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양(楊) 황태후 이야기
진혜제의 황태후인 양지(楊芷)의 부친 양준(楊駿)은 권력을 남용하여 당시 황후였던 가남풍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가남풍은 여남왕(汝南王)과 초왕(楚王)을 설득하여 피비린내 나는 정변을 일으키고 양준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대신들을 종용하여 황태후 양지가 반역에 동참하였다는 상소문을 쓰게 했습니다. 진혜제는 황후 가남풍이 원하는 대로 황태후 양지를 폐서인하고 금용성(金墉城)에 유폐했죠. 한때 황태후였던 양지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양견(楊堅)이 수나라를 세웠던 이야기
주선제(周宣帝)가 죽자, 당시 8살이었던 우문천(宇文闡)이 제위에 올라 주정제(周靜帝)가 됩니다. 주선제의 외조부였던 양견은 재상의 신분으로 주정제의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양견은 주정제를 폐하여 개공(介公)으로 삼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국호를 수(隨)로 바꿨죠. 이로써 북주(北周)가 망하고 수나라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어찌 감히-
정교랑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주복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당은 붉게 저무는 석양을 배경 삼아 분주하게 짐을 정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 여기, 그건 여기에 넣어야 해.”
“안 들어가면 괜히 쑤셔 넣지 말거라. 그냥 버리고 가면 돼.”
주 노야는 마당에서 사환과 여종들을 부리면서 마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주복이 주 노야에게 다가가 말하자, 주 노야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교랑이 돌아왔어요.”
주복이 말했다.
등불을 환히 밝혀 둔 대청에서 주 노야는 식객들과 사환들의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진 상공이 태후를 이용해서 고능준을 내쫓으려고 해? 게다가 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도 반대했다고? 정말이지 배짱 두둑한 자로구나. 양견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태후를 몰아붙였으니, 고능준이 조정에 남을 수 있는 구실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셈이야.”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진소가 섭정하는 것 또한 조조(曹操) 꼴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막료가 말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조정 대신들은 진소가 조조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앞다투어 강직한 충언을 바치고 외로운 군주를 목숨 바쳐 보필할 생각이겠지. 어쨌든 바보를 태자로 책봉하려던 사람과 자기가 섭정을 하겠다며 태후에게 물러나라는 말을 한 사람이 각각 오명을 떠안은 셈이니, 나머지 대신들은 마음 편하게 어린 황제를 보필하며 깨끗한 신하 노릇을 하면 되지 않겠나. 누군들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두고두고 기억될 명성을 얻고 싶지 않을꼬.”
주 노야가 감탄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진 상공은 폐하를 위해서, 폐하의 혈통으로 강산을 이어가고자 한 것이니, 오명을 뒤집어쓰는 일을 감수하며 후환을 제거할 생각이로군. 그자는 절대 폐하의 성은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야. 나였다면, 절대로 진소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걸세.”
방 안의 사람들도 감상에 젖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 노야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하지만 그건 우리와 무관한 일이다. 교랑이 풀려났다는 건, 태후와 고씨 가문이 지금은 교랑을 손 볼 시간이 없다는 뜻이야. 일단 태자를 책봉하고, 수렴청정부터 시작하는 게 급선무라는 소리지, 교랑이 앞으로도 무사할 거라는 뜻이 아니다. 태자가 책봉되고 누가 정사를 보좌할지 결정된 후라면, 황실은 분명 교랑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주 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재촉했다.
“어서 빨리 짐을 챙기거라. 밤사이에 경성을 나가 섬주로 향할 것이다.”
주복이 다급하게 일어서서 주 노야의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 그야 모를 일이잖습니까.”
주 노야가 주복을 쳐다보았다.
“뭐가 모를 일이라는 것이냐?”
“태자가 책봉되고 누가 정사를 보좌할지 결정된 후에도, 교랑이 처단될지는 모를 일이라고요.”
주복이 주 노야의 눈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주 노야는 갑자기 머릿속이 펑 하고 터진 듯했다.
- 설마 잊은 거요? 제일 처음 중매를 언급하고, 이 혼사를 추진시켰던 장본인이 누군지?
아 참, 그게 평왕이었지!
- 그렇다면, 이번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이 일을 해결하는 건 쉽지만, 그 대가로 우리 주씨 가문의 미래를 맞바꿔야겠지.
-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그래, 맞아!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도 교랑은 사소한 일이라고 했어.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교랑의 말대로, 그때의 일이 사소한 일이 되어 버렸고.
설마, 평왕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닌가?
주 노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어머니, 보이십니까. 어머니께서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던 외손녀가 이런 괴물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으냐.”
고능준이 책을 내려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런 믿음직한 충신이 있으니, 폐하께서 얼마나 마음이 편하시겠느냐.”
고 관인이 다급하게 고능준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아버지, 태후마마께서 더는 조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셨더니, 진소 그 망할 놈이 궁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합니다. 그놈이 정말 마마를 사지로 모는 게 아닙니까!”
“그런 말까지 했으니, 진소도 이미 자기가 끝난 걸 잘 알고 있겠지.”
고능준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고 관인이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진소 그놈이 양견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고씨 가문은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
고능준이 웃었다.
“그야 쉽지.”
고능준이 상소문 하나를 고 관인을 향해 던졌다.
“네가 아비를 대신해서 주청을 올리고 오너라.”
뭐라고요?
의아한 얼굴로 상소문을 펼쳐 본 고 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직을 청하다니!”
상소문을 건네받은 태후가 놀라서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진소 그놈 때문에 내 손자와 나를 내팽개치고, 앞으로는 신경 쓰지도 않겠다는 게냐!”
태후가 격노했다.
“이건 우리 방씨 가문의 황위이니라. 황권은 방씨 가문의 손에 있는 것이지, 대역무도한 간신들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진소 그놈이 애가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나라를 망칠 사람이라고 욕을 했었지? 그렇다면 애가가 진소의 그 충심을 받아들여 그 목을 베어 버리겠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예를 올렸다.
“마마, 마마께서 받아들이실 것은 진소의 성의가 아니라, 폐하의 강산입니다.
진소의 말이 맞습니다. 경왕이 제위에 오르면, 만천하의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겁니다. 조정 또한 불안에 떨 테고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진소의 말대로 해야 합니다.
마마와 경왕을 위해서라도, 마마께서는 꼭 그리하셔야 합니다. 마마께서 진소의 섭정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의 뜻에 굴복해 윤허하시는 게 아니라, 방씨 가문이 무사히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태후가 흐린 시야로 고능준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자네가 가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저들은 자네가 떠나기도 전부터 벌써 애가를 이리 못살게 굴고 수렴청정도 못 하게 하는데.”
“마마, 얻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내어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잖습니까.”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자가 달라고 했으니, 우리는 주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달라고 해서 가지게 된 것을, 그자가 잘 지켜 나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고, 우리의 탓도 아닙니다.”
진소가 궁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지 하루 만에 태후가 근정전에서 조회를 재개했다. 내시가 고능준이 올린 사직 상소를 읽고 나자, 일순간 근정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이제 만족하시오?”
태후의 목소리가 휘장 너머로 들려왔다.
“마마께서 진정 현명하십니다.”
태후의 삐딱한 태도에도 진소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허리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신 진소는 경왕 전하를 황태자로 책봉하시길 간청하옵니다.”
뒤이어 다른 대신들도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신, 경왕 전하를 황태자로 책봉하시길 간청하옵니다.”
더 많은 대신이 차례로 나와 무릎을 꿇고 청을 올리자, 태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허하겠소.”
태후가 입을 열자마자, 문밖에서 내시 하나가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황후마마 납시오.”
황후?
근정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휘장 뒤에 있던 태후도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가 어찌 나랏일을 논하는 조당에 들어오는 것이오!”
어사대 관리가 나와서 말했다.
“폐하께서 위독하시니, 황후 또한 대리청정을 위해 조회에 들어올 수 있소.”
누군가가 어사대 관리의 말을 반박했다. 역사에 황후가 대리청정한 선례가 있기에, 어사대 관리는 뭐라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주춤했다.
어사대 관리가 주춤하는 사이, 황후는 이미 근정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밖에서 당직을 서는 내시들도 감히 황후의 앞을 막지는 못했다.
화려한 장식에 조복을 갖춰 입은 황후는 원래 황궁 내에서 서열 3위였지만, 가장 높은 서열이었던 황제가 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서열 2위가 되었다.
“황후, 전갈도 없이 어찌 조회에 나온 것인가?”
태후가 물었다.
황후가 대신들 사이를 가로질러 옥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황후는 태후에게 정중히 예를 올린 뒤, 몸을 돌려 대신들을 내려다보았다.
“본궁이 듣자하니 태자 책봉을 논하고 있다던데, 결론이 무엇이오?”
황후의 말을 들은 대신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황후가 정말로 어떤 결론이 났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결론이 궁금했다면, 굳이 근정전까지 행차하지 않아도 조회가 끝남과 동시에 알 수 있었을 테니까.
“황후! 태자 책봉 안건은 이미 결정났네. 그러니 거처에 가서 조서를 기다리시게.”
태후의 호통에도 황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물었다.
“누가 태자로 결정되었습니까?”
“당연히 경왕이지.”
태후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애가가 아직 제대로 따지지 못한 것도 있는데, 감히 먼저 나서서 소란을 피워?
“경왕은 천일지표(天日之表: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 곧 제왕의 얼굴을 가리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본궁은 동의하지 못합니다.”
황후가 말했다. 근정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역시, 역시!
관리들이 속으로 외치면서 결례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들어 두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태후가 화를 참지 못하고 휘장을 들어 올리며 밖으로 나왔다. 조복을 입은 채 옥좌 앞에 대립한 두 여인은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황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겐가?”
태후가 격노하여 소리치는데도 황후는 담담했다.
“경왕은 천일지표가 없고 정신이 온전치 않기에 태자로 책봉될 수 없습니다.”
더욱 놀란 조정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그들은 황후와 태후 사이의 간극이 엄청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황후가 불충과 불효의 오명을 무릅쓰고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할 정도라면…….
“그럼, 황후마마의 뜻은 어떠신지요?”
황후와 태후가 대치 중인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조정 대신들이 감히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누군가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로 향했다. 황후의 뜻이 어떻냐고 묻는 것은, 진소가 태후에게 태자 책봉을 청한다는 말만큼이나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 말이었다.
누구지?
무수히 많은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키 큰 사내에게로 향했다.
장순! 또 장순이라니!
올 게 왔다는 생각에 몸 앞으로 내려두었던 황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대단한 여인이로구나! 무려 장순을 설득하다니! 황후가 언제 장순을 설득했지? 무슨 말로 장순을 설득했을까?
장순은 혈통의 존비를 가장 따지고 가리는 유학자인데, 어떻게 양자 입적에 동의할 수가 있단 말인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장순이 홀판을 든 채 침착하게 예를 올렸다.
“황후마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순이 두 번째로 질문했을 때, 하마터면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할 뻔한 황후가 정신을 차렸다. 황후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고자 하오.”
종친, 양자, 입적!
황후가 조당에서 내뱉은 이 말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경성 곳곳이 들썩였다.
작가의 말:
복의(濮議) 논쟁
송나라 인종(仁宗)은 후사가 없었기에, 그가 죽은 뒤 조정에서는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의 아들인 조서(趙曙)를 양자로 들여 황위를 계승케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송나라 영종(英宗)이지요. 그런데 영종이 제위에 오른 지 보름 만에 당시 재상이었던 한기(韓琦)가 영종의 생부, 즉 복안의왕에 대한 명분을 정확히 하라는 주청을 올려 조정에서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문무백관이 팽팽히 대립하던 중, 영종은 생부인 복안의왕 또한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 여회(呂誨), 여대방(呂大防), 범순인(范純仁) 세 사람을 지방으로 좌천시키고,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18개월 만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조(曹) 태후 이야기
송나라 영종과 양모 조 태후의 사이가 좋지 않아, 조 태후가 재상에게 울면서 영종의 불효를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을 위해-
“황후가 경왕은 천일지표가 없다고 했다는군.”
“천일지표가 뭔데?”
“쉽게 말하면 못생겼다는 뜻이지.”
“뭐? 못생겼으면 황제도 못 하나?”
“거 아둔한 사람 같으니라고. 경왕이 왜 못생겼겠나? 바보니까 못생겼지! 황후께서는 바보가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거요.”
“바보가 어떻게 황제를 해? 황후께서 맞는 말씀을 하셨군!”
“그래도 경왕은 폐하의 유일한 혈통인데, 친자를 내치고 양자를 들여 황위 계승을 하고 싶겠소?”
세간은 황위 계승과 관련된 이야기로 왁자지껄했다.
“조당은 어떠한가?”
진 노태야가 물었다.
“조당도 어지러워졌습니다.”
노복의 대답에 진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당도 어지러워졌다고? 그건 좀 의외구나. 정말로 종친을 태자로 책봉하고자 하는 이가 있단 말이냐?”
진 노태야가 손에 든 잔을 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장강주가 황후의 제안에 동의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요. 그가 앞장섰으니, 고민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도 당연지사입니다.”
노복이 대답했다.
하긴, 무슨 일이든 맨 처음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야. 누구든 먼저 앞장서기만 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이해득실을 따지며 좀 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지. 진소가 제일 먼저 나서서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겠다고 말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닌가.
진 노태야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 뒤에는?”
노복이 쓴웃음을 지었다.
“태후께서 황후께 삿대질하며 욕을 하는 바람에 조당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어사대 관리들이 나서서 상황을 중재하고 조회를 중단했지요.”
조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애들 장난이 아니고, 집안 다툼이 아니다. 그런데 태후가 툭하면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와 욕을 한다고?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자신의 기분조차 조절하지 못하는 태후가 자신의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천자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수렴청정을 한다면, 훗날 조정이 얼마나 혼란스러워질지는 안 봐도 뻔하구나.
“태후가 그런 식으로 나오게 되면, 본디 아무 생각 없이 경왕을 태자로 세우려던 대신들도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하겠지. 태후가 또 점수를 잃었군.”
진 노태야가 갑자기 진소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노야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조당이 혼란스럽다 보니, 모두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노복이 대답했다.
혼란스럽기야 하겠지. 원래는 섭정과 수렴청정, 이렇게 두 분파로 나뉘면 될 것을, 양자 입적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뒤엎어지겠구나. 꽤 소란스러워지겠어.”
진 노태야가 중얼거리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읊조렸다.
“황후는 왜 갑자기 양자 입적 이야기를 꺼냈을까?”
비록 황제의 친자가 바보라고는 하나, 황제의 대를 이을 유일한 혈통이다. 그런데 황후는 어째서 양자 입적을 생각했을까? 황후가 무슨 배짱으로?
황후, 배짱, 장순.
정교랑, 정교랑!
진 노태야가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설마 그럴 리가. 이건 무려 황태자 자리를 좌지우지하는 것이고, 장차 천자가 될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일인데!
그 여인이 감히? 어찌 감히!
“공자님!”
진호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자, 깜짝 놀란 시녀들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시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황후와 접촉했던 사람은 정 낭자밖에 없어. 그리고 정 낭자가 출궁하자마자, 황후가 조당에 가서 양자 입적 이야기를 꺼냈고.
정 낭자가 장순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 아는 사이긴 해. 서로 시녀를 한 명씩 맞교환했으니까. 장순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교랑을 위해 나서서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장순은 항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서서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반전시켰어.
황태자, 장차 천자가 될 사람을 좌지우지하다니!
정 낭자가 그럴 리 없어!
더욱 빠른 걸음으로 걷던 진호는 대문을 나서고 나서부터 뛰기 시작했다.
종친 중에 양자로 입적할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황후가 고른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궁에서 자라 황자들과 비슷한 위치인 사람이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냐고!
정 낭자가 진안 군왕과 혼인하게 된다면!
황태자! 천자!
태후와 영영 풀지 못할 원한은…….
잘못도 없고, 잘못한 적도 없는데, 왜 항상 그 여인이 피하고 물러서야 하지?
그 여인이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피하지 않겠다면, 상대에게 맞서고, 상대를 넘어서는 방법밖에 없어.
이번엔 정말로 그 여인이야. 정말 그 여인이!
아니야!
진호가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니야, 그 여인일 리가 없잖아. 나는 왜 또 그 여인을 의심하고 있는 거지? 왜 자꾸 그 여인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거리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진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는 어느새 강가에 다다라 있었다. 진호는 발길을 따라 근처에 있던 노점상의 차일막 아래로 향했다.
이렇게 깔끔하고 준수한 청년이, 이런 길가에 있는 허름하고 작은 노점에 자리할 일은 없을 텐데.
노점 찻집의 주인장이 놀람과 불안이 섞인 표정으로 얼른 진호가 앉을 의자와 탁자를 꼼꼼히 닦았다.
“관인,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진호가 손을 휘휘 젓고는 돈주머니 한 개를 주인장에게 던졌다.
“필요 없소. 잠깐 쉬다 갈 테니 방해하지 마시오.”
생긴 건 온화해 보였는데, 잔뜩 찌푸린 미간을 보니 괴팍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부잣집 도련님들 성격이 이상하긴 하지.
주인장은 생각을 떨치고 돈을 세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비켰다.
진호가 탁자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침착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번 정리해 보자.
분명 황후가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어. 진소가 경왕의 태자 책봉을 청했고, 양견 일화를 말하면서 고씨 가문을 사지로 몰았지. 고능준이 사직을 청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태후가 수렴청정할 기회도 빼앗아버렸고.
태자의 자리가 보장되고, 황제의 혈통으로 대가 이어지면, 조당도 자연스럽게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며 한 사람의 권력 독식을 막을 수 있었을 거야. 이는 갑자기 평왕이 변을 당하고, 황제의 병세가 위독해진 상황에서 가장 완벽하지 않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국면이지.
하지만 황후가 갑자기 양자 입적을 언급하면서 모든 게 어지러워졌어.
양자 입적, 양자 입적이라니! 황후가 어찌 그런 생각을!
분을 이기지 못한 진호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옆에서 다른 손님에게 차를 우려 주던 주인장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쳐다보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진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추하고 낡은 탁자를 잡고 있던 진호의 손등에는 시퍼런 핏줄이 솟아 있었다.
황제의 친자가 있는데도 굳이 양자 입적을 하려는 속셈이 뭘까? 황후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황후가 두려워하는 게 뭐길래? 황후가 두려워하는 게, 태후밖에 더 돼?
후궁의 싸움 때문에 황제의 대를 어지럽히다니!
종친이라…….
진호가 냉소를 지었다.
황후가 말한 종친은, 궁에서 황자들과 함께 자란, 총명하고 유능한 진안 군왕이겠지?
경왕에 비하면, 칠척장신에 오뚝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진안 군왕이야말로 천일지표를 가진 자가 아닌가.
진안 군왕, 무슨 일이 있어도 황궁이 있는 경성에 눌러앉으려 했던 이유가,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구나.
거리의 떠들썩한 소리가 진호의 귓가에 스치고, 진호의 시선이 머무르는 강 위에는 배들이 쉼 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얘기 들었소? 조정에서 종친을 데려다가 황위를 계승하겠다는군.”
“황후께서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셨다던데?”
“정말? 황후께서 먼저? 남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게 두렵지도 않나?”
“그러게 말이오. 우리 셋째 숙부님의 처제의 둘째 큰할아버지는 아이를 못 낳아서, 그 댁 부인이 가산을 다 탕진해 가며 첩실을 들였다니까. 곧 죽어도 양자 하나 들이자는 말을 못 해서 말이오.”
“양자 입적이라. 평생을 쏟아 일군 강산을 그리 남의 손에 넘기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나. 세상에 그런 거저먹기가 어디 있소? 양자를 들이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건데, 누가 그러고 싶나?”
사람들이 웅성웅성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던 진호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맞아. 세상에 그런 거저먹기가 어디 있다고.
폐하의 대를 이을 친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자들이 어찌 감히,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찌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폐하께서 병중이라 말씀을 하지 못하신다고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는 건가? 폐하께서 멀쩡하셨더라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대신들을 질책하셨을 텐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역무도한 짓을 저지르다니, 제대로 된 신하들은 다 죽어 없어졌구나!
진호가 또 한 번 세게 탁자를 내리쳤다. 주인장이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진호를 쳐다보았다.
“차.”
진호가 짧게 말했다. 주인장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점에서 가장 깨끗한 찻잔을 골라 차를 따른 뒤,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은은한 차향이 퍼지자, 진호의 시선이 다시 강가로 옮겨졌다.
황후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양자 입적을 주장한 거지? 자신에게 무슨 후환이 닥쳐올지 생각하지도 않는 건가?
집에서는 오로지 효도만을 생각하고, 조당에서는 군주를 위한 충의만 생각해야 하거늘(在家思孝, 事君思忠. - <세설신어(世說新語)>). 황후는 어찌 공공연히 태후의 뜻을 거역하고, 황제에게 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충불효의 오명을 짊어져 가며 양자 입적을 제안했을까?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장순이 지지해 준다는 자신감에?
장순이라…….
진호가 찻잔을 매만졌다.
장순은 황위 계승과 관련된 일에 관여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당연히 황후와 어떤 연관이 있지는 않을 터. 그런데 장순이 왜?
“사실 황후가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이유?
진호가 대화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점에 앉아 있던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이 주제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옆에 깃발 한 개가 놓여 있었고, 깃발 위에는 철구직단(鐵口直斷)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진호와 나머지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점쟁이를 쳐다보았다.
“무슨 이유? 무슨 이유가 됐든 가업을 남에게 줄 수는 없지.”
“댁들이 뭘 안다고 그러시오? 황실의 가업과 자네가 말한 둘째 큰할아버지네 경우가 같을 수가 있나? 자고로 황실은 천명을 따라야 하는 법이거늘.”
천명?
“황후가 그 제안을 하기 전에 누굴 만났는지는 알고 있소? 정 낭자를 만났다고! 신선의 제자, 정 낭자 말이오! 태백성에 대해서는 알고들 있으신가?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며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예고를 했다지. 이는 곧 황실의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바뀔 거라는 뜻이오. 정 낭자는 신선의 제자이니, 당연히 하늘이 점지한 천자가 누구일지도 알고 있는 게요.”
쨍그랑 소리가 점쟁이의 말을 끊었다.
사람들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청년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점 안에 정적이 흐르고, 점쟁이는 자신의 깃발을 슬쩍 챙겨 들고 잽싸게 도망쳤다.
이런 시기에 조정을 논하고 황제의 적통을 운운하는 것은 반역죄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떤 종친은 천상학 책을 봤다는 이유만으로도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를 뒤집어쓴 전례가 있기도 했다.
하물며 이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누가 하늘이 점지한 천자인지를 논의하고 있었으니, 더는 숨 쉬며 살기가 귀찮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점쟁이가 냅다 도망치자, 나머지 사람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꺼번에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불쌍한 노점 주인장은 그들을 쫓아가서 돈을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아이고, 관인, 소인은 저들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주인장이 떨리는 두 손으로 포권의 예를 표했다.
진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구나. 그 사람들이 이용하려던 게 바로 이거였어.
작금의 시기에 황후가 갑자기 정 낭자를 궁으로 불러들인 뒤 양자 입적을 제의한 것은, 하늘이 점지한 천자라는 이야기로 백성들의 여론을 몰아가려 했던 거야. 정 낭자의 명망을 이용해서.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
그러게 내가 일찍이 말했었잖아. 진안 군왕은 정 낭자를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 황후와 진안 군왕 둘 다 정 낭자를 이용하고 있어!
황후가 정 낭자를 만난 직후에, 양자 입적을 제안했다? 하, 제발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추측하는 이가 없기만을 바라야 하나.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말을 했으니, 하늘이 점지한 태자가 누구인지 말한 것도 당연한 일로 여겨질 텐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진 시강은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미 거기까지 생각했을 거다. 황후가 양자 입적 이야기를 꺼낸 시기를 보면,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지.”
진 시강이 말했다.
“이건 다 황후와 진안 군왕이 미리 계산했던 겁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그날부터, 두 사람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던 거라고요.”
진호가 말했다. 진 시강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정 낭자가 두 사람의 계획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느냐?”
“네, 정 낭자는 모를 겁니다. 정 낭자는 솔직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니, 누가 정 낭자에게 물을 배짱만 있다면, 정 낭자 또한 대답할 배짱이 있는 것뿐이죠. 그들이 무엇을 위해 정 낭자에게 묻는 건지는 정 낭자에게 중요하지 않고, 신경 쓰지도 않아요. 정 낭자는 자기 할 말만 할 뿐이니까요. 말하는 이에겐 의도가 없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니까요.”
진호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저도 모르게 손을 주먹 쥐었다.
“진안 군왕은 바로 정 낭자의 그런 점을 이용한 겁니다.”
진 시강이 진호를 쳐다보았다.
“십삼,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사심이 들어 있느냐?”
진 시강이 갑자기 물었다. 진호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쓴웃음을 보였다.
“아버지, 소자도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에게 몰래 상을 내리면 안 되고,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에게 몰래 벌을 내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愛人以私賞之, 惡人以私罰之. - <관자, 임법(管子, 任法)>). 아버지의 눈에는 소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진 시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은, 누구나 사심이 생기면 공평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진안 군왕이 정 낭자와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지만, 소자가 진안 군왕을 어떻게 평가해 왔는지는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단 한 번이라도 소자의 생각이 달라졌던 때가 있습니까?”
진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 시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황족들은 줄곧 폐하께서 진안 군왕을 궁에서 키우는 것을 못마땅해했지. 특히 진안 군왕이 장성한 후에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것은 더더욱.
지금 상황을 보니, 그때 우리가 불필요한 걱정을 한 것도 아니로군.
“그럼 장순은 어떻게 된 게냐? 그는 우매한 백성도 아니거늘, 어찌 그런 터무니없는 천문 현상을 믿는 게야?”
진 시강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진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진 시강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물 한 방울의 은혜에도 넘치는 샘물로 갚고, 사소한 수고에도 허리 숙여 고마워한다죠. 혹시 그런 부류의 사람을 보신 적 있습니까?”
“음,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많지는 않지. 말로 하는 건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든 법이니까.”
진 시강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하자, 진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소자도 본 적이 있습니다. 원래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딱 한 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어쩌면 두 명일 수도 있겠더군요.”
밤이 찾아오면서, 실내는 컴컴한 어둠 속에 잠겼다.
“전하!”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등불을 켰다. 탁자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의 모습이 등불에 비쳤다.
“전하, 다 쓰셨습니까?”
진안 군왕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신(臣)’이라는 글자 하나만 쓰여 있었다.
“전하! 더 이상 미루셔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더 미뤘다가는, 만인에게 비난을 받으실 겁니다!”
막료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황후가 양자 입적을 하겠다는 말이 광풍처럼 경성을 휩쓸었다. 안 그래도 긴장감이 감도는 조정은 또 한바탕 혼란에 휩쓸렸고, 조정 대신들과 황족, 종친들도 혼란에 빠졌다.
황족과 종친들은 모두 대문을 굳게 닫고 손님을 일절 받지 않았다. 혹여나 대역무도한 생각을 품었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서였다.
그리고 그들 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바로 진안 군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궁에서, 황제의 눈앞에서 자랐고, 군왕의 신분으로 친왕부를 거처로 삼았으며, 황제의 신임과 태후의 총애를 얻은 종친.
그런 진안 군왕보다 양자 입적에 더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황후가 양자 입적을 하겠다는 말은 너무 의외의 것이었다. 황제가 위독하고, 평왕이 변을 당하고, 황제의 유일한 혈육인 경왕이 바보인 지금, 이 상황을 노린 황후가 종친인 진안 군왕과 도모하여 황위를 탐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다면, 유생이나 백성 모두 다들 두 사람이 반역을 도모했다며 등을 돌릴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진안 군왕은 필시 상소를 올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했다. 자진해서 봉지로 나가겠다는 청을 올리고, 황위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하므로.
“내가 가면, 육가아는 어떡하고?”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왕을 극진히 모실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상 경왕이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누가 감히 경왕을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막료가 다급하게 말하자,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그래, 우리 육가아가 황제가 되었으니,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아무도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을 것이야. 자네는 궁에서 나온 이야기도 못 들었나? 태후 쪽 사람들이 육가아를 어떻게 대하는지? 육가아가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잠에 들게 하는 탕약을 강제로 먹이고 있다잖아! 그리고 태후께서 육가아를 어떻게 대하는데? 태후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가아의 몸이야. 폐하의 대를 이을 신분을 가진 몸. 궁에 있는 사람들은 육가아를 사람 취급하는 게 아니라, 물건 취급하는 게야. 원하는 일을 하고자 할 때 쓰는 도구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거라고!”
진안 군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막료가 시선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었다.
“실례되는 말인 줄은 알고 있으나, 그들이 그렇게 한다 해도 경왕에게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자들이 어떻게 경왕을 대하든, 경왕에게는 전부, 다 똑같을 테니까요.”
정성껏 돌봐 주든, 대충 돌봐 주든, 감정이 없고 더위와 추위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왕에게는 다 똑같을 테니까.
“나에겐 다르다.”
진안 군왕이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나에게는 달라! 나는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육가아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고!”
막료가 가만히 진안 군왕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뭘 어떻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는 전하께서 더는 경왕을 보살필 수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경왕이 아니라, 태자이고, 황제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경왕을 돌보신다면,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난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진안 군왕의 말에 막료가 흠칫 놀랐다.
“전하, 지금 전하의 뜻은, 봉지로 나가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진안 군왕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쳐다보았다.
“그렇네. 내 결백을 위한답시고 이렇게 경성을 떠나고, 경왕을 버릴 수는 없네. 나를 비난할 사람들은 실컷 비난하라 그러라지.”
진안 군왕은 말하다 말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본왕이 봉지로 나가겠다는 청을 올리면, 황위에 한 치의 욕심도 없다며 눈물 콧물이 쏙 빠지도록 억울함을 토로하면, 나를 향한 비난이 정말 사라질 것 같은가?
본왕이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본왕에게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며 날 비난할 것이고, 본왕이 간다고 해도, 내가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체면을 차리기 위해 마지못해 떠나는 것이라며, 온갖 수작을 부려 명예를 얻는다고 비난하겠지.
그러니 본왕이 뭘 어떻게 하든 간에 날 비난하려는 사람들은 날 비난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본왕이 뭘 해서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본왕을 비난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런 거라면 왜 굳이 그들의 비난을 신경 써야 하나? 나는 지금 내가 뭘 하려는지 아주 잘 알고 있고, 나 스스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행동이라고 자부하네.”
진안 군왕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을 쳐다보던 막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럼 전하께서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막료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손으로 아무렇게나 뭉쳐 구겨 버리고는 한쪽 구석으로 던졌다.
“그런데 황후께서는 왜 갑자기 양자 입적을 하시겠다는 걸까요? 그리고 듣기로는 황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본 뒤에…….”
막료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끝을 흐렸다. 진안 군왕이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야 쉽지. 정 낭자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을, 뭐하러 뒤에서 수군거리나?”
진안 군왕이 탁자를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켰다.
물어본다고?
막료가 놀란 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전하, 해가 저물었습니다.”
막료가 말했다. 벌써 밖으로 걸음을 옮긴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본왕은 지금 비난을 받는 대상인데, 어디 벌건 대낮에 그 여인을 보러 갈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아마 사람들이 튀기는 침에 익사하고 말 게야. 본왕이 비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긴 하나, 죽고 싶진 않아.”
깊은 밤, 정씨 저택에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는 등불 하나가 흐리게 켜져 있었고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휘장에 비치는 그림자도 흔들렸다. 휘장 너머에 앉아 있던 황씨가 곤히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황씨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아이를 품에 더욱 꽉 끌어안았다.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황씨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요.”
범강림이 말했다. 황씨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보, 누, 누구예요?”
범강림이 쇠뇌를 다시 침상 머리맡에 걸어두었다.
“누이를 찾아온 사람이오.”
범강림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우리 편.”
시녀가 머리를 올려묶고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회랑 아래에 등불을 등지고 서 있던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이제는 담벼락을 오르는 게 아니라, 아예 담을 넘어서 다니시네요?”
진안 군왕은 머쓱한 듯 웃고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방 안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폐를 끼쳤습니다.”
진안 군왕이 예를 표하자 정교랑이 답례했다. 시녀가 자리를 비키자, 진안 군왕이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이렇게 야심한 밤인데 둘만 있기는 좀 그렇지 않아? 큰 도련님이랑 같이 보시게 하는 건 어때?”
반근이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좀 그렇긴 뭐가 좀 그래. 예비 신랑 신부끼리 얼굴 보는 건데.”
시녀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예비 신랑 신부!
반근이 무릎을 탁 쳤다.
아,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
“그런데 확정된 일은 아니잖아.”
반근이 중얼거렸다.
“무려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인데, 확정된 거나 다름없지.”
시녀가 대꾸하고는 반근에게 어서 차를 우리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는 병세가 위독하셔서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 계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폐하의 윤허가 소용이 있나?
반근이 속으로 말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급하게 손님을 맞이하게 됐네요. 실례할게요.”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등불 아래 비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새하얀 옷 위로 묶지 않은 검은 긴 머리가 자연스럽게 어깨선 아래로 떨구어져 있었다.
“실례하는 쪽은 나죠.”
진안 군왕이 답례했다.
실내에 정적이 흘렀다.
“황후께서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낭자는 알고 있었어요?”
진안 군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진안 군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황후마마께서…….
“역시 괜히 낭자에게 불똥이 튄 거였군요.”
정교랑이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이야기는 황후마마가 아니라 내가 먼저 꺼냈어요.”
진안 군왕이 경악했다.
문가에 앉아 있던 시녀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 모든 게 아씨의…….
차를 들고 걸어오던 반근이 시녀의 안색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췄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왜요?”
“난 죽고 싶지 않으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랬던 거로구나. 경왕이 제위에 오른다면, 태후마마와 고씨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될 확률이 높다. 태후마마는 차치하고, 당장 고씨 가문부터가 분명 정 낭자를 하루라도 빨리 죽여 버리고자 하겠지.
아니지, 그들이 해치우려는 사람이 어디 정 낭자뿐일까. 이미 나도 그들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을 텐데.
“그건 다 나중의 일이니, 지금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진 상공 등이 이미 고씨 가문의 폭주를 저지했고, 설령 고씨 가문이 낭자를 건드린다 해도 지금은 아닐 겁니다. 아마 경왕이 제위에 오른 지 한참 지났을 때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화를 면할 시간은 충분해요. 더 나아가 우리가 먼저 그들을 칠 수도 있고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내겐 그럴 시간이 없어요.”
삼백 년 후의 일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일은 변하고 있어. 새로운 황제가 나타났고, 새로운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할 거야. 이 수레바퀴가 삼백 년 후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작은 가능성도 놓칠 수 없어.
그녀의 부친은 심혈을 기울여 그녀를 가르치고 키웠다. 그녀의 가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남에게 걸 수도 없고, 나중이라는 말에 기대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여기 있는 한, 난 내 눈앞에 놓인 상황만 볼 거야. 나에게는 만약이란 것도 없고, 나중이란 것도 없으니. 지금 내가 여기서 살아남게 된다면, 훗날에도 살아 있을 테고, 내가 여기서 죽게 된다면, 훗날에도 죽고 말겠지.
“하지만 양자 입적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고씨 가문과 태후도 물러서려 하지 않을 테고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그건 모를 일이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왜요?”
진안 군왕이 또 한 번 흠칫 놀랐다.
“지금은 태평성대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태평성대?
진안 군왕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천기(天機) 때문이 아니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
천기는 누설하면 안 될 때도 있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정교랑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경왕부의 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전하.”
방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진안 군왕이 들어오지 않자, 막료가 직접 그를 찾아 나섰다. 시종의 말대로 막료는 뒷마당에서 진안 군왕을 찾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진안 군왕을 발견하자, 막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하, 설마 정 낭자가 정말로…….”
진안 군왕이 경악한 막료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황후마마께서는 고작 말 몇 마디로 누군가에게 설득되실 분이 아니네. 다들 각자 살길을 도모할 뿐이지.”
평왕도 죽고, 귀비도 미쳐버렸으니, 고능준과 태후에게는 황후나 정 낭자나 모두 똑같은 원수로 보이겠지.
“그렇다면, 두 사람이 정말로 제 살길을 도모하다가 이 방법을 생각해 낸 거라고요? 아니면 정 낭자가 어떤 다른…….”
막료가 추측하는 눈치로 묻자,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막료를 쳐다보았다.
“아니네. 정 낭자는 단지, 지금이 태평성대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나 뭐 그런 걸 줄 알았는데.
막료가 은근히 실망한 기색으로 시선을 떨궜다. 진안 군왕이 방으로 걸음을 옮기자, 막료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전하, 정 낭자의 말이 맞긴 합니다. 지금은 태평성대인지라, 양자 입적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막료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나 진안 군왕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막료가 무언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진안 군왕을 앞질러 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전하, 양자 입적이 실제로 추진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막료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진안 군왕이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만약 양자 입적이 된다면, 경왕은 강산을 쥘 수 없다.
“이건 육가아의 강산이다.”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막료가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경왕이 황제가 될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꿰차는 것을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아니면…….”
아니면, 직접 그 자리에 앉으실 겁니까.
여름밤에 불어오는 바람이 경왕부 사이사이를 조용히 쓸고 지나갔다.
“원조 형, 이쪽일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한원조가 고개를 들었다. 정오의 햇빛이 너무 밝은 터라, 그는 위층 창가에서 자신을 부르는 동료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지 못했다.
“손님, 이쪽으로 드시지요.”
점원이 한원조를 반기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한원조는 시선을 거두고 눈앞의 식당과 편액 위에 쓰인 태평거 세 글자를 바라보았다.
“관인께서도 이 글씨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무원산 비석에 새겨진 글씨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 글씨들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지요.”
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한원조가 대답 대신 미소를 보이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조 형, 내가 밥을 사려고 했던 곳이 여기인데, 어때? 저번에 시 쓰는 내기에 져서, 내가 밥을 사기로 했잖나.”
별실 안에 있던 두 동료가 한마디씩 얹었다.
“좀 멀긴 해도, 이곳 태평거가 경성의 이름있는 식당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가격도 만만치 않고.”
한원조는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때, 갑자기 옆방에서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누가 일부러 그자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거 아니야? 취한 척하면서 옥좌를 두드리라고.”
“옥좌까지 안 간 게 어디야. 정말 그자가 옥좌 앞까지 갔다면, 한쪽 눈을 감은 채 모른 척하면서 그를 나무라는 황제 대신 태후가 또 휘장을 찢고 나타나 삿대질하면서 욕을 했겠지.”
“욕? 에이, 아마 손찌검을 하지 않을까?”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을지도 모르지.”
그 말을 끝으로 옆방 사람들은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원조와 동료들은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옆방은 죄다 학생들 같아 보였는데”
한 동료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말에 거침이 없군!”
다른 동료가 고개를 저었다.
감히 나랏일과 조정을 웃음거리로 삼다니!
“저런 말이 나오게끔 했으니까 그렇지.”
한원조가 대꾸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두 동료가 화들짝 놀라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원조 형, 우린 이제 말을 가려서 해야 하네. 부주의한 말을 삼가야 해.”
“부주의한 행동이 있었으니까 부주의한 말이 나오지. 조정에서 먼저 그런 행동을 했으니, 우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두 동료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물었다.
“그럼, 원조 형은 강주 선생의 편인가?”
두 사람이 조용히 물었다.
“나는 덕행이 있는 쪽의 편을 들 뿐일세.”
동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황실의 혈통과 덕행은 무관하지 않나? 특히나 지금은 폐하의 뒤를 이을 황자가 딱 한 분뿐이니.”
그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방의 누군가가 목청을 높였다.
“어째서 양자 입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오? 왜 꼭 경왕을 고집해야만 하지? 다 태조의 자손인데, 다른 종친이라고 해서 안 될 건 또 뭐요?”
“굳이 혈통을 논하고자 한다면, 진안 군왕의 부친인 수왕의 혈통이야말로 태조의 적통이지.”
이 말을 들은 동료 두 명은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조정의 일을 논하고, 조정 관리들을 즐겨 평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하면 안 되는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들의 논의나 평가가 조정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저들의 입을 단속하겠다고 나선다면, 당대의 황제가 가혹한 정치를 펼친다는 비난을 받게 될 터였다. 세상 어느 황제와 대신들이 그런 오명을 쓰고 싶어 할까? 더군다나 지금의 황제는 체면을 몹시 중요시하는 성격이었기에 더욱 그런 가혹한 정치를 펼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논의가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지고, 황제의 혈통까지 운운하자, 동료들은 더는 들어주지 못하겠다며 씩씩댔다.
“가세, 가자고. 이런 곳에 더는 있으면 안 되겠어.”
한원조가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태평거를 나온 두 동료는 흥이 깨져버린 듯 풀이 죽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재료를 사다가 저기 나무 아래서 낙득자재나 해 먹을 걸 그랬어.”
한 동료가 길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다른 한 명은 입맛도 사라졌는지 먼 곳을 내다보며 읊조렸다.
“벌써 세간의 논의가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보아하니 이번 태자 책봉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군.”
원래 이 주제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으려던 동료가 길가를 가리키던 손을 거두고 말했다.
“듣기로는 진 상공도 어느 쪽에 설지 모르나 봐.”
동료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자신이 들은 비밀을 전했다.
“뭐라고?”
“진 상공은 경왕을 밀던 거 아니었나?”
한원조도 놀란 기색으로 반문했다. 앞선 동료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원래는 그랬는데, 강주 선생께서 한마디 하셨거든.”
“뭐라고?”
한원조가 물었다.
“경왕을 제위에 올리는 것을 진혜제와 진안제 때와 비교해 보시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지금의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의 조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려는 건지 잘 생각해 보시구려.”
동료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경왕은 바보이나, 태자로 책봉되면 훗날 황제가 될 것이다. 역사에도 경왕처럼 지능이 낮은 사람이 황제가 됐던 선례가 있긴 했다. 그러나 진혜제와 진안제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권력이 바닥에 떨어지고, 몇몇 간신과 대신이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황제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고, 반란이 끊이지 않아 강산의 운이 다했다.
“강주 선생의 그 말씀은, 누가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려 한다면, 폐하를 진(晋)나라 효무제(孝武帝)로 본다는 뜻이지.”
동료가 말을 덧붙였다.
술에 취해 비빈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비빈의 손에 죽임을 당한 그 황제. 어느 황제가 천고의 웃음거리와 비교당하고 싶을까!
“누가 경왕을 옹립한다면, 그자는 못된 마음을 품고 권력을 잡아 대주를 멸망시킬 간신이라는 뜻이군.”
“와,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누가 감히 경왕을 옹립하겠나? 강주 선생은 욕을 한번 했다 하면 정말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무섭게 하네.”
동료 두 명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자, 한원조가 박장대소했다.
“지금은 태평성대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조정 대신들과 유림이 무슨 낯으로 성현을 공부하고 백성들을 마주하겠나!”
-여름에만 사는 벌레-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아씨.”
여종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찰나, 진십팔랑이 문을 활짝 열었다. 방에서 마주 앉은 채 대화를 나누던 진소와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렸다.
“아씨.”
뒤늦게 쫓아온 여종들이 민망해하며 진십팔랑을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진 노태야가 여종들을 향해 손짓하고는 진십팔랑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냐? 자, 이리 와서 앉아라.”
여종들이 물러나면서 문을 닫았다.
“아버지.”
진십팔랑은 자리에 앉자마자 예를 표할 겨를도 없이 진소를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 경왕을 황태자로 책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진소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난 그런 말을 한 적 없는데?”
“아버지, 이미 소문이 파다해요. 아버지가 장강주와 만났고, 장강주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고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반박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진소가 대꾸했다.
장강주는 변론에 능하고 박학다식한 자였다. 도리를 논하고 진리를 따지고자 한다면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진십팔랑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소리쳤다.
“그럼 아버지도 장강주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말씀이세요? 아버지도 종친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동의하신다고요? 아버지,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진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리고 진십팔랑의 말을 끊었다.
“십팔랑, 아비에게 어찌 그런 무슨 말버릇이냐? 이게 효도하는 자식의 태도더냐?”
“그럼 아버지의 행실은 충효로써 군주를 섬기는 것인지요?”
진십팔랑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폐하께 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의 친자를 제치고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겠다고 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쓰러지지 않으셨더라면, 감히 이런 일을 추진하지는 못했겠죠. 그들이 감히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폐하의 병세가 위독하여 말씀하지 못하신다는 점을 악용하려는 거예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항상 폐하의 은덕을 마음에 담아 두시고,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런 아버지께서 폐하의 은덕에 어찌 이런 식으로 보답하시죠? 이게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충효예요?”
진십팔랑이 격앙된 얼굴로 외쳤다.
진 노태야가 한숨을 쉬었다.
“십팔랑, 이럴 때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 또한 폐하께 대한 불충이고 불효니라.”
“할아버지! 그래서 아버지는 조정을 혼란에 빠트리는 나쁜 신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자신의 주장도 펼치지 못하고 대세를 따르시겠단 건가요?”
“내가 만약 그런 오명이 두려웠다면, 당초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게다.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고, 태후가 수렴청정하지 못하도록 태후를 협박하여 나를 보정대신으로 임명하도록 청했다. 이 행동만으로도 네 아비가 세간에 어떤 질타를 받을지, 어떤 사람으로 취급될지 너는 정녕 모른단 말이냐!”
진소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진십팔랑은 슬프기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진소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그런데 왜 그런 아버지께서 변하신 거죠?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았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하늘에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면, 천군만마 앞이라 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를 해내지 못하시는 건가요?”
통곡하는 진십팔랑을 보자, 진소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십팔랑, 이 일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게야.”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 한마디에 진십팔랑이 눈을 번쩍 뜨면서 자세를 고쳐앉았다.
“아버지, 제가 모른다고요? 제가 뭘 모르긴 하지만, 경왕 전하께서 폐하의 친자라는 것은, 폐하의 대를 이을 유일한 혈맥이라는 것은 잘 알아요. 그자들이 새로운 황제를 옥좌에 앉히려고 한다면, 경왕 전하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진십팔랑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십팔랑, 경왕은 옥좌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진소가 한숨을 쉬었다. 진십팔랑이 진소를 잠시 바라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결국 그 여인의 말을 믿고, 하늘이 점지한 천자를 고르시겠다는 뜻인가요?”
“그 여인이라니 누구 말이냐?”
진소가 물었다.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고 말했던 여인이요.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뜻은, 하늘이 점지한 천자가 따로 있다는 뜻이겠죠. 그 뒤로 황후가 양자 입적을 제안하셨잖아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십팔랑! 아둔한 백성들의 말을 믿는 게냐! 그 여인의 입에서 그런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느냐? 그 여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거늘, 어찌 감히 ‘그 여인의 말’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냐!”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되게 호통쳤다.
믿는 사람이 얼마나 더 많아야 하죠? 그 여인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적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여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요?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타고나야 해요!
분명히 경왕이었어야 하는데, 경왕이어야만 했는데! 이건 논의의 여지도 없었던 사실인데!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 아니라면 벼락에 맞아 죽을 것이다.
친자든 적통이든 상관없이,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 아니라면, 태자가 될 수 없다.
“저는 믿지 않습니다.”
진십팔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아버지께서 정말 이렇게 하실 거라고 믿지 않았어요. 진혜제와 진안제가 제위에 올랐던 것이 난세였기 때문이라고요? 그럼, 다들 그 이유로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지 못하는 거예요? 조정 대신들은 하늘을 무서워하는 건가요, 아니면 태평성대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무서운 건가요? 성인의 말씀은 그저 입으로나 떠들 뿐이지, 그 말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십팔랑은 몸을 홱 돌리고 방을 나갔다.
“십팔랑!”
진소가 외쳤다. 진 노태야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부를 필요 없다. 여름에만 사는 벌레가 어떻게 겨울의 얼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내버려 두어라.”
진십팔랑의 마차가 진씨 저택을 떠났다. 마차 밖에 있는 여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마차를 따라갔다.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진십팔랑의 울음소리가 천천히 진정되는 듯했다.
진씨 저택과 진십팔랑의 신혼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진소 부인이 일부러 두 사람을 가까이 두고 돌봐주려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저택을 사들인 덕이었다.
모퉁이를 돌 때쯤, 진십팔랑의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전해졌다.
“집으로 가지 말고, 평왕부로 가자.”
평왕부?
여종들이 놀란 기색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버지, 그 여인이 맞다니까요!”
고 관인이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황후는 태후 때문에 폐하의 침궁에 갇혀 있느라 그 여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밖에 더 있습니까!”
고 관인이 고능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두 사람이 일찍이 내통했던 게 분명합니다! 황후, 정씨, 진안 군왕까지 셋 다 일찍이 내통한 겁니다! 이 모든 게 태백성이 하늘에 나타났다고 했을 때부터 꾸며진 음모라고요! 아버지, 그들이 반역을 도모하는 겁니다! 황후는 반역을 꾸민 거라고요!”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고능준이 고 관인의 말을 끊었다.
“이게 어떻게 멍청한 소리입니까? 그들은 진안 군왕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거잖습니까!”
고 관인은 다급하게 외쳤지만, 고능준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멍청한 소리라는 게지. 그들이 옹립하고 싶다고 해서, 정말로 옹립할 수 있을 성싶으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웃음이 나오시나?
고 관인은 더욱 조급해졌다.
“아버지, 지금 세간에서 나오는 말들은 경왕에게 불리한 것들뿐입니다.”
“말? 영종이 생부인 복안의왕을 추존하며 묘역을 새로 꾸미려고 하자, 대간(臺諫) 관리들이 모조리 관직을 낮추기를 자청했다. 관리들뿐만 아니라, 영종이 잠저에 있을 때 그를 따르던 막료인 왕엽(王獵)과 채항(蔡抗)까지도 나서서 영종을 반대했지. 그때도 만천하의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댔으나,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고능준이 비웃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땅이 천자의 것이고, 사람 또한 전부 천자의 신하이니라. 그러니 황위는 천자가 주겠다고 해야 신하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이야. 천자가 주지 않겠다고 하는데, 신하들이 감히 뺏을 수 있겠느냐?”
고능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가서 걸어야겠다.”
고 관인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소자가 함께 가겠습니다.”
고능준이 고개를 저으면서 그를 제지했다.
“혼자서 좀 걷고 싶구나.”
고 관인이 걸음을 멈추고 고능준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람 좀 쐬고 오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이미 속으로 계산을 다 하셨겠지만, 이렇게 연달아 일이 터지니 피곤하실 수밖에요.
그러고 보니, 나도 바람을 좀 쐐야겠구나. 기분 전환도 좀 할 겸.
“여봐라, 여봐라. 나도 나가야겠다.”
고 관인이 말하자, 수하 두 명이 그를 따라갔다.
고능준의 마차가 조용히 문 앞에서 사라지고, 고 관인의 마차도 곧이어 대문 앞을 떠났다.
마차는 천천히 길가를 따라 움직였다. 고 관인의 예상대로 고능준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잠시 머릿속을 비우고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목적지 없이 마차를 타고 길가를 따라가던 고능준의 눈앞에 평왕부가 보였다. 고능준은 순간적으로 목구멍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고능준은 불필요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평왕이 궁을 나온 이후로 일부러 평왕부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평왕부로 가자.”
고능준이 말했다.
평왕부는 이미 예전의 모습을 잃은 듯했다. 원래 평왕부에 있던 내시들은 궁으로 돌아가 다른 곳으로 배치되거나, 심문을 받거나, 평왕이 안장된 후 능을 지키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시 몇 명만이 남아 평왕부를 지키고 있었다.
고능준은 별다른 제제 없이 평왕부 대문을 넘어섰고, 왕부를 따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는 평왕부의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더는 걷는 게 힘들었는지 느릿느릿 자리에 앉았다.
서재의 책장에는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탁자 위에는 붓 여러 개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벽에는 각종 서예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전부 노력하여 부단히 학문을 탐구하라는 내용이었다.
전하께서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잠드십니다.
전하께서는 유희를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오직 독서를 좋아하시지요.
주위를 훑어보는 고능준의 눈에 늘 단정한 자세로 단 하루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소년이 아른거렸다.
없어졌어, 없어졌어. 참으로 무정한 세상이로구나.
고능준의 목구멍이 화끈해지면서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찌 천도는 이리도 무정하고 불공평한 겁니까. 어떻게 평왕을, 어떻게 우리 고씨 가문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파도가 연달아 밀려오고, 한고비를 넘겼더니 또 한고비가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마지막에는 아예 불을 지피는 장작까지 빼앗아가다니요.
세상살이는 이처럼 어려운 일이군요. 세상살이는 이처럼 어려운 일이에요.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마음껏 흐느끼던 고능준은 문가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깜짝 놀라 울음을 멈췄다. 그가 곧장 몸을 일으켜 호통을 치며 문을 열었다.
“게 누구냐!”
문밖에는 여인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고 대인.”
진십팔랑이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고능준이 흠칫 놀랐다. 그는 눈물로 흐릿해진 눈가를 소매로 닦은 뒤에야 진십팔랑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 낭자였군.”
고능준이 창피한 듯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실례했습니다. 저, 저는 대인께서 여기 계신 줄 몰랐어요.”
진십팔랑이 서둘러 예를 표했다. 뒤늦게 진십팔랑을 따라 들어온 내시들이 고능준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사죄했다.
“괜찮다.”
고능준이 급하게 눈물을 닦고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호기심 섞인 얼굴로 미소 지었다.
“진 낭자가 여기는 어쩐 일로?”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 서첩을 챙기러 왔습니다.”
고능준이 아, 하고는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했다.
“편히 일 보시지요.”
진십팔랑이 예를 표하고는 서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들도 자연스럽게 진십팔랑을 뒤따라 들어왔다.
“원래 여기 있던 내시들이 모두 궁으로 돌아간지라, 전하께서 서첩을 어디에 두셨는지 저희는 잘 모릅니다.”
내시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탁자 위에 놓여 있을 걸세. 전하께서 항상 책을 읽으실 때마다 모사를 하셨으니.”
진십팔랑이 먼저 탁자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내시들이 서둘러 탁자 위를 뒤적거리다가 진십팔랑이 말한 서첩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그녀에게 건넸다.
내시들이 탁자를 뒤적거린 탓에 뿌연 먼지가 곳곳에 날렸다.
“왜 청소를 하지 않는 것이냐? 전하께서는 더러운 것을 가장 싫어하시거늘!”
진십팔랑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호통쳤다. 화들짝 놀란 내시들이 겁먹은 모습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진십팔랑도 자신이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급하게 서첩을 챙기고 곧장 서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낭자, 전하를 생각해 주어 고맙소.”
진십팔랑이 밖으로 걸어 나오자, 일부러 자리를 피해 문가에 서 있던 고능준이 말했다.
이제 평왕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늘.
진십팔랑은 조금 전 자신이 들은 울음소리가 생각나 주춤했다.
“고 대인.”
진십팔랑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우선 다른 논쟁은 잠시 내려놓고, 하루빨리 평왕을 안장하고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
태자 책봉, 수렴청정, 섭정 등 풍파가 연이어 지나는 동안, 평왕의 봉호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고, 죽은 황자에 관한 그 어떤 애도 의식도 치러지지 않았다.
평왕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다. 우스운 죽음을 맞이했고, 죽은 뒤에도 어떠한 추모조차 없었다. 친왕의 존엄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능준이 엄숙해진 표정으로 진십팔랑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낭자가 그리도 평왕 전하를 생각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평왕 전하께서 비록 돌아가시긴 했으나, 덕분에 한스러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실 듯하오.”
한스럽겠지.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사람들의 추모를 받지도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는데, 어찌 한스럽지 않을 수가 있으랴.
진십팔랑은 대답 대신 가볍게 답례하고 걸음을 옮겼다.
진십팔랑이 멀어져가는 것을 본 고능준이 고개를 돌려서 서재를 쳐다보았다. 내시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고능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들이 당장 이곳을 깨끗하게 청소하겠습니다. 더는 이곳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내시들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찧으면서 말했다.
고능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미 이승을 떠난 사람이니, 그럴 필요 없어.”
고능준은 서재를 나간 뒤, 평왕부를 떠났다.
“노야, 거처로 모실까요?”
종복이 물었다.
“아니, 궁으로 가자.”
고능준이 말했다. 종복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마부를 재촉하려던 찰나, 고능준이 다시 그를 불렀다.
“아, 그리고 내 명첩을 진 상공에게 가져다주어라. 그자와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다.”
“마마.”
내시 몇 명이 고개를 숙인 채 침전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침상 옆에 앉아 있던 황후를 불렀다.
조당에서 태후에게 삿대질을 당하며 온갖 욕을 들을 때는 반박 한마디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던 황후였지만, 태후가 천자의 거처에서 나가라는 말을 했을 때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며 태후에게 맞섰다.
- 본궁은 폐하께서 책봉한 황후입니다. 본궁이 폐위되지 않는 한, 아무도 본궁에게 황제 폐하의 곁을 떠나라는 명령을 할 수 없습니다.
폐위?
태후는 당장이라도 황후를 폐위시켜 버리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로 쉽게 황후를 폐위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태후는 즉시 조정 대신들을 불러 이 안건을 논의하도록 했지만, 전갈을 받은 대신 다섯 명 중 세 명이 입궁을 거절했고, 나머지 두 명은 지금 급선무는 태자 책봉이 우선이라고 했다.
조정 대신들은 자신들이 후궁 여인들의 암투에 관여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오늘 태후는 조당에서 체통도 지키지 않은 채 황후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인 터였다.
여인이 홧김에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쓰나. 그리고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고 해도, 태후는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하고, 다분히 편파적인 결정을 내리곤 하지. 그러니 태후가 홧김에 한 말을 가지고 우리까지 덩달아 설친다면, 황실과 조정이 온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를 자처하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대신들의 반응에 태후는 화가 나서 펄쩍 뛰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당장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마마, 태후마마께서 또 조회를 열겠다고 하셨습니다.”
내시의 말에 황후는 가볍게 웃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가서 한 번 들어나 보거라.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일련의 일을 겪으며 황후는 다시 후궁을 장악할 권력의 일부를 되찾게 되었다. 내시가 알겠다며 물러가자, 침상 옆에서 황제의 손을 닦고 있던 안비가 고개를 들었다.
“마마, 태후께서 마마를 폐위시키겠다고 대신들을 협박하면 어떡하죠?”
안비가 물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폐위에 동의하지 않는 한,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황후가 혼수상태인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안비도 황후의 시선을 따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마,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우리가 한 일을 아신다면, 마마께서는 필시 폐위되실 거예요.”
안비가 황후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황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게다.”
깜짝 놀란 안비가 고개를 돌렸다.
“마마, 마마의 뜻은 그럼…….”
안비가 목소리를 낮추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황후가 기가 찬다는 듯이 소리쳤다.
“본궁이 먼저 죽더라도, 네가 어떻게 죽을지는 알고도 남겠다!”
황후가 고함쳤다. 그러자 안비는 흠칫 놀랐다가 곧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마마, 신첩은 어떻게 죽습니까?”
“멍청해서 죽는 게지!”
“하지만 마마, 신첩은 정말 몰라서 그래요. 태의들이 폐하의 병세가 더 악화되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악화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언제 깨어나신다고 했느냐. 만에 하나 폐하께서 깨어날 수 있었더라면, 정 낭자는 절대 입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당에 도착한 조정 대신들은 태후가 태자 책봉을 언급하지 않고, 평왕에게 시호를 추서하자는 이야기만 꺼내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물론 일부 대신들이 태자 책봉을 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리기는 했지만, 의외로 태후는 화를 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가족을 잃은 평범한 노파처럼 슬픔을 감내하는 표정과 말투로 오늘은 태자 책봉을 논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애가의 황손이오. 사람이 죽은 게 우선이어야 하지 않겠소? 다른 일은 애가가 장손을 먼저 안장한 뒤에 다시 논하는 게 어떻겠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봤을 때 그 누구라 해도 차마 상심한 조모를 붙잡고 정사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조회에서는 더 이상 다른 논의들을 진행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대신들은 태후의 뜻대로 평왕의 시호를 결정했다.
본디 평왕이 벼락을 맞아 죽은 게 천벌이냐 아니냐를 두고 조정 대신들 간에 의견 차이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오는 것을 보여준 덕에 평왕이 천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시호가 모두 기각되었기에, 이제 조정 대신들은 평왕의 시호에 대한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왕의 시호는 회혜(懷惠)로 정해졌고, 사흘간 조회를 중단하며 평왕의 죽음을 추모하기로 했다.
다실(茶室)로 들어선 진소의 눈에 방 안에서 먼저 차를 마시고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조정이 혼란에 빠졌으니, 대인과 인사치레는 생략하겠소이다.”
고능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폐하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진 대인인 만큼,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같겠지요. 하지만, 이 사람 또한 그렇습니다.”
진소가 실소를 터트리고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선황의 부탁을 받았단 말이외다!”
고능준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우고 소리쳤다.
“그래서 조정을 고 대인의 집으로 삼아 쥐락펴락했던 겁니까?”
진소가 똑같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두 사람은 인상을 쓴 채 그렇게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 일을 논하려고 오늘 대인을 찾아온 건 아닙니다.”
먼저 정적을 깬 고능준이 진소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엇이오?”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의 대가 끊기는 것은 못 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두 사람이 싸울 때가 아니지요. 나는 사직을 청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외다.
여기 명단에 적힌 사람들은 다 내 사람들이니, 이들을 지방으로 좌천시키십시오. 그리고 다른 유능한 인재를 뽑아서 제위에 오른 경왕을 보필하시지요.”
진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소는 종이를 펼치고 놀라움과 분노가 담긴 표정으로 그 위에 쓰인 이름들을 훑어보았다.
고능준이 몰래 심어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게다가 나와 가깝고, 쭉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다들 경왕을 제위에 올리면 백성들이 고난에 허덕이고 나라가 망할 거라고 말하더이다. 그러나 보십시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의분에 가득 찬 것처럼 말하는 관리들은 사실 제 이득을 따지는 것일 뿐이지요.
실상 천자를 생각하고, 천자를 위한 일을 하는 사람이 나와 대인 외에 또 누가 있겠소이까? 그러니 우리 둘이서 마음을 허투루 쓰지 않고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 진혜제, 진안제 때와 같은 난세가 찾아오겠습니까? 어떻게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모든 일과 사람은 다 비슷하다고는 하나, 어떻게 모든 일의 결과가 다 똑같겠습니까? 아니, 같은 사람에게 같은 일을 하라고 해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능준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 선택이 더 낫네, 저 선택이 더 별로네를 따지기 전에, 사실 옳고 그른 선택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것부터 알아야지요. 일단 그 자리에 걸맞는 사람을 앉히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그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겁니다. 강직한 신하가 될지, 권력을 남용하는 간신이 될지, 충의를 다하여 태평성대를 이어갈지, 아니면 난세를 불러올지는, 다 사람 하기 나름이지 않습니까.
백성을 대신해 목소리를 낸다고요? 그럴 리가, 우리 같은 관리들은 백성의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지요. 다들 저마다의 신념과 정의가 있거늘,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백성이라, 이제야 백성을 논한다고요? 저들은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 따위를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다들 이 판국에서 떨어질 콩고물을 바라거나, 좋은 자리 하나 꿰차려는 생각들뿐이지요.”
고능준의 말이 끝나자, 진소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건 고 대인의 생각일 뿐이오.”
고능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게 바로 제 생각이지요. 그리고, 나는 우리 고씨 가문이 영원히 황실의 외척이길 바랍니다! 진 대인, 그럼 먼저 일어나겠소이다.”
고능준은 망설임 없이 일어나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다실 안이 조용해지자, 진소는 손에 쥔 명단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종이를 고이 접어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진소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기도 전에 또 궁에서 온 전갈을 받아야 했다. 진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전갈을 받들고 궁으로 향했다.
태후가 진소를 황제의 침궁으로 불렀다.
“황후, 잠시 물러나 있게.”
태후가 말했다. 황후는 단정하게 예를 표한 뒤, 별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진 대인, 폐하를 한 번 보시구려.”
태후가 황제의 침상 옆에 걸터앉아 황제를 바라보았다. 진소도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침상에 누워 있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황상이 후손에 대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는,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요. 폐하께서는 대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시며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었습니다.
“황상은 대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향불을 밝혀 줄 사람이 남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소. 황상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피가 섞인 친 혈통이 이 강산을 이어가는 것뿐이지.
진 대인, 저들은 모두 경왕이 황제가 될 수 없다고, 양자 입적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소. 그런데 이 늙은이는 도무지 모르겠군. 저들이 생각하는 최선이, 누구를 위한 최선이오? 진 대인,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말해 보시구려. 황상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과연 양자 입적을 윤허했겠소?”
당연히 아니지요.
진소가 말없이 침상 위에 누운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진소의 모습을 보던 태후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진 대인, 저들이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겠다고는 하나, 그렇다면 훗날 경왕의 자손들은 어쩌란 말이오?”
경왕의 자손?
진소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태후를 쳐다보았다.
“경왕은 선천적인 바보가 아니잖소. 다들 잊은 게지, 경왕이 어렸을 때 얼마나 총명했는지. 평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어.”
태후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그랬지요.
진소는 아득히 먼 옛날에 본 것 같던 어린 이황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그때의 귀엽고 영리한 어린 이황자의 모습은 이제 생각나지도 않는구나. 하지만 예의 바르고 폐하와 슬기로운 문답을 나누던 이황자의 모습은 눈앞에 선해.
“경왕은 선천적인 바보가 아니라 다쳐서 바보가 된 것이오. 그런데, 경왕이 낳을 아이들도 바보겠소?”
태후가 이어서 말했다.
“마마, 지금 마마의 말씀은 경왕이…….”
진소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의를 부르자, 고개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들어온 태의가 말했다.
“경왕 전하께서는 올해 열한 살이시며, 신 등이 살펴본 결과 자손을 이어 가실 수 있는 몸이십니다.”
자손을 이어 갈 수 있다니!
진소의 표정이 급변했다.
편전 안에서 고개 숙인 내시를 바라보던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손을 이어 갈 수 있다고…….
“일이 예사롭지 않게 돌아가고 있어. 경왕이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는군.”
“누가 벌써 아들이래? 딸일 수도 있는 거잖나.”
이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졌다. 안에서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누구요!”
안에 있던 학생들이 화가 난 표정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학생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겁에 질렸다.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고 관인이었다. 그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방 안의 학생들을 노려보았다. 고 관인의 곁에 있던 수하들도 학생들을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들 하실까? 나도 그 즐거운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
고 관인이 느긋하게 말했다. 학생들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고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경왕을 비웃었으니, 이는 죽을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학생 한 명이 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쓸모없는 놈들!”
고 관인이 냉소를 보이고는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났다.
“이쯤 되니, 그 정가 놈이 대단한 것 같기도 해. 짜증 나는 놈이긴 하지만 보통 배짱이 아니었어.”
고 관인이 말했다.
“다 관인께서 아량이 넓으신 덕입니다.”
수하들이 입을 모아 아첨했다. 고 관인이 떠나자, 안에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왔다.
“어서 가자, 빨리!”
“그나저나, 고 관인이 덕승루까지 오는 걸 보면, 이 일이 어떻게 될지는 이미 정해졌다는 거 아니야?”
학생들이 수군거리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언니, 제가 악보 챙기는 걸 깜빡했어요.”
춘령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춘령, 왜 그렇게 덤벙대.”
다른 시녀가 핀잔을 주었다.
“다녀와.”
앞서 걸어가던 주 낭자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춘령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왔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주 낭자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때, 등 뒤에서 춘령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년이 눈깔이 삐었나! 어딜 보고 다니는 거야!”
수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춘령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러더니 뺨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발길질까지 하려고 발을 들었다.
춘령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연신 사죄하면서도, 수하의 발길질을 피할 배짱이 없어 겁에 질린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관인, 부디 관용을 베푸시지요.”
주 낭자가 외쳤다.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고 관인이 고개를 돌려보자,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주 낭자가 보였다.
시종의 발길질에 얻어맞은 춘령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고 관인.”
가까이 온 주 낭자가 춘령의 옆에 서서 몸을 낮추고 예를 올렸다.
“소인이 대신 사죄드릴게요.”
고 관인이 주 낭자를 쳐다보다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웃었다.
“주 낭자였군요. 어이쿠, 제가 감히 주 낭자의 사죄를 받을 수 있습니까. 도리어 제가 낭자에게 사죄해야지요. 그러니 부디 낭자의 은인께 좋게좋게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벼락에 맞아 죽을까 봐 두렵거든요.”
주 낭자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고십사,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진호가 문가에 서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예상치도 못한 사람을 덕승루에서 마주치자, 고 관인이 의아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진십삼, 자네도 여기 있었는가?”
고 관인이 진호의 등 뒤를 흘깃 엿봤다. 젊은 사내 일고여덟 명이 별실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자, 고 관인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들 재밌게 하는가?”
진호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와서 좀 들어보겠나?”
고 관인이 잠시 진호를 바라보다가 헤헤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진십삼, 나는 자네가 아둔한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했네.”
별실 문이 닫히고,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춘령은 바닥에서 일어나면서 한쪽 손으로 조금 전에 맞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춘령이 고통으로 낮은 신음을 내자, 넋을 놓고 있던 주 낭자가 정신을 차렸다.
“조심 좀 하지?”
다른 시녀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투덜댔다.
“그, 급해서 그랬어.”
춘령이 울먹였다.
“괜찮아. 다음부턴 조심해.”
주 낭자가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춘령이 서둘러 주 낭자의 뒤를 따라가며 조용히 말했다.
“아씨, 진 공자님이 아씨를 위해서 나서주셨어요. 고 관인이 아씨한테 뭐라고 하지 못하도록요.”
진 공자님은…….
주 낭자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진 공자님은 나를 위해서 나선 게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
진 공자님은 은인 얘기, 벼락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안에서 나왔으니까.
정 낭자가 그토록 힘들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사람이 번개를 불러오는 일을 증명한 건, 단지 평왕이 천벌 받아 죽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야. 실은 사람이 번개를 불러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증명한 거고, 자신이 마음대로 누군가를 벼락 맞혀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거야.
그런데 고 관인이 정 낭자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벼락을 내려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하니까, 진 공자님은 정 낭자의 험담을 듣다 못해 달려 나오신 거지.
진 공자님은 그 여인을 위해서 나선 거고, 진 공자님은 그 여인을 지켜주려고 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
주 낭자가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웃었다.
진 공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진안 군왕이 아직도 봉지로 나가겠다고 자청하지 않았다더군. 몇몇 황족들은 성 밖에 영험하다고 소문난 도관과 사찰에 찾아가서 폐하의 건강을 위한 향불을 올리고 있다던데 말이야.”
권문세가의 자제로 보이는 젊은 관리가 차분하게 말하자,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삼, 역시 자네 쪽이 이야기하기가 편하네.”
고 관인이 웃으면서 진호에게 말했다.
“편하다? 관인은 고 대인과 함께 떠나나? 아니면, 집안 여인들과 먼저 출발하나?”
진호가 고 관인을 힐끔 보며 말하자, 고 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말은 듣기 거북하군.”
진호는 고 관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진혜제, 진안제를 논하면서, 대신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강산에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들 말하는데, 다들 외척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만 보이고, 황족과 종친이 권력을 남용하는 건 보이지 않는가 보군.”
진호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제가 제위에 오른 뒤에는 당시 가장 가까운 종친이었던 계왕(稽王)이 그를 보필했지.”
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 계왕도 뒤에 숨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야. 할 수만 있다면 아마, 제위까지 탐냈겠지.”
다른 사람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고 관인이 팔꿈치로 진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야, 다들 지금 누굴 얘기하는 거지?”
진호는 그런 고 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진안 군왕이 봉지로 나가는 것을 자청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연대 서명을 해서 상소문을 올려야 하네. 그를 봉지로 내보내 달라고.”
진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고 관인이 혼자서 턱을 쓰다듬다가 미소를 지었다.
별실 안의 사람들은 술을 몇 잔 더 기울인 뒤에 자리를 떠났다.
고 관인이 진호를 붙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십삼, 이리 좀 와 보게.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게 바로 인연이고 하지? 우리 잠시 앉아서 이야기 좀 나누는 건 어떻겠나? 술은 내가 사지.”
“내가 덕승루 술값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 보이나? 술만 사면 뭐하나, 기녀가 없는데.”
진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꾸하자 고 관인은 하하 웃으며 상등 별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가서 영롱(玲瓏)을 불러오거라. 영롱의 비파 연주로 흥을 돋워야겠다.”
문가에 서 있던 점원이 불안해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그게, 영롱 낭자가 선약이 있어서요.”
젠장, 왜 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점원이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런데 영롱 낭자는 정말로 선약이 있어서 그런 거지, 다른 건 절대…….”
점원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이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격노한 고 관인에게 뺨을 맞았다.
“내 앞에서 썩 꺼져!”
고 관인이 호통쳤다. 바닥에 고꾸라진 점원이 정신을 못 차린 채 넋을 놓고 있자, 고 관인의 수하 두 명이 그를 양쪽에서 붙잡아 일으켰다.
“다른 게 있는 게 아니라고?”
고 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때리더라도 얼굴을 때리지는 말아야 하고, 욕을 해도 아픈 곳을 건드리지는 말아야 하는 법이다. 다짜고짜 뺨부터 맞은 점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때의 화괴 다툼 이후로, 고 관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덕승루를 찾았다. 이는 그가 그 일을 전혀 개의치 않아 한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가 그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서였다. 하지만 그게 남들이 면전에 대고 그 이야기를 언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관인, 고 관인,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점원이 금방이라도 바지에 오줌을 쌀 것 같은 표정으로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작은 소란 때문에 주위의 시선이 고 관인의 무리를 향해 꽂혔다. 별실의 몇몇 사람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밖을 살피기도 했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말게. 당장 내일이라도 경성을 뜨고 싶어 그러는가?”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진호는 고 관인이 당장 내일 경성에서 쫓겨나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멍청한 고 관인이 정말 내일 경성을 뜨게 된다면, 분명히 오늘의 치욕 또한 정 낭자 탓을 하며 정 낭자를 더욱 미워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꼭 이렇다니까. 정 낭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모든 원망이 정 낭자에게 향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는 인간이든,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얼떨결에 낭자에게 불똥을 튀게 하는 놈들이든, 다 똑같아.
“이 몸은 어차피 경성을 뜨게 될 텐데, 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되나? 자네는 이가 적으나 많으나 간지러운 건 똑같다는 속담도 몰라?”
고 관인이 냉소를 보였다.
“고 관인.”
꾀꼬리 같은 맑은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칠현금 연습을 마친 주 낭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영롱 언니 대신, 소녀가 관인을 위해 보잘것없는 재주를 보여 드려도 되겠는지요?”
주 낭자가 예를 표하며 말했다. 고 관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주 낭자라면 제가 감히 모시지 못할 텐데요.”
주 낭자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는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지난번 일은 이 아형이 실례했어요. 아형이 어리석어 본분을 잠시 잊었네요. 부디 관인께서 넓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고 관인은 예상치 못한 주 낭자의 반응에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정씨 년이 또 주 낭자를 통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주 낭자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쳤다고 하니, 안으로 들게.”
진호의 말에 고 관인의 추측이 끊겼다. 주 낭자는 진호를 쳐다보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먼저 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나는 남이 남긴 걸 주워 먹는 취향이 아닐세.”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진호에게 말했다.
“웃기는 소리군. 이런 곳에 깨끗한 게 어디 있다고. 어차피 다 즐길 거리일 뿐인데.”
진호가 코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주 낭자는 정씨 가문의 사람이잖나.”
고 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주 낭자가 정말로 정씨 가문의 사람이었다면, 지난번에 관인이 벌인 그 창피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진호가 별실 중앙에 앉아 칠현금을 조율하고 있는 주 낭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여인이 정 낭자와 무슨 상관이라고!
진호가 소매를 홱 뿌리치며 별실 안으로 들어갔다.
감미로운 칠현금 연주가 별실 안을 가득 채웠다.
“말하고 싶은 게 뭔가?”
진호가 고 관인에게 말했다.
고 관인이 곁눈질로 주 낭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려나? 정말 주 낭자는 그 정씨 년과 티끌만큼도 관련이 없나?
고 관인은 황친인 진씨 가문이 항상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몹시 싫어했지만, 진씨 가문의 그 녀석은 사리 분별을 참 잘하더라는 고능준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좀 전의 사람들이랑 반나절을 토론한 결과가, 군왕을 봉지로 보내 달라는 청을 올리겠다는 건가?”
고 관인의 말에 진호가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관인은 어떤 고견이 있을지?”
고 관인이 웃었다.
“내가 책이랑은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잡초는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옛말은 잘 알지.”
고 관인이 느릿느릿 말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칠현금 연주 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이어졌다. 칠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마치 고 관인이 한 끔찍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보였다.
주 낭자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연주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눈가에 눈물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그녀를 자세히 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이야 쉽지. 당신네들이 예전에도 제거하지 못했던 뿌리를 지금 와서 무슨 수로.”
진호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게 말일세. 게다가 지금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 낸다는 신의까지 그놈 곁에 붙었으니.”
고 관인이 대꾸했다.
“그놈과 정 낭자가 무슨 상관이라고.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자네가 죽을병에 걸린다 해도, 그 여인은 자네를 살려냈을 걸세. 남들과 똑같이 말이야.”
진호가 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인가? 내가 정 낭자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군.”
때마침 한 곡이 끝나고, 별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고 관인이 주 낭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군. 주 낭자는 정 낭자와 몹시 가까울 텐데, 정 낭자에 대해 잘 아나 모르겠네?”
주 낭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관인, 무슨 말씀이세요. 정 낭자와 가까운 사람을 꼽자면, 소인의 생각에는 단연 진 관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가로 걸어가던 진호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내게 눈길을 주시네. 내게 염증을 느끼는 듯 냉랭한 눈빛이긴 하지만.
주 낭자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진호를 쳐다보았다.
“진 관인의 다리를 고쳐 준 사람이 바로 정 낭자라지요.”
진호의 차가운 눈빛에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 낭자는 끝내 하려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 낭자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가 되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진 공자님이 나를 한 번이라도 더 쳐다봐 주시길 바라서?
아니면, 정 낭자가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굳이 이 자리에 나를 끌어들인 진 공자님이 너무 미워서?
전에는 내가 일부러 두 가문을 이간질한 거라고 말하질 않나, 오늘은 아예 내가 있는 자리에서 고 관인이 저런 위험한 말을 내뱉도록 유도하질 않나.
그리고 고 관인이 내 앞에서 장차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 관인 쪽에 묶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정 낭자의 사람이 아닌 이상 영원히 고 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셈이야.
진 공자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을까? 어쩜 이리도 독하게 나를 내다 버릴까?
아니, 아니야. 진 공자님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어.
누구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잖아? 더군다나 나는 진 공자님이 아끼는 그 여인을 고씨 가문의 원수로 만든, 천한 계집이니까.
“맞네. 다만, 나는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야. 물론 어떤 자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지만.”
별실의 문이 언제 닫혔는지도 모른 채, 주 낭자는 고 관인과 진호가 떠난 별실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주 낭자는 칠현금 앞에 멍하니 앉아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진호의 말을 되새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 낭자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관인, 이만 돌아갈까요? 아니면 좀 더 둘러보다가 가실는지요?”
수하가 복도에서 고 관인에게 물었다.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쪽은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네.”
그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구석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수하들이 재빨리 고 관인의 앞을 막고 그를 보호했지만, 튀어나온 사람은 다짜고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땅에 찧고 있었다.
“또 네년이냐? 지금 뭐 하는 게야!”
수하가 춘령을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춘령이 고개를 들었다. 좀 전에 수하에게 맞은 뺨이 여전히 빨갛게 부어 있었다.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춘령의 모습은 몹시 불쌍하게 보였다.
“관인, 소인, 소인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춘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인?
“무슨 증인?”
고 관인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춘령이 무릎을 꿇은 채 고 관인 앞으로 기어갔다. 수하가 춘령을 막으려고 하자, 고 관인이 손을 들어서 수하를 제지했다.
“소인이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정 낭자가 벼락을 불러와 사람을 죽이는 것을요.”
춘령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고 관인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덕승루의 다실 안, 춘령이 들어와서 무릎을 꿇은 채 자리에 앉은 고 관인에게 예를 올렸다.
“벼락으로 허수아비를 죽이는 걸 본 게 아니고?”
고 관인이 입술을 삐쭉이며 물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고 관인, 제 말씨를 잘 들어 보세요.”
춘령이 연신 손사래를 치면서 화제를 바꿨다.
말씨?
고 관인이 멈칫하더니 이내 춘령의 말뜻을 이해했다.
“강주!”
고 관인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강주 말씨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쩐지. 경성 기녀의 시중을 드는 몸종이 어떻게 그 정씨가 벼락을 불러와 사람을 죽이는 걸 봤나 했다.
“설마 그 여인, 강주에서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게냐?”
고 관인이 조금 놀란 눈치로 물었다.
그 여인의 나이라고 해 봐야 고작해야 열몇 살 정도인데, 몇 년 전에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면 도대체 몇 살 때부터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거야?
“네.”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 관인이 강주 말씨를 못 알아들을까 봐 경성 말씨로 재차 대답했다.
“소인은 원래 강주 정씨 가문이 운영하는 도관에서 지내던 몸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씨 가문에서 정 낭자를 도관으로 보내왔죠. 그런데 도관에 계시던 관주님과 정 낭자 사이에 무슨 다툼이 있었나 봐요. 데리고 있던 몸종과 정 낭자가 합세해서,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에 번개를 불러와 벼락을 내려 관주님을 죽여 버리고, 저와 제 동생은 굶겨 죽일 작정으로 아주 먼 도관으로 보내 버렸죠. 천만다행으로 저희 자매는 도관에서 몰래 도망쳐 나왔는데, 도망치던 도중 제 동생은 궂은 날씨를 견디다 못해 병을 얻었고, 버려진 사찰에서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춘령이 울먹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랬던 거로군. 고 관인이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랬군.”
고 관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춘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 해도, 단지 증인만으로는 부족해.”
춘령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고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관인, 관인께서도 어찌하실 수 없는 건가요? 소인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너무 무서워서요. 그 여인이 평왕 전하까지 죽였다기에, 소인은 더욱 겁에 질려 차마 관아에 이 사실을 발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숨을 걸고 고 관인께 말씀드린 건데. 정말 고 관인께서도 그 여인을 어찌하실 수 없는 겁니까?”
춘령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이미 끝난 일이라 다시 언급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 언급한다고 한들 달라질 것도 없고.”
고 관인이 대꾸했다.
“소인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소인이 얼마든지 증인으로 나설 수 있어요.”
춘령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열심히 말했다.
“너 혼자로 세상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엔 역부족이야.”
고 관인이 재차 안 된다고 말했다. 춘령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얼굴을 소매에 묻은 채 대성통곡했다.
“네가 그리도 오래 숨겨왔단 말이지. 그럼, 지난번의 일도 사실 네가 계획한 것이겠구나?”
고 관인이 갑자기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자, 화들짝 놀란 춘령은 몸을 살짝 떨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뒤,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더니 춘령이 고개를 들었다.
“관인,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소, 소인은 그저…….”
춘령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사죄했다.
“너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정 낭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긴 거고?”
고 관인이 춘령의 말을 이어서 물었다. 춘령은 허리를 숙인 채 몸을 떨면서 대답하지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나를 과대평가했다. 지금은 내가 누굴 도울 처지가 못 되기도 하고, 네가 말한 그 정 낭자 때문에 나는 경성에서 아주 쫓겨날 판이거든.”
고 관인이 두 팔을 쭉 펼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춘령이 다급하게 고 관인의 앞으로 기어가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관인, 제발 소인 좀 살려 주세요.”
춘령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손끝으로 춘령의 작은 턱을 치켜들었다.
“좋다. 내가 경성을 떠날 때 너를 같이 데리고 가마. 같이 도망가자.”
고 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고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관인, 저 약아빠진 계집을 저대로 놔둬도 되겠습니까? 증인으로도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
고 관인의 뒤를 바짝 따라온 수하가 안쪽을 돌아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고 관인이 피식 웃었다.
“내가 보기에는, 저년은 증인을 하겠다고 날 찾은 게 아니야. 저 얍삽한 계집년이 나와 정씨 년 사이에 한 줄을 그었으니, 잘 남겨 두면 두 번째 줄을 긋게 할 수도 있겠지. 남겨 두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을 거야.”
다실 안에 있던 춘령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얼굴에 남은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았다. 그러고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내가 고 관인을 만난 이유는 증인 따위를 서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잘 남겨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지.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고씨 가문과 그 여인이 손을 맞잡고 화해하며 나를 희생양으로 쓸 리는 없을 테니까.
같은 시각 고능준은 태후궁에서 태후와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태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폐하의 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신은 다시는 마마를 뵐 수 없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마마께서 고씨 가문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황후도 송씨 가문과 접촉할 수 없겠지요. 그렇게 되면 마마께서는 현숙하고 덕을 갖췄다는 명성을 얻게 되십니다.”
“현숙하고 덕이 있다는 명성 한번 얻기 힘들구려.”
태후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평소 느끼시던 고충을 이제는 아시겠지요?”
고능준이 웃으면서 술잔을 들이켰다.
오늘은 태후가 특별히 고능준을 위해 송별 연회를 연 날이었다. 태후가 직접 주최한 연회인지라, 조정 대신들도 굳이 나서서 연회를 막지는 않았다.
한숨을 쉬던 태후는 황제가 생각나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경왕을 대신들에게 맡기자니, 애가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고능준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조정에는 진소가 있고, 신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경왕에게 다른 마음을 품는 자들은 없을 겁니다.”
고능준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갔다.
“하오나, 신이 마음을 쉬이 놓을 수 없는 점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마마께서 조심해야 할 사람이지요.”
태후가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앉았다.
“누구?”
“진안 군왕이요.”
고능준이 대답했다.
“그 아이가 그럴 리 없네. 여태껏 벌어진 일들은 다 황후 혼자서 벌인 짓이야. 위낭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위낭은 경왕을 위해서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아이인데, 어찌 그런 대역무도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태후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마마,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고능준이 태후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마마, 조회에도 세 번 정도 참석하셨고, 근래의 정무도 모두 마마께서 보셨지요. 그 소감이 어떠십니까?”
태후가 멈칫했다.
“어떻긴 뭐가? 짜증 나고 힘들기만 하지.”
태후가 대꾸했다.
“하지만, 천하를 손에 쥔 느낌은 참 좋지 않으십니까?”
고능준이 웃으면서 물었다. 태후의 표정이 잠시 변하나 싶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사내들이나 하는 생각이지. 좋긴 뭐가 좋다고?”
고능준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마, 진안 군왕 또한 사내입니다. 예전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서 진안 군왕에게 중임을 맡기시기도 했고, 군왕은 조회에 올라온 정사를 평왕과 함께 논한 적도 있습니다.”
태후는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면서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평왕이 있으니, 진안 군왕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황후가 양자 입적을 제안했고, 조정 대신 중에도 그 제안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많지요. 마마, 역사적으로도 종친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반역을 도모한 일이 결코 적지는 않습니다.”
태후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능준도 더는 덧붙이지 않고 소매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태후 앞으로 내밀었다.
고능준이 건넨 종이봉투를 본 태후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몸을 뒤로 내뺐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태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호통쳤다. 태후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고능준은 굳은 표정으로 태후를 바라보면서 작은 종이봉투를 더욱 앞으로 쭉 내밀었다.
“마마,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내리시지 않는다면 필시 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차츰 늙어 가실 테고, 군왕은 점점 더 혈기왕성해질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미리 방비해야만 합니다.”
고능준이 집에 돌아오자, 고 관인이 긴장한 기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고 관인이 고능준의 안색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짐은 다 챙겼느냐? 네 어미와 다른 가족들은 먼저 가라고 했다.”
고 관인이 기뻐하면서 다 챙겼다고 대답하고는 고능준과 함께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서재 안에는 오랫동안 고능준을 기다린 식객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후마마께서도 대국을 더욱 중시하시네. 그리고 누가 마마의 친손자인지도 잘 알고 계시고.”
고능준이 담담하게 말하자 식객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기뻐했다.
“지금이 딱 시기적절할 때입니다. 젊은 관리들이 연합해서 진안 군왕을 봉지로 보내 달라는 상소문을 올렸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궁으로 불려와 태후마마의 설득을 들은 진안 군왕이 경왕부로 돌아가 음독자살하는 그림이 그려지겠군요.”
식객 한 명이 말하자, 다른 식객이 감탄했다.
“참으로 강직한 연의왕(燕義王)이 따로 없구먼!”
서재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우리가 조정 대신들을 연합해서 진안 군왕에게 꼭 절호의 시호를 정해 주세.”
“왕으로 봉합시다. 왕으로.”
“진안 군왕마저도 제 목숨을 내놓으면서 결백을 주장하는데, 감히 또 어느 종친이 딴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나중에 장강주가 또 양자 입적을 입에 올리면, 아마 제일 먼저 그와 담판을 지으려는 자들이 황족과 종친일 거요. 장강주가 양자 입적을 또 이야기한다는 건, 종친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지.”
식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서재 안은 꽤 오랜만에 여유로움을 되찾은 듯했다.
“잠깐.”
고 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고능준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 이번 일도, 혹시 모릅니다.”
사람들도 웃고 떠드는 것을 멈추고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고 관인,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할 리 없는 약입니다.”
한 식객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머뭇거리신다고 해도, 태후궁의 사람들에게 이미 잘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다른 식객이 말을 덧붙였다. 고 관인이 손을 세차게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고 관인이 고능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지금 경성에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방 안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정 낭자!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래도 그만한 의술 실력은 없지 않을까요? 지금껏 본 바로는, 신선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 그 낭자에게 잡다한 기술을 전수한 것처럼 보이던데요. 번개를 불러오는 것이며, 병을 치료하는 것이며, 정말 신선의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된 것들은 없었잖습니까.”
식객이 말했다. 고능준이 손을 들어서 식객들이 말하는 것을 제지했다.
“맞는 말이야. 뭐든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지. 방심했다가는 큰코다치기 마련일세. 이미 여러 번 다쳤지 않나.”
고능준이 말했다.
“그럼 일단 그 여인부터 없애죠. 늘 말하지만, 일찍이 그년을 죽였어야 했는데, 그때 덕승루에서 괜히 머뭇거리는 바람에.”
고 관인이 씩씩대면서 말하자 고능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의 주변에도 사람이 있어. 게다가 항상 신중에 신중을 더하는 성격이지. 염탐한 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여인은 자주 출타하지도 않을뿐더러, 출타한다 해도 우리는 그 여인의 마차가 어느 것인지 알아볼 수 없다.
그리고 신비궁과 돌포탄도 만들어 내는 여인인데, 또 어떤 무시무시한 무기를 갖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야. 그러니 그 여인을 직접 건드리는 건 섣부르고 무모한 일일 뿐이다. 괜히 일만 더 키워서 우리의 손해만 막심해질 거야.”
사람들이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의 목적은 그 여인이 진안 군왕을 치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세. 그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해선 안 돼. 이 기회로 그 여인의 목숨까지 빼앗으려 들어서도 안 되고. 목적은 오로지, 그 여인이 진안 군왕을 진료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어야만 하네.”
고능준이 말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일은 더없이 쉬운 일이 되는 게야. 그리고 이 기회에 진안 군왕의 죽음이 하늘의 뜻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일 수 있겠지.”
사람들은 고능준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우리는 그 여인을 죽이지 않을 걸세. 그러니 그 여인의 입에서 진안 군왕을 치료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게끔 해야 해.”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진안 군왕을 치료하지 않겠다는 말을, 그 여인의 입에서 나오게 만든다고?
“그 여인은 황후, 그리고 장강주와 함께 진안 군왕을 제위에 올리려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진안 군왕이 죽어 가는 것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고 관인이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고능준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 세상에 그럴 리가 없는 일이 어디 있지? 누구나 다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이 있기 마련이거늘.”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정교랑이 정사낭의 손에서 금침을 뽑았다.
“사공자님, 약차 드세요.”
반근이 따뜻한 차를 정사낭에게 건넸다. 정사낭이 다치지 않은 손으로 차를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오라버니, 어서 떠나요.”
정교랑의 말에 정사낭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누이, 정말로 휴가를 내야 해?”
“네. 앞으로는 침 치료 없이 탕약만 잘 챙겨 먹으면 돼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도 강주로 돌아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사낭이 아, 하고는 무릎을 매만지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내가 경성에 남아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어떻게 누이 혼자만 두고 가.”
정교랑이 대답하기 전에 황씨가 아이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다 여기 있잖아요.”
황씨가 정사낭을 향해 눈짓을 보내며 장난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누이 말을 잘 들어야죠.”
정사낭이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누이를 도울 수는 없지요. 그러니 누이의 말을 들어 누이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도록 해야죠.
“알겠어. 그럼 나는 관청에 휴가 내러 갈게.”
정사낭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사낭을 배웅했다.
“곁을 지킬 사람은?”
정교랑이 멀어지는 정사낭의 뒷모습을 보면서 시녀에게 물었다.
“있어요. 네 명이나 붙여 두었어요.”
시녀가 회랑 아래서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정교랑에게 다가왔다.
“아씨, 이제 활쏘기하실 시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