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호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평왕이 죽었다고? 평왕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이 미친 거겠지?
무려 평왕이야. 황제에게 남은 유일한 황자고, 황위를 이어받을 유일한 계승자인데.
누가 평왕을 죽게 놔뒀겠어? 평왕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고, 누가 감히 평왕더러 죽으라고 하고, 평왕을 죽게 만들 수 있겠어?
“고 대인, 고 대인,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 감히 내 앞을 막는 겐가!”
진호가 고개를 들자, 관복이 아닌 일상복 차림으로 미친 사람처럼 궁문으로 쳐들어가려는 고능준이 보였다. 평왕에게 무슨 일이 났다고 했을 때, 가장 조급해할 사람들은 단연 고씨 가문일 터였다.
- 고씨 가문은 다르지.
고씨 가문은 달랐다. 고씨 가문은 조정의 신하인 동시에 황실의 외척이었다.
신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신하가 될 수도 있지만, 황실의 친척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 평왕을 끼고 있어서 그런 거 아냐. 평왕이 없었으면, 고씨 가문이 어떻게 경성에서 그렇게 날뛸 수 있겠어.
평왕?
평왕? 평왕이 무슨 대수겠어, 그 여인의 눈에는 다 사소한 일이겠지.
이때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에 진호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번개가 쳐서요.
진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말하던 정교랑의 모습을 떠올렸다.
번개.
빗물이 진호의 얼굴에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한여름의 빗방울이 뼈를 찌르는 듯 차갑게 느껴졌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공자님, 정말이에요. 노야께서도 말씀하셨고, 공자님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이 소식은 당장 천주로 전해질 거라고 하셨어요.”
아니, 난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다. 난 이 자리에서 그 여인을 기다릴 거야.
멀리서 진안 군왕과 함께 걸어오는 정교랑이 보이자, 진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인가요? 아니면, 진안 군왕입니까?
눈앞의 여인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 같았다.
“나였다면, 난 아마 이곳에 없었을 거예요.”
만약 그녀였다면, 그녀에게 그런 게 가능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을까. 어떻게 가족들을 뒤로 한 채 혼자 이곳에 왔고, 혼자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녀가 정말로 남에게 번개를 내릴 수 있었다면 양씨 일족에게 벼락을 내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씨 가문도 멸족되지 않았을 테고, 그녀가 이곳으로 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세상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정교랑의 대답을 들은 진호는 커다란 돌덩이가 땅에 내려앉은 듯했다.
낭자가 아니래. 낭자가 아니라고 했어.
진호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절대로 낭자가 아닐 줄 알았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몰랐잖아요.”
흠칫 놀란 진호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또 한 걸음 내딛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교랑,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교랑, 나는 그런 뜻이…….”
일렁이는 등불 아래, 정교랑이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고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정교랑은 가벼운 미소를 보인 후, 작별을 고했다.
정 낭자가 괜찮다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했어.
그저 사소한 일일 뿐이라고, 말할 필요 없다고. 더는 할 얘기가 없다고.
진호는 입술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결국 뱉지 못하고 정교랑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정교랑의 치맛자락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호는 몸을 돌리고 싶었지만, 끝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낭자의 말이 맞았어요. 나 또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일 뿐이군요.
똑같아요. 그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낭자를 봤어요.
“정방.”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옆에서 전해져 오자,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좀 걷고 싶지 않아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정교랑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런 때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진안 군왕이 머쓱하게 웃고는 웃음기를 거두었다.
이런 때엔, 웃는 것도 적절하지 않긴 하지.
“음, 내가 또 졌네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무슨 의미냐는 눈빛을 보내자,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확실히 당신이 나보다 불쌍해요.”
정교랑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때엔, 웃는 것도 적절하지 않죠.”
정교랑이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진안 군왕이 눈썹을 으쓱하고는 뒷짐을 진 채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때엔, 우리가 운다고 해도 믿어 주는 사람 하나 없겠죠.”
정교랑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울고 웃는 건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게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어요.”
진안 군왕이 잠시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아 참,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어요.”
진안 군왕이 손으로 정교랑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고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진호를 돌아보았다.
“정방, 너무 슬퍼하지 마요.”
정교랑이 예를 표한 뒤, 진안 군왕의 마차가 먼저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했다.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반근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진호는 제자리에서 몸을 돌린 채 정교랑의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때문에 반근에게는 진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반근이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집에 도착하자, 대청 안에서 정교랑을 기다리고 있던 범강림과 황씨, 그리고 정사낭과 주복이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각자의 불안함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최대한 표정에서 숨기려고 노력했다.
“아직 식사 안 했죠? 밥은 다 됐으니까 금방 준비해 올게요.”
황씨가 서둘러 몸종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주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요. 내가 본 건 평왕이 죽고, 황제가 쓰러진 다음의 일들이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평왕은 어쩌다가 죽은 거야?”
소식을 들었을 때도 깜짝 놀랐지만, 정교랑의 입을 통해 그 소식을 다시 들은 범강림은 또 한 번 놀랐다.
“벼락에 맞아 죽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범강림과 주복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지만, 자초지종을 모르는 정사낭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쩜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범강림이 말하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형제들 때문이 아니었다면, 당초 누이가 그런 맹세를 할 필요도 없었을 거고, 오늘 같은…….”
범강림이 말끝을 흐렸다.
누구나 놀랄 만한 맹세를 했으니, 모두가 기억하고 있겠지. 하필이면 평왕이 또 누구나 놀랄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으니.
누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할 정도야. 설사 정말로 누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분명 누군가가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뿌릴 거야.
이것 봐. 주 노야는 벌써 숨느라 급급해서 주복 혼자 생떼를 써서 이곳에 왔잖아.
“세상일이 어떨 땐 꼭 이렇게 공교롭기도 하죠.”
정교랑이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황실의 승계와 관련된 큰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미래의 황제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문 현상이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는 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벼락을 맞아 죽음에 이름을 뜻한다는 사실이었다.
진소가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평왕이라고 했을 때, 정말로 좀 놀랐어. 역시 하늘의 위엄은 감히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네.
생사는 지극히 흔한 일이지만, 어떻게 죽는지는 예측할 수가 없어. 심지어 평왕이 죽은 방식은, 과거에 내가 했던 말과 관련이 되어 있고.
참으로 공교롭기도 하지. 고능준이 광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기이한 시선도 당연하고, 진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물어본 질문과 범강림과 주복이 나를 피하려는 기색도, 다 당연해.
그런 일과 표정들은 정씨 가문의 자제로서 익숙한 것들이야.
천도를 관찰하는 이유는 하늘의 뜻에 따르기 위함이었다. 하늘의 뜻은 사람의 힘으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며, 천도는 항상 변하지만, 세상 사람이 그것을 관찰해 내지 못할 뿐이었다.
본디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일에 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 관련된 온갖 추측들을 하기 마련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손가락질하면서 뭐라고 하는데요?
저들을 뭣 하러 신경 써?
큰 키에 백발과 흰 수염을 기른, 신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노인이었지만, 실은 언제나 철부지 같은 면모가 있었어.
정교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들을 뭣 하러 신경 써?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범강림이 재차 묻고는 머뭇거리면서 또 물었다.
“그런데, 네 말을 믿어 줘?”
“아니요. 아직은 잠시나마 내가 필요할 때라서요.”
정교랑이 범강림과 주복을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이 믿든지 말든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믿으면 믿는 거고,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일 뿐.
당장이라도 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였던 고능준도 잠시 물러났고, 태후도 불쾌감을 잠시 거두고 인내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을 뭣 하러 신경 쓰나.
범강림이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때마침 황씨는 몸종들을 데리고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복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을 본 후로, 주복은 딱 한 마디만 하고 곧바로 자리를 떠나려던 마음이었다.
“주 공자님, 같이 식사하고 가세요. 여기서 반나절이나 계셨는데.”
황씨가 서둘러 주복을 붙잡았지만, 주복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정교랑의 목소리에 주복의 발걸음이 휘청였다.
오라버니.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도 잘 지내지 못해서 그래. 널 위해서 걱정하는 게 아니니까, 고마워할 것도 없어.”
주복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최대한 나한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고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최대한 나한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무서운 일들을 감당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 고난을 어떻게 노력만으로 이겨낼 수 있겠어.
“누가 너더러 노력하래?”
주복이 몸을 홱 돌리고 화가 난 모습으로 소리쳤다.
“나는 단지 너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해서,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 그래.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내가, 아니, 우리가 있잖아.”
주복은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정교랑의 얼굴에 어렴풋하게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그래서, 오라버니한테 고맙다고요.”
밤새 뜬눈으로 당직을 선 진소는 해가 밝아질 무렵이 되어서야 드디어 교대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대문을 넘자마자 마당에 서 있는 진십팔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초췌한 몰골의 진십팔랑은 두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진소는 진십팔랑의 옆에 함께 서 있던 여종이며 몸종들의 표정과 한쪽에 놓인 방석들을 보고는, 진십팔랑이 여기서 꼬박 하룻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십팔랑,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아버지, 평왕 전하께서 정말로, 정말로…….”
진십팔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사람을 시켜 소식을 전하지 않았느냐. 그런 일을 어찌 함부로 말하겠느냐.”
진소가 한숨을 쉬었다. 진십팔랑이 고개를 젓고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진십팔랑이 중얼거렸다.
누군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나!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자, 온 황궁의 사람들은 당황해서 헉 소리를 내는 것 말고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어.
진소가 탄식하고는 넋이 나간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평왕의 스승이기도 하고,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니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겠군.
진소가 진십팔랑을 다독이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 갑자기 진십팔랑이 고개를 돌리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럴 수가!
진십팔랑의 시야가 점점 더 흐릿해져 갔다.
평왕 전하만큼 노력하고 열심인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평왕 전하는 분명히 좋은 성군이 되셨을 텐데.
그런데 왜, 노력과 부지런함은 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없어져 버릴 수가 있어?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때로는 타고나야 한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어?
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야! 왜, 왜 그런 거야!
걸음을 멈춘 진십팔랑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느님, 어찌 이리도 불공평하십니까!
전 그 말을 인정할 수 없어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요!
“십팔랑도 저렇게 속상해하는데, 풍질로 쓰러진 폐하께서는 오죽했겠어요.”
진소 부인이 심신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향에 불을 붙이고, 진소가 죽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 일이 이렇게 되다니.”
진소 부인의 말에 진소가 미간을 꾹 누른 채 음, 하고 대꾸했다.
“그나저나, 평왕께서는 정말로 벼락에 맞아서…….”
진소 부인이 말끝을 흐리며 묻자 진소가 눈을 뜨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까지 벼락에 맞을 뻔했소.”
당시 상황을 회상한 진소는 벼락에 맞을 뻔했다는 두려움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천벌이라는 게 참으로 무서운 것이더군.
남편까지 벼락에 맞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진소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의원을 불러 진료를 받자고 했다.
“이미 궁에서 태의가 봐 주었소. 별 문제는 없다더군.”
진소가 몸보신용 약도 먹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부인을 달래자, 진소 부인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럼 폐하께서는…….”
진소 부인이 또 물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겠소. 그런 병은…….”
진소가 조심스럽게 대답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런 병은 완쾌가 힘들다고 봐야지. 설령 깨어난다 해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을 테고.
진소는 의식을 잃은 채 침상에 누워 있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젊고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옥좌에 앉아 있던 과거 황제의 모습을 회상했다.
- 경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소. 오늘 드디어 이리 보게 되다니, 참으로 반갑구려.
젊은 시절의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과거의 전례와 현재의 문제 등을 논하느라 끼니를 놓칠 때가 많았기에, 수라를 준비하는 궁인들이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생각에 잠겼던 진소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자신의 모습이 구리거울에 비치자, 그는 다시 한번 침상에 누워 있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한탄스럽기만 했다.
-죽을 각오-
진소는 목이 메는 듯한 느낌에 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소 부인이 진소의 침울한 모습을 단번에 눈치채고 한숨을 쉬었다.
“교랑은 정말로 폐하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하던가요?”
“마음 같아서는 경왕부터 고쳐 달라고 하고 싶소.”
진소가 소매를 내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병을 어떻게 고치겠어요. 교랑을 정말 신선으로 여기는 거예요?”
진소 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진소를 나무라듯 말했다. 진소는 자신의 말을 듣고, 우습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던 정교랑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그 여인은 경왕이 병을 앓는 게 아니라, 다친 것이라고 생각하오. 한데 그 여인은 외상에 능숙하고,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지고 있지 않소. 심지어 두 동강이 난 손도 이어붙일 수 있으니, 나는…….”
진소가 탄식했다.
병이 급하다 보니 닥치는 대로 의원을 찾는 꼴인 게지.
“그럼 폐하께서는 병을 앓으시는 게 맞고, 지금 그리 위독하시다는데…….”
진소 부인이 서둘러 묻자, 진소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었다.
“위독하긴 하지만, 풍질은 고칠 줄 모른다고 했소.”
“진짜로 못 고친다고 했어요?”
진소 부인이 곧바로 물었다. 진소가 고개를 들고 부인을 쳐다보았다. 진소의 시선을 느낀 진소 부인이 민망한 얼굴로 그의 눈을 피했다.
“아, 교랑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난 단지…….”
“인지상정이지.”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랬다. 평소 무엇이든 해내던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딱 한 번만 와도 온갖 의심과 추측에 시달리기 마련이었다. 평소 늘 남을 돕던 사람은 딱 한 번만 도와주지 않아도 원성을 듣고 미움을 받지 않던가. 인간이란 본디 그러하니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밖에.
내가 그 여인이었더라면, 그렇게 솔직하게 고칠 줄 모른다고 말하기는 두려웠을 텐데.
그 여인의 스승이라는 자는 알고 있었을까.
그 여인에게 수많은 기술을 가르쳐 주고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라 했을 때, 그 여인이 그 많은 기술을 구사할 수 있기에 마주해야 할 위험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을까.
“노야,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어서 조금이라도 더 주무셔야죠. 이따가 또 궁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황제가 쓰러졌다. 황제의 생사는 불분명하고, 그의 뒤를 이을 황위 계승자가 없는 상황이기에 곧 조정에는 격변의 바람이 불 터였다. 이럴 때 진소마저 쓰러진다면, 조정은 끔찍한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 자명했다.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휘장을 내리고 잠을 청하러 간 남편을 바라보던 진소 부인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역시 천문 현상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네.”
진소 부인이 중얼거렸다.
월식은 대흉을 뜻하고, 천하가 혼란스러워질 것을 암시하지.
경성 황궁의 소식은 쏜살같이 달리는 말들과 서신을 타고 각지로 흩어졌다.
마차가 준비된 지 반나절이 넘었는데도 정 대노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정 이노야는 소매를 홱 털고 정 대노야가 묵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갈 겁니까, 말 겁니까? 언제는 뭐에 쫓기듯이 서둘렀으면서, 지금은 또 왜 이렇게 미적대는 거요? 당최 강주로 돌아가자는 겁니까, 다시 경성으로 가자는 겁니까?”
투덜대면서 방 안으로 들어온 정 이노야의 눈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가만히 앉아 서신을 읽는 정 대노야의 모습이 들어왔다.
“형님, 도대체 뭘 기다리는 거요?”
“서신을 기다린다.”
정 대노야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서신을 기다린다고?
“무슨 서신을요?”
정 이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정 대노야가 기다리는 것은 경성에서 오는 서신이었다.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혼사가 결정된 후에도 정 대노야는 경성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강주로 가는 길을 재촉했지만, 자꾸만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경성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정신이 없어 자신에게 서신을 쓰는 것을 잊었거나, 누군가가 벌써 서신을 썼는데 그 서신이 아직 길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쨌거나 분명히 다음 서신이 올 것이고, 그 서신의 내용에 따라 경성으로 돌아가야 할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 대노야는 길을 재촉하다가도, 저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기를 반복했다. 이는 언제든 갑자기 서신을 받았을 때,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정 대노야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경성의 서신이 도착했다.
정 대노야가 고개를 들자, 정 이노야는 깜짝 놀랐다.
“형님, 왜 그러시오?”
정 대노야의 안색은 눈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억지로 치르는 혼사니, 평왕의 위협이니 하는 것들은 다 사소한 일이었어. 다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고! 그 애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어!
누구에게 시집갈지는 일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우선 지금은 당장 백부님께서 제 아버지를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경성에 남아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할 거에요. 그러니까 일단 강주로 돌아가세요.
정 대노야의 두 손이 격하게 떨려왔다.
그렇게 된 거였다니, 그렇게 된 거였다니!
이것도 다 그 애가 저지른 일인가?
그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정 대노야는 거의 질식할 정도로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아니야, 아니야.
정말 그 애가 한 짓이라면, 서신을 받기도 전에 나는 벌써 관졸과 병사들에게 포위됐겠지. 그럼 그 아이는 정말로 하늘을 읽고, 귀신이 부리는 요술 같은 걸 행할 수 있다는 건가?
뭐가 됐든, 경성에 남아 있으면 안 되겠구나. 당장 강주로 돌아가야 해. 지금 당장!
정 대노야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속히 강주로 돌아가자.”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정 대노야의 안색을 살피려고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벌떡 일어난 정 대노야의 정수리에 턱을 세게 부딪히고, 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가 괜찮은지 살피지도 않은 채 곧장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갔다. 정 이노야가 코와 입을 닦고 손바닥을 펼쳐보니,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너무하네, 진짜!”
정 이노야가 어금니를 깨부술 듯이 이를 부득 갈며 외쳤다.
정씨 가문의 사람들이 말과 마차를 타고 허둥지둥 역참을 떠나자, 누군가가 황급하게 역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이고, 큰일 났소! 평왕은 벼락에 맞아 죽고, 폐하께서는 분통이 터져 돌아가셨다는군!”
역참 안으로 뛰어 들어온 행인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럴 리가 있나.”
“소식이 벌써 사방에 퍼졌다니까!”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그럼 천벌 받아 죽은 거 아니오?”
“아니, 조정에서 사고라고는 하는데.”
“에이, 그게 어떻게 사고야?”
“진짜 사고라고 했다니까? 게다가 신선의 제자인 정 낭자가 평왕이 벼락 맞아 죽은 게 사고였다는 걸 직접 증명해 보이겠다 했소. 번개는 사람도 불러올 수 있는 거라나? 그래서 평왕이 벼락에 맞은 건 우연한 사고고, 천벌을 받은 게 아니라고 하던데?”
“벼락에 맞아 죽는 게 천벌이 아니란 말이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 낭자가 직접 번개를 불러오겠다 했소. 정 낭자 말대로, 번개가 정말로 사람이 불러올 수 있는 거라면, 그걸 천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이제야 소식을 접한 역참 사람들과는 달리, 경성 사람들은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조정에서 사람이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며 날짜와 장소를 공표했기 때문이다. 이틀 뒤, 금수원에서 번개를 불러오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정월 꽃등 놀이 때보다 더욱 흥분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금수원의 자리는 천금을 주고도 얻기 힘들게 됐다.
“에이, 다 허튼소리겠지. 번개를 피한다는 소리는 들어 봤다만, 번개를 불러온다는 건 살면서 또 처음 듣네.”
“그러니까 정 낭자가 신선의 제자라고 하는 거 아니요. 당연히 자신만 아는 방법이 있겠지.”
“정말 그 여인이 신선의 제자라면, 벼락 맞아 죽는 게 천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 자체가 모순이지 않소?”
방문이 열리자, 열린 문 틈새로 떠드는 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방 앞을 지나가던 몸종 하나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지만, 방문이 닫히면서 방 안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너도 가서 구경할 거야?”
“구경이야 하고 싶지만, 그 인파를 어떻게 뚫겠어.”
술을 따르는 기녀 두 명이 속닥이면서 방 앞을 지나갔다. 춘령이 방 안을 흘깃 쳐다보고는 난간 너머로 보이는 대청을 내려다보았다.
평왕이 갑작스럽게 죽고, 황제도 위독한 상태이다 보니, 경성 전역에서 노랫소리가 멈추었다. 덕승루를 찾는 손님들도 몇 없었지만, 그 몇 안 되는 손님들마저 모두 번개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춘령이 시선을 거두고 관기들이 쉬는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한가한 관기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벌써 도박판이 열렸다던데, 너는 어느 쪽에 걸었어?”
“당연히 정 낭자 쪽 아니겠어요?”
춘령이 불쑥 끼어들자 관기 두 명이 춘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 낭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춘령이 눈을 끔뻑이며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자랑하듯이 말했다. 관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네 언니의 은인이니 당연히 대단하시겠지.”
“그러니까 언니들, 꼭 많이 거세요. 분명히 큰돈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춘령이 진지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관기들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웃자, 춘령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 수 있는 만큼 다 걸어, 이 바보들아.
그 여인이 주 언니의 은인이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여인이 어떻게 번개를 불러와 사람을 죽였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단언하는 거야. 그 여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춘령이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고씨 가문 따위가 무슨 적수가 된다고, 황자인 평왕도 서슴없이 죽이는 여인인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니, 나는 반드시 잘 숨어 있어야 해. 절대 그 여인이 날 발견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계산해서 꼭꼭 숨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그 여인에게 복수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장씨 저택 안. 여인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씨께서는 거짓말을 하시지 않아요. 정말로 스스로 번개를 불러올 수 있으시다고요.”
몸종이 훌쩍이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그때 얼마나 위험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밤이었어요. 제가 지붕 위에 엎드려 밧줄을 아래로 힘껏 던지는데, 거센 바람 때문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죠. 머리 위로 천둥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저는 제가 벼락에 맞은 줄 알았다니까요.
그때 아씨는 방 안에 계셨어요. 자기가 꼭 방에 들어가서 창문과 문을 다 열어야 한다고 하셨죠. 아씨께서는 그 음탕한 악인 둘만 벼락에 맞게 하려던 게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까지 벼락에 맞을 각오로 그 방 안에 들어가신 거예요.
만약 아씨께서 마지막 그 순간에 방에서 나오지 못하셨더라면, 벼락이 내리치기 직전에 그 방에서 나오지 못하셨다면, 아니면 그 두 사람이 아씨를 따라 나왔더라면, 아씨도 그 자리에서 같이 죽었을 거라고요.
아씨께서 그러셨어요, 조금이라도 틀리면, 우린 다 죽는 거라고.
그토록 어렵고 위험한 일인데, 아씨께서 멀리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번개를 불러와 사람을 죽이는 거라고 말한다고요?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몸종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복이 감탄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세상 모든 일은, 자기 자신까지 사지에 몰아넣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남을 죽이기 위해서는 나부터 죽을 각오로 달려들어야 해.”
옆에서 듣고 있던 장 노태야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말은 해서 뭐해? 자기한테 제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남들이 어디 그런 걸 신경이나 써야 말이지.”
노복이 장 노태야를 향해 이를 악물고 눈치를 줬다. 몸종은 더욱 서럽게 통곡했다.
“하지만, 저희 아씨가 너무 억울하잖아요. 아씨가 너무 억울하다고요. 그 사람들은 왜 아씨의 말을 믿지 않는 거예요? 왜 이렇게까지 아씨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고, 사지로 내모는 거냐고요!”
장 노태야가 혀를 찼다.
“어리석은 것아.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더냐? 네가 뭐라 말한들, 그건 다 네가 하는 말밖에 안 되는 게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사람의 일이지, 꼭 네가 원하는 대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니 너도 그만 속상해하거라. 네가 네 아씨를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느냐? 네 아씨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몸이 안 좋아서라고 했지? 한데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아마 말하기도 귀찮고, 딱히 할 말도 없기 때문일 게야. 말을 하나 안 하나, 남들 생각은 똑같을 테니까.
“왜 저희 아씨만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냐고요!”
몸종이 눈물을 닦으며 말하자 장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재수가 없다고? 그 여인은 절대로 재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야. 그 여인이 언제 손해 본 적 있느냐? 그리고 지금도, 그 여인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을 보는 것이야. 그런데도 네가 그 여인을 위해 울면,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어떡하라고?”
몸종이 깜짝 놀란 기색으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이 엄청난 이득이라고요?
“아버지, 이러면 그 천것한테만 좋은 일이 되는 거 아닙니까!”
고능준이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에 침상에 누워있던 고 관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고능준을 향해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그때 그 자리에서 그 계집의 목을 베었어야 했습니다!”
고능준은 대꾸 대신 고 관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뒤로 몇 걸음 밀려난 고 관인이 두 손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두렵기도, 억울하기도 한 표정으로 고능준을 바라보았다.
고능준은 고 관인의 멱살을 잡고 가까이 끌고 와서 시뻘게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평왕한테 뭐라고 말한 거냐! 네놈, 대체 무슨 얘길 지껄인 거냐고!”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폐하께 잘못을 빌라고요.”
고 관인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벼락에 맞아 죽었단 말이냐? 왜!”
포효하던 고능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죽을 수 있냔 말이다. 왜, 왜 죽었냔 말이야.
“아버지.”
고 관인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죄를 뉘우치고 계셨습니다. 폐하께 진심을 보이고자 근정전 밖에서 무릎까지 꿇으셨고요.”
고능준이 고 관인의 따귀를 다시 올려쳤다.
“네놈 눈에는 그게 진심으로 보이더냐? 모두가 폐하의 눈치를 보면서 쉬쉬하고, 그 얘기는 입에 올리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왕이, 평왕이 문무백관 앞에서 그 일을 큰소리로 외쳐대는 게 폐하의 따귀를 후려치는 게 아니고는 무엇이야! 그건 폐하께 대한 협박이자 대역무도하고 불충, 불효한 짓이니라!”
고능준은 귀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평왕이 그런 말을 내뱉자마자, 뒤이어 벼락이 내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는 그것이 천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폐하의 뺨을 후려치고 그런 말까지 했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
고 관인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버지, 저는 전하께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는 말씀 같은 건 올리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제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가시겠다는데, 저 따위가 무슨 수로 평왕 전하의 앞을 막겠습니까.”
그래, 막을 수 없었겠지.
민간에 그런 말이 있지. 염라대왕께서 삼경(三更)에 데려가고자 마음먹으셨다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오경(五更)까지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이러니 사람이 세운 계획은 하늘의 계산에 못 미친다는 게지.”
고능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가 허무한 표정으로 고 관인을 밀쳐내고는,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진 채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위에 있던 막료들이 서둘러 고능준을 부축하러 다가갔다. 막료들의 표정도 예전만큼 여유롭지 않고, 얼굴 가득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평왕이 죽었어. 평왕이 죽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평왕이 없어졌다고 해도, 우리에겐 아직 태후가 남아 있다.”
벌써 눈물을 깨끗이 닦은 고능준이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위독하니, 이제부터 태후가 수렴청정을 맡을 거야.
“그러니 아직까지는, 우리 고씨 가문이 가장 권위 높은 외척이다.”
막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대인, 태후마마께서 수렴청정하신다 해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한 막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면, 태후는 열흘, 보름, 아니 길면 반년 넘게 수렴청정을 하겠지만, 조정의 대신들은 결코 태후가 영원토록 수렴청정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이 많은 태후가 오랫동안 수렴청정 자리를 유지하는 것 또한 힘든 일이 될 것이고.
그러니 황제의 대리로 수렴청정을 할 적임자는, 태후가 아니라 황후가 될 것이 분명했다.
황후!
“대인, 밤사이에 송씨 가문 사람들이 경성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막료 한 명이 조용히 말했다.
황후는 내양(萊陽) 송씨였다. 후궁 깊숙이 숨어 그 존재가 잊혔던 황후처럼, 세상 사람들도 내양 송씨가 황후의 본가였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살았다.
그래, 좋다.
고능준이 이를 부득 갈았다. 막료와 고능준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 관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버지, 송씨 가문은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태후께서 수렴청정하신다면, 그네들이 황후로 바꾸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버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 망할 정씨 계집입니다. 내일모레면 바로 그 계집이 번개를 불러오는 날이에요. 그 계집이 정말로 번개를 불러온다면, 이번 일은 그럼 단순한 사고로 끝나는 겁니까?”
고능준이 고개를 돌려 고 관인을 쳐다보자, 고 관인은 고능준의 따가운 눈빛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일을 어떻게 더 키우고 싶은 게냐? 태후가 그 여인에게 가능하냐고 물었던 그 순간부터, 이 일은 이미 끝난 일이 된 게다!”
고능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던 고 관인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만에 하나 번개를 불러오지 못하면요?”
고 관인은 질문을 내뱉자마자 아차 싶은 마음에 재빨리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역시나 고능준은 옆에 있던 찻잔을 고 관인을 향해 냅다 던졌다.
“불러올 수 없다면, 더더욱 그 여인과 관련 없는 일이 되는 거지!”
“번개를 불러온다면, 그 여인과 관련 있는 일이 되는 거요?”
금수원 안, 가장 좋은 자리에 설치된 차일 아래에 앉은 두 관리는 광활한 사격장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격장 주위로는 차일이 빽빽하게 쳐졌고, 차일 아래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서 있었다. 관부 관리들이 현장으로 나와 질서를 유지했다.
“저 분주한 사람들 좀 보시오. 그리고 저 이상한 물건들은 죄다 어디에 쓰는 거지? 종이 연이며, 쇠막대며…….”
차일 아래 여유롭게 앉아 있던 관리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나지막이 읊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거두고 옆 사람에게 말했다.
“저리 많은 물건을 써야 번개를 불러올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 아무도 몰래 사람을 해친단 말이오? 게다가 평왕은 근정전 바로 앞에서 그런 변을 당한 건데, 누가 감히 저런 물건들을 꺼내놓고 번개를 불러올 수 있었겠소?”
옆에 있던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흥미진진하게 사격장 안을 쳐다보고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돈은 걸었소?”
“뭐하러 거나? 아예 한쪽으로 다 쏠려서 도박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하던데.”
앞서 말하던 관리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두 관리가 고개를 돌리면서 왁자지껄한 인파를 둘러보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이오. 새해 연회 때보다 사람이 더 많이 온 것 같소.”
관리가 고개를 저으면서 혀를 차자, 옆 사람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래도, 저들이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은 게 십 대 죄악을 저질러서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폐하의 병이 급하니, 태후께서는 아무 의원이나 붙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오.”
관리가 감탄하면서 말하자, 옆 사람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붙잡을 의원이 있으니 다행이군.”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던 중, 갑자기 인파 속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서둘러 사격장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제 막 도착한 듯한 정교랑이 보였다.
“다른 건 됐고, 비바람과 번개를 불러오는 것만 볼 수 있어도 난 충분하겠네.”
두 사람이 웃으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부터 내리쬐던 뙤약볕이 사라지고 하늘이 흐려졌지만 바람은 한 점도 불지 않았다. 가뜩이나 꿉꿉하고 무더운 날씨에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서 있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났다.
반근이 정교랑에게 부채질을 해 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씨, 아씨, 제가 하게 해주세요.”
몸종이 옆에서 다급하게 말했다. 장씨 저택을 뛰쳐나와 어제부터 정교랑과 함께 있던 몸종은 한시도 쉬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씨, 저, 저는 예전에도 해 본 적 있잖아요.”
몸종이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주복이 몸종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몸종이, 그때 강주 도관에 같이 있었던 몸종인가?
“지난번에는 네가 번개를 불러오는 역할을 했으니까, 이번엔 서로 바꿔 보자. 내가 번개를 불러올 테니, 넌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정교랑이 묻자, 몸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할 수 있어요!”
“아씨, 저도 할 수 있어요!”
시녀와 반근도 뒤질세라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교랑이 반근 셋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아. 너희는 그럼 저기 허수아비 근처에 서 있어. 이따 꼭 내 말 잘 들어야 해.”
정교랑이 잠시 뜸을 들이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 말, 꼭 잘 들어야 해.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세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드넓은 사격장의 중앙을 향해 뛰어갔다. 사격장 중앙에는 허수아비 한 개가 세워져 있었다. 세 몸종이 다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을 본 구경꾼들이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이제 시작하는 건가?”
“이제 시작하는 거요?”
“시작은 무슨. 번개는커녕 바람 한 점 안 불고 있잖소.”
정교랑은 주위의 시끌벅적함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종이 연 하나를 손에 쥐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종이 연은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었다.
“나도 연을 날려 본 지가 꽤 오래됐네.”
정교랑이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들고 앞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너희 중에, 나랑 연 날리고 싶은 사람 있어?”
정교랑의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집에서 데려온 시녀들이었다. 시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높이 들고 자기가 하겠다며 나섰다.
“나.”
서너 명의 시녀들이 목청을 높이는 사이,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팔을 쭉 뻗어서 종이 연을 낚아챘다. 연을 낚아챈 사람이 주복이라는 것을 알아챈 시녀들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정교랑도 별다른 대꾸 없이, 옆에 놓여 있던 구리철사와 방울을 연에 묶고 철사로 만들어진 실타래를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교랑이 하늘을 쳐다보자, 주위의 이목이 모두 정교랑에게 집중되었다.
“이제 됐어요.”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주복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교랑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정교랑의 치맛자락이 흩날리면서, 갑자기 어디선가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번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슬쩍 보기만 해도 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거야?”
가장 변두리에 설치된 차일 아래에 있던 관리가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소리쳤다. 그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한 손으로는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옷자락을 눌렀다.
“바람이 참으로 억울하겠구려.”
다른 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는 고개를 들어 바람이 오나 안 오나를 관찰한 게야.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저 여인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 여인이 뛰기 전부터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어. 사람들은 저 낭자에게 집중하느라 몰랐을 뿐이지.
정교랑의 손끝에서 실타래가 빠르게 풀려 갔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키 큰 사내가 종이 연을 손으로 높이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바람이 불 거라고 했잖아.
아방, 또 날 놀리는 거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멀리 흩어졌다.
- 아산(阿汕), 이제 손 놓아도 돼.
순식간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소리가 진동했다. 거세게 불어오는 광풍 때문에 사람들은 눈을 뜨기도 힘들었고, 차일은 거의 날아갈 기세로 흔들렸다. 주복의 손을 떠난 종이 연도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
주복은 여전히 앞을 향해 뛰고 있는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내가 살면서 저런 웃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니지, 본 적은 있어. 매년 나들이를 나갈 때마다, 집안의 누이들이 종이 연을 날리면서 똑같은 웃음을 보였지. 하지만 저리 활짝 웃는 모습을 저 여인의 얼굴에서 볼 수 있을 줄이야.
주복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려던 찰나, 하늘에서 또 한 번 천둥소리가 울리면서 콩알 크기만 한 빗방울이 우두두 쏟아져 내렸다.
사격장에는 거센 바람 소리와 빗소리, 그리고 흥분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정말로 비가 내립니다! 정말로 비가 내려요!”
차일 아래에 서 있던 사환 한 명이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빗방울이 차일에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사람들의 흥분한 목소리 때문에 사환은 있는 힘껏 소리쳤다.
“공자님, 여기 좀 보세요, 여기요!”
진호는 사환이 가리키기 전부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비가 내리겠지. 낭자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사환이 고개를 돌려 진호를 쳐다보았다.
“어? 공자님, 그럼 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여기까지 와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진호는 사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보고 싶어서.
저 여인이 얼마나 힘들게 번개를 불러오는지 보고 싶어서.
진호의 시선 안에 있는 것은 드넓은 사격장 위를 홀로 달리고 있는 정교랑뿐이었다.
철사로 만들어진 실타래를 손에 쥔 채 달려가는 정교랑의 온몸은 금세 빗물로 흠뻑 젖었다. 진호의 눈에 비치는 정교랑은, 광풍이 부는 폭우 속 힘없는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뛰다가, 빠르게 걷다가, 힘껏 줄을 당기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교랑의 모든 동작이 진호의 눈에 담겼다. 세차게 내리는 빗물 때문인지, 진호의 시야가 점차 흐릿해졌다.
그때 병주에서도 저렇게 했던 걸까?
가족들이 버리다시피 하고 떠나서 기댈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남겨진 도관, 어둠 속에 숨어 음험한 미소를 짓고 있던 몹쓸 놈들, 그리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그날 밤.
정 낭자가 혼자서 하늘에 목숨을 걸고, 하늘의 도움을 빌렸던 그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려는 건 그런 게 아니겠지.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건, 정 낭자가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뿐이야. 정 낭자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어쩔 수 없이 저런 일을 벌였다는 건 보이지 않겠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심지어는 어가 앞에서 낭자에게 그런 말까지 했으니. 모두가 정 낭자를 두려워하는 만큼, 나 또한 낭자를 두려워했어.
진호가 고개를 들던 찰나, 큰 천둥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번쩍이는 빛이 칠흑같이 어둡던 하늘을 반으로 가르자, 사람들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비명을 질렀다.
진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안 돼, 이대로 둬선 안 돼. 너무 위험해, 너무 위험하다고!
종이 연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도, 정교랑은 계속해서 뛰어가고 있었다. 진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사람들과 눈이 휘둥그레진 채 구경만 하고 있던 관졸들을 손으로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멈춰요! 멈추라고요! 그만 뛰어요!”
진호가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진호의 목소리를 들은 듯, 정교랑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더욱 빠르게 달려갔다. 정교랑은 사격장 중앙에 세워진 허수아비를 향해 달려가다가, 갑자기 허수아비를 향해 힘껏 실타래를 던졌다.
허수아비 주위에 서 있던 세 반근은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 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엎드려!”
정교랑의 외침과 함께, 세 반근이 재빨리 바닥에 엎어졌다.
하얀빛이 번쩍하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히더니, 고막이 터질듯한 굉음이 울려 차일 아래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자빠졌다.
사격장 중앙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중앙에 세워져 있던 허수아비가 화염에 휩싸여 빗속에서 홀로 시커먼 연기를 내뿜었다.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잠잠해지고, 천둥소리가 멀어지자, 사격장에는 바람 소리와 빗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허수아비에게로 향했다.
“원, 세상에도.”
놀라서 바닥에 쓰러졌던 두 관리가 민망해하면서 바닥에서 손을 짚고 일어났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감탄사만 읊조렸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충분히 예상했던 두 사람이지만, 사람이 번개를 불러오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게 된 놀라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당시 사격장 안에 사람이 총 넷이었는데, 딱 허수아비에만 번개가 내리쳤습니다. 꼭 그날처럼요. 주위에 내시들도 몇 있었는데, 그들은 무사하고 평왕 전하에게만 번개가 내리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회랑 아래에 선 사환이 침까지 튀겨가면서 당시 금수원에서 본 상황을 열정적이고 상세하게 묘사했다.
진소가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고 빗물에 촉촉하게 적셔진 파초로 시선을 돌렸다.
“전기수가 말해 주었는데요. 아, 그 전기수는 정 낭자가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데려온 사람이었습니다. 전기수 말로는,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있긴 했지만, 번개가 내리치는 순간 세 시녀가 모두 바닥에 바짝 엎드렸기 때문에 허수아비가 가장 높이 있었다네요. 번개는 항상 가장 높이 있는 물체에 내리치는 특성이 있어서, 허수아비에만 내리꽂힌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전기수가 또 말해 주었는데, 뇌우가 내리치는 날에는 되도록 넓은 평지에 남아 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경우에는 꼭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제자리에 주저앉거나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하고, 절대로 손을 높이 올리거나 높은 나무 아래에 숨지 말아야 한답니다.”
사환이 열을 올리면서 말하던 찰나, 진소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알겠다. 그만 물러가거라.”
아직 이야기를 다 끝내지 못했다고 생각한 사환은 의아한 얼굴로 진소를 바라보았다.
“나중이 돼서는 사람들이 번개를 불러오는 과정을 보기도 했고, 듣기도 했으니, 다들 번개는 사람이 불러올 수 있으며, 평왕 전하께서는 정말 사고로 변을 당하신 게 맞다고들 했습니다.”
사환이 서둘러 결론을 덧붙였다.
노야께서 궁금해하시는 건 이거겠지?
진소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말했다.
“물러가거라.”
사환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물러갔다.
번개를 불러오는 걸 보여 준 이유가, 평왕 때문이 아니었나? 평왕이 십 대 죄악을 저질러 천벌을 받아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아는데.
어째 노야께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시지?
금수원 안.
허수아비에 붙었던 불은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사격장 중앙에는 새까만 재만 남았다. 하지만 차일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간신히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두 관리 중 한 명이 손으로 황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궁에 있는 사람들 말고 누가 관심이 있다고…….”
관리가 고개를 돌려서 시끌벅적한 사람들과 재가 된 허수아비를 바라보았다.
“여기를 찾아온 관리들은 다 그대와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오. 조정의 중신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지. 평왕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그들이 알아야 하고 신경 써야 하는 건 평왕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뿐이오.
이미 결론이 난 일이니, 사실 오늘 정 낭자가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소. 번개를 불러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 주고, 정 낭자가 손가락 하나 까딱한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만 보여 준 셈이지.”
관리의 말을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다른 관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동의하지 못한다며 입을 열었다.
“평왕이 십 대 죄악을 저질러 천벌 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잖소?”
앞서 말하던 관리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럼 왜 하필 평왕이 그 사고를 당했는지 증명할 수 있소? 왜 거기 있던 다른 사람이 아니라, 평왕이 사고를 당했는지 말이오.”
다른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당시에 평왕의 손이 제일 높이 있었으니까?”
“그럼 왜 그때 평왕의 손이 제일 높이 있었는지, 자네는 증명할 수 있나?”
앞서 말하던 관리가 곧바로 물었다.
“다, 당시에 평왕이 죄를 뉘우치고 있었으니까?”
다른 관리가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평왕이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사람이 평왕인 게지. 사고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하필 사고를 당한 사람이 평왕이었다는 거요.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평왕이었기 때문에, 결국 사고를 당한 사람도 평왕이라는 말이지.”
관리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끝을 늘렸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평왕이었기 때문에? 무슨 불경 읊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말장난이람?
다른 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번개는 정말로 사람이 불러올 수 있는 거구나.”
“평왕 전하도 참 딱하시네. 하필이면 그런 사고를 당하셨으니.”
“에이, 아니지. 사고이긴 해도,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평왕 전하만 사고를 당한 거니까, 분명히 평왕 전하는 그런 사고를 당할 운명이었던 거야.”
“그러게. 그날 나도 평지에 혼자 있었고, 몸을 일으켜 뛰고 있었는데도 벼락에 맞지 않았어. 그럼 진짜로 평왕은 벼락에 맞아 죽을 운명이었다는 건가?”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슬슬 자리를 떠나자, 고 관인이 삿대질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놈들을 확…….”
고 관인이 펄쩍 뛰면서 소리치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사환들이 재빨리 그의 팔을 붙들고 허리를 껴안으며 말렸다.
“관인, 참으셔야 합니다.”
“관인, 노야께서 더는 말썽을 피우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관인, 지금 이럴 때 난리를 치면 더 큰 일 납니다.”
사환들이 온 힘을 다해서 고 관인을 막아서고 다독였다. 예전에는 난폭한 고 관인을 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사환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고 관인을 막지 못하는 상황이 더 두려웠다.
고능준은 경성에 돌아온 즉시, 지난번에 고 관인을 따라 덕승루에 갔던 하인들을 싹 처분해 버렸다. 그렇게 본보기가 된 하인들을 본 사환들은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고 관인을 막아야만 했다.
“이런, 빌어먹을! 이번 일로 저 여인은 깨끗하게 혐의를 벗고, 새로운 명망을 얻게 된 셈이다. 평왕에게 좋은 점은 하나도 없는 일이야! 그런데도 저 여인더러 번개를 불러오라고 한 건,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고 관인은 자기 성을 이기지 못하고 차일 아래 있던 탁자를 발로 차 뒤엎어 버렸다.
사환 하나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관인, 평왕 전하께서 벼락에 맞은 게 사고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니, 월식이 있는 날,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위태로워지셨으니, 평왕 전하께서 진정한 태자라는 뜻이잖아요.”
고 관인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잠시 사환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한 번 풀고는 사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누가 그런 걸 증명하고 싶다더냐? 태자의 명을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살아 있기만 했으면 우리가 평왕을 태자의 명으로 만들 수 있고, 제위에 오르게 할 수 있었단 말이다!”
작가의 말:
연으로 번개를 불러오는 이야기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연을 날리다가 피뢰침을 발명하게 된 일화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다행-
천둥소리가 지나가고,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멎을 때쯤, 황궁에 있던 태후도 보고를 받았다.
“애가는 그럴 줄 알았다. 평왕은 절대로 천벌을 받은 게 아니야.”
“예, 마마. 허수아비 주위로 네다섯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이 바닥에 엎드렸더니 번개가 딱 허수아비에만 내리꽂혔습니다. 벼락에 맞는 건 단순히 누가 더 높이 있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전하께서 변을 당하신 것 또한 사고라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내시의 말을 들은 태후가 눈물을 훔쳤다.
“정말 잘됐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역시 사고였어, 사고.”
태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잘됐어? 다행이라고? 다행이긴, 이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내 손자가 죽은 건 똑같잖아! 어떻게 죽었든 간에, 죽었다는 건 매한가지야!
태후가 통곡하면서 소리쳤다.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일꼬.”
태후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울부짖자, 주위의 내시들과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를 토닥였다.
“마마, 봉체(鳳體: 태후, 황후 등의 몸에 대한 존칭)를 보존하시옵소서. 이제 마마께서 감당하셔야 할 무거운 짐이 많습니다.”
내시들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황제가 위독하여 나라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보니, 태후는 마음껏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그 생각에 더욱 서러워진 태후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아이고, 가엾은 우리 아가.”
내시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태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 이 소식을 황후마마께도 알리는 게 어떠실지요?”
황후?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물었다.
“황후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시고, 계속 폐하의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태후가 탁자에 기댄 채 잠시 침묵했다. 고능준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태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평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이 궁 안에 몇이나 있다고. 마음 쓰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이니, 마음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가서 알릴 필요 없느니라.”
평왕이 사고로 죽고, 황제가 쓰러지면서 황궁 안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린 거친 생각들이 황궁 곳곳에 넘실거렸다.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귀비는 어떠하더냐?”
태후가 다시 물었다.
“귀비마마께서는 여전하십니다. 약을 드시고 나면 잠드셔서 난동을 부리진 않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평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귀비는 광증이 도졌다. 증세가 심각해진 귀비가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치고 쉼 없이 소름 끼치는 말들을 해대는 통에, 태후는 어쩔 수 없이 귀비에게 약을 먹여야 했다.
태후는 늘 밝은 모습으로 자신과 담소를 나누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귀비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지금의 귀비를 생각해 보니, 한탄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모든 게 다 한순간이로구나. 이 무슨 고생인고.
또다시 울컥해진 태후가 눈을 감던 찰나, 문밖의 내시가 소식을 알렸다.
“마마, 제국(齊國)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제국’은 고능준 부인의 봉호다. 지금 고능준의 관직으로는 황제 곁을 지키는 당직을 설 자격이 되지 못해 부인을 대신 보낸 것이었다.
제국 부인은 천자로부터 봉호를 받은 부인이자 외척이기도 하니, 이러한 때에 태후의 병문안을 오는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조정 중신들은 제국 부인이 고능준을 대신해 입궁한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강경하게 고능준을 막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되어, 제국 부인의 입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눈감아주기로 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온 건지 모르겠네. 애가는 울고 싶어도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한다니!
태후가 탁자를 손으로 짚어 자세를 고쳐 앉고는 이를 악물고 침상을 두어 번 내리쳤다.
그렇다 한들,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손자를 잃고 아들까지 쓰러진 마당에, 이대로 아들이 일군 강산마저 쇠락하게 둘 수는 없느니.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들라 하라.”
황제의 침궁 문이 열리자, 누군가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마마.”
내시가 허둥대며 황후를 부르자, 침상 옆에 앉아있던 황후가 고개를 홱 돌렸다. 황후가 눈썹을 치켜뜨며 내시를 흘겨보고는 휘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가 서둘러 황후 가까이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마, 정말로 정 낭자가, 조금 전에 금수원에서 번개를 불러왔다고 합니다.”
내시의 목소리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같은 소식을 들은 황후와 태후는 분명 같은 말을 뱉었지만, 두 사람이 뱉은 말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본궁은 정 낭자가 분명 무사할 줄 알았다.”
황후가 이어서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정 낭자는 신선의 제자가 아닙니까.”
내시가 대꾸했다.
“정말로 신선의 제자였다면, 오늘 같은 일을 겪을 필요가 있겠느냐?”
황후가 고개를 젓고는 몸을 돌려 휘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얇은 휘장 너머로 침상에 가만히 누워 있는 남자가 보였다.
건재할 때는 별 소용 없어 보이더니, 쓰러지고 나서야 쓸모가 생겼네.
저렇게 겨우 숨만 붙은 상태로 누워 있으니, 나는 안심하고 저 남자가 죽는 날만 기다리면 되겠지. 이제 보니, 내가 제명에 못 죽을까 봐 불안해했던 나날들이 참…….
“마마.”
다른 내시가 불안에 떨며 침궁 안으로 들어왔다.
“제국 부인께서 또 오셨다고 합니다.”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내시가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황후에게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황후는 잠시 표정 없는 얼굴로 생각에 잠기더니,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에는 비아냥과 같잖음이 잔뜩 서려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구나. 결국 또 그자의 손에 넘어가다니.”
바깥에서 뭐라 떠들어대든, 황궁 안에서 얼마나 많은 희비가 교차하든, 정씨 저택은 여전히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이건 저희 노야께서 보내신 명첩입니다.”
“저희 부인께서 아씨의 안부를 물으셨어요.”
두 시종이 선물을 건네며 정교랑을 향한 윗전들의 안부를 전했다.
“시기가 시기인 지라, 댁에 방문하기가 어려워 직접 오시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두 분께서는 늘 낭자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시녀가 감사 인사를 하면서 답례했다.
“진(陳) 상공 내외께서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씨께서는 잘 지내고 계세요.”
진씨 가문의 시종들은 긴말하지 않고 간략하게 예를 표한 뒤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시녀는 지금 같은 시기에 진씨 가문의 사람이 정교랑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은 꽤 불편한 일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인을 보내 안부를 묻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짧은 안부 인사 하나만으로도, 내일쯤이면 어사대에 진소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쌓일 터였다.
진씨 가문의 마차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 앞을 떠나자, 누군가가 급하게 문 앞으로 달려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진 공자님?”
시녀가 놀란 기색으로 불렀다. 진호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너희 아씨를 볼 수 있겠느냐?”
시녀가 진호를 쳐다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공자님은 무섭지도 않으세요?”
진호가 피식 웃었다.
“나야 아직 관직 임용도 못 받은 신분이잖느냐. 상공 대인도 아닌데,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진호가 문가에서 걸음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서서 공손히 말했다.
“낭자에게 내가 왔다고 알려 주게.”
“알리긴 뭘 알려? 십삼, 왜 또 괜히 모양새 잡는 거야?”
문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핀잔에 진호가 고개를 들자, 목소리의 주인공인 주복이 거들먹거리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왔으면 그냥 들어오면 될 것이지. 가마라도 대령해 안으로 모셔다드리리?”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진호는 주복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문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내가 낭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그래.”
“진 공자.”
어두운 밤하늘 아래, 여인의 눈빛에서는 놀라움이나 기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진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당신, 입니까?”
하지만 이 말을 내뱉은 순간, 여인의 표정이 일순간 암담해진 것을 보고 진호는 조금 전 자신이 본 여인의 눈빛이 진짜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진호는 늘 정교랑이 자기 앞에서 다른 표정을 짓기를 기대했지만, 그 표정을 그 순간에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교랑의 눈빛에서 살짝 스쳤던 놀라움과 기쁨은 진호의 뇌리에서 한 번, 또 한 번 떠오를 때마다 날카로운 칼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고통을 안겼다.
아냐, 칼이 된 건 내 말이야. 내 말이 낭자의 마음을 찔렀을 거야.
진호의 주먹 위로 힘줄이 툭 불거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주복이 진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반근한테 듣기로는 네가 그날 궁문 앞에서 저 여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두, 둘이서…….”
“내가 낭자를 의심했어.”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주복은 멈칫했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 또,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저 여인을 의심하는 게 네놈 하나도 아니잖아.”
주복이 입술을 삐죽이면서 턱으로 황궁을 가리켰다.
“저 여인을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저곳에만 해도 수두룩할 거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는 게 더 힘들걸? 그리고 나도, 내 아버지도, 그리고 범강림도 속으로는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그래도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면 안 됐어.”
진호가 대답했다. 주복이 진호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는 주먹으로 진호를 밀쳤다.
“그래서 오늘 찾아온 이유가 뭐야. 저 여인이 넓은 아량으로 너를 용서해 주길 바라서? 그렇게 네 마음이 편해지자고?”
주복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걷혔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십삼, 네가 남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길래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리고 왜 네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해? 네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뭐고, 그래서 너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데?”
주복의 말이 맞아. 나는 낭자에게 사과하러 온 게 맞나?
아니, 사과할 건 또 뭐야? 이미 할 말 다 해놓고, 굳이 또 찾아오는 건 낭자에게 넓은 아량을 베풀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더 돼?
진호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내가 낭자를 너무 업신여겼어.”
진호가 주복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하고는 곧장 말을 타고 떠났다.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시녀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진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주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 공자님, 가서 아씨께 알, 알려야 할까요? 아마 지금쯤이면 아씨께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셨을 텐데.”
시녀가 안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관둬라. 괜히 저런 한가한 사람들 상대해 줄 필요 없어.”
주복이 몸을 홱 돌리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어 걸음 걸었을까, 갑자기 주복의 등 뒤에서 급하게 멈추는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주복은 벌써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온 진호와 마주쳤다. 진호의 뒤에는 급보를 알리기 위해 말을 타고 온 사환 하나가 있었다.
“공자님, 공자님, 뭐 하시는 겁니까. 노야께서 속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사환이 다급하게 진호에게 소리쳤다. 진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어이! 아직 널 볼지 안 볼지 물어보지도 않았단 말이야!”
주복이 소리쳤지만, 진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 서서 황씨와 몸종이 마당에서 소보아를 데리고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진호가 들이닥치자, 황씨는 재빨리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올케, 그러지 않아도 돼요. 여기서 놀고 있어요. 우리가 들어가서 이야기 나눌게요.”
정교랑이 황씨에게 말하고는 진호를 향해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했다. 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딱 한 마디만 하고 가면 되거든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띠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낭자를 다시 보게 됐을 때 어떤 모습일지 몇 번이고 상상해 봤지만, 딱히 평소와 다를 게 없네.
내가 내려놓을 수 있다면, 낭자도 내려놓을 수 있고, 내가 따지지 않는다면, 낭자 또한 따지지 않아. 군자와 교우하는 게 이리도 쉬운 것이었다니.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태후가 경왕을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진호의 뒤를 따라오던 주복이 놀란 표정으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경왕!
정교랑이 아, 하고는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호가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가자, 마당에서 풍차를 손에 쥔 채 황씨와 시녀들과 꼬리잡기 놀이를 하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소보아가 보였다.
한없이 약한 어린아이는 덥고 추운 것도 구분하지 못하고, 슬픔과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가장 천진난만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경왕부 안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끊임없이 밖으로 옮겨지는 크고 작은 상자들이 마차 한 대를 금방 채웠다.
“전하, 이런 것들은 챙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품계 높은 내시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말했지만,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다 경왕이 쓰던 것들이네. 마음대로 바꿨다가는 경왕이 난리를 칠 것이야.”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보자, 내시 몇 명이 경왕을 어르고 달래면서 간신히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경왕은 놀고 있던 차에 갑자기 끌려 나온 것이 몹시 불만인지 이리저리 팔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육가아, 우리 궁에 들어가서 함께 마마를 뵙자. 거기 가서 계속 놀면 돼. 이 형님이 같이 놀아 줄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그러나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경왕은 여전히 심통 가득한 얼굴로 옹알이를 하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품계가 높아 보이는 내시가 웃으면서 경왕을 마차에 태웠다. 진안 군왕이 경왕을 따라 마차에 올라타려던 찰나, 내시가 갑자기 진안 군왕의 앞을 조심스럽게 가로막았다.
“전하, 직접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인들이 경왕 전하를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내시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는 내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시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경왕 전하를 모시고 입궁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종친이 지금 같은 시기에 태후마마의 전갈 없이 입궁하기는 어렵사옵니다.”
그렇구나.
진안 군왕이 마차를 짚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궁의 마차가 서서히 멀어져 갔지만, 진안 군왕은 제자리에 서서 요지부동이었다. 경왕부 근처에서 이 장면을 몰래 지켜보던 눈길들이 진안 군왕에게 집중되었다.
“전하,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진안 군왕 곁에 있던 내시가 조용히 속삭였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리고 천천히 왕부 안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자, 마당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은 또 넋이 나간 모습으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왕부의 절반이 텅 빈 느낌이구나.”
진안 군왕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실상은 겨우 사람 일곱이 없어진 것뿐인데.
진안 군왕이 대부분의 시간을 경왕과 함께 보내며 그를 보살핀 덕에, 경왕의 시중을 드는 내시는 여섯 명뿐이었다. 그 여섯 명의 내시들은 경왕과 함께 자연스레 궁으로 돌아갔다.
내시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전하, 지금도 좋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도 나쁘지 않지.”
사실, 오늘만을 기다려오지 않았는가.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경왕과 함께 보낸 시간은 족히 십여 년은 되었고, 특히 최근 삼 년 동안은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삼 년 동안 경왕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자랐고, 진안 군왕은 그런 경왕의 곁을 지키며 유모처럼 그를 살뜰히 챙기고 보살폈다.
“전하, 이제 적응하셔야지요. 지금 이 순간부터 경왕은 더 이상 어린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아이를 세심하게 보살피는 유모의 역할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궁녀와 내시들이 알아서 잘할 것이고, 전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은 더 큰, 그리고 더 중요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경왕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얼른 적응해야지. 육가아가 경왕이 됐던 그때처럼. 아무도 육가아가 그런 모습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적응해야만 했던 것처럼.
이제야 좀 적응됐다 싶었던 경왕이 어느새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더라도, 나는 그 모습에 다시 적응해야만 한다.
경왕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그 아이는 항상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육가아니까.
“육가아, 형님이 네게 천하를 쥐여준다고 했었지.”
진안 군왕이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고 주먹을 쥐었다.
“이건 너의 천하니라. 드디어 천하를 네 손에 쥐게 되었으니, 이 형님이 꼭 너의 천하를 지켜 주마.”
“태후가 경왕을 궁으로 다시 들였다고? 설마 경왕을 제위에 올리려는 건가?”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하고 죽을 한 그릇 먹은 뒤, 입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인,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어찌 됐든 경왕은 폐하의 유일한 혈통이니까요.”
막료가 말했다.
“하지만 경왕은 바보가 아닌가!”
진소가 손에 쥐고 있던 빈 그릇을 탁자 위로 던졌다.
“그럼 나중에 시호(諡號: 사람이 죽은 뒤 생전의 업적, 행동 및 품성에 의해 정해지는 호)를 혜(惠)로 해야 할까, 안(安)으로 해야 할까?”막료가 멈칫하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안(安)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막료는 과거에 지능이 낮으나 제위에 올랐던 진안제(晋安帝)와 진혜제(晋惠帝) 중에 진안제가 더 바보라고 생각하여 대답했다. 진안제는 덥고 추운 것도 구분할 줄 모르고, 입이 있으나 말을 할 줄 모르니, 그런 점들이 더욱 경왕과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진소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막료를 흘겨보았다.
“자네는 지금 그런 농담이 재밌다고 생각하는가?”
진소가 소매를 홱 털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료가 민망한 듯 웃으면서 서둘러 진소의 뒤를 쫓아갔다.
“대인, 재밌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런 농담을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이 있으니 드리는 말입니다. 대인, 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작은 일이 아니지.
황궁의 마차가 경왕부 앞에 멈춰 선 그 순간부터, 소식은 경성 전역에 퍼졌고 덕분에 경성이 발칵 뒤집혔어.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긴 했지만, 그건 백성들에게 보여 주는 눈요깃거리에 불과했다. 조정 관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의 국정 운영이었다.
황제의 병이 위중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던 평왕까지 갑작스레 변을 당한 상황이었다. 옥좌는 단 하루도 비워 둘 수 없는 법, 군주가 누가 될 것인가에 따라 향후 왕조가 결정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앞길이 결정됐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바보가 어떻게 황제를 해?”
“뭐가 말도 안 돼? 바보가 왜 황제를 못 해? 전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어허, 전례 얘기는 꺼내지도 마쇼. 그 시기에 나라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요?”
“다들 알지, 다들 알아. 그런데 오늘날의 태자소부(太子少傅: 태자의 스승) 위관(衛瓘)이 누가 될지가 관건이지. 바보에게 넘어갈 옥좌가 아깝다는 말을, 술김에라도 할 수 있을 위인이 누굴지.”
“고능준은 태후가 수렴청정하기만을 바라겠군.”
주복이 말했다.
경성에 무슨 소식이 퍼지든 간에, 언제나 그랬듯 정씨 저택은 고요했다. 진호는 태후가 경왕을 데려갔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곧장 정씨 저택을 떠났다.
진호의 입장에서는 정교랑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조당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고, 황제가 위독한 데다 평왕까지 없어진 마당에 중신들의 관계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진(秦)씨 가문은 진소만큼 중임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고능준의 가문을 능가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꽤 명망 있는 황족이었다. 따라서 진씨 가문의 일거수일투족은 조정 대신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정교랑은 아주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온 일은 평왕이 사고로 죽은 것이며, 천벌을 받아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 관리들은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온 이유가, 자신이 평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태후에게 증명해 보인 것에 불과함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했다고 뭐가 달라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정교랑을 향한 의심의 씨앗이 심어졌다. 지금 당장은 평왕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대놓고 정교랑을 꺾으려 하진 않겠지만, 평왕이 황릉에 안장되고 태후의 수렴청정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고능준이 뿌려둔 작은 의심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싹을 틔우고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나무가 될 터였다.
“이게 아씨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요! 아씨께서 그 사람들을 해친 것도 아니고, 아씨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인데, 어째서 아씨를…….”
반근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관련이 없어?”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반근에게 반문했다.
“평왕은 죄를 뉘우치다가 벼락에 맞았다. 평왕이 무릎을 꿇고 죄를 뉘우치게 된 이유는 귀비가 누군가의 모함에 빠졌기 때문이지. 잘 생각해 봐. 태후 입장에서는 귀비를 모함에 빠트린 사람이 안비일 거야. 그럼 안비는 무엇을 빌미로 귀비를 모함할 수 있었을까? 그야 당연히 안비가 당시 회임하고 있던 황자가 아니겠어? 그런데 안비가 어떻게 회임을 했지? 그건 바로 진안 군왕이 보낸 간식을 먹고 나서부터야.”
주복의 말을 들은 시녀와 반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 공자님도 말씀을 꽤 잘하시네요.”
시녀의 말에 주복이 눈썹을 치켜뜨고 시녀를 흘겨보았다.
“그, 그래도 아씨와는 관련이 없는걸요?”
반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주복이 콧방귀를 뀌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안 군왕의 간식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간식?
그날 진안 군왕이 경왕부에서 연회를 열어 아씨를 초대했고, 아씨께서는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해 주셨지. 그리고 진안 군왕은 아씨께서 알려 준 대로 간식을 새로 만들어 입궁하며 폐하께 그 간식을 드렸고, 폐하께선 또 그걸 안비에게…….
“아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그게 어떻게 우리 아씨 때문이라는 거예요? 순 억지잖아요!”
반근은 씩씩대며 눈을 부릅떴지만 주복은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 여인네들은 그런 억지 잘 부리지 않느냐. 연달아 손자와 아들까지 잃게 된, 검은 머리카락 한 올 나지 않는 백발의 노파는 오죽할까? 태후는 언제나 그 위상이 드높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어서 황제조차도 태후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다. 그런 여인이 이런 충격을 받고도 도리나 이치를 운운할 수 있을 것 같더냐?”
하긴, 한꺼번에 아들과 손자를 잃어 비통함과 분노에 휩싸인 노부인이라면, 절대로 도리나 이치 같은 걸 안중에 두지 않을 거야. 게다가 고씨 가문까지 합세해서 태후가 억지를 부리도록 부추기고 있으니.
“평왕만 없어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태후가 있을 줄이야.”
시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평왕이 살아 있었을 때도, 아씨께서 혼사를 거절해 체면을 구기고 창피를 당했다는 이유로 태후는 화가 났다지만, 그 정도의 분노는 아씨께서 경성을 떠나신다면 끝날 일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아씨가 경성 밖으로 내쫓기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거야. 지금 태후에게 아씨의 존재는,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기조차 싫을 정도일 테지.
정말 끝도 없구나. 산 넘어 산이네.
방 안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아버지께서는 벌써 짐 정리를 하고 계신다. 사직서도 이미 작성해 두셨고.”
주복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나도 곧 서북으로 돌아가야 해서, 아버지와 가족들을 섬주로 바래다줄 생각이야. 그러니까 교랑, 나와 같이 가자.”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진안 군왕과 혼사를 치를 생각은 그만 접어 둬.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됐잖아. 태후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거야.”
주복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아니요.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정교랑이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을 덧붙였다.
“다만, 아직 내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작가의 말: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과 진안제(晋患帝) 사마덕종(司馬德宗) 두 황제는 모두 지능이 낮으나 제위에 올랐던 황제들입니다.
진혜제 사마충은 진무제(晋武帝)의 정실 둘째 아들입니다. 적장자가 죽고 나서 자연스럽게 사마충이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지능이 낮고 바보라는 이유로, 태자의 스승인 위관(衛瓘)은 술기운을 빌려 옥좌를 손으로 치면서 귀중한 옥좌가 아깝다는 말을 했습니다. 위관은 취하지 않았지만, 황제에게 사마충이 태자로 책봉되면 안 되고, 나아가 제위를 이어받으면 더더욱 안 된다는 충언을 한 일화가 있습니다.
-배짱-
“설마 태후 쪽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주복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안심해. 태후 쪽 사람들은 아직 너를 건드릴 수 없을 거야. 우선 네가 번개를 불러온 일 때문에 네 명망이 더욱 높아졌고, 지금 그들은 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다. 그러니까, 네가 경성을 떠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지금이야. 경성을 떠나 섬주로 가게 되면 아무래도 황궁과는 꽤 거리가 있을 테니,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 한다 해도 네가 경성에 있을 때만큼 쉽지는 않을 거다.”
정교랑이 웃으면서 주복을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내가 말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에요.”
그, 그럼 혹시 진안 군왕을 말하는 건가?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며 속으로 생각했지만,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아마 내가 물으면,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대답하겠지? 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전혀 듣고 싶지 않다고!
이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이, 누이.”
범강림은 자리에 있는 주복을 신경 쓰지도 않고 곧바로 정교랑에게 말했다.
“궁에서 전갈이 왔어.”
궁에서?
주복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범강림의 뒤로 두 내시가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정 낭자, 황후마마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두 내시가 웃으면서 공손하게 예를 올린 뒤, 황궁의 전갈을 건넸다.
황후?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황후였어?
황후의 교지?
시녀가 내시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주복이 한발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신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시기가 시기인지라 신이 먼저 교지를 확인해야겠습니다.”
평왕이 죽고 황제가 위독하니, 황궁의 대소사를 통치할 권력은 자연스레 태후가 도맡게 될 것이고, 그런 태후의 배후에는 고씨 가문이 있었다.
조정이 혼란한 시기에는 허위로 성지를 전달하는 일이 간혹 있기도 했고, 정교랑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연약한 여인 하나에 불과했다. 게다가 황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정교랑이 황궁 안으로 들어가 무슨 사고를 당한다 해도 궁 밖의 사람들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시는 주복이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웃으며 손에 있던 교지를 그에게 건넸다.
주복이 교지를 받아 펼쳐 보니, 황후의 인장과 중서성의 서명날인이 보였다. 황후의 인장은 누군가가 몰래 가져다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중서문하성의 서명날인은 절대로 가짜일 리 없었다. 지금은 진소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중서문하성을 지키며 조정을 감시할 때라, 진소 측 사람이 중서문하성에 상주할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진소가 있는 한, 황궁의 태후나 고씨 가문이 함부로 황후를 빌미 삼아 허위 교지를 내려 정교랑을 음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복이 교지를 접어서 다시 내시에게 건넸다. 교지를 받은 내시가 웃으며 주복을 향해 예를 표하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은 벌써 몸을 일으켜 가만히 서 있었다.
“황후마마께서 무슨 일로 절 부르시죠?”
정교랑이 물었다.
“마마께서 낭자를 궁으로 모셔와, 진료를 청하고자 합니다.”
내시의 말을 들은 주복의 표정이 싹 변했다.
“풍질은 고칠 줄 모른다고 했을 텐데요. 이미 그날 말씀을 올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누이는 절대로 폐하께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주복이 곧바로 대답하자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내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교랑이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고 말했다.
“괜찮아요. 황후마마께서 부르셨으니, 소녀가 다녀와야죠.”
미쳤어?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너 미쳤어? 거길 왜 가!”
주복이 내시의 존재를 무시한 채 고함쳤다.
“오라버니, 마음 편히 가져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오라버니, 마음 편히 가져요.
정교랑이 주복의 소매 한쪽을 살짝 잡아끌자, 주복은 부드러운 깃털 한 개가 마음을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는 입을 열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하려던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서 입술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내시가 정교랑의 말에 몹시 기뻐하면서 혹여나 정교랑이 다시 안 간다고 말을 번복할까 봐, 서둘러 예를 표하고 정교랑을 마차로 모셨다.
“낭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태후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황후가 중서문하성에 교지를 보내자마자, 태후는 바로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마마, 쫓아가서 막을까요?”
내시가 물었다.
“황후가 뭘 하려는 게야?”
태후가 손으로 미간을 짚은 채 물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정 낭자를 모셔와 폐하의 상태를 살피고자 하십니다. 폐하의 호흡이 계속 불안정하나, 태의들은 죄다 속수무책이라고만 한답니다. 당초 진안 군왕이 경왕에게 가져다준 탕약이 심신안정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하여, 정 낭자를 모셔와 폐하의 상태를 진단한 뒤 비슷한 탕약을 처방할 수 있을지 묻고자 하신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그래? 그 탕약의 효과가 탁월하다는 건 애가도 들어 봤다만.
“그런 거라면, 데려오라고 해야지.”
태후의 말에 다른 내시가 불안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황후께서는 분명 경왕이 입궁한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져 폐하의 옥체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시의 따귀를 후려쳤다.
“당장 이놈을 끌고 가서 쳐 죽여라!”
태후가 호통쳤다.
내시는 겁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원했지만, 주위의 내시들이 서둘러 그 내시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전해져왔다.
“제국 부인, 오셨습니까.”
내시들이 태후궁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을 보고 예를 표했다.
“마마, 왜 그러세요?”
제국 부인이 태후에게 물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황상이 하루빨리 쾌차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생기다니. 어찌 뚫린 입으로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태후가 손으로 가슴을 내리치면서 한탄했다.
“황상은 나의 아들이니라. 애가가 이 몸으로 낳아 키운 귀한 아들이라고. 누가 애가더러 당장 황상과 목숨을 맞바꾸라고 한다면, 애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리할 것이야. 그런데 감히 애가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여? 꼭 애가가, 황상이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황상의 옥체가 안 좋아지면, 애가는 얼마나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제국 부인이 태후를 따라 굵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마마, 그러니까요. 어미의 마음은 다 똑같죠. 폐하께서 쾌차하실 수만 있다면, 마마께서도 마음 편히 하루하루를 즐기실 텐데, 어디 지금처럼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고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내시겠습니까.”
태후가 제국 부인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하오나 마마, 궁에서는 아무나 어미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모두가 저희처럼 폐하께 진심이지도 않을 테고요. 그러니 마마, 꼭 폐하의 침궁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하옵니다.”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봐라, 황상의 침전에 사람을 더 보내거라.”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 해도, 큰 재난 앞에서는 각자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지. 부부가 어디 피를 나눈 모자만큼 가까울쏘냐?
그리고 황후는 애초에 기댈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어. 지금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황후와 결판을 낼 것이야!
태후가 이를 악물었다. 내시들이 태후의 명령에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태후궁 밖으로 나갔다. 내시들이 모두 나가자, 제국 부인이 직접 차를 우려 태후에게 건넸다.
“사실 신첩은 폐하께서 깨어나시는 게 두렵기도 합니다.”
제국 부인의 말에 태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마, 신첩은 폐하께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이옵니다. 평왕이 폐하의 눈앞에서…….”
제국 부인이 서둘러 말을 덧붙이고 눈물을 보이자 태후가 통곡했다.
“황제가 바로 그 일 때문에 분통이 터져 이 지경이 된 것 아니더냐.”
자기 아들이 눈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 아버지보다 고통스러울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폐하께서 후손을 잇기 워낙 힘드셨다 보니, 궁에 있는 아이들을 진귀한 보물 대하듯 아끼시던 게 눈에 선합니다.”
제국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열이 나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날에는, 아이 걱정에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적도 있었지. 살짝 스치거나 넘어져서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꼭 자기가 다친 것처럼 속상해했어.”
살짝 스치거나 넘어져도 그리 속상해했는데, 멀쩡하던 평왕이 자기 눈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본 황제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할지.
태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했다.
“그래도 지금은 경왕이라도 있으니, 폐하의 혈통이 아예 끊겼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마, 경왕을 꼭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국 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경왕 이야기가 나오자, 태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멈췄다.
“경왕은 잘 있느냐?”
태후가 묻자, 궁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주 잘 계십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뛰어노시다가, 지금은 잠드셨습니다.”
태후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시 한 명이 밖에서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정 낭자가 폐하의 진료를 마쳤습니다.”
“뭐라고 하더냐?”
태후가 물었다.
“정 낭자의 말로는 경왕이 마시는 탕약은 경왕의 병에 한한 것이오며, 폐하께는 들지 않는 약이라 하였습니다.”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 여인, 귀신 농간을 할 때부터 알아봤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으니라고.”
태후가 이를 부득 갈면서 욕을 했다.
“마마, 그 여인을 불러 폐하의 병을 보게 하는 것부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국 부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태후가 고개를 돌려 제국 부인을 쳐다보자, 제국 부인이 말을 이었다.
“마마, 잊으셨습니까? 폐하께서 쓰러지시기 전에 정 낭자를 부른 이유는 그 죄를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깨어신다면, 아마 가장 먼저 손볼 사람은 바로 정 낭자지 않겠습니까?”
제국 부인이 태후궁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태후가 흠칫 놀라고는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애초에 그 여인을 궁에 들인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아닙니다, 마마. 정 낭자가 궁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면, 정 낭자에게 마마를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마마께서 폐하를 인자하지 않고 자상하지 않게 대하신다는 빌미요. 하지만 그 여인이 제 발로 궁에 들어온 이상, 이제 마마께서는 그 여인을 궁에 남겨 두실 수 있겠지요.”
제국 부인이 말했다. 태후가 멈칫하고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재수 없는 것을 궁에 남겨서 뭐에 쓰려고? 황제를 해칠 수도 있는 사람이야.”
“정 낭자는 이미 폐하를 해쳤습니다. 다만 정 낭자가 해쳤다는 증거, 그리고 정 낭자를 벌할 수 있는 증거가 없을 뿐이지요. 이왕 황후가 정 낭자에게 폐하의 병을 봐 달라는 교지를 내렸으니, 정 낭자에게 좀 더 오래 폐하의 병을 봐 달라고 하면 될 일이잖습니까?”
제국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에 하나 정 낭자가 궁에 있는 동안,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런데도 폐하의 병을 살피고 있던 정 낭자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땐 태후가 목청을 높여 그자들을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태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가 보낸 내시의 말을 들은 황후는 무표정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궁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 태후마마께 소녀의 집에 서신 한 통만 보내 달라는 청을 올려도 될까요?”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자, 내시들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혹시 정 낭자께서 더 필요하거나, 집에서 가져다드릴 물건이 있으실지요?”
내시 중 한 명이 세심하게 물었다.
“바깥의 물건을 어찌 감히 궁에 들이겠습니까. 소녀는 괜찮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공.”
재미있는 여인일세.
제국 부인이 추측했던 것처럼 난리를 피우지도 않고, 조용하고 담담하게 명령에 따르다니. 아무리 신선의 제자라고 해도 황실이 무서운 건 매한가지인가 보군.
내시가 속으로 혀를 차고는 다른 내시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황후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괜히 낭자만 곤란하게 만들었네. 본궁은 도저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황후가 황제의 침전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가 없으면, 본궁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되네. 본궁은 진심으로 폐하께서 쾌차하시길 바라는 마음에, 무모한 일인 줄을 알면서도 낭자에게 전갈을 보냈어. 정 낭자가 직접 폐하의 상태를 봐줬으면 해서. 그리고, 사실 본궁은 낭자가 본궁의 청을 수락해 입궁할 줄 몰랐다네.”
황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본궁이 낭자를 보는 건 오늘로 두 번째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아. 그 아이가 본궁을 자주 보러온 덕에 낭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황후는 진안 군왕의 환한 웃음과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 마마, 그 여인이 웃을 줄도 알더라고요.
황후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신나게 떠들어대던 진안 군왕이 눈앞에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그 여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반짝이는 진안 군왕의 눈동자가 황후의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마마, 그 여인이 얼마나 대단하냐면요.
진짜 못 하는 게 없더라니까요? 다 할 줄 알아요.
그 여인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더라고요. 세상에 어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죠?
황후가 걸음을 옮기자, 눈앞과 귓가에 떠오르던 진안 군왕의 모습과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 아이를 통해서 꽤 오랫동안 낭자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본궁이 낭자를 직접 본 적은 손에 꼽지만, 낭자가 똑똑하고, 선량하고, 용감하고, 배짱 있는 여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낭자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그 누구도 낭자를 협박해서 그 일을 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낭자는 이번에 입궐할 때도, 아마 들어오기는 쉽지만, 나가기는 힘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테지.
사실 본궁의 부름을 거절했더라도, 낭자는 조정의 신하도 아니고, 의원도 아니니 도리에는 어긋나지 않아. 누군가가 차후에 그것을 빌미로 트집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야.
뭐, 그 이유를 근거로 삼아 어떤 사람들은 낭자를 더욱 싫어하겠지만,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을 테고.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건, 낭자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일이니까.”
한창 말을 하던 황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을 텐데도 궁에 들어온 이유가 뭐지?”
창백한 얼굴의 황후가 호기심을 숨기지 않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서 소녀에게 입궁하여 진료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폐하의 풍질은 고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지금 와서 신선의 비방을 얻어 풍질을 고칠 수 있게 됐다고 하면, 분명 황제에게 거짓을 고했다는 이유로 목이 달아날 텐데.
“폐하의 풍질은 소녀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녀는 황후마마께서 앓고 계신 죽을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앓고 계신 죽을병!
정교랑을 바라보던 황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 낭자, 역시 배짱이 두둑한 여인이로구나.”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서신을 전달하러 온 내시가 떠나자, 범강림의 안색은 잿빛이 되었다.
“역시.”
“여보, 시누이에게 별일은 없겠죠?”
황씨가 가까이 걸어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범강림의 안색이 잿빛이라면, 황씨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범강림의 고향은 산간벽지인 무원산. 과거 그가 품었던 가장 큰 소망은 군량미를 먹을 수 있는 병사가 되는 것이었을 뿐, 오늘처럼 높은 관직을 얻어 어딜 가나 대인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범강림이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당초 태평거의 무뢰배들을 거쳐서, 수십 년을 한 자리에서 장사했던 두칠과 경성의 고위 관리인 유 교리, 탈영의 죄를 판결했던 대인들부터 서북 일대를 책임지던 장수까지, 뒤이어 황실의 종친을 거쳐 이제는 태후라…….
나를 포함한 다른 무원산 형제들이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야. 요즘엔 밤에 자다가 깼을 때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도저히 어떻게 된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범강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을 거요.”
범강림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황씨는 범강림의 말이 못 미더웠는지, 고개를 돌려 주복에게 물었다.
“주씨 오라버니, 시누이는 정말로 무사한 거죠?”
황씨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된 호칭을 부르지 못하고, 서북에서 남을 부를 때 자주 쓰던 호칭으로 주복을 불렀다.
“별일 없을 겁니다.”
주복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씨는 주복이 적어도 범강림보다는 세상 물정에 더 밝고, 조정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가에 서 있던 시녀가 의아한 얼굴로 반근에게 물었다.
“반근, 왜 안 울어?”
반근이 평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울 일이 뭐 있다고.”
시녀가 장난스럽게 혀를 찼고, 반근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아씨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혀 깨물고 자결하면 그만이야. 난 살아서도 아씨의 사람이고, 죽어서도 아씨의 귀신이 될 거야. 나는 살든 죽든, 언제나 아씨 곁을 지킬 테니까.
반근이 입술을 꾹 다물고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황씨를 안심시키고 방으로 들여보낸 범강림은 주복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정말로 무사한 겁니까?”
끝내 불안함을 참지 못한 범강림이 주복에게 물었다. 주복이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무사하다라…….
아마 소식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벌써 짐을 싸서 야반도주하셨겠지.
“무사할 거요. 내가 진(秦)씨 가문에 가서 물어보겠소.”
아, 공주부 진씨 가문도 황족이지. 고능준과는 다르게 진씨 가문은 늘 누이와 사이가 좋았으니까.
“그럼 잘 좀 부탁…….”
범강림이 서둘러 공수의 예를 표하자, 갑자기 주복이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정교랑은 내 누이요!”
주복이 말에 힘을 실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친누이!”
주복이 말을 끝내고는 곧바로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떴다.
정교랑은 내 누이라고! 내 친누이! 친오라비도 아닌 네가 잘 좀 부탁하기는 개뿔!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가던 주복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겨서 말을 멈췄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사환이 주복을 앞질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의아한 얼굴로 주복에게 물었다.
“공자님?”
주복이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거리의 끝에는 진씨 가문의 저택이 있었다.
“지금 이 날씨에 과로신선을 먹으러 가겠다고? 너무 덥지 않겠어?”
“에이, 이럴 땐 또 뜨겁게 먹는 맛이 별미야! 이열치열도 몰라?”
지나가던 두 행인의 수다 속에서 ‘과로신선’이라는 네 글자가 주복의 귀에 콕 박혔다. 주복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쫓았고, 점점 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로신선.
그자가 협박한다고 겁을 먹은 게냐?
정말 그놈들이 하는 게 형편없어서 특별히 가르쳐 준 거냐고!
그렇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만든 건, 정말 형편없었어요. 음식이 아까워서, 가르쳐 준 거예요. 사람들과 함께 즐겨야, 진짜 맛있잖아요.
그 여인은 단 한 번도 남의 협박을 두려워한 적이 없어. 누군가가 그 여인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해도 그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겠지만, 절대로 그 여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돼.
만에 하나 그 여인을 건드렸다가는, 긴말할 것 없이 대뜸 활시위부터 당기고 화살을 쏠 테니까.
시정잡배든 악인이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든, 단 한 번 인연이 닿았던 사람이든, 그 여인을 건드렸다가는 필시 주저 없이 그 여인의 화살에 맞겠지.
은혜는 은혜로,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 여인이었어. 잘해 주는 자에게는 물 한 방울의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갚겠지만, 맞서려 들다가는 가차 없이 활을 들어 올릴 테지. 어떤 상황에서도 고개를 숙이거나 자리를 피할 줄 모르는 교만한 여인인데, 어찌 허리를 숙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적수는 태후, 그리고 황실이야. 황실의 권력 아래에서 반기를 드는 자는, 그게 설령 귀신이라 하더라도 자비와 예외가 따르지 않을 것이야.
주복이 고개를 돌려 다시 거리의 끝을 내다보았다.
저 자식의 성은 진씨, 저놈은 공주부 진씨 가문의 열셋째, 진호다. 그 여인이 허리를 숙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호는 황실에 허리를 숙이라고 말할까?
주복이 말고삐를 다시 쥐었다.
“공자님?”
사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복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급하게 박차를 가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진씨 가문에 가질 않으시고 거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시지?
“어머니!”
진호가 목청을 높였다.
“알겠어. 그만 좀 불러.”
진 부인이 못 이기겠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지금 이 어미가 궁에 들어가서 한번 살펴보마.”
“어머니, 일단 가서 정 낭자부터 보세요. 낭자가 제 발로 궁에 들어간 거라면, 궁에서 나오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들어간 겁니다. 일단 낭자의 계획부터 먼저 들어 보세요. 태후부터 찾아가 괜한 말씀 올리지 마시고요.”
진호가 다급하게 당부하자, 진 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말이 참 많네, 우리 아들. 알겠다, 알겠어. 꼭 정 낭자의 말대로 하마.”
진호가 헤헤 웃었다.
“그럼 어머니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 나도 내가 원해서 가는 것이야.”
진 부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문을 나서자, 진호는 회랑 아래서 홀로 한숨을 쉬었다.
“이따 주복 그 녀석이 오면 장난이나 좀 쳐야겠다.”
진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뜨거운 태양이 하늘 높이 걸리자, 문지기들이 뙤약볕을 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설마 아직도 소식을 듣지 못한 건가? 아니면, 주씨 가문은 벌써 야반도주했나?”
진호가 혼잣말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도망가더라도, 그 녀석이 도망가지는 않았을 텐데. 그 녀석은 아마 아무 데도 가지 못할걸. 낭자와 함께 정씨 저택에 남아 있겠지.”
진호가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아, 이따가 주복이 와도 장난은 치지 말아야겠다. 괜히 열 받아서 혼절이라도 하면 나만 곤란해져. 난 죽을병에 고친 사람을 살리는 비방도 모르는데.”
정오의 뜨거운 햇볕이 온몸을 찌르듯이 내리쬈다. 사환이 소매로 땀을 닦으면서 물었다.
“공자님, 언제까지 여기에 가만히 서 계실 겁니까? 들어가서 기다리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진호는 대꾸하지 않고 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똑같지 않아. 그들은 내게 남다른 존재다. 내가 그들을 다르게 생각한다는 걸 그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구나. 그러니 난 여기서 기다릴 거다. 주복 그 자식이 들어오자마자 날 볼 수 있도록.”
진호가 뒤늦게 입을 열자, 사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전엔 한 번도 이러신 적이 없었는데.
후덥지근한 공기를 몰고 온 오후의 바람이 마당 안을 쓸고 지나갔다. 땡볕에 못 이겨 시들해진 나뭇잎이 나른하게 흔들리던 때에, 문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진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왔구나! 드디어 왔어!
하지만 진호의 환한 웃음은 바로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십삼.”
진 부인이 마차에서 내리며 부채로 햇볕을 가리던 찰나, 자신을 마중 나온 진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그녀가 웃으면서 진호에게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아들, 그렇게 급했니? 설마 여기서 쭉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건 아니지?”
진 부인이 부채로 진호의 머리를 살짝 쳤다.
“이 바보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여기서 기다리나 방에서 기다리나 똑같은데, 왜 굳이 이렇게 더운 날에 땡볕에서 기다린 거야? 아들, 이 어미를 기다린 거니, 아니면 정 낭자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와서 기다린 거니? 마차에서 내린 사람이 나여서 망정이지, 다른 집안의 여인이었다면 나는 화냈을지도 모르겠다. 색시도 맞이하기 전에 벌써 이 어미는 뒷전이라고.”
웃음을 쥐어 짜내던 진호가 손으로 진 부인의 부채를 잡았다.
“어머니, 장난치지 마세요.”
진 부인이 웃으면서 진호에게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갔다.
“됐다, 됐어. 그렇게까지 걱정할 것 없다. 예전엔 안 그러더니.”
너무 오래 햇볕 아래 서 있었던 탓인지, 진호의 몸이 휘청였다. 그는 티 나지 않게 재빨리 자세를 고치고 걸음을 옮기다가, 또 한 번 문가를 돌아보았다.
문 앞이 다시 조용해졌다.
“어머니, 정 낭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진호가 시선을 거두고 진 부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안 만났어.”
진 부인의 대답에 진호가 멈칫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벌써 갇힌 겁니까? 어머니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요?”
어머니께서는 항상 태후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설마 정 낭자를 보겠다는 어머니의 청조차 거절한 건가?
“고씨 가문 사람들이 너무 기고만장합니다. 태후는 고씨 가문만의 태후가 아니잖습니까!”
진호가 버럭 화를 내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태후께서 나의 청을 거절하실 리가 있나.”
진 부인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내가 정 낭자를 보지 않은 게다.”
진호가 다시 한번 놀란 기색으로 진 부인을 쳐다보자, 진 부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호를 돌아보았다.
“진안 군왕이 정 낭자를 보고 있대서.”
진안 군왕?
그래요?
“아, 진안 군왕이 정 낭자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어머니께서 정 낭자를 보는 것과는 별개의 일인데, 왜 군왕이 정 낭자를 보고 있다는 이유로 어머니께서는 정 낭자를 만나지 않으신 겁니까?”
진호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진 부인이 싱긋 웃었다.
“태후께서는 자애롭고 선량한 분이시다. 진안 군왕이 현명하다면 정 낭자는 무사할 테고, 내가 굳이 정 낭자를 볼 필요도 없잖니.”
진호가 진 부인을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 그자가 현명하지 않다면요?”
“어때요? 여긴 지낼 만해요? 벌써 적응했으려나?”
진안 군왕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이곳은 황제의 침궁 근처에 있는 작은 편전이었다. 황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피함과 동시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빠르게 달려갈 수 있는 위치였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따라서 방 안을 훑어보았다.
“적응했어요.”
진안 군왕이 웃었다.
“누가 들으면 낭자는 전에 황궁에서 지냈던 사람으로 알겠어요.”
황궁이라…….
황제가 퇴위하고 양산이 그 뒤를 잇게 됐을 때, 황제 즉위식을 올리기 전까지 그녀는 궁에 들어와 살았다. 아직 황후는 아니었던지라 황후궁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양산과 함께 잠시 이전 왕조의 편전에서 지낸 일이 있었다.
왕부에서 지내도 무방했을 텐데, 양산이 왜 그렇게 성급하게 황궁으로 거처를 옮기나 의아했었어. 지금 돌이켜보니, 그래야 날 죽이기 더 쉬웠으니 그랬던 거였네.
실내에 정적이 흘렀다.
“정방, 지금 가장 현명한 방법은 내가 태후마마께 봉지로 나가는 것을 청하고, 낭자와 함께 경성을 떠나는 겁니다.”
진안 군왕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봉지는 아주 멀고 외진 곳으로 정해 달라고 할 거예요. 너무 아득히도 멀어서 사람들이 그런 곳이 있나 싶어 할 정도로 먼 지역으로요. 이번에 경성을 떠나게 되면, 아마 다시는 경성에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미안해요. 정방,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진안 군왕이 이어서 말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꿋꿋이 해나가겠다는 게,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정교랑이 말했다.
“그야, 당신한테 미안하다는 거죠.”
진안 군왕은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건가. 이 여인을 보기만 해도, 잠깐 대화만 나눠도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하네. 지금은 분명 웃을 때가 아니고, 웃음이 나와서도 안 될 때인데.
“나한테 미안하다고요? 내가 어떻게 된다고 해도, 그건 내 사정이에요. 나한테 그런 말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걸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하자 진안 군왕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정방, 너무 단순하고 낙관적인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까요? 아니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세차게 고개를 저을까요?”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말한 모습이 잠깐 상상이 되어 또다시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해요. 자기가 선택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과 결과도 받아들여야죠. 남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사실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 남을 탓할 수도 없는 거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하지만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다면, 당신은…….”
진안 군왕이 답답한 마음에 목청을 높였지만, 곧이어 그는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폐하께서 한동안은 괜찮으실 거예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생각을 읽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와 고씨 가문은 황제의 상태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정교랑이 궁에 남아 있는 동안 황제가 붕어할 경우, 정교랑을 황제와 함께 순장시켜 버리려는 계획을 세운 터였다.
하지만 역사서에 따르면, 황제는 풍질로 쓰러지고 일 년이 더 지나야 붕어할 운명이었다. 태후나 고씨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지만, 정교랑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후와 고씨 가문이 세운 계략은 정교랑에게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진안 군왕이 흠칫 놀라고는 다시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이 여인이 절대로 자신을 곤경에 빠트릴 리가 없지. 정말로 요 며칠 안에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길 걸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순순히 궁에 들어와 폐하와 함께 순장당하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언젠가…….
“나중의 일은 나중의 일이에요.”
정교랑이 편전 안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할 땐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너무 많은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선순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눈앞에 닥친 일을 보지 못하게 되거든요. 당장 눈앞의 일도 보지 못하는데, 나중의 일을 어떻게 결정하겠어요.”
“그럼 당장 눈앞의 일은…….”
진안 군왕이 말끝을 흐리며 묻자 정교랑이 편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랏일이죠.”
“그 여인을 궁에 남겨 두었다니!”
고능준이 눈앞에 앉아있는 부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내려오려 하며 소리쳤다.
“멍청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누가 당신더러 그런 소리를 하랬소?”
제국 부인은 불안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노야, 그 여인을 해치워야 한다면서요. 난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
“절호는 개뿔! 그 여인이 바보도 아니고, 우리가 판 함정 구덩이에 순순히 뛰어내릴까? 그 여인이 정말 함정 속에 뛰어든다면, 그건 애초부터 함정이라 부를 것도 아니었다는 거야! 그 여인이 남의 죽을병을 고칠 수 있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명줄을 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이오? 그 여인이 과감하게 궁에 들어온 걸 보면, 황제가 당장은 무사할 거라는 뜻이잖소!”
“폐하께 아직 가망이 있어요? 하지만, 태의 말로는 깨어나기 힘들다고 하던데.”
제국 부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깨어나지는 못하겠지만, 당장은 아무 일도 없겠지. 아니, 어쩌면 아주 긴 시간 동안 아무 일 없을 수도 있어.”
고능준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지!”
같은 시간, 황궁 안.
진소가 태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신, 태후마마께 태자 책봉을 간청하옵니다.”
황제가 쓰러진 뒤부터 쭉 마음의 준비를 해 왔던 태후였지만, 저 말을 정말로 듣게 되자 그녀는 어쩐지 막연해졌다.
태자 책봉이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태자가 없어지고 나서야 청하는 것인가.
“윤허하리다.”
태후가 말끝을 늘리며 대답했다. 태후의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내시가 당직을 서던 한림을 불러와 태후의 뜻을 전달케 했다.
황제의 병세가 위독한 탓에 조회는 중단되었지만, 황궁에서 교대로 당직을 서는 조정 대신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줄곧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태후가 뜻을 전달했다는 말에 사람들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붕어하셨나?
사람들이 몰래 밖을 내다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황제의 침궁이 아닌 근정전 방향으로 황급히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태후의 가마가 태후궁을 지나 근정전을 향해 갈 때, 태후궁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던 진안 군왕은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마마께서 무척 바쁘신가 보군. 소손은 나중에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마마.”
진안 군왕이 태후가 떠난 방향을 향해 간단히 예를 표하고 몸을 돌렸다.
“그럼 나는 경왕을 보러 가야겠다.”
경왕은 환궁 후 태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태후궁 근처에 다다르자, 괴성을 지르는 경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보네.”
진안 군왕이 중얼거리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전하.”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내시가 진안 군왕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길을 막는 바람에 진안 군왕의 걸음이 주춤했다.
“전하, 경왕 전하께서 곧 낮잠을 주무실 시간입니다. 다음에 다시 오시는 건 어떨지요?”
내시가 말했다.
낮잠?
“경왕이 이 시간에 낮잠을 잘 리가 없는데?”
내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야 예전의 일이지요. 경왕 전하께서 태후마마를 따른 후로는, 지금 이 시간이면 늘 낮잠을 주무십니다.”
내시가 여유롭게 말했다. 진안 군왕이 내시를 잠시 쳐다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하더냐. 잘 알겠다.”
진안 군왕은 더는 묻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전하.”
늙은 내시 한 명이 직접 진안 군왕을 배웅하면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전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왕 전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진안 군왕이 연로한 내시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당연히 잘 지내고 있겠지. 지금은 아무도 경왕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테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서 태후궁을 바라보았다. 궁에서 들려오던 경왕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경왕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게. 워낙 체력이 좋아서 쉬이 지치질 않아. 뛰어 놀고 싶어 하면 뛰게도 해 주고, 너무 답답하게 잡아 두지 말게.”
진안 군왕의 당부에 늙은 내시가 알겠다며 예를 표했다.
“전하, 그만 돌아가시지요. 앞쪽에서 곧 대사를 논할 예정입니다.”
늙은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대문을 나선 진호는 잠시 길가를 따라서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길바닥에 앉아 있는 주복을 발견한 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더위를 식히려 여기까지 온 건가?”
진호가 주복 옆에 앉으면서 물었지만, 주복은 진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네가 날 찾아오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야. 자네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만큼 알고 있을 거고, 별로 새로운 소식도 없었거든. 그리고 이번 일은, 누군가 나서서 도와준다면 아주 사소한 일이 될 테지. 그러니 자네가 걱정할 필요도 없어.”
주복이 고개를 돌려서 진호를 쳐다보자, 진호가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그 누군가는 내가 아니고, 진안 군왕일세.”
“진안 군왕? 지금 이런 일이 생겼는데, 태후가 퍽이나 두 사람의 혼사를 동의하겠다.”
주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면 못 이룰 게 없지. 진안 군왕이 자진해서 봉지로 가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정 낭자와의 혼사를 강행한다면, 태후도 분명 동의할 거야.”
진호가 말했다.
“봉지로 나간다고? 경성에 멀쩡히 잘 있다가 봉지로 나가긴 왜 나가?”
주복이 물었다.
“멀쩡히 잘 있다고? 멀쩡하게 잘 있으니 당연히 봉지로 나가야지. 종친 주제에 무슨 연유로 경성에 남아 있겠어? 황제와 태후에게 총애받는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마음 편히 경성에 있으면서 황실이 유생들과 세간의 비난을 받도록 두고 보란 말이야?”
종친이 진안 군왕처럼 굴면 남의 이목을 너무 끌잖아. 어렸을 때도 송자동자라는 별명 때문에 유생들의 질타를 불러일으키더니, 지금은 장성해서도 경성을 떠나지 않고 있어. 도리어 공까지 세워가면서 명망을 얻으려고 하고 있지.
“지금 평왕이 죽었고, 폐하는 병세가 위중하셔. 그나마 남아 있는 경왕은 불구가 됐지. 그런데도 허구한 날 황궁을 들락거리다니, 진안 군왕은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말하던 진호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자가 뭘 하고 싶든 말든,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내 누이의 미래가 궁금할 뿐이라고. 자네 말대로라면, 그 애는 진안 군왕과 함께 경성을 떠나는 건가?”
주복이 진호의 말을 끊고 물었다.
“떠나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나한테 시집오긴 싫다잖아.”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복이 진호를 노려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계속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하나 있어.”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면서 계속 말하라고 손짓했다.
“그 여인이 뭘 잘못했지?”
주복이 묻자, 진호는 멈칫했다. 주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진호에게 다시 물었다.
“그 여인이, 뭘 잘못한 적은 있어?”
진호는 주복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먼저 간다. 그늘 밑에서 쉴 만큼 쉬었어. 그리고, 날 찾아줘서 고마워.”
주복이 진호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포권의 예를 취했다. 진호는 주복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 점차 멀어져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먼저 그 여인을 건드리고, 의심하고, 미워하고, 계산한 거야. 잘못도 없고, 잘못한 적도 없는데, 왜 항상 그 여인이 피하고 물러서야 하지?
상대가 황실이라서? 그 여인이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공자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진호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진 시강의 수하가 이쪽으로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궁에 계실 텐데, 설마 궁에 무슨 일이라도?
진호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태자 책봉을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진호 곁에 멈춰선 수하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했다.
근정전 안에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직도 애가의 말이 명확하지 않소?”
침묵을 참지 못한 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게야!”
태자 책봉을 결정하라며? 이놈의 조정 대신들은 죄다 들어왔으면서 왜 아무도 본론을 꺼내지 않는 게야! 황상의 용태와 평왕 안장에 대해 묻고 이것저것 잡다한 이야기까지 다 끌어다 논의하고는, 그게 끝이야?
이러니 당초 평왕이 조회에 나가길 꺼렸던 게로군. 정말 무료하기 짝이 없구나. 애가는 지금 여기서 이런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단 말이다.
태후가 또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진소가 물었다.
“마마께서는 누구로 결정하고자 하십니까?”
태후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진소를 쳐다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누가 또 있다고?
“당연히 경왕이 아니겠소.”
태후의 대답에 근정전 안은 또 한 번 침묵에 휩싸였다.
“대신들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게야.”
황제의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주던 황후가 말했다.
“아니요. 그들은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겁니다.”
정교랑의 말에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바보를 보필하여 제위에 올렸다는 명성을 얻고 싶은 대신은 아무도 없겠지. 정말 우스운 농담이긴 하나, 이 농담에 웃을 수가 없다는 게 참.”
황후는 몸을 일으키고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특히 본궁은 더욱 웃을 수가 없지.”
황후가 말하던 도중, 문밖에서 궁녀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
황후의 안색이 급변했다.
“설마, 못 구한 것이냐?”
황후가 물었다.
“구해 냈습니다. 하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약도 드시지 않겠다며 거부하셔서요.”
궁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황후가 한숨을 내쉬고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안비가 폐하를 흠모하는 마음이 몹시 깊은지라, 폐하께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까지 갔었어. 어쩌면 본궁이 안비를 본받아야 할 수도 있겠군.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 본궁이 폐하를 따라 저승으로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러게요. 그렇게 되면, 황후마마께서는 폐하와 함께 안장되는 영광을 누리고 명예롭고 마음 편한 죽음을 맞이하시겠지요. 앞으로 닥칠 고난의 나날을 굳이 견디지 않으셔도 되고요.”
정교랑의 대답에 놀란 황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 낭자, 아무래도 본궁이 낭자의 배짱을 얕봤나 보군.”
“소녀는 거짓말을 싫어할 뿐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그래도 말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본궁은 황후야. 설령 폐하께서 부재하시더라도, 본궁은 여전히 황후지.”
황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마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경왕을 태자로 세우고 폐하께서 양위하시면, 태후마마께서는 필시 수렴청정을 하실 겁니다.”
“그럼 본궁은 황태후가 되겠지.”
“그야 모를 일이지요. 양(楊) 태후는 폐서인되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정교랑이 태연하게 말하자, 황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조정에는 가남풍(賈南風)이 없지 않으냐.”
황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하지만 곧 진혜제(晋惠帝)가 생기지 않습니까. 가남풍은 진혜제가 나온 후에야 나왔죠.”
정교랑이 바로 맞받아치자, 황후가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가남풍이 나온다 해도, 본궁의 친가에는 직권을 남용하는 간신이 없느니라. 정 낭자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구나. 본궁은 한낱 여인일 뿐이야. 조정의 일과 나랏일은 본궁이 알 수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지. 조정의 일은 대신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본궁은 그저 궁에 틀어박혀 하늘이 보우해 주시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
정교랑이 웃었다.
“마마, 마마의 부친께서는 직권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 적 없다지만, 마마께서는 이미 다른 사람을 노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귀비의 광증과 평왕의 죽음에 대해서, 태후마마께서 의심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설마 소녀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황후의 표정이 또 한 번 변했지만, 정교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께서도 충분히 잘 알고 계신 것들인데, 굳이 소녀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들으셔야겠습니까.
소녀에게는 기껏해야 공모의 죄가 있겠지요. 태성(台星)이 하늘을 지나간 일을 숨기고, 안비가 회임했던 태자를 잃고, 평왕이 벼락에 맞아서 죽고, 폐하께서 쓰러지신 것까지 소녀의 몫으로 칠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태후마마는 절대로 소녀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만큼, 이 일의 주모자 또한 놓치지 않으려 하실 겁니다. 태후께서 어떠한 일을 빌미로 소녀를 죽일 수 있다면, 주모자에게도 똑같은 죄목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 하실 테지요.
어쩌면 태후께서는, 지금 당장 주모자를 확실하게 죽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시간을 좀 더 끌면서 차츰 권력을 키운 후에 후궁과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그때 이 일을 다시 처리하시려는 걸 수도 있고요.
그때가 되면, 누가 황태후의 존재를 신경 쓸까요? 황태후의 생사를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감히!”
황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정교랑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황후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지금 이 시기에 폐하의 병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내궁을 이간질하러 온 게냐!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황후가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본궁이 죽을병이라더니, 이 일을 말함이더냐? 아주 허튼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정교랑은 황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창가로 다가가 봉선화 화분을 들어 올렸다.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게야!”
황후가 호통쳤다. 정교랑이 손에 든 화분을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던지자, 깜짝 놀란 황후가 비명을 질렀다.
“소녀의 견문이 짧았네요. 궁에서는 봉선화를 보약까지 먹여 가며 키우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정교랑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산산조각이 난 화분 사이로 흙과 탕약 찌꺼기가 섞여 있었다.
“태후께서 황후마마의 노고를 고맙게 여기시어 보약을 지어다 주셨다는데, 약을 마시면 어떨게 될지, 한번 맛이라도 보지 그러셨습니까?”
정교랑이 말했다.
“누가 네게 말해 줬느냐? 진안이 말해 준 것이냐?”
황후는 조금 전의 침착함을 잃고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물었다.
“마마, 소녀는 황제 폐하의 풍질을 고칠 줄은 모르나, 의술과 약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침궁에 계신 폐하께 쓰는 약과 이런 보약의 향은 확실히 다르지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진 모르나, 소녀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정교랑의 말에 황후는 말문이 턱 막힌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이 탕약을 들지 않으셨죠? 이 탕약을 드시고,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 함께 뒤따라가신다면 부부의 은애를 과시하기에는 퍽 좋지 않습니까? 얼마나 처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겠는지요.”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황후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그래, 낭자의 말이 맞아. 지금 본궁은 죽을병에 걸렸다. 한데, 그런다고 뭘 어쩌겠느냐.”
팍 소리와 함께,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고함쳤다.
“말해 보시오!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속셈이오? 경왕이 바보인 게 싫고, 그대들의 명성에 경왕이 오점으로 남을까 봐 두려운 거라고 말을 해 보라고!
그렇다면 대안을 내놓아야지. 경왕이 아니면 어쩌라는 말인지! 황제가 남긴 혈통이 경왕 하나뿐인 것을 어떡하겠소? 애가인들 좋은 명성을 포기하고 싶었을까!”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대신들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빈말은 집어치우시오! 애가는 지금 이렇게 그대들과 한가하게 여담이나 나누고 있을 기분이 아니란 말이오. 애가에게 남은 손자는 경왕 하나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대들이 한번 말해 보라니까!”
말씀이 지나치시네. 어찌 조정 대신들에게 황위 계승자를 결정하란 말인가! 역시 기분이 오락가락한 게 종잡을 수가 없는 여인이야.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저었다.
경왕이 등극한다면, 분명 태후가 수렴청정하게 될 터. 이렇게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감정 기복까지 심한 여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면, 조당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신, 경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기를 청하옵니다.”
진소가 침묵을 깨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조당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소가 먼저 나서서 바보인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자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기강이 갈수록 무너지는구나. 이젠 위관처럼 취한 연기를 해 보려는 사람조차 없다니. 황제가 없으니, 진소도 소신껏 말하지 못하는 건가.
대신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른 대신들뿐만 아니라, 고능준과 태후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고능준의 예상으로라면, 경왕의 태자 책봉에 가장 먼저 안 된다고 소리칠 사람이 바로 진소였다. 그래서 고능준은 진소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진소와 결판을 내려고 별렀다. 그는 진소가 분명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듯 강직한 태도를 취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태후와 끝까지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소매를 홱 털고 사직을 청하며 조당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찍이 조당에서 내쫓겨야 마땅한 진소인데, 어쩌다가 제일 먼저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자는 말을 한 사람이 되었는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수작이야!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쉬이 입을 열지 못했지만, 태후는 진소의 말에 몹시 기뻐했다.
태후는 고능준이 진소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가 진소를 중용하고 신뢰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태후는 황제가 쓰러지자마자 그가 총애하는 대신을 궁 밖으로 내쫓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유림과 백성들이 얼마나 자신의 욕을 해 댈지 눈을 감고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 잘됐구나. 이렇게 되니 얼마나 좋아?
“암, 그리해야지.”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서를 준비하라고 명령하려던 찰나, 진소가 또 한 번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폐하의 옥체가 위독하시고, 태자 전하는 지병이 있으시옵니다. 그러니 태자의 정사를 보필할 수 있도록, 청컨대 신을 보정대신(輔政大臣: 국정을 보필하며 섭정할 대신)으로 임명해 주시옵소서.”
진소의 낭랑한 목소리가 조당 안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진소를 쳐다보았다.
대단하군, 대단해! 취한 척하면서 소심하게 한 마디 내뱉고는 두 번 다시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위관과 저 강직한 진소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역시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어!
탁 소리가 들리고, 옥좌 뒤의 의자에 앉아 있던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아가 잔뜩 치밀어 오른 태후가 진소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진소! 애가는 안중에도 없구나!”
“그 후로 진 상공이 태후께 뭐라 말씀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내시가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말하다가 머뭇거렸다.
“않았지만?”
황후가 물었다.
“양견(楊堅)이 수나라를 세웠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황후가 통쾌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 상공이 아예 면전에 대고 태후를 욕한 것이나 다름없구나. 그런 욕을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
“네, 태후마마께서는 탁자를 발로 차서 뒤엎고 휘장을 홱 뜯어내시고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뜨셨습니다.”
내시가 말했다.
“태후가 수렴청정하고 싶다고 해도, 그리 쉬운 일이 되진 않겠구나.”
황후의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 서렸다.
“태후가 수렴청정하든 말든, 그건 조정의 일이지요. 후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겁니다.”
정교랑의 말에 황후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달라지지?”
정교랑이 황후를 쳐다보았다.
“양자를 들이셔야 합니다.”
양자!
황후가 흠칫 놀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씨! 도대체 본궁이 어찌하길 바라는 것이야!”
안 그래도 내시와 궁녀의 수가 적은 황제의 침궁에서 또 몇 명의 내시와 궁녀들이 물러났다.
“태의 말로는 폐하께서 조용히 요양하셔야 하고, 황후마마께서도 좀 쉬셔야 한다는군.”
“그래, 황후마마께서도 좀 쉬시긴 해야지.”
궁 밖으로 나온 내시 몇 명이 목소리를 낮춰 가며 말했다. 침궁에서 물러나는 궁녀들과 내시들을 보고 저쪽에 서 있던 내시 몇 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나온 거요?”
미간을 찌푸리던 내시가 물었다.
“태의가 안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황후마마께서도 침전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시니.”
밖으로 나온 내시가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두 궁녀가 침전 문을 닫고 황후를 향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정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가?”
황후는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고 간신히 화를 참으면서 말했다.
“양자 입적이라니, 어찌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있느냐! 황실의 권력을 어찌 남의 손에 넘기겠다는 것이야!”
황후가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말했다.
“양자 입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 입적으로 황실의 대를 잇는 것인데, 남의 손에 권력이 들어갈 리가 있나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황후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대로 폐하의 혈통만을 고집한다면, 황실의 모든 권력은 결국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평왕처럼 제정신이었던 황자도 강산을 망쳐 버릴 정도니, 정신도 온전치 않은 경왕이 그 뒤를 잇는다면, 아마 지금 황제가 재위했던 사십오 년간 이룬 치적들은 전부 무위로 돌아갈 터였다.
황후가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대를 이어? 폐하께 아무런 혈육도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폐하의 혈육이 남아있느니라. 가남풍이니, 혜제니 말이 나와서 그런데, 왜 무제(武帝)는 혜제가 바보인 것을 알면서도 황위를 넘겨주었을까? 혜제가 자신의 혈육이라서, 자신의 대를 잇는 아들이기 때문이겠지!”
“양자도 충분히 그리할 수 있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복의(濮議) 논쟁은 양자여도 일어날 수 있다. 본궁은 폐하의 대를 남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고, 재상과 문무백관들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고 싶지도 않아. 양자 입적이라니. 그런 짓을 하고도 본궁에게 열성조를 뵐 면목이 남아 있겠느냐. 또 무슨 낯으로 천하 만백성을 대하고? 본궁은 차라리 부부의 정을 중시하며 폐하와 함께 안장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그런 오명은 뒤집어쓰고 싶지 않느니라.”
황후가 이를 악물고 말하자 정교랑이 그런 황후를 쳐다보았다.
“조(曹) 태후는 그런 오명을 짊어지지 않았어요.”
그런 오명은 양자 입적을 결정했던 황제와 조정 대신들에게 씌워졌지.
황후가 잠시 멈칫했다.
“어쨌든 안 된다! 그런 일은 하고 싶은 사람더러 하라고 해. 본궁은 아니야. 본궁은 절대로 양자 입적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황후가 소매를 홱 털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 일은 황후마마께서만 언급하실 수 있습니다. 신하들이 먼저 입을 열기는 힘드니까요.”
정교랑이 말했다.
신하들이 먼저 입을 열기는 힘들다?
황후가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신하들이 먼저 입을 열기 힘들다고 했지, 입을 열 수 없다고 하지는 않았어. 그렇다면…….
밖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궁녀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옴과 동시에, 누군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온 이가 내시인 것을 확인한 황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엄하구나!”
황후가 소리쳤다. 황후의 호통에도 내시는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에게 여쭐 것이 있어서요. 정 낭자, 폐하의 병을 고치거나 호전되도록 치료할 수 있는지요?”
내시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자신이 잠시 쉬는 편전에까지 들어오고, 자신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도 뛰어넘은 채 정교랑에게 질문하는 모습에 황후는 몹시 화가 났다.
정교랑이 황후를 힐끔 쳐다보고 내시에게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만 출궁하시지요.”
내시가 말했다.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황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마마, 봉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이토록 많이 회복되었는데, 허망하게 건강을 잃는다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드셔야 할 약은, 드셔야 하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내시가 미간을 찌푸리고 정교랑과 황후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때, 궁녀 하나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탕약 한 그릇을 황후에게 바쳤다.
“마마.”
“황후가 약을 끊었었다고?”
태후가 묻자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듯하옵니다. 정 낭자가 직접 황후마마께 다시 약을 드시라고 권했습니다.”
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
“황후는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가 났구나. 좋은 보약을 줘도 안 먹어? 정 그리 죽고 싶으면 알아서 죽으라지. 급할 게 뭐 있다고.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태후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자, 내시들은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여인은 내보냈느냐?”
태후가 또 물었다.
“예, 소인들이 직접 궁 문 앞까지 배웅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던 태후가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진소 그 몹쓸 놈만 아니었다면! 분을 참을 수가 없구나!”
편전 문이 굳게 닫히자, 황후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 침상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휘장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안비가 황후의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관둬라. 본궁은 아직 살아 있다.”
황후가 눈을 감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안비가 울음을 뚝 그치고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눈가에 눈물 자국 하나 없는 안비가 또 좌우를 열심히 살폈다.
“눈알을 굴리긴 왜 굴려? 할 말이 있으면 하여라. 본궁이 아직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니.”
황후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안비가 헤헤 웃고는 무릎을 꿇은 채 황후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정 낭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황후가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눈을 떴다. 입을 열려던 그녀는 안비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연기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지. 적어도 목에 붉은 밧줄 자국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식음을 전폐한다면서 입가에 간식 부스러기까지 잔뜩 묻혀 놓고.”
안비가 민망한 듯 웃으면서 서둘러 소매로 입가를 슥슥 닦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마를 뵈러 온 것이 아닙니까. 신첩이 두려울 게 뭐 있다고요.”
황후가 안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본궁은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가 참 많아. 도대체가 배짱이 두둑한 건지, 아둔한 건지.”
안비가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신첩은 당연히 아둔한 거죠. 신첩의 간덩이는 콩알만 해요. 사실 신첩은 지금 상황이 몹시 겁이 나요. 폐하와 마마께서 돌아가신다면, 신첩도 죽은 목숨일 테니까요.”
황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어쨌든 자네는 죽어도 본궁이 죽은 뒤에 죽겠다 이 말인가?”
안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마마께서는 꼭 봉체를 보존하셔야 해요.”
어쩌면, 저런 아이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귀비를 상대로 연극을 펼칠 수 있었던 거겠지.
이것 참…….
황후는 이마를 손으로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황후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 정교랑과 대화할 때의 분노나 불안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 낭자야, 정 낭자가 해야 할 말을 했지. 그 여인은 똑똑한 사람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본궁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뭔지 잘 알고 있어.”
황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안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똑똑한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상대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준다는 뜻이야.”
황후가 덧붙여 설명하자, 안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마, 정 낭자는 마마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걸 일찍이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마마가 원하는 대로 말한 거고요? 그래서 그 여인의 생각은 어떻대요? 마마의 환심을 사려고 빈말을 한 건 아니겠죠?”
“당연히 빈말은 아니겠지. 정 낭자나 본궁이나 피차일반인 상황이니.”
황후가 대꾸했다.
정 낭자가 내 생각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그 여인을 궁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터. 정 낭자 또한 내 생각을 몰랐더라면 궁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죽을병은 본궁 혼자서 걸린 게 아니니까. 서로 죽을병 걸린 사람들끼리 한마음으로 협심할 수 있다면, 그 후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야.
“마마, 이번에는 제발 운이 따랐으면 좋겠어요.”
안비가 무릎에 손을 얹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난번에는 분명히 모든 게 다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평왕이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고, 폐하까지 쓰러지시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어. 거기에 고능준과 태후가 반격해 오니 더는 손 쓸 틈도 없었지.
“마마, 그런데 정 낭자가 말한 신하가 어느 신하일지 모르겠네요. 때가 됐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또 계획을 망치면 어떡하죠?”
안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해봐야지.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본궁은 늘 운이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지금 와서 수포로 돌아간다면 너무 아깝지 않느냐.”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본궁은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이번을 마지막 기회로 삼아 봐야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바보가 제위에 오르고, 태후가 수렴청정하면서 고씨 가문이 황실을 장악하는 꼴은 못 본다.
방법은 두 가지야. 바보가 제위에 오르게 됐을 때 태후를 해치우고 본궁이 수렴청정하는 방법, 그리고 태후를 처리하지 않고 바보도 제위에 올리지 않는 방법.
하지만 이제 와서 태후를 해치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제위에 올리는 태자를 바꿀 수밖에.
황후가 깊은 심호흡을 하고 두 손으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