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75)

작가의 말:

‘굶어 죽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 건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일’이라는 구절은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의 <이정전서 유서이십이(二程全書 遺書二十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소문-

이번에 고씨 가문이 정 낭자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것이야. 그 여인의 앞길을 막았던 자들의 말로를 생각해 보면…….

평왕의 나이가 찼고, 태자 책봉 상소문이 이미 중서문하성을 통과한 상황이다. 폐하 또한 태자 책봉을 준비하고 계시니, 황실의 외척인 고씨 가문이 경성을 떠날 날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

선황께서 일찍이 붕어하신 탓에, 폐하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셨어. 그러면서 자연스레 친정에 의지한 태후 때문에 고씨 가문의 세력이 오늘날처럼 커진 것이야.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돼.

태후께서 얽혀 있는 관계다 보니, 아무리 폐하라도 고씨 가문을 함부로 대하실 순 없지. 조정 대신들 또한 몇 번씩이나 고씨 가문을 끌어내리려 했지만, 결국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었어. 하지만 그 여인이 고씨 가문을 상대한다면…….

만에 하나 그 여인이 한 발도 물러서지 못하겠다면서 고씨 가문과 대립할 경우, 마지막 승자가 누가 되든 간에 필시 둘 중 하나는 경성을 떠나게 되겠지.

매정하게 들릴 말이겠지만, 고씨 가문이나, 정 낭자나 모두 머리 아픈 존재들이야. 그러니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진소가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아버지!”

같은 시간, 진(秦)씨 가문.

진십삼은 진 시강과 함께 마당에서 별이 수놓아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정말로 폐하께서 윤허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진 시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실 이유가 있겠느냐? 십삼,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게냐,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게냐?”

진십삼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 관인이 어디 정 낭자에게 어울릴 사내입니까. 고 관인은 분명 구겨진 체면을 위해서 이런 강제 혼사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인연을 맺는 겁니까, 원수를 맺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게다. 자고로 천자란 만백성의 천자이지, 한 사람만의 천자가 아니란다.”

진 시강이 웃으면서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별들은 너무 밝아서 제성(帝星)의 밝기를 덮을 때가 있지. 그건 좋지 않은 현상이야.”

비록 고씨 가문이 황실 종친이기는 하나, 지금처럼 세력이 막강해지는 것은 황실에서 반기지 않을 일이야. 고씨 가문을 정리할 때가 되긴 했어.

진십삼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정 낭자가 원수를 지지 않고 정말로 혼사를 치르면요?”

진 시강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 낭자가 고 관인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게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질문이 우스웠는지, 진 시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진십삼은 대꾸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

  • 그 집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사서 고생하며 자신을 괴롭힐 필요 있어요?

  •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 더 좋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 아니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 사실 다 똑같아요.

“울긴 뭘 잘했다고 우는 게요! 다 당신 때문이잖소!”

이번 일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흥미진진한 추측을 내놓는 사람들과 달리, 주씨 가문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어제부터 주 부인의 울음소리는 한시도 끊이지 않았고, 주 노야의 성난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주육낭은 부모님의 언쟁을 지켜보는 게 불편한지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정교랑도 걸음을 멈췄다.

“교교!”

주 부인이 정교랑을 보자마자 황급하게 문가로 달려왔다.

“교교, 난 정말로 최선을 다했어.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는데, 태후가 동의하지 않아서…….”

정교랑은 별다른 대꾸 없이 주 부인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주 부인, 왜 그러세요? 부인께서 정 이부인 대신 궁에 들어가셨다길래, 저희 아씨께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거예요.”

시녀가 서둘러 주 부인을 부축하며 말했다.

감사 인사? 감사 인사를 어떻게 하려고?

화들짝 놀란 주 부인이 뒷걸음질을 쳤다.

내 다리를 부러트릴 작정인가?

시녀의 말이 끝나자, 몸종 두 명이 크고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저희 아씨가 직접 담그신, 몸에 좋은 술이고요. 여기 있는 건 비단, 이쪽은 장신구들이에요. 잘 보관해두셨다가 선물할 때 쓰세요.”

눈앞에 놓인 화려한 선물들과 시녀의 말에 주 부인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뜻이지? 내게 감사하다고? 심지어 마실 거, 입을 거에 장신구까지 내주면서?

감옥에서는 처형 직전의 사형수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내준다던데, 설마…….

“교교!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다오!”

주 부인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면서 정교랑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이 무슨 짓이오! 당장 부인을 모시고 물러가거라.”

주 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호통치고는 재빨리 사람을 시켜 주 부인을 방에서 나가게 했다. 주육낭이 나서서 주 부인을 다독이고는 그녀를 부축하며 자리를 떠났다.

“네 말은, 교랑이 정말로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게야?”

주 부인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주육낭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 애는 남 탓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 탓하기보다는, 아예 그 사람을 죽여 버리지.”

주 부인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주육낭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어머니께서 자기를 도와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한 겁니다.”

“내가 그 애를 도왔다고? 내가 태후의 심기를 건드려 아예 교지까지 내렸는데?”

주 부인이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건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태후의 결정이잖아요. 어머니는 그 애를 위한 일을 하셨고, 어머니의 마음이 그 애한테 닿았으면 된 겁니다.”

주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여전히 반신반의한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이 정교랑이 선물한 술동이를 들어 술잔에 조금 따르고 주 부인에게 건넸다.

“어머니, 그 애가 어머니를 위해 직접 빚은 술인데, 한 번 맛보세요.”

주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애가 선물한 것인데, 저게 뭐일 줄 알고!

“그 애가 만든 건 이 세상에서 제일 구하기 힘든 겁니다.”

주육낭이 주 부인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주육낭은 잠시 술동이를 쳐다보다가, 주 부인에게 주려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놀란 주 부인이 주육낭의 손에 든 술잔을 빼앗으며 눈물을 흘렸다.

“육낭, 육낭, 괜찮니?”

주육낭이 주 부인을 향해 씩 웃었다.

“이 술은 너무 순하네요. 무원산만 못해. 그래도 어머니께서 드시기 딱 좋은 맛이에요.”

주 부인을 진정시킨 주육낭이 다시 대청 쪽으로 걸음을 돌리자, 주 노야와 정교랑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우리도 두려워할 거 없다. 태후가 네게 명을 내릴 배짱이 있다면, 우리도 그 명을 거역할 배짱이 있느니라.”

주 노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교지를 어기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번 일은 자식들의 혼사이기도 하니,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한들 우리를 비웃는 게 아니라 그런 결정을 내린 태후를 비웃을 게야.”

고 관인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바람에 지금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태후가 웃음거리가 되어 버리면…….

“무서울 게 뭐 있어! 기껏해야 우리 주씨 가문이 짐 싸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주 노야가 무릎을 세게 치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정교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여기서 잘 지내고 있는데, 이깟 일로 우리가 왜 손해를 봐야 하나요.”

정교랑의 말을 듣자, 주 노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교랑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큰소리를 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손해를 보지 않는 게 가장 좋긴 하지.

“교교, 우리는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다. 칼산을 넘고 불바다를 건너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절대 후퇴란 없을 것이야.”

주 노야가 다시 한번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외숙부님,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이번 일은 작은 일이기도, 아주 간단한 일이기도 해요. 거절할 수 없는 혼사라면 그쪽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도 방법이죠.”

그쪽이 하자는 대로 하자고?

“어떻게?”

주 노야가 물었다.

“혼사를 치르면 되죠.”

정교랑이 말했다.

혼사를 치르겠다고?

대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주육낭이 물었다.

“또 무슨 짓을 할 작정이야? 우리가 손해 볼 필요는 없다면서, 왜 네가 손해 볼 짓을 하려고 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닐 수도 있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낭랑한 웃음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웃긴 뭘 웃어!”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박장대소하는 진십삼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주육낭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지만, 진십삼은 웃음을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나는 혼사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웃을 수밖에 더 있나.”

진십삼이 말했다. 주육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진십삼이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에이, 급할 거 없어. 본인도 급하지 않은데, 자네가 급할 게 뭐 있다고.”

진십삼이 너스레를 떨었다.

“본인이야 당연히 급하지 않겠지! 그 여인은 멍멍 짖는 개하고 혼인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여인이야.”

진십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주육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자네가 그 개가 되는 건 어떻겠나?”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는 소리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사환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전하,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사환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사죄하자, 진안 군왕이 됐다고 손을 저었다.

“비가 오니까 좋네. 올해는 작황이 조금 나아지겠어.”

진안 군왕이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사환은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 후,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일찍 쉬시지요. 이대로 더 밤을 지새우셨다가는 몸에 무리가 가실 겁니다.”

진안 군왕이 탁자 앞으로 돌아가 관보를 손에 쥐었다.

“괜찮다. 내 알아서 할 수 있으니.”

사환은 감히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탁자로 다가가 등불을 켰다. 그러고는 화로에 올려진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왔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과 소속을 고한 후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경성에 갔던 자가 돌아왔습니다.”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손에 쥐고 있던 관보를 내려놓았다.

“어서 들라 하여라.”

비 내리는 밤의 방 안은 시종이 물건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떠들썩해졌다.

“이건 태후마마께서 가져다주라고 하신 옷입니다.”

시종이 물건을 꺼내며 말했다.

“여기에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마마께서 이리도 먼 곳까지 옷을 보내주신 게냐.”

진안 군왕이 웃었다.

“옷뿐만이 아닙니다. 저건 황후마마께서 보내 주신 신발이옵니다.”

시종이 웃으면서 다른 한쪽에 놓인 보따리를 가리켰다. 진안 군왕이 시종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신발은 특별히 군왕 전하를 위해 만든 거라고 하셨습니다. 발에 맞는 신발이 있어야 길을 걸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내디딜 수 있다고요.”

시종이 이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보따리를 풀고 신발을 들여다보았다. 검은색 신발에는 황금색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여의(如意).

“마마께 감사드리옵니다. 반드시 한 걸음씩 착실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신발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시종들이 물건을 정리하고 물러나자, 실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선물은 다 보냈느냐?”

진안 군왕이 묻자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는 잘 지내고?”

진안 군왕이 물었다. 이번에는 시종의 표정이 조금 난감해 보였다.

“잘 지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시종의 대답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시종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가 고 관인과 덕승루에서 화괴 다툼을 했습니다.”

멈칫하던 진안 군왕이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 여인과 다툴 배짱이 있었던 게냐? 어떤 방식으로 화괴 다툼을 하였느냐? 누가 더 배짱이 두둑한가? 아니면, 누가 더 돈이 많은가?”

시종이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마지막에 결국 미인을 얻은 자는, 물론 정 낭자겠지?”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묻자,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 관에 한 달이랍니다. 그 일로 경성이 아주 발칵 뒤집혔어요.”

진안 군왕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태후께서 고 관인과 정 낭자에게 혼인을 명하셨다고 합니다.”

시종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진안 군왕의 웃음소리가 돌연 멈췄다.

밤사이 봄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다. 동이 틀 무렵이 되자, 방 안에 켜 둔 등불이 점차 어두워졌다.

“낭자에게 정혼자가 생기면 내가 잘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고십사 그놈은, 낭자와 인연을 맺기에는…….”

진안 군왕이 종이 위에 쓰인 글씨를 읽어 내려가다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붓을 탁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소리투성이잖아!”

진안 군왕이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던져버렸다. 탁자 주위에는 구겨진 종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언제 딱 한 번이라도 정 낭자의 의지였던 적이 있나! 무슨 일이든, 항상 정 낭자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물어볼 틈도 없이 일어났어. 죄다 다른 이들이 원해서 일어난 일들이지!”

진안 군왕이 이를 부득 갈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이 이토록 쓸데없고 우스울 줄이야.”

깊게 심호흡을 한 진안 군왕이 곧장 문밖으로 향했다. 문가에 서 있던 시종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올렸다.

“여봐라. 가서 유 대인에게 알리거라. 본왕이 지금 당장 석당(石唐)을 만나러 가겠노라고.”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석당은 이번 무평 민란의 우두머리 중 두 사람을 뜻했다. 석당은 본디 두산(竇山)의 산적들인데, 혼란을 틈타 이번 민란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부에서 최선을 다해 가뭄을 구제하고, 진안 군왕까지 천자를 대신하여 무평으로 와 민란을 평정하니, 민란을 일으켰던 사람 대부분이 투항한 상황이었다. 투항하지 않은 자들은 두산으로 올라가 피신했다. 두산은 산세가 워낙 험한 곳인지라, 석당 패거리는 이를 무기 삼아 계속해서 투항을 미뤄왔다. 관부는 하는 수 없이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끝끝내 순순히 항복하지 않는 그들은 무척이나 껄끄러운 존재였다.

며칠 전에 석당 패거리가 투항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와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진 상태였지만, 산적들과 합의를 보러 가는 사람을 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들과 어떤 식으로 합의를 봐야 할지도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진안 군왕이 직접 산적들과 대면하겠다고 하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전하,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석당 일당이 오늘은 담판하자고 했다가, 내일은 또 싫다고 하고, 담판하러 오는 사람이 누구는 됐고, 누구는 안 되느니 하며 까탈스럽게 굴지 않느냐. 그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관부가 못 미더워서겠지. 그러니 본왕이 직접 가겠다는 게다. 이 정도면 그들에게 충분한 성의를 보이는 거니까.”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하지만 너무 무모한 행동이십니다. 두산 산적들은 워낙 잔인하고 교활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시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산적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산적이 두렵다고 해서, 이대로 질질 끌기만 하겠다는 것이냐?”

진안 군왕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본왕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본왕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당장 경성으로 돌아가야겠단 말이다.

“황당하군!”

편한 옷을 입은 채 단잠을 자다 깬 고능준이 시종을 향해 호통쳤다. 그러더니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쥔 서신을 탁자 위로 세게 내리쳤다.

먼 길을 다급하게 달려온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이야!”

고능준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고능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내가 경성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정 낭자가 내 며느리가 된다는 말이야?

이거 참!

지금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이 초래할 결과야. 결과를 추측하려면, 이 일의 시발점부터 제대로 알아야 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먹지 말고 자초지종을 얘기해 보아라.”

고능준이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시종이 알겠다고 한 뒤, 이번 일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그 관기의 계략에 빠졌다는 게냐?”

고능준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모(毛) 수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정말로 배후 같은 건 없었고, 순전히 고 관인을 피하기 위한 관기의 계략이었습니다.”

시종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고능준이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이번 일을 찬찬히 곱씹었다.

“폐하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시고?”

고능준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께서 폐하께 여쭤보셨는데, 폐하께서는 그들의 혼사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정말로 관여하지 않으신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겠구나.”

“대인, 많이 안 좋은 일일까요?”

시종이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고는 성난 얼굴로 말했다.

“좋은 일일 때는 내 생각이 나지 않고, 나쁜 일일 때만 내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생각나더냐.”

시종은 고개만 숙일 뿐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실상 황제가 이번 혼사를 반대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번 혼사에 대해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묻지도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황제가 이번 일을 아예 나 몰라라 하니, 그제야 모 수재가 고능준에게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무려 정 낭자야. 다른 여인도 아니고. 무려 신선의 비방을 얻은 여인이라고.

일이 예상한 대로,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땐, 분명히 이상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야.

시종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모 수재의 어두운 표정과 잔뜩 화가 난 고능준의 반응을 보자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다. 시종은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고능준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각자 계산하는 바가 있겠군. 그럼 우리 고씨 가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고능준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잘만 계산하면,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어.”

정 낭자 같은 여인이 우리 가문에 들어오는 게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 낭자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가문에 들어오게 되느냐는 거야.

이런 경우는 생각조차 못 했는데, 운명의 굴레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의 이점을 생각해 봐야겠어.

안 좋은 점이야 뭐,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실컷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둘 수는 없느니.

시종이 기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짐을 챙기거라. 경성으로 돌아가야겠다.”

고능준의 말에 시종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외직에 있는 관리들은 부임지를 마음대로 떠날 수는 없다. 특히나 황제의 부름도 없이 경성으로 가는 것은 더욱 금기시된 일이었다. 심지어 관리의 고향이 경성이라고 해도, 부임지를 떠나 경성으로 갈 수는 없었다.

“노부인의 건강이 요즘 안 좋다고 했지?”

고능준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원칙을 피해갈 방법이 하나 있다면, 바로 충효를 핑계로 대는 일이었다.

시종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 그런데 왜 노야께서는 탄핵을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경성으로 가시겠다는 거지?

“노야, 이번 일, 정말로 나쁜 일이 아닙니까?”

시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능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고말고.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 내가 직접 가서 정 낭자를 한 번 봐야겠다. 다만…….”

말을 멈춘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창밖의 시커먼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왠지 조금 불안하구나.”

“불안하시다고요? 왜요?”

시종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힘드니, 직감이라고 할 수밖에. 정 낭자와의 혼사는 사소한 일이지만, 자꾸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뭘 잘못하셨는데요?”

시종의 질문에 고능준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경성을 떠난 게 잘못이야. 경성에 남은 인사들을 통해 잘 대비했다고 여겼는데, 결국 사람에 관한 일이다 보니, 말 한마디의 차이, 혹은 간발의 차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수가 있어. 그래서 그런지, 어떤 일들은 지금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구나.”

고 관인이 덕승루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고 관인! 다시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기생 어미 막씨가 흥분한 어투로 소리쳤다.

퉤! 저 늙은 요부가 누굴 욕하는 거야? 내가 왜 여길 오면 안 되는데? 그 정씨 놈들이 무서워서 여기도 못 올까 봐?

정사낭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잘만 놀러 다니는데, 나 고십사는 왜 사람을 피하고 숨어다녀야 해?

고 관인은 속으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여길 안 오겠나? 덕승루가 얼마나 좋은 곳인데.”

태후가 고 관인과 정교랑에게 혼인을 명했다는 소식은 벌써 온 경성에 소문이 났다. 고 관인의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고 관인을 향해 축하한다는 인사를 쏟아냈다.

고 관인은 더욱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축하해라, 축하해. 이런 미담은 단연 만천하 사람들의 축하를 받아 마땅하지.

“고십사!”

포효에 가까운 목소리에 덕승루 내에 작은 진동이 울린 듯했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모를 젊은 사내가 서슬 퍼런 얼굴로 활을 들고 문가에 서 있었다.

저게 누구지?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주육낭!”

문밖에서 누군가가 사내를 향해 소리치자, 그제야 사람들은 사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주육낭!

뒤늦게 주육낭을 쫓아온 진십삼이 그의 팔을 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튼짓할 생각은 말게! 할 말이 있으면 좋게 얘기하면 되잖나.”

“아내를 빼앗긴 자의 원통함을, 말로 해서 되겠는가!”

주육낭이 고함쳤다.

아내를 빼앗긴 자의 원통함?

덕승루 대청 안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은 거의 화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격분한 모습이었다.

“고십사!”

주육낭은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고,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에게 굳이 경위를 설명하려는 기색도 없이 진십삼을 뿌리치고 활을 들었다. 주육낭은 정확히 고 관인을 향해 화살을 올리고 활을 겨누었다.

“군자는 죽을지언정 모욕은 당하지 않는 법이오! 그러니 내 손으로 네놈을 죽여 주마!”

깜짝 놀란 진십삼이 주육낭의 어깨를 향해 몸을 날렸다.

진십삼이 몸통을 세게 부딪힌 덕에, 주육낭의 화살은 고 관인을 빗겨 나가 옆에 있던 기둥에 박혔다. 화살이 어찌나 세게 날아갔는지, 기둥에 박힌 화살의 깃털이 격하게 흔들렸다.

화살이 빗나가자 부아가 치밀어 오른 주육낭은 아예 활을 내던지고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빼 들어 고 관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청 안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살인이야!”

덕승루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한데 섞여 한창 어지러운 틈을 타, 진십삼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높은 층계에 올라가 아수라장이 된 대청 안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당한 일에는 황당하게 맞서야 한다. 우스운 이야기를 미담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미담 또한 얼마든지 추문으로 바꿀 수 있는 법.

말이란 전부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던가. 말할 용기가 있는 자,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말하는 자, 그자가 바로 승자이리라.

“그 강주 바보가!”

쨍그랑 소리와 함께 태후가 내던진 찻잔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태후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내시를 노려보았다.

“바깥에서 또 뭐라고 하더냐?”

내시가 고개를 숙였다.

“고 관인이 여색을 몹시 밝히기에, 태후께서…….”

“그 입 다물라!”

내시가 순순히 대답하려고 하자, 귀비가 호통쳤다.

“민간에서 나불대는 헛소리를 어찌 태후마마께 고하려 드는 게냐!”

내시가 고개를 더욱 숙이고는 입을 꾹 닫았다. 화가 난 태후가 냉소를 지었다.

“말하거라. 왜 말을 못 해? 그들이 말할 수 있다면, 애가도 들을 수 있느니라.”

귀비가 서둘러 태후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마마, 기껏해야 태후마마께서 권력으로 사람을 억압한다는 말일 겁니다. 그것 외에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귀비가 내시를 향해 손짓하자, 내시가 재빨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애가가 권력으로 사람을 억압했더냐? 그 여인이 그런 일들을 벌여서 고씨 가문의 체면을 떨어뜨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방법까지 생각했겠어? 그 여인이 먼저 우리 고씨 가문을 건드린 건데, 어째서 그 여인만 억압받고 억울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게냔 말이야!”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주 공자와 정말로 진지하게 혼담을 주고받은 거라면 모르겠으나, 가짜 혼담으로 태후마마의 눈을 속이지 못하게 되니 이렇게까지 난리를 피우네요. 참으로 오만방자한 아이입니다.”

귀비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맞아. 그 여인이 오만방자한 게야! 그 여인은 항상 그런 식이었어. 이제는 아주 안하무인이 되었구나!

“다 황제가 그 여인을 봐줘서 이리된 것이야!”

태후가 소리치며 당장 황제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이번에 태후께서 드디어 짐의 고충을 알게 되셨구나.”

소식을 들은 황제가 웃었다.

“태후께서는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시는 거지만, 짐은 매일 고집 세고 교만한 조정 대신들을 상대하고 있느니라.”

내시는 황제를 따라 미소를 지으면서도,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원래부터 터무니없이 황당한 일이었는데, 이 지경이 된 것도 참 황당하구나. 그러게 누가 고씨 가문더러 정 낭자의 심기를 건드리라 했더냐? 짐도 정 낭자를 멀찍이 피하고 사는데 말이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귀비가 물었다.

황제가 태후궁에 도착할 때쯤, 귀비는 태후와 황제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예.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태후께서 폐하께 정 낭자를 질책해 달라고 하셨지만, 폐하께서는 일찍이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사소한 혼사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태후마마께도 이번 일에 더는 관여하지 말고, 황당한 일을 벌인 사람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비가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 좋은 기회에도 폐하께서는 정 낭자의 기세를 꺾기는커녕, 세상 사람들과 함께 우리 고씨 가문을 비웃겠다는 뜻이지?”

“마마, 폐하께서는 웬만하면 정 낭자의 기세를 꺾으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쨌든 정 낭자는 죽은 사람도 되살리는 비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귀비가 정교랑을 알게 된 이후로 정교랑은 더 이상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귀비는 차라리 정교랑에게 그런 비술이 있다고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수차례 위험이 있었지만, 우연이든 운이 좋았든 간에 결론적으로는 끝까지 황궁에 남은 진안 군왕처럼, 귀비는 상대에 대한 모든 것을 끝까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귀비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정녕 그 여인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게냐?”

“마마, 고 대인께서 지금 경성으로 돌아오는 중이라는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내시의 말에 귀비가 크게 기뻐했다.

“또 뭐라고 하더냐?”

“고 대인께서 이번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 화낼 필요가 없으니 조금만 참으시라고 하셨습니다. 태후께서 교지를 내리시기도 했고, 정 낭자의 부모가 있는 한 이번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요. 그 외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우든 말든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건 대인께서 경성에 도착하신 후에 의논하자면서요.”

이것도 사소한 일이라고? 예전에는 진안 군왕도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니, 이번엔 정 낭자도 사소한 일이라고 하네? 고 대인한테는 도대체 어떤 일이 큰일이라는 말이야!

귀비가 음, 대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는? 아직도 태후궁에 계시느냐?”

“폐하께서는 안비와 함께 산책하고 계십니다.”

내시가 대답하다가 멈칫하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황후마마께서도 같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귀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가 거긴 또 왜 있는 게야? 육가아 같은 아이를 하나 더 데려다 키우고 싶어 그러나?”

말을 뱉은 귀비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육가아 같은 아이를 하나 더 얻고 싶어서, 폐하께서는 정 낭자를 질책하지 않으셨어.

정 낭자가 지닌 비술 덕분에 폐하의 옥체는 점점 더 강건해지고, 황후도 갑자기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지.

폐하는 고씨 가문이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계시고, 폐하께서 평왕을 꾸짖는 횟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어.

게다가 태자 책봉은 아직도 지지부진하기만 하고.

뭔가 잘못됐어.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귀비가 두 손을 세게 쥐었다. 그녀는 오만 가지 생각에 머리가 핑 돌았다. 귀비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허공을 둘러보았다.

설마 폐하께서 뭔가를 알아채신 게 아닐까? 그때 평왕이 아우를 해쳤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아신 건가?

예전에는 황자가 평왕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 일을 덮고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안비에게도 황자가 생겼잖아.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랬어. 안비가 회임한 태자가 무척 귀중하다고. 태백성이 인간계로 내려온 것이라고.

그래. 지금 진안 군왕이나 정 낭자의 혼사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그건 다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일들이니까.

내 아들, 우리 평왕이 무탈하게 옥좌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그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

“마마, 마마?”

누군가가 귀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귀비가 비명을 지르면서 정신을 차리자, 내시가 귀비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사죄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한 귀비의 모습에, 내시는 하는 수 없이 귀비의 어깨를 톡톡 치며 그녀를 부른 터였다. 그러나 아랫사람 신분으로 귀비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엄청난 결례이기에, 바로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

귀비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호통쳤다.

“마마.”

내시가 몸을 일으키고 귀비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조용히 말했다.

“그때 말씀하신 그 일은 다 준비되었습니다. 며칠 내로 해결될 겁니다.”

그 일?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

귀비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 떠난 떠돌이 말입니다.”

내시가 조용히 귀띔했다.

집을 떠난 떠돌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지…….

그제야 생각났는지, 귀비가 내시를 흘겨보았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엥? 귀비마마께서 한시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근심하던 큰일이 왜 갑자기 사소한 일이 된 거지?

“그만 가자.”

귀비가 말하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귀비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내시에게 당부했다.

“안비를 잘 지켜보거라.”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미담 좋아하네. 누구 좋으라고 그걸 미담으로 포장하나? 이젠 더욱 우스운 추문이 되었으니, 그들이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진십삼이 웃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에이, 낭자가 고마워할 일은 아니죠. 이건 낭자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니까, 저는 감사 인사 못 받겠습니다.”

진십삼이 답례하며 웃었다.

“제가 생각해낸 방법이 아니었어도, 낭자는 아주 잘 지냈겠지요. 이번 일은 단지 제가 차마 더는 지켜보기 힘들어서 그런 것뿐입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마차가 준비됐어요.”

반근이 밖에서 들어오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자, 진십삼과 주육낭은 가볍게 인사하고 멀어져가는 정교랑과 반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십삼의 웃음이 미묘하게 굳었다.

“똑같은 것 같단 말이지.”

“뭐가 똑같아?”

주육낭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황당한 일, 미담, 추문. 이 모든 게 정 낭자의 눈에는 또 다 똑같은 거겠지.”

다 똑같다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말했잖나. 저 애는 개한테 시집을 간다 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거라고.”

주육낭이 두 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저 여인은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아. 자기와 혼사를 치를 사람이 누군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진십삼이 웃으면서 앞으로 팔짱을 꼈다.

“그래도 우리는 그 개가 되고 싶잖아. 왜? 자네는 싫은가?”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고 주육낭을 향해 물었다. 주육낭의 얼굴이 미세하게 상기됐다.

아내를 빼앗긴 원통함! 그 여인은 내 아내요!

덕승루에서 자신이 외친 말들이 귓가에 맴돌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주육낭은 고개를 홱 돌리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자네는 마음 놓고 나한테 그 연극을 시킨 거야?”

진십삼이 멈칫했다.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고 그래.”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놀랍게도 주육낭은 예전처럼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고, 진십삼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담이든 추문이든, 그 애한테는 다 같은 일이겠지만, 자네와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 자네의 집안에서도 다르게 생각할 테고.”

주육낭이 진지하게 말했다. 진십삼의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육낭, 이제는 자네와 내 이야기가 아니라, 자네 집안과 우리 집안의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건가?”

시작이라…….

사실 지금이 시작은 아니었지. 시작은 아주 오래전, 정 낭자가 내 다리를 고쳐 준 이후부터였어.

진십삼이 쓴웃음을 지었다. 주육낭의 귓가에 주 노야의 말이 맴돌았다.

  • 진씨 가문의 십삼은 더는 옛날의 절름발이가 아니다.

진씨 가문…….

그래. 진십삼은 진씨 가문이었지. 황실의 친척인 공주부 진씨 가문. 진십삼은 그런 진씨 가문의 열셋째다. 진호는 황실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중신인 진씨 가문의 자제야.

진씨 가문은 우리 주씨 가문과 다르고, 진십삼도 나와 달라. 우리 집안은 그 여인 하나 때문에 운명이 좌지우지될 것이고, 또한 그 여인이 좌지우지하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해.

“하지만 이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나는 진씨 가문의 자제이니, 나라는 존재를 가문에서 뚝 떼어 놓고 보기는 힘들지. 그래도 그 여인에게는 모든 게 다 똑같으니까, 나 또한 그 여인에게 있어서 남들과 다름없을 거야. 하지만 이왕 다 똑같을 거면, 왜 굳이 고씨 가문에게만 좋은 일을 해야 하지? 누가 봐도 이번 일은 두 가문이 원수를 지는 건데, 왜 세상 사람들에게는 좋은 인연을 맺는 것처럼 보여야 하지? 정 낭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고씨 가문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야 하나?”

진십삼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난 절대 고씨 가문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정 낭자에게는 모든 게 다 똑같다고 해도, 난 달라. 그 여인이 정해 둔 원칙이 아니었다면, 오늘 활을 잡은 사람은 내가 되었을 거고, 내가 바로 자네가 저지른 황당한 일을 벌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육낭, 내가 자네한테 그 역할을 시켰다는 것이 화가 났다면, 기꺼이 사죄하겠네.”

진십삼이 주육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공수의 예를 표했다. 주육낭은 잠자코 진십삼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틀린 것 같기도 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 나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그 연극을 하고 싶었고, 나도 날 위한 일을 한 것뿐이야.”

말을 마친 주육낭이 돌연 진십삼을 향해 발길질을 하며 이름을 불렀다.

“진호!”

진호.

“자네와 있을 때는 내 이름이 진호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사네.”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주복, 말하게.”

“자네가 눈치 빠르고 잔머리를 잘 굴린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 안 그럼 네놈의 다리를 부러트려 줄 테니까.”

주복의 말에 진호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듣게 잘 설명했잖나. 그리고 이게 뭐 숨겨야 하는 일도 아니고. 나는 정 낭자가 고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원하지 않네.”

진호가 잠시 진지한 얼굴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원치 않아. 정 낭자 또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니, 낭자도 이 혼사를 원치 않을 거야.”

뭐라는 거야.

진십삼의 말에 주복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면서도 아쉬워하는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호의 모습에 그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저놈도 참 딱해.

“자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어쨌든 그 애가 자네와 혼사를 치를 일은 없겠군.”

주육낭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설마 자네한테 시집가는 걸 원하겠나?”

진호가 웃으면서 원하겠느냐는 물음에 힘을 실었다.

그 여인이 뭘 원하는지는 귀신이나 알겠지!

주복은 답답한 마음에 정교랑이 떠난 방향을 내다보았다.

“허구한 날 이상한 일만 하러 다니는 애인데, 그 애가 뭘 원하는지 누가 알겠나? 지금이 어느 때인데 술이나 빚으러 다니질 않나.”

주육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야, 곧 무원산 형제들의 기일이 돌아오니까.”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고?

“벌써 일 년이나 지났다고?”

주복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러게. 시간이 참 빨라.”

진호가 팔짱을 낀 채 감탄했다.

모든 게 참 빨리도 지나가는구나.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서,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 느껴질 정도야. 이런 느낌은 정말이지, 기분이 나빠.

4월 중순의 경성에는 정 낭자와 고 관인에 관한 이야기와 정씨 가문에서 일어난 재산 다툼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뜨거운 화제가 또 한 번 저잣거리를 달궜다.

거리에 있던 사람은 아우성을 치며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났소?”

누군가가 뛰어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아니, 아니. 아무 일도 아니오.”

이상하게도 대답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평소대로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줄 기세로 신나게 이야기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다들 별일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저 모습이 어딜 봐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거야!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더욱 빨리 발걸음을 재촉했다. 심지어 사람들은 왜 뛰는지 묻기 전보다 더욱 빨리 달리는 듯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다들 각자 크고 작은 주전자를 손에 들고 뛴다는 것이었다.

이때, 사람들이 뛰어가는 방향과 주전자를 보고 누군가가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소리쳤다.

“오늘이 무원산 형제들의 기일이었어!”

그 외침과 함께,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따라 뛰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그 말을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무원산 형제들의 기일이 뭐 어쨌다고? 남의 집안 기일에 다들 왜 몰려가는 거야?”

누군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보다 못한 행인이 그에게 말했다.

“술을 뿌리는 날이잖소. 일 년 중 딱 오늘 하루만 무원산을 마실 수 있다고.”

행인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그 사람을 타박했다.

“무원산 양이 얼마나 적은데. 몰려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돌아오는 몫이 적어지는 것을 모르시오? 멍청한 사람 같으니라고.”

무원산! 세상에서 제일 독한 술, 무원산!

귀한 정보를 알려준 사람을 욕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다들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감탄했다.

일 년에 딱 한 번만 먹을 수 있다는 무원산이 바로 오늘 나오는 거였구나! 어쩐지 다들 손에 그릇을 들고 다리가 안 보일 정도로 뛰더라니.

큰길가로 몰려나온 더 많은 인파가 성 밖으로 이동했다. 성문 위에 서 있던 병졸들은 성 밖을 향해 달려가는 인파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작년에 노제를 지냈을 때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네.”

병졸 중 한 명이 감탄했다.

“사람이 죽은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이런 추모 행렬이 있을 줄이야. 죽을 만한 가치가 있네.”

다른 병졸이 성벽을 짚으며 말했다.

물론 모두가 이런 거창한 추모 행렬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무원산 술 때문에 저러는 거겠지.”

누군가가 냉소를 보이면서 중얼거리자, 다른 사람이 반박했다.

“술 때문이라 한들, 그게 뭐 어때서? 무원산은 역사에 길이 남을, 세상에서 제일 독한 술이오. 그러니 당연히 무원산 형제들의 이야기도 같이 기록되겠지.”

“그러니까 말이오. 나도 저런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게 술 때문이든, 물 때문이든 아무렴 상관없다오.”

“자네가? 그러려면 일단 정 낭자 같은 의누이부터 구해 봐.”

성문 위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뭣들 하는 게야!”

상관의 목소리가 성벽 한쪽에서 전해져 왔다.

병졸들은 재빨리 웃음기를 거두고 대열을 맞춰 섰지만,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추모 행렬을 쫓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근처에는 벌써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무원산 술을 뿌리기 시작했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성벽까지 전해져 오는 듯했다.

주위가 시끄럽긴 해도 무원산 형제들의 제사를 지내는 데에는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범강림이 가장 앞에 서 있고, 그의 뒤로 정교랑과 황씨가 서 있었다. 황씨는 소보아(小寶兒)를 붙잡아 주며 서봉추 형제에게 술을 올리고 큰절을 하도록 해 주었다.

소보아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황씨의 손길이 답답했는지, 손을 뻗어 무덤의 비석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황씨가 서둘러 소보아를 제지하려 하자, 범강림이 말했다.

“놀게 놔 두시오. 그렇게라도 부자가 함께할 수 있으니까 좋구먼.”

그 말을 들은 황씨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한쪽으로 비켜서서 눈물을 훔쳤다.

범강림은 지전(紙錢) 뭉치를 정교랑에게 건네고, 화로에 지전을 던져 넣는 정교랑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이, 이번 혼사는 어떻게 생각해?”

범강림이 불쑥 물었다.

고씨 가문이 태후에게 사혼을 청하자 주씨 가문의 여섯째 아들이 아내를 빼앗긴 원통함을 호소했다는 얘기에, 경성의 도박장들은 정교랑이 결국 권력에 굴복하여 고씨 가문에 시집갈지, 소꿉친구였던 사촌과 혼사를 치를지에 대해 흥미진진한 도박판을 벌였다.

범강림이 누이를 그리워하는 형제들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무덤 앞에서 이야기했다.

“소꿉친구라니요.”

정교랑이 웃었다. 소꿉놀이를 하고 놀 어린 시절, 그녀의 옆은 쓸쓸하고 고독하기만 했다.

범강림도 웃음을 터트렸다.

“저잣거리 소문이 그래. 이렇게 말해야 구미가 당기잖아.”

“큰 도련님이 이젠 농담도 잘하시네요.”

반근이 뒤에서 웃으면서 대꾸했다.

정교랑 일행의 대화 소리에 차갑기만 했던 무덤 주위의 분위기가 한결 따뜻해지는 듯했다.

“누이는 어떻게 생각해?”

범강림이 물었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역시…….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짓더니 지전 뭉치를 화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럼, 누구한테 시집을 갈 거야?”

범강림이 또 물었다.

“누구든 괜찮아요. 정말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정교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누구든 괜찮다니!

범강림은 그런 정교랑의 태도에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말이 그래! 이럴 줄 알고 일찍이 부인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했었는데, 부인은 누이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으니 원.

“그럼 누이가 혼사를 올리고 싶었던 상대는 있어?”

범강림이 이어서 물었다.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볼 필요가 없잖아요.”

범강림이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왜 생각해 볼 필요가 없어? 시집을 안 가고 싶은 여인이 세상에 어디 있어? 여인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누이는 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

정교랑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 혼사가 무슨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에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못한 황씨가 나섰다.

시누이가 어렸을 때 바보여서 도관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러니 어미가 딸에게 해 주는 말들도 들은 적 없겠지. 시누이는 사람이나 일에 대처하는 자세도 상당히 이상했는데, 아마 어렸을 적부터 이런 것들을 옆에서 알려 준 사람이 없어서겠지?

“여인에게 혼사는, 평생의 행복이 달린 문제예요. 그러니 아무에게나 시집을 갈 수도 없고, 아무나 시집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신랑감을 아주 정성껏 골라야 하죠.”

황씨가 말했다.

“올케가 큰 오라버니를 고른 것처럼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황씨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범강림을 바라보았다.

“네. 이이 같은 사람을 골랐으니, 이번 생은 복에 겨웠다고 할 수 있죠.”

범강림이 민망한지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누이 얘기를 하는 도중에, 왜 그 얘기가 나오는 거야.”

“올케는 운이 정말 좋았네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내가 잘 고른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씨도 꼭 신랑감을 잘 골라야 해요. 아무한테나 시집가도 된다고 하지 말고요.”

황씨가 말했다.

아무한테나 시집가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게 누구든 다 똑같다는 말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는 내 가문을 멸족에 이르게 할, 가문의 원수가 될 사람에게 날 시집보내셨는데, 그런 내가 아무렴 누구에게든 시집을 못 갈까. 혼사가 무슨 대수라고.

“그럼, 오라버니와 올케는 내가 누구에게 시집을 갔으면 좋겠어요?”

범강림 부부가 놀란 기색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걸 우리한테 묻는다고?

“우리가 원하는 건 소용없어요. 아가씨가 원하는 사람에게 시집가야죠.”

황씨가 말했다.

“나요? 난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내게는 딱 한 가지 중요한 일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사소한 일들이에요. 너무 자질구레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그러니까, 아씨께서 원하시는 한 가지가 있기는 한 거네? 원하시는 게 있다니!

반근이 감격스럽기도 궁금하기도 한 마음에 물었다.

“어떤 일인데요, 아씨?”

“살아가는 것.”

정교랑이 대답했다.

살아가는 것?

범강림과 황씨가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살아가는 게 어려우세요?”

반근이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삼백 년 후에도 정씨 가문이 혈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정교랑이 무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손에 쥐고 있던 지전을 화로 안에 한꺼번에 던져 넣었다. 화로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범강림이 무덤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아. 살아가는 게 어렵긴 하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게 살아 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차가운 비석이 되어 버리니까. 이 세상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그래. 죽었으면 죽은 거지, 더는 이 세상에 없으면 없는 거지.

범강림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닫았다. 그도 정교랑을 따라 손에 남은 지전을 전부 화로에 던져 넣었다.

참으로 훌륭한 산이로구나.

진안 군왕이 눈앞에 나타난 산을 보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수비는 좋겠지만, 공격은 어려운 곳이군.”

불어오는 거센 산바람에 진안 군왕의 두봉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아무래도 가지 않으시는 게…….”

관리 몇 명이 진안 군왕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말투로 재차 만류하자 진안 군왕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소. 석당 그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 투항할 의지와 성의는 있다는 거겠지. 나는 그들의 성의를 믿소.”

진안 군왕이 허리춤에 걸린 향낭 주머니를 한 번 만지고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어서 따라가거라! 어서!”

관리들이 병사들을 재촉하자, 열댓 명의 병사들이 흙먼지를 휘날리며 진안 군왕을 뒤쫓아갔다. 관리들이 잔뜩 마음을 졸이며 진안 군왕이 떠난 방향을 내다보고 있을 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대인, 전하께서 호위 네 명만 남기고 산채에 들어가셨습니다. 저희에게는 돌아가라고 명하셔서 어쩔 수 없이…….”

앞장서 있던 병사가 하는 말에 다들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일을 어쩐담!”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모두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초조해하는 사이, 한 관리가 콧방귀를 뀌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군왕은 혼자서 공로를 독차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충언과 만류를 무시하고 홀로 들어가신 거잖소. 그러니 정말 무슨 일이 난다고 한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자리에 있던 관리들이 서로 눈짓을 했다.

우리가 군왕을 억지로 보낸 것도 아니니, 혹여 정말 무슨 일이 난다고 해도 자업자득인 셈이야. 그러니 우리까지 황천길로 끌어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지.

“병사들에게 석당의 산채를 포위하고 나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전하거라.”

해가 지고 밤이 되자, 산 아래에 횃불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야영을 위해 천막을 치고 막사를 만들었지만, 막사 안에서 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안 군왕은 이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을뿐더러, 사람을 시켜서 오늘은 산채에서 하루 묵고 가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거기에 감금당한 건 아니겠지? 정말로 석당 두 사람과 환담을 하며 밤을 지새우겠답시고 산채에 남았으려나?”

“자기가 제갈공명이고, 석당 두 사람이 사마의인 줄 아나? 일부러 연극을 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러 아무것도 아닌 일로 술수를 부리는 건지!”

“이건 허튼짓이오!”

“벌써 밤이 되었으니, 산채를 공격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불리하오.”

“군왕 전하께서도 참 철없는 분이구려.”

다들 속수무책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한탄만 늘어놓고 있었다.

“해가 밝기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오. 그리고 해가 밝는 즉시 산채를 공격합시다.”

관리 하나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군왕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생기지 않든 관리들은 필시 산채를 공격해야만 했다. 어떤 결론이 나든 한마음으로 충성을 바쳤다는 성의를 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관리 하나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 있는 커다란 산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간 뒤겠지.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이 바닥에 쓰러졌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지만, 진안 군왕은 자신이 데리고 온 시종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전하, 남기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석당 두 사람이 이토록 겁쟁이들인 줄은 몰랐군.”

진안 군왕이 웃음기가 서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안 군왕은 조금 전 연회석에 앉아 있던 모습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데려온 시종들을 모두 잃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 갇혀 있는 처지였다. 그뿐 아니라, 문가와 창가에는 당장이라도 진안 군왕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화살이 그를 향해 촘촘하게 겨눠져 있었다.

“전하, 틀렸습니다. 정말 겁쟁이들이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도 없었겠죠. 이번 기회에 전하께 교훈을 하나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하시라고요.”

사내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하자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충고 고맙네. 하지만 겁쟁이가 아니라면, 등불을 밝히는 건 어떻겠나? 죽기 전에 적어도 나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명색이 군왕인데, 나를 죽인 사람도 모르고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나.”

진안 군왕의 대답에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 만약 제가 누구인지 아신다면, 죽음에 억울함이 없겠습니까?”

사내가 비웃었다.

누군가가 사내에게 조용히 다가가 속삭였다.

“산에 오르기 전에 이미 몸수색을 마쳤습니다. 시위들이 암살용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니 군왕의 몸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을 겁니다.”

웃음기가 더 짙어진 얼굴의 사내가 입을 뗐다.

“좋습니다. 등불을 밝혀서 내 얼굴을 보여 주고,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길 시간도 드리지요.”

“고맙네.”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자 옷자락이 스치며 사락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환경에 오래 있었던 사내는 등불을 밝히지 않아도 진안 군왕의 크고 건실한 체격을 느낄 수 있었다.

“참 불쌍한 군왕일세.”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서 불빛이 반짝이더니 심지에 불이 붙었다.

밝은 불빛이 갑작스레 보이자 사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심지에 붙은 불은 금방 꺼지고 작은 불씨만 남았다.

작게 남은 불씨에서 뭔가 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어이, 군왕 전하, 무슨 심지가 그렇소? 불이 붙기도 전에 꺼져 버리다니. 이렇게 된 이상 내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운명이려니 하시오. 그만 황천길로 가시구려.”

사내는 냉소를 지으며 석궁을 들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진안 군왕의 윤곽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황천길에 오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굉음이 들리더니 환한 빛이 폭발했다.

누군가의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지?

문가에 서서 석궁을 당기고 있던 사람들에게 방에서 튕겨 나와 바닥에 쓰러진 사내가 보였다. 곧이어 느껴지는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숨 막히는 화약 냄새 때문에 그들은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앞에 불빛이 또 한 번 번쩍이더니 치지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지?

  • 이건 자과(子窠)라는 화약탄이에요. 안에 든 건 화약이고요. 이걸 안쪽에 넣어서……. 그리고 이건 심지고, 이렇게 불을 붙이면 돼요.

  • 이거라면 폭도와 정면으로 맞서게 됐을 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죠.

진안 군왕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르고 넋이 나간 채로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을 향해 화구를 조준했다.

“황천길에 오르게나.”

산채 전체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산채에 있던 사람들이 폭발음이 난 곳을 향해 황급히 달려왔다.

“두목님, 두목님!”

아수라장이 된 곳을 향해 뛰어오던 두 사내가 급하게 걸음을 멈추고,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불길에 비친 주위에는 온통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젊은 사내 하나가 멀쩡한 모습으로 불길을 뚫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모습은 신선이 강림하기라도 한 듯 성스러워 보였다.

“저게 뭐지?”

“큰 소리 한 번 났을 뿐인데, 저렇게 큰 불덩이를 내뿜었다고?”

“군왕은 분명히 빈손이었는데!”

“저게 뭐야?”

비명과 신음, 겁에 질린 채 내지르는 소리, 그리고 정체불명의 굉음이 산채에 울려 퍼졌다.

빈손으로 들어간 군왕이 불덩이를 만들어 사람들을 쓰러트리고 유유히 빠져나오는 모습은 눈으로 보고도 차마 믿지 못할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저, 저건 신선의 보호잖아!”

두목 두 사람이 중얼거리면서 제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연신 땅에 이마를 찧으며 큰절을 올렸다.

“저분은 신선의 보호를 받는 게 분명해! 신선의 보호를!”

산 위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자, 산 아래에 있던 관리들과 병사들은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와 위쪽을 내다보았다. 뒤이어 산 위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내려왔다.

“무슨 일이야?”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얼굴로 물었다. 그들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산을 올라라!”

황급한 호령과 함께, 병사들이 재빨리 줄지어 산 위로 돌진했다. 양쪽에 있던 횃불이 천막 앞에 서 있던 관리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악한 얼굴로 산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4월 하순, 무평 민란을 평정했다는 기쁜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다. 황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황궁 안을 가득 메웠다.

“황실 자제들이 응석받이로 자라서, 전장에 나가 천하를 평정했던 선조의 용맹함이 없어졌다고들 비웃었는데, 우리 위낭을 좀 보거라. 이 일 이후로 또 누가 감히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봐야겠군.”

황제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들 진안 군왕께서 표기장군(驃騎將軍: 관직명)의 용맹함으로 적진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황제의 말에 맞장구쳤다. 옆에 있던 귀비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표기장군은 무슨. 일개 산적들을 어찌 흉악한 오랑캐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야.

황제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아니다. 그 정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

귀비는 황제가 말은 그렇게 해도, 속마음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가는 남들이 어찌 말하든 상관없다. 우리 위낭이 용맹하든 용맹하지 않든 다 상관없어.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줄 알고. 보여주기식으로 산 아래까지만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직접 사람을 이끌고 산채 안까지 들어간 것이냐?”

태후가 눈물을 훔치면서 물었다.

진안 군왕은 일부러 별 위험이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공을 축소하여 서신을 썼다. 하지만 무평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황제가 모를 리 없었다. 황제는 곳곳에 배치된 소식통들을 통해 이번 무평 민란에 관한 모든 내막을 하나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었다.

석당의 산채는 이번 민란에서 가장 큰 세력이 마지막까지 은신하던 곳이었다. 진안 군왕이 홀로 산채에 들어가 석당을 투항시키고 민란을 평정했다는 이야기는 듣기에도 몹시 위험했지만, 실제로는 더 위험했으리라는 것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석당 산채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진안 군왕뿐만이 아니었다. 민란을 주도했던 사람 중, 이미 관부에 의해 격파된 세력이 산채에 중재인을 보낸 일이 있었다.

중재인들은 석당 두 사람이 우유부단한 틈을 타 몰래 진안 군왕을 암살하려고 했다. 만약 진안 군왕이 산채에서 암살 당한다면 이는 석당 일행이 저지른 짓으로 치부될 테니, 석당 두 사람은 결코 투항할 수 없고 반역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민란 잔당들의 계략은 제법 뛰어나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일이 흘러갈 뻔했지만, 마지막에 진안 군왕이 중재인들의 우두머리를 죽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불발되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석당 두 사람은 결국 투항을 결심하고 민란의 잔당을 척결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 뒤, 석당 두 사람은 산채 문을 활짝 열고 관부의 병사들을 환영했다.

“폭죽으로 그놈들을 죽였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게 무슨 어린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태후가 호통쳤다.

그러게 말이야.

황제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종 네 명이 모두 살해됐다는 건, 그놈들이 훨씬 우위를 차지한 상태여서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었다는 뜻인데, 그 상황에서 위낭이 우두머리를 죽였어?

위낭에게 그놈을 어떻게 죽였냐니까, 폭죽으로 죽였다고 대답했지.

이씨 가문의 폭죽으로.

“내가 경성을 떠날 때, 야간에 신호를 보낼 용도로 폭죽을 가져왔다. 당초 무원산 형제들의 노제를 지낼 때, 이무가 정 낭자가 하늘로 쏘아 올린 폭죽을 보고, 저리 높이 쏘아지는 폭죽을 직선으로 발사하게 되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만든 게 바로 오늘날의 돌포탄이지. 그 후로 이씨 가문에서 만드는 폭죽도 전부 개량하여 더욱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되었어. 좀 전에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손에는 무기 하나 없고, 상황이 너무 긴박하다 보니 마구잡이로 향낭에 넣고 다니던 폭죽을 던졌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딱 그놈을 맞혔지 뭐냐.”

이 말은 산 아래에 있던 병사들이 산채를 뚫고 들어왔을 때 진안 군왕이 했던 말이다.

당시에는 듣고도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얼굴이 모두 새까맣게 탄 것을 보아 화약 폭발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재인들은 빠르게 진안 군왕의 시종들을 모두 죽인 뒤, 무기도 없는 진안 군왕을 상대했을 터. 이미 다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폭죽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폭죽 소리가 워낙 크고, 폭발 때문에 불길까지 번지게 되어 몹시 당황한 중재인들은 진안 군왕을 놓치게 되었고, 뒤늦게 민란 잔당의 속셈을 알게 된 석당은 산채에 남아 있던 중재인들을 모조리 죽였다. 민란 잔당들은 석당을 사지로 몰기는커녕,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 됐다.

참으로 운이 좋은 녀석이로구나.

황제가 고개를 저으면서 감탄했다.

그런 행운은 용감한 자에게만 찾아오는 거겠지.

“진안 군왕이 신선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진안 군왕이 인간계에 강림한 신선과도 같다면서, 산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군왕을 향해 큰절을 올리면서 신선처럼 떠받들었다네요. 그래서 석당 두 사람이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면서 자발적으로 조정에 투항한 것이라고요.”

귀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하늘의 뜻을 의미한다는 말에,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하지만 황제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상황이 그렇잖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환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주위에 있던 잔당들이 한꺼번에 바닥에 쓰러졌을 테니. 더구나 군왕은 짐이 보낸 칙사가 아닌가. 짐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한 것이니, 하늘의 뜻이고말고.”

“성질나 죽겠어!”

귀비가 소리치면서 탁자를 뒤엎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급기야 귀비는 탁자에 대고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어느 자식이 친아들인지 구분도 못 하시나! 누구는 하루가 멀다고 칭찬하고 지켜 주기 급급한데, 왜 친자식한테는 하루에 세 번을 꾸중해도 부족한 것처럼 트집을 잡지 못해서 안달이시냐고! 뭐? 하늘의 뜻? 하늘의 뜻이라고? 나중에 남의 자식이 하늘의 뜻이 되면, 그때도 웃을 수 있으시려나?”

내시들이 황급하게 귀비 주위를 에워싸며 그녀를 만류했다. 내시들은 바닥에 깨진 찻잔과 접시 조각들이 귀비의 발에 밟히기라도 할까 몹시 두려운 기색이었다.

“마마, 폐하께서 이렇게 기뻐하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폐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무예를 좋아하셨잖습니까. 이번 일은 폐하께서 군왕을 천자의 대리로 보낸 것이므로 기뻐하시는 것이지, 절대로 군왕을 애지중지 떠받들어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마마, 너무 과한 걱정은 삼가시는 게…….”

“본궁은 과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본궁은 화가 나는 게야!”

귀비가 격노하면서 소리치고는 휘장을 손으로 잡아 뜯어냈다.

“아주 쓸모없는 놈들밖에 없어! 시종들도 다 죽였다면서! 그렇게 좋은 기회인데도 군왕을 죽이기는커녕 폭죽 따위에 목숨을 잃어? 네놈들은 어쩜 그리도 쓸모없는 것들을 구해 온 게냐? 이 일을 광대놀이 정도로 여기는 게야?”

내시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손사래를 쳤다.

“마마, 마마, 말씀을 삼가십시오. 삼가셔야 합니다.”

귀비가 악을 쓰면서 휘장을 세게 끌어내리고 뒤돌아서서 탁자를 향해 발길질했다. 하지만 실수로 발가락을 세게 부딪히게 되자 악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마, 마마, 큰일 났습니다”

문밖에서 궁녀 한 명이 황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귀비와 어지러운 방 안을 보고 깜짝 놀란 궁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또 얼마나 큰일이 났느냐?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싹 다 말해보라고! 괜히 하루에 하나씩 이야기하지 말고, 한꺼번에 이야기하란 말이다!”

귀비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궁녀가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귀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마, 안비마마께서 태백성을 품는 태몽을 꾸셨다는 소문 들으셨습니까?”

궁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왜? 이번에는 또 뭘 품에 안았다고 하디?”

“마마,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하옵니다.”

궁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비가 고개를 돌리고 허튼소리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마마, 안비마마께서 정말로 그런 꿈을 꾸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늘에 태백성이 정말로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고?

귀비가 바른 자세로 고쳐앉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월식이 태백성과 만나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

진안 군왕이 무평 민란을 평정했다는 소식은 급보와 함께 온 경성에 퍼졌다.

일반적으로 민란을 평정했다는 소식은 서북에서 오랑캐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보다 큰 파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무평 민란은 달랐다.

민란을 평정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천자를 대신해서 백성을 위로하러 무평으로 간 진안 군왕이 홀로 석당 산채에 쳐들어갔다는 점이었다.

“딱 네 명만 데리고 들어갔대.”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진안 군왕 혼자서 의연하게 산채로 들어갔대.”

흥미진진하게 잡담을 하는 사람들 뒤로 박자감 있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 눈부신 금빛이 번쩍하더니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에 대한 도가의 존칭)께서 나타났습니다. 태상노군께서 주문을 외우고는 신광검을 촥 하고 휘둘렀더니, 악당들이 한 번에 사방으로 튕겨 나가더군요. 그 후 진안 군왕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와서는, 소매를 홱 털고 호통쳤습니다. ‘네 이놈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셈이더냐! 당장 조정에 투항하도록 하여라!’”

이야기꾼이 손에 쥔 나무판을 탁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찻집 안에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대청을 내려다볼 수 있는 별실 안. 젊은 사내 한 명이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면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육낭, 뭐가 웃겨서 웃는 건가?”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흥미진진한데 뭐.”

주복이 웃으면서 탁자 위에 놓인 건과를 한 움큼 집어 들고 자신의 입안에 던져 넣었다. 그는 편하게 난간에 몸을 기대어 이야기꾼의 말에 집중했다.

“진안 군왕은 본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왕비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관음보살께서 웃으며 금으로 만든 박을 품에 안겨 줬다더군요. 꿈에서 깬 수왕비는 자신의 회임 사실을 알게 됐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바로 진안 군왕이지요. 보살님께서 안겨 준 동자이기에 진안 군왕을 곁에 두면 아이도 잘 생기고, 재물 운도 좋아진다고……···.”

이야기를 듣던 주복이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릴 기세로 입을 벌리자,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돈주머니를 탁자 위로 던졌다.

“그만 가세.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진안 군왕과 얼마나 원한이 깊은 자기에 저러나 모르겠군.”

주복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진호를 따라 나왔다.

“재밌잖아. 군왕 전하께서 정말로 복이 많으시긴 한가 봐. 폭죽으로 적을 물리치다니. 이런 경우는 아마 전무후무하겠지?”

“폭죽으로 적을 무찔렀다는 말, 자네는 믿나?”

진호의 물음에 주복이 진호를 슬쩍 쳐다보고는 웃었다.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자네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두 눈으로 봤다고 해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 사람들은 제 눈으로 본 것을 믿는다지만, 그 눈 또한 믿을 바가 못 되지(所信者目也, 而目猶不可信 - 공자).”

“에이,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이 해결되긴 했잖아.”

주복이 말했다. 진호는 대꾸하지 않고 방금 나온 찻집을 돌아보았다.

찻집에 잔뜩 몰린 사람들 때문인지, 이야기꾼은 침까지 튀기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군왕 전하에게 복이 많다면, 친왕은 어떻겠나?”

진호가 냉랭하게 말하자 주복은 진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군왕 전하는 복을 타고났으니, 나중에 태묘(太廟: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편전에 위패를 모실 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 친왕은 딱히 복을 타고나지 않았어도, 태묘 정전의 끄트머리라도 차지할 수 있는 거고. 십삼, 군왕과 친왕은 한 글자 차이지만, 이미 그것만으로도 하늘의 뜻으로 복을 타고난 자가 갈리지 않나.”

“하늘의 뜻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나 훤히 알고 있으면, 본분을 지킬 줄 알아야지. 지금의 군왕은 제 본분을 잊었어.”

진호가 말했다.

“본분을 잊긴 뭘 잊어. 폐하께서 백 명의 관리들을 동원하여 귀환을 환영하고, 평왕에게 천자를 대신해 군왕에게 술을 올리라고 명령했는데, 무평을 구제하러 간 병사들과 관리들이 한사코 사양했다더군. 이 얼마나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자들인가? 적어도 본분은 알고 있다고 해야지.”

주육낭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진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고작 민란 하나 평정한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군왕이 상대한 자들은 백성들이거나 기껏해야 산적들 정도야. 민란 하나로 천자가 귀경길을 환영할 정도라면, 우리 서북 군사들의 공로는 어떻게 환영할 건데?”

진호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어깨로 주복을 밀쳐냈다.

“잘난 체는. 그건 본분을 지킨 게 아니야. 이번 일로 공로를 세우고 명성을 얻은 것도 모자라 폐하 앞에서 겸손함까지 지킨 게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주 잘 아는 자니 고명하다고 할 수밖에.”

주복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자네는 허구한 날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게 힘들지도 않아? 똑똑한 건 알겠는데, 정작 그 머리를 제대로 쓸 곳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차라리 그 여인의 일을 어떻게 도울지나 빨리 생각해 봐.”

그 여인의 일.

진호가 대꾸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건 내가 제일 많이 생각하는 일이지. 하지만 그 여인은 단 한 번도 내 생각을 필요로 한 적이 없어.

주씨 저택으로 돌아온 주복과 진호는 때마침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서는 정교랑과 마주쳤다.

“어디 가?”

주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경왕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복은 대수롭지 않게 알겠다고 걸음을 옮겼지만, 진호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 낭자.”

정교랑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계속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진안 군왕 전하께서 뭘 하셨기에, 경왕을 돌봐 주기로 한 거죠?”

진호가 웃으면서 물었다.

“내게 부탁을 했는데, 마침 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에게 부탁하는 게 그리도 쉬운 일이었군요.”

정교랑은 웃으며 예를 표하고 마차에 올랐다.

“뭐 하는 거야?”

주복이 눈을 부릅뜨고 팔꿈치로 진호를 툭 쳤다.

“궁금하잖아.”

진호가 먼저 걸음을 옮기면서 대답했다.

“궁금할 게 뭐 있다고?”

주복이 물었다.

“낭자가 누구에게 시집갈지 궁금해.”

진호가 웃었다.

주복이 덕승루에서 한바탕 난리를 친 탓에 고씨 가문은 낭패를 봤지만, 덩달아 소란을 피우지는 않고 조용히 지내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고 대인이 나설 모양이야.”

진호가 말했다.

“어제 중매인이 정씨 가문에 갔다던데, 그쪽 사람들은 참 낯짝도 두꺼워.”

주복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런 때엔 낯짝이 두껍지 않은 게 멍청한 거지.”

진호가 따뜻한 차를 한 잔 우리면서 말했다.

“이래서 고 대인의 수가 평범하지 않다고들 하는 거야.”

“그럼, 우린 뭘 해야 하지?”

주복이 진호가 건넨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물었다.

나도 이대로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는 건가?

진호가 고개를 들어 주복을 쳐다보았다.

오후의 햇볕이 붉게 달아오른 소년의 거친 얼굴을 비췄다. 소년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가 뜨거운 햇볕 탓인지, 아니면 좀 전에 들이켠 따뜻한 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하다는 거야.”

진호가 웃으면서 자신의 손에 쥔 찻잔을 들이켰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이제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주씨 저택의 대청 안에 앉은 정 대노야가 물었다. 그는 오늘 정교랑을 만나러 왔지만, 정교랑이 경왕부에 간 탓에 여기서 정교랑을 기다리기로 했다.

“고씨 가문에서 정말로 중매쟁이를 보냈다는 말이오?”

주 노야가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도 모자라서 이젠 중매쟁이까지 보낸다? 고씨 가문은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군.

“중매쟁이까지 보낼 정도라면, 우리 아예 육낭과 교교의 혼사를 치릅시다.”

주 노야가 비장하게 말했다. 정 대노야가 주 노야를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더는 여기 경성에 남아 있기 힘들겠구려.”

“그럴 리가 있나. 고작 이런 황당한 일로 폐하께서 우리를 쫓아내시기라도 할까? 아직 어린 자식들이 벌인 황당한 일이잖소, 다들 젊을 때 한 번씩 풍류를 즐긴 때가 있는 것을. 게다가 사적인 일을 조당에까지 끌고 갈 수는 없는 법이지. 폐하께서 그 정도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하시는 분은 아닐 거요.”

주 노야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하자 정 대노야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은 틀렸소.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건 폐하가 아니라, 평왕이오.”

평왕?

주 노야가 흠칫 놀랐다.

“설마 잊은 거요? 제일 처음 중매를 언급하고, 이 혼사를 추진시켰던 장본인이 누군지?”

정 대노야가 말했다.

아 참, 그게 평왕이었지!

이번 일은 황제와 무관했다. 정씨와 고씨 가문이 인연을 맺든 원수를 지든, 황제는 전혀 관여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게다가 황제는 나이가 있어 언젠가는 옥좌에서 내려올 사람이었다.

이번 일은 태후와 연관이 있는 일이고, 이번 혼담의 성사 여부는 태후의 체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사실 주 부인이 울며 황궁 밖으로 나왔던 때부터 이미 태후의 체면은 많이 깎인 상태였다. 하지만 태후는 어쨌거나 태후였다. 황제보다 나이가 많은 데다 황궁 여인의 입김이 조당을 좌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평왕과 연관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평왕은 유일한 황태자 후보이며, 훗날 제위에 오르면 꽤 오랜 시간 황제로 지낼 것이다. 그러니 평왕의 감정은 오랫동안 조당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테고, 이는 자연스럽게 평왕의 후손에게도 영향을 줄 터였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이 일을 해결하는 건 쉽지만, 우리 주씨 가문의 미래를 대가로 맞바꿔야겠지.

“그래서 교교가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던 건가.”

주 노야가 겸연쩍은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 대노야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주 노야를 쳐다보며 비웃었다.

“이러니까 다들 천둥소리는 커도 빗방울은 작다고 얘기하지. 온갖 큰소리는 떵떵 쳐놓고, 지금 와서 겁을 내시오? 외숙이라 성씨가 달라서 그런지, 영 못 미덥군.”

주 노야는 절대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눈썹을 치켜뜨고 정 대노야 못지않은 기세로 소리쳤다.

“어이, 정씨, 지금 누가 겁낸다는 겐가? 이게 다 자네 아들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니야! 자네 아들 일에 괜히 우리 교교까지 휘말리게 해 놓고,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드디어 싸우네. 이래야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답지.

문밖에 서 있던 여종과 몸종들이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정교랑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팽팽한 기 싸움을 멈췄다.

“교교.”

정 대노야와 주 노야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문가에 서 있는 정교랑을 보고, 주 노야가 한발 먼저 정교랑의 옆으로 다가갔다. 주 노야의 이런 치사한 행동에도 정 대노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교교에게 잘 대해 주고 말고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 누구 목청이 더 큰가를 비교하는 게 아니야.

“네 혼사니,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만 해 다오. 나는 전적으로 네 뜻을 따르마.”

주 노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짧게 네, 하고 대꾸하고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정교랑이 말하고는 정 대노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백부님이 잘 오셨네요. 안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집으로 돌아간다고?

지금 정씨 저택으로 돌아가겠다고?

“나무아미타불, 드디어 가는구나.”

정교랑이 주씨 저택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주 부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경을 읊고는 합장했다.

“왜 갑자기 돌아간다고 하는 거지?”

여종 한 명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 부인은 정교랑이 왜 떠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정교랑이 자신과 한 지붕 아래서 살지 않게 됐다는 것, 더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됐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쁠 뿐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정 이노야가 아직 집에 있을 텐데. 백부인 정 대노야가 가둬 두었다고는 하지만, 자식 된 입장에서 부모가 갇혀 있는 것을 보기 힘들어 돌아가는 게 아닐까?”

다른 여종이 의아하기도, 궁금하기도 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아니면, 혼사 때문에 돌아가는 거 아니야? 좀 전에 노야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는데, 이번 일은 무조건 혼사로 맞대응을 해야 한다던데.”

여종 중 한 명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럼 누구한테 시집가는 거야?”

여종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옆에서 불경을 읊던 주 부인도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당연히 우리 육공자님이지.”

여종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이고, 내 아들아! 내가 결국 너를 제물로 바치게 되었구나!

주 부인은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무의식적으로 탁자 위에 놓인 술 주전자를 찾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술잔에 술을 조금 따른 뒤, 고개를 들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술을 한 잔 들이켜자, 주 부인은 갑자기 온몸이 편안해지면서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술은 정교랑이 직접 빚어 주 부인에게 선물했던 술이었다.

술은 좋은 술이다만, 술만 있고 그 여인은 눈앞에 없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교랑, 방법이 떠오른 거냐?”

집으로 돌아간 뒤, 정 대노야가 정교랑에게 물었다.

“말만 해 다오. 누구에게 시집가고 싶으냐?”

주씨 그놈은 분명히 겁을 먹은 게야. 그러니 절대로 먼저 혼담을 넣으러 오지 않을 테지.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어. 그놈이 먼저 혼담을 꺼내지 않아도 교랑이 먼저 그 혼사를 원한다고 말만 한다면, 멱살을 잡고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그 혼사를 성사시킬 테다.

교랑의 어미가 죽었던 그해에, 우리가 반격할 힘이 없어서 고스란히 맞기만 한 줄 알아? 목숨 걸고 싸운다면, 우리도 두려울 게 없어!

하지만 교랑이 정말로 고씨 가문에 시집가겠다고 하다면, 그것 또한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중매쟁이의 태도를 보아하니, 고 대인은 진지하게 이번 혼사를 생각하는 것 같더군. 본인이 경성에 도착하면 꼭 직접 와서 인사를 하고 상세한 내용을 논의하자고 할 정도이니. 고씨 가문이 이대로 자세를 낮추고 교랑을 데려간다면, 아예 만회할 기회가 없는 건 아니야.

물론 모든 건 교랑의 의지에 달렸지. 교랑이 이 혼사에 동의하기만 한다면, 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줏대 없는 인간이라 비웃더라도 고씨 가문과 화기애애하게 혼담을 주고받을 거야.

“누구에게 시집갈지는 일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우선 지금은 당장 백부님께서 제 아버지를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강주로 돌아가라고?

예상치도 못했던 정교랑의 말에 정 대노야는 생각을 멈추고 잠시 넋을 놓았다.

지금 당장?

“경성에 남아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할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 강주로 돌아가세요.”

하긴, 경성에 있으면 누구든 혼담을 넣으러 오겠다고 쉽게 찾아올 수 있어. 문을 막는다 해서 혼담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강주로 돌아간다면, 혼담을 넣으러 오가는 거리 때문에 시간을 꽤 오래 끌 수 있을 거야.

맞아. 이런 일에는 시간을 끄는 게 상책이지. 난 왜 이런 간단한 생각조차 못 했을까.

“무거운 일일수록 가볍게 처리하는 게로구나.”

정 대노야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감탄했다. 하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며 정 대노야의 감탄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어떻게 강주로 돌아갈지는 백부님께서 방법을 생각해 주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의 말에 정 대노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야 아주 간단하지.”

정 대노야가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을 덧붙였다.

“고능준 대인을 따라 하면 돼.”

4월 말, 대리시 판관 정동이 상소를 올렸다. 강주에 계신 모친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동이 대리시 관아에 앉아 있던 일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어사대에 끌려가는 바람에 며칠이 늦어졌고, 곧이어 정 대노야가 정 이노야를 별적이재 죄목으로 관아에 고소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드디어 송사가 끝났다 했더니, 병이 나서 며칠 동안 집에서 쉬겠다고 했고, 이제는 모친이 위중하여 강주로 돌아가게 생겼다.

“부인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다가, 이제는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시간 끄는 일에 재미가 제대로 들렸군.”

관리 하나가 상소문을 슬쩍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고향으로 보내줘야 할까요, 보내지 말아야 할까요? 정 이노야가 경성에 들어오게 된 건 고 대인 덕인데, 지금 이자를 보내 주면 나중에 고 대인께 어찌 설명해야 할지.”

다른 관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상소문을 슬쩍 쳐다보던 관리가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졌다.

“그럼 어쩌겠나? 모친이 위중하다는데, 우리가 그를 붙잡고 늘어질 수라도 있어? 고 대인도 똑같은 이유로 경성에 돌아오시는 건데, 정동이라고 못할 건 또 뭔가? 이 일은 우리가 붙잡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야. 진 상공께서도 이미 동의하신 일이고.”

상소문에 큼직하게 찍힌 중서문하성의 붉은 인장이 다른 관리의 눈에 뒤늦게 들어왔다.

“질질 끌려면 끌라지. 시간을 늦출 수 있는 건 잠시뿐, 평생이 아니야. 강주가 아무리 멀다 해도, 빠른 말로 달리면 열흘 만에 도착하는 곳이지.”

마차 행렬이 떠났는데도 정사낭은 여전히 자리에 서서 마차 행렬이 떠난 방향을 내다보았다.

“교교, 너도 지금 같이 강주에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 지금 돌아간다 한들, 네게 뭐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으니.”

주 노야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요. 부탁을 받은 일인데, 말에 신용이 없으면 안 되죠.”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이 떠나지 않은 탓에, 아직 손목을 치료해야 하는 정사낭도 경성에 남기로 했다.

“누이, 이번 일은 많이 어려운 일이야?”

돌아오는 길 내내 침묵을 지키던 정사낭이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물었다.

정 대노야의 말을 들은 뒤, 정사낭은 계속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일상생활을 유지했다. 그가 먼저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그때의 일이 응어리처럼 맺혀 있었다.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도 오지 않았을 거라고 정사낭은 생각했다.

정교랑이 정사낭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지었다.

“사실, 다들 공연한 걱정을 하는 거라니까요. 이번 일은 정말 사소한 일일 뿐인데.”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고 관인과의 혼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정교랑은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그럼 누이 눈에는 어떤 일이 큰일인데?”

정사낭이 물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던 일이요.”

정교랑이 말했다.

무슨 일이지?

정사낭이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문 현상 말이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일식과 월식 말이야? 그건 다들 말했잖아. 흉조가 들어맞아 민란과 재해도 있었고.”

정사낭의 대답에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다른 천문 현상이 더 있었어요.”

정사낭이 흠칫 놀랐다.

일식과 월식 외에 또 다른 천문 현상이 있었다고? 그게 뭐지? 왜 나는 몰랐지?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일을 발설하는 자가 없어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그건, 그 천문 현상이 정말 사소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곧 큰일로 번질 거라는 뜻이죠.”

5월 초, 경성의 날씨는 이미 무더웠다. 아직 찌는 듯한 무더위가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고씨 가문의 서재에는 벌써 얼음물이 놓여 있었다.

조금 전, 먼 길을 달려온 피로를 깨끗하게 씻어낸 고능준은 시원한 얼음물 덕분에 냉기가 더해진 서재 안의 공기에 편안함을 느꼈다. 몸은 시원하고 편안했지만, 마음은 화가 나고 초조하기만 했다.

“멍청한 것! 어찌 정 이노야를 강주로 보낸 게냐!”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대인,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하 몇 명이 쭈뼛쭈뼛 말했다.

“진 상공이 통과시킨 안건입니다. 늘 아버지와 대립하였고, 애초에 정동이 경성으로 오는 것도 반기지 않았던 인물이지요. 아마 진작부터 정동을 경성 밖으로 내쫓고 싶었을 겁니다.”

고 관인이 옆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경성 밖으로 내쫓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더냐? 그렇다고 해서 죄다 경성 밖으로 내쫓을 수 있어? 내가 네놈들을 여기 남겨 둔 이유가 뭔데!”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정말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에 내려가겠다는 이유가 대인의 이유와 똑같았잖습니까. 모친이 위독하다고요. 만약 저희가 다른 방법을 동원해 정동을 경성에 붙잡아 두었다면, 진소 등에게 대인을 공격할 칼자루를 쥐여주는 셈이라, 저희는 대인께서 난처한 상황에 놓이실까 봐…….”

“내가 난처해? 그놈이 나를 공격하면 내 당연히 백방으로 방법을 강구하여 그자를 막아냈겠지. 다들 이렇게 앞뒤를 생각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정동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게로군.”

고능준이 냉소를 보였다.

“아버지, 정동이 경성을 떠났다고 해서 바뀔 건 없습니다. 저희가 강주로 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정동 그자한테 어디 도망갈 배짱이나 있겠습니까.”

고 관인이 말했다.

정 이노야의 존재는 단순히 혼사를 논하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너희 눈에는 오로지 혼사밖에 없지? 그깟 혼사가 무슨 대수라고!”

고능준이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이 어딜 봐서 평범한 여인네들처럼 혼사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여인으로 보이더냐. 정녕 혼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왜 자신이 목숨을 구해 준 가문과 혼사를 올리지 않았겠어!

관두자. 내가 직접 나서는 일이 아니면 꼭 이렇게 구멍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 지금 일이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일단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겠다.

“여봐라. 내 명첩을 정 낭자에게 보내거라. 내 직접 정 낭자를 보러 갈 것이야.”

고능준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직접 그 여인을 보러 가시려는 겁니까? 그깟 여인이 무슨 자격으로…….”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하던 중, 고능준이 그의 말을 끊었다.

“네놈보단 자격이 충분하니라!”

고능준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명첩을 내던지자 깜짝 놀란 고 관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환이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명첩을 들고 문밖으로 물러갔다.

고능준이 경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금세 경성에 퍼졌다. 그리고 그의 사환이 정교랑을 찾아갔다는 소식도 곳곳에 포진한 밀정들에게 빠짐없이 포착되었다.

“고 대인이 그의 아들놈보다 훨씬 말재주가 좋긴 하지.”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들 어쩌겠습니까. 정 낭자가 고능준에게 시집갈 것도 아니고!”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실소를 터트렸다.

“헛소리 마라.”

진 노태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진소를 꾸짖었다. 진소가 진 노태야에게 결례를 보였다고 가볍게 예를 표한 뒤,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고 관인이 아직도 이렇게 나오는 것은 명백한 보복입니다. 이런 식으로 혼사를 맺어 봤자, 고능준이 아무리 빈틈없이 일을 진행한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뿐이죠. 고능준이 그 둘을 평생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혼사를 치른 뒤 정 낭자가 겪을 고생길이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정 낭자가 바보도 아니고, 어찌 교활한 고능준의 말 몇 마디만 듣고 이 혼사에 응하겠냐는 말입니다.”

진 노태야가 부채를 흔들면서 웃었다.

“다른 여인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정 낭자라면 고생길이 훤히 보이든 말든 별로 대수로이 여기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여인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를 테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인이야.”

진 노태야가 부채를 천천히 흔들면서 말했다.

같은 시간, 진호는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았다.

“맞아. 그 여인은 항상 예상치도 못한 결정을 내리곤 하지. 고 대인이 그 여인을 설득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진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 낭자가 고 대인의 설득에 넘어간다면, 필경 혼사를 치르게 될 터.

혼사라…….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십삼.”

진 부인의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진호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머니, 소자가 지금 당장 급히 나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잠깐 이리 와 보거라. 네게 물을 게 있어서 그래.”

진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진호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하자, 진호는 차마 진 부인을 외면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어머니?”

“어딜 가는 게냐?”

진 부인이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채로 묻자, 진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어머니, 소자는 소자가 가고 싶은 곳을 갑니다.”

진호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러 가는 것이기도 하고?”

진 부인이 웃으면서 진호를 몇 걸음 따라가며 말했다.

“십삼, 때로 어떤 일은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단다. 꼭 말로 해야만 할 때가 있어.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지 않니?”

진호는 진 부인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서둘러 말을 타고 저택을 떠나갔다.

“애한테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십삼도 이미 다 컸소. 벌써 관직에 있는 몸이니, 자꾸 실없는 소리로 아이를 놀리지 마시오.”

진 시강이 방 안에서 걸어 나오며 진 부인을 다정하게 나무랐다. 그러자 진 부인은 부채를 흔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크긴 뭘 커요? 정말 다 컸다면, 마음에 둔 사람을 벌써 품에 안았겠죠. 이런 점은 제 아비를 하나도 닮지 않았네.”

진 부인이 부채로 반쪽 얼굴을 가린 채, 진 시강을 향해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냈다. 진 시강은 일부러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뒷짐을 지었다. 주위에 있던 여종들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며 몰래 웃었다.

진 시강 내외는 잠시 환담을 나누고 방을 나섰다. 이때, 여종이 주복이 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육낭, 십삼은 좀 전에 급히 나가던데.”

진 부인이 정중하게 자신을 향해 예를 올리는 주복에게 웃으면서 말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어. 진사가 되어 관직을 얻은 후로는 접대도 잦고 말이야.”

“네. 예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요. 저도 군에서 그랬습니다.”

주복이 대답하고는 다시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말을 타고 떠나는 주복을 바라보던 진 시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진 부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 뭐하러 애를 속이는 거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주씨 가문의 저 녀석이 미인을 얻을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럼 우리 십삼은 어떡해요.”

진 부인의 대꾸에 진 시강은 동의하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소인배의 마음이오.”

“자식 혼사 일에 사내대장부고 뭐고 따질 필요 있나요. 어차피 공평한 싸움이 아니니,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겠죠.”

진 부인이 웃으면 말하자, 진 시강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당신이 이러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

당신은 지금 사람의 힘으로 인연을 맺으려는 거잖소.

진 부인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으쓱하고는 싱긋 웃었다.

“십삼이 나에게 온 것 자체가 하늘의 뜻이니까요.”

주복이 다소 쓸쓸해 보이는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가 온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거의 도망치다시피 경성을 떠나자, 정교랑의 혼사 이야기는 금세 잊혀진 듯했다.

지금 경성의 저잣거리를 뜨겁게 달구는 주제는 진안 군왕이 홀로 산적의 산채에 들어갔으나 신선의 보호를 받아 악당들을 단번에 물리쳤다는 이야기여서, 고 관인과 정씨 가문 사이의 혼사 이야기는 지나간 일처럼 아무도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경성은 그런 곳이었다. 새롭고 신선한 일들이 매일 넘쳐나고, 아무리 시끌벅적한 사건이라도 눈 깜빡할 새에 잊히는 곳.

“아버지, 그 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복이 대청 안에서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며 시녀의 노랫소리를 감상하던 주 노야를 보며 말했다.

“어떤 일 말이냐?”

주 노야가 느긋하게 물었다.

“교랑의 혼사요.”

주복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아, 그건 급할 거 없다. 교교가 알아서 할 거야. 우리는 교교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돼.”

주 노야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무릎 위에 놓인 손으로 가볍게 노래의 박자를 맞췄다. 주복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그, 그래도 가서 물어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복이 물었다.

“물을 게 뭐 있다고. 지금 시간을 끄는 거잖냐. 이대로 쭉 시간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 노야가 말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두려우신 거겠지.

정 대노야와 함께 평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 주 노야는 이대로 정교랑과 혼사를 맺을 경우의 후환이 두려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정교랑 또한 굳이 주씨 가문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으니, 주 노야는 더욱 몸을 사리는 듯했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주복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을 질질 끌어서 뭐해! 이런 일일수록 쾌도난마로 결판을 내야지!

아버지께서 묻지 않으신다면, 제가 직접 물어보러 가겠습니다.

주복이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맞아. 내가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그 애를 도와주는 건데, 못 물을 게 뭐 있다고!

결심이 확고해질수록, 주복의 발걸음도 점점 더 빨라졌다.

내가 가서 물어봐야겠다. 내가 가서 물어봐야겠어.

주복이 주씨 저택을 나설 무렵은 진호가 반근이 우려준 차 한 잔을 전부 비울 때쯤이었다.

여름이 되자 활짝 열린 대청 문에 얇은 방충망이 더해지고, 창밖은 푸른색과 붉은 꽃이 한데 모여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냈다. 처마 밑에 있는 둥지에서는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진호가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호가 미소 지으며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고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사실, 낭자에게 주육낭과 혼례를 하라고 권해야 마땅한데.”

진호가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조용히 부채질을 하던 반근도 진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더라고요. 이번에는 정말로 혼사를 올릴 거 같아서요. 낭자가 진짜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갈 거 같아서.”

“혼사에 진짜 가짜가 있나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진호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혼사가 장난도 아니고, 진짜 가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난 혼사를 애들 장난처럼 여기고 싶습니다.”

반근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진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낭자의 원칙도 장난이 되어버리니까요.”

진호가 웃으면서 정교랑과 눈을 마주쳤다.

무슨 원칙을 말하는 거지?

반근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진호는 마치 정교랑과 반근이 대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정 낭자, 지금이라도 원칙을 조금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이번 일에는 고위급 관료와 막강한 권력이 연관되어 있으니, 주씨 가문과 혼사를 치르는 건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집안이라면 괜찮잖습니까. 우리 집안이라면,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거고, 굳이 낭자가 스스로 손해 보지 않아도 될 겁니다.”

진호가 한꺼번에 말을 다 한 뒤, 조심스럽게 눈앞에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내가 나서게 해 줘요.”

“뭘 나서요?”

정교랑이 물었다. 멈칫했던 진호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설마 못 알아들은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괜찮아. 더 명료하게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

“낭자는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문과 혼사를 치르는 것은 몹시 이치에 맞는 일이자 미담으로 남을 일이기도 하죠. 태후와 평왕의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이치에 합당한 일이라면 그들도 아무 말 못 할 테고요. 게다가 저희 진씨 가문은…….”

진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이 소리 내어 진호의 말을 끊은 것은 아니지만, 진호 스스로 말하는 것을 멈췄다.

“그 일로 왔던 거예요?”

진호가 말을 멈추자, 정교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이제 마음 쓰지 말아요. 더는 이 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고 예를 표했다.

또 이러네.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교랑이 단정한 자세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얼핏 계산해 보아도, 정교랑을 제일 많이 만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진호는 잘 알고 있었다. 선상 연회, 꽃등 놀이, 화괴의 춤 감상과 꽃놀이까지, 진십삼은 정교랑과 가장 다양한 일을 함께한 사람 또한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렇게 낯설기만 할까. 정 낭자와 마주 보고 앉을 때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렇게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사람.

“알겠어요. 그럼 내가 신경을 쓸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알려 줘요.”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으며 예를 표하자, 진호도 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호가 말을 타고 정씨 저택을 떠날 무렵, 저택 근처에 다다른 주복이 그를 발견했다. 하지만 진호는 주복을 보지 못한 채 지나쳤다.

십삼이 여기에 있었네. 혹시 또 무슨 방법이라도 생각해 낸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 같던데.

생각에 잠겨 말을 천천히 움직이던 주복이 무언가를 보고 다급하게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앞쪽을 내다보았다.

정씨 저택의 문 앞에 또 누군가가 멈춰 서더니 여름 햇볕을 받으며 말에서 내렸다.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은 사내였지만, 누가 보아도 한눈에 주목할 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말에서 내린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주복은 사내의 용모를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멀리서도 그 사내의 여유로움과 가벼운 발걸음이 느껴졌다. 사내가 층계를 올라 대문을 두드리자, 금세 문이 열렸고 사내는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이 여길 왜? 아니, 저 사람이 언제 경성으로 돌아온 거지?

주복은 티 나지 않게 저잣거리 주위를 훑어보았다. 노점상들의 호객 소리와 바쁘게 오고 가는 행인들 사이에 어딘가 날카로운 기운이 정씨 저택 주위에 도사리고 있음이 주복의 예리한 시선에 느꼈다.

“군왕 전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진안 군왕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사환의 말을 듣고 달려나온 반근이 소리쳤다. 마당에 들어선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늘 밑에 선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나랏일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지.”

정말 이상하네. 이 저택에는 오늘 처음 들어온 건데, 왜 이렇게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지?

아니야,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고, 좀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진안 군왕은 마음이 놓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걸어 나온 여인과 몸종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익숙하니, 장소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거구나.

“정말이에요? 이런 엄청난 일에, 왜 미리 연통도 없으셨어요?”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창피한 일을 저지르고 왔는데, 무슨 낯짝으로 거창한 환영을 바라겠느냐. 마음 같아서는 성 밖에 땅굴을 파서 몰래 기어들어 오고 싶었다.”

진안 군왕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반근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 무슨 창피한 일인데요?”

“너는 어째 점점 더 말 많은 반근을 닮아가는구나. 내가 큰소리 떵떵 치고 혼자서 산적을 잡으러 산채에 들어갔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 폭죽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쳐 나오지 않았더냐. 그 창피한 일을 굳이 내 입으로 직접 말하라고?”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반근은 배를 잡고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웃었고, 정교랑도 진안 군왕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창피할 일이 아니죠.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니,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에요.”

칭찬의 말을 수없이 들은 진안 군왕이었지만, 정교랑의 입에서 나온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진심이 가득 담긴 웃음이 피어올랐다.

“오늘 전하께선 저희 아씨의 축하를 받기 위해 오신 건가요?”

반근이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길을 안내했다. 반근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오늘 낭자와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회랑 아래까지 걸어갔던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고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정방, 나한테 시집오는 건 어때요?”

으응? 뭐라고?

반근은 무언가를 들었으면서도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반근은 넋이 나간 채로, 마당에 서 있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정방, 나한테 시집오는 건 어때요?

마당에 정적이 흘렀다. 반근의 놀란 얼굴을 본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디며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정방, 내게 시집오는 건 어때요?”

진안 군왕이 여유롭고 솔직한 모습으로 물었다.

정말로 그 말을 한 게 맞구나. 군왕 전하도 고씨 가문이 태후를 이용해서 강제로 혼인하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반근이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반근이 놀란 건 진안 군왕의 청혼 때문이 아니었다. 요 며칠 청혼하러 온 사람이 벌써 세 명이나 되는데, 이토록 솔직하게 청혼한 사람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고씨 가문이든, 주 노야든, 진호든, 모두 완곡하게 혼담을 꺼냈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씨를 위해서 나서 준다는 건 참 기쁜 일이야.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전하께서 마음을 써 주시는 건 감사하나, 이런 사소한 일에 굳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이게 어떻게 사소한 일이에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말을 끊고 웃었다.

맞아요, 아씨. 혼사는 절대로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요.

반근이 속으로 한탄했다.

“벌써 잊었어요? 전에 내가 그랬잖아요. 낭자가 혼사를 치른다면, 좋은 신랑감을 골라 주겠다고 했죠.”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대청에 마주 앉자, 반근은 차를 올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게 아마 삼 년 전이었지?

반근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때는 내가 아씨 곁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에서 아씨의 혼수 때문에 서로 혼사를 치르겠다고 난리를 쳤지. 맞아, 아씨께서 혼담이 오간다고 말씀하시니, 군왕께서 담벼락 위에 매달려서는 아주 친절하게 자기가 신랑감을 잘 알아봐 주겠다고 했어.

  • 결정을 못 내리겠거나 알아보기 힘들면 나한테 물어봐요. 내가 확실히 알아봐 줄게요. 중매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절대 못 속이게 한다고 장담합니다.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요.”

“내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봤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골라 봐도…….”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내가 최선인 것 같단 말이죠.”

정교랑이 또 웃었다.

“누구라 해도 상관없어요. 별일 아니니까, 굳이 마음 쓰지 않아도 돼요.”

“정방, 난 당신을 도우러 온 게 아니에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반근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도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근래에 여러 곳에서 낭자에게 혼담을 넣으러 왔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정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 사람들이 당신의 신랑감으로 적합할지, 그 집안에 시집을 가면 좋을지 나쁠지는, 내가 판단할 게 아니라 낭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맞겠다 싶었습니다. 혼사를 치른 후의 생활은 오롯이 낭자의 것이니까요.”

정교랑은 미소 띤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볼 뿐,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이건 당신의 일이고,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뭐라고 낭자를 돕겠어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그래서 낭자에게 청혼하러 온 겁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반근은 결론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시 나는 이분들의 말을 못 알아듣겠어.

“근래에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된 뒤로, 정말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 나 자신부터 먼저 생각하기로 했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눈부실 정도로 밝은 한낮의 햇살이 정교랑을 비췄다. 밝은 햇살 때문인지, 오늘따라 정교랑의 인상은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

정교랑이 입는 옷은 언제나 비슷했다. 진안 군왕을 처음 알게 된 그날 밤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교랑은 가슴께까지 오는 수수한 색깔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겨울에는 그 위로 짙은 색의 겉옷을 걸치고, 날이 더워지는 여름에는 촘촘히 짜인 얇은 반소매를 걸쳤다.

정교랑의 얼굴에는 아주 옅은 색의 연분홍 연지가 발려 있었고, 새까만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나무 비녀로 고정해 두었다. 정교랑은 늘 별다른 장신구 없이 작은 은빗 하나를 머리 옆에 꽂고 다녔다. 정교랑의 의상과 장신구는 무척이나 간소해서, 그녀의 시중을 드는 반근보다도 단출해 보였다.

정교랑은 항상 허리를 꼿꼿이 곧추세우고 서 있었는데, 그 자세는 황궁의 상궁들조차 지적할 곳 하나 없을 정도로 바른 자세였다.

그날 산에서 늑대 떼를 함께 물리쳤을 때도, 모닥불 옆에 서 있을 때도, 같은 자세였어.

조용하고 담담하게 서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위험한 일들을 겪고, 간혹 아름다운 것을 보기도 하고, 무언가를 얻었다가 잃는 경험도 하고.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만 생각하면 내 마음은 너무나도 평온해져.

이 세상에 내가 슬퍼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은 단 둘.

한 명은 내가 지키지 못해 잃게 된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곧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내가 이 여인의 뒤에 서서 그녀를 든든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몰라.

그런 건 상상하기도 싫고,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야.

진안 군왕이 앞으로 또 한걸음 내디뎠다.

“내가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당신과 혼인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진안 군왕이 한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나 방백종이,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고요.”

나 방백종이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고요.

반근은 멍한 채로 뭔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혼사가 이런 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그 행렬이 가히 십 리에 이를 정도로 풍성한 혼수. 여인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혼사에 대해 얘기할 때는 수줍어서 자리를 피하는 여인도 있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혼사 준비를 하는 여인도 있었다. 신랑감을 고르느라 머리를 쥐어짜는 부모도 있고, 이 사람 저 사람 꼼꼼하게 재고 따지는 부모도 있고,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려니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드는 부모도 있고, 딸이 드디어 좋은 배필을 찾아 혼사를 치르는 기쁨을 느끼는 부모도 있었다.

물론 반근은 정교랑이 이 중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여태껏 정교랑의 혼담은 모두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위해, 놀이를 위해, 곤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이용되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혼담을 넣으러 온 사람들 또한, 아마 지금 혹은 나중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충분히 계산한 뒤 혼담을 넣으러 온 것일 터였다.

기쁨이나 행복, 아쉬움은 없고, 정교랑의 혼사에는 언제나 두려움이나 계략, 암투만이 존재했다.

내가,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고요. 나 때문입니다. 내가 그것을 원하니까요.

반근은 이상하게도 코끝이 찡해져 왔다.

“정방, 당신의 혼사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싶다던가.”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근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사소한 일은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의 눈에는 혼사가 사소한 일이에요?”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이 사람도 참 웃긴 사람이네.

반근이 진안 군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씨께서 혼사를 사소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건 수없이 많지만, 보통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거나,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거나, 아쉽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는데, 저 말을 이렇게 좋아하는 경우는 또 처음 보네.

진안 군왕은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표정에서도 진심 어린 기쁨이 묻어났다.

정교랑도 어쩐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예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에게 혼인은 일생일대에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자유를 빼앗겼는데, 혼사라는 건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보내는 일이니 꼭 내 손으로 직접 결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방, 나는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

진안 군왕이 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당신에게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데, 당신이 사소하게 여기는 일로, 내 한평생 가장 중요한 일을 이뤄 줄 수 있나요?”

당신의 사소하게 여기는 일로, 내 한평생 가장 중요한 일을 이뤄 줄 수 있나요?

반근이 더욱 놀란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좋다고?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된다고?

이, 이게 뭐람?

“뭐긴 뭐야. 낭군과의 약속이라는 거지.”

방 안에 환하게 켜진 등불 아래에서 시녀가 중얼거렸다.

“언니.”

반근이 당황한 기색으로 시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렇게 혼사가 성사된다고?”

“청혼했어?”

시녀가 반근을 쳐다보면서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은 한참 전에 저택을 떠났다. 반근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시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하지. 아씨와 혼인하고 싶다고 했어.”

반근이 대답했다.

“아씨는 대답하셨고?”

시녀가 물었다. 반근이 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아씨께서 좋다고 하셨어.”

시녀가 어깨를 으쓱하고 손바닥을 보이면서 말했다.

“그럼 끝난 건데, 뭘 또 묻는 거야?”

“그럼, 아씨께서는 정말로 진안 군왕한테 시집을 가시는 거야?”

반근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씨께서 아직까지 거짓말하신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시녀가 웃었다.

맞아. 아씨께서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어.

반근이 자신의 두 손을 꼭 잡고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군왕이니까, 고 관인보다 대단한 사람이겠지?”

시녀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반근의 이마를 쿡 찌르며 뒤로 밀었다.

“군왕이든, 천하에서 가장 센 사람이든, 공주부의 진 공자든, 죽마고우라는 주 공자든, 누가 더 대단한지는 아무 소용 없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씨께서 좋다고 하시는 사람이야.”

반근이 이마를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면서 언니, 하고 소리쳤다.

“꿈에서 그만 깨어나. 얼른 아씨의 혼례복을 준비하러 가야지.”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혼례복이라니, 정말 시집을 가시는구나.

아씨께서 정말로 혼례를 치르시는구나.

이마를 부여잡고 있던 반근이 갑자기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시녀는 그런 반근이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서럽게 우는 반근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왔다.

“됐어, 그만 울어. 경사스러운 일인데, 왜 울고 그래.”

시녀가 반근을 다독였지만, 반근은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밤사이 반근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밤바람에 실려 창가 너머의 마당을 맴돌았다.

해가 뜨자, 쿵쿵쿵 발걸음 소리가 고능준의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고 관인이 다급한 걸음으로 걸어와 말했다. 시녀 두 명이 고능준의 옷을 갈아입혀 주고 있던 터라, 고능준은 고 관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제 진안 군왕이 그 천것의 집에 갔는데…….”

고 관인이 말하던 도중, 고능준이 몸을 돌렸다. 눈썹을 치켜세운 고능준이 고 관인의 말을 끊고 호통쳤다.

“첫째, 그건 큰일이 아니다. 둘째, 다시는 네 아내 될 사람을 천것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고 관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움츠러들었다.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소자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사죄를 마친 고 관인은 얼른 재빨리 고개를 들고 말을 이어갔다.

“요 며칠 그 정, 정 낭자 댁에 진십삼도 갔는데, 진십삼은 저와 정 낭자 사이의 일을 좋게 풀어 보고자 애쓰는 사람이니 상관없다고 쳐도, 진안 군왕이 정 낭자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는…….”

“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나 보지.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되느니라.”

고능준이 소매를 털고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마차?

“아버지, 정말로 정 낭자를 찾아가시려고요? 정 낭자를 이리로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고 관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정 낭자에게 매달리는 거지, 정 낭자가 우리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 낭자가 직접 찾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냐.”

고능준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게 어딜 봐서 우리가 그 여인에게 매달리는 거야?

고 관인이 고능준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찰나, 문밖에서 사환이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노야, 궁에서 온 겁니다.”

사환이 공손하게 고능준에게 서신 한 장을 건넸다. 그 자리에서 서신을 펼치고 내용을 본 고능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고 관인이 물었다.

고능준은 소매를 털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천천히 서신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마차를 준비할 필요 없다.”

“네?”

고 관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또 갑자기 마차가 필요 없다고 하시는 거지? 가지 않으시려는 건가?

“갈 필요 없다.”

고능준이 금세 조금 전과 같은 평온함을 되찾고 천천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폐하께 정교랑과의 혼인을 윤허해 달라고 했다는구나.”

뭐라고?

고 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혼사를 논의하는 데 장장 이 년이 걸렸다는 죽마고우 주육낭으로 부족해서, 이제는 진안 군왕까지 합세했다고? 게다가 이번에는 이 일을 폐하의 앞으로 가져갔어?

내 체면을 밟으려고 안달이 난 놈들이 수두룩하구나. 도대체 내가 그놈들과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근정전의 창문과 문이 굳게 닫혔고, 전직(殿直)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수위를 섰다. 근정전 안에서 시중을 들던 내시들이 모조리 회랑 아래로 나와 있는 것을 보니, 근정전 내부에서는 필시 극비 사안을 논의 중일 터였다.

하지만 근정전 내에서 논의 중인 내용은 나랏일이나 군사 기밀과 관련된 극비 사안이라고 보기 어려운, 지극히 사적인 황실의 가정사였다.

황제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네가 바란다는 상이 짐에게는 몹시 의외로구나.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든 게냐?”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갑작스레 생긴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래도록 그 마음을 잘도 꼭꼭 숨겨 두었구나.”

황제가 웃으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사실 예전에는 딱히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진안 군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낭자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부였죠. 낭자와 뭘 어쩌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막상 그 여인이 다른 사람한테 시집간다는 소식을 들으니…….”

진안 군왕은 민망한지 말을 하다 말고 손을 올려 옷깃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음, 그러니까 너는 그 여인이 시집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여인을 위해서…….”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주씨 가문 녀석처럼, 그 여인을 도와주기 위해서 나서는 게지. 그 여인을 곤경에서 구해 내려고.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 이건 신을 위한 겁니다.”

그가 한결 편안해진 눈빛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경왕을 위한 거기도 하고요.”

황제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여인이 너한테 시집오면, 경왕을 치료해 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황제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다소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그 여인이 꽤 오래전부터 꾸며왔던 계략일지도 모르겠군.

진안 군왕이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폐하, 그 여인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경왕의 병을 치료해 줄 일도 없지요.”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럼 무엇을 위한 것이냐?”

“신이 그 여인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입니다.”

진안 군왕이 곧바로 대답했다. 진안 군왕의 대답에 흠칫 놀란 황제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에 품었다라…….

그렇다면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 미모나 지혜, 하다못해 신기한 비술이라든지.

“신이 그 여인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진안 군왕이 말을 덧붙였다.

믿는다고?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경왕의 병은 치료할 수 없겠지만, 그 여인은 의술에 통달한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 통달한 게 의술이 아니라 그 어떤 술법이라 해도 좋습니다. 정 낭자가 준 차를 경왕에게 우려 줬더니, 신기하게도 경왕의 짜증과 초조함이 덜해지고 편안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낭자의 옆에 있는 한, 경왕은 칠현금 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가끔은 정 낭자가 죽을병에 걸린 이를 살려내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진안 군왕이 이어서 말하다가 고개를 들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 또한 진안 군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자, 근정전 안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위낭, 그럼 네가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더냐?”

황제가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은 귀비마마를 믿지 않습니다.”

황제는 마치 진안 군왕의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평왕 전하도 믿지 않습니다.”

진안 군왕이 덧붙여 말하자, 황제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진안! 지금 그게 무슨 뜻이냐! 평왕이 제 아우를 죽이기라도 한다는 게냐!”

황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황제의 호통에도 진안 군왕은 겁먹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조용히 몸을 숙이고 정중하게 예를 올릴 뿐이었다.

“폐하, 신이 어찌 감히…….”

“어찌 감히? 그럼 너는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지, 똑바로 대답해 보아라!”

진안 군왕은 허리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에 격노한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네 눈에는 형제나 가족이나, 다 악의로 가득 찬 악인들로 보이는 게로구나! 진안, 짐은 네게 크게 실망했다!”

“폐하, 신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뿐입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이젠 변명까지 하는 게냐? 네가 음험한 생각을 품은 것이 분명하거늘, 어느 안전이라고 변명을 해!”

황제가 노여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폐하, 신은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진안 군왕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고개를 들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만약 폐하께서 계시지 않고, 태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경왕은 어떡합니까! 경왕이 그렇게 된 지 채 삼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속으로 경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폐하께서도 무척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니? 다들 밤낮없이 경왕 주위에 매달려 그 아이를 돌봐야만 마음을 쓴다는 게냐? 진안, 애초에 출궁하겠다고 했던 것은 너다. 그때 출궁하겠다고 했던 건, 일부러 보라는 듯 연기한 것에 불과하더냐? 실은 남들이 너를 붙잡고 궁에 남아 달라고 애원하길 바랐던 게야? 네가 지금 와서 원망할 게 뭐가 있느냐? 짐이 언제 너더러 경왕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느냐? 짐이 언제 네게 억지로 경왕을 부탁한 적이 있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그만 돌아가거라. 경왕을 궁에 다시 들여올 테니, 남들이 속으로 경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진안 군왕은 진노한 황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한바탕 화를 낸 황제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진안 군왕에게 크게 호통쳤다.

“이제야 두려워진 게냐! 어서 짐에게 대답해 보아라!”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네, 두려워졌습니다.”

왜 고개를 저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거지?

“폐하께서는 경왕을 너무도 잘 보살펴 주십니다. 폐하께서 이렇게나 잘해 주시니, 신은 두려워졌습니다. 언젠가 이런 보살핌이 없어지는 날이 올 것을 알기에 두렵습니다.”

황제가 눈을 부릅뜨고 어대에서 성큼성큼 내려와 손가락으로 진안 군왕을 가리키며 꾸짖었다.

“네 이놈! 오늘 짐을 저주하려고 온 게냐? 짐이 아직 건재하거늘, 뭐하러 벌써 우는소리를 하는 것이냐!”

황제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두 팔로 황제의 다리를 와락 안았다.

“신은 두렵습니다! 신은 정말로 두렵습니다! 그러게 폐하께서는 왜 경왕과 신을 이리도 잘 보살펴 주셨습니까! 왜요! 오직 폐하께서만 경왕과 소자에게 잘 대해 주십니다. 그래서 신은 너무도 두렵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를 이렇게 끌어안은 적이 처음이었던 황제는 당황스럽고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녀석이 정말!”

황제가 진안 군왕을 떨쳐내려고 다리를 한 번 흔들었지만, 진안 군왕은 황제의 다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짐이 지금 사람을 부르면, 너는 이 자리에서 금오위 병사들의 손에 목이 달아날 것이야!”

황제가 호통쳤다.

“목이 달아나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신의 마음이 편해지겠지요. 더는 두려워할 것이 없어질 테니까요. 폐하, 신이 죽을 고비를 넘겨보지 않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얼마 전에 산채에 홀로 남겨졌을 때도 신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계신 한, 모든 게 다 평안할 테니까요.”

진안 군왕이 황제의 다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말했다. 황제는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진안 군왕을 보며 화가 났으나,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황실은 손이 귀했다. 황실에 겨우 아이가 생겼을 때는, 황제의 나이가 지긋할 때였다. 게다가 어린아이들은 너무도 여리고 허약했기에 황제는 아이들을 살짝 건드리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러한 이유로 황제에게 있어서는 아이들과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것이 가장 친밀한 부자지간의 감정표현이었다.

진안 군왕은 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아이였다.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는 몹시 어렸던지라, 늘 집에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통에 태후가 그를 어르고 달래기 일쑤였다. 그리고 황제를 마주칠 때마다 어린 진안 군왕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두려움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차츰 소년이 되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는 더는 전처럼 황제를 무서워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황제를 깍듯한 태도로 대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 궁에서 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된 진안 군왕은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진안 군왕은 황제 앞에서 능글맞은 모습을 보이면 보였지, 한 번도 이렇게 바짓가랑이를 잡고 떼를 쓴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아이가 떼를 쓰는 건가? 그래, 짐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이렇게 떼를 쓰는 거겠지.

하지만 떼를 쓰기에는 너무 커버렸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던 황제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재빨리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호통쳤다.

“체통을 지키거라! 네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곧 혼사를 치를 사내가 지금 이게 무슨 꼴이더냐!”

“폐하께서 계신 한, 소자는 영원히 어린아이입니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황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진안 군왕을 내려다보았다.

위낭은 어렸을 때 왕부를 떠나게 되어 가족과 소원해졌지. 그렇다고 해서 궁에 이 아이와 가까운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니, 당연히 의지할 사람은 짐뿐일 수밖에.

그리고 얼마 전 무평 산채에서는, 정말로 죽을 뻔했어. 대수롭지 않게 말하긴 했지만, 당시 얼마 위험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아. 참 많이 놀랐겠구나.

모든 사람이 짐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짐에게 이토록 의지하는 사람은 없었지.

그리고 경왕도.

경왕…….

  • 경왕이 그렇게 된 지 채 삼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속으로 경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폐하께서도 무척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제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잘 알고 있지.

“저리 가거라. 혼사를 치르는 즉시 네 신부와 함께 경성을 떠나거라. 다시는 짐의 눈앞에 보이지 않게!”

황제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진안 군왕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깜짝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잠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황제의 말을 이해했는지, 진안 군왕은 활짝 웃으며 황제의 다리를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소자는 경성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에 남아 있고 싶습니다.”

진안 군왕이 씩 웃으면서 말하자, 황제가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냉큼 꺼지거라.”

진안 군왕이 해맑게 웃으면서 작별을 고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두어 걸음 뗐을 때, 황제가 진안 군왕을 불러 세웠다.

“태후께는 네가 직접 말씀드리거라. 괜히 짐을 욕받이로 쓰려고 하지 말고.”

진안 군왕이 알겠다며 예를 표하고는 서둘러 근정전을 떠났다. 근정전의 구석에서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내시가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짐은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황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폐하, 이렇게 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내시가 미소 지었다.

정 낭자가 고씨 가문과 혼사를 치르게 된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이다. 고능준이 경성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정 낭자가 고씨 가문의 혼담을 승낙할 가능성이 반반이었는데, 그가 돌아오고 나니 그 둘이 혼사를 치르지 않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지.

고능준 그자는 짐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자야. 의외로 자상한 면모가 있어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사람들이 그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

그리고 그건 둘째 치고, 고씨 가문 자체로도 충분히 막강한 세력을 가지는데, 거기에 배짱 좋고, 안하무인일 정도로 교만하며, 능력까지 출중한 정 낭자가 합세하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이야 내가 그 기세를 억누르고 있을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어린 태자가 황위를 계승하게 된다면?

그렇다고 해서 정 낭자가 주씨 가문에 시집가게 둘 수도 없지. 태후께서 버티고 있는 한 이미 엉킨 실을 풀 수는 없고. 그렇게 된다면,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결국 경성을 떠나야만 할 테고, 고씨 가문의 기세는 날로 거세지겠지.

하지만 진안이 이 판에 뛰어든 이상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태후께서 절대로 진안에게 경성을 떠나라고 하실 리는 없으니, 그 누구도 쉽게 진안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야.

진안이 이대로 정 낭자와 혼사를 치르게 된다면, 곧 고씨 가문과 원수를 지게 될 터, 하지만 그 덕분에 고씨 가문과 정 낭자가 손을 잡는 경우는 없을 테니 어린 태자에게는 좋은 일이지.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녀석, 짐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채고 어린아이처럼 그리 떼를 쓴 건가?

자상함을 논하자면, 위낭도 빠질 수 없지. 게다가 아주 예리하기까지 해. 조정에 관한 일이나, 사람에 관한 일이나, 아주 예리한 녀석이야. 참으로 훌륭한 젊은이인데, 내 혈육이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아깝군.

가만 생각해 보니, 정 낭자가 진안과 혼인하는 게 썩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군.

그리되면, 정 낭자와 고씨 가문 사이의 인연은 끊어지게 될 것이고, 어린 황위 계승자에게도 좋은 일이 되는 게야.

이게 바로 힘의 균형인 게지.

황제가 몸을 돌리고 옥좌 위로 올라갔다.

짐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 자리에 앉은 자로서 어찌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겠는가.

진안 군왕은 급한 발걸음으로 황궁 안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의 얼굴은 조금 전 근정전에서 황제에게 보였던 기쁜 웃음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다시 혼자 있을 때의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역시 전하께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으십니다.”

진안 군왕을 따라오던 내시가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각자 필요한 것을 얻는 것뿐이니, 당연히 실수할 게 없지.”

각자 필요한 게 있으니, 각자 필요한 것을 얻을 뿐이다.

고능준도, 정씨 가문도, 주씨 가문도, 황실도, 모두가 다를 게 없어.

차이가 있다면, 각자 필요한 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얻느냐와 그것을 얻은 뒤에도 초심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느냐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진안 군왕의 뒤에 바짝 붙었다. 진안 군왕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내시 몇 명이 그를 알아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서서 예를 표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내시 한 명이 웃으면서 말하자, 진안 군왕의 발걸음이 멈췄다.

“황후마마께서 전하께 축하한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재차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을 덧붙였다.

“소원을 이루시게 되어서요.”

진안 군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언제쯤 황후마마께 축하 인사를 올릴 수 있느냐?”

진안 군왕이 앞뒤 없이 물었으나, 내시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조만간일 겁니다.”

진안 군왕은 별다른 대꾸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내시들이 서둘러 예를 올리고 진안 군왕이 태후궁을 향해 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태후마마께서 동의하실까요?”

한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진안 군왕과 대화했던 내시가 허리를 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황제 폐하도 설득했으니, 태후마마는 더 쉽겠지. 아마 말 한마디면 될 것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왕을 위해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네가 애가를 놀리는 게야?”

“마마, 소손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다 경왕을 위해서입니다.”

진안 군왕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갔다.

“소손은 절대로 육가아를 버리지 않을 겁니다. 평생토록 육가아와 함께할 거예요.

그리고 소손은 정 낭자가 육가아를 치료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소손은, 소손처럼 육가아를 대해 줄 사람이, 육가아를 진심으로 위하고 보살펴 줄 사람이 소손의 아내였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육가아를 무서워하고 혐오스러워합니다. 어쩌면 잠깐은 육가아를 아껴 주는 척 연기를 할 수 있겠지만, 어찌 한평생을 연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 낭자는 육가아를 무서워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정 낭자도 예전에는 바보였으니까요. 그런 정 낭자보다 육가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마마,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은 또 없습니다.”

그래. 태어나기를 바보로 태어나, 십여 년간 바보로 살다가 갑자기 완치된 사람은 아마 그 여인 말고는 없겠지.

태후가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또 누가 애가와 황상처럼 진심으로 육가아를 생각하고, 육가아를 아껴 줄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는데, 생판 남인 사람이 어떻게 육가아를 그 정도로 보살필 수 있겠어. 사람 마음이 그러한 게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거늘, 어찌 그 마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정 낭자 말고 또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건, 나 자신을 속이는 일밖에 더 되리.

“마마, 부디 소손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마마, 제발 소손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태후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앞에서 애원하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곧 나를 돕는 일과도 같지. 내가 벌인 이 우스운 일이 웃어른의 고충으로 바뀔 수 있을 게야.

“일어나거라. 그럼 애가는 육가아에게 보모를 한 명 구한 것으로 치마.”

태후가 진안 군왕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정 낭자의 혼사가 결정되었다. 아직 구두로만 정해져 정식적인 혼담 절차에 들어가기 시작한 건 아니지만,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뜻밖의 시작에, 뜻밖의 결말이로군.”

진소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설 때, 진소는 찻잔을 든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교랑과 진안 군왕의 혼사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진소는 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소. 정 낭자와 진안 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잠깐,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오?”

진안 군왕이 황제에게 상으로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했던 것부터,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고 진안 군왕의 청을 들어준 데까지 고작 반나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소는 소식을 전해 주는 수하들이 있기에 가장 먼저 소식을 알았지만, 항상 집에 있는 진소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좀 전에 진 시강 댁에 갔었는데, 진(秦) 부인이 얼굴이 새하얘져서는 말도 다 못 끝내고 급하게 진십삼을 찾으러 갔거든요.”

진소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씨 가문이라면 당연히 이 소식을 알고도 남았겠지.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거예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진소가 한참 동안 손에 쥐고 있느라 다 식어 버린 차를 단숨에 비웠다.

“지난번 고 관인 때도 이미 다 정해진 일이었잖소. 일이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소? 그 여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뜻밖의 전개로 흘러가니, 암만 추측하려 해도 추측할 수가 없지.”

그건 그렇지.

“사실, 그래도 군왕이 고 관인보다는 낫잖아요.”

진소 부인이 말했다.

“뭐가 낫다는 거요? 하나는 체면을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조력자를 구하기 위해서인데, 어떤 게 더 낫다는 말이요?”

진소가 물었다.

고 관인은 어떻게든 정 낭자의 기세를 누르고 자신의 체면을 되찾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이고, 진안 군왕이 정 낭자를 원하는 이유는 고 관인에게서 정 낭자를 뺏으려는 게 아니라 경왕을 위함이니.

모두 각자가 필요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지.

“그건 모를 일이죠. 교랑이 엄청난 미인이라는 걸 잊지 마요. 미모만으로도 경성에서 교랑을 이길 만한 여인은 몇 없다고요.”

미인?

진소가 잠시 멈칫했다. 그는 한 번도 정교랑의 용모를 기억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하마터면 정교랑이 여인이라는 것조차 잊을 뻔했다.

“그런 여인인데, 누가 그런 걸 눈여겨보겠소?”

진소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단랑은 눈여겨봤거든요?”

진소 부인이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대꾸하자, 진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 뜬구름 잡는 소리는. 진안 군왕이 단랑 같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마냥 어린아이였다면 지금껏 무사히 장성할 수 있었을까. 마냥 어린아이였다면 종친 신분에 명성을 드높이고 공로를 세울 수 있었을까.

진소 부인이 진소를 흘겨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난 단지 교랑이 좀 더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에요. 적어도…….”

진소 부인이 훗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적어도 군왕 전하가 고 관인보다는 잘생겼잖아요.”

진소가 실소를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조금은 더 낫지.”

적어도 그 여인이 고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보다는 나아. 그래서 폐하께서 이 혼사를 윤허하신 것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고씨 가문에서 또 난리를 치진 않겠죠?”

진소 부인이 물었다. 진소가 빈 찻잔을 잠시 손에 쥐고 있다가 씩 웃었다.

“고능준이라면, 절대로 또 난리를 치진 않을 거요.”

“아버지, 이 일을 이대로 끝내시겠단 말씀입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난 고 관인이 소리쳤다.

진안 군왕이 황제에게 정교랑과의 혼인을 상으로 청했던 그 순간부터, 고능준은 무척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치 정교랑을 직접 찾아가 혼담을 넣으려던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이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겁니다! 진안 군왕은 도대체 뭘 믿고 우리 고씨 가문의 뺨을 후려친답니까?”

고 관인이 계속해서 목청을 높이는데도, 고능준은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폐하.”

고 관인이 흠칫 놀라서 되물었다.

“예?”

고능준이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한번 말했다.

“폐하를 믿고 그런 게지.”

고 관인이 아, 하고는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폐하께서는 진안 군왕을 너무 총애하십니다! 아무리 더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앞뒤는 가려가면서 결정을 내리셔야죠.”

“왜? 황제가 진안 군왕을 총애하니, 얼마나 좋으냐?”

고능준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버지! 그럼 우리는 이대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겁니까!”

고 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인정해야지. 그러게 내 일찍이 말하지 않았느냐. 이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보아라, 지금이 얼마나 좋으냐?”

뭐가 좋다고 하시는 거지?

고 관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능준이 책을 내려놓고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무려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 아니더냐. 우리의 칼날이 진안 군왕을 향할 수 있도록 말이야. 이 얼마나 좋은 일이야? 이젠 그 두 사람을 한곳에 묶어둔 셈이니, 괜히 귀찮게 따로 손볼 필요가 없어졌어. 좀 좋은 일이더냐?”

“이게 좋은 일이라고요? 정말이에요?”

장씨 저택 안에서 몸종의 목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장 노태야가 성가시다는 듯이 귀를 파는 시늉을 하자, 몸종은 더욱 바짝 다가와 감격에 찬 표정으로 연달아 물었다.

“그럼 정말 아씨의 혼례복을 만들어도 되는 거예요? 네? 진짜로요?”

“안 된다.”

장 노태야의 대답에 몸종은 흠칫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노태야?”

“뭐가 그리 급한 게냐? 이제…….”

장 노태야가 손가락으로 수를 세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겨우 두 명 나왔을 뿐인데.”

장 노태야가 웃으며 옆에서 찻잎을 굽고 있는 노복을 향해 물었다.

“아니면 한 번 맞혀 볼까나? 다음에 나타날 사람이 누구일지?”

노복이 풉 하고 웃자, 더욱 초조해진 몸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노태야, 그럼 군왕 전하께서 저희 아씨와 혼사를 치르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몸종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물었다.

“군왕 전하의 운명이 좋을지 나쁠지에 따라 달렸지. 운이 좋다면, 네 아씨를 쟁탈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새로 나타나 전하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더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전하께서 네 아씨를 떠맡게 되는 꼴이니 전하의 운명이 무척 나쁘다고 해야겠지.”

노복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지자, 몸종이 발을 동동 굴리면서 소리쳤다.

“노태야! 저 좀 그만 놀리세요! 노태야께 더 안 여쭤볼래요. 노야께 여쭈러 갈 거예요!”

몸종이 몸을 홱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성을 내면서 떠나는 몸종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장 노태야가 고개를 저었다.

“놀린 게 아닌데 말이지. 그 여인이 얼마나 간사한 사람인데. 그 여인과 혼례를 치르게 되면 분명히 손해라는 손해는 다 보고, 방패막이밖에 안 될 텐데, 그걸 어찌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냔 말이야. 얼른 피해도 모자랄 판에 하나같이 행여나 뒤질세라 그 여인을 갖고 싶어 안달이니. 참으로 바보 같은 자들이로구나.”

노복이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노태야,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지요. 노태야께서도 그 여인 덕분에 지금 얼마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반근처럼 좋은 몸종도 하나 얻고, 그 여인에게 보낸 몸종도 매년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온갖 선물이며, 먹을 것이며 보내오지 않습니까. 몸종 하나를 보냈더니, 좋은 몸종 둘을 얻게 된 셈이죠.”

노복의 말에 장 노태야가 그를 쳐다보았다.

“어라? 네 말은 그럼 지금 내가 바보라는 소리냐?”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혼인 소식은 알 만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지만, 반나절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탓에 아직은 소식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주복이 정씨 저택 앞에서 대문을 향해 발길질을 하려던 찰나, 그의 뒤에서 다급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자, 말에서 뛰어내려 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진호가 보였다.

“십삼, 자네가…….”

주복이 입을 열었지만, 진호는 그를 무시한 채 곧장 정씨 저택의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절름발이 소리를 들었던 진호였지만, 지금은 다른 명문가 자제들에 뒤지지 않는 기마와 활쏘기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은 전장에서 쓰는 석궁의 활시위를 당길 수 있을 정도의 팔 힘을 가진 진호인지라 그가 온 힘을 다해 문을 치자 주복이 무식하게 문을 발로 차서 열 때만큼 큰 소리가 울렸다.

쿵 소리와 함께, 완전히 닫히지 않았던 측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안팎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육공자님.”

문지기들이 주복을 보자, 곧바로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예를 표했다.

내가 친 거 아니거든?

주복이 속으로 외쳤지만, 자존심 센 그가 해명을 늘어놓을 리는 없었다.

“아, 실례했네. 문짝을 바꾸든가 해야 하지 않겠나? 영 튼튼하지가 않군.”

자신의 행동에 놀랐는지, 진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여유로운 척을 했다. 문지기들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정 낭자는 안에 있는가? 진…….”

진호가 느긋하게 이어서 말하던 찰나, 주복이 그를 세게 밀치고는 소리쳤다.

“남의 집 문짝까지 부쉈으면서 시치미는. 여기서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거야?”

주복이 진호를 지나치고는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진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웃으며 주복을 따라갔다.

사환 하나가 두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정교랑에게 알렸다. 대청으로 나온 정교랑이 두 사람에게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자, 두 몸종이 차를 내왔다.

“반근은 어디 갔어요?”

진호가 정교랑의 뒤로 물러난 두 몸종을 보고는 웃으며 물었다.

저 자리는 항상 작은 반근의 자리였는데. 큰 반근은 점포들 때문에 바쁘다 보니, 자주 못 보는 데 익숙하고.

“볼일이 있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두 반근이 다 바쁘다는 말인가?

진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새 반근을 한 명 더 들일 생각은 없습니까? 내가 한 명 선물할게요.”

정교랑이 진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주복이 마른기침을 했다.

“왜? 자네도 보내려고? 내가 먼저 말했으니 내가 먼저네.”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진지한 얘기 좀 해.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주복이 진호를 흘겨보면서 화를 냈다. 진호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진호가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드디어 말하는구나, 드디어!

주복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가 무릎 위에 놓았던 손을 점점 더 세게 주먹 쥐었다.

“낭자도 알다시피 지금…….”

진호가 이어서 말하던 찰나, 주복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정 안 되면, 서북으로 가자. 서북도 나쁘지 않아. 공로도 세우고 업적도 쌓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꼭 경성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

정교랑과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았다.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야.”

진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왜 안 되는데? 죄도 없는 우리 주씨 가문을 벌하기라도 하겠어?”

“그야 당연하지. 언제부터 사람을 벌하는 데 이유가 필요했나? 육낭, 이 일은 이제 더는 애들 장난이 아니야.”

진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누가 애들 장난이래? 내가 너와 혼사를 치르겠다면 치르는 거야.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어.”

드디어 말했다, 드디어 말했다고!

게다가 내 입으로 말했어! 십삼이 나 대신 말한 게 아니라,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말했단 말이다!

“자네는 안 돼.”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안 된다고? 이 자식이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고씨 가문이 나섰을 때부터 자넨 이미 글렀어. 지금은 진안 군왕까지 나섰으니, 자네는 더더욱 안 되지.”

이어지는 진호의 말에 주복이 흠칫 놀랐다.

진안 군왕?

진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 낭자, 오늘 오전에 진안 군왕이 폐하께 낭자와의 혼사를 청했습니다.”

진호의 예상과는 달리, 방 안의 분위기는 이 소식을 전하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 낭자의 표정은 여전하네. 정 낭자야 뭐, 항상 이랬으니까. 아마 황제가 정 낭자를 후궁으로 들이겠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자, 주복은 소식을 듣고도 놀란 표정이 아니라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뭘 알겠다는 표정인 거지?

“어제 진안 군왕이 그 얘길 하려고 온 거였구나.”

어제? 진안 군왕이? 여길 왔다고?

정교랑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진호는 한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진호의 귓가에 어머니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십삼, 십삼, 진안 군왕이 폐하께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했대!”

진안 군왕?

진호가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잰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온 진 부인을 쳐다보았다. 항상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는 진 부인이지만, 지금은 초조함을 숨길 수 없는 눈빛이었다.

“어제 정 낭자에게 확실하게 이야기한 거 맞아?”

어제는…….

“아직 부득이하게 혼사를 치러야만 하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사소한 일이니, 별로 급하진 않습니다.”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소한 일이라니!”

진 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마음에 품은 여인과 혼인을 맺는 것이 언제부터 사소한 일이디?”

“네, 네, 어머니, 이제 더는 사소한 일이 아니라, 아주 큰일이네요. 지금 당장 정 낭자와 얘기해 보러 가겠습니다.”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 부인이 손으로 그를 떠밀며 재촉했다.

“어서 가거라, 어서. 설령 진안 군왕이 아니라, 황자가 나선다고 해도 우리 진씨 가문은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진호는 여기서 자신이 조금만 더 늑장을 부렸다가는, 아예 진 부인이 직접 정교랑을 찾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내였다면, 벌써 소매를 붙들어 매고 정 낭자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을 거다.”

진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소매를 붙들어 맬 정도면, 거의 뺏어오는 거 아니에요?”

진호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무려 정 낭자인데,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빼앗아 올 만하지 않겠어?”

진 부인이 진호를 흘겨보았다.

소자도 당연히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빼앗아 오고 싶죠.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소자는 감히 정 낭자를 뺏을 수 없는 겁니다. 소자 때문에 정 낭자가 난처해질까 봐, 멸시당할까 봐, 기분이 안 좋아질까 봐서요.

정 낭자가 저를 싫어하게 될까 봐, 정 낭자가 저를 미워하게 될까 봐서요.

“어서 가 봐. 진안 군왕까지 나온 판국에, 일이 더 지체되어서는 안 돼.”

진 부인이 진호를 또 떠밀며 재촉했다.

진안 군왕! 역시나 또 그자로구나!

그럴 리 없기는, 그런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지.

“마음이 점점 더 커지다 보니, 본인 신분도 망각했나 봅니다.”

진호가 천천히 말했다.

이 일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야.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거겠지. 오히려 그가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했을 거야.

그가 나섰다고 해도 우리는 겁낼 거 없어. 나와 정 낭자가 힘을 합치면, 절대로 난처한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거야. 예전에도 우리 둘이서 해냈었잖아.

  •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 말만 해요. 이번에는 누굴 해치우면 됩니까?

낭자, 말만 해요. 우리 둘이 뭉친다면 아무것도 무서워할 게 없어요. 낭자가 입을 열고 내게 말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꼭 그 일을 해낼 테니까, 말만 해 줘요.

제발, 제발 말 한마디만 해 줘요. 제발요.

진호는 자신 앞에 조용히 앉아있는 정교랑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 진안 군왕이 온 이유가 정말 이 일 때문이었나?”

진호의 귓가에 주복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주복의 목소리가 급기야는 고막을 쿵쿵 때려왔다.

“진안 군왕이 폐하께 혼인을 청한 게, 두, 둘이서 이미 얘기가 된 일이었어?”

주복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는 둘이서라는 몇 글자를 몹시 힘겹게 뱉어냈다.

“맞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맞다고 대답했어.

주복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대답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무슨 말을 더 물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 사람은 안 됩니다! 진안 군왕은 안 돼요. 그 사람은 낭자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진호가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곧추세우고 소리쳤다.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다 똑같아요.”

저 빌어먹을 똑같다는 말!

“아니요. 그자는 다릅니다.”

진호가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감정을 다스려야 해. 별거 아니야. 다 똑같아. 고 관인이 정 낭자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생각하자. 별일 아니야.

“그자의 말을 믿지 말아요. 이건 단순히 신분이나 지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신분과 지위 말고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죠.

그자는 군왕이니까 고씨 가문보다 존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권력도, 세력도 없어요. 황실에 기반이 있는 자가 아니기도 하고, 폐하께서 고씨 가문만큼 중용하는 자도 아니고요.

자신의 신분이 너무도 고귀해서, 낭자가 시집가게 되면 아무도 낭자를 건드릴 수 없을 거라는, 좋은 날만 계속될 거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으면 안 됩니다. 다 거짓말이니까요!

그자가 낭자를 원하는 이유는 고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낭자가 있어야만 자신이 조정에 설 자리가 생길 테니까요. 낭자와 고씨 가문, 그리고 태후까지 등에 업게 되면, 폐하께서는 분명히 그자를 중용할 것이고, 고씨 가문을 견제하는 도구로 쓰실 겁니다.

그런 식으로 그가 황제에게 중용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 상호 견제라는 게 뭡니까? 힘과 권력이 대등해지는 것이, 상호 견제 아닙니까. 폐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신다면, 폐하께서는 이제부터 진안 군왕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겠다는 뜻입니다. 그자를 이용해서 고씨 가문을 견제하겠다는 뜻은, 똑같이 고씨 가문을 이용해서 진안 군왕을 견제하겠다는 뜻이죠.

지금부터 폐하는 진안 군왕을 감싸주지 않을 거고, 고씨 가문이 그를 어떤 식으로 견제하든 방관하실 겁니다. 진안 군왕이 낭자를 곁에 묶어 두고, 둘이서 고씨 가문을 상대하도록요.

그럼 두 세력은 끊임없이 싸우다가, 결국 양측 모두 큰 손해를 보게 되겠죠. 그 사이에 태자가 제위에 오르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다면, 태자는 황권에 위협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없앨 겁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듯이 쉬지 않고 말하는 진호 때문에 함께 안에 있던 사람들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교랑, 그가 그런 식으로 한 말을 믿지는 않을 거죠? 그렇죠?”

정교랑이 애타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진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 말들을 믿을 수가 있어요! 그렇게 똑똑하면서, 왜 이런 것들은 알지 못하고 그의 말을 믿느냔 말입니다!”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청을 높였다.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진호가 흠칫 놀라고는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그럼 뭐라고 했는데요?”

“내게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라면서, 내가 그 일을 이뤄 줄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혼인은 정 낭자에게 있어서 사소한 일이지만, 진안 군왕에게는 중요한 일이니까, 그 일을 이뤄달라고 부탁했다고?

진호는 잠시 넋이 나갔다.

이런 뻔뻔한 자식!

“그 사람한테는 중요한 일이겠죠.”

진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모든 것을 통찰한 듯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봐요. 그자는 딱 그런 뜻으로 청혼한 거라니까요? 낭자를 얻는 게, 그 사람한테는 몹시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요.”

“그래요?”

정교랑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네.”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아니, 그 뜻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빌어먹을, 그 자식이 낭자를 얼마나 좋아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칭찬하려고 한 말이 아닌데.

정교랑이 또 한 번 웃음 짓고는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어떤 뜻이든 간에,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더는 평정심을 찾지 못한 진호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낭자가 고마워할 거 없어요. 내가 마음 쓴 것도 없고요. 내, 내 뜻 잘 알겠어요? 아무튼, 이 혼사는 절대로 승낙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된다고요.”

진호가 혼자 피식 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걱정하지는 말아요. 그자가 폐하께 낭자와의 혼사를 청한다 하더라도, 설령 폐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더라도, 이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해결할 필요 없어요. 별일도 아닌걸요. 그리고 이미 내가 그 사람과 약조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미 내가 그 사람과 약조했어요?

이미 내가 그 사람과 약조했어요.

결국 이 말을 듣게 되었네. 낭자의 입을 통해서 똑똑히 들었어.

실내에 숨 막힐 정도의 적막감이 맴돌았다.

정교랑의 뒤에 가만히 앉아 있던 두 몸종은 저도 모르게 몸이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왜 이 안에 들어온 뒤로 쭉 오금이 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말들이 비바람처럼 쏟아지고 있어. 그런데도 온몸이 굳어지고 숨쉬기가 힘들어져.

좀 전과 달리 지금은 아무도 말을 하고 있지 않아서, 마치 실내가 깊은 늪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서서히 잠기는 느낌이 들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워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로 늪에 빨려 들어가는 절망감까지 느껴질 정도야.

살려 주세요, 저희 좀 살려 주세요.

저희 생각이 틀렸어요.

반근은 늘 아씨의 뒤에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차를 따르는 것조차 잘 안 하길래, 참 마음 편하고, 몸 편한 하녀라고 생각했는데…….

저희가 틀렸어요. 이 자리는 하나도 편하지 않아요. 너무 고통스럽고 무서워요.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숨이 막힌 몸종들이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기 직전, 진호가 실내의 정적을 깨트렸다.

“낭자가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거예요?”

진호가 애써 웃음을 짜내면서 물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단지 혼사를 치르려는 거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저 말에는 분명히 다른 뜻이 숨어 있을 거야. 빨리 생각해 내야 해, 빨리.

진호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떼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혼사, 혼사를 치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죠. 적어도 이 소식이 퍼지면, 어쩌면, 아마도…….”

진호가 말을 더듬다가 대뜸 방 밖의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빌어먹을! 어쩌면은 무슨! 아마도가 어디 있어!

혼사가 소꿉놀이야? 광대놀이야? 오늘 한다고 했다가, 내일 다시 처음부터 얘기하자고 할 리가 있겠냐고!

이 소식이 퍼지면, 그때 가서 없던 일이 될 수 있겠냐고!

혼사는 인륜지대사라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라야만 하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하는 일인데. 아무렇게나 말을 바꾸면 천하의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냐고!

실내에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 두 몸종은 숨 막히는 정적을 참지 못하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왜 그에게 시집을 가려는 겁니까?”

진호가 목소리를 낮춘 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진 공자, 이건 내게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누구와 혼사를 올리더라도 다 똑같을 거라고 누누이 말했었잖아요.”

정교랑의 담담한 목소리가 진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렇지. 정 낭자는 항상 저 말을 했고, 실제로도 여러 번 저 말을 지켰지.

왕십칠에게도, 고 관인에게도 시집갈 수 있는데, 진안 군왕이라고 해서 못 갈 건 없지.

“그럼 난 어떻습니까?”

진호가 몸을 돌려 앞으로 한걸음 내디디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 나한테 시집와요. 나한테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진 공자, 당신은 달라요.”

왜 이럴 때만 다른 건데요! 왜 이럴 때만 나는 똑같다고 하지 않는 거냐고요!

진호가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고 자신의 다리를 세게 내리쳤다.

낭자가 내 다리를 고쳐 줬으니까. 낭자가 내 다리를 고쳐 줬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 사람들과 다르고 모두와 다를 거야. 그래서 나와 거리를 두고, 나를 밀어내고, 나를 피하는 거겠지.

“그럼 나도 있잖아! 나도!”

방 안에 들어선 이후 진안 군왕이 그 일 때문에 온 거냐며 묻고는 줄곧 입을 다물고 앉아 조용히 듣기만 하던 주복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정교랑, 나한테 시집와!”

주복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제 이미 그 사람과 약조해서요.”

어제?

주복이 멈칫했다.

어제 내가 길가에 잠깐 멈춘 사이, 군왕이 말에서 내려 먼저 정교랑을 만나러 들어갔던 그때?

고작 그런 간발의 차로?

만약 어제 내가 그를 제치고 먼저 여기에 들어왔더라면, 만약 내가 먼저 청혼을 했더라면, 어쩌면 내가 이 여인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리 단순하게 결정했다고?

주복은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방 안에 들어와 진호를 통해 그 소식을 알게 된 이후로,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했다. 진호와 정교랑이 무슨 대화를 하든 간에 옆에서 눈만 끔뻑일 뿐,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누가 먼저 왔냐를 따지는 거예요? 정방, 내, 내가 먼저 당신을 알게 됐잖아요.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예요. 내가 먼저라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내가 먼저 알게 된 건, 그 사람이에요.”

아니라는군. 낭자가 또 아니라고 했어.

  • 그게 아니라,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 해결할 필요 없어요. 별일도 아닌걸요. 그리고 이미 내가 그 사람과 약조했어요.

  • 아니요. 내가 먼저 알게 된 건, 그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낭자는 계속 나를 부정하고 그 자식을 인정하고 있어. 낭자가 그 자식을 인정한다고.

진호가 아무런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정교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저택 본채의 대청이 아니라 정교랑의 거처였다.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는 강주로 돌아갔지만,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정교랑은 널찍한 본채로 옮기지 않고 여전히 다소 협소한 거처에서 생활했다.

세 사람에 몸종 둘까지 좁은 방 안에 있다 보니, 진호와 정교랑 사이의 거리는 고작해야 한 걸음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게다가 진호는 정교랑의 코앞에서 정교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교랑이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한 번도 가깝지 않았던 사람처럼, 단 한 번도.

진호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구나. 난 모르는 일이다 보니 낭자에게 웃음을 샀네요.”

“공자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죠. 우습지 않아요.”

정교랑의 대답에도 진호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어떻게 우습지 않단 말입니까. 난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우스운걸요.

진호가 고개를 들어 문밖의 여름 경치를 내다보았다. 여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 진짜예요, 진 공자님. 저희 사돈댁 일이 진짜 그렇다니까요?

  • 저희 노부인께서 그 바보의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이름이 교랑이에요. 교교라고도 하고요.

교교. 병주에서 홀로 강주까지 돌아온 교교.

진호가 손으로 바둑판 위에 선 하나를 슥 그었다.

교교는 어떤 사람일까?

  • 반근이 썼던 공책도 돌려보내고, 새로 들인 몸종의 이름도 반근이라고 짓다니.

진호가 연못 가득 뒤덮은 연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바보는 정말 속 좁고 뒤끝 있는 사람인가 보네.

  • 아씨, 벌거벗고 있던 사람이 또 왔어요.

진호가 고개를 들자 문 안에 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제법 굵어진 눈송이가 흩날렸다. 새하얀 눈보라 속에서 품이 큰 옷을 입은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은 더없이 눈부셨다.

이 사람이 바로 도관에 10년 가까이 버려져 있다가, 홀로 천 리 길을 돌아온 교교 낭자구나. 이 사람이 바로 날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뚝딱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교교 낭자구나.

이 사람이 바로 차와 음식에 까다롭고 언제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교교 낭자구나. 이 사람이 바로 보기도 전에 소문으로 알 수 있다던 그 교교 낭자구나. 이 사람이 바로 일단 죽을 지경에 이르러야만 목숨을 살려 낸다는 그 교교 낭자구나.

  • 아니요. 내가 먼저 알게 된 건, 그 사람이에요.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젓다가 헛웃음을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니야, 어쩌면, 사실은, 예전에…….

진호가 또 고개를 저었다.

예전 그때, 낭자가 보수사의 차를 맛보고 싶다기에, 내가 명해 선사와 바둑 한 판을 두고 얻어온 차나무를 선물하러 왔을 때…….

그때야. 맞아, 그때가 틀림없어.

내가 차나무를 선물하려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는데, 낭자의 앞에 다구가 놓여 있었고, 낭자의 반대편에 놓인 방석에는 사람이 앉았다 간 흔적이 있었어.

그때만 해도 낭자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낭자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는데.

그때 그 손님이, 바로 진안 군왕이었구나.

  • 낭자, 차를 마시고 있었군요?

진호가 킁킁 냄새를 맡으며 물었다. 여태 마셔왔던 차와 다른 향이었다.

  • 이건 무슨 차예요?

  • 그쪽이 마실 차는 아니에요.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요.

진호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때 나는 정 낭자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엄두도 못 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정 낭자와 마주 앉아 낭자가 직접 우려 준 차까지 마셨구나.

선착순이라, 선착순. 뒤늦게 낭자를 알게 된 사람은 나였구나.

늦은 사람은 나인데, 어떻게 그와 비교를 하겠어. 그자를 먼저 알게 됐다는데, 내가 어떻게 비교가 되겠어.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이길 수 있겠어.

정말 우습구나. 참으로 우스워.

“정 낭자, 그렇다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진호가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답례하자,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만 해 줘요. 낭자는 한동안 혼례 준비로 무척 바쁠 테니까요.”

진호가 정교랑의 뒤에 있던 두 몸종을 쳐다보고는 정교랑에게 물었다.

“반근들이 다 바쁜가 본데, 몸종은 충분해요? 어머니께 몇 명 더 골라오라고 부탁드릴까요?”

“아니에요. 바쁠 게 없어서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하긴, 혼사는 집안일이니까요.”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복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웃었다.

“경성에는 사촌 오라비 일가도 있고, 집안에 사람도 많이 있을 테니, 혼사 준비에는 차질이 없겠군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호가 정교랑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다시 한번 답례했다.

몸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던 진호는 갑자기 멈춰 서서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몸을 돌렸다.

“아 참, 아직 간식 안 줬어요.”

진호가 웃으면서 정교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간식?

주복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호를 쳐다보았다.

“알겠어요.”

정교랑이 시녀들에게 과일 절임을 찬합 가득 채워 진호에게 주라고 했다.

“갈게요.”

진호가 찬합을 받아들고는 정교랑을 향해 씩 웃었다.

진호가 몸을 돌리고 대청 밖으로 나갔다. 느릿느릿 걷던 진호의 발걸음은 차츰 빨라졌고, 가림벽을 지나자 더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복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멀뚱멀뚱 서서 진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갔어? 이대로 간다고?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자, 그의 시선을 느낀 정교랑도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새카만 눈동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저 눈동자.

주복이 고개를 홱 돌리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육공자님, 조심히 가십시오.”

문 앞에서 웃고 떠들던 시종들이 밖으로 걸어 나오는 주육낭을 보고는 곧바로 예를 갖추어 그를 배웅했다. 주복은 시종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대문을 나섰다.

대문 앞에 세워 두었던 말이 없어진 사실을 알아챈 주복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빠르게 걸어가는 진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말고삐를 쥐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 말굽 소리를 내며 진호의 옆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십삼!”

주복이 외쳤지만, 진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두 팔로 무언가를 감싼 채 걸어가는 진호의 뒷모습을 보던 주복은 어쩐지 오늘따라 그가 더욱 왜소하고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팔로 뭘 안고 있는 거지?

아, 간식이 담긴 찬합이겠군.

“십삼, 십삼.”

주복이 진호를 서둘러 쫓아갔다. 진호의 걸음걸이가 워낙 빨랐던지라 주복은 어쩔 수 없이 큰 보폭으로 뛰어가야만 했다.

진호 가까이 다가간 주복이 진호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진호가 앞만 보고 걷는 탓에 주복은 진호의 힘에 부쳐 두어 걸음 끌려가고 말았다.

“왜?”

진호가 주복에게 붙잡힌 게 영 언짢다는 기색을 내비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복은 입만 우물쭈물할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복은 진심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머릿속은 새하얗기만 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설마 이번에도 간식을 달라고 하지 않은 거야?”

진호가 웃으면서 찬합을 더욱 꽉 끌어안고는 한쪽 팔로 주복을 막으면서 재차 말했다.

“내 거 뺏을 생각은 마. 갖고 싶으면 자네도 낭자한테 달라고 해. 이건 낭자가 내게 고맙다는 의미로 준 거니까.”

진호의 말을 듣자, 새하얗기만 했던 주복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몇 년 전 그때도 그 여인의 혼사 때문이었어. 정씨 가문에서 혼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 여인을 아무한테나 시집 보내려고 했을 때도, 나와 십삼이 다급하게 그 여인에게 어울리는 신랑감을 찾아주려고 난리를 쳤지. 지금처럼.

옛날 생각에 주복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난 일이 있어서, 두 사람과 놀아 줄 수 없어요.

  • 저거 가져가서 먹어요. 마음은 고마운데, 다른 데 가서 놀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구나.

주복이 진호와 진호의 품에 있던 찬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똑같아.

“십삼.”

주복은 말을 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진호는 뭐가 그리 바쁜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주복은 더는 진호를 붙잡지 않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점점 더 멀어지는 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것도 나쁘지 않지. 그 여인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건 무척 잔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쭉 어린아이처럼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사실 그게 잔인하다기보다는, 이 상황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야. 잔인한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어이, 비키쇼!”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여기서 한참을 서 있더니만.”

“바보야 뭐야? 저리 비키라니까!”

때때로 행인들과 마차가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면서 길 한복판에 서 있던 주복의 옆을 지나갔다.

시끄러워 죽겠네!

주복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자리를 떴다.

“공자님, 말은요?”

“걸어서 돌아오신 거예요?”

“공자님, 공자님?”

주복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누군가가 주복의 팔을 붙잡았고, 그 덕분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육낭, 무슨 일이니?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어딜 다녀온 게야?”

주 부인이 놀란 기색으로 주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복이 아, 하고 대꾸했다.

“그 애한테 갔다 왔어요.”

주복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주 부인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주 노야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냐? 왜 그따위 몰골을 하고 있어?”

주복이 또 한 번 아, 하고 대꾸했다.

“그 애 혼사가 정해졌어요.”

정해졌다고?

주 노야 내외가 깜짝 놀랐다.

“누구랑? 누구랑 혼례를 올리기로 했는데?”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진안 군왕이요.”

주복의 대답에 주 노야 내외가 흠칫 놀랐다.

주 부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우리 육낭이 아니라? 이 녀석이 기뻐서 저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진안 군왕이라…….

“진안 군왕이라고?”

주 부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게 진짜야?”

“가짜일 리 있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폐하께 정 낭자와의 혼인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 애도 좋다고 했고요.”

주복이 대답했다. 곧이어 마당 안에 주 노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이라니! 우리 교교, 역시 우리 교교는 남다를 줄 알았어!”

“노야, 노야, 무려 종친이에요!”

“그야 당연하지! 게다가 황실과 아주 가까운 종친이야! 나중에는 친왕 작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노야, 그럼 우리 교교가 왕비가 된다는 뜻인가요?”

“왕비라, 우리 교교는 황비를 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지.”

“어서, 어서 교교한테 사람을 보내서 제대로 좀 물어보거라.”

주복은 시종일관 멍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서 마당 안이 시끌벅적해졌다가 조용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 물어보셨으면, 전 이만 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주복이 그제야 뻐근해진 목과 어깨를 두어 번 돌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낀 채 몸을 흔들거리며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주복이 귀가와 동시에 축제 분위기가 된 주씨 가문과는 반대로, 진씨 가문에는 진호가 돌아온 뒤로 침울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가서 좀 봐야 하지 않겠어?”

여종 몇 명이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렸다.

“가지 말아라! 가서는 안 된다.”

진 부인이 손으로 여종들을 제지했다.

“하지만 십삼공자님께서…….”

여종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 아니니? 나한테 와서 우는소리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고, 십삼이 원칙을 어기고 싶다 해도 정 낭자가 원칙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니까. 십삼이 속상해서 좀 울고 싶다는데, 괜히 우리가 가서 방해하지 말자고.”

진 부인의 말에 여종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게 평소 같지가 않아서 말이죠.”

진 부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겠니. 십삼은 어렸을 때부터 정상인이 되고 싶어 했어. 그러다 보니 십삼은 정상인의 이상적인 반응을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꾸며 냈을 뿐, 진정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지.

하지만 지금 십삼은 그런 정상인들의 반응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거니까, 당연히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게지. 아마 지금 십삼은, 절대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걸 거야.”

진 부인이 말하다 말고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십삼 얘기는 그만하자. 두 사람 얘기만 들어도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니까.”

여종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척 속상했지만, 진 부인의 말을 듣고는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속상한 일을 두고 윗전 앞에서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여종들의 표정은 몹시 우스꽝스러워졌다.

“부인,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나이가 꽤 있는 여종이 진 부인을 타이르듯 말하자, 진 부인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아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농담한 게 아니야.”

진 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십삼의 반응이 이상한데도 내가 가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어?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비정상이라는 걸 들키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내가 그 비정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나까지 십삼에게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면, 자신이 비정상적이란 걸 남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십삼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

진 부인의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얘기에 여종들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여종들이 진 부인의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진 부인은 걸음을 옮겼다. 여종들도 서둘러 진 부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안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 어머니한테 들켜버렸네요. 우는 게 정말 못났는데, 너무 창피한걸요.”

“십삼, 누가 너 우는 거 보러 왔대? 이 어미는 너를 위로하러 온 거야.”

진 부인이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당당한 모습으로 말했다.

“십삼한테 간식 좀 갖다 줘. 위로 좀 해줘야지.”

대청 문 앞에 다다르자, 진호가 팔걸이 책상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을 본 진호는 자신의 손에 쥐여 있던 과일 절임을 높이 흔들었다.

“이미 있어요, 그 여인이 만들어 준 거예요.”

진호가 웃으면서 말하자 진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정 낭자도 참.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또 너한테 선물을 준다니? 괜히 더 속상하게?”

진 부인이 일부러 화난 투로 말했다. 진호가 웃으면서 눈썹을 으쓱했다.

“정 낭자는 원래 그렇잖아요. 낭자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소자가 어떻게 그 여인에게 일편단심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진 부인이 입술을 삐쭉였다.

“그럼 계속 일편단심 해라. 나는 바빠서 이만.”

진 부인이 장난스럽게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몸을 돌리자, 여종들도 재빨리 진 부인의 뒤를 따라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몸을 돌린 진 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 대신에 그녀의 미간에는 슬픔이 드리워졌다.

진 부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진호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쥔 과일 절임을 천천히 자신의 입안에 넣었다.

“참 달다.”

진호는 천천히 과일 절임을 씹으면서 자신의 품 안에 있던 찬합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이랑 똑같아, 예전이랑 똑같아.

그러니까 급할 거 없어. 이 혼사도 절대로 성사되지 않을 거야. 그때는 그 얼토당토않던 놈을 정혼자라고까지 불렀는데, 결국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잖아.

진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가 찬합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정교랑, 이번에도 그렇게 될 거죠? 그렇죠, 맞죠?

이틀 뒤, 사예감(司禮監) 사람들이 정씨 가문 저택에 들어섬과 동시에,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혼사를 올린다는 소문이 경성 전역에 퍼지면서 저잣거리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덕승루 화괴 다툼에서 고 관인이 정교랑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했다는 미담이 퍼진 지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덕승루에 웬 혈기왕성한 사내가 찾아와 고 관인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원수라며 화살을 쏘았다.

사내가 쏘아낸 화살은 경성 사람들의 심장을 관통했지만,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신랑감이 등장한 것이다.

황족, 군왕, 종친.

파란만장한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인물들 중엔 무관도 있고, 문관도 있고, 조정의 권력가도 있으며 죽마고우인 어린 무장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종친까지 나서서 정교랑과의 혼인을 원한다고 했다.

정교랑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벌써 책 한 권은 쓰고도 남았을 텐데, 정교랑의 혼인을 둘러싼 새로운 우여곡절 덕분에 경성의 이야기꾼들은 신이 나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식도 잊은 채 새로운 판본의 <신선 낭자 혼례기>를 써 내려갔고, 경성의 다리 위, 찻집, 식당, 주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황궁 안. 평왕은 아무리 정사가 바빠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이름이 났겠군.”

평왕이 냉소를 보이자, 붓을 들고 글씨를 써 내려가던 진십팔랑이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린 내시가 평왕의 옆으로 비켜서서 아첨의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별의별 이야기가 다 있던데, 어찌나 듣기 거북하던지, 정말…….”

평왕의 얼굴에 음침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원을 이룬 게야.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니, 본왕도 당연히 군왕을 축하해 줘야지.”

무미건조하게 대꾸하던 평왕은 진십팔랑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전하께서는 글씨 연습을 더 하지 않으셔도 돼요. 문서를 쓰실 때 조금만 신경 써서 쓰시면 될 거예요.”

진십팔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진십팔랑은 궁에 있는 공주들에게 서예를 지도하고 있었다. 똑똑하고 부단한 노력을 쏟는 평왕을 가르칠 때와는 달리 공주들을 가르칠 때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평왕이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학문의 길에 오른 자는 단 하루도 게을러서는 아니 되며, 학문의 세계는 끝이 없으니 본왕은 자만해서는 아니 되오. 부디 낭자도 본왕을 도와주길 바라오.”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이러시니, 뭇 학자들이 창피하겠사옵니다.”

“과찬이오.”

평왕은 입으로는 과찬이라고 말하면서도 몹시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찬이라니요. 전하처럼 이렇게 변함없이 학문을 수양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해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겉과 속이 달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이지요. 처음에 아무리 큰소리를 쳐 봤자, 결국에는 그저 그렇다는 게 드러나니까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마치 정 낭자처럼요.

처음에는 정말로 어떤 집안으로 시집을 가든 상관없고, 아무것도 재고 따지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여러 소문으로 사람들의 신임과 명성을 얻고는 결국 황족한테 시집을 가는 것처럼요.

진십팔랑이 다시 붓을 쥐고 입꼬리를 올렸다.

정 낭자도 알고 보면 그저 그런 사람인 거지요.

말 몇 마리가 역참 문 앞에 도착하면서 역참 앞이 시끌벅적해졌다.

“정 대노야, 이 몇 필은 어떠십니까?”

역승이 물었다. 정 대노야가 말들을 힐끗 보고는 역승에게 물었다.

“마차를 몰기에 최상급인 말들이오?”

역승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가 직접 고른 놈들입니다.”

“역승의 눈썰미를 믿어 보지.”

정 대노야가 웃으며 역승에게 묵직한 돈주머니 하나를 던져 주었다.

“수고 많았소. 차나 한잔 마시면서 목 좀 축이시오.”

역승이 돈주머니를 받고는 활짝 웃었다.

“정 대노야,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감사합니다.”

역승이 서둘러 말 장수를 불러오자, 정 대노야의 사환은 흥정도 없이 말을 사들였다.

“정 대노야는 돈을 참 시원시원하게 쓰시네. 말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얼마 쓰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또 말을 바꾸시다니.”

“심지어 가격도 안 따지신다니까? 수고비라면서 돈을 이만큼씩이나 주시고. 우리 역참에 매일 저런 분들만 왔으면 좋겠네.”

“듣기로는 집안 어르신이 몸이 편찮으셔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라던데.”

“이야, 그렇다면 엄청난 효자시군.”

창밖으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지나가자, 정 이부인이 분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뭐라고? 정 대노야가 돈을 시원시원하게 쓴다고?

저 인간이 언제부터 그리 돈을 시원시원하게 썼다고? 웃기지도 않아. 예전에는 자기 입에 들어가는 차에만 돈을 들였지. 그뿐이야? 집안사람들이 자기가 아끼는 차를 한 잔이라도 더 마셨다가는 아주 살덩이를 떼는 것처럼 아까워했어!

돈 쓰는 데 시원시원한 사람들이라고? 조 집사도 그러고, 반근도 그러더니, 이제는 정 대노야까지.

어떻게 저렇게 돈을 펑펑 쓰겠어? 그야 자기네들 돈이 아니니까 그렇지!

그 애는 정말 바보가 틀림없어. 그 돈을 내 손에 맡겨 준다면, 절대 저런 식으로 돈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텐데!

정 이부인이 씩씩대면서 몸을 홱 돌렸다.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여종이 재빠르게 부축한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부인, 조심하세요.”

조심하라는 말에 정 이부인은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세간의 소문처럼 정말로 정강이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인대가 늘어지고 뼈에 금이 간 탓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다리는 띵띵 부어 있었다. 뼈가 다 붙기도 전에 이렇게 마차를 타고 먼 길을 떠나게 되니, 정 이부인은 정말로 가는 길에 뼈가 부러지진 않을까 근심이었다.

“부인, 식사하세요.”

문밖에서 여종이 밥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뭐가 급하다고 벌써 밥을 차려? 입맛 없다.”

정 이부인이 언짢은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좀 드셔야죠. 말을 바꾼 것을 보아하니, 곧 길을 재촉할 듯해요. 또 길에 오르면, 언제 다시 쉴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여종이 말했다.

정 이부인은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정 이부인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종들이 서둘러 정 이부인을 말리면서 다독였다.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여종들은 위로보다는 타이르는 말을 많이 했다.

여종들은 이미 정 대노야가 기세를 역전하고, 예전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됐다는 것을 눈치챘다. 게다가 소문을 통해 정 이노야가 관직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정말 정 대노야의 말대로 정 노부인의 건강이 몹시 위태로운 거라면, 어쩌면 이 길은 정 노부인을 마지막으로 보러 가는 길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 이노야는 관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강주에서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삼년상을 치르고 난 삼 년 후의 일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우리는 이부인을 모시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대노야지.

여종들이 정 이부인을 간신히 어르고 달래서 밥을 먹였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도록 정 대노야는 떠나자는 말이 없었다.

“가는 거요, 마는 거요? 갈 거냐고 말 거냐고!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또 금방 해가 져서 야영해야 할 텐데!”

정 이노야가 정 대노야의 방 안에 들어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방 안에 있던 정 대노야는 서신 한 장을 손에 쥔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집에서 온 겁니까?”

정 대노야의 표정을 본 정 이노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어머니께서 벌써…….

“사낭이 보낸 것이다.”

정 대노야가 대답했다.

그 요망한 것이 결국 태후에게 졌나? 그럼 축하할 만한 일인데.

정 이노야가 기대 섞인 눈빛으로 정 대노야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교랑의 혼사가 정해졌다는군.”

정 대노야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말했다.

혼사가 정해졌다고?

“누구랑요?”

정 이노야가 소리쳤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아주 황당하기 짝이 없어!

딸내미의 혼사가 정해졌는데, 친아비는 아무것도 모르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진안 군왕.”

정 대노야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

고 관인도 아니고, 무려 진안 군왕이라니!

정 이노야는 귓가가 웅웅 울리는 듯했다. 너무 갑작스럽고 큰 경사라서 그런지, 정 이노야는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어서, 어서 마차를 준비해서 경성으로 돌아갑시다. 어, 어서요.”

정 이노야가 외쳤다.

꼭 빨리 가야 해. 일단 혼사부터 치르고 보자. 만에 하나 강주에 계신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이 혼사는 기약 없이 미뤄질 수도 있어.

황실와 혼인을 맺다니. 무슨 준비를 해야 하지?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 같아서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이야!

정 이노야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댔지만, 정 대노야는 멍하니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형님, 뭐 하는 겁니까? 빨리 가야죠!”

정 이노야가 재촉했지만, 정 대노야는 고개를 저었다.

“갈 수 없다.”

“갈 수 없다니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집안 어른도 없이 여식의 혼사를 치를 수는 없잖습니까.”

맞아. 교랑이 혼사를 치르는데, 집안 어른이 없어서야 쓰나. 그런데 하필 그 시기에 교랑이 우리를 강주로 돌려보냈단 말이지.

그 애는 무슨 일이든 빈틈없이 처리해 왔어. 혹 교랑이 이 혼사를 예상했다면, 과연 우리를 강주로 돌려보냈을까?

설마 이 혼사는 교랑의 예상 밖의 일인 건가? 그럼 우리는 지금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정 대노야가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이건 사낭이 단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한 서신일 뿐이다. 경성으로 돌아오라는 말은 쓰여 있지 않았어. 그리고 교랑이 우리에게 일부러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고.

교랑의 말을 들어야 해. 교랑이 당장 경성을 떠나 강주로 돌아가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정 대노야가 서신을 접어서 소매 안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지금 떠나겠다.”

정 이노야가 그제야 싱글벙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일 먼저 역참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는 금세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왜 그래? 무슨 일이냐? 경성으로 가는 게 아니더냐?”

“이노야, 경성으로 간다는 말씀이 없으셨는데요? 대노야께서는 강주로 돌아가자고 하셨습니다.”

강주로 돌아간다고? 어째서 강주로 돌아간다는 거야?

“정말로 혼사를 치르게 된다면, 당연히 우리를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 터. 우리는 강주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면 될 일이다.”

정 이노야가 담담하게 마차 안에 앉은 정 대노야를 쳐다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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