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75)

작가의 말:

‘송나라 개경(開慶) 원년, 수춘부에서 돌화창을 발명했다. 돌화창은 굵은 대나무 통으로 총신을 만들고, 그 총신에 점화용 화승을 넣어 발사한다. 총성이 어마어마하여 백오십 보 밖에서도 들렸다. - <송사(宋史), 병지(兵志)>’

돌화창을 발명한 진규(陳規)는 금나라에 대항해 싸웠던 송나라 장수로 안구(安丘) 출신의 저명한 군사가입니다.

<교랑의경> 19권에 계속

교랑의경 19권

차례

상경

축하

소란

유일무이

누이를 지켜

-상경-

2월의 덕승루는 봄처럼 따스했다. 아름답게 장식한 구름다리를 지나가는 옷자락 소리가 사락사락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는 금세 멈추었다.

“언니?”

걸음을 멈춘 주 낭자를 보고 춘령이 영문을 모르겠는 듯 불렀다.

“오늘은…….”

잠시 머뭇거리던 주 낭자가 돌아섰다.

“손님 안 받을래.”

춘령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언니, 진십삼 공자도 와 계시잖아요.”

주 낭자는 벌써 발길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이레 후면 예부시(禮部試: 향시 급제자들이 응시하는 예부성 주관 과거 시험)잖아.”

주 낭자가 고개를 돌려 구름다리 저편의 별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은 때 어떻게 유희를 즐길 수 있겠어?”

그거야 네가 알 바 아니잖아!

순간 울화가 치민 춘령이 속으로 욕했다.

속으로는 가고 싶으면서. 그러니 기생어미한테도 누가 온 건지 물어봤겠지. 화장도 마치기 전에 서둘러 옷부터 갈아입은 게 누군데!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연극을 해?

“언니.”

춘령이 앞으로 다가가 초롱초롱한 눈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진 공자가 특별히 언니를 보러 온 거라면요?”

“허튼소리!”

주 낭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춘령은 겁을 먹은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런 춘령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주 낭자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그분의 명성을 더럽힐 거야.”

춘령이 고개를 들고 끄덕였다.

“언니는 진 공자한테 정말 잘하네요.”

주 낭자가 웃음을 지었다.

“환락가에서 일하는 처지니 모든 게 진실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손님을 대할 땐 자기 자신에게 진심이어야 해. 연극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해야 손님의 돈을 받을 수 있어.”

춘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는 주 낭자를 바라보았다. 주 낭자를 바라보던 따스한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같잖다는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연극을, 너만 하는 줄 알아? 그리고 네 연극은 너무 형편없어!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춘령이 순간 눈을 번득이고, 휙 뒤돌아 구름다리 이쪽으로 걸어왔다.

문을 열자, 별실 내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훅 쏟아져 나왔다.

“어떤 문제가 나오든 시정(時政)은 빠지지 않을…….”

떠들던 목소리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뚝 그쳤다. 별실 안에 있던 서생들과 공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춘령이 겁먹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주 낭자께서 오늘은 손님을 안 받으시겠대요.”

그 말에 별실에 있던 이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모처럼 빠져나와 칠현금 연주나 잠깐 들을까 했더니.”

누군가가 말했다.

“다들 급제하시길 기원한다며, 급제하고 나면 공자님들께 가무를 보여 드리겠대요.”

춘령이 공손하게 말을 전하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주 낭자는 엄한 스승님 같다니까.”

“역시 주 낭자야. 성리학의 대도를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네.”

저만 잘난 줄 아는 이 머저리들!

춘령은 속으로 비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웃고 떠드는 공자들 사이에 진 공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춘령은 멈칫하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창가에 선 진십삼은 술잔을 손에 쥐고 창에 기대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저기 좀 봐.”

진십삼이 불쑥 입을 열며 손을 뻗어 밖을 가리켰다. 웃고 떠들던 이들이 다가와 거리를 함께 내다보았다. 거리를 지나는 금군의 무리 뒤로 황실 의장이 달린 마차가 지나갔다.

“평왕이네!”

“진안 군왕께서 초무사로 책봉되어 오늘 무평으로 떠나시잖아. 폐하께서 평왕에게 대신 배웅하라 명하셨대.”

누군가의 말에 진십삼이 설명해 주었다.

“맞아. 진안 군왕께서 무평으로 가겠다고 자청하셨대.”

“뜻밖이네. 송자동자한테 그런 담력이 있을 줄이야.”

뜻밖이라고?

진십삼이 냉소를 지었다.

송자동자가 단지 자식을 낳게 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껏 황궁에서 총애를 받으며 무탈하게 살아남았을 것 같아?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만백성을 위무하고자 군왕께서 모범을 보이신 거지.”

그 말에 진십삼은 더욱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폐하와 만백성을 위해서라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그냥 저 자신을 위해서지. 황제가 갑자기 병이 난 일로 적잖이 놀랐나 보네. 황제의 은총이 오래 가지 않을 듯하니 공을 세울 길을 찾으려는 게야.

종친의 몸으로 공까지 세우려 하다니, 바라는 게 많네.

진십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가는 의장 행렬을 바라보며 찻잔을 들고 단숨에 비웠다.

“진안 군왕이 정 낭자랑 가까이 지내더라고. 군왕의 마차가 정 낭자 저택 앞에 있는 걸 여러 번 봤대.”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해 준 것도 군왕을 위해서겠지.”

짚이는 게 있긴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다는 뜻을 담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십삼이 찻잔을 탁자 위로 내던졌다.

“난 먼저 가 보겠네.”

다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진십삼은 이미 문을 나선 후였다.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춘령은 황급히 비켜서다가 실수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진십삼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쌩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가 버렸고, 사환은 두봉을 끌어안으며 급히 뒤쫓아 갔다.

“갑자기 왜 저래?”

“이번에 꼭 붙어야 하니 공부하러 가는 게지.”

별실에 있던 이들은 웃으며 떠들어댔고, 문밖에 꿇어앉아 있던 춘령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문을 잡고 일어섰다.

왜냐고? 너희가 그 여인 얘기를 꺼내서잖아! 그 여인!

춘령이 고개를 들었다.

그 여인은 왜 죽지도 않는 거야? 왜 아무도 그 여인을 어쩌지 못하는 거냐고! 왜 점점 그 여인 뜻대로 다 되는 거 같지? 이젠 황족까지 연이 닿다니!

황족과 연이 닿았는데 진 공자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춘령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화괴라는 주 낭자의 명성도 결국은 허울뿐이네. 아무리 가식을 떨어도 황족이나 귀인과는 연결이 안 되잖아.

“어이,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춘령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일어섰다. 춘령이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래쪽을 보니 점원이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귀공자 하나를 안내해 들어오고 있었다.

“저건 누구예요?”

춘령이 물었다.

“저분은 말이지.”

지나가던 점원이 춘령의 말에 아래쪽을 힐끔 쳐다보고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고씨 가문의 십사공자야.”

“고씨 가문이요? 그 황실 외척 고씨 가문?”

점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마마와 귀비마마, 평왕 전하가 있는 고씨 가문 말이다. 고 전시께서 경성을 떠나시니 고씨 가문 도련님들도 덕승루를 마음껏 드나드네.”

점원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고씨 가문이란 말이지…….

춘령은 다시금 아래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2월의 강주엔 흐린 날씨에 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두봉만 걸친 정육랑은 우산을 들고 급히 뒤따라오는 몸종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막 대청 문 앞에 당도했을 무렵, 안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망할 놈이!”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노야, 이제 막 약을 드셨잖아요. 의원이 이번 늦겨울에 또 병이 도지면 큰일 난댔어요.”

정 대부인이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힐끔 보며 물었다.

“사낭이 뭐라는데요?”

“둘째 내외가 교랑을 못살게 군다는군.”

정 대노야의 말에 정 대부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이 교랑을 괴롭힌다고요? 제정신이래요? 그 불운덩어리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거 모른대요?”

정 대노야가 눈을 부라리며 정 대부인을 노려보았다.

“거 무슨 헛소리요!”

“내 말이 틀려요?”

따지려 들던 정 대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엄연한 사실인데.”

정 대노야는 정 대부인을 상대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다시 서찰을 들었다. 정 대노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문밖에 있던 정육랑이 안으로 들어오자, 또다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 대노야가 서찰을 도로 내던지는 소리였다.

“짐 챙기시오. 내 경성으로 가야겠소!”

경성으로?

정 대부인은 황당한 듯 고개를 돌려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고, 정육랑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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