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75)

“무뢰배들은 계속 영덕 대사의 공로를 그 여인이 빼앗아 간 거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어떤 중놈이 영덕 대사를 추모하는 법회를 열려던 것을 저희가 제때 도착하여 간신히 막았습니다.”

관청 안에서는 이번 사건에 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관리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한 대인이 옷소매를 만지며 말했다.

“다들 고생이 많았네. 시간이 늦었으니, 이 일은 내일 다시 논의하세. 오늘은 다들 그만 돌아가서 쉬게나.”

관리들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한 대인에게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맨 마지막으로 관청을 나서던 현승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다른 관리들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하고는, 한 대인에게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인, 그래서 그 여인은 잡으신 겁니까?”

한 대인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현의 일인데,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되지.”

“대인, 무려 영덕 대사를 죽인 사람입니다.”

현승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미 끝난 얘기 아니었습니까? 그 여인을 잡…… 아니, 모셔 오기로요. 어쨌든 사람을 죽였으니, 형식적으로라도 뭔가 보여 줘야 합니다.”

이번 일을 가장 쉽고 깔끔하게 마무리할 방법은 영덕 대사를 죽인 여인을 내세워 백성의 성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관청 관리들이 나설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그 여인에게 떠넘기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한 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또 한 번 자신의 옷소매를 주물렀다.

그래, 그렇게 하기로 했었지. 하지만 그 여인을 보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 그렇게 어린 여인에게 이 일을 떠넘기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

“요승이 백성들을 현혹했던 사건으로 정리했으니, 그 여인이 저지른 살인은 악을 물리친 것이나 다름없네. 그건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야. 그 여인에게 확인할 건 다 확인했고, 나 또한 선을 그었네. 이번 일은 더 이상 그 여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일세.”

한 대인이 말했다.

“그럼 저희의 일이 되는 것 아닙니까!”

현승이 다급하게 외쳤다.

“우리의 일이 맞아. 당초 내가 그자를 엄하게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후환을 낳은 것이야. 그 여인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해도, 내가 그 여인에게 칼자루를 쥐여준 것이나 다름없네. 그러니 이번 일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말게. 본관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겠네. 그 여인이 영덕 대사를 죽여 준 것만으로도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된 것이니.”

한 대인은 다른 건 다 좋은데,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무관처럼 행동하신단 말이야.

현승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현승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문가에 다다랐을 무렵, 현승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관청 안에 있던 한 대인은 또 옷소매를 쥐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듯했다.

정말 이상하네. 도대체 옷소매 안에 뭘 넣어 두었길래?

현승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자리를 떠났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한 대인은 날이 밝을 때쯤이 되어서야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는 자리에 눕자마자 숙주에서 가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얘기 듣고 왔어요. 숙주까지 전해질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한 부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듣고 왔소?”

한 대인이 대답 대신 반문했다.

“이것저것이요. 어떤 사람은 관청에서 일부러 돈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말까지 하고 있어요.”

한 부인이 말했다.

“황당하군.”

한 대인이 옷소매를 내치면서 말했다.

“나도 황당해요. 하지만 노야, 사람이 셋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잖아요.”

한 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영덕 대사를 죽인 여인을 잡았냐고 물으러 온 거겠지?

한 대인은 부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옷소매를 매만졌다.

“걱정 마시오. 다 생각해 둔 방도가 있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한 부인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추궁했다. 하지만 한 대인은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 집안일에 대해 물었다.

“원조는 사돈댁에 갔어요. 내년이면 경성에 가서 과거 시험을 봐야 하니, 원조에게 가 보라고 당부했거든요. 사돈댁에서는 우리 한조가 파혼할까 봐 초조한 것 같던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빨리 혼례를 올리고 말지 왜 자꾸 혼사를 미루는지 모르겠네요.”

“다 원조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요. 한창 신혼일 때 책이 눈에 들어오겠소? 사돈댁은 우리 원조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러는 것이오. 원조가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쉬이 파혼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게지.”

“우리 원조가 참 잘 컸어요. 참, 경성에서 또 반년 치 배당금을 보내왔더라고요. 그리고 같이 전해 온 말이 있는데, 반근 낭자가 거처를 마련해 두었으니 원조는 몸만 오면 된다고…….”

“반근!”

한 대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면서 부인의 말을 끊었다. 한 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반근이었어.”

흥분한 모습으로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던 한 대인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설마 반근이 그 반근인가? 맞아, 맞아. 그럴 수 있지. 엄청난 집안 출신에, 경성으로 간다고 했으니까.”

한 대인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던 한 부인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한 대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자신이 겪었던 일을 부인에게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한 부인도 한 대인만큼이나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요? 노야, 동명이인인 건 아니고요?”

한 부인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여인이 나를 보고 말한 첫마디가 뭔 줄 아시오? 나한테 한씨가 맞냐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소.”

아무 이유도 없이 성씨와 출신을 묻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이건 필시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한 부인이 흠칫 놀랐다.

“내가 숙주라고 대답하니, 그 반근이라는 몸종이 헉 소리를 내면서 놀라더군.”

한 대인이 부인을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설마요, 설마.”

한 부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우리가 생각하는 게 맞는다면, 그 여인이 나에게 괜히 이걸 준 게 아닐 것이오. 그러니 한 번 시도해 봐야겠소.”

한 대인이 손으로 옷소매를 매만지며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무슨 시도를 해요?”

한 부인이 물었다. 한 대인은 대답 대신 네모나게 접은 종이를 옷소매에서 꺼내 들었다.

“나는 일식이 언제 일어날지 알고 있소.”

한 대인이 천천히 말했다.

“대인, 무슨 말씀이십니까!”

관청에 자리한 관리들과 서리들이 놀란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고 한 대인을 쳐다보았다.

“나는 언제 일식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고 했네. 이건 우리에게 온 큰 기회야. 그러니 이걸 잘 활용해서 백성들이 관청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해. 이렇게 해야만 요승이 남겨둔 후환을 뿌리째 없앨 수 있네.”

한 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인께서 역법을 보고 예측할 줄 아십니까?”

현승이 물었다.

“무인력(戊寅曆: 당나라 건국 원년에 부인균이 발간한 역법)을 볼 줄은 알지만, 예측하는 능력은 없지.”

한 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옷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누가 나에게 일식 날짜를 알려 줬다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관청에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대인, 그 여인이 알려 준 겁니까?”

현승이 물어보며 무의식적으로 한 대인의 옷소매를 쳐다보았다.

어제 돌아온 이후로 계속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이유가 바로 저거였어? 그 여인이 저걸 이용해서 한 대인이 자신을 문책하지 못하도록 한 건가?

한 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 여인이 알려 줬어. 그 여인은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라고 했지.”

만약 저 날짜가 진짜고,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아주 효과적이고 좋은 기회가 될 거야. 하지만 대인께서 너무 쉽게 현혹되신 건 아닐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나지막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날짜가 틀리면요?”

현승이 진지하게 물었다.

날짜가 틀리면, 이번 일은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영덕 대사의 잔당들이 그 기회를 이용해 다시 백성들을 현혹할 발판을 만들어 주는 꼴이 된다.

너무 위험한 일이야.

  • 대인, 정말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 오신 건가요?

  • 역시 한씨가 맞네요.

  • 그렇다면, 한 대인께 기회를 하나 드리지요.

그 여인은 분명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야! 결코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야!

한 대인은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들었다.

“틀림없을 걸세. 모든 이에게 이 사실을 전하게. 지금부터 반강현은 구호 의식 준비를 시작하겠네.”

관청 안 사람들은 한 대인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대인, 대인,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현승이 한 대인을 만류했다.

“맞습니다, 대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이번 일은 별 탈 없이 지나갈 겁니다.”

다른 관리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몇 년 후 임기가 끝나 반강현을 떠나면, 한 대인에게 반강현은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는 곳이 될 테니 굳이 이번 일을 강행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한 대인의 관직 생활은 이걸로 끝날 것이다.

어제와 달리 한 대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관직 생활이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몸을 사리면 쓰나?”

한 대인이 자신 앞에 놓인 종이를 천천히 펼쳤다.

“이번 일은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내 이름을 걸고 공고문을 하달하게. 다들 구호 의식 준비를 단단히 하게나.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다 책임질 테니.”

아침이 되자, 반강현 관청의 문이 활짝 열렸다. 관청 밖으로 걸어 나온 관졸들의 손에는 공고문 종이가 잔뜩 들려 있었다.

“자네들은 저쪽으로 가게. 우린 이쪽으로 가겠네.”

맨 앞에 있던 관졸이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지시했다. 뒤에 있던 관졸들은 각자 맡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공고문이래?”

“영덕 대사의 험담을 써 놓은 거 아니야?”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지어낼지 모르겠네.”

주위에 서 있던 백성들이 관졸들의 뒤를 쫓아갔다. 관졸이 공고문을 벽에 붙이자, 백성들은 벽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빨리 좀 읽어 봐.”

백성들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를 공고문 앞으로 밀어 세웠다. 글을 아는 이가 공고문을 한 글자씩 띄엄띄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인덕력(麟德曆: 당나라 고종 때 이순풍이 만든 태음력)에 따르면 6월 18일 오시(午時) 일각에 일식이 일어날 것이니, 반강현의 모든 백성은 구호 의식에 동참하라.”

공고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또 일식이 있다고? 이미 지나간 거 아니야?”

“설마 영덕 대사님의 예측이 틀렸나?”

“관청에서 뭘 이런 걸 다 해? 누구 주장이야?”

“관청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거야?”

한 대인이 붙인 공고문으로 인해 반강현 전체가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한문충(韓文忠)!”

반강현의 모든 관리가 관청에 모여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관리들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소리치는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아이고, 한 대인께서 벌써 사천대 나리가 되신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소인이 실례를 범했사옵니다.”

소리치던 대부(大府) 관리가 서슬 퍼런 얼굴로 이를 갈며 공수의 예를 표했다. 한 대인이 재빨리 허리를 숙이면서 사죄했다.

“아닙니다, 소관이 어찌 감히요. 대부 대인, 농이 지나치십니다.”

“내가 농을 해? 내가 농을 하는 것인가, 자네가 농을 하는 것인가!”

대부 관리가 호통을 치면서 공고문 종이를 쥐고 흔들었다.

“6월 18일 오시 일각에 일식이 일어난다고? 백성들은 이 공고문을 낸 게 우리 대부라고 생각할까, 자네라고 생각할까?”

대부 관리가 성난 목소리로 한 대인을 질책했다.

“대인, 농이 아니오라 역법에 따라 일식 날짜를 예측한 것입니다.”

한 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부 관리가 한 대인을 향해 공고문을 집어 던졌다.

“일식이 일어나지 않으면? 살인을 저지른 죄인을 잡아 백성들의 화를 풀어 주기도 바쁜데, 자네는 지금 뭘 하겠다는 건가? 한문충, 영덕 대사가 죽으니, 자네가 그 자리를 꿰차고 차기 대사라도 하려고?”

대부 관리가 언성을 높이면서 물었다.

“대인, 소관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미신 따위를 믿는 것이 아니고, 역법을 계산해서 예측한 것입니다. 소관은 성인의 말을 섬길 뿐, 괴력난신을 믿지 않습니다. 소관은 단지 요승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리고 싶어 이 일을 감행하는 겁니다.”

한 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일식이나 날씨와 같이 하늘을 읽는 것은 대부분 역법으로 예측이 가능했다. 역법에 통달하면 일식 예측이 신기하다고 볼 일도 아니었지만, 대부 관리는 지금 눈앞에 놓인 상황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그럼 본관한테 대답해 보게. 영덕 대사는 일식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여 요승이라는 이름이 붙고 참수를 당했지. 자네가 말한 날에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자네는 어찌하겠나? 요승처럼 목숨을 내놓아 백성들 앞에서 단죄를 받을 텐가?”

화가 난 대부 관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대부 대인의 질책을 듣고 있던 한 대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좋다니?”

대부 관리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일식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한 대인이 말했다.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 대인을 극구 만류했다.

“대인, 대인, 말씀을 삼가십시오.”

“대인,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대인, 뭘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좋게 말로 하시지요.”

한 대인을 만류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한 대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대부 관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좋다. 한문충. 자네가 뱉은 말을 꼭 기억하게.”

대부 관리는 옷소매를 홱 털고 성큼성큼 관청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 대인, 이러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관청에 있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한 대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서둘러 대부 관리를 뒤쫓아 갔다.

어느새 관청 안에는 한문충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한문충은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허리를 곧게 펴고 관청 밖을 내다보았다.

근래 들어 반강현은 꽤 이름을 알리게 됐다. 처음에는 영덕 대사가 일식 법사를 치르던 날 죽임을 당한 데 이어, 반강현 관청에서 영덕 대사를 죽인 범인을 그냥 보내준 일까지 있었다. 영덕 대사가 정말로 요승이었는지, 영덕 대사를 죽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백성들이 제대로 알기도 전에, 반강현 관청에서는 또 새로운 소식이 흘러나왔다.

현령 한문충이 일식이 있을 날짜와 시간을 역법에 따라 예측했고, 예측이 틀릴 경우, 그 즉시 목을 잘라 백성들 앞에서 단죄받겠다는 소식이었다.

한문충이 관청의 뒤쪽 저택에 발을 들이자, 한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맞이했다.

“노야,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당신이 예측한 시간도 아니잖아요. 만에 하나 예측한 시간이 틀려도, 노야의 명성에 흠이 생길지언정 언젠가는 다시 메꿀 수 있는 거였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런 말로 맹세까지 해 버리다니요. 목숨까지 내놓으면 어떡해요!”

한 부인이 울며 소리쳤다.

“아버지.”

한 부인의 울음소리를 들은 한원조가 놀란 얼굴로 한 대인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역법을 공부하셨습니까?”

한 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예측한 게 아니다. 누가 알려준 것이야.”

한 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한원조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참, 일식 시간을 알려준 이가 네가 경성에서 알고 지내는 반근 낭자네 사람일 수도 있어. 그래서 네 아비가 이렇게 철석같이 그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고.”

반근?

한원조가 흠칫 놀랐다. 한 대인은 그날 역참에서 본 정교랑의 외모를 세세하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반근의 가족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게 설명하셔도 저는 알 길이 없어요.”

한원조가 쓴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그럼 그날 본 반근 낭자는 어떻게 생겼는데요?”

한 부인이 한 대인에게 반근의 외모를 묘사해 보라고 재촉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한원조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면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한원조가 한 부인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나이나 말씨는 제가 알고 있는 반근과 비슷한 것 같아요.”

한원조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한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합장했다. 한 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힘들었을 텐데, 어서 가서 좀 쉬시오. 원조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소.”

한 부인은 요즘 한꺼번에 닥친 일들 때문에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녀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대청 안에 남아 있던 두 부자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조, 내가 말한 반근은 네가 알고 있는 반근과 다른 사람이지?”

한 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원조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아버지, 소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몇 번 본 게 전부인지라…….”

한원조가 말끝을 흐리자 한 대인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한참 적막이 흐른 뒤, 한원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의 묘사대로라면, 그 반근은 제가 아는 반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은 완전히 낯선 사람이라는 거군. 나를 아는 사람이기에 일식 날짜를 예측해준 게 아니었어. 그럼 이번 일은…….

한 대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정말로 도박이나 다름없겠군.

“아버지, 후회하십니까.”

한원조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한 대인이 고개를 돌리고 한원조를 보며 웃었다.

“의(義)가 있는 곳이라면 수천, 수만이 내 앞을 가로막아도 기꺼이 갈 것이다.”

세상에는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이도 있고, 제발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는 이도 있지만, 시간은 언제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흘러갔다.

드디어 6월 18일이 되던 날, 반강현의 성문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번에는 성문 통행을 막는 승려들이 없었지만, 지나가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백성들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모여든 백성들의 등줄기에는 땀이 흥건했다.

“날이 이렇게 맑은데, 일식이 있을 것 같아?”

“영덕 대사님의 공덕이 대단한 건지, 관청의 주장이 맞는 건지는 정오가 지나면 알게 되겠지.”

“그런데 진짜 오늘 일식이 일어난다면, 앞으로는 관청이 무슨 말을 해도 난 다 믿을 거야.”

“관청의 말이 틀렸다면, 관청 사람들이 우리 영덕 대사님을 죽인 거야!”

웅성거리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한시도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관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한문충은 진지한 표정으로 성문 앞의 정중앙에 서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주위에 서 있던 관리들과 서리들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한문충 혼자 성문 앞에 서 있는 듯 초라해 보였다.

“일에 차질이 생기면, 부디 대부 대인께서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성벽 위에 설치된 차양 아래에 서 있던 관리들이 자리에 앉은 대부 관리에게 웃으며 부탁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시녀들에게 좀 더 빨리 부채질을 하라고 재촉했다.

대부 관리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냉소를 보이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관청의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졌네. 최선을 다하기야 하겠다만, 백성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한문충이 어떻게 될지는 본관도 장담하기 어려워. 윗분들은 본관이 어떻게든 막아보겠지만, 민심을 거스르는 건 힘든 일이니까.”

대부 관리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대인께서 저희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관리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본관이 고생을 안 하면 어쩔 건데? 백성들이 반강현 관청을 불태우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그러면 본관의 체면은 무사하겠나?”

대부 관리의 말에 관리들이 또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며 맞장구를 쳤다.

“저자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갑자기 대부 관리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묻자, 성벽 위의 사람들이 서둘러 성문 앞을 내다보았다. 한문충이 두 관졸에게 대나무 막대기를 바닥에 꽂으라 명하고 있었다.

대나무 막대기는 태양 아래에서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이걸로 시간을 볼 수 있소. 오시 일각에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본관은 즉시 목숨으로 사죄하겠소이다.”

한문충이 큰소리로 외치며 대나무 막대기를 가리켰다.

떠들썩해진 백성들은 흥분한 얼굴로 바닥에 비치는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예정된 오시 일각이 다 되었다.

“저, 저, 저자가…….”

분노가 치밀어 오른 대부 관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한문충을 가리키면서 말까지 더듬었다.

“대인, 화를 가라앉히세요. 대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재빨리 대부 관리에게 부채질을 해주면서 화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대부 관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관리들을 밀쳐내고는 성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화를 가라앉히기는 개뿔! 한문충 저놈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대부 관리가 아래를 가리키면서 외쳤다. 대부 관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사람들은 잠시 당황했다.

이때, 한없이 맑던 하늘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어두워졌어! 태양이 검게 변했다고!”

성문 아래서 백성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천둥소리보다 더 큰 사람들의 외침이 대부 관리의 뒷말을 집어삼켰다.

대부 관리도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경악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부 관리의 속에서 들끓던 걱정거리들은 점점 검게 변하는 태양과 함께 사라졌다.

일식! 일식! 정말로 일식이 일어났어!

“어, 어서, 구호를 시작해라!”

대부 관리가 서둘러 옆에 있던 관졸의 칼을 뽑아 들고는 성벽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검게 변한 하늘 아래, 온 반강현의 사람들이 징과 북을 울렸다.

저택 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한 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늘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보살님의 보우에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부인의 뒤에 서 있던 몸종과 하인들은 환호하며 미리 준비해 둔 징을 울리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한원조는 징 소리와 환호 소리로 가득 찬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여 비틀거렸다. 그러면서 흐릿한 시야로 성문 앞을 내다보았다.

성문 앞에 서 있던 한 대인의 허리가 점점 꼿꼿하게 펴지는 것을 본 한원조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같은 시각 경성에서는 하늘에서 갑자기 태양이 사라지면서 온 성이 발칵 뒤집혔다.

천자가 있는 황궁부터 비렁뱅이들이 있는 골목까지, 누구 하나 놀라 뛰어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북 치는 소리,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덕승루 2층에 있던 진십삼이 팍 소리를 내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의 뒤에서 엎드린 채 소리를 지르던 춘령은 더욱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조금만 있으면 사천대 관리들이 폐하를 찾아가 자신들이 부처님에게 치성을 올린 덕에 일식에 잡아먹히지 않았다고 하겠군.”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창가로 다가온 주 낭자는 진십삼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는 진십삼과 함께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일은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 예측이 맞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요. 천자가 열심히 덕을 쌓아야 천벌을 면할 수 있다고 아뢸걸요?”

주 낭자가 진십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웃음을 터트리던 진십삼이 갑자기 창밖의 무언가를 보고 멈칫했다. 그가 창밖으로 몸을 내빼면서 작게 읊조렸다.

“세상에나.”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오직 진십삼만이 아래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십삼의 시선을 따라가던 주 낭자는 창밖의 무언가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수라장이 된 거리 위에 등불 네 개가 홀연히 나타났다. 앞뒤 좌우로 켜진 등불은 마차 한 대를 둘러싸고 천천히 움직였다.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등불이 그 안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비추었다. 검게 물든 경성의 거리 위에서 오직 마차 안에 있는 여인만이 눈부시게 빛났다.

어느 댁 규수지?

“대낮에 출타하는데 등불을 챙기다니. 일식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주 낭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십삼은 주 낭자의 말에 대꾸할 겨를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주 낭자는 언제나 느긋해 보이던 진십삼이 뛰다시피 문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뒤이어 층계를 뛰어 내려가는 소리를 들은 주 낭자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명과 공포가 가득한 거리에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등불을 환히 켠 채 서행하는 마차를 보던 주 낭자가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여인인가?”

일식으로 인해 어두워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진십삼이 혼란에 빠진 대청을 뚫고 문밖으로 뛰쳐나갔을 무렵, 경성을 뒤덮었던 어둠은 거세게 부는 강풍과 함께 차츰 걷히고 있었다. 그는 거리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뛰어다니는 인파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등불과 정교랑의 마차를 찾아냈다.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사실 솜털까지 곤두서 있던 반근은 해가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종들에게 말했다.

“이제 등불 꺼.”

등불을 들고 있던 시종들은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나잖아! 정말 놀라워! 사람에 관한 일은 항상 정확하게 예측하셨다지만, 이런 하늘의 일까지 예측하실 수 있다니.

구름이나 풀을 보고 바람이나 비를 예측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천구가 태양을 집어삼키는 일식까지 아실 줄이야!

오늘 아침, 채비를 마치고 길에 오를 때였다. 정교랑은 시종들에게 오늘 일식이 있을 것이니, 혹시 날이 어두워질 때 무서우면 등불을 밝혀도 된다고 했다.

당초 시종들은 정교랑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관청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지만, 경성 관청에서 발표한 일식 시간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경성 성문을 지날 때쯤, 반근이 갑자기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시종들은 정교랑이 더워서 휘장을 걷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잠시 후,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등불을 켜.”

시종들이 정교랑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던 찰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일식이 일어나기 직전 정교랑이 했던 말 한마디와 급격하게 변한 하늘을 떠올리던 시종들은 다시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종들이 등불을 끄자, 누군가가 갑자기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마부의 옆자리에 앉았다. 깜짝 놀란 반근이 비명을 지르자 시종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공격 태세를 취했다.

“납니다.”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고 마차 안을 향해 싱긋 웃었다. 오랜만의 만남이 적잖이 반가웠는지, 그의 눈가에는 기쁨이 흘러넘쳤다.

작별한 이후로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진십삼은 정교랑이 어제 본 사람처럼 친숙했다.

가끔은 정교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정교랑을 보니, 미간의 움직임과 눈빛, 표정과 손짓 전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여인을 볼 수 없던 때에는, 이 여인과 나 사이에 안개구름 가득한 첩첩산중이 있는 듯했는데, 막상 다시 보게 되니 하늘 끝까지 번진 노을빛을 보는 듯 벅차도록 눈부시구나.

“공자님, 놀라 기절할 뻔했잖아요!”

반근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진십삼을 탓했다.

오늘 진짜 여러 번 놀라네.

“이 사람들 이거 안 되겠군. 내가 나쁜 놈이었으면 어쩌려고? 잠깐 사이에 아씨께서 위험해졌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진십삼이 시종들을 향해 우스갯소리를 했다. 시종들은 창피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수는 언제나 마지막에 움직인다는 말, 못 들었어요?”

진십삼의 어깨 뒤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십삼이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은 부채를 손에 쥐고 천천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금세 밝아진 태양이 마차 안을 비추자, 정교랑이 쥐고 있던 부채 손잡이 한쪽에서 서늘한 빛이 반짝였다.

정교랑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보호를 마지막 방패로 삼은 적 없었다.

진십삼이 피식 웃었다.

“무슨 역법을 봤던 겁니까?”

“인덕력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런 취미가 있었어요? 나도 며칠 배우긴 했지만, 일식을 예측할 정도는 못 돼서 말입니다. 낭자는 꽤 정통한 것 같은데, 나한테도 좀 알려 줄 수 있어요?”

“산술은 잘해요? 천원술(天元術)이라든가.”

진십삼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어우, 그런 건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내가 배운 거라고는 구장산술(九章算術)뿐입니다.”

진십삼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역법으로 절기를 예측하는 것은 사천대의 일이니, 공자는 사람이 좇아야 할 도리를 담은 육경(六經)에 집중하는 게 좋겠네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나는 알려 줘도 못할 거라고 해요.”

“대자연에는 변하지 않는 일정한 규칙들이 있어요. 역법을 배우고 말고와는 상관없죠.”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내가 워낙 어리석다 보니, 그런 건 배울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이 주제는 넘어가죠.”

진십삼이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하며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낭자는 그간 잘 지냈어요?”

“나쁘지 않았어요. 진 공자는요?”

정교랑이 답례를 하며 말했다.

안부 인사를 이제야 해?

반근이 속으로 말했다.

“몇 해 동안 못 보다가 이렇게 거리에서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진십삼이 말했다. 반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마부 옆에 앉은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누가 누구를 데려다주겠다는 거야?

정교랑이 미소지으면서 그러라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뛰어든 진십삼 때문에 멈췄던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부와 나란히 앉아 마차 안에 있는 이와 담소를 나누며 떠나는 진십삼을 보던 주 낭자가 시선을 거두었다.

“아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춘령이 말했다.

주 낭자는 깜짝 놀라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춘령을 쳐다보았다. 춘령은 얼른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숙였다.

“춘령, 왜 그런 생각을 하니? 그건 틀려도 한참 틀린 생각이야. 본분을 잊은 것이기도 하고. 사람이 본분을 잊으면, 삶이 고달파져.”

주 낭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네, 아씨. 소인이 잘못했어요.”

춘령이 다급하게 말했다. 주 낭자가 춘령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말없이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춘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춘령의 얼굴에서는 좀 전의 불안함이나 황공함 같은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짓고 있었다.

“본분은 무슨. 자기 신분이 미천해서 봉황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거겠지.”

춘령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혼란스러웠던 일식이 지나가고, 거리 위는 다시 잠잠해졌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환히 빛나던 그 마차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아오다니, 또 돌아오다니! 다시 돌아와서 참 다행이야!

어떤 복수가 진정한 복수냐고? 원수가 두 눈으로, 두 귀로, 온몸으로 내 복수를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복수라 할 수 있지. 그게 아니라면, 눈멀고 귀먹은 이 앞에서 광대놀이를 하는 것처럼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식에 온 경성 거리가 들썩였다. 그 혼란 속에서 일행 하나가 소리 없이 켜졌다 꺼진 등불처럼 유유히 사라져 갔다.

황제의 성난 목소리가 황궁 대전 밖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천변(天變)은 짐의 책임이다. 하나 일월성신의 변화를 살피는 것은 경들의 책무야! 그런데 천변만 일어났다 하면, 짐에게 정사에 힘쓰고 백성을 잘 보살피라고 하지. 짐의 잘못이라면 미리 말해 줄 순 없었나? 짐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무엇이 틀렸는지! 그게 바로 경들이 이행해야 할 직무 아닌가!”

“전하, 고정하십시오. 천변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니, 침착하게 정사에 임하시고, 유희를 멀리하시옵소서.”

대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신 몇 명이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폐하께서 알려달라 하신다고 진짜 말하다니. 뭐, 어차피 저놈들은 뭘 해도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고 잡아떼겠지. 정말 뻔뻔스럽기 그지없군.”

대신 중 한 명이 비웃었다.

“뻔뻔스럽지 않으면 사천대에서 어찌 버티겠소이까? 폐하께서도 욕이나 한 바가지 하고 노여움을 푸시려는 걸 테지. 저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아주 잘 알고 계실 테니 말이오.”

다른 대신이 맞장구쳤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저 사천대 놈들에게 무슨 명분으로 벌을 내릴 수 있겠어? 일식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그 얘기가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나서서 인간이 하늘의 일을 예측하려 들면 안 된다고 하겠지. 그럼 일식이 일어났으니까? 그건 더욱 안 돼. 천재지변은 인간이 감히 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때 대전 안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노한 황제가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진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였다.

“썩 꺼지거라! 냉큼 꺼지라고!”

황제가 고함을 질렀다.

대전 밖에 서 있던 대신들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웃음기를 거뒀다.

사천대 관리 무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대전 밖으로 나왔다. 대전 안에서 황제에게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책망을 들은 이들이 아닌 것처럼, 그들은 문밖에 서 있던 대신들에게 담담하게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떴다.

“그래도 저들이 뭐 하나는 건지긴 했구려. 이제 보수사에 올리는 향불 값은 아낄 수 있겠소.”

대신 하나가 사천대 관리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자, 주위에 있던 대신들은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예를 갖춰야 하는 대전 앞이 아니었다면, 분명 다들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대신들은 밖에 서서 황제가 자신들에게 대전 안으로 들라는 말을 하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전 안에서 들려온 것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폐하, 너무 노여워하시지 마십시오. 저들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일은 애초에 저들이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진안 군왕이네?

누군가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어째서 저들이 할 일이 아니란 말이냐? 조정에서 저자들을 둔 것이 다 쓸모없는 짓이라고?

“폐하,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저들은 역법에 따라 절기를 정하지 않습니까.”

안에서 새어 나오는 대화를 듣고 있던 대신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나지막이 수군거렸다.

“이야, 군왕이 말 한마디로 사천대의 존재를 없애버렸네. 절기를 정하는 건 태사국 관리 중 아무나 데려와서 시켜도 되잖아.”

대신들뿐만 아니라, 대전 안에 있던 황제도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의 웃음소리가 팽팽하게 굳어 있던 대전의 분위기를 한결 누그러뜨렸다.

“폐하, 대자연에는 변하지 않는 일정한 규칙이 있고, 그것을 인간이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사천대가 일식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순풍(李淳風) 같은 인재가 항상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저들이 천변으로 인간의 길흉을 논한다면, 그것은 문제이며 곧 저들의 잘못입니다. 사천대 관리로서 역법을 통해 일식을 예측하지는 못할망정, 길흉을 논하고 천변이 폐하의 잘못이라며 백성을 현혹하다니요. 그러니 폐하께서는 저들에게 중징계를 내려, 근거 없는 요설로 백성을 현혹하는 자들이 경계토록 하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옵니다.”

밖에 서 있던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진안 군왕이 폐하께 좋은 칼을 하나 쥐여드렸네.

<교랑의경> 15권에서 계속

교랑의경 15권

차례

기쁨

응분의 대가

기회

그림

급보

정의

다시 정의

-기쁨-

중서문하성 관청에 앉아 있던 진소가 붓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근래 폐하께서 군왕을 가까이에 둔다고 했어.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신 거겠지. 군왕이 대황자보다 낫다는 것을.”

진소의 말에 관리 한 명이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

“고 전시가 들으면 기함할 말씀입니다.”

고 전시 이야기가 나오자, 진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군왕이 맞는 말을 했네. 이참에 사천대를 정리해야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놈들 때문에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이 빛을 발할 자리가 없어.”

요설로 민심을 현혹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유이긴 하지만.

“하지만 역법으로 일식을 예측할 수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

진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정 대인, 있습니다.”

관리 하나가 대답했다. 관청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대답한 관리를 쳐다보았다.

있다니 뭐가?

“이번에 일어난 일식 시간을 역법으로 정확하게 맞춘 자가 있습니다. 이순풍 천사(天師)가 만든 인덕력을 통해 예측했다고 했답니다.”

관리가 이어서 대답하자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왜 일찍 보고하지 않았는가?”

진소가 물었다.

“그런 일을 어찌 감히 보고하겠습니까.”

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천문 역법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감히 하늘의 일을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경외감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사천대 관리들은 예측에 무수히 많은 착오가 있었음에도 지금껏 중징계를 받은 적이 없었다.

“더구나 숙주부에서 반강현의 잘못을 책망하는 급보가 올라온 터였습니다.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면서요.”

관리가 덧붙여 말했다. 진소를 포함한 관청 안의 모든 사람이 대답하던 관리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가 반강현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했다.

“반강현 근방에서 몹시 유명하고 위신이 높은 노승 하나가 일식 법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신도 수천 명을 반강현 성문 앞으로 모았답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 많은 신도 앞에서 노승의 목을 베고…….”

반강현 이야기 때문에 관청 안의 분위기가 떠들썩해졌다. 심지어는 문을 지키던 관졸들까지 관청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경청했다.

일식 한 번에 이렇게 재미난 일화가 생기다니.

“어서 가자고. 검정(檢正) 대인께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계신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관청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 여인은 분명히 역법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일 거야.”

“에이, 그 여인뿐만 아니라 그 노승도 그랬을걸?”

“역법을 잘 아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 다만 그리 똑똑하고 순발력이 빠른 여인이 배짱까지 두둑하긴 드물잖아. 자네였다면 거기서 어떻게 했겠어?”

중구난방으로 말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고 그 질문에 대해 고민했다.

나라면 아마 그 노승과 논쟁을 벌였겠지. 그러고는 백성들에게 오늘 일식이 없을 거라고 했을 거야. 노승이 댁들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

“백성들이 그 말을 수긍했을 것 같나?”

누군가가 비웃으면서 반박했다.

“그런 말을 알아들을 만한 이들이었다면, 그 노승의 신도가 그 정도로 많진 않았겠지.”

“그러게. 거기 모인 백성 대다수가 노승의 신도기도 하거니와, 신도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알고 지내는 이웃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어디서 느닷없이 낯선 이가 나타나 이 이웃은 무엇무엇이 잘못됐고 나쁘고 어쩌고 하면, 그 낯선 이의 말을 믿겠나, 이웃의 말을 믿겠나?”

당연히 내가 잘 아는 사람 말을 믿지. 그건 사람의 본능이야.

“논쟁을 벌여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겠지. 맞고 틀리고는 차치하더라도, 진흙탕에 발을 빠트리는 것과 다름없었을 테니. 적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지. 그 여인이 애초에 그 노승을 단칼에 죽여 자신과 싸울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일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거야.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니까.”

적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라.

탁자 뒤에 앉아 있던 진소는 붓을 쥐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 그럴 배짱을 가진 사람이 있기는 할까?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여인뿐일 테지.

그 여인?

진소의 허리가 꼿꼿이 펴졌다.

설마…….

“노승의 목을 자른 것으로 그 여인이 과단성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기는 이르지요.”

관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여인이 이어서 한 행동이야말로 주목할 만합니다. 그 여인은 노승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노승을 요승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신도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도 가볍게 손을 털고 관청에 그 공을 넘겼다지요. 그러고는 역법에 의거하여 예측한 일식 시간을 관청에 알려 줬습니다. 그 일련의 일 덕분에, 신묘하기만 했던 일식이 그저 그런 평범한 일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아깝구먼. 왜 이름을 날릴 기회를 잡지 않고?”

누군가가 웃으면서 말하자, 관리가 냉소를 보였다.

“이름을 날려요? 그 여인이 어리석은 백성 앞에서 오만하게 구는 자였다면, 잠시 이름을 날리고는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그 노승처럼 죽었겠지요. 모르긴 몰라도, 반강현 관청에서 가장 먼저 그 여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을 테고.”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요승 때문에 피해가 막심한 반강현에서는 절대 두 번째 영덕 대사를 허용하지 않을 테지.

“그 여인의 행동은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관부를 향한 백성의 경계심을 풀게 하면서, 잃었던 민심과 위신을 되찾았으니까요.”

이야기하던 관리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연하게 웃었다.

“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여인이 역법에 얼마나 능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 여인이 신묘한 힘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관청 관리들이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르지요. 박학다식하다고 칭찬할 수는 있겠으나 그뿐입니다. 역법은 그 여인뿐 아니라 다른 이도 압니다. 역법에 얼마나 정통한지가 다를 뿐이지요. 아래로는 명성을 얻고, 위로는 질투나 미움을 받지 않는 처신이 세상에서 가장 해내기 어려우며 가장 이상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범재(凡才)여야 남의 시기를 받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곤 하지만, 세상에는 남의 시기를 사지 않는 기재(奇才)도 있었다. 그런 이는 무엇을 하든 명성을 얻으며 모두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는 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 여인이 아무리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 해도, 나와 부친의 눈에는 그저 병이 있어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가엾은 낭자일 뿐이다. 그 여인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이유 역시 남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벌인 일이었고.

그래. 살인과 방화를 저질러 이득을 취했다 해도, 사람들은 다 그 여인을 아끼고 좋아하잖아.

진소는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여인은 어디 사람인가?”

진소가 불쑥 묻자, 시끌벅적했던 관청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관리 하나가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공고문에 그렇게 상세한 것까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강남 말씨를 쓰던 것으로 보아 강주부 일대의 사람일 것 같습니다만, 그 여인을 호위하던 시종들은 모두 경성 말씨를 썼다고 합니다.”

진소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는 얘기들 나누라는 손짓을 하고는 관청 밖으로 나와 뜨거운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 여인이 움직였다 하면, 무조건 파란이 이는구나.

진소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경성에도 조만간 파란이 일겠군. 그러고 보니, 일식이 정말로 길흉을 알려 주긴 했네.”

그 정도로 대단한 여인이었나?

아니지,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숙주부와 반강현에 소상히 알아보고, 상소문을 작성하여 폐하께 올리게. 신하 된 자로서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려야지. 하는 일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녹봉을 받는 사천대를 정리할 때가 됐네.”

진소가 안쪽을 향해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관청 안에 있던 관리들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멀어져 가는 진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옥대교 저택에서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근 언니!”

시녀와 반근이 서로를 반근이라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주위에 서 있던 어린 몸종들은 놀라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두 반근이 손을 맞잡고 서로 마주 보며 웃다가, 이내 정교랑이 무엇 때문에 경성에 오게 됐는지 떠올리고는 눈물을 보였다.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아씨부터 챙기자.”

시녀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맞다, 손님도 있었지.”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참. 저 손님, 너무 빨리 온 거 아니야?”

시녀가 투덜대면서 얼굴에 웃음이 만개한 진십삼이 앉아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누굴 해치우려는 겁니까?”

진십삼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또 저 소리!

시녀가 회랑 아래서 흘겨봤다.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진 공자님은 꽤 서생다워지셨고, 아씨는 더욱 단아해지셨네.

그나저나 진 공자님은 오랜만에 만났으면 좋은 얘기부터 좀 할 것이지, 어쩜 저래? 우리 아씨를 무슨 산적이나 도둑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뭐만 하면 누구 목숨을 앗아가는 줄 아나!

물론 정교랑은 산적이나 도적처럼 흉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 어느 산적이 저렇게 빨리 차를 우려낼까.

진십삼은 눈앞에 놓인 찻잔을 쳐다보았다. 유약이 검게 칠해진 도자기 찻잔 안에 적당히 우려진 녹찻잎이 파르스름한 빛을 띠며 둥둥 떠 있었다.

“내가 실례를 했군요.”

진십삼이 사과를 하면서 예를 표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무턱대고 따라와서는 힘들게 차까지 우리게 했으니 말입니다.”

“차 한 잔 우리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에요.”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싱긋 웃었다. 그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숨에 차를 비워냈다.

“이번에 경성에 온 건, 오라버니들을 안장하기 위해서예요.”

정교랑이 말을 덧붙였다.

못 본 지 2년이나 됐는데, 낭자는 모든 게 여전하네.

진십삼이 속으로 생각했다. 정교랑은 여전했지만, 진십삼은 예전과 달리 정교랑이 무슨 말을 하면 되묻지 않고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낭자.”

진십삼이 웃음기를 거두고 예를 올리자, 정교랑이 답례했다.

“그럼, 휴식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진십삼이 말을 하다가, 입술 끝에 매달린 말 대신 다른 말을 급하게 생각해 냈다.

낭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나를 찾아올 리는 더욱 없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낭자를 찾아올게요.”

정교랑이 가볍게 답례했다.

옥대교 저택의 대문이 닫히는 것을 본 진십삼은 한숨을 내쉬고 활짝 웃었다.

이렇게 우연히 낭자와 마주치다니. 오늘 낭자가 경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아직 아무도 모르나 보군.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됐어. 내가 제일 먼저 정 낭자를 집에 바래다줬다고!

내가, 제일 먼저.

“공자님, 어딜 가려면 말씀 좀 하고 가세요. 하마터면 못 찾을 뻔했습니다. 천구가 태양을 먹는 끔찍한 날인데, 여기저기 뛰어다니시면 어떡합니까.”

사환이 투덜대면서 말고삐를 건넸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 위에 올라탔다.

“천구가 태양을 먹는 게 뭐 그리 무섭다고. 좋기만 한 날을 두고.”

진십삼이 가볍게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떠나갔다.

천구가 태양을 먹는 날이 좋은 날이라고?

사환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자님은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진십삼이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사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진 시강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여유롭게 부채질을 하고 있던 진 부인이 물었다.

“십삼의 기분이 왜 저렇게 좋은 거요?”

진 시강이 물었다.

“우리 십삼이 언제 기분이 안 좋았던 때가 있나요.”

진 부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엔 정말로 기뻐 보여서 그렇소. 아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숨길 생각도 없을 정도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진 시강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상하지.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일식 때문인가?”

진 시강이 중얼거렸다. 진 부인은 부정 탄다는 눈빛으로 진 시강을 쏘아보았다.

“십삼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라.”

진 부인이 시녀에게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시녀가 진 부인에게 말했다.

“십삼공자께서는 책을 읽고 계십니다.”

시녀의 말을 들은 진 부인이 진 시강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예전이랑 똑같기만 하네요, 뭘. 진짜 기쁘면, 책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진십삼은 손에 쥔 책을 보면서 행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하지만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늘 보았던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진십삼은 오늘 이른 아침에 책을 한 권 읽고, 스승님께 경문 몇 편을 여쭤보았다. 그러고는 벗들과 함께 덕승루로 가서 시를 읊으며 여유를 즐겼다.

이제 진십삼의 옆에는 동문수학하는 학우들과 권문세가의 자제인 수많은 벗이 있었다. 그들은 진십삼을 덕승루로 초대해 화괴의 가무를 즐겼고, 진십삼은 한껏 흥을 즐기고 나서 잠시 물러나 쉬었다. 편안하면서도 여유로운 하루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여인을 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속에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깡그리 사라졌다.

여태 만났던 사람들이나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전부 무의미하고 공허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 여인이 눈앞에 나타나고 나서야 그의 모든 것은 화지에 색을 더한 것처럼 생명력을 되찾고 각자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진십삼은 한숨을 토하며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속상하네. 나는 2년이라는 시간을 허투루 보냈던 건가? 2년 동안 느낀 즐거움은 모두 가짜였단 말이야?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기쁨은, 나만의 기쁨이겠지. 그 낭자에게는…… 다 똑같은 사람일 뿐일 거야.

진십삼은 다시 책을 들고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낭자는 내게 직접 차도 우려 주었는걸.

구운 차병을 낭자의 주전자에 직접 우리고는, 보기 드물게 검은색 유약이 칠해진 도자기로 만든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그렇게 각별한 태도로 찻잔을 건넸다.

낭자는 내게 마음이 없는 게 아닐 거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거나,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간식이 든 찬합을 무뚝뚝하게 건넸을 때도 그랬잖아.

  • 가져가서 먹어요.

주육낭은 낭자의 그런 행동을 퍽 수치스러워했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간식을 쥐여준 것처럼 보였으니까.

진십삼도 당시에는 조금 민망했지만, 나중에 깨달았다. 그 낭자가 달래고 싶은 아이는 세상에 몇 없다는 것을. 낭자가 달래 준 아이는 아마 손에 꼽을 정도일 테니까.

진십삼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책을 탁자 위로 던졌다.

해가 저물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수문장과 관졸들은 성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원래는 이렇게 일찍 성문을 닫지 않지만, 오늘은 일식이 있었던 터라 평소보다 일찍 성문을 닫으라는 관청의 명이 있었다.

이때, 말을 탄 두 사람과 물건을 잔뜩 실은 말 한 필이 성문 앞으로 다가왔다. 수문장은 그들에게 멈추라는 손짓도 하지 않고 곧장 그들을 성문 안으로 들여보냈다.

“말에 물건을 한가득 실었던데, 왜 검사도 하지 않고 들여보내십니까?”

관졸 하나가 의아한 얼굴로 수문장에게 물었다.

“이러니 아직 네놈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지.”

수문장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턱으로 성 안쪽을 가리켰다.

“좀 전에 지나간 그 사내, 살기가 느껴지지 않디? 차림새를 딱 보면 군에서 먼 길을 달려온 게 보이잖아.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썼던 사람을 검사하라고? 얻어맞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야?”

말을 탄 채 성문을 지난 주육낭은 익숙하고도 낯선 거리를 둘러보았다. 돌아온 고향에서 느껴지는 친숙함이 온몸을 덮치자, 주육낭은 채찍질을 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거리에는 화려한 등불들이 이제 막 켜지기 시작했지만, 낮에 있었던 일식 때문에 오가는 행인들은 많지 않았다. 한창 시끌벅적해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경성의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공자님?”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사환은 주육낭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며 말을 멈추차 얼른 따라서 말고삐를 당겼다. 사환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주육낭의 시선은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등불이 환하게 켜진 옥대교 앞 저택이었다. 문 앞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옥대교 저택 앞은 조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 여인은 도착했으려나? 서북과 비교하면 강주부에서 오는 길이 더 멀 테니, 나보다 일찍 출발했겠지?

“공자님, 우선 정 아씨를 뵙고 갈까요?”

사환이 웃으며 물었다.

보러 가겠느냐고? 내가 저 여인을 왜 봐?

내가 보러 간다고 한들, 그 여인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채찍을 휘둘렀다.

빠르게 앞서 나가는 주육낭 때문에 사환도 서둘러 채찍을 휘둘러야 했다. 사환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자, 옥대교 저택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 무리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눈에 익은 사람들 같은데, 집에서 봤던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고.

짙어지는 밤하늘 아래, 말굽 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사환의 시야는 모퉁이에 가려져 더 이상 옥대교 저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남겠습니다. 그때 주 노야께서 저희를 아씨께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문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재차 말했다.

“아씨께서 너희가 필요 없어졌다고 하신 게 아니야. 겁먹기는.”

시녀가 웃으면서 말하자, 시종들은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어휴, 엄청 겁먹게 되네요.”

시종 중 하나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인제 그만 돌아가. 집을 나온 지 한참 됐으니까,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회포도 풀고 하루 푹 쉬다 와.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시녀가 말했다.

시종들은 정교랑을 따라다닌 지 오래였던 터라, 더는 토 달지 않고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자리를 떠났다. 시녀와 반근은 시종들을 눈으로 배웅한 뒤 대문을 걸어 잠갔다.

옥대교 저택 앞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때 옥대교 저택 바로 옆의 저택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이 등불에 비쳤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 거리의 어둠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밤이 되자, 수문장들이 황궁의 궁문을 걸어 잠갔다. 온종일 정사를 돌보았던 황제도 비빈들과 함께 태후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새로 수리한 태후궁 전각 곳곳에는 화려한 문양이 보였고, 등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재 황제의 슬하에는 두 명의 황자와 세 명의 공주가 있었다. 많다고 할 순 없으나 그렇다고 적은 자손도 아니었다. 아들 하나와 딸 셋이 한자리에 모여 조잘조잘 떠들어 대니 아이들의 목소리가 무척 정겹게 들렸다.

“아바마마께 한 잔 올릴게요.”

비빈과 유모의 지도하에, 제일 어린 공주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럴싸한 동작을 취하며 황제에게 술잔을 올렸다.

어린 공주의 귀여움 덕분에 황제는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황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공주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앞에 두고 술잔을 받았다.

황제가 웃으면서 태후궁 안을 둘러보았다.

그 두 아이는 오지 않았구나.

“오늘 일식이 있었으니, 군왕과 경왕을 불러오거라. 같이 술도 한잔하면서 놀란 마음을 추슬러야지.”

황제가 말했다.

“좀 전에 불렀소. 하나 경왕의 상태를 모르는 것도 아니니, 괜히 군왕을 난처하게 하지 맙시다.”

태후가 대답했다.

“계속 이렇게 사람을 피하면 좋지 않을 텐데.”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그놈은 착하고 가엾은 모습을 꾸며내는 것일 뿐이에요. 우리만 피하는 거지, 폐하를 피한 적은 없잖아요. 정말로 사람을 피하는 거였다면, 매일 폐하 근처를 서성이며 조회까지 따라갈 리는 만무하겠지요. 대황자가 조회를 나가는 것은 당연하고 응당한 일이지만, 아직 친왕 봉호도 받지 못한 군왕이 어찌 감히 조회를 나간단 말입니까.

군왕이 몹시 괘씸했던 귀비는 속으로 생각하고는 대황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군왕이 폐하 앞에서 네게 창피를 준 적 있느냐?”

대황자는 지금과 같이 무료하고 따분한 시간을 싫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사람들을 피해서 처소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아랫것들이 아부를 떠는 것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렇게 여기서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등바등할 게 아니라.

그러니 바보가 되는 게 그리 나쁘지도 않지. 그 바보와 군왕은 내게 감사해야 마땅해.

“어딜 감히요! 군왕은 아둔해서 경문도 못 외우고, 옛 고사도 잘 모르는데, 어찌 제게 창피를 줄 수 있겠습니까?”

대황자가 콧방귀를 뀌면서 으스댔다.

비록 태후와 황제가 진안 군왕에게 글공부를 거듭 권하긴 했지만, 군왕은 경왕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차츰 학당에 발길을 끊었다. 거의 학업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왕은 어차피 종친이고 과거를 볼 필요도 없으니, 사리 분별을 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으로 충분하긴 했다. 군왕의 고집을 꺾지 못한 태후와 황제는 결국 학업 권유를 포기했다.

“한데 군왕이 폐하께 의견을 자주 낸다고 하더구나. 폐하께서도 군왕의 의견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시고…….”

귀비가 말끝을 흐렸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대황자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주먹을 쥐고 고개를 돌려 귀비를 쳐다보았다.

“마마, 얼마 전 관산의 수로 안건도 제가 결정했고, 대하의 수해에 관한 신법 제정 논쟁에도 제가 참여했습니다. 혹시 그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으신지요?”

대황자가 귀비에게 반문했다.

올해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황제를 따라다니면서 조정의 일에 대해 들은 게 많다 보니, 대황자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얘 말하는 것 좀 봐. 어쩜 저리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세등등할까. 정말 위엄있어 보이네.

귀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없을 리가 있나. 이 어미가 다 귀담아듣고 있단다.”

“그럼 부디 안심하세요, 마마.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건 소자이고, 폐하께 자주 의견을 내는 사람 또한 소자입니다.”

대황자가 말했다.

“알겠다, 알겠어. 이 어미는 네가 받아야 할 주목을 빼앗길까 봐 그런 거야.”

귀비가 대황자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아무도 소자를 향한 관심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감히 내 자리를 꿰차려는 사람이 있다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리라. 그 바보 경왕처럼.

“무슨 재미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느냐?”

태후의 목소리가 귀비와 대황자의 대화를 끊었다. 두 사람이 서둘러 태후 쪽을 쳐다보자, 태후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리 와서 애가에게도 말해 다오.”

귀비가 웃으면서 대황자의 등을 떠밀자, 대황자는 웃음을 짜내며 몸을 일으켜 태후에게 다가갔다.

대황자는 어린 공주와 황제 곁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두 부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던 태후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기 이 보양탕이라도 황후에게 좀 가져다주거라.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이 일식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몸이라도 따뜻하게 데워야지.”

“짐이 조금 이따 가 보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에게 보양탕을 가져다주었던 내시가 돌아와서 웃으며 태후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황후는 잠들었더냐?”

“아닙니다. 군왕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소인이 보양탕을 가져다드렸더니, 기뻐하시면서 군왕과 함께 나누어 드셨습니다. 황후께서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고요.”

내시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저 봐, 저 봐. 사람을 피하긴? 사람을 골라 가면서 피하는 게지. 내 앞에서만 안 보일 뿐이지, 어디서든 나타나는 놈이야.

귀비가 손에 힘을 주어 부채질을 했다.

저 내시 놈도 아니꼬워. 왜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는. 황후가 자는지 안 자는지만 대답하면 될 것을, 뭐하러 주절주절 입을 놀려?

태후와 황제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군왕이 황후를 챙기고 있을 줄 알았소.”

태후가 말했다.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지만, 군왕을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그게 뭐? 그놈의 군왕 나부랭이가 지금은 효도한답시고 궁에 남아 있지만, 앞으로도 평생 여기서 효도나 하면서 살 줄 알아?

태후나 부황, 황후께서는 그놈의 효도, 효도. 참 좋아하신단 말이지. 그런데 나는 그놈 효도 같은 거 필요 없어.

대황자가 금잔을 쥐고 느긋하게 보양탕을 들이켰다.

금잔에 담겨 있던 보양탕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금잔을 내려놓으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마마, 일찍 쉬십시오.”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며 물러났다.

황후는 침상에 기대어 진안 군왕이 물러나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래. 너도 인제 그만 쉬거라.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의미심장한 황후의 말에 진안 군왕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럴 필요까지 뭐 있어. 그 아이한테 평생을 묶여 살 작정인 게야? 그만 가거라. 너도 밖에 나가 너의 삶을 살아야지. 그만하면 꽤 오래 곁을 지킨 것 아니더냐.”

진안 군왕은 여전히 말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간다면,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너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한가하게 왕야의 삶을 살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어. 하지만 네가 황궁에 남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너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적이 늘어날 거야. 그때 폐하와 태후마마마저 궁에 안 계신다면, 너는 아주 힘들어질 게다. 그 와중에 경왕을 어찌 챙기겠느냐? 네가 진심으로 경왕을 위한다면, 눈앞의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네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서둘러 생각해 봐야 한다.”

황후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한 것은 2년 만에 처음이었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황후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그러니 부디 마마께서 강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를 더 오래 돌봐 주시지요.”

진안 군왕이 말을 끝내자, 황후는 그저 고개를 저으면서 눈을 감았다. 궁녀들이 휘장을 내려놓자 진안 군왕의 시야에서 황후가 가려졌다.

경왕의 궁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욱 걸음을 재촉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환한 전각 안에서는 내시 몇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린아이와 놀아 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굴러갈 것처럼 둥글둥글한 아이가 딸랑딸랑 흔들며 노는 흔들이북을 손에 쥐고 뛰어다녔다. 아이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눈이 살에 파묻혀서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웃었다. 아이의 입가에서부터 흘러내린 침이 목에 둘린 턱받이를 흥건하게 적셨다.

뚱뚱한 몸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경왕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 싶으면 바닥에 넘어져 소리를 질러댔다.

다행히도 바닥에는 아주 두껍게 깔린 깔개가 있었고, 주위에 있던 탁자와 의자 역시 모두 구석으로 치워 둔 후였다. 전각 안에 있는 모든 기둥에도 솜이불을 둘러 두어, 경왕이 넘어진다고 해도 뼈마디를 다치거나 상처를 입을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내시들은 넘어진 경왕을 보고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육가아, 왜 그래?”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바닥에 드러누운 경왕은 괴성을 지르면서 손에 있던 흔들이북을 힘껏 휘둘렀다. 경왕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진안 군왕은 경왕이 휘두른 흔들이북에 손과 어깨를 수차례 맞았다.

내시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경왕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진안 군왕은 그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했다. 진안 군왕은 경왕이 때리는 대로 맞으며 웃는 얼굴로 그를 어르고 달랬다.

전각 밖에 서 있던 군왕의 내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경왕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군왕께서 저러시는 것도 어차피 다 헛수고일 텐데. 저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실는지.

한참 난리를 피우던 경왕은 지친 건지 흔들이북을 한쪽에 내던지고 그대로 드러누워 잠을 자려 했다. 진안 군왕이 그런 경왕을 서둘러 일으켜 씻으러 가자고 팔을 끌었다.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경왕이 침상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진안 군왕은 그제야 말을 멈추고, 손에 쥐고 있던 깃발과 장난감들을 내려놓았다.

“전하, 시간이 늦었사옵니다. 전하께서도 그만 쉬시지요.”

옆에 서 있던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 단잠에 빠진 경왕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살이 너무 쪄도 건강에 좋지 않다던데. 어떻게 해야 살을 뺄 수 있지? 나중에 이 태의한테 물어보거라.”

진안 군왕이 경왕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전하, 어쩌면 이 태의께 물어보지 않으셔도…….”

내시가 말끝을 흐리자 진안 군왕이 의아한 얼굴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좀 전에 온 사람의 말로는, 정 낭자께서 경성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내시의 말에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나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 낭자가 돌아왔다고? 언제?”

갑작스럽게 커진 진안 군왕의 목소리 때문에 경왕이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였다. 아차 싶었던 진안 군왕은 재빨리 경왕을 조심스럽게 다독이고는 다시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휘장을 내렸다.

“오늘 당도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시가 이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아, 하고는 두 손을 모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진안 군왕은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마음이 미친 듯이 벅차올랐다. 심장이 들끓는 것 같은 그 감정을, 진안 군왕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전각 안에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전하께서도 그만 씻고 쉬시지요.”

내시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응, 하고 대꾸한 뒤 걸음을 옮겼다.

궁녀들이 뜨거운 물을 진안 군왕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끼얹었다. 뜨거운 물이 진안 군왕의 넓고 단단한 어깨를 지나 목욕통 안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안 군왕이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궁녀들은 더욱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었다.

그 여인이 돌아왔어. 다시 돌아왔다고!

갑자기 진안 군왕이 물결이 출렁이는 소리를 내며 목욕통 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가벗은 채로 서 있는 소년의 건장한 신체가 드러나자, 물을 끼얹던 궁녀들은 깜짝 놀랐다. 궁녀들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히면서 뒤로 물러났다.

황궁에는 지켜야 할 규율이 많다. 특히나 진안 군왕의 처소에서는 더욱 지켜야 할 규율이 많았기에 궁녀들은 진안 군왕을 가까이서 시중들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서늘한 바람에 정신을 차린 진안 군왕은 다시 천천히 목욕통 안에 몸을 담갔다. 궁녀들이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진안 군왕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목욕통 밖으로 나와 수건을 대충 몸에 두른 뒤 맨발로 문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진십삼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십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게냐?”

진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으셨습니다.”

시녀들이 서둘러 대답했다. 진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진십삼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럼 진짜 이상한데. 노야께서 잘못 보신 게 아닌가 봐.”

진십삼이 밤새 책을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봐라, 어제 십삼과 함께 나간 사환이 누구냐?”

진십삼은 문 앞에서 들려오는 진 부인과 시녀들의 대화를 듣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문 앞에서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진십삼은 침상에서 몸을 바르게 눕고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 올린 채 발끝을 까딱거리면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베개 대신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래도 일어나기가 싫네. 오늘은 뭘 해야 좋을까?

학당에 빠지면 안 될 텐데. 아니지, 안 될 건 또 뭐야? 어차피 배우면 다 알게 될 것들인데.

벗들을 보러 가야 하나? 아니야. 가 봤자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고, 정사에 대한 논쟁이나 하다 말겠지.

칠현금을 켜고, 활을 쏘기에는 날이 더워 몸을 움직이기가 싫고.

진십삼은 손에 쥔 부채를 두어 번 흔들다가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 부채로 얼굴을 덮었다.

됐다. 그냥 잠이나 자자.

조용했던 문 앞에서 다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못 자겠구나. 어머니께서 사환한테 물어보면 다 알게 되실 테니, 오늘 편히 쉬긴 글렀어.

진십삼의 예상대로 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진십삼은 아예 못 들은 척을 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있어야겠군.

진십삼의 머릿속에 이 생각이 스치던 찰나, 누군가가 발길질로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니, 어머니께서 이렇게까지 흥분하실 일인가?

화들짝 놀란 진십삼은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 쪽을 쳐다보던 진십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가 빛을 등지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밝은 햇빛을 뒤로한 탓에, 상대의 얼굴보다 탄탄하고 다부진 몸의 윤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이, 태양이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잠을 자? 이게 바로 자네가 말한, 장원이 될 사람의 행실인가?”

주육낭이 팔짱을 낀 채 턱으로 침상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헝클어진 머리에 청색 비단 내의를 입고 있던 진십삼을 못마땅한 듯 흘겨보았다.

능청을 떨면서 반박을 해야 할 진십삼이 평소와는 다르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주육낭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진십삼을 좀 더 가까이에서 쳐다보았다.

“어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멍청이가 된 거야?”

주육낭이 손으로 진십삼의 이마를 짚으면서 뒤로 밀쳤다.

“바보가 된 거냐고? 이 바보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십삼이 주육낭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꺼져.”

진십삼이 언짢은 티를 내면서 말했다.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면 보지 말라 했거늘, 남의 침실에 그렇게 함부로 쳐들어오는 건 어디 도리인가? 전장에 다녀오더니, 더욱 야만인이 돼서 왔군.”

주육낭이 진십삼의 머리를 다시 뒤로 밀었다.

“예의에 안 맞기는. 네놈 헐벗은 몸뚱이도 다 봤던 사이인데. 고작 이런 거로 예민하게 굴기는.”

주육낭이 혀를 차면서 진십삼을 쳐다보고는, 다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얇은 마로 짠 남색 옷에 청색 신발, 구겨지지 않게 단정히 묶인 하얀색 허리띠까지, 주육낭은 자신의 멀끔한 모습에 몹시 뿌듯해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주육낭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날 좀 보라고. 그리고 다시 자네 꼴을 한번 봐봐. 내 살다 살다 자네의 이런 누추한 꼴을 보는 날이 있을 줄이야. 남자는 자라면서 열여덟 번 변한다지만, 자네는 변하면 변할수록 더 못난 놈이 되는 것 같네.”

주육낭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진십삼이 갑자기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진십삼의 주먹에 맞은 주육낭은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이야, 샌님인 줄만 알았더니, 제법 힘이 있네?”

주육낭이 너스레를 떨면서 웃음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진십삼은 또다시 손을 올리고 주먹을 날렸다.

“계속 때리면 나도 반격한다?”

“어어? 지금 내가 주먹을 휘두르면 분명 피를 본다니까?”

“자네, 어디 다쳐도 그때 가서 날 탓하지 마!”

“그래도 때리네? 진짜로? 나 진짜로 반격한다?”

방 안에서 다급한 주육낭의 목소리가 들려오다가, 이내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들이 진십삼의 방 안을 힐끔 쳐다보고는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두 소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주육낭은 마지막으로 진십삼을 향해 발길질을 한 번 더 날렸다.

“잘하는 짓이다. 좀 비웃었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아주 정신이 나갔군!”

주육낭이 소리쳤다. 진십삼은 말없이 주육낭을 발로 차서 반격했다. 두 사람은 바닥에 누워 또 한바탕 서로를 향해 발길질했다.

끝내 주육낭이 먼저 소리쳤다.

“아, 좀! 그만 좀 해! 전장에서 다쳤던 몸이라고!”

진십삼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길질을 날렸다.

“아주 대단하십니다. 나한테 서신으로 다쳤다고 우는 소리 늘어놓을 시간은 있고, 경성으로 돌아온다고 미리 알려 줄 시간은 없었어? 그런 간사한 농간을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진십삼이 화를 내자 주육낭이 호탕하게 웃었다.

“왜? 놀랐냐?”

주육낭이 너무 얄미웠던 나머지, 진십삼은 주육낭의 얼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방 안에 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얼굴! 이 빌어먹을 절름발이 놈이!”

“좀 더 줘.”

주육낭이 손에 쥔 찻잔을 시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주지 마.”

이미 젓가락을 내려놓은 진십삼이 반대편에서 말했다. 시녀가 웃으면서 주육낭의 찻잔을 가져와 차를 따랐다.

“공자님, 저희 집 차를 많이 그리워하셨나 봐요.”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진십삼이 장난으로 시녀를 나무랐다.

“어라? 이 차가 누구네 차인데 그렇게 마음대로?”

시녀는 진십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웃으면서 주육낭에게 찻잔을 건넸다.

“그야 당연하지. 서북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는 줄 알아?”

주육낭도 진십삼의 말을 무시한 채 시녀에게 말했다. 그는 커다란 경단을 통째로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모조리 정염(井鹽: 염분을 지닌 우물물에서 만든 소금)으로 간을 해서, 무슨 요리든 간에 죄다 떫고 쓰기만 해.”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이 측은한 눈빛으로 주육낭을 쳐다보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불쌍해하지 마. 그런 건 말단 병졸들이나 먹는 거니까, 이 녀석은 그런 거 구경도 못 했을 거다.”

진십삼이 성가시다는 듯이 손짓을 하며 시녀들에게 상을 치우라고 했다. 시녀들은 주육낭이 차를 다 들이킬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을 치웠다.

주육낭은 마지막으로 경단 하나를 집어 입에 욱여넣고 방석 위에 널브러졌다. 그러고는 배를 두드리면서 꺼억 소리를 내며 용트림을 했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향해 부채를 던졌다.

“정오가 훌쩍 지났는데, 왜 여태 밥을 안 먹다가 남의 집에 와서 먹는 거야? 무슨 거지도 아니고!”

주육낭은 진십삼이 던진 부채를 주워서 여유롭게 부채질을 했다.

“자, 자. 배불리 먹고 마셨으니, 말 타고 활이나 쏘러 가 볼까? 약해 빠진 미래의 장원급제자께서는 활시위나 제대로 당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주육낭이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자 진십삼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 많이 달라졌군. 햇빛에 피부도 타고 얼굴도 좀 꺼칠해진 것 같고. 무엇보다 그새 병졸들 허풍까지 이리 통달했을 줄이야. 그래. 그까짓 거, 같이 가 주지.”

사환에게 말을 준비하라고 한 뒤, 두 사람은 활을 고르면서 또 한참을 아웅다웅했다.

“공자님께서 저렇게 즐거워하시는 게 얼마 만인지.”

“그러게. 저렇게 신나 보이시는 것도 참 오랜만이야.”

시녀들이 회랑 아래서 웃으면서 속닥거렸다.

거리에 말굽 소리가 들려오자, 행인들이 옆으로 비켜서 길을 터주었다.

“어이, 절름발이. 2년 동안 마차만 타고 말은 안 탔던 거야? 왜 그렇게 굼떠?”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진십삼이 말을 앞으로 몰며 대꾸했다.

“적당히 해라, 외팔아.”

주육낭은 자신의 탄탄한 어깨를 보란 듯이 내밀어 보였다.

“어깨가 커진 건 모르겠고, 간덩이가 커진 건 보이네. 아주 제대로 부었어. 입만 열면 절름발이, 절름발이. 사실 그 말, 꽤 오래 참은 거 아니야? 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부르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반어법이잖아. 자네는 나한테 절름발이가 아니니까 절름발이라고 부르는 거지. 자네를 정말로 절름발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그렇게 부르지 못했을걸.”

주육낭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십삼이 눈썹을 으쓱하면서 아, 하고 대꾸했다.

“알긴 아는구나. 난 또 자네가 그걸 모르는 줄 알았지.”

진십삼이 주육낭 가까이 말을 몰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럼 자네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향기로운 여인’이 돌아왔는데, 한번 가서 보지 않겠나?”

“누가 그 애 보러 가고 싶대?”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얼굴은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향기로운 여인은 개뿔! 이 자식, 잘도 받아치는군. 내가 항상 그 여인을 고약한 여인이라고 부르던 것을 뒤집어 저렇게 놀리다니.

“진짜 안 가려고? 오랜만에 온 건데, 서로 얼굴도 보고 안부도 묻고. 얼마나 좋아?”

진십삼은 얼굴이 새빨개진 주육낭을 쳐다보며 놀렸다. 하지만 주육낭은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앞쪽을 내다보았다.

“좋은 일이라고 할 순 없지. 이런 일 때문이라면, 차라리 영원히 안 보는 게 나아.”

주육낭이 진지하게 말했다.

정교랑이 이번에 경성으로 돌아온 건, 서무수 형제 중 다섯이 죽었기 때문이니까.

진십삼도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아꼈다. 서무수 형제들의 생김새는 기억나지 않아도, 정교랑이 그들을 부를 때의 모습은 기억에 또렷했다.

  • 오라버니.

정교랑이 진지하게 서무수 형제들을 부를 때의 그 모습.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닌, 그 사내들의 마음을 이용하려던 게 아닌, 그저 온 진심을 담아 가족의 마음으로 부르던 그 호칭.

오라버니.

하지만 이제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미안하네. 내가 경솔했어. 자네 말이 맞아. 난 전장에 나가 본 적이 없어서, 눈앞에서 생사의 경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네. 내가 경솔한 말을 했어.”

진십삼이 사과했다. 주육낭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향해 외쳤다.

“어이구, 이 경솔한 놈 좀 보게!”

주육낭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진십삼의 말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진십삼이 타고 있던 말이 울부짖으면서 앞발을 치켜들었다가 앞쪽으로 돌진했다. 말에 타고 있던 진십삼은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야, 이놈아!”

진십삼이 소리를 질렀지만, 주육낭은 해맑게 웃으며 그를 지나쳐 성 밖으로 내달렸다. 신나게 말을 타고 달리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본 진십삼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래. 이들이 없던 날은 전부 색을 잃은 헛된 시간일 뿐이었어.

그래. 이들이 돌아와서, 난 정말로, 진심으로 기뻐.

이거 하나 인정하는 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진십삼은 기합을 넣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정교랑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주육낭은 바로 다음 날 옥대교 저택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이미 왔다 가셨다며, 뭘 또 나한테 먹을 걸 가져다주라는 거야?”

옥대교 저택 앞에 멈춰 선 주육낭은 말에서 내리면서 투덜댔다.

“이런 걸 마음에 들어 하겠어?”

주육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사환은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양손 가득 선물 보따리를 들고 눈빛을 반짝이면서 저택 대문을 쳐다보았다.

사환은 자신의 공자님이 여길 오기 바라든, 바라지 않든 상관없었다. 다른 사환들이 눈독 들였던 자리를 자신이 꿰차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할 뿐이었다.

어젯밤에 돌아왔던 시종들은 정교랑을 따라 2년 가까이 집을 떠나 있었다. 집안에선 그들을 잊고 산 지 오래였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뜻밖에도 그들이 떼돈을 벌어 돌아왔지 뭔가.

뭐,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기도 하지. 정 아씨는 경성에서 운영하는 세 점포를 모두 시녀에게 맡길 정도로 돈이 넘쳐나니까. 시종 몇 명에게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품삯을 준다고 해도, 아씨께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걸. 아씨 주변에 남는 사환 자리 같은 건 없으려나.

사환이 문을 두드리자마자 대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대뜸 짜증부터 냈다.

“왔어요? 왜 이렇게 느려요? 다음에는 댁에서 술을 못 시키겠……. 어? 주 공자님? 주 공자님이 왜 여기 계세요?”

시녀가 놀란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께서 가 보라고 하셔서 왔다.”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사환을 부르려던 찰나, 사환이 번개처럼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누님.”

사환이 공손하게 시녀를 향해 예를 올리고는 선물 보따리를 내밀었다.

과장된 사환의 몸짓에 시녀가 쿡 하고 웃었다. 시녀는 사람을 시켜서 선물을 안으로 들이게 하고, 주육낭이 데려온 사환에게 돈꿰미 하나를 던져주었다.

사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고 허리 숙여 예를 올린 뒤, 주육낭의 뒤로 물러났다.

주육낭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사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별건 아니고, 잡다한 것과 먹는 것들이다. 고향 섬주에서 보낸 것들도 있고…….”

그리고 내가 서북에서 가져온 것까지.

“주 노야와 공자님께 감사드려요.”

시녀가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주육낭이 문턱을 넘으려고 하자 시녀가 한발 앞서서 그를 제지했다.

“주 공자님, 저희 아씨께서는 일이 있어서 손님을 만나지 않으세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회랑 아래 있던 반근이 어린 두 몸종에게서 그릇을 받아 몸을 돌리려던 찰나, 쾅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공자님!”

시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반근이 놀라서 고개를 들자 마당 안으로 발을 들인 주육낭이 보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주육낭은 곧바로 마당을 가로지르지 못했다. 마당에 서 있던 시종들이 주육낭을 재빨리 막아섰기 때문이다.

주육낭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시종들을 알아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네놈들의 성씨가 무엇인지도 잊은 것이냐. 감히 나를 막아?”

“공자님, 저희는 주씨입니다만, 지금은 정 아씨를 따르고 있습니다.”

가장 앞에 있던 시종이 대답하면서 한 손을 들어 다른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주위에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와 금방이라도 주육낭을 붙잡아 문밖으로 내던질 태세를 취했다.

주육낭은 시종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한숨을 내쉬고 허탈하게 웃었다.

“정교랑!”

주육낭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대청을 향해 소리쳤다.

대청 안에 있던 어린 몸종이 한쪽 문을 열었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이 비켜서자 대청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정교랑이 보였다.

가슴께까지 오는 치마 위에 청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여인의 얼굴은 도자기처럼 티끌 없이 맑았다. 홍조도 없이 하얗기만 한 얼굴이라 정교랑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꼭 어제 본 사람처럼 익숙하구나.

주육낭이 속으로 생각했다.

시녀가 시종들에게 비켜서라고 손짓했다. 회랑 아래 있던 반근과 어린 몸종들이 주육낭을 향해 예를 올렸다. 주육낭은 주저 없이 대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청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주육낭은 정교랑 앞에 주르륵 놓인 술그릇과 커다란 술동이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주육낭이 호통쳤다. 정교랑은 자신 앞에 놓여있던 술그릇 하나를 들고 대답했다.

“술 마셔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술그릇을 들이켰다.

술을 마셔?

주육낭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반근과 두 몸종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 술동이를 들어 정교랑이 비운 그릇을 다시 채웠다. 반근은 술이 채워진 그릇을 정교랑 앞에 놓고 텅 빈 술동이를 한쪽에 일렬로 정리했다.

“아씨, 운선거(雲仙居)에서 술을 보내왔습니다.”

시녀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술동이를 품에 안고 대청 안으로 들어와 술동이를 내려놓았다. 어린 몸종들은 시녀가 가져온 술동이를 들어서 새 그릇에 술을 따랐다.

정교랑은 자연스럽게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다른 그릇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교랑이 그릇에 있던 술을 마시지 못했다.

갑자기 주육낭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술그릇을 확 낚아챘다. 주육낭의 손힘이 너무 센 탓에, 그릇 안에 있던 술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정교랑의 옷을 적셨다.

얇은 여름 옷감의 젖은 옷은 정교랑의 몸에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위에서 아래로 정교랑을 내려다보던 주육낭은 피치 못하게 정교랑의 산봉우리와 골짜기 같은 상체를 보게 됐다.

반근이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어느새 얼굴이 새빨개진 주육낭은 멀찍이 비켜서서 애꿎은 바닥만 쳐다보았다. 얼핏 보아도 주육낭 역시 반근과 몸종들 못지않게 놀란 모습이었다.

“나, 나는…… 아니, 너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며!”

주육낭이 말을 더듬으면서 소리쳤다.

“마시는 것을 즐기지 않을 뿐, 못 마신다고 한 적은 없어요.”

정교랑은 반근이 건넨 손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주육낭에게도 손수건을 한 장 건네주라고 몸종에게 눈짓했다.

주육낭이 입고 있던 장포에도 술이 조금 튀긴 했지만, 정교랑만큼 흠뻑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주육낭은 머뭇거리다가 몸종이 건넨 하얀 손수건을 받아 고개를 숙이고 두어 군데를 슥슥 닦았다.

“전에는 두려워서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기도 했고요. 안 그래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 술까지 마셨다가는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서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는 두렵지 않다는 건가? 아니면, 속상한 마음이 두려운 마음보다 더 크다는 건가?

“아무리 속상하다고 한들, 건강까지 해쳐선 안 돼.”

주육낭이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술로 근심을 달래는 게 뭐 잘하는 짓이라고.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짓이지.”

손수건을 내려놓은 정교랑은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주육낭은 정교랑이 또다시 술그릇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고개를 홱 들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야!”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한잔할래요?”

정교랑이 물어보면서 반근에게 손짓했다.

반근이 술그릇 하나를 주육낭에게 건네자, 주육낭은 곧바로 그릇을 받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정교랑 옆에 꿇어앉아 앞에 놓인 술그릇들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주육낭이 어찌나 빨리 술을 들이켰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있던 술그릇 일곱 개가 깨끗하게 비워졌다.

주육낭은 마지막 그릇을 비운 뒤, 소매로 입가를 대충 닦았다. 그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그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주육낭은 떨리는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곧바로 술기운이 치솟아 오른 주육낭은 얼굴이 새빨개졌고, 눈가에도 취기가 어려 있었다.

“내가 그자들을 잘 돌보지 못한 거야.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네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이 세상엔 누군가를 돌봐야만 하는 사람도, 누군가가 돌봐 줘야만 하는 사람도 없어요. 다 각자의 일일 뿐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정교랑이 말을 끝낸 뒤 술을 들이켜려고 손을 올리자, 주육낭이 팔을 뻗어 정교랑의 술그릇을 뺏어와 단숨에 비웠다.

“그래. 난 내 일을 말한 것일 뿐이야. 너와도, 그자들과도 상관없는 일을!”

주육낭이 말을 마친 뒤 술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옮기지 못하고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아씨, 만취했어요.”

주육낭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살피던 반근이 말했다.

“여덟 그릇이나 마셔야 만취라니. 이 술은 정말 형편없구나.”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녀는 대청 안에 놓인 술동이들을 둘러보고는 반근에게 지시했다.

“치워. 남은 술은 다들 나눠 마시게 하고.”

반근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반근은 정교랑이 주육낭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대자로 뻗어서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는 주육낭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기 술동이 좀 치워 줘.”

반근은 주육낭의 옆을 지나가면서 마당에 있던 시종들에게 말했다.

-응분의 대가-

황궁, 경왕의 궁.

이 태의가 맥을 짚던 손을 떼자, 경왕을 양쪽에서 잡고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경왕을 놓아주었다. 내시들의 손에 눌려 답답해하던 경왕은 소리를 지르며 내시들의 품에서 뛰쳐나갔다.

“마당으로 데리고 가서 놀아 줘라.”

진안 군왕의 말에 내시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왕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십니다.”

이 태의가 말하고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 말은 귀가 닳도록 듣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전하가 듣고 싶으신 말씀은 이 말이 아니겠지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희망은 일찌감치 버렸어요. 짧고 고된 인생인데, 현실에 맞지 않는 억측으로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 태의는 늠름하게 웃는 진안 군왕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도 부디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고달프고 짧으니까요.”

나는 내가 하게 될 일을 생각하면, 아주 즐겁습니다. 그 일을 해낸 뒤에는 아마 더욱 즐겁겠지요.

이 태의가 천천히 물러났다.

“전하, 정 낭자께 경왕을 한 번 더 데려가 보는 건 어떠신지요?”

내시가 조용히 물었지만, 진안 군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은 의원이 아니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내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정 낭자가 돌아온 게 영 이상합니다. 때로는 목숨을 살려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꼭…….”

“내가 묻지 않은 일에 대해 굳이 알려 줄 필요 없다.”

진안 군왕이 내시의 말을 끊었다. 뒤에 서 있던 내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린 진안 군왕의 얼굴 반쪽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냉랭한 진안 군왕의 반응에 내시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은 회랑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 전각 앞에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를 쳐다보았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경왕을 향해 걸어가면서 손뼉을 쳤다.

“이리 와. 이 형이랑 축국(蹴鞠) 하러 갈까?”

휘장 사이로 비친 햇살이 주육낭의 눈을 찔렀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귓가로 끊임없이 들려왔다.

“노야, 아무래도 의원을 불러와야겠어요.”

“무슨 의원을 불러. 술을 진탕 마셔서 저러는 거잖소.”

“술을 마신 건지 독을 쓴 건지 누가 알아요? 노야, 그 여인을 어떻게 믿으라고요.”

“또 헛소리를 하면 당신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겠소.”

“이것 봐요. 당신도 걱정은 되지만 그 애가 무서운 거잖아요. 우리 육낭이 잘못되더라도, 당신은 그 애가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할 거죠?”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주 노야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주육낭은 몸을 일으켜서 큰소리로 외쳤다.

“전 괜찮으니까 그만 싸우십시오. 조용히 혼자 누워 있고 싶어서 그래요.”

문밖에서 들려오던 주 부인의 울음소리가 뚝 끊기고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낭, 정말 괜찮은 거니?”

주 부인이 문밖에서 물었다.

“네, 정말 괜찮아요. 일어났습니다.”

주육낭이 대답했다.

“그럼 됐다, 그럼 됐어.”

주 부인은 문밖에 서 있던 시녀들에게 몇 마디 당부를 더 한 뒤에 자리를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인은 참 불쌍해. 그 여인에 대해 잘 모르는 가족들은 그녀를 멸시하고, 그 여인에 대해 잘 아는 가족들은 그녀를 무서워하거나 꺼리잖아. 누구 하나 그 여인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가엾이 여기는 가족이 없어.”

진십삼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 말 못 들었어? 혼자 조용히 좀 누워 있고 싶다니까?”

주육낭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들었지.”

진십삼이 대꾸하고는 팔찌 하나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건 오랑캐들한테 얻어온 전리품인가? 늑대 이빨? 꽤 예쁘네.”

“그렇게 마음에 들면 가져가던가.”

주육낭이 말하면서 침상에 도로 누웠다.

“사내자식이 이런 걸 해서 뭐해.”

진십삼이 웃으면서 늑대 이빨로 엮어진 팔찌를 주육낭의 얼굴에 던졌다.

“뭐, 이런 걸 차고 다닐 여인도 몇 없겠지만.”

주육낭은 진십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팔찌를 손목에 차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이, 그나저나 어제는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 자네는 왜 그렇게 취한 거고? 정 낭자가 어쩌다 자네에게 술을 같이 마시자고 했지?”

진십삼이 주육낭을 툭툭 밀치면서 웃었다. 참다 못한 주육낭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윽박질렀다.

“과거 시험이 반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만 돌아가서 공부나 좀 하시지? 나중에 자네가 낙방하면, 나는 자네를 위로해야 하는 거야, 조롱해야 하는 거야?”

진십삼이 웃으면서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얘기하기 싫다면 관둬. 어차피 자네는 정 낭자 앞에서 항상 창피한 꼴만 보였으니까. 얘기하기 싫다 해도 이해하겠네.”

쿵 소리와 함께 짐승 머리 조각이 문에 부딪혀 떨어졌다.

소리를 들은 진십삼이 문밖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면서 헤헤 웃었다.

“한 번도 나를 진짜로 때리려고 한 적도 없으면서, 세게 던지는 척하기는.”

주육낭이 씩씩대면서 옆에 있던 찻잔을 집어 들자, 진십삼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떠났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주육낭은 피곤한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고 침상 위로 쓰러졌다. 그는 천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휘장 뒤로 시녀가 방을 나가는 그림자가 비치자, 주육낭은 베개 밑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어 펼쳐 들었다.

새하얀 손수건 위에 ‘태평’ 두 글자가 암홍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건 분명 그 여인이 만든 게 아닐 거야. 그 여인은 아마 바느질을 하는 법도 모를걸.

주육낭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생각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한쪽으로 휙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잠시 뒤, 다시 손수건을 주워 얼굴에 덮은 주육낭은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십삼이 옥대교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곧 있으면 과거 시험 아니에요? 타지에 있던 서생들도 벌써 경성으로 들어오던데, 공자님은 엄청 한가해 보이네요.”

시녀가 말했다.

“다 믿는 구석이 있느니라.”

진십삼이 너스레를 떨면서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대청 밖으로 나오고 있던 정교랑이 보였다. 반근은 손에 너울을 들고 있었다.

“어디 출타하려는 겁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가 도울 게 있을까요? 이번 일은 지난번과 많이 다르던데요. 지난번은 경성에서 일어난 일이고, 조정의 일과도 엮여 있었지만, 이번 일은 이미 끝난 전투와 서북 군사가 관련된 일이에요. 게다가 승리를 거둔 전투이기에, 서북의 모든 관리와 장수들은 이번 전투에 이견이 없을 겁니다. 겨우 병졸 몇 명 죽어 나간 일에는 아무도 꿈쩍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조정도 마찬가지겠죠. 생각해 봐요, 낭자. 서북 용곡성에서도 키우지 못하고 눌러 버린 일인데, 경성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은, 낭자가 정정당당하게 나오더라도 꽤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경성 인근에 묫자리를 알아봐 줘요.”

묘, 묫자리?

진십삼이 깜짝 놀랐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거센 바람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차 한 대가 급하게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마중 나온 점원이 서둘러 우산을 펼쳤지만,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옷은 이미 젖어 있었다.

“상등 방에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해 주시오. 다들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가야겠으니.”

사내의 말을 듣자, 점원은 객잔 안으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병졸로 보이는 젊은 사내들은 연꽃이 새겨진 조각문양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고, 평범한 행색의 아낙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들의 말씨와 옷차림새, 그리고 표정에서는 시골 촌뜨기의 어벙함이 한가득 묻어났다.

저런 사람들이 상등 방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다고?

점원이 입술을 삐죽였다.

“방에 술도 한 주전자 가져다주시오. 좋은 술로다가.”

사내가 점원 앞에 서서 말했다.

점원의 눈에는 자신 앞에 선 사내 또한 연꽃 조각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는 병졸들과 다를 바 없이 비쩍 마르고, 억세고,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처럼 볼품없어 보였다.

“왜 그러시오?”

범강림이 자신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점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저희 객잔은 선불이라서요.”

점원이 팔짱을 끼고 느긋한 모습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돈주머니 한 뭉텅이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민첩하고 정확한 동작으로 돈주머니를 받아 든 점원은 굳이 주머니를 열어보지 않고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고, 손님. 상등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어이! 빨리 뜨거운 목욕물 좀 받아 와. 말에게는 질 좋은 건초를 먹이겠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뒤로하고, 객잔 안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범강림 일행이 상등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대청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대청 구석에 앉아 있던 세 손님이 몸을 일으켜서 뒷마당 입구로 걸어갔다. 그들은 상등 방을 향해 올라가는 범강림 일행을 흐릿한 비안개 사이로 지켜보았다.

“형님.”

세 사람 중 한 명이 턱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나머지 두 사람도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뒷마당에서 몇 사람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큰 상자는 방수포로 덮여 있었고, 상자를 드는 두 사람과 옆에서 우산을 씌우고 있는 두 사람 모두 조심조심 움직였다.

세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뒷마당의 휘장 뒤에 숨어서 상자가 좀 전에 돈주머니를 던진 사내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가 세 사람의 시야를 가렸다.

폭우처럼 쏟아지던 비는 새벽이 되어서야 그쳤다. 하얗게 뜬 반달이 새벽 안개를 비추며 주위를 밝혔다.

갑자기 내린 폭우 때문에 객잔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나 상등 방은 더더욱 한산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지붕에 남아 있는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달빛 아래로 그림자 세 개가 마당을 가로질러 층계를 올라가더니 상등 방 앞에서 멈춰 섰다.

한 남자가 먼저 문에 귀를 대고 안쪽 소리를 살폈다. 남자는 얇은 철사를 문틈 사이로 끼워 넣으며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남자가 자신의 뒤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바닥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이어졌다. 방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구석에 있는 큰 상자를 바로 찾아냈다. 뒤늦게 들어온 남자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문을 열었던 사람이 재빨리 그를 잡아 세우고 바닥을 가리켰다.

걸음을 옮기려던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가느다란 실 하나가 달빛에 비쳐 보일 듯 말 듯 빛났다.

경계선으로 기관까지 설치해 놨네?

두 남자는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닌, 몹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저 상자에는 분명 값나가는 게 들어 있을 거야.

경계선을 발견했던 남자가 손짓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안쪽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남자는 두어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이와 동시에, 푸슉 소리와 함께 남자의 뒤에서 누군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에라이, 선이 하나 더 있었어.”

바닥에 넘어진 남자가 낮게 읊조리면서 상처 난 다리를 꾹 누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뒤에 있던 사람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던 순간, 남자는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 뒤에 있던 사람은 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넷째야.”

남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쓰러진 사람을 부르며 서둘러 다가갔다.

쓰러진 사람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져 있었고, 목에는 아직 진동이 남아 있는 긴 화살이 꽂혀 있었다. 쓰러진 사람의 목 뒤로 흘러나오는 피가 달빛에 비쳐 괴이한 빛을 내뿜었다.

“도둑놈 주제에 큰소리를 내다니, 정말 버릇이 없는 놈들이로구나.”

남자의 뒤에서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넋이 나간 채로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병풍에 가려진 침상 옆에서 활을 든 사내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혀, 형님,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남자가 쉰 목소리로 빌면서 손에 쥐고 있던 칼을 한쪽으로 던지고 두 팔을 높이 들었다.

범강림은 그의 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다 먹고 살자고 이러는 건데,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실례가 많았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키던 남자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서 옆으로 몸을 굴렸다. 이때, 갑자기 다른 남자가 문 앞에 나타나 범강림을 향해 단도를 날리고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범강림은 날아오는 단도를 피하느라 얼떨결에 조준을 제대로 못 한 채 활시위를 놓았다. 바닥에 있던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범강림에게 달려들어 허리춤에 있던 또 다른 칼을 꺼내 범강림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그 칼은 범강림의 목에 작은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남자가 범강림에게 달려드는 순간, 누군가가 문가에서 쇠뇌로 쏜 화살이 남자의 목을 관통했고, 남자는 손에 칼을 쥔 채로 쓰러졌다.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두어 번 꿈틀대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혀, 형님들.”

방문 앞에서 누군가가 말을 더듬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목에 겨눠진 두 자루 칼날에서 서늘한 빛이 번쩍였다.

“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범강림은 뒷걸음질 치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외쳐라.”

범강림이 말했다.

“도둑이야!”

도둑이 들었다는 소리에, 온 객잔이 시끌벅적해졌다. 방마다 등불이 켜졌고, 점원들은 몽둥이를 손에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사람들의 외침이 객잔 안을 가득 메웠다.

그냥 도둑일 뿐이니까, 잡히면 잡히는 거지, 죽지는 않겠네.

목에 칼이 닿아 있던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둑으로 살며 하루하루가 어두컴컴한 밤이길 바랐지만, 지금만큼 등불과 사람들이 반가울 때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짓기도 전에, 활시위가 울리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매서운 화살촉이 달빛을 가르며 날아와 남자의 목에 정확하게 꽂혔다. 남자는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화살과 함께 뒤로 고꾸라졌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서 몇 초간 경련을 일으키다가 숨을 거두었다.

“도둑 잡아라!”

범강림은 활을 내려놓으면서 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정오가 가까워질 때쯤, 객잔 마당에 잔뜩 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관리 한 명이 시체 옆에서 몸을 일으키고 관졸에게 손짓했다.

두 관졸이 시체 위로 하얀 천을 덮은 뒤 시체를 들고 층계 아래로 내려갔다.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들려 내려오는 시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웅성거렸다.

“물건을 훔치려고 해서, 다 죽였다는 말인가?”

관리가 방 안에 있던 사내 몇 명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기를 안고 있던 아낙은 간밤에 도둑도 모자라 살인까지 겪어서 그런지, 사색이 된 낯빛으로 품에 안긴 아기를 토닥였다.

“예. 물건을 훔치려는 것도 모자라서, 저를 발견하자마자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범강림이 말했다.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 안으로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너희는 어디 사람이고, 뭐 하는 자들이냐?”

범강림이 노인(路引: 여행 허가증)을 관리에게 건네면서 대답했다.

“무원산의 범강림이라고 합니다. 서북 군영의 감용으로, 가족을 만나러 아내를 데리고 경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병졸들은 저희를 호송하는 자들이고요.”

범강림이 건넨 노인을 확인한 관리는 모든 의문이 풀렸다. 오랑캐 열댓 명 이상을 죽이지 못한 자는 감용이 될 수 없었다.

죽임을 당한 도둑들은 관청에서 전부터 쫓고 있던 자들이었다. 필요에 따라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자들이지만, 워낙 뒤처리가 깔끔하다 보니 아직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들을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서북 병사를 마주치다니.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놈들일세.

어쩌다 이런 비렁뱅이 같은 병사들의 물건을 훔치려고 한 거야? 훔칠 게 뭐 있다고.

관리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큰 상자로 향했다.

보아하니 고급 자재로 정교하게 만든 나무 상자로군. 상자를 만드는 데만 해도 큰돈을 들였을 텐데, 저 안에 든 것은 그럼…….

“저건 뭐지?”

관리가 물었다.

범강림이 상자를 열어 관리에게 보여주었다. 상자 안에 일렬로 가지런히 놓인 유골함을 본 관리는 흠칫했다.

“전장에서 형제 다섯을 잃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형제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싶어서요.”

범강림이 말했다.

관리가 층계를 내려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또다시 와글와글 떠들었다.

“나리, 나리. 무슨 좋은 물건을 훔치려 한 겁니까?”

구경꾼 중 한 명이 나서서 관리에게 물었다. 관리가 그 사람을 흘깃 쳐다보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사람.”

관리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몰려들었지만, 관졸들이 재빨리 사람들을 비켜서게 하며 길을 텄다.

관리는 객잔 밖에 서 있는 수레에 실린 시체 세 구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 참,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목숨을 잃다니. 운도 지지리 없지.”

관리가 고개를 돌려 객잔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병졸들도 너무 사나운 거 아니야? 유골함 몇 개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게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잖아?

방 안에 있던 범강림은 상자 앞에 서서 유골함들을 한참 쳐다보다가 술 한 잔을 상자 앞에 붓고는 천천히 뚜껑을 닫았다.

“강림 형님, 이 상자가 너무 눈에 띄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강림 형님, 씀씀이가 너무 크셔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요. 좀 조용히, 겸손하게 가는 게 좋겠습니다.”

범강림을 호위하던 병졸 세 명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자 범강림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무리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나쁜 마음으로 남을 해치려는 자를 막을 수는 없네. 눈에 띄게 다닌다고 해도 겪어야 할 일은 똑같으니, 차라리 통쾌하게 처리하는 게 낫지. 아니면, 아예 더 화려하게 하고 다닐까? 그럼 우리를 해치려는 자들이 우리가 건드려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한 번쯤 더 고민해 볼 테니까.”

범강림이 다시 한번 상자를 쳐다보면서 손에 들린 활을 꽉 쥐었다.

범강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층계를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경성에서 새로 전해온 소식이 있는지 확인하러 앞쪽 역참에 갔던 병졸이 급보 한 장과 함께 돌아왔다.

“강림 형님, 경성에서 보낸 급보입니다.”

범강림이 서둘러 봉투를 뜯어 옆에 있던 부인에게 서신을 건넸다. 아기를 안고 있던 아낙이 범강림에게 서신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

“누이가 우리더러 천천히 오라고 하네요. 7월 말쯤 경성에 도착할 수 있도록요.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해요.”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범강림은 바깥을 내다보면서 서신을 접었다.

그럼 기다려야지. 얼마가 됐든 기다려야지. 누이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 없으니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적 없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늘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했지.

혼란스러웠던 일식이 지나가고, 7월의 경성은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

이른 아침, 조회를 마친 진소는 옥대교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를 호위하던 시종들은 서둘러 마차 옆으로 다가가 진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가서 정 낭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

진소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시종 하나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옥대교 저택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금세 옥대교 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어린 몸종 하나가 문밖으로 나와 시종과 몇 마디를 나눈 뒤 다시 문을 닫았다.

시종이 진소에게 돌아와 말했다.

“정 낭자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없다고? 그럼 아직 경성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가? 일식을 예측했던 사람이 정 낭자가 아니었나?

진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시종들은 진소를 재촉할 수 없어서 거리 한복판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뒤,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진소의 마차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뒤늦게 시선을 의식한 진소는 그제야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명을 내렸다.

진소가 탄 마차가 진씨 저택 앞에 도착하자, 마차 한 대가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진십팔랑을 포함한 진씨 가문의 여식들이 마차에서 내려 진소를 향해 예를 올렸다.

“어딜 가는 것이냐?”

진소가 물었다.

“박양(博陽) 군주(郡主: 황족 여성의 봉호)께서 저희를 시회에 초대하셨어요.”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시회는 바깥으로 나들이를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해서, 경성 여인들은 시회에 나가는 것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시 짓기에 재능이 없는 진십팔랑이 시회에 나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진소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기에 말없이 눈으로 딸들을 배웅했다. 진소에게 있어서는 진십팔랑이 시회에 나가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남들에게는 몹시 놀라운 일이었다.

박양 군주의 거처에 도착해 있던 다른 집안의 낭자들은 진십팔랑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십팔랑, 박양 군주 댁의 찬모가 만드는 차탕(茶燙: 기장, 수수 등의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설탕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 음식)이 맛있어서 온 건 아니지?”

한 여인이 웃으면서 비꼬는 말을 던졌다. 여인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알았나 몰라. 군주님 댁의 차가 너무 맛있어서, 한번 마시면 잊을 수 없는 맛이기에 왔지.”

진십팔랑이 웃으며 여인의 말을 받아치고는 상석에 앉아 있던 박양 군주에게 말했다.

“제가 식탐이 좀 있는데, 절 비웃진 않으실 거죠?”

박양 군주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먹기 좋아하고, 먹을 줄 알고, 먹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얻기 힘든 능력이지.”

원래는 진십팔랑을 비웃으려고 던진 말인데, 도리어 그녀를 칭찬하는 말이 되어 버리자 주위 사람들은 비아냥대는 태도를 숨겨야만 했다. 여인들은 어쩔 수 없이 군주를 따라 진십팔랑을 칭찬하는 말 한두 마디를 얹었다.

진십팔랑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면서 싱긋 웃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여인들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시회 때 제대로 혼쭐을 내 주겠어.”

간단한 인사치레를 거친 뒤, 본격적인 시회가 시작되었다.

“십팔랑.”

다들 고개를 숙이고 시를 쓰는 데 집중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 있던 여인들이 진씨 가문 딸들의 탁자 앞에 서서 진십팔랑을 불렀다.

여인이 진십팔랑의 텅 빈 탁자 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차탕을 다 먹었으니, 할 일이 없어진 거야?”

“시에는 재능이 없는지라, 좀 이따 내가 도울 수 있는 것만 도우려고.”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도와? 돕긴 뭘 도와? 십팔랑,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신을 경하드리고자 군주께서 특별히 주최하신 시회야. 마음을 담아 시 한 편 쓰는 게 그렇게 어려워?”

다른 여인이 진십팔랑에게 시비조로 말했다.

“마음을 담는 게, 꼭 시일 필요는 없잖아.”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십팔랑이 어떤 마음을 쓸지 궁금해 죽겠네.”

여인들이 깔깔 웃으면서 진십팔랑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까닥이며 생긋 웃었다.

“진십팔랑이 진짜 이상해졌다니까.”

제자리로 돌아온 여인들이 분해서 투덜댔다. 주먹을 날려도 상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어디 한번 무슨 마음을 쓰는지 두고 보자고.”

여인들은 한쪽에 서서 자신들의 시를 써 내려가면서 끊임없이 진씨 가문의 딸들이 무엇을 하는지 확인했다.

진십팔랑은 자매 중 한 명이 자신을 부를 때까지 가만히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부른 자매의 자리로 가서 붓에 먹물을 묻히고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진십팔랑의 행동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정말로 시를 쓰는 건가?

하지만 진십팔랑은 곧이어 다른 자매의 자리로 옮겨가 붓을 들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

“아, 자매들이 지은 시를 대신 쓰는 것 같은데?”

여인들 중 하나가 말하자 다른 여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쓴다는 게, 고작 저런 거야?”

“자매들은 시를 짓고, 자기는 옮겨 써 주기만 하고?”

“저래 놓고 자매가 함께 쓴 시라고 우기진 않겠지?”

여인들이 진십팔랑의 행동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진십팔랑 쪽으로 점점 시선이 모아지자, 박양 군주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군주의 시녀가 군주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지막이 고하자, 박양 군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좀 옹졸하지 않나? 시를 못 짓는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자매들을 따라 나들이 나왔다고 해도 괜찮을 것을.

박양 군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망한 표정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사람들이 작성한 시를 모두 거둬들였다. 박양 군주는 연로한 한림들을 특별히 모셔와 시회의 시를 평가하도록 한 터였다.

한림들은 안쪽 대청에서 담소를 나누면서 시녀가 시를 가져오길 기다렸다. 술을 마시며 한껏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늙은 한림들은 시녀가 종이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는 듯한 미소를 보였다.

학문이나 시에 대해 깊이 공부한 여인이 드물다 보니, 늙은 한림들은 시회에서 나오는 시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시회의 초대에 응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박양 군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맛있는 술을 실컷 마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양 군주가 이들에게 대접하는 술은 군주의 저택에서 직접 빚은, 경성에서도 매우 맛좋기로 유명한 술이었다.

“자, 자, 내기나 한번 하세. 오늘은 과연 몇 명이 운율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나? 진 사람은 벌주 석 잔을 마셔야 하네.”

한림 중 한 명이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그게 어딜 봐서 진 거야? 석 잔씩이나 마시는데 이긴 거라고 해야지. 무슨 심보인지 훤히 보이네, 보여.”

다른 한림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우스갯소리가 오갔지만, 어찌 됐든 남의 집 귀한 술을 마셨으니 할 일은 해야 했다. 한림들은 시녀가 들고 온 종이를 몇 장씩 나눠 가지고 시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흠, 이건 나쁘지 않네. 먹을 아주 잘 갈았어.”

“이것 좀 보시오, 문장 부호를 틀리지 않게 쓴 시도 있소.”

“운율이 맞는 시를 한 편 찾았네. 그러니 술 석 잔은 내 것이야.”

대청에서 시를 비웃고 풍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헉 소리를 냈다.

“좋아, 좋아!”

그 사람이 탁자를 마구 치면서 소리쳤다.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떤 말로 비꼴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정말 너무 훌륭해!”

그는 다른 이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흥분된 목소리로 끊임없이 외쳤다. 그가 옆에 있던 다른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또 좋다고 소리를 쳤다.

진짜 좋은 시인가?

“어디 한 번 읽어 보시게.”

사람들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손에 쥔 종이를 보면서 연신 감탄만 늘어놓았다. 심지어는 탁자 위에서 손가락으로 시를 따라 쓰기까지 했다.

정말 그 정도로 좋다고?

사람들이 홀린 듯이 그 사람 주위로 몰려갔다.

“세상에! 이, 이건!”

대청 안에서는 더 많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한림들이 있는 대청 못지않게 앞쪽 대청도 몹시 떠들썩했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여인들은 수시로 깔깔거리고 웃으며 진씨 가문의 딸들을 흘겨보았다.

박양 군주는 진씨 가문의 딸들을 저대로 두었다가는 그녀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십팔랑을 제외한 진씨 가문의 딸들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진 상공 댁의 딸들인데, 너무 무안을 주면 주최자인 내 체면만 깎이잖아.

박양 군주가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직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느냐.”

오늘은 유독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물론 박양 군주도 한림들이 시회에 나온 시들을 진지하게 평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회를 주최한 군주 역시 오늘 모인 여인 중에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몇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대부분의 시가 간신히 말이나 되는 정도일 거라고 군주는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 시회에서 정말로 훌륭한 시를 뽑으려는 게 아니라, 이런 시회를 통해 자신의 효심을 표현하려던 것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림들에게 결과를 물으러 갔던 시녀가 연로한 한림 한 명과 함께 군주 앞으로 돌아왔다. 박양 군주는 시녀의 뒤를 따라온 한림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고고한 척을 하는 한림들은 직접 밖으로 나와 결과를 발표한 일이 결코 없었다. 군주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아마 죽어도 이런 시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다.

“양 대인께서 어쩐 일로…….”

군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연로한 한림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이 시들은 어느 낭자가 쓴 겁니까?”

한림이 손에 쥔 네 장의 종이를 군주에게 펼쳐 보였다. 본디 종이가 구겨지든 말든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다녔던 그지만, 지금은 아주 소중한 보물단지를 모시듯이 종이 네 장을 두 손으로 받쳐서 들고 있었다.

박양 군주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경성의 유명한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그래서 박양 군주는 시를 제출할 때, 가문의 후광을 배제하고 귀한 집 따님들의 이름을 보호할 목적으로 시를 쓴 사람의 이름 대신 각자의 탁자 위에 적힌 숫자를 종이 위에 대신 적게 했다.

감격스러워하는 양 대인을 본 사람들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시가 바로 오늘의 1등 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름 시를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던 몇몇 여인들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자신에게 쏟아질 찬사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12, 13, 14, 15.”

다행히도 양 대인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깔끔하게 번호를 불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에, 대청 안의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히 자세까지 고쳐 앉고 자신의 번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여인들은 더욱 당황스러워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만 하고 누가 먼저 자신의 것이라고 나서지 않자, 양 대인은 다시 한번 번호를 소리 내어 불렀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쪽에 모여 앉은 진씨 가문의 딸들에게로 향했다.

“진 상공 댁 낭자들의 시라고?”

박양 군주가 다소 놀란 얼굴로 시녀에게 되물었다.

진씨 가문의 딸들은 항상 규칙에 맞는 무난한 시를 써냈어. 특출나게 좋은 시를 써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못 본 사이에 실력이 갑자기 좋아진 건가?

“한 번 읽어 주시지요.”

누군가가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양 대인은 아, 하고 대꾸하고는 손에 쥔 시 중 아무 시나 골라 읊었다.

양 대인이 읊은 시를 들은 사람들이 더욱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준이 아무리 미미하다 한들, 시에 사용된 단어가 좋은 단어인지 평이한 단어인지는 구분할 줄 알았다. 한림이 읽은 시는 기껏해야 규율을 잘 맞춘 정도지, 결코 가장 잘 쓴 시라고 볼 수는 없었다.

“시로 결과를 낸 게 아닌 것 같네요?”

시회에 참여한 자제들은 대다수가 유명한 권문세가 출신이었다. 배경을 믿고 남을 업신여겨선 안 된다는 가정교육을 꾸준히 받아온 여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이들은 아니었다.

시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양 대인에게 의도가 명백한 반어법을 던졌다.

하지만 양 대인은 사람들의 태도에 화를 내기는커녕, 몹시 기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맞아. 다들 이미 알고 있었던 거로군.”

맞아? 알아? 뭘 알고 있었다는 거야?

양 대인의 태도에 사람들은 더욱 당황스러워했다.

저 늙은이가 아무리 술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자리에서 술주정을 할 사람은 아닌데?

박양 군주가 헛기침을 하고는 양 대인에게 물었다.

“양 대인, 이 시들이 좋다는 뜻입니까?”

양 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박양 군주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역시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거였어.

“시는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이 글씨가!”

노인이 두 손으로 종이를 소중히 받쳐 들고는 외쳤다.

“이 글씨들이!”

글씨?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랐다.

“반듯하게 세운 붓끝으로 매 획에 힘의 강약을 조절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글씨는 모두 정사방 균형에 맞되 팔결(八決)에 따른 팔변이 모두 알맞은 길이와 굵기로 뻗어 있어요. 붓을 내리기 전에 마음속에서 글씨의 뜻을 곱씹고, 그 후에 붓을 움직이니 행간이 부드럽고 자연스럽지요. 점과 획으로서 형태와 본질을 나타내고, 운필로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장엄하면서도 아름답고, 금강이 보이는 듯 대범함이 있습니다.”

양 대인의 격양된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양 대인이 한꺼번에 뱉은 말들을 들어도 그저 귓가가 윙윙거릴 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역시 한림은 한림이야. 어쩜 저렇게 혀끝에서 연꽃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말을 수려하게 한담.”

누군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 늙은 한림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글씨는, 어느 낭자가 쓴 겁니까?”

양 대인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앞으로 한발 내디디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의 변변치 않은 재능을 과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진십팔랑이 천천히 앞으로 나와 양 대인에게 예를 올린 뒤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고, 낭자. 과찬이라니요. 낭자가 가진 재능은 변변치 않은 재능이 아닙니다. 이 글씨만으로도, 낭자는 당장 한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림에 들어갈 수 있다?

시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여인이긴 했지만, 서예만으로 한림에 들어간 사람에 대해서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경성에서 아주 유명한 일화이기 때문이었다.

태조(太祖) 집권 시에, 양주의 종공권(鐘公權)이라는 자가 어느 사찰에 글씨를 남겼는데, 우연히 그 글씨를 본 태조는 그 글씨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조는 오직 종공권의 글씨만 보고 그를 한림시서(翰林侍書)로 발탁했다. 그 후로도 종공권은 우습유(右拾遺)와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에 봉해져, 뭇 진사와 수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물론 태조의 이런 파격적인 인사 때문에 조정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기도 했다.

이후의 황제들은 당연히 이와 같은 황당한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예만으로 한림에 들어간 자가 또 나오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 일화를 서예 실력에 대한 극찬으로 쓰고 있었다.

박양 군주가 개최한 여인들의 시회에서 나이가 지긋한 한림이 이 정도의 칭찬을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좋다고요?”

박양 군주가 모두를 대신해 양 대인에게 물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어서 보여 주세요.”

양 대인은 종이를 군주에게 건네는 대신 제자리에 서서 종이를 펼쳐 군주에게 보여줬다. 자신이 쥔 종이에서 손을 떼는 것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박양 군주는 그런 양 대인을 어이없어하면서도 굳이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자신에게 펼쳐 보인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숨까지 참아가면서 박양 군주의 표정을 살폈다. 진씨 가문의 딸들을 포함한 모두가 긴장된 모습으로 박양 군주를 주시했다.

박양 군주는 글씨를 잘 써 훌륭한 작품까지 남긴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늙은 한림이 술을 진탕 마셔 헛소리를 한다고 여기며,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박양 군주는 제대로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게 좋단 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조용한 대청 안, 진십팔랑의 표정은 한없이 여유롭고 담담해 보였다.

진십팔랑은 놀고 즐길 기회를 수없이 포기하며 2년 내내 밤이고 낮이고 글씨 연습에 매진했다. 그녀는 붓이 닳을 때까지, 버리는 종이가 산이 될 때까지, 붓을 씻는 작은 연못을 까맣게 물들일 때까지 글씨에 매달렸다.

그 모든 게 전부 오늘을 위한 노력이었다.

황제 폐하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박양 군주가 개최한 시회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며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다.

박양 군주는 오랜 시간 종이를 들여다본 것 같기도, 슬쩍 보고 만 것 같기도 한 모습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 낭자.”

박양 군주가 진십팔랑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난 오늘 낭자를 초대한 것을 정말로 후회하네.”

후회한다고?

“낭자가 필시 내 명성을 가릴 것이기 때문이지. 낭자의 글씨를 폐하께 올린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내 글씨가 낭자의 글씨만 못하다고 생각하실 거야.”

박양 군주가 말을 이어가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필시 내 명성을 가릴 것이다.

이 말은 한림에 들어간다는 말처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시회에 참가한 사람 중 절반은 이 말의 유래를 알고 있었다.

박양 군주는 정말로 후회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양 대인처럼 진십팔랑을 칭찬하고 있었다. 어쩌면 양 대인보다 더욱 큰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말은 위(衛) 부인이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본 뒤, 태상관 왕책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했던 말이었다.

이젠 왕희지까지 나왔네.

“소녀, 군주님의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진십팔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팔랑이 허리를 다시 펼 때쯤, 대청 안의 여인들은 아니꼬운 시선 대신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박양 군주의 이 말 한마디로, 이제 진십팔랑은 경성에서 유명한 인사가 될 것이다. 진십팔랑은 황제 폐하에게 글씨를 올릴 수 있는 크나큰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진십팔랑이 언제부터 저렇게 글씨를 잘 쓰게 됐는지 모르겠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진 낭자.”

양 대인은 아직도 군주에게 종이를 건네지 않은 채, 종이를 두 손으로 귀하게 떠받들며 물었다.

“낭자의 스승이 누구십니까? 차정사 벽에 쓰인 다섯 글자와 태평거에 걸려 있는 ‘태평’ 편액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양 대인의 말을 들은 박양 군주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어디서 본 적 있는 글씨라고 생각했어.

2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예전만큼 차정사의 글씨를 많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차정사가 그 글씨 덕에 경성의 명소로 등극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았다. 타지에서 경성으로 온 서생들이나 서예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꼭 차정사에 가서 글씨를 감상하곤 했다.

박양 군주는 이제 차정사에 직접 방문하여 글씨를 감상하지는 않았지만, 차정사 글씨의 모사품을 서재에 보관하고 있었다. 서예를 좋아하는 군주도 차정사 글씨체를 따라 해 보려고 연습했지만,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붓을 들면 그 느낌이 살지 않아 결국 차정사 글씨들을 따라 쓰지는 못했다.

박양 군주가 양 대인이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니, 진십팔랑의 글씨는 정말로 차정사의 글씨들과 비슷해 보였다.

“그럼 대인께서는 제 글씨가 차정사의 다섯 글자만큼 훌륭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진십팔랑은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 대신 반문을 했다.

양 대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종이를 들여다보려던 찰나, 박양 군주가 손을 뻗으며 양 대인에게 종이를 한 장 달라고 재촉했다.

“양 대인, 한 장 줘 보세요.”

양 대인이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군주가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대인, 오늘은 제가 주최한 시회입니다.”

아, 그렇지, 그렇지. 이 글씨들을 얻어가려면 주인의 비위를 잘 맞춰야지.

양 대인이 서둘러 웃으며 종이 한 장을 군주에게 건넸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또 한 장을 골라 군주에게 건넸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한 두 사람의 행동에도 웃음을 터트리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더욱 부러운 눈빛으로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여인들이 천천히 진십팔랑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십팔랑, 어쩜 그렇게 글씨를 잘 써?”

“십팔랑, 우리한테도 미리 보여 주지 그랬어.”

사람들이 농담을 던지면서 웃었지만, 진십팔랑은 입을 열지 않고 긴장한 얼굴로 양 대인과 박양 군주를 쳐다보았다. 둘은 고개를 숙이고 각자의 손에 들린 종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 다섯 글자보다 훌륭합니다.”

양 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양 군주도 양 대인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글씨들보다 더 정교하고, 노련해.”

그 글씨들보다 좋아! 그 여인의 글씨보다 좋다고! 그 여인의 글씨보다 더!

진십팔랑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주먹을 쥐었던 그녀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드디어 해냈어. 노력하면 되는 거였어. 노력만 하면,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해낼 수 있었어.

“그럼, 진 낭자는 그 다섯 글자와 연관이 있다는 뜻인가요?”

양 대인이 퍼뜩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진십팔랑이 시선을 천천히 내리깔고 대답했다.

“네.”

“낭자의 스승이 누구요?”

양 대인과 박양 군주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차정사의 그 다섯 글자의 주인을 드디어 찾아낸 건가?

진십팔랑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다섯 글자가 바로 제 스승이에요. 제 글씨는 그 글자들을 끊임없이 모사하여 만들어 낸 글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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