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75)

작가의 말:

신비궁은 송나라 때 이굉(李宏, 이광(李廣)이라는 설도 있음)이 황제에게 신비궁을 바쳤던 일화를 본떴습니다. <송사병지(宋史兵志)>에는 당시 이굉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을 받았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고대의 황제와 조정이 늘 훌륭한 인재를 갈구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굉은 큰 상과 높은 관직을 하사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석-

온 경성이 오늘 성문 앞에서 있었던 쇠뇌 시연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엄청 큰 활이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자네 제대로 본 거 맞아? 흔히 볼 수 있는 활이랑 비슷한 크기였어.”

“어쨌든 간에, 화살이 슉 하면서 날아가더니, 저 멀리 있던 방패를 관통했다니까!”

“폐하께서 그 활에 신비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어.”

“난 되도록 빨리 오랑캐들이 그 신비궁을 구경했으면 좋겠네. 그런 엄청난 무기라면 보기만 해도 무서워 오줌을 지릴걸?”

“병사들을 이끌고 오랑캐를 무찌르려는 훌륭한 무장들이 좀 많아? 그 재수 없는 강문원 놈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 말고 빨리 딴 데로 꺼지든지 하지 원.”

주육낭은 소란스러운 인파 사이를 헤치며 성문을 나섰다. 역시나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 눈에 익은 마차와 시종들이 서 있었다. 주육낭이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자, 진십삼이 웃으면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도대체가 자네의 시력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그렇게 멀리 있던 방패는 단번에 턱턱 명중시키더니, 이렇게 준수하고 멋스러운 사내가 코앞에 있는 건 알아보질 못하니 말이야.”

진십삼이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주육낭이 진십삼을 향해 침을 뱉는 시늉을 하고는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자네를 기다리러 온 건 아니겠지.”

진십삼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말에서 내린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진십삼이 그를 제지했다.

“지금은 가지 마.”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진십삼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주육낭은 진십삼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맨땅을 자리 삼아 앉은 정교랑은 묘비에 이름을 새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정교랑의 손에 들린 끌과 망치가 묘비 위에 부딪힐 때마다 땅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녀의 손에 들린 망치가 자신들의 가슴을 내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육낭은 진십삼 옆에 나란히 서서 앞을 내다보았다.

“축하해.”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진십삼의 말을 듣고도 주육낭은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육낭, 다른 사람이 베푼 호의를 받을 줄도 알아야 해. 남이 베푼 호의가 자네를 해치는 일은 없어. 세상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타인의 호의라지. 그러니 부디 그것을 귀하게 여기도록 해.”

진십삼이 감상에 젖은 투로 말했다.

“시끄러워.”

주육낭이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흘겨보았다.

“과거시험이 바로 내년인데, 급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 보지? 이렇게 허구한 날 싸돌아다니기만 해도 괜찮은가?”

진십삼은 주육낭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정교랑이 있는 쪽을 내다보았다. 그런 행동이 괘씸했던 주육낭은 진십삼을 향해 발길질했으나, 진십삼은 재빠르게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육낭의 발을 피했다.

“그런 멍청한 질문은 못 들은 거로 하겠네.”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며 뭐라 대꾸하려던 찰나, 급히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범강림이었다. 주육낭이 그랬던 것처럼 범강림 또한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교랑이 있는 곳을 향해 직진했다.

“큰 도련님, 축하드려요.”

반근이 미소 띤 얼굴로 범강림에게 예를 올렸다.

축하한다는 반근의 말에 범강림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교랑이 손을 멈춘 채 자신을 쳐다보자, 범강림은 정교랑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누이.”

그의 입술 끝에 매달려 있던 말은 수없이 많았지만, 모든 말은 결국 이 한마디로 응축되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고생이 많겠어요. 오라버니.”

“살아 있으면서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쓰나.”

범강림이 비석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서무’까지만 새겨져 있고, 아직 ‘수’는 새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서무수.

범강림은 서둘러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남들 몰래 눈물 두 방울을 흙 위로 떨군 뒤, 웃음을 쥐어 짜내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뭘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 있는 것 좀 집어 줄래요?”

범강림은 응, 하고 대꾸한 뒤 정교랑이 천천히 글씨를 새기는 모습을 응시했다.

정교랑은 점 하나, 획 하나에 마음을 담아 비석에 글자를 새겼다. 종이 위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그만큼 글씨 한 자에 들이는 정성의 정도와 무게 또한 달랐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누이가 알려 준 대로 폐하께 말씀을 올렸어. 폐하께서 몹시 기뻐하시더라고.”

비석에 글씨를 새기는 정교랑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범강림이 말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을 말한 것이니, 기뻐하실 수밖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주 공자가 먼저 상을 하사받았고, 그다음에 폐하께서 나한테도 물어보셨어. 아, 그리고 진(陳)씨 가문 낭자도 무슨 상을 하사받았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무슨 직책이었는지는 자세히 못 들었어. 옆에 있던 대인들이 자꾸 말을 걸지 뭐야.”

끌과 망치가 비석에 부딪히는 소리와 범강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교랑은 입꼬리를 올렸다. 범강림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눈빛을 보면 그녀가 범강림의 말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범강림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 그녀 자신과 관련된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남의 일을 듣는 듯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범강림이 갑자기 입을 다물자, 정교랑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누이, 이것들은 사실 다 누이가 가져야 할 것들인데, 왜 누이가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범강림이 말끝을 흐리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필요한 사람이 가져야죠.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인데, 내가 가져서 뭐 하겠어요. 신경만 쓰이죠. 물진기용(物儘其用: 사물은 무릇 그 용도를 다하도록 써야 한다는 뜻)이란 말은 물건에 쓰이기도 하고, 사람에 쓰이기도 해요.”

필요가 없으니, 가지지 않는다라······.

범강림은 정교랑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가 필요 없다고 하는 거면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거겠지.

정교랑은 범강림이 건넨 망치를 받아 계속해서 비석에 글씨를 새겼다.

고작 그 정도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것보다 더 좋은 것도 많이 가져 본걸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해가 질 무렵, 진씨 저택에도 연회가 준비되었다. 하지만 연회석의 주인공인 진십팔랑은 통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나갔다고?”

진소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묻자, 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간 게야?”

진소 부인이 물었다.

평소 같은 때면 몰라도, 오늘처럼 자신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온 날에 홀연히 집을 비울 만큼 예의 없는 아이가 아닌데.

“정 낭자 댁에 가셨어요.”

몸종이 대답했다. 진소 부부는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정 낭자한테 갔다고?

“하긴, 전에 단랑과 십팔랑이 정 낭자와 가깝게 지내긴 했죠. 기쁜 일을 빨리 알려 주고 싶어서 간 걸지도 몰라요.”

진소 부인이 말했다.

“그래도 굳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갈 필요는 없지 않소. 내일 가도 충분하거늘.”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진소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때, 십팔랑이 정 낭자 댁에 자주 가서 뭘 한다고 했지? 책을 읽는다고 했나?”

진소 부인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

진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진십팔랑은 정교랑 앞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조서를 내밀었다. 고개를 든 진십팔랑의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교랑은 손으로 조서를 가까이 들고 내용을 확인한 뒤,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글씨 좀 보여 줄래요?”

진십팔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글씨가 쓰인 종이를 정교랑에게 건네고는 떨리고 기대되는 눈빛으로 정교랑의 표정을 살폈다.

은은하게 밝힌 등불 덕분에 정교랑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평소 정교랑의 모습이 더 익숙했던 진십팔랑은 그녀를 더욱 빤히 바라보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원한 정교랑의 눈빛이 은은한 불빛을 덮었다.

진십팔랑이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나쁘지 않네요.”

나쁘지, 않다고?

진십팔랑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낭자께 감사드려요.”

진십팔랑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묘한 분위기 때문에 실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 그리고 축하드려요, 낭자. 원하던 바를 이루었잖아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던 진십팔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고맙다면서, 고개를 젓는다?

기쁘다는 뜻인가? 아니라는 뜻인가?

진십팔랑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문득 자신이 오늘 무턱대고 달려온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교랑과 함께 이 기쁨을 누릴 생각으로 잔뜩 흥분했던 진십팔랑의 마음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그래, 사실 정 낭자에게 나는 가까운 축에도 못 끼겠지. 낭자는 나와 두터운 교분을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

그것도 아니라면, 폐하께서 내리시는 상이 정 낭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까?

나쁘지 않네요.

나쁘지 않네요?

진정으로 타고난 글씨를 가진 사람만이 폐하의 상을 하사받았어야 한다는 뜻인가?

“낭자, 아니면 낭자도 글씨를 써서 폐하께 바치는 건 어떨까요? 폐하께선 분명 낭자의 글씨를 무척 좋아하실 테고, 그럼 낭자한테도 상을······.”

진십팔랑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교랑의 시선에 말을 멈추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정교랑의 눈빛에, 진십팔랑은 자신이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진소(陳素), 글씨 연습을 왜 하죠?”

정교랑이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진십팔랑이 흠칫 놀랐다.

“글씨 연습을 좋아하니까······.”

“아니에요. 남들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죠.”

정교랑이 진십팔랑의 말을 끊고는 고개를 저었다.

“진소, 자신의 글씨가 자신의 마음에도 들고 남도 우러러보는 글씨였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그건,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인데.

진십팔랑은 정교랑의 말에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잠시 멍해졌다.

“진소,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죠?”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냐고? 내가, 무엇이 두려우냐고?

진십팔랑은 다시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안색이 창백해진 진십팔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두려운 건, 내가 충분히 잘나지 못하다는 거예요. 충분히, 낭자만큼 뛰어나지 못하고, 낭자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게······.”

진십팔랑이 조용히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향해 말했다.

“낭자보다 못하고, 낭자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게 두려워요.”

문가에 앉아 있던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추하죠? 이런 내 모습, 아주 신물이 나죠?”

진십팔랑이 무릎 위에 놓았던 손을 세게 쥐었다.

“나도 나를 좋아하고 싶어요. 나도,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내가 되고 싶다고요. 그런데 난 해내지 못했어요. 여태껏, 내가 원하던 내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이 여인을 보자마자, 아니 이 여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나는 결코,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되지 못했다는 걸.

진십팔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꼈다.

“그랬구나.”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려 들면, 힘들어져요. 그럼 평생 자신을 좋아할 수 없게 될 거예요.”

마당에 서 있던 어린 몸종이 방 안을 들여다보려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회랑 아래를 지나가는 반근을 보고 재빨리 자세를 고쳤다.

“진 아씨, 차 드세요.”

반근이 따뜻한 차 한 잔을 진십팔랑에게 밀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진십팔랑은 옆으로 몸을 살짝 틀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소가 실례했습니다.”

진십팔랑이 정교랑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정교랑은 말 대신 목례로 가볍게 답례했다.

실내에 또 한 번 정적이 찾아왔다.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점을 견디지 못하여, 조급하고 편협한 마음으로 낭자에게 결례를 범했어요.”

진십팔랑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던 응어리를 직면하고, 한바탕 울고 나니, 진십팔랑은 도리어 차분해진 듯했다.

“실은 오늘, 감사 인사를······.”

진십팔랑은 말을 하다 말고 정교랑을 보며 입을 닫았다. 정교랑은 한결같이 평온한 눈빛으로 진십팔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감사라······. 내가 누굴 속여.

“오늘 온 건, 두 가지 이유였어요. 하나는 낭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고, 다른 하나는 낭자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예요. 그런데······.”

그런데 칭찬은커녕, 감사 인사조차도 질투가 되어 버렸네. 내가 지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해.

“오늘 온 이유는, 사실 낭자에게 묻고 싶었어요. 정말로 전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까요? 그리고 제 글씨가 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진십팔랑이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정교랑이 아, 하고는 다시 글씨가 쓰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좋아졌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진십팔랑이 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정말이에요?”

진십팔랑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재차 물었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손에 든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좋아졌어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진십팔랑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소매로 입을 가리면서 감사하다고 연신 예를 올렸다.

“낭자께 감사드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휴. 저거 때문이었으면, 애초에 들어올 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반근이 고개를 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 낭자는 경성에서 지내려는 건가요?”

진십팔랑이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한동안은 있을 거예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도 낭자께 가르침을 받으러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원한다면요.”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은 진십팔랑은 웃으면서 다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문을 나섰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켜서 진십팔랑에게 답례했다.

회랑 아래, 마당을 밝게 비추는 등롱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등롱 아래 달린 풍령이 내는 맑은소리와 조경으로 만든 대나무 통에서 물이 떨어져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귓가를 간지럽혔다.

모든 것이 2년 전과 같았다.

진십팔랑은 고개를 돌려 회랑 아래 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흐릿해진, 희미한 여인의 형체가 보였다.

맞아, 모든 게 다 지난날과 다름없어.

진십팔랑은 몸을 돌려 자세를 살짝 낮추고 예를 표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멈춰 서서 몸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진십팔랑은 끝내 멈추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진십팔랑이 탄 마차가 밤길을 따라 진씨 저택에 도착했다. 그녀를 목 빠지게 기다렸던 가족들이 진십팔랑을 마중 나왔다.

“십팔랑, 대체 어딜 갔던 거야?”

자매들이 입을 모아 진십팔랑을 나무랐다.

“정 낭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다녀왔어.”

진십팔랑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감사 인사?

진십팔랑의 대답을 들은 진소 부인은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가 진십팔랑에게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진십팔랑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어서 연회석에 앉아요, 우리 어인 낭자.”

“다른 건 몰라도, 오늘 밤에는 꼭 십팔랑이 쓴 글씨를 선물로 받을 거야.”

다들 호들갑을 떨게 진십팔랑을 축하했다. 진십팔랑은 웃으면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관심 속에서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진십팔랑을 보고, 진소 부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옥대교 저택 안에서는 반근이 등불을 하나씩 끄고 있었다. 마지막 등불 하나만 남은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정교랑이 침상 옆에서 머리를 풀었다.

“아씨.”

반근이 머뭇거리다가 침상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좀 전에 진 낭자의 질문에 딱 하나만 대답하신 거죠? 어느 질문에 대답해 주신 거예요?”

정교랑이 반근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반근도 많이 발전했네. 질문이 몇 개인지를 알아듣다니.”

반근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 저는 좀 둔할 뿐이지, 바보는 아니에요.”

반근이 웃으면서 정교랑을 나무라듯 대답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무릎을 꿇고 정교랑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씨. 혹시, 제가 바보라는 말을 써서 화나신 건 아니죠?”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난 한 번도 화난 적 없어.”

그제야 반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이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아씨, 일찍 쉬셔요. 내일도 비석에 글씨 새기러 가셔야 하잖아요.”

반근이 문을 닫자 방 안은 더욱 어둑해졌다.

휘장 너머의 침상 위에 누워있던 정교랑이 옆으로 몸을 돌렸다.

  • 네가 너무 잘났으니까. 넌 너무 잘났어. 그러니까, 넌 죽어 마땅해.

나는 화난 적 없어.

단지, 가끔 속상할 뿐이야.

9월 중순, 이날은 황제의 탄신일, 즉 신비궁이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열흘이 지난 때였다. 금군이 호송하는 수레가 신비궁 삼백 개를 가득 싣고 서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병기 제작소는 본디 경비가 삼엄한 곳이지만, 최근의 궁노원은 경계 수위를 한 단계 더 격상시켰다.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함부로 들어가기 힘들어 보이는 궁노원에서는 밤낮없이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신비궁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전장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랑캐 놈들이 짐을 위해 신비궁의 제물이 되어 주겠구나.”

옥좌 위에 앉은 황제가 눈빛을 반짝이며 웃음 지었다.

경성 밖. 건장한 병사들과 장군들이 금군 앞에 멈추어 섰다.

“계주 병마부 총관 종승포(鍾承布)는 어명을 받들어, 서북 관청으로 부임하시오.”

금군의 외침과 함께, 스물 일고여덟 되어 보이는 건장한 젊은 장수가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섰다.

2년 남짓 늦어지긴 했지만 진소가 강력하게 천거했던 종승포가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다만 아직 너무 젊은 탓에 바로 서북 경략사 직책을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종승포는 불만스러운 기색 없이 오기 섞인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젊은 게 뭐 어때서? 몇 번 이겨서 공적을 쌓으면 그만이지.

종승포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종승포는 마차 휘장을 들어 올려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신비궁들을 쳐다보았다.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삼백사십 보 밖에서 느릅나무의 절반을 뚫을 수 있고, 칠십 보 밖에서도 철갑옷을 관통한다는 어마어마한 병기라고?”

종승포가 못 미더운 눈빛으로 신비궁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활의 몸체에서 삐져나온 까칠한 거스러미가 그의 손을 찔렀다.

이렇게 조잡하고 거칠게 만든 것이?

“말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소년의 목소리가 종승포의 뒤에서 들려왔다. 종승포가 고개를 돌리자, 앳된 얼굴의 장수 하나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자네가 바로 폐하께 쇠뇌 시연을 했다는 주복 시금인가?”

종승포가 입꼬리를 올리고 물었다. 주육낭이 종승포에게 공손하게 읍을 했다.

“소장, 장군을 뵙겠습니다.”

종승포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신비궁을 다시 마차 안에 넣어 두었다.

“그럼, 그 호칭에 걸맞은 것인지 아닌지 지켜보지.”

종승포는 신비궁을 뜻하는 건지, 주육낭을 뜻하는 건지 모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주육낭은 미동 없는 표정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출발!”

호령 소리와 함께 신비궁을 실은 마차와 종승포가 이끄는 대군은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큰길 위에 있던 행인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비켜서서 대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봤어? 저 마차 안에 담긴 게 바로 신비궁이라는 거래.”

누군가가 손으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행인들은 그 사람이 가리키는 쪽을 내다보았다. 행인 중 몇 명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성으로 가는 추레한 차림의 서생이었다.

누가 황제의 탄신일에 신비궁을 선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일을 소재로 지은 시도 곧 세간으로 퍼져 나갔다. 물론 그중 대다수는 온갖 미사여구로 황제의 은덕을 칭송하는 내용이었지만, 신비궁 또한 그렇게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널리 퍼졌다.

과거시험을 보러 경성으로 향하던 서생들도 신비궁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비궁의 위력에 의구심이 있었다.

“황제께 진상되는 진귀한 물건은 매년 있기 마련이지만, 막상 써 보면 기대에 못 미치지 않았나?”

서생 중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리 뛰어난 병기인지 아닌지는 전장에서 써 봐야 알겠지.”

다른 사람이 대꾸했다.

“허풍 섞인 얘기는 그만하자고. 아무튼 이 경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좋은 물건이 없진 않아. 이를테면 무명의 고수가 남긴 차정사의 글씨처럼 말이야.”

누군가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서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바로 시와 도를 논하는 것이었다. 차정사의 글씨 얘기가 나오자, 이에 대해 흥미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내심 오기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맞아, 맞아. 나도 차정사 글씨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

“얼마나 대단한 글씨일지, 빨리 가서 보고 싶다니까.”

“모사품을 보긴 했지만 영 느낌이 안 오더라고. 드디어 그 글씨들을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네!”

제일 먼저 신비궁 얘기를 꺼냈던 서생은 관심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뒤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이때 서생들의 시야 안에 경성 성문이 들어왔다. 뒤떨어져서 걷던 서생이 길가를 보더니 돌연 눈빛을 반짝였다.

“세상에, 저기가 바로 무원산 형제의 무덤인가 본데?”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글씨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던 서생들이 외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 현인의 무덤이라고?”

서생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처음 들어보는 거 같지?

“무원산 형제들! 이게 말하자면 긴데, 신비궁도 무원산 형제들과 관련이 있지.”

소리쳤던 서생이 우쭐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차정사 글씨는 벌써 3년 전의 일이니, 하나도 신선하지가 않아. 이 무원산 형제들 이야기야말로 근래 경성 사람들의 입방아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이지. 어휴, 그때 온 경성에······.”

서생이 눈을 반짝이면서 생동감 넘치게 무원산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서생들은 놀란 표정을 짓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다가 결국에는 비탄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노정은 다행히도 풀려났고 진급까지 했어.”

“그래야지. 그런 정의로운 사람은 간신배로부터 잘 보호해야 한다고.”

“이왕 지나가는 김에, 무덤 앞에 잠깐 들렀다 갈까?”

“좋지. 술을 가져오지 않은 게 참 아쉽네. 무원산 형제들에게 술이라도 한잔 올려야 하는데.”

서생들이 말에서 내려 무덤 앞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술 이야기가 나오자, 앞서 무원산 형제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서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씨 낭자가 독한 술이 담긴 술동이를 무덤 앞에서 스무 단지도 넘게 깨트렸어. 다들 이 근처만 와도 술 냄새가 진동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더라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여기 와서 술 냄새를 맡으면서 취하기도 했대.”

무덤 앞에 다다른 서생들이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심지어 서생 한 명은 무덤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냄새를 맡았다.

“정말로 술 냄새가 나는지, 내가 한번 맡아 보겠네.”

“듣기로는 세상에서 제일 독한 술이라고 하던데. 그날 그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진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다더군.”

서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술 냄새를 맡겠다며 허리를 숙였던 서생이 갑자기 무릎을 꿇은 것이다.

무릎을 꿇어?

“이 사람이, 정말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거야?”

누군가가 배를 잡고 하하 웃었다. 무릎을 꿇었던 서생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비석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취했어.”

서생은 떨리는 손으로 비석을 매만지면서 그 위의 이름을 읊었다.

“서무수.”

취한 게 아니라, 뭐에 홀린 것 같은데?

주위에 있던 서생들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무릎을 꿇은 서생에게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 서생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비석 위를 매만지면서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 그렸다.

“서무수.”

무릎을 꿇은 서생은 끊임없이 같은 이름을 되뇌었다.

도대체 서무수가 누군데 그래?

의아해하며 비석으로 시선을 옮기던 서생들은 전부 그대로 얼어 버렸다.

“여, 여, 여긴 분명 무명 비석이었는데, 언제 글씨가 새겨진 거지?”

무덤을 발견했던 서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비석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서무수의 이름을 읊었다.

“서무수.”

다른 서생들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머지 비석 위의 이름을 외쳤다.

“범석두!”

“서납월!”

“서봉추!”

“범삼축!”

황공한 기색이 역력한 서생들은 비석 위의 이름을 외치면서 좌불안석한 모습으로 무덤 주위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서생 무리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 있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왜들 저러는 거요?”

행인들은 서생들이 서 있는 곳이 무덤 앞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더욱 놀랐다. 한동안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앞이 시끌벅적하긴 했지만, 술고래들이 독한 술 냄새라도 맡겠다며 무덤을 찾아왔던 것이 다였다. 하지만 술 냄새는 금세 사라졌고, 어찌 됐든 그들과는 연고가 없는 무덤이다 보니 더 이상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을 찾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렇게 많은 사람이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앞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차림새를 보아하니, 술고래가 아니라 서생인 듯한데, 저러고 있는 모양새가 영 반쯤 미친 술고래 같단 말이지.

“설마, 귀신이 들렸나?”

서북 용곡성 관청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죄다 남루한 행색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칙사가 진지하게 조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불안해 어쩔 줄 모르던 그들의 표정은 차츰 흥분과 희열로 바뀌었다.

“······이에 선절교위(宣節校尉: 관직명)에 봉하니, 군마를 관장토록 하라.”

조서를 다 읽은 칙사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서사근을 쳐다보았다.

“서사근, 명 받들겠나이다.”

서사근이 큰절을 올리고는 울먹거리며 조서를 받았다. 마당 가득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서사근을 에워쌌다.

“참 잘됐소. 참 잘됐구려!”

“또 진급한 거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서사근의 벗이오? 진급하는 사람은 서사근인데, 어째 당사자보다 더 감격스러워 보이네.”

주위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이 물었다.

“아니오. 저 사람들은 임관보에서 도망친 병사들과 잡역부들이야. 강문원이 저들을 감옥에 처넣어 이제 곧 죽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풀려났지. 서사근이 진급까지 하는 걸 보니까,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저리들 기뻐하는 거 아니겠소.”

이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관청 안에서 장수들 무리가 걸어 나왔다.

“이놈들, 죽는 것이 그리 두렵더냐!”

맨 앞에 있던 장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렁찬 목소리가 마당 안의 소란을 덮어 버렸다.

마당 안이 조용해졌는데도, 장수는 행여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못 들었을까 싶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죽는 것이 그리 두려우냐고 물었다!”

목숨을 건진 기쁨을 채 다 누리지도 못한 사람들의 안색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장수를 쳐다보았다.

종승포는 마당 안의 사람들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당장 관청 밖으로 꺼지거라! 군복을 벗고, 네놈들의 가족을 챙겨 모조리 용곡성을 떠나거라. 냉큼 서북에서 꺼지라는 말이다!”

종승포의 말이 끝나자, 마당 안에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냉큼 꺼지래도!”

종승포가 목청을 높여 호통쳤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몸을 떨었다. 그들은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재빨리 관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사근과 유규, 그리고 어떤 사내 하나만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꺼지지 않는 것이냐?”

종승포가 눈썹을 치켜뜨고 고함쳤다.

“대인께서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니, 꺼지지 않았습니다.”

종승포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왜 네놈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관청 밖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고 뒤를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은 작은 소리로 그 사내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간신히 건져낸 목숨인데, 저리 맹수같이 사나운 장수를 자극해서 뭐하냐는 생각에서였다.

사내는 미동도 없이 자리에 서서 대답했다.

“소인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남자의 태도에, 종승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종승포의 웃음소리가 마당 안을 뒤덮었다.

“좋다. 얼마 전, 오랑캐들에게 우리의 성보 두 채를 빼앗겼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이여, 나와 함께 이전의 치욕을 깨끗이 설욕하러 가겠는가!”

종승포가 한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수위 병사들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설욕하자!”

“설욕하자!”

병사들의 외침은 마당 안에서부터 관청 밖까지, 거센 파도처럼 끊임없이 휘몰아쳤다.

벌써 관청 문 앞까지 다다랐던 임관보의 병사와 잡역부들은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관청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라이, 누가 죽는 게 두렵대?”

“죽는 게 뭐가 두렵다고! 침상에 누워 뒈지는 것보다, 전장에서 전사하는 게 더 나아!”

“서무수 형제들은 죽음으로 공로를 맞바꿨는데, 살아 있는 우리가 공로 하나 못 세울까!”

종승포의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했던 그 사내의 주위로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그들은 더더욱 목청을 높여 함께 설욕하자고 다짐했다.

마당 안의 광경을 보던 종승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관청 안에 앉아 있던 장수들도 사내들의 우렁찬 외침을 들었다. 연배가 있는 장수 몇 명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역시 젊은 사람이라 사기를 북돋는 재주가 있어.”

누군가가 말했다.

“종 장군이 아직 어리긴 어리군.”

옆에 있던 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감히 설욕하자는 말을 저렇게 쉽게 내뱉다니. 이전의 치욕? 전임자의 치욕을 말하는 것인가?

강문원은 아직 서북을 뜨지도 않았어. 그 일에 대해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그런데 저렇게 서슴없이 강문원을 무시하고 짓밟아도 되는 거야? 저렇게 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생긴 것도 괜찮고, 말하는 것도 들어줄 만한데, 얼마나 일을 잘할지가 관건이군.”

연로한 장수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장수와 병사들이 거리 위를 뛰어다니며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대열로 집합했다.

이제 막 감옥에서 풀려난 유규는 세수할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옷만 갈아입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유규를 불러 세웠다. 유규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 장수가 말 위에 올라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의 안장과 장비로 보아 족히 중급 장수는 되어 보였다.

이야, 저 칼이며 창 좀 보게. 게다가 활은 세 개씩이나.

유규가 감탄하고 있던 사이, 젊은 장수가 활 두 개를 그에게 건넸다. 유규는 눈을 끔뻑이며 활을 받지도 않고 젊은 장수만 빤히 바라보았다.

“범강림이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오. 하나는 서봉추의 삼석궁이고, 다른 하나는 조정에서 새로 제작한 신비궁이요. 궁수 부대에 가면, 신비궁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 줄 것이오.”

유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활을 건네받았다. 그가 막 입을 열기도 전에, 주육낭은 채찍을 휘둘러 말을 타고 자리를 떠났다.

“어이, 그 활은 놓고 가야지.”

누군가가 유규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뭐라고?”

“군에서 지급해주는 활이 있을 텐데, 누가 네놈에게 이런 활을 쓰라고 했나? 개인 장비를 쓰는 것은 군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당장 그 활을 두고 가.”

“퉤! 좋은 장비를 두고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네. 군의 돈으로 장만한 것도 아닌데,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좋은 장비? 네놈들 손에 좋은 장비가 있는 것 자체가 낭비다. 어서 이리 내놔. 그리고 내가 그런 법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 감히 상관 명령에 불복종하려는 것이냐! 네놈같이 위계질서를 무시하는 놈을 어느 장수가 데려다 쓰려 할까. 네놈은 잡역부로 쓸 수도 없겠어!”

활을 쥔 유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서봉추의 삼석궁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신비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비궁? 신비궁이 도대체 뭐길래?

“신비궁을 준비하라!”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과 함께, 성문 위에 일렬로 서 있던 궁수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쇠뇌를 든 병사들이 그 자리에 배치됐다. 햇빛 속에서 바라보니 쇠뇌는 이미 장전되어 있었다.

성문 아래 참호에 몸을 숙이고 있던 유규가 고개를 돌려 성문 위를 올려다보고는 자신의 옆에 놓인 신비궁을 쳐다보았다.

“그냥 평범한 중노잖아?”

유규가 낮게 읊조리고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조정 관리들이 또 어느 돈에 눈먼 놈한테 당했구먼. 몇 번 당했으면 이제는 정신 좀 차려야 하는 거 아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규는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적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적군의 말굽이 땅에 닿을 때마다 지진 같은 진동이 만들어졌다.

유규는 손에 쥔 칼을 내려놓고 활을 집어 들었다. 잠시 멈칫하던 유규는 자연스레 서봉추가 자신에게 남겨준 삼석궁을 택했다. 유규는 화살을 올리고, 전방을 조준한 채 마음속으로 수를 셌다.

봉추, 잘 봐 둬. 내가 네놈의 활로 어떻게 오랑캐를 죽이는지.

더 가까이 와.

더 가까이.

더.

둥둥둥 북소리가 유규의 고막을 때렸다. 공격을 뜻하는 북소리에 유규는 반사적으로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유규가 잔뜩 화난 얼굴로 외쳤다.

“새로 온 놈이냐? 이렇게 먼 거리에서 어떻게 화살을 쏘라고······.”

유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시커먼 화살들을 올려다보았다.

박자에 맞춰 들려오던 적군의 발소리가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전방에서 들려오는 참담한 비명이 천둥소리가 되어 유규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유규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앞을 내다보았다. 말을 타고 있던 적군들이 베어지는 보리처럼 우수수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먼 거리인데, 저렇게 강하다고?

가슴을 치는 북소리와 화살이 쏘아져 나가는 진동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유규가 고개를 들자,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이 머리 위로 한시도 쉬지 않고 날아갔다.

저렇게 빨리, 저렇게 많이.

유규는 온몸이 떨려왔다. 그는 삼석궁을 내팽개치고 신비궁을 잡고 허둥지둥 고리를 몇 번 밟았다. 궁수 부대의 설명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유규의 뒤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우라질!”

유규는 조급한 마음에 욕을 내뱉으며 힘겹게 화살을 올렸다. 점점 더 가까워지던 적군이 썰물 빠져나가듯 퇴각하는 것이 유규의 눈에 보였다.

“안 돼! 이 몸이 죽일 놈은 좀 남겨줘!”

유규는 포효하다시피 소리치면서 장전한 신비궁을 쏘아댔다.

용곡성.

강문원은 저택 안 대청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강 대인.”

누군가가 대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면서 성가시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제 가셔야지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게.”

강문원이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왔던 사람이 한숨을 쉬고는 강문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엇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강문원은 대답하지 않고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주먹 쥐었다.

난 못 믿겠다. 난 절대로 못 믿는다! 하느님도 나를 서북에서 못 떠나게 붙잡았는데, 저놈들 따위가 감히 나를 내쫓을 수 있으랴!

“급보요!”

바깥에서 전령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첩입니다, 대첩! 종 장군께서 성보 두 개를 되찾으셨습니다!”

강문원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강문원은 전령병의 급보를 더 정확히 듣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전령병의 목소리는 금세 멀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방금 환청을 들은 걸 거야.

좀 전에 대청 안으로 들어왔던 사람이 얼른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승전보입니다. 강 대인, 종 장군이 대승을 거두었으니 서북은 안정을 되찾은 셈이네요. 대인께서는 마음 놓고 떠나셔도 되겠습니다.”

마음 놓고 떠나라고?

강문원은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천천히 등받이에 기댔다.

“그 신비궁이라는 것 때문이냐.”

강문원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청 안에 서 있던 사람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대인도 참, 그야 당연히 종 장군의 뛰어난 지휘 덕분이지요.”

강문원이 헛웃음을 보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가겠네.”

걸음을 옮기던 강문원이 문가에 다다를 때쯤 멈춰 섰다.

“그 신비궁이라는 걸 범강림이 바쳤다고?”

강문원의 뒤를 따라가던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 군감이지요.”

남자가 ‘군감’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범 군감.

강문원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그는 고개를 돌려 저택을 둘러보았다.

3년이구나. 여기서 좀 더 오래 지낼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 후회하지 마십시오!

앳된 젊은 장수의 외침이 강문원의 귓가에 울렸다.

이 모든 게, 내가 죽은 병사 몇 명의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란 말인가? 정말로 그깟 일 때문에?

  • 강문원, 후회하지 마시오!

지그시 눈을 감던 강문원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문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문원이 한창 경성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서북 대첩의 소식은 이미 급보로 경성에 도착했다. 쏜살같이 뛰어다니는 전령병 덕분에 경성의 여기저기에서부터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와 경성 전체가 들썩였다.

저잣거리에 위치한 술집 안. 고능준이 창밖을 통해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말을 탄 전령병이 술집 앞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대인, 꼭 저희 노야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고능준 앞에 앉은 사내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통사정을 했다.

“분명히 어떤 괘씸한 자가 저희 노야께 죄를 뒤집어씌워 노야를 모함한 겁니다. 이 일은 맹세코 저희 노야와 무관한 일이에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능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위치에 앉은 사람이라면, 필시 누군가의 눈엣가시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강문원과 무관한 일이라고? 최소한 남이 자신을 깔아뭉갤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지. 그 기회라는 게 본디 우습긴 했다만.

강씨 가문의 사람들을 간신히 돌려보낸 뒤, 고능준은 천천히 별실 밖으로 나와 층계를 내려왔다.

그의 뇌리에 문득 진소의 생각이 스쳤다. 진소가 변한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섰다.

진소가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울 수단을 쓸 사람이 아니야. 서북 병사들을 선동한다거나, 폐하께 사직을 청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낸다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말로 폐하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거나.

옛날의 진소라면 절대로 그런 수단을 쓰지 않았을 것이야.

언제부터 변한 거지? 아니면,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변한 건가?

설마, 그 강주 바보?

정말로 그 강주 바보 때문이려나?

고작 식당 하나 때문에, 유 교리를 죽느니만 못한 상태로 만든 그 강주 바보?

고작 죽은 병졸 몇 명의 포상 때문에 장수 하나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서, 장차 경략사가 될 사람의 앞길을 영영 끊어버린 그 강주 바보?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듣고 또 들어도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인데, 강주 바보는 그런 일을 해냈어. 그것도, 아주 손쉽게, 가볍게 해냈지.

그놈의 강주 바보!

“서무수!”

“아니지, 아니지. 범석두가 최고야!”

“자네가 알긴 뭘 알아? 무원산 형제 중엔 서봉추가 제일이야!”

왁자지껄한 소리에 고능준이 우뚝 멈춰 섰다.

뭐라고?

무원산? 누가 아직도 그자들을 입에 올리는 거야? 끝도 없구나, 끝도 없어. 서무수라는 자는 또 뭐 하는 놈인데?

“대인, 모르셨습니까? 비석에 무원산 다섯 용사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고능준의 표정을 본 점원 중 하나가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서무수, 범석두,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가 바로 그 다섯 용사의 존함입니다.”

점원이 무원산 다섯 형제의 이름을 익숙하게 말하는 것을 본 고능준은 깜짝 놀랐다.

어째서, 온 경성 사람들이 그 형제들의 이름까지 다 알고 있는 거야? 무원산 하나로는 부족한가?

“비석 위에 새겨진 글씨가 정말 엄청나거든요. 온 경성 사람이 그 글씨를 감상하러 죄다 무덤 앞으로 간답니다. 듣기로는, 비석 위에 쓰인 글씨가 차정사 글씨보다 더 뛰어나고, 천하에서 제일가는 서예라고 불린답니다.”

점원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천하제일!

고능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그래! 무원산 하나로는 부족하다 이거지? 그들의 이야기를 민간에 퍼트리고, 저잣거리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구전되는 것도 모자라서, 서생부터 사대부까지 모조리 그 이름들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야. 누구나 그 다섯의 이름을 기억하고 찬양하도록!

참으로 대단한 강주 바보로구나!

고능준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 글씨를 보는 사람마다 꼭 뭐에 홀려서 미친 사람이 된 것 같더라니까.”

“관부에서 어쩔 수 없이 그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보냈는데, 정씨 낭자네서도 무덤을 지키는 시종을 따로 붙였대. 혹여나 누가 비석을 통째로 뽑아 갈까 봐.”

“에이, 웃기지 마. 누가 남의 무덤 비석을 훔쳐?”

“누가 훔치냐고? 으이구, 뭣도 모르는 내가 봐도 훔치고 싶은 글씨인데, 배운 양반들은 오죽하겠어?”

“박양 군주까지 직접 와서 보고 갔다니까? 글쎄, 글씨를 보고 집에 가서 엉엉 울었대.”

“화가 나서?”

“뭐라는 거야. 기뻐서 우는 거지. 그 글씨들을 봤으니, 이번 생은 여한이 없다면서 울었다던데?”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자, 누군가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바짝 긴장한 모습의 진십팔랑이 조용히 물었다.

“진 낭자의 글씨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거참, 물을 걸 물으시오. 애초에 비교 자체가 안 되지.”

“그럼 누구의 글씨와 견줄 만한데요?”

진십팔랑의 물음에 더 이상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대신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와 어이가 없다는 실소만이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대답보다 더 듣기 거북하네.

진십팔랑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경성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수군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황자에게 서예를 가르치는 편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무덤에서부터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던 진십팔랑은 조용한 자리를 찾아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소매 안에서 손을 꺼내어 줄곧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펼쳤다.

범석두.

무자비한 세 글자가 시야로 들어와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진십팔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오늘 온 이유는, 사실 낭자에게 묻고 싶었어요. 정말로 전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까요? 그리고 제 글씨가 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 좋아졌어요.

정 낭자가 좋아졌다고 한 건, 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날 정교랑의 저택에서 나오기 직전, 진십팔랑은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에게 다시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고 묻고 싶지 않기도 해서 결국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옥대교 저택을 나섰다.

지금은, 정 낭자가 왜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지 알겠어. 내가 왜, 끝내 묻지 못했는지도.

사실 정 낭자의 대답은 그대로일 테니까.

  •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진십팔랑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는 점점 더 구겨지다가 아무렇게나 뭉쳐졌다. 눈물이 진십팔랑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 낭자.”

진십팔랑은 화들짝 놀라 종이를 소매 안에 집어넣고 눈물을 훔친 뒤 몸을 돌렸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궁녀 하나가 층계 위에서 진십팔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귀비마마께서 잠시 부르세요.”

진십팔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궁녀를 따라 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멀리서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진십팔랑의 눈에 들어왔다. 진십팔랑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익숙한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 낭자도 왔네.

“저건 누구지?”

층계 위에 서 있던 귀비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을 내다보면서 궁녀에게 물었다.

“마마, 저분이 바로 정 낭자예요. 폐하께서 잠시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궁녀의 대답에 귀비가 아, 하고 대꾸하고는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다는 신선의 제자, 그 정 낭자 말이더냐?”

귀비가 말하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경왕의 병이 나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는구나.”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 표정이었지만, 귀비의 눈가에는 서늘함이 비쳤다.

지금껏 시간을 끌며 그리 어마어마한 소란까지 피웠으니, 2년 전과는 비교도 안 돼. 이런 때에 경왕의 병을 치료해야 공로를 더욱 값지게 인정받을 수 있겠지.

참으로 대단한 강주 바보로구나!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와 달가닥거리는 나막신 소리가 텅 빈 전각 안에 울려 퍼졌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경왕을 붙잡았다.

“땀 좀 닦고, 잠시 쉬자.”

진안 군왕이 단단히 경왕을 붙잡은 모습을 본 내시 둘은 숨을 헐떡이며 실소를 터트렸다.

“역시 군왕께서 힘이 좋으십니다.”

경왕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내시 두 명이 붙어도 경왕을 붙잡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내가 더 열심히 몸을 단련해야 우리 육가아를 잘 돌볼 수 있어.”

진안 군왕은 내시가 건넨 손수건으로 경왕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고는 경왕에게 탕을 몇 모금 먹였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내시 한 명이 다급하게 경왕궁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진안 군왕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경왕이 빠르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녀석 참.”

진안 군왕이 뛰어다니는 경왕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전하, 그리로 가실는지요?”

내시가 조용히 묻자,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내가 이렇게 빨리 가면, 폐하보다 먼저 소식을 알게 됐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겠느냐.”

“송구합니다, 전하. 소인이 아둔했습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아니지. 마음이 급했을 뿐이야. 급할 게 뭐 있어? 매년을 이렇게 지냈는걸.”

진안 군왕이 말했다. 그는 전각 밖을 내다보면서 손수건을 옆으로 던져두고 일어나 뒷짐을 졌다.

이번에 정교랑이 황제를 알현하게 된 곳은 외궁인 근정전이 아니라 내궁이었다. 어린 나이라 하더라도, 외간 여인을 만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던 황제는 정교랑과 대면하는 곳을 태후궁으로 골랐다. 태후가 서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게 대외적인 이유였다.

사실 태후는 신의 낭자에 관한 소문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면 고쳐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는 이상 이를 대외적 이유로 대기는 적절치 않았다. 불길하기도 하거니와 그리 대담한 여인이라면 어명을 거역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나 어린 낭자였다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큰절을 올리고 있던 정교랑을 보고 태후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저렇게 어린 낭자였어?

아마 정교랑을 본 모든 사람에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일 것이다.

저렇게 어린 낭자가, 저토록 어린 낭자가, 온 경성을 떠들썩하게 뒤집어 놓고, 천자까지 쥐락펴락했다니.

“올해로 열일곱입니다.”

황제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겨우 열일곱이라고? 위낭보다 아직 두 살 어리구려.”

태후가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황제가 그렇다고 했다. 팽팽한 기 싸움이 펼쳐졌던 조당 분위기와는 달리 태후궁의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고개를 들어 보거라. 얼굴을 좀 보여 다오.”

태후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미인이라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봤던 태후였지만, 정교랑의 얼굴을 보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참 곱게도 생겼구나. 단정하고 우아한 게, 참 고와. 강주 사람이라고 했느냐?”

“강주 정씨입니다.”

황제가 대신 대답했다.

“아, 땅을 파서 강을 길어 우공이산의 힘을 보여 주었던 그 정씨 말이오?”

태후의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복이 타고났다고 했소. 그러니 도가의 선인께서 저 아이를 돌봐주시는 게지.”

태후가 웃으면서 말했다. 일국의 황제로서, 그는 차마 도가를 운운하는 태후의 말에 맞장구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네 선인 사부는 세상을 떠났다지?”

드디어 정교랑에게 직접 물을 수 있게 된 태후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녀는 태생부터 바보였던 탓에 정신이 깨어난 뒤의 일을 기억할 뿐, 유년 시절의 기억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옵니다.”

진소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정교랑의 스승을 찾았던 일은 황제도 알았다. 황제 역시 사람을 보내 소상히 알아보았지만, 진소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황제가 알아낸 정보는 진소의 것보다 훨씬 더 상세했다.

“곡원산 사람으로, 서생 출신이지만 이룬 것 없이 죽었다더구나.”

황제가 말했다.

태후와 정교랑은 황제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심지어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황제의 용안을 빤히 쳐다보는 결례까지 범했다. 정교랑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황제는 초조함과 호기심, 은근한 흥분이 담긴 정교랑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고의로 짐을 속인 것이 아니야.

“그자의 성은 송(宋)이고, 이름은 금(今)이니라.”

황제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이름을 말했지만, 정교랑은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이냐?”

황제가 서둘러 물었다.

“기억에 없습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과거시험에서 몇 번 낙방한 뒤로, 어느 날 갑자기 미치광이가 됐다더군. 도복을 입은 채 도가의 고사를 읊고 다니다가 행방불명된 자라고 들었다.”

황제가 설명을 덧붙였다.

“역시 도가와 관련이 있었던 게로군.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아무런 구속 없이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던 모양이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태생이 바보인 저 여인의 병을 말끔히 고치고, 그렇게나 진귀한 비술들을 알려주었는데, 스승인 본인은 얼마나 더 대단할까. 어떻게 그런 인재가 죽었단 말인가.

그자가 죽지 않았다면, 일단 제자부터 속세에 내보내 이름을 널리 알렸겠지. 그럼 누군가가 삼고초려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그자를 세간으로 나오게 했을 것이야.

병주에 사람을 보내기 전까지는 황제 또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봐도 송금이라는 자는 정말로 죽은 것이지, 숨어 있는 게 아니었다. 성현을 모셔 온 옛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흔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정교랑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송금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빠르게 되뇌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인 정방과는 달리, 송금이라는 이름은 기억 속에 없었다.

방금 들은 폐하의 말씀에 따르면, 송금이라는 자는 갑자기 미치광이가 됐다고 했어. 그건 바보였던 내 병이 갑자기 나아진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도대체 누구일까? 누가 나를 깨운 거지? 그리고 왜 또 죽은 거야? 왜 내가 병주로 돌아가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정교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폐하께서 알아보신 송금 선생의 일생과 외모에 대한 정보를 소녀에게 알려 주실 수 있으실지요?”

황제의 눈에 비친 정교랑은 무언가에 홀린 것 같기도, 어딘가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저런 반응은 진실된 것이다. 작위적으로 꾸며 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야.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이었던 사람이니, 당연히 그리해야지.”

황제가 흔쾌히 대답하고는 황성사로 내시를 보내 송금의 정보가 담긴 책자를 가져오게 했다.

“네 글씨도 스승이 가르쳐 준 것이냐?”

태후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들어 올리고 감탄을 금치 못한 얼굴로 물었다.

태후도 정교랑의 글씨에 들은 바는 있었지만, 그저 지나가는 풍문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정교랑의 글씨를 모사한 작품을 받고 나니, 왜 정교랑이 글씨로 이리 유명한지, 박양 군주가 집에 가서 왜 눈물을 흘렸는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이 있는 글을 쓴 것도 아니고, 이름 석 자에 날짜를 남긴 것뿐인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기도, 비통하기도 하게 만들더구나.”

태후가 말했다.

“호방한 붓끝이 천 리 밖까지 달하여, 강직한 힘이 보이다가도, 유려함이 돋보인다. 전주(篆籒: 주나라 선왕 때 태사 주籒가 만든 서체) 같아 보이기도, 깊이 새긴 글씨 같아 보이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손을 거쳐 나온 글씨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해. 하늘을 울리는 지극한 충절이 비석을 새기는 사람의 손끝에 그대로 드러나 더없이 비통하더구나.”

황제가 정교랑의 글씨에 대해 진지하게 칭찬한 뒤, 잠시 뜸을 들이고 이어 말했다.

“정씨, 네 오라비들은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으니, 부디 슬픔을 거두거라.”

정교랑이 큰절을 올리며 답례했다.

“서북에서 급보를 보내왔다. 우리가 빼앗겼던 성보 두 채를 되찾았다지. 전부 신비궁의 공로니라.”

황제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이마가 땅에 닿게끔 큰절을 올렸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건 서북의 병사와 장수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친 공로이고, 폐하의 혜안과 은덕 덕분입니다. 하찮은 물건 따위가 어찌 사람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정교랑의 말에 황제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정씨, 네 오라비들은 모두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짐은 말편자와 신비궁이 모두 네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 그러니 어떤 상을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

“폐하, 첫째로 그것들은 본래 소녀의 것이 아니라 스승에게 배운 기술입니다. 둘째로 소녀는 어떤 기술을 배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라버니들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걸 안 덕분에 그것들을 기억해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폐하의 인자함과 넓은 아량이 없었다면, 신비궁이 서북에서 쓰이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것들은 소녀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소녀의 것이 아니며, 소녀 덕분에 쓰임새를 찾은 것도 아닌데, 어찌 소녀의 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넋이 나간 황제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이, 태후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말도 저리 잘할까. 공로를 탐하지 않는 겸손함에다 사람을 설득하는 이치까지 깨달았어.”

태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여인이 공로를 짐에게 넘김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짐의 입을 막은 셈이거늘.

오라버니들이 이루고 싶어 하던 게 있었으니, 누이로서 그들을 위해 기억해 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오라버니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으니,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지.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짐에게 원한을 품은 걸까?

원한을 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적어도 원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뜻이니까. 아무렴, 아무 생각도 없이 허송세월하는 자들보다는 훨씬 나아.

게다가 어린 처자가 성질을 부려 봤자 얼마나 부릴 수 있다고. 짐이 황제라는 사실을 잘 알고, 마지막에는 칭찬까지 몇 마디 덧붙였지 않나.

지금 저 여인이 보여 주는 모든 언행은, 짐이 듣던 바와 똑같구나. 솔직하고, 아부를 떨거나 굽히는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이거나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태도. 저건 절대로 진소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번 일은 확실히 저 여인 혼자서 꾸미고 해낸 것이로군. 진소와 다른 이들은 그저 저 여인의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린 것이고.

대화가 한창이던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듯한 소리였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감히 태후궁에서 저리 결례를 범하는 것이야?

하지만 황제는 곧 무언가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내시가 난색을 표하며 아뢰었다.

“폐하, 진안 군왕께서 안으로 들기를 청하옵니다.”

태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다니까. 역시나 그 일 때문에 정 낭자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구려.”

태후가 황제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조용히 말했다. 신의 낭자이기 때문에 보러 온 거겠지. 황제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진안 군왕이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군왕도 저 낭자에게 미움과 기대를 동시에 품고 있을 텐데. 밉긴 해도, 그때는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군왕이 저 여인을 도왔던 이유가 뭐겠는가. 저 여인처럼,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위해서였겠지.

“들라 하라.”

황제가 말했다.

내시가 황제의 명을 전하자, 좀 전에 들렸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교랑이 아직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누군가가 바람처럼 빠르게 걸어와 정교랑의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인 정교랑의 시야에 아직 흔들리는 장포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관화가 들어왔다. 그리고 태후궁 전각 안에서 나는 묵직한 진향(陳香)과는 다른, 산뜻한 향이 정교랑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정 낭자, 왔군요.”

청량한 목소리가 정교랑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소년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

정교랑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예를 올렸다.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듯한 귀비가 기다란 손톱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궁녀가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금잔을 보지 못한 듯했다.

“예상대로, 진안 군왕께서는 그리로 가셨습니다.”

내시가 급하게 들어와 조용히 말했다. 귀비가 냉소를 지으며 궁녀가 올린 금잔을 받아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경왕을 치료해주는 대가로, 황제와 태후께서는 그 낭자에게 뭘 해 주기로 했지?”

귀비가 묻자 내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경왕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귀비가 멈칫하면서 내시를 쳐다보았다.

“아직 말하지 않았다고?”

귀비가 피식 웃으면서 금잔을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긴, 이렇게 오랫동안 잘도 기다려 왔는데, 성급하게 굴 것 없겠지. 괜히 모양새만 추해져.”

귀비가 금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자. 우리도 정 낭자를 한 번 만나 봐야지. 듣기로는 정 낭자의 글씨가 천하제일이라던데, 이참에 우리 대황자에게 글씨를 가르치라고 데려와야겠구나.”

-과한 걱정-

진십팔랑은 귀비가 자리를 뜬 줄도 모른 채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십팔랑은 기다리는 게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는 책장에 가득 꽂힌 서적 중 하나를 꺼내 읽었다. 편전 한쪽에서는 책을 읽고 그 뜻을 설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마마께서 수업이 끝나는 대로 태후궁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 정 낭자가 왔답니다.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의 글씨를 보기 위해 궁으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아마 정 낭자에게 전하의 글씨 공부를 맡기고자 하실 테지요.”

“음? 그럼 진 낭자는?”

“전하, 천하제일이 있는데, 천하제이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진십팔랑이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진 낭자.”

누군가가 진십팔랑을 부르자, 그녀는 다소 황급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대황자와 대화하던 어린 내시는 진십팔랑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진 낭자, 전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어린 내시가 한쪽으로 몸을 돌리고 진십팔랑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진십팔랑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대황자의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조당에서 꼿꼿한 모습만 보이는 진소는 황제께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그의 자식인 진십팔랑은 황궁이 무섭나 보군. 진소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 자식은 그저 평범하구나.

어린 내시가 속으로 비웃으며 진십팔랑의 뒤를 따라갔다.

대황자에게 경서를 가르치던 국자감 관리가 물러나자, 그 안에는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대황자만 남아 있었다.

올해로 열세 살이 된 대황자는 어느덧 애티를 많이 벗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각 분야의 전문 스승들이 대황자 곁에서 예의범절부터 경서, 산술을 도맡아 가르친 터였다. 그 덕분에 대황자는 또래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 낭자.”

대황자는 진십팔랑을 향해 정중하게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반절을 올렸다.

진십팔랑은 답례를 했으나, 곧바로 글씨 연습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대황자의 탁자 위와 주위에 잔뜩 쌓인 서적을 쳐다보았다.

“이것들은, 전부 전하께서 읽으셔야 하는 책인가요?”

진십팔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씨 가문의 자제들도 당연히 책을 많이 읽어야 했지만, 대황자와 비슷한 나이대인 동생들이 읽는 책은 대황자에 한참 못 미쳤다.

대황자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에 쥔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진 낭자,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는 책 한 장을 더 읽고 있겠습니다.”

대황자가 말했다. 진십팔랑의 시선이 대황자의 손에 들린 책을 향했다.

“전하께서는 벌써 그 책까지 읽으시는 건가요?”

대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책은 부지런히 읽어야지요.”

“아유, 우리 전하께서는 매일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주무십니다. 근면성실하신 분이지요. 전하의 글공부를 칭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정도예요.”

한쪽에 서 있던 내시가 아부를 떨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진십팔랑 역시 대황자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에 대해 진소에게 들은 적 있었다.

“전하께서도 열심히 노력하시는군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공부와 정사를 다스리는 일은,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진 낭자의 글씨 또한 부단한 노력 끝에 만들어진 글씨 아닙니까?”

대황자가 단정한 자세로 물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만들어 낸 글씨인걸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야. 난, 두렵지 않아.

“전하, 그럼 잠시 책을 읽고 계세요. 우선 글씨를 몇 자 써 오겠습니다.”

대황자는 알겠다고 대꾸한 뒤, 손에 쥔 책에 집중했다.

진십팔랑은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좀 전까지만 해도 조심스럽고 위태로워 보이던 진십팔랑의 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무게 있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탁자 앞에 앉은 진십팔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미리 준비되어 있던 붓을 들었다. 진십팔랑이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태후궁에 도착한 귀비는 정교랑을 만나지 못했다.

“갔다고요?”

귀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래. 경왕을 보러 갔어.”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 기뻐 보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태후의 눈가에 비친 기쁨을 보며, 귀비는 소매 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정교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낭자가 우리 집에 올 때는 담벼락을 넘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시들이 천천히 열고 있는 궁문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이번에 새로 들어온 과일 차고, 이건 새로 만든 밤떡이에요.”

“이것도 한 번 먹어 봐요.”

늘 조용하던 경왕의 궁이 모처럼 분주해졌다. 내시와 궁녀들은 각종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전각 안을 드나들었다.

정교랑 앞에 놓인 탁자에는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진안 군왕은 그래도 부족하다 싶은지, 계속해서 아랫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앉아 탁자에 오른 음식을 먹었다. 어떤 음식이 올라와도 진지하게 맛을 봤다.

“배부르면 억지로 먹지는 마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건 있어요? 있다면 찬합에 담아 가져가요.”

진안 군왕이 신이 난 얼굴로 물었다.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에 놓인 음식 중 몇 가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요.”

옆에 서 있던 궁녀와 내시들은 정교랑의 행동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저 낭자는 어쩜 사양도 안 하네.

진안 군왕은 싱글벙글하며 사람을 시켜 정교랑이 가리킨 음식을 찬합에 담으라 명했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경왕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두 내시가 경왕이 깼는지 확인하러 얼른 밖으로 나갔다.

“전하가 일 년 내내 하신 말보다, 오늘 하신 말이 더 많네.”

두 내시가 서로 눈짓을 하며 속닥거렸다.

“언제 강주로 돌아간 겁니까?”

진안 군왕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정교랑에게 말을 걸었다.

“일 년 전에요.”

진안 군왕이 아, 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오라비들의 일은 몹시 유감입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애도를 표한 것에 감사하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그때 도와준 게 고맙다는 건가?

어쩌면 둘 다겠지.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경왕께서 안으로 드십니다.”

내시의 목소리를 들은 진안 군왕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졸린 눈을 비비며 내시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왔다.

“육가아, 어서 이리 와 봐. 정 낭자가 왔어.”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의 손을 잡았다.

진안 군왕도 못 알아보는 경왕인데, 한 번 봤던 정교랑을 알아볼 리가 만무했다. 경왕은 알 수 없는 옹알이를 하고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음식을 마구 입안에 욱여넣었다.

진안 군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경왕을 쳐다보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때요? 일 년 사이에 키가 많이 컸죠?”

진안 군왕은 자랑하는 듯한 말투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정교랑이 진지하게 경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컸네요.”

“여전히 너무 뚱뚱하긴 하죠.”

진안 군왕이 우걱우걱 음식을 먹는 경왕을 보면서 말했다. 실내에는 경왕이 음식을 먹는 소리와 웅얼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몇 번씩이나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지만, 진안 군왕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경왕과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볼 뿐, 정교랑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자,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지.

“전하, 소인들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정 낭자와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내시가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늘리며 조용히 말했다. 흠칫 놀란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시의 말을 못 들은 건지, 정교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탁자 위에 놓인 간식과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살면서 정교랑만큼 진지하게 음식을 음미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정교랑은 평생 음식이란 걸 먹어 보지 못했던 사람처럼 맛을 음미하고, 맛을 느끼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쩌면 정 낭자가 음미하고 있는 건 음식이 아니라, 나의 성의일지도.

어릴 적 명절 때면 부왕과 모친께서 나와 형제자매들에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셨던 것처럼.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부모님의 사랑처럼.

비록 기억에 몇 번 없는 명절상이긴 하지만, 적어도 정 낭자보다는 많이 받았겠지. 어쩌면 정 낭자는 그런 사랑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거야.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진안 군왕은 내시와 궁녀들의 발걸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게 섰거라.”

진안 군왕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문가에서 이제 막 걸음을 내딛으려던 내시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뒤를 따라 문밖으로 나가려던 사람들도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정 낭자, 일 년이나 지났는데, 낭자는 여전히 경왕의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까?”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정교랑이 손에 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경왕은 병을 앓는 게 아니니, 치료할 것도 없죠.”

정교랑의 대답을 들은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작별을 고했다.

“소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교랑이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질수록, 다시는 정교랑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진안 군왕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교랑이 갑자기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이 퍼뜩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일순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조용히 몸을 돌려 경왕의 궁을 떠났다.

한참 음식을 먹다가 배가 부른 경왕은 소매로 입가를 쓱쓱 닦은 뒤 밖으로 나가 놀았다. 내시와 궁녀들이 서둘러 경왕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전각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린 듯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을 보고, 좀 전에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다가와 털썩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찧었다.

“소인이 경거망동했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네 마음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해서 그런 게지.”

“전하.”

내시가 고개를 들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데, 나를 위한 게 무엇이더냐?”

진안 군왕이 내시의 말을 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만이, 나를 위한 것이다.”

내시는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떨면서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무슨 일이든, 천만 가지 방법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굳이 아끼는 사람을······.”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떠나간 문밖을 내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해칠 필요는 없지.”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은 환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했다. 아슬아슬했어. 천만다행이로구나.

태후궁 안. 귀비가 이따금 밖을 내다보았다.

“마마, 경왕도 이리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그 낭자가 어떤 진단을 내리는지, 우리도 한번 들어는 봐야죠. 거기 숨어서 무슨 말을 할지 누가 알아요?”

“경왕은 잠들었다고 했다. 위낭이 어찌 자는 경왕을 깨워서 데려오겠느냐. 여기까지 오는 길에 또 어느 눈 안 달린 것이 경왕을 놀라게 하면 어쩌려고. 그리고 숨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그게 숨길 일이라도 된다는 게야?”

귀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경왕을 놀라게 해?

진안 군왕이 있는 한, 황궁에서 경왕을 놀라게 할 바보가 어디 있어? 까딱 잘못했다간 경왕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초주검이 되도록 매를 맞을 텐데.

내시 한 명이 잰걸음으로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진안 군왕께서 경왕의 병세에 대해 물었지만, 정 낭자는 여전히 경왕을 치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시가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 그 말이 사실이냐?”

귀비가 같은 표정으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예. 그때 소인이 문가에 서서 군왕과 정 낭자의 대화를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경왕은 병이 없으니, 치료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어찌하여 병이 없다는 것이냐?”

귀비가 물었다. 내시가 대답하기 전에, 태후가 귀비의 말에 대답했다.

“당초 위낭이 육가아를 데리고 정 낭자를 찾아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어. 육가아는 바보가 된 것이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말이야. 그리고 죽을병은 더욱 아니니, 자신이 치료할 수 없고, 치료할 것도 없다고.”

태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슬픈 표정으로 진안 군왕의 상태를 물었다.

“위낭은?”

“전하께서 경왕을 돌봐야 하는 탓에, 마마께 직접 아뢰지 못하여 송구하다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또 한 번 무너진 게야.”

태후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비는 태후 옆에서 마음 아프다는 듯한 몇 번 탄식을 내뱉은 뒤, 태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후궁을 벗어난 뒤에야 귀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그 말이 참이더냐?”

좀 전에 태후궁으로 들어왔던 내시가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귀비에게 말했다.

“소인이 감히 마마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소인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옵니다. 정 낭자의 대답을 들은 뒤, 군왕은 넋이 나간 채로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습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쭉,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사옵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던 귀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귀비가 경왕궁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만에 하나, 경왕에게 병이 생긴다면?”

“그럼 그 병만 고치겠지요. 정 낭자가 바보는 병이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귀비마마께서는 걱정이 너무 과하십니다.”

급하게 불려온 고능준이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진안 군왕과 정 낭자가 모두 거짓말을 했다면요? 분명히 고칠 수 있는 것인데, 일부러 숨긴 거라면요?”

귀비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마마,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단언했는데, 그 둘이서 뭘 어떻게 숨기겠습니까? 황제 폐하를 속이는 게 무슨 재미라고요. 천자를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일이, 한 번으로 부족하단 말입니까? 아무리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그런 짓을 또 할 리는 없지요.”

고능준이 대답했다. 귀비는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 낭자가 두 번씩이나 고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만천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따귀를 치는 일은 한동안 벌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정 낭자는 잠시 내려두시지요. 대황자를 위협할 만한 인물이 아니기도 하고, 폐하께서도 아직 정 낭자를 내치기는 아까우실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우리가 그 낭자를 궁지에 내몰 필요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도리어 우리가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어요.”

고능준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무슨 일이든지 경중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일이 꼬여버릴 것이야.

“이 일이 아직도 심각하지 않다고요? 안 그래도 진안 군왕이 온종일 황궁 안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무슨 신의 낭자니 뭐니 하는 사람까지 나타나서는.”

귀비가 미간을 찌푸리고 조급해했지만, 고능준은 담담하게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해결해야 할 일은 해결해야겠지만, 가능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끌어들여야 합니다. 별로 급할 것은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안 급해요? 군왕이 벌써 열아홉인데도, 아직 황궁에 남아 있어요. 이번에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망언도 서슴없이 늘어놓는 신의까지 궁에 들어왔는데, 무슨 괴상한 비방을 쓸지 누가 알아요? 도가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게 몸을 수양하고 기를 통하게 하는 거잖아요. 죽었다 살아난 동 내한이 그 나이에 아들을 또 낳았다는데, 동 내한의 나이는 폐하의 춘추와 비슷하다고요. 그 신의가 무슨 도술이라도 부려 폐하께 아들을 하나 더 안겨 주면 어쩌냔 말이에요!”

귀비가 눈을 부릅뜨고 숨 쉴 겨를도 없이 소리쳤다. 고능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군왕을 출궁시킵시다.”

고능준이 말했다.

“대체 어떻게요!”

귀비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그놈이 주둥아리를 어떻게 놀렸길래, 태후와 폐하께서는 그놈을 세 살배기 어린애 대하듯이 대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군왕을, 누가 감히 내쫓아요? 군왕을 해치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태후가 그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들 텐데.”

귀비의 말에 고능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태후께서 진안 군왕이 황궁에 살지 않으면 남이 해친다고 생각하여 황궁에 두시는 거라면, 오히려 일이 쉬워지지요. 대황자도 황궁 밖으로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대황자를?

깜짝 놀란 귀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럴 순 없어요! 나는 군왕을 내쫓으려는 거지, 우리 사가아를 내쫓으려는 게 아니라고요! 사가아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인데, 그렇게 어린 애를······.”

“그러니까요. 그렇게 어린 대황자도 출궁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왕부로 가 지내는데, 대황자보다 나이가 더 많은 진안 군왕이 어찌 출궁을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고능준이 말했다.

“그, 그래도······.”

귀비가 고개를 저었다. 고능준이 귀비의 말을 끊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도 아시겠지만, 최근 들어 폐하께서 정사를 돌보며 진안 군왕의 의견을 더욱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귀비는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렸다. 고능준이 한 말은 이미 귀비가 수차례 들었던 이야기였다. 황제가 늘 진안 군왕의 의견을 칭찬하는 탓에, 대황자가 허수아비처럼 멍청해 보인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그놈을 내보내겠다는 거예요!”

귀비가 소리쳤다.

“군왕은 황궁 안에서나 지금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출궁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대황자는 친왕인 데다 폐하의 혈통이고, 군왕은 그저 군왕일 뿐입니다. 마마, 친왕이 황궁에 들르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지만, 이미 출궁한 군왕이 무슨 핑계로 황궁에 들를 수 있겠습니까? 폐하와 태후께서는 군왕을 자유롭게 황궁 안으로 들이고 싶겠지만, 조정 대신들의 생각은 다를 겁니다. 친근이라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친하고 가까워야 친근이란 말을 쓸 수 있지요. 친하긴 하나 가까이 있지 않다면, 사람 마음은 물처럼 옅어지기 마련입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그런가? 군왕이 궁을 나가게 된다면, 확실히 지금처럼 제멋대로 황궁 곳곳을 누비면서 폐하와 태후의 눈에 띌 수는 없을 것이야. 하지만 대황자는 다르지. 진정한 황실 혈통인 데다, 황궁 안에는 이 어미가 있어. 하지만 군왕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도 없잖아!

귀비가 손에 깍지를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경왕은요? 그놈은 분명히 경왕을 방패 삼아 떼를 쓸 거예요.”

“경왕이라.”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황궁에 있는 공주가 어디 한 둘입니까. 다 큰 아이든, 어린아이든, 실수로 경왕과 부딪혀 놀라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귀비는 고능준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하고 눈빛을 반짝였지만,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도 경왕 때문에 놀랐던 공주가 있었어요. 그런데 태후께서는 도리어 공주만 꾸중하셨잖아요.”

고능준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마마,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니까요. 경왕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다들 마음이 아프겠지만, 평생 마음 아파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 무슨 일이든 경중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거지. 이럴 때일수록 조급해지면 안 돼.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거든.

그래도 지금은 사람을 정리할 때가 되긴 했어.

무슨 일을 할 때,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니 진안 군왕도 갑자기 끼어들어서 내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됐지.

나 고능준은, 원수라면 절대로 잊지 않는 사람이야. 군왕, 네놈 때문에 내가 이렇게 큰 손해를 봤으니,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됐다. 그러니 내가 조금씩 조금씩, 그 빚을 돌려받을 것이야.

한차례 가을비가 지나간 뒤, 경성 날씨는 한층 더 쌀쌀해졌다.

동쪽 성문의 감문관 이무는 성문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말을 타고 성 밖을 향해 달려갔다.

성 밖의 길 위에는 행인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문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사람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많아졌다. 좀 더 앞으로 가 보니, 길가는 초시(草市: 도성 밖에 열리던 시장)라도 열린 것처럼 떠들썩했다.

“여기에 웬 초시가 열렸지? 경성이 바로 근처인 데다, 서쪽으로 삼 리만 더 가면 초시가 따로 있을 텐데.”

지나가던 행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나서서 설명했다.

“서쪽으로 삼 리를 더 가면, 초시는 있어도 무원산 형제의 무덤은 없잖소.”

설명을 들은 행인은 화들짝 놀랐다.

남의 무덤 앞에 초시가 열렸다고?

행인이 입을 다물기도 전에, 근처에서 통곡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인이 고개를 돌리자, 울타리를 두른 무덤 앞에서 나이가 지긋한 사내 하나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자는 성묘하러 온 사람이오?”

행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오. 글씨를 보고 바보가 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게지.”

옆에 있던 노점 상인이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글씨를 보고?

행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대성통곡을 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옷차림만 보아도, 연로한 학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님, 제게 좋은 붓, 먹, 종이와 벼루가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저 비석을 직접 탁본한 글씨도 팔고 있는데.”

행인이 관심을 보이는 듯한 모습에 노점 상인은 더욱 목청을 높였다.

“모사품을 탁본한 다른 이들의 것과는 급이 다르다 이거예요.”

행인은 아직 상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듣던 주위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손사래를 쳤다.

“허풍 좀 작작 떠시오. 울타리에다가 위병까지 붙은 마당에, 어떻게 비석에 종이를 대고 직접 탁본했다는 것이오?”

“아, 거 진짜라니까 그러네. 내 셋째 외숙의 손자의 이모의 아들의 조카가 태평거에서 일하는 덕에, 주인어른께 부탁하여 허락을······.”

“지랄도 유분수지.”

“뭐라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에, 행인은 더욱 혼란스러운 듯 말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무덤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늙은 서생을 쳐다보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쉼 없이 서예 대가들의 글씨를 연구해 겨우 나만의 서체를 만들었단 말이오. 온 경성에 소문이 났던, 천하제이 행서라 불리던 차정사의 글씨를 보고도 인정할 수 없었거늘.”

늙은 서생이 울면서 말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듣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자신들 또한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 비석의 글씨를 모사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늙은 서생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런 늙은 서생이 체통을 잃고 통곡하는 모습은 몇 번이나 보아도 재미있는지, 구경꾼들이 나서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남보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이 여기는 것이오?”

“그건 당연한 거고, 내가 우는 것은 이 글씨들이 너무도 비통하기 때문이오.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울리고, 인생무상에 대한 분개와 비통함이 글씨에 새겨져 있잖소. 마음이 글씨에 깃든 것이고, 글씨가 곧 사람의 영혼인 것이지. 그러니 이것은 서예기도 하면서 서예가 아니고, 글씨면서도 글씨가 아니라는 뜻이오.”

늙은 서생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구경꾼들은 워낙 제정신이 아닌 듯한 말들을 많이 들어서인지, 우습다는 듯 웃는 사람도 있었고, 늙은 서생의 말을 대강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다.

늙은 서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쪽에서 멍석을 깔고 글씨를 모사하던 서생 한 명이 손뼉을 치면서 바닥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알겠다, 이제야 알겠어!”

서생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듯 날뛰었다.

“서예이기도 하면서 서예가 아닌, 글씨면서도 글씨가 아닌 경지. 손과 마음 모두, 서예를 한다는 생각 없이 글씨를 썼기 때문에 저 글씨가 훌륭한 것이야!”

서생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비틀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군댔다.

“도가 튼 사람이 한 명 늘었네.”

“미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걸 수도 있지.”

이무는 이리저리 휘청이는 서생을 피하고자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오지 말고 물러서시오.”

무덤을 지키는 위병 두 명이 호통쳤다.

이무가 걸음을 멈추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무를 알아보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엇? 이 대장도 저 글씨에 홀리셨습니까?”

한 노점 상인이 이무를 향해 외쳤다.

이 대장이라는 말에, 주위 사람들이 이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직책이 감문관이다 보니, 성문을 자주 드나드는 잡상인들과 친하지는 않아도 서로 얼굴은 익히고 있었다. 이무를 알아본 노점 상인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이 대장도 저런 걸 좋아하시네.”

“대장 말고, 서생으로 전향하려는 건가?”

“하긴, 백날 대장을 해 봤자 뭐해? 문관 정도는 돼야 앞길이 트이지.”

“글씨를 보러 온 게 아니지 않을까? 술 냄새를 맡으러 온 것 같은데.”

“에이, 글씨를 보러 온 서생들이 무덤 앞에서 진을 치고 있잖아. 술 냄새를 맡으러 온 술꾼은 차치하고, 우리가 여기서 큰 소리를 내는 것조차 질색하는걸.”

“저 서생들도 참. 글씨를 보는 건 저들 마음이라지만, 술 냄새도 못 맡게 하는 건 좀 심했어.”

“하하하, 자네는 여기서 술장사를 하고 싶었던 거지?”

갑자기 주위가 시끌벅적해지자 당황한 이무는 서둘러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이무는 곧장 아버지에게 불려갔다.

이무는 이씨 집안의 서자였다. 게다가 그는 형제들처럼 언변이 뛰어나지 않고, 천성이 둔했다. 말재주가 없는 터라 장사는 그른 데다, 설령 손재주가 있다고 해도 이씨 가문의 폭약 공방에서 일할 수는 없었다. 이씨 가문의 폭죽 제조 비방은 오직 적장자에게만 물려주기 때문이었다.

뭐든 어중간하게 했던 이무를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이무에게 막일을 시키는 대신 돈으로 하급 무관 신분을 얻어 주었다. 물론 가문을 위해 관청에 의지할 만한 사람을 심어 두고자 하급 무관 신분을 얻어 준 것이었지만,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하는 이무를 본 이씨 가문은 사실상 이무에게 기대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요새 공방에 자주 드나든다고 들었다.”

이무의 부친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게다가 은밀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꿍꿍이인 게냐!”

“저, 저, 저는 단지 시험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무가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시험? 무엇을 시험하려고?”

이무의 부친이 탁자를 팍 내리치며 다그쳤다.

“기껏 대장씩이나 시켜줬으면, 대장 일에나 심혈을 기울일 것이지. 감히 네놈이 공방 일에 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야?”

“아버지, 무원산 형제의 장례를 치르던 날, 하늘 높이 솟아오른 폭죽을 보셨습니까? 그때 쓴 폭죽이 저희가 만든 폭죽보다 훨씬 좋아 보이길래, 소자가 한번······.”

다급하게 해명하던 이무는 부친의 냉랭한 눈빛을 보고 나머지 말을 꿀꺽 삼켰다.

“너는 쓸데없는 생각을 참 많이 하는구나.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우리 가문의 일은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네가 뭘 해야 진급할 수 있는지나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보다 더 일찍 관직을 얻은 사람도, 너보다 더 늦게 관직을 얻은 사람도 벌써 저만치 높이 올라갔는데, 왜 너만 제자리인 것이냐? 평생 그렇게 감문관이나 할 작정이야?”

이무는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부친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

“암, 그날 폭죽을 너만 봤을까? 우린들 그 폭죽을 못 봤을 것 같으냐?”

이무의 부친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사람은 제 본분을 지켜야 하는 법이야.”

이무가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찰나, 땅의 진동과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바깥으로 뛰쳐나와 서쪽을 바라보았다. 이씨 저택의 한구석에서 짙은 매연이 피어올랐다.

폭발이 발생한 곳은 다름 아닌 이씨 저택의 고방이자 폭죽 공방이 있는 곳이었다.

“큰일이다.”

이무 부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네놈은 이제 진급할 생각도 할 필요가 없겠구나! 어떻게 죄를 청해야 할지나 생각하거라!”

거리에 징과 북이 울리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막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고능준도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불이 난 건가?”

고능준은 고개를 들고 서쪽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당에 멈춰 섰다.

“노야, 안심하십시오. 이쪽까지는 불길이 닿지 못할 것입니다.”

수하가 서둘러 고능준에게 말했다. 고능준이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뒷짐을 졌다.

“정말 갑작스러운 화재구나.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무척 놀라시겠어.”

고능준의 예상대로, 경성 한복판에 불이 났다는 소식은 금세 황궁까지 전해졌다. 온갖 조서에 파묻혀 있던 황제는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침상에 누웠다가,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이 나는 것은 경성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매번 인명 피해를 동반했다. 어느 집안의 첩실이 비상금을 숨기다가 거리 반쪽을 태워 먹은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도 해서, 황제는 이번 화재 소식에 더욱 놀란 터였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불길이 잦아들어 사상자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시들이 서둘러 황제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황제는 내시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불이 완전히 꺼진 것도 아닌데, 어찌 사상자 수를 파악했단 말이냐. 이놈의 내시들은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아둔해지는 것이야? 짐을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고작······.

황제는 경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황궁에서 가장 높은 전각으로 가기 위해 대전을 나섰다. 황제가 전각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태후와 비빈들이 보였다.

“이씨 가문의 폭죽 공방이 터진 것이라고?”

태후가 물었다. 이미 황성사의 사람이 태후에게 사실을 전했을 것이라 생각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그런 것들을 집에 두면 안 된다고 했거늘. 어떻게 그런 위험한 것을 집에 뒀단 말이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지.”

태후가 합장하고 아미타불을 외며 말했다.

“예전부터 그런 것을 집에 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오성 병마군이 조사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꼭 죄를 물어야 하오, 황상.”

태후의 말에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각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말없이 매연이 피어오르는 곳을 내다보았다. 다행히도 불길이 금방 잡혀, 시커멓던 매연은 점차 옅어졌다.

잠시 뒤, 황성사의 관리가 자신의 뒤에 있던 오성 병마사의 관리를 가리키며 양해를 구했다.

“긴급한 사안이다 보니, 신이 직접 오성 병마사 관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폐하와 마마께서 궁금해하시는 것에 대해 소상히 대답해 드릴 수 있는 자입니다.”

황궁의 후궁은 윤허 없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 가문 사람들의 말로는, 평소 폭죽을 다루는 일이 몹시 조심스러워 점포도 모두 성 밖으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오늘 폭발은 이씨 가문의 자제 중 한 명이 아둔하게도 남몰래 제조 규칙을 어기고 폭죽을 제조하여 생긴 일이라고 하옵니다. 집안의 어른이 그자를 찾아내 문책하던 와중에 폭발이 발생했으며, 하필이면 평소 땔감을 쌓아 두는 고방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바람에 주위에 있던 땔감에 불이 붙어 불길이 거세졌다고 합니다. 이씨 가문의 자제는 이미 자수하여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성 병마사의 관리가 사건의 전모를 소상히 말하던 도중, 진안 군왕이 내시와 함께 다급하게 전각 위로 올라왔다.

“마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위낭.”

태후가 진안 군왕을 보자마자 그에게 손을 뻗어 가까이 오게 했다. 태후가 진안 군왕에게 조용히 말했다.

“안 그래도 마침 너를 부르려고 사람을 보내려던 참인데······.”

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고개를 돌리던 찰나, 진안 군왕의 뒤에서 날카로운 어린아이의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궁녀들의 비명까지 합세하여 후궁의 평온함을 깨트렸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넋을 놓던 순간, 진안 군왕은 후다닥 뒤쪽으로 달려갔다.

“우리 공주잖아!”

한 비빈이 자신의 딸아이의 목소리임을 알아채고, 예를 표할 겨를도 없이 진안 군왕의 뒤를 쫓아갔다.

경성에서 일어난 폭발에 대해 보고하던 관리는 영문도 모른 채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를 데리고 후궁으로 들어온 황성사 관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궁에서는 후궁의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곧 살길이었다. 그는 서둘러 자신이 데려온 오성 병마사 관리의 팔을 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후궁 일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가지면 안 된다. 두 관리가 허둥대며 발걸음을 돌렸지만, 아쉽게도 한발 늦고 말았다. 궁녀들이 두 공주를 품에 안은 채 그들의 정면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공주 하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이미 혼절한 상태였다. 겁에 질린 채 울부짖으면서 달리는 궁녀들 뒤로, 괴상한 웃음소리와 위로 번쩍 들어 올린 두 손이 보였다.

저것이 바로 2년 전부터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과거의 이황자, 지금의 경왕이로구나.

관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멀리서 보이는 두 손과 점점 더 가까워지는 동그랗고 거대한 경왕을 쳐다보았다. 햇빛에 비친 경왕은 입을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공주가 놀라서 혼절하였습니다.”

“마마, 마마. 어마마마께 데려다주세요.”

“숙녕, 왜 그러니? 숙녕, 정신 차려.”

“어서 태의를 불러오거라! 어서!”

진안 군왕은 비명과 울음소리가 뒤섞인 곳을 지나, 단지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신이 나서 손을 휘휘 저으며 해맑게 웃는 경왕의 옆에 멈춰 섰다.

“당장 저것을 잡아라!”

태후의 목소리가 진안 군왕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밧줄로 묶어라! 밧줄로 묶어!”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렸다. 경악과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의 태후와 비빈들의 품에 안긴 공주들에게 시선을 돌린 황제를 본 진안 군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후다닥 뛰어나가려는 경왕을 이를 악물고 붙잡았다.

진안 군왕은 단 한 번도 지금처럼 경왕을 세게 눌러 잡은 적이 없었다. 진안 군왕의 손에 눌린 채 꼼짝도 못 하게 된 경왕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속박감과 자신을 억누르는 통증에 괴성을 질렀다.

“괜찮아, 겁먹지 마. 육가아, 이 형이 절대로 남들이 창피 주지 못하게 할게.”

태후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태후궁에 수차례 울려 퍼졌다.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내시 한 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의 볼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입가에는 핏빛이 비쳤다.

“소인은 그저 마마께서 경왕 전하를 걱정하실까 봐, 미리 가서 경왕을 모셔 오려던 것이었습니다. 소인이 경왕 전하를 잘 모시지 못하여 공주님들을 마주치게 됐습니다.”

눈을 감고 있던 태후는 경멸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탁자를 내리쳤다.

“치워라.”

양옆에 서 있던 내시들이 재빨리 바닥에서 사죄하던 내시의 입을 틀어막고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태후궁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찰나의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던 그때, 태후가 바깥을 내다보며 물었다.

“공주들은 어떠하냐?”

“태의가 심신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처방했고, 크게 놀랐을 뿐 건강에는 지장이 없다 하였습니다. 다만 어린 공주님께서 경기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여, 폐하께서 공주님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궁녀가 예를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태후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태후의 한숨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손, 마마께 죄를 청하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진안 군왕이 말했다.

“너는 또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태후가 진안 군왕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마를 땅에 대며 큰절을 올렸다.

“소손, 경왕과 함께 황궁을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위낭, 지금 애가를 탓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소손은 스스로 자책을 하는 겁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어 태후를 쳐다보았다.

“마마, 소손은 마마와 폐하의 은총을 받기만 했을 뿐, 보답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이미 2년, 아니 곧 3년이 지나가는데도 소손은 여전히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소손은 올해로 만 열아홉이 되었는데도 출궁하지 않고, 마마와 폐하의 비호에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마마와 폐하께서 만천하의 비웃음을 짊어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말입니다.”

“애가가 말하지 않았느냐. 감히 누가 너를 비웃는다고!”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호통쳤다.

“감히 어떤 놈이 애가의 집안일을 왈가왈부한다는 말이냐!”

진안 군왕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마마, 소손은 남들의 비웃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는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려 합니다. 소손은 구석진 곳에 숨어서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소손이 피하고 숨는다고 해도, 생각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으며 보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은 이미 변해 버렸습니다.”

“괜찮다, 괜찮아. 애가가 거처를 새로 찾아주마. 다른 사람이 절대 너희를 방해할 수 없도록.”

태후가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을 일으키려 했다. 진안 군왕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했다.

“마마, 소손은 더 이상 숨지 않으려고 합니다. 경왕이 다쳤다고는 하나,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소손은 경왕을 데리고 당당하게, 광명정대하게 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다시 한번 태후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소손, 출궁을 청하옵니다. 하오나 소손, 마지막으로 마마의 총애에 기대어 마마께 어려운 청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태후가 엎드려 있던 진안 군왕의 등을 다독이면서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태후가 끝내 눈을 감자, 눈물 두 줄기가 태후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말하거라.”

말하거라.

엎드려 있던 진안 군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고개를 들었다.

“소손, 경성에 남아 경왕과 같은 왕부에서 살기를 청하옵니다.”

“먼저 출궁을 청했다고?”

고능준이 놀란 눈으로 묻자, 수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마께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고능준이 실소를 터트리고는 손을 저어 수하에게 물러나라고 명했다.

“그러게, 그놈은 겉보기처럼 허술하고 생각 없는 놈이 아니라니까.”

고능준이 막료들에게 말했다.

“단번에 이 일의 관건을 알아차리고, 빠르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다니. 군왕의 심지가 만만치 않습니다.”

막료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능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태후와 폐하의 반응을 보자마자 경왕에 대한 애정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다니. 빠른 상황판단이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결단력은 쉬이 가질 수 없지요. 진안 군왕과 경왕에 대한 폐하의 총애가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아예 사라졌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른 막료가 맞장구를 쳤다.

황제의 총애가 아무리 옅어졌다고 한들, 진안 군왕과 경왕이 황궁 안에서 지내는 데에 불편함을 느낄 만한 것은 없었어. 하지만 이대로 출궁하면, 다시는 황궁 안으로 되돌아올 수 없겠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빠른 결단력으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판단해 내다니.

“이대로 폐하의 총애가 다할 때까지 버티는 것보다는 지금 한발 물러서는 게 낫지. 그럼 도리어 폐하와 태후께서 그들에게 신세를 지는 모양새가 될 게야.”

고능준이 말했다.

“대인, 폐하께서 그들의 출궁에 동의하실까요? 진안 군왕이 황궁에서 지낸 세월이 십수 년인데. 아무리 폐하가 군왕의 친부가 아니라 해도, 부자지간의 정은 어느 정도 있지 않겠습니까?”

막료 한 명이 물었다.

“부자지간이 아닌데 부자지간의 정이 있을 리가.”

고능준이 냉소를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 폐하께서 그 정도로 군왕을 아낀다고 생각하는가? 폐하는 단지 체면을 위해 군왕에게 잘 대해 주시는 것뿐일세. 때마침 오성 병마사와 황성사 관리들이 이번 일을 직접 목격했으니, 진안 군왕을 내보내기엔 지금이 더할 나위 없는 시기지. 폐하께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있겠나? 잊지 말게, 군왕은 올해 열아홉이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가정을 이루고 아비 노릇을 할 나이지.”

고능준이 ‘아비 노릇’에 힘을 실어 말했다. 막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와의 정을 논하자면, 우리 대황자야말로 진정 폐하와 정이 깊은 부자지간이지. 대황자도 출궁하여 왕부에 살기를 청했는데, 다른 이가 무슨 말을 하겠나?”

고능준이 말했다.

진소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황제가 결정을 내린 뒤였다.

“대황자는 평왕(平王)에 봉하여 왕부로 나가 살게 하고, 창의군 절도사로 임명한다. 경왕은 위위소경(衛慰少卿)직에 임명하여 출궁하도록 한다. 진안 군왕은 우위낭장(右偉郎將)직에 임명하고, 경왕부를 거처로 지정한다. 즉시 왕부 건물 보수를 시작하고, 보수가 끝나는 대로 각자 거처를 옮기도록 한다.”

수하가 읽어 주는 내용을 들으면서도 놀란 기색 없이 다른 상소문을 펼쳐 보던 진소가 잠시 붓을 멈추고 말했다.

“일찍이 그랬어야 하는 일이야. 여인들의 유언비어를 믿고 군왕을 오랫동안 황궁 안에서 키우다니, 그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황자들이 한꺼번에 출궁하게 되었으니, 어사대 관리들이 몹시 당황했겠습니다. 월례 보고의 내용도, 이제는 주제를 바꿔야겠네요.”

막료가 옆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어사대는 늘 황자와 군왕이 오랜 시간 동안 황궁 안에 머무르는 일을 지탄해 왔다. 비록 황제는 그런 류의 탄핵에 신경조차 안 썼지만, 그래도 어사대 관리들은 끊임없이 그 일을 잡고 늘어졌다.

진소가 냉소를 지었다.

“황자들만 도리를 어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출궁해야 할 사람들은, 황자 말고도 많지.”

예를 들면, 고능준.

아무리 종친이라고 해도, 고능준 그자도 일찍이 지방의 부임지로 보냈어야 했어. 그런데······.

“서북의 일이 우리 뜻대로 되었으니, 한동안은 폐하께서 다른 인사이동을 윤허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막료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더더욱 고능준을 경성에서 내보낼 수 없겠지. 견제와 균형을 좋아하는 폐하께서 절대로 그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야.

진소 또한 막료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자네는 어찌 그리 소문에 귀가 밝은가? 그나저나 올해는 무평(茂平) 지역의 가뭄이 더욱 심해진 모양이군.”

진소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에 쥔 상소문을 읽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합니까?”

막료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올해는 아무런 수확도 못 거둘 모양이야.”

진소가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지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칫하면 내년에 기근이 일어날 수도 있겠어. 전운사를 시켜 하루빨리 그들에게 돈과 식량을 나눠 주라고 하게. 무평 백성들이 적어도 겨울을 나고, 내년 봄에 파종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도록 해야 해.”

하급 관리는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진소가 던진 상소문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9월 말, 10월 초의 경성에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우선은 경성의 폭죽 대가인 이씨 가문의 저택 반절이 불에 탄 일이었다. 순식간에 커진 불길 때문에 온 경성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씨 가문은 경성의 이름난 재력가답게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집을 수리하라고 목돈을 쥐여줬다. 그러고는 자기 집안의 자식을 직접 잡아들여 관청에 넘긴 덕분에 사건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다른 하나는 황궁에 있던 이황자와 송자동자라는 별명을 가진 진안 군왕이 출궁한 일이었다. 이는 곧 황자들이 혼례를 올릴 시기가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혼담을 넣으러 가는 사람들 때문에 황궁 문턱이 닳을 정도라던데.”

“황실 문턱을 어디 자네 집 문턱처럼 그리 쉬이 넘을 수 있다던가.”

“어떤 여인이 평왕비가 될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 폐하께서는 완평 강(康)씨 가문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던데.”

“에이, 그런 소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강씨 가문이 퍽이나 황실과 혼인을 맺으려고 하겠다. 강씨 가문은 하루빨리 조당에 들어가 과거 강 상공의 명망을 되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황자와 혼례를 올리겠어? 그건 자신들의 앞길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지.”

경성의 찻집과 주점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한 달 사이에 다양한 일이 일어났지만, 결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룬 듯했다.

황제는 민심을 앞세운 협박으로 다소 체면이 깎였지만, 강력한 병기를 얻은 덕에 서북에서 연달아 몇 번이나 대승을 거두었다. 진소는 주봉상을 잃은 대신 서북 전체의 군사력을 장악하게 됐다. 고능준은 이번 일에서 낭패를 보았지만, 그래도 진안 군왕을 출궁시켰으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세간 사람들의 눈에 불쌍한 처지가 된 것은 진안 군왕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가 되어 황궁에서 버림받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열아홉이나 된 송자동자라니, 어떻게 그를 계속 송자동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열아홉에도 송자동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면, 송자의 의미가 사뭇 달라지리라.

황자들을 모두 출궁시키긴 해야겠지만, 황후나 비빈들은 그들이 황궁을 떠나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황후나 비빈들은 황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관저를 황자들의 왕부로 삼았다.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대황자와는 달리, 공부할 필요가 없는 진안 군왕은 황궁 안팎을 분주히 드나들었다. 그는 수리 중인 왕부를 사흘에 한 번씩 방문해 진행 상황을 살폈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마음대로 출타할 수 있게 됐으니.”

진안 군왕이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과 가까운 시종만 곁에 두고, 왕부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수리를 담당하는 관리가 진안 군왕에게 공손하게 길을 안내하면서 왕부 안을 소개했다. 관리는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 속으로 입을 삐쭉였다.

군왕이 영 맹하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네. 저 준수한 외모만 아깝지 뭐야.

역시 아이는 남의 손에서 길러지면 안 돼. 남의 손에 길러지니까 저런 폐인이 되는 거지.

“연못은 없어야 하니, 저곳은 전부 흙으로 메워두게. 물의 깊이를 잘 모르는 아이야.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도 경왕이 위험해질 수 있어.”

관리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왕부를 한 바퀴 돌며 여기저기를 까다롭게 지적하고 요구사항을 말했다.

“듣자 하니, 자네들이 수리한 관저는 바람만 불어도 무너진다던데. 난 황자가 묵을 친왕부가 그렇게 허술하진 않았으면 하네.”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저렇게 대놓고 말해서는 안 되지. 폐하께서도 우리 체면을 지켜 주시는데, 저 생각 없고 철도 안 든 군왕 나부랭이가 감히 저런 말로 나를 모욕해?

관리는 얼굴이 사색이 되면서도 연신 아니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한참이나 왕부 곳곳을 누비던 진안 군왕이 대문을 나섰다. 그가 문 앞에 잠시 서 있더니 좌우를 살폈다.

“전하, 환궁하시려는 겁니까?”

가까이 있던 시종이 물었다.

“거길 돌아가서 뭐 해? 앞으로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여인의 집을 방문할 것이야.”

시종이 진안 군왕을 보며 피식 웃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삼으셨으면.

-말할 수 있는 것-

담벼락을 두드리는 소리가 오랜만에 옥대교 저택에 울려 퍼졌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화들짝 놀랐다.

“옆집에서 벽을 수리하는 건가요?”

황씨가 아기를 품에 꼭 안으며 물었다. 황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담벼락 위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황씨는 기겁하면서 사환들에게 소리쳤다.

“저놈을 매우 쳐라!”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시녀가 담벼락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분을 매우 쳤다가는, 아주 경을 칠걸요.”

시녀가 담벼락 위에 있던 사람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올렸다.

“군왕 전하를 뵈옵니다.”

군왕?

황씨가 더욱 놀란 표정으로 담벼락 위에서 환하게 웃는 소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성의 황실 종친들은 전부 저런 식으로 사람을 만나나 보네.

다행히도 이번에는 진안 군왕이 사다리를 타고 담벼락을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예전처럼 담벼락을 타고 넘었다면, 황씨는 더더욱 기함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옥대교 저택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황씨는 정교랑과 갓난아기, 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환과 시녀들을 대동하고 나와 진안 군왕에게 큰절을 올리며 그를 맞이했다.

마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예를 받는 진안 군왕도 어딘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진안 군왕이 어색해하는 이유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자신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 때문이 아니라, 과거 옥대교 저택의 풍경이 생각나서였다. 그때에 비하면, 담벼락을 오르던 소년도 변했고, 쓸쓸하기만 했던 옥대교 저택의 마당도 변했다. 진안 군왕은 어쩐지 조금 씁쓸해졌다.

그때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만큼 즐겁고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구나.

또 어떤 고난이 닥쳐올지를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겠지.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훗날에는 즐거웠던 시간으로 남는다는 것을, 당시에는 미처 모를 거야.

“육가아, 형이 오늘은 즐거운 일을 하나 하러 가려고.”

왕부를 나서기 전, 진안 군왕이 장난감을 손에 쥐고 대청 바닥에서 놀고 있던 경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형이 뭘 하러 갈지 궁금하지 않아?”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은 경왕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물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리가 만무한 경왕은 여전히 손에 쥔 장난감만 만지작거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래. 네가 알고 싶다니 형이 알려 줄게. 전에 형이 말했지? 그놈이 널 해쳤으니, 나도 그놈을 해칠 거라고.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기 마련이라고 그랬잖아. 그놈이 너를 바보로 만들었으니, 나도 그놈을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 했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게 어떤 거냐고? 육가아, 그때 기억나? 우리가 바깥세상을 돌아다닐 때, 어느 마을에서 사람들이 괴물 하나를 불태워 죽이는 걸 봤잖아. 사실 그건 괴물이 아니라,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었어.

맞아. 사실 난 그때부터 계획을 세웠어. 일단 황궁으로 돌아오되,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문둥병이 심하게 걸린 사람을 찾아내게 했어.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들려왔지. 심한 문둥병을 앓는 자를 찾아냈고, 그를 경성으로 데려오고 있다는 소식. 육가아, 그때 말했던 것처럼, 문둥병에 심하게 걸린 사람이 썼던 물건을 그놈의 거처에 가져다 두기만 하면······.

뭐라고?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볼까 봐 겁난다고? 육가아, 넌 참 착한 아이야. 어쨌든, 아랫것들이 밖에서 확실히 시험해 봤는데, 일상생활이나 대화 같은 건 전혀 문제가 없대. 워낙 책에 파묻혀 살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어하는 녀석이니······.

그런데 하필 이때 정방이 돌아올 줄이야. 뭐랄까,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난감했어.

대황자가 문둥병에 걸린다면, 분명히 정방에게 치료를 부탁하겠지. 하지만 정방이 고쳐 주지 않거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거야. 폐하와 귀비, 그리고 태후마마께서는 정방을 미워하게 될 테지.

음,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나는 정방이 녀석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게 더 두려워. 그렇게 되면, 내가 한 일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니까.

그래서 나는 정방이 무조건 경성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방을 내쫓을 순 없지. 가장 좋은 방법은, 고능준과 귀비가 정방이 떠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고능준과 귀비가 정방을 내쫓을까?

내가 대황자의 병이 고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들도 정방이 너를 고쳐 주는 걸 두려워해. 남이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게 되면, 일이 쉬워지기 마련이야.

그래서 난 만반의 계획을 세웠지. 정방이 폐하의 부름을 받고 입궐한 날, 정방을 네 궁으로 데려온 다음, 아랫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문을 닫은 뒤에 육가아 너를 고칠 수 있겠냐고 정방에게 다시 묻는 거야.

아니, 사실 묻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어. 태후마마께서 정방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하문하실 때, 내가 입으로는 못 고친다고 대답하며 조금만 뜸을 들여도 귀비는 충분히 불안에 떨 테니까.

아마 귀비는 미친 듯이 궁금할 거야. 우리가 문까지 닫아놓은 채, 아랫것들을 전부 물리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을 거고, 우리 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귀비는 정말 미쳐 버릴걸.

그럼 귀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방을 경성 밖으로 내보내려 했겠지. 네가 다시 좋아질 거라는 일말의 희망조차 없애 버리려는 심보로 무슨 일이든 벌이려고 했을 거야.

육가아, 한번 상상해 봐. 그렇게 귀비가 정방을 내쫓는다면, 나중에 대황자가 병에 걸려 죽어갈 때 귀비는 돌아 버리지 않을까? 대황자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정방을 자신이 내쫓았으니, 자기 손으로 친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셈이잖아.”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지자, 경왕은 깜짝 놀란 듯 진안 군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육가아, 어때? 그렇게 되면 정말 좋을 거 같지 않아?”

진안 군왕이 두 손으로 경왕의 어깨를 잡자, 경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른 흥밋거리를 찾으러 기어갔다.

왕부의 대청은 황궁에 있던 경왕의 궁처럼 모든 곳을 안전하게 꾸며 놓았다. 경왕이 실내에서 뛰어다닌다 해도, 다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끝내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았어.

그 여인이 내가 준비한 간식과 과일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음미하는 것을 봤거든.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도 봤어. 그래서 육가아, 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인인데,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은 여인인데, 세상이 이미 그 여인을 몇 번이고 벼랑 끝으로 내몰았는데, 나까지 그 여인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이용하면······.

맞아. 그 여인은 대단한 사람이지. 어쩌면 귀비와 고능준 역시 그 여인을 해치긴 힘들 거야. 그들이 정방의 심기를 건드리면, 도리어 정방이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반격을 가할 테니까.

물론, 정방이 귀비와 고능준을 해치워 준다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난, 난 도저히 그러질 못하겠더라고. 마음이 쓰여서. 난 정방을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내몰고 싶지 않아. 왜 항상 정방만 어렵고 힘들게 살아야 해?

내가 계획대로 움직이려고 첫발을 내디디던 그 순간부터 난 후회했어. 결국, 내 계획을 스스로 멈췄고.

그 결과 우리가 당해 버렸지. 그들의 계획대로 우리는 궁에서 내쫓기고 버려졌어. 우리가 다시 대황자에게 접근하기란 요원한 일이 된 거야.

그런데 있잖아. 너무 신기하게도, 나는 내 결정이 후회스럽지가 않아. 도리어, 도리어 더 기쁘고, 마음이 가벼워.

육가아, 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 천 갈래, 만 갈래나 있다고 생각해. 한 길이 막혔으면, 다른 길로 가면 돼. 멈추지 않고 계속 가다 보면, 우린 반드시 길을 찾아낼 거야.

육가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나는 오늘 정방한테 가서 사과하려고. 바로 멈춰 서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획을 실행하려고 걸음을 떼기는 했으니까.”

“전하?”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진안 군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진안 군왕이 생각에 잠겨 예를 받지 않는 동안, 옥대교 저택 안의 사람들은 허리를 숙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차 싶었던 진안 군왕은 웃으면서 일어서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일전에 정 낭자에게 진료를 청했던 연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것뿐이오. 어려워할 필요 없소.”

범강림이 집을 비운 탓에 그 아내인 황씨가 시녀의 도움을 받아 손님을 맞이했다. 다행히 황씨는 동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는 서둘러 아랫것들과 함께 차와 간식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때마침 장반근이 여기 와 있었네. 어서 가서 맛있는 것 좀 만들어 줘.”

시녀가 한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웃으며 서 있던 몸종은 그 말에 해바라기씨를 까 먹으며 농담을 건넸다.

“나는 장씨 성을 가진 손님인데, 어떻게 언니 일을 빼앗을 수 있겠어.”

시녀가 웃으며 몸종을 한 손으로 잡아끌었다.

“온 경성 사람들이 장씨 댁 찬모를 모시는 걸 영광으로 여기잖아. 그러니까 빨리 뭐라도 좀 만들어 주라, 응? 모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먼저 행차해 주셨으니, 우리 정씨도 그 영광 좀 한번 누려 보게.”

황실 사람이 집에 왔는데도, 두 반근은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황씨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츰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황씨의 표정을 본 시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서워하실 것 없어요. 큰 도련님과 아씨는 황제 폐하도 알현했던 분들인걸요.”

그냥 알현한 정도가 아니라, 감히 황제와 내기까지 했지.

시녀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황씨는 미소를 보이며 대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술 때문에 알게 된 인연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벗을 만나는 느낌인데.

“2년 만입니다.”

진안 군왕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감탄 섞인 말을 뱉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집이 북적북적해졌네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도 이젠 대문으로 들어오실 수 있게 됐죠.”

역시, 고난 중에도 기쁜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기쁜 일은 함께 나눠야죠.”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낭자도 들었죠?”

진안 군왕이 대뜸 물었다.

“몸종과 사환이 매일 저잣거리에 가서 장을 보거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알 만한 일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지요.

“사람들은 우리가 쫓겨난 것으로 생각하더군요. 실은 정확히 내가 원하던 바였는데.”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올 때가 되긴 했죠. 때가 되면,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니까요.”

진안 군왕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낭자한텐 숨기지 않고 말할게요. 원래는, 내가 좋지 않은 생각을 품고 하려던 일이 있었어요. 그 일에는 낭자도 휘말리게 됐을 거였고, 낭자의 상황이 몹시 불편해졌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웃음기를 거두고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사실 낭자는 이미 그걸 눈치챘을 것 같아서, 오늘 사죄하려고 온 겁니다.”

정교랑이 잠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 순 없어요.”

차와 간식을 들고 오던 시녀와 몸종은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씨께서 입궁하셨던 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왜 꼭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들리지?

시녀가 몸종의 눈짓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반근과 시녀는 황궁 대문 앞까지만 따라갔을 뿐, 황궁 안까지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대청 안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제가 바뀌고 말았다. 방금 전 이야기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낭자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자들이 작정하고 우리를 궁에서 내보낸 것도 맞지만, 나도 때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뿐이니까. 내가 바라던 대로, 경왕을 보살피면서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해요. 그리고 결심했어요. 지금처럼 광명정대하고 떳떳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고요. 적어도 하늘만큼은, 광명정대하고 떳떳한 사람을 속이지 않잖아요.”

시녀가 차와 간식이 든 쟁반을 들고 발걸음 소리를 내며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몸종은 회랑 아래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군왕 전하, 아마 모르실 테지요. 우리 아씨는 하늘도 능히 속일 수 있는 분이에요.

몸종의 귓가에 거대한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 아씨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비열한 수단을 쓰든 대놓고 떳떳한 수를 쓰든 똑같아요. 하늘이 벌하지 않으면, 아씨께서 하늘을 대신해 벌하실 거거든요.

진안 군왕은 차 한 잔을 비운 뒤, 간식 몇 개를 집어 먹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낭자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진안 군왕이 방에서 나가기 직전, 웃음기를 거두고 다시 한번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전 아량이 넓지 않아요. 속이 아주 좁은 편이죠.”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멈칫했지만 이내 웃음을 보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 여인은 속이 좁은 편이지. 과로신선 하나 때문에 수십 년간 공을 들이며 경성에 자리 잡은 조정 대신의 가문을 풍비박산하게 만들고, 논공행상 하나 때문에 서북 장수 하나의 목숨을 빼앗고 서북 관리와 장수들의 앞길을 끊었으니.

“굳이 감사해야겠다면, 차라리 본인의 넓은 아량에 감사하세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친다는 건 결국 나를 해치는 것과 같으며, 남의 도움을 바랄 바에는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훨씬 낫죠. 정말 나 자신의 넓은 아량에 고마워 죽겠습니다. 난 어쩜 이렇게 잘났는지.”

시녀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서로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면 결국 잘 해결된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정교랑의 뒤에서 진안 군왕을 배웅하던 시녀는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문밖에 있던 진안 군왕의 시종이 진지하게 말했다.

“전하, 바깥에 사람이 많이 왔습니다.”

“전하, 걱정하실 거 없어요. 요 며칠 내내 그랬거든요.”

시녀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흠칫 놀라며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고 들어왔다.

“난 다른 거 모르겠으니, 내게 글씨나 한 열 폭 정도만 써 주면 안 되겠습니까? 가져가서 좀 팔려고요.”

우스갯소리를 하며 대문을 넘어서던 진십삼이 마당 가득 서 있던 사람들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정교랑 옆에 서 있던 진안 군왕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은!

진안 군왕은 단번에 진십삼을 알아보았다.

2년 전, 정교랑과 함께 놀잇배를 타고 강 위를 지나가던 사내. 진씨 가문 열셋째, 진호.

진안 군왕과는 달리, 진십삼이 진안 군왕을 알아보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진십삼 역시 황실의 종친이긴 했지만, 어렸을 때는 다리가 불편하여 입궐할 일이 없었고, 최근 2년 동안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느라 입궐할 일이 없었다. 황궁 깊숙한 곳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진안 군왕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진십삼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군왕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잠시 후, 진십삼은 상대가 누군지 퍼뜩 깨닫고 얼른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전하를 뵈옵니다.”

진안 군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받은 뒤 대문을 나섰다.

저택의 대문 앞에는 다양한 나이대의 사내들이 있었다. 나름대로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며 바짝 다가가지는 않았다. 정교랑 등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도 잠시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앞으로 달려들거나 무례하게 떠들지 않았다.

“낭자 글씨의 명성이 대단하여 찾아온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유를 알아본 시종이 진안 군왕에게 말했다.

어쩐지, 글공부를 한 사람들이라 저렇게 예의를 갖추고 있는 거였군.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명성이 곧 자신의 명성인 듯 기쁘고 뿌듯한 얼굴로 정교랑을 돌아보았다.

정교랑과 옥대교 저택의 사람들이 문 앞에서 진안 군왕을 향해 작별의 예를 올렸다.

마차가 움직이자,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휘장을 들어 올려 뒤를 돌아보았다. 정교랑 일행은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진십삼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이 진안 군왕의 눈에 들어왔다.

마차는 빠르게 옥대교를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낭자는 글씨를 그렇게 잘 쓰면서 어찌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었던 겁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의 뒤를 따라 대문을 넘어서면서 말했다. 황씨는 이제 불쑥불쑥 찾아오는 진십삼에게 익숙해졌는지, 놀란 기색도 없이 아기를 안은 채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정중하게 예를 갖춰 황씨에게 답례했다.

“물어본 적도 없잖아요. 그리고 썩 좋은 글씨도 아니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대더니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다가는 또 몇 명이나 미쳐 버릴지 모르겠군요.”

장난스러운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대청 안에 앉자 반근과 몸종이 차를 올렸다.

“아씨, 저는 이만 점포에 가 볼게요.”

시녀가 말했다.

“아주 고생이 많으십니다.”

진십삼이 농담을 건네자 시녀는 말없이 빙긋 웃고는 물러났다.

“아씨, 소인도 이만 가 볼게요.”

몸종이 말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종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 장씨 댁 참모가 참 부럽습니다. 낭자, 또 맞바꾸고 싶은 몸종은 없습니까? 그럼 나도 좋은 찬모를 집에 둘 수 있을 텐데요.”

시녀와 함께 몸종이 나가는 것을 쳐다보던 진십삼이 시선을 거두고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 뒤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흠칫 놀라며 정교랑 쪽으로 자리를 조금 옮겼다.

“바꿀 필요가 있나요. 반근도 할 줄 아는 것들이니, 배우고 싶다면 이 아이에게 배워요.”

정교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진십삼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죠?”

“농담할 게 뭐 있어요. 그저 요리일 뿐인데.”

“그럼, 진짜로 우리 집 몸종을 여기로 보냅니다?”

진십삼이 재차 물어보자 정교랑이 네, 하고 대꾸했다.

“육낭이 서신을 보냈는데, 신비궁에 관한 칭찬만 입이 마르도록 늘어놨더군요.”

진십삼이 차를 마시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장수와 병사들이 더 잘 다루네요.”

“낭자는 정말 그게 낭자의 공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 것이든 아니든, 똑같아요.”

“그게 어딜 봐서 똑같아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딜 봐서 다른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공로가 있으면 명성을 얻을 수 있고, 명성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각종 이득과 부귀영화가 뒤따라오니, 많은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는······.

진십삼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눈앞에 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담담한 표정에 옷차림은 늘 변함없는 무채색이야. 먹고 마시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차와 간식이고, 집 안의 가구와 장식은 단출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남들의 눈에 아무리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이어도, 이 여인의 눈에는 그저 한 줌 흙과도 같으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노자의 말씀이 이런 거겠지.

“아무튼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일단 글씨부터 몇 자 좀 써 줘요.”

진십삼이 생각을 멈추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글씨를 왜요? 그리고 갑자기 쓰라고 하면 못 써요.”

정교랑이 대답하면서 손으로 서재를 가리켰다.

“저기에 이미 써 둔 글씨가 있으니, 필요하다면 몇 장 가져가든가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은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서재로 걸어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종이를 두둑이 집어 들고는 고이 접어 대청으로 돌아왔다.

“공자님, 그 종이는 불을 지필 때 쓰는 건데요.”

진십삼이 몹시 귀한 물건을 대하듯 종이를 접는 것을 본 반근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리 귀한 것을 어찌 감히 그렇게 막 다룬단 말이냐.”

진십삼이 눈을 부릅뜨며 반근에게 말했다. 반근이 입을 가리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 집안 형제들이 모사하기에 충분하겠어요.”

진십삼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그를 배웅했다.

“아 참, 좀 전에 진안 군왕께서는 또 경왕의 일로 왔던 겁니까?”

진십삼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아니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예의를 중시하는 진십삼은 여기서 더 캐물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온 겁니까?”

“사과하러요.”

정교랑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과?

경왕 때문인가? 정 낭자가 경왕을 치료하지 못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유로 그녀를 또다시 궁으로 불러서?

하긴, 황궁의 태의도 황제 폐하 앞에서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텐데 정 낭자는 오죽할까. 불안하고 난감한 일이었겠군. 그리고 최근에 낭자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폐하께서는 낭자를 더욱 난감하게 만드셨겠지.

“그렇네요. 사과할 만해요.”

진십삼이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향해 웃었다.

“왜 웃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요. 왜 낭자는 내가 물을 때마다, 대답하지 않거나 알려 주지 않은 적이 없죠?”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남에게 말 못 할 일도 아닌데, 왜 안 알려 줘요?”

진지하게 대답하는 정교랑의 모습에 진십삼은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안 알려 주겠다고 하는 낭자의 모습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뭐가 재밌다는 거야?

진십삼을 배웅하러 나온 반근과 황씨가 정교랑을 쳐다보며 잠시 그 모습을 상상했다.

저렇게 단정하게 서 있는 낭자가 뾰로통 입술을 내민 채 눈웃음을 지으며 ‘안 알려 줄 거예요.’라고 한다면······.

반근과 황씨는 동시에 몸을 움찔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정교랑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네요.”

집에 도착한 후에도 진십삼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막 귀가한 그는 마당에 서 있던 진 부인 그리고 다른 두 부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우연이다. 이번에는 진짜로 우연이야.”

진 부인이 진십삼의 의심 어린 눈빛을 보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진십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좀 전에 했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서둘러 몸을 돌리고 웃음을 멈추려 애썼다.

“십삼이 오늘 왜 저렇게 기쁜 거래요?”

두 부인이 물었다.

“쟤? 그러니까······.”

진 부인이 웃으면서 대답하려던 찰나, 진십삼이 몸을 다시 돌리고는 글씨가 쓰인 종이를 뭉텅이로 쥐어 내밀며 진 부인의 말을 끊었다.

“형제들이 그리도 원하던 정 낭자의 친필 글씨입니다. 제가 얻어 왔어요.”

진십삼의 말에 두 부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원산 다섯 형제의 무덤은 경성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왕희지가 쓴 <난정집서>의 뒤를 잇는 천하제이 행서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그 글씨의 탁본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어쨌거나 남의 무덤이니 비석 위에 재료를 덕지덕지 묻혀 가면서 탁본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무덤의 주인이 꽤 명망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비석 가까이 가서 글씨를 모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풍문에 의하면 귀비가 비석에 글씨를 새겼던 정교랑에게 평왕의 글씨 선생 노릇을 부탁했지만, 정교랑은 단칼에 귀비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했다. 당시 정교랑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 글씨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 감상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에요. 소녀는 감상을 위한 서예를 할 줄 모르고, 더욱이 남을 가르치는 법도 모릅니다.

정교랑의 건방진 태도에 귀비는 기가 찼지만, 황제는 껄껄 웃으며 고지식한 듯하나 겸손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 감탄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천하의 귀비마마까지 거절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직접 찾아가서 글씨를 달라고 했담?

그 정 낭자한테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종이를 가져왔단 말이야? 저것 중 딱 한 장만이라도 집에 가져갈 수 있다면, 보물 감상 연회를 족히 몇 번은 열 수 있을 텐데.

“십삼, 어서 내게 보여다오.”

두 부인이 진 부인을 뒤로하고 진십삼을 에워쌌다. 진 부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기, 그래도 쟤가 내 아들인데, 십삼이 그걸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 어미의 동의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

진십삼은 세 부인 사이에 껴서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형제들에게 줄 몇 장만 간신히 남겨 놓고 두 부인에게 종이를 나눠줬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나머지 몇 장마저도 전부 빼앗길까 싶었던 진십삼은 서둘러 종이를 소매 안에 넣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참, 그리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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