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75)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서 명절의 들뜬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아가씨는 안 가신다고?”

아이 옷을 챙기던 황씨가 놀라 묻자 어린 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언니가 그렇게 말했어요.”

“왜 안 가? 자리도 다 맡아 놨던 거 아니었어?”

내실에서 나오던 범강림이 물었지만, 어린 몸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녁에 꽃등 놀이 보러 나가실 때 아기씨를 잘 챙기시라고 반근 언니가 당부했어요. 유괴범이 많대요.”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내가 가 볼게요.”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이부인은 황씨가 대문 안으로 들어온 후에야 그녀가 온 사실을 알았지만,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문지기며 집을 지키는 호위가 전부 정교랑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문은 문지기와 호위가 지키고, 안채에는 시녀가 떡 버티고 앉아 돈줄을 틀어쥐고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은 곧 바뀌겠지만.

정 이부인의 시선이 앞에 놓인 비단함으로 향했다.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정 이부인은 두 손을 뻗어 비단함을 손으로 쓸어 보면서 굳은 결심을 하고 함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가벼운 바람에도 쉬이 날아갈 듯 가벼운 종이 몇 장뿐이었지만 정 이부인에게는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문서에는 선홍색 인장이 찍혀 있었다. 어젯밤 그 문서가 손에 들어온 순간부터 거기 쓰인 이름을 보고 또 봤지만, 아직도 낯설기만 했다.

팽청랑.

팽청랑.

이게 누구 이름이더라?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이름이 있지?

정 이부인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부인, 큰 아씨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쩌죠?”

옆에 있던 여종이 조심스레 물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정 이부인이 움찔했다.

“혼수 때문에 대노야까지 고소했잖아요.”

여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고소 때문에 대노야는 진흙탕을 뒹굴게 됐고 일가 전체가 숨 막혀 죽을 뻔했지.

“그 일과는 달라. 그땐 대노야가 그 애를 속이고 혼수를 가로채려 했잖아. 난 그러지 않을 거야.”

정 이부인은 손에 든 문서 속에서 한 장을 꺼내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고는 또 한 장을 꺼내 머뭇거리다가 결국 손을 멈추었다.

“그 애가 시집갈 때가 되면 난 인색하게 굴지 않을 거야. 이거 다 챙겨 줘야지. 떵떵거리며 시집갈 수 있도록. 집에서도 먹을 거며 입을 거며 쓸 거며 달라는 대로 다 챙겨 줄 거고. 부처님 공양하듯 떠받들 거야.”

암요, 부처님이고말고요. 돈을 낳고 재산을 불려 주는 부처님이신데.

여종이 속으로 말했다.

“알아. 내심 기분이 편치 않겠지. 그래도······.”

거기까지 말한 정 이부인의 시선이 다시 문서로 향했다. 정 이부인은 손을 뻗어 문서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무언가에 도취된 눈빛이었다.

견물생심이라더니.

당초 그 애가 정 대노야를 고소한 것도 따지고 보면 돈 때문이잖아.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로 집안 어른을 고소하는 위험을 무릅썼어. 나도 그 애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위험 정도는 무릅써야 하지 않을까?

대노야를 고소한 건 모친의 혼수 때문이니 근거가 있고 이유도 타당했어. 그리고 지금 정 이노야가 그 애의 재산을 가져온 것도 이치에 맞고 법적 근거까지 있는 일이잖아.

굳이 대노야의 일과 비교하려 한다면, 이번엔 우리가 그때의 정교랑이고, 정교랑이 그때의 대노야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두려울 게 뭐 있어?

“어머니.”

밖에서 들려온 정칠랑의 목소리가 정 이부인과 여종의 대화를 끊었다. 정 이부인은 얼른 문서를 비단함 속에 집어넣었다. 정칠랑은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왜 꽃등 놀이 보러 안 가요? 재미있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불러 옆에 앉히며 물었다.

“모르는 소리. 꽃등 놀이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몰라. 네 아버지께서 알아보니 어린애를 유괴해 가는 일이 매년 벌어진대. 우린 이번에 처음 경성으로 올라와 이곳을 잘 모르니 꽃등 놀이는 집에서 보자꾸나. 거리로 나가서 보는 건 내년에 하면 되잖아.”

정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지만, 정칠랑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네 아버지께서 특별히 너 주려고 커다란 등롱도 사셨어. 집채만큼 커다란 거야.”

그 말에 정칠랑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정말 집채만큼이나 커요?”

정 이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가 언제 너 속이신 적 있어?”

정칠랑은 그제야 신이 나서 웃었다.

“더구나 네 넷째 오라비도 곧 과거 시험이 있고 네 아버지도 경성에 오자마자 일에 휘말렸어. 그러니 지금은 매사 조심해야 해.”

정 이부인의 말에 정칠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같은 시각 정교랑의 거처에서는 황씨 또한 정교랑에게서 같은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였군요. 사공자의 일이 중하죠. 노야의 일도 있으니 삼가야 하고요. 그런 이유 때문이라니 마음이 놓이네요.”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감사를 전했다.

“오라버니와 올케한테 걱정을 끼쳤네요.”

황씨는 얼른 웃으며 답례를 표하고, 일어나 작별을 고한 후 자리를 떴다.

어느덧 정월 대보름 꽃등 놀이가 다가왔다. 어두운 밤을 환히 비추는 꽃등 사이로 인파가 북적였다. 여기저기 등롱이 걸려 있고, 각양각색의 등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등산(燈山: 산 모양의 대형 등롱)도 보였다.

성문 위의 황제에게 예를 표하고 황제가 자리에 앉자, 거리로 나온 관료들과 그 식솔들도 자리에 앉거나 꽃등을 구경하러 갔다.

“올해는 어쩐지 좀 다른 것 같네.”

천막 안에 앉은 진 부인이 바깥의 인파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여종에게 말했다.

“정 낭자 집에선 정말 안 온대?”

“네. 정 아씨 댁에선 안 왔습니다. 주씨 가문도 안 왔고요. 그 범 군감도 안 왔대요.”

여종이 대답했다.

“사람이 부쩍 줄어든 것 같네.”

진 부인이 말했다.

“많이 줄긴 했죠. 십삼도 안 왔잖아요.”

옆에 있던 부인 하나가 손을 뻗으며 끼어들었다. 그러자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곧 시험이잖아요. 늦었지만 벼락치기라도 해야죠.”

“겸손하시긴. 아, 그러고 보니 고씨 가문도 안 왔네요.”

웃으며 대꾸하는 부인의 말에 진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죄를 지어 외직으로 나가게 된 고능준이 꽃등 놀이에 나올 리는 없었다.

“진 상공 댁 가문도 안 왔고요.”

말을 걸었던 부인이 말했다. 재해로 인한 민란의 상황이 심각해지는 상황이라 진 상공으로서는 유희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네요.”

그 부인이 이번에는 성문 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올해는 어린 황자님도 한 분 더 늘어나셨잖아요.”

진 부인도 웃으며 성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 폐하께선 기분이 좋으실 거야. 지난해에 일식과 월식이 연달아 나타나고 재해로 민란까지 일어났다고는 하나, 옥체의 건강을 회복하고 황자까지 얻게 되셨으니까. 폐하의 만복이 길이 이어진단 뜻이니 폐하로서는 더 없는 경사겠지.

“폐하, 저기 좀 보세요.”

화려한 두봉을 걸친 후궁이 성문 위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춥진 않소?”

황제는 경치 구경에 별 관심이 없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히 물었다.

“폐하 곁에 서 있으니 전혀 안 추워요.”

안비가 웃음을 지었다.

뒤쪽에 앉은 귀비는 은애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손톱을 뜯었다. 병약한 황후는 꽃등 놀이에 늘 불참했기에, 지금까지는 언제나 귀비가 황제 곁을 지킨 터였다.

겨우 용종 하나 가졌다고, 저 기고만장한 꼴 좀 봐. 누군 용종 안 가져 본 줄 알아?

안비가 또 뭐라 소곤거렸는지, 앞쪽에서 황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빈이 용종을 가진 건 나라의 경사였으나, 귀비에게는 경사가 아니었다. 귀비에게 진정한 경사는 태자 책봉뿐이었다.

“고 전시는 언제 출발한다더냐?”

귀비가 나지막이 물었다.

“23일로 정해졌답니다.”

옆에 있던 궁녀가 목소리를 낮춰 고했다.

“가기 전에 만나 봐야겠다.”

귀비의 말에 궁녀가 네 하고 대답했다.

“평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저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성문 위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귀비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비단옷에 금관을 쓴 소년 친왕이 성큼성큼 걸어오자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예를 표하는 모습이 보였다.

“해가 바뀌었다고 더 의젓해졌구나.”

귀비는 아들을 흐뭇한 얼굴로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소년 친왕이 찬란하게 빛나는 꽃등 아래에서 황제에게 예를 표하자, 황제는 웃으며 예를 표했다. 옆에 있던 안비는 두 부자가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정겹고 마음 따스해지는 광경에 귀비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떠들썩한 성문 위와는 달리 황궁 안은 다소 쓸쓸해 보였다. 황후의 궁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마, 건강을 잘 챙기셔야 합니다.”

궁녀가 먹여 주는 차를 마시는 황후를 보며 진안 군왕이 말했다.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정 낭자한테서 본궁에게 줄 간식도 좀 얻어 오지 않으련?”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을 건네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황후는 웃으며 궁녀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정말 경성을 떠났다 올 생각이니?”

황후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께 작별 인사를 고하러 온 겁니다. 정월이 지나면 바로 출발할 거예요.”

황후는 진안 군왕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누굴 위해 내린 결정이니?”

“마마와 경왕을 위해서죠.”

진안 군왕의 대답에 황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짓자 곧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따 태후마마의 궁에도 들르거라. 마마께선 너의 그런 말을 좋아하셔.”

진안 군왕은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마마께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황후가 음, 하고 대꾸한 후 궁녀가 먹여 주는 차를 마셨다.

“일식이 일어난 후와 월식이 일어나기 전, 그 사이에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

황후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놀란 마음에 목구멍이 조여 또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궁녀가 화들짝 놀라며 밖에 대고 소리쳤다.

“아무도 없느냐. 어서 마마의 약을 가져오거라.”

문밖에 서 있던 내시와 궁녀가 황급히 뛰어나갔다. 황후 옆에 있던 궁녀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황후의 기침 소리는 차츰 잦아들었다.

“위낭,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황후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문 현상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하늘을 속이며,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황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일을 모르지?”

“본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짧기도 했고, 본 사람 역시 확신을 갖지 못했죠.”

황후가 자리에 똑바로 앉으며 물었다.

“정 낭자 말이냐?”

“아니요, 사천대요.”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투로 말했다.

“사천대입니다.”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자 멈칫하던 황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실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래, 본궁이 잘 알겠느니라. 걱정 말고 가 보거라.”

황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

일어나 나가던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말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내시와 궁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약을 가져왔습니다. 약이요.”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자리를 떴다. 황후는 가까이 있던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문밖에서 우르르 들어온 이들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애를 써? 남을 위한 일도 아니고 자신을 위한 일인데, 고맙긴.”

황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경이 넘었을 무렵, 정씨 저택의 연회가 끝났다. 정씨 가문 식구들은 다들 마당으로 나와 집안 곳곳을 장식한 등롱을 쳐다보았다. 마당에도 꽃등으로 만든 등산이 두 개나 세워져 있었지만, 바깥에서 벌어지는 꽃등 놀이가 더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문간방의 사환은 문을 지킨다는 핑계로 대문 근처에 서서 떠들썩한 거리를 내다보았다.

“꽃등 놀이는 사나흘 동안 계속된대. 요 며칠은 사람이 많아도 마지막 날엔 별로 없을 거래. 그땐 아버지께서도 구경 가게 해 주실 거야.”

정사랑이 정칠랑을 위로해 주었다. 정칠랑도 그 말에 다소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돌려 대청 안쪽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버지한테 가서 말할게.”

정칠랑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정사랑이 얼른 붙잡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선······ 언니와 얘기 중이셔.”

그 말에 정칠랑은 기분이 상했다. 우리까지 쫓아내고서 얘기는 무슨.

한편 같은 시각 대청에서 정 이노야의 말을 들은 반근과 시녀는 놀라 안색이 싹 변했다.

“노야, 뭐라고 하셨어요?”

반근과 시녀는 놀랍고 기가 찬 눈빛으로 정 이노야를 쳐다보았다.

“윗전들 말씀하시는데, 아랫것이 어느 안전이라고 끼어드느냐!”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시녀는 전혀 밀리지 않는 기세로 눈썹을 치켜세우며 따지려 했지만, 앉아 있던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붙잡았다.

정교랑은 정 이노야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등롱에 비친 그 미소가 아름답게 빛났다.

“맞는 말씀이에요, 아버지.”

“숙부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대청 안에서 오래 기다린 정사낭은 정 이노야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벌써 환한 대낮이니 본디 공부에 전념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과거 시험까지는 불과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터라 정사낭은 어젯밤에도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만 간단히 한 후 꽃등 구경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하지만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사환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고,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부랴부랴 달려온 터였다.

“그건 큰누이가 힘겹게 이룩한 재산인데, 숙부님이 어찌, 어찌······.”

정 이노야는 정색을 하며 정사낭을 노려보았다.

“공부한다는 놈이 왜 이리 어리숙해? 국법도 모르느냐?”

“하지만 숙부님, 그건 굳이 문제 삼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추궁하지 않는······.”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며 밖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문제 삼지 않는 건 일이 없을 때 얘기지. 지금 우리 집에 일이 좀 많으냐? 내가 왜 탄핵을 당했는데? 그 애는 왜 죽이네 살리네 하는 소리를 듣고? 그게 다 그 애가 벌인 일 때문에 꼬투리를 잡혀서가 아니냐!”

정사낭은 눌변이기도 했고 늘 웃어른을 공경해 왔던지라 정 이노야의 말에 얼굴만 시뻘게질 뿐 제대로 반박도 못 했다.

“그, 그건 숙부님의 행동이 올곧지 않아서······.”

정사낭이 우물쭈물하며 대꾸했다.

“불효막심한 놈! 그게 나한테 할 소리더냐!”

정사낭이 목을 움츠렸다.

“이것 봐, 이것 좀 보라니까. 이게 다 그 애 때문이다. 그것이 천지신명께 불경하고 군주와 집안 어른을 무시하니, 죄다 그 애를 따라 하잖아.”

정 이노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대청 안을 서성였다.

“시골 무지렁이도 땅을 살 땐 조부나 부친의 명의로 사야 하는 이치를 안다. 더구나 그 애는 여인의 몸인데, 어찌 그리 황당한 짓을 벌인단 말이냐!

그 문서의 명의를 아무도 몰래 바꾸느라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느냐? 돈도 적잖이 들어가고, 아쉬운 소리도 적잖이 했어!

그런데 나보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내가 뭘 어째야 하는데? 대답해 봐라. 그럼 내가 어찌해야겠느냐?

못난 놈 같으니라고. 네놈이 감히 웃어른을 가르치려 들어? 책에서 그리 배웠느냐? 썩 물러가거라!”

정신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 정사낭은 황급히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정 이노야의 태도와는 달리 이른 아침부터 정교랑을 찾아온 정 이부인의 태도는 훨씬 온화했다.

“교교, 이게 다 널 위한 거야.”

정 이부인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농담도 잘하시네요.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건 처음 봐요.”

시녀가 비아냥거렸다.

“교교가 남이니? 노야께서 남이야?”

정 이부인이 불쾌한 듯 시녀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시녀가 정 이부인을 보고 피식 웃었다.

“부인, 변하셨네요.”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대번에 말뜻을 알아들은 정 이부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전의 정 이부인은, 정교랑은 물론이거니와 시녀에게도 공손하고 깍듯이 대했다. 하지만 흰 종이에 검은 글자를 박아 놓은 문서가 손에 들어온 지금은, 태도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수중에 곡식이 있으면 마음이 여유로워지니 자신감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제 더 이상 남이 베풀어 주는 돈으로 생활하지 않아도 되고, 돈과 곡식이 그녀 손으로 들어왔다. 아직은 허울뿐인 문서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안 될 게 뭐 있어?

그래, 사실이 그렇잖아. 겁낼 거 없어.

정 이부인은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지금은 예전과 상황이 달라졌어.”

정 이부인은 애매모호한 말로 대꾸한 후 더 이상 시녀를 상대하지 않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지금 넌 명성이 높지만, 네 아버지는 이제 막 상경하여 경성에 기반이 없으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음으로 양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는지 몰라. 네 명성을 무너뜨리고 네 아버지의 앞길을 막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맞는 말씀이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또 이 말이네.

정 이부인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젯밤 정 이노야가 이번 일을 밝힌 후에도 정교랑은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때도 이 말만 남긴 채 일어나 자리를 떴다. 정 이노야 부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달려왔지만, 정교랑은 아직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어젯밤에 잠을 푹 잤나 보네. 정말, 괜찮은 건가?

“교교, 이건 정말 널 위해서고,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해서야.”

정 이부인이 거듭 강조했다.

“그럼 왜 이노야 명의로 안 하고, 부인 명의로 하셨어요?”

참다 못한 반근이 물었다.

눈이 퉁퉁 붓고 실핏줄까지 선 걸 보니 밤새 한숨도 못 잤나 보네.

“교교를 위해 그런 거야. 교교의 아버지 명의로 하면, 그건 곧 정씨 가문의 재산이 되고, 대노야의 것이 되잖아. 교교의 아버지는 딴마음을 안 먹지만, 정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지.”

반근은 입술을 깨물었다. 따지고 싶지만 할 말이 없었다. 잠자코 있는 시녀를 보며 정 이부인은 우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치에 맞는 일인데 누가 뭐랄 수 있겠어!

“교교, 아무 걱정 마. 이건 그냥 겉치레일 뿐이지, 진짜 내 것으로 만든 건 아니야.”

정 이부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전부 네 거야.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반근 낭자는 계속해서 관리인일 거고, 나중에 네가 시집갈 땐 전부 네가 가져가게 할게.”

실내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정 이부인은 입이 마르고 혀가 아팠다. 계속 혼자만 떠드는 기분이었다.

“교교, 내 말을 못 믿겠어? 나랑 네 아버지는······.”

정 이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믿어요.”

정교랑이 정 이부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으응?

정 이부인이 다소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믿으면 나도 믿어요.”

그러더니 정교랑은 앞에 놓인 문서를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이름이 쓰인 문서였다. 이미 정 이노야가 바꿔 버렸지만.

“반근.”

정교랑의 부름에 시녀는 얼른 대답하고 꿇어앉아 문서를 집어 들었다.

“태워 버려.”

정교랑이 말했다.

태우라고?

정 이부인은 놀라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반근 역시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하지만 시녀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네 하고 대답한 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서를 들어 옆에 있던 화로에 넣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문서 몇 장이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이게 다야?

정 이부인은 멍한 표정이었다.

“부인, 다른 용건 있으세요?”

시녀의 목소리에 정 이부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 아니.”

황급히 일어나던 정 이부인이 또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교교, 뭐 필요한 건 없고? 나한테 사람을 보내서······.”

정 이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녀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반근한테 말해. 할 일이 있으면 그것도 나한테 편히 말하고.”

정 이부인이 적절히 화제를 돌렸다. 시녀는 정 이부인을 쳐다보기만 할 뿐 잠자코 있었다.

이 방 사람들은 다 이상하단 말이야.

정 이부인은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얼른 작별을 고한 후 밖으로 나왔다.

정말 이대로 넘어가는 건가? 이렇게 간단하게?

정 이부인은 영 믿어지지 않는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안 그럼 어쩔 건데?”

얘기를 들은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치가 그러한데, 법도를 안 지키면 제가 어쩔 거야? 그나마 내가 신경 써서 뒷수습을 했으니 망정이지.”

정 이노야는 한숨을 쉬며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씩씩거렸다.

“하여간 그 애는 어릴 때나 다 커서나 골칫거리만 안긴다니까.

노태야를 돌아가시게 하고 제 어미를 죽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벼슬길까지 순탄치 못하게 해 놓으니, 원.”

“그래도 지금은 당신 벼슬길이 순탄하잖아요. 그게 다 그 애 덕분인걸요.”

정 이부인이 주의를 주었다.

“그거야 폐하께서 영명하시고 인자하신 덕분이지! 안 그랬음 아직도 어사대에서 못 풀려났을걸?”

정 이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치자, 정 이부인은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정칠랑이 정교랑을 그토록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부친의 총애를 정교랑에게 빼앗기는 게 겁나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신선의 제자라는 딸은 돈도 많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웠으니, 정 이노야가 신주 단지 모시든 애지중지 떠받들며 고분고분하게 군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 이부인은 후처일 뿐이니, 정 이부인과 그 자식들의 자리는 위태로울 수밖에.

그래서 정 이부인은 정교랑을 부러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은근히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일이 일단락됐으니 허튼 생각 마시오. 관련된 이들한텐 사람을 보내 확실히 설명하고. 괜히 해서는 안 될 말을 지껄이면 우리까지 연루된단 말이오.”

정 이노야의 말에 정 이부인은 알았다고 한 후, 신이 나서 비단함을 쳐다보았다.

꽃등 놀이의 마지막 날에도 정칠랑은 거리로 구경 나가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잔뜩 화가 난 정칠랑은 떼를 쓰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지만, 바쁜 정 이부인은 정칠랑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한편 정 이부인의 친정에서 보낸 하인과 하녀 열 명도 마침내 경성에 당도했다. 정 이부인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뻐하며 몇 명은 곁에 두고 몇 명은 점포로 보냈다.

“새로 온 사람들이라고? 사람이 부족하진 않은데.”

갑자기 점포로 보내진 사람들을 보고 각 점포의 관리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녀는 여전히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정 이부인의 이유는 그럴듯했고, 차츰 그 말에 힘이 실렸다.

“연극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어차피 겉치레일 뿐이잖아. 여기서 허드렛일이나 돕게 하면 돼. 신경 쓸 것 없어.”

지금은 신경을 안 쓴다지만, 나중엔?

“반근 낭자, 저, 정말로 주인어른이 바뀐 거야?”

오 관리인이 물었다.

“아니면요? 이번엔 남이 아니라 집안 식구가 이러네요. 집안사람들끼리 싸울 순 없잖아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요?”

시녀가 대꾸했다.

“하긴, 천륜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 예법과 율법에도 명백히 나와 있고.”

점포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교체되었고, 배당금을 받는 사람들 또한 새로운 문서를 받게 됐다.

“이건······.”

문서를 받은 범강림이 분노를 참지 못하며 탁자를 내리쳤다.

“내가 뭔가 일이 생길 줄 알았다니까!”

“그럼 어쩌죠?”

황씨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지만, 범강림은 묵묵부답이었다.

어쩌지?

정 이노야의 말엔 반박할 여지가 없잖아. 언젠가 기회를 봐서 아무도 몰래 정 이노야를 흠씬 두들겨 패 주는 것 말고는 분풀이할 방법이 없군.

물론 패는 것도 쉽진 않을 거야. 소동이 벌어지면 내 앞길이 막히는 건 물론이고 누이한테도 불똥이 튈 테니까.

범강림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이 아둔한 머리통에선 아무것도 떠오르는 방도가 없네. 셋째 아우가 있으면 좋았을 것을.

서무수 생각이 나자 범강림은 목이 콱 막혀 얼른 몸을 돌리며 표정을 숨겼다.

정씨 부녀의 사정을 아는 범강림과 달리 폭죽을 만드는 이씨 가문을 상대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문서를 받은 이 대노야는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다는 듯 부끄러워했다.

“부끄럽소이다. 내가 소홀했군. 낭자를 불효한 이로 만들 뻔했어.”

내용을 바꾼 문서를 받아든 이 대노야는 아랫사람을 시켜 자기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문서를 꺼내 오게 한 후 정 이노야가 보낸 집사 앞에서 태워 버렸다.

“아셨다니 다행입니다. 대노야 댁의 자손이 이랬다면 어찌하셨겠습니까? 더구나 저희 노야와 아씨는 지켜보는 눈도 많잖습니까.”

정 이노야의 집사가 여전히 불만이 가시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간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려야지!”

이 대노야는 서슬 퍼런 얼굴로 일갈한 후,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낭자와 노야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라고 말씀을 전해 주게.”

이 대노야는 두툼한 봉투까지 건넸다. 정 이노야의 집사는 환하게 웃으며 얼른 봉투를 받아 챙기고 신이 나서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왜 계모의 명의로 바꾼 거죠?”

이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 이노야는 이노야라는 걸 잊지 마라.”

이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노야가 아둔한 사람은 아니군. 이런 일까지 꾸밀 줄 알고.”

거기까지 말한 이 대노야는 퍼뜩 떠오르는 게 있는 듯 대청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 훑어보았다.

“얘기가 나온 김에, 우리 집안도 조사를 해 봐야겠다. 집안 여인들이 해 온 혼수로 요 몇 년 새에 이윤이 얼마나 났는지.”

그 말에 대청에 있던 이들 중 여럿의 안색이 변했다.

분가하지 않은 대가족 내에서는 각자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이런저런 수법을 동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기 아내의 혼수로 이윤을 내는 건 가장 흔하면서 틀림없는 방법이었다. 정 이노야도 그런 수완을 부리는데 이씨 가문의 자식들이라고 못 할 건 없지 않은가.

정 이노야가 보낸 문서는 뜻밖에도 그런 식으로 이 대노야의 마음을 건드렸다.

이 일을 조사하다 보면 올해도 다 가겠군.

이무는 대청 안에 있는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전에도 그런 짓을 한 적이 없거니와 지금은 더더욱 그런 보잘것없는 이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대노야의 서슬 퍼런 얼굴에 미간이 찌푸려질 뿐이었다.

“이노야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는 이노야도 알고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그렇다면 정 대노야인들 모르겠습니까?”

이무가 물었다.

정사낭은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시험이 코앞입니다. 마음을 다잡으셔야죠.”

서동이 근심스러운 듯 말했다.

“난들 그러고 싶지 않겠느냐. 분을 삭일 수 없어서 그런다.”

“도련님, 큰 아씨께서도 염려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 하셨잖습니까. 별일 없으실 겁니다.”

정사낭이 걸음을 멈췄다.

“일이 생기면 어쩔 건데? 아무리 괴로워도 남한테 말하지 않는 아이야. 이런 일을 당하고 괴롭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정사낭은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렇다고 뭘 어쩌겠습니까.”

겁먹은 서동이 쭈뼛거렸다.

그래,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정사낭은 다시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아무튼 내 반드시 증언할 것이다. 내가 누이를 대신해 지켜볼 거야. 나중에 교랑이 시집갈 때 한 푼이라도 남겨 둘 생각은 접어야 할 거다. 그랬다간, 그랬다간, 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정사낭이 우뚝 멈춰 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 반드시 지켜볼 것이다. 그때 가서 번복하기라도 하면······. 그때 내가 누이를 대신해 나서려면 이번에 반드시 급제해야 해!

정사낭은 다시 탁자 앞으로 돌아와 앉아 서책을 집어 들었다. 서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정사낭이 또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도련님, 또 왜 그러십니까?”

서동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께 서찰을 보내 이 일을 알려야겠다.”

정사낭이 말했다.

“노야.”

다급히 들어오며 소리쳐 부르던 정 이부인은 대청 안에 정 이노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얼른 내실로 들어갔다.

정 이노야는 나른한 모습으로 기대앉아 두 어린 시녀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정 이부인이 손을 휘휘 내젓자 두 시녀가 얼른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낭 그 녀석이 강주로 서신을 보냈지 뭐예요. 이 일을 전한 게 틀림없어요.”

정 이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 이노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그게 뭐?”

“대방 쪽에서 알면 우리만 좋은 일 하는 걸 그냥 두고 보겠어요?”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는 웃음을 지었다.

“안 그럼 어쩔 건데? 두고 보지 않으면 뭘 어쩌려고? 와서 빼앗기라도 하게? 명의는 우리 앞으로 되어 있다지만, 실은 그 애 것이잖소. 그 애 혼수를 빼앗으려 했다가 그 수모를 당했는데, 그러고도 부족하단 말이오?”

하긴 그렇지.

정 이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환하게 웃었다.

“역시 노야는 주도면밀하세요.”

정 이부인은 남편을 띄워 주며, 밖으로 나간 어린 시녀들을 다시 불러 정 이노야의 다리와 어깨를 주물러 주도록 했다.

정 이노야는 흡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무릎에 올려 둔 손으로 박자를 치며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경성에 있는 점포 몇 개의 주인 이름이 바뀐 일은 어디까지나 남의 집안일이었기에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정씨 가문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들은 바로 정보를 입수했다.

“정 이노야가 동작 한번 빠르군.”

고능준이 웃음을 지었다.

“시간을 끌면 성가신 일만 생기잖습니까. 이번엔 정 낭자가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하고 냉가슴만 앓고 있습니다.”

막료도 웃으며 말했다.

“자업자득이지.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굴었어야지, 왜 자기 이름을 떡하니 박아 놔? 그리 잘난 체를 했으니 누굴 원망하겠나.”

“원망할 수가 없죠. 지극히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하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이제 나도 안심일세.”

고능준은 일어나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경성을 비우는 동안 자네들이 할 일은 딱 두 가지뿐일세.”

고능준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자리에 앉은 막료들과 측근들도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귀를 기울였다.

“첫째, 이번 재난 구휼을 기회로 진안 군왕을 경성에서 내보내게. 그리고 둘째, 3월이 되면 태자 책봉을 주청 올려야 하네.”

막료들과 측근들이 공손히 대답했다.

“대인, 정말 23일에 출발하려 하십니까?”

수하 하나가 고개를 들고 아쉬운 듯 말했다.

“입춘이 지나거든 가시지요. 이 엄동설한에 길을 재촉하다간 몸이 고달프실 겁니다.”

그러자 고능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면 내가 고달플 수밖에.”

고능준은 돌연 웃음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평왕과 궁에 계신 귀비마마를 잘 살펴야 하네. 마음이 안 놓이기로 따지면 그 둘이 더 걱정이야. 특히 마마 말일세.”

정월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능준은 재해 상황 보고를 지체하여 민란이 일어나게 했다는 죄로 좌천되어 경성을 떠났다. 고능준은 측근 몇 명의 배웅만 받으며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경성을 나갔다. 마차 한 대에 시종 몇 명이 따르는 게 전부였다.

“가엾소?”

황제가 물었다. 눈치 빠른 귀비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가엾긴요. 재해 때문에 떠도는 백성을 생각해 보세요. 가엾은 건 백성이죠. 떠들썩한 배웅을 받으며 떠나진 않은 걸 보면 그나마 양심은 있나 봐요.”

황제는 귀비의 말에 웃음을 짓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민간에서 멀어져 높은 자리에 오래 있어서 그렇지.”

“맞아요. 이번에 밖에 나간 김에 견문 좀 넓히고 오라고 하세요. 민간의 어려움을 알아야 폐하의 고충도 알죠.”

황제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귀비도 참. 가족이 아니라 원수를 대하듯 말하는군. 귀비는 안타깝지도 않소?”

“폐하, 가족이기에 신첩이 더 분통을 터뜨리는 거예요. 고 전시는 신첩의 가족입니다. 신첩은 고 전시가 떳떳하게 잘되길 바라는데, 이런 일을 벌였지 뭐예요.

고 전시 체면뿐 아니라 신첩의 체면과 폐하의 체면까지 깎였어요. 폐하께서 너무 오냐오냐하신 탓이다, 폐하께서 능력에 상관없이 가까운 사람만 쓴다 어쩐다 하며 수군댈 거 아니에요. 애먼 사람한테까지 불똥이 튀게 됐으니 열이 받을 수밖에요.”

황제가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고 전시가 짐의 고충을 알아줘야 할 텐데.”

황제의 웃는 얼굴을 보며 귀비는 내심 마음이 놓였다. 순간 고능준이 떠나기 전 자신을 구명하기 위해 청을 올리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한 일이 떠올랐다.

내가 뭐 바보인 줄 알아? 언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 그동안 헛살았게?

황제가 평왕이 다녀갔는지 물었다.

“아니요. 뭐가 그리 바쁜지 모르겠어요. 사람을 시켜 다녀가라고 해도 매번 바쁘다면서 도리어 신첩을 원망하더라고요. 신첩이 법도를 지키지 않고 걸핏하면 궁으로 부른다나요. 신첩도 열이 받아서 그냥 내버려 두려고요.”

황제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융통성이 없는 녀석이라니까. 어쨌든 법도를 지켜서 나쁠 건 없지.”

그럼 법도를 안 지키는 이들을 주의 깊게 보셔야죠, 폐하.

귀비가 속으로 말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아마 황제도 내심 귀비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폐하께서 잘 가르쳐 주세요.”

“그래야지.”

황제의 기분이 좋은 걸 본 귀비는 옆에 있던 궁녀에게 눈짓을 했다.

“폐하, 마마, 저녁 수라가 준비되었습니다.”

귀비의 눈짓을 본 궁녀가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는데, 문밖에서 궁녀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폐하, 안비마마께서 몸이 안 좋아 태의를 부르셨답니다. 폐하께서도 가 보시지요.”

그 말을 들은 귀비는 안색이 싹 변해 황제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잘 지내다가 왜 또 몸이 안 좋아?”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가마를 대령하라고 분부했다. 내시들과 궁녀들이 황제를 따라 우르르 나갔다. 오늘 밤 황제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아는 귀비는 열이 받아 금잔에 들어있는 차를 바닥으로 휙 뿌렸다.

“수법이 매번 똑같잖아. 말이 씨가 되는 수가 있으니 조심 좀 하지?”

귀비가 투덜거렸다.

“마마, 태의가 안비의 용종은 황자라고 했대요.”

궁녀의 말에 귀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황자면 뭐? 본궁도 황자를 가졌었어. 그땐 황후께서 육궁을 통솔하셨지만, 본궁은 안비처럼 안 굴었다고.”

“아휴, 안비를 어찌 마마와 비교하겠어요.”

귀비를 달래던 궁녀가 갑자기 뭔가 은밀한 말을 하려는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망설였다.

“할 말 있으면 할 것이지, 수상쩍게 왜 이래?”

귀비가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궁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마, 누가 그러는데 안비가 황자를 가진 게 범상치 않대요.”

귀비는 실소를 터트렸다.

“황자고 용종이야. 당연히 범상치 않을 수밖에. 여염집 여인도 아니고 황궁에서 그런 수작을 벌이려 하다니, 참······.”

“마마, 안비가 용종을 잉태할 때 태백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답니다.”

태백성을 품었다······.

귀비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금잔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어허!”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감히 그런 말을!”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안비가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안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황제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폐하, 정말 신첩이 말한 거 아니에요.”

안비가 목멘 목소리로 호소했다.

“신첩은 그런 말 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신첩의 몸이 허약해 용종을 가지고도 사흘에 한 번씩 몸이 안 좋다 보니, 그런 유언비어가······.”

“몸이 허약하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다니!”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름다운 안비의 얼굴과 어느덧 제법 부풀어 오른 배를 보고는 안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일어나시오.”

안비는 흐느껴 울며 감사를 표하고 일어났다.

“신첩의 몸이 너무 약하니까 뒤에서 신첩더러 아주 귀하신 몸이라고 비아냥거리나 봐요. 신첩이 가진 아이도 금처럼 귀하다며 태백성에 빗대는 유언비어를 지어냈나 본데, 폐하, 신첩은 감당할 수 없어요.”

감당하지 못할 건 또 뭔가. 짐의 혈통인데 하늘의 별이 내려오지 못할 것도 없지.

황제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물론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지만.

“알았소. 남들은 몰라도 안비 처소의 사람은 단속할 수 있잖소. 일단 여기 사람들부터 제대로 단속하면, 밖에 떠도는 유언비어는 자연히 수그러들 거요.”

황제가 안비를 토닥여 주자, 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신첩한테 화 안 나신 거죠?”

애교가 뚝뚝 묻어나는 안비의 목소리에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일로 뭐 화낼 게 있나.”

황제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안비의 배를 어루만졌다.

“짐의 혈통인데 금처럼 귀하고말고!”

“신첩의 생각도 그래요.”

안비도 황제의 말에 활짝 웃으며 손으로 복부를 쓸었다.

“애가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몰라요. 신첩을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안비가 저녁 수라를 들라 명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저녁 수라를 들며 황제는 술도 두어 잔 마셨다. 황제가 한창 기분이 좋던 그때, 밖에서 내시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폐하, 폐하, 급보입니다.”

내시가 중서성의 인장이 찍힌 급보를 황제한테 바쳤다.

이 시간에 급보라니?

“어디에서 온 것이냐?”

“무평입니다.”

황제의 물음에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무평!

순간 황제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좋지 않은 일임을 직감한 황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급보를 받았다. 급보를 펼친 황제의 안색이 확 변했다. 순간 황제의 몸이 기우뚱하나 싶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폐하!”

대경실색한 안비가 얼른 손을 뻗으며 부축했다. 옆에 있던 궁녀들과 내시들도 우르르 달려왔다.

가까스로 자리에 앉은 황제가 괜찮다는 의사를 표하고자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연 황제는 울컥 피를 토했다.

비명 소리가 황궁의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어가를 달리는 긴박한 마차 소리에 정월 말 겨울밤의 분위기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누구지?”

궁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마차를 정탐하던 이들이 속삭였다.

“평왕의 마차야.”

“방금 전엔 진 상공의 마차가 지나갔는데.”

그때 저쪽에서 또다시 다급히 달려오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 마차는 궁문 앞에서 막히고 말았다.

“군왕, 폐하의 전교 없이는 야밤에 입궁하실 수 없습니다.”

황궁을 지키는 금군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주변을 밝히던 등불이 젊은 군왕의 얼굴을 비추었다. 모두의 시선이 군왕에게로 향했다.

“경왕은 되겠지?”

진안 군왕이 뒤에 있는 경왕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경왕을 흔들어 깨워 데려왔는지, 경왕은 마차에서 또 잠들어 있었다.

금군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저하는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무엄하구나. 경왕이 어찌 입궁할 수 없단 말이냐?”

진안 군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전하, 경왕은 입궁하실 수 있지만, 전하는 안 되십니다. 경왕께서 기어이 입궁하셔야겠다면, 전하는 마차에서 내려 기다리십시오.”

금군 대장이 느릿느릿 말했다.

“경왕께서 어찌 혼자 입궁하신단 말이오!”

진안 군왕의 마차 옆에 있던 내시가 따지고 나섰지만, 돌아온 것은 금군의 더 삼엄한 경계일 뿐이었다. 황궁의 경계는 황제에게 일이 생겼을 때 가장 삼엄해지기 마련이니까.

진안 군왕은 육중하게 닫힌 궁문을 바라보았다. 겨울밤 궁문 안은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진안 군왕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휘장을 내렸고, 마차는 천천히 말 머리를 돌려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잠시 좀 걷고 싶구나.”

마차 안에서 갑자기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를 깼다.

“전하, 지금은 아니 되옵니다.”

내시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창밖을 쳐다보는 진안 군왕을 보며 나지막이 고했다.

“응, 안 되는 거 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진안 군왕이 말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갑자기 병이 나시다니!

그때 뒤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휘장을 쥐고 있던 진안 군왕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무탈하시다 하옵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말소리에 진안 군왕은 천천히 눈을 감고 긴 한숨을 토했다.

“사실, 무탈하실 줄 알았다.”

진안 군왕이 불쑥 입을 열자 내시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궁에서 정 낭자를 안 불렀잖느냐.”

그러니 죽을병은 아니셨던 게지.

“전하, 지금은 농담하실 때가 아니옵니다.”

내시가 입을 삐죽거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진안 군왕은 잠시 미소를 짓다가 표정을 수습하고 천천히 말했다.

“이번엔, 좀 늦긴 했어도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다음번엔?”

“다음번에도 가능할 겁니다. 우리 사람은 충분합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하지만, 소식을 안다 해도 우리가 들어갈 수 없지 않느냐.”

그랬다. 그건 궁에서 나온 대가였다. 황궁은 낡고 진부하여 숨 막히고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곳이었다. 그 안에 있을 땐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을 치지만, 일단 나오고 나면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일보다 어려웠다.

진안 군왕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마차 안에 잠든 경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겁먹지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내시가 또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겁먹지 말라고······.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실은 너무나도 무서웠으니까.

그랬다.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진안 군왕은 무서웠다. 특히 궁문 앞에서 막혔던 그 순간엔 더더욱.

이번엔 괜찮다지만 다음번엔? 그땐 누가 장담하지?

마차는 어둠을 헤치며 흔들흔들 달려갔다.

황제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은 밤새 빠르게 퍼져 나갔다. 수많은 집의 등불이 잇달아 켜지고, 무수한 시선이 황궁을 향했다.

다행히 날이 밝을 즈음, 황제가 무탈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회는 평왕의 주재로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조회는 특히 무미건조하게 진행됐다. 대신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황제의 용태뿐이었다.

궁에서 하룻밤을 보낸 진소와 중신 몇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기쁨과 분노가 겹쳐져 기혈이 제대로 통하지 못했을 뿐 옥체는 무탈하시다는군.”

진소가 말했다. 이어서 태의국 사람도 나와 황제의 건강을 확인해 주었다. 오후부터는 황제를 알현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용상에 앉아 내시가 먹여 주는 약을 먹는 황제를 보고 나서야 다들 한결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다들 보시구려. 어젯밤에 당도한 급보요.”

황제는 목소리도 맑고 정신도 또렷해 보였다. 신하들은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탁자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황제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게 만든 급보가 놓여 있었다.

“무평 지역에서 민란에 가담하는 세력이 늘어나 왕을 자청하며 노강성(盧江省)을 공격했다는군. 노강 현령은 물러서지 않고 성을 사수하며 관인을 끌어안고 집을 불태운 후 집안 식구 열여덟 명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고.”

“그랬군.”

같은 시각 역참에 있던 고능준 역시 급보의 내용을 필사한 내용을 보고 받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폐하는 정말 괜찮으신 게냐?”

고능준이 물었다.

“네. 당시 폐하께서 급보의 내용을 다시 한번 말씀하기도 하셨답니다.”

측근의 말에 고능준은 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강건한 모습을 보여 주고자 신하들 앞에서 일부러 그러셨군.

“이 대체 무슨 일이냐!”

고능준이 급보를 탁자 위로 던지며 소리쳤다.

“가서 그자들에게 전하거라. 다음번엔 적당히 하라고. 저들은 급보를 올려 날 경성에서 내쫓고 나라에 공을 세웠다는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우리는 급보를 올려 하마터면 폐하를 돌아가실 뻔하게 했으니, 그 죄가 극악무도하지 않느냐.”

측근이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일이 이리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측근은 고개를 숙였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기도 하고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황제가 그 정도 충격도 못 받아들일 줄 누가 알았을까. 겨우 이 정도도 못 버틴다고?

“태의는 뭐라더냐?”

고능준이 멈칫하는 표정을 지으며 불쑥 물었다.

“태의 말로는 기쁨과 분노가 교차하며 기혈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합니다. 각혈을 하신 것도 별일 아니고요. 오히려 피를 토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된답니다.”

측근은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미 확인했습니다.”

고능준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인,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다.”

고능준이 손을 들었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길을 재촉해 서둘러 망주(望州)로 가야지.”

측근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뒤돌아 나가려 했다.

“그리고, 저들에게 전해라. 이번 재해를 빌미로 진안 군왕을 경성에서 내보내고 나면, 나머지 일은 잠시 제쳐 두라고. 지금 가장 시급한 건 태자 책봉이다.”

고능준이 재차 당부하자 측근이 네 하고 대답했다.

-이제민 구제-

정월이 지나자 황제는 정상적으로 조회에 참석했고,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날 밤 일도 차츰 잊혀졌다. 사실 울화가 치밀어 각혈을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점점 더 크게 번져 갔다.

“이재민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민란을 일으킨 역당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소이다.”

조당의 싸움도 날로 치열해졌다. 황제는 손을 뻗어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저들이 말하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야. 이재민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역당 세력이 힘을 받고 있지. 하지만 지금은 그걸 얘기할 때가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해결할지 논하는 게 핵심이지.

“무평의 이재민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죄를 물으시옵소서.”

“민란부터 평정하심이······.”

“누구를 보내야 하겠소이까?”

끊이지 않는 논쟁 속에서 돌연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신이 가겠나이다.”

젊은 목소리였다. 모두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앞으로 나서며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진안?”

황제가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웬 말썽이냐?”

“폐하, 말썽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신이 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신이 아직 나이가 어려 중임을 감당할 수 없는 건 압니다. 신 역시 중임을 바라진 않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이재민을 구제할 문신과 반란을 평정할 무장을 고르실 때까지, 신이 폐하를 대신해 무평으로 가 백성을 위문하고 역당의 세력을 진압하겠나이다.”

하긴. 반란이 일어나면 황제나 태자가 친히 출정하곤 했지. 지금 같은 때에 황족이 무평으로 간다면, 재해를 겪고 있는 백성은 큰 위로를 받을 테고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두려움에 떨게 될 거야.

조당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허튼소리 마라! 진소, 서둘러 구휼을 시행하고 반란을 평정할 이를 인선해 사흘 내에 짐에게 보고하시오. 다들 그만 퇴청하시오!”

황제가 퇴청하자 대신들도 무평으로 갈 대신을 논하기 위해 조당을 나왔다. 조당을 나오던 이들 중 두 대신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두 대신이 다시 앞쪽을 쳐다보았다. 젊은 군왕이 다른 대신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내시가 군왕을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가 진안 군왕을 부르는 눈치였다.

“전진을 위한 후퇴인가?”

대신 하나가 나지막이 말하자 다른 대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지금 같은 때에 이런 장난을 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닌데.”

“정말 가려는 것 같소?”

먼저 입을 연 대신이 놀라 물었다.

그게 말이 되나.

하지만 사흘 후 나온 황제의 공식 발표는 말이 안 되는 그 일을 사실로 입증해 주었다. 진안 군왕은 초무사(招撫使) 신분으로 떠나게 되었다.

“천지신명께서 도우셨구나. 앓던 이가 빠진 듯 후련해.”

소식을 들은 귀비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환히 웃었다.

“역시 고 전시가 일을 제대로 대비해 놓고 갔구나. 자기가 떠나자마자 바로 쫓겨나게 하다니. 고 전시의 작품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인사할 건 해야지.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하거라.”

잠시 머뭇거리던 궁녀가 입을 열었다.

“마마, 두 분 대인이 그러시는데, 이번 일은, 그분들이 하신 게 아니랍니다.”

귀비가 멈칫했다.

“무슨 말이야?”

“소인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하셨어요. 본디 군왕이 지난번에 폐하 앞에서 구휼이 우선이라는 말씀을 올린 걸 문제 삼아 일을 키우려 했는데, 대인들께서 입을 열기도 전에 군왕이 초무사로 가겠다고 자청했답니다.”

자청을 했다고?

귀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생각이지? 공을 세우고 싶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무려 경성을 떠나는 일이라고! 무려 반란을 평정하러 가는 일이란 말이다! 혹여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공이고 명성이고 아무 의미도 없게 되는데.

“전하, 지금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아십니까? 정녕 전하의 뜻이란 말씀입니까?”

경왕부. 경왕의 병을 보러 온다는 핑계로 방문한 이 태의가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폐하를 설득하느라 애를 좀 먹었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 내가 틀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구휼을 시행하여 재해에 관한 걱정이 사라지면 백성이 안심할 줄 알았는데, 한번 불안해진 마음을 위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돈과 곡식을 풀어도 난민이 점점 많아지는 상황이니 내가 틀렸죠. 그래서 직접 가 보고자 합니다.”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떻습니까? 이유가 그럴듯하죠? 폐하께서도 얘기를 듣더니 동의하셨어요.”

“전하의 말재주를 누가 당해 내겠습니까.”

진안 군왕은 이 태의의 말에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들었다.

“하온데, 전하.”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4년 전 산길에서 야밤에 늑대 떼를 만난 일을 잊으셨습니까?”

“4년 전이요?”

찻잔을 손에 쥔 채 비스듬히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돌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진지해진 군왕의 표정을 보며 이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 여인을 만난 지도 곧 4년이 다 되었군요.”

이 태의는 멈칫하더니 곧 분노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전하, 지금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태의가 불쾌한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경성을 떠난 후 맞닥뜨리게 될 위험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황자들이 아직 어렸던 4년 전에도 궁을 나갔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황자 하나는 어느덧 장성했고, 다른 하나는 병으로 불구의 몸이 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지금이었다. 황제의 병세가 호전되었다고는 하나 정세는 아직 불안했다. 이런 때에 경성을 떠난다니, 그것도 그 먼 곳으로 간다니, 게다가 이재민을 구제하고 반란을 평정하러 간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나도 진지한 얘기를 하는 중입니다.”

진안 군왕은 자세를 바꿔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을 안 지 벌써 4년이에요. 그 여인이 없었다면, 내가 죽은 지 4년은 되었겠네요.”

이 태의가 불길한 소리 말라는 듯 퉤 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전하는 하늘이 보우하시는 분인데 돌아가시다니요. 그 여인이 아니었어도 다른 누군가가 있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그 여인뿐이죠.”

진안 군왕의 단호한 표정에 이 태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미련을 보이시면서, 어찌 경성을 떠나신단 겁니까?”

“미련을 보이긴요. 이 태의, 그 나이에 참 이상한 생각도 잘하십니다.”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자 이 태의는 어이가 없는 듯 눈을 흘겼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들은 남을 이상하게 본다니까.

입만 열었다 하면 그 낭자 얘기뿐이면서. 무슨 생각인지는 바보가 봐도 훤히 알겠는데, 누굴 속이려고!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더니 곧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은 그 낭자를 생각할 때가 아니지.

“전하, 폐하께서 병환이 도지셨으니, 이번 기회에 경왕과 함께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 태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손을 내저으며 이 태의의 말을 잘랐다.

“궁으로 돌아가도 소용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문밖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궁 안도, 더 이상 내게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전하, 폐하는 무탈하십니다. 설령 훗날······ 아무튼 태후마마도 계시잖습니까.”

“그러면 뭐요? 태후께서 귀비보다 오래 계시겠습니까? 평왕보다 오래 계시겠습니까?”

진안 군왕은 웃으며 다시 이 태의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이 대인이 방도를 생각해 보세요.”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하, 저는 태의입니다. 병자를 고칠 뿐이지요.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이 태의가 느릿느릿 말하자,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압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당초 이 태의도 날 구하지 않았겠죠. 그 많은 이들이 다들 날 못 구한다고 했는데.”

이 태의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잘랐다.

“그건 별개의 일입니다. 전하의 병은 고치기 힘든 병입니다. 저 말고는 못 고쳐요.”

진안 군왕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압니다. 이 대인은 마음이 착하고 의술도 고명하죠.”

웃음을 터트리는 눈앞의 젊은이를 보며 이 태의는 만감이 교차했다.

언제 이리 장성하셨을까.

부왕, 부왕, 구해 주세요.

침상 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가 눈앞에 보였다. 중얼거리는 그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이 태의는 차마 아이를 뿌리치고 나갈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 멀리 떠나시면, 무탈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진안 군왕은 웃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런데 난 ‘어쩌면’ 같은 말이 싫습니다. 남한테 결정권이 있고, 난 그저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래도 절반의 기회가······.”

“귀비와 평왕이 날 죽이지 않을 기회요?”

진안 군왕이 돌연 언성을 높였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봄처럼 따스하던 실내에 찬 바람이 몰아쳤다.

저분은 군왕이야. 내 앞에서 몇 번이나 생사를 넘나든 병약하고 힘없는 존재지만, 어쨌거나 황실의 혈통이 흐르는 귀한 분이지.

이 태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하, 말씀을 삼가십시오.”

이 태의가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들이 내게 그런 기회를 주길 바라고 기대하진 않을 겁니다.”

군왕의 냉랭한 목소리가 정수리를 때렸다.

“두렵습니다.”

돌연 군왕의 목소리가 바뀌며 분위기가 변했다.

두렵다고?

이 태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젊은이의 시선은 문밖을 향해 있었다. 2월 어느 날 오후의 햇빛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오며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네, 두렵습니다. 그날 밤 궁문 밖에 서서 어둠 속에 있는 캄캄한 황궁을 보고 있노라니 두려웠습니다.”

“경성을 떠나 마주할 일들보다도, 야밤에 늑대 떼를 만나는 위험천만한 일들보다도 두렵습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 태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을 떠나면 벌어질 일들은, 내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칼을 쥘 수 있으니까요. 칼을 들이밀면 칼로 막고, 화살을 쏘면 화살로 막으면 됩니다. 저들이 날 죽이려 들면 나도 저들을 죽이면 되고요.

하지만 그날 밤엔, 그저 황궁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손엔 칼이 있었지만 아무 힘이 없었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어요.”

이 태의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진안 군왕은 팔을 활짝 벌리고 긴 소매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두려운 건 위험이 아닙니다. 위험은, 익숙하니까요. 내가 진정 두려운 건 위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이죠.

그래서 차라리 궁을 떠나 기습과 살육의 위험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경성에서 안온하게 지내고 싶지만은 않기도 하고요. 그랬다간 언젠가는 영문도 모른 채 궁으로 불려가, 옥좌에 앉은 평왕을 보게 되고 말 겁니다.

난 다섯 살에 영문도 모르는 채 입궁했고, 영문도 모르는 채 부모님과 작별해야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사랑을 받고, 영문도 모르는 채 버려졌죠.

이번엔, 더 이상 영문도 모르는 채 가만히 기다리지만은 않을 겁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사실 사소한 일들뿐이었어요. 남에게 기대어 살다가는, 그날 밤처럼 일이 생겨도, 난 입궁할 자격조차 없겠죠.”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은 웃으며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그 여인이 나더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냐고 묻더군요. 4년 전이랑 똑같아요. 그때도 그 여인의 조언 덕분에 목숨을 건졌죠. 그 여인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이 태의가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들었다.

“전하, 정 낭자가 전하를 도울까요?”

“날 돕는다고요? 그 여인은 늘 나를 도와줬습니다. 아, 아니지, 아주 많은 사람을 도왔어요.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이죠.”

“전하,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잖습니까!

그 여인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면, 예를 들어 그 여인이 능하다는 신비한 비술인지 뭔지를 써서 귀비와 신황이 전하를 두려워하고 해치지 않도록······.”

진안 군왕은 다시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웃음을 거둔 후 이 태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대인, 방금 이 대인은 마음이 착하다고 했는데.”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의 시선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초조한 투로 말했다.

“착하지만, 아둔하진 않습니다. 전하를 두 번이나 해치려 하고, 친아우를 죽이려 했다는 약점을 잡힌 이를 그 여인이 감화할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모종의 방법으로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일 수 없도록.”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마음이 놓이는 일이자 가장 무서운 일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뿐이죠.”

진안 군왕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얼굴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하지만 이 태의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이건 내 일입니다.

그 여인의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가서 말할 겁니다. 떳떳하게 말할 거예요. 다만 이 일은, 나와 다른 이의 은혜와 원한, 생과 사가 걸린 일일 뿐 그 여인과는 무관합니다. 그 여인이 알 필요도 없고, 날 도울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 대인과 마찬가지죠.”

나?

이 태의가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대인한테 내 병을 고쳐 달라고, 내게 약을 지어 달라고 했죠. 그뿐입니다. 그건 내게 국한된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은, 이 대인이나 정 낭자와 무관합니다. 이번 생사는 두 사람과 무관한 일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두 사람한테 불공평하죠.”

이 태의는 잠자코 진안 군왕을 바라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이 세상에 공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죠.”

이 태의는 잠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다가 결국 긴 한숨을 토한 후,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럼 오늘, 이 이수(李修)는 전하께서 긴 여정을 무탈하게 마치고 개선하시길 바라며 인사 올리겠습니다.”

이 태의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만사형통하시길 바라옵니다.”

무평에 가겠다고 황제를 설득했으니, 나머지 사람들을 설득하긴 쉬웠다. 문제는 경왕에 관한 일이었다.

“경왕부에 두겠다니?”

태후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마마.”

진안 군왕이 한쪽 무릎을 꿇고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경왕으로 책봉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경왕부에 있어야죠.”

“그런 말은 집어치워라! 그 애는 경왕이고, 애가의 육가아기도 해.”

“마마.”

진안 군왕은 태후의 팔을 끌어안았다.

“마마께서 육가아를 아끼신다면, 궁 밖에 있게 두세요. 경왕부는 밝고 탁 트여 있습니다. 육가아가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소손이 커다란 연무장을 만들어 주었거든요. 거기서 육가아를 돌볼 이들도 많이 있고요.”

“허튼소리. 황궁엔 그런 게 없다더냐?”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마마, 경왕은 궁 밖에 있어야 자유롭게 지냅니다.”

“이 궁에서 누가 감히 그 애의 자유를 빼앗는단 말이냐!”

태후는 진안 군왕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진안 군왕은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며 놓지 않았다.

“마마, 경왕은 다른 사람이 자유롭지 않은 걸 원치 않을 겁니다.

마마, 경왕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황궁에 있든 경왕부에 있든 광활한 황야에 있든 경왕한텐 다 똑같아요. 마마, 다 똑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라요. 누이들도 이제 다 컸고 안비마마는 회임을 하셨습니다. 폐하는 정사를 돌보느라 늘 바쁘시죠. 마마, 가뜩이나 신경 쓰셔야 할 일이 많은데, 경왕까지 폐를 끼치게 할 순 없습니다.”

태후가 또다시 눈물을 보였다.

“너도 참, 육가아가 무슨 폐를 끼쳐.”

진안 군왕을 뿌리치려던 태후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래, 공주들이 다 컸지. 봄이면 여기저기 뛰놀며 장난치기 좋을 거야. 안비도 회임을 했으니 차츰 몸이 무거워질 테고. 황상은 병도 있고 정사로 바쁘니······.

“마마, 마마께서 계시는 한 경왕은 어디에 있나 잘 지낼 겁니다.”

진안 군왕이 태후의 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손이 정 낭자한테도 부탁했거든요.”

정 낭자?

“뭘 부탁해? 경왕을 고쳐 주지도 않겠다는데.”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마, 고쳐 주지 않는 게 아니라, 고칠 수 없는 겁니다.”

진안 군왕이 태후의 말을 교정해 주자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무슨 부탁을 해!”

“고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의술에 정통하잖습니까. 신비한 비술도 알고요.”

진안 군왕이 헤헤 웃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태후는 또 콧방귀를 뀌었다.

“액막이를 하겠단 말이냐?”

태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마마,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애가는 여인일 뿐 군자가 아니니라.”

“마마, 소손을 놀리지 마십시오.”

태후는 진안 군왕을 노려본 후, 못 말리겠다는 듯 진안 군왕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너도 참. 누굴 닮아 그리 성격이 괴팍한지 모르겠구나. 편히 지낼 수 있는데 굳이 고생을 자처하겠다니.”

“폐하께서 말씀하셨어요. 소손은 태후마마를 많이 닮았다고요.”

진안 군왕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태후가 마침내 웃음을 터트렸다. 한바탕 웃고 난 태후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옆에 시립해 있던 궁인들을 보며 명했다.

“너희들이 경왕부로 가거라. 애가를 대신해 경왕을 잘 돌봐야 한다.”

궁인들이 얼른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이것 봐. 아쉬우니 어쩌니 해도 그런 건 없어.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궁인들을 불러 당부하는 태후를 바라보는 진안 군왕의 입가엔 시종일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굳어 있는 듯 딱딱한 웃음이.

“아씨, 아씨.”

다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온 반근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사환에게 건네는 것조차 잊은 채 대청 쪽으로 뛰어갔다.

“왜 아씨께 경왕을 돌봐 달라고 했는지 알아냈······.”

회랑 아래로 달려온 반근의 목소리가 우뚝 멈췄다. 대청에는 정교랑과 범강림 외에 젊은이도 하나 앉아 있었다. 그가 반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멀리 떠나야 해서 그런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반근이 차를 올렸다.

“그런데 오늘은 왜 여기에 와 있습니까? 정말 대단한 우연이네요.”

진안 군왕이 찻잔을 들며 묻자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우연이죠.”

“제가 집에서 같이 밥 먹자고 누이를 불렀습니다.”

범강림의 말에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돌려 대문 밖을 쳐다보았다.

“다들 새 옷을 입었군.”

진안 군왕이 시립해 있는 사환과 몸종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집안에 무슨 경사라도 있소?”

정교랑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 듯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범강림이 멋쩍어하며 미소를 지었다.

“네, 아이 생일이라서요.”

“큰 도련님, 그럼 진작 말씀하시죠. 저희는 빈손으로 왔잖아요.”

범강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애인데 무슨 생일을 챙겨. 그냥 다 같이 식사나 한 끼 하는 거지. 그런 말 마.”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난 빈손으로 온 게 아닌데.”

그가 향낭에서 무언가를 꺼내자 범강림이 얼른 예를 표했다.

“어찌 감히요. 당치 않습니다.”

“귀중한 건 아니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물건을 밀어 주었다.

“마침 두 개를 사서 말이오. 하나는 돌아가서 경왕한테 줘야지.”

범강림이 고개를 들었다. 반근도 뭔지 궁금한 듯 목을 빼고 쳐다보았다.

“호루라기인데······.”

호루라기는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지만, 때때로 선물이란 얼마나 귀중한지보다 누가 선물했는지가 중요한 것이었다. 진안 군왕 같은 귀인이 준 선물은 아무리 가벼운 것일지라도 천금처럼 귀했다.

더구나, 경왕을 주려고 산 것이라지 않았던가. 범강림은 황급히 예를 표하며 사양했다.

“받아 둬요.”

정교랑이 말했다. 다시 한번 사양하려던 범강림이 말을 바꾸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반근, 아이에게 갖다 줘.”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호루라기를 들고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진안 군왕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내가 태후와 폐하께 말씀을 드려 놨어요. 그럼 경왕은 낭자한테 부탁 좀 하겠습니다. 자주 갈 필요는 없고요. 경왕부는 황궁에서 보낸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 나서서 도와주기만 하면 충분하죠.

정교랑과 범강림도 배웅하려고 일어났다.

“전하,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범강림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범강림을 쳐다보며 웃었다.

“아니오. 모레 떠나야 하니 경왕 곁에 있어 줘야지.”

범강림이 얼른 예를 표하며 알았다고 했다.

“전하,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과 범강림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내실로 들어갔던 정교랑이 작은 함을 들고 나왔다.

“전하, 절 따라오세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웃으며 따라갔다. 두 사람이 뒷마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범강림도 같이 가려고 했지만, 옆방에 있던 황씨가 고개를 내밀고 범강림을 불렀다.

“전하께서 식사하고 가신대요?”

황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범강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강림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무렵, 정교랑과 진안 군왕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범강림은 따라가지 않았다.

“요즘 잘 지내죠?”

진안 군왕이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는 여인을 보며 물었다.

“잘 지내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전하는 잘 지내셨어요?”

“네.”

미소를 짓던 진안 군왕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이제 초무사가 됐으니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잖습니까. 내가 군과 관리들을 이끈다고요. 물론 대부분의 경우엔 장식에 불과하겠지만.”

정교랑도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함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아, 이건 그······.”

진안 군왕이 뭔지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던 날,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죽통이었다.

그때 얼핏 보기도 했고 정교랑이 소매로 가려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평범한 죽통으로 보이진 않았다. 죽통 앞쪽에는 구리통도 달려 있었다.

이게 뭐지?

하지만 이번엔 입을 열어 묻지 않았다.

“전하께 드리는 작별 선물이에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작별을 고할 땐 아무 말 없더니.

“거짓말. 호루라기에 대한 답례면서.”

“그것도 작별 선물이잖아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대꾸했다.

“떠나면서 준 거니까요?”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대답을 마친 정교랑이 죽통을 들더니 함 속에서 기다란 종이를 꺼내 통 속에 넣었다. 진안 군왕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동작을 지켜보았다.

“이게 뭐예요? 이것도 장난감이에요? 불면 소리 나나?”

진안 군왕이 웃으며 물었다.

“네.”

정교랑이 손을 들어 한쪽을 겨누며 말했다.

“그런데, 부는 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소리가 나는데요?”

정교랑은 다른 한 손으로 심지에 불을 붙이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렇게요.”

정교랑이 심지에 붙은 불을 죽통에 가져다 댔다.

이렇게?

진안 군왕이 그게 뭔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귓가에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통이 눈앞에서 폭발한 것 같았다. 놀란 진안 군왕이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귀가 웅웅 울리고 몸이 휘청거렸다.

소리가 어마어마하네!

정신을 차린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표정은 태연했고, 손에 쥔 죽통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장난감이 참······.”

웃으며 죽통을 쳐다보고 다시 앞쪽을 쳐다보던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백오십 보 밖에 세워진 과녁이 갈라진 채 쓰러져 있었다.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과녁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화염이 남아 있었다.

백오십 보 밖인데, 저리 누더기가 되다니······.

“진짜 무시무시하네.”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정말 무시무시한 장난감이잖아!

“네, 좀 무섭긴 하죠. 이거라면 폭도와 정면으로 맞서게 됐을 때, 상대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할 거예요. 그럼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이 시큰해졌다.

전부 다, 알고 있구나.

이재민을 구제하고 반란을 평정하러 가는 이 길에, 암살과 음해 또한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는 말하지 않았고, 그녀는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빈말이라도 걱정하는 척 안부조차 건네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것을 주었다.

정교랑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멍한 채로 아무 말 없이 있자 영문을 모르는 듯했다.

“놀랐어요?”

정교랑이 손에 든 죽통을 들고 흔들었다.

“이건······.”

정교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있던 젊은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를 확 껴안았다. 낯선 호흡이 순간 그녀의 몸을 감쌌다.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싫어하는 정교랑이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을 때조차도 기껏해야 반근 한 사람만 시중을 들 뿐이었고, 그 시중이라는 것도 어깨를 주무르거나 옷자락을 정돈해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껴안은 것이다. 그것도 남자가.

낯설고, 단단한, 그 기분과 호흡.

순간 정교랑의 몸이 굳었다.

여인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반근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지르면 안 돼, 소리 지르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면 누가 보잖아. 그럼 아씨의 정조가······.

그 짧은 비명 소리에 진안 군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제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 손을 풀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나, 난, 난 그, 그냥······.”

진안 군왕이 말을 더듬었다.

“고마운 마음에······.”

반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고마워? 이런 식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법이 어디 있어?

호색한 같으니라고, 이유도 참!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했다.

“감사할 것 없어요. 답례라고 했잖아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반근이 발을 굴렀다.

저 호색한의 같잖은 이유만 탓할 것도 없네. 아씨는 무례한 일을 당했으면서 어찌 저런 괴상한 생각을 하시지?

분위기가 이상해지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안 군왕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더듬거렸다.

“호루라기 하나를 이렇게 좋은 물건과 바꾸다니. 그, 그러니까······.”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섞여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코에 감도는 여인의 맑은 향내 때문인가. 그리고 방금 그 이상하고 부드러운 느낌도······.

허튼 생각 하면 안 돼!

머리를 세차게 흔들자 머릿속에 호루라기가 떠올랐다. 진안 군왕은 반사적으로 향낭에 손을 넣어 나머지 하나를 꺼냈다.

“저기, 이건 낭자한테 주는 거예요.”

반근은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고는 손에 든 죽통을 함에 넣었다.

“여기 탄환이 네 개 더 있어요. 이렇게 탄환을 통 안에 넣어 쓰면 돼요.”

정교랑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여기 심지에 불을 붙이면······.”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이 고개를 들자,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의 진안 군왕이 보였다.

“조심해요. 이 장난감은, 잘못 갖고 놀면 자신이 다쳐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진지한 얼굴로 앞으로 다가와 섰다.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보여 줘요.”

고개를 숙인 채 시범을 보이는 낭자와 가까이 서서 진지하게 보고 듣는 소년을 보며 반근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아, 내가 방금 본 무례한 행동은, 환각이었나?

일가를 데리고 나와 진안 군왕을 배웅하고 난 범강림이 고개를 돌려 반근을 쳐다보았다.

“반근, 왜 그래? 얼굴이 좀 이상한데?”

반근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요.”

반근의 대답에 범강림이 한숨을 쉬었다.

“이노야 내외도 참······.”

그런 일을 당했는데, 근심이 안 될 수가 없지.

그때 마당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보니, 황씨의 품에 안긴 아이가 호루라기를 불며 새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는 관심이 쏠리자 기분이 좋은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고, 아이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도 웃음을 지었다.

새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계속 마당을 맴돌았다.

“그래, 그래. 밥부터 먹자. 밥 먹고 또 불어.”

황씨가 아이를 어르며 말했다. 모두가 대청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다시 새소리가 들렸다.

“어허!”

아이를 맡기고 걸음을 옮기던 황씨가 아이를 혼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유모의 품에 안긴 아이의 입과 손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고개를 흔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거, 내 거.”

자신의 호루라기를 빼앗긴 줄 아는지 아이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어린 몸종이 얼른 달려와 호루라기를 건넸다.

저 애가 부른 게 아니었나?

황씨가 멈칫하는 사이, 또다시 새소리가 들렸다. 뒤쪽에서 걷고 있던 정교랑이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입에서 호루라기를 뗐다.

“나도 있어.”

정교랑이 손에 호루라기를 들고 아이를 향해 흔들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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