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75)

내가 바보가 된 건지, 형님이 바보가 된 건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가네.

“정괴! 미친 거요?”

신부 측 집안 어른들이 조용히 있는 동안, 신랑 측의 집안 어른들은 무척 시끌벅적했다.

“궁에 있는 아이들 중 처음으로 올리는 혼사네요.”

귀비가 웃었다. 자리에 있던 비빈들은 모두 웃으며 귀비의 말에 맞장구를 쳤고, 태후는 더욱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전부 다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한다.”

태후가 말하고는 이 소식을 수왕부 쪽에 전했는지를 물었다. 귀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했어요. 사흘쯤 후엔 수왕비도 이 소식을 알게 될 거예요.”

태후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왕비가 진안 군왕의 친모라고는 하나, 경성에 오면 손님이나 다름없으니, 어찌 됐든 이 혼사는 우리 쪽에서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그야 당연하지요. 진안 군왕은 태후마마의 슬하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귀비가 말했다. 태후가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 진안 군왕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군왕은 어디에 있느냐? 오늘 궁에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황후마마의 궁에 있습니다, 마마.”

궁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위낭은 황후와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는데, 육가아가 변을 당한 후로 육가아를 대신해 황후에게 효를 다하는 게로구나.

황제가 예전에 이런 말을 하면서 감탄했지.

육가아가 황후에게 그리도 효심이 지극하다고. 변을 당하게 됐던 이유 또한 황후를 위해 매화를 꺾으려다가…….

태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당초 군왕은 내 다리의 이쯤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았는데, 금세 그렇게 훌쩍 커 버렸어. 아이가 크는 속도는 참 빠르기만 한데, 무탈하게 키워 내는 건 참으로 어렵지.”

태후가 화제를 바꾸고 손짓을 해가며 진안 군왕의 키를 묘사했다.

태후와 비빈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밖에서 안비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비는 황궁에서 뭇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대상이었다. 황제가 밤마다 같이 있어 주고, 좋은 것만 먹고 마시며, 무엇을 원하든 황제가 다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배가 꽤 부른 안비가 웃으며 태후궁 안으로 들어오자, 태후가 다정한 손짓으로 안비에게 예는 생략하라고 말했다.

“어쩐 일로 나온 게냐. 날씨가 한창 더울 때인데.”

태후가 물었다.

“태의가 신첩에게 자주 걸어 다니라고 하기도 했고, 혹시 신첩이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 하여 와 보았습니다.”

태후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지었다. 귀비도 웃기는 했지만, 동시에 조소 섞인 눈빛으로 안비의 배를 쳐다보았다.

“안비가 도울 일이 뭐 있누. 몸 관리를 잘하는 게 우리를 돕는 게지.”

태후가 웃었다.

화기애애한 대화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태후궁에 모여있던 비빈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안비가 힘겹게 몸을 가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내시 두 명을 시켜 안비를 거처까지 데려다주라고 지시했다.

“귀비마마.”

안비가 자신보다 조금 더 앞서 걸어가고 있던 귀비를 불렀다. 귀비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안비 동생, 무슨 일 있어?”

귀비가 웃으며 묻자 안비는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귀비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더위를 너무 잘 타다 보니까, 얼음을 좀 더 쓰고 싶어서요.”

안비가 말했다.

후궁의 일들은 황후 대신 귀비가 도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후궁에서 먹고 쓰는 것들은 모두 정해진 양이 있었지만, 당연히 원칙보다는 사람이 중요했다.

“농담도 참, 그런 걸 물어볼 필요가 뭐 있어.”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태후궁 내시들이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마, 저쪽 정자에 가서 계속 말씀을 나누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날씨가 워낙 덥지 않습니까.”

어머, 귀한 몸이시라 이거지. 이젠 햇볕 아래 잠시 서 있는 것도 못 견디겠다 이거야?

귀비가 속으로 냉소를 짓고는 다시 한번 안비의 배를 쳐다보았다. 귀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 앞에 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마마, 저희 걸으면서 이야기 나눌까요?”

안비가 웃으면서 공손하게 손으로 귀비를 앞으로 안내했다. 귀비가 웃으면서 안비를 앞서가며 걸음을 옮겼다.

“그야 당연히 마마께 말씀을 드려야죠. 원칙을 어겨서는 안 되니까요.”

안비가 좀 전에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네년이 어긴 원칙이 이미 수두룩하거늘.

귀비가 속으로 또 한 번 냉소를 지었다.

폐하께 일찌감치 말씀드려 놓고, 또 나한테 와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거야? 누굴 바보로 아나.

“동생이 괜한 걱정을 하네.”

귀비가 웃으면서 층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귀비가 층계에 발을 내디디는 것을 보고, 안비는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괜한 걱정이라니요, 다 마마께서 괜한 걱정을 하실까 봐서죠.”

어찌 이렇게 버릇없는 말을!

귀비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안비의 배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 저거 하나 믿고 이러는 거겠지.

“동생, 그렇지 않아.”

말을 마친 귀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안비는 잠시 자리에서 주춤하며 층계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배 위에 놓인 손을 꼭 쥐었다 펴고는 이를 악물며 걸음을 내디뎠다.

“마마, 제 설명을 들어주…….”

안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귀비의 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팔이 잡힌 귀비는 화들짝 놀라면서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쳤다.

“뭐 하는…….”

귀비가 입을 열자마자, 안비는 귀비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층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귀비는 말을 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귀비의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아직 태후궁에서 멀리 가지 않은 비빈들이 깜짝 놀라 층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멀리서 태후궁을 향해 걸어오던 두 사람도 그 광경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안비가 층계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본 진안 군왕이 경악한 얼굴로 앞을 내다보았다.

저게 지금 무슨 일이지?

“위낭.”

황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때, 본궁이 네게 주는 혼례 선물은 마음에 드느냐?”

-사고-

관청을 나서던 진소는 회랑 아래에서 관리 서너 명이 내궁 쪽을 내다보며 소곤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진소가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지금 뭐하고들 있소?”

진소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관리들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궁에 무슨 일이 생긴 듯합니다.”

진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궁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무슨 일이 생겼는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비빈 중 한 명이 넘어졌답니다.”

앞으로 나선 관리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것도 일이라고!

진소가 입을 열려던 찰나,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손을 휘저었다.

“알아냈소, 알아냈어. 안비께서 넘어졌다고 하오.”

뛰어오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소리쳤다.

모여 있던 관리들이 다급하게 그를 향해 입을 다물라는 눈짓에 손짓까지 했지만, 뛰어오던 사람은 말을 다 하고 나서야 진소가 옆에 서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소는 그 사람을 꾸짖지 않고 다소 놀란 기색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물었다.

“안비께서?”

뛰어온 사람은 혼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비께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층계에서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복중에 있는 용종은…….”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맴도는 태후궁에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회랑 아래 모여 있던 비빈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채 전각 안을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빈들은 이따금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태후궁의 모든 창문과 문이 굳게 닫혔고, 전각 안에는 황후와 황제, 그리고 태후가 있었다.

태후가 창백해진 얼굴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무슨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두 손을 꽉 쥐고 있던 황후는 긴장한 동시에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황제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뒷짐을 진 채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안쪽에서 들려오는 안비의 비명과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도대체 해낼 수 있다는 게냐, 없다는 게냐!”

황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아무도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은 궁녀들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제지했다. 황제는 소매를 홱 털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리저리 서성였다.

“폐하, 정 낭자를 모셔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후의 목소리가 황제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정 낭자?

황제가 고개를 돌리고 황후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병약한 탓에 늘 창백했던 황후의 안색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창백해 보였다.

황후가 황제를 쳐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신첩은…….”

황후는 더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신첩은 더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제발 정 낭자를 청해 오시지요. 정 낭자에게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후, 허튼소리 말게!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겐가!”

태후가 눈을 번쩍 뜨고 외쳤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황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황제는 마음속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두렵소. 짐도 너무나 두렵소.

아이들이란 너무도 연약해 손에 쥔 모래와도 같구려.

놓치지 않으려고 아무리 세게 쥐어 봐도, 결국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잡고 있기에는 너무도 힘든 존재구려.

“정씨를 부르거라.”

황제가 고개를 돌리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쪽에서 들려오던 안비의 울부짖음이 돌연 멈췄다. 전각 안에 있던 황제, 황후 그리고 태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일제히 안쪽을 쳐다보았다.

이 태의가 안쪽에서 걸어 나오자, 황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태의, 목숨을 구할 수 없는 게 확실하오?”

목숨을 구할 수 없어야만, 정 낭자를 모셔 올 수 있다는 뜻이겠지.

황제의 말뜻을 이해한 이 태의는 실소를 터트리고 싶었지만, 웃을 때도 아니고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 목숨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은 맞으나, 정 낭자를 모셔 올 필요는 없습니다.”

이 태의의 뒤로, 태의국의 의원들과 의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안비마마께서 황자를 낳으셨으나…….”

의녀는 말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태(死胎)였습니다.”

짙은 어둠이 황궁의 하늘을 가렸다. 황궁 곳곳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첩첩산중 같은 궁궐은 등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산해 보였다.

여름밤의 바람이 궁중 사이를 훑고 지나가며 낮게 울리는 소리는 궁궐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만들어 내는 낮은 소리는 오늘따라 더욱 사람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안비는 넘어지면서 복중 태아를 잃게 되었다. 황제가 무척 기대하고 애지중지하던 그 황자를.

기절했다가 깨어난 안비는 죽네 사네 하며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그녀가 약도 먹지 않고, 식사도 거부한 채 죽겠다고만 하는 통에, 안비의 궁 근처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안비 옆에서 그녀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안비가 사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안비의 곁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외궁에 위치한 근정전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여름인데도 근정전의 문과 창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고, 회랑 아래 서 있는 내시들은 근심 어린 눈빛으로 근정전의 문을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멀리서 사람들 한 무리가 등불을 켠 채 근정전 쪽으로 다가왔다.

“황, 황후마마십니다.”

내시들이 근정전을 향해 오는 사람이 황후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놀란 기색으로 서둘러 황후를 맞이했다. 황후는 내시들의 통보를 생략하고, 스스로 문을 열고 근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근정전 내부에는 등불 두 개만이 켜져 있어 실내가 몹시 어두웠다. 옥좌 위에 앉아 있던 황제는 인기척을 느끼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잠든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폐하, 그만 돌아가 쉬시지요.”

황후의 말에 황제가 음, 하고 대꾸했다.

“짐은 조서를 조금만 더 보다가 가겠소. 오늘 조금 더 보면, 내일은 조금 덜 봐도 될 테니.”

황제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정신 또한 맑아 보였다. 황후가 황제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 나랏일이 어디 오늘 더 본다고 해서, 내일 더 줄어드는 것이랍니까. 오늘 조서를 많이 보면 볼수록, 내일은 더 많은 조서가 올라올 텐데요.”

황제가 느릿느릿 눈을 뜨고 웃음을 지었다.

“황후의 말대로라면, 짐이 조서를 적게 읽으면 읽을수록, 조서가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오?”

황후가 웃으며 황제의 손을 꼭 잡았다.

“신첩이 하고 싶은 말은, 급하지 않다는 겁니다. 폐하, 차근차근하셔도 됩니다.”

황제가 다른 손으로 맞잡은 황후의 손을 다정하게 포갰다.

“급하지 않으면 안 돼서 그렇소. 시간이 짐을 기다려 주지 않는구려.”

황후가 황제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폐하, 아직 시간은 많습니다. 신첩을 보세요. 신첩은 그리 오랜 세월을 병상에서만 보냈는데, 지금은 또 건강이 차츰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폐하, 폐하께서 신첩과 함께 있어 주셨던 것처럼, 신첩도 항시 폐하와 함께할 것입니다. 이 길을 둘이 함께 걷는다면,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을 겁니다. 폐하, 그러니 급할 것 없습니다. 두려워하실 필요도 없고요. 신첩이 있지 않습니까. 신첩이 폐하와 함께하겠습니다.”

짐에게 아직 시간이 많다고? 짐도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소.

어렸을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는데, 이 나이가 되어서 또 태자를 얻지 않았는가. 드디어 하늘이 짐의 노력을 인정했다고 생각했거늘, 그게 아니었어.

그렇게 어렵게 얻은 태자를, 또 잃었으니까.

또 잃었어.

어쩌면 성인이 된 그 순간부터, 황자를 낳는 일이 짐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것 같구나. 하지만 기대를 할 때마다, 번번이 실망했지.

지금 돌이켜보면, 짐에게는 꼭 두 가지 감정밖에 없는 것 같아.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두 감정만 반복하며 교차할 뿐,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

결국엔 실망밖에 남지 않는데도. 왜 아직 이러한 감정들에 익숙해지지 않는 거지?

짐은 왜 또 다시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일까?

“폐하,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어요.”

황후는 몸을 일으키면서도 황제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쉬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혼자가 아니시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폐하께 의지하고 있는데요. 신첩과, 육가아 그리고 태후마마까지.”

육가아.

황제의 눈이 번쩍 뜨였다.

  • 아바마마, 아바마마, 소자는 어느 게 대하인 줄 압니다.

  • 아바마마, 소자가 나중에 크면, 꼭 이 지도를 따라 여기저기 다녀 보겠습니다. 소자가 아바마마를 대신해서 이 지도를 따라…….

육가아, 우리 육가아.

그래, 짐은 초조해해서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짐이 없어지면, 우리 육가아는 어떡하라고. 다른 사람은 다 제 앞가림을 해도, 우리 육가아는 그럴 수 없으니, 평생 남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지자, 황제는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좋소. 오늘은 이만 가서 쉬고, 내일 할 일은 내일 하리다. 황후가 훌륭한 조언을 해 주었소.”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조언이라 해도, 알아듣는 이에게만 들리기 마련이지요.”

황제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다른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황후가 황제의 뒤를 따라가자, 문밖에 서 있던 내시들은 한시름 놓은 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길을 안내하고자 등롱을 밝혔다.

근정전을 나선 황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오늘 황성사의 당직은 누구더냐?”

내시 한 명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폐하, 소인 하정(何正)이라 하옵니다.”

“하정? 좋은 이름이구나.”

황제가 내시의 이름을 곱씹으면서 웃자, 하정은 서둘러 감사하다며 예를 올렸다.

“하정은 들으라. 오늘 안비가 당한 변을 철저히 조사토록 하여라.”

황제의 말이 끝나자, 근정전 주위는 바람까지 멈춰 버린 듯 조용해졌다.

“폐하, 이 일은 사고일 뿐입니다.”

황후가 조용히 말하면서 황제의 소매를 살짝 잡아끌었다. 황제가 황후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사고가 너무 많소. 짐은 더는 사고를 보고 싶지 않구려.”

같은 시각 정씨 가문의 저택은 예전보다 등불이 더 환히 밝혀져 있었다.

정교랑의 혼례 준비를 위해 범강림과 황씨도 정씨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정씨 저택은 밤낮으로 시끌벅적했다.

“반근, 밤 좀 그만 새. 눈이 빨갛게 충혈된 것 좀 봐.”

“안 돼. 아씨의 혼례복은 꼭 시간 맞춰서 다 만들어야 한다고.”

“네가 직접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

“잘하고 있나 지켜봐야지. 영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

시녀와 반근이 담소를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밤바람과 흔들리는 등불이 두 사람에게는 마치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행복하고 감격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구나.

시녀는 저도 모르게 감상에 젖었다.

아씨를 따르고 나서부터 놀람과 슬픔, 답답함과 불안함 같은 감정들은 느껴 봤지만, 평범한 아씨들을 모실 때의 감정 같은 건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어.

이런 감정이 조금 늦게 우릴 찾아오긴 했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

고개를 든 시녀는 단정한 자세로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재빨리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아씨, 이제 정 대노야께 서신을 써도 될까요?”

시녀가 물었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럴 필요 없어.”

정교랑이 별이 수놓아진 밤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 사람 사이의 조화, 그 천시, 지리, 인화가 모두 준비됐어.”

하늘빛이 밝아질 무렵, 진소가 아침상이 차려진 대청으로 걸어 나왔다.

“정 낭자한테 안 가보시려고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난 안 가도 될 듯싶소.”

진소가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잠시 멈칫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예단은 잘 신경 써주시오.”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진소 부인이 진소에게 어떤 예단을 준비할지 말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사환 하나가 잰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진소에게 무언가를 나지막이 전했다. 진소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환은 예를 표하고 곧바로 물러났다.

식사를 마친 진소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단은 급할 거 없소.”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살짝 떨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정 낭자에게는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너무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서 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

진안 군왕이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하고, 폐하와 태후 모두 그 혼사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제발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혼사를 치르게 해 달라고 속으로 얼마나 부처님을 찾았는지.

하지만 매번 아무 일 없게 해 달라고 빌더라도, 또 되묻게 돼.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을까? 정말로?

그러니 이번에도 결국…….

사실 이번에도 결국 무슨 일이 나고 말았다고 차라리 마음을 놓아야 할지,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입을 한 대 때려야 할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오. 다만, 어제 안비가 황자를 잃었소.”

진소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안비가 황자를 잃었다고?

“잃다니요?”

진소 부인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황제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안비의 황자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경성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황제가 아끼는 만큼, 태아가 무사할 수 있도록 애지중지 보호했을 텐데, 어쩌다가 잃은 거지?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소. 별로 놀랄 일도 아니오.”

진소가 말했다.

안 그래도 황제는 자식을 보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순산했다 하더라도 무탈하게 자란 아이는 평왕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는 자식을 잃은 것이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조정 대신들에게는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 조정 대신들은 황제가 잃은 자식이 몇 명이 됐든, 황위를 이을 황자는 단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진소 부인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게 정 낭자와는 무슨 상관이죠?”

진소 부인이 묻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상관이냐니?”

진소가 반문했다. 진소 부인이 멈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보였다.

하긴, 그게 정 낭자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너무 긴장했나 봐요. 난 또 정 낭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서.”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를 한 입 마셨다.

“그래도 영향을 받긴 하겠지.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시다 보니, 이 혼사는 미뤄질 수도 있겠소.”

진소 부인은 그건 별일 아니라는 듯 잠시 진소와 담소를 나누었다.

평온한 진 상공의 저택과는 달리, 고능준의 거처는 난리가 났다.

대청 안에 놓여 있던 밥상이 엎어지고, 접시와 음식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벌써 산산조각이 난 찻잔과 그릇들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왜 그걸 이제야 알리는 게야!”

고능준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매섭게 소리쳤다. 그 앞에 있던 사환과 식객이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대인, 원래 이 일은 마마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조용히 입을 열던 사환은 그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고능준에게 따귀를 호되게 맞고 말았다. 이마에 핏대가 선 고능준이 바닥에 고꾸라진 사환을 향해 고함을 쳤다.

“원래는 마마와 관련이 없었다고? 그런데 지금 궁에 갇힌 사람이 누구더냐!”

태후궁.

하룻밤이 지났지만, 태후궁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맴돌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두 궁녀가 조심스럽게 태후를 부축하고, 다른 궁녀가 무릎을 꿇은 채 태후에게 죽을 떠먹여 주었다. 그러나 태후는 몇 입 넘기지도 못하고 손을 휘휘 저으며 먹지 않겠다고 했다.

“마마, 어제 점심때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사옵니다. 뭐라도 좀 드셔야 하옵니다.”

궁녀들이 울면서 태후를 달랬다.

“못 넘기겠다. 지금 어떻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냐.”

태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궁녀들이 태후를 달래는 동안, 황후가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황상은?”

태후가 황후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 통 침수에 못 드시긴 하였으나, 밤새 신첩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기분도 많이 나아지셨고요. 조금 전에는 안비를 보러 그리로 가셨습니다.”

황후가 궁녀가 손에 쥐고 있던 태후의 죽을 건네받았다.

“그래, 가야지, 가 봐야지. 어제 황상이 그렇게 떠나고 나서, 안비가 울며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그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게다. 황제가 갔으니 다행이구나. 갔으니 다행이야. 애가는 황제가 그리 무정한 사람이 아닐 줄 알고 있었다.”

태후가 울면서 말했다.

“마마, 폐하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데요. 마마께서 그것을 모를 리 없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워낙 마음이 약하시다 보니, 속상해하시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하신 게지요.”

황후의 말에 태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역시 황후가 황상을 제일 잘 아는구나.”

태후가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의 미모는 본래 빼어나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수년간 사람을 만나지 않고 병상에만 누워 있던지라, 그 모습이 더욱 야위고 수척해 보였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황후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 초췌해졌다.

“경영(景榮), 몸이 이제 막 나아지기 시작했을 텐데, 갑자기 이런 일을 겪고 밤까지 지새우면 쓰나. 그 몸으로 어떻게 버티려고.”

태후가 하염없이 울면서 황후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조심스럽게 태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니 마마께서 더욱 기운을 차리셔야 합니다.”

황후가 직접 태후를 위로하니, 태후는 금세 죽을 비우고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나고 황제가 태후궁에 도착했을 때는, 태후는 황제를 향해 탁자를 세게 내리칠 정도로 기운을 회복했다.

“누가 감히 그 애를 가둬 두라고 했소! 뭣 하러 그 애를 가뒀느냔 말이오!”

태후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소. 그 자리에서 사고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지금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게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황제가 태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누가 자리에 있었느냐? 무엇을 보았지?”

황제가 불쑥 물었다.

전각 안에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두 내시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희가 곁에 있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 안비마마를 거처에 잘 모셔다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황제가 물었다. 겁에 질린 두 내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태후를 쳐다보았다.

“어서 말하거라!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될…….”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치려던 찰나, 황제가 태후의 말을 끊었다.

“마마, 저들에게 마마께서 듣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저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것을 말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황제의 말을 들은 태후는 흠칫 놀랐다가 곧 격노하였다.

“황상, 지금 그 말은 무슨 뜻…….”

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후가 기침을 하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마, 폐하!”

두 내시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외침이 태후의 목소리를 덮었다.

“소인들이 본 바로는, 귀비마마와 안비마마께서 처음엔 대화를 잘 나누시다가, 층계를 내려갈 때 잠시 다툼이 있으셨습니다. 그 뒤 귀비마마께서 안비마마를 살짝 밀치셨는데…….”

태후가 경악하면서 소리쳤다.

“허튼소리! 네 이놈들!”

태후는 황제를 질책하는 것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시들을 향해 삿대질했다.

“마마, 소인들이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소인들이 어찌 감히요.”

내시들이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말했다. 태후는 순간적으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곧 눈이 뒤집히면서 혼절했다.

전각 내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 밤낮으로 바빴던 태의국에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태의 몇 명이 서둘러 태후궁으로 향하자, 이제야 안비의 궁에서 돌아온 이 태의가 길을 비켜섰다.

“태후께서는 괜찮으신가?”

“괜찮으시네. 갑작스러운 근심과 걱정에 화병까지 도져 쓰러지셨을 뿐이지.”

“지금 갑자기 화병이 났다고? 조금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안비의 황자 때문이 아니라, 귀비 때문인 듯하네만.”

태의들이 조용히 수군거렸다. 이 태의가 회랑 아래에 잠시 서 있다가 태의국의 곁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 태의가 문을 열자, 곁채 안에 서 있던 태의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이 태의인 것을 알아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이 대인, 안비마마의 맥상(脈象)은 괜찮으시지요?”

이 태의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비마마의 맥상이 어떠한지는 오 대인이 제일 잘 알잖소.”

이 태의가 천천히 말끝을 늘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오 태의가 웃었다.

“그럼 다행입니다. 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이 태의는 잠시 오 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 대인.”

오 태의가 고개를 들고 이 태의를 보면서 웃었다.

“이 대인, 분부하실 일이라도?”

이 태의가 한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거요?”

오 태의가 흠칫 놀랐다가 이 태의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약상자 밖으로 삐져나온 혈흔이 묻은 면포 조각이었다.

오 태의는 웃으면서 면포를 약상자 안으로 마저 쑤셔 넣었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인. 역시 누군가의 말처럼, 이 대인께서는 우리 사람이시군요.”

이 태의는 오 태의를 쳐다보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오 태의의 약상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 태의의 약상자는 다른 태의들이 쓰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유심히 보다 보면 그의 것이 다른 태의들의 것보다 더 넓고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성 오씨 가문에 사산한 태아를 키우는 능력도 있었군.”

이 태의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오 태의는 이 태의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할 뿐이었다.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입니다. 자랑할 게 못 되지요.”

오 태의가 두 손을 한 번 비비고는 약상자를 어깨에 멨다.

“이 대인께서도 쉬셔야지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 태의가 이 태의의 옆을 지나치면서 약상자를 가볍게 두드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직 처리할 게 남아서요.”

“오신(吳訊)!”

이 태의가 갑자기 흥분해서는 자신을 지나쳐 가려던 오 태의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며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그 누군가가, 정말로 이 몸이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던가?”

이 일을 발설한다고?

안비가 품고 있었던 것은 애초에 황자가 아니었으며, 진작 죽은 태아였다고.

어제 안비가 낳은, 태아의 형상을 띄었다는 그 사태가, 실은 오 태의와 의녀가 밖에서 구해 온 고깃덩이에 불과했다고, 그리고 그 고깃덩이가 지금 오 태의의 약 상자 안에 있다고.

이 일의 진상을 발설한다?

오 태의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이 태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 대인께서 이 일을 발설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 대인께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분이잖습니까.”

오 태의가 읊조리듯이 이 대인의 말에 대꾸했다.

이 일을 발설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까. 그럼 내가 그자들과 다를 바가 있을까.

이 태의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오 태의가 웃으면서 공손히 예를 표한 뒤, 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대인, 혹시 알고 계십니까? 어쩔 땐 사람을 해칠 줄 모르는 게, 사람을 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대인, 아직도 약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군왕을 생각하고, 이황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태의가 오 태의를 잠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를 잡았던 손을 툭 하고 떨구었다.

그런 거였어? 사실 나도, 그 아이들을 해친 공범이었나?

“폐하, 신첩은 어쩔 수 없이 폐하께 듣기 싫은 소리를 몇 마디 해야겠습니다. 폐하, 태후마마께서도 안비가 황자를 잃은 일에 대해 무척 속상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태후께 그리 심한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휘장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황후의 목소리에 서서히 정신을 차린 태후가 어지러웠던 생각들을 정리했다. 이윽고 기침 소리와 함께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태후는 긴 한숨을 쉬었다.

“황후에게 울음을 그치라 전하고, 안으로 들이거라.”

휘장이 걷히자, 황후가 잰걸음으로 태후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훔쳤다. 황제는 한 발치 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태후를 잠시 쳐다보고는 꿇어앉았다.

“소자의 죄가 큽니다.”

“황상의 죄가 아니오. 이건 누구의 죄도 아닌 일이오.”

태후가 버둥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황후가 서둘러 태후를 부축해서 자리에 앉게 도왔다.

“황상, 애가도 황상의 고충을 잘 알고 있소.”

황제가 허리를 숙이고 태후를 향해 어마마마, 하고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황상, 다 사고일 뿐이오. 사고 말이오. 하랑(荷娘)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르겠소! 그리고 지금 하랑의 입장에서는 그런 짓을 저지를 이유가 더더욱 없잖소!”

태후가 눈물을 주륵륵 흘리면서 사정했다.

“마마, 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이 일에 관하여 묻고 조사하려는 거고요. 짐이 이러는 것은, 모두에게 이 일이 사고라는 점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황제의 눈빛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결심이 엿보였다.

태후가 눈을 지그시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냔 말이오.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런 일이…….”

울부짖던 태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게 위낭이 출궁한 후에 일어난 일들이야.

“그러게 애가가 위낭을 출궁시키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소. 위낭이 궁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가 발생할 리도 없었을 텐데. 다 그대들이 위낭을 내쫓은 거 아니요.”

태후의 말에 황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마, 위낭을 출궁시킨 사람은 짐이나 마마가 아닙니다.”

황제가 자세를 바로 하고 천천히 말했다.

애가나 황상이 위낭을 출궁시킨 게 아니라니?

“아, 그렇지, 그래. 아무튼, 애가는 절대로 위낭을 출궁시킬 생각이 없었어. 다 위낭이 출궁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귀비가 자주…….”

태후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 되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 이건 우연이고, 이건 사고야.

세상에,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

“폐하, 이건 사고예요! 도끼를 잃었다고 이웃을 의심하시는 건 아니 될 일입니다!”

“이건 사고가 아니야!”

귀비가 자신의 앞에 있던 꽃병을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꽃병은 귀비가 방 안에서 집어 던질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이었다. 다른 물건들은 이미 바닥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이건 누군가가 고의로 본궁을 모함하려는 게야!”

더는 부술 게 없어진 귀비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궁 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귀비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의 화장이 다 번지고, 놀람과 분노가 혼재한 귀비의 얼굴은 몹시도 흉해 보였다.

“안비, 이 독한 계집!”

귀비가 밖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안비, 정녕 아깝지도 않더냐!”

귀비가 숨을 헐떡이며 성을 냈다.

태아가 아깝지도 않더냐! 안비가 정녕 미친 게야? 무려 황자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귀비는 다시 한번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밖으로 나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문밖의 내시들이 안쪽을 향해 소리치면서 안간힘을 써 가며 문을 막아섰다. 안에 있던 궁녀들과 내시들도 한꺼번에 귀비에게 몰려가 울며 그녀를 붙잡았다.

“본궁을 가둬 두겠다고? 본궁을 조사하겠다고?”

귀비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두려움이나 슬픔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만이 존재했다.

“이딴 수작에 누가 넘어가? 누가 믿는다고 이딴 수작을 부리는 게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본궁에게 수를 써? 웃기지도 않는구나! 누가 그걸 믿는다고! 폐하께서는 절대로 믿지 않으실 게다!”

참으로 우습구나, 참으로 우스워!

본궁이 안비의 태아를 노렸다고? 본궁이 황자를 해쳤다고 모함을 해?

분을 참을 수 없어 미칠 노릇이네!

그래, 맞아. 안비가 품은 황자를 해치려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지. 밤낮 가릴 거 없이 안비가 태아를 잃게 해 달라고 저주를 하기도 했어.

하지만 본궁이 제대로 뭘 하기도 전에, 안비 그 고약한 것이 본궁을 음해해?

고약한 것! 고약한 것!

“태후를 뵈어야겠다! 태후궁의 내시들은 봤을 것이야. 안비 그 고얀 것이 일부러 넘어진 걸 봤을 거라고!”

귀비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마마, 뵐 수 없습니다.”

내시와 궁녀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귀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삿대질을 하면서 호통쳤다.

“이 멍청한 것들, 이 쓸모없는 것들아! 본궁이 나갈 수 없다고 해서, 네놈들도 나갈 수 없단 말이냐!”

“그게 아니옵니다, 마마. 저희나 바깥에 서 있는 내시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태후궁에는 갈 수 없습니다.”

내시 한 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귀비가 흠칫 놀랐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왜? 태후마마께서도 안비를 해쳤다고 하시더냐?”

귀비가 조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게 아니오라, 태후마마께서 상심이 깊어 몸을 가누지 못하시는 탓에, 황후마마께서 태후마마의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황후마마께서 태후마마의 안정을 위해서 아무도 태후궁에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후궁의 일들은 모두 황후마마께서 관장하겠다고 하셨고요.”

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

귀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황후?

정말 믿기지 않는구나. 궁에 들어온 지 이십여 년이 지났건만, 후궁의 일을 모두 황후가 관장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

참으로 우습구나, 우스워.

황후가 관장한다고? 병상에 누워 족히 일고여덟 번은 죽었다 살아난 그 황후가?

뭔가 이상한데.

귀비가 고개를 저으면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뭔가 이상해. 분명히 뭔가가.

옆에 서 있던 내시도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황후!

내시는 항상 초췌하던 황후의 몸 상태가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호전되었다는 게 생각났다.

황후의 건강이 좋아진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황자를 한 명 더 낳을 것도 아니고, 낳는다 한들 그 어린 황자는 평왕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갓난아이에게는 너무도 많은 변수가 있어서,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조정 대신들 또한 그 어린 황자에게 큰 기대를 걸 리 만무했다. 설령 황후가 그 갓난아이를 키워 낸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서 내시는 황후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황후가 갑자기 황궁 안을 거닐고 다니는 것이, 죽기 직전 잠깐 기력이 살아나는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틀렸다. 황후의 건강이 좋아진 것이 평왕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건 맞지만…….

사실은, 어쩌면, 황후가 노린 사람은 귀비마마였을지도!

황후의 목표는 귀비마마였다.

귀비마마였다고!

난리통인 귀비의 전각과는 반대로, 태후궁은 몹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깊이 잠든 태후가 나지막이 코를 골자, 침상 앞에 꿇어앉아 있던 황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황제가 입을 열면서 고개를 돌리자, 팔걸이 책상에 기대어 잠든 황후의 모습이 보였다. 다소 헝클어진 귀밑머리에 손을 댄 채 잠든 황후의 모습은 더욱 초췌해 보였다.

황제가 하려던 말을 멈췄다. 그의 눈가에 황후를 아끼는 애정이 서렸다.

조용히 병상에서만 수년을 보낸 터라, 궁인들뿐 아니라 하마터면 짐도 황후를 잊을 뻔했어. 평화롭고 기쁠 때는 아무도 떠올리지 않지만, 모두가 혼란스럽고 불안해할 때 조용히 위아래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니는 이가 바로 황후라니.

이런 사람들이 있지. 기쁘고 행복할 때는 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다가도, 곤경에 처했을 때, 사람을 일으켜 주고 지지해 주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존재. 그런 사람은 오직 황후뿐이야.

황제가 손을 내밀어서 조심스럽게 황후를 살짝 건드렸다.

“경영, 여기서 자지 마시오.”

황제가 조용히 말했다. 황후가 화들짝 놀라면서 잠에서 깼다.

“폐하, 신첩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황후가 잠든 태후를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황제는 그런 황후를 향해 아니라고 손짓했다.

“결례는 무슨. 밤낮을 꼬박 지새운 것을 잘 아는데. 황후도 어서 가서 좀 쉬시오.”

황제가 다정하게 말하자,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그럼 신첩은 잠시 쉬러 가겠습니다. 신첩의 몸으로는 더는 버티기가 힘듭니다.”

다른 비빈들처럼 눈물을 비추며 기어코 남겠다고 말하지 않는군.

다들 제 목숨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짐과 태후를 위해서라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구는데, 황후는 솔직하게 제 몸이 버티지 못한다고 말해.

이 얼마나 솔직하고 진실된 모습인가. 이게 바로 진심이라는 게지.

“신첩이 또 앓아눕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어찌합니까.”

황제가 휘장을 내리는 황후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신첩은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태후궁에서 잠시 쉬겠습니다. 여기 있어야 태후마마를 모시기 좋을 것 같아서요.”

황후가 황제를 태후궁 밖으로 배웅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폐하, 안비의 궁에서 잠시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안비의 궁이라…….

황제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폐하, 신첩은 다 압니다. 안비가 계속 울기만 하는 바람에 폐하께서도 마냥 듣고만 있기 불편하시다는 걸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안비를 멀리하시는 것도 좋지 아니합니다. 그럼 이렇게 해 보시는 건 어떨지요? 안비의 궁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쉬시는 거예요. 그럼 폐하께서 긴말하지 않으셔도, 안비는 충분히 폐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침수에 드셨는데도 폐하를 붙잡고 우는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고요.”

황후가 다정하게 황제의 팔을 끌어안고 말했다.

“신첩은 이럴 때 폐하께서 혼자 계시는 게 속상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 사람이 슬플 때는 외로운 게 더 무서워.

황제가 웃으면서 황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후의 손을 토닥였다.

“짐이, 그리하리다.”

황제가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황후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 폐하, 황성사에게 궁 문을 단단히 지키라고 해 주세요.”

황제는 조정과 황실에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사고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 일이 썩 좋은 일은 아니잖습니까. 괜히 남들이 우리를 비웃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비웃는다고.

이미 몸이 반쯤 무덤에 잠긴 늙은 황제가 새싹을 틔우고 싶어 한다며 비웃고, 노쇠한 몸으로 황자를 얻고 싶어 한다며 비웃겠지.

그럴 줄 알았어. 괜히 기뻐하는 걸 줄 알았다니까. 그 나이 먹고 창피하지도 않나.

사람들이 비웃을 말들을 떠올리자, 황제는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황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번 일은 짐에게 다 생각이 있으니.”

황후가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문가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

“마마, 안으로 들어 잠시 쉬시지요.”

내시 한 명이 공손히 말했다.

황후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됐다. 본궁은 충분히 쉬었느니라.”

“이번에는 내가 잘못 짚은 것 같소.”

진소가 대조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시녀가 건넨 차를 받아오면서 말했다.

“어떻게 잘못 짚었는데요?”

진소 부인이 묻고는 시녀들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하자,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이 전부 밖으로 나갔다.

“폐하께서 이 일로 타격이 크셨을 줄 알았는데, 기분도 괜찮아 보이고, 정신없어 보이지도 않소. 적어도 예전처럼 툭하면 넋을 놓는 상태가 아니셨소.”

진소가 말하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익숙해진 거겠지?”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진소를 타박하듯 말했다.

“그런 일에 익숙해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속상한 일은 몇 번을 겪어도 똑같이 속상하죠.”

진소가 자신의 실언을 숨기고자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십팔랑의 말을 들어보니, 이번에 황자를 잃은 일은 누군가가 고의로 저지른 것 같다던데요.”

진소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차를 마시던 진소는 부인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십팔랑? 십팔랑이 언제 돌아왔소? 그런 허튼소리를 멋대로 하고 다니면 쓰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궁을 드나드는 십팔랑이 어찌 그런 말을.”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혀를 찼다.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십팔랑이 나한테만 한 말이에요.”

진소 부인이 서둘러 해명했지만, 진소는 곧바로 진십팔랑과 평소에 대화를 나누는 형제자매들을 모두 불러왔다.

“아버지, 제가 왜 허튼소리를 하겠어요. 누구나 다 알 만한 일 아니에요? 배후가 있던 게 아니라면, 황궁의 경계는 왜 갑자기 삼엄해졌으며, 안비, 태후 그리고 귀비마마 세 분은 왜 갑자기 병이 났다면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죠? 아버지,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아마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나도 알다마다.

황궁에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온갖 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

폐하의 정서가 안정적이었던 이유가, 슬픔을 대신할 게 생겼기 때문이로군.

이건 사고가 아니다. 하늘이 황제를 벌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고의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야.

이런 짓을 저지른 범인을 찾아내어 그자를 벌하면, 불안하고 억울하고 화가 난 폐하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겠지. 폐하는 그렇게 해야만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죽은 황자에 대한 미안함을 덜고, 또 한 번 아이를 잃은 불행을 직시할 수 있는 게야.

이번 일은 폐하의 잘못이 아니라 고의로 이런 짓을 저지른 자의 잘못이고, 하늘의 뜻이 아니라 누군가의 음모라고.

“그렇다면 이번 일은 폐하께서 끝을 봐야만 끝이 나겠구나.”

진소가 천천히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너무나도 졸렬한 수작이잖아요. 태어나지도 않은 황자의 목숨으로 폐하를 위협하고 귀비마마를 모함했으니까요. 이렇게 심각한 일인데, 어떻게 끝을 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진십팔랑의 말에 진소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말은, 배후가 안비라는 것이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 두말할 필요가 있나요?”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게다.”

“아버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바보 아니에요?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잖아요.”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무슨 뜻이지?

진십팔랑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물으려던 찰나, 사환 하나가 다급히 진소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진소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또 왜요?”

진소 부인이 서둘러 물었다.

“고능준이 폐하께 알현을 청했다고 하오.”

진소가 대답했다.

“고 대인께서 당연히 폐하를 뵈어야지요. 귀비마마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에 휘말렸잖아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진소가 웃음 지었다.

“고능준은 귀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에 휘말렸기 때문에 황제를 뵈러 가는 것이 아닐 게야. 아마도 이 수작이 너무 빤히 보이기 때문에 가는 거겠지.”

“아버지.”

진십팔랑이 입을 열었지만, 진소는 그녀의 말을 끊고 진소 부인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고.”

진소 부인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이어 갑자기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정 낭자도 그 자리에 불렀소.”

정 낭자!

진십팔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여인은 왜 불러요? 이 일도 그 여인과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진십팔랑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이게 정 낭자와 무슨 관련이 있겠어. 궁에 병이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정 낭자를 부른 거겠지.”

그럴 수도 있겠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일지는 몰라도, 결국 이 일도 정 낭자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로군.

정말이지…….

진소 부인이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손으로 살살 쳤다.

마차에서 내려 궁문을 넘던 고능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황실 금군에게 검문을 받고, 어린 내시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정교랑을 발견했다.

“정 낭자.”

고능준이 정교랑을 부르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 이번에 내가 경성에 돌아온 이유는 낭자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잠시 지체하는 사이에 이제야 낭자를 보게 되었군요.”

고능준이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공수의 예를 표하자 정교랑이 몸을 살짝 낮추며 답례했다.

“바깥이라 충분히 정중한 예를 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선 낭자에게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고능준이 말하면서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잘못이 없던 일에 사과할 필요가 있나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고능준과 정교랑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내시는 언성을 높이거나 재촉하지 않고 웃으며 완곡하게 말했다.

“고 대인, 정 낭자, 폐하께서 두 분을 기다리십니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 다음번에 꼭 댁에 방문하겠습니다.”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한 후, 두 사람은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앞뒤로 나란히 걸어갔다.

두 사람은 금세 근정전 앞에 도착했다. 걸음을 멈춰 선 고능준이 고개를 돌리자, 정교랑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춘 게 보였다. 고능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 낭자는 황궁 여인들의 병을 봐주러 입궁한 게 아니었나? 왜 여기로 온 거지?

“정 낭자.”

고능준이 정교랑에게 말을 물으려던 찰나, 근정전의 문이 열렸다.

“고 대인, 폐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근정전 안에서 걸어 나온 내시가 예를 표했다. 고능준은 하는 수 없이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폐하를 기다렸다가 같이 내궁으로 가려는 걸 수도 있겠군. 폐하께서는 정 낭자가 진료하는 것을 직접 봐야 마음을 놓으실 테니.

근정전 안으로 들어선 고능준은 곁눈질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몇 달 만에 돌아온 근정전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야.

망각은 좋은 것이기도 나쁜 일이기도 하지. 원래 세상만사란 이렇게 복과 화가 동시에 오는 법이니, 얼마나 뛰어난 수완으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

고능준이 옥좌 위에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읍을 했다.

“폐하, 사실 신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고능준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뻔한 수작에다가, 남을 음해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일인데, 내가 이리 조급하게 황제한테 달려와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황제를 욕보이는 것밖에 더 되겠나. 하지만 궁에서 전해져 오는 소식들이 점점 더 이상해져서 말이야.

귀비는 역시 소문대로 궁에 연금됐고, 황제는 여전히 안비의 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태후는 일절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 탓에 황궁 소식이 이래저래 끊기게 되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황성사 사람들이 아직도 궁 안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닌다는 사실이지. 보아하니, 황제는 이 뻔한 수작을 진지하게 파헤치려는 것이로군.

황제는 안비가 품고 있던 황자를 지극히 아꼈지.

그러나 사실 황자를 아낀다기보다는, 폐하 자신을 아꼈던 것이리라. 안비가 품고 있던 황자는 단순한 황자가 아니라, 황제의 희망이었으니까.

희망은 모두가 품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황제에게는 더욱 간절한 희망이 있었겠지. 신체 건강하고, 무병장수하는 희망.

지금 벌어진 일은 너무도 속이 훤히 보이는 수작인지라, 믿는 구석이 있지 않는 한 절대로 벌일 수 없는 짓이야. 황제의 희망을 철저히 짓밟고, 만천하의 사람들을 장님 취급, 바보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폐하, 폐하의 지나친 총애가 시샘과 화를 부른 것입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한쪽에 서 있던 내시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 대인이 실성을 했나? 어떻게 저런 말을 입에 올리는 거야?

황제도 놀란 기색으로 고능준을 내려다보았다.

“고 대인의 말은, 황자가 짐의 잘못으로 변을 당했다는 뜻이오?”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능준은 근정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황제는 몹시 침착했다. 그에게서는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함이 느껴졌다.

황제가 저리 침착한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닌데. 나는 저토록 냉정한 황제를 보러 온 게 아니야.

내가 보러온 것은 분노하는 황제의 모습이지. 적어도 황제가 분노해야만 생각이 더욱 활발해질 수 있으니. 내가 기대했던 모습은 저렇게 무뚝뚝한 얼굴로 남이 설계해 놓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황제의 모습이 절대 아니라고.

“그럼 안비가 짐의 총애에 기대어, 황자를 저버리고 귀비를 음해했다는 말이오? 안비가 무엇을 위해 그리하지? 귀비를 음해한다고 한들, 안비가 지금보다 더욱 존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나? 더욱 존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들, 황자 없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황자만 살아 있다면, 안비는 궁에서 갖은 영예를 누리며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황자가 없어진 지금, 안비가 앞으로 궁에서 어떻게 지낼지는 그대 같은 궁 밖의 사내보다 더 잘 알지 않겠소!”

황제는 말을 하면 할수록 흥분하여 탁자에 손을 올리고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아직 부족해.

고능준이 허리를 숙이고 큰절을 올렸다.

“폐하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안비가 아무리 귀비와 원수지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앞길이나 다름없는 황자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 리 없지요. 그래서 이 일이 더욱 수상하다는 겁니다.”

고능준이 잠시 뜸을 들이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안비가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은 태의가 몇 명입니까?”

옆에 서 있던 내시가 경악한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 대인이 단단히 미쳤구나!

팍 소리와 함께, 황제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능준, 그 말은 짐이 애초에 황자를 가지지도 못했고, 이 모든 것이 다 안비의 계략이라는 것이더냐?”

황제가 고능준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짐이 이럴 줄 알았어. 꼭 저런 말로 짐을 비웃을 줄 알았다고! 다들 짐이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비웃고, 애초에 아들을 가지지도 못할 거라고 비웃을 줄 알았느니!

저 봐라, 저 봐. 이제는 생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내 면전에 와서 저런 말을 지껄이는군.

고능준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신은 그래서 폐하의 지나친 총애가 화를 불렀다고 한 것입니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더 좋아하는 법입니다(上有所好 下必甚焉 - 맹자).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지요. 일부러 허튼수작을 부려 폐하의 눈을 속이는 것이요!”

고능준은 고개를 들고 황제를 쳐다보며 눈빛을 반짝이고 목청을 높였다.

“폐하, 당시 안비가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었던 태의는 몇 명이며, 누구입니까? 다른 태의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었던 태의가 몇 명이냐고?

황제가 속으로 잠시 생각을 했다.

몇 명이었지? 한 명이었던 것 같은데.

궁에 있는 비빈들은 회임했을 때 특히 조심하는 편이라, 자신에게 익숙한 태의 하나만을 부를 터. 태의 하나가 맥을 짚고 진단을 내렸다면, 더는 다른 태의로 바꾸지 않았겠지.

“폐하, 태의 몇 명이 그리 말했습니까? 태의국에서는 관련 검증이 이루어졌습니까? 진맥했던 기록은 남아 있는지요?”

고능준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의 물음이 연달아 황제의 고막을 때렸다.

태의 몇 명이었냐고? 한 명이었지.

관련 검증이 이루어졌냐고? 아니, 당시 소식을 듣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따로 검증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어.

설마…….

아니야, 아니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

격노한 황제가 층계를 내려와 고능준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내시들은 이 정도로 진노한 황제를 처음 보는지라, 겁에 질려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헛소린들 뭐 어때?

내가 황제를 보러 온 건,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죄를 벗기 위함이 아니야. 그거야말로 웃긴 소리지. 귀비의 일은 변명을 할 필요도, 감정에 호소할 필요도 없는데, 죄는 무슨.

나는 단지 황제가 조금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야. 정신을 차리게 하는 김에 의심의 씨앗도 심어놓고.

고능준이 속으로 웃었다. 그는 체통도 잊은 채 삿대질하는 황제를 쳐다보면서도 한 치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두려울 게 있겠나? 이렇게 멍청하고, 빤히 보이는 수작 따위를 진지한 일로 만들다니.

황제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니, 정신 좀 차리라고 따끔하게 자극해야지.

아무리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창문과 문도, 격노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문밖에 서 있던 내시들과 시위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정 낭자는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숨기려나?

내시들이 조심스럽게 곁눈질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여전히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정교랑의 표정은 내시들보다도 훨씬 더 담담해 보였다.

역시 신선의 제자답네. 천자가 격노하는 소리를 들어도 두려운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다니. 저 여인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재미있네.

정교랑이 속으로 생각하며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역사서에 기록된 중신들은 저런 식으로 황제를 대했구나. 저 안에 있는 고 대인도 역사서에 짙은 한 획을 그었지.

황제가 고 대인을 존중해 그를 중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 대인이 황제의 면전에서 황제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황제가 내궁으로 피신하여 그를 만나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황제는 고 대인의 의견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현명한 성군과 강직한 충신이라는 미담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었지.

사서에 몇 줄로 묘사되어 있던 일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정말 재미있네. 화가 난 황제가 내궁으로 피신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으려나.

정교랑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황제가 화를 내며 근정전 밖으로 뛰쳐나오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내시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긴 회랑을 따라 잰걸음으로 떠나가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안비의 궁.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안비가 시녀의 시중을 받으면서 천천히 약을 먹고 있었다. 내시의 말을 들은 안비가 연신 기침을 했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안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의자에 앉아 있던 황후는 내시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약부터 먹게. 일단 자네의 맥상을 잘 조절해 놔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 대인이 태의국에 있는 모든 태의를 데리고 와서 자네의 맥을 짚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정말로 큰일이 나는 게야.”

안 그래도 새하얗던 안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약 그릇을 가져와 궁녀가 먹여주기도 전에 사발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던 도중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하던 안비가 몸을 떨며 외쳤다.

“마마, 마마.”

황후가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댄 채 웃으면서 눈을 떴다.

“자네가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진안 군왕이 보낸 간식을 먹고 회임했다는 이야기를 할 배짱이 있고, 태의가 태아의 맥이 불안정하다고 했을 때도 황자를 얻었다고 말하고 다닐 배짱도 있잖나. 안비, 자네의 배짱이 그렇게 두둑한데, 이제 와서 무서울 게 뭐 있어?”

안비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마마, 마마, 신첩은 배짱이 두둑한 것이 아니오라, 아둔한 것이옵니다.”

“아둔하기는. 아둔하더라도 꼭 살길이 없으란 법은 없네.”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안비가 황후를 쳐다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하온데, 하온데, 폐하께서 의심을…….”

안비가 다급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당연히 의심하시겠지. 폐하께서 제일 잘하시는 게 바로 의심이 아닌가.”

황후가 말했다. 안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마마, 그때 신첩에게 약조하셨지요. 꼭 신첩이 잘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요. 신첩은 아직 죽기 싫습니다.”

“시끄럽다.”

황후가 짧게 말했다. 안비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쏟으며 황후를 쳐다보았다.

“폐하께선 당연히 의심하시겠지. 하지만, 우리보다 누군가가 더 빨리 의심을 받을 것이니,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네.”

황후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은, 본궁의 운이 아주 조금 더 좋았을 뿐이야.”

그리고 때로는, 운이 아주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충분하지.

근정전 안.

고능준 또한 화가 난 채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는 황제를 쳐다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이 늦기 전에 황제를 알현했다는 것이 몹시 다행이라고 여겼다. 비록 그가 경성에 돌아오게 된 계기가 아들과 정교랑의 터무니없는 혼사 이야기 때문일지라도.

그가 경성이 아니라 부임지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 사건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성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일이 손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으리라.

그러니까, 그 혼사가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지.

천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욕을 내뱉던 황제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짐이 드디어 알겠구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겠어. 이번 일은 정말로 짐의 잘못이긴 하지.”

황제의 반응에 고능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폐하, 신이 좀 전에는 도가 지나친 말을 했사옵니다. 사실 황자를 잉태했다는 건 죄가 될 수 없…….”

고능준이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말하려던 찰나, 황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너희가 믿는 구석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짐이 이제야 알았다.”

조금 전의 분노가 사그라든 것인지, 황제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고능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거지?

갑작스럽게 변한 황제의 태도에 고능준은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왜 갑자기 또 차분해진 거야? 정말 많은 일이 황제의 예상을 벗어났나 보군. 이번 사고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모양이야.

“고 대인, 그대들은 다른 사람들의 추측이 두려운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추측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잖소.”

황제가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옥좌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대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이번 일이 귀비를 음해하려는 의도가 너무도 투명하게 보이는 일이기 때문이야. 귀비가 스스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쓸 리도 없고.

귀비가 어째서 안비를 해치려 하겠소? 안비가 황자를 회임해서?

황자? 귀비가 황자를 회임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귀비의 황자는 벌써 다 큰 성인이 되어 왕에 봉해졌어. 그런데 안비가 회임했던 황자는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고, 태어난다고 한들 몇 살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처럼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예측하기도 힘든 일인데, 어찌 이런 불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귀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안정적인 앞길을 해치는 일을 하겠소?”

내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고능준이 속으로 생각했지만, 황제의 말투는 어딘가 거슬리고 이상했다.

“영명하시옵니다, 폐하.”

고능준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황제가 옥좌에 등을 기대면서 고능준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그러하겠지. 절대로 귀비가 이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을 거라고 예상했을 게야. 이 일은 단순한 사고이거나, 애초에 안비가 귀비에게 앙심을 품고 계략을 짠 것이라고 말이야.”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귀비에게 이는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게야. 설령 귀비가 이런 짓을 저지르더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도 귀비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고능준은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황제의 머리가 정말로 어떻게 된 것이 맞군! 내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게 아니었어! 머리를 쓰기는 했는데, 아주 어리석은 쪽으로 머리를 썼어!

의심의 씨앗을 뿌리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의심을 하라고 한 건 아니었다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렇게 생각하기도 힘들 터인데!

“폐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범인이고, 모든 사람이 남을 해치는 자들입니다.”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홀판을 든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가 목청을 높이고 말을 이어갔다.

“폐하, 지금 도끼를 잃었다고 이웃을 의심하는 마음을 품을 때가 아닙니다! 폐하, 어찌 사적인 의심을 품는 동시에 공정하게 이 일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말씀대로 귀비가 절대로 의심받지 않을 위치에 있기에 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안비라고 해서 그리 못 할 이유가 있습니까?”

말장난처럼 이리저리 둘러대는 게 참으로 엉망이구나!

“짐이 잘 알겠소.”

황제가 고능준을 향해 그만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이번에는 고능준의 말을 듣고도 격노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짐은 그대의 뜻을 잘 알겠으나, 이번 일은 다른 때와는 다르오.

고 대인, 이번 일은 당연히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고, 의도가 너무도 빤히 보이니 그 졸렬함이 극에 치달은 일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많은 사람이 모르고, 짐도 몰랐던 일이지만, 오직 귀비만 알고 있던 일이 있소.”

뭐라고?

고능준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고 대인도 그 일을 알고 있었는지, 짐은 모르겠구려.”

“폐하!”

고능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고능준, 월식이 있기 전에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것을 알고 있소?”

뭐라고?

고능준이 흠칫 놀랐다.

태백 천상?

머릿속을 정리하던 고능준은 근정전에 들어서기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고능준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문가를 쳐다보았다.

그 여인! 그 여인은 후궁 비빈들의 병을 봐주러 온 것이 아니었어!

“태백성이 나타나 월식과 만나면, 태자가 위태로워지지.”

황제의 목소리가 고능준의 귓가에 전해졌다.

태자가 위태로워진다.

고능준이 몸을 살짝 떨었다.

“폐하,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

“정씨를 들라 하여라.”

황제가 고능준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내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근정전의 문을 열자, 정교랑이 천천히 근정전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정씨, 짐이 그대를 부른 건 물어볼 것이 있어서다.”

황제가 예를 표하고 있던 정교랑에게 곧바로 물어보았다.

“지난해 섣달 보름이 되기 전,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는가?”

“폐하께 아뢰옵니다. 그렇습니다.”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고능준은 할 말을 잃은 채 한쪽에 잠자코 서서 황제와 정교랑의 문답을 지켜보았다.

“그럼, 태백성이 나타나 월식과 만나면 태자가 위험해진다는 게 사실인가?”

황제가 이어서 물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그렇습니다.”

“태백성이 등장하고, 객성(客星: 혜성, 신성 등)이 구진(勾陳: 작은곰자리)에 보일 때, 천하의 군주가 될 자가 나타나는가?”

황제가 다시 물었다.

고능준은 황제의 앞선 두 마디를 들을 때까지 크게 와닿는 것이 없었으나, 황제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몹시도 귀에 익은 말이구나.

태조가 등극하던 해, 태사국의 천상도(天象圖)에 태백성이 보였다. 진(秦) 지역에서는 이를 진왕이 천하를 갖게 될 징조로 여겼고, 실제로 진왕은 훗날 형제들을 제치고 천하를 손에 쥐게 되었다.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다니.

고능준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나도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데, 귀비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고능준의 귓가에 담담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그렇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능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 대인, 이제 알겠소?”

고능준이 가볍게 탄식했다.

“폐하, 신은 모르겠습니다.”

고능준이 정교랑을 흘깃 쳐다보았다.

“박학다식한 고 대인이 어찌 아직도 모른다는 말이오?”

황제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폐하, 물론 태백성에 관해서는 알겠습니다. 다만, 조정에 사천대와 태사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어찌 왜 조정 관리들에게 이를 묻지 않고 정 낭자에게 하문하시는지요?”

고능준의 말이 끝나자, 정교랑이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 대인의 마음이 급해졌나 보네.

정교랑이 속으로 생각했다.

고 대인이 던진 질문을, 황제라고 던지지 않았을까. 설마 황제가 정말로 내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황제가 내게 묻는 것은, 단지 증명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일 뿐인데.

증명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다른 누군가가 이 얘기를 했다는 뜻이지.

보아하니, 사서에 기록된 고 대인에 관한 내용이 정확한 건 아닌가 보네. 황제를 도망치게 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는 아닌 것으로 보여.

뭐, 그럴 수 있지. 사서도 결국 사람이 쓴 것일 테니, 기록한 자의 편애와 감정이 섞이기 마련이니까. 사실과 다르게 누군가를 미화하거나, 누군가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도 있겠지. 사서라고 해도 다 믿을 게 못 되네.

황제가 고능준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짐도 잘 알고 있소.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의 말일 뿐이고,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아무 말이나 귀담아듣거나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짐은 사천대의 말을 들어도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어 그 말을 증명해 줄 정 낭자를 부른 것이오.”

고능준이 흠칫 놀랐다.

그럴 리가 없어!

사천대에서 태백성이 나타났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나 고능준이 절대로 모를 리가 없단 말이야! 사천대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내게 숨길 리가 없어! 심지어 이렇게 오랫동안 숨겼을 리는 더욱 없다고! 작년의 일, 무려 작년의 일이라니.

“사천대 제거 등을 들라 하라.”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고능준의 귓가에 차례로 들려왔다.

역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어. 또, 또 이런 느낌이야.

이 느낌은 처음이 아니지. 지난해 월식 때도 그랬어. 원래 월식 사건을 빌미로 진소를 조정에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도리어 진소가 무평 설해(雪害)를 빌미로 나를 조정에서 내쫓았지.

무평 설해.

수하가 내게 일부러 보고하지 않은 탓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소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든 무평 설해 말이다.

이번에도 똑같아. 태백성이 나타났다는 것을 내게 알리지 않았다니.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걸 내게 숨겨서 뭐에 쓴다고?

이 일은 무평 설해처럼 내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는데, 왜 내게 숨기고, 황제에게 숨겼던 거야? 지금 와서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신 곽원은…….”

근정전 안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듣자, 고능준은 생각을 접고 정신을 차렸다. 근정전 안에는 세 사람 외에도 사천대 관리들 몇 명이 서 있었다.

곽원. 예전에 목숨 걸고 월식을 보았다고 했던 그자로군.

태백성에 대해서도 저자가 말했나?

고능준이 예를 올리고 있던 곽원을 쳐다보았다.

저자라면, 목숨 걸고 월식을 알렸던 공로가 있으니 황제는 저자의 말을 몹시 신뢰할 것이야.

“신이 그때 태백성을 보긴 하였으나, 잘못 본 줄로 알았기에 감히 보고할 수 없었습니다.”

“폐하, 당시 곽원이 태백성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으나, 신을 포함한 다른 관리들은 태백성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어 월식 예측 날짜가 다가오기에, 월식에만 집중하느라 태백성을 잊고 있었습니다.”

“태백성에 대해 논의한 적은 없었지만, 신들이 곽원이 했던 말을 기록하여 기밀로 보관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기밀이 새어 나가게 되어…….”

어찌 된 일인지 그 기밀이 새어 나가게 되어?

고능준이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당연히 누군가가 고의로 그 말을 퍼트린 거겠지!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오랫동안 그 이야기를 홀로 간직하고 있다가 시기적절할 때 퍼트린 것일 수도 있겠군. 시기적절할 때라면, 당연히 내가 경성을 떠났을 때겠지.

마치 큰 깨우침을 얻은 사람처럼, 고능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폐하, 그 천문 현상에 관해서는 근심할 필요 없습니다.”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큰 소리로 외쳤다.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능준이 눈 딱 감고 이를 악물며 말하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태자가 없다고? 태자가 없었어? 그대들의 눈과 마음은 벌써 평왕을 유일한 태자로 모시지 않았는가?”

“폐하께서 만천하 사람들 앞에서 태자 책봉을 명하지 않으셨으니, 평왕은 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절대 마음속으로도 평왕을 태자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고능준의 말에 황제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좋아. 그대의 말이 맞소. 짐이 태자를 책봉하겠노라 만천하에 공표하지 않았으니, 아직 태자가 없는 건 맞지. 그 말은 곧, 누구나 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 테고.”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고능준을 내려다보았다.

“태백성이 등장하고, 객성이 구진에 보일 때, 천하의 군주가 될 자가 나타난다 했소.

이는 태백성을 품은 안비의 황자가 나타났으니, 아직 확정되지 않은 태자 평왕이 위태로워진다는 뜻일 수 있지. 또 안비의 용종이 태자가 될 수도 있었으니, 어떤 의미에선 용종을 사산한 게 태자가 위태로워진다는 뜻일 수도 있소.

어떻게 보든 간에 태자가 위험해진다는 건 사실이오.

고 대인, 짐이 다시 묻겠소. 안비가 겪은 사고가 아직도 사소하고 멍청한 수작으로 보이시오?”

이게 어딜 봐서 멍청한 수작입니까! 이건 누가 보아도 아주 치밀하게 짠 판이 아닙니까!

고능준이 손에 쥔 홀판을 부러트릴 기세로 세게 쥐었다.

참으로 대단한 판이로구나!

황궁의 경계가 아무리 삼엄해도 황궁 안의 소식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백성들의 관심사는 비빈이 사고로 황자를 잃었다는 소식이 아니었다. 비빈이 황자를 잃게 된 게 사고가 아니라 황제를 두고 투기하는 후궁 비빈들의 계략이라고 해도, 그들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을 것이다. 굳이 황궁이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경성의 권문세가라면 다들 한 번쯤 겪어 봤을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문 현상에 관한 참언(讖言: 앞일에 대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말)이 연관된 일이라면, 백성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신선과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태백성이 나타나고, 객성이 구진 에 보일 때, 천하의 군주가 될 자가 나타난다는 말은 백성들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그 말은 황궁에 있는 황자가 천하의 군주가 될 것이라는 뜻인데, 지금 황궁엔 황자가 둘이잖소. 둘 중 누가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다는 거지?”

“예전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당연히 평왕 전하가 되겠지.”

작년 천문 현상이 가리킨 태자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황자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맞소, 맞아. 그리고 예전에 했던 그 말과도 딱 들어맞잖아. 월식이 있는 날, 태백성이 보이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고.”

“그러면 도대체 누가 태자라는 거요?”

“거 아둔하기는. 당연히 위태로워진 황자가 태자인 셈이지.”

“아, 그럼 안비가 잃은 그 황자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태자였다는 말이오?”

“그야 당연하지. 그게 아니고서야 귀비가 다급해질 이유가 뭐 있겠소? 안비가 낳을 황자가 하늘이 점지한 태자라는데, 평왕이 어떻게 태자가 되누?”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찻집과 식당 사이를 비집고 이 층에 있는 별실까지 흘러들어왔다. 별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천상, 참언 같은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황제가 고씨 가문에 대한 총애를 조금 거두려고 하는가 보오.”

“거둘 때가 되긴 했지.”

그 자리에는 고씨 가문의 처지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조하며 내심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혀를 차면서 불만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 뭐하나?”

손에 술잔을 쥐고 있던 노인이 혀를 찼다.

“고씨 가문의 세력은 그 집 사람이 다 죽어야만 잠잠해질 것이야. 푸르른 산이 있는데, 어찌 땔감 걱정을 하겠나? 잊지 말게. 이제 폐하께 남은 황자는 평왕뿐이야.”

그렇지. 이제 황제에게는, 오직 평왕밖에 남지 않았어.

고씨 가문의 서재 안.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이를 악물고 같은 말을 뱉어냈다.

“그래, 우리 고씨 가문이 무서울 게 뭐 있다고! 폐하께서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죽은 황자의 목숨값으로 평왕을 죽이겠다 해도, 어디 우리 고씨 가문이 눈 하나 깜짝할 줄 알고!”

고 관인의 굵직한 목이 오늘따라 유난히 비대해 보였다. 그는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고능준이 고 관인을 흘겨보았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는 늘어놔서 뭐 하느냐?”

“욕이라도 해서 화풀이라도 하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정말 너무 억울하다고요! 이게 지금 다 무슨 일이랍니까? 우리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냔 말입니다. 아버지, 황제의 총기는 이제 기운이 다한 것이 아닐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런 어리석은 일을!”

고 관인이 씩씩대면서 화를 냈다.

“황제가 어리석은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바둑판을 잘 짜 둔 사람이 고명하다고 할 수밖에.”

고능준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온했다.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말하면서 가끔 다리를 주무르는 것뿐이었다. 어제 반나절 내내 근정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아버지, 어제 그러지 마셨어야 합니다. 왜 아버지께서 무릎을 꿇으신 겁니까. 아버지께서 무릎을 꿇으시면, 귀비마마가 정말로 이 일을 꾸몄고, 우리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고 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외쳤다.

“허튼소리. 그 일과 내가 무릎을 꿇는 것이 무슨 상관이더냐? 폐하의 체면을 생각해야지, 이것아. 그리고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에서 꿇은 것이야.”

내가 내 잘못을 인정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무릎 꿇고 사직을 청하거나, 죄를 뉘우치겠다며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말했겠지.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황제가 그 말을 내게 물은 순간, 나는 대답 대신 무릎을 꿇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곧추세우고, 입을 꾹 다문 채로.

그 후로는 황제가 내게 무슨 말을 묻든 간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 황제가 들을 생각이 없다면, 나 또한 답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말이야.

아무런 증거도 없으면서, 천상 참언 따위를 믿고 귀비가 황자를 해쳤다고 몰아세워?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다고!

“황성사 사람들이 귀비마마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껏 황성사의 조사를 버텨낸 자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작정하고 조사한다면…….”

막료가 머뭇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갓난아기도 아니고, 수십 년을 산 사람들인데 털다 보면 어찌 먼지가 안 나올까.

게다가 귀비마마께서는 이미…….

“조사? 안비의 황자를 해쳤다는 죄목도 마음대로 씌울 수 있는 판국에, 다른 죄목이라고 못 씌울까? 황성사에서 뭘 조사해 내든 그걸 곧이곧대로 인정할 셈인가?”

고능준이 냉소를 보였다.

“그럼 마마께서 뭘 해야 할까요?”

막료가 물었다.

여인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 자주 쓰는 수법 같은 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화를 낸다거나, 통곡한다거나, 자해한다거나.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귀신이 문을 두드린다고 무서워할쏘냐?”

고능준의 말을 들은 방 안의 사람들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기에는 좀…….

고능준이 언짢은 기색으로 사람들을 흘겨보았다.

“평왕! 평왕! 평왕이 있는데 귀비마마가 무서울 게 뭐 있다고!”

고능준이 답답하다는 듯이 탁자를 내리쳤다.

“가서 귀비마마께 말을 전하거라. 우리 고씨 가문은 이깟 일로 겁먹을 사람들이 아니라고. 지금 무슨 말을 듣더라도 절대로 고개 숙여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신분을 잘 기억하라고 하여라.”

사환 한 명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빠르게 방을 나갔다.

“그럼 평왕은 뭘 해야 합니까? 귀비를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하라고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고 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하지만 고능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 일은 평왕과는 무관한 일이니, 귀비를 대신해서 억울함을 호소해서는 안 되지. 폐하는 평왕의 부친이고, 귀비는 생모야.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어. 지금 평왕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은 오직 효도뿐이다.”

막료가 고능준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가 잘못을 인정해서도 안 되고, 우리도 죄를 인정해서는 안 되지만, 자녀들이라면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긴 하지요. 부모 간의 불화가 생겼을 때, 자식 된 도리로서 속상하다고 자책하는 것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평왕이 뭘 하면 되는 거요?”

막료의 말을 듣던 고 관인이 성가시다는 투로 물었다.

“자신이 얼마나 속상한지 설명하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문책을 받겠다는 상소문을 써야지.”

고능준의 대답에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뭘 그렇게까지…….”

“뭘 그렇게까지? 자식이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네놈은 뭐 그리 불만이 많아! 언젠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되더라도, 네놈은 날 위해서 무릎 한 번 꿇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내 일은 너와 무관한 일인 게야?”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고 관인에게 호통쳤다. 고 관인이 난감해하면서 말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건 별개의 일이지요. 굳이 그렇게 스스로를 저주하실 필요까지 있습니까.”

고능준이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 관인을 흘겨보았다.

“네놈이 불러온 화로도 충분하다. 나 스스로 저주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재수가 없으니까.”

제가 불러온 화라뇨. 이건 다 그 몹쓸 정가 계집 때문인데.

그때 덕승루에서 그 계집을 죽였어야 했어. 괜히 살려 둬서 아버지한테 꾸중만 듣고.

고 관인은 다시 한번 후회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이 벌어진 것은 다 폐하 때문입니다. 일찍이 평왕을 태자로 책봉하셨더라면 괜히 다른 사람들이 딴생각을 품을 수도 없었을 텐데.”

고 관인이 재빨리 화제를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 폐하께서 확실히 딴생각을 품으신 것 같습니다.”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나간 일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이제 황제는 그런 생각을 품을 여지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제 평왕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황제가 또 무슨 딴생각을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번 일도 무사히 지나가겠지요?”

고 관인이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평왕에게는 별 영향이 없겠으나, 우리 고씨 가문에는 타격이 있을 듯합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이미 많은 조정 대신이 대인의 탄핵을 추진하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대인께서는 지금 폐하와 대립하고 계신 상태인지라, 폐하께서도 이번 기회를 빌미로 대인의 기세를 꺾으려 들 테고요. 아무래도 이번에 저희에게 오는 타격이 클 듯한데…….”

막료가 말했다.

맞는 말이야. 지금 당장은 황제가 문제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어디든 분출할 곳이 있어야 할 텐데. 귀비가 아니라…….

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음해하는 겁니까!”

고 관인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그야 간단하지. 이번 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고씨 가문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다.”

고 관인이 멈칫했다.

“그러기엔 적이 너무 많은데요?”

설마, 조정의 문무백관 중 절반이 이번 일에 가담했다? 그건 말도 안 돼. 이렇게 판이 커질 때까지 우리 고씨 가문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어.

그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누군가가 혼자서 벌인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세 사람 이상이 합심한 일이라면 나 고능준이 몰랐을 리가 없어. 더 나아가서 무리를 지어 손을 맞잡고 나를 해하려고 했다면, 내가 진작에 어떻게든 눈치챘겠지.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일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모함인데, 황제가 범인이 귀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바로 태사국에서 태백성의 일을 숨겼던 것.

황제의 말에 따르면, 귀비가 비밀리에 태사국 사람과 내통하여 기밀 정보인 태백성에 관해 알아냈고, 일부러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이라고 했다.

태백성이라…….

사천대 관리들이 근정전에서 했던 말은 믿을 만해. 그들 실력으로 태백성을 발견했을 리가 없고, 발견했다고 한들 그걸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놈들, 멍청하긴 해도 신중한 편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사천대가 생긴 지 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월식에 관해 목숨 걸고 얘기하는 자가 곽원 하나뿐일 리 있겠나.

월식.

정 낭자.

천문 현상.

  • 이미 알아봤는데, 그 학생 혼자 한 일이라더군요. 사천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답니다. 그래서 폐하의 귀까지 들어갔나 봅니다.

  • 폐하께서는 정 낭자를 불러 하문하려 하셨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진안 군왕한테 가서 물어보라 하셨고요.

  • 아마 정 낭자도 월식이 있을 거라 했겠죠. 그러니 폐하께서 그 곽원이라는 학생의 청을 응낙하신 겁니다.

고능준의 귓가에 아득하게 맴돌던 말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고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폐하께서 정 낭자를 부르시려고 한 게 이 때문이었군.”

고능준이 작년에 막료의 말을 듣고 내뱉었던 말을 다시 한번 읊조렸다.

생각지도 못했구나.

작년에 했던 말을 지금 다시 하는 것임에도, 이리도 딱 떨어질 수가 있다니.

“큰일 났다.”

진십삼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옆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시녀 둘이 화들짝 놀랐다.

“공자님.”

시녀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진십삼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진십삼은 시녀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문밖으로 쌩하니 나가버린 후였다.

“공자님, 공자님, 겉옷 챙기셔야죠!”

시녀들이 다급하게 비단 겉옷을 챙겨 들고 진십삼의 뒤를 쫓아갔다.

진십삼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시녀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공자님이 다시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시녀가 웃었다. 진십삼이 시녀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네 생각인 게냐, 네 아씨의 생각인 게냐?”

“당연히 제 생각이죠.”

시녀가 빙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래서 네가 네 아씨를 능가할 수 없는 게다.”

진십삼이 고개를 젓고는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녀가 진십삼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또 뜻밖의-

“태백성을 알고 있었다고요?”

마당 안에 들어선 진십삼은 대청 안에 앉을 새도 없이 회랑 아래에서 바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본 거예요?”

진십삼의 물음에 정교랑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말하지 않았어요?”

진십삼이 또 물었다.

“아무도 안 물어보던걸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교랑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교랑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웃어서는 안 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안 물어보던걸요.

“이렇게나 큰일을……. 조정에 바로 알렸어야죠.”

진십삼이 감탄하며 말하자 정교랑이 진십삼을 바라보았다.

“진 공자, 천문 현상에 관한 일은 길흉을 예측하는 일이라, 굳이 묻지 않는 한 먼저 말할 수는 없어요. 사천대나 태사령처럼 천문 현상을 관측하는 게 일인 사람들을 제외하고요.”

지금 화난 건가?

진십삼이 잠시 흠칫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랬군요. 제가 그것까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혹시 화난 건 아니죠?”

“화 안 났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가 태백성을 보고도 말하지 않은 것을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고, 그저 감탄한 겁니다.”

진십삼이 웃음기를 거두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낭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또 뜻밖의 일에 휘말리게 된 것에 대해서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또 뜻밖의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반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마자 반근은 흠칫 놀랐다.

내가 왜 역시라고 했지?

“무고하게 어떤 일에 휘말리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다 그에 따른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진호가 웃었다.

“낭자가 한 그 말이 충분한 이유가 되겠네요.”

“말하는 이에게 의도가 없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예전에 아씨와 군왕 전하께서 나누시는 대화도 못 알아들었는데, 이제는 진 공자님과의 대화도 알아들을 수가 없네.

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와서 얘기해요. 날씨가 좋지 않네요. 곧 비가 내릴 거예요.”

정교랑이 진호에게 안쪽으로 들라는 손짓을 했다.

날씨가 좋지 않다고?

반근과 진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도 불지 않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쬈다.

“아, 그럼 저는 햇볕 아래 널어 둔 혼례복을 걷으러 갈게요.”

반근이 서둘러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아씨께서 비가 온다면 꼭 올 거야.

혼례복이라…….

진호는 잠시 멈칫했다가 시선을 거두고 대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번 일은, 폐하께서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는 말을 입에 올리신 순간부터 낭자와 연관된 일이 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은 진호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날 찬합을 받고 마당을 떠난 뒤로, 진호는 정교랑을 다시 보게 될 때 뭔가 다른 느낌을 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정교랑을 마주한 지금 진호는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고 느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았다.

맞아, 변한 건 없어. 예전과 똑같아.

이것 봐, 역시나 또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되었잖아?

“월식 전에 폐하께서 진안 군왕을 시켜서 낭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던데요?”

진호가 물었다.

“맞아요. 월식이 있었냐고 내게 물어봤었어요. 그건 별로 특별한 게 아니죠. 월식은 누구나 계산해낼 수 있는 거니까요. 나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식이야 흔한 것이니 문제 될 건 없어요. 다만, 낭자에게 물었다는 게 중요하죠.”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진안 군왕이 낭자에게 물어봤다는 건, 누구나 알아도 되고, 알 수도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물었는지는 오직 낭자와 진안 군왕 둘만 아는 게 되죠.”

“황후마마께서 후궁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계신 듯합니다. 안비가 황자를 잃어도 폐하께서 안비에 대한 총애를 거두지 않고, 매일 안비궁에서 침수에 드시는 것도 황후마마의 조언 때문이라고 하고요.”

보고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더 잿빛으로 변했지만, 고능준의 표정은 담담했다. 방 안의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보고하던 사람은 차마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궁에 있는 사람은 모두 황후마마의 사람들이고, 태후궁에 있는 자들도 어느 쪽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 여인, 참으로 잽싸게 움직이는군. 잠깐 사이에 사람을 전부 바꾸다니, 폐하의 의심을 살 걱정은 하지도 않나?”

고 관인의 말에 보고하던 사람이 고개를 살짝 들고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 근래에 바꾼 건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바꾸기 시작한 듯합니다.”

뭐라?

고 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태상예원(太常禮院: 관직명)을 시켜 관까지 짜 놓고 부장할 물건까지 정리해 두었던 그 황후가? 곧 숨이 넘어갈 듯했던 그 여인이 어찌 후궁을 관장하게 됐단 말인가!

웃기지도 않은 소리!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태후와 귀비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있거늘, 어떻게 그게 가능하냔 말이야!

“그럴 리가 없기는. 본디 사람을 죽도록 물어뜯을 수 있는 개는 바로 죽은 듯이 구석에 숨어 지내던 개다. 황후마마께서 이번 한 번을 물어뜯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숨죽이고 살았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탄복할 일이지.”

고능준이 평온하게 말했다.

“이건 절대 황후마마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황후마마께서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일이거나,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지 않은 한 황후마마께서 이런 일을 벌이실 리가 없습니다.”

막료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청난 이득? 귀비를 없앨 수 있는 게 가장 큰 이득이겠지. 이참에 태후까지 쓰러트리면 황후가 황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될 테니. 평왕이 제위에 오르게 되면, 태후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황후밖에 없을 것이야.”

고능준이 말했다.

귀비는 정실 황후는 아니지만, 황제의 친모로서 태후에 책봉될 자격이 충분했다.

황제의 생모라는 명분이 있고, 고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세력이 받쳐 주는 데다, 이미 성년이 된 황제까지 있으니, 황후만 죽어 준다면 태후의 자리는 바로 귀비의 것이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귀비가 태후에 봉해질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 셈이고, 심지어는 폐비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뭐 어떻다고요? 귀비가 없어지면, 평왕이 황후를 어미로 모시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고 관인이 소리쳤다.

“그럼, 평왕이 황후를 모친으로 섬기면 안 되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그렇게 되면 황후는 모양새만 어미가 되는 꼴 아닙니까. 황제의 생모를 모함한 원한까지 있는 마당에, 참 마음 편히도 태후 자리를 지키겠…….”

고 관인이 입술을 삐쭉이면서 투덜댔다. 고능준이 고 관인을 향해 침을 뱉으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모양새! 모양새가 뭐 어때서? 옥좌도 모양새가 아니더냐!”

그렇긴 한데.

수렴청정을 받은 황제는 많았다. 전 왕조의 태후는 장장 이십 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니, 옥좌에 앉은 황제는 꼭두각시처럼 모양새만 지키는 장식에 불과했다.

“왜 황후가 마음 편히 못 지낼 것이라 생각하느냐? 평왕의 친모도 음해할 수 있는 황후가, 평왕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도록 가만히 놔둘까? 황후가 평왕에게 효행과 천륜의 도를 들먹이면 무슨 일인들 못 해내겠느냐. 그리고 같은 이유로 얼마든지 평왕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느니라.

황후가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던 건, 만천하 사람의 입 때문이겠지.

안비의 황자가 죽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죽은 그 황자가 하늘이 점지한 태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평왕이 제위에 오르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평왕이 죽은 태자보다 못한 황제라고 생각할 것이고, 평왕은 대의명분이 불분명하고 하늘의 이치에도 어긋나는 황제라고 생각할 것이야.”

고능준이 말했다.

훗날의 태후가 과연 그런 황제를 두려워할까? 아마 태후는 그런 황제를 앞에 세워두고 속 편하게 조정을 쥐락펴락하겠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바로 사람들의 입이다.”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감탄했다.

황후, 참으로 잘 짜인 바둑판을 만드셨소.

“이게 다 그 빌어먹을 태백성 때문이 아닙니까! 분명히 그것 때문에 모든 게 틀어진 겁니다!”

고 관인이 씩씩대며 소리쳤다. 고능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 태백성이 꼭 안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지금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이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까?”

고 관인이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께서 정말로 화가 나서 미쳐버리신 건가?

“일이 이 지경이 됐다고 한들 뭐 어떠냐. 바둑판이 잘 짜여 있을 뿐, 아직 승패가 갈린 건 아니야. 황후와 진안 군왕이 정씨를 매수해서 태백성으로 우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도 똑같이 태백성으로 그들을 공격해야지!”

고능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버지, 그렇다면 이번 일은 그 세 사람이 협심해서 만들어 낸 겁니까? 만에 하나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떡하죠?”

“인정하지 않아?”

고능준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부터 이 세상의 모든 잘못이, 당사자가 인정해야만 잘못이 되었느냐?”

고능준이 웃음기를 싹 걷어냈다.

“그리고 이미 정씨가 그날 근정전에서 황제에게 자신도 태백성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진호가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 물었다.

“이 차는 뒷마당에 심었던 그 차나무로 만든 겁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가 씩 웃고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근정전에서, 낭자는 태백성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정교랑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진호는 스스로 이어서 말했다.

“알아요, 나도 알아요. 낭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도 안다고요.”

정교랑이 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낭자는 아는 거라면 꼭 말하고, 알지 못한다면 말하지 않는 사람이죠. 아는 것이라면 말 못 할 것이 아니니 묻는 자가 있다면 필시 답할 거라는 것도 압니다. 누군가가 낭자에게 청을 했을 때, 낭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응한다는 것도 잘 알아요.”

진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맞아, 낭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야. 어떤 면에서 보았을 때는 무시무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다른 쪽에서 이 여인을 본다면, 사실 이 여인은 너무도 단순해서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갓난아기 같아.

“그래서 그자가 낭자를 이용했다는 거예요. 어쩌면 진안 군왕은 낭자에게 월식이 있을 거냐고 물어본 그 순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했을 겁니다.”

진호가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내게 태백성에 관해 물어본 적은 없어요.”

진호가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눈썹을 세우며 말했다.

“낭자에게 태백성에 관해 물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자한테 필요했던 건, 낭자에게 물어본다는 그 행동입니다.”

진호가 냉소를 지었다.

“그자가 간사하다는 점이 바로 이겁니다. 진안 군왕은 낭자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폐하, 신 폐하께 주청을 올릴 일이 있사옵니다!”

황궁에서 열리는 대조회에서 또 한 명의 대신이 앞으로 걸어 나와 홀판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마음껏 올리거라. 며칠간 고능준의 탄핵을 주장하고, 귀비를 폐비시키라는 상소문이 눈처럼 쌓이겠구나.

그래, 어디 한 번 실컷 주청을 올려 보아라. 이참에 고능준의 편에 선 자가 얼마나 많은지, 짐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겠다.

고씨 가문과 귀비가 안하무인으로 제멋대로 굴더라도, 짐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방관하는 거라고 비웃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을 멍청한 꼭두각시로 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 정 그렇게 화가 난다면, 어디 한번 평왕까지 죽여 그 황자에 대한 대가를 치러 보든지요?

  • 할 수 있습니까? 예? 그럴 배짱이 있냐고요?

  • 그럴 배짱이 없겠지요! 황제에게는 다른 황자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황제를 비웃을 수 있는 겁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수히 많은 사람의 비아냥과 비웃음이 황제의 귓가에 환청처럼 들려왔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손이 점점 떨려오고, 눈앞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폐하.”

내시가 황공한 기색으로 조용히 황제를 불렀다.

시끄러운 비웃음 소리가 멀어지고, 시야도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깊은 심호흡을 하며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황제가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고는 눈꺼풀을 움직였다.

“말하거라.”

“폐하, 태백성에 관하여 철저한 조사를 청하옵니다.”

홀판을 든 대신이 목청을 높였다.

암, 철저히 조사해야지. 귀비와 고능준 등이 어떻게 사천대와 내통했는지, 천문 현상에 관한 참언 따위로 혹은 다른 무언가로 황실의 자손을 음해했는지 제대로 알아내야지.

황제가 속으로 말했다.

“진안 군왕과 강주 정씨 여인이 영악한 마음을 품고 태백성에 관한 일을 고의로 은닉한 것에 대한 조사를 청하옵니다.”

대신의 말이 이어서 들려왔다.

뭐라고?

진안 군왕? 강주 정씨?

근정전 안에 서서 대신의 주청을 듣고 있던 진소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결국, 또 그 여인이 연루된 일이 되는군. 할 줄 아는 게 너무 많아도 골치가 아픈 법이지.

황제도 놀랐는지 등받이에서 살짝 몸을 뗐다가 아직도 말이 끝나지 않은 대신을 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고능준 패거리의 반격이 시작되었구나. 드디어 올 게 왔어.

황제의 입가에 걸렸던 희미한 냉소가 사라졌다.

“정씨 여인이 일식과 월식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면, 태백성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태백성은 월식 전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월식이 있기 전에 진안 군왕을 시켜서 정씨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지요? 그런데 그때 왜 정씨는 월식 전에 보았던 태백성을 폐하께 보고하지 않았을까요? 정씨가 태백성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 근정전에서 폐하와 문답을 할 때 분명히 보았다고 대답했으니까요.

폐하께서는 귀비만 태백성을 알고, 폐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신은 폐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누군가가 태백성에 관한 일을 고의로 은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철저히 조사해 주십시오. 귀비, 진안 군왕, 정씨 중 누가 먼저 태백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를요.”

누가 먼저 알게 됐든 간에, 황제 폐하조차 몰랐던 일이란 말입니다!

대신의 말이 끝나자, 대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황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여봐라, 진안 군왕과 정씨를 불러오너라.”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에 우리의 살길을 만들어 준 사람은 바로 진소군. 그날 진소가 황제가 정씨를 불러오는 것을 막아 준 덕분에 우리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야. 살다 보니 진소에게 고마워할 날도 생기네그려.”

고능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방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평왕 쪽에는 말을 전했느냐?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리긴 했고?”

고 관인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오늘 조회가 끝나면 폐하께 상소문을 올린다고 했습니다. 벌써 입궐했고요.”

고능준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의 바둑판을 놓은 사람들이 그 세 사람이었을 줄이야.”

고능준이 감탄했다.

“그러게 제가 일찍이 진안 군왕 그놈을 없애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 관인이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난들 없애려고 하지 않았는 줄 아느냐.”

고능준이 고 관인을 흘겨보고는 냉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그놈이 항상 운 좋게 살아남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계산해서 대적해 왔던 거였어. 우리가 그놈을 해치우고 싶지 않아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놈을 해치우지 못한 거란 말이다!”

이래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계산을 한다는 게지. 아무도 얕봐서는 안 돼.

“우리가 얕본 거다.”

고능준이 탄식했다.

몹시 화나는 일이긴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아직 기회가 있으니, 이번에는 꼭 그놈을 해치워야 한다.”

고능준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고 관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씨도요. 그때 덕승루에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그 계집의 숨통을 끊었어야 했는데.”

고능준이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너도 여기서 놀고 있지만 말고, 입궁해서 평왕을 지켜보아라. 또 그들이 운 좋게 빠져나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돼. 황후가 또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고 관인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저는 어머니와 함께 태후를 뵈러 가겠습니다. 황후가 대외적으로 태후께서 앓아누우셨다고 했으니, 우리의 병문안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우리 고씨 가문이 태후를 뵈러 가는 것조차 막아선다면, 우리는 황후가 태후를 해쳤는지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 전하.”

내궁 안.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평왕을 내시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무엄하도다! 본왕이 가지 않겠다면, 가지 않는 것이니라!”

평왕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뜨며 내시에게 호통쳤다.

“전하, 어찌 안 가보실 수가 있습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내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일이 본왕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본왕이 그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데! 본왕이 바로 피해자다! 본왕이 바깥에서 무슨 취급을 받는지 아느냐!”

안비가 잃은 그 잡종 놈이 하늘이 점지한 진정한 천자고, 나는 가짜라고 하더구나!

내가 가짜라고! 내가!

이렇게 똑똑하고 유능한 내가! 황제 폐하의 피를 물려받은 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잡종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그런데도 본왕더러 죄를 인정하러 가라고? 본왕이 웃음거리가 된 것으로는 모자라더냐?”

평왕이 내시의 멱살을 거머쥐며 이를 악물고 읊조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전하, 이건 귀비마마를 위한 일입니다. 전하의 생모요.”

내시가 다급하게 말했다.

“귀비가 본왕의 생모이기 때문에, 본왕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게야! 귀비는 할 일도 없으면서, 허구한 날 궁을 싸돌아다니며 뭘 하고 다니는 게냐? 툭하면 본왕더러 자기를 만나러 입궁하라고 하질 않나. 그날도 본왕이 입궁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날 입궁했다면, 분명히 본왕까지 그 일에 연루됐을 거란 말이다!”

평왕이 눈을 부라리고 내시의 얼굴에 침을 잔뜩 튀기며 소리쳤다. 그러더니 씩씩대면서 내시의 멱살을 놓고 힘껏 밀쳐 버렸다.

바닥에 고꾸라진 내시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다 귀비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본왕을 사람 취급한 적이 없었어. 맨날 아둔하다고 구박하고, 그 바보와 비교하고. 이젠 그 바보가 없어졌더니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그 잡종과 본왕을 비교해? 귀비의 눈에는 본왕이 그 고깃덩이만도 못하다는 거겠지!”

평왕이 이를 부득 갈고는 성큼성큼 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내시들이 서둘러 평왕의 뒤를 쫓아갔다.

“전하,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전하, 이건 다 효를 위함입니다.”

또 다른 내시가 조용히 말하면서 아예 평왕의 앞을 막아섰다.

“전하, 폐하께서는 효도를 가장 중요시하십니다. 귀비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폐하께서 귀비를 꺼리실 수는 있으나, 그것이 전하를 미워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전하께서 친모인 귀비를 모른척하신다면, 폐하께서는 필시 전하가 불효자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효도?

평왕이 발걸음을 멈췄다.

“전하, 당초 경왕도 황제께 약을 먹여드리고, 황후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황후께서 좋아하는 꽃을 따 드리면서 폐하의 총애를 받지 않았습니까.”

내시가 재빨리 덧붙여서 설명했다.

경왕!

그 바보?

본왕은 아직도 그 바보와 비교를 당해야 하는 것이더냐!

평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가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힘껏 쥐었다.

  • 형님, 형님, 우리 매화 따러 가요.

평왕의 귓가에 까르르 웃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곧 그는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느낌을 받았다.

평왕이 헉 소리를 내면서 손을 세차게 내쳤다.

“꺼져!”

평왕이 소리쳤다. 평왕의 앞을 막아섰던 내시는 깜짝 놀라면서도, 평왕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평왕을 붙잡았다.

“전하, 이대로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대로 가 버리시면 필시 폐하의 미움을 살 것입니다.”

평왕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두웠던 그의 표정에 갑자기 미소가 걸렸다.

“미움을 사? 그래, 본왕이 지금 폐하께 죄를 빌러 가마!”

왜 갑자기 또 간다고 하시는 거지?

내시들이 흠칫 놀랐지만, 평왕은 기분이 항상 오락가락해서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왕은 몸을 돌려 근정전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전하가 가신다고 했으면 된 거야.

내시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서둘러 평왕의 뒤를 쫓아갔다.

염탐을 위해 입궐한 고 관인은 모친과 함께 태후의 병문안을 한 뒤에야 간신히 시간을 내어 혼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하는 가셨느냐?”

고 관인이 태후궁 밖에 서서 물었다.

“전하께서 가셨습니다.”

한 내시가 조용히 대답했다.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어감이 이상한데?

“전하께서 근정전으로 가셨단 말이냐?”

고 관인이 재차 물었다.

“예, 그리로 가셨습니다. 가신 지 한참 되었습니다.”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이제야 어감이 좀 낫네.

고 관인은 옷을 털고 잠시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 봐야겠다.”

고 관인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엄청 거세네!”

회랑 아래 서 있던 내시들과 궁녀들이 나지막이 속삭이며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바람이 지나가자, 고 관인은 다시 한번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좀 전까지 뙤약볕이 내리쬈던 하늘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비가 오겠군.”

고 관인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근정전 안.

강풍 때문에 창문이며 문이며 할 것 없이 요란한 소리가 진동하자, 내시들이 서둘러 창문과 문을 붙잡고 섰다.

바람이 지나간 근정전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근정전 안의 문답이 끊겨 대전 안이 조용해진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평왕 때문이었다.

황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탁자를 짚고 있던 황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대전 안에 서 있던 내시들은 황제의 분노가 하늘에 잔뜩 낀 먹구름처럼 서서히 뭉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바탕 폭풍우가 휘몰아치겠구나.

내시들이 속으로 외쳤다.

“뭐라고 하더냐?”

황제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내시가 겁에 질린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평, 평왕 전하께서 안비가 자식을 잃은 화가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며, 하늘의 뜻을 바로 하기 위해서 외직으로 보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내시가 이마를 땅에 찧으면서 목청을 높였다.

자식을 잃은 화? 외직으로 보내 달라?

진소가 조금 놀란 눈치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고능준이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거지? 며칠 전에는 황제에게 대들어 화를 돋우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평왕까지 들먹이며 황제를 협박한다?

뭐 이렇게 된 것도 나쁘진 않지. 고능준이 멍청해졌든, 돌아 버렸든 간에 나에게는 좋은 일이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기필코 고능준을 파직해야만 해.

그런데 다른 건 차치하고, 평왕이 고능준을 따르며 배운 거라고는 어찌 저런 것밖에 없는지! 저리도 기고만장하고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원래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늘.

진소가 살짝 고개를 젓고는 바른 자세로 섰다.

“자식을 잃은 화가 평왕 때문이라고? 자신을 외직으로 보내 달라 했다고?”

황제가 내시가 한 말에 한 글자씩 힘을 실어서 되뇌었다. 금방이라도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자식을 잃은 화? 외직을 청한다?

짐이 평왕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평왕은 그 일이 벌어진 당일에 짐을 찾아왔어야 했어.

그런데 평왕은 진안 군왕이 내궁의 일에 자리를 피하겠다고 물러난 것을 보고, 저도 궁에 들어오지 않았어. 진안 군왕은 군왕이고, 평왕은 친왕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냔 말이다!

  • 폐하, 평왕이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아마 겁먹어서 안 온 걸 거예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분명히 폐하를 찾아올 겁니다.

황제가 황후에게 푸념할 때, 황후가 황제에게 웃으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래. 짐을 찾아올 줄은 알았으나,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토록 오래 기다렸건만, 짐의 뺨을 후려치는 것으로 돌아올 줄이야!

자식을 잃은 화? 외직으로 나가겠다?

짐이 귀비를 용서하지 않겠다면, 네놈은 외직을 빌미 삼아 짐을 협박하겠다는 게냐!

  • 배짱이 있다면 저를 한 번 죽여 보시죠? 저를 경성 밖으로 내쫓아 보세요. 저를 아들로 인정하지 말란 말입니다.

  •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있냐고요! 황실의 자손이 영영 끊기기를 바라십니까?

만천하의 사람들이 짐을 비웃고, 조정 대신들도 짐을 비웃고, 이제는 아들이란 놈까지 짐을 비웃으려 들어?

세간에서 이 일을 어떻게 말하든 간에, 짐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이 일을 숨기고 있다. 대신들도 일부러 내궁의 일은 제하고 탄핵을 주장하는 마당에, 뜻밖에도 아들놈이 짐의 뺨을 후려치고 있구나!

근정전 밖에 꿇어앉아서,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만천하 사람들 앞에서 짐에게 짝 소리를 내며 따귀를 후려쳤어!

황제의 손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려왔다.

“썩 꺼지라고 하여라!”

황제가 고함을 내지르며 자신의 앞에 놓인 탁자를 손으로 엎어 버렸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문무백관이 허리를 숙이고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울리는 천둥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막 궁문을 넘어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었다.

“전하, 어서 이리로 오셔서 비를 피하시지요.”

내시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을 안쪽으로 안내하려 했다.

“많이 내리는 것도 아니니 괜찮다. 가서 우산을 가져오거라. 나는 먼저 가고 있겠다.”

진안 군왕이 말하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급하게 우산을 찾아온 내시들이 우산을 펼치고 진안 군왕의 뒤를 쫓아갔다.

같은 시각, 정교랑을 데리러 온 내시들이 정씨 저택 앞에 도착했고, 정교랑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얘기할 셈이죠?”

회랑 아래 선 진호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어떨 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는데도 믿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죠?”

단호한 정교랑의 태도에, 진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네. 마음 써 줘서 고맙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내디뎠다.

“네, 알아요.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어가까지 데려다줄게요.”

진호가 층계를 내려가려는 찰나, 정교랑이 갑자기 진호의 손목을 잡았다.

“잠시만요.”

얇은 여름옷 위로, 갑자기 낯설고 부드러운 손길에 손목을 잡힌 진호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장애가 있던 터라, 철이 들고 나서부터 그는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댈 수 없게끔 했다.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할 때도 되도록 자신의 힘으로 해결했다.

주복과 가끔 주먹질을 하며 투닥거릴 때를 제외하고는 지금껏 진호의 손목을 잡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인은 당연히 더더욱 없었고.

여인의 손은 이런 건가?

부드러운데 힘이 있고, 어딘가 좀 거친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오랜 시간 활쏘기를 해서 굳은살이 박인 거겠지.

낭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떤 상황이어도, 난 꼭 낭자를 보호하고 지켜 줄 거니까.

진호는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정교랑이 잡아끄는 힘 때문에 다시 층계 위로 올라갔다.

바로 그때,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번쩍하며 번개가 내리쳤다.

마당에 있던 사환들과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몇몇은 겁에 질린 채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진호도 갑자기 내리친 천둥 번개 때문에 귀가 먹먹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번개가 쳐서요.”

정교랑이 말하면서 진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교랑의경> 21권에 계속

교랑의경 21권

차례

이런 젠장

죽을 각오

번개

다행

배짱

어찌 감히

오늘을 위해

여름에만 사는 벌레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젠장-

\

번개까지 치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황궁 안, 천둥 번개 때문에 놀라서 자빠질 뻔한 내시들이 황급히 우산을 고쳐 쓰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우두커니 빗속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의 머리카락과 옷은 벌써 비에 흠뻑 젖은 채였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놀란 표정으로 감탄했다.

“엄청난 천둥 번개로구나.”

멀리서 천둥소리가 몰려오자, 내시들이 재빨리 진안 군왕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며 재촉했다.

“전하, 어서 가시지요. 근정전으로 가서 비를 피하셔야 합니다.”

진안 군왕과 내시들이 더욱 빠른 걸음으로 근정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진안 군왕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저 앞에…….”

진안 군왕이 다소 놀란 기색으로 웅장한 근정전 앞을 내다보았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평왕 전하, 전하!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제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더는 이렇게 무릎을 꿇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번개까지 치고 있습니다!”

내시들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평왕을 말렸지만, 비에 흠뻑 젖은 평왕은 일어날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좀 전에 내리친 번개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이 천둥 번개에 놀라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며 묘한 흥분감을 느꼈다.

평왕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고, 눈빛도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다. 본왕은 죄를 뉘우치는 중이니라. 폐하께서 아직 본왕을 책망하지도 않으셨는데 어찌 자리를 뜬단 말이냐.”

평왕이 큰 소리로 외치고는 고개를 들고 활짝 열린 근정전 문을 올려다보았다.

비 때문에 날씨가 흐려져 근정전 안은 더욱 어둑했다. 평왕의 시야에는 근정전 안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사람들만 보일 뿐,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본왕은 굳이 보지 않아도, 저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지.

놀랐거나, 화가 났거나, 두려워하는 거겠지?

죄를 뉘우친다고? 본왕이 무슨 죄를 뉘우쳐야 하는데?

죽은 놈들은 죽어 마땅하니까 죽었겠지, 본왕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똑똑한 데다 노력까지 열심히 하는 본왕을 모두가 칭찬했어.

그런데 본왕을 어찌 감히 그 바보와, 살아남지도 못한 그 고깃덩이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폐하,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시지요. 누가 폐하에게 있어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아들인지!

지나가는 고양이나 개 따위는 그리도 아껴 주시면서, 어찌 소자에게는 한없이 야박하신 겁니까!

평왕이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쓰면서 속에서 외쳐대는 말들을 삼켜냈다.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던 평왕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아바마마, 통촉하시옵소서! 다 소자의 잘못입니다. 부디 소자를 외직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평왕이 소리쳤다.

“전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폐하께 아뢰시지요.”

내시들이 한쪽에서 무릎을 꿇은 채 애원했다. 평왕을 위해 가져왔던 우산도 평왕이 힘껏 내던지는 바람에 비바람에 쓸려 멀리 날아가 버렸다.

“천둥 번개가 치고…….”

내시가 덧붙여 말했지만,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가 내시의 목소리를 덮었다.

대전 안에 있던 조정 관리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기가 힘들었는지, 서로 눈짓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대치하면 어떡합니까? 어서 말려야 합니다.”

“누굴 말리자는 뜻이오?”

“폐하를 말리자는 게요? 지금 그게 무슨 뜻이오? 폐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오?”

그럼 어쩔 수 없이 평왕을 말려야겠지.

평왕이 이런 식으로 난리를 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폐하께서 기가 차서 말씀도 못 하실 정도니.

진소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진소가 걸음을 옮기자, 관리 몇 명이 재빨리 진소의 뒤를 따랐다.

“가지 말라! 아무도 평왕에게 가서는 아니 된다! 무릎을 꿇겠다고 하니 저대로 꿇고 있게 두어라!”

황제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진소를 뒤따르던 관리들은 걸음을 멈췄지만, 진소는 예를 표하며 말했다.

“폐하, 근정전 앞에서 결례를 보이는 것은 친왕이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필히 가서 제지해야 합니다!”

진소가 엄숙한 얼굴로 말하고는 황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곧바로 근정전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근정전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자, 평왕은 더욱 흥분했다.

하! 하!

“전하, 소란 피우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진소가 목청을 높여서 외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진소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며 그를 따라갔다.

“본왕은 소란 피운 적이 없소!”

평왕이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본왕의 뜻은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진심으로 벌을 받겠다는 것이오! 본왕이 한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하늘이 내리는 벼락을 맞을 것이오!”

평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하늘이 쩍 하고 갈라지는 듯한 폭발음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진소는 순간적으로 두피부터 발바닥까지 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곧이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쓰러지던 순간, 진소의 앞에 있던 사람도 쓰러지는 게 진소의 눈에 들어왔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에게 우산을 씌워 주던 내시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심지어 몇 명은 혼절하기까지 했다.

진안 군왕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빗속에 서 있었다.

세상에나.

다른 쪽에 서서 근정전을 내다보던 고 관인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평왕 전하인 게냐?”

“예, 전하께서 폐하께 죄를 뉘우치신다고 저렇게 반나절 가까이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자식, 독하기는 엄청…….”

좀 전까지만 해도 내시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던 고 관인은 마지막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눈앞의 광경을 목격했다.

고 관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젠장!

이건 고 관인의 뇌리에 남은 유일한 말이었다.

이런 젠장!

천둥소리가 근정전 위를 지나가는 동안, 굵은 빗방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무거운 적막이 근정전 앞을 짓눌렀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진 평왕에게 달려가면서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한 적막을 깼다.

넋이 나간 사람들이 빗속을 내다보았다. 뛰어온 사람은 진안 군왕이었다.

“여봐라, 여봐라! 어서 태의를 불러오너라!”

진안 군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진안 군왕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여봐라, 여봐라!”

사람들이 뒤늦게 소리치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평왕 근처에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가 내리는 근정전 앞, 여러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은 벼락에 맞아 죽어서가 아니라, 질겁하면서 넘어지고 정신없이 울부짖느라 일어설 힘이 없어서였다.

근정전 앞의 광경은 털끝이 삐쭉 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이 와중에 귀가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가 또 한 번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또 누가 벼락에 맞을지 어떻게 알아. 벼락 맞은 평왕을 가까이했다는 이유로, 하느님께서 화가 나 또 누군가에게 벼락을 내리꽂으시면 어떡해?

고 관인이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지만, 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외침들이었다.

벼락에 맞았어! 벼락에 맞았어!

  • 본왕의 뜻은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진심으로 벌을 받겠다는 것이오! 본왕이 한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하늘이 내리는 벼락을 맞을 것이오.

정말로, 진짜로, 진짜로 벼락에…….

고 관인이 악 소리를 내지르고는 잽싸게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린 탓에, 그는 몇 걸음도 못 가 바닥에 넘어졌고 버둥거리며 기어갔다.

바닥에 쓰러졌던 진소도 간신히 고개를 들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아직은 하반신이 마비된 것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앞에 쓰러져 있던 평왕을 쳐다보며 그에게 힘겹게 기어갔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무슨 일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에 근정전 문 앞에 서 있던 조정 관리들이 깜짝 놀랐다.

큰일 났다!

문가에 있던 사람들 그 누구도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며칠 만에 연이어 자식을 둘이나 잃은 아비를 어떻게 봐야 하지? 게다가 그 아비는 하필이면 황제여서, 뒤를 이어 강산을 돌봐야 할 계승자를 둘씩이나 잃어버린 셈인데.

대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

황제가 목청을 높여 다시 한번 물었다. 좀 전에 머리가 울릴 정도로 컸던 천둥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황제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고 곧이어 조정 관리들이 모두 문가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좀 전에 벼락이 친 것 같은데, 비명이 들린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누가 벼락에 맞았나?

설마 진소인가? 좀 전에 대전을 나갔던 사람은 진소인데. 설마 진소가 벼락에 맞은 거야?

“무슨 일이냐니까!”

황제가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관리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진소의 목소리가 대전 안으로 들려왔다.

“어서, 어서 대전 안으로 모시고 가거라.”

황제가 한시름 놓은 얼굴로 생각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저 힘찬 목소리가 그대로인 것을 보니, 진소는 무사하군.

참으로 다행이야. 절대로 진소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돼. 진소는 평왕을 잘 보좌하고, 그의 성장을 책임지고 지켜 봐야 하니까.

“어서 태의를 불러오거라, 태의를.”

누군가가 분주하게 외치자, 호통 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태의를 부를 때가 아니오!”

모두의 시선이 호통을 친 대신에게로 쏠렸다. 평왕을 들고 회랑 아래까지 온 내시들도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대신이 고개를 숙여 평왕을 살펴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 낭자를 부르시지요.”

대신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바로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하나?

아마 바로 장례를 치른다 해도 어렵진 않을 거야. 태상시와 예부에서 황후의 장례를 준비해 온 지 몇 년은 됐을 테니, 수의는 새로 짜긴 해야겠지만, 관곽이나 다른 것들은 바로 쓸 수 있을 거야. 무덤도 이미 준비되어 있을 거고.

다만, 평왕이 황릉에 안장될 수 있을지가 문젠데. 어찌 됐든, 벼락에 맞아서 죽은 것이니까. 황제 앞에 죄를 빈다는 명목이긴 했지만, 귀비가 안비를 해친 죄를 평왕이 대신…….

잠깐, 내가 지금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대신의 뇌리에 마지막 생각이 스치던 찰나, 그의 등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왕을 둘러싸고 있던 조정 관리들이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보자, 언제 가까이 다가온 건지 모를 황제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폐하!”

대전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황제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새까맣게 탄 평왕의 얼굴만이 그의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저 사람은 짐의 아들, 평왕이 아니다. 절대 아니라고!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진소는 무사할지언정, 그가 보필해야 할 평왕이 더 이상 없는데!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황제는 짙은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벌떼처럼 황제를 둘러싼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진소는 황제에게 달려가지 않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항상 진중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이던 진소였지만, 지금은 몹시 남루한 꼴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과 관복, 빗속에서 평왕을 향해 기어가느라 잃어버린 신발 한 짝, 엉망이 되어버린 버선발까지.

진소는 멍하니 제자리에 선 채 아무도 돌보지 않는 평왕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황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정말 큰일이 났구나.”

진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럴 수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게 꿈이라면,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악몽이 아닌가.

궁 안이 한창 혼란스러울 때, 정교랑의 마차가 드디어 궁문 앞에 도착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만 돌아가세요.”

정교랑이 몸을 돌려서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진호에게 예를 표했다. 진호는 자신에게 예를 올리는 정교랑이 아닌, 그녀의 뒤를 내다보았다.

왜 저렇게 소란스러워 보이지?

정교랑이 진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궁문 너머에 서 있던 위병이 정교랑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이어 몇 명의 내시가 비틀비틀 허둥대며 정교랑을 향해 뛰어왔다.

“정 낭자, 정 낭자, 드디어 오셨군요.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내시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제가 정 낭자를 부른 이유는 문답하기 위함일 텐데, 어째 내시들의 표정과 태도가 영 이상하네.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정교랑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진호가 무의식적으로 정교랑의 손목을 잡았다.

반근이 깜짝 놀랐다.

대낮에 모두가 보는 궁문 앞에서 어쩜 저런 행동을 하시는 거야! 우리 아씨는 이미 군왕 전하와 혼인을 약속했는데!

반근이 진호를 밀어내려고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가려던 찰나, 진호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반근이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뭐가 또 틀어졌다고?

“아이고, 어서 서두르세요!”

내시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정교랑을 끌고 갈 기세로 소리쳤다. 정교랑이 웃으며 진호에게 예를 표했다.

“괜찮아요.”

머뭇거리던 진호는 결국 손을 놓았다. 정교랑의 손을 놓음과 동시에 그는 무척 괴로워졌다.

마음이 왜 이러지? 이 손을 놓으면, 앞으로 낭자를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참 이상하기도 하지.

아니야, 지금은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혼사는 사소한 일이니까.

아, 혼사가 사소하다면…….

멈칫했던 진호는 이내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설마 지금까지의 모든 게, 다 낭자의 예상 안에 있었던 일인 건가? 그렇다면…….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이 모든 일은 다 낭자와 무관한 일이야!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전부 진안 군왕이 낭자를 이용했기 때문이야.

진호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럼 가 봐요.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내가 호기심이 많은 것으로 칩시다. 낭자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싶어서 그래요.”

진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정교랑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예를 표하자, 기다리다 못한 내시들이 곧바로 정교랑의 팔을 잡고 끌다시피 하면서 그녀를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역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시들의 손에 끌려가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고 설핏 웃음이 났다.

저 여인도 참 대단하지. 내시들에게 끌려 저리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도, 넓은 보폭으로 여전히 안정감 있게 걷다니.

궁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사방에 깔린 금군 병사들은 무기를 더욱 세게 쥐고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근정전 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연로한 조정 중신들인지라, 강산이 변하는 일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도 이번 일은 가히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소란스러움이 멈추자, 대신들은 차분함을 되찾고 질서정연하게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했다.

하지만 근정전을 향해 걸어오는 정교랑을 본 순간, 수위를 서던 금군, 내시, 그리고 대신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정 낭자, 우선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진소가 말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근정전 안쪽에 있는 황제에게 가 있었고, 진소와 몇 명의 대신들만이 자리에 남아 평왕을 지켰다.

정교랑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진소의 말에 놀란 기색도 없이 조용히 그를 따라 근정전의 편전으로 갔다.

대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편전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신의 낭자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근정전의 편전은 대신들이 잠시 쉬는 곳인지라 그리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편전 안에는 침상 위에 홀로 누워 있는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진소가 걸음을 멈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 뒤섞였다.

“정 낭자, 이분은 평왕 전하입니다.”

진소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평왕 전하?

무덤덤하던 정교랑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 사람이 바로 평왕 전하로구나.

침상 위로 시선을 옮기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정교랑의 표정에 놀라움이 더해졌다. 하지만 진소의 눈에 정교랑은 놀란 게 아니라 감탄하는 것처럼 보였다.

“벼락에 맞았네요.”

벼락에 맞다니.

정말 재미있네, 아주 뜻밖의 일이야.

원래대로라면, 평왕은 내년에 제위에 올라 장장 사십오 년 동안 나라를 통치할 다음 황제가 될 텐데, 이렇게 없어지다니. 역사서에도 평왕에 대한 기록은 없어지겠군.

역시 바뀌는구나.

하늘이 내 성의를 외면하지 않았고, 나를 속이지 않았어. 하늘은 나를 속이지 않아.

우리 정씨 일족이 멸문의 화를 입을 거라고 하니 멸문의 화를 입었고, 변할 거라고 하니 정말 변했어.

바뀔 수도 있구나. 정말 바꿀 수 있어.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주먹 세게 쥐었다.

아버지, 보세요. 정말로 바꿀 수 있어요.

“정 낭자.”

정교랑의 표정을 보다 못한 진소가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그는 정교랑에게 이렇게 많은 표정이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놀라서, 그런 거겠지?

정교랑이 감정을 다스린 뒤, 진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보라고 데려온 게 아니오.”

진소가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대인께서는 제가 뭘 했으면 하시는지요?”

정교랑이 물었다.

또 바보인 척하는 거냐!

진소가 이를 악물었다.

“살릴 수 있습니까?”

진소가 평왕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대답했다.

“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죽을병이어야만 고친다 하지 않았소?”

“대인, 저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다고 했습니다.”

정교랑이 침상에 놓여있는 평왕의 시체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요.”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인 거고, 이미 죽은 사람은 시체에 불과하다.

평왕은 죽었어. 벼락에 맞은 그 순간에 죽었다고.

진소가 속으로 탄식했다.

그건 나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대신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제에게 달려가진 않았을 테지.

지금의 평왕은 그저 시신 한 구일 뿐이다.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잘 보이려는 사람이나, 지키려는 사람이 없어진 거지.

그래도 평왕은 황제의 유일한 혈육이자, 건강하게 자란 황자인데, 이를 어쩌면 좋을꼬. 이젠 없어졌다. 평왕이 없어졌어.

“진 대인, 진 대인.”

대전 밖에서 내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부르십니다.”

황후가 정 낭자를?

설마 폐하도…….

진소는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숨이 가빠왔다.

폐하까지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시기에 폐하까지 쓰러지시면 안 돼!

진소가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그를 본 내시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대인, 태의들이 이미 폐하를 진맥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은 일단 무탈하나, 황후마마께서 정 낭자가 궁에 들어온 김에 폐하의 용태를 한번 봐 주십사 하셔서…….”

지금은 일단 무탈하다…….

진소는 귀가 웅웅 울리는 느낌에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탈하시면 됐다. 잠시여도 좋으니, 무탈하시면 됐다.

“대인께서도 어서 그리로 가시지요.”

내시가 조용히 진소에게 말했다.

진소가 곁눈질로 편전을 훑어보았다. 내시의 눈빛에는 불쾌감과 두려움, 그리고 당장이라도 이곳을 피하고 싶다는 기색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평왕을 저런 눈빛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무려 평왕이야. 제위를 이어받을 황위 계승자이고, 장차 우리가 충심으로 모셔야 했던 천자. 하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모든 게 바뀌었어.

평왕이 시체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더욱 골치 아픈 건 벼락에 맞아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평왕이라도, 벼락 맞아 죽은 자의 시체라면 황릉에 안장되지 못할 수 있어.

내시들까지 저렇게 불쾌감을 내비치다니, 참으로…….

입술을 움찔거리던 진소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잠시 편전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참으로 무정하구나.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기니.

“가세.”

진소가 짧게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비가 그치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바닥에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만이 좀 전의 폭풍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황제의 침전은 평왕의 시신이 놓여있는 편전보다 시끌벅적했다. 아무리 근정전에서 대조회를 참가하는 조정 관리들이라고 해도, 황제의 침전까지 출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황제의 침전에 몰려들었다.

관리들은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은 일이 너무도 소름 끼쳤다. 아직까지도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침전 안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소가 침전을 향해 걸어오자, 관리들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평왕 전하께서는…….”

가장 앞장서 있던 관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진소에게 묻자, 진소는 말 대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그대로 두기에는…….”

관리가 재빨리 화두를 돌려서 말했다.

그렇게 참혹하게 죽었는데 버림까지 받은 친왕은 아마 평왕이 처음일 테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폐하는 어떠신가?”

진소가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마마, 정 낭자를 모셔왔습니다.”

내시의 말을 듣자,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던 황후와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이 시선을 돌렸다.

“들라 하라.”

황후가 말했다.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마마를…….”

정교랑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려던 찰나, 황후가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예는 됐다. 어서 이리 와서 살피거라. 폐하께선 어떠하시냐?”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고개를 들자, 정교랑과 황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저 여인이 바로 정 낭자로구나. 과연 신선의 제자다운 모습이로군.

황후가 속으로 생각했다.

정교랑이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의 침상 옆에 서 있던 태의들이 정교랑을 위해 자리를 비켰다. 비빈들과 공주들은 울음을 멈추고 긴장한 기색으로 정교랑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정교랑이 황제의 안색을 살핀 뒤, 손목의 맥을 짚었다. 정교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던 이 태의도 정교랑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다.

침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교랑이 낯설 수도 있겠지만, 이 태의는 정교랑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당초 정교랑이 경성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료를 봤을 때도 이 태의는 정교랑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여인이 진 노태야를 대할 때는 무척 여유롭고 담담해 보였어. 그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지.

하지만 지금 이 여인은 온 정신을 집중한 모습으로 황제의 맥을 짚고 있고, 표정도 꽤 다양하군. 정말로 이 여인이 황제를 치료할 수 있을까?

역시 중풍이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올해 조회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고, 일 년을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뜬다고 되어 있어.

재미있네. 바뀐 것도 있고, 그대로인 것도 있으니.

정교랑이 혼수상태인 황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몹시 진지한 모습으로 황제의 맥을 짚었다.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과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인데, 역사서에는 싸늘한 네 글자만 남았지.

질, 년후훙(疾, 年後薨: 병을 앓다가 이듬해에 훙서하였다).

후세의 사람들은 ‘질(疾’)이라는 글자 하나에 응축된 슬픔과 걱정스러움, 두려움과 황공함을 결코 느끼지 못하겠지. 싸늘하기만 한 그 네 글자를 볼 뿐.

매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인걸.

우리 정씨 가문이 멸족당한 일도 역사서에 기록되었겠지.

정씨모역, 족멸(程氏謀逆, 族滅: 정씨 가문이 모반을 꾀하여 멸문의 화를 입었다).

그건 아마 이 한마디일 거야.

정교랑이 손을 들고 손끝으로 수를 셌다.

여섯 글자. 역사서에 여섯 글자나 남길 수 있다니, 그것만 해도 대단해. 짧은 여섯 글자가 어찌나 그리도 쓸쓸한지.

귓가에 들리는 기침 소리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이 태의가 눈을 부릅뜨고 정교랑에게 물었다.

“정 낭자, 어떻습니까?”

“풍질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고칠 수 있습니까?”

이 태의가 곧바로 물었지만,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대답 한번 깔끔하네.

“정 낭자, 폐하께서 풍질에 걸려 깨어나지 못하시게 된다면, 그 또한 죽을병이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연유로 고치지 못한다는 건가요?”

비빈 한 명이 다급하게 물었다.

“스승님께서 풍질을 고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의학적 이론을 말하거나 원칙을 논하며 해명하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정교랑이 이런 대답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들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신의 낭자가 할 줄 모른대. 그럼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다는 건데.

정 낭자가 정말로 못하는 건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지는.

침전 안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울음소리를 들은 진소와 대신들이 결례를 무릅쓰고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가 위중한 게 아니라, 정교랑이 황제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울음을 터트렸다는 말을 듣자, 진소를 포함한 대신들의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혼수상태인 황제를 바라보던 진소 등의 낯빛은 다시 어두워졌다.

풍질은 일찍 깨어나면 깨어날수록 희망이 있는 것인데, 만약 이대로 쭉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침전 안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나라에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황제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유일하게 대리청정을 할 수 있던 평왕마저도 벼락에 맞아 잿더미가 되어 버렸어.

지금 상황에서 누가 대리청정을 할 수 있지?

아니, 대리청정은 차치하고, 더 중요한 것은 황위의 계승자야.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어요!”

내시 한 명이 황급하게 침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고 대인께서 궁에 쳐들어오셨습니다!”

고 대인이!

진소 등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하더니 곧바로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아버지, 아버지.”

사력을 다해서 외치는 소리가 고막을 때려왔다. 고 관인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고능준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아버지, 아버지, 평왕 전하께서, 평왕 전하께서…….”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는 고 관인의 모습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평왕 전하, 평왕 전하!

고능준이 편전 안으로 한 걸음씩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홀로 쓸쓸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고능준은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평왕을 향해 내민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 노야, 노야, 마마께서 용종을 회임하셨다고 합니다.

고능준의 귓가에 십여 년 전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참으로 좋은 소식이로구나. 마마께서 드디어 용종을 회임하시다니.

그래, 좋은 소식이지. 귀비마마께서 용종을 얻게 되었으니, 잘 낳기만 한다면 그 아이는 폐하의 장자가 되는 셈이야.

태후에 이어 귀비까지, 고씨 가문이 두 황제를 거쳐 황실의 종친으로 지낼 수 있다니.

외척이 뭐 어때서? 여인의 치맛바람으로 세력을 얻은 외척이라고 세간의 비웃음을 산다 해도, 그게 뭐 어때서?

황실의 외척도 충분히 공을 세워서 이름을 날리고, 조상을 빛내고, 업적을 쌓을 수 있어.

나 고능준이 가진 뛰어난 재능과 출중한 지략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의가, 고작 외척이라는 신분에 묻히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비웃음을 등에 지고 가야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원대한 포부를 포기하고, 걱정 없이 마음 편히 먹고 마시는 한심한 외척이 되어야 하는가?

외척도 외척 나름이야. 나 고능준이 앞으로 이뤄나갈 것은, 역대 외척들이 해내지 못했던 것들일 거야. 나는 세력을 만들어 권력도 거머쥐고, 명성까지 쌓아 나갈 테니.

그리고 나는 그걸 해냈어. 수십 년 동안 흔들림 없이 공들여서 쌓아낸 나만의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나를 해치려는 자들과 내 앞길을 막으려던 자들은 모두 차례로 쓰러졌고, 간사한 외척이라며 하루빨리 나를 경성 밖으로 쫓아내려던 자들도 결국엔 나의 디딤돌이 되었지.

한 걸음, 딱 한 걸음. 내가 쌓은 탑 꼭대기까지는 딱 한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노야, 노야, 큰일 났습니다. 평왕 전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허튼소리! 다 허튼소리야!

평왕 전하께서 돌아가실 리가 있나!

평왕 전하는 절대로 죽을 분이 아니다!

고능준이 떨리는 손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평왕의 어깨를 잡았다.

“전하, 전하, 어서 일어나십시오.”

고능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조용히 읊조리다가, 이윽고 평왕의 어깨를 점점 더 세게 흔들면서 목청을 높였다.

“어서 일어나세요! 어서 일어나라고!”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능준, 이 무슨 짓이오!”

진소의 목소리가 편전 밖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고능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밖에서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마마, 마마.”

진소가 누군가를 제지하려는 듯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진소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편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가아! 사가아!”

귀비가 침상 위를 보고는 소리를 지르면서 통곡했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평왕 위로 엎어지다시피 그를 껴안았다.

“사가아, 사가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귀비가 평왕을 꽉 끌어안고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른 평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귀비가 두 손으로 평왕의 얼굴을 감싸고 소리쳤다.

“어서 일어나거라, 어서! 이 어미를 놀리지 말고, 이 어미를 놀리면 못써!”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난리를 치는 귀비를 보던 고능준은 도리어 침착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문가에 서 있는 진소와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조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게, 그리도 해서는 안 될 일입니까?”

고능준이 천천히 말했다. 진소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귀비를 쳐다보고는 말을 아꼈다.

편전 안에는 처량한 울음소리만 맴돌았다. 진소와 몇 명의 대신들만 편전을 지키고 있던 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편전 안에 있었지만, 사람이 적을 때보다 지금이 몇 배는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귀비가 중얼거리면서 평왕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평왕을 홱 밀쳤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우리 사가아가 아니다, 우리 사가아가 아니야!”

귀비가 뒷걸음질 치면서 겁에 질린 모습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리 가, 저리 가!”

귀비가 무언가를 쫓아내려는 듯이 허공을 향해 휘휘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을 본 내시와 궁녀들이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육가아다! 보이지 않느냐! 저건 육가아라고! 육가아가 괜히 장난질을 치는 게야!”

귀비가 악을 쓰며 소리치자,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때, 고능준이 갑자기 손을 들고 귀비의 목덜미를 세게 내리쳤다.

진소와 대신들이 무의식적으로 헉 소리를 내뱉고는 그대로 풀썩 쓰러지는 귀비를 쳐다보았다.

“마마께서 더는 자극받아서는 아니 된다. 어서 마마를 궁으로 모시고 태의를 부르거라.”

고능준이 자신이 결례를 보인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시와 궁녀들이 재빨리 귀비에게 몰려가 그녀를 양쪽으로 잡고 편전 밖으로 물러났다.

고능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더는 평왕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더는 의미가 없어졌어. 의미가 없는 일은 빨리 잊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해.

“고 대인, 이제 그만 돌아…….”

진소가 몸을 돌리면서 말하던 찰나였다. 고능준이 잽싸게 편전 옆을 돌아서 후궁을 향해 달려갔다. 그 광경을 본 진소와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놈이 감히!

사람들이 서둘러 고능준의 뒤를 쫓아갔다.

“막아라, 어서!”

진소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곳곳에 배치된 금군 병사들이 고능준을 둘러쌌다. 금군 병사들에게 포위당한 고능준이 갑자기 옥대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나 고능준은 선황의 당부를 받아 폐하께 충의를 다했소. 나는 태후의 친조카로서 태후마마와 폐하께서 편찮으시다기에 병문안을 하러 가는 길인데, 감히 누가 내 앞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고능준의 우렁찬 목소리에 포위망을 좁혀가던 금군 병사들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저건 선황께서 고능준에게 하사하신 옥대다.”

진소가 탄식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쓰러졌다는 일은 숨길 일도 아니고, 언젠가는 백성들에게도 알려야 할 일이지.

언젠가?

진소가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언젠가는 무슨. 아마 지금쯤이면 벌써 경성에는 온갖 소문이 돌고 있겠지.

황제의 침전 안에 있던 태의들이 쉬지 않고 황제의 몸에 침을 놓으며 약을 달였다. 황후는 비빈과 공주들을 데리고 잠시 물러나 있었다.

정교랑은 이미 황제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한 터였다. 그러나 고능준 때문에 진소와 조정 대신들이 자리에 없기도 하고, 황후도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며 계속 황제 걱정만 하는 통에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정교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에게 물러나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아 정교랑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교랑에게 누군가가 다가갔다.

“겁나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속삭였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정신없는 와중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진안 군왕의 옷을 갈아 입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듯했다. 진안 군왕의 머리카락과 옷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어서 그런지, 각진 얼굴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고 눈빛이 더욱 그윽해 보였다.

“뭐가 겁나요?”

정교랑이 대꾸했다. 문밖에서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휘장이 홱 하고 들어 올려졌다.

“폐하!”

고능준이 소리를 지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가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폐하!”

황후가 깜짝 놀라며 서둘러 침상 옆으로 갔다. 그녀가 입을 열려던 찰나, 고능준의 시선이 정교랑에게 향했다.

“진 대인!”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가 정교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외신(外臣)들은 안으로 들이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저 여인은 어찌 여기 있는 겝니까!”

“폐하께서 정 낭자를 조회에 불러 하문하시고자 하셨소.”

진소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무엇을 하문하시려고 했답니까?”

고능준이 곧바로 큰소리로 추궁했다.

“그건 고 대인께서 알 필요 없소이다. 고 대인은 폐하의 문병을 온 거요, 폐하를 질책하러 온 거요?”

진소가 단호하게 호통치자, 고능준이 화두를 바꿨다.

“폐하께서 이 지경이 되셨는데, 왜 아직도 궁에 남아있는 겁니까? 누가 저 여인을 폐하의 침전까지 들였고요? 저 여인도 여길 들어올 수 있는데, 왜 나는 막는 겁니까!”

고능준이 격노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어째 어린아이가 성질부리는 것처럼 보이네. 고능준도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귀비처럼 정신을 놓은 건가?

“고 대인, 정 낭자는 본궁이 황제 폐하의 진료를 위해 안으로 들였소.”

황후가 입을 열었다. 고능준이 황후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 하고 대꾸했다.

“그런 거였습니까?”

고능준이 말끝을 늘리면서 천천히 말하고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언제 천둥 번개가 치고, 어떻게 번개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아서, 폐하와의 내기에서 지면 벼락을 맞아서 자결하겠다고 했던 그 정 낭자를요? 그 정 낭자를 모셔와 폐하의 진료를 보게 한 사람이 바로 황후마마셨군요.”

편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면서 순식간에 정교랑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 소녀도 믿습니다. 서북의 병사들을 조사한 결과, 제 오라비들이 충분한 위로금을 받았고 그 죽음에 전혀 억울한 게 없다고 밝혀지면, 만백성을 부추겨 하소연한 만큼 이번에도 소녀가 만백성에게 알리겠습니다.

  • 뭘 어찌 알리겠단 것이냐?

  •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는 벌을 받겠습니다.

정교랑과 황제가 했던 대화가 대신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구석에 서 있던 정교랑을 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더 이상해졌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정교랑과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 싶은 건지 뒷걸음질까지 쳤다.

번개를 불러 죽는 벌.

번개를 불러 죽는 벌!

침전 안의 분위기가 기이해졌다. 정교랑은 의형제들을 위해 공로를 따지면서, 분명 황제 앞에서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겠다는 선언을 했다.

당시 정교랑의 말을 두 귀로 직접 들은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정교랑의 명성이 날로 유명해지면서 정교랑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따라서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겠다는 말도 자연스레 모두가 아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러니 성패나 좋고 나쁨이 모두 한 사람에게 달렸다(성야소하패야소하成也蕭何敗也蕭何-성공하는 것도 소하에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 달려 있다'라는 뜻으로, 한 사람의 손에 성패가 모두 달려 있음을 비유)는 옛말이 있는 게지. 그때는 허무맹랑하고 요사스러운 말로 명성을 얻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 말들이 칼이 되어 네 목을 노릴 것이야.

고능준이 정교랑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음험함이 서려 있었다.

번개를 불러 죽겠다던 수단은 저 여인 스스로 말한 것이고, 번개를 불러오겠다고 한 이유 또한 그날 황제가 저 여인에게 직접 물어 알게 된 것이다. 이 자리에는 그날 저 여인이 한 말들을 똑똑히 들은 대신들이 수두룩해.

저 여인은 자신이 한 말에 제 발이 저려 서슴없이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이야.

맞아, 바로 저 여인 때문이야! 오늘 벌어진 모든 일도 다 저 여인 때문이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불길한 요괴가 틀림없어!

주위 사람들의 경악과 공포, 두려움 가득한 표정을 보라고! 저들도 틀림없이 저 여인을 요괴라고 믿는 것이야.

아니, 아니지. 저 요괴뿐만이 아니다. 제 입으로 요괴를 불러왔다고 한 황후도 있고, 진안 군왕까지 있어! 저 세 사람이 협심하여 평왕을 해치고, 황제의 목숨을 노린 것이야!

속으로 포효하면 할수록, 고능준은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려왔다.

“고 대인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어린 처자가 내기하며 홧김에 내뱉은 치기 어린 말을 곧이들었소?”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치기 어린 말이라고요? 황후께서는, 그 말이 곧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고능준이 냉소를 보였다.

“무엄하다!”

황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고능준, 어찌 그리 결례를 보이는 것이오!”

진소도 고능준에게 호통쳤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호통에도 고능준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잘 보시게나. 여기 있는 사람들의 눈빛에 서린 꺼림칙함과 의심, 그리고 불쾌한 기색을. 의심의 씨앗은 이미 벌써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우기 시작했어.

저런 요괴를 이 자리에 계속 있게 놔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저 요괴가 번개를 불러와 평왕을 죽이고, 황제의 분통을 터트려 쓰러지게 했는데, 그다음은 누가 될지 어떻게 알아?

“황후께 여쭙습니다, 태후마마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고능준이 두 사람의 호통을 가뿐히 무시하고 물었다. 애초에 고능준은 반박하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는 굳이 길게 싸울 마음이 없다는 듯이,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질문 하나하나만을 내뱉었다.

“태후마마께서는 얼마 전 황자를 잃은 슬픔에 아직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계시오. 폐하와 평왕은 모두 태후마마와 가장 가까운 분들이지. 본궁은 아직 병상에 누워계신 태후마마께 이 일을 섣불리 알릴 수가 없었소.”

섣불리 알릴 수가 없었다고? 일부러 알리지 않으려던 거겠지.

저 기세등등한 모습 좀 보게나. 황후, 내가 정말로 황후를 얕봤구려.

고능준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폐하와 평왕이 모두 태후마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태후마마께서는 폐하의 모친이고, 평왕의 조모입니다. 태후마마께서 겪으실 슬픔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태후마마께서는 단지 누군가의 어미나 조모이기에 앞서, 일국의 태후십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태후께서 수렴청정하시어 나랏일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태후마마를 뵙는 것 또한 막아서는 아니 되지요!”

고능준은 마지막 한마디를 할 때 황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막는다는 표현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후에게 향했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네. 저런 사람이라면 황제를 후궁으로 피신하게 만들 정도긴 하겠어. 저 사람은 침전 안으로 들어온 뒤, 고작 말 몇 마디로 뜻밖의 사고를 철두철미한 음모로 바꿔버리고, 나와 황후를 모든 사람의 적으로 만들었어.

정교랑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정교랑의 어깨를 살짝 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의아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웃어요?

별거 아니에요.

정교랑이 눈빛으로 답한 뒤, 입꼬리를 내렸다.

고능준의 외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감히 누가 막아서겠느냐고 물었소!”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자리에 있던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진소, 대인이 막을 거요?”

태자가 있다면 태자가 대리청정하는 것이 맞지만, 지금은 아직 책봉된 태자도 없을뿐더러, 그나마 남아 있던 유력한 황위 계승자마저 죽어 버렸다. 그리고 태자가 없을 때, 황제가 앓아눕는다면 관례에 의해서 태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한다.

진소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고능준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대들이 막을 텐가?”

고능준이 목청을 높여서 소리쳤다.

침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태후마마 납시오.”

문이 열리고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태후가 두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침전 안으로 허둥지둥 들어왔다.

고능준이 황후를 노려보았다.

내가 입궁한 순간부터, 후궁은 더는 황후의 관할이 아니게 됐습니다.

황후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태후에게 예를 올렸다. 고능준도 서둘러 몸을 돌려서 큰절을 올리며 울먹였다.

“마마.”

자리에 있던 대신들도 고능준을 따라 태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지만, 태후는 그들을 무시한 채 황제가 누워있던 침상으로 곧장 달려갔다. 예를 올리고 있던 황후는 태후가 데려온 궁녀들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났다.

“황상!”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살벌한 대화에 찍소리도 못 내던 비빈들이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태후와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황후!”

통곡하던 태후가 잠시 뒤 눈썹을 치켜세우며 황후를 노려보았다.

“황후, 어찌 애가에게 알리지 않은 것인가!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왜 애가에게 말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황후가 두려운 기색 없이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신첩은 마마께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찌 저런 당당한 태도로, 저런 염치없는 말을!

태후가 눈을 부릅떴지만, 예상치도 못한 염치없는 말에 딱히 추궁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첩은 마마께서 감당하기 힘드실까 봐 염려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일로 화병을 얻으셨고, 귀비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들었는데, 신첩이 어떻게 마마께 말씀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신첩은 감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귀비가 광증을 보이는 바람에 고능준이 귀비를 기절시킨 일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지만, 황후는 침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는 곧, 황후가 후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고능준이 황후를 쳐다보면서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태후가 황후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태의를 불렀다.

“황상의 용태는 어떠한가?”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의들이 태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황제의 병증을 소상히 말했다. 황제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고, 깨어난다고 해도 지각이 있을지는 모를 일이라는 말에 태후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세상에나, 세상에!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지금 애가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마마, 마마,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고능준의 말에 태후는 당장이라도 혼절해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고능준이 보냈던 사람이 한 말처럼, 애가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절대로 그들의 뜻대로 되게 둬서는 안 되지!

“정씨!”

태후가 갑자기 소리쳤다. 정교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예를 표했다.

“죽을병이 아니면 못 고친다더니, 왜 지금 와서는 못한다는 말인가?”

태후가 물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게 된다면 죽을병이 아니기에 소녀는 고칠 수 없습니다. 혹 폐하께서 깨어나지 못하시더라도, 풍질 같은 중증은 소녀가 고칠 줄을 모릅니다. 스승님이 제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황제가 깨어나든 깨어나지 않든, 나는 황제의 병을 고칠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왜 중풍 치료법만은 가르쳐 주지 않으셨던 걸까?

정교랑이 침상 위에 누운 황제를 쳐다보았다.

이유야 간단하겠지. 아버지께서는 내가 황제의 병을 고치지 않길 바라신 거야. 꼭 일 년 후에 붕어해야만 하는 황제의 목숨을 구해 주지 말라고.

“황당하구나!”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당연히 고칠 수 없겠지. 네가 악한 마음을 써서 평왕을 해치고, 폐하를 해친 것이 아니더냐!”

태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마마!”

진안 군왕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입 다물라!”

태후가 단호하게 호통치고는 정교랑을 노려보면서 삿대질했다.

“여봐라, 당장 저 계집을 가두어라!”

침전 밖에 있던 시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정교랑을 매섭게 노려보는 고능준의 눈빛에 광기가 비쳤다. 고능준은 애써 억누르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손과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 계집을 가둬라! 그리고 목을 베어라! 목을 베어!

“마마.”

시위들을 제지한 진소가 태후를 불렀다.

“무엄하다! 황상이 깨어나지 못하니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더냐! 애가의 말은 말 같지도 않아서 듣지 않겠다는 게야?”

태후가 격노했다.

“말도 들어줄 수 있는 말 나름이지요!”

누군가가 거침없이 소리쳤다. 침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누구야? 누군데 저런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사람들이 소리를 쫓아가자, 조용히 뒤에 서 있던 키 큰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장순! 또 네놈이로구나!

고능준의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

“지금 네, 네가 감히 애가의 말이 말 같지 않다는 소리를 하는 게냐!”

태후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럼 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장순이 가차 없이 대꾸했다.

“장순, 태후마마를 모독하고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려 하시오? 어사는 어디에 있는가!”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지만, 장순은 고개를 젓고는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어사는 어디에 있는가! 저 잔챙이 놈이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려 하는 게 보이지 않느냐!”

잔챙이 놈이라니! 저 빌어먹을 놈이 입을 열자마자 욕을 해?

창피한 줄도 모르는 놈이 사람 꼴을 하고는 입만 열면 욕지거리를 내뱉다니, 대유학자라는 칭호는 무슨 술수를 써서 얻은 건지 모를 일이군!

고능준이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장순이 고개를 돌려 태후에게 소리쳤다.

“마마께서 이리하시는 건, 천자와 평왕을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신은 조정의 중신으로서, 폐하와 평왕을 대간대악한 자로 몰아세우는 마마를 제지해야만 합니다. 마마를 제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눈에 뵈는 것 없고 나라에 불충한 간신이 되는 것이지요!”

“허튼소리, 허튼소리! 애가는 폐하와 평왕을 위해 저 요괴를 가두려는 게야!”

태후가 반박했다.

평왕이 벼락에 맞았어, 벼락에 맞았다고!

하느님, 어떻게 평왕에게 벼락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천벌로 벼락을 맞아 죽은 자라는 오명이 천추에 남을 텐데, 그렇게 되면 평왕이라는 봉호도 남기기 힘들단 말입니다!

죽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죽인단 말입니까, 하느님!

안 돼, 절대로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할 수 없어!

평왕은 벼락에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저 요괴의 손에 죽은 것이야! 저 요괴가 평왕을 해쳤어! 그렇게 해야만, 그렇게 해야만 평왕의 명예를 지킬 수 있고, 황실의 체면을 지킬 수 있다!

“마마, 반강현에서 일식을 불러온다는 요승을 죽였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장순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반강현 일식 요승 사건.

태후가 멈칫했다.

그 사건은 경성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지만, 정교랑의 명성을 따라 자연스럽게 경성까지 소식이 전해졌고, 후궁의 여인들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작년에 일식이 일어났을 때, 정교랑이 반강현에서 일식을 빌미로 백성을 현혹하는 요승의 목을 벤 적이 있었지.

“사람들에게 대사라고 추종받던 승려는 목이 달아나자마자 요승으로 몰렸습니다. 그리고 그 요승의 목을 벤 정씨는 인간계에 내려온 보살이라는 명성을 얻었고요. 마마께 묻겠습니다. 백성들에게 보살이라고 추종받는 정씨가 아무런 연유 없이 마마께 벌을 받는다면, 백성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반강현의 스님은 요승이었기 때문에 정교랑의 손에 죽은 것이고, 그럼 정교랑의 손에 죽게 된 평왕은…….

태후의 표정이 급변했다.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시오! 그건 정씨가 백성들을 현혹했던 요사스러운 말이오! 정씨는 그런 요언을 퍼뜨린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어야 마땅하오!”

고능준이 목청을 높였다. 장순이 고개를 홱 돌리고 고능준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정씨가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했다고 하였소?

그럼 평왕이 어찌 벼락에 맞아 죽었는지는 알고 있소? 평왕은 당시 하늘에 맹세컨대 만약 자신이 한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하늘이 내리는 벼락을 맞을 것이라고 하였소.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지.

황제, 문무백관, 내시, 금군 병사까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평왕의 말을 들었고, 벼락이 내리치는 광경을 지켜보았소. 평왕은 하늘에 맹세하였고, 그 맹세가 지켜지지 않았으니 하늘이 그에게 벌을 내린 것이오.

고 대인에게 묻겠소이다. 이보다 더 사실대로 정확하게 말할 수 있소이까?

그리고 태후마마께 묻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과연 평왕이 한 행동을 요괴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태후께서 정씨를 가두겠다는 것은, 정씨가 번개를 불러 평왕을 죽였다는 이유에서겠지요. 하지만 태후께서는 만백성의 눈에 보살인 정씨가 하늘을 대신하여 정의를 구현한 게 아니라고 설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씨의 손에 죽은 평왕이, 또 한 명의 요승이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장순의 우렁찬 목소리가 침전 안을 가득 메웠다.

침상을 짚은 채 몸을 일으키려던 태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태후는 불안한 기색으로 자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혀오던 장순을 쳐다보다가 결국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야.

애가의 손자가, 정말로 천벌을 받아서 죽게 된 걸까?

평왕이 용서받을 수 없는 십 대 죄악을 저질러서 천벌을 받아 죽게 됐다고 알려지면, 황릉에 안장될 수도 없어. 이리도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죽어서도 외로이 지내게 된다니.

태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안 된다. 우리 가엾은 평왕을 그렇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정씨는 번개를 불러올 줄 안다고 했소! 그건 정씨가 스스로 했던 말이고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이오!

반강현에서의 일은 정씨가 그 요승과 아무런 원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다르오. 정씨를 우리 가문으로 시집보내자는 제안은 평왕이 먼저 꺼냈고, 그 말을 따라 태후마마께서 혼인을 명하시고, 황제 폐하께서 윤허하게 된 일이외다. 정씨는 이 혼사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태후를 만나러 오지 못하게 집안 어른의 다리까지 부러트린 사람이오.

게다가 그 이전에는 사촌을 시켜 내 아들을 암살하려고까지 했지! 정씨의 불순한 의도가 이리도 투명하게 보이는데,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요!”

고능준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고 장순을 노려보았다.

“물론 장 대인께서는 다르겠지요. 장 대인과 정씨는 같은 고향 출신이기도 하고, 정씨에게 큰 은혜를 입어 서로 시녀를 교환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고능준이 다른 대신들을 훑어보았다.

“진 대인께서도 정씨에게 은혜를 입었다지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지금은 정씨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지만, 언젠가 죽을병을 고쳐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잖소이까!”

“고 대인,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억지 부리지 마시오.”

진소가 격노했다. 고능준이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억지 부리는 게 뭐 어때서?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는 게 과연 낫다고 할 수 있나?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맞지만,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사람이라면 다들 각자의 이득을 위한 사심이 있기 마련이니까!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래, 장순과 진소에게 있어서 저 여인은 은인일 테니, 그들은 저 여인을 위한 말을 할 테지. 다들 한통속이야! 한통속이라고!

“정씨, 이제 와서 번개를 불러오지 못한다고 할 수 있느냐?”

태후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태후와 대신들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예를 표한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소녀, 번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정교랑의 대답이 끝나자 침전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정교랑에게 질문했던 태후조차 놀라서 흠칫했다.

뭐라고?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인정을 했어?

그럼 애가가 반나절 동안 대신들과 말씨름을 한 게 뭐가 돼?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나?

태후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소녀가 불러오는 번개는 소녀 스스로에게만 불러올 수 있지, 남에게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당시 소녀가 폐하께 약조했던 것도 소녀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겠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뭐라고? 지금 말장난하는 건가?

“허튼소리! 그럼 평왕이 스스로 번개를 불러와서 죽은 것이니, 천벌을 받았다는 뜻이더냐!”

태후가 호통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평왕이 자신을 해친 것은 맞으나, 천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지?”

황후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능준이 매섭게 황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고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사고?

“그럼, 평왕의 죽음은 천벌이 아니라는 것을 낭자가 증명할 수 있소이까? 평왕이 십 대 죄악을 저질러서 천벌을 받은 게 아니라, 사고로 그리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냐는 소리요.”

장순이 이어서 물었다. 고능준의 시선이 이번에는 장순에게로 향했다.

저놈은 지금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태후와 대신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야.

평왕의 죽음은 천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평왕이 십 대 죄악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다고, 황실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할 방법이 있다고.

엄청난 유혹이로구나!

정교랑이 장순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합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요!”

고능준이 악을 쓰면서 소리쳤다. 정교랑이 고능준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고 대인께서는 소녀가 명망이 있다 하셨지요. 그리고 소녀가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하셨고요. 그러니 소녀는 세상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습니다.”

명망이란 것은 참 좋은 것이야. 어떻게 쓰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니까.

“고 대인께서는 소녀가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면 소녀가 번개를 불러올 수 없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정교랑이 고능준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세상 사람이 다 내가 번개를 불러올 수 있는 줄로 믿는다면서요. 그 믿음을 이용해서 평왕의 오명을 씻고, 황실의 체면을 지키고 싶지 않나요?

당신들은 평왕의 명성이, 황제 폐하의 명성이, 황실의 명성이 신경 쓰이지도 않나요?

엄청난 유혹이로구나.

고능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신경 쓰이지 않아.

평왕이 십 대 죄악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떨치든 말든, 천벌을 받아서 죽은 것이든 아니든, 나는 지금 그딴 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고.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건, 평왕이 죽었다는 사실뿐이야. 이미 벌어진 죽음이라면, 절대 허탈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 돼.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을, 정말로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꼭 사지로 몰아넣어야 해!

하지만 고능준과는 달리, 누군가는 평왕의 명성과 황실의 명성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정말로 가능하다는 말이냐?”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태후가 정교랑을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후가 물음을 던지자, 많은 사람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구나.

진소는 손바닥이 흥건한 느낌에 손을 살짝 문질렀다. 정교랑의 말이 끝난 뒤, 사람들은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을 느꼈다.

그나저나 저 여인…….

진소의 시선이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침전 안에서 살벌한 말들이 쉼 없이 오갔지만, 저 여인은 무사태평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어. 분명 자신에 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꼭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흥미진진하게 남의 얘기를 듣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

물론, 오늘 같은 상황은 풍림이 저 여인을 탄핵했던 지난번 상황과는 완전히 달라. 이 자리에서 변명 같은 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지,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어.

모든 일에는 좋고 나쁨이, 복과 화가 동시에 오는 법. 저 여인은 번개를 불러올 줄 안다는 말을 했기에 오늘 같은 죄를 뒤집어쓰게 됐지만, 바로 그 말 덕분에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구나.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한 일이었는데, 내가 괜히 긴장하고 장순까지 나서게 되었네.

저 여인은 항상 심장을 부여잡을 만할 일들에 휘말리지만, 항상 마지막에 나타나서는 한없이 단순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군. 꼭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니, 아니, 우리가 바보 같은 게 아니라, 너무 똑똑해서 생각을 너무 복잡하게 하는 것일지도. 저 여인은 바보였던 시기가 있기에 뭐든 단도직입적으로 간단명료하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거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라……. 사람은 저마다 품고 있는 사심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어떻게 증명할 테냐?”

태후의 목소리가 진소의 생각을 끊었다. 진소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오는 날이면, 세상 사람들에게 소녀가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런 날씨가 한 해나 반년이 넘도록 없다면 어떻게 할 거요?”

고능준 쪽의 관리 한 명이 물었다.

고능준은 조금 전 광기를 보이면서 목청을 높이던 것과는 딴판으로 입을 다물고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능준의 침묵은 그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서슬 퍼런 눈빛으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것임을.

“그래. 평왕이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느니라.”

태후가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닷새 이내로 또 그런 날씨가 올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 낭자가 참 대단한 능력을 갖췄습니다. 비바람을 불러올 줄도 알고.”

어떤 관리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이 그 관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비바람은 어디에나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어요. 그 비바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아둔하기 때문이죠.”

누군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곧바로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삼켰다.

지금 상황에서 웃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꼴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사람의 이목이 정교랑에게 집중이 되어서 웃음을 터트린 사람을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정교랑에게 말을 건넸던 관리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씩씩대며 콧방귀를 뀌고,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누가 강주 사람 아니랄까 봐.”

그가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고능준의 편에 서지 않은 장순을 욕했다. 혼잣말보다도 작은 목소리인지라, 그의 말이 장순의 귓가에까지 닿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중서문하성에서 이 일을 관장해 주시오.”

태후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말했다. 진소가 앞으로 나아가 태후의 명을 받들었다.

“폐하의 병세가 어찌 될지 모르니, 신 등은 궁에서 교대로 당직을 서겠습니다.”

태후는 더는 대꾸할 힘도 남지 않았다는 듯이 알아서 하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진 대인이 알아서들 하시구려.”

태후는 고개를 돌리고 의식 없이 침상 위에 누워있는 황제를 보더니, 다시금 비통함이 몰려오는지 침상을 잡고 통곡했다.

“폐하.”

비빈들이 또 울음을 터트리자, 침전 안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같은 시각, 황궁 밖.

평왕이 변을 당하고, 황제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소식은 이미 밖으로 새어 나왔다.

궁문이 워낙 굳게 닫혀있기도 했고, 조정 관리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 탓에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고능준은 선황이 하사한 옥대를 앞세워 궁문을 돌파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배짱이 없었다. 이럴 때 난리를 피우면 분명히 금군 병사들의 칼에 목이 달아나도 싸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능준이 옥대까지 들고 궁에 난입했다는 것은, 그 소문이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궁 밖에 있던 관리들은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소란을 피웠다.

주 노야의 서재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고여덟 명의 식객들이 분주하게 붓을 들고 서신을 써 내려갔다.

“간단하게 쓰게, 간단하게. 다들 바보가 아니니까 대충 알아볼 것일세. 지금은 서신을 빨리 보내는 것이 중요해.”

주 노야가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재촉했다.

“서북 쪽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니 몇 통 더 쓰고, 섬주는 두 통만 쓰면 될 걸세. 집안 어른께 한 통, 지부 대인께 한 통.”

“노야, 지부 대인께는 저희가 아니어도 벌써 보내려는 사람이 수두룩할 겁니다.”

한 식객의 말에 주 노야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주씨 가문의 서신이 빠져서는 안 되지.”

고향에 본가까지 다 섬주에 있는데 체면이라도 차리려면.

식객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계속해서 서신을 써 내려갔다.

다른 방에 들어가 보니, 주 부인이 여종들을 데리고 온갖 서랍을 뒤져가며 장례를 치를 때 입는 옷들과 옷감을 찾아내고 있었다.

주 노야는 번잡한 방 안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마당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이며 조카들이 집사와 사환을 데리고 나와 빨간 등롱을 떼어 내고, 붉은 칠을 한 조각들을 가리기 바빴다.

그때, 유독 바쁘지 않아 보이는 한 사람이 주 노야의 시야에 들어왔다.

“평왕이 정말로 죽은 겁니까?”

주복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죽었지, 그럼 가짜로 죽었겠느냐? 진짜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린다고. 심지어 폐하까지…….”

주 노야가 성가시다는 투로 대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저택 안인데도 주 노야는 뒷말을 내뱉는 것이 두려웠다.

주복이 고개를 돌려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그럼, 혼사를 치를 필요가 없겠네요?”

엉? 뭐라고?

주 노야가 멈칫했다.

“교랑이 혼사를 치를 필요가 없잖습니까.”

주복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황제가 붕어한다면 국상 기간에 정교랑의 혼사가 치러질 가능성은 전무했다. 황제가 붕어하지 않고 병상에 앓아눕기만 해도, 그 혼사는 치러지지 않을 것이다.

주 노야가 아, 하고 대꾸했다.

“그야 당연하지.”

“아버지, 평왕이 죽었습니다.”

주복이 죽었다는 말에 힘을 실으며 되뇌었다.

평왕이…….

주 노야가 흠칫 놀랐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안색이 갑작스레 변했다.

  • 아버지, 유 대인이 풍질에 걸렸다고 합니다.

  • 물론입니다. 그 애가 해치운 게 틀림없습니다. 그 애를 넘보는 사람은 모조리 해치워 버렸으니까요

  • 남의 손을 빌려 무뢰배들을 쏴 죽였을 때나, 강주 소현묘관의 관주와 그 정부한테 벼락을 내리쳐 죽였을 때처럼 했겠죠.

언젠가 주복과 나눴던 대화가 주 노야의 귓가에 맴돌았다.

다 죽었어.

유 교리, 관주, 태평거에 찾아온 무뢰배, 명성이 바닥에 떨어져 경성 밖으로 쫓겨난 풍림.

그 여인과 갈등이 있었던 사람, 그 여인의 재물을 탐했던 사람, 그 여인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든 사람이나 위협을 가한 사람들까지.

  • 설마 잊은 거요? 제일 처음 중매를 언급하고, 이 혼사를 추진시켰던 장본인이 누군지?

평왕!

평왕은 태자 책봉의 유일한 후보이며, 훗날 제위에 오르게 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황제로 지냈을 사람이지. 그러니 평왕의 희로애락은 분명 조당을 좌우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평왕의 후손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고, 평왕이 있는 한, 주씨 가문이나 정씨 가문의 재기는 불가능했어.

  •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주 노야의 귓가에 정교랑이 몇 번이고 했던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러게 말이야. 어디 사소한 게 혼사뿐이랴? 평왕도 사소한 일이 되었는데. 이젠 평왕까지 죽었어.

정말, 그 아이의, 소행일까?

주 노야가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 말은 주 노야가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묻지 못할 말이었다. 그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바람에 재빨리 기둥을 붙잡았다.

아이고, 세상에나!

“그러게 내 뭐라 했느냐. 반근, 혼례복을 지을 필요는 없을 거라고. 누가 네 아씨와 관련될 일이 생기면, 분명히 재수가 없어질 거라고 했잖아.”

장씨 저택 안, 장 노태야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몸종의 울음소리가 더욱 서러워졌다.

“아유 정말, 노태야, 반근 좀 그만 놀리십시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노복이 발을 굴리면서 장 노태야를 나무라고는 서둘러 울고 있는 몸종을 다독였다.

“다들 확실하진 않다고 하더구나.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국상 기간이 끝나고 혼사를 치르면 될 일이야. 이참에 혼례복도 천천히 준비하면 되고.”

“에이, 그야 모를 일이지. 반근이 우는 이유는 혼례복을 짓지 못해서가 아닐 텐데?”

장 노태야가 노복의 말에 곧바로 반박했다. 몸종이 흠칫 놀랐다.

“반근, 평왕 전하께서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하더구나. 이것 때문에 우는 게지?”

장 노태야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하더구나.

몸종이 바닥에 엎드린 채 꺼이꺼이 울었다.

“아이고 정말, 그 얘기는 왜 또 꺼내시는 겁니까!”

“왜? 이 얘기는 하면 안 되는 얘긴가? 우리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누굴 속이려고.”

“노태야, 지금 남의 재앙을 고소하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뭡니까? 배고픈 병이 안 도지신 지 꽤 됐지요?”

“어허, 만평, 너희들은 도대체 장씨 가문 사람이냐, 정씨 가문 사람이냐? 어째 다들 그 여인만 싸고돌아? 내가 골칫거리를 몰고 온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느냔 말이다. 정말 재수가 없네, 재수가 없어. 역시 내 말이 맞았다. 정 낭자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재수가 없어진다니까.”

“정말 뜻밖이네요.”

정교랑의 등 뒤에서 조용히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황궁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 때쯤이었다. 진안 군왕의 뒤로 펼쳐진 첩첩산중 같은 궁전 사이의 노을이 오늘따라 더욱 방대해 보였다.

“정말 뜻밖입니다. 분명히 화창한 날씨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변할 수 있는지.”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붉게 물든 하늘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평왕이 죽기를 몇 번이고 바랐다. 직접 문둥병에 걸린 환자까지 찾아내어 평왕을 해치려고 한 적도 있지만, 결국 계획에 그쳤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평왕이 갑자기 죽어 버렸네. 심지어 그리도 참혹하게.

진안 군왕은 평왕의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꽂히는 장면을 그 자리에서 직접 목격했다. 지금 다시 그 광경을 회상해 보아도, 진안 군왕은 여전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죽었어.

진안 군왕의 시선이 궁에 머물렀다. 그는 방금 전 홀로 침상 위에 외로이 누워 있던,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된 소년의 모습이 떠올렸다.

불쌍하다? 기쁘다?

진안 군왕은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 때문에 자신의 기분을 정확히 표현해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이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그 자식은 죽는 순간까지도 남을 곤경에 빠트린다는 거야.

“이게 바로 무상 아니겠어요.”

정교랑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세상사가 무상한 건 당연한 거기도 하고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상사가 무상한 건 당연하니, 두렵다고 느낄 필요는 없는 거겠죠.”

두 사람이 궁문을 나서자마자 긴장과 불안 속에 궁문은 곧바로 닫혀 버렸다.

어가에 세워 둔 마차들이 모두 내쫓긴 터라, 두 사람은 어가를 따라서 쭉 걸어갔다. 어가의 끝에 다다르자 길가에 세워진 마차가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아씨, 아씨.”

눈물을 머금은 반근이 등불을 들 겨를도 없이 뛰어왔다.

밝게 불이 밝혀진 어가 때문에 마차가 세워진 길가가 더욱 어둑해 보였다.

“갈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요. 한동안은 서로 보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 낭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정교랑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모퉁이에서 진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진 공자.”

정교랑의 목소리에서 조금 놀란 기색이 묻어나왔다.

정말로 여기서 계속 날 기다린 거야?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정 낭자와 둘이 할 말이 있어 그러니 자리를 좀 비켜 주시지요.”

진호의 말에 진안 군왕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마차에 올라탔다.

“진 공자, 여기서 기다…….”

정교랑이 입을 열려던 찰나,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진호가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당신, 입니까?”

진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아래 정교랑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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