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 고칠 수……
세밑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현묘관의 참배객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불이 약한 것 같구나. 너희 둘도 같이 가서 불을 때라.”
손 관주가 두 도동에게 명하자 도동들이 얼른 대답하고 불을 때러 갔다.
“또 뭘 해야 하지? 더 준비할 게 뭐가 있으려나.”
손 관주는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며 혼잣말을 했다. 뭔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밖에 있던 반근이 들어와 손 관주를 보며 웃었다.
“관주님, 그리 바삐 움직이지 않으셔도 돼요. 잠시 묵는 거예요.”
“잠시 묵는 것도 묵는 건데 대충 할 수야 없지.”
손 관주는 후회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름에 내가 방에 있는 자리를 갈아야 한다고 했는데 여태 안 갈았지 뭐야. 지금 다시 불을 지피면 곰팡내가 날 텐데.”
“괜찮아요. 처음 불을 지피는 것도 아니고, 관주님께서 쭉 불을 때셨는데 무슨 곰팡내가 나요. 향만 좋던걸요.”
반근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손 관주는 여전히 불안한 듯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아씨의 손님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잖아. 그건 아씨의 체면을 깎는 일인데.”
“아씨의 체면이 다른 사람 때문에 깎이겠어요?”
반근이 웃으며 대꾸하자 손 관주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씨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
손 관주는 앞에 있는 몸종을 쳐다봤다.
반근이라…….
“너도 이름이 바뀐 거니?”
손 관주는 재미있는 일이 생각나는 듯 웃으며 물었다.
“또 누가 이름이 바뀌었는데요?”
반근도 웃으며 되물었다. 손 관주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지만, 손 관주의 귀에는 묵인으로 들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밖으로 나갔다.
“글쎄 금가아를…….”
“금가아요?”
반근은 금가아라는 말만 듣고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 반근이 하나 더 있을 뻔했구나.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 누나, 나 불렀어?”
금가아가 이쪽으로 달려오자, 반근과 손 관주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금가아만 이들이 왜 웃는 건지 영문을 몰라 했다.
“그분들 쉴 곳은 마련해 드렸어?”
반근이 웃음을 거두고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금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온 사람이 많진 않아. 방금 곁채에 자리를 마련해 드렸어. 그 공자님도 거기에 계셔.”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필요한 거 있나 가 봐야겠어요.”
반근이 손 관주에게 말했다.
“그래. 어째 죄다 사내들만 왔는지. 여인은 하나도 안 데려왔네. 가서 살펴봐. 난 아씨께서 잘 주무시나 가 볼게.”
반근과 손 관주는 각자 할 일을 하러 갔다.
반근은 금가아가 알려 준 길로 걸어갔다. 겨울인데도 주변이 적막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평소에 정성 들여 가꾼 듯했다.
그때 아씨께서 이곳에 지내셨겠구나. 그 구역질 나는 연놈들도 여기서 마주치셨을 테고.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아씨 곁을 지켜 드리지 못한 게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으아!”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에 반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반근은 어느새 마당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안쪽으로 아이 하나가 보였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입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를 내며 손에 든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육가아, 어서 내려놔. 손 다칠라.”
소년이 급히 달려와 아이의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나뭇가지를 빼앗으면서 나뭇가지에 다치지 않으려다 보니 소년은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손이며 얼굴이 여기저기 긁혔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심조심 나뭇가지를 빼앗았다.
- 아씨, 아씨, 그거 내려놓으세요. 이거 가지고 노세요.
반근의 눈앞에 환각과도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거기도 도관이었고, 거기에도 이렇게 작은 마당이 있었다. 나뭇가지를 휘저으며 히죽히죽 웃고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니는 어린 아씨와 그 뒤를 조심스레 쫓아다니는 어린 몸종…….
“육가아, 밥 먹자.”
- 아, 하세요. 착하죠, 한 입만 드세요.
밥알이 튀고 밥그릇이 엎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건 먹으면 안 돼”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 아씨, 얼른 버리세요. 바닥에 떨어진 건 먹으면 안 돼요. 어서 이리 주세요.
어린 몸종은 어린 아씨의 손에서 얼른 전병을 빼앗았다. 귓가에 딱딱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가아, 거기 서.”
주먹밥을 빼앗긴 아이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도 제대로 안 보며 무작정 달리자, 진안 군왕이 얼른 뒤쫓아갔다. 반근이 손을 뻗어 아이를 붙잡았다.
“자, 착하죠. 말 들으세요. 저기 가서 놀아요.”
반근이 몸을 낮춰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아이가 반근을 향해 헤헤 웃었다. 생기 잃은 얼굴에 눈빛은 흐리멍덩했으며 입에서는 침이 죽 흘러 옷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보는 열에 아홉은 못생기기 마련이었다. 표정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다 보니 기괴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 눈에는 못생기고 무서워 보였다.
헤헤 웃던 아이가 갑자기 홱 달아났다. 아이는 비틀비틀 달려가며 이이야야 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바닥에 떨어진 밥그릇을 본 진안 군왕이 얼른 달려가 주우려 했다.
“공자님, 제가 할게요.”
반근이 나서자 진안 군왕은 고집을 피우는 대신 반근이 하게 두고, 한쪽 옆에 앉았다. 진안 군왕은 마당을 어지러이 뛰어다니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한숨을 돌렸다.
“예전엔 저렇지 않았다. 병이 난 거야. 병만 고치면 아무 일 없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릇을 정리하던 반근은 진안 군왕을 힐끔 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잠시 숨을 고른 진안 군왕이 다시 일어나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육가아, 형이 옷 갈아입혀 줄게.”
진안 군왕이 아이를 붙잡았다.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는 아이는 무슨 일인지 몰라 으아아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내들은 남을 돌보는 일에 서툰데, 하물며 저런 바보를 돌보는 일이라니. 이 공자님은 왜 시중들 사람도 안 데려왔지?
“공자님, 제가 도울게요.”
반근이 일어나 다가왔다.
“도움은 필요 없다!”
진안 군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반근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안 도와도 돼. 도와주는 건 한순간이지, 어차피 평생 도울 순 없지 않느냐.”
진안 군왕이 한결 누그러진 투로 말을 덧붙였다. 진안 군왕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아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육가아, 육가아. 말 듣자, 형이 옷 갈아입혀 줄게.”
끊임없이 사고를 치며 소란을 피우는 아이와 성가신 기색은 조금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르고 달래는 소년을 보며 반근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그릇을 정리해 부엌으로 가져다 놓고, 빗자루를 들고 나와 바닥의 흔적을 지웠다.
마당의 문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일어나셨네요.”
고개를 들던 반근이 정교랑을 보고 반색을 하며 외쳤다. 두봉을 걸치고 두모를 쓴 정교랑이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도 반가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몸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
“어서 좀 봐요. 이 아이가 병자예요.”
진안 군왕이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아이를 붙잡아 앞으로 밀며 말했다. 흥분한 표정의 진안 군왕이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죠.”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떼를 쓰며 아예 바닥에 철퍼덕 자리를 깔고 앉았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어디서 보나 똑같아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과 불안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이렇게 됐어요. 일 층 정도 높이였나 봐요. 더 높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앉아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이제 떼를 쓰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흙을 가지고 놀 뿐이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이는 흙을 집어 입으로 가져다 댔다. 진안 군왕이 얼른 다가가 손을 쳐내자 아이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육가아, 육가아, 이건 먹으면 안 돼. 간식 가져다줄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선 정교랑은 우는 아이를 달래며 얼른 간식을 가져다주는 소년을 반근과 함께 바라보았다. 물론 아이는 간식을 먹지 않았다. 손으로 뭉개서 반만 먹고 반은 내던져 버렸다. 바닥이며 몸에 간식이 묻었다.
“한 달 전에 다쳤어요.”
진안 군왕은 아이를 달래며 계속해서 정교랑에게 설명했다.
“그때 닷새 정도 의식이 없었죠. 그러다 깨어난 후로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어요. 사람을 못 알아볼 뿐이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사람만, 못 알아보는 거예요?”
정교랑이 물었다. 정교랑의 시선은 바닥에 누워 손가락을 빨고 놀며 으으어어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는 아이를 향해 있었다.
사람을 못 알아보는 정도로 단순하지 않아.
“그, 그러니까 머리도 좀 온전치 않고요.”
진안 군왕이 얼른 덧붙이며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바라봤다.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바로 데려온 겁니다. 아직 고칠 수 있겠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반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 다시 한번 봐요. 잘 보라고요. 오늘 안 되면 내일 다시 봐도 되잖아요.”
소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눈빛은 애걸에 가까웠다. 반근은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병은 내가 못 고쳐요.”
마당에 울려 퍼진 여인의 목소리가 그대로 진안 군왕의 귀에 꽂혔다.
“아닙니다. 다시 한번 봐요, 다시 한번. 잘 보란 말입니다.”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지체하면 안 될까 봐 데려온 게 아니잖아요. 지난번에 제 원칙을 안다고 하셨죠.”
진안 군왕은 멈칫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경왕 전하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에요. 제 원칙을 아신다면, 제가 고칠 수 없다는 것도 아셨을 텐데요.”
마당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직됐다. 바닥에 누운 아이의 아무 의미도 없는 웃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정교랑이 병을 치료하는 데는 원칙이 있었다. 방문 진료를 하지 않는 것, 죽을병이 아니면 치료하지 않는 것, 치료했던 집안과 혼인하지 않는 것.
진안 군왕도 그 사실을 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안 군왕은 그녀에 관한 모든 일을 알았으니까.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어 마당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이 마당으로 벼락이 떨어져 사람이 죽은 일도 알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웃음을 지었다.
“저 꼴이 됐습니다.”
진안 군왕은 바닥에 누워 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새 지쳤는지 아이는 더 이상 흙이나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지 않고, 침을 흘리며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했다.
“저 꼴이 됐습니다. 죽는 것과 다름없는 셈이죠.”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못이라도 박겠다는 듯이. 하지만 소용없었다. 여인은 이번에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맞아요!”
진안 군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뎌 정교랑 앞에 섰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여 정교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맞다고요!”
진안 군왕의 목소리에는 이미 분노가 담겨 있었다. 금방이라도 정교랑의 멱살을 잡을 태세였다. 다른 때였다면, 정씨 가문 사람들처럼 욕설을 퍼부으며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이었다면, 반근은 진작 달려들어 그런 자들이 아씨 옆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근은 고개를 들어 소년을 쳐다보았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지만, 표정에서는 절망이 숨겨지지 않았다.
진안 군왕을 쳐다보던 정교랑은 돌연 손을 들어 어깨를 쓸어 주었다. 진안 군왕의 몸이 움찔했다. 그 손이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백종.”
귓가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 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이미 기억하는 이가 없을 이름이었다.
방백종,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가벼운 토닥임 속에는 분명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며 턱 끝을 살짝 들었다.
“이미 저 꼴이 됐습니다. 죽은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진안 군왕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건 다 좋고 건강해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웃고. 안 죽어요.”
“하지만 죽었다고요.”
진안 군왕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죽었습니다. 나의 육가아는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반근은 다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울었다.
“당신의 육가아가 죽었다면, 난 더더욱 고칠 수 없겠네요.”
그 말에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표정은 늘 한결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재회했을 때도 놀랍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며, 저렇게 된 아이를 보고도 혐오스러워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하긴, 낭자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난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바라봤다.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거.”
진안 군왕은 심호흡을 했다.
“그럼 진씨 가문의 십삼공자는요? 거기도 죽진 않았는데 고쳤잖습니까.”
“그 사람은 달라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네. 그렇겠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도 따지고 보면 죽을 사람이었죠. 낭자 때문에 분통이 터져 초주검이 됐었으니.”
진안 군왕이 웃으며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육가아도 그렇게 고쳐 주십시오. 놀라서 까무러치게 하든, 아니면 다른 수를 쓰든 해서 죽게 만들어 놓고…….”
진안 군왕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지만 정교랑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개 좀 그만 흔들어요!”
진안 군왕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그는 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진안 군왕의 고함에 마당 분위기는 다시 경직됐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정교랑이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은 그런 정교랑의 모습을 보며 분노하면서도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진 공자는 경왕 전하와 달라요.”
정교랑은 땅바닥에 누운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곧 잠이 들려는 것 같았다.
“경왕 전하는 마음이 없어요.”
마음이 없다? 예전의 아씨처럼…….
반근은 놀라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진 공자에겐 마음이 있었어요. 자신에게 병이 있는 걸 알았죠. 간절히 바라는 게 있고, 두려움도 있고, 원한도 있었어요. 크게 슬퍼하기도 하고 크게 기뻐하기도 하며, 감정의 기복이 컸죠. 진 공자의 병은 다리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었어요. 마음의 병은 죽을병이니, 내가 고쳐 줄 수 있죠.”
정교랑은 아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우님은 지금 마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아우님은 자신한테 병이 있다는 것도 모르죠. 당신 말처럼, 이제는 당신의 육가아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아우님은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자신이 누구든 상관없죠. 그저 자신일 뿐이니까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알거나 느끼는 것도 없고, 욕망이나 바람도 없고, 기쁨이나 공포도 없어요. 그러니까 아우님한텐 병이 없는 거예요. 죽을병이란 건 더더욱 어불성설이죠.”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병에 걸린 겁니다, 병에. 어서 병이라고 말해요, 병이라고.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표했다.
“그러니까 전하, 아우님은 죽을병이 아니에요. 전 못 고쳐요.”
마당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이전의 침묵과는 다른 침묵이었다. 이번에는 분노도, 숨 막히는 압박도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한 침묵이었다.
“그렇군요. 오(吾), 잘 알겠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찰나의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의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오(吾)는 존귀한 황실 자제들이 스스로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었다.
반근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은 천천히 몸을 숙이고 손을 뻗어 바닥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육가아, 땅바닥에서 자면 안 돼. 차갑잖아.”
진안 군왕은 아이를 품에 안고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형이 데려다줄게. 마차에서 자.”
진안 군왕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여기 머물지 않고 떠나겠다는 뜻이었다. 반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정교랑을 힐끔 쳐다봤다.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대문 근처로 간 진안 군왕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정방.”
이 이름 역시 누군가가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반근은 미처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진안 군왕이 돌아섰다. 겨울날 밝고 환한 정오의 햇살 아래에 선 소년의 날카로운 얼굴에선 심연처럼 깊고 그윽한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못 고친다고 했죠? 정말 못 고치는 겁니까? 아니면 원칙 때문에 못 고치는 겁니까?”
못 고친다고 했죠? 정말 못 고치는 겁니까? 아니면 원칙 때문에 못 고치는 겁니까?
머리를 굴릴 줄 모르고 말뜻도 잘 못 알아듣는 반근조차 그 말의 의미는 대번에 이해했다. 반근은 전에도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소년은 아씨에게 늑대 떼를 유인한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사실 그때는 그 말이 어디가 이상한지 의식하지 못했다. 똑똑한 반근 언니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며 놀라고, 똑똑한 반근 언니가 그 별 뜻 없어 보이는 질문에 숨은 위험을 설명해 주고 나서야 이해했다.
이번에도, 저 소년은 아씨를 의심하는 걸까? 아씨께서 일부러 병을 고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화를 내려는 걸까?
반근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원칙은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거예요.”
정교랑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원칙은 다른 이를 위해 정하는 게 아니고,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 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자신을 위한 거죠. 자신에게 말하고 일깨워 주기 위한 거예요. 얼마나 큰 그릇에 얼마만큼의 밥을 먹어야 할지.”
반근은 다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믿을까? 지난번에 아씨의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정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당신도 전에 바보였다면서요? 당신도 전에 이러지 않았어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무엇을 알거나 느끼는 것도 없고, 욕망이나 바람도 없고, 기쁨이나 공포도 없이 살았지만, 지금은 나았잖아요.”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신도 이렇게 바보였다면서요? 이렇게 더럽고 추하고 아둔해서, 남들한테 미움을 받았지만 다 나았잖아요? 당신은 나았으면서, 왜 이 아이는 못 고친다는 거죠? 당신은 고쳤잖아요.”
반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놀랍고 두려운 눈빛이었다.
나았으면 나은 거지, 안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씨 본인조차도 잊은 과거인데, 그 얘기를 꺼내며 따져 묻다니.
정교랑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정교랑은 낫지 않았다. 병이 나은 건 정교랑이 아니라 정방이었다. 바보 정교랑은 이미 죽었으니까.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힐끔 보고, 말없이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결국 안 믿는 거구나.
반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차츰 멀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문을 나가 시야에서 사라진 소년의 모습을 바라봤다.
“관주님, 관주님.”
도동들이 달려오며 손 관주를 불렀다.
손 관주는 제자들에게 사야 할 가구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 낭자의 거처를 손님에게 내주었으니, 정 낭자는 당분간 산 아래의 현묘관에서 지낼 것이다. 양쪽 다 조금도 소홀히 대할 수 없기에 제대로 준비해야 했다.
말이 끊긴 손 관주가 언짢아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한참 바쁜데.”
“관주님, 정 아씨의 손님이 가셨어요.”
도동들이 말했다.
갔다고? 묵지도 않고 가 버리다니?
손 관주가 놀라 일어섰다.
“관주님, 저기 보세요.”
얼른 밖으로 나가 산문 아래에 서서 도동들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벌써 산길을 내려가는 무리가 있었다. 이어 마차가 보이고, 말에 탄 호위들이 주변을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 두봉을 걸친 소년 공자는 아이를 끌어안고 마차에 탔다. 이어 호령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세밑이 다가오긴 했지만, 산기슭에는 여전히 광주리를 들고 나와 노점 장사를 하는 촌민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공자의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어디서 향불을 피우러 온 이들이더냐?”
촌민 하나가 현묘관 문 앞에 있는 도동을 붙잡고 물었다.
“향불 피우러 온 거 아니에요.”
도동이 대답했다.
“그럼 뭐 하러 왔는데?”
촌민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저도 몰라요.”
도동이 고개를 돌려 다른 도동에게 물었다.
“여기서 묵는다지 않았어? 왜 그냥 가지?”
다른 도동도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알겠어.”
도동은 고개를 돌려 아직 옆에 서 있던 촌민을 보며 놀라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어느 댁 분이세요? 왜 처음 보는 거 같죠?”
촌민은 하하 웃더니 뒤쪽을 가리키고는 걸음을 옮겼다.
“곽(郭)씨 가문이요? 곽씨 집성촌은 여기서 엄청 먼데, 여기까지 장사하러 나오셨어요?”
도동이 고개를 내저었다.
“곧 새해인데…….”
촌민은 어느새 광주리를 메고 자리를 떴다. 산길을 돌자 멀지 않은 곳에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촌민이 휘장을 들고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산길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인근 마을에서 이따금 폭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때 산길 옆에 있는 숲에서 쉭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길을 지나는 이가 있었다면 분명 소스라치게 놀랐을 터였다.
숲에서 튀어나온 이들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옷을 털고 말없이 고개를 돌려 마차가 떠나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산길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근처 산비탈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그는 뒤돌아 현묘관 방향으로 달려갔다.
“여럿은 아니고 일고여덟 명 정도였어.”
조 집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반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우릴 감시하는 사람이 있단 거예요? 무슨 생각일까요? 대체 누군데요?”
반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됐든, 내 생각에 우리 사람은 아닐 것 같다.”
조 집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조금 늦게 출발하시지요.”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심하는 걸 보면 원칙을 지키는 자들이야. 원칙만 지킨다면, 아무 일 없어.”
아씨는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야. 아씨께서 아무 일 없다고 하셨으니 아무 일 없겠지.
조 집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점포 두 곳은 이미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농토 두 곳도 곧 인수를 마칠 거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을 예정이었던 손님이 가 버렸으니, 정교랑은 자연히 태평관에 묵게 됐다. 손 관주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정교랑 옆에서 웃고 떠들었다. 물론 떠드는 쪽은 대부분 손 관주였지만.
어둠이 내리자 도동 둘이 태평관의 등롱에 불을 밝혔다. 안에서 손 관주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이라니까요. 글쎄 그 시주님이 정말 믿으시더라고요.”
“도사님, 정말요?”
밖에 있던 도동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혀를 내둘렀다.
“관주님께서 저리 말이 많으셨다니.”
도동 하나가 웃으며 소곤거렸다.
“다들 우리 관주님은 선인이라 말을 아끼신다지 않았어? 관주님께 한마디 듣고 싶어 돈도 척척 내던데.”
다른 도동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둘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밤의 어둠도 마차의 움직임을 막지는 못했다. 세밑이 다가오면서 큰길에서도 희미하게 폭죽 소리가 들렸다. 폭죽 소리는 쓸쓸한 겨울밤에 따스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양팔을 휘젓고,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치우려 했다.
진안 군왕은 이불을 끌어당기고 한쪽 옆에 놓아둔 수건을 들어 아이의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준 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고는 다시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봤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황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충격에서부터 태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의 공포와 절망, 어쩌다가 일어난 일인지 떠올렸을 때의 분노와 애타는 심정까지.
이황자를 데리고 의원을 찾아가기로 했을 때의 흥분에서부터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릴 때의 기대, 이황자가 나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을 때의 기쁨과 환희, 그 여인을 봤을 때의 안도감까지.
그리고 오늘 못 고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온몸의 피가 식는 느낌까지.
불과 달포 만에 진안 군왕은 한평생 겪을 심정을 다 겪고 난 기분이 들었다. 평생을 다 산 느낌이었다.
진안 군왕은 천천히 한숨을 토하고, 눈을 감으며 마차에 기댔다.
이건 꿈일 거야. 눈을 뜨고 날이 밝을 때면, 난 아직 그 작은 도관에 있겠지. 몸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고 문을 열어 주면, 그 여인이 들어와서 육가아에게 약을 먹일 거야. 아, 아니면 육가아에게 침을 놓거나 뜸을 떠 줄 수도 있고. 육가아는 치료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고 떼를 쓸 거야. 듣자니 그 여인은 병을 치료할 때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던데, 그럼 어쩌지?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좀 곤란한데. 그 여인은 단정하고 현숙해 보이지만, 일 처리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잖아. 아예 육가아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켜 버릴지도 모르지.
진안 군왕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마차가 흔들리자 품속에 있던 아이가 옹알이하듯 중얼거렸다. 그 바람에 진안 군왕은 현실로 돌아왔다.
고급 마차라고는 하나 밤바람이 새어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화로에 숯을 피워 놨지만, 겨울밤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차 밖에서는 말과 마차 소리, 시종들의 숨소리, 이따금 나지막이 떠드는 소리, 허공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차갑고 절망적인 현실.
육가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의 육가아는 이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품속에 안겨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못 돌아오는구나. 이젠 없어, 없다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백종, 너무 괴로워하지 마.
진안 군왕은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며, 가만히 스스로를 위로했다.
새벽빛이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손 관주가 태평관의 문을 두드렸다.
“관주님, 이렇게 일찍 또 오셨어요?”
도동이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또는 뭐가 또야.”
“내려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으면서.”
도동이 중얼거렸다. 손 관주는 도동을 내버려 둔 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은 준비했고? 아씨는 음식에 까다로운 분이니 정성 들여 준비해라. 조심조심 움직이고. 시끄럽게 굴다가 아씨 깨실라.”
손 관주는 웃으며 안쪽을 쳐다봤다.
“아씨는 벌써 일어나서 방금 나가셨어요.”
도동의 말에 손 관주는 멈칫했다.
“벌써?”
겨울인지라 산의 분위기는 더욱 어둡고 쓸쓸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교랑은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손에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산길에 떨어져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수시로 치우며 걸었다. 반근은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추워서인지 걷는 게 힘들어서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아씨, 그때도 반근 언니랑 이렇게 산을 오르셨어요?”
“응.”
반근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장 노태야를 만난 게 어디쯤이에요?”
반근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이었어.”
정교랑이 손에 든 나뭇가지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고개를 든 반근은 까치발을 들고 올려다보며 당시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좋았겠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각자 좋은 게 있는 거고, 가는 길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다른 법이야. 아쉬워할 것 없어.”
정교랑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뒤따라갔다. 그러자 정교랑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반근을 돌아봤다.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정교랑의 물음에 도리어 반근이 멈칫했다.
“아씨, 무엇을요?”
정교랑이 웃었다.
“예전의 저 작은 도관에서 말이야.”
정교랑이 방금 전에 나온 태평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한테 쫓겨난 아이가 둘 있었어. 반근은 가엾어하는 눈치였는데…….”
“아씨.”
반근이 정교랑의 말을 자르며 억울한 듯 말했다.
“가엾은 건 아씨인데, 뭐하러 남을 가엾어해요? 왜 남들은 아씨를 가엾어하지 않고요? 아씨께서 그 사람들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어요? 남들이 슬프고 괴로워한다고, 아씨도 같이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해요? 그렇게 안 하면 아씨는 매정하고 모진 사람이고요? 남들한테 병이 있다고 아씨가 무조건 고쳐 줘야 해요? 고쳐 주지 않거나 못 고치면 아씨의 죄가 되고요? 남들은 아씨를 가엾어하지 않는데, 왜 아씨만 남들을 가엾어해야 해요? 아씨가 말씀을 하지 않아서요? 아씨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요? 그럼 그래야 하는 거예요?”
반근은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을 했다. 정교랑은 멈칫하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난 그냥 해 본 말인데…….”
정교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래쪽으로 내려와 반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반근은 숨을 헐떡이며 흐느껴 울었다.
“아씨, 전 괜찮아요. 그냥 눈물이 좀 나와서요. 우리 얼른 걸어요. 이러다 늦겠어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정교랑은 반근을 보며 피식 웃고는, 더 말하지 않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마 걷기도 전에 앞쪽에서 갑자기 호령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반근이 놀라 걸음을 멈추고, 긴장하며 바라봤다.
정교랑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지만, 조 집사 등은 그래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산책을 나올 때면, 한발 앞서가며 사방으로 흩어져 정교랑을 지켰다.
갑자기 경고 신호가 들리다니, 무슨 위험이라도 있나?
하지만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돌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공자님이었군요!”
반근이 놀라 소리쳤다. 자욱한 새벽 안개 속에 앉아 있던 이가 두모를 벗자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다, 이런 우연이.”
우연이라고? 왜 또 돌아온 거야? 여전히 포기를 못 한 건가?
반근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보러 내려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올라올 줄은 몰랐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소년 쪽으로 다가가자 시종들이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봐요.”
진안 군왕이 물러나는 시종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말도 필요 없네요. 다들 낭자를 믿고 따르는 게 보여요.”
정교랑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하지만 낭자가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도, 난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이거랑 그걸 어떻게 비교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낭자한테 화를 내면 안 됐습니다. 그 애한테 일이 생긴 건 낭자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 애를 못 고치는 것도 낭자 때문이 아니고요. 전부 낭자와 무관한 일인데, 낭자를 원망했습니다. 원망해야 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낭자를 원망했어요. 힘 앞에 굴복하고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했죠.”
세상에.
반근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화 안 났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알아요.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에요. 낭자한테 사과한다기보다는 내 맘 편하자고 하는 말이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의 팔을 가볍게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괴로워하지 마요.
진안 군왕도 정교랑을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괴로워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녀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진안 군왕이 목함 하나를 내밀었다.
“낭자를 위해 준비한 새해 선물이에요.”
진안 군왕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인편에 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생겨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러다 마침 직접 나오게 됐죠. 어제 깜빡해서…… 오늘 가져왔어요. 이걸 줬으니 헛걸음한 건 아닌 셈이네요.”
선물이라고?
반근은 저도 모르게 정교랑의 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묶어 올린 머리에는 은빗 하나만이 꽂혀 있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았다. 반근이 한 발 앞으로 나갔지만, 정교랑은 반근에게 건네지 않고 직접 열어 보았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빼며 무슨 선물인지 들여다봤다. 목함 안에는 비녀가 하나 들어 있었다. 금이나 은으로 된 건 아니었고, 보석 장식도 없었다. 놀랍게도 꽃과 나무를 조각한 나무 비녀만이 하나 들어 있었다. 게다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주신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어머니께서 주신 게 아니라, 내가 어머니 머리에서 멋대로 빼낸 거예요.”
어머니, 어머니.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화려하게 단장한 여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졌다.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백종, 착하지.
여인은 몸을 낮춰 어린아이를 토닥여 준 다음 안아 올리더니 옆에 있던 아낙의 품으로 넘겨주었다.
어머니, 어머니.
조금 아쉬운 기색이긴 했지만, 여인은 결국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떼어냈다.
어머니, 어머니.
아이는 여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이가 여인의 머리에서 비녀를 빼냈다. 여인의 머리가 풀어졌지만, 여인의 발걸음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이는 비녀를 손에 꼭 쥔 채, 점점 멀어지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 여인을 쳐다보았다.
“선물을 줄 땐, 가장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걸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반근의 시선이 다시 정교랑의 머리로 향했다. 정교랑은 손을 들어 비녀를 머리에 꽂은 다음, 목함을 반근에게 건넸다.
“별로 예쁘진 않네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여인의 머리카락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머리칼은 칠흑처럼 새까매 장신구를 꽂지 않아도 아름다웠다.
“쓰기에 편하면 그만이죠.”
정교랑이 다시금 몸을 낮춰 예를 표하자, 진안 군왕이 답례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안 군왕이 작별을 고하려는데,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좀 걸으려고요. 같이 걸을래요?”
좀 걷자고?
멈칫했던 진안 군왕은 뭐가 할 이야기가 있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진안 군왕이 따라갔다.
조용한 산길에 발걸음 소리가 더해졌다. 진안 군왕은 앞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두봉을 휘날리며 빠르고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수시로 길을 치워 가면서.
진안 군왕의 예상과 달리 한참을 걸었는데도 말이 없었다. 정말 걷기만 했다. 침묵 속에서 걷기만.
“자주 걸어요?”
진안 군왕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예전엔 몸이 안 좋았거든요. 많이 걷는 게 회복에 좋아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전에는 바보였으니 말도, 행동도 불편했겠지. 스스로 부단히 노력한 끝에 이렇게 호전된 거구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에는…….”
정교랑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기분이 안 좋아서 이렇게 걸어요. 마음이 좀 편해지거든요.”
기분이 안 좋을 때 걸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그래서 나한테 같이 걷자고 한 건가? 이 여인이 남을 위로할 때도 있네?
진안 군왕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는, 얼른 뒤따라갔다.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발걸음 소리만이 산길에 울려 퍼졌다. 이따금 숲속에서 새나 짐승의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육가아를 고칠 수 없다는 건, 사실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고, 그 지푸라기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정신 차려, 정신.
진안 군왕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반근은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반근이 일부러 뒤처진 건 아니었다. 둘의 걸음이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었을 뿐이었다.
진안 군왕은 점점 빨리 걸었다. 원래는 정교랑이 앞서 걷고 있었지만, 진안 군왕은 양보도 잊은 채 정교랑을 앞질러 갔다. 정교랑도 이에 뒤질세라 속도를 높이다 보니 좁은 산길에서 나란히 걷는 경우가 수시로 생겼다.
반근은 위험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종들이 앞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씨께서 누군가와 함께 있으니 혼자만 낙오될 수 없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쫓아 올라갔다.
현묘산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산꼭대기에 올랐을 무렵, 새벽빛은 어느새 환히 밝아져 있었다. 밝은 햇살이 산으로 쏟아지자 안개가 물러갔다. 산기슭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멀리 강주성도 보이고, 큰길에는 말을 타거나 나귀를 끌고, 수레를 밀거나 걸어가는 사람들이 점처럼 보였다. 줄지어 움직이는 까만 점은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면서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진안 군왕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숨을 깊게 토해냈다. 오래 걸어서인지 산속 공기가 맑아서인지 울적했던 마음이 한결 풀어진 것 같았다.
“아마 공자(孔子)님은 산에 올랐을 때도 ‘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逝者如斯夫: 쉬지도 않고 흐르는 시간을 강물에 비유)’ 하고 감탄하셨을 것 같네요.”
진안 군왕이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산을 올라서인지 하얗기만 하던 여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커다란 눈망울도 더욱 반짝반짝 빛났다.
“정방.”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미안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아주 미세하여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동작이었지만, 그 동작 덕에 여인의 얼굴에선 한결 생동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추하고 아둔하지 않았냐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건데. 당신이 전에 어땠는지는 상관없어요. 어쨌든 지금은…… 예쁘니까요.”
정교랑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자, 얼굴 전체가 눈부시게 빛났다. 진안 군왕도 따라 웃었다.
“괴로워요?”
정교랑이 불쑥 물었다. 진안 군왕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나도 괴로워요.”
정교랑은 진안 군왕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끝없는 슬픔이 묻어났다. 그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은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괴로워요. 정말 괴로워요. 진짜 괴로운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죠.
“하지만, 괴로워도 살아야죠. 안 그럼 뭘 어쩌겠어요. 울어요? 소란을 피울까요? 그게 무슨 소용이죠? 실컷 울거나 소란을 피우고 나서는 어쨌든 살아야 하잖아요.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천지의 조화는 가는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은 이어져 잠시도 쉬지 않으니, 그것이 도(道) 본연의 모습이라(天地之化 往者過 來者續 無一息之停 乃道體之本然也)고 했죠. 우리는 순응할 뿐, 그 이치를 바꿀 순 없어요. 순응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죠. 죽는 거예요. 죽고 나면 모든 게 끝이니까요. 그런데, 억울하지 않아요?”
잊어라. 그게 좋아.
그래, 잊는 거 좋지. 근데 어떻게 잊겠어. 억울해서 어떻게!
억울해! 억울하다고!
진안 군왕 역시 시선을 돌려 산 아래를 쳐다보며 조용히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고달프죠?”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모르겠어요. 아마도 운명이겠죠.”
운명이라.
두 사람은 말없이 잠자코 산 아래를 쳐다봤다. 햇빛이 점점 밝아오면서 길가에 행인도 늘어났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괴롭든 즐겁든, 고달프든 순조롭든, 밤과 낮은 하루 또 하루 쉬지 않고 흘러갔다.
날이 환하게 밝자 시야는 도리어 흐릿해졌다. 산바람이 거세지면서 두 사람의 두봉이 휘날렸다.
“모자 써요.”
정교랑이 손을 들어 두모를 썼다. 산바람을 타고 폭죽 소리가 이따금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늘이 스무아흐레인가요? 그믐인가?”
진안 군왕이 불쑥 물었다.
“그믐이에요. 내일이 초하루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육가아랑 여기 남아서 새해를 같이 보내야겠네요. 사람이 많으면 떠들썩하고 좋잖아요. 낭자가 불편할지 모르겠지만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압니다.”
진안 군왕이 선수를 쳐서 입을 열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낭자를 불편하게 할 수 없다는 거. 그냥 말해 본 거예요.”
그러자 반근이 얼른 뒤돌아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조 집사한테 가서 떠날 준비는 잠시 멈추고, 새해 준비부터 하라고 해.”
경성. 어둠이 내리자 큰길에 인적이 드물어졌다. 집집마다 대문 안에서만 왁자지껄 떠들었다.
옥대교 저택에는 벌써 새로운 도부(桃符: 새해에 귀신을 쫓기 위해 문짝에 붙이던 조그마한 나뭇조각)가 붙어 있었다. 사환 둘은 등롱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닦는 중이었고, 마당에서는 몸종 둘이 바쁘게 움직였다.
“반근 언니, 정말 집에 안 가?”
“안 가. 내가 가면 이 집이 썰렁해지잖아. 여기는 아씨의 집인걸. 반근, 너나 어서 가 봐. 정월에 노태야께 세배드리러 갈게.”
말하는 사람도 반근이라 부르고, 대답하는 사람도 반근이라 부르는 기이한 광경에 사환들과 몸종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들을 쳐다봤다.
두 여인은 웃으며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막 몸종을 배웅하고 들어오는데 대문 앞이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사공자께서 오셨네.”
시녀가 웃으며 얼른 나가 맞이했다. 대문 앞에 있던 사환들도 얼른 예를 표하며 가난하고 초라해 보이는 젊은 서생을 쳐다보았다.
정사낭은 다소 불안한 기색이었다.
“난 서원에 있으면 되는데, 뭘 여기까지 오래.”
“여기가 댁이잖아요. 서원도 방학을 했는데 혼자 거기서 뭐 하시려고요.”
웃으며 이야기하던 시녀는 정사낭의 행색을 보고 놀라 물었다.
“공자님, 이 엄동설한에 옷을 왜 이리 얇게 입으셨어요. 겨울 두봉은요?”
“급하게 나오느라 챙기는 걸 깜빡했네. 마차를 타니까 별로 춥지도 않고.”
정사낭이 웃으며 말했다. 시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몸종을 시켜 정사낭을 안으로 모시도록 했다. 그러고는 정사낭의 사환을 한쪽 옆으로 잡아끌었다.
“집에서 안 보내 주셔서요.”
시녀를 무서워하는 사환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집에서 안 보냈다고 가서 사지도 못해? 그럼 널 뒀다 뭐하니?”
시녀가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반근 누나, 그, 그게 돈이 별로 없어요.”
사환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에서 돈 안 보내 줬어? 너희 공자님은 우리 아씨와 다르잖아. 죽거나 말거나 집에서 신경도 안 쓰진 않을 텐데.”
반근 누나의 신랄한 말솜씨에 사환은 머쓱해하며 웃었다.
“그, 그건 아니고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직 오고 있는 길인가 보죠.”
시녀는 사환의 이마를 쿡 찌르고 비켜서라는 듯 노려보았다. 사환이 비켜서자 시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밥만 먹고 갈게.”
정사낭이 말했다.
“돌아가서 뭐 하시게요? 내일 아침에 저랑 같이 장 노태야 댁에 세배드리러 가세요.”
장 노태야?
“스승님 댁 말이냐?”
정사낭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을 찾아뵙는 건 아니고요, 노태야를 찾아뵙자고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그거잖아! 아니지, 스승님께 세배드리는 일보다 더 떨리는 일이야.
“여기 새 옷이에요.”
“나 주려고 옷까지 지었어?”
“그건 아니고요. 원래 도련님들 드리려고 지은 건데, 입진 않으셨거든요. 공자님이 좀 더 호리호리하시니 줄여야겠네요.”
등불이 켜진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추운 겨울밤을 녹였다.
어둠이 내리자, 경성 여기저기서 폭죽 소리가 더 자주 들렸다. 집집마다 걸린 등롱도 따스하게 빛났다.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는 도성의 모습은 선경과도 같았다.
산허리에 위치한 도관은 밤이 되자 더욱 쓸쓸해 보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숲속에서 문 앞에 내건 등롱만이 외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반면 후원의 곁채는 사람들로 복작복작했다. 어려운 자리기도 했고, 처지가 처지인지라 마음껏 마시며 즐기는 이는 없었지만.
“박주(薄酒)지만 목들 축여라. 상황이 상황이니 이해들 하고.”
자리에 있던 이들은 조 집사의 말에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리고 한입씩 마셨다.
“산간이라 음식이 변변치 않아 미안하구나. 그래도 이 현묘관 간식은 아주 유명한 거니까, 다들 먹어 봐.”
자리에 앉은 이들이 감사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며 먹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갑자기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조 집사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금가아가 활짝 웃으며 폭죽을 던지자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금가아, 장난치지 말고 잘 봐. 그러다 다친다.”
문이 활짝 열린 대청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 안에 정교랑과 진안 군왕, 이황자가 앉아 있었다. 폭죽 소리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이황자가 비명을 지르며 앞에 있던 탁자를 걷어찼다.
반근이 얼른 뛰어나가 금가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진안 군왕이 난동을 피우는 이황자를 얼른 붙잡으며 말했다.
“그걸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폭죽을 무서워하진 않아. 오는 길에 계속 들었거든. 앉아 있기 싫어서 짜증을 내는 거야.”
“반근, 아까 우린 차를 올려.”
정교랑의 말에 반근이 얼른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황자는 진안 군왕의 손을 뿌리치고 맞은편에 있는 정교랑의 탁자 앞으로 갔다.
이황자를 미처 붙잡지 못한 진안 군왕이 따라 일어섰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이황자가 정교랑 앞에 있는 탁자에 놓인 쟁반을 들어 움켜쥐었다. 간식을 먹으려 했는지 갑자기 쟁반을 엎어 버린 이황자는 일이 뜻대로 안 되자 울음을 터트렸다.
대청 안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괜히 더 있다 간다고 했네. 떠들썩하면 뭐해. 이런 떠들썩함을 누가 좋아한다고.
진안 군왕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황자를 붙잡는데, 손 하나가 간식을 쑥 내밀었다.
“여기.”
정교랑이었다. 이황자가 손을 뻗어 간식을 받으며 헤 웃자, 옷으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안 군왕이 얼른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었다. 정교랑이 또 손을 내밀었다.
“당신 거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힐끔 보고 씩 웃었다. 한 손은 이황자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은 침을 닦아 주고 있었다. 간식을 받을 손은 없지만 안 받자니 또 아쉬운 마음이 든 진안 군왕은 몸을 쭉 빼고 고개를 내밀어 정교랑의 손에 든 간식을 입으로 받아 넣었다.
“고마워요.”
진안 군왕이 간식을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별꼴이야, 진짜!
반근이 놀라 얼른 몸을 돌렸다.
“자, 자. 폭죽 터트리자, 폭죽. 우리도 몇 개 던지자고.”
조 집사가 소리치자 다들 웃으며 폭죽을 들어 불 속으로 던졌다. 마당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산 아래 마을에서 들리는 폭죽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정월 초하루. 하늘빛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황궁 앞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마차도 많고 사람도 많았지만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한 모습이 황궁의 위엄을 더해 주었다.
문무백관이 관직에 따라 차례로 입궐하는 동안, 진십삼은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대전 밖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대전 장식은 호화로웠고, 등불은 찬란하게 빛났다. 매년 한 차례씩 열리는 연회였지만 진십삼은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땐 떠들썩한 곳을 피하는 게 진짜 떠들썩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자로 숨는 게 진짜 은거(大隱隱朝市. 비범한 은자隱者는 산중에 있지 않고, 저자에 살면서도 초연하게 지낸다는 의미. 백거이의 시 중에서)라는 이치를 이제 알겠네.”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자신을 정상인이라고 여겨 행했던 수많은 일을 진짜 정상인이 되어 바라보니 역시 비정상으로 보였다.
“공자님, 부인께서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환이 나지막이 주의를 주었다. 진십삼은 어느새 편전으로 와 있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호기심이 일었다.
“공자님, 이곳은 교방사 가희와 무희들이 대기하는 곳입니다.”
문 앞에 있던 내시가 웃으며 말하자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 교방사 여관(女官)이 무리를 이끌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 대부분 답가(踏歌: 발로 박자를 맞추며 부르는 노래. 중국 고대 가무 형식의 일종)를 부르는 여자들이었다.
돌아선 진십삼이 자리를 뜨려는데, 맨 뒤에 있던 기녀가 진십삼을 향해 예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라 진십삼은 걸음을 멈추었다. 기녀는 별다른 말 없이 예만 표한 후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갔다.
“주(朱) 낭자였군.”
진십삼이 그제야 생각을 떠올리고 말했다. 머리 가득 장신구를 달고 화려한 무복(舞服)을 입은 기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예를 올렸다.
황궁 연회나 제사 때에는 황궁 전속 가희 외에도 교방사 기녀를 데려다 쓰곤 했다. 물론 황궁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히 성년이 된 여인이라면 그 선발 기준은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순결은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기준이었지만 관기 중에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고운 외모를 가졌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외모가 조금 떨어져야 그나마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예가 뛰어나면 나이가 많고 나이가 어리면 가무의 기교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둘 다 갖추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 단지 소인은 무엇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진십삼은 주 낭자의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주 낭자는 최선을 다했지요.”
주 낭자도 진십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자신이 한 말을 진십삼이 여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얼른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혀 다시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뒤돌아 고개를 숙인 채 편전 안으로 들어갔다.
할 거면 최선을 다해야 해. 그래야 사는 게 재미있지.
진십삼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세밑에 이황자에게 일이 생기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픔은 잊고 삶은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진 법도는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올해 새해맞이 연회 역시 중단되지 않았다.
궁중 음악과 함께 축하 연회의 막이 올랐다. 초백주(椒柏酒: 산초나무 열매와 잣을 넣어 빚은 술. 정초에 마시면 괴질을 물리친다고 함)가 계속해서 나왔고, 노랫소리와 음악 소리, 시 읊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날이 환히 밝았다. 폭죽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산 아래 도관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종소리와 경 읊는 소리가 마음을 안정시켰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자 정교랑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어젯밤에 그냥 잤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도 그믐 풍습을 안 지키고 잤군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꾸했다.
어쩐지 저녁을 먹자마자 시녀와 시종들만 남겨 두고 먼저 일어나더라니. 자리를 피해 주는 줄 알았는데 그냥 자러 간 거였구나.
“왜 더 자지 않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어제 오후에 한숨 잤더니 밤에 안 잤는데도 별로 안 피곤하네요. 낭자의 차 덕분에 육가아도 푹 잤어요. 아직도 안 깼더군요.”
정교랑은 살짝 예를 표하고, 잠자코 두모를 단단히 여민 다음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요?”
진안 군왕이 얼른 물었다.
“좀 걸으려고요.”
또 걷는다고? 기분이 안 좋을 때 걷는다더니, 늘 기분이 안 좋은가?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겨 뒤따라갔다.
어제는 근심이 있어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여인의 표정이 전과 달라 보였다. 무표정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눈 아래에 드리워진 쓸쓸함이 가려지지 않았다. 단지 가족에게 버림받은 연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정방.”
진안 군왕이 소리쳐 부르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내 일이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내 일이라. 일이 있긴 한데 나 자신의 일이니, 다른 이에게는 말해 주지 않겠다?
진안 군왕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위로하고 싶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날 봐요. 얼마나 비참한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세상살이가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더 비참해요.”
정교랑이 대꾸했다.
“난 어릴 때 부모님 곁을 떠났어요. 부모님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란 걸 알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게 더 비참해요. 마음껏 원망할 대상도 없으니까요.”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땐 아직 어린아이였다지만, 어린애가 눈치는 더 빠르잖아요. 낭자도 가족한테 버림받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머니와 외조모가 있었잖아요. 그리고 비꼬자는 게 아니라 까놓고 말해서 낭자가 그때 그런 상태였던 건, 운이 좋았던 거예요. 아픈 줄도 모르고, 무서운 줄도 몰랐잖아요. 난 달랐어요. 얼마나 비참했는데요. 곧 내리쳐질 작두를 눈 뜨고 지켜보는 것과 같아요. 죽음을 기다리며 숫자를 세고 있는 공포와 막막함 같은 거요.”
정교랑은 그래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아직 가족이 있잖아요. 내가 더 비참해요.”
“있긴 있지만, 마음도 안 주는 가족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요. 마음을 주는 가족은 딱 하나였는데, 이젠 죽었죠.”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은 한 명만…….”
정교랑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당신은 마음을 주는 가족을 딱 한 명 잃은 거잖아요. 난…….
“내가 더 비참해요.”
정교랑은 끝내 한마디만 툭 내뱉었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풉 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우리 지금 누가 더 비참한가 겨루는 거예요? 이런 일까지 겨루다니, 세상살이라는 게 정말 힘들긴 힘드네요.”
부귀영화를 비교하든 재주를 겨루든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 조금 더 낫길 바라기 마련이다. 이렇게 누가 더 불운하고 누가 더 비참한가를 놓고 겨루는 일은 실로 드물고 기괴한 것이었다.
정교랑도 웃음을 지었다.
“방백종, 그러니까 비참한 사람이 당신 하나만 있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아 둬요. 세상살이가 힘겨운 사람도 당신 하나만은 아니에요. 다들 그렇죠.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정방, 당신도 괴로워하지 마요.”
진안 군왕도 정교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괴롭지 않아요. 괴로운 건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괴로워할 수 있다는 건 당신이 아직 존재한다는 걸 뜻하니까요. 힘든 건 두렵지 않아요. 견뎌내지 못하는 게 두렵죠.”
진안 군왕은 씩 웃으며 손을 뻗고, 잠시 망설이다가 정교랑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그러고는 얼른 손을 거둔 후, 뒷짐을 지고 한발 먼저 걸어갔다. 정교랑이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반근이 두봉을 걸치며 쫓아 나왔을 무렵,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조 집사, 조 집사.”
반근이 소리쳐 부르자, 근처에 있던 조 집사가 대답했다.
“따라간 사람 있어요? 그 사람들, 아직도 근처에 있는 거 아니에요?”
반근이 불안한 눈길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조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람도 붙였으니 걱정 마라. 아씨께서 걱정 말라고 하셨잖아. 그 사람들이 손을 쓸 생각이었으면 진작 썼지.”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뒤따라 올라갔다.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 산길에는 마차가 늘어서 있었다. 손 관주도 도관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길가로 나와 섰다. 손 관주는 상심한 표정이었다.
반근이 처방 하나를 내밀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차예요. 병은 고쳐 줄 수 없지만, 이 차를 마시게 하면 짜증은 가라앉힐 수 있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시종이 손을 내밀어 받았다.
“양주에선 얼마나 오래 있을 겁니까?”
“아직 모르겠어요.”
진안 군왕의 질문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서찰을 보내도 될까? 하긴, 어디서 묵을지는 본인도 모르는 것 같은데, 나한테 서찰을 보낼 수 있겠어? 보낸다 한들, 구중궁궐에서 어찌 받을 것이며…….
진안 군왕은 결국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가요.”
정교랑이 무릎을 구부려 예를 표했다.
“조심히 가세요.”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가던 진안 군왕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정방, 사실 난 아마 당신을 보고 싶어서 온 것 같기도 해요.”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마 당신을 보고 싶어서 온 것 같기도…….
슬프고 괴로울 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달려와서 볼 수도 있는 분이시네.
반근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쭉이며 빙긋 웃었다.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웃음을 지을 순 있었다.
저쪽에서 진안 군왕이 막 마차에 오르려는데, 마차에 있던 이황자가 폴짝 뛰어내리더니 비틀거리며 길을 따라 내달렸다. 시종들이 붙잡으려고 달려갔다.
“뛰어다니게 내버려 둬라. 내가 따라가겠다.”
진안 군왕이 마차에 오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이황자의 뒤를 따랐다.
“육가아, 천천히 가. 넘어질라.”
진안 군왕과 이황자가 앞뒤로 길을 따라 하나는 걷고 하나는 뛰며 내려갔다. 마차와 시종들도 소리를 치며 뒤따라갔다. 정교랑 역시 몸을 돌렸다.
“아씨.”
손 관주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다가섰다.
“언제 돌아오시든, 태평관은 늘 아씨를 위해 정돈해 놓겠습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한 후, 반근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행렬이 서쪽을 향해 천천히 출발했다. 손 관주는 길가에 서서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쭉 지켜보았다.
성을 나와 십 리쯤 갔을 무렵, 반근이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조 집사가 얼른 말을 몰아 다가왔다.
“조귀, 그만 돌아가 보게. 천 리를 배웅해도 헤어져야 할 때가 오는 법이야.”
정교랑의 말에 조 집사는 주저하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아씨, 그자들이 아직 따라오고 있는데요.”
“괜찮아. 손을 쓸 생각이었으면 진작 썼겠지. 섣불리 성가신 일을 꾸밀 자들로 보이진 않아.”
조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정월 초하루라 길은 텅 비어 있고, 정교랑 일행만 쓸쓸히 나와 있어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아씨, 아무래도 제가 따라가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아씨께서 이렇게 가시면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요.”
정교랑은 혼수를 돌려받은 후, 곧 먼 길을 떠나게 됐다. 되찾은 혼수를 그냥 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조 집사가 맡아 관리하도록 전권을 주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조 집사는 놀랍고 기쁘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
우선은 아씨가 이런 큰일을 맡길 정도로 자신을 신임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뻤다. 점포 두 개와 농토 두 곳을 직접 맡아 관리하면, 거기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수익이 날지 금방 계산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두 점포와 두 농토를 한꺼번에 맡아 대관리인이 된다는 게 불안했다. 예전 주씨 가문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경성에서 세 점포를 맡아 관리하는 반근을 떠올리자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나보다 훨씬 어린 그 애도 잘하잖아. 내가 그 어린애만 못할까 봐?
다만 이곳에 남으면 아씨를 호송할 수 없었다. 직접 이것저것 챙겨 드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역시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씨의 치밀한 계획 아래 되찾은 혼수였다. 고생은 아씨께서 하셨는데 뒤에서 안락한 생활이나 누리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했다.
“부당하다고?”
정교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말했다시피, 그건 내가 계획한 일이야. 자네들이 한 일이 아니지. 그렇다면 자네들이 없었어도 난 계획대로 일을 성사시켰을 텐데, 뭐가 걱정이란 거지?”
조 집사가 멋쩍어하며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내 곁에서 한 일은 다 내가 시킨 일이야. 자네가 하나 여기 있는 다른 사람이 하나 별다를 게 없지.”
정교랑이 옆에 있는 다른 시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의 손짓에 시종들은 반사적으로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가슴을 쫙 펴고 무슨 일이든 맡겨만 달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조 집사가 실소를 터트렸다.
“누구라도 할 수 있어.”
정교랑은 다시 조 집사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없는 동안, 이곳엔 사람이 필요해. 내 재산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지. 결정권을 갖고 일을 처리할 능력과 담력이 있으면서, 대충 아무렇게나 하지 않을 사람 말일세.”
조 집사 역시 가슴을 쫙 펴고 고개를 들었다.
나, 나에 대해 말하는 거지, 지금? 날 칭찬하는 거잖아!
“그러니 자네가 내 옆에 있으면 난 도리어 마음이 안 놓여. 자네가 여기 남아야 자네도 마음을 놓고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지.”
정교랑이 말했다. 조 집사는 흥분되는 얼굴을 했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염려 마십시오. 소인이 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어쨌든 경성의 그 어린애보단 잘 해내야지.
반근은 미소를 지으며 휘장을 내렸다. 조 집사가 돌아서며 다시 시종들을 불렀다. 시종들이 웃으며 조 집사를 에워쌌다.
“형님, 욕심이 과하십니다. 큰길을 차지했으면서 작은길까지 점령하려고요? 형제들도 일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염려 말고 관리인 노릇이나 잘하세요. 우리 몫까지 노릴 생각 말고요.”
“열심히 하세요. 경성의 그 누이만 못하면, 사내 체면이 뭐가 됩니까.”
조 집사가 웃으며 나무랐다.
“잘들 해. 아씨 말씀 잘 듣고, 뭐든 깔끔하게 처리해야 해. 돈은 내가 맡을 테니, 아씨를 모시는 일은 너희가 맡아.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씨를 따른 후로,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윗전의 말씀이 진짜인지 아닌지 이것저것 따지고 추측할 필요도 없고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어요. 이런 건 돈을 줘도 못 바꾸죠.
다들 웃으며 포권의 예를 취하고 작별했다.
길은 멀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마당에 선 고 통사가 허공으로 팔을 뻗자, 매 한 마리가 날개를 쫙 펴고 내려와 앉았다.
“못 고쳤다고?”
고 통사가 고개를 돌리며 뒤에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네, 그 낭자의 말이 경왕 전하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고, 아주 건강하시다고 했답니다. 그런 바보의 병은 자신이 병을 고치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아 고칠 수 없다면서요.”
“얼씨구, 진짜로 원칙을 고수했단 말이지?”
고 통사가 웃으며 팔에 앉은 매를 시종에게 건넨 다음, 손을 닦고 걸음을 옮겼다.
“원칙상 고칠 수 없으니까요. 당시 군왕께서는 거의 이성을 잃고 펄펄 뛰다가 그 낭자를 때릴 뻔했답니다. 원칙 때문에 안 고치는 건지 아니면 고칠 수 없는 건지 물으셨는데도, 그 낭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랍니다. 원칙상 고칠 수 없고, 고칠 수 없어 그런 원칙을 만들었다고 하면서요.”
시종이 말을 보태며 보고하자, 고 통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신의니 뭐니 하는 소리도 저 스스로 벗어던진 거겠지. 따지고 보면 일리 있는 일이었어. 원칙을 고수하는 거 좋지, 좋고말고. 그래서 어디로 간다더냐?”
“양주로 간답니다.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시종의 대답에 고 통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못마땅한 듯 말을 이었다.
“하여간 말을 안 듣는군. 아직도 제가 어린애인 줄 알지. 정초부터 어딜 싸돌아다니려고. 집에 있기 싫으니까 말썽을 피우는 거 아니냐. 그런 애가 있으면 집안 식구들도 골치깨나 아플 거야.”
시종은 그렇다며 맞장구를 치고 덧붙여 물었다.
“그럼 우리 사람들은…….”
“불러들여라. 우리가 정씨 가문 사람도 아닌데, 그 집 아이를 보살피며 호송할 필요야 없지 않느냐.”
고 통사가 웃으며 말하자 시종이 얼른 알았다고 했다.
“다들 군왕 쪽으로 보내라. 잘 지키라고 해.”
고 통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꼴은 보고 싶지 않구나. 폐하와 마마께서 지금도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몰라. 잘들 지켜야 한다.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약하고 힘없는 동물을 살뜰히 보살피듯, 힘없는 어린아이에게 그는 언제나 넘치는 사랑을 주었다. 시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고 통사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여유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월 대보름엔 경성만 떠들썩한 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이 떠들썩했다. 작은 마을에서도 등롱을 산 모양으로 커다랗게 만들어 대보름 명절을 즐겼다. 경성에서 본 것만큼 정교하진 않았지만, 저녁이 되어 불을 밝히자 반짝반짝 찬란하게 빛났다.
등롱으로 만든 산을 둘러싼 아이들이 웃고 떠들었다. 진안 군왕의 옆에서 손을 잡고 선 이황자 역시 소리를 지르며 등롱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잡아끌었다. 헤헤 웃으며 등롱으로 만든 산 주변을 돌던 이황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등롱을 잡아떼려고 했다.
근처에 있던 점포의 주인장이 그 모습을 보고 행여 모양이 무너지기라도 할세라 발을 동동 굴렀다. 호위하는 시종들이 많은 걸 보면 두 사람 다 비범한 신분이 틀림없을 터였지만, 주인장은 그래도 다가가 말렸다.
“손님, 저녁에도 써야 하는 거라서요. 여러 사람이 보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겁니다.”
주인장의 간곡한 말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황자를 붙잡으며 나지막이 타일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돌아봤다. 비틀비틀 위태로운 걸음걸이와 입가에 흐르는 침, 눈은 웃고 있지만 표정은 멍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서 바보라는 티가 났다. 그런 아이를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따뜻하고 극진하게 보살피고 있으니 절로 호기심이 일었다.
“이 아이는…….”
주인장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바보입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너무나도 솔직한 대답에 주인장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바보고, 내 동생이기도 하죠.”
진안 군왕이 담담하게 웃으며 이황자의 손을 잡았다.
“육가아, 우리 저 앞에 가 보자. 저 앞에 더 좋은 거 있어.”
아이는 그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아아야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갔다.
“바보를 저리 살뜰히 챙기는 건, 살다 살다 처음 보네.”
저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주인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금세 한 바퀴를 쭉 돌았다. 이황자는 고단했는지 더 이상 걷지 않고 땅바닥에 털퍼덕 앉았다.
“공자님, 배를 바꿔 탈까요? 아니면 마차로 갈까요?”
시종이 다가와 물었다. 진안 군왕은 앞쪽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바닥에 앉은 아이를 보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쪼그리고 앉았다.
“육가아.”
아이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만 갖고 놀았다.
“육가아, 너 지도 보는 거 좋아하지?”
진안 군왕이 아이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 형이 진짜 산하를 보여 줄게, 어때?”
경성에서는 정월 말에 큰 눈이 내렸다. 풍년이 들 상서로운 징조였다. 이른 아침 거리에 쌓인 눈은 관아에서 나온 인력들이 깔끔하게 치운 후였고, 황성 앞은 더욱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대전에는 어사가 앞쪽에 서 있고, 조정 대신들이 각자 자리에 서서 대기 중이었다. 황제만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나지막이 이야기를 주고받자, 즉시 어사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음악 소리와 함께 시종들과 총관, 환관이 먼저 나타나고 곧이어 황제가 걸어 나왔다. 신하들이 엎드려 절을 올리면서 이번 달 조회가 시작되었다.
진소는 신하들의 대열 속에서 황제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는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전에는 그래도 조회에 참석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었지만, 요즘은 기력이 남아 있는 시늉조차 힘들어 보였다.
조회는 금방 끝났고, 곧이어 상공 대인과 삼사사(三司使), 한림원 관리 등이 정사를 논하기 위해 불려왔다. 이들을 불러올 동안, 대태감이 안쪽에서 황제에게 무어라 말씀을 올렸다. 황제가 노여움이 담긴 목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황실 자제들이 밖을 유랑한다니, 체통을 지켜야지.”
“전하께서 의원을 더 찾아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단 두 마디였지만, 전하와 의원, 밖이라는 단어에서 진소 등 상공들은 경왕을 데리고 의원을 찾아 밖으로 나간 진안 군왕의 이야기인 걸 대번에 눈치챘다.
세밑에도 안 돌아왔다던데, 보아하니 당분간 안 돌아올 모양이군.
문이 열리자 다들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내시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평정심을 회복하여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려온 대인들이 정사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서북의 군사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대전 분위기는 곧 경직됐다.
“종승포(鍾承布)는 방탕한 자요. 가세만 믿고 군에서 상관의 말을 거역했으니 자리를 옮겨야 마땅하오.”
“곽 대인, 강문원 한 사람의 주장만 듣고 예단하지 마시오. 주 감사는 종승포가 유능하고 출중한 자라 하였소. 서북으로 간 불과 몇 달 만에 벌써 전공을 세웠다더군.”
서북의 장수들을 놓고 논쟁이 지속되자, 황제는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이 일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지.”
둘의 말을 끊은 황제가 다른 대신들을 보며 말했다.
“다음.”
회계를 맡은 관리가 앞으로 나섰다.
“풍림이 태창로 전운사의 감찰 결과…….”
탐관오리에 관한 보고가 계속되자, 황제는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조사하시오, 조사해. 전부 다 조사하시오. 어사대도 가고 대리시도 가서,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전부 잡아들이라고.”
황제가 호통을 쳤다. 일이 커질 모양이었다.
진소 등도 이 일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이견이 있다 한들 이런 때에 황제에게 맞서며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대전에는 대답하는 소리와 침묵만이 감돌았다.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자 황제는 한숨을 쉬며 안에 있는 중신들을 쓱 훑어봤다.
“다른 일은 없소?”
황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내시 하나가 들어와 고 통사가 알현을 청한다고 아뢰었다. 관직도 낮고 아직 지제고(知制誥) 직함도 받지 못한 고 통사는 진소 등처럼 부름이 없어도 안으로 들어와 정사를 논의할 자격이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고 통사를 기다리게 했겠지만, 마침 속이 답답하던 터라 황제가 고 통사를 안으로 들였다. 어쩌면 답답하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으로 들라는 내시의 통보 소리가 전해지자, 내시 하나가 고 통사에게 속삭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무어라 나지막이 속삭인 내시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숙고하십시오, 대인.”
고 통사는 손에 든 상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상소를 챙겼다. 지금 이런 때에 이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폐하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하나? 무엇보다도 요즘엔 기뻐할 만한 큰일이 없는데. 큰일이 아니면, 작은 일이라도…….
걸음을 옮기며 미간을 찌푸리던 고 통사는 무언가 떠오른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작은 일이긴 하지만 경사가 있긴 하지. 폐하께선 지금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신경 안 쓰실 거야. 좋은 일이기만 하면 돼.
고 통사는 심호흡을 하고 짐짓 기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좋은 소식이옵니다.”
고 통사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진소 등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용상에 앉은 황제는 표정이 밝아졌다.
“군목사(群牧司)에서 온 희소식이옵니다.”
고 통사의 말에 대신들이 실소를 터트렸다.
“군목사에서 올해도 말똥을 팔아 거금을 벌어들였나 봅니다?”
누군가가 비웃는 투로 진소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소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 통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진소는 황제가 고 통사를 안으로 들인 일에 더 관심이 갔다. 예전이었다면 안으로 들이지 않고, 최소한 정사에 관한 논의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했을 터였다.
고 통사가 곧 원대로 지제고에 봉해지겠군.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이런 외척은 내쫓아야 마땅하거늘. 이런 자들을 경성에 두는 것만으로도 화근의 싹이 될 터인데, 조정 일에 참여할 명분까지 주려 하다니, 폐하께서 아둔해지신 건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진소의 귀에 고 통사의 말이 조금씩 들려왔다.
“……서북 군마의 손실이 다소 줄었습니다.”
군마? 다소?
진소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게 무슨 희소식이라고.”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표정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폐하, 아직은 얼마 안 됩니다만, 새로 채택한 방안이 검증을 거쳤단 뜻이 아니옵니까. 본디 목감에서 매년 군마 삼백 필밖에 공급하지 못하는 데다, 군마의 손실이 크다 보니 늘 모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손실을 줄일 수 있다면, 군마 공급량에 변함이 없어도 전체적인 수는 늘어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서북의 기마병 역시 늘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폐하.”
고 통사가 말했다.
기마병!
군에 있는 장수들은 기마병을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에 능한 기마병이 워낙 적었고, 말이 귀하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서쪽 오랑캐의 기마병이 대단한 건 말 때문이었다. 오랑캐는 기마병 한 사람당 말을 서너 필 갖고 있는데, 이들은 한 필씩만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만 충분히 공급된다면, 더 이상 서북 오랑캐가 우쭐댈 일이 없을 터였다.
군마 손실을 피할 방법을 찾았다니, 경사 중의 경사로다!
황제는 자세를 바로 했고, 진소 등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물건이 무엇이오?”
황제의 하문에 고 통사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우연히 생각해 낸 거라 아직 정식 이름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군목사에 이름을 하사해 주시옵소서.”
대전에 있던 이들은 그 말에 속으로 욕을 해댔다.
정식 이름이 없긴,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동시에 대신들은 고 통사가 본디 이 일을 아뢰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현을 청하고 난 후에야 황제가 기분이 안 좋은 걸 알고 임시방편으로 다른 일을 고한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말발굽에 편자를 댔으니 말편자라고 하면 되겠군.”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말편자 덕분에 정사를 논하는 회의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득의양양한 얼굴의 관원들이 고 통사를 에워쌌다. 진소가 삼사사를 불러 세웠다.
“군목사의 일을 삼사에서 왜 몰랐소? 저런 소인배가 아뢸 기회를 가로채게 하다니.”
진소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군목사에서 말똥 파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삼사사가 속으로 대꾸했다.
“가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지금 안다 해도 늦은 건 아니었다. 아뢸 기회는 고 통사에게 빼앗겼지만, 다른 공까지 선점하게 둘 순 없었다.
<교랑의경> 14권에서 계속
교랑의경 14권
차례
소란
돌아오다
무슨 일
부고
최선
길에서
용기
-소란-
황제가 말편자라는 이름을 내린 소식이 아직 조정에 알려지기 전, 서북 쪽 사람들에게는 벌써 말편자가 꽤 익숙했다.
용곡성의 병화(兵火)로 훼손된 성벽은 얼추 복구를 마쳤고, 새해를 맞이하여 붙인 장식을 떼기 전이라 황량한 겨울날인데도 따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람을 태운 말 한 마리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성안의 비좁은 길 사이를 내달렸다. 말편자에서 나는 경쾌한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던 사람들은 말에 사람의 머리 몇 개가 걸린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은 군영으로 들어서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 바람에 커다란 나무 우리 안에 있던 말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넷째 형님, 넷째 형님!”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구간에서 수의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내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저쪽에서 말을 몰고 달려오는 사람을 보고 씩 웃다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소리 죽여. 말들 놀라게 하지 말고.”
“이깟 소리에 놀랄 정도의 군마라면 형님이 정성 들여 보살필 필요도 없소. 등짐 싣는 일이나 시켜야지.”
서봉추가 껄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형님, 넷째 형님, 어서 이리 와 보시오.”
서사근은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또 무슨 일로 달려온 거야?”
서봉추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로 주위를 몇 바퀴 돌며, 말에 걸려 있는 사람 머리를 보게 했다. 머리가 걸려 있는 그 흉악한 모습이 서사근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 서사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녀석, 이번엔 또 몇 개냐?”
서봉추가 껄껄 웃으며 양손을 쫙 펼쳤다.
“열 개요!”
“대단하네. 이번에도 공을 꽤 인정받겠어.”
서사근이 웃으며 말했다. 군에서 생활하려면 무엇보다도 전공을 세우는 게 중요했다. 전공을 세우면 평범한 병사도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군관은 진급을 할 수 있고, 병사는 녹봉이 올라갔다.
“다들 감용으로 복권됐소.”
서봉추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때 한 무리가 다가왔다.
“서사근!”
우두머리로 보이는 군관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험상궂은 목소리에 서봉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서사근이 얼른 다가갔다.
“송 전직(殿直: 관직명).”
서사근이 예를 표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 전직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매섭게 내던졌다.
키 크고 건장하여 근육까지 탄탄한 무장이다 보니 겨울철인데도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힘껏 내던진 물건이 서사근의 팔을 으스러뜨리자, 갑작스러운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서사근이 팔을 붙잡고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내던져진 물건이 옆으로 떨어졌다. 다름 아닌 편자였다.
“이 자식이!”
놀란 서봉추가 분노하며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달려들었다. 우두머리 군관 옆에 있던 자들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뭐냐, 하극상이라도 벌이려고?”
군에서 병사가 상급 군관에게 대드는 건 대죄였다. 서사근은 몸을 버둥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서봉추의 다리를 붙잡고 말렸다.
“왜 사람을 쳐? 왜 사람을 치냐고!”
서봉추는 시뻘게진 눈으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군관은 서봉추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사근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
“군사력이 강해진 게 네놈 공로라고? 아주 당당하게도 말했더구나.”
서사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직, 전 그런 말을 한 적 없습니다.”
군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말발굽에 편자를 박은 일로,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워 세운 전공이 네놈 몫이 됐잖아!”
군관은 서사근에게 삿대질을 하며 계속 소리쳤다.
“전에 이딴 거 없을 때 우리 한족이 흉노를 격파하고, 기련산을 우리 발아래 둔 건 뭔데? 헛소리냐? 네놈들이 없으면 용맹이고 뭐고 없어?”
군관의 호통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더욱 멀리 물러났다.
“당치도 않습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공을 가로채겠습니까.”
서사근이 다급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군관은 그런 서사근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똑똑히 듣거라. 사람은 언제나 짐승이나 물건 따위보다 귀중한 법이야!”
군관이 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게 쳤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있던 병사들을 가리키면서 목청을 높여 외쳤다.
“바로 우리가! 서쪽 오랑캐를 격퇴한 것이다! 이건 우리의 목숨으로 맞바꾼 공이야! 그깟 말굽 편자가 없었어도 이겼을 것이고,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란 말이다. 그딴 게 있든 없든, 서쪽 오랑캐를 때려잡은 사람은 우리야.”
서사근은 고개를 숙이고 연신 맞는 말이라고 동의했다. 군관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서사근을 향해 다시 한번 침을 뱉은 후 병사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미칠 지경이던 서봉추가 군관을 향해 돌진했지만, 서사근이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급히 돌아왔다.
“형님, 괜찮소?”
서봉추가 서사근을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서사근이 맞은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지만, 서봉추는 억지로 그의 손을 떼어내고 소매를 올려보았다. 서사근의 팔에 시퍼런 피멍이 든 것을 본 서봉추는 펄쩍 뛰면서 군관의 뒤를 쫓아가려 했지만, 이번에도 서사근이 안간힘을 다해 그를 붙잡았다.
“형님! 여기 남아서 좋을 게 뭐 있소! 죽는 게 두려워서 후방에 있다는 오명이나 뒤집어쓰고, 말굽 편자를 만들어 냈는데도 알아주는 이 한 명 없이 미움까지 받다니요! 형님만 아직도 병졸 신분이오. 우리는 다 감용이 됐는데!”
울화가 치민 서봉추가 소리쳤다. 잠시 자리를 비켜 숨어 있던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것 참, 서 형만 억울해졌네. 어떤 군관이 말굽 편자 이야기를 상소문에 조금 부풀려 쓴 모양이야. 그것 때문에 윗분들의 심기가 불편해졌지. 그래서 기마병 군관들을 부추겨 서 형을 때리게 한 거라고.”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럼 이게 형님의 공이 아니란 소리요? 말이 덜 상하니까 저놈들이 말을 두 필씩이나 거느릴 수 있는 거 아니오! 이게 다 말굽 편자 덕이 아니라면 뭐 때문이란 말이오! 칼로 적의 목을 베는 것만 공이고, 우리 형님의 공은 공도 아니란 말이오?”
서봉추가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은 대충 얼버무리면서 대답을 회피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서봉추는 화가 나다 못해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한 기세였다.
“난 또 형님이 아주 잘 지내는 줄 알았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 남은 거요!”
서사근은 별일 아니라는 듯 쓴웃음을 보였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남은 거지. 공을 세우고 안 세우고는 상관없어. 내 노력을 누가 증명해 줄 필요도 없고.”
마구간을 훑어보던 서사근이 보람찬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픈 팔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과연 효과가 있었어. 헛수고한 게 아니란 걸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해.”
서봉추는 말을 타고 군영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서서 이야기 중이던 범강림과 서무수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 나갈 때만 해도 위풍당당했는데,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여기서 도대체 누가 서봉추의 기를 죽일 수 있단 말이야?
용맹하게 적장을 베어 죽이니 윗분들이 좋아하고, 공을 세우는 욕심은 있지만 진급할 욕심은 없으니 동료들도 좋아하고, 씀씀이까지 커서 늘 잡역들의 환대를 받는 서봉추였다. 이제는 중매를 서 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까지 했고.
“자네한테 중매 서 주겠다는 사람도 많잖아. 왜 괜히 남을 놀려.”
범강림이 웃으며 서무수에게 말했다. 서무수가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짓고는 서봉추를 불러 세웠다. 서봉추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범강림이 물었다.
“어디 갔었어?”
서봉추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넷째 형님 보러 성에요.”
무원산 형제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군영에서 감용 용사가 되어 전장에 나가게 됐지만, 서사근은 주사(朱四)의 추천으로 곽 도감의 허락하에 후방에 남아 말굽 편자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말굽에 편자를 박던 기술은 한층 나아져 이젠 아예 말굽에 편자를 지져서 붙이는 기술로 발전했다. 불편한 말굽 때문에 말들이 상처를 입는 데서, 용곡성의 모든 기마병의 말들이 말굽 편자에 적응하기까지의 일은 전부 서사근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피나는 노력은 적장의 목을 베어 오는 일처럼 눈에 띄는 것이 아니기에 서사근은 여전히 병졸 신분에 머물러 있을 뿐더러 아무런 공로도 인정받을 수 없었다.
범강림이 뭐라고 더 묻기 전에 서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넷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냐?”
서봉추는 볼을 부풀리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니오.”
범강림이 서봉추의 머리를 한 대 때리면서 꾸짖었다.
“네가 감히 어디서 거짓말을 배워온 것이냐!”
서봉추가 맞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벌게진 눈으로 외쳤다.
“넷째 형님이 괴롭힘을 당하고, 두들겨 맞아 다치기까지 했소!”
서봉추의 말을 듣은 범강림과 서무수의 안색이 변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이구나!”
범강림이 외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자, 서무수가 그를 막아섰다.
“일단 제대로 물어봅시다.”
서무수가 서봉추를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봉추, 어떻게 된 일이야?”
“잘나신 윗분들이 말입니다. 넷째 형님의 공로를 인정해주지는 못할망정, 형님이 자기들의 공로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서 기마병 군관들을 부추겨 형님을 때렸지 뭡니까! 형님은 그놈들이 던진 말굽에 맞아서 팔에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고!”
서봉추가 소리쳤다.
윗분들, 부추김.
범강림이 서무수를 보며 물었다.
“제대로 물어봤으니, 이젠 어쩔 거야?”
서무수가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
“어쩌기는,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서무수가 범강림보다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면서 외쳤다.
“무기 챙겨!”
범강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윗분이고 나발이고 내 형제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제일 먼저 나서야지! 앞뒤를 재고 따진다면, 그건 형제가 아니지!
“무기 챙기고, 형제들 불러모아!”
범강림이 소리쳤다.
무원산 여섯 형제가 엄청난 기세로 말을 타고 나오자, 한쪽에서 따끈한 전병을 입에 물고 있던 유규가 눈을 크게 떴다.
“어이, 어이! 어디 가!”
유규가 입에 물고 있던 전병을 뱉고 외쳤다. 서무수 형제들은 유규를 본 체도 않고 말을 달려 병영을 벗어났다.
“감히 어딜 도망가려고! 이 몸이 항시 네놈들을 지켜보고 있어!”
유규는 서둘러 주위에 보이는 아무 말이나 집어 타고 서무수 형제들을 뒤쫓았다.
용곡성의 한 천막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왜? 무슨 일이래?”
천막 바깥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와 물었다.
“싸움 났대!”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더욱 득달같이 천막 안으로 몰려들었다. 새해도 지나고, 성안에 별다른 일도 없다 보니, 남의 싸움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놓칠 수 없었다.
쿵 소리와 함께 거구의 사내가 천막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범강림이 사내의 몸 위로 달려들어 다리로 몸을 짓누른 다음 가차 없이 주먹을 내리쳤다.
주위의 구경꾼들이 범강림의 맹렬한 기세에 환호했다. 뒤늦게 달려온 몇 사람들이 다급하게 나서서 얼굴이 피범벅이 된 사내와 범강림을 간신히 떼어놓았다.
“무슨 짓들이냐! 감히 누구한테 대드는 것이야!”
“범강림, 또 네놈들이로구나. 지난번에 상관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아군을 죽일 셈이더냐!”
싸움을 말린 사람들이 범강림에게 고함을 질렀다.
“우리 형제를 괴롭힌 만큼 갚아준 것일 뿐이오. 지난번이나 지금이나, 당연히 예외는 없소!”
범강림과 형제들이 외쳤다. 눈 깜짝할 새에 천막 밖은 또다시 싸움판이 되었다. 유규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소리쳤다.
“역시 못난 놈들이로구나! 오랑캐들을 때려잡지는 못할망정, 아군을 때리다니!”
유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바탕 혼란 속에서 누군가가 그를 팔꿈치로 세게 쳤다. 화들짝 놀란 유규가 펄쩍 뛰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감히 나를 때려? 내가 만만해?”
유규도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소식을 들은 주육낭이 관청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싸움에 관여한 모든 사람이 관청으로 연행된 후였다. 소식을 듣고 놀란 용곡성 지휘사는 노발대발하며 서무수 형제들을 곤장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고함을 쳤다.
“대인, 저희에게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들의 죄도 물어야 마땅합니다!”
서무수가 말했다. 지휘사는 냉소를 보이며 서무수의 말을 무시했다. 보잘것없는 병졸들에게 말대꾸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신분이 깎이는 기분이 들었다.
“네놈들이 사람을 때린 게, 다른 이의 잘못이라는 게냐?”
옆에 서 있던 서리가 호통을 쳤다.
“대인, 왜 저희가 사람을 때린 연유를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서무수가 다시 한번 사정했다. 서리가 혀를 차며 비웃었다.
“네깟 놈이 뭐라고 대인께서 물어보시겠냐.”
“소인에게는 당연히 대인께서 물어보실 만한 가치가 없지만, 그자들은 군목감의 서사근을 때렸습니다. 도감 대인께서 행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묻지 않으시겠단 겁니까?”
서무수가 소리쳤다.
감히 도감 대인을 내세워서 나를 압박해?
용곡성 지휘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무수, 지금 내 공당에서 소란을 피우려는 것이냐.”
지휘사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호통쳤다.
일개 감용 용사가 위주로(渭州路) 용곡성 지휘사에게 따지려 들다니.
시끌벅적했던 주위의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뭐든 못 할 게 없는 저 배짱은 그 여인에게서 배운 거겠지.
주육낭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대인,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서무수가 허리를 펴고 말했다.
“소인은 단지 사실을 규명하고 싶을 뿐입니다. 소인의 형제 서사근은 저들에게 맞은 것도 모자라 공로를 가로챘다는 오명을 썼습니다. 소인은 그것이 너무도 분합니다. 도감 대인께서 인정한 공로가, 어떻게 가로챈 공로가 되는 겁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소인의 형제는 매일 남에게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겠지요. 또 소인들이 상관에게 대든 것은 벌을 받아 마땅하나, 지휘사 대인께서도 저들의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소인의 형제를 때린 게 옳은 일이고, 소인의 형제가 공을 가로챈 게 사실이며, 도감 대인께서 공을 치하하신 일은 잘못된 일이 되는 겁니다.”
지휘사는 무덤덤한 표정을 보였지만, 그의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탈영병 놈들이!
저놈들이 뭐하다 온 놈들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지. 사고를 치고 사람을 죽인 뒤에 탈영병으로 숨어 지내다가, 경성에서 우연히 높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서북으로 돌아온 놈들.
감용은 자랑스러운 병사들이라지만, 저런 파렴치한 감용은 필요 없어. 나한테 대드는 저 꼬락서니를 보라지. 뭘 믿고 저러는 거야? 아무리 위쪽에 믿을 사람이 있다 해도, 저래서야 되겠어?
믿을 구석이 있다고 해도 고작 병졸 몇 명이 뭘 할 수 있다고. 아무 빌미나 덮어씌워서 군에서 쓰는 곤장으로 몇십 대 때리면, 죽이진 못해도 반병신은 만들 수 있어. 그런다고 해서 날 문책할 사람도 없고.
그런데 저 빌어먹을 놈들이 도감 대인을 내세우니 그럴 수도 없게 됐잖아. 내가 여기서 상관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죄로 저놈들을 다스린다 한들, 이 일이 도감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나도 똑같은 죄목으로 벌을 받겠지.
“서무수.”
지휘사가 천천히 말했다.
“예, 대인”
서무수가 대답했다. 지휘사가 이를 갈면서 한 글자씩 어렵게 내뱉었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조사하도록 하지.”
관청을 유유히 벗어나는 서무수 형제를 본 주위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휘사가 화를 참으면서 소매를 홱 내쳤다.
두고 보라고!
관청을 나온 서무수 형제들은 기분이 상쾌해졌다.
분풀이도 하고, 주먹질을 허투루 한 것도 아니게 되니, 참으로 통쾌하도다!
“남의 미움을 사는 게 뭐 좋다고.”
주육낭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서무수가 고개를 돌려 예를 표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지요. 더군다나 미움을 산 사람이 본래 나를 미워하던 사람이라면, 이 일로 그의 미움을 샀다고 하기에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서무수의 말에 주육낭이 실소를 터트리다가 혀를 찼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걸 보니 아주 잘 배웠네, 그 여인한테.
주육낭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대인.”
서무수가 그를 부르자, 주육낭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무수가 웃으면서 주육낭을 향해 공수하며 읍을 했다.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진 주육낭은 마른기침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서사근은 서무수와 다른 형제들을 보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서사근은 놀란 동시에 형제들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이럴 필요까지 뭐 있소! 우리 형제들이 서북에서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어떻게 얻어낸 건데! 또 도망자 신세를 지고 싶어 그러시오!”
형제들이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던 서사근은 버럭 화를 냈다.
“형님, 우리가 무서워할 게 뭐 있소? 좀 전에 셋째 형님이 말을 어찌나 잘하시던지, 아주 옳은 말만 골라서 하더라니까요! 우리 넷째 형님을 괴롭히는 건, 곧 도감 대인을 욕보이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서봉추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터트리자 얼굴에 난 상처가 쓰라려 아야야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여전히 헤죽거리는 서봉추의 모습은 몹시도 우스꽝스러웠다.
유규가 옆에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뭐하냐. 도감 대인을 앞세워 지휘사를 압박한 게 뭐 잘한 짓이라고. 장수를 하늘처럼 여기는 군영에서는 너희 몇 명을 해치우는 데 큰 힘을 들일 필요도 없어. 이번에는 도감 대인의 덕을 봤다고 쳐도, 지휘사가 이대로 쭉 겁을 먹고 너희를 가만히 둘 줄 알아? 웃기시네! 지휘사는 어떻게 하면 너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벼르고 있을 거야. 죽일 수는 없어도, 곤장으로 반죽음이 될 정도로 때릴 수는 있으니까. 그런다 한들, 누가 지휘사를 문책하겠나? 문책하고 싶다고 해도, 이미 일은 벌어진 뒤겠지.”
몇 세대를 걸쳐 전장의 장수로 지내는 유씨 가문의 후손으로서, 유규는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병영 생활을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도 분한 일을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서북에서 경성으로 쫓겨나 쓸모없는 폐인 취급이나 당하면서 늙어갈 뻔했다.
믿을 만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힘 있는 친척도 없는 놈들이 어디서 저런 배짱이 나오는 거야? 배짱이 아니라 바보인가?
유규의 말을 들은 서사근은 더욱 걱정스러워졌다. 서봉추가 유규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흥, 댁이나 잘하슈.”
“이게 다 네놈들 때문이다. 나까지 휘말리고.”
유규는 지지 않고 서봉추에게 눈을 부라리면서 자신의 얼굴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외쳤다. 서봉추가 유규를 보면서 얄미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허풍을 치더니, 그 꼴이 되도록 맞은 거요?”
“이게 다 쓸모없는 네놈들 때문이라니까!”
유규가 욱해서 소리쳤다. 유규와 서봉추가 말씨름을 하는 동안에도 서사근은 여전히 근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를 어쩌면 좋소. 지휘사의 눈 밖에 났다면 무슨 죄를 덮어씌워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이를 어쩌면 좋아.”
“넷째야, 너무 염려치 말거라. 우리는 별일 없을 거다.”
서무수가 서사근을 위로했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서사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네가 있으니까.”
서무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요?”
서사근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서무수가 몸을 일으켜서 마구간을 가리켰다.
“언젠가는 우리 넷째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이게 얼마나 큰 공인지, 꼭 알아볼 것이야.”
“이게 정말 그렇게 큰 공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게 화풀이를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돼요. 말굽 편자가 없던 때에도, 용맹한 병사들은 얼마든지 적장의 목을 베어서 공을 세울 수 있었어요. 서북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였던 기마 장수들은 더욱 말할 필요도 없죠. 그런데 이 편자가 생기니, 용감한 병사들과 장수들의 공이 말살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억울하고 화가 날 만해요.”
“그자들의 공과 네 공은 별개의 것이야. 그자들이 오해했을 뿐이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자들도 너를 잘못 탓했다는 것을 깨달을 게야.”
서무수가 말하다가 웃음 지었다.
“넷째야, 너 자신을 믿지 않아도 좋고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런데 누이도 믿지 않을 셈이냐?”
서무수의 말에 서사근이 미소를 지었다. 서사근이 뭐라 더 입을 열려던 찰나에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 한 무리가 천막 안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서사근, 서사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서사근을 부르면서 그를 찾았다.
“벌써부터 골칫거리를 만들려고 오는 게야?”
유규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유규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천막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양쪽으로 비켜섰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분해서 이를 갈던 지휘사가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사람들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쥐여 있었다.
“서사근, 이리 와 보거라, 어서! 네게 상이 내려왔다!”
지휘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휘사의 말에 목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말을 돌보던 사람이 관직을 얻었대! 어서 가보자!”
군에는 목감이 있으니, 당연히 관직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말을 돌보는 사람에게 관직이 있다는 건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목감 관리는 절대로 직접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지 않았다. 그런 일은 서리나 병졸, 또는 잡부들이나 하는 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서생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을 얻을 수 있지만, 글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관직을 얻으려면 오직 공을 세우는 방법밖에 없다. 감용 병사라면 적군을 죽이는 것으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지만, 말을 돌보는 사람이 말을 잘 돌봐서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몰려오는 인파로 인해 조그마한 목감은 발 디딜 틈도 없게 되었다.
“삼반, 관리하는, 말을…….”
임명장을 손에 쥔 서봉추는 큰 소리로 글을 읽으려 했지만, 아는 글자가 몇 개 없어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감 안에 있던 사람들도 서봉추가 뭐라고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무수의 형제 중 하나가 그에게서 임명장을 빼앗아 서무수에게 건넸다.
“저리 가, 저리 가. 괜히 나서긴 뭘 나서. 형님더러 읽으시라고 해.”
서무수가 웃으면서 임명장을 건네받았다.
“삼반차직(三班借職) 관구(管勾)로서, 군의 말을 관리하는 직에 임명한다.”
“관구! 그럼 그 주씨 녀석이랑 같은 거 아니오?”
서봉추가 소리치자 서무수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 넷째는 종구품(從九品) 관직일 뿐이야.”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서봉추가 눈을 크게 떴다.
“종구품? 그럼 관리라는 뜻이잖소!”
서봉추가 한쪽에 서 있던 지휘사를 가리키면서 외쳤다.
“그럼 지휘사 전시(殿侍)직보다 더 높은 거네!”
지휘사는 사람들 앞에서 지목되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조금 전 관청에서처럼 노발대발하며 그들 형제를 때려죽이고 싶었던 심정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그는 서사근이 관직을 얻었다는 사실을 썩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지휘사는 관직을 얻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한평생을 전장에서 구른 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서야 간신히 이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 눈앞의 저 병졸은 단번에 구품 관직을 얻었으니, 이것이 벼락출세가 아니면 무엇이랴.
저놈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보통내기가 아닌가 보군. 덤빌 수도 없을 만큼 강한 자를 시샘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나까지 피해를 보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바보나 하는 짓이지.
“서 관구, 관복은 빠른 시일 안에 도착할 거요. 공무를 볼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소? 아니면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는 것이 좋겠소?”
지휘사가 웃으면서 물었다. 서사근은 멍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 떠들썩한 소란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 없다는 듯이.
“우리 넷째가 너무 기쁜 나머지 넋을 놓았나 봅니다.”
서무수는 지휘사가 무안해지지 않도록 대신 대답했다. 지휘사에게서는 좀 전에 서무수를 대할 때와 같은 오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서무수가 자신이 무안해지지 않게 나서준 것을 기뻐하기까지 했다.
서사근이 관직을 얻은 걸 보면 나머지 형제들이 관직에 오르는 것 역시 시간문제야. 그런 이들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겠지.
탈영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숨어 살고 있었지만, 경성을 한 번 다녀오더니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어. 서북으로 돌아와 감용 병사로서 적군을 베어 죽이고 있지만, 다른 병사들과 달리 포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다른 이들은 포상금을 조금이라도 더 얻어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저자들은 돈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군단 말이지.
듣기로는 정초에 경성에서 저자들에게 보낸 돈이 도감 대인의 전 재산보다도 많다던데. 돈을 가져온 사람도 말끝마다 주인어른, 주인어른 하면서 무척 공경한 태도로 저들을 대했다지.
그리 어마어마한 재산과 신분이 있는데도, 왜 저렇게들 목숨 걸고 전장에 나가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 게다가 전장에 나서지 않은 저 병졸마저 별 볼 일 없는 말굽 편자 하나로 관직까지 얻어 내다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군.
살면서 읽은 책이 몇 없던 지휘사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디선가 보았던 구절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수 있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에 든 송곳, 재능이 있는 사람은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라는 뜻).
저 사내들은 언젠간 큰일을 할 사람들이야.
“인지상정이지. 내가 처음으로 관직을 하사받았을 때는, 기쁘다 못해 울음을 터트렸소.”
지휘사가 자조하면서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지휘사의 말을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멍한 표정으로 넋을 놓은 채 서 있던 서사근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서사근은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사근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저 봐. 내 말이 맞지 않나.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난다니까.”
지휘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서무수가 마구간에서 서사근을 찾아냈을 무렵, 서사근은 울음을 그치고 마구간 구석에 앉아 손에 쥔 말굽 편자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형님.”
발걸음 소리를 들은 서사근은 고개를 들어 서무수를 쳐다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더 무겁고 두껍게 만든 건데, 한겨울 눈밭에도 끄떡없을 것 같소.”
서무수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사근이 건넨 말굽 편자를 받으며 옆에 나란히 앉았다.
마구간 안은 악취가 풍겼고, 두 형제의 눈앞에서는 말들의 다리와 꼬리가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연회에 참석한 것처럼 한없이 기뻐 보였다.
“형님, 이거 꿈이죠?”
서사근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서무수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사근을 가볍게 한 대 쳤다.
“꿈이라 한들 어떠냐. 좋은 꿈이면 된 거지.”
서사근이 서무수를 따라 방긋 웃었다.
“관직을 얻으니까 기쁘지?”
서무수가 어깨로 서사근을 툭툭 치면서 물었다.
“예, 기쁩니다.”
서사근이 심호흡을 하고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는 일할 때, 조금 더 수월해지겠죠.”
서사근의 말을 들은 서무수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서봉추가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넷째 형님이 우리보다 못 지낸다고 불쌍해했는데, 이제는 형님에게 예의를 갖추고 관구 대인이라고 부르게 생겼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옆에 서 있던 유규도 믿기지 않는 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입으로 세게 깨물었다. 손가락을 깨물자마자 그는 악 소리를 질렀다.
아프잖아!
“저 쇠붙이 몇 개가 관직을 가져다주었다고? 저깟 게 내가 전장에 나가서 적군을 죽이는 것보다 더 귀해? 세상이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나.”
유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육낭이 몸을 돌려 가까이 온 수하를 쳐다보았다.
“제대로 확인해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저자가 정말로 운이 좋았습니다. 어쩌다 폐하께서 이 일을 알게 되어 자세한 경위를 하문하셨답니다. 그러자 다들 공을 세우려고 난리였고요. 다른 건 몰라도 좋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공을 빼앗길 순 없었겠죠. 결국 서사근은 절도판관과 위주로 경략사, 병마 감찰사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았고, 중서문하성에서 아무런 논쟁도 없이 만장일치로 관직을 하사하는 것에 동의했다 합니다. 그 어떤 문제나 논쟁도 없이, 단번에 관직에 오른 건 실로 전대미문이지요.”
수하가 조용히 말했다.
진짜 운이 좋긴 좋네.
주육낭이 실소를 터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그 여인이 예상했던 것일까?
주육낭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여인,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주육낭은 고개를 숙이고 품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곱게 다듬어진 것이 아닌, 늑대 이빨을 이어서 만든 투박한 팔찌였다.
정월도 다 지나가는 지금 이 시기에 새해 선물을 보내는 것은 적절치 않겠지. 그 여인이 이런 걸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를 일이고.
주육낭은 잠시 팔찌를 손에 쥐고 있다가 자신의 손목에 둘렀다.
-돌아오다-
대주 건원 7년. 정월이 지나자, 황제는 연호를 영화(永和)로 바꾸었다. 바뀐 연호는 연중에 사용을 시작하여, 6월부터 영화원년(永和元年)이 되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황궁 대전에도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관복을 입은 관리들의 등허리에 땀이 한가득 흘렀다.
조회는 아직 진행 중이었지만, 어탑(御榻: 황제가 앉는 상탑)에는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대황자가 어탑 아래에 놓인 의자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올해 열두 살이 된 대황자는 반년 전보다 키가 훌쩍 자라 몸이 홀쭉해졌다. 황자의 조복을 입고 단정하게 앉아 엄숙한 대전에 있는 대황자의 모습에서 황족의 기품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관료들과 함께 서 있던 고능준은 그런 대황자의 모습을 보며 기특하다는 미소를 보였다.
연호를 참 잘 바꿨어. 바꾸고 나서부터는 일이 술술 풀리잖아. 나는 바라던 대로 시제(侍制) 자리를 얻어서, 조당에 오르는 수십 명의 관리 중 한 명이 되었고. 더 이상 황족의 친척인 금오위 상장군에 그치지 않으니, 조정에서 내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리겠지. 그러니 예전처럼 뒤에 숨어 남의 입을 빌려 말할 필요가 없어.
술술 풀리는 건 나뿐만이 아닐 터. 대황자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어. 해가 지나니까 갑자기 훌쩍 커버린 것 같네. 혹은 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공부도 더욱 열심히 하기에 선생들이 입을 모아 칭찬을 하지. 폐하께서도 대황자를 전보다 더욱 신임하고 계시는 듯하고. 요즘 대황자는 제법 어린아이 티를 벗은 듯하단 말이야. 오늘 조회를 참관할 때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집중해서 정사를 경청했고.
조회는 금방 끝이 났고, 관원들은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편전으로 향했다.
“그 일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대황자가 먼저 편전 안으로 들어가 오늘 조회에 대해 황제에게 간단한 보고를 올렸다. 황제가 대황자에게 묻는 말소리가 편전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 대인의 말씀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사람을 보내어 확인한 뒤에 결정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자도 잘 모르지만, 책에서 읽었던 게 생각이 나서 한번 확인하고 싶습니다.”
“잘 생각하였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던 고 통사, 아니, 이제는 고 전원(殿院)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고 전원은 언젠가 자신이 외직으로 나갈 것을 알고 있었으나, 나갈 땐 나가더라도 마음 편히 나가고 싶은 바람뿐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지금 대황자의 모습은 그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문이 열리고 대황자가 밖으로 나왔다. 대황자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대신들에게 자연스럽고 예의 있게 답례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대신들은 저마다 감탄을 하며 대황자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많이 자라긴 했구나.
대황자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대황자의 발걸음은 기나긴 회랑을 지난 뒤에야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양쪽에 흔들리지 않게 가지런히 두었던 두 손도 서서히 긴장을 풀면서 소매와 함께 움직였다. 그제야 그에게서 제 나이다운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마마, 마마.”
대황자의 목소리가 태후궁에 울려 퍼졌다. 우렁차고 기쁜 목소리에는 소년의 활기가 배여 있었다.
“목소리 좀 낮추어라. 폐하께서 아시면 예를 지키지 않았다고 또 나무라실 것이야.”
귀비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 기대어 있던 태후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쪽 옆에 앉아 있던 비빈 몇 명, 대황자와 비슷한 또래의 공주 두 명, 그리고 이제야 돌이 지난 공주가 대황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예는 무슨. 조당에 있는 것도 아닌데.”
태후가 웃으면서 대황자에게 이리 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제 겨우 열두 살인데, 조당에 반나절 내내 앉아 있느라 힘들지는 않았고?”
태후는 궁녀를 시켜 대황자에게 부채질을 해 주도록 하고,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대황자가 의젓한 모습으로 태후 옆에 앉았다.
“아닙니다. 고작 반나절 앉은 것으로 어찌 힘들다고 하겠습니까. 부황께서는 매일 그렇게 보내시는걸요.”
대황자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태후는 더욱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인 게냐. 이렇게 힘든데, 하루 정도는 쉬지 않고?”
태후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마마,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선생이 오늘 가르치는 부분은 이미 제가 외웠던 부분인지라, 걱정할 것도 없고요.”
자신만만한 모습의 대황자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가아는 어쩜 저리 똑똑할까.”
비빈들이 대황자를 칭찬하자, 대황자가 더욱 환하게 웃었다. 귀빈도 기뻐하며 웃었다.
“진안 군왕과 육가아는 아직도 안 돌아왔대요?”
앳된 공주의 목소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자, 자신의 소생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비빈은 재빨리 공주를 안아 들고 말했다.
“그러게. 만약 두 사람도 여기 있었다면, 분명 대황자의 총명함에 대해 입을 모아 칭찬했을 텐데.”
주위에 있던 다른 비빈들도 서둘러 맞장구를 치고는 빠르게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태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공주의 말을 들은 뒤로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대황자와 귀비, 그리고 비빈들은 잠시 앉아 담소를 나눈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태후궁은 다시 조용해졌다.
“위낭이 육가아를 데리고 어디로 갔다고?”
태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달포 전에 형산(衡山)을 떠났답니다. 숙주(肅州)에 신의가 한 명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니, 그리로 가셨을 거예요.”
궁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태후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숫자를 셌다.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를 않는구나. 신의니 뭐니 하는 것들은 죄다 허풍일 텐데, 그걸 믿다니.”
태후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군왕은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으신가 봅니다.”
궁녀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태후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고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시간문제일 뿐이야.”
궁녀는 뭐라 대답하기 어려워, 조심스럽게 휘장을 내리고 조용히 물러났다.
반면, 귀비는 휘장을 홱 치우면서 성을 냈다.
“유비(劉妃)가 고의로 그런 게야. 우리가 그 바보를 잊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지? 어쩜 분위기가 좋다 싶을 때마다 그 얘기를 꺼내!”
궁녀와 내시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숙혜(淑慧) 공주가 그만큼 컸는데, 제대로 가르칠 때도 되지 않았나? 하긴, 천한 도자기 장인 가문 출신의 유비 밑에서 뭘 배우겠어. 당장 숙혜 공주를 주(朱) 현비(賢妃)의 거처로 옮기라 하여라. 거기서 교양이라도 쌓게.”
태후의 슬픔이나 귀비의 불쾌함은 대황자의 기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는 서재에 앉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경서 한 편을 외워냈다. 스승이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대황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이제 더는 누군가와 비교당하지 않아도 되고, 그 빌어먹을 지도도 보지 않아도 돼. 끝이 없을 것 같던 꾸중도 없어졌고, 모두가 다 날 좋아하고 내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어. 이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누려야 했던 나날들이야.
이런 날들만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 애가 없어지니 모든 게 다 좋아졌어. 그 애가 없어진 뒤에야, 나는 최고가 된 거야.
“스승님, 어제 했던 공부를 복습하고 싶습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몇 군데 있어서요.”
대황자가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앉은 뒤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陳)씨 가문의 식구들은 피서를 위해 한 달 동안 교외에 있는 저택에서 지내기로 했다.
“십팔랑, 십팔랑.”
진단랑이 마당 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해가 지난 뒤, 키가 부쩍 자란 진단랑은 예전보다 행동이 좀 더 성숙해졌다. 진단랑이 뛰어다니는 모습도 더 이상 예전처럼 우스꽝스럽지 않고, 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는 듯 생동감이 넘쳤다.
진십팔랑의 마당에 있던 여종과 몸종이 서둘러 진단랑을 부축하며 맞이했다.
“단랑 아씨, 아씨께서는 지금 글씨 연습을 하고 계셔서 방해하면 안 돼요.”
여종들이 나지막이 고했다. 진단랑은 아, 하고 대꾸하고는 아쉬워하며 목을 빼고 창문을 향해 말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글씨 연습만 해서 뭐 해? 할아버지께서 밥 먹으러 나가자고 하시던걸.”
진단랑이 까치발을 하며 안쪽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서재의 창문은 열려 있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단정하게 앉아 있는 진십팔랑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녀는 짙은 색 저고리를 입고, 뒤로 묶은 머리카락에 아무런 장신구도 꽂지 않고 있었다.
오늘날, 이런 그녀의 모습은 진씨 가문 십팔랑을 알아보는 표식과도 같아졌다. 진십팔랑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딜 가나 단번에 진십팔랑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말소리가 들리자, 진십팔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괜찮으니 할아버지랑 같이 다녀와. 아직 두 장 더 써야 해.”
진단랑이 회랑 아래서 서재 안쪽을 훑어보았다. 서재의 벽과 바닥에는 온통 글씨가 쓰인 종이로 가득했다.
“언니, 글씨 쓰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이미 충분히 잘 쓰는 것 같은데?”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정중앙 서화판 위에 걸린, 크게 쓰인 몇 글자를 쳐다보았다.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타고나야만 한다고?
진십팔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붓을 들어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진단랑이 무료한 듯 다시 물었다.
“진짜 안 가게? 태평거에 간다는데.”
진십팔랑이 멈칫하고는 붓을 거두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단랑, 아직 정 낭자를 기억하니?”
진십팔랑의 물음에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작년의 열렬한 반응과는 달리, 한풀 꺾인 듯한 반응이었다. 어린아이의 기억은 짧아 말 몇 마디를 나눴던 사람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을 또렷이 구분하지 못했다. 작별하고 석 달만 지나도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정 낭자가 경성을 떠난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네.
어머니 말씀으로는, 강주에서도 떠났다던데. 정 낭자는 지금쯤 어디서 방랑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 낭자는 올 때나 갈 때나 흔적 하나를 남기지 않았네. 어린 단랑은 관두고, 당장 나만 해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어. 마치 애초에 정 낭자라는 사람이 경성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언니, 그래서 가는 거야 마는 거야. 같이 안 가면, 두부도 안 사 올 거야.”
진단랑의 목소리가 진십팔랑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두부, 태평거, 신선거, 그리고 차정사의 글씨들.
아니야.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정 낭자는 존재했던 것뿐만 아니라, 많은 발자취를 남겼어.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정 낭자가 남긴 발자취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때때로 정 낭자를 떠올리겠지.
올 때는 갑작스러웠지만, 갈 때는 담담했어. 짧은 일 년 동안, 경성에 이렇게나 많은 발자취를 남기다니. 경성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풍랑에 그 여인의 흔적이 남아 있어. 정 낭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죽어도 그 여인을 알 수 없겠지만, 그 여인을 아는 사람들은 평생 그 여인을 잊을 수 없을 거야.
진십팔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혼자 가서도 먹을 수 있거든? 어서 할아버지 모시고 가. 너무 많이 먹다 체하지 말고. 그러다 뚱뚱보 된다.”
올해 일곱 살이 된 진단랑은 자신만의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진단랑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코끝을 문지른 후 어깨를 으쓱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여름의 신선거는 태평거보다 다소 썰렁했다. 하지만 신선거가 썰렁하다고 해서, 이 집이 곧 문을 닫네, 마네 같은 걱정을 하는 이는 없었다.
시녀는 장부를 쳐다보면서 한 손으로 분주하게 산가지를 놓으며 셈을 했다. 시녀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로 춘령에게 물었다.
“사공자께서 다음 달에 강주로 돌아가신다고? 갑자기 왜?”
시녀의 반대편에 앉은 춘령은 그녀가 손을 멈추지 않고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느라 물음을 듣지 못한 듯 보였다. 고개를 들었다가, 넋이 나간 춘령의 모습을 본 시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물었다.
“반근 아씨, 진짜 일을 잘하시네요.”
춘령은 대답 대신 감탄을 뱉었다.
“아씨는 무슨. 난 너랑 같은 아랫것일 뿐이야.”
시녀가 말했다.
“아니에요, 같을 수가 있나요!”
춘령이 화들짝 놀라면서 두 손을 세차게 저었다.
“저처럼 저급한 것이 어떻게 아씨와 같을 수 있겠어요.”
“저급한 것은 무슨. 네가 거기로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잖아. 원해서 간 게 아니라면, 너는 깨끗한 몸이야. 그리고 아씨라고 부르지 마. 내가 모시는 아씨도 있는데, 그런 호칭은 도리에 어긋나.”
시녀의 단호한 태도에 춘령은 민망한 듯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공자 말씀으로는 강주 선생께서 입조하셔야 해서 한동안 학당을 닫아야 한대요. 2년 뒤에 과거 시험을 칠 때쯤 다시 여신다던데요.”
춘령이 뒤늦게 시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겠네. 노야께서 맡으신 일이 하나 더 늘었다고 하던데.”
시녀는 사환을 불러 정사낭이 타고 갈 말과 마차를 빌리고 선물을 준비하라 일렀다. 그러고는 사환에게 돈이 부족한지 물었다.
“혹 부족하면, 일단 아씨 몫에서 좀 떼서 공자님께 드려.”
“차용증을 써둘까요?”
사환이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반년 동안 정사낭에게 들어간 돈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에이, 그 정도도 내 마음대로 못해? 차용증은 무슨.”
시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옆에 있던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다 반근 언니가 여기서 힘들게 일한 덕분에 번 돈인데, 마음대로 쓰지도 못해?”
시녀가 춘령을 쳐다보며 나무랐다.
“그 말도 틀렸어. 이건 내 덕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깔아 준 사다리 덕분에 지붕 위로 올라오게 된 건데, 그걸 어떻게 내 공이라고 해?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잊으면 안 돼.”
“아, 맞아요, 맞아요. 덕승루에 있긴 하지만, 우리 아씨께서 나한테 엄청 잘 대해 주시거든요. 그러니 난 성심을 다해 아씨를 잘 모실 거예요. 반근 언니, 이게 바로 본분이라는 거죠?”
춘령이 눈망울을 크게 뜨고 진지하게 물었다. 시녀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춘령은 헤헤 웃으면서 몸을 일으키고 신선거를 나왔다.
밖으로 나온 춘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춘령은 시기와 미움이 섞인 눈빛으로 신선거를 돌아보았다.
어쩜 저렇게 씨알도 안 먹힐까. 그 여인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리도 충직한 개가 되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