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75)

얼굴 한쪽이 저릿해져 왔다. 띠풀(茅草, 모초)에 얼굴을 스친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띠풀이 시야를 가려서 오랑캐들을 자세히 볼 수가 없잖아.

주육낭은 자신 앞을 가리고 있는 띠풀을 뿌리째 확 뽑아 버리고 전방을 주시했다.

이때, 주육낭의 시선 안에 들어와 있던 오랑캐 병사 하나가 갑자기 무언가 발견한 듯 주육낭 쪽을 쳐다보며 동태를 살폈다.

주육낭은 재빨리 몸을 바닥에 바짝 붙였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전장에 나가기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3년째지만, 전장에 나간다는 건 늘 긴장되고 털끝이 삐쭉 서는 일이었다. 물론 전장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그런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사방이 조용해지고, 인기척과 말굽 소리가 사라졌다. 눈치 없는 띠풀이 다시 주육낭의 시야를 가렸다.

음, 어쩌면 띠풀이 내 앞에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띠풀 뒤로 몸을 숨길 수 있으니까.

주육낭이 가볍게 한숨을 쉬자, 코앞에 있던 띠풀이 주육낭의 얼굴에서 잠시 멀어지나 싶더니, 금세 그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띠풀 한 줄기가 주육낭의 콧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육낭이 재빨리 손으로 띠풀을 빼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띠풀은 콧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육낭은 재채기가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여기서 재채기를 하면 어떡해! 안 돼! 절대로 재채기를 하면 안 돼!

주육낭은 양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안간힘을 쓰며 재채기를 참았지만, 콧구멍 안에 들어간 띠풀은 야속하게도 그의 콧속을 한껏 간지럽히고 있었다.

망했다, 망했어! 안 돼! 이러면 큰일 난다고!

“에취!”

엄청난 소리로 재채기를 한 주육낭은 서둘러 말을 타고 그곳을 벗어날 생각으로 띠풀 사이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천근만근 된 듯 일어나지지 않아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주육낭의 귓가에 들려왔다.

주육낭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포복절도하는 진십삼이 보였다.

진십삼?

그래, 나는 경성으로 돌아왔지. 여긴 서북이 아니야.

꿈이었구나.

주육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인상을 팍 쓰고 진십삼을 향해 말했다.

“진십삼, 꼭두새벽부터 내 집엔 뭐 하러 온 거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속바지만 걸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 바지는…….

“잘 봐. 여기가 누구 집인지.”

진십삼이 웃으면서 손에 쥔 붓을 주육낭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주위를 훑어보던 주육낭이 화들짝 놀랐다.

“내가 어째서 자네 집에 있는 거야?”

주육낭의 물음에 진십삼은 여유롭게 웃으며 자리에 앉아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난들 어찌 알까? 자네가 꼭두새벽부터 고주망태가 되어서 우리 집 대문을 부술 듯이 발로 차고 들어와서는, 꼭 나랑 달을 봐야겠다고 난리를 치지 않나, 나한테 검무(劍舞)를 보여주겠다고 떼를 쓰질 않나.”

진십삼은 별안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의 검무 실력은 정말 최악이더군.”

주육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젯밤에…….

어젯밤에 씩씩대면서 덕승루를 뛰쳐나온 후, 집에 가기는 싫은데 마땅히 갈 곳은 또 없다 보니 야시장 노점으로 가 술을 퍼마셨지.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네.

주육낭이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몸도 아파.

주육낭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어깨와 팔을 확인하자, 군데군데 시퍼런 피멍이 든 것이 보였다.

“어이, 내가 취한 틈을 타서 나를 흠씬 두들겨 팬 거 아니지?”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치자 진십삼은 혀를 찼다.

“내가 자네를 때릴 수나 있겠나? 자네는 천하무적이라 가슴으로 바위를 깨고, 어깨로 나무를 쓰러트릴 수 있을 텐데. 그런 자네를 내가 어떻게 때려?”

진십삼의 말만 들어도, 주육낭은 자신이 어제 얼마나 추태를 부렸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주육낭이 헛기침을 하고는 옷장에 걸린 옷을 아무거나 꺼내 걸쳐 입었다.

“이 알록달록한 자네 취향의 옷들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내 옷들은 깨끗이 빨아서 말려 놨지?”

주육낭이 투덜대면서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냉큼 말해 봐.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진십삼이 물었다.

“일은 무슨 일? 술 처먹고 고주망태 된 놈 처음 봐?”

주육낭이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자네처럼 술 처먹는 사내는 처음 봐서 그래.”

진십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술에 취해도 입은 무겁더라고? 내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절대로 얘길 안 하더군. 자네가 그렇게까지 입을 닫았다는 건, 분명히 아주 중요한 일이고, 절대로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겠지.”

이제 갓 진사가 된 사내와 아직 시집도 안 간 여인이 화괴 다툼에 오만 관을 썼다는 거?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기 전에, 아주 창피해 죽을 일이지!

주육낭이 진십삼의 말을 못 들은 척 잡아떼고는 진십삼의 찻잔을 빼앗아 차를 마셨다.

“어이, 어이, 차 다 마셨으면 얼른 가 봐. 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진십삼이 말했다.

“자네가 바쁠 일이 뭐 있다고? 기껏해야 또 벗인가 지인인가 하는 그 서생들이랑 유흥을 즐기러 가는 거 아냐?”

주육낭이 진십삼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로 까먹은 거야?”

진십삼이 웃으면서 자신의 장포를 손으로 한 번 쓱 쓸어내리고 말했다.

“나는 오늘 약속이 있네.”

  • 내일 혹시 시간 돼요? 성 밖에서 오 리 떨어진 도관에 벚꽃이 예쁘게 폈다는데, 같이 꽃놀이하러 갈래요?

그제야 생각났는지,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지 마!”

갑자기 주육낭이 진십삼의 팔을 낚아채고 소리쳤다.

“아, 그래서 도대체 정 낭자한테 무슨 일이 생겼던 건데?”

이번에는 진십삼이 반대로 주육낭의 팔을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주육낭이 진십삼의 손을 홱 내치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둘 다 어린 나이도 아니면서, 남녀가 유별한데 무슨 단둘이 꽃놀이를 가?”

진십삼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주복, 이 사람아. 설마 지금 내 앞에서 수작을 부리는 건가? 자네 연기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라네.”

그때 시녀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십삼공자님, 정 낭자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명은 너무 기뻐 화들짝 놀란 것이고, 다른 한 명은 말 그대로 깜짝 놀란 것이었다.

“여기로 왔다고?”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역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진십삼이 활짝 웃는 얼굴로 주육낭의 팔을 뿌리치고 말했다.

“자네는 집에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여기서 살든가 해. 난 이만 가 볼 테니.”

주육낭은 언짢은 표정으로 진십삼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십삼을 불러 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결국 진십삼을 붙잡지는 않았다.

약속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고?

그 애도 참, 참!

주육낭은 이를 갈면서 찻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어머니, 거긴 조금만 늦어도 마차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서요. 저는 이만 정 낭자를 데리고 가 보겠습니다.”

진십삼이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진 부인을 향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다급해 보이는 진십삼의 모습에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급할 거 뭐 있니?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지금 마저 다 하실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서 어머니가 제일로 웃깁니다. 소자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정 낭자에게 마저 이야기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예를 표하자, 정교랑도 자리에서 일어나 진 부인을 향해 예를 올리고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부인은 두 사람이 앞뒤로 나란히 대청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부인, 그래도 정 아씨가 십삼공자님을 잘 대해 주시는 것 같아요.”

여종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우리 십삼이 정 낭자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기 마련이지. 사람은 감정이 있는 동물이야. 사람의 진심은 돌덩이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다는데, 원칙 정도야 거뜬히 바꿀 수 있지 않겠어?”

진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여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인이 오랜 세월을 무식하게 살아오고, 글공부도 따로 한 적 없지만, 사람은 살아 있고, 원칙은 죽은 거라는 도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진 부인이 여종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 십삼이 너무 도도한 게 문제야. 정 낭자가 세운 원칙을 어길 생각조차 하지 않잖아. 하지만 다행인 건, 정 낭자도 십삼 못지않게 도도한 사람이라는 거지. 자기가 원한다면, 언제든 원칙을 갈아엎을 수 있을 만큼.”

진 부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엇, 하는 소리를 냈다.

“부인, 왜 그러세요?”

옆에 있던 여종이 서둘러 물었다.

“십삼 이 녀석! 좀 전에 웃긴 이야기를 하는 내가 웃기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하는 이야기가 웃기다는 거야? 어휴, 또 십삼한테 당했네.”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진십삼의 방에 있던 주육낭은 언짢은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공자님, 식사하시겠어요? 부엌에서 식사 준비가 다 됐다고 합니다.”

시녀가 물었다.

“안 먹는다. 지금 나갈 거야.”

주육낭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사환 한 명이 허둥대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

사환이 반가워하며 외쳤다. 자신을 따르는 사환임을 알아본 주육낭이 걸음을 멈췄다. 주육낭의 시선은 사환이 안고 온 보따리로 향했다.

“공자님,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해 왔습니다.”

사환이 부리나케 보따리를 펼치고 내의부터 겉옷까지 하나하나 꺼내 놓았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중얼거렸다.

“네놈이 쓸모 있을 때가 다 있구나.”

주육낭이 두 팔을 넓게 벌리자, 시녀들이 서둘러 주육낭에게 다가가 그의 옷을 갈아 입혀주었다.

사환이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어제 공자님이 소인더러 끝까지 따라오지 말라고 하시면서, 공자님 혼자 어디론가 사라지시는 걸 보고는 정말 제대로 취하셨구나 싶었습니다요.”

주육낭은 사환이 조잘대면서 한참 동안 자기 자랑을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표정을 굳힌 채 대꾸하지 않고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환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정 아씨께서 저더러 공자님께 옷을 갖다 주라고 하셨어요.”

사환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정 아씨?

주육낭이 흠칫 놀라서 반문했다.

“뭐라고?”

사환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설명했다.

“사실, 공자님께 옷을 가져다드리는 게 소인 생각은 아닙니다. 정 아씨께서 어젯밤부터 공자님을 찾으셨는데, 진 공자님 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하셨어요. 소인이 정 아씨께 공자님이 만취하셨다고 아뢰니까, 아씨께서 소인더러 옷가지를 챙겨서 진 공자님 댁에 같이 가자고 하시지 뭡니까.”

다른 때였다면, 사환은 분명히 다 자기 덕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부풀렸을 텐데, 옷을 가져오게 만든 사람이 정교랑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있는 사실 그대로 주육낭에게 이야기했다.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사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 애가 내게 옷을 갖다 주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라고?”

주육낭이 너무 갑작스럽게 움직이기도 했거니와 워낙에 힘이 센 탓에 주육낭의 허리띠를 묶어 주고 있던 시녀들이 그를 따라 앞으로 쏠려갔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시녀들이 주육낭을 향해 볼멘소리를 냈다.

“됐다. 그만들 나가 봐.”

주육낭이 시녀들에게 손짓하고는 사환을 더욱 세게 잡았다.

“맞느냐고 물었다.”

사환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나를 위해서?”

주육낭이 재차 확인했다.

“예.”

사환이 대답했다.

“정확히 어떻게 말했는데?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소상히 이야기해 봐.”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사환을 재촉했다.

“어디서부터요?”

사환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 아씨께서 어젯밤부터 공자님을 찾으셨는데…….

어젯밤부터 나를 찾았다고?

주육낭이 입꼬리를 씰룩대다가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참고 말했다.

“어제부터 이야기해.”

주육낭은 아직 못다 입은 옷을 여밀 생각조차 안 드는 듯 앞섶을 반쯤 풀어 헤친 모습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어제라면…….

“자세하게, 자세하게 말해 봐.”

주육낭이 또 한 번 당부했다. 사환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뒤로 물러났던 시녀들이 조용히 웃음 지었다.

“공자님, 식사를 대령해오라고 했으니, 천천히 식사하시면서 이야기를 듣는 건 어떠세요?”

시녀가 물었다.

주육낭이 큰 손을 내밀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좋다.”

바람이 불어오자, 벚나무 가득 핀 벚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벚나무 아래에 있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무 아래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사내도 있고 여인도 있고, 앉은 사람도 있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벚나무를 올려다보았고, 어린아이들은 바닥에 떨어지는 벚꽃을 잡겠다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라는 말처럼, 성에서 오 리 밖에 있는 도관도 별다른 것 없이 벚꽃 하나만으로도 유명해질 만하네요. 이 도관을 처음 지을 때 벚나무를 잔뜩 심어 놓은 사람 덕분에, 이 도관은 몇 대 동안 향불 값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두봉과 두모 위에 내려앉은 벚꽃 때문인지, 오늘따라 정교랑의 모습은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무심코 꽂아 둔 버드나무 가지가, 숲을 이루게 된 것일 수도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다 그렇죠.”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 앞에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시녀가 미리 두 사람의 찻잔 위에 씌워 둔 얇은 망사 덮개 덕분에 벚꽃이 찻잔 안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들 그 이야기 들었소?”

행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덕승루에서 화괴 다툼이 일어났다는군.”

“에이, 화괴 다툼이 뭐 희귀한 일이라고. 그건 흔히 일어나는 일이잖소.”

하긴, 화괴 다툼 없는 화괴가 무슨 화괴라 할 수 있으랴.

이야기를 듣고 입꼬리를 올리던 진십삼은 정교랑을 향해 손을 내밀고 간식을 먹어보라고 청했다.

“이것 좀 먹어 봐요. 어머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간식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끝으로 간식을 조금 떼어내 먹었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근데, 맛이 있지는 않아요. 어머니께 불경스러운 말을 하자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 간식은…….”

“이번에는 좀 다르다던데? 어떤 여인이 화괴 다툼에서 이겼대.”

“어떤 여인이 화괴를 하고 싶어서 다툰 거라고?”

“그게 아니라 어떤 여인이 돈을 걸고, 어떤 사내와 화괴 다툼을 해서 이겼다고.”

행인들의 대화를 들은 벚나무 아래 사람들이 일제히 행인들을 쳐다보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진십삼도 말을 하다 말고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내다보며 웃었다.

“저 사람들 말, 들었어요?”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서 정교랑에게 물었다.

“낭자는 저런 이야기 믿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요.”

진십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직접 본 사람처럼 말하네요? 진짜로 믿는 거예요?”

진십삼이 찻잔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정교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본 게 아니라, 그 화괴 다툼을 한 사람이 나거든요.”

그 화괴 다툼을 한 사람이 나거든요?

진십삼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몸종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정교랑의 두봉과 두모에 튄 차를 닦아 주었다.

정교랑이 담담한 표정으로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진십삼은 놀라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공수의 예를 표하며 활짝 웃었다.

“미인을 얻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정교랑이 답례했다.

“주복!”

진십삼의 목소리가 밖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진십삼이 마당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주육낭은 편한 자세로 대청에 비스듬히 누운 채 시녀 둘이 고무줄놀이를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왜 아직도 집에 안 갔어? 괜히 자네 집까지 갔다 다시 왔잖아.”

진십삼이 주육낭을 탓하듯이 말했다.

“자네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는 서로 놀라서 마주 보았다.

“말할 필요 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진십삼이 먼저 말하고는 대청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후 시녀들을 향해 손짓했다. 두 시녀가 서둘러 고무줄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주육낭은 절로 웃음이 나는지 입을 벌리다가 곧 표정을 수습했다.

“너무 속상해하진 마. 그래도 자네와는 꽃놀이를 갔잖나.”

주육낭이 말했다.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되물었다.

“뭔 소리야? 그나저나, 그렇게 큰일을 나한테 왜 숨겼어!”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주육낭이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그 사람이 살의까지 내비쳤다면서? 그래도 큰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게 큰일이 아니었으면, 어제 자네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이유는 또 뭔데?”

진십삼이 주육낭을 다그쳤다. 주육낭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아, 하고 대꾸했다.

“그 일을 말하는 거였군. 자네가 알 정도면, 이미 경성에 그 이야기가 다 퍼졌다는 소린가?”

“쓸데없는 소리.”

진십삼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삽시간에 이야기가 퍼질 만한 소재가 다 들어 있잖아. 화괴며, 고씨 가문이며, 게다가 미모에, 돈에, 권력에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천만 명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신선의 제자 정 낭자까지 있는데. 이야기가 안 퍼지는 게 더 이상하다, 이놈아.”

주육낭이 멍한 표정으로 아, 하고 내뱉었다. 그는 잠시 잊고 있었던 그 골치 아픈 일이 떠올라 표정을 굳혔다.

“정말로 주 낭자 혼자서 벌인 일이야?”

진십삼이 물었다.

“몰라. 아무튼, 걔는 누가 벌인 일이든 관심 없대. 풍류를 즐기는 오라비가 기쁘기만 하면 된다더라.”

주육낭이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설마 그거 때문에 정 낭자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혼자 고주망태가 되어 우리 집으로 쳐들어온 거야?”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 참, 내가…….”

“그런 거라면, 자네는 정말 그 풍류를 즐긴다는 오라비보다 못한 놈이네.”

진십삼이 주육낭의 말을 끊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발끈하여 진십삼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번 일 말이야. 정 낭자가 깨진 이를 배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을 만큼 속상한 일이었는데, 거기서 뭘 했다고? 정 낭자한테 성질을 부려? 그게 오라비로서 누이에게 보일 모습이야? 정사낭이 멍청하긴 해도, 적어도 제 누이를 아낄 줄은 아는 사람이야.”

진십삼이 말했다.

“속이 상하긴. 내가 보기엔 아주 기뻐서 환장을…….”

주육낭은 이를 바드득 갈며 말끝을 흐렸고, 진십삼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정 낭자가 자네처럼 고주망태라도 되어야 속상하다는 말이야?”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일이 이미 그 지경이 됐는데, 정 낭자가 거기서 뭘 더 할 수 있었겠나? 대부분은 아마 그 자리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 관인에게 빌며 사죄할 생각만 했겠지. 절대 그 오만 관을 화괴 다툼에 쓰진 않았을 거야. 공손히 고 관인에게 받치면서 화를 가라앉히라고 아부를 떨었을 테지. 하지만 주복, 만약 자네였다면, 고 관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을 텐가?”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지.

“자네도 그러지 않는데, 정 낭자가 어떻게 그러겠나?”

진십삼이 주육낭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 낭자는 단 한 번도 아랫사람의 잘잘못을 따진 적이 없어. 정사낭의 손목을 부러트린 하인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지. 왜 그런 줄 알아? 자신이 일개 하인들과 다투는 걸 하찮다고 여기니까. 그만큼 그 여인은 자존심이 센 사람이니까. 그런 여인이 퍽이나 고 관인에게 사죄하고 싶었겠다. 더군다나 그 여인의 잘못도 아닌 일에!

누가 봐도 이건 정 낭자가 정사낭을 위해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씌운 거야! 아둔하고 착해 빠진 정사낭은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무척 속상해할 테고, 죽을 만큼 자신을 자책하겠지.

그런데 정 낭자가 거기서 고 관인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죄하면, 정사낭은 어땠겠어? 자기 때문에 누이가 이런 일에 휘말리고, 치욕스러운 사죄를 한다는 것에 더 미안하고, 더 속상하고, 더 창피해서 그 자리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야. 그런데 정 낭자 같은 사람이, 일을 그렇게 만들었을 거 같아?

자네는 어떻게 정 낭자가 이 일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속으로 기뻐한다고 말할 수가 있지? 남의 수작에 놀아나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고씨 가문과 입에 담기도 망신스러운 일로 원수를 졌어. 정 낭자가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났겠나?

정 낭자가 어째서 화낼 리 없고, 속상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정 낭자도 사람이야. 오욕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지. 제멋대로 구는 사람보다,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이 더욱 고통스럽다는 걸 왜 몰라?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정 낭자가 뭘 할 수 있어? 화를 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데? 없어, 아무 소용없다고. 정 낭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지금 처한 곤경에서 어떻게 살길을 마련할지 고민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정 낭자가 고 관인과 화괴 다툼을 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최선의 결정이기도 해.

음모여도, 함정이어도, 설령 고씨 가문과 원수지간이 되더라도, 정 낭자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딱 한 가지 중요한 것만 생각한 거야. 화괴 다툼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

화괴 다툼으로 시작했다면, 화괴 다툼으로 끝내자.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일이니, 결과가 어찌 되든 일단 해보자. 모든 일은 결국 화괴 다툼으로 시작하고, 끝을 내자. 정 낭자는 그렇게 생각했겠지.

화괴 다툼을 하는 게 얼마나 덧없고 황당한 일인지는 온 경성 사람이 다 알고 있을 거다. 황당한 일인 만큼, 서로 승패를 받아들이고, 그냥 한 번 웃고 훌훌 털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 고작 화괴 다툼으로 가문 간의 불화가 일어난다면, 그거야말로 더욱 황당한 일이 되는 거지.

고씨 가문이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걸?

어린 여인이 제 오라비를 위해 화괴 다툼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 세간에 떠돌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어린 여인의 용기에 손뼉을 칠 거야.

만약 그 자리에서 정 낭자가 고개 숙이고 사죄했다면, 신선 낭자도 비굴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비웃음을 샀을 거라는 사실을 정녕 모르겠나?

자네가 거기서 성질부릴 일이 뭐 있어? 자네까지 설칠 필요가 뭐 있냐고!”

진십삼의 말을 듣던 주육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내가 그거 때문에 화를 낸 게 아니잖아! 나는 그 애가 고씨 가문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난 게 아니라고! 나는 그저, 난 그저 그 애 주변에 있는 멍청한 놈들한테 화가 나는 거야. 괜히 그 애한테 골칫거리만 떠넘기니까.”

“다른 건 없고?”

진십삼이 넌지시 말했다.

“그래, 그런데도 그 애가 그 멍청한 놈들한테 잘해 준다는 게 화가 난다! 됐냐? 그래, 맞아! 난 정확히 이것 때문에 화가 났다, 왜!”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버럭 화를 냈다.

주복, 그건 화가 난 게 아니라, 질투야.

“그런데도 그 여인이 그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니까, 우리가 그 여인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사낭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정 낭자가 정사낭을 매몰차게 내쳐야만 해? 정 낭자가 정사낭을 먼지 나게 두드려 팼다면, 우리는 정 낭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주육낭은 속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금세 풀이 죽은 모습으로 생각에 잠겼다.

맞는 말이야. 그 여인이 몹시 짜증 나고 밉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야.

창피해하기도, 부끄러워하기도 하는 주육낭의 표정을 본 진십삼이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어쨌든 황당한 일에 불과하고, 어린 낭자가 성질 한번 크게 부린 일로 치부할 수도 있으니까. 고씨 가문 쪽에는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보겠네. 관기의 수작에 두 가문이 놀아난 것이니, 따지고 보면 둘 다 피해자일 뿐이야. 자연스럽게 큰일을 작은 일로, 작은 일은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주육낭은 아무런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녁은 먹고 가지? 정 낭자에게 급하게 사과하러 갈 필요는 없어.”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과는 무슨.”

주육낭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공자님, 공자님.”

사환 한 명이 급하게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 아씨께서 오셨습니다.”

두 사람이 또 한 번 화들짝 놀라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또?”

“하, 저녁에는 성문이 닫히니까, 등불 아래서 꽃놀이할 생각은 마라.”

주육낭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진십삼이 입을 막 열려던 찰나, 사환이 먼저 말했다.

“공자님, 정 아씨께서는 공자님을 데리러 온 거라고 하십니다.”

사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를, 데리러 와?

주육낭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날 왜 데리러 와?”

진십삼이 피식 웃으면서 주육낭의 어깨를 탁탁 쳤다.

“네 진심이 보였나 보지. 육낭, 진심을 보이는 게 뭐냐고 물었지? 지금 자네의 마음이 바로 진심이야.”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주육낭이 멍한 표정으로 회상했다.

  • 그 사내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긴 한 것 같네. 시키는 대로 할 배짱이 있으니, 쓸모가 있는 게 맞지.

  • 육낭, 저번부터 자네가 계속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이런 게 바로 진심이야.

다른 것은 고려하지 않고, 그 여인을 믿고, 그 여인을 걱정하는 것.

주육낭이 퉤 하고 침을 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걸음을 옮기다 말고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아, 좀 전에 자네한테 하려던 말을 아직 못 했네.”

주육낭이 말했다. 진십삼은 좀 전에 대청 안에서 헤벌쭉 웃던 주육낭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아까 그 애가 왔던 일, 실은 나 때문이었단 거야.”

주육낭은 헤벌쭉 웃으면서 장포를 손으로 쓱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자네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나한테 옷을 가져다주려고 온 거거든.”

진십삼은 흠칫 놀란 얼굴로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진십삼이 뒤늦게 고개를 저으며 읊조렸다.

“그래서 온 거였구나.”

날이 저물 무렵이 되자 거리를 오가는 행인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빠르게 내달리는 말과 마차들 때문에, 정교랑이 탄 마차의 속도가 더뎌졌다. 말을 타고 있던 주육낭은 마차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마차를 따라갔다.

“말, 가져다줘서 고마워.”

머뭇거리던 주육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날씨인지라,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져 있었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고마워할 거 없어요. 나 때문에 말을 잃어버린 거잖아요.”

“아니야.”

주육낭이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대답했다.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자, 주육낭이 이어서 말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너한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스스로한테 화가 나서 그래.”

“이번 일은,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래. 뭘 어쩔 수 있겠어.

참…… 재수가 더럽게 없었지.

말고삐를 쥐고 있던 주육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 없이 주씨 저택에 도착했고, 정교랑이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어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을 향해 주육낭이 외쳤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 너무 속상해하지도 말고. 네가 그 멍청한 놈을 지켜주고 싶으면 지켜.”

주육낭이 굳은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너는 내, 내가 지켜줄 테니까.”

마, 말해 버렸어! 이렇게 남사스러운 말을 뱉어내다니!

이제 빨리 가야지, 빨리!

주육낭이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주육낭의 발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고 웃으며 물었다.

“간식 먹을래요?”

“또 간식이야? 간식 말고 딴 건 없어?”

주육낭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뭘 원하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뭘 원하냐고?

“그림.”

주육낭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말이야. 진십삼한테 준 그림 같은 거.”

“알겠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헤벌쭉 웃던 주육낭은 얼른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수습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재빨리 정교랑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나도 꽃 그려줘. 밤에 피는 꽃 같은 거. 진십삼한테 줬던 그림보다 더 좋은 거.”

“부인, 부인.”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정씨 저택의 조용한 새벽을 깨웠다.

머리를 단장하고 있던 정 이부인이 언짢은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온 여종을 흘겨보았다.

“여긴 경성이야. 품위 없이 호들갑 좀 떨지 마라.”

여종은 재빨리 걸음을 늦추고 알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일인데?”

화려한 비녀로 가득한 장신구 함에서 신중하게 하나를 골라 머리에 꽂은 정 이부인이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좀 전에 반근 낭자한테 가서 돈을 받으려고 했는데, 반근 낭자가 돈이 없다고…….”

여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 이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돈이 없긴 왜 없어?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자기가 뭐라고 우리한테 돈을 안 줘?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여종은 연이어 다그치는 정 이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귀가 아파 왔다.

“웬 호들갑이오? 체통을 지켜야지.”

조식을 먹은 뒤, 여유롭게 산책을 한 바퀴하고 대청 안으로 들어온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야, 내 말이 맞잖아요. 주씨 가문은 돈 때문에 교랑을 데려간 거예요. 이젠 우리한테 돈도 한 푼 안 주겠대요!”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 이노야 앞으로 다가갔다.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허튼소리. 그 돈은 내 돈인데, 누가 감히 내 돈을 빼돌린다는 거요?”

정 이노야가 집사를 불러서 말했다.

“점포에 보낼 사람을 골라 놨으니, 오늘 당장 점포에 가서 관리인들을 싹 바꾸게. 앞으로 장부는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곧장 우리 손으로 들어올 걸세.”

정 이부인이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구나! 그 점포들이 드디어 완전히 내 것이 되겠어!

“노야, 부인. 노야, 부인!”

대청 밖에서 또 하인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 단속도 좀 하시오. 집안 꼴이 이게 뭐요?”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정 이부인을 나무랐다.

“알겠어요, 노야. 지금까지는 안주인이라고 하기도 그랬잖아요. 관리인들부터 바꾸고 나면, 안주인 노릇 제대로 할게요.”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이때, 가노 하나가 거의 구르다시피 대청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부인, 큰일 났습니다. 집 앞에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정산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가노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정산? 무슨 정산?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정 이부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점포에 납품하는 업자들인데, 뭘 정산해야 한다며 돈을 달랍니다.”

가노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정산할 게 있으면 반근을 찾아가야지, 왜 우리를 찾아와!”

정 이부인이 화를 냈다.

“반근 낭자가 돈이 없다고 해서 부인을 찾아왔다는데요.”

가노의 대답에 정 이부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날 찾아서 뭐해? 내가 행수도…….”

“부인, 행수를 찾아온 거라고 합니다. 부인께서 그 점포들의 행수 아니십니까.”

정 이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노가 서둘러 말했다. 흠칫 놀란 정 이부인은 문득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이때다 싶어서 행수를 찾아?”

“노야, 노야.”

또 다른 가노가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또 뭐냐?”

정 이노야는 아침부터 집안이 시끄러워 몹시 짜증이 나 있었다.

“노야, 사람들 말을 들어 보니, 저희 큰 아씨가 화괴 다툼에 오만 관을 썼다고 합니다!”

가노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오만 관! 화괴! 큰 아씨!

정 이노야 부부가 경악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 그래서 반근 낭자가 돈이 없다고 한 거였나?”

옆에 있던 여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만 관! 오만 관을 통째로 화괴한테 썼다고?

“자네 오만 관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나?”

“대학사의 한 달 녹봉이 기껏해야 일백 관이네. 아마 조정 관리들의 한 달 녹봉을 다 합쳐도 사만 관이 채 안 될걸세.”

“하하하. 그렇게 따지면, 조정 관리들은 기루의 관기보다도 돈을 못 버는군.”

이 층에 앉아 있던 노인 몇 명이 시끌벅적한 대청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일세.”

노인 중 한 명이 혀를 찼다.

이때, 밖에서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찻집에 있던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자,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서 가세! 정씨 가문 사람들이 덕승루에 가서 오만 관을 도로 내놓으라고 깽판을 치고 있다는군!”

누군가가 거리에서 소리쳤다.

정씨 가문이 덕승루에?

이 층에 있던 노인들이 감탄했다.

“이상한 일은 매년 있었지만, 유독 올해는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군.”

찻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구경거리를 찾아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황당하네, 황당해.”

이 층에 있던 노인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황당한 소리 마요! 기루의 화대를 다시 받아간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듣네요.”

한편 덕승루 안에서는 기생 어미 막씨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댁들이 사기 친 거잖아!”

기생 어미 막씨의 반대편에 서 있던 아낙들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을 줄 몰랐는지, 오만 관이라는 엄청난 액수 때문에 끓어올랐던 패기는 지금 이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상하네. 이런 일은 고향에서도 있었잖아. 화신 묘회(火神 廟會)에서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현승 댁 사람들하고도 대판 싸웠어. 그때도 구경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겁을 먹기는커녕 점점 목에 힘이 들어갔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움츠러들지?

여기 사람들이 간드러지는 경성 말씨를 써서 그런가? 아니면 우리 앞에 서 있는 저 기생 어미라는 여인이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미모를 자랑하고, 일거수일투족에서 농염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런가?

아낙들은 이 상황이 거북하기만 했다.

기생 어미 막씨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틀렸어요. 저희는 사기를 친 게 아니라, 판 거예요.”

팔았다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주위에 있던 사내들은 곧바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웃음을 터트렸고, 여인들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보다 못한 정씨 가문의 집사가 나서서 말했다.

“이보시오, 이번 일은 확실히 황당한 일이잖소. 우리 아씨와 공자님께서 장난 좀 친 걸 진짜로 받아들이다니요. 부탁이니 오만 관을 그만 돌려주시오.”

돌려달라고?

기생 어미 막씨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농이 지나치시네요. 이미 즐길 건 다 즐겨 놓고, 돈은 도로 돌려달라고요?”

“아직 안 즐겼으니 하는 말이 아닙니까.”

집사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미모를 파는 아이들이에요. 그러니 손님이 눈길만 주어도 즐긴 것과 다름이 없죠. 눈알을 파낸다 한들, 이미 본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즐겼으면 즐긴 값을 내야죠.”

기생 어미 막씨가 여유롭게 웃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 번 봤다고 오만 관씩이나 받는 게 어디 있습니까!”

집사가 급한 마음에 소리치자 기생 어미 막씨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건 저도 모르니, 댁의 아씨와 공자한테 가서 물어봐요. 제가 아는 건, 즐길 돈이 있으면 기루에 와서 즐기는 거고, 돈이 없으면 오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하룻밤을 같이 보내며 즐길 건 다 즐겨 놓고, 이튿날이 되자 후회된다며 화대를 돌려받겠다는 경우와 지금이 다를 바가 뭐죠?”

갈수록 노골적인 기생 어미 막씨의 말을 들은 사내들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구경꾼들이 덕승루 안으로 점점 많이 더 들어오자, 집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교활한 것!

조용히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큰소리칠 줄이야! 이게 무슨 망신이람!

“어서 가세.”

집사가 조용히 말하자, 얼굴이 새빨개져 있던 아낙들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집사와 아낙들은 도망치듯 덕승루를 빠져나와, 사람들의 비웃음을 들으며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가서 댁 공자님께 꼭 말씀드리세요. 우리 아형이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기생 어미 막씨가 허겁지겁 떠나는 집사 일행에게 소리쳤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났는지 웃음을 터트리면서 덧붙였다.

“아, 그렇다고 급할 건 없어요. 정 공자님은 손을 다쳤으니까, 다 나으면 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한 달 정도는 거뜬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특별히 한 달은 미뤄 드릴게요.”

덕승루 안의 사람들이 기생 어미 막씨의 말을 듣고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거요? 그 교활한 기생 어미가 행여나 순순히 돈을 내놓겠네!”

정씨 가문의 저택 안, 집사의 이야기를 들은 정 이노야가 정 이부인에게 버럭 화를 냈다.

“망신을 당하려고 작정한 거요?”

정 이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소리쳤다.

“그래요. 나 미쳤어요! 오만 관을 허공에 뿌렸는데, 제정신일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의 팔을 덥썩 잡고 말했다.

“당신은 대리시 관리잖아요. 어서 그 요망한 덕승루 것들을 잡아들이고, 우리 돈을 되찾아 와요!”

정 이노야가 소매를 홱 내쳤다.

“지금 돈이 문제요? 이건 우리 목숨과 앞길이 달린 문제라고! 당신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오만 관밖에 없소? 우리가 지금 누구한테 원수를 졌는지는 안 보이시오?”

정 이노야는 치밀어오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쏟아냈다.

“무려 고씨 가문이오! 우리 집안이 웃음거리가 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 일은 고씨 가문까지 웃음거리로 만들었단 말이오! 고 관인! 고씨 가문! 관기 하나 때문에 그런 망신스러운 일에 휘말린 것도 모자라 다툼에서 졌다는 소문이 평생 꼬리표처럼 고 관인을 따라다닐 것이오. 고 관인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그런 일을 당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지 않겠소?”

정 이부인이 눈물을 훔치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정 이노야를 쳐다보았다.

맞아. 고씨 가문이었지.

“노야, 그래도 이번 일은 당신과 무관해요. 두 재수 없는 아이들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요. 노야, 어서, 어서 고 관인께 가서 사죄드려요!”

정 이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일찍이 어머니 말씀을 들었어야 해. 그 불운 덩어리는 정말 가는 곳마다 내 앞길을 막고, 우리 정씨 가문에 화를 불러오는군.”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문밖을 향해 외쳤다.

“데려왔느냐?”

“노야, 주씨 가문에서 못 데려가게 막으며, 저희를 때려서 내쫓았습니다.”

문가에 서 있던 사환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하자 대로한 정 이노야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씨 놈들이 감히! 내 딸을 내가 데려가겠다는데, 제깟 것들이 뭐라고 못 데려가게 해! 내가 직접 가서 데려와도 똑같이 막을 수 있나 보자!”

“노야, 노야. 주씨 가문 사람들이, 노야께서 오신다 해도 똑같이 때려서 내쫓을 거라고…….”

사환이 말끝을 흐리며 정 이노야를 말렸다.

“그놈들이 감히! 국법을 우습게 여기는 게야?”

입으로는 화를 내고 있지만 정 노야의 발은 제자리에 멈춰 선 후였다. 정 이부인이 자연스럽게 정 이노야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노야, 주씨 사람들은 국법이고 뭐고 무시하는 거 잘 알잖아요. 그냥 거기서 그대로 지내라고 해요. 주씨 가문 사람들이 우리 교랑을 그렇게 키워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노야, 다 주씨 가문 잘못이에요. 그러니 어서 고 관인께 가서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해요.”

맞아. 다 주씨 가문 탓으로 돌리면 되겠어!

정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맞아. 이건 다 주씨 놈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정 이노야가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어서 겉옷을 가져오너라. 내 당장 고 관인을 뵈러 갈 것이니.”

정 이부인은 분주하게 여종들을 재촉하다가, 정 이노야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사낭은…….”

정 이노야가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그런 풍기 문란한 짓을 저지르다니, 내 조정에 죄를 청하여 그놈의 진사 자격을 박탈시키겠소.”

그러면 고 관인도 내가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이라 여길 테지.

정 이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를 부득 갈았다.

“맞아요. 사낭도 우리처럼 목숨이 간당간당한 맛을 한번 느껴보라고 해요.”

“어서 마차를 준비하거라.”

결심을 내린 정 이노야는 마음이 더욱 조급해진 듯했다.

“노야, 나가실 수 없습니다. 문 앞이 아예 막혔어요. 아침에 온 사람들이 정산을 안 해 주면 관아로 가서 고소하겠다고 난리입니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집사가 말했다.

“고소할 사람은 고소하라고 해!”

정 이부인이 소리쳤다.

“부인! 그 점포들은 이제 부인의 것이잖습니까. 정말로 고소하면, 그 점포들은 모조리 관아에 압류당하고 맙니다!”

압류!

“그건 안 된다! 닭이 있어야 달걀이라도 낳지, 닭마저 없어져 버리면 우린 아무것도 없어. 그 점포들은 꼭 지켜내야 해.”

정 이노야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요? 아니면, 점포 하나를 팔아서 다른 점포를 지키는 건 어때요?”

정 이부인이 눈알을 굴리다가 말했다.

“미쳤소? 점포 한 개를 팔아? 점포 하나당 월 수익이 얼마인 줄 알고 하는 말이오? 점포를 팔다니! 그 아이가 강주에서 엉뚱한 데 뿌린 돈으로도 부족하시오?”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그럼 어떡해요?”

정 이부인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 이노야가 말없이 정 이부인을 잠시 쳐다보았다.

뒤늦게 정 이노야의 생각을 읽은 정 이부인이 몸을 살짝 떨며 뒷걸음질 쳤다.

“일단 당신 혼수로 막아봅시다.”

정 이노야가 말했다.

내 혼수!

“얼, 얼마나요?”

정 이부인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일고여덟 명쯤 왔으니까, 합하면 총 이만 관 정도 됩니다.”

집사가 말했다.

이만 관!

정 이부인이 질겁했다.

“나한테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딨다고요!”

정 이노야가 성가시다는 듯이 대꾸했다.

“없으면 여기저기서 긁어모아야지. 저기에 금은 장신구들이 한가득이니, 우선 갖다 팔면 되잖소.”

정 이노야가 정 이부인의 화장대를 가리켰다. 정 이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장신구 함들을 쳐다보았다.

크고 작은 삼단 장신구 함 속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귀한 장신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전부 정 이부인이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라서 모아온 것들이었다.

아직 착용도 못 해 본 것도 있는데, 우리 아들딸, 며느리한테 물려줄 것도 있는데…….

“정말 미치겠네!”

“황당하다고? 정말로 황당한 사람이 누군데. 그 여인과 누가 더 돈이 많은지를 겨루다니. 정 낭자는 원한다면 언제든 사람을 살리는 대가로 일만, 이만, 삼만 관을 벌 수 있어. 정 낭자는 아마 돈을 물처럼 여길걸? 들어오든, 나가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찻잔을 비운 진 노태야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진소가 고개를 저으며 시녀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진 노태야에게 건넸다.

“정 낭자가 황당한 일을 벌이긴 했습니다. 오라비가 화괴 다툼하는 것을 종용하는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껄껄 웃었다.

“그렇긴 해. 그 어린 낭자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다른 이는 더더욱 못 하지.”

진 노태야의 말을 들은 진소가 말없이 웃었다.

“내가 드디어 깨우친 게 하나 있구나. 그 여인과 맞설 일이 생기면, 딱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진 노태야가 의미심장하게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말했다.

“자신이 손해 보는 게, 바로 복이야.”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다는 건, 참으로 어렵겠지.”

대전 앞에 도착한 귀비가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대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이건 신첩이 어제 태후께 받은 간식이에요. 폐하도 한 번 맛보셔요.”

귀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황제가 손에 쥔 상소문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귀비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한발 늦었군. 평왕이 좀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황제가 말했다.

“아쉽네요. 폐하, 평왕이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니, 평왕한테 시킬 일이 있으시다면 한 번 맡겨 보심이 어떨지요? 폐하의 옥체에 무리가 갈까 근심이옵니다.”

귀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린 나이가 아니라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건 아니오.”

황제의 대꾸에 귀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왕이 오늘 또 폐하께 꾸중을 들었나 보군. 게다가 심한 꾸중을 들은 게 분명해.

“평왕이 아둔한 게 있어도 폐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귀비가 말했다. 황제가 간식을 두 입 먹고 내려놓았다.

“태후께 가 봅시다.”

황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폐하.”

귀비가 황제를 따라 몸을 일으키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혹시 정 낭자가 화괴 다툼을 한 이야기는 들으셨는지요?”

황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태후께서 벌써 이야기를 들으셨단 말이오?”

황제가 귀비에게 물었다가 웃으면서 혼잣말했다.

“소식이 꽤 빠르군.”

폐하의 성격이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요즘은 말하는 것도 이상해지신 것 같아.

“폐하, 정 낭자의 행실이 참으로…….”

귀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귀비의 말을 끊고 말했다.

“이상할 게 뭐 있나. 정 낭자의 행실은 늘 한결같았소. 의형제 몇 명이 죽은 일을 가지고 감히 짐에게 대들었는데, 이번에는 친 오라비가 다쳤소. 게다가…….”

황제가 귀비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린 여인이 그런 일을 벌인 것도 황당하다지만, 경성 관리가 그 여인과 같이 다퉜다는 게 더욱 황당하지 않소?”

황제가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소매를 홱 털었다.

“짐은 안비를 보고 갈 테니, 귀비 먼저 태후를 뵈러 가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는 대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비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 채, 새빨개진 얼굴로 황제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자식이 뭘 잘했다고 고자질까지 시켜?”

황제의 혼잣말이 대전 밖에서 전해져왔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관요(官窯)에서 만든 귀한 청자 찻잔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을 뒹굴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탁자 뒤에 앉아 있던 고 관인이 이를 으스러질 듯이 갈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사환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환의 대답을 들은 고 관인은 자신 앞에 있던 탁자를 통째로 엎어버렸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모든 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천노(賤獠) 정씨! 천노 정씨!”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정도의 욕설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아예 기둥을 뽑아버릴 기세로 물건을 때려 부수는 고 관인을 보던 식객이 서둘러 사환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십사 관인, 십사 관인.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식객이 고 관인을 다독였다.

“화를 가라앉히라고? 지금 나더러 어떻게 화를 가라앉히라는 거야!”

고십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에 쥔 꽃병을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체면 깎이고 명성을 잃은 것도 모자라 남들 미움까지 사? 분명히 그놈들이 나를 걸고넘어진 건데, 어째서 나만 안팎으로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거냐고!”

도통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의 고십사가 소리쳤다.

식객이 고십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십사 관인,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관인의 성씨는 고씨가 아닙니까. 강한 자에게는 아첨하고 약한 자는 짓밟는 게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럽니다.”

특히나 강한 사람일수록 평소 짓밟기 어렵다 보니,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난다면 더욱 주목을 받고 더욱 소란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런 이치는 고십사도 잘 알았다. 물건을 내던지며 한바탕 분풀이를 한 고십사가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그 강주 바보! 강주 정씨! 사람을 시켜 그 계집의 버릇을 제대로 고쳐 줘야겠군.”

고십사가 이를 부득거리며 손짓했다.

“고 관인, 지금은 안 됩니다. 관인께서 정 낭자와 원수지간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됐잖습니까. 게다가 폐하께서도 이번 일이 황당하다고 하신 마당에, 여기서 더 일을 키웠다가는 아예 수습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를 겁니다. 저희가 그 낭자를 해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낭자를 해치더라도, 사람들은 관인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식객이 서둘러 고십사를 말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고십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라이, 그럼 내가 지금 그 여인을 어르고 달래고 안전하게 지켜 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게야?”

“그건 아니지만, 화괴 다툼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러니 고 관인도 그 일을 그만 내려놓으셔야 하고요. 그 일은 잠시 잊고 묻지도, 언급하지도 않으셔야 합니다.”

“퉤! 차라리 개처럼 꼬리를 숨기고 깨갱대며 빌빌 기라고 하지 그러나!”

고십사가 욕을 해댔다. 식객의 얼굴에 고 관인의 침이 잔뜩 튀었지만, 차마 소매를 들어 얼굴을 닦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식객이 다시 한번 조용히 고십사를 설득했다.

“잠시 참으라는 거지 평생을 참으라는 말이 아니잖습니까. 일단 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몸을 사리셔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몸을 사려야 하는데!”

고 관인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도 이 일을 황당한 일로 치부하셨는데, 여기서 일을 더 크게 만들었다가는 고 관인만 더욱 황당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겁니다.”

참다 못한 식객이 고십사를 향해 소리쳤지만, 고십사는 이를 갈며 냉소를 지었다.

“그때 내가 그 자리에서 바로 그 계집을 죽였어야 했어. 황당한 태도에는 황당한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지. 그런데 내가 그런 황당한 일에 갇히다니.”

“관인, 일보 후퇴는 일보 전진을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 황당한 일을 벌인 여인을 추종하는 자들 또한 똑같이 황당한 자들이니, 잘 두고 보십시오.”

식객이 고십사를 다독이듯 말했다.

고십사가 미간을 찌푸린 채 엉망진창인 방 안을 훑어보고는 문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문밖에는 따스한 봄날의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정말로 재수가 없군!

아버지께서 경성에 계시지 않으니 좀 자유롭게 놀 수 있나 싶었건만, 며칠 놀지도 못하고 이런 재수 없는 일에 휘말리다니.

경성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기는커녕, 경성 최대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어!

강주 정씨!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정씨 저택.

대청 안에 앉아 있던 정 이부인이 몸을 살짝 떨었다.

“지금 절기에 꽃샘추위가 올 리가 없는데.”

정 이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앞섶을 여미고, 문밖에서 차례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앞장서서 들어오는 늙은 사내의 손에 들린 장부였다. 장부를 쳐다보던 정 이부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부인, 모든 점포의 장부입니다.”

오 관리인이 예를 표하며 장부를 앞으로 내밀었다. 정 이부인이 여종에게 눈짓하자, 여종은 감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재빨리 장부를 받아왔다.

정 이부인이 마른기침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곤경에 처한 상황이니, 모두 한 마음으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네. 자네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하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돼. 아무리 자금이 부족하다 해도, 내 절대로 자네들을 홀대하진 않을 테니.”

오 관리인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반근 낭자는…….”

오 관리인의 뒤에 서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반근은 원래 윗전을 모시는 시녀잖나. 그동안엔 경성에 가족이 없으니, 반근이 어쩔 수 없이 교랑을 대신해서 점포를 관리한 거였네. 이제는 우리가 경성에 왔으니, 반근은 본디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정 이부인이 사내의 말을 끊고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내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만들 가 보게.”

정 이부인이 바깥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아, 온 김에 서로 인사도 나누고.”

오 관리인과 사내들이 고개를 돌려 문밖을 내다보자, 네댓 사람이 자신들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저들은 우리 집안 사람이네. 앞으로 자네들의 일을 도울 걸세.”

정 이부인이 말했다.

일을 도와?

오 관리인이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오 관리인 일행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정 이부인은 재빨리 장부를 집어 들었다. 옆에 서 있던 여종이 정 이부인 가까이 다가가 장부를 같이 펼쳐 보았다.

“부인, 부인. 점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어마어마합니다. 정말 엄청난 액수예요!”

여종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교랑이 어떻게 오만 관을 몸에 지니고 다니겠어. 그리고 그 얍삽한 아랫것들이 꿀꺽한 돈까지 생각하면…….”

정교랑이 날린 오만 관과 하인들이 떼 갔을 돈을 생각해 보니, 정 이부인은 눈이 핑 돌았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여종이 서둘러 정 이부인의 등을 두드려 주며 그녀를 달랬다.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 돈은 금방 다시 메꿀 거예요. 길어야 한 달, 한 달이면 됩니다!”

여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정 이부인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합장했다. 정 이부인은 합장한 자신의 손에 반지와 팔찌가 없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화장대를 쳐다보았다. 화장대 곳곳을 가득 채우던 반짝이는 장신구가 없으니, 화장대가 몹시도 휑하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함에 넣어두지 말걸. 이렇게 쓰지도 못할 줄 알았으면, 실컷 보기라도 하는 건데.”

정 이부인이 아쉬운 마음에 투덜거렸다.

아니지, 애초에 그 애한테 머리를 조아릴 필요도 없이, 서둘러 점포들을 빨리 내 손에 넣었어야 하는 건데! 그럼 이번 같은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다들 그 반근이라는 천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었어. 정말로 얄미워 죽겠단 말이지.

“아씨, 정말로 이대로 정 이부인한테 점포를 넘겨주실 겁니까?”

오 관리인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갖고 싶으면 가지라고 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저희는…….”

오 관리인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저희도 점포를 떠나는 게…….”

오 관리인이 말끝을 흐렸다.

오 관리인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다. 몇 년간 태평거와 신선거의 장사가 잘됐던 건 정교랑이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점포를 운영한 오 관리인과 시녀의 뛰어난 수완 덕분이었다. 점포와 관련된 모든 거래처와 점원 관리 또한 오 관리인과 시녀가 도맡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교랑이 없다고 해서 점포들이 당장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 관리인과 시녀, 그리고 원래 있던 점원들이 점포를 모두 떠나게 된다면 모든 점포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할 것은 자명했다.

정 이부인이 정교랑의 재산을 빼앗겠다는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으니, 오 관리인은 펄펄 끓는 솥 아래의 장작을 빼내듯 점포들의 근간을 흔들어 놓겠다는 마음으로 정교랑에게 물은 것이었다.

“일하기 싫어졌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흠칫 놀란 오 관리인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오 관리인이 피땀 흘려가며 키운 점포인데, 남이 그걸 엉망으로 짓밟아도 괜찮겠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까워서 어떻게 그럽니까.

심혈을 기울여 가며 차츰차츰 키워 온 점포들이었다. 오 관리인에게 그 점포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도록 막대한 부를 안겨 준 일터였을 뿐 아니라, 직접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짜릿한 성취감까지 안겨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씨, 그건 아씨의 피땀이기도 하잖습니까.”

오 관리인이 말했다.

“내 피땀은 내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해요. 오 관리인의 피땀은 오 관리인의 일이니, 오 관리인은 오 관리인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되고요. 피땀이라고 부르면서, 아무렇게나 짓밟히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잖아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 관리인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다 그렸어?”

문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오 관리인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젊은이 하나가 성큼성큼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알아본 오 관리인은 서둘러 정교랑에게 예를 표한 뒤 물러났다.

“무슨 일 있어?”

오 관리인이 물러나는 모습을 본 주육낭이 물었다.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육낭은 대수롭지 않게 아, 하고 대꾸하고는 정교랑을 재촉했다.

“별일 없으면, 빨리 그림이나 그려 줘.”

“공자님, 아씨께서 이미 다 그리셨어요. 안 그래도 제가 공자님께 갖다 드리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시녀의 손에 들린 족자를 보자마자 주육낭은 픽 웃으며 족자를 받아왔다.

“공자님, 그림이 어떤지…….”

시녀가 말하는 도중에, 주육낭이 몸을 돌려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볼 필요 없어. 나는 딴 데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

주육낭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벗어났다.

“뭐가 저렇게 급하시대.”

시녀가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정교랑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시녀가 반근을 보며 물었다.

“아씨께선 어딜 가셔?”

“경왕부에 들르신대.”

반근이 걸어오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같이 다녀올게.”

시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반근이 손으로 시녀를 막으면서 웃었다.

“언니, 바쁜 점포에서 쫓겨나서 드디어 좀 한가해졌잖아. 이참에 마음 놓고 편히 쉬어.”

“아휴. 이젠 내가 정말로 쓸모없어졌나 봐. 안팎으로 내가 필요한 곳이 없네. 어쩌면 우리 노태야 댁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시녀가 일부러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반근 옆에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가.”

시녀가 가슴을 부여잡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씨, 이제 이쯤에서 제가 아씨 다리를 붙들어 안고 통곡하면 되나요?”

“그래, 안아.”

정교랑의 대답에 시녀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아씨는 너무 놀리기에 좋은 사람이에요. 아씨 댁은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날 수 있는 곳이잖아요. 아씨께선 신경 쓰지도 않으시는데, 제가 뭐하러 아씨께 울면서 빌겠어요?”

시녀가 반근을 향해 손짓했다.

“반근, 집에 올 때 왕씨네 호떡 하나만 사다 줘.”

반근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정교랑을 따라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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