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75)

말없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을 본 내시가 마른기침을 했다.

“고 선생, 말씀이 많으셨습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전하께서 깨어나신 지가 얼마 안 되었잖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진안 군왕도 지쳤는지, 내시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침상에 누웠다.

이때, 고 선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정 낭자를 모셔 오려고 했는데, 정 낭자가 또 거절하더군요. 뭐라더라? 집에 상을 치러야 하는데 집안에 어른들이 계시지 않으니 손님을 만나기가 영 불편하다고요.”

고 선생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지금처럼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땐 불러도 안 오겠다면서, 위험천만했던 어젯밤에는 왜 기어코 들어오겠다며 밤새 기다린다? 그 여인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어젯밤에 그 여인이 들어왔으면 그 몸종뿐 아니라 우리 전하의 목도 꺾었을지 모르는 일 아니오?”

“고 선생!”

내시가 목청을 높이며 고 선생을 흘겨보았다.

“집에 상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집안 어른이 계시지 않으니, 당연히 정 낭자가 자리를 비우기 불편하겠지. 정 낭자가 손님을 만나기 불편하다고 말했다면, 정말로 손님을 만나기 불편한 상황인 걸세.”

고 선생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진안 군왕이 입을 열었다.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향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요. 어서 편히 쉬십시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전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는 겁니다.”

고 선생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하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를 따라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내시는 시중드는 시녀들에게 당부한 후, 자신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만 골라서 하는 거요! 전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기를 바란다면서 그런 말을 늘어놓다니.”

“솔직한 말을 했을 뿐이오.”

“솔직한 말이어도 때를 골라서 할 줄 알아야지. 안 그래도 전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몇 없지 않소. 게다가 지금은…….”

작게 대화하는 소리가 휘장 너머로 점점 더 멀어지더니, 차츰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진안 군왕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서 손바닥을 펼쳤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조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손에 꼭 쥔 채 팔을 내렸다.

그래, 잠이나 자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내가 하루빨리 회복하는 것이야.

절대로 죽어서는 안 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아무리 힘들어도, 꼭 살아남아야 해.

휘장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두 시녀는 더 이상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시녀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들고 걸어가 휘장과 몇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오후의 방 안이 한밤중처럼 조용해졌다.

주씨 저택의 마당 안, 마차들이 뿌연 먼지를 흩날리면서 차례로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주복이 다급하게 마차 한 대를 쫓아갔다.

“아버지! 지금이 떠날 때입니까?”

주복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주 노야가 휘장을 들어 올리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호통쳤다.

“그럼 이 판국에도 떠나지 말란 말이냐! 여기 더 남아 있다가는 우리가 관에 들어갈 판이야!”

주 노야는 주복에게 삿대질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아! 네가 우리를 따라 섬주로 가지 않겠다면 네 맘대로 하거라. 이미 종 장군에게 당장 너를 데리고 서북으로 돌아가라고 얘기해 뒀으니.”

“아버지!”

주복이 원망 섞인 눈빛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떠난다지만, 우리 집이나 여기 있는 집기 같은 건 마음대로 써도 되니까, 교교더러 다 가지라고 해라. 무슨 일이 있으면 섬주로 서신을 보내면 되고, 섬주로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된다고 전해. 아, 절대 우리를 남으로 여기지 말라고 전해 다오.”

주 노야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하고는, 주복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마부를 재촉하며 급히 마차의 휘장을 내렸다.

주복은 하는 수 없이 주 노야를 성문까지 배웅해 주고, 주 노야 일행이 점점 더 멀어져 까만 점이 되어갈 때까지 바라보다 말을 돌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난 주복은 말에 채찍을 가하며 어디론가 내달렸다.

“저기 보게, 주 공자님이 또 오셨네.”

진(秦)씨 저택의 대문 앞. 한가롭게 수다를 떨고 있던 문지기들이 시위들을 불러오며 일사불란하게 경계 태세를 갖췄다.

“주 공자님!”

집사가 말에서 내려 활을 집어 든 주복을 향해 외쳤다.

“저희도 주 공자님께 예의를 차리고 싶지만, 진씨 가문의 대문 앞에서 무기를 보이셨으니 저희도 무기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복은 집사와 진씨 저택의 마당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 기세로 소매를 걷어붙인 문지기와 시종들을 훑어본 주복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주 공자님?”

집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주복은 웃으며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 한쪽을 찢어내더니,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활시위를 당기며 화살을 쏘아냈다.

문지기와 시종들이 흠칫 놀라던 찰나, 텅 소리와 함께 문짝에 화살이 꽂혔다. 화살촉에는 조금 전 주복이 찢어낸 옷자락이 걸려 있었다.

주복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씨 저택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 머리를 틀고 자리를 떴다. 진씨 저택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알겠다. 물러가거라.”

진호가 손을 휘휘 젓자, 사환이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물러났다. 자신의 앞에 놓인 찢어진 옷자락과 화살을 바라보던 진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이 언제 할포단의(割袍斷義: 절교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옷을 찢어서 내비침)까지 배웠담.”

진호는 화살과 옷자락을 집어 들고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몹시 더디게 걸었다. 주복이 남기고 간 물건을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대하듯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떠받들고서.

같은 시각 주복은 정씨 저택의 대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마당에는 장례를 치를 때 쓰는 물품들이 갖춰졌고, 범강림과 황씨는 각자 분주한 모습이었다.

주복을 발견한 황씨는 잠시 주저하다가 여종을 시켜 삼베를 가져오게 했다. 주복은 잠자코 삼베를 받고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정교랑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린 대청 문 사이로 정교랑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앉은 반근은 정교랑의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천으로 한 번 싸매기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상처가 이렇게나 깊은데.”

반근이 말했다.

아씨께서는 어제 덕승루를 떠나신 뒤로 밤새 집에 들어오시지 않으셨고, 집으로 돌아오시자마자 사공자님의 장례를 준비하느라 종일 바쁘셨어. 입관할 때는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씨의 손에 이렇게 큰 상처가 난 줄도 모르고 있었네.

손바닥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보기 흉한 흉터가 정교랑의 손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천으로 싸 놓으면 낫는 게 더뎌.”

정교랑이 말했다.

“그렇지만 흉터가 생길 텐데요?”

반근이 울먹이면서 정교랑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흉이 지면 지는 거지 뭐. 하나 더 늘어나는 것뿐인데.”

정교랑이 손을 거두었다.

그때, 내가 죽었을 때는 사방에서 날아온 화살이 내 온몸에 박혔어. 아마 내 마지막 모습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는 모습이었겠지.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지금 웃는 건가?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문가로 다가갔다.

“큰 도련님께서 사공자님의 장례 준비를 마치셨어요. 아씨, 그 외에 또 분부하실 일이 있으세요?”

반근이 눈물을 훔치면서 물었다.

무원산 도련님들이 돌아가신 뒤로, 아씨께서 도련님들의 명예를 바로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아씨의 노력으로 도련님들은 역사서에 이름이 올라갈 정도로 유명해지셨어. 아씨께서 비석에 새긴 천하제일 행서와 온 경성 사람들을 탄복시킨 무원산 술 덕에 누구든 행서나 술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가 자연스레 무원산 형제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하지.

하지만 사공자님은 기녀의 손에 죽었고, 주 낭자까지 옥에서 자결하면서 이번 일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어. 경성에 떠도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었지.

아씨는 분명 사공자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이유를 밝히고, 사공자님의 명예를 되찾아 주시겠지.

“화장한 뒤에, 유골은 사람을 시켜 강주로 보내. 그리고 경성에는 의관총(衣冠塚: 소지품 옷가지 등을 묻은 무덤)을 하나 마련하고.”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정교랑을 바라보면서 정교랑이 다른 말을 덧붙이기를 기다렸다.

“그게 다인가요?”

반근이 물었다.

“아, 비석에는 글씨를 새기지 마.”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초 도련님들의 비석을 세울 때도 처음엔 글씨가 없었어. 도련님들의 억울함을 풀어 드린 후에야 아씨께서 손수 비석에 글씨를 새기셨지. 그러니 이번에도, 아씨께서는 사공자님의 복수를 한 뒤에 비석에 글씨를 새기실 생각이신가 보네.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주복을 향해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주복이 문 앞의 회랑 아래서 옷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하면 돼? 말만 해.”

주복이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진 공자님을 어떻게 해치울 거냐는 말인가?

반근이 발을 헛디디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 이번에는 누굴 해치우려는 겁니까?

반근의 눈앞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묻던 과거 진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누구를 해치울 거냐고 묻던 사람이, 이제는 해치워지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거야?

한여름 오후의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자, 회랑 아래에 달린 풍경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사실, 손 하나 없다 해도 별일 없었을 텐데.”

정교랑이 주복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복이 멈칫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정 대노야가 강주로 돌아갔을 때, 정사낭은 손목을 치료하기 위해서 강주로 돌아가지 않았지. 설마 지금, 그때 정사낭을 경성에 붙잡아 뒀으면 안 됐다고 후회하는 건가?

주복이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웠다.

“별일이 없긴 뭐가 없어! 멀쩡히 나을 수 있는 손을 왜 잃어야 해? 내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늘을 허투루 보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정교랑은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이 여인이 지금 만약을 생각하고 있잖아?

이 세상에 만약 같은 건 없어요!

이 여인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바로 이런 말이라고!

예전의 정교랑이라면 절대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야. 눈앞에 만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간식을 내어주면서 애들은 저리 가서 놀라는 투로 대했으니까.

그땐 그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말과 행동이 아주 기분 나빴는데, 지금은 왜 그때의 정교랑이 이토록 그리운 거지?

정교랑, 차라리 그때처럼, 만약을 이야기하는 나를 귀찮다는 듯 내쫓아 버려. 난 네가 이렇게 후회하고 자책하는 거 죽어도 보고 싶지 않다고.

“정교랑.”

주복이 한쪽 무릎을 앞으로 꿇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사낭의 죽음은 너와 무관해.”

“무관하다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주복은 정교랑의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정사낭의 누이라서, 너한테 죽을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어서, 네가 그 자식의 목숨을 살려 놓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 전부 너와 관련된 건 사실이지만, 이 중 단 하나라도 네 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있어? 네가 정사낭의 누이가 되기를 선택했어? 너는 너 자신이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었어?”

주복이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였다.

“너는 피해자야. 우리는 피해자라고! 그런데 왜 네가 자책해야 하는 건데!

그놈들이 그런 수법까지 쓰는 걸 네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정사낭이 사람을 잘 믿는다고 해서, 그 죽음이 전부 네 탓이 되고 정사낭의 탓이 되는 거야? 너희는 원래 그렇게 남들의 계략에 걸려들어야 하고, 남들의 손에 죽어야 해? 누가 그렇게 정하기라도 했어?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사람을 죽이고, 계략을 짠 놈들은 그 빌어먹을 놈들이야! 진호, 진씨 가문, 그리고 종친의 양자 입적을 반대하는,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너는 스스로를 탓하고 원망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자책하는 걸 알면, 우리의 원수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어?”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주복을 쳐다보았다.

-버텨야지-

“예전에 나는…….”

정교랑을 바라보던 주복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바보라는 이유로 너를 괴롭혔어. 그러니까 네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너 자신이 바보라는 걸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상처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탓할 게 아니라, 그렇다는 이유로 너를 괴롭힌 그 사람들을 원망해. 이 세상에 괴롭힘 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으니까.”

입꼬리를 올리며 웃던 정교랑이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주복의 옷자락을 손으로 살짝 끌었다.

“앉아요.”

주복은 다리가 후들거려 자리에 주저앉다시피 털썩 앉았다.

“난 괜찮아요. 단지,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교랑이 말하자, 주복이 곧바로 물었다.

“그 말?”

정교랑이 마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은 오래전 정평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고군분투한다고 해서,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노력도 했고 애도 썼는데 왜 그렇게 됐냐고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해 봤습니까? 그들도 똑같이 노력했을 텐데, 당신만 성공하고, 남은 실패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당신에게도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남들도 똑같습니다. 어째서 당신한테만 당연할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겁니까?”

주복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그러니까 네 말은, 그놈들이 너와 정사낭을 계략에 빠트린 데에 무슨 타당한 이유라도 있다는 거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히 타당하죠. 그들의 이번 목표는 아주 명확했어요. 진안 군왕을 죽여야만 했고, 꼭 이 계획을 성공시켜야만 했죠. 그러려면 가장 큰 변수를 제거해야 했는데, 그 변수가 바로 나였어요. 그리고 나를 막으려면 오라버니가 필요했죠. 그래서 그들은 오라버니를 납치했고, 날 막았어요. 잘 짜인 계획이 참 순조롭게 진행되었네요.”

정말 미쳤군!

주복이 다시 분을 못 이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그럼 내가 지금 진씨 가문에 찾아가서 진호에게 큰절을 올릴게. 진호 그놈이 잘 짜둔 바둑판에 탄복한다고, 그놈이 정사낭을 죽인 일에 아주 탄복한다고!”

주복이 억지로 마지막 한마디를 이 사이로 내뱉었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사람이 죽인 게 아니에요.”

정교랑의 말에 주복이 흠칫 놀랐다.

  • 난 몰라!

  • 내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긴 할 거야?

  • 내가 진작 알았다면, 정사낭을 납치하기까지 한 걸 알았다면, 난 절대로…….

  • 주육, 자네는 알잖나. 그랬다면, 난 절대로…….

주복의 귓가에 진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정말로 그자를 믿어?”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면서 물었다.

“믿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자리에 앉은 주복이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답답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남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믿는다고? 네가? 내가 널 모를 줄 알고?”

주복이 소리쳤다.

정교랑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답답해하는 주복을 쳐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정교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복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 일은 진호도 분명히 알고 있었어. 네게 연꽃 구경을 가자고 했던 그 순간부터, 너를 속이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다 결정된 셈이라고.”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주복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맞아요. 그 순간부터였죠. 그 순간 이후로 닥쳐올 일이, 이런 일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정말 인생무상이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봐.”

주복이 말했다.

“우선 오라버니부터 안장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오라버니의 부모님께 제대로 된 설명이라도 해 드려야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강주로 돌아가려고?”

정교랑은 주복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강주로 돌아간다라…….

정사낭 사건과 관련이 있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죽었다. 덕승루의 주인장은 이 일로 관부에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게 됐고, 기생 어미 막씨는 먼 곳에 노역으로 보내졌다. 두 사람은 이 일과 실질적으로 관련이 없는데도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고, 정사낭 사건은 결국 기녀들의 질투로 빚어진 일로 흐지부지 끝났다.

“두고 봐. 이 일은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고.”

“그때 정 낭자의 의형제들이 죽었을 때 기억나? 폐하한테까지 가서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그 난리를 쳤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무려 사촌 오라비가 죽었으니.”

“어서 서둘러! 이번에는 꼭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지.”

“술동이도 두어 개 더 챙겨 가고, 하인들도 몇 명 더 데리고 가. 술을 뿌린다고 할 때, 아예 그 자리 주변을 에워싸서 받도록.”

온 경성 사람들이 또 한 번 성대한 술판이 벌어지길 기대하며 정사낭의 노제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정사낭의 노제는 치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옆에 무자비(無字碑)가 하나 더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나 조용히 안장했다니!

오매불망 노제를 기대했던 경성 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너무하네. 자리를 놓칠까 봐 평왕 전하를 안장하는 것도 구경하러 가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평왕이나 보러 갈 걸 그랬어. 아, 이젠 회혜왕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긴, 그렇게 쪽팔린 일로 죽었는데,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서 뭐하겠어? 안 그래도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 아무렇게나 매장하면 그만이지.”

“체면? 체면이 아주 크게 상하긴 했지요.”

진소가 진 노태야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정사낭의 죽음은 눈 뜨고 코 베인 격이지. 그런데도 말하지 못하는 고충이니.”

진 노태야가 대꾸했다.

“그럼 이번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는 겁니까?”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여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아. 손해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절대 아닌데.

“그야 물론 아니지.”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바깥을 가리켰다.

“새로 세워진 비석도 무자비가 아니더냐. 이번에는 누가 그 비석을 꾸며 줄지 두고 봐야지.”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리고 병풍을 바라보았다.

저 병풍에 또 얼마나 많은 동그라미가 더해질지 모르겠군.

“이번 일은 정말로 진(秦)씨 가문에서 계획한 것이더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진소는 아내가 진 시강의 부인에게 이 일에 관해 물었던 게 생각났다.

진 부인은 긴말하지 않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깨끗한 자는 깨끗하다고 대답했다지.

“진씨 가문은 은혜를 원수로 갚을 정도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 노태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은망덕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때로는 가는 길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곤 하지.”

진씨 가문은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는 일을 극구 반대하는 세력이야. 지금 유림은 두 분파로 갈렸지. 탄핵을 논하고, 양자 입적을 반대한다는 상소문을 올리는 자들, 그리고 장강주와 같은 편에 서서 양자 입적을 지지하는 자들로.

진소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너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느냐?”

진 노태야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진소가 고개를 들고 진 노태야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마마.”

안비의 목소리가 황제의 침궁에 울려 퍼졌다.

“그거 아세요? 혹시 벌써 들으셨나? 큰일 났어요, 큰일!”

황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자네가 본궁에게 말해 줘야 알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야말로 큰일이 나는 거겠지.”

안비가 다급히 황후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마, 이를 어찌하면 좋죠? 결국 경왕이 태자가 될 상황이잖아요.”

황후가 피식 웃었다.

“뭘 어째? 버텨야지. 저들은 경왕이 아들을 낳기를 기다리는 게야. 저들이 그걸로 버티겠다면, 본궁도 그쯤은 기꺼이 버텨주지.”

같은 시각, 조당 안에서는 경왕이 처음으로 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내시가 큰 소리로 경왕을 태자에 책봉한다는 조서를 읽었다. 내시 몇 명이 경왕을 부축하면서 태자 책봉식을 마친 후, 태후가 경왕을 보좌할 네 명의 대신들을 호명했다.

“그러니 한동안 양위(讓位: 황제의 자리를 물려줌)는 없을 것이오. 경왕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니, 훗날 경왕이 낳을 황손이 제위에 오를 것이외다.”

고능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소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앞으로 십여 년간, 수고해 주실 진 대인께 미리 감사드립니다.”

진소가 코웃음을 치고는 답례했다.

“당치도 않소이다. 본관의 노고가 고 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고능준은 진소의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저는 장강주 선생의 낯짝이 그리도 두꺼울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조정에 남아 있을 생각을 하다니. 원래 성격대로라면 벌써 화를 내면서 사직서를 던지고 나갔을 텐데요.”

고능준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 마음은 고 대인이 더욱 잘 알지 않소?”

진소가 냉소를 짓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 대인, 이제 모든 일이 정리되었는데, 언제쯤 떠날 생각이오?”

고능준이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자 전하께서 혼례를 치르는 것까지는 보고 가야지요.”

고능준은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찌 됐든, 태후마마의 손자가 처음으로 치르는 혼사가 될 테니까요. 폐하께서 깨어나 경왕의 혼사를 직접 두 눈으로 보실 수 있다면, 참으로 기뻐하실 텐데.”

기뻐한다고? 태평성대를 이어가던 멀쩡한 조정이 이 지경으로 전락했는데 퍽이나 기뻐하시겠다. 이 일은 훗날 역사서에 얼마나 큰 웃음거리로 남을지.

그렇다 한들, 뭘 더 어쩔 수 있겠나? 정말로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여 제위에 올린다면,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운 시국을 초래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야.

태자가 후대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게지. 하루빨리 혼사를 치르고, 내년 즈음에 예전의 경왕을 닮은 총명하고 정상적인 황손을 낳는다면, 경왕도 제 몫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지.

진소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차 한 대가 대문 앞을 떠났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내다보았다.

“노야?”

문지기가 조심스럽게 진소를 불렀다. 진소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십팔랑이 왔다 갔소?”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떠난다고 하던가?”

진소가 또 물었다. 지난번 진소와의 논쟁 이후로, 진십팔랑은 한동안 진씨 저택에 발걸음을 끊은 터였다.

“요 며칠 사이에 간대요.”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고 진소를 바라보았다.

“노야, 아무리 그래도 십팔랑은 아직 어리잖아요. 아비가 되어서 어린 딸자식이랑 그렇게 다퉈야겠어요?”

“내가 다투고자 하는 게 아니라, 십팔랑 스스로 내려놓지 못해서 그런 거요.”

진소가 대꾸했다. 진소 부인이 미소를 짓고는 진소 앞으로 옷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 봐, 고집 센 거까지 똑같네요. 둘 다 마음이 누그러졌으면서 누구 하나 먼저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으니 원. 이거 봐요. 십팔랑이 지은 당신 옷이에요.”

진소는 옷 보따리를 보며 웃음을 숨기지 못하다가, 이내 민망한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입을 옷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뭘.”

진소가 투덜대자 진소 부인은 못 말린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가서 한 번 입어 봐요, 몸에 맞는지.”

시선을 거둔 진십팔랑이 마차의 휘장을 내렸다.

“아씨, 다시 돌아가는 건 어떠세요? 깜빡한 물건이 있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여종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씨께서 노야의 얼굴도 뵐 겸.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떠나는 날 뵙게 될 텐데 뭘. 요 며칠 조정에 대거 인사이동이 있기도 했고, 태자가 책봉된 지도 얼마 안 되었으니 한창 바쁘실 거야. 아버지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시게 해 드려야지.”

여종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진십팔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다시 마차 휘장을 들어 올렸다.

“평왕부 앞으로 지나가자.”

마부가 알겠다고 한 뒤 방향을 돌렸다.

회혜왕이 안장되고 평왕부의 편액이 철거된 후, 지금은 관부에서 나와 남은 물건을 정리하고 관리 중이었다.

“내리시겠어요?”

여종이 물었다. 손으로 마차 휘장을 걷고, 잠시 저택을 바라보던 진십팔랑은 고개를 저었다.

“가자.”

진십팔랑이 휘장을 내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다급하게 마차를 향해 뛰어왔다.

“혹시 진 상공 댁 낭자십니까?”

사내가 예를 올리면서 물었다. 여종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사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명첩 하나를 건넸다.

“저희 대인께서 낭자께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대인? 내게 부탁을?

진십팔랑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명첩을 받았다.

고능준.

고능준? 고능준이 나를 보자고 했다고?

진십팔랑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손에 들린 명첩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평왕의 서재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울던 백발노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본디 고능준은 그리 늙지 않았지만, 평왕이 죽은 후로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것 같았다.

나에게 부탁이라, 무슨 일이지?

진십팔랑은 잠시 고민하다가 명첩을 소매 안에 넣고 마차 휘장을 내렸다. 마차가 다시 길가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우린 정말 이대로 떠나는 겁니까?”

고 관인이 고능준의 뒤를 바짝 따라오면서 물었다.

“왜? 돌아가는 게 뭐 어때서? 네가 굶기를 하겠느냐, 입을 옷이 없기를 하겠느냐, 추위에 떨기를 하겠느냐?”

고능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고향에서는 우리 고씨 가문이 그곳의 황제나 다름없지만, 사람이 돈 하나만 추구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고향에서 제아무리 떵떵거린다 한들, 경성에서 기세등등하게 돌아다니는 것만 하겠냐고요.

“노야.”

제국 부인이 대청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태후마마는 뵈었소?”

고능준이 물었다.

“네, 마마의 뜻은 여전하세요. 우리 쪽에서 태자비를 골라 주기를 바라셔요.”

제국 부인의 대답에 고능준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고를 수는 없소.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줘야지.”

제국 부인과 고 관인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좋은 기회인데, 왜 남에게 넘겨야 하는 거지?

“아, 그리고 마마께서 진안 군왕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국 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하자, 고능준은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인네들의 사사로운 정이란.”

“노야, 진안 군왕은 태후마마께서 손수 키우신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 감정을 어떻게 단칼에 끊어내겠어요.”

제국 부인이 고능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진안 군왕의 몸 상태를 봐서는, 이제 더는 뭘 할 수도 없어 보이고요.”

“십여 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여태 멀쩡히 살아 있지 않소.”

고능준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래도 마마께서는 내심 안타까우시겠죠. 이젠 군왕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졌을 테고요.”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미안함과 아쉬움은 차차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감정들이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마냥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지는 못하겠소. 세상일이라는 게 워낙 예측하기가 힘들잖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이런 상황이 올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소.”

고능준이 천천히 말했다.

“그럼 아버지, 확실하게 군왕을 없앨 생각이십니까?”

고 관인이 서둘러 물었다.

“너는 우리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못 줘서 안달인 게냐!”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지금은 조정 대신 네 명이 정사를 돌보고 있다. 조정의 각 파벌이 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서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어. 우리는 이 혼란스러움을 조용히 피해 가야 해. 지금 저들은 저들끼리 싸우면서도, 우리 고씨 가문에 대해서는 다들 의견을 같이할 것이야.”

고 관인이 머쓱한 듯 입을 다물었다.

“태후가 미워하는 것은 진왕 군왕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미워해야만 하는 건 군왕의 신분 그 자체지.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일은 더 수월해진다.”

고능준이 잠시 수염을 쓰다듬다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고 관인이 재빨리 물었다. 고능준이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태후를 뵈러 입궁해야겠다.”

“반근 언니.”

반근이 시녀를 붙잡고 조용히 불렀다.

“우리 진짜로 가?”

시녀가 모퉁이에 서서 반대편에 있는 관저를 잠시 쳐다보았다.

“당연히 가야지.”

“아씨께 한번 여쭤보고 가는 건 어때?”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시녀가 몸을 돌리고 반근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아씨를 몰라? 아씨께서는 절대로 누굴 찾아가 오해를 설명하시는 분이 아니야. 남이 아씨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아씨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니까. 말하자면, 나를 아는 이는 내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이는 나더러 무엇을 찾느냐고 하는 거지(知我者爲我心憂, 不知我者謂我何求 - <시경>).”

반근이 반쯤 알아들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와 함께 관저를 내다보았다.

“주 공자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잖아. 군왕 전하는 아씨께서 그날 자기를 일부러 구해주지 않은 거라고 오해해서, 아씨를 아예 관저 안으로 들이지도 않으셨대. 그래서 아씨께서는 그날 밤새 경왕부 밖에 서 계셨고.”

시녀가 몹시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

“밤새 앉아 계신 거지.”

반근이 시녀의 말을 고쳐주자, 시녀가 반근을 흘겨보았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달라.”

반근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씨께서 경성에 계시는 동안 말이 통했던 사람도, 가까이 지냈던 사람도 이젠 전부 없어졌어. 진 공자님은 아씨와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원수지간이 되었지. 그건 진 공자님이 선택한 일이지만, 군왕 전하는 달라. 다른 이의 함정에 빠진 아씨를 오해하게 된 상황이잖아. 군왕 전하와 혼사를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아씨께서 정말로 개의치 않으신다고 해도, 나는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긴 힘들어. 아씨께서 이대로 또 억울하게 한 사람을 잃으시는걸.”

시녀가 조용히 말했다. 반근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한텐 증거도 있어.”

시녀가 자신의 소매를 꼭 잡고 말했다.

“군왕 전하라면, 분명 아씨를 이해하실 거야. 군왕 전하는 늘 아씨를 믿으셨잖아.”

  • 아, 참.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 책에서 봤는데, 늑대 떼는 야밤에 큰길에서 먹이를 찾지 않는대요. 사람이나 마차를 기습하는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 아, 참.

아씨께서 말씀하시면, 군왕 전하는 그대로 믿어 주셨어.

“아씨께서 이대로 강주로 돌아가셔선 안 돼.”

시녀가 깊은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결심한 듯이 손짓했다.

“가자.”

“전하, 전하.”

이 태의가 잰걸음으로 문턱을 넘어서면서 진안 군왕을 다급하게 불렀다. 안쪽에 있던 내시 두 명이 이 태의를 향해 재빨리 다가와 쉿 소리를 내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이 태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전하께선 지금 막 잠드셨습니다.”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 태의가 미안한 웃음을 보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무슨 좋은 일이기에 이렇게 기뻐하십니까?”

내시가 흥분한 표정의 이 태의를 보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정 낭자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정 낭자는…….”

이 태의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하던 찰나,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누가 정 낭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이 태의! 저 두 사람은 뭡니까!”

“고 선생, 저들은 나를 찾아온 것이오.”

“뭐요? 이 태의를 찾아왔다고? 저 여인이 신선거, 태평거의 총 관리인이라는 것을 모를 줄 아시오?”

“예, 저희는 이 태의를 찾아온 게 아니라, 진안 군왕 전하를 뵈러 온 거예요.”

“지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여기가 너희가 오고 싶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이 태의, 외부인을 멋대로 왕부 안으로 들이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이요!”

“이보세요, 선생. 우리는 저기 있는 문으로 들어왔어요. 당초 전하께서 우리 저택에 들어오실 때는 담벼락을 넘어서 오셨지만요.”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던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고 선생, 반근이 온 것인가?”

진안 군왕이 목청을 높여서 물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멈추고, 잠시 뒤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시녀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보고 침상 가까이 다가가려 걸음을 뗐다.

“잠깐, 멀찌감치 떨어져라.”

고 선생의 말에, 시위 두 명이 즉시 경계하는 눈빛으로 시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녀가 걸음을 멈췄다.

“전하, 소인은 그날 저희 아씨께서 전하를 구하러 오시지 못한 이유를 알려드리고자 이곳에 온 거예요. 그때 저희 아씨는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 있었어요. 진씨 가문의 공자님이 저희 아씨를 속여 연꽃 구경을 데려가고, 그 틈을 타서 곧바로 사공자님을 납치해 아씨를 협박했거든요.”

시녀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침상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시중을 드는 시녀가 재빨리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그래? 그랬던 거로구나.”

휘장 사이로 보이는 진안 군왕의 허약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반근이 안심한 듯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럼요. 제가 증거도 가지고 있어요.”

시녀가 서둘러 대답하고, 소매에서 조심스럽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볼 필요 없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젓자, 시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정도면 충분해.”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었다.

“내 말이 맞았어. 정사낭은 나 때문에 변을 당한 것이야.”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시녀는 눈물이 왈칵 쏟을 정도로 기뻐했다.

“소인은 알고 있었어요. 전하께서 이해해 주실 거라고요.”

시녀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고 선생이 시녀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냉소를 지으며 종이 위의 글씨를 훑어보았다.

“낭자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아래 몇 마디를 그대로 말하시오. 만약 한 글자라도 틀렸다가는 정사낭의 시신을 보게 될 것이오.

무슨 일이죠?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볼 필요 없어요.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아봐요.”

고 선생이 종이 위에 쓰인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시녀와 반근이 고 선생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저기에 쓰여 있는 말처럼, 그날 아씨께서 하신 말씀은 아씨가 정말로 하시려던 말씀이 아니었어요.”

고 선생이 실소를 터트렸다.

“틀렸다. 우리가 문제라 여기는 건, 네 아씨가 했던 말이 아니야.”

시녀와 반근이 멈칫했다.

“네 아씨가 했던 행동이 문제인 거지.”

고 선생이 손에 쥔 종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에게 뭐 하나만 물어보마. 만약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말이, 전하의 병을 고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전하를 죽이라는 말이었다면.”

고 관인이 종이에서 시선을 거두고 시녀를 바라보았다.

“네 아씨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으냐?”

우리 아씨께서 어떻게 했을 것 같냐고?

우리 아씨께서는…….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서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저희 아씨께서는 남을 먼저 해친 적이 없단 말이에요!”

반근이 소리쳤다.

고 선생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은 먼저 해치는 상황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협박을 받는 상황이라면, 너희 아씨가 남을 해칠까, 해치지 않을까?”

고 선생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시녀와 반근을 쳐다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너희는 정 낭자의 측근이니, 정 낭자의 답이 무엇일지 잘 알고 있겠지.”

고 선생이 침상에 누운 진안 군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혼인은 내게 사소한 일이에요.

정 낭자에게는 사소한 일이겠지.

“고 선생, 그 말은 틀렸네. 내가 해를 입은 건 정 낭자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 해를 당한 결과도 정 낭자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지.”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그러자 고 선생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영명하십니다, 전하.”

고 선생이 표정을 가다듬고, 더는 이 주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그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은 요양에 전념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진안 군왕은 고 선생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침상에 누웠다. 시녀들이 휘장을 내리자,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전하.”

“그만 나가시오.”

시위들이 시녀와 반근에게 손짓했다.

시녀는 미동 없는 휘장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갔다. 반근도 서둘러 눈물을 훔치고 시녀의 뒤를 쫓아갔다.

“총 관리인.”

고 선생이 문을 나선 시녀를 불러 세웠다. 시녀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이걸 놓고 갔더군.”

말이 끝나자마자, 고 선생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아무렇게나 찢어 내팽개쳤다. 찢어진 종이가 허공에 흩뿌려지자, 시녀는 애써 참았던 눈물이 또 한 번 왈칵 쏟아져 나왔다.

“찢지 마세요! 찢으면 안 된다고요!”

시녀가 앞을 가로막는 시위들을 밀쳐내고 고 선생 앞으로 달려와 바닥에 흩어진 종이 쪼가리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울면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는 시녀를 보던 반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찢지 마세요! 찢으면 안 된다고요!

같은 시각 황궁 안. 태후가 놀란 표정으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태자의 혼사는 급선무가 아니라고? 그럼 그보다 더 급선무인 일이 도대체 뭔데?”

“마마, 올해 궁에 악운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십시오.”

고능준이 한숨을 쉬면서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평왕이 죽고, 황상이 쓰러지고, 애가는 대신들의 눈치만 보다가 이젠 애가의 친정까지 경성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지.

태후가 눈물을 훔쳤다.

정말 악운이 끊이질 않는구나.

“그러니 이참에 혼사로 액막이를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액막이 후에 거행할 태자의 혼사도 길해질 테고요.”

고능준이 말했다.

“혼사로 액막이를 하자고?”

태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의 혼사로?”

“그야 당연히 길한 사람의 혼사로 액막이를 해야지요. 지금까지 황궁에 복을 불러온 사람은 진안 군왕이었잖습니까.”

고능준이 당연한 듯이 말하자 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군왕이 있었지. 그래. 군왕이 있으니 참 다행이구나. 태자도 하루빨리 아들을 얻을 수 있겠어.”

어허, 진안 군왕이 또 송자동자 노릇을 하면, 군왕을 더 아쉬워할 거면서. 여인네들은 허구한 날 생각하는 게 꼭 이런 것뿐이라니까!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지. 그쪽으로 말하는 게 일이 더 쉬워지겠어.

“그렇지요. 우선 진안 군왕의 혼사를 치르고 나면, 진안 군왕의 병도 액막이하고, 동시에 황실 또한 여러모로 액막이할 수 있으니, 겸사겸사 좋잖습니까.”

고능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도 손뼉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애가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가 액막이할 때가 되기는 했지. 위낭도 참 다사다난했어. 당초 황상도 위낭의 혼사를 치러야겠다고 했었는데, 아직도…….”

태후가 말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왕비를 고르는 건 태자비를 고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야. 이렇게 급히 구해서야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할 수나 있겠나?”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종이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그 위를 가리켰다.

“마마, 잊으셨습니까? 왕비는 이미 골라 두었잖습니까.”

태후가 고능준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강주 정씨.

뭐라고?

그 여인을?

“그 재수 없는 여인이 길하긴 뭐가 길하다고! 그 여인 때문에 이런 재수 없는 일들이 줄줄이 일어난 것이거늘.”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호통쳤다.

그렇긴 하다만…….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의술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원래 진안 군왕이 그 여인과 혼사를 올리려던 것도 경왕을 돌보기 위함이었고요.”

태후가 눈을 흘기면서 호통쳤다.

“의술이 대단하다고? 경왕도 치료하지 못하고, 폐하를 깨어나게 하지도 못하는데, 대단하기는 무슨! 다 허풍으로 만들어진 명성이야! 그 여인이 아둔한 백성들을 현혹한 거라고!”

“허풍으로 만들어진 명성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고능준이 말하자, 태후가 멈칫했다.

허풍으로 만들어진 명성이라면, 당연히 그만한 의술이 없으니 경왕을 치료하거나, 황제를 살려낼 수 없어. 물론 온몸에 독이 퍼진 진안 군왕도 구해 낼 수 없지.

세간에는 정교랑이 신선의 비방을 가진 자라고 알려져 있으니, 사람들은 분명히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을 거야.

하지만 그 의술이 허풍이라면 진안 군왕이 쾌유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게다가 조정이 종친의 체면을 차려줄 좋은 구실이 되니, 더할 나위 없어.

“더군다나, 정 낭자와 진안 군왕의 혼사는 폐하께서도 윤허하셨던 일입니다. 태후마마께서는 폐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니, 조정 대신들도 아무 말 못 할 겁니다. ”

천자가 바뀌면 그 아래의 대신들도 바뀌는 법이다. 대신들이 태후의 수렴청정을 극구 만류하는 이유는 조정과 정사를 잘 모르는 태후가 권력을 쥘 경우, 태후를 현혹시킨 간신들이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질서가 흐트러지고, 각자 취하기로 했던 이득이 어지럽혀질 수도 있었다.

태후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명하십니다, 태후마마.”

고능준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황궁을 떠난 고능준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느 찻집으로 향했다. 고능준이 찻집에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진십팔랑이 보였다.

“늦어서 미안하오.”

고능준이 말하자, 진십팔랑이 말없이 답례했다.

“외람되게도 이리 만나자고 청한 건, 특별한 일 때문은 아니오.”

고능준이 말하면서 수하를 향해 눈짓했다.

수하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바치자, 진십팔랑의 여종이 보따리를 받아와 매듭을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이건 회혜왕의 유품이오. 회혜왕의 유품을 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다른 건 몰라도 이 책들은 버리기엔 아까워서 말이오.”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구나.

진십팔랑이 한 권을 집어 들자, 그 위에 찍힌 평왕의 인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진십팔랑은 상심한 표정으로 잠시 책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전하께서 살아생전 책을 무척 아끼셨는데, 책은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낭비하는 것이라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진십팔랑이 고능준을 향해 예를 표했다.

“진 낭자, 곧 경성을 떠난다고 들었소만?”

고능준이 물었다.

“낭군이 진사가 된 후로 아직 고향에 내려가지 못해서요.”

진십팔랑의 대답에 고능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럼 당연히 가 봐야지. 이 일은 없던 일로 해야겠구려.”

“고 대인,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히 말씀하시지요.”

진십팔랑이 곧바로 말했다.

“실은 태후마마께서 진 낭자가 공주들의 교습을 그만둔 걸 못내 아쉬워하셔서 말이오. 더군다나 곧 태자비도 간택해야 하는데, 궁에 계시는 폐하와 태후마마께서는 연로하시고, 귀비마마께서는 병으로 쓰러지셨잖소. 황후마마께서는 계속 폐하의 곁을 지키고 계셔야 하고, 태자는 또 그런 처지니, 태후마마 혼자서 태자비를 가르치시는 것은 무리지. 성인이 된 공주도 없는 터라, 공주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그러니 진 낭자가 태자비를 돌봐 주는 역할을 맡는 것은 어떨까 해서 말이오.”

고능준의 말에 진십팔랑이 서둘러 예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한낱 신하의 아내로 비천한 신분인데, 어찌 감히 그런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낭자의 집안일이 우선이지. 다만 비천하다는 말은 쓰지 마시오.”

고능준이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감탄 섞인 어조로 이어서 말했다.

“아무래도 태자가 바보다 보니, 태자비를 고르는 게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긴 하오. 아무리 잘 고른다고 한들, 또 한 명의 가남풍이 나와 조정을 혼란에 빠트릴지 누가 알겠소이까.”

“대인! 지금은 중신들께서 조정을 잘 이끌어 가고 있으니, 결단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진십팔랑이 목청을 높였다.

조정을 이끄는 중신 중 한 명이 진소인데, 고능준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진십팔랑의 아버지인 진소를 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고능준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사과했다.

“그렇소. 이건 폐하의 강산이고, 원래 회혜왕의 강산이어야 하기도 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결단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오.”

고능준이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십팔랑도 몸을 일으켜서 답례하고 고능준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십팔랑이 다시 책 몇 권을 내려다보면서 손으로 책들을 매만졌다.

“언니!”

갑작스러운 외침에 진십팔랑이 깜짝 놀랐다. 문가를 쳐다보니, 진단랑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언니, 왜 여기서 혼자 차 마시고 있어?”

진단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진십팔랑이 책을 여종에게 건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할아버지랑 잡극 보러 왔지. 언니 마차가 밖에 있길래 한번 와 봤어. 난 또 언니가 집에 간 줄 알았지.”

진단랑이 헤헤 웃으면서 진십팔랑을 따라 걸었다. 진십팔랑은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언니도 우리랑 같이 잡극 보러 가자. 이제 경성을 떠나 멀리 떠나면 거기 말씨는 여기랑 다를 거 아니야. 그럼 노래나 연극도 경성이랑은 다를 테고.”

진단랑이 진십팔랑의 옆에서 쉴 새 없이 재잘댔다. 진단랑을 바라보던 진십팔랑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언니?”

갑작스러운 진십팔랑의 행동에, 진단랑은 고개를 들고 진십팔랑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진십팔랑의 표정을 보고 진단랑이 물었다.

“왜 그래?”

진단랑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또 물었다.

“나 화장 다 지워졌어?”

올해로 열한 살이 된 진단랑은 슬슬 진소 부인이나 자매들과 함께 손님을 맞이하고 출타하기 시작했다. 옅은 화장을 하기 시작한 진단랑은 아직 자신의 화장 실력에 자신이 없어 했다.

“아니.”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진단랑의 코끝을 가볍게 쳤다. 그리고 진단랑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이제 가 봐.”

“언니, 우리랑 연극 보러 안 갈 거야? 연극 보고 집에 가서 다 같이 저녁도 먹자. 오늘 아버지도 집에 계셔. 그런데 언니 언제 떠나? 떠나면 다시는 경성으로 안 돌아와?”

꾀꼬리 같은 진단랑의 목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찻집의 마당까지 걸어 나온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한마디 대꾸했다.

“아니.”

“안 돌아온다고?”

진단랑이 속상해하면서 되물었다.

“아니, 안 간다고.”

진십팔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단랑이 놀란 얼굴로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던 찰나, 거리에서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진단랑이 물으려던 말을 뒤로하고 손으로 거리를 가리켰다.

“어? 반근 언니들이다!”

반근?

진단랑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휘장을 반쯤 걷어둔 마차에 반근 둘이 앉아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반근 언니들이 왜 울고 있지? 가서 물어봐야겠다.”

진단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마차를 쫓아가려고 하자, 진십팔랑이 진단랑의 손을 붙잡았다.

“상을 치르는 중이니 우는 게 당연하지. 괜히 가서 방해하지 마.”

진단랑은 걸음을 멈추고 짧게 탄식하며 마차가 유유히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반근 언니들이 진짜 서럽게 우네.”

진단랑이 한숨을 푹 쉬면서 속상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녀가 앞을 내다보고 반근의 손을 잡았다.

“그만 울어. 곧 집에 도착하잖아. 아씨께서 우리가 운 걸 알아보시면 어떡해.”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눈물은 또 금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디 갔다 온 거야?”

황씨가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반근과 시녀를 보며 물었다.

“저희는…….”

반근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자, 시녀가 한발 먼저 대답했다.

“무덤에 잠시 다녀왔어요.”

황씨가 아, 하고는 두 사람의 퉁퉁 부은 두 눈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서들 가 봐. 시누이가 보면 속상해하겠다.”

두 반근이 예를 표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반근 언니, 왜 사공자님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어?”

반근이 물었다.

“무덤은 불길한 곳이지만, 사공자님의 무덤은 불길한 곳이 아니니까.”

시녀가 대답하자, 반근이 멈칫하면서 물었다.

“불길하다고?”

“응. 좀 전에 우리가 간 곳만큼 불길한 곳이 또 어딨어?”

시녀가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하자 반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반근 언니!”

반근이 못 말린다는 듯이 시녀의 어깨를 때리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정교랑의 거처에 도착했다. 정교랑은 회랑 아래서 두 몸종과 함께 긴 풀로 새들을 어르고 있었다.

“아씨, 잠깐 나갔다 왔어요.”

시녀가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화장도 다 지워졌고, 눈도 퉁퉁 부었고, 코도 빨간 것이…….

반근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자, 시녀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이 상해서요.”

시녀의 말에 정교랑은 음, 하고 대꾸하고는 두 사람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저희는 가서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시녀가 말하고는 서둘러 반근을 데리고 곁방으로 가다가, 갑자기 발을 구르고 제자리로 되돌아 왔다.

“아씨, 제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거 알고 계시죠? 아씨께서는 제 말을 믿지 않으시면서 딱히 묻지도 않으시니 오히려 제가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반근이 경악한 얼굴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언니가 이번에 정말 제대로 마음이 상했나 봐. 행동까지 이상해지고.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리고 물었다.

“어딜 다녀왔는데? 어쩌다 그렇게 서럽게 울었어?”

“반근이랑 경왕부에 다녀왔어요.”

시녀가 말했다.

회랑 아래서 새들을 어르고 놀던 몸종들이 서둘러 풀을 내려놓고 놀란 얼굴로 황급히 물러났다.

시녀가 경왕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반근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시녀는 이야기하는 데에 더 집중하느라 반근처럼 눈물을 쏟지는 않았다.

“그게 뭐 울 만한 일이라고.”

정교랑이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 사람들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자기들이 뭔데 아씨를 의심해요!”

시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의심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거잖아.”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자,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은 황제가 아니야. 그러니 충효의 도리에서, 진안 군왕을 구하는 게 충이라 할 순 없지. 효를 우선시한다면, 난 당연히 내 가족을 먼저 택해야 해. 그러니 그들은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나 또한 그들의 질문에 화나지도, 속상하지도 않아.”

시녀와 반근이 멍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하긴, 아씨의 말씀이 맞긴 해.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생각하던 시녀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나 다 그렇게 했을 텐데, 제가 그들한테 반문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도 하잖아.”

정교랑이 대꾸했다.

남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잊곤 하지.

“그걸 잊어버리면, 걱정이 늘어나는 법이야.”

정교랑이 말을 덧붙이자, 시녀가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걱정이나 잔뜩 하라지!”

정교랑과 시녀가 한창 대화하던 도중, 황씨가 다급하게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궁에서 사람이 왔는데, 혼사와 관련해 이야기할 게 있대요.”

황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혼사?

시녀와 반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황씨를 쳐다보았다.

정교랑도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황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혼사라니요?”

범강림이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물었다.

“범 군감, 농이 지나치십니다. 당초 폐하께서 윤허하셨던 일이 아닙니까. 그야 당연히 정 낭자와 진안 군왕의 혼사지요.”

내시가 웃으면서 말하자, 범강림이 놀란 기색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아직도 유효하단 말입니까?”

내시가 웃음기를 싹 거두고 호통쳤다.

“황당하외다! 폐하의 성지를 뭐로 여기는 겁니까!”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혼사를 올린다는 소식은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온 경성에 퍼졌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신나게 전하던 도중, 또 하나의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이 혼사를 거절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일은 결코 내가 제안한 일이 아니오.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결정이오.”

“나 말이오? 나야 당연히 전하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태후가 그 여인을 시켜 신혼 첫날밤에 전하의 목을 꺾어 버리라고 했을지 누가 아나?”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들려오던 논쟁이 끝났다.

방문이 다시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희미한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침상으로 다가가려던 이 태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시녀가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태의? 침을 놓으시려고요? 아니면 진맥을 하시려고요? 전하께서는 아까 막 잠드셨어요.”

“그렇군.”

이 태의가 조용히 말하고 내려진 휘장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됐다. 나중에 전하께서 깨어나신 뒤에 다시 오마.”

시녀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 태의는 다시 침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몸을 돌리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올리며 나무 조각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굴렸다.

“마마, 전하께서는 차마 그러실 수 없어 거절하신 듯합니다.”

태후궁 안, 내시가 감탄하며 말했다.

“전하의 건강이 몹시 안 좋아졌으니, 정 낭자만 억울할까 봐서요.”

태후가 눈을 흘기면서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뭐? 정 낭자가 억울해? 그 악운 덩어리가 뭔데 억울하네 마네야? 황실로 시집오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퍽도 억울하겠다. 난들 그 여인이 좋아서 들이려는 줄 알아?”

내시가 깜짝 놀랐다.

아이고, 태후마마, 그리 말씀하시면 아주 큰일 납니다!

“마마, 그래도 전하께서 이렇게 홀로 쓸쓸하게 가시도록 두면 안 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정 낭자에 대한 전하의 마음이 이리도 깊은데요.”

그래. 제 복에 겨워 정신 못 차리는 것 같으니라고. 애가가 너를 꼭 진안과 순장해 주마. 진안이 결국 독을 못 이겨 목숨을 잃으면, 당연히 너도 같이 땅에 묻혀야지.

“괜히 그 여인에게 절개가 곧다는 미명만 덧씌워주는 꼴이군.”

태후가 냉소를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회혜왕이 죽었을 때, 세간에서 그 죽음을 두고 얼마나 웃고 떠들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려.

“마마, 그리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여인의 미명은 결국 우리 황실과 마마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시가 아첨의 미소를 보이면서 차를 바쳤다.

“그럼, 소인은 가서 마마의 교지를 전달하겠습니다.”

태후가 찻잔을 받아오며 음, 하고 대꾸했다.

경왕부 안.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시 몇 명이 사다리를 타고 대문 위에 걸린 편액을 바꾸고 있었다. 경왕부 세 글자가 쓰인 편액이 내려지고, 진안 두 글자가 쓰인 편액이 그 자리를 채웠다.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관저는 진안 군왕께서 들어오실 때 싹 수리했던 곳입니다. 혼사를 치르고 차차 손보면 수고를 덜 수도 있고요.”

관저를 관리하는 내시들과 관아의 관리들이 말했다. 궁에서 온 내시가 낮게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말을 그렇게 하면 쓰나. 되도록 빨리 준비하라고 했지, 수고를 덜기 위해 대충하라는 게 아니오.”

내시가 관리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호통쳤다.

“태후마마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가는, 그 후환을 책임질 수나 있겠소이까?”

관저의 내시들과 관리들이 재차 알겠다며 잘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궁에서 온 다른 내시가 진안 군왕의 방 안에 들어가 웃는 얼굴로 태후의 교지를 전달했다. 진안 군왕의 침상 옆에 서 있던 내시가 무릎을 꿇고 태후의 교지를 양손으로 받았다.

교지를 건넨 내시가 눈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전하, 잘 들으셨지요? 태후마마께서 더는 말썽을 피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시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 갔다.

“어찌 됐든 간에, 이건 폐하께서 일찍이 윤허하셨던 일이니, 폐하께서도 전하의 혼사를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어쩌면 너무 기뻐 깨어나실지도 모를 일이고요.”

침상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머리로 베개를 두어 번 살짝 쳤다. 큰절을 올린다는 뜻이었다.

“알겠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내시는 그제야 활짝 웃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신신당부했다.

“태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전하께서 앓아누워 계시긴 하나, 꼭 정성을 다해 준비하라고 하셨네. 다만, 전하의 회복이 우선이니, 전하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간소하게 준비하게.”

방 안의 사람들이 내시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은 천천히 두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씨 저택의 마당 안. 범강림이 가족들을 데리고 함께 큰절을 올렸다.

“시간이 촉박하니, 너무 많이 준비하지 않아도 되오.”

내시가 말했다.

“하지만 해야 할 건 해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혼인은 인륜지대사잖습니까. 집안 어른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요.”

범강림이 말하자, 내시가 눈썹을 꿈틀대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이고, 강주가 얼마나 먼 곳인데, 한번 왔다 갔다 하려면 족히 한 달은 걸리잖소.

그리고 이게 누구 잘못이오? 폐하께서 일찍이 두 사람의 혼사를 윤허하셨는데, 왜 진작 준비하지 않고? 정 낭자의 부모는 뭐가 그리 급해 갑자기 강주로 돌아간 것이며, 외숙까지 전부 떠났다지? 다들 이상하리만큼 황급하게 떠나던데, 당최 뭘 하자는 건지.”

내시의 말에 범강림은 속으로 뜨끔했다.

“강주에 계신 노부인의 병세가 악화되어 그렇습니다.”

범강림이 서둘러 말하자, 내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오. 그럴수록 더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삼년상을 치르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범강림이 고개를 숙이고 민망해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시가 투덜거리면서 대문을 나서자, 마당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범강림이 몸을 돌리고 마당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 놓인 예물이 담긴 함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뭐든 서둘러 진행하려고 하는군. 교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예물을 보내와서 혼사를 정했어. 더는 서로 오가는 절차 없이 곧바로 혼사를 치를 수 있도록 말이야.

혼사라……. 혼사는 인생 중에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인데.

범강림이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다들 전혀 기뻐하는 기색 없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서 있었다. 마당 한쪽에 놓인 큼직하고 붉은 예단 함들과 대비되는 분위기가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우리도 서둘러 준비하세.”

범강림이 갈라진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범강림의 말이 떨어지자, 마당 안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적막함을 걷어냈다. 시녀는 집사를 데리고 예물 목록을 작성했고, 범강림은 사람을 시켜 강주와 섬주에 서신을 썼다.

“서북에도 한 통 보내고.”

범강림이 말했다.

방 안의 등불이 밝혀졌다. 범강림과 함께 탁자에 둘러앉은 집사가 붓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썼습니다.”

집사가 대답했다. 범강림이 몸을 돌리고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병부의 사람을 쓰는 게 더 빠를 게야.”

범강림이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사위 될 분이 군왕이시니, 우리가 굳이 서신을 쓰지 않아도 벌써 강주와 섬주에 있는 관리들이 앞다투어 소식을 전했을 겁니다.”

집사가 웃으면서 대꾸했지만, 범강림은 집사의 말에 웃지 못했다. 집사가 머쓱해하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서신 작성을 마친 집사가 범강림에게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범강림은 세세하게 퇴고를 거칠 겨를도 없이 내용만 맞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자 집사는 서둘러 서신을 접어 물러나 수하들에게 이를 전달했다.

황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도 빠짐없이 준비하긴 글렀어요.”

황씨가 자리에 앉으면서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농토와 점포는 이미 있는 것이니 괜찮다지만, 금은으로 만든 장신구들은 당장 구하기가 어려워요.”

범강림은 황씨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멍하니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넷째 아우한테는 전에 말해 놨으니, 일찌감치 준비해 뒀을 텐데.”

범강림이 입을 열었다.

“준비해 뒀어도, 혼사를 치르기 전까지 도착하기는 어렵잖아요.”

황씨가 말했다.

혼수는 혼례 당일에 가져가야 혼수라고 할 수 있고, 혼수로서의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혼례를 치른 뒤에 가져가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혼수로 치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하지 뭐. 혼수를 보려는 사람도 없을 텐데.”

범강림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씨도 범강림을 따라 촛불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시집을 가긴 하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네요.”

황씨가 말했다.

-경사스러운 분위기-

시녀가 방 안에 들어설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반근의 밥상에 놓인 음식들도 그대로 있었다. 시녀가 반근을 쳐다보았다.

반근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반근, 아직 밥도 안 먹은 거야?”

시녀가 물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나중에 먹을게”

반근이 말했다. 시녀가 반근 옆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밥 먹을 시간은 있어야지.”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굶어 죽진 않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반근이 대꾸했다. 시녀가 반근을 쳐다보다가 바닥에 펼쳐진 붉은 혼례복을 매만졌다.

“포목점에 가면 잘 지어 놓은 혼례복도 있어.”

시녀가 말했다.

“안 돼.”

반근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홱 들었다. 반근이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다시 외쳤다.

“안 돼!”

시녀는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반근이 당황스러웠는지, 깜짝 놀라서 반근을 쳐다보았다.

“아무튼 안 돼!”

반근이 소리치면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반근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로 바느질을 이어갔다.

“아무튼 안 돼. 다른 건 다 없어도 되는데,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아씨께서 남이 만든 혼례복을 입고 혼사를 치르게 할 수는 없어. 언니,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반근의 말을 들은 시녀가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생각했던 아씨의 혼례는 이런 게 아니야.”

반근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재빨리 소매로 눈물을 닦고 바느질을 이어갔다.

“이런 게 아니라고.”

한창 꽃다운 나이에, 그 행렬이 가히 십 리에 이를 정도로 풍성한 혼수여야 했는데.

내가 생각한 아씨의 혼례는 이런 게 아니야. 이런 게 아니라고!

같은 시각, 잠들지 못한 사람은 비단 시녀와 반근만이 아니었다. 몸을 뒤척이던 진소 부인이 결국 옷을 걸치고 침상 위에 앉았다.

“또 왜 그러시오?”

진소가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속상해서요. 그리고 생각을 정했어요.”

“뭘 정했단 말이오?”

진소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단랑을 위해 준비해 뒀던 혼수를 내일 다 정씨 저택으로 보내려고요. 고운 처자가 시집가는데, 그렇게 촉박하고 초라하게 보낼 수는 없어요.”

진소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초라하기는. 돈은 우리보다 훨씬 많을 텐데.”

진소가 웃었다.

“하지만 돈 말고는 가진 게 없잖아요. 돈이라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정 낭자가 돈을 돌 보듯 하는 거겠지.

잠시 생각하던 진소가 정적을 깼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시집간 뒤에 잘 지내는 게 관건이지, 혼례 때 체면 차리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소.”

“그건 별개의 일이죠. 하여간 남자들은 이해를 못 한다니까.”

진소 부인이 진소에게 핀잔을 주자, 진소는 실소를 터트리고 부인에게 사과했다.

“알겠소, 알겠소. 부인, 내가 잘 몰라서 그렇소.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꼭 정 낭자의 체면이 제대로 설 수 있게 시집 보낼 거예요.”

말을 마친 진소 부인은 내친김에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어? 부인, 이 꼭두새벽에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진소가 웃으면서 묻자, 진소 부인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당직 서는 여종을 불렀다.

“사람을 전부 부르거라. 내 딸 시집보내는 거라고 치고 준비해야겠다.”

진소 부인의 마당은 밤새 시끌벅적했고, 해가 뜰 무렵까지도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

“나도 갈래요. 나도요!”

진단랑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다들 바쁜데, 가서 말썽 피우려고? 집에서 얌전히 공부하고 있거라.”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혼사 당일엔 분명 아씨를 데리고 가실 거예요.”

옆에 서 있던 유모도 조심스럽게 진단랑을 어르며 달랬다.

진소 부인이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고 여종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전복인(全福人: 부모님이 건재하고, 남편과 아들, 딸이 모두 있는, 여러 면으로 원만한 부인. 혼례식 날 신부를 맞으러 가는 부인의 자격이 주어짐)도 꼼꼼하게 잘 고르고.”

진소 부인이 말했다.

“고르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모두가 부인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라서요.”

집사 부인이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대답했다. 지금의 정 낭자를 태후가 얼마나 못마땅해하는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야.”

진단랑이 진소 부인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어머니, 저도 가서 도와주고 싶어요.”

또 빠트린 게 없나 곰곰이 생각하던 진소 부인이 갑작스럽게 안긴 진단랑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 넘어질 뻔하자, 여종들이 재빨리 진단랑을 진소 부인에게서 떼어냈다.

여종들의 손에 붙들려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단랑을 보며 진소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같이 가자. 가서 도와주기다?”

진단랑이 환호하면서 껑충 뛰어올랐다.

“단랑이 가서 무슨 도움이 된다고!”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단랑이 있으면 더 흥겨워지겠죠.”

진소 부인이 대꾸하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다른 여종을 불렀다.

“여봐라. 단랑뿐 아니라 우리 집안 며느리들도 다 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고 해라. 경사스러운 일인데, 사람이 복작복작해야 신혼 분위기가 더 나지.”

여종들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진소 부인이 막 나가려던 그때, 여종이 진(秦) 부인의 방문을 알렸다. 진소 부인은 며느리와 아이들에게 먼저 나가 마차에 탈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고, 혼자서 진 부인을 맞이했다.

“출타하는 데 방해 안 되게, 시간 오래 끌지 않고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갈게요.”

진 부인이 자신의 여종에게 손짓하자, 여종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내 마음이에요.”

진 부인이 말했다. 진소 부인이 받은 종이 위에는 농토와 점포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진소 부인이 복잡한 표정을 짓자, 진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요. 정 낭자는 절대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죠.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든 간에, 정 낭자는 항상 자신과 무관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거라는 것도요.”

진 부인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겁쟁인가 봐요. 뭐가 그리 두려운지 모르겠어요.”

진소 부인은 잠자코 진 부인을 쳐다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두려운데?”

진소 부인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진 부인의 말을 반복했다. 진 부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세상 이치가 그렇잖아요. 좋은 마음이 꼭 좋은 일로 연결되는 건 아니죠. 아무튼 이건 받아 줘요. 언니 이름 빌려서, 언니 덕 좀 보게요.”

진소 부인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종이를 다시 진 부인에게 돌려주었다.

“정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잘 알면서 이래? 자네한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생각이 나서 누군가를 보러 왔을 땐, 꼭 그 사람을 보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진다는 말이 있잖아. 자네한테 정 낭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걸로 충분해. 무엇보다 나는 정 낭자를 속이고 싶지도, 정 낭자에게 그 선택을 떠넘기고 싶지도 않아.”

진소 부인이 진 부인의 손을 두어 번 정도 따뜻하게 다독였다.

“그러니까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두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종이를 여종에게 건넸다.

“언니, 사실 나도 알아요. 그래도 언니한테 와서 말이라도 해 보고 싶었어요.”

진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예를 표하자,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어서 가 봐요. 타향에서 온 의형제 부부가 얼마나 막막하겠어요.”

진 부인의 말에, 진소 부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소 부인이 며느리와 아이들을 데리고 정씨 저택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정씨 저택 사람들은 전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범강림과 황씨는 혼례를 치른 경험이 있긴 했지만, 그건 서북에서의 일이었다. 몰락한 집안의 회계 선생의 딸과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장수의 혼례였다. 그래도 돈은 있으니 성대한 혼례를 올리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정교랑의 혼사와는 비교가 안 됐다.

“전복인은 어디 가서 찾지?”

밤새 한숨도 못 잤는지 눈 밑이 퀭해진 황씨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자책과 후회 섞인 말투로 범강림에게 말했다.

“내가 맨날 뒤에 숨어만 있고, 뭐든 다 시누이가 알아서 하게 떠넘긴 탓이에요. 남은커녕, 당신의 동료나 친인척 중에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네요.”

“괜찮소. 내가 가서 찾아보리다. 내가 아는 자들이라고는 죄다 병사나 장수들이긴 하지만, 누이는 별로 그런 걸 개의치 않아 할 거요.”

범강림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네.

황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강림이 전복인을 찾으려 대문을 나서려던 때였다.

진소 부인이 웃는 얼굴로 마당 안에 들어섰다. 진소 부인의 방문에 범강림과 황씨는 놀라기도, 기뻐하기도 하면서 그녀를 맞이했다. 곧이어 그녀의 마차에 실린 크고 작은 예단 함을 보고는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이고, 저걸 어떻게 받습니까.”

황씨가 황급하게 말했다.

“당연히 받을 수 있지요. 이건 범 군감 내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정 낭자에게 해주고 싶은 겁니다.”

진소 부인이 말하면서 예물 함을 안으로 들이라고 지시했다. 며느리와 아이들이 전부 마차에서 내리자, 정씨 저택 안은 일순간 시끌벅적해졌다.

황씨는 서둘러 시녀와 몸종들에게 차와 물을 내어오도록 명하고, 진씨 가문의 아이들에게는 사탕과 꿀에 절인 과일을 나눠 주었다. 갑자기 어린아이들과 여인네들이 많아진 덕에 정씨 저택에는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분주할 것 없어요. 혼사 준비는 어디까지 했죠?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겨요.”

진소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황씨가 황송해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범강림이 공손하게 예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그럼 부인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소 부인이 미소 짓자, 황씨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진소 부인을 대청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 혼사 준비를 논의했다.

“갑자기 바깥이 왜 저리 시끄럽지?”

시녀가 정리하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진소 부인께서 가족들을 데리고 오셨어요.”

어린 시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집에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던 터라, 시녀는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혼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후 때문에 정교랑의 일을 선뜻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시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웃었다.

“아씨, 이제 큰아씨의 입가에 포진이 좀 덜 나겠어요.”

시녀가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인사드려야겠다.”

시녀가 서둘러 정교랑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 문서들은…….”

시녀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들을 쳐다보면서 묻자, 정교랑이 탁자 위를 훑어보고 대답했다.

“전부 강주로 보내.”

시녀가 알겠다고 대꾸하고는 어린 시녀에게 정교랑의 시중을 부탁하고 탁자에 앉아서 바쁘게 움직였다.

황씨에게 진행 상황을 들은 진소 부인은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빠르게 여종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황씨는 진소 부인의 곁에 남아 같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볼일부터 보고 나서 낭자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진소 부인이 자신을 향해 예를 표하는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사촌 오라비인 주 공자가 경성에 있어서, 주 공자한테 신부를 데려다주는 신행을 부탁했어요. 그리고 전복인은 내가 몇 명 엄선해 봤는데, 낭자와 따로 논의할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낭자는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히 있다가 시집가면 돼요.”

진소 부인이 황씨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 일들은 부인이 말할래요? 아니면 내가 가르쳐 줄까요?”

그 일들이라면…….

혼사를 치른 지 몇 년이 지난 황씨지만, 그 일들이라는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진소 부인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인도 아직 새댁이라는 걸 내가 깜빡했네요. 내가 알려 줄게요.”

황씨가 민망해하면서 어색한 미소를 짓던 순간, 갑자기 마당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이라 잔뜩 신이 난 소보아가 몸종과 여종들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소보아는 낯도 가리지 않고 내내 까르르 웃으면서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마당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웃음소리를 듣던 황씨는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드디어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나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방 안의 창문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밖과는 다르게 방 안은 숨 막히는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시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구석에 놓인 얼음 대야를 쳐다보았다.

“가서 새것으로 바꿔오거라.”

시녀가 얼음 대야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대야 안에 아직 얼음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하지만 따져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시녀는 조용히 얼음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내시가 좌우를 살피더니 등 뒤에 숨겨온 보따리 하나를 풀어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잰걸음으로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전하?”

내시가 나지막이 진안 군왕을 부르며 휘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내시를 쳐다보자, 내시가 헤헤 웃으면서 휘장을 반쯤 걷었다.

“전하, 이것 좀 보십시오.”

내시가 말하면서 보따리에서 꺼내온 옷을 펼쳤다. 반쯤 걷힌 휘장 너머로 짙은 붉은색 혼례복이 햇빛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저건…….

“혼례복이 완성되었습니다. 몰래 가지고 와서 보여 드리는 겁니다.”

내시가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모습으로 말했다.

온통 붉은색인 혼례복 위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금빛 무늬가 햇빛에 비치며 눈부시게 빛났다.

진안 군왕이 눈을 감았다. 내시가 또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 시녀가 들어와서 내시를 불렀다.

“경 공공, 고 선생께서 찾으십니다.”

내시가 황급히 혼례복을 진안 군왕의 몸 위로 던져 두고 휘장을 내렸다.

“또 무슨 일로 날 찾는 것이냐? 글쎄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궁에서 온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좋을 대로 하라지. 어차피 우리 관저에서 뭘 어쩌지는 못할 텐데.”

내시가 구시렁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시녀들은 내시가 나가는 것을 배웅하고는 새 얼음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시녀들이 나지막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진안 군왕의 귓가에 들려왔다.

“신방 봤어?”

“여기를 신방으로 꾸미지 않고?”

“고 선생이 여기 말고 저쪽 반대편에 있는 처소에 마련했어. 얼추 다 꾸민 거 같던데? 되게 예쁘게 해 놨더라.”

“왕비께서 몇 명이나 데리고 들어오시려나?”

왕비라…….

진안 군왕이 눈을 떴다.

왕비.

진안 군왕은 이불에서 손을 꺼내고 자신의 몸 위에 덮인 혼례복을 찬찬히 만졌다.

혼례복. 이게 혼례복이라는 거구나.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시녀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경 공공.”

인기척이 느껴지자, 진안 군왕은 서둘러 손을 다시 이불 속으로 넣고 눈을 감았다.

내시는 휘장을 들어 올리고, 잠든 듯한 진안 군왕을 쳐다보고는 서둘러 혼례복을 다시 보따리 안에 넣고 물러났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진안 군왕은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베개 아래서 나무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꼭 쥐고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집사와 저택을 관리하는 아낙, 그리고 주복의 시중을 드는 사환과 시녀밖에 남지 않은 주씨 저택이었지만, 주씨 저택의 마당은 시끌벅적했다.

“공자님, 이것들이 노야께서 남기고 가신 전부입니다.”

집사가 문서 몇 장을 건넸다.

“이건 고방에서 고른, 금은으로 만든 장신구들과 비단 옷감이에요.”

다른 아낙이 말했다.

“안 봐도 된다. 전부 다 보내거라.”

주복이 성가시다는 듯이 대꾸했다.

집사와 아낙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낙이 집사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 사람은 더는 말하지 않고 알겠다며 물러났다.

마차를 꾸미고, 예단이 담긴 함을 마차로 옮기느라 마당 안이 또 한 번 왁자지껄해졌다. 주복은 잠시 마당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마당에서 실뜨기를 하고 있던 두 시녀가 주복을 보고는 서둘러 그의 시중을 들러 다가왔다.

“저리 가, 가라고.”

주복이 시녀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젓자,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시녀들은 웃으며 물러났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주복은 잠시 넋을 놓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뒤,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옷궤를 열고 몸이 다 들어갈 정도로 깊숙한 곳에서 상자 한 개를 끌고 나왔다.

주복은 맨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상자에 달린 자물쇠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뒤통수를 스스로 팍 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복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좌우를 살폈다.

“열쇠를 어디에 뒀지?”

주복이 중얼거리면서 탁자와 책장을 마구잡이로 뒤졌다.

“공자님, 뭘 찾으세요?”

사환이 문밖에서 고개를 내밀고 묻자, 깜짝 놀란 주복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가!”

주복이 갑자기 화를 내자, 사환이 화들짝 놀라고는 혀를 내밀면서 물러났다.

주복은 문가로 다가가 주변에 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하고, 다시 대청 중앙에 섰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이마를 탁 하고 쳤다.

침상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주복이 그 안에 든 열쇠를 보고 기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복이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상자 뚜껑을 젖혔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은 지난번에 주복 혼자서 상자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던 때보다 물건 몇 개가 더 늘어 있었다. 물론 여인들이 쓸 법한 아기자기한 물건들이었다.

주복이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어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주복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물건들을 보고 읊조렸다.

“이건 상사(上巳: 삼월 삼짇날) 때 산 선물이고.”

“이건 단오절 때.”

“음, 이거는 보자마자 사야겠다 싶어서 산 거고.”

주복이 상자에 있던 모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서 조용히 읊조린 뒤, 자신의 소매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작은 상자 안에는 팔보여의(八寶如意) 금비녀가 놓여 있었다. 주복이 조심스럽게 비녀를 집어 들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새빨간 보석과 눈부신 금빛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금비녀를 손에 쥐고 한참을 감상하던 주복이 천천히 비녀를 조그마한 상자 안에 넣어두고 손을 놓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비녀가 든 상자는 온갖 장신구와 아기자기한 물건이 담긴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혼인 축하해.”

주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인 축하한다, 정교랑.

여종들이 몇 차례나 마차를 오가며 분주하게 상자들을 내렸지만, 아직도 짐을 다 옮기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 이부인은 조용히 불경을 읊었다.

방 안에서는 정 대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그 계집이 준 걸 원한다더냐!”

정 대부인이 휘청거리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마당에 놓인 상자 몇 개를 들어 힘껏 집어 던졌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장신구들이 바닥에 쏟아지자, 금은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거렸다.

여종과 몸종들이 재빨리 바닥에 널브러진 장신구들을 주우려고 했지만, 정 이부인이 한발 빨랐다. 정 이부인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장신구들을 치마폭에 주워 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정 대부인이 울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내 아들의 목숨을 판 것이야! 내 아들의 목숨을 판 돈이라고!”

정 이부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정 이부인은 옆에 서 있는 여종과 몸종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장신구들을 챙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목숨을 팔기는 무슨. 사낭은 기루에서 기녀에게 죽임을 당했다던데, 그게 우리 교랑과 무슨 상관이라고. 괜히 우리 교랑한테 불똥만 튀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군왕의 왕비가 되는 건데 이렇게 촉박하고 초라한 혼례를 올릴 리가 있겠어?”

중얼거리던 정 이부인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는지 서재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정 대부인이 숨넘어갈 정도로 우는 통에, 몸종과 여종들은 모두 정 대부인의 곁에 머무르며 그녀를 부축하고 다독이고 있었다. 정 이부인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자신이 주운 것들을 품에 안고 자리를 떠나고자 몸을 돌렸다.

문가에 서 있던 두 몸종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 이부인을 바라보았다.

“이부인.”

몸종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정 이부인을 부르자, 정 이부인은 도리어 눈을 부릅뜨고 몸종들을 흘겨보았다.

“왜? 이건 우리 교랑이 보내온 게야.”

정 이부인이 바닥에서 주운 상자 두 개를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나는 교랑의 계모인데, 이 정도도 가지면 안 돼?

몸종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라 가만히 선 채로 멀어져 가는 정 이부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재 안. 정 대노야도 정 대부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야, 이것들은 저희 아씨께서 무엇을 보상하고자 보내신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조귀가 입을 열자, 정 대노야가 손을 들어서 그의 말을 끊었다.

“긴말할 것 없네. 나도 잘 알고 있어.”

정 대노야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교랑이 정말로 무정한 아이였다면, 그때 나더러 서둘러 가족을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겠지. 경성에서 교랑이 얼마나 많은 위험과 험난한 상황들을 겪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됐네. 내가 교랑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할 뿐이야.”

조귀가 정 대노야를 향해 예를 표했다.

“대노야께서 아씨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조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정 대노야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사낭도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은 거지, 교랑이 해친 게 아니야. 교랑이 그의 목숨을 구하고 명성까지 안겨 줬지만, 결국 사낭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어. 사낭의 명줄은 딱 거기까지였던 게야. 무엇보다도, 교랑이 이 일로 자기 탓을 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리고 이것들은…….”

조귀가 큰절을 올리자, 정 대노야는 그가 내민 문서들을 내려다보았다.

“곧 혼례를 치를 텐데 시간이 이리도 촉박하다는 것은, 황실에서 교랑의 체면을 조금도 챙겨 주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이것들을 강주로 보내와서 뭐 하겠나? 최소한 경성에 남겨 두고 교랑의 기를 세워 줬어야지.”

조귀가 고개를 저었다.

“아씨께서 그런 겉치레를 신경 쓰시는 분도 아니잖습니까. 아씨께서는 본디 집안 어른께서 보관해야 할 문서이니, 집으로 보내는 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관부를 거친 문서인데, 판결을 무시할 수는 없잖습니까. 아씨께서는 소인에게 아씨의 모친께서 남기신 혼수만 경성으로 보내 달라고 하셨습니다.”

조귀의 말에, 정 대노야가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에 옮기고, 실행하면 반드시 끝을 본다.

그 애는 농담도 안 하고 에둘러 말할 줄도 몰라. 무슨 일이든 대강하는 법이 없고.

“알겠네.”

정 대노야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교랑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게. 교랑이 피땀 흘려 얻어낸 이 재산들을 절대로 망치지 않겠다고.”

“예. 그럼 소인은 내일 경성으로 떠나겠습니다.”

조귀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다 데리고 갈 건가? 자네가 데리고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몇 명뿐이니, 집에서 시종들을 더 데려가게.”

“괜찮습니다. 아씨께서는 사람 수에 연연하지 않으시니까요.”

사람 수만 많은 것보다는 일을 잘하는 사람 하나를 더 좋아하시지요. 예를 들면, 저처럼요.

조귀가 조용히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였다.

정 대노야가 한숨을 쉬면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례가 모레라고 들었는데, 자네가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혼례에 참석할 수는 없겠군. 우리도 그 전에 도착하기는 글렀고.”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절대로 노야께서 경성으로 오시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조귀가 서둘러 말했다. 정 대노야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내가 가면 안 될뿐더러, 우리 집안 자제들도 경성으로 가지 못하게 잘 감시해야지. 한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주를 떠나지 못하게 해야겠어.”

정 대노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당에서 노부인과 정 이노야의 대화가 들려왔다.

“지금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마차부터 준비하지 않고. 우리 교교가 혼례를 올린다잖아. 황실의 종친한테 시집가는데 친정에서 안 가면 쓰겠느냐?”

“어머니,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아비라는 자가 군왕과 혼사를 치르는 걸 뻔히 알면서 강주로 돌아온 게냐?”

“어머니, 그게 다 형님 때문 아닙니까!”

대화를 듣던 조귀가 동정 섞인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바라보았다.

“그럼, 노야께서 말씀 좀 잘 해 주십시오.”

조귀가 몸을 일으키고 예를 표했다.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홀로 차디찬 강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노부인과 아우를 상대하러 갔다.

교랑이 이렇게나 많은 재산을 주었는데, 내가 우리 정씨 가문의 안위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대노야 소리를 듣기도 창피한 일이지.

북정을 떠난 조귀는 각 점포에 들러 관리인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해가 질 때쯤 남정으로 돌아왔다. 남정에는 새로 지은 저택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고, 지저분했던 흙바닥도 모두 새로 깨끗하게 깔려 있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빗물이 넘치고 벌레가 진을 치고 있던 옛 남정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여름 저녁, 시원한 곳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골목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조 집사.”

조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남정 사람들이 그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며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조귀가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다가, 한쪽을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정평!”

큰 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둘러앉아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던 정평이 조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은 바쁩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서요.”

정평의 대꾸에 조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잃는 것은 얻기 위함의 첫걸음이고,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나아가는 것은 물러나는 것을 위한 것이고, 물러나는 것은 나아가는 것의 근간이다. 복은 화의 시작이 되고, 화가 오기 전에는 필시 복이 먼저 온다.”

정평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어린아이들이 투정을 부리듯 외쳤다.

“도경 읊지 말고요. 이야기 들려주세요. 재미난 이야기요.”

“에이, 이야기 한 번 하면서 도경도 한 번 읊는 거지. 너희들, 내가 이야기 들려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내가 무려 십여 년 동안 책을 읽어서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만 뽑아내 말해 주는 거거든. 내 이야기는 아무나 듣고 싶다고 해서 다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여기에는 교훈이 무지막지하게 녹아 있다고.”

정평이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조귀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정평, 정말로 나와 함께 경성으로 가지 않을 텐가?”

정평이 고개를 저었다.

“일백 문을 다 벌었으니, 이제 문을 닫고 경서 공부에 매진할 겁니다.”

정평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뭐, 물론 나도 언젠가는 경성으로 가겠지만요. 우린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요.”

조귀가 입술을 삐쭉였다.

“고작 일백 문 가지고 어떻게 문을 닫아걸고 공부만 하겠다는 건가? 굶어 죽는 게 무섭지도 않나.”

조귀가 아이들에게 이어서 이야기하는 정평을 보며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조귀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두 시녀가 그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비록 정교랑이 이 집에서 살고 있진 않았지만, 집은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저녁때면 언제나 등불을 밝혔다.

조귀는 주인 없는 안채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두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녀들이 밥상을 막 들여왔을 무렵, 정계가 몇 사람을 데리고 저택으로 찾아왔다.

“집사 어른, 저희가 더 도울 게 있을지요?”

정계가 물었다.

“괜찮소. 치울 것도 별로 없고.”

조귀가 대답했다. 정계와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작은 상자를 조귀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조귀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씨께서 혼인을 치르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약소한 마음이나마 담아 보았습니다.”

정계의 말에 조귀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괜한 돈을 쓰고 그러시오. 댁들이 잘 지내는 게 바로 아씨께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모르나?”

정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잘 알지요.”

정계가 작은 상자를 열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귀한 금은보화는 아니고, 저희가 와당을 한 개 만들어 봤습니다.”

와당?

조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상자 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정말로 와당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이건…….”

조귀가 와당에 새겨진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연꽃 절지 무늬입니다. 정씨 선조의 고택에서 쓰이던 표식인데, 아씨께서 어릴 때 강주에서 지내신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나서요. 이제 곧 시집을 가시니 저희가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아씨께서 딱히 부족한 건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움이 담긴 기억을 선물하고자 준비했습니다. 아씨께서 어딜 가시든, 정씨 가문은 언제나 아씨의 고향이고 집이라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

정계의 말에, 조귀가 웃었다.

“좋소. 마음을 담은 선물이니, 아씨께서는 분명히 좋아하실 걸세.”

정계 등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조귀를 따라 웃었다.

“그럼 아씨의 선물을 전했으니, 이제 집사 어른께도 선물을 하나 드려야지요.”

한 사내가 술동이 한 개를 꺼내어 탁자 위에 탁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어디 한번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조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시녀들을 불렀다.

“좋지! 술상을 내오너라. 오늘 한번 취할 때까지 마시세!”

정계 등과 거하게 회포를 푼 조귀는 숙취로 인해 아침 일찍 출발하지 못하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떠날 채비를 마쳤다. 조귀는 여러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남정 골목을 나섰다.

깨끗하게 치워진 북정 거리에 긴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행인과 마차가 쉼 없이 지나다니는 곳에 벽을 따라 차양막이 설치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간이 화로를 만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조귀가 놀라서 물었다.

“집사 어른, 정 낭자께서 내일 혼례를 올리시니, 정 대노야께서 아무나 와서 음식과 술을 먹고 갈 수 있도록 사흘 동안 길거리에서 연회를 여신다고 합니다. 저기 덕흥루에서 가장 유명한 숙수를 데려와 요리를 준비하시고요. 강주성에 사는 그 누구든 편히 와서 연회를 즐기되, 축의금은 내지 않아도 된답니다.”

구경하던 사람 중 한 명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숙수가 힘들어 죽으면 어떡하오?”

조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정 대노야께서 마차 한 대에 가득 실릴 정도의 값을 치르셨답니다. 힘들어 죽는다 해도 이 일은 꼭 해야죠.”

다른 구경꾼이 외치자,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귀도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런 경사스러운 일에는 사람이 많이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축하해야지. 눈앞에서 볼 수는 없다 해도, 이 마음들은 전해질 테니.

조귀가 말 위로 몸을 휙 날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강주 정씨 저택의 마당도 북정 거리만큼 시끌벅적했다. 대청 안에 앉은 정 노부인은 정 대노야가 어디서 구해 온 사람인지도 모를 아낙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노부인께서 참 복도 많으시지.”

“안 그래도 제가 얼마 전에 마당에서 커다란 꽃을 따는 꿈을 꿨는데, 역시 길몽이었나 봐요.”

“노부인께서 귀한 군왕 손주사위를 보시네요.”

아낙들의 아첨에 정 노부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면서 목청을 높이고 말했다.

“우리 교교의 할아비는 교교가 남다르다는 걸 일찍이 알았네. 교교에게 이름을 지어주겠다면서 반년 내내 작명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다는 거야. 낳기 직전까지도 이름을 정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길을 지나가는 노승을 만났어. 그 노승이 입을 열자마자 한 글자를 딱 뱉었는데…….”

말하던 정 노부인은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 바보 이름이 뭐였더라?

“방이요.”

옆에 서 있던 여종이 재빨리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그게 바로 방(昉)이라는 글자였네.”

노부인이 자연스럽게 말을 덧붙이고는 눈이 없어질 정도로 웃음 지었다.

“게다가 더 신기한 게 뭐였는 줄 알아? 그때 노야께서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로 정방이라 중얼거리고는, 그 노승에게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자 고개를 들었는데, 그 노승은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어머나, 그럼 부처님을 만나신 거 아니에요?”

주위에서 감탄 섞인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문밖에 서 있던 정 이부인이 눈썹을 꿈틀대며 눈을 흘겼다.

“뻔뻔스러운 할망구 같으니라고. 누가 들으면 교랑이 황후마마라도 되는 줄 알겠어. 뭐? 부처님이 이름을 지어 줘? 그 애가 바보라는 걸 알자마자 요강에 빠트려 익사시키려고 했다더니만. 참 나, 부처님이 내리실 벌이 두렵지도 않나.”

정 이부인은 구시렁대며 욕을 내뱉고는 대문 앞으로 나갔다.

거리에는 길거리 연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쌀이 왔네, 고기가 왔네 하며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사람들과 술장수들이 술동이를 내리는 모습을 보던 정 이부인은 속으로 계속해서 불경을 읊었다.

“저게 다 무슨 낭비람. 역시 사람들은 자기 돈이 아니면 아주 있는 대로 낭비하려고 발악을 하네.”

같은 시각 경성의 정씨 저택에서는 여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왔어요. 왔어요.”

여종 몇 명이 소리치며 방 안으로 들어와 휘장을 내렸다.

창가에 있던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방 안으로 들여지는 옷걸이를 바라보았다. 옷걸이에는 온통 붉은색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혼례복이 걸려 있었다.

여종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어린아이들이 문가에 기대어 호기심 어린 얼굴로 혼례복과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이어 다른 부인들 그리고 젊은 새댁들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진소 부인이 혼례복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잘 만들었다는 칭찬을 하고 상서로운 말들을 했다.

“잠시 이리 와요. 낭자에게 해 줄 말이 좀 있어서.”

진소 부인이 정교랑의 손을 이끌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동씨 가문의 부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진소 부인이 바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줄게요.”

진소 부인이 방을 나가자, 부인들과 젊은 새댁들도 자연스럽게 진소 부인을 따라 방을 나갔다.

실내가 조용해지자, 정교랑이 천천히 옷걸이 앞으로 걸어가 혼례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문과 문틈 사이로 들어와 부서지는 햇빛 때문에 실내는 몹시 환했다. 혼례복 위에 수놓아진 금빛이 강가의 윤슬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예뻐요?”

누군가가 문밖에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진단랑이 서 있었다.

“예뻐.”

정교랑이 싱긋 웃었다. 진단랑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정교랑의 옆에 서서 정교랑과 함께 혼례복을 쳐다보았다.

“나도 예쁘다고 생각해요.”

진단랑이 정교랑의 소매를 흔들면서 졸랐다.

“언니, 한번 입어 봐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혼례복을 잠시 바라보다가, 혼례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교랑의 마당에 도착한 주복이 열린 대청 문 사이로 한 여인을 지켜보았다. 여인은 두 팔을 벌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주복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붉은색…….

온통 붉은색이네. 눈부신 붉은색에 금실로 촘촘하게 수놓은 꽃까지.

시집가는 여인은 예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지금껏 살면서 저런 붉은색을 처음 본다고 주복은 생각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붉은색은 본 적이 없어.

항상 우중충한 무채색만 입던 여인이 저렇게 눈부신 붉은색을 몸에 걸치니, 깊은 밤 만개한 모란꽃 한 송이가 따로 없군.

사실 무채색의 옷을 입어도 어디서나 돋보이긴 했지. 그런 여인이 저리 돋보이는 옷을 입으니, 눈부시게 빛나서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구나.

정말 유일무이해. 저 여인은.

“혼례복이 정말 예뻐요!”

대청 안에서 진단랑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단랑은 정교랑의 주위를 빙글빙글 뛰어다니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옆에 놓인 구리거울을 바라보았다.

주복은 그런 정교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복의 눈에 정교랑은 구리거울 속에 비친 혼례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 같기도, 앞으로의 나날들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어딘가 모르게 들뜬 것 같기도 했다.

혼례복이 정말 예쁘네.

“주 공자?”

여인의 목소리가 주복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주복은 심장이 멈춰버린 듯이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가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재빨리 몸을 돌렸다.

“주 공자의 옷도 준비해 뒀는데, 입어 봤어요?”

진소 부인이 웃음기 서린 눈으로 물었다.

주복이 정교랑의 신행을 담당했지만, 주씨 가족이 모두 섬주로 내려간 탓에 황씨가 그의 예복을 준비했다. 주복은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네, 하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마당을 떠났다.

-혼례-

주복이 떠난 뒤, 실내를 향해 시선을 돌리던 진소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참, 혼례복을 지금 입으면 어떡해요. 단랑, 혼례는 놀이가 아니야. 어서 혼례복에서 손 떼. 손자국 남으면 내일 어떡하려고 그래.”

저녁이 되자, 북적이던 사람들이 떠난 정씨 저택 마당은 다시 평소와 같은 조용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반근과 시녀는 여전히 방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근과 시녀는 이미 싸 둔 상자와 보따리를 몇 번이고 확인하고, 물건을 제대로 챙겼는지 재차 확인했다.

“빠트릴 게 뭐 있겠어. 너무 신경 쓰지 마.”

정교랑이 잔뜩 긴장한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집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은 정교랑이었다. 정교랑은 목욕을 마친 뒤, 창가에 앉아서 어린 시녀들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맡기고 손으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사람만 있다면, 뭐든 다 갖출 수 있어.”

정교랑이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이 책은, 안 가져가도 상관없어. 새로 한 권 사면 그만이니까.”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녀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정교랑의 손에서 책을 가져갔다.

“말씀 안 하셨으면 까먹을 뻔했어요.”

시녀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책 몇 권도 모두 정리해 반근에게 건넸다. 정교랑은 웃으면서 반근이 책들을 상자 안에 넣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거 읽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만 읽으세요. 매일 읽으시니까 딱 오늘 하루만 건너뛰어요, 네? 내일 밤에 마저 보시면 되잖아요.”

시녀가 헤헤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빗던 어린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은 신혼 초야잖아. 아, 그런데 신랑이 친영도 못 오고 맞절하는 의식도 못 치른다던데, 그럼 동방화촉은…….

아씨께서 시간이 많긴 하시겠네.

그래도 너무 가엾으시네. 무려 신혼 초야인데.

어린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의 긴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었다.

내일이면 이 머리카락 위로 봉관이 씌워지고, 아씨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시겠지.

어두운 밤하늘 아래, 여름 곤충들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경.”

휘장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닥에 앉아 졸고 있던 내시가 깜짝 놀랐다. 내시는 눈도 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침상 쪽으로 기어갔다.

“전하,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물 드릴까요?”

내시가 휘장을 살짝 걷으며 연달아 물었다.

어둑한 등불 때문에 휘장 안은 더욱 어두워 보였다. 침상 위에 있던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내시는 서둘러 그를 제지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태의가 되도록 몸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전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난 괜찮다.”

진안 군왕이 대답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내일이냐.”

내시가 웃었다.

“예, 내일입니다.”

내시가 침상 옆에 꿇어앉아 태사국에서 계산한 친영을 출발하기에 좋은 시간과 신부가 가마에서 내리는 시간, 신랑 신부가 맞절하고 천지신명과 부모님께 절을 올리는 시간 등을 하나하나 손으로 꼽으며 소상히 설명했다.

“영헌(永軒) 국공야(國公爺)께서 전하를 대신하여 여기서 신부를 맞이하실 것이고, 대공주 부마와 이 한림께서 친영 행렬로 가실 겁니다.”

내시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자, 진안 군왕의 호흡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의 표정 또한 몹시 평온해 보였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내시의 말을 끊었다.

“그럼 혼례복은…….”

진안 군왕의 말에 내시가 멈칫했다.

“그럼 국공야가 내 혼례복을 입는 건가?”

진안 군왕이 묻자, 내시가 웃으면서 휘장을 걷었다.

“전하, 전하의 혼례복은 여기 있습니다. 국공야께서는 혼례복을 입지 않습니다. 혼례복은 오직 신랑 신부만 입는 것이지요.”

짙은 밤하늘 때문인지, 침상 옆에 세워 둔 옷걸이에 걸려 있는 혼례복은 무슨 색인지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전하,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어찌 됐든 혼례식은 일종의 의식일 뿐이고, 앞으로 두 분이 함께 보내실 나날이 더욱 중요합니다.”

내시가 웃으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나면, 내일이 되겠지. 드디어 이날이 왔네.

하늘빛이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시녀가 정교랑을 깨웠다.

“친영은 오후라고 하지 않았어?”

정교랑이 평상시 입던 치마저고리를 걸치며 벽에 걸려 있던 활을 집어 들었다.

“아이고, 우리 아씨.”

시녀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고는 정교랑의 손에서 활을 빼앗았다.

“아씨, 활쏘기하시라고 일찍 깨운 게 아니에요.”

반근은 방 한쪽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머리 손질해 주는 사람이 온 다음에 세수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세수한 다음에 기다리는 게 나을까?”

반근이 어린 시녀에게 정교랑이 오늘 할 장신구들을 꺼내 놨는지 확인했다.

“안 꺼내 놔도 돼. 방이 이렇게나 작은걸. 두어 걸음이면 다 닿잖아.”

정교랑이 천천히 구리거울 앞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반근,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밤새 한숨도 못 잤잖아. 일단 네 화장부터 하고 와.”

시녀가 말하자, 반근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정신 좀 봐. 아씨를 창피하게 해서는 안 되지!”

반근이 소리치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둥대며 문턱을 지나가던 반근은 하마터면 발이 삐끗해 넘어질 뻔했다. 문가에 서 있던 어린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반근을 부축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오던 황씨가 반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반근이 왜 저렇게 긴장해?”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워낙 중차대한 일이잖아요. 큰아씨께서는 큰 도련님께 시집온 날, 어떠셨어요?”

시녀가 미소 띤 얼굴로 황씨에게 물었다.

“어, 그때는…….”

황씨가 곰곰이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머리가 새하얘졌다는 거 말고는 잘 기억이 안 나. 아, 맞아. 그날 아침에 어머니께서 과일 한 개를 손에 쥐여주셨던 게 생각나네. 그런데 나는 그걸 먹을 생각도 못 하고, 결국 손에 그대로 쥔 채로 신방까지 들고 갔어.”

시녀와 몸종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때 나는…….

황실에서 시중들러 온 사람들이 집 안팎을 가득 채웠고, 정씨 저택도 신부를 배웅하는 정도 이상으로 성대하게 꾸며져 있었다.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저택만큼 화려한 모습이었다.

정교랑은 쿵쾅대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모가 준 인삼 절편을 손으로 으깨고 있었다.

친영 행렬은 성을 반 바퀴 더 돌고 나서야 궁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먹은 게 하나도 없었던 정교랑은 하마터면 실신할 뻔했다. 옆에 앉아 있던 양산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삼 절편을 조용히 정교랑의 손에 쥐여주었다.

“자. 네가 허둥대는 걸 보니까, 분명히 뭔가 빠트린 게 있을 줄 알았어.”

양산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으면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너는 칼도 잘 쓰고, 활도 잘 쏘고, 기마도 잘하면서, 배고픈 건 왜 잠시도 이렇게 못 견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난 배가 고팠던 게 아니라, 긴장했던 거야.

귓가에 시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정교랑이 정신을 차렸다.

“아씨께서도 긴장하신 거죠?”

시녀가 웃으면서 물었다. 시녀가 정교랑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정교랑에게 새 신발을 신겨 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내가 나중이 되어서야 후회한 게 있는데, 혼례를 올리는 날이 내가 살면서 제일 한가했던 날이더라고요. 모두가 다 나를 위해 고생하고 바삐 움직이는데, 나는 마음 편히 손 놓고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으니까요. 그런 날은 아마 살면서 딱 한 번밖에 없을 텐데, 그때 실컷 즐길 걸 그랬어요.”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린 몸종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진소 부인이 도착했음을 알리자, 황씨가 서둘러 진소 부인을 맞이하러 문가로 다가갔다.

방 안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정교랑은 구리거울 앞에 앉아 다른 사람의 손에 머리카락과 화장을 맡기고, 주위에 있는 부인들과 젊은 새댁들이 들려주는 축복의 말들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날이 훤히 밝고,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정교랑은 계속 방 안에 앉아 진안 군왕의 친영 행렬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언니, 이상해요.”

진단랑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상하긴 하네. 그때는 신부 화장이 지금처럼 짙고 화려하지 않았는데.

“너 괜히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신부 화장은 원래 다 이래.”

진십팔랑이 말했다.

“아니, 언니가 저렇게 있을 때는 안 이상했는데, 정 언니가 이러고 있으니까 엄청 이상해.”

진단랑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연회석이 준비됩니다. 이제 다들 나가셔요.”

진소 부인의 여종이 방으로 들어와 고하자, 진십팔랑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같이 있어 줄까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긴, 우리가 여기 남아 있는 게 더 어색할지도 모르겠네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수다 떨러 다시 올게요.”

진십팔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진소 부인이 데려온 젊은 새댁들과 부인들도 정교랑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여인네들 대하듯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들 고마워요.”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여인들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에이, 괜찮아요.”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는 단랑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여인들이 밖으로 나가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씨, 배는 안 고프세요?”

반근이 물었다.

“배고파도 드시면 안 돼. 신혼 첫날인데 속이 안 좋아지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아씨, 오늘 하루만 좀 참으세요.”

시녀가 말했다.

“그래도 엄청 오래 걸리잖아.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는데, 부모님께 절하는 의식까지 끝내고 나면 아마 밤일걸?”

반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진안 군왕의 요양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바깥마당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지금이 몇 시지?”

진안 군왕이 휘장을 걷으며 물었다. 두 시녀가 서둘러 대답하자, 문밖에 서 있던 내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내시가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을 보며 물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왜 아직도 가지 않는 것이냐?”

진안 군왕의 물음에 내시가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 급하실 거 없습니다. 정씨 저택에서 여기까지는 지름길로 올 터이니, 금방 다녀올 겁니다.

진안 군왕이 흠칫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름길로 온다고?”

혼례를 올리는 이유는 여러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시끌벅적하고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내기 위함이었다. 혼례를 올리는 날,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는 기쁨을 자랑하고, 신부는 혼수를 자랑했다.

특히나 요즘은 날이 갈수록 경성 규수들의 혼수가 더욱 풍성해지는 추세였다. 그래서 꽤 명망이 있는 집안이라면, 신부의 혼수를 자랑하기 위해 족히 경성 한 바퀴를 다 돌면서 가곤 했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집안이어도, 혼례 날에는 경성에서 가장 떠들썩한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며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면서 많은 사람에게 경사를 알렸다.

그런데 지름길로 오가겠다고? 무슨 도둑질하고 도망을 치는 사람처럼?

이게 혼례를 올리는 거야, 아니면 도둑놈을 몰래 집으로 들여오는 거야?

“태후마마의 분부십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다시 침상 위에 천천히 누웠다. 그의 시선이 침상 옆에 놓인 혼례복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전해졌다.

“왔어요. 왔어요!”

어린아이들이 외치면서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왔네. 뭐 이렇게 느릿느릿 와.”

반근은 친영 행렬이 영영 안 오는 줄 알고, 오늘 혼례를 올리는 것이 꿈이었나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아씨, 어서 붉은 천을 쓰세요.”

반근이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붉은색 천을 얼굴 위로 덮자, 정교랑의 시야 안에는 온통 붉은색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교랑은 눈을 감고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아씨, 긴장하지 마세요.”

시녀가 정교랑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한쪽에서 반근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씨께서도 긴장하실 거라고 했잖아. 누가 아씨는 긴장하지 않으신대?”

“그래도 아씨께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으셨다니까? 완전 남 일인 것처럼 홀가분해 보이시길래.”

“아직 때가 안 돼서 그러신 거겠지.”

정교랑이 주먹을 쥐었던 손에서 다시 힘을 뺐다. 정교랑은 긴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가득 들어오는 붉은색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덮쳐오는 선명한 붉은색이라니. 우리 정씨 가문이 멸족당했을 때, 그리고 꿈에서 무수히 많이 보았던, 온 하늘을 뒤덮었던 그 붉은색.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이오?”

친영 행렬이 마당 안으로 들어오자, 주복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일찍 와서 뭐 합니까?”

“집안 어른들이 없으니, 차를 올릴 필요도 없잖습니까.”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발하면 되고, 오가는 시간도 짧으니까요.”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하게 대답하면서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범강림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됐다, 어서 서두르거라. 길한 시간 놓칠라.”

내시가 성가시다는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경사를 위해 고른 시간인데, 괜히 지체하다 놓쳤다가는 헛수고만 한 꼴이 아니냐.”

체면은 조금도 챙겨 주지 않겠다 이거로군.

정씨 저택의 마당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몇몇은 일부러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주복이 마당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정교랑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육공자께서 아씨를 배웅해 주십니다.”

진행을 맡은 이가 목청 높여 외치자, 주복이 정교랑을 등에 업었다. 이는 주복과 정교랑이 가장 가까이에서 한, 가장 친밀한 접촉이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고.

주복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문턱을 넘어선 주복이 조심스럽게 층계를 내려갔다.

“만약…….”

주복이 저도 모르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요란스러운 폭죽 소리와 북소리며 징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색했던 마당이 드디어 혼례를 올리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오라버니, 뭐라고요?”

소란스러운 와중에, 주복은 자신의 귓가에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교랑의 목소리는 주위의 소음보다 훨씬 작았지만, 주복의 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다.”

주복이 대꾸했다.

등에 업힌 정교랑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복은 고개를 들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에서 아득히 멀어지고, 눈앞에 보이는 길도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만약 이대로 계속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씨 저택의 대문 앞은 벌써 인파로 인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오성병마사 위병들이 질서를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마차가 지나갈 공간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나왔네! 나왔어!”

키 크고 우람한 사내의 등에 업혀 나오는 신부를 보자, 대문 앞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구경꾼들은 신부의 모습을 더욱 가까이서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다른 혼례를 구경할 때와 사뭇 다른 점이 있다면, 구경꾼들의 손에 술동이가 몇 개씩 들려 있다는 것이었다.

“술 있소? 술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외쳐댔다.

하지만 신부는 그대로 가마에 올랐고, 친영 행렬도 마차와 말에 올라탔다. 그 옆으로 여종과 몸종들이 나란히 줄지어 섰다. 오성병마사의 위병들이 길을 트자, 건장한 사내들이 신부가 탄 가마를 번쩍 들어 올렸다. 모든 것이 여느 여인들이 시집가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건 없어?”

대문 앞에서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람. 의형제 몇 명 죽었을 때는 그리도 거창하게 노제를 지내더니만.”

“그러게 말일세. 과거에 급제한 진사들을 축하할 때도 술을 빚었잖소.”

“정작 자기 일에는 하나도 신경을 안 쓰네. 얼마 전에 정사낭이 죽었을 때도 그렇고, 오늘처럼 본인이 혼례를 치르는 날에도 아무것도 없다니.”

누군가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퍼뜩 들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면, 거리에 볼거리가 있는 거 아닐까?”

“맞아, 그럴 수도 있네. 신선거 쪽으로 가 보세!”

경성에서 가장 북적북적한 번화가인 저잣거리로 몰려가려던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어라? 이상하다?”

사람들이 놀란 모습으로 소리치며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친영 행렬을 손으로 가리켰다.

“왜 저 좁은 골목으로 가는 거야?”

말 위에 타 있던 주복이 앞쪽에서 행렬을 이끄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정말로, 체면이라고는 아주 조금도 챙겨주지 않을 작정이군.

친영 행렬 뒤에서 신행을 함께하고 있던 사람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챘다.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행렬을 따라 걷던 몸종과 아낙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수군거렸다.

“이상하다. 길을 잘못 든 거 아니야?”

혹시나 혼례 당일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까 봐, 진소 부인은 직접 전복인을 자처해서 정교랑의 신행에 함께했다. 마차 밖을 내다보던 진소 부인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서둘러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며 내시에게 물었다.

“노국 부인(魯國夫人: 진소 부인의 봉호), 폐하께서 쓰러지시고, 군왕 전하께서도 요양 중이셔서 모든 것을 간소화하여 진행하라는 태후마마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내시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태후마마의 뜻이라는 말에 진소 부인도 더는 따지지 못하고 억지웃음을 짜내며 휘장을 내렸다. 진소 부인은 좁디좁은 골목을 향해 가는 친영 행렬을 내다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신부인 정 낭자의 체면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려는 황실의 뜻이 이리도 명백할 줄이야.

가마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반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씨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반근이 중얼거리자, 시녀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말?”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

반근이 대답했다.

거리 곳곳을 누비면서 경성 한 바퀴를 돌고, 온 경성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친영 행렬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지름길을 통해 신부를 맞이하려는 거구나. 그래서 아씨께서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하셨던 거야. 금방 식사를 하실 수 있을 테니까. 금방이면, 다시 쉬면서 책을 읽으실 수 있을 테니까.

반근이 앞쪽을 내다보았다. 황궁에서 온 영인들은 악기를 건성으로 연주했다. 흥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음악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지나다니던 행인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친영 행렬에 깜짝 놀랐다.

멀쩡한 큰길을 놔두고 이렇게 좁은 골목을 골라서 시집가는 신부도 있어? 시집가는 신부 댁이 얼마나 남 보기 부끄러운 초라한 집안이길래?

하지만 행인들은 친영 행렬 가장 앞쪽에 보이는 오성병마사 위병과 금군 병사들을 보고 더욱 놀라며 재빨리 길을 비켰다.

저 정도면 신랑이 최소한 친왕 정도는 돼 보이는데. 그런데 친왕이 왕비를 맞이하는데, 친영 행렬이 이리 초라하다고?

행인들이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친영 행렬을 구경했다.

“내 말이 맞지?”

친영 행렬을 이끌던 두 사내가 한가롭게 잡담을 나눴다.

“이 길이 큰길보다 좁긴 해도, 행렬이 거뜬히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는 널찍하다니까.”

모여드는 구경꾼들을 내쫓을 필요도, 행렬을 에워싸고 함께 행진하는 구경꾼들 때문에 발걸음을 늦출 필요도 없어.

“그러게 내가 술 한 사발 더 마시고 나가도 된다고 했잖아. 우리끼리 한잔하는 게 더 중하지.”

다른 사내가 하품을 하면서 취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내를 원망했다. 잡담을 나누던 사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골목 앞쪽 모퉁이에서 느닷없이 마차 한 대가 튀어나오더니 행렬 앞에서 느릿느릿 나아갔다.

길을 터는 금군 병사들이 어이, 어이 하면서 마차를 향해 고함쳤지만, 마차를 끌던 늙은이는 귀가 먹었는지 금군 병사들의 호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마차를 몰았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군!

참다못한 금군 병사가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늙은이를 향해 달려갔다.

아니지, 꼴이 말이 아니어야 더 좋지. 태후마마의 뜻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혼례를 엉망진창으로, 꼴이 말이 아닐 정도로 진행해야 더 좋을 테지.

내시가 아차 싶은 마음에 재빨리 금군 병사를 불러 세웠다.

“별로 멀지도 않고 길이 좁기도 하니, 비키라고 하는 게 더 번거롭네. 먼저 가라고 하게나. 우리가 조금 더 천천히 가면 되지.”

“그러게 말입니다. 급한 것도 아닌데요.”

누군가가 웃으면서 내시의 말에 맞장구쳤다.

친영 행렬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리자, 좁은 골목길에서 작게 울리던 영인들의 악기 소리보다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보다 못한 반근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반근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 화장이 망가지진 않을까 걱정하며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친영 행렬은 금세 좁은 골목을 벗어났다.

“여기서 꺾어서 거리 하나만 더 지나면 되네.”

“이따 가서 계속 마셔야지.”

친영 행렬에서는 시답잖은 말들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친영 행렬이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앞쪽에서 칠현금 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하고 시원시원하게 들려오는 칠현금 연주 소리가 사내들의 잡담 소리를 덮었다.

누가 거리에서 칠현금 연주를 하는 거지?

친영 행렬의 사람들이 잡담을 멈추고 앞을 내다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 사내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최 악공이잖아?”

누군가가 소리치자, 더 많은 사람이 칠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황궁 영인인 최 악공은 황실에서 주최하는 중대한 행사나 중요한 제사 때 연주하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영인이었다. 권문세가에서 연회를 열 때도, 최 악공을 초청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유명한 악공이었다.

그런데 그런 최 악공이 왜 길바닥에서 연주를 하는 거지?

최 악공은 연주에 심취한 듯, 친영 행렬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친영 행렬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최 악공의 칠현금 연주도 점점 더 경쾌해졌다.

친영 행렬의 북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사내들의 잡담도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의 귓가에는 최 악공의 칠현금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의 귓가에 맴도는 그의 연주는, 눈앞에 백 마리가 넘는 새들이 지저귀며 무리 지어서 날아왔다가 다시 힘찬 날갯짓을 하며 다른 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듯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새들을 따라가거나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최 악공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거리로 몰려들었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칠현금 연주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최 악공의 연주에 흠뻑 취했고, 연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신나는 음률이 마냥 즐거웠다.

“저 곡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친영 행렬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 악공이 새로 쓴 곡인가 봐!”

“그런데 최 악공이 왜 여기까지 와서 저러는 거지?”

누군가가 물었다.

친영 행렬은 이미 최 악공을 지나쳤지만, 사내들은 여전히 그의 연주에 홀린 듯 고개를 돌리면서 귓가에 들려오는 연주를 감상했다.

“벌써 잊은 거야? 최 악공이 누구의 연주를 듣고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됐는지?”

정 낭자!

칠현금 연주로 경왕부의 액막이를 했을 때, 정 낭자는 바보인 경왕을 춥다고 느끼게 하고, 최 악공을 칠현금 연주에 홀리게 했었다.

“그렇다면, 최 악공은 지금…….”

사람들은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최 악공을 돌아보았다.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정 낭자의 혼인을 축하하는 거구나.

“곡이 진짜 너무 좋잖아!”

“언젠간 꼭 최 악공을 집으로 모셔서 저 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할 거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감격에 찬 표정으로 같은 말을 뱉고, 최 악공이 연주하고 있는 곡명이 무엇인지 물어보러 가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친영 행렬에 속해 있는 게 원망스럽기만 했다.

“맞아, 맞아. 나도 꼭 모셔 올 거야. 모셔 와서 저 곡을, ‘정 낭자 송혼곡(送婚曲)’을 연주해 달라고 해야겠어!”

정 낭자 송혼곡?

곡명이 정해졌으니, 정 낭자가 시집가던 날 최 악공이 이 곡을 작곡해 바쳤다는 이야기 또한 오래도록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리라.

거리 곳곳에 금세 소문이 퍼졌다.

“어서 가 보자. 저쪽에 황궁 악사가 정 낭자에게 송혼곡을 바치고 있대!”

“엄청 듣기 좋은 곡이래!”

정 낭자? 저리 좁은 거리에 그렇게 좋은 볼거리가 있다고?

인파가 순식간에 좁은 거리를 향해 모여들었다.

친영 행렬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최 악공의 연주 소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끊임없이 고개를 돌리곤 했다.

사내들이 아쉬워하며 앞을 내다보던 찰나,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기 봐! 저 사람들이 지금 뭘 하는 거야?”

또 누가 칠현금 연주를 하나?

모두가 일제히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 양쪽에 언제 모인 건지 모를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무리에는 노인과 청년, 어린아이가 모두 섞여 있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제각각이었다. 같은 점은 단 하나, 그들의 손에 붓과 먹이 들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저게 뭐지?

친영 행렬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앞을 내다보던 사이,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의 앞으로 두 사람이 손에 커다란 종이를 들고 재빠르게 뛰어갔다. 새하얀 백지가 두루마리 비단처럼 사람들 앞에 펼쳐졌다.

“붓을 드시오!”

누군가가 외치자 양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붓을 쥐었다.

최 악사의 칠현금 연주를 뒤로하고, 새로 연주를 시작하려던 영인들이 멈칫했다. 영인들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거리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나이도, 옷차림새도, 신분도 제각각인 듯했다.

거리의 사방에서는 인파가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글을 쓰시오!”

조금 전에 소리쳤던 사람이 또 외치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 놓인 백지 위로 붓을 휘두르며 먹물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저게 무슨…….

친영 행렬에 속해 있던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말고삐를 당기지 않은 탓에 말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말 위에 올라타 있던 사람들은 털끝이 삐쭉 서는 듯한 느낌에 온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놀란 얼굴로 백지에 글씨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가 새하얀 백발이 된 노인, 젊고 준수한 사내, 머리를 땋은 어린아이가 섞여 있었지만, 다들 진지하고 집중한 표정으로 각자 손에 들린 붓을 휘둘렀다. 값비싸고 귀한 붓을 든 사람도, 털이 다 빠진 닭털 붓을 쥔 사람들도, 각각 백지 위에 노련하거나 서툰 솜씨로 크거나 작은 글씨들을 써 내려갔다.

“그 해 정씨 여인이 서예를 가르칠 때,

점 하나, 획 하나에도 저마다의 순서와 도가 있다고 했네.

붓을 내리기 전에 마음을 먼저 쓰니,

가을 나무들조차 놀라 우수수 낙엽을 떨구리.”

사람들이 먹을 흩날리며 붓을 움직이자, 누군가가 큰소리로 시를 읊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 뒤로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연로한 노인의 목소리와 어린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한데 섞여 자아내는 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한 번 또 한 번 때렸다.

친영 행렬의 사람들은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긴 화폭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말에 탄 사람들은 더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지도,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이지도 않았다. 최 악공의 연주가 더는 귓가를 맴돌지 않는데도, 사내들은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

그 해, 정씨 여인이 서예를 가르칠 때!

문 앞에서 바닥을 자리 삼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여 줬던 정교랑은, 자신이 글씨를 쓴 종이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눠 주었다.

누군가를 가르쳤다고 한 적은 없지만, 뭇 사람들에게 스승으로 섬겨지는 사람.

시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들 아씨를 기억하고 있었어. 모두가 아씨를 기억하고 있었어!

아씨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부탁하지 않으셔도, 모두가 다 잊은 게 아니고, 선물하지 않는 게 아니야.

언제 몰려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거리의 사방을 가득 메웠다. 좁은 골목이었지만, 경성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모인 듯했다.

“정 낭자의 혼삿길을 배웅하는 건가?”

“세상에, 이런 배웅은 난생처음 봐.”

“엇, 저기 글씨를 쓰는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저분은 맹림관에서 무척 유명한 선생이신데!”

“나도 아는 얼굴이 하나 있어. 우리 옆집의 셋째 아들내미가 저기 있네?”

거리 양쪽으로는 족히 백 장(丈)은 되어 보이는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친영 행렬의 입장에서 백 장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아주 느릿느릿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친영 행렬을 이끄는 사람들이 인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탓이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몰려든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다. 전방의 금군 병사들은 길을 트느라 진땀을 뺐다.

“아무리 가까운 지름길로 가도, 못 막는 건 여전하네.”

친영 행렬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 길로 시집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 낭자인 것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른 돌아가 술이나 마시고 싶다고 했던 사내조차도 숙취가 가득한 얼굴 대신 경외감 가득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내다보았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리에서 시끌벅적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던 그때,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며 노을을 품은 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냈다.

해가 뜬 대낮에 노을을 품은 구름 같은 폭죽이라니!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일제히 할 말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산인해 속에서 기이한 정적이 흐르자, 사람들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폭죽 소리가 한 번, 또 한 번 울려 퍼지면서, 하늘에 오색빛깔의 연기가 구름처럼 떠다녔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말해 뭐해. 이것도 ‘그 해에 정 낭자의 가르침’을 받았던 누군가가 축하 선물을 하는 거겠지.”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친영 행렬 중 다른 사내가 장단을 맞췄다.

“그러게. 태후마마께서 축하해 주지 않으신다고 해도…….”

친영 행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고개를 들고 하늘에 끊임없이 수놓아지는 색색의 폭죽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텅 비었던 거리가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축하해 주는군.”

그리고 이런 축하는, 아무리 존귀한 태후마마라 해도 받기 어려울 거야.

“그 해 정씨 여인이 서예를 가르칠 때,

점 하나, 획 하나에도 저마다의 순서와 도가 있다고 했네.

붓을 내리기 전에 마음을 먼저 쓰니,

가을 나무들조차 놀라 우수수 낙엽을 떨구리.”

가을 나무들조차 놀라서 우수수 낙엽을 떨구리!

반근이 가마의 창가를 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아씨, 아씨.”

반근이 울음을 터트렸다.

“보셨어요? 보이세요? 엄청 많은 사람이 아씨를 배웅하러 나왔어요! 정말 엄청 많은 사람이 아씨의 혼례를 축하하러 나왔다고요! 아씨, 이번에는 아씨께서 틀리셨어요. 친영 행렬은, 금방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가마 안에서 시종일관 눈을 감은 채 단정하게 앉아 있던 정교랑이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정교랑이 느릿느릿 눈을 떴다. 조금 전에 봤던 그 붉은색이 여전히 시야 안에 들어왔다.

붉은색. 온통 붉은색이지만, 조금 전에 느꼈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어졌어.

“아씨, 아씨. 보이세요? 저렇게 많은 사람이 다 아씨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씨, 저들이 다 아씨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허공에서 팡팡 터지는 폭죽 소리와 함께, 격앙된 반근의 목소리가 정교랑의 귓가에 들려왔다.

보여. 나도 보여.

앞을 직시하는 정교랑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하늘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터지는 폭죽이 알록달록한 연기를 만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로, 오색찬란한 연기를 등지고 유유히 거리를 지나가는 친영 행렬은 더없이 화려해 보였다.

“무원산 형제들의 노제를 지낼 때, 대낮에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폭죽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보다 더욱 화려한 불꽃놀이를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이런 걸 보고 청출어람이라고 하는 거지?”

“훌륭한 스승 밑에서 뛰어난 제자가 나온다고 해야지.”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와 어린아이들의 환호와 감탄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른들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탄 아이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친영 행렬이 거리의 끝에 다다르자, 분주하게 폭죽을 쏘아 올리는 이씨 가문 사람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씨 가문 폭죽 점포의 점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누군가가 점포로 다가왔다. 새 옷을 입은 이무가 그 사람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이 대인.”

친영 행렬에 있던 누군가가 말에서 내릴 겨를도 없이 몸을 내밀고 물었다.

“저 폭죽은 이번에 점포에 새로 들인 물건입니까?”

“예.”

이무가 대답했다.

대낮에도 오색찬란한 폭죽을 터트릴 수 있다니. 저런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마 친영 행렬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씨 폭죽 점포는 문턱이 다 닳겠지. 손님들이 수없이 찾아올 테니 말이야.

다만…….

그 사람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딱 이번 한 번만 공개하고, 판매하지 않는 물건은 아니겠지요?”

이무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예, 판매는 안 합니다. 스승님의 혼례를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거거든요.”

이무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못내 아쉬워하며 탄식하자, 그 대화를 듣지 못한 사람들도 이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쉬운 탄식이 앞쪽에서부터 행렬 뒤쪽까지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또 저러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저렇게 좋은 걸 만들어 놓고 또 팔지는 않겠다고 하는 거요?”

“사람들의 구미만 당겨 놓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해 버리다니. 이 광경을 다시 보려면 꿈이나 열심히 꿔야겠군그래.”

이무는 주위의 원성을 들어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내내 미소 띤 얼굴로 친영 행렬을 향해 예를 표하고 있었다. 신부의 가마와 혼수가 줄지어 그의 앞을 지나쳐 가고는 동안, 하늘에는 여전히 화려한 불꽃놀이가 터지고 있었다.

거리의 한 찻집 안에 있던 고능준이 시선을 거두었다. 불꽃놀이에 비친 그의 표정은 다소 복잡한 듯 보였다.

“아깝군.”

고능준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체면을 깎으려고 해도 또 저리 기세등등하게 시집갈 줄이야. 정말 아깝게 됐네요.”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친영 행렬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제자리에 남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들 저마다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교랑이 받은 축하 선물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모습을 볼수록 부아가 치민 고 관인이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저만한 규모에 저리 많은 사람을 대동하면서, 오만 관으로 충분했을지 모르겠네요.”

고 관인이 고개를 들고 부친을 쳐다보자, 부친도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그 표정은 다소 이상했지만.

“아버지?”

고 관인이 의아해하며 불렀다.

그때 내가 한발 늦은 게 참 아쉽군. 조금만 더 일찍 정 낭자를 볼 수 있었더라면, 저런 성대한 축하를 받으면서 친영했을 사람은 바로 우리 고씨 가문이었을 텐데.

고능준은 한숨을 내쉬고 창가 밖으로 보이는 군왕부로 시선을 돌렸다. 친영 행렬이 질서정연하게 대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고 모든 게 결정됐으니, 저 문을 넘어선 이상 저 여인을 도로 꺼내 오고 싶다고 해도 소용없겠지.

“아깝네.”

고능준은 또 한 번 탄식했다.

저렇게 재능이 뛰어난 여인이라는 게 참으로 아깝군. 조금만 더 일찍 저 여인을 만나 흉금을 터놓으며 같은 도를 추구했다면, 저 여인은 분명히 우리 고씨 가문으로 시집왔을 텐데.

아니, 아니지. 아까워할 때가 아니야.

한 걸음 잘못 내디뎠다고, 계속 잘못 내디딜 순 없어. 저 여인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절대로 아깝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준비는 잘 해 두었느냐?”

고능준의 물음에 고 관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고능준은 고개를 들고 불꽃놀이를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불꽃놀이가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긴 한데, 오래 못 본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구나.”

친영 행렬이 군왕부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자연스럽게 차단되었다. 하지만 군왕부의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흥분한 표정으로 조금 전 거리에서 봤던 광경을 떠들어댔다.

“어찌나 흥겹던지, 그런 진풍경은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런 친영 길이 아니었어.”

“거리 양쪽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붓을 내려서 글을 쓰는데, 온몸에 소름이 쫙 돋지 뭐야. 왠지는 모르겠지만, 일흔두 명의 제자들이 공자 성인이 떠나시는 길을 배웅하는 모습이 상상되더라니까?”

“에이, 무슨 소리야. 나는 노자가 소를 타고 서쪽으로 떠나는 모습이 그려지던데?”

“쉿, 더는 말하지 말자. 괜히 우리 말이 황궁으로 전해졌다가는…….”

“전해지면 뭐 어쩔 거야. 우리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뭘.”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정씨 가문 사람들은 득의양양한 표정 대신 짜증 섞인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진소 부인이 더는 화를 참지 못하고 진안 군왕 측의 전복인을 향해 작은 소리로 호통쳤다. 진소 부인을 못 알아볼 리 없는 전복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가서 한번 여쭤볼게요.”

전복인은 속으로 이번 일을 수락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물론 수락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진 상공 정도라면 태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럴 배짱이 없으니 할 수 없지.

전복인이 잰걸음으로 후원에 들어서려 하자, 시위 두 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총관 대인께 한 번만 여쭤봐 줄 수 있나요? 군왕비께서 이미 당도하셨는데, 왜 아직도 대례(大禮)를 시작하지 않지요?”

전복인이 후원 문 앞에 서서 물었다.

조금 전 혼사를 진행하는 내시들이 모조리 불려간 뒤,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마당에는 신부 가마와 친영 행렬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황실의 종친이니 망정이지 다른 집에서 이리 대했다면, 신부 측에서 당장이라도 가마를 돌릴 정도의 무례였다. 사실 제아무리 황실 사람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신부를 홀대한다면, 진소 같은 중신들이 일단 가마를 들고 떠난 뒤 황제를 찾아가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 낭자는…….

진소 부인께서 신부 배웅을 해 주신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 낭자가 진씨는 아니니까.

전복인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후원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든 전복인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설마 수탉을 못 찾았나?”

주변에 서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반근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여종을 흘겨보았다.

진안 군왕의 병세가 위독한 탓에 신부 맞이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했고, 맞절을 올릴 때도 다른 사람이 수탉을 안고 진안 군왕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액막이를 위한 혼사 자체가 신부에게는 치욕이었다.

“저들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돼.”

반근이 조용히 읊조리자, 시녀가 쿡 하고 웃으면서 반근을 놀렸다.

“반근, 언제 그렇게 차분해졌대?”

반근이 고개를 치켜들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아씨께서 예전에 하셨던 말씀처럼,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좋을지 나쁠지 어떻게 알아.

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오늘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씨를 축하해 줄 줄 몰랐어. 걱정했던 것처럼 군왕부까지 오는 길이 쓸쓸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지.

아직은 두 사람이 대례를 올리기 전이니까, 무서울 건 하나도 없어. 바로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아?

반근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칠 때,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던 반근은 무언가를 보고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건…….

시녀가 또 농담을 하려고 반근을 쳐다보던 찰나, 전에 없이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던 반근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반근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반근이 또 왜 그러지?

시녀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반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시녀도 반근만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저건!

가마 밖에서 나지막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가마 안에 있던 정교랑은 수군대는 소리를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정교랑에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밥 먹는 일만큼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하루 내내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라고 해도, 정교랑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정교랑이 종일 앉아 있어야 할 날이 아니었다. 가마 밖에서 수모(手母: 신부의 단장 및 그 밖의 일을 곁에서 돕는 여자)의 과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신부는 가마에서 내리시지요.”

가마가 낮춰지자, 낯선 여인이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부축했다.

붉은 천 때문에 주위의 시야가 가려졌지만, 다행히도 발밑은 잘 보였다. 정교랑은 눈을 내리깔고 발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이 가마에서 내려오자, 주위에서 들려오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가마 앞까지 쭉 이어진 붉은 깔개와 붉은 치맛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가 질 무렵인지라, 노을에 비친 붉은색이 더욱 환하게 느껴졌지만, 정교랑은 눈을 감지 않고 침착하게 치맛자락을 보고 있었다.

붉은색 비단이 정교랑 앞으로 내밀어지자, 정교랑은 비단의 끝을 잡고 잠시 기다렸다. 비단의 반대편을 잡고 있던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이 전해지자, 정교랑 옆에 있던 전복인이 걸음을 옮기라고 조용히 일러주었다.

정교랑은 한 걸음 한 걸음 안정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교랑이 바닥에 놓인 말안장을 넘고 천천히 대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청 안은 몹시 조용했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옷깃 스치는 소리, 그리고 비녀와 장신구가 서로 부딪히는 작은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을 터였다.

누군가가 정교랑 옆에 섰다. 붉은 혼례복의 옷자락이 충분히 보일 만한 거리였다.

“천지신명께 일 배!”

혼례를 진행하는 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허리를 숙였다.

천지신명께 절 올립니다.

“부모님께 이 배!”

정교랑이 또 허리를 숙이고 절을 올렸다.

부모님께 절 올립니다.

“신랑 신부 맞절!”

정교랑의 시야로 들어와 있던 붉은 옷자락이 뒤로 사라졌다.

수모가 정교랑을 부축하면서 천천히 옆으로 돌았다.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낭군께 절 올립니다.

정교랑이 손에 쥐고 있던 비단이 또 살짝 움직였다. 신방으로 들라는 진행자의 외침과 함께 정교랑이 걸음을 옮기자, 주위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그 소리에 정교랑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신방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정교랑은 금세 방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방 안에서는 장신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고, 연지향이 더욱 짙어졌다.

정교랑은 신방에 같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여인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침상 위에 바른 자세로 앉은 정교랑의 귓가에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붉은 천을 걷어야 했음에도, 또 모든 게 멈춰 버린 듯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랑이 혼례에 참가하지 못하니까, 붉은 천을 걷는 것도 생략하는 건가?

정교랑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붉은 천이 걷히고 눈앞이 환해졌다.

태양이 이미 서쪽으로 졌지만, 낮이 긴 여름인지라 아직 어둑해지기 전이었다. 방 안을 밝힌 등불 덕분에 명암이 교차하던 정교랑의 시야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휘황찬란한 옥 장식과 비단에 정교랑은 눈이 부셨다.

“어머나, 신부가 정말 예쁘시네요.”

귓가에 들려오던 수군거림 대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정교랑은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실내의 밝기에 눈이 적응하는 것을 느꼈다.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방 안의 장식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교랑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 붉은 천 아래로 보이던 혼례복의 옷자락이었다. 그 위로 검은색 옥대가 보였고,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탕기가 쥐여 있었다. 그리고 정교랑이 좀 더 위로 시선을 옮기자,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얼굴이 보였다.

정교랑은 살짝 놀랐는지 멈칫했다.

부쩍 야위어진 사내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서 있었다. 살이 많이 빠진 탓인지, 사내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안색이 어두워 그런지, 그의 두 눈동자는 더욱 그윽해 보였다.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아도, 진안 군왕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일순간 두 사람의 시야와 귓가에서는 방 안에서 시끌벅적하게 호들갑을 떨던 사람들이 사라진 듯했다.

정교랑이 놀란 기색을 내비치고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그럼 조금 전까지 다 이 사람이었던 건가?

그랬군요, 당신이었어요.

“자, 전하, 이리로 와서 앉으시지요.”

여인의 말이 울려 퍼지면서 재잘대는 주위 목소리도 더욱 가까워졌다. 정교랑은 시선을 내리깔고,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진안 군왕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시녀 두 명이 쟁반을 손에 받치며 걸어왔다.

“전하의 건강을 생각해 오늘은 신방에서 장난을 치는 일은 생략할게요. 두 분이 합환주를 한 잔씩 하신 뒤에 혼례를 마치도록 하죠.”

전복인의 말에 시녀들이 무릎을 꿇고 쟁반을 높이 받쳤다.

정교랑이 쟁반 위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자, 진안 군왕도 술잔을 손에 쥐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정교랑이 몸을 돌려 진안 군왕을 정면으로 쳐다보자, 진안 군왕이 술잔을 든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내민 팔을 술잔을 든 손으로 감싸고 손등으로 가볍게 진안 군왕의 손등을 부딪혔다.

팔을 엇갈리게 낀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술잔을 들고 있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살짝 고개를 젓자, 진안 군왕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두 사람의 작은 동작을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정교랑이 고개를 꺾어서 술잔을 비웠다. 진안 군왕은 입술을 적시는 정도로만 술잔을 기울이고 정교랑을 따라 쟁반 위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