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75)

작가의 말:

천노(賤獠)는 당대에 쓰이던 욕입니다. 민족의 속성으로 비아냥대는 욕으로, 흔히 쓰이는 천것(賤婢, 천비)이라는 말보다 심한 욕이죠. 남서쪽 땅을 노(獠)라 하기에 남방 사람들을 욕할 때도 오랑캐 노(獠)를 써서 욕했는데, 정교랑이 남방 사람이라 이런 욕을 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자료의 출처는 <당천지남(唐穿指南): 남 앞에 꿀리지 않는 당나라 욕설 지침>입니다.

-유일무이-

해 질 무렵, 진십삼은 취기가 오른 채 집에 돌아왔다.

“자네, 어딜 갔던 거야?”

주육낭이 소리쳤다.

“자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진십삼이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주육낭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진십삼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그 여인이 선물한 그림 좀 보여 줘.”

주육낭은 진십삼을 끌고 가다시피 하며 서재를 향해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보러 온 거야?”

주육낭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던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래. 그런데 왜 잠가 둔 거야? 안 그랬으면 내가 훔쳐 가려고 했는데.”

주육낭이 언짢다는 듯이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훔쳐 갈까 봐 잠가 뒀지.”

진십삼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진십삼을 서재 앞까지 끌고 오자, 진십삼은 걸음을 멈추고 몹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이 그림은 한 달에 딱 한 번만 보여 줄 수 있어. 괜히 그림 망가져.”

주육낭이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엄청 귀한 것처럼 말하네. 여차하면 내가 한 장 더 그려 달라고 하면 그만이야.”

“그래, 좋아. 그럼 가서 한 장 그려 달라고 해.”

진십삼이 활짝 웃으며 서재 문을 열고는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썹을 으쓱했다.

“아무나 다 나랑 같은 대접을 받는 줄 알아?”

진십삼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서재 안의 등불 하나가 켜졌다.

“잠깐, 잠깐. 일단 술부터 좀 가져와 봐. 술 없이 무슨 꽃을 감상한다고.”

주육낭이 말했다.

“이봐,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꽃에 취할 수도 있다고.”

진십삼이 웃으면서 시녀들에게 등불을 밝히라고 말했다.

서재 안의 등불이 하나씩 차례로 밝혀졌다. 은은한 불빛 아래, 진십삼의 시야에 모란이 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십삼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눈앞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화폭을 감상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제 보아도 기분 좋은 그림이란 말이지. 이건 날 위한, 나만의 모란이야.

진십삼의 눈앞에 모란 한 송이가 천천히 피어났다.

모란이 피어나?

진십삼이 멈칫하고 놀랐다.

위씨 저택에 있는 모란은 천 겹의 붉은 꽃잎이 감싸고 있다던데(魏家華者, 千葉肉紅華, 重重層層 - 구양수歐陽修 <낙양목단기洛陽牧丹記>), 정 낭자가 나한테 그려준 모란이 그 품종이었나?

등불이 점점 밝아지면서, 진십삼의 눈앞에 보이는 모란이 조금씩 피어났다. 그리고 붉은 모란 위로 날갯짓을 하던 나비 한 마리가 모란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모란을 낮에 본 사람들은 강렬한 색상을 띤 꽃에 미인이 따라 준 술에 취하듯 홀리고, 밤에 본 사람들은 옷가지를 흠뻑 적시는 짙은 꽃향기에 취한다(國色朝酣洒, 天香夜染色 - 이정봉李正封).

방 안의 모든 등불이 켜지자, 진십삼은 그제야 자신의 앞에서 화폭을 들고 서 있는 주육낭을 발견했다.

“내 거야.”

주육낭이 입이 귀에 걸린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네는 아무나 다 나랑 같은 대접을 받는 줄 알아?”

진십삼이 흠칫 놀랐다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주육낭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나를 끌고 오면서 연기한 게, 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였어?”

진십삼이 주육낭의 어깨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는 자신의 뒤에 펼쳐진 화폭을 가리키며 말했다.

“됐고. 내 모란이 더 유일무이해.”

“내 거야말로 유일무이하거든? 내 모란 한 송이가 네 거 백 송이를 이긴다.”

주육낭이 지지 않겠다는 투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진십삼은 주육낭을 쳐다보다가 그가 든 화폭으로 시선을 옮기고 미소를 지었다.

“틀렸어. 그 여인이 유일무이한 거야.”

그 여인이야말로 유일무이하지.

주육낭도 자신의 손에 들린 화폭을 내려다보았다.

맞아, 그 여인이야말로 유일무이해.

두 사람은 술 한 동이를 금세 비웠다. 편한 자세로 앉아 여전히 입이 귀에 걸린 채 웃고 있는 주육낭을 보고 있자니, 진십삼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정 낭자가 자네한테 이렇게나 잘해 줄 줄이야.”

“그러게 말이야.”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내가 누이한테 잘해 주는 거지.”

진십삼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오늘 고 관인을 만나러 갔었어.”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고 관인!

주육낭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늦게 집에 왔구나. 사환 말로는 십삼이 지인을 만나러 갔다던데, 그 지인이 바로 고 관인이었군.

진십삼이 이번 일에 대해 고씨 가문에 잘 설명할 방법을 최대한 모색해 보겠다고 했지. 진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둘 다 황실의 친척이기도 하고, 특별한 왕래는 없어도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니까.

고 관인이 정교랑을 완전히 용서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쯤은 늦출 수 있겠지.

“자네, 뭐라고 했나? 고씨는 뭐라고 했고?”

주육낭이 물었다.

“나야 솔직히 말했지. 고 관인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고.”

해가 지자, 덕승루의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이 시작되었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목소리와 노랫소리가 한데 섞여 덕승루를 감쌌다.

“언니.”

주 낭자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화려하게 단장한 관기 한 명이 웃으면서 주 낭자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춘령이 씩씩대며 관기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노(路) 아씨, 저희 언니가 쉬고 계시잖아요.”

춘령이 외쳤다. 관기는 춘령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으며 앉아 있던 주 낭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니, 벌써 자려고요?”

관기가 물었다.

관기들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는지라, 대낮에 내의를 입고 밤이 되어야 화려한 단장을 하곤 했다. 하지만 한창 손님을 맞을 시간인 지금도, 주 낭자는 머리를 풀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내의만 입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오늘은 손님을 맞이하지 않고 쉬겠다는 모습이었다.

주 낭자가 응, 하고 대꾸했다.

“언니는 여유롭고 한가해서 참 좋겠어요. 어떻게든 입에 풀칠이라도 하며 살겠다고 아양 떠는 우리와는 다르잖아요.”

관기가 웃으며 말했지만, 주 낭자는 관기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노 아씨, 그럼 빨리 나가세요. 다른 언니들이 왕 관인을 빼앗아 가면 어쩌려고 여기 있어요?”

춘령이 말했다. 관기는 춘령을 잠시 흘겨보고는 계속해서 주 낭자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제 칠현금이 고장 났는데, 언니는 요즘 칠현금을 쓸 일이 없잖아요. 오늘 좀 빌려도 되죠?”

“기루에 남는 게 칠현금일 텐데, 왜 굳이…….”

주 낭자가 춘령의 투덜거림을 끊고 대답했다.

“가져가.”

주 낭자가 책을 내려놓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관기를 쳐다보았다.

“언니, 언니의 칠현금은 엄청 귀중한 거잖아요.”

춘령이 기분 나쁘다는 기색으로 주 낭자에게 투덜거렸다.

“귀중?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한 물건은 똑같은 물건일 뿐이야. 동생의 칠현금 솜씨가 뛰어나니, 내 칠현금을 욕되게 하지 않겠지.”

주 낭자가 말했다. 관기는 주 낭자의 대답에 활짝 웃으며 재빨리 칠현금을 품에 안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언니는 말을 어쩜 그렇게 잘해요? 이러니까 고 관인과 정 관인 모두 언니한테 푹 빠지지.”

관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노 아씨, 말재주가 없으면 가만히 좀 있어요. 그럼 손님이 몇 명 더 늘 테니까.”

춘령이 말했다. 관기가 고개를 돌리고 춘령을 흘겨보았다.

“나 참, 몸종 주제에 왜 그렇게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지 원.”

“제가 아씨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듣기 좋은 말을 해 줘요?”

춘령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춘령.”

주 낭자가 춘령을 나무라자, 춘령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관기도 춘령을 붙잡고 말싸움을 계속하기는 귀찮았는지, 별다른 말 없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칠현금을 안고 물러났다.

“언니.”

춘령이 주 낭자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너도 그만 물러가렴. 난 책을 조금만 더 보다가 잘게.”

주 낭자의 말에 춘령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주 낭자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지금처럼 여유롭게, 아무런 목적 없이 책을 읽은 건 너무도 오래전 일이네.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직접 책을 펼쳐 들고 나를 가르치셨던 기억이 나.

사내는 공로와 명성을 위해 책을 읽는다지만, 여인들이 책을 읽는 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야. 하지만 열심히 읽어 보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셨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지.

교방사에 들어온 후로 읽은 책과 여기서 익힌 칠현금 혹은 다른 기예들, 그 모든 건 나 나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사내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거였어.

아니야,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사내들의 환심을 얻는 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잖아?

정적이 흐르는 방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적막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노 아씨, 저희 언니께서는 주무신다고…….”

춘령이 관기를 막아서는 말이 들려왔지만, 곧바로 관기의 호통이 들려왔다.

“지금 자긴 뭘 자. 언니가 잠이 오게 생겼니?”

관기가 문을 벌컥 열고 술 냄새를 풍기며 주 낭자 앞으로 다가왔다.

“언니, 큰일 났어요.”

노 낭자의 다급한 모습에 주 낭자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좀 전에 왕 관인이 그러는데, 누가 고 관인을 찾아가 화괴 다툼을 했던 이유가 다 언니 때문이라고 했대요.”

노 낭자의 말에 주 낭자는 피식 웃었다.

“원래 내 탓이 맞는걸.”

“아니, 그게 아니라…….”

노 낭자는 마음이 급했는지, 주 낭자의 말을 끊더니 조심스럽게 문밖을 내다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진십삼 공자님이 고 관인을 찾아가 모든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언니였다고, 정 공자님을 이용해 고 관인을 떨쳐내려던 언니의 계략이었다고 했대요. 정 공자님은 언니랑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인데 억울하게 언니의 덫에 걸려들었다면서, 언니가 일부러 정 공자님을 이 일에 끌어들여 두 가문의 분쟁을 부추겼다고 했대요.”

노 낭자의 입에서 진십삼이라는 세 글자가 나오자마자, 주 낭자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노 낭자의 말들에 주 낭자는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노 낭자의 입 모양으로 보아서는 계속해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주 낭자는 그저 귓가가 시끄럽다고 느낄 뿐,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니,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번에 엄청난 가문 두 곳의 미움을 한 번에 산 거잖아요.”

“난 아직 접대 중이어서 이만 일어날게요. 손님들 아직 안 갔는데,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일부러 몰래 온 거예요.”

“언니, 언니.”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꽉 쥐고 앞뒤로 흔드는 느낌에, 주 낭자는 정신을 차렸다. 주 낭자가 아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흔들고 있던 춘령을 쳐다보았다.

“언니, 괜찮아요?”

춘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주 낭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내가 한 짓이라고 했다고.”

주 낭자가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언니, 언니,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진 관인께 말씀드리러 갈게요.”

춘령이 주 낭자보다 더 많은 눈물을 떨구며 울먹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춘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곧 주 낭자의 손에 붙잡혔다.

“가서 뭐라고 말할 건데! 그분의 말씀이 옳아. 다 내 잘못이야.”

주 낭자가 소리쳤다.

“언니! 언니, 아니에요. 언니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진 관인이 언니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왜 진 관인이 정 낭자를 위해 언니를 모함하냐고요! 진 관인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춘령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정 낭자를 위해서…….

주 낭자가 힘없이 웃었다.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맞아. 고 관인을 찾아가서 그렇게 말하는 게 옳지. 사람은 원래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보살피고, 어떻게든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고 지켜 주고 싶어 하잖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 낭자를 위해 언니를 해치는 건 말도 안 되죠! 언니는 일편단심 그분만 생각하는데,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언니가 왜…….”

“입 다물어!”

주 낭자가 소리 질렀다.

울부짖던 춘령이 주 낭자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고는 울음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들어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주 낭자도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놀란 눈치였다.

무지막지한 여자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

아무도 듣기 싫어하는 그런 목소리가, 종달새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칭찬받던 내 목소리라니. 모두가 혐오하는 그 목소리가…….

그날 벌어진 일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가?

난 그분 때문에 고 관인을 접대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옷소매를 쥐고 있던 주 낭자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모든 것을 떨치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그러시는 게 옳아. 진심이니까. 하지만 여기 덕승루에 진심 따위란 없어.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인 적도 없고.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헛소리 하지 마.”

춘령이 눈물을 흘리면서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언니.”

“그런 헛된 말과 헛된 일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주 낭자의 말에 춘령은 재빨리 이마를 땅에 찧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언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춘령이 숨이 넘어갈 듯 울먹였다. 주 낭자는 다른 손에 들린 책을 세게 쥐면서 옆에 있던 구리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난 꼭 잘 지낼 거야. 보란 듯이 아주 잘.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고 관인이 던진 금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시녀 두 명이 서둘러 금잔을 주웠다.

“썩 꺼져!”

고 관인의 욕을 듣자, 두 시녀는 사형을 면제받은 죄인들처럼 기뻐하며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요 며칠 집에 갇혀 있던 터라 고 관인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성질이 괴팍해졌다. 고 관인에게 맞아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른 시녀가 두 명 있었는데, 결국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 일로 고씨 저택의 하인들은 고 관인의 시중을 들 때마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행여나 고 관인에게 맞아 죽는 재수 없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까 걱정스러운 마음에서였다.

“제 생각에는 진십삼 공자의 말이 틀림없습니다. 이번 일이 좀 수상쩍긴 하잖습니까.”

식객이 말했다.

“수상쩍다니? 수상쩍다 한들, 뭐가 달라지는데?”

고 관인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고 관인의 반응에 식객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자님,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더는 남의 손에 놀아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 낭자와 악연을 맺는 것을 몹시 기뻐하는 자가 있을 겁니다. 노야께서도 떠나시기 전에 당부하셨지요. 지금은 정 낭자를 상대할 때가 아니라, 태자 책봉이 더 시급…….”

“태자 책봉이 뭐 급하다고. 이미 기정사실인 것 아닌가. 평왕을 태자로 세우지 않으면 누굴 세울 수 있는데? 그 바보를 태자로 세우기라도 할까.”

고 관인이 식객의 말을 끊고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뭐든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게…….”

식객이 웃으면서 말했지만, 고 관인은 냉소를 지었다.

“신중이라. 그러니까 그 정씨를 신중히 대해야 한다는 말일세. 진십삼의 말이 맞아. 나도 그 정씨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나나 정씨나 다 남의 손에 놀아난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그 정씨가 몹쓸 계집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

남의 손에 놀아난 것을 알면서도, 왜 나에게 사과하지 오지 않지?

어쩔 수 없어 그런 식으로 나오기는 개뿔. 정씨 입장에서는 이 일을 황당한 일로 만들어야 제일 좋잖아.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정씨를 공격할 때 이번 일이 이용될 테니까.

어차피 황당한 일이라면, 정씨가 내게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해도 될 텐데, 왜 나만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거냐고! 딱 보면 모르겠나? 정씨가 얼마나 악독하고, 우리 고씨 가문에게 오만불손한지.”

그날 이후로 잘못을 저지른 개처럼 꼬리를 다리 사이에 숨기고 몸을 사리며 지내 온 생각을 하자, 고 관인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그가 자신 앞에 있던 찻잔을 세게 바닥에 던졌다.

“참으로 원통하구나!”

“참으로 원통하구나!”

같은 시간, 정 이노야도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의 앞에도 찻잔과 접시가 여러 개 놓여 있었지만, 식기가 아까워 차마 집어 들어 깨트리진 못했다.

저 식기들도 다 돈이다. 집안 살림이 빠듯해서 밥해 먹는 것도 어려워질 지경이야.

며칠만 더 기다리면 돼. 며칠만 더 기다리면 월말이니, 점포들이 막대한 수익금을 내게 쥐여주겠지.

“노야, 고 관인이 만나 주지 않던가요?”

정 이부인이 물었다. 정 이노야가 어두워진 안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번이나 만남을 청했는데, 있는 인맥을 싹 다 끌어모아도…….”

정 이노야가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이게 다 그 몹쓸 것과 사낭이 불러온 화야!”

정 이노야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화를 냈다.

“그 몹쓸 것은 지금도 주씨 가문에서 한껏 여유를 즐기고 있을 테고, 사낭은 요양한답시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으니, 원! 저들은 편하게 지내면서, 왜 골치 아픈 일은 다 내 몫이냔 말이오!”

정 이노야가 이를 부득 갈았다.

“정사낭의 진사 자격을 박탈시켜달라는 상소문을 한 번 더 올려야겠소. 남들은 내가 보여주기식으로 고 관인을 찾아가는 줄 알아.”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누군가가 침을 뱉었다.

“퉤! 이 썩을 놈아! 감히 내 아들의 진사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정 이노야 부부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째 형님의 목소리 같지 않소?”

정 이노야의 물음에 정 이부인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노야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대노야잖아요!”

정 이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흔적이 묻어나는 행색의 정 대노야가 지팡이를 짚으며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정 대노야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혀 쿵쿵 소리를 내며 정 이노야의 고막을 때렸다.

“이 썩을 놈아, 무슨 낯짝으로 자기 집 자식들과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이 썩을 놈아, 네놈이 그 둘을 고소하러 가기 전에,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눴다고 내가 먼저 네놈을 고소할 것이야!”

주 노야는 정 이노야의 약점을 잡기 위해 사람을 시켜 정씨 저택을 지켜보게 했다. 그래서 정 대노야가 정씨 저택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임에도 주 노야는 그가 온 소식을 바로 알게 되었다.

“정 대노야가 경성에 왔다고? 그자가 뭐 하러 여길 와?”

소식을 들은 주 노야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하러 왔겠어요? 다 교랑의 돈 때문이죠. 그 사람이, 그 많은 재산을 정 이노야 부부 둘이서 꿀꺽하게 놔둘 사람이에요? 그랬다가는 배 아파 죽을걸요?”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돈이면 배가 아플 만도 하지.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그자가 또 교교의 재산을 노린다고? 강주에서 교교의 혼수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봤다던데, 그 교훈으로도 부족했나?”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정 이노야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 대노야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 이부인이 먼저 냉소를 보이며 비아냥댔다.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딱 보니까 생선 냄새를 맡고 온 고양이네.”

“악독한 것! 지금은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이혼장은 내가 대신 써 두었으니 당장 우리 정씨 가문에서 꺼지거라!”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을 향해 거침없이 욕을 해댔다.

늘 남에게 항상 온화한 모습만 보이던 정 대노야였다. 물론 이따금 엄격한 가장으로서 정 이노야를 호되게 꾸짖을 때도 있었지만, 정 이부인에게는 한 번도 실례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훗날 사이가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욕을 한 일은 없었다.

정 이부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정 대노야가 자신에게 심한 욕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창피하고 화가 난 나머지 통곡하기 시작했다.

“천벌 받을 놈! 강주에서 우리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경성까지 쫓아와서 우리를 못살게 굴어? 어디 한번 내쫓아 봐! 당신네 집 대문 앞에서 목매달아 죽을 테니까!”

정 대노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콧방귀를 뀌면서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정 이부인의 울부짖는 소리에 정 이노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정 이부인을 다독이며 정 대노야를 향해 발을 굴렀다.

“형님, 뭐 때문에 이리 급하게 경성까지 쫓아왔느냔 말입니다!”

“무슨 일? 아우 네가 이 요부의 말에 홀려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정 대노야가 냉소를 지으면서 문서 몇 장을 정 이노야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정 이노야는 그 문서들을 대번에 알아보고 정 대노야가 경성에 온 이유를 알아챘다. 신선거 등 점포에 관한 문서의 사본이었다.

“형님, 어떻게 된 일인지는 형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모두 교랑의 것입니다.”

정 이노야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잘 알고 있다. 이게 다 교랑의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만,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묻는 게 아니냐!”

정 대노야가 호통쳤다.

“교랑이 아둔하여 저와 형님이 건재한데도 자기 이름을 점포 문서에 올렸지 뭡니까. 율법에 따르면 부모가 생전에 있을 때, 그 자식은 절대로 자신의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지요. 부모와 자식 간에는 재산의 구분이 없다는 율법 말입니다. 교랑이 따로 재산을 가졌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 되면, 분명히 불효를 이유로 교랑을 발고했을 겁니다.”

정 이노야의 말에 정 대노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잘났구나. 부모가 생전에 있을 때, 자식은 절대로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구나. 한데 부모가 살아 계신대도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눌 경우, 그 자식을 삼 년 형에 처한다는 율법은 모르는 것이냐? 이 재산들을 팽씨의 명의로 돌려놓다니, 대체 저의가 뭐야!”

정 이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울음을 멈춘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저의가 뭐냐고요? 대노야가 우리 교교의 재산을 탐낼까 봐, 교교를 지켜 주려고 그런 거예요. 교교의 혼수까지 뺏으려고 했던 사람인데, 경성의 재산이라면 오죽할까!”

정 대노야가 냉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렇다는 말은, 너희가 일부러 호적을 따로 만들고 재산을 나눈 일을 인정하는 게지?”

정 이노야가 멈칫하며 대답하지 못하던 사이, 정 이부인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정해요.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거죠.”

정 이부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턱을 치켜들고 입꼬리를 올렸다.

“대노야, 설마 남들도 고발하지 않는 죄목을 가져다 이이를 고소할 생각은 아니겠죠? 이건 교교의 재산이라고요. 모두 교교의 것이니까 허튼 생각 마세요.”

이 영감탱이가 혼수 싸움으로 고생했던 건 그새 잊은 거야?

정 이부인이 정 대노야에게 경고하듯 ‘교교’라는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맞아. 그 문서들에 내 이름을 올린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교교의 손에서 넘겨받은 재산이니, 대노야도 쉽게 그 재산들을 빼앗을 생각은 못 하겠지. 우리가 대노야를 무시하고 이렇게 손쉽게 재산을 나눌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대노야가 교교의 혼수를 노렸을 때 이미 된통 당했던 경험 덕분이야.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사니까, 남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가족뿐이야. 가족의 일원으로서 대노야도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겠지. 이 재산이 모두 내 이름으로 되어 있기는 하나, 여전히 교교의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감히 이 재산을 탐내거나 우리를 고소할 수는 없을 거야. 재산은 모두 내 명의로 돌려두었으니 남들이 트집 잡을 기회는 원천차단한 셈이고. 가족들 또한 무슨 상황인지 뻔히 알지만 이의를 제기하긴 힘들어.

교교도 국법이 지엄하고, 이를 어길 수 없으니 우리가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 거겠지.

이대로 오랜 시간이 흐르면……. 아니지, 오랜 시간이 지날 필요도 없어. 재산은 이미 내 소유가 되었잖아? 이제 내 거라고! 나는 황금을 낳는 거위를 가진 셈이야!

정 이부인이 눈빛을 반짝이며 생각에 잠긴 사이, 정 이노야가 평정심을 되찾고 고개를 저으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형님, 천 리 길을 달려온 이유가 고작 그것 때문입니까? 아비로서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정사낭부터 손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정 대노야가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늦었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네놈을 관아에 고소했으니.”

“정말로 관아를 찾아가 고소했다더냐?”

주 노야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소인이 돌아올 때 일부러 관아에 가서 알아보았는데, 정말로 정 이노야를 고소했답니다. 관아도 이 일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었대요. 아, 정씨 저택도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정 대노야가 관아에 고소장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 이노야 내외가 미친 사람들처럼 정 대노야와 치고받으며 싸우고 있어요.”

사환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정 대노야가 데리고 온 사람 수가 적어서 그런지, 싸움에서 좀 밀린답니다. 정 이부인이 정 대노야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여러 개 남겼고요.”

누가 밀리든 말든 그건 주 노야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 노야 입장에서는 둘 중 한 명이 맞아 죽거나, 둘 다 죽는 게 제일 좋았다.

그런데 정대낭 그자는 왜 이렇게 대담한 일을 벌이는 거지?

주 노야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교교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무섭지도 않나. 어떻게 또 교교의 것을 빼앗을 생각을 한 게야?”

주 노야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노야, 정 이노야도 뺏을 수 있는데, 정 대노야라고 해서 못할 건 또 뭡니까? 두 형제가 다 한통속인 게지요.”

사환이 입술을 삐쭉이면서 대답했다. 그때, 주 노야가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우며 소리쳤다.

“다시 말해 보아라!”

화들짝 놀란 사환이 몸을 살짝 떨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예전에는 정씨 가문 사람들을 찰지게 욕하면 욕할수록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는데. 어쩔 땐, 욕하시다가 흥이 오르면 상금을 주시기도 했고.

그런데 오늘은 왜 한통속 정도의 욕설에 역정을 내시는 거지?

“한, 한통속이라고.”

사환이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주 노야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말을 끊었다.

“그거 말고. 좀 더 앞에.”

“아, 정 이노야도 뺏을 수 있는데, 정 대노야라고 해서 못할 건 또 뭐겠습니까?”

사환이 서둘러 대답했다. 주 노야가 손뼉을 치더니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감탄했다.

“맞아, 맞아. 그거야, 바로 그거라고! 아우가 먼저 교교의 것을 빼앗았으니까, 형이 그걸 다시 빼앗는다면 교교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아우의 것을 빼앗는 게 돼. 그리고 어쩌면, 정대낭 그자가 재산을 빼앗아서 교교한테 돌려줄지도 몰라!”

주 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 대노야의 의도가 투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맞아, 분명히 그럴 거야. 정이낭은 교활하게 효도를 빌미로 교교의 재산을 빼앗았어. 남의 가정사다 보니, 그 누구도 정이낭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 형이라면 가능해!”

주 노야가 연이어 손뼉을 치면서 감탄했다.

“정대낭 그자도 참. 한 번 된통 당하더니 똑똑해졌구나. 하마터면 네놈의 속셈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어.”

“그렇게 된 거였군요.”

주 노야의 말을 들은 사환이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주 노야에게 아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노야께서 정 대노야보다 훨씬 똑똑하십니다. 정 아씨께서 노야의 저택에서 편히 쉬고 있지 않습니까.”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칭찬이라기에는 어딘가 이상한데?

“됐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사람을 모으거라. 여봐라,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정 대노야가 왔는데, 사돈으로서 인사를 안 할 수야 없지.”

주 노야가 시녀를 향해 손짓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청 안으로 들어서던 주 부인은 주 노야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깜짝 놀랐다.

“노야, 괜찮으세요?”

주 부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정씨 가문에 사람이 왔다고 노야가 인사를 하러 갔지? 노야가 정씨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두들겨 패지 않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인데.

“괜찮소, 괜찮아. 더 늦게 가면 우리만 손해니까 서둘러야 하오.”

주 노야가 다급하게 문밖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서두르거라! 있는 무기 싹 다 챙겨 들어라.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정대낭이 선창을 했으니, 나도 빨리 가서 장단이라도 맞춰야지.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정대낭 혼자 독식하게 둘 순 없어.

주 노야는 민가를 습격하러 가는 도적 떼처럼 흉악무도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주 부인은 서둘러 하인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주 부인이 혀를 찼다.

“당초 정씨 가문은 한 집안에서 분가하지 않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는데, 곧 있으면 그 집도 분가하게 생겼구나. 아니지, 분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체면까지 내팽개치고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게야. 형제끼리 관아를 드나드는 불명예스러운 짓까지 벌이려 하다니.”

주 부인이 중얼거리며 혼잣말했다.

“부인, 돈이 사람 마음을 변하게 한다잖아요.”

옆에 서 있던 여종의 말에 주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돈?

꼭 돈이 사람 마음을 변하게 하는 건 아니야. 그 애가 자기 재산을 모조리 나에게 준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못할 게야.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렵겠지.

“정 대노야의 마음을 움직인 건, 돈이 아니라 그 여인이야.”

그런데 정 이노야 부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게지. 그 여인의 부모라는 점을 이용하면서도, 그 여인이 얼마나 악독한 사람인지를 모른다는 게 참…….

“하지만 급할 거 없다. 곧 있으면 그들도 깨닫게 될 테니.”

주 부인이 합장한 채 잠시 불경을 읊조렸다. 주 부인은 이렇게 해야만 정교랑을 떠올리기만 해도 놀라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 여인은, 뭘 하고 있느냐?”

주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여종은 주 부인이 말한 그 여인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 ‘그 여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교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진십삼 공자님이 오셔서요.”

여종이 조용히 대답했다.

“진십삼 공자라. 이렇게 대놓고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빨리 진십삼 공자한테 시집이나 가라지.”

주 부인이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이어서 물었다.

“육낭은?”

여종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같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정 대노야가 경성에 왔기에, 노야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인사하러 가셨습니다.”

사환이 대답했다.

주씨 집안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사환의 말을 들었다면, 분명히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정 대노야가 왔는데 사람을 끌고 인사하러 갔다고? 인사하러 가는데 시종들을 모조리 대동하는 이유가 뭐야? 싸움을 걸거나 난리를 피울 때나 사람을 데려가지 않나?

하지만 주육낭은 주 노야가 사람을 데리고 정씨 가문에 간다는 것은 곧 싸우러 간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대꾸 없이 시선을 거두고 진십삼을 향해 말했다.

“헛수고할 필요 없어. 고 관인은 아예 들을 마음도 없어 보이던데. 지금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자기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생각과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다는 생각밖에 없을 거야. 복수하지 않으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괜히 자네가 가서 좋은 말을 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숙이고 들어가서 좋게 말하면 할수록, 그자는 더욱 기를 펴고 당당해질 테니까.”

진십삼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진십삼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최소한 낭자가 자기보다 당당하다고 여기진 않을 테니까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다 똑같아요.”

다 똑같아요. 상관없어요.

진십삼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고씨 가문은 다르다고요.”

유 교리나 풍림과는 다른 일이야. 그 사람들은 모두 관리지만, 고 관인은 관리일 뿐만 아니라 황실의 친척이다.

풍림 등은 황실의 신하에 불과하지만, 고씨 가문은 황실의 친척이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황실 입장에서는 신하보다 친척이 더 가깝지.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 평왕을 끼고 있어서 그런 거 아냐. 평왕이 없었으면, 고씨 가문이 어떻게 경성에서 그렇게 날뛸 수 있겠어.”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려던 찰나, 정교랑이 먼저 물었다.

“평왕?”

정교랑이 뱉은 간단한 두 글자는 질문하는 것 같기도, 주육낭의 말을 반복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교랑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평온했지만, 진십삼은 정교랑이 뱉은 두 글자 때문에 갑자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평왕?

다 평왕을 끼고 있어서 그런 거 아냐. 평왕이 없었으면, 고씨 가문이 어떻게 경성에서 그렇게 날뛸 수 있겠어.

평왕 덕분에 그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럼, 만약 평왕이 없어진다면?

자신이 한 생각에 진십삼은 깜짝 놀랐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지?

정 낭자와 대립했던 사람들의 끝이 안 좋아서? 유 교리만 봐도, 정 낭자의 식당 하나를 탐했다는 이유로 패가망신을 당했으니.

정 낭자가 칼을 빼냈다 하면, 무조건 그대로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혀서? 서북 군정 일만 해도 그래. 보잘것없는 장수 하나가 의형제의 공로를 빼앗았다는 이유로 서북 인사를 손바닥 뒤집듯이 모조리 갈아엎었어. 그 장수는 목숨을 잃었고, 장수와 연관된 모든 사람이 서북에서 쫓겨났지.

평왕이 없었으면, 고씨 가문이 어떻게 경성에서 그렇게 날뛸 수 있겠어.

만약 평왕이 없었으면…….

“귀비가 낳은 황자가 평왕이고, 귀비의 성씨가 고씨야.”

주육낭의 목소리가 진십삼의 귓가에 들려왔다.

“평왕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진십삼이 돌연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소리친 진십삼 때문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십삼은 주육낭과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귀비가 평왕의 친모라는 말을 하는 중이었는데, 뭐가 무관하다는 거야?”

주육낭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묻자 진십삼이 찻잔을 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은, 폐하께서 외척에 대한 경계를 늦추신 적 없기도 하고, 외척은 조정의 중신이 될 수 없으니까, 그들의 권력은 결코 막강하지 않다는 뜻이야.”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평왕에 관한 소개고, 평왕과 고씨 가문의 관계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왕이 그런 사람이구나.”

평왕이 누구인지 물어본 거였군. 역시 내가 공연한 생각을 했어.

진십삼이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낭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고 관인의 불만을 아예 없애는 건 헛된 바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 역시 그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고 관인을 찾아간 이유는, 조금이라도 여유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마워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웃었다.

“이 정도에 고맙다고 하면 괜히 서먹하잖아요.”

“이 틈을 타서 다른 꿍꿍이를 품으면 더 서먹해진다.”

주육낭이 경고 섞인 눈빛으로 말하자,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정 대노야가 주씨 저택에 들어설 무렵, 젊은 사내 두 명이 웃으며 문을 나서고 있었다. 한 명은 준수하고, 다른 한 명은 몹시 용맹한 면모를 뽐냈다. 얼핏 보아도, 숨길 수 없는 경성 명문가 자제의 분위기가 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정 대노야가 둘 중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

저건 주육낭이고, 저 옆에 있는 사람은…….

이때, 정 대노야의 시선을 느낀 진십삼이 고개를 돌렸다. 온화한 성품을 지닌 사내 같았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족의 기개가 느껴졌다.

정 대노야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두모와 두봉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정 대노야의 얼굴에는 정 이부인의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같은 몰골로는 도저히 누구를 만날 수가 없겠어. 특히 언뜻 보아도 귀족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저 사람들은 더욱.

“진십삼 공자가 이제 돌아가려 한다고?”

주 노야와 집사의 대화를 들은 정 대노야가 몸을 움찔했다.

진씨 가문의 열셋째! 진씨 가문!

“공주부 진씨 가문을 말하는 거요?”

정 대노야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주 노야가 몸을 돌리고 자랑스레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이번에 상경하여 만난 주 노야는 줄곧 지금처럼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짓던 악독한 표정보다는 한결 나았지만, 사실 정 대노야는 주 노야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쳐다보든,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댁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겠지.”

정 대노야의 말에 주 노야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곧바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진십삼은 정교랑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라 거짓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 노야는 화를 삼키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고, 정 대노야는 한 방 먹였다는 듯 득의양양한 얼굴로 주 노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는 호기심에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말에 오른 진십삼은 주육낭과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했는지,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햇빛에 비친 진십삼의 모습이 눈부실 정도로 멋스러웠다.

저렇게 멋스러운 사내라면 사윗감으로 삼는 것조차 꿈도 꿀 수 없는 일인데, 저런 사내가 교랑에게 마음이 있다니.

시녀와 반근은 정 대노야가 경성에 왔다는 이야기를 사환을 통해 전해 듣고 정교랑에게 귀띔도 한 터라, 정 대노야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정 대노야의 몰골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례, 실례 좀 하리다.”

정 대노야가 민망한 듯 말하고는 소매로 얼굴 반쪽을 가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

“연기 좀 그만하시오. 실례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면, 여기 들어오기 전에 했어야지.”

주 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온갖 불쌍한 척을 다 하면서, 자신이 온 힘을 다해서 교교를 대신해 공정함을 따지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거겠지.

늙은 여우 같은 놈.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와서는!

정 대노야가 헛기침을 했다.

“주 노야, 교랑과 잠시 집안일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겠소이까?”

정 대노야가 ‘집안일’이라는 세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누가 뭐래도 교랑의 성은 정씨지, 주씨가 아니야.

주 노야가 속으로 침을 뱉었다.

“아이고, 교랑이 정씨라는 걸 아직 기억하고 계셨나 보오?”

주 노야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교교가 주씨 가문이 낳은 요괴라고 할 땐 언제고.

“주 노야, 피차일반이외다.”

정 대노야가 주 노야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꼭 네놈은 교랑이 정씨 가문이 낳은 요괴라고 말한 적 없는 것처럼 말하네.

보다 못한 시녀가 마른기침을 하며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주 노야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 밖으로 나갔다. 정 대노야는 그런 주 노야를 힐끗 쳐다본 후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랑.”

정 대노야는 정교랑의 이름만 부를 뿐, 말을 잇지 않았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 대노야가 갑자기 두 손을 공손히 올리고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했다.

“사낭의 일은 정말 고맙게 됐다.”

정교랑이 답례했다.

“대노야, 별말씀을요. 제가 마땅히 해야 했던 일이에요.”

정 대노야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많긴 하나, 그걸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정 대노야가 다시 한번 공수의 예를 표하며 말했다.

“교랑, 예전의 일은, 이 백부가 네게 미안했다.”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예전의 일도 그래요. 서로 마땅히 해야 했던 일이니까,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그냥 가볍게 하는 말이겠지?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패배한 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승리한 자의 여유일 테지.

어쩌면 이 애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순간일지도 모르겠군. 잘못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며 사죄하는 것.

정 대노야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같은 시간, 정 이노야 부부도 마음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얏, 아프잖소!”

정 이노야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있던 정 이부인을 밀쳐냈다. 정 이부인이 바닥에 넘어지면서 아이고, 하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내 머리!”

정 이부인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외쳤다.

“형님이 제대로 미친 게 틀림없어! 감히 사람을 때려? 집에서 때린 거면 그러려니 하겠다만, 머나먼 경성에까지 시종들을 대동해 나를 때리러 와?”

정 이노야가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미친 게 아니라, 돈에 눈이 먼 거죠.”

정 이부인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어떤 돈인지는 제대로 보고 눈이 멀어야 할 거 아니오!”

정 이노야가 대꾸했다. 정 이부인은 금방이라도 분통이 터져 죽을듯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내 재산을 빼앗으려고 들어? 아직도 여기가 강주인 줄 아나? 대노야는 어디서 저런 근본도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저러는 거죠?”

말을 하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주씨 가문!”

“주씨 가문도 빌어먹을 놈들이야!”

주씨 가문 이야기만 들어도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정 이노야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연신 팔을 문질러 대는 정 이노야 때문에 방 안에는 소매가 쓸리는 사락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도 주가 놈이 때린 거야!

“아주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감히 형님에게 주먹을 휘두르다니! 천륜을 거스르는 대죄니라!”

주 노야가 정씨 저택의 대문을 자기 집 들어오듯 당당하게 들어와서 내뱉은 첫마디였다.

주 노야가 대문을 넘을 때, 형님의 손에 붙들려 맞고 있던 사람은 나였는데, 어떻게 내가 먼저 형님을 때린 걸 알고 있었지?

그 후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에게 주먹을 날리고. 허구한 날 무식하게 무예 수련만 하는 무장이라 그런지, 힘도 무식하게 세서 그놈 주먹 한 방에 난 그대로 고꾸라졌어.

“노야, 대노야가 주씨 집안과 손을 잡은 게 틀림없어요!”

정 이부인이 소리쳤다. 정 이노야는 흠칫 놀랐다가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놈 모두 창피한 줄을 모르는군. 강주에서는 둘이서 짜고 교랑의 혼수를 탐하지 않나, 이번에는 교랑의 재산까지 빼앗으려고 들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로구나!”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정 이노야를 잡아 일으켰다.

“노야, 서둘러야 해요. 주 노야가 좀 전에 대노야를 데리고 간 걸 보면, 분명히 교랑한테 가서 허튼소리로 현혹하려 들 거예요. 교랑이 오해하기 전에, 우리도 빨리 가서 설명해야 한다고요! 어서요, 어서!”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무작정 힘으로 끌고 나갔다. 정 이노야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소리쳤다.

“멍청한 여편네야! 내 팔!”

“십사 관인! 십사 관인!”

문밖에서 사환 하나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방 안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던 고 관인이 사환을 향해 손에 쥔 술잔을 냅다 던졌다.

“이 잡놈아, 내가 이러고 있는 게 그리 기쁘더냐!”

고 관인이 화를 냈다.

시종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술잔을 보고도 피하지 못했다. 술잔에 맞은 시종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연신 사죄했다.

“십사 관인, 그게 아니라요. 부윤(府尹: 지방 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 대인께서 엄청난 일을 알려 주시겠다며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엄청난 일? 그리 큰일이라면 내 의사를 물을 게 아니라, 바로 아버지께 서신을 썼겠지.”

고 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정씨와 관련된 일입니다. 지금 정씨 집안에 난리가 났어요. 정씨의 백부가 정씨의 부친을 관아에 고소했답니다!”

형제끼리 관아에 서로를 고소하는 일은 몹시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특히나 관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일을 기피했다.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 하는데, 어떻게 나랏일을 할 수 있냐는 어사대의 탄핵을 받을 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고 관인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사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던 거로군.”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이 가산을 몽땅 손에 쥐고 있었던 거였어. 그러니까 그런 황당한 일에 큰돈을 뿌리지.

자식이 사유재산을 두어 부모에게 불효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그 부친과 짜고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눴다?

“충효를 모르는 파렴치한 여인이구나. 올곧지 못한 행동을 했으니, 집안 어른들이 관아를 드나들며 싸움을 벌이는 게지.”

고 관인이 비웃었다.

“관인, 관아에서 이 사건을 진행할지 말지 물어 왔습니다. 혹 관인께서 불편하시다면, 이 사건을 수리하지 않겠다면서요.”

사환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하나? 당연히 사건을 진행해야지. 집안의 어른들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닌데.”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시종이 조심스레 물었다.

“관인의 말씀은, 이 사건을 크게 만들자는 뜻인지요? 아니면, 모(毛) 수재에게 한 번 물어보심이 어떻습니까?”

모 수재는 고능준이 고 관인에게 붙여 준 식객이었다.

고 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노야께서 경성을 떠나시기 전에, 정씨 가문과 싸우지 말고, 그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게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괜히 저들과 싸우면 우리의 품위만 떨어진다고요. 그러니 이번 사건은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일이 커지면, 보통 망신이 아니잖습니까.”

사환이 고 관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에라이, 정씨가 내 체면을 바닥까지 떨궈놨는데, 나는 정씨 체면을 생각해 줘야 해? 그것도 모자라서, 정씨 가족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게 보살펴 주라고?

내가 등신 천치인 줄 알아?

“아버지께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정씨 가문이 화목해야 정씨의 부친이 문제없이 대리시 관직에 부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씨 부친이 대리시 관직에 올라야만, 정씨 일가가 얼마나 부도덕한 자들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수 있으니까. 본디 풍림이 난리를 칠 때부터 정씨 일가를 패가망신시키려 했는데, 그 여인이 운 좋게 빠져나온 거야. 그런데 지금은 또 돈 때문에 자기들끼리 집안싸움을 하겠다지 않느냐. 참으로 염치도 없는 자로구나.”

고 관인이 냉소를 지었다.

“가산 분쟁처럼 쓸데없는 사건은 굳이 아버지께 여쭙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큰일만 아버지께 확인받아도 충분해. 이번 사건은 관아에서 알아서 법대로 진행하라고 전하거라.”

“교교!”

정 이노야 부부는 족히 반나절을 허비한 끝에 주씨 저택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화가 잔뜩 난 상태로 정교랑의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에 평온하게 앉아 있는 정 대노야를 보자, 두 사람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됐다.

“저놈들이다. 저놈들이 네 재산을 빼앗으려고 해!”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가 재산을 빼앗는다고? 그러면 왜 그 문서에 적힌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닐까?”

정 대노야가 냉소를 지었다.

“내 이름이 쓰여 있긴 해도, 교교와 미리 다 상의한 거예요.”

정 이부인은 다급한 말투로 소리친 후 정교랑 앞에 잰걸음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는 억울하기도, 화가 나기도 한 듯 정교랑에게 사정했다.

“교교, 너나 나나 다 잘 알고 있잖아. 그 재산은 다 네 것이야.”

“제 것이라고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 이부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네 것이지. 그때 너랑 이야기했잖니. 남들이 네 아버지가 경성에 올라온 것을 탐탁지 않아 해서, 괜히 네 불효를 빌미로 아버지를 탄핵할까 봐 내 이름으로 바꾼 거잖아.”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요? 이 재산은 다 교교의 것이에요. 대노야, 전에 교교의 혼수를 뺏으려고 했던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젠 교교가 가진 재산까지 다 탐내는 거예요?”

정 이부인이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정 대노야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정 이노야 부부에게 말했다.

“혼수는 내 잘못이 맞다. 교랑 어미의 혼수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던 건 명백한 내 잘못이야.”

“알면 됐네요!”

정 이부인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혼수는 혼수고, 교랑의 재산은 교랑의 재산이야.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랑이 사유재산을 둔 것은 교랑의 잘못이 맞아.”

정 대노야가 이어서 말했다.

저놈이 감히 교교의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해?

정 이노야 부부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 정도로 가난이 두려운 거야? 불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그게 잘못인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봐봐! 네놈한테 반문하잖아! 이 여인이 화가 났다는 뜻이야!

정 이부인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 대노야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이지. 교랑, 조부모와 부모가 살아 계실 땐, 자식이 사유재산을 두면 안 된다는 율법이 있다. 그리고 우리 정씨 가문엔 선조의 유훈을 따라 분가를 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어. 그래서 네 부모도 사유재산을 따로 가지지 못하는 거고.”

“그렇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우리 교교는…….”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지만, 정교랑이 정 이부인의 말을 끊었다.

“그렇군요. 전 몰랐어요. 그런 걸 신경 쓰지도 않았고요. 잘못된 거라면 바른대로 해야죠.”

뭐라고?

정 이노야 부부가 경악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지만, 반대로 정 대노야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게 맞았어. 역시!

“교랑, 너 미쳤니? 어떻게 네 재산을 저 사람한테 줄 수 있어!”

정 이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노야께 당연히 드려야 하는 거라면 드려야죠. 그때 당신이 내 재산을 당신에게 줘야 한다고 했을 때, 내가 줬던 것처럼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구한테 당연하게 뭘 줘? 이거 바보 아냐?

정 이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재산은 전부 다 네 것인데, 왜 나 몰라라 내팽개치는 거야? 넌 주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돼. 네가 대노야를 무서워할 게 뭐 있어!”

“교랑, 형님을 무서워할 필요 없다. 내가 네 아비이니, 당연히 너를 위하고 네 것을 지켜 줄 것이야. 네 것을 형님에게 줄 필요는 없어. 네가 안 준다 해도 형님은 너를 어찌할 수 없을 게다!”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부녀가 힘을 합쳐 공동의 적을 향해 적개심을 불태우자는 듯이 말했다.

정 대노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불효막심한 놈아!”

정 대노야가 웃음기를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과연 네놈이 나를 어찌할 수 있을지 내 두고 보마!”

말을 마친 정 대노야는 소매를 홱 털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정 이노야가 분을 이기지 못하며 눈을 부릅떴다.

“교교. 저 봐라, 저 봐. 저 사람이 저리 기고만장하게 나온다니까? 좀 전에는 우리를 때리러 집까지 찾아왔어.”

정 이부인이 정교랑의 팔을 끌어안고 억울한 표정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지금은 하소연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됐는지, 정 이노야는 단도직입적으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교랑, 말만 해 다오. 어떻게 하면 좋겠니?”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이미 말했는걸요.”

말했다고?

정 이노야 부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잘못된 거라면, 바른대로 하면 된다고요.”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바른대로 하면 된다고?

“뭐가 바른 건데?”

정 이노야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관아에서 결정해 주겠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관아에서 결정해 준다고?

정 이노야가 아직 넋이 나가 있는 사이, 정 이부인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목청을 높였다.

“교랑, 너 지금 대노야가 관아에 우리를 고발한다는 거에 동의한다는 말이니? 이건 우리 가정사인데, 어째서 남들 앞에서 난리를 피우겠다는 거야?”

“남들에게 말 못 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 가족끼리 논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관아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거죠.”

정교랑이 말했다.

정 이노야 부부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변함없는 정교랑의 표정에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우린 확실히 호적을 따로 만들어 재산을 나누고, 사유재산을 은닉했어. 이건 논쟁해도 답이 안 나오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야.

어떤 게 이치에 맞는 결론인지, 관아에서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눈 감고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 관아까지 가지 않아도 뻔한 결과인 것을, 대노야가 일부러 집안 망신을 시키겠다고 관아까지 일을 끌고 간 거니까.

보통의 경우라면 대노야를 말려야 정상인데, 교랑은 대노야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아예 대놓고 대노야한테 관아에 우리를 고소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관아에서 결정토록 하자고?

정교랑!

“너! 지금 우리를 가지고 논 거니?”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재산을 우리에게 넘겨준다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었어? 우리가 그 오랫동안 기뻐했던 게 다 헛짓거리였던 거야?

“몹쓸 것! 대노야와 주씨가 네게 얼마나 좋은 걸 약조했기에 이러는 게냐? 어떻게 그들과 한통속으로 나를 음해할 수 있어! 세상에 이런 불효막심한 것이 다 있나!”

정 이노야가 분을 못 이기며 소리쳤다.

밖에서 기다리다 지친 주 노야는 정 이노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치 전투 개시를 알리는 북소리를 들은 장수처럼 시종들을 데리고 곧장 대청 안으로 쳐들어왔다.

“불효막심한 건 네놈이지!”

주 노야가 소리를 내지르며 정 이노야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감히 사유재산을 숨겨? 그리고 그 죄를 친딸에게 덮어씌워? 내가 네놈의 형님을 대신해서 한 수 가르쳐 주마!”

주 노야의 주먹에 맞은 정 이노야가 바닥에 고꾸라지자, 정 이부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정 이노야를 향해 달려갔다. 정 이노야 부부가 더 소란을 피우기 전에, 주 노야는 시종을 시켜 두 사람을 문밖으로 끌어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줄곧 문 앞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좀 전에 이노야 부부가 주씨 가문에 발을 들이려 했을 때도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한바탕 실랑이 끝에도 정씨 가문에서 데려온 시종들은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고, 정 이노야 두 내외의 몸뚱이만 겨우 이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대부분 군인 출신인지라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두 사람을 손쉽게 대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욕설 소리가 차츰 멀어지자, 주 노야는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다정한 표정으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많이 놀랐지, 교교? 네 외숙이 있는 한, 너는 무서워할 게 아무것도 없단다. 절대로 이 집에서는 정씨 놈들이 난리를 피울 수 없을 게야.”

마당에 서 있던 주 부인은 주 노야의 말을 듣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놀라긴 뭘 놀라? 사람도 죽인 애가, 겨우 이런 거 가지고 놀라겠어?”

주 부인이 고개를 들고 정씨 부부가 떠난 대문을 내다보았다. 점점 더 멀어지는 정씨 부부의 목소리에, 주 부인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합장을 하고 불경을 읊었다.

가엾은 정 이부인…….

그러게 내가 저 여인은 금강야차라 건드리면 안 된다고 일찍이 말했거늘.

“노야, 저 몹쓸 것이! 저 몹쓸 것이 우리를 해친 거예요!”

주씨 저택의 대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이 자신을 부축하러 다가온 여종들을 밀쳐내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울면서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정 이노야는 거의 제힘으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인지라 사환들이 양옆에서 그를 부축했다.

주씨 시종들에게 마구잡이로 밀쳐진 정 이노야의 옷과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주 노야와 그 시종들에게 흠씬 얻어맞은 정 이노야의 얼굴에는 오전에 맞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른 상처가 더해졌다. 사환들에게 부축을 받는 정 이노야의 몰골은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노야, 노야.”

정 이부인은 속상한 마음에 정 이노야를 붙잡고 울먹거렸다. 정 이노야는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듯, 그런 자신의 몰골에 전혀 창피함을 느끼지 않았다.

“내 그 몹쓸 것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리라!”

정 이노야가 이를 부득 갈면서 소리쳤다. 그러고는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 정 이부인을 재촉했다.

“일단 돌아가세.”

정 이부인도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걱정할 것 없소. 관아에서는 절대로 이번 사건을 수리하지 않을 거요.”

정씨 저택에 돌아온 정 이노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읊조렸다.

“왜요? 그 계집은 분명 우리를 일부러 고소한 거예요!”

정 이부인이 울면서 소리쳤다.

“일부러 우리를 고소한 거라고 해도, 관아의 벼슬아치들이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을 것 같소? 그 계집이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내 기필코 천륜을 어긴 대죄로 그 계집을 곤장형에 처하게 만들 것이오. 누가 날 막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다른 사람이 나를 고발해서, 그 계집이 직접 관아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난 엄연한 그 계집의 아비야! 지난번에 나를 탄핵했던 풍림이 지방으로 좌천된 게 얼마나 됐다고 감히 나를 건드려? 풍림이 가는 길에 동행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와 보라 그래!”

정 이노야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정 이노야의 단호한 태도에 정 이부인은 한시름 놓았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여전히 정교랑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어요. 그 애가 좋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재산을 넘겨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고요. 우리가 그 애를 얼마나 진심으로 잘 대해 줬는데, 어쩜 이럴 수가 있죠?”

정 이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대청에서 갑자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심으로 잘 대해 줬다고 하였느냐? 본인 스스로 그 말을 믿기는 하고?”

정 이노야 부부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대청 안을 쳐다보았다. 대청 안에서는 정 대노야가 한껏 여유로운 자세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 여긴 우리 집이라고요!”

정 이부인이 버럭 화를 냈다. 정 대노야가 같잖다는 듯 정 이부인을 흘겨보았다.

“이 저택은 정씨 집안의 소유야. 정씨로 된 모든 재산은 다 내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에나!

정 이부인은 정 대노야가 이토록 철면피인 줄은 처음 알게 되었다.

“형님, 적당히 하십시오.”

정 이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내가 네놈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정 대노야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으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이제 네놈이 이 모든 걸 멈추고 싶다고 해도, 절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정 이노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침을 뱉으려고 입술을 떼던 찰나, 대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노야, 노야, 큰일 났습니다!”

집사가 황급히 뛰어왔다.

“또 뭐가? 누가 또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더냐!”

부아가 치밀어오른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집사를 향해 소리쳤다.

“노야. 그게, 관졸들이 쳐들어, 아니, 관졸들이 찾아왔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정 이노야가 흠칫 놀라서 반문했다.

“관졸들이 뭐하러 여길 와?”

“원고와 피고를 데리러 왔다고 합니다.”

집사가 울상을 지으며 대청 안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정 대노야를 흘깃 쳐다보았다.

뭐가 어째?

정 이노야가 경악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청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켰다.

“자, 가자. 이번 사건을 제대로 진행해 보자고. 네가 얼마나 파렴치한 불효자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겠다!”

정 대노야가 소매를 홱 털고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정 이노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집사를 쳐다보았다.

“관리들이 미친 게야? 어떻게 이 사건을 수리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그럴 리가 없어!”

정 이노야가 소리쳤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럴 리가 없다니. 그러게 내가 경성에 가지 말라고 일찍이 말하지 않았느냐. 여긴 좋은 곳이 아니라고 했는데, 들은 체도 안 하더니.”

정 대노야가 천천히 정 이노야의 곁을 지나치면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 이노야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정 대노야의 뒷모습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빌어먹을, 내 꿈에도 몰랐구나. 내가 넘어야 할 경성의 칼산이 형님이었고, 나를 심판대에 올리는 사람이 내 친딸일 줄은! 이 간사한 놈들아! 간사한 놈들!”

정 이부인이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 얼굴로 대성통곡했다.

“이 사기꾼들아! 거기에 들어간 내 돈이 얼만데! 그건 내 돈이라고!”

-누이를 지켜-

올해 경성의 봄은 예년의 봄보다 훨씬 시끌벅적했다. 덕승루 화괴 다툼으로 오만 관을 허공에 뿌렸다는 일화는 벌써 무수히 많은 이야깃거리로 파생되었다. 이 사건이 경성을 한창 달구고 있을 때, 또 다른 사건이 사람들의 관심을 한데 모았다.

“정씨 가문에서 또 난리가 났다던데.”

“또 무슨 난리? 이번엔 덕승루에 화대를 얼마나 냈다고 하오?”

“집안에 그런 딸내미가 나오다니. 나였다면 벌써 창피해 죽었을 거요.”

“아닐세. 이번에는 정씨 가문 대노야가 정 낭자의 부친을 관아에 고소했다고 하더군. 호적을 따로 만들어 사유재산을 은닉했다고!”

“이야, 정 이노야도 간덩이가 제대로 부은 사람이네.”

“그런데 그럴 만도 하지. 오만 관을 화대로 날릴 수 있는 정도의 재산이잖소. 그 누구라 해도 눈 딱 감고 자기 거로 만들고 싶을걸?”

“그런데 고소까지 한 걸 보면, 정 대노야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것 아니오?”

“정 낭자의 가족이 그런 행보를 보일 줄 누가 알았겠어? 어쩌다 저잣거리 한량 같은 가족을 둬서는. 신선의 제자라는 명성만 모욕을 당하게 생겼네.”

“모욕? 세상 어느 신선의 제자가 기루에서 화괴 다툼을 하나? 그것도 모자라 화대로 오만 관을 쓰고? 정말 황당하고 우스운 이야기지.”

“아무튼, 정씨 집안에 멀쩡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걸 이번 기회로 제대로 알게 됐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을 텐데, 정씨 일가는 분명히 엉망진창인 게야.”

방 안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씨 저택에서 저런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지가 꽤 됐던 터라, 문 앞에 서 있던 시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기뻐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고 관인께서 드디어 기뻐하실 일이 생겼어요! 우리가 덜 얻어맞게 됐어요!

“망신이야, 집안 망신!”

고 관인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어 무릎을 치며 웃었다.

“이보다 더 망신스러운 일이 있겠나? 신선의 제자라는 건 헛소문인 거고, 분명 황당한 이야기로 남들을 현혹하고 다니는 무당일 게다.”

“그러니까요. 신선은 사람이 먹는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 밥을 먹는 자는, 모두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인 게지요.”

시종이 아첨의 웃음을 보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감히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누가 제일 큰 웃음거리가 되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고 관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한껏 화기애애한 방 안으로 식객 한 명이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십사 관인, 관아의 말을 들어 보니 이번 정씨 형제의 사건을 수리하자고 했던 게 관인의 뜻이라고 하던데요?”

식객이 다급하게 물었다. 고 관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가, 아주 시끌벅적해지겠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망신을 줘야지.”

식객이 머뭇거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관인, 이러면 좋지 않을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정 이노야의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져 자칫하면 경성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딨나? 왜? 자네는 아직도 그자를 보호하고 싶은 겐가?”

고 관인이 식객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제가 보호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자가 경성에 있어야만 정 낭자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정 이노야가 경성 밖으로 쫓겨나면, 정 낭자를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식객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고 관인은 반대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억제?”

고 관인이 웃음을 거두고 콧방귀를 뀌었다.

“고작 여인네 하나일 뿐인데, 억제하기 힘든 겐가, 아니면 억제하기 싫은 겐가? 정말로 그 여인을 억제하고 싶다면, 손가락 하나로도 그 계집을 눌러 죽일 수 있어.”

“관인,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이 항상 물샐 틈도 없을 정도로 용의주도하게…….”

식객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지만, 고 관인은 그의 말을 끊고 냉소를 지었다.

“퉤! 물샐 틈도 없기는! 자네도 전에 말하지 않았나. 그 여인도 고작해야 여인네일 뿐이야. 아버지와 자네들이 너무 과한 걱정을 하는 게 틀림없다니까. 그 여인의 수법이 얼마나 물샐 틈이 없든 간에, 한낱 여인네가 도대체 뭘 어쩔 수 있겠나?”

고 관인이 여유롭게 두 팔을 벌리고 팔걸이 의자에 기댔다.

“더 말할 필요 없네. 일개 여인네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내가 똑똑히 보여 줄 테니.”

바깥의 소란스러움과는 달리, 정씨 저택은 몹시 고요했다. 하지만 지금의 고요함은 예전의 고요함과는 확연히 달랐다.

정칠랑이 마당 앞에 서서 대청을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온 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따뜻한 봄날인데, 지금은 가을 겨울의 스산함이 느껴질 정도로 마당엔 냉기만이 맴돌았다.

대청 안에서 말싸움 소리와 정 이부인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이렇게 됐네. 강주에서도 이랬고, 경성에 와서도 똑같아.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부모님과 백부, 백모님과의 사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나 봐. 그 여인이 우리 집에 들어온 뒤로는 쭉 그랬어.

전에는 그 여인이 바보라서, 나와 우리 집안을 무시당하게 하는 존재여서 싫었어. 그래서 가족들이 다 그 여인을 싫어하며 혐오했고, 그래서 가족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라고 여겼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특히나 경성에 온 이후로 그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겠어. 경성에서 어머니를 따라 여러 가문의 연회에 참석했는데, 다들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아첨 떨고 있다는 걸 느꼈어.

언니들에게 혼담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혼담을 넣은 가문들은 예전의 우리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훌륭한 가문들이야.

내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모든 게 그 여인 덕분이라는 걸 모를 리는 없지.

여기 경성에서는 사람들이 그 여인을 싫어하거나 혐오하지 않아. 오히려 그 여인을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잘 보이려고 온갖 아첨을 떨지. 그 덕에 우리 자매들도 남들이 떠받들게 됐고.

우리가 누구 덕분에 이런 대접을 받든, 좋은 일인 건 맞잖아? 그러니 여기에서 지내는 생활이 점점 더 좋아져야 정상인데, 집안 어른들의 관계는 왜 점점 더 나빠지는 거지? 대판 싸운 뒤에 아예 대화조차 하지 않던 때를 지나, 기어코 관아까지 가서 싸우게 되다니.

정 이부인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자, 정칠랑은 생각을 멈추고 앞을 내다보았다. 대청 문이 열리고, 정 대노야가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마당에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정칠랑을 보자, 정 대노야는 멈칫했다.

칠랑은 아우 내외가 애지중지 키운 탓에 철이 안 들고 제멋대로지. 그래도 그렇게 큰 덕인지, 아무런 걱정 없이 해맑기만 한 앳된 소녀였는데. 그 명랑했던 칠랑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무리를 잃어 쓸쓸하고 외로운 기러기처럼 불안해 보이는군.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다 정씨 가문을 위한 것이 아닌가. 다 우리 정씨 가문의 후세를 위한 일이야. 그런데 어째 우리 아이들의 표정이…….

어서 이 모든 게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야지. 그러면 우리 정씨 가문도 순탄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고, 우리 후손들도 더욱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을 테니.

정 대노야가 정칠랑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

“칠랑, 경성에서는 좀 지낼 만하더냐?”

정칠랑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대답하지 않았다.

“육랑이 네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단다. 너희에게 주라며 챙겨 준 선물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급하게 오느라 못 가져왔구나.”

정칠랑이 정 대노야를 빤히 바라보면서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백부님, 왜 우리를 이렇게 모질게 대하시는 거예요?”

정칠랑이 울며 묻자, 정 대노야가 정칠랑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네 백부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다. 네 부모는 더 큰 잘못을 했고.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해, 너희들을 위해, 우리는 더 이상 잘못된 행동을 계속해서는 안 돼.”

말을 마친 뒤, 정 대노야는 곧바로 정사낭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사낭의 거처 주변은 시녀의 명을 받은 주씨 가문의 시종 네 명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그래서 정 이노야는 거처 밖에서 큰소리로 정사낭을 향해 호통치고 욕하기는 해도, 거처 근처까지 오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정사낭의 거처는 몹시 조용했다. 정사낭의 시중을 드는 몸종과 여종들은 모두 시녀가 직접 고른 하인들이었다. 정사낭의 거처 안팎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정사낭만을 위한 단독 부엌도 따로 있었다.

정 대노야가 정사낭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식사 시간이어서 맛있는 냄새가 마당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언니, 밥 다 됐어. 사공자님은 아직도 식사 안 하시겠대?”

두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근심스러운 말투로 대화하고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한 정 대노야가 잠시 주춤했다.

정 대노야는 덕승루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소상히 알아보았다. 예전과 달리, 그는 이번에 경성에 들어오고 나서 곧장 정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 정 대노야는 경성의 여러 찻집과 술집, 학당과 저잣거리, 그리고 사찰과 도관을 두루 돌아다니며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그는 정교랑과 고씨 가문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직접 수소문하여 자초지종을 알아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손해 보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정 대노야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정사낭은 잠을 자는 듯했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결국 입을 열었다.

“먹을 생각이 없으니, 그만 가져가거라.”

하지만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내 누군가가 의자에 앉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밥을 안 먹는 건, 그 여인에게 보여 주기 위함인 게냐? 얼마나 험한 꼴을 더 보여 주고 싶은 게야?”

정 대노야의 말을 들은 정사낭은 흠칫 놀라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정사낭이 놀란 눈으로 외쳤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저질렀던 일이 떠올랐는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울먹였다.

“아버지, 소자가 불효자입니다. 괜히 집안에 폐만 끼치고.”

정 대노야가 정사낭의 팔을 내리고 천천히 한쪽 소매를 걷자, 붕대로 칭칭 감은 후 나무막대기 두 개로 고정한 정사낭의 손목이 드러났다.

“정말 예전처럼 좋아질 수 있는 게냐?”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이가 그렇다고 했으니 틀림없습니다.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아프진 않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정사낭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엄격한 분이셨다. 자신이 이런 짓을 저지른 걸 알았다면, 고 관인이 손목을 부러트리지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자신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을 보자마자 한 첫마디가 이렇게 다정한 말일 줄은, 정사낭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사낭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일단 밥부터 먹거라. 다친 몸이 빨리 나을 수 있도록 푹 쉬고. 이렇게 제 몸을 상하게 하다니, 네 누이 보라고 이러는 게냐?”

정 대노야가 말했다. 정사낭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또 한 번 생각나서 창피해하며 사죄했다.

“아버지, 소자가 불효…….”

정사낭이 입을 열자마자, 정 대노야가 그의 말을 끊었다.

“뭐가 불효라는 말이냐? 네 동기들과 함께 덕승루에서 만찬을 즐기고, 화괴를 불러와 흥을 돋우려고 했다가 다른 사람과 화괴 다툼을 한 것? 풍류를 아는 사내라면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일인데, 뭐가 창피하고 뭐가 불효라는 게야? 그깟 화괴 다툼이 뭐라고? 학업과 과거 시험도 따지고 보면 경쟁인데, 화괴를 두고 경쟁할 수 있고말고. 그런 게 바로 젊은이지.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

정사낭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네 누이가 이미 말했다. 이건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그런데 네가 이렇게 대범치 못하게 내려놓지 못하고 끙끙 앓는 건, 네 누이와 대적하겠다는 뜻이냐? 네 누이가 사소한 일이라고 한 말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게야?”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호통쳤다.

“아버지, 그건 누이가 저를 지켜 주려고…….”

정사낭이 창피해하며 설명하려 했지만, 정 대노야는 또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네 누이가 너를 지켜 주려고 그랬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너는 왜 네 누이를 지켜 줄 생각을 못 하는 게야?”

누이를 지켜?

정사낭이 멍한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누이에게 폐만 끼치는 내가 어떻게 누이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이지…….

“네 누이가 너를 지키고자 네가 옳다고 말했으면, 넌 옳은 게다. 그러니 너는 세상 사람에게 네 누이가 말한 게 옳다고 알려 줘야 해. 그게 바로 네가 누이를 지키는 방법이다. 가족이 무엇이더냐? 가족이라면 다 같이 한 마음이 되어 바깥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정 대노야가 갑자기 정사낭의 어깨에 손을 세게 얹고 목청을 높였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거라! 겁먹고 움츠러들 게 뭐 있어!

어깨 펴고! 세상 사람들에게 네가 옳다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라고 하거라! 어깨 펴고! 네가 남 보기에 창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란 말이다!”

어깨 펴고! 당당하게!

정사낭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폈다.

“아버지.”

정사낭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 대노야를 불렀다.

“교랑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비록 네가 교랑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교랑이 너를 지킬 때, 겁쟁이처럼 숨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원래 잘못을 저지르며 현명해지는 것이야. 그러니 이번 잘못이 헛되지 않게, 이번의 손해가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절대로 네 가족을 고통스럽게 한 원수가 통쾌함을 느끼게 둬선 안 된다.”

정사낭이 정 대노야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울먹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소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겠습니다.”

“아씨, 어때 보여요?”

반근이 정사낭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며 다친 부위를 정교랑에게 보여 주었다. 정교랑이 손으로 정사낭의 손목을 천천히 문질렀다.

“공자님, 아프세요?”

정사낭은 자신의 다친 부위를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정사낭을 쳐다보며 시녀가 쿡 웃었다. 정사낭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프네.”

정사낭이 솔직하게 말했다.

“아픈 게 안 아픈 것보단 나아요. 안 아프면, 큰일 나는 거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교랑이 정사낭의 다친 손목에 침을 놓고 새로 약을 바르자, 반근이 붕대를 다시 감아주었다.

“근데 어쩐 일로 공자님이 직접 여기까지 오셨어요? 안 그래도 아씨께서 그쪽으로 가시려던 참이었는데.”

반근이 붕대를 감으며 물었다.

“오늘 나가서 동기 몇 명과 술을 마시기로 했어. 여기는 지나가는 길에 들렀고. 이러면 괜히 누이가 우리 집까지 오지 않아도 되잖아.”

정사낭이 웃으면서 말했다. 반근과 시녀가 다소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공자님, 밖에 나가 술 드시려고요?”

“왜? 마시면 안 되나?”

정사낭이 똑같이 놀란 눈치로 반문하고는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누이, 나 술 마셔도 돼?”

“술은 아직 안 되고, 차나 음료 정도는 괜찮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알겠어. 누이한테 먼저 물어봐서 다행이네. 시간이 늦었으니, 난 이만 가볼게.”

정사낭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도 정사낭을 배웅하려 몸을 일으키고 그와 함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참, 누이는 어디 나가지도 않는 것 같던데, 내가 나가는 길에 사다 줄 건 없어?”

정사낭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씨께서 밖에 안 나가시더라도, 저희가 있잖아요.”

시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정사낭이 그제야 알겠다며 인사한 뒤 대문을 나섰다. 정사낭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녀가 안심이 되는 듯 픽 웃었다.

“아씨, 참 좋네요.”

시녀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이 좋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좋다는 거야?”

정교랑이 묻자, 시녀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께서는 뭐든 다 아시니까 참 좋네요.”

시녀가 정교랑의 소매를 끌면서 말했다.

“아씨, 우리도 나가서 놀아요.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답답한 거 있죠.”

정씨 가문 사람 중 절반은 마음이 홀가분했고, 나머지 절반은 수심에 가득 찼다. 같은 시간, 정 대노야의 고소장을 수리한 관아의 판관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인, 이번 건은 어려운 사건입니까?”

며칠 사이에 수염이 다 빠질 정도로 수염을 쓰다듬는 판관이 걱정스러웠던 수하가 차를 올리며 물었다.

형제들의 재산 싸움이면, 좋은 사건 아닌가? 모든 관아에서 쌍수 들고 환영하는 사건이 바로 이런 사건이지 않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관리가 배에 기름칠할 수 있는 이런 귀한 사건은 당연히 좋은 사건이잖아. 이런 사건을 맡으면 다들 싱글벙글 기뻐하기 바쁘던데, 판관 대인은 왜 저렇게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계시는 건지.

“형제간의 재산 싸움 말이냐? 가산을 놓고 싸우는 게 뉘 집 형제인지를 봐야지.”

판관이 말하면서 탁자 위에 놓인 고발장을 손으로 탁탁 쳤다.

“무려 정씨야. 정씨.”

수하가 목을 빼고 고발장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정씨가 왜요?”

판관이 수하를 흘겨보았다.

“정씨가 왜냐고? 왕 공사, 자네가 어떻게 우상공사(右廂公事: 관직명)가 된 줄 아는가?”

왕 공사가 아첨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인, 알다마다요. 다 대인께서 소인을 챙겨 주신 덕분이지요.”

판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틀렸어. 자네를 도운 건 정씨 낭자였네.”

예?

왕 공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초 유금천은 순풍에 돛단 듯 잘나가기도 했고 부윤의 측근이기도 했는데, 하필이면 이 정씨 여인을 건드려서 지방에 좌천된 게야.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는 아직 산속에서 광부들이나 관리하고 있었겠지.”

판관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듣기론 고 대인의 심기를 건드려서라고…….”

왕 공사가 놀란 얼굴로 말하자, 판관이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모자란 인사를 봤나. 경성에 들어온 지 그렇게 오래됐으면서,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안 했어? 여기는 경성이고, 관아일세. 자네처럼 귀도 먹고 말까지 못해서야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으려는 게야!”

부아가 치밀어오른 판관이 호통쳤다. 왕 공사가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자, 판관은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물러가라고 했다.

왕 공사가 나간 뒤에도 판관은 여전히 탁자 위에 놓인 고소장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 낭자에게 미운털이 박혔다가는, 아니, 고 관인에게 미운털이 박혔다가는!

정 낭자에게 미움을 샀다가는 풍림과 똑같은 처지가 될 것이고, 고 대인의 미움을 샀다가는 유금천과 같은 꼴이 날 것이야. 이번에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안팎으로 사람대접을 못 받겠구나.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어.

부윤 대인, 이 간사한 놈 같으니라고! 어떻게 이렇게 뜨거운 감자를 내게 던져줄 수 있어!

“안 되겠다. 민사 소송이긴 하나, 어쨌든 정 이노야는 관리니 이 사건을 대리시로 넘겨야겠어!”

판관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쫓겨났던 왕 공사가 다시 뛰어 들어왔다.

“대인, 귀덕낭장 주 노야께서 오셨습니다.”

귀덕낭장 주씨!

판관이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역시 정 낭자도 사람을 보내왔군.

“이번 사건이 판결 내기가 어렵소이까?”

귀덕낭장 주 노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역시 정 낭자가 보낸 사람다워. 기세가 대단한 것이 고 관인 쪽에서 보낸 사람 못지않군.

판관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요?”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묻자 주춤하던 판관이 주 노야에게 되물었다.

“그럼, 주 대인께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물을 필요가 뭐 있소? 정동 그자가 사유재산을 은닉했다는 증거가 확실하잖소. 정동의 부인 이름으로 재산을 두었다는 건, 부모가 생존에 계신데 재산을 따로 나눈 별적이재(別籍異財)의 죄에 해당하지.”

주 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판관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예, 예. 하지만 제가 어찌 감히 별적이재라고……. 으응?”

판관이 자연스럽게 주 노야의 말을 따라서 대답하던 중,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고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한 거지?

“감히 별적이재라 할 수 없기는. 이게 바로 별적이재인 것을.”

주 노야의 말에 판관이 주 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주 노야, 정동은 정 낭자의 부친이잖습니까.”

“부친인 게 뭐? 부친이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자식 된 자로서 아비의 죄를 덮어줘야 한다는 말이오? 아버지가 중하다고 해서, 종족을 배반해도 된다는 소리요? 지금 정 낭자에게 종족을 배반하고 죄를 숨겨 주었다는 죄명을 씌우겠다는 것이오? 정 낭자가 그럴 사람이오?”

주 노야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판관이 주 노야를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일이 쉬워지지요.”

주 노야가 나간 뒤, 판관이 무언가 결심한 듯 탁자를 내리쳤다.

“여봐라.”

왕 공사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판관이 고소장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고소장을 받아오려고 재빨리 판관에게 다가갔다.

“대인, 이걸 대리시로 보내시려고 그러시지요? 소인이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왕 공사가 웃으면서 말하자, 판관이 그를 향해 침을 뱉었다.

“이런 아둔한 자를 봤나. 이 좋은 일을 왜 대리시로 보내나? 원고와 피고를 공당으로 소환하게. 본관이 친히 판결을 공표할 테니.”

좋은 일? 수염이 다 빠질 정도로 잡아 뜯으며 근심하던 일이 갑자기 좋은 일이 됐어?

왕 공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발장을 받아왔다.

이래서 경성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복잡하다고 하는 거구나.

“노야!”

관부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문서를 본 정 이부인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정 이부인의 뒤에 서 있던 두 여종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작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고생했소.”

정 대노야가 관졸에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시종이 관졸에게 수고비를 건넸다. 관졸들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기쁘게 수고비를 받아 갔다.

“문서는 모두 바꿔 두었으니, 정 대노야께서 잘 보관하십시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관졸들이 정중하게 말하자 정 대노야가 그들을 배웅하면서 말했다.

“신선거에 자리를 마련했으니, 시간이 된다면 잠시 들렀다 가시게.”

저 봐, 저 봐. 벌써 주인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 좀 봐!

정 이노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난 며칠간 신선거 주인으로 지내면서도 돈이 아까워 남들을 초대하지도 못했는데! 그렇게까지 아낀 게 결국 남 좋은 일만 됐어!

관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정 대노야가 몸을 돌리고 웃음기를 거두었다.

“형님, 괜한 것에 손대서 다치지 마십시오.”

정 이노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천륜과 이치에 맞게 가져가는 것이야. 너야말로 괜한 것에 손대지 마라.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이번에 내가 주도면밀하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대리시에 끌려가 관직도 못 지켰을 것이야.”

정 대노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요? 형님이 지금 이러는 게 날 위한 것이라고?”

정 이노야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내, 내가…….”

정 이노야가 거친 숨을 내쉬다가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한테 말씀드릴 겁니다.”

“어머니께 뭐라고 말씀드릴 건데? 네가 친딸이 일궈낸 재산을 어머니 명의로 두지 않고, 네 부인의 명의에 달아 사유재산을 은닉했다고 말할 것이냐? 어머니께서 너를 천륜을 어긴 대죄로 네놈을 또 한 번 관아에 고소하면 어쩌려고?”

어머니의 성정이 생각난 정 이노야가 잠시 주춤했다.

어머니께서는 늘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셨지. 내가 어머니를 고명 부인으로 만들어 드릴 수 있다 믿으시고 나를 제일 아끼셨어.

하지만 나와 함께 경성으로 오지는 못하셨으니, 형님 내외가 어머니를 챙겨 드리면서 나에 관한 무슨 안 좋은 말을 늘어놨을지 어떻게 알아.

이 상황에 내가 천륜을 어긴 대죄로 또 한 번 관아에 드나들게 된다면, 난 분명 경성에서 내쫓길 거야.

“적당히 하거라.”

정 대노야는 황당해하는 정 이노야를 쳐다보며 무덤덤하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걸음을 옮겼다.

“대노야, 점포에는 제 돈도 들어가 있어요. 제 돈은 돌려주셔야죠.”

정 이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정 대노야가 혀를 찼다.

“있다고 우기면 답니까?”

“대노야, 진짜예요. 그 몹쓸, 아니, 교랑이 화괴 다툼에 돈을 다 쓰는 바람에 점포 운영이 어려워졌는데, 제가 혼수를 팔아가면서 점포를 지켜냈다고요. 심지어 제 장신구들까지 팔았어요.”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정 대노야의 뒤를 쫓아가며 사정했다. 하지만 정 대노야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꾸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점포에 쏟은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장부를 그리 오랫동안 쥐고 있었는데 빼돌린 돈이 얼마일지 누가 알아? 내가 돈을 도로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워 어쩔 줄 모를 판에,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해?”

세상에! 정말 억울해 죽겠네!

“대노야! 양심을 걸고 하늘에 맹세컨대 진짜라니까요!”

정 이부인이 다시 울음을 터트리며 손으로 가슴을 쳤다.

“양심을 걸고 하늘에 맹세한다니까요! 정말로!”

사람이 어쩜 저렇게 속이 시커멀 수가 있어! 세상에 도리가 존재하긴 하는 거야?

내 돈! 내 장신구들! 그리고 장부에서 매일 늘어나는 복리까지! 며칠만 기다리면 한 달을 채우는데, 며칠만 더 기다리면 그 돈이 다 내 손으로 들어오는데!

아이고, 하느님!

“더는 이렇게 못 살아. 이렇게 살 바에는 내가 나가 죽어 버려야지!”

정씨 저택의 마당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4월 초,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이었다. 퇴조를 알리는 악공들의 중주가 울리자 옥좌에 앉아 있던 천자는 조당을 떠나고, 진소 등의 중신들은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중요 사안들에 대해 토의했다. 그리고 조회에 참여했던 나머지 문무백관들은 황궁 밖으로 나갔다.

고 관인은 여느 때처럼 여러 관리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아첨을 들으며 웃고 떠들었다.

“고 관인이 치욕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병가를 내어 조회에 참여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한 관리가 먼발치서 고 관인 무리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다른 관리가 음, 하면서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나. 고 관인이 병이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조회에 불참할 사람은 아니지. 정말 다친 사람도 병가를 내지 않고 조회에 참석했지 않나.”

대답하던 관리가 턱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먼저 말을 꺼낸 관리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과거시험을 치르고, 관직을 제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진사들이 웃으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 정 진사 말인가?”

관리가 웃으면서 정사낭의 손목으로 시선을 옮긴 뒤 말을 덧붙였다.

“관복의 소매가 긴 것이 아쉽군.”

정사낭의 소매를 바라보는 시선은 비단 한 명뿐이 아니었지만, 정사낭은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듯 동료들과 웃으며 걸어갔다. 심지어 어떤 이가 일부러 그에게 망신을 주려고 다가와 다친 곳은 어떻냐고 물었을 때, 정사낭은 시원스럽게 소매를 걷어 올리고 웃기까지 했다.

“별일 아니네. 조금 상처가 난 것뿐이니.”

조금 상처가 난 것뿐이라고?

“분명 손목이 부러졌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을 묻던 관리가 놀란 얼굴로 반문하자, 정사낭이 쾌활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서로 술 마시고 흥이 올라 살짝 손발을 쓰며 다툰 것뿐이네. 그런 자리에서 근육과 뼈가 상할 정도로 싸우면 쓰나. 자네가 그리 말하면, 고 관인이 뭐가 되겠나!”

자신이 고 관리를 모함한다는 식의 발언을 듣자, 관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가세, 가자고. 오늘처럼 다 같이 모이는 것도 힘든데, 내가 한턱내겠네.”

정사낭이 웃으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만 관으로 화괴를 얻은 자가 한턱내겠다는 소리를 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몰려왔다.

“주 낭자도 오는 거요?”

누군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당연하지.”

정사낭의 낭랑한 웃음소리에는 젊은이 특유의 득의양양한 기세가 잔뜩 서려 있었다. 정사낭의 웃음소리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족히 사백 명은 넘는 진사 가운데 이름을 알리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정사낭은 이 어려운 것을 단 며칠 만에 해냈다. 물론, 덕승루 화괴 다툼으로 명성을 얻은 것이지만.

“역시 젊은이의 의지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군.”

누군가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의 표정만 보면 젊은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뱉은 말에는 젊은이를 향한 부러움이 가득했다.

“정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람에, 황당한 일이군. 저리도 창피한 줄을 모른다니. 쯧쯧. 체통을 지켜야지.”

다른 누군가가 몹시 언짢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뭐라 떠들든 간에, 화괴 다툼은 기껏해야 젊은 나이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일로 여겨지게 됐다. 썩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사낭의 사생활이고, 아직 젊은 사내다 보니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되었다. 조정 대신 중에서도 젊은 시절에 황당한 일을 벌인 자가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를 뜨는 사람들과 귓가를 스치는 말들 때문에 고 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녀석이 얼굴에 철판을 깐 게 분명합니다. 감히 고 관인을 상대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는 연극 따위를 꾸미다니. 관인, 언제부터 저놈과 이번 일에 대해 논하지 않기로 하신 겁니까?”

시종이 씩씩대면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고 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시종을 향해 호통쳤다.

“내가 바보더냐?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아? 너 같은 잡것이 그걸 다시 내게 읊어 주는 의도가 뭐야? 일부러 내 면전에 대고 욕하려는 게냐?”

일부러 아부를 떨려고 씩씩거리며 했던 말인데, 고 관인의 노여움을 살 줄 몰랐던 시종은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고 관인은 더는 시종을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멀어지는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저런 체면도 없고 창피도 모르는 놈을 봤나!

하지만 정말로 창피를 모르는 사람만이 더욱 유유자적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사낭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지낼수록, 화괴 다툼 사건은 더욱 별일이 아니게 되는 셈이니, 고 관인도 자연스럽게 이번 일을 웃어넘겨야만 했다.

고 관인이 이번 일을 웃어넘기지 못한다면, 도리어 하찮은 일들을 걸고넘어지는 소인배이자 풍류를 제대로 즐길 배짱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고 관인이 이를 부득 갈면서 읊조렸다.

“퉤!”

누군가가 고 관인의 뒤에서 화가 난 듯 큰 소리로 침을 뱉었다.

지금 누구한테 침을 뱉는 게야?

화가 잔뜩 나 있던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몸을 돌리자마자 인상을 펴고 미소를 지었다.

“평왕 전하.”

고 관인이 웃는 얼굴로 예를 표했다. 조복을 입은 채, 뒷짐을 지고 걸어오던 소년이 거만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고 관인은 평왕이 화가 났지만, 자신에게 콧방귀를 뀌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평왕 앞에 서 있던 이가 고 관인 자신이 아니었다면, 평왕은 아마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을 테니까.

“전하? 어찌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고 관인이 물었다.

“기분 좋지.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아? 설마, 진안 군왕이 무평 민란을 잠재우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아직 못 들었나?”

무평 민란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았다는 소식이 대조회에서 알려지고, 곧이어 경성 곳곳에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소식은 내궁에도 금세 전해졌다. 진안 군왕이 승전보를 알리는 인편에 태후와 황후에게 올릴 선물을 보낸 덕분이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 같으니라고!”

궁전 안, 귀비가 오랫동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시중을 드는 이들은 그녀가 깨부순 찻잔 조각을 흔적도 없이 치우고, 귀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놈이 보낸 선물 중에 내게 보낸 선물은 없었다고?”

내시가 난감한 얼굴로 귀비를 따라 궁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마마, 선물은 현지에서 파는 조그마한 장식품일 뿐입니다.”

“아무리 약소한 선물이어도, 격식을 지켰다는 게 중요한 것이야.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약삭빠르게 사람들의 환심을 샀는데. 경왕이 다친 요 몇 년 동안도 그랬어. 본궁에게도 늘 깍듯하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는데 이번엔 왜 하필 내 선물만 빼먹었느냔 말이야!”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그러게요. 이것 참 이상하네요. 그럴 리가 없는데. 진안 군왕이 격식 차리는 데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데, 혹시 선물을 전달하던 이가 실수한 건 아닐까요?”

내시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번 일이 정말로 이상하긴 해. 평소대로라면 진안 군왕이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닐 텐데.

“이상해? 이상할 것도 없지. 예전에는 안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사람을 가리겠다는 뜻이야. 많이 컸다 이거지. 혼자 밖으로 나가 정무를 처리하고, 병사들까지 거느리게 됐잖아. 게다가 이번엔 승리까지 손에 거머쥐었으니 얼마나 재주가 좋아? 그리고 제일 무엇보다도…….”

귀비가 냉소를 지으며 말하다가 서성이던 것을 멈췄다.

“명망을 얻었다는 게야.”

“마마, 이게 무슨 명망이라고요.”

내시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째서 아니야? 이런 게 명망이지! 이젠 온 경성 사람이 다 알잖아. 송자동자는 자식만 낳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싸움도 잘하고, 칙사 노릇도 제대로 한다는 것을!”

귀비가 목청을 높이고 말했다.

“마마, 그렇다 한들 뭐가 바뀌겠습니까.”

내시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마마께서 점점 근심이 많아지시네. 특히나 진안 군왕과 관련된 소식을 들으면 더욱 그래. 별것 아닌 일에도 저리 이성을 잃으시니.

고 대인께서 경성을 떠나기 전에 마마를 잘 돌봐 드려야 한다고 하신 게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구나.

마마께서 정말 좀…….

“뭐가 바뀌겠냐고?”

귀비가 고개를 홱 돌리고 내시를 노려보았다.

귀비는 조회에 나가지 않아도, 황제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귀비의 귓가에 황제의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짐이 그럴 줄 알았소. 진안 군왕은 절대로 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지.”

이러셨겠지. 귀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 상공께서 폐하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셨습니다.”

내시가 서둘러 말했지만, 귀비는 내시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쨌든 폐하는 그리 말씀하셨잖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든, 꺼내지 않든 간에, 폐하께서는 분명히 속으로 그리 생각하실 게다!”

어쩜 내 주위에는 이리도 멍청한 것들만 있는 건지.

귀비의 침이 얼굴에 잔뜩 묻은 내시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벌써 4월인데, 태자 책봉 이야기는 왜 아직도 결론을 못 내렸지?”

귀비가 물었다.

“아, 태자 책봉은 이미 중서문하성을 통과했는데, 폐하께서 무평의 재해와 민란이 잠잠해진 후에 다시 논하자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다시 논하자고? 다시 논할 게 뭐 있다고?”

귀비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황후마마께서 4월은 태후마마의 탄신일이 있는 달이라, 이번 진안 군왕의 승전보와 함께 성대하게 축하하자고…….”

내시가 말끝을 흐렸다.

“황후? 황후가 말했다고? 황후가 언제부터 말을 할 줄 알게 됐어?”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다그치자 내시는 귀비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미소 지었다.

“마마, 황후마마의 병세가 많이 나아진 듯합니다. 그저께는 태후마마를 뵈러 가시기도 했고요.”

이젠 바깥출입까지 한다고?

“본궁은 왜 그 일을 몰랐던 게야? 그렇게 큰일을 왜 본궁이 모르느냔 말이다!”

귀비가 경악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후궁에서 일어난 일인데, 내 눈을 피해갔어?

황후가? 그 병약한 여인이 다시 후궁을 쥐락펴락하겠다고?


작가의 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보통 팔 품 이하의 관리여서 대조회를 참여할 자격이 안 됩니다. 작품의 전개에 필요한 부분이어서 넣은 장면이니,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교랑의경> 20권에 계속

교랑의경 20권

차례

내가?

소문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고

또 뜻밖의

-내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마마께서 오랜만에 평왕 전하를 뵙고 있기도 했고, 폐하와 함께 세 분이 오붓하게 식사를 하시던 중이라, 그런 사소한 일은 방해가 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황후마마께서는 잠시 앉아 계셨다가 금방 궁으로 다시 돌아가셨고요. 오가는 길에 계속 가마에 타 계셨고, 가마에서 내릴 때는 언제나 궁녀 둘이 양옆에서 황후마마를 부축하고 있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도 깜짝 놀라셨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죽을 때가 되어 잠시 기력을 되찾았나 싶어서요.”

귀비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시를 나무랐다.

“허튼소리!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니라!”

내시가 헤헤 웃으면서 재빨리 귀비에게 아첨을 떨었다.

“마마 앞에서 못 할 말이 뭐 있겠습니까.”

귀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평왕 전하께서 태자가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장차 천자가 되실 거고요. 나중에 황후마마께서 건강을 되찾으시더라도, 이곳 내궁에서 황후마마는 텅 빈 껍데기일 뿐, 실제로 가장 존귀하신 분은 바로 귀비마마 아니십니까.”

이때다 싶은 내시가 얼른 아부를 떨며 귀비를 안심시켰다.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평왕이 태자로 책봉되지 않는 한, 본궁은 영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다.”

귀비가 문밖을 내다보면서 두 손을 꼭 잡았다.

고 대인의 말씀이 맞았어. 마마께서는 마음의 병을 얻으신 게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거라. 본궁은 진안 군왕이 경성으로 돌아오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본궁은 진안 군왕에게서 들려오는 좋은 소식도 더는 듣기 싫다고 전해라.”

귀비가 ‘좋은 소식’이라는 네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귀비의 살기 어린 말을 듣고도 내시는 겁먹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주저하면서 고민할 뿐이었다.

“마마, 너무 급한 거 아닐까요? 천천히 하셔도…….”

내시가 조용히 말했지만, 귀비는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천천히는 무슨 천천히! 십 년씩이나 뜸을 들인 것으로도 부족하더냐?”

내시는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맞는 말이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본궁의 말을 명심해라. 본궁도 네놈들이 무슨 생각인지 잘 알고 있어. 본궁에게 신중히 하라고, 더 주도면밀하게 일을 처리하라고 하고 싶겠지. 하지만 한 걸음을 놓치면 다음 걸음도 놓치게 되고, 다다음 걸음도 놓치게 된다. 너희들은 진안 군왕 따위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게지? 죽이고 싶을 때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귀비가 천천히 말했다.

“소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지만 귀비는 콧방귀를 뀌며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라면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너희들, 이런 생각을 안 했느냐? 벌써 십 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그놈을 해치울 기회가 두어 번은 더 있었어. 그런데 번번이 실패하지 않았느냐. 먹는 것으로 해치려 했더니, 이 태의가 정성을 쏟아 고쳐냈고, 사냥하러 나간 틈에 없애 버리려고 했더니 갑자기 평왕이 중간에 나타났다. 드디어 황궁 밖으로 나갈 기회가 생겨 늑대 떼를 불러왔더니, 생판 모르는 행인들과 함께 야영하며 늑대들을 물리쳤지. 쉽게 죽이기에는 그놈 명줄이 보통 질긴 게 아니야.”

귀비가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놈은 운이 너무 좋고, 명줄이 너무 질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운은 점점 더 좋아지고, 명줄은 점점 더 질겨질 거다. 너희들이 손쉽게 죽이기에, 그놈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고.”

귀비의 말에 내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신 말씀이옵니다, 마마. 소인이 당장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겠습니다.”

내시가 잠시 주춤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말씀대로, 태자 책봉은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소인이 즉시 대인들께 말씀을 여쭈러 가겠습니다.”

귀비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본궁이 급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너무 상대를 얕봐서 그래.”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은 황후를 보러 가야겠다. 이렇게 좋은 소식이 전해졌는데, 본궁이 친히 가서 축하해야지.”

귀비의 말에 내시는 서둘러 궁녀들을 불러와 귀비가 편히 환복할 수 있도록 물러났다.

잠시 뒤, 귀비가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본 내시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긴 하네.

진안 군왕이 이번에 귀비에게 결례를 보인 것과 황후마마의 병세가 갑자기 호전된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으려나?

그런 생각이 뇌리에 잠깐 스쳤지만, 이내 내시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설령 연관이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라고.

황후의 건강이 아무리 좋아진다 한들 결국 황후일 뿐이고, 진안 군왕이 제아무리 황제와 태후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이번 기회로 공로를 인정받는다고 해도 결국 군왕일 뿐이야.

이번 일로 자신을 향한 질투와 시샘만 더하고, 남들에게 더욱 눈엣가시가 된 것 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태자 책봉이 가까워지니, 황제에게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발악하는 거겠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댈 수 있도록.

생각해 보니, 정말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의 메뚜기와 죽기 직전에 잠깐 기력이 좋아지는 사람들 같군.

내시가 가볍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대낮의 덕승루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화스러운 상등 별실 안에 사내 일고여덟 명이 관기를 하나씩 옆에 끼고 둘러앉았다. 그중 단연 제일 돋보이는 사람은 정사낭의 옆에 앉아 있는 주 낭자였다.

주 낭자는 머리를 느슨하게 올려 묶고, 별다른 장신구 없이 옥비녀를 하나 꽂고 있었었다. 진한 화장이 아니어서 더욱 청순한 분위기를 풍기는 주 낭자에게서는 다급하게 단장한 티가 났다.

“주 낭자가 사낭을 보고 싶어 마음이 급했나 보네. 제대로 치장하기도 전에 달려오다니.”

옆에 있던 관리들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주 낭자가 소매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눈빛은 사람의 영혼을 홀릴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주 낭자는 오로지 정사낭에게만 그런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내들은 모두 정사낭에 대한 부러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관인께서 아직 다친 곳이 낫지 않아 출타하시기 불편하실 줄 알았어요. 소인 홀로 며칠 동안 심심하고 무료했는데, 관인께서 갑작스레 오시는 바람에 소인은 정말…….”

주 낭자가 아양 섞인 표정으로 가볍게 정사낭을 탓했다. 주 낭자가 한 손으로 정사낭의 팔을 흔들며,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말을 이어갔다.

“소인은 정말 창피해요. 소인이 꽃단장을 마치고 오도록 부디 공자님께서 기다려 주셔요.”

별실 안에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런 단장도 하지 않고 손님을 맞으러 나오는 관기는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단장에 차이가 있다면 손님에 따라 단장하는 정도가 다를 뿐, 관기들은 절대로 아무런 준비 없이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리에 앉은 사내들은 당연히 주 낭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 낭자가 공연히 정사낭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저런 말과 연기를 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주 낭자의 모습이 연기인 걸 알면서도 사내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여인이 자신을 위해 연기까지 해 가며 환심을 사려 한다는 게 즐겁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기쁨이기 때문이었다.

덕승루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조회를 마치고 평왕을 따라 평왕부로 온 고 관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고 관인과 평왕의 앞에서도 가희와 무희들이 가무를 펼치고 있었다.

“전하, 아버지께서 가희와 무희들을 왕부에 두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고 관인이 먼저 입을 뗐다. 평왕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평왕부의 총관이 예를 올리면서 먼저 대답했다.

“관인, 왕부에서 양성하는 이들이 아니오라, 태후마마의 탄신일 축하 연회에 가무를 선보이려 잠시 불러온 자들입니다. 전하께서는 늘 자중자애하는 분인데, 소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겠사옵니까.”

“됐네. 본왕은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자네의 부친처럼 본왕을 어리석은 이로 취급하지 말게.”

고 관인이 서둘러 알겠다며 아첨의 미소를 보였다.

“전하께선 글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십니다. 조정 대신들 말로는 이번에 평왕 전하께서 과거 시험을 보셨더라면 아마 십 등 안에는 충분히 드셨을 거라고 하더군요.”

평왕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인지라, 평왕의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본왕이 그 문제들을 풀어보긴 했네. 별것 아니더군.”

고 관인이 술잔을 높이 들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생이 평왕 전하께 진사주를 바치겠나이다.”

평왕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퉤 하고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신선거의 진사주가 아닌 것이 아깝군.”

신선거 얘기에 고 관인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신선거에는 대단한 신선이 살고 있나 봅니다. 이토록 사람을 괴롭히다니.”

고 관인이 이를 악물고 술잔을 비웠다.

신선거는 정씨 가문의 것이었고, 최근 고 관인과 정씨 가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평왕도 알고 있었다.

“그 낭자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군. 진안 군왕도 그 여인을 연회석에 초대하고 경왕을 부탁한 일로 그 여인이 아주 거드름을 피우며 경왕부를 당당하게 드나든다지? 태후마마께서 경왕에게 붙여둔 궁인들은 그 여인에게 말도 못 건다더군. 무슨 말만 물어도 그 여인이 호통을 친다면서.”

평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고 관인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기색으로 술잔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전하, 이게 다 황실에서 그 여인을 너무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두어서가 아닙니까. 여인네 하나가 무당 노릇을 하면서 이리 거만하게 구는데, 이러다가는 폐하께서 그 여인을 궁으로 모셔와 부적을 쓰게 하고 굿까지 할 판입니다.”

그 여인이 진안 군왕과 무척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어. 게다가 바보인 경왕의 병도 말끔하게 고칠 수 있다고 들었고. 이러다 그 여인이 폐하의 눈에 들어, 폐하께서 그 여인의 말을 듣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면 큰일인데.

폐하 앞에 있을 때마다 걸림돌이 되는 진안 군왕 하나로 부족해 천자를 쥐락펴락하는 신선 낭자까지 더해진다면 내 앞날은 아주 엉망진창이 될 게야!

평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네 하나일 뿐인데, 어찌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정녕 말이 됩니까?”

고 관인이 씩씩대며 화를 냈다.

여인네라.

평왕이 고 관인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없을 리가 있나. 여인네라면 지아비를 하늘로 삼아야 하는 게 숙명 아닌가. 그러니 그 여인에게 신랑감을 하나 찾아주면 그만이지.”

신랑?

고 관인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평왕을 쳐다보았다.

“누가 그런 여인과 혼례를 올리고 싶겠습니까? 그리고 태후마마께서 이미…….”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못 하겠지만 고 관인이라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평왕이 잠시 고 관인을 쳐다보다가 눈썹을 으쓱하고 말했다.

내가?

고 관인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천것을 누가 좋아한다고.”

고 관인의 반응을 보자, 평왕은 자신의 방법이 꽤나 좋은 생각이라고 느꼈다.

“그 천것을 내가 본 적이 있긴 한데, 용모는 나쁘지 않더군.”

“전하, 용모와는 별개의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고 관인이 연신 고개를 저었다. 평왕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불가능한 일이라니? 그 천것의 가문은 어떤 가문이고, 자네의 가문은 또 어떤 가문인가? 경성에서 고씨 가문에 혼담을 넣으려는 사람들은 차고 넘쳐. 정씨 가문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가문과 인연을 맺는 것이야.”

“전하, 저희는 원수지간입니다.”

고 관인이 말했다.

“원수지간이니 자네가 그 여인을 가져야지. 그 여인과 혼례를 올리기만 하면, 그 여인은 완전히 자네의 것이 되는 거잖나. 여인은 지아비를 하늘같이 섬겨야 하니, 자네의 말을 듣지 않는 날에는 혼을 낼 수도 있고.”

혼을 낸다는 자신의 말에, 평왕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눈이 맞아야만 혼례를 올린다고 하던가? 원수지간이야말로 혼례를 올리기 딱 좋은 상대지. 혼례를 올린 뒤에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복수할 수 있지 않은가? 채찍으로 때리든 바늘로 찌르든, 굶기든 수치스럽게 만들든…….”

평왕은 얼굴이 점점 더 상기되면서 호흡이 가빠졌다. 옆에 서서 눈치를 보던 내시가 재빨리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하, 혼인은 인륜지대사지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옵니다. 고 대인께서 결정하시도록 놔두시지요.”

“왜 본왕이 결정하면 안 되는데!”

내시가 자신의 말을 끊자, 평왕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내시를 흘겨보며 호통쳤다.

“온 천하가 다 내 신하고 백성인데, 왜 내가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냐!”

고 관인이 서둘러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내시 역시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평왕이 감정을 추스르는 것을 지켜본 후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고 뒤로 물러났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정 낭자는 워낙 평범한 여인이 아닌지라, 정씨 가문에 혼담을 넣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고 관인이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평왕은 같잖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는 자네가 참 거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 정도 배짱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군. 차라리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며 횡포를 부리는 정 낭자가 더 낫겠어.”

고 관인은 평왕 앞에서 온순한 고양이라도 된 듯 순종적인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그건 다 사람들이 제 아버지의 권력을 질투해서 일부러 저를 헐뜯겠다고 지어낸 말이지요. 제가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버지께서 저와 형제들을 얼마나 엄하게 가르치시는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왜 이번 화괴 다툼에서 낭패를 봤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된다면 분명히 저를 엄하게 혼내실 테니 겁이 나서 그랬던 거지요.”

평왕이 피식 웃었다.

“자네가 제대로 낭패를 보긴 했지. 그러니까 그 틈을 타서 정씨 놈들을 더 세게 팼어야지. 그래야 자네가 당한 망신이 덜 아까웠을 텐데.”

“전하께 우스운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여기서 더 말씀하시면, 저는 정말로 사람들을 볼 낯짝도 없어지겠습니다.”

고 관인이 창피하다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정 낭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자네는 평생 그렇게 창피해야 할 걸세.”

“혼례는 인륜지대사인지라,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는 정 낭자가 어떻게 자기 멋대로 혼사를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아직 어린 나이신데, 벌써 중매를 서려 하십니까?”

고 관인이 웃으면서 물었다. 평왕은 그런 고 관인의 웃음이 몹시 아니꼬웠다.

“본왕이 중매를 설 수 없다면, 태후께서 서시면 되잖나.”

평왕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태후마마요? 아닙니다. 어찌 이런 일로 태후마마를 귀찮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황실에서 정 낭자에게 혼인을 명하는 셈이 됩니다!”

고 관인이 놀라기도, 황공하기도 한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황실에서 명한 혼인이라!

평왕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럼 더 좋은 것 아닌가? 본왕 생각엔 정 낭자가 감히 태후의 은총을 거절할 순 없을 것 같은데.”

고 관인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평왕이 더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손짓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네. 본왕이 태후마마께 직접 가서 말씀드릴 테니, 자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정 낭자와 혼례를 올린다는 것이 억울하다 해도, 어쨌든 본왕을 도운 공은 인정해 주겠네. 이는 본왕이 진심으로 정 낭자를 싫어하기도 하고, 정 낭자가 다시는 진안 군왕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일세.”

고 관인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소신이 어찌 억울하다 여기겠습니까.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고 관인이 왕부 대문을 나가자, 그를 배웅했던 왕부 총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 이대로 저놈이 평왕 전하를 이용하도록 내버려 두실 겁니까?”

내시가 총관에게 조용히 묻자 총관이 미소를 지었다.

“결과에 따라 다를 테지. 혹여 저 녀석이 정 낭자를 목표로 전하를 이용하는 거라면, 굳이 저놈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을 게다.”

“그럼 총관 대인도 전하께서 태후마마를 찾아가시기를 바라는 건가요?”

어린 내시가 물었다. 총관이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전하의 이 방법이 참으로 좋지 않느냐. 안 그래도 정 낭자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존재고, 진안 군왕과도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결코 우리에게 득이 될 사람이 아니야. 이대로 고씨 가문과 혼례를 올린다면 정 낭자는 고씨 가문의 감시하에 지내게 될 테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지.”

내시가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에 앉아 있던 고 관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께서 이리도 총명하실 줄이야.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시다니.”

시종이 옆에서 고 관인을 따라 웃으며 물었다.

“관인께서는 이 방법이 어떠신 것 같습니까?”

고 관인이 자신의 짧고 넙데데한 턱을 매만지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는 정교랑이 덕승루의 별실 문을 열고 들어왔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 계집이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

고 관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덕승루 별실 안의 연회가 끝나자, 얼큰하게 취한 관리들이 서로 웃고 떠들면서 작별을 고했다.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정사낭을 붙잡았다.

“에이, 단둘이서 오붓하게 대화도 좀 해야지.”

정사낭의 동기들이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재빨리 문을 닫고 떠났다.

별실 안이 조용해지자, 한시도 쉬지 않고 웃고 떠들던 정사낭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모두 사라지고 난 후,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주 낭자가 몸을 일으키고 창가에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 사이로 불어 들어온 따뜻한 봄바람이 별실 안을 가득 메웠던 술 냄새를 내보냈다.

“정 관인, 많이 힘드시죠?”

주 낭자가 정사낭에게 따뜻한 차를 한잔 건네며 다정하게 물었다. 정사낭이 자세를 바르게 고쳐앉고 찻잔을 받았다.

“고맙소.”

정사낭이 예를 표한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낭자도 힘들었겠소.”

사람들 앞에서 연기한다는 건,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니.

주 낭자가 고개를 저으면서 살풋 미소를 지었다.

“소인은 힘들지 않아요. 소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정사낭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나 태생부터 당연히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이는 없소.”

그러니 이게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지요.

“정 공자님, 소인이 속상해할 말씀은 하지 마세요. 소인은 지금 같은 삶이 바로 소인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주 낭자가 웃으면서 정사낭의 팔을 끌어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미인이 다정하게 자신의 팔을 끌어안으려 하자, 정사낭은 당황해하며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 주 낭자를 피했다. 주 낭자의 두 팔이 허공에 덩그러니 남겨지자, 주 낭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공자님, 왜 피하시고 그러세요.”

정사낭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 낭자, 이러지 않아도 괜찮소.”

주 낭자가 의아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관인,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전처럼 대하면 되오.”

정사낭은 주 낭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주 낭자는 정사낭과 조금 거리를 두고 바른 자세로 고쳐앉은 뒤,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정 공자님, 주형이 공자님께 사죄드립니다.”

주 낭자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아니, 그 일을 말하는 게 아니오. 그 일은 낭자와 아무 상관 없소. 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정사낭이 황급히 아니라고 말했다.

“공자님, 주형이 미우신가요?”

주 낭자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아니, 아니오. 내가 왜 낭자를 미워하겠소? 미워하겠다면, 나 자신부터 미워해야지. 주 낭자가 고의로 날 이용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날 위험에서 구해 내려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날 위한 말을 계속 했다는 것도. 그런데도 떠나지 않았던 건 나 자신이었소.”

주 낭자가 고개를 들고 정사낭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이 주형도 그래요. 자신이 참 원망스럽고 밉네요.”

주 낭자가 찻잔을 들어 올리고는 정사낭을 향해 눈짓했다.

“소인, 공자님을 위해 한 잔 올리겠습니다.”

정사낭이 서둘러 자신의 찻잔을 높이 들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각자의 찻잔을 비웠다.

“정 공자님.”

몸을 일으키고 별실을 떠나려던 정사낭을 주 낭자가 불러 세웠다. 정사낭이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은 후회하시나요?”

주 낭자의 물음에 정사낭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누이가 그러는데,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경우가 없다더군. 이미 저지른 일, 벌어진 일이라면 앞만 보고 가야 한다고.”

정사낭이 가볍게 묵례한 뒤, 별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자, 별실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주 낭자는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저는 후회하는걸요.”

주 낭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녁이 되자, 주육낭은 정교랑의 거처로 향했다. 마당에 들어선 주육낭의 눈에 회랑 기둥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은 정교랑이 보였다. 양쪽으로 은은하게 켜진 등불 때문인지, 낮에 보던 정교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정교랑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천천히 감상하는 것 같았다.

“그건 뭐지?”

주육낭이 물었다.

“메뚜기요.”

메뚜기?

주육낭이 정교랑이 손에 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얇은 대나무껍질로 엮어서 만든 생동감 넘치는 메뚜기 모형이었다.

“어디서 난 거야?”

주육낭이 물었다.

“선물 받았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 그 자식이 선물한 거겠지?

주육낭이 입술을 삐쭉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제자리에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저 여인은 어째 한 번도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어. 항상 내가 물으면, 저 여인이 대답하고, 빈말이나 잡담 한 번을 안 하잖아. 허구한 날 저렇게 말도 없이 지내니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

주육낭은 회랑 아래에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메뚜기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주육낭이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별 봐요.”

정교랑이 시선을 옮기지 않고 대답했다.

별을 본다고?

주육낭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예쁘긴 하다만, 저게 무슨 재미가 있다고.

주육낭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마당을 떠났다.

“아씨, 오늘도 늦게까지 별을 보실 거예요?”

반근이 정교랑에게 두봉을 걸쳐주며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밤하늘을 가리켰다.

“잘 봐. 저기 저 별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어. 그런데 아직 충분하진 않아.”

저 별? 어떤 별을 말하는 거지?

반근은 아무리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그 별이 그 별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반근은 정교랑이 별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로 점점 더 밝아지는 별이 있을 거라고 믿기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느 정도여야 충분한 거예요?”

반근이 물었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 사이의 조화만 못하지(天時地利人和). 이제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은 갖춰졌으니, 나머지는 사람에게 달렸어.”

“아이고 세상에나, 우리 아가. 벌써 중매인이 되고 싶었던 게냐?”

황궁 안. 태후는 놀랍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평왕을 쳐다보았다.

“마마, 이 일은 단순한 중매가 아니고, 진지한 일입니다.”

평왕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태후가 웃으면서 귀비를 쳐다보았다.

“이것 좀 보게나. 우리 평왕의 진지한 일부터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귀비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가아, 괜한 소란 피우지 말아라. 너 같은 어린아이가 말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정 낭자를 고 관인에게 시집보내겠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우스운 일을 미담으로 만들어야지요.”

평왕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스운 일을 미담으로 만든다고?

귀비와 태후가 멈칫했다.

“지금 고씨 가문은 덕승루 화괴 다툼 때문에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면, 고씨 가문은 영원히 웃음거리로 남겠지요. 이번 다툼을 계기로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면,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던 상대에서 애틋한 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낭만적인 미담이 남지 않겠습니까. 마마께서는 고씨 가문이 이대로 경성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두고 보시기만 하실 겁니까? 정 낭자가 경성에 있는 한, 고씨 가문은 영원히 웃음거리로 남을 겁니다.”

태후와 귀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당연히 고씨 가문이 경성의 웃음거리로 남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 혼사가 정말로 괜찮은 방법이로구나.”

고씨 가문이 더는 웃음거리로 소비되지 않고, 어딘가 불길하고 수상쩍은 정 낭자가 고씨 가문의 사람이 되는 셈이니. 정 낭자도 고씨 가문의 감시를 받게 된다면, 더는 황당한 일을 벌일 수 없겠지. 고씨 가문은 우리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집안이기도 하고.

참으로 일거양득이구나.

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번 같은 터무니없는 일도 인제 그만 끝을 낼 때가 됐어.”

태후가 고개를 들고 문밖을 향해 말했다.

“여봐라. 정씨 가문 부인을 궁으로 불러오너라. 애가가 중매를 서야겠다.”

정 이노야가 경성으로 올라온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경성에서 보낸 반년이라는 시간이 그는 마치 꿈만 같았다. 짧은 반년 사이, 관직이 급격하게 바뀐 것도 모자라,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깜짝깜짝 놀랄 만한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어사대로 끌려가기도 했고,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풀려나기도 했다. 월 수익이 만 관에 달하는 재산을 손아귀에 넣은 적도 있고, 또 눈 깜짝할 새에 그 재산의 명의가 바뀌기도 했다.

여기 이 집도 그래.

정 이노야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대청은 저택의 본채였다. 대청 안은 여전히 넓고 깔끔했지만, 더는 정 이노야의 거처라고 할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정 대노야가 이곳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대노야께서 이걸 여기다 놔두라고 하셔…….”

“대노야께서 이것들은 치우라고 하시네. 괜히 사치스러워 보이기만 한다고.”

대청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여종들의 대화가 정 이노야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여종들은 이 집의 주인이 정 대노야라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대화를 나눴다. 정 이노야는 지금의 상황이 강주에 있을 때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다.

이게 강주에 있을 때와 다를 게 뭐야!

정 이노야가 분통을 터트리는 사이, 문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노야, 오 관리인이 왔습니다.”

사환 두 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오 관리인!

“들라 하여라.”

대청 안쪽에서는 정 대노야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문밖에서부터 두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목에 힘을 주고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걸어오는 오 관리인의 모습도 보였다.

4월 초에 오 관리인이 온다는 것은, 지난달 점포들의 장부를 정산한다는 뜻이었다.

장부 정산! 수익금!

정 이노야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원래대로면 오늘 이 시간에 오 관리인을 맞이할 사람은 바로 나였는데!

곁채에서 하얀 수건을 이마에 올리고 침상에 누워 있던 정 이부인은 오 관리인이 정산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노야, 내 돈은 어떡해요.”

“울긴 왜 우는 거요! 형님이 경성을 떠나지 않고 아예 정씨 집안을 통째로 경성에 옮겨 놓으면, 그때 가서 울고불고하시구려.”

정 이노야가 성가시다는 투로 말했다.

“대노야는 그 애한테 들러붙은 거예요. 그러니 절대로 쉽게 그 재산을 내려놓지 않을 거라고요.”

정 이부인이 말했다.

“부인, 반근 낭자도 같이 왔어요. 대노야께서 장부를 바로 반근 낭자한테 주시더라고요.”

여종이 방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말했다.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그 애한테 들러붙은 거라니까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또 다른 여종이 황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노야, 부인,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황궁?

정 이노야 내외가 놀란 기색으로 여종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께서 부인을 뵙고자 하셨습니다.”

여종이 이어서 말했다.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이마에 올려져 있던 수건이 떨어졌다.

“태후마마께서 나를 보자고 하셨다고?”

“태후마마께서 정 이부인을 불러오라고 했단 말이오?”

자연스럽게 정씨 가문의 가장인 정 대노야가 직접 황궁의 내시를 만났다. 내시가 찾아온 이유를 들은 정 대노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 대노야. 그러니 정 이부인의 입궁 채비를 서둘러 주십시오.”

내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 대노야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내시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공손하게 손짓했다. 정 대노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정 대노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시가 눈썹을 치켜뜨고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마마께서 어떤 일로 부르시는지, 저희 같은 아랫것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정 대노야가 서둘러 사과했다. 그의 이마에 순식간에 식은땀이 맺혔다. 정 대노야가 몸을 돌리고 대청을 나가려던 찰나, 내시가 마른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경사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그러니 정 이부인께도 경사스럽게 입고 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경사스러운 일!

정 대노야는 심장이 터질 듯했지만, 조용히 알겠다고 한 뒤 침착하게 예를 표하고 대청 밖으로 물러났다.

오 관리인과 시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후당에 서 있었다.

“교랑은 알고 있는 일이더냐?”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시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정 대노야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녀는 태후가 정교랑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교랑을 싫어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경사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실은 경사스러운 것과 거리가 먼 일이 분명했다.

“당장 아씨께 알리러 갈게요.”

시녀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태후께서도 아씨를 싫어하시고, 정 이부인도 아씨를 싫어해요. 그러니까, 절대로 그 두 사람이 아씨의 일에 관여하게 둬서는 안 돼요.”

시녀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본 정 대노야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맞아. 절대로 그럴 순 없지. 절대로 제수가 궁으로 들어가게 해선 안 돼.

그런데 어떻게 막는담?

정 대노야가 고개를 돌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대청 안에 앉아 있는 내시의 표정을 보아하니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른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정 이부인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어떻게든 설득해야 하나?

아니야. 당초 아우가 경성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내가 그렇게 설득했건만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어.

정 대노야의 호흡이 가빠졌다.

절대로 제수가 입궁하게 둬서는 안 돼. 절대로!

“여봐라!”

정 대노야가 문밖을 향해 손짓하고는 조용히 사람을 불렀다. 여종 한 명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정 대노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노야, 분부하시지요.”

곁채 안, 정 이노야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정말로 요즘은 매일매일이 꿈을 꾸는 것 같단 말이지. 아주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해!

“노야, 노야. 태후마마께서 나를 보시겠다는데, 내, 내가 가서 뭐라고 해야 하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정 이부인은 거의 혼절 직전인 사람처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오.”

정 이노야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고 말했다.

“당신은 무조건 태후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되오.”

정 이부인은 아직도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태후를 뵙는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태후가 당신을 보겠다고 한 건 분명히 그 바보 때문일 거요.”

정 이노야는 흥분하면 할수록 정신은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경성에 올라온 후로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항상 그 바보와 연관되어 있었어.

“우리가 이번에 판을 뒤집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태후의 손에 달렸소.”

정 이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정 이부인이 더욱 긴장했다.

“당신 돈을 생각하시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정 이부인이 답답했는지, 정 이노야가 호통을 쳤다.

내 돈! 그놈들이 사기 친 내 돈!

정 이부인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여봐라,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문밖의 여종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정 이부인의 옷을 골라 주었다. 단장하느라 한창 분주할 때, 아낙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이고, 정 이부인, 대노야께서 저도 부인의 시중을 들라고 하셔서요.”

정 이노야 내외가 아낙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방 안으로 들어온 아낙은 대노야의 사람이었다. 정 대노야가 오기 전까지 정 이부인이 관리하던 것들을 모조리 도맡아 관리하게 된 사람이기도 했다. 이 아낙은 평소에는 정 이노야 내외를 보아도 콧구멍이 다 보일 정도로 턱을 높이 치켜들고 다녔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환한 미소를 보이며 정 이노야 내외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대노야께서 조심히 물어보셨는데…….”

아낙이 좌우를 살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했다.

“궁에서 온 사람 말로는, 경사스러운 일로 부인을 뵙자고 하시는 거래요.”

경사스러운 일!

정 이노야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랬군. 그래서 형님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이렇게 사람을 붙인 건가? 이미 늦었어! 서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놨는데, 지금 와서 아부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야!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부인, 경사스러운 일이니 옷도 화사하게 입으셔야죠.”

아낙이 이어서 말했다.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슬쩍 쳐다보자 정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서 금색 비단옷을 꺼내 오거라.”

정 이부인이 재촉했다. 방 안에 있던 여종과 몸종들이 다시 분주해졌다.

뒤늦게 들어온 아낙도 이부인을 돕겠다며 주위를 서성였지만, 정 이부인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아낙에게 눈치를 줬다. 하지만 아낙은 그런 정 이부인의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첨의 미소를 보이며 서 있었다.

옷을 다 입은 정 이부인은 단출한 옷 장식과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보고, 자신이 몹시 볼품없고 추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정 이부인은 이를 부득 갈며 분을 삭였다.

내 돈, 내 장신구들!

“가자.”

정 이부인이 열의에 가득 찬 모습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여종들이 서둘러 정 이부인의 뒤를 따라나서자, 아낙도 재빨리 무리를 뒤따라 방을 나섰다. 아낙은 정 이부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 여종들 사이를 마구잡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앞다투어 가겠다는 아낙과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여종들 때문에 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아, 좀 비켜요!”

한 여종이 짜증을 내면서 아낙을 확 밀쳤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낙은 무리 밖으로 밀려난 게 아니라 무리의 앞쪽으로 밀쳐졌다. 아이고, 하는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던 아낙은 공교롭게도 층계를 내려가고 있던 정 이부인의 등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곧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정 이부인이 층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세상에나, 부인!”

여종들이 바닥에 굴러떨어진 정 이부인을 부축하려고 혼란스럽게 층계를 내려가던 찰나, 아낙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낙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정신없이 정 이부인을 향해 내려가던 여종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여인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곁채 마당의 하늘을 갈랐다.

대청 안에 앉아 있던 내시가 저도 모르게 찻잔을 쥔 손을 살짝 떨었다. 내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지?”

문밖에 서 있던 집사가 서둘러 대청 안으로 들어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아무,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고?

내시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간이 늦었네. 태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이부인께 좀 더 서둘러 달라고 말해주시게.”

내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 대노야가 대청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대인, 대인, 큰일 났소이다.”

“뭐라?”

황궁 안, 태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언제 다친 게냐?”

귀비가 미간을 찌푸리고 묻자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조, 조금 전의 일입니다.”

조금 전?

흠칫 놀랐던 귀비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웃음을 보였다.

“참 공교로운 일이네요. 왜 하필 태후께서 보자고 하실 때 다리가 부러질까?”

태후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맞아.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잖아?

“이부인이 너무 기뻐하던 나머지 문턱을 넘다가 발을 헛디뎌 층계 아래로 떨어졌고, 정 이부인을 부축하려던 여종들이 한꺼번에 덮치는 바람에, 정 이부인의 정강이를 다쳤다고 합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그렇단 말이지?

듣기에는 그럴싸하네. 견문 없는 아낙이 갑자기 황궁에 들어온다는 생각에 황급하고 정신이 없었겠지. 그래도 이번 일은 어딘가 수상쩍어.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궁으로 들어와 태의에게 다리를 보이라고 전하거라.”

귀비가 냉랭하게 웃으며 말하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리를 다쳤을 뿐 입을 다친 건 아니잖느냐. 애가가 특별히 황궁의 연탑(軟榻: 침상과 긴 의자를 겸한 가구)을 보낼 터이니, 즉시 입궁하라고 전하거라.”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내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마, 실은 정 대노야가 이부인이 다리를 다친 것이 부끄러워, 감히 마마께 험한 꼴을 보여드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후마마께서 상의하실 것이 정 낭자의 일이라면, 정 낭자의 친부모와도 같은 외숙 내외가 경성에 있다면서, 다리를 다친 이부인 대신 외숙모가 태후마마를 뵈러 오는 건 어떠한지 여쭈셨습니다.”

외숙모?

태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긴, 정 이부인도 계모라고 들었으니. 차라리 외숙모와 혼사 얘기를 하는 게 좀 더 일을 확실히 할 수 있겠어.

“누가 온들 상관없다. 애가는 할 말만 할 테니, 그들은 듣기만 하면 돼.”

태후가 말했다.

내시가 서둘러 알겠다고 한 뒤, 귀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재빨리 궁을 빠져나갔다.

정 낭자가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태후가 결심한 일이니 이 혼사는 필시 이루어질 것이야.

귀비는 내시를 부르려던 손을 거두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뭐라고요? 나더러 어딜 가라고요?”

주씨 저택.

주 부인이 경악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안 가요, 안 가요. 난 가기 싫다고요!”

난 절대로 그 바보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

“가기 싫다고 해도 가야 하는 일이오!”

주 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치자 깜짝 놀란 주 부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노야, 궁에서 온 사람이 재촉하고 있습니다.”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서 가시오. 태후를 뵌 적이 없던 것도 아니고, 무서워할 게 뭐라고 그러시오!”

주 노야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주 부인에게 소리쳤다.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요? 예전에 태후를 뵈었을 때는 그 바보 때문이 아니었거든요?

“당신이 가기 싫다는 이유로 교교를 보낼 작정이오? 이건 다 교교를 위한 일이오.”

주 노야가 말했다.

맞아. 이건 그 애를 위한 일이야. 내가 안 간다면, 분명히 그 애한테 죄를 짓는 꼴이 되겠지.

주 부인이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 바보한테 죄를 지으면, 어떤 꼴이 날지는 안 봐도 뻔하잖아.

“그리고 태후를 뵈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겠지?”

주 노야의 물음에 주 부인은 털이 삐쭉 서는 느낌이 들었다.

정 대노야는 정 이부인이 태후에게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지 못했거나, 잘못된 말을 할 거라고 예상했을 거야. 그래서 정 이부인은 문을 나서기 직전에 다리가 부러지는 변을 당한 거고.

주 부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정씨 가문이야. 예전에는 정교랑이 왜 그렇게 독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알겠어. 정교랑이 정씨 가문 혈육이기 때문이야.

정말로 독하네!

“정말 너무도 독하십니다! 형님, 참으로 독하세요!”

정 이노야의 울부짖음이 마당에 울려 퍼졌다. 곁채의 마당 문에서 쾅쾅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정교랑의 시녀가 공들여 고른 저택인지라 문짝이 부서지거나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었다.

“문 열어! 문 열라고!”

정 이노야가 한 맺힌 목소리로 외쳤지만, 저편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정괴(程槐)! 이젠 내 아내까지 다치게 하는 거냐!”

정 이노야가 이름까지 불러 가며 욕을 해댔다. 정 이노야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야. 형님이 이런 짓까지 저지르다니!

세상에나, 세상에. 도대체 어떤 마음을 먹어야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지? 어떻게 자기 제수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트릴 수 있냐고!

“시끄럽다.”

정 대노야의 침착한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왔다.

“정괴!”

정 이노야가 온 힘을 다해 문짝을 향해 몸을 부딪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냐? 어떻게 제 아우의 부인을 때려서 다치게 할 수 있어! 정녕 실성을 했군.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하냐고!”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정 대노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정동, 지금 네 부인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이 너를 찾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문틀을 잡고 있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오한을 느끼고 몸을 살짝 떨었다.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정 대노야의 목소리가 정 이노야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지 않으면, 네 다리도 부러질 테니까.”

소식을 듣고 뒤늦게 집에 도착한 주육낭은 주 부인의 마차가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다급하게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주육낭이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와서 물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주육낭 때문에 방청소를 하고 있던 두 시녀가 깜짝 놀랐다.

“그 여인은?”

주육낭이 물었다.

“아씨께서는 반근과 같이 나가셨어요.”

시녀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나갔다고? 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주육낭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갔는데?”

주육낭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어차피 아무에게도 어디 가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나서,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곧바로 문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 밖에 있는 양조장에 가셨어요.”

한 시녀의 대답에 주육낭의 발걸음이 살짝 꼬였다.

그 여인은 왜 자꾸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거야! 아니면, 혹시 내가 물어볼 줄 알고 일부러 말해주고 간 건가?

주육낭이 가벼워진 걸음으로 층계를 폴짝 뛰어 내려갔다. 그는 이가 다 보이도록 활짝 웃고는, 놀란 기색의 시녀들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뭐라? 태후께서 어찌, 어찌 그런 일을.”

소식을 들은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주 부인이 이미 입궁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고하자 황제가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폐하, 그쪽으로 가시겠습니까?”

내시가 서둘러 물었다.

태후궁 안. 주 부인은 태후를 향해 정중하게 큰절을 올린 뒤 몸을 일으켰다.

“애가가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자네의 조카인 정교랑의 혼사 때문일세.”

태후는 인사치레도 하기 귀찮은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예, 마마의 깊은 헤아림에 감사드립니다.”

주 부인의 무릎에 놓인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봉호를 받은 부인이긴 하나 하등 관리의 아내인지라, 주 부인은 매년 새해에 황제와 태후를 참배하는 행렬의 끄트머리에서나 태후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태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 부인은 자신이 태후를 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몹시 흥분되고 긴장하리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상상했던 상황과 완전히 달랐다.

태후를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 때문은 아니었다.

“애가가 어찌 헤아리지 않을 수 있겠나. 아이들이 참 겁도 없단 말이야. 이게 다 무슨 소란인지.”

태후가 말했다.

맞아요, 맞습니다. 그 여인도 참…….

주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고는 몸을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소인의 죄이옵니다.”

“죄를 따질 일은 아니고, 다 인연인 게지요. 싸우면서 정이 든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한들, 그런 인연도 있는 법. 고 관인이 그 댁 교랑을 마음에 두었다고 하니, 이대로 두 사람의 혼사를 치를까 합니다. 그렇게 되면, 황당한 일도 미담으로 남겠지요.”

귀비가 입을 열었다.

“그래. 황당한 일을 벌이는 아이들끼리 지지고 볶고 살라고 하게. 괜히 다른 사람한테 폐 끼치지 말고.”

태후가 말했다.

“마마, 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 천생배필인 게지요.”

귀비가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웃으며 한창 수다를 떨던 귀비와 태후가 아무런 대꾸도 없는 주 부인을 쳐다보았다. 주 부인은 손뿐 아니라 몸까지 살짝 떨고 있었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여인네로군.

태후는 언짢은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고, 그와 반대로 귀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주 부인,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태후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아니,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요!

주 부인이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다.

어떡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해?

혼사를 거절하면? 그건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와야만 가능한 일이야. 태후가 내린 명을 거역하는 셈이라고!

하지만 내가 이 혼사를 받아들인다면?

정 대노야는 나를 궁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자기 제수씨의 다리를 부러트렸어. 내가 이 혼사를 받아들이는 걸 결코 원하지 않을 거야. 정 이부인의 다리는 벌써 부러졌어. 내가 그 여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마 다리 하나 부러지는 거로는 끝나지 않겠지.

그래. 태후의 명을 거역한다고 해도, 그게 목숨을 잃을 정도의 죄는 아닐 거야. 기껏해야 경성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내려가는 정도겠지.

하지만 그 여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을 했다가는, 분명히 목이 달아날 거야!

“마마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 혼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 부인이 허리 숙여 예를 올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태후가 흠칫 놀랐다. 귀비는 주 부인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된다는 게지?”

태후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 태후궁 뒤편에 서 있던 황제가 주 부인의 대답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왜 안 되냐고? 정 낭자가 바보도 아니고.

아, 예전에는 바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바보가 아니야. 태후께서 이 혼담을 넣는 이유가 뭔지는 정 낭자도 빤히 알 터.

정 낭자를 가르친 스승도 필시 교만한 사람이겠지. 요즈음 보이는 뼛속까지 교만한 문인들처럼 말이야. 권력으로 그들을 유혹할 수는 있겠지만, 권력으로 그들을 억누를 수는 없지. 그들에게 굶어 죽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 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거든.

정 낭자는 의형제의 죽음 때문에 천자인 나와 내기까지 불사하는 여인인데, 태후께서 아무리 황권으로 억압한다 한들 권력에 고개를 숙일 리 없지. 그 여인의 눈에 별로 대수롭지도 않을 혼사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그 여인이 이번에는 무슨 방법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려나?

호기심이 인 황제는 세 여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왜 안 되냐고? 그 여인이 싫어하니까!

주 부인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나? 어떻게 말해야 내 다리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왜냐면, 교랑은 이미 저희 집 여섯째와 혼담이 오가는 사이기 때문입니다.”

주 부인이 기지를 발휘해 대답했다.

아들아, 미안하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혼담을 거절하기에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이유는 바로 이미 들어온 혼담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시를 향해 손짓했다. 황제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귀비의 목소리가 전각 안에서 들려왔다.

“주 부인, 참으로 공교롭네요. 태후마마께서 정 이부인을 보겠다고 하니 정 이부인이 갑자기 다리가 부러지지 않나, 주 부인을 보겠다고 하니 갑자기 정 낭자가 주 부인의 아들과 혼담을 주고받고 있다지 않나. 그런데 왜 두 사람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까요? 설마 주 부인이 말한 그 혼담이, 이제 막 논의되기 시작한 건 아니겠지요?”

주 부인의 몸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네, 맞습니다. 귀비마마, 이 모든 게 그 여인 때문이고, 저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걸 잘 아시는군요.

귀비의 말을 들은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호통쳤다.

“주 부인, 귀비의 말이 정녕 사실인 게냐?”

“아니, 아닙니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이미 혼담이 오갔습니다. 벌써 이 년 전부터 혼담이…….”

주 부인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정씨 가문과 한창 혼수 때문에 서로 앞다퉈 정교랑의 혼사를 논할 때, 주 노야는 진심으로 주육낭과 정교랑의 혼사를 고려했었다.

“그렇다면 그건 이 년 전에 이미 끝난 혼담이 아닌가요? 이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혼사를 치르지 않았다니요.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가요?”

귀비가 주 부인의 말을 끊고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떡해! 말을 잘못했나 봐! 내가 말을 잘못했나 봐!

이제 끝장났네, 끝장났어! 내 다리! 내 다리!

귀비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야.

혼담을 넣은 지 벌써 이 년이 지나도록 혼사가 성사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이 년 전의 그 혼사가 성사됐다고 말하는 건, 제 뺨을 후려치는 꼴이잖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태후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 여인이 교만하기 짝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로 이 세상에 너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냐!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됐네, 주 부인. 그만하게나. 그쪽 혼담이 어찌 됐든 애가는 상관없네. 이미 두 사람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애가가 태후라는 지위를 빌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게야. 이건 자네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정 낭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네. 애가는 고씨와 정씨에게 혼인을 명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니, 자네는 돌아가서 정씨 가문에 말만 전하게. 날씨도 딱 좋은 봄날이니, 두 가문 모두 하루빨리 중매쟁이를 통해 혼사를 치르라고.”

“마마, 아니 되옵니다. 그렇게는 아니 되옵니다. 아이고, 사람 죽겠네!”

혼이 달아날 정도로 깜짝 놀란 주 부인은 태후 안전인 것도 망각한 채 고성을 질렀다.

저 여인네는 어찌 저리도 결례를 보이는 것이야! 그 무례한 여인의 가족이 틀림없구나!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만 물러가게!”

“마마, 아니 되옵니다. 소인은 감히 이 혼사를 받들 수 없사옵니다!”

주 부인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감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저러는지 원.”

“당장 내쫓거라! 어서!”

태후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주 부인에게 몰려가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문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수선하게 문밖으로 몰려나가는 사람들을 보던 황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폐하,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황제는 고개를 젓고는 태후궁을 떠났다.

내시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황급히 손짓하고는 서둘러 황제의 뒤를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할아버지, 태후마마께서…….”

태후궁 근처에 눈 뜬 장님처럼 서 있던 어린 내시가 늙은 내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늙은 내시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내시들의 주둥아리와 눈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봐도 된다고 하는 것만 보고, 우리가 말해도 된다는 것들만 말하도록 하여라.”

늙은 내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후궁 안에서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여봐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야.”

늙은 내시가 덧붙였다.

어린 내시가 안비의 궁에서 황제를 찾아냈다.

안비는 눈에 띄게 배가 불렀다. 안비의 맥을 짚었던 태의들은 모두 안비가 임신한 아이가 황자일 것이라고 거듭 단언했다. 황자를 얻을 거라는 기대에 몹시 기뻤던 황제는 매일같이 안비의 궁에 머물렀다.

원래대로라면 안비는 더 이상 시침(侍寢)할 수 없기에 황제는 안비의 처소에서 밤을 지새울 수 없었다. 태후도 이 일로 황제에게 두어 차례 귀띔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안비와 함께 동침했다.

“짐은 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소. 나이가 들수록 어린애가 좋아지는구려.”

황제가 말했다. 그러자 반대편에 앉은 안비가 환하게 웃었다.

“폐하, 아직은 너무 어린지라 폐하께서 같이 계셔 주시는 것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일부러 골이 난 듯이 말했다.

“허튼소리, 아무리 어려도 알 건 다 알고 있을 것이야.”

황제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안비의 배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네 어미가 네 흉을 본 것이다. 절대로 짐이 한 말이 아니니라.”

안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는 황제의 팔을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폐하께서도 황후마마와 비슷하시네요. 두 분 다 아이들을 좋아하시니.”

황제가 멈칫했다.

황후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들었다만.

황제가 물었다.

“황후가 여기에 자주 오는 것이오?”

“아니요. 태의가 신첩더러 많이 걸어 다니라고 하여서, 걷다 보니 어화원에서 몇 번 황후마마를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마마께서도 태의의 말을 들으시고 자주 걸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첩은 감히 황후마마 가까이에 가지 못하기도 했고, 황후마마께서도 신첩을 피해 멀찍이 거리를 두고 계셨기 때문에 몇 마디만 주고받았을 뿐이옵니다.”

안비가 대답했다.

“피한다고?”

황제가 묻자 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마마께서는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시다 보니, 행여나 자신의 병세가 신첩의 복중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멀찍이 피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태의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황후마마께서는 조심하시더라고요.”

황제가 무엇 때문인지 알겠다는 듯이 헛웃음을 보였다.

황궁의 여인들이란…….

“폐하, 그런 게 아니에요.”

황제의 생각을 꿰뚫었는지, 안비가 그의 팔을 흔들면서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절대로 그런 이유로 신첩을 피하시는 게 아니에요. 황후마마께서는 단지, 두렵다고 하셨어요.”

“두렵다고?”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워낙 약하다 보니, 좋아하는 만큼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안비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더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신첩은 알 것 같았어요. 황후마마께서 신첩의 배를 볼 때면, 기쁨이 드러나는 동시에 잔뜩 긴장하시는 기색 또한 역력하시거든요. 그 모습에 신첩이 얼마나 속상했는지…….”

황제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황후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소. 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다른 하나는 태어난 지 사흘을 못 넘기고 죽었지. 나중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어 육가아를 데려다 키우게 되었는데, 결국…….”

황제가 천천히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결국, 예전의 그 육가아마저도……. 한 여인이 연달아 몇 번씩이나 그런 충격을 받았으니…….

황제가 짧게 한숨을 토했다.

“황후가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기는 하지.”

황제가 말했다. 안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의 팔을 안은 채 아양을 떨며 불안 섞인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태의가 안비 모자가 몹시 건강하다고 말하였으니.”

황제는 안비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안비의 등을 쓸어내리며 다독였다. 두 사람이 한창 애틋한 시간을 보내던 그때, 태후의 말을 전하러 온 어린 내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 내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의 혼사가 아닌가. 태후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리하시면 되느니라. 짐이 그런 일까지 관여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어린 내시가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안비가 조금 놀란 눈치로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정 낭자의 일인데도요?”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정 낭자가 왜? 정 낭자가 혼사를 올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소?”

안비가 장난스럽게 타박하듯 황제의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폐하, 신첩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고 계시잖아요. 이 혼사, 괜찮은 걸까요?”

“괜찮은지 아닌지는 상관없소. 다만, 이 일이 꼭 좋지 않은 일이라 할 순 없지.”

황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희미한 달빛이 떠오르고, 어두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수놓아졌다.

봄밤인지라 날씨가 아직 서늘하군.

금잔 안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켠 진 노태야는 온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 황당한 일이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 부인이 황궁을 나옴과 동시에, 태후가 고 관인과 정교랑에게 혼인을 명했다는 소식이 경성에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황실에서 가문 간의 혼인을 주도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황실과 주로 마주치는 인사들은 조정 대신들이다 보니 가문 간의 관계가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으며, 권문세가의 혼사는 더욱이 애들 장난처럼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태후는 한가로이 집안일이나 신경 쓰는 아낙이 아니기에, 황실의 혼사가 아닌 한 절대로 쉽게 혼인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태후가 친히 먼저 혼사 이야기를 꺼낸 걸 보고, 사람들은 태후가 정말로 진노한 게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황당한 일을 미담으로 승화시키겠다? 고 관인의 이번 한 수는 황당해 보이긴 해도, 참으로 묘수구나. 어쩔 땐 일이 꼭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니까? 황당한 일이니 황당한 방법으로 대처하는 게지. 물고기는 물고기만의 길이 있고, 새우는 새우만 다니는 길이 있다시피 말이야.”

진 노태야가 이어서 말했다.

“묘수라고요? 정 낭자 입장에서는 묘수가 아닐 텐데요.”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리기만 할 뿐, 차를 마시지 않은 진소가 대꾸했다.

“주 부인은 울기까지 하며 궁 밖으로 내쫓겼습니다.”

진 노태야가 풉 하고 웃었다.

“주 부인도 참. 태후의 체면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태후의 체면을 챙겨 주려던 사람은 다리가 부러졌잖습니까.”

진소의 대답에 진 노태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씨 가문 사람들이라 그런지, 역시 보통내기들이 아니야.”

여전히 찻잔을 쥐고만 있던 진소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러니,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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