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75)

작가의 말:

당나라 때의 명기이자 여성 시인이었던 설도(薛濤)는 어릴 때부터 음률을 익혔습니다. 본문 내의 시 구절은 설도의 아버지가 시의 앞 구절을 읊자, 어린 설도가 뒤 구절을 지어 화답한 일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청음-

경왕부 안에 연회석이 마련되었다. 연회석이라고는 하지만 자리에는 오직 세 사람만 앉아 있었다.

진안 군왕이 허리를 세우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인사말이라도 해야 하나요? 하하, 내가 직접 연회를 열어 본 적이 없어서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해야죠.”

정교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경왕 전하와 군왕 전하의 입부를 경하드려요.”

진안 군왕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경왕은 벌써 입에 음식을 욱여넣으면서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연회에 가무가 빠지면 섭섭하죠. 아, 여기 왕부에 있는 기녀는 아니고, 황궁에서 예인들을 빌려왔습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내며 미소 지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그전에, 전하께 축하 선물부터 드리고 싶어요.”

진안 군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았다.

“그럼 선물을 받아야죠.”

진안 군왕이 잔뜩 기대에 찬 모습을 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선물을 드리기 전에 전하의 왕부에 있는 칠현금을 잠시 빌려도 될까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서 있던 내시가 서둘러 칠현금을 가지러 갔다. 왕부 안에는 칠현금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오늘 초대한 예인에게서 칠현금을 빌려 올 수 있었다.

“급하게 구한 것이라 그리 좋은 칠현금은 아닙니다. 낭자께 양해를 구합니다.”

내시가 칠현금을 건네며 공손하게 말했다.

“칠현금이기만 하면 돼요.”

정교랑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칠현금을 받아 잠시 조율하고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곳 왕부에는 부족한 게 없을 거예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남도 드릴 수 있겠죠. 저라고 특별할 건 없으니까요. 대신 새로운 거처로 옮기셨으니, 칠현금 연주로 액막이를 해 드릴게요.”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하겠다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칠현금 연주가 시작되고도, 대전 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경왕이 음식을 먹는 소리가 유난히 크기도 했고, 경왕이 이따금 지르는 괴성이 칠현금 소리보다 더 컸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온 예인들은 잠시 편전에서 대기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기다리던 예인들은 칠현금을 빌려 간 것으로 보아 당장 무대에 서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황궁의 예인들은 각종 제례나 연중행사가 있을 때마다 천자 앞에서 가무를 선보이곤 했다. 그렇다 보니 왕부에서는 긴장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연회석 손님이 단 한 명뿐인 왕부에서의 공연이 산전수전 다 겪은 황궁 예인들을 긴장시킬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내시가 칠현금을 빌려 간 후 들려오는 말소리에 예인들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급하게 구한 것이라 그리 좋은 칠현금은 아닙니다.”

내시의 목소리를 들은 예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칠현금을 빌려준 악공의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칠현금을 갑자기 빌려 간 일로 기분이 상했던 악공은 내시의 말에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감히 최(崔) 악공의 칠현금이 좋지 않다고 하다니. 그럼 이 세상에 좋은 칠현금은 열 개도 안 되겠네.”

예인 중 한 명이 웃으면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저 낭자의 연주가 어떨지 모르니까, 창피해하지 말라고 미리 한 말이겠지. 저 내시도 참 배려심이 깊네.”

다른 예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맞장구쳤다.

예인들이 조용히 떠드는 새에, 대전 안에서는 칠현금 연주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경왕이 때때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칠현금 연주 소리는 우스꽝스럽게만 들렸다.

예인들이 계속해서 웃고 떠드는 와중에 갑자기 최 악공이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 악공이 왜 저러지?”

예인 중 한 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왕 앞이니 조심하시오.”

최 악공이 경왕 때문에 놀라 그러는 것일까 봐, 그의 옆에 있던 다른 예인이 나지막이 충고했다. 최 악공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잘 들어 보시오.”

최 악공의 말에 예인들이 잠시 멈칫했다.

뭘 들으라는 거야?

예인들이 귀를 기울이자, 편전 내에서 수군대는 목소리와 경왕이 내는 괴이한 소리, 그리고 끊임없는 칠현금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칠현금 연주는 끊임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음 한 음이 완연하여 수군대는 소리를 뚫고 귓가를 맴돌았다. 보통은 악기 연주 소리를 들을 때 음 하나하나가 귓속으로 파고든다는 표현을 쓰지만, 지금 들려오는 칠현금 연주는 귓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귓불을 간지럽히는 듯 귓가에서만 잔잔히 맴돌았다.

그 느낌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자, 듣는 이들은 누군가가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귀를 열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칠현금 소리가 갑자기 격앙되었다. 흐르는 구름과 물 같기도 하고 하늘 가득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이 마구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한 칠현금 소리는 빠른 연주에도 소리가 섞이지 않고 느려질 때도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슬프고 처연한 칠현금 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어디선가 나지막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 악공이 주위를 둘러보자, 예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슬픈 칠현금 연주 소리에 떠오른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안 그래도 초겨울이라 스산한 기운이 극에 달하는데, 어찌 이런 구슬픈 연주를 한단 말인가? 액막이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이리 비통한 연주를 하는 거지?”

최 악공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칠현금 소리는 더욱 비통하고 스산해졌다. 칠현금의 현이 한 줄 한 줄 떨릴 때마다 듣는 사람의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굳어 버린 최 악공은 칠현금의 운지법을 떠올리는 것도 잊은 채 연주 소리를 귓가에서 떨쳐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들리는 칠현금 소리가 말소리를 뚫고 귀에 꽂히는 것을 보아하니, 연주자는 마음속에 아무런 잡념이 없어.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어느 정도 경지에 달한 자라면 어떤 외부의 방해에도 흔들림 없이 온 정신을 집중해서 칠현금을 연주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연주를 듣게 만들 수 있다니! 소란스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내가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지금도 저 칠현금 소리는 끊임없이 내 마음속을 파고 들어와.

사람의 마음은 하나이니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이 연주 소리는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여러 곳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에 잠긴 최 악공은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칠현금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기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소름이 돋은 이유는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몸에 한기를 느껴서였다.

가을의 쓸쓸함과 겨울의 한기가 스며있는 연주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얼음으로 뒤덮인 땅 위에 서 있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소리는 사람을 가만히 서 있지 못하게 하고, 이리저리 서성이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어지도록 만들었다.

뛰쳐나간다고? 그래서 액막이라고 한 거였나?

이 집에 남아 있는 더럽고 속된 것들이, 저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게 하려고?

최 악공은 이를 악물고 몸이 떨려오는 것을 참으려고 애썼다.

마음속에 슬픔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연주에 마음이 동할 텐데, 저 바보 경왕은 여전히…….

최 악공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저쪽에서 경왕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 추워! 추워! 너무 추워!”

경왕이 울부짖으면서 소리쳤다. 경왕의 목소리를 들은 최 악공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덥고 추운 것도 구분할 줄 모르는 바보에게까지 추위를 느끼게 하다니!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는 저 여인은 도대체!

최 악공은 마구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연주 소리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뒤 따스한 햇볕이 먹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연주는 땅 위에 곤충이 모습을 드러내고, 나뭇가지 위에서 어여쁜 새가 봄의 노래를 지저귀며 포근한 봄날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듯 따사로웠다.

최 악공은 속으로 또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잔뜩 긴장했던 그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최 악공은 언 땅에 새싹이 움트듯 온몸에서 활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지자, 최 악공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푸르른 봄날에 나들이를 나간 어린아이와 소녀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최 악공은 심호흡을 깊이 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편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조금 전에 자신이 느꼈던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기라도 하다는 듯, 모든 것은 그가 처음 칠현금 연주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만졌다.

꿈이 아니었어.

“최 악공, 칠현금 잘 썼습니다.”

내시가 편전 안으로 들어오면서 칠현금을 건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최 악공은 칠현금을 안고 있던 내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내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최 악공의 칠현금은 그의 스승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그가 연주자의 길로 접어든 후부터 지금까지 쭉 쓴 것이니, 족히 이십 년은 넘은 칠현금이었다.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며 자나 깨나 옆에 모시고 살아 수족처럼 친숙한 이 칠현금이, 지금은 왠지 모르게 낯설고 경외감이 들었다.

“최 악공?”

내시가 성가시다는 듯이 그를 불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두 손으로 서둘러 칠현금을 받았다.

이제 우리 차례겠지? 어서 가서 그 낭자를 뵈어야겠다.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최 악공이 칠현금을 고쳐 안고 감격에 찬 얼굴로 내시의 뒤를 쫓아갔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는 내시의 뒤를 따르던 예인들을 헤치고 제일 앞에 서서 연회석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하지만 그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쯤, 내시들이 그를 불러 세웠다.

“뭐 하는 거요?”

문 앞을 지키던 내시들이 미간을 찌푸리고 호통쳤다. 최 악공이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연주해야지.”

“연주는 무슨. 연회는 이미 끝났습니다.”

내시가 최 악공을 바보 보듯 쳐다보며 대꾸했다.

끝났다고? 벌써?

최 악공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청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정말로 연회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를 정리하는 시녀들만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자 최 악공과 함께 편전을 나온 예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최 악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끝난 지 한참 됐는데.”

내시의 말이 최 악공의 귓속에 파고들자, 그는 온몸이 저릿하게 떨려오면서 마비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요량삼일(繞梁三日: 음악 소리가 사흘이나 사라지지 않고 대들보를 두르고 있다는 뜻으로 매우 아름다운 음악을 비유하는 말)!

이게 바로 성자께서 말씀하신 요량삼일이로구나!

최 악공은 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칠현금을 안은 채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최 악공, 왜 그러시오?”

대청 앞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대청 앞의 시끌벅적함을 알 길이 없는 진안 군왕은 왕부의 대문 앞에서 정교랑을 배웅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집이 어디인지 알았으니까, 앞으로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와요.”

진안 군왕이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비록 궁에서 나오긴 했어도, 왕부 밖을 마음대로 나가진 못하거든요.”

진안 군왕의 뒤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채 걸어오던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선물 고마워요. 연주를 들은 덕분에 기분이 많이 좋아졌어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것 때문은 아닐걸요. 그 곡은, 사람한테 들려주는 곡이 아니거든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어이, 어이.”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올리지 않는 법입니다.”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지, 듣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왜요. 무서워요?”

진안 군왕이 기가 찬다는 듯이 하, 하면서 소매를 털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정교랑은 미소 띤 얼굴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근데 기분이 좋아진 건 진짜예요. 어제는 어머니의 서신을 받고 얼마나 속상했는데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뒷짐을 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기분이 좋지 않으셨어요. 내가 출궁 전에 아우의 포상 문제를 청하지 않았다고 못마땅해하세요. 모처럼 찾아온 좋은 기회인데, 왜 아우들 생각은 안 하고 경왕과 함께 살게 해 달라는 청을 올렸느냐며 타박하시더라고요.”

“인지상정이니, 누굴 탓할 일이 아니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괜히 속상해한다는 뜻인가요?”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것도 인지상정이니, 괜히 속상해한다고 볼 순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다 각자의 입장이 있다, 이런 뜻인가요? 아우들이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다 보니, 어머니께서 자연스럽게 아우들을 먼저 챙기는 것도 인지상정인 거고, 내가 밖에서 홀로 지낸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머니의 아들인데 아우들 생각밖에 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속상해하고 질투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라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아니에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맞아요.”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정중하게 예를 올린 뒤, 경왕부를 떠났다.

“진안 군왕이 또 정 낭자를 초대했다고?”

귀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

내시가 조용히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아시느냐?”

귀비가 물었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군왕이 황궁의 예인들을 잠시 빌려 갔다가 돌려드리겠다며 지금 황궁에 들어와 폐하를 뵙고 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예인들을 돌려주는 걸 왜 자기가 꼭 직접 와야 해? 그건 궁에 들어오기 위한 핑계일 뿐이지! 녀석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았다.”

황궁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폐하와 태후를 뵙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경왕의 병을 고치려는 것도 포기하지 않았어.

“마마, 폐하께서 간식을 보내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비가 자세를 고쳐앉고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이건 진안 군왕께서 특별히 황궁에 가져오신 겁니다. 전하께서 귀비마마께도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공손하게 찬합을 내밀었다. ‘진안 군왕’이라는 네 글자에, 웃고 있던 귀비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 버렸다.

“이건 정 낭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냐?”

황제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이 건넨 찬합에 든 과일 간식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정 낭자를 위해 만들었던 건 벌써 다 먹었고, 이건 폐하와 마마께 드리기 위해서 새로 만든 겁니다. 거기에 정 낭자가 알려 준 조미료를 더 넣었으니, 폐하께서 한번 맛을 보십시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내시가 시식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황제가 젓가락을 들고 간식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맛있구나.”

황제가 간식을 천천히 음미하고 감탄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출궁한 이후로 처음 입궁하는 것인데, 좀 더 있다 가지 않고.”

“경왕 혼자 왕부에 남아 있는지라, 걱정이 되어서요.”

황제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는 뭐라더냐?”

황제가 넌지시 물었다.

“폐하, 신이 정 낭자를 초대한 것은 경왕의 병을 봐 달라고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몸을 일으켰던 진안 군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을 쳐다보던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무엇 때문이지?”

“신은 어릴 때부터 궁에서 자랐습니다. 궁에 있는 아우와 누이들은 모두 신보다 어렸기에, 신과 또래인 이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진안 군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경왕을 데리고 강주로 가서 정 낭자에게 진료를 부탁했을 때의 일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때 정 낭자의 태도는 몹시 단호했고 매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정 낭자가 워낙 말을 듣기 거북하게 하지 않습니까.”

황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당시의 내용을 세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정교랑을 직접 대면했던 적이 있으니 황제 역시 그녀가 얼마나 고집 세고 무뚝뚝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신은 부아가 치밀어 미쳐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정 낭자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 나오는 대로 마구 퍼붓고 나왔지요.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 낭자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쭉 품고 있었지요.”

“미안한 마음?”

황제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네. 신은 뭐든 있는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정 낭자가 꽤 솔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그때 무례하게 말하며 협박했을 때도, 뒤늦게 사과한 지금도, 정 낭자는 한결같이 무덤덤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요. 아무래도 정 낭자는 좀, 좀…….”

진안 군왕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보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 같더냐?”

황제가 진안 군왕의 말을 받아치자, 진안 군왕이 손뼉을 쳤다.

“네, 네. 맞습니다. 바로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뜻입니다.”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놈 보게. 그게 어떻게 내 뜻이 된 게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빙긋 웃으며 진안 군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꽤 좋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하고, 친해지기 쉽고. 꼭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서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때로는 밉기도 합니다.”

“여인이 아니더냐.”

황제가 한 마디 덧붙였다.

“여인이요? 신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모든 여인이 다 그렇습니까? 신이 알고 지내던 누이들은 그렇지 않던데요. 신이 느끼기에는, 정 낭자가 육가아와 비슷합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슷하긴 하구나. 하나는 예전에 바보였고, 하나는 지금 바보가 됐으니.”

황제는 남에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로 혼잣말을 한 뒤, 젓가락으로 간식을 하나 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

“폐하, 조금씩만 드시지요. 워낙 달콤하다 보니, 많이 드시다가는 탈이 나실 수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걱정 어린 말투로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가 웃으면서 젓가락을 내려놓자, 진안 군왕은 물러나겠다며 예를 올렸다.

“그럼, 신은 이제 정말로 물러나겠사옵니다.”

진안 군왕이 황제를 향해 장난스러운 눈짓을 하고 마지막으로 큰절을 올린 뒤 물러났다.

해 질 무렵이 된 터라, 대전 안은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천천히 물러나는 진안 군왕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나간 문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황제는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앞에 놓인 찬합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들고 간식 하나를 더 집으려 할 때였다.

“폐하,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더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내시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네놈은 군왕의 말을 참 잘 듣는구나.”

황제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깜짝 놀라 ‘죽여주시옵소서’를 연발했겠지만, 이 내시는 달랐다.

“소인이 어찌 군왕의 말을 듣겠사옵니까. 소인은 폐하의 말씀만 따르옵니다.”

내시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망설임 없이 찬합 뚜껑을 닫았다.

“폐하, 군왕께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시지 마십시오. 경왕 때문에 일찍 간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이제는 진안 군왕께서 종친 신분이 되었으니, 마음대로 궁을 드나들었다가는 어사대의 탄핵을 받을 것이옵니다. 군왕께서 궁에 있던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종친이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탄핵 타령이야?”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내시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폐하, 귀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황제가 가볍게 손짓하자, 내시들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귀비가 눈웃음을 보이며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나, 군왕은 벌써 갔나 봐요?”

귀비가 놀란 얼굴로 묻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빨리 갔대요? 아쉽네요. 군왕과 함께 태후마마를 뵈러 가려고 했는데 말이죠. 예전과 달리 궁에 들어오기 쉽지 않을 텐데 좀 더 머무르다 가지 않고.”

귀비가 웃으면서 말하던 도중,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찌 예전과 다르단 말이오? 위낭이 궁에 들어오는 게, 왜 어렵다는 거요?”

황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자, 귀비는 순간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폐하, 소첩은, 소첩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황제가 귀비의 말을 끊고 냉랭하게 말했다.

“위낭은 종친 신분이니 예전처럼 궁에 드나들었다가는 어사대의 탄핵을 면치 못할 거란 말이오? 어느 놈이 과연 그런 짓을 하는지, 짐이 두고 보겠소!”

황제는 무섭게 호통을 치더니 소매를 홱 털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황제의 면박에 귀비는 창피하고 화가 났다.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기는 무안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 버릴 수도 없어서 귀비는 한참을 서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망치듯 대전을 나왔다.

“입궁한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는데,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내게 얼굴을 붉히신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나를 그런 식으로……. 무엇보다 억울한 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귀비의 궁 문밖에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전각 안에서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마마의 잘못이 맞습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이게 어떻게 내 잘못이라는 거예요?”

귀비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난 그저 좋은 뜻에서 진안 군왕을 보러 간 거예요. 겸사겸사 간식을 보내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요. 그놈이 먼저 함정을 파 놨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마마, 다른 이가 졸렬한 게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똑똑하지 못해 그렇습니다.”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에요? 난 애초부터 놈이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줄 알았어요! 궁에 있을 때는 사탕발림으로 태후의 마음을 사로잡고, 폐하 앞에서는 평왕의 걸림돌이 되더니, 궁을 나간 지금은 더욱 겁도 없이 날뛰고 있잖아요!”

귀비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고능준이 고개를 저었다.

“마마,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셔야 합니다. 경왕과 진안 군왕, 그리고 정 낭자까지, 그들은 모두 사소한 사람일 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들이 사소한 거라면 뭐가 큰일이게요? 만에 하나라도 경왕의 병이 나으면요?”

귀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병이 낫는다 한들, 뭐가 바뀌겠습니까? 평왕은 경왕보다 나이도 많고, 어쨌거나 경왕은 바보로 살았던 아이입니다. 반면에 평왕은 근 몇 년간 국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교양을 쌓았고요. 생각해 보세요. 경왕보다 나이도 많은 데다가 벌써 조회까지 나가는 평왕을 두고, 삼 년 내내 바보로 산 경왕을 택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려 삼 년입니다, 마마!”

고능준이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자질을 갖춘 평왕의 성품이 부도덕하다면?

귀비가 무릎 위에 놓았던 손을 주먹 쥐었다.

고능준이 귀비의 손을 보며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마마, 걱정이 지나치신 듯합니다. 신이 전에 말했잖습니까. 바보였던 사람의 말을 믿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귀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능준이 말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왕의 안정입니다. 평왕이 학문에 얼마나 통달했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더욱 중요한 건 평왕의 품행이지요. 반대로, 군왕은 사람이 좋으면 좋을수록 상황이 나빠질 겁니다. 종친 주제에 그리 눈에 띄는 게 꼭 좋다고만 볼 순 없지요.”

귀비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늘 일을 생각하니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럼 이제 난 어떡하지요? 폐하께서는 나를 의심하고, 더 이상 체면도 지켜 주지 않으시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살아요.”

귀비가 흐느끼면서 말했다.

“마마는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평소처럼 지내십시오. 대신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십시오. 마마께서 개의치 않는다면, 남들도 개의치 않을 것이고, 마마께서 신경 쓰면 쓸수록, 남들 또한 신경 쓸 것입니다.”

고능준이 말을 끝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마께서는, 오늘처럼 늦은 시간에 경솔하게 신을 부르지 마십시오.”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상공 자리에 앉지도 못하면서, 야밤엔 입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진소 대접을 받고 싶은가 보네.”

고능준이 실소를 터트렸다.

“마마께서 황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도 조심해야지요.”

평왕이 제위에 오르더라도, 황후가 태후에 오르는 것이 이치에 합당했다. 태후는 천자를 훈계할 수도, 후궁을 처벌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귀비가 천자의 생모라고는 하나, 일이 생길 경우 조정 대신들은 귀비 편에 서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귀비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해 줄 수 있는, 남의 계략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대신들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훗날 고능준이 조정에 남아 있지 않더라도, 고능준이 키운 세력이 남아 있다면 귀비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리라.

고능준이 무슨 뜻으로 저 말을 했는지 귀비 자신도 잘 알았기에, 귀비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고능준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해가 지고, 또다시 새로운 날이 밝았다.

“십삼, 십삼.”

방 안에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회랑 아래서 새장을 구경하고 있던 진십삼은 서둘러 대답한 뒤 안쪽을 쳐다보았다. 대청 안에는 벌써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갑니다, 가요.”

진십삼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자 위에 오른 요리는 평소보다 가짓수가 많았다.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진십삼이 예를 올렸다. 대청 분위기가 부쩍 밝아졌다.

“우리 진호가 또 한 살을 먹었구나. 축하한다.”

진 시강이 웃으면서 말했다. 형제자매들이 진 시강을 따라 술잔을 높이 들자, 진십삼도 술잔을 들고 답례를 하며 모두와 함께 잔을 비웠다.

진십삼의 나이가 아직 어린 탓에 따로 생일 연회를 열지는 않았다. 대신 집에서 식사하되 평소보다 가짓수를 늘려 다양한 요리로 생일을 축하했다.

진십삼은 형제자매들이 준 선물을 가득 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진십삼의 방 안에는 이미 선물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옆에 있던 사환이 선물을 하나하나 짚으며 각 선물이 어디에서 온 건지 설명했다.

“주육낭은 뭘 선물했느냐? 설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진십삼이 곧바로 물었다.

“오늘 아침에야 도착했습니다.”

사환이 웃으면서 선물 더미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진십삼이 미소를 보였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면, 일부러 시간을 계산해서 보낸 거로군.

진십삼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단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건 또 어느 재수 없는 놈한테서 뺏어 온 건지 모르겠네.”

진십삼이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단도를 손에 들고 몇 번 돌려보았다.

“공자님께서 주 공자께 선물하신 것보다 못한 거네요.”

사환이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공자님께서 언제 물건이 귀한지 아닌지를 따지셨어? 중요한 건 마음이야.”

다른 사환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십삼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단도를 사환에게 던져 주었다.

“서재에 걸어 두어라.”

사환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서재로 향했다. 진십삼은 잠시 주변을 서성이다가 주육낭이 준 상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정 낭자의 것은?”

“아, 정 낭자의 선물도 도착했습니다.”

사환이 대답하고는 선물 더미를 뒤적거렸다. 진십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로 빼놓을 것이지.”

진십삼이 선물을 찾느라 분주한 사환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찾았습니다!”

사환 하나가 명첩이 붙은 선물 하나를 높이 들고 기쁘게 외쳤다. 사환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며, 진십삼은 사환이 왜 그 선물을 한참 찾아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십삼이 매해 받는 선물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붓, 먹, 종이와 벼루고, 다른 하나는 옥대나 향낭 따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주육낭이 선물한 잡동사니 같은 물건이었다.

사환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선물 더미에서 꺼낸 것이었다. 매년 제일 많이 받는 종류다 보니, 선물 더미 속에 파묻힐 수밖에.

진십삼이 손을 뻗어 선물을 받아왔다. 정교랑이 보낸 선물은 네모난 벼루였다. 꽤 값나가는 경성의 명품 벼루로 진십삼이 받은 다른 벼루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바쁘신 반근 관리인이 손수 고른 것일 테지. 반근은 선물을 아주 신경 써서 고르니까.”

11월이 되자 경성 날씨는 부쩍 서늘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나 싶더니, 급기야 찬바람이 불어 행인들은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성문 가까이에 있는 저택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서자, 쪽문에서 대화하던 두 여인이 마차를 바라보았다.

“반근.”

시녀가 마차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비단 치마를 입은 몸종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손을 들어 너울을 쓰며 환하게 웃었다.

좀 전까지 시녀와 대화하고 있던 어린 몸종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리를 피했다.

“어? 아직 얘기 다 안 끝났는데?”

놀란 모습으로 뛰어가는 어린 몸종의 뒷모습을 보며 시녀가 외쳤다.

“나중에 볼일 있으면 점포로 와. 집으로 찾아오지 말고.”

시녀의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다급하게 뛰어간 어린 몸종은 모퉁이를 돌아 종적을 감췄다.

“새로 산 몸종이야? 나 때문에 놀랐나? 왜 도망가지?”

몸종이 시녀의 시선을 따라 길가를 내다보며 웃었다.

“그러게. 장씨 댁 찬모가 워낙 유명하니 놀랄 만도 하지. 새로 산 몸종은 아니고, 사공자를 찾아온 애야. 참, 너랑 고향이 같아. 강주 출신이라던데?”

시녀가 몸종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우리 강주 사람이라고? 누군데?”

몸종이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도 평범하진 않네. 경성 제일 화괴 주 낭자의 시녀거든.”

시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몸종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언니, 함부로 말했다가는 큰일 나. 사공자께서 어떻게 기방 여인과 친분이 있어?”

“누가 강주 선생 댁 몸종 아니랄까 봐, 이젠 군자의 도까지 배웠네.”

시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언니, 이 얘기가 퍼져나간다면 사공자께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언니가 그걸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몸종이 진지하게 말했다.

“알아, 알아. 사공자께서 주 낭자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몸종이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니야. 강주에서 납치되어 인신매매로 팔려 온 몸종인데, 2년 전에 우연히 사공자와 마주쳐 알게 된 사이래. 평소엔 딱히 왕래가 없었는데, 이번에 사공자께서 경성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날 찾아온 거야.”

시녀가 말했다. 몸종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그 어린 몸종이 뛰어갔던 길을 내다보았다.

“근데 왜 날 보는 게 겁나서 도망친 것 같지?”

몸종이 물었다.

“너 무서워서 도망간 거라니까.”

시녀가 가볍게 대꾸하고는 몸종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화제를 바꿨다.

“오늘은 어쩐 일로 한가한가 봐?”

“갑자기 경성에 반근이 무더기로 생겨나는 바람에, 이 장반근은 쓸모가 없어졌지 뭐야. 돈도 못 벌게 됐으니, 언니네 와서 밥이나 한 끼 얻어먹을까 하고.”

몸종이 장난스럽게 한탄하는 시늉을 했다. 시녀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굳게 닫힌 저택 문 너머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퉁이 벽에 숨어 있던 춘령이 조심스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춘령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했다. 춘령은 가슴께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저 반근은 그때 날 봤을 거야. 몇 년이 흐르긴 했지만, 날 알아볼 수도 있어.

춘령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댔다. 춘령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열두 살인 지금은 어릴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때 모습이 남아 있을 테니 조심해야겠어.

반근이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그 표독한 여인은 분명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 죽여 버릴 거야. 우리 두 자매의 살길을 끊어 버렸던 것처럼, 똑같이 날 죽이려 들겠지.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아무 의미도 없이 죽는 게 두려울 뿐이지.

춘령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저택 앞에 세워진 마차와 굳게 닫힌 대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춘령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눈이 내리네.

춘령은 옷깃을 여미고 저잣거리 속으로 빠르게 몸을 감췄다.

“눈 온다!”

정칠랑이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고 신이 난 모습으로 외쳤다.

“어서 휘장 내려라. 추워 죽겠다.”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확 잡아당기며 휘장을 내렸다. 정 이부인의 손에는 손난로가, 발치에는 화로가 놓여 있었지만, 여전히 온몸을 덜덜 떠는 정 이부인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정말 사서 고생이야!”

정 이부인이 다시 휘장을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역참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부인, 아직 대여섯 리 남았습니다.”

시종이 대답했다.

아직도 대여섯 리나 남았다고?

정 이부인은 초조해하며 마차를 끄는 야윈 말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내가 좋은 말로 바꾸자고 했잖아요. 내 말은 듣지도 않지! 어른도 이렇게 추운데 아이들은 오죽하겠어요!”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두꺼운 겨울용 두봉을 두른 정 이노야는 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두 부자는 머리만 바깥으로 내놓은 채 장난을 치며 웃었다.

“지금 누굴 탓하는 거요? 누가 당신더러 돈을 그리 조금 챙겨 오라고 했소? 그 푼돈으로 경성까지 어떻게 버티라고. 지금 와서 좋은 말로 바꿀 만한 돈도 없고.”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

“내가 돈을 적게 챙겼다고요? 형님이 돈을 안 주는데, 그럼 내가 소매 걷어붙이고 돈이라도 빼앗아 왔어야 한단 거예요, 지금?”

정 이부인은 말을 하다 보니 울화가 치밀어 더욱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당신 딸도 그래요. 우리가 경성에 가는 걸 빤히 알면서 돈도 한 푼 안 보내 주고. 그 조 집사란 놈도 평소에는 우리 돈을 물 쓰듯이 하면서, 이번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잖아요!”

“그놈은 나중에 제대로 손봐 줘야지. 주씨 가문에서 바보를 좌지우지하니까, 조 집사 놈도 그 뒷배를 믿고 설치는 거요. 우리가 경성에서 자리를 잡으면, 주씨 가문 따위가 대수겠소?”

정 이노야의 말에 정 이부인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역참에 도착하면, 좋은 역마로 바꿔요. 돈 나가는 일도 아닌데.”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가 고개를 저었다.

“허튼소리. 우리가 어찌 역마를 쓸 수 있단 말이오?”

정 이노야는 더 이상 정 이부인을 상대하지 않고, 품에 안고 있던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이구, 착하지 우리 희가아. 말 타고 경성에 가면 사탕도 먹고 큰 저택에 살 수도 있을 게야.”

어린아이가 정 이노야를 쳐다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정칠랑도 서둘러 정 이노야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버지, 저도 큰 저택에 살래요. 새 옷도 사고, 장신구도 새로 사고요.”

“그래, 그래. 다 사자, 다 사. 이 아비가 다 사 주마. 너희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사 줄 수 있어.”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정 이노야가 기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 이부인이 세 사람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정 이노야의 발치로 화로를 슬며시 밀어 주었다.

날이 저물 무렵, 정 이노야 일행은 드디어 역참에 도착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낡고 허름한 다른 역참들과는 달리 새로 지은 역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큰불이 나는 바람에, 조정에서 돈을 하달하여 새로 지은 겁니다.”

문지기가 말했다. 문지기는 정 이노야 일행이 건넨 역권을 받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 정말 죄송하지만 방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 개?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정 이노야의 뒤에는 딸아이 셋과 두 첩실, 그리고 일고여덟 명의 여종들과 몸종들, 열댓 명의 시종들이 서 있었다. 마당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자, 정 이부인은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방이 없다뇨?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데, 우리더러 방 하나에 부대끼고 있으라고요?”

정 이부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최소한 방 세 개는 더 구해 오시오.”

미간을 찌푸린 정 이노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명령조로 말했다. 그는 행여나 역졸이 자신의 직첩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봐, 역졸의 눈앞에 대고 직첩을 흔들며 자신의 신분을 알렸다.

“대리시 관리라고? 대리시 관리라 한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여기에 묵고 있는 이들을 내쫓기라도 하라는 것이냐?”

역졸의 말을 들은 역승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바깥을 가리키며 한 마디 덧붙였다.

“지난번에 뭐 때문에 이곳이 불탔는지 그새 까먹었느냐? 아니면, 또 한 번 불이 나야 관리들이 정신을 차릴까!”

역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요. 이자 역시 관리 신분을 앞세워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돈이라도 더 내겠단 말도 없이요.

역졸의 말에 역승은 더욱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떻게 방이 없을 수가 있어?”

“그러게. 여긴 역참인데 말이야.”

“역권에 직첩까지 있는데, 어째서 여기 못 묵는단 거지?”

마당의 소란 때문에 역참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유모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어린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첩실의 옆에 꼭 붙어 있던 아이들도 추워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역참의 안팎에 있던 사람들이 정 이노야 일행을 쳐다보았다.

대청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탁자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밖을 내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요즘 들어 관리들이 점점 더 건방지네. 직첩은 본인한테나 있는 거지, 처자식한테도 있는 줄 알아?”

한 젊은 사내가 투덜댔다. 젊은 사내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연로한 사내가 그를 향해 그만하라고 손짓하자, 사내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 노야는 정씨라고요. 이번에 대리시에 부임하려고 경성에 가는 건데.”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입을 다물고 있던 젊은 사내는 실소를 터트렸다.

“저런 관리도 대리시에 간다고?”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의자가 드르륵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호위 몇 명이 하얀 피부의 뚱뚱한 중년 사내를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오. 체통을 지킬 줄 알아야지.”

중년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지키던 호위들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칙사께서 납시는군.”

젊은 사내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연로한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칙사라고 불린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중년 사내는 역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역참 안으로 들어올 때 관례에 따라 큰 소리로 신분을 알린 터라 다들 그가 어명을 전하는 칙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칙사는 자신의 신분만 알렸을 뿐, 그 후로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했다. 자신이 묵을 상등 방 한 칸 외에는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호위들을 마룻바닥에서 자게 두었다. 먼 길을 떠나온 터라, 칙사 일행은 잠시 대청에 머물며 조촐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칙사가 나선다는 것은, 청백리가 탐관오리에게 죄를 선고하는 일만큼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들 기대에 찬 모습으로 문가에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대인, 어찌하시겠습니까?”

대청을 등지고 있던 역졸은 칙사가 나온다는 것을 모른 채 정 이노야 일행에게 느긋하게 물었다.

“아니면, 여기 묵고 있는 백성들을 내쫓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허튼소리!”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오자 소스라치게 놀란 역졸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역졸은 호통을 친 사람이 칙사임을 알아보고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 대인, 그게 아닙니다. 소인이 그러겠다는 게 아니오라, 여기 이분이…….”

잠자코 듣고 있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들 말단 관리가 제일 얄밉다고들 하지. 내 지금껏 관직 생활을 하면서 말단에 있는 놈들의 괴롭힘을 수도 없이 당했지만, 지나가다 마주친 역졸 나부랭이까지 날 모함하고 죄를 뒤집어씌울 줄은 미처 몰랐네.

“네 이놈!”

정 이노야가 역졸에게 삿대질하며 혼을 내려던 찰나, 누군가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감히 백성을 선동하여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욕보이려 하다니! 네놈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칙사가 호통을 치고는 역졸의 면상에 거침없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역졸은 하마터면 바닥에서 한 바퀴 구를 뻔했지만, 칙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정 이노야에게 가서 읍을 했다.

“정 대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다니, 제가 실례했습니다.”

칙사가 정 이노야에게 겸손하게 말하자, 재미있는 구경을 하겠다는 기대를 잔뜩 안고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럴 줄 알았어. 청백리가 탐관오리를 혼쭐내는 장면은 연극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저 칙사 양반이 저리 겸손하게 대할 정도면, 저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더 높은 사람인 거야?

사람들이 수군대며 추측하는 사이, 칙사는 뒤늦게 뛰어나온 역승을 몰아붙이며 매섭게 혼을 냈다.

“예, 예. 대인께서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소인이 지금 당장 마련해 보겠습니다.”

역승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정 이부인에게 직접 길을 안내하면서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체면을 구기지 않게 된 정 이노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대인께서는 누구신지…….”

정 이노야가 정중하게 답례하며 물었다.

“소경문(蘇景文)이라고 합니다. 중서문하성의 공사(公事)지요.”

칙사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소 공사셨군요.”

정 이노야가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며 내심 기뻐했다.

역시 경성에서 관직을 얻는 게 좋긴 좋아. 아무나 붙잡고 인사해도 죄다 중서문하성 관리니 말이야.

“소 공사께서는 타지에서 공무를 보고 경성으로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정 이노야가 물었다.

“예. 명을 받아 무평 지역의 재해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소 공사가 웃으면서 한 손으로 정 이노야의 팔을 잡고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

“정 대인,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소 공사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의 호위들이 즉시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을 내쫓았다.

“비키시오. 대인들께서 공무를 논하시는 자리니, 냉큼 자리를 비키시오.”

정당한 이유다 보니, 대청 안이 분주해졌다. 곧바로 사람들 열댓 명이 대청 밖으로 내쫓기고, 탁자 다섯 개가 비워졌다. 정 이노야는 소 공사의 탁자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탁자에 앉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속으로 열불이 뻗쳤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좀 전의 젊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연로한 사내가 그의 어깨를 세게 눌렀다.

“아버지.”

젊은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인정에는 어긋나나, 이치에는 맞는 일이다.”

연로한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두 부자가 소 공사의 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 이노야와 소 공사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제가 눈이 어두워 소 공사를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정 대인께서 절 모르시는 건 이상할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정 대인을 몰라뵙는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 대인께서 큰 공을 세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소 대인께서 농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십수 년간 본분을 지키며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감히 큰 공을 세웠다기에는…….”

“정 대인의 따님께서는 의형제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폐하를 알현하기도 했잖습니까.”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 여식이 철없이 군 탓이지요. 이번에 경성에 들어가면, 제가 꼭 폐하께 사죄를 드리고자 합니다.”

대화를 듣던 두 부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게다가 정 낭자는 폐하께 새로운 병기인 신비궁까지 바쳐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정 낭자를 낳고 길러 준 정 대인 또한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신 게 아닙니까.”

곧이어 두 대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대청을 가득 메웠다. 대청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정 이노야가 웃으면서 술잔을 높이 들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자, 자, 정 대인. 소생이 대인께 한잔 올리겠습니다.”

옆에 있던 소 공사의 호위가 웃으며 직접 정 이노야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아이고, 당치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 이노야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정 이노야는 온몸을 철갑옷으로 두른 호위들을 쳐다보면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잘들 봐 두라고. 무려 천자의 친위대인 신위군이 나한테 술을 따라 준다 이거야.

변방 지역의 관리와 조정 관리의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였어! 천양지차라는 말이 이런 뜻이로구나.

이제부터 나 정동(程棟)은, 넓은 바다에서 뛰노는 물고기가 될 테다!

한바탕 먹고 마시니 먼 길을 달려온 고단함에 정 이노야는 금세 취기가 올랐다. 그는 먼저 일어나겠다고 예를 표한 뒤, 가족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정 이노야가 자리를 뜨자 소 공사도 호위들을 데리고 휴식을 취하러 갔다.

한참을 추위에 떨며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대청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정 대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칙사조차 그를 깍듯이 대하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오. 그 사람이 정씨라는 거 못 들었소? 게다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따님이 있다잖소.”

누군가가 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더욱 수군대기 시작했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그 여인을 말하는 거야? 그 여인이라면 아주 유명하지.”

“도교 이 진인께서 직접 사사한 제자라던데.”

“그럼 신선이 아니오?”

“그러니까 칙사가 저리 깍듯이 대하는 게로군.”

사람들의 이야기가 점점 더 산으로 가자, 젊은 사내가 부친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연로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두 부자가 탁자의 반대편에 홀로 앉아 있던 수척한 중년 사내에게 공수의 예를 표했다.

“관인(官人),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젊은 사내가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수재, 편히 쉬시구려.”

중년 사내가 답례했다.

“관인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방을 쓰는 건 어떠신지요?”

젊은 사내가 물었다. 중년 사내는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 앞에 놓인 냉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천천히 씹었다. 그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거나 누운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도 여기서 자는데, 나도 그래야지 않겠소이까.”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연로한 사내는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긴 후 젊은 사내에게 조용히 말했다.

“원조, 가서 저 대인의 술값을 계산하거라.”

이들은 바로 한원조 부자였다. 한 대인은 진급으로 인해 경성에 가는 길이었고, 한원조는 과거를 보기 위해 부친과 함께 경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귀판관-

한원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대인께서 거절하실 듯싶습니다.”

한원조가 고개를 돌리고 홀로 앉은 수척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오늘 밤은 사람이 많은 탓에, 한원조 부자와 수척한 사내는 한 탁자에 합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말수가 적은 편이라, 간단한 인사 몇 마디를 나눈 것 외에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한원조 부자는 그 사내가 서둘러 상경 중인 관리일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어디에서 왔는지, 뭘 하러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원조 부자는 사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추측을 늘어놓지 않고 예의를 지켰다.

높은 관리에게는 아부를 떨고, 하찮은 이는 냉대하는 작은 역참에서조차 방을 얻지 못하는 걸 보면, 고위직 관료는 아닐 테고.

언행과 태도를 보아하니 몹시 강직하고 자중하는 사람이야. 원조의 말대로 이유 없는 호의를 받아들일 사람은 아니겠군.

한 대인은 대청 안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수척한 사내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다행히도 어제 내리던 눈은 거의 그쳤고, 밤사이에 내린 눈도 두껍게 쌓이지는 않았다. 갈 길을 재촉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아침부터 떠날 채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새로 바꾼 말을 보고 있자니, 정 이노야는 감격스러운 한편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저, 저, 소 대인. 어찌 감히 제가 역마를 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중요한 나랏일을 위해 길을 재촉하는 게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정 이노야가 말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소 공사가 웃으면서 정 이노야의 팔을 잡았다.

“정 대인께서는 요직에 부임하고자 경성으로 가시는 게 아닙니까. 그게 어찌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명을 받들어 경성으로 가는 건데, 중요한 나랏일이고말고요.”

정 이노야가 웃음을 터트리며 소 공사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럼, 대인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소이다.”

정씨 일가가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길을 떠나자, 소 공사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소 공사 옆에 서 있던 호위가 침을 탁 뱉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퉤! 분수도 모르는 놈. 대인께서 체면 좀 세워 줬다고 감히 어딜 기어올라! 아무나 대인의 어깨를 칠 수 있는 줄 알아?”

소 공사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뭐 하는 놈인진 몰라도, 고 대인께서 잘 보살펴 주라 하셨잖느냐. 하필 여기서 마주쳤는데, 고 대인의 당부를 무시할 순 없지.”

“고 대인도 참. 어떻게 저런 놈을 보살펴 주시려는 건지. 대인께서도 저놈을 너무 치켜세우신 것 같습니다.”

호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치켜세워야지. 암, 그렇고말고. 치켜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뜨리겠느냐? 어제 대청 안에서 저놈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한둘이 아닐 게다.”

소 공사가 냉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호위가 아, 하며 그제야 깨달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대인께서 일부러 백성들을 내쫓으신 거로군요. 소인은 내심 대인을 걱정했습니다. 몇몇은 꽤 까다로워 보였거든요. 관직에 있는 몸 같아 보이기도 했고요.”

“이 몸이 욕지거리 몇 마디 듣는 게 대수겠느냐? 본관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

소 공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한 뒤 몸을 돌렸다.

“자, 우리도 어서 길을 재촉해야겠다. 정 대인에게 역마를 내주었으니, 우리는 말을 바꿔서는 안 되겠다. 중요한 나랏일을 하시는 분께서 지체되면 큰일이야.”

호위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정 이노야 일행이 떠날 때는 정 이노야 일행을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역참 앞에 잔뜩 모여 있었다. 놀라워하거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경외감 어린 눈으로 정 이노야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살아 있는 신선을 낳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해 역참 앞이 왁자지껄했다.

한원조 부자는 역참 앞이 한산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겨우 말을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때마침 어제 합석했던 수척한 사내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야윈 말 세 필과 사환 두 명, 그리고 행낭 하나를 가진 단출한 차림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역참 앞에 선 수척한 사내가 멀어져가는 정 이노야 일행을 내다보며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정 대인이라. 엄동설한에 백성들을 밖으로 내쫓고, 천자의 친위대에게 술을 따르게 한 것도 모자라, 역마로 가족이 탈 마차를 끌게 했다? 나라를 위해 대단한 공을 세운 정 대인일세. 참으로 대단한 정 낭자야.”

엄동설한에 백성들을 밖으로 내쫓고, 천자의 친위대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역마로 가족이 탈 마차를 끌게 했다…….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원조 부자였지만, 관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들 부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또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될까.

선황제 때에는 술에 취한 재상(宰相)이 천자의 호위에게 칼을 내려놓고 술을 따르게 한 일이 있었다. 당시 그는 선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결국 어사대의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지방 관리로 좌천되었다.

지금의 황제가 등극한 후에는 설경이 아름답다는 말을 했던 관리가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민가를 강제 철거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잃기도 했다.

또 어느 무장은 역마로 집안 식량을 운반했다는 죄목으로 목숨까지 잃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휘말리게 된다면 꽤 골치 아픈 일들을 겪을 터였다. 심지어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 사람이라면 그 말로는 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리라.

물론,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죽는 건 아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저런 짓을 저지르는 관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그런 일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듯 행동했고, 관리들 역시 대충 눈감아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굳이 나서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고, 때로는 바로 그 예외가 가장 무서웠다.

한원조 부자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 관리는 대충 눈감아주는 부류일까? 아니면,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일까?

역승이 두꺼운 두봉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아이고, 풍 대인, 풍 대인! 바람이 거셉니다. 이걸 걸치시지요.”

“내 것이 아닌 것은 받을 수 없네.”

풍림은 역승이 건넨 두봉을 거절하고 유유히 역참을 떠났다.

“아이고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저 귀판관(鬼判官) 나리가 드디어 떠나셨네.”

“대인, 이번에는 다행히도 불이 나지 않았습니다.”

“닥치거라. 한 번 불탄 것으로 부족하더냐.”

역승과 역졸들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역참 안으로 돌아갔다.

풍림!

한원조 부자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풍림 대인이셨군요.”

한원조가 멀어져가는 수척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2년 전, 삼사 판관 풍림이 어명을 받고 태창로를 조사하러 가던 길에, 누군가가 그가 묵은 역참에 불을 질러 그를 죽이려 한 일이 있었다. 화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풍림은 자신의 관을 짜서 태창로로 향했고, 그는 장장 1년 반이나 태창로에 머물며 전운사의 곡식과 자금의 흐름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풍림은 족히 백 명에 가까운 관리들이 전운사 횡령에 가담했음을 밝혀내고 그들의 죄를 물었다. 죄인이 된 관리 중에는 감옥에 갇힌 자도 있고, 아예 자결을 택한 자도 있었다. 풍림이 태창로에 머문 기간 동안, 태창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자들과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풍림은 귀판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저분께서도 경성으로 부임하시나 보군.”

한 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다면, 정 대인의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풍림은 정 대인의 모든 만행을 현장에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밤새 대청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댄 이야기도 모두 귀담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풍림은 분명 화가 단단히 났을 터. 그러지 않고서야 좀 전과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풍 대인께서 경성에 들어가자마자 하실 일이 생겼네요.”

한원조가 말 위로 몸을 날리며 말했다.

“나라를 위해 대단한 공을 세웠다…….”

한원조가 숙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병기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형제의 억울함을 푼 후에야 신비궁을 바치다니. 그걸 어떻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까. 관리가 자신의 안위와 이득만을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관리로서 자질이 부족하지(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 - 논어).”

튼실한 역마로 바꾸고 경성을 향해 힘차게 박차를 가하던 정 이노야는 자신이 어떤 함정에 빠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정 이노야가 저지른 만행은 아직 머나먼 경성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큰길 위에 깔린 눈은 완전히 그치기도 전에 말굽에 밟혀 녹아 버렸다.

사환들이 옥대교 저택의 대문 앞에 얇게 쌓인 눈을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 두었다.

정교랑이 글씨를 쓰는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바닥에 앉았다. 귀한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은 사람들은 낮은 탁자와 깔개로 자리를 마련했고,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은 대충 나뭇가지를 꺾어 와 맨바닥에 앉았다. 글씨를 쓰는 무리 속에는 매일같이 보이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글씨를 쓰는 새로운 얼굴도 있었다.

인파의 바깥쪽에 자리 잡은 진십삼은 정교랑의 손짓을 보면서 허공에 대고 글씨를 따라 그렸다.

“날씨가 부쩍 추워져 먹이 다 녹지도 않아요. 천막을 치거나 좀 더 넓은 대청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글씨를 연습하는 시간이 끝나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던 진십삼이 말했다. 그가 반근이 건네준 손난로를 쥐고 있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난 글씨 쓰는 걸 가르칠 생각 없어요.”

그저 쓰기 위해 쓴다는 건가?

“아니, 나는 낭자가 추울까 봐서요.”

진십삼이 서둘러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십삼을 힐끔 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껍게 입기도 했고, 활쏘기를 끝내자마자 글씨 연습을 하는 거라서요.”

정교랑이 손을 앞으로 내밀고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안 추워요.”

정교랑의 손은 가느다랗고 새하얬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온통 굳은살과 활시위 자국으로 가득한 손이었다.

진십삼은 이토록 거친 여인의 손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나 누이들,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의 손만 보았던 진십삼이기에 무릇 여인의 손이라면 섬섬옥수인 데다 색을 칠한 손톱에 반지나 가락지를 낀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고, 손톱에 색도 칠하지 않은, 심지어 거칠기까지 한 여인의 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진십삼은 지금 처음 알게 되었다.

“맞다, 이것 좀 봐요. 주육낭이 내게 선물한 단도예요.”

진십삼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내어 정교랑에게 보여 주었다. 정교랑이 진십삼에게서 단도를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난 벼루를 싫어해요.”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반근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계속해서 단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럼 뭘 좋아하는데요?”

“낭자가 만든 간식이든 차든, 뭐든 상관없어요. 아무튼, 난 벼루는 싫어요.”

진십삼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단도를 진십삼에게 돌려주었다.

“알겠어요. 다음에는 간식과 차를 선물할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십삼이 잠시 말없이 정교랑을 쳐다보자 실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정교랑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간식 접시를 진십삼에게 밀어 주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가만히 앉아 있던 진십삼이 손으로 간식을 집어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었던 탓에, 진십삼은 금세 차와 간식 한 접시를 싹 비웠다.

“이건 낭자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선물한 거죠.”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에요.”

진십삼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원하는 게 뭔지 알려 줘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한쪽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반근은 놀라서 진십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진 공자님이 화를 내는 건가? 아니면, 응석을 부리는 건가?

반근은 ‘응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반근이 서둘러 진십삼의 찻잔에 차를 더 따라 주었다.

“우리 집에서 여는 연회에 낭자를 초대하면, 올 겁니까?”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진십삼이 또 잠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 온다고 할 줄 알았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 오진 않겠죠. 그럼, 내가 급제하면 낭자를 초대할 수 있을까요?”

정교랑이 진십삼을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그때도 간식과 차를 선물해야 하나요?”

진십삼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급기야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당연하죠.”

진십삼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가 주육낭에게 답신을 쓰던 진십삼은 갑자기 오늘 정교랑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지만, 그는 계속해서 붓을 움직였다.

“난 분명 혼자서 며칠 동안이나 꿍해 있었는데, 그 여인의 무구한 표정과 말을 마주하니 헛웃음이 나오더라고. 정말 그 여인에게는 속수무책이야. 아,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어. 아마 이렇게 놀릴 테지. 난 당연히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심지어 나는 그 여인 때문에 분통 터져 죽을 뻔했던 사람이라고.

그래도 최소한 그 여인이 나를 달래 주긴 했잖아? 달래 준다? 음, 어감이 좀 이상한데.”

진십삼이 잠시 붓을 멈추고 좀 전의 상황을 되새겼다.

맞아, 정말로 나를 달래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 여인에게 빨리 혼담을 넣고 싶었던 저번처럼 말이야. 그 여인이 우리에게 간식 상자를 하나씩 쥐여 주고 달랬던 것처럼. 나도 알아. 자네는 지금쯤 또 웃고 있을 거야. 웃긴 뭘 웃어?”

“십삼, 뭐가 그렇게 웃기니?”

진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십삼이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진 부인은 회랑 아래에 서서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진십삼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주육낭에게 답신을 쓰고 있었습니다.”

진십삼이 말했다. 진 부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바보 같은 주육낭에게 서신을 쓰는 게 그렇게 재미있니? 주육낭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겠구나.”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저 웃기지 마세요. 저 지금 무척 바쁘단 말입니다. 답신을 다 쓴 후에는 책도 읽어야 해요.”

진십삼이 점잖은 척을 하면서 대답했다.

“웃기려는 게 아니라, 근 며칠간 네가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었다고 들었다. 지나가는 낙엽만 봐도 슬퍼 탄식하는 것도 모자라 어쩔 땐 혼자서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지? 네가 걱정돼서 한 번 와 본 게야. 난 또, 네가 궁에 있는 최 악공과 같은 병을 앓나 했지.”

진십삼은 진 부인이 하나씩 말할 때마다 고개를 젓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최 악공이요? 안 그래도 이번에 아버지께서 그분을 초대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갑자기 병이 나다니요? 무슨 병인데요?”

“상사병이래.”

진 부인이 대답했다.

상사병?

멈칫하던 진십삼이 곧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머니, 제가 상사병이라뇨. 그렇게 돌려서 아들을 욕하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마당에 진 부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같은 시각 황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태후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상사병? 이 무슨 망측한 일이란 말이냐! 저 풍기 문란한 자를 당장 궁 밖으로 내쫓거라!”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아니, 아니, 마마, 그게 아닙니다. 최 악공은 사람이 아니라 칠현금 소리에 홀렸답니다.”

내시가 다급하게 설명했다. 태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계속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고얀 것들,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어?”

태후가 내시들을 나무라자, 내시들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 게냐?”

태후가 물었다.

“말하자면 진안 군왕과도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가 아, 하면서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안이 뭐 어쨌다고?”

황제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태후궁 안에 있던 비빈들이 다소곳하게 일어나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가 두봉을 풀고 한쪽에 앉았다.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후의 아래쪽 맨 앞에 앉아 있던 귀비를 힐끔 보고는 다시 물었다.

“진안이, 뭐라고?”

귀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황제의 시선을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손난로를 두 손으로 세게 쥐었다.

태후 앞으로 불려온 최 악공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은 흐리멍덩했다. 아무리 악공들이 외모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고 해도, 궁에 들어올 정도의 영인(伶人: 궁중 악공, 광대)이라면 용모도 남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 악공의 볼품없는 모습을 본 황제와 태후, 비빈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폐하와 마마를 뵈옵나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최 악공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사람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악공이란 사람이, 어찌 칠현금 소리에 매혹됐다는 말이냐?”

태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자가 악공이기에 매혹될 수 있는 게지요. 소리에 정통한 덕에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남들이 그저 뛰어난 연주라고 생각할 때 악공은 그 연주가 왜 뛰어난지, 어떻게 뛰어난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 안에 갇히기도 쉽고요.”

황제의 말을 들은 최 악공이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가 실소를 터트리며 물었다.

“그 낭자가 그리도 칠현금을 잘 타더냐?”

태후가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물었다.

“특별히 위낭을 위해 연주했다지?”

“네, 맞습니다, 마마. 전하께 칠현금 소리로 액막이를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행여 정 낭자의 칠현금 소리가 저택 안에 오래 맴돌지 못할까 봐, 아예 영인들의 무대를 취소하셨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액막이?

“도가의 제자가 아니라고 할 땐 언제고. 액막이도 했으니, 이젠 풍수를 봐 주려나?”

태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가 들었을 때도 연주가 좋더냐?”

황제가 태후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내시에게 물었다.

“소인은 음률에 문외한이오나, 몹시 흥겹긴 했습니다.”

내시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흥겹다고? 비파 연주도 아닌데, 칠현금을 어떻게 흥겹게 연주한다는 게야?”

태후가 물었다.

“연주가 흥겨운 것이 아니오라, 당시 분위기가 몹시 흥겨웠습니다. 한쪽에서는 소인들이 대화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영인들이 웃으며 떠들고, 경왕께서도 이따금 소리를 지르시는 통에 무척이나 떠들썩했습니다.”

그럼 아무도 칠현금 연주를 듣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연주를 하고 있는데, 감상은커녕 다들 제 할 말만 하고 있었으니.

그런데도 어찌 칠현금 연주가 뛰어나다고 하는 거지? 그 많은 사람이 칠현금 소리에 매혹되지 못했는데, 왜 최 악공 한 사람만 그 소리에 매혹되었을까?

혹 칠현금 연주에 매료된 게 아니라, 정 낭자에게 홀린 거 아니야? 하긴, 정 낭자가 엄청난 미인이긴 하지.

비빈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소매로 입을 가리고 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태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최 악공처럼 연로한 사내도 홀렸는데, 아직 여색을 모르는 순진한 진안 군왕은 오죽할까.

황제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교랑이 빚었다던 무원산 술처럼 정교랑의 연주 역시 듣는 이를 취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소리일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최 악공, 정말로 병이 난 것이냐? 병이 났으면 태의에게 치료를 받거라. 병이 났으면 난 게지, 괜히 황궁에 유언비어 퍼트릴 것 없다.”

태후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최 악공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마, 소인은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옵니다. 정 낭자의 연주는, 확실히 신묘했습니다.”

“신묘? 백거이가 향산에 머물렀을 때는 저잣거리의 노파조차 그의 시를 찬양했건만, 정 낭자의 칠현금 소리는 오직 네 마음만을 사로잡았는데 어찌 신묘하다고 한단 말이냐?”

태후의 말에 최 악공이 고개를 들었다. 공허했던 그의 두 눈에서 갑자기 형형하게 빛났다.

“마마, 정 낭자의 연주는 소인이 운지법을 생각할 겨를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문외한은 구경만 하고, 전문가는 기술을 본다는 말이 있다. 남들이 아무 생각 없이 연주를 들을 때, 최 악공은 당연히 칠현금의 운지법과 기교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최 악공이 운지법이나 기교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연주에 매료된 것이라면, 연주자의 실력이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으리라.

태후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다른 사람은 매혹되지 않았는데, 왜 하필 최 악공만 매혹되었냔 말이다. 혹시 우리 위낭도 매혹된 건…….

그때 최 악공이 말을 이었다.

“정 낭자가 연주한 건 ‘추풍조(秋風調: 가을 정취를 담은 구슬픈 곡조)’였습니다.”

추풍조가 희귀한 곡조도 아니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태후가 속으로 생각했다.

“폐하, 마마, 정 낭자의 추풍조는 경왕마저 오한을 느끼며 춥다고 외치게 했습니다.”

정 낭자의 연주로 경왕까지 추위를 느꼈단 말이야?

경왕이 춥다고 할 정도라면!

태후가 흠칫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 악공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후를 보며, 비빈들 역시 화들짝 놀랐다. 황제 또한 눈을 크게 뜨고 최 악공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왜들 저러시는 거야?”

영문을 모르는 비빈이 옆 사람에게 조용히 물었다.

“경왕은 바보잖아. 배가 고픈지, 배가 부른지, 추운지 더운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바보.”

비빈들이 고개를 돌리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비의 모습이 보였다.

“바보가 듣기에도 춥다고 느낄 정도면, 그 연주 실력이 얼마나 신기에 가깝겠는가. 바보가 들어도 감정을 느낄 정도라면,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연주겠어.”

귀비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바보가 감정을 느낄 정도라니! 감정은, 마음이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건데.

바보에게 그런 연주를 몇 번 더 들려주면, 결국 마음을 되찾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귀비가 손난로를 부술 기세로 손을 꽉 쥐었다. 그녀의 귓가에 태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어서 위낭에게 입궁하라고 전하거라! 정 낭자도 들라 하고!”

누가 들어도 다소 황당한 일인지라 황제도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침착하게 이성을 유지했다. 황제는 정 낭자는 됐으니 우선 진안 군왕부터 궁으로 들이라고 명했다.

영문도 모른 채 황급히 입궁한 진안 군왕은 태후의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마마, 그건 경왕의 병을 치료하려던 게 아니라, 액막이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어찌 경왕이 추위를 느끼느냐? 스산하고 구슬픈 추풍조는, 듣는 이로 하여금 오한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우리 육가아도 춥다고 느꼈다면? 육가아의 병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게 아니더냐?”

태후가 추궁하듯이 물으면서 눈물을 떨궜다. 진안 군왕은 무릎을 꿇은 채로 태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아닙니다.”

“왜 아니라는 것이냐. 이 녀석아, 언제까지 애가를 속이려는 게야?”

태후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마마, 육가아의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 정 낭자가 육가아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것도 아니고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의 뒤에 앉아 있던 귀비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연기해 봐라. 네놈이 뭐라고 할지 정말로 궁금하구나.

“그럼 왜 육가아가 춥다고 한 거지?”

태후가 물었다. 진안 군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정 낭자 말로는, 그 곡은 사람에게 들려주는 곡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하여 악운과 속된 것들을 몰아내고,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집에 있는 악귀를 몰아낸다?

사람에게 들려주는 연주가 아니었으니, 현장에 있던 내시와 영인들은 대화를 멈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연주 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저 귓가를 스칠 뿐, 마음속까지 닿지는 못했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모두가 아무런 감흥이 없을 때 경왕 혼자서만 춥다고 했다는 것은, 경왕이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경왕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최 악공은? 설마 최 악공도 사람이 아니라는 거요?”

하급 관리가 이해 안 간다는 투로 물었다. 한창 떠들고 있던 다른 하급 관리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나 참, 그래도 이해가 안 되오? 최 악공도 당연히 보통사람은 아닌 거지. 그 사람은 칠현금에 통달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 악공이니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거요.”

“그런데 그 자리에 악공이 그렇게나 많았다던데, 왜 최 악공 한 사람만 그렇게 됐지?”

“최 악공의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뜻 아니겠소.”

하급 관리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조정 대신들이 그 앞을 지나갔다. 대신들이 발을 세게 구르며 호통쳤다.

“체통들을 지키시게!”

고개를 돌리던 하급 관리들이 조정 대신들을 알아보고는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자리를 피했다.

“온 경성 사람들이 무원산을 떠들고, 온 조정의 관리들이 신비궁을 말하며, 저잣거리에는 온통 비석에 새겨진 행서 이야기뿐이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잊히기도 전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더해졌구려.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하다니.”

조정 대신 중 하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또 무슨 기예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지 궁금하군.”

다른 관리가 맞장구를 쳤다.

경성에 있는 종친들이 하루가 멀다고 연회를 열다 보니, 군왕이 한 사람만을 위한 연회를 연 것은 딱히 특별한 일 축에도 끼지 못했다. 연회에 초대한 사람이 조정 대신만 아니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다만 군왕이 초대한 이는 경성에서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정 낭자였다. 물론 그 역시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쨌거나 경왕의 상태가 그러했으니까. 정 낭자는 치료할 수 없다고 거듭 말했다지만, 신의가 자주 찾아온다 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 낭자는 병을 치료한 것도 아니고, 글씨를 쓴 것도 아니고, 칠현금을 연주했다고 했다. 심지어 칠현금 연주로 악공 하나의 혼을 쏙 빼놓았고, 바보인 경왕까지 놀라게 했다고.

특히 사람을 위해 연주한 게 아니라는 진안 군왕의 말로 인해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널리 퍼졌다.

진안 군왕이 그 말 뒤로 내놓은 해명은 이러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기에 칠현금 소리를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경왕은 마음이 없기에 칠현금 소리에 반응한 것이라고.

그 말인즉슨, 칠현금 소리로는 경왕의 병을 치료할 수 없을뿐더러, 경왕은 마음이 없기에 병이 나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덧붙여진 해명보다는 앞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경왕의 병이 나을지 낫지 않을지는 세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뭇 사람들은 신기하고 기괴한 이야기에 더 열광했다.

관청에 있는 관리들이 하는 이야기는 그나마 사실에 가까웠지만, 입에서 입을 거쳐 저잣거리의 찻집까지 흘러간 이야기에는 과장이 많이 섞여 있었다.

“사람이 들으라는 연주가 아니라, 귀신들한테 들려주는 연주였다는군.”

“보통사람은 귀신을 볼 수 없다지만, 개나 당나귀 같은 동물은 귀신을 볼 수 있다잖아.”

“자네 말은 지금 경왕이 개라는 건가?”

“자네 죽고 싶은 게야? 어찌 그런 헛소리를!”

“모르면 좀 가만히 있게나. 마음이 없어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경왕께선 아직 영혼이 모이지 않은 갓난아기 같다는 뜻이야. 갓난아기는 잡념도 없고 세상을 보는 눈도 무척 깨끗하잖아. 그러니 보통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도 느낄 수 있지.”

“그렇다면 말이 되긴 하네. 그런데 칠현금 소리에 홀린 최 악공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최 악공은 바보가 아니라, 신기가 있는 사람이지.”

“왜 최 악공은 개나 당나귀라고 하지 않고?”

“그런 짐승들이 칠현금 소리에 매혹될 리가 없잖아. 최 악공은 칠현금 연주가 신의 경지에 다다랐기에 그런 신기 있는 연주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거지.”

“그러게. 그 자리에 그렇게 많은 악공 영인이 있었는데도, 딱 최 악공 한 명만 넋이 나갔다잖아. 최 악공도 신선의 계시를 받았던 거네.”

“맞아, 맞아. 내가 듣기로는, 최 악공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칠현금 기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대.”

“역시 최 악공은 천하제일의 악공이야.”

“에이, 지금도 최 악공이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사람아, 정 낭자는 제외해야지. 그분은 신선의 제자니까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논할 수밖에.”

대화를 듣던 장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보아하니, 정 낭자가 또 한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었구나.”

장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최 악공의 연주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는 있지만, 특출 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요. 다들 최 악공은 스승의 후광 덕에 영인이 된 거라고 말하곤 했으니까요. 심지어 어떤 이는 최 악공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바로 그가 가진 칠현금이라고 했다더군요. 그러던 것이 이제는 정 낭자의 칠현금 소리에 매혹되어 큰 깨우침을 얻고 천하제일의 악공이라는 칭호까지 얻었으니, 신선이 도와준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쇠를 두드리려면, 우선 쇠가 단단해야 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최 악공이 본디 칠현금에 통달하지 않았더라면, 정 낭자의 칠현금 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겠지. 아무리 신선이 최 악공을 깨우쳐 주고 싶다 해도, 최 악공에게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면 아무 소용 없었을 것이다.”

장 노태야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감탄했다.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말편자를 만들어 낸 서사근이 생각납니다. 매일 마구간을 드나들며 쇠붙이 말굽을 관찰하고 개량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말편자도 없었겠지요. 신비궁을 얻은 범강림 또한 직접 나설 배짱이 없었다면, 신비궁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거고요.”

“맞네, 맞아. 또 그 왼손잡이 숙수 이대작도 마찬가지지. 오른손을 잃었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비웃음이나 자괴감도 이겨내지 않았나.”

장 노태야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 그뿐입니까. 어사대의 탄핵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사건을 조사한 노사안도 있고, 비문을 보고 글씨의 도를 깨우친 서생들도 있죠.”

이어서 말하던 노복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아차, 하마터면 장반근을 놓칠 뻔했습니다. 타고난 손재주로 요리에만 집중해서 득도했으니까요.”

장 노태야가 노복의 말을 듣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 낭자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나 많단 말이더냐? 너무 많아서 이젠 하나하나 기억하기도 힘들어졌어.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서 병풍에 써 놓아야겠다. 이러다 병풍을 가득 채우는 건 아닐지 모르겠구나.”

장 노태야가 몸을 일으키자, 노복이 웃으면서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노야께서는 그런 잔재주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잖습니까.”

노복이 조용히 말했다.

“탐탁지 않아도 어찌하겠느냐? 정 낭자는 여인의 몸이니, 과거를 치를 수 없는 것을. 정 낭자는 그런 잔재주로 돈을 모으려는 사람도 아니고, 그것을 빌미로 좋은 혼처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을 해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이 지낼 뿐이지. 누구 앞길을 막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점이 걱정이죠. 정 낭자에겐 그럴 의도가 없지만,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시샘을 받아 화를 입을까 봐서요.”

노복이 말했다.

대청을 지나가던 두 사람의 귀에 수많은 사람의 대화 소리가 얽혀 서로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노복의 말을 들은 장 노태야가 걸음을 멈추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노복을 향해 목청을 높여 외쳤다.

“낭자가 그걸로 남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지, 낭자가 방어하고 반격할 줄 모른다고 하지는 않았다.”

장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대화를 멈추고 장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대청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자각한 장 노태야는 머쓱한 듯 껄껄 웃으며 찻집을 떠났다. 노복이 서둘러 장 노태야의 뒤를 따라가자, 찻집 안은 금세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그날 있다던 선약이 경왕부 연회에 가는 거였군요.”

진십삼이 반근이 건넨 찻잔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정말로 미룰 수 없는 약속이었네요.”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룰 수 없는 약속이 아니라, 내가 초대에 응했기 때문에 미룰 수 없는 거였죠.”

정교랑이 말했다. 미소를 짓던 진십삼은 무언가 떠오른 듯 정교랑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 말은 진짜로 낭자가 한 말입니까?”

“어떤 말이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진안 군왕 말로는, 그 연주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게 아니라고 낭자가 말했다던데.”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한 말이 맞아요.”

“그 말은 좀 적절치 않은 듯합니다.”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뭐가 적절치 않다는 거죠?”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낭자가 진안 군왕에게 말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 될 게 없죠.”

진십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이 멋대로 남들에게 낭자의 말을 전하는 건 적절치 않아요. 이번 일은 낭자를 신의라고 부르는 것과는 달라요.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잖아요. 자고로 군자는 괴력난신을 입에 올리지 않는 법인데, 낭자의 명망이 높아진 지금 그런 얘기가 돌면 사람들은 더욱 그 이야기를 부풀릴 테고, 그렇게 되면…….”

진십삼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낭자가 일부러 교활한 술수를 부린 듯 이야기가 왜곡되는 건 좋지 않아요.”

진십삼이 말을 덧붙였다.

“말한 사람은 아무런 의도가 없지만, 듣는 사람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정교랑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진안 군왕이 말할 때 더욱 조심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군왕이 저지른 경솔한 행동이 차후에 낭자에게 어떤 어려움으로 돌아올지, 낭자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 걱정도 안 된답니까?”

진십삼이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니까 말한 사람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했잖아요. 듣는 사람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군왕을 감싸 주는 겁니까?”

정교랑이 진십삼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감싸 준다고 할 수 있죠? 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뿐인데.”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가 신경 쓰지 않는 일을, 내가 신경 쓸 수 있겠어요?”

진십삼은 정교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신경을 쓰든 말든 그건 내 일이니까, 낭자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려는 거죠?”

반근은 정교랑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십삼마저 말장난하듯이 신경을 쓰네, 마네, 개의치 않네, 어쩌네 하는 것을 보니, 반근은 더욱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정교랑이 진십삼을 쳐다보며 웃었다.

“내가 초청에 응하지 않고, 원하는 선물을 주지 않은 것이 그렇게 신경 쓰였나 봐요?”

이젠 아씨까지 합세했네.

더 듣고 있다가는 어지럼증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반근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차를 우렸다.

“내가 신경 쓰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말 돌리지 마요. 정교랑, 자기 자신부터 생각하면 안 돼요?”

“난, 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는단 거예요. 진호, 내가 무심코 한 말을 남이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남에게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걱정만 하다가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최소한 내가 말할 때는, 내가 하는 말에 다른 뜻을 얹으려 하지 않는 것이고요.”

정교랑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잠시 정교랑을 쳐다보던 진십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릴 때,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찻잔을 들어 올리던 진십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난 당신의 초대를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 아무 선물이나 준 것도 아니에요. 나에게는 선약이 있었고, 선물도 주고 싶던 것으로 준 거지, 겉치레로 준 게 아니니까요.”

정교랑이 진십삼의 앞으로 간식 접시를 더 밀어 주면서 말했다. 진십삼은 눈을 크게 뜨고 간식 접시와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이요?”

진십삼이 물었다. 정교랑이 빙긋 웃었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냥 장난삼아 이야기한 건데, 낭자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줄 몰랐네요.”

진십삼이 활짝 웃으며 간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난 개의치 않으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그런데 정말로…….”

잠시 뜸을 들이던 진십삼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말할 때 좀 더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재능 있는 사람은 도리어 시샘을 받아 화를 입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정교랑이 가볍게 예를 표하며 감사를 전했다. 차 한 잔과 간식 세 개를 얻어먹은 진십삼이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연말에는 낭자를 귀찮게 하러 오지 않겠습니다. 과거 시험이 코앞이라, 이제는 스승님 댁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걸고 공부해야 하거든요. 무슨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사람을 보내 날 찾아 줘요.”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십삼을 배웅했다. 정교랑은 문밖까지 나와 진십삼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생 댁에서 공부하겠다고? 예전에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 부인이 놀란 얼굴로 진십삼에게 물었다.

“마음이 영 불안해서요. 장원급제하겠다고 동네방네 큰소리를 쳤는데, 만에 하나 낙방이라도 한다면 어머니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마음을 다잡고 스승님 댁에서 공부만 하려고요.”

진십삼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얼씨구, 우리 십삼이 이젠 긴장도 할 줄 아네?”

진 부인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머니, 긴장하는 게 아니라 늠름해진 거죠.”

진십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학문의 길에는 끝이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서는 아니 되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밖으로 걸어 나오던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을 존경하고, 도리를 중시해야 하느니라. 사람은 똑똑하되 경망스러워서는 안 된다. 네가 세상에 발을 내딛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항상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진십삼이 예를 올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소자는 내일 나갈 채비를 마치고, 스승님 댁에서 섣달 23일까지 공부하며 지내겠습니다.”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삼.”

문을 나서는 진십삼을 바라보던 진 부인이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제는 방에 갇혀야 할 만큼, 네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는 거니?”

진 부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진십삼은 몸을 흠칫할 뿐, 진 부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진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이젠 장난도 안 통하다니. 이번에는 정말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 보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연주가 경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던 태후는 기어이 정교랑을 태후궁으로 불러들였다.

“연주, 하고 싶어요?”

황궁 문을 넘어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물었다.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불렀다는 건, 분명 정 낭자의 연주를 듣고 싶어서일 테지.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떻게 연주를 하나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우리 하지 말죠.”

앞서서 길을 안내하던 내시가 마른기침했다. 사담을 나누지 말라는 뜻을 두 사람에게 전하는 듯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겁먹을 거 없어요.

입 모양으로 말한 뒤, 진안 군왕은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가 큰 소리로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도착을 알리자, 이미 태후궁에 도착해 있던 비빈들은 일제히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들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이 문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귀비였다.

지난번에 태후궁 앞에서 정 낭자를 봤을 때는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고, 내가 정 낭자를 별로 신경 쓰지 않기도 했지. 뒤늦게 태후궁으로 가서 정 낭자를 보려고 했을 땐, 진안 군왕이 이미 정 낭자를 데려간 후였고.

문이 열리자, 미소를 머금은 진안 군왕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정교랑이 보였다.

다들 아직 정교랑의 용모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일자로 뻗은 어깨와 걸음을 옮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움직임이 없는 치맛자락, 별다른 장신구 없이 우아하게 올려묶은 머리카락만 보아도 종친인 진안 군왕과 잘 어울릴 만한 벗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기개와 분위기는 보잘것없는 벼슬아치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규수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심지어 저 여인은 십수 년을 바보로 살았다지? 그래서 사람들이 저 여인을 신선의 제자라 여기는구나.

“소손, 태후마마를 뵈옵나이다.”

진안 군왕이 태후에게 큰절을 올렸다.

진안 군왕이 허리를 숙이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뒤에 있던 정교랑에게 향했다. 진안 군왕과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정교랑은 정중하게 소매를 들고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이리 오너라.”

태후가 미소를 머금고 진안 군왕에게 손짓했다.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켜 태후 옆에 앉았다.

“소녀, 태후마마를 뵈옵나이다.”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일어나거라.”

태후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도 않은 채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는 비빈들을 곁눈질로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정씨,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정리하고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에서는 황공함이나 부끄러움 따위를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事無不可對人言), 남에게 구경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나아갈 때는 정도를 지키고, 물러나야 할 때는 깔끔하게 물러나라.

그것이 바로 우리 정씨 가문의 자손이니라.

양쪽에 앉아 있던 비빈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정교랑을 보고 놀란 이도 있고, 부러움의 눈빛을 보내는 이도 있고,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는 이도 있었다.

“정 낭자는 칠현금도 탈 줄 안다지?”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단 한 곡을 알 뿐이에요.”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딱 한 곡밖에 모른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최 악공을 매료시킨 그 추풍조 말인가요?”

비빈 중 한 명이 묻자, 정교랑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최 악공 이야기가 나오자, 태후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최 악공을 불러오게 했다.

“최 악공이 영영 넋이 나간 채로 지낼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정신을 차렸더구나. 또 어떤 곡을 아느냐?”

태후가 웃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전 그 곡 하나밖에 할 줄 몰라요.”

다른 비빈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그 한 곡밖에 못 한다는 거죠?”

정교랑이 대답을 하려던 찰나, 최 악공이 뛰다시피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최 악공은 태후에게 허둥지둥 예를 올린 뒤, 감격한 얼굴로 정교랑을 향해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최 악공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본 비빈들이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이는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불안해진다더니(近鄕情怯), 이럴 때 쓰는 말이로구나.”

태후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말했다.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경외감이 드는 걸 수도 있죠.”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군왕은 사람의 마음을 잘 꿰뚫네요.”

귀비가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책을 많이 읽었으면 더 잘 알았을 텐데, 아쉽게도 제가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요. 제가 평왕의 총명함의 절반만이라도 따라갔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진안 군왕이 귀비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귀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정 낭자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토록 사람을 매료시킨다는 연주를 안 들어 볼 수가 없지.”

태후가 말했다.

“최 악공, 어서 칠현금을 정 낭자에게 내주게.”

비빈 중 한 명이 웃으면서 최 악공을 재촉했다.

“마마, 공주들은 잠시 자리를 비키게 할까요?”

어린 공주를 품에 안고 있던 비빈이 물었다. 다른 공주와 함께 앉아 있던 또 다른 비빈이 기대 반, 두려움 반의 눈빛으로 태후를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연주를 귀담아들었던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하나는 칠현금 소리에 매혹되어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신선의 깨우침 덕에 칠현금 실력이 신선의 경지에 이른 최 악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곡이 아닌데도 춥다고 소리친 경왕이었다.

황실 공주들의 칠현금 솜씨는 훌륭해도 그만 훌륭하지 않아도 그만이었지만, 정교랑의 연주에 매혹되어 신선의 가르침을 얻는다면 그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비빈들은 자기 소생의 공주가 최 악공처럼 신선의 가르침을 깨우쳤으면 하는 마음에 정교랑의 연주를 기대하는 한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게 아닌 연주에 반응한 경왕의 꼴이 날까 봐 두려워했다.

“자리를 피할 게 뭐 있지? 칠현금 연주 하나 못 듣는 이가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비빈들의 생각을 알아챈 태후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태후에게 질문했던 비빈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최 악공은 공손한 태도로 정교랑에게 칠현금을 건넸지만, 정교랑은 칠현금을 받지 않았다.

“정 낭자?”

최 악공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불렀다. 순간 정교랑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생각이 최 악공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렇게나 어린 낭자였다니!

며칠 전에 정교랑이 생각보다 어린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눈앞에서 정교랑의 나이를 가늠하게 되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린 낭자가 어떻게 그리 구슬픈 추풍조를 연주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정 낭자?”

칠현금을 받지 않는 정교랑의 모습에 태후가 정교랑을 불렀다.

왜 멍하니 서 있는 거지? 혹시 놀랐나? 하긴, 여기는 황궁이니까.

“소녀는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릅니다.”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예를 올리며 말했다.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른다고?

정말 연주할 줄 모르는 거야, 아니면 연주하지 않겠다는 거야?

“뭐라고 하였느냐?”

태후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소녀는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정교랑이 다시 대답했다. 태후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숱하게 봤어도, 저렇게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귀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할 줄 모른다면 정말로 할 줄 모르는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귀비가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전하께서는 정 낭자에 대해서 참 많이도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둔해서 그런지, 도무지 정 낭자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어서요. 그럼 그날 경왕부에서 칠현금을 연주한 사람이 다른 사람인가요?”

귀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 낭자,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애가는 낭자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 없구나.”

“마마께 아뢰옵니다. 좀 전에 마마께서 소녀에게 물으셨지요, 또 무슨 곡을 할 줄 아느냐고요. 소녀는 딱 한 곡밖에 연주할 줄 모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떻게 딱 한 곡만 연주할 줄 알죠?”

최 악공이 들어오기 직전 질문했던 비빈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 이 한 곡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왜 딱 한 곡만 가르쳤대? 참 이상하지. 이래서 바보였던 저 낭자가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건가?

태후가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자신의 귀밑머리를 만졌다.

“그럼 그 곡이라도 연주해 보아라.”

“마마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곡도 연주할 수 없습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또 왜?”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여기는 새로운 거처가 아니기에 액막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곡도 연주할 수 없지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귀비궁에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너희가 보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구나. 태후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셨는데!”

귀비가 탁자를 손으로 탁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에 꽂은 장신구가 격하게 흔들렸다. 궁녀와 내시들이 귀비의 눈치를 보며 따라 웃었다.

“그럼 도대체 정 낭자는 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하기 싫다는 거예요?”

궁녀가 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게냐? 내가 보기에는 그냥 바보인 척하는 게야.”

귀비가 손으로 입을 가리지도 않고 크게 웃었다.

“신선의 제자라는 소문을 등에 업고,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는 것을 등에 업고, 또…….”

신이 나서 말하던 귀비가 돌연 웃음기를 거두고 냉소를 지었다.

“이제는 진안 군왕까지 등에 업었지. 내가 보기에, 정 낭자의 연주에 홀린 사람은 비단 최 악공뿐만이 아니야.”

같은 시각, 태후궁.

머리끝까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는 황제까지 불러와 화를 냈다.

“그 계집이 만백성을 현혹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젠 애가까지 바보로 아는 거요? 뭐라? 새로운 거처가 아니라 연주할 수 없다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이오! 말을 지어내 거절할 거면 그럴싸한 말로 성의라도 보일 것이지!”

“마마.”

진안 군왕이 입을 열려고 하자, 태후가 삿대질까지 하며 고함을 쳤다.

“그 입 다물어라!”

태후의 삿대질에도 진안 군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헤헤 웃으며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정 낭자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닙니다. 정 낭자의 말대로 스승께 배운 곡이 딱 그 한 곡뿐인데, 그게 하필이면 액막이할 때만 연주하는 곡이라고 하잖습니까. 액막이용 곡조를 어찌 사람에게 감상하라고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감상을 위한 글씨를 안 쓰느니 뭐니 하는 말처럼 말이더냐? 그게 다 무슨 헛소리야! 세상 어느 누가 곡만 배우고 악기를 배우지 않는단 말이야!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어!”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그럼 이젠 들어 본 적 있으시네요.”

진안 군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태후가 손을 들고 진안 군왕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너는 오늘 정 낭자의 입이 되려고 궁에 따라 들어온 것이냐?”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나무라자, 진안 군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소손이 열었던 연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정 낭자가 오늘 궁에 불려온 것이니, 소손이 당연히 따라와야죠.”

너무나도 당당한 진안 군왕의 태도에 태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황제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짐이 가서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어마마마께 제대로 된 해명을 하라고요.”

황제가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 정교랑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아니라,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황제가 편전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정교랑은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배짱이 대단하더구나. 못하는 말이 없어.”

황제가 말했다.

“폐하, 할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왜 배짱을 가져야만 말할 수 있는지요?”

할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왜 배짱을 가져야만 말할 수 있는 거냐고?

황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교랑을 잠시 쳐다보았다.

  • 신은 뭐든 있는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정 낭자가 꽤 솔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그때 무례하게 말하며 협박했을 때도, 뒤늦게 사과한 지금도, 정 낭자는 한결같이 무덤덤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요.

  • 꼭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서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때로는 밉기도 합니다.

그래, 참 밉기도 하구나. 태후를 저 정도로 화나게 만들다니.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떤 연유로 곡만 배우고, 악기는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냐?”

황제가 물었다.

정교랑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버지, 저는 뭘 배워야 해요?”

“다 배워야 한다.”

“아버지, 제가 아무리 똑똑해도 다 배울 수는 없잖아요.”

“배울 수 있지. 뭐든 일도(一道)만 파면, 다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일도가 뭔데요?”

정교랑이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일도,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이지요. 스승님께서 제게 칠현금을 가르치실 때,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액막이 목적으로요. 그래서 소녀는 추풍조 한 곡만 배웠습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일도라, 그건 무슨 이치인 게냐?”

“일도를 깨우친다면 무엇을 배우더라도 한 가지를 제대로 배울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소녀가 칠현금을 배웠다면, 분명 배움에는 끝이 없었을 것이고 평생 그 칠현금 한 가지에만 몰두했을 겁니다. 하지만 칠현금이 아니라 한 곡만 배우게 된다면, 그 한 곡을 제대로 깨우쳤을 때 배움이 끝나지요. 그럼 그때부터는 또 다른 일도에 집중하여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요.”

그런가?

황제가 놀라서 물었다.

“죽을병이 아니면 못 고친다는 그 말도, 그런 연유에서 한 것이냐? 네 스승이 가르친 의술이 오직 그 한 가지여서?”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편자도 일도고, 신비궁도 일도고, 글씨도 일도라니.”

황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잠시 넋을 놓았다.

“일도,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도리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네 스승이 진정한 기인이로구나. 참으로 아까운 인재야.”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을 뜬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그런 귀인을 조정에서 일찍이 알아보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구나. 일찍이 그자를 찾아내어 조정 대신으로 임명했더라면, 벌써 오랑캐들의 씨를 말리고도 남았겠지.

그런 기인의 유일한 제자가 저 바보였다는 것도 아까워. 저 여인에게 그런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전수했는데도, 저 여인의 심지가 온전치 않은 탓에 충분히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정상적인 사람을 제자로 삼았더라면, 분명히 청출어람이 되어 그 기술들을 더욱 정교하게 갈고 닦을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안타까운지고.

황제의 이야기를 들은 태후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괴상한 스승 밑에서 괴상한 제자가 난 셈이구려.”

태후가 말했다.

“원래 기인 중에는 괴상한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가 한숨을 쉬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진안 군왕이 기쁘게 말하고는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는 무슨 감사?”

태후가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진안 군왕이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 마마의 화를 풀어 주셨으니까요. 마마께서 계속 진노해 계셨더라면, 이번 일이 더욱 커졌겠지요. 그럼 소손이 저지른 잘못도 더 커지는 것이고요.”

태후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유의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삼가거라. 위낭, 너는 궁에서 쭉 자랐으니 바깥사람들이 얼마나 험악하고 영악한지 모를 게다. 과거에 바보였던 여인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돼. 그 여인의 눈에 누가 바보일지는 모르는 일이야.”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한 뒤, 큰절을 올리면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소손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궁에 남아서 애가와 함께 저녁을 먹고 가거라.”

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손이 출궁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몇 번이나 궁에 드나들었습니다. 소손이 여기 남아 저녁까지 먹고 간다면, 마마께서는 분명히 대신들의 질책을 받고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실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애가가 그들의 입을 무서워할까.”

“마마께서는 괜찮으시겠지만, 소손은 마마께서 질책받으실 것이 마음 쓰입니다.”

진안 군왕이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있던 태후가 미소를 지었다.

“입만 살아서는. 저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건지 모르겠네.”

“짐은 건강이 좋지 않아, 위낭을 가까이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황제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태후가 황제를 향해 눈을 흘겼다.

“황상, 그렇게 급하게 결백을 주장할 필요는 없잖소? 애가도 알고 있소. 애가가 위낭을 데려다 키웠다는 거. 다 애가를 보고 배운 거겠지.”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보니, 과연 어마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태후가 침을 뱉는 시늉을 하고는 황제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애가는 저 정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소.”

태후가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황상이 나랏일을 위해 정 낭자를 어떻게 치켜세우든 상관하지 않겠다만, 애가까지 정 낭자의 일에 휘말리지는 않게 하시구려.”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어마마마, 정 낭자는 여인의 몸입니다. 짐이 여기서 더 어떻게 치켜세울 수 있겠습니까. 정 낭자에게 관직을 하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정 낭자는 공을 세웠으니, 짐이 이미 낭자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상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정 낭자를 더 치켜세우고 싶다 한들, 조정의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여인의 몸이라면 아무래도 혼인이 가장 중요하겠지.”

태후가 천천히 말했다.

“정 낭자가 모친을 일찍 여의었다고는 하나, 친부가 아직 건재한데 짐이 어찌 낭자의 혼인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맞소. 그건 남의 집안일이지. 하지만 정 낭자는 과거에 몹쓸 병을 앓았으니, 오불취(五不娶: 아내로 삼아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경우)에 해당하오. 현명한 스승을 만나 병이 완치되었고는 하나, 세상에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정 낭자에게 접근하는 이도 있을 거요. 어찌 됐든, 정 낭자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니까. 집안 어른이 어련히 알아서 혼사를 진행하겠냐마는, 황상도 정 낭자의 혼사에 대해 신경을 써 주시구려. 정 낭자와의 혼담을 기회 삼아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은 늘 있기 마련이니까.”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

태후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황제는 잠시 태후를 쳐다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께서 사려가 깊으십니다.”

“그리고 출궁한 아이들의 혼사 날짜도 슬슬 잡아야겠소. 평왕과 경왕은 아직 어려 급하지 않지만, 내년이면 위낭이 벌써 스무 살이오.”

태후의 말에 황제가 태후를 바라보았다.

진안 군왕의 혼사 이야기를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바로 태후였다. 그런데 지금 진안 군왕의 혼담을 먼저 꺼내는 것으로 보아, 태후는 황궁에서 자손을 늘리는 일에 대해 확실히 체념한 듯했다.

체념할 때가 되긴 했지. 젊었을 때도 짐은 자식을 가지기 힘들었는데, 곧 쉰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아이를 쉬이 가질 리가 있겠나. 죽다 살아난 동 내한처럼 말이지. 동 내한의 막내딸은 동 내한의 손녀보다도 어리다지?

황제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부러움 섞인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낳은 아들은 연이어 요절했지만, 다행히도 성인이 되어 가는 대황자 한 명은 남아 있었다.

그래,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되긴 했어.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께서 위낭에게 괜찮은 신붓감을 골라 주십시오.”

대전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진안 군왕은 걸음을 재촉하며 초조한 듯 앞을 내다보았다.

“전하, 급하실 것 없습니다.”

진안 군왕을 직접 배웅하던 늙은 내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를 뵙고 싶어 하는 이는 비단 전하뿐만이 아니옵니다.”

“그럼 또 누가 있단 말이더냐?”

진안 군왕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태후궁의 늙은 내시는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는 시작과 끝맺음이 확실한 분이시지요. 전하께서 정 낭자를 궁으로 데려왔으니, 가실 때에도 데려다주시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늙은 내시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도지는 주도면밀해.”

늙은 내시가 웃음기 섞인 얼굴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전하, 이 늙은이는 전하께서 소인을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도지는 늙은 내시의 품계였다. 조정 대신들이나 그보다 아래인 사람들은 그를 도지라고 부르지만, 종친인 진안 군왕 앞에서 그는 그저 가노일 뿐이다.

진안 군왕이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전하, 인제 그만 가시지요. 정 낭자는 최 악공한테 붙잡혀 있습니다. 소인은 태후마마의 곁을 지켜야 해서, 여기까지만 배웅하겠습니다.”

늙은 내시가 웃으면서 예를 표하자, 진안 군왕은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뒤로 선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늙은 내시가 태후궁에 도착하자마자, 어린 내시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귓속말을 들은 늙은 내시는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더니, 곧 태후궁 밖을 내다보면서 탄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무슨 일이든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는 법, 형님의 뜻을 따르면 형수의 미움을 사기 마련이라는 속담이 생각나는군. 남편의 사랑을 받는 색시가 시부모의 마음까지 사로잡긴 힘든 법이지.”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앞에 도착하자, 최 악공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한 뒤 물러났다.

“최 악공이 뭐라고 했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나한테 고맙대요.”

정교랑이 말했다.

두 사람은 앞뒤로 몇 걸음의 간격을 두고 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하던 내시는 조용히 그들의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인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뒤따라 걸었다.

“나는 곡만 배웠을 뿐이고, 칠현금은 배우지 않았다는 말에 최 악공은 제호관정(醍醐灌頂: 사람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도를 깨닫게 함)의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문제가 뭔지 알았대요. 덕분에 드디어 꽉 막힌 새장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졌다고 하더군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럼 당연히 낭자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 악공이 유명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전하가 아닐까요?”

진안 군왕이 아, 하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나한테도 고마워해야겠어요. 나중에 내가 가서 감사의 선물을 받아 낭자한테 절반쯤 나눠 줄게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오늘은 낭자를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아요. 육가아가 혼자 집에 있어서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은 예를 표하고, 진안 군왕이 먼저 마차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마차에 오른 진안 군왕이 휘장을 들어 올리고 정교랑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올리고, 마차가 서서히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씨, 이제 저희도 가요.”

반근이 정교랑에게 손난로를 쥐여 주면서 말했다. 태후궁에서 황궁의 문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정교랑이 손난로를 손에 쥔 채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어가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넓은 어가에는 지나다니는 마차도, 행인도 별로 없었다. 어가에 보이는 행인들은 모두 관청의 심부름꾼이거나 궁에 머무는 내시들이었다.

“어째 경성에 종친이 부쩍 많아진 것 같군.”

대전을 향해 걸어가던 관리 하나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지나가는 마차를 쳐다보며 말했다. 초록색 관복을 입은 관리는 관모를 쓰고, 깨끗한 관화를 신고 있었다. 허리춤에 은어대(銀魚袋)까지 걸린 것으로 보아,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입궁한 관리의 복장이 틀림없었다.

“풍 대인, 저분은 종친이 아니오라, 정 낭자이옵니다.”

길을 안내하던 내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

풍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제는 평민 백성도 차례를 무시하고 황제를 알현한다는 것인가? 폐하께서는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줄 서 있는 중서성 대신들은 보이지 않으시다더냐?”

“풍 대인께서는 이제 막 경성에 들어오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저 정 낭자라는 분은 평민 백성이라고는 하나 나라를 위해 매우 큰 공을 세우신 분입니다.”

내시는 신이 난 모습으로 정교랑이 어떤 공을 세웠는지 이야기하려고 했다.

정 낭자의 일이라면, 다들 한가할 때 한 번쯤은 이야기했을 테지. 하지만 항상 서로 이야기하겠다고 난리들을 치는 바람에 정작 내가 이야기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어. 드디어 오늘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무원산 술로 온 경성 사람을 취하게 했던 일? 아니면 비석에 새긴 글씨로 뭇 서생들의 혼을 빼앗은 일? 아니면 가장 근래에 일어난 일이자 황궁 내시들이 가장 잘 아는, 칠현금으로 경왕부의 액막이를 했던 일?

자신이 늘어놓을 이야기들을 생각하자 기분이 들뜬 내시는 점점 더 잿빛이 되어 가는 관리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다.

“공로? 폐하께서 그 공로에 대한 상을 하사하지 않으셨는가?”

풍림이 말했다.

“하사하셨지요. 정 낭자의 의형제, 그리고 정 낭자의 부모까지. 아, 그나저나 대인께서는 정 낭자가 그 공로를 어떻게 얻었는지 아십니까? 그게 이야기하자면 긴데…….”

내시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이미 상을 하사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폐하를 알현한다는 말이냐?”

풍림이 내시의 말을 끊고 천천히 말했다.

“심지어 여인의 몸인데, 누가 저 여인을 황궁 안까지 불러서 폐하를 알현하도록 두었어?”

내시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칠현금 연주를 듣고자…….”

내시는 풍림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단히 화가 난 풍림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고는 나머지 말을 도로 삼켜야만 했다.

“지금 칠현금 연주라고 하였느냐? 처리해야 할 정사가 산더미 같이 쌓였고, 폐하를 뵙고자 하는 조정 대신들이 줄을 섰는데, 폐하께서는 자신이 정사를 등한시한 채 한가로이 칠현금 소리나 듣는 황제라고 만백성에게 알리시려는 게냐!”

풍림이 호통쳤다. 내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표정으로 풍림을 쳐다보았다.

내시는 신책군을 이끄는 신책중위(神策中尉)가 아니라 품계 없는 풋내기 내시였기 때문에, 조정 관리가 갑작스럽게 질책을 쏟아내자 놀라 멍해졌다.

심지어 이 관리가 질책하는 이는 무려 황제 폐하였다. 물론 관리들이 황제를 질책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풋내기 내시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네 이놈, 천자를 가까이서 모시면서도 폐하께서 경계해야 할 것을 귀띔해주지는 못할망정 소문을 과장하여 전하다니, 아주 영악한 마음을 가진 놈이로구나!”

풍림의 호통이 끝나자, 두 다리에 힘이 쪽 빠진 내시는 급기야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초록 관복에 은어대를 한 문관이 아니라, 평범한 문관이 내시를 질책했어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는 내시가 고환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 같은 품계의 무관보다는 같은 품계의 문관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문관은 사치스럽고 안일하게 지내는 조정의 문관들과는 달랐다. 무려 풍림이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일가족을 멸할 수 있는 귀판관 풍림.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내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연이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죄했다. 내시는 속으로 통곡했다.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걸까. 하필 이렇게 재수 없는 귀판관의 길을 안내하다니. 나 참, 운도 지지리도 없지.

새파랗게 어린 내시가 무릎까지 꿇자, 풍림은 소매를 홱 털었다.

이게 다 폐하께서 너무 인자하신 탓이야. 그러니 내시들과 조정 관리들이 점점 더 기고만장해서 날뛰지!

풍림은 일개 내시와 얼굴을 붉혀 가며 자신의 신분을 깎아내릴 사람이 아니었다. 내시에게 호통을 치고 난 풍림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두 내시가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무언가에 대해 떠들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내시는 이야기에 빠져든 나머지 자신들의 코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살피지 못했다.

“최 악공이 드디어 정 낭자를 직접 만나 뵙고, 자신의 두 귀로 정 낭자의 가르침을 받았다며 어찌나 기뻐하던지.”

“정 낭자가 뭐라고 했는데? 정말로 신선 스승님께서 정 낭자에게 그리 놀라운 기술들을 전수해 주었대?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정 낭자가 어찌 그렇게 많은 재주를 익혔겠나.”

“듣기로는, 정 낭자는 날 때부터 다 할 줄 알았다고…….”

이제 막 마음을 가라앉혔던 풍림은 내시들의 대화를 듣더니, 다시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음. 성인을 뜻하기도 함–논어)라니! 간덩이가 제대로 부었구나. 감히 자신을 성인으로 치켜세워?”

갑작스러운 호통에 두 내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내시들이 자기 앞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바람처럼 쌩하고 그들을 지나쳐 갔다. 얼른 고개를 돌리자, 초록색 관복을 입은 관리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대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누구래?”

두 내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좀 전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내시가 자신들을 향해 허둥지둥 뛰어오는 게 보였다.

“누구냐고요?”

한겨울이었음에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내시가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외쳤다.

“목숨을 앗아가는 판관입니다!”

판관? 목숨을 앗아간다고?

두 내시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린 내시는 풍림처럼 쏜살같이 그들의 곁을 지나쳐 사라졌다.

같은 시간, 귀비궁에서는 또다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후가 정말로 그리 말하더냐?”

귀비가 금잔을 손에 들고 물었다.

“예, 마마. 태후께서 정 낭자는 몹쓸 병을 앓았으니 오불취에 해당하는 여인이라면서 폐하께 정 낭자의 혼사에 신경 써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정 낭자와의 혼담을 기회 삼아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이 늘 있기 마련이라면서요.”

누구든 정 낭자와 혼사를 올리려면,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겠구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태후마마.

귀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여인의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 게다가 태후는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아니더냐.”

귀비가 웃으면서 금잔 안에 든 차를 입에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음미했다.

“그래도 그 여인을 경성 밖으로 쫓아내지는 않았구나.”

귀비가 금잔을 든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마, 고 전시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마마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정 낭자는 불과 며칠 사이에 벌써 태후마마의 미움을 샀습니다.”

내시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일은 정 낭자가 전에 세운 공이 있기도 하고, 폐하께서도 정 낭자에 대한 기대가 아직 남아 있으니, 굳이 정 낭자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는 정 낭자를 좌시하지는 않으실 테지요. 폐하께서 그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분은 아니니까요.”

귀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금잔을 다시 입가에 가져갔다.

“마마.”

내시는 재빨리 귀비의 금잔을 가져와 옆에 있던 궁녀에게 차를 더 따르라고 손짓했다.

“지금 정 낭자를 경성 밖으로 내쫓는다면, 움직이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 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사소한 인물 때문에, 마마와 전시 대인께서 괜히 폐하의 의심을 살 필요는 없지요. 게다가 지금 정 낭자를 경성 밖으로 내쫓으면, 도리어 그 여인을 돕는 셈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귀비가 물었다.

“땅이 넓으니, 외진 곳까지 황제의 힘이 닿기는 힘든 법입니다. 경성을 떠나면 정 낭자는 더욱 멋대로 굴 수 있겠지요. 반면 정 낭자가 경성에 남아 폐하의 눈앞에 있다면, 정 낭자가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도 크게 부풀릴 수 있습니다. 폐하와 멀리 있을수록, 미움을 사기는 더욱 힘들어지는 법이지요.”

내시가 웃으면서 가득 채워진 금잔을 귀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귀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시가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압니다만, 부디 마음 편하게 가지십시오. 정 낭자는 이미 삼세번이나 경왕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은 말을 바꾸기 힘들겠지요. 그리고 마마, 평왕께서는 조정 대신들의 눈앞에서 하루하루 성장하고 계십니다.”

귀비가 웃으며 치맛자락을 정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게. 그런 사소한 일은 그만 생각해야겠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진안 군왕의 혼사야. 황궁에서 나와 가장 가까웠던 아이의 혼사이니, 우리도 태후를 뵈러 가자꾸나.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몰라.”

내시가 웃는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귀비가 소식을 듣게 됐을 무렵, 진안 군왕 또한 마차가 아직 경왕부에 당도하기도 전에 소식을 알게 되었다.

“전하,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내시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진안 군왕은 도리어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를 어찌하다니? 이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다고.”

“좋은 일이라고요? 태후께서는 정 낭자의 앞길을 영영 끊으실 작정인 겁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내시를 본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앞길은 무슨. 고작해야 혼사 아니더냐. 그보다 더 사소한 일이 어디 있다고 앞길 타령이야? 괜한 호들갑은.”

여인의 앞길이라 하면, 당연히 혼사가 아니겠습니까.

내시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봐. 그렇다면 정말 잘된 일이잖아. 태후께서는 정 낭자에게 큰 도움을 주신 거나 마찬가지야.”

진안 군왕의 말에도 내시는 진안 군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가서 이 좋은 소식을 낭자에게 전하거라.”

진안 군왕이 손바닥을 내밀며 빙긋 웃었다.

“좋은 소식을 전했으니, 심부름 값을 달라고 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매를 맞는 게 아니라, 돈을 달라고 하라고요?

내시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마차에서 엉거주춤 뛰어내렸다.

옥대교 저택 앞, 이제 막 정교랑과 함께 집에 도착한 반근은 내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시의 말을 다 듣고 난 반근은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태후께서 폐하에게 아씨의 혼사를 신경 써 달라고 했으니, 이제 이노야는 아씨의 혼사를 마음대로 정할 수 없게 되는 건가?

그런데 왜 소식을 전하러 온 내시에게는 기쁜 기색이 전혀 없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옆에서 듣고 있던 시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반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녀를 쳐다보자, 시녀가 태후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태후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제 누구든 아씨에게 혼담을 넣으려는 이는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게 되는 거야. 게다가 우리 아씨는 몹쓸 병을 앓았던 적이 있어 오불취에 해당한다고 하셨잖아. 그런데도 아씨에게 혼담을 넣으려 한다면, 그건 오직 아씨의 명망만 보고 접근하는 비천한 자라고 욕하신 거지. 생각해 봐. 권문세가에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아씨께 혼담을 넣겠어? 아씨께 혼담을 넣는 것만으로도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폐하의 미움을 살지도 모르는데?”

반근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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