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75)

사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정 이노야는 사내가 대문 밖으로 사라진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돌아섰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경하드립니다, 노야. 이번 내양 자사 자리는 틀림없겠습니다.”

두 문객이 웃으며 예를 표했다. 정 이노야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확정되진 않았네. 아직은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확신에 차 보였다.

“틀림없습니다. 유옥곤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숙부님 쪽에 얘기가 잘 됐다고요. 위고 아래고 할 것 없이 틀림없습니다.”

문객이 웃으며 말하자 정 이노야는 미소를 지었다.

당초 장순의 도움을 얻진 못했지만, 장씨 저택 앞에서 만났던 유옥곤과는 최근 3년간 연락을 지속해 왔다. 유옥곤의 벼슬길은 순조로웠다. 무엇보다도 유옥곤의 숙부인 유평(劉平)의 벼슬길은 탄탄대로였다.

이번엔 유씨 가문에 연줄을 댔으니 문제없으리라.

“내양 자사 자리는 이미 따놓은 당상입니다.”

문객이 탄식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3년 늦긴 했지만요.”

그 말에 정 이노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3년!

정 이노야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본디 3년 전에 얻었어야 할 자리인데, 누구 때문에 앞길이 막힌 건지 3년을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3년이라니! 인생에 3년이 몇 번이나 된다고!

“네, 대인. 어쨌거나 이제 바라던 바대로 되었잖습니까.”

문객들이 얼른 위로의 말을 전했다. 정 이노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라던 바대로 됐으니 잘된 일이야.

정 이노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경성. 황궁 내에 위치한 유내전(流內銓: 이부 소속 관청)은 조용했다. 관료들이 정사당으로 향하는 작은 길 위에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뒤에서 무거운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엄숙한 표정의 관료가 보였다.

“유 정언(正言: 관직명).”

관료들이 얼른 예를 표했다.

한림원 학사이자 지제고(知制誥: 황제의 조서 초안을 작성하는 관직) 겸 우정언(右正言)을 맡고 있는 유평이었다.

“체통들을 지키시오.”

유 정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자, 관료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흩어졌다.

관료 하나가 유평을 관청 안으로 안내한 후 책자 하나를 올렸다.

“대인, 이번 관직 이동 계획이니 살펴보시지요.”

유평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책자를 받아 넘겨 봤다. 책장을 쓱쓱 넘기던 유평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자는 안 되네.”

관료가 놀라 고개를 숙이고 살펴봤다. 책자에 기록된 필체와 표식을 확인한 관료는 더욱 놀란 눈치였다.

“이건, 분명 대인께서 직접…….”

“내가 뭐?”

유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관료는 멈칫했다. 경성에서 일하는 관료치고 눈치 없는 자는 없었다.

“대인 말씀이 맞습니다. 3년 만에 시행되는 대규모 인사이동인 만큼 신중해야지요. 대조 확인도 철저히 하고요.”

관료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유평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유평이 나가고 나자 관료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책자를 살폈다.

“대체 뭐가 문제야?”

관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책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아둔한 사람을 봤나. 이자가 누군지 좀 보시오.”

누구냐고?

관료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이름을 살폈다.

정동.

지방 관리가 한둘도 아닌데, 그 이름을 어찌 다 기억하나.

“정(程)!”

옆에 있던 관료가 귀띔을 해주며 손으로 황궁 안쪽을 가리켰다.

“서북 일에 대해 벌써 잊으셨소?”

관료는 순간 퍼뜩 깨달은 듯 안색이 싹 변하여 얼른 붓을 들고 정동의 이름에 갈고리 표시를 했다. 그러고도 불안한지 붓으로 이름 위를 두어 번 칠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승진 좋아하네. 그런 딸을 낳아 놓고선. 멸문의 화를 입을 날이 얼마 안 남았거늘.”

관료가 중얼거렸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서북 일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잖소”

옆에 있던 관료가 말했다.

하긴 그렇군.

“그런데 번개를 어떻게 불러들일지 궁금하긴 하군.”

“나도 벼락에 맞는 사람을 본 일은 아직 없소.”

관청 내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서북쪽을 쳐다봤다.

서북 일은 어떻게 되려나?

경성 사람들이 기대하는 눈길로 서북쪽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워낙 먼 거리인지라 서북에 있던 이들은 이번 일의 성패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음을 알지 못했다.

급보로 보낸 조정의 공문은 아직 당도하기 전이었지만, 그렇다고 용곡성의 분위기가 마냥 편하고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유규가 관청에서 끌려나가며 소리소리 질러대자 지나가던 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보긴 뭘 봐!”

병사 중 우두머리가 호통을 쳤다. 구경하려고 몰려들던 백성들은 얼른 몸을 움츠리며 흩어졌다.

“서사근을 풀어 줘! 그 전엔 못 돌아간다!”

유규는 소리를 지르며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쓱 닦았다. 병사들이 냉랭한 눈길로 유규를 쏘아봤다.

“꺼져.”

병사들의 말과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범강림을 내쫓은 것도 모자라 이젠 서사근까지 잡아가다니,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러나? 서무수 형제의 죽음이 수상하잖아. 강문원 그 새끼는 뭘 무서워하는 거야?”

유규가 소리를 질렀다.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은 유규의 말을 듣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일은 구경하면 안 돼. 듣지 말아야 할 걸 듣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간 경을 치거든. 서쪽 오랑캐의 세작이라는 죄명을 붙여 관청에서 잡아가면 감옥에서 살아서 못 나와.

동시에 누군가가 유규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체포해라. 군령을 거역한 죄로 하옥한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소리치자, 병사 일고여덟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유규를 포위했다.

그때 긴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말을 탄 무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말에 탄 이가 외쳤다. 고개를 돌리던 병사들이 얼른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섰다.

“주 대인, 이자가 술에 취해 관청에서 난동을 부리기에, 명을 받들어 체포했습니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주봉상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렸다. 옆에 있던 조성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다. 데려가 술이나 깨게 해라.”

병사들이 얼른 대답하며 유규를 부축해 일으켰다. 병사 중 우두머리가 뭐라 대꾸하려는데, 주봉상이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비켜라.”

주봉상의 측근들이 소리치자, 병사 중 우두머리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비켜섰다.

“부총관, 그자를 체포하다니 무슨 뜻이오?”

관청 안. 주봉상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탁자 앞에 앉은 강문원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전에는 부총관이라는 호칭이 몹시도 귀에 거슬렸지만, 지금은 평온하기만 했다.

늦가을 메뚜기는 뛰어 봤자 며칠이라고, 네놈이 끝장날 날도 머지않았구나.

“서사근은 소란을 피워 군의 사기를 어지럽혔으니, 군법에 따라 처벌함이 마땅하오.”

강문원이 앞에 있던 서책을 내던지며 대꾸했다. 주봉상이 서책을 받았다.

“그자가 무슨 소란을 피웠단 말이오? 괜히 일 만들지 마시구려. 성가신 일이 아직도 부족한 거요?”

서책을 넘겨 보던 주봉상은 돌연 안색이 싹 변해 성을 냈다.

“이게 뭐요?”

“조정에서 급하다고 해서, 내가 서둘러 조사를 마쳤소.”

강문원이 웃으며 주봉상을 향해 아래턱을 쳐들었다.

“어쨌든 날 탄핵한 것이니, 내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최선을 다하려면 일을 피하는 게 옳지 않겠소?”

주봉상이 손에 든 서책을 도로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거요? 대체 뭘 조사했고, 뭐가 모함이란 거요?”

“서사근을 조사했지. 그자가 당사자니 그자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소? 그자는 전장에 나가지도 않았소. 직접 본 게 아니라 남한테 들은 말만 하고 있는데, 그게 유언비어로 모함하는 게 아니면 뭐요?”

주봉상은 어이가 없는지 도리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자는 전장에 나가지 않았지만, 전장에 나간 이들도 있잖소. 직접 본 게 아니라서 유언비어라니, 그럼 직접 본 사람의 진술은?”

강문원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손으로 탁자를 쓸며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다 물어봤소.”

강문원이 또 다른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명명백백히 말했소이다. 어떤 정보를 받았고, 어떤 전술을 구사했는지.”

강문원의 얼굴엔 어느덧 웃음기가 걷혀 있었다. 강문원이 ‘전술’이라는 단어에 힘을 싣자 주봉상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참, 감찰 대인을 깜빡했군. 내가 물어보는 게 피차 불편하다는 건 대인도 잘 알 거요. 대인은 직접 써 주시구려.”

강문원이 손에 든 서책을 건네며 말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직접 가서 물어보시든가. 누구에게든 가서 똑똑히 물어보시오.”

강문원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자, 주봉상이 굳은 표정으로 서책을 받았다.

“조언 고맙소이다.”

주봉상도 힘을 실어 천천히 말했다.

주봉상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편청에서 기다리던 방중화가 들어와 불안한 기색으로 예를 표했다.

“대인, 소관은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방중화가 물었다.

“가 보게.”

강문원이 대답했다.

“그, 그런데 주 대인이, 소관에게 뭘 하문하진 않으실까요?”

방중화가 불안한 듯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주봉상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묻지 않을 걸세.”

강문원 역시 바깥쪽을 쳐다보며 냉랭한 웃음을 지었다.

“감히 못 묻겠지.”

“네, 대인. 묻고 말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무슨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방중화도 얼른 강문원을 따라 웃음을 지었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문원이 서슬 퍼런 눈길로 노려보았다. 방중화가 흠칫 놀라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네가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친 일 말이더냐?”

강문원의 냉랭한 말투에 방중화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썩 꺼져라. 또다시 나라에 불충한 마음을 품었다가는 군법이 용서치 않을 것이야.”

강문원이 혐오와 경멸이 담긴 눈길로 말했다. 방중화는 머리를 세 번이나 땅에 찧으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 후 부랴부랴 일어나 자리를 떴다.

“전부 방중화 때문에 일어난 화인데…….”

옆에 있던 막료가 말했다.

“이게 어찌하여 화란 말인가?”

강문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끊었다.

“저자가 명을 거역하기라도 했어? 임관보에 안 가길 했나? 후방에 제때 소식을 안 전하길 했나? 수하들을 데리고 성을 안 지키길 했나?”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막료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자 때문에 일어난 화란 말인가? 저자가 전사하지 않은 게 죄란 말이야?”

강문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성을 지켰네. 사상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 그 몇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산 자를 두고 겁박해도 된다는 말인가?”

막료들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모아 그럴 순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이치지요. 우리처럼 변방을 지키며 직접 전장에 나가는 사람은 다 압니다. 하지만 경성에서 잠화를 머리에 꽂고 말이나 타고 다니며 거리를 노니는 문관 나리들은 모르죠. 그자들 보기엔 우리가 죄다 전사하는 게 당연하거든요.”

누군가가 말했다. 강문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 같은 무장은 이겨도 공을 바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면 바로 문책을 받네. 걸핏하면 탄핵하고 질책하지. 이번에 내가 인정해 봐. 앞으로 무슨 일만 있으면 죄다 경성으로 달려가 소란을 피울 텐데, 그럼 군영 꼴이 뭐가 되겠나!”

막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 감찰이 무원산 형제들을 두둔하는 것 같던데요.”

막료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뭐? 무원산 형제들 때문에 제 앞날까지 내팽개칠 수 있겠나? 당시 우리 쪽 정찰 실수로 계획이 어긋나 큰 화로 번졌고, 허둥지둥 적에 맞서다가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끝에 승리했다고 해? 그런 일이 밝혀져 봤자 그자한테 좋을 게 뭐 있지?”

강문원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자가 나와 이렇게 오래 싸우고 있는 이유가 뭔가? 둘 다 서북에서 쫓겨나고 싶어서 그러겠어? 본인도 본인이지만, 다른 이들도 생각해야지!”

문관이든 무관이든 관직 사회에 발을 들이는 일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차는 것과 같았다. 평생에 걸쳐 높이,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일생뿐 아니라 아들과 손자에게도, 대대손손 부귀영화가 이어지길 바랐다.

“가족을 위해 동산의 맹세까지 저버리다니, 주봉상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사안(謝安: 동진東晉의 정치가. 동산東山에서 은거하다가 관직에 나가 크게 성공함)에 비할 순 없지 않겠나.”

강문원이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인! 대인!”

주봉상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유규가 얼른 달려갔지만, 주봉상의 측근들이 손을 뻗어 막았다.

“대인, 서사근을 위해 나서 주십시오.”

주봉상이 유규를 힐끔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대인!”

유규가 격분하며 주봉상의 측근들을 물리치고 달려들었다.

“대인!”

주봉상이 걸음을 멈췄다.

“서사근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니며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민심을 어지럽혔으니 벌해야 마땅하다.”

“대인, 유언비어를 퍼뜨린 적 없습니다. 전부 사실입니다. 사실이라고요.”

유규가 소리쳤다.

“증거는?”

주봉상이 고개를 돌리고 유규를 보며 물었다. 유규는 얼른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증명할 수는 있고?”

주봉상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서사근은 임관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을 어찌 믿지? 범강림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임관보 전투에 참여한 이천여 명 중 생존자는 불과 백여 명이다. 범강림 혼자 떠들 뿐 나머지 백 명은 말이 없어. 유규, 이래서야 조정을 어찌 설득하겠느냐? 백성들이 믿겠느냔 말이다.”

유규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그리 쉽게 가릴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나.”

주봉상은 다시 한번 유규를 힐끔 쳐다보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유규도 쫓아가지 않았다. 토기 인형처럼 거리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세상사가 그리 쉽진 않지…….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길가에 멍하니 넋을 놓고 선 사내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고는 알아서 피해 갔다.

“비켜라, 비켜!”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길가에 서 있던 사내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말에 탄 이가 뛰어난 승마술로 사내의 몸을 훌쩍 뛰어넘은 덕에 아슬아슬하게 화를 피했다.

“죽고 싶어?”

말에 탄 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돌아 빽 소리치고는 채찍을 휘둘렀다.

매서운 채찍이 몸을 휘갈기자 유규가 불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주위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던 걸까.

유규의 시선이 옆에 있는 관청으로 향했다. 관청의 문은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범강림 한 사람의 말로는 소용이 없다. 아무 소용 없어.

내가 너희를 두고 볼 것이다! 내가 너희를 지켜볼 것이야!

유규는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임관보에 참여한 이천여 명 병사 중 생존자는 불과 백여 명. 증인이 필요해, 증인이.

유규는 순간 걸음을 우뚝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깼다. 자그마한 골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나가요! 나가라고!”

아낙이 소리를 질렀다.

“제발 부탁드리오. 부탁드립니다.”

유규 역시 소리를 지르며, 대문을 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낙이 힘으로 유규를 상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하지만 곧이어 사내 하나가 안에서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오더니 유규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뚝 부러졌다. 유규는 한쪽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으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대문 앞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아낙은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고, 부러진 채 반만 남은 몽둥이를 들고 선 사내 역시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유규가 피하지 않을 줄은 미처 몰랐던 듯했다.

유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나머지 한쪽 무릎도 마저 꿇었다.

“이 유규는 한평생 천지신명과 황제 폐하, 아버지와 사부님 외엔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일 없는 사람이외다. 오늘 이렇게 무릎을 꿇겠소. 제발 앞으로 나와 정의를 위해 증언해 주시오.”

사내가 반만 남은 몽둥이를 휙 집어 던졌다.

“난 할 말 없소이다.”

사내가 돌아서며 외쳤다.

“문 닫아.”

“그때 사람 수가 워낙 적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는 건 알고 있소. 원군도 오지 않았을 때니 거기 남았다 해도 서무수 형제를 구할 순 없었겠지. 그들의 죽음은 댁들과 아무 상관도 없소이다. 누굴 원망하려는 게 아니오. 그래도 인정은 받아야지 않겠소이까. 그들이 죽음으로 성을 지킨 공로는 인정을 받아야지. 방중화는 도중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는데도 공로를 인정받고 상을 받았는데, 그들은 왜 안 된다는 거요? 이건 불공평하지. 불공평해.”

유규는 갈라진 목소리로 간곡히 부탁하며, 고개를 들어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위험한 상황이고 원군도 없이 고립무원의 처지였으니, 댁들은 구하고 싶어도 그들을 못 구했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소. 지금 그 일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잖소.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그들의 일을 묻고, 그들을 위해 나설 거요. 조정에서 나선다면 댁들이 그들을 구할 수 있소. 그들을 구할 능력이 댁들한테 있단 말이오. 댁들만 입을 열고 정의로운 말을 해 준다면 그들을 구할 수 있소. 제발 부탁드리오. 그들을 구해 주시오. 댁은 충분히 할 수 있소. 댁들은 이제 그들을 구할 수 있소. 오직 댁들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다고! 제발 부탁드리오!”

유규가 땅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절을 올렸다. 아낙은 한쪽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몸이 절로 떨렸다.

사내의 뒷모습 역시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었지만, 끝내 걸음을 옮겼다.

“문 닫아.”

사내가 또다시 소리쳤다.

“여보…….”

아낙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문 닫으라니까!”

사내는 소리를 빽 지르고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낙은 한숨을 내쉬고 밖에서 머리를 찧으며 절을 올리는 유규를 힐끔 보고는 대문을 닫았다.

어둠이 깊어지자 마당에 있던 등이 하나둘 꺼졌다. 변방의 요충지인지라 야간에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천지는 칠흑같이 어둡기만 했다.

아낙이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걸어가 대문 틈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캄캄한 골목 안은 더욱 어두웠지만, 눈을 비비고 뚫어져라 쳐다보자 꿇어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낙은 다시 발소리를 죽여 안으로 들어왔다. 집 안에도 등불은 꺼져 있었다.

“아직도 꿇어앉아 있어요.”

아낙은 칠흑처럼 어두운 방 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눈이 이미 어둠에 적응한지라 희미한 빛만으로도 침상에 앉아 있는 사내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사내는 대꾸하지 않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아낙은 다가가 앉으면서도 눕지 않았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건 숨소리뿐이었다.

“여보.”

“입 다무시오.”

방 안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여보…….”

“글쎄 입 다물라니까!”

“여보, 입 다물면 마음이 편해져요?”

사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내가 목소리를 죽이며 호통을 쳤다. 두 부부가 어둠 속에서 마주 앉았다.

“저 사람 말이 맞아요. 당신은 지금 그들을 구할 수 있어요.”

아낙이 나지막이 말했다.

“정신이 나갔군!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인데 뭘 구한단 거요?”

사내가 씩씩거리며 도로 누우려 하자, 아낙이 사내를 홱 붙잡았다.

“죽음을 헛되게 하려고요?”

아낙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뭘 어쩔 건데!”

사내가 씩씩거렸다. 아내는 잠시 침묵하다가 계속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보, 나도 거리에서 들었어요. 조정에서 정말 이 일을 재조사하기 시작했대요. 방중화는 초조해하고 총관 대인조차 겁을 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서사근을 체포했겠죠. 여보, 우리가 나서서 증언하면 정말로…….”

“입 다물어! 죽고 싶어 환장했군!”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호통을 쳤다.

“난 당신이 겁에 질려 사는 게 싫어서 그래요. 평생 겁에 질려 살겠죠. 무거운 돌덩이를 가슴에 얹은 채로 살 거라고요.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럼 최소한 속은 편하겠죠.”

사내는 벌러덩 눕더니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까지 덮어 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아낙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 죽여 흐느꼈다.

“범강림이 쫓겨나고 서사근도 잡혀갔어요. 그런데도 그들을 위해 저리 나서는 사람이 있고,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사람이 있잖아요.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면, 세상인심은 정말 아무 희망도 없는 거예요.”

“세상인심은 본디 기대할 것도 없소.”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가 차츰 잠잠해졌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오자 아낙은 눈을 떴다. 사내는 이미 옆에 없었다. 아낙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자, 막 대문을 열려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9월 초인지라 서북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짙은 안개 속에 꼿꼿하게 꿇어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대문을 잡은 사내의 손이 움찔거렸다.

밤새 꿇어앉아 있었다니!

“뭘 바라고 이러는 거요?”

사내가 답답한 듯 물었다. 고개를 든 유규가 사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정의.”

“정의가 뭐? 그래 봤자 명목일 뿐입니다. 저들한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사내의 말에 유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소. 소용없지. 죽으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 그래도 산 사람이 있잖소. 그 많은 사람이 저들처럼 살아야겠소?”

유규가 뒤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죽은 사람의 정의를 위한 일이자 산 사람이 무시 받지 않기 위한 길이오.”

사내는 유규를 물끄러미 보다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좋습니다. 내가 정의를 행하지요.”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던 유규는 사내가 앞으로 다가서며 또다시 손을 내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손을 붙잡았다. 사내가 손을 힘껏 끌어당기며 유규를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선 채 손을 꽉 잡았다.

안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낙은 또다시 눈물을 훔쳤다. 그래도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유규가 비틀비틀 돌아섰다.

“또 어딜 가려고 그러십니까?”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또 다른 정의를 찾아가야지.”

유규가 고개를 돌려 사내를 향해 씩 웃었다.

“한 사람을 찾았으니, 더 많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요.”

사내는 유규를 쳐다보다가 얼른 따라나섰다.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찾으면 더 빨리, 더 쉽게 찾을 수 있겠지요.”

손에 금패를 쥔 사내의 말이 쏜살같이 질주했다.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전부 누런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무리는 곧장 용곡성 관청으로 들어갔다.

“성지를 받으라.”

성지를 받으라는 태감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용곡성 관청에 있던 장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지난번과 같은 내용이었지만 이번에는 말투가 좀 더 호되고 매서웠다. 당장 결과물을 받아들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은 채 경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투였다.

왜 이렇게 서두르지?

“서둘러야 합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요.”

내시가 말했다.

강문원이 주봉상을 힐끔 쳐다보자, 주봉상은 시선을 피하며 잠자코 있었다.

“대인, 그 일은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강문원이 미소를 지으며 상소문을 바쳤다.

“전부 허황된 말이었습니다. 하나하나 조사해 보니 그들 다섯 형제의 일을 증언할 만한 사람이나 증거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범강림 등이 원한 때문에 거짓을 고한 듯합니다.”

내시는 강문원과 강문원의 손에 들린 상소문을 차례로 쳐다봤다.

“확실합니까?”

내시가 위엄이 서린 말투로 물었다.

“확실합니다.”

강문원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문밖에서 다급한 보고 소리가 들렸다.

“대인, 큰일 났습니다.”

병사 하나가 달려 들어오며 문밖에서 소리쳤다.

무엄한 놈이로군.

자리에 있던 이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황제의 칙사가 있는 자리에서 저럴 수는 없는 법인데!

장수 하나가 문가로 다가가 호통을 치려 했지만, 한발 늦은 듯했다.

“밖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임관보 전투에서 생환한 이들인데, 서사근과 범강림을 위해 증언하겠답니다!”

뭐라고?

자리에 있던 이들은 순간 멈칫했다. 강문원의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칙사의 메마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강 대인, 이게 무슨 일입니까?”

<교랑의경 16권>에 계속

교랑의경 16권

차례

증언

좋은 소식

신비궁

비석

과한 걱정

말할 수 있는 것

불효

-증언-

무슨 일이지? 누가 작정하고 해치려 드는 거잖아!

세상에 우연이란 건 없다. 사람이 세우는 계획만이 있을 뿐.

칙사가 성지를 전하자마자 어쩜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춰서 기다렸다는 듯 전령병을 통해 사람들이 몰려온 소식을 전한단 말인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고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었을 텐데.

주봉상 이놈이!

강문원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인파 속에 서 있던 주봉상은 강문원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처럼 놀란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예상한 듯한 눈빛이었다.

역시 저놈이었군.

강문원은 이를 갈며 지금 당장 주봉상을 씹어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강 대인!”

칙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다시 울려 퍼졌다. 훨씬 준엄해진 목소리였다.

“나더러 폐하를 속이란 거요?”

강문원은 관청 밖을 쳐다보고, 이어 굳게 닫힌 정문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문을 열어라!”

강문원이 소리쳤다.

관청 정문이 열리자, 장수들과 관리들이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선 크고 작은 사람 수십 명을 쳐다봤다. 몰려든 사람 중에는 병사도 있고 감용도 있고 잡역부도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방중화는 다리가 후들거려 손으로 담벼락을 짚고 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란 표정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한곳에 모인 거지?

임관보 전투 이후 방중화는 자신을 따라 도망쳤던 생존자들을 여기저기에 분산시켜 놓았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하고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일을 입에 올리기 마련이었다.

방중화는 시간이 흐르면 그 일들도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도망친 일이었다. 그들 또한 목이 잘릴 대죄를 지었음이 분명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아둔하게 자신의 목숨을 바칠 인간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는 서쪽 막사에 있던 감용 유규입니다. 무원산 형제 다섯은 죽음으로써 성을 사수한 공이 있으며, 무장 방중화는 성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공을 가로챘음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저는 임관보 전투의 생존자입니다. 무원산 형제 다섯은 죽음으로써 성을 사수한 공이 있으며, 무장 방중화는 성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공을 가로챘음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더 많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저도 증언하겠습니다! 저도 증언하겠습니다!”

“저도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죽음으로 성을 사수한 용사입니다!”

“저도 증언하겠습니다. 저도 증언하겠습니다!”

수십 명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더니 한목소리로 모아졌다. 그 목소리가 온 거리를 가득 채웠다. 온 성의 병사와 백성이 모두 나와 소리치는 것 같았다.

문 앞 층계에 서 있던 장수들과 관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인파 밖에 서 있던 방중화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뒤돌아 달아났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관청 감방에 앉아 있던 서사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지?”

“뭐야?”

감방 밖에 있던 위병들도 하나둘 관심을 보이며 문 밖을 쳐다봤다. 얼마 안 가 누군가가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무원산 다섯 형제를 위해 증언하겠다는 사람이 몰려왔소!”

“수십 명은 되던데! 칙사 앞에서 소리치고 있다고!”

“그럼 무원산 다섯 형제한테 정말 공이 있단 건가?”

모두의 시선이 감방 안으로 향했다.

감방 안에 있던 서사근은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추태를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자리에 단정히 앉은 채로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가 증언하겠습니다. 저희가 증언하겠습니다.

서사근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채찍에 맞은 상처가 여기저기 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제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형제들이 화장되어 유골로 변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울 필요가 없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것이 어째서 울 일이란 말인가. 기쁘게 웃어 마땅한 일이었다.

서사근은 입을 벌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야지. 웃어야 해!

“이 일이 내 소행이란 거요? 이런 일을 해서 나한테 좋을 게 뭐 있다고?”

문과 창이 굳게 닫힌 관청 안에서 주봉상이 냉소를 지었다. 주봉상은 탁자 위에 놓인 상소문을 손에 들었다.

“이 상소문에 서명한 것도 나고, 조사한 내용 역시 나도 함께 들었소. 대군의 병력을 이동한 것 또한 내가 동의한 일이었소. 강문원, 그대는 부총관이고 나는 감찰사요. 그대의 지휘가 적절치 못했다 함은 내 감찰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단 뜻이니, 벌하려 한다면 내 죄부터 벌해야 하잖소!”

강문원은 냉소를 지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인, 확실히 물어봤습니다. 그 전령병이 유규의 돈을 받았답니다.”

강문원은 계속해서 냉소를 지으며 주봉상을 힐끔 쳐다봤다.

“그럼 그 많은 자들이 전부 돈을 받았단 말이냐? 유규한테 그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 만한 돈이 있다고?”

강문원이 냉랭하게 물었다.

“유규한테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무원산 형제들한테 돈이 있었습니다.”

장수 하나가 말했다.

“맞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근래 들어 서사근이 가산을 다 털어 썼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거들었다. 그 말에 강문원은 더욱 분노했다.

“그자의 재산이 얼마나 된다고 털어 써?”

“대인, 방금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더니 임관보 전투 이후 지금까지 넉 달 동안 서사근이 매일 쉬지 않고 그 생존자들의 집에 찾아갔답니다. 땔감이며 쌀, 곡식, 기름을 끊임없이 대줬답니다. 버리면 또 갖다 주고, 버리면 또 갖다 주면서요. 물론 돈도 주고요. 그자들이 이리저리 숨기며 둘러대는 통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 계산해도 족히 20만 관은 될 겁니다.”

옆에 있던 장수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관청에 있던 이들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20만 관이라니!

“내 서북에서 꼬박 3년을 보내면서 모은 재산이 겨우 10만 관인데. 일개 병사들이 3년 만에 20만 관을 모으다니······.”

장수 하나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강문원이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자리에 있던 이들도 속으로 외쳐댔다.

재산이 20만 관이나 되는데, 누가 여길 온단 말인가!

재산이 20만 관이나 되는데, 누가 그걸 마구 나눠 준단 말인가!

재산이 20만 관이나 되는데, 빌어먹을 불공평인지 뭔지를 왜 따진단 말인가!

“내가 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아시오? 난 알고 있었거든. 강 대인도 그들이 뭐 하던 사람인지 모르진 않을 터인데.”

주봉상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경성 태평거의 주인이오. 1년이면 한 사람당 최소 2만 관의 배당금을 받는데, 무려 일곱 명이 3년을 모았잖소. 20만 관을 모으는 게 불가능할 것도 없지! 20만 관이 뭐요, 더 많을 수도 있지. 목숨까지 여기 내던진 걸 보면 공명과 공로를 위함인데, 누가 그 공로를 지워 버렸으니 가만있을 수 있겠소?

무려 20만 관인데, 그 사람들의 증언을 못 살 것 같소? 죄를 추궁할까 두려워 증언하지 않는 건데, 20만 관씩이나 준다고 하면 죄는 관두고 목숨을 사겠다 해도 저들은 기꺼이 내놓을 것이오.

이 일을 확실히 조사해야 한다고 누차 말하지 않았소. 강문원, 본인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으면서 되레 나까지 조사를 못 하도록 협박하고, 다른 이들의 앞길을 생각하라며 윽박질렀지? 나까지 협박했으면서, 왜 저 백성들은 협박하지 못하는 거요?

생각해 보시오. 저들이 경성에서 그만한 소란을 피워 폐하까지 아시게 될 정도면, 이 작디작은 서북에선 오죽하겠소? 아직도 날 의심하다니, 날 의심하면 뭐? 나야말로 강 대인이 고의로 우릴 죽이려 드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소이다!”

주봉상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강문원에게 홱 내던졌다. 옆에 있던 장수들이 얼른 달려들어 주봉상을 말렸다.

관청이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강문원도 무원산 형제들의 신분과 내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20만 관이라니! 이번에 조정에서 서북의 승리를 치하하며 내린 상을 다 합쳐도 20만 관이 채 못 되는데. 서북 전체에 내린 상이 20만 관인데, 그들 일곱 형제의 재산이 20만 관이라······.

그렇게 돈이 많은 자들이, 군에는 뭐하러 들어와! 일부러 날 엿 먹이려고?

“강 대인, 주 대인.”

장수 하나가 머뭇거리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의심할 때가 아닙니다. 우린 이제 한배를 탄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 저쪽에서 칙사가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않으면, 오늘 보고 들은 바를 전부 폐하께 고할 텐데, 그렇게 되면 정말······.”

관청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칙사지.

노발대발하며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경성으로 돌아가려던 칙사를 눌러 앉히기 위해 이들은 방금 전 무려 1만 관이나 되는 돈을 찻값으로 준 터였다.

20만 관이라······.

강문원의 머릿속에 그 어마어마한 액수가 스쳐 지나가자, 또다시 욕이 터져 나왔다.

권력을 겨루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돈을 놓고 겨루는 거였군. 그 빌어먹을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데, 거기서 방심했어.

“대인, 이 일은 어쨌거나 방중화가 공을 노리고 거짓 보고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전투를 치르고 난 터라 피해가 막심한 탓에 군을 다독여야 했습니다. 대인께서는 그자에게 속았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진상을 알게 되신 겁니다.”

장수 하나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가자?”

강문원이 무거운 표정으로 탁자를 부여잡았다.

“무슨 수가 더 있겠소? 그럼 그자가 공을 인정받고 승진하도록 우리가 협박했다고 할까?”

주봉상이 말했다. 강문원은 주봉상을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인, 시간이 없습니다.”

“대인, 더는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장수들이 말했다.

“그럼 저들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텐데.”

강문원이 말했다.

“지금 더 밝혀질 게 있단 말입니까?”

누군가가 다급한 투로 대꾸했다.

서북의 관인이 찍히기 전까진 완전히 밝혀졌다고 볼 수 없지.

강문원이 탁자를 잡은 채 고민에 빠졌다.

“대인, 저들 또한 당시 방중화의 일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잖습니까. 따지고 보면 장수가 수하를 버리고 도망친 일이 억울한 겁니다. 그 억울함을 풀어 주면 될 일이지요.”

누군가가 재촉하자 관청에 있던 다른 이들도 동조했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군. 더 시간을 끌다간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빨리 매듭을 짓는 게 나아. 기껏해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로 폐하께 꾸중이나 듣는 정도겠지.

“방중화를 데려와라. 칙사 대인께서 친히 하문하실 것이니 죄를 숨김없이 자백해야 할 것이다.”

강문원은 ‘친히’와 ‘숨김없이 자백’이라는 말에 유독 힘을 실었다.

“잘 감시해야 합니다. 괜히 도망쳐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낭패예요.”

장수 하나가 덧붙였다. 대청에 서 있던 측근들은 눈빛을 반짝이고 얼른 허리를 굽히며 알았다고 했다.

관청 앞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자마자 달아났던 방중화는 성을 나가지 못했다. 성문 앞에서 위병들에게 막혔다. 별별 말을 다 늘어놓고 별별 사람 핑계를 다 대도 소용없었다. 결국 방중화는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뜻밖의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획한 일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문에 있던 이들이 왜 방중화를 막았겠는가. 관청 쪽에서는 아직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이는 소란을 피우며 증언하겠다고 나선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분명 관청 사람이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포승줄에 묶인 채 성문 근처의 누추한 방에 갇힌 방중화는 자리에 앉아 이를 갈며 분을 삼켰다.

누구지? 대체 누구야?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문밖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누군가가 문 앞으로 와 섰다.

“방중화, 칙사께서 하문할 게 있다며 부르신다.”

문밖에 있던 이가 말했다. 그 말에 방중화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분했다.

이 몸만 처벌하고, 네놈들은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과 그들 손에 들려 있는 낡은 천을 보자 방중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왜들 이러는 거야? 난 칙사를 뵈어야······.”

문이 닫히면서 시야가 가려졌다. 흐느끼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말라고!

마지막 숨이 끊어지던 순간, 시야가 흐려진 방중화의 귀에 그 외침 소리가 들렸다.

  • 아니, 사실대로 하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요. 방 대인, 대인이 얻은 공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대인이 그 공로를 얻는 게 응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지도 않을 거고요. 단지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공로가 조정에 보고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형제들뿐만 아니라, 끝까지 성보에 남아 싸웠던 감용 병사들까지 전부 포함해서 보고되어야 하고, 그에 합당한 추서가 있어야 합니다.

  • 염병할 방씨 놈아! 나중에 후회하지 마!

그들 말대로만 했으면 간단했을 일인데······. 적어도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낫잖아.

방중화의 목이 옆으로 축 늘어지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선홍색 관인이 상소문 위에 무겁게 찍혔다. 주봉상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운 한숨을 토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이들도 그와 같은 모습이었다.

서리가 조심스레 상소문을 올렸다.

“대인, 수고가 많으십니다. 증인들의 증언은 전부 여기 담았습니다만, 괘씸한 방중화 놈은 처벌이 두려워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강문원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칙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옷소매 속에 든 찻값을 봐서 그냥 넘어가는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어린 내시가 상소문과 증언이 담긴 문서를 받아 경성에서 가져온 황색 꾸러미에 담았다.

칙사와 어린 내시가 말에 올랐다. 먼지를 휘날리며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무리를 쳐다보며 강문원은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이제 우린 조사에 소홀했던 죄를 청하는 청죄(請罪) 상소를 올리러 가야겠군.”

강문원의 말에 장수들과 관리들이 네 하고 대답했다.

조사에 소홀했던 죄 정도면 감당할 수 있지. 기껏해야 녹봉이 삭감되고 폐하께 꾸중 몇 마디 듣는 정도일 테니까.

이번 일은 이렇게 지나가는군.

강문원은 못마땅한 마음을 꾹 누르며 옷소매를 홱 뿌리치고 뒤돌아 관청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비가 내리면서 9월의 경성은 한층 서늘해졌다. 큰길을 달리던 일행 중 하나가 앞쪽 길가에 보이는 점포 깃발을 보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저기가 바로 태평거일세. 저기 두부가 아주 일품이라지. 우리도 가서 요기나 하고 가자고.”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길가에 있던 행인 하나가 이들을 불러세웠다.

“가지 마시오, 가지 마. 지금은 가면 안 돼요.”

행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리자, 일행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가면 안 된다는 거요?”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라 모르는구먼. 태평거가 송사에 휘말렸소.”

행인의 말에 일행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 송사 때문이었군. 그게 뭐 겁난다고.”

그러자 동료들이 놀라 물었다.

“송사에 휘말렸다는데 겁이 안 나?”

“소문도 못 들었나? 이 태평거는 금강역사께서 지켜 주는 곳이야. 전에도 송사에 휘말린 적 있는데 결국 아무 일 없었어.”

동료들이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행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엔 다르오. 이번에 금강역사께서 만난 분은 무려 천자시거든.”

천자?

일행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행인이 늘어놓는 말을 듣고 즉시 말 머리를 돌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을 달려 떠나갔다.

큰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무조건 태평거로 향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태평거 안이 썰렁한 건 아니었다.

대청에 있는 탁자에는 손님들이 몇 자리 앉아 있었다. 평범한 백성도 있고, 서생이나 상인도 있었는데, 다들 자리에 앉아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신분은 각기 다르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화제는 같았다. 태평거의 행수와 무원산 형제가 조정과 대치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 낭자가 도조 이 진인의 제자라는 소문 덕분에 백성은 자연스레 정 낭자 편을 들었다.

“생각해 보라고. 이 진인께서 직접 거두신 제자인데, 거짓말을 하겠나?”

“맞아. 조정에서도 참 너무해. 신선의 제자까지 못살게 구는 걸 봐. 그러니 우리 같은 백성은 더 살길이 막막하지.”

백성들이 나지막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다른 탁자에 앉아 있던 상인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살게 굴 수밖에. 신선의 제자 손에 있는 비술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라고. 그게 다 돈인데.”

“그러니 명성이 아무리 높아도 무슨 소용이야. 기반이 없는걸.”

“기반이 아예 없다고 볼 순 없지. 그래도 관리 집안 여식인걸.”

“관리 집안이 어디 한둘인가? 그 정도 출신은 아무것도 아니지. 일이 생겼을 땐 아무 도움도 안 돼.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일로 불똥이 튀어 피해나 볼 뿐이지.”

상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옆에 있던 서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아무 기반도 없는 사람이 명성만 높으면 그건 오히려 머리 위에 걸린 칼이나 마찬가지야. 떨어졌을 때 다치는 건 자기 자신뿐이거든.”

서생 하나가 말했다.

“그런데 이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긴, 입을 뻥긋거려 일어난 일이지.”

한 사람이 찻잔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서생이 대청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거리고 골목이고 할 것 없이 죄다 조정을 욕하고 있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솜씨가 아주 쓸모 있는 모양이야.”

“어디 백성뿐인가. 정 낭자의 편을 드는 관료들도 한둘이 아니야. 그 낭자는 어사대 감옥에서도 아주 마음 편히 지내는 것 같더라고. 이유가 뭐겠나. 신선 낭자한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지. 세상 이치가 그렇잖아. 은혜를 입었으면 좋은 말을 해 주는 게 당연해. 거창한 도리를 운운하지 않아도 말일세.”

대청에서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소리는 창문을 통해 위층까지 전해졌다. 주육낭은 어쩐지 더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문을 닫으라니까, 뭐하러 열어서는. 괜히 저런 쓸데없는 말이나 나오게 하고.”

주육낭은 못마땅한 듯 툴툴거리고, 손에 든 술잔을 탁자로 집어 던졌다.

“애초에 집안에 일이 있어서 사흘 쉰다고 했잖아. 말을 안 지켰다간 정말 관부에서 협박을 받은 모양새가 되는데.”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문을 열면 협박을 받지 않은 게 되나?”

“그야 당연하지.”

진십삼은 주육낭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본인만 아니면 되는 거야. 그럼 영원히 남들이 하는 말에 불과할 뿐이지.”

주육낭은 답답해하며 찻잔을 들었다. 다시 창밖의 큰길로 시선을 돌리던 주육낭이 순간 벌떡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갑작스레 움직이는 바람에 찻물이 몸으로 튀었다.

“왔다!”

주육낭이 소리쳤다. 진십삼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말 두 마리가 큰길을 쏜살같이 달려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긴 했지만 조정의 급각체(急脚遞: 급한 공문서를 말이나 사람이 빨리 전달하던 제도. 하루에 400리에서 500리를 주파)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네. 거드는 사람이 생긴 모양이야.”

진십삼이 천천히 말했다. 그 말에 주육낭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봤다.

무슨 일인데? 거든다고? 뭘 거들어? 지금 같은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

급각체는 곧장 성문을 지나갔다. 거리의 행인들은 재빨리 비키며 길을 내주고, 더 큰 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는 시끄러운 저자 근처 골목에 있는 장씨 저택까지 들렸다.

“어서 가서 물어봐라. 무슨 일인지 물어봐.”

늙은 문지기가 사환을 재촉했다.

“저 아저씨가 요즘 무슨 바람이 불어 저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진 거야.”

사환은 투덜대면서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갔다. 얼마 안 가 사환이 돌아왔다.

“급각체 하나가 지나갔대요.”

사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지기가 벌떡 일어섰다.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왔군요!”

문지기는 사환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부랴부랴 후원으로 달려갔다.

후원에 있는 노태야의 거처 회랑 아래에서는 몸종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고 있었다.

“반근, 이건 아무나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당에 선 장 노태야가 동백나무에 가지를 치며 말했다.

“너희 낭자가 이번엔 실로 아둔하게 굴었어.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다니. 폐하의 눈엔 엄청난 잘못으로 보일 수밖에.”

몸종은 그 말에 더욱 큰 소리로 흐느꼈다.

“노야도 괴력난신을 싫어하고 명성에 기대 백성을 속이며 군주를 기만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이다. 노야가 편들어 줄 거란 생각은 접는 게 좋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폐하는 인자한 분이니 기껏해야 몇 마디 나무라고 마실 게야. 너희 아씨를 어떻게 하실 분은 아니다.”

“만에 하나 저희 아씨를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면요? 아씨는 충분히······.”

몸종은 거기까지 말하고 얼른 말을 멈췄다. 가위를 들고 허리를 구부린 채 분재를 마주하고 있던 장 노태야의 손도 순간 멈칫했다.

충분히 번개를 불러 벼락을 맞힐 수 있는 사람이지.

진작 예측은 했다만, 오늘 그 사실을 두 귀로 듣게 됐구나. 어린 낭자가 참······.

장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똑바로 섰다.

“반근, 너무 걱정 말거라.”

장 노태야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너희 아씨는 능히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다. 원칙을 지킨다고는 하나 결코 인자하지는 않지. 아끼는 몸종에게 순탄한 앞길을 열어 주면서도, 자기에게 더 필요한 이를 데려가는 걸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어. 매정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크게 비난할 일은 아니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부류는 절대 아니야.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결과를 그 낭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지. 헤어나올 수 없는 불구덩이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을 리가.

분명 여지를 남겨 두었을 것이다. 몸종에게 딱 부러지게 설명해 주긴 힘들지만.

“반근, 급각체가 왔다. 급각체가 왔어.”

마당에서 늙은 문지기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두고 보면 되겠구나. 곧 결과를 알 수 있을 테니.

장 노태야는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 가지치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급각체가 거리를 달릴 무렵, 황궁 안에서는 일상적인 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군사에 관한 일과 정사를 어찌 만백성이 논한단 말입니까. 지금 모두가 무원산 일을 떠들어대는 통에 온 경성이 시끌시끌합니다. 황당한 얘기도 수없이 나오고 있고요.”

어사 하나가 말했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냉랭한 표정이었다.

노정이 상소를 올리고 온 경성이 무원산에 대해 떠들기 시작한 데다, 서북 일을 재조사하라는 어명까지 떨어지면서 어사대의 어사들은 전부 분주해졌다.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세라 온갖 사건을 들춰내 조당에서 문제 삼으며 탄핵했다.

오늘은 그래도 많지 않은 편이었으나, 고개를 돌리자 탁자 위에 무더기로 쌓인 탄핵 상소가 보였다. 하지만 황제는 성가신 눈치였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힘들다(防民之口甚于防川 - <사기>)고 했소. 이미 일어난 일인데, 백성들이 떠드는 걸 막을 수 있겠소?”

어사는 황제가 입을 열자 더 신이 났다. 계속 말할 수 있는 핑곗거리를 준 것 같았다.

“전부 소인배 노정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어명을 어기고 국사를 그르친 탓에······.”

그때 누군가가 반박하고 나섰다.

“서북 일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누가 백성을 속이고 조정을 기만하며 국사를 그르쳤는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그 말에 더욱 분노한 어사는 한발 앞으로 나가 진소를 겨냥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북 군영과 관계된 대사(大事)를 일개 무당 따위가 우롱했소. 진소, 그대는 참정이란 사람이 사정을 알면서도 간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파를 탄압하는 일에 이용하며 천자의 은혜를 저버렸소이다. 국사가 중한 법인데 재조사라는 황당한 말로 폐하를 협박했지. 천하 만백성을 현혹한 꼴이니 이임보(李林甫: 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으로 유능한 관리를 배척하여 당을 쇠퇴의 길로 이끈 인물)의 무리와 다를 바 없소.”

대전에 서 있는 진소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어사는 천자의 명을 받아 풍문을 듣고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를 아뢰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러니 진소 같은 지위에 있는 자는 탄핵에 대해 곧장 반박하는 건 불가능했다. 탄핵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민간과 조당이 시끄러워지면서 정사가 지체되기 마련이었다.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고능준은 그런 황제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짓고, 조정 대신 하나를 향해 눈짓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대신이 얼른 나섰다.

“폐하, 태상시에서 아뢰기를 경성 서쪽에 사는 백성들이 태일궁(太一宮)에 신의사(神醫祠: 신의의 사당)를 짓고 정 낭자 조각상을 도교 이 진인의 옆에 두어 섬기게 하고자······.”

그 말에 대전은 온통 아수라장이 됐고, 황제는 ‘하’ 하며 한탄하는 소리를 냈다. 딱히 뭐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탄 소리만으로도 그 분노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아뢰옵니다.”

대전 문밖에서 보고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서성에서 서북의 급각체를 보내 왔습니다.”

서북!

소란스럽던 대전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벌써 당도했다고? 최소 여드레에서 열흘은 잡아먹을 줄 알았는데.

“들라 해라.”

황제가 말했다.

온 조당의 이목이 한곳으로 쏠렸다. 황제는 서북 관청의 관인을 찍어 밀봉한 서찰을 내시에게서 받은 후, 서찰을 열어 눈으로 쓱 훑었다.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됐구나!

진소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당에 있던 이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번개를 불러 벼락에 맞는 일을 구경하긴 글렀나 보네.

은근히 아쉬워하는 관료도 절반 이상이었다.

이 쓸모없는 놈들!

고능준은 분노로 이를 갈면서도 밖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황제가 그 낭자를 지독히도 못마땅해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북 일이 그 낭자의 바람대로 되더라도, 큰 풍파를 일으키기는 힘들 터였다.

황제는 빠르게 서찰을 훑은 후 옆에 놓인 문서 몇 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붉은 지장이 빼곡하게 찍혀 있는 문서였다. 황제는 문서를 손에 들고 확인하지 않은 채 바로 입을 열었다.

“이자문.”

어사중승이 얼른 대답하며 앞으로 나와 섰다.

“어사대에서 결론을 내리시오.”

황제가 앞에 놓인 서찰을 가리키며 내시에게 눈짓했다.

“돌려 보게 해라.”

대황자는 손에 든 서찰을 들여다보고, 옆에 있는 고능준 손에 들린 문서를 쳐다보았다. 뭔가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방중화가 한 시진 동안 성보를 지키라는 명을 내렸으면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먼저 철수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에 남은 무원산 형제들이 힘겹게 싸웠고요.”

고능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옆에 있던 진소가 냉소를 지었다.

“고 대인, 시간이 되기도 전에 먼저 철수했다니요? 싸움이 두려워 도망쳤다고 해야지 않겠소.”

“싸움이 두려워 도망치다니요? 정녕 싸움을 두려워하는 자였다면, 애초에 그런 명을 내리지도 않고 바로 철수했을 거요. 수적 열세가 분명한 상황에 굳이 결사전을 벌일 필요는 없잖소.”

고능준 역시 냉소를 보이며 받아쳤다.

“결사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수적 열세에 놓였으면 성을 버리고 도망쳐도 된다는 말이오? 고 대인, 그리 말하면 서북에 있는 장수들이 서운할 거외다.”

어사중승이 가운데 서서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다들 말을 멈추었다. 밖에서 내시가 정 낭자를 인도해 후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고능준과 진소는 눈을 한 번 마주친 후, 서로 눈길을 외면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린 소녀가 바닥에 꿇어앉아 예를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황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언뜻 분한 눈빛이 스쳤지만, 황제는 재빨리 감정을 숨겼다.

“소녀, 폐하의 혜안에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사대에서 이미 사정을 듣고 온 터였다.

“네 오라비들의 공로와 포상은 중서성에서 심사하여 정할 것이다.”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감사의 절을 올렸다.

실내는 곧 침묵에 휩싸였고, 습관적인 위로의 말도 없었다. 빈말조차 건네기 싫을 정도로 황제가 이 일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능준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남을 해치지도 못하고, 저에게도 득 될 게 없는 일이 아닌가. 허울뿐인 명예를 얻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화를 자초한 게지!

“물러가라.”

과연 황제는 별다른 말 없이 정교랑을 돌려보낼 눈치였다. 정교랑은 감사의 예를 올리고 일어섰다.

“정씨.”

황제가 정교랑을 불러세웠다. 정교랑이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냐?”

황제가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공이 없는 자도 공을 다툴 수 있는데, 공이 있는 자가 왜 공을 다툴 수 없단 말입니까. 소녀는 공을 다투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황제는 정교랑을 힐끔 쳐다보고 손을 내저었다. 내시가 얼른 정교랑에게 눈짓하자 정교랑이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대신들이 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중서성과 어사대가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시오. 단, 방중화 하나가 죽은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지을 생각은 접어야 할 거요. 강문원은? 주봉상은? 청죄 상소를 올리게 하고, 녹봉을 삭감하시오.”

황제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들이 일제히 대답하려는데, 누군가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서북 감찰사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렸나이다.”

진소가 고개를 숙이고 상소를 올리며 말했다. 고능준은 멈칫했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들보다 좀 빠르면 뭐? 그래 봤자 직무에 소홀했음이 입증되는 것뿐인데.

가뜩이나 폐하께서 임관보의 일로 심기가 불편하신 이때, 저런 잔꾀를 부려 봤자 화만 자초할 뿐이지.

예상대로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제는 입을 열기도 귀찮은지 내시 쪽으로 손을 들었다. 내시가 얼른 손을 뻗어 상소를 받은 후 황제에게 올렸다.

상소를 열어 본 황제는 몇 줄 읽기도 전에 안색이 싹 바뀌었다.

방금 전 서북에서 온 상소를 읽을 때보다 표정 변화가 훨씬 컸다. 가까이에 서 있는 관료들 눈에는 상소를 든 황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무슨 일이지? 청죄 상소를 보고 어찌 저리 진노하신단 말인가.

고능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진소를 힐끔 쳐다봤다. 숙연한 진소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대전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황제는 서북에서 온 상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들여 청죄 상소를 읽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실내 분위기가 점점 굳어졌다. 내시와 관료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황제의 기분이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저건······ 분노야······.

분노?

임관보의 일을 알았을 때도 황제의 감정은 기껏해야 분하다는 정도였다. 주봉상이 잔꾀를 부리면서 청죄 상소를 올리고 빠져나가려 한 일로 부아가 치밀었다 한들 가소롭다고 냉소나 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런데 분노라니?

대체 무슨 일이지?

“괘씸한 놈들! 짐을 이토록 기만하다니!”

조용했던 대전에 갑자기 폭발하는 듯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도, 밖에서 층계를 내려가던 내시조차 그 소리에 걸음을 우뚝 멈추고 놀라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황제가 저토록 진노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여인의 가벼운 기침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내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신의 시선이 여인의 몸으로 향했다. 여인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어서 길을 안내하라는 듯한 눈빛만 보일 뿐이었다.

천자를 알현할 때도 겁먹지 않더니, 천자께서 격노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군. 어린 낭자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야.

내시는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굳게 닫힌 문과 창문 안에서 말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내시는 감히 귀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공이 없는 자도 감히 공을 다투는데, 공이 있는 자가 왜 공을 다툴 수 없느냐고 한 거지.

정교랑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정교랑은 내시를 따라 크고 작은 전각이 겹겹으로 늘어선 황궁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 뒤로 내시들이 중서문하성 등 관청이 모인 곳으로 허둥지둥 달려가며 흩어졌다.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렸다고 하오!”

“무슨 죄목으로? 무원산 사건을 덮기로 한 죄?”

“아니, 서쪽 오랑캐의 주력군과 싸운 전투에서 군공(軍功)을 거짓으로 보고했다는군.”

“세상에, 어떻게 군공을 거짓 보고할 수 있어?”

황궁 대문이 아무리 굳게 닫혀 있다고 한들, 소문은 황제의 성난 호통 소리와 함께 중서문하성 등 수많은 관청으로 금세 퍼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것은 아주 중대한 사건이니, 이 사건에 비하면 무원산 형제들의 일이나 신의 낭자가 번개를 불러들인다는 등의 일은 그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는 군주를 기만한 대죄였다. 대주의 조정은 문인을 우대하여 문관을 죽이지 않지만, 무장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을 내렸다. 정당한 사유 없이도 대장군을 죽일 수 있는 조정이니, 감히 군공을 거짓 보고한 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이 얘기가 나온 거야?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하긴 했지만, 그건 임관보 전투에서 방중화가 한 짓이잖아.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서쪽 오랑캐의 주력군과 싸운 전투의 군공 얘기가 나오느냔 말이야!

대전 조당에 서 있던 고능준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당시 서쪽에 있던 척후병이 먼저 달려와 보고했습니다. 적군의 수가 오천이라고요. 하지만 용곡성에는 만 명이 넘는 병력이 있었기에 분명 용곡성 병사들이 이길 전투라고 판단하고, 다른 척후병들의 보고를 듣기도 전에 전투를 명했습니다.

하지만 임관보의 봉화와 전령병의 급보를 확인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병사가 오랑캐를 포위한 게 아니라, 반대로 오랑캐들이 뒤에서부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것을요.

전방에 있는 오랑캐 병력은 이천 남짓이었으나, 후방에도 오랑캐의 주력 정예군 팔천이 있어 협공을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오랑캐들은 두 성보를 도륙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 병사 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다행히도 용곡성을 사수한 덕에 서쪽 오랑캐의 주력 정예군은 결국 퇴각했습니다. 사실상 오랑캐가 패배하여 퇴각했다기보다는, 쌍방의 대치가 오래 이어지다 보니 명확한 승패를 가를 수 없게 되어 퇴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신이 이번 전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철저하게 준비했더라면, 오랑캐들의 함정에 빠져 수많은 군사를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감찰사임에도 공을 세우기 급급하여, 폐하의 은덕에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청죄 상소를 읽는 내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헛소리야! 모두 다 헛소리야! 이건 음모라고! 사람을 현혹하는 말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야!

어떻게 됐든 간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잖아. 용곡성 함락도 막아냈고, 결과적으로는 오랑캐가 물러났으니,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것도 아니야!

“거짓 보고가 아니라면, 왜 임관보의 일을 위아래로 꼭꼭 숨겼지? 조사도 안 하고, 보고도 안 했어. 어째서 그 무원산 형제가 경성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우도록 만들었느냐는 말이오.”

황제가 천천히 말하면서 고능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능준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정리가 됐다.

“짐은 이번 급각체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로 급했던 모양이로군. 이 사건을 조사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리 급하게 움직였던 거였어.”

황제의 목소리가 고능준의 머리 위에 돌덩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쾅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고능준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고능준이 진소를 노려보았다.

진소! 내가 속았구나!

황제가 진소와 정 낭자의 관계를 알아챌 수 있도록 귀띔해 왔는데, 진소가 자연스레 이를 이용하다니! 내가 속았어!

진소가 정 낭자를 보호하려고 나선다면, 그 오라비인 무원산 형제들의 임관보 일에 진소를 엮어 끌어내리려 했다. 진소라고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정 낭자를 위하긴 개뿔, 무원산 형제들을 위하긴 개뿔! 서북 관청에서 임관보의 일을 시인하게 만들려던 거였어!

그게 사실이 되면, 황제의 의심이 사실로 입증되니까.

임관보의 일이 참이라면, 또 무슨 일이 참이려나? 임관보의 일도 숨겼는데, 또 무슨 일을 못 숨기겠어?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딱히 대수로운 일도, 겁낼 일도 아니니까. 주봉상 혼자 죄를 시인하는 게 아니라, 서북 관청 사람 전체가 죄를 시인한다 해도, 무서울 건 없지.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폐하의 의심이 아니던가!

이번 서북 관청의 일로 황제의 의심을 사게 된다면, 이후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언사 또한 의심받을 터. 빌어먹을, 이건 서북 관청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일이라고!

고능준은 일순간 살인 충동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진소를 한입에 집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저놈, 어떻게 한 거지? 분명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봤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한 거냐고!

모든 게 내 계산 속에 있었어. 그래서 경계심을 푼 건데, 그 틈을 파고들 줄이야!

고능준의 시선이 진소에게로 향했다. 무원산 형제들의 일이 어떻게 매듭지어지든 간에, 황제는 진소와 정 낭자에 대해 염증을 느낀 건 분명했다. 그래서 고능준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매미를 잡느라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참새를 보지 못하는 사마귀 꼴이 되어 버렸다.

진소!

고능준은 어금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황궁 대문이 굳게 닫혀 있다 해도, 조당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려 서북 관청의 군공 거짓 보고 사건을 밝힌 일은 온 경성에 바람처럼 퍼졌다. 이미 풍랑이 일기 시작한 조정에 더욱 무시무시한 파도가 덮쳤다.

“이야, 주봉상이 목숨까지 내놓고 그런 일을 벌이다니. 자신의 앞길을 내건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진 상공이 마지막에 둔 한 수가 정말 독하고 정확했어. 서북 관청에서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한 방에 골로 보내 버린 셈이니까.

“주봉상을 내어주고, 강문원을 쳐낸다? 아니지, 아니지. 강문원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야. 강문원에게 줄을 댄 사람들이 모조리 흔들리겠어. 꽤 해 볼 만한 도박인걸.”

“그리고 군공을 거짓 보고한 게 어디 이번 한 번뿐이겠어? 전부터 그런 짓을 얼마나 많이 해 왔겠느냐고.”

“맞아. 폐하께서도 신의 낭자와 무원산 형제들 일로 망신을 당해 분을 삭이고 계셨을 텐데, 서북 관청에서 제 발로 찾아와 때려 달라고 얼굴을 내민 거잖아. 폐하께서 때리시지 않으셨다면 오히려 저들이 무안했을 정도야.”

“그럼 끝났네. 이번에 조정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겠지?”

“옥사가 벌어질지도 몰라.”

“자네 생각엔 몇 명이 들어갈 거 같아?”

“드디어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니!”

관청 관리들의 입을 타고 오르내리던 여러 가지 말이 급기야는 경성 저잣거리의 술집과 찻집까지 흘러 들어갔다.

-좋은 소식-

“다른 건 모르겠고, 지지리도 운 없던 노정은 확실히 무사하겠어. 충심이 지극하여 조사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들을걸.”

장씨 저택 안. 장 노태야가 한 식객에게 말하자, 식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정은 이번 기회로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복직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장 노태야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아마 다음번 어사중승 직책을 노려볼 수도 있겠지.”

장 노태야가 식객과 얼굴을 마주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쪽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몸종이 참다못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노태야, 노태야. 저희 아씨는요?”

몸종이 다급하게 물었다. 노정이 누구든, 서북 관청이든 뭐든, 몸종은 오로지 폐하께서 아씨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장 노태야가 몸종을 쳐다보고는 식객에게 시선을 돌렸다.

“봤나? 서너 해가 지났는데도, 난 여전히 이 아이의 윗전이 아닐세.”

장 노태야를 따른 지 어느덧 서너 해가 된 몸종은 장 노태야의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앞으로 몸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노태야, 소인은 아둔해요. 부디 그만 놀리세요.”

몸종이 눈시울을 붉혔다.

“반근, 걱정하지 말아라. 노정과 네 아씨는 같은 편이다. 노정이 무사하니, 네 아씨도 당연히 무사할 게야.”

식객이 웃으면서 몸종에게 말했다.

몸종이 식객의 말을 듣고 재빨리 장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장 노태야가 몸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몸종은 그제야 기쁨의 눈물과 함께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두 손을 합장했다.

“정 낭자가 무사하다고는 하지만······.”

싱글벙글 뛰어나가는 몸종을 보면서 식객이 조용히 읊조렸다.

“낭자가 득을 봤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식객의 말에 장 노태야는 말없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서북 사건이 어떻게 됐든, 누가 이득을 취하고 누가 재수가 없게 되든 간에, 정 낭자에게는 좋은 점이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폐하와 대신들은 이 일이 어쩌다 커진 것인지 똑똑히 기억할 테니까요. 정 낭자가 자신의 명망을 이용해 이번 사건을 키운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점이 정해졌겠죠.”

식객이 천천히 말했다.

자신의 명망을 이용해 조정을 협박이라도 하듯 사건을 키우는 것은 조정에서 몹시 싫어하고 기피하며 가능한 한 윤허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 자네의 말은 정 낭자가 칼로 쓰였다는 것인가? 그렇다기에는 무원산 형제들이 명분을 얻지 않았나.”

장 노태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고작 명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의미가 있지.”

장 노태야가 탁자 위에 놓인 서책 위에 손을 올리고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정 낭자가 원했던 게 바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정당한 명분이지 않나.”

식객이 장 노태야의 손 아래 있는 서책을 슬쩍 보니, ‘태평경’이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거물이든 사소한 인물이든 죽었든 살았든, 그 모두에게 보여 준 바가 있잖나. 그 칼은 보통 예리한 칼이 아니야.”

장 노태야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그자들이 한 일을 다 알고 있었어?”

같은 시간, 옥대교 저택의 마당 안에서 주육낭이 정교랑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누가 네 명망을 이용해서 일을 키우고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트렸는지, 누가 서사근을 잡아들였는지, 누가 병사들과 장군들을 선동했는지, 누가 백성들에게 태일궁 앞에 네 생사당(生祠堂: 존경하는 인물을 위해 살아 있을 때부터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지으라고 부추겼는지.”

주육낭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무릎 위에 놓아둔 손에 어느새 힘이 들어갔다.

다, 모두가 그랬어. 네게 적대감이 있는 사람이든, 은혜를 입은 사람이든, 원수진 사람이든.

정교랑이 웃었다.

“난 알 필요 없어요.”

“그놈들이 널 발판 삼아 이득을 취하고 있잖아! 이 일로 너는 더 이상 경성에 남지 못할 수도 있다고.”

문가에 다다른 범강림이 주육낭의 목소리를 듣고는 우뚝 멈춰 섰다.

“누이.”

그가 정교랑을 부르면서 문가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일 때문에 누이가 경성에서 쫓겨난다고?

“내가 있고 싶은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있을 수 있어요.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순 없죠.”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리고 남들이 내 덕을 보는 건 관심 없어요. 내 관심사는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가죠.”

다른 사람이 뭘 얻었는지는 상관없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는지, 목적을 달성했는지가 더 중요했다.

“넌 그릇이 커서 참 좋겠다. 이렇게 관대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비아냥거렸다.

“소심한 건 자네지. 별일 아닌 것도 내내 잊지 못하고 구시렁대니.”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주육낭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난 아무리 사소한 일이어도 기억해. 이 여인 앞에서 스스로 쓸데없는 일을 만드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고, 이 여인은 언제나 개의치 않아 했지.

주육낭이 소매를 홱 털고는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낭자가 원하는 건, 시일이 좀 더 지나야겠습니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주봉상의 일로 중서문하성은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즉시 처리될 예정이었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와 포상도 자연스레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급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답례했다.

그건 급하지 않다고? 그럼, 뭐가 급한 거지?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낭자가 원하는 건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구나. 진소 등이 바라는 바를, 이 낭자라고 바라지 않을 리가.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정 낭자는 칼이 아니라, 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서북 관청 사람들이 가엾군. 이 여인이 얼마나 속 좁은 사람인지 모르고 있으니.

서북 관청 안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연회석으로 마련된 자리에는 향긋한 술과 맛있는 요리들이 잔뜩 놓여 있었지만, 대청 안은 텅 비고 오직 강문원만이 상석을 지키고 있었다. 환하게 밝혀진 등불 아래 비친 강문원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했다.

오늘은 강문원의 생일이었다. 최근 밀려 들어오는 일들 때문에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는 있지만, 그럭저럭 마음 편한 나날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공로를 인정받은 강문원은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다니던 ‘부(副)’자를 머지않아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떳떳하게 경략사라는 직책으로 불릴 수 있으며, 경략사 자리를 얻는 동시에 지주(知州) 자리도 얻게 될 터였다.

물론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별일은 아니지만, 눈엣가시처럼 짜증을 불러일으키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인정해 준 사건이 그러했다.

결과적으로 그 사건 또한 강문원의 뜻대로 잘 해결되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 강문원의 첩실이 아들을 낳았다. 이번에 낳은 아들은 강문원의 열세 번째 아들이었다. 자식을 낳아도 키우기 힘든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몰랐다.

술술 잘 풀리는 일들 덕분에 강문원은 자신의 마흔여섯 번째 생일을 성대하게 축하하고자 했다. 그런데 경성에서 당도한 밀서(密書) 때문에 생일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손님석이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주! 봉! 상!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강문원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탁자를 뒤엎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접시와 술 주전자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죽여 버리겠다. 내가 꼭 죽이고 말리라!”

강문원이 소리치면서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회랑 아래 서 있던 수하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고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대인, 대인. 고정하십시오!”

수하와 식객, 그리고 막료들이 재빨리 강문원 앞을 막아서면서 그가 쥐고 있던 칼을 간신히 빼앗았다.

“지금 당장 죽여야겠다. 지금 당장!”

강문원이 음험하고 표독한 표정을 지으면서 외쳤다.

“대인, 대인 말고도 주 감찰을 죽이고 싶어서 혈안이 된 자들은 차고 널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자를 죽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전투 중에 말에서 떨어졌다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해도 의심할 자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도 아닌데, 용곡성 안에서 그자를 어떻게 죽이시겠다는 말입니까?”

막료가 강문원을 다독이며 말했다.

더군다나 강문원은 경성의 밀서를 받자마자 사람을 보내 주봉상을 불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봉상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연회에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미 관복을 벗어 던진 채 자진 투옥한 상황이었다. 벌을 기다리는 죄인의 신분이니, 감옥에 앉아 조정에서 내려오는 흠차(欽差: 황제의 명으로 보내는 파견인)를 기다리겠다나.

“자진해서 감옥으로 들어가지 않았느냐. 옥에서 사람 하나 죽는 게 뭐 대수라고!”

강문원이 눈을 부라리고 이를 갈면서 말했다.

무관이었으면 벌써 죽고도 남았을 텐데, 주봉상은 하필이면 문관인 데다가 스스로 청죄 상소까지 올렸으니.

“대인, 지금 같은 때 주 감찰이 죽으면 더 큰일입니다. 지금 죽게 되면 모두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막료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그걸 모르겠나!

강문원이 소리쳤다.

“그놈이 계속 살아 있다 해도 어차피 똑같아!”

강문원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날뛰며 안절부절못했다.

밀서를 받던 그 순간, 강문원은 단번에 깨달았다. 며칠 내내 자신을 괴롭혀왔던 이유 모를 불안함이 밝혀진 것이다.

어쩐지 계속 뭔가 이상하다고 했어!

그렇게 된 일이었군. 그렇게 된 일이었어!

서사근이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 정보는 누가 흘려보냈고, 일부러 사방에 찢어 놓았던 병사들이며 잡역부들은 어떻게 그리 우연히 모여든 것이며, 성을 빠져나가려던 방중화는 대체 누가 못 나가게 막았던 거야?

이 모든 건 내가 임관보 전투에 대해 인정하고, 상소문에 내 이름이 박힌 도장을 찍게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어!

“이건 속임수다. 이건 거짓 증거라고! 모두 함정이었어!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게 무슨 대수라고. 거짓 보고는 무슨! 전투에서 이겼으면 허풍을 좀 치고 다닐 수도 있지. 공로를 부풀려 말하고, 양민을 죽여 공로를 가로채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어?”

분을 이기지 못한 강문원이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떠들어대자, 막료들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강문원의 말대로,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하는 일이 그리 드물지는 않았다. 역대 전투에서도 공로를 부풀려 보고한 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참 우스운 것이, 별일이 아니라고 할 땐 별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별일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번 군공 거짓 보고 사건이 조정에 올라간 시기도 어쩜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임관보 전투의 공을 가로챈 일을 시인하던 바로 그때, 하필 경성에서는 한 여인의 압박에 못 이겨 황제가 재조사를 천명하지 않았던가!

“이번 일은 폐하의 용안에 먹칠을 하고, 폐하의 체면을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과 마찬가지지요.”

막료들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대로하지 않으시는 게 더 이상하지. 주봉상이 정말 독하고 날카로운 수를 두었어.

강문원이 홧김에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발로 차서 부쉈다. 그 위에 놓여 있던 의장 등의 물건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대인께서도 당연히 상소문을 올리고 변론을 하셔야겠지만, 절대로 경성에 불려 가시면 아니 됩니다.”

내가 경성으로 불려가게 되면, 분명히 끝도 없는 싸움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서북으로 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겠지.

그래. 내가 경성으로 가서는 안 돼. 경성으로 가게 되면,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거야.

“하지만, 가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강문원이 이를 악물었다.

주봉상이 일을 이렇게까지 키웠으니, 조정 대신들은 필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들 것이다. 그리고 이 일로 폐하께서 대로하셨는데, 내가 버티고 가지 않을 방법이 있겠느냔 말이다.

“아직 칙사가 당도하기 전이니, 좀 더 방도를 생각해 보지요.”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던 막료들은 칙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강문원에게 말했다.

아직 엄동설한의 찬바람이 부는 겨울도 아니건만, 마당에 서 있던 강문원은 밤바람에 뼈마디가 시린 기분이 들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관청에 있던 사람들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졸음에 무뎌진 건지 아무도 졸린 기색이 없어 보였다.

무수히 많은 관보와 문서, 그리고 병서들이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이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 줄 방도는 찾을 수 없었다.

“내 일단 주봉상부터 죽이고 봐야겠다!”

강문원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막료들이 다급하게 강문원을 붙잡았다.

“대인, 그자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으시려는 겁니까!”

“맞습니다. 아직 어떤 결정이 나올지 모를 일입니다. 대인께서 서북을 떠난다고 해도, 다른 부임지로 가시겠지요. 고 대인께서 대인을 보호해 주실 테니, 머지않은 시일에 분명히 재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젯밤에 경성으로 가면 안 된다고 할 땐 언제고.

냉소를 보이던 강문원의 눈빛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이미 절반은 진 싸움이야.

“급보입니다. 급보요.”

병졸 하나가 급보를 외치면서 관청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청산보에서 온 급보입니다. 동남쪽으로 오랑캐들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귀순하게 된 흑산 번족(蕃族)을 공략한답니다. 흑산 번족이 원군을 청했습니다!”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랑캐의 병력은 얼마나 되느냐?”

노장 강문원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만 명이옵니다!”

병졸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금패와 함께 관인을 찍어 밀봉한 서찰을 내밀었다.

이만 명!

관청 관리들은 더욱 놀라서 얼굴에 핏기가 없어질 정도였지만, 곧바로 무언가 떠오른 듯 혈색을 되찾았다.

“잘 왔다, 잘 왔어. 마침 잘 왔어! 하하하하!”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웃음소리가 관청 내에 울려 퍼졌다. 무릎을 꿇고 있던 병졸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적군이 이만 명이나 된다는 게, 그렇게 좋은 소식인가?

물론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감옥에 있던 주봉상은 소식을 듣자마자 시종일관 유지하던 담담한 표정을 잃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굴색은 차츰 잿빛으로 변했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두 손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결국, 모든 일은 때와 운명이로구나.”

주봉상이 중얼거렸다.

지체 높은 관료나 장수들은 이러한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받는 데 반해, 말단 병졸이나 감옥에 갇힌 병졸이 소식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었다. 물론 이들이 소식을 듣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전장에 나가게 하려나 모르겠네.”

“공이라도 세워서 속죄하려고?”

감옥에 갇힌 몇몇 병졸이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감옥 구석 자리에 쭈그려 앉아있던 서사근과 유규는 병졸들의 농담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서로의 눈에 비친 절망감을 응시했다.

다 끝났군. 강문원을 경성으로 보내지 못하게 됐어.

정말 하늘이 강문원을 도와주는 건가?

흑산 번족이 도움을 요청한다는 소식이 경성에 닿았을 무렵, 서북과 마찬가지로 경성에서도 듣는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고, 어떤 이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식을 듣고 웃음을 터트리거나, 얼굴색이 창백해지는 사람들은 전쟁이 우습거나 무서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때와 운명에 대한 감탄을 뱉은 것이다.

“또 한 번 큰 싸움이 벌어지겠군. 이번엔 강문원이 무사하겠네.”

“그러게. 전시에 장수를 바꾸는 건 모두가 금기시하는 일이니, 아무리 폐하라도 강문원을 못 건드리시겠어.”

“강문원이 운이 좋았어.”

아직 조당에서 논의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황궁 밖에 있는 이들은 이미 조정 대신 결론을 내렸다.

장 노태야는 천천히 손에 쥔 가위를 내려놓으며 가지치기를 하던 분재를 쳐다보았다. 장 노태야가 조용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적어도 얻은 건 있지. 명분을 바로 했으니 말이야.”

장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명분을 바로 했으면 뭐 어쩔 텐가. 무명이었던 무원산 형제가 이름을 알리고 명예를 얻었듯, 서북에 있는 이들도 능히 그럴 수 있을 텐데.

“모든 게 다, 때와 운명이구나.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한참을 생각하던 장 노태야는 결국 가위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성을 내고 옥대교를 떠나며 다시는 오지 않겠노라 맹세했던 주육낭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옥대교로 달려왔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주육낭은 이번에도 한발 늦었다.

“아씨께서는 진 상공 댁에 가셨어요.”

문 앞에 있던 사환이 말했다.

진소의 집에 갔다고? 진소를 찾아가서 뭐 해? 진소를 찾아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야?

고의든 아니든, 이번에 진소에게 당한 사람은 고능준 한 사람만이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진소 본인도 제 코가 석 자일 텐데.

정교랑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진(陳)씨 저택의 사람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온 진십팔랑은 저 멀리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진십팔랑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십팔랑, 안 가?”

진단랑이 갑자기 멈춰선 진십팔랑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일이 있어서 아버지를 뵈러 왔을 테니,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자.”

정교랑이 진소의 서재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진십팔랑이 말했다.

2년 전에 비하면, 키가 많이 커졌네.

“십팔랑, 저 사람이 정 낭자야?”

진단랑이 물었다.

“으이구, 정 낭자랑 제일 친했던 사람이 바로 넌데, 벌써 다 잊은 거야?”

진십팔랑이 진단랑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잖아. 까먹을 수도 있지.”

진단랑은 볼에 바람을 넣고 입을 삐죽이며, 서재 안으로 들어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여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린 여기서 잠시 기다리자.”

서재 문을 바라보던 진십팔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조당에서 돌아온 진소는 피곤에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정교랑을 맞이했다.

“정 낭자, 서두를 것 없습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진소의 말에 정교랑이 진소를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대인께서는 정도(正道)를 따르시는 분이니, 걱정하지 않아요.”

진소는 정교랑의 미소를 보고 흠칫했다.

정도라······.

  • 진 대인,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黨同伐異).’ 이것이 바로 진 대인께서 아셔야 할 정도입니다.

진소의 귓가에 2년 전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확실히 이번에는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불과 2년 전만 해도 내가 그토록 멸시하던 수단까지 썼지.

내가 고능준 그자를 조정에서 꼭 내쫓으려는 이유는 딱 하나야. 그자는 국사와 민생보다 사리사욕을 우선시하기 때문이지. 조정에서 그런 간악한 소인배를 중용해선 절대 안 돼.

고능준 일당은 틈만 나면 진소에게 그런 간사한 수법을 써 왔지만, 진소는 그들과 똑같은 수법으로 반격하는 걸 원치 않았고, 그런 고능준 일당을 같잖게 여기기도 했다. 그는 늘 자신이 당쟁을 하는 게 아니라, 관료로서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정도를 걷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진소는 시간이 지나며 알게 모르게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특히 이번 일을 겪으면서 더더욱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막료와 수하들이 이번 사건을 대처할 방법을 찾고 있을 때, 그들을 말리기는커녕 아예 발 벗고 나서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그러한 방법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진소는 자신의 앞에 단정히 앉은 여인을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도를 따르라고 충고했던 사람이, 결국 그 정도 때문에 피해를 본 심정이 어떨지. 정말로 모든 것은 때와 운명에 달린 셈이로구나.

“다만, 이번에도 대인의 운은 별로 안 좋았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소는 정교랑의 말이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비웃음. 하지만 이 여인에게 비웃음은 결례라 할 수도 없지.

“정 낭자, 이번 일에 대해서는 내가 방도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도 말고, 조급해하지도 마십시오.”

진소가 한숨을 토하고는 뜻하는 바가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떻게 급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대인께서는 급하지 않으신가요?”

정교랑이 진소를 쳐다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급하지 않냐고? 급하지 않았으면 하룻밤 사이에 입안에 포진이 이렇게 많이 생겼을 리가!

“정 낭자, 낭자를 돕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급해할 때가 아닙니다. 천천히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진소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교랑이 진소를 보며 그러냐는 투로 물었다.

“그럼 말을 바꿔서 해 보죠. 제가 대인을 돕는 건 어떨까요?”

나를 도와?

진소가 멈칫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낭자가 계속 나를 돕고 있던 건데.”

진소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요. 공연한 생각이에요. 전 누구를 돕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저는 단지,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누가 이 일로 이득을 얻든 상관이 없었던 거로군. 도울 마음이 없었는데도 이렇게 도움이 되는데, 작정하고 돕는다면 어떻게 될까?

진소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앉은 여인은 자신의 딸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다. 하지만 이 여인이 해낸 일들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손아랫사람처럼 대할 수 없었다.

“그럼 감사 인사부터 하지요.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말해 주십시오.”

진소가 진지하게 말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기필코 이 싸움의 승부를 가려야 했다. 또다시 지난번처럼 진흙탕 싸움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황제가 직접 나서서 중재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번에는 기필코 황제가 서북 군정에 대한 결단을 내리도록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주봉상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일이 웃음거리로 전락하리라.

“오라버니들의 공로 치하는 더 미루지 않았으면 해요. 당장 진행해 주세요.”

정교랑이 말했다. 놀란 진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공로? 우리가 얘기하던 화제가 언제 다시 공로로 돌아갔지?

“지금 공로라고 했습니까?”

진소의 물음에 정교랑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로죠. 폐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 아닌가요? 그렇다면 더 이상 시간 끌지 말아 주세요.”

일단 자신부터 돕고 나서 다른 얘기를 하라는 뜻인가?

진소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그건 정 낭자가 얻어 마땅한 것이야. 지금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폐하를 성가시게 하는 일밖에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문제 될 건 없지.

“알겠습니다.”

진소가 대답했다.

기다리다 지친 진단랑이 말했다.

“십팔랑, 난 어머니한테 갈래.”

진십팔랑이 재빨리 진단랑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곧 나올 거야. 무려 정 낭자잖아.”

진단랑이 십팔랑의 손을 홱 뿌리치며 말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아닌데 뭘. 십팔랑, 보고 싶으면 혼자서 봐. 뭐가 무서워서 그래!”

진단랑은 고개를 돌리고 냅다 뛰어가려고 했지만, 결국 한발 빠른 진십팔랑에게 붙잡혔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무섭긴 왜 무서워. 그때 정 낭자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보지도 않고 가게?”

두 자매가 아웅다웅하던 와중에, 서재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여종이 진십팔랑을 불렀다.

두 자매가 옥신각신하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정교랑과 시녀가 보였다.

짙은 색 치마에 짙은 색 덧옷을 입고, 나무 비녀로 머리를 한데 올려 묶은 뒤, 옆머리에 작은 은색 빗을 꽂은 정교랑의 모습은 일순간 낯설게 느껴졌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진십팔랑의 기억 속 그 모습과 똑같았다.

“정 낭자.”

진십팔랑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가 정교랑을 부르자, 정교랑이 웃으면서 목례를 했다. 시녀도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저기······.”

진십팔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내가, 우리, 아니, 내 서재에 잠시 앉았다 가는 건 어때요?”

정교랑이 아직 채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진단랑이 다가왔다.

“그쪽이 정 낭자예요?”

진단랑이 물었다. 진단랑에게 시선을 옮긴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진단랑이구나?”

“맞아요. 아직 날 기억하네요? 그런데 나는 그쪽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진단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단랑.”

진십팔랑이 다급하게 진단랑의 어깨를 툭 치면서 나무랐다. 정교랑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올라갔다.

“괜찮아요. 다시 알아가면 되죠. 나는 정교랑이라고 해요.”

정교랑이 진단랑을 향해 반절을 올리며 말했다. 진단랑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진단랑이라고 합니다.”

진단랑이 치마가 땅에 닿지 않게 살짝 올리고 무릎을 조금 굽히면서 정교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진십팔랑은 헛웃음이 나왔고, 옆에 서 있던 여종들은 조용히 웃음 지었다.

“역시 정 낭자는 어린아이랑 말이 제일 잘 통해.”

여종 중 하나가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통성명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음, 자세히 보니까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진단랑이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미소 띤 얼굴로 진단랑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 여기서 낭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쪽으로 가서 조금 앉았다 가겠어요?”

진십팔랑이 정교랑에게 앉았다 가기를 재차 권했다.

“아니요.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다음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건 완곡한 거절인가? 회피인가? 아니면······.

진십팔랑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스쳤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있는 정교랑은 어린 진단랑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며 속으로 반성했다.

정 낭자가 일이 있다고 했다면, 정말로 일이 있어서 거절한 걸 거야. 다른 뜻은 없어.

정교랑은 진단랑에게 가벼운 작별의 예를 표하고 걸음을 옮겼다.

“정 낭자, 앞까지 바래다줄게요.”

진십팔랑이 얼른 따라가며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본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정 낭자는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정 낭자는 여전히 말수가 적지만, 그 옆에는 항상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붙어 있어.

“우리는 친하지 않으니까,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단랑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나도 그래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나무라는 말 대신, 자신과 똑같다는 말을 들은 진단랑이 눈을 반짝거렸다. 진씨 가문의 여종들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솜씨가 제법이네.

“그래도, 말하다 보면 우리가 할 얘기가 생길걸요?”

진단랑이 활짝 웃고 정교랑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되니까.”

정교랑이 진단랑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팔랑은 한 발자국 뒤에서 다 큰 소녀와 어린아이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게 어딜 봐서 친하지 않다는 거야. 예전이랑 똑같은데 뭘.”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정교랑이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정교랑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진십팔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정 낭자, 반드시, 다 잘 해결될 거예요.”

“네, 다 잘 해결될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마차가 떠나가는 것을 하염없이 보던 진십팔랑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옆에서 재잘대는 진단랑을 따돌리고 혼자 진 노태야의 거처로 왔다. 진소도 진 노태야와 함께 있었다.

“아버지, 정 낭자가 도움을 청하러 온 건가요?”

진십팔랑은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고는 진소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애원하는 말투로 부탁했다.

“아버지, 정 낭자 좀 도와주세요.”

진소는 진십팔랑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정 낭자가, 나를 도우러 온 것이다.”

진십팔랑은 뭔가를 잘못 들은 것처럼 멈칫했다.

“아버지를 돕는다고요? 정 낭자가 아버지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데요?”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치하할 수 있게 하는 것.

진소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이 일을 진십팔랑에게 말해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게 도대체 누가 누구를 돕는단 말이지?

“그래. 정 낭자가 너를 도와주는 것이지.”

진 노태야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진소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때로는 도와줄 기회를 주는 게, 가장 큰 도움이기도 한 법이야.”

도와줄 기회가 제일 큰 도움이 된다고? 무슨 뜻이지?

진십팔랑이 의아한 얼굴로 진소를 쳐다보았지만, 진소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소원한 관계가 될 테지.

“이게 무엇이오?”

근정전 안. 상소문을 올리는 진소를 보며 황제가 물었다.

“무원산 다섯 형제의 포상에 대한 안건입니다.”

진소가 대답했다. 한쪽에 꿇어앉아 있던 진안 군왕과 대황자가 진소를 쳐다보았다. 대황자의 표정에서는 놀라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 이 시국에 그 얘기를 꺼내?

황제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소문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알겠소.”

황제의 대답을 듣고도 진소는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중서문하성에서 이미 심의된 안건이니,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

“정녕 그리 급하단 말인가!”

진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가 목청을 높여 호통쳤다.

“은혜를 갚는 일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급한 일이냐고 물었소.”

대전 안에 적막이 흘렀다. 황제가 격노하는 모습을 본 진안 군왕과 대황자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섰다.

“폐하, 당초 정 낭자가 부친의 병을 치료한 뒤, 신이 집 한 채를 치료비로 지불했습니다.”

진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는 황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도, 사죄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 낭자에게 신세 진 게 없단 말이오?”

황제가 냉소를 보이며 물었다.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정 낭자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의원이니 병을 치료했을 뿐이고, 신은 병자를 위해 상응하는 치료비를 지불했으니, 각자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 낭자가 그런 말까지 했다고? 그대의 눈에도 그 낭자는 보통내기가 아니겠구려.”

비꼬는 듯한 황제의 말에 진소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가엾기도 합니다.”

가엾다고?

황제는 냉소를 지을 뿐, 진소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절망이 극한에 달한 게 아니라면, 어째서 다른 사람을 믿지도, 남에게 의지하지도 않겠습니까?”

진소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치를 뻔히 꿰뚫고 있으면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정 내려놓을 수 있으려면 더 이상 퇴로가 없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했다.

진소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폐하께서도 정 낭자에 대해 들으신 얘기가 있을 겁니다. 선천적으로 바보로 태어난 탓에, 집안사람들은 정 낭자를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려고 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버림을 받았지요. 바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정 낭자를 기피했습니다. 정 낭자는 집과 가족이 있음에도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천하에 가엾은 사람이 어디 그 낭자뿐이란 말이오? 아무리 가엾다고 한들, 그게 소란을 피우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대가 자비심을 베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국법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잖소.”

“맞습니다. 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은 정 낭자에게 빚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갚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은혜를 갚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진소가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황제는 여전히 언짢은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면서도, 진소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2년 전 탈영병 사건 때, 정 낭자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신이었습니다.”

진소가 한숨을 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폐하, 신은 그 일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2년 전의 일을 잊고 있었던 황제는 진소의 말을 듣고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는 진소가 정 낭자를 돕지 않았지.

“심지어 신은 국법과 군율은 거역할 수 없는 지엄한 것이라고 하며 정 낭자를 나무라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그 일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지만, 신은 지금까지도 탈영병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소가 고개를 들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황제는 진소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두었다.

“당시 신이 정 낭자의 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정 낭자가 경성을 떠나게 되어, 신은 보은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2년이 흐른 지금 정 낭자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고, 이번에도 정 낭자는 가장 먼저 신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 역시 신이 정 낭자 편에 서서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신은 정 낭자의 청을 받고, 몹시 놀랐습니다.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신중, 또 신중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은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수하에게 서북에 관련된 일을 몇 마디 묻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조사해 볼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노정이 신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조사를 시작했지요. 그다음의 일들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들이고요.

폐하, 신은 이번에 정 낭자의 청을 들어주기는커녕,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폐하께서 그 낭자가 등문고를 쳐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백성들을 선동해 일을 키운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정 낭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시끄럽게 키운 장본인은 바로 신입니다. 모든 것이, 신이 낭자의 청을 거절했던 탓이지요.”

진소가 소매 안에서 상소문 하나를 더 꺼내어 허리를 숙이고 황제에게 바쳤다.

“신, 사직을 청하옵니다.”

사직?

진안 군왕과 대황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소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진안 군왕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조정 대신이 사직을 청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지만 거절당하여 오기를 부릴 때라든가, 어사에게 탄핵을 받아 자존심을 세울 때라든가, 관직의 품계를 올려 달라고 시위를 할 때라든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할 때라든가.

물론, 이런 경우는 모두 보여주기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진소는 조정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사직을 청한 일이 없었다. 보여주기식으로도 그러지 않았다. 사직을 청하기는커녕, 어사에게 탄핵을 받을 때조차도 진소는 자리를 피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당당하게 조회에 참석했다.

  • 성은을 입었으니,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고,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는 당초 전시(殿試)에서 황제의 낙점을 받은 후, 황제를 알현하던 자리에서 진소가 올렸던 말이었다. 진소는 조당에 발을 들인 이후로, 지금껏 꾸준히 그 말을 지키며 강직하고 태산같이 굳건한 모습을 보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결코 옳은 결정을 포기하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황제는 서서히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작은 탄식을 뱉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진소를 잠자코 쳐다보았다. 기세가 드높고 의기양양하던 과거의 진소가 아닌, 구레나룻이 하얗게 센 진소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직을 하기 전에, 폐하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치하해 주실 것을 청하옵니다. 서북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일은 증거와 증인이 엄연한 안건이기에 폐하께서도 윤허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신은 국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그 낭자를 위해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이는 국법과 규율을 어기지 않고, 폐하의 명을 거스르지도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진소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진소가 앞서 올렸던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 치하에 관한 상소문을 펼쳤다.

잠시 후, 진소가 사직을 청했다는 소식이 온 황궁에 퍼졌다.

“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는다지만, 이렇게까지 떼를 쓰면서 행패를 부려? 대전이 코앞이거늘, 장수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인지 몰라서 저러는 게야? 국사를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그딴 수작으로 폐하를 위협하다니. 쥐꼬리만 한 재간마저 바닥이 난 모양이구나.”

고능준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대인, 서북에 관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듣기로는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 치하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수하가 가까이 와서 말했다. 고능준이 흠칫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그 일 때문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이 시국에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다고?”

“정말 그 일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도 즉시 치하하라고 명령하셨고요.”

수하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진소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고능준이 인상을 쓰면서 생각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째 최근 들어 진소 그놈의 행적이 영 괴상하단 말이야. 관직이 높아질수록 진소와 대면할 일이 잦아지는데, 생각할수록 낯선 사람처럼 이상해. 차라리 예전엔 더 파악하기 쉬웠던 것 같아.

알면 알수록 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인 건가?

“이번 싸움은 자신이 필패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정 낭자와 작당한 일을 폐하 앞에 툭 까놓고 인정하려는 건 아닐까요? 폐하께 옛정을 생각해서 이번엔 너그러이 넘어가 달라고 말입니다.”

막료 하나가 말했다.

정말 그뿐일까?

고능준은 수염만 쓰다듬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이미 진소에게 예상치도 못하게 한 방 먹었어. 천만다행으로 하늘이 내 편이었으니 망정이지······.

“대인, 누가 이번 전투를 일부러 일으킨 것도 아니니, 어차피 부인할 순 없잖습니까. 어찌 됐든 폐하께서도 이런 때에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생각은 없으실 테고요. 주봉상이나 진소나 일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일 겁니다.”

막료가 말했다.

이치대로라면 그렇지.

고능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심히 지켜보게.”

고능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보탰다.

“그리고 그 강주 바보도.”

강주 바보 따위가 고 시제(侍制)의 걱정거리가 되고, 진 상공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다니. 강주 바보는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해.

막료가 속으로 생각하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임관보에서 백 명 남짓한 병력으로 성보를 지키며 죽을힘을 다해 싸운 용사들의 충의를 높이 사는 바이니 그 가족들에게······.”

옥대교 저택 안,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조서를 높이 들고 문장의 고저 기복을 맞추며 공로 치하하는 조서의 내용을 읽었다.

“범석두, 서무수,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를 정명 장군에 추서하고, 범강림을 전시 직에 봉하며, 서봉추의 아들을 삼반차직(三班借職: 하급 무관 관직)에 위임한다.”

옥대교 저택 앞에 모여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저쪽에서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저런 어린애가 무장이 되다니. 가장 하급의 무관이라고는 하나, 목숨을 바치고 정명 장군에 오른 제 아버지에 비하면, 관직을 참 쉽게도 얻는군.

폐하께서 너그럽고 통 큰 결정을 내리셨네.

“인자한 황제 폐하께서는 공을 세우면 포상을 내리는 것을, 억울한 게 있으면 조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이셔. 이번에는 대신들 때문에 폐하의 성총이 가려진 거래.”

조서를 읽던 관리는 백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놓으면서도 딱히 감격하지는 않았다.

지금 폐하께서는 서북 일로 골머리를 앓고 계시니 이런 일에 크게 신경 쓰실 겨를이 없어. 이번 일에 한 치의 실수라도 있었다간, 황제가 무당의 협박에 굴복한 일로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될뿐더러 조정 대신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나겠지.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열성조(列聖朝) 앞으로 달려가 통곡하며 사죄드려야 할지도 몰라.

관리가 손에 쥔 조서를 범강림에게 건넸다. 엎드려 감사 인사를 올리던 범강림이 일어나 조서를 받들자, 관리는 두어 마디 말을 건넨 후 수하들을 이끌고 옥대교 저택을 떠났다.

관리들이 떠나자,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시녀가 서둘러 사환을 시켜 동전이 가득 담긴 광주리 두 개를 들고 오게 했다.

“다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전한 시녀가 사환에게 돈을 뿌리라고 명했다. 옥대교 문 앞이 갑자기 왁자지껄해졌다.

같은 시각, 소식을 들은 태평거, 신선거, 이춘당도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저잣거리가 또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옥대교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바깥의 소란과는 상관없이 대청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범강림은 붉어진 눈시울로 자신의 앞에 놓인 조서와 임명장을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범강림의 아내도 그 옆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훔쳤다.

“누이, 무덤 앞에 가져가서 아우들을 기쁘게 해주는 건 어때?”

범강림이 임명장과 조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급할 거 없어요. 아직, 부족해요.”

아직 부족하다고?

범강림이 멈칫하면서 의아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범강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거동에 불편함은 없지만, 전투에서 다친 이후로 범강림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삼석궁을 당기거나 화살을 연달아 열 발 이상 쏘아낼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며 적군의 갑옷을 뚫을 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가까운 거리에서 쇠뇌로 적을 쏘아 죽이는 정도였다.

범강림은 여태껏 형제들의 명예를 위한 투쟁만을 생각했지,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룬 지 얼마 안 된 않은 지금, 갑작스럽게 하고 싶은 게 없냐고 물어보는 정교랑 때문에 범강림은 풀이 죽었다.

이제는 폐인이 된 내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눈물을 훔치던 범강림의 아내가 놀란 얼굴로 조심스럽게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

“나? 나야 뭐, 경성에 남아서 점포나 보면서 살아야지.”

범강림이 너스레를 떨면서 웃었다.

“오라버니는 적군을 죽이고 싶은 마음 없어요?”

적군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가 어떻게 적군을 죽일 수 있겠어?

범강림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누이는 절대로 남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법이 없지. 누이는 언제나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누이 앞에서는 내 본심을 숨길 필요 없고, 누이의 의중을 추측할 필요도 없어. 누이가 뭘 물으면, 난 큰 소리로 솔직히 대답하기만 하면 돼.

“있지.”

깊은 한숨을 내뱉던 범강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라버니가 만인적(萬人敵)이 되도록 도와줄게요.”

만인적? 장수를 말하는 건가?

화들짝 놀란 범강림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범강림은 만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서무수가 형제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필부지용(匹夫之勇)일 뿐이고, 아무리 기마와 궁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일인적(一人敵)에 불과하다고 했다. 혼자서 적군을 죽이고 공로를 세운다고 한들, 그 수를 셀 수 있는 정도였다. 만인적이란, 오직 전술이 뛰어난 장수들에게만 쓰이는 호칭이었다.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를 말하는 건가? 지금의 내가 어떻게 장수가 될 수 있겠어! 글씨도 못 읽는 사람인데!

정교랑이 진지하게 입을 뗐다.

“이 세상에서 만인적이라고 불리는 건, 비단 장수들뿐만이 아니에요. 날 따라와요, 오라버니.”

“끝장이야. 이제 다 끝장이라고.”

주 노야가 대청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회랑 아래 꿇어앉아 있던 시녀들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주 노야가 사나흘째 저 말만 반복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두려워하던 시녀들도 두려움이 점차 무뎌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괜히 당신까지 덩달아 상소를 올릴 거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꼭 써야겠다면서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이젠 하느님이 저쪽 편에 섰네요.”

주 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어째서 하느님이 그자를 돕느냔 말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교교야말로 하느님의 친자식인데.”

주 노야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교교니 뭐니, 그만 좀 해요. 폐하의 뜻에 반하는 일을 저질렀는데도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자식 같으니까.”

주 부인은 주육낭 걱정에 감정이 북받쳐 울먹거렸다.

“아이고, 가여운 우리 아들. 이를 어쩌면 좋아. 이번 일로 남주로 쫓겨나 난이라도 평정하러 가게 되면, 정말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텐데.”

주 부인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문 앞에 있던 시녀에게 주육낭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문 앞에 있던 몸종 중 하나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저, 그게, 육공자께서는 출타하셨어요.”

“어디로!”

눈치를 보는 몸종의 모습에 주 부인이 호통을 쳤다.

“정 아씨 댁에 가셨어요.”

몸종들이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그 애 때문에 죽게 생겼네. 전생에 우리 주씨 가문과 대체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래!”

주 부인의 울음소리가 주 노야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덮고 문밖으로 울려 퍼졌다.

“어딜 갔던 거야?”

같은 시각, 옥대교 저택의 마당에서는 주육낭이 문턱을 넘어서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볼 일 있어요?”

정교랑이 멱리를 벗으며 주육낭의 물음에 대답 대신 반문했다.

“짐 챙겨. 나랑 섬주로 돌아가자.”

주육낭이 말했다. 마당 안에 서 있던 반근과 어린 몸종들, 사환들이 놀란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일이 생겼다고 도망가요? 군인이 맞긴 해요?”

“예봉(銳鋒)을 피하는 것도 일종의 전술이야. 나약해서 피하는 게 아니라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요. 사람이 예봉을 피할 뿐, 예봉이 사람을 피한 적은 없죠.”

주육낭이 다시 반박하려 하자, 정교랑이 가볍게 손을 올려 제지했다.

“활은 잘 쏴요?”

주육낭은 정교랑의 물음에 멈칫하며, 언짢은 듯 흥 소리만 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궁술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면······.”

나한테 내 궁술이 믿을 만하냐고 묻는 건 또 무슨 경우야? 이 고약한 여인이 이젠 입만 열면 망신을 주네!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대답하려던 찰나,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나 좀 도와줄 수 있냐니!

순간 주육낭은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더러, 자기를 좀 도와줄 수 있냐고 물은 거야?

드디어 내가 자기 옆에 있는 게 보였구나. 드디어 나도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어, 드디어!

형제들이 없어졌으니, 따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겠지.

주육낭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칠 듯이 기쁘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쓰라려 오는 기분이 참······.

“무슨 도움?”

주육낭이 물었다.

“날 따라와요. 날 도울 담력이 있는지부터 봐야겠어요.”

뭐라고?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들고, 벌써 뒷마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삐죽이던 주육낭이 목에 힘을 주고 정교랑을 따라갔다.

말에서 내린 진십삼은 예전처럼 곧장 신선거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고개를 들어 신선거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어 주위에 있는 다른 식당들을 둘러보았다.

신선거의 주위에는 온통 식당 건물들로 가득했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진 터라 신선거 좌우에 있던 식당들은 모두 만석이었다.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다 보니, 낙득자재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져서 뽀얀 김이 서린 식당의 창가는 신선경을 방불케 했다.

진십삼은 다시 신선거로 시선을 돌렸다. 신선거 앞은 늘 그렇듯이 조용했지만, 예전과는 사뭇 다른 조용함이었다.

“정말 이상하네. 손님이 많이 줄었어.”

오 관리인이 장부를 훑어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인어른의 일은 이미 좋은 쪽으로 결정 난 거 아니었나?”

“태평거는 그럭저럭 괜찮아요.”

시녀가 말했다.

진십삼이 신선거 안으로 들어서자, 오 관리인과 시녀가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태평거가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찾아오는 손님이 다르기 때문이지. 태평거는 서민들이 많이 찾는 가게다 보니, 무원산 형제들을 포상한 것으로 이번 일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손님이 끊이지 않는 거야. 하지만 신선거는 태평거와는 다르게 고위 관직자나 권문세가 사람들이 찾는 곳이잖아. 그러니······.”

진십삼이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조정 일을 꿰뚫고 있는 고위 관직자와 권문세가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해결된 모양새인 무원산 형제들의 사건이 실은 여전히 위태위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직 승패가 갈리지는 않았잖아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도 운이 너희 아씨를 따를지는 잘 모르겠구나.”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십삼도 이번 일에 대해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필 이런 때에 서북에 또다시 전투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한 달만이라도 시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간은 역시 하늘의 뜻을 예측할 수 없구나. 모두 때와 운명이니라.

시녀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손에 쥔 장부를 탁 덮었다.

“저희 아씨는 한 번도 운에 모든 걸 맡기신 적 없어요.”

진십삼이 시녀를 쳐다보면서 눈썹을 으쓱했다.

“너희 아씨는 요즘에 뭐가 그리 바쁜 거야? 왜 자꾸 집에 없어?”

진십삼의 물음에 시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를 위한 커다란 선물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커다란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진십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또 선물이라고? 무원산 형제들이 경성을 떠나서 서북으로 갈 때 했던 선물 같은 건가?

그렇다면 정 낭자가 준비하는 선물이 뭔지, 정말로 기대되는걸.

-신비궁-

대황자가 상소문을 내려놓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내일은 아바마마의 탄신일이니, 일찍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황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 요 며칠 계속 쉬지도 못하셨으니, 잠시 쉬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진안 군왕도 거들었다. 황제가 웃으며 눈을 떴다.

“그래. 하필이면 짐의 생일에 오랑캐가 짐에게 이리 큰 선물을 줬구나.”

황제는 웃고 있으면서도 냉랭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올리지? 경서나 사서에는 비슷한 사례가 있지 않았을까?

대황자는 전에 읽었던 서적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훑었다.

“생각해 보니, 폐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큰 선물인 줄도 몰랐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갑옷을 입으셨는데, 오랑캐 왕족 따위가 어찌 폐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은 턱을 들면서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황제는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 일은 짐이 어려서 잘못했던 일이니라. 지금 언급할 일도 아니고, 영예롭게 여길 것도 못 돼.”

하지만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존경과 흠모가 담긴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남들 앞에서는 그 얘기를 꺼내지 말아라. 대신들이 죄다 입을 모아 훈계했어. 무릇 병기는 곧 흉기(兵子, 凶器也)고 어쩌고 하면서.”

황제는 진안 군왕을 나무라기는커녕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황제의 말을 들은 대황자가 눈을 반짝이면서 재빨리 황제의 말을 이었다.

“하여 진정한 군자는 부득이한 상황에서만 병기를 드는 법이지요(聖人不得已而爲之).”

그때 대신들은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황제에게 삿대질해가며 침이 마르도록 훈계를 했었다.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황제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대황자가 그때 들었던 말을 외쳐내니, 황제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전 안에 괴이한 적막함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적막감에 대황자는 어쩔 줄을 몰랐다. 뭐라 말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대황자는 막막한 마음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폐하, 여기 흥미로운 얘기가 있네요. 전 이제야 알았습니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나지막한 탄사를 뱉으면서 실내의 적막감을 깨트렸다.

“무엇을 말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말편자라는 거, 무원산 형제 중 한 명이 만들었던 거군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무원산.

다소 좋아지던 황제의 안색이 다시금 굳어졌다. 황제는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진안 군왕과 대황자를 훑어보았다.

두 녀석도 참.

대황자는 자신의 말이 왜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몰랐지만, 황제가 싫어하는 무원산 얘기를 꺼낸 진안 군왕을 보고는 남몰래 고소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짐이 피곤하니, 인제 그만 물러가거라. 쌓여 있는 상소문들을 당장 다 볼 순 없으니, 잠시 쉬어야겠다. 혹시 모르지, 짐의 생일이 지나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황제가 말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이 서둘러 예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내시 한 명이 상소문 하나를 들고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중서문하성에서 올린 보고입니다. 폐하께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황제가 내시의 상소문을 받아 펼쳐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는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거 참.”

황제가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지면서 말했다.

“죄다 오기를 부리겠다고 난리구나.”

허리를 숙인 채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러나던 진안 군왕은 내시가 자신에게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정 낭자······.

“폐하, 무슨 일입니까? 또 강문원에 관한 논쟁입니까?”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대황자도 진안 군왕을 따라 걸음을 멈추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아바마마, 하루 이틀 안에 결론을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차차 논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대황자가 재빨리 한마디 거들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무원산 형제 중 하나인 범강림이 짐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는구나.”

황제가 비웃으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선물이라.”

황제의 입가에 걸린 냉소를 본 대황자는 영리하게 입을 다물었다.

“말편자처럼 희귀한 물건일까요?”

진안 군왕은 황제의 비꼬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호기심 담긴 말투로 물었다.

말편자라······.

뭐라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눈빛에 변화가 생겼다.

“말편자가 뭐 희귀하다고.”

대황자가 언짢은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진안 군왕이 대황자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전하,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말편자 덕분에 말굽이 상해서 버려지는 말이 매년 천 필 이상 줄었습니다. 군에서 버려지는 말이 준다는 것은 곧 매년 천 필 이상의 군마를 거저 얻는다는 뜻이지요.”

“천 필이라 한들, 말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대황자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됐다. 그만하고 물러가거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빠르게 물러났다.

대전 안이 조용해지자 황제가 탁자 위에 놓인 상소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원산 형제 중 한 명이 말편자를 만들어 낸 거라고? 그때 말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의 이름이, 이름이, 뭐였더라?

말편자라······.

황제가 상소문을 펼쳤다.

경왕의 궁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당 안에서 여럿이 축국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끌리지 않는 짧은 옷을 입은 진안 군왕이 소매를 동여매고 외쳤다.

“육가아, 육가아! 이쪽으로, 이쪽으로, 나한테 줘!”

공을 차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경왕은 당연히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혼자서 공을 굴렸다. 그런데도 진안 군왕은 환하게 웃으며 경왕의 뒤를 따라 뛰어다녔다.

한참을 뛰던 경왕이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육가아, 이리 와서 좀 더 놀자.”

진안 군왕이 이리저리 뛰면서 외쳤다. 하지만 경왕은 진안 군왕의 말을 무시한 채 바닥에 드러누워 아무렇게나 발을 휘둘렀다.

결국 진안 군왕은 경왕을 어르고 달랜 끝에 어렵사리 욕탕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어떻게 됐느냐?”

진안 군왕이 경왕의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어 주며 내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윤허하셨습니다. 내일 범강림이 선덕문 앞에서 폐하를 알현하기로 하였습니다.”

내시가 조용히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육가아, 그 여인이 폐하께 어떤 선물을 할지 궁금하지 않아?”

목욕통 안에 앉아 있던 경왕은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장난감을 쥐며 물장구를 쳤다.

“아마 무시무시한 살인 병기일 거야.”

진안 군왕이 경왕의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볼 수 없는 게 참 아쉽긴 한데, 뭐 아무렴 어때.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텐데.”

진안 군왕이 수건을 가져와 경왕을 돌돌 감싸자, 궁인들이 힘을 합쳐 경왕을 안고 나갔다.

“내일이,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동이 틀 무렵, 이른 시간임에도 진십팔랑은 자매들과 진소 부인에게 둘러싸여 대청 안에 앉아 있었다. 대청 안은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잡담 소리로 떠들썩했다.

“옷이 너무 칙칙한 거 아니야? 좀 화사한 옷으로 바꿔 입는 건 어때?”

“비녀도 그렇고. 머리 장식이 너무 적어.”

“머리 장식 하나만 더 달자.”

자매들이 진십팔랑의 옷과 장신구를 보면서 재잘댔다.

“박양 군주를 따라가는 것뿐이니, 이 정도면 충분해. 어쩌면 폐하의 용안을 못 뵐 수도 있는걸.”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십팔랑이 입은 옷은 2년 전에 입었던 양식 그대로 지은 옷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치맛자락과 허리춤에 금색 꽃을 수놓아 생동감 있으면서도 단아한 미가 돋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옷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힘이 있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진십팔랑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면, 나한테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일지도.

“이제 가야겠다. 군주께서 날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진십팔랑이 몸을 일으키고 자매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문을 나섰다.

이제 난 준비됐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궁금해지네.

해가 중천에 뜬 시각, 황제가 대신들을 데리고 선덕문 앞에 멈춰 섰다. 미리 나와 질서정연하게 황제를 기다리고 있던 문무백관과 멀리서 들려오는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환호 소리를 듣는 일이 일 년에 한 번 정도로 드문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제는 환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척이나 기뻤다.

밤낮없이 국사를 돌보고 조정에서 대신들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것도 모자라 변방에서도 골치 아픈 일이 쉼 없이 밀려 들어오는 천자의 자리지만,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다스리는 느낌은 늘 사람을 도취시켰다.

“진 상공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도 안 나오다니.”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황제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황제는 이미 두 번이나 진소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소는 계속 집에서 칩거하며 황제의 탄신일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게 다 그 신의 낭자니 뭐니 하는 여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협박의 이점을 만백성이 맛봤으니, 죄다 따라 하려 드는군.

짐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선물을 준비했다?

이 몸이 만백성 앞에서 너희에게 장단을 맞춰 줘야 한단 말이더냐?

황제가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하자, 대신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선물을 준비한 사람을 보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말씀을 번복하려 하시옵니까.”

중서문하성의 대신이 황제에게 직언을 올렸다.

그리고 이놈의 중신들도 그래. 어째 점점 더 엇나가는 것 같군. 중서문하성만 해도, 짐의 조서를 반려하는 일이 수없이 늘었어.

“진 대인이 오지 않았는데도 중서문하성의 관리들이 본분을 다하네.”

누군가 무심코 수군거리던 소리가 황제의 귓가로 들어왔다. 황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래, 좋다. 네놈들 연극에 짐이 끝까지 장단을 맞춰 주마.

미간을 찌푸린 황제가 몸을 돌리고 천천히 말했다.

“범강림을 부르거라.”

성문 위에서 한 사내가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성문 아래에 있던 백성과 관리들은 그를 보지 못했지만, 성문 위에 있던 황족 종친들과 대신들은 그를 눈여겨보았다.

박양 군주의 뒤에 서 있던 진십팔랑은 ‘무원산’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놀라 고개를 들고 성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사내는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보잘것없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겨우 저런 사람을 위해서 정 낭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키운 거라고?

범강림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황제가 자신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그는 큰절을 올린 직후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소인,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리옵니다. 소인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죽음을 불사하겠습니다.”

범강림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쿠, 그러지는 말아라. 네놈들 목숨이 얼마나 값진 것인데, 죽기에는 아깝지.

황제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물론 명색이 천자인데 만백성 앞에서 일개 평민에게 인상을 쓸 정도로 소인배는 아니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자, 내시들이 서둘러 범강림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하지만 범강림은 다시 한번 큰절을 올리며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소인은 몸이 불편하여, 폐하를 위해 전장에 나가서 적군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여 소인이 폐하께 올릴 선물을 하나 준비했사옵니다. 부디 폐하께서 소인의 선물을 받아주시어, 폐하의 위세를 떨치게 해 주시옵소서.”

황제는 곁눈질로 범강림의 두 손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뭘 선물하려는 거야? 만수무강하라는 시라도 한 수 지어 왔나? 아니면 그 신의 낭자한테 복이 들어오는 점괘라도 알아 왔나? 그것도 아니면, 짐이 불로장생할 수 있는 묘약이라도?

황제가 속으로 한껏 비웃으면서 말했다.

“그리하거라.”

“소인이 폐하께 올리는 선물은 무기이기에, 폐하의 윤허 없이는 감히 올릴 수 없습니다.”

무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갑자기 머릿속에 말편자가 떠올랐다.

“어떤 무기더냐?”

황제가 주저하다가 물었다.

“쇠뇌입니다.”

범강림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같잖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고,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대단한 성인께서 쓰셨던 쇠뇌인가?”

“에이, 신선이 썼던 거겠지.”

성문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범강림을 비웃으며 나지막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범강림을 내려다보았다.

“소인이 폐하께 바치는 쇠뇌는 평범한 중노(重弩)보다 백배는 더 강합니다.”

중노보다 백배나 더 강하다니!

현장이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범강림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소인이 만든 쇠뇌는 삼백사십 보 밖에서 느릅나무의 절반을 뚫을 수 있고, 칠십 보 밖에서 철갑옷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추세운 범강림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황제가 두려워서 벌벌 떨지도, 주변의 웅성거림에 겁먹거나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범강림,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황제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범강림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중노는 현재 군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무기로, 공격과 수비를 막론하고 꼭 필요한 무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중노보다 백배는 강하다고? 도대체 어떻게 생긴 쇠뇌길래 그 정도의 위력이 있단 말이야? 허풍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폐하께 검증해 드릴 수 있습니다.”

범강림의 말에 황제가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너희 뜻대로 하게 해 주마. 너희가 만백성 앞에서 망신을 당하더라도, 그건 짐의 책임이 아니니라.

“윤허하노라.”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삼백사십 보 밖에서 느릅나무의 절반을 뚫을 수 있고, 칠십 보 밖에서 철갑옷을 관통할 수 있다면······.

지금은 몸이 안 좋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 체통을 지키고 있지만, 사실 황제는 아주 호전적인 성향이었다. 이 때문에 젊은 시절의 황제는 중신들에게 질타를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 범강림의 말을 듣는 순간, 황제는 이미 그 쇠뇌가 얼마나 강력한 살상력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살인 병기라는 뜻인데.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고개를 든 황제는 명을 전하러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내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범강림이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흉기다 보니, 그것을 황궁으로 가져올 순 없었다. 당연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성문 아래에 있던 백성들과 관리는 뒤늦게 성문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며 무슨 일인지 수군대던 찰나, 내시가 큰 소리로 황제의 명을 전했다. 그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곧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폐하께서 유원 나들이를 가시는 3월도 아닌데, 금군(禁軍: 황궁과 황제를 호위하는 친위대) 병사가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것도 구경할 수 있겠네.”

백성들은 시험 삼아 쏠 쇠뇌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지녔는지는 몰랐지만,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몹시 기뻐했다.

“왔어, 왔어!”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내시 하나와 소년 하나를 둘러싼 채 엄숙한 표정으로 바짝 경계하며 앞으로 걸어오는 금군 부대가 보였다.

금군에게 둘러싸인 소년은 전포(戰袍: 무사들이 입던 옷)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쇠뇌를 쥐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의 소년은 위풍당당하고 용맹스러워 보였다.

세간의 분위기가 개방적이다 보니 주육낭의 모습을 본 소녀들과 여인들은 환호를 보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 여인은 주육낭을 향해 향낭과 손수건을 던지기도 했다. 황제가 3월 유원 연회를 열 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공연을 보이는 금군을 대하는 것처럼, 백성들은 주육낭에게 환호를 보냈다.

권문세가의 가족들이 있는 구역에 진입하자, 환호 소리가 잠잠해졌다. 관가의 여인들은 평민들처럼 환호를 보내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여인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뉘 집 여식이 이리도 결례를 보이는 게야?

다들 미간을 찌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육낭! 저건 육낭이잖아!”

주씨 가문의 낭자가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주육낭을 가리키며 외쳤다. 주 부인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집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밖에 나온 것도 모자라, 황제 폐하를 뵈러 가는 거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주씨 가문의 소녀들이 재잘거리며 떠드는 와중에 주 부인은 눈을 뒤집으며 까무러쳤다.

주육낭은 귓가에 들리는 소리를 일절 무시하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고관대작들이 서 있는 곳을 지나갔다. 여인들의 환호 대신 어떤 사내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주육낭은 이번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의연히 걸어갔다.

진십삼이 헤헤 웃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왜요? 멋지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진십삼을 흘겨보고는 계속해서 주육낭의 손에 들린 쇠뇌에 대해 수군거렸다.

“평범해 보이는데.”

“뭐로 만든 거야? 소의 힘줄이나 쇠뿔도 안 보여. 애들 놀잇감 같은 거 아니야?”

놀잇감? 나 참, 댁들이 감히? 저걸 갖고 놀긴 쉽지 않을 텐데.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성문 아래에 도착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의 손에 쇠뇌가 들려 있는 데다 황제와 몹시 가까운 거리인지라 금군은 주육낭의 주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칼자루를 찬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주육낭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금군은 주육낭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면, 모조리 달려들어서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기세였다.

“소신 주복(周箙)이 폐하께 쇠뇌를 시험해 보이겠습니다.”

주육낭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성문 위를 향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향한 큰절은 생략했다.

황제가 소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린 거 아닌가? 쇠뇌를 당기는 힘이 부족하지는 않으려나? 좀 더 건실해 보이는 궁수에게 맡기는 게 좋을 텐데.

황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배치하라!”

일찍이 내시의 분부를 들은 금군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명령을 들은 금군 부대의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주육낭과 칠십 보 떨어진 곳에 일렬로 섰다.

이와 동시에, 성문 위에도 방패를 든 금군이 일렬로 서서 황제와 조정 중신들을 보호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쇠뇌를 든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소년이 쇠뇌를 내리고 발로 무언가를 밟는 행동을 했다. 멀리 있던 사람들에게는 소년이 정확히 어떤 동작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다시 쇠뇌를 들어 올리고 조준하는 자세를 취하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소년은 쇠뇌를 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옆에 있는 금군을 쳐다보았다.

“방패만 남기고, 사람은 비켜 서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험 삼아 쏘는 것이니, 인명 피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주육낭의 옆에 서 있던 금군이 놀란 표정으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이렇게 먼 거리라면 갑옷을 뚫는 정도만 해도 대단할 텐데, 저 쇠뇌가 갑옷을 관통해서 사람을 죽일 정도라고?

주육낭이 화살을 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황제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의중을 알아차린 내시가 큰 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래에 있던 금군이 재빨리 주육낭의 말을 위로 전했다.

주육낭의 말을 전해 들은 성문 위의 사람들은 또다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기도 하고, 실소를 터트리거나 허튼소리를 한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폐하, 저자가 하는 말은 사실이옵니다. 소인도 조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범강림이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황제가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명을 들은 금군은 방패를 나무틀에 고정해 놓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주육낭이 다시 쇠뇌를 들고 멀리 있는 방패를 조준했다.

현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고, 모두가 조용히 소년을 지켜보았다. 무수히 많은 시선이 작렬하는 햇빛처럼 맹렬한 기세로 한곳에 모아졌다. 숨이 막힐 정도의 적막감에 근처에 서 있던 금군까지도 손에 땀을 쥐고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저 소년은 일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을까? 떨려서 활을 제대로 쏘기나 하겠어?

금군의 시선이 주육낭의 팔로 향했다. 그들은 예리한 눈빛으로 주육낭의 팔에 떨림이 있는지 주시했다.

“에구머니나! 아씨, 아씨!”

주육낭의 귓가에 반근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주육낭은 잠시 그날의 옥대교 저택을 떠올렸다.

주육낭은 검은 폭포처럼 긴 머리카락을 풀고 과녁 옆에 서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머리 위에는 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싱싱한 배, 검은 머리카락, 반짝이는 두 눈과 백옥같이 하얀 피부. 먹색 치마 위에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덧옷까지. 정교랑의 모습은 한 폭의 기묘한 그림과도 같았다.

“자, 쏴요.”

정교랑이 자신의 머리 위에 놓인 배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반근과 몸종들이 헉 소리를 내면서 비명을 질렀다. 주육낭 또한 반근 못지않게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지금 무슨 장난을 치는 거야?

“용기가 없는 거예요? 아니면 못하는 거예요?”

정교랑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정교랑의 그 말과 웃음이 주육낭의 자존심을 쿡 찔렀다. 그는 콧방귀를 뀌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아이고, 공자님. 안 돼요!”

정말로 활을 쏘려는 주육낭을 보자, 반근은 재빨리 두 팔을 벌리고 정교랑의 앞을 막아섰다.

“반근, 날 못 믿어? 아니면 주 공자를 못 믿는 거니?”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리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아씨, 제가 할게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네?”

“너보다 내가 하는 게 더 나아.”

정교랑이 손을 들어 반근에게 비키라고 손짓했다.

다급해진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보았지만, 이미 활시위를 당긴 주육낭도 비켜설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둘 다 정말 황소고집이야.

반근은 하는 수 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육낭은 활시위를 놓았다. 몸종들의 비명과 함께, 정교랑의 머리 위에 있던 배가 화살에 꽂혀 날아갔다.

반근이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서둘러 정교랑의 얼굴에 튄 과즙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됐어요. 이런 놀이는 이제 그만 하세요.”

반근이 혼신의 힘을 다해 두 사람을 말렸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반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개 더.”

반근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노는 거 아니야. 놀 시간도 없어. 그리고 나는 놀 줄도 몰라.”

놀 시간도 없고, 놀 줄도 모르다니.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반근이 정교랑에게 배 하나를 더 건네자, 정교랑이 이번에는 배를 한쪽 어깨 위에 올려 두었다. 심지어 그녀는 배를 지그시 누른 채 주육낭을 쳐다보며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반근과 몸종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면서 정교랑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씨.”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주육낭은 정교랑을 쳐다보며 속으로 그녀가 옮기는 걸음을 셌다. 정교랑은 벽에 다다른 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집이 너무 작네.”

정교랑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서 넘기고는 어깨 위에 올린 배를 가리키며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쏴요.”

주육낭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가늘게 뜨며 배를 조준했다. 햇빛에 비친 싱싱한 배가 미소 짓는 소녀의 얼굴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한쪽으로 넘긴 머리카락 때문에 정교랑의 작고 하얀 귀가 드러났다. 정교랑의 귀에는 다른 여인들이 흔히 하는 귀걸이 같은 것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귀를 뚫지 않은 거겠지. 바보로 태어난 아이에게 귀를 뚫어줄 리가 있나.

하긴, 누가 감히 저런 뽀얀 피부의 살갗에 구멍을 낼 수 있겠어.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도 안타까워 뚫을 수 없겠지.

주육낭이 활시위를 놓았다. 활시위가 떨리는 진동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철판이 뚫리는 뭉툭한 소리가 들려왔다.

칠십 보 밖에 세워져 있던 방패가 흔들거렸다.

방패가 흔들거림을 멈추기도 전에, 주육낭은 곧바로 쇠뇌의 고리를 밟고 화살을 하나 더 올린 뒤 조준했다.

웅웅웅, 탕탕탕.

주육낭이 빠르게 쇠뇌를 당기고 화살을 쏘아내는 소리가 쉼 없이 고막을 때렸다.

“화살을 올리는 속도가 엄청나.”

금군 한 명이 중얼거렸다.

“심지어 화살을 당기는 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아.”

다른 금군이 맞장구쳤다.

이 말인즉슨, 주육낭이 쓰는 쇠뇌는 화살을 올리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전장에서 시간은 곧 목숨이 아니던가. 생사는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승부 또한 한순간에 판가름 날 때가 많았다.

주육낭은 연달아 화살 열 발을 쏜 후에야 쇠뇌를 내려놓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주육낭을 주시하던 금군은 드디어 주육낭이 숨을 고르며 손목을 터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주육낭의 모습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은 일제히 칠십 보 밖에 일렬로 세워진 방패로 향했다.

금군 병사가 서둘러 방패 쪽으로 뛰어갔다.

“관통했습니다!”

금군 병사가 성문 위의 황제를 향해 구멍 난 방패를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그러고는 백성들이 있는 쪽을 향해 방패를 돌려 들었다.

백성들이 환호를 지르려던 찰나, 또 한 명의 금군이 방패를 높이 들었다.

“관통했습니다!”

“관통했습니다!”

“관통했습니다!”

금군들이 방패를 하나씩 치켜들며 외쳤다. 첫 번째 방패를 보고 환호를 지르려던 백성들은 주춤했다. 가장 가까이서 방패를 볼 수 있었던 고관대작들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고관대작들이 놀라 소리조차 내지 못하자, 백성들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덩달아 조용히 서 있었다.

성문 앞에 모인 거대한 인파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전 황제가 성문 위에 오를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황제가 성문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만백성은 쥐죽은 듯 조용하고, 일렬로 들어 올려진 방패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생각해 보아라. 저런 쇠뇌를 손에 든 이들이 너희 앞에 있다. 한 줄일 수도 있고, 두 줄일 수도 있고, 혹은 부대 전체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지겠느냐?”

그건 어떤 광경일까?

쇠뇌를 장전한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조준하여 쏘아내면, 저 강력한 화살들이 오랑캐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그 화살들은 방패나 갑옷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랑캐의 방패와 갑옷을 관통하리라.

관통!

관통!

살점들이 허공에 날아다니고, 고통에 울부짖는 오랑캐의 목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덮겠지. 오랑캐의 정예군 따위가 대수더냐! 오랑캐의 철갑 기마병 따위가 대수더냐!

하하하하!

황제 옆에 서 있던 금군 대장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금군 대장의 결례를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을 깨는 그 웃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두피가 저릿해지면서 온몸에 뜨거운 전율이 일어남을 느꼈다.

어마어마한 살인 병기로구나!

열 개의 방패가 성문 위로 올려졌다. 황제는 방패를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구멍이 난 모양을 유심히 보니, 화살로 방패를 관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방패 뒤에 선 사람까지 쏘아 죽일 수 있겠어.

황제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폐하, 화살을 올리는 속도도 엄청납니다! 저 소년 장수는 연달아 열 발을 쏘고도, 그저 숨을 내쉬며 손을 털기만 했습니다. 중노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속도입니다. 이는 발의 힘으로 활시위를 당기기 때문입니다.”

소년 장수라는 말에 황제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소년은 쇠뇌를 금군에게 맡긴 뒤 황제를 알현하러 성문 위로 올라와 어느덧 범강림 옆에 서 있었다.

“너는 어느 집안 출신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주육낭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신은 귀덕낭장 주월의 여섯째 아들로, 서북 군영의 조성 휘하에 있는 삼반 주복이라 하옵니다.”

주육낭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맹하고 의기양양한 소년이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녀석이야.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궁술이 뛰어나더구나. 짐이 상을 내리마.”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우시금(右侍禁)에 봉하노라.”

계급 네 개를 뛰어넘다니!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2년이 넘도록 서북 전장에서 적군과 맞서 싸워도 겨우 한 계급 오를 뿐이었는데. 황제 앞에서 쇠뇌를 시험 삼아 쏜 것만으로도 무려 네 계급을 뛰어넘었어!

주육낭은 조심스레 주위의 관리들을 둘러보았다. 황제의 근처에 있을 수 있는 무관들은 높은 계급의 장수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우시금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낮은 직책이었다. 따라서 무장들은 황제가 소년 장수를 우시금에 봉하는 것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반면 문관들은 황제가 지금처럼 즉흥적으로 관직을 내리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 같은 분위기에 굳이 나서서 트집 잡으려 드는 문관은 없었다.

황제가 주육낭에게 내린 관직이 무관이니 망정이지 행여 문관에 봉하기라도 했다면 아마 여기 있는 모든 문관이 나서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을 것이다.

“성은에 감사 인사를 올려야지요.”

주육낭의 옆에 있던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주육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성은이 망극하다고 외쳤다.

주육낭의 결례에도 황제는 언짢은 기색 없이 그를 칭찬했다. 황제의 칭찬과 진급이라는 포상을 받은 주육낭은 어쩐지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도와 달라? 그 여인을 도와줬더니, 도리어 내가 진급했잖아? 도대체 누가 누굴 돕는 거야?

주육낭이 넋이 나간 사이, 범강림이 입을 열었다.

“폐하, 다른 사람을 시켜 이 쇠뇌를 시험해 보셔도 좋습니다.”

황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짐은 널 믿는다.”

체면? 지금 짐의 체면이 중요한가? 이것으로 이뤄낼 서북의 공적에 비하면, 짐이 한 여인의 오기에 체면이 상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아직 어린 낭자니 철이 덜 들어서 그럴 게야.

황제의 말을 듣고 범강림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큰절을 올렸다. 황제의 진심 어린 미소를 보자, 고능준도 황제를 따라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고능준은 범강림을 쳐다보다가 구멍이 뚫린 방패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 대단한 병기구나. 중노와 크기는 비슷해 보이는데,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양이야. 궁노원(弓弩院)에서 중노 하나를 만드는 데 족히 열흘은 걸린다. 너의 저 쇠뇌를 만들려면 며칠이나 걸리더냐?”

고능준이 냉소 섞인 얼굴로 범강림에게 물었다. 고능준의 의중을 알아챈 주육낭은 몸을 살짝 떨었다.

젠장! 고능준 저 독한 놈이!

여염집 백성이 저런 병기를 사사로이 소지하는 건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소지하고 있는 병기가 다섯 개를 넘을 경우, 참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 쇠뇌를 범강림이 경성에 들어오기 전에 만들었든 경성에 들어온 뒤에 만들었든, 열흘이 걸렸든 보름이 걸렸든, 옳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황제가 기분이 좋으니 괜찮겠지만, 추후 누군가가 이 일을 다시 언급하며 이간질하는 말을 보탠다면 황제는 분명 범강림을 의심할 것이다.

주육낭이 대답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범강림이 그보다 한발 빨랐다.

“이 쇠뇌는 그리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소인이 혼자 밤낮을 재촉하며 만들었을 때, 족히 엿새가 걸렸습니다.”

범강림은 뭔가 창피하다는 듯이 말했다.

누이는 고작 사흘 만에 완성했는데.

고능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럴 리가 없어!

주위에 있던 대신들이 감탄사를 뱉었다.

그럴 리가 있나!

황제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엿새라고 했느냐? 정녕 엿새 만에 만들었다는 말이냐?”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어찌 감히 폐하께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너 혼자서 말이냐?”

황제가 다시 물었다. 믿을 수 없는 대답에 황제는 숨까지 가빠졌다. 범강림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폐하! 어서, 어서 궁노원에 저 쇠뇌를 만들라고 명하십시오. 모든 장인을 동원한다면, 열흘 내로 족히 백 개가 넘는 쇠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서둘러 만들어 서북으로 보내야 합니다! 소장이 직접 폐하를 대신하여 큰 선물을 서북에 전하겠습니다!”

황제 옆에 있던 무장 하나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무장의 결례를 지적하는 어사는 아무도 없었다. 어사들조차도 범강림의 말에 놀라 입이 떡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하옵고 폐하, 소인의 쇠뇌는 나무 깃을 단 화살입니다. 그래서······.”

범강림이 말을 이어 갔다. 무장이 흠칫하며 외치던 말을 멈췄다.

그래서······.

황제는 순간적으로 숨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새의 깃털이 필요하지 않다?”

“맞습니다. 나뭇조각을 깃으로 삼아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활의 몸체와 활시위를 소의 힘줄이나 쇠뿔로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산에 있는 나무와 삼노끈이면 충분합니다.”

게다가······.

범강림이 계속해서 설명했지만, 황제는 범강림의 목소리가 점점 더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일인데, 그보다 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소식이 있다니.

강력한 군대와 뛰어난 무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돈이었다.

군비로 들어가는 돈에는 끝도 없었다. 누군들 병사들에게 좋은 무기를 쥐여주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나라에서 군에 쓸 수 있는 비용은 제한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천 관이고 만 관이고 쏟아부으며 병사들과 장비들을 지원하고 싶지만,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황궁 내에는 수리하지 못한 채 폐허로 남겨 두는 전각이 차고 넘쳤다. 황제는 이미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지내고 있었지만, 텅 빈 국고는 쉬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들은 황제의 호전적인 결정을 질책해 왔다. 전쟁을 한 번 치를 때마다 엄청난 나랏돈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범강림이 만든 이 쇠뇌는 그런 문제까지 단번에 해결해 버렸다. 중노보다 백배는 더 강력한 살상력을 가졌지만, 제작 비용은 중노의 절반도 못 미치다니!

황제는 곁눈질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좀 전까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 준비를 하던 대신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용이 문제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트집 잡긴 힘들었다.

범강림, 이자가 말을 참 잘하는구나! 짐이 조당에서 대신들과 한참을 논쟁해야 할 문제를, 말 한마디로 다 해결했어!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전군 병사들에게 이 강력한 쇠뇌를 보급하는 것 또한 불가능은 아니라는 뜻이다!

전군 병사들에게! 전군 병사들에게!

“물에 닿아도 물을 흡수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노에 비해 손상이 빠른 편입니다.”

범강림이 이어서 말했다. 황제는 손끝이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여봐라, 여봐라! 어서 짐에게 이것을 전군에게 보급하려면 얼마가 드는지······.”

황제는 큰 소리로 소리치다가, 갑자기 쇠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이것의 이름이 무엇이냐?”

범강림이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인이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이름을 하사해 주시옵소서.”

황제는 성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금군들이 쇠뇌를 거둬 보이지 않는 곳에다 보관한 탓에 쇠뇌가 시야로 들어오지 않았다.

“신궁, 신······ 신비궁(神臂弓). 신비궁이라고 부르거라.”

잠시 고민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신기(神器)를 얻으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고능준이 제일 먼저 외쳤다. 고능준은 속으로 분해 죽을 것만 같았지만, 어떤 때에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능준의 말을 들은 주변 관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꿇고 목청을 높여 외쳤다. 성문 위에서 대신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문 아래에 있던 백성들도 일제히 두 팔을 높이 들고 따라 외쳤다. 순식간에 성문 위아래로 거센 파도가 일듯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는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좋아! 이번 생일은 참으로 즐겁구나!

하늘을 울리는 백성들의 환호를 들은 황제는 기분 좋게 몸을 돌려 황궁 대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신들은 황제의 뒤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탄신 연회 자리로 이동했다. 범강림과 주육낭도 황제의 탄신 연회에 초대되었다.

“범강림, 짐이 상을 내리고 싶구나. 원하는 게 무엇이냐?”

황제가 옥좌에 앉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늘 창백하던 황제의 얼굴에 모처럼 혈색이 돌았다.

범강림이 큰절을 올리며 대답했다.

“소인은 단지 적을 죽여 나라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오나 이제는 부상으로 인해 불구의 몸이 되었으니 직접 전장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인은 병사와 장수들이 적군을 쏘아 죽일 수 있는 화살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또한 소인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황제는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너를 어전(御前) 번방도군두(藩方都軍頭) 겸 궁노원 군감에 봉하겠노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대전 안에서 대신들이 헙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에 성문 위에서 주육낭이 하사받은 품계도 꽤 빠른 진급에 속했지만, 황제의 이 결정은 그보다 훨씬 파격적이었다. 이번에는 몇몇 무장들까지 움찔거렸다.

“폐하, 아무래도 중서성의 관리들과 상의를 해 보심이······.”

관리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황제는 관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정색하며 반문했다.

“서북의 일에 대해서는 상의가 끝났소?”

말문이 턱 막힌 관리는 소리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차피 높은 관직에 봉한다 한들, 궁노원에서 활이나 만들 뿐이다. 일개 장인에 불과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천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든 게 인재인 법인데,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사람이 나라를 위해 기술과 신기를 바친다면 나라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옛날부터 흔히 있던 일이니, 생각해 보면 안 될 것도 없지.

범강림이 큰절을 올리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말편자를 만들었던 자도 네 형제라고?”

황제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시에 저희 일곱 형제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누이가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때 누이가 저희에게 각자가 가진 재능과 기호에 따라 기술을 선물해 주었지요. 넷째가 말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다 보니, 누이가 그에게 말편자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이제 제가 몸이 불편하여 전장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누이는 적을 죽일 수 있는 다른 기술을 전수해 주었고요.”

범강림의 말을 듣던 황제의 표정이 차츰 변해 갔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도 황제처럼 표정이 달라졌다.

강문원은 끝났구나.

고능준은 머리가 핑 도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쇠뇌의 엄청난 살상력부터 쉬운 제조법, 그리고 저렴한 제작 비용까지. 범강림은 연달아 휘둘러대더니 급기야 가장 날카롭고 매서운 일격을 황제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일곱 형제에게 각자의 재능에 따라 기술을 한 가지씩 전수했다고. 이미 두 명의 형제는 각자의 장기를 살려 적군을 죽이고, 아군에 큰 보탬이 되는 물건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명은 어떠한 재능을 가졌으며, 어떤 놀라운 기술로, 어떠한 신기를 만들어 냈을까?

하지만 이제 그 답은 영원히 미궁으로 남게 됐다. 그 다섯 명은 죽고 없으니까. 그들의 재능이 뭔지, 어떠한 기호를 가졌는지, 이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의 손해로다. 이게 바로 나라의 손해라는 것이야.

무원산 형제가 만든 신기를 떠올릴 때마다, 황제는 죽은 다섯 형제를 떠올릴 터였다. 죽은 다섯 형제를 떠올릴 때마다, 황제는 이번 일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황제의 머릿속에 하루하루 쌓여 가면, 강문원이 서북에 남기는 힘들 테지. 어디 남기 힘들 뿐인가. 황제의 마음에 좋은 인상을 남기는 건 아마도 한평생 힘들 것이리라.

정녕, 정녕!

정녕 이토록 독하단 말이냐, 강주 바보!

인간은 하늘의 뜻을 예측할 수 없다지만, 기어코 하늘의 뜻을 누르고 지나가는 이도 있는 법이구나.

“노야, 노야.”

같은 시각, 진(陳)씨 저택.

마당에서 부친과 함께 바둑을 두며 차를 마시던 진소는 사환의 목소리에 바둑을 두던 손을 멈췄다.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몰랐지만, 사환은 성문 앞에 모였던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진소에게 빠짐없이 전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진소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진소가 손을 휘휘 내저어 사환을 물리자, 진 노태야는 손에 쥐고 있던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강문원은 끝났구나.”

진 노태야가 진소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구나. 역시, 정 낭자가 널 돕고 있었던 거였어.”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는 놀라운 한편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형제들의 공로를 치하하도록 폐하를 재촉하라고 했던 게, 폐하께 이 선물을 바치기 위해서였다니. 그리고 이 선물이 모든 국면을 뒤집다니.”

신비궁! 정말 엄청난 살인 병기로구나!

“정 낭자가 걱정할 게 뭐 있겠습니까. 폐하를 자극했다고 한들, 자신의 명망 때문에 폐하께서 자신을 싫어한다고 한들, 문제 될 건 없지요. 어차피 명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을. 이제 보니 정 낭자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던 겁니다. 신선이니 뭐니 하는 도술을 내세운 것도 아니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실력 말입니다.”

신분도 평범하고 의지할 가족조차 없었던 여인이니, 그 명망 또한 신기루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명망 아래에 탄탄하게 닦아 둔 기반이 나라를 이롭게 할 엄청난 공적이라면?

“도통 꿰뚫어 볼 수가 없군요.”

진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사환이 또 노야를 외치며 뛰어 들어왔다.

“노야, 경하드리옵니다. 노야, 경하드리옵니다!”

두 사환이 큰절을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경하?

폐하께서는 응당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지만, 사직을 청하고 집에 있는 나에게 축하할 일이 뭐 있다고?

“노야, 폐하께서 십팔랑 아씨가 바친 서예를 극찬하며 아씨를 사서어인(寫書御人)에 봉하고, 대황자께 글씨를 가르치라 하셨습니다.”

사환이 연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뭐라고?

진소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앉아 있던 진 노태야도 무척 기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황궁의 연회석에서는 진십팔랑이 황제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뒤로한 채 황제가 하사한 조서를 품에 끌어안았다.

꿈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장면이지만, 그 꿈이 사실이 되는 순간의 기분이란 꿈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십팔랑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길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진십팔랑은 끝까지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든 채, 최대한 담담해 보이는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짐이 참으로 기쁜 날이로구나. 이번 생일만큼 귀하고 많은 선물을 받아본 건 처음이로다!”

옥좌에 앉은 황제가 웃으면서 술잔을 높이 들었다.

대전 안에는 대신들의 만세 소리와 함께 풍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녀들이 형형색색으로 나풀거리는 소매를 움직이며 가무를 선보이자, 대전 안은 인간계의 선경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외진 곳에 있는 경왕의 궁은 황궁 대전 안의 흥겨움이 전혀 전해지지 않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진안 군왕과 경왕 앞에도 연회석이 마련되었다. 경왕은 바보가 된 후로 되도록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면, 황제에게 난처한 상황만 생길 것이 분명했다.

“자, 이것도 먹어 봐.”

진안 군왕이 경왕에게 숟가락으로 차를 떠먹여 주었다. 양고기를 손에 쥐고 신이 나서 먹고 있던 경왕은 인상을 쓰며 진안 군왕의 숟가락을 피했다.

“그러다 체할라.”

진안 군왕은 이리저리 피하는 경왕을 다독이면서 간신히 차를 반 잔 정도 먹였다. 진안 군왕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내시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세 사람이나 상을 받은 것이야? 폐하께서 이번 탄신일을 몹시 즐겁게 보내고 계시는구나.”

내시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즐거우면 된 거지.”

진안 군왕이 별다른 말이 없자, 내시는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내시는 문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홀로 금잔을 쥐고 천천히 술을 들이켜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경성 밖. 대로변의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생긴 무덤 쪽을 내다보았다. 무덤 앞에는 시녀 하나가 광주리를 손에 든 채 서 있었고, 두봉을 두른 여인이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었다.

하늘은 높고 공기는 상쾌한 가을날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정교랑의 얼굴에 얼룩을 만들었다.

정교랑은 손을 뻗어 비석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발치에는 묘비에 글자를 새기는 도구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정교랑이 끌과 망치를 손에 쥐고 묘비 위를 두드리며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범석두.”

“서무수.”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

누이가 오라버니들을 위해 묘비를 세우고 이름을 새기러 왔어요.

새로 만들어진 무덤, 오래된 나무, 서 있는 시녀와 바닥을 자리 삼아 앉은 아리따운 낭자. 대로변에서 무덤 쪽을 내다보던 사람들은 한 폭의 기이한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아쉽구나, 아쉬워. 저리도 어여쁜 여인이 손에 망치와 끌을 쥐고 있으니 원. 저것들을 칠현금으로 바꾸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누군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황궁 연회가 끝났다. 상을 받은 이들에게 아직 정식으로 임명장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들의 집 앞은 방문객들과 넘쳐나는 선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천자의 말이 갖는 무게는 지엄한 것이었다.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상을 내렸으니 차질이 생길 리 만무했다.

“육낭은? 육낭은 어디 있어? 노야께서 부르신다고 전해라.”

주 부인의 목소리가 마당 안에 울려 퍼졌다.

“부인, 부인, 의원을 모셔왔습니다.”

시녀들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누가 의원을 부르라 했느냐? 육낭이 어디 있냐니까!”

주 부인이 말했다.

주 부인은 하루 새에 두 번씩이나 혼절한 터였다. 성문 앞에서 주육낭이 쇠뇌를 들고 눈앞을 지나갈 때 처음 혼절했고,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육낭이 황제에게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혼절했다.

두 번씩이나 연달아 혼절한 주 부인이 걱정스러웠던 주 노야는 시녀들에게 의원을 불러오라 명했다.

주 부인은 성가시다는 듯 시녀와 여종들에게 손을 휘휘 젓고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주 부인의 얼굴을 비췄다.

“공자님은 황궁 연회 이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여종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주 부인이 순간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 누이를 보러 갔나 보네.”

주 부인이 활짝 웃으며 여종들을 재촉했다.

“어서 서두르거라. 교교에게도 집에 온 선물을 좀 보내 주고. 아 참, 우리 집에서 며칠 묵었다 가는 건 어떠냐고도 물어보거라. 상냥하고 공손한 말투로 물어야 한다. 괜히 우리 교교 귀찮게 잔말 많이 하지 말고.”

여종과 시녀들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떴다.

주육낭은 일찍이 옥대교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범강림은 황궁 연회를 마친 후에도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무장들에게 둘러싸인 채 궁노원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범강림에게 관직이 내려졌다는 소식은 벌써 집으로 전해져 온 집안의 사람들이 옥대교 저택을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시종들과 사환, 그리고 어린 몸종들은 기쁜 표정으로 범강림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기를 안고 있던 황씨는 주육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지만,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형수 노릇을 하러 주육낭을 마중 나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누가 손님인지도 모르겠네. 저 소년은 정 낭자의 진짜 오라버니잖아.

“정 낭자는 그때 나간 이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황씨가 말했다.

“어디로 갔습니까?”

주육낭의 물음에 황씨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 여인이 자신이 어딜 가는지 친절하게 말해 줬을 리가 없지.

미간을 찌푸리던 주육낭은 무언가 생각난 듯 눈빛을 번뜩이며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던 주육낭이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서서 몸을 돌리고는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잠시 실례했습니다, 형수님.”

주육낭은 그 말만 던지고 황씨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후다닥 말에 올라탄 후 질풍처럼 내달려 사라졌다. 황씨는 그런 주육낭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황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유, 제가 감히요. 어찌 감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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