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십삼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렸다.
“부엌에서 영리하고 똑똑한 몸종 하나만 골라서 정 낭자 댁으로 보내 주세요.”
“왜? 일손이 부족하대?”
진 부인이 물었다.
“아니요. 장씨 가문의 찬모인 장반근을 낭자가 가르쳤다니, 진씨 가문의 진반근도 한 명 만들고 싶어서요. 낭자한테 제자를 하나 보내겠다고 했어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세 부인은 동시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래도 된다고?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강주 선생 댁의 찬모를 정 낭자가 가르쳐 냈다고?”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네. 원래는 정 낭자의 시중을 들던 몸종이었죠.”
강주? 장강주, 강주 바보. 그러고 보니 모두 강주 출신이네.
“어쩐지!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구나!”
두 부인이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정 낭자는 못하는 게 뭘까?”
진 부인이 웃으면서 옆에 있던 여종에게 부엌에서 몸종 두 명을 골라 오라고 명했다.
진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부인 중 하나가 진 부인의 팔을 덥석 붙잡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진 부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댁에 몇 명이나 있다고 찬모를 두 명씩이나 보낸답니까. 너무 사치스러운 거 아니에요?”
진 부인의 팔을 붙잡은 부인이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진 부인이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 되물었다.
“우리 집에서도 한 명 보낼게요.”
그제야 눈치를 챈 다른 부인이 재빨리 진 부인의 다른 팔을 붙잡고 말했다.
“어어? 내가 먼저 말했거든요?”
진 부인의 팔을 먼저 붙잡았던 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무슨 소리예요. 말은 내가 먼저 했잖아요.”
다른 부인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두 사람 다 못 말려, 진짜.”
진 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진십삼은 부인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며 빙긋 웃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진 부인이 진십삼을 불러 세웠다.
“십삼, 정 낭자가 몇 명까지 보내도 된다고 했니? 세 명도 괜찮을까?”
두 부인에게 시달리던 진 부인이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물었다.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첫 번째 반근은 가르쳐서 곁에 뒀고, 두 번째 반근은 남에게 줬고, 지금은 세 번째 반근까지 있잖아요. 반근이 서너 명 더 는다고 해서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낭자는 별로 개의치 않을걸요.”
옥대교 앞에 서서 반나절 내내 고민만 하고 있던 서생 하나가 굳게 닫힌 옥대교 대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를 갖추고 찾아온 건데, 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까?”
서생이 물었다.
“저 낭자의 집엔 웃어른이 없소. 혼례를 올리지 않은 여인이기도 하고, 범 군감이 바빠서 매일 집을 비우는데 어찌 외간 사내가 저 집에 방문할 수 있겠소? 이는 큰 결례요, 결례.”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서생이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말했다.
“집에서부터 닷새나 걸어 경성까지 왔습니다. 무덤 앞에서 그 글씨들을 보느라 또 닷새를 보냈고요. 그런데도 저는 그 글씨들의 정수(精髓)를 아직 못 깨달았습니다. 이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면, 밤이고 낮이고 정 낭자의 글씨만 생각하다가 이번 생에 다시는 붓을 들지 못하겠지요. 너무 아쉬워서 도저히 이렇게는 못 돌아가겠습니다. 정 낭자에게 딱 한 마디만 가르침을 들어도 전 충분합니다.”
“귀비마마의 체면도 무시하는 분인데, 우린들 오죽하겠나? 황자조차도 가르치지 않겠다는 분인데, 우린들 오죽하겠냐고.”
더 많은 사람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눈빛을 반짝이던 서생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낙담했다. 한숨을 푹 내쉬고 걸음을 돌린 그 서생은 곧 어금니를 꽉 물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래도 꼭 한 번은 물어보고 싶습니다. 설령 얻어맞고 쫓겨난다 해도, 헛걸음하기는 싫습니다.”
서생은 많은 이들의 놀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옥대교 저택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행여나 자신이 후회할까 봐 두려웠는지, 문 앞에 멈춰 서기도 전에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렸다.
쾅 소리가 나자, 자신의 행동에 놀란 서생은 손을 든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문 앞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서생이 뒤늦게 침을 꿀꺽 삼키고 도망치려던 찰나, 대문이 열렸다. 거구의 시종 두 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생 앞으로 다가왔다.
“누굴 찾아왔습니까?”
“정, 정 낭자를 찾아왔습니다.”
서생이 말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누구시죠?”
“저, 저는 개양의 장문창(張文昌)이라고 하, 합니다.”
“용건은요?”
“저는 나, 낭자께 행서 필체에 대해 가르침을 얻고자 왔습니다.”
시종 두 명이 서생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문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마치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 나가기라도 할 듯 바짝 긴장하여 숨소리를 죽였다.
내쫓을 거면, 말로 했으면 좋겠네. 그래도 예의를 갖추고 방문한 서생인데, 설마 때려서 내쫓진 않겠지?
“잠시 기다리십시오.”
시종들이 이 한마디를 남기고 문을 닫았다. 서생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문밖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는 서생과 시종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대문이 도로 닫힌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서생이 문 앞에 무탈히 서 있자, 사람들은 서생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어떻던가?”
“무슨 말을 했소?”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묻기 시작하던 때, 다시 대문이 열렸다.
“저희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감히 가르침은 줄 수 없으나 지금 글씨를 쓰고 있으니 원한다면 들어와서 보라고 하세요.”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는 몸종 하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문밖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멍해졌다.
들어와서 보라고?
문을 두드렸던 서생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감격에 북받쳐 몸을 떨면서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뒤에 대문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가 마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저, 저도 보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정교랑의 글씨를 보고 싶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은 대문 앞의 광경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때 서재 밖으로 걸어 나오는 정교랑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반근은 고개를 돌리고 다급하게 외쳤다.
“아씨!”
아씨?
다들 외치는 소리를 멈추고 회랑 아래로 시선을 옮기자, 묘령의 여인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나 어린 여인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세상의 온갖 고초와 비통함이 담긴 그런 글씨를 써낼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사람들은 곧 정교랑에 관한 소문들을 떠올리며 생각을 바꿨다.
그런 여인이기에, 그런 글씨를 써낼 수 있었던 게야. 참으로 기이한 일이군.
정교랑은 문 앞에 빽빽하게 서 있던 사람들을 쳐다보고 걸음을 멈췄다. 옥대교 저택 앞에 다시 한번 적막이 흘렀다.
“내가 글씨 쓰는 것을 보고 싶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예, 낭자께서 쓴 글씨에 대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서생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글씨는 누굴 가르칠 만한 게 못 돼요. 난 가르칠 줄도 모르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역시,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하던 찰나,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난 매일 이 시간에 글씨 연습을 해요. 그러니 내가 글씨 쓰는 걸 보고 싶다면 와서 봐도 되고, 글씨를 따라 써도 돼요.”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가르침을 줄 수는 없지만, 글씨 쓰는 것을 봐도 된다? 저 낭자가 글씨 쓰는 것을 볼 수 있고, 옆에서 따라 쓸 수 있다는 것은, 가르침이나 다름없잖아!
세상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말입니까?”
누군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저 글씨 쓰는 것일 뿐이잖아요. 안 될 게 있나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이 와서 물어볼 걸, 뭐 하러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기만 했을까! 정 낭자의 귀한 가르침을 하루라도 더 빨리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앞뒤를 다투면서 마당 안으로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아씨, 집엔 저 많은 사람이 다 들어올 곳도 없는걸요?”
반근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다 들어오지도 못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정교랑이 아, 하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럼, 내가 밖으로 나가면 되지.”
정교랑이 말했다.
성문 밖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앞은 하룻밤 사이에 한산해졌다.
이상한 낌새를 제일 먼저 눈치챈 이는 아침 일찍부터 광주리를 들고 나온 노점 상인들이었다. 평소라면 글씨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해가 뜨기도 전부터 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글씨를 보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초시의 모든 노점상이 장사를 시작했는데도, 무덤을 지키는 위병 둘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설마 관청에서 접근 금지령이라도 내렸나? 무원산 형제들을 방해하지 말라는?”
누군가가 추측을 내놓았다.
“황릉도 아닌데, 세상에 그런 법도가 어디 있어? 무덤 지키는 저 위병들도 아무 소리 안 하는데, 관청이 뭐라고 남의 무덤에 이래라저래라야?”
“혹시 또 무슨 일 터진 거 아니야?”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거, 되지도 않는 추측 좀 그만하시오. 정 낭자가 자기 집 앞에 자리를 깔고 글씨를 가르치기 시작했다더군. 죽은 사람 비석에 있는 글씨를 보고 모사하는 것보다, 산 사람이 직접 글씨를 쓰는 게 더 보고 싶지 않겠소?”
자리를 깔고 글씨를 가르친다고?
“단랑!”
두루마리 족자 한 개를 품에 안고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가던 진단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무시했다. 누군가가 단랑의 이름을 두어 번 더 부르면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멈춰 세웠다.
“뛰긴 왜 뛰어?”
진십팔랑이 숨을 헐떡이면서 물었다.
“볼일이 있어서 그래. 나 방해하지 마, 언니.”
진단랑은 진십팔랑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진십팔랑이 실소를 터트렸다.
“네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래? 자수도 이제 배우기 시작했고, 공부할 것도 얼마 없으면서, 노는 것 말고 또 무슨 볼일이 있어? 됐고, 자, 이리 와. 와서 나랑 글씨 연습하자.”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진단랑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글씨 연습하러 가는 길이란 말이야. 나, 정 낭자한테 가서 글씨 배우려고.”
진십팔랑이 깜짝 놀랐다.
“저, 정 낭자는 글씨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너 어리다는 핑계로 괜히 가서 정 낭자 귀찮게 하지 마.”
“그런 거 아니거든?”
진단랑이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글씨를 가르치는 건 아니지만, 자기가 글씨 쓰는 걸 보는 것은 된댔어.”
글씨 쓰는 걸 봐도 된다고?
진씨 가문의 마차가 옥대교 앞에 멈춰 섰다. 사실 마차가 멈춘 것이라기보다는, 엄청난 인파로 인해 길이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어차피 못 가. 나는 내려서 걸어갈게.”
진단랑이 쪼르르 마차에서 내렸다. 진십팔랑은 얼른 진단랑을 챙기라며 몸종들을 재촉했다.
“언니, 필요 없어. 사람은 많고 자리는 좁으니까 나 혼자 가면 돼. 종이 펴 주는 몸종 하나, 먹 가는 몸종 하나에 시중드는 몸종 하나까지 곁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진단랑은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혼자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갔다.
글씨 쓰는 걸 봐도 된다고?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차에서 내린 진십팔랑은 몸종과 사환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옥대교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 앞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 진십팔랑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진십팔랑의 눈앞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파가 모여 앉아 있었다.
진십팔랑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매년 꽃등 놀이를 할 때마다 인산인해의 장관을 봤으니,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많은 사람 축에도 끼지 못했다.
항상 텅 비어 있던 옥대교 근처 정교랑의 저택 앞이 오늘은 사람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나이대는 다양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한쪽씩 나눠 앉아 있었는데, 여자들은 너울을 쓴 차림이었다. 작은 서안을 들고 온 사람도 있고, 무릎 앞에 종이를 깔고 글씨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좀 더 뒤쪽으로는 가난한 집의 어린아이도 어디선가 나뭇가지를 주워 와 바닥에 대고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인파로 북적거리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이하고 경외감이 드는 풍경이 옥대교 앞에 펼쳐졌다.
정중앙에 앉아 있던 여인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붓을 들고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진단랑은 간신히 정교랑 근처까지 비집고 들어갔다. 어린아이다 보니, 진단랑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단랑은 진지하게 종이를 펼쳐 놓은 후,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낭자, 낭자, 그 글씨는 어떻게 썼는지 자세히 못 봤어요. 다시 써 주세요.”
진단랑이 소리치자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붓을 들고 조금 전의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정교랑이 방금 썼던 종이를 옆에 놓자, 몸종 하나가 종이를 들고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진십팔랑은 순간 사람들의 눈에서 빛이 쏘아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저요.”
한 사람이 손을 높이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제가 가져갈 차례인 듯합니다.”
반근이 걸어가 손에 든 종이를 그 사람에게 건넸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보물 떠받들다시피 두 손으로 받았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잠시 쳐다보다가, 얼른 다시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행여나 정교랑이 쓰는 한 획이라도 놓칠까 봐.
“십팔랑.”
누군가가 등 뒤에서 진십팔랑의 이름을 불렀다. 진십팔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박양 군주 댁에서 봤던 그 소녀들이었다.
“십팔랑, 너도 정 낭자가 글씨 쓰는 걸 보러 온 거야?”
소녀 중 하나가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와 벼루를 진십팔랑에게 흔들어 보였다. 진십팔랑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소녀가 대꾸했다.
“에이, 진 낭자께서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평왕께 서예를 가르치러 가기에도 바쁜 몸인데. 글씨라고는 일절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이랑 다르겠지.”
진십팔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옷소매 안의 손을 꽉 쥐었다.
“서둘러야겠네. 정 낭자는 매일 반 시진만 글씨 연습을 하신대. 이러다 또 놓칠라.”
두 소녀는 진십팔랑의 양옆으로 지나가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몸종이 분한 얼굴로 서둘러 진십팔랑을 부축했다.
“아씨, 저희도 저리로 갈까요?”
몸종 중 하나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리로 가겠느냐고? 저리로 가서 뭐해?
- 글씨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 감상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에요. 소녀는 감상을 위한 서예를 할 줄 모르고, 더욱이 남을 가르치는 법도 모릅니다.
남을 가르칠 줄 모른다고 했던 사람인데, 내가 저길 가서 뭘 해? 정 낭자에게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진십팔랑은 잠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방금 전 두 사람의 말처럼, 반 시진이 지나자 정교랑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남아 있던 몸종들은 정교랑이 글씨를 썼던 종이를 사람들에게 나눠 준 후, 붓과 먹 그리고 탁자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단랑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대문이 닫히자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고,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계속 자리에 앉아 글씨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붓으로 자신의 지인과 장난을 치는 사람도 있고, 연못에서 붓을 씻는 사람도 있었다.
조용했던 옥대교 저택 앞은 다시 마차와 사람들이 오가면서 원래의 활기를 되찾았다.
“저런 게 바로, 진정한 은둔자는 저잣거리에 살고, 가장 통속적인 것이 곧 가장 우아한 거라는 말이로군.”
“출신도 배경도 따지지 않고, 배우고 싶으면 누구든 와서 배우라는 저 마음가짐이, 진정한 의미의 대유(大儒)일세.”
“당초 강주 선생이 망주(望州) 광양의 나무 아래에서 경서를 가르친 것이 생각나는군. 그때도 족히 백 명은 넘는 사람이 강주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지. 강주 선생의 가르침이 소리가 있는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강주 낭자의 가르침은 문 앞에서 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는, 무성의 가르침이구려.”
“그럼, 이제 강주 선생이 두 명 있다는 거요?”
강주 선생.
본적지를 자신의 칭호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유명한 진소조차도 진 상공으로 불릴 뿐, 구주 출신이라고 해서 진구주라 불리진 않았다.
진십팔랑이 심호흡을 한 뒤 정교랑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 나 지금 안 가.”
진십팔랑이 들어오는 것을 본 진단랑이 외쳤다. 진단랑이 뭘 하려는 건지 소매를 동여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그런 진단랑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정 낭자랑 같이 간식 만들 거야.”
진단랑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간식을 만들어?
그때 정교랑이 옷을 갈아입고, 소매를 동여맨 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 회랑 아래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세 몸종이 공손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할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도 무료하니, 재미로 요리나 좀 해 볼까 싶어서요.”
정교랑이 말했다.
재미? 저 낭자가 재미를 안다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목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십팔랑이 어색한 웃음을 쥐어짜냈다.
“낭자와 조용한 곳에서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청 안. 진십팔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해가 안 가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나와 관련 있는 거라면 편하게 말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가 글씨를 잘 쓴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이게 다 뭐죠?”
진십팔랑이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난 지금, 이렇게 지내요. 매일 글씨 연습을 하고 있고, 그게 남에게 보여주지 못할 일은 아니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니 와서 보라고 한 거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
진십팔랑이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솔직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남들과 똑같은 거짓말쟁이였네요. 당신이 쓴 글씨가 좋지 않다고요? 그렇게 좋지 않은 글씨가, 어떻게 천하제이 행서로 불릴 수 있죠? 어떻게 귀비, 태후, 그리고 폐하까지 좋지 않은 글씨를 칭찬하시냐고요!”
“그건 그들의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에요. 난 내 글씨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걸요. 난 나 자신에게 솔직할 뿐이에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진십팔랑은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고 어찌할 수도 없다고요?”
눈시울이 붉어진 진십팔랑이 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당신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 진소(陳素)가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된 건 알아요?”
“몰라요.”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진십팔랑이 다시금 실소를 터트렸다.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참았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른다고요? 네, 당연히 당신은 모르겠죠.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긴 해요. 진소,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난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어요. 오롯이 신경 쓸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죠. 우린 누구나 자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어요. 남을 신경 쓰지 말아요. 진소, 날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을 챙겨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당연히 남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겠지! 무슨 일을 하든 자신만의 원칙이 있잖아. 당신의 그 원칙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야. 정나미도 없고 오직 원칙뿐이야. 당신 눈엔 사람 사이의 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진십팔랑은 말을 끝내자마자 문을 홱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당에 서 있던 시녀와 몸종들, 그리고 진단랑은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놀라서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
진단랑이 진십팔랑을 향해 외쳤지만, 진십팔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그런 진십팔랑의 모습에 진단랑은 민망하고 마음이 급해져 일단 그녀를 쫓아 나갔다.
진단랑이 나간 뒤,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이 서둘러 안쪽을 쳐다보았지만, 정교랑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아씨, 괜찮으세요?”
반근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떨지는······.
정교랑의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반근은 울면서 뛰쳐나간 진십팔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십팔랑, 어서 문 좀 열어 봐.”
방문 너머로 진소 부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정 낭자랑 말다툼했어요! 막 정 낭자한테 소리 지르고! 정말 무례했어요!”
진단랑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진십팔랑은 아예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벽 쪽으로 돌아앉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문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문 앞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진십팔랑은 천천히 두 손을 내려놓고 무릎을 껴안은 채 그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십팔랑, 네가 괜찮은지 물어보러 왔단다.”
문밖에서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십팔랑은 흠칫 놀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 노태야였다. 진십팔랑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아요.”
문밖에서 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스스로 괜찮다는 것을 알면 됐다.”
진 노태야의 발걸음 소리가 문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내가 알면 됐다, 나 자신이 알면 됐다! 왜 다들 자기 자신만 신경 쓰라는 거야!
진십팔랑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진 노태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전 모르겠어요. 정 낭자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전 정말 모르겠다고요. 정 낭자는 왜 항상 높은 곳에서 남을 내려다보며, 짓밟고 지나가는 거죠? 왜 저를 웃음거리로 만드냐고요!”
진십팔랑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진 노태야는 어두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정 낭자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너는 알지 않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할아버지!”
진십팔랑이 소리쳤다.
“아무도 너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없다. 널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자신뿐이야!”
진 노태야가 호통쳤다.
“정 낭자는 왜 그러는 건데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요!”
진십팔랑이 울부짖었다.
“정 낭자는 의지가 있고 그것을 해낼 능력도 있는 반면, 너는 의지도 없고 해낼 능력도 없으니까! 십팔랑, 무의미한 시기와 질투를 거두고 너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똑바로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잘 해내려면, 우선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알아야 하느니라. 할 능력이 있지만 의지가 없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해낼 능력도 없이 원하기만 한다면 헛되이 미혹된 것이다. 진소, 너는 어리석음에 도달하기도 전에 미혹부터 됐어! 헛되이!”
“아니에요. 전, 전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단지, 인정할 수 없는 것뿐이에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
“인정할 수 없다고?”
진 노태야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더니 눈을 번쩍 뜨고는 호통쳤다.
“십팔랑, 고작 2년의 글씨 연습이 고생이라고 생각하느냐?”
고생······.
진십팔랑은 아랫입술만 꾹 깨물 뿐, 진 노태야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넌 네가 충분히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겠지.”
진 노태야가 말을 이어 갔다.
열심히······.
진십팔랑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입술을 움직이지 못했다.
“십팔랑, 너는 왕희지가 글씨 연습을 몇 년 동안이나 한 줄 아느냐?”
진 노태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자, 진십팔랑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팽팽하게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순간을 멈추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진십팔랑은 알고 있었다.
“십팔랑, 네가 그 자리를 얻게 된 것은, 네가 열심히 연습하고 고생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네가 그 자리를 얻게 된 이유 중 절반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절반의 이유를 왜 모르느냐? 그건 바로 네 성이 진씨인 덕분이다. 네 아비가 진소고, 네 아비가 진 상공인 덕분이야!”
진 노태야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받은 그 총애는 황제의 성은이고, 그건 황제가 진 상공의 체면을 봐준 것뿐이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진십팔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등이 문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할아버지,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하세요?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거냐고요!”
창백한 얼굴의 진십팔랑이 눈물을 쏟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진십팔랑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 노태야는 진십팔랑을 다정하게 타이르고 훈계했지만, 마지막 한마디는 진십팔랑의 뼈를 때리는 것만큼이나 아팠다. 촉촉한 보슬비가 내리나 싶더니 별안간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와 오장육부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거의 혼절 직전인 진십팔랑의 모습을 보고, 진 노태야는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누구지?
그건 정수리에 세찬 일침을 가하는 말일 게야. 무시무시한 무기이기도 하고. 그러니 정 낭자도 하마터면 혼수상태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지.
하지만 별수 있나? 침을 맞으려면 피를 봐야 하고, 낫지 못할 병이라면 독한 약을 써야 하는데.
“십팔랑.”
진십팔랑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진 노태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리도 두려우냐.”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두렵냐고? 난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지?
진십팔랑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진십팔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녀가 아둔하여, 조부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진십팔랑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진십팔랑의 방 안.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몸종이 따뜻하게 데운 수건으로 진십팔랑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향긋한 차를 우려 두 사람 앞에 가져다 놓았다.
진단랑이 잠시 문 앞을 기웃거렸지만, 여종이 서둘러 진단랑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정 낭자가 귀비의 청을 거절한 것은, 바로 정 낭자가 비석에 새긴 행서 때문이다. 비석의 글씨로 인해 정 낭자가 명성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 낭자가 어떤 마음으로 그 행서를 썼는지 아느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진십팔랑이 찻잔을 내려놓고 진 노태야의 말을 경청했다.
“의형제 다섯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본래 그 형제들의 것이어야 할 공로까지 빼앗겼다. 어리고 힘없는 여인의 몸으로, 감히 천자와 내기까지 감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로를 되찾을 수 있었지.
잘 생각해 보아라. 그간의 일에서 정 낭자가 감당해야 했던 ‘만에 하나’가 얼마나 많았겠느냐? 만에 하나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면, 정 낭자가 했던 모든 일은 전부 물거품이 됐을 것이야.
어디 그뿐이더냐? 폐하를 비롯하여 조정 관리들이 전부 정 낭자를 사정없이 물어뜯었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비가 내린 뒤 맑게 갠 날씨처럼 보인다만, 정 낭자의 사방에는 아직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십팔랑, 우리 진씨 가문은 그래도 명문가 반열에 속하니, 너와 네 형제자매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런 너희에게는 바늘에 손이 찔려 피가 찔끔 나는 정도가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일 게야.
그런데 어찌 그런 마음가짐을 정 낭자와 비교할 수 있느냔 말이다.”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였다.
“정 낭자가 웃는 걸 본 적 있느냐? 그리고 정 낭자가 왜 말하기를 싫어하는지 아느냐?
정 낭자에게 이 세상은 너무도 무정하여 웃을 일도, 이야기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십팔랑, 너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그 비석의 글씨가 대단하다고, 천하제이 행서라고 칭송한다. 한데 그 글씨가 왜 그토록 좋은지 아느냐?
말로 이루 표현해낼 수 없는 비통함이, 글씨의 매 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 힘겹게 써 내려간 글씨를, 어떻게 감상을 위한 글씨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통함으로 쓴 글씨 덕에 얻은 명성을, 정 낭자가 자랑스러워하겠느냐?
아마 정 낭자는 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글씨들을 영원히 쓰지 않기를 택했을 것이다.
십팔랑, 그래도 그런 글씨를 써낸 정 낭자가 부러우냐?
십팔랑, 내 말하지 않았느냐. 늘 자비심을 품고, 세상 사람들 눈에 정 낭자의 무엇이 좋아 보이는지, 그 명성을 어찌 얻은 것인지 보란 말이다.
정 낭자는 자신이 쓴 글씨를 누가 가져가든 상관없다고 하지. 그 이유인즉슨, 자신의 글씨가 좋지 않다는 정 낭자의 생각과는 달리, 모든 사람이 정 낭자의 글씨를 좋은 글씨라고 생각하고 낭자가 쓴 글씨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 낭자가 그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하겠느냐? 정 낭자가 감당해야 할 사람이, 자기 자신 말고도 더 있어야 해?
네 말대로라면, 정 낭자는 자신의 비통함을 표하고자 비석에 글씨를 쓰는 것도 안 되고, 한바탕 우는 것도 안 된다는 게야? 정 낭자는 아무리 슬퍼도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냐? 정 낭자가 한 일은, 남들 앞에서 글씨로 눈물을 흘린 것밖에 없다. 세상이 정 낭자의 글씨를 높이 추켜세웠을 뿐이야. 너는 그걸 보고도, 정 낭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를 낚아챘다고 여기느냐?
집 앞에 돗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는 것은, 정 낭자의 마음에 거리낄 게 없어서다. 그 글씨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고, 마침 자신은 항시 같은 시간에 글씨를 쓰니, 못 보여 줄 것도 없겠지. 정 낭자는 떳떳하고 부끄러울 게 없기에 마음 가는 대로 편히 행동했을 뿐이야. 그럼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정 낭자가 살피고 고민해야 한단 말이냐? 자신의 행동으로 누가 기뻐하고, 또 누가 기뻐하지 않는지까지 살피라고? 다른 이가 싫어할까 봐 자신이 하던 일까지 멈추란 말이더냐?
십팔랑, 사람을 업신여겨도 너무 업신여기는구나!
십팔랑, 천도(天道)는 무정하다지만,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 자비를 베풀어야 해.”
진십팔랑이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엎드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조부님, 제가 틀렸어요. 당장 가서 사죄할게요.”
진십팔랑이 감정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갈 필요 없다.”
진 노태야가 진십팔랑을 불러 세웠다.
“죄는 죄야. 사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진 노태야의 말을 듣자, 진십팔랑은 걸음을 멈추고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진단랑과 함께 다녀오마.”
진 노태야가 문을 나서면서 진단랑을 불렀다.
진십팔랑은 문가에 가만히 서서 앞을 내다보았다. 기다리다 지칠 지경이었던 진단랑이 진 노태야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정 낭자 댁에 가는 거예요? 잘됐네요. 이게 다 언니 때문이에요. 정 낭자한테 요리도 마저 배워야 하는데.”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어린아이라서 정말 좋겠다. 아무런 잡생각 없이, 순수하게 정 낭자를 존경하고 감동할 수 있으니까.
조부님, 제가 남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두렵지 않아요.
제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건, 저보다 못한 사람이 절 앞선다는 사실이죠.
태사국이 길일로 택한 10월 18일, 평왕은 궁을 나와 왕부로 거처를 옮겼다. 이튿날, 진십팔랑은 출타할 채비를 했다.
“십팔랑, 평왕부에 가는 거니?”
진소 부인이 확신 없는 말투로 물었다.
“어머니, 평왕께 글씨를 가르칠 시간이 됐어요.”
진십팔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진소 부인과 함께 서 있던 자매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십팔랑, 귀비마마께서 그런 말씀까지 하셨는데, 어찌······.”
진십팔랑의 언니 중 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귀비가 정교랑에게 평왕의 글씨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때, 누군가가 귀비의 옆에서 완곡하게 진십팔랑의 글씨도 꽤 괜찮다며 폐하께서 직접 고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자 귀비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 글씨 좀 쓰는 게 뭐 대수라고. 천하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더냐? 내가 원하는 것은 천하제일이야.
귀비의 그 말은 내시와 궁녀들의 입을 타고 저잣거리까지 흘러나왔다. 그래서 박양 군주 댁에서 봤던 두 소녀가 진십팔랑에게 ‘글씨라고는 일절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이라는 말로 조롱한 것이었다.
“폐하께선 저한테 전하께 글씨를 가르치라고 하셨어요. 이제 안 가도 된다는 말씀은 없으셨고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제가 할 일과 무슨 상관이죠?”
진십팔랑이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자매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 부인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따스한 눈빛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평왕은 어제 막 왕부로 들어갔어. 며칠 더 있다가 가는 건 어때?”
진소 부인의 말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전하는 무척 열심이신 분이에요. 오늘은 관두고, 당장 어제도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으셨을걸요.”
천부적인 재능이 없어도, 우리처럼 이렇게 열심인 사람들을, 하늘이 속일 리가 없겠지. 아니, 속여서는 안 되지.
마차가 거리를 지나갔다. 옥대교를 지날 무렵, 십팔랑은 조용히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저쪽 정교랑의 저택 대문 앞은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여인은 정중앙에 단정히 앉아 붓을 들고 나무틀에 걸어 둔 종이에 글씨를 썼다. 거리가 멀다 보니 진십팔랑에게는 무엇을 쓰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비교할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진십팔랑은 마차 휘장을 내렸다. 그녀의 마차가 옥대교 앞을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교랑도 몸을 일으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글씨를 쓰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바람에, 옥대교 앞을 지나가던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를 호위하는 시종은 사람들을 내쫓으며 길을 트려고 했지만, 마차에 타 있던 사람이 그를 제지했다.
“잠시 기다리면 된다.”
마차 휘장이 들어 올려지더니, 일상복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고능준이었다.
“급할 게 뭐 있다고.”
시종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마차 옆으로 물러났다.
고능준의 시선은 시끌벅적한 옥대교로 향했다. 옥대교 아래의 강가에서는 여러 사람이 붓을 씻고 있었다.
“에구머니나! 지금 빨래하는 거 안 보여요?”
강가에서 빨래하던 아낙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옷은 나중에 빨아도 되지만, 붓은 나중에 씻으면 큰일 나서요.”
서생들은 넉살 좋게 웃으며 붓을 씻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강가의 모습에서 저잣거리의 흥취가 물씬 풍겼다.
“여기서 글씨 쓰는 것을 보는 자들이더냐?”
고능준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
“예, 대인. 사람들이 글씨 쓰는 것을 본 뒤에, 항상 이 강가에서 붓을 씻다 보니 강물이 새까맣게 물들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 이가 이 풍경을 화폭에 담아 ‘세필도(洗筆圖)’라는 이름을 붙여 큰 호평을 받기도 했고요. 과거에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옥대교의 세필도가 있다나요.”
시종이 공손하게 말했다. 고능준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여간 서생들은 자기를 치켜세우기 바쁘다니까.”
고능준의 시선이 옥대교 저택의 대문으로 옮겨 갔다.
“그런데 저 정 낭자는 서생들이 한껏 치켜세워준 덕에 명성이 자자해졌습니다. 이제 아무도 저 여인이 백성들을 현혹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뿐더러, 그 얘기를 꺼내는 사람을 아예 바보 취급해 버린답니다. 심지어, 정 낭자에게 강주 낭자라는 호칭까지 붙여 줬다지요.”
“강주 사람들은 그걸 영광으로 여겨야겠구나.”
고능준이 웃으면서 눈을 게슴츠레 떴다.
“유명해지고 명망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야. 저 여인의 부모와 가족도 몹시 기뻐할 테지.”
“대인, 듣기로는 정 낭자가 친부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강주에 갔을 때는 가산을 둘러싼 싸움 때문에 백부를 관아에 발고했다는 말도 있고요.”
시종이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자, 고능준이 고개를 저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말조심하거라. 필시 뭔가 오해가 있겠지. 정 낭자가 어디 그런 파렴치하고, 충효를 모르는 사람이겠느냐?”
시종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혹 오해가 아니라면? 그럼 정 낭자는 파렴치하고 충효를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
지금의 폐하께서는 인자하시고 충효를 중요시하는 분이다. 이렇게 명망이 있고 모두가 떠받드는 낭자가 충효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신다면······.
역시 고 대인이로구나! 달콤한 말 속에 사람을 죽이는 칼이 숨어 있어.
“참, 그러고 보니 정 낭자의 부친이 올해 전임한다지 않았나?”
고능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부친의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같은 시각, 머나먼 강주의 정 이노야는 심한 재채기를 했다.
“또 어떤 놈이 내 욕을 하는 거야?”
안 그래도 화가 잔뜩 나 있던 정 이노야는 재채기 때문에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이름을 읊었다.
정 이노야가 읊는 이름들은 정 이부인에게도 생소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예전에는 생소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소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정 이노야의 상관이거나 동료들이었다. 전에는 자주 왕래하며 뒷돈까지 쥐여 주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정 이노야가 날이면 날마다 이를 악물고 저주를 퍼붓는 대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내양 자사 자리가 분명하다고 했어. 돈 받고 선물 챙길 땐 틀림없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모두가 한통속으로 나를 놀려먹은 거잖아.”
정 이노야가 씩씩대면서 중얼거렸다.
“해주(海州)? 해주라니! 나더러 해주로 가라고? 그리고 뭐? 거기서 거기라고? 어딜 봐서 거기서 거기야?”
정 이노야만큼 이 일에 분노한 정 이부인의 입가에는 물집이 잔뜩 생겨 있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정 이노야에게 물었다.
“노야,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분명 확정된 일이었잖아요.”
“자꾸 윗선, 윗선, 운운하는데, 내가 윗선에 죄를 지은 게 있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위고 아래고 다 끝낸 얘기를, 왜 갑자기 윗선에서 번복하냐는 말이오!”
“혹시 윗선까지 못 간 건 아닐까요? 난 그 유옥곤이라는 사람이 왠지 못 미덥다고 했잖아요.”
정 이부인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췄다.
“안 되겠소. 내가 직접 다녀오리다.”
직접 간다고? 유옥곤을 만나러?
“대부인에게 가서 2천 관을 받아 오거라.”
정 이부인이 옆에 서 있던 여종에게 지시했다. 여종은 재빨리 알겠다고 하고 대청을 나섰지만, 곧 빈손으로 돌아왔다.
“대부인께서 돈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화가 난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돈이 없어? 돈을 다 어디에다가 썼길래!”
“장부는 여기 있으니, 어디에다 썼는지 자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무뚝뚝한 표정의 정 대부인이 탁자 위로 장부를 밀었다. 정 이부인은 냉소만 보일 뿐 장부를 받아 확인하지는 않았다.
“이 집의 안주인은 형님인데, 저희가 어떻게 감히 장부를 확인하겠어요.”
“돈을 어디다 썼는지 확인할 배짱은 없고, 돈 달라고 할 배짱은 있다? 난들 이 집 안주인 노릇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아이고, 형님.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부잣집 안주인은 하고 싶고, 가난한 집 안주인은 하기 싫으신 거잖아요.”
정 이부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저, 저 말하는 본새 좀 보게.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야.
정 대부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가 가득 서린 서러움을 숨겼다.
싸울 만큼 싸웠고, 다툴 만큼 다퉜어. 이젠 나도 지쳤다고.
“줄 돈 없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정 대부인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줄 돈이 없다고요? 그럼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면 되잖아요! 이노야의 앞길은 신경도 안 쓰시네요. 돈도 없이 누구한테 부탁해요!”
정 이부인이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그때 안쪽에서 격렬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들으라고 허구한 날 기침이야? 병이 있으면 약을 먹든가.”
정 이부인이 막말을 내뱉었다.
“이게 어딜!”
정 대부인이 이부인을 노려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정 대노야를 부축했다. 정 대노야가 힘겹게 지팡이를 짚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정 이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건성으로 예를 표했다.
“남에게 부탁하느니 자기 사람한테 부탁해야지. 가서 아우에게 전하시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 없으니, 경성에 있는 자기 딸을 찾아가라고.”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의 무례를 못 본 척하고 천천히 말했다.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대노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도 우리 교교가 돈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래도 그렇지, 아비란 사람이 어떻게 딸아이한테 손을 벌리겠어요?”
정 이부인이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트리자, 정 대부인이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전에는 잘만 갖다 쓰더니만.”
“그거야 당신들이 혼수를 독점했으니 그런 거고!”
정 이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런 죄명을 내가 허투루 뒤집어쓸 것 같아?
“그만하시오. 내 말을 못 알아듣겠소?”
정 대노야가 지팡이를 땅에 콱 찍으면서 호통쳤다.
“돈이 있으면, 사람도 있는 법이오. 그 아이가 인맥도 없이 무슨 재주로 그런 일들을 벌였겠소!”
정 이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찰나, 여종 하나가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부인, 갑자기 사람들이 엄청 몰려왔습니다. 이노야께 축하드린다면서요.”
축하?
정 이부인은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결정이 또다시 번복된 건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결정이 잘못 내려졌다고 하더군.”
정 이노야의 서재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사내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럼, 해주가 아니라는 거요?”
정 이노야가 의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아니지요, 아니고 말고요. 해주가 아니라 경성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발 먼저 대답했다.
“거 참, 농이 지나치시오. 내가 어찌 경성 관리가 된단 말이오.”
정 이노야가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에이, 우리끼리 숨길 거 없잖소. 양아들이 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하다던데. 이번에 큰 공도 세웠으니, 폐하께서 분명 노야한테도 상을 내리실 거요. 아직 직첩(조정에서 내리는 임명장)이 내리진 않았지만,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한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이노야가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내 양아들이라니?”
정 이노야는 찻물을 닦을 새도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그 일곱 명 말이오.”
다른 사내가 일곱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일곱씩이나? 무슨 헛소리야! 나한테 무슨 양아들이 있단 거야!
무슨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갑자기 그런 게 무더기로 튀어나와?
몸종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차와 다과를 대청 안으로 들고 왔다.
대청 안에는 대방 내외와 이방 내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네 사람이 싸우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으며 앉아 있는 모습은 정씨 저택에서 실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네 사람이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만 있자, 몸종과 여종들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때 온 경성 사람들이 다 거리로 나왔다고 합니다. 성문을 지키는 오성 병마사의 수령까지 정 아씨의 술을 한 잔 얻어 마시고 길을 터준 것도 모자라, 호송까지 해 줬다고 합니다······.”
“성안에서부터 성 밖까지, 족히 천 명도 넘는 사람이······.”
“그날 폭죽도 엄청 많이 쏘아 올렸는데, 꽃등 놀이 때 쏜 폭죽보다 더 많았다고······.”
대청 안에서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그,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짓을!”
정 이노야가 외쳤다.
“그렇게 하면, 돈이 다 얼마야.”
정 대부인과 이부인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동서지간에 의견일치가 된 게 하도 오랜만인지라, 두 사람은 어색하게 눈을 마주쳤다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일개 일손들한테 의형제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갖다 붙이다니. 시체를 안장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정 이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얼떨떨해하는 가운데 정 대노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그 아이라서 해낼 수 있는 일이야. 후에는 일이 더 커졌겠지?”
정 대노야가 관청에서 소식을 알아 온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일이 더 커졌습죠.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노씨 성을 가진 관리가 폐하께 탄핵 상소를 올렸고, 대로하신 폐하께서 그자를 하옥하셨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경성부 관아에서도 사람을 보내 정 아씨의 점포 세 곳을 조사하려고 했답니다. 그러자 몰려든 백성이 관청과 조정이 도둑이 제 발 저려 괜히 무고한 사람을 잡는다고 한목소리로 정 아씨의 편을 들고 나섰고요. 정 아씨의 의형제들이 억울하게 공로를 빼앗긴 게 확실하다면서요.”
들은 얘기를 다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집사는 다시금 두피가 저릿해져 왔다.
“나중에는 어사대에서 정 아씨를 잡아갔습니다.”
어사대!
“관직 생활을 이십 년도 넘게 한 나도 어사대에 끌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딸아이가 나보다 먼저 어사대에 잡혀가다니.”
-불효-
중얼거리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이제 보니 그 애 때문이었어!”
정 이노야가 고함을 질렀다.
“윗선!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윗선에서 날 잡아다가 어사대에 처넣지 않았구나. 해주로 보낸 것만으로도 성은이 망극한 일이야!”
정 이노야는 생각할수록 몸서리가 쳐졌다.
다 그 계집 때문이야! 다 그 불운 덩어리 때문이라고! 눈앞에 없어도, 여전히 우리를 못살게 구는구나!
팍 소리와 함께, 정 이노야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형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 이노야가 이마를 부여잡고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정 이노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치우자, 정 이노야의 이마에 커다란 혹이 난 것이 보였다. 정 이부인은 하늘이 떠나갈 듯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쳤다.
문밖에 서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은 그제야 이 사람들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좀 하거라, 생각을! 벌써 몇 번을 당했는데, 아직도 복과 화를 구분할 줄 몰라? 그 아이 때문에 네가 진급을 못 해? 정녕 그러하다면, 네가 어찌 이리 멀쩡하게 이 자리에 서 있겠느냐? 정말 그 아이 때문에 진급이 막혔다면, 그 사람들은 왜 또 불쑥 찾아와 아부를 떨고?”
정 대노야의 말을 듣던 정 이노야가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왜 그런 거지?
“마지막에는 결국 그 아이가 이겨서, 폐하께서 상을 하사하신 게지?”
정 대노야가 정 이노야를 향해 혀를 차고는 집사에게 다시 물었다.
집사가 이어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 형제들은 장군으로 추서됐고, 지방으로 좌천될 뻔한 노씨 성을 가진 관리도 복직했습니다. 서북에서 제일 높은 직책이었던 강문원은 다른 곳으로 전임 가게 되었고요. 살아남은 두 형제 중 하나가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린다며 쇠뇌를 바치자, 폐하께서 그 쇠뇌에 신비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답니다. 그 쇠뇌를 단기간 내에 대량 생산하여 서북으로 보냈더니, 서북에서 그 쇠뇌 덕에 연달아 몇 번이나 대승을 거뒀다 합니다.”
정 이노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한 번 놀랐다.
“역시, 역시!”
정 대노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예상했던 결과이긴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욱 감동적이구나.
서북의 수장, 경성의 고위 관리, 게다가 황실의 천자까지!
강주에서 내가 그 아이와 혼수 쟁탈을 벌였을 때, 그 아이는 끝내 얼굴도 비추지 않은 채로 집사와 몸종에게 모든 걸 맡겼어. 난 또 어린 낭자가 체면이 상할까 봐 창피하여 나서지 않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런 게 아니었군.
그게 어딜 봐서 창피하여 나서지 않은 거야? 나설 필요도, 그럴 만한 가치도 없어서 나서지 않았던 게지. 그 아이의 눈에 우린 그저 저잣거리의 행인보다도 못한 존재일 테니까.
정 대노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대청 안의 사람들은 차츰 정신을 차리고 혼잣말을 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 형제들에게 관직을 추서한 데다, 쇠뇌로 큰 공을 세웠으니······.”
정 이노야가 중얼거리면서 좀 전에 자신을 축하하러 왔던 동료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경성으로 가서 관직을······.
“하! 폐하께서 내리시는 내 상도 곧 당도하겠구나!”
정 이노야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정 이부인도 뒤늦게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야, 드디어 고생길이 끝났어요! 빨리 경성으로 가야겠네. 아이고, 어서, 어서 짐을 정리해야······.”
너무 기쁜 나머지 정 이부인은 허둥대면서 몸을 돌렸다.
“정리는 무슨 정리를 해. 내 딸이 거기 있잖소. 설마 우리가 살 곳도 마련해 놓지 않았겠소? 이제야 그 아이를 허투루 키운 게 아니라는 보람이 느껴지는군.”
정 이노야의 대꾸에 정 이부인은 머릿속으로 얼른 셈을 했다.
그 아이는 경성에 돈을 긁어모으는 점포를 세 개나 가지고 있어. 그 아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혼수인 농토와 포목점은 전부 조 집사라는 놈이 통째로 꿀꺽 삼켰지만, 우리가 경성으로 간다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그리 많은 점포를 혼자서 감당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닐 테니, 식구끼리 돕고 살아야지.
정씨 가문의 아랫것은 쓸 게 못 돼. 여기 있는 것들은 죄다 대노야 사람들이니까.
얼마 전부터 친정에서 좀 도와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참에 친정 조카나 몇 명 데리고 경성으로 가서 점포 일을 돕게 하면 딱 좋겠네. 누굴 데려갈까나?
그러고 보니 또 새해네. 경성에 가는 거니까 새 옷을 지어서 입고 가야겠지? 아니다, 경성에서 만드는 게 여러모로 더 좋겠어.
세상에, 이제부터 바빠지겠네.
정 이부인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 이부인은 다급한 마음에 재빨리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끌고 자리를 떴다.
대청 안이 조용해지고, 정 대노야 부부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 이노야의 이마를 맞히고 깔개 위로 떨어진 찻잔을 보자, 정 대부인은 좀 전의 일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노야, 오늘 들은 얘기가 다 사실이에요? 그 바보가 폐하의 용안까지 뵈었다고요?”
정 대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 대노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상하구려.”
정 대부인은 순간 긴장했다.
“가짜겠죠?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요.”
생각에 잠겨 있던 정 대노야가 정신을 차리고 정 대부인을 노려보았다.
“뭐가 가짜라는 거요? 한 번, 두 번까지는 헛소문이라 여길 수도 있소. 그러나 세 번째, 네 번째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진짜지. 그리고 관부 사람들도 죄다 진짜라고 하는 일이 어찌 가짜일 수 있겠소?”
정 대노야가 깊은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내 말은 아우가 경성 관리로 진급한 게 영 이상하단 거요.”
“뭐가 이상해요? 그 애가 그런 일을 벌이는 바람에 폐하께서도 그 아이의 공로를 인정하셨다잖아요. 공을 세우긴 했지만,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은 여인의 몸으로 상을 받을 순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부모나 형제에게 대신 상을 하사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한숨을 푹 내쉬던 정 대부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아이의 친어미인 과랑도 추서될지 몰라요.”
정 대노야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치야 그렇다지만, 듣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소. 이번엔 그 아이가 이겼다고는 하나, 이 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진 이도 한둘이 아니겠지. 나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구려.”
“노야, 너무 걱정 마세요. 경성에는 주씨 가문도 있잖아요.”
정 대부인이 말했다. 정 대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사낭을 불러오거라.”
정사낭을 불러오라는 말에 정 대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사낭은 불러서 뭐 하게요? 그때 이미 물어봤잖아요. 사낭은 그 아이를 몇 번 본 거 말고는,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뭘 물으려는 게 아니라, 즉시 채비를 하여 경성으로 보내야 하오.”
정 대노야가 말했다.
“저더러 경성에 가란 말씀입니까? 게다가, 지금 당장이요?”
정 대노야의 말을 들은 정사낭은 깜짝 놀랐다. 어차피 곧 있을 과거 시험 때문에 경성으로 가야 하긴 했지만, 11월에 출발해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정 대노야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이 교랑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정사낭이 더욱 놀란 얼굴로 정 대노야의 말을 끊었다.
“네? 왜요? 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금방이라도 정교랑에게 달려갈 듯한 정사낭의 모습을 보고, 정 대노야는 또 한 번 감탄했다.
설마, 고작 이것 때문이었어?
고작 저 마음 때문에 교랑이 저놈을 보살펴 주고, 예를 갖춰 대했다고?
정교랑이 정사낭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정 대노야가 직접 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조 집사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조 집사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한결같이 거만하고 안하무인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조 집사도 정사낭을 대할 때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얼른 말에서 내려 자세를 바르게 한 후 공손하고 깍듯하게 예를 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 집사는 정사낭과 대화할 때마다 공손히 허리를 살짝 숙였으며, 함께 걸을 때도 앞서 걸으라는 손짓을 하고 자신은 몇 걸음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곤 했다.
조 집사가 이렇게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것은, 정사낭을 진심으로 존경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사낭은 강주로 돌아온 뒤로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자신은 정교랑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음을 강조했지만, 정 대노야는 끝내 사람을 시켜 정사낭이 뭘 했는지 알아냈다.
정교랑이 도관에서 지낼 때 돈을 보냈고, 강주를 떠나 경성으로 갈 때도 배웅을 나가 돈을 줬다. 경성에서는 주씨 저택까지 직접 찾아간 데다, 거기서도 돈을 줬다고 했다.
정 대노야는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으이구, 이 어리석은 아들아. 네가 준 그 푼돈은 그 집 사환이 쓰는 용돈보다도 적을 텐데.
그런데도 그 애는 사낭의 돈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매번 감사히 챙겼다지. 진심은 하찮게 여길 수 없는 거니까.
정 대노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낭, 경성에 가서 교랑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만 물어보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도울 일이 있냐고도 꼭 물어보고, 이노야가 경성으로 전임하게 된 일도 알리거라.”
정사낭이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조, 좋은, 일인 거죠?”
정 대노야가 정사낭을 쳐다보면서 반문했다.
“좋은 일이냐고 물으면서, 왜 말을 더듬는 게냐?”
내가 말을 더듬었나?
정사낭이 멍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숙부님께서 경성으로 가시게 된다면, 누이도 경성에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겠지. 전에 숙부님께서 누이를 별로 안 좋아하시긴 했지만, 그건 누이한테 병이 있었기 때문이야. 지금은 병도 다 나았고 능력까지 대단해졌으니, 숙부님께서도 분명 누이를 좋아하실 거야.
조, 좋은 일인 게 맞겠지?
어두운 안색의 진소가 고능준이 당직을 서는 관청 안으로 들어갔다.
“진 상공, 정말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웃음을 머금은 고능준이 몸을 일으키면서 아랫사람이 갖춰야 할 공경함을 담아 예를 표했다.
“이 명부를 승인하셨소?”
진소가 명부 하나를 고능준의 탁자 위로 던지자, 고능준은 웃는 얼굴로 탁자 위에 올려진 명부를 가볍게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관이 승인한 것이 맞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고능준이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진소에게 물었다.
“올해의 관료 고과는 이미 끝났는데, 어찌 이리 독단적으로 전임을 허락한 거요? 그것도 전임지가 이미 확정되었던 시기에.”
진소가 대답을 피하고 반문했다.
“특별한 일이라 특별하게 처리했을 뿐이오만.”
고능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자가 어딜 봐서 특별하지? 관리 평가에서도 낮은 등급을 받고, 십 년 넘게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 공적도 못 세웠는데! 어째서 그자를 대리시(大理寺)로 전임 보냈느냔 말이오!”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고능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
“그 유명한 정씨 낭자의 부친이잖습니까. 정 낭자는 의형제를 도와 말편자를 만들고, 신비궁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정 낭자의 오라비들이 서북에서 억울하게 공로를 빼앗긴 일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폐하와 조정에서도 서북의 쓸모없는 장수들을 처리했고요. 그 덕에 서북에는 새로운 용맹한 젊은 장수가 부임하여, 오랑캐를 백 리 밖까지 쫓아내고, 원래 우리의 것인 성보도 모두 수복하지 않았습니까. 진 대인, 이런데도 정 낭자에게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능준이 마지막 말을 할 무렵, 그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는 말끔히 걷혀 있었다. 진소가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말했다.
“그건 정 낭자의 공로이지, 낭자의 부친과는 무관하오.”
고능준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가 곧바로 웃음을 멈추었다. 고능준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소리를 지르며 진소에게 삿대질을 했다.
“진소, 어찌 감히 그런 불충하고 불효막심한 말을 하는 것이오! 폐하께서 공을 세운 자식을 둔 부모에게 상을 내리면 안 된다는 거요? 아니면 부모가 공을 세운 자식 덕에 호강하는 게 틀렸단 거요?”
관리들이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이유가 무엇이며, 무장이 위험한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공로를 세운 공신이 되어 아내는 봉작을 받고 자손은 대대손손 관직을 세습하게 하기 위함이며, 부모님께 영예를 안겨 효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모든 관리가 그 바람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일생을 바쳐 애써도 음관(蔭官)으로 장자에게 관직 하나 마련해 주는 게 전부였다.
물론 진소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그 부모가 해마다 봉작을 하사받을 뿐 아니라 조부나 증조부에게도 품계와 벼슬이 추증되곤 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진소의 젖먹이 손자조차도 벌써 관직에 올라 조정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고위 관직에 오르고 싶어 하고, 큰 공을 세우고 싶어 할 수밖에.
“지금 내 얘기가 아니라 정 낭자 얘기를 하고 있잖소. 고 대인, 괜히 이때다 싶어 엮지 마시구려.”
진소가 천천히 대답했다. 고능준이 옷소매를 탁 털고, 금세 예의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눈에는 웃음기까지 서려 있었다.
“공을 세운 건 정 낭자라지만, 여인의 몸이다 보니 사정상 낭자의 부친을 진급시킨 것뿐입니다. 이게 어디가 잘못됐습니까? 설마 진 상공은 정 낭자가 그 공로를 얻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낭자의 부친이 상을 받기에 자질이 부족하다는 겁니까?”
고능준은 진소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아비의 자질이 형편없다 해도, 그리 귀한 딸아이를 두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상을 받아 마땅하지요. 인륜이 그러하고 충효의 도리가 그러하잖습니까. 진 상공은 이 충효와 인륜의 도리가 틀렸단 말씀입니까?”
거기까지 말한 고능준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입꼬리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아니면 진 상공은 정 낭자라는 사람이 본디 불충하고 불의하며, 불효막심하여 인륜을 거스르는 사람인지라 그 부모와 영예를 함께 나눌 필요도 없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고능준, 이 사람아. 어찌 그리 독한 수를 둔단 말이냐!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진소가 표정의 변화 없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건 당연하지요. 소관은 군주와 아버지를 깍듯이 모시며 절대 거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소관이 어찌 감히 불충하고 불의한 길을 가겠습니까.”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진소가 고능준을 잠시 쳐다보더니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고 대인, 참으로 정성이 지극하시오.”
고능준이 공수의 예를 표하면서 진소처럼 또박또박 대답했다.
“당치 않으십니다. 폐하께 녹봉을 받아 먹고사는 사람이니, 폐하께 충성하는 것이 곧 소관의 본분이지요.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잊어서는 아니 되니까요.”
진소가 나가자, 관청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시 고능준의 곁으로 돌아왔다. 수하 하나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들어왔다.
“대인, 보셨습니까. 진 상공의 얼굴이 새파래졌습니다.”
“허튼소리.”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면서 옷을 정리하고는 제자리에 앉았다.
“정정당당한 상공 대인께서 고작 논쟁 몇 마디에 얼굴이 파랗게 질릴 분이던가. 다 나랏일이야. 이게 다 나랏일인데, 사람을 봐 가며 다르게 처리할 순 없지 않겠나.”
고능준은 수하와 반대 의견을 말하는 듯했지만, 조롱 가득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대인, 정말 묘수를 두셨습니다.”
수하가 아첨하면서 고능준에게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서 건네주었다.
“묘수는 무슨. 나도 다 좋은 뜻에서 하는 일인데.”
고능준이 찻잔을 받아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그 낭자가 본디 받아 마땅한 것이야. 진 상공이 가장 무서워하고 꺼리는 게 있다면, 아마 능력도 없는 이를 가깝다는 이유로 관직에 올렸다는 비판이거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권력을 남용한다는 말이겠지. 그러니 진소는 이 일을 행할 수도 없고 언급조차 하기 싫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쓰나. 너무 섭섭하잖아. 진소가 창피해서 못 하겠다면, 내가 대신 나서 줘야지.”
수하가 헤헤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대인. 감히 정 낭자가 부친과 불화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다니, 그건 명백한 모함 아닙니까. 대인께선 정 낭자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신 거죠.”
“부녀지간에 무슨 불화가 있다고. 다 헛소리고, 모함이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민심을 사로잡은 정 낭자를 폐하께서 얼마나 중시하시는데, 그런 정 낭자에게 어찌 불충하고 불효막심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씌우는지, 원.”
물론 정 낭자가 정말로 불충하고 불효막심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고능준의 말에 수하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을 선동하며 인륜의 도를 운운하더니, 이 천하가 다 네 뜻대로 될 줄 알았느냐?
네가 천륜을 저버리고 가족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벌인 사실을 폐하와 만백성이 알게 되든 그렇지 않든, 어쨌거나 너도 한번 된통 당할 날이 올 것이다.
자애로운 아비에 효성스러운 자식이라.
자식을 요강에 빠트려 익사시키려 했던 친부에게 어떻게 효도할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난 아주 옹졸한 사람이야. 내가 당했던 것은 하나하나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상대가 존귀한 군왕이든 미천한 강주 바보든 뭐든 간에, 내 눈엔 그저 똑같은 놈들일 뿐이야.
고능준이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이 일을 알게 된 진 노태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찌할 도리가 없군.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예상했다만, 피해갈 길이 없어.”
부친은 자식에게 관직을 물려줄 수 있고, 자식은 부모에게 명예를 안겨줄 수 있으니, 자식과 부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정교랑이 유명하지 않던 예전이라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 정 낭자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정교랑 한 사람만 보는 게 아니라, 정씨라는 성씨를 보고, 그 가족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놓치지 않고 호들갑을 떨며 말을 옮길 터였다.
그건 유명 인사가 되려면 지불해야 할 대가이기도 했다.
자녀가 공을 세웠다면 그 부모에게도 잘 가르쳐 키운 공이 있었다. 그러니 그 부모에게 상을 하사하는 것 또한 지극히 이치에 합당했다.
하지만 그게 정 낭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다른 이들은 정 낭자와 가족들과의 관계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진(陳)씨 가문은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당초 우리 쪽에서 진료를 청했을 때도, 정 낭자는 그 기회에 가족들을 피하고자 우리를 따라나섰어. 경성으로 온 후에는 주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 그 뒤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정씨 가문을 고소해 재판까지 감행하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지금 정씨 가문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구차하게 사는 것 또한 전부 그 낭자의 작품이고.
그런 정 낭자가, 부친에게 상을 내리길 원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부친이 경성으로 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군.
“고능준, 그놈도 참.”
진 노태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하더니 진소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만, 고능준도 알고 우리도 아는 것이니, 필시 정 낭자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다만 정 낭자가 워낙 고집이 세다 보니, 예에 어긋나는 짓을 할까 걱정입니다. 여기는 강주와 다르잖습니까. 행여나 이곳 경성에서 집안 어른을 관아에 고소했다가는······.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정 낭자의 목숨을 붙여 두신다고 해도, 백성들이 정 낭자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신선의 제자라 하더라도, 그런 금수만도 못한 짓은 용납할 수 없겠지.
“언제 정 낭자가 예의를 지키지 않은 적 있더냐. 정 낭자는 무슨 일을 하든, 정도를 지키는 사람이다.”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소자는 정 낭자가 정도를 모르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 낭자가 한결같이 지키는 한 가지는 잘 알고 있지요.”
진소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찻잔을 손끝으로 가볍게 툭 쳤다. 찻잔이 엎어지자, 진소가 천천히 말했다.
“그 여인의 앞길을 막는 자에게는 죽음뿐이라는 것을요.”
진 노태야는 잠자코 고개를 돌려 병풍을 쳐다보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매사 제 뜻대로만 될 수 있겠습니까. 정 낭자가 점점 욕심을 부렸다가는 언젠가 분명히 큰 탈이 날 겁니다.”
진소의 예상대로, 황제는 고능준이 올린 정 이노야의 포상 안건을 윤허했다.
열흘 후, 관청을 통해 직첩이 강주로 보내졌고, 황제의 뜻을 알리는 성지도 옥대교에 도착했다.
“소녀, 폐하의 은혜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성지를 두 손으로 받들었다. 시녀가 성지를 전하러 온 내시에게 붉은 천으로 감싼 돈 봉투를 건넸다.
내시들의 눈가에 기쁨이 서렸다. 돈 봉투를 받아 기쁜 게 아니라, 이 돈 봉투가 여타 돈 봉투와는 다르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려 도교 이 진인의 제자가 준 돈이야. 이걸 몸에 지니고 다니면, 분명 화를 면하고 액운을 쫓아낼 수 있겠지!
내시들을 배웅한 뒤, 내시를 맞이하며 피웠던 향로부터 서둘러 치웠다. 옥대교 저택의 마당에는 기쁜 분위기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가 불안한 기색으로 정교랑의 눈치를 살폈다.
정교랑이 성지를 두어 번 훑어보고는 반근에게 건넸다.
“아씨, 이를 어쩌면 좋죠?”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뭘 어떻게 해?”
정교랑이 물었다. 시녀가 답답한 마음에 반근을 밀치고 앞으로 나서며 정교랑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아씨, 정 이노야 내외가 경성으로 오면, 우린 그 사람들 등쌀에 마음 편히 못 살 거예요.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황씨는 정교랑의 가정사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범강림 역시 그 부분은 잘 몰랐기에 아내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기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반근과 시녀의 모습을 보자, 범강림과 황씨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그럴 리가.”
정교랑이 가볍게 웃었다.
그들이 우리 아씨를 못살게 구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인가? 아니면, 양쪽 모두 서로 물어뜯으며 못살게 굴거나.
“그럼, 이곳으로 오게 하시려고요?”
반근이 물었다.
“안 그럼 어쩌겠어. 무려 어명인데. 하, 이를 어쩐담?”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해야 할 것을 해야지.”
정교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이, 우리가 아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건 어때? 궁노원 근처라면 새 저택을 찾기도 쉬울 텐데.”
범강림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반근을 불렀다. 정교랑 옆에 서 있던 반근과 시녀가 동시에 대답했다.
“가서 적당한 저택을 하나 사들여. 그 사람들이 경성에 도착하면 바로 지낼 수 있도록.”
이번에는 두 반근 중 시녀만 허리를 숙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시녀가 밖으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저택의 대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주 노야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교교, 어떻게 할 건지 말만 해 다오.”
주 노야는 단도직입적이었다.
“뭘 어떻게 해요?”
정교랑이 물었다. 주 노야는 자리에 앉으며 차를 내오려는 반근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차를 마실 새가 어디 있어? 교교, 그 속 시커멓고 양심도 없는 정씨 내외가 경성으로 온다고 들었다.”
주 노야가 분개하며 말했다.
경성은 역시 소식이 빠르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시로 보낸다고 하더군요.”
“교교, 듣자니 이 일을 꾸민 자가 바로 고 전시라더구나.”
주 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교랑은 그게 뭐 어쨌냐는 얼굴로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아. 지난번 서북의 일 때문에, 고 전시가 너에 대한 정보를 캐고 다닌 것 같다. 그 속이 시커먼 부부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빤히 알면서, 일부러 네 속을 뒤집으려고 그들을 경성으로 부른 거야.”
주 노야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정교랑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로는 제 속이 뒤집히지 않아요.”
주 노야가 생각을 바꾸며 한숨을 쉬었다.
“속이 뒤집히는 건 차치하고, 난 정 이노야 그놈을 아주 잘 알아.”
주 노야는 속이 시커먼 부부란 말 대신, 이노야를 콕 집어서 말했다. 주 노야의 그런 잔꾀를 정교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허풍만 가득한 놈이야. 학문도 썩 뛰어난 건 아니고, 관직에서도 일 처리에 뛰어난 건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면 4년 전에 진급했지 지금껏 있었겠느냐.”
주 노야의 말을 듣던 정교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다가 금세 사라졌다.
왜 웃는 거지? 그래도 친부랍시고 그때의 분함은 다 잊고, 다시 부녀의 정을 이어 나가고 싶은 거야?
멈칫했던 주 노야가 말을 이었다.
“경성에서 관직을 얻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야. 심지어 대리시 같은 곳이라면 더욱 힘들지. 그놈이 일을 못 한다는 이유로, 교교 너까지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을까 근심이구나.”
“무려 조정에서 임명한 건데, 안 올 수는 없잖아요.”
정교랑의 말에 주 노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교교도 그놈이 경성으로 오는 것을 원치 않는 거야!
“조정의 명이긴 하다만, 본인이 사양할 수도 있잖아.”
주 노야는 그 말을 내뱉고는 곧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니다. 그놈이 퍽이나 사양하겠군.”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외숙부님.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게 낫겠죠(既來之, 則安之 - <논어>).”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아니면 이렇게 하자꾸나.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사는 건 어떠니? 그러면 그놈들이 널 괴롭히려 들 때, 내가 나서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난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거 겁 안 난다. 외숙이 나서겠다는데, 누가 감히 나더러 뭐라 하겠느냐.”
주 노야의 말에 정교랑은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금 감사의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바른 자세로 앉은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주 노야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으로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정사낭이었다.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듯 고생이 묻어나는 정사낭의 모습에 반근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넷째 공자님께서 갑자기 이곳엔 어쩐 일로?”
방에 있던 정교랑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숙부님이 경성으로 올 수도 있대.”
정사낭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올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명이 떨어졌어요. 공자님, 설마 이 소식을 알리려고 강주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반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이 소식을 알리려고 강주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 그건 너무 터무니없잖아.
정사낭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버지께서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물어보라고 하셔서. 참, 그리고 누이에게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어.”
아버지라면 정 대노야?
대청에 있던 주 노야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아버지께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정사낭이 말했다.
이 빌어먹을 정가 놈이! 또 나랑 한판 해보자는 게야?
우리 집 교교를 빼앗기 위해, 이젠 친동생까지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냐!
가만 보니, 아주 바보는 아니로군. 드디어 우리 교교가 제 동생보다 값지다는 걸 알아차렸으니 말이야.
정사낭이 경성에 이르러 정교랑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조정에서 내린 직첩은 아직 강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하지만 정 이노야가 경성의 대리시로 영전해 간다는 소식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쿵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정육랑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누군가가 커다란 상자를 정육랑의 눈앞에 턱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정육랑이 득의양양한 정칠랑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열 살이 다 되어가는 정칠랑은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따라서 바닥에 앉아 있던 정육랑은 고개를 들어 정칠랑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런 각도로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정육랑은 정칠랑의 얼굴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단 기분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 여인의 모습이 살짝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복동생이어도 서로 닮은 구석은 있는 건가.
“이건 내가 쓰던 책이랑 자수야. 난 곧 부모님이랑 경성으로 갈 건데, 짐이 너무 많아서 못다 가져간대. 그래서 너 주려고.”
정칠랑이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거 다 엄청 좋은 것들이야. 내가 싫어해서 버리는 게 아니라고.”
“난 이딴 거 필요 없어. 그냥 네가 갖고 있어.”
“갖고 있어 봤자 뭐해.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우린 이번에 경성으로 가면 다시는 강주로 안 돌아올 거래. 그리고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거라면 경성에 있는 우리 언니가 뭐든 다 사 줄 거라고 하셨어.”
정칠랑이 우쭐한 모습으로 손짓을 해가면서 말했다. 그런 정칠랑의 모습에 정육랑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니? 그럼 넌 이제 정팔랑이겠네?
나한테 언니가 생긴다고? 내가 적장녀인데?
싫어, 싫어! 그런 바보 언니라니, 창피해서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봐.
내가 왜 정팔랑이야! 나 정팔랑 하기 싫어!
정육랑의 귓가에 과거 정칠랑이 울부짖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육랑이 정칠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 앳된 모습의 어린아이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우쭐함과 기쁨이 가득했다.
“언제부터 네가 바보 언니를 둔 걸 자랑스럽게 여기게 됐을까?”
“우리 언니는 황제 폐하도 알현했던 사람이야!”
바보라는 호칭이 싫었는지, 정칠랑은 잽싸게 반박했다. 정칠랑이 정육랑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뭐, 괜찮아. 내 친언니이자 네 사촌 언니기도 하니까, 너한테도 언니긴 언니지.”
정육랑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미안한데, 나는 충효도 모르는 바보 언니를 둘 엄두가 안 나.”
정육랑이 정칠랑이 가져온 상자를 팍 하고 엎었다.
상자가 엎어지자, 그 안에 들어있던 자수와 금은으로 된 비녀 등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정육랑이 흠칫 놀랐다.
정칠랑이 가져올 물건이라고는 기껏해야 꽃을 수놓은 손수건이나 장난감에 불과할 줄 알았는데, 저런 장신구까지 들어 있을 줄이야. 그토록 인색했던 정칠랑이 장신구까지 주다니.
이제 돈 많은 언니가 하나 생기니, 전에 쓰던 건 하나도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네.
“네 언니는 친해지기 쉬운 사람이 아니던데, 이것들 잘 챙겨 두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그 집에서 쫓겨나면 전당포에 맡겨 강주로 돌아올 경비나 마련하렴.”
정육랑이 콧방귀를 뀌고는 무심코 그러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바닥에 널브러진 비단 손수건을 밟고 지나갔다.
정칠랑은 정육랑의 발에 밟힌 손수건을 보고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정칠랑은 정육랑을 밀쳐내고 울면서 잡동사니를 다시 아무렇게나 상자에 담아 품에 안고 뛰쳐나갔다.
두 자매가 매일같이 싸우는 게 익숙했던 몸종과 여종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정육랑이 뒤늦게 몸을 돌려 밖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지만, 정칠랑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자 정육랑은 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무슨 일이야?”
정육랑이 두 귀를 막은 채로 물었다.
“조정에서 내리는 이노야의 상이 당도했대요.”
여종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몸종들은 재빨리 폭죽 소리가 나는 곳으로 구경하러 달려갔다.
왔구나.
정육랑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회랑 아래에 섰다.
“곧 성지를 받아야 하잖아요. 아씨께서도 어서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여종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죽어도 가기 싫지만,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육랑이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앞마당에 도착했을 무렵, 대문 근처에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병환으로 일절 바깥출입이 없던 정 노부인마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맨 앞에 서 있었다. 정 노부인은 골골 앓던 병자의 얼굴 대신, 생기 넘치는 얼굴로 문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에 정씨 가문에서 성지를 받들고 상을 받았을 때가 기억나는구나. 죽기 전에 이런 광경을 또 보다니, 지금껏 산 보람이 있어.”
이가 빠져 발음이 새는 노인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서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정씨 가문은 과연 복을 타고났네. 더는 안 되겠다, 안 되겠다 싶다가도, 또 이렇게 재기하다니.”
누군가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감탄했다.
“무슨 관직을 얻은 거래?”
정 이노야가 하사받은 관직에 흥미를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백성 대부분은 구경거리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폭죽을 구경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 나온 관졸들을 구경하고, 북적대는 인파를 구경하고, 어명을 받들고 경성에서 내려온 칙사 일행을 구경했다.
어쩌다 관직을 받았든 무슨 상관이랴. 구경꾼들에게는 훗날 자신의 후손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고, 얼마나 떠들썩했는지만 기억하면 될 일이었다.
정씨 저택의 마당 안에서 칙사가 성지 낭독을 마치자, 정씨 가문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성은에 감사를 표했다.
“대인께서는 편한 날짜를 택해 상경하십시오. 급할 것 없습니다.”
칙사가 겉치레로 말했다. 아들을 경성으로 느긋하게 보낼 생각이 없었던 정 노부인이 목청을 높였다.
“아유, 무슨 소리를. 빨리 가야죠, 빨리. 채비는 다 끝냈으니까, 지금이라도 출발할 수 있어요.”
정 노부인의 모습에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이 서둘러 정 노부인을 부축하여 자리를 피했다.
“왜들 그러냐. 내 말이 틀려? 더 기다릴 게 뭐 있어? 어서 경성으로 가서 공을 세우고, 나도 상 하나 받게 해 줘야지. 이번에는 어떻게 된 게 내 건 없고, 죽은 주씨한테만 상이 내려졌느냔 말이야.”
정 노부인은 목청을 높여 투덜대면서 두 며느리의 부축 속에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가 칙사를 잘 모시고 나자, 정 이노야를 한쪽으로 불렀다.
“이번 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정 대노야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을요?”
싱글벙글한 표정의 정 이노야는 대청 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 이노야의 머릿속에는 당장이라도 들어가 동료들과 축하주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을 사양하거라.”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 이노야는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정 대노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관리들은 조정에서 내린 상을 받을 때, 그 상을 사양함으로써 더 높은 관직을 달라는 일종의 시위를 하곤 했다. 보통은 두세 번 거절한 뒤 관직을 받아들이거나, 황제가 다른 관직으로 바꿔 주는 일이 많았다. 물론, 일이 잘못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나 가능한 거절이었다. 어차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일 뿐이니까.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형님. 제가 이제 막 관직을 얻은 신출내기도 아니잖습니까. 아니, 이제 막 관직을 얻었다 해도, 그 정도는 알죠.”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가 자신을 너무 어린아이 취급한다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 경성으로 가지 말라고. 다른 곳으로 바꾸거라.”
정 대노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정 이노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형님, 미쳤습니까?”
저게 어딜 봐서 미친 거야? 고의로 우리의 앞길을 막으려는 게지!
이야기를 들은 정 이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짐 정리를 하다 말고 정 노부인의 거처로 달려갔다.
<교랑의경 17권>에 계속
교랑의경 17권
차례
천륜
청음
귀판관
다른 도리
하늘이 사람을 놀리다
-천륜-
정 이부인이 대성통곡하면서 말했다.
“형제끼리 돕고 살아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저희도 알아요. 어머님께서도 몸이 편찮으시고, 아주버님도 크게 병이 나신 터라, 이노야가 여길 떠나 먼 경성까지 가 버리면, 집에 일이 생겼을 때 아무도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요.”
정 노부인은 정 이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찻잔을 바닥으로 내던져 깨트려 버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내가 지금 기력이 펄펄 솟는 게 보이지 않느냐! 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내 아들이 내게 상을 안겨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게야! 첫째의 몸이 안 좋다고 해도, 우리 집에 사람이 없다더냐? 집안에서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는 손자가 수두룩해.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엔 증손자까지 보았는데, 우리끼리 이 정씨 집안 하나 못 지켜낼까! 그리고 둘째가 경성으로 가는 게 어찌 자기 자신을 위해서냐? 다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해서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 정 노부인이 호통을 쳤다.
“첫째가 병을 앓더니 머리까지 어떻게 된 게야? 당장 첫째를 불러오너라!”
정 노부인의 말에 황급히 정 대노야를 부르러 달려나간 여종을 보며, 정 이부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 노부인의 방 안에서는 반나절 내내 호통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 대부인은 문가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정 대노야는 아직 병중이니, 제발 남편 대신 자신이 벌을 받게 해 달라고 울면서 빌고 또 빌었다.
“우리 둘째의 앞길을 막는 것은 곧 우리 정씨 가문의 앞길을 막는 것이니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어! 둘째가 네 친형제인데, 어째서 너는 둘째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이냐!”
“어머니, 저는 진심으로 아우를 위해서…….”
정 대노야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고 설명하려 했지만, 정 대부인이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고 애원했다.
“노야, 제발, 제발요. 제발 그만하세요.”
정 대부인이 바닥에 엎드린 채 서럽게 울었다. 정 대노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정 대노야도 결국 포기했는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면서 사죄했다.
“소자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어머니.”
정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둘째에게 여비나 두둑이 챙겨 주거라. 경성은 물가가 비싸 살기 힘들다던데, 이리저리 접대하려면 둘째한테 돈 나갈 곳이 많을 것이야. 우리 정씨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야지.”
반나절 내내 참고 있던 정 대부인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어머님, 집에 돈이 없어요. 게다가 이방 내외는 경성에 가면 더욱 돈 걱정이 없을 거고요. 교랑이…….”
이번에는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을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을 끊었다.
“예, 알겠습니다. 어머니. 집에서는 허리띠를 졸라맬지라도, 먼 길을 떠날 때는 돈을 충분히 챙겨야지요. 아우가 망신당할 일 없도록 소자가 잘 준비하겠습니다.”
정 노부인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물러가거라. 네 아우가 집을 떠나 그렇게 먼 곳까지 가는 이유가 뭐겠느냐. 다 우리 정씨 가문을 위한 일이야. 그건 다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한데, 어찌 그렇게 철없이 아우에게 불만을 품는 게야.”
정 노부인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상경했다간 자신의 앞길만 망치는 게 아니라 정씨 가문까지 무너뜨릴 테니 걱정할 수밖에요.
정 대노야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정 노부인에게 그간의 일들을 납득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정 대노야는 공손하게 알겠다고 대답한 후, 부인과 함께 군말 없이 물러났다.
“제수씨,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든, 내게 직접 말하십시오. 어머니께서 이해하지 못하시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 더 이상 어머니를 앞세우지 말란 말이오. 어머니께서 연로하시기도 하고, 더는 우리 형제지간의 일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소이다.”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역시 대노야께서 어머님 생각을 많이 하시네요.”
정 대노야는 정 이부인의 대답을 무시한 채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한 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가는 게 좋을 거다. 최소한 새해라도 맞이하고 올라가는 게…….”
편찮으신 어머니와 형님을 집에 두고 떠나게 되어서 송구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말에 또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형님, 그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새해가 되고 나서 상경하라고요? 대리시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저뿐입니까? 제가 가지 않으면, 그 자리를 메꾸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고요!”
“네 말대로, 대리시는 네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곳이야.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거라. 경성 바닥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 꺼림칙해.”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가 분통을 터뜨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형님!”
참다못한 정 이노야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왜 그러는 겁니까, 도대체! 저는 조정의 명을 따라 경성으로 부임하러 가는 겁니다. 칼산과 불바다를 넘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정씨 가문을 패망의 길로 이끌러 가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 가게 막는 겁니까?”
정 이노야는 순간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 말은 여인네들이나 하는 소리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였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 대노야의 모습에 정 이노야의 생각 또한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제가 형님보다 잘난 게 그렇게 싫습니까?”
“퉤!”
정 대노야가 곧바로 침을 뱉었다.
“이놈아, 네가 나보다 못났다 한들 그게 무슨 기뻐할 일이라고!”
“그런데 왜 경성으로 못 가게 막는 거냐고요!”
“경성은 칼산처럼 위험한 곳이야. 이대로 가 봤자 넌 도마 위에 오른 생선 처지밖에 안 돼!”
정 대노야가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치자, 정 이노야는 흠칫 놀라며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실소를 터트리며 대꾸했다.
“형님, 그게 사실이라 해도 만천하의 사람들은 다 칼산으로 뛰어드는 길을 택할 겁니다.”
“하긴 그렇지. 온 세상이 죄다 관직을 얻어 출세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말이야. 어찌 보면 꼭 맨발로 칼산 위를 거니는 것 같아.”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형님의 병세가 많이 심각해졌구나.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 같네.
중얼거리는 정 대노야의 모습에 정 이노야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짜증과 울화가 사그라들고 도리어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형님, 어서 가서 쉬십시오. 제가 벼슬살이를 한 지도 어느덧 십수 년입니다. 아직도 관직 생활에 대해 잘 모를까 봐서요?”
“관직에 오른 지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넌 이 일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정 이노야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빽 소리를 질렀다.
“생각해 보아라. 교랑이 우리를 그토록 증오했는데, 그 아이가 너를 경성으로 불렀을 것 같아? 교랑은 절대로 널 위해 상을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폐하께서 상을 하사하겠다고 하셨어도, 교랑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야.”
정 대노야의 말을 듣다 못한 정 이노야가 버럭 화를 냈다.
“그 계집이 어딜 감히요! 충효도 모르는 그런 자식은 필요 없습니다! 하늘이 용납하지 않아요!”
“하늘이 용납하고 자시고 간에, 일단 냉정하게 생각해 봐라. 교랑의 그 대단한 수완으로 황제 폐하께 못할 말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 머리 위로 상이 떨어졌어. 누군가가 이번 일을 강행했다는 뜻이겠지. 이건 절대로 그 애가 원하는 일이 아니야. 그 애가 원하는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 애와 원수지간인 사람이 저지른 일일 거다. 네가 이대로 상경하면, 교랑의 원수의 편에서 칼잡이를 자처하는 꼴이 돼!”
정 이노야는 세상에 이런 바보가 있나 하는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형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정 이노야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목청을 높였다.
“교랑은 제 딸입니다! 제가 낳은 친딸이라고요! 그런데 그 아이가 절 밀어낸다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 대노야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자, 정 이노야는 그만하라며 손짓했다.
“형님, 지난번 일은 제가 형제지간의 의리를 저버린 게 아닙니다. 형님께서 너무 지나치셨어요. 그 혼수는 본디 그 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천륜을 거슬렀다고 볼 수는 없죠. 교랑이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형님이지 저와는 무관하단 말입니다.”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발걸음을 돌렸다.
“형님, 전 내일 떠날 겁니다. 오늘은 짐을 챙겨야 하니, 송별 연회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형님은 몸조리나 잘하세요. 전 관청 사람들과 인사 나누러 가겠습니다.”
정 이노야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외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뭐? 혼수 때는 내가 지나쳤다고? 네놈과 무관하다고?”
정 대노야는 열이 받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했다.
“그래, 내가 지나치긴 했지. 너와도 무관한 일이라고 치자.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경성에 가거든 절대 그 아이에게 지나친 일을 해선 안 된다. 그럼 그 아이가 천륜을 거스른다 해도 도리가 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정 대노야가 흠칫 놀랐다.
천륜을 거스른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 때문이라고요?”
정 대부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건 협박이오.”
정 대노야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의심쩍은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낸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정 이노야는 밤늦게 술에 떡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술도 깨지 않은 채 기어이 마차에 몸을 싣고 식구들과 함께 도망치듯 강주를 떠났다. 집안사람들이 배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난 것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정 대부인은 괘씸하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어 아예 배웅할 생각조차 안 했지만, 정 대노야는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 자녀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성 밖으로 쫓아가 그들을 배웅했다.
“정말 복이 많은 집안이야.”
“칠랑 아씨는 나중에 경성에서 좋은 사람한테 시집가시겠지?”
“듣자니 교랑 아씨는 황제 폐하와도 아는 사이래. 이부인의 말을 들어보니까, 칠랑 아씨는 잘하면 황실과 연을 맺을지도 모른다던데?”
“이야, 그럼 우리 가문도 황실의 종친이 되는 거야?”
마당에서 몸종들과 여종들이 수군거리며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육랑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창가에 있던 꽃병을 마당으로 내던졌다.
“다 꺼져!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날카로운 정육랑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종들과 몸종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정육랑이 창가에 서자, 국화꽃 향을 품은 바람이 연꽃 연못을 지나 정육랑의 온몸을 휘감았다.
황금빛 가을인 10월이 됐으니, 며칠만 더 지나면 이 집에서 국화꽃 시회를 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모두 떠났어. 다 그 경성의 바보를 언니라고 부르며 쫓아갔다고.
정육랑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걘 나쁜 사람이야! 그 바보는 나쁜 사람이라고! 너희들은 조만간 그 바보한테 당하고 말거야!”
정씨 저택의 문 앞에는 더는 구경꾼이 모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잣거리는 정 이노야의 진급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북정의 떠들썩함에 비해, 남정의 저택은 몹시 쓸쓸해 보였다.
“이야, 댁의 아씨가 참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정평이 오색깃발을 돌돌 말며 강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감탄했다.
“그야 당연하지.”
조 집사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죠.”
정평이 얄밉게 웃으면서 비꼬았다.
“그 댁 아씨가 경성에서도 감히 패도(覇道: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난폭하게 행동함)를 일삼을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조 집사가 정평을 흘겨보면서 대답했다.
“패(覇)는 우리 아씨와 무관한 말이야. 아씨는 오직 도(道)만을 행하시는 분이지.”
정평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조 집사를 보면서 손뼉을 쳤다.
“조 집사, 날 허투루 따라다닌 건 아니군요. 드디어 도를 깨우쳤으니.”
정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 집사가 정평의 모자를 탁 하고 쳤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부잣집에 가서 풍수나 봐 줘. 여태 백 문도 못 모았으니, 원. 고생해서 벌었으면 아껴 쓰기라도 하든가. 고작 사흘 만에 먹고 마시는 데 다 쓰면 어쩌자는 거야?”
조 집사가 정평을 나무라며 타박하자, 정평은 헤헤 웃으면서 모자를 바로 썼다.
“급할 거 없습니다. 급할 거 없어요. 모든 일에는 정해진 수가 있는 법이니.”
조 집사가 또 그를 때리려고 손을 치켜들자, 정평은 실없이 웃으며 잽싸게 달아났다.
정 이노야가 강주를 떠나 경성으로 오고 있을 무렵, 경성에 있던 정교랑은 평소와 변함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활을 쏘고, 그 후에는 옥대교 앞에서 글씨를 썼으며, 오후에는 몸종 몇 명을 데리고 요리하고, 저녁에는 책을 읽었다.
“종일 하는 게 많긴 해도,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니 원.”
황씨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인들은 잦은 출타를 삼가야 한다지만, 저 나이 때엔 나들이도 자주 가 줘야 하는데.”
“밖으로 놀러 나가고 싶으세요? 어디로 갈까요? 내일 같이 가세요.”
지나가던 시녀가 중얼거리는 황씨의 말을 듣고 웃으며 다가왔다.
“이젠 경성에서 안 가 본 곳이 없는데 어딜 또 가겠니.”
황씨가 우스갯소리로 시녀에게 대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씨는 옥대교 저택이 부쩍 편해졌다. 그러다 보니 말하는 것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시녀나 반근과도 편히 지냈다.
“에이, 벌써 경성을 다 돌다니요. 가 볼 곳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데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사이, 누가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누가 왔나 보네, 나가 봐야겠다.”
황씨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신비궁이 세운 혁혁한 전공 덕에 신비궁의 수요는 폭증했다. 황제는 궁노원에서 장인 한 명이 신비궁을 매일 한 개씩 만들어 내기를 바랐다. 그 덕에 궁노원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고, 범강림은 밤낮으로 당직을 서며 아예 궁노원에서 살게 되었다.
다행히도 황씨는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황실의 종친인 진안 군왕까지 보고 나니, 다른 사람을 맞이할 때의 마음도 한결 편해진 덕분이었다. 게다가 정교랑을 보기 위해 옥대교 저택의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문을 열어 보니, 사내 하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던 사내는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저, 저는 정 낭자께 가르침을 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사내가 긴장한 모습으로 말을 더듬었다.
“아씨께서는 매일 여기 앞에서 글씨를 쓰세요. 글씨 때문이라면,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오면 돼요.”
시녀가 말하자, 사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게 아니고, 저는…….”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다른 것에 대해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
다른 것?
시녀가 뒤늦게 사내를 훑어보았다. 그의 옷차림은 확실히 서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체 건장해 보이는 사내에게서는 서생의 단정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요리를 배우러 온 거예요?”
시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진십삼이 몸종 셋을 골라 정교랑에게 요리를 배우게 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저잣거리로 퍼졌다. 제2의 장반근이 되고 싶던 여러 집안의 몸종들이 옥대교 저택의 문을 두드렸지만,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정교랑이 그들의 청을 거절했기 때문이 었다. 집이 너무 협소하기도 하고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요리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지금의 세 명을 다 가르친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돌려보낸 것이다.
소식을 들은 권문세가들은 더욱 흥분했다. 찬모 몇 명이 요리를 배워 온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정교랑과 친분을 맺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권문세가에서도 불시에 사람을 보내 언제쯤 자리가 빌 것 같냐고 묻는 일도 흔했다.
시녀의 말을 들은 사내는 잠시 제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뒤늦게 시녀의 말뜻을 이해한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낭자와 거래를 하나 하고 싶어서요.”
거래?
시녀가 사내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누구신지?”
사내는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두 손으로 몸을 뒤적거렸다. 뭔가를 한참 찾던 사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을 멈췄다.
“제, 제가 이번에 관직을 잃어 명, 명첩이 없습니다. 저, 저는 이씨 가문 사람이고, 이름은 무라고 합니다.”
사내가 창피해하며 말했다.
“이무?”
정교랑이 손에 쥔 책을 내려놓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네. 이씨 가문의 사람이에요. 보름 전에 경성에 불을 냈던 그 사람이요.”
시녀가 조용히 귀띔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댁에서 이미 날 찾아왔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무원산 형제들의 장례를 치르던 날, 이씨 가문 사람들이 선물을 한가득 가지고 옥대교 저택을 찾아왔다. 그때 그들은 장사나 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난 이것으로 장사할 생각이 없어요.”
정교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무가 알겠다고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주위에 앉아 있던 몸종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입을 열려 하다가도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녀는 정교랑이 자신에게 남아 있으라는 눈짓을 하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어린 몸종들을 데리고 밖으로 물러났다.
“낭자, 저는 낭자와 우리 가문 간의 폭죽 장사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무가 소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꺼내 정교랑의 앞으로 밀었다.
“저는 이것을 거래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무가 내민 것은 쇠로 만들어진 볼품없는 상자였다.
반근이 상자를 받아 정교랑 앞에 가져다 놓자, 정교랑이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언제나 변함없던 정교랑의 담담한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나 싶더니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게 뭐지?
반근이 목을 빼고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기다랗게 돌돌 말린 종이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종이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했고, 상자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성씨가 뭐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잠시 멈칫하던 이무는 용기를 내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교랑의 눈가에 찰나지만 놀라움이 스친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교랑은 상자에 담긴 물건에 관해 묻지 않고 자신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름을 묻는 것도 아니고, 성씨가 무엇인지만 물으니 퍽 우스운 질문이었다.
“성은 이고, 이름은 무라고 합니다.”
이무가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었는데, 이 여인이 내 말을 흘려들었나 보네.
“이씨 성이라…….”
정교랑이 혼잣말을 하고는 이무를 잠시 쳐다보았다.
“원래부터 이씨였나요? 아니면, 나중에 성씨를 바꿀 계획이 있다든가.”
이무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살다 살다 저런 질문은 또 처음 들어보네.
내가 우리 이씨 가문을 멸족할 놈이라고 욕하는 건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내가 이 여인과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초면부터 이렇게 심한 욕을 할 리 없잖아?
그게 아니라면, 그냥 바보라서 저렇게 묻는 건가?
이 여인이 어렸을 때 바보였다는 소리를 듣긴 했어. 아무리 명사께 가르침을 얻고 신묘한 비술을 많이 터득했다 한들,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가 보네.
이무는 바보를 상대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바보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섯 살배기 딸아이가 있는 그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법에는 능숙했다.
어린아이와 대화할 때는, 아이가 묻는 대로 대답하거나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원래부터 이씨였습니다. 저는 폭죽 장사를 하는 이씨 가문 대방의 일곱째 서자입니다. 앞으로도 성씨를 바꿀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천륜을 어기는 대죄를 지어 족보에서 제명당하지 않는 한요.”
이무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족보에서 제명당한다면 무슨 성씨를 가지고 싶어요?”
정교랑이 곧바로 물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다가, 이무가 걱정되어 그의 안색을 살폈다.
부아가 치밀어서 까무러치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면 어떡하지? 우리 아씨를 처음 대하는 사람은 아씨의 언행이 조금 버거울 수도 있을 텐데.
“족보에서 제명된다고 해도 저는 이씨일 겁니다.”
이무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면서 대답했다. 정교랑이 아, 하고는 다시 이무가 건넨 상자로 눈을 돌렸다.
“이 거래는 하지 않겠어요.”
정교랑이 상자를 이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해서도 안 되고요.”
해서도 안 될 거래라.
맞아. 이 여인과 내 생각이 일치한 거라면, 이게 해서는 안 될 거래이긴 하지.
반근이 자신을 배웅할 자세를 취하자 다급해진 이무가 물었다.
“낭자, 낭자께서는 이 물건을 아시는 거죠?”
아씨는 저 물건을 자세히 보지도 않았고, 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는데, 어째서 저 사람은 아씨가 저걸 아신다고 확신하지?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역시 솔직한 사람이었어!
이무가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앞으로 다가갔다.
“아, 아무리 만들어도 저는 이걸 맞게 만든 건지를 모르겠습니다. 낭자, 저, 저는 도저히 왜 그런지 이유를…….”
“저걸로 뭘 만들고 싶은데요?”
정교랑이 이무의 말을 끊고 물었다. 이무는 흠칫 놀라며,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말이람. 뭘 만들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저걸 저렇게 만들어 왔다고?
반근이 이무를 쳐다보았다. 이무의 표정은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길을 잃은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이무의 표정을 보고, 반근은 그가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걸로 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맞게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고, 될지 안 될지는 어떻게 알겠어요?”
정교랑의 말에 이무는 또 한 번 멈칫했다.
“사실, 뭘 만들려는지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은…….”
이무는 뭔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말로 표현해 내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는 두 손을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지만, 여전히 헤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던 그가 돌연 손을 허공에서 멈추고 눈을 반짝거렸다.
“맞아. 저걸 어떻게 써야 할 줄을 몰랐던 거야. 그래서 계속 잘못 만들었구나.”
이무가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람처럼 사라졌다.
방 안에 있던 반근과 마당에 서 있던 시종들은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문밖으로 사라진 이무 때문에 깜짝 놀랐다. 놀란 기색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무가 다시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회랑 아래로 뛰어 들어왔다.
“낭자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무가 새빨개진 얼굴로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당치 않아요. 솔직하게 물어본 것뿐이에요.”
정교랑이 자신 앞에 있던 상자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놓고 갔어요.”
이무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면,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무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렸다.
“낭자께서 만드신 폭죽을 보고 생각해 낸 겁니다.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한 글자의 가르침으로도 스승이 된다고요. 제가 감히 낭자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절대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제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이무를 쳐다보았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허무맹랑했는지, 이무는 얼른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문가에 다다른 이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낭자, 그 사람의 성은 무엇입니까?”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묻는 이무의 질문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지? 누구를 말하는 거야?
의아한 얼굴로 서 있던 사람들과는 달리, 정교랑은 이무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진(陳)씨예요.”
이무가 허리를 숙이고 마지막으로 정교랑에게 예를 올렸다.
“이 이무가 꼭 기억하겠습니다.”
이무가 큰 소리로 외친 뒤 쏜살같이 문 앞에서 사라졌다. 옥대교 저택이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반근이 이무가 남겨둔 상자를 들고 정교랑에게 물었다.
“아씨, 이건 보관해 둘까요?”
정교랑이 반근에게서 상자를 받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아씨, 이건 뭐라고 불러요?”
반근이 물었다.
이건 뭐라고 불러요?
아이고, 소방(小昉: 정방의 별칭). 그걸 함부로 만졌다가는 큰일 납니다. 여기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 전부 다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것들이에요.
왜 이번엔 왕비라고 부르지 않죠?
왕비님, 부친께서 또 제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또 저를 골탕 먹이려고요?
흥, 안 알려줄 거거든요?
그럼 저도 안 알려드릴 겁니다.
정교랑이 상자를 닫고 시선을 떨궜다.
“모르겠어.”
예전처럼, 알고는 계시지만 기억나지 않는 물건인가?
반근은 행여나 정교랑의 아픈 곳을 건드릴까 봐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녁 식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사공자께서 새 저택에서 혼자 지내시느라 무척 심심하실 것 같은데,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건 어떠세요?”
반근이 웃으면서 물었다.
정 이노야 식구가 살 집은 시녀가 사흘 만에 마련했는데, 지금은 정사낭이 지내고 있었다. 새로 들인 몸종들, 사환들도 전부 그리로 보냈다.
“강주에서 밤낮없이 급하게 오느라 공부를 못 했을 거야. 무리하게 와서 몸져눕지 않은 것으로도 천만다행이지. 쉬면서 공부할 시간을 좀 줘야 해. 내년에 있을 과거 시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정교랑이 말했다.
“공자님께서 급제하실지 모르겠네요.”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반근은 잠시 합장을 하며 기도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씨, 공자님을 위해 보수사에 가서 향을 올리는 건 어떠세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가요, 가요.”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가 맞장구를 치면서 황씨에게 거들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 다 같이 가요.”
마당에서 몸종과 함께 아기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던 황씨가 빙긋 웃으며 맞장구쳤다.
“11월이라 날씨가 쌀쌀해졌으니, 부처님께 동상 안 걸리게 해 달라고 빌어야겠다.”
정교랑이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자 핑계를 대야 겨우 아씨를 밖으로 데려갈 수 있네.”
시녀가 조용히 웃으면서 회랑으로 걸어오던 반근에게 말했다. 반근이 입꼬리를 올리고 뭐라 대꾸하려던 찰나,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대문을 쳐다보았다. 사환이 문을 열자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내시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정 낭자, 소인은 경왕부의 사람입니다.”
내시가 명첩을 내밀면서 말했다.
“경왕과 진안 군왕께서 낭자를 내일 있을 연회에 초대하셨습니다.”
진안 군왕?
마당 안의 하인들이 서둘러 내시를 안쪽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내시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특별한 용무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새로운 거처로 옮겼으니, 세간의 풍습에 따라 낭자를 초대하여 같이 집을 둘러보며 담소나 나누고 싶으시다고요. 다른 사람은 일절 초대하지 않으셨고, 오직 낭자만 초대하셨습니다.”
초대에 응하시려나?
모두의 시선이 정교랑에게 집중되었다.
아씨께서는 거의 출타하시지도 않는데, 과연 남과 만나는 초대에 응하실까? 아무리 군왕이 평민 백성과는 다르다 해도, 아씨께서는 결코 평범한 분이 아니시니.
천자인 황제와 내기를 하고, 매일 대문 앞에서 서생들을 거느리며 글씨 연습을 하고 계셔. 그뿐 아니라 아씨가 해낸 일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지.
그러니, 아씨께서 군왕의 초대를 거절하신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좋아요.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내시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고 서둘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가 건넨 금박이 붙은 초청장을 받은 시녀가 돈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수고가 많으세요, 공공.”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시는 별다른 겉치레 없이 웃으면서 돈주머니를 받고는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그럼 보수사는 모레쯤 가야겠네.”
반근의 말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모레쯤 갈 거라고 보수사에 얘기하고 올게.”
초청장을 받은 정교랑은 안으로 들어가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황씨는 마당에 서서 대청과 마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려 왕부의 초청장을 받은 건데.”
보수사 방문을 모레로 미뤄야겠다는 말밖에 하지 않다니.
“내일 입을 옷과 장신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황씨가 물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반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씨의 옷은 늘 입는 몇 벌이 전부라 갈아입어도 별로 티도 안 나실걸요?”
시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맞장구쳤다.
“장신구도 그렇고요. 작은 은색 빗과 비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세요. 그런 고민보다는, 차라리 내일 아침 식사를 뭐로 할지 정하는 게 더 중요하죠.”
반근이 미소 띤 얼굴로 한마디 더 얹었다. 황씨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럼,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황씨가 범강림이 매일 하던 말을 따라 하면서 마당에서 걸음마 연습을 하던 아이를 향해 손뼉을 쳤다.
“자, 이리 오렴, 이리 와. 백모에게 와 보거라.”
이튿날, 정교랑은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활쏘기를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대문 밖에서 글씨를 썼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정을 마친 정교랑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올리며 나갈 채비를 마쳤다.
“보수사에 갈 때랑 똑같네.”
황씨가 고개를 저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마차에 무언가를 싣는 것도 보이지 않고, 두 반근의 손도 텅 비어 있는 모습을 확인한 황씨가 반근을 붙잡고 물었다.
“축하 선물은?”
“아씨께서 가지고 계세요.”
반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황씨가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정교랑 또한 손에 든 것이 없었다.
어디에 가지고 있다는 거지?
정교랑은 의아한 표정의 황씨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흔들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는데?
황씨가 더욱 의아한 얼굴로 입을 떼려던 찰나, 말을 탄 진십삼이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진십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출타하는 겁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안 그래도 낭자를 연회에 초대하려고 왔는데.”
진십삼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선약이 있어서요.”
정교랑이 가볍게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속으로 흠칫 놀라면서도 곧바로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밤에는요?”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은 이번에 경성에 돌아온 뒤로 더욱 조용해졌다. 전에는 그나마 간간이 밖에 나가 식사도 하고 나들이도 했지만, 지금은 아예 대문을 닫아걸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럼 내일 점심은요?”
진십삼이 끈질기게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내일은 보수사에 향을 올리러 가야 해서 미리 공양을 예약해 뒀어요.”
예약은 무르면 되잖아. 기껏해야 사찰 공양일 뿐인데.
황씨가 나서서 말리려 하자 시녀가 재빨리 황씨의 팔을 잡았다. 시녀가 조용히 황씨에게 고개를 젓자 황씨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무르면 안 될까요? 내일이 내 생일인데.”
진십삼이 연이은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공교롭게 됐네요. 이미 예약한 거라 무르기가 좀 그래서요.”
정교랑이 다시 예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 알겠습니다. 원칙을 중시하는 낭자인데, 일찍 초대하지 않은 내 잘못이죠.”
진십삼이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하고는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그래도, 선물은 줄 거죠?”
정교랑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진십삼은 말 위에서 정교랑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한 뒤, 고삐를 잡아당기고 대문 앞을 떠났다. 저잣거리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고개를 돌리자, 저택의 대문이 굳게 닫히고 정교랑이 탄 마차가 시종들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가는 모습이 보였다.
진십삼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차츰 사라졌다.
“원칙이라. 그래도 사람 사이의 정을 조금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진십삼이 혼잣말을 하며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면, 아직 부족한가?”
한숨을 내뱉던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경왕부의 하인들은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정원 쪽은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정말로 이 꽃이 최선이냐?”
“수라간 사람들은 도착했느냐?”
왕부 총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총관의 쉴 새 없는 지시 때문에, 커다란 왕부 내에는 하인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은 경왕부에 처음 짐을 들이던 날만큼이나 시끌벅적했다.
누가 보면 한 명이 아니라, 온 동네 사람을 다 초대한 줄 알겠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그 여인은 격식 차리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진안 군왕이 총관에게 못 말리겠다는 듯이 말하고는, 웃으면서 경왕의 허리띠를 정리해주었다.
진안 군왕이 경왕의 어깨를 탁탁 치고 말했다.
“자, 이제 됐다.”
옷을 입느라 진안 군왕의 손에 붙들려 한참을 기다렸던 경왕이 쏜살같이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경왕을 돌보는 내시들이 서둘러 경왕을 쫓아갔다.
“집에서 편하게 같이 식사하는 정도니,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진안 군왕이 회랑 아래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총관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총관의 시선을 느낀 진안 군왕이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아닙니다, 아닙니다.”
총관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아, 하고는 자신이 입은 옷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흰 바탕에 깃을 둥글게 하여 만든 남보라색 옷을 입고, 물총새의 깃을 넣어 만든 주홍색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초겨울 날씨에 대비되는 진안 군왕의 옷은 몹시 화사해 보였다.
좀 경망스러워 보이려나?
“경왕을 지켜보고 있게. 난 잠시 들어갔다가 나올 테니.”
진안 군왕의 말에 총관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분주하게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진안 군왕은 뒤쪽에 서 있고, 어린 내시 두 명이 양쪽에서 옷을 허공에 들고 앞에 대 주었다.
“이건 어떠냐?”
진안 군왕이 앞에 선 내시 네 명에게 물었다.
“좋아 보입니다.”
내시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좀 전 그 옷에 비하면?”
진안 군왕이 진지하게 물었다. 내시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것도, 비, 비슷하게 좋습니다.”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색이 무슨 상관이랴. 그냥 입으면 옷인 것을.
“됐다, 됐어. 가서 궁녀들을 불러오거라.”
내시들은 형벌을 면제받은 듯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일제히 알겠다고 대답한 뒤, 궁녀들을 부르러 갔다.
옷에 대해서는 역시 여인들이 훨씬 낫겠지.
“군왕, 이게 좋겠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이게 더 나아요.”
방 안에서 궁녀들의 목소리가 참새들의 지저귐처럼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의견이 전혀 없어도 문제고, 의견이 너무 다양해도 문제군.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궁녀들 때문에 진안 군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들 그만하거라. 그래서 어떤 옷을 입는 게 제일 좋겠느냐?”
진안 군왕이 호통치듯 물어보자, 방 안에 서 있던 열댓 명의 궁녀들이 동시에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환한 햇살이 실내를 밝게 비췄다. 올해로 열아홉 살이 된 진안 군왕에게서는 더 이상 소년의 풋풋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몇 년 사이, 그는 경왕을 데리고 궁 밖을 한참 유랑했고, 경왕과 놀아 주거나 그를 안전하게 보살피기 위해 건강한 신체를 단련했다.
부유한 생활을 누린 덕에 귀티가 흐르는 데다 생기도 넘치고 용모까지 준수하니 남다른 기품이 느껴졌다.
“군왕께서는 뭘 입으셔도 멋있는걸요.”
궁녀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진안 군왕은 기가 찬 듯 실소를 터트렸다.
“전하, 전하, 정 낭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문밖에서 총관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다급해진 진안 군왕이 궁녀들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떤 게 좋다고? 아니다, 아무거나 다오. 어서, 빨리!”
방 안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반근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 정교랑이 내리도록 부축하고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왕부를 훑어보았다.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황궁과 가까이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서요.”
영접하러 나온 상궁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내디뎠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지, 사실 이 정도면 꽤 규모가 되는데. 이 낭자는 어째 진담으로 받아들이나 보네?
예상치 못한 정교랑의 반응에 상궁은 깜짝 놀라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정교랑을 평범한 사람 대하듯이 하면 안 된다는 총관의 당부가 떠올라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왔어요?”
정교랑이 막 문가에 다다랐을 때,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청자색 바탕에 은은한 하얀색 꽃무늬가 새겨진 장포를 입은 진안 군왕이 환한 웃음으로 정교랑을 맞이했다.
“이쪽으로 들어가요.”
진안 군왕은 총관의 놀란 표정을 애써 무시하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린 뒤, 문턱을 넘어 그를 따라갔다.
“왜 그러세요?”
상궁이 총관의 놀란 표정을 보고 물었다. 총관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이를 위해 치장한다더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저 낭자가 얼마나 원칙을 중시하는데요. 허튼 생각 마세요.”
상궁이 나지막이 말하자 총관이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낭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닐세.”
저 낭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니?
상궁이 의아한 얼굴로 총관에게 더 물어보려 했지만, 총관은 벌써 정교랑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육가아, 육가아. 어서 이리 와서 정 낭자에게 인사해야지.”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전하께서는 저 낭자를 볼 때만 경왕을 먼저 불러오시네.”
“그렇지, 뭐. 평소에는 경왕이 다른 사람과 마주칠까 봐 겁나서 항상 꼭꼭 숨겨두시잖아.”
대청 안에서 물러난 두 시녀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정 낭자께서 경왕을 뵙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의술을 아는 분이 아니더냐. 그게 아니라면 낭자를 왜 초청하셨겠어?”
상궁이 정색을 하며 나무라자 두 시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상궁이 대청 안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의 손에 이끌려 와 정교랑 앞에 선 경왕이 보였다. 남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을 질색하는 경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정교랑의 얼굴에서는 겁을 먹거나 꺼리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교랑의 표정은 진안 군왕이 경왕을 대할 때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역시 신의라 다르긴 다르네. 하긴, 저 여인의 눈에는 병이 있든 없든,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겠지.
정교랑이 경왕에게 예를 표한 뒤 몸을 일으켰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경왕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 사이에 경왕은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한번 둘러볼래요?”
진안 군왕이 손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웃었다.
“좋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경왕을 불렀다.
“육가아,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
진짜로 둘러보겠다는 거야?
상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서둘러 진안 군왕의 뒤를 따라갔다.
“정방, 저기 좀 봐요. 원래는 저기가 연못이었는데, 내가 흙으로 메워서 꽃을 잔뜩 심었어요. 아마 내년 봄이나 여름쯤이면 꽃밭이 되어 있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꽃으로 모양을 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인데요? 어떤 모양이 좋을까요?”
진안 군왕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물었다.
“음양도(陰陽圖)가 좋겠네요.”
정교랑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말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옆에 있던 총관에게 지시했다.
“전하, 이곳의 구도와 풍수는 모두 사천대에서 정한 것이라 함부로 바꿔서는 아니 되옵니다.”
총관이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들이 본 거라 바꾸려는 게다.”
진안 군왕 역시 목소리를 낮추고 총관에게 대꾸했다. 총관이 멈칫하자 진안 군왕은 총관을 보며 자신의 말대로 하라는 눈짓을 보낸 후,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씩 웃었다.
“정방, 우리 이쪽으로 가 봐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경왕은 앞쪽에서 바람개비 한 개를 손에 들고 신나게 뛰어다녔다. 경왕의 뒤로 시녀와 내시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고, 그 행렬은 청석판이 깔린 길 위로 쭉 이어졌다.
“진짜로 바꾸신대요?”
다른 사람이 총관에게 물었다. 총관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군왕의 성격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어서 사람을 보내 황궁에 알리거라.”
“사천대 사람들이 이 일을 알면 분명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내시 하나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참, 대인. 사천대 사람들한테 묻기 좀 그렇다면, 다른 이에게 물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시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누구한테? 설마 보수사의 승려들은 아니겠지?”
총관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니요. 그때 반강현에서 일식 시간을 정확히 맞혔던 한 대인께서 곧 경성에 오신다고 합니다. 한 대인을 이곳으로 모셔 구도를 보게 하시지요. 한 대인이 괜찮다고 하면, 사천대 관리들도 아무 말 못 하지 않겠습니까.”
내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천대에서 예측한 일식 시간은 열에 아홉은 틀리곤 했다. 어쩌다 한 번 일식 시간을 맞혀도, 늘 운이 좋아서 때려 맞힌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천대가 일식 시간을 맞히지 못한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누군가가 일식 시간을 정확히 맞히고 온 성의 백성들을 대동해서 천구를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 상서로운 일은 해당 성의 백성들뿐 아니라, 다른 성의 백성들에게도 선망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백성들을 모아 함께 일식을 막아낸 관리도 그 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때마침 관리에 대한 고과가 있었던지라, 반강현의 모든 관리가 한 대인의 평가를 후하게 준 덕에 한 대인은 단번에 지현(知縣)에서 지주(知州)로 진급했다. 이런 연유로 한 대인은 곧 경성으로 들어와 황제를 알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한 대인께서 경성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주의 깊게 살피거라. 그분이 경성에 당도하시는 즉시 내게 알리도록 하고.”
내시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총관은 금세 멀어진 진안 군왕을 보고 서둘러 그를 쫓아갔다.
“이제 자네 차례야.”
누군가가 말했다. 넋을 놓고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던 진십삼이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외쳤다.
“좋은 시네, 좋은 시야.”
“좋긴 개뿔. 빈말은 넣어 둬. 뒤의 두 구절이 남았잖아.”
소년이 손에 쥔 술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이 열리더니 주 낭자가 들어왔다. 그 뒤로 칠현금을 품에 안은 몸종이 따라 들어왔다. 별실에 있던 일고여덟 명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진짜로 주 낭자를 모셔온 거야?”
“주 낭자를 모시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시끌벅적한 와중에 주 낭자는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에게 예를 표하고 진십삼의 근처로 걸어갔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주 낭자에게 목례했다.
복도에서 취객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원산을 마시고 싶다니까? 왜 안 팔아? 여기가 경성에서 제일 좋은 술집이라며?”
“손님, 무원산은 정 낭자한테만 있습니다. 그분이 팔지 않겠다는데, 우린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정 낭자한테만 있고, 남한테는 없는 술. 팔지도 않을 거면서 맛만 보이는 바람에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졌지. 하지만 정 낭자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협박을 겁내는 사람도 아닌 데다, 부귀영화도 관심 없는 사람이니, 그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들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렸다. 별실의 문이 닫히자, 복도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차단되었다.
“진호!”
누군가가 술잔을 흔들면서 진십삼이 듣기 싫어하는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다. 진십삼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불러?”
“그래야 내 말을 들으니까.”
사내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자네 오늘 왜 그러는 거야? 자네의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일부러 다들 모였는데, 정작 당사자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으니, 원.”
고개를 숙인 채 칠현금을 조율하던 주 낭자는 생일이라는 단어에 멈칫했다. 주 낭자가 고개를 들어 진십삼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진십삼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 자, 그래서 나머지 두 구절은?”
진십삼의 말에 사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만들다 만 시를 생각했다.
“마당의 오래된 오동나무, 줄기가 하늘을 뚫고 솟았네(庭除一古桐,聳干入雲中).”
사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같은 말만 되뇌었다.
“가지는 남북을 오가는 새들을 반기고, 나뭇잎은 바람을 맞이하는구나(枝迎南北鳥,葉送往來風)”.
주 낭자가 화답했다. 사람들이 주 낭자가 읊은 시를 다시 한번 따라 해 보고는, 손뼉을 치며 좋은 시라고 감탄했다.
“주 낭자, 역시 경성의 제일 화괴답습니다.”
사내들이 웃으면서 칭찬했다. 사내 중 하나는 주 낭자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기까지 했다.
“하찮은 재주일 뿐이에요.”
주 낭자는 웃으며 술잔을 받아 소매로 입을 가리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화려한 춤 솜씨에 글재주까지 겸비하셨군요!”
대청 안의 사람들이 주 낭자에게 환호했다. 진십삼은 빙긋 웃으며 주 낭자를 바라보고 술잔을 비웠다.
“생일 당일인 내일은 우리가 같이 있기 힘드니까, 오늘 아주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보자고.”
진십삼에게 말하던 사내들이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낭자, 생일 주인공 옆에 동석하는 건 어떻습니까?”
진십삼은 얼른 손사래를 치면서 어찌 감히 그런 부탁을 하느냐고 했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고말고. 걱정하지 마. 자네 부친께서 아셔도 자네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릴 리는 없을 테니까.”
사내들이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말했다. 주 낭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십삼의 옆에 앉지 않고 웃으며 예를 표했다.
“동석하는 것은 별일 아닙니다만, 차라리 소인이 여러분께 가무를 보여 드리고 공자님들의 흥을 돋우는 건 어떨까요?”
주 낭자의 가무는 가히 경성 최고였지만, 남들 앞에서 선보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평소에는 기껏해야 손님들에게 칠현금을 연주하는 게 전부고, 꽃등 놀이나 새해 명절 때처럼 권문세가에서 거금을 들여 초청할 때나 겨우 가무를 보이곤 했다.
사내들은 횡재한 듯한 기분이었다. 주 낭자를 모셔 온 것도 모자라, 주 낭자의 가무까지 볼 수 있다니!
“이게 다 생일 주인공 덕분이네, 다 자네의 복 덕분이야!”
사내들이 웃으면서 외쳤다. 진십삼이 사내들을 따라 웃으면서 술잔에 술을 부어 주고, 주 낭자를 향해 미소 지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주 낭자는 진십삼을 향해 웃으며 가볍게 목례한 뒤 한 걸음 물러섰다. 주 낭자가 팔을 들며 소매를 허공에 던지자, 풍악이 울리면서 주 낭자의 춤이 시작되었다.
별실 안의 사내들은 주 낭자의 가무를 보며 계속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진십삼은 주 낭자의 춤을 보면서 웃음 짓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 있다던 선약은 어느 연회에 가는 거였을까? 나는 왜 낭자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지?
아니지, 묻는다 한들, 뭘 어쩔 수 있겠어? 따라가기라도 할까.
진십삼은 홀로 실소를 터트린 후 술잔을 들고 천천히 술을 음미했다.
화려한 춤솜씨로 사내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주 낭자는 휘날리는 소매 사이로 진십삼을 보았다. 주 낭자의 눈가에 잠시 씁쓸함이 비쳤지만, 주 낭자는 곧바로 눈빛을 숨기고 춤에 집중했다.
주 낭자의 섬세한 손끝과 구름 위를 나는 듯한 춤솜씨는 사내들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 만큼 매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