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난 거야?
하루 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따뜻한 집을 떠난 서무수 형제들은 취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성보(城堡: 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만든 소규모 요새)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무수는 성보 아래에 빽빽하게 서 있는 적군들을 쳐다보았다.
알록달록하고 이상한 글씨가 쓰인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변방의 병사들은 그 깃발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 깃발들은 서쪽 오랑캐 왕의 친숙부가 총괄하는 정예병 부대의 것이었다.
“저게 바로 그 늙다리의 부대구나.”
서봉추가 한쪽에서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피와 흙이 한데 섞여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우리도 드디어 견문을 좀 넓히겠네.”
서봉추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 드디어 견문을 좀 넓혀볼 기회가 생겼구나.
성보 군영에 있는 병사들은 오랑캐 정예병들과 맞서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서무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빽빽하게 서 있는 적군들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물밀 틈 없이 메워진 적군 진영은 그야말로 온천지를 뒤덮을 정도였다. 말과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제자리에서 대기 중인 병사들 외에도 오랑캐 기마병들이 먼지 바람을 일으키면서 말을 타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오랑캐들이 내는 말굽 소리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폭우 소리와 같았다.
셀 수 없어도 세야 해!
서무수는 눈을 부릅뜨고 적군의 수를 헤아렸다.
“몇이야?”
범강림이 물었다.
“육천입니다.”
서무수의 대답을 들은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썩을 놈의 새끼! 그 조가 놈, 우리한테 후방에서 포위 공격하라며, 오랑캐 놈들의 혼을 쏙 빼놓겠다더니. 에라이, 대체 누구의 혼을 빼놓겠단 거야? 대체 어디에서 들어온 정보야? 오랑캐의 주력군이 왜 여기 나타났느냔 말이야!”
장수 하나가 욕을 해대며 불안한 듯 이리저리 서성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거 아니야? 오랑캐의 주력이 왜 여기에 와 있냐고! 대체 왜!”
장수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인,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대인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서무수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말했다.
장수는 걸음을 멈추고 뒤쪽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데려온 병사 수백을 제외하면, 성보 안에는 채 천 명도 안 되는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성보 안에 있는 잡역부들 이백 명까지 다 합쳐 봤자, 고작 이천이었다. 좀 전에 서무수가 말한 육천 명의 적군이 떠오르자 장수의 안색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 갔다.
“봉화에 불을 붙였느냐?”
장수의 물음에 수하가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럼, 그럼 철수하자.”
장수가 말했다.
“하지만 대인, 지금 철수한다면 후방에 있는 부대가 준비할 시간이 충분치 않을 겁니다.”
서무수 형제들이 지키고 있는 성보는 용곡성의 요충지였다. 만약 적군이 이곳을 뚫는다면, 용곡성 전체를 뚫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지금 철수할 경우, 잘못된 정보를 듣고 다른 방향을 향해 응전 태세를 갖추고 있을 부대들로서는 발가벗은 등을 적에게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될 터였다.
물론 장수도 그런 끔찍한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지만, 여기에 남는다고 해도 끔찍한 결과를 마주할 게 뻔했다.
“그건 다 조성(趙成) 그자의 판단 착오로 빚어진 결과다.”
장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간다고 해도, 모든 잘못은 명령을 내린 조성에게 있었다.
서무수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 그래도 저희가 여기 남아 좀 더 버텨야 합니다. 전령병도 돌아왔고 봉화도 올렸으니, 조 장군의 부대도 한 시진 정도라면 준비를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서무수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성보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성을 두고 방어하며 싸우는 것이니, 절반의 승산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오랑캐들이라 공성전에는 매우 취약해.
이건 무모한 도전이자 엄청난 공을 세울 기회이기도 했다. 용곡성을 지켜낸 주 대인이 그랬던 것처럼.
장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주 대인께서도 이천 명 남짓한 병력으로 용곡성을 지켜내셨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나! 우리가 수적 열세라고는 하나 딱 한 시진만 막아내면 돼. 오랑캐 놈들한테 똑똑히 알려주자고! 우리 진영은 절대로 뚫리지 않고, 우리가 지키는 성도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는 걸!”
“대인, 대인!”
용곡성 북쪽에 있던 유규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뱅글뱅글 돌다가, 지나가던 장수를 보고는 덥석 붙잡았다.
“이제 지원군을 보내도 되죠?”
장수는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유규를 흘겨보았다.
“지원군을 보내긴 개뿔!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라!”
“대인, 하지만 방(方) 시금(侍禁: 관직명)의 부대가…….”
유규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장수는 호통을 쳤다.
“방 시금의 부대가 뭐! 봉화도 올라왔는데, 벌써 도망치고도 남았겠지!”
장수가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떴다. 유규는 초조한 표정으로 장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놈들을 지켜볼 거야. 내가 그놈들을 지켜볼 거라고! 그놈들, 아무 데도 도망치지 못해!”
유규가 중얼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망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막 안. 주육낭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천막 안의 모든 시선이 주육낭에게 집중됐다. 주육낭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장수가 그에게 앉으라는 눈치를 줬다.
“육낭, 앉거라.”
총괄로 보이는 관료는 주육낭의 행동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저 아이가 자네 주씨 가문의 후예인가?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방 시금의 부대는 바로 성보를 버리고 철수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육낭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모래로 만든 눈앞의 지형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리가 너무 짧습니다. 그쪽에서 봉화를 올리고 전령병을 보냈다지만, 전령병이 오가는 시간은 우리가 준비를 마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이 점은 오랑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방 시금의 부대도 알고 있겠죠. 그러니 그들은 절대 성보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시간을 끌고 있을 겁니다.”
“전령병의 말로는 오랑캐가 최소 사천이라는데, 성보에 남은 병력은 이천도 안 될 걸세.”
한 장수의 말에 주육낭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우리 군은 절대 적군이 많다고 해서 겁먹을 사내들이 아닙니다.”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된 그놈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이건 엄청난 기회야. 너희가 큰 공을 세울 엄청난 기회!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너희들, 꼭 버텨야 한다!
주육낭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전방에 서 있는 여섯 병사의 손은 끊임없이 화살을 올리고 활시위를 당기며 바삐 움직였다. 성벽 위에서부터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들이 성 아래에 있는 방패와 철갑옷들을 뚫자, 아래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원산 형제들의 궁술이 엄청나군.”
방 시금이 성문 위에서 말했다.
어쩌면 정말 한 시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방 시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앞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수하 한 명이 재빨리 화살을 쳐내자, 방 시금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화살은 바닥에 떨어지며 방 시금의 정강이를 세게 쳤다.
방 시금은 화살에 맞은 정강이가 몹시 아팠다.
역시 오랑캐 왕족의 정예병다워. 궁술이 남달라!
말을 타고 괴성을 지르면서 성벽 아래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오랑캐들을 보자, 방 시금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끝도 없이 펼쳐진 적진을 내다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어쩌면, 한 시진은 너무 긴 시간일지도 모르겠네.
성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 때문에, 성벽 아래서 공격을 하던 적군이 잠시 물러났다.
서봉추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놈들!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 주마! 이따 저것들을 못다 챙겨 가는 게 한이네. 저것만 해도 벌써 공이 몇 개야?”
서봉추가 성벽 아래에 널브러진 오랑캐들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봉추,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딸 수 있는 오랑캐의 목은 차고 넘치니까.”
형제 중 하나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형제들의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공성전이 또 한 차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리 작은 성도 뚫지 못한다면 정예병이라고 할 수도 없지.
형제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예병들도 형제들과 같은 생각인지, 조금 전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휘몰아쳤다.
오랑캐들이 쏘아 올리는 화살 때문에 성벽 위의 병사들은 고개를 들기조차 힘들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
범강림이 큰 소리로 물었다.
“금방입니다! 이제 반 시진 남았습니다!”
반 시진이나?
“오늘따라 한 시진이 무척 길게 느껴지네.”
어떤 병사가 말했다. 병사들은 화살 비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성벽 아래로 반격했다.
“화살 더 없어? 화살 좀 줘!”
서봉추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서봉추는 고개를 돌렸다.
성벽 위에 남아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령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방 시금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봉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 대인이 도망쳤다!”
고개를 돌린 다른 병사들도 텅 빈 사령관 자리를 보고는 절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사령관이 도망갔다는 소리에 성벽 위는 일순간 혼란스러워졌다.
두 병졸은 소식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냅다 도망치려 했지만, 적에게 등을 보인 순간 성벽 아래에서 날아온 돌덩이에 맞아 머리통이 산산조각 났다.
“이 비겁한 놈들아!”
서봉추가 바닥에 쓰러진 병졸들을 향해 포효했다.
“모두 집중해! 지금 도망친다 한들, 저 오랑캐 놈들보다 빨리 도망가지는 못한다고! 우리가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해!”
서무수가 혼란스러워하는 병사들을 붙잡고 말했다.
“서 감용, 어떻게 시간을 더 끌라는 말입니까! 지금 남은 병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다른 병졸이 외쳤다. 서무수는 성벽 아래에 홍수처럼 밀려오는 적군들을 내려다보고, 머리 위로 쉼 없이 날아오는 돌덩이와 화살들을 올려다보았다.
“성에 불을 질러!”
서무수가 말했다.
무자비한 발길질에 창고 문이 부서지다시피 열렸다. 케케묵은 먼지와 낡은 바구니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범강림이 손으로 잡동사니를 치워내면서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여기에 기름이 있나?”
범강림이 외쳤다. 서무수와 다른 세 형제도 창고 안으로 들어와 사방을 헤집으면서 방 시금의 사돈 팔촌까지 싸잡아 욕했다.
방 시금이 도망간 탓에, 성보 안에 남아 있던 병졸들과 잡역부들까지 한꺼번에 달아났다. 잡역부들이 없으니 병사들이 물건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서 서둘러! 불이 붙을 만한 건 모조리 꺼내 와, 시간이 없어!”
범강림이 형제들을 재촉했다. 형제들은 성문 앞에 기름통을 꺼내 놓은 뒤, 주위의 민가와 거리에 기름을 뿌렸다.
“어서 가자!”
기름을 얼추 다 뿌린 듯하여, 범강림은 형제들을 재촉해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은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무수 일행이 없는 틈을 타 재빨리 달아났다. 성벽 위에 남은 것이라고는, 도망치다 돌덩이에 맞거나 화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뿐이었다.
오랑캐들이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쿵쿵 울려 퍼지는 충차의 충돌음이 병사들의 심장을 쥐어짰다.
“불을 붙여, 불을!”
범강림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가 손에 쥔 횃불을 아래로 던지자, 기름이 뿌려진 곳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서무수가 갑자기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셋째야, 어디 가는 거야!”
범강림이 소리쳤다.
“아직 한 시진이 안 됐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올라가서 좀 더 버텨 볼게요!”
서무수가 대답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는 여기저기 흩어진 쇠뇌를 모아 일렬로 세웠다.
범강림은 어이, 외치면서 서무수의 뒤를 쫓아갔다. 이미 다른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앞서가던 서봉추와 형제들도 성벽 위로 오르는 범강림을 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벽으로 되돌아왔다.
성벽 위에는 쇠뇌 열 개가 놓였다.
“죽어라, 이놈들아!”
서봉추가 외치면서 쇠뇌를 쏘았다.
서무수와 다른 형제들이 나머지 쇠뇌를 쏘자,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와 함께 성벽 아래로 화살이 우수수 쏟아졌다. 오랑캐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성벽을 부수던 충차도 잠시 멈췄다.
“가자, 어서!”
범강림이 외치자마자, 서무수가 갑자기 그를 옆으로 힘껏 밀쳤다.
“왜 그래?”
바닥에 엎어진 범강림이 고개를 들며 서무수를 올려다보자, 서무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무슨 일 났어?
“형님!”
서봉추가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서무수를 향해 외쳤다. 주위의 형제들도 재빨리 서무수 옆으로 뛰어갔다.
순간, 서무수는 주위의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내려다보았다. 오랑캐의 매서운 화살은 서무수의 살을 찢고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난번에도 이 화살이었지. 이 화살 때문에 형제들과 함께 탈영하고 도망칠 때 병이 났었지.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서무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단지 병일 뿐, 명이 달린 일도 아닌데, 못 고치긴요.
내 명이 여기까지겠지.
내 명줄에는 공을 세워 입신양명하는 게 없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없는 건 어쩔 수가 없지. 그래도 전장에서 눈을 감을 수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해.
“누이한테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전해 줘.”
서무수는 점점 흐릿해지는 형제들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유규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성보 안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시체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전장에서 이보다 더 참혹한 시체도 많이 봤으니까. 유규는 시체들을 뒤적이면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댔다.
그놈들은? 그놈들은 어디 있어? 도망친 거야? 정말로?
“내가 네놈들을 지켜보고 있을 거다! 내가 네놈들을!”
같은 말을 연신 외쳐 대던 유규는 성벽 아래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커다란 머리에 부릅뜬 눈, 거칠게 난 수염.
유규는 떨리는 손으로 서봉추의 몸을 뒤집으려 했지만, 서봉추가 두 팔로 꽉 안은 오랑캐 때문에 뒤집기가 쉽지 않았다. 긴 창 하나가 서봉추와 오랑캐의 몸을 나란히 관통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서봉추가 이 오랑캐를 끌어안고 긴 창을 향해 돌진한 모양이었다.
유규는 두 사람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떼어내지 못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놈들은? 다른 놈들은 어디 갔지?
유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다시피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네놈들을 지켜볼 거다! 내가 지켜볼 거라고!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 다 돌아와! 당장 돌아오라고!
유규가 악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주위에는 거센 밤바람이 불고, 여름 밤하늘에는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꿈인가? 꿈이구나! 다행이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대화 소리, 말이 우는 소리, 횃불이 타는 소리가 유규의 귀에 한꺼번에 들려왔다.
“사상자 수는?”
“오랑캐 머릿수는 얼마나 되고?”
“시신은 구덩이를 파서 화장해.”
“숨이 붙어 있는 자는 열여덟이고, 치료한다면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부상병부터 옮겨.”
사상! 시신!
유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꿈이 아니었어!
유규는 비틀거리면서 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오랑캐들의 시신은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서 각각 한쪽에 쌓아 두었다. 오랑캐들의 수급을 군영으로 가져가야,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무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고, 주위에는 파리와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다른 한쪽에는 아군의 시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랑캐들의 시신과는 달리, 아군의 시신들은 바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내일쯤이면 아군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다 파낼 수 있을 것이다.
유규는 아군의 시신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몸을 휘청거리면서 시체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유규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기어 다니면서 시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주저앉다가 몸을 일으키기를 반복하면서 시신들을 확인했다.
“유규!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다 못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여인네도 아니고 사람 죽은 거 처음 봐? 왜 미친 사람처럼 그래?”
그래. 미칠 게 뭐 있다고.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죽음과 함께여야 해. 죽음이 무서웠다면 벌써 도망쳤겠지.
난 무서운 게 아니야. 내가 왜 죽음을 무서워하겠어. 난 단지, 난 단지…….
“내가 네놈들을 지켜본다고 했잖아! 도망칠 생각하지 마!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고! 어서.”
해가 뜨자, 환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오랑캐의 정예병 부대는 한 번에 십 리 밖까지 퇴각해야만 했다.
간밤의 치열한 전투 때문에 용곡성 병사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오랑캐들이 퇴각한 틈을 타, 군영의 막사를 재정비하고 어젯밤 참전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주육낭은 코 고는 소리가 귓가에 천둥같이 울리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격렬한 전투를 벌인 직후인지라, 신경이 곤두서 있고 긴장이 늦춰지지 않았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에 주육낭은 결국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 한 무리가 말과 함께 군영 안으로 들어오자, 군영 안이 잠시 떠들썩해졌다. 군영 안으로 들어온 사람 중에는 병졸도 있었고 잡역부도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보는 사람이 안쓰러워질 정도로 추레했다.
돌아왔구나!
주육낭은 크게 기뻐하며 사람들 근처로 다가갔다.
한쪽으로 밀려난 병졸과 잡역부들은 적군의 눈을 피해 산을 넘어 길을 크게 돌아오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들은 아예 맨바닥을 자리 삼아 앉거나 드러누워 버렸다.
주육낭이 사람들을 훑어보았지만, 무원산 형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육낭은 그들을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선을 거두었다.
주육낭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서는 장수 하나가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지원군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인.”
지친 기색이 역력한 조 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자네가 아주 잘 해줬어. 성을 수비하면서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 준 덕에 진영을 재정비할 수 있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결과는 아주 끔찍했을 거야. 방 시금, 이번에 자네가 아주 큰 공을 세웠어.”
조 대인이 말했다.
역시 큰 공이었어!
방 시금은 더욱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가슴을 펴고 외쳤다.
“다 대인의 고명하신 가르침 덕분입니다! 소장,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쳐 싸우겠나이다!”
막사 안의 다른 장수와 관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공로와 포상을 내려야 할 자들을 제대로 챙겨 줌세.”
조 대인이 말했다. 천막 문 앞에 서 있던 주육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지원군이 제시간에 도착했나 보군.
주육낭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조 대인이 그를 불러세웠다.
“아 참, 방 시금.”
조 대인이 주육낭을 부르면서 방 시금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주 전치(殿値)에게도 고마워해야 하네. 주 전치가 선두로 기마병을 이끌고 갔었네.”
방 시금이 서둘러 주육낭에게 예를 올렸다.
“같은 아군의 일이니, 스스로를 구한 셈입니다. 인사받을 일이 아닙니다.”
주육낭이 겸손하게 답례했다. 조 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주육낭의 어깨를 탁탁 쳤다.
이번에는 정말 이자의 말이 맞았어. 주 감찰의 말대로 이자를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군. 특히나 이자의 제안에 대해서는 더욱.
조 대인은 주 감찰의 당부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대대로 무장을 해 온 주씨 가문이니, 주씨 가문 출신 장군들의 위신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씨 가문의 다른 장군들의 말을 새겨들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제 갓 서북으로 온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의 말을 귀담아들으라니 조 대인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조 대인에게 말을 전하는 주 감찰도 의구심을 품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경성을 떠나기 전 진소 상공이 당부한 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을 전해야 했다.
진 상공이 당부했다고? 그 어린놈이 진 상공의 신임을 얻은 건가?
조 대인은 그러한 연유로 주육낭이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주육낭의 예상이 옳았고, 방 시금은 기대에 부응해 성보를 수비하며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리고 때맞춰 보낸 지원군 덕분에 방 시금을 무사히 데려왔고, 전투에서도 이길 수 있었다. 덕분에 조 대인이 내렸던 잘못된 지시는 자연스럽게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게 되었다.
아슬아슬했어. 이제 해야 할 일은, 오랑캐들을 완전히 물리치는 것뿐이야.
“어서 가서 쉬게나. 아직 큰 전투가 남아 있어!”
조 대인이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막사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큰 소리로 조 대인의 외침에 호응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반나절이 채 되기도 전에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잠을 자고 있던 장병들과 정찰을 하고 있던 병사들은 재빨리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북소리, 호각 소리와 함께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장사진을 펼쳤다. 전열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적군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천둥 같은 북소리가 한바탕 지나가자, 뱀의 꼬리처럼 휘어지는 진영 사이로 도끼와 장창을 든 기마병들이 홀연히 나타나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비명 소리가 하늘을 가르고, 피비린내가 공기 중에 만연했다.
주육낭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적군의 목을 베었다. 유년 시절 들었던 수많은 전쟁 이야기,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며 무예를 갈고 닦았던 시간, 형제들과 어른들의 조언,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위해 존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육낭이 힘껏 휘두르는 칼과 도끼에 혈흔이 낭자했다.
해가 서쪽으로 질 때쯤, 도처에 깔려 있던 오랑캐들이 종적을 감췄다. 지금 남은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널려 있는 시체와 한쪽에서 목청 높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오랑캐의 머리를 잘라내는 아군 병사들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바닥은 전부 새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게 바로 승리와 공로의 색깔이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붉은 색.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자, 큰 전투로 인한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용곡성 밖으로 구불구불하고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큰 전투를 치르고 성을 지켜낸 병사들을 영접하기 위해 마중을 나온 성안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은 전리품을 실은 수레와 장병을 감격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수레 한가득 실린 오랑캐의 수급과 깃발들을 보며 잔뜩 흥분하여 환호를 질렀다.
전투 중 부상을 입은 주육낭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도 전에 먼저 성안으로 들어왔다.
“전치 대인, 조금만 참으십시오.”
군의의 말과 함께, 주육낭의 몸에서 빼낸 화살촉이 철판 위로 떨어지는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주육낭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나무막대기 하나를 꽉 쥔 채, 군의가 상처 부위에 약을 뿌리고 잡역부가 붕대를 싸매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인, 며칠 쉬시면 나을 겁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군의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물러났다. 전투를 벌일 때마다 부상병이 속출하여 군의는 쉴 틈이 없었다.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옆쪽 천막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군의가 물었다.
“부상병 하나가 죽네 사네 하고 있습니다.”
잡역부가 대답했다.
“저도 시체 더미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텐데, 죽고 싶다고 난리를 쳐? 제 복을 모르는 자로군.”
주육낭의 수하들이 말했다.
“자신의 형제들이 다 죽었으니, 자기도 죽어야 한답니다. 임관보(臨關堡)를 지키며 싸웠던 병사라던데요.”
임관보에서 빠르게 전령병을 보내고, 소수의 병력으로 오랑캐 육천을 상대하며 한 시진 반이나 시간을 끌어 준 덕에 후방에서 전투 준비를 단단히 할 수 있었다. 이천 병력 중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삼백이니, 거의 전멸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임관보의 부상병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내가 가 보겠다.”
주육낭이 돌연 입을 열었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주육낭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대인, 아직 붕대를 다 싸매지 못했는데요.”
주육낭이 팔을 홱 빼고 간 탓에 잡역부는 붕대를 허공에 든 채로 외쳤다.
부상병들이 있는 막사 안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병사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피비린내와 살이 곪아 가는 냄새가 풍겨 왔다.
소란스러운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잡역부와 군의는 밖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안을 쳐다봤다.
“이럴 필요까지야 있나.”
“전장에서 생사는 아무도 모르는 법인데.”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지.”
“아니면, 확 기절시켜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문밖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던 주육낭은 어쩐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비키시오. 주 전치께서 오셨소.”
수하들이 큰 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주육낭에게 길을 터 주었다.
큰 전투에서 승리했으니 장수와 관리들은 기쁨에 취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인데, 품계 있는 무관이 갑자기 부상병을 살피려 여기까지 온다고? 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람들이 문 앞을 비워 줬지만, 주육낭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인, 이쪽으로 드시지요.”
군의가 서둘러 안내했다.
전투에서 다친 부상병들은 정서가 불안정했다. 장애가 생긴 부상병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했다. 이런 때에 지체 높은 무관이 나서서 부상병들을 위로한다면, 그들의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라고 군의는 생각했다.
주육낭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상병을 안치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 탓에, 주육낭이 들어선 이곳은 땔감을 모아두는 고방을 비워 마련한 곳이었다. 비좁은 고방 안에는 부상병 한 명이 누워 있었다.
나무판 위에 누워있는 부상병은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팔에 난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팔뿐만 아니라 머리와 다리에도 큰 상처가 있었다.
“아이고, 이러면 안 되오.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처치도 하지 않고 뒀다가 어쩌려고!”
군의가 소리를 지르며 부상병 앞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누워있는 줄 알았던 부상병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홱 내쳐 군의를 밀어냈다.
“꺼져! 내가 죽겠다는데, 네놈들이 무슨 상관이야! 내 형제들이 다 죽었는데, 나만 살아서 뭐해!”
부상병이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군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부상병의 얼굴을 확인한 주육낭은 머리가 띵해졌다.
“범강림, 지금, 누가 죽었다고 했소?”
주육낭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환영 대열은 아직도 성 밖에서 왁자지껄하게 병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서사근이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다급하게 형제들의 행방을 물었지만, 병사들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서사근은 하는 수 없이 병사들을 제치면서 계속 뒤쪽으로 파고들었다.
성문 앞의 환영 대열이 흩어지고 군대도 모두 성안으로 들어갔지만, 서사근만 성문 앞에 남아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넷째 아주버님, 봉추랑 아주버님들이 왜 안 보이죠?”
“그러게요. 우리 그이는요?”
두 아낙이 서사근의 뒤에 바짝 붙어 물었다.
“임관보에 있었으니까, 지금쯤이면 벌써 성안에 들어갔을 겁니다.”
서사근이 어색한 미소를 짜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럼 우리도 어서 들어가요. 벌써 집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서봉추의 부인이 등에 업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형님, 우리도 빨리 돌아가요.”
두 아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안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서사근은 제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등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수레를 끄는 바퀴 소리에 서사근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사내가 큰길 위로 수레를 끌면서 성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다른 사내 두 명이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서사근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수레를 끄는 사내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사근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봐, 유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제발 좀 그만하라고! 전사자는 모두 구덩이에 묻는 게 원칙인데, 이렇게 시신을 끌고 오는 경우가 어디 있어!”
두 병사가 몹시 답답한 듯 유규에게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내고 있었다. 둘은 꼬박 이틀 밤을 새워 그를 따라다니며 만류했다. 하지만 유규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수레를 끌고 용곡성까지 걸어왔다.
유규는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수레에 실린 시신들 위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낡고 해진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수레가 덜컹거릴 때마다, 덮개 밖으로 나온 다섯 쌍의 발이 흔들렸다.
위주 개석보 수비군 소속 갑대 감용 서무수, 서봉추, 범강림, 범석두, 기병 서사근, 서납월, 교용 범삼축.
못난 놈들아! 탈영할 배짱도 있고, 형제를 방패로 삼을 배짱도 있다면, 이리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감용이란 무엇이더냐?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장수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자 아니더냐! 너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아라!
-우리는 탈영병이 아니오! 우리는 모함을 당한 거요!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도망칠 생각하지 마!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유규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밧줄에 짓무른 어깨의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수레는 범강림의 집 앞에 도착해서 멈춰 섰다. 아낙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부고-
5월 초, 강주부에 무더위가 찾아왔다.
준마 한 마리가 먼지를 휘날리며 거리 위를 내달렸다. 건조하고 뜨거운 날씨에 먼지까지 휘날리니, 행인들은 재빨리 한쪽으로 피했다. 말을 탄 병졸은 무척 급한 소식을 전하러 오는 듯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으로 보였다. 성문을 지키던 관졸들은 말을 멈춰 세우기는커녕, 서둘러 주위에 있던 백성들을 밀치며 길을 터주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급하게 오지? 우리 성은 군영 쪽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텐데.”
“그냥 지나가는 거 아닐까?”
관졸들이 나지막이 속닥이던 중에, 말을 탄 병졸이 말고삐를 휙 잡아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성문 앞에 급히 멈춰 선 말이 앞발을 쳐들며 울부짖었다.
“강주부 정씨, 정씨 가문의 저택은 어디 있소?”
병졸이 큰 소리로 물었다.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관청을 찾는 것도 아니고, 정씨 저택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고? 그럼 관청과 관계된 일이 아닌가 보네?
관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길을 안내했다. 병졸은 관졸들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채찍을 휘둘러 말을 급히 출발시켰다. 거리에 있던 행인들은 돌진해오는 말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길을 비켜 주었다.
“아씨, 큰일 났습니다!”
조 집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택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서찰 한 통이 쥐여 있었다.
마침 회랑 아래에서 대청 문을 열고 있던 반근과 그 안에 있던 정교랑이 조 집사를 쳐다보았다.
큰일이 났다고?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큰일인데?”
“무슨 일이 나든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어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요.”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를 다시 눕히려고 손을 뻗으며 말했다.
“말이야 쉽지.”
정 대노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좋은 일은 당연히 우리와 관련 없겠지만, 나쁜 일이라면 또 모를 일이야.”
정 대노야가 집사에게 어서 말하라고 눈짓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병졸이 대문 앞에서 정가 교랑을 찾으러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정교랑을 찾는다길래 남정에 있는 저택을 알려 줬죠. 혼자 보내기가 영 불안해서 저도 따라가 봤더니, 조 집사가 병졸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병졸이 건넨 서신을 읽더니, 손까지 덜덜 떨었고요.”
집사가 놀란 표정으로 정 대노야에게 말했다.
기고만장하던 조 집사 그놈이 그렇게 놀랄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가 보군.
“그 후로 조 집사가 집에 들어갔고, 집안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집사가 말을 덧붙였다.
울음소리?
“그 바보가 울었단 말인가?”
정 대부인이 서둘러 물었다. 집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문이 닫혀서 누구의 울음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아무튼 여인의 울음소리였어요.”
바보가 울었든 아랫것이 울었든,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쨌든 큰일이 터졌다는 건 확실하군.
정 대노야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댔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주육낭은 천막 안에 앉아 같은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전장에서 들려오던 북소리와 목숨 걸고 싸우는 병사들의 외침, 살갗이 찢기는 소리가 주육낭의 귓가에 맴돌았다.
주육낭은 반나절 내내 같은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에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붓끝에서 언제 묻혔는지도 모를 먹물이 말라 갔다.
주육낭은 서찰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주육낭은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분명 빠른 시일 내에 강주부에 부고가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범강림은 아직 제정신이 아니지만, 말편자로 관직을 얻은 서사근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을 테니 부고를 보냈을 것이다. 다른 병사들의 부고라면 깜깜무소식이거나 한참이 지난 뒤에 집으로 도착하겠지만, 그들과는 달리 돈도 있고 관직도 있는 무원산 형제들의 부고는 분명 곧바로 강주부에 도착할 것이다.
부고에 적힌 말들 외에 내가 또 무슨 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 비통한 일을 다시 적는 것? 그 여인을 위로하는 말?
위로? 지금 상황에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어.
주육낭은 옆에 놓인 붓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가나 싶더니, 결국 팍 소리와 함께 붓이 부러졌다.
정교랑 저택의 대청에서는 여전히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반근은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조 집사는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병풍 앞에 앉아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녀의 시선은 아직 서신을 향해 있었다.
서신에 쓰인 내용은 몹시 간략했다. 무장 집안인 주씨 가문에서 일한 조 집사는 서신에 쓰인 내용을 눈을 감고도 외워낼 수 있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누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와 같은 말들.
정교랑은 손을 들어 서신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범석두, 서무수,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
정교랑은 서신 위에 쓰인 이름을 천천히 내뱉었다. 반근의 울음소리가 통곡으로 변했다.
“아씨, 아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슬픔을 거두세요.”
반근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갔다.
“슬프지 않아.”
정교랑은 손으로 서신 위의 이름들을 매만졌다.
“가서 알아봐. 어떻게 죽은 건지.”
반근은 우느라 정신이 없어 정교랑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 집사는 정교랑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고 밖에 있던 병졸을 불렀다.
부고를 전하러 왔던 병졸은 바깥마당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언제 일어난 일입니까?”
시종 하나가 병졸에게 물었다.
“4월 19일이오.”
병졸이 대답했다.
4월 19일? 오늘이 5월 3일이니까, 고작 열흘 남짓한 시간에 용곡성에서 강주까지 왔다는 말이잖아? 정말 빨리 왔네.
병졸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의 시종들을 쓱 둘러보고는, 따뜻한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갈증을 해소했다.
“서 관구께서 경비를 두둑하게 챙겨 주신 덕분에 오는 내내 말을 바꾸어 가면서 달려왔소이다.”
병졸은 평생 서신을 날라도 벌지 못할 돈을 한 번에 받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연이어 사흘을 달리고 하루 쉬기를 반복하며 짧은 시간 안에 강주부에 도착했다.
시종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원산 형제들과 직접 가까이 지낸 건 아니었기 때문에 깊은 비통함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었기에 왠지 모르게 숙연해졌다.
죽었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니까.
병졸은 잔에 남은 따뜻한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오는 길이 너무 고돼서 그런가.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차는 처음 먹어 보는 것 같네.
병졸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 문간방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네. 장식들이 소박해 보이지만, 초라해 보이지가 않아. 마시라고 내준 차도 꽤 맛있고, 탁자에 놓인 과일도 무척 싱싱해 보여. 예전에 들렀던 가난한 집안처럼 인색한 분위기도 아니지만, 부잣집처럼 호화롭지도 않아.
이 저택은 크고 깔끔해 보이는군. 골목에 들어오면서 보니 새로 지은 것 같은 집은 몇 채 없고, 대부분 부서지고 낡아빠진 것들뿐이었는데.
병졸이 의아해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근데 그 사람들은 무원산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어떻게 이런 부유해 보이는 곳에 의남매를 맺은 누이가 있는 거지?
병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와중에 조 집사가 보낸 시종이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병졸은 늘 그랬듯 서신의 주인이 자신을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방으로 들어가 쉬지 않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병졸은 예의를 지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사환을 따라 뒷마당을 지나쳤다. 뜻밖에도 부고를 받은 다른 집들과는 달리 이 집은 매우 조용했다. 병졸의 귓가에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곡 소리는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적막감만 맴돌았다.
핏줄이 아니라 의로 맺어진 관계라서 그런가?
병졸은 회랑 아래에 서서 예를 올렸다.
“앉아요.”
방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졸은 고개를 들지 않고 회랑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죠?”
부고를 받은 집에서 항상 나오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병졸은 무원산 형제들이 죽었던 날의 전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보통은 사망자의 사인이 된 전술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알려주는 편이지만, 서사근이 두둑하게 챙겨 준 돈을 생각해서인지 병졸은 조금 더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병졸이 이야기를 하던 중 여인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울어야지, 우는 게 맞아. 사람이 죽었는데, 우는 게 정상이지. 비록 피붙이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의남매잖아.
“이번 전투로 부상자와 사상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범석두 등 다섯 병사는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였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병졸이 허리를 숙이며 상투적인 말로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 말인즉슨, 그들이 성보를 수비하며 싸운 것이 이번 전투의 승패를 뒤바꿨다는 말인가요?”
여인이 물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닌데? 저 여인이 우는 게 아니었나?
병졸이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원래는 후방에서 기습을 준비하던 부대였는데, 오랑캐 정예병 부대가 그쪽을 치는 바람에……. 그런데도 그들은 바로 도망치지 않고 봉화를 올리고 전령병을 보내 본영에 있던 부대가 재정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수적으로 몇 배나 차이나는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니, 가히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며 역경에 맞서 싸웠으니, 가치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지요.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네요.”
여인이 말했다.
“네, 조정의 포상도 곧 내려질 겁니다. 소인이 급하게 오느라 어떤 포상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위로금도 같이 내려올 거고요. 조정의 위로금이 올랐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인당 돈 다섯 관에 비단 여섯 필…….”
집안의 분위기에서 부고로 인한 비통함이 묻어나지 않아서인지, 병졸은 저도 모르게 괜한 말을 덧붙였다. 병졸이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병졸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입을 닫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대청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여인은 짙은 색 옷에 꽃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꽃처럼 아름다운 묘령의 소녀였다.
병졸은 병풍 앞에 있던 소녀를 감히 더 보지 못하고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소녀의 옆에 엎드려 통곡하는 시녀가 보였다.
울던 여인이 저 시녀였구나.
“그깟 돈이나 비단이 무슨 대수라고요! 도련님들의 한 달 치 임금만 해도 돈이 얼마고, 비단이 몇 필인데! 셀 수도 없이 많아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아이고, 하느님!”
하느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느님, 정말 이럴 수는 없습니다!
남정의 골목에 숨어 머리만 내밀고 정교랑의 저택을 몰래 쳐다보던 이가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아이 때문에 깜짝 놀랐다.
“뭐 하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소리쳤다.
사환이 어린아이를 흘겨보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썩 꺼져! 꺼지라고!”
사환이 일부러 더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다그쳤다.
예전에는 사환을 보기만 해도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 내던 어린아이가 이번에는 느닷없이 돌멩이를 주워 사환을 향해 던졌다. 사환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어린아이에게 욕을 해대며 도망쳤다.
“상을 치르고 있다고?”
정 대노야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예. 집에 있던 도부(桃符: 악귀를 쫓는 용도의 부적)도 전부 가려 놓았고, 사환들도 모두 허리를 매듭지어 묶었습니다.”
집사가 대답했다. 정 대부인이 화를 내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 감히 누굴 저주하는 게야! 그 지경으로 난리를 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우리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정 대부인이 소리치자, 정 대노야가 부인을 흘겨보았다.
“그만 좀 하시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난리부터 피울 셈이오? 얼마나 더 피해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고 호통쳤다.
“지금 피해 보게 된 것이 다 내 탓이라는 말이에요?”
정 대부인이 곧바로 따져 물었다.
여인네들은 역시 눈치가 빨라.
정 대노야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사낭을 시켜서 알아보게 해라.”
정 대노야는 대부인의 말을 무시한 채 집사에게 지시했다.
집사는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러났다. 집사가 마당을 벗어나기도 전에 안에서 말다툼 소리가 새어 나왔다.
“똑바로 말해요.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에요? 당신과 이방 내외의 잘못이잖아요.”
“부인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괜히 혼자서 난리를 치고 그러시오.”
“지금 끝까지 내 잘못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더는 이 집에 못 있겠으니, 내가 집을 나갈게요!”
“나가? 어디로 나갈 건데? 당신 친정 말이오? 그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고?”
정 대부인이 울음을 터트리자, 집사는 서둘러 도망치다시피 마당을 벗어났다.
정사낭은 뛰는 듯 빠른 걸음으로 정교랑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놓여 있던 알록달록한 장식들은 모두 치워져 있었고, 회랑 아래에 앉아 있던 반근은 하얀 상복을 조금 뜯어내어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무슨 일 생겼느냐?”
정사낭이 반근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씨와 의남매를 맺었던 오라버니들께서…….”
반근이 울먹였다.
“전에 말했던 그 도련님들 말이냐?”
정사낭이 물었다.
작년 새해 정사낭이 입었던 새 옷들은 전부 그들을 위해 준비했지만 끝내 쓰이지 못한 것들이었다. 경성에 있는 시녀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들도 있다 보니, 정사낭은 반근이 말하는 도련님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아씨께서 가장 의지하시는 오라버니들이에요. 혈육보다도 더 가까운 분들이죠. 같이 늑대도 죽였고…….”
같이 사람도 죽였죠.
반근이 말을 하다 말고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모두 없어졌어. 정말로 다 없어졌어. 어떻게 그리 한순간에 모두 없어질 수 있지?
반근은 지금이 제발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조금만 지나면 이 슬픈 악몽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구나.”
정사낭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변방의 전란 속에서 사상자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때는 잘 지냈다고 들었는데, 왜 다시 입대한 거야? 경성에 남아 있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정사낭이 물었다. 반근이 애끓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넷째 공자님, 저희 아씨께서 그분들을 내모신 게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서 그러신 게 아니라…….”
반근이 다급하게 말하다가 돌연 말을 멈췄다. 자신이 뱉은 말에 반근 스스로 화들짝 놀랐고, 정사낭도 덩달아 흠칫했다.
그래서 아씨께서는 더욱 자책하고, 더욱 슬퍼하시는 걸까? 만약 도련님들이 경성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반근이 후드득 눈물을 떨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뜻은 그게 아니라…….”
반근은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가린 채 통곡했다. 정사낭이 서둘러 반근을 다독였다.
“알아, 알아. 누이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누이는 아마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걸 알았기에 그랬을 테지. 그분들은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을 거야. 자고로, 세상만사는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 힘든 법이잖아.”
반근은 힘겹게 울음을 삼키며 정사낭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누이는?”
정사낭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반근과 한참이나 대화를 주고받았는데도, 정교랑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씨께서는 정평을 찾아가셨어요. 저는 서북으로 보낼 장례 물품을 준비하느라 집에 있었고, 아마 조 집사가 아씨와 함께 있을 거예요.”
정평은 또 누구지? 누이는 어쩐지 우리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단 말이야.
정사낭이 속으로 생각했다.
문밖에 선 조 집사가 안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정평과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아씨께서는 저놈을 볼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시잖습니까. 하필 오늘 같은 날 저놈을 보게 되면 더 안 좋지 않을까요.”
시종이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이독치독(以毒治毒)이 될지도 몰라.”
조 집사가 다시 한번 안쪽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게 뭐 그리 슬픈 일이라고.”
정평이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이 여인도 참 웃긴 사람이야. 정씨 일족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막강한 사람인데, 어쩔 땐 꼭 철이 덜 든 아이처럼 나한테 달려와서 되지도 않는 질문을 한단 말이지.
“슬픈 게 아니에요.”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손으로 눈가를 만졌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생사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애초에 그녀에게 이곳 사람들은 전부…… 죽은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교랑은 마음 한쪽이 몹시 답답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답답함 때문에 정교랑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렇잖습니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이니, 그들은 원하던 바를 이룬 거예요. 슬퍼할 게 뭐 있습니까. 병사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니, 이런 결말도 충분히 예상했겠죠.”
정평이 말했다.
“하지만 죽기 위해 병사가 되려는 사람은 없잖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우리 정씨 가문이 새로운 황제를 보필했던 건, 멸족이나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세상에 마땅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아! 이렇게 말 한마디로 가볍게 정리되는 죽음은 없다고.
“에이, 그건 좀 틀린 말 같네요.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겨야죠.”
정평의 말에 정교랑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집안에서 가장 영민한 사람이었다. 한 번 보면 즉시 깨우치고,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다. 남들은 일 년을 걸려 배울 것을 한 달 만에 익혔다. 하지만 선조 앞에선 언제나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정교랑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혈육을 만나서인가? 삼백 년을 거스르긴 했지만, 그래도 혈육이니까.
“그자들은 자신이 왜 병사가 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러니 그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래서 그들의 죽음이 값지고 의미 있다고 하는 겁니다.”
값진 죽음. 저도 알아요, 값진 죽음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걸. 오라버니들은 용감하게 전장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어요. 이름과 공로를 남기고 그에 상응하는 포상을 받았으니, 허투루 산 건 아니지요.
하지만 제 아버지는요? 제 혈육과 친구들은요? 다 죽었어요. 모조리 다 죽어 버렸다고요. 그들도 오라버니들처럼 용감하게 맞서 싸웠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놈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어요.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한 채로 죽고, 그간 해 왔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했습니다. 값진 죽음이 아니었죠.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허투루 산 것이 아닌가요?
“응? 뭐라고요?”
정평은 귀를 기울였지만, 정교랑이 웅얼거리는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고, 그간 해 온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하면 허투루 산 거 아니냐고요?”
정평이 들은 것을 되묻자,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아닌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정평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원하는 바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렇죠. 좀 전에 말했잖아요.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를 알면 된다고. 낭자가 말한 그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던 겁니까?”
“아니요. 우리는 잘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새로운 황제를 잘 보필해서, 대업을 이루려 했죠.
우리라고?
정평의 눈썹이 꿈틀이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좋을 대로 말하라지.
“그것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요?”
정평이 물었다.
“네.”
정교랑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천문과 지리를 살피고, 전략을 짜고, 장병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해 온몸에 적군의 피를 묻혔다. 단 한 사람도 뒷걸음질 친 이는 없었다.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정평이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값지지 않다고 할 수 있죠? 충분하지 않아요?”
“그게 어떻게 충분해요?”
정교랑이 목청을 높였다.
문밖에 서 있던 조 집사가 서둘러 안쪽을 들여다보고 정평을 향해 위협적인 손짓을 보냈다. 정평은 조 집사의 손짓을 보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요? 낭자가 원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낭자가 고군분투한다고 해서,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원하는 대로 다 이뤄질 거라는 입에 발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말하는 대로 다 이뤄지는 세상이라면, 세상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지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노력도 했고 애도 썼는데 왜 그렇게 됐냐고요? 낭자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해 봤습니까? 그들도 똑같이 노력했을 텐데, 낭자만 성공하고, 남은 실패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낭자에게도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남들도 똑같습니다. 어째서 낭자한테만 당연할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겁니까?”
정평이 말했다.
뭐라고?
정교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평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위해 그 일을 시작했는지 잘 알고, 그것을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하고 애썼다면, 그게 바로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그 자체로 값진 겁니다. 한고조 유방이 황제가 된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초패왕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한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거예요. 거지가 밥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고, 개미들이 강가에 빠져 죽지 않고 둑을 오른 것 또한 원하는 바를 이룬 거죠.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以萬物爲蒭狗 - <노자>)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낭자는, 어디서 나온 자신감으로 원하는 바를 이뤘는지 아닌지를 한 사람의 성패로 따지는 거죠? 무슨 근거로 하늘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 판단하는데요? 그건 다 낭자가 생각하고 원하는 바일 뿐이지, 절대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정평의 목소리는 흥분한 듯 고양되었다. 한껏 집중한 그가 눈빛을 반짝이며 외쳤다.
문밖에 서 있던 조 집사가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정평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잰걸음으로 정평의 거처를 벗어나자, 조 집사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정평의 멱살을 잡았다.
“아파요, 아파. 아프다고.”
정평이 외쳤다.
“안 그래도 요새 들어 우리 아씨의 기분이 부쩍 좋지 않으신데, 네놈이 뭐라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조 집사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정평에게 위협적으로 호통쳤다. 정평은 억울하다는 듯 해명했다.
“생각의 창을 넓히게 일깨워 주었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끝을 맞이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에 의미를 두라고. 본래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그 안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조 집사가 정평의 멱살을 잡은 채로 그를 세차게 흔들었다.
“알아듣게 말해!”
조 집사가 호통쳤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으니,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말이죠.”
“고작 말 한마디를 그렇게 길게 했다고? 이런 네놈이 사기꾼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저녁 무렵, 조 집사는 불안해하며 정교랑이 있는 안채로 들어갔다. 그를 본 반근이 조 집사에게 손짓했다.
“별일 없었어요. 이제 막 목욕을 마치셨으니, 곧 주무실 거예요.”
반근이 조용히 말했다.
“정말 별일 없었어?”
조 집사가 속삭이다시피 묻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어려운 여인이네. 어쨌든 친남매가 아니니, 그렇게 슬퍼할 정도는 아닌가 보군.
조 집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 있으면 날 불러. 오늘은 내가 당직이니까.”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 집사가 마당을 나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반근은 회랑 아래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 덕에 정교랑의 그림자가 창가에 비쳤다.
정교랑은 씻고 난 뒤 한참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오늘 정평에게서 들은 말이 너무 많아 정교랑은 조금 멍해졌다.
그만 생각하자, 그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머리를 풀었다.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맑은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보니, 치맛자락 옆에 조그마한 은빗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희미한 등불에 비친 은빗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아씨, 저희 형제 일곱은 모두 동향입니다. 무원산에서 왔죠. 저희의 천한 이름은 기억하실 것 없으니 은인인 아씨의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은혜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아씨께선 제 형제를 구하고 은자까지 주셨잖아요.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죠.
아씨께 장생위패(長生位牌: 은인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만드는 위패)라도 세워 드려야 하는데.”
무원산 형제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정교랑은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실상 은혜라고 할 것도 없지. 사소한 수고였을 뿐이야.
정교랑은 자신과 친했던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빨리 또 겪을 줄 몰랐다. 무원산 형제들을 잃은 슬픔과 혈육을 잃었던 슬픔이 한데 섞여 얽히고설킨 감정이 피부에 와 닿는 듯싶다가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마치 환상처럼.
정교랑은 바닥에 떨어진 은빗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더는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
조용히 해요, 조용히. 우리 셋째 아우가 노래를 부른다고!
형제의 정이여. 생사의 기로에서도 호방한 기개와 정의를 잃지 않으리. 아름다운 여인이여, 날 위해 웃어 주오.
“천고의 풍류를 즐기리.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목숨까지 바치리라. 고운 얼굴 백발이 되어도, 사랑하는 이 마음은 늙지 않네.”
곁방에 누운 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반근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켜 귀를 기울였다.
환청이 아니야.
나지막한 격부(擊缶: 물이 든 동이를 두드려 소리를 내는 일) 소리와 낮은 노랫소리가 밤바람을 따라 저택 안에 울려 퍼졌다.
반근이 곁방 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노랫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영웅에게 묻노니, 무엇이, 어려우랴.”
아씨께서 노래를 부르시는 건가? 노래가 너무 구슬프네.
반근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씨께서 속상해하시지도, 슬퍼하시지도 않을 리가 없어. 단지 말로 표현하지 않으실 뿐이지.
그런데 저건 무슨 노래지?
반근은 정교랑이 부르는 노래를 몰랐지만, 조 집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제자리에 서서 노래를 들었다.
“기억하느냐.”
바깥마당에 있던 조 집사가 안쪽을 멍하니 쳐다보며 물었다. 조 집사의 옆에 있던 두 시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아, 너희는 모르겠구나. 그때 그 자리에 없었으니.”
멋쩍게 웃으면서도 조 집사는 여전히 넋이 나간 눈빛이었다. 조 집사는 노랫소리와 격부 소리가 더욱 잘 들리도록 안쪽 마당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의 눈앞에 화르륵 타오르는 모닥불이 아른거렸다. 그는 늑대 떼를 물리치던 그날의 산골짜기로 돌아간 듯했다.
“인생은 연기처럼 부질없으니 스쳐지나 없어지는구나!”
조 집사의 귓가에 사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수염을 가진 사내가 한쪽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니 그대는 걱정 말라. 천금이 다 흩어져도, 꿈은 끝이 없도다.”
반대편에서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바닥을 자리 삼아 앉은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칼로 술 단지를 두드리며 호응했다. 주위에 앉은 사내들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고, 모닥불에 비친 그들의 그림자는 바닥에 일렁였다.
모두 사라졌어.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어.
조 집사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집사 어른, 지금 우시는 겁니까?”
시종 하나가 놀라서 눈을 끔뻑이면서 물었다.
“그래, 운다.”
조 집사는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이면서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뭐랬느냐. 정평 그 자식, 이독치독을 한 거야. 아씨를 낫게 했어. 봐, 나도 울고 있잖아. 울면 된 거야, 우는 게 정상이지.”
어떻게 울음이 나지 않을 수 있나, 어떻게 속상하지 않을 수가 있나. 제아무리 똑똑하고 세상 이치를 잘 안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정이란 것을 어찌할 수 있나.
시종들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가 이독치독을 했다는 거야? 아씨께서도 울지 않으시는데, 집사 어른이 왜 우는 거지?
조용한 격부 소리와 노랫소리는 몇 번이고 반복되며 저택 안을 맴돌았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