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 대인, 이게 얼마 만이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이 태의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왜요? 또 어디 몸이 불편하십니까? 제가 못 고친다고 하면 신의를 부르시려고요?”
진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속 좁기는. 웃자고 한 소리에 그리 꽁해서야 쓰겠소? 체통을 생각해야지.”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고, 진맥을 위해 탁자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진 노태야도 웃으며, 진맥하도록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 태의는 좌우 양쪽의 맥을 살핀 후 손을 거두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진소는 이 태의의 말에 순간 바짝 긴장했다.
“죽지는 않겠어요.”
이 태의가 말했다. 진소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지만 진 노태야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놀랍게도 내시였다.
진소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내시는 진소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 태의부터 잡아끌었다.
“어서요 대인. 폐하께서 입궐을 명하셨습니다.”
내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시의 말에 진소의 안색이 급변했다. 진소가 얼른 사방을 둘러보자 주위에 있던 시종들이 물길 열리듯 쫙 갈라지며 비켜섰다.
이 태의는 단 한마디의 질문도 없이 약상자를 챙겨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당에 있던 이들이 흩어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상태로 돌아갔다.
진 노태야와 진소는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던데…….”
“폐하일까요? 아니면 태후마마나 황후마마께서?”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두운 얼굴로 황궁 쪽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보자. 금방 소식이 올 게야. 황궁에선 아무것도 숨길 수 없지.”
이 태의가 내시에게 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의로 묻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태의는 태의로서 물어야 할 말과 묻지 말아야 할 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게다가 내시의 안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통 엄중한 일이 아니구나.
곧장 황궁의 내궁으로 들어간 이 태의는 내시가 황제의 궁으로 향하지 않는 걸 보고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급사만 아니라면 조정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은 없을 터였다. 궁에서 몇 번 더 방향을 틀어 어느 전각 앞에 도착했을 무렵, 이 태의는 더욱 안도했다. 황자의 처소였기 때문이다.
궁에서 자라는 황자와 공주에게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른 황족 구성원에 비해 더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다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이 태의의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어쨌거나 황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특히 이황자라면 더더욱.
이 태의가 문 쪽으로 가 보니, 호리호리한 소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겨울 황궁의 쓸쓸한 그림자 아래에 있는지라 더욱 힘없고 애잔해 보였다.
이 태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진안 군왕을 지나쳐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진안 군왕 역시 이 태의를 보지 못한 듯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넓디넓은 황궁 전각 앞에 찬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스치자 버선만 신은 발이 드러났다.
그리 급하게 달려온 터였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내시가 커다란 두봉을 끌어안고 신발을 든 채 옆에 있다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앞으로 다가갔다.
“전하, 옷을 걸치시지요.”
내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라.”
진안 군왕이 냉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내시는 울상인 채로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바람이 창살을 때리며 우우 하는 소리를 내는 통에 굳게 닫힌 전각의 안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더욱 희미하게 들렸다. 안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창백한 안색에서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지라 두 눈은 더욱 새까매 보였다.
뒷걸음질을 치던 진안 군왕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문을 벌컥 열자 안에 있던 이들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안에 있던 이들은 진안 군왕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진안 군왕 역시 평소처럼 깍듯이 예를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침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진안 군왕에게 낯선 전각이 아니었다. 아니, 실은 익숙한 곳이었다. 종종 이곳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했으니.
“형님, 우리 바둑 둬요.”
침상에 누운 그 아이가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안 군왕이 얼른 따라가려는데, 눈앞에 있던 아이가 사라지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이황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황자의 얼굴은 여전히 발그스레했다. 얼굴에 묻어 있던 진흙 자국은 이미 깨끗하게 지운 후였다. 콧김을 내쉬면서 희미하게 코 고는 소리가 났다. 흰 천으로 머리를 싸매지 않았다면 쌔근쌔근 자는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직 숨을 쉬고 있어!
뛸 듯이 기뻐하며 침상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간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콧김을 확인해 보았다.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어요.”
진안 군왕이 소리치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의, 태의,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 태의가 안타까운 눈길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식을 회복하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이 태의가 하던 말을 끝마쳤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
황제의 물음에 이 태의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 부위를 다치셔서 지력에 큰 손상을 입으셨습니다.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정신이 온전치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어찌 된단 말이냐?”
황제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바보가 되실 겁니다. 반응이 더디고 동작이 굼뜨시겠죠.”
이 태의가 대답했다.
바보라니!
전각 분위기가 일순간 굳어 버렸다.
“허튼소리!”
진안 군왕이 침상 옆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고는 삐딱한 시선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허튼소리 마십시오! 분명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 태의는 굳은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맞섰다. 진안 군왕 역시 물러서지 않고 이 태의를 쳐다봤다. 그래야만 이 태의가 말을 바꿀 거라는 듯이.
전각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황제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떨며 심호흡을 깊게 한 다음, 다시 눈을 떠서 다른 태의들을 쳐다보았다.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황제가 물었다. 한쪽 구석에 꿇어앉아 있던 다른 태의들은 그 말에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신들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태의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인 듯 눈을 감고 등을 기대앉았다. 태후와 귀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쏟았다.
“이황자가, 어쩌다 다친 겁니까?”
비통에 잠겨 있던 전각에 갑자기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 태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아는 건가? 제정신이야?
하지만 진안 군왕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못 듣기라도 했을까 겁난다는 듯 다시 입을 열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황자가, 어쩌다가 매산에서 떨어진 거죠?”
진안 군왕의 시선이 귀비에게로 향했다.
“대황자는, 뭐라고 합니까?”
그 말에 귀비와 태후가 울음을 그치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황제조차도 눈을 번쩍 떴다.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을 뿐인데 전각 안에는 수천, 수만의 화살이 날아가는 듯 보였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태의들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고, 왜 하필 오늘 입궐했단 말인가. 병석에 누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어야 했다. 입궐하는 길에 마차에 치이고 말에 부딪혀 다리라도 분질러졌어야 했단 말이다.
이황자가 어쩌다가 매산에서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옆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 있는 내시들과 궁녀들 역시 더는 듣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황궁에서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고 알지 말아야 할 일을 아는 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재촉하는 일일 뿐이었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대황자를 지목해 묻다니. 지금 이때에 대황자 얘기를 굳이 꺼내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바보라 해도 능히 짐작할 만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이들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장살을 당한 내시들이 흘린 피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우리까지 그 황천길에 벗이 되어 주어야 하나?
전각 안은 몹시도 적막하여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화로도 네 개나 가져다 두었지만 오싹할 만한 한기를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위낭,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의 목소리가 전각에 천천히 울려 퍼졌다.
“폐하!”
귀비가 통곡을 하며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신첩을 죽여 주시옵소서.”
귀비의 울음소리가 전각의 적막을 깼지만, 그 울음에 사람들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결국 시작하는구나, 이제 막을 수 없어…….
진안 군왕이 황제를 보며 앞으로 한 발 내디디고 막 입을 열려는데, 문밖에서 내시의 비명에 가까운 보고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마마 납시오.”
내시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문을 열고, 오랜 기간 와병 생활을 하느라 바깥출입을 못 하던 황후가 궁녀 둘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들어왔다.
황후는 예복 차림이었다. 봉관(鳳冠: 황태후나 황후가 쓰던 관)을 쓰고 예장을 갖춘 탓에 황후는 더욱 쇠약해 보였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귀비가 슬피 울며 황후에게 예를 올렸다.
“신첩에게 죄가 있습니다.”
전각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비가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경영(景榮), 이 무슨 짓이냐. 어서 일어나거라.”
태후가 말했다.
“신첩에게 죄가 있습니다.”
황후가 다시 말했다.
귀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였구나.
하지만 곧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황후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다니. 결코 물러서지 않겠단 뜻인가?
태후 역시 짚이는 부분이 있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모두 물러가라.”
황제가 명했다.
전각에 있던 이들은 대사면이라도 받은 듯, 천자 앞에서 결례를 보이는 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르르 빠져나갔다. 전각을 나오는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다들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었다. 저승문에서 살아 돌아온 표정이었다.
안에는 황실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안은 텅 빈 듯 황량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햇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듯 어두컴컴할 뿐이었다.
“경영, 어서 일어나거라. 몸도 안 좋은데. 육가아의 일은…….”
태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황후를 보는 태후의 눈빛은 슬프면서도 결연했다.
전각의 분위기는 또다시 급격히 경직됐다. 다들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사고였어.”
태후는 짧은 네 음절의 말로 이번 일의 결론을 내렸다. 태도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 말에 귀비는 계속해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었고, 황제는 표정 없는 얼굴로 용상에 앉아 있었다.
전각 안에 또다시 적막감이 맴돌았다.
“사고가 아닙니다.”
입을 열었지만 아직 소리를 입 밖으로 내기 전이었던 진안 군왕이 멈칫하며, 말을 가로챈 황후를 쳐다보았다.
바닥에 꿇어앉은 황후가 고개를 들고 손을 뻗어 봉관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가 좌르르 풀어졌다. 풀어진 머리칼 사이로 하얗게 센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귀비가 잽싸게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면 비명 소리가 새어 나갔을 터였다.
황후는 황제보다 나이가 어렸다. 오랫동안 병을 앓았다고는 하나 보양에 힘쓰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칼을 갖고 있었는데, 흰머리가 이렇게 많아졌을 줄이야.
요새 흰머리가 부쩍 는 건가? 아니면 소식을 듣고 갑자기 백발이 된 건가?
황후가 봉관을 앞으로 내밀자 옆에 있던 궁녀도 품고 있던 황후 인장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곽가 경영,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황후가 부복하며 말했다. 태후의 표정은 어두워졌지만, 황제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지지 않았다.
“경영, 이게 무슨 뜻이냐?”
태후가 천천히 물었다. 황후가 고개를 들며, 병약한 얼굴로 슬픈 미소를 지었다.
“마마, 이 일은 제 잘못입니다.”
황후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고가 아닙니다. 제 잘못이죠. 제가 육가아의 효심이 지극하다며 칭찬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절 기쁘게 해 주려고 이 추운 날 매화를 꺾으려 산에 올라가지도 않았을 테고, 떨어져 다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육가아는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아직 어린애죠. 생모를 일찍 여의고 제 손에 자란 아이예요. 마마, 육가아는 아직 어리지만 모르는 게 없는 아이입니다. 절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제 환심을 사려고 그런 거예요. 마마, 폐하, 육가아는 아이고 저는 어른입니다. 제가 제대로 훈육하지 못한 탓이에요. 사실, 사실 전 매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전혀 안 좋아하는데…….”
황후는 가슴을 쥐어뜯기도 하고 세게 치기도 했다. 말의 속도가 차츰 빨라지면서, 차츰 흥분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태후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 결연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슬픔과 연민의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경영, 경영, 그만하거라.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이건 사고였어.”
태후가 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사고가 아니에요!”
황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황후는 자신의 옷섶을 쥐어뜯으며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접니다, 제가 육가아를 해친 거예요! 제가 육가아를 해쳤다고요! 전 매화도 싫고, 그 애가 약시중을 드는 것도 싫습니다. 다 싫어하면서 좋아하는 시늉을 하고, 좋아한다는 걸 보여 주려고 했어요. 제가 해친 겁니다! 제가 진작 솔직하게 말하고 따끔하게 이야기했다면, 육가아가 매화를 꺾으러 가지도 않았겠죠. 그 어린 애가 절 기쁘게 해 주려고 매화를 꺾은 겁니다. 그래야만 효심을 보일 수 있으니까요. 아직 어린애인데, 제가 그 애를 해쳤습니다. 제가 그 애를…….”
절규에 가까운 황후의 목소리가 전각에 울려 퍼졌다. 황후는 옷섶을 쥐어뜯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 뜯기도 했다.
“어서 붙잡아라, 어서 붙잡아!”
태후가 일어나 소리쳤다. 귀비 역시 달려가 황후의 손을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황제도 더 이상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황후의 말에 결국 무너진 듯 비통한 표정이었다.
“아니오, 짐의 잘못이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인다지. 달콤한 벌꿀 또한 독약이 될 수 있소. 아직 어리고 순수한 아이인데, 효심이 지극하다 칭찬했으니 날 기쁘게 하고 싶었겠지. 내가 그 아이를 해친 거요.”
태후가 발을 굴렀다.
“황상, 황상까지 장단을 맞추려는 거요? 이건 사고였소! 사람이 한평생 무탈하고 안온하게 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소? 물을 마시다가도 사레들려 죽을 수 있는 법이오! 그렇다고 물을 마시라고 한 사람한테 잘못이라 할 수 있소? 아니면 그게 물의 잘못이겠소?”
황후가 비통함을 못 이겨 거의 광증을 보이다시피 한 탓에 귀비 혼자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각 안은 울음소리와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태의! 태의!”
태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전각 문이 열리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어 궁녀와 내시, 태의가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다시금 전각을 가득 채웠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지만 덕분에 방금 전 싸늘한 기운과 질식할 것 같은 공기가 사라지면서 전각 안에는 한층 생기가 돌았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방금 전 모습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확 바뀐 분위기를 딱딱한 표정으로 그저 보고만 있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던 진안 군왕은 침상에 부딪치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뒤에 있는 아이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낮 동안에는 맑은 날씨였지만, 밤이 되자 바람이 불었다. 밤바람이 무겁게 황궁 전각을 때리면서 귀신의 흐느낌과 같은 소리를 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비대한 체구의 누군가가 침상 깊숙이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죽이러 온 건가? 사람이야? 아니면 귀신?
“사가아…….”
휘장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곧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귀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궁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양쪽에 있는 궁등에 불을 밝혔다. 순간 실내가 환해졌다. 귀비는 피곤하고 지친 안색이었다.
침상의 휘장을 걷자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귀비의 눈 속에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귀비가 주변을 쓱 둘러보자 궁녀들이 즉시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귀비는 침상 앞에 앉아 손을 뻗어 이불을 걷었다. 대황자는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했지만, 귀비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뭘 겁내는 게야!”
귀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 호통이 대황자의 마음속에 있던 공포를 눌러 버리자 대황자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귀비가 심호흡을 하고 대황자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 주며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귀비가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육가아는 안 죽었어.”
다소 긴장이 풀렸던 대황자는 그 말에 움찔하고 긴장하며 바로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귀비가 꽉 붙잡은 탓에 뺄 수 없었다. 두 모자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놀랍고 무서운 표정이었다.
안 죽었다니, 안 죽었다니. 내가 손을 놓은 걸 누가 알기라도 하는 날엔…….
대황자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이토록 두려워하다니. 안 죽었다는 말에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다면…….
귀비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격랑이 몰아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두 분 황자님께서는 폐하를 뵙고 나와 어화원을 지나다가 매화를 꺾으러 가셨는데…….”
황후궁에서는 내시 하나가 엎드려 덜덜 떠는 목소리로 보고 중이었다. 거기까지 말한 내시가 고개를 들고 말을 보충했다.
“이황자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대황자님께서는 처음에 별로 안 내켜 하시다가, 옆에 있던 내시가 몇 마디 거들자 따라가셨고요.”
이황자궁에서 실려 돌아온 황후는 잠든 듯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내시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대황자님께서는 내시들을 시켜 매화를 꺾게 하고, 이황자님께서는 직접 꺾으셨지요. 그러다가 이황자님이 대황자님께 매화를 보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쪽 돌과 흙이 단단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황자님께서 그만 발을 헛디디시는 바람에…….”
“아니, 대황자가 밀친 것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시의 말을 끊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침상 근처 어두운 곳에서 진안 군왕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당시 시중을 들었던 내시들은 이미 장살로 목숨을 잃은 탓에 이제 구체적인 경과를 아는 이는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진안 군왕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뜻하는 게 뭘까?
황궁엔 사방에 귀가 있어 비밀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있으나 마나 한 장식물에 불과한 군왕의 수족이 이미 황궁 곳곳에 포진해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계속 말하거라.”
황후의 목소리가 경직된 분위기를 깼다.
“이황자님께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자 대황자님께서 손을 뻗어 잡았지만, 힘이 부족해 다른 이들이 도우러 올 때까지 못 버티셨습니다.”
내시가 단숨에 말을 끝까지 전했다.
실내는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밖에서 밤바람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물러가라.”
황후의 말에 내시는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흠뻑 젖은 등에 차가운 바람이 스쳐 뼈를 스미는 한기가 느껴졌지만, 도리어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내시는 좌우를 두리번거린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실내에는 희미한 불빛이 남았다. 침상에 누워 있던 황후는 어느새 일어나 앉아 있었다. 여전히 병약한 얼굴에 머리를 풀어헤친 상태였지만, 광기에 휩싸였던 낮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슬픔과 비통함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궁에서 지낸 세월이 얼마더냐. 지금껏 무탈하게 잘 지내기에, 무슨 일이 생기든 누가 돕지 않아도 잘 헤쳐나갈 줄 알았다.”
황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은 침상 앞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인 채 표정을 숨겼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넌 오늘 죽을 길을 스스로 찾은 거야.”
황후가 말을 이었다. 꿇어앉은 진안 군왕이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러는 게 네 목숨을 재촉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으냐?”
황후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를 스쳤다. 오랫동안 병을 앓은 터라 황후의 목소리는 아름답지 않았다. 더구나 낮에 울고불고하며 악을 쓴 터라 더욱 갈라지고 힘이 없었다.
이황자가 다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황자가 어쩌다 다쳤는지에 대해 아무도 따지려 들지 않았다. 더구나 태후가 사고였다고 선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안 군왕이 추궁한 것이다. 그것도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대황자는, 뭐라고 합니까?
이 질문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아우를 죽였다…….
최종 결과가 어찌 되든,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천하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대황자가 손가락질을 받도록 벼랑으로 내몰았으니, 귀비와 태후는 물론이고 황제 역시 진안 군왕을 용서치 않을 것이었다.
진안 군왕 역시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무사히 출궁하기 위해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준비해 왔던 나날들도, 자유의 몸이 되겠다는 염원도 이제 물거품이 될 것이다.
누구나 아는 자명한 일이고 그 이치를 이해한다면 단념할 수도, 내려놓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어떤 일은 정말이지…….
“억울했습니다.”
진안 군왕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목멘 목소리로 내뱉었다.
억울합니다! 억울하다고요!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하다고.
황후가 웃으며 진안 군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억울한 게 무에 그리 대수라고. 이 세상에 억울한 일 한 번 안 겪은 이가 있다더냐. 너는 그런 적 없고?”
당연히 있죠.
“너도 억울한 일이 있었으면서, 뭐하러 소중한 목숨까지 내팽개쳐. 소중히 여겨 주는 이도 없거늘.”
황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진안 군왕은 엎드린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엎드린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후가 적시에 당도하지 않았더라면, 황후가 자책하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오늘 일은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터였다.
아, 물론 진안 군왕에게만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원만하게 일을 마무리했을 테고.
황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게 고마워할 것 없다. 나 역시 널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니.”
황후는 어둡고 쓸쓸한 실내를 바라보았다.
마마, 마마, 제가 약 먹여 드릴게요. 쓰다고 겁내지 마시고요.
마마, 오늘 스승님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제가 들려드릴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씁쓸한 일이 얻었다가 다시 잃는 것이라고 했던가. 애초에 얻지 않았다면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 것을.
“그 오랜 시간 동안 넌 육가아를 잘 돌봤지. 적어도 그 시간 동안 육가아는 아주 즐겁게 지냈어.”
황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육가아는 날 마마라고 부르며 따랐는데, 내가 그 애한테 해 준 건 너보다도 훨씬 적구나. 그러니 이번엔 내가 육가아한테 선물을 줬다고 치자. 네가 그 애 때문에 화를 입은 걸 알면 육가아도 기뻐하지 않을 게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진안 군왕은 어깨가 들썩이도록 꺽꺽 흐느껴 울었다. 진안 군왕 자신인들 마음 편히, 즐겁게 지내고 싶지 않았겠는가.
황후는 진안 군왕이 소리 내어 울도록 잠시 내버려 두었다.
“너도 여기서 실컷 울거라. 여길 나가는 순간부터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해. 계속 잘못된 길로 나가지 않도록 내가 막긴 했지만, 어쨌거나 오늘 네가 한 말은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다.”
황후는 천천히 말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앞으로 뭘 원하는지는 너의 일이고, 오로지 너 자신에게 달렸어.”
결국 이 세상에서 믿을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명심해라.”
황후가 진안 군왕을 보며 말했다.
“폐하는 성군이시다.”
같은 시간 궁 밖에서도 같은 말을 하는 자가 있었다.
“예전엔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분명 그래.”
진 노태야가 말했다.
소위 성군은 황제가 얼마나 영명하고 용맹한지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쳐죽일 소리로 들리겠지만 신하들은 진시황이나 한무제 같은 황제를 원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웬만큼 자질을 갖춘 정도가 좋았고, 솔직히 자질 같은 건 평범해도 상관없었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가히 성군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조건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잘 아는 것이었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만, 뭘 하면 안 되는지를 알 테니까.
그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자 실천에 옮기기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병약하고 손이 귀한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성군이 되려면, 다친 황자에 대해 비통한 마음이 들더라도 이 때문에 비이성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됐다. 어쨌거나 그는 부친인 동시에 강산과 사직을 책임지고 있는 군주였다.
“이황자의 일이 사고였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정녕…….”
진 노태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소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집 안에서 나누는 대화라고는 하나 대역무도한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궁에서 들려 온 소식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들어야 할 말만 듣고 듣지 말아야 할 말은 듣지 말아야 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입에 담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그 말을 삼키고 지나갔다.
“황실의 후계를 고려한다면, 폐하께서 대황자를 어찌하실 수 있겠느냐?”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황제에게는 대황자 하나만이 남았다. 대황자가 사실을 전부 실토한다 해도, 결코 비바람을 맞게 할 순 없었다.
“폐하의 춘추가 벌써 쉰이시다.”
진 노태야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지금 황제의 몸 상태로 황자를 또 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할뿐더러, 설령 황자를 얻는다 해도 황제의 병약한 몸으로 황자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그 황자가 무사히 장성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누구나 아는 이치였다. 그게 아니라면 황후가 왜 그리 울고불고하며 죄를 청했겠는가.
어차피 친아들도 아니고, 다치면 다친 것으로 그뿐이었다. 그녀로서는 황후의 자리만 온전히 지키고 있으면, 어느 황자가 등극하든 태후가 될 터였다.
이런 때에 형이 아우를 다치게 한 것인지 추궁하는 건 쓸모없는 일일뿐더러 황제와 태후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 나중에 대황자가 등극하고 나면 자신을 그리 대했던 여인이 태후가 되는 걸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황자가 등극할 때까지 무탈히 지낸다는 전제하에.
황실의 일이란…….
황자 하나가 다친 것뿐이었다. 다치는 일이 처음도 아니고, 황궁에 하나뿐인 황자도 아니었다. 오늘 황궁에서 일어난 변고는 신하들에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고 황실 자손의 고달픔에 대해 한마디 얹으며 넘기면 그뿐이었다.
진소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딱히 큰일도 아니죠.”
어둠이 깊어지자 밤바람 소리 역시 더욱 크게 들렸다. 대황자 궁에는 등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고, 회랑 아래에는 수많은 궁녀와 내시가 서 있었다.
하지만 전각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귀비만이 침상 앞에 앉아 넋이 나간 얼굴의 대황자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귀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
“넌 모르겠지만, 아이는 원래 어릴 때 키우기 힘들단다. 귀신이나 요괴 같은 게 달라붙거든. 그래서 어린애들이 걸핏하면 여기저기 부딪치는 거야. 잘 걷다가도 갑자기 넘어지고 그러지 않던?”
대황자는 마음이 다소 진정된 듯 고개를 들어 귀비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왜 그러는 건데요?”
“그게 다 요괴나 귀신이 달라붙어서 그러는 거야.”
귀비가 대황자를 보고 빙긋 웃으며 손으로 귓불을 쓸어 주었다.
“그래서 아이가 무사히 장성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대황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눈빛이었다.
“저, 정말요?”
대황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황자의 귓불을 쓸어 주던 귀비의 손에 별안간 힘이 들어갔다. 대황자가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당연히 진짜지. 내가 널 속여서 뭐해! 내 말 명심해라.”
귀비가 대황자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육가아는 본디 명이 짧아서 하늘이 데려가신 거야. 이건 그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대황자는 통증 때문에 입을 벌린 채로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거둔 귀비는 다시 따뜻한 표정으로 대황자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사가아, 명심하렴. 이제 넌 부황의 유일한 아들이야. 이제 넌 강산과 사직을 이어받을 거야. 네가 방씨 황족의 혈통을 잇겠지. 감히 널 어떻게 할 사람은 없어.”
귀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널 어떻게 할 만한 사람도 없고.”
대황자가 귀비를 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가 대황자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착하지.”
귀비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무겁고 비통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네가 아직 어려 몸이 건장하지 못한 탓이지 뭐니. 그게 아니었다면 육가아를 잡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에 이제 막 진정되었던 대황자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귀비는 대황자의 어깨를 확 잡아당겨 몸을 꽉 붙잡고, 대황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내가 뭐랬어!”
귀비가 목소리를 낮춰 다그쳤다.
“넌 아직 어려서 힘이 달렸던 거라고 그랬잖아. 그게 아니었다면 육가아를 잡아 줄 수 있었을 거라고!”
대황자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이까지 덜덜 떨었다.
모, 못 끌어당겼다고…….
“넌 아직 어려서 힘이 부족했던 거야. 육가아를 끌어당길 수 없었어! 말해, 다시 말해 봐.”
귀비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쉭쉭 소리를 내던 밤바람이 어느샌가 잠잠해지고, 하늘빛이 밝아졌다.
대황자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대신 하품을 했다.
“제가 아직 어려서 그랬어요.”
대황자가 중얼거렸다.
“힘이 없었거든요. 그게 아니었다면 육가아를 끌어당길 수 있었을 거예요.”
거기까지 말하자 대황자의 코가 저도 모르게 씰룩거렸다.
그래, 힘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땐 정말 끌어당길 수 없었어.
“마마, 제가 힘이 없었던 탓에 육가아를 끌어당기지 못했어요. 형님, 형님 하며 절 불렀는데, 구하지 못했습니다…….”
대황자는 와락 울음을 터트리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황자를 보며 귀비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며 표정을 감춘 다음 다시 아들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이황자의 병이 불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어쨌거나 죽은 건 아니었기에 황궁이 소란스러워는 일은 없었다. 새벽이 되자 아침 식사가 각 궁으로 보내졌다.
배달된 식사를 본 내시가 내려놓으라는 손짓을 했다. 사람들이 물러가자 내시는 진안 군왕의 침전 문을 여는 대신 뒤쪽으로 갔다.
구주 수왕부에서 보낸 새해 선물을 쌓아 두는 고방의 문을 열자, 그 가운데에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그 비단옷 차림에 여전히 그 버선을 신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후다닥 달려가느라 하얗던 버선이 까맣게 변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제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내시가 얼른 걸음을 멈췄지만, 발걸음 소리를 들은 건지 진안 군왕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 형님, 우리 지도 보러 아바마마께 가요.
이황자가 자신을 보고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래. 같이 가자, 같이.”
진안 군왕이 행여 조금이라도 늦을세라 부리나케 일어나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입을 열자 눈앞에 있던 아이는 사라지고, 내시만이 슬픈 얼굴로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천천히 돌아서며 고방 안에 있는 진열대를 쭉 훑었다. 전부 휘황찬란한 물건들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물건들을 하나하나 쓸어 보았다.
사실 보내온 물건은 매년 똑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건 진안 군왕이 전혀 좋아하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사실 조금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사실 그 반응들은 전부 거짓이었다.
기쁜 시늉을 했다. 여전히 아껴 주는 가족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자 연극을 했다.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아껴 주는 이는 없었다. 작게나마 마음을 담아 선물을 준비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없었던 거야! 애초에 없었던 거라고!
근데 왜 자신을 속였지? 왜 남을 속인 거야?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쓸데없는 새해 선물 받고 싶대? 좋아하는 시늉을 한 거잖아! 아끼고 사랑해 주는 혈육이 있는 척 환상을 만들어 낸 거라고! 그런 짓을 벌이느라 진정으로 날 좋아하고 살피며 걱정해 주는 사람을 잃었어!
제발 정신 차려!
진안 군왕은 진열대 선반에 있던 보검을 꺼내 들더니 비단이 담긴 선물 상자를 매섭게 내리쳐 베어 버렸다. 선물 상자가 떨어지고 비단이 찢어지면서 진열대도 쓰러졌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 차려, 정신. 너한텐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마마…….”
황궁의 열린 문 사이로 여인의 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찬합을 든 내시가 얼른 걸음을 멈추고, 밖으로 나오는 내시를 쳐다보며 눈으로 물었다. 안에서 나온 내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시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냈다. 문이 닫히자 안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귀비가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맞은편의 태후는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눈가가 붉고 피로한 안색이었다.
“이 일은 아무도 모르니 괜한 생각 말거라.”
“마마, 숨길 수 있는 비밀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은 다들 입을 다물고 있지만 나중은 모르는 일이죠. 세상 사람들의 입을 무슨 수로 막아요.”
귀비가 울며 흐느꼈다.
“하물며 그런 식으로 물었어요. 그게 그 뜻이잖아요…….”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위낭도, 그런 뜻은 아니었을 게야. 아직 어리니 말을 가려서 할 줄 몰랐던 거지. 너무 슬프고 경황이 없어 그저 당시 상황을 물으려다가 무심결에…….”
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비가 말을 끊었다.
“마마, 그 말을 믿으세요?”
귀비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귀비가 태후 앞에서 이토록 결례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태후는 화를 내거나 호통을 치는 대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방금 사가아가 어땠는지 마마와 폐하께서도 다 보셨잖아요.”
귀비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사가아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이에요. 눈앞에서 아우가 그런 일을 당했으니, 그 애 마음이 어떻겠어요.”
대황자는 방금 전 황제와 태후 앞에서 자신이 아우를 붙잡지 못했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공포에 질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놀라도 보통 놀란 게 아니고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했다. 황제는 대황자 궁에서 한참을 위로하고 다독이며 재워 주었다.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육가아가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바보가 될 거라더니, 사가아가 먼저 바보가 되겠어요.”
귀비의 말에 태후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헛소릴 하는 게야!”
태후의 호통에 귀비는 도리어 마음이 놓였다.
“제가 헛소리를 한다고요? 사가아가 그런 누명을 쓰게 됐는데, 바보가 안 되고 배기겠어요?”
귀비가 흐느껴 울었다. 태후가 굳은 얼굴로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내시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분명 방해하지 말라 명했거늘, 누가 감히 들어오는 게야?
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측근 노태감이 보였다.
“마마.”
노태감이 예를 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
태후는 불쾌하지만 내쫓지 않고 화를 꾹 누르며 물었다. 눈치가 빠른 인사인데 이렇게 들어올 정도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진안 군왕 쪽 사람이 와서 일이 생겼다고…….”
노태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했다. 귀비가 즉시 울음을 멈추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이쪽을 노려봤다.
“그 애가…….”
귀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태후가 얼른 말을 잘랐다.
“무슨 일이더냐?”
태후가 경고의 눈빛으로 귀비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정신줄을, 놓으셨다고…….”
노태감이 말했다.
정신줄을 놓아?
속으로 냉소를 짓던 귀비가 막 입을 열려는데,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 봐야겠다.”
“마마!”
귀비가 다급하게 일어나며 소리쳤다.
“더 이상 궁에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태후는 엄숙한 눈빛으로 쏘아붙인 다음, 심호흡을 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비는 떠나는 태후의 모습을 분노로 노려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이어서 내시를 불렀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대황자 궁에 계시더냐?”
귀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는 태후가 간 방향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소란을 피우거라, 소란을 피워. 큰 소란일수록 좋을지니.
진작 궁에서 꺼져 버렸어야 할 녀석이 안 가고 버티더니, 이번엔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갔구나.
태후가 진안 군왕의 처소 쪽으로 왔다. 앞뜰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안으로 들어선 태후는 소리 나는 쪽을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는 내시들이 서 있었다. 다들 당황스럽고 불안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때때로 말리기도 했다.
“무슨 일이냐?”
태후가 물었다. 후원에 있던 내시들이 무릎을 꿇고 시선을 피했다. 고방에 있는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던 태후는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진안 군왕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위낭, 무슨 짓이냐!”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마, 이것들을 태워 버릴 겁니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불안한 표정의 진안 군왕은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말투 또한 어딘지 모르게 뻣뻣했다. 딱 봐도 온전한 정신은 아닌 듯했다.
황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게 불이었다. 몇 년 전 낙뢰에 불탄 전각도 아직 수리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지금은 겨울이라 한번 불이 났다 하면 불길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진안 군왕의 궁이 후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진짜 불이라도 나면 골치 아파질 터였다.
“위낭, 위낭, 허튼짓 말거라. 어서 횃불을 내려놓고 이쪽으로 와.”
태후가 따뜻한 말투로 달랬지만,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쓸쓸하게 웃었다.
“마마, 제가 육가아를 해쳤습니다. 이 물건들이 육가아를 해쳤어요. 이것들을 태워 버리고, 저 자신도 태워 버릴 겁니다.”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육가아를 해쳤다는 사람이 또 있네.
태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진안 군왕을 빤히 쳐다봤다.
이 녀석이…… 정말 그리 생각하는 건가? 아니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야. 일단 횃불부터 내려놓는 게 우선이야.
“위낭.”
태후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일부러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 얘길 하러 온 거란다. 어서 이리 오렴. 육가아가 방금 깨어났어.”
“정말요? 육가아가…….”
진안 군왕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가려 할 때였다.
“어서 붙잡아라.”
태후가 손짓과 함께 소리치자 사방에서 대기 중이던 내시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마마, 절 속이셨군요. 절 속이셨어요.”
진안 군왕이 괴성을 지르며 고방 안을 뛰어다녔다.
“육가아는 안 깨어났잖아요. 육가아는 안 깨어났어요.”
날카로운 목소리는 갈라진 목소리로, 흐느끼는 목소리로 차츰 변해갔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셈이야?”
내시들에게 제압된 진안 군왕에게 태후가 호통을 쳤다.
“육가아가 깨어나게 만들 겁니다. 육가아가 무사하게 지킬 거예요.”
밧줄로 묶인 채 바닥에 옆으로 누워 있게 된 진안 군왕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너만 그 애를 생각하는 줄 알아?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우리도 전부 처소를 태우기라도 할까?”
태후가 고개를 들어 고방 안을 살펴보았다. 이것저것 내던지고 부숴 버려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여긴 구주 수왕부에서 보낸 선물을 놓아 두는 곳이었지. 그런데 이젠 전부 산산조각이 났구나. 이 아이가 보물처럼 애지중지 떠받들던 것을 전부 깨뜨리고 짓이겨 버렸어.
“마마, 마마. 이건 사고가 아닙니다.”
귓가에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진안 군왕은 태후를 보지 않고 발버둥 치는 것도 포기한 채 땅바닥을 보며 천천히 눈물을 흘렸다.
“다 저 때문입니다. 저한테 같이 가자고 했는데, 제가 안 갔어요.”
그랬단…… 말이지?
태후는 진안 군왕을 보며 잠자코 있었다.
“제가 안 갔습니다. 이 물건들을 보겠다고요. 이 물건들이 뭐 볼 게 있다고……. 제가 마마를 속이고 육가아를 속였습니다. 사실 전 이 물건들을 봐도,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그냥 제 가엾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요. 애초에 그들은 절 잊었습니다. 절 잊었죠. 그들이 보낸 이 물건은 늘 똑같은 것들입니다. 육가아가 한 번 웃어 주는 것만 한 기쁨도 못 준다고요. 그런데도 전 아닌 척 연극을 하며,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왜 이따위 물건들을 보겠다고 그 애랑 같이 가지 않은 걸까요. 제가 같이 갔다면, 온 힘을 바쳐서라도 육가아를 붙잡아 주었을 텐데……. 어떻게든 붙잡았을 겁니다.”
바닥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횡설수설하며 혼잣말을 늘어놓는 소년의 모습에 태후의 눈에서도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후가 꿇어앉으며 진안 군왕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어리석은 것. 왜 너까지 아둔하게 굴어.”
태후 역시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사고였다.”
“제 잘못입니다. 제 잘못이에요. 사실 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육가아뿐이죠. 그날 왜 같이 안 갔을까요. 왜 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우들이 그리운 척 연극을 한 걸까요. 실은 신경조차 안 쓰는데요. 아우들도 저한테 관심 없고요. 그런데 왜 그런 헛짓을…….”
진안 군왕은 여전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튼소리 마라, 허튼소리 마.”
태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리석은 것. 그건 헛짓이 아니야. 나도 알고 육가아도 알아. 넌 우리가 걱정할까 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던 거야. 어리석은 것, 우리도 다 안다. 그게 무슨 헛짓이야? 철이 든 거지.”
그러면서 태후는 옆에 있는 내시에게 얼른 밧줄을 풀어 주라고 명했다. 사방에 꿇어앉아 있던 내시들이 얼른 달려와 밧줄을 풀며 일어나도록 부축해 주었다.
황제가 이미 문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시 하나가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황자님께서는 군왕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군왕께서는 그때 막 구주에서 온 새해 선물을 받으셔서…….”
눈치 빠른 귀비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내시가 나지막이 고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자, 귀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황제의 옆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인 듯 보였지만, 오랜 세월 황제를 모신 귀비는 알 수 있었다. 황제의 표정이 이미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귀비는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태후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진안 군왕을 표독스러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폐하를 모셔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저 녀석 좋은 일만 시켰네, 망할 녀석!
어둠이 내릴 무렵, 귀비가 종종걸음으로 태후궁에 들어섰다. 태후와 황제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사가아는 잠들었고?”
태후가 물었다.
“아직이요. 막 달래서 뭐 좀 먹였어요.”
귀비가 꿇어앉으며 말했다.
“마마, 군왕을 마마의 궁에서 지내게 하시려고요?”
“그래, 거기서 지내게 하려니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다.”
마음이 안 놓일 게 뭐 있어!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 또다시 그 물건들을 본다면, 백 번 천 번을 대비해도 불을 지르고 말 거야.”
태후가 황제를 보며 말했다.
“구주에서 보낸 그 물건들을 어쨌으면 좋겠소? 전부 부숴 엉망진창이 됐던데. 저쪽에서 알면 괜한 오해를 살까 걱정이오.”
오해 사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그 집안 아들이 저지른 짓인데!
귀비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 거길 봉쇄하고, 사람을 시켜 천천히 정리하도록 하죠.”
황제가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피곤에 지친 태후가 그만 물러가라고 했다. 궁문을 나온 귀비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폐하, 군왕이 태후궁에서 지내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이제 장성했는데 후궁에서 함께 지내는 건 좀…….”
황제가 걸음을 멈추고 귀비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눈길에 귀비는 괜히 마음이 찔려 나머지 말을 도로 삼켰다.
“좀 기다려 봅시다. 짐이 알아서 할 테니.”
황제가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애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었소. 오직 육가아 하나뿐이었지. 이런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내쫓으란 말이오.”
귀비는 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얼른 뒤따라갔다.
“태후마마 옆에 있으면, 마마께서 다독여 주시기도 편하고.”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사가아도 데려오시구려.”
지금 대황자 상태로서는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는 게 가장 안심이었다. 어딜 보내든 마음이 안 놓일 터였다.
귀비가 한숨을 쉬었다.
“하나만 돌보기에도 마마께서 고단하실 거예요.”
귀비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황제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군왕이 사가아한테 조금…….”
황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가아를 탓한 게 아니오. 자기 자신한테 그런 거지.”
“폐하.”
귀비가 황제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군왕의 말을 믿으세요?”
황제가 고개를 돌려 귀비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대는, 짐의 말을 안 믿소?”
귀비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멈칫했다가 얼른 몸을 낮추며 예를 표했다.
“당치 않습니다.”
황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육가아한테 일이 생긴 게, 짐의 잘못이라는 얘기였소.”
황제는 어둠으로 물든 밤하늘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짐이 그리 칭찬하지 않았다면, 그 애가 어찌…….”
“폐하.”
귀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리쳤다.
“짐이 정말 자책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소?”
황제가 귀비를 보며 묻자 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 믿습니다. 폐하께서 괴로우시다는 거 잘 알아요.”
귀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짐은 위낭도 믿소.”
귀비는 멈칫하며 황제를 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진안 군왕은 황제와 귀비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궁문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편전의 창 뒤에 서서 지켜보았다. 황제와 귀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진안 군왕은 시선을 거두고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밤이 뒤덮은 궁은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날이 어두워졌구나.”
진안 군왕이 말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날이 어두워졌어.
진안 군왕은 발을 들어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옆에 있던 내시가 그 말에 눈짓을 주고받았다.
“등을 대령해라, 등을.”
내시 하나가 말했다.
등을 대령해라, 등을.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궁등이 하나하나 켜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켜진 궁등은 캄캄한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날이 아직 밝기 전, 마당은 어두컴컴했다.
벌써 깨끗하게 씻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반근은 부엌으로 가서 흰죽을 쑤고 정교랑의 방 문 앞으로 왔다. 아직 손을 뻗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역시 단정히 차려입은 정교랑이 걸어 나왔다.
“아씨, 우리 출발해요.”
반근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걸음을 옮겼다.
새벽이라 골목은 조용했다. 닭이나 오리도 아직 잠들어 있었고, 개들은 발걸음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가 금세 다시 내리고 다리 속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계속해서 잠을 청했다.
길목을 세 바퀴째 돌고 있던 정평은 여인이 표표히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암청색 두봉에 머리를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이라 고운 얼굴을 두모로 가리지 않은 채였다. 어두운 두봉에 새하얀 얼굴은 분명한 대비를 이루며 더없이 잘 어울렸다. 겨울 새벽의 안개 속에서 보니 신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정 낭자, 정 낭자.”
정평이 웃으며 다가갔다.
“이런 우연이 있나. 어디 가요?”
정교랑은 정평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네. 그냥 좀 걸으려고요”
정교랑은 정평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정평은 정교랑이 대답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몸을 옆으로 살짝 트는 걸 눈여겨봤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건 물론이고, 고개를 숙일 때에도 정면으로 마주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건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대하는 예절이 분명해.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이 낭자의 손윗사람은 저기 저 대저택에 있는걸. 요 며칠 그 저택에서 사람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데도 배웅 한 번 하는 일이 없던데.
정평은 입을 삐죽거리고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진짜 내 말에 놀라서 그러나?
“정 낭자, 점괘가 두 개일 순 없지만, 내가 점을 한 번 더 봐 드릴 순 있는데…….”
정평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아니에요. 괜한 생각 마셔요. 그 점괘가 옳았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저의 개인적인 일이죠.”
정평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 이리 똑똑한 낭자잖아. 똑똑한 사람이 그리 쉽게 놀랄 리 없지.
“그럼 일 보십시오, 낭자.”
정평이 예를 표하며 웃었다. 정교랑은 몸을 틀어 정평의 예를 피하고,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감히 말을 올리기도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정평은 감히 자신을 범접하기도 송구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낭자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고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평이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긴 후에야 정교랑은 계속해서 가던 길을 걸었다. 정교랑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겨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내가 천부적 재능을 타고나 크게 될 인물인가 보네. 다른 사람은 못 알아보는데, 저 낭자는 똑똑하고 명이 기이해서 알아본 거야. 그래서 내게 저토록 공경한 거고…….”
정평의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채소로 어깨를 탁 쳤다.
“평 총각, 대단하네.”
근처에 있던 집에서 아낙 하나가 나와 씩 웃었다. 아낙의 손에는 식칼도 들려 있었다.
“사흘이나 이 주변을 돌더니, 진짜 우연히 정 낭자를 만나고 말이야.”
정평의 일은 정교랑과 함께 나들이를 나갔던 아낙들이 돌아오면서 남정에 쫙 퍼졌다.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정평이 정 낭자의 미움을 샀다고 여겼지만, 두 아낙이 단호하게 부인했다. 미움을 사기는커녕 정 낭자가 정평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미움을 샀다면 초주검이 되도록 매질을 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때리기는커녕 정 낭자가 직접 사과까지 했다는 게 이유였다.
정 낭자는 이제 남정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됐다. 그런 정 낭자가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그들도 존경을 표하는 게 당연했다.
정계의 주도로 남정 사람들은 힘을 합쳐 정평에게 집을 마련해 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정평이 돌아온 후의 상황은 이들의 상상과 다소 달랐다.
정 낭자는 정평이라는 사람을 아예 모르는 듯 행동했다. 다른 특별 대우를 하는 건 더더욱 없었다. 이에 따라 남정 사람들의 열정과 존경심도 금세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예전처럼 깔보고 무시하거나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일은 없었다. 과거 정평을 그리 대했던 건 사실 정평의 신분이나 내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정평은 정 대노야에게 자신의 조부가 정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했다. 젊었을 적 밥벌이를 위해 타향으로 갔다가 촉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가난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는 게 정평의 주장이었다. 조부는 부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했으나 부친 역시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다시 아들 정평에게 당부했다. 정평은 고생 끝에 이제야 겨우 돌아왔다고 했다.
“조부님으로부터 지금까지 삼 대입니다. 저는 촉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곳 강주 말씨를 정통으로 구사하지요.”
정평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했다.
이제 정평의 신분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다들 그를 정씨 일족으로 받아들이면서 태도 또한 달라졌다.
“하여간 간도 크지. 감히 아씨를 속이다니 매질이 겁나지도 않아?”
아낙이 웃으며 말하자 정평도 헤헤 웃으며 아낙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주머니. 속인 게 아니라고요. 핑계를 대서 둘러대 봤자 어차피 저도 알고 그 아씨도 알고 다른 이들도 알잖습니까. 어차피 모두 안다면 정당하게 나가는 게 낫죠. 세상에 뻔히 알면서 말하지 않는 일이 좀 많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미움을 받으니까요.”
아낙이 퉤 하고 침을 뱉으며 식칼을 들고 휘휘 저었다.
“말하는 거 보면 아주 야무져. 입만 잘 털면 뭐하나,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채소탕이라도 좀 먹으려오?”
정평이 헤헤 웃으며 읍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정평이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집 짓는 곳에 가 봐야 하거든요. 풍수라도 좀 짚어 줄까 하고요.”
아낙은 또다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풍수를 짚어 주긴 개뿔. 밥 한술 얻어먹으려고 그러지.”
정평은 히죽 웃으며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집 짓는 곳 쪽 밥이 푸짐하게 나오긴 하지.”
아낙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가로젓고 계속해서 채소를 다듬었다.
칼질하는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깼다. 칼질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면서 개와 닭 소리,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 어른들이 혼내는 소리도 늘어났다.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두견새 피 토하고-
“……정교랑, 이 뻔뻔한 것.”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당에서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씨 가문 사람이 또 왔네.”
“대노야께서 편찮으시니 저들까지 덩달아 병이 걸린 건지, 원. 허구한 날 아씨를 찾아와 저리 소란을 피우다니.”
“아씨도 참 성격이 좋으셔. 저걸 그냥 두시다니.”
“그러게 말이야. 활을 쏴서 쫓아 버리시지 않고.”
바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는 마당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처마 아래에 선 정육랑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리를 질러댔다. 정육랑은 씩씩거리며 방 안에 있는 여인을 쳐다봤다.
여인은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찻잔을 들고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따금 물이라도 마시지 않았다면 석상을 조각해 놓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제 정씨 가문은 온 성의 웃음거리가 됐어! 정교랑, 네가 이러고도 정씨야?”
정육랑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전에는 저 바보가 몹시도 무서웠다. 입이 삐뚤어지고 눈이 사시일까 봐, 침을 흘리고 콧물을 흘릴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저 바보한테 두 번 놀랐을 때는 밤에 악몽까지 꾸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저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그리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탄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데도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악몽을 꾸게 하는 공포는 아니었다. 오밤중에 자다가 잠깐 깼을 때, 뼛속 깊이 한기가 느껴지는 공포였다.
정씨 가문은 망할 거야. 강주부의 웃음거리가 되겠지. 혼담이 오가던 가문들한테서도 이젠 소식이 끊겼어.
전에는 집안에 바보가 있다는 이유로 남들에게 비웃음을 사곤 했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은 정육랑과 무관한 것이었고, 그건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게 더 좋을 때도 있었다. 그 조소를 빌려 자신에게 닥친 마음에 안 드는 일들을 마음껏 원망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달랐다. 집안에 바보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씨 가문의 일이었다. 정씨 가문은 저 바보한테 고소를 당했고, 관부에서는 사건을 수리했다. 정씨 가문의 명성이 완전히 짓밟힌 것이다.
집안의 어느 한 개인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기껏해야 정씨 가문도 덩달아 창피를 당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집안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면 구성원 모두에게 화가 미치기 마련이다.
집이 있어야 사람이 있는 법인데, 집이 없다면 그 집 사람들은 뭐가 되겠는가.
“정교랑, 넌 곱게 못 죽을 거야!”
정육랑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려 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반근이 막았고, 마당 곳곳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던 시종들도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거 놔, 이 천것들이 어딜 감히!”
정육랑이 반근을 밀쳤다. 정육랑은 여전히 방 안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정교랑을 죽일 듯이 쏘아보며 홱 뒤돌아 눈물을 닦고 달려나갔다.
“정교랑, 넌 가문과 조상을 욕되게 했어. 천륜을 거스른 거지. 이런 몹쓸 짓을 했으니 곱게 죽진 못할 거다!”
쾅 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는 차츰 멀어져 갔다. 마당 안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사실 곱게 죽고 안 죽고는, 무슨 일을 했는지와 상관없어.”
정교랑이 자세를 바로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회랑 아래에 있던 반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씨, 그 얘길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생각하신 거예요?”
반근은 어쩐지 책망하는 투로 물었다.
“들었지. 엄청 시끄럽게 떠들었잖아. 목소리는 듣기 좋던걸. 정 대부인보다 나아.”
정교랑이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또 누가 왔니?”
반근은 정교랑의 말에 또다시 웃음을 짓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 정 대노야는 대문 앞에서 쓰러져 실려 돌아갔다. 목숨은 건졌지만 의원은 침상에서 한 발자국도 내려오면 안 된다고 했다. 한 번만 더 내려왔다가는 신선이 와도 못 고친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 일로 정씨 가문은 엉망진창이 됐고, 정 대부인은 사람들을 이끌고 쳐들어오기까지 했다. 물론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그 이후로 정씨 가문 사람들이 종종 찾아왔다. 욕을 퍼붓기도 하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고, 간곡하게 사정하기도 했다.
사실 반근은 정교랑이 그런 이들을 대문 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조 집사나 자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나. 그런데 늘 조용한 생활을 즐기던 정교랑이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거처를 옮기지 않고, 정씨 가문 사람들이 대문을 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이 떠들어 대는 말에 대꾸한 적은 없지만, 꽤 진지하게 듣는 듯 보였다. 물론 그런 말이 정교랑에게 상처를 줄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반근은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아씨, 뭐하러 그런 일에 시간을 쓰세요.”
아씨는 그런 분이 아니잖아. 누군가와 잡담을 나누는 분도, 남들의 잡담을 듣는 분도 아니셔.
소매를 끈으로 동여매던 정교랑은 반근의 말에 잠시 동작을 멈췄다.
“난 그냥, 너무 한가한 게 싫어서.”
한가하게 있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는데, 지금은 생각을 많이 할 수 없었다.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곱씹다 보면,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눈을 뜨면 나가서 걷고, 낮에는 사람들이 욕하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활도 쏘고 글씨 연습도 하고 책도 보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저녁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지금은 그러는 게 좋았다.
반근은 정교랑의 눈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앞으로 다가가 소매를 단단하게 동여매 준 다음, 벽에서 활과 화살을 내렸다.
하루 또 하루, 해가 뜨고 지면서 섣달의 연말 분위기가 한층 짙어졌다. 하지만 황궁에서는 밝은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전각에서 내시 둘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손에는 커다란 나무통이 하나 들려 있었고, 통에는 용변 냄새를 풍기는 옷이 담겨 있었다. 옆을 지나가던 내시들과 궁녀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는 손으로 코를 틀어막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손으로 등을 세게 내리쳤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손으로 등을 내리친 이는 전각 방향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경고하듯 말하고는 혀를 날름거리고 손을 내렸다.
“육가아, 옷 갈아입었으니 우리 뭐 좀 먹자.”
진안 군왕이 옷자락을 들고 침상 옆으로 앉더니, 옆에 놓인 탁자에서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침상 위의 이황자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발그레한 얼굴에 웃음을 띤 채였다. 머리의 상처에 감겨 있던 흰 천은 이미 풀어 버렸고, 대신 모자를 써서 상처를 가렸다. 얼핏 예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웃음과 함께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과 흐리멍덩한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게 달라졌다고.
모든 게 달라졌다.
이황자는 팔을 활짝 벌리고 위아래로 흔들며 입으로 아무 의미 없이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진안 군왕은 밥그릇이 쏟아지지 않도록 얼른 팔을 붙잡고, 웃으며 달래 주었다.
“밥 먹어야지, 밥. 밥 먹고 나서 형이랑 놀러 가자.”
금으로 된 밥그릇에 담긴 밥을 은수저로 떠서 이황자의 입에 가져다 댔다. 삼킨 게 반, 흘린 게 반이었다. 턱받이에 묻은 음식들을 보고 있노라면 비위가 상했다.
가뜩이나 흘린 게 반이었는데, 팔을 세차게 흔드는 바람에 밥그릇이 저 멀리 날아갔다. 쨍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전각에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의 몸에도 자연히 이것저것 흘린 게 많았다. 내시가 얼른 무릎을 꿇고 닦아 주었다.
“전하, 어서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내시가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진안 군왕은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침상에서 팔을 흔들고 있는 이황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황자는 침을 흘리며 이이야야 하는 소리를 냈다. 진안 군왕은 내시의 말이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육가아, 넌 병에 걸린 거야, 병.”
진안 군왕이 별안간 이황자의 어깨를 확 붙잡아 누르며 말을 이었다.
“병이라면 내가 데려가 고쳐 줄게. 네 병을 고쳐 줄 거야.”
“허튼소리!”
탁 하고 내리치는 소리가 궁 안에서 울려 퍼졌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내시들과 궁녀들은 또다시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쪽으로 걸어오던 귀비는 의아한 눈치였다.
“또 왜 저러셔?”
귀비가 물었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진안 군왕께서 안에 계시옵니다.”
내시 하나가 예를 표하며 나지막이 고했다.
진안 군왕이 함께 있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벌써 보름이 넘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여전히 태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귀비가 입을 삐죽거렸다.
“아직 시간도 이른데. 군왕은 왜 경왕(慶王) 옆에 있지 않고?”
이황자는 다친 지 닷새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황자는 태의의 진단대로 바보로 변해 대소변조차 못 가리는 처지가 됐고, 말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이황자의 상태를 확인한 황제와 태후는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 태의를 시켜 계속 치료하게 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고 사흘 전, 황제는 이황자를 경왕에 봉한다는 성지를 내렸다.
자손이 귀했던 탓에 황제는 일부러 봉작을 미뤄 왔다. 대황자는 열 살이 되던 해에야 영국공(寧國公)에 봉해졌고, 지금껏 군왕에 책봉되지도 않았으니 친왕 책봉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올해 일곱 살인 이황자는 국공에도 봉하기 전에 곧장 친왕으로 봉했으니 이는 법도에 한참 어긋난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미 폐인이 된 이황자를 왕으로 봉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하나는 병자의 액막이를 위한 경사를 만들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아들을 향한 부친의 사랑 때문이었다.
이런 때에 굳이 폐인 친왕을 걸고넘어지며 부친을 자극해 망신을 당하려는 이는 없었다.
내시가 좌우를 살핀 다음 다시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서 나지막이 고했다.
“경왕의 일로 떼를 쓰고 계십니다.”
귀비의 가슴이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다. 두봉 속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또 왜?”
귀비의 물음에 내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왕 전하를 모시고 나가 병을 고칠 의원을 찾아가겠다고 하십니다.”
내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가서 의원을 찾아가겠다?
귀비는 멈칫했다.
“병이 급하면 아무 의원에게나 매달린다더니.”
태후가 탁자를 내리치며, 앞에 꿇어앉은 소년을 딱히 도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매일 가까이에서 지켜봤는데도, 어쩐지 갑자기 부쩍 수척해진 듯 보였다. 눈가에 거무스름하게 그늘이 져 있었다. 머리는 단정히 묶었지만, 옷으로 튄 오물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너희는 군왕을 어찌 모시는 게야!”
태후가 갑자기 호통을 치자, 문밖에 있던 내시들이 우르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마마, 저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육가아를 돌보겠다고 했어요.”
태후가 진안 군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위낭, 꼴이 이게 무어냐…….”
“마마, 마마,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우선 육가아를 고칠 방도부터…….”
진안 군왕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위낭!”
태후가 언성을 높이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어 태후를 쳐다보았다.
소년의 커다란 눈에는 실핏줄이 가득했다. 고집스러운 비통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정신 차리자. 못 고친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막다른 길은 아니에요.”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을 이었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같이 놀러도 가고 싶고요. 시도라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진안 군왕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한 번만 해 보겠습니다. 시도도 안 해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육가아를 붙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보고 싶습니다. 붙잡아 보고 싶어요. 형님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마마, 육가아를, 육가아를 되돌리고 싶어요. 마마…….”
태후는 눈물이 흐르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도 우리 육가아를 되돌리고 싶구나, 우리 육가아를 되돌리고 싶어.
두견새 피 토하고 원숭이 슬피 우는(杜鵑啼血猿哀鳴 - 백거이 <비파행>) 심정이 이러했으리라.
“그 의원에 대해서는 어디서 들었느냐?”
태후가 목멘 목소리로 물었다.
귀비는 초조한 얼굴로 창가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기다리다 짜증이 날 무렵,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는 궁녀가 보였다.
“뭐라더냐?”
귀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태후께서 동의하셨어요. 폐하도 모셔 오셨고요.”
궁녀의 말에 귀비는 안도의 한숨을 토하며 희색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합장했다.
“그래서 폐하는 뭐라고 하시던?”
“폐하께서도 동의하시며, 군왕의 지극정성을 들어주겠다고 하셨어요.”
지극정성이라…….
귀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폐하께서 군왕께 고맙다고도 하셨고요.”
궁녀가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이자 귀비는 인상을 썼다.
“폐하께서 고맙다고 하셨다고? 고맙긴 뭐가?”
“폐하를 대신해 마음을 다한다나…… 대충 그런 의미였는데, 소인도 자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귀비가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진안 군왕이 경왕을 데리고 출궁하여 의원을 찾으러 가는 건 틀림없었다.
“군왕이 찾는다던 의원은 어디 있다더냐? 모시러 갔느냐?”
귀비의 물음에 궁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 의원을 모셔 오는 게 아니고, 나가서 의원을 찾아갈 거라고 하셨어요.”
뭐야?
귀비는 흠칫 놀랐다.
“그래서 군왕께서 경왕을 모시고 그 의원을 만나러 출궁하셨습니다.”
“어째서?”
궁녀의 말에 귀비가 물었다.
“군왕의 말씀으로는 의원을 모시러 갔다 모셔 왔다 하면 시간만 아까우니까, 그러느니 직접 가겠다고 하셨어요. 경왕의 병은 하루라도 빨리 고치는 게 낫다면서요.”
그러더니 궁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 쭈뼛쭈뼛 덧붙였다.
“그 뒤는 소인도 잘 못 들었는데…… 아무튼 폐하와 태후께서 동의하셨어요.”
귀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의원을 만나러 출궁했다는 말만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눈에 거슬리던 것들이 드디어 궁을 나갔구나!
경왕은 그래도 괜찮았다. 바보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진안 군왕은 정말이지 잠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식을 낳게 해 준다는 소위 송자동자(送子童子)라서 싫은 건 아니었다. 그냥 보기 싫었다.
태후궁에 갈 때마다 한쪽 옆에 꿇어앉아 있는 소년을 볼 때면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찔리는 게 있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걸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보기 싫었다.
지극정성이라니, 거 잘됐네. 그 지극정성 끝까지 쏟으라고. 경왕을 고치지 못하면 평생 돌아오지도 말란 말이다.
평생 돌아오지 않는다면…….
귀비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지난번엔 뜻대로 안 됐다만, 이번엔…….
“노노(奴奴).”
귀비의 부름에 궁녀 하나가 옆에서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귀비가 손을 들자 귀비 가까이로 다가왔다. 귀비의 귓속말을 들은 궁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추운 겨울 섣달인지라 경성 근처의 강에도 얼음이 적잖이 얼었다. 겨울 낚시를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때였다.
강가에 있는 오두막에 일고여덟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나이대는 다양했고, 시종들은 옆에 시립해 있었다.
강가에서 갈채 소리가 들려왔다.
“고기가 잡혔나 보군.”
오두막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가에서 걸어오는 세 사람이 보였다. 그중 하나는 혈색이 좋아 보이는 고능준 통사였다.
“전에는 나도 낚시를 별로 안 좋아했어. 괜히 힘만 든다고. 근데 겨울 낚시는 의외로 잘되네.”
“통사 대인,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군가가 웃으며 손으로 강가를 가리켰다.
“겨울 낚시라고 해서 다 잘되는 건 아니지요.”
모두가 강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가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수확이 있는 이도 있고, 양손에 빈 이도 있었다.
고 통사는 이런 공손한 아부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았다. 상대가 잘 보이고 싶다는데, 굳이 고고한 시늉을 하며 무안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의 고 통사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찬모가 왔나 보군.”
한 사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서 열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몸종이 내렸다. 평범한 외모에 옷차림은 단정하고 깔끔했다. 모자가 달린 두봉을 걸치고 있었는데, 짙은 색상이었지만 테두리에 여우 털이 달려 있어 딱 봐도 값나가 보였다.
찬모는 여기저기서 모셔 가는 존재다 보니 수입이 쏠쏠했다. 금은을 둘렀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찬모 치고는 너무 어리지 않나?
“여기 반근 낭자는 회를 치는 솜씨가 끝내줍니다.”
누군가가 의혹을 해소시켜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반근?
근처에 있는 나무판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사람 하나가 그 이름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털모자 속에서 소년의 준수한 외모가 드러났다.
반근이 또 있어?
주씨 가문에 하나, 장씨 가문에 하나 아닌가. 아, 그렇지. 정씨 가문에 있던 그 애구나. 장씨 가문 노태야의 시녀와 바꾼 아이.
진십삼은 그 몸종이 고관대작 앞에서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예를 표하는 모습을 미소로 바라보았다. 몸종은 길게 말하지 않고 두봉부터 벗은 다음 소매를 동여맸다. 이어 고 통사가 잡은 고기를 받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 통사 등은 다시 오두막 안 화로 주변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생선회가 차려졌다. 청자 접시 위에 놓인 생선회는 매미의 날개처럼 얇으면서도 살이 탱탱했다. 고 통사가 고개를 절로 끄덕이며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이건 저희 집 특제 양념장이에요.”
반근이 작은 접시 하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 통사는 생선회를 한 점 집어 양념장을 찍은 후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생선회가 혀끝에서 사라지면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훌륭하군, 훌륭해. 훌륭하구나.”
고 통사는 훌륭하다는 말을 연거푸 세 번이나 했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이내 마음이 놓이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근데 양이 좀 부족할 것 같네.”
누군가가 농담을 던졌다.
“이 녀석이, 그럼 나가서 한 마리 잡아 오든가.”
고 통사가 웃으며 대꾸했다. 농담을 던진 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옆쪽에서 소년의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게 마침 고기가 있으니 대인들께 올리겠습니다.”
일제히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진 공자?”
누군가가 말했다. 진십삼이 이들을 향해 다시금 예를 표했다.
“십삼이 대인들을 뵈옵니다.”
고 통사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예를 거두라고 하며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물론 고 통사는 이 소년이 누군지 알았다. 사실 고씨 가문과 진씨 가문은 황친으로 친척 관계였으나, 두 가문 사이에 교류는 딱히 없었다.
“실은 제가 식탐이 많아서요. 고기를 올리고 한 첨 얻어먹을까 하고 왔습니다. 숙부님들과 백부님들께서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진십삼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랬군.
사람들은 대꾸하는 대신 고 통사를 쳐다봤다.
“식탐이 많으면 먹어야지. 남도 아니고. 뭘 고기까지 챙겨와.”
고 통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이들도 뒤늦게 따라 웃었다. 진십삼이 웃으며 시종에게 어롱을 건네자, 저쪽에 있던 반근이 받았다. 반근은 눈을 들어 진십삼을 힐끔 쳐다본 다음 고개를 숙이고 일하러 갔다.
진십삼은 웃어른들과 함께 자리하지 않고, 한쪽 옆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고 통사가 웃으며 학업에 대해 물었다.
“이제 다리도 좋아졌으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거라.”
고 통사가 웃어른으로서 따스한 관심을 표했다.
“네, 스승님을 모셔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3년 후엔 과거를 봐야죠. 오늘은 잠깐 짬을 내서 나온 겁니다.”
진십삼이 대답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생선회 한 접시가 또 올라왔다. 생선회를 조금 먹고 난 진십삼은 일어나 거듭 감사를 표한 후 물러갔다. 고 통사 등도 붙잡지 않고, 사환과 함께 돌아가는 진십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근도 작별 인사를 올렸다.
“에이, 얼마 먹지도 못했는데.”
다들 놀란 눈치였다.
사례금이 부족했나?
반근이 예를 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벌써 네 마리예요. 생선회가 맛있다고는 하나 많이 드시면 안 돼요. 비장과 위장을 상하기 쉽거든요.”
그렇단 말이지?
다들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반근은 긴말하지 않고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저 찬모의 말이면 거짓은 아닐 거야. 저 찬모가 장 노태야를 모시면서 양생에 좋은 보양식 준비에 얼마나 공을 쏟는지 몰라. 누군가는 저 찬모한테 차를 우리는 방법을 배워 마셨더니 지병으로 앓던 무릎 관절통이 싹 나았다지 뭔가.”
누군가가 말했다.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기에, 다들 금세 알아들었다. 하지만 고 통사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누구? 저게 누구네 집 찬모라고?”
고 통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장강주 댁입니다. 장 노태야의 전용 찬모라네요.”
설명하던 이가 대답했다.
장강주!
고 통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대인, 사실 지난번 일은 장강주가 우릴 도운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옆에 있던 이가 웃으며 말했다.
“왕보당이 죄를 받도록 도왔단 말인가?”
고 통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거나 진소 일당의 뜻대로 되진 않았잖습니까. 대인,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장강주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직도 싸우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싸움이 길어지면 연루되는 일과 사건도 늘어나기 마련이고요.”
또 다른 이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어쨌든 기반을 잃지 않게 됐으니.
고 통사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도 냉소를 지었다.
“그래도 날 돕기 위해서는 아니었네.”
그야 당연하지.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위하기 마련인걸.
“대인, 우리는 그자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남을 돕거나, 우리 일에 훼방만 놓지 않으면 족하지요. 그리고 이번에 장씨 가문으로 가서 찬모를 빌려 달라고 하면서 대인과 함께 놀러 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장씨 가문에서 두말없이 수락하더군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건 체면을 의미했다.
고 통사의 표정이 마침내 환해졌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고 통사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걷히지 않았다. 고 통사는 서재에서 식객들과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축하드립니다, 대인. 경하드립니다, 대인.”
식객들이 일제히 예를 표하자 고 통사는 혀를 찼다.
“어린애 하나가 음식 좀 얻어먹고, 찬모를 빌려 생선 좀 먹은 걸 가지고 축하하고 말 게 뭐 있다고. 왜들 이리 호들갑인가.”
“대인,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진 공자가 어디 음식이나 한입 얻어먹자고 왔겠습니까? 장씨 가문은 별 뜻 없이 찬모를 빌려줬고요? 대인,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십니다!”
“그게 아니면 뭔데?”
고 통사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야 당연히 황태자…….”
식객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고 통사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고 통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자코 있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과 희열은 감출 수 없었다.
그래, 황태자. 이제 폐하의 황태자가 될 사람은 하나밖에 안 남았어. 조정 사람들이 상황 파악을 할 때가 됐지.
“대인,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밖에서 고하는 소리에 고 통사는 움찔하며 안으로 들어오라 명했다. 귀비의 말을 전해 들은 고 통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허튼소리!”
고 통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왜 아둔하게 쓸데없는 짓을 벌여! 지금은 행여 구정물이라도 튈까 멀찌감치 서 있어야 할 때다. 예전이라면 손을 쓸 필요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냐. 개돼지만도 못하게 됐는데, 뭐하러 그런 데 신경을 써!”
창공을 나는 매는 자신과 동등한 상대나 자신보다 강한 상대만 바라본다. 개미 같은 존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법이다. 이제 그들은 하늘을 나는 매가 됐고, 경왕은 개미 같은 존재가 됐다.
운명이로다.
고 통사는 탁자를 손으로 쓸며 미소 지었다.
“어이구, 춥다!”
찬바람이 불자 군관은 손을 벅벅 비벼댔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서북은 얼음이 꽝꽝 어는 날씨가 됐다. 두꺼운 모피 장포도 뼛속으로 스미는 냉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이 든 군관이 이러할지니, 새파랗게 젊은 군관이 추위를 버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주 공자는 좀 어때? 춥지는 않고?”
나이 든 군관이 옆에 있는 말에 탄 주육낭을 쳐다보며 물었다.
경성에서 부유하고 안온한 생활을 하고 지내던 소년 공자는 서북의 찬바람에 시달리다 불과 달포 만에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툼한 두봉을 걸치고 커다란 털모자까지 쓰고 있는데도, 얼굴은 새빨갛게 터 있었다. 귀에는 동상 자국이 여기저기 보였다.
“춥습니다.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주육낭이 웃으며 대답하자, 나이 든 군관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곧 새해를 맞이하겠군. 그땐 우리 서북 지역도 아주 떠들썩할 거야.”
나이 든 군관이 말머리를 돌렸다.
“가자고.”
이들은 길에서 폭죽을 던지는 아이들을 지나쳐 곧장 관청으로 향했다.
주육낭은 곧장 자신의 거처로 갔다. 위병들이 미리 화로에 불을 지펴 놓았는데도 방 안 공기는 여전히 썰렁했다. 모자를 벗은 주육낭은 손을 비볐다가 얼굴과 귀에 갖다 대며 몸을 녹였다.
“관구(管勾: 관직명), 댁에서 온 물건입니다.”
밖에 있던 위병이 들어와 커다란 꾸러미를 건넸다.
주육낭이 물건을 내려놓고 나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몸이 좀 녹자 주육낭은 그제야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집에서 보낸 옷이며 신발, 버선 등일 것이다. 서찰도 한 통 들었을 테고.
주육낭은 부친과 모친, 아우들과 누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꾸러미를 펼쳐 보았다.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법이었다.
물건을 다 확인하기도 전에 위병이 또 들어왔다.
“관구, 여기 서찰이 한 통 더 있습니다.”
또 있다고? 가족이랑 같이 보낸 게 아니라면, 혹시…….
주육낭이 벌떡 일어나 쿵쾅대는 가슴으로 서찰을 받았다. 진십삼의 필체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녀석이 있었지.
주육낭은 빙긋 미소를 짓고 앉아서 서찰을 뜯어 보았다. 몇 줄 읽기도 전에 밖에서 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어 위병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관구, 산음채의 서무수가 알현을 청합니다.”
위병이 발을 걷고 들어와 말했다.
서무수?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서북으로 온 후부터는 군관과 병사라는 신분의 차도 있고, 묵는 군영도 다르다 보니 왕래가 전혀 없었다.
“들여보내라.”
주육낭이 서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서무수는 주육낭을 향해 예를 표했다. 두 사람이 잠시 침묵을 지키면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걸 대인께…….”
서무수가 먼저 입을 열며 자기로 된 연고통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데?”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동상 치료와 예방에 좋은 약입니다. 살에 바르면 좋을 겁니다. 누이…… 아, 아니, 정 낭자가 보내 주었습니다.”
정 낭자…….
주육낭은 등에 벌레가 기어가기라도 한 듯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 난 이런 거 안 써.”
서무수는 자기로 된 연고통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두말없이 뒤돌아 나갔다.
“어이.”
주육낭이 불렀다.
“이거 가져가. 누가 이런 거 달라나.”
입으로는 소리를 지르면서도 주육낭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를 내며 연고통을 집어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주육낭은 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연고통에 시선을 두었다.
동상 치료와 예방에 좋은 연고라.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리던 주육낭은 얼른 웃음을 거두었다.
무슨 짓이야, 뭘 웃어? 이게 뭐 좋다고!
주육낭은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세라 겁난다는 듯 잠시 옆으로 비켜서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연고통 쪽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고 싶지만 손이 나가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 연고통을 들여다봤다. 그게 무슨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물건이라도 된다는 듯이.
동상을 치료하고 예방한다? 흥, 그런 건 여인들이나 챙기지.
주육낭의 입이 벌어지며 다시 웃음이 나왔다. 꾹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어 고통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같은 시각 서무수도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형님, 그 녀석한테 뭐하러 나눠 줍니까. 누이가 그 녀석 주라고 한 것도 아닌데.”
굳은 얼굴의 서봉추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살면서 이렇게 만난 것만 해도 인연이야. 그리고 꽤 괜찮은 녀석이잖아. 곧 새해인데 같이 즐거우면 좋지. 험난한 세상, 즐겁게 살자고.”
무슨 괴상한 논리야.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네.
서봉추가 인상을 썼다.
“즐겁고 안 즐거운 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형님이 형님 약 덜어 준 거니까, 내 거 쓸 생각은 접으시오.”
서무수는 웃음을 터트리며 서봉추를 걷어찼다.
“어서 가자. 얼른 가서 새해를 맞이해야지.”
한편 황궁에서는 새해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쉭쉭 부는 바람 소리에 음침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한층 짙어졌다.
급히 귀비전으로 향하는 고 통사의 얼굴 역시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무슨 일입니까? 이런 때에 왜 이리 철없게 구십니까?”
고 통사는 예도 갖추지 않은 채 목소리를 낮춰 불평을 토로했다. 귀비는 고 통사의 언짢은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좌우를 살피더니 바짝 다가왔다.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때예요.”
“또 뭔데요?”
“진안 군왕이 글쎄 어느 의원을 찾으러 갔는지 알아요?”
고 통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고 그놈의 큰일이라는 게 뭔지 기대도 안 했지.
“어느 의원을 찾아갔는지 뭔 상관입니까. 신선이라도 찾아갔으면 몰라도.”
“진짜 신선을 찾아갔어요.”
귀비는 다급한 투였지만, 고 통사는 이마를 짚었다.
“마마, 하시고 싶은 말씀이 대체 뭡니까?”
“경왕을 진짜로 고치면 어쩌죠?”
귀비가 걱정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데도, 고 통사는 실소를 터트렸다.
“웃지 마요.”
귀비는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신의는 진짜 고칠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진소 부친을 봐요. 금석을 먹었던 동 내한도…….”
저잣거리에 도는 풍문은 고 통사도 물론 알고 있었다.
“만 관에 목숨을 고쳐 준다는 그 신의요?”
고 통사가 멈칫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요, 만에 하나…….”
진안 군왕이 고의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의원을 찾아간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이 의원을 찾아가겠다더니, 돌연 떠나 버렸다. 대체 어느 의원을 찾으러 간 건지 귀비가 알아냈을 무렵, 진안 군왕은 벌써 떠난 지 오래였다.
그 녀석이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 대비한 거지. 아니라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어!
“그냥 무당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얘길 들어보니 의원은 아니라던데. 병을 고치는 비술이 있다 한들, 그리 대단한 자는 아닐 겁니다. 그러니 몇 사람을 고친 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죠.”
고 통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죠. 만에 하나 이번에도 고치면요?”
“만에 하나요? 만에 하나 고치더라도, 한 번 다쳤던 몸입니다. 대황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치면 안 된다고요!”
귀비가 소리를 빽 지르며 말을 끊었다. 고 통사가 눈을 부릅뜨고 굳은 얼굴로 귀비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 소문이, 모함이 아니라 근거 있는 얘기였습니까?”
귀비가 눈을 껌뻑이며 고 통사를 쳐다봤다.
“아니에요. 아, 그, 그래요. 그 애도 참, 어쩌다 그런 일을 벌인 건지…….”
귀비가 말을 이었다.
“행여 깨어나서 허튼소리라도 지껄일까 걱정이에요. 명심해요. 이건 절호의 기회라고요. 대인도 지금 의심하고 있잖아요. 황후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고 통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그 의원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고 통사가 탁자를 짚고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물었다.
“뭘 하겠다고?”
놀란 표정의 진 시강이 앞에 앉아 있는 진십삼을 보며 물었다. 진 시강은 자기 집인데도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군왕이 경왕을 모시고 병을 치료하러 가는 걸 막아? 네가 제정신이냐?”
경왕의 일에 대해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진안 군왕이 경왕과 함께 밖으로 의원을 찾으러 나간다는 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안 군왕의 행동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고, 황제도 동의했다.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피와 우애를 나눈 육친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이런 때에 나서서 막는 자가 있다면, 그자야말로 인륜을 저버리고 도의를 모르는 작자라 할 것이다. 세간에서 욕을 먹는 건 물론이거니와 목숨을 잃는다 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정 낭자는 신의로 얻은 명성을 간신히 잠재운 상황입니다. 이번에 병을 고치게 되면 낭자의 뜻대로 안 되잖아요.”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지만 진 시강은 전혀 웃긴 얘기가 아니라는 듯 무거운 표정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야 당연히 알죠. 모든 일은 양면성을 가지지 않습니까.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일을 누군가는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법…….”
탁 하는 소리가 진십삼의 말을 끊었다. 어두운 표정의 진 시강이 손으로 탁자를 내리친 터였다.
“십삼, 너무 공연한 생각을 하는구나.”
진십삼이 빙긋 웃었다.
“압니다, 알아요. 이게 제 첫 번째 반응이었습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종종 비현실적이고 충동적이죠.”
진 시강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십삼, 너도 네가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거다. 명심해라.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야. 특히 그런 대역무도한 일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이 남의 마음을 추측하여 넘겨짚는 건 금물임을 명심해라.”
진 시강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군자는 마음이 평온하고 너그러우며, 소인은 마음이 항상 근심으로 조마조마하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 <논어>)고 했느니라. 저만 잘났다고 잔머리를 굴리는 일을 대도(大道)라 할 수는 없지!”
진십삼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진 시강은 진십삼을 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네 두 번째 반응은 무엇이더냐?”
“정 낭자한테 서찰을 쓸까 합니다. 요즘 경성에서 일어난 새로운 일을 전해 주려고요.”
그 말에 진 시강은 잠자코 아들을 쳐다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정 낭자라는 이를 직접 본 적은 없다만, 그동안의 일들을 보면 그 낭자는 너와 완전히 다르더구나.”
진십삼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부친을 쳐다보았다. 당시에는 부친 몰래 한 일이었지만, 그 일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점을 잘 아는 진십삼이었기에 부친이 정교랑에 대해 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는 않았다. 놀라운 건 부친의 평가였다.
정 낭자는 나와 완전히 다르다고? 어째서 다르단 말이지? 우린 분명 같아. 둘 다 몸이 안 좋았고, 둘 다 똑똑한데.
무릎 위에 올려둔 진십삼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실 대단한 의미가 있는 말도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은 본디 다르니까. 그런데도 진십삼은 속이 편치 않았다.
다르다는 그 말이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처럼 느껴졌다. 둘은 결코 섞일 수 없다는 듯이.
“아버지.”
진십삼은 서둘러 입을 열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입을 열고 싶을 뿐이었다. 뭐라도 말하려고. 그래야만 부친의 말을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정 낭자는 어떻게 장강주를 설득했을까?”
진 시강은 진십삼의 말을 듣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그 낭자가 정도(正道)였기 때문이다. 고 통사와 진 상공이 음으로 양으로 무슨 수작을 벌이든, 장강주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무슨 계산을 따져봤든 상관없었어. 정 낭자는 자신의 사심을 정당하고 떳떳하게 꺼내 보여 주었지. 가리거나 숨기지 않고, 어떤 음모도 없이 말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겠느냐. 사악함은 올바름을 이길 수 없다(邪不勝正) 생각하고, 정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대도(大道)니라.”
진십삼은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있었다.
그래, 맞아. 낭자는 그런 사람이었지. 가리거나 숨기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며 올곧게 걸어가는 사람이었어.
“그 낭자에 대해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존경할 만해.”
진 시강이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옷소매를 털었다. 진십삼은 그런 아버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 있던 진 노태야를 금침으로 사흘 만에 일어나 앉게 하고, 숨이 끊어졌던 동 내한을 술과 안주를 약 삼아 하룻밤 사이에 회생시켰다.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진 시강의 물음에 진십삼이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괴력난신을 떠올렸습니다.”
“너도 그러할진대, 저잣거리의 평범한 이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신기와 같은 비술을 가졌으면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떼돈을 벌 만도 한데, 정 낭자는 거기서 과감하게 멈추고, 그 명성이 잊혀지도록 조용히 지냈다.”
“아버지, 그게 옳은 일입니다. 괜히 귀신이니 뭐니 하는 말이 돌아 태평도(太平道: 후한 말기에 생겨난 도교 교단)나 미륵교처럼 신도들이 생겨나면, 결국 조정에서 칼을 빼지 않겠습니까.”
진십삼이 말했다.
“그런 세상사의 이치를 꿰뚫어보긴 쉽지만, 막상 그 당사자가 되었을 때 그만두고 물러나기란 그리 쉽지 않아. 흐드러지게 핀 꽃은 사람을 홀리기 마련이지.”
거기까지 말한 진 시강이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십삼, 그리 이치에 통달하고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인데, 네가 굳이 귀띔할 필요 있겠느냐?”
진십삼이 멈칫했다.
“아들아, 관심이 지나치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진 시강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관심이 지나쳐 마음이 어지러워졌다니…….
부친이 이런 농담을 건넨 건 처음이었기에, 진십삼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됐다.
“정말 잊었나 보군. 병을 고치지 않는 세 원칙 말이다.”
진시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세 손가락을 내밀었다.
방문 진료를 하지 않고, 죽을병이 아니면 고치지 않으며, 병을 고쳐 준 집안과 혼인하지 않는다.
속으로 원칙들을 되뇌던 진십삼은 순간 멈칫했다.
죽을병이 아니면 고치지 않는다!
“그래서, 원칙이라는 게 좋은 거다.”
진 시강이 다시 서책을 들으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경왕의 병이 낫는 걸 원치 않으시는…….”
잠시 침묵하던 진십삼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서책을 쥐고 있던 진 시강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원하고 원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해.”
진십삼은 네 하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가로 걸어가던 진십삼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만약, 원칙은 원칙일 뿐이고, 정 낭자가 고칠 수 있다면요?”
어쨌거나 바보의 병을 고친 예가 생생하게 있지 않은가. 그런 낭자가 못 고친다고 하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자신과 부친조차도 못 믿지 않는가. 그들은 그 원칙이 좋은 원칙이라는 걸 믿을 뿐이었다.
“그건 그 낭자의 선택에 달렸지.”
진 시강이 아들을 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귀띔을 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진십삼은 알았다고 하며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이 훅 불어오자, 회랑을 걷던 진십삼이 걸음을 멈췄다.
“그건 낭자 본인의 선택이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거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진십삼은 웃으며 혼잣말을 하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같은 시각, 준마 여러 마리가 경성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각기 다른 성문에서 나왔지만 전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깊은 밤, 곁채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반근은 옷을 걸치고 앉아 손에 든 서찰 한 통을 쳐다봤다. 탁자 위에도 서찰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어두컴컴한 등이 반근의 얼굴을 비췄다. 다소 창백한 얼굴이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개 짖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리는가 싶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반근은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옷깃을 꽉 잡았다. 귀를 기울여 보니, 발걸음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누구냐?”
대문 밖에서 야간 당직을 서던 시종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역시 누가 왔어!
반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 밖에서는 더 이상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군가가 곁채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조 집사.”
반근이 문을 열자, 등롱 아래에 서 있는 조귀의 모습이 보였다. 조귀가 무거운 표정으로 반근을 향해 손짓했다. 반근은 얼른 문을 닫고 나와 마당 한쪽 옆으로 갔다.
“또 한 통이…….”
반근은 조 집사가 건네는 서찰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어느 집이에요?”
반근이 물었다.
“이번에도 주씨 가문이래.”
조 집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룻밤 사이에 네 통이라니, 주씨 가문이 방패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네.
별수 없는 일이었다. 당초 경성을 떠날 때 주 노야가 했던 말처럼, 이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주씨 가문은 평생 정교랑과 같은 배에 탄 것과 마찬가지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은 가족과 떨어질 수 없었다.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일이 생기면, 그 가족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 낭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주씨 가문도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주씨 가문은 가장 좋은 표적이자, 맨 앞에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방패였다.
“경성에 일이 났나 보다.”
“아씨를 깨울까요?”
조 집사의 말에 반근이 물었다. 조 집사는 한숨을 내쉬고 손에 든 서찰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깨우자.”
서찰 네 통을 금세 읽은 정교랑은 알았다고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근과 조 집사는 정교랑을 보며 지시를 기다렸지만, 정교랑은 다시 자러 가려는 듯했다.
“아씨, 무슨 일인데요? 중요한 일이에요?”
하는 수 없이 반근이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반근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이 서찰들엔 요즘 경성에서 일어난 새로운 소식들이 담겼어. 내 안부도 물었고. 그다지 중요한 건 없어.”
경성의 새로운 소식이라…….
조 집사는 짚이는 게 있었다. 예상대로 뭔가 일이 났음을 알리는 서찰이었다. 아마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하룻밤 새에 서찰이 네 통이나 왔다. 그것도 각기 다른 곳에서 전부 주씨 가문의 이름을 빌려 보낸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어쨌거나 아씨한테 경계하라는 귀띔을 한 셈이니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반근은 조 집사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안도했다.
아씨께서 별일 아니라고 하시니 별일 아니겠지.
“그럼 아씨, 내일 그대로 출발할까요?”
반근이 물었다.
“물론이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정교랑은 전에 얘기한 대로 양주로 가는 채비를 시작했다.
경성에서 보내온 새해 선물과 점포 배당금으로, 먼 길을 떠나기에 충분한 돈과 식량이 마련됐다. 반근 역시 정씨 가문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다들 이곳 사람이 아니니 새해 명절이라 해도 조상 앞에 제를 올리거나 하는 일은 챙기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다들 새해 명절 준비로 바쁜 이때, 이들은 먼 길을 떠날 채비에 여념이 없었다.
요 며칠 마차와 말까지 준비를 마쳤고, 내일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씨, 그럼 쉬세요.”
반근과 조 집사가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촛불의 불을 끄고 문을 닫자 어둠과 함께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반근은 다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동녘이 밝아오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러 나갔다. 날이 조금씩 밝을 무렵, 대문 밖에서 또다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나 싶더니 대문 밖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멈춰라. 누굴 찾아왔느냐?”
소란 속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경성에서 왔다. 정 낭자를 뵙고자 한다.”
또 경성에서 사람이 와? 이번에도 서찰을 보낸 건가?
반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두모까지 쓴 사내가 서 있었다. 주씨 가문 시종들이 누군지 물으며 두모를 벗기자 소년의 용모가 드러났다.
문 여는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소년 역시 새벽빛을 받고 선 반근을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 고, 공자셨군요!”
반근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날 알아보는 이가 있네. 정말 다행이야.”
소년은 기쁨이 감춰지지 않는 눈으로 씩 웃었다.
알아보다마다. 이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아씨께서 아직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셨을지도 모르는걸.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공자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
반근이 물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소년을 볼 수 없었다. 이따금 생각이 날 때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 같기도 하고, 모든 게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나타날 줄이야.
소년은 반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차에 짐을 싣느라 분주한 주씨 가문 시종들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어디, 가려고?”
질문을 던지는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햇빛을 받으며 선 소년의 웃음이 갑자기 서늘해지는 것 같아 반근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네, 막 출발하려던 참이에요.”
소년은 아, 하며 대꾸했다. 얼굴의 웃음기는 더욱 진해졌지만, 눈빛은 침울해 보였다.
“그렇구나. 정말 딱 맞춰 왔네.”
소년이 천천히 말했다.
딱 맞춰 왔다고? 이게 딱 맞춰 온 건가?
공자가 막 도착했을 때, 이들은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못 만났을 것이다. 근데 이게 딱 맞춰 온 거라고?
아, 하긴. 딱 맞춰 온 것도 맞네. 한발만 늦었으면 못 만났을 테니까.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반근이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는 반근을 쳐다보았다.
“반근, 아씨께서 마차 두 대를 줄이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거라고…….”
저쪽에서 걸어오며 말하던 조 집사는 대문 앞에 선 소년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가, 상대를 알아보고 더욱 놀랐다.
“아니, 너, 너, 너는 그……···.”
그날 밤 산골짜기, 늑대의 울음소리,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있던 그 불량한 소년이 아닌가.
“늑대 떼를 몰고 온 그 녀석 아니냐?”
조 집사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맞소. 납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늑대 떼를 몰고 온 그 녀석입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 또 그러고 있네요.”
뭐라고?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 또 그런다는 게 무슨 말이야? 또 뭐가? 또 늑대 떼를 몰고 왔다고?
조 집사가 뭐라 더 묻기도 전에 안에서 반근이 나왔다.
“공자님, 안으로 드세요.”
반근이 웃으며 길을 비켜섰다. 진안 군왕은 곧장 걸음을 옮기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어 대문 안을 쳐다보았다. 마당은 아주 작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곧장 안채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작았다. 따라서 대문을 열자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짙은 색상의 치마를 입고, 커다란 검은색 두봉을 걸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오목조목한 얼굴, 새까만 두 눈과 담담한 표정이 보였다.
언제 보든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두봉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진안 군왕은 그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휘잉 부는 밤바람에 화르르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작고 여윈 체구에도 정해신침(定海神針: 중국 황룡 동굴 내 가장 긴 종유석)처럼 우뚝 서 있으면서, 주변의 비명 소리와 늑대 울음소리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저놈들의, 코를, 태워.”
여인이 횃불을 들고 말했다. 침착하고, 태연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저놈들의 코를 태워라! 저놈들의 코를 태워! 저놈들의 약점을 태워 버리란 말이다!
진안 군왕은 심호흡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반근이 따라 들어가려는데, 조 집사가 뒤에서 붙잡았다.
“저 녀석은 뭐 하러 온 거야?”
조 집사의 물음에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일정이 지체되면 안 되는데.”
조 집사는 의혹의 눈길로 안쪽을 쳐다보았다. 왠지 불안한 기분이었다.
진안 군왕이 자리에 앉자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올린 후, 한쪽 옆으로 물러났다.
“일정이 지체되는 건 아니겠죠?”
진안 군왕이 가장 먼저 꺼낸 말에 반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힐끔 쳐다봤다. 정교랑은 살짝 답례를 전할 뿐 잠자코 있었다.
진안 군왕은 빙긋 웃더니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반근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 잔만 더 다오. 간식이 있으면 그것도 좀 주고.”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뭐지, 밥을 안 먹은 건가?
소년을 보던 반근은 그제야 시뻘건 실핏줄이 보이는 눈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봤다.
밤새 길을 재촉했나?
반근은 얼른 대답하고 일어나 나갔다. 마당에 서 있던 조 집사는 반근이 부엌으로 들어가 차와 떡 등을 분주하게 준비해 나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또 뭘 먹겠대?”
조 집사가 목소리를 낮춰 물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시간이 꽤 됐는데.”
반근은 도리어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뭘 그리 초조해하세요?”
조 집사는 그 질문에 멈칫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방 안을 쳐다보았다.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것 같아서.”
조 집사가 중얼거렸다.
진안 군왕은 손으로 간식을 집어 곧바로 입에 넣었다.
“뜨거워요.”
반근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진안 군왕은 입을 가리고 스스, 하며 찬바람을 넣어 식히고는 옆에 있던 차를 들어 마셨다.
“결례를 보였습니다.”
진안 군왕이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교랑은 잠자코 미소를 지으며 물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간식과 차를 먹고 나자 소년의 얼굴에 한층 생기가 돌았다. 소년은 정신이 좀 드는지 방 안을 살폈다. 이미 짐 정리를 마친 후라 텅 비어 보이는 방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낭자가 불편할까 걱정이네요.”
소년은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날 불편하게 할 순 없어요.”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날 불편하게 할 순 없어요.
무심한 표정,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 왜소하고 허약한 신체.
작디작은 이 여인은 늘 그랬다. 진안 군왕은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사실 이들이 만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만나서 대화까지 나눈 일은 더욱 적었다. 그래서 진안 군왕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도, 낭자가 날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구해 줄 필요가 없는데, 어떻게 구할 수 있겠어요.”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은 어리둥절했다. 귓가에 또 다른 반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 아휴, 저 두 사람은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반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방백종이라 합니다.”
빙긋 웃던 진안 군왕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건 부왕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고…….”
뭐라고? 부왕?
반근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당에 있던 조 집사는 기다리다 못하고 이쪽 회랑으로 걸어와 반근에게 손짓했다. 그러다 보니 조 집사도 안에서 들리는 소년의 말을 듣게 됐다.
“이름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폐하께서 지어 주신 겁니다. 지금 불리는 이름이기도 하고요. 내 이름은 방위(方瑋)고, 봉호는 진안입니다.”
조 집사는 숨이 넘어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반근에게 손짓을 하려고 내밀었던 손으로 그저 방 안을 가리킬 뿐이었다.
성은 방씨! 봉호는 진안!
천하에 방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많고 많았지만, 봉작을 받을 수 있는 가문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방씨 황족이었다.
진안 군왕…… 진안 군왕!
그럼 저 사람이!
경성! 경성!
조 집사의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럼 경성에서 온 서찰들에 담긴 소식이 저자에 관한 것이었겠군.
진안 군왕은 놀란 조 집사와 반근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앞의 여인을 봤다. 예상대로 여인은 별로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누가 말해 줬나 보군요.”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신분 말인가요? 당신이 말해 줬잖아요.”
“내가요?”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차요.”
차라면…….
진안 군왕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황궁의 차를 선물한 적은 있지만, 그게 황궁의 차라고 말하진 않았다. 어디선가 마셔 봤거나, 누가 말한 게 아니라면. 어디선가…… 황궁으로 진상하는 차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게 아닌데.
“천가의 꽃등 놀이!”
진안 군왕이 눈썹을 꿈틀이고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은 미소를 지으며 정답을 맞힌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여기 온 이유를 생각해 보면,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치료를 받으러 왔어요.”
문가에 있던 반근은 이제 더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전에도 둘의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종잡을 수 없어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군왕! 황실 사람! 치료!
이 셋 사이에 대체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거야?
정교랑은 뜻밖이라는 눈치였다.
“나는 아니고요. 난 먼저 왔고, 병자는 뒤에 오고 있어요. 낭자의 원칙을 알기에, 병자를 데리고 직접 찾아온 겁니다.”
반근은 이미 생각하기를 포기한 상태인지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하지만 조 집사는 여전히 생각 중이었다. 원칙. 황실 사람도 아씨의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 집사는 우쭐한 기분이 들거나 흥분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누군가가 내 원칙을 존중해 준다는 건 물론 기쁜 일이지만,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남에게 예를 지키는 건 바라는 바가 있어서라고. 그러니 오기(吳起) 장군이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직접 빨아 주었을 때, 병사의 노모가 대성통곡을 한 것이리라.
“좋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씩 웃고,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저들은 걸음이 느려 뒤처졌고, 나만 먼저 온 겁니다. 낭자를 만나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럼 가서 저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정교랑도 배웅을 위해 일어났다. 진안 군왕은 기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문가에 있던 반근과 조 집사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함께 배웅했다.
대문을 나서려던 진안 군왕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아, 참.”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회랑 아래에 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떠나려고 했어요?”
진안 군왕이 대문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나 때문에 지체되는 건 아니죠?”
저 말은 물어본 거 아니었나?
반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소년을 쳐다보았다.
왜 또 묻는 거지?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나지 않겠단 건가?
정교랑이 소년을 보며 웃었다.
“지체된다고 볼 순 없죠. 그동안 준비하느라 떠나지 않고 있었어요. 먼 곳으로 갈 생각이거든요. 그래서 준비 기간이 좀 길었고, 이제 준비를 끝냈어요. 하루 일찍 떠나나 늦게 떠나나 똑같아요.”
“일이 정말 딱 맞춘 것 같네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교랑을 보며 웃는 진안 군왕의 모습은 새벽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걸 왜 묻는 거죠? 벌써 몇 번을 물었잖아요.”
반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난 저걸 왜 묻는지 알고 싶지 않구나. 난 그저 우리가 늦지 않게 떠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야.”
조 집사가 중얼거렸다.
정씨 저택에서는 정교랑 쪽에 생긴 일을 전혀 몰랐다. 수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어찌 됐든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정 이부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두어 번 했다. 토시에서 손을 빼자 더욱 한기가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이냐? 다들 죽은 게야?”
정 이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문밖에 있던 두 여종이 얼른 들어왔다.
“왜 이리 추워? 화로에 불이 꺼져도 안 들여다보지?”
정 이부인이 소리쳤다. 두 여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쭈뼛쭈뼛 대답했다.
“부인, 안 꺼졌는데요.”
“안 꺼졌는데 이리 추워?”
“부인, 요즘에 산 석탄은 질이 안 좋아서요.”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멈칫했던 정 이부인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살기 싫으면 아예 살지를 말든가.”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고 입는 거로 분풀이를 하다니, 그러고도 무슨 음덕을 쌓아!”
정 이부인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자기가 저지른 업보에 온 가족이 피해를 보고 있는데, 그러고도 염불을 외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이런 욕을 퍼부어 대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마당에 있던 여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못 들은 척했다.
“어머니!”
정칠랑이 안에서 나오며 소리치자, 정 이부인이 말을 멈췄다.
“칠랑, 새해가 되면 외조모님 댁에 가서 며칠 지내다 오거라.”
“싫어요.”
정칠랑이 정 이부인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내 집을 두고, 왜 남의 집에 가요?”
“요즘 집이 어수선하잖니. 거기 가서 조용히 지내는 게 좋아.”
정 이부인이 인상을 쓰며 다독였다.
“내 집은 여기예요. 다른 곳은 내 집이 아니라고요. 아무리 좋아도 내 집은 아니잖아요!”
정칠랑은 굳은 얼굴로 빽 소리를 지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 이부인이 소리쳤지만, 정칠랑의 걸음을 붙잡을 순 없었다.
우다다 뛰어나간 정칠랑은 곧장 정 대부인의 마당으로 갔다. 하지만 정칠랑은 마당 문 밖에서 걸음을 멈췄다.
예전엔 이맘때면 집 안이 늘 떠들썩했다. 여종들은 새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새해 선물이 오갔다. 형제자매들도 한곳에 모여 떠들썩한 명절 분위기를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세밑 분위기는커녕 사람이라고는 없어 썰렁하기만 할 뿐이었다.
정칠랑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에서는 약 냄새가 났다. 여종 둘은 무언가를 씻고 있었고, 대청의 문이 열려 있어 그 안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정 대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 돈은 건드리면 안 되는데…….”
정 대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부인, 점포에 빚이 너무 많습니다. 물건을 대는 업주들도 독촉이 심하고요.”
집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뭘 하려고?”
정 대부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방 안에서 정 대노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대부인은 집사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님과 육랑을 고모님네서 모셔 오려고요. 그러려면 방을 좀 손봐야 해서요.”
방 안에 있던 정 대노야에게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정 대부인이 집사를 향해 손을 내젓자, 집사는 난감해하면서도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 장부를 챙겨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개를 들던 정 대부인은 마당에 있던 정칠랑을 그제야 발견했다. 정 대부인은 흠칫 놀라나 싶더니 금세 무표정해졌다.
예전이었다면 정칠랑은 벌써 쪼르르 안으로 들어가 정 대부인 옆에 앉아 백모님을 불러대며 과일 절임을 먹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 정 대부인도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테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네. 백모님 얼굴에서 그런 자애로운 미소가 사라진 게 언제부터였지?
“칠랑, 육랑을 보러 왔니? 아직 안 왔으니 다른 데 가서 놀거라.”
정 대부인이 냉담하게 말했다. 정칠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백모님, 하고 불렀지만 정 대부인은 못 들은 척했다.
“노야께서 약 드실 시간이다. 약은 아직이더냐?”
정 대부인이 밖에 대고 소리치자, 여종이 얼른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마저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는 정칠랑만 덩그러니 남았다. 정칠랑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입을 삐죽거리고는 뒤돌아 다시 뛰어갔다.
“아씨, 어디 가시려고요?”
정칠랑을 따라왔던 여종들이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정칠랑을 향해 외쳤다. 정칠랑은 들은 체 만 체하며 대문 밖으로 달려갔다.
“어딜 나가세요!”
여종들이 소리를 지르며 얼른 뒤따라갔다.
집 밖으로 나오니 바깥 분위기는 떠들썩했다. 오래된 골목에는 폭죽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가 가득했다. 소란스러웠지만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고 정신 사납게 만드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활기차고 생생한 느낌이었다.
정칠랑은 뭍으로 나와 있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이런 기분을 집에서 느끼지 않고 밖에서 느끼다니, 그것도 이런 남정 골목에서! 진짜 웃기지도 않아!
웃고 장난치던 아이들은 정칠랑의 등장에 동작을 멈추었다. 정칠랑 역시 그들을 쳐다보았다. 꾀죄죄한 옷차림에 손이며 얼굴이 지저분한 아이들인데 다들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왜 웃는 거지? 내가 웃겨?
“꺼져!”
정칠랑이 소리치며 소매를 걷고 앞으로 달려갔다. 정칠랑은 정교랑의 대문 앞에서 걸음이 막혔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정칠랑의 눈에 들어왔다. 그 여인은 정중앙에 앉아 있고, 모두가 공손한 태도로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부님과 백모님이 말씀하실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대문 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쳐다봤다.
“아씨,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계가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들이 물러났다. 조 집사가 손을 내젓자 정칠랑을 막고 있던 시종이 비켜섰다.
“정교랑!”
정칠랑은 이를 악물고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정칠랑을 쫓아왔던 여종들은 뒤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정칠랑의 말에 기겁을 했다.
“아씨, 무례하게 굴지 마세요. 언니라고 부르셔야죠.”
여종들은 정칠랑에게 나지막이 주의를 주고는 정교랑을 향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니는 무슨!”
정칠랑이 여종들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널 언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어. 너한테 언니라고 부르려면 널 언니로 여겨야 하잖아. 널 언니로 여긴단 말을 믿는다면 그거야말로 바보지!”
여종들은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방 안에 앉아 있던 정교랑은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야. 역시 어린애는 솔직하다니까.”
“아씨, 아씨까지 똑같이 굴지 마세요.”
여종들은 정교랑에게 사죄하며 얼른 정칠랑을 데려가려고 했다.
“정교랑, 넌 바보야. 우린 널 좋아하지 않아. 우린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너 우릴 해치러 왔지?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는 건 네 잘못이야. 그러게 누가 바보로 태어나래? 그러게 누가 사랑을 못 받으래? 그건 네 잘못이야. 근데 왜 우리한테 화풀이냐고!”
정칠랑이 발버둥을 치며 악을 쓰자, 여종들은 다짜고짜 손을 뻗어 정칠랑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
정교랑이 일어서며 말했다.
활을 쏘려는 거야! 사람을 죽이려고!
여종들은 놀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씨…….”
여종들이 소리치며 무릎을 꿇었다.
“이리 와.”
정교랑이 정칠랑을 향해 손짓했다. 여종들이 사죄를 올리는 틈에 몸을 빼낸 정칠랑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난 너 안 무서워!”
정칠랑이 소리쳤다.
“네가 날 무서워하고 안 무서워하고는, 너의 일이야. 나와는 상관없어. 신경도 안 쓰고. 너희가 날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 역시 너희의 일이야. 나와는 상관없고 신경 쓰지도 않아.”
정칠랑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너희가 날 싫어하는 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고 너희의 잘못도 아니고.”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정칠랑은 굳은 얼굴로 고집스레 정교랑을 쳐다봤다.
“싫어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남을 괴롭히는 것도 잘못이라 할 순 없지. 세상이 원래 그렇거든.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이에겐 잘해 주고, 좋아하지 않는 이에겐 못되게 구니까. 그건 인간의 본성이니 비난할 것도 없어.”
정교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못이 있다면, 사람을 볼 줄 모르는 게 잘못이겠지.”
정교랑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를 괴롭힐 거면 상대를 제대로 봐야 해.”
정칠랑은 분노조차 잊은 듯 눈앞의 여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슨 소릴 하는지 왜 못 알아듣겠지? 지금 대체 누가 바보야?
“또 뭐라고 하더냐?”
손으로 침상을 짚으며 일어나 앉으려던 정 대노야는 기력이 달려 도로 누웠다. 격렬한 기침이 나왔다.
“입 다물거라. 넌 왜 이렇게 철이 없어?”
정 대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정칠랑을 밀쳤다. 바닥에 꿇어앉은 정칠랑은 정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백모님이 날 밀치셨어. 저 냉담한 표정에 슬퍼하는 게 당연한데, 난 왜 슬픈 마음이 별로 안 들까?
싫어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이에겐 잘해 주고, 좋아하지 않는 이에겐 못되게 굴거든.
“말하게 두시오.”
정 대노야가 정칠랑에게 물었다.
“또 뭐라고 하던?”
“앞으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지 확실히 알아보래요. 자신보다 약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지만, 자신보다 강하면 싫어한다는 걸 숨기고 절대 들키지 말래요. 괴롭히는 건 더더욱 안 되고요. 안 그럼 대가를 치러야 한대요.”
정칠랑의 말에 정 대노야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런 대가를 치르는 건 자업자득이란 말이구나.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나 탓해라?”
물론 정칠랑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정칠랑의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 정교랑의 말을 기억했다가 집에 돌아와 전달한 것만 해도 장한 일이었다.
정 대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정 대노야에게 그만 얘기하라고 했다.
“우리 집에 그런 애 없었던 거로 쳐요. 노야, 노여워할 것 없어요.”
“노야, 노야.”
그때 문밖에서 집사의 소리가 들렸다. 집사는 들어오라는 말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관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관부에서 또 사람이 와?
“새해맞이도 제대로 못 하게 하려고? 기어이 내가 관아 앞에 가서 머리를 박고 죽어야 관두겠다더냐?”
정 대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요, 아닙니다, 부인. 판결 결과가 나왔습니다.”
집사가 말했다.
판결이 났다고?
정 대노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 대부인 역시 정 대노야를 돌볼 새도 없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정말이냐?”
관부에서 벌써 재판 결과가 나왔다고? 우리 정씨 가문을 들볶아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
“네, 혼수를 정 낭자한테 주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집사가 신이 나서 말했다.
혼수를 정 낭자한테 주라고…….
정 대노야가 집사를 쳐다봤다. 이런 소식에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날이 올 거라고는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기뻐하는 집사의 웃음과 안도하는 정 대부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서글픈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래, 그래, 그렇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서 집안의 재물을 잃고 형제가 갈라서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구나.
그래, 그래, 그렇지.
이게 그 대가로구나. 인정하마!
정 대노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침상에 도로 누웠다. 눈을 뜰 기력조차 남지 않은 듯 가만히 손을 들어 정 대부인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피곤하구려. 쉬어야겠소.”
정 대노야가 중얼거렸다.
한편 그 소식에 기뻐하는 이는 또 있었다. 정 이부인이었다.
“판결이 나왔다고?”
사실 진작 예상했던 일이었다. 혼수를 누구에게 주느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판결이 나오는 시기가 문제였을 뿐. 판결이 일찍 나온 걸 보면 어쨌든 정교랑이 정씨 가문을 봐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종이 어색하게 웃었다.
“잘됐구나. 연말에 이런 판결이 나왔으니, 두 발 쭉 뻗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겠어.”
신이 난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어서 가자. 교랑을 보러 가야겠다. 그 많은 점포의 장부를 받아 관리해야 할 텐데, 교랑 혼자서는 힘들지.”
그러니 계모인 내가 최선을 다해 도울 거야. 혼수를 넘겨받아야지. 이건 엄연히 우리 거야. 다시는 대방에서 눈독 들이지 못하게 해야 해.
정 이부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남정으로 왔다. 하지만 정교랑의 거처는 텅 비어 있었다.
“떠났다고? 어디로?”
정 이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아씨께서 일이 있다며 다른 곳에서 지내겠다고 하셨어요.”
문을 지키던 아낙이 쌀쌀맞은 투로 대꾸하고는 손에 든 빗자루로 땅바닥을 힘껏 쓸었다. 뽀얀 먼지가 일자 정 이부인 등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며 얼른 비켜섰다.
“어디로?”
정 이부인은 그러면서도 다급하게 물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아낙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정 이부인은 그런 아낙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도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기에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곧 새해인데 또 어디로 간 건지…….”
돌아서던 정 이부인은 언제 왔는지 모를 낯선 사내 셋이 뒤에 서 있는 걸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여간 여긴 지저분하고 법도도 없다니까. 남녀가 유별한 것도 모르고.
정 이부인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자리를 떴다.
갔다고…….
진안 군왕의 귓가에 아낙의 말이 울렸다. 진안 군왕은 두모를 들어 올리고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았다. 힘이 쭉 빠지며 몸이 떨려왔다.
“전하, 아니, 공자님.”
뒤에 서 있던 시종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감시할 사람을 남겨야 한다고…….”
감시? 감시했어도 떠났을 텐데, 다를 게 뭐 있어?
진안 군왕이 주먹을 꽉 쥐고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정 낭자가, 떠났습니까?”
“떠났다니까요. 몇 번을 말해야…….”
아낙은 성가신 듯 짜증을 내며 고개를 들다가 눈앞에 있는 소년을 보더니 놀라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웃음을 지었다.
“혹시 경성에서 온 공자님이세요? 아씨와 약조를 했다던?”
그 말에 진안 군왕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아낙을 빤히 쳐다봤다.
“그렇습니다만.”
흥분한 듯 진안 군왕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날 아시오?”
“아씨께서 준수하게 생긴 공자에 대해 말씀을 남기고 가셨거든요.”
아낙은 웃으며 소매에서 서찰 한 통을 꺼냈다.
“아씨께서 여긴 불편하다며 다른 곳에서 공자님을 기다리겠다고 하셨어요.”
준수하게 생긴 공자!
손을 뻗어 서찰을 받는 진안 군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웃고 있는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럴 줄 알았어. 낭자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지. 절대 날 속일 리 없어.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