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당사(唐史)>에 ‘이전(李畋)은 강남서도(江南西道) 원주부(袁州府) 상률 사람으로 무덕 4년(서기 621년) 4월 18일생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산귀(山鬼)에 놀라 병을 얻었는데, 아무리 치료하려 해도 효험이 없자 전국에 방을 붙여 명의를 수소문했습니다. 당시 스물넷이었던 사냥꾼 이전은 방을 보고 대나무 통에 초석을 넣고 터뜨려 산요(山魈: 깊은 산에 사는 요괴)의 사악한 기운을 쫓았지요. 그 덕에 건강을 되찾은 이세민은 이전을 ‘폭죽조사(爆竹祖師)’에 봉했다고 합니다.
-그림-
본디 거리의 열기는 거리에서 그치고 으리으리한 저택의 안방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택에 사는 이들도 그 어느 때보다 빨리 그 열기를 알았다.
저택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은 하늘을 가득 수놓던 불꽃이 사그라들고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못내 아쉬워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노야, 노야, 확실히 알아봤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봤어요.”
수많은 저택에서 사환들이 같은 말을 외쳐댔다. 사환의 말을 들은 진소는 놀라며 불안한 기색을 보이다가 끝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인이었군.”
진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계절을 다 겪은 듯한 표정 변화를 보인 후, 그 말 한마디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면 진소 부인은 시종일관 호들갑을 떨었다.
“역시 정 낭자가 돌아온 거였구나. 노야, 정 낭자가 정말 돌아왔어요.”
흥분한 진소 부인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렇소. 돌아왔구려.”
사실 정 낭자가 안 돌아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 없었다면 모를까, 일이 생기지 않았는가. 정 낭자는 그 어느 때에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발을 들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던 그녀였다.
“노야, 그것 봐요. 공연한 생각을 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준비를 많이 한 걸 보면 진작 돌아왔던 거예요. 그런데도 이 일에 관해 누굴 찾아가 부탁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저 조용히 슬픔을 억누르며 안장했을 뿐이죠.”
진소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소는 고개를 돌려 부인을 바라보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이게 조용히라고? 두 번 조용했다간 놀라 죽겠군. 까딱하다간 사람을 잡겠어!
정 낭자가 나섰다 하면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걸 아는 진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찾아오지 않았지. 그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았고.
진소 부인은 장례에 뭐라도 보내야겠다며 옆에서 끊임없이 떠들어댔지만, 진소의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진소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봤다. 떠들썩한 거리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디 오늘뿐이랴. 내일도, 모레도 떠들썩하겠지. 입에서 입으로 얘기가 전해지며 과장에 과장이 얹어질 테고.
“여봐라.”
진소가 고개를 들어 외치며 진소 부인의 말을 끊었다. 사환이 들어오며 대답했다.
“노사안이 떠났는지 알아보거라.”
진소가 말했다.
진 노태야는 여전히 회랑 아래에 서서 목이 꺾이도록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진단랑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만 보거라, 단랑. 그러다 목 아플라.”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하자, 진단랑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시선을 간신히 거둬들였다.
“할아버지, 우리도 얼른 폭죽 사러 가요. 저런 폭죽 살래요.”
다급한 진단랑의 목소리에 진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든 다 파는 건 아니란다.”
진단랑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진 노태야를 바라봤다.
“가질 수는 있겠지만, 꼭 사서 가지란 법은 없지.”
진 노태야가 웃으며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 할아비가 널 데려가 구해 주마.”
앞 구절은 못 알아들어도 뒷 구절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진단랑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들한테 가서 말할래요.”
진단랑이 쫄랑거리며 뛰어갔다.
진 노태야는 뛰어가는 손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쳐다봤다. 병풍에 흐릿하게 표시했던 동그라미가 날이 갈수록 또렷해진 탓에 봉래산 육첩 병풍은 본래의 우아한 멋을 잃었다.
“이번엔, 또 몇 개가 더해지려나 모르겠군.”
진 노태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경성엔 밤새 큰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고 난 경성은 훨씬 맑고 상쾌해 보였다.
거리에 뿌린 지전은 어제 깨끗이 치운 데다 간밤에 비까지 시원하게 내린 터라 거리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얼핏 보기에는 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그래 보이는 것뿐이었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금세 달라진 점을 눈치챘다.
“저 사람들은 뭐 하는 거요? 제사를 지내는 건가?
행인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묘지야. 작은 크기는 아니다만 은근히 초라해 보인단 말이지. 새 무덤에 비석도 새로 세우고, 나무도 새로 심었어. 근데 묘지 주변에 웬 사람이 저리 많아? 아예 땅바닥에 누운 사람도 있고.
“아, 저건 제사 지내는 게 아니오. 술을 먹는 거지.”
누군가가 웃으며 대꾸했다.
술을 먹는다고? 술을 코로 먹나?
행인들은 더욱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술이 어디 있단 거요?”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둥그런 표시를 했다.
“여기가 죄다 술이오.”
행인들은 더욱 머리가 어질어질한 눈치였다.
아니, 경성 사람들은 죄다 정신이 나간 건가?
“모르시나 보네?”
정신 나간 사람들이 더 여럿 몰려왔다.
“어제 경성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소.”
“무슨 일인데?”
몰려든 행인들도 궁금해하며 물었다.
“여기가 누구 무덤인지 아시오?”
“아니, 그게 술이랑 무슨 상관이오?”
“술 얘기를 하려면 이 무덤 얘기부터 해야 하거든.”
한편 같은 시각 경성 사람들은 태평거와 신선거는 물론이고 이춘당까지 찾아가 술을 사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술을 팔고 안 팔고는 차치하더라도, 아니, 어떻게 약포에 와서 술을 내놓으란 겁니까?”
이춘당 관리인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어디서 살 수 있소?”
“난 어제 딱 한 사발밖에 못 마셨단 말이오. 딱 한 사발 마셨다고. 난 이제 다른 술은 못 먹소. 죄다 밍밍하고 맛대가리 없어서.”
“댁은 한 사발이라도 마셨지. 난 한 방울 찍어만 봤소.”
똑같은 말이 신선거와 태평거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어찌나 아우성들을 치는지 영업이 힘들 정도였다.
양쪽 모두 관리인들이 나와 이들을 다독였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술은 저희 집에서 빚은 게 아닙니다. 저희한테 없어요.”
“당신네 행수가 빚은 거라지 않았소?”
“행수께서 빚은 건 맞는데, 우린 안 팔아요.”
“왜 안 판단 거요?”
“팔려고 빚은 술이 아니니까요. 저희 행수께서 저희 주인어른들을 위해 특별히 빚으신 겁니다.”
“그래도 팔면 좀 어때서?”
오 관리인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여러분, 여러분.”
오 관리인은 몰려든 사람들이 조용해지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세상에 둘도 없는 술을, 그분들을 위해 빚은 겁니다. 판매하는 거라면, 둘도 없는 하나뿐인 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래? 정말 안 판다고?”
주 부인의 물음에 몸종들과 여종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사람들이 문 앞을 에워쌌는데 계속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 집 술을 주문하고 싶다며 찾아온 식당도 많았는데, 죄다 거절했고요.”
찻잔을 든 채 멍하니 있던 주 부인이 실소를 터트리며 물었다.
“그 술이 그리 맛있다더냐?”
“네, 엄청 맛있대요. 그 사람들이 1관에 사겠다고 했어요.”
몸종 하나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건 어제 가격이고, 오늘은 2관으로 올랐어요.”
또 다른 몸종이 말했다. 주 부인이 풉 하며 차를 내뿜었다.
2관이라니!
“걔가 그렇게 세게 불렀단 말이야? 그게 뭐 목숨 걸린 일이랑 같은 줄 아나?”
“부인, 아씨께서 부르신 가격이 아니라, 앞다투어 사겠다는 사람들이 부른 가격이에요.”
주 부인의 말에 몸종들이 대답했다.
하긴, 목숨이 걸렸을 때도 그랬지. 그 애는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울고불고하며 값을 불러댔어.
2만 관이요!
2만 관이요!
그때 마당에서 외치던 소리가 주 부인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주 부인은 손으로 가슴을 쳤다.
정말 돌아 버리겠네. 또 아랫것들이 말하던 그날 광경이 떠오르잖아. 거리에서만 술을 뿌린 게 아니라, 무덤 앞에서 동이째 깨 버린 술만 해도 열댓 동이가 넘는댔는데.
가만있자, 한 주전자에 2관이면…….
주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애는 왜 이렇게 돈을 쉽게 버는 거야? 근데 정작 본인은 돈을 돈으로 여기질 않으니.
어디서 시골 촌뜨기들을 만나서는 의남매인지 뭔지를 맺었다질 않나. 의남매면 의남매지 점포 주인은 또 왜 맡겨. 죽었으면 그만이지 장례는 또 왜 그리 떠들썩하게 하는 것이며…….
그게 바보가 아니면 뭐야?
“그래서 이번엔, 팔았다더냐?”
주 부인이 한숨을 토하며 물었다. 그래도 술을 팔면 괜히 허세 부린 꼴은 아니지. 덕분에 술이 유명해지게 됐으니.
몸종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같은 대답만 했어요. 돈은 얼마가 됐든 천금을 준다 해도 못 판대요. 못 판다면 못 파는 거래요.”
몸종이 단호하게 말했다.
- 못 고친다면 못 고치는 거예요.
옛일이 떠오른 주 부인은 기가 막혔다.
“그런데 팔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못 먹는 건 아니래요.”
또 다른 몸종 하나가 무언가 떠오른 듯 얼른 덧붙이자,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 몸종을 쳐다봤다.
“그 관리인이 그랬어요. 주인어른들의 기일이 되면, 그때도 술을 나눠 줄 거래요.”
“그럼 그 사람들의 기제사가 돌아와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거 아니오?”
찻집 안.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그럼 내년 이맘때나 돼야겠군.”
“아니지, 아니지. 내년 이맘때가 아니야. 무원산 용사들은 5월에 죽었거든. 장례는 이제야 치르게 됐지만 말이오. 그러니 내년 5월이라고 해야 정확하지.”
“기억력 한번 좋네.”
“똑똑히 기억해 둬야 하고말고. 그날을 아주 가슴 깊이 새기고 살 거요.”
“그리 계산하면 한 석 달은 일찍 먹을 수 있겠군. 거 잘됐네!”
“……그건 어떻게 알았소?”
“내 숙부님 댁 조카의 처제의 진외종조부의 손자가 태평거에서 일하거든.”
“아니,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돈이 싫다는 거야?”
“거기가 돈이 없겠어? 상대가 누군지 좀 보라고! 무려 태평거에! 이춘당에! 신선거잖아!”
“게다가 신의라고. 목숨 하나에 만 관도 넘는.”
“잠깐, 술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신의는 또 뭐요?”
“아니, 그 엄청난 일도 모르시오? 소문을 전혀 못 들었구먼. 그 신의로 말할 것 같으면, 벌써 한참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잠깐, 신의 얘기를 하다 말고 왜 또 무원산으로 새지? 무원산은 또 뭐요?”
“무원산의 다섯 용사가, 서북 전선에서 죽었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누가 좀 알아듣게 설명할 수 없소? 그럼 오늘 찻값은 내가 다 내리다!”
“내가 하겠소!”
“내가 하겠소!”
대청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진십삼은 탁자에 돈을 던지고 일어섰다.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는 일에 정신이 팔린 주육낭의 모습이 보였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툭툭 쳤다.
“가자고.”
주육낭은 얘기가 끊기자 화를 냈다.
“자네나 가 봐.”
진십삼이 웃으며 대꾸했다.
“다 들었잖아. 걱정 말라니까.”
주육낭은 진십삼을 아랑곳하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진십삼은 걸음을 옮기다가 몇 걸음도 못 가 다시 돌아왔다.
“뭔지 알겠다. 그 여인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모자란 거구나.”
주육낭이 코웃음을 쳤다.
“난 아예 그 여인을 보러 갈 건데, 같이 안 갈 거야?”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 차 더 가져와!”
주육낭이 찻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계산대 앞에 기대어 사람들의 열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점원은 두어 번 소리쳐 부른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전자를 들고 달려왔다.
진십삼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문밖 거리도 인파로 떠들썩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 속에서 한 사람이 목청을 높이며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노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흥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내용이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거리를 가리키는 손동작만 봐도 역시나 무원산 얘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십삼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환이 건네는 말고삐를 받았다. 몸을 훌쩍 날려 말에 올라탄 진십삼은 떠나기 전 다시 한번 찻집을 힐끔 돌아봤다. 창문 너머로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주육낭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저쪽에 서서 손짓 발짓을 동원해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손님을 진지한 눈길로 보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수시로 놀랐다가, 기뻐했다가, 감탄했다가, 비탄에 빠지는 표정을 지었다. 얼핏 보기엔 전부 처음 듣는 얘기라 몹시도 흥미진진한 듯했다.
진십삼은 피식 웃고 말을 몰아 출발했다. 그때 다른 사환이 먼 곳에서 달려왔다.
“공자님, 공자님.”
가까이로 다가온 사환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진십삼은 잠시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빠르네.”
진십삼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낭자가 자기는 자기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된다고 했구나. 다른 일은 앞다투어 해 주려는 사람이 나오니까.”
그날의 장례가 일으킨 거대한 바람에 대해 정교랑은 거의 모르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들을 안장한 후 옥대교 저택으로 돌아온 정교랑은 예전과 다름없는 나날을 이어갔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질 무렵, 아기의 울음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배가 고파서 그러나요?”
시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범강림의 아내 황씨가 아이를 어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잠을 못 자서 투정 부리는 것 같아.”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회랑 아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시녀가 고개를 돌리고는 밝게 웃었다. 황씨도 얼른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회랑 아래에서 짙은 색 옷을 입은 여인이 이쪽을 보는 모습이 보이자, 황씨는 재빨리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저기, 시, 시끄러우셨죠.”
황씨가 불안해하며 서둘러 아기를 어르려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러자 놀란 아이가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황씨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황씨 본인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들은 원래 잘 울잖아요. 시끄러울 게 뭐 있어요.”
정교랑이 걸음을 옮겼다.
“큰아씨,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고개를 돌린 시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는 황씨를 보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씨는 괜히 트집 잡고 그러는 분 아니에요. 여기가 내 집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황씨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서북 둔보성(屯堡城)에서 자란 여자였다. 장부를 관리하던 아버지 옆에서 글 몇 자를 익힌 덕에 어느 정도 식견은 갖게 됐으나, 하루아침에 경성에 집이 생기고 대단한 시누이가 생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온 경성 사람이 다 나와 장례식에 참가하게 만드는 시누이라니.
황씨가 손으로 가슴을 쓸며 품속에 안긴 아기를 토닥였다. 이번 일로 어찌나 놀랐는지 그녀는 지금껏 시누이의 얼굴조차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그이랑 막 혼례를 올렸을 때였어. 일곱째 동서가 나한테 시누이는 어떤 사람일 것 같은지 묻더라고.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오르는 거야. 일곱째 도련님은 누이가 신선 같다고 했는데…….”
황씨가 품속의 아기를 어르며 말을 이었다.
“그땐 매일 언제쯤 얼굴을 보려나 궁금했어. 동서지간 일곱이 다 같이 올 줄 알았는데, 결국 나 혼자 왔지 뭐야.”
시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무언가 생각난 듯 일어섰다.
“큰아씨, 집에 왔는데도 좀 어색하시죠? 제가 도련님들이 쓰시던 방 보여 드릴게요. 떠날 때 모습 그대로 하나도 안 건드렸어요. 옷도 그대로 있고요.”
시녀의 말에 황씨도 아기를 안고 따라 일어섰다.
“아가, 네 아버지 방이 어떻게 생겼나 가 보자.”
후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다. 정교랑도 활을 들고 과녁을 조준했다.
“누이도 여전히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한 거야?”
범강림이 손에 든 활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텅 하는 소리로 화살을 쐈다.
“좋았어.”
범강림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정교랑이 범강림을 보며 손에 든 활을 흔들었다. 범강림이 의아한 눈길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석궁이에요.”
정교랑이 뿌듯한 표정으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범강림은 흠칫 놀라며 정교랑을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훌륭해.”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정교랑은 다시 활시위를 당기고, 한 발 또 한 발 연달아 화살을 쏘았다. 범강림은 한쪽 옆에 서서 조용히 지켜봤다.
좋아, 훌륭해.
범강림의 시야가 이따금 흐릿해졌다. 형제들이 옆에 서서 함께 웃으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좋아. 근데 안정감이 좀 부족하네.”
범강림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고개를 돌린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활시위를 당겼다.
진십삼이 왔을 무렵, 정교랑은 글씨 연습 중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끝나실 거예요.”
시녀가 문을 열고 생긋 웃으며 진십삼이 들어오도록 비켜서며 말했다.
“넌 웬일로 집에서 한가하게 있어? 대관리인이 안 바쁘다더냐?”
“아씨께서 며칠 쉬라고 하셨어요.”
진십삼이 건넨 농담에 시녀가 웃으며 대꾸했다. 진십삼이 옷매무시를 정돈하며 말했다.
“큰형님께서 오셨다니, 인사를 드리러 가야지.”
진십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범강림과 진십삼의 모습이 열린 문 사이로 보였다. 딱히 낯선 사이로 보이지 않아 황씨는 놀라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저 공자는 뭐 하는 분이셔?”
황씨가 물었다.
“공주부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세요.”
어린 몸종이 대답했다.
공주부라니!
황씨는 숨이 막힐 것 같아 가슴을 부여잡았다.
우리 그이는 저 공자랑 아까 분명 평절로 인사했는데? 아이고, 세상에.
황씨가 놀라는 사이 저쪽 서재의 방문이 열리더니 정교랑이 걸어 나왔다.
“누이, 서북에서 있었던 일을 진 공자께 소상히 말씀드렸어.”
범강림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우린 남한테 말 못 할 일 한 거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제 형제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겁니다.”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과 범강림이 진십삼을 쳐다봤다. 한 사람은 딱히 변화가 없는 표정이었지만, 한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젯밤에 누가 강문원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거든요.”
진십삼이 말했다.
첩실의 방에서 안락함을 즐기던 고능준은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짜증이 났다.
오늘은 조회에 안 가도 되는 날이었다. 사실 고능준은 조회를 주재하는 진소 등의 얼굴을 보기 싫어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요즘에는 진소의 어두워진 낯빛을 보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산해진미도 매일 먹으면 물리는지라 오늘은 아예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기로 한 터였다.
“탄핵을 당하면 당하는 거지, 뭐 대단한 일이라고. 탄핵 한 번 안 당해 본 사람이 어디 있다고 떠들어대나? 그깟 탄핵이 무슨 대수라고 일을 삼아. 이 사람들이 아주 발전은커녕 점점 퇴보하는군.”
고능준은 심기가 불편한 듯 탁자를 여러 번 내리쳤다. 앞에 꿇어앉아 있던 두 관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숨소리를 죽였다.
“대인, 이번에는 다릅니다.”
“뭐가 달라? 누군데? 이번에는 진소 일파 중 누구던가? 누구길래 그리들 놀라? 무슨 일로 탄핵한다는데? 매국? 아니면 적과 내통한 죄?”
고능준이 호통을 쳤다.
“노사안입니다.”
두 관리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노사안?
“그 망할 놈이 아직도 경성을 안 나갔어?”
고능준이 멈칫하며 물었다.
“본디 떠날 때가 지났습니다. 우리 쪽에서 이부에 명해 빨리 부임지로 가라고 재촉도 했고…….”
“됐네, 됐어. 곧 죽을 인사인데, 뭘 그리 벌벌 떨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끊던 고능준이 곧 멈칫하며 물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탄핵 상소를 올리지? 이젠 지방 관리 신분이잖아. 진소의 짓인가?”
고능준은 두 관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냉소를 지으며 옷소매를 뿌리쳤다.
“잘들 노는군. 규정을 어기고 은밀히 상소를 전달해? 이참에 그놈도 남주로 같이 보내 줘야겠어.”
고능준이 웃으며 말했다.
“대인, 진소가 전달한 게 아닙니다. 노사안이 간 역참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관리 하나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변방에서 온 급보로 포장해 바로 폐하께 올라갔답니다.”
고능준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망할 놈이 아주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빨리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건가. 그래, 얼마나 참신한 걸 고했다던가?”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강문원이 외적을 가벼이 보고 조정을 기만했답니다.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논공행상을 부적절하게 행하여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민간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잠깐, 잠깐.”
고능준이 말을 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관리를 쳐다봤다.
“노사안이 정신이 나갔나?”
두 관리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능준이 탁자를 탁 내리치자, 두 관리는 놀라 벌벌 떨었다.
“그자가 미친 게 아니면, 자네들이 바보가 된 게야?”
울화가 치민 고능준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서북의 논공행상에 대해 알아본 일로 쫓겨나 경성을 떠나게 된 놈이야. 그런 놈이 서북의 논공행상을 빌미로 탄핵 상소를 올렸다고. 제 발로 죽을 길을 찾아가겠다는데, 좀 좋은 일인가. 자네들은 뭐가 무서워 벌벌 떠는 게야!”
두 관리가 한숨을 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대인, 그자가 탄핵 상소만 올린 게 아닙니다. 장례를 그린 그림 한 폭을 같이 올렸습니다. 온 경성이 영웅호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만백성이 울분을 터트리며 함께 우는 그림 말입니다.”
오늘 조회에는 한 사람도 빠진 이가 없었다. 요즘은 통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던 황제까지 나와 있었다.
내시 두 명이 대전에 서서 그림을 양쪽으로 천천히 펼쳤다.
“노사안의 조부 노첩(盧捷)은 그림을 참 잘 그렸지. 선황께서 노첩의 작품을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며 침전에 걸어 두셨던 기억이 나는군.”
황제가 옥좌에 앉아 천천히 말했다.
“다만 그 자손들은 재능이 부족하여 화필을 잡지 않았어. 글공부에 전념한 통에 악기나 바둑, 서화는 뒷순위로 밀려난지라 노첩의 작품은 점점 귀해지고 있고.”
조당에서 시와 사, 그림을 논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유희에 빠져 있다며 어사에게 탄핵당할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앞으로 나와 따지고 드는 어사가 없었다.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형형한 눈빛으로 대전에 펼쳐진 화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죽음을 기다리는 새끼 양을 보며 어디서부터 물어뜯는 게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노사안이 조부처럼 정교한 솜씨를 익힌 건 아니지만, 핏줄은 못 속이는 법 같소. 경들도 나와서 한번 보시구려. 노사안의 그림이 어떤 것 같소?”
조회에 참석하는 관료는 많지 않기에 두 줄로 서 있는 열댓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황제의 말을 듣고도 다들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할 뿐,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는 이는 없었다.
“폐하, 노사안의 언사는 직분에 맞지 않는…….”
고능준의 눈빛을 본 관료 하나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서 눈 딱 감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말을 끊었다.
“노사안의 언사가 직분에 맞지 않는 건 짐도 알고 있으니, 굳이 언급할 것 없소. 짐은 지금 그림에 대해 얘기하는 거요.”
황제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그림이 어떠냐고 묻고 있잖소!”
황제의 기세에 감히 나서서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신이 명을 받들겠나이다.”
소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경직된 대전 분위기를 깼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내디디는 모습을 본 대황자가 얼른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대황자가 한발 앞서가려고 하자, 진안 군왕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고 먼저 가도록 양보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이 앞장을 서자 진소도 걸음을 옮겼고, 나머지 관료들도 관직의 고하에 따라 순서대로 그 뒤를 따랐다.
아주 긴 족자에 경성의 서문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묘사하는 정경이 썩 훌륭한 건 아니었고 붓놀림도 평범했다. 하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만은 가히 일품이었다.
처음엔 침묵을 지키며 그림만 쳐다보던 관료들이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관료들도 소문을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지자,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노사안은 과연 노첩의 후손이었다. 묘사가 어찌나 세세한지 말 머리에 달린 흰 꽃 하나까지도 대충 그리는 법이 없었다.
관을 들고 있는 사람, 하얀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품속에 안겨 있는 아이의 표정까지도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었다.
아기는 흰 깃발을 잡으려고 손을 뻗기도 하고, 눈을 비비기도 하고, 손가락을 빨기도 하며 순진무구한 모습이었다.
거리로 나온 남녀노소의 표정도 하나하나 달랐다. 놀라는 사람, 무슨 일인지 묻는 사람은 물론이고 만취했으면서도 술을 보며 달려드는 사람까지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본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대황자는 느긋하게 그림을 보는 진안 군왕을 힐끔 보고는 따라서 걸음을 늦추었다. 진안 군왕은 행여 하나라도 놓칠세라 미간을 찌푸리며 구석구석 꼼꼼히 살폈다.
대황자는 그림 보는 게 따분했다. 꼭 지도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선으로 이은 그림을 보는 건 늘 따분하고 지루했다.
하지만 대황자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고 도도한 시선으로 진지하게 그림을 쳐다봤다.
찾았다!
진안 군왕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그림의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지러이 모여 있는 인파 속에서 낭자 하나가 손을 뻗어 말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멱리를 쓰고 있는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노사안의 그림은 확실히 그 조부만큼 정교하지는 못했다. 그 여인의 기품은 멱리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인데, 노사안의 붓 아래에서는 평범하기만 했다.
여기는 좀 더 높이 그리고, 옷소매는 좀 더 품이 넓어야 하는데. 아무리 멱리를 썼어도 그렇지 그냥 검게 칠하기만 하면 쓰나. 어렴풋이 얼굴이 보이게 해야지.
“전하.”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나지막이 군왕을 부르며 주의를 주었다. 진안 군왕이 몸을 똑바로 펴고, 진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전한 후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뭘 저리 넋을 놓고 본 거지?
진소도 고개를 빼고 들여다봤지만, 딱히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길고 긴 그림은 동문까지 계속됐고, 이어서 묘지 앞의 떠들썩한 광경과 하늘이 터지는 불꽃이 보였다.
“그림이 어떻소?”
옥좌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림은 그냥 그런데, 그림이 너무 가증스럽군.
고능준은 이를 갈았다. 그림이나 가무는 언제나 글로 묘사한 것보다 더 직관적이고 훨씬 충격적이었다.
이 일을 그저 상소문 한 장으로 묘사했다면 읽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 황제가 훨씬 차갑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면 훨씬 직관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례 행렬과 빼곡하게 둘러서서 구경하는 인파까지, 경성에서 일어난 떠들썩한 사건이 종이 위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한 해에 한두 번 정도 출궁하고, 그나마도 몇 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있는 어화원에 가는 게 전부인 황제에게 이 그림이 가져다줄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하리라.
황제는 그림 속에 펼쳐진 그날의 광경을 따라 걸으며, 그 기분을 함께 만끽한 듯했다.
“백성이 울분을 토하며, 구경하는 열 중 아홉은 슬퍼했습니다. 서쪽에서 동쪽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지전은 눈처럼 휘날리고 흰 깃발은 숲을 이루었으며, 온 경성이 무원산을 떠들어댔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일에 대해 은밀히 조사하던 중, 강문원 일파에게 폐하를 기만한다는 공격을 받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경성을 떠나다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하늘에 영령의 안녕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죄인의 몸이라고는 하나 폐하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억울하게 원성만 들으시는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분에 맞지 않는 언사임을 알면서도 강문원이 폐하를 기만한 죄를 낱낱이 고하고자 합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신의 목을 베어 선덕문 밖에 거신다 하여도 기꺼이…….”
대전에 있던 내시가 노사안이 올린 상소를 목청 높여 낭독했다. 그림을 다 보고 난 관료들은 또다시 침묵에 빠졌다.
“대답해 보시오. 노사안의 그림이 어떻소?”
황제가 다시 물었다.
대황자는 자신이 앞으로 나가 한두 마디 하고 싶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림의 좋고 나쁜 점을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황제가 질문을 던지는 의도는 거기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 건 더욱 적절치 않아 보였다.
그저께 수업에서 스승님은 말을 삼가라고 하셨지. 확신이 없는 일이라면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하셨어.
그런 생각을 하며 주저하는 사이, 진안 군왕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폐하, 노사안의 그림은 그저 그렇습니다.”
진안 군왕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진안 군왕에게로 모아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놀라는 표정을 감출 수 없는 듯했다.
황족은 조회에 참석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장식에 불과했다. 장차 태자로 책봉될 몸으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논쟁에 참여하는 대황자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랐고, 이 점은 진안 군왕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황제와 무언가를 논하더라도, 조당의 관료 앞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한 일은 전혀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황제가 진안 군왕을 바라봤다. 기쁨이나 분노가 드러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폐하, 신이 폐하께 그려 올린 ‘삼산오악 유람도’를 기억하십니까?”
진안 군왕이 편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무, 무슨 그림이라고?
자리에 있는 관료들은 다들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황제의 낯빛은 미묘하게 변했다.
“신이 그림은 잘 모릅니다만, 그래도 노사안의 그림이 평범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신의 그림과 비교해도 썩 나은 건 아니죠.”
진안 군왕의 시선은 내시들이 펼쳐 들고 있는 그림으로 향했다.
“하지만 신에게는 노사안이 마음을 썼다는 게 보입니다. 신이 폐하께 바친 그림을 볼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눈으로 보고 붓으로 옮긴 그 마음이 똑같습니다.”
마음을 썼다!
그건 평가였다. 이 그림에 대한 평가이자 이 일에 대한 평가였고, 이는 황제가 듣고 싶어 하는 평가이기도 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림 뒤에 숨어 있던 일들이 그림을 찢고 나와 모두의 앞에 펼쳐졌다.
방위(方瑋)!
말을 참 거침없이도 하는구나! 어딜 감히 쓸데없이 나서는 게야!
고능준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속으로 포효했다.
그 말에 놀란 건 아니었다. 그 말을 한 사람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어차피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올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진소 일파의 사람이어야 했다.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군왕이 아니라.
진소가 했다면 어땠을까. 도리상 진소 일파의 사람이 말했어야 했다. 노사안은 진소가 천거한 인사이므로 황제의 눈에 그는 진소의 사람이었다.
진소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는 속으로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진소가 앞으로 나서며 노사안이 옳았다고 한다면, 이는 가까운 이의 허물을 덮어 주는 꼴이 될 터였다.
아무튼 진소가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결과는 똑같았다. 황제의 의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의심은 이 일을 진소가 뒤에서 조종했을 거라는 의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데없이 진안 군왕이 입을 열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예전의 무슨 그림 얘기까지 꺼내며 황제의 생각을 끌어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폐하,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진소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거 보라고. 신’도’ 그리 생각한다는 게 됐잖아. 신’은’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겨우 한 글자 차이지만, 이는 황제의 마음속에서 의심이 사라지게 하기 충분했다.
“폐하, 노사안이 마음을 쓴 건 사실이나 그 의도가 심히 불순합니다!”
고능준도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지금 급선무는 논쟁이 아니라 사건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고 대인의 감상은 참으로 이상하외다. 어디서 그 의도가 불순하게 보인단 말씀입니까?”
“노사안은 강문원의 무리가 공을 가로채고자 폐하를 기만했다 주장하는데, 신이 보기에는 도리어 노사안이 백성을 선동해 폐하를 협박하는…….”
“백성을 선동해요? 온 백성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고 대인께서는 노사안을 너무 과대평가하십니다.”
조용했던 대전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광풍이 휘몰아치고 세찬 비가 내리는 듯 반박과 힐난이 끊이지 않았다.
대황자는 다소 멍한 채로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한 상황에 침묵을 지키며 바짝 엎드려 귀먹고 눈먼 듯 고분고분 움직이던 조정 관료들이 한마디도 지지 않을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일 태세였다.
이게 뭐야. 대체 뭐 때문에 저리 떠들고 싸우는지 모르겠네. 따분하기만 하고.
대황자는 대전에 잠자코 서 있었다. 어릴 적 부황을 대신해 조회에 참석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었다. 그때는 그나마 앉아 있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니까.
이 인간들이 대체 언제까지 떠들 작정인지 모르겠네.
불꽃이 펑펑 터지도록 도화선에 불을 붙인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꾹 참고, 예의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관료들의 소리는 어느새 배경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네요.”
진안 군왕이 대황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대황자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진안 군왕은 그런 대황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얼마나 잘 그렸습니까. 진짜처럼 생생하기도 하고요. 전엔 황궁 밖에 나가면 동문과 서문을 자주 갔습니다. 여기 이 다리도 알아보겠네요. 다리 어귀에 사자 석상이 세 개 있었는데…….”
대황자는 아예 걸음을 옮겨 진안 군왕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진안 군왕의 시선이 그림 끝자락의 불꽃에 머물렀다.
성 밖에서 본 그날의 불꽃놀이는 이렇게 찬란했구나.
그 불꽃은 진안 군왕도 봤지만, 별처럼 작은 불꽃 몇 개에 불과했다. 그날 불꽃이 터질 때, 진안 군왕은 높은 곳에 위치한 황궁의 버려진 뜰에 육가아와 함께 앉아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불꽃놀이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 경성 거리는 저토록 시끌벅적했다니.
진안 군왕의 눈길은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몇 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
정말 화나고 또 화나고, 슬프고 또 슬프겠구나. 본디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이젠 그것마저 잃고 말았으니.
좌천되어 외직으로 나가던 노사안이 경성을 떠나면서 천자께 탄핵 상소를 올려 천자의 분노를 자아낸 일은 한나절도 안 되어 온 황성과 관청에 소문이 퍼졌다. 여기저기서 의론이 분분하고 인심도 흉흉했다. 이번 일로 또 얼마나 많은 이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할지, 또 누가 이번 일 덕에 이득을 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사안은 이번 일이 일으킬 풍파를 예상했지만, 그 광경을 직접 볼 순 없었다. 황제가 노사안의 상소를 확인하던 무렵, 어사대는 그를 체포하여 하옥했다.
심문을 받으러 공당으로 나온 노사안을 보고 있노라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어사들은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같은 조정 관료로서 수없이 마주친 사이였지만, 어사들은 조금도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노사안이 가슴을 쫙 펴고 고개를 꼿꼿이 들며 당당하게 나오는 게 몹시 아니꼬울 따름이었다.
이곳이 관료들이라면 듣기만 해도 벌벌 떠는 어사대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노사안 저놈은 평소에도 고개 한번 제대로 든 적이 없는데.
늘 진소의 뒤에서 고분고분 순종하며 약삭빠르게 움직이던 노사안이었다. 담력도 작고 줏대도 없던 노사안이 어찌 저리 강직하고 정의로운 태도로 나온단 말인가.
“노정(盧正), 네 죄를 알렷다!”
어사 한 명이 경당목을 탁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이 사람은 분에 넘치는 언사를 행한 죄를 지었소이다.”
노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핵심을 빼놓고 부수적인 걸 이야기하는군.”
어사가 냉소를 보였다.
“조정 관료를 중상모략한 죄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어사의 냉소에 노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중상모략을 했다고요? 대인, 절 너무 띄워주십니다그려. 제게는 그만한 수완이 없습니다. 민정을 살펴 보고했을 뿐이지요.”
노사안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민정을 살피는 것도 죄가 된다면, 이 노정이 죄를 인정하겠소이다.”
어사는 속으로 침을 뱉으면서도, 다시 표정을 바꾸어 물었다.
“노정, 이럴 것까지 있소?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울분이 쌓인 건 알지만…….”
어사가 무언가를 유도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노사안이 말을 잘랐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 마음속엔 울분이 없습니다. 백성을 대신해 울분을 토했을 뿐이지요.”
노사안이 하도 당당하게 나오자 도리어 어사가 할 말을 잃었다.
“노정, 죽을 길을 찾아가려고 작정한 거요?”
어사의 물음에 노사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어찌 죽을 길이란 말입니까. 천자를 대신해 민정을 살피고, 권신들이 성총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막은 것인데요. 이는 신하의 사명이자 신하의 도리이기도 합니다.”
노사안이 목청을 높였다.
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만 끌어내라는 손짓을 했다. 어쨌든 첫 심문에 무언가를 받아내기란 힘든 것이었다. 어사대에서 사대부에게 고문을 가하긴 힘들지만, 다른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며칠 고초를 겪고 나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노사안은 조금도 두렵지 않은 듯 뒤돌아 가슴을 쫙 펴고 고개를 꼿꼿이 든 채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걸어나가던 노사안은 문 앞에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는 어사중승을 봤다.
“노정.”
어사중승과 스쳐 지나가는데, 어사중승이 노사안을 불러 세웠다. 노사안이 담담한 표정으로 어사중승을 쳐다봤다.
“이번에 진소가 그대를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어사중승이 나지막이 물었다. 노사안이 어사중승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 자신감은 어느 한 사람에게서 오는 게 아닙니다. 만백성에게서 오지요.”
저놈이 정신줄을 놓았나? 좌천되어 남주로 가게 되었으니 남은 인생에 가망이 없다 여겨 광증에 사로잡혔군.
어사중승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그리 간단한 일은 결코 아닐 터였다. 노사안은 확실히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었다. 진소가 구해 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지 않고,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핵심이었다.
만백성이라…….
이게 정말 그리 커질 일이란 말인가?
“여봐라, 거리에 나가 조사해 봐라. 노정의 그 그림이 대체 얼마나 과장됐고, 얼마나 사실적인 것인지.”
어사중승이 말단 관리를 불러 분부했다.
한편 같은 시각 경조부 관아의 관간우상공사(管幹右廂公事: 관직명) 유금천(劉錦泉)도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간악한 백성이 그런 일을 벌였는데, 네놈들은 전혀 몰랐단 말이냐? 네놈들은 전부 죽었어?”
유금천은 소식을 듣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트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왔다.
그날의 일은 유금천도 나중에 소문을 들어 알게 됐지만, 그저 돈 많은 이가 장례를 치렀다는 정도였다. 돈을 펑펑 썼다는 둥, 돈 많은 태평거와 신선거가 어쨌다는 둥 하는 얘기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일을 노사안이 이용했을 줄이야!
유금천 앞에 선 수하들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죽음으로 내몰린 노사안이 이런 수를 쓸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사실 고위층 관료 누가 누굴 탄핵하는 등의 일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그림이었다. 그림 속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것도 경성에서, 동쪽과 서쪽을 가로지르면서. 그런데 그곳이 바로 이들의 관할이었다.
이 일이 천자의 앞으로 올라갔으니, 가볍게는 부윤(府尹)이 유금천을 용서하지 않을 테고, 무겁게는 황제가 유금천을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노사안 때문에 죽게 생긴 건 분명했다.
“대인, 이번 일은 진 상공 쪽의 계획이 아닌 듯싶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쪽의 계획이 아니면, 그자들이 왜 튀어나온 건데? 왜 갑자기 그 수많은 사람이 장례를 보러 몰려나와?”
유 공사가 호통을 쳤다.
“장례를 치르던 사람들이 술을 나눠 줬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엄청 맛있는 술이었답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독한 술이라던데요.”
“저희 집 사환은 한 사발 받아먹고 취해서, 이틀 만에 깨어났습니다!”
“정말 그리 독하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화제가 바뀌었다. 유 공사는 무언가 깨달은 듯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탁자를 무겁게 내리쳤다.
“술이라!”
유 공사가 냉소를 지었다.
“술이었군. 술을 받아먹으려고 죄다 뛰쳐나온 거였어. 온 경성이 영령을 배웅하기는! 노사안이 개소리를 지껄였군!”
다들 그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랬다.
“전부 그 술 때문에 일어난 사달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일이 쉬워지겠군.”
유 공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신선거와 태평거는 양조 허가를 받은 곳이 아니다. 전부 잡아들여라. 멋대로 술을 판 죄를 묻겠다!”
양심 없는 장사치가 술을 팔아먹으려고 술수를 부린 게지. 민정이니 원성이니 하는 건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어!
그래, 복잡할 것도 없는 일이야. 다른 일로 번지기 전에 눌러 버려야겠어. 노사안이 뭘 어쩔 수 있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유 공사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부윤 대인과 고능준 대인께서 애쓰지 않으시도록 내가 앞장서서 일을 해결하면, 분명 큰 칭찬을 받을 게야.
“속히 가거라. 관졸을 여럿 데려가 점포를 폐쇄해 버려!”
서무수 등을 안장한 후, 벌써 닷새가 지났다. 범강림이 태평거로 오자 오 관리인이 직접 수행하며 새로 온 관리인을 소개해 주었다.
점원들의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와 범강림의 담담한 표정을 보며, 범강림의 아내 황씨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주인어른들의 방은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오 관리인의 말에 황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범강림을 쳐다봤다.
집으로 돌아오자 형제들에 관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얘기할 때마다 괴로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범강림의 표정은 조금도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기운이 나는 듯 보여 이상할 정도였다.
“너무 걱정 마시오.”
범강림이 방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했다.
“모두 내 형제들이 아니오. 형제들을 잃었지만, 난 두렵지 않소. 굳이 그들을 잊으려 애쓸 필요도 없고.”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주인어른, 관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오 관리인이 달려와 소리쳤다.
관부?
황씨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지만, 범강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도리어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예상대로군. 누이의 말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어.”
범강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가 보리다.”
“주인어른, 저들을 안으로 들이시지요.”
오 관리인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범강림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린 사람들 앞에서 말 못 할 일을 한 적 없소.”
범강림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태평거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님들은 먹고 마시던 일을 멈추고, 대청에 선 관졸들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나리.”
뒤쪽에서 나온 범강림이 예를 표했다.
“댁이 여기 주인이오? 점포를 닫고 우리랑 함께 갑시다.”
관졸의 말에 왁자지껄했던 주변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점포를 폐쇄하겠다고요?”
같은 시각 경성의 신선거. 시녀가 관졸의 말에 실소를 터트리며 물었다.
“이유는요?”
“허가도 없이 술을 빚었기 때문이다.”
관졸이 말했다.
대청에서 수군거리며 구경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이들이 오늘 신선거에 모인 건 사실 며칠 전 그 술 때문이었다.
자리에 있는 손님 중 대부분은 그 술을 맛보지 못했지만, 그 술이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경성에서 술을 빚을 자격은 정식 허가를 받은 점포와 관가의 양조장, 세금을 내고 운영하는 개인 양조장에게만 주어졌다. 그 외의 곳에서 술을 빚으면 중죄에 해당한다는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민 백성에게 적용되는 것이고, 고관대작이나 권세가의 집에서는 사사로이 술을 빚는 일이 흔했다. 관부도 뻔히 알면서 못 본 척 눈감아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허가도 없이 술을 빚었다는 죄는 트집을 잡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느 벼슬아치에게 뒷돈을 챙겨 주지 않았거나, 어느 벼슬아치의 먹잇감이 되었거나.
그리 맛좋은 술이라면 분명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눈독을 들이는 벼슬아치가 생겼겠지. 흔히 있는 일이긴 한데,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시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리, 오해예요. 우리는 허가 없이 술을 빚은 적도 없고, 판매한 적은 더더욱 없어요. 성 밖에 있는 노씨의 양조장에서 술을 사다가 살짝 개량했을 뿐이죠. 장례 때만 썼고 돈도 안 받았어요. 이젠 다 나눠 주고 없는데, 허가도 없이 술을 빚어 팔았다니요?”
그래? 노씨의 양조장에서 사 온 거였군!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달려가려는데, 옆에 있던 이들이 붙잡았다.
“자네 바보인가? 개량했다는 말 못 들었어? 노씨가 빚은 술이 그리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어쨌거나 어디서 나온 술인지 알았잖아. 일단 가서 실컷 마시며 속을 좀 달래야겠어.”
손님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관졸들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증인이 있다.”
관졸 중 우두머리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시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맹세코 판 적 없거든요. 우리 쪽에도 증인이 있어요.”
시녀가 대청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여러분 중에 우리 집에서 술 사신 분 있으세요?”
“없소.”
“누구든 산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파시오. 돈은 얼마든지 드리리다.”
대청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청이 소란스러워질수록 관졸들은 불안하고 짜증이 나는 기색이 역력했다.
“됐다. 시끄럽고, 어서 문 닫고 같이 좀 가자.”
관졸들이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도, 시녀는 냉랭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리,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유야 확실하지. 술을 빌미로 백성을 선동해 소란을 피웠잖아.”
관졸 하나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백성을 선동하지 않았느냐!”
시녀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시녀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대청은 차츰 조용해졌다. 그 웃음소리에 관졸들은 소름이 돋았다.
“뭘 웃어?”
부아가 치민 관졸들이 소리를 질렀다.
“고마워서요.”
시녀가 관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고맙다고?
관졸들이 멈칫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시녀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우리가 술을 나눠 주자 백성들이 제 발로 달려왔어요. 근데 그게 어떻게 우리가 백성을 부추겨 소란을 피운 게 되죠?”
시녀가 바깥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 지금 밖에 몰려든 저 사람들은 뭐예요? 댁들이 여기 와서 소란을 피우니까 구경하러 온 건데, 그럼 이번엔 댁들이 백성을 부추겨 소란을 피운 거겠네요?”
관졸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앞은 어느 틈에 구경하러 온 백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이라도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이들로 거리도 인파로 북적였다.
관졸들은 순간 안색이 싹 변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말이 길어진 거지?
“아무튼 할 말이 있으면 관아에 가서 하고, 일단 가자.”
관졸 중 우두머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쇠사슬을 내밀었다. 그가 앞으로 다가서기도 전에 시녀가 다시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날 잡아가겠다고요? 우리 점포를 폐쇄하겠다고요? 우리가 주인어른을 안장하고 길에서 술을 나눠 주며 노제를 지낸 게 백성을 선동한 거예요? 우리 주인어른께선 분명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요? 우리 주인어른께서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안장한 게, 백성을 선동한 거예요? 나리, 뭐가 유언비어인데요? 우리 주인어른께서 안 돌아가셨어요? 아니면 우리 주인어른께서 전사한 게 거짓이에요?”
나이도 어린 여자애가 똑 부러지는 말로 다다다다 쏘아붙이니 관졸들은 머리가 어질어질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어안이 벙벙하기까지 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허튼소리…….”
관졸 중 우두머리가 목청을 높이며 시녀의 목소리를 덮으려 했지만, 시녀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받아쳤다.
“허튼소리라고요? 무슨 허튼소릴 했는데요? 우리가 무슨 공을 바라길 했어요? 상을 달라고 했어요? 주인어른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얘기하면 안 돼요? 말하면 그게 유언비어가 되고요?”
시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지며 자신의 옷섶을 쥐어뜯었다. 어느새 촉촉해진 눈시울이 반짝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예요? 왜 우릴 잡아가고 점포를 폐쇄하겠단 건데요? 우린 다 필요 없고, 원하는 것도 없는데, 대체 왜요? 떳떳하게 안장하는 것조차 안 돼요? 우리 주인어른께선 전사하셨어요. 떳떳하고 부끄러울 게 없는 일이라 아무도 몰래 슬그머니 안장하지 않았더니, 그게 죄가 된다는 거예요? 좋아요. 그게 죄라면, 잡아가요! 잡아가라고요!”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던 관졸들은 문턱에 부딪히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고,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어떻게 된 거지? 그 얘기가 왜 나와? 우린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관졸들은 고개를 돌려 문밖에 있는 인파를 쳐다봤다. 몰려든 인파는 어느새 침묵을 지키며 울분에 찬 표정으로 관졸들을 보고 있었다. 다시 안쪽을 쳐다보자, 대청에 있는 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한편 범강림은 관졸들 앞으로 나서며 활을 집어 들었다. 관졸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허리에 찬 칼을 빼 들었다.
비록 한참 전 일이고, 지금 눈앞에 선 사내는 일곱 명이 아니라 단 한 명뿐이었지만, 당초 태평거에 난입했던 무뢰배들이 문 앞에서 화살에 맞아 죽은 일은 모두의 기억에 생생했다. 태평거는 금강이 지켜 주는 곳이라는 소문이 여전히 관아에 퍼져 있었다.
“범강림, 무슨 짓이냐? 체포에 불응해 살인을 하겠단 거냐?”
관졸들이 소리쳤다. 범강림은 관졸들을 보며 씩 웃더니 손에 든 활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난 이제 사람을 죽일 수 없소. 활시위도 못 당기고, 화살을 쏠 수도 없지. 사람을 죽이려면, 쇠뇌를 쓸 수밖에 없소.”
범강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자신의 옷을 잡아 뜯어 확 풀었다. 범강림의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미처 눈을 피하지도 못했다. 아낙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난 이제 사람을 죽일 수도 없거니와, 댁들을 죽이지도 않을 거요. 내 형제들은 서쪽 오랑캐 손에 죽었소. 나는 요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남은 힘은 서북 오랑캐를 죽이는 데 써야지 어찌 화살을 댁들한테 겨눌 수 있겠소. 내 형제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댁들한테.”
범강림이 웃음을 터트리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자, 와서 잡아가시오. 시키는 대로 하리다. 댁들이 죄가 있다고 하면, 죄가 있는 것이니, 잡아가시구려.”
관졸들은 멍한 표정이었고, 대청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상반신을 드러낸 사내의 몸 여기저기에 남은 무시무시한 흉터를 보노라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 끔찍한 흉터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처참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흉터 하나하나가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했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된 흔적이었다.
“잡…….”
“잡기는 개뿔!”
대청에 있던 누군가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접시 하나가 날아와 깨졌다.
“빌어먹을 네놈들 죄부터 물어라!”
일갈과 함께 기름 솥에 물을 부은 듯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 공사가 얼굴을 부여잡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안에 있던 관료들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했지만, 보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 공사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옆에 있는 부윤도 안색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윤은 잡아먹을 듯한 눈길로 유 공사를 노려봤다.
부윤 본인은 사정을 몰랐다고 하나, 어쨌거나 수하가 벌인 일이었다. 그 일로 고능준 대인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부윤 자리에 오른 건 이제 겨우 두 달이었다. 물론 이 자리는 그저 거쳐 가는 자리고, 최종 목표는 중서문하성 정사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일에 연루되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고능준이 먼저 후려치지 않았다면, 부윤이 나서서 따귀를 쳤을 것이다.
“네놈이 나한테 원한이 있느냐?”
고능준이 유 공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아니면 진소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이더냐?”
유 공사는 치욕도 잊은 채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대인, 대인, 전혀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저는 대인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자…….”
“근심을 덜어? 근심을 더하는 건 아니고?”
고능준이 유 공사의 말을 끊으며 일갈했다.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 아니냐! 일을 눌러 가라앉혀도 모자랄 판에, 멋대로 사람을 체포하겠다며 일을 이 지경으로 키워?”
“대인, 그 일은 백성이 분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집의 술을 마시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벌어진 일이죠. 그래서 그 술을…….”
유 공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자 고능준은 냉소를 지었다.
“유금천, 바보가 되었느냐? 사사로이 술을 빚어 파는 게 대죄라는 걸 너 혼자 알았느냔 말이다.”
그건 아니지. 모두가 아는 일인걸. 그러니 술을 팔지 않고 그냥 나눠 주며 백성을 끌어들인 거겠지. 국법을 어기면 성가신 일이 벌어지고 죄를 뒤집어쓴다는 것도 고려했을 테고.
“대인, 저는 그저 사람을 관아로 데려다 놓고 일이 잠잠해지게 하려던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놈들이 글쎄…….”
유금천이 말을 더듬으며 해명하자, 고능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뜻밖에도 그놈들이 관리를 겁내지 않고 관리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백성이었겠지. 어린 계집애한테 걸려들 줄은 몰랐을 거야. 술을 핑계로 체포할 생각만 떠오르고, 다른 생각은 안 떠올랐더냐?”
고능준이 유금천을 보며 말했다.
“유금천, 중서문하성 비각에 있던 유장(劉璋)을 기억하느냐?”
생소한 이름이었다. 유금천은 관두고 옆에 있던 부윤조차도 멈칫했다가 한참 만에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승진의 기쁨으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중풍을 얻고, 후에는 아들이 지은 죄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된 채 나귀가 끄는 달구지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가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는 유 교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자 얘기는 왜?
“지금 자네의 지위가 병을 얻기 전 그자에 비하면 어떻다고 생각하나?”
고능준이 물었다.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온 후로, 지방 지현(知縣)과 통판으로 임직한 게 벌써 십 년이었다. 뛰어난 치적 덕에 천거되어 경성으로 올라왔다고는 하나, 아직 중서문하성 비각 교리에 비할 위치는 아니었다.
한 오륙 년, 아니, 십 년쯤 지나면 조정 관리가 될 수도 있겠지. 물론,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는 전제하에.
유금천이 수심에 찬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소관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유장과 비교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무슨 근거로 태평거와 신선거 사람들이 자네를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지?”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뭐라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란 눈으로 고능준을 쳐다봤다.
들을수록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당초 유 교리의 일이…….
“태평거와 신선거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고능준이 물었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라고…….”
유금천이 얼른 대답했다.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고능준이 웃음을 멈추고 유금천을 노려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쓸모없는 놈, 냉큼 꺼져라!”
고능준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밖에 대고 손가락질을 했다.
공개적으로 그런 욕을 듣고 따귀까지 맞았으니, 이제 유금천은 경성에 발을 붙이지 못할 터였다. 유금천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저런 쓸모없는 놈을 봤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뭣도 모르면서 손을 써? 그 산이 어떤 산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호랑이를 때려잡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여긴 어쩌자고 죄다 저런 쓸모없는 놈들뿐인 거야?”
대청에 고능준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관리들은 고개를 숙인 채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고능준은 한참 동안 호통을 치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이제 어쩔 셈인가?”
고능준이 한숨을 토하며 물었다. 부윤이 눈치를 주자 관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대인, 태평거와 신선거는 문을 닫고 휴업에 들어갔습니다만, 그건 저희 뜻이 아니옵고…….”
고능준은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들 뜻이 아니어도, 자네들 뜻이 되지 않았는가.”
관졸들이 태평거와 신선거에 와서 소란을 피우고 돌아간 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장례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지금, 신의 낭자와 전사한 다섯 용사, 홀로 남겨진 아들의 슬픈 사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전기수들에게 더없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됐다.
경성에서는 불과 하루도 안 되어 새로운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크고 작은 술집과 찻집에서, 거리와 골목에서, 대갓집 안채와 마당에서 무원산이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관부는 백성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태평거와 신선거는 문을 닫았다. 대외적으로는 집안에 일이 있어서라고 했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관부의 행패 때문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는 그저 술과 사람에 관한 잡담이 오가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조정과 관부까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게 됐다. 백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분노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수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인, 이 일을 무마하긴 힘든 겁니까?”
부윤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사실 저희가 딱히 잘못한 건 아니잖습니까. 저들이 멋대로 술을 뿌렸으니, 관부에서 어찌 된 일인지 조사하는 건 당연합니다. 말이 오가는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이니, 사정을 설명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사실이 그러하니까?”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정사에 사실이 중요했지?”
고능준이 한숨을 내쉬며 문밖을 바라봤다.
“중요한 건 필요야. 폐하께서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조정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백성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보고, 저들이 필요로 하는 걸 주어야 해.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사실엔 아무도 관심 없어!”
그래서 노사안이 감히 탄핵 상소를 올린 것이다. 폐하께 보여 드릴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그런데 뜻밖에도 유금천 그 쓸모없는 놈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바람에 민심을 부추기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운이 고능준 편에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럼 대인, 정말 강문원을 조사하실 생각입니까? 사, 사실 이건 사소한 일이잖습니까.”
부윤이 물었다.
“사소한 일? 엄청난 일 치고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 않는 게 있던가? 서둘러 각자가 필요로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 주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일이 연루될 게야.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받아내려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겠지.”
그랬다. 조정의 분쟁은 언제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가 탄핵에 탄핵을 거듭하며 끝없이 이어졌다.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연루된 사람도 점점 늘어나, 결국에는 어느 한쪽이 처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끝났다. 물론 그 어느 쪽도 실패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승부는 나기 마련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지만, 나쁜 결과도 고려해야 했다.
또 그 탈영병들이 문제로군! 지난번엔 내 계획을 망치더니, 이번에도 또!
또 그들이야! 아니지, 또 그 여인이야! 그 여인!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는 것 외에도, 이리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니!
태평거와 신선거의 내력과 그 뒤에 있는 이의 신분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난번에 그 여인이 이황자를 고칠 수 있는지 여부 외에 다른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때 깔끔하게 죽여 없앴다면, 이리 성가신 일도 없었을 터인데.
“강주 바보!”
고능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강주 바보.”
한편 진 노태야도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다만 진 노태야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앞으로 경성엔 두 개의 강주가 있겠구나. 하나는 강주 선생, 하나는 강주 바보.”
진소가 차를 우려 건넸다. 진 노태야가 찻잔을 받으며 손을 내저었다. 회랑 아래에 앉아 무원산 이야기를 전한 사환이 얼른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넌 잠시 기다렸다가 하소연을 받아 줄 생각이었지만, 놓친 게 있다. 그 여인이 어디 기다리는 사람이더냐.”
진소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다리기는커녕 아예 만백성을 끌어들였습니다. 온 경성이 술을 탐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온 경성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지요.”
진소는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여인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다른 이들이 계속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진 노태야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어쨌거나 넌 그 낭자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노사안은 더더욱 고마워해야 하고.”
진소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당 문 밖에서 사환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대인, 속히 입궐하시라며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진소가 사환과 부친을 차례로 쳐다봤다.
“왔군요.”
궁에서 온 부름을 말하는 것인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서문에 위치한 송(宋)씨네 점포는 경성에 있는 술집 중 손에 꼽힐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아이고, 반근 낭자랑 대관리인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송씨네 점포의 관리인이 웃으며 인사했다.
신선거와 태평거를 관리하는 시녀와 대관리인은 경성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이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우리 점포가 문을 닫았으니, 밥 먹을 곳을 찾아봐야 하잖아요.”
시녀가 웃으며 대꾸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송씨네 관리인에게 말했다.
“거리에 인접한 상등 방으로 주세요.”
무언가 더 말하려던 송씨네 관리인의 시선이 시녀를 뒤따라 들어오는 남녀 한 쌍에게서 멈췄다.
소년 공자는 귀티가 나는 차림새였다. 화려한 옷자락이며 허리춤에 걸린 옥패, 움직임에 따라 언뜻언뜻 보이는, 은실로 수놓은 신발까지 어느 것 하나 귀해 보이지 않는 게 없었다.
관리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순간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멱리로 가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송씨네 관리인은 세상에 다시 없는 진기한 보물이라도 본 듯한 눈빛이었다.
대관리인만 온 게 아니구나. 행수까지 왔어! 그 무원산이라는 독한 술을 먹을 기회가 나한테도 온 것인가?
“아씨, 이곳으로 드시지요.”
송씨네 관리인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친히 길을 안내했다.
이들이 막 점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성 밖에서 들어온 마차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차 안에서 백옥처럼 희고 고운 손이 나와 휘장을 들어 올리자, 청아하고 아름다운 얼굴 반쪽이 드러났다.
“언니, 정말 진 공자님이네요.”
옆에 있던 춘령이 바깥을 쳐다보며 말하고는, 점점 멀어져 가는 주점을 보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진 공자님을 뵙네요. 글공부로 바쁘신 줄 알았더니, 미인과 함께 놀러 다니시나 봐요. 요즘엔 왜 언니를 통 안 찾아오시죠? 언니를 잊으셨나.”
“허튼소리 마. 저분이 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큰일 날 일이야.”
주 낭자가 대꾸했다.
“명문가의 자제가 향락에 빠지면 체통은 어찌하고? 더구나 저분이 언제 날 찾아오셨니? 다른 이의 초청 때문에 왔다가 우연히 동석한 거지.”
춘령이 헤헤 웃었다.
“맞아요. 진 공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죠.”
그렇기에 존경하고, 그렇기에 못 잊는 것일 테고.
마차는 성안으로 달려갔다. 그때 거리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란이 일더니 행인들이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급보를 전하는 역참의 병사가 말을 탄 채 내달렸다.
“서북으로 갈 급보로군요.”
진십삼이 멀어져 가는 병사를 보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에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정교랑은 멱리를 벗고 청초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 급보가 전해지면, 이 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할 겁니다. 온 천하가 낭자를 알아볼 테고요.”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느릿느릿 먹기 시작했다.
“난 언제나 여기 있었어요. 알아보든 말든, 보든 못 보든 그건 남의 일이죠.”
정교랑도 고개를 들어 진십삼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일부러 누군가에게 자신을 알리려 한 적도, 알려지지 않기 위해 숨은 적도 없었다.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진십삼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지 않았던가.
진십삼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진십삼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가족에게 버림받았으면 어떻고, 경성이 살기 힘들면 어떠하랴. 호시탐탐 재산을 노리는 이들이 있으면 또 어떠하랴. 고관대작에게서 먹을 걸 챙기고, 횡포를 부리는 무뢰한은 깔끔하게 죽여 없앴다.
거센 비바람 앞에서도, 험한 가시밭길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보기에 옳은 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거센 풍랑과 위험천만한 일들도 그녀의 눈에는 맑게 갠 하늘과 다를 바 없었다.
다 똑같았다.
정교랑은 찻잔을 들어 진십삼과 허공에서 부딪치고, 소매를 들며 단숨에 비웠다.
용곡성은 8월 하순이 되자 벌써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출한 마당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 관구, 이 편자를 박으면 정말 얼음 위에서도 빨리 달릴 수 있습니까?”
대장간처럼 생긴 초막 밖. 병졸들이 쭈그려 앉거나 일어선 채 초막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초막 안에서 웃통을 벗은 사내가 대답했다.
“그럼 이번 겨울에 양마하(亮馬河)를 건너 오랑캐 땅으로 쳐들어가 영지를 회복할 수 있는 겁니까?”
병사들이 웃으며 물었다.
“물론이지.”
사내가 대답했다. 대장장이들이 건네는 편자를 받아 꼼꼼하게 살펴보던 그는 이번에도 던져 버렸다.
“두께가 일정치 않잖아.”
대장장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얼른 다시 만들러 갔다.
사내는 매어 놓은 말 옆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능숙한 동작으로 말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 옆에 있는 나무판 위에 말굽을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들어 올렸다.
이제 군마는 거의 다 편자를 박은 상태라 말편자를 보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달궈진 편자를 박는 일을 직접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병졸들이 차마 못 견디고 신음 소리를 냈다.
“얼마나 아플까.”
누군가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서사근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열댓 살쯤 된 어린 병졸이었다. 여위고 허약해 보이는 체구에 안색도 창백하고, 군복은 몸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게 꽤 흥분한 눈치였다. 서사근이 형제들과 함께 연줄을 통해 처음 군영에 들어와 군복을 받아 입었을 때도 아마 저런 모습이었으리라.
“아프지도 않고 어떻게 빨라지겠느냐.”
서사근이 껄껄 웃으며 말편자를 박고 인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긁개를 들어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둔 말굽을 쓱쓱 다듬었다. 넋을 놓고 그 능숙한 동작을 바라보는 사이, 어느덧 말편자 네 개가 깔끔하게 박혔다.
“서 대인, 손재주가 대단하십니다.”
다들 칭찬을 늘어놓자 서사근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래. 서 대인의 손재주는 정말 대단하지.”
문밖에서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사근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걷혔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무관 셋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관청 사람들이었다. 병졸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서 대인.”
그중 한 무관이 입을 열었다. ‘대인’이라는 두 글자에 특히 힘이 실려 있었다.
“여기 일하는 게 아주 즐거워 보이는군.”
“관복을 갖춰 입지 않아 예를 못 올리겠군요. 이건 소생이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서사근이 대답했다. 서사근은 관구로 군마에 관한 일을 맡고 있지만, 말편자를 박는 일을 직접 할 필요는 없었다. 벌을 받아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서사근, 시답잖은 소리나 하자고 온 거 아니다. 요즘 다친 군마가 몇이나 되는지 대답해 봐라.”
무관 하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전부 스물다섯 필입니다.”
서사근이 대답했다.
“대답 한번 뻔뻔하구나.”
다른 무관이 눈을 부라리고 나서며 호통을 쳤다.
“군마를 관리하랬지, 누가 군마를 못쓰게 만들랬느냐?”
“최고의 편자를 만들어 냈으니, 못쓰게 됐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올겨울엔 우리 군마가 더 빠르게, 더 멀리 달릴 수 있을 겁니다. 말 스물다섯 필을 바쳐 무수한 오랑캐의 목숨을 취할 수 있으니, 충분히 값지지요.”
서사근의 말에 무관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저 자식이 만든 말편자가 쓸만한 건 사실이니까. 편자가 없을 때도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웠다지만, 저게 생겨서 해가 될 건 없잖아. 말의 손상이 줄어드니 군에 배정되는 말도 점점 늘고 있고.
더 이상 전처럼 말편자를 놓고 왈가왈부하며 공을 다투는 건 현실적으로 맞지 않아. 말편자에 있어서 저놈은 자신감이 넘치고, 우린 아니니까.
“여기서 열심히 잘해 보라고.”
무관들은 비꼬는 듯한 말을 던지고 자리를 떴다. 막 문을 나서는데, 무관 하나가 깜빡한 게 있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서무수.”
무관이 갑자기 소리쳤다. 서사근은 순간 움찔하며 손을 멈추었다. 이름을 불렀던 무관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 미안. 이름이 너무 비슷해서 자꾸 실수하네. 서무수가 워낙 깊은 인상을 남겨서 말이지. 제가 무능해서 죽어 놓고 공을 바라는 놈은 처음 보거든. 용곡성 밖에 누워 있던 병사들도 죄다 벌떡벌떡 일어날 일이야.”
긁개를 쥔 서사근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퍼런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귓가에 계속해서 무관의 말이 들려왔다.
“난 그런 쓸모없는 놈들 못 봐.”
서사근이 무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마당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누군가가 무관을 기습했다. 다들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사이, 비꼬던 무관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벌써 저만치 날아가 있었다. 기습한 이는 무관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달려들어 거침없는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재빨리 떼어 놓긴 했지만, 그 무관의 얼굴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눈, 코, 입 가릴 것 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손을 들어 피를 닦은 무관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이들이 죽자고 매달려 간신히 뜯어말렸다.
한편 옆으로 끌려간 유규의 얼굴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덤벼라, 이 개잡놈아. 아주 등신을 만들어 줄 테니까.”
유규가 소리를 지르자, 무관도 저쪽에서 괴성을 질러댔다.
“군에서 싸워 봤자 좋을 거 없어.”
“저런 자식을 뭐하러 상대해.”
“앞길을 생각해야지. 자포자기하면 쓰나. 우리까지 저놈이랑 똑같아질 순 없잖아.”
다들 무관을 말리며 유규를 쳐다봤다.
유규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옷도 지저분한 상태였다. 몸에선 술 냄새가 풍겼고, 눈도 게슴츠레했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유규는 또다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요즘 유규는 아예 군인을 때려치운 듯 허구한 날 군영에서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웠다. 상부에서 유씨 가문에 알렸으니 몇 달 내로 쫓겨날 터였다.
이번에 돌아가면 저번처럼 미관말직이나마 경성에서 순찰을 맡기도 힘들 테니, 집으로 돌아가 쉴 게 뻔했다. 군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으며 살 테고.
“저런 쓸모없는 놈을 패는 데 쓰기엔 내 주먹이 아깝지.”
무관은 이를 갈며 그 한마디를 내뱉고,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떴다.
“쓰레기 같은 자식. 자기편 때릴 때나 쓰는 주먹이면서. 이 몸이 기다리고 있으마. 어디 한번 와서 때려 보라고!”
유규가 악을 썼다. 무관들이 떠나자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유규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유규는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쓱 닦았다.
“보긴 뭘 봐, 싸우는 거 처음 봐? 계속 그렇게 보면 가만 안 둔다!”
유규가 소리를 지르자, 구경하던 이들은 같잖다는 얼굴로 입을 삐죽거리며 자리를 떴다.
“미친놈.”
“정신 나갔어.”
“겁쟁이 자식.”
비웃으며 수군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유규는 그런 말들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달려들었다. 호리병에 든 술이었다.
유규는 술병을 들어 쓱쓱 닦고,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마셨다. 술이 입가에 묻은 피와 섞여 흘러내렸다.
서사근이 들고 있던 긁개를 내려놓고 걸어왔다.
“정말 폐인이 됐군요.”
“폐인으로 사는 것도 괜찮아.”
유규가 서사근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긴, 난 여기 서 대인과 비교가 안 되지. 종일 공무에 매달려 있으니, 승진하고 부자 되는 일만 남았잖아.”
서사근이 유규의 손에서 술병을 홱 낚아채 바닥에 매섭게 내던졌다. 술병이 깨지면서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사근 이 개자식, 너 미쳤어?”
유규가 벌떡 일어나 서사근의 멱살을 잡았다. 그때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급보요, 경성에서 온 급보!”
전령이 소리를 외치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경성에서 온 급보?
서사근이 움찔하며 유규를 잡았던 손을 홱 뿌리치고 급보를 든 전령이 간 방향으로 뒤따라 뛰어갔다. 급보가 곧장 관청으로 들어간 모습을 본 서사근은 길가에 서서 숨을 몰아쉬며 관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단념하라니까.”
유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지난번에도, 이렇게 쫓아왔잖아. 그런데 결과는 어땠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놈은 여전히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잘살고 있다고.”
“모르는 일이오. 모르는 일입니다.”
서사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일이다, 모르는 일이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유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망이 없는 일이라니까. 아무 쓸모도 없어!”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일이라고.”
서사근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르는 일이지! 모르는 일이야!
“넷째 도련님, 넷째 도련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서사근이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고개를 돌리자, 이쪽으로 달려오는 말이 보였다.
꿈에서 수도 없이 본 광경인데…….
이번엔 진짜인가? 진짜 사람이 온 건가? 진짜 이루어진 거야?
“넷째 도련님, 큰 도련님의 서찰입니다.”
달려온 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서찰을 건넸다. 서사근은 침을 꿀꺽 삼키고 쭈뼛쭈뼛 서찰을 받아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범강림은 아는 글자가 많지 않았고, 서사근 역시 아는 글자가 몇 안 됐다. 형제들끼리 상황을 아는 처지라 서찰도 간단명료하게 쓰곤 했다. 편지에는 ‘말[說]’이라는 한 글자만 쓰여 있었다.
말이라…….
말해도 된다? 말할 수 있다? 말할 것이다?
서사근은 서찰을 손으로 꽉 쥐며 늘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등을 구부렸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엄습하자 서사근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니까. 누이라면 충분히 해낼 거야.
“대답해라. 이게 무슨 뜻이지?”
관청에 있는 강문원이 손에 든 문서를 보며 놀라 물었다.
“대인, 이건 대인께서 대답하실 문제입니다.”
병사가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문원이 들고 있던 문서를 탁자 위로 내던졌다.
“내가 뭘 대답해! 내가 대답할 게 뭐 있단 말이냐! 상벌이 불분명했다고? 공을 탐해 조정을 속여 상을 가로챘다고? 내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해야 한단 말이냐?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
병사가 호통에 놀라 쭈뼛거렸다.
“폐하께서 노정이 대인을 탄핵한 상소를 받아들이시고, 무원산 형제들의 일을, 철저히 조사하라 명하셨단 뜻입니다.”
병사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더듬으면서도 전할 말을 다 전했다.
무원산 형제들!
강문원이 눈을 부릅뜨며 병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무원산 형제들이 뭔데?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대인, 이 문서에서 말하는 이는 범석두, 서무수 등인데…….”
막료가 옆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인, 저들이 결국, 일을 키웠습니다.”
저들?
멈칫하던 강문원은 한참 기억을 더듬은 끝에 그들이 누군지 생각해 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다시 문서를 들고 살펴봤다.
“……무원산 다섯 용사들이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여 그 충절이 천지를 뒤흔들었으니…… 사대부들이 이를 논하고 백성들까지 소동을 일으켜…… 애석하게도 전사한 다섯 용사는 공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고집 센 강문원은 주변의 말을 듣지 않아…… 천자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바…… 성총을 흐리며 거짓말로 군주를 기만하는 강문원 같은 무리를 결코 그대로 두셔선 안 될 것이옵니다.”
거기까지 읽은 강문원은 더는 못 읽겠다는 듯 다시 문서를 탁자 위로 내던졌다.
“노정! 네놈을 기필코 죽여 버리고 말겠다!”
“대인, 이젠 노정의 일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 다섯 명입니다.”
막료가 얼른 말했다.
그 다섯 명이라…….
강문원이 대청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놈들이 제법이구나. 결국 경성으로 가 일을 벌이다니.”
강문원이 씩씩거렸다.
- 대인, 후회하지 마십시오.
귓가에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났구나, 이 주가 놈! 네놈들이 탄핵하면 이 몸은 반격을 못 할 성싶으냐?”
질책과 탄핵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지.
강문원은 규방에서 자란 고고한 낭자처럼 지내며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그였다.
마지막에 누가 후회하나 어디 두고 보자!
-급보-
경성에서 온 급보를 강문원 한 사람만 받은 건 아니었다. 감찰사 직위에 있는 주봉상도 받았다.
“성지를 받듭니다.”
주봉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며 말했다. 주봉상은 황제의 조서를 받으며 흥분했다.
2년만이구나. 서북 감찰사 자리에서 곧 쫓겨날 것 같은 이때, 드디어 직무를 이행할 기회가 왔어.
물론 황제가 대놓고 강문원을 질책한 것은 아니었다. 노정의 탄핵 상소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황제가 내린 조서에는 서북 무원산 형제의 전공에 대해 조사하라는 내용만 언급되어 있었다.
게다가 황제는 강문원의 입장을 배려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주봉상에게 조사를 명하긴 했지만, 그 문서는 강문원의 손을 거쳐야 했다. 강문원의 손을 거친다면 그가 무차별적인 공격에 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물론 주봉상이 조사를 통해 정말 무언가를 밝혀낸다면, 강문원도 막을 도리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주봉상에게 이번 일은 엄청난 기회였다. 주봉상과 강문원 중 누가 떠나고 누가 남을지 결정할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에 거취가 결정되면 서북 군영에 관련된 모든 이들의 인사 변동이 있을 게 분명했다.
이는 또다시 2년 전 왕보당 사건 때로 돌아간 것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무원산 형제들의 생사가 사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2년 전에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였고, 이번에는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운명이라는 게 참으로 재미있구나.
주봉상은 넋이 나간 채로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대청에서 막료들이 떠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그의 생각을 끊었다. 주봉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돌아가 오늘 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강문원이 조정에서 내리는 상을 거절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그는 뭔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감했다. 하지만 관료가 탄핵으로 공격을 당하는 건 드문 일도 아닌지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과연 그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는 다시 상이 내려왔고, 훨씬 더 화려한 미사여구로 칭찬을 늘어놓기까지 한 터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탄핵을 당하고, 황제가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했다니. 철저히 파헤치라는 명이 내려온 건 아니지만, 이제 막 공로에 대한 표창을 받은 서북 군영으로서는 무거운 벌이 아닐 수 없었다.
“대인, 주 도감에게 확인했는데, 주 도감도 이 일을 몰랐답니다. 거짓을 말하는 표정 같진 않았습니다.”
막료 하나가 말했다. 주봉상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무원산 다섯 형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북에서 그 다섯 명을 위해 나선 이는 주씨 집안의 육낭뿐이었다. 주육낭은 서북에서 강문원의 눈 밖에 나게 된 바람에 울분을 삼키며 경성으로 돌아갔다.
경성에서는 강문원이 막지 않으니 만백성이 나와 영령을 맞이하게 하는 재주를 부릴 수 있었을 테고, 죽기 직전의 노정이 이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을 것이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진 덕에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다.
처음엔 별 뜻 없이 시작한 일이었으리라. 아마 경성의 주씨 가문조차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겠지. 그러니 이곳의 주씨 일족은 더더욱 알 턱이 없을 테고.
물론 주씨 가문 전체가 공모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주씨 집안에서 대놓고 인정할 리는 없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 일을 노정 같은 이가 계획했을 리는 없었다. 주육낭과 강문원 사이에 틈이 생긴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강문원이 서북에서 입지를 굳힌다면, 주씨 가문으로서는 좋은 날이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게 된 마당이니 작정하고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나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인, 주씨 가문과 관계가 있긴 한데, 분명 주육낭이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막료가 손에 들고 있던 서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황제의 성지와 함께 각자 경성에 심어 둔 밀정과 친구들이 보낸 서찰도 도착했다. 황제의 성지만으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주봉상 쪽뿐만 아니라 강문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청에 있던 이들이 주봉상을 바라봤다.
“주씨 가문의 생질녀가 무원산 형제들과 의남매를 맺었답니다.”
막료가 손에 든 서찰을 내밀며 말했다.
의남매? 일개 여인이 그런 일을?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원산 형제들이 부자라는 소문은 다들 들으셨지요?”
막료의 말에 저쪽에서 서찰을 들고 쳐다보던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에서 무슨 점포를 운영하는 주인이라던데, 워낙 터무니없는 소문이어서.”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주인이 맞았어요. 그것도 아주 유명한 점포였습니다.”
막료가 말을 이었다.
“바로 태평거입니다.”
‘태평거’라는 이름이 나오자 대청에 있던 이들은 화들짝 놀라 웅성거렸다.
주봉상은 경성 사람이 아니지만, 임명을 기다리며 한동안 경성에서 지낸 터라 태평 두부나 태평거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긴 보통 인기 있는 곳이 아닌데. 참, 그러고 보니 그 다섯 사람을 태평거에서 체포했다고 했어. 그때만 해도 놈들한텐 관심이 없었기에 거기서 점원이나 잡역부로 일하는 줄 알았지. 그런 관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무원산 형제들은 통이 크다는 소문이 그래서 나왔군.
“그들과 의남매를 맺은 누이가 바로 태평거의 진짜 주인인 행수랍니다.”
막료가 말했다.
“주씨 가문이 아니고? 어린 여인이 홀로 이룬 사업이다?”
누군가가 놀라 물었다. 막료가 고개를 내저으며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저쪽에서 서찰을 보던 막료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주씨 가문이 아닙니다. 관부에 등록된 문서도 확인을 마쳤답니다. 하긴 주씨 가문에서 일개 생질녀를 주인으로 내세울 리는 없잖습니까. 이치상 안 맞지요. 아니, 그런데…… 태평거뿐만이 아닙니다.”
막료가 서찰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선거도 그렇다네요.”
다들 더욱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막료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춘당도 그렇고요. 이제 보니 진소의 부친을 고치고 죽어가던 동 내한을 살리며, 죽을병이 아니면 안 고치고, 목숨을 구하려면 만 관을 내놓아야 한다던 신의 낭자가…….”
막료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러면 말이 되지요! 그 여인이 그런 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게 말이 돼요. 주씨 가문이 아니라!”
대청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그 서찰을 보려고 한데 뒤엉켜 실랑이를 벌였다. 막료들이 그런 추태를 보이는데도 주봉상은 호통을 치지 않았다. 주봉상 본인도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주봉상의 귓가에 막료들이 늘어놓던 말들이 메아리쳤다. 주봉상은 서찰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수군거리는 이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이고, 세상에나.
태평거, 신선거, 이춘당의 행수.
진소의 부친을 고쳐 진소의 근심을 말끔히 씻어 주고, 동 내한을 살려낸 신의 낭자.
그게 무원산 형제들의 누이였다니!
아이고, 세상에. 어쩐지…….
- 후회하지 마십시오! 후회하지 마십시오!
주봉상은 그 소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강문원한테 대고 그런 말을 하다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겐 철없고 치기 어린 말로 들릴 뿐이었다.
이제 보니 욱해서 홧김에 한 말이 아니었군. 믿는 구석이 있어 한 말이었어.
“왜 사서 고생을 하지?”
주봉상이 중얼거렸다.
“그런 누이가 있는데, 뭐하러 군에 들어오고 난리야.”
급보로 인해 여러 사람이 분노하고 충격에 휩싸였지만, 목이 빠지게 급보를 기다리던 서사근은 도리어 평온한 모습이었다.
목간 마구간에서 온종일 공무, 그러니까 말편자를 박는 일을 마치고 나자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사근은 물을 끼얹어 몸을 씻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문을 나섰다. 그는 거리에서 술을 두 병을 사고, 사탕 같은 주전부리도 사서 한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서사근은 구불거리는 길을 돌고 돌아 어느 골목에 들어섰다.
어느 집 앞에서 꼬마 셋이 술래잡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서사근이 대문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불렀다.
“유강 형님.”
마당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도리가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왜 또 왔어. 서사근, 그만 돌아가. 그 일에 대해선 정말 모른다니까. 할 말도 없고.”
서사근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손에 든 술을 대문 앞에 내려놓았다.
“아닙니다. 오늘 기분이 좋아서 술을 좀 샀는데 같이 마실 사람도 없고 해서요. 어쨌든 형님은 내 형제들과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분 아닙니까. 그래서 얼굴이나 볼까 하고 왔어요.”
말을 마친 서사근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 자리를 떴다.
마당에 서 있던 사내는 떠나는 서사근의 모습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집 안에서 아낙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여보, 또 서사근이 온 거예요?”
아낙의 물음에 사내는 응 하고 대꾸했다. 아낙이 한숨을 쉬었다.
“가엾긴 한데…….”
“가엾긴 뭐가?”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을 끊었다.
“전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이 죄다 가엾단 거야? 군에 입대했으면 언젠가는 죽을 날도 있으려니 해야지, 가여울 게 뭐 있어!”
사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아낙이 상기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날이 올 걸 아니까 가엾다는 거죠.”
이번에는 전처럼 고개를 숙인 채 고분고분 물러서지 않고,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들고 받아쳤다.
“군에 입대한 이상 그런 날이 올 걸 아니까 가엾다는 거라고요. 죽어도 헛죽은 거잖아요. 남한테 모함이나 당하고. 처자식은 편히 살지도 못해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이에요. 그래서 가엾단 거예요. 오늘 우리가 저 사람들을 가여워하지 않으면, 내일 누가 우릴 가엾이 여기겠어요!”
사내는 아낙이 악을 쓰며 따지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화를 내려고 해도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헛소리 집어치워!”
사내는 소리를 빽 지르고 옷소매를 뿌리치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낙은 분하다는 얼굴로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대문 옆에 놓인 술 두 병이 보이자, 아낙은 냉큼 가서 술을 집어 들었다.
“숨겨 줘 봤자 좋을 게 뭐 있다고. 말단 병졸에서 한 계급 오르면 뭐해. 신세 진 거 두고두고 기억하며 남들 눈치도 봐야 하는데. 차라리…….”
아낙이 중얼거리며 밖을 내다봤다. 서사근의 모습은 이미 골목에서 사라진 후였다.
“차라리 은혜를 베푸는 게 낫지. 돈도 시원시원하게 쓰는 사람인데.”
아낙은 중얼거리며 손에 든 술을 보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기뻐하며 밖에 대고 소리쳤다.
“큰애야, 가서 양뼈 좀 사 와. 어미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아낙이 아이에게 뼈를 사 오라고 할 무렵, 서사근은 또 다른 집의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골목에 서서, 대문 밖에 나와 놀고 있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서사근이 익숙한지 손길을 피하지 않고 헤헤 웃었다. 대문 앞에는 아낙 둘이 있었다. 젊은 아낙은 서사근을 보자마자 경계심을 드러내며 쫓아내려 했지만, 나이 든 아낙이 손을 뻗으며 붙잡았다.
“어머니, 우릴 원망하는 마음에 저 사람이 욱해서 애한테 무슨 짓이라도…….”
젊은 아낙이 초조해하자 나이 든 아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엔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애한테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야. 우릴 해칠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나이 든 아낙이 골목을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 아낙도 불안한 눈길로 골목을 쳐다봤다.
서사근이 쪼그리고 앉아 꼬마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사근이 웃자 아이도 따라 웃었다. 그러자 서사근이 바구니에서 사탕을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사탕을 흔들며 친구들한테 나눠 주러 갔다.
서사근은 골목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따라서 껄껄 웃었다.
“듣자니 그 죽은 이한테도 애가 하나 있다던데…….”
나이 든 아낙이 돌연 입을 열었다. 젊은 아낙은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젊은 아낙은 불안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듯했다. 나이 든 아낙은 그런 젊은 아낙을 힐끔 보고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젊은 아낙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부르려 했다.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서사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젊은 아낙은 입을 열다 말고 다시 다물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서사근의 바구니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서사근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목감의 마구간 앞에 서 있었다. 요즘 서사근은 이곳에서 기거했다.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사람들이 대여섯 명쯤 우르르 나왔다.
“서사근, 강 대인께서 물어볼 게 있으시다. 우리랑 같이 가야겠다.”
우두머리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서사근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곧장 따라나섰다. 주변 여기저기에서 여러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물어보라지. 말해 줄 테니까. 도리어 물어보지 않는 게 겁나지. 말할 기회가 없을까 봐.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을까 봐 겁날 뿐이라고.
서북에서 조사를 시작할 무렵, 경성의 어사대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불려 왔다.
“어떻게 됐소? 말했소이까?”
“아주 활기차더군. 어제는 시까지 한 수 지었다니까.”
“그 자식이 생각보다 고집이 있네. 길어야 사흘이면 울고불고하며 유서를 쓸 줄 알았더니만.”
어사대 사람들이 모여 농담을 나누던 그때, 밖에서 몇 사람이 굳은 얼굴로 급히 들어왔다. 다들 얼른 하던 얘기를 멈추고 자세를 고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도 관청으로 들어가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또 누굴 잡아 온 거지?”
막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안에서 또 몇 사람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으로 들라 해라.”
어사 하나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단 관리에게 말했다. 말단 관리가 얼른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있던 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흥분하며 그들을 지켜봤다.
마차가 관청들이 늘어선 거리를 천천히 지나갔다. 화려하다기보다는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들이었지만 장엄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는 내내 보이는 건물은 대체로 비슷해 보였다. 다만 마차가 멈춰 선 건물은 문이 남쪽을 향해 열려 있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문이 북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범강림이 뒤에 있는 마차를 쳐다봤다. 반근이 마차에서 내려 정교랑을 부축했다.
“누이, 누이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 내가 전하면 되니까.”
정교랑이 손으로 멱리 한쪽을 들어 올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장에서 피 흘려 싸운 건 오라버니가 한 일이니 오라버니가 말해요. 오라버니들을 영접하고 오라버니들을 안장한 건 내가 한 일에요. 내가 한 일이면 내가 말해야죠. 우린 우리가 한 일을 말하면 돼요. 저들이 알까 봐 두려워할 일도 아니고, 걱정할 것도 없어요.”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같이 가.”
두 사람이 막 걸음을 옮기는데, 옆에서 몇 사람이 급히 나오며 이들과 부딪쳤다. 범강림이 재빨리 정교랑을 붙잡아 주고는 분노하며 손을 뻗으려 했지만, 정교랑이 범강림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냐? 여기가 어딘지 몰라? 문을 막고 뭐 하는 거야?”
되레 그들이 소리를 질렀다. 황궁의 내시들이었다. 범강림과 정교랑은 한발 물러서며, 그들이 먼저 지나가도록 했다.
“괜찮아?”
범강림이 물었다. 정교랑은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 손으로 멱리를 들었다. 그러자 방금 지나간 내시 중 하나가 안으로 찔러 넣어 준 쪽지가 보였다. 정교랑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쪽지를 펼쳤다.
- 정방, 슬퍼하지 마요.
“누이?”
범강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걱정스럽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정교랑은 쪽지를 고이 접어 소매 속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가죠.”
정교랑이 말했다.
“노야.”
주 노야의 서재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부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흥분한 표정으로 들어온 주 부인이 주 노야와 주육낭의 말을 끊었다.
주 부인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탁자에는 상소문을 쓸 종이가 놓여 있었고, 주 노야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다.
“뭘 쓰려고요? 대체 뭘 쓰게!”
주 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아녀자가 이 무슨 짓이오?”
주 노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탄핵 상소를 쓰려는 거죠? 그걸 써서 뭐 하게요? 거리에 인심이 흉흉해요. 노정의 일로 불똥이 튀어 어사대에서 잡으러 올까 봐 벌벌 떤다고요. 내가 다 알아봤어요. 전부 다 그 애가 한 짓이라고 밝히고, 우리는 선을 확실히 그어야죠. 왜 죽을 길을 스스로 찾아가려는 거예요!”
주 부인이 악을 썼다.
“어머니, 그리 심각한 건…….”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 부인은 주육낭의 따귀를 후려쳤다. 주 노야까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재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을 세우라고 서북에 보낸 거야. 그 여인을 위해 집안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라고 보낸 게 아니라!”
주 부인이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뭘 안다고!”
주 노야가 분통을 터트렸다. 따귀를 맞은 건 아들이지만, 이는 주 노야의 얼굴에 따귀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 노야가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래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육낭이 왜 이러는지는 알아요. 너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주 부인이 주육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 여인이 아니었다면, 네가 그렇게 나서서 입을 열었겠어?”
잠시 침묵하던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거봐, 아니라면서 무슨…….”
주 부인은 기가 막혔다. 주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육낭이 말을 잘랐다.
“어머니, 그 여인이 아니라 정교랑입니다. 고모님의 딸이고, 우리 주씨 가문의 친족이라고요. 우리는 평생 그 애와 함께할 수밖에 없어요. 정교랑이 잘되면 우리도 함께 영광을 누리고, 정교랑이 잘못되면 우리도 좋을 게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선을 그으려 해도 그을 수 없어요. 지금은 그럭저럭 넘어가더라도, 훗날 숙청되고 말 겁니다.”
“그렇게까지 될 일도 아닌데, 기어이 그 애 옆에 붙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주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둘 다 아쉬우니 그런 거잖아. 그냥 포기하면 그만인데. 버리면 그뿐이야.”
“어머니, 염려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주육낭이 앞으로 다가가 주 부인 옆에 꿇어앉았다.
“어떻게 아무 일이 없어? 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괜히 칼잡이로 쓰이는 거야. 누가 이기든 백성을 부추기고 선동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텐데, 조정에서 그런 자를 가만두겠어?”
주 부인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지만, 주육낭은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어머니도 그걸 아시네요.”
“지금 웃음이 나와? 내가 무슨 바보인 줄 알아? 내가 이래 봬도 경성에서 지낸 게 몇 년인데.”
주육낭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정교랑은 칼이 아니라, 칼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칼로 자기편을 해칠 리 없어요.”
초조해하며 어쩔 줄 모르는 주씨 저택과 달리 황궁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진안 군왕의 궁은 더욱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어젯밤에 늦게 잔 데다 아침을 먹은 후 마당을 뛰어다니며 한바탕 공놀이까지 한 경왕은 피곤한지 또 자러 갔다.
경왕이 자는 시간은 진안 군왕이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서책을 들고 탁자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오래도록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전각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귀를 기울이던 진안 군왕은 아예 서책을 내팽개치고 회랑 아래로 나왔다.
“전하, 나가려 하십니까?”
수행하는 내시가 물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젓고, 꼼짝도 하지 않고 선 채 잠자코 바깥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과묵한 진안 군왕이었기에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8월 말에서 9월 초의 서늘한 바람이 조용히 불어왔다. 그때 전각 밖에 내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시는 손에 상소문을 들고 빙긋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황제의 시중을 드는 종육품 내시관이었다. 그가 오는 모습을 본 진안 군왕은 곧 활짝 웃음을 지었다.
“전하, 폐하께서 전하께 상소문을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내시가 뒤따라 들어가자 문밖에 있던 내시가 문을 닫아 주었다.
“그 여인은 봤는가?”
진안 군왕이 돌아서며 물었다. 내시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있었다.
“전하, 소인이 하는 일인데도 마음이 안 놓이십니까?”
내시가 상소문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서두르지 마시고 우선 이것부터 보시지요.”
그러고는 수다스러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하, 이러시는 거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지난번에도 폐하 안전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가 다른 이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셨습니까. 또 무슨 약점이라도 잡히면 큰일입니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손을 뻗어 상소문을 받았다.
“큰일 나면 나라지. 무슨 대수라고.”
진안 군왕이 다시 재촉했다.
“어떻게 됐는가? 그 낭자를 보긴 했어?”
“봤습니다.”
“전해 줬고?”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묻자 내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던가? 슬퍼했어? 아니지, 아니지. 슬퍼도 겉으로 드러낼 사람이 아니야. 그럼…… 그 낭자가, 어때 보였는가?”
소년이 밝은 얼굴로 두서없는 질문을 해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전하, 어린 낭자가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게다가 목적지는 어사대였고요. 얼굴을 안 가렸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가 곧 실소를 터트렸다.
“수고했네, 공공.”
진안 군왕이 입을 다물자 도리어 내시가 궁금한 듯 물었다.
“전하, 겁내지는 않더냐고 물으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은 웃으며 탁자 앞에 앉아 상소를 펼쳤다.
“겁낼 여인이 아니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거든. 그저…… 가끔 좀 슬플 뿐이지.”
내시가 천천히 물러나 문을 닫았다.
한편 같은 시각 어사대.
단상에 앉은 어사가 아래에 선 이들을 보며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 같은 평민 신분으로 여기 선 이는 너희가 처음이다. 여긴 관료들만 올 수 있는 곳이거든. 그러니 영광인 줄 알아라.”
물론 이런 영광을 원하는 이는 없겠지만.
웃음기를 거둔 어사가 경당목을 탁 내리쳤다.
“범강림, 네 죄를 알렷다!”
“소생은 모릅니다.”
“노정과 어떻게 아는 사이지?”
“소생은 모르는 이입니다.”
어사대 대청에서 묻고 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는 안에서 들리는 대화를 엿들으려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북향으로 지어진지라 어사대 관청의 실내는 대체로 어두웠다.
자리에 앉은 어사중승은 오늘 어사대가 어쩐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밖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인, 동 내한께서 오셨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키 크고 풍채 좋은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자문(子文) 아우, 오랜만일세.”
어두운 실내에 쾌활한 사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은 어사중승의 관직이 동 내한보다 높지만, 어사중승 역시 한림원 학사 출신인지라 동 내한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다만 어사중승의 자리가 자리다 보니 다른 신료들과 조금 소원해졌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자문은 동 내한을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이 드릴 말씀입니다. 중정(中正) 형님은 요즘 얼굴 한번 뵙기 힘듭니다그려.”
“내가 몸이 좀 안 좋았잖나.”
동 내한이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동 내한은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가 한참 만에 본론을 꺼내던 이전 두 사람과 달리 동 내한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사중승이 미소를 지었다.
어사대에서 조금 떨어진 관청 안에 있는 고능준 역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창피해할 일도 아니지. 진시황이나 한무제도 신선이 되는 방법을 구하려 하지 않았던가. 신의 낭자가 바로 눈앞에 있어. 허황된 소문이 아니라고. 그러니 다들 공손하게 대할 만도 하지.”
고능준의 말에 측근들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고능준은 손에 들고 있던 상소를 탁자로 집어 던지며 말을 이었다.
“와서 편들어 줄 사람이 많을수록 좋아. 거리에 나가 소문을 내게. 무려 신의 낭자를 붙잡아 왔으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잖나.”
측근들이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어사대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각종 추측과 소문이 새어 나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소문 들었어? 정 낭자가 잡혀갔대.”
“이렇게 원통한 일이 있나. 전사한 이들한테 공로를 챙겨 주지는 못할망정, 가족이며 지인들한테도 화를 입히다니.”
“신의 낭자는 도조 진인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인데, 천벌이 두렵지도 않나.”
“가세. 어서 구경하러 가자고. 도조 진인께서 현현하실지 몰라.”
누가 먼저 제안한 건지 찻집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주육낭은 무거운 표정으로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분명 고능준의 사람이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린 거야.”
주육낭의 말에 진십삼 역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큰일이군. 신선이 부처니 하는 말로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그러길래 병을 고치지 말았어야지!”
주육낭이 못마땅한 투로 대꾸했다.
“그래서 세 가지 원칙을 세운 거야.”
진십삼이 주육낭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말을 이었다.
“세상만사는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순 없는 법이지. 그땐 병을 고치는 일로 그 여인이 득을 본 게 더 많아.”
“그럼 지금은?”
주육낭이 물었다.
전사한 다섯 형제에 대해 만백성이 울분을 터트리고 욕을 해대는 건 황제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백성이 신의 낭자를 떠받들고 추앙한다면 황제의 눈에 달리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동씨 가문과 팽씨 가문에 이어 수많은 이가 어사대로 달려가 음으로 양으로 사정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진소가 말했다.
“이번 일을 노정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게지. 정 낭자 일행은 노정한테 이용당했을 뿐이니, 이번 일과 무관하다는 건가?”
진 노태야의 물음에 진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아버지도 어서 가서 정 낭자를 도와주세요.”
진십팔랑이 불쑥 끼어들었다. 진소가 진십팔랑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능준도 그리 생각할 거다.”
진십팔랑은 멈칫하며, 자신의 말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은혜를 입으면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기 마련이지.”
진 노태야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천자께서 가장 겁내는 게 바로 은혜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건 천자 한 사람뿐이어야 했다. 누구든 그 일을 함께 나누려 들면…….
“그 낭자가 단칼에 베어 버린 영덕 대사처럼 조만간 누군가의 칼에 목이 잘리겠죠.”
진소가 말했다.
영덕 대사는 또 누구지? 사람은 또 언제 죽인 거야?
진십팔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부친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번 일이 정말 그렇게까지 커진 건가? 그냥 의남매들의 장례를 치르고 안장한 거 아닌가? 그 정도는 인지상정인데.
“이게 바로 앞으로 나선 결과다.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널 볼 수 없어.”
진소가 말했다.
“그 말은 틀렸다. 사람이 평생 뒤에 숨은 채로 살 수 있겠느냐? 앞으로 나섰다면, 나설 만큼 자신감이 있어서겠지.”
진 노태야가 대꾸했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그렇게까지 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일인데 천천히 말하면 뭐 어떻습니까. 꼭 이렇게 급히 움직여야 했느냔 말입니다.”
진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은 큰일의 가치가 있고, 작은 일 역시 작은 일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값지다 여겨지면 값진 것이지.”
진 노태야가 말했다. 진소는 웃으며 진 노태야에게 예를 올렸다.
“그럼 소자는 값진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부친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진십팔랑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부님, 이렇게 큰 일을 정말 정 낭자가 일부러 벌였단 말씀이세요? 정말 담도 크네요.”
“때로는 더 이상 퇴로가 없을 때 담이 커지기도 하지.”
진 노태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부러워할 것 없다. 가능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길 바랄 이가 있겠느냐. 정 낭자는 속으로 널 부러워할지도 몰라.”
“절 부러워할 게 뭐 있다고요. 전 정 낭자와 비교도 안 되는걸요.”
진십팔랑이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있는 것이 정 낭자에겐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정 낭자에겐 있고 너에겐 없는 것을 네가 부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사람은 누구나 남이 부러워할 만한 걸 갖고 있어. 남들이 가진 걸 보지 말고 남들이 못 가진 걸 더 많이 보도록 해라. 그래야 늘 자비심을 품고 살 수 있느니라.”
나에겐 있고 정 낭자에겐 없는 것이라…….
문밖에서 자매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십팔랑은 바깥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수록 슬픈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본디 가진 것도 없는데 그나마도 빼앗겼어요. 저였다 해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만있지 않았을 거예요.”
진십팔랑이 주먹을 쥐며 말을 이었다.
“작은 일이라 해도 정의로운 일이고 정에 관한 일이라면 그건 작은 일이 아니죠. 더없이 큰 일이에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돌려 진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조부님, 폐하께 올릴 글에 뭘 써야 할지 떠올랐어요.”
진 노태야는 흠칫 놀랐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덩달아 허튼짓할 생각은 접어라. 능히 할 수 있는 바를 하는 게 값진 것이다.”
“조부님, 괜한 생각이세요. 불경을 필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진십팔랑이 웃자 진 노태야도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아비만 걸핏하면 깜짝깜짝 놀라는 줄 알았더니, 나까지 너희 어린 낭자들 때문에 놀라는구나.”
“범강림, 네가 이런 일들을 했느냐?”
관리가 건넨 기록을 보며 어사가 물었다.
“네.”
범강림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노정은 어떻게 끌어들인 것이냐?”
어사가 물었다.
“대인, 저는 그분을 모릅니다. 저는 제 형제들을 경성으로 데려와 안장했을 뿐입니다.”
범강림의 말에 어사가 냉소를 지었다.
“너희는 무원산 사람이 아니냐. 너희 본적지가 경성도 아닌데 한 달이나 걸려 이곳까지 데려와 안장한다고?”
어사가 경당목을 탁 내리쳤다.
“말해라. 누구의 연줄이더냐. 누가 계획한 일이고, 누가 백성을 불러모았느냔 말이다!”
“저예요.”
범강림은 말없이 있는데, 대청에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사의 시선이 한쪽 옆에 서 있던 여인에게로 옮겨갔다. 아니, 사실 시선은 줄곧 여인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어린 낭자가 그 신의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 도조의 제자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오지.
보수사에서 보물로 떠받드는 그 두부도, 경성에서 꽤나 유명한 과로신선도……. 전부 주씨 가문의 것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이 여인 뒤에 있는 건 대체 누구지?
여인의 부계(父系) 친족에 대해 알아보고, 가장(家狀: 집안 조상과 형제의 행정에 관한 기록)도 살펴봤지만 딱히 알아낸 건 없었다. 계속해서 더 알아보는 수밖에.
어린 낭자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단상 위를 향해 살짝 몸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네가? 네가 뭘 어째?”
어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오라버니들을 경성으로 데려와 안장하고, 제가 사람을 시켜 노제를 지내고, 제가 술을 나눠 주며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아주 깔끔하게 인정하는군.
어사가 경당목을 들어 내리치려고 꽉 쥐었다.
“제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어요. 제가 그렇게 한 거죠.”
정교랑이 어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사는 미인의 미소에 넋이 나간 게 아니었다. 미인의 말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사가 얼른 경당목을 들어 내리쳤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제가 키웠다고요. 제가 하늘까지 닿도록 일을 키웠단 말입니다.”
경성 백성들이 분노하고 울분을 터트리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로군.
방금 전 사내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묻기도 전에 줄줄이 인정하니, 도리어 어사가 멈칫했다.
“왜 그랬느냐?”
어사가 물었다.
“공을 다투고 싶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어사대는 곧 조용해졌다. 시끄러워진 건 이튿날 조당이었다.
“……고능준은 권력을 전횡하며 조정 대신들이 사정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강문원 등의 무리는 기고만장하여 윗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며 공이 있는 자에게도 상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폐하, 조천하(曹川河)에서 흘린 치욕스러운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대조회(大朝會)가 열리는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형식적으로 진행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어사 하나가 고능준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어사는 흥분한 표정으로 격앙된 언사를 내뱉었다. 하마터면 고능준의 면전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욕설까지 해댈 뻔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대전에 어사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조정 대신들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건 천자의 눈에도 보였다. 좋은 구경거리를 보게 된 흥분, 기회를 봐서 끼어들겠다는 흥분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천자의 시선이 자꾸만 진소와 고능준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진흙으로 만든 토기 인형처럼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듯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누구 생각이지? 고능준이 스스로를 욕보이며 한발 물러서는 건가? 아니면 진소가 이판사판으로 물고 늘어지는 건가?
둘 중 누구든 황제의 눈에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이게 다 그 장례 행렬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 신의 낭자라고 했던가…….
“조당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는데도 어사중승께선 보고만 계실 겁니까?”
조정 대신 중 하나가 더는 못 보겠다는 듯 나섰다. 옆에 앉아 있던 어사중승이 냉랭한 모습으로 대꾸했다.
“풍문을 듣고 천자께 아뢰는 일은 어사의 직무이니, 다른 조정 대신들의 예를 똑같이 적용할 순 없을 것이외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 조정 대신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물러서시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앞으로 나섰던 조정 대신은 분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쪽에서는 어사의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고능준은 배움이 짧고 무능한데도 요행히 조당에 자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런데도 천자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않다는 등의 내용으로 옮겨갔다.
“노정의 일을 조사한 건 어찌 되었소?”
계속 내버려 두었다간 조당이 더 엉망진창이 될 것임을 아는 황제가 입을 열며 어사의 말을 끊었다.
대조회에서 황제가 직접 노정에 대해 거론한다는 것은 황제가 노정의 탄핵을 받아들였다는 뜻과 같았다. 진소를 힐끔 쳐다보는 고능준의 눈길에 분노의 빛이 스쳤다.
황제가 조정 대신들 앞에서 입을 연 덕에 대조회는 그럭저럭 절차대로 진행된 끝에 해산했다. 이어 조금 더 관직이 높은 대신들이 다른 전각으로 옮겨가 정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서북 무원산 형제들의 친척을 불러 조사를 마쳤습니다. 어사대에서 지금 글로 정리 중이고요.”
어사중승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이 대인, 어제 어사대를 찾아온 이가 모두 몇 명이었소?”
고능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일곱 명입니다.”
어사중승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조금도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중 정 낭자를 위해 찾아온 이는 모두 몇 명이었고?”
고능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물론 고능준 본인도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답은 어사중승의 입을 통해 나왔을 때 효과가 훨씬 컸다. 이자문은 가까이 지내는 이가 없이 외로운 사람이었다. 때로는 그러한 점이 더 유용하게 작용했다.
“전부 다였습니다.”
어사중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정 낭자가 가진 신의의 비술이 대단하긴 하구려. 그리 인심을 얻었으니 말이오.”
고능준이 웃으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정의-
이렇게 되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귀로 직접 확인하는 건 또 달랐다. 넌지시 황제의 표정을 쳐다보던 진소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폐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인지상정이지요. 화를 피하기 위해 모르는 척하거나 어려움에 빠진 틈을 타 도리어 해를 가하려 한다면 그런 마음이야말로 두려울 것입니다.”
진소의 말에 고능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럼 진 대인께서도 지금 인지상정 때문에 나서는 거요?”
“인지상정이지요.”
진소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모두의 시선이 진소에게로 쏠렸다.
“아까 어사가 조천하를 언급하지 않았소이까. 과거 조천하에서 왜 대패하였는지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오.”
과거 천하를 평정한 태조는 내친김에 서쪽 오랑캐의 경내까지 진격했다. 본디 서쪽 오랑캐의 왕궁까지 점령할 수 있었는데, 이전 전투의 논공행상이 더뎌지면서 인심이 흉흉해진 탓에 서쪽 오랑캐의 성 코앞에 있는 조천하에서 대패하고 결국 그대로 퇴각해 돌아왔다.
“세상 사람들을 충과 효로 교화하여도 우매한 백성은 대부분 금전적 이익을 더 중시하오. 장수들은 벼슬과 직위로 구속할 수 있다지만, 하층 병사들도 그와 똑같이 대우할 순 없는 일이오. 도리로 설득하고 이익으로 회유하면 따르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외다. 지금 이 일에서는 강문원의 일 처리가 적절했는가, 공이 있는데도 조사하지 않은 점은 없었는가 논해야 하오. 이는 병사들이 직접 체감하는 이익은 물론이고 조정을 향한 울분이나 원한과도 관계된 일이오. 인지상정인 동시에 병사들의 마음에 관한 일이고 국가의 대사에 관한 일이라 할 수 있소.”
“그래서 불만이 있으면 조금 불공평한 게 있다고 해서 백성을 부추겨 조정을 협박해도 된다는 말이오?”
고능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조정에서 백성을 위해 나서지 않은 적 있소이까? 농가의 아낙조차 돼지를 잃어버려 억울할 땐 등문고(登聞鼓: 백성의 억울함을 살피기 위해 매달아 놓았던 북)를 두드려야 함을 알고 있소. 그런데 불치병을 고치고 식당과 주점을 열며, 친아버지는 권세 있는 지주(知州)고 외숙은 귀덕낭장이라는 신의 낭자가 억울함을 어찌 풀어야 할지 모른단 말이오?”
“고 대인께서도 저들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오?”
진소가 냉랭하게 말했다.
“저들한테 불공평한 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소만, 진 대인이야말로 불공평한 게 있어 보이는구려.”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이자문.”
줄곧 침묵하던 황제가 불쑥 입을 열며 두 사람의 논쟁을 끊었다. 어사중승이 대답하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물어본 건 어찌 됐소?”
황제가 물었다. 어사중승이 대답하며 옷소매 속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들을 테니 읊어 보시오. 다들 같이 들읍시다.”
황제가 문서를 받지 않으며 말했다.
받지도 않는다니, 얼마나 못마땅해하는지 알겠군.
고능준의 눈에 웃음이 스쳤다. 맞은편의 진소는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범강림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장수 방중화를 따라 임관보를 지날 때 돌연 서쪽 오랑캐들의 공격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수적으로 워낙 열세였지만 후방의 진지가 대비하도록 시간을 끌어 주기 위해 불과 이천의 병사로 성을 지키며 적에 맞섰지요. 한 시진만 시간을 끌기로 하고 싸우는데, 뜻밖에도 방중화가 도중에 도망쳤답니다. 결국 범강림의 형제들과 버림받은 나머지 병사들만 남아 성을 사수했습니다. 성이 불탈 무렵, 서쪽 오랑캐가 성문을 공격하여…….”
이자문의 다소 딱딱한 음성이 조당에 울려 퍼졌다. 벌써 두 달쯤 지난 후였지만, 이번 전투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듣는 건 다들 처음이었다.
전투가 참혹했으리라는 건 모두가 상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어쩌겠는가. 여기 서 있는 관료들이 어디 그런 일에 관심을 두었던가.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결과였다. 이겼는지 아니면 졌는지.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능준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번졌다.
이제부터는 전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묘사하겠군. 저들이 얼마나 용맹했는지 말이야.
“……그 후 범강림은 서쪽 오랑캐가 쏜 화살에 맞아 성벽 아래로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가, 나중에 달려온 원군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답니다.”
어사중승이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다 읽었다는 뜻이었다.
조당에 있던 이들은 모두 놀란 눈치였다.
“그게 다요?”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자문은 또 진지하게 상소를 들어 쓱 훑으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게 다요.”
이자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게 다라니…….
“그자는 도중에 의식을 잃는 바람에, 요행히 목숨을 건졌군.”
“그래서 원하는 게 뭐라고 하오? 죽지 않았으니 위로하고 보살펴 달라는 건가?”
“도망친 장수가 그들을 죽고 다치게 한 원흉이라는 거요?”
논쟁이 오가면서 조당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양옆에 있던 어사들이 앞으로 나와 호통을 친 후에야 다소 고요해졌다.
“그 정 낭자는? 정 낭자는 뭐라고 했지?”
황제가 물었다.
대황자는 이런 일이 관료들끼리 다투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어사중승을 쳐다보던 대황자는 무언가 떠오른 듯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봤다.
다른 때는 늘 생기 있어 보이던 진안 군왕이 이번엔 어쩐 일인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사중승이 상소를 쓱 훑고 대답했다.
“그 여인은 공을 다투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당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공을 다투려 한다니!
의남매를 영접하고 안장하려 했을 뿐 억울하다고 한 게 아니라, 그저 호화스러운 장례를 치르고자 했을 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 게 아니라, 결코 이럴 의도는 아니었으며 그럴 마음도 없다고 한 게 아니라…… 일부러 작심하고 이렇게 했다는 말이었다.
그 여인이 공을 다투려 한다!
조당 안이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무슨 공을 다툰단 말이오? 끝내 굴복하지 않고 싸운 자들 또한 한둘이 아니오만, 이런 경우는 없었소이다!”
“돈이 있고 세력이 있으면 멋대로 이런 일을 벌여도 된다는 거요?”
“백성을 선동해 겁박을 하다니!”
이번에도 어사 둘이 나와 호통을 친 후에야 조당이 잠잠해졌다. 용상에 앉은 황제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아주 깔끔하게 인정하는군.”
황제의 표정을 보고 황제의 말을 들으며, 고능준과 진소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황제는 늘 이랬다. 너희가 뭘 하든 난 다 아니까 날 기만할 생각은 넣어 두라고. 여인이 계속해서 억울하다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면, 황제는 더욱 질색하며 못마땅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깔끔하게 인정한다면, 백성을 부추겨 조정을 협박하려 했다는 죄는 성립되더라도, 황제가 느끼는 혐오감은 한결 줄어들 터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혐오감이 다소 줄어들 뿐, 죄는 분명했다. 노정의 탄핵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여인은 죄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진소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린 낭자가……. 죽어간 의남매를 위해 목숨을 걸고 공을 다투어 공명을 얻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분이나 푸는 정도지. 지금껏 쌓은 명망을 잘 이용했다면 좋은 곳에 쓸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소동을 벌였으니 명망은 도리어 해가 될 뿐이었다.
결국 속 좁은 여인네다 보니 감정을 앞세우는군.
“그 여인을 부르시오. 무슨 공을 다투려는 건지, 무엇이 불공평한지 짐이 물어야겠소.”
황제의 말에 조정 대신들은 흠칫 놀랐다.
“폐하, 불가하옵니다. 그런 하찮은 여인을 어찌 용인하신단 말입니까.”
“그렇사옵니다. 그 여인이 등문고를 두드렸다면 몰라도, 신선이니 도사니 하는 말로 백성을 선동하고 관료와 결탁하여 중상모략을 저지른 자인데 어찌 이를 눈감아주려 하십니까!”
관료들이 떠들어대는 통에 조당이 또다시 어수선해졌다. 이번에는 어사들이 여러 번 호통을 친 후에야 간신히 소리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 여인이 그랬기에 짐이 만나 보려는 거요. 짐은 그 여인에게 답을 주어야겠소. 그 여인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그 여인과 결탁한 관료에게도 답을 줄 거요.”
관료들은 계속해서 반대하려 했지만, 황제의 결심은 확고했다. 명을 들은 내시들이 재빨리 나가 말을 전했다. 황제는 막간을 이용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황제가 조당 뒤쪽에 있는 후당으로 가 잠시 쉬는 동안, 관료들은 조당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사들이 한쪽 옆에 서서 노려보고 있었지만, 관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까지 막을 순 없었다.
표정은 다들 제각각이었다. 흥분하는 이도 있고, 무관심한 이도 있고, 근심하는 이도 있었다. 다들 황제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추측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노정은 끝났군.”
고능준이 다소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태조의 예를 본받으시려나 봅니다.”
관료 하나가 말했다.
조당 안에 의론이 분분한 만큼 조당 밖도 초조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당에서 일어난 일을 숨길 수는 없었다. 더구나 보기 드문 일이 벌어진지라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시 변방의 장수였던 송명(宋明)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자라 아주 제멋대로였어. 남의 재물은 물론이고 아내와 딸까지 빼앗았다니까. 그러다 백성 하나가 상경하여 등문고를 두드리자, 태조께서 친히 그 백성을 만나 주셨지.”
신분이 신분인지라 진십삼은 부친의 관청 바깥쪽에 마련된 공간에 앉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진십삼은 주육낭을 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육낭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찻잔을 들고 있으면서도 반나절 내내 한 모금도 안 마시는 걸 보면 얼마나 초조해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낭자가 자신의 명망에 기대 백성의 뜻을 모아 협박할 수 있었다면, 폐하도 능히 그러실 수 있지. 어쨌거나 폐하께서 정 낭자를 만나 주시는 것만으로도 백성은 만족할 거야. 공로를 인정받느냐 마느냐, 상을 받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백성의 관심사가 아니거든. 백성들은 그저 이번 일 자체에 관심을 둘 뿐이지.
정 낭자를 만나 주고 난 후 폐하께서 강문원이 군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다며 서북 군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성대한 제를 올리라 명하신다면, 백성은 위로를 받았으니 그럭저럭 넘어갈 거야. 강문원 역시 자신을 지켜 주신 폐하께 더욱 감격할 테고. 모두가 폐하의 성은에 감읍하며 폐하를 인자한 성군이라 칭송하겠지. 참, 노정은 멋대로 역참의 말을 이용하고, 백성의 뜻을 부풀리며 공신을 모함한 것도 모자라 조정을 우롱하기까지 했어. 인자하신 폐하께서 문신을 죽이실 리야 없겠지만, 살아서 남주 땅까지 가긴 힘들 거야.”
잠자코 진십삼의 말을 듣고 있단 주육낭이 물었다.
“그럼 서무수 형제들은 결국 또 아무것도 못 얻는 거네?”
진십삼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미 얻은 것 같은데? 온 경성이 무원산에 대해 떠들고 있잖아. 폐하께서도 친히 물으실 정도니, 공로는 인정받지 못했다지만 대단한 공명을 떨친 셈이지.”
주육낭은 잠시 침묵하다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네가 말은 잘했는데, 내 생각에 결과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 그 애가 남 좋은 일 시키자고 그리 바삐 움직였을까?”
그 여인이 그럴 사람이던가.
“그런 일을 벌여 봤자 헛수고만 한 셈이지.”
고능준이 중얼거리고 웃으며 맞은편의 진소를 쳐다봤다. 진소의 표정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눈빛은 편안해 보였다.
“어찌 헛수고라 할 수 있겠소. 폐하께서 태조를 본받으신 걸 보면, 이는 곧 폐하께서도 강문원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긴다는 뜻인데.”
진소 역시 고능준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능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숲에서 홀로 유달리 큰 나무가 있으면 바람이 쓰러뜨리기 마련이고, 남달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는 필시 여럿의 비방을 받기 마련이지(木秀於林, 風必摧之. 行高於人, 衆必非之). 강문원은 서북을 지키며 여러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있소. 병사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소홀했다 해도, 사려 깊지 못한 정도지 이를 큰 과오라 할 순 없잖소.”
그런 과오는 황제에게 도리어 좋은 일이었다. 군을 위무하는 일은 강문원보다 황제가 하는 편이 훨씬 적합하기 마련이니까.
진소 역시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 과오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요?”
그 정도 과오에 불과한 게 아니다?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어사가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정씨 여인이 왔습니다.”
조당에 있던 관료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고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드넓은 황궁의 저 멀리서 한 여인이 내시들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였기에 멱리를 벗고 겉에 입는 긴 옷도 벗은 상태였다. 짙은 색상의 치마만 입은 여인은 다소 왜소한 모습이었다. 으리으리한 전각들이 사방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지라 더욱 작고 허약해 보였다.
저게 바로 그 정 낭자인가?
진소를 제외하고는 다들 정 낭자를 처음 보는지라, 관료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여인을 살폈다.
나막신이 청석판에 닿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전각 안을 맴돌았다.
“아방(阿昉: 정방의 별칭)!”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크고 건장한 사내가 쏟아지는 햇빛 속에 역광으로 선 모습이 보였다.
“아방, 대주의 옛 도성은 폐허가 되어 이 터와 무너진 전각밖에 안 남았어. 그래도 전엔 꽤 으리으리했을 것 같네.”
사내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청량한 소리가 황량한 황궁에 울려 퍼지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설마 그렇게 좋았을까. 그래도 네가 살 집엔 비할 수 없을걸.”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뒤에 있던 사내의 웃음소리가 더욱 밝아졌다. 사내가 정교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앞서가던 내시가 뒤돌아 정교랑을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갑옷 차림으로 양옆에 있던 호위들도 창을 바투 잡으며 경고의 눈길로 노려봤다.
“겁낼 것 없소.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되니까.”
내시가 중얼중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린 소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천자를 처음 뵙는 자리에서는 황제를 알현할 자격을 얻은 관료들조차도 허둥대며 추태를 보이기 마련이니, 하물며 이렇게 어린 낭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낭자가 이리도 어렸구나. 신의 낭자라기에 일흔이나 여든은 된 줄 알았지. 아무리 못 돼도 스물은 넘었을 줄 알았는데, 어사대에서 이렇게 어린 계집이 나올 줄이야.
열여섯은 됐으려나? 아니면 열일곱?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하고, 족히 10장 정도의 높이는 되어 보이는 주변의 전각들을 둘러봤다.
“오나라 왕궁의 화초는 옛길 속에 묻히고, 진나라의 고관대작은 고분의 주인이 되었다네(吳宮花草埋幽徑, 晉代衣冠成古丘 - 이백). 아방, 내가 지은 시 어때?”
여인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거짓말쟁이. 시와 사(詞)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시와 사를 모르는 건 아니거든?”
거짓말쟁이……. 아니지, 거짓말쟁이가 아니야.
“이로부터 당시에는 천제도 취하여 진나라 땅에 산하가 있음을 상관하지 않았네(自是當時天帝醉, 不關秦地有山河 - 이상은).”
정교랑이 앞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내시가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묻고는, 정교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경고했다.
“궁에서는 묻지 않는 것에 대답하면 아니 되오.”
정교랑은 다시 예를 표하며 입을 다물었다.
“저리 어렸다니.”
조당에 있던 관료들이 시선을 거두었다.
“저 놀란 것 좀 보게나. 무슨 배포로 그런 일을 꾸민 거야.”
웅성거리던 관료들은 이번에도 어사들이 나서서 경고한 끝에 조용해졌다.
뒤에서 교사한 사람이 없다는 게 이상하지.
낭자의 나이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생각보다 더 어린 모습에 고능준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확실한 정보임을 거듭 확인하지 않았다면, 고능준은 저런 낭자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나서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 낭자가 그런 도움을 받을 만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을 테고.
어쩌면 그래서 유 교리가 방심했다가 일이 틀어졌는지도 모르겠군. 저런 상대라면 실로 만만히 보기 쉽지.
고능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진소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쳤을 때부터 연을 맺은 건가? 뭔가 캐낼 수만 있다면, 도조 이 진인의 제자로 알려진 신의 낭자만으로도 진소를 경성에서 내보낼 수 있을 텐데.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저 낭자는 그런 소문에 대해 시종일관 인정하지 않았고, 명성을 더 날릴 수 있는데도 과감하게 물러났다. 신의 낭자라는 이름만 남겼을 뿐 여기저기 연을 맺은 건 아니어서 꼬투리 잡힐 만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수를 더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더더욱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 되지.
고능준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일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일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승기를 잡은 건 확실했다.
조당 앞에 당도했을 무렵, 여인은 관료들의 시선에서 사라져 회랑 아래 한쪽에 서 있었다. 내시가 측문으로 들어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안 군왕은 조당에 서서 전각의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에는 문 위쪽의 꽃문양 투조 장식이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 구멍이 뚫린 투조 장식 때문에 겨울엔 더 춥고 여름엔 더 더우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장식이 작은 게 못내 아쉬웠다. 더 많고 더 컸다면, 그 뒤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 텐데.
두려울까? 두렵진 않을 거야.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처음 황궁에 왔던 때도 그랬으니까. 으리으리한 황궁에 호위는 또 어찌나 많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부모가 자신을 황궁 여관(女官)의 품에 맡기고 뒤도 안 돌아보며 떠난 후로,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가장 큰 두려움을 맛보고 나니, 더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저쪽에서 안으로 들라는 황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여인이 측문을 통해 후당으로 들어가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섰다. 조당에서는 여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말소리는 잘 들렸다. 몇몇 관료들은 무심결에 장지문 쪽으로 몇 걸음 다가서다가 잡아먹을 듯 쏘아보는 어사들의 눈빛을 보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도조 이 진인을 본 일이 참이냐, 거짓이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료들은 그 말에 깜짝 놀랐고, 어사중승조차도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그런 농담을 가장 먼저 꺼낼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답하기 까다로운 농담이었다.
대황자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흥분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긴장했다.
참이라고 한다면 황제의 안전에서 괴력난신의 헛소리를 늘어놓는 꼴이 되니, 황제가 입을 열지 않아도 관료들이 나서서 끌어내 참형에 처할 것이다.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반박하지 않고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한 셈이니까.
뭐라고 하려나?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었다. 황제의 안전에서 말씀을 올릴 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음이 올곧지 못하다는 증거니까.
잠깐 숨 한 번 쉬는 사이, 저쪽에서 벌써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녀는 자신에 대해 알 뿐 다른 이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 후,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진안 군왕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감췄다.
황제가 고개를 들고 앞에 꿇어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황제 역시 조정 대신들처럼 탄식을 내뱉었다.
이리 어렸다니.
이어 황제는 정교랑의 자태를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는 하나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꿇어앉아 있었다.
조정 중신과 고관대작의 위엄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반인도 그 앞에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천자를 뵙는 자리는 어떻겠는가. 전시를 치르고 급제한 공생들조차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는 겁에 질리는 탓에 해마다 망신을 당하는 이가 나오곤 했다.
그런데 저 어린 낭자는 법도에 따라 단정하게 꿇어앉아 있다고는 하나 자리를 어려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자태는 마음에서 나온다 했으니 과연 대단한 여인이로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황제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너 자신의 생각은 어떠하고?”
황제가 물었다.
“소녀가 만난 건 사람이지 신선이 아닙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역시 스승이 있었군!
장지문 밖의 관료들이 수군거리자, 이번에도 어사가 나서서 호통을 쳤다.
황제는 그 대답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황성사(皇城司)를 통해 경성에 떠도는 풍문을 들은지라 과거 진소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정교랑의 스승을 찾은 일은 황제도 알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이 모르는 것은 진소가 숨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에 대해선 신경을 안 썼기 때문이었다. 요 며칠을 제외하고는 그 어린 낭자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네 스승은 어떤 사람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당시 소녀는 의식이 온전치 않았습니다. 진 대인께서 찾아 주지 않으셨다면, 세상에 그런 분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겁니다. 소식을 알았을 무렵 스승님은 이미 돌아가신 후인지라 존함조차 모릅니다. 따끔한 충고 한마디로 소녀에게 경고를 남기셨을 뿐이죠.”
“무슨 말을 남겼는데?”
황제가 궁금한 듯 물었다. 조당에 있는 대신들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또다시 장지문 쪽으로 다가서자 이번엔 어사들도 호통하지 않고 함께 귀를 기울였다.
“‘넌 누구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녀를 의식불명에 이르게 하고 다시는 못 깨어나게 만들 뻔한 그 서찰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그런 서찰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일 터였다.
회복을 기억한 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려 애썼다. 한 번에 딱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양씨 가문을 찾는 일. 양씨 가문을 찾는 일에 매달리는 동안 다른 일이나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혼란에 빠질 것 같았다.
하긴 무슨 소용이랴.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정교랑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움찔거리다가 가슴에 갖다 대지는 않고 자제했다.
그래.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난 누구지?
대답을 들은 조정 대신들은 멈칫했다.
“무슨 충고가 저래?”
대황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경고의 의미를 담은 충고가 분명합니다.”
진소가 엄숙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성현이 일생을 바쳐 수많은 경서를 탐독하는 목적은 결국 하나입니다. 그건 바로 깨닫기 위해서죠.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는 것, 말은 쉬워 보여도 답하긴 어렵고, 행하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대황자는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지만, 진소는 한때 대황자의 스승이었다. 스승께 불경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는지라 대황자는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공손히 수긍했다.
관료들이 다시 귀를 기울이는데, 장지문 너머 저쪽은 한동안 조용하기만 했다.
“물러가라.”
황제가 말했다. 그 말에 대황자가 멈칫했다.
“말씀도 안 하시고?”
대황자가 중얼거렸다.
소문에 대해 더 말씀하셔야지. 관료들이 싸워대는 소리보다 훨씬 재미있는걸. 이제 시작인데 왜 끝내시는 거야?
이번엔 진소도 대꾸하지 않았다.
“정씨 여인이 괘씸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것만 해도 충분하지요.”
고능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천하 만백성에게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황제가 어찌 백성을 선동해 자신을 협박하는 여인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단 말인가.
“전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악(五惡)의 무리는 도적보다 더 흉악하다 하였습니다. 정씨는 속으로 뻔히 알면서도 음험하고, 행동은 경박하고 치우쳐 있으면서도 완고하니, 저런 자는 절대 쓸 수 없으며 용인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고능준이 간곡하게 말했다.
공자님 말씀!
대황자는 자신이 잘 아는 화제가 나오자 눈빛을 반짝거렸다.
“첫째로 속으로 뻔히 알면서도 음험한 것(心達而險), 둘째로 행동은 경박하고 치우쳐 있으면서도 완고한 것(行僻而堅), 셋째로 당치도 않은 이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言僞而辯), 넷째로 온갖 추악한 일만 기억하면서도 박학다식한 체하는 것(記醜而博), 다섯째로 잘못된 언행을 옹호하고 거기에 분칠까지 하는 것(順非而澤)을 이르지요.”
대황자의 말에 고능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경사자집(經史子集: 동양의 도서 분류법 중 하나. 경서經書ㆍ사서史書ㆍ제자諸子ㆍ문집文集)에 능통하시지요. 출처며 풀이를 자유자재로 인용하시니 참으로 명석하십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대황자는 뿌듯해하며 도도한 웃음을 지었다.
“상대를 불의로 이끄는 자가 바로 악인이지요.”
고능준이 이어 말했다.
조당에 있던 대신들은 둘의 대화를 아까 전처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대신들이 궁금해하던 건 그저 정 낭자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진소는 서북의 주봉상이 몰락하고 나면 또 누굴 보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왕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된 장수들과 관리들을 불러들일 때가 되기도 했고.
고능준의 생각은 벌써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애초에 여인이 황제 앞에서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나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황제 면전에 대고 소리소리 질렀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일개 평민이 그런 짓을 한다면 곧장 위병들에게 끌려나가 목숨을 잃을 테니까.
죽으면 더 좋긴 하지. 그럼 그 여인을 노정과 진소에게 속은 자로 몰아가며 백성을 선동한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까. 굳이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아도 진소가 사직을 청할 텐데.
고능준은 진소를 힐끔 쳐다봤지만, 진소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그때 저쪽에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능준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장지문 너머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저 자식이!
고능준은 열불이 치솟았다.
“무엄하오! 부름도 없이 어딜 들어가는 겁니까!”
고능준이 분노를 숨길 수 없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당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고능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씨, 너는 그 충고를 기억하고 있으면서, 어찌 그런 황당한 일을 벌인 것이냐? 국법이 지엄하거늘, 불공평한 일을 당해 억울하다면 법도를 지켜 발고해야 하지 않느냐. 너 자신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워 황자조차 고치지 않겠다 했으면서, 조정에서 세운 원칙을 무시하고, 천하의 원칙을 무시한단 말이냐!”
진안 군왕이 정씨를 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당초 의원을 찾아가겠다며 경왕을 데리고 출궁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이가 바로 저 신의 낭자였으니까. 결과 또한 모두가 알았다. 경왕은 여전히 바보였으므로.
듣자니 신의 낭자는 세 가지 원칙을 들어 경왕의 치료를 거절했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후 관료들은 신의 낭자가 원칙 때문에 고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고칠 수 없었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생각할수록 답을 알 수 없었다. 원칙 때문에 안 고쳤다고 하자니, 상대는 무려 황자였다. 황자의 병을 고친다면 평생의 부귀영화를 보장받고 근심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대체 무슨 원칙이기에 그만한 유혹을 뿌리친단 말인가.
고칠 수 없었다고 하자니…… 과연 믿어도 될까?
아마도 답은 저 낭자의 마음속에만 있겠지.
지금 보니 진안 군왕은 못 믿는 눈치로군. 치료를 거절당한 울분이 떠올라 저리 나서서 호통을 치는 거겠지.
자연히 어사중승도 따라 들어갔다.
“부름도 없이 어딜 들어간단 말입니까! 이는 불경죄입니다!”
고능준이 진안 군왕의 앞을 막으며 얼굴이 벌게진 채 소리를 질렀다.
“폐하 안전에서 어찌 소란을 피우십니까! 이는 불경죄입니다!”
어사중승은 도리어 고능준에게 소리를 질렀다. 고능준은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라 이자문을 씹어먹을 듯 노려봤다.
“대인들은 뭘 하려는 거요?”
이자문은 고능준을 보지 않고 뒤에 있는 관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혼란을 틈타 구경하러 따라왔던 관료들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얌전히 장지문 밖으로 나갔다.
이자문은 그제야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께서는 어전에서 실례를 보였으니, 신이 불경죄를 물을 것이옵니다.”
이자문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의 표정에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진안 군왕은 다른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일어나 내시를 따라 나가는 정교랑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넌 원칙을 중시하는 자 아니더냐? 넌 왜 원칙을 지키지 않지? 오늘은 왜 원칙을 어기느냔 말이다. 내 너의 죄를 묻겠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분을 참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소녀는 원칙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정교랑이 몸을 살짝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이게 원칙을 지키는 것이더냐? 원칙을 지킨다면 백성을 선동할 게 아니라 등문고를 두드렸어야지.”
진안 군왕이 냉소를 보였다.
“입 다물고, 썩 물러가십시오!”
어사중승이 소리쳤다.
“난…….”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정교랑을 쳐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해가 안 간단 말이다!”
어사중승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정씨, 이게 어찌 원칙을 지키는 것이란 말이냐?”
“소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오라버니들을 안장한 것은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습니다. 불공평한 일이 하늘에 닿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예상한 대로 소녀의 바람을 눈여겨본 관료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관료가 응당 해야 할 일이니, 원칙에 따른 게 아닙니까?”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거 봐, 이거 봐. 당치도 않은 이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게 뭔지 오늘 제대로 보는군.
고능준은 냉소를 지었지만,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그 불공평한 일은 원칙에 맞는 것이더냐? 전투를 치르려면 사상자가 나오는 건 피할 수 없다. 죽거나 다친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어찌하여 너희만 불공평하다며 불복하는 거지?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뭐하러 군에 들어갔느냐?”
“맞아요. 저희는 돈이 있으니 경성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굳이 군에 들어갔을까요?”
정교랑의 말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네가 바라는 것이냐? 돈은 충분히 있으니, 명예를 원한다?”
황제가 자발적으로 입을 열다니!
아까는 진안 군왕을 도와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지만, 이번엔 황제 본인이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황제의 호기심까지 건드렸군. 궁금한 게 있으면 알아보기 마련이지.
이는 고능준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못마땅해야 멀리하고, 멀리해야 더 못마땅해지는 법이니까.
간신히 황제가 괘씸히 여기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저 간사한 여인이 말을 많이 할수록, 듣는 이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가증스러운 진안 군왕 때문이었다. 저 여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다니!
그래. 애초에 진안 군왕한테 원망 따위는 없었어. 진소처럼 신세를 갚은 거지. 어사대에 찾아와 편을 들던 동 내한 같은 사람처럼 신세를 갚은 거야! 저 여인에게 잘 보이면 훗날 도움이 될 테니까!
아니면 진소랑 미리 짠 건가? 둘이 언제부터 한통속이었지?
진안 군왕이 감히 대신과 결탁하다니!
순간 고능준의 머릿속이 어수선해졌다.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듯했다. 귓가에 또다시 그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건 오라버니들의 바람이었어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쳐 탈영병이라는 치욕을 씻으려 했죠. 죽더라도 가치 있게 죽고자 했어요.”
“나라에 충성을 바쳐? 공을 탐하고 이익을 꾀하는 거겠지.”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공을 탐하고 이익을 꾀하는 게 어때서요? 오라버니들은 전선에 나가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그런 공을 탐하는 걸 조정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니, 그럼 조정에서 원하는 건 아무 바람도, 의욕도 없는 병사들인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저 여인에게 말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고능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렇다면 뭐가 그리 원통하단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불공평하지? 다른 이들은 안 죽었는데 너희만 전사한 게 불공평하다고?”
“아닙니다.”
“살아남은 이는 공을 인정받았으니, 너희도 공을 다퉈야겠다?”
“아닙니다.”
“정씨, 네 오라비들이 받은 위로금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많다는 걸 아느냐?”
“압니다.”
“그럼 대체 뭐가 불공평하단 것이냐? 또 무슨 공을 다투겠다는 거지?”
“공이 없는 자도 공을 얻었으니, 공이 있는 자는 당연히 공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있는지 없는지 관부에서 정하는 건 인정할 수 없고, 너희가 정해야만 인정할 수 있단 말이냐?”
“저는 관부를 믿지 않습니다.”
“관부는 널 어찌 믿지?”
“관부와 조정에서 절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믿어야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더냐?”
“그 일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 일을 겪은 사람이 누군데? 의식을 잃은 덕에 요행히 목숨을 건진 그 오라비 말이냐?”
“네.”
“그자는 너와 가까운 사이이니 모두를 설득할 수 없다. 가까운 사이끼리는 서로 허물을 덮어 주고 숨겨 주는 법인데, 다른 이들이 납득하겠느냐?”
“그렇다면 저와 가깝지 않은 사람을 찾아야겠지요. 서북에 그 일을 겪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라면 조정에서도 믿을 수 있겠지요.”
여인의 말이 끝나자 전각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장지문 저편의 관료들 역시 숨을 죽였다.
어린 낭자가 담력이 대단하네. 폐하의 안전에서 조금도 겁먹지 않는 것 좀 봐. 도리어 폐하께서 격노하신 것 같네. 그러니 저리 묻고 답하고 했겠지.
“서북에도 맛좋은 술이 있는 것이냐?”
황제가 말했다.
비꼬는 말이잖아!
“없습니다.”
정교랑의 표정과 목소리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믿으실 수 있겠지요?”
협박을 하다니!
황제가 눈앞의 여인을 빤히 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장지문 너머의 진소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황제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짐은 믿을 수 있다. 한데, 너는 서북에서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
“소녀도 믿습니다. 서북의 병사들을 조사한 결과, 제 오라비들이 받아 충분한 위로금을 받았고 그 죽음에 전혀 억울한 게 없다고 밝혀지면, 만백성을 부추겨 하소연한 만큼 이번에도 소녀가 만백성에게 알리겠습니다.”
“뭘 어찌 알리겠단 것이냐?”
황제가 냉랭하게 물었다.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는 벌을 받겠습니다.”
정교랑의 대답에 모두가 멈칫했다. 고능준조차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번개를 불러 죽어? 벼락을 맞겠다고?
그것도 벌이긴 벌이지. 자고로 극악무도한 자만이 벼락에 맞아 죽는 법이니까. 벼락에 맞아 죽는다면 만백성이 납득할 것이다.
그런데, 번개를 불러들인다는 게…….
“언제 번개가 칠지 누가 알고 네가 벼락에 맞게 한단 말이냐? 번개가 치지 않고, 네가 벼락에 맞아 죽지 않으면, 그건 하늘의 잘못이지 너와 무관하다는 뜻 아니냐?”
고능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 말하니 정 낭자가 정말 도교 이 진인의 제자 같군. 자결하는 방법조차 저리 심오하다니.”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있었다.
“대인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소녀는 천문을 익혀 언제 번개가 치는지, 어떻게 해야 벼락에 맞는지 알고 있으니 준비할 수 있습니다.”
고능준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교묘한 술수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도 모자라 이제는 비바람까지 부를 수 있다니.
보통 미친 여인이 아니야!
서북 쪽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황제 앞에서 저리 오만방자하게 굴었으니 이젠 죽은 목숨이리라.
고능준은 눈앞의 여인을 다시 봤다. 전각 밖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힐끔 본 후, 이렇게 정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꽃다운 미모의 십 대 소녀가 단정하게 서 있었다. 자신의 집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능준의 시선이 소녀의 두 눈으로 향했다. 처음 봤을 땐 아름다워 보이더니 다시 보자 어두워 보이고 세 번째 봤을 땐 심오하여 속을 알 수 없어 보였다.
저건 결코 어린 낭자의 눈이 아닌데. 정말 신선이라도 만났나?
그게 아니라면 어디서 저렇게 건방진 배짱이 나오지? 진소를 믿고 저러나?
“윤허하노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천자의 말이 갖는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정교랑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삼고구배(三叩九拜: 머리를 세 번 땅에 찧고 아홉 번 절함)의 예를 올렸다. 그 행동이 어찌나 침착하고 올바른지 깐깐한 어사중승조차도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구중궁궐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에 내시의 시선은 몇 번이나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정말 기이한 일이네. 어린 낭자의 발걸음이 저리 안정적일 수가. 입궁할 때도 흐트러짐이 없더니, 출궁할 때도 마찬가지야.
내시들은 벌써 전각 안에서 일어난 일을 훤히 알고 있었다.
저 낭자가 감히 폐하 앞에서 도박을 걸었단 말이지? 그것도 목숨을 건 도박을.
사실 대단한 것도 아니군. 아니 할 말로 이 세상 만물의 목숨은 전부 천자의 손아귀에 있지 않던가. 애초에 도박이라고 할 것도 없지.
“낭자,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요?”
내시가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정교랑은 내시를 힐끔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얼씨구, 어린 낭자가 웃기까지 하네.
“정의를 믿거든요.”
“정의?”
내시가 고개를 숙였다.
정의라……. 천하에 자신만 정의고, 다른 정의는 없다는 건가?
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탁자로 집어 던졌다.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난 듯 황제가 불쑥 물었다. 내시 하나가 앞으로 나와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말해라.”
황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군왕께서는…… 산에 앉아 계십니다.”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왕에게 일이 생긴 후, 황궁에서 매산은 금기어가 되어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다. 경왕이 매화를 꺾으려다가 사고를 당했기에, 다들 매화의 매 자도 입에 올리지 못했고, 각 궁에서도 감히 매화를 놓아두는 이는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손을 내젓자,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겹겹의 휘장이 아래로 내려졌다.
“어린 낭자의 배포가 대단한 건 알았지만, 폐하를 압박할 정도로 큰 줄은 몰랐습니다. 큰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일 정도입니다.”
진소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살길을 조금도 남겨 두지 않으니 말이죠.”
“그 낭자는 언제나 살길을 열고자 싸워 오지 않았느냐. 번개를 불러들여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남의 살길을 빼앗고 자신의 살길을 쟁취하며 기사회생했지. 태평거에선 대낮에 사람 다섯을 죽이기까지 했어.”
노태야는 고개를 돌려 뒤쪽의 병풍을 바라보았다.
“유 교리를 죽음으로 내몰고 장강주를 설득했으며, 역참에서는 탐관오리를 활로 쏴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부친의 가문을 무너뜨렸다. 일거수일투족, 언행 하나하나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어. 강경하고 인정사정없으며 늘 필사의 각오로 덤비는 성격이야. 근래 들어 두 해 동안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은둔하고 있었다 해서 벌써 잊은 것이냐?”
진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잊고 싶어 잊은 게 아니라, 그 낭자의 모습을 보자 다 잊고 말았다. 아니, 믿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어리고 단정하며 말수까지 적은, 우아한 여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규방 여인의 모습인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그녀는 입으로 말하지 않고 그저 손을 쓸 뿐이었다.
2년간 은둔하며 지낸 후 문을 나서자마자 대사로 추앙받는 승려를 참살하더니, 경성에 당도하자마자 풍파를 일으켰다. 단정하고 예의 바른 낭자였다. 원칙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누구든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게 맹수든 힘없는 벌레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때려죽이고 박살을 내는 게 그녀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독한 사람이었다. 남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이번엔 자신의 살길을 끊어 버렸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살길이 끊어질지 모르겠네요.”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들어 서북 방향을 쳐다봤다.
“서북 쪽엔 얼마나 자신 있느냐? 정 낭자는 서북에 있지 않으니 경성과는 또 다를 거야. 정 낭자의 손이 거기까지 닿진 않을 테고, 거기서 세력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거짓으로 누군가와 손을 잡기엔 변수가 너무 많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자신은 없는데, 제 생각엔 정 낭자가 승기를 잡은 것 같습니다.”
진소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 낭자는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두 부자가 서북쪽을 쳐다보던 시각, 경성에선 여러 사람이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바라봤다.
이번 일의 성패는 서북에 달려 있었다.
-다시 정의-
강주.
추적추적 가을비가 며칠째 그치지 않고 내렸다. 정사낭은 골목 어귀를 서성이며 머뭇거렸다. 바람이나 쐴까 하고 산책을 나와 걷다 보면 늘 누이가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됐다.
이제 누이는 이곳에 없지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에 젖은 청석판에 말발굽이 닿자 다그닥다그닥 하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만 듣고도 누가 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요즘 경성에서는 말편자가 유행한다고 했다. 말발굽에 못질을 하거나 굽쇠를 박아 말발굽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누가 생각해 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강주에서는 돈을 물 쓰듯 쓰는 조 대집사가 가장 먼저 쓰기 시작하여, 지금은 자기 말의 발굽에 그런 편자를 박으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다만 대장장이가 편자를 제대로 박지 못한 탓에 조 집사가 타는 말과는 달리 편자가 거칠고 조악하게 박혀서, 결국엔 경성에서 말편자 박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을 두엇 불러오기까지 했다.
“사공자님!”
조 집사가 외치는 소리에 정사낭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조 집사, 예는 됐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방수포로 된 우의를 입고 삿갓을 쓴 조 집사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한치의 소홀함도 찾아볼 수 없는 깍듯한 예였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좋은 차를 새로 구했는데, 비도 오고 하니 같이 드시지요.”
예를 마친 조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 잠시 주저하던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낙했다.
“누이는 경성에서 잘 지내지?”
“염려 마십시오. 아씨께서는 어디서든 잘 지내실 분이지요.”
“누이가 서찰을 보내오던가?”
“공자님, 저희 아씨는 말수가 적으시잖습니까. 서찰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긴 그렇지.”
두 사람은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두 여종이 우산을 쓰고 웃으며 나와 맞이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돈은 안 된다니까. 우리 아씨의 윤허가 있어야 한다고.”
조 집사의 말에 두 여종은 쭈뼛거리며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났다.
“무슨…….”
정사낭이 물었다.
“이부인께서 돈을 달라십니다. 이노야께서 쓰신다고 하더군요.”
조 집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어느덧 3년이 흘러 이노야의 임기가 다 되었기에 돈을 융통하려는 것이었다.
“공자님, 들어가시지요.”
조 집사는 정사낭의 생각을 끊으려는 듯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못 주겠다고?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
정 이부인이 여종들을 보며 묻자, 여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퉤, 이번엔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고? 기분 좋게 돈 펑펑 쓸 때는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자기네 아씨는 무슨! 우리 집 아씨지!”
정 이부인은 분을 참지 못하며 탁자에 있는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다가 풉 하고 내뿜었다.
“무슨 차 맛이 이래! 이런 걸 사람 먹으라고 준단 말이냐?”
여종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가세가 예전만 못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을…….
“분가할 수도 없는데 이리 설움만 당하고 있으니, 원.”
정 이부인은 대청을 왔다 갔다 하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가서 대부인께 전하거라. 이노야께 보낼 돈을 융통해 달라고. 이노야의 앞길이 막히면 저들이 감당할 수 있다더냐?”
여종들이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정 이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가세가 기울었으니 믿을 건 우리 이노야뿐인데, 눈치껏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우리 이노야의 앞길까지 막아 놔야 속이 시원하다더냐.”
여종들은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알았다.”
정 대부인이 응낙하는데도 여종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대부인, 서두르시랍니다.”
여종들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전에는 여종들의 그런 태도가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이제는 정 대부인도 습관이 된 터였다.
정 대부인은 고방 열쇠를 꺼내 옆에 있던 집사 부인에게 건넸다.
“가 보게. 이노야께 보낼 돈을 꺼내 줘.”
집사 부인이 머뭇거렸다.
“하오나…….”
집사 부인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정 대부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말은 맞는 말이지. 앞길이 중요하지 않느냐. 앞길이 막히면 다 잃는 거야. 그럼 정말 끝이야.”
집사 부인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이제 집에 있던 여종과 몸종도 많이 팔아치운지라 집사 부인이 여종과 함께 나가자 안팎이 조용해졌다.
정 대부인은 탁자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은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게 뭐가 더 있나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터였다.
정 대부인의 시선이 장부에 닿았다. 아주 오래전에 기록한 목록에서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주과랑(周戈娘).
정 대부인은 손을 뻗어 그 이름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 전 형님 말씀만 따를게요.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제가 할게요.
귓가에 여인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규방 교육을 받고 자란 규수라고는 하나 무장 집안 출신인지라 거칠고 투박한 면이 있는 여인이었다.
당시 정 대부인은 말재주가 변변치 않고 시키는 일이나 할 줄 아는 주과랑을 깔보며 은근히 무시했다. 그러다가 이노야가 상처하고 재취를 맞이했다. 새로 들어온 후처는 학자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현숙하고 우아하며 품위가 있었다. 말솜씨도 유창하여 볼수록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보니 말만 번드르르해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네! 자기 식구한테 횡포나 부릴 줄 알지. 과랑은 남에겐 으르렁거려도 자기 식구는 끔찍이 위할 줄 알았는데.
정 대부인은 주과랑의 이름을 쓸어 보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
형님, 저 죽기 싫어요. 죽을 수 없어요. 제가 죽으면 우리 교교는 어떡해요.
형님, 전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정 대부인이 탁자 위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과랑이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꼬.
방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정 대부인은 얼른 울음을 그치고 후다닥 눈물을 닦은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일어나셨어요?”
정 대부인이 물었다. 침상에 누운 정 대노야는 진작 일어났는지, 손에 서책까지 한 권 들려 있었다.
“안 잤소.”
잔 게 아니라면, 방금 전 일을 다 들었겠구나.
정 대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눈물을 한 번 더 닦았다. 정 대노야는 별다른 말 없이 계속해서 서책만 들여다봤다. 정 대부인은 몇 번 더 훌쩍이더니 눈물을 거두고 정 대노야에게 뭘 보느냐고 물었다.
“족보요.”
“그걸 뭐하러 봐요?”
정 대노야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가리켰다.
“아버지께서 그 애한테 왜 이 이름을 지어 주셨는지 기억하시오?”
정 대부인이 멈칫하며 족보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정방. 정방이 누구야?
정 대부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위에 쓰인 정 이노야의 이름을 보자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노야, 그만 보세요. 생각도 하지 말고요.”
정 대부인이 또다시 눈물을 흘리자, 정 대노야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왜 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요? 명백히 존재했던 일이고 존재하는 사람이잖소. 마음이 편치 않고 괴롭다고 해서 보지도 않고 생각도 안 한다 한들 그게 없었던 일이 되고 그냥 넘어갈 일이 된단 말이오? 그럴수록 진지하게 마주해야지.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말고.”
정 대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물을 닦았다.
“의원이 그랬잖아요. 노야는 화를 내서는 안 되는 병에 걸렸다고.”
정 대부인이 간곡하게 말했다.
볼수록 화만 날 텐데, 화병으로 죽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려나.
정 대노야는 정 대부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족보의 이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방, 본디 남자아이에게 지어 주려던 이름이오. 밝게 빛나란 뜻이지. 아버지께서는 내 재주가 평범하단 걸 알아보셨소. 둘째 아우도 조금 영리한 정도였지. 그래서 우리 정씨 가문의 앞날은 그다음 세대에 달렸다고 보신 거요.”
정 대노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 대부인은 들을수록 울화가 치미는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우리 집안의 앞길을 그 애가 망쳐 버렸죠.”
“아니오.”
정 대노야가 말했다.
아니라고?
정 대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병색이 짙어진 정 대노야는 근래 들어 한동안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정 대부인은 의원을 불러 다시 진찰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정신까지…… 이상해졌나?
“생각해 보시오.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능력이 있다면, 자연히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능력도 있지 않겠소.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지.”
거기까지 말한 정 대노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같은 이치란 거야. 정말 정신이 이상해지셨나?
정 대부인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낙주부 관청.
정 이노야는 공손한 태도로 중년 사내를 배웅했다.
“염려 마시오. 이 일은 저희 대인께서 생각해 두신 게 있소이다.”
사내가 말했다.
“여기 수고비입니다. 차나 한잔 사 드십시오.”
정 이노야가 봉투 하나를 건네자, 사내는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넙죽 받았다. 그러자 정 이노야는 더욱 기뻐했다.
“그럼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사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참, 위쪽에 인사 전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
무언가 생각난 듯 사내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자, 정 이노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