습이 아니셨는데!

이부자리가 어지럽다니! 앓아누워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분께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주무셨을 리 없잖아!

설마!

모든 사람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디선가 팍 소리가 들리자,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내시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자, 자네, 자네들이 한 이 대단한 짓 좀 보시게!”

고 선생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침상 앞에 서 있던 내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시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 선생이 당황한 듯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참으로 황당하군!”

고 선생이 걸음을 멈추고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소?”

“어, 어쩌면 그런 게 아닐 수도…….”

내시가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조용히 대꾸했다.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실에 있던 궁녀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흰색 비단을 손에 쥔 궁녀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저기, 그…….”

궁녀의 시선이 이 태의에게 진맥을 받던 진안 군왕에게로 향했다.

“경,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경하?

몇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궁녀의 손에 들린 흰색 비단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새하얀 눈밭에 점처럼 피어난 매화 같은 혈흔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이 펑 하고 터졌다.

고 선생과 이 태의는 벌써 슬하에 손자까지 둔 나이 든 사내인지라, 당연히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내시는 사내라고 할 수 없으나, 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인지라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양이 조금 적긴 하지만, 그래도 저기 묻어 있는 건 확실히 혈흔이야.

역시, 그, 그 일을…….

이 태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베개를 진안 군왕의 몸 위로 떨어트렸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전혀 미동 없는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조금 전 휘장을 걷을 때 잠깐 의식을 찾았던 것 빼고는 계속 의식을 잃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잿빛이 된 진안 군왕의 얼굴에 희미하게 창백한 안색이 비쳤다. 목 주변으로 새파란 멍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저건 손으로 꼬집어서 만든 상처 같은데…….

방 안에 또 한 번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고 선생이 이를 악물고 그 사이로 두 글자를 뱉었다.

“짐승!”

“그럴 리 없어.”

“전하께서 저 지경이신데, 어떻게 그런…….”

수군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자, 욕실에서 목욕물의 온도를 확인하던 시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부엌으로 갔던 시녀는 차마 안채로 오기가 두려워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녔지만, 그래도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시녀가 안채로 돌아오자마자, 궁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시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건 부인의 것이니, 잘 보관해 둬요.”

시녀는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상자를 집어던질 뻔했다.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궁녀의 표정은 시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궁에서 평생을 지낸 궁녀인지라, 귀인들이 초야를 치르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한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무지 어떤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부인께서 드실 대추 연밥죽도 하나 더 만들어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한마디 생각해 낸 시녀가 궁녀에게 말하고는 다시 실내로 시선을 돌렸다.

시녀는 조금 전에 본, 거의 잿빛이 된 진안 군왕의 안색과 혼신의 힘을 다한 듯 피곤한 모습을 떠올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보양식을 드실 건 전하인가?

어젯밤에 진짜 뭔가 있었나 보네. 전하께서 먼저 시작하신 걸까?

맞아, 분명히 전하께서 먼저 시작하셨을 거야. 우리 아씨는 그런 분이 아니잖아!

전하께 아직 그럴 힘이 남아 있을 줄이야.

시녀가 잡생각을 떨쳐내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시녀는 다시 목욕통 안에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하고, 어린 시녀에게 뜨거운 물을 더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후 식사를 대령하라고 했다.

“식사를 옮겨 달라고 해.”

어린 시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시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럴 리가 없기는 왜 없어? 잘 맡아 봐.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잖아.”

“고 선생이 물었는데, 이 태의도 이런 향은 생전 맡아 본 적 없대. 무슨 약 냄새가 난다고.”

“혹시 최음제가 아닐까?”

향! 어제 그 향!

시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다면, 어젯밤에는 아씨가 먼저…….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여종들이 재빨리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이불을 새로 교체한 뒤, 깨끗해진 침상을 확인한 두 여종은 서둘러 시녀에게 예를 표하고 밖으로 물러났다.

아씨께서 먼저 시작하셨다 해도, 분명히 아씨만의 이유가 있을 거야. 아씨께서 절대로 틀린 결정을 내리실 리는 없으니까!

시녀가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문밖에서 부인의 문안을 묻는 소리가 들려오자, 시녀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고 잰걸음으로 문가로 향했다.

문밖에 서 있던 고 선생은 내시들이 가마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 옆에 서 있던 내시와 이 태의의 표정도 다소 어두워 보였다. 그들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정교랑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 후 복잡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청색 치마저고리 차림이었고, 끈으로 동여맨 소매는 아직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등지고 서 있던 정교랑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정 낭자는 저리도 혈색이 좋아 보이는데, 저기 가마에 타 계신 우리 전하께서는 거의 초주검이 되어서 지금껏 주무시고 계시네. 이 태의가 침을 두 번이나 놓았는데도 깨어나시지 못할 정도라니.

이다지도 짐승 같을 수가!

고 선생이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부인!”

고 선생이 억지로 화를 누르면서 정교랑을 불렀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고 선생 일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려는 건가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불러요.”

언제든 부르라고?

고 선생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 거의 혼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또 부르면, 전하께 또 그런 짓을 하려고? 저 짐승 같은 여인이!

“부인, 전하께서 몸이 더 안 좋아지신 듯합니다.”

이 태의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정교랑은 이 태의를 바라보며 손을 들고 말을 제지했다.

“원래부터 안 좋았어요. 난 일단 씻으러 가야겠으니, 이따 얘기하죠.”

정교랑이 유유히 안채로 들어가자, 문밖에 서 있던 세 사람은 경악하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사신! 내 또다시 그대의 말을 믿는 날이 온다면, 그날부로 나는 그대의 성을 따를 거요!”

고 선생이 눈을 부릅뜨고 이 태의를 향해 호통쳤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시들을 향해 손짓했다.

“어서 전하를 거처로 모셔라! 궁에서 태의도 한 명 더 부르고!”

황궁 안에서 궁녀와 내시들의 말을 듣던 태후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태후가 찻잔을 내려놓고 재차 물었다.

“설마, 정 낭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과장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요. 군왕부에서 태의를 더 데려갔는데, 전하의 속이 너무 허하다 보니 약도 넘기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침을 놓아도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군왕부에 있는 사람들은 근심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마마, 맞습니다. 전하의 안색은 산 사람의 안색이 아니었어요.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보였다니까요.”

옆에 있던 궁녀가 한마디 거들었다.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닌데, 그 와중에 그런 짓을 하면 기가 다 빨릴 수밖에!”

“그래도 전하께서는 정 낭자를 진심으로 아끼어 혼례 때도 직접 참석하셨는데, 정 낭자가 그리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쯧쯧.”

궁녀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급할 게 뭐 있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요.”

급하다?

태후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회임하고 싶은 거겠지. 그리되면, 진안 군왕이 이 세상에 없다 해도 속 편히 반평생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역시나 계산적인 여인이었어. 어쩜 그리도 악독할까.

혼례를 올리던 날도, 백성들을 선동해 눈꼴 사나운 꼴을 보이더니, 그것도 자기가 군왕비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서였겠지? 최음제를 써서라도 회임만 한다면, 장차 진안 군왕이 세상을 뜨더라도 그 여인은 안전하고 무탈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 여인은 경왕의 치료를 한사코 거절했고, 또 황후와 진안 군왕을 부추겨 회임에 좋은 비방을 넣은 간식을 안비에게 전해 주었어. 그리고 태백성을 운운하면서 평왕을 해쳤고, 귀비를 광증에 걸리게 했으며, 황상을 풍질로 쓰러지게 했지.

  • 마마, 황후마마께서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을 겁니다. 아마 황후마마께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교랑이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진안 군왕도 정 낭자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고요.

훗날 그들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지를 때, 분명히 그 일에 대한 명분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교랑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명분을 얻고, 명성까지 얻게 되었잖습니까. 신선의 제자, 일식과 월식, 태백성, 번개를 부르는 일 등, 정교랑은 모두가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만들어 왔지요. 장차 정교랑이 누군가를 가리켜 하늘이 점지한 천자라고 한다면, 백성들은 분명히 그 말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고능준의 목소리가 태후의 귓가에 들려왔다.

  • 마마, 마마께서 정말로 이 독버섯을 제거하고, 백성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자 하신다면,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셔서는 안 됩니다.

태후가 한숨을 쉬고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래. 더 기다릴 수는 없지.

“여봐라, 군왕비를 궁으로 부르거라.”

황궁의 내시들이 태후의 명을 전하러 궁을 나설 무렵, 정교랑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평소와 똑같이 글씨 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딱 한 가지 있다면, 오늘은 서재가 아니라 침상이 있는 안채에서 글씨를 쓴다는 것이었다. 군왕부에는 아직 정교랑의 서재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녀는 군왕부의 여종들과 대화하며 관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한참을 대화하던 시녀가 드디어 할 일을 마친 듯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옆에 있던 반근이 서둘러 부채를 들고 다가가 시녀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반근 언니, 고생이 많아.”

반근의 말에 시녀가 풉 하고 웃었다.

“반근 언니, 밖에서 점포 관리하는 것보다, 여기 있는 게 더 힘들지?”

반근이 또 물었다.

“안 힘들어. 어디서 뭘 하는 사람들인지 확실히 알아 놓고, 각자 하던 일을 잘 하라고 했을 뿐이야. 우리는 입만 바쁘면 되니까.”

시녀가 대답하던 사이, 여종 한 명이 다가왔다.

“반근 언니.”

여종의 부름에 시녀와 반근이 무의식적으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여종이 흠칫 놀라자, 반근이 혀를 날름거리며 민망한 듯 웃었다.

-소심-

“부인께서 사용하실 서재를 다 정리했는데, 어떤지 한번 봐 주겠어요?”

여종이 물었다.

“다리도 좀 바쁘네.”

반근이 부채로 시녀의 어깨를 톡 치고는 헤헤 웃었다. 시녀가 웃으면서 여종과 반근을 따라 서재로 향하려던 그때, 안채에서 정교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필요한 게 있으세요?”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손에 쥔 붓을 멈추고 시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넌 이름이 뭐지?”

정교랑의 물음에 시녀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씨, 왜, 왜 그러세요? 아씨, 안 돼요. 절 내쫓지 마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왕부 여종들과 웃고 떠들며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던 시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교랑이 빙긋 웃었다.

“전에는 너희가 내 곁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를지 몰랐어.”

시녀가 고개를 들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하긴, 난 아씨 곁을 지키던 몸종을 대신해 온 거잖아. 그 몸종을 반근과 바꿨던 거고.

“그래서 너희를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어.”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정교랑의 미소를 보자, 시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떨궜다.

분명히 아무런 말도 아닌데, 왜 듣자마자 눈물이 나오는 걸까?

기억하지 않으면, 잃게 되었을 때 괴롭지 않아서였을까?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너도 딱히 갈 곳이 없어 보이네.”

정교랑의 말에, 눈물을 흘리던 시녀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순간에도 눈물이 떨어졌지만.

그렇긴 하네. 이제는 아무도 아씨께 섣불리 몸종을 맞바꾸자고 요구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난 아씨의 곁에 쭉 남아있을 거야. 영원히.

“그래서, 네 이름이 뭐라고?”

정교랑이 물었다. 시녀가 눈물을 훔치고 바른 자세로 고쳐앉은 뒤, 정교랑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고는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소인 소심(素心), 아씨를 뵈옵니다.”

“소심.”

정교랑이 소심의 이름을 한 번 되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서 일 봐.”

소심이 알겠다고 한 뒤, 예를 표하면서 물러났다.

“소심.”

문밖에서 반근이 소리쳤다. 소심이 반근을 보면서 왜 부르냐는 눈짓을 보냈다.

“소심.”

반근이 헤헤 웃으면서 또 한 번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녀가 피식 웃고는 반근을 향해 못 말린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어 시녀 소심은 고개를 들고 마당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여종을 쳐다보았다.

“갈까요?”

소심이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화기애애한 신방 분위기에 비해, 진안 군왕의 거처에는 묵직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요?”

고 선생이 서성이던 걸음을 멈췄다. 이 태의가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생각하는 중이오.”

고 선생이 또 이리저리 서성이기 시작했다. 내시는 침상 옆에 꿇어앉아 따뜻한 수건으로 진안 군왕의 어깨와 가슴을 닦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윗옷을 걸치지 않고 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그래서인지 어깨와 가슴팍에 새파랗게 멍든 자국이 더욱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건 손으로 꼬집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 전하께 이리도 잔인하실꼬.”

내시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맨손으로 사람 목도 꺾어 버리는 여인이잖나. 잔인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지!”

고 선생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치자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우리 불쌍한 전하, 도대체 이게 무슨 고생이십니까.”

“지금 전하를 탓하는 겐가?”

고 선생이 몸을 홱 돌리고 더욱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건 다 자네들이 꾸민 짓이 아닌가! 그 여인이 군왕부로 들어오자마자, 그 여인이 든든한 뒷배라도 되는 듯 모시며 떠받들고 있었으니 원. 전하의 상태가 위독했을 때도, 그 여인의 도움 없이 고비를 잘 넘겼거늘!”

고 선생이 말하는 사이, 잠시 밖으로 나갔던 이 태의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아니면, 부인께 한 번 여쭙는 것이…….”

“이사신!”

고 선생의 포효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때, 황궁에서 태후의 전갈을 전하러 온 내시가 진안 군왕의 거처로 발을 들였다. 그가 들어오자, 고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태후의 내시가 침상 가까이 다가가 진안 군왕을 보고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세상에나! 어찌 전하께서 이리되신 것이오!”

태후의 내시가 미간을 찌푸리고 방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따지듯이 물었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 않았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방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허리 숙여 사죄했다.

“소인들이 무능하여 그렇습니다.”

태후의 내시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전하의 몸은 본디 안 좋으셨으니.”

내시는 말을 바꾸며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그래서 마마께서는 특별히 시일을 앞당겨 부인을 왕비로 책봉하고자 하십니다.”

정교랑은 그제야 무릎을 꿇고 내시를 향해 예를 올렸다.

“태후마마께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이 큰절을 올리고는 내시가 건넨 금책(金冊)과 인장 등을 받았다.

“그럼 군왕비께서는 소인과 함께 입궁하여 감사 인사를 올리시지요.”

내시의 말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알겠네, 공공, 잠시 기다려 주게.”

정교랑은 안채로 들어가 군왕비의 대례복으로 갈아입은 뒤, 내시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났다.

고 선생을 포함한 군왕부 사람들은 그제야 몸을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군왕비 책봉을 서두르시는 거지?”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차피 이 혼사는 액막이를 위한 것이니, 뭐든 빨리빨리 처리하시려는 거겠지요.”

한 막료가 대답했다. 하지만 고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액막이를 하려던 것이었다면, 혼례 당일까지 그토록 신부를 홀대하진 않았을 거요.”

고 선생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차츰 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내다보았다. 그가 잔뜩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하고 조용히 물었다.

“궁에 아직 우리 사람이 있는가?”

내시가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조금은 남아 있을 겁니다. 태후마마 측근에 사람을 두기는 힘들지만, 소식을 전하는 정도는 가능하지요.”

고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대단한 능력이 있는 여인 아닌가. 적어도 저 자신을 지킬 능력은 있겠지.”

고 선생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하고는 고개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간 이 태의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자네, 이 태의! 자꾸 누구에게 기대려고 하지 말고, 빨리 전하를 낫게 할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게 좋을 걸세!”

이 태의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고 했다.

“가자. 약을 바꿔 봐야겠다.”

이 태의가 아이에게 말하자, 아이는 내시 두 명을 데리고 서둘러 이 태의를 따라갔다.

황궁 안.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군왕비에 책봉한 은덕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절을 올렸다.

태후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궁녀가 서책 한 권을 들고 여칙(女則)을 줄줄이 읊었다. 정교랑은 태후의 가르침에 감사하다며 다시 한번 태후를 향해 절을 올렸다.

“다들 군왕비가 엄청난 의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태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후는 ‘다들’과 ‘엄청난’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태후의 말투에는 냉소와 비아냥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숙인 채 태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일찍이 황상에게 이 혼사를 윤허해 달라는 청을 올렸기에 이번 혼사가 성사된 것이야. 그러니 위낭의 진심을 절대 저버리지 말고, 지아비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잘 모셔야 한다. 무엇보다 군왕이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잘 돌봐 주고.”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위낭은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어. 궁에 들어올 때는 위낭이 참 어렸지. 툭하면 여기가 아프고, 툭하면 저기가 아파서 애가가 얼마나 고생하며 위낭을 키웠는지 몰라.”

태후가 회상에 젖은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태후의 눈앞에 아장아장 걷던 어린아이가 점점 더 자라나 늠름한 청년이 되어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떠올랐다.

  • 마마, 저는 마마의 궁에 와서 노는 게 제일 재미있습니다.

  • 마마, 마마께서 내주시는 음식이 제일 맛있습니다.

태후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마!”

옆에 있던 내시가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태후를 불렀다.

“우리 위낭은 애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니, 꼭 잘 보살펴야 한다.”

태후가 회상을 멈추고 울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태후를 힐끔 쳐다보고는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예, 그건 신첩의 본분이지요.”

“마마, 눈물을 흘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의 혼사는 경사가 아닙니까.”

내시가 웃으면서 태후를 다독이고는 궁녀에게서 따뜻한 수건을 받아와 태후에게 건넸다.

“마마께서 더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태의의 당부가 있지 않았습니까. 만에 하나 태후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군왕 전하께서 얼마나 근심하시겠습니까.”

내시가 말했다.

태후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군왕 전하께서는 근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근심하시겠지요.

태후가 내시의 말을 알아듣고 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그래. 이건 경사스러운 일이니, 어서 황상에게 가서 소식을 전해 황상을 기쁘게 해 드리거라.”

태후가 정교랑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몸을 일으키고 태후궁 밖으로 물러났다.

황제를 보러 가라는 말인즉 황후를 만나러 가라는 뜻과 다름이 없다.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본 황후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태후가 이리로 보낸 것이냐?”

황후가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문을 닫은 내시를 보며 정교랑에게 물었다.

“너와 본궁이 도둑이라도 되는 듯 경계하고 막으면서, 오늘은 어째서 이리로 보낸 거지? 태후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여긴 태후의 사람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태후의 말에 정교랑이 아, 하고 대답했다.

“이젠 막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겠죠.”

막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미간을 찌푸리던 황후가 갑자기 무언가를 알아차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구나!”

황후가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됐다.”

이 태의가 더는 부글부글 끓지 않는 약탕기를 바라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약재도 새로 바꿨고, 뭉근하게 타는 불과 세차게 타는 불을 번갈아 가면서 탕약을 끓였으니, 분명 효과가 나타날 거야. 적어도 전하의 정력 보충은 될 터이니 곧 잠에서 깨어나시겠지.

아이가 약탕기에서 탕약을 따른 뒤,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어린 내시에게 그릇을 건넸다.

“가자.”

이 태의가 말했다. 약방을 나와서 짧은 회랑을 지나면 바로 진안 군왕의 거처가 있었다.

“경 공공은?”

방 안에 들어선 이 태의가 물었다. 방 안에는 두 내시와 두 시녀만 있을 뿐, 항상 자리를 지키던 경 공공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고 선생이 부르셔서 잠시 나가셨습니다.”

시녀가 대답했다.

이 태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을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게 했다. 한 내시가 학취호(鶴嘴壺: 학의 부리를 닮은, 주둥이가 얇고 긴 주전자)에 탕약을 따르고 어린 내시와 함께 진안 군왕에게 조심스레 약을 먹였다.

“이제 됐다. 너희는 여기서 전하의 상태를 잘 살피거라. 전하께서 깨어나신다면 즉시 나를 부르고. 나는 약방에 가서 새 약을 달여야겠다.”

내시와 시녀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 공공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상 옆에 꿇어앉은 두 시녀와 얼음 대야를 새로 가져다 놓던 두 시녀를 쳐다보았다.

“이 태의는? 아직도 약을 달이고 있다더냐?”

경 공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이미 전하께 약을 한 차례 올렸습니다. 태의께서는 또다시 새로운 약을 달이러 가셨고요.”

경 공공이 그제야 미간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려진 휘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태의께서 전하께서 깨어나실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내시가 서둘러 말했다. 경 공공이 서둘러 침상 가까이 다가가 휘장을 걷었다.

“전하?”

경 공공이 휘장 안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작은 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하지만 진안 군왕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경 공공이 침상 위에 누운 진안 군왕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하? 전하!”

경 공공이 두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의 몸을 덥석 잡았다. 진안 군왕의 몸은 차갑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안 돼!

황급하게 손을 뗀 경 공공은 그만 뒤로 쓰러져 버렸다.

“전하!”

어린 내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새로 달인 약을 들고 문턱을 넘어서던 이 태의는 갑작스러운 비명에 깜짝 놀라서 손을 살짝 떨었다. 어린 내시가 안쪽에서 구르다시피 밖으로 뛰쳐나왔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내시가 울부짖으면서 외쳤다.

돌아가셨다니?

쨍그랑 소리와 함께, 이 태의가 손에 쥐고 있던 탕약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문과 창문을 굳게 닫고 휘장까지 친 방 안은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방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은 방구석에 놓인 얼음 대야 속에 있는 것처럼 온몸이 으슬으슬하고 소름이 돋았다.

고 선생이 손을 떨며,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이, 이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지 않소? 혼수상태이신 거 아니오?”

고 선생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침상 옆에 있던 경 공공은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아 있었다.

“눈이, 눈이 안 감겨. 내, 내가 전하의 눈을 감기려고 했는데, 눈을 감지 못, 못하시네.”

경 공공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온 뒤로도, 경 공공은 바보가 된 듯 계속 같은 말만 되뇌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다니.

중얼거리는 경 공공을 보던 고 선생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태의!”

이 태의는 침상의 반대편에 앉아 손바닥으로 펼쳐진 금침들을 이리저리 쓸고만 있을 뿐, 그중 하나라도 들어 올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몸이 차네. 몸이 차.”

이 태의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어찌된 일이오!”

고 선생이 이 태의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전하께서 돌아가시다니, 전하께서 왜 돌아가신 것이오!”

전하께서 돌아가시다니, 고 선생도 전하의 죽음을 인정한 거로구나.

고 선생마저 진안 군왕이 죽었다고 말하자, 다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어젯밤에 그 여인이 한 짓 때문은…….”

누군가가 조용히 말하자, 이 태의가 멈칫하면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여인!

“살릴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이라면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이 태의가 고개를 홱 들고 소리치며 곧장 문밖을 향해 달려갔다. 고 선생이 이 태의의 팔을 단번에 붙잡고 그를 멈춰 세웠다.

“전하께서 누구 때문에 이리되셨는데, 지금 누구를 찾으러 가려는 게요! 이사신, 자네는 도대체 누구의 사람인 게야!”

눈이 벌게진 고 선생이 고함을 질렀다.

“정 낭자 때문이 아니오. 독이 번진 것이오. 독이!”

이 태의가 소리쳤다.

독이 번졌다고?

“무슨 독?”

고 선생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똑같은 독이오! 그 독이 다시 번진 거라고!”

이 태의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때, 누군가가 밖에서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조사해 보니, 여기에서 독이 나왔습니다.”

막료가 빈 그릇과 학취호를 들고 오며 말했다. 실내에 있던 시녀와 내시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허망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안 군왕이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면, 독을 쓴 범인이 누구든 간에 진안 군왕 가까이서 시중을 든 하인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었다.

“저, 저는 약방에만 있었어요! 저는 계속 사부님의 말씀을 따라서 약방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다고요!”

아이가 이 태의의 다리를 붙들고 통곡하면서 소리쳤다.

“역시 막으려야 막을 수는 없는 건가.”

고 선생이 읊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은 시녀와 내시들을 훑어보았다.

저들 중 누구지?

혼례를 올린다는 것을 빌미로, 궁에서 시녀와 내시들을 참 많이도 보냈지. 불순한 의도를 품은 자가 분명 있을 거라 여기고, 전하의 곁에서 수발드는 자들을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골랐는데.

그 와중에 전하께서는 고집을 부리며 직접 혼례까지 참석하시느라 기력이 많이 상하신 상태였고, 거기에 태후궁에서 마시지 않고 버린 그 독약 반 잔까지 마저 드셨으니.

전하를 기필코 죽이려는 속셈이야.

누군가가 혼자서 계획한 걸까, 아니면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계획한 걸까.

“가서 부인을 모셔 오거라! 부인께서 살리실 수 있다! 전하께서는 병을 앓으시는 게 아니라, 독에 중독된 것이니, 부인께서는 전하를 살릴 방법을 분명 알고 계실 것이다!”

이 태의가 고 선생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그 여인을 부른다고?

또 이렇게 되었네. 전하께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마다, 그 여인은 전하 곁에 없어.

지난번에는 한가롭게 연꽃 놀이를 하러 갔고, 이번에는 황궁에 들어갔고.

고 선생이 힘없이 웃었다.

“태후마마께서 그 여인을 이토록 급히 군왕비에 책봉하시려던 이유가 이거였군. 아니면, 이미 그렇게 하기로 그 여인과 사전에 얘기가 됐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또 형제자매나 친인척이 볼모로 잡혀 있다거나.”

이게 정녕, 전하의 운명이란 말인가.

온몸에 힘이 쪽 빠진 고 선생은 뒤에 놓여 있던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점점 더 멀어지는 이 태의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됐나?”

고능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순조롭게 끝난 듯합니다.”

수하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정 낭자는?”

고능준이 또 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인.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황궁에 불러들인 후에 손을 썼습니다. 군왕부에서 황궁까지는 오가는 거리가 있으니, 시간은 충분히 벌었을 겁니다.”

수하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던 고능준의 눈가에 안도감이 비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겠지? 세상에 그 정도로 명줄이 질긴 사람은 없을 거야.

제아무리 질긴 명줄이라고 해도, 이토록 치밀한 계획을 이길 수는 없을 터.

고능준이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태후궁에서 태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내 새끼. 어서, 어서 가자. 애가가 당장 가서 우리 위낭을 봐야겠다.”

태후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내시와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를 부축했다.

“그리고 군왕비에게 당장 왕부로 돌아가라고 전하거라!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어디서 미적대고 있다는 게냐! 어찌 그리도 한가한 것이야!”

태후가 지팡이를 홱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황후가 한숨을 쉬고는 자신 앞에 평온하게 앉아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본궁 생각으로는, 지금 떠난다면, 넌 분명히 잘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황후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황후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신첩은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황후가 웃었다.

“누가 도망치는 것을 좋아할까. 다만, 지금은 좋고 말고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게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황후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정말 천생연분이긴 하네. 예전에도 본궁이 군왕에게 황궁을 떠나 자유롭게 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아이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지.”

황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본궁도 그냥 해 본 말이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인지라, 남을 도울 처지가 못 돼.”

정교랑이 황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마마께서 그리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마, 마마.”

내시 한 명이 전각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태후마마께서 출궁하여 군왕부로 향하신다고 합니다.”

황후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군왕부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쯤 날개를 달아도 도망치기가 힘들겠군. 정 낭자, 그럼 본궁이 더는 붙잡고 있지 않으마. 더 지체했다가는, 이 황궁도 못 빠져나가겠어.”

정교랑이 예를 표하고 작별을 고했다. 정교랑이 밖으로 나가자, 휘장 뒤에서 안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만들어 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세상 태평하게 여유를 부리진 않을 거 아니에요. 주씨 가문은 혼례도 치르기 전에 죄다 도망가더니, 역시 진작 예상했나 봐요.”

안비가 입술을 삐쭉이면서 말하다가 황후를 바라보면서 투덜댔다.

“정 낭자는 신선의 제자이니까 당연히 문제없이 도망칠 테고, 정작 날개가 필요한 사람은 우리 같은데요?”

황후가 안비를 보면서 풉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게 날개를 달아 준다 한들, 날아갈 수는 있고?”

금군 병사들이 매서운 기세로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오자, 행인들이 서둘러 길 옆으로 몸을 피했다. 반대편에서 말을 타고 오던 주복은 혹시나 행인들이 자신의 말에 부딪혀 다칠까 봐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궁에서 귀인이 출타하시나 봐요.”

사환이 의장 행렬의 규모를 보면서 말했다.

지금 궁에서 출타할 수 있는 귀인은 딱 한 명밖에 없을 텐데.

생각에 잠겼던 주복의 표정이 급변했다.

주복은 갑자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고는, 옆으로 비켜선 행인들 사이를 비집고 금군 병사들이 향하는 곳으로 뛰어갔다.

“공자님!”

사환이 당황해하며 주복을 불렀다.

“그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공자님, 군왕부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봅니다.”

주점 안, 수하가 창밖의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조용히 말했다. 진호는 고개를 들어 수하가 가리키는 곳을 흘깃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셨다.

“태후마마께서 출궁하실 정도라면, 일 처리는 확실히 됐다는 뜻이겠지요. 저들이 이렇게 빠르게 손을 쓸 줄은…….”

수하가 말끝을 흐렸다.

“빠르다니, 뭐가 빨라? 족히 십여 년을 질질 끌었는데.”

진호가 콧방귀를 뀌면서 웃었다. 수하가 진호를 따라 어색하게 웃고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진안 군왕이 죽든 말든 그건 저희와 상관없는 일이라지만, 정 낭자는 무사하시겠지요? 저들이 원하는 것은 일거양득일 텐데.”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꺾어서 술잔을 비웠다.

“고능준은 아직도 자신의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나 보군. 고능준은 자신이 정 낭자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지난번 정 낭자를 함정에 빠트린 사람은 그자가 아니야!”

진호가 술잔을 손으로 세게 쥐었다.

정 낭자를 함정에 빠트린 건 바로 나, 진호지!

혹은, 정 낭자 자신일지도. 정 낭자는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은 거니까!

진호가 고개를 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아파오고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정 낭자는 무사하시다는 뜻이군요.”

수하가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말하다가 눈빛을 반짝였다.

“저기, 정 낭자가 군왕부로 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수하의 말에 벌떡 일어난 진호가 창가로 다가가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한 마차가 혼란스러운 거리 위를 다급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여름 휘장이 바람에 흩날리면서 마차 안에 단정하게 앉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진호는 지난번 일식이 있던 날, 아비규환인 거리 위에서 홀로 등불을 밝힌 채 유유히 지나가던 정교랑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지금처럼 주점의 위층에 서서 정교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교랑을 못 본 지 이 년이나 지났을 때였지만, 그때는 꼭 어제 본 것처럼 정교랑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며칠 정도 못 봤을 뿐인데, 꼭 평생토록 정교랑을 만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진호는 지난번에 자신이 냉큼 아래층으로 달려나가서 정교랑의 마차에 올라탄 뒤, 정교랑을 향해 미소 지었던 일이 생각났다.

  • 납니다.

그리고 그때, 정 낭자는 부채를 흔들며 내게 미소 짓고 있었지. 그러니 지금도 뛰어갈 수 있어. 어서 가!

진호는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지만, 결국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창가에 멍하니 서서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고 선생, 고 선생, 태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고 선생, 군왕부 사방이 포위되었소이다.”

다급한 목소리가 고 선생의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왔다. 하지만 고 선생은 그 말들을 일절 무시했다.

잠시 후, 주위에서 들려오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후마마, 들어가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태후마마, 슬픔을 거두소서.”

고 선생을 부르던 목소리 대신, 문밖에서 내시들이 태후를 위로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고 선생은 한숨을 쉬고 손을 들어 소매 속에 든 작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경 공공, 그래도 우리가 그간 알고 지낸 정이 있으니, 내가 좋은 것을 좀 나눠 주겠네. 그래야 전하의 뒤를 따라갈 때 조금 더 편히 따라갈 수 있을 테니.”

고 선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직도 침상 옆에 앉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경 공공을 향해 말했다.

경 공공이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이렇게 고생만 하다 가셨는데, 아랫것인 제가 어찌 편히 가겠습니까.”

경 공공이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는 잠든 것 같은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하의 옷을 갈아입혀 드려야겠습니다. 추우실 텐데 이렇게 둘 순 없어요.”

경 공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고, 금군 병사들이 방 안으로 우르르 쳐들어왔다.

“당장 끌고 나가라!”

앞장서 있던 금군 병사가 소리치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다짜고짜 달려들어 경 공공과 고 선생의 손을 뒤로 꺾으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마당에는 금군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가마에 앉아 있던 태후에게 조용히 말을 전했다.

“몸이 차고, 아무런 맥도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고, 내 새끼.”

태후가 그제야 가마에서 내려왔다. 태후는 두 궁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목놓아 울부짖었다.

“군왕비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군왕비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태후가 입을 열자마자, 문밖에서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면서 소리쳤다.

지금 돌아와서 뭐해! 저 아둔한 사람 같으니라고, 왜 돌아온 게야! 기왕 나갔으면 돌아오지 말지, 여길 뭐하러 돌아와!

고 선생이 문밖에서 구르다시피 뛰어오는 이 태의를 보면서 탄식했다.

이 태의의 뒤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은 조금 전에 군왕부를 나설 때만큼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너는 군왕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게냐! 어찌 곧바로 왕부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야! 애가가 황상의 침궁으로 너를 보낸 것은, 폐하를 뵈라는 뜻이었지, 황후와 한가하게 노닥거리라고 보낸 게 아니다! 감히 황후와 대화를 하다니! 어찌 감히 황후와 대화를 나눈단 말이냐!”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안 군왕의 거처를 가리켰다.

“황후가 종친 양자 입적을 제안한 일로 이미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아이인데, 네가 또 황후를 찾아가 그 일을 떠들다니! 그러니 위낭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했겠지!”

태후의 말을 듣던 고 선생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 여인도 태후의 계략에 넘어갔던 거로구나.

정교랑이 태후를 바라보았다.

“마마, 무슨 말씀이시죠? 전하께서 죽다니요?”

태후가 흠칫 놀랐다.

그럼, 안 죽었다는 건가?

태후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자들이 거짓을 고할 리가 없는데? 그리고 그 약이 얼마나 독한지는 애가가 그 누구보다 잘 알거늘.

“군왕비께서 아직 모르시나 봅니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돌아가셨습니다.”

태후의 옆에 서 있던 내시가 서둘러 말했다.

“그래요? 들어가서 봤어요?”

내시가 멈칫했다.

상심이 너무 커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건가?

내시가 고개를 들고 연민의 눈빛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태후도 내시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더는 말하지 않고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마,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더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태의가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소인들이 마마를 대신하여 울 테니, 부디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두 내시가 태후를 부축하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는 내시들의 말을 무시한 채 통곡하기 시작했다.

“위낭,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게야. 왜 애가의 말을 듣지 않고.”

울면서 말하던 태후가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손을 뻗었다.

“물.”

사내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의 울음소리가 뚝 끊기고,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시신이 움직인다!”

찰나의 정적이 지난 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겁에 질린 태후는 침상 위에서 천천히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새하얀 얼굴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숨이 턱 막힌 태후가 눈을 뒤집으면서 혼절했다.

시신이 움직이고 있어!

“그럴 리가 없다!”

고능준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진짜로 죽은 것과 죽은 척 연기하는 것도 구분하지 못한단 말이냐!”

“대인!”

수하와 식객들이 다급하게 고능준의 말을 끊었다.

“구분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직접 손을 썼기 때문에, 절대로 착오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약을 달일 때 한 번, 그리고 약을 먹일 때 또 한 번 썼습니다. 대인, 군왕부에 있던 사람이 주전자에 조금 남은 약을 개에게 먹여 봤더니, 개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군왕은 그 약을 한 사발이나 마셨고요!”

“맞습니다. 그때 자리에 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족히 한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로 죽어 있었단 말입니다!”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른 고 관인이 수하와 식객들을 다그쳤다.

“그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냐! 심지어 깨어나자마자 말까지 해? 며칠 전에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던 사람인데, 죽다 살아나니까 다 나았다는 게냐?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냐고!”

수하와 막료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귀신을 본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수작을 부린 거겠지. 분명히 그 정씨 여인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야!”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죽은 사람을 살릴 줄 아는구나.”

고 관인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정 낭자는 당시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독이 군왕의 몸에 퍼지고 나서부터 군왕이 깨어날 때까지, 그 여인은 군왕 근처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상태를 볼 기회도 없었는데, 어떻게 군왕을 치료한단 말입니까!”

식객이 다급하게 말했다.

방 안에 정적이 흐르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정말 귀신이라도 본 건가?

태후가 눈을 천천히 끔뻑이며 깨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귓가에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소손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마마를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요.”

태후가 또 숨통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어 재빨리 손으로 가슴팍을 치면서 눈을 크게 떴다. 옆에서 조심스럽게 태후의 상태를 살피던 태의가 빠르게 침을 놓아 태후의 기를 통하게 했다. 태후가 긴 한숨을 내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 너!”

태후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두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자리에 있던 태의들도 말문이 막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 마마의 홍복 덕분이지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태후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마마께서 혼사로 전하의 액막이를 해 주신 덕분에, 전하께서 몸이 좋아지셨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방 안팎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런 거였나?

아니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마마께 경하드린다고 말해야 하나? 진안 군왕이 호전되긴 했으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내시 한 명이 쿵 소리를 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마마의 홍복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마당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 사람을 따라 무릎을 꿇고 복창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마마의 홍복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태후는 귓가가 웅웅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혼사로 액막이가 되어 진안 군왕이 나아졌다고?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는 이 일을 설명할 길이 없잖아?

군왕부에 있는 사람들이 짜고 쳐서 애가를 속일 수야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독약과 그 사람들, 그리고 애가가 직접 보낸 사람들까지…….

태후가 요란스럽게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모두가 애가를 속였을 리가 없잖아!

설마 정말 저 여인이…….

태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사람들과 함께 예를 올린 정교랑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미소 띤 얼굴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는 죽도록 정교랑이 싫었지만, 정교랑이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따뜻하고 편안한 미소에 단정한 자세, 그리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일거수일투족까지. 궁에서 예법을 가르치는 상궁조차도 감히 정교랑의 자세를 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 여인의 두 눈…….

새까맣고 빛나는 두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같아. 저 여인을 보면 볼수록, 저 새까만 두 눈 때문에 등골이 서늘해져.

사람의 생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여인이라.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던 태후의 눈가에 두려움이 스쳤다.

“마마, 어쩌면 폐하의 병세 또한 호전될지도 모릅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

맞아. 이 여인이 황상의 침궁에 갔었지! 거기서 황후와 한참을 대화했을 텐데,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고, 황상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어떻게 알아!

“궁으로 돌아가자! 어서!”

태후가 눈을 번뜩이면서 소리쳤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저 여인의 앞에 더 있어서는 안 되겠어!

큰일 났네. 벌써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아. 저 여인이 벌써 애가에게 무슨 수를 쓴 건 아니겠지? 염라대왕이 벌써 붓을 쥐고 애가의 이름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 거면 어떡하지?

어서 가야 해. 당장 여기를 벗어나야 해!

“전하, 몸조리 잘하십시오. 또 태후마마를 놀라게 하지 마시고요.”

태후가 정신없이 방을 나가자, 태후의 내시가 서둘러 안부의 말을 덧붙였다.

“자네들, 전하를 잘 돌보게나.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궁에 알리도록.”

내시는 방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상황을 원만하게 수습하고, 서둘러 의장 행렬을 갖춰서 군왕부를 떠났다.

길가에 앉아 있던 주복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군왕부에서 떠나가는 태후의 의장 행렬과 문가에서 행렬을 배웅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주복은 문가에 서 있던 사람 중 정교랑이 있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주복의 눈엔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잘 보였다. 다들 하나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것에 기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여느 때처럼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정교랑의 얼굴과 크게 대비되었다.

다행이다. 무탈하구나. 역시 아무 일 없을 줄 알았어.

주복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옆에 있던 벽을 짚었다. 주복의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가던 진호는 뒤에서 들려오는 금군 병사들의 소리에 모퉁이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려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공자님, 태후마마께서 오가시는 게 이리도 빠른 것을 보니, 정말로 진안 군왕이 무사한가 봅니다.”

수하가 진호의 뒤에서 말했다.

“그 여인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나.”

진호가 고개를 돌리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사람들은 항상 그 여인을 믿지 않아. 그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인데도 말이지. 특히나, 그 여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할 텐데 말이야.”

그 여인이 당신들을 얼마든 상대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그리고, 당신들 뜻대로 되게 그 여인이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것도.

“어서 가서 확인하거라!”

태후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 바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황상은 깨어났느냐?”

내시와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의 곁으로 다가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가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아느냐?”

태후가 소리쳤다.

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마, 신이 조금 전에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여전히 깨어나시지 않으셨습니다.”

고능준이 미간을 펴고 부드럽게 말했다.

태후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고, 눈빛도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여인이, 폐하께서 깨어나실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정말로 액막이를, 액막이를 한 거였어.”

태후가 중얼거렸다. 고능준이 옆에 서 있던 내시를 향해 눈짓하자, 내시가 서둘러 탕약을 바쳤다.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깨어나실 리가 없…….”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후가 격노하며 내시의 따귀를 후려쳤다. 내시가 털썩 무릎을 꿇으면서 손에 들려 있던 탕약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마마,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시가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면서 울먹였다. 하지만 태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

“당장 끌고 나가서 쳐 죽이거라!”

뒤에 서 있던 내시들이 황급하게 그 내시를 일으켜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애가는 황상이 깨어나길 바란다. 애가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황상이 깨어나기를 바란다고! 황상이 깨어나지 않는 것이 애가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데, 더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롭구나.”

전각 안에 태후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능준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해결될 텐데요.”

고능준은 태후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황제가 깨어나길 바랐다.

안 그래도 사리 분별을 못 하던 노파인데, 이번에는 정말 놀라서 그런지 더욱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군. 저런 노파를 보좌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야.

“하지만!”

태후가 별안간 소리치고는 몸을 떨면서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태후가 고능준을 향해 가까이 오라고 눈짓했다.

“그 여인, 사람의 생사를 쥐락펴락하잖나. 황상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면, 필시 애가도 죽게 만들 수 있겠지? 맞아, 맞아. 그 여인은 분명히 그럴 능력이 있을 게야. 벌써 애가의 목숨을 어떻게 끊을지 궁리하고 있을지도 몰라.”

고능준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말해 봤자 태후가 귓등으로 흘려들을 것 같은 바른말 대신, 천자는 하늘이 점지한 군주며 태후의 목숨은 염라대왕이 어찌할 수는 없다는 등의 위로의 말들을 전했다.

태후의 상태가 조금 나아지자, 그는 내시에게 새로 탕약을 가져오라고 한 뒤 태후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고 태후궁을 나왔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됐길래 태후마마께서는 저렇게 정신이 없을 정도로 놀라셨을까?

고능준이 마차 위로 몸을 싣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그 여인에게 당하다니.

태후마마께서 의장 행렬까지 대동하면서 황궁을 떠나 군왕부로 갔으니, 반나절이 채 되기도 전에 온 경성에 그 소식이 퍼졌을 거야.

진안 군왕이 혼사를 올리고 액막이를 한 덕에 몸이 나아졌다고. 그 여인이 또 한 번 새로운 신화를 쓴 거지.

고능준이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마차를 세게 쳤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 여인이 벌인 짓이야. 하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진안 군왕을 처리하는 자들에게 내가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고, 재차 확인했는데. 절대로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고, 만일의 경우도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그 여인은 뭘 한 거야?

그게 뭐인지 꼭 밝혀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쥐고 있다 해도 헛짓거리하는 꼴이나 다름없으니.

“이상한 게 하나 있긴 한데.”

고 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방 안의 사람들이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초야 말이오.”

고 관인이 말했다.

“초야에도 저희 사람들이 그 여인을 예의주시했습니다. 진안 군왕을 치료하지는 않았어요. 약도 달이지 않았고요.”

막료가 대답했다. 고 관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너무 식견이 너무 좁은 거 아니오? 사람을 치료하는 데 꼭 약을 달이고, 침을 놔야 하는 줄로만 아나?”

그럼 또 뭐가 있지?

고 관인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채음보양(采陰補陽: 음기를 취하여 양기를 북돋는다는 도가의 방중술 중 하나).”

“황당하구나!”

귀를 쫑긋 세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 관인의 말을 듣고 있던 고능준이 찻잔을 탁자 위로 내던지며 욕을 뱉었다.

“아버지, 황당하긴 하지만, 지금껏 황당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믿기 어려우신 마음은 알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그대로고, 약도 그대로입니다.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신혼 초야에 동방화촉을 밝힌 것인데…….”

고 관인이 말하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게다가 듣기로는 아주 격렬한 초야였다고 합니다. 진안 군왕이 어찌나 몸을 혹사했는지 이튿날 혼수상태로 들것에 실려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채음보양을 했다는 뜻인데.”

막료 한 명이 고 관인의 말을 믿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 채음보양이 아닐 수도 있소. 먼저 양을 취한 다음, 음으로 다시 양을 보충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도가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소? 도가에서는 그런 방중술이 흔하잖소.”

다른 막료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고능준은 차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는지, 탁자를 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황당하기가 이를 데가 없군. 제대로 조사나 하게!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황당무계한 말만 지껄이지 말고!”

황당하든 말든, 효과만 있으면 됐지.

진안 군왕부 안,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정교랑의 거처 앞에 서 있던 고 선생이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번에 여기 앞에 서 있을 때가 불과 반나절 전의 일인데, 내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군.

이른 아침에 진안 군왕을 모시러 정교랑의 거처에 왔을 때, 고 선생은 안 그래도 반쪽짜리였던 진안 군왕의 목숨이 또 반 토막이 난 것을 보고는 부아가 치밀어 정교랑의 거처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분명히 죽었다고 믿었던 진안 군왕이 다시 반쪽짜리 목숨을 가지고 되살아나자, 고 선생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똑같은 반쪽짜리 목숨이어도, 고 선생은 지금이 더욱 기뻤다.

“선생, 이 태의가 조금 전에 이미 여쭤봤다고 합니다. 왕비께서 이 태의더러 원래 하던 대로 전하를 치료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니 우리는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왕비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되지요.”

경 공공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지금 나는 왕비께 전하를 치료해 달라고 온 게 아닐세. 이 태의가 어떻게 침을 놓고, 약을 달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단지 전하를 거처로 모셔 온 것뿐일세. 이미 혼례를 올린 부부인데, 거처를 따로 하는 법이 어디 있나? 이제부터는 여기가 전하의 거처이니, 전하를 이리로 모시고 온 것일세.”

경 공공이 의아한 얼굴로 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선생, 무슨 꿍꿍이십니까?”

경 공공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고 선생이 찾아온 이유를 들은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은 서둘러 여종과 몸종들을 데리고 침상을 정리한 후, 진안 군왕을 침상으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이번에는 정교랑이 고 선생에게 나가라고 말하기 전에, 경 공공이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휘장 옆에 서서 잠자코 있던 고 선생이 경 공공을 따라 나가다가,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휘장 너머에 있는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했다.

“왕비 전하, 아무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교랑이 네, 하고 대꾸했다.

고 선생은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도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입술만 달싹이고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했다.

고 선생이 드디어 결심한 듯이 이를 악물고 정교랑을 향해 또 한 번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다만, 전하께서 아직 몸이 허약하십니다. 부디 전하를 가엾이 여기시어, 살살 다뤄 주십시오.”

그때, 종일 여종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느라 말을 많이 했던 소심이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곁채에서 회랑을 통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소심은 고 선생의 말을 듣자마자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풉 하고 뿜어냈다.

지, 지, 지금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래?

우리 아씨를 대체 어떻게 보고! 정말 황당하네!

“부인의 음식은 어느 쪽으로 차려 놓을까요?”

“아씨, 입에 맞는지 한 번 드셔 보시겠어요?”

“아직도 아씨라고 하면 어떡해.”

“아차차, 깜빡했어.”

여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진안 군왕의 귓가에 들려왔다.

내 방에서는 한 번도 저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 적이 없었는데.

나는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도 싫고, 누가 가까이서 시중을 들겠다고 내 옆에 붙어있는 것도 싫었어. 혼자 있는 게 제일 편했지.

그런데 지금 저 소리를 듣고 있어도, 전혀 싫지가 않고 도리어 편안하다는 느낌이 드는군. 따스한 봄날에 창문을 열자 불어온 봄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는 것 같아.

진안 군왕이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눈을 뜨려고 했다.

“전하!”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진안 군왕이 눈을 뜨자, 경 공공이 그의 얼굴 앞에 바짝 다가오더니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또 잠든 건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부인, 부인,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어요!”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목청을 높였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진안 군왕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안 군왕은 흐릿하기만 했던 시야가 갑자기 밝아지는 듯했다.

“깨어났네요. 물 마실래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 물을 드리게.”

정교랑이 말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경 공공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두 시녀를 불러와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을 침상에 앉혔다. 시녀 두 명이 한 모금씩 천천히 진안 군왕에게 물을 떠먹였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대청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태의에게 전하께서 깨어나셨다고 알리게. 이제 약을 드실 수 있다고.”

정교랑이 말했다. 문가에서 대기하던 어린 내시가 알겠다고 말한 뒤, 급하게 이 태의를 찾으러 뛰어갔다.

정교랑이 대청에서 진안 군왕이 보이는 방향으로 앉자, 두 시녀가 정교랑에게 그릇과 젓가락을 쥐여주었다. 이어 두 시녀와 무슨 말을 나눈 건지, 정교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은 그 모든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별안간 누군가가 진안 군왕의 시야에 불쑥 들어와 정교랑의 모습을 가렸다.

“전하, 물 드셔야지요.”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의 코앞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멍한 표정인 데다가, 어딘가 넋이 나가신 것처럼 보이는군.

연이어 두 번이나 맹독에 중독되었으니, 전하께서도 몸이 많이 상하셨겠지? 가만 보니 눈빛도 흐리멍덩해지신 것 같고.

진안 군왕이 눈을 감고 다시 침상 위로 누웠다.

“됐다.”

이제 겨우 두세 모금밖에 안 드셨는데!

진안 군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경 공공은 못내 아쉬워하는 얼굴로 더는 물을 권하지 않았다. 진안 군왕은 언제나 마음을 한 번 정하면, 절대로 그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가 그의 결정에 대해서 재차 확인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이 태의가 식사를 하고 있던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한 뒤, 진안 군왕의 맥을 짚으러 침상으로 다가왔다.

“정말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정말 많이요.”

진안 군왕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던 이 태의가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 태의가 진안 군왕에게 약을 먹이고 침을 놓는 사이, 식사를 마친 정교랑이 그에게 다가왔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이 태의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한쪽 옆으로 모시고 갔다.

“부인, 분명히 같은 독이었는데, 왜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까?”

“같은 독이지만, 중독된 사람이 예전과 달라졌으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군왕 전하께서 달라지셨다는 뜻인가?

이 태의가 의아한 눈빛으로 침상 위에 누워있는 진안 군왕을 돌아보았다.

어디가 달라지셨다는 거지?

“부인, 그럼 전하를 어떻게 달라지게 하신 겁니까?”

이 태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대화를 듣던 경 공공이 민망한 듯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왜 저러지?

-살살-

이 태의가 고개를 돌리고 경 공공을 향해 눈짓했다.

“부인, 반나절 내내 고생하셨는데, 잠시라도 편히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경 공공이 정교랑에게 다가와 공경한 태도로 말했다. 정교랑이 가볍게 대꾸하고는 방을 나갔다.

“부인, 서재에 자리를 정리해 뒀어요.”

“책부터 읽으시겠어요?”

반근과 소심이 참새처럼 재잘대면서 정교랑과 함께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태의가 몹시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아직 다 묻지도 못했는데.”

이 태의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이 태의는 바보입니까? 도대체 부인께 뭘 묻는 겁니까!”

경 공공이 이 태의 못지않게 언짢은 기색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경 공공이 이 태의의 소매를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가서 조용히 말했다.

“전하께서 어떻게 달라지셨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어떻게 달라졌냐고?”

이 태의가 되물었다. 경 공공이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전하께서, 그, 그러니까, 진, 진정한 사내가 되신 게지요.”

경 공공의 말에, 이 태의가 멈칫했다.

“그런데 그걸 물어보겠다고요? 정, 정녕 창피도 모르는 겝니까! 아무리 부인을 스승으로 모신다지만, 삼가고 조심해야 할 건 지켜야지요.”

경 공공이 민망함을 무릅쓰고 말까지 더듬으면서 이 태의를 나무랐다. 그가 손끝으로 먼지를 털 듯이 이 태의의 어깨를 살짝 쳤다.

“부인께서 어떻게 대답하라고 그런 질문을 드린단 말씀입니까.”

이 태의가 그제야 눈치챈 듯이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런 건가?”

그런 치료법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하지만 본디 의술이라는 것은, 배우고 또 배워도 끝이 없는 것이니. 그때는 정 낭자가 진 노태야를 사흘 만에 침상에서 내려오게 만들 줄도 미처 몰랐으니까.

두 사람이 대화하던 사이,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마른기침을 했다.

“전하.”

두 사람이 쏜살같이 침상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진안 군왕을 불렀다.

“물러가거라.”

이 태의와 경 공공이 흠칫 놀랐다.

“시끄러우니까.”

진안 군왕이 짤막하게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 태의와 경 공공이 서로를 탓하듯이 눈짓했다.

말소리에 전하께서 시끄러우셨구나. 전하께서는 죽었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만 푹 쉬셔야 해.

두 사람이 서둘러 예를 표하고 밖으로 물러났다.

“갑시다. 부인께서 여기 계시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경 공공이 회랑 아래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 태의에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야 없지.”

이 태의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서재 쪽을 바라보았다. 얇은 휘장 너머로 정교랑이 단정하게 책을 읽는 모습을 보던 이 태의가 말을 덧붙였다.

“아직 부인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 한참 남았는데.”

경 공공은 혀를 찬 뒤, 서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고 휘장을 향해 예를 올렸다.

“부인, 전하께서도 쉬겠다고 하셔서 소인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으니, 언제든 필요하신 게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

경 공공이 공손하게 말하자, 정교랑이 손에 쥔 책을 잠시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정교랑이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 공공 등이 물러나자 소심은 서둘러 휘장을 들어 올렸고, 정교랑은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침상에 누운 진안 군왕은 눈을 감은 채 잠든 듯했다.

“부인?”

반근이 조용히 정교랑을 불렀다.

“너희도 그만 가서 쉬어. 이래저래 놀라서 피곤할 텐데.”

정교랑이 말했다. 소심과 반근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방에서 물러났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자신의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여름의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진안 군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안 군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방 안에 등불이 켜졌을 무렵이었다. 방 안에서 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봐. 이건 분명히 어린아이가 쓴 걸 거야.”

“그러게. 이 점은 아씨께서 쓰시는 점이랑 비슷해!”

뭘 보고 있는 거지?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기뻐하면서 재빨리 군왕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렸다.

휘장 너머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멈추고, 대청에서 구슬발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전하, 어서 다시 누우세요.”

소심이 반쯤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진안 군왕의 가까이로 다가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정신이 많이 맑아졌어. 오래 누워 있었으니 잠시 앉아 계시게 해.”

정교랑의 말에 시녀들이 서둘러 베개를 가져와 진안 군왕의 등 뒤에 받치고 바르게 앉을 수 있도록 부축했다.

너무 오래 누워 있긴 했나 보군. 눈이 어질어질해.

이때, 누군가의 손이 진안 군왕의 어깨에 닿았다. 얇은 여름옷 위로, 손의 부드러운 촉감과 따스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입술만 적셔요.”

정교랑이 한 손으로 진안 군왕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입가에 찻잔을 가져다 댔다. 진안 군왕이 순순히 정교랑의 말에 따라 입술을 적셨다.

“부인, 밥상은 어디에 차릴까요?”

시녀가 바깥에서 물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다.

“같이 밥 먹을래요?”

“앉아서 식사를 하신다고?”

바깥 곁채에서 밥을 먹고 있던 고 선생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감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걸음을 옮겼다.

“전하께서 일찍이 정 낭자와 혼인을 맺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지요?”

경 공공이 웃으면서 물었다.

“일찍이? 일찍이었다면, 전하께서는 정 낭자와 혼례를 치를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정 낭자를 순장시킬 작정이 아니었다면, 태후마마께서는 절대로 전하와의 혼사를 추진하지 않았을 걸세.”

그리고 지금쯤 태후마마께서는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겠지.

“정 낭자가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들었다만, 소문으로 듣는 것과 실제로 그 대단함을 목도하는 것은 사뭇 다르군.”

고 선생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심지어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별일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마음이 참 홀가분해졌습니다.”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정말 군왕부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위험했어. 하지만 그때 들어온 정 낭자는 단 몇 마디만으로 국면을 반전시켰지. 하늘과 땅을 뒤엎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 테지.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전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게 관건이야. 전하께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던 건, 절대적으로 정 낭자 덕분이고.

유가의 제자로서 귀신이니 신선이니 하는 이야기를 믿지는 않지만,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으니, 신선의 제자라는 말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제비집 죽을 한 그릇 드셨소.”

이 태의가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면서 몹시 기뻐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한동안 식사를 일절 못하시지 않았소이까. 그렇게 많이 드신 것은 처음이로군.”

고 선생이 더욱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자네가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는데, 어찌 밖에 나와서 게으름을 피워?”

이 태의가 뒤늦게 경 공공을 발견하고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경 공공이 이제 가 보겠다며 일어나기도 전에, 고 선생이 먼저 손을 들어 경 공공을 제지했다.

“왕비께서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것을 꺼리시네. 우리를 먼저 부르시지 않는 한, 괜히 가서 귀찮게 하지 말게.”

이 태의가 고 선생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어디서 들어본 말인 것 같은데? 고 선생, 그런 건 참 빨리도 배우시는구려.”

방 안에서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가에 서 있던 사환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헤헤 웃었다.

왕부에서 저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난 게 얼마 만이야. 정말 제대로 액막이를 했나 보네.

은은한 등불이 방을 밝히고,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여름밤의 시원한 바람이 얇은 휘장을 흔들었다.

정교랑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반근이 입가심용 차를 내왔다. 밖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방으로 들어와 밥상을 치웠다.

정교랑과 진안 군왕이 식사를 마쳤다는 소식에, 경 공공과 이 태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의 맥을 짚으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진안 군왕은 아직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며칠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상태였다. 이 태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쓸데없는 말까지 해가며 이것저것 물었다.

진안 군왕은 이 태의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가에 앉아 경 공공과 대화하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등불 아래 비친 정교랑의 피부는 더욱 뽀얗고 매끄러워 보였다. 정교랑은 두 눈을 반짝이면서 진지하게, 때로는 여유롭게 경 공공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 정교랑의 태도 덕분에, 말하고 있던 경 공공은 정교랑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동시에 다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전하?”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의 시야를 가리고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제 말을 들으셨는지요?”

“말할 게 뭐 있다고. 먹어야 할 약이 있다면 먹고, 놔야 할 침이 있다면 놓으면 되지. 이 태의는 말이 너무 많아.”

이 태의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이 태의가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의 시선이 머물렀던 정교랑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교랑과 대화하고 있던 경 공공이 경악한 기색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진안 군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께서도 가셔야 한다고요?”

경 공공은 내일 혼례 풍습 중 하나인 신부의 친정 나들이에 대해 정교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안 군왕의 몸이 좋지 않다 보니 당연히 내일 일은 미뤄지거나 취소될 줄 알았는데, 정교랑이 내일 경성에 있는 친정에 가면서 진안 군왕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전하의 몸 상태가…….”

내용을 들은 이 태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내일이면 다 나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내일이면 다 낫는다고?

이 태의와 경 공공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진짜야 가짜야?

군왕부에 밤이 찾아왔다. 정교랑이 목욕을 마치자, 진안 군왕도 내시와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마치고 다시 침상 위로 돌아왔다.

“머리는 말렸고?”

정교랑이 묻자, 어린 내시가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부인, 전하는 머리를 감지 않으셨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물러가거라.”

내시들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물러갔다. 반근과 소심이 방 안에 있던 등불 두 개를 끄고 내시들을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당직을 설게. 너는 방에 가서 자.”

소심의 말에 반근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낮에 그리 큰일이 있었잖아. 나도 여기 남아 있을래.”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두 사람이 조용히 대화하는 사이, 안채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 벗어요.”

일순간 몸이 굳어진 반근과 소심이 놀란 토끼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지, 아니야. 사람이 잠을 자려면 당연히 옷을 벗어야지.

“오늘도 또 하려고요?”

진안 군왕의 허약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반근과 소심이 재빨리 서로의 눈을 피했다. 얼굴이 불에 덴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소심이 반근의 손을 덥석 잡고 허둥대며 대청을 빠져나가서 곁채로 달려갔다. 소심이 재빨리 방 안의 모든 등불을 끄자, 어둠이 드리워진 저쪽 침실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심이 침상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아씨, 부디 전하를 살살 다뤄 주세요.

동이 트고, 문이 열릴 무렵이었다. 경 공공은 사람들을 데리고 정교랑의 거처 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정교랑이 시간에 맞춰 나오자, 경 공공 등이 공손히 문안 인사를 올렸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반근과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마당에 있던 소심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여종들에게 오늘 출타할 때 챙겨야 할 것들을 지시하고 있었다. 마당 안으로 경 공공이 들어오자, 소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전하께서 아직 주무시니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소심의 말에, 경 공공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참으로 다정하시네.”

소심이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고는 경 공공에게 차를 올리라고 시녀에게 지시했다.

“저는 보양탕이 잘 끓고 있나 보러 갈게요. 부인께서 특별히 전하를 위해 끓이라고 당부하셔서요.”

경 공공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소심 낭자, 어서 가서 볼일 보게나.”

경 공공은 대청 안에 서서 편안하게 숨을 골랐다.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가 더없이 상쾌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어딘가에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이제야 봤네. 풍경을 언제 달았대.”

경 공공이 작게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신방을 꾸밀 때는 없었는데. 역시 여인은 여인이야. 이런 작은 장식품에도 신경을 쓰고 말이야.

경 공공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곳곳에 신경 쓴 티가 나는군.

향로, 나무와 새가 그려진 병풍, 그리고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낮은 받침대.

저런 자그마한 가구들을 들여왔을 뿐인데, 방 안의 분위기가 사뭇 편안해졌네. 그래, 이런 곳이야말로 집이지.

몇 사람이 대청 안에 서서 기다리던 중, 내실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 공공이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열었다.

휘장 안쪽에서 삐져나온 손이 휘장을 걷으려는 듯 버둥거렸다.

“전하.”

경 공공이 기뻐하면서 잰걸음으로 침상에 다가가 휘장을 걷었다. 갑자기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셨는지, 진안 군왕이 음,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입이 떡 벌어진 표정으로 휘장에서 손을 놓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다 경 공공은 연민이 섞인 눈빛으로 진안 군왕을 내려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이번에도 윗옷을 입지 않은 채 침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이번에는 어깨뿐 아니라 등 전체에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어제 손으로 꼬집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같은 곳을 또 마구잡이로 꼬집었는지, 몇몇 곳에서는 혈흔까지 보였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네. 그래서 부인께서 보양탕을 끓이라고 하셨구나. 정말 제대로 보양하셔야겠어.

“목욕을 하고 싶네.”

진안 군왕의 낮은 목소리가 이불 사이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경 공공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어린 내시들을 재촉하면서 따뜻한 물을 준비하게 했다.

“너무 뜨겁게 하진 말거라. 상처가 따가우실 테니.”

경 공공이 조용히 당부하고는, 방을 나가는 내시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태의에게 약이라도 좀 받아 와야 하나?

궁에는 그런 약이 많기는 한데, 다 여인들에게 쓰이는 것이었어. 사내에게 쓰는 약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감히 폐하의 옥체를 이런 식으로 상하게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경 공공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떄, 그의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경 공공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 듯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윗몸을 훤히 드러낸 채, 속바지만 입고 휘청거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한 걸음씩 내디디며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

“전, 전, 전, 전하!”

경 공공이 말을 더듬으면서 소리쳤다.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부축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진안 군왕의 성가시다는 표정과 불쾌한 말투에 경 공공은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댔다. 그러고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전하! 아이고, 전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경 공공이 허리를 숙이고 엎드린 채 울먹였다.

적절한 온도로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목욕통에 몸을 담그던 진안 군왕의 몸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아프시지요?”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이런 건 아픈 축에도 못 낀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하긴, 이 상처들을 만들어 낼 때가 더 아프셨겠지.

경 공공이 울상을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남녀 사이의 그런 일들이 꼭 다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네.

경 공공은 진안 군왕에게 연민의 눈빛을 보내며 더욱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었다.

따뜻한 물 속에 편하게 누운 진안 군왕은 조금 전보다 고통이 덜한지, 천천히 몸에 힘을 빼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실내에서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낯선 이유는 그가 군왕부에서 지내며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했던 향이기 때문이고, 익숙한 이유는 요 며칠 내내 은은하게 맡았던 향이기 때문이다.

진안 군왕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욕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옆에 세워진 옷걸이에는 여인의 치마저고리가 걸려 있었다.

이제 여기는 나 혼자만 쓰는 곳이 아니구나. 같이 쓰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어.

“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밖에서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보양탕이 준비되었어요. 부인께서 먼저 드셔 보시겠어요?”

부인!

진안 군왕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내, 부인!

“전하? 괜찮으십니까?”

경 공공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괜찮다. 요즘 계속 혼미한 탓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구나. 여기서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읊어 보거라.”

경 공공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 진안 군왕이 목욕통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진안 군왕이 말하면서 곧장 걸음을 옮겼다.

아직 몸이 허하시고, 여긴 욕실이라 바닥도 미끄러울 텐데, 어찌 그리 바삐 움직이십니까.

경 공공이 재빨리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진안 군왕이 욕실에서 걸어 나오자, 대청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멈췄다. 구슬발 너머에서,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둘러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올리던 시녀들은 진안 군왕이 두 발을 땅에 딛고 욕실에서 혼자 걸어 나온 것을 눈치채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시 고개를 홱 들었다.

진안 군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채의 창가에 앉았다. 경 공공이 그의 곁으로 가서 꿇어앉았다.

두 시녀와 내시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서 빠르게 욕실을 정리했다.

“부인, 이제 씻으시러 가시지요.”

정교랑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경 공공이 아, 하고 짧게 감탄했다.

아침마다 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니, 당연히 땀을 씻어내셔야지.

“왕비께서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역시 보검은 연마해야 다듬어지고, 매화향은 한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피어나는군요.”

“전하, 보양탕을 드시지요.”

진안 군왕의 시녀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왕비께서 전하를 위해 특별히 만들라고 하신 겁니다.”

경 공공이 웃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진안 군왕이 손으로 그릇을 받아오면서 말했다.

“하던 얘기부터 마저 하자.”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진안 군왕의 기세는 많이 회복된 듯했다. 경 공공은 감격스럽기도, 기쁘기도 하여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시녀들이 자리를 비키고, 경 공공이 조용조용 말하는 소리만이 실내를 채웠다.

같은 시각 욕실 안에서는 반근이 신난 얼굴로 재잘댔다.

“아씨, 전하께서 정말로 다 나으셨나 봐요!”

반근이 정교랑의 머리카락이 젖을까 봐 조심스럽게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있었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잖아.”

정교랑이 가볍게 물을 두어 번 끼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느릿느릿 나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반근이 헤헤 웃으면서 하얀 천으로 정교랑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옷걸이에서 새로 꺼낸 치마를 정교랑에게 입혀 주었다.

“나았으면 됐지요.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교랑은 치마저고리를 건네받고 천천히 입으며, 헤실대는 반근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정말 안 나을 줄 알고 걱정했어? 그럴 리가 있겠니?”

반근은 마냥 좋다는 듯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었다.

“죽은 건, 한 명으로 족해.”

정교랑이 말하고는 치마저고리를 마저 입고 욕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은 건, 한 명으로 족해.

사공자님 한 명이면 족하지.

반근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으면서 눈가에 슬픔이 드리워졌다.

정교랑이 욕실에서 나오자, 경 공공은 하던 말을 멈추고 정교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청으로 걸어갔다.

“이제 알겠으니, 그만 물러가거라.”

진안 군왕의 말에 경 공공이 흠칫 놀랐다.

아, 아직 못다 말씀드렸는데요?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을 잠시 쳐다보다가,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춘 정교랑을 슬쩍 보고는 잠자코 예를 표한 뒤 물러났다.

“지금 밥 먹을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그러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보양탕 그릇을 내려놓았다.

“밥상을 들여라.”

정교랑이 말하자 문밖에 서 있던 시녀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네는 어째 툭하면 자리를 비우는 것인가?”

풀이 죽은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오는 경 공공을 본 고 선생이 물었다. 경 공공이 소매 안으로 손을 넣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고 선생은 경 공공이 암울한 표정으로 한숨까지 쉬자 깜짝 놀랐다.

“왜 그러나? 전하께 또 무슨 일이 생긴 겐가?”

고 선생이 다급하게 물었다.

“전하께서 변하셨습니다.”

경 공공이 또 한숨을 푹 쉬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하의 몸 상태가 또 변했다는 겐가?”

고 선생이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전하의 몸 상태가 변한 게 아니라, 전하께서 변하셨다고요.”

경 공공이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하자, 고 선생이 멈칫했다.

“예전의 전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듣는 걸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시끌벅적한 걸 싫어하셨지요. 심지어는 선생 같은 막료들과 대화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실 정도로요.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내게 이야기하시고,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내 이야기만 들으시고, 내게만 말을 거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왕비만 보였다 하면, 내 말도 끝까지 안 듣고 밖으로 내쫓으신다니까요.”

경 공공이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푹 쉬면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내게 눈길 한 번을 안 주시지 뭡니까. 내가 방해라도 된다는 듯이.”

경 공공의 말을 듣던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때 문밖에서 사환이 뛰어 들어왔다.

“주씨 가문의 공자님이 오셨습니다.”

신부의 친정을 방문하는 날에는 신부의 오라버니 중 한 명이 직접 찾아와 집으로 초대를 하며 신부를 데리고 가야 했다. 하지만 정사낭이 없다 보니, 주복이 그를 대신해서 정교랑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고 선생은 서둘러 사환에게 주복을 안으로 모시라고 한 뒤, 경 공공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만 울게나. 손님 맞이할 시간이네.”

경 공공이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내가 손님맞이 할 게 뭐 있습니까?”

경 공공은 노비 신분이기 때문에 손님을 맞이할 필요 없이, 신부의 사촌 오라버니가 당도했다고 안에 통보하기만 하면 됐다.

고 선생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벌써 스스로 시어머니처럼 굴고 있지 않나. 그러니 당연히 친정의 사촌 오라버니를 직접 맞이해야지.”

“주 공자님, 전하와 왕비께서는 지금 식사 중이십니다. 마차는 미리 준비해 뒀으니, 잠시 안으로 들어 기다리시지요.”

고 선생이 객청에 서 있는 주복을 향해 예를 표하며 말하자 주복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그 여인은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주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서 사환이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전하와 왕비께서 나오셨습니다.”

거봐, 시간 맞춰 나올 줄 알았다니까.

주복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주복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더니, 급기야 경악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았다.

주복의 표정을 본 고 선생도 그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보다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당을 걸어오던 사람 중, 가장 앞서서 걷던 사람은 주복이 기다리던 정교랑이 아니라 젊은 사내였다.

다소 어두운 계열의 주홍색 비단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디디며 다가왔다. 조금 느리긴 했지만, 진중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모습이 위풍당당해 보이기도 했다.

그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주복은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볼 수 있었다. 무척 야위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허약하고 희멀건 색을 띠고 있었지만, 커다란 두 눈만은 빛이 나고 생기가 넘쳤다.

“전, 전하.”

고 선생이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설마 헛것을 보고 있나? 아니야, 틀림없이 전하야.

고 선생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눈앞에 보이던 그 젊은 사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점점 가까이 걸어와 층계를 오르고 회랑 아래에 멈춰 서기까지 했다.

“육낭이 왔군.”

진안 군왕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주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떻게 저 모습이 된 거지?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내시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힘겹게 걸음을 옮겼고, 혼례 때 맞절을 하면서도 곧 쓰러질 거 같았던 모습이었는데? 심지어는 내시 둘이서 부축을 해도 힘에 부쳤다고.

태후가 부랴부랴 출궁해 달려올 정도라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

주복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진안 군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직 안색이 어둡긴 했지만, 화사한 주홍색 옷 덕분인지 심각할 정도로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피부에서는 어렴풋하게 광채가 느껴졌고, 온화한 표정 속 깊고 큰 두 눈은 더욱 반짝여 보였다.

진안 군왕은 누가 보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왜 잠시 앉다 가지 않고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 정신을 차리고 진안 군왕의 뒤에서 걸어오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저 여인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진안 군왕의 등장이 모든 사람의 이목을 빼앗은 거야? 저놈한테 뭐 볼 게 있다고!

주복은 속으로 씩씩댔다.

신혼이었기에 정교랑도 진안 군왕처럼 붉은색 비단옷을 입긴 했지만 평소처럼 나무 비녀와 작은 은빗 외에는 별다른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

맑은 눈빛과 담담한 표정, 붉은색 옷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그대로인 것 같았다.

“다들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주복이 시선을 거두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지금 바로 가는 건 어떻겠나?”

진안 군왕이 말했다. 대청 안팎에 있던 사람들이 진안 군왕의 말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복이 정교랑을 흘깃 보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의 의장 행렬이 대문 앞을 떠나자, 고 선생과 이 태의는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무슨 말로도 마음속의 이 감격스러운 감정을 표현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 선생이 먼저 정적을 깨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께서는 역시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고, 실행하면 반드시 끝을 보시는군.”

전하께서 오늘 나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니, 정말로 전하를 낫게 하셨어.

마차는 정씨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본 정씨 가문의 사람들은 고 선생이나 이 태의, 그리고 주복보다도 더욱 놀란 얼굴이었다. 정씨 저택 주위에서 진안 군왕을 염탐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했으리라.

진안 군왕에 관한 소식은 금세 경성 전역에 퍼졌다.

“스스로 걸을 수 있다고?”

고 관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예, 남들의 부축도 없이 비틀거리지도 않고 혼자서 잘만 걷더라고요. 심지어 정 낭자가 마차에서 내릴 때, 군왕이 몸을 돌려서 정 낭자의 손을 잡아 주기까지 했습니다.”

시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연기한 거겠지.”

고 관인은 미간을 찌푸렸고, 고능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죽을 때는 연기한 게 아니라고 확신하더니,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연기라고 의심하는 게냐?”

고 관인이 민망해하면서 말했다.

“아, 아버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누군가가 문밖에서 다급하게 들어왔다.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진안 군왕부에 심어 둔 사람도 말을 전해 왔습니다. 어제부터 몸이 점점 나아져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아예 침상에서 내려와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요. 내실에서 대문까지 걸어 나가는 동안 아무도 군왕을 부축한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태의는 오늘부터 약을 달이거나 침을 놓는 일도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군왕비가 진안 군왕은 완전히 나았다고 말해서요.”

막료가 말을 끝내자, 고능준이 잠시 침묵했다.

고 관인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멀쩡하게 나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다니?

고능준이 탁자에 손을 올렸다.

“그 여인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다는 걸 잊은 게냐.”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다시 막료에게 물었다.

“그쪽에는 몇 명이나 남아 있지?”

“어제 한 번 정리가 되긴 했지만, 다행히도 아직 세 명이 남아 있습니다.”

막료의 대답에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발각되지 않은 자들이고?”

“예, 그 세 명은 처음부터 진안 군왕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진안 군왕의 곁에 있던 자들이고, 저희와 직접 접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막료가 말했다.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이 왜 갑자기 나아졌는지, 무슨 치료법을 썼는지 제대로 조사하라고 하게. 그걸 알아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다음 행보는 방향조차 잡지 못할 테니 말이야. 죽었다 살아나는 건 한 번이면 족해!”

막료가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고씨 저택의 암담한 분위기에 비해, 정씨 저택에는 즐거운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정씨 저택에는 범강림 내외뿐만 아니라, 진소 부인도 같이 있었다.

진안 군왕을 본 진소 부인은 환하게 웃으면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았으면 됐네요. 다 나았으면 됐어요. 그날 어찌나 놀랐는지.”

진소 부인이 말했다.

그날 태후가 급히 군왕부로 달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진안 군왕이 위독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내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마께서 특별히 날 보려고 행차하셨던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탓에, 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거든요. 안 그래도 이미 궁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내일 내가 직접 궁으로 가서 태후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리려고요.”

진소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이 폐하와 태후마마의 총애를 독차지했다던데, 이러니 당연히 예뻐할 수밖에.

진안 군왕이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범강림은 간단하게 안부 인사를 한 뒤 사람들을 연회석으로 초대했다.

“오늘은 이대작과 반근이 요리를 했습니다.”

범강림이 말했다.

이대작과 찬모 반근이 정교랑과 진안 군왕 앞으로 다가가 큰절을 올렸다. 경 공공이 서둘러 두 사람에게 붉은 천으로 감싼 돈 봉투를 건넸다.

“그날 아씨를 배웅해 드리지 못했어요.”

몸종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울먹였다.

그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아씨의 친영 행렬이 초라할까 봐, 군왕 전하의 몸이 버티지 못할까 봐.

“배웅을 못 하다니, 진짜 아쉬웠겠다.”

소심이 웃으면서 몸종에게 팔짱을 끼고 분위기를 띄웠다.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와서 아씨를 배웅했는데.”

“나도 봤어, 나도! 그날 정 언니한테 글씨 써 주는 사람도 엄청 많았고, 하늘에서는 예쁜 불꽃이 팡팡 터졌어!”

진단랑이 방방 뛰면서 끼어들었다.

몸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저도 봤어요. 저도 문가에 서서 봤어요. 불꽃놀이는 족히 반나절이 넘도록 하늘을 수놓고 있던데요? 집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나와서 그걸 보느라, 거리 하나가 다 막힐 정도였어요.”

물론 장 노태야께서 밖으로 나와 제가 썩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중얼거리긴 했지만요.

그날을 회상하자, 몸종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방 안의 사람들도 그날을 떠올리자 저마다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제말을 배우기 시작한 소보아도 신나서 끊임없이 옹알이를 했다.

“하지만 아쉬운 게 하나 있어요. 이씨 가문에서 그날 썼던 폭죽들을 팔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정 언니, 그 사람들한테 가서 딱 한 개만 나한테 주라고 해 줄 순 없어요?”

진단랑이 울상을 지으면서 말하고는 손으로 정교랑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폭죽뿐만이 아니야. 최 악공네 집에는 사람들이 문턱이 닳을 정도로 찾아갔는데, 악보를 절대로 보여 주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지금 세간에 떠도는 정씨 송혼곡은 그날 최 악공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이 기억을 더듬어 짜깁기한 거야. 어디선가 누가 정씨 송혼곡을 연주할 수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우르르 몰려가 자리다툼을 할 정도라니까?”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여종이고, 몸종이고 할 거 없이, 다들 신이 나서 자신이 보거나 들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웃고 떠드는 소리 덕분에 연회석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한쪽에 앉은 진안 군왕이 세 반근과 진단랑에게 둘러싸인 정교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에 진안 군왕의 입가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때, 누군가가 진안 군왕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보자, 주복이 그를 향해 눈짓했다.

“잠시 측간에 다녀오겠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범강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주복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겠습니다.”

주복이 말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범강림에게 괜찮다는 의미의 미소를 보이고 주복을 따라 연회석을 나섰다. 문턱을 넘어서던 진안 군왕은 자신의 등 뒤로 들려오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내가 있을 때는 다들 조심스러운가 보군.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릴 때,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하나가 진안 군왕의 옷을 잡고 모퉁이로 끌고 갔다. 주복이 진안 군왕을 벽으로 몰아세우며 눈을 부라렸다.

“연기하신 겁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연기한 거냐고요! 애초에 아무 일도 안 생겼던 겁니까?”

주복이 떨리는 목소리를 낮추고 호통쳤다. 진안 군왕은 그의 손도 같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군왕께서 왜 연기를 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겠습니다. 무슨 필요가 있어서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요. 다만, 제가 아는 건 딱 한 가지입니다. 정사낭이 죽었습니다. 정사낭이 죽었다고요!”

진안 군왕이 주복을 빤히 바라보다가, 옷을 잡고 있던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연기한 게 아닐세. 정말로 그 여인이 나를 치료한 거야.”

하지만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주복은 여전히 진안 군왕의 옷을 놔주지 않았다. 주복의 퀭한 눈 밑은 그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음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육낭,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 여인까지 믿지 않을 수 있겠나? 이 모든 게 가짜이고 연기인데, 정사낭의 죽음만 진짜라면, 내가 이리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주복이 진안 군왕의 옷깃을 놓았다.

하긴, 그 여인은 원한과 은혜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이야. 이놈 말대로 만약 그 모든 게 가짜였다면, 그 여인이 절대로 자신의 체면을 위해 진안 군왕을 치료해 줬을 리 없어.

“육낭, 나는 그 여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네.”

진안 군왕이 주복을 쳐다보면서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전에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걸세.”

주복이 진안 군왕을 노려보았다.

“육낭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주복이 몸을 돌리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봐, 자건.”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고 주복을 불렀다. 주복의 자(字)는 자건(子健)이었다.

“자건!”

진안 군왕이 또 그를 불렀다. 주복이 씩씩대면서 고개를 홱 돌리자, 진안 군왕이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측간은 어디에 있지?”

  • <교랑의경> 23권에 계속

교랑의경 23권

차례

중요한 사람

밤의 사색

적합한

장궁

무슨 대수

대도

가르침

단장취의

-중요한 사람-

진안 군왕이 다시 대청 안으로 들어설 때도, 연회석에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회랑 아래에 걸음을 멈춘 주복이 창살 사이로 보이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정교랑이 미소를 짓자, 흑옥 같던 두 눈이 호수에 잔잔하게 이는 물결처럼 반짝였다.

사실 주복은 정교랑이 웃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예전 정교랑의 얼굴은 늘 표정이 없었고, 두 눈도 공허하기만 했었고.

앞으로는 저 여인이 웃는 걸 더 보기 힘들어지겠지.

주복은 갑자기 더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떴다.

“공자님, 지금 가시게요? 아직 식사도 안 하셨잖아요.”

사환이 말을 끌고 오면서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장씨 가문의 그 유명한 찬모가 손수 만든 음식에다가, 태평거에서 보낸 태평 두부까지 있는데? 조금 전엔 그 왼손잡이 숙수가 태평 두부로 꽃을 조각하는 걸 다른 사환들이랑 같이 봤어. 부엌에 있는 여종 말로는 인원수대로 만든 거라, 이따가 다 하나씩 먹을 수 있다던데. 그 맛있는 꽃 두부를 한입에 넣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먹긴 뭘 먹어. 한 끼 안 먹는다고 굶어 죽기라도 하냐?”

주복이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하고는 말 위로 올라타려고 말고삐를 건네받았다.

“주 공자님!”

소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자, 소심이 품에 보따리를 하나 안은 채 정교랑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먼저 돌아간다.”

주복이 고개를 숙인 채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그럼 먼저 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소심이 주복에게 보따리를 건넸다.

“이건 아씨께서 지으신 옷이에요. 부모님과 누이들이 집에 없으니까, 공자님 스스로 잘 챙기셔야 해요.”

“내가 옷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주복은 작은 소리로 대꾸하다가, 옆에 멀뚱멀뚱 서 있는 사환을 향해 바닥에 있던 작은 돌멩이를 찼다.

사환이 아파서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주복을 쳐다보았다.

옷이 부족한 것도 아니라면서요.

사환은 얼른 보따리를 받아 오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속으로 투덜댔다.

“행장을 꾸린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주복이 음, 하고 대꾸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난 어디 안 가.”

그러고는 냉소를 지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정사낭도 아니고.”

이 말을 뱉자마자 주복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또 칼로 마음을 도려내는 말을 해 가지고는!

“걱정할 필요 없어. 큰 병영으로 옮기기도 했고, 종 장군께서도 날 살뜰히 챙겨 주시거든. 종 장군의 병영에까지 마수를 뻗을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너나 잘 챙겨. 네가 잘 지내면, 나도, 아니 우리도 잘 지낼 테니까.”

당황한 주복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말 위로 훌쩍 몸을 날린 후 서둘러 말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숨기려고도, 나를 피하려고도 하지 마요. 꼭 나한테 와서 말해요.”

정교랑이 주복의 등 뒤에서 말했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짤막하게 알겠다고 대꾸했다.

“당신은 정사낭이 아니에요. 하지만, 남들이 내 약점으로 쥐고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당신은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당신은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정교랑의 마지막 말을 듣자, 주복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발걸이에 힘을 주어 말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 힘이 너무 셌는지, 말이 히이잉 울부짖으며 곧장 내달렸다.

주복도 말이 갑자기 이렇게 빠르게 달려나갈 줄은 몰랐는지, 몸이 뒤로 기울면서 말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으로 대문 앞을 떠났다.

한참을 달리던 주복은 언제, 어떻게 달려왔는지도 모를 거리에 멈춰 섰다.

“너도 내게 중요한 사람이다.”

주복이 천천히 말했다.

“아니, 네가 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연회가 끝나고, 진안 군왕의 의장 행렬이 정씨 저택 앞을 떠났다.

“지름길로 가자.”

진안 군왕이 마차 앞에 있던 경 공공에게 말했다. 경 공공이 멈칫했다.

앞뒤로 긴 의장 행렬이 있던 터라, 정씨 저택으로 올 때는 큰길을 따라서 왔다. 하지만 지름길로 가게 된다면 좁은 골목을 통과해야 해서 행렬을 분산시키고 최소한의 시위로 호위하며 가야 했다.

그러기엔…….

군왕부를 나서고부터 지금까지 쉬지 못하셔서 몸이 힘드신가?

문득 긴장한 경 공공이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고단해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하자, 정교랑은 더는 묻지 않고 마차에 두었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마차가 좁은 골목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해가 지고 한낮의 무더위가 가라앉은 시간이라 골목 곳곳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좁은 골목에 삼삼오오 모여서 더위를 식히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오는 의장 행렬을 보고는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진안 군왕의 의장이야!”

“오늘은 왕비가 친정 나들이를 가는 날이었나 보네!”

“저거 보라고. 군왕비도 같이 있나 봐.”

“그럼 오늘도 불꽃놀이를 하려나?”

길가에 서서 목을 빼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본 진안 군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책을 읽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책을 읽느라 바깥의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정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부르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 봐요.”

창가 밖을 가리키던 진안 군왕의 눈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정교랑도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서 그를 따라 웃었다.

“그날 사람이 정말 많았잖아요.”

오늘 정씨 저택에서 가장 많이 대화한 주제가 바로 혼례 당일, 정교랑의 친영 행렬과 그 외의 놀라운 광경들이었다. 다들 그런 광경은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진안 군왕은 사람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는데, 진소 부인이 그의 눈치를 보면서 화제를 돌렸었다. 신랑이 친영 행렬이 얼마나 떠들썩했는지 모르니, 정말 아쉽겠네, 하면서.

“원래 친영 행렬은 다 떠들썩하잖아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미소 지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또 웃었다.

“정방, 나도 봤어요.”

나도 봤다고?

정교랑이 의아한 듯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이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면서 또 한 번 말했다.

“그날, 나도 내 두 눈으로 봤어요.”

진안 군왕은 ‘나도’와 ‘내 두 눈’에 힘을 실어 말했다. 정교랑이 다소 놀란 기색으로 진안 군왕에게 물었다.

“그날, 당신이 왔었어요?”

진안 군왕은 여유롭게 두 손을 목 뒤로 깍지낀 채 방석에 몸을 뉘었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마차 천장 너머가 보이는 듯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엄청 천천히 따라갔어요. 최 악공의 칠현금 연주는 잘 못 들었지만, 사람들이 글씨를 쓸 때 시를 읊었던 건 잘 들었어요.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 그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요.”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만, 불꽃놀이는 잘 봤어요.”

저녁인지라, 마차 안을 비추는 은은한 불빛이 진안 군왕의 두 눈을 더욱 반짝이게 했다.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던데요? 휘장 너머로 봤는데, 진짜 예쁘더라고요. 대낮에도 그렇게 오색찬란한 불꽃놀이를 할 수 있는 줄은 몰랐어요.”

“어디 있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마차 휘장도 있고, 칠현금 연주도, 글씨를 쓸 때 시를 읊었던 것도 들었다고 한 걸 봐서는 같은 시간에 이 거리에 있었던 거 같은데.

“내가 말했었죠. 이 혼사는 내게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요. 그래서 그날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진안 군왕이 말하고 다시 방석 위에 누웠다.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그날로 되돌아간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나를 마차에 실어 달라고 하고, 왕부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이 거리에서 당신을 기다렸죠. 친영 행렬이 이 거리에 도착할 때쯤, 몰래 행렬 뒤쪽으로 붙어서 따라갔어요. 마차에 누워 있어야 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천장이 천으로 되어 있어서, 몸을 일으킬 수는 없어도 천을 걷으니 바깥 광경이 보였어요.”

진안 군왕이 혼자 피식 웃었다.

“그때 당신은 앉아 있었겠죠? 붉은 천 때문에 바깥도 볼 수 없었을 거고요.”

그랬던 거구나.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사실 나는 불꽃놀이는 못 봤어요. 어때요, 예뻤어요?”

“네, 정말 정말 예뻤어요.”

진안 군왕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크지 않은 마차 안, 진안 군왕은 누워 있었고 정교랑은 앉아 있었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지, 진안 군왕은 익숙하고 은은한 향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정교랑의 얼굴을 보자, 어디서 갑자기 용기가 샘솟았는지 그가 손을 뻗어 정교랑을 자신 쪽으로 확 당겼다.

“누워서 보니까 더 예쁘던데요? 불꽃놀이가 얼마나 잘 보였는지 당신도 한번 상상해 봐요.”

갑작스럽게 끌어당긴 진안 군왕 때문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던 정교랑은 그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찍으면서 그 위로 엎어졌다.

마차 안에서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전하?”

마차 앞에 앉아 있던 경 공공이 황급히 휘장을 걷고, 작은 문을 열고 물었다.

마차 안의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몸 위로 반쯤 엎어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정교랑의 손에 진안 군왕의 앞섶이 걸려 풀어 헤쳐지는 바람에 진안 군왕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에구머니나!

경 공공은 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닫고, 재빨리 휘장을 꼼꼼하게 쳤다. 얼굴이 화끈거려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세상에! 잠, 잠, 잠시도 못 기다리시는 건가?

경 공공이 앞을 내다보자, 벌써 군왕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군왕부로 곧장 들어가면, 혹시 두 분의 흥취가 깨지는 건 아닐까?

이박삼일 만에 전하께서는 약을 드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몸이 나아지셨어. 이대로 몇 번만 그 일을 더 한다면, 원기 왕성하여 활력이 넘치시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경 공공은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결심했다.

황당하면 뭐 어때? 그야 남들 눈에 그리 보이는 거지. 전하의 몸을 위해서라면…….

“여봐라.”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손짓하면서 옆에 있던 시위를 불렀다.

말을 타고 있던 시위가 서둘러 경 공공의 옆으로 다가가, 경 공공의 귓속말을 들었다. 시위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명령에 따랐다.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은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앞섶을 잘 여며 주었다.

“뜯어졌네요.”

“이것도 밤에 하는 거랑 비슷한 효과예요?”

진안 군왕이 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헤헤 웃으면서 물었다.

“아니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가슴을 문지르며 실망한 듯 탄식했다.

“아, 그럼 괜히 아팠네.”

정교랑이 이를 드러내고 웃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진안 군왕의 새하얗던 이빨은 어느새 검게 그을린 듯 변해 있었다.

그 독이 이 사람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흔적을 남겼네. 하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어찌 잊을까. 절절히 느껴지는 아픔인데.

잊자, 잊어. 잊는 게 제일 나아.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양산! 그럴 수는 없다고!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의 뺨을 쓰다듬었다. 진안 군왕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괜히 아픈 게 아니에요. 오래 아픈 것보단 짧게 아프고 넘어가는 게 낫죠. 그럼 나중에는, 아프지 않을 테니까.”

굳은살이 박인 정교랑의 손바닥은 마냥 부드럽기도, 무언가 까슬한 게 느껴지기도 했다. 진안 군왕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정교랑의 손길이, 어릴 때 안겼던 어머니 품속처럼 느껴졌다.

  • 종낭(琮郞), 무서워할 것 없어. 하나도 안 아파.

몹시 아득해서 이제는 잊어버린 듯한 기억이 순식간에 휘몰아쳤다. 눈시울이 붉어진 진안 군왕은 누웠던 몸을 반쯤 일으켜 또 한 번 정교랑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정교랑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교랑을 불렀다.

정교랑의 몸이 살짝 굳었다. 정교랑은 반사적으로 진안 군왕을 밀치려 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밀치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아파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소심이 마차 휘장을 걷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거지?”

지름길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지름길은 혼례 날에 이미 가 봤는데? 사람이 그리 많았는데도 한 시진이면 갔었어. 평소라면 반 시진도 안 걸려서 도착할 길인데, 왜 혼례 당일보다도 오래 걸리는 거 같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훑어보던 소심은 깜짝 놀랐다.

“이게 지금 무슨…….”

“왜 그래?”

반근이 소심의 옆에서 머리를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주위 환경은 낯설기만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여기는 군왕부가 아니잖아?”

소심이 앞쪽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마차의 앞뒤에 붙어있던 의장 행렬이 없어지고, 시위 열댓 명만 남아 간격을 두고 마차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의 마차는 앞쪽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여기는 군왕부잖아.”

반근이 갑자기 말하면서 옆에 있던 담벼락을 가리켰다.

“군왕부 후원의 담벼락 같은데?”

군왕부 후원의 담벼락?

반근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소심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군왕부 안은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경성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소심은 뒤늦게나마 이곳을 알아보았다.

저건 정말 군왕부 후원의 담벼락인데, 지금 어딜 가려는 거지?

“뒤를 따라오라고만 하시고, 어디로 간다고는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지금은 군왕부를 끼고 계속 돌고 있어요.”

마부가 조용히 말했다.

군왕부 주위를 돌고 있다고?

소심과 반근은 서로 마주 보다가 다시 앞쪽의 마차를 내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중독된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당신 저택에 데려갔던 거 같은데. 그때 당신이 집에 없었어요. 거기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당신이 거기에 있지 않아서…….”

진안 군왕이 말하면서 정교랑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는 무언가를 꽉 잡으려는 듯이 한 손을 세게 주먹 쥐었지만, 손바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손을 폈다.

“그 후로는 계속 혼수상태였어요. 이대로 정말 죽는구나 싶었는데, 또 잠시 깨어났죠. 깨어나자마자 정사낭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고.”

정사낭이 죽었다. 무려 정사낭이. 정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그녀를 아껴 주던 그 정사낭이.

정사낭이 죽다니, 심지어 그녀가 보는 앞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얼마나, 그녀가 얼마나 아플까. 그런 아픔은 대체 어떤 아픔일까.

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생각만 떠올리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이 턱 막혔으니까.

“정방, 미안해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자, 정교랑의 매끈하고 쭉 뻗은 목이 보였다. 언제 어디서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정교랑의 습관 때문일 것이다.

“나 때문이 아니었다면, 당신과 정사낭도 이렇게 남의 계략에 빠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 이 일도 결국 내 탓이 돼요.”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정교랑의 옆모습이 진안 군왕의 눈에 들어왔다. 정교랑의 오뚝한 코가 먼저 보였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짙은 속눈썹이 보였다.

“만약 내가 의술을 모르고, 죽을병이 아니면 고치지 않는다는 원칙이 없었더라면, 남들의 계략에 이용되지도 않았을 거고, 오라버니도 죽지 않았겠죠.”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은 그런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방, 미안해요.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무엇을 잘못 말했는지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눈빛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평온하고 담담해 보이는 얼굴.

속상하고 마음 아픈 일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이 여인의 얼굴에는 그런 상심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저 얼굴 뒤로, 얼마나 많은 슬픔을 홀로 억누르며 감당하고 있을까.

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믿어 왔는데, 이 여인은 매번 나보다 더 불행한 일을 겪어.

생각해 보니 우리가 천생연분이긴 하네. 남들 눈에는 화려하기만 한데, 우리가 겪은 일은 그 누구보다도 참혹하잖아.

진안 군왕의 귓가에 작은 기침이 들려왔다.

“계속 이렇게 앉아 있으면, 가슴팍이 아플 텐데.”

이렇게 앉아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앉아 있지?

진안 군왕이 뒤늦게 자신의 자세를 내려다보고는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튕겨 나갔다.

쿵 소리와 함께, 마차가 잠깐 흔들거렸다.

마부 대신 직접 마차를 끌고 있던 내시가 덩달아 몸을 살짝 떨었다.

안전을 위해 이 마차를 탄 게 천만다행이었네. 여름에 조금 덥긴 해도, 휘장이 아니라 문과 창문이 다 달린 마차라 방음도 잘 되고 말이야. 마차 안에 타 있는 사람도 여기가 길 위인지, 왕부 근처인지 전혀 모를 거야.

좋은 마차야. 워낙 방음이 좋아서 그런지, 큰 소리가 새어 나오지도 않고, 조용히 대화하는 듯한 말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네.

이렇게 큰 소리가 난 건 처음인데.

“괜찮아요?”

“아파요!”

마차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 공공은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음란한 생각을 황급히 떨쳐내고, 앞을 바라보며 오늘 정씨 저택에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를 곰곰이 곱씹었다.

두부, 음, 꽃으로 조각된 두부를 먹었지. 태평거에서 만든 태평 두부가 유명하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태평 두부를 직접 먹은 건 또 처음이네.

미간을 찌푸리면서 뒤통수를 매만지는 진안 군왕을 보며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픈 걸 알면 됐어요. 아픈 걸 모르면, 오히려 곤란해지죠.”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눈을 피한 채 민망하게 웃으며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맞는 말이에요. 아픈 건 살아 있다는 증거죠(痛則生).”

진안 군왕의 귀는 거의 녹아버릴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치겠네. 내가 뭘 한 거야!

“통해야 산다(通則生), 아니에요?”

정교랑이 웃음기 서린 눈으로 말했다.

“비슷한 거 아니겠어요? 아플 통이나, 기가 통할 통이나.”

여전히 정교랑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표정이 몹시 궁금했지만, 괜히 헛기침을 하며 점잖은 모습으로 창문을 열고 중얼거렸다.

“집에 당도할 때가 다 됐는데?”

“거리로 따지면, 세 바퀴째겠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세 바퀴째요?”

멈칫했던 진안 군왕은 그제야 정교랑의 말뜻을 알아듣고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아경!”

진안 군왕이 소리쳤다.

돼지찜을 먹은 뒤에 생선 요리를 먹었는지, 전분으로 만든 어묵을 먹었는지 헷갈려 하던 경 공공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마차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무릎을 꿇어 엎드린 채로 한 손으로 문을 열고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말 산책이라도 시키려고?”

진안 군왕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말 산책이 아니라, 사람 산책이지요.

경 공공이 속으로 말하고는 앞섶이 터진 진안 군왕의 옷과 머리카락이 삐져나온 관을 빤히 바라보았다.

“되게 빨리 끝나셨네.”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진안 군왕이 굳은 얼굴로 뒷짐을 진 채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의 안색을 살피고는 그의 뒤를 따라 민망한 듯 손을 모으고 따라오는 경 공공을 쳐다보았다.

쯧쯧, 자네는 정말!

고 선생이 경 공공을 향해 눈으로 말하고는 서둘러 진안 군왕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군왕 내외가 신방으로 돌아오자, 시녀들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도록 시중을 들었다.

“먼저 씻어요. 난 잠시 저들과 상의할 게 있으니.”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불러세웠다.

“이쪽 거처에 서재를 하나 마련했으니, 그쪽으로 가서 이야기 나눠요.”

진안 군왕이 놀란 듯이 멈칫했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전하, 이쪽으로 가시지요.”

소심이 길을 안내했다. 진안 군왕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정교랑은 그제야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경 공공, 고 선생과 함께 들어온 막료 서너 명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전하의 서재인 줄 알았는데, 내원에 있는 서재일 줄이야.

“전하께서 여기에도 서재를 만드신 게냐?”

고 선생이 물었다.

“왕비께서 쓰시는 겁니다.”

소심이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천천히 차를 따랐다.

“왕비께서 말씀하시기를, 전하께서 내원에서 논의하는 게 가장 좋을 거 같다고 하셔서요.”

경 공공이 웃으면서 소심의 말에 맞장구쳤다.

“좋다마다요. 여기에 계시면, 왕비께서도 언제든 전하를 뵐 수 있으니.”

뭐? 나를 한 시도 떠나보낼 수 없어서, 언제든 보고 싶어서 내원에 앉아 있으라고 하는 거 같아? 대체 어딜 봐서?

진안 군왕이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도대체 중독됐던 사람이 나야, 아니면 경 공공이야? 어째 사람이 부쩍 멍청해진 거 같단 말이지.

음, 아니면, 어쩌면, 아마도, 그러니까……. 저 여인이 멀리 가고 싶지 않아서,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돌보기 불편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너무 조심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생각에 잠긴 진안 군왕이 입을 삐죽이며 웃는 것을 본 고 선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진안 군왕의 얼굴을 차마 더는 보지 못하겠는지, 일부러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쭉 저렇게 지내시는 건 아니겠지?

소심은 진안 군왕의 시녀가 아니기에, 사람들을 서재로 안내한 뒤에 곧바로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안 군왕의 시녀들도 밖으로 물러났다.

“이번 일에 관련된 자들은 우선 가둬 두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처리할까요?”

고 선생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서재 안을 훑어보았다.

내실만 한 크기의 서재는 그리 넓지 않았고 원래 쓰던 외원의 서재에 비하면 몹시 작았다.

놓여 있는 가구들도 다 간소하네. 탁자, 방석, 책장, 향로…….

“간소하게 놓인 것들이긴 하나, 다 좋은 물건들입니다.”

진안 군왕의 시선을 따라가던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헛기침을 했다.

이 두 사람 좀 보게. 분명히 자기 집인데, 꼭 남의 집 희귀한 세간살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굴잖아!

고 선생이 눈치를 주자, 경 공공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전에는…….”

진안 군왕이 탁자를 손끝으로 두드리면서 입을 열었다.

진안 군왕의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보내 준 사람들.

태후가 상으로 내린 사람, 황제가 먹을 갈라고 보내 준 사람, 귀비가 차를 따라 주라고 보낸 사람, 그리고 대신들이 보내 준 말을 관리하는 사람이나 마차를 모는 마부 등. 심지어 어떨 때는 차 맛이 좋다고만 해도 차를 우린 시녀를 보내오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거나 미소만 지어도 그 사람을 보내 주곤 했다.

물론 진안 군왕이 직접 고른 하인들도 있긴 했다. 궁에 새로 들어온 내시나 궁녀를 배정할 때면, 습관처럼 편히 사람을 고르곤 했으니까.

시중을 드는 하인들의 출신은 복잡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기도 했다. 진안 군왕이 직접 고른 사람들은 자기 사람이고, 나머지는 전부 자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본분을 지키지 않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하인들을 종종 걸러냈다. 그게 자기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 버렸다. 과거 그가 신임했던 집사가 일부러 늑대 떼를 불러왔다는 것을 알고 바로 때려죽였던 것처럼.

하지만 자기 사람이 아니라면, 붙여줬던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굳이 자기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 사람이라면, 하던 대로 하면 돼.”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내 준 사람이라면 돌려보내고.”

고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 진안 군왕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냥은 말고, 때려죽여 보내게.”

고 선생이 흠칫 놀랐다.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던 경 공공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 놀랐던 건, 누구를 때려죽이라고 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선물 받은 하인을 돌려보내는 것은, ‘당신의 꿍꿍이가 탄로 났으니, 이들을 돌려보낸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돌려보내진 자들은 결국 자신의 주인 손에 죽음을 당했다. 단지 진안 군왕의 손을 거치지만 않았을 뿐.

하인들에게는 돌아가서 죽나 죽고 나서 돌아가나, 죽는 건 매한가지겠지만, 하인을 돌려받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그 의미가 확연히 달랐다.

고 선생이 표정을 가다듬고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궁에서 보낸 자도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손바닥으로 천천히 탁자를 쓸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워. 어디서 이렇게 좋은 물건을 구해 오나 몰라. 고작 탁자일 뿐인데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네. 꼭 저 여인처럼.

“황궁 사람이니 더욱 봐줘선 안 되지. 그들이 저버린 건, 본왕의 호의가 아니라 태후마마의 호의이니까. 감히 태후마마의 호의를 저버렸는데, 가볍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번 일이 전하께서 황제 폐하와 태후마마의 명성을 지켜 드리고자 재차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전하께 독을 써서 벌어진 일임을 밝히자는 말씀이신지요?”

이는 불순한 의도를 품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기 때문에, 충절을 지키고 결백을 밝히기 위해 음독자살을 시도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음해로 중독됐음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이들을 때려죽여 돌려보내는 순간, 이 일은 명확하게 규정될 테고,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 게 자명했다. 이미 다사다난한 시기를 보내는 조정으로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서재 안에 정적이 흘렀다. 바깥마당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진안 군왕의 웃음이 정적을 깨트렸다.

“아, 숨은 조금 붙여 두지. 궁에 들어가 마마께 사죄할 마지막 숨은 남겨 둬야 하니까.”

고 선생과 경 공공은 또 한 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본왕이 이러는 것은 다 마마와 폐하의 명성을 위한 것일세. 본왕이 전에 체면을 지키고자 자결을 시도한 일로 마마께선 상심이 아주 크셨지. 본왕에게 다시는 절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울며 당부하셨는데, 그 후로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마마의 마음을 외면하고 재차 자결을 시도하겠는가? 그건 태후마마를 무시하고, 마마의 뺨을 후려치는 일이야. 그럼 세간에서 태후마마를 얼마나 욕하겠나? 본왕이 마마의 은혜를 저버리고 이리도 제멋대로 구는 것은 다 태후마마께서 본왕을 오냐오냐 버르장머리 없이 키웠기 때문이라고 험담할 것이 뻔해.”

진안 군왕이 설핏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서늘함이 가득했다.

“본왕이 제멋대로 군다는 소리를 듣는 건 괜찮지만, 마마께 본왕을 오냐오냐 키웠다는 비난을 받게 할 순 없지.”

진안 군왕이 말을 끝내자, 고 선생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처리한다면, 반대로 전하께서 제멋대로라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실 텐데요.”

한 번에 하인 열댓 명을 장살하고, 또 몇 명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정도로 살려두어 황궁으로 돌려보냈다는 소문이 퍼지면, 진안 군왕은 필히 그 흉악무도함으로 유명세를 떨칠 터였다.

“바깥세상의 사람들은 전하께서 정말로 남이 쓴 독에 중독이 됐는지 아닌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겁니다. 그저 전하께서 괜한 화풀이를 하신다고 믿겠지요.”

이어지는 고 선생의 말에 진안 군왕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깥세상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본왕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본왕이 중독됐을 때, 그들이 본왕을 대신해서 아파 주기라도 했는가? 본왕이 다 낫고 나니, 이제야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는.”

고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하셨는데, 이 정도 분풀이는 하셔야죠. 그렇다면 이 일은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고 선생이 몸을 일으키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만, 부인께서 이 태의에게 이쪽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고 선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다 나았는데, 굳이 가까이 올 필요가 있나?”

웬 이 태의? 왕비가 곁을 지키는데 뭘 굳이…….

경 공공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전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겠지? 부인께서 계시니 괜히 와서 알짱거리지 말라고.

“부인께서 그리 분부하신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요. 지금은 전하의 건강이 우선이니, 뭐든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고 선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께서 내리신 결정이니, 당연히 반대하시지 않겠지.

진안 군왕이 대꾸가 없자, 고 선생은 예를 표하고 물러날 준비를 했다.

“종일 바쁘셨을 텐데, 일찍 쉬시지요.”

고 선생이 멀뚱멀뚱 서 있는 경 공공을 향해 눈짓했다.

“경 공공, 그만 가세.”

경 공공이 멈칫하고 곧바로 대꾸했다.

“소인은 전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부인께서 계시니 자네가 시중들 필요는 없네. 그리고 자네 손아귀 힘이 꽤 쓸 만하지 않은가. 새파랗게 어린놈들은 이런 일을 통 해본 적이 없을 터이니, 괜히 단번에 다 때려죽일까 겁나는군. 그러니 자네가 가서 시범이나 한번 보여 주게나.”

고 선생이 말했다. 경 공공은 언짢은 기색으로 가만히 서 있었지만, 진안 군왕이 자신을 남겨 두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알겠다며 예를 표했다.

“이런 일은 소인도 하기 싫습니다. 이제야 손톱을 좀 길렀더니만.”

“직접 때리라는 것도 아니잖나. 그냥 서서 지켜보기만 해도 된다니까.”

두 사람이 소곤거리면서 방을 떠나자,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고 서재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그 여인은 이 중에 무슨 책을 읽을까? 글씨를 연습할 때 썼던 종이가 이렇게나 많네.

한참을 서재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진안 군왕이 밖으로 걸어 나오자,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에게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안채를 바라보았다.

환한 불빛 아래로 활짝 열려 있는 문과 창문이 보였다. 얇은 휘장에 새겨진 모란꽃이 불빛에 비쳐 은은한 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시녀 한 명이 지나갔다.

“전하.”

인기척을 느낀 소심이 휘장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와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표했다.

소심이구나.

“볼일은 다 보셨어요? 부인께서 전하를 위해 밤참을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밤참을 준비했다고? 나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하다니, 다정하기도 해라.

진안 군왕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두 시녀가 휘장을 걷어 올리자 방 안으로 들어온 진안 군왕은 다소 어색하게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정교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이 태의와 이야기하러 가셨어요. 전하,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지요.”

소심이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소심의 안내를 받으며 창가에 앉았다. 소심이 다른 사람에게 밤참을 가져오라고 시키자, 진안 군왕은 소심을 제지했다.

“지금은 됐다. 일단 차부터 한 잔 마셔야겠어.”

소심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진안 군왕의 시녀가 서둘러 차를 우리러 갔다.

진안 군왕이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고 팔걸이의자에 기대 편안한 자세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여기가 내 신방이구나.

내가 직접 꾸미지 못해서인지, 왕부에서 꽤 구석진 곳으로 정해졌네. 정 낭자와 혼사를 치르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지 어떻게 치를지 곰곰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어. 혼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물론 낭자에게는 사소한 일이겠지만, 내게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일이니 꼭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어. 여러 사람이 축하해 주는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하지만 이건 생각지도 못했군. 혼례를 얼렁뚱땅 대충대충 치를 줄이야.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신랑과 상중인 신부라니.

진안 군왕이 한숨을 푹 쉬고는 손에 쥔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부인의 말씀은, 전하께서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이 태의가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가, 곧 풀 죽은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가 맥을 짚었을 때는 분명 멀쩡하셨는데.”

아니지, 맥을 짚었을 때 멀쩡하면 뭐해? 그때도 분명 맥이 짚이지 않았는데, 이 여인이 오자마자 다시 살아났잖아.

“사실, 나는 병을 고칠 줄 몰라요.”

정교랑의 말에 이 태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부인, 너무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겸손한 게 아니라, 할 줄 아는 건 할 줄 아는 거고, 할 줄 모르는 것은 할 줄 모르는 거죠. 일부러 남에게 숨기거나 말하지 않는 건 없어요. 우리 정씨…….”

정교랑이 돌연 말을 멈췄다. 이 태의가 고개를 들자,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셨던 것은 매산도(梅山道)지 의술이 아니었어요.”

매산도! 매산동만(梅山峒蠻)! 그곳은 무당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경악한 이 태의는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조정에서는 무당을 매우 금기시하는 분위기야. 게다가 정 낭자는 황실 종친의 일원이 되었으니, 앞으로 더욱 주의해야 할 텐데.

“저마다의 길이 있는 게지요. 위급할 때 사람을 돕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이 태의가 서둘러 말했다.

정교랑이 이 태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태의가 이해하는 것 같기에 정교랑도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내가 전하를 해독하긴 했지만, 이미 몸이 너무 많이 상했어요. 앞으로 더욱 요양에 힘써야 하니, 이 태의가 신경 좀 써 줘요. 내가 있다고 괜히 손 놓고 있지 말고요.”

이 태의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태의의 의술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 태의는 순식간에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머쓱함에 웃음 지었다.

“아닙니다, 당치도 않지요. 어떻게 제가 감히요.”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게 아니라, 의술을 말한 거니까.”

정교랑이 말하자, 이 태의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이 여인도 참!

이 태의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이 옆에 서 있던 반근을 쳐다보자, 반근이 서둘러 작은 함 하나를 이 태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이 태의가 물었다.

“내게 물어봤던 향이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 태의가 멈칫했다가, 동방화촉을 밝힌 다음 날 자신이 물어봤던 것을 떠올리며 민망해했다.

초야를 치른 후 온몸의 기가 빨린 진안 군왕을 보고 이 태의는 한동안 방 안에 머무르면서 곳곳을 조사했다. 방을 조사하던 중, 그는 왕부에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던 향을 느꼈다. 분명 약 냄새가 섞인 향이었다.

“다만, 전하께서만 쓰실 수 있는 향이에요. 다른 사람이 이 향을 써서는 안 돼요. 언제 또 필요해질지 모르니, 잘 보관해 둬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 태의가 놀라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전하의 해독은 이 향과 관련이 있었던 겁니까?”

“그래요. 없어서는 안 될 향이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랬던 거로군.

이 태의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정중하게 함을 받아왔다.

“한동안은 집에 계실 때도 많이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사람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긴 했지만, 얼마나 많은 자가 이곳에 숨어 있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죠. 이번 일로 보이지 않는 손해를 본 사람이 있을 테니, 결코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겁니다.”

이 태의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정교랑이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보이지 않는 손해? 글쎄요. 이런 건, 보이지 않는 손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밤의 사색-

“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몸종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진안 군왕은 서둘러 바른 자세로 고쳐앉았다가,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다시 재빨리 팔걸이의자에 등을 붙이고 골똘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밤참은 지금 드시겠어요?”

소심이 정교랑에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밤참은 드셨는지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정교랑은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뒤였다. 치마저고리는 평소와 같은 암청색이었지만, 장미꽃 같은 진한 보라색 치마를 입은지라 전보다 훨씬 화사해 보였다.

신혼은 신혼이네.

사실은, 이 여인도 내심 신혼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 거겠지? 그러니까 옷차림도 저리 신경을 쓰는 거고.

진안 군왕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요. 잠시 쉬고 있었어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물었다.

“왜 아직도 옷을 안 갈아입었어요?”

“좀 힘들어서요. 일단은 조금 쉬려고요.”

진안 군왕이 편히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자, 시녀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을 따라갔다. 진안 군왕은 간단하게 몸을 씻은 뒤, 시녀들이 가져다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내 물건들은 다 여기로 옮겼느냐?”

진안 군왕이 물었다.

“옷가지만 조금 가져왔습니다.”

시녀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더는 묻지 않고 욕실을 나섰다.

정교랑은 연자줏빛 내의를 입은 채로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다가오자, 반근이 서둘러 보양탕이 담긴 그릇을 그에게 건넸다.

“이 태의가 뭐라고 하던가요?”

진안 군왕이 그릇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정교랑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의 약 처방에 관해서 이야기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약을 더 먹어야 합니까?”

정교랑이 책을 내려놓고 진안 군왕을 보며 웃었다.

“약 먹는 게 무서워요?”

진안 군왕이 풉 하며 웃고는 수저도 쓰지 않고 보양탕 그릇을 통째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당신 것은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난 약을 먹을 필요가 없어서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누굴 놀릴 줄도 아는 사람이었군.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처 몰랐던 면을 점점 더 알게 되네.

“그래도 이 약은 꽤 맛있네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그릇에 남은 보양탕을 마저 들이켰다. 차를 가져온 시녀가 무릎을 꿇고 진안 군왕에게 차를 바치자, 진안 군왕이 차를 머금고 입을 헹궜다.

“시간이 늦었어요. 종일 피로했을 텐데, 일찍 쉬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일찍 쉬자는 말에 당황했는지, 진안 군왕은 입을 헹구던 차를 꿀꺽하고 삼켜 버렸다.

방 안의 시녀들이 서둘러 예를 표하며 물러났고, 소심은 잠시 주춤했다.

“야간 당직은 필요 없어. 그러니 너희도 그만 가서 쉬어.”

정교랑이 말했다. 소심과 반근이 서로 마주 보고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바깥의 등불이 하나둘씩 꺼졌다.

“집에 있을 때도, 누가 야간 당직 서는 걸 싫어했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나도요.”

진안 군왕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방 안에 정적이 흐르고, 곧 묘한 긴장감이 채워졌다.

“오늘, 또 하나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아니요.”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침상으로 다가가 휘장을 걷었다.

그때 은은한 등불 빛이 정교랑의 얇은 연자줏빛 여름 내의를 비추었다. 가벼운 재질의 내의 아래로 부드럽고 매끈한 새하얀 속살이 비쳤다.

진안 군왕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하, 참 잘됐네요.”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어깨를 돌리고 팔을 펴면서 홀가분한 척을 했다.

“드디어 안 아파도 되겠어요. 모처럼 잠을 푹 잘 수 있겠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건 모를 일이죠.”

등불이 꺼진 방 안, 진안 군왕이 눈을 힘껏 크게 뜨고 천장에 걸린 휘장을 바라보았다. 옆에 누운 정교랑은 밖을 향해 몸을 돌려 누웠기에, 조금 전처럼 서로의 몸이 닿는 일은 없었다.

진안 군왕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아주 조금 스친 것일 뿐인데, 저도 모르게 몸을 안쪽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진안 군왕이 재빠르게 몸을 피하자, 정교랑도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진안 군왕이 밑도 끝도 없이 말하자, 옆에 누워 있던 정교랑이 네, 하고 대꾸했다. 진안 군왕은 입을 닫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이 바보야, 그럼 정 낭자는 익숙하겠냐? 게다가 낭자는 무려 여인인데.

“내 말은, 몰랐다고요. 우리가 혼례를 치를 줄.”

진안 군왕이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원래부터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에요. 그냥 이런 거죠.”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머리 뒤로 받쳤다. 그는 긴장해서 얼음처럼 꽁꽁 얼어버린 몸을 조금씩 풀며 자세를 편안하게 고쳤다.

“원래대로라면, 혼사는 참 좋은 일이어야죠.”

그런데, 우리의 혼사는 내가 독에 중독되어 곧 죽을 지경이었을 때, 동시에 정사낭이 기루에서 살해당했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누군가의 계략이었음을 빤히 알면서도 시기를 놓쳐 흐지부지되었을 때 겨우 치러졌지.

게다가 태후마마 때문에 강제로, 심지어는 액막이라는 명목으로 다급하게 치러졌어.

이건 내가 생각해 온 혼인이 아니야. 그리고 이런 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당신이 이 혼인을 거절한다 해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당신이 정말 나와 혼인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어요.”

눈이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휘장의 색은 점차 푸른 빛을 띠었고, 곧이어 얇은 재질까지 눈에 보였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은은하게 퍼지는 익숙한 향을 맡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에 누운 정교랑의 굴곡진 등허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어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긴, 만약 정 낭자가 원하지 않았다면, 태후가 아무리 압박한다고 하더라도 낭자는 혼사를 치르지 않았겠지.

그런데 왜 동의했을까? 더군다가 그런 상황에서.

진안 군왕은 심장이 더욱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심호흡을 하며 손을 머리 뒤에서 빼내 조심스럽게 가슴 위에 얹었다.

“진작 끝난 얘기 아니었나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을 등지고 누워서인지, 정교랑의 목소리가 조금 낮고 침울하게 들려왔다.

일찍이 혼인을 약조하긴 했지. 내가 청혼했을 때, 정 낭자도 좋다고 했고.

하지만 그땐 지금과 상황이 달랐잖아. 그때만 해도 난, 내가 정 낭자에게 이렇게 해를 입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정사낭이 나 때문에 죽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이미 정한 건데,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정 낭자는 뭐든 결정을 내리면 번복하는 일이 없고, 무슨 일이든 한번 말한 건 반드시 실행에 옮기며, 실행하면 반드시 끝을 보는 사람이다. 그게 도리라는 건 나 또한 잘 알지만…….

진안 군왕이 다시 손을 머리 뒤로 넘겼다. 왠지 모르게 휘장 안이 조금 답답하다고 느껴져 그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침상은 커 봤자 침상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인지라, 몸을 뒤척이던 진안 군왕은 허리에 얇은 이불을 덮고 몸을 옆으로 돌린 채 누워 있던 정교랑을 품에 안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진안 군왕은 재빨리 뒤로 몸을 옮기려다, 쿵 소리를 내며 침상 끝쪽 난간에 부딪혔다.

“왜 그래요?”

정교랑이 물어보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진안 군왕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자꾸만 불에 덴 듯 튕겨 나가는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서둘러 바른 자세로 눕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요.”

정교랑은 더는 묻지 않고 다시 옆으로 몸을 뉘었다.

괜히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놓고, 또 나 혼자 난리를 치고 있네. 정 낭자는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을 텐데.

진안 군왕이 안쪽을 향해 몸을 돌려 눕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는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다가, 몸이 저리기 시작할 때쯤에야 서서히 긴장을 풀고 편한 자세로 누웠다.

옆에 누운 정교랑은 깊이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 낭자는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가 보네. 내가 이틀 동안 죽은 듯이 잠들었을 때, 낭자는 멀쩡한 정신이었으니 이젠 익숙해진 건가.

하긴, 익숙하지 않을 건 또 뭐야. 첫날밤에는 내가 굳이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온 것이니.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옆으로 누운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과 한데 섞인 정교랑의 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사실 그날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대청으로 나가 맞절을 한 뒤에 합환주를 마셨고, 그 뒤로는 거의 의식을 잃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꼭 눈 깜짝할 새가 지난 것 같았고, 현실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 선생이 왜 자신을 따돌렸냐고 경 공공과 이 태의를 욕하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이 한바탕 꿈을 꾼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태로 정말 혼례를 올렸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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