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정씨 조상 정평에 관한 설정은 서한 시대의 도교 학자이자 사상가인 엄군평(嚴君平)의 행적에서 가져왔습니다.
-밤의 사색-
어둠이 내린 객잔의 어느 방 안. 팔다리가 묶인 정평이 바닥에 앉아 몸으로 문을 쾅쾅 찧었다.
“이봐요, 이봐.”
정평이 문틈 사이로 힘없이 소리쳤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댁들 아씨는 정신이 드셨소이까? 깼으면 물어보십시오. 분명 그리 말할 테니.”
문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정평의 귀에 그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일단 먹을 거라도 좀 주면 안 되겠소?”
물론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정평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움직여 문에 기대앉은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객잔의 상등 방이었다. 낭자가 언제든 정평을 편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팔을 뒤로 결박하여 마구간이나 나뭇간에 가두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방 안의 장식은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온기가 느껴졌다. 탁자 위에는 차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래도 얼어 죽진 않겠군.
정평은 몸을 움직여 탁자 쪽으로 갔다. 차 주전자에 입을 대고 차를 마시려 해 보았다. 움직임이 불편한 탓에 사레가 들리면서 몸으로 차를 조금 쏟긴 했지만, 정평은 싱글벙글 웃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좋은 차야.”
정평은 입을 대고 차를 마저 마셨다.
기뻐하는 정평과 달리 저쪽에선 아낙들이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약을 들고 왔다. 시종 둘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어때요? 깨어나셨어요?”
아낙들의 물음에 시종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의원을 부르러 갔습니다. 집에도 연통을 했고요.”
시종들이 말했다.
“너무 세게 내리친 건 아니에요?”
세랑이 물었다. 시종 하나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당황하여 강도를 제대로 조절 못 한 탓에, 아씨께서 아직도 안 깨어나시는 건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원!”
아낙들은 한숨을 내쉴 뿐 시종들을 나무라진 않았다. 당시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낙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휘장 뒤에 있는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삼랑, 이럼 약을 먹일 수가 없잖아.”
세랑이 말했다. 삼랑도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의원 말로는 괜찮다잖아. 깨어나면 약을 먹이고, 깨어나지 않으면 안 먹여도 된댔어. 괜히 사레 걸리면 더 안 좋다고.”
두 아낙은 수심에 잠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잘 지내셨는데.
“이게 다 그 사기꾼 때문이야!”
세랑이 분통을 터트렸다.
“목숨이 없는 사람이니 뭐니 하는 바람에, 이 꼴이 됐잖아.”
하지만 삼랑은 맞장구를 치는 대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근데, 좀, 이상하긴 하잖아.”
삼랑이 불쑥 입을 열자, 세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사실, 어렸을 때 바보였다지만, 지금 아씨를 봐. 어디 바보 같아?”
삼랑이 나지막이 소곤거리자 세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모로 보나 언행으로 보나 바보는 아니었다.
세상에 저런 바보가 어디 있나. 저런 사람이 바보라면 우리 같은 사람은 뭐가 돼!
“나았다지 않았어?”
세랑이 물었다.
“바보의 병도 낫는단 말이야?”
삼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혹시 귀신에 들린 건 아닐까? 듣자니 귀신에 씌었다가 들키면 귀신이 도망친대. 귀신이 도망치면 그 사람은 죽는 거지. 아까 낮에 봤잖아. 꼭 정신줄을 놓은 사람처럼 구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랑은 낯빛이 새하얘지며 손을 들어 삼랑을 때렸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무슨!”
세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삼랑도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방은 어두웠고, 창문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면서 휘이잉 소리를 내는 바람에 한층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드, 등불을 켜자.”
삼랑의 말에 세랑은 얼른 등불을 켰다. 등잔 몇 개에 불이 들어오자 방 안은 한결 따스해 보였다. 두 사람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원이 왔습니다.”
문밖에서 시종의 말이 들리자 두 사람은 얼른 일어났다. 약상자를 든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이 많아지자 아낙들은 불안감이 다소 가시는 듯했다. 막 입을 열려는데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요, 난 괜찮아요.”
등불을 들고 자리를 안내하던 삼랑은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소리를 질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비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밖에 있던 시종들도 남녀유별을 따질 계제가 아닌지라 얼른 달려 들어왔다.
“아씨, 아씨, 제가 잘못했어요.”
아낙들이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아씨께서 깨어 계셨구나. 그럼 우리가 나눈 말도 분명 들으셨을 텐데.
아이고, 이 아둔한 것아. 뒤에서 남의 얘기를 할 때도 들킬까 봐 겁을 내는 법인데, 대놓고 떠들어 댔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괜찮아요. 두 사람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두려워요. 들어오자마자 불쑥 입을 여는 게 좀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나 때문에 놀랐나 보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자기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정말이지, 너무…….
두 아낙은 더욱 면목이 없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씨, 그런 사기꾼이 지껄이는 헛소리 믿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그런 사기꾼들은 입을 털며 먹고 사는 작자들이잖아요.”
그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낙들을 쳐다봤다.
“두 사람이 도와줄 일이 있어요.”
아낙들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내쫓기는커녕 일을 시키겠다니. 포용력이 대단하신 분이야.
“돈을 가져가서 책 좀 사 와요. 무슨 책이든 상관없어요. 많이 사 올수록 좋아요.”
책? 지금?
아낙들은 당황하면서도 얼른 알겠다고 대답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정평은 복도에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에 놔요, 전부 여기에.”
말소리와 함께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들이 어지럽게 들렸다.
“살살 다뤄요.”
뭐 하는 거지?
정평이 얼른 문가로 다가가 한쪽 눈으로 밖을 내다봤다. 복도에서 사환 두세 명이 급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두꺼운 서책 뭉치가 들려 있었다.
책? 이 오밤중에 저 많은 책을 들여온다고?
“밖에 있는 수레에 더 남았어?”
아낙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이걸 다 가져오라니. 아씨께서 다 보실 수는 있으려나?”
아씨?
정평은 몹시 기뻐했다.
그 낭자가 깨어났구나!
“이봐요, 이봐.”
정평이 어깨로 문을 쳤다.
“날 좀 풀어 줄 순 없겠소?”
정평이 계속 소리를 질러대자 누군가가 걸어왔다. 하지만 문을 열지는 않았다.
“풀어 달라고?”
사내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잠자코 있어라. 아씨의 일부터 도와드리고 네놈을 손봐 줄 테니까!”
이 오밤중에 무슨 일?
정평은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이미 깊은 밤이라 복도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관두고 일단 잠이나 자자. 일어나서 얘기하지, 뭐.
동녘이 밝아올 즈음, 문을 지키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낙이 잠에서 깼다. 앞에 있는 다른 아낙은 바닥에 누워 이불을 덮은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날이 밝겠네.
아낙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주무르고 똑바로 앉아 안쪽을 쳐다보았다. 방문을 열자 안에 단정히 앉은 여인이 보였다.
단정히 앉아 있어!
아낙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설마 밤새 저리 앉아 계셨나?
방 안에는 여전히 등불이 켜져 있었다. 어젯밤에 사 온 책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탁자 위에도 책이 흩어져 있고, 여인은 그 가운데 단정히 앉아 있었다.
여인이 책을 펼쳐 본 건 아니었다. 여인의 앞에 놓인 책 한 권은 어젯밤에 보던 그 책이었고, 나머지 책들도 여전히 원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늘빛이 밝아오면서 밝게 빛나던 등불은 차츰 어두워졌다. 그 바람에 방 안은 도리어 어두워졌다. 여인도 생기를 잃어 한층 침울해 보였다.
아낙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무언가 꽉 막힌 느낌이었다.
정처 없이 걷고, 소리 없이 울고,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저리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모습에 비하면 그건 괴로운 것도 아니었네.
진정 괴로울 땐 마음이 다 타 재만 남은 듯한 저런 모습이 나타나지. 정말 그 사기꾼 말대로, 그래서 그런 걸까?
삼백 년이라…….
인생이란 찰나와 같은 것이라,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갈 뿐이었다. 그녀는 생사의 순간에 삼백 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었다.
대주(大周) 건원(乾元) 6년.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서책을 펼친 다음, 책에 기록된 머리말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었다.
익숙한 것은 그 시대가 기억 속에 있어서였고, 낯선 것은 생생한 느낌 때문이었다. 과거에 읽었던 책도, 서가에 꽂혀 있는 진귀한 고서도 아닌데.
대주, 건원 6년. 건국 후 칠십 년도 채 안 된 지금은 네 번째 황제인 중종(中宗)의 재위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던 곳에서 대주 황족 방씨는 이미 몰락하여 전부 죽고, 뒤를 이은 대경(大慶) 역시 어린 마지막 황제가 갑작스레 병사하면서 사분오열하여 와해됐다. 이어 전화 속에 살아남은 성벽의 잔해 위에 새 나라 대량(大梁)의 깃발이 꽂혔다.
정교랑은 멍하니 손을 꼽아 보았다.
그게 294년 이후의 일이구나. 그때 정씨 일족도 멸문의 화를 입었고.
정교랑이 손을 떨구며 탁자를 붙잡았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가늘고 긴 손가락이 새하얘졌다.
이럴 수가. 강주 정씨가 그런 멸문의 화를 입다니. 십 년이나 양(楊)씨 가문을 도와 함께 싸웠는데, 결국…….
“아방, 아바마마께서 퇴위하시면 태사국에서 우리의 책봉일을 택할 거야!”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경하드립니다, 황후마마.”
정교랑은 탁자를 잡고 소리 없이 웃었다.
우습구나, 우스워.
가장 가까웠던 이가 친히 내린 명에 그녀는 온몸에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됐다. 그 사람은 제 손으로 직접 그녀의 심장을 파내기도 했다.
우습구나, 너무나도 우스워.
대량의 사황자, 양산!
대량, 양씨!
새가 없어지면 활이 소용없어 활집에 넣어 둔다지만(蜚鳥盡良弓藏), 양씨 가문의 천하가 안정을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정씨 가문에 칼을 휘두르지?
건국 초기엔 나라를 안정시키고 논공행상을 해야 마땅한데, 정씨 가문에 칼을 휘둘렀다?
난세로 어수선하고 나라가 바뀔 때에도, 강주 정씨는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켜왔다. 명성이 자자한 점술가의 일족으로서 대대로 제왕의 존경을 받았으며, 가주(家主)는 대대로 태사국(太史局)을 관장해 왔다. 하늘을 보고 땅을 살피며 날씨를 예측하고 책력을 만들고 역사를 편찬했다.
그게 바로 천하에 명성을 날린 강주 정씨요,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낸 명문 정씨였다.
유서 깊은 정씨 가문이 그렇게 망하다니!
가산을 몰수하고 멸문에 처해라! 고양이 한 마리, 개 한 마리도 남겨 두지 마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모조리 불살라 버려라!
불태우고 심장을 꺼내 삶아라. 혼을 갈기갈기 찢고 영을 없애 버려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려!
없어! 이젠 없다고! 전부 없어졌어!
정씨 가문이 없어졌어! 정씨는 이제 없어!
정교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던 아낙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씨…….”
정교랑은 아낙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 사람 어디 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지금 어디 있죠?”
그 사람?
아낙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멈칫했다가 곧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대답했다.
“사기꾼이요? 옆방에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바닥에 잠들어 있던 아낙도 이내 잠에서 깼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여인의 옷자락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잠이 싹 달아난 아낙이 벌떡 일어났다. 다른 아낙은 잠에서 깬 아낙을 내버려 둔 채 정교랑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아씨!”
복도에 있던 시종들도 놀라 소리치며 똑바로 섰다.
“아냐, 아냐. 난 그냥 좀 걸으려고.”
정교랑이 말했다.
또 그냥 걷는다고?
모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오밤중에…….
달려들어 말리려는데 정교랑이 옆방 문 앞에 서더니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복도에 있던 등불이 안으로 비추자 침상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낮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아낙들이 등불을 들고 들어와 방 안에 있는 등에 불을 붙였다. 소란 통에 정평도 잠에서 깼다. 갑작스러운 불빛이 눈을 찌르자 눈을 가리려던 정평은 여전히 손발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냈다.
“또 뭘 하려고…….”
정평이 하품하며 말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곧이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교랑은 목멘 목소리로 흐느끼나 싶더니 종국에는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을 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조상님. 이 후손이 무능하여 정씨 가문이 없어졌어요. 정씨 가문이 사라졌어요.
날이 훤히 밝자 객잔도 활기를 되찾았다. 점원들이 정갈하게 차린 식사를 들고 복도를 오갔다.
“식사요, 식사 왔습니다.”
이미 밧줄을 풀고 깨끗하게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은 정평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손을 비볐다. 더는 못 기다리겠는 듯 눈앞의 탁자를 앞으로 끌어당기던 정평은 탁자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문득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평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씩 웃었다.
“벌써 몇 끼를 굶어서 말입니다.”
두 아낙은 입을 삐죽이고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많이 드세요.”
“불편하신 곳은 없지요?”
시종이 물었다. 아낙들과 시종들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멸시하는 눈빛도, 사기꾼이라는 호칭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평이 젓가락을 들며 웃었다.
“만족합니다, 만족하고말고요. 나한테 그럴 것 없어요. 누군가의 길흉에 대해 말한다는 게 그렇습니다. 나쁜 말 듣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이런 험한 꼴을 당해도 그러려니 합니다. 사실 댁들이 날 때린 것도 아니고요.”
정평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러자 시종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얼른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시종들이 예를 표했다.
아씨께서도 사과하셨는데, 우리야 말할 것도 없지.
정평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오, 아닙니다. 댁들 아씨가 사과한 건 그 일 때문이 아니에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멈칫하여 고개를 들고 정평을 쳐다봤다.
이거 때문이 아니라고? 그럼 뭐 때문인데?
정평은 젓가락을 쥐고 그릇을 집어 들었다.
“나랑 닮은 사람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정평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 놀랐으니 사과한 거지만요.”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다.
“아무튼 너무 걱정들 마십시오. 댁들 아씨가 깨어났으니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다들 밥부터 먹어요.”
정평은 젓가락을 흔들며 웃음을 지은 후, 밥을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정평의 방에서 물러난 두 아낙은 직접 아침 식사를 들고 정교랑에게 갔다. 정평 앞에서 한바탕 통곡을 하고 난 정교랑은 모두의 걱정과 달리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정신을 잃거나 또다시 정처 없이 걸으러 나가는 대신 방으로 돌아왔다.
“아씨, 뭐라도 좀 드세요. 벌써 두 끼나 거르고, 밤까지 지새우셨어요.”
아낙이 나지막이 말했다. 서책 더미 속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눈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낙은 몹시 기뻐했고, 시종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인과 함께 집을 나서는 일은 본디 아무 걱정도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을 만나고 어떤 사람과 마주치든 여인은 본인의 능력으로 깔끔하게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누군가와 마주치거나 무슨 일을 만난 게 아니라, 여인 본인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말이다.
이래서 남의 문제는 돕기 쉬워도 자기 문제는 어렵다는 건가.
밖에서 긴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반근이 두봉을 걸치고 고단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반근의 뒤로는 똑같이 초조한 안색의 조 집사가 보였다.
“아씨!”
“대체 무슨 일이더냐?”
반근은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쳤고, 조 집사는 걸음을 멈추고 시종들에게 물었다.
“말하자면 깁니다. 사실 저희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시종들이 대답하는 말은 반근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반근이 안으로 들어서자 저쪽에 앉아 식사 중인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아씨!”
반근이 소리치자 정교랑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반근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반근은 또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씨, 무슨 일이에요?”
반근이 무릎을 꿇고 울며 물었다.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으세요?”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래. 괜찮아.”
정교랑이 대답했다. 반근은 정교랑을 보자 더욱 눈물이 나왔다.
“아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또 혼절을 하시다니요?”
반근이 두려운 표정으로 울며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숙여 젓가락으로 천천히 밥알을 골랐다.
“이젠 혼절하지 않을 거야.”
이젠 혼절하지 않으신다고? 그렇담 다행이긴 한데, 아씨의 얼굴이 왜 이렇게 슬프고 절망적으로 보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사실 말하고 말 것도 없어요. 아씨께서 갑자기 변하신 거죠.”
“그게 말이 되나? 그런 작자가 목숨이 없네, 죽네 하며 떠들었다 한들, 아씨께서 눈 하나 깜짝할 분이냐고!”
조 집사와 반근은 옆방에 시종들과 모여 앉아 있었고, 정교랑은 식사를 마친 후 두 아낙과 함께 활을 쏘러 나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달라, 달라졌어.
반근이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뭐라 형언할 순 없지만 반근은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아씨가 마음이 없는 듯 무뚝뚝한 분이었다면, 지금의 아씨는 영혼을 잃은 분 같았다.
예전의 아씨는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지만 마음을 찾고 싶다는 의지와 바람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씨는 모든 기대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듯 생기라고는 찾을 수 없어 보였다.
반근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씨는 쭉 마음을 찾고 계셨어. 혹시…… 찾으셔서 그런 건가? 근데 마음을 찾았는데 왜 저렇게 변하신 거지?
“결국 핵심은 정평이라는 자에게 있군.”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는 쭉 그자를 찾아다니셨고, 그자를 찾은 후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조 집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녀석한테 가서 물어봐야겠다.”
반근은 조 집사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리며 따라 일어섰다.
“나도 갈래요.”
방문을 나서던 두 사람은 활쏘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정교랑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정교랑은 소매를 묶은 끈을 풀지 않은 채 한 손에는 활을, 한 손에는 화살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다. 시종들의 묘사와 달리 평상시와 다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짐 챙겨. 바로 출발할 거니까.”
조 집사와 반근은 멈칫했다.
“어이, 그럼 난 이제 가 봐도 되죠?”
그때 다른 쪽 방에 있던 정평이 밖으로 몸을 빼고 물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정평의 모습에 정교랑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네.”
정교랑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편하실 대로…… 하셔요.”
하셔요?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정평을 쳐다보았다. 정평이 입을 벌리고 헤 웃었다.
“그렇게 깍듯할 거 없어요.”
웃으며 대꾸한 정평은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몸을 밖으로 뺐다.
“아, 전에 성에서 나를 찾던 사람이 혹시 낭자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정평이 히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진작 알았으면 지금껏 도망다닐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럼 이제 집으로 갈 수 있겠네요.”
정교랑이 재차 예를 표했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정교랑은 정평이 자리를 떠난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짐을 챙겨라.”
조 집사의 분부에 시종들은 얼른 대답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확실히 달라지셨구나.”
조 집사가 한숨을 내쉬며 반근에게 말했다. 막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반근이 그 말에 멈춰 섰다.
“못 봤어? 아씨께서는 정평과 눈도 못 마주치셨어. 사람이 사람을 감히 똑바로 못 본다는 건, 존경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둘 중 하나야. 전에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신 적 없는데.”
경성의 그 수많은 고관대작과 귀인들에게도 존경을 표한 적 없고, 손가락 하나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던 여인이었다. 여인은 누구를 대하든 시종일관 담담한 시선으로 응했다. 그런데 내력도 불분명한 저 정평이란 자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평이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조 집사는 걸음을 옮겨 정평을 쫓아갔다.
“대체 몇 번을 말합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아니, 보면 모릅니까?”
멱살을 잡힌 정평이 소리쳤다.
“당신네 아씨는 보통 똑똑한 게 아닌데, 아랫사람들은 왜 죄다 이렇게 아둔하지?”
이거 봐, 이상하잖아! 보통은 아씨더러 바보라고 했어. 아씨한테 똑똑하다고 한 자는 이자가 처음이라고!
조 집사는 정평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어서 말해라. 넌 대체 뭐 하는 자냐!”
조 집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윽박질렀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다 알아봤잖습니까. 사실 딱히 속일 것도 없고요. 난 정씨 가문 사람입니다. 난 내 이름을 자랑스레 여기는데 뭐하러 속여요? 바보라 해도 다 알겠네. 난 그냥 댁들 아씨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을 뿐이라고요. 옛 추억이 떠올랐거나 그런 거겠죠. 댁들 아씨도 추태를 보였다며 벌써 나한테 사과했어요. 근데 댁들은 왜 이렇게 아둔하게 구는 거야!”
조 집사가 정평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렇게 보니 정씨 집안 작자들을 닮은 것 같긴 하네.
“당신들 이러면 못써. 댁들 아씨가 그리 명민하니, 이럴수록 댁들이 아둔한 것만 더 돋보인다고.”
정평이 씩씩거리며 투덜대자 조 집사가 손을 들어 따귀를 날렸다.
“양양거리지 말고 분수를 지켜라.”
조 집사가 퉁명스레 말했다.
정씨 성을 가졌다고 해서 다 아씨처럼 대단한 줄 알아? 어디서 입을 놀려!
“썩 꺼져라.”
정평은 콧방귀를 뀌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다음 건들건들 자리를 떴다. 조 집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지켜보다가, 정평이 거리로 사라진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이쪽의 정교랑은 벌써 짐 정리를 마치고, 마차를 두 대 더 준비하게 했다.
“아씨께서 두 사람이 밤새 오느라 고단했을 거라며 말을 타지 말고 마차로 이동하시래요. 그래야 가는 길에 쉴 수 있다고요.”
두 아낙이 조 집사에게 말을 전하며 감탄했다.
“저리 심성이 곱고 다른 이를 잘 챙겨 주는 아씨는 처음 보네요.”
보살님처럼 착하고 야차처럼 무서워 종잡을 수 없는 분이지.
조 집사는 한숨을 내쉬고, 이미 마차에 오른 정교랑을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씨.”
휘장을 들고 마차에 오른 반근이 팔걸이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정교랑을 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불렀다. 정교랑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응 하고 짧게 대꾸했다.
“혹시, 마음을 찾으신 거예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이 눈을 뜨고 반근을 보며 싱긋 웃자 반근은 눈물을 떨궜다.
“아씨.”
반근이 다가앉아 정교랑의 옷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마음이 있으면 원래 그래요. 기쁠 때가 있으니 괴로울 때도 있는 법이죠. 기분 좋은 일을 많이 생각하고, 속상한 일은 잊으세요. 그게 좋아요.”
정교랑이 반근의 손을 토닥여 주며 웃었다.
“가서 쉬어. 돌아가면 네가 도울 일이 많을 거야.”
속상한 일을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다면, 세상에 고통스러운 일이 그리 많을 리 없지. 자고로 남의 일에 대해 말하긴 쉬운 법이었다.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마차가 흔들거리며 출발하자 바람에 휘장이 나부꼈다. 그때 옆에서 ‘어이, 어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댁들도 떠나는 거요?”
정교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휘장을 들고 밖을 내다보았다. 거리에서 정평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씨?”
마차 옆에 있던 시종이 나지막이 불렀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고 휘장을 내렸다.
마차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녀가 없다면, 선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녀가 뭐라고 개입하여 바꾼단 말인가.
선조에게는 선조가 해야 할 일과 선조가 가야 할 길이 있고, 그녀에게도 그녀가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그녀는 선조의 후손인 동시에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녀인 동시에 그녀가 아니기도 했다. 정신을 놓고 무너질 만큼 아득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질 수 없었다. 아니,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생각해야 했다.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는 정방이 해야 할 일을.
대로변에 마차가 다시 멈춰 섰다. 두 아낙과 반근이 각각 책을 한 아름씩 안고 뒤편 마차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씨, 이 정도면 될까요?”
정교랑은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리고 이들이 가져온 서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서책이 가득 쌓여 있던 자그마한 공간에 새로 가져온 서책까지 더해지자 마차는 더욱 비좁아 보였다.
“아씨, 중간중간 쉬어 가며 보세요. 그러다가 눈 버리세요.”
반근의 당부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든 서책을 펼쳤다.
마차는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
집안사람들이 대대로 태사국에서 일했기에 정교랑은 어려서부터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을 더듬으며 살펴보니 서책에 기록된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얼마 없었다.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대부분 큰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놓고 보면 한낱 모래알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곳에서 정교랑이 보고 들은 명망 있는 인사들도 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 이름을 날리고 있는 중신들만 봐도 그랬다. 진소라는 자는 역사서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장순에 대한 기록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저 성현의 도를 가르치던 대유학자로 남아 있을 뿐 정사에 참여한 기록은 없었다. 진씨 가문이나 주씨 가문에 대한 기록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다음 황제는 중종의 맏아들이었지.
정교랑은 서책을 내려놓고 손을 꼽으며 셈해 보았다. 오 년 후에 등극하여 장장 사십오 년을 재위할 터였다. 그녀의 선조인 정평도 그 시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정씨 가문이 이때부터 벼슬길에 나가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사실 선조는 줄곧 평탄한 삶을 살았고, 강주부의 작은 산골에 은거하며 책을 집필하다가 생을 마쳤다.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정씨도 첫 대에서 기반을 다지고, 다음 대에서 세를 불리고, 그다음 대에 이르러서야 번성하게 됐다.
선조 정평이 후대를 위해 닦은 기반은 바로 그가 집필한 <노자> 해석본이었다. 정평은 <노자> 해석본과 신묘한 관상술로 차차 명성을 얻었다.
그럼 정교랑이 태어난 북정은 어떻게 된 걸까?
지금은 강주부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지만, 백 년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했다.
역사서에 쓰인 한 글자 한 글자는 천금보다 값진 것이었다. 일상의 번다한 일들이 아니라 고르고 고른 중요한 내용으로 한 줄 한 줄, 한 장 한 장이 채워졌다. 기록으로 남는 게 쉬운 일이었다면 청사에 이름을 남기는 영예를 얻고자 수많은 사람이 그리 애쓰지도 않았을 터였다.
기억과 일치하는 기록을 찾으면 또 어쩔 건데?
정교랑은 손에 든 서책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이곳의 사람들과 이곳의 일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삼백 년이라는 거리가 있는데, 살아 있다 한들 뭘 어쩐단 말인가. 혈육들은 결국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를 막을 능력도, 복수할 힘도 없었다.
대량, 양씨…….
양씨!
눈을 번쩍 뜬 정교랑이 손을 뻗어 휘장을 들어 올렸다.
“세워라.”
마차 옆에 있던 시종이 얼른 마차를 세우라 명하고 분부를 들으러 왔다.
“양주(涼州)로 가야겠네.”
“양주요?”
모자를 손으로 누르며 잽싸게 달려온 조 집사는 정교랑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걷고 싶어서.”
또 걷겠다고!
시종들에게 지난번 걸을 때의 상황에 대해 들은 조 집사는 흠칫 놀랐다.
성을 따라 걷는 것도 아니고 양주로 걸어가겠다니, 목숨을 내놓으란 소린데. 아니, 근데 갑자기 웬 양주? 정평의 말대로 예전에 알던 사람이 기억난 거라면, 병주로 가는 게 맞지 않나?
“아씨, 양주는 너무 멀지 않습니까. 게다가 겨울이기도 하고요. 정 가고 싶으시면 우선 집으로 가서 채비를 단단히 하고 떠나시지요. 먹을 것이며 입을 걸 챙겨 떠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해야겠지. 출발하게. 일단 집에 가서 상의하고 결정하지.”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무 심하게 변하신 건 아니네. 그래도 이치를 알고 사리 분별을 하시잖아.
조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치를 알고 사리 분별을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인은 원래 변덕이 심한 법이니, 별일도 아니지.
“가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야지!”
돌아선 조 집사가 손을 흔들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정씨 저택.
정 대노야는 상태가 많이 좋아져 이제 거동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병세는 좋아졌지만 심기는 여전히 불편한 상태였다.
관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대며 조사하는 통에 안팎이 조용한 날이 없었다. 두 점포가 문을 닫게 되면서 성내에서는 정씨 가문을 두고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그 바람에 다른 점포들까지 덩달아 장사가 안 됐다.
아직 대놓고 목돈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구실로 챙겨 가는 돈도 벌써 적잖이 나간 터였다. 상황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이노야는?”
대청을 서성이던 정 대노야가 물었다. 혼수에 관해 논해야 하니 이노야를 부르라고 사람을 보냈는데,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도록 아우는 오지 않았다. 기어 왔어도 벌써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노야께서는 임지로 돌아가셨습니다.”
사환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흠칫 놀란 정 대노야는 곧 울화가 치밀었다.
“누가 돌아가라 했느냐? 언제 돌아갔는데?”
“노야, 진정하세요.”
정 대부인이 안에서 나오며 말했다. 정 대부인은 분노로 숨을 헐떡이는 정 대노야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그 아비에 그 딸 아니랄까 봐. 보통 매정하고 독한 부녀가 아니야.”
“또 둘이 입을 맞췄겠죠. 동서가 돌아오면서 이노야도 다시 변했어요. 전에는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찾아와 문안을 살피더니, 바로 떠난 거 봐요. 말 한마디 없이.”
정 대부인 역시 분노를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 화근덩어리를 내쫓으라고 해야겠어요. 팽씨 가문으로 돌려보내야죠. 대체 딸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한번 보라고!”
정 대노야가 손을 뻗어 부인을 말렸다.
“그만하시오. 그 여인은 오히려 내쫓기만을 기다릴 거야. 내쫓으면 또 나가서 떠들어댈 텐데, 그럼 우리 정씨 가문의 체면이 뭐가 되겠소?”
“그럼 지금은 뭐, 체면이 남아 있고요?”
정 대부인도 열이 받아 받아쳤다.
“그래도 문을 닫아걸고 있으면, 집안일이잖소.”
정 대노야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문을 닫아걸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 대부인이 대꾸했다. 정 대노야가 찻잔을 쥐었다.
“있고말고. 그 애가 원하는 게 결국 혼수 아니오. 줘 버리시오!”
정 대노야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주라고?
정 대부인도 언성을 높였다.
“그럼 우린 뭐가 돼요? 체면을 잃고 실속까지 잃으라고요?”
정 대부인은 아깝기도 하고 열받기도 해서 손이 떨렸다.
아무리 주씨 가문의 혼수라지만, 그동안 내가 심혈을 기울여 경영해 온 가산이야. 어쩌자고 남한테 그냥 내주란 거야!
“정신을 못 차렸군. 본디 그 애의 혼수잖소.”
정 대노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 대부인은 새파래진 안색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문부터 닫고 얘기합시다. 이렇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떠들다간 남들 등쌀에 망하게 생겼으니.”
정 대노야가 밖을 보며 물었다.
“그 애는 돌아왔더냐?”
“아직이요.”
밖에서 여종이 대답했다.
“그런데 노야, 그 아씨의 몸종과 주씨 가문 집사가 어젯밤에 급히 나가더니, 아직도 안 돌아왔습니다. 혹시 그 아씨를 모시러 간 게 아닐까요?”
“어젯밤에? 급히?”
정 대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묻고는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네.”
여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누군가가 와서 무슨 소식을 전하자 급히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그 아씨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정 대부인이 냉소를 지었다.
“여자애가 허구한 날 싸돌아다니기만 하니, 일이 안 생기는 게 이상하지.”
정말 일이나 생겼으면 좋겠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벌을 내리시는 게지!
“곧 돌아올 모양이니 잘 지켜라. 오자마자 나한테 보고하고.”
정 대노야의 말에 여종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날이 훤히 밝을 무렵이었다. 정 대노야가 약을 먹으려 하자 여종이 급히 들어와 정 낭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보고했다.
“어제 한밤중에 돌아오셨습니다. 방금 이부인께서 보러 가셨고요.”
정 대부인이 냉소를 지었다. 정 대노야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에 앉았다.
“노야, 우리는 가면 안 돼요.”
정 대부인의 말에 정 대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집사를 불러오도록 했다.
“자네가 가서 그 애를 만나 봐. 혼수를 돌려주겠다고 하게.”
집사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를 떴다.
정 대부인은 아깝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 아까워할 것 없소. 혼수를 다 준다 한들, 결국 당신 친정으로 갈 거잖소. 어차피 제 논에 물 대기지. 다시 당신이 관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정 대노야는 부인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계속 혼수를 놓고 버티면, 이방 내외는 혼사를 못 치르게 어깃장을 놓을 거요. 그럼 우리도 할 말이 없어져.”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하지. 별수 없겠네.
정 대부인도 고개를 끄덕이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며 한발 물러났다.
집사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종이 급히 들어왔다.
“부인, 왕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올 때가 되긴 했지. 시간을 하도 잡아먹어서 연내에 혼사를 치를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정 대부인이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동안, 정 대노야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대청에 앉은 정 대부인이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왕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정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종 역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갔던 여종은 곧 돌아왔지만, 왕 부인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본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부인, 왕 부인께서…….”
여종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을 삼켰다.
“왕 부인이 왜?”
정 대부인이 물었다.
“남쪽으로 가셨습니다.”
남쪽?
정 대부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쪽을 뭐하러?”
“방금 대문 앞에서 정 낭자가 돌아왔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마침 대문을 지나던 집사가 그 모습을 보고 돌아왔다고 말씀드렸더니, 곧장…….”
여종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 부인께서도 집사를 따라 그쪽으로 가셨다네요.”
“그 바보를 보러 갔단 말이냐?”
정 대부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잘못 들은 거겠지?
“아마도요.”
여종이 대답했다.
“그 애를 뭐하러 보러 가? 며느리가 보고 싶어서? 아무리 그래도 나부터 보는 게 도리지. 직접 보러 가는 경우가 어디 있어?”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죠.
여종은 쭈뼛거리며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정 대노야가 그 얘기를 듣고 안에서 나왔다.
“방금 왕 부인이 정 낭자가 돌아왔냐고 물었다 했느냐?”
정 대노야가 물었다. 여종은 멈칫하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차에서 내리실 때 그리 물으셨습니다.”
정 대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애가 집을 비웠던 걸 어찌 알았지?”
남정을 걸으며 집사는 뭔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달라지긴 진작부터 달라졌었다. 새로 지은 저택이며, 웃고 떠들며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만 봐도 그랬다. 오늘은 특히 사람까지 늘었다. 좁은 골목에 고급 마차까지 들어서 있다 보니 복작복작한 느낌이 났다.
예전엔 북정에서나 이런 분위기가 느껴졌던 것 같은데?
“사람이 많군.”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사가 얼른 고개를 돌리자, 여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왕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뒤쪽으로 마차까지 세워져 있어 더욱 부산스러워 보였다.
“부인, 정말 가시려고요? 우선 댁으로 가시지요. 대부인을 통해 정 낭자를 부르시면 되잖습니까.”
집사의 말에 왕 부인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할까 봐 그러네.”
집사는 그 말에 괜히 뜨끔했다.
하긴. 부르는 일이야 어려울 게 없지만, 그 부름에 오고 말고는 별개의 문제지.
왕 부인은 웃으며 집사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던 게로군. 어쩐지 노부인께서 편찮으시더니 대노야까지 병이 났다 했네. 십칠이 돌아와 정 낭자를 만난 얘기를 하기에 이상하다 싶어 사정을 알아봤으니 망정이지, 지금껏 까맣게 모를 뻔했네.
“보통 독종이 아니로군!”
저간의 사정을 들은 왕 노야는 허벅지를 탁 내려치며 감탄했다. 그 독종한테 당한 사람이 자신의 친누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로.
“불을 질러 배 일곱 척을 깡그리 불태워 버린 조부님의 수완이 떠오를 정도야.”
왕 노야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회상에 잠겼다.
“자그마치 일곱 척이야. 전 재산이었지. 보통 사람은 아까워서 못 하지만, 버리지 않으면 얻지도 못하는 법.”
조부님의 화끈하고 과감한 결단력에 대해서는 왕 부인도 일찍이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추억이나 곱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죠? 십칠이 그 낭자의 심기를 건드렸잖아요.”
신이 나서 돌아온 아들은 정 낭자가 퇴혼에 흔쾌히 동의했다고 했다. 아들의 꿍꿍이를 훤히 아는 왕 부인은 사환과 몸종을 불러다 꼬치꼬치 캐물었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대강 알게 됐다.
이 망할 녀석, 겁대가리도 없이 정 낭자한테 협박을 하다니.
“그래도 정 낭자가 우리 십칠한테 정이 각별한가 봐요. 기꺼이 응낙한 걸 보면.”
왕 부인의 말에 왕 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이 각별하긴. 십칠 그놈이 저 혼자 착각하는 거지. 그 낭자는 십칠이 안중에도 없을 거요. 그런 사람들은 마음속에 천하를 품고 있다고. 잘 맞으면 함께하고 안 맞으면 떠나보내는 것일 뿐, 강요하거나 억지를 쓰는 일은 결코 없어.”
왕 부인은 입을 삐죽거렸다.
천하는 무슨. 여인이 무슨 천하를 품는단 말인가. 남편을 공경하고 자식을 잘 가르치는 게 본분을 다하는 일이지.
“그럼 혼사는 이대로 무를까요?”
왕 부인의 말에 왕 노야는 한숨을 내쉬며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러는 수밖에. 십칠한텐 그만한 복이 없는 거요.”
“난장판이 되어 죽네 사네 하는 정씨 가문을 봐요. 그런 복은 언감생심이죠.”
왕 부인이 대꾸했다.
“그야 정씨 가문에서 그 낭자의 심기를 건드려서 그런 거고. 매형한테 좀 오만한 면이 있잖소.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사람이야. 벌레 한 마리도 맹수를 들볶아 죽일 수 있는 법이거늘, 더구나 그 낭자는 벌레가 아니라 사자잖소.”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사실 왕씨 가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경성의 일을 알고도 사사로운 욕심에 그 사실을 숨긴 채 혼사를 추진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정 대노야가 지금껏 까맣게 몰랐을 리 없었다.
왕 부인은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혼사를 무르더라도 최대한 성의를 보여야 하오. 당신이 직접 다녀오시오. 그 낭자가 돌아왔거든, 직접 만나 미안한 마음을 전하시구려.”
갑자기 들려오는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에 왕 부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앞쪽에서 걸어오는 여인들의 목소리였다.
힐끔 쳐다보던 왕 부인도 흠칫 놀랐지만, 집사는 몹시 놀란 눈치였다.
“저건 경성 공주부 진씨 가문의 사람들 같은데?”
집사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이 무슨 일이지? 이부인을 따라온 건가?
여인들은 마차에 오르지 않고 마차에 서 있었다. 주씨 가문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세밑에 눈이 내리면 오는 길이 힘들어질까 봐, 저희 부인께서 새해 선물을 미리 보내라고 하셨어요.”
“아씨께 부족한 게 없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성의 표시는 해야죠.”
“이건 저희 십삼공자께서 아씨께 특별히 보내신 거예요.”
마차에서는 크고 작은 상자들이 끊임없이 내려졌고, 이따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사와 왕 부인은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희 부인’이라면, 진 부인 아닌가? 진 부인이 친히 새해 선물을 보낸다고?
왕 부인 등은 ‘진 부인’과 ‘친히’라는 단어를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단순히 주씨 가문을 봐서 그러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터, 그럼 정 낭자를 위해서?
집사는 손을 들어 콧잔등에 난 땀을 닦았다. 옆에 있던 왕 부인은 이젠 확실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딱히 내키지 않는 걸 억지로 왔는데, 이제 보니 노야의 판단이 정확했어. 이만한 인물이라면 혼사가 무산되더라도 절대 원한을 맺어선 안 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왕 부인은 정씨 가문 집사를 지나쳐 앞으로 갔다.
“이 댁 아씨를 뵐 수 있을까요?”
왕씨 가문의 여종이 주씨 가문 시종에게 명첩을 내밀며 공손히 물었다.
명첩! 명첩을 건네다니! 이건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잖아!
뒤쪽에 서 있던 정씨 가문 집사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편 이미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던 정 이부인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정교랑이 명첩을 도로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교랑, 진씨 가문이야. 공주부의 진씨 가문. 함부로 할 수 있는 가문이 아니잖아.”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씨 가문이기에 길게 얘기할 필요 없어요. 안 된다고 하면 진씨 가문에서 내 뜻을 알 거예요.”
진씨 가문에서…… 안다고? 정말 경성에서 진씨 가문과 왕래가 있었나?
정 이부인은 방금 전 진씨 가문 여종들이 보인 공손한 태도와 새해 선물을 떠올려 보았다. 단지 주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그럼 진씨 가문은 안 되더라도 다른 가문은…….”
정 이부인이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분간은 혼사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나중에 얘기하자고?
“교랑, 왕씨 가문으로 시집가선 안 돼.”
정 이부인이 말했다.
“알아요.”
정교랑은 정 이부인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살펴 주셔서 감사해요. 이 일에 대해선 당분간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정 이부인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문가에 있던 반근이 일어났다.
“부인, 이만 돌아가세요. 아씨께선 어젯밤에 막 돌아와 아직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어요.”
몸종의 말에 정 이부인은 입 밖으로 꺼내려던 수많은 말을 도로 삼켰다. 또다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고 싶진 않았다. 이 바보는 정 대노야까지 고소할 정도니, 몸종을 시켜 자신을 쫓아내는 것쯤은 무례한 축에도 안 낄 것 같았다.
“그럼 푹 쉬렴. 무슨 일 있거든 나한테 말하고. 네 부친이 집에 안 계셔도 내가 나설 수 있어. 우리 가족만 한마음이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단다.”
정 이부인이 말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서 예를 표했다.
“어서 쉬어. 나올 거 없어.”
정 이부인이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아씨, 왕씨 가문의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마당에 있던 시종이 그제야 말씀을 올렸다.
왕씨 가문? 정 이부인은 깜짝 놀라 눈을 들어 밖을 쳐다보았다. 과연 왕씨 가문 부인이 거기 서 있었다.
“안으로 모셔.”
“교랑…….”
정 이부인이 불안한 기색으로 돌아서려 하자 반근이 앞으로 나서며 막았다.
“부인, 살펴 가세요.”
몸종과 실랑이를 벌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말싸움은 겁나지 않았지만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아랫것들은 겁났다. 정 이부인은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대문 밖에 있는 집사가 보이자 더더욱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들 해. 물건 상하지 않게.”
정 이부인은 집사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귀밑머리를 만지며 마차에서 선물 상자를 옮기는 이들에게 명했다. 진씨 가문 여종들과 주씨 가문 시종들은 정 이부인을 힐끔 쳐다보고, 별다른 대꾸 없이 선물을 옮기는 일에 열중했다.
집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나서며 정 이부인을 불렀다. 하지만 정 이부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주씨 가문 시종에게 물었다.
“답례 선물은 준비했고?”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정 이부인은 개의치 않았다.
“답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무려 공주부 진씨 가문이야.”
정 이부인이 손뼉을 치며 자신의 여종들에게 명했다.
“어서 열심히 도와야지.”
정 이부인의 여종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선물 옮기는 일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주씨 가문 시종들이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쭈뼛쭈뼛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안으로 들어갔던 왕 부인이 나왔다.
벌써? 역시 단칼에 거절당했나 보네.
정 이부인이 얼른 쳐다봤지만 왕 부인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싱글벙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여종들과 속삭였다.
“우리도 새해 선물을 보내야겠구나.”
새해 선물? 왕 부인도 새해 선물을 보낸다고?
저리 싱글벙글 웃는 걸 보니 뭔가 큰 이득을 본 모양이야. 거절을 당해서 분을 못 이기고 씩씩대는 모습이 아니잖아. 한데 혼사를 그대로 추진한다 치면, 손아랫사람한테 새해 선물을 보내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애초에 왕씨 가문에서도 원하지 않는 혼사였나? 정 대부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거고?
“왕 부인.”
정 이부인은 내친김에 궁금증을 풀고자 왕 부인을 불렀다. 왕 부인은 걸음을 멈추고 정 이부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얼굴의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거리를 두었다.
“어서 가자. 빨리 집에 가야지, 할 일이 많아.”
왕 부인은 정 이부인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정 이부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옷소매를 홱 뿌리친 다음, 여종들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한편 정씨 가문 집사는 그제야 기회를 잡고 말을 건넸지만, 반근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역시 돌아오니 한시도 잠잠할 때가 없네.”
반근은 혼잣말을 하며 말을 전하러 들어갔다가, 금세 다시 나왔다.
“아씨께서 혼수 때문에 온 거라면 얘기할 필요도 없다고 하세요. 관부의 판결을 기다리자고 하시네요.”
“낭자, 낭자.”
집사는 황급히 반근을 부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리 노야께서 말씀하셨어. 아씨께서 그 혼수가 그리 마음에 쓰이거든, 가져가라고 말이야.”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야 없죠. 그렇게 말씀하시니 우리 아씨께서 막무가내로 굴어 노야께서 할 수 없이 주시는 것 같잖아요. 그건 공정하지 않죠. 관부의 결정을 기다리는 게 낫겠어요.”
말이야 바른말로, 너희 아씨가 막무가내로 구는 거 맞잖아!
“낭자, 그리 야박하게 말하면 안 되지. 어쨌든 한 가족인데…….”
고개를 돌린 반근이 집사의 말을 딱 잘랐다.
“아씨께서 단호하게 나가지 않으면 원칙을 지킬 수 없다고 하셨어요. 이랬다저랬다 하면 오히려 엉망이 된다고 하셨죠.”
반근은 집사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만 돌아가세요. 그 일은 길게 얘기하실 것 없어요. 저희 아씨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건 혼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명예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혼수를 원하는 게 아니야? 명예를 원한다고?
집사가 놀란 눈으로 반근을 쳐다보았다.
“경성의 과로신선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셨어요?”
반근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집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이 과로신선을 만들어 먹는 걸 보고 그걸 베껴 떼돈을 번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고는 과로신선이 자신의 것이라 우겼죠. 그래서 처음에 과로신선을 만들어 먹은 사람을 만나자 고마워하기는커녕 경계하며 협박까지 했대요. 정작 과로신선을 만든 사람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며 돈도 거절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집사가 물었다.
“돈도 안 되는 과로신선이 온 거리를 뒤덮게 됐죠.”
반근은 싱긋 웃고는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돈도 안 되는 과로신선이 온 거리를 뒤덮게 됐다고? 뭔 소리야?
집사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명예를 원할 뿐, 돈은 됐다?”
서재에 있던 정 대노야는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찻잔을 집어 던졌다. 문턱을 넘어간 찻잔은 마당으로 날아가 산산조각이 났다. 마당에 있던 사환과 몸종들은 즉시 뒤로 물러섰고, 서재 안에 있던 집사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직접 가서 무릎 꿇고 바치라는 거냐?”
말을 마친 정 대노야는 가슴을 부여잡고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집사와 여종들이 얼른 달려와 등을 쓸어주고 물을 따라 준 끝에 한참 만에 기침이 멎었다.
“또 뭐라고 하더냐?”
정 대노야가 의자에 기대앉아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말씀은 딱히 없었고, 아씨의 시녀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
정 대노야가 냉소를 지었다.
“말해 봐라.”
집사가 반근이 말한 이야기를 떠듬떠듬 옮기자, 정 대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개뼈다귀 같은 이야기인지.”
손을 뻗어 찻잔을 쥐던 정 대노야는 찻잔이 비어 있자 또 울화가 치밀었다. 옆에 있던 시녀가 놀라 얼른 잔을 채워 주었다.
“과로신선이라…….”
정 대노야가 찻잔을 들고 읊조렸다. 입으로는 신경도 안 쓴다고 하면서도 내심 그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후로 돈도 안 되는 과로신선이 온 거리를 뒤덮게 됐다니.
난 돈을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그 돈 욕심내지 마.
정 대노야는 몸을 움찔하더니 또다시 찻잔을 내던졌다.
“어딜 감히!”
정 대노야는 새파래진 안색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숨을 헐떡이며 목을 움켜쥐었다. 서재 안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어서 의원을 불러!”
“어서 의원을 불러라!”
같은 시각, 대청에 앉아 있던 정 대부인도 안색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뭐가 어째? 혼사를 무르기로 했다고?”
정 대부인이 앞에 앉은 왕 부인을 보며 물었다.
“네, 형님. 생각해 봤는데, 십칠이 영 싫다네요. 억지로 비틀어 딴 참외는 맛이 없다잖아요. 그냥 여기서 관두려고요.”
왕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왕 부인은 기분이 날아갈 듯한 상태였다. 정 낭자가 조금도 매달리지 않고 호탕하게 퇴혼을 응낙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왕 노야의 말대로 왕씨 가문의 해상 무역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정 낭자는 흥미를 보이기까지 했다. 기회가 된다면 견문을 넓혀 보고 싶다나.
인척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같이 장사하는 일까지 안 될 건 없지. 협업 방식은 다양하니까.
왕씨 가문에서 협업 의사를 밝히자 정교랑은 딱히 반감을 보이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정말 잘된 일이었다. 수완도 뛰어나고 머리도 좋은 데다 인맥까지 갖췄으니 협업 상대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올케!”
정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빽 지르자, 왕 부인은 정신을 차리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볼게요.”
“기다려. 얘기 아직 안 끝났잖아! 관둔다고 하면 다야? 어떻게 된 일인지는 말해야지.”
“말하고 말 게 뭐 있어요. 정 낭자도 동의한 일인걸.”
왕 부인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정 낭자?”
정 대부인이 멈칫하며 되물었다. 왕 부인은 말실수를 깨닫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뭐든 억지로 해서 좋을 거 없잖아요. 정 낭자도 그 이치를 알고 동의했다고요.”
하지만 정 대부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정 대부인이 왕 부인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 애를 먼저 보러 간 이유가 뭐야? 그 얘길 하려고 보러 간 거야?”
왕 부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냥 보러 간 거예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집에도 일이 많아서요.”
왕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정 대부인이 손을 뻗어 붙잡으며 놔주지 않았다.
“올케, 똑바로 말해. 대체 무슨 일인데? 하루라도 빨리 혼례를 올리고 싶다며 난리더니 갑자기 말을 뒤집는 이유가 뭐야? 날 속일 생각은 집어치워. 내가 올케랑 아우를 모를 것 같아? 뭔가 이득이 되니까 이러는 거잖아.”
정 대부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계속 말 안 하면 내 직접 가서 아우한테 물어볼 거야. 친누나까지 속이려 든 건지 따질 거라고!”
정 대부인은 그간의 일이 떠오르자 비통한 심정이 들었다.
“정씨 가문에서 설움당하는 것도 업보려니 생각하고 꾹 참고 있는데, 이젠 친정까지 나한테 이래?”
정 대부인은 눈물이 나오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왕 부인은 괜히 찔리기도 하고 꽤 난감한 눈치였다.
“형님, 속이긴요. 십칠이 싫다고 펄펄 뛰니 방법이 없잖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왕 부인이 말을 이었다.
“실은 말이죠, 형님. 형님네가 정 낭자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지 말고 좀 더 알아보세요.”
잘 모른다고? 더 알아보라고? 그 바보에 대해 알아보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정 대부인이 무언가를 더 따져 물으려는데, 문밖에서 여종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노야께서 또 병이 나셨어요!”
왕 부인은 정 대부인이 놀란 사이 얼른 손을 빼냈다.
“형님, 어서 대노야께 가 보세요. 배웅은 됐어요. 이만 갈게요.”
왕 부인은 도망치다시피 떠났다. 정 대부인은 초조하기도 하고 열받기도 했지만 왕 부인을 신경 쓸 때가 아닌지라 정 대노야부터 보러 갔다.
의원은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의원은 정 대노야가 무탈하다고 하면서도 며칠간은 꼼짝도 하지 말고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화를 내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그 말에 정 대노야는 또 울화가 치밀었다.
“마음을 편히 갖긴! 내가 마음 편히 갖게 생겼어?”
정 대노야는 침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의원도 강주부에서는 꽤 명성이 있었고, 만만치 않은 성격이었다.
“그건 노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요.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소인은 병이나 고칠 줄 알지, 팔자는 고칠 줄 모릅니다요.”
열받은 정 대노야가 뒤로 넘어갔다. 정 대부인도 울화가 치밀었지만 의원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정 대부인은 아랫것을 시켜 의원을 깍듯이 배웅하게 하고, 정 대노야의 앞에 앉아 눈물을 보였다.
“열받는 건 아는데, 그래도 참으셔야 해요. 지금 우리 집 사정을 생각해 봐요. 어머님은 연로하셨고, 이노야는 저리 밖으로만 도는데 당신까지 잘못되면 정씨 집안은 끝이에요.”
정 대부인이 한탄을 늘어놓았다.
“인생이라는 것도 실은 참는 거예요. 참고 또 참다 보면 지나가기 마련이죠.”
정 대노야를 다독이던 정 대부인은 조금 전 왕 부인이 다녀간 일이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정나미가 떨어지고 비통하여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 대노야는 그런 정 대부인의 모습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마음을 넓게 가지시구려.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맞서야 해.”
정 대부인은 아예 침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보통 독한 애가 아니오. 혼수도 싫다고 할 정도니…….”
정 대노야의 말에 정 대부인이 멈칫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럼 원하는 게 대체 뭐래요?”
정 대부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물었다. 정 대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안을 둘러보며 낙담한 투로 대꾸했다.
“우리 정씨 가문을 망치려는 걸지도 모르겠소.”
정씨 가문을 망치려 든다고?
정 대부인은 경악했다. 정씨 가문을 망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서 좋을 게 뭐란 말인가.
“뭐가 좋냐고? 누가 알겠소.”
정 대노야가 중얼거렸다.
“과로신선이 온 거리를 뒤덮게 됐다지만, 그래서 그 사람한테 좋을 게 뭐가 있어?”
뭐라고? 과로신선? 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과로신선이라니요?”
정 대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으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 대노야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정 대노야는 고개를 홱 돌리며 부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봐라. 집사를 불러와라.”
정 대노야가 밖에 대고 소리치자 집사가 금세 달려왔다.
“거리에 나가 수소문해 보게. 경성의 과로신선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 대노야가 말했다.
정말 알아보라고? 그 시녀가 별 뜻 없이 지껄인 말일 텐데?
집사는 멈칫하면서도 더는 노야를 자극할 수 없어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과로신선이 뭔데요? 뭘 알아보란 거예요?”
정 대부인이 재차 묻자 정 대노야는 한숨을 토했다.
“나도 모르겠소. 일단 알아보고 얘기합시다.”
정 대노야가 말을 얼버무렸다. 정 대부인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친정에서 이 혼사를 못 치르겠대요.”
정 대노야는 흠칫 놀라며 일어나 앉았다.
“그 애를 먼저 보러 간 게 그래서였소?”
정 대노야가 물었다.
“입으로는 아니라는데 보나 마나 뻔하죠.”
생각할수록 마음이 차게 식었다.
“그 바보를 먼저 만나서 얘길 꺼냈대요. 바보가 동의한 걸 보고 나한테 와서 얘기한 거고요. 친정 사람들 눈엔 내가 그 바보만도 못한가 보죠?”
얘기하다 보니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 대노야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러더니 그 바보의 일에 대해 좀 더 알아보라나요.”
정 대부인이 하소연했다.
“알아보라고?”
정 대노야는 부인의 말을 끊으며 소리치다가 기력이 달리는 듯 침상으로 쓰러졌다. 정 대부인은 놀라 입을 다물고 정 대노야를 진정시키려 했다. 정 대노야가 부인의 손을 붙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뭔가 이상하오. 십칠은 한동안 경성에서 지냈고, 그 바보와 같이 돌아왔잖소. 그 바보에 관해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혼사를 서둘렀다가 갑자기 말을 바꾼 거요. 그러면서도 우리한텐 비밀로 하고!”
정 대부인도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정 대노야한테 잡힌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 대부인이 떨고 있는 것인지 정 대노야가 떨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가서 알아봐!”
정 대노야가 이를 악물고 천천히 내뱉었다.
경성의 과로신선에 대해 알아보란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거리로 나선 집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거리로 나설 준비를 마친 터였다. 벌써 이틀째 반복하고 있는 일이었다.
무언가를 알아보러 다니는 사소한 일은 본디 집사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대노야의 심기가 불편한 데다 정씨 가문에 관한 추문이 돌기 시작한 때였다. 사환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지 않았다가 정씨 가문에서 뭔가를 알아본다는 소식이 퍼지기라도 하면 더욱 큰일이었다.
“집사 어른, 또 차를 마시러 나오셨습니까?”
점포를 열던 사람들이 집사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공경과 두려움의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무슨 일인지 떠보려는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집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옅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천천히 말을 몰아 가장 번화한 저자로 나온 집사는 거리에서 가장 크고 북적이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집사 어른, 전에 말씀하신 그 경성에서 유명하다는 요리 말입니다. 진짜 있는 요리더라고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찻집 주인이 직접 맞이하며 말을 건넸다.
진짜 있다고?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집사로서는 뜻밖이었다.
“어서 말해 보시오, 어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여기요, 길 좀 물읍시다.”
누군가가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경성 말씨가 짙게 묻어났다.
집사와 찻집 주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청의를 입은 사환 하나가 보였다. 먼 길을 재촉해 달려온 듯한 고단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뭘 말이오?”
찻집 주인이 물었다.
“북정의 정씨 저택이 어디죠?”
청의를 입은 사환이 말했다.
북정에 대해 묻는다?
찻집 주인은 반색을 하며 정씨 가문 집사를 탁 쳤다.
“사람을 제대로 찾았구려.”
집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환을 쳐다봤다.
경성에서 왔나?
“누굴 찾아오셨소? 누가 보낸 거지?”
경성에서 정씨 가문과 관계가 있는 집안은 주씨 가문뿐인데. 아, 사공자도 계셨군. 혹시 사공자께서 보내신 전갈인가?
청의를 입은 사환은 의심 어린 눈길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누구신지…….”
“이쪽은 정씨 가문의 집사 어른이오.”
찻집 주인이 웃으며 대답하자 청의를 입은 사환은 아, 하고 대꾸했다. 겁을 내거나 경의를 표하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반가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잘됐군요. 정씨 가문의 교랑 아씨께서는 그 댁에 거하십니까? 밖에 따로 거하십니까?”
사환의 물음에 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아, 아니, 교랑 아씨를 찾아온 거요?”
“네.”
“주씨 가문에서 보낸 건가?”
집사의 질문에 청의를 입은 사환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이보십시오, 집사 어른. 내가 주씨 가문의 사람이면 굳이 길을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환의 표정에선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집사는 그런 사환의 눈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럼 어느 댁 사람이오?”
집사가 물었다.
“그래서 정 아씨께선 그 댁에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청의를 입은 사환이 대답 대신 다시 물었다. 집사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진(陳)씨 가문의 사환이 아니더냐?”
모두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집사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을 건넨 이가 진(秦)씨 가문의 여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는 사이란 말이지?
청의를 입은 사환이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어머, 어멈들도 여기 계셨네요! 잘됐다!”
사환이 쪼르르 달려가 예를 표했다.
“어떻게 온 게야?”
“노태야와 노야, 부인께서 새해 선물을 보내셨거든요.”
“진작 말하지. 우리랑 같이 보내면 좋았을걸.”
“따로 와야 더 떠들썩하죠.”
“가자. 우리가 아씨께 데려다줄게.”
이들이 웃고 떠들며 함께 나가는 동안, 찻집 주인과 정씨 가문 집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저들이 말하는 게, 그 정씨 가문 이노야의, 바보 따님 맞지요?”
주인이 떠듬떠듬 묻자, 집사는 대답 대신 입만 쩝쩝 다셨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진씨 가문 사람들도 여기 와서 안 돌아가고 있더니, 이젠 또 다른 진(陳)씨 가문까지 왔네. 두 가문 다 아씨를 보러 온 것 같은데. 가만있자, 근데 어느 진(陳)씨 가문이려나?
“지부 대인, 지부 대인!”
강주부 관아. 식객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지부 등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식객이 사람들 앞에서 이리 추태를 부리니 지부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지부 대인, 진(陳)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식객은 지부의 안색을 살필 겨를도 없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진씨 가문이라니?”
지부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경성이요. 진소 상공 댁 말씀입니다.”
식객의 대답에 지부뿐 아니라 옆에 앉아 있던 하급 관리 둘도 벌떡 일어섰다.
“아니, 갑자기 연통도 없이 어찌?”
송 지부는 황망해하며 서둘러 사람을 시켜 관복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아닙니다. 대인, 진씨 가문의 하인이 온 겁니다. 역참 사람이 방금 소식을 전해 왔지 뭡니까.”
식객이 말했다.
또 하인이라?
송 지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식객을 쳐다봤다.
“그럼, 혹시 또 정씨 가문?”
송 지부의 물음에 식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통판과 절도추관도 불려왔다. 좀 더 정확한 소식도 속속 도착했다.
“곧장 정씨 저택으로 향한 게 아니라 남정으로 갔답니다.”
“고소를 했던 정 낭자가 남정에서 지낸다 합니다.”
“맞습니다. 진(秦)씨 가문 여인들이 직접 안내하여 정 낭자를 만났고요!”
거기까지 들은 송 지부는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쳤다.
“감히 겁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인다 했더니, 역시 뒷배가 있었군.”
‘뒷배’라는 말에 통판과 절추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들에게 뒷배는 장단점을 모두 갖춘 것이었다. 장점은 정 대노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고, 단점은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건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통판이 나지막이 물었다. 정씨 가문의 돈을 어떻게 나눠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나? 그렇다면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송 지부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자 옆에 있던 절추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낭자가 말했잖습니까. 혼수는 필요 없고 명예를 원한다고.”
송 지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떨어질 게 없으면 일찍 일어나지 않는단 말도 있네. 이익을 원치 않을 수가 없지. 더구나 자기 돈인데.”
통판이 허벅지를 탁 내리치며 대꾸했다.
“그럼 어려울 게 없지요. 우리가 맡은 사건은 정씨 가문의 사건이지, 정 낭자의 사건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혼수는 건드리지 않되 다른 방식으로는 얼마든 괴롭혀도 된다는 것이렷다.
괴롭힐 이유도 충분하고, 이제는 괴롭힐 배짱까지 생겼다. 정 낭자가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던가. 돈은 필요 없다고. 정씨 가문이 대가를 치르기 바랄 뿐이라고.
통판의 말을 들으며 지부와 절추도 퍼뜩 깨달았다. 통판이 찻잔을 들었다.
“고명하구려, 참으로 고명해.”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은 차를 술 삼아 잔을 부딪치고 찻잔을 단숨에 들이켜며 큰 소리로 웃었다.
“부인, 부인, 저기 좀 보세요.”
정 이부인과 함께 걸어가던 두 여종이 골목에 서서 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또 아씨를 찾아왔나 봐요. 그것도 경성 사람이요.”
또 경성에서 사람이 왔다니. 정 이부인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저쪽을 쳐다봤다.
진(秦)씨 가문 마차에 버금갈 정도의 마차였고, 마차에서 내리는 여종들 역시 옷차림이 깔끔했다. 이번에도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를 내리고 있었다.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내쫓으려 하면 미안하다고 빌면서라도 거기 남아 있어야 했는데.”
정 이부인이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물었다.
“이번엔 어느 집이래?”
“진(陳)씨라고 하던데요.”
여종이 대답했다.
경성의 진씨 가문? 진씨 성을 가진 이는 한둘이 아니었지만 정 이부인이 아는 진씨는 많지 않았다. 이를테면 진소 상공 댁이라든가. 그 외의 진씨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공주부 진씨 가문과 친해 보이네. 그럼 저쪽도 대단한 집안이겠지.”
정 이부인이 혼잣말을 했다.
한편 같은 시각 정 대노야도 집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진(陳)씨?”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성에서 왔다고?”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 대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누구지? 대체 경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부인은 돌아왔는가?”
정 대노야가 물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정주의 왕씨 가문으로 간 대부인이 얼추 돌아올 때가 됐을 무렵이었다.
“노야, 그리고 과로신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집사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어서 말해 보게.”
정 대노야가 말했다.
“본디 두씨 성을 가진 자가 만든 건데, 장사가 아주 잘 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경성에 낙득자재라는 요리가 또 나왔고요. 과로신선과 비슷하면서도 가격은 무척이나 저렴한지라 과로신선의 인기가 차츰 시들해졌답니다. 두씨 성을 가진 자는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통에 장사가 더욱 안 됐고요. 결국 두씨는 점포를 팔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집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은 또 과로신선이 또 장사가 아주 잘 된다네요. 엄청 비싸서 경성에서 아주 유명한 주점이 됐다고 합니다. 아무나 먹을 수 없어서 고관대작과 귀인들만 찾는 곳이라지요. 특히 지금과 같은 겨울에는 좌석 하나 얻기도 힘들 정도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마친 집사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그 시녀의 말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정 대노야는 수염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두씨 성을 가진 자. 인기가 많았다가 갑자기 낙득자재가 나오면서 장사가 안 됐다. 그러다가 점포를 팔았고…….
다른가?
두씨 성을 가진 이가 있었다. 누군가가 과로신선을 만들어 먹는 걸 보고 그걸 베껴 장사를 한 덕에 떼돈을 벌었다.
그러자 두씨 성을 가진 자는 과로신선이 자신의 것이라 우겼다. 그래서 처음에 과로신선을 만들어 먹은 사람을 만나자 고마워하기는커녕 경계하며 협박까지 했다.
과로신선을 만들었던 사람은 과로신선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며 돈을 마다했다. 그 결과 경성에는 낙득자재라는 요리가 등장했다. 과로신선과 비슷하면서도 가격은 훨씬 저렴한 것이었다.
결국 돈도 안 되는 과로신선이 온 거리를 뒤덮게 됐다. 그로 인해 과로신선의 장사가 안 되자 두씨 성을 가진 자는 점포를 팔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수염을 쓰다듬던 정 대노야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다른 게 아니야. 같아! 같은 이야기라고!
“그래서 지금 과로신선은 누구의 것이라더냐?”
정 대노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주인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느 고관대작과 관계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집사의 대답에 정 대노야가 다그쳐 물었다.
“이를테면 진씨 가문에서…….”
집사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 대노야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진씨 가문?”
정 대노야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진씨 가문?”
집사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진, 진소 상공 댁은 아니겠지요.”
정 대노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네가 어찌 알아? 바깥의 진씨 가문이 진소 상공 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
집사는 경악했다.
뭐라고? 그럼 정 낭자한테 새해 선물을 가져온 진씨 가문이 진소 상공 댁이란 말이야?
“확실히 알아보면 될 일을, 매사 혼자 넘겨짚기만 하지. 생각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다를 게 뭐 있어!”
정 대노야의 호통에 놀란 집사는 황급히 일어서서 알아보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남정 쪽은 여전히 북적북적했다. 마차와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으니 아이들과 여인들은 타향 말씨를 쓰는 이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폈다. 남정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을 정도의 외양은 아닌 데다 일부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며 친근하게 군 덕에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집사는 심호흡을 한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또다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또 누가 오나?
놀라 쳐다보던 집사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천지신명이 도우셨는지 이번에는 그래도 아는 사람이었다. 마차 앞에 탄 노복은 장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장씨 가문!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집사가 숨을 멈췄다.
서, 설마!
“사람이 많구려.”
장씨 가문의 노복이 여유로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두 진씨 가문 사람들은 노복을 모르는 눈치였다.
“어르신도 새해 선물을 가져오셨습니까?”
진(陳)씨 가문 시종이 떠보듯 물었다.
또 누구지? 동 내한의 가문에서 새해 선물을 보내리라는 건 알고 있다만. 말씨를 보아하니 여기 사람 같은데.
“새해 선물은 아니오. 누가 물건을 좀 전해 달래서 왔지.”
노인은 느릿느릿 대답하고는 문 앞에 있는 이들을 향해 물었다.
“누가 정 아씨의 사람이지?”
주씨 가문의 시종 하나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나는 장씨 가문의 사람이오.”
노복이 시종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장씨. 현지 말씨. 장씨 가문.
옆에 있던 진(秦)씨 가문 여인들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진(陳)씨 가문 사내들이 퍼뜩 깨달았다.
노야께서 장순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욕하신 적이 몇 번 있지. 강주, 강주라고.
“장강주 선생 댁 말씀입니까?”
진(陳)씨 가문의 사내가 불쑥 나서며 물었다. 그러자 진(秦)씨 가문 여인들도 몹시 놀란 눈치였다.
강주 선생 댁에서도 정 아씨한테 물건을 보내다니!
노복은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 주씨 가문의 시종에게 말했다.
“우리 노태야…….”
그 말에 정씨 가문 집사를 비롯하여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고 숨을 참았다.
무려 장씨 가문 노태야의 신분을 꺼내다니. 두 진씨 가문에서 부인이나 노야의 명의로 온 것과는 격이 달랐다. 노태야라면 이들보다 더 윗대니 그럴 수밖에.
“……의 몸종 반근이…….”
장씨 가문의 노복이 느릿느릿 말을 잇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곧 헙,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장 노태야의 몸종이면, 그건 곧 장 노태야의 뜻과 같다는 걸 의미했다.
정씨 가문의 집사는 어리둥절했다.
반근이라니,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은데.
문 앞에서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심란해졌다. 시끌벅적한 문 앞과 달리 정교랑이 있는 방 안은 조용했다.
“이건 단랑 아씨께서 아씨께 드리라고 따로 특별히 챙겨 주셨어요.”
진 상공 댁 여종이 웃으며 작은 함 하나를 내밀었다.
“아씨께서 가장 먼저 보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반근이 웃으며 받아 함을 열자 토기 인형이 나왔다. 반근이 웃으며 정교랑에게 건넸다. 팔걸이에 기대앉아 있던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았다.
“아씨를 닮았다고 하진 않을게요.”
여종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하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입을 가린 채 웃고 있는 미인 토기 인형을 보며 정교랑도 따라 웃었다.
진단랑……. 정교랑의 동생 중에도 단랑 또래의 여자아이가 여럿 있었지만…….
“그래, 고맙네.”
정교랑이 말했다.
진씨 가문의 여종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의아하다는 눈빛이 언뜻 스쳤지만,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예를 표한 후 물러났다.
반근은 이들을 직접 배웅하며 밖으로 나왔다. 대문 앞으로 와서야 고개를 돌리고 안쪽을 쳐다봤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정교랑이 팔걸이 의자에 가만히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옆에 놓아 둔 토기 인형과 같은 모습으로.
대문 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는 뚝딱뚝딱 집을 고치는 소리도 들렸다. 활기 있고 생기 넘치는 소리였다.
문 하나를 두고 딴 세상처럼 한쪽은 더없이 고요하고 한쪽은 활기가 넘쳤다.
반근은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쉰 다음 가만히 예를 표하며 진씨 가문 여종들을 배웅했다.
선물을 보내고 난 두 진씨 가문 사람들은 묵을 곳을 마련해 주겠다는 조 집사의 뜻을 간곡히 거절하고 작별을 고했다.
“따로 안 챙겨 주셔도 됩니다. 저쪽의 반근 누이가 벌써 다 보내 줬어요.”
두 진씨 가문 사람들이 말했다.
조 집사와 반근은 웃으며 예를 표하고 성 밖까지 나가 배웅하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이들의 떠들썩한 행렬은 성 밖으로 나가는 내내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무슨 일인지 수군거리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역시 진소 상공 댁의 사람이었군.”
대청에 앉아 집사의 보고를 듣고 있던 정 대노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집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뭐? 어서 말하게.”
집사가 뜸을 들이자 정 대노야가 재촉했다.
“장강주 선생 댁의 사람도…….”
집사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정 대노야는 또다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댁에서도 사람을 보냈던가?”
정 대노야가 찻잔을 움켜쥐며 물었다.
장씨 가문까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두 진씨 가문과는 다릅니다. 장씨 가문에서는 몸종을 대신해 물건을 보낸 거라고 했습니다.”
집사는 밝은 목소리였지만, 정 대노야는 들고 있던 찻물을 집사의 얼굴에 끼얹어 버렸다.
“다르긴 뭐가 달라! 장씨 가문 몸종이 자네한테는 왜 아무것도 안 보내는데?”
정 대노야의 호통에 집사는 얼굴에 있는 찻물을 닦지도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 대노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을 서성였다.
경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수많은 이들이 그 바보를 아끼는 게야? 주씨 가문 때문인가?
퉤! 어림없는 소리!
정 대노야는 속으로 침을 뱉었다. 곁가지들이 돈을 노리고 친하게 구는 거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인이 주인의 명첩을 들고 먼 길을 달려와 보란 듯이 새해 선물을 바칠 정도라면 얘기가 달랐다. 주씨 가문은 관두고 주씨 가문 같은 집안 열 개를 합친다 해도 그 정도 대우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대체 경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한편 같은 시각 왕씨 저택.
정 대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그 얘길 꺼내고 있었다. 대청에는 왕 부인 외에도 왕 노야, 왕 노부인이 함께 있었다.
“다 같은 식구가 아니냐. 네 누이한테 숨기는 게 있으면 냉큼 말하거라.”
왕 노부인의 말에 왕 부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딱히 숨기는 것도 없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 대부인이 말을 끊었다.
“이만 갈게. 다시는 이 집안 문턱 안 넘어. 시집간 여식은 출가외인인 걸 내가 깜빡했네.”
정 대부인이 울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황급히 말렸다.
“누님, 정말 숨기는 거 없습니다. 저희도 들어서 아는 정도인데, 정 낭자가 무슨 선술(仙術: 신선이 행하는 술법)을 익힌 것 같습니다. 병을 고치기도 하고 그런가 봐요.”
왕 노야가 말을 이었다.
“직접 본 건 아니고 노복한테 들은 겁니다. 진위 여부도 잘 모르는데 누님한테 섣불리 말할 순 없잖습니까. 그리고 말을 한들, 누님이 믿으셨겠습니까?”
선술을 익혔다고? 병을 고쳐?
정 대부인은 멈칫하며 눈물을 뚝 그쳤다.
선술을 익혔다면…….
예전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기고 안 믿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 대노야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그리고, 이제 진인이니 도사니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마시오. 그 여인네가 바보를 어찌 감당하겠소? 도사라는 그 여인이 바보한테 큰절까지 올리던 걸 내 눈으로 봤단 말이오.
더 고명한 선술을 익힌 사람이니, 큰절을 올렸겠지.
“믿어.”
정 대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도리어 왕씨 가문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이런 말을 정말 믿는다고? 믿는다니 다행이긴 한데.
왕 노야 내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정 대부인은 눈빛을 반짝이며 왕 노야와 왕 부인을 보고 다그쳐 물었다.
“그 일 때문에 마음이 동했던 거라면, 또 무슨 일로 혼사를 번복하게 된 건데?”
“십칠이 싫다잖아요.”
왕 부인의 말에 정 대부인은 냉소를 지었다.
“잊지 마, 나도 왕씨 가문 사람이야. 내 몸에도 왕씨 가문의 피가 흐른다고. 내가 왕씨 가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를 것 같아?”
왕 부인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말씀드릴 테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왕 노야가 입을 열었다. 정 대부인이 냉소를 지었다.
“더 놀랄 일도 없어. 어디 놀랄 일이 한두 번이었어야 말이지!”
“사람을 죽였어요.”
갑작스러운 왕 노야의 말에 정 대부인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한 채 멍하니 동생을 바라봤다.
“뭐라고?”
정 대부인이 물었다.
“사람을 죽였답니다. 그것도 두 명이나.”
왕 노야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대답했다.
사람을 죽였다고…….
정 대부인이 퍼뜩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소동이 떠올랐다.
- 살인이에요, 살인! 활과 화살을 들고 절 쏴 죽이려 했습니다.
정말, 사람을 죽였다고?
“십칠이 제 눈으로 직접 봤답니다. 아주 깔끔하게 죽였대요. 두 사람 때문에 벌어진 일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선수를 쳐서 깔끔하게 죽여 없앴답니다. 죽일지언정 한 놈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거죠.”
왕 노야는 노복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인 양 생생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어두운 밤, 화재, 맹렬한 바람, 손에 활을 든 여인,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글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유성처럼 빠르게 내달리는구나.(颯沓如流星)
열 보에 한 사람씩 죽이며 천 리를 가도 멈추지 않네.(十步殺一人 千里不留行)
일을 마친 후 옷소매 훌훌 털고 떠나리라.(事了拂衣去)
- 이백의 <협객행> 중.
정 대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정말로?”
왕 노야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큼, 아니지, 내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왕 노부인이 염불을 했다.
“그래서 십칠이 돌아오자마자 놀라 그 꼴이 됐구나. 죽네 사네 하면서 이젠 죽은 목숨이라고 했지. 그런 여인을 들였다가, 언제 죽을지 누가 알아!”
왕 노부인이 말했다.
“그래서 방법이 없었어요. 형님을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십칠이…… 진짜로 두 번이나 목을 맸다니까요.”
왕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하소연하자 정 대부인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나한테 말도 안 해?”
왕 부인과 왕 노야가 눈을 마주쳤다. 언뜻 안도의 눈빛이 스쳤다.
“우리도 겁이 나서 그랬죠. 형님네 집에 일이 많기도 했고요.”
왕 부인이 말했다.
“너희도 어서 그 바보와 선을 그어라. 내쫓는 게 제일 좋아. 집에 두면 절대 안 된다. 화근덩어리야. 애초부터 불길한 아이였어. 남기지 말아야 할 걸 남겨 뒀으니, 그 애가 너희를 잡아먹을 거야.”
왕 노부인이 말했다.
“아휴, 어머님. 그런 말씀 마세요. 가뜩이나 형님도 마음이 안 좋을 텐데.”
왕 부인의 말에 정 대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았으니 서둘러 돌아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됐구나.”
왕 노부인이 안타까운 듯 딸을 보며 말했다.
“며칠 머무르며 푹 쉬다 가거라.”
“벌써 이틀이나 나와 있었는데 쉬긴요. 집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정 대부인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왕 노야와 왕 부인이 직접 나가 배웅했다. 마차가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두 부부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형님을 이렇게 속여도 될까요…….”
왕 부인은 주저하는 표정이었지만 왕 노야는 단호했다.
“속이긴 뭘 속여? 다 말하지 않았소. 병을 치료한다는 일을 숨겼나, 사람을 죽였다는 일을 숨겼나?”
그러고 보니 다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왕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형님네 집안일은 그만 걱정하고, 정 낭자랑 어떻게 협업할지나 생각해 봐요. 정 낭자가 어디에 관심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왕 부인의 말에 왕 노야도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을 재촉한 정 대부인은 저녁 무렵 집에 도착했다. 먼 길을 달려온 탓에 고단했지만 쉴 새도 없이 정 대노야에게 말을 전하러 갔다.
“선술을 익혀 병을 고친다고? 길에서 사람을 죽이고?”
정 대노야는 무척 놀란 눈치였다.
“그렇다니까요. 그 일로 여러 사람이 놀랐나 봐요.”
정 대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뭐 딱히 드문 일도 아니죠. 전에도 그런 소문이 있었잖아요. 누구네 집 바보랑 누구네 집 벙어리가 갑자기 신선을 만났다나 하는 얘기요. 병도 고치고 앞일도 내다보고 못 하는 게 없죠. 그 애도 바보였으니 그런 일이 생길 만도 해요.”
정 대노야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정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이틀이나 가 있었으면서 그런 말에 속아 돌아온 거요?”
정 대노야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혈육의 정도 외면할 정도니 당신 아우도 참 독하구려. 앞으로는 그 집에 걸음을 끊는 게 좋겠소.”
정 대부인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정말 선술 덕에 병을 치료한 거면, 그 사람들이 혼사를 추진하려 했겠소?”
정 대노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무녀나 박수무당은 사도(邪道)로 여겨졌기에, 보란 듯이 혼례를 올리는 일이란 불가능했다. 한다하는 가문과의 혼례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퍼뜩 깨달은 정 대부인은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아, 아니…….”
말문이 막힌 정 대부인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된 거야? 그 간단한 이치를 왜 생각하지 못했지?
“당신을 속인 건 아니오. 반만 말한 거지. 그 애가 병을 치료할 줄 아는 건 확실하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들 중 하나를 치료한 게 틀림없어.”
정 대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공주부 진씨거나 진 상공 댁일 수 있지. 아니면 혼담을 넣었던 다른 가문일 수도 있고.”
정 대노야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정 대부인이 입을 열었다.
“사람도 죽였대요. 그 바람에 십칠이 놀라 절대 안 된다고 해서 혼사를 무르게 된 거고요.”
“사람을 죽였다는 것도 사실이겠지. 궁술이 뛰어났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을 게야.”
정 대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십칠이 직접 목격했다면, 십칠이 돌아오자마자 그 일을 바로 알았을 텐데…….”
정 대노야가 머리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공주부 진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는 십칠이 돌아온 후였어. 하지만 혼사는 이제 막 물렀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정 대노야는 냉소를 지으며 손으로 탁자를 탁 내리쳤다.
“그 일로 혼사를 무르긴! 십칠은 살인을 무서워할지 몰라도 당신 아우가 어디 그럴 사람이오? 오히려 좋아 죽을 사람이지. 이제 보니 그래서 혼사를 서둘렀던 게로군.”
정 대부인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공주부 진씨 가문 사람들이 왔을 때, 당신 올케 표정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시오. 그때 당신한테 뭐라고 했지?”
그때 뭐라고 했냐고?
막 문을 들어선 올케는 안색이 몹시 안 좋았어. 자꾸만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키면서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 보였지. 그러다가 진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천하에 진씨 성을 가진 자가 한둘도 아닐 텐데, 경성에서 왔다는 말 한마디에 대뜸 공주부 진씨 가문이냐고 물었지.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적어도 진씨 가문과 정교랑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
그러더니 혼사를 서두르자고 했어. 날 잡아당기며 혼담에 관한 건 주씨 가문에서 벌인 일이 틀림없다고, 절대로 동의해선 안 된다고 누차 당부했지.
정 대부인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사람들이 아무리 대단한들 정씨 가문과는 아무 관계도 없잖아요. 혼사를 치른들 괜히 주씨 가문만 좋은 일 시키는 거지.
사람은 자기부터 챙기기 마련이에요.
그래. 그 사람들이 아무리 대단한들 왕씨 가문과는 아무 관계도 없겠지. 혼사를 치른들 우리 정씨 가문만 좋은 일 시키는 거고. 사람은 자기부터 챙겨야 하잖아.
정 대부인은 괴성을 지르며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치고 발로 걷어차 버렸다.
거짓말! 거짓말! 전부 거짓말이었어! 그래도 한 식구라 여겼는데!
혈육의 정이고 뭐고 없어! 전부 거짓말이라고! 이런 망할 것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정평은 마침내 남정에 들어섰다. 누가 길을 막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이제 할 필요가 없었다.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며 놀고 있었다. 정평이 소리쳐 부르자, 아이들이 놀이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정평을 쳐다봤다.
“사기꾼이 돌아왔다!”
정평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아이들이 먼저 소리를 질러댔다. 정평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으며 몸을 돌렸지만,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 눈덩이가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정평이 다시 손을 내리며 돌아서자 아이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무슨 호랑이라도 됐나?
정평은 이를 드러내고 발톱으로 할퀴는 동작을 하며 어흥 하고 포효한 다음, 어깨를 으쓱하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눈이 펑펑 내리는지라 묵을 곳부터 마련해야 했다. 정평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으며 걸었다. 골목으로 들어서던 찰나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그 아이들이 다시 나타났다. 아이들 뒤로는 아낙들도 몇 명 보였다.
놀란 정평은 얼른 걸음을 멈추고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손을 내보였다.
“아이고, 평 총각. 왜 이제야 왔어.”
아낙 하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평 총각?
정평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낙을 쳐다본 다음 고개를 돌리며 뒤쪽을 확인했다. 텅 빈 골목에는 정평 외에 아무도 없었다.
아낙이 손을 뻗어 정평을 덥석 붙잡으며 앞으로 끌고 갔다.
“총각 말하는 건데 뭘 두리번거리고 그래. 어딜 갔다가 이렇게 오랜만에 돌아와. 곧 새해잖아. 다들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러잖아도 찾으러 가야 하나 얘기하던 참인데…….”
뭐가 어째?
“아주머니, 다들 절 찾으셨다고요? 무슨 일로요?”
정평이 뒷걸음질을 치려 하며 물었다. 하지만 이미 두 아낙이 웃으며 에워싸고 잡아끄는지라 숨으려 해도 숨을 수 없었다. 정평은 떠밀리다시피 어느 집 앞으로 향했다.
“지낼 곳은 깨끗하게 정돈해 놨어.”
아낙들이 웃으며 말했다.
정평은 눈앞에 있는 집을 쳐다보았다. 풀과 나무로 지은 허름한 초막이라고는 하나 이곳 남정에서는 꽤 괜찮은 편에 속했다.
“제 집이라고요?”
정평이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누추하지만 조금만 참아. 새해가 되어 저쪽에 집을 다 지으면, 자기도 새집으로 옮겨 갈 거야.”
아낙들이 웃으며 말했다.
새집까지 있다고?
정평은 놀라 아낙들을 쳐다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다른 곳을 찾아온 건가? 아니면 꿈인가?
정평은 자신을 꼬집어 보다가 아얏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엇?”
정평이 갑자기 멈칫하며 저쪽을 쳐다보았다.
“저, 저건 정 대노야가 아니십니까?”
사환 하나가 우산을 받쳐 들고, 사환 하나가 사내를 부축하며 어느 집 문 앞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사내는 두봉을 걸치고 두모까지 쓰고 있었지만 정평은 그 사내가 정 대노야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봤다.
“그래, 맞아. 정 대노야께서 또 정 아씨를 찾아오셨네.”
아낙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정평의 시선이 다시 두 아낙을 향했다. 이번에도 놀란 표정이었다.
남정 사람들에게 정 대노야는 신과 같은 존재인지라 다들 극진히 공경했다. 물론 마주칠 기회조차 거의 없었지만.
그런데 지금 이 아낙들을 보면 늘 보던 일이라 신경도 안 쓰인다는 투였다.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말투며 표정에서도 드러났다.
내가 이곳을 비운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정 아씨요? 어느 정 아씨 말입니까?
무언가 떠오른 듯 정평이 물었다. 아낙들이 웃으며 대꾸했다.
“전에 봤던 그 정 아씨 말이야.”
정평은 누굴 말하는지 퍼뜩 깨달았지만, 그래도 아리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정 아씨가 왜 여기서 지내세요?”
그때 문이 열렸다. 반근은 문밖에 선 정 대노야를 바라보며 대책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노야, 왜 또 오셨어요? 저희 아씨께서는 손님을 안 만나시겠대요.”
대문 처마 아래에 서 있던 주씨 가문 시종들이 반근의 말을 듣고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정 대노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난 손님이 아니다. 가서 전하거라. 지금 시간이 없으면 내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남이 아니니 실례라 할 순 없을 것이다.”
손님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손윗사람이었다. 고소까지 했는데 눈까지 내리는 엄동설한에 손윗사람을 문밖에 세워 두다니. 쓰러지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것까지 막긴 힘들었다.
반근은 정 대노야를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발을 구른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정 대노야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서책을 들고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지라 그 모습은 희미하게 보였다.
활을 쏘는 건 주씨 가문에서 가르칠 수 있다만, 병을 고치는 건 누가 가르쳐 줬을까?
바보의 병도 좋아질 수가 있나? 정말 기인이라도 만났나? 본디 심한 바보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호전됐는데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아 몰랐나?
어찌 됐든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얘기하는 수밖에.
“대체 무슨 생각이냐? 적당히 좀 하지?”
정 대노야가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죠.”
정교랑은 서책을 내려놓고 정 대노야를 보며 미소를 지어다.
“적당히 좀 하지 그러셨어요. 어릴 때 일은 따지지 않을 생각이에요. 인지상정이니 원망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 후의 일은 좀 심하셨어요. 정도를 못 지키고 점점 더하셨죠. 그런데 이제 와서 나보고 적당히 하라고요?”
뭘 점점 더해? 누가 할 소리를.
정 대노야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제 원하는 게 뭐냐?”
정교랑이 정 대노야를 쳐다봤다.
“그리 물으시다니, 아직도 내가 장난하는 줄 아나 봐요?”
내가 장난하는 줄 아나 봐요?
정 대노야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여인이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혼수를 원한대서 준다고 했잖아. 뭘 더 바라는 게야?”
정 대노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혼수요?”
정교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받든 말든 신경 안 써요.”
신경 안 쓴다고?
정신이 든 정 대노야가 다시 냉소를 지었다.
정녕 신경 쓰지 않는다면 굳이 관부까지 찾아가 일을 키운 건 또 뭔데?
“신경을 안 쓴다니? 그럼 관부의 탐관오리들을 주려고 그 돈을 갖다 바친 게야?”
정교랑이 정 대노야를 힐끔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돈은…….”
그때 대문 밖에서 마차 소리와 함께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누가 왔어?
정 대노야가 고개를 돌려 대문 밖을 쳐다보았다.
남정 쪽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은 정 대노야도 들어 알고 있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새해 선물이 도착하는데 대부분 경성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이 엄동설한에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새해 선물을 보낼 정도라면 보통 잘사는 집은 아닐 것이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고.
그 정성을 들이는 이유는 뭔가 이익을 바라서겠지. 이를테면 병을 고친다든가!
정 대노야는 다시금 어금니를 깨물며 왕씨 가문을 떠올렸다.
“아씨, 경성 점포에서 배당금을 가져왔어요!”
금가아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반근도 반색을 하고 일어서며 물었다.
“반근 언니도 왔어?”
대문 밖에서 누가 들어왔다.
“반근 누이는 못 왔어. 연말이라 경성에 일이 몰려서 말이지. 도저히 시간을 못 내겠다며 아씨께 죄송하다고 전해 달래.”
두꺼운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쓴 중년 사내가 들어오며 말했다. 얼굴에 먼 길을 달려온 티가 났다. 사내는 대문을 들어서자 이쪽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어서 들어와서 몸 좀 녹이세요. 금가아, 가서 차 가져와.”
“진작 당도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눈이 하도 와서 지체됐어.”
“곧장 진주원으로 가면 수고도 덜고 좋죠, 뭐.”
“반근 누이와 오 관리인이 연말에 바쁠 거랬는데, 이렇게 나오니 좋네. 이렇게 얼굴도 보고.”
마당에 한두 사람이 늘었을 뿐인데, 웃고 떠들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분주하다 보니 일고여덟 명은 있는 것 같았다. 정 대노야는 회랑 아래에 서 있으면서도 이곳과 동떨어진 곳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정 대노야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이들은 누구지?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경성의 점포? 배당금? 아니, 반근은 여기 있는 거 아니야? 왕씨 가문에서 숨기는 게 더 있나?
“대노야, 용건 끝나셨으면 그만 돌아가세요.”
귓가에 몸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 대노야는 자신이 그 집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문 밖은 안보다 더 시끌벅적했다.
커다란 마차 두 대에서 짐을 내리는 가운데, 아이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들은 경성에서 온 이들이 이따금 던져 주는 사탕을 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세 점포에서 따로 보냈네요?”
“대관리인이 한꺼번에 보내자고 했더니 다들 반대하지 뭐야. 주인 아씨께 점수를 딸 기회를 대관리인 혼자 독점하게 둘 순 없다나.”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정 대노야는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세 점포?
“그럼 대관리인만 더 좋은 거 아니에요? 각자 따로 보내면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생색만 내면 되는데.”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태평거 거고, 이건 신선거 거야. 그리고 이건 약포 거. 좀 특이해 보이지? 약포 관리인이 자기들이 버는 돈은 다른 두 점포에 훨씬 못 미치는 걸 알고 더 공을 들였거든. 이 물건들 좀 봐. 보통 정교한 게 아니야.”
마차 앞을 에워싼 아이들과 사람들이 물건을 구경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정 대노야는 홀린 듯 앞으로 다가가 한 사내를 툭툭 쳤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정 대노야를 쳐다봤다.
“그 신선거라는 곳 말인데, 거기서도 과로신선을 파나?”
정 대노야가 사내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르신, 아닙니다.”
아니구나.
정 대노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도 파는 게 아니라…….”
사내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우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서만 팝니다. 경성에서 우리 점포만 독자적으로 팔죠.”
정 대노야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우리 점포? 그럼 그 과로신선이…….”
정 대노야는 고개를 홱 돌려 정교랑 거처의 대문을 바라보고, 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가리켰다. 뭐라 말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과로신선은 우리 아씨 거예요.”
사내가 웃으며 말을 이어받았다. 사내는 정 대노야의 예사롭지 않은 옷차림을 보고 호기심이 인 듯 물었다.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누구냐고? 난 바보다!
정 대노야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안에서만 맴돌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이 떡 벌어진 정 대노야는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귓가가 웅웅 울렸다.
신경을 안 쓴다니? 그럼 관부의 탐관오리들 주려고 그 돈을 갖다 바친 게야?
그 돈은…….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이미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는데, 속 시원하게 분풀이나 하자고 푼돈 쓰는 걸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어쩐지 그런 맹랑한 짓을 한다 했네! 어쩐지 돈 아까운 줄 모른다 했어!
이 바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같은 시각 경성. 경성엔 눈이 내리지 않아 하늘이 맑았다. 겹겹의 전각으로 둘러싸인 황궁은 한층 활기차 보였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황궁도 분주해졌기 때문이다.
“전하, 전하. 왕부에서 새해 선물이 왔습니다.”
내시가 웃으며 들어와 예단을 건넸다.
“가서 보시겠습니까, 전하?”
진안 군왕은 쭉 폈던 다리를 오므리고 책상다리로 앉으며 손을 뻗어 예단을 받았다.
“이번에도 작년 거랑 똑같네.”
진안 군왕이 목록을 훑으며 말했다.
“옷도 못 입을 것 같고. 작년엔 작아서 못 입었는데, 이번엔 클지 작을지 모르겠네.”
왕부의 담당자가 일괄적으로 준비해 보내는 예단인지라 양식도 매년 똑같았다.
“어머니나 형제들이 보낸 서신은 없고?”
진안 군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묻지 않게 되는 일도 많았지만, 유독 이 질문만큼은 단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대답 역시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연말이라 바쁘다 보니 왕비님께서 챙길 겨를이 없으셨을 겁니다. 전하, 두 달 전에 왕비님께서 서신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내시가 웃으며 말하자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참, 두 달 전에 어머니께서 서신을 보내셨지. 그걸 잊었구나. 아우의 작위에 관해 알아보라고 하셨는데, 말씀을 올린다는 걸 깜빡했네.”
진안 군왕이 웃으며 자리에 일어났다.
“새해에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기분이 좋으실 때 기회를 봐서 말씀드려야겠다. 가자. 해마다 똑같지만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잖아. 집에서 온 선물인데 보러 가야지.”
진안 군왕의 손에 있던 예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안 군왕은 비단 옷자락으로 예단을 스치며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막 문을 나서는데 맞은편에서 이황자가 신이 난 얼굴로 걸어왔다.
“형님, 우리 지도 보러 아바마마께 가요.”
그날 이후로 이황자는 지도에 관심을 보였고, 지도 보는 법을 영리하게 깨쳤다. 그러자 황제는 아예 태사국 관리를 시켜 지리를 가르치게 했다. 딱히 무언가를 익히라기보다는 재미 삼아 놀라는 의미였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자는 지도를 볼 수 있지만 군왕에게 지도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 보세요. 난 어머니한테 새해 선물이 와서 보러 가야 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요? 좋겠다. 형님, 어서 가 봐요.”
이황자가 신이 나서 말했다.
“좋은 특산품이 있으면 남겨 둘게요. 막내아우가 전하의 또래니 분명 장난감을 보냈을 거예요. 갖고 놀게 챙겨 놓겠습니다.”
이황자는 더욱 신이 나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전하, 어서 가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뒤에서 내시가 주의를 주었다.
“황후마마께서 당부하셨잖습니까.”
이황자는 알았다고 하며 진안 군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쫄랑쫄랑 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대황자도 떠밀리다시피 문을 나서고 있었다.
“마마, 전 가기 싫습니다. 책도 아직 못다 외웠어요.”
귀비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책을 외워? 책을 외워 뭐해! 네 부황께서 좋아하시는 건 그게 아니야. 좀 배워라, 배워. 벌써 얘기 다 들었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 하문하실 때마다 제대로 대답도 못 한다며?”
“전 그거 배우는 거 싫어요.”
대황자가 억울한 듯 대꾸했다.
“시끄럽다. 좋고 싫은 게 어디 있어? 뭘 배우는지가 중요해? 부황께서 뭘 보고 싶어 하시는지가 중요하지.”
귀비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대황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온화한 말투로 다독였다.
“착하지, 우리 사가아(四哥兒: 대황자의 별칭). 어미 말 듣고 어서 가 봐.”
대황자는 하는 수 없이 알았다고 대답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 언니가 저한테 선물 안 보냈어요?”
진단랑이 외치며 안으로 통통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안에서는 진소 내외와 그 딸들이 여종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진단랑의 등장으로 얘기가 끊겼다.
“체통을 지켜야지 웬 호들갑이냐.”
진소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무라자 진단랑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잘못을 시인했다. 진십팔랑이 옆자리를 가리키며 이리 오라고 손짓하자 진단랑은 얼른 다가가 언니들 사이에 앉고는 기대의 찬 눈빛으로 여종의 보고를 기다렸다.
“정 언니는 잘 지낸대? 언제 돌아온대?”
진단랑이 소곤거리자 진십팔랑은 진단랑을 향해 고개를 가로젓고 입 다물라는 눈짓을 보냈다.
“지친 표정에 울적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진(秦)씨 가문 사람들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른다고?”
진소 부인의 물음에 여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수와 관련된 송사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거든요.”
“그럼 송사 때문이겠네.”
진소 부인의 말에 진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낭자가 소송 같은 문제로 괴로워할 것 같소?”
“어쨌든 여인이에요. 게다가 아직 십팔랑 또래의 어린 낭자죠.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가 봤자 뭐 좋을 게 있다고.”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더니 다시 여종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다른 가문에도 별 관심이 없다고?”
“당분간 혼사에 대해선 생각하고 싶지 않으시대요.”
여종이 대답했다.
혼사를 생각할 마음이 안 들 만도 하지. 그런 사람들이면 집안에서 좋은 혼처를 구해 줄 리도 없고.
진소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종에게 그만 나가 보라고 했다. 진소도 일어나 서재로 돌아가면서 대청에는 진소 부인과 자매들만 남아 분위기가 한층 편안해졌다.
“왜, 무슨 일인데?”
진단랑이 언니들을 붙잡으며 물었다.
“별건 아니고, 정 낭자한테 곤란한 일이 있나 봐.”
진십팔랑의 말에 진단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상관없어. 정 언니는 두려울 게 없거든.”
진십팔랑도 웃으면서 진단랑의 이마를 쿡 찔렀다.
“두려운 게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안 좋은 게 문제지. 생각해 봐. 부모님이 혼내실 때 넌 기분이 좋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진단랑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좋아.”
하긴. 혼나기만 해도 기분이 안 좋은데, 혈육들과 싸우며 소송까지 벌이고 있으니.
“전에는 정 낭자가 무슨 일을 만나도 놀라지 않고 침착한 게 부러웠는데, 지금 보니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불행을 안고 있네.”
“모든 걸 꿰뚫어 봐야 내려놓을 수도 있는 법이지. 지혜는 고난에서 나오는 법이야.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남이 무엇을 가졌다고 부러워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그걸 얻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을지부터 생각해야 해.”
자매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숙이며 모친의 가르침에 감사를 표했다.
대황자는 대전에 서 있었다. 앞에 걸린 지도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눈을 부릅떠 봤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졸면 안 돼, 졸면 안 된다고. 지난번에도 졸다가 부황께서 돌아가라고 하시는 바람에 귀비마마께 반나절이나 벌을 받았잖아.
책을 외우자. 그럼 졸음을 쫓을 수 있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는 것이 있기 마련이요, 모르는 것이 없으면 아는 것이 없기 마련이다(有不知則有知, 無不知則無知). 성인에게 본디 앎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음을 통해 앎이 있게 된다(聖人未嘗有知,由問乃有知).”
입에 잘 안 붙는 경서를 읽는 것이 대황자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대황자는 그런 책들이 좋았다.
읽고, 외우고, 듣고, 논하고. 얼마나 쉽고 재미있는데. 이런 천문이니 지리니 별자리니 하는 건 머리만 아프다고.
경서를 공부할 때면 잘 읽는다고, 빨리 외운다고 늘 칭찬을 받곤 했다. 스승은 대황자가 한 번 본 건 잊어버리는 법이 없을 정도로 영민하다고 감탄을 늘어놓았다.
영민하다고…….
대황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전하, 전하?”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대황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봤다. 태사국 관원이 어색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이황자가 대황자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고 있고, 용상에 앉은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대황자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사가아, 대하(大河)는 어디로 흐르지?”
황제가 물었다.
대하라…….
대황자는 얼른 지도를 쳐다봤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산하는 가뜩이나 눈에 안 들어왔는데, 지금 보니 더더욱 뒤죽박죽으로 보였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강이지?
진짜 대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본 적이 없으니 지도 위에 있는 점과 선으로 묘사된 강줄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저…….”
답을 귀띔해 주려는 이황자의 입 모양이 시야로 들어왔다.
뭐라고?
대황자는 이황자를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뺐다.
“사가아, 지도가 재미없으면 수업 들으러 올 것 없다.”
황제의 말에 대황자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또 쫓겨나는 건가? 이대로 돌아가면 마마께 꾸지람을 들을 텐데.
넌 왜 이렇게 아둔하니? 왜 이렇게 아둔해. 육가아도 하는 걸 너는 왜 못해? 네가 그 애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대황자의 귓가에 귀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찮고 성가시다는 표정의 얼굴도. 대황자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이황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바마마, 저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어요. 대인께 다시 한번 설명해 보라고 해 주세요.”
엄숙하게 굳어 있던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 웃음은 예전에 대황자도 자주 보던 것이었다. 부황 앞에서 책을 외울 때면 저런 웃음을 짓곤 하셨는데, 지금은…….
“녀석, 잔머리는.”
황제가 저쪽의 관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설명해 보게.”
관원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대황자는 이황자가 자신을 향해 헤헤 웃는 모습을 보고 무표정한 채로 시선을 돌려 지도를 쳐다봤다.
황제는 아들들과 오래 놀아 줄 시간이 없었다. 재미 삼아 지도를 함께 보는 것인지라 수업은 금방 끝났다. 대황자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문을 나서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이황자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형님.”
대황자는 못 들은 척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대황자보다 체구가 작고 동작이 날랜 이황자가 금세 따라잡았다.
“형님, 책 외우는 거 가르쳐 줘요.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거 외워야 해요. 내일 물어보신대요.”
굳은 얼굴의 대황자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지만, 이황자는 노여워하지 않고 웃으며 뒤따라갔다.
두 황자는 곧 어화원을 지나쳤다. 이황자가 또 뭔가 생각났는지 대황자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형님, 우리 매화 꺾으러 갈래요? 저번에 황후마마께 갖다 드렸더니 엄청 좋아하셨어요.”
대황자는 콧방귀를 뀌며 옷소매를 뿌리치려 했지만, 옆에 있던 내시가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매화가 예쁘게 피었으니 가서 꺾으시죠. 돌아가는 길에 마마들께 드리시면 좋잖습니까.”
내시가 대황자에게 암시를 주듯 말했다. 대황자의 몸이 굳어졌다.
궁녀나 태감들이 할 일을 굳이 나더러 하라니. 그놈의 효도, 효도. 성가셔 죽겠어.
대황자가 이를 악물며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어화원 쪽으로 향하자 이황자도 신이 나서 따라갔다.
어화원에는 매화나무로 이루어진 매산이 있었다. 호수를 따라 크고 작은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빨갛고 하얀 매화들이 곧 흐드러지게 필 기세였다.
몸집이 비대한 대황자는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찼다. 대황자는 내시들에게 매화를 꺾으라는 명을 내렸지만, 이황자는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직접 꽃가지를 꺾었다.
“형님, 이거 예쁘죠?”
이황자는 수시로 꽃가지를 들고 대황자 쪽으로 돌아와 물었다. 대황자는 돌 위에 내시가 벗은 옷을 방석 삼아 깔고 앉아 쉬고 있었다.
“안 예뻐.”
대황자가 대꾸했다.
“형님, 형님,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이황자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대황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따라갔다.
저쪽 산석 근처에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구불구불한 매화나무 가지에 붉은 매화와 흰 매화가 뒤섞여 반쯤 피어 있었다. 화초에 별 관심이 없던 대황자조차도 가슴이 뛸 정도로 아름다운 매화였다. 순간 부황의 서재에서 보았던 매화도가 떠올랐다.
“아바마마께 갖다 드려야지.”
이황자가 웃으며 소리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내가 할 거야!”
대황자도 얼른 걸음을 옮기며 손을 뻗어 이황자를 홱 밀쳤다. 옆에 있던 내시가 그 광경을 보고 얼른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두 분 전하, 여기서 장난치시면 안 됩…….”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황자에게 떠밀린 이황자가 중심을 못 집고 비틀대다가 갸우뚱하는 모습이 보였다. 물기가 축축하게 남아 있는 돌을 밟은 발이 미끄러지면서 이황자는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대황자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붙잡았다. 대황자까지도 몸이 앞으로 쏠렸지만, 다행히 몸집이 비대하고 힘이 있어 함께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황자는 허공에 몸을 반쯤 걸친 채 간신히 버텼다.
내시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형님, 형님.”
한쪽 손만 대황자에게 의지한 채 허공에 매달려 있던 이황자가 울며 소리쳤다. 너무 놀란 탓에 몸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형님, 형님.
대황자는 이황자를 쳐다보았다. 꽤 놀라 정신이 없을 텐데도 아우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된 귀염상으로 보였다.
영리하고, 말도 잘하지. 부황은 저 녀석만 좋아하셔.
넌 왜 이렇게 아둔하니! 네가 그 애보다 뭐가 못나서? 걘 너보다 나이도 어리잖아!
다 이 녀석 때문이야…….
이 녀석만 아니었다면 그 알아듣지도 못할 내용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마마께 혼나지 않아도 됐어. 부황께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일도 없지. 모두가 칭찬하고 떠받들던 건 분명 나였어. 그런데 이젠 내가 글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어. 지도도 못 읽는 아둔한 놈이라고 비웃기만 하잖아.
전부 이 녀석 때문이야…….
이 녀석이 없다면 부황께서 가장 아끼시는 건 앞으로도 나겠지. 스승님께서 가장 영리하다고 하는 이 역시 앞으로도 나일 거야. 귀비마마께서도 더 이상 내가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실 리 없고.
그런 생각들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주변에 있던 내시들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으려 했다. 순간 그 모든 게 천천히 멀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황자는 울며 소리치는 이황자를 보면서 손을 놓아 버렸다.
자책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은 집에서 보내온 새해 선물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구주(衢州) 수왕부에서 보낸 새해 선물은 결코 약소하다고 할 수 없는 규모였다. 비단이며 옷, 서화, 붓, 먹, 종이, 벼루 등등 소년에게 필요한 물건은 빠짐없이 고루 들어 있었다.
진안 군왕은 선물들을 하나하나 직접 살피며 정리했다. 옆에 있는 내시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내시는 조용히 기록만 했다.
전각 안에는 진열대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진열대 선반 위에 빼곡하게 쌓아 둔 선물 상자에는 몇 년 몇 월에 보낸 선물인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두 내시가 진안 군왕이 건넨 비단과 선물 상자를 들어 옮겼다.
“이거로 새 옷을 만들면 되겠다.”
진안 군왕이 내시에게 비단을 건네며 말했다. 내시는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내시는 정말 훌륭한 옷감이라며 감탄을 늘어놓고는 비단을 들고 진열대 선반 쪽으로 갔다. 이쪽에 놓인 옷감들도 전부 고급 비단이었다.
몸을 돌리자마자 내시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내시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떨리는 목소리였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내시 하나가 보였다. 창백한 안색에 경황이 없는 표정이었다. 내시는 ‘전하’만을 외친 후 말을 잇지 못했고, 입술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무슨 일이더냐?”
진안 군왕이 시선을 거두고 다른 선물 상자를 열어 보며 물었다. 그 안에는 토기 인형이 하나 들어 있었다. 물론 평범한 인형은 아니었다. 인형에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니 대가의 작품이었다.
이건 육가아한테 줘야겠다.
진안 군왕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전하, 이황자 전하께 일이 생겼습니다!”
내시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진안 군왕의 몸이 움찔하며 굳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토기 인형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