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 먹구름이 드리운 경성 하늘에서 내린 것은 눈송이가 아니라 빗방울이었다. 비가 내려 쌀쌀한데도 공기 중에선 봄기운이 느껴졌다.
내일은 예부시, 그러니까 성시(省試)의 급제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정사낭은 벌써 반나절째 서재에 앉아 있었다. 시험은 보름 전에 끝났지만, 곧이어 전시(殿試: 복시覆試에서 선발된 사람이 군주를 알현하며 보는 마지막 시험)를 봐야 하니 유희를 즐길 순 없었다. 아직은 차분히 공부에 매진할 때였다. 그럴 필요가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 성시에서 급제하지 못한다면…….
소리 없이 내리는 비도 정사낭의 귀에는 무척이나 시끄럽게 들렸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서성이던 정사낭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밖에서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순간 뜨끔한 정사낭이 다시 탁자 앞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발걸음 소리도 사라졌다.
잘못 들었나 보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탁자 위에 있는 서책으로 눈길을 돌리던 정사낭은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듯 또다시 일어섰다. 그때 문에 벌컥 열렸다.
“사공자님!”
시녀의 밝은 목소리가 울리자 정사낭은 화들짝 놀라 도로 앉았다. 까르르 웃는 시녀의 웃음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졌다.
“반근 언니, 공자님 좀 놀리지 마!”
반근이 시녀를 밀어내고 앞으로 가며 말했다. 정사낭은 얼굴이 붉어졌으면서도 침착한 척 서책을 집어 들었다.
“무슨 일이냐? 난 공부 중이었는데.”
시녀가 웃음기를 거두고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가 가엾은 듯 쓸쓸한 목소리로 불렀다.
“공자님…….”
“언니, 공자님 놀리지 말라니까.”
반근이 시녀를 보며 발을 탁 구르더니, 정사낭 앞으로 다가가 예를 표하며 활짝 웃었다.
“경하드려요, 공자님.”
순간 정사낭의 머릿속에 쾅 하는 소리가 울리며 눈앞에 불꽃이 터졌다. 방이 붙는 건 내일이지만, 지금쯤이면 급제자 명단이 나왔을 무렵이었다.
인맥과 수완이 있는 이들은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었고, 정사낭의 누이인 정교랑은 물론 인맥과 수완이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급제인가?
“반근, 내가 공자님을 놀리려는 게 아니야. 공자님은 사 태부(동진의 재상 사안謝安. 침착하고 태연자약한 태도로 장령들의 사기를 돋움)를 좀 보고 배우실 필요가 있어.”
“사 태부가 누군데?”
시녀와 반근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정사낭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급제에 쏠려 있었다.
급제했구나.
정사낭이 마침내 입꼬리를 올리며 웃기 시작했다.
“급제자가 삼백육십오 명이다. 사백십팔 명이 응시했고.”
정 이노야가 호들갑 떨 것 없다는 투로 말하자 정사낭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시험에 급제하지 못해 부끄러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부끄러움이었고, 기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급제한 거죠.”
정교랑이 말했다.
“꼴등으로 붙었다가, 전시에서 상위권으로 올라간 경우도 있잖아요. 듣자니 노야께서도 성시에 이백구십 등으로 붙었다가, 전시에서 백삼십사 등까지 올라가셨다던데요.”
그 말에 정 이노야의 안색이 급변했다. 뭐라 따지기도 전에 정칠랑이 먼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넷째 오라버니보다 잘 봤네.”
“네, 맞아요. 그 해엔 응시자가 적어서 삼백 명밖에 안 뽑았거든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삼백 명 중에 이백구십 등?
“아, 그럼 아버지는 꼴찌에서 십 등이었네요.”
속으로 셈을 마친 정칠랑이 말했다. 열이 받은 정 이노야가 눈을 부릅떴다.
“한 집안에서 진사를 둘이나 배출한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야.”
정 이부인이 나서며 수습하려고 했다.
“딱히 어렵진 않은 것 같은데요?”
시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대꾸했다.
가만있자, 얘가 어느 집 아랫것이었더라? 왜 이리 버릇이 없어? 정씨 가문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부아가 치민 정 이노야는 대체 어느 집에서 어렵지 않단 소리를 지껄이냐고 호통을 치려 했지만, 시녀의 얼굴을 보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래, 이 아이는 우리 집안 아랫것이 아니었어! 장씨 집안에서 왔지!
하긴, 장강주 집안이면 조상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연이어 진사를 배출한 게 어디 한두 번이겠나. 조상은 관두고 장강주 대에만 해도 벌써 넷이나 배출했는데.
스승님이자 연장자께서 주신 아랫것이니, 함부로 꾸중할 수도 없고.
따끔하게 호통을 치려던 정 이노야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전시 준비에 힘쓰거라.”
정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떴다.
“공자님, 우리 방 보러 가요.”
시녀도 정 이노야의 체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사낭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미 결과를 아는데, 뭐 하러 굳이 보러 가?”
반근의 물음에 시녀는 쿡 웃음을 터트렸다.
“방이 붙은 곳이 아주 떠들썩하거든. 묘회(廟會)나 꽃등 놀이 때처럼 사람도 많고 재미있어. 급제자 중에 사윗감을 고르려고 나온 사람들도 많고.”
대청에 있던 어린 낭자들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경성에 온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가지만 앙상했던 마당의 꽃나무에서도 이제는 꽃봉오리가 생겨나는 걸 보면, 추운 겨울에서 초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때였다. 그런데도 정씨 가문 낭자들은 묘회나 꽃등 놀이는 언감생심이고 저택의 대문조차 나가 본 일이 없었다.
화려하고 볼거리도 많으며 사건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던 경성이지만, 그녀들에게는 차라리 강주가 나을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시녀에게서 방을 붙은 곳이 무척이나 떠들썩할 거란 말을 들으니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아씨, 우리가 사공자님을 모시고 같이 가면 어떨까요?”
시녀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은요?”
시녀가 이번에는 정사낭을 보며 물었다.
정교랑이 응낙한 마당에 정사낭이 응낙하지 않을 리가.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분들은…….”
시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에게로 향했다. 다들 한껏 기대에 차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같이 가요.”
어린 낭자 셋은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물론 정칠랑은 금방 도로 털썩 앉으며 뾰로통한 얼굴로 흥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런 정칠랑의 모습에 정사랑과 정오랑은 앉아야 할지 일어서 있어야 할지 언뜻 판단이 서지 않아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럼 어서 옷 갈아입고 같이 출발하세요. 여봐라, 마차를 준비해라.”
시녀가 큰 소리로 외치며 같이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같이 가자고 저러는데 굳이 거절하는 건 좀 아니지.
정사랑과 정오랑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우르르 나가는 모습을 본 정칠랑이 다시 벌떡 일어섰다.
“오라버니.”
정칠랑이 쪼르르 뛰어가 정사낭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난 오라버니랑 같은 마차 탈래요.”
정사낭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럿이 함께 출타하다 보니 여종들이며 몸종들까지 덩달아 분주해지자 홀로 소외당한 집안 안주인 정 이부인도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반근, 반근.”
종종걸음으로 나온 정 이부인이 여종들에게 분부를 내리고 있는 시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여종들에게 하던 말을 끝마친 후에야 정 이부인 쪽으로 왔다.
“부인, 분부라도 있으세요?”
“사낭이 급제를 했으니 그래도 축하는 해야지.”
정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세요, 부인. 돈이 들어가는 부분은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전 아씨를 모시고 방을 보러 다녀올게요.”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던 시녀가 두어 걸음 걷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참, 부인도 같이 가시겠어요?”
시녀가 눈웃음을 치며 묻자, 정 이부인은 눈을 흘기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아냐. 애들 놀러 가는데 내가 거길 뭐하러 가.”
시녀가 웃으며 뒤돌아 나갔다. 시녀의 모습이 마당 문 밖으로 사라지자, 정 이부인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나더러 준비하라고? 돈은 자기가 내고? 그럼 난 뭐가 돼?
문서로 박아 놨으면 뭐해, 허울뿐인 주인인 것을.
정 이부인은 한숨을 토했다. 그녀는 이런 날이 너무 오래 지속되지는 않길 바랄 뿐이었다.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벼 끝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공자님, 저기까지 어떻게 가죠?”
사환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딱 보니까 처음 보러 온 모양이네.”
옆에 있던 서생이 아둔한 사환과 어리숙한 공자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러게. 우린 오밤중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그 말에 저쪽에 있던 서생이 고개를 돌렸다.
“원조 형, 이번엔 오밤중부터 기다린 보람이 있군.”
서생은 공수의 예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급제를 경하드리오, 원조 형!”
그 외침 소리에 한원조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옆에서 한 무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한원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곁을 지키던 사환과 시종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누군가의 손에 붙잡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례지만 혼처가 있으시오?”
같은 질문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있습니다, 있어요.”
한원조가 웃으며 대답하자 인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원조와 동료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 급제한 사윗감을 찾느라 아주 난리군.”
웃으며 이야기하던 서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원조, 삼 년 전 일 기억나나? 그때도 사윗감으로 점찍혀서…….”
“아니라니까 그러네. 몇 번을 말해.”
한원조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진 상공 댁은 아니야. 진 상공의 딸 중에 그 글씨를 아주 잘 쓴다던 어린 낭자의 신랑감도 이번에 진사 급제를 했는데, 합격자 방이 붙은 곳에서 고른 건 아니라더군. 그럼 그때 자네를 사위로 맞이하려던 건 대체 누구지?”
“몇 번을 말하나. 글쎄, 그런 거 아니래도.”
답답하다는 듯 해명하려던 한원조가 돌연 말을 멈추고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 보세요. 저 급제자를 낚아챘어요!”
시녀가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정사랑과 정오랑은 물론이고 정칠랑까지 흥분되는 표정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나이도 많으면서 뭘 뺏고 저래?”
정사랑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빼앗아야죠. 진사 급제를 하면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일가족 전체의 세금이 줄어들거든요. 세금이 줄면 그만큼 재산을 불릴 수 있잖아요.”
시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그래? 그렇담 재물을 불러들이는 복덩이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이 또다시 떠들썩해지면서, 서너 명이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칠랑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정사낭 역시 그런 누이들의 모습에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는 나랑 같이 방을 보러 온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이들을 구경하러 온 것이냐?”
정사낭이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방을 보고 싶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사낭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앞쪽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방에 붙은 이름 석 자를 내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결과를 아는데, 굳이 뭐하러 봐.”
정사낭의 말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저기…….”
정교랑이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부르자, 시종 네다섯 명이 즉시 다가와 일제히 대답했다.
“네, 아씨.”
“길을 좀 내야겠어. 나랑 오라버니가 가서 볼 수 있도록.”
시종들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험상궂은 얼굴을 앞세우며 인파 속에서 길을 열었다. 순식간에 길이 나자 정사낭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누이, 설마 저 시종들의 이름을 모르는 거야?”
정사낭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몰랐네요. 돌아가면 기억해 둘게요.”
정사낭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정교랑을 보호하며 방이 붙은 곳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저 사람은, 누구지?
순식간에 벌어졌다 다시 닫히는 인파를 보며 한원조가 생각에 잠겼다.
저 여인과 젊은 서생도 방을 보러 가는 건가?
“원조, 원조.”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며 한원조의 어깨를 탁 치는 바람에, 생각이 끊겼다.
“저기 좀 봐. 저기 저 사람 말이야.”
동료가 한원조의 어깨를 치며 한쪽 옆을 가리켰다.
시녀는 여전히 마차에 탄 채로 어린 낭자들에게 이런저런 구경거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수시로 들렸다.
“저 여자애 말인데, 왠지 낯이 익지 않아?”
동료가 한원조를 보며 물었다.
“그때, 자네를 찾아왔던 그 몸종 아닌가?”
“가세. 우리가 지금 이런 거나 구경할 때인가? 얼른 돌아가 이제 마음 푹 놓고 전시 준비에 매진해야지.”
한원조는 웃으며 화제를 돌리고 돌아섰다. ‘전시’라는 두 글자에 퍼뜩 정신이 든 두 동료는 순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가세, 가자고.”
두 사람은 몰려드는 인파를 거슬러 나와 한원조를 따라 자리를 떴다.
정교랑와 정사낭은 어느덧 급제자 명단 앞에 서 있었다. 이미 석차를 아는지라 이름이 대략 어디쯤 있을지 알고 있는데도 정사낭의 시선은 맨 앞 수석의 이름으로 향했다.
진호.
“그 진 공자네. 나이도 어린데 저리 대단할 줄이야.”
정사낭이 놀라움과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이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비교할 필요도, 마음에 담아 둘 필요도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비교하는 거 아냐.”
정사낭은 웃으며 맨 마지막 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이름이 보이자 순간 가슴이 쿵쾅대며 흥분됐다.
“저기 봐. 내 거야, 내 거.”
과연 자신의 이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그냥 들었을 때와는 다른 기쁨이 있었다. 흥분한 정사낭의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빼고 석차를 확인하더니 입을 삐죽였다.
“맨 끝에 있으면서도 저리 좋아하다니, 수석이라도 했으면 까무러쳐 실려 나가는 건 아닌가 몰라.”
“공자님!”
경성 밖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에서 말 두 필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사환이 앞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보세요. 주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뒤쪽 말에 타고 있던 공자가 모자를 벗고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이번 예부시의 수석 급제자 진호였다.
수석 급제자 진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야, 주 시금, 오느라 고생 많았네.”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간 진십삼이 공수의 예를 표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주육낭은 아직 비옷 차림이었지만, 옷에 묻은 빗방울은 이미 바람에 마른 후였다. 모자를 벗은 주육낭이 진십삼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이구,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진 성원(省元)께서 친히 마중까지 나오시고.”
주육낭이 공수의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자, 자, 더 불러 봐. 그래야 비도 오는데 꼭두새벽부터 여기까지 마중 나온 보람이 있지.”
주육낭은 퉤 하고 침을 뱉더니 뒤에서 화관(花冠) 하나를 불쑥 꺼냈다. 진십삼이 놀라 소리쳤다.
“어이, 뭘 하려는 거야?”
진십삼은 얼른 말 머리를 돌렸지만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어느새 말을 몰아 온 주육낭이 손을 뻗어 말고삐를 홱 낚아챘다.
“난 그런 거 쓰기 싫다고!”
진십삼이 소리를 질렀지만, 주육낭의 완력을 당해내긴 역부족이었다. 진십삼의 머리에 화관이 씌워졌다.
“다들 진 성원이라 부르는데, 꽃장식 정도는 해 줘야지!”
주육낭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전시가 남았잖아! 꽃장식은 무슨!”
진십삼은 손을 뻗어 빼내려 했지만, 주육낭이 막았다.
“어이, 절름발이, 겁이 나서 그래? 꽃까지 꽂았는데 전시에서 십 등 안에 못 들까 봐?”
진십삼은 어이가 없는 듯 주육낭을 뿌리쳤다.
“자극할 필요 없어. 소용없으니까.”
진십삼은 말을 몰아 앞장서 가면서도, 머리에 꽂은 우스꽝스러운 화관을 벗지 않았다.
“난 분명 십 등 안에 들어 꽃을 꽂을 거야. 이 꽃은 너무 흉해서 싫은 것뿐이야.”
“흉하긴 하네.”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어떤 꽃을 골라야 예쁜지도 모르겠고 해서…….”
“길에서 꺾은 거지? 돈 주고 산 거 아니고?”
주육낭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몰아 앞으로 쫓아갔다. 말 두 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성을 향해 달려갔다.
“어이, 뉘시오?”
정씨 저택의 문지기가 다짜고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소년을 황급히 막으며 소리쳤다.
평범한 옷차림에 어깨에는 커다란 짐 보따리가 하나 걸려 있었다.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먼 길을 달려온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런지 젊은 나이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험상궂어 보였다.
소년은 문지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대문을 발로 차고,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놀란 문지기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소리를 질러댔다.
“여봐라.”
하지만 짐 보따리를 짊어진 소년은 벌써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후였다.
아, 아니…….
“왜들 보고만 있소?”
문지기가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쪽에는 시종 넷이 팔짱을 끼고 서서 이야기 중이었다. 웃고 떠들던 시종들은 이쪽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르는 듯 계속해서 웃고 떠들었다.
문지기는 정 이부인이 친정에서 데려온 자였다. 문지기는 편한 자리인 만큼 정 이부인이 특별히 배정해 준 터였다.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명첩을 확인하는 일은 체면이 서는 일이었고, 저택을 방문한 이들이 상으로 주는 돈을 은밀히 챙길 수 있으니 이점이 많았다.
정월인지라 찾아오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다들 문지기를 무시한 채 곧장 시종들을 찾는 바람에 문지기는 장식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문지기는 대문 앞을 청소하는 일을 맡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 온 사람은 아예 시종도 거치지 않고 대뜸 안으로 난입하는 게 아닌가.
아니 저 시종들은 눈이 멀었나, 왜 보고만 있어?
“누군지 몰라? 문지기 노릇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 사람 얼굴부터 익혀라. 저분은 주씨 가문 도련님이야.”
저쪽에 있던 시종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주씨 가문?
문지기가 멈칫했다.
“정씨 가문으로 시집왔던 주씨 가문 부인께서 돌아가신 후, 주씨 가문 사람이 정씨 저택을 찾아올 땐 문을 두드리는 법이 없다. 발로 뻥뻥 차면서 들어오지.”
시종이 웃으며 설명했다.
“어엇, 주 공자님? 돌아오셨네요!”
회랑 아래에 있던 시녀가 소리를 듣고 나오며 반갑게 맞이했다. 시녀의 웃는 얼굴과 스스럼없는 진심 어린 환대가 어색한 듯 주육낭은 도리어 멈칫했다.
“난…….”
주육낭이 입을 열려 했지만 시녀는 벌써 뒤돌아 대청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씨, 주 공자께서 오셨어요. 아씨께 드릴 선물도 한 아름 안고 오셨네요.”
시녀의 말에 주육낭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뭐,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선물을 가져오긴 누가!
반근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를 우리자, 시녀는 반근을 향해 손짓하며 자신이 남아 시중을 들겠다는 뜻을 표했다. 반근은 시녀의 호의를 눈치채고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고마움을 전한 후 물러났다.
“이, 이건 내 선물이 아니야.”
주육낭이 대뜸 해명부터 하자, 찻잔을 들고 있던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시녀 역시 쿡 웃음을 터트리며 옆에 놓인 커다란 짐 보따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공자님께서 우리 넷째 도련님을 대신해 가져다주신 거예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결의를 맺은 오라비들은 모두 떠났고, 제대로 된 형제들은 없으니 많이 상심했겠지?
무릎 위에 올려 둔 주육낭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사람 걸 가져온 거야. 너무 많아서, 내 건, 못 가져왔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말하자 시녀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반근, 놀려서 뭐해.”
정교랑이 찻잔을 내려놓고 시녀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순간 주육낭의 눈빛에 분노가 서렸다. 시녀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꾹 참으며 일어나 물러갔다.
“오라버니는 잘 지내죠?”
정교랑이 물었다.
오라버니!
시녀에게 놀림을 받아 일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라버니! 날 오라버니라고 불렀어!
너무나 급격한 감정 변화에 순간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응. 너, 너는 잘 지내지?”
주육낭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자, 정교랑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고 웃었다.
“잘 지내요.”
정교랑이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들어요.”
주육낭은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이번에도 다시 돌아갈 거예요?”
정교랑이 물었다.
“가야지. 보름이나 한 달쯤 후에, 갈 거야. 그 벽력탄인지 뭔지 나오면.”
주육낭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실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육낭은 그만 일어나 작별을 고하고 싶기도 하고, 또 그러지 않고 싶기도 했다. 주육낭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로 옮겨 왔네. 여기서는 좀 지낼 만해?”
주육낭이 불쑥 물었다.
“네. 어디서 지내나 똑같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지. 미련한 질문을 했네. 내가 일부러 말 걸고 싶어 물어본 것 같잖아.
주육낭은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이만 갈게. 그 사람한테 전할 물건 있으면 준비해. 내가 가기 전에 한 번 들를게.”
정교랑은 좋다고 대답하며 배웅을 위해 일어났다.
“공자님, 왜 이렇게 서둘러 가세요.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마당에 있던 시녀가 말했다.
이 망할 것이! 방금 날 놀렸다 이거지?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시녀 쪽으로 걸어갔다.
“육공자님, 전 공자님을 위해 그런 거예요.”
시녀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실까 봐, 입을 열도록 도와드린 거라고요.”
또, 또!
주육낭이 시녀를 노려보았다.
“신경 꺼라.”
주육낭은 협박조의 한마디를 일갈한 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정씨 저택의 대문을 나와 말에 오른 주육낭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 얼굴이었다.
오라버니라…….
주육낭이 곧 입을 삐죽거렸다.
근데, 좀 이상한데.
순간 주육낭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오라버니? 날 부르는 게 아닌 거 아냐? 서사근에 대해 물은 거였나?
주육낭은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어쩌자고 그렇게 대답을 빨리 한 거야!
이런 망신이 있나! 다시는 보러 가지 말아야지!
주육낭은 채찍을 매섭게 후려갈기며 질풍처럼 달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주육낭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는데 주 부인이 사람을 시켜 불렀다.
“또 거기로 달려갔었던 거야?”
주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러더니 또 안쓰러운 듯 덧붙였다.
“이 얼굴 튼 것 좀 봐.”
“어머니.”
주육낭이 자신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동상 걸린 거 아닙니다. 바를 연고가 있거든요. 손도 하나 안 텄어요.”
주육낭이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모친에게 보여 주고, 자신도 쳐다보았다.
이 연고도 그 애가 준 거지. 일부러 나 주라고 챙겨 보낸 건 아니지만.
아, 진짜 성가셔 죽겠네. 왜 빠지는 곳이 없어.
주육낭이 손바닥을 벅벅 비볐다.
“……육낭!”
주육낭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모친을 바라보았다.
“돌아온 김에 혼사를 정하자꾸나. 다음에 돌아왔을 때 혼례를 올리도록.”
주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순간 주육낭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아직 어립니다. 무슨 혼례를 올려요.”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 가려 했다.
“어리긴 뭐가 어려. 열아홉이나 됐으면서!”
주 부인이 초조한 듯 소리쳤다.
“스물아홉도 안 늦습니다.”
주육낭이 고개를 홱 돌리고 가 버렸다. 그때 밖에서 들어오던 주 노야가 주육낭을 막았다.
“찾고 있었는데, 어딜 다녀온 게냐?”
“물건을 좀 전해 줄 게 있어서요.”
주 노야의 물음에 주육낭이 답했다. 주 노야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응 하고 대꾸하고는, 마중 나오던 주 부인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당신 말이 맞았소. 그 두 내외가 교교의 재산을 몽땅 차지했다는군.”
걸음을 옮기려던 주육낭이 다시 걸음을 우뚝 멈췄다.
뭐라고?
“내가 뭐랬어요. 정 이부인이 자랑하고 싶어 아주 몸살을 앓더라니까요. 내가 모임에 안 나갔어도 얼마나 우쭐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아요.”
주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긴.”
주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주육낭이 두 사람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육낭, 정가네 이방 놈이 교랑의 재산을 몽땅 차지했다. 명의까지 제 후처 이름으로 바꿔 놨다는구나. 그런 바보가 또 있나 몰라.”
주 노야가 껄껄 웃었다.
“아버지,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가서 뭐라 말씀이라도 하셔야죠.”
주육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우리까지 나설 게 뭐 있어? 그 애가 좀 대단하니? 대처할 방법이 있겠지.”
주 부인이 대꾸했다.
그 애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맬 때도 우린 그 애 재산을 빼앗기는커녕 죽도록 시달리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 그런데 병도 없이 멀쩡한 데다 명성까지 자자한 지금 그 두 내외가 대놓고 그 애 재산을 빼앗았잖아.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면 뭐겠어?
“대처할 수 있다 해도, 어쨌든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 가서 괜찮은지 안부라도 물으셔야죠.”
안부?
무려 귀판관도 내쫓고 마는 신선의 제자인데, 무슨 안부를 더 물어?
주 노야와 주 부인이 잠시 멍해 있는 사이, 주육낭이 홱 뒤돌아 가 버렸다.
“아니, 너 어디 가는 게냐?”
주 노야가 소리쳤다.
“그자들한테 따지러 갑니다!”
주육낭이 대답했다.
“거기 서!”
주 노야가 소리치며 따라가 붙잡았다.
“따지긴 뭘 따져? 이건 그쪽 집안의 일이야! 네가 저들의 죄를 묻겠단 거냐? 딸의 재산을 가로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딸의 재산은 본디 부모의 재산인 것을 빼앗을 게 뭐 있어? 부모님께 드리지 않는 게 도리어 죄거늘!
지금은 일이 잠잠해졌으니 괜히 가서 소란 피우지 마라. 소란을 피워 일을 키우는 날엔 교교가 가장 먼저 피해를 볼 거야.”
“그래, 그래. 그쪽 집안의 일에 우리가 관여할 거 없어. 관여할 수도 없고.”
주먹을 부르쥔 채 서 있던 주육낭은 결국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주 노야가 몇 번 소리쳐 불렀지만 주육낭을 붙잡을 순 없었다.
“정말 악연이라니까.”
주 부인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저 녀석이 아주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네. 이러다 정말 야차를 며느리로 들이는 거 아니야?
“어이, 어이! 거기.”
정씨 저택의 문지기들이 벌컥 열린 문을 향해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문지기들이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를 알아보고는 흠칫 놀랐다.
“아니, 또 그쪽이오?”
문지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쿵 소리가 또 한 번 들리더니 한쪽 문짝이 아예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겁한 문지기들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주 공자님, 지금 아씨께서는 글씨 연습을 하고 계세요.”
서재의 문이 열리면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붓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서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주육낭이 보였다.
“짐 챙겨. 나랑 가자.”
주육낭이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또 저 소리잖아!
저 말을 못 들은 지 벌써 사 년이 다 됐네. 이제 다시는 들을 일 없겠다 싶었는데, 또 아씨를 강제로 어디에 데리고 가려고 저러는 거야?
시녀와 반근이 미간을 찌푸린 채 주육낭의 앞을 가로막았다. 뒤늦게 주육낭의 뒤를 쫓아온 시종들도 주육낭을 향해 전투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지금은 사 년 전과는 달라. 지금은 그때처럼 쉽게 아씨를 데려가긴 힘들걸?
“어디로요?”
정교랑이 물었다.
“우리 집에 가서 지내.”
주육낭이 짧게 대답했다. 정교랑이 아,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교랑이 거절할 것이라 예상하고 정교랑을 설득할 말을 한가득 준비해 왔던 주육낭은 말문이 턱 막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또 이러네! 이 여인은 어쩜 이렇게 말에 앞뒤가 없어? 그때도 괜히 저런 짤막한 말만 듣고 오해했잖아.
“말하기 전에 밑밥 좀 까면 안 되나.”
주육낭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도 밑밥 같은 거 안 깔아주잖아요.”
정교랑이 붓을 내려놓고 문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반근.”
시녀와 반근이 웃으면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당장 짐 쌀게요.”
“교랑을 데리고 네 집으로 가겠다고?”
대청 안에 앉아 있던 정 이노야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손님이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가겠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정 이노야가 매를 부르게 생긴 표정의 주육낭을 노려보았다.
“왜 네 집에 데려가겠단 것이냐?”
“왜 우리 집에 데려가면 안 됩니까? 고모부님께서는 13년 전에도, 제 고모와 누이를 우리 집으로 내쫓았지 않습니까. 누이가 좀 편하게 지냈으면 해서 우리 집으로 데려가는 건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주육낭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정 이노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네 이놈, 헛소리하지 말아라.”
“고모부님, 제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제 부모님께서는 모두 건재하십니다.”
주육낭이 냉소를 보였다.
정 이노야가 뭐라 더 대꾸하려 했지만, 주육낭은 더는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몸을 홱 돌려 버렸다.
“고모부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손아랫사람의 본분을 다 지킨 겁니다. 전 고모부의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손아랫사람의 본분? 본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정씨 가문 조카였으면, 벌써 흠씬 두드려 패고 마당에 무릎 꿇렸어. 그것도 모자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게 했을 텐데!
정 이노야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씨 가문은 참으로 염치도 없구나!
당초 그네들이랑은 연고도 없던 강주에서도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이제는 자기 구역라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어!
이를 부득 갈던 정 이노야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경성에 들어온 이후로 주씨 가문과 겉치레로라도 인사 한번 나눈 적이 없어. 심지어 경성에 주씨 가문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뻔했지.
그래, 현실은 현실이야. 언젠가 들이닥칠 일은, 결국 들이닥치게 돼 있어.
“노야, 지금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빼돌리러 온 게 명백하잖아요. 어서 다시 빼앗아 와요!”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정 이부인이 안채에서 잰걸음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어떻게 뺏어? 외조모 댁에서 애를 데려가 며칠 재우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면서 막아? 게다가 주씨 가문은 무장 출신이라 무식하고 염치도 없는데. 괜히 저들 앞을 막았다가 길 한복판에서 머리끄덩이 붙잡고 싸우기라도 할까? 저들은 창피를 모르는 자들이라지만, 나에게는 체통과 체면이라는 게 있소!”
정 이노야가 눈을 흘기면서 대답했다.
“그, 그럼 만에 하나 교랑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정 이부인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저놈이 감히 그럴쏘냐! 그때는 우리가 저놈을 관아에 고발해야지! 사흘이 지나면 다시 교랑을 집으로 데려올 것이야. 만약 그때가 돼도 교랑을 못 데려가게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게 구는 놈들은 우리가 아니라 저놈들인 게야!”
정 이부인이 아, 하고는 엉거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노야. 그러고 보니 교랑이 저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요. 저 애가 가 버리면, 우리가 집에서 먹고 마시는 데 쓸 돈은 어떡해요?”
정 이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퍼뜩 생각난 듯이 소리치면서 문밖으로 뛰어갔다.
“반근, 반근!”
정 이부인의 외침을 듣던 정 이노야는 기가 차서 숨이 턱 막혔다.
우리가 어딜 봐서 이 집안의 웃어른이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안 되겠다. 저 계집애 소유의 문서는 이미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지금부터 진정한 주인 노릇을 좀 해야겠어.
주육낭이 몇 년 만에 또 정교랑을 남의 집에서 빼앗아 왔다는 소식을 들은 주씨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여종과 몸종들은 마당을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정교랑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사 년 전 그날에 비해, 주 부인의 감정에는 기쁨 대신 황공함이 가득했다.
“어느 방을 내어주실 건가요?”
“가구는 어떤 것으로 준비하면 될까요?”
“그쪽 거처에 몸종은 몇 명이면 되나요?”
여종들의 질문이 쉼 없이 쏟아지자, 주 부인은 머리가 터질 듯이 어지러웠다.
“의원을 불러오거라. 내가 진짜 병이 나서 그런다.”
주 부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병이 나긴 무슨. 당신은 어째 교교가 우리 집에서 지내기만 하면 병에 걸렸다는 거요? 진심으로 교교를 대하는 게 아니라, 교교를 불운 덩어리로 여기는 게 아니오!”
어휴, 이 몸이 어찌 감히요! 난 정말 진심으로 교교를 대하고 있다고요!
주 부인이 몸을 살짝 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여종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지시했다.
“부인,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아씨께서는 편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세요. 그러니 하인을 많이 둘 필요도 없고요. 마당을 청소하는 몸종 두 명이랑, 심부름꾼 한 명만 있으면 돼요.”
편하게? 내가 어찌 그러겠나.
주 부인은 어떻게 그러냐며 손사래를 치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하기에는, 어떻게 해도 적절하지 않을 듯싶어 주 부인은 결국 시녀에게 모든 걸 맡기고 모든 것을 시녀의 말대로 준비했다.
“교교, 여기서 편하게 지내려무나. 괜히 정씨 내외 눈치 보면서 거기 있지 말고. 그놈들이 또 너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이 숙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야.”
대청 안에서 주 노야가 의분에 찬 모습으로 말했다.
“눈치 보지 않았어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감사의 예를 표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주 부인이 웃으면서 정교랑이 지낼 거처가 다 정리되었음을 알렸다.
“그럼, 외숙부님과 외숙모님께 잠시 신세 좀 질게요.”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아니다, 아니야.”
“신세는 무슨, 내가 감히…….”
한 사람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사람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주 노야 내외는 정교랑을 거처까지 직접 안내했다.
“저게 어딜 봐서 외손녀가 외조모 댁에 와서 지내는 거야? 꼭 부처님을 집으로 모셔온 것 같네.”
회랑 아래에 선 주씨 가문 자매들이 감탄했다.
“우리도 가서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찌 됐든 자매지간이긴 하잖아.”
한 소녀가 물었다. 잠시 눈빛을 교환하며 생각에 잠겼던 자매들은 끝내 가지 않기로 했다.
“에이, 됐어. 부처는 모시는 것만 해도 충분해.”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무렵, 주씨 가문의 연무장에서는 사내들이 한창 무예를 수련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우렁찬 기합 소리는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멈췄다.
“육낭, 가자.”
한 형제가 주육낭에게 말했다. 탄탄한 어깨를 드러내고 있던 주육낭은 무거운 석쇄(石鎖: 돌로 만든 운동기구) 앞에 서서 알겠다고 대꾸했다.
“먼저들 가. 난 조금만 더 하다 갈게.”
“3년 동안 실제 전장을 경험하고 오더니, 더욱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구나.”
형제 몇 명이 감탄하면서 연무장을 떠났다.
연무장이 조용해지자, 주육낭은 석쇄를 두어 번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는 시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이때 어린 몸종 하나가 연무장을 향해 뛰어오다가 주육낭을 보자마자 다시 왔던 방향으로 도망쳤다.
“도망가긴 왜 도망을 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주육낭이 호통치자, 어린 몸종은 불안한 기색으로 제자리에 걸음을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몸종이 예를 표하면서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게 아니라요. 정 아씨께서…….”
몸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종의 뒤로 시녀가 걸어왔다.
“어? 주 공자님, 아직 여기에 계셨네요? 지금쯤이면 다들 갔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고는 대꾸하지 않고 느긋하게 땀을 닦았다.
“수련은 다 하신 거예요?”
시녀가 또 물었다.
“그래.”
주육낭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시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을 곁눈질로 느꼈다.
보긴 뭘 봐! 뭘 보냐고!
“수련 다 하셨으면, 옷이라도 좀 걸쳐서 몸을 가리시는 건 어때요? 곧 있으면 아씨께서 활쏘기를 하실 시간이라서요.”
시녀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주육낭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흘깃 쳐다보고 읊조렸던 말이 생각났다.
- 벗으니까, 못생겼어요.
주육낭이 사환의 손에 들려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몸에 두르고 다급하게 소매 한쪽에 팔을 집어넣었다.
딸가닥거리는 나막신 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무채색 저고리에 꽃이 수놓아진 치마를 입고 소매를 동여맨 여인이 어깨에 활을 멘 채 천천히 연무장 안에 들어왔다.
주육낭이 옷을 입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저, 거꾸로…….”
정교랑이 들어옴과 동시에 사환이 말하자, 주육낭은 사환이 정교랑에게 반대쪽으로 돌아서라고 말하는 줄 알고 사환에게 발차기를 날리며 호통쳤다.
“거꾸로 돌긴 뭘 돌아! 괜한 소리를 왜 해!”
“아니, 도련님이 옷을 거꾸로 입었다고요.”
바닥에 주저앉은 사환이 잔뜩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고개를 숙여보자, 옷을 정말로 거꾸로 입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껏 달아올라 있던 그의 얼굴은 더욱 화끈거렸다.
주육낭이 민망해하며 서둘러 옷을 다시 벗었을 때, 유유히 그 옆을 지나가던 정교랑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왜, 왜!”
주육낭이 급하게 마구잡이로 옷을 몸에 걸치고는 눈을 부릅떴다.
“좋은 아침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문안 인사를 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은 개뿔! 사내의 헐벗은 몸을 보면서 문안 인사를 하는 여인이 어디 있다고!
주육낭이 정교랑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투덜댔다.
“주 공자님, 그래도 사 년 전보다는 몸이 훨씬 좋아지셨네요.”
시녀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주인이며 아랫것이며 하나같이 창피를 모르니 원!
주육낭이 옷을 고쳐 입고 허리끈을 꽉 묶을 때쯤, 그의 등 뒤로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와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성큼성큼 걸어 연무장을 벗어났다.
정교랑이 매일 아침 활쏘기를 한다는 소식은 금세 주 노야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연무장에 있는 과녁들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집안의 자식들에게 한 시진 일찍 아침 수련을 끝내라고 명했다.
“왜요!”
주육낭이 씩씩대면서 주 노야에게 대꾸했다.
“저희가 무예를 수련하는 건 무장 가문의 자제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여인은 그저 활쏘기 놀이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교가 하는 일은 모두 당연한 일이다.”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는 듯이 호통쳤다.
이튿날, 다른 형제들은 주 노야의 말대로 한 시진 일찍 수련을 끝냈지만, 주육낭은 혼자 연무장에 남아 수련을 계속했다. 때마침 주 노야는 출타하여 집에 없던지라, 그를 말리던 다른 형제들도 결국 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주육낭은 며칠 전보다 한술 더 떠서, 정교랑이 활쏘기를 하는 와중에도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정교랑이 오기 전에 미리 옷을 챙겨 입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주 공자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주육낭이 석쇄를 연달아 몇 번이고 들어 올리는 것을 본 시녀가 감탄했다.
어깨가 으쓱해진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거들먹거리면서 병기를 올려두는 선반 앞으로 걸어갔다.
“주 공자님은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를 다 다룰 줄 아세요?”
시녀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주육낭이 말없이 곤봉 한 개를 뽑아 들고 정교랑 쪽을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벌써 세 번째 과녁 앞으로 옮겨갔다. 초봄의 푸르스름한 하늘빛 아래에 서 있는 정교랑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주육낭이 곤봉과 칼을 번갈아 가면서 휘두르자, 그의 옷자락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꽃잎처럼 휘날렸다. 그의 몸놀림을 구경하던 시녀가 연신 손뼉을 치면서 환호했다.
숨이 살짝 거칠어진 주육낭이 장창으로 병기를 바꾸고 고개를 슬쩍 돌려보더니, 잠깐 멈칫했다.
어디 갔지?
“주 공자님, 전장에서는 어떤 병기를 쓰세요?”
시녀가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너희 아씨는?”
주육낭이 물었다.
“저희 아씨요? 저희 아씨는 전장에 나가시지 않잖아요.”
시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과녁을 가리키면서 다시 물었다.
“너희 아씨는 어디 갔냐고 물은 것이다.”
시녀가 그제야 아,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글쎄요, 아마 처소로 돌아가셨을걸요?”
아마 처소로 돌아가셨을걸요? 누가 윗전 시중을 저따위로 들어?
“괜찮아요. 저희 아씨는 제가 시중들 필요가 없거든요. 주 공자님, 주 공자님, 전장에 나갔을 때는 장창을 쓰세요, 아니면 칼을 쓰세요? 저것도 한 번만 써 주시면 안 돼요? 저건 무슨 병기예요?”
시녀가 선반을 가리키며 묻자, 주육낭은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리 가.”
주육낭은 시녀를 더 상대하지 않고, 겉옷을 손에 쥔 채 연무장을 떠났다. 사환과 몸종들이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연무장을 떠난 주육낭은 시녀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시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주육낭은 그제야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근육통이 온 어깨를 주물렀다.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드네.
-축하-
다음날, 주육낭은 평소처럼 연무장에 끝까지 남아 있었지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정교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내 말이 맞잖아. 그 여인은 활쏘기를 놀이로 여길 뿐이라고. 당연한 일은 무슨!”
주육낭이 눈썹을 치켜뜨며 읊조리고는 장창을 선반에 걸었다.
“겨울에 가장 추울 때인 삼구(三九)나, 여름 더위가 한창일 삼복(三伏)에도 수련은 게을리하면 안 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여도 끈기 있게 수련해야지, 저렇게 마음대로 해서 쓰나!”
“도련님, 그게 아니라요. 제가 듣기로는 이번에 전시 결과가 발표되어 정 아씨께서 전시에 급제한 공자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시러 가셨답니다. 급제자들이 열흘 후에 머리에 꽃을 꽂고 말을 타고 거리를 순회할 때 필요한 선물 말입니다.”
사환 한 명이 씩씩대는 주육낭에게 재빨리 설명했다.
어제였던 3월 7일, 성시를 치른 진사들이 황제가 주재하는 전시에 참여했다. 그리고 오늘,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난 후 결과가 공개됐다.
“정사낭의 순위는 고작해야 삼백 등쯤이라고 하던데, 진십삼처럼 일갑(一甲) 팔 등도 아니면서 축하할 게 뭐 있다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투덜거렸다.
“정 아씨께서는 진십삼 공자를 위한 축하 선물을 준비하시는 것 같던데요.”
같잖다는 표정을 짓던 주육낭이 멈칫했다.
그놈을 위한 선물?
“고작해야 일갑 팔 등인데, 추, 축하할 게 뭐 있다고. 나는 무려 연달아 삼급을 뛰어넘어 진급한 관리거늘!”
“옷을 갈아입으시오!”
3월 16일, 어가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급제 행렬의 진행자가 고성으로 외쳤다. 벌써 관복을 받은 진사들은 녹색 관복 차림에 관화를 신고, 손에는 홀판을 쥔 채 허리를 곧추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이제 더는 어렵고 힘들게 공부하던 수재 학생도, 황토를 가르며 고생스럽게 밭농사와 경작을 하는 농부도, 발길 닿는 대로 수레를 끌고 다니며 장사하는 장사꾼도 아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최고인 사(士), 관리가 된 것이었다.
급제한 진사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 아내와 손자까지도 관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니 실로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카나 사촌 같은 친인척들도 진사의 도움으로 세금을 감면받거나 강제 노역을 면제받을 수 있다. 용문(龍門)에 오른다는 뜻인 등용문이라는 말로 과거 급제를 표현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한 사람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그 딸린 식구들도 권세를 얻기 마련이었다.
“성은에 감사드리시오!”
진행자의 외침에 따라, 정식으로 천자의 신하가 된 사람들이 성문 위에 있는 황제를 향해 깍듯하게 큰절을 올렸다.
“꽃을 꽂으시오!”
금색 테두리의 궁화(宮花: 황제가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하사하는 꽃 장식품)가 진사들 앞으로 한 송이씩 놓이자, 연로한 자든 젊은 자든 가릴 것 없이 모두 한쪽 구레나룻에 가지런히 꽃을 꽂았다.
“풍악을 울리시오!”
일찍이 준비를 마친 황실의 영인(伶人)들이 흥겨운 연주를 시작하자, 나이 어린 환관들이 일사불란하게 폭죽을 터트렸다. 숙연했던 천가가 순식간에 시끌벅적하고 흥겨워졌다.
“관인(官人)들께서는 말에 오르시지요.”
황궁에서 한 마리 한 마리 심사숙고하여 고른 말들 위로는 붉은 비단이 올려져 있었고, 새 옷으로 단장한 마부들이 진사들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드디어 관인이 되었구나!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진사 몇몇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의식을 마친 진사들의 축하 행렬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장원 급제한 진사가 가장 앞에서 행렬을 이끌고, 사백여 명의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황궁 밖을 향해 이동했다. 금군 병사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트고, 황실의 영인들도 풍악을 울리며 뒤따랐다.
오색찬란한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행렬을 이끌자, 온 경성이 축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어서 와서 봐봐! 이제 온다!”
황제가 친히 나와 있어 다소 숙연했던 어가 주위의 분위기와는 달리, 온 경성의 사람들이 몰려와 환호하는 거리 위는 열기로 가득했다.
금군 병사들이 행렬을 호위할 뿐 아니라, 오성병마사의 병사들과 관부의 관졸들까지 길가 양옆에서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손에 곤봉을 쥔 병사와 관졸들이 질서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백성들의 열띤 성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름 전부터 좋은 자리를 선점한 규방 여인들은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진사 행렬을 향해 던졌다. 허공에 띄워진 각양각색의 손수건들은 마치 선녀가 흩뿌리는 알록달록한 꽃잎처럼 보였다.
행렬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이는 과거에 급제한 진사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백성들이 진사 행렬의 흥겨움을 한껏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날아간 손수건은 가끔 진사들의 얼굴에 떨어지기도 했다. 앞쪽에서 가고 있던 진사 한 명이 손을 들어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손수건을 걷어냈다. 사내의 이런 작은 동작 하나에도, 길 양옆에 있던 여인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손수건을 걷어낸 진사는 올해 서른다섯이었다. 과거를 준비하는 내내,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고 시험에만 전념했던 사내가 용기를 내어 여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자,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행렬을 구경하기에 좋은 건물의 이 층에 자리한 여인들은 사내의 눈길 한 번에도 폭죽 터지듯 까르르 웃으며 추파를 던졌다.
그런 여인들의 반응에 진사는 흥분되는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했으니 이번 생은 죽어도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거야.”
정신없는 와중에도, 누군가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진사의 귓가에 들려왔다.
느리게 간다고? 이 와중에 느리게 간다고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있어?
진사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본디 그의 뒤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와야 할 사람이 언제부턴가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온다면 아예 말의 뒤꽁무니에 부딪힐 기세였다.
뒤따라오던 진사는 꽤 젊고, 초록색 관복이 그 용모를 더욱 환히 빛나게 하는 청년이었다. 얼굴 옆에 놓인 궁화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구레나룻에 꽂힌 궁화가 몹시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진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청년의 준수한 외모는 꽃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서른다섯의 진사는 이제야 만 열아홉이 된 젊은 청년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의 젊음뿐만 아니라, 준수한 용모와 으리으리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도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러웠다.
“방진(方進) 형.”
청년이 진사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말고삐를 살짝 당기고는 공수의 예를 표하고 사과했다. 청년의 미소에 길가의 여인들은 더욱 열띤 호응을 보내왔다.
갑작스러운 여인들의 환호에 방진의 말은 하마터면 놀라서 뒤집힐 뻔했다. 다행히 마부가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었기에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진(秦) 아우, 앞에서 워낙 천천히 가서 그렇네. 너무 서두르지 말게나.”
방진이 손으로 앞과 뒤를 차례로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아마 뒤쪽도 서두르진 않을 걸세.”
진십삼의 바로 뒤에 있던 진사도 진십삼과 멀리 떨어져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십삼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방진의 어깨너머를 내다보면서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뭘 찾는 거지? 왜 저렇게 서두르나?
방진은 내심 궁금했지만, 지금은 남의 일을 궁금해할 때가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만끽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모두의 환호 속에 행렬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행렬의 앞쪽에서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저긴 무슨 일이야?”
“덕승루의 주 낭자가 진사들을 축하하기 위해서 춤을 선보이고 있대.”
주 낭자가 춤을 선보이고 있다는 소식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뒤쪽까지 퍼졌다. 사람들이 목을 쭉 빼고 앞을 내다보는 사이, 진사 행렬은 천천히 덕승루에 가까워졌다.
덕승루 앞에는 화려한 색상의 휘장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고, 무대 대신 큰 북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주 낭자가 북춤을 추려나 봐!”
“이리들 와봐! 주 낭자가 북춤을 춘대!”
“주 낭자가 꽃등 놀이 때 말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기는 처음이잖아! 천금을 줘도 보기 힘든 주 낭자의 북춤이야!”
황실의 영인들이 한발 앞서 나간 덕에, 진사들은 주 낭자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급하게, 때로는 느긋하게,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격앙되게 북을 치는 주 낭자의 몸짓에서는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삭막한 겨울인지라 화려한 색상의 비단옷은 단연 눈에 띄었고, 굴곡진 주 낭자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가 머리에 쓴 관에 달린 구슬 장식은 햇빛에 비칠 때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흔들거렸다.
가장 앞쪽에서 주 낭자의 춤을 구경하던 진사가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는 통에, 뒤에 있던 진사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끌던 마부들도 넋이 나간 것처럼 주 낭자의 춤사위에서 눈을 떼지 못해 행렬은 잠시 멈춰 버렸다. 다행히도 금군 병사들이 재빨리 나서서 재촉한 덕에 전체 대열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주 낭자의 시선이 향하는 사람은 진십삼이었지만, 진십삼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짤막한 감탄만 내뱉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 낭자의 춤사위에 매료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거둔 뒤로는 덕승루 앞을 유유히 지나쳐 주 낭자가 점점 더 멀어질 때까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는 모를 것이다. 주 낭자의 춤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게 아닌, 오직 그만을 위한 선물이라는 것을.
“정말 평생토록 잊지 못할 춤이로군.”
방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또 한 번 고개를 돌렸다. 방진의 뒤로는 진십삼이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진십삼이 미소를 짓고 앞을 내다보며 돌연 손을 들었다.
“저기 좀 보십시오.”
뭘 보라는 거지?
방진이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앞쪽에는 거리와 건물의 창가에 걸터앉아 환호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딱히 주 낭자만큼 이목을 끌면서 축하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신선거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방진이 저 멀리로 시선을 돌리자, 오색찬란한 휘장으로 장식한 식당 하나가 보였다.
신선거?
경성에 들어온 뒤로 줄곧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해 왔던 그였으나, 신선거는 방진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며칠 전 성시를 치르고 난 후에, 집안 가족들이 그를 데리고 신선거에서 조촐한 축하 연회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서늘한 초봄에 먹는 뜨끈한 과로신선은 정말로 맛있었지.
하지만…….
“진 아우가 과로신선이 먹고 싶다면, 일단 경림연(瓊林宴: 황제가 과거 급제한 진사들을 위해 여는 연회)부터 다녀와야지.”
방진이 목소리를 낮추고 웃으며 말했다. 신선거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여전히 앞쪽을 내다보던 진십삼이 싱긋 웃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방진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보자, 신선거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진사 행렬이 가까워지자, 가장 앞에 서 있던 관리인이 두 손을 높이 들어 포권의 예를 표했다.
“신선거에서 관인들을 위해 술 한 잔 바치겠습니다!”
술을 바친다고?
진사들이 놀란 얼굴로 생각했다.
술이라고 해 봤자 특별할 게 뭐 있다고,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사람들의 뇌리에 이 생각이 스치던 찰나, 갑자기 거리가 왁자지껄해지더니 엄청난 인파가 신선거 앞으로 몰려왔다.
“혹시 여기 주인어른이 직접 빚은 술이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관리인이 웃으며 공수했다.
“맞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흥분했다.
“혹시 그 술이 무원산입니까?”
관리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당연히 아니지요. 무원산은 오직 무원산 형제들만을 위한 술입니다. 관인들을 위한 술은 또 따로 있지요.”
점점 더 몰려오는 인파에 사람들을 막고 있던 관졸과 금군 병사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래?”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씩 물었다.
“저기 신선거에서 또 술을 바친다는데?”
누군가가 대답하고는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저 진사들, 관직을 얻자마자 길바닥에 널브러져서 황제가 여는 경림연에도 못 가는 건 아니겠지? 혹 그렇게 된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기담이 될 텐데 말이야.”
깊이가 얕은 금잔들이 탁자 위를 가득 채웠다. 금잔을 가득 채운 술의 표면이 겨울 햇살 아래서 빛을 내며 일렁이자, 그 모습이 마치 옥으로 빚은 미주처럼 보였다.
“마시고 취하진 않겠지?”
가장 먼저 금잔을 손에 쥔 장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혹여나 경림연에서 추태를 부릴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한데 이 술이 그렇게 대단한가?
장원이 잠시 머뭇거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맹수처럼 달려들 기세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 안 마실 거면, 날 주게나!”
사람들의 외침이 천둥보다도 크게 들려왔다.
깜짝 놀란 장원이 살짝 손을 떨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신의 손에 쥔 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술이 정말로 그렇게 좋다고?
“이 관인양(官人酿)은 관인들께서 선대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리기 위해 빚은 술인지라 관인들의 흥취를 살짝 돋울 뿐, 신선대에 오르시는 발걸음을 어지럽힐 정도는 아닙니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리며 설명했다.
조금이라도 더 머뭇거렸다가는 자신을 산 채로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주위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긴 장원이 고개를 젖히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내려가자, 장원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장원이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술일세!”
장원이 뭐라고 더 하기도 전에, 주위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술을 마신 것처럼 통쾌해하며 소리쳤다.
참으로 좋은 술인데, 하필 관인들만 마실 수 있는 술이라니.
“설마 이 술도 판매하지 않을 계획이요?”
주위의 구경꾼들이 외쳤다. 관리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희 신선거에서는 사사로이 술을 양조하여 판매하지 않습니다. 저희의 술은 주인어른께서 성의를 표하실 때 쓰시는 겁니다.”
구경꾼들은 아이고 소리를 연발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진사들이 한 명씩 나서서 금잔을 가져가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럼 저 술을 마시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수밖에 없겠군.”
많은 사람이 손뼉을 치다가 허벅지를 치면서 한탄했다.
관리인이 누군가에게 금잔 하나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바치면서 예를 표했다.
“축하드립니다, 진 공자님.”
관리인의 말 한마디와 함께, 신선거의 점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큰소리로 따라 외쳤다.
정 낭자도 참!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금잔을 받아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진십삼은 빈 잔을 건넨 후 행렬을 따라 다시 앞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진사들의 감탄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사람들의 선망과 부러움이 섞인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면서 술잔을 들이키는 진사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이 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게 아닌, 오직 그만을 위한 선물이라는 것을.
경림연이 끝나고, 진십삼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등불이 서서히 밝아질 때였다. 그가 살짝 취기 오른 얼굴로 대문을 넘어섰다.
“십삼공자님, 축하드립니다.”
집안의 하인들이 양쪽에 서서 공손하게 진십삼에게 예를 올렸다.
“상을 내리거라.”
진십삼이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사환들이 미리 준비된 소쿠리를 들고 나와 소쿠리에 든 돈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진 관인, 축하드립니다.”
돈을 받은 하인들이 활짝 웃으면서 진십삼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진십삼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손짓했다.
“상을 내리거라.”
십삼공자에서 진 관인으로 바뀌었다. 진십삼은 큰 도약을 해낸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새로운 삶을 얻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대청 안의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대청 안에 앉은 진 시강과 진 부인은 하인들에게 에워싸인 채 걸어오는 진십삼을 바라보았다.
“소자,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진십삼이 옷매무시를 단정히 정리하고 진지한 얼굴로 무릎을 꿇어 큰절을 올렸다. 큰절을 올리는 아들을 바라보던 진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진 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장수나 재상이 되는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 오로지 아들이 유유자적하고 쾌활하게 지내며,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나의 오랜 바람이 현실이 되었구나.
“십삼.”
진 부인이 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오는 아들을 불렀다. 진십삼이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어머니, 소자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친히 저를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가 너 데려다준대? 어미는 네가 받은 축하 선물이 보고 싶어서 가는 게야.”
진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진십삼은 고개를 저었다.
“축하 선물 보는 게 뭐 급하다고요. 내일 봐도 늦지 않는걸요?”
“안 돼. 다른 사람들 건 내일 봐도 되지만, 정 낭자가 무슨 선물을 했을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진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진십삼이 흠칫 놀랐다.
정 낭자?
“선물은 이미 한 거 아니었어요?”
진십삼이 물었다.
설마 관인양을 특별히 집에 좀 더 보내준 건가?
“어서 와 봐.”
벌써 진십삼 거처의 마당에 발을 들인 진 부인이 굳게 닫힌 문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반근 낭자가 신신당부했었어. 네가 와야만 선물을 열어볼 수 있다고.”
진짜로 더 있어? 거리에서 관인양을 선물한 것 외에도, 또 선물이 있단 말이야?
진십삼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가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공자님.”
문 앞에 서 있던 시녀들이 예를 올렸다. 진십삼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문을 밀었다.
대청 안에는 등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회랑 아래에도 불이 켜진 등불은 두세 개뿐인지라 어둑하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공자님, 안으로 드시지요.”
시녀들이 등롱을 손에 들고 차례로 들어가면서 진십삼에게 길을 안내했다. 하나, 둘, 세 개의 등불이 차례로 켜지고, 대청 안이 점점 더 밝아져 왔다. 대청이 점점 더 밝아질수록, 진십삼은 점점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화려하기도, 은은하기도 한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진십삼의 눈앞에 계속해서 나타났다.
“모란이잖아!”
문가에 서 있던 진 부인이 놀라기도 기쁘기도 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모란이 엄청 많네!”
모란! 만개한 꽃, 반쯤 핀 꽃, 봉오리가 생겨 막 피어나려는 모란까지!
진십삼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3월은 낙양의 모란이 한창 만개할 시기였다. 세간의 묘사에 따르면, 낮에 보는 모란은 화려해서 눈이 부시고, 밤의 등불 아래서 보는 모란은 은은하고 온화한 멋을 자아낸다고 했다.
진십삼은 어릴 때 낙주에 가서 모란을 구경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도 모란이 참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이 되어서는 다리가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꽃놀이를 즐길 흥취가 생기지 않아서인지, 언젠가 낙주에 다시 한번 가 볼 마음만 품고 있었을 뿐, 끝내 낙주에 다시 찾지는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지금 이 순간, 진십삼은 낙주에서 봤던 모란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란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낙주가 아닌 바로 그의 대청 안에서.
진십삼의 대청에는 흡사 모란원 야유를 즐기는 듯한 정취가 풍겼다.
모든 등불이 차례로 켜지자, 진 부인도 드디어 실내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감탄했다.
대청의 중앙에 족히 육 척 길이는 넘어 보이는 화폭이 가로로 펼쳐져 있었다. 시녀 네 명이 화폭의 모서리를 한쪽씩 잡고 있었고, 다른 시녀들은 등불을 손에 들고 화폭의 주위에 서 있었다. 일렁이는 등불 때문인지, 백 송이 가까운 모란들이 마치 살아있는 꽃처럼 두 사람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세상에나.”
진 부인이 손을 가슴에 올린 채 중얼거렸다. 격하게 요동치는 마음에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넋이 나간 모습으로 모란 화폭을 바라보던 진 부인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진십삼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소매를 살짝 털고는 두 팔을 벌린 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는 화폭 앞 맨바닥을 자리 삼아 앉았다.
“술을 가져오너라, 술!”
진십삼이 한껏 흥이 오른 모습으로 외쳤다. 그가 연신 손뼉을 치다가 화폭에 쓰인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지난날 궁색할 때는 자랑할 것 없더니, 오늘 아침에는 우쭐하여 생각에 거칠 것이 없어라. 봄바람 따라 의기양양 말을 타고 달리니, 오늘 하루 장안에서 온갖 꽃을 다 보았네.”(昔日齷齪不足誇, 今朝放蕩思無涯. 春風得意馬蹄疾, 一日看盡長安花. - 맹교, <등과후登科後>)
봄바람 따라 의기양양 말을 타고 달리니, 오늘 하루 장안에서 온갖 꽃을 다 보았네!
이번 생은 딱 오늘만을 위한 것이로구나. 오늘이 있으니, 죽어서도 여한이 없을지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모를 때였다. 분위기에 흠뻑 취해 술을 마시던 진십삼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화폭을 바라보다가, 손에 든 술 주전자를 입에 기울이는 것을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큰하게 취한 진십삼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모란에 홀린 것처럼,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회랑 아래서 화폭만 바라보고 있던 진 부인이 한숨을 토했다.
“봉화에 불을 붙여 여인의 미소 한 번을 얻어내는 것처럼, 여인의 마음을 달래어 환심을 사는 건 늘 사내인 줄로만 알았는데, 비로소 오늘에야 깨달았구나. 여인도 똑같이 사내의 마음을 흔들고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을.”
진 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일 하나를 마무리 지었네.”
새로 들어온 진사 사백여 명을 위한 일들을 마무리 지은 뒤, 한결 편안해진 듯한 표정의 진소가 입을 열었다. 물론, 이 일이 끝났다고 해서 진소가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조정에 아직 속 썩이는 일들이 많죠?”
진소 부인이 차 한 잔을 건네며 다정하게 물었다.
고능준이 쫓겨났다고는 하나, 고능준과 얽힌 정사들은 줄어들기는커녕 도리어 늘어났다. 고능준 수하에 있는 세력이 고의로 상황을 악화시킨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를 내쫓은 진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결과였다.
이재민 구제와 민란 진압과 관련된 무평에서는 도통 좋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고, 황제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괴팍해져 갔다. 조당에서 황제와 진소의 의견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서, 진소에게 알 수 없는 화풀이를 하는 일도 많아졌다.
“이젠 조정에서 노야의 세력이 가장 막강하니, 폐하의 화풀이도 자연스럽게 노야께 향하는 거겠죠.”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맞는 말이오. 하지만 난 절대 고씨 가문을 조정에 들일 수 없소. 이런 상황도 잠시뿐일 거요. 제일 굵은 가지를 쳐냈으니, 잔가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알아서 정리될 테지.”
진소가 거침없이 대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서북 군정처럼 말이오. 그쪽도 이젠 다 정리가 되었잖소.”
“고생 많으셨어요, 노야.”
힘들어하는 남편의 모습이 속상했지만, 진소 부인은 애써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서북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그 여인이 먼저 생각난단 말이지. 겉보기에는 그 여인과 무관한 일처럼 보이지만, 서북 군정에는 그 여인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어.
강문원을 해치우자 서북 쪽의 인사는 자연스럽게 물갈이되었어. 그 여인이 만들어 낸 신비궁과 돌포탄 덕분에 서북 군영이 연달아 대승을 거두면서, 새로이 서북 군정 자리를 차지하게 된 장수들이 황제의 인정을 받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사실 서북 군정 일도 그 여인이 큰 공을 세운 것과 다름없군.
“십팔랑의 혼사는 26일에 치르기로 했어요. 정 낭자 쪽에도 청첩을 보냈고요.”
진소 부인이 말했다.
아, 딸아이의 혼사도 있었지. 그것도 잘 신경 써야 하고.
“십팔랑이 혼사를 치른 후에도 당장은 사위와 함께 노주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지?”
진소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묻자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왕 전하께 계속 서예를 가르치고 있어서요.”
진소 부인의 얼굴에 득의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가나 칭찬을 듣는 딸아이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들의 큰 자랑거리였다.
“지금 후궁의 일도 모두 귀비마마가 장관하고 계시고, 황실의 공주들도 슬슬 공부를 시작할 때라 십팔랑에게 공주들의 서예 공부까지 맡기셨거든요.”
부인의 자랑에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여인이 혼사를 치렀으면, 집에서 남편을 도와 아이 훈육에 힘쓰고 어른들을 공경하며 현모양처로 살아야 하거늘, 어찌 계속 경성에 남아 있겠다는 거요? 그게 뭐가 좋다고.”
“아예 안 간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여기서 조금 더 지내다 아이가 생기면 자연스레 내려가겠죠. 나도 십팔랑이 갑자기 이렇게 훌쩍 가 버리는 게 아쉽고요. 그렇게 멀리 가 버리면, 몇 년에 한 번 얼굴 보는 것도 힘들어질 텐데.”
진소 부인이 진소를 나무라듯 말하자, 진소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래요?”
진소 부인이 물었다.
“어째 십팔랑이 예전과 비교하면 뭔가 달라진 것 같단 말이지.”
“벌써 시집갈 만큼 나이가 찼는데, 아직도 예전의 어린애 같을 수가 있나요?”
진소 부인이 실소를 터트렸다. 진소가 머쓱하게 웃고는 느릿느릿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개괄하자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 하였소(詩三百, 一言蔽之, 曰思無邪. - <논어>).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해내기 어려운 일이 바로,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오.”
시간은 흘러 어느새 3월 26일, 진십팔랑의 혼삿날이 되었다. 진씨 가문 저택 곳곳에는 경사스러운 붉은 비단 장식이 걸렸다. 바깥마당의 소란스러움에 비해, 안쪽 마당은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온했다.
“십팔랑, 화장한 얼굴 볼래요?”
혼례를 치르는 것을 도와주러 온 아낙들이 진십팔랑의 어깨를 살짝 옆으로 틀며 구리거울을 보여주었다. 구리거울 속에는 심혈을 기울여서 단장한 여인이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진십팔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신선의 제자인 정 낭자도 왔대.”
“어서 가서 구경하자.”
문밖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진십팔랑이 고개를 돌렸다.
도착했나 보네.
“정 낭자가 십팔랑보다 한 살인가 더 어리지 않나? 그 낭자도 이제 슬슬 혼사를 치를 나이가 됐는데.”
“어떤 집안이랑 혼사를 치를지 모르겠네.”
“태후께서 하신 말씀이 있는데, 누가 그 여인에게 혼담을 넣겠어.”
밖에서 나지막이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자, 진십팔랑은 어쩐지 짜증이 났다.
하여간 여인들이란. 눈에 보이고 신경 쓰이는 게 온통 혼사밖에 없지? 그 여인은 혼사 따위 안중에도 없을 텐데.
여인의 몸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언변으로 어사대 관리를 물러나게 하고, 기이한 병기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 태후의 미움을 샀다고는 하나 황제의 인정을 얻었고, 종친과 교분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 눈엔 아마 더 큰 세계가 있겠지.
진십팔랑이 몸을 일으키자, 수다를 떨던 아낙들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진십팔랑에게 혼례복을 입혀 주었다.
진십팔랑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3월 말의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마당에는 초록 잎이 나기 시작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고,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개했다.
자리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진십팔랑은 단번에 정교랑을 찾아냈다. 정교랑은 나무 그늘 아래, 눈에 띄지 않는 색상의 옷을 입고 두 여인과 소녀들 뒤에 있었지만, 단연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
저 여인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저 여인이 진안 군왕에게 경왕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면, 나는 귀비에게 공주들의 서예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저 여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잖아? 내가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저 여인과 똑같이 원하는 바를 이뤄낼 수 있을 거야.
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축하 선물을 하사하셨습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여인이 혼례를 치를 때 황제의 선물을 받는 경우는 얼마 없기 때문이었다.
“십팔랑, 정말 축하해요.”
아낙들이 진십팔랑을 에워싸고 축하했지만, 진십팔랑은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그건 다 제 아버지 진소 덕분이죠.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이자, 아낙들이 혼례 때 쓰는 무거운 관을 진십팔랑의 머리 위에 올렸다. 붉은 면사포가 시야를 가리자, 진십팔랑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의 저택으로 찾아와 신부를 데리고 혼례 마차에 올라탔다. 신부의 출가를 배웅하러 왔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날 준비를 했다.
정 이부인은 주위에 있던 부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안면을 트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데려온 세 딸아이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분주한 모습이었다. 한창 분주하게 인사를 한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렸을 때, 정교랑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랑, 여기서 동생들 잘 지키고 있어.”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정사랑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정교랑을 찾았다. 그리고 곧 문가에서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교교.”
정 이부인이 잰걸음으로 다가가 정교랑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부인.”
반근이 얼른 다가와 정교랑을 잡았던 정 이부인의 손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예를 표했다.
“어딜 가려고?”
정 이부인이 서둘러 물었다.
진단랑이 신부 측 가족 신분으로 후행(後行)을 가게 된지라 정교랑도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집에 돌아가자꾸나. 네 외숙 댁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는데, 이제는 집으로 돌아올 때도 됐잖니.”
정 이부인이 다시 한번 손을 내밀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이부인.”
반근이 재빨리 정 이부인의 손을 막았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정교랑이어서 그런지, 정 이부인이 정교랑의 소매를 잡아끄는 동작을 취하자 숨어 있던 더 많은 시선이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정교랑이 입을 열려던 찰나, 구석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걸어 나와 정 이부인의 손을 단번에 쳐냈다.
“그만 돌아가야지.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주육낭이 언짢은 기색으로 호통치고는 정 이부인을 노려보았다.
“저리 좀 가시죠?”
저 자식은 어떻게 여인들만 들어오는 뒷마당까지 들어온 거야?
정 이부인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 무식한 놈이 예전엔 나한테 계모니 뭐니 하는 욕까지 했었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놈과 또 다투면, 물론 저놈도 사람들의 질책을 받겠지만, 내 체면 또한 처참하게 구겨질 거야.
주육낭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정교랑도 정 이부인을 향해 예를 올리고 몸을 돌렸다.
“저 사람은 누구길래 집안 어른한테 말버릇이 저래?”
“집안 어른? 웃기지도 않는 소리. 저 사람은 주씨 가문의 육공자잖아. 정 이부인은 저 사람한텐 집안 어른이 아니지.”
“아무리 계모라고 해도 그렇지, 정 낭자는 왜 나서지도 않지?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무례는 무슨. 주씨 가문이잖아, 주씨 가문이 정 낭자와 정 낭자의 모친 일로 정씨 가문이랑 얼마나 피 터지게 싸웠는지 몰라서 그래? 저 두 가문은 서로 얼굴만 봐도 눈이 뒤집히는 원수지간이야.”
“하나는 외숙, 하나는 친부네인데, 자식들이 나선다고 뭘 어쩌겠어?”
작은 소리로 오가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반근은 정교랑을 탓하는 말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근은 민망하고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서야 하는 정 이부인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다음, 다시 턱을 치켜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오직 주씨 가문만이 아씨를 대신해 일을 처리해 줄 수 있어. 그리고 주씨 가문만이 아씨를 위해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고. 그들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만, 아씨께서는 그럴 수 없잖아.
반근의 귓가에 시녀의 말이 맴돌았다. 반근이 앞을 내다보자,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 정교랑을 재촉하는 주육낭이 보였다.
하늘색이 어둑해졌을 무렵, 반근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주육낭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게 되었다. 순간 반근은, 아주 오래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소년이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기고만장한 기세로 정씨 가문의 마당에 우뚝 서서 소리쳤다.
- 누이의 억울함조차 풀지 못한다면, 내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던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반근을 쳐다보자, 반근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주육낭.”
진 상공 저택의 대문을 나서자마자, 누군가가 주육낭을 불렀다. 주육낭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니 화려한 옷을 입고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진십삼이 보였다.
“이 자식, 신랑처럼 차려입고 뭐 하는 거야?”
주육낭이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진십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신랑이랑 동기(同期) 급제자라 오늘 친영 행렬에 초대됐어.”
진십삼이 대답하고는 말에서 내려와 정교랑을 향해 싱긋 웃었다.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내일 혹시 시간 돼요? 성 밖에서 오 리 떨어진 도관에 벚꽃이 예쁘게 폈다는데, 같이 꽃놀이하러 갈래요?”
진십삼이 물었다. 정교랑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주육낭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난 시간 없다.”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자네는 자네 할 일이나 하러 가. 자네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꾸하고는 주육낭의 어깨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정교랑에게 물었다.
“혹시 또 선약이 있는 건 아니죠?”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럼 같이 가는 겁니다?”
진십삼이 빙긋 웃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자 주육낭이 진십삼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냈다.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신랑 따라서 친영 행렬로 왔다니까.”
진십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고는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봐도 모르겠는데? 친영 행렬은 다 떠나고 없는데, 자네 혼자 덩그러니 남아서 뺀질거리고 있으니.”
흥겨운 풍악이 울리고, 폭죽 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마차와 말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혼례 행렬을 구경하던 거리의 사람들이 신랑 신부에게 축복을 보냈다.
진십삼이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는 급하게 행렬의 뒤를 쫓아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에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자.”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서 말하던 찰나, 정교랑이 멀어지는 혼례 행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보였다.
표정 역시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처연했다.
저 애 나이가 올해 열여덟이니, 진십팔랑보다 한 살 적군. 세간의 분위기가 많이 개방적으로 바뀌었다지만, 여인이 열아홉에 시집을 가는 것도 꽤 늦게 가는 편이지.
태후 때문에 혼담을 넣는 사내가 없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똑같을 거야.
“뭐 볼 게 있다고.”
주육낭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혼례복이 예뻐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삼백 년 전의 혼례복도 꽤 예쁘네. 아닌가, 혼례복은 언제나 예쁘긴 하지.
정교랑이 멀어지는 혼례 행렬을 내다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혼례복이라…….
주육낭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정교랑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하나도 안 예뻐. 가자, 가자.”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주육낭을 쳐다보며 미소 짓고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를 따라갔다.
“정말 성질나 죽겠네!”
마차에서 내린 정 이부인이 이를 부득 갈며 소리쳤다.
“부인, 고정하세요. 주씨 가문 사람들이 원래 그렇잖아요. 괜히 신경 쓰지 마세요.”
여종들이 서둘러 정 이부인을 다독였다.
“주씨 가문이 원래 그렇다고? 주씨 가문이 그렇게 판을 치도록 그 애가 부추긴 게 아니라면, 무장 출신인 주씨 가문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나대겠어! 내가 바본 줄 알아? 그 애가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나온 이상, 나도 의리 같은 거 지킬 생각 없어!”
“숙모님.”
갑자기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 이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 정사낭이었다.
“사낭, 어디 나가려고?”
정 이부인이 미소를 쥐어 짜내며 묻자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동문수학한 동창끼리 한 번 모이기로 해서요.”
대답을 마친 정사낭은 정 이부인에게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 한번 모여서 축하도 하며 즐겨야지. 우리 신선거에 가서 즐기는 건 어떠니? 거기 가면 돈도 안 들 텐데.”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사낭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숙모님, 누이는 사실 좋은 사람이에요. 누이에게 잘 대해 주신다면, 누이도 두 분께 더욱 잘할 겁니다.”
망설이던 정사낭이 눈을 딱 감고 하려던 말을 뱉었다. 정 이부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낭, 그 말인즉 우리가 교랑에게 잘 못 한다는 뜻이니? 이런 식으로 매도하면 우리가 억울하지”
“잘 대해 주고 말고는, 두 분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정사낭이 이 한마디를 툭 내뱉고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한 뒤, 정 이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저 녀석 저거, 진사가 되더니 하늘 높은 줄을 모르네. 집안 어른을 대하는 예의가 없어, 예의가!”
정 이부인은 정사낭에게 들릴 만큼 목청을 높여 욕을 해댔지만, 정사낭은 입을 꾹 다물고 저택의 문을 나섰다.
거리로 나온 정사낭이 잠시 자리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네, 숙모님. 진사까지 됐으니 이제 저도 어깨 펴고 살아야죠. 누이가 또 두 분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가는,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도련님, 반근 누나가 신선거에 별실을 예약해 두었대요.”
사환이 해맑게 말했다.
자신이 모시는 공자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그 시중을 살뜰히 들은 사환에게도 큰 공이 있는 셈이었다. 시녀가 상으로 사환에게 돈을 두둑이 챙겨주자, 사환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기뻐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누군가가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정사낭과 사환이 깜짝 놀라서 소리치려는데, 그 사람이 돌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공자님! 제발 저희 아씨 좀 도와주세요!”
소녀가 울부짖으며 땅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정사낭은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는 소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환은 대번에 알아보았다.
“춘령? 무슨 일이야?”
사환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춘령?
어둠 속에서 땅에 납작 엎드린 소녀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손을 싹싹 비비고 있었다. 정사낭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소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든 소녀의 얼굴은 벌써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춘령이구나.
“춘령, 무슨 일이냐? 어서 일어나서 얘기해 보거라.”
정사낭이 허공에 엉거주춤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러나 춘령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정사낭을 향해 몇 걸음 기어갈 뿐이었다.
“사공자님, 저, 저는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사공자님,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화려한 장식등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경성의 화려한 봄밤에 서서히 막이 올랐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덕승루의 불빛,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의 치맛자락과 허리끈이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여인들의 꾀꼬리 같은 노랫소리와 교태 섞인 웃음소리가 이따금 덕승루 밖으로 새어 나왔다.
주 낭자의 규방은 덕승루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주 낭자가 창문을 닫자,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차단됐다.
구리거울 앞에 놓아둔 향에서 은은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방 안은 한층 더 조용하고 분위기 있어 보였다. 하지만 거울 앞에서 단장하고 있던 주 낭자는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바깥의 소란스러움과 진한 분향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형(阿衡)!”
여인의 목소리가 주 낭자의 귓가에 전해지는 동시에, 누군가가 그녀의 옆에 앉으면서 고개를 내밀고 헉 소리를 냈다.
“아직도 화장을 못다 한 게야?”
주 낭자가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주 낭자는 눈앞에 앉은, 서른이 넘은 미모의 여인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하며 어머니라고 불렀다.
“서둘러야지. 지금이 벌써 몇 시인데 눈썹도 안 그렸어? 이리 오렴, 어미가 직접 그려 주마.”
여인이 다급하게 눈썹 붓을 들어 올리고, 주 낭자의 얼굴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다. 하지만 주 낭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여인의 손길을 피했다.
“어머니, 오늘은 손님을 접대하고 싶지 않아요.”
웃음기가 서려 있던 여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형, 어미가 네게 말했지? 돼먹지 못한 계집들이 하던 짓을 배워서는 안 돼. 유명세가 조금 생겼다 싶을 때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 말이다. 기녀는 어디까지나 기녀야. 기녀의 교만이 지나치면 억지를 부리는 것밖에 안 돼.”
주 낭자는 시선을 피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이 다시 웃음을 쥐어 짜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 낭자를 설득했다.
“아형, 다른 때면 어미도 너를 억지로 접대시키진 않을 거야. 손님을 받든 안 받든, 연회를 가든 안 가든, 다 네 마음대로 해도 돼. 하지만 오늘 온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잖니. 그분은 딱 너 하나 보겠다고 오시는 건데, 넌 벌써 두 번이나 거절했어. 오늘은 정말로 더는 못 미뤄.”
“이미 몇 번을 왔으니까, 어쩌면 오늘은 안 올지도 모르죠.”
주 낭자가 대답했다.
“그래, 그분이 안 오신다면, 넌 오늘 손님을 받지 않아도 돼.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미리 단장해야 하지 않겠니?”
여인이 웃으면서 주 낭자를 재차 다독이자, 주 낭자는 결국 억지웃음을 지으며 눈썹 붓을 손에 쥐었다.
“역시 우리 아형은 사려가 깊다니까.”
여인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보이며 몸을 일으키고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방 안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여인이 남기고 간 진한 분향 때문에 주 낭자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녀는 눈썹 붓을 허공에 내던지고, 향을 한 움큼 쥐어 향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왜 하필 그런 사람을 마주쳤을까?
요 몇 년 동안 주 낭자에게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 그녀를 두렵게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말하자면, 그날이 결국 오고야 만 것이다. 교방사의 기녀가 어떻게 평생 깨끗한 몸으로 지낼 수 있으랴.
하지만 주 낭자는 그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주 낭자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힘이 이제 절반 정도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매정하게도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정말 싫은걸.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왜 하필 그날 방을 잘못 들어갔을까? 딱 한 번 잘못 들어간 방 때문에, 영영 그 방에서 몸을 뺄 수 없게 될 줄이야.
사실 좋게 생각하면, 주 낭자가 그만큼 무한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한 번만 보아도 잊지 못할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인이라는 뜻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얼굴이 죽도록 싫었다.
주 낭자가 구리거울을 쳐다보았다. 버들잎처럼 가느다란 눈썹에 고작 붓을 한 획 얹었을 뿐인데, 벌써 그녀의 매혹적인 눈매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또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
“재촉하긴 뭘 재촉해.”
주 낭자가 언짢은 기색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문 앞에 꿇어앉은 춘령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언니, 연회석 초대가 있어요.”
“오늘은 손님을 안 받을 거야.”
주 낭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씨 가문 사공자님의 초대예요.”
춘령이 서둘러 말을 덧붙이자 주 낭자가 멈칫했다.
정씨 가문의 사공자는 또 누구람?
“안 받아, 안 받는다고.”
주 낭자가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면서 대꾸했다.
“언니.”
춘령이 무릎을 꿇고 앞으로 기어가며 불안한 기색으로 주 낭자에게 재차 말했다.
“언니, 언니, 초대에 응하시는 게 어때요? 이따가 혹 그 사람이 오기라도 하면…….”
주 낭자가 몸을 살짝 떨고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넋을 놓았다.
“아형, 아형.”
여인의 간드러진 콧소리가 들려오자, 주 낭자가 화들짝 놀랐다.
“언니, 언니.”
춘령이 더욱 놀란 모습으로 주 낭자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형, 고 관인께서 오셨어.”
문 앞에 서서 환한 미소로 말하던 여인은 아직 단장을 마치지 못한 주 낭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서둘러!”
주 낭자가 놀란 기색을 애써 숨기면서 눈썹 붓을 들어 올렸다.
“어머니, 공교롭게도 제가 이미 다른 초대에 응해서요.”
여인이 멈칫하고는 곧바로 물었다.
“다른 사람의 초대? 그게 누군데?”
그, 무슨 공자라더라?
주 낭자가 춘령을 바라보자, 주 낭자의 의중을 파악한 춘령이 재빨리 대답했다.
“정씨 가문의 사공자님이요.”
정사낭? 뭐 하는 놈이지?
여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 유명한 가문의 자제 중에 내가 모르는 사내는 없을 텐데. 정사낭이라는 이름은 꿈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어.
이 어미가 화괴 노릇을 했을 때, 너는 젖도 못 뗀 갓난쟁이였는데, 기어코 나랑 이런 장난질을 하겠다 이거지?
여인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거절하고 고 관인한테 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미 초대에 응했는데, 말에 신용이 없으면 안 되죠.”
주 낭자가 뒤지지 않는 기세로 대꾸했다.
“악역은 이 어미가 대신해 줄게. 네가 식언이나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을 게야. 내가 그 정 공자한테 가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잘 말해 주마.”
여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하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정 공자의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지 내가 한번 봐야겠구나.”
여인이 중얼거리며 방을 나갔다.
덕승루의 별실 안. 젊은 사내 몇 명이 정좌로 앉아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구경했다. 사내들의 얼굴에서는 숨겨지지 않는 기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야, 문유. 자네가 우리를 여기로 초대하다니, 정말 대단한데?”
사내 하나가 정사낭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감탄했다. 정사낭이 어색한 미소를 보이면서 대답했다.
“아니 뭐, 앉아서 이야기도 좀 하고.”
정사낭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칠현금 연주도 듣자고.”
사내들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더욱 기뻐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칠현금을 연주하는 기녀도 하나 부르겠다는 건가?”
덕승루를 방문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덕승루의 기녀들이 경성에서 으뜸이라는 것은 사내들도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덕승루에서는 아무 기녀나 데려와도 그 가무와 칠현금 연주가 사람을 매혹할 정도로 가히 일품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물론, 기녀를 초대하는 비용 또한 그만큼 비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정사낭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고는 불안한 기색으로 문가를 쳐다보았다. 긴 기다림 끝에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란 정사낭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느 분이 정 공자님이실까요?”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방 안으로 들어선 미모의 여인이 웃으면서 물었다.
저 사람이 정사낭이 초대한 기녀인가? 나이가 좀 있어 보이긴 해도, 역시 덕승루의 기녀답게 아름답네.
방 안의 사내들이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정 공자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젊은 데다, 지방 말씨를 쓰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여인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를 어쩐다. 공자님께 죄송해서 어쩌면 좋죠? 공자님이 고르신 주 낭자는 오늘 선약이 있어 여기에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 낭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깜짝 놀랐다.
그 유명한 화괴 주 낭자를 말하는 건가?
“이 녀석도 참, 아무나 고르면 될 것이지, 오자마자 무턱대고 귀한 화괴를 부르면 어떡해? 네가 무슨 수로 주 낭자를 초대한다고.”
한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정사낭에게 속삭였다.
정사낭은 그 사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주 낭자를 초대했을 때는, 선약이 없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주 낭자는 이미 내 초대에 응했습니다.”
사내들은 일제히 경악한 얼굴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제가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죠. 주 낭자는 다른 약속에 가야 해서, 오늘은 도저히 정 공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웃음기를 거두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세상에 그런 도리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먼저 초대를 했고, 주 낭자도 제 초대에 응했다니까요?”
정사낭이 허리를 펴고 목청을 높였다.
얼씨구? 물러설 생각이 없다 이거야?
별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정사낭을 따라왔던 사내들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정 공자님,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요. 주 낭자가 공자님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거죠?”
여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하더니 같잖다는 눈빛으로 정사낭을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설마…….
사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저 녀석이 주 낭자와 일찍이 알고 있던 사이인가?
“주 낭자가 그 손님을 받고 싶지 않아서, 공자님을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거지요?”
여인이 계속해서 물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난 그저 덕승루에 술을 마시러 온 것뿐인데, 왜 내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겁니까? 어서 주 낭자를 이 방으로 데려오면 그만인 것을.”
정사낭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여인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공자님, 제가 여기서 공자님 같은 분을 몇 명이나 봤을까요? 여인의 미소 한 번을 얻기 위해서 영웅이 미인을 구하는 연극을 펼치는 걸 셀 수도 없이 많이 봤어요. 잠깐 사내의 피가 끓을 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답니다. 피가 끓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떨 땐 그 잠깐의 충동이, 평생 감당하지 못할 후환을 초래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덕승루에 처음 온 사내들은 여기까지의 대화를 듣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 정사낭 저 녀석이 기루에서 다른 사람과 화괴 다툼을 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나?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화괴가 다른 사람보다 정사낭에게 더욱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농담을 하는 거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당최 못 알아듣겠으니, 어서 주 낭자나 빨리 내 앞으로 데려오란 말입니다.”
정사낭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강경하게 대답했다.
저 시골 촌뜨기 놈이!
여인은 화괴 출신인지라 젊은 시절부터 항상 사내들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왔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그 미모가 차츰 퇴색되자, 교방사로 들어와 기녀들의 교습을 담당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내에게 무시당해 본 일이 없던 여인이었는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새파랗게 젊은 시골 촌뜨기 하나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하며 입을 아프게 하자, 여인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공자님이 정 그렇게 제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겠다면,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여인이 돌연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 주 낭자를 찾아오지 마세요!”
그러자 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정사낭의 사환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감히 우리 관인께 말버릇이 그게 뭐요!”
관인?
여인이 정사낭을 쳐다보자 사환이 우쭐대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우리 도련님이 이제는 나랏일을 하는 관인이다! 너같이 보잘것없는 늙은 교방사 기생 어미 따위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여인이 눈썹을 으쓱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관인, 저희 덕승루에는 관인이 차고 넘쳐서, 굳이 관직을 들먹이면서까지 저를 겁주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정말로 겁을 주려거든,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부터 잘 돌아보셔야지요.”
“어이, 우리 관인이 어떤 분인 줄 알아?”
사환이 머쓱해하며 화를 버럭 냈다.
같은 시간 호화스러운 상등 별실 안. 미인의 품에 기대어 있던 뚱뚱한 사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내가 눈을 뜨자, 별실 안의 연주 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상석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눠 앉아 장난을 치며 술을 마시던 사내와 기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어 별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별실 안의 모든 이목이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은 어린 몸종에게 집중되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주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 관인께 아뢰옵니다. 저, 저희 아씨께서는 이미 정 관인의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춘령이 불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정 관인?”
사내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어느 정 관인 말이냐? 얼마나 대단한 사내길래 주 낭자의 선택을 받은 것이야? 나는 벌써 서너 번이나 주 낭자를 초대했는데, 어쩜 한 번을 오지도 않고?”
사내가 자신 앞에 놓인 술에 절인 과일 하나를 집어 들고는 손끝으로 과일을 으스러트렸다. 사내의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으깨진 과일의 즙이 뚝뚝 흘러내렸다.
어느 정 관인이냐고?
이번 과거에서 진사 급제한 강주 정씨, 정문유 말이다. 물론 그가 어느 가문 출신이고, 어떤 관직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의 성씨가 강주 정씨라는 사실이지. 그의 누이가 바로 강주 낭자라는 호칭을 가진 정 낭자고. 도교 이 진인의 수제자이자, 장강주와 같은 선상에서 언급되는, 귀판관마저 사지로 몰아 지방으로 좌천시킨 그 강주 정씨 여인 말이야.
춘령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굳이 이런 말을 해 줄 필요는 없지.
혹시 모르지. 정사낭의 정체를 그쪽한테 알려 줘도, 정사낭 쪽에서 그쪽 기세에 눌려서 도망칠 수도 있잖아. 그럼 연극은 시작되지도 않을 거고, 나 또한 헛수고만 하게 될 뿐이야.
“그러게, 정 관인이라는 자가 누구길래 그렇게 대단해?”
별실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비아냥대면서 소리쳤다. 우수수 쏟아지는 질문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춘령의 몸이 떨리는 듯했다.
“소, 소인은 잘 몰라요.”
춘령이 말을 더듬으면서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무튼, 아씨께서는 그분이 대단한 분이라고만 하셨습니다.”
‘대단한 분’이라는 칭찬은, 여인이 사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상찬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내 앞에서,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여인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모욕적인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별실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단해?”
고 관인이 웃음을 멈추고 하인을 향해 손짓했다.
“내 명첩을 들고 가서 그 대단하신 정 공자님께 전하거라. 오늘 밤에, 내가 그의 주 낭자를 잠시 빌려 가겠노라고.”
“제가 이부(吏部) 관리도 아니고, 공자님의 장모도 아닌데, 공자님의 관직이 뭐든 제 알 바 아니잖아요.”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한 사환 때문에 부아가 치밀어오른 교방사 기생 어미가 눈썹을 높이 치켜뜨고 소리쳤다.
“저희 덕승루가 매일 접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댁 같은 관인 나리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협박이 두려울 리 있겠어요?”
여인이 정사낭에게 삿대질을 하며 마지막 한마디를 날렸다.
“우리 덕승루는 댁 같은 관인을 접대할 수 없으니, 그만 나가고 다른 곳을 찾아보시지요!”
한낱 기생 어미한테 내쫓기다니!
별실 안에 있던 사내들은 귀까지 새빨개진 채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낭, 사낭, 어서 가자. 역시 이런 곳은 오지 말았어야 해.”
사내들의 말을 들은 여인이 사내들의 차림새를 대충 훑어보았다. 가난하고 궁상맞아 보이는 사내들의 모습에, 그녀는 턱을 더욱 높이 치켜들고 불쾌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