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75)

2월 초사흘, 경성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군왕께서 왕부로 돌아오셨다.”

통보 소리가 들리자 경왕부 사람들이 나와 조회를 마치고 돌아온 진안 군왕을 깍듯이 맞이했다. 군왕을 바짝 뒤따르는 내시의 손에는 황제의 칙명을 담은 성지가 높이 들려 있었다.

“전하,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대청으로 들어온 진안 군왕이 두봉을 벗고 두 팔을 활짝 벌리자, 궁녀들이 조복을 벗기고 길을 떠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하자. 금군을 데려가 관서군과 합류할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요대까지 찬 진안 군왕이 손을 휘휘 내젓자 궁녀들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전하, 뇌천군도 관서군과 함께 갈 겁니다.”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하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뇌천군도 그동안 밖에서 고생이 많았지.”

웃으며 당치 않다고 대답한 내시는 진안 군왕이 선반에 있는 작은 함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날 정 낭자의 댁에서 가져오신 물건이군. 오는 내내 보물을 대하듯 꼭 껴안고 계시더니, 돌아오자마자 자물쇠를 채우셨지. 언제부터인가 허리춤에 걸 수 있는 기다란 향낭 속에 넣어 두셨고.

“전하, 이게 무엇이옵니까?”

“호루라기 두 개와 바꾼 선물이다.”

내시가 궁금증을 못 참고 묻자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호루라기 두 개?

내시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왕은?”

진안 군왕이 옷자락을 탁탁 털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물었다.

오전 내 실컷 놀고 난 후 씻고 탁자 앞에 앉은 경왕은 옆에 누가 앉든 말든 관심도 없는 듯 앞에 차려진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경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형이 어디 좀 다녀와야 해. 아마 반년이 좀 걸리거나 일 년은 돼야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겁먹지 말고 집에 얌전히 있어. 여러 사람이 널 지켜 줄 거야.”

경왕이 응,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진안 군왕의 말에 대답한 건 아니었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시와 궁녀는 이미 물러간 후였다. 진안 군왕이 향낭을 풀고 그 안에 담긴 죽통을 꺼냈다.

“봐, 그 여인이 선물한 거야.”

경왕은 그제야 눈길을 주며 죽통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진안 군왕은 손을 높이 들며 피했다.

“이건 네가 가지고 놀 수 없어. 너무 위험해.”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지만 경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렸다. 대청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세를 바로 하고 똑바로 앉은 진안 군왕은 죽통을 뒤로한 채 금세 다른 물건에 집착을 보이는 경왕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향낭을 허리에 찼다.

“전하, 이제 출발하셔야 하옵니다.”

문밖에서 내시가 주의를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안 군왕은 궁녀들이 붙잡고 있는 경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염려 말고 가세요. 경왕은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나이 든 궁녀가 웃으며 말하고는 다시 경왕을 쳐다보았다.

“경왕 전하, 군왕과 작별 인사 하셔야죠.”

경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목공을 가지고 놀 뿐이었다. 진안 군왕이 앞으로 다가가 경왕을 안아 주었다.

그래, 이런 사람만, 이렇게 가까운 사람만, 가서 안아 주고 싶은 거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으니까. 가장 나약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가슴을 상대에게 보여 줄 수 있으니까.

“이만 갈게.”

진안 군왕은 벌써 숨이 막히는 듯 발버둥 치는 경왕을 토닥여 주고, 손을 푼 후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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