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75)

반근은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참 잘된 일이네. 전하께 이 소식을 알려 주어 감사하다고 전해 주게.”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반근, 드려.”

시녀는 잠시 멈칫했다가, 곧 정교랑의 말대로 돈주머니 한 개를 꺼내 내시에게 건넸다.

정말로 돈을 주네?

내시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손에 들린 돈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내시가 떠난 뒤, 방 안으로 들어온 반근이 무릎을 꿇고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씨, 이번엔 또 황궁에서 무슨 일에 휘말리신 거예요?”

반근이 물었다.

“또라니 무슨 말이지?”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후께서 왜 그런 말씀을…….”

반근이 초조한 투로 말했다.

“그건 태후의 일이니, 나는 몰라.”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아씨, 정말로 이 일이 좋은 일인가요?”

이번에는 시녀가 물었다.

“태후께서 날 위해 직접 나서서 권력에 빌붙는 비천한 자들을 걸러 주신다는데, 좋은 일이고말고.”

정교랑이 대답했다.

아, 그런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시녀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 소인이 또 속물처럼 굴었네요.”

“네가 속물인 게 아니고, 세상 사람이 속물인 것도 아니야. 단지, 모를 뿐이지.”

말을 마친 정교랑은 안쪽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고 은색 빗과 비녀를 뺐다. 비녀를 빼는 동시에, 정교랑의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그녀가 누군지 몰랐다.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건 그녀가 원하고 바라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몰랐고, 이곳의 희로애락이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 또한 몰랐다.

“언니, 진짜 별일 아닌 거 맞아?”

반근이 시녀의 소매를 붙잡고 조용히 물었다.

“아씨께서 오매불망 좋은 집안과 혼례를 올리고 싶어 하던 분이라면 문제가 되겠지. 그런데, 네 생각에 아씨가 그런 분이야?”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반근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좋은 집안은커녕 왕십칠 공자 같은 이와의 혼사도 개의치 않으셨어.

“애초에 아씨께서는 혼사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으신데, 안 좋은 일이라고 할 건 없지. 정말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은 제 발 저려 혼담을 넣지 못할 테고, 그 오명을 쓰기 두려워하는 사람들 또한 아씨의 좋은 신랑감이 되기는 진작에 글렀어. 태후의 말씀 덕분에, 별 시답잖은 사람이 아씨께 혼담을 넣으러 오는 일을 깔끔히 막은 셈이야. 그럼 정정당당하게 아씨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만 혼담을 넣으러 올 수 있겠지. 그런데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입을 떡 벌린 채 시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반근이 활짝 웃었다.

“어휴, 괜히 깜짝 놀랐네.”

반근은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난 그럼 밥하러 갈게.”

시녀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반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시녀가 웃음기를 거두고 중얼거렸다.

“세상에 정말 그런 좋은 사람이 있을까?”

과거에 몹쓸 병을 앓은 것을 개의치 않고,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명망을 이용하려 들지 않고, 황제의 의심과 온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나!”

관청 안, 고능준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요. 천하가 이리 시끌시끌한 것은, 제 이익만 챙기려는 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인데 말입니다.”

수하가 고능준에게 차를 따라 주면서 맞장구쳤다.

“그래서 남을 기만하면, 필시 남도 나를 기만하게 된다는 것이야. 그러게 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잘난 체를 해댔을까. 잘 두고 보게나. 지금은 겨우 시작일 뿐이니.”

고능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다급한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들어오는가!”

수하가 황급히 호통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숨을 헐떡이며 조심스럽게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능준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근정전에서 당직을 서는 하급 관리였다.

고능준은 웃음기를 거두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신 게냐?”

고능준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하급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능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귓속말을 듣던 고능준은 흠칫 놀라나 싶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자가 참 빨리도 왔구나.”

태후와 진안 군왕, 고능준 그리고 정교랑이 기뻐하는 사이, 근정전에 있던 황제만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원래는 황제도 기분이 좋았다. 몇 년간 타지에서 고생한 판관에게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을 전하려던 황제는 입을 떼기도 전에 그 판관으로부터 질타를 당해야 했다. 정사를 등한시하고 한가하게 유희를 즐겼다면서.

황제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몸이 좋지 않아, 어릴 때든 장성해서든 제대로 유희를 즐겨 본 일도 없는데, 그런 비판을 받자 기분이 나쁜 한편 쓴웃음이 나왔다.

풍림이 이번에 경성으로 돌아온 것은 황제가 그를 어사중승으로 임명하여 어사대의 권력을 쥐여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풍림이 가장 먼저 질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천자 자신이었다.

“알겠소.”

황제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저으며 화제를 바꿨다.

“어사중승 직에 부임하는 것은 그리 급한 일이 아니오. 그간 타지에서 고생 많았소. 경조부에서 관저를 마련했으니 우선 식솔들부터 데려와 챙기시구려. 곧 새해 명절이 돌아오니 가족 간의 정도 돈독히 쌓고.”

황제가 인자한 성군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성은이 망극하오나, 신은 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풍림이 예를 올리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뜻한 말을 몇 마디 더 해 주려던 찰나,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신은 대리시에 명해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하고, 감히 백성을 인질 삼아 천자를 협박하여 의형제의 공로를 인정받고, 조정에 당파를 만들고, 국법을 우습게 여기고, 저 자신을 성인이라 칭한 강주 정씨 여인을 조사하고, 징벌로 다스릴 것을 청하옵니다.”

풍림이 엄숙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문밖에 서 있던 어린 내시는 혈색이 돌아오기도 전에 또다시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징벌로 다스리다니!

아이고, 세상에나. 누가 귀판관 나리 아니랄까 봐! 저 판관의 붓끝에서 죽어 나간 사람이 몇이나 되던가. 저 판관이 지나가는 곳마다 귀신의 곡소리가 들린다더니, 이번엔 상경하자마자 신선의 제자인 정 낭자까지 건드리네!

  •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하고, 감히 백성을 인질 삼아 천자를 협박하여 의형제의 공로를 인정받고, 조정에 당파를 만들고, 국법을 우습게 여기고, 저 자신을 성인이라 칭한 강주 정씨 여인을 징벌로 다스릴 것을 청하옵니다.

신임 어사중승 풍림이 황제를 알현하자마자 내뱉은 일성은 바람처럼 온 경성에 퍼져 큰 파란을 일으켰다.

“풍림이 드디어 미친 게야? 정 낭자는 어쩌다가 풍림의 성질을 긁었다더냐?”

진 노태야가 경악하며 물었다.

“자신이 틀리면 스스로 번개를 불러와 벼락을 맞아 죽겠다며 폐하와 내기하고, 칠현금 연주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연주가 아니라는 요사스러운 말을 내뱉은 죄. 무원산 술을 빚어 온 경성 사람들의 열광을 이끌어 내며 백성을 현혹한 죄. 평민 백성의 몸으로 황제와 태후, 그리고 진안 군왕과 교분을 맺은 죄. 의형제의 억울함을 푼 후에야 신비궁을 바치고, 의형제들의 도움이 있어야 다른 병기들을 생각해 낼 수 있다고 말한 죄. 조정 대신들을 이용해 편을 가르고…….”

진소가 말끝을 흐리자, 진 노태야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널 두고 하는 말인 게냐?”

진소가 쓴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는 죄는 또 뭐고? 자신을 성인이라 칭한 죄는 무슨 소리야?”

진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 낭자의 언행 자체가 법도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 합니다. 또 정 낭자가 스승 없이도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을 깨우친 성인이라고 내시들이 떠드는 말을 들었답니다.”

진소가 대답했다.

“죄다 터무니없는 헛소리로구나!”

진 노태야가 찻잔을 탁자 위로 내동댕이치고는 버럭 화를 냈다.

“정 낭자가 언제부터 법도를 우습게 여기고, 언제 자기 자신을 성인이라고 칭했다더냐? 그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와전된 이야기야! 풍림 그자가 제대로 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인제 보니 순 엉터리였어!”

“폐하께서도 풍림이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하십니다.”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가 눈을 들어 진소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생각에는 도가 지나치지 않으냐?”

진소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 낭자의 행실을 좋아하진 않지만, 정 낭자가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손뼉을 치며 환호할 정도로 제가 배은망덕한 놈은 아닙니다.”

진 노태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명성이 날로 높아지니 어찌할 도리 없는 일이긴 하지. 게다가 정 낭자에게 벌어진 일들이 워낙 눈에 띄기도 했고.”

“일단 사태가 좀 진정되긴 했지만, 풍림 그자는 보통 완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관청에서 언제쯤 조사를 시작하나 벼르고 있을 테지요.”

진소가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전부 멋대로 추측한 것일 뿐, 사실과는 다르지 않더냐!”

화가 난 진 노태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조당.

“사실이 아니라고요?”

조복을 입은 풍림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럼 폐하께서는 이 모든 게 사실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 하십니까? 사고가 터지기 전에 경계하여 방지해야 함을, 폐하께서는 정녕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그 여인의 행실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는 폭풍전야나 다름없단 말씀입니다!”

진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풍 중승, 입만 열면 정 낭자가 법도를 우습게 여기고,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하는데, 그 여인이 무슨 화를 불러온다는 말이오?”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고함쳤다.

“성군의 혜안을 가리고, 백성을 술로 유혹함으로써 자신을 추종케 하여 민심을 좌지우지하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이지요. 심지어 그 여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민심을 현혹하지 않았소이까!”

풍림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헛소리는 집어치우시오! 그 여인이 어찌 그런 일을 한단 말이오!”

진소가 강경하게 풍림에 맞섰다.

“진 대인께서도 점괘로 앞날을 예측할 수 있게 되셨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여인이 화를 초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십니까?”

풍림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대신들 뒤에 서 있던 고능준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처음 조당에 들어선 이후로 몇 년이 지났으나, 오늘만큼 즐거운 날은 얼마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풍림이라는 자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오늘 풍림이 보여 준 모습은 부친이 고씨 가문 가산의 절반을 잃게 한 것도 모자라 부친까지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할 뻔한 태창로 조사 사건을 까맣게 잊게 할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능준과 그의 가족들은 매일같이 풍림을 원망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집어삼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둘 다 눈에 거슬리기는 매한가지니, 둘이 개싸움을 벌이다가 조당에서 내쫓겼으면 좋겠군.

가만 보니, 정 낭자가 꽤 쓸모 있네. 그 여인 때문에 서북의 실권을 잃었다지만, 이참에 풍림과 진소를 내 눈앞에서 치워준다면…….

아니지, 아니지. 둘 중 하나만 없애도 충분해. 나 고능준은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야. 많은 것을 탐하려고 하지도, 무턱대고 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지.

“대인의 그 허무맹랑한 추측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정 낭자에 대한 모독이외다!”

진소의 목소리가 조당 안을 가득 메웠다.

“진정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자 했다면, 진작에 신비궁을 내놓았겠지요. 의형제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나서가 아니고! 폐하께서 기강을 어지럽히는 그 여인의 행실을 계속 눈감아주신다면, 천하가 혼란에 빠지는 큰 화가 초래될 겁니다.”

진소가 고함을 치는데도 풍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요부가 아무리 간사하더라도, 조정에서 그 죄를 징벌로 엄히 다스린다면 분명 천하가 그 위엄에 놀라고 백성들도 지혜를 회복할 겁니다. 폐하,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후회하셔도 늦습니다!”

옥좌에 앉은 황제의 안색이 점점 잿빛으로 변해 갔다.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황제의 모습을 본 고능준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풍림이 어떤 자인가?”

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고능준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기녀들의 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고능준이 주위에 앉은 막료들에게 물었다.

“직접 관을 짜서 태창로로 갔던 자야. 한번 물었다 싶으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지. 거북이(王八: 비하의 의미) 같은 부류라니까.”

고능준이 자문자답하자 막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그 거북이가 경성에 돌아오자마자 문 사람이 바로 정 낭자라니. 역시 하늘이 무심하지 않군요.”

막료 중 한 명이 맞장구쳤다.

고능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기녀들의 노래를 들으며 박자에 맞춰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쳤다.

“하늘? 하늘이 무심치 않을 때는 그리 많지 않아.”

고능준이 서신 한 통을 막료들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소경문이 보낸 서신일세.”

머리를 맞대고 서신을 읽은 막료들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사정이 있었군요. 대인께서 일찍이 씨를 뿌려두었으니, 풍림이 경성에 오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정 낭자를 물고 늘어진 거였습니다.”

“역시 대인께서 고명하십니다.”

막료들이 웃으면서 고능준을 치켜세웠다. 다른 막료가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이러니 하늘의 계산은 사람이 세운 계획에 못 미친다는 말이 있겠지요. 사람이 미리 계획을 세워야만 하늘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대인께 한 잔 올립시다!”

막료들이 일제히 술잔을 높이 들자, 고능준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자신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런데 대인, 풍림이 정 낭자가 화를 초래할 거라고 계속 떠들고는 있지만, 만에 하나 정 낭자가 또 신비궁 같은 어마어마한 병기를 황제께 바치면 어쩌지요? 그럼 또 큰 공을 세우는 셈인데, 그래도 풍림이 정 낭자를 해치울 수 있을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졌던 실내가 잠시 조용해졌다.

고능준이 술잔을 들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 낭자가 왜 또 병기를 바쳐? 설마 그사이에 또 의형제를 만들었나? 아니면, 이번에는 가족이 원하는 게 있어서? 주씨 가문의 주육낭에게는 관직을 하사했고, 정씨 가문의 부모도 상을 받아 경성으로 올라오게 됐네. 그 낭자에게 무슨 가족이 더 있고 무슨 청이 더 있겠나?

잊지 말게. 원칙은 그 여인 스스로 정했어. 본인 입으로 한 말이고.

태후 앞에서도 아주 당당하게 나갔다지 않던가. 액막이를 할 게 아니라면 절대 칠현금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스스로 원칙을 깨고 병기를 내놓을 순 없는 노릇이지.

혹 그랬다가는, 아마 풍림이 정 낭자를 더 빠르게 사지로 내몰걸!”

뒤늦게 고능준의 말을 알아들은 막료들은 웃기 시작했다. 막료들의 웃음소리는 실내의 분위기를 다시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힘을 들일 필요가 전혀 없겠습니다. 멀리서 구경할 준비만 하면 되겠어요.”

막료들과 고능준이 호탕하게 웃었다. 기녀들이 아양 떠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문과 창문을 굳게 닫았는데도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밝은 기운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같은 시각, 주씨 저택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주 노야는 몸종과 여종들이 크고 작은 보따리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호통을 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노야, 어서 짐을 싸야 해요. 당장 섬주로 가자고요. 경성에 더 남아 있어서는 안 돼요.”

주 부인이 주 노야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말했다.

“허무맹랑한 소리 좀 그만하시오! 그 뻔뻔한 정씨 놈들이 곧 있으면 경성에 들어오는데, 교교가 우리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그들을 상대하란 말이오?”

주 노야가 호통쳤다.

“지금 교교를 걱정할 때예요? 정씨 내외가 경성에 도착해서 교교를 괴롭히기 전에, 풍림이 먼저 교교의 목을 벨 거예요! 노야, 우리 이제 더는 그 아이와 엮이지 말아요. 그 아이와 엮인 후로 어째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어요.”

주 부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주 노야는 주 부인의 손을 내치며 콧방귀를 꼈다.

“무서울 게 뭐 있다고? 교교가 지금껏 걸어온 길에 풍랑이 좀 많았소? 하지만 교교는 매번 그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폐하께 상까지 받았잖소. 교교 앞을 가로막는 자들과 풍랑은 전부 교교의 디딤돌이 될 뿐이오.”

주 부인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노야, 이번에는 무려 풍림이라고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앗아간 풍림이요.”

“그자가 풍림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거요.”

주 노야는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주 부인이 서둘러 주 노야를 이끌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노야, 무슨 내막을 알고 있는 거죠? 우리 교교가 이번에도 무사할 걸 알고 있는 거예요?”

주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주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막은 무슨. 훤히 보이는 일인 것을. 풍림이 누군지 잊었소?”

“풍림은 어사중승이죠.”

주 부인이 영문을 몰라 하며 대답하자 주 노야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자의 별호가 뭐냐고.”

“귀판관이요.”

주 부인의 대답에 주 노야는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렇지. 풍림은 귀신이고, 우리 교교는 신선인데, 신선이 어찌 귀신을 무서워할꼬.”

주 노야의 말에 주 부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여봐라! 당장 의원을 불러오너라! 노야께서 정신이 나가셨어!”

정신이 나간 사람은 비단 주 노야뿐만이 아니었다. 그 말은 이미 경성에 쫙 퍼져 있었다.

백성들은 조정 관리들이 무슨 말을 하면서 싸우는지 관심이 없었다. 백성들의 관심사는 오직 이번 일의 주인공들이었다.

하나는 귀판관이라 불리는 사내고, 다른 하나는 도교의 신선인 이 진인께 직접 가르침을 얻었다는 제자였다. 하나는 귀신이요, 하나는 신선이라. 사람은 귀신이나 신선을 속일 수 없다더니, 과연 정 낭자는 가는 곳마다 적들을 맥없이 쓰러뜨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런데 귀신과 신선이 맞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누가 누구를 속이려나? 누가 더 강할까? 이번에야말로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네!

“분명히 신선이 이길 걸세!”

“그건 모를 일이지. 신선도 잡귀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잖아. 게다가 이 신선은 어린 낭자기도 하고.”

“듣자니 대리시에서 벌써 사람을 잡아들여서 조사 중이래.”

“그 말이 참이야?”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던 사환이 더는 못 들어주겠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찻값을 탁자 위로 내던지고는 후다닥 찻집을 뛰어나왔다. 말에 올라탄 사환은 단숨에 성 밖까지 나가 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시서(侍書), 또 어디 가서 놀다 온 거야?”

저택 안에 있던 사환이 물었다.

“놀기는 뭘 놀아. 정 낭자한테 또 일이 생겼어.”

시서라고 불린 사환이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에서 나온 사환이 화들짝 놀랐다.

“또? 잠잠해진 지 이제 며칠이나 됐다고 또?”

“그러니까. 나도 깜짝 놀랐어.”

시서가 말하면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서 공자님께 가서 말씀드려야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서가 안쪽으로 뛰어가려 하자, 사환이 그를 막아섰다.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생각해 봐. 어제도 급하게 달려와서는 태후께서 정 낭자의 혼삿길을 막았다고 난리 치는 바람에 공자님께서 한참 비웃으셨잖아. 태후의 행동은 도리어 정 낭자를 위한 일이라고, 큰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라고 하셨지. 앞으로 그런 사소한 일은 얘기하지 말라고도 하셨어.”

“이번에는 사소한 일이 아니야.”

시서가 조급해하며 말했다.

“그럼, 목숨이 달아날 만한 일이야? 공자님께서 그러셨잖아. 목숨이 달아날 일만 말하라고.”

콧방귀를 뀌며 말하던 사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서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진짜로 목숨이 달아날 만한 일이라고?”

“목이 달아나? 누가 정 낭자의 목을 노리는데?”

진십삼이 손에 쥔 책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풍림이요. 귀판관 풍림 말입니다.”

시서가 곧바로 대답했다.

“풍림?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지?”

진십삼이 미간을 더욱 찌푸리고 물었다.

“태창로 전운사 횡령 사건을 조사했던 그 풍림이요. 이번에 폐하께서 풍림을 어사중승으로 임명하셨는데…….”

진십삼이 시서의 말을 끊고 물었다.

“풍림이 누군지는 당연히 알지, 이 녀석아. 풍림이 왜 정 낭자의 목숨을 노리냐고 묻는 거잖아!”

진십삼이 인상을 쓴 채 소리치자 시서가 아, 하고는 재빨리 대답했다.

“찻집에 있던 사람들 말로는, 귀판관 나리가 우연히 길에서 정 낭자를 스쳐 지나갔답니다. 정 낭자에게서 무시무시한 요기(妖氣)를 느끼고는 황제께 정 낭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고…….”

대답하던 시서가 진십삼의 발길질에 바닥에 엎어졌다.

“찻집에 있던 사람들의 말이라고? 네놈은 머리가 없는 게냐, 다리가 없는 게냐! 집에 가서 물어보고 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진십삼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공자님께서 걱정하시는 걸 아니까 그런 거죠. 정 낭자에게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와서 알리라고 하셨잖아요. 초조해하고 걱정하실까 봐 한달음에 달려온 건데.

시서가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인이 당장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시서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진십삼이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됐다. 내가 직접 가마.”

직접 가신다고? 하긴, 보통 큰일이 아닌데 직접 가셔야지.

시서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는 한쪽에 그대로 걸려있는 진십삼의 겉옷을 집어 들고 얼른 쫓아갔다.

“공자님, 옷은 입고 가셔야죠!”

진십삼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의 속도를 늦추고 한쪽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제가 가서 문을 두드리겠습니다.”

사환이 옥대교를 향해 가려던 찰나, 진십삼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정 낭자를 보러 가기 전에,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진십삼이 말에 박차를 가하자, 사환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진 시강이 집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진십삼은 곧바로 진 시강을 찾아 관청으로 향했다. 진 시강은 진십삼이 올 줄 진작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참 빨리도 왔구나. 네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사흘은 지나야 알 줄 알았는데.”

자리에 앉은 진십삼이 진 시강의 우스갯소리를 무시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버지, 이번에는 무엇 때문입니까? 또 뒤에서 뭔가 바라는 자가 있는 겁니까?”

진 시강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누가 뭔가를 바라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진십삼의 표정이 굳어졌다.

“풍림은 그저 맡은 바 책임을 다했을 뿐이라고요?”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이 힘들어지는데.”

진십삼이 말했다.

풍림이라는 자는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엄격한 사람이라는 말을 간간이 들었어. 게다가 지금은 어사중승 자리에까지 올랐다고.

워낙 강직한 사람이니, 사건을 사건으로만 대하지, 사람에 대한 악감정으로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이 아닐 거야.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책임을 다할 뿐,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거나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 이번 일을 벌인 것도 아닐 테고.

쉽게 넘어갈 수 없겠는걸.

“그러게, 종친과 가까이 지내봤자 좋을 게 없다니까. 이 모든 게 다 그 말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들려주는 칠현금 연주가 아니라는…….”

진십삼이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세게 쥐었다.

스승님도 찾아내고, 병기를 만들기도 하고, 더 이상 치료도 안 하며, 신선의 제자니 뭐니 하는 헛소문은 잠재웠다고 생각했는데.

근래 들어 정 낭자는 글씨로 학자와 서생들의 인정을 받고, 문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글씨를 가르치는 성인의 도를 따르고 있었거늘. 낭자에 관한 모든 일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가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같은 때 갑자기 진안 군왕이 그런 말을 해서!

“군왕은 정 낭자가 신선하다고 여겼을 겁니다. 낭자에 대한 호기심에 편하게 우스갯소리도 한 거고요. 자신이 가볍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정 낭자를 얼마나 힘들게 만들지, 생각이나 해 봤겠습니까?

아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 낭자를 그렇게 대한다고 해서, 낭자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낭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이겠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은 이 무정한 일들을 전부 안고 갈 수밖에요.”

진십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십삼! 어디 가는 것이냐?”

진 시강이 외쳤다.

“풍림에게 가서 물어봐야겠습니다.”

진십삼이 대답했다.

“풍림에게 직접 묻겠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물어?

넌 아직 수재도 아니다. 이 아비의 후광으로 이제 겨우 과거를 치르게 된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어사와 논쟁을 벌이겠다는 게야? 벼슬길에 나가기도 전에 조정의 기강을 흐린다는 죄를 뒤집어쓰려고 그래? 그리되면 평생 벼슬길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정 낭자를 돕는 일은 평생 생각도 못 하게 될 거야!”

진 시강이 단호하게 말했다. 진십삼이 몸을 돌리고 물었다.

“그럼 아버지께서 정 낭자를 대신하여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정 낭자는 이런 일로 목숨을 잃을 사람이 아니야. 성가시고 골치 아픈 정도겠지. 기껏해야 경성을 떠나 강주로 돌아가는 선에서 끝날 게야.”

진 시강의 대답에 진십삼은 웃음을 지었다.

“정 낭자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쫓겨난단 말입니까? 떠난다면, 낭자가 떠나고 싶을 때만 떠날 수 있어요. 여태껏 낭자가 맞닥뜨린 골칫거리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더는 안 됩니다. 그럴 순 없지요. 그러면 안 될 일이에요.”

“이 세상에 그러면 안 될 일이 어디 있느냐? 그만 돌아가 공부에 매진하거라. 정 낭자에게 그런 일이 닥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고, 정 낭자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면, 일단 네가 먼저 정 낭자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나서는 건 도리어 정 낭자에게 해가 될 수 있어.

이번 일은 예전과 달라. 누군가가 음지에 숨어 계략을 꾸미는 것이 아니니, 너희가 남몰래 뒤에서 행했던 그런 수법도 더는 통하지 않아. 이제 다들 환한 곳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내고, 징과 북을 울리며 정정당당하게 싸우려 하고 있다. 결코 말 몇 마디로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해서 끝날 싸움이 아니야.”

진 시강의 말에 진십삼은 조용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소자, 잘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십삼이 몸을 돌리고 관청을 나섰다.

이번에도 말이 옥대교 근처에서 멈췄다.

“공자님, 가 보시게요?”

사환이 물었다.

어차피 나를 먼저 찾아온 적은 없었으니,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게 더 낫겠지.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고 옥대교 앞으로 말을 몰았다. 문을 지키던 사환이 얼른 문을 열고 진십삼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진 공자님.”

“너희 아씨는?”

진십삼이 물었다.

“아씨께서는 출타하셨습니다.”

사환이 대답했다.

이 와중에 출타했다고?

잠시 흠칫하던 진십삼은 곧 웃음을 보였다.

역시 정 낭자답군.

“아씨께서는 큰아씨를 모시고 성 밖에 있는 태평거에 가셨습니다. 아마 밤이 되어야 돌아오실 거예요. 공자님께서 남기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아씨께 가서 공자님이 오셨다고 말씀드릴까요?”

사환이 물었다.

소란을 피해서 나간 건가?

하지만 이런 시기에는 아무리 태평거라고 한들, 태평할 리가 있나.

“풍 판관이 그러더군. 그 낭자는 검은 눈동자가 작고 흰자위가 큰 사백안이라 천하를 어지럽힐 관상이라고.”

“에이, 됐소. 정 낭자는 여인의 몸이라 관직을 얻지도 못하잖소. 장수나 재상이 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단 말이오? 그 귀판관이란 자가 귀신을 너무 많이 봐서 아무 일에나 깜짝깜짝 놀라는 거 아니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지금 정 낭자의 명성은 장수나 재상보다 더하잖소. 말편자와 신비궁을 만들 줄 아는 의형제도 있고, 비석에 새긴 글씨 하나로 학자와 서생들 사이에서 선생이라는 칭호도 얻었어. 게다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비술도 알고 있잖소. 사람이 그리 대단할 수가 있나? 거의 요괴지, 요괴.”

“사람이든 요괴든, 아무렴 무슨 상관이오? 나는 정 낭자가 빚은 무원산 술을 딱 한 잔만 마실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요.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정 낭자가 시키는 대로 다 할 거라고!”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무원산 한 동이 주시구려.”

대청 안에 있던 점원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여기엔 그 술이 없습니다.”

“아니, 태평거의 행수가 정 낭자 아니었소? 그런데 왜 무원산이 없단 말이오? 괜히 이리저리 숨기지 말고 까놓고 얘기해 보시오. 얼마면 되는지 말을 해 보라고.”

점원은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역시 괴이하고 수상쩍어. 이러니까 귀판관 나리가 자네들 주인어른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하시는 게지.”

무원산 술을 달라고 외쳤던 손님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손님들의 대화에 잔뜩 화가 나 있었던 한 점원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행주를 팍 내팽개쳤다. 점원이 그 사람에게 가서 따지려고 하던 찰나, 다른 점원이 그를 막아섰다.

“관리인께서 당부하셨던 거 잊었어? 괜한 시비 걸지 마.”

“시비는 지금 저놈들이 걸고 있잖아.”

행주를 내팽개친 점원이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관리인의 말씀을 잘 생각해 봐. 장사하겠다고 문을 열었으니, 손님더러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야. 손님들의 입을 막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고.”

점원이 목소리를 낮추고 그를 다독였다. 그때 새로운 손님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점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점원을 앞으로 밀었다.

“얼른 손님 맞이해야지.”

점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들어온 손님을 맞이했다.

먼 길을 떠나온 듯한 행색의 키가 크고 젊은 사내 하나가 문밖에 서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우선 사방을 살폈다.

“여기가 이렇게 많이 변하다니. 이젠 못 알아보겠네.”

사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내를 대강 훑어본 점원은 그의 신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요즘 들어 경성에 많이 보이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경성으로 향하는 수재가 틀림없었다.

3년 전에도 경성에 왔었나 보네. 그러니까 저렇게 감탄하는 거겠지?

“예전의 취봉루를 말씀하십니까? 주인어른이 바뀐 지 꽤 됐습니다. 이제 여기는…….”

점원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수재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들고 편액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태평.”

“예, 예. 맞습니다. 여기가 태평거로 바뀌었습니다. 저희 가게 편액에 쓰인 글씨가 꽤 훌륭하지요?”

점원이 웃으며 말했다.

“글씨는 괜찮군.”

수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 동안 편액을 들여다보았다.

“더 좋은 글씨도 있습니다요.”

점원이 웃으면서 수재를 붙잡고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수재, 일단 저희 태평거의 태평 두부와 과일 간식으로 입맛을 돋운 뒤에, 낙득자재를 한 솥 드시고 속 뜨끈하게 경성으로 가십시오.

가는 길에 살짝 방향을 틀면 차정사라는 사찰이 나오는데, 먼저 거기 벽에 쓰인 글씨부터 보시고, 사찰에 들른 김에 향불도 하나 올리시지요. 그다음에는 경성을 쭉 가로질러서 성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화려한 경성이야 앞으로도 볼 날이 많잖습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은 급하지 않지요. 아무튼, 동문으로 나가서 십 리를 더 가면 거기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이 있는데,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무원산 비석 글씨까지 다 보셨다면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그때쯤이면 아마 해가 졌을 테니, 시끌벅적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경성 저잣거리로 가셔서 신선거를 찾아보세요.

마지막으로 신선거에서 과로신선을 한 상 드시고 나면, 앞으로 경성에서의 날들도 후끈 달아오를 겁니다. 보양식 덕에 피로가 싹 가셔 정신이 번쩍 날 테니, 과거 급제는 따놓은 당상이지요.”

점원의 청산유수 같은 소개를 들은 수재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훌륭하군. 어쩐지 여기 장사가 잘된다 했더니, 점원들의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그런 거였어.”

수재의 칭찬을 들은 점원은 어색해하거나 창피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지 않고, 공손하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좌석으로 모실까요, 별실로 모실까요? 좌석은 다 같이 모여 앉아 왁자지껄한 맛이 있고, 별실은 깔끔하고 조용한 대신에 돈이 몇 푼 더 듭니다요.”

점원이 옆으로 비켜서면서 손으로 수재를 모시며 물었다. 젊은 수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기 행수를 만나러 왔소.”

점원이 흠칫 놀랐다.

“나는 숙주 한씨, 한균이라고 하오.”

-다른 도리-

대청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한원조가 고개를 들고 문가를 쳐다보자, 어디서 본 듯한 중년 사내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정말로 주인어른이시네요! 주인어른, 오셨습니까!”

중년의 사내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한원조가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치 않습니다. 이제는 임 집사가 이곳의 관리인이 되었군요. 축하해요.”

중년의 사내는 3년 전에 한원조에게 배당금을 배달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중년 사내가 웃으면서 한원조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주인어른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주인어른께서 경성으로 오실 줄 알고, 여기서 지내실 거처와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한원조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아, 그건 괜찮습니다. 지낼 곳은 이미 마련했거든요.”

“주인어른, 서먹하게 그러실 필요 있습니까. 아, 참. 공부하시느라 바쁘시겠지만, 장부를 한번 훑어보시겠습니까?”

임 관리인이 서둘러 장부를 한원조에게 건네며 묻자 한원조는 고개를 저었다.

“서먹하게 구는 게 아닙니다.”

한원조는 소매에서 비전 증서 한 장을 꺼내어 장부 위에 올려놓은 뒤, 한꺼번에 임 관리인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3년 치 배당금입니다. 총 삼만 이천 관에, 이자 오천 관도 따로 얹었습니다. 한번 확인해 봐요.”

임 관리인이 놀란 표정으로 한원조를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오늘 온 것은 태평거 주인 자리를 돌려주기 위함입니다.”

한원조가 말했다. 기쁘게 문을 열고 별실 안으로 들어오던 반근과 시녀도 일순간 표정이 굳어 버렸다.

“한 공자님, 또 농담하시는 거죠?”

시녀가 먼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한원조가 시선을 시녀에게 돌리자, 모호하기만 했던 3년 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 방긋 웃고 있었던 시녀가 지금도 똑같은 모습으로 별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낭자, 오랜만에 보는군.”

한원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녀를 반겼다.

“한 공자님, 그런 농담은 마세요. 군자가 도리와 덕행에 어긋나지 않게 재물을 얻는 게(君子愛財, 取之有道 - 명심보감) 무슨 문제죠?”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한원조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낭자의 말이 맞소. 군자가 재물을 얻을 때는, 도리와 덕행에 어긋나서는 안 되지. 그러니 난 더 이상 이 재물을 얻을 수 없소.”

한원조의 말 속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시녀가 멈칫했다.

“한 공자님, 설마 세간에 떠도는 말들 때문에, 불똥이 튈까 봐 이러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시녀가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공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셔.”

한원조가 대답하기 전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원조의 시선이 시녀의 뒤로 향했다. 열여섯에서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 보였다.

한원조의 시선을 느꼈는지, 반근이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반근의 얼굴에는 한원조에 대한 확신과 기대가 떠올랐다.

“한 공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셔.”

반근이 다시 한번 말했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한원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불똥이 튀는 걸 피하기 위함은 아니오. 난 다만…….”

준비했던 말을 막힘없이 풀어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반근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원조는 힘겹게 입을 열고, 결국 하려던 말을 전했다.

“소생은 다만, 군자가 아닌 자를 사귀지 않을 뿐이오.”

한 공자의 말을 들은 시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천천히 별실 안으로 걸음을 옮긴 시녀가 임 관리인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했다. 임 관리인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별실 문을 닫으며 물러났다.

“한 공자님, 방금 그 말씀, 무슨 뜻으로 하신 거죠?”

시녀가 물었다.

“낭자도 알다시피, 나는 내가 태평거의 주인장이 된 이유가 의문이었소. 그리고 오늘이 되어서야 이곳의 행수가 정씨 낭자라는 걸 알게 됐지.”

“그러니까 결국 세간에 떠도는 소문 때문이군요.”

시녀가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한원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소문을 듣기도 했고, 어쩌다 알게 된 일도 있어 이런 결정을 내렸소. 화를 면하기 위해서라든가, 불똥이 튀는 걸 피하기 위해서는 아니오. 다만, 나는 낭자의 주인 되는 사람의 행실에 동의하지 못할 뿐이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일을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道不同不相爲謀 - 논어)는 말이 있잖소.”

“저희 아씨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어요. 저희 아씨에 관한 일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과 달라요. 저희 아씨는 좋은 사람이라고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 나는 정 낭자가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게 아니오. 정 낭자는 아주 좋은 사람이오. 그러지 않고서야, 그때 내가 숙수의 아내를 위해 나섰던 것만 보고 태평거의 지분을 나눠줬을 리 없지.”

한원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한 공자님. 그게 아니라요.”

반근이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갔다. 시녀가 반근의 팔을 잡고, 무표정한 얼굴로 한원조를 쳐다보았다.

“좋은 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이지. 아쉽게도 정 낭자의 행실이 내가 추구하는 도리와 달라 어쩔 수가 없소. 부디 양해해 주시오, 낭자.”

한원조가 이어서 말했다.

“저희 아씨의 행실이 뭐 어땠길래, 한 공자님이 이토록 저희 아씨와 거리를 두시는 거죠?”

시녀가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그걸 직접 얘기하라기엔 조금…….”

한원조는 말끝을 흐렸다.

“관녕(官寧)은 화흠(華歆)이 고관대작의 수레가 지나가자 책을 덮고 잠시 바라본 일로 부귀영화에 뜻을 두었다며 화흠과 절교를 했다지요. 한 공자님께서 어찌 이리도 매몰차게 저희 아씨를 벗 삼을 수 없다는 건지, 저희는 그 이유라도 알아야겠어요.”

시녀가 말했다.

“의형제들의 억울함을 풀 때, 정 낭자는 왜 폐하께 먼저 신비궁을 바치지 않고 백성부터 선동했지? 사람을 위한 연주가 아니라며 폐하 앞에서 칠현금 연주를 거절한 건 또 어째서고?”

한원조의 말에 반근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희 아씨께서 그러신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예요!”

“저희 아씨께서는 마음에 따라 움직이실 뿐이에요.”

시녀가 반근을 꽉 잡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한원조가 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내 마음에 충실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일 뿐이오.”

“차라리 공자님도, 풍림의 말에 백번 동의한다고 말하지 그러세요?”

시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한원조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정 낭자는 대간사충(大奸似忠: 아주 간사한 사람은 충신과 흡사하다는 뜻으로, 악한 본성을 숨기고 마치 가장 충실한 체하는 사람을 뜻함)이니, 나와는 추구하는 길이 다르오.”

대간사충!

시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균!”

시녀가 한원조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한원조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공수의 예를 표한 뒤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고 시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근 낭자, 혹시 예전에 반강현을 지나간 적이 있소?”

한원조가 물었다.

“아니요. 저는 단 한 번도 경성을 떠난 적이 없어요.”

시녀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역시 아니었네.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한 공자님, 한 공자님!”

반근이 다급하게 한원조의 앞으로 뛰어가며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외쳤다.

“공자님까지 우리 아씨께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다들 아씨를 이렇게 모질게 대하냐고요!”

“낭자, 추구하는 도리가 다를 뿐이오. 사람 때문이 아니라, 도리 때문에.”

한원조가 다시 한번 공수의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간 낭자가 베풀었던 은혜에 감사드리오.”

한원조가 막 문턱을 넘어서던 때, 대청 복도에 서 있던 여인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원조가 걸음을 멈췄다.

“아씨.”

반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하며 정교랑을 향해 뛰어갔다.

저 사람이, 그 정 낭자인가? 출중한 용모에 단정한 옷차림, 딱 봐도 범상치 않아.

살짝 입꼬리를 올린 정교랑이 한원조를 향해 두 손을 올리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한원조는 얼른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면서 시선을 피했다.

“저는 감히 예를 받을 수 없습니다.”

“공자님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예를 마치고 말했다. 한원조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에게는 재능이 많으니, 부디 그 명성을 바른 일에 쓰시길 바랍니다.”

“한균, 당신은 우리 아씨를 훈계할 자격 없어!”

시녀가 별실 안에서 한원조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정교랑은 가볍게 손을 들어 시녀를 제지하고, 다시 한번 한원조를 향해 예를 표했다.

“공자님의 말씀에 감사드려요.”

이 여인은 듣던 대로 시원시원하군.

한원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수록,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반근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서러워졌다.

이미 이만한 명성을 얻고,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다면 당연히 여러 사람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알 터인데 왜 저렇게까지 서럽게 우는 거지? 내가 뭐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풍림처럼 죽이느니 마느니 한 것도 아닌데.

한원조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낭자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 있는 몸종이 자신의 소매를 어떻게 쥐어뜯으며 통곡하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한원조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층계를 내려갔다.

말에 올라탄 한원조는 곧장 거처로 향하지 않고, 천천히 큰길을 따라 말을 타고 움직였다. 성문 근처에 다다르자, 찻집이 하나 보였다. 날씨가 추운 탓에 찻집에 잠시 머무르는 행인이 많았다.

“공자님.”

사환이 반갑게 한원조를 향해 손짓했다. 한원조가 말에서 내려 사환에게 말고삐를 쥐여 주고는 찻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여인이더냐?”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대인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아닙니다.”

한원조가 대답했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찻잔을 건네받고 차갑게 언 손을 녹였다.

“반근은 한 번도 경성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한 대인이 실망한 기색으로 아, 하고 탄식했다.

“설령 그 여인과 동일인물이라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에만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추구하는 도리와는 별개지요.”

한 대인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원조,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그런 행동은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니겠느냐? 남들 눈에는 네가 단지 화를 피하기 위해 그러는 것으로 보일 텐데.”

“화를 피하기 위한다는 오명이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아들이 정 낭자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한원조의 말투는 단호했다. 한 대인이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경성의 차향이 좋구나.”

한원조가 한 대인을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풍림이 이렇게 빨리 경성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우리 둘도 꽤 걸음을 재촉한 편인데, 풍림보다 이틀이나 늦게 도착했으니. 게다가 그렇게나 빨리 정 낭자의 죄를 물을 줄이야.”

한 대인이 말했다.

“이미 그날 역참의 일만으로도 화가 잔뜩 났을 텐데, 경성에 들어오자마자 정 낭자가 자유로이 황궁을 드나드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위한 연주가 아니라는 말로 칠현금 연주를 거부하고, 자칭 성인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들었으니, 화가 단단히 났겠지요.”

한원조가 말했다.

유학의 도를 따르는 신하로서는 황제 앞에서 귀신을 운운하고 자신을 성인이라 칭한 것만으로도 인내심이 극에 달할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구나.”

한 대인이 탄식했다.

경성에 들어오기 전 한 대인은 관청 일로 바빴고, 한원조는 책에 머리를 파묻고 공부에 매진하느라 정교랑에 관한 소식을 알지 못했다. 한원조 부자도 풍림처럼 그날 역참에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정교랑과 관련된 일들을 알게 되었다.

두 부자는 이번에 경성으로 들어온 김에 태평거의 행수를 만나보고자 했다. 상대가 조정 중신일 수도 있으니 만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뜻밖에도 상황은 두 부자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내 생각에는, 정 낭자가 그렇게 사리사욕이 많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때 네가 행한 사소한 일조차도 큰 은혜로 여기는 이가 아니더냐.”

한 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버지, 사람의 사리사욕은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달라지곤 하지요.”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던 한 대인은 한원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우리는 정 낭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지 않느냐. 다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지.”

두 사람은 거기서 잠시 대화를 멈추고 주위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나는 정 낭자가 좋은 사람 같아. 풍 판관이 정 낭자를 죽이느니 마느니 할 필요까지 있어? 까놓고 말해서, 정 낭자가 뇌물을 받았어? 국법이라도 어겼어?”

“어딜 봐서 좋은 사람인데?”

어딜 봐서 좋은 사람이냐는 질문이 나오자마자, 주위에서 왁자지껄하게 정교랑에 관해 떠들기 시작했다. 신의 낭자, 무원산 술, 차정사 글씨, 신비궁 등등.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한원조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정 낭자의 손에서 기사회생한 사람들의 목숨값은 천금에 가깝고요. 그러다 보니, 정 낭자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병을 치료해 주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겠죠. 그리고 실제로도 자신이 원했던 목적을 달성해 신의 낭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요.

술로 말할 것 같으면, 노제를 지내 의형제의 영을 기리기 위해 빚은 술이지만, 어쨌든 간에 그 술을 마시는 사람은 산 자입니다. 그러니 산 사람인 경성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거고요.

글씨는 정 낭자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단지 쓰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 준 것뿐이며, 신비궁은 정 낭자가 원하던 바를 이루고 난 후에야 조정에 바친 겁니다. 단순히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려는 이유로 바친 게 아니지요.

아버지, 사람들이 말하는 정 낭자의 좋은 일들을 하나씩 곱씹어보아도, 모두 정 낭자가 사심을 품고 한 일들입니다.

아둔한 백성들은 이 일을 그저 흥밋거리로 소비하겠지만, 조정의 대신들은 다릅니다. 정 낭자의 손에 놀아나는 것도 잠시지, 평생 이렇게 정 낭자를 방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 낭자의 행실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가 한둘이 아니겠지요. 폐하께서도 분명 정 낭자에 대해 꺼리시는 게 있을 거고요. 태후께서 정 낭자의 혼사에 대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정 낭자에게 사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심이 있고, 황제 폐하에게도 당연히 사심이 있으나, 서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에 사심이 없는 풍림이 나타나 버렸으니…….”

한원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끝을 흐렸다. 한 대인은 한원조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구나. 참으로 안타까워.”

“안타깝다고? 뭐가 안타깝다는 게요?”

풍림이 상소문을 탁 하고 내려놓으면서 반대편에 앉은 노사안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중승, 그래도 정 낭자가 가진 재능이 출중하거늘,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오?”

노사안의 말에 풍림이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재능이 출중하다 하였소?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 출중한 재능은 언제든 조정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그 출중한 재능이 의형제의 억울함을 푸는 일과 가족의 이득을 챙기는 일에만 쓰이고, 감히 천자를 어지럽힌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설령 정 낭자에게 사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소. 도리어 조정이 강문원와 같은 무능한 장수들을 유능한 장수로 물갈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 그것만 봐도, 정 낭자가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소?”

노사안이 말했다.

“큰 공?”

풍림이 상주문을 다시 집어 들고 천천히 말했다.

“왕망(王莽: 중국 전한의 정치가.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신(新)으로 명명함)도 한나라의 권력을 찬탈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왕망을 칭송하고 큰 공을 세웠다며 치켜세웠지.”

풍림의 말에 노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중승이 정 낭자를 왕망과 같은 선상에서 논한다는 것만으로도 정 낭자는 충분히 만족하겠군.”

노사안의 말을 듣고 나서야, 풍림은 자신이 뱉었던 말을 되새겼다.

내가 어찌 일개 여인네와 왕망을 비교했단 말인가. 도가 지나쳤군.

풍림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실내의 긴장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풍림과 노사안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서로 3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둘 다 어사대로 부임하며 재회하게 된 터라 그들은 더욱 기뻐했다.

“관지(寬之), 자네 참 많이 변했어.”

노사안이 직접 우린 차를 풍림에게 건넸다. 풍림이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내 목숨이 지금껏 붙어 있는 이유는, 다 운 덕분일세. 운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새까맣게 타서 한 줌 재가 되었을 것이야.”

풍림이 말했다.

3년 전, 역참에서 풍림이 불에 타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는 노사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노사안도 잠시 감상에 젖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살아 있다고는 하나, 내 목숨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닐세. 그때 날 도와줬던 분은 내 감사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어. 그러고는 내가 나 스스로를 구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해 주었지. 그때 나는 결심했네. 앞으로는 결코 생과 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이 내게 준 여생을 가치 있게 보낼 거라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그 은인께 보답하겠다고.”

풍림이 말했다.

노사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풍림이 그날 어떻게 목숨을 건졌는지는 노사안도 잘 알았다.

“그분은 내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뼛속 깊이 새길 교훈까지 주셨다네.”

풍림이 이어서 말했다.

차를 들이켜던 노사안은 갑자기 사레가 들린 건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노사안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관지! 자네가 언제부터 그런 농담을 할 줄 알았나?”

“농담이 아닐세.”

풍림이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날 내가 반 시진 남짓한 시간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건, 일생의 수확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어.”

단호한 풍림의 모습에 노사안이 웃음기를 거두었다.

“알겠네, 알겠어. 어쩐지 자네가 3년 사이에 딴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더니만. 이게 다 한 번의 마주침에 값진 가르침을 준 스승 덕분이었군.”

풍림이 노사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 스승이 여인이라지?”

노사안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고로 스승이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 법일세.”

풍림이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노사안은 그런 풍림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은인도 여인이고, 정 낭자도 여인이고.”

“감히 내 은인을 누구와 비교하는 것인가? 내 은인은 대의에 초연한 분이야. 귀신을 운운하며 백성을 현혹하는 여인과 비교하다니!”

풍림이 노사안의 말을 끊고는 버럭 화를 냈다.

시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도 반근은 여전히 눈물을 쏟고 있었다. 시녀가 반근의 앞에 앉으며 반근을 다독였다.

“그만 울어. 태평거에서 돌아오는 내내 울었잖아. 아씨께서도 화를 안 내시는데, 네가 이러면 어떡해.”

“아씨께서 화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아씨 대신 화내고, 아씨 대신 울 거야. 아씨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하셨다고, 다들 아씨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반근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씨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니까.”

시녀가 대답했다.

“무슨 위협이 됐는데? 아씨가 그 사람들 돈을 뺏은 것도 아니고.”

반근이 대꾸했다.

“돈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지.”

시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신념? 그깟 신념이 뭐길래!”

반근이 눈물 고인 눈으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시녀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신념은 별건 아니지만, 돈보다도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사실 이번 일도 예전 일들과 다를 바 없어. 두칠, 유 교리, 정 대노야 때와 똑같은 일이야.”

똑같은 일이라고?

반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시녀가 반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아.”

대놓고 잘잘못을 가리며 서로 삿대질하는 일보다 더 엄중하고 속상한 일이지.

반근이 정교랑의 방으로 들어설 때, 정교랑은 탁자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씨, 속상하시죠?”

반근이 정교랑 앞에 꿇어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속상할 게 뭐 있어. 내가 말했잖아. 사람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이상할 게 없고, 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행운이라고.”

정교랑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씨가 잘못하신 게 없잖아요.”

반근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정교랑이 책에서 시선을 떼고 반근을 바라보았다.

“그건 남들과는 무관한, 네 생각일 뿐이야.”

반근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옳고 그름은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정교랑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갔다.

“네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해서 옳은 게 아니야. 물론, 그들이 옳다고 한다 해서 옳은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바에만 집중해. 남들의 인정과 감사를 얻을 생각은 하지 말고, 네가 원했던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봐. 그랬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해.”

“하지만 아씨, 이번에는 풍림과 한 공자님이잖아요.”

반근이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였다.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어? 다 똑같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다르죠. 그들이 아씨를 도와준 적도 있고, 아씨가 그 사람들을 도와준 적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아씨는 서로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 알고 계시고요. 지금 그들이 이러는 게, 아씨의 등에 칼을 꽂는 것과 뭐가 달라요? 아씨, 많이 아프시죠?”

반근이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정교랑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이 이렇게 크게 웃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웃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어서, 반근은 화들짝 놀라 우는 것도 잊은 채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리석긴. 그 사람들이 뭐라고, 그 정도에 내가 아프겠어? 그건 아프다고 하기도 민망하지.”

정교랑이 웃으며 말했다. 눈물로 흐릿해진 반근의 시야에 정교랑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가려운 축에도 못 들어.”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교랑의 얼굴에는 차츰 웃음기가 걷히고, 희미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

반근이 눈물을 닦으며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지?

황제가 손에 쥔 상소문을 내려놓으며 한쪽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짐의 차를 얻어 마시려고 입궁한 것이냐?”

황제가 물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폐하, 오늘은 대조회가 있는 날 아닙니까. 신이 정정당당하게 폐하의 용안을 뵐 수 있는 날이니, 폐하 곁에 오래 머무르려고 그러죠.”

진안 군왕이 능청맞게 대꾸하자 황제가 퉤 하고 침 뱉는 시늉을 했다.

“허영심만 가득한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그런 것만 배웠더냐. 네가 정정당당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 뭘 하든 정정당당한 것이니라.”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말없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정 낭자를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건 아니고?”

황제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어 놀란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무슨 말을요?”

“좋은 말 말이다.”

황제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 낭자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남이 나서서 말할 게 있겠습니까. 신이 폐하께 정 낭자를 편드는 말을 하게 된다면, 아마 풍림과 똑같은 사람이 되겠지요.”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황제가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짐의 마음이 놓이는구나. 네가 출궁하여 왕부에서 지내는 것도 마음이 놓인다.”

진안 군왕이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들이켜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또 신의 마음을 짐작하신 거지요? 그렇다면 신은 말을 아끼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장난 섞인 말을 하며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황제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진안 군왕을 눈으로 배웅했다.

진안 군왕이 물러남과 동시에, 내시 하나가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폐하, 반강현의 한창(韓昌)이 폐하를 알현하고자 합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한창이 황제를 알현하기로 한 일은 중서문하성에서 미리 황제에게 귀띔했던 일이기도 하고, 관례에 따른 형식적인 자리였기에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강현의 한창?”

진안 군왕을 따라 나가던 어린 내시가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가 서둘러 옆에 있던 다른 내시에게 물었다.

“혹시 일식을 예측하셨다던 그 한 대인 말입니까?”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어린 내시는 몹시 기뻐하며 진안 군왕의 뒤를 쫓아가 물었다.

“전하, 전하, 그 한 대인이 맞는다고 하던데요? 경왕부의 꽃밭을 음양도로 꾸며도 될지 한번 물어보심이 어떠실지요?”

“그 사람한테 물어서 뭐해? 누가 뭐래도 그 여인의 말이 제일 믿을 만하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그 여인이라 하심은, 당연히 정 낭자겠지?

어린 내시는 헤헤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진안 군왕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대전 앞으로 돌아가 한창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게 뭘 묻는다고?”

한창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붙잡고 말을 묻는 어린 내시에게 놀라 반문했다.

한창이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진사 전시에 합격했을 때도 황제의 용안을 뵌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오늘처럼 혼자서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가 아니었기도 하고, 몇 년 만에 황제를 다시 보는 자리이기에, 한창은 흥분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신이 행여나 무슨 실수라도 저지를까 봐 불안해했다.

황제가 자신을 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에 대해 특별한 인상이 남은 것 같지는 않았다. 형식적인 말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한창은 금방 대전 밖으로 물러났다.

무탈히 황제를 뵙고 나왔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찰나, 한창은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 내시 하나에게 붙잡혔다.

“한 대인, 저희 전하께서 왕부의 꽃밭을 달리 꾸며 보시고자 하시는데, 한번 봐 주실 수 있습니까?”

어린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한창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다른 내시들에게도 들렸다. 내시들 중 하나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눈을 게슴츠레 뜨며 자리를 떴다.

근정전 안.

황제는 상소문을 내려놓은 후, 허리를 굽히고 있던 내시를 쳐다보았다.

“조정 대신과 사사로이 교분을 쌓는다?”

“예. 소인이 감히 거짓을 고할 리가 있겠습니까.”

황제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폐하, 황성사(皇城司)에 조사를 명하심이…….”

내시가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말했다.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그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황성사에서 이 일을 조사하게 된다면, 단순히 대신과 교분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겠지. 조사하다 보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일들이 생길 것이야. 그게 얼마나 사소한 일들인지는 중요치 않아. 아니, 조사 결과 아무 일이 없다 하더라도, 진안 군왕을 조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 한 번을 조사했으면, 두 번도 조사할 수 있고, 세 번, 네 번도.

조정 대신과 종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황제의 신임을 잃는 일 아니던가. 황제의 신임을 잃는다는 말은, 조당에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조사는 무슨. 아직 황궁에 있을 테니, 불러와서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

황제의 말이 신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내시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이러니 황제의 신임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

내시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막 궁문을 나서려던 한창은 다시 황궁 안으로 불려갔다. 아직 궁 밖으로 나가지 않은 어린 내시도 한창과 함께였다.

“전하께서 꽃밭을 바꾸고 싶다고 하셨으나, 사천대에서 동의하지 않을까 봐…….”

어린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왕부의 풍수와 구조는 모두 사천대에서 확인하고 결정한 것이었다. 왕부 내의 작은 변동이라면 모르겠으나, 꽃밭 전체를 바꾸는 것은 필히 사천대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한창과 무슨 상관이라는 것이냐?”

황제가 물었다.

“폐하, 오해가 있사옵니다.”

한창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는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경성에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지만, 상경하자마자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소인은 한 대인께서 일식을 예측하셨다고 들어, 풍수지리에 대해서도 분명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대인을 모시고 꽃밭을 둘러본 뒤에, 다시 사천대에 말한다면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지리라 생각하고…….”

어린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감히 한창을 방패막이로 쓰려 했다는 것이냐!”

황제가 격노했다. 어린 내시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황제에게 사죄했다.

“진안을 불러오거라. 어찌 출궁하자마자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는 게야!”

황제가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신이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대전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곧이어 진안 군왕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무슨 구조를 바꾸겠다고? 누가 너더러 구조를 바꾸라고 했느냐? 이번에 왕부의 구조를 바꾸고 나면, 다음에는 왕부 안에서 판을 깔고 놀기라도 하겠다는 게야?”

황제가 굳은 표정으로 호통쳤다.

한쪽에 서 있던 한창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 유명한 송자동자 진안 군왕을 힐끗 쳐다보고는 서둘러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창의 귓가에 소년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자리는 원래 연못이었는데, 혹시나 경왕이 다칠까 걱정되어 메운 곳입니다. 맨땅만 두기에는 허전해서 꽃을 심었지요. 그런데 꽃과 풀만 듬성듬성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꽃으로 도안을 만들고자 했을 뿐입니다.”

진안 군왕의 말에 황제가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도안을 만들려고 그리 몰래몰래 묻고 다니는 것이냐?”

“정 낭자의 말로는, 그 자리에 음양도를 만드는 게 좋겠다고 해서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정 낭자!

황제가 멈칫했다. 한창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가 소문대로 종친과 친분이 있었군.

“정 낭자가 하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따른단 말이냐?”

황제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네, 신은 정 낭자를 믿습니다. 낭자는 절대로 거짓말이나 헛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정 낭자의 모든 말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무슨 근거? 이젠 풍수지리까지 본다더냐!”

황제는 그날 태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도가의 제자가 아니라고 할 땐 언제고. 액막이도 했으니, 이젠 풍수를 봐 주려나?

“풍수를 이미 봐 주고 있었군.”

황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창은 제자리에 머쓱하게 서 있었다. 어쨌든 황실의 일인지라 자신이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황제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했다.

“가서 정 낭자를 불러오거라.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짐이 직접 물어봐야겠다!”

황제가 고함쳤다. 한창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드디어 나도 말로만 듣던 정 낭자를 볼 수 있는 건가? 아니지, 아무래도 난 이만 물러나는 게 낫겠어.

한창이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던 찰나, 황제는 진안 군왕의 말에서 한창과 관련된 일을 떠올렸다.

“그때, 그대가 일식 시간을 직접 예측했소?”

황제가 더는 진안 군왕을 신경 쓰지 않고 한창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신은 천문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것만 알 뿐, 일식을 예측할 정도로 통달하지는 못합니다.”

한창이 서둘러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그가 곁눈질로 옆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황제가 일부러 자신에게 무안을 줬다는 것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밝게 웃으며 서 있었다.

“그럼 어떻게 된 일이지? 듣기로는 지나가던 여인이 그대에게 알려준 것이라고 하던데.”

황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예. 맞습니다.”

한창이 그날 있었던 일을 황제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여인이 홀로 제단 위로 올라가 다들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요승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통쾌하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황제가 진안 군왕을 흘겨보자, 진안 군왕은 여전히 해맑게 웃는 얼굴로 조용히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인네가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다니.”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폐하, 당시의 상황에서는 요승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창이 대답했다.

“반강현 전체가 그 여인에게 몹시 고마워하는 모양이군.”

황제가 한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한창은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사옵니다. 소신은 그 여인이 위신봉상(危身奉上: 일신의 위험을 감수하며 천자를 받들다)을 행했다고 생각하옵니다.”

위신봉상은 가히 충이라 할 수 있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요승은 죽여 마땅하지만, 핵심은 누가 어떻게 죽이느냐지. 또 그를 죽였다는 이유로 불러올 후환과 뒷감당 등 수많은 변수를 모두 고려해야 해.

그러니 반강현 관리들은 요승이 아무리 날뛰어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게지.

어떤 일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수가 있어. 그 일로 인해 다칠 수도 있고,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지만, 이를 무릅쓰고 조정과 백성을 위해 화를 없앤 것이니 가히 충이라 할 수 있으리라.

황제가 입을 열려던 찰나, 문 앞에 서 있던 내시가 말을 전했다.

“폐하, 정 낭자가 당도했다고 합니다.”

“들라 하라.”

한창은 무의식적으로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진안 군왕이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자신과 함께 문 쪽을 쳐다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역광 때문에 여인의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호리호리하면서도 마냥 가녀리지만은 않은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인은 몹시 안정적인 자태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던 여인은 황제와 열댓 보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황제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정씨, 폐하를 뵈옵니다.”

정씨라……. 저 여인이 바로 정씨 낭자로군.

한창이 고개를 살짝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일어나서 묻는 말에 대답하거라.”

황제가 말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황제를 향해 감사의 예를 올린 뒤,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한창은 드디어 정교랑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젊은 여인이었군. 아니, 젊다기보다는 어린 소녀에 가까워. 기다란 눈썹 아래 깊은 눈동자.

정교랑의 두 눈을 보자마자, 한창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헉 소리를 냈다.

황제가 입을 열려던 찰나에 한창이 소리를 내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지방에서 온 관리라고 해도, 나이도 적지 않은 자가 천자 앞에서 어찌 저리 결례를 범한단 말인가.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창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내시는 일부러 한창을 향해 헛기침하기도 했지만, 한창은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한창은 감격스럽다 못해 흥분한 기색으로 정교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 당신, 당신이었습니까? 당신이 바로 저, 정 낭자인 거요?”

한창은 말까지 더듬으면서 정교랑에게 물었다. 정교랑이 한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다.

“네, 저예요.”

한창의 물음에 모두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정 낭자의 명성이 하늘을 찌른다 한들, 저렇게 흥분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황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하가 그토록 결례를 저지르다니, 실로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신하 된 자라면 하늘과 땅을 섬기고, 성인을 섬기고, 군주와 부친을 섬기는 것으로 족했다. 평민 여인을 섬기는 것은 체통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내시들은 어두워진 황제의 안색에서 황제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결례를 범하며 추태를 보이고 있는 한창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내시들은 눈치 없는 한창이 딱하기까지 했다.

정말 가엾은 사람이군. 새 관직에 부임하여 황제를 알현하러 온 좋은 날이거늘, 오늘 저 모습 때문에 저자의 앞길은 영영 끊기겠어.

하지만 그 가엾은 지방 관리를 나서서 도와주려는 자는 없었다. 서로 안면이 없는 사이이기도 하고,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한창을 도울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다, 당신이 정 낭자였군요. 정 낭자였어요.”

한창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거의 잿빛에 가까운 안색이 된 황제가 입을 열려던 그때, 누군가가 먼저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입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물었다.

아는 사이?

황제가 멈칫했다.

당신이 정 낭자였군요. 정 낭자였어요.

듣고 보니 같은 말이 아니었네?

다, 당신, 당신이었습니까? 당신이 바로 저, 정 낭자인 거요?

아, 그래서 정 낭자가 좀 전에 두 마디로 대답했던 거로군. 네, 접니다, 라고.

“우연히 한 번 뵌 일이 있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한 번이 설마…….”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저 여인입니다. 저 여인이에요!”

한창이 황제를 향해 넙죽 절을 올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저 여인이 바로 소신이 말했던, 요승을 단칼에 베어 죽였던, 우연히 반강현을 지나갔던, 그 여인입니다!”

역시! 어찌 이럴 수가!

한창의 말에 진안 군왕은 활짝 웃었지만, 황제는 다소 놀란 모습이었다. 황제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단 한마디로 요약되었다.

정 낭자가 정말로 풍수지리를 볼 줄 알았네?

“폐하, 신이 말했잖습니까. 정 낭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요.”

진안 군왕이 황제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황제가 진안 군왕을 향해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적당히 해라, 위낭. 그렇게 쉴 틈 없이 저 여인을 위해 좋은 말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황제는 입을 열고자 했지만, 막상 입을 떼려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한창이 왜 저토록 결례를 보이는지 연유를 물으려 했는데, 이유가 이미 밝혀져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창이 말했던 그 여인이 바로 정 낭자라는 말에, 황제는 놀라서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씨, 스승이 천문을 읽는 법도 가르친 것이더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정교랑에게 말을 건넸다.

“예, 조금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황제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

“조금씩 할 줄 안다는 게 꽤 많군.”

어째 정 낭자의 이름이 빠지는 날이 없을까.

더 이상 물어볼 게 남지 않은 황제는 대전을 훑어보고, 종친인 진안 군왕과 자신의 신하인 한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다른 한 사람은 최 악공 못지않게 무언가에 홀린 듯 감격에 찬 얼굴이었다.

황제는 자신이 옥좌에 앉은 천자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서 있는 여인보다도 주목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어린 사람이 일식을 예측해냈다고? 그럼 천문 역법에 능통하다는 뜻인가?

아니지. 뭐든 일도만 판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일식 예측만 할 줄 알려나?

“천문에 대해서도 일식 예측만 가능한 것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아닙니다. 천문에 대해서는 조금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황제가 아, 하고 대꾸했다.

“그때 그 중은 왜 죽였지?”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역법을 알아 농사에 쓰기 위함입니다. 백성들이 절기를 알고, 농사를 더욱 수월하게 짓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죠. 역법은 길흉을 논하고 복을 쌓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더욱이 일식 예측 따위로 백성을 현혹해서는 아니 되고요.

천문으로 길흉을 논하는 망언을 하는 자는, 즉시 목을 베어 국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가에서도 천문 역법을 악용하는 자를 엄벌하지요.

소녀가 감히 관청을 대신하여 그자를 국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지만, 천문과 도학을 공부하는 자로서 이를 악용하는 간악한 자를 척결했을 뿐입니다.”

정교랑의 말을 듣고, 황제는 속으로 몹시 기뻐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사천대, 그 빌어먹을 놈들은 뭐만 하면 하늘의 움직임이 변했다고 짐을 탓했지. 천자로서 인자한 덕목을 쌓지 못했다는 이유로, 허구한 날 짐더러 사죄하라고 했어.

이놈들, 네놈들이 감히 다음에도 하늘의 움직임으로 길흉을 논한다면, 짐이 친히 네놈들의 목을…… 아, 목을 벨 수는 없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게 황제의 위치에 있는 자라면 불가능해.

가만 보니, 저 여인이 정말로 위신봉상을 몸소 실천한 셈이로군.

실로 안타깝구나, 안타까운지고. 어찌 저런 인재가 여인이란 말인가? 사내였다면, 내 진즉 저 여인을 사천대 태사국으로 모셔 왔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저 여인의 스승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황제는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 그럼 신은 꽃밭에 도안을 만들어도 되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적막을 깨고 물었다. 정신을 차린 황제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네 왕부이니, 왕부를 통째로 뜯어버린대도 짐은 말리지 않겠다.”

“폐하, 신이 왕부를 얼마나 아끼는데요. 무려 폐하께서 신에게 내려 주신 것이 아닙니까.”

진안 군왕이 헤헤 웃으면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제가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어 보이자, 대전 안에 있던 나머지 두 사람도 진안 군왕을 따라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세 사람이 줄지어 대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내시가 서둘러 황제에게 차를 올렸다.

“다 식었다.”

황제가 언짢은 기색으로 호통쳤다. 황제는 찻잔을 탁자 위로 세게 내려놓으며 내시를 노려보았다.

“잡일도 할 줄 모르는 것이냐!”

내시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연신 이마를 땅에 찧으며 사죄했다.

“썩 꺼져라!”

황제가 굳은 표정으로 고함쳤다. 내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울상만 지은 채 예를 올리고 쏜살같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잡일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놈이로구나.”

대전 문 앞을 지키던 늙은 내시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딜 감히 진안 군왕을 모함하려 드는 게야. 도리어 폐하의 입장만 난처하게 됐잖아. 쌤통이다, 이놈아!

“폐하의 춘추가 아직 한창이시거늘, 급할 게 뭐 있다고 저리들 서두르는지.”

늙은 내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늙은 내시를 따라다니는 어린 내시가 머뭇거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도 달리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저렇게라도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방도가 있긴 할까?

늙은 내시는 말 없이 두 손을 소매 안에 넣고 첩첩으로 쌓인 구중궁궐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먹구름이 하늘에 남아 있던 한 줄기 햇빛을 가렸다.

곧 눈이 내릴 듯싶군.

“곧 눈이 내릴 듯해요. 어서 돌아가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밤이 돼서야 내릴 거예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낭자의 말을 믿어야지요.”

한창은 두 사람의 뒤에 서서 천천히 그들을 따라 걸었다.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젊은 남녀를 보고 있자니, 한창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정 낭자가 내가 그리도 보고 싶어 했던 그 은인이었다니. 반강현을 지나갔던 그 여인이 바로 정 낭자라니.

눈앞의 이 여인이 딸의 유명세를 빌려 백성을 업신여기는 가족을 둔 정 낭자이자, 천자와 태후 그리고 종친과 사적으로 친분을 쌓는 그 정 낭자라니.

한창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사리사욕을 위해 황실과 가까이 지낸다기에는…….

폐하를 알현하여 큰절을 올릴 때조차, 정 낭자는 허리를 굽실대지 않았어. 게다가 그 표정에서는 아부를 떨기 위한 비열한 미소와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

그 모습은, 조정 대신들이 자신의 청렴함을 증명하려는 듯 일부러 강직하게 행동하는 모습도 아니야. 그보다 더 자유롭고, 태생부터 몸에 밴,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강직함이었어.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으며, 남에게 아첨하지도 않는 순수한 강직함.

그런 사람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황실을 가까이한다고?

한창은 고개를 저으면서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한창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내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벌써 마차에 몸을 싣고 떠났고,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배웅한 뒤 자신도 마차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한창이 서둘러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 낭자.”

한창이 정중하게 정교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한창을 향해 답례했다.

“소생이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건, 모두 낭자의 도움 덕분입니다.”

한창이 말했다.

“농이 지나치세요. 그날 제가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대인의 일은 대인의 일일 뿐, 저와는 무관하다고요. 말한 사람에게 별 뜻이 없다고 한들, 듣는 사람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요. 제 말을 대인이 듣지 않았다면, 모든 게 다 헛된 일이 되었을 겁니다. 대인께서 제 말을 귀담아들었으니, 오늘의 결과가 있는 거고요. 듣고 보면, 정말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죠?”

정교랑이 말했다. 한창이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께서 도량이 크십니다.”

한창이 다시 한번 예를 올리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아들놈 원조가 낭자를 단단히 오해했습니다. 제가 돌아가는 즉시, 원조를 데리고 낭자께 사죄하러 가겠습니다.”

“무슨 오해요?”

정교랑이 물었다.

“낭자가 악인이라는 오해입니다.”

한창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한 공자님은 저를 악인으로 오해한 게 아닙니다. 대인도 그 점은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정교랑이 말했다.

알다마다요. 원조는 낭자를 악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조는 낭자를 좋은 사람으로, 선량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도리와는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지요.

한창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낭자, 저희 부자가 낭자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한창이 정교랑에게 재차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한 대인. 예전에 제가 한 공자님께 은혜를 입었어요.”

정교랑이 답례하며 말했다.

정 낭자가 원조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한창이 놀란 모습으로 정교랑에게 더 물어보려던 찰나, 반대편에서 내시 한 명이 한 관리에게 길을 안내하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창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관리를 알아보고 흠칫 놀랐다.

“풍 중승.”

한창은 저도 모르게 풍림을 부르고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다더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풍림이 걸음을 멈췄다. 풍림은 한창을 쳐다보고, 그가 역참에서 자신과 잠시 합석했던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풍림이 한창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으나, 한창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그의 인사를 무시했다. 한창의 시선은 풍림을 등지고 선 여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가족인가? 그런데 가족이 무슨 일로 여기 황궁까지 따라 들어온 거지?

풍림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별다른 말 없이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를 등지고 서 있던 여인이 몸을 돌린 순간, 걸음을 내디디던 풍림의 시선이 무심코 여인에게로 향했다.

바로 그때, 풍림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창백한 안색이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을 가진 여인이 마차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 정 그렇게 말하고 싶으시다면, 대인의 목숨을 구한 것도, 고마워해야 할 사람도 제가 아니에요.

풍림은 온몸에 전율이 일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몸을 홱 돌리고 목청을 높여 외쳤다.

“당신이었군요!”

풍림의 반응에 화들짝 놀란 한창은 얼른 정교랑의 앞으로 가서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자신의 행동에 머쓱함을 느꼈다.

풍림이 아무리 귀판관이라고 한들, 여인을 때릴 인물은 아니지.

한창의 등 뒤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풍림은 정교랑 앞에 선 한창을 밀쳐낼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한창을 향해 뻗었던 손을 황급히 거두고 정중하게 읍을 했다.

“풍림, 낭자를 뵙겠습니다.”

풍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풍림의 모습에 한창은 더욱 놀랐다.

이,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설마 정 낭자에게 비아냥대는 건가?

한창이 눈을 크게 뜨고 정교랑을 돌아보았다. 정교랑은 풍림을 향해 진지하게 답례하고 있었다.

“한 대인,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정교랑이 한창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한창은 정교랑이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서둘러 자리를 비켜서고 손을 들어 안내했다.

풍림은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 있는 얼굴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공손히 정교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풍림, 낭자를 배웅합니다.”

풍림은 정교랑이 탄 마차가 어가를 따라 멀어지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한창에게 말했다.

“한 대인, 저 낭자가 한 대인의 가족이었군요. 대인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꼭 한번 댁에 방문하고 싶습니다.”

한창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풍림을 쳐다보았다.

“풍 대인, 저 낭자는 제 가족이 아닙니다.”

풍림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럼 혹시 아시는 분의 가족인지요?”

풍림이 서둘러 예를 표하면서 재차 부탁했다.

“그렇다면 한 대인께서 저를 그분께 소개해 주십시오. 저 낭자는 제 소중한 은인입니다.”

한창이 경악하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요?”

“저 낭자가 바로 이 풍림의 목숨을 구해 주신 생명의 은인입니다.”

풍림은 낯선 자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 습관까지 잃어버린 듯, 한창을 오랜 벗처럼 대하며 한창이 묻는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제가 은인을 꼭 다시 만나 뵙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소원을 이루게 되었네요. 한 대인, 제가 은인을 다시 뵐 수 있도록 꼭 좀 다리를 놓아 주십시오.”

간곡히 예를 표한 풍림은 고개를 들고 나서야 한창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낭자가, 풍 대인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은인이라고요?”

한창이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풍림이 허리를 펴고 물었다.

“한 대인, 저 낭자가 여인이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아니면 제가 지금 농담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겁니까?”

한창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 여인을 무시한다고?

저 여인 때문에 내가 폐하 앞에서도 결례를 보였는데, 그럴 리가 있나.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어.

한창은 잠시 말없이 풍림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귀판관 풍림은 미친 사람 같지도, 술에 취한 사람 같지도 않아 보였다.

풍 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여인이 풍 대인께도 큰 은혜를 베풀었군요.”

한창이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풍 대인께‘도’?

그 말에 풍림이 한창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물었다.

“그럼 설마 한 대인께서도…….”

한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아니, 아니, 저와 제 아들놈 모두 낭자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군.

풍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대인께 여쭙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우리의 은인을 다시 뵐 수 있는 겁니까?”

풍림의 간절한 모습을 본 한 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겠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풍 대인, 정말로 알고 싶으신지요?”

풍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춤했다.

역참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오늘은 어찌 이리 이상한 사람처럼 굴지?

“은혜를 알고도 갚지 않는 것은 군자가 아니지요.”

풍림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한창이 입맛을 다시며 재차 물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 보은은커녕, 은인을 해치려고 한다면요?”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리를!

풍림이 미간을 더욱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건 금수만도 못한 것이지요.”

한창이 풍림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인,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한 대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눈썹을 치켜세운 풍림이 한창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소리쳤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놀린다고 할 수밖에요.”

한창이 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그게…….”

풍림이 입을 열었지만, 한창이 그의 말을 끊었다.

“풍 대인, 저분은 대인께서도 아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대인께서 아주 잘 아시는 분이지요.”

한창이 어가에서 멀어지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성은 정씨고, 강주 사람입니다.”

정씨, 강주 사람.

풍림이 몹시 기뻐하면서 한창의 말을 되새겼다. 풍림은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기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다가, 문득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고 한창을 쳐다보았다.

정씨! 강주 출신 여인!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풍림이 새빨개진 얼굴로 한창의 팔을 붙잡았다. 한창을 붙잡은 풍림의 손등에는 시퍼런 핏줄이 솟아 있었다.

풍림이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풍림은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푹 쓰러졌다.

“풍 대인! 풍 대인!”

“풍 대인! 왜 그러십니까!”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풍림이 쓰러졌다고?”

황제가 놀란 눈으로 눈앞의 내시를 쳐다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네. 좀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멀쩡하던 자가 왜 갑자기 쓰러져? 태의는 불렀고?”

황제가 물었다.

“예. 이미 불렀습니다. 태의가 직접 풍 중승을 거처로 모시고 갔습니다. 다행히도 큰 병은 아니라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내시가 서둘러 대답했다. 황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게 짐이 좀 쉬라고 했거늘, 안 듣고 고집을 부리더니.”

황제가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강직하고 충직한 신하들은 죄다 좋은 명성은 자기들이 다 가져가고, 짐만 각박한 사람으로 만든다니까.”

“폐하, 풍 중승은 과로로 쓰러진 게 아닌 듯합니다.”

내시가 말했다. 황제가 의아한 눈빛으로 내시를 쳐다보자, 내시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놀라서 쓰러졌다고…….”

내시가 말끝을 흐렸다.

놀라서 쓰러졌다고? 대체 어떤 자가 뭘 어떻게 했기에 귀판관 풍림이 놀라 쓰러지게 해?

“풍 중승이 황궁 앞에서 한 대인과 정 낭자를 마주쳤다고 합니다.”

내시의 말에 황제가 흠칫 놀랐다.

설마……. 설마 이번에도 정 낭자와 관련이 있는 게야?

이미 좀 전에도 신하 한 명이 정 낭자를 보고 내 앞에서 결례를 보일 정도로 놀랐거늘, 또 한 명이 정 낭자를 보자마자 놀라 쓰러졌다는 게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한창은 태의와 함께 풍림의 거처로 향했기에, 황궁에서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풍림에게 길을 안내하던 내시밖에 없었다.

“소인도 잘 모르는 일이옵니다.”

다급하게 불려온 내시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때 한 대인께서 먼저 풍 대인께 말을 걸었고, 풍 대인께서는 한 대인께 예를 표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뜨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정 낭자가 몸을 돌리자, 풍 대인께서 ‘당신이었군요.’라고 하시더니…….”

당신이었군요? 또 그 말을?

“그다음에 당신이 바로 정 낭자냐고 물었느냐?”

황제가 내시의 말을 끊고 물었다. 내시가 멈칫하다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다음에는 정 낭자가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다음에는?”

황제가 이어서 물었다.

“그다음에는 풍 대인께서 정 낭자에게 예를 올리고 대화를 나누러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소, 소인은 편하게 말씀 나누시라고 자리를 피했고요.”

내시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황제가 내시를 노려보았다.

네놈들은 다른 때는 엿보지 않고 엿듣지 않는 게 없으면서, 왜 하필 그런 때에는 자리를 피하는 게야!

“그 후 정 낭자가 자리를 뜨고, 풍 대인과 한 대인께서 대화를 몇 마디 나누었는데, 풍 대인께서 갑자기 흥분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다가 한 대인께서 정 낭자가 떠난 방향을 가리키며 무슨 말씀을 하시자, 풍 대인께서 바로 혼절하셨습니다.”

내시가 단숨에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정말로 정 낭자와 관련된 거라고?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창에게 직접 물어봐야겠군.

“한창을 불러오거라.”

내시들이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조용히 물러났다.

같은 시각, 풍림이 궁문 앞에서 혼절했다는 이야기는 금세 경성 곳곳에 퍼졌다. 특히 그 자리에 정교랑이 있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더욱 신이 나서 소문을 널리 퍼트렸다.

“귀신은 신선을 무서워하는 게 맞네, 맞아.”

“딱 한 번 얼굴을 마주했을 뿐인데, 귀판관이 놀라서 쓰러질 정도라니.”

관청에 있는 관리들과 하급 관졸들은 귀신에 관한 일을 진지하게 논하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농담 정도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는 했다. 삽시간에 관청 곳곳에서 귀신이 오르내리게 됐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로고.

이야기를 들은 고능준은 혼절한 풍림이 어이가 없는 한편 우스웠다.

“유 교리보다도 못한 자로군. 쓸모라곤 없는 자야. 내심 풍림을 응원한 내가 다 우습네.”

고능준이 소매를 홱 털고 말했다.

“정 낭자가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풍림이 혼절까지 했다는 게냐?”

“대인, 듣기로는 풍림이 당신이었냐고 묻자, 정 낭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그게 뭐 그리 놀랄 일이라고.”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더 상세한 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한창만 알고 있습니다.”

수하가 말했다.

“한창? 그건 또 누구냐?”

고능준이 미간을 더욱 찌푸리고 물었다.

“일식 시간을 정확히 예측했다던 반강현의 현령입니다. 그 일 이후에 도랑 보수 작업도 성공적으로 끝내서 태창로 전운사에 부임하게 됐기에, 관례에 따라 황제를 알현하러 왔다고 합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일식을 예측하긴 했지만, 도랑 보수로 공을 세운 덕에 진급했다?

교묘한 말이었지만 고능준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한창이 태창로 전운사로 부임하게 된 진짜 이유는 도랑 때문이 아니라 일식 때문이라는 것을.

“설마 정 낭자와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

고능준이 의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리 일식을 예측했다고 한들, 한창은 눈에 띄지도 않는 인물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오늘 황제를 알현하러 입궐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니 한창이 오늘 대전 안에서 결례를 보인 일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었다.

“당장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수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한창은 그리 중요한 자가 아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풍림이 앞으로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야.”

고능준이 말했다.

“대인, 만약 풍림이 이번 일로 죽는다면, 정 낭자는 아예 끝장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의 의도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여인이 자신의 죄를 벌하겠다고 나선 현임 어사중승을 분통 터트려 죽이거나 놀라게 해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정교랑이 암암리에 손을 썼던 유 교리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벌건 대낮에 벌어진 일이고, 원인과 결과가 명백한 일이 아니던가.

누군가가 이를 정 낭자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다면, 조정에서도 필경 정교랑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백성들도 놀라 두려워할 테고.

“그럼, 풍림이 이참에 죽어버리는 게 더 좋겠군.”

고능준이 말하면서 수하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창이 풍씨 저택을 떠나, 폐하의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문밖에 서 있던 고능준의 측근이 나지막이 고했다.

수하가 웃음기를 거두고 고능준을 향해 예를 표했다. 고능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하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울 저녁에 부는 매서운 북풍을 맞으며 걸음을 옮기던 한창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한창이 속으로 탄식했다.

“한 대인, 서두르십시오. 폐하께서 거의 반나절이나 기다리셨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내시가 고개를 돌리고 한창을 재촉했다. 한창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잰걸음으로 어가를 가로질러 갔다. 어가를 지나가는 동안, 어가 양쪽에서 자신을 향하는 시선이 곁눈질로도 보였다.

오늘 이후로 경성 조정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어. 내가 유명해지게 된 이유도 참…….

한창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찬바람을 맞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근정전 안은 몹시 따뜻했고, 벌써 등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한 대인은 풍 대인과 구면이오?”

황제가 물었다.

“경성으로 오는 길에 한 번 마주친 일이 있습니다.”

한창이 대답했다.

“풍 중승의 병은 어떤 병이오?”

황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태의가 아닌 한창에게 병을 묻는다는 것은, 황제도 풍림이 쓰러진 이유가 병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폐하, 풍 중승께서 앓는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한창이 대답했다.

역시…….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폐하, 풍 중승과 정 낭자도 서로 구면입니다.”

이어진 한창의 말에 황제가 흠칫 놀라며 반문했다.

“구면이라고?”

한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면일 뿐만 아니라, 정 낭자는 풍 중승의 목숨을 구하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뭐라고?

황제가 경악했다.

“어디 알던 사이뿐인가. 풍림이 큰 은혜를 입었다고 했어.”

“무슨 은혜?”

“한창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풍 중승이 그렇게 얘기했다고만 했어. 더 자세한 건 폐하께서 풍 중승에게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군.”

“풍 중승이 자신을 구해 줬던 그 생명의 은인을 꿈에서도 찾아다녔다던데, 자신이 때려죽이겠다던 사람이 바로 그 은인일 줄이야.”

“혼절할 만도 하네.”

하늘색이 짙어질 무렵, 바깥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북풍을 타고 문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노사안이 손에 쥔 공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서 떠들던 사람들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노 어사.”

떠들던 이들이 노사안에게 예를 표했다.

“오늘 밤은 바람이 좀 강하군. 경계를 늦추지 마시게. 당직을 설 거면, 당직을 서는 모양새를 보여야지.”

노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로를 밀치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노사안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회랑 아래에 서서 앞에 보이는 궁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도 오늘 침수 드시기는 글렀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한창은 풍림이 정 낭자에게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잘 몰랐고, 그 일에 대해 떠들던 이들도 몰랐다. 하지만 노사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불과 하루 전에 풍림의 입을 통해 그 일을 직접 듣기까지 했다.

  • 아직 살아 있다고는 하나, 내 목숨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닐세.

  • 그때 나는 결심했네. 앞으로는 결코 생과 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이 내게 준 여생을 가치 있게 보낼 거라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그 은인께 보답하겠다고.

  • 그분은 내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뼛속 깊이 새길 교훈까지 주셨다네.

  • 감히 내 은인을 누구와 비교하는 것인가?

  • 내 은인은 대의에 초연한 분이야. 귀신을 운운하며 백성을 현혹하는 여인과 비교하다니!

어제 풍림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던 노사안은 쓴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실로 하늘이 사람을 놀리는구나.”

노사안이 중얼거렸다.

마차가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내며 어가를 지나쳤다. 어가 양쪽으로 밝혀진 불빛이 은은하게 길을 비췄다. 대낮에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어가는 밤이 되자 더욱 어두워 보였다.

어가에는 공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관리들의 마차가 간간이 보였다. 한창이 마차의 휘장을 내리고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

한원조의 다급한 목소리가 한창을 깨웠다. 눈을 번쩍 뜬 한창은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환한 등불에 눈이 부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등롱이 치워진 대신 걱정이 가득한 한원조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깜빡 잠이 잠들었구나.”

한창이 한원조의 어깨를 짚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찬바람이 훅 불어오자, 한창은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한원조가 서둘러 두봉을 가져와 한창에게 덮어 주고 우산을 펼쳤다.

“눈이 오는 것이냐?”

한창이 물어보고는 고개를 들고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겨울바람에 섞인 차가운 눈송이가 한창의 손과 얼굴에 내려앉았다.

“정말로 눈이 내리는구나.”

한창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어서 들어가시지요.”

한원조가 우산을 좀 더 낮게 세워 들고 온몸을 덮쳐오는 찬바람을 막았다.

추운 바깥에서 실내로 들어와 따뜻한 기운이 훅 느껴지자, 한창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우산을 정리한 한원조는 사환이 올린 뜨거운 차를 한창에게 건넸다. 한창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는 편안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원조는 서둘러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우선 한창이 씻고 옷을 갈아입는 일부터 도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탁자 위에는 저녁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한창이 황제를 알현하기로 했던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던지라, 그는 조식도 먹지 않고 황궁으로 향했었다. 행여나 황제 앞에서 결례를 보일까 염려해서였다. 점심은 풍림을 마주쳐 한바탕 사달이 나는 바람에 먹지 못했고, 부랴부랴 황궁으로 다시 불려갔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당연히 황제가 한창에게 저녁을 함께 들자고 할 리는 없으니, 한창은 쭉 공복일 수밖에 없었다.

한창은 뒤늦게 허기가 졌지만 통 입맛이 돌지 않아 술만 한 잔 마신 뒤, 반찬만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 먹었다.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원조가 물었다.

황제가 관례에 따라 관리를 대면하는 시간은 대개 일각, 길어야 한 시진이었다. 따라서 다들 한창이 황제를 알현하는 데 걸릴 시간은 일각도 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한창이 황제를 알현한 시간은 족히 반나절이었고, 심지어 하루에 무려 세 번이나 용안을 뵌 터였다.

한창이 한숨을 푹 쉬면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원조를 쳐다보았다.

“원조, 일이 생겼다.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우습기도, 슬프기도 한 일이야.”

우습기도, 슬프기도 한 일?

한원조가 의아한 표정으로 한창을 쳐다보았다.

“듣기로는 풍 중승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던데요?”

한원조가 물었다.

“풍 중승의 일은, 우리가 겪은 일과 똑같다. 내 추측이 맞았어. 정 낭자가 바로 내게 일식 시간을 알려 줬던 그 낭자였다. 오늘 황궁에서 그 여인을 봤다.”

한원조가 흠칫 놀라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한원조는 자신의 부친이 그 낭자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원조는 시녀가 반강현을 지나간 적이 없다는 말에, 부친을 도왔던 사람이 정 낭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마음을 놓은 터였다.

하필 아버지가 황궁에서 정 낭자와 마주치고, 그 은인이 바로 정 낭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니. 내가 태평거 주인장 자리를 내놓기 전이라면 모두에게 즐겁고 반가운 일이었겠지만, 내 이미 정 낭자의 면전에서 주인장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심경이 얼마나 복잡하셨을까. 만감이 교차하셨겠지.

“아버지, 이 불효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한원조가 탁자를 밀고 한창에게 큰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소자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정 낭자께 사죄하러 가겠습니다.”

한창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한원조를 쳐다보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그 말을 정 낭자에게 똑같이 했더니, 정 낭자가 뭐라고 한 줄 아느냐?”

한원조가 고개를 들고 머뭇거렸다.

“원조 네가 정 낭자를 악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사죄할 필요 없다고 하더구나.”

한창이 말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한원조는 말문이 막힌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여인이로군.

등불이 환하게 켜진 실내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사죄가 아니라, 감사의 인사를 하러 가야겠군요.”

긴 침묵을 깨고 고개를 든 한원조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한창은 한원조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창의 눈가에 씁쓸함과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추구하는 도의가 다르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의 신념이 있고, 선택권이 있다.

자신이 따를 신념을 결정하는 일은 어렵지만, 그래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 법.

“아 참, 그리고 정 낭자가 네게 큰 은혜를 입었다던데? 그건 무슨 소리냐?”

한창이 무언가 생각난 듯 한원조에게 물었다.

“정 낭자가 제게 은혜를 입었다고요?”

한원조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껏 정 낭자와 마주친 적도 없습니다. 태평거에 관한 일도 모두 정 낭자의 시녀가 나서서 처리했는걸요. 저는 몇 년 동안 숙주를 떠난 적이 없고, 간혹 왕래하는 지인들 외에는 다른 이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과거 시험 때문에 경성에 온 것이고요. 정 낭자는 강주 출신이고, 신의 낭자라고는 하나 저와는…….”

한원조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외쳤다.

“정씨! 신의 낭자! 아버지! 정 낭자가 고모님의 목숨을 구해 준 그 신의입니다!”

고모님이라니?

“그 신의가 바로 정 낭자였다니. 정 낭자였다니!”

문득 무언가 깨우친 듯한 표정의 한창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한창이 흥분한 표정으로 손을 높이 들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아이고, 아이고. 정 낭자가 내 은인일 뿐이 아니라, 네 고모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구나. 정 낭자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은인이었다니, 참으로, 참으로…….”

한창이 문득 멈칫했다.

“잠깐만, 정 낭자 말로는 네가 정 낭자의 은인이라던데?”

내가 정 낭자의 은인이라고?

한원조가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언제 그 여인을 본 적이 있었나?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은혜? 고모님의 병을 고쳤을 때는 그 여인이 고모님께 은혜를 베푼 것일 테고.

  • 공자님까지 우리 아씨께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다들 아씨를 이렇게 모질게 대하냐고요!

한원조는 문득 반근이 울부짖으며 외쳤던 말과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 공자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순간 몇 년 전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아오면서 연신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외치던 앳된 몸종의 얼굴과 태평거에서 마주친 반근의 얼굴이 한원조의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그 여인이었어!

한원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 존함을 여쭈어라. 훗날 은혜를 갚아야지.

허약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한원조의 귓가를 희미하게 스쳤다.

그 여인이었어!

세상에, 전부 그 여인이었어!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그때 그 여인이 했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니!

  • 공자님, 실례지만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 그럼 ‘원조’는 공자님의 자(字)고요?

  • 공자님의 의협심에 탄복했습니다.

다, 모든 게 다, 그렇게 된 일이었어!

  • 공자님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마치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모습이 한원조의 눈앞에 떠올랐다.

어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그 은혜를 이렇게까지 갚는단 말인가!

한원조는 온몸에 전율이 일고 두피가 저릿해져 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탁자를 세게 움켜쥐었다.

어찌 이렇게까지 은혜를 갚을 수 있냔 말입니다!

-하늘이 사람을 놀리다-

새롭게 어사중승 자리에 부임한 풍림의 거처는 인명(仁明) 골목에 위치했다. 경성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저잣거리까지 두 골목을 가로지르면 도착할 수 있고, 저잣거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인명 골목은 경성에서 가장 살기 좋고 조용하기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인명 골목 곳곳에 매서운 북풍을 타고 온 눈꽃이 내려앉았다.

풍림은 하인 둘과 둘둘 만 이불 한 채만 달랑 들고 상경한 터였다. 아무 가구도 없이 등롱 몇 개만 켜져 있으니 커다란 저택은 더욱 음산하고 쓸쓸해 보였다.

사환이 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바깥의 찬바람이 새어 들어와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촛불이 거의 꺼지기 직전, 사환은 재빨리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약 드시지요.”

사환이 조용히 말하며 침상 위에서 벽을 보고 돌아누운 풍림을 쳐다보았다.

“됐다.”

풍림이 대답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사환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노야.”

사환이 애원 섞인 목소리로 풍림을 불렀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풍림이 말했다. 윗전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아는지라 사환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훔쳤다.

벽을 보고 누워있던 풍림은 천천히 눈을 뜨고, 촛불로 인해 벽에 그려진 검은 음영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 여인이 정 낭자일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풍림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둘이 어떻게 같은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불꽃이 튀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깼다. 풍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불꽃이 튀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따귀를 때리는 소리처럼 느껴지자, 볼 한쪽이 얼얼해졌다.

어찌 이런 일이!

내 목숨을 구한 것도, 고마워해야 할 사람도 자신이 아니라던 그 여인이, 백성을 현혹하고 천자를 위협한 그 요부와 어찌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태생부터 달라 보이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일 수가 있느냔 말이다!

사람이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있지?

변해?

아니다. 그 여인이 변했다고 하기엔, 실상 내가 그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지 않은가. 한창을 만났을 때처럼, 역참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쳤던 게 내가 그 여인에 대해 아는 전부였으니까.

풍림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던 사환이 화들짝 놀랐다.

“노야.”

사환이 놀란 눈으로 풍림을 부르자, 풍림이 맨발로 바닥을 디디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서 마차를 준비해라.”

풍림이 말했다.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환이 풍림의 옷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노야, 노야.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그 여인을 보러 가야겠다. 내 직접 물어볼 것이 있어.”

풍림이 대답했다.

“노야,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밖에 눈도 오고요.”

사환이 벌써 문가에 다다른 풍림을 향해 소리쳤다.

풍림이 문을 열자, 거센 찬바람이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그의 온몸을 덮쳤다. 풍림이 주춤하며 발걸음을 멈추자, 뒤에 있던 사환과 다른 사환이 재빨리 풍림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그를 말렸다.

“노야,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 시간에 어찌 거길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이 시간에 여인을 만나러 가는 건 큰 실례지.

풍림은 문을 닫지 않고 잠시 문 앞에 서서 온몸을 덮쳐오는 눈을 그대로 맞았다.

“노야, 오늘은 일단 좀 쉬시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환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풍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환이 서둘러 문을 닫고, 맨발인 풍림을 안쪽으로 모셨다.

어두컴컴한 풍림의 저택이 다시금 조용해졌다.

같은 시각, 등불이 환하게 켜진 다른 저택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자, 바깥의 한기를 두른 사내가 실내로 걸어 들어왔다. 실내에 둘러앉아 있던 네다섯 사람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됐소?”

“알아냈습니다. 3년 전, 풍림이 묵었던 역참에 불이 났던 그날, 강주로 돌아가던 정 낭자가 우연히 풍림과 같은 역참에 묵었다고 합니다. 정 낭자가 역참에 불을 질렀던 방화범들을 현장에서 화살로 쏘아 즉살하고, 불길이 더 거세지기 전에 역참에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켰다고 하더군요. 그중 풍림이 있었기에 풍림이 그 여인을 생명의 은인이라 여기는 거고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가 말했다. 내막을 알게 된 사람들이 얼른 고개를 돌려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번 일은, 정말로 하늘이 무심치 않았던 게로군. 어찌 그런 우연이.”

일상복을 입고 앉아 있던 고능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막료들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감탄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찌 그런 우연이.”

“누가 보수사에 가서 향불이라도 올렸소?”

막료 중 한 명이 진지하게 물었다.

“향불을 올리진 않았고, 얼마 전에 다리를 지나다가 살코기가 제법 남아 있던 오리목을 비렁뱅이에게 던져준 적이 있소만. 설마, 그때 내가 복을 쌓았나?”

다른 막료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눈짓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박장대소했다. 천장이 떠나가라 웃어대는 그들의 기세는 허공에 휘날리는 눈발마저 놀라게 할 정도였다.

고능준 또한 탁자를 연신 손으로 내리치면서 웃었다.

“이번에 풍림이 쓰러지는 바람에 모든 게 다 수포가 될 줄 알았는데, 역시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이번 일로 눈엣가시인 두 사람을 동시에 없애버릴 수 있게 됐어!”

“사람이 세우는 계획은 하늘의 계산보다 못한다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거로군.”

진소와 진 노태야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마주친 두 부자는 손을 내저으며 풍림에 대해 보고한 수하를 물렀다.

“그때 그 여인이 정말로 정 낭자일 줄이야.”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리고는 붓으로 동그라미와 점을 그려둔 병풍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지나가던 행인이 불의를 보고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지?

  • 정 낭자가 떠난 지 얼마나 됐지?

  • 그럼 열흘 전에 정 낭자가 지나갔을 지점이 바로.

풍림이 친필로 작성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도움을 주었던 일행은 약 이십 명이고, 경성에서부터 한 여인을 호송해 오고 있었다.’

여인!

현장에서 두 명을 화살로 쏴 죽였다? 설마 정말로 그 강주 바보는 아니겠지?

“넌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난 그때부터 그게 정 낭자일 줄 알았다.”

진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자, 진소가 민망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하늘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군요. 일이 이렇게 돼버리면 곤란한데.”

진 노태야도 웃음기를 거두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화로 덕분에 실내는 무척이나 따뜻했지만, 분위기는 얼음장과도 같았다.

“풍림이 자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몬 셈이구나. 이번 일로 정 낭자의 죄를 묻지 않고 덮는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불충으로 여겨질 거다. 사적인 일로 대의를 포기하는 것이니, 어사대 관리들은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일 테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정 낭자의 죄를 묻고, 정 낭자를 경성 밖으로 내치거나 형을 내린다면, 평생 배은망덕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 거야.

충과 효를 동시에 행할 수 없다고들 한다. 충을 행하고자 하면, 효를 잃을 것이고, 효를 행하고자 한다면, 충을 배반해야 하지. 이번 일로 풍림은 충과 효,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얻을 수가 없게 됐어. 결국 모든 걸 잃게 되는 셈이지.

황제 폐하가 인자한 성군이시긴 하다만, 풍림이 이번 일에 충을 따른다 해도, 그의 배은망덕함은 폐하의 마음속에 영원히 뽑히지 않을 가시를 찔러 넣을 것이야.”

진소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풍림이 정 낭자의 죄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두 사람의 명성에 크나큰 오점이 남을 겁니다. 그렇다고 정 낭자의 죄를 묻지 않고 황제께 사죄하며 제 발로 경성을 떠난다 해도, 이 일은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니 정 낭자는 언제든 같은 죄목으로 대신들에게 공격받을 테고요.”

진소가 찻잔을 내려놓고 탄식했다.

“정말로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계산에 미치지 못하는군요.”

실내의 등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창가에 길게 늘어뜨렸다. 창밖의 눈꽃이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의 그림자 위를 날아다녔다.

간밤에 내린 눈이 마당에 소복하게 쌓였다. 곳곳을 뒤덮은 새하얀 눈 덕분에 아침 햇살이 더욱이 밝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나온 장 노태야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려던 찰나, 노복이 그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려던 장 노태야는 하마터면 허리에 담이 걸릴 뻔했다.

“만평, 무슨 짓이냐?”

장 노태야가 자신의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노야, 풍림의 일에 관해서 들으셨지요?”

노복이 물었다.

“어제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또 왜?”

장 노태야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그러더니 노복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아차차, 병풍에 그린다는 걸 깜빡했네. 정 낭자가 풍림도 구했지.”

노복이 기가 찬다는 듯이 허, 하고는 장 노태야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애초에 정 낭자가 풍림을 구했기 때문에, 지금 둘 다 사지에 놓인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나.”

장 노태야가 태연하게 붓에 먹을 찍었다.

“그럼 아닙니까? 풍림이 자신과 자신의 은인을 사지로 몰아넣었잖습니까. 풍림이 정 낭자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야기를 안 했으면 모를까요. 풍림 그자가 배짱이 손톱만 해서 정 낭자를 보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혼절해 버리는 바람에, 그 사실을 숨길 수도 없게 됐고요.”

노복은 말하다 말고 버럭 화를 냈다.

“정 낭자가 자기 목숨을 구해 준 게 남에게 말 못 할 창피한 것도 아닌데, 숨길 필요가 뭐 있다고.”

장 노태야는 붓을 들고 병풍에 한 획을 그려 넣은 뒤, 잠시 감상을 하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노야, 정 낭자가 풍림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게 만천하에 밝혀진 이상, 풍림은 정 낭자를 놓아주고 싶어도 못 놓게 되는 꼴이 됐습니다. 양쪽이 함께 망할 수밖에 없지요. 반근은 정 낭자 걱정에 매일같이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는 장 노태야의 모습을 본 노복은 더욱 속이 타들어 갔다.

“반근? 아둔하기는.”

장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 낭자가 그 애를 팔다시피 했는데도, 반근은 아직도 정 낭자를 잘 모르는 모양이야.”

“노야.”

노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장 노태야를 불렀다.

“양쪽이 함께 망한다?”

장 노태야가 붓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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