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75)

서사근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아낙이 눈물을 머금은 채로 그를 마중 나왔다.

“도련님, 오셨어요?”

아낙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큰형님은 아직도 그 상태입니까?”

서사근이 물었다. 아낙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서사근은 아낙의 품에 안긴 갓난아이를 쳐다보았다.

“일곱째 동서가 몸져누워서 아이를 대신 봐 주고 있어요.”

젊은 아낙이 말했다.

“그쪽 친정에서 사람이 왔습니까?”

서사근이 물었다. 아낙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네, 동서를 간호하고 있어요.”

아낙이 조용히 대답했다.

병간호를 하는 건지, 개가하라고 닦달하는 건지는 모를 일이지. 하긴, 친정에서 그러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야.

서사근이 밖을 내다보았다.

“도련님이 결정하세요. 원래대로라면 일곱째 동서가 삼년상을 치러야 하는데.”

아낙의 말을 듣던 서사근은 코끝이 찡해졌다.

그들 형제 사이에서는 서사근이 무언가를 결정할 필요가 없었다. 늘 서무수가 의견을 내고, 범강림 형님이 그에 동조하며 형제들을 이끌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그저 형님들을 따르기만 하면 됐다. 함께 고생하고,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고, 좋은 일이 생기면 다 같이 기뻐하고. 그런데 지금은…….

“삼년상은 무슨. 아직 어린 처자인데 굳이 고생시킬 필요 있습니까.”

서사근이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혼수도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예물도 모두 챙겨 가서 나중 살림에 보태라고 하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고생을 덜 하죠. 분명 봉추도 그러기를 바랄 겁니다.”

서사근이 울먹이면서 말끝을 흐렸다. 서사근의 말을 듣고 있던 젊은 아낙은 입을 꾹 다문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갓난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면서 아낙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해맑은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낙은 더욱 감정이 북받쳤다.

“그럼 이 아이는, 형수님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봉추는 씨를 남겼네요.”

다른 형제들은…….

서사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에는 탕약 냄새와 살이 썩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뒤섞여 풍겼다. 깨어 있는 건지 잠들어 있는 건지 모를 범강림이 벽을 보고 돌아누워 있었다.

“큰형님, 이젠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창피합니다! 이게 어딜 봐서 형님의 모양새입니까.”

의자에 앉은 서사근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범강림은 서사근의 말을 들으면서도 미동 없이 누워만 있었다.

“언제까지 누워있기만 할 거요? 인제 그만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해야죠.”

서사근이 울먹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죽는 거야. 난 아우들과 함께 죽었어야만 해.”

범강림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서사근이 침상 옆에 놓인 탕약 그릇을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그릇이 깨지는 쨍그랑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형님, 그 말인즉슨 나도 나가 죽으라는 소리요? 우리 일곱 명이 한날한시에 태어난 건 아니지만, 한날한시에 죽기를 바랐으니,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나도 죽어야 한단 말이오?”

“넷째야,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범강림은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럼 형님은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러고 계시오? 지금 형님이 이러고 계시는 모습, 다른 형제들은 볼 수도 없잖습니까. 그래서 형제들 대신 나랑 형수, 세상 사람들, 그리고 누이한테 보여 주려고 이러는 겁니까?"

서사근이 소리쳤다. 범강림은 ‘누이’라는 말에 몸을 움찔거렸지만, 벽 쪽으로 몸을 더욱 파고들었다.

“넷째 도련님, 강주부에 있는 시누이가 사람을 보내 왔어요.”

마당에 있던 아낙이 서사근을 향해 외쳤다. 그 외침을 듣자마자, 서사근은 범강림을 뒤로하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범강림도 몸을 일으켜 바깥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련님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아씨를 대신하여 장례 물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범강림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서 사람들이 마당에서 상복을 입고 장례 물품을 옮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음 한쪽이 욱신거렸다. 그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웠다.

내가 무슨 낯짝으로, 무슨 낯짝으로 누이를.

바깥의 대화 소리가 잦아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찰나의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던 그때, 서사근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서사근은 의자에 앉아 정교랑이 보내온 장례 물품 목록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범강림은 침상에 돌아누운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사근이 목록을 전부 읊고는 범강림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누이가 서신 한 통을 더 보내왔어요. 거기에 딱 한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난 내가 할 대답을 알고 있지만, 형님이 어떤 대답을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범강림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에 적막감이 흘렀다.

“후회합니까?”

서사근이 불쑥 물었다. 범강림의 몸이 움찔했다.

“누이가 쓴 서신에는 그 다섯 글자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후회하나요?’”

서사근이 다시 반복해서 물었다.

후회하냐고?

  • 우린 탈영병이오. 목이 잘릴 대죄를 지었는데 목숨을 건진 것만도 행운이지. 억울함을 풀고 누명을 벗어 이젠 그냥 병사가 됐소. 병사라면 돌아가야겠지.

  • 아니요. 원랜 안 돌아갈 수도 있었어요. 내가 오라버니들을 위해 큰 선물을 세 개 준비했어요. 이게 첫 번째 선물이에요.

  • 오라버니들한테 묻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어요. 오라버니들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오라버니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단련하는 데 습관이 됐어요. 무기를 손에 들고 언제든 싸울 태세를 취하는 게 습관이 됐죠. 춤과 노래가 있는 곳에 누워 있어도, 공격을 알리는 징과 북소리가 들리진 않는지,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는 데 습관이 됐어요.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 맹수고, 용은 깊은 못에 있어야 영물인 법이죠. 오라버니들의 활은, 전장에 있어야 해요. 전장에서 적의 가슴을 쏴야, 천금의 가치가 있는 활이 되죠. 그래서 오라버니들은 값비싼 활을 사러 가지 않았던 거예요. 그 활을 여기 걸어 두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내가 준비한 선물이, 오라버니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내 아우들아. 공을 세우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는데, 너희는 후회하느냐? 난, 후회해야 할까?

결과가 이리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우들은 재물을 끌어안고 평생 부자로 살기만을 원했을까? 지금 이 순간을 전장에서 보낼 게 아니라, 경성에서 좋은 걸 먹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길 원했을까? 이 모든 게 다 꿈이길 바랐을까?

그때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할까?

“범강림! 후회하냐고!”

서사근이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후회하지 않아!”

범강림이 정신을 퍼뜩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난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형제들 중 그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

굶어 죽을지언정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 맹수야. 우리의 활이 천금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곳은 오직 전장뿐이고. 그 화살이 적군의 가슴을 뚫든, 우리의 가슴을 뚫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곳은 오직 전장뿐이거든.

서사근과 범강림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어서 건강을 회복하십시오. 공을 세우고 이 치욕을 깨끗이 씻어 내서 형제들의 원수를 갚고 원한을 풀란 말입니다.”

서사근이 이를 악물고 한 마디씩 힘을 주어 말했다.

“부인, 부인!”

범강림이 바깥을 향해 외쳤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아낙이 아이를 안은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보.”

아낙이 울먹이면서 범강림을 불렀다.

“가서 왕 의원을 불러오시오.”

젊은 아낙은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지었다. 아낙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눈물을 훔치면서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넷째야, 일단 돌아가거라. 여기에는 내가 있으니,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관청에 못 나간 지 꽤 됐을 텐데, 어서 가 봐.”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공로와 포상은 이미 위에 보고했으니, 조만간 명이 내려올 겁니다. 이번에는 분명 아주 큰 공을 인정받을 거요.”

“그래. 그때 다시 하늘에 있는 형제들을 기리자.”

범강림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일곱째 제수씨는 수절하게 두지 맙시다.”

서사근이 좀 전에 형수에게 말했던 내용을 범강림에게 알렸다.

“그래, 네 의견에 따르마.”

범강림이 말했다.

“형님.”

서사근이 범강림을 쳐다보면서 그를 불렀다. 범강림은 서사근을 쳐다보며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서사근은 형님이라고 부르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뭔데 그래?”

범강림이 물었다. 서사근은 눈물을 머금은 채로 미소를 지었다.

“형님이 돌아와서, 참 좋습니다.”

“됐고, 누이에게 답신이나 보내. 난 글을 쓸 줄 모르니까.”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쓸 필요 없고, 셋째가 죽기 직전에 누이한테 남긴 말이 있어.”

범강림이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누이에게 말을 남겼다고?

서사근은 놀라는 한편 마음이 쓰렸다.

셋째 형님…….

  • 아니 글쎄, 유 매파, 연지분 칠한 여인들 좀 그만 보내시오. 우리 셋째 형님은 그런 여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니까.

  • 그럼 셋째 도련님은 어떤 여인을 좋아하는데요? 내가 꼭 찾아올 테니까, 말만 해요.

  • 어디에서도 못 찾을 거요. 우리 누이 같은 여인은.

  • 봉추, 그 입 다물어.

서사근은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을 질끈 감았다.

“형님, 말씀하십시오. 지금 바로 답신을 쓰겠습니다.”

서사근이 말했다.

5월 말, 강주부 성문 앞은 서신을 전달하는 서북의 병졸 때문에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또 왔네, 또 왔어. 이번에도 서북에서 온 병졸 같은데?”

“정씨 저택은 여기서 쭉 가다가 강가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으면 되오.”

성문의 위병은 말을 탄 병졸이 길을 묻기도 전에 큰 소리로 알려 주었다. 병졸이 위병의 말을 듣고는 말을 멈추지도 않은 채 곧장 위병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렸다.

“큰 도련님이 보낸 서신이다.”

서신을 쥔 조 집사가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반근에게 말했다. 반근은 몹시 기뻐하면서 서신을 들고 뒷마당으로 뛰어갔다.

뒷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소매를 동여맨 정교랑이 짚으로 만든 과녁을 삼십 보 밖에 두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는 진동 소리와 함께,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에 박혔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두 몸종이 환호했다.

“아씨, 정말 대단하세요.”

반근의 목소리를 들은 정교랑이 활을 몸종에게 건네고 반근에게서 서신을 받아 서신을 펼쳤다. 종이 뒷면에 비치는 글씨가 한 줄밖에 되지 않아 반근은 몹시 의아했다.

그렇게 멀리서 급하게 보낸 말이 고작 한 마디라고?

무슨 말일까? 딱 한 마디일 뿐인데, 아씨께서는 한참을 뚫어져라 보고 계시네.

한여름의 뒷마당은 바람도 멈춘 듯 고요했다.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의 그림자가 정교랑의 얼굴에 얼룩을 그려냈다.

정교랑이 촤락 소리를 내며 서신을 접어 반근에게 건네고는 다시 뒤돌아 손을 내밀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반근은 정교랑이 어린 몸종에게서 활을 다시 가져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좀 전에 쥐었던 활을 다시 쥐나 싶더니 이내 손을 놓았다.

“가서 조 집사에게 일석궁을 가져오라고 해.”

정교랑이 말했다.

일석궁을 달라는 어린 몸종의 말에 조 집사는 깜짝 놀랐다.

“일석궁? 아씨께서 그걸 당길 수 있다고 하시더냐?”

조 집사는 의아해하면서도 재빨리 고방에서 일석궁 하나를 들고 직접 뒷마당으로 향했다. 정교랑은 조 집사에게서 활을 받아 자세를 잡고 활시위를 당겼다.

아씨가 저걸 당길 수 있으려나?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정교랑의 가녀린 팔뚝과 손목을 쳐다보았다.

  • 이쪽에 힘을 주고 잘 잡아야 해. 자, 이제 활시위를 당겨 봐.

정교랑은 자신이 쥐고 있는 활을 누군가가 같이 잡아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교랑이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기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현이 부들부들 떨리며 곡선을 이루었다. 깃털 달린 화살은 당겨진 활시위 사이에 흔들림 없이 올려져 있었다. 진동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간 화살이 과녁을 맞혔다. 비록 빨갛게 칠해진 정중앙을 맞히지는 못했지만, 과녁 밖으로 빗나가지도 않았다.

활에 대해 잘 모르는 몸종들은 좀 전의 명중보다 못한 것이라 여겨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 집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천천히 하면 돼. 누이가 벌써 오두, 육두짜리 활을 들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해.

봐요, 오라버니. 이제 난 오두, 육두짜리 활이 아니라, 일석궁도 당길 수 있어요.

활을 내린 정교랑은 과녁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같은 시각 서북.

활시위를 당기려던 범강림이 활을 내리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관졸과 병졸들을 쳐다보았다.

“포상입니까.”

범강림이 물었다.

4월의 큰 전투가 일으킨 먼지가 가라앉고, 한 달 남짓한 시간 만에 병사들과 백성들은 전란의 고통을 뒤로하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부상병들의 몸은 차차 나아지고 있었고, 전사자의 가족에게는 위로금이 전달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떨어질 공로와 포상을 기대하고 있었고, 무관들은 진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여름의 서북은 몹시 활기찼다. 범강림은 이제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 있거나 누워서 보내야 했다. 의원은 그에게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전처럼 팔다리를 자유롭게 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서사근은 무척 마음이 아팠지만, 정작 범강림 본인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꼭 전장에 나가야 적군을 죽일 수 있나.”

범강림이 서사근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형제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나는 우리 넷째랑 말을 돌보면 되지. 아우가 만든 말편자 덕분에 우리 용사들이 말을 타고 오랑캐들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게 아니겠냐. 그것도 적군을 죽이는 것과 매한가지지.”

가히 대전(大戰)이라고 칭할 만한 전투였다. 게다가 그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서북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공로와 포상이 조정에서 빠르게 하달됐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범강림의 아내는 병졸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다. 병졸들은 손에 쥔 명단을 보며 서무수 등 다섯 형제의 이름을 읊었다.

오랜만에 형제들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범강림은 형제들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져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아우들이 금방이라도 대문을 벌컥 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올 것만 같았다.

“네, 맞아요.”

젊은 아낙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물건은 다 여기에 두었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병졸들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워낙 이런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들었던 동정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은 이미 마모되어 없어진 터였다.

젊은 아낙이 알겠다고 대답하고, 병졸들이 돈과 비단을 마당 안으로 옮기는 것을 아이를 안은 채 지켜보았다.

“인당 돈 여섯 관, 비단 여덟 필이오.”

병졸은 위로금을 읊으면서 누구 덕분에 위로금을 이렇게 빨리 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덧붙였다.

“조정을 비롯하여 강 총관 어른께서 위로금을 한 푼도 빠짐없이 빠르게 전달하라고 하셨소.”

하긴, 예전에는 전사자가 발생하더라도, 위로금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지.

전투가 끝났다고 해도, 병졸은 대부분 시신을 찾기가 어려워 평생 가족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가족들도 전사자 위로금을 구경조차 못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결국 그 위로금은 관청 서리부터 말단 관졸까지 한 다리씩 걸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과거에는 장수가 부하의 사망을 꾸며내 위로금을 빼돌리는 사건들도 잦았다.

젊은 아낙이 아이를 안은 채 위로금을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갓난아이에게 말했다.

“아가, 이건 네 아버지께서 너한테 남기신 거야. 잘 봐 두렴.”

아직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말갛게 웃는 얼굴로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옹알이를 했다. 아이의 옹알이를 듣자 범강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 확인했어요.”

젊은 아낙이 말했다.

병졸은 겉치레로 위로의 말을 몇 마디 덧붙인 뒤, 곧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잠깐.”

범강림이 외쳤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돌려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용건이 남았소?”

맨 앞에 서 있던 병졸이 물었다. 그는 회랑 아래 앉아 있던 젊은 부상병을 보고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참. 더 있지, 더 있어.”

병졸의 반응을 본 범강림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부상병에게 하달되는 돈도 있소.”

병졸이 다른 주머니에서 돈 꾸러미를 꺼내며 말했다.

“그게 다요?”

범강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다냐니?”

병졸이 의아해하면서 반문했다. 범강림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아낙이 서둘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부축했다.

“내 아우들은 모두 임관보를 지키고 싸운 용사들이란 말이오!”

범강림이 눈을 부릅뜨고 위로금과 비단들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그런데 고작 이것뿐이란 말이오?”

병졸이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고작 치고는 꽤 많지 않나?”

병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위로금은 돈 다섯 관에, 비단 다섯 필에 불과하오. 방 시금 대인께서 조정 관리들에게 무릎을 꿇고 간곡히 청을 올린 덕에, 임관보를 지켰던 병사들에게는 위로금이 더 내려온 거요. 심지어 시금 대인께서는 자신의 진급을 미뤄도 좋으니…….”

“그놈이 무릎을 꿇어? 진급까지 한다고?”

범강림이 병졸의 말을 끊고 외쳤다. 갑자기 험상궂은 태도로 돌변한 범강림을 본 병졸은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무슨 짓이오? 방 시금 대인께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참전하여, 용맹하게 적군을 물리치셨소. 그러니 당연히 진급해야 마땅하거늘.”

“용맹해? 죽음을 각오해?”

범강림이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병졸을 향해 달려들었다.

병졸은 재빨리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범강림이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젊은 아낙만으로는 병졸을 향해 달려드는 범강림을 부축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마당에 여인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곧이어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놈이 용맹하다고? 죽음을 각오했다고? 그놈이!”

끊임없이 같은 말만을 반복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내의 쉰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관청의 뒤쪽 저택에서는 연회가 한창이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큰 전투가 끝난 뒤, 진급과 포상이 결정된 때였다. 장수들이 가장 득의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쫙 펴고 다닐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연회석에 앉은 사람 중 웃음소리가 제일 큰 이는 단연 방중화(方仲和)였다.

정구품 시금이었던 방 시금은 이번 전투 덕분에 단번에 네 단계를 뛰어넘어 진급했다. 그는 용곡성의 요충지 중 하나인 함고채(函古寨)의 지채(知寨)직을 맡게 되었다.

방중화의 진급은 벼락출세나 다름없었다. 이번 진급은 관직 품계뿐만 아니라, 그의 실적에도 굉장히 도움이 되는 진급이었다. 방중화의 나이에 지채 자리를 경험했다면 훗날 도감직을 얻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도감, 도감이라니.

방중화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또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 자. 술 마십시다, 술.”

방중화는 격양된 표정으로 옆 사람과 술잔을 세게 부딪히며 건배했다.

“시금 어른, 시금 어른.”

누군가가 방중화의 뒤에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방중화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 목소리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옆 사람과 술잔을 기울였다.

“시금 어른.”

뒤에 있던 사람이 다시 한번 방중화를 시금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눈치도 더럽게 없는 놈이!

방중화가 언짢은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말단 관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누가 좀 뵙고 싶다고 합니다.”

“꺼지라고 해라.”

방중화가 성가시다는 듯 대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계속해서 웃고 떠들었다. 말단 관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강 총관의 뜻은 대인이 경성으로 가서 폐하를 알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중화와 술잔을 부딪치던 사람이 말했다.

강 총관은 강문원(姜文元) 병마부총관을 뜻했다. 경략사 직책이 아직 공석 상태이기도 하고, 관직 앞에 ‘부(副)’ 자를 붙여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부를 때 자연스럽게 ‘부’ 자를 뺀 강 총관이라 칭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빼고.

“아이고, 그건 강 총관께서 저를 좋게 봐주신 덕분이죠.”

방중화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때 방중화의 뒤에서 또다시 그를 부르는 말단 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호칭으로 부르지 못하겠느냐!”

방중화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말단 관리가 멈칫하더니, 이내 호칭을 바꿔서 불렀다.

“대인.”

방중화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보따리 싸서 내보내야겠네.

“말해. 또 뭔데?”

“만약 대인께서 그 두 사람을 만나러 가지 않는다면, 그들이 직접 대인을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관졸이 조용히 말했다.

방중화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데 그래?”

“범강림과 서사근입니다.”

방중화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를 찾아올 배짱도 없었을 텐데, 역시 범강림은 다르군.

술잔을 쥔 방중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혼란을 틈타 방중화와 함께 도망친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함구했다.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임관보에 남아 오랑캐들과 끝까지 싸우던 병사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모두 전장에서 전멸한 터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시체 더미 속에서 겨우 숨이 붙어 있던 범강림을 찾아내어 그의 목숨을 건져냈다. 방중화는 범강림이 사실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시기에 얼굴을 보기는 좀 거북했다.

직첩(職牒: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이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만에 하나 무슨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방중화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실례하겠소이다.”

방중화가 주위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말하고는 연회 자리를 벗어났다.

방중화가 뒤쪽 저택의 편청을 향해 걸어오자, 서사근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범강림도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채 대인.”

서사근이 먼저 예를 올렸다. 몹시 만족스러운 호칭을 들은 덕에 방중화는 오는 내내 쌓였던 분노가 사르르 녹았다. 방중화가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렇게 부르지 말게. 아직 직첩도 못 받았네.”

“대인의 공로는 확실하잖습니까. 그렇게 불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지요.”

범강림이 냉소를 지으면서 ‘공로’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방중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방중화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대인, 제 형제들이 전사했는데, 위로금 따위로 끝나다니요. 제 형제들이 용맹하게 싸웠고, 죽음을 각오하여 참전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살아 계신 대인께서도 공로를 인정받아 진급하시는데, 그렇다면 제 형제들도 추서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위로금이 적어서 온 거였어?

“위로금에 관해서는 이미 보고를 올렸네. 사상자들에게 주는 위로금은 늘 부족했어. 나는 최선을 다했네. 자네 형제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할 수 있도록.”

방중화가 말했다.

“저희는 위로금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제 아우들을 추서하여 이름을 남기게 해 주십시오. 제 아우들은 위로금이 필요한 병사가 아니라, 용맹하고 의로운 용사였습니다.”

범강림이 큰 소리로 말하면서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방중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한 적 없네.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 의로운 용사들이니, 위로금을 더 챙겨 준 거 아닌가.”

“어이, 방씨! 시치미 떼지 마시오!”

범강림이 갑자기 호통을 치면서 방중화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당신이 세웠다는 그 공로, 어떻게 세운 건지 똑바로 말해 보시오! 공로를 세운 자가 당신이 아니라 내 아우들이었다는 것을 조정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당신도 잘 알지 않소! 그깟 위로금 몇 푼 가지고 될 일이 아니라고!”

방중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문밖을 힐끔 내다보았다.

“범강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방중화가 조용히 호통쳤다.

“무슨 말인지는 네놈이 제일 잘 알겠지! 적군과 맞서 싸워 시간을 끌자고 했던 건 내 셋째 아우였고, 마지막까지 성보를 지키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게 우리야. 그런데 너는? 네놈은 중간에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갔잖아! 내 아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해서, 어찌 네놈이 공을 가로챌 수 있느냔 말이다!”

흥분한 범강림은 말을 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급기야 그는 격렬한 기침을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방중화, 보고할 건지 말 건지, 똑바로 말하시오.”

서사근이 끼어들었다.

“하긴 뭘 해. 그때 일은 한 달 반 전에 보고를 올렸으니, 이미 끝난 일이야. 보고는 무슨 보고!”

방중화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그러면서 이를 악물고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됐네. 내가 포상으로 받은 돈과 비단을 전부 줄 테니, 그만 가게나.”

방중화가 선심을 쓰듯 회유했지만, 범강림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누가 네놈한테 돈을 달래? 돈 필요 없어. 내 아우들의 공로를 인정해 달라고!”

그놈들의 공로를 인정해 주면, 난 뭐가 되라고?

방중화가 냉소를 지었다.

죽은 사람한테 공로는 무슨. 돈이나 더 달라는 소리겠지.

“그래서, 얼마를 더 주면 되는데?”

방중화가 물었다.

“방 대인,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리는 사실대로 보고를 올리길 바랄 뿐입니다. 아니, 사실대로 하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요. 방 대인, 대인이 얻은 공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대인이 그 공로를 얻는 게 응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지도 않을 거고요. 단지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공로가 조정에 보고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형제들뿐만 아니라, 끝까지 성보에 남아 싸웠던 감용 병사들까지 전부 포함해서 보고되어야 하고, 그에 합당한 추서가 있어야 합니다.”

서사근이 침착하게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 병사들의 이야기를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하고, 그들에게 추서하라고? 조정 관리들이 바보인 줄 알아? 그렇게 하면 내 앞길은 영영 끊기게 돼!

방중화는 속으로 분노했다.

내 앞길을 끊는 것은 내 부모를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미쳤다고 보고를 해?

고작 네놈 하나가 뭘 바꿀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어.

네가 무슨 수를 써도,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건 없어. 기회를 줬는데도 제 발로 차 버렸으니, 날 탓하지 말라고.

방중화가 허리를 펴고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용건이 남았나? 없다면 그만 돌아가게. 형제를 잃은 슬픔에 충격이 크긴 하겠지. 자네들이 본관에게 실례한 건 눈감아줄 테니, 돌아가서 몸조리나 잘하시게. 괜한 짓거리는 관두고.”

범강림과 서무수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방중화를 쳐다보았다.

“이봐, 방씨. 진짜 보고하지 않으려는 거야?”

범강림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서 떨리는 목소리로 호통쳤다.

“보고는 이미 다 했다니까. 더 보고하고 말 것도 없어.”

방중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범강림이 방중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리 양심을 저버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던 범강림은 격렬한 기침 때문에 욕을 다 끝내지 못했다. 서사근은 재빨리 범강림을 부축하면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서사근이 방중화를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 대인,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대인을 따르던 병사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다니요.”

“서 관구, 난 할 만큼 했네. 형제들이 서운함을 느낀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방중화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서사근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 찰나, 방중화가 소매를 홱 털면서 바깥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손님 배웅하거라.”

멀리 서 있던 수하들과 하급 관리가 우르르 편청 안으로 들어와 서사근과 범강림을 밀치며 밖으로 내쫓았다. 수하들이 거칠게 밀어대는 바람에 범강림은 그만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수하들과 관졸들은 아예 서사근과 범강림을 밖으로 질질 끌면서 데리고 나갔다.

“염병할 방씨 놈아! 나중에 후회하지 마!”

범강림이 방중화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말라고!”

나 참, 후회할 게 뭐 있다고. 그때 일찍 도망치지 않았다면 난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죽는 것이야말로 후회할 일이지.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그대로 보고된다면, 벼락출세는커녕 진작 하옥됐을 거라고. 그런 걸 두고 후회할 일이라고 하는 거야!

방중화는 소매를 홱 털고서 아예 몸을 돌려 문을 등지고 섰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말라고!

범강림의 외침이 차츰 멀어져 갔다.

성큼성큼 관청 안으로 들어서는 주육낭의 귀에 누군가와 대화하는 조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검(巡檢) 대인, 그건 다 유언비어일 뿐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중화의 목소리가 들리자, 주육낭은 걸음을 멈췄다.

“죄다 범강림 그자가 지어낸 말들입니다. 위로금이 적다고 불만을 품었다지요. 처음에 저를 찾아와서는 더 많은 돈과 비단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돈이나 비단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니, 그에게 제가 가진 것을 다 내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위로금은 조정에서 정한 원칙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자에게 돈을 내준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그자가 자네가 공로를 가로챘다는 유언비어를 주위에 퍼뜨리고 다닌다?”

관청 안의 대화 소리가 창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문 앞에 있던 하급 관리가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이 하급 관리를 향해 손짓하자, 하급 관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급 관리가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성의 목소리가 바깥으로 전해져 왔다.

“들라 하라.”

주육낭이 들어오자, 방중화가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이 일은 내가 엄중히 다스리겠네. 대전을 치른 후라 병사들의 마음이 어수선할 테니, 부하들을 잘 보살피게나.”

조 순검이 말했다. 방중화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주육낭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고는 관청을 나갔다.

“무슨 일로 왔는가?”

조성이 주육낭을 보며 물었다. 이번 대전에서 주육낭이 의견을 낸 뒤로, 조성은 자신보다 어려도 한참 어린 후임인 그를 좀 더 친절하게 대했다.

“임관보에 관한 일입니다.”

주육낭이 말했다.

이틀 전, 범강림이라는 자가 관청 앞에서 통곡하며 방중화가 자기 형제들의 공로를 가로채 진급하는 거라고 욕을 해대다가 관졸들에 의해 쫓겨났다. 하지만 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도리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더욱 자주 오르내렸다.

방중화라는 자는 당초 임관보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몇 사람이 간신히 그를 설득해서 딱 한 시진만 시간을 끌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반 시진이 채 되기도 전에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쳤다고 했다.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 병사들은 모두 제 살길을 찾아 앞다투어 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성에 남은 스물 몇 명의 병사들만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런 방중화가 자신이 성을 버리고 재빨리 도망친 죄를 숨기고, 끝까지 성보를 지키던 병사들의 공로를 가로채 진급하게 됐다. 그런데 조정이 그런 악질을 감싸고 진급까지 시켜주다니, 장차 큰 우환으로 남을 터였다.

용곡성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이었다. 게다가 워낙 자극적인 이야기이다 보니, 금세 용곡성 전역에 소문이 퍼져 어딜 가나 이야깃거리로 오르내렸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석연치 않았던 조 순검은 결국 방중화를 불러 직접 물어봤다.

“방중화의 말로는, 그 부상병이 위로금이 적다고 생각해서 악의적인 소문을 지어낸 것이라고 하던데.”

조성이 말했다.

방중화의 주장 또한 종종 있는 일이었다. 군에는 항상 그런 얄미운 병졸들이 있었다. 목숨이 아까워 전장에 나가기는 꺼리고, 전장에 나갔다 오면 공로나 포상이 적다며 불평하는 자들. 그들은 장군이나 관리들이 일부러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모양새를 만들어 사람들을 선동했다.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소란을 피웠다.

“대인께서는 왜 범강림에게 직접 물어보시지 않는 겁니까?”

주육낭이 물었다.

그 부상병을 데려와서 물어보라고? 순검인 내가 직접 그 부상병을 만나 일의 경위를 묻는 것은, 단순히 그냥 묻는 정도가 아니라 관청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관청이 유언비어를 믿고 부상병을 심문하는 꼴이 되고, 방중화를 의심하는 거라고 볼 게 분명해. 그런 일에 휘말리는 건 좋지 않아.

이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어찌 됐든 관리 집안의 자제니 그리 간단한 이치도 모를 리는 없을 터인데.

조성은 주육낭을 잠시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아는 자인가?”

조성이 물었다.

주육낭은 숨기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래서 세상만사는 자신과 관련이 없을 때만 온갖 도리의 잣대를 갖다 댈 수 있는 거지.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앞으로 나서게 될 수밖에 없어.

조성이 관청 안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왔다 갔다 했다.

“그럼, 자네 생각에는 그 부상병의 말이 사실이다?”

조성이 멈춰 서며 물었다.

“거짓말을 할 자가 아닙니다.”

그 뜻은, 방중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명확히 단정 지을 수가 있나?

보통은 머뭇거리면서 ‘저도 잘 모르겠으니, 부디 대인께서 옳은 결정을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나? 그다음 내가 잠시 고민하다 주육낭에게 이 일은 파고들지 않는 게 좋다고 다독이고, 후에 다시 내게 간청하면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주육낭의 체면을 봐줄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게 순서인데.

일반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른 주육낭의 부탁 방식에 조성은 당황하여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그 형제들은 절대 성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성을 지켰을 테지요.”

주육낭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양옆으로 떨어뜨렸던 그의 두 손은 언제부턴가 주먹이 꽉 쥐여 있었다.

“육낭.”

다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던 조성이 별안간 멈추어 서서 주육낭을 쳐다보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장에서는 생사를 예측할 수 없고, 칼과 화살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는 법이야.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든 발생할 수 있지.”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수의 예를 표했다.

“그러니 부디 대인께서 범강림을 심문하시기 바랍니다. 방 대인의 말이 맞는다면, 조사를 통해 방 대인의 누명을 씻을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조성은 말없이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주육낭도 허리를 숙인 채 공수한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관청 안에 적막감이 흘렀다.

사실 이번 일을 조사하게 된다면 내게 좋을 것이 없어. 나는 전투 직전에 내린 잘못된 판단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지금처럼 숨길 걸 숨기고, 다들 기뻐하고 있을 때 얼버무리고 넘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말일 텐데.

조성은 자신의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주육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꽤 깊은 관계였나 보군. 지난번에 꼭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했던 것도, 아마 그자들을 위해서였겠지.

그럼 주 감찰이 내게 했던 그 말들은 사실 별게 아니었나? 하지만 그러기엔 진 상공까지 나서서 당부했다는데.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도박을 해 볼까?

“좋다. 그럼 그 부상병을 불러 한번 심문해 보지. 이렇게 계속 소문만 파다한 건 방 대인에게도 딱히 좋은 일이 아닐 테니.”

조성은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허리를 더욱 숙여 예를 올렸다.

감사드립니다! 대인!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문을 열자마자 관청 병졸들이 서 있는 것을 본 범강림의 아내는 덜컥 겁부터 났다.

결국 관청 관리들의 성질을 긁은 건가? 남편은 이제 잡혀가는 건가?

“날 찾는 거요?”

마당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킨 범강림이 담담한 표정으로 묻고는 부인을 쳐다보았다.

“일단 당신은 짐을 챙겨서 넷째네로 가 있으시오.”

범강림이 일을 키우기로 결정했을 때, 두 형제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고난이 있으면 같이 겪기로 했잖소. 그런데 왜 이 일은 내가 나서면 안 되는 겁니까? 내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형님들은 한 번도 관리를 무서워하며 피한 적이 없었소. 그때도 다들 날 위해 기꺼이 발 벗고 나섰는데, 왜 난 안 된다는 겁니까? 형제들이 그렇게 됐는데도 내 관직 때문에 나서지 못한다면, 이 관직을 얻어서 뭐에 쓰라고!”

서사근이 말했다.

“넷째야, 네 관직은 분명히 나중에 크게 쓰일 날이 올 거다. 나는 말단 병졸일 뿐이니, 내가 소란을 피워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가 쉬워. 큰 후환 같은 것 없이, 기껏해야 감옥에 갇히는 게 다일 거다. 하지만 네가 소란을 피운다면, 관직이 있는 자가 일부러 소란을 피우는 꼴이 돼. 관부의 윗분들께서 절대로 용납할 리 없지. 그러니 내가 먼저 길을 터 보마. 너는 뒤에서 나를 잘 챙겨 줘. 우리의 목표는 이 일을 크게 만드는 거다. 그리고 지금 남은 사람이라고는 너와 나 단 둘뿐이야. 집사람은 괜찮아. 서방이 죽으면 개가하겠지. 하지만 우리한테는 봉추가 남기고 간 아이가 있지 않냐. 너와 나 모두에게 무슨 일이 생겨 버리면, 그건 원수에게만 좋은 일이다. 우리에게 득이 될 게 없어.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하자. 각자의 위치에서 천천히.”

범강림이 서사근을 다독이자, 서사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전에는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 주던 서무수 형님이 있었지.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굳이 어렵게 머리 굴릴 필요 없이 힘만 쓰면 됐어. 서무수 형님이 없는 지금은 큰 형님이 그 역할을 해 주시네.

“네. 알겠습니다. 형님의 뜻을 따르겠어요. 우리 천천히 합시다.”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범강림의 회상을 끊었다. 엄숙한 표정의 병졸들은 범강림에게 자신들을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여보.”

부인이 범강림을 붙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것이오? 제대로 말해 주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소.”

범강림이 말했다.

어차피 관청 관리들은 나를 무뢰한으로 볼 거야. 그렇다면 끝까지 얼굴에 철판을 깔 수밖에.

“순검 조 대인께서 심문을 위해 데려오라 하셨소.”

병졸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순검 대인!

정신이 퍼뜩 든 범강림이 환하게 웃었다.

소식을 들은 서사근은 한달음에 달려와 범강림과 함께 순검청으로 향했다.

“순검 대인께서 이 일을 조사하신다니, 드디어…….”

범강림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요. 순검 대인께서 조사하신다니.”

서사근도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비록 관직에 오른 지 얼마 안 됐고, 겨우 목감 관리이긴 하지만, 관청에 존재하는 원리원칙들을 어렴풋이나마 깨우친 터였다.

순검 대인이 사람을 불러서 심문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서사근은 얼추 알고 있었다.

예상 밖의 일이야!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심문을 받다니!

형제들이 하늘에서 우릴 위해 기도한 것이 틀림없어.

서사근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범강림을 부축하며 층계를 올라 관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관청 안으로 들어설 때, 주육낭은 측문으로 관청을 나왔다. 주육낭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관청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이건 누이가 주라던 동상 치료용 연고입니다.

  • 이건 누이가 주라던 단오절 향낭입니다. 이건 벌레 퇴치용 향이고…….

주육낭은 고개를 숙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이가 나한테 주는 것은 무슨. 그 여인은 날 한 번도 오라비라고 생각한 적이 없을걸? 동생으로 본다면 모를까.

서무수, 서무수. 한 번도 그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도 잘 안 나네.

주육낭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엎드린 채 이야기를 끝낸 범강림을 보며, 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거라.”

“부디 저희 형제를 위해 현명한 결정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소인이 이러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닙니다. 오로지 형제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하늘에 있는 제 형제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범강림이 울먹이며 말했다. 서사근이 범강림과 함께 예를 올렸다.

“알겠네.”

조성이 말하면서 그들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범강림과 서사근은 조성을 향해 수차례 감사의 인사를 올린 뒤 관청에서 물러났다.

“대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하가 조성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보면 모르겠나?”

조성은 서사근의 부축에 의지하여 관청을 떠나는 범강림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런 비통함은 고작 돈 따위를 위해서 쥐어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저렇게 뼛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비통함은, 돈으로 살 수 없지.

수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찌하실 겁니까? 대인, 이 일은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사실 조정에 공로를 인정해 달라고 보고서를 하나 더 올리면 그만인 일이다. 문서를 다루는 벼슬아치에게 시키면 금방 끝날 테니 사소하기도 하고 쉬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안이 정말 조정으로 올라갈 경우, 방중화가 남의 공로를 빼앗았다는 죄목으로 벌을 받는 건 둘째 치고, 조정에서는 왜 공로에 착오가 생겼는지 문책할 게 뻔했다. 이 죄목 하나에 연루되는 서북 일대의 관리들이 한둘이 아닐 테고, 전투 직전 조성이 내린 잘못된 판단까지 다시금 문제가 될 터였다.

그리된다면, 전투에서 이기고 공로를 세워 한껏 들뜬 서북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혀 침체되겠지.

조 순검은 어두운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청자 찻잔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산산조각이 난 찻잔 사이로 튄 찻물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내 결백을 위해서라고? 내가 아둔패기인 줄 알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방중화가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말했다.

“정말 내 결백을 생각해서 그런 거라면, 그놈을 당장 때려잡아 감옥에 처넣었어야지! 그놈을 군법으로 다스렸어야 한다고!”

화를 참지 못한 방중화는 탁자를 아예 엎어 버리고 대청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수하 몇 명이 서둘러 방중화에게 다가가 그를 진정시켰다.

“조성 그놈이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게야. 놈은 애초부터 내가 자기 자리를 꿰찰까 봐 날 경계하고 싫어했지. 이번 기회를 빌미로 나를 밟아 버릴 작정이 분명해.”

방중화가 수하들을 밀쳐내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대인, 대인, 듣기로는 섬주 주씨 가문의 주육낭이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합니다.”

수하 하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방중화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주육낭? 아, 그 자식? 맞아, 맞아, 틀림없어. 그날 그 자식이 조 순검을 만나러 갔었지.”

방중화가 방 안의 사람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자식, 나한테 무슨 원수라도 졌나?”

“대인께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병사들과 친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이유 없이 생긴 원한이나 친분은 없는 법.

방중화가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조 순검 말로는, 그때 지원군을 보냈던 것도 그 주씨 놈의 생각이라고 했어. 난 또 웬일로 날 위해 지원군을 보냈나 했더니, 내가 아니라 그 뒈진 놈들을 위해 그랬던 거였군.”

“대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순검 어른께서 이 일을 들춰낸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상황인 것 같습니다.”

수하의 말에 다른 수하도 눈치껏 귀띔했다.

“순검 대인을 한번 뵈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수하들의 말에 방중화는 냉소를 보이면서 다시 이리저리 서성였다.

“지금 내가 순검을 만나서 뭐 해? 제 발 저리는 걸 티 낼 필요가 있어?”

방중화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누구는 줄 댈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대인, 대인, 강 총관께서 부르십니다.”

누군가가 관청 안으로 다급하게 들어왔다.

강 총관?

하루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조성이 흠칫 놀랐다.

서북 경략사 자리는 아직 공석이었다. 칙명으로 부임한 감찰사 주봉상이 있긴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병마부총관인 강문원이 서북의 최고 권력자였다.

강 총관이 자신을 부른다는 말에, 조성은 머뭇거릴 새도 없이 곧장 달려갔다.

강 총관이 있는 관청에 도착하니, 이미 그의 곁에는 방중화가 서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조성은 방중화가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를 단번에 눈치챘다. 조성은 곧 방중화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의 수하가 단계를 뛰어넘어 더 윗사람에게 상고하는 일은 어떤 상관이라도 기분이 상할 일이었다.

방중화, 저놈이 퍽이나 떳떳하겠다!

강 총관은 조성에게 형식적으로 군무를 물은 뒤, 곧바로 방중화와 관련된 유언비어로 화제를 돌렸다.

“큰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안 됐고, 서북에 아직 처리되지 않은 일도 많이 있으니, 조 순검은 그런 사소하고 별 쓸데도 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소.”

강 총관이 손에 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조성은 강 총관에 말에 허리 숙여 예를 표하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조성은 곁눈질로 방중화의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았다.

“하지만 대인, 범강림의 이야기를 조사하지 않고 덮어 버리면, 세간의 의심이 커질까 염려됩니다.”

조성이 고개를 들어 한 마디 덧붙였다.

저놈,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지? 강 총관께서 이렇게 알아듣게 말씀하셨는데, 감히 거기다 토를 달아?

얼굴색이 파랗게 질린 방중화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따졌다.

“순검 대인,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불손한 말투였다.

어차피 나는 지채가 될 몸이니, 저깟 순검 밑에서 눈치나 보고 살지 않을 테다. 강 총관이라는 뒷배가 있는데,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이건 다 방 대인 자네의 결백을 위함이네.”

조 순검이 말했다.

“제 결백을 위해서라고요? 제 결백은 벌써…….”

눈을 부릅뜬 방중화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됐소. 방 대인의 결백함은 따로 검증할 필요가 없소. 본래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자들이야.”

강문원이 방중원의 말을 끊고 몸을 일으켰다. 조성과 방중화가 놀란 얼굴로 동시에 강문원을 쳐다보았다.

설마 강 총관께서도 그 사람들을 아시는 건가? 그깟 병졸 몇 명이 그리 유명하단 말이야?

“전에 상관을 죽이고 탈영했던 자들이오. 이번에 서북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공을 세워 그 죄를 씻기 위해서였지.”

강문원이 말하고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경성에서도 한바탕 난리를 피우더니, 기어이 서북까지 와서 풍랑을 일으키는구나. 공로와 포상을 원해? 정말 황당하군. 제정신인가?

이번에 그들 형제가 한꺼번에 몇 명씩 죽어 나갔다던데,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하루빨리 죽는 게 나아.

겨우 둘밖에 안 남았는데도, 이리 소란을 피우려 들다니. 지난번에 내 진급을 망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도 못한 직책까지 흔들 셈인가!

“그런 병졸 따위의 말에 휘둘리지 마시오. 좋은 말로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니, 원칙대로 하시오. 사람들의 의심을 살 만한 유언비어를 통제하지 못한 건 그대들의 탓이니.”

강문원이 진지하게 말했다. 조성과 방중화는 재빨리 송구하다고 예를 표하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자코 소식을 기다리던 범강림과 서사근이 다시 조 순검을 찾아오자, 조 순검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대인, 대인,”

범강림이 지팡이를 짚은 채 안으로 쳐들어가려 하자, 서사근이 그를 붙잡았다.

“형님, 그만합시다.”

서사근이 고개를 들어 높이 있는 관청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의연한 웃음을 보이면서 자포자기하듯 읊조렸다.

“다 소용없습니다.”

범강림이 이를 악물고 관청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쓸모없어졌어.”

쓸모없어. 우리는 작디작은 개미보다 못한 존재일 뿐이야. 대단하신 관청 대인들 눈에는 더욱 그렇겠지.

“우리가 쓸모없는 게 아니라, 저들이 쓸모없는 겁니다!”

서사근이 큰소리로 외치고는 범강림을 부축했다.

“형님, 갑시다.”

서사근과 범강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청을 떠났다.

“육낭, 뭐 하는 게야!”

사내가 주육낭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주육낭은 소처럼 관청을 향해 돌진했다.

“저 자식이!”

사내가 다시 한번 팔을 뻗어 주육낭을 잡아 세웠다.

어느새 관청 앞에 다다른 주육낭과 주씨 가문 사람들 귀에 관청 안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주육낭은 관청 안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자들이 살아있었다면, 확실히 조사할 만도 했겠지. 하지만 그자들은 이미 죽었어!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조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더냐!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애처럼 굴지 말거라!”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호통쳤다. 주육낭은 관청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럴 사람, 있습니다. 저도 그럴 거고, 그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그 사람? 누구를 말하는 거지?

사내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주육낭은 그의 손을 내치고 성큼성큼 관청 안으로 걸어갔다.

관청 안의 웃음소리가 잠시 멈췄다.

관청 안에서는 열댓 명의 장수와 관리들이 둘러앉아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이번 전투 이후 공로를 인정받고 진급이 결정된 자들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관청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소년을 본 방중화는 비웃음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다.

“그 일 때문에 온 왔느냐? 내가 결정한 일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강문원이 주육낭을 쳐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대인, 정확히 조사하셨습니까?”

주육낭의 물음에 강문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혈기왕성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조사할 필요 없네.”

강문원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을 들었다.

“나는 내 수하들이 용맹하게 적군에 맞서 싸웠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믿네. 자네와 같이 아직 철없고 어린 친구들이나 그런 유언비어에 마음이 흔들리겠지.”

“총관 대인, 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육낭이 실례했습니다.”

주씨 가문의 웃어른이 앞으로 나서면서 허리 숙여 사죄했다. 그가 주육낭을 노려보면서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주씨인 것을 잊지 말거라. 더 소란을 피웠다가는, 네놈을 경성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인, 이 일은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받아야 할 공로를 인정받고 싶은 것일 뿐이지, 누군가를 음해하려 게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포상금이 아니라 오직 공명(功名)뿐입니다.”

주육낭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강문원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읊조렸다.

“대인께 있어서는, 아주 쉬운 일이잖습니까.”

맞아. 쉬운 일이지.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사람은 누구나 편히 살고 싶어 하잖아.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뭐 있어?

강문원이 웃음을 지었다.

“군사 일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전투를 벌일 때마다 사상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아직 어려서 적응하는 게 힘든 모양인데,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주씨 가문의 웃어른들이 다시 한번 주육낭의 팔을 꽉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강문원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지만, 강문원은 그들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자, 일단 나갑시다. 진급해서 다른 부지로 발령 난 이들부터 배웅하고, 나머지 얘기는 돌아와서 다시 하지.”

강문원은 연회 자리에 앉아 있던 장수와 관리들을 향해 친절한 미소를 보이고는 먼저 앞장섰다.

주육낭의 등장으로 인해 무거워졌던 관청 안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사람들은 웃으면서 강문원을 에워싸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리의 끝에서 강문원을 쫄래쫄래 따라가던 방중화는 일부러 주육낭 바로 옆에서 우쭐한 얼굴로 건들거리며 그를 지나쳐 갔다.

“강 대인,”

주육낭이 강문원을 불러세웠다. 주육낭은 주씨 가문 웃어른들의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관청 문 앞까지 다다랐던 강문원이 걸음을 멈추자, 그를 뒤따르던 사람들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강 대인, 후회하지 마십시오.”

주육낭이 비장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내뱉었다.

난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네. 어린애가 홧김에 내뱉는 가소로운 말이군.

실소를 터트린 강문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재빨리 강문원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관청 밖으로 나갔다.

이때 방중화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후회하지 말라고? 그놈이랑 같은 말을 하고 있네?

방중화는 고개를 돌려 관청에 우뚝 서 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한쪽은 빛이 많이 들어오고 한쪽은 들어오지 않아 소년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건장하고 우람한 모습의 소년이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 후회하지 마, 후회하지 말라고.

네놈이나 후회하지 말아라. 강 대인의 눈 밖에 난 이상, 네놈의 좋은 날은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어!

방중화가 입술을 삐쭉이면서 서둘러 사람들의 뒤를 쫓아갔다.

-최선-

어두운 등불 아래, 범강림이 서툰 솜씨로 먹을 갈고 있었다. 그의 반대편에 앉은 서사근이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이러는 거, 정말 무능해 보이지 않소?”

처음 종군했을 땐, 큰 공을 세우기도 전에 탈영병이 되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고, 간신히 기회를 얻어 서북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지금까지도 제 앞가림 하나 못 하고 공로나 뺏기는 신세라니. 오랜 시간 동안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아직도 그 어린 낭자에게 의지해야 한다니. 차라리 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게 낫지.

“어렸을 적 부모를 여의고 가난했던 우리가 거리를 집으로 삼아 떠돌아다닐 때, 셋째가 그랬지. 사내대장부로 태어났다면 이루는 게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셋째가 우리한테 글을 가르치려고 했잖아.”

범강림이 멋쩍게 웃으면서 말하자 서사근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던 두 사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머리로는 글공부가 불가능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셋째가 머리 대신 힘을 쓰자고 했지.”

범강림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한쪽에서 아이를 재우고 있던 범강림의 아내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몇 년간 열심히 무예를 단련한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입대했는데, 공로를 세우기는커녕 모함에 휘말려 목숨이나마 부지하려고 탈영을 했어. 그때 셋째가 너희 몰래 내게만 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는 남들과 같이 원대한 꿈을 가졌지만, 팔자가 종잇장보다 얇은 사람들인 것 같다고.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하더군.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하느님이 특별히 점지해 준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 믿고 싶지만, 실은 허공에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먼지 중 하나일 뿐이라고.”

범강림의 말에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는 누이라는 큰 행운을 만났잖아요. 하느님이 특별히 점지해 주신 운명인 셈이죠.”

“그래. 그러니 이번 생은 값지다고 생각하자.”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먹을 갈았다.

“넷째야.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얼마만큼의 그릇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 경성에서 누이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외의 일은 누이에게 의지해야 해. 우리가 무모하게 일을 벌이고, 방씨 놈과 다른 관리 어른들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형제들의 공로도 챙기지 못하고 우리까지 놈들의 덫에 휘말릴 거야. 네가 보기에는 우리가 체면부터 챙겨야 하겠느냐, 아니면 목적을 달성해야 하겠느냐?”

서사근이 고개를 들어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형님.”

서사근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그저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적자.”

범강림이 손짓을 하자, 서사근이 고개를 다시 한번 끄덕이고는 붓을 들었다. 두 형제가 서신을 적기 시작하자, 범강림의 아내는 잠든 아이를 안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범강림의 아내는 방 밖으로 나와 한결 시원해진 여름밤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두 형제의 행동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순검 대인께서도 손대지 못할 정도의 큰일을, 누이에게 말한다고 해서 방법이 생기나? 누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경성.

해가 들기 시작할 때쯤, 시녀가 조심스럽게 진십삼의 방문을 열었다. 시녀는 방 안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던 진십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자님, 못 주무셨어요?”

시녀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어앉았다. 진십삼이 어깨를 주무르면서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세숫물을 받아오고 시중을 들겠다는 시녀의 말을 거절했다.

“서신을 써야겠다.”

시녀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붓과 먹을 가지고 와서 진십삼 옆에 앉아 먹을 갈기 시작했다.

  • 나도 자네 말처럼 그 방씨 놈을 흠씬 패 버리고 싶었지만, 때려 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토록 분한 것을 참는 게 어른이라면, 차라리 영원히 철들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강 총관을 직접 찾아갔는데, 당숙과 형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나를 혼내고 외출을 금지했어. 마음 같아서는 나를 꽁꽁 묶어 경성에 보내 버리고 싶으셨겠지. 그분들은 모르셔. 내가 왜 이렇게까지 그 병졸들을 신경 쓰는지 모른다고.

나는 알고 있지.

진십삼이 붓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갔다.

  • 나는 자네가 신경 쓰는 이유를, 그리고 그 여인이 신경 쓰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고, 그 여인이 무엇을 신경 쓰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자네가 장성했기 때문에 분함을 참는 게 아니라, 충분히 강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해서 참아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해.

누구나 더욱 높은 곳을 갈망하고 더욱 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남들에게 수모를 겪지 않기 위한 본능일 수도 있어. 이 세상에 정해진 도리란 없으니까. 오직 강한 자만이 도리가 되지.

그 말인즉슨, 만약 자네가 강해진다면, 자네 말이 곧 도리가 될 거라는 뜻이야. 그러니 서북에서 최선을 다해. 나는 내년이면 과거 시험을 치를 거니까, 자네도 허풍 떨며 큰소리쳤던 말 잊지 말고 꼭 지키라고.

이번 일은 거기까지 하고, 더 이상 관여하지 마. 서북에서 이미 그 일을 끝내기로 한 이상, 자네가 계속 나서서 소란을 피우면 자네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아질 거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지.

이 점은, 누구보다도 자네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사실 네놈도 그리 아둔하진 않잖아…….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가던 진십삼의 붓끝이 갑자기 멈추었다.

사실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묻는다는 건, 그냥 누구 하나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겠지.

진십삼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는 쓰고 있던 종이를 구겨 한쪽으로 던지고 새로운 종이를 꺼내 들었다.

잠시 뒤, 사환이 서신을 들고 떠나는 모습을 본 진십삼은 회랑 아래에서 기지개를 쭉 켰다.

“공자님, 아침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시녀가 옆에서 말했다. 여름이 찾아온 정원을 말없이 바라보던 진십삼은 한숨을 쉬었다.

“세숫물과 나갈 옷을 준비해라.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진십삼이 말했다.

여름은 신선거의 장사 철이 아니었다. 한산해진 신선거는 조용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진 공자님 오셨습니까. 때마침 별실이 하나 비었는데, 그리로 드시지요.”

길을 안내하던 점원이 친절하게 권했다.

“아무 데나 있어도 되는데. 아, 반근은?”

진십삼이 물었다. 점원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반근 누이는 조금 아까 막 나갔습니다. 공자님께서 볼 일이 있으시다면 소인이 지금 당장 부르러…….”

진십삼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다. 온 김에 물어본 것일 뿐이야.”

진십삼의 걸음걸이와 함께 옷자락이 휘날렸다. 그는 층계를 오르고 동쪽으로 향했다.

서쪽의 한 별실에서 나온 춘령은 단번에 진십삼을 알아보았다. 춘령은 진십삼을 우연히 마주친 것에 대해 뛸 듯이 기뻐 그를 부르려다가, 동작을 멈추고 자신의 뒤를 따라 별실을 나오는 주 낭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열린 별실 문틈 사이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주 낭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둘러 별실을 빠져나왔다. 주 낭자는 이번 접대 자리가 썩 즐겁지 않았다.

춘령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진십삼의 길을 안내하던 점원이 비어 있던 별실 문을 열자, 춘령은 얼른 층계 가까이서 발을 헛디딘 척하며 요란스럽게 넘어졌다.

주 낭자와 그 뒤를 따르던 또 다른 시녀가 화들짝 놀라 춘령을 부축하러 다가왔다.

진십삼도 갑작스러운 우당탕 소리에 춘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 낭자 일행의 얼굴을 알아본 진십삼은 별실을 들어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주위에 있던 다른 점원이 서둘러 춘령을 부축하러 다가오자, 춘령은 다른 시녀의 부축을 받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래요.”

춘령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주 낭자가 춘령에게 조심하라고 다독인 뒤 걸음을 옮겼다.

“괜찮은 것이냐? 의원을 불러올까?”

진십삼의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든 주 낭자는 진십삼을 보자마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곧바로 다시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발을 헛디뎌서 그래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춘령이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허둥대며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주 낭자도 다시 한번 진십삼을 향해 예를 표하고 걸음을 뗐다.

“주 낭자는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약속이라도?”

진십삼이 물었다. 주 낭자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돌아가는 길이에요.”

“낭자의 칠현금 연주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혹시 내게 오늘 그 연주를 들어볼 행운이 있을지요?”

진십삼의 물음에 주 낭자는 잠시 주춤하다가 대답했다.

“공자님, 과찬이십니다. 행운이라니요.”

주 낭자가 진십삼을 향해 몸을 돌리고 목례했다. 진십삼은 싱긋 웃으면서 별실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주 낭자가 걸음을 옮기자, 춘령을 부축하던 시녀는 춘령을 내팽개치고 칠현금을 챙겨서 서둘러 주 낭자의 뒤를 쫓아갔다. 다리를 문지르는 척하던 춘령은 살짝 고개를 든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술과 요리가 금세 별실 안 식탁 위로 올라왔고, 딩딩당당 하는 칠현금 연주 소리가 별실 안에 울려 퍼졌다. 한 곡이 끝나자, 넋을 놓고 있던 진십삼이 정신을 차리고 손뼉을 치면서 주 낭자의 연주 실력을 칭찬했다.

“주 낭자의 연주가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진십삼이 말했다.

“2년이 지났는데도 실력이 제자리라면, 소인의 밥줄이 끊기지 않을까 싶네요.”

주 낭자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진십삼처럼 권문세가 출신에 성품이 올곧은 공자들은 기루에 쉬이 발을 들이지 않았다. 자연히 관기를 불러 술자리를 함께 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주 낭자의 연주를 들었던 것이 우리 집 연회에서였지.

주 낭자의 말에 진십삼은 잠시 딴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 연회는 정교랑의 배웅을 위해 열었던 거고.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니. 정 낭자도 참 매정해. 떠난다고 작별한 뒤로는 서신 한 장 보내지 않다니.

잠시 진십삼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던 주 낭자는 칠현금의 음을 조율했다. 그러고는 조금 전의 곡보다 더 서정적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진십삼은 다시 시작된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술을 천천히 입에 머금으며 연주를 감상했다.

또 한 곡이 끝나자, 주 낭자는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옆에 놓여있던 찻잔을 들었다.

“잠깐.”

진십삼이 손짓으로 주 낭자를 제지했다.

하긴, 한낱 기녀인 내가 어떻게 공자님의 허락도 없이 차를 마실 수 있을까.

주 낭자가 허리를 숙이면서 찻잔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차가 식었을 텐데.”

진십삼이 다른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

“호흡이 안정적이지 않은 걸 보니, 주 낭자도 나처럼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러니 따뜻한 차를 마셔요.”

진십삼이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을 주 낭자 쪽으로 밀어주었다. 문가에 앉아 있던 주 낭자의 시녀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주 낭자 앞으로 찻잔을 가져다 놓았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 낭자가 고개를 들어 진십삼을 쳐다보면서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나처럼’이라는 말에 감사드릴게요.”

말을 끝낸 주 낭자는 진십삼이 건넨 따뜻한 차를 단숨에 비웠다.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음(知音)에 감사하는 게 아니고요? 지음이 아니었다면, 낭자가 내 마음을 위로하려고 연주했다는 걸 알지 못했을 텐데.”

“그건 공자님의 몫이지요. 지음인지 아닌지는, 공자님께서 소인의 뜻을 알아주시는지 아닌지에 달렸습니다. 공자님을 위해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지는 소인의 몫이죠.”

주 낭자가 미소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소인의 본분이기도 하고요.”

진십삼이 크게 웃었다.

“좋소. 참으로 좋은 본분이오. 그러고 보니 꼭 그 여인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여인?

기녀와 닮았다는 소리를 좋아할 여인은 없었다. 다른 기녀였다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교태를 부리고 수줍어하며 ‘제가 어찌 감히요’와 같은 말을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주 낭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음을 지을 뿐, 황송하거나 과분한 칭찬을 들은 사람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별실 문이 열리고 여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진 공자님, 절 찾으셨다면서요?”

시녀가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말을 건네다가 반대편에 앉아 있던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그래.”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 낭자가 물러나려고 예를 올렸다. 그녀를 붙잡을 생각이 없었던 진십삼은 사환에게 주 낭자를 배웅하고 돈을 주라고 지시했다.

“진 공자님, 요즘 기분이 안 좋으세요? 술을 마시는 것도 모자라 기녀까지 부르시다니요? 부친께서 아시면, 공자님 다리가 남아나지 않을 텐데요.”

“걱정 마라. 아버지께서도 차마 그러진 못하실 거야. 또 너희 아씨를 모셔 오기에는 너무 비싸서 말이다.”

주 낭자는 별실을 나오면서 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저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이 그만큼 가깝다는 뜻이었다.

별실 문이 다 닫힌 것을 확인한 주 낭자는 그제야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뭐라고요?”

시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희 아씨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거라고.”

진십삼이 시녀를 쳐다보면서 대답하고는 술을 들이켰다. 시녀는 잠시 진십삼을 빤히 바라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 공자님,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같은 시각 강주. 남정 골목에 떠들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망가긴 왜 도망가!”

조 집사가 정평의 목덜미를 꽉 잡고 외쳤다. 조 집사는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던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말했다.

“우리 아씨를 보고 도망가는 이유가 뭔데!”

“아니, 그쪽 아씨를 보고 도망치려는 게 아닙니다. 날이 곧 저무니까,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거리로 뛰어가던 중이었다고요.”

정평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평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조 집사는 그의 뒤통수를 몰래 때리고는 정교랑 앞으로 밀쳤다.

가까이 다가온 정교랑을 보자, 정평이 헤헤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어이쿠, 이런 우연이. 낭자는 또 걸으러 나온 겁니까?”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대인께서는 어딜 가세요?”

“나야 뭐, 거리로 나가려던 길이죠.”

정평이 넉살 좋은 미소를 보이면서 슬쩍 발을 뺐다.

“그럼 나는 이만.”

“제가 대인께 드린 돈은 왜 안 받으시죠? 다른 뜻은 없고, 대인께서 하루빨리 경서를 깨우치는 데 집중하고 저작을 남기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드린 건데.”

정교랑이 정평의 말을 끊고 물었다. 정평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낭자, 내 마음대로 살도록, 다들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세요.”

정평이 말을 끝내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두어 걸음 뗐을 때, 제자리에 서 있던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대인의 후대 자손들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으세요? 대인께서 좀 더 강해지신다면…….”

정평이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낭자는 아직도 모르는군요.”

정교랑은 웃고 있는 정평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평이 손을 들어 정교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가 강해진다 해도, 그건 내 일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내 후손들과는 더욱 관련이 없지요. 내 후손들이 나중에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해도, 그건 그들의 일이고,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이에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당신과 관련이 없는데요, 어떻게! 수수방관하겠다는 뜻인가요? 후손들을 외면하겠다고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멸족을 당하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우리들의 운명이라는 거예요? 이대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거냐고요!

“우리는 이대로 단념할 수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녀는 정평이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그럼 더 강해져야죠. 아직은 결론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아직 운명에 순응할 때가 되지 않은 거죠. 자꾸 남한테 강해지라고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요.”

아직 운명에 순응할 때가 아니라고? 아직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요? 아니라면 내가 강해진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죠?”

정교랑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물었다.

“이젠 그들이 없는데.”

정교랑은 정평의 옷자락을 쥔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읊조렸다.

“낭자가 있잖아요.”

정평이 정교랑의 말을 끊고 말했다.

내가? 내가 아직 있다고?

“하지만, 나, 나는, 나는 내가 아닌걸요.”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어째서 자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평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영원히 자기 자신인 거예요. 영원히 존재하는 거죠. 낭자가 살아있고, 마지막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끝이 아닌 겁니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어서 가요. 어서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요.”

내가 아직 살아 있어! 아직 기회가 있어! 모든 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교랑은 경악하며 깨달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귓가에서는 거대한 진동 소리가 울렸다.

난 아직 정방이야. 난 아직 정방이라고. 양씨 가문과의 일은 끝나지 않았어.

난 아직 죽지 않았고, 아직 기회가 남아 있어. 우리 일족을 위해 복수할 기회가 남아 있어.

정교랑이 갑자기 말을 잃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평은 그 틈을 타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역시 어린애라 그런지 달래기가 쉽네. 듣고 싶은 대로 말해 주기만 하면 되니까.

“저놈이!”

조 집사가 정평의 뒤를 몇 걸음 쫓아갔지만, 날쌔게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조 집사는 고개를 돌리고 제자리에 서서, 넋이 나간 채로 서 있는 정교랑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또 뭐에 홀린 건가?

갑자기 골목 안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 일행을 발견한 사환이 더욱 빠르게 뛰어와 정교랑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아씨, 서북에서 온 서신입니다.”

반근이 서신을 받아와 봉투를 뜯어 정교랑에게 건넸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정교랑은 서신을 읽으며 서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된 일이었다니.”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아씨, 무슨 일이예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서신을 접은 뒤 잠시 앞쪽을 응시했다.

그렇게 된 일이었다니! 역시 강해져야만 해.

“떠날 채비를 해. 경성으로 가야겠다.”

경성?

놀란 반근이 고개를 돌려 조 집사를 쳐다보자, 조 집사도 똑같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

“지금요?”

반근이 물었다.

“지금.”

정교랑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저택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길에서-

6월, 서북의 새벽은 서늘했다.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 용곡성 남쪽 성문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치열했던 이번 전투가 끝나고, 많은 사람이 진급하고 포상을 받았다. 특히, 관리 신분이 아니었던 사람 중에서 이번 기회에 품계를 얻은 경우가 많았다. 품계를 처음 얻은 자들은 족보를 호부에 올려 조사를 받아야 하므로 서북을 떠나 경성에 다녀와야 했다.

진급한 자 중에서는 문관도 있고 무관도 있었으며, 나이가 어린 이도 있고 연로한 이도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품계를 얻는다는 건 과거 시험에 급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예의상 배웅하러 나온 관리들 외에도, 가족과 사돈의 팔촌까지 다 남쪽 성문 앞으로 나와 이들의 경성행을 배웅했다.

경성으로 가는 대열에는 주육낭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전투 덕분에 주육낭도 두 단계 진급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품계가 없던 이가 아니므로 호부에 족보를 제출하러 경성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관청에서 문서 전달을 핑계로 주육낭을 잠시 경성으로 보낸 것이다.

“밖에 나온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집이 그립지?”

주씨 가문의 웃어른들이 주육낭을 둘러싸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립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주육낭이 대답했다.

“그래. 과연 우리 주씨 가문의 사내대장부야.”

웃어른들이 커다란 손으로 주육낭의 머리와 어깨를 탁탁 쳤다.

“어이. 그러다가 젊은이 어깨가 남아나질 않겠어. 아무리 젊고 튼튼한 몸이 부럽다고 해도, 그렇게 막 치면 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웃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 대인,”

자색 장포를 입고 있던 주 감찰사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애지중지한다는 그 육낭이 바로 이 아이요?”

주 감찰이 신체 건장하고 탄탄한 체격을 가진 소년을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는 올해 몇 살이지?”

“열여덟입니다.”

주육낭이 턱을 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주 소처럼 힘이 불끈불끈하구먼.”

주 감찰이 웃으면서 주육낭의 어깨를 세게 두어 번 쳤다.

“대인, 저희한테 뭐라고 하시기 전에, 대인께서도 살살 치셔야겠습니다.”

주씨 가문의 웃어른들이 농담을 건넸다. 주 감찰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주 감찰 옆에 서 있던 조성이 주육낭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그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네.”

주육낭이 서둘러 조성을 향해 예를 표했다.

“대인, 당치 않으십니다. 대인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소인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주 대인께도 말씀은 드렸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조성이 말끝을 흐리면서 다른 한쪽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이 조성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환하게 웃고 있는 강문원의 모습이 보였다.

“일단은 경성으로 돌아가게. 잠시 피해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

조성이 주육낭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을 덧붙였다.

“자네는 아직 어리지 않나. 급할 거 없네.”

간결하게 인사치레를 끝낸 장수와 관리들은 성안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강 부총관, 강 부총관.”

사람들 사이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몇 관리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강문원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강문원은 억지 미소를 쥐어 짜냈다.

서북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강문원을 강 총관이라고 불렀지만, 유독 몇 사람만은 끈질기게 그를 강 부총관이라고 불렀다. 주 감찰사가 그중 한 명이었다.

“주 대인.”

강문원이 손을 들며 인사했다.

“강 부총관, 같이 가시지요.”

주 감찰은 웃으면서 강문원의 팔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

어찌 저렇게 주둥이를 열 때마다 부총관, 부총관 거리는 건지 원. 내가 부총관이라는 걸 잊을까 봐 일부러 저러는 거야 뭐야?

강문원은 주 감찰이 몹시 아니꼬웠지만,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다른 관리들을 거느리면서 함께 성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관리와 장수들이 자리를 뜨자, 경성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대열에 합류하며 가족들과 고별했다. 가족들은 눈물을 훔치며 배웅하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남쪽 성문 앞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직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던 주육낭은 성안을 두어 번 돌아보았다.

“육낭, 아직 기다려야 할 사람이라도 있느냐?”

누군가가 물었다. 주육낭이 고개를 저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닙니다, 형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주육낭이 몸을 휙 날려 말에 올라타자, 사환과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말에 올라타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사람이 타지 않은 말에는 서북 특산물이 잔뜩 실려 있었다.

주육낭은 마지막으로 성안을 힐끗 돌아보고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움직였다.

정오가 다 되어갈 때쯤, 남쪽 성문 앞은 새벽녘부터 배웅하러 나왔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시끌벅적해졌다.

마차 두 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성문 밖으로 나왔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시종 네다섯 명이 조촐하게 이끄는 마차 두 대는 특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마차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탄 채 그들을 배웅했다.

“형님, 나도 같이 가게 해 주시오.”

서사근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이쪽에 사람이 없으면 안 돼. 집에도 사람이 없으면 안 되고. 나중에 누가 올지도 모르니까 잘 지키고 있어.”

범강림이 마차 안에서 말했다. 누구보다도 범강림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서사근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서사근은 시종들을 한 번 둘러보고, 짐이 실려 있는 마차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범강림의 아내가 마차 안에서 아이를 안은 채 말했다.

“관구 어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꼭 경성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시종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범강림을 호위하는 시종들은 서사근이 직접 엄선한 병졸들이었다. 충성심이 있고, 믿음직스러운 자들만 골라 품삯을 넉넉히 주고 범강림의 호위를 맡겼다.

“그래. 수고들 하거라.”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넷째야, 그만 돌아가. 우린 이제 가 볼게.”

범강림이 말했다.

서사근은 돌아가라는 범강림의 말을 한사코 무시한 채 십 리 밖까지 그를 배웅했다. 끝내 멈춰선 서사근은 범강림이 탄 마차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그들 일행을 눈으로 배웅했다.

“범강림은 뭐 하러 가는 거래?”

방 지채는 이번이 첫 진급이 아니라서 경성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곧장 자신의 새로운 임지로 가서 지채직에 부임했다.

그는 용곡성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거기에 남아 있는 몇 사람들을 예의주시했다. 그중 한 명이 범강림이다. 그런데 자신이 새로운 임지로 떠나자마자 범강림이 온 가족을 데리고 용곡성을 떠났다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뭐라고?”

방 지채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놈도 참 웃기는 놈이야. 사람이 죽은 지 두 달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고향으로 데려갈 생각을 하다니.”

아무렴 상관없어. 그놈이 떠난다면 더 좋고, 이참에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더욱 좋지. 그렇게 된다면 내 지채직이 위협받을 일도 없으니까.

6월의 날씨는 천덕꾸러기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티끌 하나 없이 맑던 하늘에 돌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비를 피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오 관리인이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그는 거세게 내리는 굵은 빗방울을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고. 아씨께서 비를 맞지는 않으시려나?”

한 손으로 쉴 틈 없이 산가지로 셈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장부를 넘기던 시녀가 고개도 들지 않고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아씨께서는 앞날만 잘 내다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랑도 무척 가까우시잖아요. 하느님이 비를 내리기 전에 분명히 아씨께 귀띔하셨을 거예요.”

시녀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오랜만에 보는 시녀의 생기발랄한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아씨께서 경성으로 온다는 진 공자의 말만 들었을 때는 사실 반신반의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주부에서 보내온 서신을 받았다. 거기에는 아씨께서 정말 경성으로 돌아오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저 아이는 손발을 어찌해야 할 줄 모를 정도로 기뻐하면서 매일같이 제자리를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지. 저렇게 일이라도 해야 그나마 흥분이 가라앉는 모양이야.

“그리 대단한 분이니, 하느님께서 올해 일식 시기도 아씨께 알려 주셨겠지?”

오 관리인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시녀가 고개를 들고 오 관리인을 쳐다보자, 두 사람은 풉 하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시녀와 오 관리인은 얼마 전에 정교랑이 안전하게 경성에 도착하도록 기도를 드리러 보수사에 갔었다. 하지만 예약된 법사(法事)가 있었는지 보수사 대웅보전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중에 수소문을 해보니, 그날은 태사국 사천대(司天臺: 천문 관측을 담당하던 관청)의 관리들이 보수사에 와서 향불을 올리고 기도를 드리러 오는 날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황궁에서도 비밀이 새어 나오는 판국에 일개 사찰에서 비밀이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사국 관리들이 영묘하기로 소문난 보수사에 와서 기도를 올린 이유는 부처님께 일식이 일어나는 날짜를 점지받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온 경성에 퍼졌다. 경성 사람들은 한동안 이 일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태사국 사천대 관리들이 무능하고 게으르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향불을 올리면서 부처님께 일식 날짜를 점지해 달라는 황당한 일까지 벌일 줄은 몰랐다. 사천대 관리들은 죽어도 인정할 수 없다고 잡아뗐지만, 이미 퍼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었다.

어사대 관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녹봉을 축내는 능력 없는 자들을 쳐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끼어든 다른 관리들 때문에 졸지에 파벌 싸움이 되어 버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관리들의 파벌 싸움은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아무도 얻은 것 없이 흐지부지 끝을 맺었다.

백성들은 조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흥미로운 소문에만 관심을 가졌다.

시녀와 오 관리인은 마주 보면서 한참을 웃은 뒤에 정교랑 일행이 어디까지 왔을지 계산했다. 매섭게 휘몰아치는 빗줄기와는 반대로, 대청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같은 시각, 경성에서 백 리쯤 떨어져 있는 곳은 날씨가 쾌청했다.

“아씨, 성문을 지나갈 수 없답니다.”

말을 타고 되돌아온 시종 두 명이 마차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왜 못 지나가? 성 밖으로 못 나간다는 말이야?”

반근이 부채질을 하면서 휘장을 들어 올리고 물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반근의 콧잔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성문 앞이 아예 막혀 있습니다. 지나가게 해주지도 않고요.”

시종이 대답했다.

“엥? 왜 성문을 못 지나가게 해? 가는 길은 전부 확인했는데?”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듣기로는 무슨 법사를 열어야 해서 통행을 금지한다고…….”

시종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반근이 실소를 터트렸다.

“도대체 무슨 대단한 법사이길래 성문을 막지? 관청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나?”

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종도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시종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성문 가까이 가기도 전에 우리를 막아섰습니다. 내일은 되어야 성문을 지날 수 있다면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늦어도 오늘 밤에는 평량(平凉) 역참에 도착해야 해. 내일 움직이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고.”

반근이 다급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 보자.”

6월의 뜨거운 태양 열기가 바닥에 내리쬈다. ‘반강현(盤江縣)’ 세 글자가 적힌 성벽 위에 서 있던 몇 사람은 차양 아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韓) 대인, 정말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한 사내가 물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버려 둘 수밖에.”

관복을 입고 있던 중년 남자는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며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인, 저 중놈이 날이 갈수록 더 기고만장해집니다. 오늘은 저자들이 성문을 막지만, 내일은 관청 문까지 막으려 들 겁니다.”

성문을 바라보고 있던 하급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 대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다 한들, 자네 중 누가 저자들을 막을 수 있겠나?”

한 대인이 성벽 아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성벽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문 바로 앞에는 백성들이 빼곡히 서 있었고, 저 멀리서도 수많은 백성이 성문을 향해 절하며 몰려오고 있었다.

성문 앞의 정중앙에는 제단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제단 주위로 승려 열댓 명이 있고, 제단 위에는 허리를 펴고 고고한 자세로 앉아 있는 노승이 보였다. 선하고 자애로운 표정의 노승이 신도들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신도들은 파란이 일듯 일제히 제단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군가가 저 노승에게 성문에서 비키라고 말한다면, 신도들은 밟아 죽이라는 노승의 말을 듣기도 전에 기꺼이 노승을 위해 그자를 밟아 죽일 것으로 보였다. 설령 상대가 관청 관리라 하더라도, 신도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살인을 감행할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당초 도랑 공사를 하면서 법사나 간단히 열고 돈 몇 푼 줘서 돌려보내려 했던 건데, 어떻게 1, 2년 사이에 이 지경이 됐는지.”

“불경 한 권 못 뗀 땡추를 대사님이라고 부르다니, 어리석은 백성들이란.”

다른 사람이 냉소를 보이며 비아냥대자, 한 대인이 깊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백성을 어리석게 만든 건, 자네와 나의 책임일세. 내가 너무 방심했어. 승려 하나가 여기 남아서 불법을 설파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티끌을 모아, 오늘날의 태산이 될 줄이야.”

“어떻게 해야 저 중놈을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신을 모셔 오는 건 쉽지만 돌려보내는 건 어렵다지 않소. 저 중놈이 거느리는 신도가 많아지면서 시줏돈도 어마어마하게 챙겼다던데, 여기서 순순히 떠날 리 있겠소?”

다른 사람이 고개를 저으면서 한탄했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어이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일단 상황을 봐 가며 움직이는 수밖에.”

한 대인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조금 전까지 쨍하게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왔다.

“이번에는 제발 사천대 놈들 말이 정확했으면 좋겠네. 그놈들 말대로 정말 일식이 일어난다면, 저 중놈이 어떻게 움직일지 궁금하군.”

한 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성벽 위에 있던 관리들이 뒷짐을 진 채 혀를 차고 있던 때에, 갑자기 성문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오?”

“누가 성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법사 때문에 막혀서 못 나가고 있나 봅니다.”

관리들이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 성벽 아래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정말로 승려들 때문에 길이 막힌 마차 한 대가 보였다.

“타향 사람들이라 사정을 잘 모르나 보군. 어서 사람을 보내서 저 사람들을 보호하게. 저 중놈들은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한 대인이 옆에 서 있던 관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관리는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관졸을 성벽 아래로 내려보냈다.

성문 앞 분위기는 이미 심상치 않았다.

“바삐 가야 할 곳이 있으니, 길을 좀 터 주시오.”

시종은 공손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비켜 주지 않으면 때릴 기세로 승려들을 노려보았다. 시종 앞에 서 있던 승려 둘이 거들먹거리면서 대꾸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나? 오늘 일식인 거 모르시오? 우리 사부님께서 법사로 복을 빌어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날이니까, 돌아가서 좀 숨어 있든가, 아니면 여기 같이 꿇어앉아서 기도하든가 하시오. 사리 분별 못 하지 말고.”

시종이 이를 악물고 뭐라고 대꾸를 하려던 찰나,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일식? 오늘이 일식이라고?”

정교랑이 물었다.

“그렇소.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성가시다는 투로 말하며 마차로 눈을 돌리던 두 승려는 말을 하다 말고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와, 엄청난 미인이네.

“아, 시주님.”

승려 중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시종이 재빨리 승려를 막아서면서 경고의 의미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인연이 닿은 분과 대화 좀 하겠다는데, 안 된다는 거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시종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지, 승려의 말투는 담담했다. 승려의 말을 들은 주위의 신도들이 시종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젊은이, 어서 비켜서요. 대사님께 불경하면 안 되지!”

“저 낭자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거 잘됐네! 빨리, 빨리 대사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 보자고.”

신도들이 점점 몰려오자, 호위를 맡은 시종 열댓 명은 빠르게 마차 주위를 둘러싸며 정교랑을 보호했다. 하지만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기에는 개미 떼 같은 신도들 사이에 점처럼 있는 시종들이 한없이 작고 힘없어 보였다.

“비키시오, 비켜.”

관졸 몇 명이 신도들 사이를 비집고 오더니 마차 주위의 사람들을 비켜서게 했다. 승려 둘은 관졸들을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나리들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은 법사를 거행하는 날이라, 나리들께서 소지하고 계신 사악한 기운이 서린 칼들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리들 때문에 일식 법사의 효력이 달아나면, 누가 책임지실 겁니까?”

승려의 말을 들은 신도들이 다시 한번 마차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유, 어서 멀찌감치 떨어져요.”

“시간이 다 되어 가니까, 어서 가요, 어서요!”

밀치면서 거리를 좁혀오는 인파 때문에 관졸들은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뒷걸음질 치던 관졸들은 급기야 정교랑이 타고 있던 마차에 몸이 부딪혔다.

“무슨 법사라고요?”

여인의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저 여인은 간덩이가 부었나? 빨리 휘장을 내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지!

관졸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왜 길을 막는 거죠? 나는 서둘러 성을 나가 길을 재촉해야 해요. 내 길을 막는 게, 당신들인가요?”

정교랑이 승려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두 승려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시종들이 다시 그들을 막아섰다.

“시주님, 급히 성을 나가야 한다고요?”

두 승려는 정교랑의 온몸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정교랑이 입은 옷은 품이 크고 소매가 넓었지만, 얇은 여름옷인지라 몸의 굴곡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아니면, 시주님이 마차에서 내려 우리 사부님께 여쭤보는 건 어떻습니까?”

“감히 어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반근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허, 아가씨. 대사님께서 좋은 뜻에서 말씀하신 건데, 뭘 그리 사납게 굴어?”

“누가 아니래. 저게 무슨 태도야? 대사님께 불경하게!”

“영덕(寧德) 대사님을 뵐 기회가 얼마나 귀한 건데, 굴러들어온 복을 아낄 줄 모르네.”

주위에 몰려 있던 신도들이 반근과 시종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불만의 말들을 뱉었다. 두 승려는 보란 듯이 반근과 시종들에게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근은 두 승려의 면상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반근이 따지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좋아요.”

정교랑이 마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진짜 가신다고?

반근이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정교랑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아씨.”

반근이 다급하게 정교랑을 불렀지만, 정교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반근, 넌 여기서 기다려.”

정교랑이 옆에 있던 시종 한 명에게 눈짓했다.

“날 따라와.”

시종이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정교랑 가까이서 그녀를 호위했다. 두 승려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히히 웃었다.

승려들이 길을 안내하자, 빽빽하게 서 있던 신도들이 양 갈래로 갈라지면서 길을 터 주었다.

제단 위에 앉아 있던 노승은 시종일관 눈을 내리깔고 불경을 읊었다. 그는 정교랑 일행이 일으킨 소란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두 승려가 제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과 시종만 제단 위로 보냈다. 제단 위에 앉아 있던 노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성벽 위에 있던 관리들은 속이 타들어 갔다. 한 대인이 성벽을 짚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여인은 도대체 뭘 하려는 게야? 왜 저렇게 철이 없어?”

“대인, 저 중놈한테 해코지당한 여인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저 여인의 말씨를 보아서는 타향 사람인 것 같은데, 친척도 없는 타지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피해를 봐도 말할 곳이 없을 겁니다.”

하급 관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제단 쪽을 가리켰다.

“어서, 어서 당장 사람을 보내거라. 일단 저 여인한테 성을 나가지 말고, 어디든 잠깐 숨어 있으라고 해. 잠시만 기다리면 되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저러는 게야! 중놈들의 기세가 저리 드센데, 뭘 어쩌려고!”

한 대인은 제단 위로 올라가는 여인이 걱정되다 못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수하에게 지시를 마친 한 대인이 다시 제단 위로 시선을 돌렸을 무렵, 제단 위에 있던 노승은 고개를 들어 그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주님, 무슨 일이신지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노승이 친절하게 물었다. 하지만 정교랑을 쳐다보는 순간 그의 눈빛에 비친 음탕함은 숨길 수 없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저 눈빛.

정교랑 옆에 서 있던 시종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성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당신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정교랑이 물었다.

“시주님, 오늘은 일식이 있는 불길한 날입니다. 정오에 법사를 거행하지 않으면, 복을 빌어 백성을 구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시주님도 잠시 기다렸다가, 법사가 끝난 후에 길을 재촉하심은 어떻습니까?”

노승이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님, 난 불교 신자가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성인의 학문을 익힌지라, 요괴나 귀신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불길하다는 말도 믿지 않아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하고는 노승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내가 대사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하나입니다. 내가 성을 나가는 것을 허락할 건가요, 말 건가요?”

“나무아미타불. 시주님, 부처님께 불경을 저지른다면, 축생도(畜生道)에 드실 겁니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노승이 측은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사님,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시주님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여기 있는 모두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노승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면서 손을 살짝 들었다. 그 손짓을 본 신도들은 환호하면서 그를 향해 경건하게 큰절을 올렸다.

노승이 다시 정교랑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번 법사는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겁니다. 만백성의 복을 위한 일인데, 시주님의 편의를 위해 제단을 철거한다는 것은 이 많은 사람의 복을 무시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시종은 노승의 말이 입에서 입을 통해 뒤쪽으로 전해지면서 인파가 들썩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저놈이 감히 아씨를 위협하고 겁을 주다니.

시종은 마차가 있는 쪽을 내다보았지만, 좀 전에 자신이 걸어왔던 길은 이미 신도들로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시종은 조심스럽게 정교랑 근처로 가서 칼이 있는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았다.

“대사님, 복을 빌기 위해 기도한다는 말이 참 우습네요. 악재도 없는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나요?”

정교랑이 말했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던 노승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이 여인은 다른 여인들과는 확연히 달라. 다른 여인들이었다면 벌써 겁을 먹고 순순히 내가 하라는 대로 따랐을 텐데.

좋아, 좋아. 색다른 재미가 있네.

“시주님, 그 말은 무슨 뜻인지요?”

노승의 질문에 정교랑이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대사님도 천문과 역법에 통달했을 테니, 오늘 일식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겠죠?”

뭐라고?

깜짝 놀란 노승이 흠칫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정교랑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시종에게 명했다.

“죽여.”

노승의 바로 앞에 서 있던 시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서걱 소리와 함께 노승의 목을 베었다.

잘린 노승의 머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손을 들어 방어할 새도 없었다. 댕강 잘린 노승의 머리가 제단 위로 떨어지고,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정교랑이 걱정되어 미간을 찌푸린 채 성벽 위를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던 한 대인은 제단 위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이 떡 벌어진 한 대인은 숨을 쉬는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세상에나,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펄펄 끓는 기름이 가득한 솥에 물을 한 바가지 쏟아부은 것처럼, 성문 앞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귀가 찢어질 듯한 신도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반강현의 하늘을 갈랐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한 대인은 성벽을 짚으면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여인이 아니라, 금강야차(金剛夜叉)잖아!

머리 없는 시신이 제단 위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울컥울컥 피를 내뿜었다. 노승의 머리는 데굴데굴 구르다가 층계 아래로 떨어져 제단 앞에 있던 한 신도의 발치에 멈췄다. 정신도 못 차린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아낙이 멍하니 노승의 머리를 쳐다보다가 악 소리를 내지르며 혼절했다.

성문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사람들과 제단 쪽으로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성문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만큼 반근과 시종들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인파를 뚫고 서둘러 제단 앞으로 가고 싶었지만, 양쪽에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반근과 시종들은 제단 주위로 파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만 있어야 했다.

“아씨, 죽, 죽이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보기와는 다르게 이 중놈이 백성들한테 꽤 위신 있어 보이는데.”

시종이 정교랑에게 조심스레 말하자 정교랑이 시종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시종이 놀라서 흠칫했다.

평소 웬만한 일엔 웃지도 않으시던 아씨인데.

다른 일도 아니고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 웃다니. 우리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 마음먹은 저 사람들 앞에서.

“손이 빠르더구나. 마음에 들어.”

정교랑이 말했다.

응?

시종은 또 한 번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정교랑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인파를 쳐다보았다.

“마귀야! 마귀!”

제단 아래에 있던 승려들이 시뻘게진 눈으로 정교랑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들은 정교랑을 찢어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지만, 제단 위에 놓인 섬뜩한 시신과 제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머리 때문에 선뜻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제단 주위로 몰려왔던 신도들도 겁에 질려 차마 더 이상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무려 살인이야, 살인! 칼을 휘둘러 목을 베다니! 게다가 아무리 용감한 사내라도 살인 앞에서는 낯빛이 변하기 마련인데, 저 여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심지어 가벼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어!

도, 도, 도대체 저게 뭐야?

“마귀! 마귀!”

“때려죽여!”

“불태워 버려!”

분노로 가득 찬 외침이 제단 앞에 울려 퍼졌다.

“틀렸어요. 마귀는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죠.”

정교랑은 핏대가 잔뜩 선 사람들을 보고도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제단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법사를 집도할 때 쓰는 방석을 발로 차서 제단 아래로 떨어트렸다.

“일식은, 이자가 불러올 거니까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묻힐까 봐, 시종이 정교랑의 말을 한마디씩 큰 소리로 복창했다.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시종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뒷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정교랑의 말이 번져 나가자, 현장의 분위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뭐라고? 영덕 대사님이 마귀라고?

영덕 대사님이 일식을 불러올 거라고?

“헛소리하지 마시오!”

인파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승려들이 겨우 한곳에 모였다. 혼자 있을 때 쭈뼛거리며 나서지 못했던 모습과는 달리, 한곳에 모인 승려들은 기합을 외치며 제단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시종은 팔을 올리고 칼날을 바깥으로 향하게 들었다. 칼날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노승의 피가 묻어 있었다.

서너 명쯤은 혼자서 거뜬히 상대할 수 있어.

시종이 앞쪽을 내다보자, 자신의 동료들이 미친 사람처럼 눈이 뒤집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조금만 버티면, 아씨께서는 무사하실 거야.

“이 마귀는, 오직 자신만이 일식을 막을 수 있다고 했지요. 하지만 이자는 일식을 막을 수 없어요. 내가 이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정오가 지난 뒤에 분명히 일식이 나타났을 거예요.”

뭐라고?

제단 위로 달려들던 승려들이 흠칫하며 얼굴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제단 위에 서 있는 정교랑을 올려다보았다.

헛소리.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돌려 곁눈질로 승려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마귀를 죽였으니, 오늘은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못 믿겠으면, 다들 여기서 정오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기도하지 않고, 향을 피우지 않고, 불경을 읽지 않아도, 천구(天狗: 일식·월식을 일으키는 흉신凶神이 사는 별)는 알아서 몸을 숨길 겁니다.”

정교랑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천천히 말했다.

정말이야?

제단 위로 이어진 층계에 멈춰 서 있던 승려들이 경악했다. 그들은 할 말을 잃고 눈을 크게 떴다. 시종은 재빨리 정교랑이 했던 말을 몇 번이고 큰 소리로 복창했다.

“나를 때려죽여야 한다고 목 아프게 외칠 필요 없어요. 난 정오가 지날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요. 일식이 일어난다면, 이 자리에서 내 목을 잘라 단죄하겠습니다.”

정교랑은 자신의 손을 목에다 대고 긋는 시늉을 했다.

혼란스러워하던 백성들은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제단 위에 서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백성들은 웅성대면서 정교랑의 말을 한 번, 또 한 번 뒤로 전했다.

끝이야. 모두 다 끝났어!

승려 두 명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쿵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승려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저 마귀의 말을 믿으면 아니 되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다른 승려가 황급하게 외쳤다.

“천구가 물러나는 것은 우리 사부님께서 밤낮없이 기도했기…….”

승려들의 목소리는 정교랑의 고함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렇게 밤낮없이 기도해서 효과가 있었다면, 오늘은 뭐하러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기도를 올리는 거죠?”

그, 그건 당연히 위신을 쌓기 위해서지. 물론, 말은 그렇게 못하지만.

승려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종은 더 많은 사람이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정교랑의 반문을 계속해서 복창했다.

“사부라는 자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되니까, 백성들을 모아서 도와달라고 하려던 거 아닌가요?”

정교랑이 이어서 물었다.

아니야! 그건 분명 아닌데, 사람들을 왜 모았는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

그,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기엔…….

승려들은 고개를 들어 높은 곳에 서서 위압감을 뿜어내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던 승려들은 입안 가득 느껴지는 쓴맛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단 쪽을 향해 달려가는 수하들을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던 한 대인은 흠칫 놀랐다.

“이건, 저 늙은 중놈이 제 무덤을 판 거라고 봐도 되겠지?”

한 대인이 옆에 있던 수하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아이고 나리, 저 여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을 저질렀다고요! 나리, 저 마귀를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승려 하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가까이 있던 관졸 한 명을 붙잡고 소리쳤다. 관졸은 정교랑의 마차 앞에서 뒷걸음치던 것과 달리,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승려들을 비웃었다.

이제 와서 살인이 일어났다고 관청을 찾아? 전에 네놈들이 거리에서 생사람을 때려죽였을 때는 어떻게 했는데?

“에이, 급할 게 뭐 있소. 저 여인이 자기 목숨을 담보로 큰소리를 쳤으니, 진짜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우리가 지금 다짜고짜 저 여인을 잡아간다면, 백성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요. 저 여인이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우리도 꼭 살인의 죗값을 치르게 하겠소.”

관졸들이 승려들을 흘겨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끝장났네, 끝장났어.

위신이 드높던 사부님이 죽었으니, 백성들이 아무리 격분한다고 해도 사부님이 살아있을 때만큼 한뜻으로 모아 선동할 수는 없을 거야.

더 끔찍한 것은, 저 여인이 사부님을 창으로 삼아 사부님이 스스로 만드신 방패를 찌르고 있다는 사실이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도대체 어쩌다가?

잿빛이 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승려들을 본 관졸들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벽 위 차양 안에서는 한 대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양 앞에 서 있던 하급 관리들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 지었다.

“현존(縣尊: 현령을 높여 부르는 호칭) 대인께서 마지막으로 저리 웃으신 게, 아마 도랑 보수가 완공된 날이었지요?”

“이야,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일 줄 누가 알았겠나?”

관리 중 한 명이 손을 비비며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어쩐지 일식 예측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어. 저 늙은 중놈도 분명히 오늘 일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

이를 알고 있던 사람이 어디 노승 한 명뿐이었으랴. 성벽 위에 서 있는 관리 대부분은 오늘 일식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누가 제단 위로 올라가서 그놈의 목을 벨 수 있었겠소?”

할 수 있었을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숙연해지면서 고개를 저었다.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나? 감히 어떻게.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행에 옮기기에는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저 여인은 분명히 보통내기가 아닐 걸세. 좀 전에 제단으로 가기 전에, 저 여인이 뭐라고 했다던가?”

한 대인이 말했다.

“관졸의 말로는, 중놈이 일식이 있을 거라고 했다는 소리를 듣고 마차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의아하다는 말투로 오늘 일식이 있냐고 되물었고요.”

옆에 있던 관리가 대답했다.

“그럼 말이 되네. 저 여인은 오늘 일식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저렇게 망설임 없이 일을 벌인 게야.”

한 대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천문 역법에 대해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천체력에 통달한 사람이기에 저렇게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거겠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대인,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수하가 작은 소리로 성벽 위에 있던 현감에게 알렸다.

관리들은 속으로 오늘 일식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쉬이 놓이지 않아서 모두 차양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몰려온 건지 모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하자, 성문 앞 분위기는 점점 더 긴장이 고조되었다.

제단 주위에는 승려들 대신 관졸들이 허리를 펴고 지키고 있었고, 죽은 노승의 머리와 몸통은 한곳에 모아 잠시 하얀 천으로 덮어두었다. 노승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위풍당당했던 승려들은 제단 앞 구석에 몰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승려들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변화를 경험한 터였다.

우리가 저런 악운 덩어리의 길을 막은 것일 줄 누가 알았겠어! 저런 짓을 할 줄 알았으면, 제단을 철거해서라도 성 밖으로 내보냈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하늘빛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방울과 징 따위를 손에 쥔 채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정교랑 곁에는 반근이 도착해 있었고, 시종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이곳을 빠져나갈 탈출로를 탐색했다.

마차는 버리고, 말을 타고 빠져나가면 되겠어.

시종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신호를 보냈다. 잔뜩 긴장한 시종들과는 달리, 제단 위에 있는 두 여인은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아씨, 저 위에 올라가서 앉으시는 건 어때요? 그럼 더 위엄 있어 보이지 않겠어요?”

반근이 위쪽을 가리키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정교랑은 제단 꼭대기를 향하는 층계 중턱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위엄은 무엇에 기대서 나오는 게 아니야.”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의 발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반근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너무 심심해요.”

정교랑이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반나절이면 충분해.”

반나절씩이나?

반근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한숨을 쉬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퍼뜩 고개를 들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아씨, 아니면 제가 차를 우려 올까요? 이번에 새로 만든 찻잎이 어떨지 궁금해서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혈흔이 낭자한 제단 위에 향긋한 차향 퍼졌다. 하얀 천으로 덮은 시신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온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여인을 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늘을 까맣게 덮었던 먹구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햇빛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나자 해는 차츰 서쪽으로 기울다가 노을빛을 내뿜으며 성벽을 비추었다. 차와 간식을 다 먹은 정교랑은 옆에 있던 시종들에게도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거대한 재앙이 도래한 듯 잔뜩 긴장한 채 불안에 떨고 있던 백성들은 제단 위의 여유로운 광경을 보고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백성들은 경외감이 사라진 눈빛으로 한쪽 구석에 몰린 승려들을 쳐다보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던 이들은 책상다리로 고쳐 앉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백성들은 일상적인 잡담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법사를 치를 예정이었던 오전과 비교했을 때, 반강현이라는 지명이 쓰인 성벽도, 모여 있던 백성들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신성하고 경외감이 넘쳤던 오전과는 달리, 성문 앞은 떠들썩한 저잣거리처럼 활기가 넘쳤다.

잠시 하늘을 살피던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이 일어나는 것을 본 백성들이 일제히 잡담을 멈추었다.

인산인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성벽 위에 서 있던 관리들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 여인이 자신 덕분에 일식을 면했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또 저 앞에 무릎을 꿇고 저 여인을 신처럼 떠받들 것이다. 좀 전에 죽어 나간 노승을 그리 대했듯이.

어쩌면 백성에게는 그저 숭배할 대상이 필요할 뿐,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곧 해가 저무니까, 여러분도 그만 돌아가세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만 돌아가라고?

고요했던 성벽 앞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관리들은 불안했던 마음을 쓸어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어서 가서 백성들을 설득시켜 중놈들 말에 현혹되지 않게 해라.”

“근처에 있는 승려들도 모조리 잡아들이고. 괜히 남겨두었다가는 또 무슨 말을 지어낼지 몰라.”

“그 중놈이 여태껏 저지른 만행을 백성들한테 공고문으로 알리거라.”

성벽 위에 있던 관리들이 바삐 움직이면서 명령을 하달했다.

날이 밝아오자, 관로 옆에 위치한 평량의 역참이 떠들썩해졌다.

역졸 두 명이 문가에 서서 한 상인이 건네는 역권(驛券)을 받고 있었다. 이쪽 길을 자주 오가는 상인인데, 매일 누구에게서 역권을 얻는지 한 번도 제 돈을 내고 역참에 묵은 적이 없었다. 역참에 묵는 돈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상인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덜 쓰는 게 돈을 버는 셈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골임을 알아본 역졸은 하품을 하며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휘휘 저어 상인을 들여보냈다.

“대산 형제, 밤잠을 설쳤소?”

상인이 역졸에게 친근하게 안부를 물었다.

“말도 마시오. 새벽에 사람들 한 무리가 왔었는데, 먹고 마시고 목욕까지 하겠다고 해서 아주 잠깐 눈을 붙였소.”

역졸이 말했다.

“나 참,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사람을 그리 귀찮게 해?”

상인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역졸의 비위를 맞췄다.

으이구, 역졸이 왜 있겠냐? 밤낮 안 가리고 손님을 모시는 게 네놈의 본분인 것을, 그까짓 걸 힘들다고 투정 부리긴.

상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여인들은 원래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잖아.”

다른 역졸이 말하면서 대산이라고 불린 역졸을 흘겨보았다.

“공짜로 일을 시킨 것도 아닌데 뭘.”

대산은 그제야 헤헤 웃으면서 소매 안에 있는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역시, 돈 있는 사람들이니 역졸들을 마음대로 부렸겠지.

상인이 마차를 끌면서 마당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그의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 큰일!”

역참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목이 굵고 몸이 장대한 남자가 당나귀를 끌면서 역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역졸이 그가 건넨 역권을 확인해 보니, 반강현에 있는 어느 서리의 친척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누군가가 말했다.

“영덕 대사님을 아시오?”

남자가 소리쳤다.

반강 일대에서 영덕 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 지역에도 명성이 자자해서, 어떤 지부 대인은 그를 상전으로 모신다는 소문까지 돈 터였다.

“영덕 대사님께서 새로운 부적을 만드셨습니까?”

“아이고, 빨리 가서 하나 구해와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어찌나 그걸 갖고 싶어 하시는지, 원.”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본 남자가 마른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영덕 대사님이 어제 살해당하셨소.”

남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청천벽력 이상으로 경악했다. 역졸들도 놀라서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헛소리 아니오?”

“영덕 대사님이 살해당할 리가 없잖소!”

점점 더 커지는 논쟁에 역참 안에 있던 이들도 마당으로 나와 구경했다. 남자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자, 사람들은 역참 문이 막힐 정도로 그를 에워쌌다.

소식을 들은 역승도 깜짝 놀라서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든 채 마당 안을 내다보았다. 누군가가 역승의 뒤로 와서 물었다.

“뭘 그렇게 봐요?”

여인이 물었다.

역승이 고개를 돌리자, 나이 어린 몸종이 서 있었다. 역승은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띠고 친절하게 물었다.

“낭자, 일어났어요? 뭐 필요한 거라도?”

“여기 부엌을 좀 써야겠어요.”

반근이 말했다.

“아, 식사는 우리가 준비해 두었는데.”

“아니에요. 저희 아씨는 바깥 음식을 드시지 않으세요.”

반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귀하게 키운 부잣집 따님인가 보네.

역승은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겉으로는 입꼬리를 올리며 옆에 있던 역졸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저기는 왜 저렇게 시끄러운 거예요?”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바깥을 내다보면서 물었다.

“영덕 대사님께서 돌아가셨대요.”

역승은 반근에게 영덕 대사가 누구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듣기로는 어제 일식 법사를 치르기 직전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반근이 아, 하고 대꾸했다.

“살해당한 게 아니라, 보살님 슬하에 있던 금강이 죽인 겁니다. 영덕 대사는 대사님이 아니라 마귀였다고.”

앞쪽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역승의 말을 고쳤다. 역승은 터무니없는 소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에게 손짓했다.

“저리 가시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헛소리가 아니라니까? 어제 영덕 대사가 복을 빌어서 백성들을 구원하겠다고 일식 법사를 치르려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금강이 영덕 대사가 일식을 불러오는 마귀라면서 단칼에 죽여 버렸단 말입니다.”

역승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그는 사건의 전모를 한꺼번에 말해 주었다.

일식이 예정됐다는 관청의 통보를 받았던 역승은 영덕 대사가 일식 법사를 치를 거라는 사실도 미리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식이 일어나지 않자, 역승은 당연히 영덕 대사의 기도 덕분에 일식을 면했다고 생각했다.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서, 마귀로 몰리다니!

“갑, 갑자기 왜 죽임을 당한 거요?”

역승이 다급하게 물었다.

“왜긴 왜겠습니까? 당연히 보살님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셔서 마귀를 물리치신 거지.”

그가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자 역승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그런 말은 어린애 달래는 데나 쓰겠다.

역승이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뒤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역승과 앞에 있던 사람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몸을 돌려 역졸을 따라가려던 어린 몸종이 보였다. 그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게, 누가 길을 막고 있으라나?”

반근이 중얼거리고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자리를 떴다.

길을 막았다고? 누굴 말하는 거야?

반근의 말을 들은 이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곧 마당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마당에서는 영덕 대사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에 대한 기막힌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떠들썩한 논쟁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됐다. 반강현에서 온 손님이 점점 더 많아지자, 분위기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영덕 대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소상해질수록 점점 더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었다.

한 대인이 수하들과 함께 역참에 도착했을 무렵, 논쟁은 영덕 대사의 죽음이 관음보살님이 인간계에 내려와 마귀를 없앤 것으로 결론이 났다.

“댁들, 혹시 그건 봤소? 그 여인이 마귀를 죽이고 나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그 여인 뒤로 관음보살님의 후광이 막…….”

“어? 잠깐만. 왜 갑자기 여인이라고 하는 거요? 금강이라고 하지 않았소?”

“관음보살님의 응신(應身: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만 해도 서른두 가지인데, 보살님이 거느리는 금강이 꼭 남자라는 법은 없잖소?”

“끼어들지 말고 이야기를 좀 끝까지 들어 봅시다. 그 여인이 차를 마시는데 뭐가 어쨌다고?”

“그 여인이 마시던 차가, 사실 차가 아니었다네. 찻잔에 담긴 건 관음보살님의 정병(淨甁: 목이 긴 형태의 물병)에 담긴 감로수였어. 그리고 그 감로수 덕분에 우리가 일식을 면했다고 하더라고.”

듣다 못한 한 대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수하들이 한데 몰려 있는 사람들을 비집고 길을 트자, 그제야 사람들은 한 대인이 온 사실을 알아챘다.

역승이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와 한 대인을 맞이했다. 역승이 한 대인을 부르는 호칭에 사람들의 이목은 한 대인에게로 집중되었다.

현존 대인! 이번 사건의 진상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

사람들이 한 대인을 향해 왁자지껄하게 질문을 던지자, 한 대인은 난처한 기색으로 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역참 대청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간신히 대청 안으로 들어온 한 대인은 아직도 마당에서 관졸들을 붙잡고 사건을 물어보는 사람들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반강현이 제대로 유명해지겠군.

“대인, 찾으시는 분이 있습니까?”

역승이 공손하게 묻자 한 대인이 역승을 향해 몸을 돌리고 대답했다.

“어젯밤에 투숙한 강남 말씨를 가진 여인을 찾고 있네. 시종들은 경성 말씨를 쓰고 있었고, 그들의 행선지 또한 아마도 경성일 걸세. 어리고, 어, 어여쁜 여인이었네.”

역승은 한 대인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있습니다, 있어요. 어제 새벽에 도착한 분이지요. 상등 방에 묵고 있습니다.”

역승이 한 대인에게 길을 안내하고자 앞장섰지만, 한 대인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알아서 가겠네.”

한 대인이 말했다.

신분이 어마어마한 분인가 보네.

역승이 어색하게 걸음을 멈추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한 대인이 걸음을 막 떼려던 찰나, 역승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인, 영덕 대사님은 정말로 살해당하신 겁니까?”

한 대인이 그를 잠시 쳐다보고는 음, 하고 대꾸했다.

“왜 살해당했습니까? 왜요?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 지어졌고요?”

역승이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냈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던 한 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눈이 있으면서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거겠지.”

무슨 뜻이지?

한 대인의 의미심장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역승은 의아한 얼굴로 한 대인의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대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곧장 상등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모두 앞쪽 마당에 몰려 있어서인지, 상등 방이 있는 뒷마당은 매우 조용했다. 한 대인이 수하들을 이끌고 상등 방에 가까이 가자, 회랑 아래 서 있던 시종들이 한 대인을 막아섰다.

“이분은 반강현 현존 한 대인입니다.”

관졸이 서둘러 소개했다. 다른 때였다면, 감히 현존 대인의 앞을 막느냐고 호통을 쳤겠지만, 이 사람들 앞에서는 어쩐지 자연스레 공손한 태도가 나왔다.

대낮에 말 한마디로 영덕 대사를 죽인 사람들이야.

얼마나 큰 용기가 있어야 그런 일을 감행할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잖아. 심지어 그 사람들은 영덕 대사에게 미쳐 있는 신도들이었고, 영덕 대사가 일식을 면하게 한다는 기도를 보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어.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돼도 쉽사리 칼을 휘두르기 힘들 텐데, 이 사람들은 그 세 가지가 모두 겹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였지.

관졸들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믿었다.

관음보살님의 금강임이 분명해. 그러니 그렇게 깔끔하게 마귀를 해치울 수 있었겠지.

방문이 열리고, 찬합을 들고 밖으로 나오던 반근이 한 대인을 보더니 가볍게 예를 올렸다.

한 대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방에 앉아 있던 여인이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낭자.”

한 대인이 정교랑을 향해 답례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한 대인은 그제야 정교랑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당시 성벽 위에 있었던 한 대인은 정교랑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멀리서 보이는 여인의 자태와 관졸들의 설명을 듣고 정교랑이 미인이리라 짐작은 했다. 그리고 지금 가까이에서 정교랑의 얼굴을 본 한 대인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내심 감탄했다.

웃으면서 담소나 나누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이 여인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고. 게다가 피가 낭자한 시신 앞에서 평온하게 차를 마셨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게 아니었다면, 절대로 믿을 수 없었을 거야.

정말로 이 여인은, 보살님이 인간계에 내려보낸 금강인가?

“말을 꺼내기도 부끄럽소만.”

한 대인이 한숨을 쉬면서 운을 뗐다.

“거두절미하고, 오늘은 낭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자 이렇게 왔소. 우리 대신 반강현의 근심을 없애 주어서 참으로 감사하오.”

한 대인이 공수의 예를 표하자, 정교랑이 답례를 하며 한 대인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잠시 한 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 대인은 갑작스러운 정교랑의 주시에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직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언뜻 보아도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바른 여인인데, 어찌 이렇게 무례하게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는 말인가?

“대인께서는 한씨라고 하셨지요. 고향은 어디세요?”

한 대인은 멈칫했지만 정교랑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숙주(肅州)요.”

한 대인의 대답을 듣자,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놀라서 외쳤다.

“엇, 숙주! 한씨?”

날 아는 사람인가?

한 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숙주에 낭자가 아는 사람이 있소?”

한 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인, 굳이 제게 감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중이 저의 길을 막고, 길을 비켜 달라는 청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저를 위협했기에 그리한 것뿐입니다. 대인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니, 대인의 감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요승(妖僧)의 입을 먼저 막지 않았다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겁니다. 제가 복잡한 일은 질색인지라.”

내가 물은 것은 대답하지 않고, 앞선 질문에 대답하네.

노승을 죽인 이유가, 복잡한 일을 싫어해서라.

하긴, 그 노승도 어제 일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 이 여인이 했던 말을 똑같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할 기회가 없지.

이 여인이 갑작스럽게 노승을 죽이지 않고, 그가 몇 마디 더 하게 놔뒀더라면, 정말로 일이 복잡해졌겠군. 그리됐다면, 아마 이 여인도 지금쯤 반강현에 발이 묶여 있었을 터.

이 여인은 지략과 용기를 겸비했고, 일 처리까지 깔끔해. 분명히 보통 집안 출신이 아닐 것이야.

한 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낭자에게 고맙소. 밤새 조사를 해서, 그 요승들이 여태껏 해온 만행을 밝혀냈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오. 현존 대인 소리를 들으면서도 백성을 지키지 못하다니. 이번엔 꼭 그 요승의 세력을 송두리째 뽑아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 하오.”

정교랑은 한 대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 정말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오신 건가요?”

정교랑의 질문에 흠칫 놀란 한 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똑똑한 여인이로구나. 본디 감사 인사만을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만, 지금은 감사 인사만을 위해 온 것이 되었지.

“그렇소. 사죄의 의미로 온 것이기도 하오. 반강현에서 그런 일을 겪게 하다니, 정말 송구할 따름이오.”

정교랑이 한 대인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한씨가 맞네요.”

역시 한씨라고? 무슨 뜻이지?

한 대인이 정교랑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 대인께 기회를 하나 드리지요.”

기회?

한 대인은 정교랑의 말을 더욱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반근, 종이와 붓을 가져와.”

정교랑이 말하자 반근이 곧바로 종이와 붓을 가져와 먹을 갈았다. 한 대인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반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네.

한 대인이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정교랑은 글씨 한 줄을 쓰고 붓을 거둔 채 먹을 말리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잘 쓰시기 바랄게요. 대인, 이거면, 요승이 백성들을 현혹했던 일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정교랑이 종이를 건네면서 말했다. 종이를 건네받은 한 대인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종이에 쓰인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종이 위에 쓰인 것을 본 한 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진짜야, 가짜야?

-용기-

한 대인이 관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을 무렵이었다. 관청 안에는 아직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한 대인이 돌아온 것을 본 관리들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대인, 그 여인은 잡았습니까?”

관리들의 물음에 한 대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네.”

한 대인은 잡았냐는 물음에 찾았다는 대답만 하고는, 승려들을 다 잡아들였냐고 물었다.

“승려들은 다 잡아들였는데, 영덕 대사와 친분이 있던 무뢰배들이 이 틈을 타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현승(縣丞: 현의 부지사)이 대답했다.

문제가 심각하긴 하군.

한 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이 이제 막 시작되긴 했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백성들이 불안해할 겁니다.”

옆에 있던 서리가 말했다.

“그러게요. 그 여인은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홱 가 버리다니, 우리더러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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