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차남 조덕소(趙德昭)의 봉호가 연의왕(燕義王)입니다.
태조 조광윤이 죽은 뒤, 그의 아우인 태종 조광(趙光)이 즉위하면서 조덕소는 태자가 될 기회를 잃게 됩니다. 태종은 조덕소를 무공 군왕(武功郡王)에 봉하여 조회 때 재상보다 높은 자리에 서 있게 했죠.
그러나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 태원 지역으로 출정을 나갔던 태종은 어느 날 밤 우연한 사건으로 잠시 군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때 병사들이 아무리 주변을 수색해도 태종의 모습을 찾을 수 없자, 누군가가 덕소를 제위에 올려야 한다는 발언을 했죠.
수도로 돌아온 태종은 북벌의 상황이 좋지 않아 태원 전투와 관련한 장수와 병사들에게 오랜 시간 포상을 하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조덕소가 태종에게 태원 전투에 참가한 장수와 병사들의 논공행상을 언급하자 태종은 격노하며 “네가 황제가 된 후에 포상을 해도 늦지 않겠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날 조회에서 물러난 조덕소는 곧바로 자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송태종은 조덕소가 자살했다는 이야기에 몹시 후회하여 곧장 그의 거처로 달려가 “바보야, 왜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 하고 외치며 조덕소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했죠. 그는 조덕소를 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하고 위왕(魏王)으로 봉하며 시호를 하사했습니다. 그 후에는 오왕(吳王)으로, 더 나중에는 월왕(越王)으로 추봉하기도 했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관청 앞, 누군가가 진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고 관인과 작별 인사를 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진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대꾸했다.
“일부러 자네를 찾아온 건 아니네. 인수인계할 게 있어 잠시 들렀다 가려던 참이지.”
진호가 별다른 대꾸 없이 웃으면서 공수의 예를 표하고 곧장 걸음을 옮기려 하자, 고 관인이 서둘러 그를 다시 붙잡았다.
“아, 마주친 김에 부탁 하나만 하지.”
진호가 고 관인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부탁?”
“경성에서 정 낭자를 불러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은 것 같아서 말이지.”
고 관인이 능글맞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호가 고 관인의 팔을 덥석 쥐었다.
“그 여인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진호가 목소리를 낮추고 경고했다. 고 관인이 재빨리 진호의 손을 다독이면서 그를 진정시켰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미친놈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잘 들으시게. 오늘 오찬 이후에 정 낭자를 덕승루로 불러서 둘이 오붓하게 차나 한잔하고 있게나.”
고 관인의 말에 진호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고 관인이 진호를 향해 씩 웃고는 진호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서 떼어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미인과 즐겁고 여유로운 시간 보내길 바라네.”
고 관인이 말하고는 진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진호가 몸을 돌려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말에 오른 고 관인은 진호를 향해 이가 다 보일 정도로 웃으면서 재차 손짓하고 말머리를 틀었다.
진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관청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황궁을 내다보았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라…….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그놈 때문에 정 낭자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결단을 내려야 할 때를 놓치면 안 돼. 송두리째 뽑아버려야지.
황궁 안, 태후가 손을 휘휘 젓자, 내시 몇 명이 상소문으로 가득 찬 탁자를 얼른 옆으로 치웠다.
“마마,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태후가 그를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폐하는 뵙고 왔느냐?”
태후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마마, 강녕하셔야 합니다.”
진안 군왕이 울먹이면서 말하자, 갑자기 태후의 눈에서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옆에 서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태후에게 다가왔다.
“전하, 어서 마마께 그만 우시라고 위로의 말씀을 올리십시오. 마마께서 도통 눈물 마를 날이 없이 지내신 터라, 더 우시다가는 실명할 위험까지 있다고 태의가 말했습니다.”
내시들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깜짝 놀란 진안 군왕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태후에게 다가갔다.
“마마, 마마, 어서 눈물을 거두시옵소서.”
진안 군왕이 자신의 눈물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으면서 말했다.
“이거 보세요. 소손도 울지 않습니다. 소손도 울음을 그쳤어요.”
태후가 진안 군왕의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우리는 더 이상 울어서는 안 됩니다. 마마께서도 봉체를 보존하셔야지요. 폐하와 경왕, 그리고 저도 마마께서 안 계시면 아니 됩니다.”
진안 군왕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가 진안 군왕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눈물을 닦는 동안, 궁녀들이 따뜻하게 데운 수건을 가져와 태후의 눈을 닦아주고 차를 다시 우려 다과상을 올렸다.
“너도 참 오랜만에 오는구나.”
태후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눈을 내리깐 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마마, 신도 조심해야지요.”
“애가 앞에서 계속 신이니 뭐니,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네가 무슨 신하라고.”
태후가 화가 난 표정으로 내시들이 한쪽에 치워둔 상소문을 가리켰다.
“네가 조심한다는 게, 다 저기 쌓인 탄핵 상소를 말하는 게지? 뭐? 봉지로 나가는 것을 자청해야 한다고? 저들이 어찌 애가의 자손들에게 이래라저래라한단 말이냐!”
진안 군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가에는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마, 마마의 뜻은 소손도 잘 알지만, 앞으로 그런 말씀은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소손은 탄핵을 받아 마땅합니다.”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태후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저들은 왜 몰라주는 게냐.”
진안 군왕이 서둘러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마마, 더는 눈물을 흘리셔서는 안 됩니다. 소손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마께서 계신 한, 소손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태후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시들에게 명했다.
“경왕을 데려오너라.”
진안 군왕은 경왕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으로 내시들의 뒤를 따라가며 좌불안석한 모습을 보였다.
육가아를 못 본 지가 아주, 아주 오래됐네.
“둘이 안 본 지 이제 며칠이나 됐다고.”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본 태후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진안 군왕이 태후를 쳐다보고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무평 출정 이후로는, 이번이 경왕과 가장 오래 떨어져 있던 때입니다.”
진안 군왕은 말을 끝내자마자 또 시선을 문밖으로 돌렸다. 태후가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둘의 우애가 참 돈독하구나.”
태후가 감탄하면서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붉어진 그녀의 눈가에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머뭇거림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마마, 또 눈물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내시가 조용히 마른기침을 하며 태후에게 수건을 건넸다. 내시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렸다.
“마마, 우시면 안 됩니다.”
진안 군왕은 태후가 수건을 쥐고 눈가를 꾹꾹 누르는 것을 본 뒤에야 안심한 듯이 태후를 바라보았다. 이때, 경왕이 괴성을 지르면서 태후궁으로 들어왔다.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에구머니나, 깜짝 놀랐네.”
태후가 실소를 터트렸다. 진안 군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문가로 뛰어가 뒤뚱뒤뚱 걸어오는 경왕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육가아, 육가아.”
진안 군왕이 반가움에 연신 경왕을 불러댔다. 그가 활짝 웃으면서 경왕의 어깨를 붙잡고 분주하게 상하좌우를 살피며 물었다.
“이 형님이 보고 싶었지?”
경왕은 누군가에게 잡혀있는 것을 몹시 싫어할뿐더러, 지금처럼 이렇게 덥석 잡히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그래서 경왕은 진안 군왕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경왕의 짜증에도 진안 군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그를 다독이며 이리저리 살폈다.
“이 형님 안 보고 싶었어? 형님이 너 주려고 맛있는 것도 잔뜩 챙겨왔는데.”
진안 군왕이 주절주절 우스운 말을 내뱉자, 곁에 있던 내시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형님이 보고 싶진 않았냐고?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형님은 무슨!
“경왕을 돌보시느라 마마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진안 군왕이 다시 점잖게 자리에 앉아 태후에게 예를 표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원래부터 애가가 잘 돌봤어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네게 떠넘겼던 것이지.”
태후가 고개를 저으며 식사 준비를 지시했다. 식사를 준비하라는 태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경왕을 잠시 쳐다보다가 태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마마, 소손이 궁에 남아 식사까지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오늘 궁에 머무른 시간이 꽤 길어서요.”
태후의 표정이 급변했다.
“애가가 밥 한 끼 먹이겠다는데, 그것조차 안 된다는 게냐! 여봐라! 가서 저 상소문을 모조리 불태워 버려라!”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탁자를 쾅 내리치며 상소문을 가리켰다.
“마마, 아니 됩니다. 고정하시지요.”
진안 군왕이 서둘러 태후를 말렸다. 그런 진안 군왕을 보자 태후는 또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조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조정의 신하들이 또 얼마나 가시 돋친 말만 해댈지. 그래, 그만 가 보거라.”
태후가 경왕을 향해 손짓하면서 그를 불렀다.
“경왕, 이리 와서 형님과 인사해야지.”
하지만 태후의 말을 이해할 리 없는 경왕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손으로 쥐고 입안에 넣으려 했다. 진안 군왕이 그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았다.
“경왕이 배가 고픈가 봅니다.”
진안 군왕이 다정한 눈빛으로 경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쉬운 듯 경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식사를 들여오라 하시지요. 소손도 마마께서 내어주시는 음식을 먹지 못한 지 꽤 오래된 듯합니다.”
태후의 뺨에 살짝 경련이 일더니 태후가 앞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태후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리던 찰나, 옆에 있던 내시가 한발 앞서서 외쳤다.
“식사를 준비하라.”
내시가 진안 군왕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오실 줄 알고, 마마께서 특별히 전하께서 어렸을 적부터 즐겨 드시던 것으로 상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태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마마께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후가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너는 워낙 어릴 때부터 철이 들어서 그런지, 편식도 하지 않고 뭐든 잘 먹어 애가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어.”
얹혀사는 주제에 까탈스럽게 굴어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주는 대로 잘 먹어야지요.
진안 군왕이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태후를 향해 빙긋 웃었다.
오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태후는 기분이 울적한 탓에 몇 입 먹지도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장난을 치던 경왕은 금방 배가 찼는지,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았다. 진안 군왕은 그런 경왕을 간신히 어르고 달래면서 밥 한 그릇을 겨우 먹였다. 하지만 경왕은 더는 앉아 있기가 힘들었는지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대면서 아무렇게나 발길질을 하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됐다, 됐어.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라.”
태후가 말했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경왕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경왕은 성가시다는 듯이 진안 군왕을 힘껏 밀치고 옹알이를 하면서 뛰쳐나갔다. 내시들이 서둘러 경왕을 뒤쫓아 뛰어갔다.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고 저도 모르게 경왕의 뒤를 두어 걸음 따라가다가 멈춰 섰다.
“괜찮다. 나중에 자주 들어와서 경왕을 보면 되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우리는 한 식구야.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저들이 뭐라고 하든 애가는 두렵지 않다.”
태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몸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손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시가 진안 군왕에게 다가와 차를 올렸다.
“전하, 차를 드시지요.”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말했다.
진안 군왕은 내시가 바친 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으로 찻잔을 가져와 고개를 꺾고 그 안에 든 차를 단숨에 비웠다.
“마마, 소손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담담하게 태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태후가 몸을 일으키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태후가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진안 군왕을 불렀다.
“위낭.”
태후가 그를 ‘위낭’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 진안 군왕이 입궁한 뒤로 처음이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태후를 바라보았다.
“위낭.”
태후가 진안 군왕을 마주 보며 또 나지막한 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마, 울지 마세요. 소손이 또 마마를 찾아뵙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하고는 다시 예를 표했다.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뒷걸음으로 문가에 다다른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태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를 부축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위낭.”
태후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마마, 오늘은 뙤약볕이 너무 심하니 밖으로 나가시진 마옵소서.”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태후에게 말했다. 문턱을 넘어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빙긋 웃었다.
“마마, 나오지 마세요. 이제 들어가서 좀 쉬셔야죠. 소손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태후궁을 떠났다. 점점 더 멀어지는 진안 군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내 새끼, 애가의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구나.”
가슴에 손을 올리며 힘겹게 말을 내뱉은 태후는 곧바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이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재빨리 태후를 부축했다.
경왕부 안. 내시와 막료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진안 군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경왕부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다급하게 그를 에워쌌다.
“전하, 왜 이렇게 오래 계시다 오셨습니까?”
막료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마께서 오찬을 준비하셨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막료들의 얼굴이 일순간 사색이 되었다.
“전하, 말씀드렸잖습니까! 절대로 궁에서 식사하시면 안 된다고요. 어서 이 태의를 불러오너라!”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뭐든 주의하고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막료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표정 없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안색이 바뀌면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전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진안 군왕을 살폈다. 진안 군왕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고 소매 속을 쳐다보았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 반 잔을 버렸다.”
진안 군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 반 잔을 버렸어.”
무슨 뜻이지?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진안 군왕의 시선을 따라 그의 소매를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의 오른쪽 소매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를 반 잔이나 버렸는데!”
진안 군왕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그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안 군왕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마, 소손이 소매 속으로 차를 반 잔이나 버렸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안 군왕이 입에서 검붉은 피를 뿜어내며 앞으로 푹 쓰러졌다.
“전하!”
“어서 이 태의를 불러라!”
정사낭이 식당에서 나오자, 앞을 지키던 시종 한 명이 조용히 좌우를 살피다가 손짓했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말을 끌고 다가왔다.
“문유 아우, 그럼 우리는 이만 가겠네. 아우가 떠날 채비를 마치고 출발할 때 다시 배웅하겠네.”
동료들이 포권의 예를 표하자 정사낭이 서둘러 답례했다.
“노부인의 일에 유감을 표하네.”
동료들이 다정하게 말했다.
정사낭이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다들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정 대노야와 이노야가 강주에 계신 노모의 병세가 위독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전 서둘러 강주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정사낭까지 강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노부인의 병세가 차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정사낭이 다시 한번 감사의 예를 표하고 떠나는 동료들을 배웅했다.
“사공자님도 그만 돌아가시지요.”
시종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나 시종이 재빨리 정사낭의 앞을 막은 덕에 그 사람은 정사낭 가까이로 가지 못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은 시종의 어깨에 부딪혀 아이고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때문에 품에 안고 있던 작은 보따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공자님, 잠시만요.”
춘령이 겁먹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상대가 춘령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정사낭이 깜짝 놀랐다.
“춘령?”
“사공자님, 저, 저, 저는…….”
춘령이 말을 더듬다가, 결국 말 한마디를 다 하지 못한 채 작은 보따리를 시종의 손에 밀어 넣었다.
“이거, 저희 언니가 돌려드리라고 한 거예요.”
춘령이 큰소리로 외치고는 곧장 몸을 돌리고 뛰어갔다.
언니?
“춘령!”
정사낭이 다급하게 춘령을 불렀지만, 춘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이게 뭐지?
정사낭은 시종이 보따리를 푸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사공자님, 비전 증서입니다. 오만 관이에요.”
시종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비전 증서 위에 쓰인 금액을 읽었다.
오만 관!
저희 언니가 돌려드리라고 한 거예요.
정사낭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춘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종의 손에서 비전을 가져왔다.
이게 지금 다 뭐 하는 거야!
“춘령, 기다려라!”
정사낭이 한숨을 쉬고는 말에 올라타는 것도 잊은 채 춘령의 뒤를 쫓아갔다. 시종들이 서둘러 정사낭을 따라갔다.
같은 시각 진호는 정씨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 공자님.”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진호를 본 시녀가 조금 놀란 눈치로 그를 불렀다가 이내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식사는 했어요?”
진호가 회랑 아래로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얇은 치마저고리로 팔을 반쯤 가리고, 구름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어 올린 정교랑이 회랑 아래서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의 손에는 새들을 어르며 놀 수 있는 길고 가느다란 풀이 들려 있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
“한발 늦었네요.”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손을 들었다.
“그럼 차를 마시러 가자고 하는 건, 아직 늦지 않았죠?”
시녀가 고개를 돌려서 반근을 불렀다.
“반근이 수고할 거 없다.”
진호가 말하고는 정교랑에게 공손하게 초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낭자와 밖에서 차를 한잔해도 될는지요?”
“이번엔 무슨 꽃을 보러 가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지난번에 두 사람이 함께 나들이를 나가 벚꽃을 구경했던 일을 떠올린 진호의 눈가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자고로 유월에는 연꽃이 예술이지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이 옷을 갈아입으러 안으로 들어가자, 반근이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언니, 오늘 점포에 나갈 거야?”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시녀가 반근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왜? 늑장 부리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조금만 더 서두르면 아씨의 혼례복이 완성돼서 그래.”
반근이 충혈된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시녀가 반근의 붉어진 눈을 보고는 속상한 마음에 반근의 이마를 손끝으로 콕 찔렀다.
“내가 말했지. 급할 거 없다고. 당분간은 혼사를 치를 수 없다니까.”
반근은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는 투로 발을 구르면서 입술을 삐쭉였다.
“언니! 아무튼, 나는 일단 아씨의 혼례복을 다 만들어 놔야겠어.”
시녀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가 봐, 가 봐. 내가 아씨랑 같이 다녀올게.”
정교랑이 옷을 다 갈아입고 진호와 함께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찬합을 든 반근이 쫓아왔다.
“이 간식들 지금 막 만든 거예요. 나들이하며 먹기에도 좋을 거고요.”
진호가 웃었다.
“꽃놀이하는 곳에는 없는 게 없을 텐데.”
“거기에 우리 아씨께서 직접 만든 간식도 있대요? 진 공자님은 안 드시고 싶은가 봐요?”
반근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나중에 또 먹으면 되지.”
진호가 여유롭게 말했다.
“나중에는 못 드실 수도 있잖아요.”
반근이 웃으면서 어린 시녀에게 찬합을 안겨 줬다.
나중에는 못 드실 수도 있잖아요.
반근이 가볍게 던진 농담에 진호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자, 자, 그만 갈까요?”
시녀가 말했다. 드디어 걸음을 떼나 싶었는데, 진호가 갑자기 어린 시녀의 품에서 찬합을 빼앗아 반근에게 돌려주었다.
“어?”
반근이 놀라서 소리쳤다.
“이건 저녁에 네 아씨가 돌아온 뒤에 먹자. 내 것도 남겨 줘.”
진호가 웃으면서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님이 어째 주 공자님처럼 고집이 세진 것 같아.”
반근이 투덜댔다.
“아유, 됐어. 뭐하러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 나가서 진 공자님이 사주시는 거 먹지 뭐. 돈 쓰고 싶다고 하시는데, 쓰게 둬야지. 내가 돌아오면서 네 것도 많이 챙겨 올게.”
시녀가 웃으면서 반근을 다독이자, 반근은 그제야 헤헤 웃으면서 정교랑 일행을 배웅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침상 끝에 걸터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허리를 숙이며 또다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타구를 들고 있던 시녀의 몸에 피가 한가득 튀자, 시녀는 겁에 질린 채 울먹이면서 목청껏 태의를 불렀다.
밖에서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안 군왕은 구토를 얼마 하지도 못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서 엎드린 자세로 축 늘어졌다. 내시가 서둘러 진안 군왕을 부축하여 그의 몸을 뒤집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진안 군왕의 얼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안 군왕의 얼굴은 검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해독할 수 있다면서요! 괜찮아질 거라면서, 왜 전하께서는 아직도 피를 토하시는 겁니까! 왜 안색이 검푸른 빛을 띠냔 말입니다!”
내시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이 태의를 향해 소리쳤다. 이 태의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진안 군왕의 맥을 짚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때, 침상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또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진안 군왕의 온몸으로 피가 튀자, 방 안의 시녀들이 울음을 터트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태의, 도대체 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어서 전하를 살려내란 말입니다! 어서 전하를 살려내라고!”
내시가 미친 사람처럼 이 태의의 멱살을 잡고 그를 흔들었다. 이 태의가 서둘러 약 상자를 열고 금침을 꺼내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할 수 있냐고? 치료해낼 수 있냐고?
모르겠어. 약을 쓰고, 침을 놨는데도, 왜 아직도 안 되는 거지?
“할 수 없소!”
이 태의가 금침을 내팽개치고 진안 군왕의 어깨를 잡았다.
“전하의 몸에는 옛날부터 쌓였던 여독이 남아 있어서, 반 잔만 마셨다 하더라도 독이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오! 난 못 해. 난 전하를 살려낼 수 없소!”
내시가 이 태의를 옆으로 밀치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어서 정 낭자를 모셔오너라.”
정 낭자.
미동 하나 없었던 진안 군왕이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이 태의의 팔을 붙잡았다.
“전하!”
깜짝 놀라서 진안 군왕을 쳐다본 내시가 눈물을 머금고 그를 애타게 불렀다.
“전하.”
진안 군왕이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이 태의.”
진안 군왕이 손을 허공에 올리자, 이 태의가 서둘러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전하, 전하. 지금 정 낭자를 모시러 갔습니다.”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 낭자를 데려오지 마십시오. 정말, 정말 이 태의가 나, 나를 살려줄 수는 없는 겁니까? 정, 정 낭자에게는 원칙이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안간힘을 쓰면서 한 글자씩 내뱉었다.
원칙?
이 태의가 흠칫 놀랐다.
“병을 고쳐 준 사람과는 혼인을 맺지 않는…….”
진안 군왕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이 태의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 태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없다. 정 낭자를 모셔 올 게 아니라, 당장 전하를 그리로 모셔라!”
반근이 손에 쥔 바늘과 실을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반근 언니, 물 좀 마셔요.”
어린 시녀가 서둘러 반근에게 물을 건네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잔을 받았다.
이때,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밖에서 전해져 왔다.
“무슨 일이지?”
반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밖을 내다보자, 인상이 흉악한 사람들 무리가 살벌한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 낭자, 정 낭자, 사람 좀 살려 주십시오!”
반근이 깜짝 놀라서 손을 떨었다. 물잔에 들어있던 물이 반근의 앞에 놓여있던 혼례복에 쏟아졌다.
“어서 정 낭자를 모셔와!”
한 시위가 고함을 치면서 황씨의 옷을 잡아당겼다.
“정말로 집에 안 계세요. 정말이에요.”
황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당에 있던 몸종들과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반근이 황급히 뛰어나와서 소리쳤다.
“아씨께서는 출타하셨어요.”
“반근 낭자.”
내시 한 명이 반근을 불렀다. 반근이 그 내시를 쳐다보고 놀라며 내시의 뒤에 있던 가마로 시선을 옮겼다.
저건, 누구지?
내시가 가마의 휘장을 들어 올리자, 반근은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반근은 자신의 손 틈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참아냈다.
저건 누구지? 저게 누구지? 저 사람은 내가 아는 그 젊은 군왕 전하가 아니야. 눈부신 햇살보다 밝은 미소를 가진 그 군왕 전하가 아니라고!
반근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세상에나!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전하, 전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반근이 울면서 가마에 매달렸다.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다. 어서 정 낭자를 찾아와야 해.”
이 태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다급하게 말했다. 반근이 눈물을 흘리며 불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씨께서는 출타하셨다고요!”
“어디로 갔느냐?”
두 막료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연꽃을 보러 간다고 하셨어요.”
반근이 곧바로 대답했다.
“경성 내외에서 연꽃을 볼 수 있는 곳은 족히 일고여덟 곳은 되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한 시위가 끼어들어 물었다. 반근과 황씨가 멈칫했다.
연꽃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 한 곳이 아니란 말이야?
전에는 아씨께서 어딜 가면 간다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하필 이번에는 진 공자님의 초대였어. 진 공자님께서 우리에게 어디 간다고 말해 주는 걸 깜빡하셨나?
“진 공자님이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누이가 어디로 가는지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황씨도 불안해하며 대답했다.
이럴 수가!
내시와 시위들 모두가 막료들을 쳐다보았다.
“찾아라. 사람들을 전부 동원해라. 한 곳 한 곳 전부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내야 한다!”
막료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시종들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뛰어갔다.
“너희도 어서 가서 찾아봐.”
황씨가 주변에 있던 시녀들에게 지시했다.
“절대로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절대로 울며불며 소리쳐서도 안 되고.”
막료가 신신당부했다.
“무슨 일이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막료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손에 빗장을 든 채 달려오는 주복의 모습이 보였다.
진안 군왕 일행은 문 앞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어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문지기와 시종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곧장 정교랑의 거처로 달려왔다.
그런 상황에 뒤늦게 집에 도착한 주복이 바닥에 쓰러진 문지기와 시종들을 보고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빗장을 쥐어 들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었다.
“댁들은…….”
주복이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소리치려던 찰나, 반근이 재빨리 말했다.
“전하예요. 어서 아씨를 찾아야 해요!”
반근이 주복을 지나쳐서 밖으로 뛰어갔다.
전하?
시녀와 다른 시종들이 서둘러 반근을 뒤따라 밖으로 뛰어가자, 주복의 시선이 가마로 향했다. 가마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을 알아본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진안 군왕!
막료가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떼려던 찰나, 주복이 빗장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반근과 시녀들을 금세 제치고, 진안 군왕의 시위들까지 지나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정 낭자의 방으로…….”
진안 군왕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면서 중얼거렸다. 이미 시야가 흐릿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정교랑의 대청만큼은 또렷하게 알아보았다.
내시가 진안 군왕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를 안으로 모셔라. 방에서 정 낭자를 기다려야겠다.”
내시가 다시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전하, 정 낭자가 금방 올 겁니다. 그러니 꼭 버티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그래. 나에겐 아직 정 낭자가 있어.
나는 꼭 정 낭자를 기다릴 테다. 기다려서, 낭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덕승루 안. 마음이 조급해진 정사낭이 별실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한번 가 보거라.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수하와 사환이 알겠다고 하고 문을 열려던 찰나,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열었다. 화려하게 단장한 주 낭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정 공자님께서 오실 줄 몰라, 단장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부디 공자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 주세요.”
주 낭자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정사낭이 답례하고는 앞에 놓인 작은 보따리를 가리켰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건, 내 것이 아니니 도로 가져가요.”
“공자님의 돈이에요.”
주 낭자의 말에 정사낭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 돈이 아니에요.”
정 낭자의 돈이죠.
주 낭자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럼 소인은 더욱 저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소인은 저만한 가치가 안 돼요.”
“저 돈은 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정사낭의 말에 주 낭자가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주 낭자의 값을 매긴 돈이 아니니, 낭자와는 상관없는 돈입니다. 저 돈은 내 누이가 나더러 쓰라고 준 돈이죠.”
정사낭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랑스럽고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인 이야기만 나오면, 모든 사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가.
“그러니까 공연한 생각은 마요. 이미 내게 줘서 써 버린 돈인데, 그걸 다시 돌려달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사낭이 또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누이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해도 내가 직접 번 돈으로 돌려줄 겁니다.”
주 낭자가 정사낭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정 낭자에게 공자님 같은 오라버니가 있다는 게 참으로 부럽네요.”
주 낭자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인에게도 오라버니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요절했거든요.”
정사낭이 불안한 기색으로 다독였다.
“우, 울지 마요. 사실 부러워할 것도 없어요. 나 같은 오라비를 둬서 어디에 쓴다고. 우리 누이가 아마 낭자보다 훨씬 더 불쌍할걸요?”
정사낭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위로랍시고 정교랑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보다 더 불쌍하다고? 남의 모함 때문에 부모님을 잃고 교방사로 들어와 기녀의 삶을 살게 된 나보다 더?
주 낭자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요. 정 낭자가 선천적으로 바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신선 같은 스승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얻었잖아요.
내게 새 삶을 가져다줄 신선 같은 스승, 나는 평생 만나지 못할 거예요.
“웃지 마요. 우리 누이는 진짜로 불쌍한 사람이라니까요? 누이도 속이 말이 아닐 거예요. 힘들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내 눈에는 보여요. 그런데도 난 딱히 도와줄 수도 없고.”
주절주절 늘어놓던 정사낭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머쓱한 듯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낭자를 붙잡고 이 얘기를 하는 건지 원.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주 낭자가 웃으면서 손으로 정사낭을 붙잡았다.
“정 공자님, 이왕 여기까지 오신 거, 소인이 본분을 다할 기회는 주셔야지요? 이 돈도 안 받겠다고 하셨으니…….”
주 낭자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일부러 정사낭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주 낭자의 미소 한 번에 방 안이 온통 환해지는 듯했다.
정사낭과 사환은 그런 주 낭자를 바라보면서 넋을 놓았다.
본분을 다한다?
기녀가 다할 수 있는 본분이라면…….
“아닙니다. 낭자의 쉬는 시간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도록 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사낭이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말했다.
“춘령.”
주 낭자가 고개를 돌려서 춘령을 불렀다. 춘령이 재빨리 칠현금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공자님, 저희 아씨께서 본분을 다하실 수 있게 좀 도와주세요.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 보실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춘령의 말을 들었어도, 정사낭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던 찰나, 주 낭자가 별실 중앙에 자리를 잡고 칠현금 연주를 시작했다. 감미로운 칠현금 연주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주 낭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동안의 정이 얼마나 깊었을까. 석양 비추는 깊은 산속에는 가을비가 내리네(一往情深深几許, 深山夕照深秋雨, 靑塚黃昏路).”
쓸쓸하기도, 아련하기도 한 노랫소리에 정사낭은 결국 걸음을 멈춰 섰다.
“황사가 햇빛을 가리면 눈가에 가득 차는 황량함은 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소슬한 가을바람은 단풍나무의 붉은 잎을 쓰다듬고 지나가는데, 끝없는 근심과 처량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구나(滿目荒涼誰可語? 西風吹老丹楓樹. 從來幽怨應無數.)”
방 안에서 칠현금 소리와 노랫소리가 새어 나오자, 시녀가 정사낭에게 붙여준 네 명의 시위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수면이 일렁이고, 꽃잎과 나뭇잎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진호가 연못에서 반쯤 꽃을 피운 연꽃을 따왔다.
“들키면 혼나실걸요?”
시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진호가 웃으면서 연꽃을 정교랑에게 건네자, 정교랑이 연꽃을 받았다.
“낭자는 무슨 꽃을 좋아해요?”
진호가 물었다.
“좋고 말고가 없어요. 다 좋으니까.”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손에 올려진 연꽃을 들여다보았다.
“꽃도 똑같다는 말이에요?”
진호가 웃음을 터트리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낭자한테 똑같지 않은 건 대체 뭘까.”
진호가 혼자 중얼거리는 듯이 말하고는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저쪽의 꽃이 더 만개했네요. 저기로 옮겨서 볼까요?”
정교랑이 진호가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종이와 붓을 준비해 왔어요. 지난번에 낭자가 내게 그림을 선물했으니, 오늘은 내가 낭자에게 그림을 한 폭 선물해 주려고요.”
진호가 말했다.
“그림까지 그리시려고요? 해가 질 때쯤이 되어야 다 그리시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저녁도 진 공자님이 사주셔야 할 텐데?”
시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원에서 뛰어나온 반근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댔지만, 쉴 틈도 없이 마부에게 물었다.
“또 어디 있죠?”
반근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 말에 박차를 가했다.
“동쪽으로 조금 더 가면, 어느 식당 뒤편에 큰 연꽃 연못이 있을 거요.”
마부가 말했다.
“어서 서둘러요!”
반근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죽으면 안 돼.
군왕께서 돌아가시면, 아씨께서 다시는 혼사를 치를 수 없을지도 몰라.
평왕이 사고로 벼락에 맞아 죽은 것도 아씨 탓부터 하는 사람들인데, 군왕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씨께서 어떤 취급을 당할지는 안 봐도 훤해!
마차는 빠르게 동쪽으로 내달렸다.
마차가 채 멈춰 서기도 전에 반근은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마음이 너무 급했던 나머지, 발을 헛디딘 반근이 바닥에 넘어졌다. 마부가 반근을 부축하러 다가오기도 전에, 반근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고 식당 안으로 돌진했다.
이때, 누군가가 식당 안에서 뛰어나왔다.
“주 공자님!”
반근이 소리쳤다.
“여긴 없어.”
주복이 짧게 대꾸하고는 휘파람을 불어 옆에 세워 둔 말을 불렀다. 말이 자신의 앞에 오기도 전에, 주복은 두어 걸음 뛰어서 말 위로 몸을 휙 날렸다.
주복이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처럼 사라지자, 반근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주복이 말을 타고 저잣거리를 가로질러가자, 행인들과 주변 노점상들이 주복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주복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뒤로 한 채 미친 사람처럼 질주했다.
- 진 공자님이 제일 좋아하는 연꽃 연못이 어디예요?
주복은 반근이 물었던 질문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좋아하기는 개뿔! 십삼 그 자식이 퍽이나 꽃 감상을 하겠다. 떨어지는 낙엽이나 다 시들어 죽어가는 꽃 따위를 좋아하는 놈인데, 연꽃 나들이를 하더라도 가을에 다 져가는 시든 연잎이나 보러 가겠지!
시든 연잎?
주복의 눈앞이 번쩍였다.
- 육선관(六仙觀)의 연꽃은 별 볼 일 없네. 하지만 나중에 이곳 시든 연잎 구경은 올 만하겠어.
꽤 오래전에 진호가 했던 말이 주복의 귓가를 스쳤다.
육선관!
주복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질주하던 말이 앞발을 들면서 울부짖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를 피했다.
주복이 그대로 말 머리를 틀어 서쪽을 향해 달렸다.
진호가 붓을 쥔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 공자님, 아직 한 획 남았어요.”
“이 한 획이 너무 중요해서 그런지, 붓을 내리기가 무섭네.”
진호가 대꾸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호를 쳐다보았다.
“낭자가 마지막 한 획을 그어 주는 건 어때요?”
진호가 손에 쥔 붓을 정교랑에게 건넸다. 정교랑이 붓을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교랑!”
주복의 외침과 함께, 붓이 탁자 위로 떨어져 검은 먹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고, 그림 아까워서 어째!”
시녀가 소리쳤다.
“미안해요. 내가 못 받았네요.”
정교랑이 말하자, 진호가 웃었다.
“제가 잘 못 건네서 그래요.”
진호가 성큼성큼 탁자 쪽으로 걸어오는 주복을 쳐다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 저놈 때문입니다.”
주복은 진호의 말을 무시한 채 정교랑의 손목을 낚아챘다.
“빨리 가자.”
주복이 고개를 홱 돌리고 정교랑을 끌고 가려 했다.
“무슨 일이에요?”
놀란 시녀가 발을 구르면서 외치고는 재빨리 두 사람을 따라갔다. 정교랑은 벌써 주복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탁자 뒤에 앉아 있던 진호도 한숨을 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정 낭자.”
갑자기 누군가가 그늘 밑에서 걸어 나와 정교랑의 앞을 막았다. 그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쟁반 하나를 받치고 있었고, 쟁반 위에는 고이 접힌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누가 말을 전해 달라고 해서요.”
깜짝 놀란 진호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일순간 사색이 되었고, 곧이어 몸까지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진호가 몸 옆으로 늘어트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놈!”
주복이 앞을 막아선 자에게 호통치고는 비키라며 손짓했다.
“썩 꺼져!”
하지만 그 사람은 미동도 없이 서서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정 낭자, 이걸 안 보고 가신다면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주복이 쟁반 위에 놓인 종이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자, 그 사람이 몸을 피했다.
“안 보신다면, 분명 후회할 겁니다.”
그 사람이 같은 말을 되뇌자, 격노한 주복이 한 손으로 상대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주복 때문에 쟁반이 흔들려 얇은 종이가 쟁반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정교랑은 떨어지는 종이를 낚아채 망설임 없이 종이를 펼쳤다.
“아씨?”
정교랑의 표정을 살피던 시녀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에 시녀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낭자가 저기 있다!”
“정 낭자!”
두 시위가 정교랑을 향해 달려왔다.
“정 낭자, 전하께서 낭자의 거처에서 낭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속히 돌아가시지요.”
시위가 숨도 채 고르지 못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시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죠?”
정교랑이 시위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묻긴 뭘 물어, 어서 가자.”
주복이 이를 악물며 조용히 읊조리고는 정교랑의 손목을 더욱 세게 잡았다. 정교랑이 손목을 틀어 주복의 손을 뿌리쳤다. 빈손이 된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
시위가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전하의 몸에 문제가 생겼는데, 이 태의마저도 전하를 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빨리 저희와 같이 돌아가시지요.”
시녀가 작게 헉 소리를 내고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문제길래 태의도 못 고친다고 하고, 아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지?
혹시, 죽을병? 세상에나, 죽을병이 분명해!
어떻게 그럴 수가!
시녀가 서둘러 뛰어가려던 찰나, 여전히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종이를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정교랑이 보였다.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낭자!”
두 시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정교랑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주복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정교랑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로 향하자, 그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누구지?
“낭자, 아직 전하의 증상을 보지도 않았잖습니까!”
시위가 말했다.
“볼 필요 없어요.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아봐요.”
이때, 뒤늦게 뛰어 들어온 반근이 정교랑의 말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근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우리 아씨 맞나?
아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죠?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게냐!”
방 안에 있던 이 태의가 좌불안석하며 밖을 두리번거렸다. 태의의 등 뒤로 다시 한번 낮은 신음이 들려오고, 내시가 비명을 질렀다.
“태의, 태의!”
이 태의가 재빨리 몸을 돌려보자, 가마 위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또 피를 토하고 있었다. 환해 보였던 방 안은 순식간에 진안 군왕의 안색과 비슷한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이 태의가 진안 군왕에게 달려들듯 다가가 금침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의 앞섶을 풀어 헤치고 왼쪽 가슴 주위에 침을 놓았다.
“태의, 전하의 몸까지 까매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시가 소리쳤다.
“나도 알고 있네!”
이 태의가 외치고는 진안 군왕의 가슴을 훑어보았다.
나도 잘 알고 있다고. 군왕이 작고 여린 어린아이일 때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때의 야위고 왜소했던 몸이 이제는 탄탄하고 튼실해졌는데, 왜 달라진 게 없지? 왜 또다시 검게 변했냐고!
예전과 똑같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결국 사람은 정해진 숙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정 낭자는 아직인가!”
이 태의가 고개를 홱 돌리고 처절한 소리로 외쳤다.
“왔습니다. 왔습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시끄러운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문가로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시위 둘뿐이었다. 간절히 기다리던 정교랑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인의 걸음이 느려 뒤늦게 도착하는 건가?
이 태의가 시위들을 밀치고 뒤를 내다보았다.
“대인, 정 낭자가 고치지 않겠다고 합니다.”
시위 한 명이 주저앉다시피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울먹이면서 말했다. 방 안의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무슨 헛소린가! 정 낭자가 전하를 고치지 않겠다고 할 리가 없잖아!”
고개를 돌린 이 태의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대인, 정 낭자가 정말로 고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명의를 부르라면서요!”
다른 시위가 소리쳤다. 내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바닥에 엎드린 시위의 목덜미를 잡고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고치지 않는다고 했다고? 어떻게든 정 낭자를 데려왔었어야지!”
시위가 고개를 들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러려고 했지만, 못 데려왔습니다.”
내시는 그제야 시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으로 맞은 듯한 새파란 피멍이 군데군데 보였다.
“오지도 않을뿐더러, 너희를 때리기까지 했어?”
중얼거리던 내시의 동공이 떨려왔다.
“정 낭자는 진씨 가문 공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시위가 덧붙여서 말했다.
진씨 가문 공자, 진씨 가문이라면…….
그래서 집에 없었구나, 그래서 갑자기 연꽃을 보러 간 거였고, 그래서…….
“난 못 믿겠다! 정 낭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직접 가서 찾아오겠다. 내가 직접!”
이 태의가 갑자기 목청을 높이고 소리치면서 문가를 향해 걸어가려 했다. 한 막료가 재빨리 이 태의를 덥석 붙잡았다.
“이사신(李四申)! 전하께서 더는 기다리실 수 없소! 정 낭자가 고치지 못한다면, 대인이 고쳐야 하오!”
이 태의가 고개를 저었다.
“난 못 하오. 그때도 제대로 고치지 못했어. 그때도 내 손으로 전하를 제대로 고치지 못했다고! 지금은 더더욱 고칠 수가 없어!”
이 태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쉼 없이 중얼거리자, 막료가 손을 높이 들고 이 태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자네가 고치지 못하면, 전하는 자네의 손에 죽는 것이라는 걸 왜 모르나! 어렸을 때처럼, 전하는 자네의 손에 죽는 것이라고!”
막료가 고함을 질렀다.
어렸을 때처럼.
- 태의, 태의, 나 죽기 싫어요.
어린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 태의의 소매를 쥐었다. 그러고는 가엾은 새끼 고양이처럼 이 태의의 품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 나를 살려 줄 수 있어요?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부왕과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하셨단 말이에요. 난 기다려야 해요.”
이 태의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좋소이다. 내가 고치겠소. 내가 고치겠다고! 잘못된다 해도 기껏해야 내 목숨 하나 날아가는 것일 테지? 죽는 게 뭐가 무섭다고. 나는 무섭지 않소.”
이 태의가 무언가 결심한 듯 소리쳤다.
소란스러운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 시야로 흐릿하게 들어오는 사람들의 어지러운 뒷모습에 진안 군왕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건가?”
진안 군왕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기를 쓰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전하, 그만 돌아가시지요.”
내시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간다고? 왜 돌아가? 정 낭자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왜?
“전하, 더는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내시가 더욱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왜 기다리지 않는다는 거야? 왜 더 기다리지 않고?
“아니다. 기다려야 한다. 정 낭자를 기다려야 해. 기다리기로 해놓고, 내가 낭자를 기다리기로 해놓고, 먼저 가 버리면 안 돼.”
진안 군왕이 팔걸이를 움켜쥐고 명령했다.
“가마를 내려라.”
“전하!”
내시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악물고 시위들에게 손짓했다.
“가자.”
가마가 천천히 문밖을 향해 갔다. 흔들리는 가마 때문에 진안 군왕이 팔걸이를 놓치면서, 몸이 힘없이 뒤로 눕혀졌다.
“안 돼.”
진안 군왕이 소리쳤다. 가마가 갑자기 덜컹거리더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가마를 들고 있던 시위들이 깜짝 놀라 앞뒤를 살펴보자, 진안 군왕이 가마 안에서 손을 뻗어 문틀을 붙잡고 있었다.
“전하!”
내시가 더욱 울컥하여 눈물을 쏟으면서 진안 군왕의 팔을 잡았다.
“전하, 손을 놓으십시오.”
안 돼. 기다려야 해. 기다려야만 해! 나는 정 낭자가 오기만을 기다릴 거야.
진안 군왕은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문틀을 꽉 붙잡았다. 그런 그의 손마저 이미 얼굴만큼 거뭇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가자!”
내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면서 문틀을 쥐고 있던 진안 군왕의 손을 힘껏 떼어냈다.
몇 번이나 피를 토하고, 거의 죽기 직전일 정도로 몸이 허약해진 진안 군왕이었지만, 문틀을 붙잡고 있는 힘은 가히 괴력에 가까울 정도였다. 쓸 수 있는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아 문틀을 쥐고 있는 듯, 내시는 좀처럼 문틀에서 진안 군왕의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가자니까!”
내시가 목청을 높이고 울부짖자, 시위들이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문틀을 붙잡던 진안 군왕의 손이 열려 있던 문짝으로 향했다. 문짝이 가마에 부딪히는 쾅 소리와 함께 시위들의 발걸음이 휘청였다.
다른 시위들이 재빨리 다가와 문짝을 반대편으로 치우자, 가마는 다시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진안 군왕의 손은 여전히 가마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의 손에는 문짝에서 손가락으로 파내다시피 뜯어낸 작은 나무 조각이 쥐여 있었다.
기다려야 해. 기다려야 해!
- <교랑의경> 22권에 계속
교랑의경 22권
차례
빌어먹을
이미 늦었어
버텨야지
경사스러운 분위기
혼례
속상해하지 말고
소심
살살
-빌어먹을-
두 시위가 더는 달려들지 않고 새빨개진 눈으로 씩씩대며 왔던 방향을 향해 뛰어가자, 주복이 손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했다.
육선관의 도사들은 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싸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시위 두 명이 자리를 떠나자, 그제야 무리에게 등 떠밀려 나온 한 도사가 불안한 기색으로 주복에게 말을 걸었다.
“선인, 관, 관, 관내에서는 싸우시면 안 됩니다.”
도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폐를 끼쳤습니다.”
주복이 공수의 예를 표했다.
도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하나둘씩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 뒤에서 나오자마자, 두 시위를 무자비하게 때리던 살벌한 사내가 한 손으로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사내의 힘이 얼마나 셌는지, 바닥에 먼지가 일고,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기까지 했다.
또 싸우려나 봐, 또!
도사들이 악 소리를 내지르고는 다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진십삼! 네가 어떻게!”
주복이 바닥에 엎어진 진호를 팔로 짓누른 채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에, 주복은 힘겹게 같은 말만 되뇌었다. 이 짧은 말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난 아닐세. 난 아니야.”
바닥에 눌려있던 진호가 어금니를 꽉 물고 주복을 밀쳐냈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키고 정교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종이를 보여 주십시오. 어서요!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길래!
빌어먹을 놈! 그 빌어먹을 놈이!
주복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진호를 향해 주먹을 세게 휘두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교랑을 향해 걸어갔다.
정교랑은 여전히 얇은 종이를 손에 꼭 쥐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주복의 주먹을 맞아 몸을 일으키지 못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진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복이 정교랑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낭자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아래 몇 마디를 그대로 말하시오. 만약 한 글자라도 틀렸다가는 정사낭의 시신을 보게 될 것이오.”
주복은 계속해서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무슨 일이죠?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볼 필요 없어요.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아봐요.”
주복이 한 마디씩 끊어 읽고는 있는 힘껏 종이를 구겼다. 주복은 포효하다시피 소리를 내지르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사내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말해!”
주복이 고함쳤다. 종이를 들고 왔던 사내가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낭자는 여기서 여유롭게 연꽃 구경이나 마저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요?”
사내의 말이 끝나자, 주복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무거운 주먹에 코뼈가 휜 듯한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피를 토했다.
진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붙잡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정교랑에게 다가갔다. 정교랑이 몸을 돌려 진호를 쳐다보자, 진호의 걸음이 주춤했다.
“어디 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어디 있어요?
결국 내게 이 말을 묻는구나.
진호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을 토했다. 그가 눈을 뜨려던 찰나, 주복의 주먹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난 몰라!”
진호가 소리쳤다. 그가 몸을 비틀어 주복의 주먹을 피하고 주복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내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긴 할 거야?”
주복은 새빨갛게 충혈된 두 눈으로 진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십삼, 너라면 믿을 수 있겠어?”
주복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진호의 멱살을 쥐었다.
“너라면 믿을 수 있냐고! 네가 언제부터 연꽃 구경을 다녔어?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긴 해?”
진호가 말없이 주복을 쳐다보았다. 주복 또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진호의 멱살을 잡고 있던 주복의 손이 점점 더 세게 떨려왔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도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진십삼! 말해!”
주복이 애원하듯이 소리쳤다.
“내가 진작 알았다면, 정사낭을 납치하기까지 한 걸 알았다면, 난 절대로…….”
천천히 고개를 젓던 진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주복의 팔을 잡고 있던 손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주육, 자네는 알잖나. 그랬다면, 난 절대로…….”
납치하기까지 했더라면? 지금 ‘까지’라고 한 거야?
주복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포효하고 진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복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낸 진호가 허리를 숙이며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곧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복이 곧바로 진호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붙잡고 연달아 소리쳤다.
“말해! 정사낭은 지금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냐고?
진호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고십사가 나에게 정 낭자를 데리고 나가 차를 마시러 가라고 하긴 했지만, 나 진호는 절대 고씨 가문이 시키는 대로 한 게 아니었어. 내가 정 낭자에게 함께 가자고 한 건, 누가 나에게 시켜서 그랬던 게 아니야. 내가 정말로 정 낭자와 함께 가고 싶었기 때문에 청한 것이라고!
바로 내가 원했기 때문에 정 낭자에게 청한 거라고!
내가 고십사의 말 때문에 차를 마시자고 한 줄 알아? 나는 정 낭자를 데리고 꽃놀이를 하러 온 거야. 4월의 그때처럼 말이야!
그나저나 고씨 가문이 정말 진안 군왕에게 손을 쓸 줄이야.
어떻게 한 거지? 암살?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일이 이렇게 시끄러워질 정도라면, 고씨 가문도 죽음을 자초하는 것일 테니. 아니, 아니지.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정사낭, 정사낭!
정사낭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잘 들으시게. 오늘 오찬 이후에 정 낭자를 덕승루로 불러서 둘이 오붓하게 차나 한잔하고 있게나.
진호가 고개를 홱 들었다.
“덕승루!”
주복이 진호를 밀쳐내고 냅다 밖으로 뛰어갔다.
주복은 밖으로 나가는 길에,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사내에게 또 주먹을 휘둘렀다. 바닥에 고꾸라진 사내는 더 이상 몸을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정교랑도 주복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교랑.”
진호가 몸을 일으키면서 외쳤다. 하지만 정교랑은 진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잠깐의 멈칫거림도 없이 진호의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교랑!”
진호가 다시 한번 쉰 목소리로 외치면서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한편, 정교랑을 따라 뛰던 시녀는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제자리로 돌아와 무언가를 찾는 듯 바닥을 더듬거렸다.
“언니, 언니.”
시녀를 따라 구르다시피 뛰어온 반근이 울부짖었다.
“언니, 나 마차 있어, 저기 마차 있어.”
시녀는 주복이 구겨놓은 종이를 찾아내 품에 넣고, 반근을 부축하며 다시 밖으로 뛰어갔다.
말에 올라탄 주복이 미친 듯이 채찍질을 하며 박차를 가하자, 뒤를 따라오던 시종들과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런데 주복의 뒤에서 들려오던 말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나 싶더니, 아예 주복을 앞서갈 기세로 속도를 냈다.
내 수하 중에 나를 능가할 기마 기술을 가진 놈이 있었던가?
주복이 곁눈질로 뒤를 쳐다보았다. 말에 탄 사람을 본 주복은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을 탄 정교랑이 주복의 옆을 스치며 그를 추월해 갔다.
저 여인이 말도 탈 줄 알았어? 게다가 꽤 잘 타네.
그런데, 치마를 입고 어떻게 말을 모는 거지?
자신을 앞서가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주복은 하마터면 놀라서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측기(側騎: 두 발을 한쪽으로 내리고 몸을 옆으로 튼 채 말을 타는 기술)!
“죽고 싶어서 그래? 멈춰!”
놀란 주복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박차를 가해도 정교랑을 쉽게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주복은 화가 났던 것도 잊은 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여인은 항상 마차만 타지 않았나? 기마는 언제 배운 거지? 그냥 탈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수준급의 기마를 하잖아!
측기라니! 군에 있는 고급 척후병들도 저렇게 빠르게 안정적으로 달리기는 힘든데!
저 여인이 활을 쏠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만, 기마까지 할 줄은 몰랐어. 심지어 저렇게 잘 탈 줄은 더더욱 몰랐다고!
저 여인이 우리에게 아직 보여주지 않은 기술은, 또 뭘까?
주복이 머리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치고, 서둘러 기합을 넣으면서 질주했다.
저녁이 되었다. 뜨거웠던 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벌써 거리로 나와 저잣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덕승루는 예전만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여전히 등불을 화려하게 밝히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덕승루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시끌벅적하던 덕승루는 갑작스럽게 안으로 들이닥친 사람들 때문에 더욱 소란해졌다.
“찾아라!”
주복이 소리쳤다. 시종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대청 안에 있던 점원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점원들이 소리치자,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돌진해왔다.
여인이잖아?
점원들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찰나, 여인은 손을 뻗어 그들을 양쪽으로 밀쳐냈다. 주복이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리면서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좀 전에 저 여인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때 느꼈는데, 여자 치곤 힘도 엄청나게 세. 아마도 매일 활쏘기를 했던 탓이겠지? 그나저나, 저 여인이 앞장서게 놔둘 수는 없지.
주복이 발걸음을 재촉하고는 길을 막는 점원들을 휙휙 밀치면서 정교랑에게 길을 터줬다.
“어머나, 이게 누구람. 정 낭자 아니에요?”
소식을 듣고 대청으로 뛰어나온 기생 어미 막씨가 정교랑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만 관도 서슴없이 뿌리는 귀한 정 낭자잖아? 그때 일로 내가 아주 단단히 기억해 놨지.
“내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죠?”
정교랑이 물었다. 막씨가 아첨의 웃음을 보이면서 서둘러 위층을 가리켰다.
“당연히 아형이랑 같이 있죠. 온 지 한참 됐어요.”
정교랑은 막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지나쳐갔다. 막씨가 민망한 듯 입술을 삐쭉이고는 고개를 돌려 살갑게 말했다.
“낭자, 재밌게 놀다 가요.”
조금 이상하게 들리긴 해도, 할 말은 해야지.
한발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간 주복은 복도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롭게 웃고 떠들고 있는 시종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원래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었지만, 지금은 정씨 가문의 시종들이 된 터라 주복은 단번에 그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시종들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주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주복의 뒤로 걸어오는 정교랑이 보이자, 시종들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 서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아씨.”
뭔가 이상한데? 정말로 납치당한 거라면, 시종들이 이렇게 여유롭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이놈들이 정사낭을 납치한 놈들에게 굴복했을 리도 만무하고.
“정사낭은?”
주복이 물었다.
“사공자님은 방 안에 계십니다. 주 낭자도 같이 있고요.”
시종이 별실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방 안에서 칠현금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기당한 건가? 진십삼 그놈이 이런 수작을 잘 부리긴 하는데! 아니면, 정말로 약속을 지키고 사람을 놓아 준 건가?
어떻게 됐든 간에, 주복은 내내 허공에 떠 있던 심장이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릴 듯 후들거렸다.
주복이 다짜고짜 시종의 뺨을 후려쳤다.
“쓸모없는 놈! 누가 너희더러 정사낭을 따라 여길 오라고 했냐?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갑자기 맞게 된 시종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해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지금이 기루를 들락거리면서 기녀나 끼고 놀 때야? 게다가 한가하게 칠현금 연주까지 듣고 앉아 있어?
“나는 누구 때문에 놀라 죽을 뻔했는데, 그 누구는 이렇게 여유롭게 놀고 계시다 이거지?”
주복이 투덜대면서 별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주복의 과격한 발길질에 정교랑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단번에 문짝이 나가떨어지고, 방 안에서 들려오던 칠현금 소리도 멈췄다.
“정사낭, 네가…….”
소리치던 주복은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복의 뒤에 있던 정교랑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려 하자, 주복이 갑자기 몸을 홱 돌리고 정교랑을 품에 끌어안았다.
옆에 있던 시종들과 주복을 따라온 시종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별실 안의 광경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혈기왕성한 주 공자님이 못 견디고 저러시는 건가?
아무리 못 견디겠다고 하더라도, 여인에게 저렇게 결례를 보이면 안 되지! 게다가 정혼자가 있는 여인에게 저런 결례를 범하면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시종들이 경악한 사이, 정교랑이 주복을 밀쳤다.
“보지 마.”
주복이 더욱 세게 정교랑을 끌어안고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내 말 들어. 교랑, 들어가지 마. 들어가지 말고, 보지도 마.”
주복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몸이 굳어 버렸다.
- 아방, 보지 마! 가지 마! 아방! 가면 안 돼! 보지 마!
아니, 아니야. 나는, 그런 말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여길 온 건 그런 말을 듣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고!
“비켜!”
정교랑이 소리치면서 두 팔로 주복을 밀쳤다. 주복은 그대로 뒷걸음질 치면서 방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종들의 안색도 일순간 사색이 되었다.
“사공자님!”
시종들이 외치면서 별실 안으로 쳐들어갔다.
방 안에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낯뜨거운 장면 대신, 선홍빛으로 붉게 물든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별실의 바닥이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주 낭자는 탁자 위에 엎드려 있었고, 정사낭의 사환은 벽에 기댄 채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정사낭은…….
푸슉 소리와 함께, 두 손이 피로 젖어 있는 춘령이 정사낭의 가슴팍에서 비수를 뽑아냈다.
“이거 봐요. 일부러 몇 번 더 찔렀으니까, 확실하게 죽었을 거예요. 아주 확실하게 말이에요. 절대로 당신이 살려낼 수 없을 정도로요.”
춘령이 해맑게 웃으면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당신한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아서 내가 특별히 신경을 좀 썼죠.”
주복과 시종이 춘령을 향해 달려들기 전에, 정교랑이 한발 먼저 춘령 앞으로 다가갔다. 춘령이 돌연 비수를 들고 정교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교랑이 비수 날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교랑!”
주복이 소리를 지르며 춘령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네가 한 짓이니?”
정교랑이 주복을 제지하고 춘령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면서 물었다. 춘령은 정교랑의 손에서 비수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정교랑이 칼날을 어찌나 세게 쥐고 있는지, 손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데도 비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응, 내가 했어.”
춘령이 흥분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한 줄 알아?”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네가 한 짓인지 아닌지일 뿐이야. 네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어떻게 상관이 없어?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춘령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목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이 들더니, 서걱 소리와 함께 시선이 반대편으로 돌려졌다.
어? 왜 그 여인이 보이지 않지? 왜 창문이 보이는 거야? 내가 언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지?
춘령의 뇌리에 이런 생각들이 스칠 때쯤,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난 아직 죽으면 안 돼! 아직 말하지 못했다고!
저 여인에게 아직 말하지 못했어,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네가 나와 내 동생을 내쫓아서, 네가 너무도 악독하고 잔인한 여인이라 나와 내 동생에게 살길조차 남겨 주지 않아서, 네가 내 동생을 버려진 사찰에서 쓸쓸히 죽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드디어 오늘, 아끼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는 기분이 어떤 건지 너도 알게 해 준 거라고!
다 너 때문이야!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라고!
아직 말하지 못했어, 아직 말하지 못했다고! 저 여인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정사낭을 곤경에 빠트린 사람도, 정사낭을 죽인 사람도 나야. 너희는 모르겠지만, 다들 내 손에 놀아난 거라고!
마침내 복수했을 때, 원수가 자책하며 땅을 치고 울부짖는 모습을 내 눈으로 봐야 하는데,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알려 줘야 하는데, 다 네년이 저질렀던 짓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걸 알려 줘야 하는데!
너 때문이라는 걸 알려 주지 못한다면, 모든 게 다 헛수고가 되잖아! 그럼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난 아직 죽으면 안 돼. 아직 말해 주지 못했어!
저 여인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나, 는…….”
꺽꺽 소리를 내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하려 했던 춘령은, 결국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졌다.
진호가 말에서 내려와 덕승루 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무렵, 덕승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진호의 눈에 비친 덕승루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살인이야! 살인이야!”
인파에 휩쓸린 진호는 덕승루 밖으로 밀려날 뻔했지만, 시종들이 길을 터준 덕에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 올라갈 수 있었다.
기생 어미 막씨가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살인이야! 아이고, 살인이야!”
소리를 하도 지른 탓에 목이 쉬었는데도, 막씨는 쉴 새 없이 외쳤다.
주복은 전장에 나가 칼을 휘두르는 장수이니 두려울 게 없을 테고, 정 낭자도 규방에서 고이 자란 소녀가 아니니까 무서워하지는 않을 거야.
더군다나 저 사람들이 납치한 자는 바로 정사낭이니까.
무려, 정사낭.
고능준은 정 낭자를 협박하기 위해 정 이노야를 강주에서 데려와 대리시로 부임케 했지만, 그런 협박은 낭자에게 있어서 표면적으로나 압박으로 보일 뿐이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의 명에 따라야 한다지만, 그 여인에게 부모의 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 여인에게 부모란, 기껏해야 공경하게 대해야 하는 사람들, 또는 혼사처를 정해 주는 사람들에 불과할 텐데.
저 여인이 예의를 차리는 대상은 비단 부모만이 아니야.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라 해도, 언제나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단정한 태도로 대하니까.
더구나 혼사를 사소한 일로 여기는 여인이니, 혼사를 결정하는 부모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세상엔 예외가 있는 법. 저 여인이 예외로 여기는 상대가 있다면, 그게 바로 정사낭이다.
어리석고 줏대 없으며 비리비리한 서생에 불과한 정사낭이 바로 정 낭자를 협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물론 진호는 그게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돕는 것으로 따지면 정사낭보다는 주육이 정교랑을 훨씬 많이 도왔고, 정사낭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늘 골칫거리만 안겨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정교랑은 그런 정사낭을 늘 다정하고 부드럽게 보듬어주었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한다?
의외로 단순한 이유였을지도 모르겠군. 상대방이 자신을 대하는 그대로 상대방을 대하는 마음.
낭자에게 경외감을 느끼거나, 낭자를 신뢰하거나, 낭자를 도와주려 하거나, 낭자를 정말로 좋아하거나 하는, 정 낭자를 향한 온갖 감정들 속에서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씨로 저 여인을 생각해 주는 것이리라.
우리 누이는요?
우리 누이를 괴롭히지 마세요.
우리 누이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참으로 독한 수를 두었구나!
진호가 주먹으로 기둥을 세게 쳤다.
죽어 마땅해!
감히 그런 정사낭을 납치한 놈들이라면 죽어도 마땅하지! 아직 괜찮을 거야. 아직은 구할 수 있을 거야!
문가로 다가가 별실 안의 광경을 본 진호는 온몸이 얼음장처럼 굳어 버렸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공자님, 미혼약을 탄 차입니다!”
주 낭자와 사환의 옆에 있던 시종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물을 끼얹어 깨워라.”
주복이 말했다.
방구석에 놓여 있던 얼음 대야 안의 얼음은 전부 녹아 물이 되어 있었다. 시종들이 대야를 들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었다.
“어우, 차가워!”
화들짝 놀라 깨어난 사환은 머리가 어질어질한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쳤다.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은 사환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 났어요?”
시종이 사환의 뺨을 세게 쳤다.
“지금 그걸 우리한테 묻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시종이 사환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우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소리쳤다.
시종의 손에 붙들린 사환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사낭에게로 시선이 향한 사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쪽에!
“고, 고, 공, 공자님…….”
사환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환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동시에, 주 낭자의 비명이 별실 안에 울려 퍼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주 낭자가 붉게 물든 자신의 치맛자락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피로 물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정사낭과 춘령, 그리고 정교랑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왜 사방이 전부 피로 물들어 있는 거지? 피가 왜 이렇게 흥건한 거야! 그리고 저 여인의 손에도 피가 묻어 있어!
세상에, 세상에!
“그건 너한테 물어야지.”
주복이 이를 부득 갈고는 눈을 부라리면서 주 낭자를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누구야! 누가 네게 정사낭을 죽이라고 시켰냐고!”
정사낭을 죽이라고 시켰다고?
겁에 질린 주 낭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정사낭을 죽이려 하는 자는 없었다고요!
“이 돈은 네가 가지고 있거라.”
“아닙니다. 소인은 관인의 돈을 받을 수 없어요.”
주 낭자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 돈을 가지고 있다가 정사낭에게 돌려줘. 그리고 너와 정사낭의 사이는, 이로써 깨끗하게 정리되는 거라고 전하고.”
그렇단 말이지?
주 낭자는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남자를 쳐다보았다.
“네가 고 관인의 체면을 얼마나 깎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우리 관인의 체면을 어떻게든 되찾아야겠으니, 네가 먼저 정 공자와의 사이를 끝내. 그리고 칠월 칠석에 우리 관인께서 너를 연회에 초대할 예정이니, 그때는 정 공자가 아니라 우리 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자식이 우리 관인 대신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정말, 오로지 고 관인의 체면 때문이라고?
주 낭자가 자신의 앞에 놓인 비전 증서 몇 장을 내려다보았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아. 정 공자님은 애초에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아도 됐는데, 나 때문에 괜히 이 일에 휘말린 거니까.
나는 이미 진흙탕에 빠진 몸이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내가 정 공자님을 이 진흙탕에서 구해내야 해.
그래. 고 관인이 나중에 내게 무슨 짓을 할진 모르겠지만, 우선 정 공자님과는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겠어.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대체 왜…….
“정 공자님, 정 공자님.”
주 낭자가 발버둥을 치면서 주복을 밀쳐냈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는지 주 낭자는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정사낭의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던 중 옆에 누워 있던 춘령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가 괴상할 정도로 꺾인 춘령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 낭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제가 차를, 저는 딱 한 잔만 마셨는데,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공자님! 공자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환이 울부짖으면서 정사낭 곁으로 기어와 이마를 땅에 쾅쾅 찧었다.
시종이 주전자 한 개를 들고 오며 주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전자 안에 약을 탄 차가 들어 있었습니다.”
“중간에 잠시 칠현금 연주가 멈추긴 했는데, 말소리는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차를 마시고 계시나 보다 했죠. 그 뒤로 또 칠현금 연주가 들려오기에 저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시종들이 이를 악물고 말하다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 뒤로 칠현금 연주가 띄엄띄엄 들리긴 했지만,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시종들이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울먹였다.
참으로 독하구나. 참으로 독하구나!
“누가 시킨 거냐고!”
주복이 바닥에 엎어져 있던 주 낭자를 들어 올리고 다시 소리쳤다.
“저는 몰라요. 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어떻게 이럴 수가.”
주 낭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주복이 주 낭자의 뺨을 세게 후려치고 윽박질렀다.
“말하라니까.”
주복이 고개를 홱 돌리고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여기 덕승루에 있는 사람 중, 단 한 명도 놓치지 마라!”
그때 넋을 놓은 채 문가에 서 있던 진호가 주복의 시야에 들어왔다.
진호?
진호!
주복이 주 낭자를 내팽개치고 진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너냐! 너라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주마!”
주복이 진호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진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주복이 보이지도 않는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앉아 있는 정교랑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교랑은 이 소란스러움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미동 하나 없이 앉아 있었다.
그놈들은, 저 여인의 마음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저 여인의 마음을 죽여 버렸어.
교랑, 교랑…….
“공자님.”
누군가가 진호를 뒤로 잡아끌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교랑을 바라보던 진호의 시야가 가려지고, 진호의 귓가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주먹질 소리, 그리고 거친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옷소매 휘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 공자님, 정말로 저희 공자님은 아닙니다!”
진호의 앞을 가로막은 시종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것은 시종의 고통스러운 신음뿐이었다.
앞이 가려졌어. 가려져서 정 낭자가 안 보이잖아!
“교랑! 교랑, 내 말 좀 들어 봐요.”
진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며 자신을 붙잡고 있던 시종들의 손을 떨쳐내고 별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교랑, 내 말 좀 들어 봐요.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죽어 버려!”
주복이 있는 힘껏 발길질을 날렸다.
진씨 가문의 시종들이 재빨리 진호를 보호하며 그를 에워쌌지만, 주복의 발길질에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진호도 다시 별실 밖으로 밀려났다.
여기에 더 남아 있다가는, 주복이 정말로 진호를 죽일 것만 같았다. 진호의 수하가 또다시 달려 들어가려는 진호를 붙잡고 소리쳤다.
“공자님, 어서 가셔야 합니다!”
간다고?
지금 가 버리면 어떡해. 난 정 낭자를 저대로 두고 갈 수 없어.
이대로 갈 순 없다고!
진호는 발버둥을 치면서 수하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우르르 몰려든 시종들이 진호를 붙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진십삼!”
주복이 포효하자, 진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진호가 멍한 얼굴로 주복을 쳐다보았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주복이 자신에게 들러붙은 진호의 시종들을 떼어내려고 애쓰며 주먹을 휘둘렀다.
“진십삼!”
진십삼.
“공자님, 정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일단 지금은 자리를 피하시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세요.”
수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진호는 점점 더 멀어지는 주복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중은 없어. 나중은 없다고.
이제 더는 없어.
정교랑이 더는 피가 돌지 않아 싸늘하게 식어 버린 정사낭이 가슴팍을 매만졌다.
“아씨, 아씨.”
“사공자님, 사공자님.”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울부짖는 소리.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와 매서운 불길, 그리고 새까만 연기.
내가 늦었어요.
동산 오라버니, 내가 늦었어요.
“아방, 그만 봐! 거기 내버려 두고 어서 이리 와!”
어떻게 내버려 두라는 거예요, 동산 오라버니잖아요. 이건 동산 오라버니잖아요.
“아방! 소용없어! 어서 서둘러! 그만하라고!”
소용없어. 다 소용없어.
동산 오라버니, 내게 이렇게 많은 걸 가르쳐 줬지만, 다 소용없었어요.
다 소용없다고요.
정교랑이 손을 뻗어 칼로 난도질당한 옷자락을 찢어냈다.
“어서 실과 바늘을 가져와. 실이랑, 바늘을 가져와. 내가, 내가 꿰맬 수 있어. 내가 봉합할 수 있어.”
정교랑이 울면서 중얼거렸다.
“교랑, 교랑!”
황급히 정교랑에게 돌아온 주복이 정신을 차리라며 정교랑의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손 놔, 어서 이 손 놓으라고. 소용없어. 정사낭은 이미 죽었어! 어서 내려놔, 네 손에도 상처가 났다고!”
“소용없다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주복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정교랑의 막연한 표정과 정신없는 모습에, 주복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교랑.”
주복이 애써 눈물을 참으며 정교랑의 어깨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슬퍼하…….”
슬퍼하지 말라고?
에라이! 이보다 더 쓸모없는 말이 어딨어! 이 상황에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내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여기서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주복은 고개를 치켜들고 슬픔을 토해내는 듯 포효하고는 정교랑을 품에 안았다.
소용없어.
주복의 품에 안긴 정교랑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차피 다 죽었잖아. 삼백 년 후나, 지금이나, 다 소용없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사공자님이 왜 돌아가신 거예요?”
시녀와 반근이 울면서 물었다.
왜냐고? 나 때문이겠지. 내가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겠지.
품에 안겨 있던 정교랑이 갑자기 버둥거리자 주복이 손에 힘을 풀었다. 정교랑은 주복을 확 밀쳐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교랑!”
주복이 소리치면서 재빨리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설마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아씨!”
시녀와 반근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빠른 속도로 덕승루의 층계를 내려와 대청을 가로지르며 달려갔다. 수수한 치맛자락에 묻은 붉은 핏자국이 괴이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마침 소식을 들은 관부의 관졸들이 덕승루에 도착했다. 그들은 피가 덕지덕지 묻은 정교랑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면서 뛰어가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주복이 문밖으로 쫓아 나왔을 무렵, 정교랑은 벌써 말을 타고 석양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공자님, 여긴 어떡하죠?”
시종들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탄 주복에게 물었다.
관부에서 사람이 나왔으니, 조사할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데려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지. 만에 하나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면…….
주복이 관졸들을 훑어보았다.
“차라리 잘됐다. 안 그래도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던 차였는데.”
주복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하고는 서둘러 채찍을 휘둘렀다.
거리에 어렴풋이 보이던 정교랑의 뒷모습이 저물어가는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내 앞을 막으려고 하지만, 절대로 그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그럼 더 강해져야죠. 아직은 결론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아직 운명에 순응할 때가 되지 않은 거죠.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요? 아니라면 내가 강해진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죠? 이젠 그들이 없는데.
낭자가 있잖아요.
그래. 아직 내가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끝난 게 아니라고!
누군가가 대청 안에 서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바구니에 있던 약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이 태의!”
접시를 들고 있던 내시가 참다못해 소리쳤다.
“도대체 약을 어떻게 처방해야 하냐고요!”
이 태의가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약을 한 줌 쥐며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겠나.”
“이 태의!”
내시가 답답해하며 발을 굴렀다.
“나는 못 고친다고 했잖나. 하지만 전하께서는 꼭 나으실 걸세.”
이 태의가 자신 앞에 놓인 각양각색의 약 바구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시가 눈썹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그럼 어서 고쳐야죠!”
“내가 못 고친다고 하면, 정 낭자가 고칠 수 있어.”
이 태의는 그 말만 남긴 채 몸을 돌려 냅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다시 정 낭자를 모셔 오겠네!”
부아가 치민 내시는 이 태의의 옷을 확 붙잡았다. 내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밖에서 다른 내시가 뛰어 들어왔다.
“전하께서 또 피를 토하셨습니다.”
또 피를 토하셨다고?
이 태의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또 구토를 하셨어. 이대로 밤이 될 때까지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토하기도 힘드실 거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테고.
“이 태의, 정 낭자가 고칠 수 있는 걸 이 태의는 왜 못 고친단 겁니까? 정 낭자가 고칠 수 있다면, 분명히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까! 이 태의, 한평생을 의원으로 살았는데 고작 그 한마디 때문에, 그 여인 하나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업신여겨서야 쓰겠소이까?”
내시가 이 태의의 멱살을 쥐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내가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닐세. 내가 나를 과대평가한다 해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고.”
이 태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시도 결국 힘이 빠진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낭자를 모셔 오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전하께는 오직 이 태의뿐이에요.”
전하께는, 오직 나뿐이다.
“이 태의가 고칠 수 없다 해도, 이대로 전하께서 돌아가시는 걸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 알려 드려야죠! 우리가 전하께서 죽어가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고, 전하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있다고!”
그래. 죽기 살기로 한다는 말은, 이럴 때 나온 거겠지.
이 태의는 밖을 한번 힐끔 내다보고는 몸을 홱 돌리고 약재들을 접시 위에 주섬주섬 챙겨 담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달여 목욕통에 넣게. 이건 전하께서 드실 수 있는 탕약으로 달이고.”
이 태의의 말대로 착착 준비되자,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이 누워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가에 다다랐을 때쯤, 한 막료가 이 태의를 붙잡았다.
막료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 태의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묻고 싶은 눈치로 머뭇거렸다. 막료의 의중을 알아차린 이 태의가 느릿느릿 말했다.
“해가 지고도 전하께서 더는 토하지 않는다면 성공한 것이오. 하지만 계속해서 토하신다면…….”
이 태의가 말끝을 흐리자, 막료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 태의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태의는 잠자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면…….
“사부님, 여기 금침이요.”
방 안에 있던 아이가 상자에서 금침을 꺼내왔다. 다양한 길이의 금침들이 등불에 비쳐 쨍하게 빛났다.
이 태의는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작은 욕실 안에 뜨거운 김이 자욱하게 꼈는데도 진안 군왕의 검푸른 피부는 선명하게 보였다.
경맥을 따라 독기를 한 줄씩 밀어내는 방법으로.
이 태의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손목을 두어 번 털었다.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침술이지만, 본 적은 있어.
본 적이 있어!
- 정 낭자, 내가 자리를 피해 줘야 하오?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가 걷힌 방 안,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흐릿한 빛이 무릎을 꿇고 앉은 여인의 얼굴을 비췄다.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이 태의를 바라보았다.
- 괜찮아요. 봐도, 배울 수 없거든요.”
세상에 배울 수 없는 게 어디 있다고! 배울 배짱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더는 물러설 길이 없을 때, 배우고자 하는 배짱만 있으면 뭐든 가능해.
이 태의의 마음이 일순간 차분해졌다. 그가 손끝으로 긴 금침 하나를 뽑아 들었다.
“사부님, 할 수 있으세요?”
아이가 이 태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 봐야 아는 법이야.”
이 태의가 대답하고는 허리를 숙이고 침을 놓기 시작했다.
문밖에는 꽤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떠나야 할 사람들은 지금 짐 정리를 하고 떠나시오.”
한 막료가 대뜸 입을 열자, 모두가 막료를 쳐다보았다.
“고(顧) 선생, 지금 저희더러 떠나라는 겁니까? 지금 이럴 때, 전하를 내버려 두고 가라는 말씀이세요?”
까무잡잡한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호통쳤다.
“그대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니 떠나라는 소리가 아니오. 그대들이 살아 있어야 훗날 전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지 않겠소. 먼저들 가서 우리 쪽 사람들이 잘 뭉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다독이고 있으시오.”
고 선생이 진지하게 말하자, 한 사내가 처량한 미소를 보였다.
“전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저희가 뭉쳐 봐야 얼마나 가겠습니까.”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도 흩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겠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다고?
“뭉칠 수 있을 때까지 뭉치는 거지. 일 년이 됐든, 이 년이 됐든, 복수는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거요.”
고 선생이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선생들, 아무래도 다들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내시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내시를 쳐다보았다.
“우리 같이 전하를 모시는 아랫것은, 전하께서 돌아가신다면 필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시는 소매 안에 손을 숨긴 채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들께서는 장차 큰일을 하실 분들인데, 이대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선생들의 능력은 언젠가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위해 쓸 날이 올 겁니다. 나라를 위해 힘쓰고, 백성들의 고단함을 덜어 줄 수 있다면, 그게 설령 경왕을 돕는 일이라 해도 군왕 전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고마워하실 겁니다.
지금 떠나신다면 살길이 있겠지요. 벌써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필사적으로 뚫고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더 지체하다가, 전하께서…….”
내시가 머뭇거리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노을에 물든 구름이 바람을 따라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때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내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침은 다 놓았습니다. 이제 전하를 방으로 옮겨 주세요.”
아이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하늘 끝에 걸려 있던 노을마저 사라지고, 방 안에 등불이 밝혀졌다. 침상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바닥에 일렁였다.
“전하, 전하?”
모두의 시선이 진안 군왕에게 집중되었다. 내시가 무릎을 꿇은 채 작은 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그러나 침상 위에 누운 진안 군왕에게서는 작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 태의에게 옮겨 갔다.
“전하의 안색이 아직도 검푸른 색입니다. 도대체…….”
누군가가 이를 악물고 조용히 읊조렸다. 이 태의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침상에 누운 군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 진안 군왕의 몸이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또 구토를 하시려나 봅니다!”
여태껏 진안 군왕이 피를 토할 때마다 몸을 떨었던 터라,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황급하게 소리쳤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또 피를 토하시게 된다면, 그건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뜻인데.
“아닙니다!”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타구를 받치고 있던 내시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피를 토하시지 않았어요!”
피를 토하시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침상 근처로 우르르 몰려와 진안 군왕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몸을 떨던 진안 군왕이 금세 진정된 모습으로 숨을 고르게 쉬었다. 군왕의 입가에 흐르는 것은 침이지, 조금 전까지 토해내던 검붉은 색 피가 아니었다.
“이 태의! 지금 이건…….”
사람들이 일제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이 태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맥했다.
“드디어 괜찮아지셨습니다. 또 한 번 염라대왕에게서 전하를 끌어왔어요.”
이 태의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숨을 토해냈다. 모두가 뛸 듯이 기뻐하며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던 찰나, 이 태의가 쿵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방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 태의가 너무 기뻐서 혼절했나 보오.”
“아니에요. 사부님은 힘들어서 쓰러지신 거예요.”
“어서 다른 태의를 불러 이 태의의 상태를 살피게 하시오.”
“이제 궁에 서신을 써야겠군. 이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아무 일 없는 척 꾸며댈지 궁금하군.”
“그래도 내일 보내는 게 어떻겠소?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전하께서?”
“그게 아니라, 만에 하나 그놈들이 기어코 여기까지 쳐들어와 전하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면 어떡하오? 여기 있는 사람으로 그들을 막는 건 턱도 없잖소.”
사람들이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던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선생, 정 낭자가 왔습니다.”
문이 쾅 닫히자, 정교랑이 주춤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 앞을 밝히는 등불이 켜져 있지 않은 탓에, 정교랑은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에 홀로 서 있었다.
정교랑이 다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두드리지 마시오!”
누군가가 문 너머에서 소리쳤다.
“청을 받고 왔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문 너머에 있던 사내가 냉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정 낭자,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미 거절하셨던 것 아닌지요?”
사내가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사내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우선 상태부터 본 다음에 다시 얘기하죠.”
정교랑이 문 안으로 들어서려 발을 뗐을 때였다.
동시에 차락 소리가 들리면서, 검 네다섯 자루가 일제히 정교랑을 향해 겨눠졌다.
“정 낭자,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오늘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괜찮은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네. 전하께서는 이제 괜찮아지셨습니다.”
사내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졌구나.
정교랑이 아, 하고는 또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래도 내가 한번 보는 게 좋겠어요.”
정교랑이 걸음을 떼자, 그녀를 향해 칼을 뽑은 시위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등롱에 비친 검들이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정 낭자, 볼 필요 없습니다.”
사내가 정교랑의 앞을 막아서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낭자를 믿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온 사내를 본 방 안의 사람들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정말로 정 낭자였소?”
사람들이 물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누군가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정 낭자에게 한번 봐 달라고 하는 건 어떻겠소? 전하께서 조금 더 빨리 나아지실 수도 있고.”
그러자 방 안에 서 있던 고 선생이 실소를 터트리며 비아냥대는 투로 말했다.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아지실까 봐, 부랴부랴 달려온 거라고 생각되진 않소?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전하의 부고가 들리지 않으니, 그게 걱정된 누군가가 정 낭자를 보낸 걸 수도 있잖소? 정 낭자가 전하 가까이에서 전하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소?”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자, 고 선생이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하나둘씩 밝혀지는 등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신의로 명성을 떨치는 사람이긴 하나, 신뢰할 수 있는 우리 사람은 아니오. 이번에도 정 낭자를 믿으며 무턱대고 기다리기만 했다면, 전하께서는 벌써 목숨을 잃으셨을 거요. 그랬다면, 당연히 더 빨리 나아지실 거라는 기대도 하지 못했겠지.”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자, 다들 재빨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로 온 태의가 진안 군왕의 진맥을 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의식을 찾은 듯 잠시 끙끙거리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하께서는 어떠하시오?”
사람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태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위험하시긴 하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믿을 만한 태의 두 명이 모두 진안 군왕이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하자, 사람들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에게도 믿을 만한 자들이 있소. 우리 사람을 믿어야지, 굳이 정 낭자까지 안으로 들일 필요는 없어.”
고 선생이 단호하게 말하자, 방 안의 사람들도 동의했다.
“하온데…….”
대문 앞에서 정교랑을 만났던 사내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하온데?”
고 선생이 물었다.
“하온데 정 낭자가 어딘지 좀 이상해 보였습니다.”
사내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상하다고?
“이상하다고? 역시 수상하다 했어! 절대로 정 낭자를 여기로 들여서는 안 되오. 혹 억지로 들어오겠다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야 하오.”
아니, 아니, 그런 이상함이 아니라, 정 낭자의 모습이…….
사내가 또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고 선생이 말을 이었다.
“다시는 전하께 착오가 생겨서는 안 될 것이오.”
하긴, 전하께 다시는 착오가 생겨서는 안 돼. 지금은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사내가 하려던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침상을 지키는 태의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방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시녀는 이불을 정리하던 중, 진안 군왕이 손을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태의.”
시녀가 서둘러 태의를 불렀다.
태의가 다급하게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이불 안에 있던 진안 군왕의 손이 무언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내 무언가를 손에 쥔 것처럼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태의와 시녀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진안 군왕의 손을 뒤집자, 진안 군왕이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자세히 본 시녀와 태의가 깜짝 놀랐다.
“나무 조각? 전하의 이부자리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았던 게냐?”
태의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시녀가 서둘러 고개를 젓고는 재빨리 진안 군왕의 손에서 나무 조각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나무 조각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손에 힘을 주며 더욱 세게 쥐었다.
“놔두거라. 전하께서 통증이 심하여 잡을 것이 필요하신 걸 수도 있다. 쥐고 있는 동안 통증이 완화될 수도 있으니, 그냥 두어라.”
태의가 조용히 말했다. 시녀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진안 군왕의 손을 다시 이불 속으로 넣고 휘장을 내렸다.
실내에 정적이 흐르고, 밤이 찾아왔다.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던 정교랑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층계 위에 서서 어둠이 드리운 거리를 내다보았다.
내가 필요 없다면, 사실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
맞아, 좋은 일이야.
“교랑!”
말에서 뛰어 내린 주복은 경왕부의 구석진 외벽에 쪼그려 앉은 정교랑을 발견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기 때문에, 새하얀 말이 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주복은 정교랑이 저기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복이 덕승루에서 시종들과 두어 마디를 말하는 사이, 정교랑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정교랑이 진호를 찾으러 간 줄 알고 하마터면 진(秦)씨 저택으로 갈 뻔했다.
주복은 정교랑이 진호를 죽이러 갔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사낭을 죽인 몸종의 목을 꺾어 버렸던 것처럼.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걸 수없이 많이 본 주복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주복도 깜짝 놀랐다. 정교랑의 힘이 그렇게 셀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활쏘기에 기마를 잘하는 것도 모자라, 근거리에서 일격에 사람을 죽이는 기술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니.
게다가 정교랑이 갑자기 그 몸종의 목을 꺾어 버린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정교랑을 꽤 오랜 시간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주복은 알고 있었다. 정교랑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느낄 일에도, 언제나 담담하게 사소한 일을 대하듯 행동했다는 것을. 또 평소에는 상대에게 직접 수를 쓰는 것은 고사하고, 상대와 말 한마디를 섞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게다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몸종의 목을 꺾어 버리다니.
주복이 황급히 정교랑에게 다가가 정교랑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안 들어갔어?”
주복이 물었다.
왜 여기서 혼자 쪼그려 앉아 있는 거야? 설마…….
-이미 늦었어-
“괜찮다네요. 내가 볼 필요가 없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복은 잠시 놀랐다가 이내 격노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 새끼들이!”
주복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문가를 향해 돌진했다.
경왕부 안에 있던 시위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주복이 문가를 향해 뛰어오는 것도 모자라 문에 대고 발차기를 날리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시위들은 재빨리 문가를 향해 뛰어갔다.
주복의 발차기로 경왕부 대문에서 쿵 하는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경왕부를 수리할 때 진안 군왕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튼튼한 재질로 바꾸라고 신신당부했던 터라, 대문은 소리만 났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교랑을 안 들여보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데! 지금 우리를 갖고 노는 거야? 네놈들만 아니었다면, 그런 참담한 일을 겪을 필요도 없었다고! 문 열어, 문 열라고! 이 새끼들아, 당장 문 열어!”
대문이 열리고, 일렬로 서 있던 시위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며 주복을 조준했다. 등불 아래 비친 화살촉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카로워 보였다.
“죽여, 어디 한번 죽여 봐! 네놈들 때문에 이미 우리 사람 한 명이 목숨을 잃었어. 한 명 더 죽는다 해도 상관없으니까, 나도 죽여 보라고!”
주복이 냉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돌아와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주복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주복은 시위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리고 문가를 떠났다.
시위들이 일사불란하게 차례로 활을 거두자, 대문이 굳게 닫혔다.
대문 앞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등불에 비친 대문에는 조금 전의 일이 정말로 일어났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주복의 커다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마당에 있던 시위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선생, 저대로 내버려 둬도 됩니까?”
시위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한 막료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들이 뭘 하고 있는가?”
문가에서 밖을 몰래 내다보던 시위가 뛰어와서 대답했다.
“또 구석진 벽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내쫓을까요?”
시위의 물음에 막료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움직임을 제압할 때다. 군왕께서 확실히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뭐든 조심해야 해. 저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저대로 내버려 둬라. 우리가 문을 여는 틈을 노리는 걸 수도 있으니.”
“정 낭자가, 정말로 청을 거절했던 것이 후회되어 왔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다른 시위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막료는 냉소를 지었다.
“이미 늦었어.”
주복이 애꿎은 벽에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여긴 왜 왔어?”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면서 물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나 싶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젠 네가 필요 없다는데, 왜 아직도 여기 남아 있는 거야?”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난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살갗이 찢어진 통증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앉아 있고 싶어서요.”
정교랑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들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주복이 경왕부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에게 빚을 진 거야! 오늘 일어난 일은 다 저놈들 때문이잖아! 우리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라고!”
정교랑이 허탈한 듯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주복이 움찔거리는 정교랑의 입술을 보며 다그쳤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주복이 정교랑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알아듣지 못할 테니,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말해 봤자 나는 알아듣지 못할 테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헛수고일 테니까 말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정교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십삼 그 자식이 여기 같이 있었다면, 저 여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을 텐데.
진십삼…….
주복이 주먹을 쥐고 벽을 세게 쳤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어.
주복은 힘없이 벽에 손을 대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따귀를 올려치는 맑은소리가 짝 하고 울렸다. 고 관인이 손으로 뺨을 쥐고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아버지.”
고 관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능준을 불렀다.
“누가 네놈더러 정사낭을 죽이라고 했느냐? 내가 몇 번을 얘기해! 괜히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무슨 일이든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한다고! 죽일 거였으면, 그 여인이나 죽였어야지. 정사낭을 죽여서 뭐에 쓰겠다고! 풀을 베어 뱀을 자극하는 꼴밖에 더 돼?”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고 관인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버지, 저는 정사낭을 죽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사낭이 주 낭자와 보내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려 달라고만 했죠. 그 잠깐 사이에 얍삽한 몸종 년이 정사낭을 죽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고능준이 다시 손을 올리자, 고 관인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뒷걸음질 쳤다.
“아버지, 아버지,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그 몹쓸 계집한테 당한 거라니까요! 정사낭을 죽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고능준이 소매를 홱 털고 손을 거두었다.
“그래서 시신은?”
고능준이 한쪽에 서 있던 식객들에게 물었다. 불안에 떨고 있던 식객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검시관이 시신을 확인했고, 정사낭의 시신은 정씨 가문으로 옮겨졌습니다. 덕승루에 있던 이들은 전부 하옥되었고요.”
이리저리 서성이던 고능준이 고 관인에게 물었다.
“기녀한테는 뭐라고 말했고?”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자의 체면 이야기만 했지, 다른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 몹쓸 계집에게도 정사낭이 덕승루에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해 달라고만 했어요. 그 외에 다른 말은 일절 안 했습니다. 그 몹쓸 계집은 이미 정교랑의 손에 죽었고요.”
고 관인은 말하면서도 소름이 돋아 몸을 살짝 떨었다.
수하의 말에 의하면, 이름이 무슨 령인가 했던 그 몸종은 단번에 목이 콱 꺾여서 죽었다고 하던데.
무시무시하군. 목을 꺾어서 죽이다니!
“그러니까 아버지, 이번 일은 아무리 조사해도 저희와는 무관한 일일 겁니다.”
고 관인이 이어서 말했다.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능준이 돌연 물었다.
“경왕부에 있다고 합니다.”
식객이 서둘러 대답했다.
“경왕부라고?”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낭자는 경왕부 문턱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해 경왕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고만 합니다.”
식객이 웃으면서 말했다.
“경왕부 사람들은 다 정 낭자를 의심하는 듯했습니다. 진안 군왕의 병이 급하긴 하나, 아무 의원이나 부를 수는 없었겠지요.”
다른 식객이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정 낭자가 경왕부를 떠나지 못하는 걸 보니, 상황이 심각해진 건 분명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암암리에 태의 두 명을 더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고능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군. 일찍이 경왕의 병을 고치라는 어명도 거역했던 정 낭자인데, 군왕의 병까지 고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 여인은 이제 끝났어. 일석이조, 일거양득이로구나. 그리고 설령 군왕이 죽지 않는다 해도.”
고능준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 두 사람은 멀어지겠지.”
고능준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는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니 뭐니 하는 말들로,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질 일은 없을 게야.
“대인, 틀렸습니다.”
한 식객이 손가락 세 개를 세우면서 말했다.
“일석삼조입니다.”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아, 맞네, 일석삼조죠. 이 일을 우리가 저질렀다는 걸 아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멍청한 정씨 가문 사람들은 절대 그 사람 말을 믿지 않을 테지요.”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는 울먹이는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발에 걸린 쇠사슬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빨리 걷지 못해!”
거칠게 떠밀린 주 낭자는 요란스러운 쇠사슬 소리를 내며 창살을 붙잡았다.
“들어가! 썩을 년.”
우람한 체격의 여자 옥졸이 호통을 치며 주 낭자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고는 옥방 안으로 떠다밀었다.
주 낭자는 악 소리를 지르며 옥방의 바닥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옥졸은 옥방 안으로 발을 들이지도 않고 곧바로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주 낭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좋은 옷감을 쓴 비단옷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낭자의 은인이잖소.”
주 낭자의 머리 위에서 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땅을 짚고 허리를 펴려던 주 낭자는 순간적으로 팔에 힘이 빠졌다.
“소인도 알고 있습니다. 정 공자님은 좋은 분이지요.”
“아니, 정 공자를 말하는 게 아니오. 내가 말한 사람은, 당신 가문의 원수인 유 교리를 죽인 사람이지.”
진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주 낭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말 그 여인이!”
유 교리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한동안 저잣거리를 뜨겁게 달구긴 했으나, 누가 유 교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증거를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 교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에 대해 별별 소문이 다 돌았지만, 주 낭자는 그 사람이 정 낭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진호는 주 낭자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두운 감옥 안, 기름 등잔의 불빛 아래로 비치는 진호의 미소는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당연하지. 내가 정 낭자와 함께 한 일이거든.”
주 낭자가 놀란 표정으로 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물론 대부분은 정 낭자가 했고, 나는 옆에서 살짝 거들기만 했지. 그러니 주 낭자는 주씨 가문에서 기념비를 세워야 했을 은인을 제 손으로 해친 셈이오.”
진호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주 낭자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면서 울먹였다.
“아니에요. 소인이 그런 게 아닙니다. 소인이 아니에요.”
주 낭자가 진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진 공자님, 정말 소인이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소인은 정말로 정 공자님을 죽이려고 한 적 없어요. 그런 생각조차도 한 적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런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고? 누군들 그런 생각이나 했겠어?
나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하지만…….
진호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주 낭자를 흘겨보면서 손을 내쳤다.
“하지만 결국엔 당신 때문에 정사낭이 죽었어! 당신이 정사낭을 죽인 거라고!”
진호가 주 낭자의 멱살을 붙잡고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정 낭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죽였어. 정 낭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정 낭자가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잃었는데! 당신 때문에 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고!”
목에 옷이 걸려 얼굴이 새빨개진 주 낭자는 숨쉬기가 힘들어 캑캑거렸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요.
진호를 바라보던 주 낭자가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마 지금이 진 공자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순간이겠지.
주 낭자는 자신의 얇은 여름옷을 붙잡고 있던 진호의 손에서 어렴풋한 온기를 느꼈다.
“차가 식었을 텐데. 호흡이 안정적이지 않은 걸 보니, 주 낭자도 나처럼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러니 따뜻한 차를 마셔요.”
“그럼,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나처럼’이라는 말에 감사드릴게요.”
주 낭자가 자신에게 따뜻한 차를 건넨 사내를 쳐다보았다.
주 낭자는 사내의 속에 응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사내는 주 낭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주 낭자의 걱정과 관심을 눈치챘다.
“지음(知音)에 감사하는 게 아니고요? 지음이 아니었다면, 낭자가 내 마음을 위로하려고 연주했다는 걸 알지 못했을 텐데.”
사내가 설핏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공자님의 몫이지요. 지음인지 아닌지는, 공자님께서 소인의 뜻을 알아주시는지 아닌지에 달렸습니다. 공자님을 위해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지는 소인의 몫이죠.”
주 낭자가 미소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소인의 본분이기도 하고요.”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참으로 좋은 본분이오. 그러고 보니 꼭 그 여인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진 공자님이 웃었던 것도, 기분이 좋아 보였던 것도, 사실은 나 때문이 아니었겠죠. 진 공자님은 그 여인과 어딘가 닮아있는 저의 본분 때문에 웃었던 거예요.
주 낭자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진호가 주 낭자의 멱살을 놓자, 주 낭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정사낭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정 낭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게 정사낭을 죽게 만든 거야. 그런데도 아직 당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나? 이 모든 게 다 당신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진호가 소리치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주 낭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예, 다 소인 때문이에요.”
주 낭자가 고개를 들었다.
“진 공자님이 소인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정 공자님은 소인 때문에 죽은 겁니다.”
주 낭자를 내려다보던 진호의 얼굴에서 냉랭한 웃음이 번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겠지.”
진호가 천천히 말했다. 주 낭자가 눈물을 머금고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인, 잘 알고 있습니다.”
진호는 대답을 들은 즉시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자, 주 낭자는 텅 빈 옥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낮은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의자를 향해 기어가, 허리띠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주 낭자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의자 위에 올라섰다.
이 옥방에는 창문도 있네.
주 낭자는 기뻐하며 창틀에 천천히 허리띠를 묶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매듭지은 허리띠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아, 바깥이 보이네. 곧 해가 뜨겠구나.
더 높이, 더 높이. 더 잘 보이게, 더 높이.
주 낭자가 까치발을 들었다.
애초에 어머니가 이렇게 돌아가실 때, 나도 같이 데리고 가셨어야 했어. 뭐, 지금도 늦지는 않아. 곧 있으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뵐 수 있을 테니까.
이번 일로 내 명성은 바닥을 치게 됐지만, 내 바람대로 순결을 지켰으니 괜찮아.
주 낭자는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꽤 잘 살았어.
탁 소리가 들리고, 낮은 의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무렵, 감옥 밖에 서 있던 진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한 놈씩.
진호는 얼굴을 가릴 정도로 두모를 푹 눌러 쓴 채, 말을 타고 떠나갔다.
해가 차츰 방 안으로 들어올 무렵,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시가 잠에서 깼다. 내시는 반사적으로 침상을 바라보았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사람이 두 눈을 뜨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시는 잠시 넋이 나간 얼굴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침상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전하?”
내시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진안 군왕을 부르자, 진안 군왕이 작은 소리로 음, 하고 대꾸했다. 내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어요!”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리자,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주복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마차 한 대가 황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설마…….
몸을 일으킨 주복은 무언가에 홀린 듯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갑자기 주복의 등 뒤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주복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어이?”
말에 올라탄 정교랑의 모습을 본 주복이 놀라 소리쳤다.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가요. 날도 밝았고, 앉고 싶을 만큼 앉아 있었으니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아직 해야 할 일도 많이 남았고요.”
주복이 경왕부를 흘깃 쳐다보고는 정교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복도 서둘러 자신의 말을 끌어와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새벽녘의 파란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앞뒤로 말을 타고 나란히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마마!”
안비의 목소리가 황제의 침궁에 울려 퍼졌다.
황후는 황제에게 마지막 탕약 한 숟가락을 먹인 뒤, 궁녀가 건넨 따뜻한 손수건으로 황제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고 있었다.
“마마, 지금 용안이나 닦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안비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침상에 걸터앉은 황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진안 군왕한테 일이 생겼대요.”
“무슨 일이?”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왕부에서 사람이 왔는데, 군왕 전하가 맹독에 중독되었다는데요? 태후마마께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우셨고요. 어제 전하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다고, 자기 때문에 전하가 음독을 시도한 것 같다면서요.”
안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황후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구나. 그 늙은이가 그리 독하게 나올 줄이야.”
“마마, 정말로 태후마마일까요?”
안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태후 외에 또 누가 그 아이를 해칠 수 있겠느냐.”
황후가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그 사람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지.”
“그럼 전하는 지금…….”
안비가 말끝을 흐리면서 물었다.
“어제 일어난 일을 지금에서야 보고한다는 것은, 군왕의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뜻이야.”
황후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침상에 앉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종친들은 더욱 겁을 먹을 텐데요. 더는 마마와 양자 입적을 논하지 않으면 어쩌죠?”
안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황후는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야 모를 일이지. 이 세상에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거는 사람이 더 많은 법이거든. 진안 군왕이 없어진다면, 그 기회가 다른 종친들에게 갈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
황후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을 덧붙였다.
“누가 제위에 오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겠지.”
경왕부 안. 휘장을 내린 실내는 어둑했다.
“태후마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침상 위에 누운 진안 군왕이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소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태후마마께서 먼저 전하께서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이라며 단정 지으셨습니다.”
하긴, 태후마마께서는 필히 내가 음독자살했다고 말씀하셔야겠지. 그게 아니라면 태후궁 내에서 내게 독을 쓴 사람을 조사하셔야 할 테니까.
몸이 회복되지 않은 터라, 진안 군왕은 아직 바깥바람을 쐬지 못했다. 방의 구석진 곳에 휘장을 친 채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마마께서 내가 연의왕이 되길 바라신다면, 내가 마마의 바람을 이뤄 드려야지.”
“죽지 않았다고?”
경왕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진안 군왕이 죽지 않았다는 소식은 결국 새어 나갔다.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알게 된 고능준은 부아가 치밀어 탁자를 내리쳤다.
“일이 또 이리 틀어지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정 낭자를 감시할 게 아니라 이 태의를 먼저 해치울 걸 그랬습니다. 우리 쪽에서 독의 함량을 늘린 만큼, 저쪽 이 태의의 의술도 늘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막료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지금 그런 말을 해서 뭐 하나?”
고능준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대인, 죽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진안 군왕은 이제 반쪽짜리 목숨밖에 안 남은지라, 어쩌면 남은 세월을 침상에서만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수하가 서둘러 말했다.
“그 말이 참이냐?”
고능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예. 소인이 태후마마께서 보낸 사람과 함께 진안 군왕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정말입니다.”
수하는 조금 전에 자신이 본, 생기 없는 얼굴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진안 군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제 누구 하나 멀쩡한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경왕을 비웃을 수는 없겠구나. 진안 군왕 그놈의 명줄이 꽤나 질기군. 이번엔 어찌어찌 살아남았다지만, 또 수상쩍은 행동을 했다가는 그땐 놈의 숨통을 기필코 끊어 버려야겠다.”
고능준의 말에 모두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경왕의 일을 좀 의논해볼까?”
걸음을 떼려던 고능준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아 참, 그리고 나머지 종친들도 잘 지켜보거라. 또 누가 연의왕을 자처할지도 모를 일이니.”
태후가 보낸 사람이 돌아가자, 경왕부는 진안 군왕을 보러오는 손님을 일절 받지 않았다.
마침내 조용해진 방 안에서 내시와 이 태의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 태의, 어서 가서 잠깐이라도 쉬십시오.”
“전하께서는 어떠하신가?”
“약을 드시고 아까 막 잠드셨습니다.”
이 태의는 휘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이불을 살짝 걷어 진안 군왕의 손을 이불 밖으로 꺼냈다. 진맥을 짚고자 진안 군왕의 손을 뒤집던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이 무언가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이 태의가 맥을 짚으려던 손으로 진안 군왕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빼내려 했다. 진안 군왕이 손을 움찔거리고는 이불 안으로 손을 숨겼다.
이 태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두 눈을 뜬 채 이 태의를 쳐다보는 진안 군왕의 모습이 보였다.
“전, 전하를 방해했습니다.”
이 태의가 서둘러 말하고는 기쁜 기색으로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또 이 태의 덕분에 살았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선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는 말이 있지요. 다행히도 하늘이 무심치 않았습니다.”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전하, 신이 맥을 한 번 짚어봐도 되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손을 이불 밖으로 빼내고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 올려진 나무 조각을 본 이 태의가 흠칫 놀랐다.
아, 이거였구나.
- 아니다. 기다려야 한다. 정 낭자를 기다려야 해. 기다리기로 해 놓고, 내가 낭자를 기다리기로 해놓고, 먼저 가버리면 안 돼.
이 태의의 눈앞에 죽을힘을 다해 문틀을 붙잡고 있던 진안 군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태의는 시선을 떨구고 조용히 맥을 짚었다.
“어제 전하의 용태는 꽤 위독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바로 약을 중단하고 침으로 경맥까지 막았는데,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
내시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내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길 테니.”
막료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태의가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키자, 내시와 막료가 일제히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아니면, 정 낭자를 다시 모셔와 상태를 보게 하는 건 어떻겠소이까?”
이 태의가 말했다. 내시와 막료의 얼굴이 일순간 사색이 되었다.
“그럼…….”
내시가 놀라서 소리치자, 이 태의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 그래야 좀 더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그렇소.”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 낭자가 마음 편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제 이 태의가 혼자 힘들게 전하를 구하고 쓰러질 필요도 없었겠지요. 이 태의는 정 낭자 없이도 전하를 구해 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더는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막료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전하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이만 물러나시지요.”
내시가 마른기침하고는 진안 군왕을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내시와 막료는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휘장이 내려지고, 밖으로 걸어가던 막료가 이 태의에게 말했다.
“자꾸 정 낭자 이야기 좀 꺼내지 마십시오.”
“정 낭자의 의술이 정말 대단해서 그렇소.”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그 여인은 우리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전하께서 사경을 헤맬 때도 고치지 않겠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뭐하러 머리를 조아리면서 애걸복걸해야 하냔 말입니다! 전하의 병은, 정 낭자가 없어도 낫지 않았소이까!”
휘장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에 진안 군왕은 나무 조각을 천천히 세게 쥐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나뭇결이 손바닥을 찌르는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 낭자가, 내 병을 돌봐 주지 않겠다고 했다고?
“고 선생, 듣다 보니 그 말은 좀 이상하외다. 만약 정 낭자가 없었다면, 전하께서는 정말로 가망이 없으셨을 것이오.”
진안 군왕이 손을 세게 쥐면서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정 낭자가…….
“내가 전하께 쓴 침술은 정 낭자를 보고 배운 것이오. 당초 진 노태야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 정 낭자가 썼던 침술을 옆에서 보고 배웠지.”
“그럼 그건 이 태의 스스로 배운 것이지요. 그러니 이 태의가 전하의 목숨을 구한 겁니다. 정 낭자에게만 의지했더라면, 전하께서는 일찍이 돌아가셨을 겁니다.”
막료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꾸하자, 이 태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 선생, 그리 말하는 것도 틀렸다 볼 순 없지만, 정 낭자가 아니었다면, 전하께서는 일찍이 오 년 전에 목숨을 잃으셨을 것이오.”
막료와 내시가 흠칫 놀랐다.
“우리처럼 손재주를 업으로 삼는 사람은 항상 스승을 존경해야 하오. 그러니 침 하나의 가르침도 스승으로 모셔 마땅하지. 고 선생이 정 낭자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나, 최소한 내 앞에서는 정 낭자 험담을 하지 마시오.”
이 태의가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났다.
막료와 내시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태의는 다 좋은데, 사람이 저렇게까지 겸손해서야 원.”
막료가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내시가 머뭇거리다가 진안 군왕이 누워 있는 방을 바라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면, 이 태의 말대로 정 낭자를 한번 모셔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 몸이 정말 많이 상하셨잖습니까.”
막료가 내시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정말 많이 상하셨지. 지금 전하의 몸으로는 조금의 풍파도 견디지 못하실 걸세. 그래서 나는 감히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 없네.”
“정 낭자가 어제 문밖에서 밤새 앉아 있었다지요?”
내시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더군. 수위들 말로는 우리가 궁에 사람을 보낼 때가 돼서야 자리를 떠났다고…….”
막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의 방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내시가 쏜살같이 방 안으로 달려갔다. 막료가 내시를 뒤따라 뛰어 들어갔을 무렵에는, 시녀 두 명이 무릎을 꿇고 진안 군왕을 부축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휘장 기둥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댔다.
“또 구토하시려는 건가?”
내시가 놀라서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침상 위에 걸터앉은 진안 군왕이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여길, 여길 왔었다고?”
진안 군왕이 물었다.
누굴 말하는 거지?
내시가 멈칫했다.
“정 낭자가, 어제, 여길 왔었다고?”
진안 군왕이 내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끊어 말하자, 막료가 내시를 흘겨보고는 한발 먼저 나아가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막료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숨을 몰아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몸 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을 꼭 쥐고 있던 진안 군왕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걷혔다.
“그러게 내가, 내가, 기다리자고 했잖나. 내가, 정 낭자를 기다리지 않아서, 내가, 믿음을 져버린 것이야. 정 낭자가, 화, 화나진 않았겠지?”
진안 군왕이 침을 삼켜 가며 어렵게 말했다.
“전하! 정 낭자가 신뢰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믿음을 져버리신 게 아닙니다.”
막료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튼소리. 만약 이 세상에서, 아직,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건 분명히, 정 낭자일 걸세.”
진안 군왕은 숨을 헐떡이느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전하, 정 낭자는 어제 전하의 상태를 보지도 않고 치료를 거절했습니다.”
막료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말했다.
“그럼, 정 낭자가, 치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야.”
진안 군왕이 곧바로 반박했다.
막료는 눈만 부릅뜰 뿐, 진안 군왕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내시는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진안 군왕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잠깐의 시도와 짧은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 진안 군왕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제, 왜 정 낭자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는가?”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었던 때인지라, 정 낭자를 섣불리 안으로 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제는 정말 상황이 너무 위험하고 긴박했습니다.”
막료가 대답했다.
그 여인이 어제 문밖에서 밤새 앉아 있었다고?
그 여인이 어제 문밖에서 밤새…….
“정 낭자를, 만나야겠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지금 이런 시기에 어찌!”
막료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진안 군왕은 막료를 쳐다보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 낭자를 만나야겠다.”
“뭐지?”
정씨 저택 앞에 도착한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저택 대문에 붙어 있는 하얀 종이를 바라보았다. 선홍색 도부(桃符: 악귀를 쫓는 복숭아나무 부적) 또한 가려져 있었다.
상중인가?
“나를 찾아왔다고요?”
방에서 걸어 나온 여인이 회랑 아래에 서서 물었다. 문가에 서 있던 남자가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소생은 진안 군왕 전하의 사람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는 차마 회랑 아래 선 여인을 똑바로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옆에 서 있던 시녀를 곁눈질로 흘깃 쳐다보았다.
눈이 새빨갛게 부었고,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하군. 정말로 상을 치르는 중인가?
경왕부 사람들은 경계 태세를 취하며 밤을 꼬박 지새웠고, 조정 중신들과 금군 병사들의 동태를 살피느라 잔뜩 긴장해 있던 터라 다른 소식은 일절 접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죠?”
정교랑이 물었다. 남자가 잡생각을 떨치고 다시 한번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께서 낭자를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집에 상이 있습니다. 집안 어른이 계시지 않아 직접 상을 치러야 해서, 지금은 따로 손님을 만나기 힘들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남자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정씨 가문에 또 일이 생겼다.
소식은 이미 어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한 터라, 오늘은 다리 위에서 차를 파는 노점의 점원마저도 그 일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었다.
“주 낭자가 품에서 비수를 팍 꺼내고는 비장하게 한마디 하더이다. ‘당신이 내 마음을 저버린다면, 소인이 당신의 그 마음을 파내 버리고 말겠어요.’”
점원은 한 손으로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난초 모양을 만들고, 국자가 들린 다른 한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저으며 연극에 심취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 중 하나가 점원의 말을 끊었다.
“어이, 어이. 그게 아니잖소. 정 공자를 죽인 건 주 낭자의 시녀라던데? 정 공자가 주 낭자를 강제로 겁…….”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오만 관이나 내놓은 정 공자가, 강제로? 오만 관이면 덕승루에 있는 모든 기녀와 하룻밤을 보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시 별실 안에는 주 낭자와 정사낭,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드는 시녀와 사환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정씨 가문의 시위들이 바로 문밖에 서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하고요.”
“차에 약을 탔다더군. 정사낭을 죽인 건 주 낭자의 시녀인 춘령이고. 아, 춘령도 강주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럼 그 시녀는 무슨 이유로 정사낭을 죽인 거요?”
소문을 들은 막료와 수하들이 한마디씩 거들던 사이, 한 막료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수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주 낭자는 어제 감옥에서 허리띠로 목을 매달아 자결했고, 춘령은 정 낭자가 현장에서 목을 꺾어 죽였어요. 당시 정 낭자는 별실에 도착하자마자 춘령에게 딱 한마디를 물었다고 하는데.”
“네가 한 짓이냐?”
어딘가에서 허약한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갑자기 이 대목에서 저런 목소리가 들리니, 수하와 막료들은 깜짝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모두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베개에 몸을 기댄 채 침상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보였다.
“그 여인이 그리 물어봤지?”
진안 군왕이 말을 덧붙였다.
수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자 진안 군왕은 힘없이 미소지었다.
“네. 전하께서 생각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정 낭자의 물음에 그 시녀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정 낭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하가 말끝을 흐리면서 두 손으로 목을 꺾는 시늉을 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누군가를 직접 죽인 적은 없지만, 살면서 한 번 이상은 살인을 목격한 적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정교랑이 춘령의 목을 꺾어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들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여인이 이성을 잃고 칼로 마구 찔렀다면, 거기까진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손으로 사람의 목을 꺾어 죽였다면…….
그건, 피를 보는 것보다 더 참혹한 방식이야.
“그래서 어제 정 낭자가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고 제가 그랬잖습니까.”
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사내에게 향했다.
“자네가 말했었던가?”
누군가가 물었다.
말했긴 했나?
“어제 보니까, 정 낭자의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까.”
사내가 대답했다.
어제 정 낭자는 덕승루에서 곧장 이리로 왔던 건가?
“이번 일이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그 말씀인즉, 정 낭자가 전하를 치료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누군가가 정사낭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했다는 겁니까?”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무 공교롭지 않나.”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전하, 세상에 공교로운 일이 어디 한둘입니까? 정사낭이 덕승루에서 겁도 없이 날뛸 때, 정 낭자가 나서서 천금을 썼던 것도 주 낭자의 계략이었지요. 주 낭자에게 당한 게 있으니, 정사낭은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주 낭자를 희롱했을지 누가 압니까? 정사낭을 납치하는 게, 그리 쉬웠겠습니까? 당시 정씨 가문의 시위가 넷이나 현장에 있었답니다. 주씨 가문의 사람과 정 낭자가 덕승루로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문 앞에 서 있던 시위들은 한참 후에야 윗전이 죽은 걸 발견했을 겁니다.”
고 선생이 조소를 보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가 정사낭을 납치한 것도 아니고, 당시 정사낭이 덕승루를 떠나지 못할 만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정사낭 본인이 덕승루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죠.”
말을 끝낸 고 선생이 시위 한 명을 불렀다. 문밖에서 시위가 들어오자, 고 선생이 말했다.
“그날 네가 본 것과 정 낭자가 대답한 바를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예. 그날 정 낭자는 진씨 가문의 십삼 공자와 꽃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병은 고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하의 상태는 볼 필요도 없고, 자기는 고칠 수도 없다면서 저희더러 다른 의원을 부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어떻게든 정 낭자를 데려오려 했는데, 주씨 가문의 육공자가 갑자기 저희를 때렸습니다.”
시위의 말이 끝나자, 고 선생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들으셨는지요? 정 낭자는 그날 진십삼과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 선생이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상소문으로 가득 찬 함이 놓여 있었다.
“저건 태후마마께서 전하께 보내온 상소문 더미입니다. 전부 전하를 탄핵하는 내용이지요. 그리고 저 상소문을 쓰도록 앞장선 자가 바로 진씨 가문 자제이고요.”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아무래도 정 낭자는 진씨 가문을 선택한 듯합니다.”
실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