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75)

영화 원년 10월 말.

7월에 경성을 떠나, 함께 공부하던 학형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방문했던 정사낭은 드디어 강주 근처에 다다랐다. 며칠 전부터 마중하러 나와 있던 정씨 가문의 사람들이 기쁘게 그를 반겼다.

정사낭의 마차를 본 정씨 가문의 집사는 흠칫 놀랐다. 정사낭이 타고 온 마차가 무척 고급스러웠기 때문이다. 몇 개월을 타고 다녔을 마차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것처럼 보였다. 또 집사는 그 마차를 만드는 데 쓰인 재료가 모두 최상급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끌고 온 마차를 쳐다보았다. 정 대부인은 정사낭이 타고 다니던 마차가 너무 오래되어서 사람이 앉을 수도 없을 지경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집사에게 좋은 마차를 골라서 마중 나가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집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꾸민 마차를 끌고 왔지만, 정 사낭이 몇 개월 동안 타고 다녔던 마차보다 뒤지는 느낌이었다.

정사낭은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여 집사가 끌고 온 마차로 갈아탔다.

반나절이 지나자, 정사낭이 탄 마차가 강가에 도착했다. 집이 점점 가까워오자, 흥분한 정사낭은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집을 떠난 지 어언 일 년이 넘었구나.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운 것이 난생처음이었던 정사낭은 휘몰아치는 향수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모든 게 익숙하게도, 낯설게도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 낯설긴 하네.

문 앞을 지키는 사환을 보면서 정사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없어졌잖아?

필요에 따라 집안 하인들을 바꾸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었기에 그는 잡생각을 떨치려 했다. 하지만 마당으로 들어선 정사낭은 다시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춘란이 여기 없다고?”

정사낭이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가까이서 자신의 시중을 들던 몸종이 바뀌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사낭은 불안해하며 시선을 피하는 몸종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설마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춘란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그럴 리가 없는데. 춘란은 항시 내 곁에 있으려 무슨 일이든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성격이야, 그런 애가 잘못을 저리를 리가 없어.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정사낭이 그제야 몸종에게 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대문을 지날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 보이는 듯했지만, 보면 볼수록 어딘가 익숙하지 않았다.

쇠락.

맞아, 가문이 쇠락한 게 틀림없어.

등골이 서늘해진 정사낭은 몸을 움찔거렸다.

“대노야께서 병에 걸리셨습니다.”

몸종들은 더는 숨기지 않고 무릎을 꿇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도대체 어떤 병에 걸리셨길래 집안이 이렇게 쇠락한 거지?

정사낭은 혼절할 뻔한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씻지도 않은 채 정 대부인의 거처로 달려갔다.

정 대노야는 이제 자신의 힘으로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몸을 가누는 건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그런 정 대노야의 모습을 본 정사낭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 옆에 있던 여종들이 정사낭을 다독이면서 그를 일으켰다.

“지금은 몸이 괜찮아져서 따로 네게 알리지 않은 것뿐이다. 강주 선생께 가르침을 받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데,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정 대노야가 말했다.

정사낭은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제자매들이 정사낭과 함께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 대부인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자식들을 다독였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다. 올해는 식구들이 다 같이 모였으니, 단란한 연말을 보내겠구나.”

정 대부인이 정사낭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많이 야위었네.”

“어머니, 야위긴 뭐가 야위어요. 살이 붙어서 오라버니 얼굴이 동그래졌는걸요.”

정육랑이 정 대부인의 말에 대꾸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정육랑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우느라 눈이 빨개진 정 대부인까지도 웃음을 터트리자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정사낭은 정육랑을 쳐다보았다. 안 본 사이에 누이가 철이 든 듯했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누이의 안색은 예전만 못했고, 심지어 나이가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표현은, 애지중지 떠받들며 응석받이로 키운 정씨 가문의 여식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이 성숙해졌다고 해도,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 대신 신분에 걸맞은 기품이 더해졌다는 말을 쓸 터였다.

더구나 귀한 집 따님들의 성숙함은 곧바로 나이와 연관 지어지지도 않았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말은 고생을 겪어 세월의 풍파를 맞았다는 뜻인데, 정씨 가문의 딸들은 고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버지의 병 때문인가?

정사낭이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형제자매들은 이미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주제는 바로 정사낭이 가져온 선물이었다.

“마차 한가득 실어 왔더라고.”

정삼낭이 다소 과장을 섞어 가며 정사낭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 자식 이거, 어디 들를 때마다 선물을 하나씩 사서 온 거 아니야?”

“아닙니다. 다 경성에서 준비한 것들이에요.”

정사낭이 웃으면서 사환에게 선물을 방 안으로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식구들이 다 모인 김에 선물을 나눠 주려는 마음이었다.

선물을 나눠 주는 일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었다. 정 대노야 부부도 집안 분위기가 조금 더 밝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아이들과 함께 맞장구를 치며 자리를 지켰다. 방 안은 금세 크고 작은 선물 상자로 가득 메워졌고, 이따금 기쁨에 찬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 대부인은 건네받은 옥여의(玉如意)를 손바닥 위에 놓고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밀하고 세세한 무늬, 매끄러운 옥의 표면은 한눈에 보아도 값어치가 상당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사낭, 이런 걸 살 돈이 어디서 났니?”

정 대부인의 물음에, 선물을 받고 만지작거리며 기뻐하던 형제자매들도 손을 멈추고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아우, 내게 준 이 벼루도 꽤 비싸 보이는데?”

정삼낭이 물었다. 정육랑도 자신의 손에 있던 팔중 비녀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러게, 강주에서는 이런 양식의 비녀를 본 적이 없어. 경성에서 새로 만들어 낸 거겠지?

전에는 항상 장신구를 차고 집 밖을 나섰던 정육랑이지만, 작년 그 일이 있던 이후로는 어떠한 장식도 하고 싶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집안 형편이 빠듯하다 보니, 정육랑은 반년 동안 새로운 장신구를 산 적이 없었다.

정육랑이 비녀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고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집에서 매달 쓰는 돈마저 반 이상을 줄였는데, 공부하라고 경성에 보낸 오라버니가 어디서 저렇게 많은 돈이 난 거지? 어머니의 반응을 봐서는 적은 액수는 아닌 것 같은데.

정사낭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정 대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외쳤다.

“아, 사낭! 내가 깜빡하고 네가 반년 치 쓸 돈을 부치지도 않았잖아!”

정 대부인은 외치면서 스스로 놀랐다.

잊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그걸 까먹었담! 그럼 우리 아들이 작년에 보냈던 돈으로 일 년을 버틴 거야? 세상에나!

그런데 아들의 모습을 보면, 딱히 힘들게 지낸 것 같지는 않은데.

“괜찮아요, 어머니. 아직 돈이 남아 있어요.”

정사낭이 말했다.

“돈이 남아? 돈이 어디서 났기에?”

정 대노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부채를 보며 물었다.

“저 부채만 해도 은자 하나 값은 될 텐데.”

그렇게 비싼 거야?

가격을 들은 정사낭이 흠칫 놀랐다. 곧이어 그는 민망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 사실 이것들은 제가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준비해준 것이냐?”

“숙부님 댁 큰누이가 준비해준 겁니다.”

정사낭이 밖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숙부님과 숙모님, 이방 누이가 안 보이네요? 제가 가서 인사하고 오겠습니다.”

“멈춰라!”

정 대노야가 걸음을 옮기려던 정사낭을 향해 호통을 쳤다. 정사낭은 화들짝 놀라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어느 큰누이? 어느 큰누이가 네게 이것들을 줬느냔 말이다.”

정 대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정사낭을 다그쳤다. 정 대노야는 뇌리에 스치는 불안한 생각 때문에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숙부님 댁 큰누이요. 이 선물들은 큰누이가 경성에 남겨 둔 반근 낭자가 준비한 겁니다. 실은 지난 반년 동안 큰누이가 준 돈으로 생활했습니다. 이 마차랑 옷, 그리고 필요한 것들도 다 반근 낭자가 챙겨주었고요. 안 그래도 큰누이한테 감사 인사를 하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정사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건들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정사낭은 형제자매들과 부모님이 손에 쥐고 있던 선물들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하는…….”

눈이 휘둥그레진 정사낭이 입을 열자마자, 날카로운 정육랑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왜 그 계집 얘기를 꺼내는 건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정육랑이 정사낭을 향해 삿대질했다.

“그 계집 얘기를 왜 꺼내냐고! 집안이 이제야 좀 조용해졌는데, 왜 또 그 계집 얘기를 꺼내! 그 계집이 무슨 망령이라도 돼? 이 집 떠났잖아. 이 집을 떠난 지가 언젠데 왜 아직도 그 계집 얘기가 나와!”

소리를 지르던 정육랑은 점점 더 감정이 격해지는지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여인, 그 여인! 아주 망령 같은 여인! 그 여인은 집을 떠났지만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어. 그 여인은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다가 숨통을 조여서 죽이려는 거야!

그 재수 없는 것이! 그 악령 같은 것이!

난리를 치는 정육랑 때문에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 대부인이 정육랑을 재빨리 품에 안아 진정시키면서 여종과 함께 정육랑을 거처로 데려갔다.

정사낭은 넋이 나간 얼굴로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단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얘기하고, 먼저 경성에서 네가 겪은 일을 얘기해 보거라. 그 애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정 대노야가 지친 기색으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그 여인.

정사낭은 과거를 회상했다.

그 여인과 무슨 일이 있었지? 딱히 별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경성에 도착하고 나서, 누이를 한번 만나려 했지만 만나지 못했고, 후에 왕십칠이 경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누이를 볼 수 있었지. 내가 누이를 챙기려 했었는데, 도리어 누이가 나를 챙겨주는 꼴이 됐고.

“그때 돈도 조금 쥐여 줬습니다. 주씨 가문이 누이한테 야박하게 굴까 봐서요. 그런데 뜻밖에도 누이한테 제일 부족하지 않은 게 돈이더군요.”

정사낭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 벌어도 만져보지 못할 액수가 정교랑의 장부에 찍혀있던 것을 보았다.

“주씨 가문에서 누이를 홀대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사환이 전한 누이의 말 한마디에 겁을 먹은 주 노야는 아주 숨이 멎을 뻔했었어. 누이가 직접 나선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주 노야가 왜 그렇게 누이를 무서워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만.

“그 애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주 노야뿐만이 아니야. 우리도 다를 게 없어. 그 애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모르고 있었던 게 이런 결과를 초래했지.”

정삼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결과요? 형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정사낭이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번 물었지만, 정 대노야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호통쳤다.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왜 서신에 아무 말도 안 전했느냐!”

정 대노야가 무릎을 짚고는 이를 갈며 물었다.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왜 집에 알리지 않았냔 말이다!”

정사낭이 당황한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제가 알게 됐을 때는 누이가 강주로 돌아가기로 한 뒤였습니다. 어차피 누이가 집으로 돌아와서 얘기할 테니, 제가 서신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정사낭의 말을 듣던 정 대노야는 숨이 턱 막히는 바람에 몸을 휘청이면서 뒤로 쓰러졌다. 정 대노야가 쓰러지자, 방 안은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리신 겁니까? 빨리 의원을 불러서 제대로 좀 봐 달라고 해요.”

집안이 왜 이 꼴이 됐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정사낭은 다급하게 외쳤다.

육랑도 그래. 병이 꽤 깊어 보이던데. 어머니도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고. 전부 왜 이러는 거야? 온 식구가 다 병에 걸린 것 같잖아!

“어떤 의원이 와도 다 소용없어!”

정육랑을 데려다주고 돌아온 정 대부인은 정사낭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들어왔다.

“이 집에서 다시는 그 애 얘기를 꺼내지 말거라. 그 입만 다물고 있어도, 우리 식구들의 목숨은 보전할 수 있을 게야!”

“다 소용없소. 우리는 이미 그 애와 얽혔어. 이번 생은 글렀단 말이오. 그 애가 이 집에 있든 없든, 이제 우리는 끝난 거라고.”

정 대노야가 침상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사낭은 갑작스러운 정 대부인의 호통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누이가……. 누이가 뭘 어쨌길래?

누이가 여기 없다고? 그럼 어디로 간 거지?

정교랑 때문에 정씨 가문이 난리 통이 되었을 무렵, 경성으로 이어지는 강 위에는 관선(官船) 한 척이 천천히 경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11월 초, 경성의 날씨는 부쩍 서늘해졌다. 소년 하나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관선의 뱃머리에 서 있었다. 겨울 햇빛을 한몸에 받은 소년은 머리 위로 하나씩 지나가는 무지개다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문득 2년 전, 마차를 타고 강가를 지나던 중 배에 탄 여인과 소년의 모습을 우연히 봤던 장면을 떠올랐다. 그 두 사람도 지금의 자신처럼 머리 위로 지나가는 무지개다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시 마차 안에 있던 소년은 마음속에서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멀리 날아가 사라지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강 위에서 보는 무지개다리가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그래서 그 여인이 그렇게 환하게 웃던 거였어. 그 여인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작별한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 통 전해지는 소식이 없으니.

뱃머리에 선 소년은 백옥같은 피부에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걸치고 있던 금테를 두른 암청색 두봉이 바람에 나부끼자, 소년은 인간계에 내려온 신선과도 같아 보였다. 강가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 시선을 빼앗겼고, 어떤 여인들은 용기를 내어 소년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은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뱃머리에 서서 무지개다리만 올려다보았다.

“군왕, 바로 금수원(金水苑)으로 갈까요?”

누군가가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금수원은 강물을 황궁 안까지 이어 놓은 황실의 원림(園林)이다. 전에는 황제도 금수원에서 배를 타며 여유를 즐겼다. 진안 군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 안에서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무덤덤했던 소년의 표정이 갑자기 온화해졌다. 소년이 고개를 돌려 안쪽을 향해 손짓했다.

시위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린아이는 더 이상 예전 이황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정교랑의 말대로 이황자는 지난 일 년간 잘 먹고, 잘 자고, 매우 건강하게 지낸 탓에 살이 많이 쪘다. 하지만 멍한 눈빛과 입가에 흐르는 침은 변함이 없었기에, 살이 붙은 이황자의 모습은 더욱 바보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런 이황자의 모습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영락없는 바보의 모습을 한 이황자를 따뜻하게 쳐다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대하듯 기쁘게 반겼다.

“육가아, 이리 와 봐.”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향해 손짓했다.

이황자는 진안 군왕이 자신을 부르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든 시위의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이황자를 데리고 나온 시위들은 그런 이황자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차분하게 이황자를 꽉 붙잡고 진안 군왕의 앞으로 데려갔다.

진안 군왕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황자 경왕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나 이황자의 시선은 진안 군왕을 향해 있지 않았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이황자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이황자의 어깨를 쥐었다.

“이 형이 너를 데리고 산과 강을 둘러보았으니, 그럼 이제…….”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고 이황자의 뒤에서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는 앞을 가리켰다.

“네게 천하를 쥐여 줄게.”

진안 군왕은 앞을 가리켰던 손을 내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이황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의 천하를.”

경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황궁 안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도 잠시 경왕이 누구인지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경왕이 황궁을 떠난 시간은 고작해야 일 년이었지만, 황궁 안의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 있었다.

사륜거가 바닥 위를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가 황궁 안의 적막을 깨트렸다.

황궁에서 마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친왕뿐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친형제가 많지 않고, 그나마 있던 몇 명도 모두 봉지로 나가 황궁에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 이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던 때는 바로 일 년 전, 군왕이 경왕을 데리고 궁을 떠났을 때였다.

마차 안에 앉은 진안 군왕은 눈을 감은 채 정신수양을 하고 있었다. 말굽 소리와 마차 바퀴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눈을 뜨고 휘장을 들어 올려 밖을 내다보았다.

주위에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군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진안 군왕의 시선은 마차를 끌고 있던 말에게로 향했다. 맑고 청량한 말발굽 소리가 박자감 있게 들려왔다.

“말굽에 뭐가 붙은 게냐?”

진안 군왕이 물었다.

“말편자입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말편자?”

“전하께서 궁을 떠난 지 꽤 오래셔서, 경성의 새로운 소식들을 아직 모르시나 봅니다. 저건 군목감에서 새로 만든 것이온데, 쇠붙이를 말굽에 붙여 말굽을 보호하는 용도입니다. 전장에 나가는 말들에게 말편자를 달아 둔 덕에 말의 손상이 몹시 적어졌지요. 말편자라는 이름도 폐하께서 하사하셨어요. 황궁 안에 있는 말들에게도 편자를 붙이니, 말굽 소리도 더 듣기 좋아졌습니다.”

타고 다니는 말까지 변하다니, 일 년 사이에 변한 것이 참으로 많구나.

진안 군왕은 휘장을 내렸다.

태후궁에는 사람이 여럿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안 군왕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내시들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전해져 오자, 태후궁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문이 열리자, 키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소년이 걸어들어왔다. 문을 지나기 전까지 느릿느릿했던 소년의 발걸음은 태후궁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조금씩 빨라졌다.

“태후마마.”

진안 군왕은 잰걸음으로 태후 앞에 다가가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울먹이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진안 군왕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태후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태후는 서둘러 진안 군왕에게 일어나라며 손을 뻗었고, 주위의 비빈들도 눈물을 훔쳤다.

한참을 엎드린 자세로 있다가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은 태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태후는 그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쳐다보다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왜 이렇게 야위었느냐.”

태후가 울먹이며 말했다. 한쪽에 서 있던 귀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대황자의 등을 떠밀었다.

“형님.”

대황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그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키가 부쩍 자랐군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다른 공주들도 서둘러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소녀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금세 태후궁을 메웠다. 진안 군왕은 공주들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태후가 그를 붙잡고 문밖을 내다보면서 물었다.

“경왕은…….”

태후가 말끝을 흐리며 묻자, 진안 군왕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말했다.

“배를 타고 오느라 힘들었는지, 환궁하자마자 잠들었습니다. 우선은 거처에서 쉬도록 했습니다.”

진안 군왕이 예를 올렸다.

“마마, 경왕을 깨우지 않은 신을 용서해 주십시오. 경왕은 더 이상 예전의 육가아가 아닙니다. 부디 마마께서도 경왕을 평소와 같은 기준으로 대하지 마시고,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태후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태후는 진안 군왕을 일 년간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거리감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전각 앞.

태후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옆으로 귀비와 진안 군왕이 난색을 보이며 태후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 뒤로 화려한 색상의 두봉을 걸친 비빈들이 있었고, 대황자와 공주 두 명, 그리고 한 살배기 공주까지 주 현비의 품에 안겨 태후를 따라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마마, 오늘은 날씨도 쌀쌀한데, 다음에 가시지요.”

귀비가 다시 한번 조용히 태후를 만류했다.

“맞습니다, 마마. 육가아가 그리 오래 자는 편도 아니니, 조금 뒤에 일어나면 제가 직접 데리고 마마를 뵈러 가겠습니다.”

진안 군왕도 태후를 말렸다.

“법도대로라면, 애가(哀家: 과부가 된 태후가 자신을 일컫는 말)는 태후고 육가아는 황손이니, 황손이 태후를 만나러 오는 것이 맞다. 하나 너도 말하지 않았느냐. 육가아는 더 이상 예전의 육가아가 아니라고. 그러니 애가도 육가아를 더 이상 황손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야.”

태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울먹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애가가 원칙대로 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 애가가 직접 육가아를 보러 갈 것이니라.”

귀비는 더는 태후를 말리지 않았고, 진안 군왕도 슬픈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마마께 심려를 끼쳐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이게 바로 네놈이 원하던 바 아니더냐.

귀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곁눈질로 진안 군왕을 흘겨보았다. 전각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태후는 내시 두 명이 허둥지둥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깨어나셨어요!”

내시들은 무슨 끔찍한 일을 본 사람들처럼 당황한 모습이었다.

저놈들이 감히 경왕을 불쾌히 여기는 게야? 경왕이 더는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고, 지금 저놈들이 경왕을 불쾌히 여기는 게 아니더냐!

태후가 내시들을 향해 벌컥 화를 냈다.

“저놈들의 따귀를 매우 쳐라! 감히 저런 잡것들에게 경왕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냐!”

화들짝 놀란 내시들이 태후 앞으로 달려와 이마를 땅에 찧으며 사죄하자, 진안 군왕이 태후의 앞을 막아서고 말했다.

“마마, 이들은 그런 뜻이 아닐 겁니다. 육가아가 저와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겁을 냅니다. 마마께서 부디 이들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태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려 궁 안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더니 이내 뜀박질로 바뀌었다. 진안 군왕의 다급한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태후는 다시금 코끝이 찡해졌다. 태후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궁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 안에서는 이따금 기괴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고 건조한 목소리가 각기 다른 높낮이로 울려 퍼졌다.

두 공주는 겁이 난 듯 몸을 뒤로 조금 내뺐다. 대황자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지만,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손은 벌써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모두가 궁 안에 서서, 들어 올려진 휘장 너머로 침상에 앉아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일 년 전, 사고가 발생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황자는 곧바로 황궁을 떠났기에 사람들은 그의 다친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또 사고가 난 직후는 사람들이 이황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이황자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시점이었다.

황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사고를 당한 이황자의 모습이 아니라, 생기 있는 얼굴에 환한 미소, 밝은 두 눈동자를 가진 장난스럽고 귀여운 이황자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침상 위의 어린아이를 본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느꼈다.

저 아이는 누구지? 설마 내가 알던 그 이황자인가? 저건 어린아이라고 할 수도 없겠는데? 저렇게 못생기고 소름 끼치게 생긴 아이는 처음 봐!

침상 위에는 살이 뒤룩뒤룩 찐 아이가 아무렇게나 팔을 휘저으면서 고개도 가누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아아 소리만 내고 있었다. 콧물과 침을 끊임없이 흘리던 아이는 한쪽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는지,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리고 눈을 뒤집었다.

공주 하나가 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겁에 질린 모습으로 사람들 뒤에 숨었다.

“썩 나가거라!”

태후가 공주를 향해 호통을 쳤다.

비빈이 재빨리 공주를 꿇어 앉히고 태후에게 빌었다.

“빨리 잘못했다고 해, 어서!”

비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공주의 목덜미를 잡고 억지로 공주의 머리를 땅에 박으면서 읊조렸다. 경왕에 이어 갑작스러운 비빈의 행동에 연달아 놀란 공주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울음을 터트렸다.

“못 알아들은 게냐? 냉큼 꺼지래도!”

태후가 다시 호통을 쳤다.

덜덜 떨면서 무릎을 꿇고 있던 비빈을 향해 귀비가 손짓하자, 비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닦으면서 공주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저 아이가 두려운 사람이 있거든, 전부 여기서 나가라.”

태후가 천천히 말하면서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던 비빈과 공주들을 훑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정도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는 없었다.

“마마,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려워하다니요. 저 아이는 육가아입니다. 저희는 육가아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본걸요.”

주 현비가 눈물을 훔치면서 공주를 품에 안은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숙녕(淑寧), 잘 보렴. 네 오라버니야. 어서 오라버니라고 불러 봐.”

이제야 겨우 한 살이 된 어린 공주가 말을 할 리는 만무했다. 어린 공주는 경왕의 모습이 무서운 건지도 모른 채, 해맑게 옹알이를 하면서 팔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 모습을 본 태후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태후는 고개를 돌려 침상을 쳐다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침상 위에 앉아 팔을 높이 들고 기괴한 소리를 질러 댔다.

진안 군왕은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정하게 아이의 손을 잡아 옷을 입히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신발 끈을 묶어 주었다. 진안 군왕은 아이에게 나지막이 무어라 말한 뒤,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물을 먹이기까지, 진안 군왕은 혼자서 그 많은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태후는 주위에 멀뚱히 서 있는 내시들이 괜히 걸리적거리는 느낌까지 들었다.

저런 능숙함은 위낭이 오랜 시간 육가아의 곁에서 수발을 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

아이에게 물을 먹이고,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태후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육가아는 착하기도 하지.”

진안 군왕이 고개를 숙여 어린아이와 머리를 맞대며 웃었다.

  • 육가아가 정말 대단하네!

황궁 안, 소년과 어린아이가 머리를 맞대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가 소년의 팔을 잡고 늘어지며 보챘다.

  • 형님, 형님. 저랑 더 놀아요, 네?

옛날 생각이 떠오른 태후는 한 손을 뻗으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지만, 걸음을 내딛는 동시에 눈앞의 환상이 깨져버렸다. 맑고 명랑했던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는, 아무런 의미 없이 내지르는 기괴한 소리로 바뀌었다.

내가 알던 육가아는 영영 볼 수 없는 게로구나.

태후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흘리자, 뒤에 서 있던 비빈들도 함께 울먹였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던 대황자는 귀비의 눈짓을 알아보았다. 지금 시점에는 울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대황자였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통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황자는 바보가 된 아이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이의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저게 누구야? 저건 절대로 육가아가 아니야. 나보다 귀엽고, 똑똑하고, 부황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그 아우가 아니잖아. 그 아우는 이제 없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그런데, 지금도 꽤 지낼 만할 것 같은데?

대황자는 궁전 안의 사람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모두가 경왕을 위해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듯했다.

이것도 나쁘진 않잖아? 다들 아직 저 아이를 좋아하고, 아껴 주고, 저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고. 얼마나 좋아?

저 아이도 지금이 좋은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환하게 웃어?

대황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얼마나 좋아, 지금이 제일 좋을걸.

진안 군왕이 황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의원은 잘 찾아보았느냐?”

황제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중에는 의원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는 한쪽에서 족자를 꺼내어 황제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폐하를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짐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한 것을 보니, 정말로 더는 찾아다니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내시가 진안 군왕이 건넨 족자를 받아 황제 앞에서 펼치자, 황제는 흠칫 놀랐다.

“육가아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번은 육가아와 함께 산꼭대기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우연히 일출을 보게 되었습니다. 출렁이는 구름 사이로 햇빛이 서서히 번져 나가는 장관을 마주하게 되었지요. 그때 육가아가 지도 보는 걸 좋아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폐하께서도 지도를 좋아하셨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워낙 정사로 바쁘시고, 육가아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높은 산과 세찬 강물이 흐르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많이 보지 못했을 듯싶었습니다.”

진안 군왕이 이어서 말했다.

“그건 제가 직접 그린 것입니다. 현지의 유명한 화공에게 부탁한 것이 아니라요. 그림에는 저마다의 정이 스며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화공의 손을 거친 그림은 그들의 눈에 비친 강산일 뿐이라 생각하여, 제 눈에 보이는 산과 강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 장관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폐하께 그림으로 보여 드리고 싶었죠.”

황제가 눈앞에 펼쳐진 화폭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두꺼운 붓으로 그려낸 그림에는 높고 거대한 산이 있었고, 물길이 세차 보이는 강이 있었다. 첩첩산중이 보이기도 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보이기도 했다.

그림 솜씨가 그리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고, 서투른 붓질이 그림 곳곳에 고스란히 묻어났지만, 그래서인지 그림에는 더욱 생동감이 넘쳤다. 황제는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마치 자신이 이 산과 강을 앞에 두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천하라고는 하나, 제대로 볼 기회도 없었다. 황제가 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기껏해야 이 황궁뿐이고, 조금 더 멀리 나간다고 해도 제를 올릴 때 지나는 경성의 거리가 전부였다.

분명 그의 천하인데, 이 조그마한 황궁 안에 갇혀있는 신세를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 역시 자신의 천하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실행은커녕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신하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나라가 곧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질책할 터였다.

천자, 천자라…….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해도,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천자의 운명이로구나.

황제는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황궁을 떠났던 일 년 사이, 수척하고 병약해 보이던 진안 군왕의 얼굴에는 생기가 차오르고, 눈빛에는 광채가 더해졌다.

“정성이 갸륵하구나.”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바로 정성을 들이는 일, 진심이었다. 천하를 가진 천자조차도 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신의 진심이옵고, 폐하께서 오랜 세월 가르쳐 주신 진심이기도 합니다. 육가아를 대신하여 폐하께 효심을 다하고 싶기도 했고요.”

진안 군왕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황후에게도 가 보거라.”

비록 대신한 것이라 해도, 그 지극한 효심을 보고 싶은 사람이 비단 짐뿐만은 아닐 게야.

진안 군왕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물러났다.

밤색이 짙어진 황궁 안, 진안 군왕의 앞뒤로 내시들이 등롱을 밝게 비추며 조심스럽게 길을 안내했다. 층계 위에 선 진안 군왕이 멀리 있는 궁문을 쳐다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계산해 보려는 듯,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전하, 무슨 셈을 하시는지요?”

진안 군왕의 뒤에 서 있던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날짜를 세고 계시는 것이다.”

내시 옆에 있던 다른 내시가 천천히 말했다. 감상에 젖은 목소리였다.

“무슨 날짜요?”

내시가 다시 물었지만, 다른 내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층계 위에 서 있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군왕께서 출궁하실 날짜, 자유의 몸이 되실 수 있는 날짜를 세는 게지.

11월 18일, 바로 오늘. 이 날짜는 내가 군왕과 함께 손가락을 꼽으며 셌던 날이기도 하고, 바라고 또 바라던 날이기도 해. 하지만 작년에도 나가지 못했고, 올해도 그러하구나.

어쩌면, 영영 나갈 수 없을지도.

“궁으로 가자.”

진안 군왕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황궁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은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칠흑 같은 밤 속으로 사라졌다.

11월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2월이 되어 새해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

올해는 황제의 기분도 좋고, 건강도 많이 호전되어 새해를 맞이하는 황궁 분위기가 한층 흥겨웠다. 작년에는 이황자의 사고 때문에 황궁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지만, 올해는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다.

귀비와 대황자가 태후궁 앞에 다다르자, 태후궁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태후의 웃음소리 이외에도 이상한 웃음소리가 같이 들렸다.

대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전 가지 않겠습니다.”

대황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렸지만, 귀비가 재빨리 붙잡았다.

“경왕이 있다고 해서 네가 피할 건 또 뭐냐.”

귀비가 눈썹을 치켜뜨고 낮게 호통쳤다.

“그 애를 피하는 게 아니라, 보기가 싫을 뿐입니다. 전 해야 할 일이 많아요. 그 바보와 놀아줄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대황자가 성가시다는 듯 대답하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귀비가 대황자를 몇 번 불렀지만, 대황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사가아가 요즘 점점 더 말을 안 듣네.”

귀비가 말했다.

“마마, 전하께 차츰 주관이 생기시는 게지요. 듣기로는 어제 조당에서 상공 대인, 참정 대인들과 논변까지 하셨답니다.”

내시가 아첨의 미소를 보이며 대황자를 치켜세웠다. 아들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진 귀비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귀비가 태후궁 안으로 들어섰을 때, 태후는 경왕에게 손수 탕을 떠먹여 주고 있었다. 먹은 게 반, 흘린 게 반으로 보였지만 태후는 경왕이 반이나 먹었다며 기뻐했다.

“위낭, 네가 보기에는 육가아가 애가를 알아보는 것 같으냐?”

태후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물었다.

퍽이나 알아보겠네.

귀비는 미소를 띤 채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바보처럼 웃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마마께서 경왕 전하를 그리도 매일같이 돌봐 주셨는데, 당연히 알아보겠지요.”

귀비가 말했다. 진안 군왕은 귀비를 향해 예를 올린 뒤, 경왕을 데리고 물러나겠다고 했다.

“조금 더 있다 가지 뭘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모처럼 둘의 얼굴을 보게 됐는데.”

귀비가 웃으면서 붙잡았지만, 진안 군왕은 입꼬리를 올린 채 가볍게 목례를 하고 경왕과 함께 자리를 떴다.

“자네들이 겁먹을까 봐 저리 급하게 가는 것 아니겠나.”

태후가 귀비에게 말했다.

진안 군왕은 가끔 태후궁을 들르는 것 외에는 항상 자신의 처소에 머물렀다. 태후궁에 들를 때도, 비빈이나 공주들이 태후를 알현하러 왔다는 전갈을 받으면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제가 왜 겁을 먹어요. 억울합니다, 마마.”

귀비가 웃으면서 가볍게 말했다. 태후에게 새해와 관련된 일들을 이야기하던 귀비는 태후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새해가 되는 김에, 진안 군왕이 전에 지내던 바깥 궁을 한번 수리하는…….”

“수리는 무슨. 위낭은 거기서 지내지 않을 것이야.”

귀비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태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마, 진안 군왕도 내년이면 열여덟입니다.”

귀비가 태후에게 일렀다.

“열여덟이 왜? 평왕도 서른이 될 때까지 궁에서 살았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게야? 누가 또 뒤에서 세 치 혀를 놀리더냐?”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귀비를 흘겨보았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야 진안 군왕을 생각해서 말씀 올리는 거죠.”

귀비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말했지만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위낭이 궁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경왕도 위낭만을 따르지 않느냐. 애가는 절대로 위낭을 내보내지 않을 것이야.”

쨍그랑 소리와 함께 귀비가 던진 옥 접시가 산산조각 났다. 문밖에 서 있던 궁녀들은 재빨리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나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문을 지켰다.

“경왕이 그 애만 따르지 않냐고? 그 애가 없으면 왜 안 되는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깟 바보 수발 하나 못 들까!”

“말씀을 삼가세요, 마마!”

고 전원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귀비는 들끓는 화를 식히려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그 애를 궁에 남겨두는 걸 보니, 마마께 다른 속셈이 있는 거예요. 폐하의 옥체가 많이 좋아지셨으니, 손자 하나를 더 보고 싶은 게죠. 옥체가 좋아지신 지 얼마나 됐다고, 어쩜 그렇게 득달같이 비빈들을 폐하 옆으로 보내는지. 그러다 폐하의 옥체에 무리라도 가면 어쩌려고!”

귀비는 분이 가시지 않은 듯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어 갔다.

“회임한 비빈이 생겼다고 해도, 누가 들으면 웃음거리밖에 더 돼요? 진안 군왕이 올해 열여덟입니다! 다른 집 아들들은 그 나이면 벌써 혼례를 올리고 아비가 됐다고! 이러다가…….”

“마마, 마마! 그런 말씀을 입에 올리시다니요! 목숨을 잃을까 두렵지 않습니까!”

귀비의 말을 듣다 못한 고 전원이 눈썹을 치켜뜨고 귀비의 말을 끊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어차피 누군가의 입에서 나올 말입니다.”

귀비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고 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뭘 그리 초조해하십니까. 진안 군왕이 궁 안에 있든 궁 밖에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진안 군왕이 경왕의 시중을 들면서 세상 구경을 시킨 일로 태후와 폐하께서 감동하셨을 순 있겠지만, 얻은 게 있는 만큼 잃은 것도 있습니다. 마마의 말씀마따나 군왕은 벌써 열여덟 살입니다. 한데 공부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사람 됨됨이가 훌륭한 것도 아니지요. 가만 보면 참 다행입니다, 경왕과 너무도 잘 어울리니까요. 이미 폐인이 된 둘을 뭐하러 염려하십니까? 그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겁니다.”

귀비가 좀 전보다 누그러진 태도로 한숨을 쉬었다.

“그건 나도 알죠.”

귀비가 팔걸이 의자에 기대면서 말했다.

“그런데 진안 군왕을 보면 마음이 통 편치 않습니다. 그 애의 눈빛은 독사처럼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다고요. 그 애가 아직도 궁에 있다는 생각만 떠올리면, 한시도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술잔에 비친 활의 그림자가 뱀으로 보이는 게로군. 마음속에 다른 꿍꿍이가 있으니, 남들도 자신과 똑같아 보이겠지.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기에 고 전원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평생 저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말고, 되도록 생각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고 전원은 잠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두 눈을 번뜩였다.

“군왕이 올해 열여덟이니, 다른 건 몰라도 혼인을 미룰 수는 없을 테지요. 혼례를 올리면 자연스럽게 황궁 안에 남아 있을 수도 없을 거고요.”

귀비도 고 전원의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그러네. 혼례를 올릴 나이가 됐어!”

하지만 귀비는 곧바로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폐하와 태후께서 송자동자를 그리 쉽게 놓아줄 리 없을걸요.”

고 전원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에이, 말을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폐하와 태후께서는 자비로운 분들입니다. 군왕이 경왕 전하를 위해 그리 헌신했는데, 설마 이대로 군왕을 평생 경왕의 유모로 살라고 하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챙겨 줄 사람이 없는 군왕인데, 얼마나 가엾습니까.”

귀비가 고 전원의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틀린 말이 아니야. 군왕도 사내인데, 챙겨줄 사람이 하나 있긴 해야지. 자고로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챙기는 것은 부부뿐이니까.

요란스러운 폭죽 소리가 거리에 들려왔다. 아이들 무리가 웃고 떠들면서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자, 정사낭은 서둘러 몇 걸음 비켜섰다. 그가 밟고 있는 바닥은 새로 깐 지 얼마 되지 않은 벽돌 바닥이었다. 비록 며칠 전에 눈이 내렸었지만, 벽돌 바닥 덕분에 땅이 축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남정 동네를 몇 번씩이나 들른 정사낭이었지만, 정사낭은 여전히 그곳을 볼 때마다 보며 감탄했다.

어째서 남정은 하루하루 새롭게 느껴질까? 게다가 이게 다 그 여인의 덕분이라니.

아니지, 놀라울 것도 없어.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혼자서 경성에서 점포를 세 개나 운영하고 있잖아. 그렇게 어려운 일도 해낸 여인인데, 뭔들 못 할까.

정사낭의 뒤로 말굽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대집사께서 돌아오셨다! 대집사께서 돌아오셨어!”

아이들 일고여덟 명이 말 한 마리의 뒤를 쫓으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모피 옷을 입고 방한모를 쓴 채 말을 탄, 누가 봐도 부잣집 노야처럼 보이는 사내는 그런 아이들을 성가셔하거나 불쾌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자, 가서 사탕 사 먹거라.”

사내가 손짓을 하자, 말을 이끌던 사환이 허리춤에서 돈을 한 움큼 꺼내어 아이들에게 쥐여 주었다. 돈을 받은 아이들은 기뻐하면서 자리를 떴다.

조 대집사가 돈을 시원시원하게 쓴다는 소문은 이미 강주 전역에 퍼졌다. 아니 사실은, 돈을 시원시원하게 쓴다는 말보다 돈을 펑펑 쓴다는 말이 좀 더 적절했다. 써야 하는 돈과, 쓸 필요가 없는 돈을 가리지 않고 써 댔기 때문이었다.

‘돈은 펑펑 쓰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은 조 대집사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말이었다.

자기 돈이 아니니까 펑펑 쓰는 거겠지.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은 이 말을 여러 번 했다. 동서지간의 사이는 여전히 좋지 않아 서로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일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관점이 같았다.

어머니와 숙모를 떠올리자, 정사낭은 아예 두 집으로 갈라선 북정 식구들이 떠올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제자매를 포함한 집안사람들은 전부 북정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정교랑이라고 단언했다. 그들은 정교랑이 얼마나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며 얼마나 매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늘어놓았지만, 정사낭은 그런 말들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내가 아는 정교랑과 그들이 말하는 정교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네. 내가 아는 정교랑은 단정하고, 예의범절을 잘 알고, 상냥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여인이 또 어디 있다고.

정교랑 생각에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던 그는 돌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 여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아무리 그래도, 여인 혼자 이렇게 오래 나가 있다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군.

“넷째 도련님.”

강주에서 무서울 것이 없다는, 심지어 지부 관청마저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조 대집사가 정사낭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에서 내려 공수의 예를 표했다.

남정 사람들은 조 대집사의 이런 공경한 태도를 볼 때마다 환각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조 집사는 정 대노야도, 정 이부인도 때려서 내쫓을 정도로 배짱 두둑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공경이라는 단어는 조 대집사가 정씨 가문 사람들을 대할 때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단, 정사낭만 제외하고.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그냥 좀 걷고 싶어서. 누이는 돌아왔나?”

정사낭의 물음에 조 대집사가 고개를 저었다.

“바깥에 있는 누이는 잘 지내고 있다던가? 곧 있으면 새해가 돌아오는데.”

정사낭이 또 물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아씨께서는 늘 그랬듯이 잘 지내고 계십니다. 지난달에 온 서신에도 모든 게 다 안녕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조 집사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뜨려고 하자, 조 집사가 웃으면서 차를 한잔 대접하고자 정사낭을 붙잡았다.

“도련님, 이왕 오신 거 차 한잔 드시고 가시지요.”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 정사낭이 완곡하게 거절하려던 찰나, 골목 안에서 시녀 한 명이 뛰어나왔다.

“넷째 공자님!”

춘란이 기뻐하며 외쳤다.

금가아는 정교랑의 사람인지라, 그의 가족인 춘란은 정사낭의 거처에서 쫓겨났다. 금가아는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정씨 가문에 자신의 가족을 모두 놓아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비 주제에 큰소리를 치며 자신에게 대드는 것을 참지 못했던 정 대부인은 금가아의 가족을 풀어 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는 정 대노야가 그의 가족을 풀어주라고 했다.

“아랫것과 그렇게 기 싸움을 해야겠소? 체통을 지키시오. 얼마나 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 거요!”

정 대부인은 결국 금가아의 가족을 놓아주었고, 금가아의 부모는 정교랑의 농토에서 일하게 되었다. 정교랑이 집을 비웠기에 그녀의 시중을 들 시녀가 필요하지 않아서, 조 집사는 춘란에게 점포의 일을 돕게 했다.

처음으로 집안일이 아닌 바깥일을 하게 된 춘란은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북정 저택으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정사낭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접었다. 춘란은 우선 생계를 이어나가는 게 급선무라 생각하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점포 일을 시작했다.

반년이 지나자, 점포 일에 익숙해진 춘란은 포목점을 잘 가꾸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고, 이제는 누구나 그녀를 춘란 누이라고 불렀다.

“공자님, 안쪽에서 잠시 쉬다 가세요.”

춘란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쁘게 말했다. 정사낭은 두 사람의 진심 어린 초대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정의 새 저택은 6월에 완공되었다. 공사를 총괄했던 정계는 약속대로 사람들에게 집을 나눠 주었고, 제일 큰 저택을 정교랑의 집으로 남겨 두었다. 조 집사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정계의 바람대로 큰 저택에 정교랑의 물건들을 옮겨 놓았다. 그리고 조 집사 자신은 새로 고용한 사환과 함께 큰 저택의 바깥채에서 지냈다.

문 앞에 깔린 정갈한 벽돌 바닥은 눈이 왔던 것도 모를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새로 지은 집들은 고아한 운치가 돋보였고, 이따금 집 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 앞을 지키던 사환이 서둘러 조 집사 일행을 맞이했다.

“집사 어른, 정평이 와서 반나절 동안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평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정계는 자신이 살던 낡은 저택을 정평에게 주면서, 정교랑의 말을 기억하고 정평에게 풍수에 대한 가르침을 청했다. 정평은 정계의 청을 사양하지 않고 진지하게 집의 풍수를 보아 주고 그 대가로 정계의 낡은 저택을 받았다. 사람들은 정계가 정평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모두 정교랑의 체면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당시 정평도 정계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득의양양한 투로 말했다.

“내가 최고의 풍수를 봐줬으니, 안심하고 잘들 사십시오.”

그 후 정평은 돗자리를 치우고 정계가 살던 저택에서 살게 되었다.

“초대할 때는 안 오더니, 오늘은 어쩐 일인가?”

조 집사가 웃으면서 물었다.

“제가 집사 어른을 대신해서 좋은 거래를 하나 생각해 왔습니다. 새로운 점포를 연다고 들었는데, 풍수를 한번 봐 드릴까 합니다.”

정평이 손에 쥔 깃발을 흔들면서 검지 하나를 내밀었다.

“딱 일 문이면 됩니다.”

조 집사가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일세. 좋아, 내일 내가 자네를 찾아가겠네.”

정평은 한껏 즐거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서려고 했지만, 조 집사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를 불러세웠다.

“풍수를 그렇게 잘 보는데, 왜 우리 아씨의 거처는 안 봐주지? 이리 와서 방 안에 가구 배치는 어떤지 한번 봐 주시게.”

조 집사의 말에 정평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지었다.

“당신네 아씨는 명이 없는 분이라, 내가 봐주지 못하겠소만.”

재수 없는 말을 듣자, 조 집사는 악운을 내쫓기 위해 재빨리 침을 퉤 뱉고는 정평을 쫓아냈다.

등 떠밀려 온 정사낭은 마당에 서서 높이 걸린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태평.

“경성에서 보내온 거요?”

정사낭이 물었다.

“아니요. 현묘관 손 관주께서 보내신 겁니다. 아씨께서 워낙 태평이라는 글자를 좋아하시니, 저희 마음대로 편액을 걸어두었지요.”

현묘산에는 태평관이 있고, 경성에는 태평거가 있다. 듣기로는 누이가 태평 만두라는 것도 좋아한다고 했으니.

태평, 태평. 하늘의 도는 공평무사하여 선함을 칭찬하니 이는 곧 태평이라.

“누이가 좋아할 것 같네.”

정사낭이 웃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 춘란이 따뜻한 차를 우려 왔다.

기분 좋게 포근한 대청 안이 향긋한 차향으로 가득 메워졌다. 밖에서 들려오는 폭죽 소리와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영화 2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경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강주성의 정월도 무척 흥겨웠다. 넓은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해지자, 정평은 돈을 벌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깃발을 휘적거리며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나왔던 정평은 정오가 되도록 첫 장사를 개시하지 못했다.

“왜 그런 줄 아나?”

정평과 제법 가까워진 근처 점포의 점원 하나가 노둣돌에 기대면서 그에게 한가로이 말을 걸었다.

“왜 그런데?”

정평이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돈을 너무 적게 받아서 그래. 애걔걔, 고작 일 문? 너무 싸게 받으니까 자신이 없어 보이고, 그러니 자네가 봐주는 점괘도 미덥지 못한 거지. 다른 점쟁이들이 어떻게 장사하는지 구경은 해 봤어? 점괘 하나당 천금이야. 그게 더 자신 있어 보이고 왠지 용할 것 같잖아. 자네 꼴을 좀 봐. 누가 봐도 비렁뱅이 같은데, 누가 자네한테 점괘를 보겠어?”

점원의 말이 끝나고, 정평이 아직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정평 앞에 와서 멈춰 섰다. 점원과 정평은 깜짝 놀라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커다란 먹색 두봉을 두르고 가장자리가 새하얀 토끼털로 장식된 두모를 쓰고 있어서, 반쪽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여인이 손으로 두모를 살짝 들추자, 토끼털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을 본 점원은 눈을 크게 뜨고 넋을 놓았다.

우와, 엄청난 미인이잖아.

정평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정 낭자, 돌아왔군요!”

정교랑은 정평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아왔어요. 이제 막 성에 들어왔고요.”

정교랑은 정평이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무 힘들어요. 성문을 지나고 거리를 따라서 오고 있었는데, 한눈에 당신이 보였어요. 더 이상 걸을 힘도 없는데…….”

정교랑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점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엥?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한눈에 당신이 보여?

점원이 곁눈질로 정평을 훑어보았다.

에이, 설마. 저 비렁뱅이 같은 놈이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얻은 거야?

정평은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전에 정교랑이 자신 앞에서 대성통곡하던 일도 겪었던지라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또 마음의 병이 도졌구나.

정평이 자리에 앉아 미소를 지었다.

“많이 힘들었지요. 힘들면 이리 앉아서 좀 쉬어요.”

정평은 서둘러 자신 옆에 있던 낮은 의자를 정교랑의 앞으로 놓았다. 정교랑은 정평의 말을 듣고 의자에 앉았다.

정교랑의 주위에 있던 반근과 시종들은 정교랑이 방해받지 않도록 촘촘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서서 인파가 몰려들지 못하도록 막았다.

막상 정교랑을 자리에 앉혀 놓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정평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조 집사는 낭자가 돌아온 걸 알고 있습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요. 양주에서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요.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죠. 닥치는 대로 찾았고, 마을마다 샅샅이 뒤졌지만, 찾아내지 못했어요. 찾아내질.”

말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정교랑을 본 정평이 서둘러 그녀를 다독였다.

“세상만사는 인연을 따르는 법입니다. 찾지 못했다면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이니, 억지로 구하려 들지 말아요.”

“억지로 구하려 들지 말라고요? 그러기엔 너무 억울해요. 서러워서 포기할 수 없다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정평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교랑의 심원한 눈빛을 쳐다보고 있자니, 정평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또 그때와 같은 절망이 느껴져.

“세상 모든 일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어요. 믿고 싶지 않다고 서러워하고 억울해하면, 괜히 마음만 더 힘들어집니다.”

정평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말을 덧붙였다.

“낭자, 인생을 살면서 때를 놓치지 않고 제때 즐기는 게 가장 좋은 겁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천천히 말했다.

“제때 즐기라.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는데요?”

정교랑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건 낭자만이 알 수 있죠. 남이 돕고 싶다고 해서 도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정평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키고 자리를 떴다. 반근과 시종들은 정교랑을 위해 서둘러 길을 트고 따라갔다.

점원은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떠난 아름다운 여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정평을 붙잡으며 질문을 쏟아냈다.

“저게 누군데, 저게 누구야? 저게 누구냐고?”

“우리 가문 낭자.”

정평이 정신 사나운 점원을 밀어내며 말했다. 정평은 정교랑이 떠나간 방향을 내다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 보니 저 낭자, 정말 가엾네.”

점원이 혀를 차면서 정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엾긴 누가 가여워? 진짜 불쌍한 게 누군데? 자네가 입은 옷은 저 여인이 데리고 다니는 사환만도 못해.”

“사람의 가엾음은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걸세.”

정평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정교랑의 뒤를 쫓았다. 인파 사이로 보이는 정교랑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정교랑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 정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평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가르침을 받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어요.”

정교랑이 정평을 향해 말했다.

또 이렇게 공손한 태도네? 그새 감정을 추스른 건가?

정평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가르침이라니요. 편하게 물어보세요, 편하게.”

“만약, 훗날 어떤 사람이 당신을 해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그 화를 어떻게 막을 건가요?”

정교랑이 진지하게 물었다.

만약 훗날 어떤 사람이 나를 해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그 화를 어떻게 막을 거냐고? 참 흥미로운 질문이네.

점원은 앞으로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당연히 그자를 흠씬 두드려 패서 인생의 쓴맛을 보여줘야지요.”

점원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그러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니면 먼저 죽여 버리든가.”

죽여?

점원이 화들짝 놀라 정교랑을 쳐다봤지만, 정교랑은 한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가볍게 뱉었다.

무려 사람을 죽이는 일인데.

“어, 그게 제일이죠, 예. 후환이 남지 않도록.”

점원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정평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랬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교랑은 정평을 보며 잠자코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양주로 간 것이다. 양씨의 선조가 사냥꾼 출신이니, 그들의 본적인 양주로 찾아갔다. 삼백 년 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 억울함을 풀 길도 없으니, 고심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싹부터 없애버리는 것. 양씨 핏줄의 싹을 모조리 잘라 버려, 근간을 없애버리고 깨끗하게 멸족시키는 것.

정교랑은 시종일관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곱씹었다. 참혹했던 친족의 죽음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떠올리려 하지 않고 오로지 양씨 집안의 멸족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정교랑은 양씨 성을 가진 자를 찾지 못했을뿐더러 그런 마을도 찾아내지 못했다.

정교랑은 양산과 함께 고향에 갔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지금 정교랑의 기억 속에는 거대한 호수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거대한 호수.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곳.

이런 경우를 두고 상전벽해라고 하던가? 없어, 아무것도 없어. 찾아내지도 못하겠어.

삼백 년. 지금은 삼백 년 전이라 양씨 선조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도무지 포기할 수 없었던 정교랑은 양주 전체를 샅샅이 뒤졌다. 양씨 성을 가진 자도 찾아내긴 했지만, 누가 그 양씨 가문의 선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양주에 사는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러고 싶었다.

그날 밤, 정교랑은 양씨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의 집 앞에 비수를 들고 서 있었다.

“우와, 언니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예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정교랑의 다리를 붙잡고 감탄을 늘어놓았다.

“진짜 예쁘다.”

맑고 발그스레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본 정교랑은 차마 비수를 쥔 손을 휘두를 수 없었다.

잘 생각해. 나의 자매들과 조카들을 생각하자. 양씨의 손에 죽어 나간 정씨 가문 사람 중에도 저 아이와 비슷한 나이가 있었겠지. 양씨는 아이들까지도 가차 없이 죽였는데, 나는 왜 죽이질 못하는 거야!

죽여야만 해. 모조리 다 죽여야만 해.

“아씨, 길을 물으시려는 겁니까? 하루 묵으시려는 겁니까?”

집에서 나온 두 노인이 정교랑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교랑은 차갑게 내려앉는 심장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정신 차려. 아득한 천지에 가족도, 원수도 없이 나 홀로 쓸쓸히 남아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건 틀린 생각이죠.”

정평의 목소리가 정교랑의 귓가에 들려왔다.

뭐가 틀려?

정교랑과 점원이 정평을 쳐다보았다.

“뭐가 틀렸는데? 그 사람을 막아야 할 거 아냐? 그럼 그 사람이 자네를 괴롭히는 걸, 두 눈 뜨고 그냥 보고 있겠다고?”

점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정평이 턱을 매만지며 웃음을 지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정평이 소매 안에서 점을 볼 때 쓰는 대전(大錢: 동전의 일종) 세 개를 꺼내면서 말했다.

“내가 점을 보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내가 봐주는 점괘로 길흉을 물을 수는 있지만, 액운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정평의 말을 들은 점원이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그러니까 장사가 안 되지.”

정교랑은 정평의 말뜻을 이해한 듯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말은,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인가요?”

정교랑의 말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바꿀 수 없어? 바꿀 수 없는 거냐고! 이럴 거면 대체 나를 왜 다시 되살린 거야. 이 기억을 안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이번 생을 버티라는 거야?

점원은 정교랑의 분노를 느꼈는지, 괘씸하다는 듯 정평을 흘겨보았다.

으이구, 이러니까 장사가 안 되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손님마저 화를 돋워서 장사를 그르치니 원.

점괘를 보는 사람이라면, 입에 사탕을 물고 아첨을 떨 줄도 좀 알아야지.

“내 말뜻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바에는 차라리 자신에게 물어보는 게 낫다는 거죠. 나에게 그 질문을 하는 건, 낭자 자신에게 질문하느니만 못해요.”

정평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자, 정평은 말을 이어갔다.

“일단 자신에게 물어봐요. 왜 그 사람에게 화를 당하는지.”

왜 화를 당하냐고? 왜 양씨가 정씨 일족을 몰살하냐고?

정교랑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알다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아.

  • 왜긴? 넌 너무 잘났잖아.

내가 너무 잘났으니까, 죽어야 한다는 거야? 정씨 가문이 너무 훌륭해서 양씨 가문에 위협이 되니, 존재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어떤 가문이 훌륭해지길 바라지 않아? 평생을 이룬 것 없이 고생만 하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너무 훌륭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으니, 쇠락해서 훌륭하지 않게 되어 화를 면해야 한다는 뜻이야?

말이 안 되잖아!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정평은 정교랑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턱을 매만지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낭자는 지금 사람에 대해 묻는 거지, 화를 입게 되는 이유나 사건에 대해 묻고 있지 않잖아요.”

사람? 사건?

정교랑의 생기 없던 눈빛에 조금씩 빛이 감돌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인생을 살다 보면 피치 못하게 사람과 엮이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자가 나타나겠지요. 누군가를 막으려는 노력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게 효과적입니다.”

정평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내려놓으라는 건가요?”

정교랑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안 돼. 절대로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양씨 가문, 절대로…….

“그 화는 아직 안 일어난 거죠?”

정평이 손을 비비면서 물었다.

일어났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도 해.

“나중에 일어나요.”

아주 아주 나중에.

정교랑이 말했다.

“그럼 그런 생각은 해 봤어요? 그 사람을 죽였다고 쳐도, 다른 사람은요?”

정평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

“사람이 걷는 길에 빗대어 얘기해 보죠. 길을 걷다가 웅덩이와 그 안에 든 뱀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웅덩이를 메우고, 뱀을 밟아서 죽였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런다고 앞으로도 웅덩이나 뱀이 없을까요?”

정평의 말에 정교랑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화를 입힐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화를 입게 된 이유를 찾아야 해요.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그런 거였어? 그래서 운명은 바뀌지 않고, 피할 수도 없다는 거야?

내가 지금 양씨를 죽인다고 해도, 삼백 년 후에 주씨나 우씨, 아니면 그 누가 우리 정씨 가문을 멸족할 수 있다고? 우리 정씨 가문이 강해지는 한, 영원히 그런 화를 피할 수 없단 말이야?

강하다는 게 언제부터 잘못으로 치부된 건데? 강하다는 건 절대로 잘못이 아니야!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교랑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면 되죠.”

정평은 당연한 얘기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낭자에게 화를 입히려는 사람들이 아예 화를 저지를 생각도 못 할 정도로 강해지라고요.”

더 강해져야 해!

정교랑이 정평을 바라보았다.

역시 선조님도 강한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거야. 강하다는 이유로 화를 입을 거라면,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해!

그래. 우리가 화를 입은 건, 강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야. 그들이 두려워 벌벌 떨 정도로 강하지 못해서.

사람은 누구나 그랬다.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이에게는 경외감을 보이지만, 그 거리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고작 이 정도냐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정씨 가문을 더욱 막강하게 키워내야 해. 양씨 가문이 애초에 우리를 건드릴 생각조차 못 하게.

“대인.”

정교랑이 탁자를 짚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흥분한 표정으로 정평을 바라보았다.

“대인, 꼭 부탁드려요. 꼭 더 훌륭해지고 강해지세요.”

갑작스러운 정교랑의 행동에 정평은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갑자기 또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아니, 아니. 내가 아니라, 낭자가요, 낭자가.”

정평이 다급하게 손을 저으면서 말했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거의 바닥에 무릎을 꿇을 기세로 몸을 기울였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쓸모가 없어요. 대인, 오직 대인만이 그들을 구하실 수 있어요. 우리를 구하실 수 있다고요.”

정교랑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다.

또 마음의 병이 도진 모양이네.

“잘 생각해 봐요. 낭자가 아는 일이니, 이건 낭자의 일이에요. 나와는 무관해요.”

정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보다 못한 반근이 끼어들었다.

“사람이 어쩜 그래요!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어디 덧나요? 알겠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냐고요!”

반근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래도 군자가 함부로 허언을 하면 안 되지.”

정평이 억울한 듯 대꾸했다. 이때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정평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군자는 개뿔. 풍수를 봐 주기로 한 걸 없던 일로 치고 싶어?”

눈을 부릅뜬 조 집사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쳤다. 정평은 그제야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교랑에게 말했다.

“좋아요, 알겠어요. 내가 꼭 더 강해지도록 노력할게요.”

정교랑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대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꼭 더 강해지셔야 합니다. 제게 뭘 시켜도 다 해내겠습니다. 돈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가진 돈을 다 드리겠습니다. 전부 다요. 더 필요하시다면 더 벌어 올게요.”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알겠어요. 알겠으니 일단 일어나서 얘기해요.”

정평이 어색하게 웃으며 정교랑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일단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요.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예.”

반근이 조심스럽게 정교랑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조 집사와 시종들이 주위의 구경꾼들에게 물러나라고 호통을 쳤다.

정교랑이 인파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자, 정평과 점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식은땀을 닦아냈다.

“미친 사람이었구나.”

점원이 중얼거렸다. 정평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미친 사람이야.”

정평이 멀어지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정교랑은 더 이상 반근의 부축 없이 곧은 시선으로 앞을 보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의 뒤로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교랑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웅성대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며 비웃었다.

그들은 정교랑이 걸어온 눈물겹고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고단한 여정을 알 턱이 없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정월이 된 남정에는 새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골목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여인들도 하나둘씩 집 밖을 나섰다.

“정 아씨께서 돌아오셨대!”

“진짜? 드디어 돌아오셨네!”

소식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은 새로 지어진 정교랑의 저택을 쳐다보았다.

골목의 떠들썩함에 비해 저택 안은 몹시 조용했다. 정교랑을 보러 온 정계와 다른 사람들을 조 집사가 예의 있게 막아섰다.

“아씨께서 피곤해하시오. 오늘은 그만 쉬셔야 하니, 다음에 다시 오시구려.”

조 집사가 조용히 말했다.

정교랑이 먼 길을 다녀와서 쉬어야 한다는 것쯤은 정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교랑을 만나지 못 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들이 보여야 할 성의는 충분히 보여야 했다.

정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 어른께서는 몸종을 따로 두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이들이 여기서 물을 끓이고 밥 짓는 것을 도우면 어떨지요?”

정계가 뒤에 서 있는 아낙들을 가리키자, 아낙들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아니오. 아씨의 원칙을 다들 알고 있잖소.”

조 집사는 정계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게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 아씨는 절대 우리를 아랫것으로 대하지 않는다니까. 도리어 우리를 손님 모시듯이 한다고.”

지난번에 정교랑을 따라 나들이를 갔던 두 아낙이 골목 안에서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의 거처에 갔다가 도움이 필요 없다는 말에 아쉬워하며 돌아온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캬,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그 아씨를 따라 나들이 다녀온 것만으로도 이번 생엔 더 이상 여한이 없어. 거기서 먹은 것이며, 마신 것이며.”

수차례 들었던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이번에도 걸음을 멈추고 경청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이야기 속의 두 아낙의 자리에 자신들을 대입해 보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두 아낙을 그렇게 대했으니, 그 자리에 자신들이 있었어도 똑같이 손님을 모시듯이 대해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을 그리 살뜰히 챙겨 주는 아씨가 이 세상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춘란이 부채질을 열심히 해댄 덕에 화로에 지핀 불이 더욱 거세졌다. 불 위에 올려둔 솥에서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너무 센 불로 하지 말고, 천천히 우리면 돼.”

반근이 걸어들어오면서 말했다. 춘란은 당황해하며 서둘러 부채를 내려놓았다.

“반근 언니.”

춘란은 자신에게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반근을 불렀다.

  • 나랑 아씨는 여기서 낚시 중이었어. 갑자기 달려와 놀라게 한 사람은 너잖아.

  • 나한테 넷째 공자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있어.

춘란의 귓가에 반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불러 놓고 왜 멍하니 있어?”

반근이 웃으면서 춘란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동생을 잘 보살펴 줘서 고마워.”

정신을 차린 춘란이 반근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네가 그때 우리 아씨를 살펴 줬던 게 고맙지.”

반근이 말하자 춘란은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

“아휴, 그러지 마. 언니가 먼저 날 도왔잖아. 언니가 아니었다면, 공자님은 벌써 돌아가셨을 거야.”

“우리 아씨께서는 사소한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하셨어. 그러니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귀하게 여기고 감사해야지.”

반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이, 둘이 무슨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다 밥 다 타겠다.”

금가아가 문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서로에게 깍듯하게 예를 표하던 두 몸종이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아씨께서 일어나셨다.”

조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근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춘란과 함께 밥상을 차려 안쪽 마당으로 걸어갔다.

저녁이 되자, 등롱이 마당 안을 밝게 비췄다. 천천히 열리는 대청 문틈 사이로 단정히 앉아 있는 정교랑이 보였다.

아직 이른 봄의 경성은 다소 쌀쌀했다. 진안 군왕은 커다란 두봉을 두르고 있었다.

태후궁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진안 군왕은 곧바로 몸을 돌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태후궁 앞에 있던 내시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을 붙잡았다.

“전하,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진안 군왕은 어쩔 수 없이 태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후궁 안은 향기롭고 포근했다. 궁 안에는 태후와 귀비, 비빈들과 낯선 낭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진안 군왕이 들어오자, 낯선 낭자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 마마께서 주셨던 향음자(香飮子: 고대의 우유차)를 얻으러 왔습니다. 육가아가 무척 좋아해서요.”

진안 군왕이 태후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태후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저, 육가아를 혼자 두면 안 돼서요.”

진안 군왕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위낭, 앉거라.”

태후의 단호한 태도에 진안 군왕은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에 야윈 것 좀 봐라.”

태후가 진안 군왕을 가리키며 비빈들에게 말했다. 비빈들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낯선 낭자도 고개를 들어 힐끔 쳐다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에이, 야위긴요. 훤칠해진 거죠. 마마께서는 제가 더 준수해진 것 같지 않으십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대전 안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낯선 낭자도 소매를 들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가 준수하다는 것쯤은 잘 알지.”

태후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갔다.

“어찌 됐든, 육가아는 네 아우고 너는 육가아의 형이다. 네가 육가아를 아낀다고는 하나, 꼭 네가 직접 수발을 들 필요까지는 없지. 수발을 드는 아랫것에게는 아랫것의 본분이 있고, 너에게도 너의 본분이 따로 있는 법이야. 위낭, 설마 평생 육가아의 곁을 지킬 셈이냐?”

“당연하죠. 전 평생 육가아의 곁을 지킬 겁니다. 마마, 저는 봉작도 필요 없고,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요. 단지 경성에 남아 있고 싶을 뿐입니다. 마마,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진안 군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아무도 너를 내쫓지 않는단다.”

태후가 서둘러 아니라며 진안 군왕의 어깨를 토닥였다.

“육가아만 챙기지 말고, 너 자신도 챙기란 말이었어.”

진안 군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태후에게 예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태후는 못 말리겠다는 듯 진안 군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낭이 하나밖에 모르는 성격이라, 누구를 좋아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애야. 애가가 몸이 한창 안 좋을 때 부득이하게 궁을 따로 내주고 위낭에게 나가서 지내라고 했더니, 위낭이 가기 싫다고 어찌나 울고불고하던지. 애가는 그때 위낭이 아주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니까.”

태후가 웃으면서 비빈들에게 말했다.

“전하는 정이 많은 분이죠. 보기 드물어요.”

귀비가 웃으면서 뒤에 앉아 있던 소녀를 슬쩍 보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손짓했다.

“이런, 실례를 했네. 아운(阿云), 어서 전하께 인사 올려야지.”

낯선 낭자는 불안한 기색으로 자세를 고쳐 앉고는 진안 군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소녀 오(吳)씨, 전하를 뵈옵니다.”

소녀는 가녀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쪽은 현비 주씨의 조카예요. 모친과 같이 경성에 올 일이 있다길래, 현비가 이 아이더러 궁에 들르라 했대요.”

귀비가 미소 띤 얼굴로 진안 군왕에게 소녀를 소개했다. 진안 군왕은 대답 대신 가벼운 목례로 답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고 소매를 들어 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내시 하나가 조용히 물러났다.

“숙혜 공주가 주 현비의 거처로 옮겨갔는데 어찌나 좋아하던지. 주 현비의 한 살배기 어린 공주도 숙혜 공주를 그렇게 좋아해서, 둘이 매일 잠도 같이 잔다네요.”

귀비가 웃으면서 주 현비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역시 아이들은 많을수록 좋죠.”

비빈 한 명이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진안 군왕은 물러가겠다고 예를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향음자는 주 현비한테 있어요. 전하께서 직접 받아가시지요.”

귀비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옆에 앉아 있던 오 낭자를 쳐다보았다.

“아, 가는 김에 아운을 주 현비 처소로 데려다주시면 더 좋겠네요.”

귀비의 말에 바짝 긴장한 오 낭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당치 않습니다. 전하께 그런 수고를 끼칠 순 없어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대답했다.

“에이, 수고랄 것도 없죠.”

귀비가 재빨리 오 낭자를 재촉했다.

“어서 가 보렴.”

오 낭자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예를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옮기자, 오 낭자도 고개를 숙인 채 좁은 보폭으로 뒤따라갔다.

소년과 소녀가 자리를 뜨자, 대전 안에 있던 비빈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어때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죠?”

귀비가 웃으면서 물었다.

“주씨 가문 사람이니, 교양도 있는 아이겠지.”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비의 말이 맞다. 위낭의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되겠어. 이렇게 지내다가는 폐인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마마, 너무 염려치 마세요. 혼례를 올리고, 챙겨줄 아내가 생긴다면 달라지겠죠. 경왕은 군왕이 챙기고, 군왕은 아내가 챙기도록요.”

귀비가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그래야지.”

근심을 걷어낸 태후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대전 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었을 리 없는 진안 군왕은 오 낭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올해 몇 살이에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오 낭자는 진안 군왕이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입을 열자마자 대뜸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니, 오 낭자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3월이 지나면 열여섯입니다.”

오 낭자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아, 그래요?”

진안 군왕은 또 한 번 고개를 돌려 오 낭자를 쳐다보며 웃었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큰 편이네요.”

길고 가녀린 체형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오 낭자는 고개를 더욱 푹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현비마마의 본가는 영주(寧州)인데, 낭자도 거기서 지냅니까?”

진안 군왕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오 낭자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햇살이 소년의 준수한 옆태를 비추었다. 진안 군왕의 얼굴을 보던 오 낭자가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괜찮습니까?”

진안 군왕이 재빨리 손을 뻗어 오 낭자의 어깨를 감싸며 부축했다. 소년의 손에 어깨를 맡긴 오 낭자는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 그 자리에 얼어 버렸다.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황궁은 생각보다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에요. 마마들께서도 상냥하게 대해 주실 겁니다.”

진안 군왕은 곧바로 오 낭자를 부축했던 손을 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진안 군왕이 오 낭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뒤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와 어린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황궁 안에서 저렇게 소리를 크게 질러도 되나?

오 낭자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뚱뚱하고 키가 작은 아이 하나가 이쪽을 향해 거의 구르다시피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눈이 뒤집힌 채 침을 질질 흘리는 아이의 모습은 꼭 정월 꽃등 놀이에 쓰이는 귀신 가면과 흡사했다.

오 낭자가 질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숨으면서 손으로 아이를 때리려고 했다. 이때, 누군가가 오 낭자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괜찮아요, 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요. 아이가 철이 없어 낭자를 놀라게 했군요. 내가 바로 데리고 갈게요.”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낭자의 손목에는 아직 진안 군왕의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햇살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탓에 오 낭자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 진안 군왕과 귀신 가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 낭자는 꿈을 꾼 듯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

태후가 금잔을 탁 하고 세게 내려놓자, 귀비와 주 현비는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태의를 보내거라. 그 아이가 많이 놀랐겠구나.”

태후가 천천히 말했다.

“아닙니다, 마마. 아운은 괜찮을 겁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누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을 거예요.”

주 현비가 서둘러 대답했다.

“장난이라고 한들, 경왕이 정말 그 애를 때리기라도 한다는 말이더냐?”

태후가 주 현비를 쳐다보면서 냉담하게 말했다. 귀비는 주 현비를 노려보고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마마, 이번 일은 뜻밖에 일어난 일입니다. 경왕이 갑자기 그렇게 뛰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갑자기?”

태후가 귀비를 쳐다보았다.

“귀비의 말인즉슨, 이게 다 군왕이 미리 계획이라도 했다는 게야? 군왕이 일부러 그 아이를 놀라게 하려고?”

귀비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태후가 내시에게 명했다.

“얘기해 보거라.”

“군왕과 오 낭자는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진안 군왕께서 먼저 오 낭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고요. 낭자에게 나이는 몇이냐 물어보고, 키가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고는 황궁 안에서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까지 하셨지요.”

이게 어딜 봐서 군왕이 오 낭자를 싫어한다는 거야? 마음에 드니까, 군왕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한 거겠지.

“마마, 제 말씀은 그게 아니오라, 경왕이 갑자기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아이들은 놀라기 마련이라는 뜻이었어요.”

귀비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태후는 어림없다는 태도였다.

“그럼 놀라지 않을 사람을 찾았어야지. 진정 교양이 있는 사람은 단정하고 예의가 있는 법이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자는 옹졸한 게지.”

주 현비는 태후궁에서 나온 뒤로부터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울긴 뭘 울어. 자네가 옹졸하다는 것도 아닌데.”

귀비가 귀찮다는 듯 한마디 했다.

“마마, 태후께서 제 욕을 하신 거잖아요. 저희 집안이 옹졸하다고요.”

주 현비가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 소리 들어도 싸지!”

귀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주 현비를 다그쳤다.

“자네는 왜 경왕 일을 귀띔도 안 했어? 경왕과 군왕이 서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는 걸 왜 말해 주지 않았냐고!”

“이, 이럴 때조차 경왕을 데리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집안에 알려…….”

주 현비는 눈물을 훔치면서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했지만, 귀비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됐네. 설령 알린다 해도 이미 늦었어. 이번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

경왕의 궁 안, 수심이 깊어 보이는 진안 군왕이 곤히 잠든 경왕을 토닥였다.

“전하, 현비마마께서 향음자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내시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시는 밖으로 물러났다.

경왕에게 시선을 돌린 진안 군왕은 자조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육가아, 내가 너를 무기로 쓰게 됐구나. 가만 생각해 보니, 너를 비웃고 피하는 자들과 내가 다를 바 없어.”

진안 군왕은 잠시 뜸을 들이고 경왕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도 우린 이대로 나아가야 해. 퇴로가 없거든.”

경왕이 칭얼거리며 잠꼬대를 하다 몸을 뒤집자, 진안 군왕은 잠든 경왕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전하도 좀 쉬시지요.”

어두운 구석에 서 있던 내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다. 난 조금 걷고 싶구나.”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또 걷겠다고? 군왕께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 모르겠네.

내시는 서둘러 진안 군왕에게 두봉을 걸쳐 주고 그를 따라 문을 나섰다.

다른 이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던 진안 군왕은 일부러 한산하고 외진 곳으로 경왕의 거처를 골랐다. 그는 어화원이나 산책을 즐길 만한 곳을 걷는 게 아니었다. 고작해야 경왕의 궁 주위를 몇 바퀴 돌 뿐이었다.

주위에 서 있던 내시들은 군왕의 이런 모습이 이미 익숙한지, 경왕의 궁 안을 몇 바퀴씩 돌고 있는 진안 군왕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끝이 없는 길을 걷는 사람처럼, 진안 군왕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침 해가 환하게 떠오르자 대문이 열리고 정교랑이 밖으로 나왔다. 반근과 두 몸종도 바구니와 낚싯대를 들고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이쪽 강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아요. 아씨, 낚시하려면 성 밖으로 나가시는 게 더 낫습니다요.”

대문 앞에 있던 이웃이 낚싯대를 보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정교랑은 웃으면서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정교랑이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정평이 튀어나왔다. 조 집사와 반근은 깜짝 놀랐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낭자와 제대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정평이 말했다.

거리에서 마주쳤던 그날 이후로 정교랑은 정평을 찾지 않았고, 정평도 일부러 찾아오지 않았다. 그날 거리에서 있었던 일은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되어 버렸다.

정교랑이 자세를 낮춰 예를 올렸다.

“말씀하세요.”

“낭자가 강해져야 해요. 다른 사람이 강해져 봤자, 그건 소용없어요. 낭자의 위기는 낭자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정평의 말을 들은 조 집사와 반근의 눈이 뒤집혔다.

“이 망할 놈이!”

조 집사는 욕을 해대며 정평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정평이 말을 끝내자마자 잽싸게 도망치는 바람에 그를 잡지는 못했다.

“군자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멀리서 정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받은 조 집사의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저놈 성격도 참 이상하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누가 정씨 핏줄 아니랄까 봐.

그런 생각을 하던 조 집사는 다급하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아, 아니. 그렇다고 우리 아씨가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내가 강해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정씨 일족은 더 이상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걸.

“가자.”

잠시 제자리에 서 있던 정교랑이 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른 봄이어서 강가는 제법 쌀쌀했다. 반근이 나무 의자를 내려놓자, 정교랑이 강 쪽으로 낚싯대를 휙 휘두르고는 의자에 앉았다.

정교랑의 행동을 본 주위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졌다.

“언제부터 이 강에 물고기가 살았지?”

누군가가 머리를 내밀면서 강 안을 살폈다.

“이 강에 물고기가 있겠냐? 저 사람, 정씨 가문의 바보잖아. 바보가 낚시하는 건데 물고기가 필요하겠어?”

다른 사람이 팔짱을 끼면서 혀를 찼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씨 가문의 바보가 정 대노야를 관청에 고소했다는 소문은 이미 강주 전역에 퍼졌다.

저 바보가 어머니의 혼수를 되찾으려고 자기 큰아버지를 고소했다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기 어렵지. 무엇보다도 저 바보가 승소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야.

그들은 정교랑이 관청에 정 대노야를 고소했다는 이야기의 상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일부 똑똑한 사람들만이 그 일의 내막을 추측해 볼 뿐이었다.

조 집사가 강가에 가만히 앉아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주위의 시종들에게 눈짓했다. 조 집사와 시종들이 한쪽으로 자리를 비켰다.

“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조 집사가 묻자 시종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조 집사는 세 사람의 머리를 차례로 내리쳤다.

“잘났어, 아주! 이젠 나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느냐?”

조 집사가 소리를 낮춰 호통치자, 시종들은 헤헤 웃으면서 대답했다.

“집사 어른께 일부러 숨기려는 게 아니고요. 잠깐 빼고는, 대개 평소와 같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조 집사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그럼 그 잠깐은 어땠는데?”

시종들이 다시 한번 눈빛을 교환하고는, 머뭇거리며 조 집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게, 아씨께서 엄청 커다란 호수를 찾아낸 뒤로부터 그랬지 아마?”

시종 하나가 옆에 있는 시종에게 묻다시피 입을 열었다.

“맞아요. 커다란 호수 하나를 보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그 뒤로 아씨의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졌어요.”

“뭐 딱히 이상해졌다기보다는, 며칠 내내 호수 앞에 가만히 앉아만 계셨어요.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긴 했는데.”

“있긴 했는데, 그때처럼 갑자기 난폭해지시지는 않았죠.”

시종 둘이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정교랑의 이상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난폭해졌다고?

조 집사가 시종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난폭해졌다니?”

시종 몇이 주위를 살피면서 조 집사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집사 어른, 한동안 저희는 숨소리도 크게 못 내고 지냈습니다.”

시종들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말했다.

뒷마당의 마구간 안에는 양주에 갔다 왔던 마차들이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두 시종이 마차 앞으로 다가가 천막을 들어 올리자, 조 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쓰지 않는 마차에 천막을 씌워 놓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마차를 밧줄로 꽁꽁 묶어 놓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었다.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밧줄을 풀고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마차 안을 들여다보던 조 집사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눈이 휘둥그레진 조 집사가 마차를 가리키며 외치려고 하자, 시종 하나가 재빨리 조 집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집사 어른, 목소리를 죽이십시오!”

정신을 차린 조 집사가 시종들을 밀쳐내고 마차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마차 안에는 조금 이상하게 생긴 쇠뇌(발사장치가 달린 활)가 놓여 있었다.

주씨 가문은 무장 가문인지라 조 집사는 무기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있는 쇠뇌는 여태 봐왔던 쇠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철로 만들어진 등(쇠뇌 앞부분에 둥그런 고리 모양으로 나와 있는 부분)과 구리로 만들어진 발사장치, 마(麻)로 만든 현. 활의 몸체는 3척 하고도 2촌, 현은 2척 하고도 5촌 길이었다.

조 집사는 활을 손에 쥐기도 전부터 좋은 쇠뇌라는 생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팔을 뻗어 활을 들려던 조 집사는, 활의 무게 때문에 온몸을 휘청거렸다.

“이건 족히 4석은 되겠구나!”

조 집사가 놀라워하며 활시위를 당기려던 찰나, 시종이 그를 제지하고 활을 가져갔다.

“집사 어른, 이건 이렇게 쓰는 겁니다.”

시종이 쇠로 된 고리를 밟아서 화살을 장전했다.

시종이 화살을 발사하자, 조 집사는 깜짝 놀랐다. 일반적인 쇠뇌와는 달리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쇠로 된 고리를 밟는 시종들의 얼굴에서는 현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화살을 장전하는 모습만 보고도, 조 집사는 이 쇠뇌의 힘이 무척이나 셀 것이라고 예상했다.

텅 하는 진동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화살은 순식간에 반대편 나무에 팍 하고 꽂혔다. 얼마나 세게 꽂혔는지, 화살은 나무를 거의 뚫을 기세로 단단하게 박혀 버렸다.

조 집사의 눈이 더욱 커졌다.

“저희가 시험 삼아 철갑옷에도 쏴 보았는데.”

시종이 조 집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삼백사십 보 밖에서 느릅나무를 반쯤 뚫었고, 칠십 보 밖에서 철갑옷을 뚫었습니다.”

놀란 조 집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엄청난 신병이기(神兵利器: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강력한 무기)잖아!

“아, 아씨께서 만드신 게냐?”

조 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종들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걸 만들어서 뭐에 쓰려고?”

조 집사가 말을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군자의 육예 중 하나가 바로 활쏘기이니, 정교랑이 활을 만들어 과녁을 쏘는 것은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한 활이 아니라, 이런 강력한 쇠뇌라면 얘기가 달랐다.

시종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살인이요.”

쇠뇌를 건네받은 조 집사는 다시 한번 휘청였다.

그래, 살인. 아씨께서 사람을 죽이시는 거야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만, 굳이 이런 쇠뇌까지 만들어서 상대해야 할 사람이 대체 누구지?

사람 하나를 죽이시려는 거였을까, 사람들 무리를 죄다 죽이시려던 거였을까?

“그 후로 아씨께서 양주 곳곳을 돌아다니시는 동안 몇 번 살의를 품으신 적이 있습니다. 진짜로요. 그런데 죽이려던 사람은 모두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었고, 그중에는 노인들이나 어린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 시종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살인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면부지인 데다 정교랑 일행을 살갑게 맞이해 주던 선량한 사람들에게 차마 손을 쓸 수는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무고한 살인이기 때문이었다.

“아씨는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니야.”

조 집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 집사가 생각하는 정교랑은 항상 원칙을 지키고 약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씨 저택에서 정 대노야와 정씨 시종들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그녀는 조 집사에게 무력을 쓰지 말라고 일렀다. 하인들과 싸워 봤자 체면만 깎인다고 했던 정교랑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거만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씨 가문의 시종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길 가다 만난 무고한 자를 죽일 수 있냐는 말이다.

“그렇긴 하죠. 나중이 돼서는 또 괜찮아지셨거든요.”

시종들은 여운이 남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다시 강주로 돌아왔어요. 그 이후의 일들은 집사 어른도 아실 테고요.”

성에 들어오자마자, 거리에서 정평을 마주쳐 그에게 울며불며 뭔가를 부탁했지.

조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쇠뇌를 쳐다보았다. 쇠뇌를 보면 볼수록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활이 시종들이 말한 것처럼 그리 강력하다면 말이지. 이걸 조정에 바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을 인정받을 거야!

“집사 어른, 아씨께서 이걸 잘 간수하라고 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조 집사가 시종들에게 지시했다.

“마차에 두지 말고 지하 비밀 창고에 넣어 두거라.”

쇠뇌와 함께 마음을 추스른 조 집사는 다시 바깥으로 걸어 나와 강가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좌선하는 노승처럼 평온한 얼굴의 정교랑을 본 조 집사는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떤 일에도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다는 건 좋지 않은데. 죽을병에 걸려서 곧 세상을 뜨게 된다고 해도, 저리 평온할 것만 같단 말이지. 저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감정이 메마르다니. 이를 어쩌면 좋을꼬?

사람이 살면서 바라는 것 하나 정도는 있어야 좋을 텐데. 정평이라는 그 이상한 놈도 돈 백 문을 벌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무슨 일-

영화 2년 4월.

용곡성 거리 위로 말 서너 마리가 달려오더니 어느 민가 앞에 멈춰 섰다.

소박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민가에는 빨간색과 초록색의 화려한 장식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언뜻 보아도 혼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된 집처럼 보였다.

“넷째 형님,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오? 벌주 마셔요, 벌주!”

술 주전자를 높이 치켜든 서봉추가 술 냄새를 풍기며 외쳤다.

“큰형님, 제가 출타했던 터라 이 좋은 경사를 놓쳤습니다.”

서사근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중 나온 범강림은 금방이라도 큰절을 올릴 기세인 서사근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다. 관리의 몸이니 어쩔 수 없지.”

“맞아, 맞아. 넷째 형님은 관리시고, 우리는 일개 병사지.”

서봉추가 눈치 없이 외치자, 서무수가 그의 등짝을 한 대 후려쳤다.

“네 색시는 애를 업고 널 찾고 있는데, 넌 여기서 주정이나 부리고 있어? 관리는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불만 있으면 너도 말을 돌보러 가든가.”

“아유, 그럴 바에는 그냥 병졸이 훨씬 낫죠.”

서봉추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헤벌쭉 웃었다. 그러고는 서무수의 말을 듣고 순순히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서 있던 형제들이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일곱 형제가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서봉추의 품에 안겨 있는 몇 달 된 아이까지 합하면 모두 여덟이었다. 아낙들이 부엌과 방을 오가면서 술과 음식을 내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네.”

서사근이 눈앞의 형제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봉추 아우의 아들이 벌써 이렇게 컸고, 큰형님도 장가를 드셨고.”

“그러게. 이제 너희 몇 명만 남았다. 어서 가정을 이뤄야지.”

범강림이 서사근의 말을 받아치면서 손가락으로 몇 사람을 지목했다.

“우리는 아직 세워야 할 공이 많습니다. 자, 넷째야, 이 술 한 번 맛보거라.”

서무수가 웃으면서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맞소, 맞아. 형님, 관주랑 이 술 중에 어느 게 더 맛있는지 말해 봐요.”

서봉추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이게 누이가 강주부에서 보내온 술이야?”

서사근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좋은 술이라고 감탄했다.

“감탄부터 해대지 말고, 누이가 뭐라고 했는지는 안 궁금해?”

형제 중 하나가 웃으면서 물었다.

“보나마나 뻔하지. 누이는 분명히 이 술이 별로라고 했을 거야. 마땅한 술이 없으니, 이걸로라도 흥을 돋우라고 보냈겠지.”

서사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방 안이 웃음바다가 되자, 문밖에 있던 아낙들이 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역시 형제들이 다 모이니까 즐거워 보이네.”

아낙 하나가 말했다.

“누이 얘기만 나오면 더 즐거워 보인다니까요.”

새댁으로 보이는 아낙이 대꾸했다.

앞서 말을 건넨 아낙이 새댁 같은 아낙의 손을 잡으며 반짝이는 금팔찌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소매를 살짝 걷어 자신의 손목에 걸린 금팔찌를 내보였다.

“언제쯤 일곱 개가 다 채워질까.”

“시누이가 어떤 사람인지 참 궁금해요. 답례로 뭘 보내야 할지 고민했는데, 남편 말로는 누이한테 부족한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신을 직접 만들어서 보냈는데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이에요.”

새댁이 창피해하며 말했다.

“에이, 그럴 리가. 바느질 솜씨 한번 구경해도 돼?”

아낙들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바느질 공예를 하나씩 꺼내 보면서 손재주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옆방에서는 간간이 사내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갑자기 거리에 울려 퍼진 다급한 딱따기 소리가 형제들의 즐거움을 깨트렸다.

“무슨 일 났나?”

형제들이 밖으로 나와 물었다.

“무슨 일이겠소. 서쪽 오랑캐 놈들이 또 이 몸한테 공 세울 기회를 바치러 온 거겠지.”

서봉추가 아들을 아내에게 건네고는 외쳤다.

“이번 공만 세우면, 우리도 다 명실상부한 장군이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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