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75)

“그럼 돌아가서 네 아씨에게 알리거라. 가문도 있고 친족도 있으니, 집안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게다가 재산 문제로 자식이 가장을 고소하는 일은 기강에 어긋나는 일이니, 터무니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네 아씨를 불경죄로 다스리겠노라!”

통판이 호통을 치면서 경당목을 쥐었다.

“퇴······.”

“대인, 저희 아씨께서는 재물 때문에 이 재판을 하고자 하시는 게 아니에요.”

반근이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씨께서 정 대노야를 고소한 것은 아씨의 모친인 주씨 부인의 명예를 위해서입니다.”

반근이 정 대노야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대노야께서는 저희 아씨가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혼수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하면 저희 아씨께서는 무사할지 모르겠지만, 저희 부인의 억울함은 어찌합니까?”

부인?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의아해했다.

이게 그 죽은 주씨 부인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통판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순간 경당목을 쥐고 있던 통판의 손이 주춤했고, 퇴정을 알리려던 통판의 호통도 잠시 멈췄다.

공당 아래 서 있던 반근의 맑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부인께서는 아씨와 함께인 단란한 가족생활을 얼마 즐기지도 못하시고 일찍 별세하셨습니다. 그런 부인께서 저희 아씨께 유일하게 남겨주신 것이, 바로 그 혼수고요.”

말을 하던 반근의 마음이 점점 아려왔다.

정교랑이 담담하고 감정 없는 말투로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만 해도, 반근은 별생각이 없었다. 당시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도록 아씨의 말을 외우기도 벅찼기에 감정의 동요 또한 없었다.

반근은 자신의 양쪽으로 반듯하게 서 있는 관졸들을 훑어보았다. 또 공당 정중앙에 걸린, ‘명경고현(明鏡高顯: 밝은 거울이 높이 걸려 있다는 뜻으로, 판결이 공정함을 일컫는 말)’이라 쓰인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관포를 입고 있는 관리들과 자신의 주위에 꿇어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순간 반근은 자신과 정교랑이 병주 도관에서 숨죽이고 살던 시절이 떠올랐고, 이노야 식구들이 말도 없이 병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이 떠올랐다. 병주 도관에 번개가 내리쳤던 그 밤과 병주에서 강주까지 힘들게 왔던 천 리 길의 여정도 떠올랐다. 정교랑이 집에서 쫓겨나 소현묘관에서 지낼 때 마주쳤다던 음란한 남녀의 소름 끼치는 눈빛까지도.

정교랑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길에는 고난과 역경이 가득했다. 그 고난과 역경은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겪어보지 못할 것들이었다.

아씨는 그 많은 고난과 역경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셨어. 끝도 없는 고난과 역경들을 견뎌내셨다고.

왜? 왜 우리 아씨만 그런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하는 건데?

만약 부인께서 살아계셨다면, 아씨께서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셨을까?

“비록 아씨를 직접 키우지는 못했지만, 부인께서는 유산으로나마 딸과 함께하고자 하셨을 거예요.”

만약 부인께서 살아 계셔서, 아씨가 다 나은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런데 대노야는 아씨를 위한 혼례를 올리겠다는 미명으로 세상 사람들을 속이셨죠. 모녀의 정을 끊고, 자식을 사랑하는 주씨 부인의 마음을 욕보인 것. 이것이야말로 천륜을 어기는 대죄이지 않습니까.”

말을 하던 반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반근은 울먹이는 목소리를 간신히 참아가며,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했다.

절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호소하는 데는 나이든 어멈들보다 저런 어린아이가 더 효과적이긴 하지.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소녀의 눈물만으로 동요할 사람들이 아니야. 온갖 참혹한 사건과 억울한 사건들을 다뤄왔기 때문에, 서럽게 운다고 해서 판결이 달라지지는 않아. 더군다나 오늘 같은 사건은 더더욱 판결을 뒤집기 힘들지. 이런 사건은 사정보다 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법이거든.

절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곁눈질만으로도 통판이 냉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저희 아씨는 모친께서 남겨주신 혼수의 값어치가 얼마가 됐든,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아씨께서 쟁취하시려는 것은 재물이나 점포, 농토와 금은보화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의 명예입니다. 남들처럼 아씨를 아껴 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고, 부인께서 아씨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지켜내기 위함이죠! 그 혼수는 주씨 부인께서 정정당당하게 아씨께 물려주는 유산이니, 그 누구도, 어떤 명목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공당 안에 반근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반근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통판 대인과 절추 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몇 걸음 기어갔다.

“저희 아씨는 기필코 이 재판을 진행해야만 하고, 맞서 싸워야만 합니다. 정씨 가문에서는 결코 아씨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아씨께서는 오직 관부의 올바른 판결만을 바라고 계세요. 이 재판을 십 년, 이십 년, 아니 죽을 때까지 치러야 한다고 해도! 아씨가 평생 시집을 가지 못한다고 해도! 이 재판만은 꼭 진행해야겠다고 말씀하세요. 대인, 부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결코 부인께 억울한 오명을 씌워서는 아니 됩니다!”

반근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반근의 말이 끝나자마자 절추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이와 동시에, 통판도 자세를 고쳐 앉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근을 쳐다보았다.

정 대노야도 반근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절추나 통판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대신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참으로 맹랑하구나!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게야. 이게 어딜 봐서 제 어미를 욕보이는 일이라는 게냐?”

정 대노야는 투덜거리며 통판에게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판결을 끝내라는 눈짓을 보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던 그는 공당에 있던 관리들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통판 대인의 표정이 왜 저러지?

정 대노야는 공당 안의 모든 관리를 훑어본 뒤, 다시 통판에게 시선을 옮겼다. 모든 사람의 표정이 좀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정 대노야는 좀 전에 반근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방금 저 말에, 뭐 잘못된 게 있었나? 아니, 저 몸종이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어. 지극히 옳은 말이었지!

공당에 있던 모든 관리와 관졸들이 속으로 외쳤다.

정 대노야가 했던 말들은 번개가 잠시 번쩍이는 느낌이었다면, 저 여린 몸종이 한 말은 귀가 찢어질 듯 울리는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사실 관리들은 처음에 반근이 울먹이면서 했던 많은 말들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하지만 반근이 마지막에 했던 말은 똑똑히 들었다.

재물도, 혼수도 필요 없고, 바라는 것은 오직 명예뿐이다.

꼭 이 재판을 해야만 한다. 한평생을 바쳐서라도! 한평생을!

사람들이 가산 문제로 관청에 오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돈 때문이다.

형제끼리 가산 문제로 관청에서 재판을 하게 되면, 가산의 절반 이상이 없어지게 된다. 재판이란 말다툼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기에, 관청에 발을 들이는 건 쉽지만 나가는 것은 지독히도 어려웠다.

특히나 사람 목숨이 달린 게 아닌, 단순히 재산에 대한 재판이라면 관리부터 관졸들까지 꼭 한 다리씩 걸쳐서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에게 이득을 내어주는 재판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진행할 리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산 문제로 관청까지 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바보가 나타나다니! 더군다나 가산은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명예만을 바라는 바보가!

자리에 있던 관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명예를 우선시하고, 재물을 등한시하는 이런 재판이었다.

이게 뭘 뜻하는 거냐고?

사람들은 반근이 한 말의 속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관리들은 더 이상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절추를 쳐다보지 않았다.

어쩐지 저 목수 놈이 체면도 내팽개치고 이 재판을 강행한다 싶었어!

생각을 해 봐, 생각을! 좀 전에 다들 돌려봤던 그 혼수 목록을 떠올려 보라고!

금은으로 만든 거대한 산을 눈앞에 던져다 주면, 누군들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겠어? 여기서 한 몫을 따내면 반평생은 족히 풍족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상대가 누군지를 고민할 겨를이 어디 있어!

강주의 명문가든, 정씨 가문의 대노야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우리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도 아니고, 저들이 제 발로 관청까지 찾아와 고소장을 올린 사건이라고. 우리는 원리원칙대로 일하는 것뿐이니, 정정당당하고 떳떳해! 우리가 겁낼 게 뭐 있어!

조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번쩍이는 눈빛들을 보자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무서워지기도 했다. 조귀는 자수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과 걱정을 마침내 씻어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 아씨가 꼭 이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던 거군. 주 노야도 돈이 아까워서 끝내 재판을 진행하지 않았는데. 아씨는 애초부터 이 재판에서 이길 생각이 없었던 거야.

욕심이 없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처럼, 이길 생각이 없어야 지는 것이 두렵지 않지.

조귀는 정교랑이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남정 사람들에게 집 짓는 돈으로 일만 관을 내어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인색하지 않은 게 뭐냐고?

한 개, 두 개, 세 개 정도가 아니라 일만 관 어치의 재산을 생판 남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야말로 인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동에 옮기기는커녕, 고려해 볼 사람조차 없을 것이야!

생판 남에게는 주기 아까우니까!

내가 그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만, 상대방도 그 재물을 얻을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제 것을 다 내어준다는데, 욕심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나? 정말 지독하군!

  • 돈은 펑펑 쓰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조 집사의 귓가에 정교랑의 담담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후당에서 밖으로 나가려던 송 지부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휘장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거두었다.

어쩐지, 어쩐지. 이게 어딜 봐서 재판하려고 온 거야? 돈지랄을 하러 온 것이지!

이렇게 된 일이었군, 이렇게 된 일이었어!

정 대노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후당에 언뜻 보이던 옷자락이 다시 안으로 거둬지는 것과 통판이 경당목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주위 관리들의 굶주린 늑대 같은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부 대인을 찾아간 것도 나고, 공당까지 온 사람도 나야. 게다가 심혈을 기울여 열변을 토한 것도 난데!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저들은 말 한마디로, 고작 말 한마디로 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냐는 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 모든 노력은 남들 좋은 일을 위한 밑밥이었어.

단순 구타 사건을 이렇게 빨리 재판할 필요도 없었어. 열흘, 보름이 넘게 끌어도 됐는데, 내가 뭐에 홀려서 이렇게 빨리 판결을 내려 달라고 했지?

아니, 아니야. 난 뭐에 홀린 게 아니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 바보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 바보가 날 공당까지 올 수밖에 없게 만들고, 혼수 목록을 꺼낼 수밖에 없게 만들고, 우리 가문의 재산을 남들 앞에 공개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야!

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돈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 있지.

만약 저들이 가산의 규모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 계집의 궤변을 들었다면,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달라!

우리 집안의 가산은 더 이상 모호한 수치가 아니야. 좀 전에 혼수 목록을 봤던 사람들은, 속으로 구체적인 계산을 했겠지.

내가 내 손으로 먹잇감을 자처했어. 발가벗은 채로 저 굶주린 늑대들 앞에서 뜯어 먹히길 자처한 꼴이 됐다고! 그런데 그 바보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심지어 공당에도 나오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다니!

그 애가 할 일은 딱 한 가지야.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해 두면, 손을 내밀어 저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여러분, 근사한 연회를 마련했는데, 한번 즐겨 보시겠어요?

저 고약하고 악독한 것이!

정 대노야는 바닥에 엎드려 있던 반근을 가리키다가 옆에 있던 조 집사를 가리켰다.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던 이부인의 여종을,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고 사건을 진행하려는 통판을, 후당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지부 대인을, 그리고 공당에 나오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그 바보와 주씨 가문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고약하고 악독하도다!

입을 열고 소리치려던 찰나, 정 대노야의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는 말 대신 울컥 피를 토했다.

공당 안에 여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정 대노야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뭐라고 묻는 것 같았지만, 순간 시야가 흐려지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가슴팍의 옷섶을 꽉 움켜쥐면서 뒤로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정 대노야를 본 조귀는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

또 한 놈이······.

조귀가 속으로 말했다.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정씨 저택의 적막을 깼다.

정 이부인은 정 대부인이 날린 따귀를 가까스로 피했다. 하지만 정 대부인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밟은 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패가망신시키는 네년을 내 손으로 죽여주마!”

정 대부인이 정 이부인 위로 올라타 울부짖으면서 정 이부인의 얼굴을 할퀴고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정 이부인은 정 대부인의 손을 막으면서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성을 잃은 정 대부인의 힘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꼼짝없이 바닥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었다.

마당에 있던 여종들도 합세했다. 물론 처음에는 여종들도 두 부인의 싸움을 말리기 바빴다. 하지만 정 이부인의 얼굴에 피가 나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의 여종들은 그만 눈이 뒤집혀 윗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정 대부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본 정 대부인의 여종들도 화들짝 놀라 정 이부인의 여종들에게 달려드는 통에 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방문 앞에 서 있던 정칠랑은 정 이노야가 집으로 오면서 특별히 사다 준 토기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한 손으로 문틀을 잡고 있던 정칠랑은 아수라장이 된 마당을 보고는 잔뜩 겁을 먹고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공포에 질린 정칠랑은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 순간, 정칠랑이 안고 있던 토기 인형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정 대노야의 마당에는 사람들이 잔뜩 서 있었다. 대청 안으로 하나둘 모여든 의원들은 조용히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거나 어두운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청의 다른 쪽에는 집안의 모든 자녀가 모여 앉아 있었다. 정 대부인은 축 늘어진 채 여종의 품에 기대 누워 있었다. 방금 전 정 이부인과 머리채를 잡고 싸운 통에, 머리카락이며 옷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 대부인은 정리해 주려는 여종들의 손길도 거부했다.

“조금 이따가 내가 노야와 같이 죽거든, 입관할 때 정리해 다오. 괜히 지금 헛수고하지 말고.”

정 대부인의 말에 여종과 자녀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소리는 대청 문밖에서도 울려 퍼졌다.

“어머니, 소자는 그런 적 없습니다. 소자는 형님을 해친 적이 없습니다!”

정 이노야가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갔다. 정 이노야는 노부인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이마를 수차례 땅에 찧으며 외쳤다.

“소자는 몰랐습니다. 정말로 부인이 그런 짓을 했을 줄 몰랐습니다!”

창백한 안색의 노부인이 정 이노야의 손을 홱 뿌리쳤다.

“천 번, 만 번을 막아도 집 안에 있는 도둑은 못 막는다더니! 우리 정씨 가문은 바로 네놈의 손에 망한 것이야!”

노부인이 손으로 가슴팍을 치면서 소리쳤다. 그러더니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정 이노야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제 속이 시원하더냐? 이제 만족하냐고!”

바닥에 엎드려 있던 정 이노야는 노부인이 휘두른 지팡이에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억울합니다. 무슨 만족을 한단 말입니까!

분가한 것도 아닌데, 이런 사건에 휘말려서 제가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재판에 쓰이는 가산은 곧 제 가산이나 다름없는걸요. 저도 그 돈이 아까워 죽겠단 말입니다!

아, 아니지.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파 죽겠다고요! 더구나 저는 관직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에 휘말리면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증언으로 친형을 분통 터지게 한 사람이라는 낙인까지 찍힌다고요!

아이고, 억울해 죽겠네!

정 이노야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대성통곡했다.

“대노야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방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부인은 정 이노야를 때리다 말고 지팡이를 던져 버린 후, 여종들의 부축도 없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들아!”

정 대노야의 방 안에는 의원들의 당부에 따라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 정 대부인은 침상에 엎어진 채 우느라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노부인은 눈물을 훔치면서 정 대부인을 다독였다.

“어서 뚝 그치거라. 네가 울면 큰애도 마음이 안 좋을 것이야.”

노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하고는 눈물을 참으며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얘야, 몸은 좀 괜찮니?”

정 대노야의 안색은 잿빛에 가까웠고 눈빛은 혼탁했다. 정 대노야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듯, 천천히 눈동자만 움직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정 대부인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형님, 형님.”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정 이노야가 외쳤다. 그의 눈빛에는 슬픔과 두려움이 혼재해 있었다.

형님, 절대로 죽으면 안 됩니다. 형님이 죽으면, 내 관직 생활도 여기서 끝이라고요!

정 이노야의 목소리를 듣자, 정 대노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정 대노야는 입을 벌린 채 아아아 소리만 낼 뿐,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일어나 앉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갑작스럽게 힘을 쓰는 통에 숨이 막히면서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형님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났지? 안달이?”

정 대부인이 울면서 정 이노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늘에 맹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형님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형님이 죽어서 내게 득이 될 게 뭐 있다고!

정 이노야는 울음을 터트린 채 바닥에 엎드려서 정 대부인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었다.

잠시 뒤, 숨을 고른 정 대노야의 혈색이 돌아왔다. 정 대부인은 문가에서 정 이노야를 때리고 욕하면서 가라고 외쳤다.

“일단 내보내지 마시오.”

정 대노야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정 대부인은 정 대노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쥐고 울먹였다.

“여보, 지금 보면 밉기도 하고 화도 나니까, 몸이 좀 좋아진 뒤에 다시 얘기해요. 오늘은 일단 동생한테 화내지 말아요. 저런 사람 때문에, 화낼 가치도 없어요!”

노부인도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비록 모두 같은 피붙이라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둘째의 잘못이야.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당장 족보에서 둘째의 이름을 뺀다고 해도 큰애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야. 큰애가 관청에 가서 입만 뻥끗해도, 둘째는 벼슬길이 끊기겠지.

그런데 둘째의 벼슬길을 끊는다고 해서 우리 정씨 가문에 좋을 게 있나? 하지만 둘째를 혼내지 않으면, 큰애는 정씨 가문 가장의 역할을 소홀히 한다고 비난받을 거야.

노부인은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늘 충효를 강조하고 형제 자매간의 우애가 끈끈하다고 소문난 정씨 가문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집안 문제로 관청을 찾아가지 않았던가.

청렴결백한 정씨 가문이 남도 아니고 자식한테 고소를 당하다니!

관졸들이 정 대노야를 집으로 모셔오고 있으며 이 일이 온 동네에 구경거리가 됐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노부인은 너무 창피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정씨 가문이었다. 가난할 때도 있고 부유할 때도 있었지만, 오늘만큼 망신스러운 일은 처음이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우선 저놈부터 때려 죽어라! 그리고 나도 저놈을 따라 죽어 버려야겠다! 창피해서 조상님들을 볼 면목이 없어!”

노부인이 침상 위로 엎어지면서 울부짖었다. 방 안은 또다시 난리가 났다.

“아직도 여기 있어요? 형님이 숨을 거두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이러시나?”

정 대부인은 울면서 정 이노야를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했다.

“아우한테 잠시만······.”

정 대노야가 쉰 목소리로 말했지만, 정 대부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노야, 지금은 저 사람과 상종할 때가 아니에요. 몸이 좀 좋아진 뒤에 벌해도 늦지 않아요.”

정 대부인의 말에 정 대노야는 고개를 저었다. 정 대노야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정 대부인과 여종들이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가 공당에서 혼절해 들것에 실려 왔다는 소식을 들은 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정 대노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혈색 좋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던 부잣집 노야는 반나절 만에 고된 농사일로 야윈 농부가 된 것 같았다.

형님이 자신에게 잘 대해 주던 시절을 떠올리던 정 이노야는 몹시 마음이 아파 왔다.

“형님, 형님.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 이노야가 울면서 무릎을 꿇은 채로 침상 근처까지 기어가 바닥에 엎드렸다.

“지금 와서 잘못을 뉘우쳐 봤자, 이미 늦었어!”

정 대부인이 서럽게 울면서 외쳤다. 정 대노야가 손을 들어 부인을 제지하고는 정 이노야를 쳐다보았다.

“증언하고자 한 게 너희의 생각이었느냐? 아니면 그들의 생각이었느냐?”

정 대노야가 쉰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노야, 노야.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의원이 흥분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정 대부인이 울면서 말했다. 정 대노야는 부인의 말을 무시하고 정 이노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그 바보가 우리더러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형님, 형님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 애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도 속은 거예요!”

정 이노야가 엎드린 채 울먹였다.

“그 애한테 속았다고?”

정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들고 정 이노야를 향해 삿대질하며 비꼬았다.

“그 바보한테 속았다고요? 지금 누굴 바보로 알아?”

“그만하시오.”

정 대노야가 손을 들고는 정 대부인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애가 어딜 봐서 바보요? 바보는 그 애가 아니라 우리야. 인제 그만 인정합시다. 그 아이가 정말로 바보였다면, 주씨 가문에서 그리 심혈을 기울였을 리가 없소. 질척이는 진흙은 벽을 바를 수 없어. 좋은 찰흙만이 담벼락을 지탱할 수 있지.”

정 대노야가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소상히 얘기해 보거라. 도대체 그 애가 뭐라고 하더냐?”

정 이노야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부인이 그 바보에게 현혹되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정 이노야는 대노야에게 정교랑을 찾아갔던 날의 일을 소상히 말해주었다.

정 대부인은 정 이노야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그게 다예요? 걔가 혼례를 올리기 싫다고 해서, 증언을 해 주기로 했다고? 이노야, 두 사람은 우리가 아주 봉으로 보이나 봐요?”

“형수님, 진짜입니다! 우리, 우리는 정말로 그 애한테 속은 거라니까요. 우리는 그, 그저 그 애가 또 소란을 피울까 봐 그런 겁니다. 소란을 피우면, 우리 집에도, 형, 형님에게도 안 좋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증언하기로 한 거라고요.”

정 이노야가 다급하게 변명했지만, 정 대부인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정 대부인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정 대노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부인이 진씨 가문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지? 만나서 무슨 얘길 했다더냐?”

정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저도 잘······. 듣기로는 아주 좋은 혼담이 있다고······.”

정 이노야는 확신이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네 안사람을 데려오거라. 내가 직접 묻겠다.”

정 대노야의 말에 정 대부인이 남편을 말리면서 울먹였다.

“노야, 일단 지금은 속 썩이지 말고, 좀 쉬세요. 그런 여편네는 우리 정씨 가문에서 쫓아내야 해요!”

정 대부인이 여종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그년을 내쫓거라! 당장!”

여종들은 정 대부인의 명령을 듣고도 제자리에 서서 정 대노야의 눈치를 살폈다.

“내쫓고 싶어도, 일단은 정확한 사정을 듣고 내쫓으시오. 이리로 데려오너라.”

정 대노야가 여종들에게 손짓하자, 여종들은 그제야 알겠다며 자리를 떴다.

이야기를 하느라 기력을 다 썼는지, 정 대노야가 침상 위로 픽 쓰러졌다. 정 대노야가 쓰러지는 바람에 방 안에는 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정 이노야는 차마 정 대노야 옆으로 가지는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정 대노야를 애타게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 후, 여종들이 돌아왔지만 정 이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오겠다고 하디?”

정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그년이 죽어도 오기 싫다고 해도,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오거라!”

“그게 아니고요. 이부인께서 도망가셨습니다.”

여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서 넋이 나갔다.

“도망을 쳐? 어디로? 친정으로 도망친 게야? 그럼 잘됐네. 다신 이 집에 발도 들이지 말라고 해라!”

정 대부인이 괘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 남정에 있는 정 아씨 집으로 가셨다고······.”

여종이 말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정 대부인이 옆에 있던 탁자를 손으로 엎으며 외쳤다.

“좋아. 이참에 둘 다 밧줄에 묶어서 여기로 데려와!”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급한 나머지 말도 하기 전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정 대노야는 새빨개진 얼굴로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정 대부인이 대노야의 등을 토닥이면서 눈물을 흘렸다.

“노야, 노야.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죽게 되더라도, 꼭 그것들을 먼저 때려죽이고 가겠어요! 이렇게나 도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것들을, 가만두는 게 더 큰 잘못이에요!”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의 소매를 꽉 쥐며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아니오, 아니 되오.”

정 대노야가 고개를 저으면서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때려죽이면 아니 되오. 때려죽여선 아니 돼. 이제는 그 애를 밧줄에 묶어서는 아니 되오. 우리 가문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그 애한테 있단 말이오!”

그 애?

정 대부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한 얼굴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정 이노야가 울음을 멈추고 정 대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애한테? 그럼, 부인이 그쪽으로 간 게 잘한 일인가?

“가서, 모셔 오너라.”

정 대노야는 이 짧은 한마디를 온 힘을 다해 말했다.

가서, 모셔 오너라!

모셔 오라니!

정 대노야는 울분과 비통함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침상 위로 쓰러졌다.

  • 당연히 나 자신의 뜻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가야 할 때가 되면 내 발로 알아서 나갈 테니. 그리고, 내가 이 집에 거저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정 대노야의 귓가에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 아이를 이 집에서 살지 못하게 해서, 그 대가를 치르는 건가?

남정은 모든 게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남정 골목에 들어온 여종들의 표정엔 불안함이 가득했다. 예전의 도도한 표정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정교랑의 거처 대문 앞에서 걸음이 막힌 여종들은 이제 자세를 낮추며 아첨의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번거롭겠지만, 아씨를 뵐 수 있는지 물어봐 줄래?”

“아씨께서는 집에 안 계세요.”

눈앞에 서 있던 아이들이 콧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집에 없다고?

여종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시끌벅적한 소리는 멀리서 들리기도, 가까이서 들리기도 했다.

정칠랑은 이곳에 온 이후로 계속 저 시끄러운 말소리에 시달리고 있었다.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거기에 남정 동네 특유의 시궁창 냄새까지. 정칠랑은 모든 것이 끔찍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정칠랑은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구석으로 바짝 웅크렸다. 그러자 좀 전부터 들리던 사각사각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칠랑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벽 위에 벌레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기어가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은 정칠랑이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별안간 낮에 큰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머리채를 잡고 싸우던 모습까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정칠랑이 비명을 지르고는 문 앞으로 기어갔다.

“칠랑, 칠랑. 왜 그러니?”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와 정칠랑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어머니, 어머니. 저 여기 있기 싫어요. 여기는 너무 끔찍해요. 벌레도 있단 말이에요.”

정칠랑이 울면서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괜찮아, 괜찮아. 이 어미가 죽여 줄게!”

정 이부인이 재빨리 대답하고는 아무렇게나 벽을 몇 번 때리며 정칠랑을 위로했다. 정칠랑은 정 이부인이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두 모녀가 방석 위에 나란히 앉았다.

“어머니, 우리 여기서 안 살면 안 돼요? 여긴 너무 낡았어요.”

정 이부인의 품에 안긴 정칠랑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 이부인이 방을 둘러보았다.

거칠고 조잡한 재료로 지은 집인 데다 오래된 집이다 보니 낡고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반근이라는 몸종이 지내던 방이라고 했는데, 몸종이 지내기 전에는 무슨 용도로 쓰였을지 모를 곳이었다. 나뭇간이었으려나?

이렇게 낡은 집을 본 건 정 이부인 역시 생전 처음이었다.

“사금이 지내는 집보다도 못해요.”

정칠랑이 투덜댔다. 사금은 정씨 가문에서 집을 지키라고 키우는 개의 이름이었다. 깜짝 놀란 정 이부인이 황급히 정칠랑의 입을 틀어막았다.

“함부로 말하면 못써. 저들이 들을라.”

정 이부인이 속삭였다.

“들으면 뭐 어때서요?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정칠랑이 빽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내쫓길 수도 있어.”

“내쫓을 테면 내쫓으라죠. 이렇게 낡아빠진 곳에서 지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정칠랑의 말에 정 이부인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런 낡아빠진 집에서 지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모친의 표정을 본 정칠랑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정칠랑이 고개를 들고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백모님이 우리더러 집에 들어오지 말래요?”

정 이부인이 자세를 고쳐앉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 사람? 그 사람은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는 사람이야. 칠랑, 걱정하지 마. 네 언니랑 같이 있으면,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을 마친 정 이부인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이 바보한테 의지할 줄은 몰랐는데. 벼랑 끝에 내몰려 숨으러 온 곳이 여기일 줄이야.

정칠랑은 정 이부인이 왜 자신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왜요?”

정칠랑이 물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힘들었던 정 이부인은 미소를 쥐어짜며 정칠랑을 안심시켰다.

“집안에 일이 좀 있었는데, 넌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네가 나중에 크면, 이 어미가 다 설명해 줄게. 너무 걱정하지 마, 칠랑. 조금만 더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칠랑은 지금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집에서 자신과 제일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인 백모와 모친이 싸우던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들었니? 네 큰어머니가 사람을 보냈었어.”

정 이부인이 바깥을 가리키면서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정칠랑은 정 이부인의 말에 반가워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항상 온화했던 백모님이 표독한 얼굴로 자신의 어머니를 때리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서워할 거 없어, 겁내지 않아도 돼.”

정 이부인이 정칠랑의 얼굴을 보고 서둘러 품에 안아 주었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왕십랑 그 천한 것이 감히 내 딸 앞에서 나를 때리고 욕해? 우리 딸이 얼마나 놀랐을까!

“그 사람들은 우리를 괴롭히러 온 게 아니라, 네 언니를 모셔 가려고 온 거였단다.”

정 이부인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네 언니 때문에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딱히 방법이 없으니 네 언니를 모셔 가려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겁낼 거 하나도 없어. 머지않아 우리도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품에 안고 다정하게 토닥이며 위로했다. 종일 놀라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던 정칠랑은 정 이부인의 품에서 금세 잠이 들었다.

정 이부인은 한숨을 쉬고 아픈 허리를 꾹꾹 눌렀다. 무심코 얼굴을 만지다가, 정 대부인이 낸 상처에 손이 닿았다. 정 이부인은 상처가 쓰라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왕십랑 네 이년! 두고 보자!

정 이부인은 속으로 정 대부인을 욕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상처의 통증이 조금 줄어드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온 정 이부인의 눈에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반근이 보였다.

“반근, 반근.”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반근을 부르면서 가까이로 다가갔다. 반근이 걸음을 멈추고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이부인, 날도 다 저물었는데 언제 가시려고요?”

저 계집이 감히 나를 내쫓으려고 해? 오늘 일만 아니었으면, 나한테 제발 여기서 지내라고 싹싹 빌어도 여기엔 안 살았어!

정 이부인이 미소를 쥐어짜며 말했다.

“반근, 교랑이 대노야의 분통을 터트려서 거의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놨잖니. 게다가 우리가 공당에서 증언한 것 때문에, 정 대부인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났는데. 우리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정 이부인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그 말에 반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 좀 그렇긴 한데, 이를 어쩌면 좋지?

“반근, 좀 전에 정 대부인이 보낸 사람이 네 아씨를 모셔 가겠다고 하는 걸 봤어.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려는 건가 봐. 저들이 졌다는 걸 인정한 거지. 그러니까 숨어 있는 네 아씨를 어서 데려오렴. 이제 다 네 아씨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부터 조건을 협상하면 돼.”

정 이부인이 눈썹을 꿈틀대면서 말했다. 반근이 미간을 찌푸리며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이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희 아씨는 밖에 놀러 나가신 거예요. 아씨가 숨긴 왜 숨어요?”

참나. 저 계집이 끝까지 시치미를 떼네.

이렇게 큰일을 저지르고, 하마터면 자신의 백부를 공당에서 분통 터트려 죽일 뻔했어. 게다가 돈을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관부 놈들한테 가산까지 넘기게 됐고.

도리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일을 저질렀으니 집에서 매질을 당해 죽어도 할 말이 없지. 그래서 숨은 거잖아. 숨은 게 아니면 뭔데?

정 이부인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없이 웃었다.

“아, 숨은 게 아니라, 피하신 거라고 해도 되겠네요.”

반근이 웃으며 바깥을 가리키고, 다시 정 이부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너무 소란스러워서요.”

반근의 말에 정 이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 이부인은 자신의 옆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반근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조 집사, 잠깐 들어오세요. 아씨께서 분부하신 일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어요.”

반근이 말했다. 문밖에서 알겠다는 대답이 들리더니 곧 조 집사가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조 집사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정 이부인은 서둘러 몸을 돌리고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조 집사는 정 이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 소란을 피해서 놀러 간 거라고?

설마 이 지경으로 일을 벌여 놓고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거야?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강주부 관청.

서재 안에 은은한 차향이 퍼졌다.

한바탕 고생한 뒤에 마시는 향긋한 차 한 잔이 인생의 낙이지.

“향곤(向昆), 마셔 보게.”

송 지부가 천천히 차를 따르고는 반대편에 앉은 이 절추에게 찻잔을 건넸다. 송 지부는 언제 불만이 있었냐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이 절추를 쳐다보았다.

이 절추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송 지부가 건넨 찻잔을 받고 예를 올렸다. 찻잔을 받은 이 절추는 고개를 젖혀가며 단숨에 차를 비웠다.

“차가 좋군요. 향이 좋아요. 대인의 다예 솜씨가 점점 더 훌륭해지십니다.”

이 절추가 감탄했다.

“향곤, 자네는 차 맛을 아니까 어떤 차가 좋은 차인지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차에 대해서 잘 모르네. 그래서 이 좋은 차를 갈증을 해소하는 데에 쓰고 있지.”

통판이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공당에서 큰소리치며 화를 내던 통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방 안은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대화로 가득 채워졌다.

차를 한 잔씩 마신 세 사람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대인께서 보시기에는, 이 사건을 계속 진행해야······.”

이 절추가 말끝을 흐리면서 송 지부에게 물었다. 옆에 앉은 통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

통판은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가 송 지부의 눈치를 보고는 재빨리 입을 닫았다. 절추와 통판의 시선이 송 지부에게 고정되었다.

송 지부는 두 사람이 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당연히 해야지, 당연히! 이 사건은 무조건 진행해야 해! 돈이 얼만데, 돈이!

송 지부는 실소를 터트렸다. 송 지부가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부르자, 식객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일은 어떻게 됐는가?”

식객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퇴정할 때 그 사람들도 나갔습니다. 그 후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지금껏 관청으로 찾아온 일도 없었습니다.”

송 지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공당에서는 이 재판을 계속 진행할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원고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이 재판이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 대노야가 공당에서 분통 터져 죽을 뻔한 일은, 정씨 가문에게는 손해였고 주씨 가문에게는 이득이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은 그 후로 따로 관청을 찾아오거나 별다른 귀띔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씨 가문도 이 결과에 대해 만족하는 건가?

이 절추와 통판은 송 지부와 식객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대인,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통판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으로 봐서는, 진씨 가문도 결과에 만족한다는 뜻이겠지.

송 지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닐세, 아니야.”

통판이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원칙대로 해야지요. 원칙대로.”

동의한다는 뜻이야. 동의한다는 뜻! 하긴, 이런 사건을 거절할 리가 있나.

절추와 통판은 한시름 놓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차 좀 드시지요.”

서재 안에 있던 세 사람은 서로 웃으면서 차를 권했다.

정씨 저택.

무거운 분위기가 온 저택에 스며들었다. 저택 안에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어딘가 불안하고 황급해 보였고, 걸음걸이도 평소보다 다급했다.

탕약을 들고 대청 안으로 들어오던 몸종은 하마터면 방에서 나오던 여종과 부딪힐 뻔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씩 쳐다봤을 뿐 불평하거나 따질 겨를도 없이 각자 가던 길을 재촉했다.

정 대노야가 한쪽 손으로 침상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정 대부인이 서둘러 부축했다.

“뭐라고? 출타했다고? 언제 나갔다더냐? 어디로?”

정 대노야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물었지만 여종은 고개를 저었다.

“날이 밝자마자 나갔다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종이 불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럼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없었고?”

정 대노야가 침상의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여종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반근이라는 몸종과 조 집사는 다 집에 있었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자기들한테 하라고······.”

정 대노야가 여종을 보고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들한테 얘기하라고?”

정 대노야가 중얼거렸다.

귀한 집 따님이니 공당에 직접 나설 리는 없고, 자신을 대신할 노비만 남겨두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노비가 윗전을 대신해 공당에서 말하는 건 가능해도, 노비는 윗전을 대신해 결정을 내릴 수 없어.

  • 죄송합니다만, 저희 아씨께서 분부하시기를······.

  • 그걸 저희가 어찌 결정하겠습니까. 일단 저희 아씨께······.

정 대노야는 눈을 감고도 반근과 조 집사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정녕, 정녕!”

정 대노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실소를 터트리면서 침상을 손으로 내리쳤다.

“정녕!”

정 대부인과 방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정 대노야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정 대노야가 정녕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우리 정씨 가문을 패가망신시키려고 작정을 한 게야!”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진 정 대노야가 목청을 높여서 소리쳤다. 정 대노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악독하고 고약하구나!”

정 대노야는 말을 마치자마자 침상 위로 쓰러졌다. 정 대부인의 비명과 함께,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동행-

경성의 11월은 건조하고 쌀쌀했다. 북풍이 불어오자, 경성에는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왔어? 왔어?”

난로 옆에 앉아 있던 진(秦) 부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여종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여종은 대답 대신 소매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손에 쥐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진 부인이 웃으면서 여종에게 손을 뻗으며 서신을 달라고 손짓했다.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방에서 걸어 나오던 진 시강이 여종의 손에 쥐어진 서신을 힐끔 쳐다보았다.

진 시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자꾸 그런 쓸데없는 일로 관청의 속달을 사용하지 마시오.”

진 부인이 여종에게서 서신을 받아오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종은 대답을 한 진 부인이나 말을 건넨 진 시강 모두 이 일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데, 무슨 소식이라도 알아야지 않겠니.”

진 부인이 여종에게 말했다.

고개를 내저으며 대청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진 시강은 두모나 두봉도 걸치지 않은 채 일상복 차림으로 들어오던 진십삼과 마주쳤다. 진십삼은 밖에서 우수수 내리는 우박을 그대로 맞은 듯했다. 진십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카락에서 우박이 떨어졌다.

“아버지, 관청에 가시는 겁니까.”

진십삼이 예를 올리고 물었다.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그리 급하더냐.”

진십삼은 자신이 겉옷도 없이 돌아다닌 것을 나무라는 진 시강의 말뜻을 알아채고 넉살 좋은 웃음을 보이며 예를 표했다. 진 시강은 사환이 씌워 주는 우산을 쓰면서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진십삼은 문가에 서서 진 시강을 눈으로 배웅한 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진 부인은 서신 하나를 손에 들고 이제 막 열어 보려 하고 있었다. 진십삼이 들어오는 것을 본 진 부인은 재빨리 서신을 한쪽에 숨기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진 부인이 웃으면서 여종을 향해 물었다.

“우리가 오늘 누구네 간다고 했었지?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어서 준비하고 나가자. 자꾸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여종은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십삼은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 앉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삼, 이 어미랑 같이 나갈까? 종일 집에 박혀서 공부만 하니, 재미없고 답답하잖아.”

진 부인이 진십삼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어머니, 빨리 재미있는 얘기 좀 들려주세요.”

진십삼이 말했다.

“나는 웃긴 이야기 같은 거 잘 못 하는데, 어떻게? 그리고 재미있는 일도 없어.”

진십삼은 진 부인이 말하는 틈을 타, 재빨리 손을 뻗어 진 부인이 숨겨둔 서신을 낚아챘다. 진 부인이 웃으면서 서신을 도로 뺏어오려 했지만, 진십삼의 손이 진 부인보다 훨씬 빨랐다.

“볼 수 있겠어? 서신에 무슨 말이 쓰여 있을 줄 알고?”

진 부인이 묻자 진십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의 아들인 제가, 겁낼 게 있겠습니까.”

진십삼이 서신을 펼치면서 여유롭게 대답했다. 더구나 서신에 쓰여 있을 내용은 이미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 정씨 가문의 이부인은 동의했지만, 정 낭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아직 정 낭자에게 물어볼 기회를 못 찾은 것 같은데······.

으응? 내가 예상했던 결말이 아닌데?

진십삼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진 부인은 팔걸이 의자에 기댄 채로 여종이 건넨 찻잔을 손에 쥐고 눈웃음을 지으며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다리가 나아진 이후로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디 남들보다 준수했던 진십삼의 용모는 더욱 수려해졌다. 올해 열일곱이 된 그는 전보다 키도 훌쩍 큰 터였다.

진 부인은 천천히 찻잔을 돌리면서 진십삼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켜보았다.

서신을 접한 진십삼은 놀라서 눈썹이 올라간 듯하면서도,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화가 난 듯 표정이 굳어지기도 했다가, 곧 의연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서신을 다 읽어갈 때쯤에는 웃음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서신을 한 장씩 넘기던 진십삼은 작은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벌써 십칠 년이나 본 아들인데, 이토록 다채로운 표정을 본 것은 또 처음이네.

항상 웃고 있다고 해서 즐겁다는 뜻은 아니지. 울고 웃고, 기쁨과 슬픔이 있는 게 진정한 즐거움이야.

“어머니.”

진십삼의 목소리에 진 부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진 부인이 눈웃음을 지으며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어머니,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진십삼이 서신을 흔들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왜? 정 낭자가 무슨 해선 안 될 짓이라도 한 게야?”

진 부인이 서신을 달라고 손을 뻗으면서 물었다. 진십삼이 한숨을 쉬면서 서신을 돌려주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은 아닙니다. 낭자가 한 일은 도리와 이치에 부합한 일이니까요. 이 일을 남이 알게 된다고 해도 정 낭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둔한 자가 많지요. 정 낭자가 한 일은 틀린 일이 아니지만, 남의 미움을 살 수도 있는 일입니다.”

진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 낭자가 언제 남에게 미움받는 걸 신경이나 썼나?”

“미움받는 게 신경 쓰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십삼이 진 부인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치면서 말했다.

“어머니, 전 압니다.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지요.”

진 부인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쟤는 말을 어쩜 저렇게······.

진 부인은 한 손으로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면서, 다른 한 손으로 서신을 화로에 던졌다.

화로에 던져진 서신은 불길에 휩싸였고, 곧 재가 되어 사라졌다.

“어머니, 아직 서신을 읽지도 않으셨잖아요.”

진십삼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 내가 보고 싶은 내용은 없잖니. 내 관심사는 오로지 혼사뿐이란다. 다른 일은 나와 관련도 없고, 읽어 봤자 신경만 쓰이겠지.”

진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십삼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물러났다.

진십삼이 방을 떠나자, 진 부인은 웃음기를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부인, 십삼공자께서 정말로 정 낭자를 마음에 두셨나 봐요.”

여종이 말했다.

“우물에 있던 십삼을 꺼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 준 사람인데, 누군들 그런 사람을 마음에 품지 않겠느냐. 게다가 정 낭자는 재미있잖아. 정 낭자 같은 사람은 나도 본 적 없어. 요즘 여인들과는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지. 정 낭자를 곁에 두고 싶은 건 십삼뿐만이 아니야. 나도 그래.”

재미있다고?

여종으로서는 의아할 뿐이었다.

무뚝뚝하고, 말도 잘 하지 않고, 일부러 사람에게 거리를 두어 천 리 밖까지 밀어내는 여인이 뭐가 재밌다는 거지?

“한데 그 낭자에게는 원칙이 있잖습니까.”

여종이 말했다.

“원칙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은 변해. 그러니까 시도는 해 봐야지.”

진 부인이 찻잔에 남아있던 차를 쭉 들이켰다.

진십삼이 옥대교에 도착했을 무렵, 우박은 어느새 눈꽃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꽃이 나뭇가지와 옥대교, 그리고 땅을 천천히 덮었다.

진십삼이 말고삐를 당기는 것을 보자, 사환도 서둘러 말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두어 번 말굽을 굴렀다. 그러나 진십삼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멈춰 있을 뿐이었다.

“공자님, 반근 낭자는 지금쯤 점포에 있을 텐데요.”

사환이 진십삼에게 귀띔했다. 사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마차 소리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절 찾으셨어요?”

진십삼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시녀를 돌아보았다.

“벌써 돌아온 것이냐? 네 아씨가 없으니, 농땡이를 피우기 시작하는구나.”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시녀가 미소 띤 얼굴로 진십삼에게 뭐라 대꾸하려던 그때, 마차에서 또 한 사람이 허둥지둥 내렸다.

허둥대서인지 다리가 짧아서인지, 마차에서 내리던 사람은 발을 땅에 제대로 딛지도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진십삼이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겁에 질린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새로 온 몸종인가?

“넌 왜 내렸어? 마차로 데려다준다니까?”

시녀가 여자아이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말했다.

“아, 아니에요, 반근 언니. 언니 집에 도착했으니까, 저도 혼자 갈 수 있어요.”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눈이 오는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여자아이는 한사코 사양하며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시녀는 진십삼이 궁금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를 향해 웃으며 두 손바닥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했다.

“사공자를 뵈러 성 밖에 있는 서원에 갔었는데, 때마침 이 아이도 사공자를 뵈러 왔다지 뭐예요. 강주 출신이기도 하고, 눈도 오고 해서 같이 데려왔어요.”

시녀의 말에 진십삼은 아, 하고 짧게 대꾸했다.

정사낭.

진십삼이 여자아이를 한 번 더 쳐다보았을 때, 여자아이도 고개를 들어 몰래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여자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토끼처럼 재빠르게 달아났다. 진십삼이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진십삼이 저잣거리를 따라서 빠르게 사라진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누구네 몸종인데?”

여자아이가 떠난 방향을 내다보던 시녀가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지 않았어요. 사공자께 들으니 강주에서 경성으로 팔려온 아이래요. 누구네 집 몸종인지까지는 저도 모르죠.”

시녀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녀가 진십삼을 쳐다보며 물었다.

“공자님, 저희 아씨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별일은 아니고, 너희 아씨가 워낙에 돈을 시원스럽게 쓰잖느냐. 돈 부치는 걸 조금 서둘러도 좋을 것 같던데?”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하자 시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연말에 정산하기로 약조했으니, 지금은 보낼 수 없어요. 그래도 너무 염려 마세요. 저희 아씨께서는 뭐가 부족하다고 해도 문제없이 잘 지내실 거예요. 게다가 그게 돈이라면 더더욱이요.”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 머리를 틀었다.

진십삼과 사환이 말을 타고 떠나가자, 시녀도 옥대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모퉁이에 몰래 숨어 있던 춘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춘령의 얼굴에서 좀 전의 놀라고 겁먹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춘령은 손으로 코끝을 비비고 방향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강주부 외곽 서북 방향에서는 열댓 명의 호위가 마차 두 대를 이끌고 나아가고 있었다.

거센 북풍이 마차의 휘장을 나부끼게 하자, 아낙 하나가 마차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저기, 날씨가 너무 안 좋은데, 어디서 잠깐 쉬었다 가는 건 어때요?”

말을 타고 있던 호위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씨께서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두 아낙은 앞서가고 있는 마차를 내다보았다.

저 아씨한테 퍽이나 계획이 있겠다.

어느 날, 정교랑은 갑자기 마당에 있던 어린아이에게 강주부 근처에 재미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어린아이는 별생각 없이 녹각산(鹿角山)이라 대답했는데, 정교랑이 바로 다음 날 채비를 해서 지금 이렇게 녹각산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반근과 조 집사는 재판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급하게 정계에게 남정 여인 두 명을 구해 달라고 했다. 남정 여인들은 대략적인 이야기만 듣고 곧장 마차에 올라타서 정교랑과 함께 녹각산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매서운 바람에 눈이 섞여 눈보라가 되었다. 휘장을 올리고 앞을 내다보던 아낙들은 서둘러 휘장을 내리고 마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마차 안에는 석탄 화로가 피워져 있고, 자리에는 두껍고 부드러운 방석이 깔려 있었다. 마차에 타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방석을 만지작거렸는데도, 두 아낙네는 저도 모르게 또 방석에 손이 갔다.

“이렇게 좋은 원단을 방석 만드는 데에 쓰다니, 아까워 죽겠네. 이걸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 얼마나 따뜻하고 예쁠까.”

아낙 하나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으이구, 뭘 안다고. 부자들은 원래 다 그래. 정 대부인은 요강도 금은으로 만든다잖아.”

다른 아낙이 조그마한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따랐다. 아낙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맛을 음미하듯 차를 조금씩 입에 머금으며 마셨다.

“그만 좀 마셔. 그렇게 계속 마시니까 자꾸 측간을 찾지. 창피하지도 않아?”

아낙이 다른 아낙의 어깨를 때리면서 웃었다. 두 아낙은 마주 보고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저 아씨 밑에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 사람은 마차 안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감탄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정교랑을 따라 집 밖을 나선 지금이 제일 호강하는 때라고 두 아낙은 생각했다.

마차는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섰다.

두 아낙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조그마한 성에 들어온 듯했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밖은 눈보라가 일고 있어서 간혹 가다 보이는 행인 몇 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거리는 몹시 조용했다.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어느 객잔 앞이었다. 호객하는 점원들이 살갑게 웃으면서 정교랑 일행을 마중했다.

여기서 하룻밤 묵으시려는 건가? 아씨는 굳이 가까이서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모양새는 갖추는 게 좋겠지?

두 아낙은 마차에서 빠르게 내린 뒤, 정교랑의 마차 앞에 서서 말했다.

“아씨, 내리시지요.”

정교랑이 마차 안에서 한 손으로 휘장을 들어 올렸다. 두 아낙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북정 여종들이 윗전에게 하던 모습을 따라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아낙들이 내민 손을 잡지 않고 혼자 알아서 마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낙들은 가장자리에 금테를 두른 커다란 두봉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자신들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차와 말은 뒷마당에 세워졌고, 말들에게는 질 좋은 건초가 먹이로 제공됐다. 돈주머니를 건네받은 점원은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정교랑 일행을 맞이했다.

“저 사람들은 먹고 싶은 대로 주문해서 먹으라고 해요. 나는 흰죽에 곁들일 냉채 두 접시면 되니까.”

문 앞에 서 있던 점원이 정중하게 정교랑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시야에 들어오는 치맛자락만 쳐다보았다.

치마는 밝지 않은 담청색이었고, 화려하게 수놓아진 장식도 없었다. 하지만 점원은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바닥에 끌리는 치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 아씨.”

점원의 대답과 함께 시야에 보이던 치맛자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새하얀 버선이 눈에 들어왔고, 새하얀 버선마저 곧 점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점원의 시야는 건장한 아낙의 몸집에 의해 가려졌다.

“빨리 움직이지 않고!”

아낙이 외쳤다. 퍼뜩 정신이 든 점원은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허둥대면서 뛰어가려다가 하마터면 옆에 있던 기둥에 부딪힐 뻔했다.

아낙은 큰 소리로 웃다가, 자신의 웃음소리가 너무 무식해 보일까 봐 서둘러 웃음을 멈추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방에 앉은 정교랑이 책 한 권을 펼쳤다. 다른 아낙이 웃음을 그친 아낙을 향해 눈짓했다. 두 아낙은 벌써 한참을 방 안에 말없이 서 있었지만, 무슨 시중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씨, 저희가 방을 좀 닦아 드릴게요.”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아낙이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야! 부잣집 사람들은 워낙 따지는 게 많으니까, 먹고 마시고 덮고 자는 것도 다 자기들 것을 쓴다잖아. 남의 손 탄 건 지저분하다고.

두 아낙이 기뻐하면서 소매를 걷어 올리려고 했다.

“괜찮아요.”

정교랑이 책을 내려놓으면서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같이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식사하고 쉬어요.”

어떻게 그래!

“아이고, 그럼 우리가 뭐가 됩니까. 아씨의 시중을 들기로 하고 따라온 건데.”

아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수 없어요. 동족의 사람을 어떻게 노비 취급할 수 있겠어요.”

정교랑이 진지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을 데려온 건, 내가 여인의 몸이라 혼자 출타하기 불편해서예요. 그러니 두 사람은 내 시중을 들러 온 게 아니라, 나와 동행하는 거예요.”

정교랑의 반응에 두 아낙은 조금 당황했다.

“아씨, 말씀이 과하십니다. 저희는 노비 노릇을 하려는 게 아니고, 손 닿는 대로 일을 좀 하려는 것뿐이에요.”

아낙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한쪽에 놓인 세숫대야를 가지러 갔다.

“절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정교랑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여종이 우뚝 멈춰 섰다.

난처하게 만들다니, 누가 저 여인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집을 짓겠다면 짓고, 정 대노야를 고소하겠다면 고소하는 사람인데.

“농담이 아니에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 말 한마디에 두 아낙은 정교랑이 마당에서 화살을 들고 있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움찔했다.

아낙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방을 나갔다. 아낙 하나가 아차 싶었는지, 어색하게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아씨, 무슨 일이 있으시면 꼭 저희를 불러 주세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낙은 그제야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우리도 평범한 부인들처럼 놀라고 데려오신 건가?”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써도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두 아낙은 방석 위에 앉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점원이 웃으면서 밥상을 들여왔다.

“두 분,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각양각색의 정갈한 그릇이 밥상 가득히 놓여 있었다. 그릇만 보아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던 두 아낙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천히 드십시오.”

점원이 친절하게 말하며 방에서 물러났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마당에 흩날리는 눈발이 보였다. 아궁이로 따뜻하게 데워진 바닥 위에 앉아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던 두 아낙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서로의 어깨를 때리면서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나. 내가 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우리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반근 낭자가 그랬잖아. 무조건 아씨의 말을 들으라고. 아씨가 하라는 대로만 하랬어. 절대로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아씨가 우리더러 동행해 달라고 하셨으니까, 배객 노릇만 하면 되겠지?”

두 아낙은 입이 귀에 걸리게 웃으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배객!”

두 아낙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같은 시각,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왕 부인은 눈을 잔뜩 맞은 여종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노부인께서 위중하시더냐?”

왕 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정씨 가문의 여종은 왕 부인의 질문에 숨이 턱 막혔다.

어디부터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아니요, 아니요. 노부인은 괜찮으세요. 그런데 저희 노야께서······.”

“노야가 왜?”

왕 부인은 화들짝 놀랐다. 노부인보다 노야가 아픈 것이 그녀에게는 훨씬 중요했다.

“별일은, 별일은 아니에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의원을 불렀는데, 별일 아니라고 하셨어요.”

여종이 왕 부인의 시선을 회피하면서 대답했다. 여종의 대답을 듣자마자, 왕 부인은 밖으로 나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니. 부인께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대부인께서 당부하시기를, 부인께서 오실 필요는 없고, 혼례 일정만 조금 더 미루자고 하셨어요. 때가 되면 대부인께서 직접 오신다고······.”

미루면 미룰수록 나야 좋지.

왕 부인이 속으로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말 별일 아닌 게지?”

왕 부인이 묻자 여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노부인께서 편찮으신 게 아니라, 대노야의 몸이 안 좋다고? 사람이라도 불러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악귀라도 붙은 건 아니겠지?”

악귀가 맞긴 한데, 저희 집 악귀라서요.

여종은 속으로만 대꾸하고, 겉으로는 왕 부인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치며 얼버무렸다.

왕 부인은 안부를 두어 마디 더 물어보고는 정씨 가문의 여종을 돌려보냈다. 왕 부인은 자신의 앞에 가득 놓인 음식들을 쳐다봤지만, 이미 입맛이 다 떨어져서 젓가락을 쥐고 싶지 않았다.

왕 부인은 고개를 들어 마당에 내리는 눈을 쳐다보았다.

“저쪽에서 허구한 날 돌아가면서 아플 줄 알았으면, 우리 십칠을 밖에 내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왕 부인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눈이 이렇게나 오는데, 우리 십칠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으려나? 춥진 않겠지? 따뜻한 옷은 챙겼겠지? 집이 그리우려나? 내가 보고 싶겠지? 먹는 건 잘 먹고 있고?”

왕 부인은 어르고 달래서 집 밖으로 내보낸 아들이 몹시 걱정되었다. 왕 부인은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내린 눈 덕에 아침 햇살은 더욱 눈부셨다.

“이야, 저게 바로 녹각산인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행인이 많지 않았다. 일찍 문을 연 점포들 앞에서는 사람들이 빗자루로 사락사락 소리를 내면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에 갑자기 나타난 정교랑 일행은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다.

살집이 있는 아낙의 말을 들은 한 점포의 점원이 대꾸했다.

“맞아요. 저기가 바로 녹각산입니다. 눈 내린 경치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죠.”

점원은 여운을 느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낙이 몹시 기뻐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씨, 우리도 한 번 가 봐요. 녹각산의 설경이 일품이라는 말은 익히 들었는데, 직접 가 볼 기회는 한 번도 없어서······.”

점원이 아낙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몇 명의 시종들 사이로 한 여인이 두봉을 두른 채 서 있었다. 커다란 두모에 얼굴은 가려졌지만, 두모 아래로 백옥같이 고운 턱이 조그맣게 보였다.

부잣집 아씨가 나들이 나왔나 보네.

“보기에는 가까워도, 여기서 이십 리는 더 가야 해요.”

점원이 말했다. 정교랑이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한 손으로 두봉을 살짝 들어 올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을 내다보았다.

“좋아요. 가요, 우리.”

정교랑이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은색 비단 장식을 두른 녹각산은 인간계의 선경처럼 아름다웠다. 녹각산은 워낙에 설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곳곳에 식당과 주점이 즐비해 있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 있는 한 고급스러운 주점의 이 층에서 남녀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씨, 여긴 사람이 꽉 찼나 봅니다.”

시종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호객하러 나온 점원은 시종의 말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씨, 사람 없습니다, 없어요. 이 층에는 한 무리밖에 없으니 자리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병풍으로 공간을 나눌 수 있어서 서로 방해될 것도 없고요. 설경을 감상하기에 제일 좋은 자리도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넓은 대청에서 보셔도 좋고, 따뜻한 방 안에서 감상하셔도 좋지요.”

“그럼 여기로 하지.”

정교랑이 말했다.

점원은 크게 기뻐하면서 목청을 높여 인사를 올렸다. 시종 중 다섯은 아래층에 남아서 문을 지키기로 했고, 나머지 시종 다섯과 두 아낙은 정교랑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이 층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여인들의 교태 섞인 콧소리에서는 몹시 음란한 분위기가 풍겼다.

누가 여인들을 끼고 놀러 나왔나 보군.

앞서 걸어가던 시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올라가도 괜찮은 건가? 안 괜찮으면, 내쫓아야지 뭐.

시종이 걸음을 재촉하면서 층계를 올라갔다.

시종이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에, 이 층에 있던 손님들이 놀랐는지 웃고 떠드는 것을 잠시 멈추고 층계 쪽을 쳐다보았다. 이와 동시에 층계를 올라온 두 시종은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시종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정교랑을 막아서고 싶었다.

커다란 대청 안, 설경을 마주한 곳에는 두꺼운 깔개가 깔려 있었다. 깔개 위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지만, 남자는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여자들은 하얀 가슴이 훤히 보이는 옷을 두르고 있었고, 비녀며 장신구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짙은 화장으로 색기를 풍기는 관기들은 양쪽에 앉아 칠현금을 연주했다.

지금 이게 식당이야, 기루야?

갑자기 이 층으로 올라온 사람들을 보자, 앉아 있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랐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급히 옷으로 가슴을 가리고 남자의 품에 숨으려고 했다. 여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통에, 남자는 하마터면 바닥에 납작하게 깔릴 뻔했다.

“뭐야! 썩 꺼지거라, 썩 꺼져! 누가 너희더러 올라오랬어? 이 몸이 여기를 통째로 다 빌린다고 했잖아.”

여자들 사이에서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은 시종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시종들은 여인들 사이에 있는 남자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느라, 뒤에 오고 있던 정교랑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공자님, 여길 통째로 빌릴 돈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길을 안내하던 점원이 웃으면서 뒤에 있던 정교랑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손님들, 이쪽으로 오시지요.”

층계를 올라온 두 아낙이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을 보면서 감탄을 하려다가, 대청 중앙의 눈꼴 시린 광경을 보고는 악 소리를 내질렀다.

“정말 남사스러워 죽겠네!”

깔개 위에 앉아 있던 여인들이 목청 큰 남정 아낙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흘기면서 소리를 질렀다.

정교랑이 층계를 다 올라올 때쯤, 두 아낙이 서둘러 정교랑의 앞을 막아섰다.

“보시면 안 됩니다, 보면 안 돼요. 아씨께서 보시면 눈병 나십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여인들에게 파묻혀 있던 남자는 자신의 여인들이 창피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꺼져, 꺼지라고! 당장 꺼져!”

남자가 삿대질하면서 호통쳤다. 꽃밭에서 펄쩍 튀어 오른 사내를, 정확히 말하면 소년 공자를 본 시종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공자도 여기 있었네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여인의 입술 자국을 얼굴에 묻힌 채 화를 내던 소년 공자는 정교랑의 목소리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아는 사람인가?

소년 공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층계 쪽을 쳐다보았다. 두 시종이 자리를 비키자, 두봉을 두른 채로 천천히 두모를 들어 올리는 여인이 보였다.

여인이 두모를 벗자,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토록 아름다운 미인을 봤음에도, 소년 공자는 야차라도 본 양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엄마야! 여길 어떻게!”

소년 공자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외쳤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자신의 발에 걸려서 뒤로 자빠졌다. 소년 공자가 뒤로 넘어지면서 뒤에 있던 탁자를 엎어버린 통에, 탁자 위에 있던 술과 다과 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쏟아졌다.

이 층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안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비명 소리는 천장을 뚫을 듯한 기세였다.

점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두모를 벗은 젊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어린······ 어머니가······.”

점원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대청에 젊은 남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점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귀신이라도 본 듯 혼비백산한 채 여인들 사이로 숨은 소년 공자의 얼굴이 보였다.

“한 가족이에요?”

점원이 요리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시종에게 물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되겠지.

머뭇거리던 시종은 으흥 하는 콧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점원의 눈에는 묵인으로 보이는 대답이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했다.

‘요람에 누운 할아버지와 지팡이 짚고 다니는 손자’라는 말이 있듯 항렬은 나이와 무관한 것이었다. 게다가 소년 공자는 딱 봐도 있는 집 자식 같아 보였다.

돈 많은 노야가 어린 후처를 들이는 건 흔한 일이지.

“그러니까 계모다?”

뒤따라 내려오며 마지막 층계를 딛던 시종은 점원의 물음에 발을 헛디뎌 엎어질 뻔했다.

“어디서 개소릴 지껄여!”

시종은 점원의 따귀를 올려붙일 기세로 손을 들었다가 모자를 빗겨 친 후 소리를 빽 질렀다.

“또다시 그런 개소릴 지껄였다간 네놈 입에 개똥을 넣어 주겠다!”

점원은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감싸 쥔 채 입을 다물었다.

정교랑은 왕십칠 쪽으로 가지 않고 한쪽 옆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얼른 뒤따라 자리에 앉던 아낙들은 여인들 품속으로 파고든 왕십칠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낙들 역시 왕십칠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외모는 준수한데 몸이 좀 허약해 보이네.

근데 뭘 저렇게 놀라? 아씨가 정 대노야를 고소한 일을 아나?

놀란 왕십칠의 모습을 본 정교랑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바깥의 설경을 감상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왕십칠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이 사정없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공자님, 저 낭자는 누구예요?”

옆에 있던 예쁘장한 시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이들은 낭자가 처음 얼굴을 드러냈을 때 이미 깜짝 놀란 터였다.

저리 아름다운 낭자가 왔다면 공자가 기뻐 어쩔 줄 몰라야 하는데, 이토록 놀라 혼비백산할 줄이야.

분명 놀라 혼비백산한 것이었다. 좋아서 넋이 나간 게 아니라.

“입 다물어라, 입 다물어.”

왕십칠이 소리쳤다. 밖에 나와 여러 일이 지나도록 공자가 이들을 이토록 무섭게 대한 건 처음이었다. 시녀들은 곧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왕십칠은 시녀들을 아끼고 달래 주기는커녕 저쪽에 있는 낭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공포와 경계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왕십칠이 느끼는 긴장감과 공포심은 이쪽의 분위기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점원들이 줄줄이 들어오더니 탁자 위에 요리들을 차려 놓았다.

“아씨께선 술을 안 드시지만, 날이 추워 술을 주문했습니다.”

시종이 공손히 말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술을 마시지 않지만, 여기 있는 두 사람은 마시는 게 좋겠네.”

정교랑이 권하는 손짓을 하자, 점원들은 얼른 술 주전자 두 개를 두 아낙 앞으로 내려놓았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저희도 술 안 마셔요.”

두 아낙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건 당연했다. 감히 술을 마시다니. 기껏해야 새해 명절에 술지게미를 물에 타 실컷 마셔 본 게 전부였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어려워하지 말고 들어요. 설경을 감상할 땐 술을 곁들여야 해. 건강 때문이 아니면, 나도 마셨을 거예요.”

두 아낙은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들은 본디 규율이나 법도 같은 건 잘 몰랐고, 남을 보며 따라 하는 정도였다. 정교랑은 이들에게 딱히 규율이나 법도를 바라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깔보거나 거리를 두지도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건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두 아낙은 그 경멸과 무시의 눈빛을 정씨 가문 집사 부인들의 눈에서 자주 봤다. 정씨 가문의 대부인과 이부인이야 만나 볼 기회조차 없었고.

그런데 이 아씨는 그런 사람들과 완전히 달랐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아씨의 시선은 그저 평온하고 담담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우러러보거나 내려다보지 않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

“정말 좋은 술이네요.”

술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향기를 맡아 본 아낙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반나절이나 걸은 데다 추운 겨울에 출출하기까지 하던 차라 두 아낙은 곧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정교랑은 아낙들의 대화에 끼지 않았지만, 두 아낙 역시 딱히 어려워하지 않아 분위기는 편하고 스스럼없어 보였다.

그에 비해 왕십칠은 고통스러운 눈치였다.

“왜 이래?”

시녀 몇 명이 툭툭 치자 왕십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시녀는 억울하단 표정으로 왕십칠을 보며 손을 뻗어 다리를 주물렀다.

“다리에 쥐가 나겠어요.”

“공자님, 여기서 드시는 게 마음에 안 드시면 우리 이만 가요.”

다른 시녀도 속삭였다.

가자고?

왕십칠은 문득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도망쳐 왔는데, 저 여인은 여기까지 쫓아왔어!

“정교랑!”

왕십칠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멈칫하며 왕십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뜻밖에도 왕십칠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비틀고 있었다.

“어엇······.”

왕십칠이 허리를 숙이며 다리를 붙잡았다. 두 아낙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놀란 표정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공자님, 다리에 쥐가 나셨나 봐요!”

시녀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부랴부랴 왕십칠의 다리를 주물렀다. 시녀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왕십칠의 비명이 섞이면서 이 층에서는 또 한바탕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정교랑은 금잔을 든 채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물을 마시며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정교랑, 뭐, 뭘 하려고?”

왕십칠이 시녀들을 밀치고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가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왕십칠을 쳐다봤다.

“설산을 보잖아요.”

정교랑은 손에 든 금잔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바보 시늉에 도가 튼 여인이야. 무섭고 독한 살인자일수록 위장에 능한 법이지.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실컷 보든가. 난 간다.”

왕십칠이 이를 갈며 말하자 정교랑은 금잔을 내려놓았다.

“뭘 하려고?”

놀란 왕십칠이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정교랑이 왕십칠을 향해 예를 표했다.

“안녕히 가세요, 공자님.”

왕십칠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분명 네 입으로 말한 거다. 체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고 내가 알아줄 거란 기대는 버려.

왕십칠은 곧장 뒤돌아 나갔다.

영문을 몰라 넋이 나가 있던 시녀들은 쿵쿵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공자를 불러대며 허둥지둥 뒤따라갔다. 한바탕 떠들썩하던 대청이 마침내 고요를 되찾았다.

저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기녀는 칠현금을 안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뭐야, 돈도 안 주고 내뺐잖아!”

시녀는 비명을 지르며 쫓아 내려가려고 했지만, 정교랑이 불러 세웠다.

“다른 곳에 연주하러 갈 거니?”

정교랑이 물었다. 두 기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눈앞에 있는 여인을 재빠르게 훑었다.

화려한 장신구는 없었지만 최고급 옷감을 쓴 데다 바느질 솜씨도 정교해 보였다. 게다가 방금 전 부잣집 공자가 이 낭자한테 놀라 줄행랑을 놓은 것만 봐도, 이 낭자가 더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아니요.”

두 기녀가 웃음을 지으며 예를 표했다.

“그럼 연주로 흥을 돋워 봐.”

정교랑이 말했다.

“방금 전 그 공자님의 돈은······.”

기녀 하나가 떠보듯 물었다.

“내가 내지.”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두 기녀는 순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다가와 한쪽 옆에 꿇어앉았다.

“듣고 싶은 곡이 있으세요, 아씨?”

“밝고 경쾌한 거면 돼.”

두 기녀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현을 조율하며 음을 맞췄다. 곧이어 딩딩당당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낙들은 기뻐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설경은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술이며 안주에 흥을 돋우는 곡조까지 있으니 이게 웬 호사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쪽의 대청 분위기가 한창 흥겨워졌을 즈음, 저쪽의 왕십칠은 마차를 내달리고 있었다.

왕십칠에게 가장 큰 총애를 받는 시녀 둘은 마차의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도 찻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옷소매도 얼룩덜룩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수심에 잠겨 있는 공자의 모습을 보자 다가가 위로의 말을 꺼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공자님, 성에 있는 객잔으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다른 곳으로 모실까요?”

마차 밖에서 사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으로 돌아가서 뭐해!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냉큼 도망쳐야지!”

왕십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차 밖에서 바로 네 하는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는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심하게 흔들렸다.

왕십칠은 마차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엎어진 탁자를 한쪽으로 밀쳐 두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이라······.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왔는데, 결국 쫓아오지 않았던가!

정말 무시무시한 여인이네. 왜 이렇게 끈질긴 거야?

왕십칠은 손을 뻗어 얼굴을 쓸어 보았다.

얼굴······.

너무 잘생긴 게 화근이었어! 잘생긴 외모가 이리 큰 죄업일 줄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왕십칠은 돌연 눈빛을 반짝였다.

“멈춰라!”

왕십칠의 명에 마차가 급히 멈춰 섰다. 너무 갑작스럽게 세우는 바람에 말은 히이잉 울부짖었고, 마차 안에서도 비명이 흘러나왔다. 왕십칠은 하마터면 마차 밖으로 튕겨 나갈 뻔하게 만든 마부를 욕하는 대신, 휘장을 들고 소리쳤다.

“돌아가자, 돌아가.”

마부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말 머리를 돌린 다음, 머뭇거리며 물었다.

“공자님, 어디로 돌아갈까요?”

“남승루(覽勝樓)로 돌아가라고!”

왕십칠의 고함에 마부는 말을 재촉했다.

다시 돌아온 소년 공자의 모습에 남승루 점원들은 흠칫 놀랐다. 이미 자리를 말끔히 정돈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잠깐 나갔다 와서 계속 먹으려던 거였나?

왕십칠은 마차에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칼 있냐?”

왕십칠이 홱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 있던 사환에게 물었다. 사환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다리가 풀릴 뻔했다.

“공자님, 뭘 하시려고요?”

사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 낭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큰일 난다고요!

“시끄럽고, 빨리 내놔!”

왕십칠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사환은 하는 수 없이 울상을 지으며 옆에 있던 호위의 칼을 가져다 건넸다.

“이거밖에 없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비수를 본 왕십칠이 눈을 부라렸다.

“공자님, 이거 외엔 곤봉뿐인데요.”

사환의 말에 왕십칠은 한숨을 내쉬고 비수를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거로 하지.”

왕십칠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 층을 쳐다보았다. 이 층에서는 칠현금 가락과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부른 기녀한테 노래를 시켜? 진짜 뻔뻔한 여인일세!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아무도 따라오지 마!”

왕십칠은 시종들에게 소리친 후, 작은 비수를 움켜쥐고 걸음을 옮겼다. 왕씨 가문 시종과 시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공자님, 공자님······.”

시녀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쳐 부르면서도, 감히 쫓아가지 못했다.

“공자님이 뭘 하려고 저러시지?”

“공자님은 정 낭자를 싫어하시잖아. 설마 정 낭자를 때리시려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왕십칠의 사환은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한테 맞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노래를 들으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다들 먹고 마시며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종들은 주위 여기저기로 흩어져 편한 모습으로 있었지만, 호위에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왕십칠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저쪽에 있는 여인은 시종일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여인은 팔걸이에 기대 한 손으로 금잔을 쥐고 한 손은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칠현금 가락에 맞춰 박자를 쳤다.

흥, 아주 미인도가 따로 없네.

왕십칠이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저쪽에 있던 미인이 고개를 돌려 왕십칠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순간 미인의 얼굴이 백골로 변했다.

왕십칠이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왕십칠을 쳐다봤다. 칠현금을 타던 기녀마저 연주를 멈췄고, 정교랑 역시 고개를 돌렸다.

아, 환각이었구나.

왕십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교랑, 이리 와.”

왕십칠이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은 뜻밖이라고 여기면서도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두 아낙도 얼른 따라 일어나려고 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앉아 있어요.”

정교랑은 두 기녀에게도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딩딩당당 악기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왕 공자, 무슨 분부라도?”

왕십칠 앞에 선 정교랑이 물었다. 정교랑이 걸어오자 왕십칠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너, 너 따라와. 할 말이 있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왕십칠은 저쪽 병풍 뒤, 시선이 가려지는 별실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은 딱히 뭐라 묻지 않고 뒤따라 갔다.

별실로 들어가 창밖을 보고 선 왕십칠의 몸은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왕십칠이 별안간 몸을 홱 돌리자 정교랑은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 공자, 무슨 뜻이죠?”

정교랑이 웃으며 물었다.

비수를 손에 꼭 쥐고 있던 왕십칠은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반짝였다.

“정교랑, 나한테 달라붙지 마! 난 절대 너랑 혼인 안 해.”

왕십칠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왕십칠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날 안 놔주고 기어이 달라붙겠다면, 내, 내가 확······.”

비수를 든 왕십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소리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날 죽이려고요?”

정교랑의 물음에 왕십칠은 코웃음을 쳤다.

“널 죽여? 나도 알아, 너 대단한 거. 난 널 죽일 수 없어. 하지만, 나 자신을 죽일 순 있지! 너, 너, 넌 내 얼굴을 좋아하는 거잖아. 계속 혼인을 강요하면, 내, 내 얼굴을 망쳐 버리겠어!”

왕십칠이 비수를 든 손의 방향을 틀어 자신의 얼굴을 겨눴다.

얼굴을 망쳐?

반짝이는 예리한 칼날이 왕십칠의 얼굴을 향했다. 정교랑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듯 놀라 쳐다보기만 했다.

“나 농담하는 거 아냐!”

왕십칠이 소리쳤다. 왕십칠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보여 주려는 듯 떨리는 손으로 이를 악물었다. 보드라운 피부를 뚫고 빨간 점이 생겨났다.

정교랑은 그런 왕십칠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이 고개를 젖혀가며 와하하 웃어대는 통에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밖에서 들리는 딩딩당당 칠현금 소리를 덮어 버렸다.

반근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척이나 놀랐을 테고, 주육낭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을 것이다. 정교랑이 소리 내어 웃은 것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비수를 든 왕십칠은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예쁘고 웃음소리도 듣기 좋아······.

“좋아요.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정교랑은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동의하죠. 이 혼사를 원치 않는다면, 관두죠.”

이게 다야?

왕십칠이 의아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로?”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공자도 숨어다닐 것 없어요. 돌아가서 가족들한테 말해요. 가족들이 안 믿으면 나한테 오라고 해도 되고요.”

말을 마친 정교랑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아, 어이!”

왕십칠이 소리치자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왕십칠을 쳐다봤다.

“공자, 또 뭐죠?”

왕십칠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말 동의하는 거야? 욱해서 날 죽이거나 하는 건 아니지?”

왕십칠의 물음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었다.

“공자 말을 잘 들으라고 하지 않았나요?”

왕십칠은 그 말에 멈칫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거슬려?

  • 뭐, 상관없지. 그림 같은 미인은 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낭자는 앞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 아주 좋아. 말만 잘 들으면 됐지. 앞으로 낭자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내가 편안하게 살게 해 줄게.

눈앞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왕십칠은 오싹 소름이 돋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여인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잘 들은 건데요.”

정교랑이 왕십칠을 향해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다음 뒤돌아 걸어갔다.

“아, 저기······.”

왕십칠은 또다시 소리쳐 부르려 하며 걸음을 내디뎠지만, 이번에는 여인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별실을 나갔다.

정말로······.

왕십칠은 얼이 빠진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알 수 없는 서운함과 약간의 아쉬움이 몰려왔다.

사실, 그래도 꽤 귀여웠는데. 이대로 끝내는 건가? 저 미인을······.

걸음을 옮겨 별실 밖으로 나온 왕십칠의 눈에 옷자락을 털고 자리에 앉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시종들이 공손하게 서 있었다.

하얀 눈이 펼쳐진 설경의 햇살 아래로 보이는 짙은 옷자락은 눈이 부셨다. 그날 밤 섬뜩한 빛을 내뿜던 화살처럼.

살인······.

순간 오싹 소름이 끼친 왕십칠은 층계를 우다다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아래층에 있던 시종들은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울상을 짓고 있던 시녀들은 뛰어 내려온 왕십칠을 보더니 반색을 하며 달려들어 살뜰한 말을 건넸다.

이래야 좀 여인다운 느낌이 들지.

왕십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예쁜 두 시녀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가자, 이만 돌아가자.”

왕십칠이 웃으며 말했다.

시녀들은 순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왕십칠에게 달려들어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초조하고 얼마나 괴로웠으며 얼마나 애가 탔는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공자님, 그 낭자가 정말 이젠 안 달라붙겠대요?”

왕십칠은 우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나 왕십칠이야······.”

왕십칠은 말을 하다 말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노랫소리와 칠현금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자, 마차에 타서 얘기하자.”

목을 잔뜩 움츠린 왕십칠이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는 시녀들을 끌어안고 마차에 올랐다.

“공자님, 성으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까요?”

사환이 밖에서 물었다.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 멍청한 놈아!”

마차 안에서 왕십칠이 욕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사환의 대답과 동시에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았다.

“공자님, 어서 말씀해 보셔요.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뭐, 간단해. 알다시피 이 몸이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잖느냐. 그러니 안 놔주려고 하지. 글쎄, 울기까지 하더라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했어. 인정에 호소하고 도리로 설득하니, 결국 알아듣더구나.”

시녀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왕십칠을 우러러보았다.

“정말 가엾네요. 공자님은 왜 그 낭자가 눈에 안 차세요?”

왕십칠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다. 확실히 그렇구나. 난 그 낭자가 눈에 안 차.

“인연이 아닌 거겠지.”

왕십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잘 설득했어. 이 세상에 좋은 사내는 많으니, 나 때문에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공자님은 정말 너무 좋은 분이세요. 그러니 누가 공자님을 놓치려고 하겠어요.”

시녀들이 조잘조잘 떠들던 그때, 왕십칠에게 기대 있던 시녀 하나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고운 손가락으로 왕십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공자님, 이게 뭐예요? 연지예요?”

손가락이 닿자 통증을 느낀 왕십칠이 아얏, 하는 소리를 내자 시녀도 놀라 소리를 질렀다.

“피잖아요, 피!”

순간 마차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쏟아대는 통에 왕십칠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왕십칠은 여리디여린 시녀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괜찮다, 괜찮아. 조금 베인 것뿐이야.”

시녀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왕십칠을 쳐다보았다.

“공자님, 아니, 어쩌다가 베인 거예요?”

왕십칠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낭자가 때렸어요?”

시녀의 말에 왕십칠은 순간 안도했다.

“그래, 맞아.”

왕십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이마를 받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울고불고 떼를 쓰며 난리를 피우지 뭐냐. 글쎄, 칼까지 들고 자결을 하겠다며······.”

시녀들은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칼까지 들고 있었어요?”

한 시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묻자 왕십칠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내, 내 거였어. 내가 비수를 가져갔거든. 옷자락을 베어 절교하려고. 근데 그걸 잽싸게 낚아챘어. 그걸 도로 빼앗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만 베인 거야.”

시녀들은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공자님은 정말 용감하세요.”

“공자님, 너무 위험하셨어요. 다음엔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마차 안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오며, 길 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왕십칠 일행은 큰길을 따라 차츰 멀어져 갔다.

아낙은 자신이 푹신한 양모 위에 누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드랍고 따스했다.

너무 편안하네. 지금 이거 꿈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아낙은 눈을 번쩍 떴다. 푸른 휘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누군가가 휘장을 들어 올리자, 순간 눈부신 햇살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낙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세랑, 진짜 잘 자네. 밖에 나오니까 아주 부잣집 마님이 다 됐어.”

안으로 들어온 아낙이 웃으며 침상 앞에 앉았다. 빛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세랑은 눈을 떴다. 일어나 앉으려는데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삼랑,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세랑의 물음에 삼랑은 웃음을 지었다.

“어제 술을 좀 퍼마셨어? 안 아픈 게 더 이상하지.”

세랑은 어젯밤 일을 떠올리고는 머리를 치며 일어나 앉았다.

“아이고, 내가 미쳤지. 진짜 취하도록 마셨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시중들 사람이 만취하도록 퍼마셨으니, 원. 이 시간이 되도록 퍼질러 자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침 식사를 가져왔어요. 맛있게 드세요.”

세랑이 손으로 바깥쪽을 가리켰다.

“저 봐, 저 봐. 먹고 마시는 것도 모자라 시중까지!”

삼랑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서두르기나 해. 얼른 먹고 시중들러 가게. 좀 아까 보니까 아씨께서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시더라고.”

정씨 저택 안.

잰걸음으로 총총 걸어오던 여종은 문을 넘으면서 눈을 밟아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이게 뭐야? 다들 눈이 멀었느냐?”

여종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앙칼지게 소리치자, 옆에 있던 두 몸종이 얼른 빗자루를 들고 달려왔다.

“한 번만 더 게으름을 피웠다간 살가죽을 벗겨 버릴 줄 알아!”

여종은 몸종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소리쳤다. 몸종은 말대꾸도 못 하고 조용히 비질에 열중하며, 여종이 대청으로 허둥지둥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대청에서는 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정 대부인은 손수건을 들고 이제 막 약을 들이켠 정 대노야의 입가를 닦아 준 다음, 베개를 정돈하고 정 대노야를 눕혔다.

정 대노야는 초췌한 안색이었고, 눕는 동작조차도 힘에 부치는 듯 긴 한숨을 토했다. 안으로 들어온 여종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냐?”

정 대노야가 눈을 감은 채 묻자 여종은 고개를 숙였다.

“별일은 아니옵고······.”

여종이 우물쭈물하자 정 대노야가 말을 끊고 나섰다.

“말해라! 그날도 분통 터져 죽지 않았는데, 더 이상 놀랄 일이 뭐 있겠느냐! 내가 무섭지 않다는데, 너희가 뭘 겁내는 게야!”

정 대부인이 얼른 손을 뻗어 가슴을 쓸어 주었다.

“무서우실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신경 쓰실까 봐 그러죠. 의원이 이 병은 조용히 요양에 힘써야 한다고 했잖아요.”

정 대부인이 말했다.

“지금 신경 쓰지 않으면, 나중에 더 골치 아파질 거요. 뭐가 됐든 당장 해결해야지. 말해라.”

“네, 조사할 게 있으니 관부로 좀 나오시랍니다. 그리고 장부도 보겠대요.”

안색이 싹 변한 정 대부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어딜 감히!”

여종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점포 두 개도 강제도 문을 닫게 해 놓더니, 이젠 우리 집까지 손을 뻗쳐?”

정 대부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하루만 문을 닫아도 점포 손실이 얼마나 되는 줄 저들이 알기나 해?”

“알다마다.”

정 대노야가 간신히 일어나 침상에 앉으며 말했다.

“노야, 우리도 위쪽에 연줄이 없는 게 아닌데, 저들이 어떻게 이런 횡포를 부리죠?”

정 대부인은 돌아앉아 정 대노야를 부축하며 눈물을 보였다.

“못 할 것도 없겠지.”

정 대노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굶주린 개가 고기를 입에 물었는데 조금 놀랐다고 입에 문 걸 내려놓을 것 같소? 더구나 저들은 논리도 분명하고 근거도 타당한데······.”

정 대노야가 손을 뻗어 남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고소를 취하하지도 않을 테고.”

정 대노야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교랑의경> 13권에서 계속

교랑의경 13권

차례

누구의 잘못

밤의 사색

자책

두견새 피 토하고

-누구의 잘못-

저쪽? 왜 저쪽이라고 했지? 그 여인은 분명 이쪽 사람인데.

한숨을 푹 내쉰 정 대노야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서 그 애를 데려올 방법이나 찾아보시오! 내란을 잠재워야 외환을 막지. 안 그랬다간 저들이 정말 우리 정씨 가문의 살갗을 벗기고 뼈를 바르려 들 거요.”

“어딜 감히요!”

정 대부인이 놀라 소리쳤다. 정 대노야는 이미 기력을 소진한 듯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었다.

“못 할 것도 없지!”

지부 관청 안. 일상에서 입는 도포를 입은 송 지부가 친히 차를 우리며 말했다.

“고소장을 접수했으면 응당 조사해야 합니다. 조사를 안 하는 것이야말로 직무 유기지요.”

맞은편에 앉은 식객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관졸 두 명이 급히 들어왔다.

“대인, 정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는데 대노야가 병으로 앓아누워 당분간 올 수 없답니다.”

지부 대인은 예상했던 반응인 듯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봤는가?”

지부 대인은 식객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의 반응을 보게. 우리 사람을 욕하며 내쫓질 않나, 병을 핑계 대질 않나. 이게 무슨 뜻이겠나?”

식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한다는 뜻이지요.”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지.”

송 지부는 찻잔을 들며 미소를 짓고,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백자 찻잔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올곧고 깨끗한 이는 없네. 조사하려 들면, 뭔가는 나오기 마련이지. 겁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나? 더구나…….”

송 지부는 손에 들고 있던 차를 단숨에 비우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그 진씨 가문 사람은, 아직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가?”

식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바깥출입을 안 하고 있습니다. 가끔 밥이나 먹으러 나오는 정도지, 누군가와 왕래하는 일도 없고요.”

송 지부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거 이상하네. 그 사람들은 여기 왜 온 거지?”

남정으로 온 두 여종은 정교랑의 마당 문이 활짝 열려 있자 기대에 찬 눈길로 안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가 시야로 들어오자, 두 여종은 기뻐하며 아씨를 불렀다.

“우리 집 교랑은 지금 없는데.”

정 이부인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우리 집……. 언제부터 그쪽 집이 된 거야?

두 여종은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감히 말대꾸를 하지는 못했다.

“그럼 교랑 아씨께선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올 때가 되면 오겠지.”

여종들이 웃으며 묻자 정 이부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서던 여종들의 눈에 정 이노야 집안의 두 여종이 고개를 숙인 채 급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대방과 이방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지경인지라, 이들은 정면에서 마주쳤는데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나더러 돌아오라고? 돌아오긴 어디로? 내쫓을 땐 언제고 돌아오래? 어림도 없는 소리!”

뒤에서 정 이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여종은 돌아보지 않은 채 골목 모퉁이를 돌아 들어갔다.

“어머니!”

안에서 나오던 정칠랑은 아버지가 보낸 여종을 내쫓는 정 이부인의 모습을 보고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벌레가 물어서 못 자겠어요.”

불과 며칠 만에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를 잃고 얼굴이 누렇게 뜬 시골 아이가 된 딸의 모습을 보자 정 이부인도 마음이 쓰렸다.

사실 잠을 못 잔 건 딸뿐 아니라 정 이부인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정면을 바라보자 반쯤 열린 방문이 보였다. 몸종은 이제 막 정돈을 마치고, 이불을 다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네 언니도 집에 없으니, 그 방에 가서 눕는 게 어떠니?”

정 이부인의 말에 정칠랑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바보 방 쓰기 싫어요!”

“바보란 말 하지 말랬지!”

정 이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이제 우리 모녀가 재기할 수 있을지는 전부 그 애한테 달렸어.”

정 이부인은 정칠랑을 잡아끌며 걸음을 옮기더니, 나머지 반쪽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서 따뜻한 기운과 함께 맑고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정 이부인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청태향(淸泰香)이네!”

듣기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향이라고 했다. 전에 한 번 사 본 적이 있는데, 정 대부인이 사치와 낭비를 이유로 비용을 전부 삭감하고,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바꾼 향도 좋은 것이었지만, 정 이부인은 어쩐지 성에 차지 않았다.

최고급을 써 봤는데 차등의 것이 눈에 찰 리가 있나. 얘가 이 향을 쓰다니 뜻밖이네.

정칠랑은 향에 대해 잘 몰랐지만 요 며칠 꿉꿉한 냄새에 죽을 것 같다가 모처럼 향긋한 냄새를 맡자 구원이라도 받은 듯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어머니, 나 여기서 잘래요!”

정칠랑이 선포하듯 외쳤다. 정 이부인은 정칠랑을 찰싹 때리면서도 잠자코 따라 들어가 방 안을 살폈다.

정 이부인과 정칠랑이 지내던 거처보다 별로 크진 않았지만, 벽에는 대나무로 엮은 자리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푹신한 깔개가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정 이부인은 점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오산(吳山) 선생의 그림이잖아.”

정 이부인은 병풍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이 솜씨는…….”

“어머니, 이 등이 엄청 예뻐 보여요. 위에 그림도 있어요.”

바닥에 꿇어앉은 정칠랑이 등을 보며 외쳤다. 새하얀 종이 등롱이 장식용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간단한 실선이 이어져 반쯤 핀 연꽃 모양을 나타냈다.

정칠랑이 손을 뻗어 그 위에 찍힌 낙관을 만져 보며 읽었다.

“막간(莫干)…….”

또다시 헙 하고 숨을 들이켜며 꿇어앉은 정 이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등을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건 연주(燕州) 막씨 가문의 등이야! 폐하께 올릴 진상품을 만드는 집안인데…….”

“외조부님도 갖고 계셨던 거네요.”

정칠랑도 어디서 봤는지 알아보고 입을 삐죽였다.

“네 외조부님은 보물처럼 애지중지 떠받드셨지. 쓰는 건 고사하고 쳐다보기만 해도 아까워하셨어.”

정 이부인이 등을 돌려보며 말했다.

얘는 이걸 이렇게 아무렇게나 쓰고 있네. 아까워라.

정칠랑이 이번에는 저쪽에 있는 다리가 죽간처럼 세워진 서안(書案)을 보며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머니, 이 서안은 쌍육 말판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두 모녀가 함께 들여다보려는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예요?”

반근이 놀라 소리치자 정 이부인은 머쓱해하며 등을 내려놓았다. 저쪽의 정칠랑도 입을 삐죽거리며 탁 소리가 나도록 서랍을 밀어 넣었다.

“뭐 도울 건 없나 보고 있었어.”

정 이부인이 말했다.

“얼른 나가세요, 얼른요.”

반근이 말했다.

혐오스러워 죽겠다는 저 표정은 정 이부인도 일찍이 본 적이 있었다. 집안에서 하급 여종들이 실수로 안에 들어오면, 이부인의 측근 여종들이 기겁을 하고 내쫓으며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그래 봤자 아랫것 주제에.”

정칠랑이 소리쳤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어린아이일수록 더 눈치가 빠른 법이었다. 게다가 요 며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 일들을 겪으면서 저 아랫것이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걸 확인한 터였다.

정칠랑은 그대로 폭발했다.

“난 안 나가. 난 여기서 잘 거야!”

정 이부인은 그래도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나가지는 않고, 웃으며 비위를 맞추려 했다.

“반근, 교랑도 지금 집에 없잖니. 칠랑이 당분간만 여기서 자면 안 될까?”

정 이부인이 침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침상은 안 쓸게. 이 깔개 위에서 자면 돼.”

“부인, 그게 말이 돼요? 아씨는 자기 방에 아무나 들어오는 걸 싫어하세요. 저도 밤에는 여기서 자는 일이 드물다고요.”

“네까짓 게 뭔데? 넌 그래 봤자 하인이잖아!”

정칠랑이 콧방귀를 뀌며 소리치자 반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언변으로 따질 것 같으면 장 노태야를 따르는 청매만 못했고, 장 노태야 댁의 소심과는 더더욱 비교가 안 되는 반근이었다.

말문이 막힌 듯한 반근의 모습에 정 이부인은 내심 기뻐했다.

“반근, 칠랑은 교랑의 동생이고 나이도 어리잖아. 여기서 자게 해 줘. 아마 교랑이 있었어도 별말 안 했을 거야.”

정 이부인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두 모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없이 홱 뒤돌아 나갔다.

정칠랑이 반근의 뒤에 대고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같잖은 계집애, 어디 내 앞에서 행세를 부려! 따귀 한 번 더 맞아 볼래!”

정칠랑은 푹신한 침상에 누워 팔다리를 쭉 펴고는 편안한 듯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는 돼야 사람이 살 만하지.”

정 이부인은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계속해서 사방을 둘러봤다.

이제 보니 얼핏 소박해 보이는 장식들이 전혀 소박하지 않네. 전부 최고급을 썼어. 주씨 가문에 이리도 돈이 많았을 줄이야. 게다가 그 아이를 이토록 끔찍이 아끼다니.

“좀 이따 뜨거운 물에 좀 씻고, 한숨 푹…….”

정 이부인이 고개를 숙여 정칠랑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반근이 되돌아왔다. 뒤에는 조 집사와 시종들까지 대동한 채였다.

“마침 잘들 왔네. 나 대신 집에 가서…….”

정 이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근이 말을 끊었다.

“저 사람들 끌어내요!”

뭐라고?

정 이부인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시종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손을 뻗었다.

“이놈들, 무슨 짓이냐! 아, 이 손 놔! 이건 하극상이야!”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문밖에서 장난치듯 보초를 서고 있던 아이들은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 이부인은 시종들에게 떠밀려 비틀비틀 대문 밖으로 나왔고, 곧이어 정칠랑도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정칠랑은 놀라기도 하고 열받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정 이부인 역시 눈물을 쏟으며 정칠랑을 끌어안았다.

“어디 안 다쳤니? 안 다쳤어?”

그러던 정 이부인이 뒤를 돌아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너희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두 모녀를 쳐다보던 반근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쾅 하고 대문을 닫아 버렸다.

반근에게는 말재주가 없었다. 그렇다면 입은 다물고, 자신이 할 일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얘, 얘!”

놀란 정 이부인이 일어나 달려들었다.

“어떻게 우릴 내쫓을 수가 있어! 우린 너희 아씨한테 당해서 집에도 못 들어가게 됐는데, 어쩌라고 우릴 내쫓아? 우린 어디로 가라고?”

“뭘 우리 아씨한테 당했단 거요?”

조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냉랭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 집에서 쫓아낸 게 우리 아씨도 아니고.”

“그 아씨가 우리한테 증인을 서라고 안 했으면, 내가 지금 이 꼴이 됐겠나?”

정 이부인이 씩씩거렸다.

“우리 아씨께서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요? 애초에 댁한테 마음이 없었으면 아무도 강요할 수 없었던 일 아니오.”

조 집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당신네가 강요한 거잖아!”

정 이부인이 씩씩거리며 소리치는데도 조 집사는 웃으며 받아쳤다.

“무슨 강요를 했는데요?”

증인을 안 서면 시집을 안 가겠다고…….

조 집사의 웃음이 짙어졌다.

“부인, 우리 아씨께서 시집을 가든 말든 부인과 무슨 상관입니까? 부인의 이익에 해가 되는 거라도 있나 보죠? 그게 아니면 뭐가 그리 초조하셨을까요?”

조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자신이 자신을 강요했을 뿐이지요.”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야, 말이 안 통해. 이러니 대노야께서 분을 못 참고 혼절을 하시지!

정 이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달려들려 했지만, 조 집사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이부인, 대부인만 이부인을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 이부인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걸음을 멈추고, 옆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정칠랑과 구경하러 몰려든 남정 사람들이 던지는 시선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어, 어딜 감히!”

정 이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 집사가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정 이부인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고 정칠랑을 잡아끌며 도망쳤다.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녀를 보며 조 집사가 손뼉을 탁탁 쳤다.

“자자, 가서 일들 봐라.”

정 이부인은 울고 있는 정칠랑의 손을 잡고 몇 번을 주저하다가 결국 쪽문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이부인…….”

문을 연 여종이 놀라 소리쳤다. 정 이부인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여종들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들은 정 이부인을 막는 대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당으로 들어선 정 이부인의 눈에 대청에서 아들 희가아를 달래는 여종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정 이부인은 기쁘면서도 이렇게 기뻐하는 게 맞는지 몰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정 이노야는 정 이부인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어딜 돌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청에 있던 여종이 기지를 발휘해 희가아의 엉덩이를 세게 꼬집었다.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정 이부인은 내심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달려가더니, ‘우리 아가’, ‘밥도 제대로 못 먹었구나’, ‘어미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희가아만 잠깐 보고 갈 거예요. 희가아를, 잘 돌봐 줘요…….”

정 이부인은 흐느껴 울며 희가아를 끌어안고 남몰래 꼬집었다. 희가아가 더욱 자지러지게 우는데도 정 이부인이 짐짓 내려놓으려는 시늉을 하자, 여종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며 막았다.

정 이노야는 울음소리에 초조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관둡시다. 이렇게 된 마당에 끝장을 볼 것도 아니고.”

정 이부인은 내심 기뻐하면서 희가아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마당은 한참이 지나서야 조용해졌다.

정 이부인은 족히 한 시진을 씻고 나서야 그나마 사람 꼴을 갖추게 됐다고 생각했다. 깨끗하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대청에 앉은 정 이부인은 손난로와 찻잔을 받으며 편안한 듯 가벼운 한숨을 토했다.

“형님과 형수님께 가서 잘못을 사죄드리시오.”

정 이노야가 옆에서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요? 우리 잘못도 아닌데.”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는 발끈하여 벌떡 일어섰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나와? 당신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천륜을 거스르고 형님께 맞섰겠소?”

정 이노야가 노발대발하는데도 정 이부인은 담담한 눈빛으로 정 이노야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사람들이 교랑의 혼수를 빼앗고 교랑을 내쫓지 않았다면, 교랑이 고소를 했겠어요? 그 사람들 잘못이 먼저인데, 우리 탓으로 돌리는 건 무슨 경우래요?”

그런가?

정 이노야가 멈칫했다.

“옛말에 토끼도 급하면 사람을 문댔어요. 두 부부가 교랑의 혼수를 가로채서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모자라 교랑까지 핍박하니 일이 이 지경이 된 거 아니에요? 복은 복대로 누리면서 우리한테 고마워하지도 않더니, 이제 죄를 받게 되니까 우리 탓을 해요? 생각해 봐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잖아요.”

정 이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당신은 그 바보의 아버지고, 나는 계모라는 게 잘못이겠죠.”

정 이노야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정 이부인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정 이부인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전에는 자신의 거처도 꽤 근사하게 꾸며 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정교랑의 그 소박한 공간이 눈앞에 떠올랐다.

“글쎄, 교랑이 자기 집을 어떤 것들로 꾸며 놨는지 알아요?”

정 이부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정 이노야 쪽으로 바짝 붙어 앉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쪽에서 이노야 부부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저쪽의 정교랑 일행은 녹각산을 지나 마을로 들어섰다. 어느덧 눈이 그치고 길가에 쌓인 눈도 대부분 치워져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행인이 늘어났다.

“아씨, 이것 좀 보세요. 정말 잘 만들었네요.”

두 아낙이 등롱 점포 앞에서 고개를 돌리더니 주마 등롱 하나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마차를 타는 대신 도보로 걷고 있던 정교랑은 두모를 푹 눌러쓴 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요.”

그러자 시종 하나가 얼른 앞으로 나와 돈을 지불했다. 아낙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웃고는 얼른 등롱을 챙겨 뒤따라오던 마차에 실어 두었다. 마차에는 벌써 물건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먹을 것이며 마실 것, 놀 것, 쓸 것 등 없는 게 없었다.

“다음부턴 아예 칭찬을 하지 말아야겠어. 뭐가 좋다고만 하면 사라고 하시네. 먹고 입는 것에 이렇게 돈을 낭비하다니!”

세랑이 말했다.

“근데 칭찬을 안 하면 그냥 멍하니 보기만 해야 하잖아. 그럼 장터 구경하는 재미도 안 나실 테고…….”

삼랑이 울상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주머니들, 서두릅시다.”

저쪽에서 시종이 불렀다. 얼른 대답한 두 아낙은 서로 자제하자고 당부하며 뒤따라갔다.

정교랑이 서화 노점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이 든 서생인 노점 주인은 낡고 해진 도포 차림이었다. 연신 손을 비비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몸을 녹이던 서생은 정교랑의 일행이 걸음을 멈추자 상냥하게 맞이했다.

정교랑은 서화를 쭉 둘러봤다. 두 아낙은 서화에 대해 몰랐지만 문자에 대해 본능적인 경외감과 동경을 품고 있었다.

“아씨, 그림이 어때요?”

아낙들의 물음에 정교랑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별로네요.”

늙은 서생이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낭자는 참 말을 직설적으로 하시는구려.”

“돌려서 말하면, 어르신한테 좋을 게 있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늙은 서생은 멈칫했다.

“적어도 기분은 좋지요.”

“그럼 기분 좋자고 여기서 노점을 하나 보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서 이 엄동설한에 여기 나와 있겠나!

늙은 서생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따지려고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소. 낭자 말이 맞소.”

늙은 서생이 쓴웃음을 지으며 정교랑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그래도 이 글씨들은 괜찮네요. 삼랑, 가져가서 아이들한테 보여 줘요.”

늙은 서생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늙은 서생은 손사래를 치는 두 아낙을 향해 얼른 앞에 있던 서화를 내밀었다.

“한번 보시구려. 애들 가르치는 용도로는 쓸 만하다오.”

두 아낙이 머뭇거리는 사이, 정교랑은 옆에 걸려 있는 서화를 흥미롭게 살폈다.

“흥 깨지 말고.”

아낙이 나지막이 눈치를 주자, 삼랑도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떠들며 서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낭자, 기분 좋으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기도 합니다.”

늙은 서생은 손을 비비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교랑을 향해 말을 이었다.

“어떤 일에 정진하고자 한다면 우선 자립이 먼저겠지요. 나는 서화를 팔고 있지만, 서화를 파는 게 아니라오.”

맞지만 또 아니라니. 말을 빙빙 돌리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옳은 말씀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호객 소리가 들려왔다.

“점괘 보세요, 점괘요. 화를 피하고 복을 받게 해 드립니다. 단돈 일 문에 모시겠습니다.”

사내는 갈라진 목소리로 이따금 기침을 해댔다.

정교랑이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늙은 서생은 아휴 하는 소리를 내더니 서화를 들어 올리며 뒤쪽을 가리켰다.

“저 점쟁이도 마찬가지라오. 사실 저치가 점괘를 보는 것도 점괘를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니…….”

서화를 걷자 대나무 장대로 만든 틀 너머로 젊은이 하나가 팔짱을 낀 채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이의 앞으로는 낮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옆에 꽂은 깃발은 바람을 따라 표표히 나부끼고 있었다.

그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평.”

몸이 절로 떨리는 추위에 발을 구르며 몸을 녹이고 호객행위를 하던 젊은이는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엇, 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나무 장대로 세운 틀에 걸린 서화가 들어 올려지면서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이가 어린 낭자의 미모에 감탄하기도 전에, 여인은 앞에 놓인 대나무 장대를 홱 걷어치웠다.

늙은 서생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여인은 바닥으로 떨어진 서화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말…… 무서운…… 여장사다!

정평은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여장사는 금세 정평 앞에 섰다. 어깨에 걸쳐 있던 그림은 바람이 불자 그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엉망이 된 노점에 발을 동동 구르던 늙은 서생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눈앞으로 돈을 불쑥 내밀자 우뚝 멈췄다. 울고불고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나지 않았기에 길 가던 행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힐끔거리기만 뿐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지는 않았다.

“여장…… 아니지, 낭자, 절 아십니까?”

정평은 자신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며 쭈뼛쭈뼛 물었다. 그러면서 잽싸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곳에 온 지 시일은 좀 흘렀다만, 돈벌이는 얼마 못 했어. 그중에 여인이 있었나? 점을 친 사람의 가족인가?

아니지, 아니지. 여긴 내 구역이 아니라 누구한테 이름을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대번에 내 이름을 부르지?

“어머나, 사기꾼이네!”

따라온 아낙들도 놀라 소리쳤다. 정평은 아낙들을 바로 알아보며 흠칫 놀랐다.

“엇, 삼랑 아주머니와 세랑 아주머니가 어쩐 일이십니까?”

정평이 히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삼랑은 대뜸 정평의 한쪽 팔을 붙잡았고 세랑 역시 다른 한쪽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둘은 좌우 양쪽에서 정평을 잡았다.

“여기로 도망쳤던 게로군!”

삼랑과 세랑이 흥분하여 소리치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드디어 잡았네요.”

정평은 즉시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씨, 겨우 일 문 아닙니까. 뭘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인 정평은 울상을 지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뭔데요. 환불은 안 됩니다. 어쨌든 점괘를 풀어 줬는데, 공으로 할 순 없죠. 정 그러시면 절 패서 분풀이라도 하세요.”

정평이 주절주절 떠들어대는데도 앞에 있는 여인은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여인은 아직도 정평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꼼꼼히 뜯어보았다. 옆에 있는 두 아낙은 영문을 몰라 가슴이 두근거리는 눈치였다.

정평은 한숨을 토하고 한결 편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여인이 구석구석 살필 수 있도록 협조해 주었다.

“닮았어요?”

정평이 물었다.

닮았냐고?

두 아낙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흠칫 놀랐다. 정교랑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씨!”

아낙들이 놀라 소리쳤다.

같이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여인은 언제나 덤덤한 표정이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도 살짝 미소나 짓는 정도였다. 딱히 친절하다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정색하는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다.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건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정평은 도리어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닮았나.”

정평이 입을 헤 벌리며 웃었다.

“그럼 마음껏 봐요. 실컷 보라고.”

바람이 훅 불어오면서 길가의 나무에 쌓인 눈이 흩날리며 이리저리 떨어졌다. 아낙은 얼른 자신의 두봉을 탁탁 털어 정교랑을 막아 주었지만, 이미 한발 늦은 때였다. 단정히 앉은 여인에게 눈이 떨어지면서 짙은 색상의 옷 위로 영롱한 반점을 만들며 내려앉았다.

여인이 조금 특이하고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던 시종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정씨 가문의 아낙들과 늙은 서생은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저, 정말로 실컷 보려는 건가?”

늙은 서생이 중얼거렸다. 실컷 보라고 하자, 여인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계속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일일세.

늙은 서생은 아예 서화 장사를 접고, 옆에서 대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망가진 대나무 틀과 서화 값을 배상받았으니 오늘 벌이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린 낭자가 정말 힘이 장사네. 저 민첩한 동작 좀 봐. 석궁도 당길 수 있겠어.

아낙들은 저도 모르게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설마, 그럼 어쩌지?

저 사기꾼도 얼굴은 별 볼 일 없는걸. 왕십칠만도 못하잖아.

“허튼 생각 마시오. 그런 거 아니오.”

늙은 서생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두 아낙은 늙은 서생을 노려봤다.

“뭘 안다고!”

아낙들이 투덜거렸다.

“댁들보다는 잘 알지. 저 낭자의 눈빛을 보면 댁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오.”

늙은 서생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받아쳤다.

이쪽에서 입씨름을 하는 동안 저쪽의 정평은 한참 동안 호객행위를 했음에도 오는 이가 없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돌린 정평은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을 이제 막 눈치챘다는 듯 씩 웃으며 다가왔다.

“낭자, 점괘 한번 봐 드릴까요? 일 문에 봐 드리고 풀이까지 해 드립니다.”

정교랑이 갑자기 놀란 듯 벌떡 일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정교랑의 모습에 오히려 다른 이들이 깜짝 놀랐다.

이 세상에 아씨께서 무서워하시는 것도 있나?

살인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시종들이 생각했다.

자기 집안 웃어른도 고소하면서…….

아낙들이 생각했다.

내가 튼튼하게 묶은 대나무 장대도 단번에 풀어 버리면서…….

늙은 서생이 생각했다.

“사기꾼, 저리 가. 누가 여기서 사기 치래?”

두 아낙이 소리를 지르며 정평을 쫓아내려 했다.

“저리 가. 쳐다볼 수 있게 저쪽에 가만히 서 있기나 해.”

“사실 저자가 점괘는 꽤 정확하다오.”

늙은 서생이 말했다.

정평은 얼마 전 이곳으로 와 자리를 깔았다. 워낙 작은 고을인 데다 날씨까지 추웠는데 모처럼 동료가 생겨 늙은 서생은 내심 기뻐하던 차였다. 무엇보다도 자기보다 벌이가 더 시원치 않을 정도로 재수가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늙은 서생은 며칠 전 정평에게 점을 보고 일 문을 냈다. 정평은 며칠 내로 재물운이 들어올 거라고 했지만, 늙은 서생은 물론 믿지 않았다.

점괘를 두고 며칠 동안 놀리기까지 했는데, 실제로 돈이 들어오자 늙은 서생은 퍼뜩 깨달았다.

이게 바로 그 재물운이로구나!

그림을 거는 장대와 서화 몇 장의 손실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보다 훨씬 막대한 보상이 주어졌다. 우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늙은 서생은 젊은이의 거래가 성사되길 바랐다.

비록 일 문짜리 거래지만, 저 돈 많은 낭자의 비위를 잘 맞춰 기분이 좋아지면 대박이 날지도 모를 일이니까.

“낭자, 겁낼 것 없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낭자가 피하고 겁낸다고 해서 안 오진 않습니다. 똑바로 보면 사실 별것도 아니죠.”

피하고 겁낸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게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지…….

정평을 쳐다보던 정교랑이 눈을 살짝 내리깔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어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는 것과 다름없는 웃음이었지만.

정평은 정교랑의 표정을 못 본 척 따라 웃고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정교랑이 앞으로 걸음을 옮겨 낡은 탁자 앞에 섰다.

“간단합니다. 여기 있는 대전(大錢: 동전의 일종)을 흔들었다가 던지시면 됩니다.”

정평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전 세 개를 꺼냈다. 정교랑이 막 손을 뻗어 받으려는데, 정평이 대전을 도로 가져갔다.

“저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규율이 있는데 점괘는 공짜로 못 보거든요. 선불을 주셔야…….”

정평이 히히 웃으며 다른 쪽 손을 내밀었다. 옆에 있던 시종이 즉시 돈을 건넸다. 하지만 정평은 돈을 받지 않고 손을 도로 뺐다. 시종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 문만 주시면 됩니다.”

정평은 손가락 두 개를 뻗더니 시종의 손에서 딱 일 문만 집었다.

“왜 일 문을 받죠?”

정교랑이 벌떡 일어나며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깜짝 놀랐다.

정평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마, 많은가요?”

정평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낭자, 공짜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 가문의 규율이라…….”

“이 돈 다 줄게요. 돈 벌고 싶은 거 아니에요? 왜 안 받겠단 거죠?”

손을 뻗어 시종의 손에 있던 돈을 움켜쥔 정교랑이 정평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다 가져가요!”

정평은 난처한 듯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그래도, 규율이 규율인지라…….”

정평은 천천히 손가락 두 개를 내밀며 정교랑을 보고 조심스레 말했다.

“일 문만 받겠습니다. 더도 안 되고, 덜도 안 돼요.”

정교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평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입을 다문 채, 정평이 조심조심 일 문을 집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교랑은 나머지 돈을 시종에게 도로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모두의 상상처럼 분노하여 탁자를 뒤엎거나 정평에게 욕설을 내뱉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정교랑의 표정은 담담했다. 애초에 흥분했던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평은 일 문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챙겨 넣고, 또다시 조심스레 대전 세 개를 건넸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대전을 손에 쥐었다.

“단단히 쥐고 원하는 걸 생각하며 흔드세요. 그다음 던지시면 됩니다.”

정평이 시범을 보이자, 정교랑은 대전을 손에 쥐고 천천히 흔들었다.

“네, 네, 그렇게요.”

정평이 어린애를 달래는 듯 말하자, 정교랑은 입을 삐죽이며 미소를 지었다. 차오르는 눈물로 또다시 시야가 흐릿해졌다.

정교랑이 손을 뒤집으며 대전 세 개를 탁자 위로 던졌다. 정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주변 사람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점괘 하나 보는 일이 이리도 고단할 줄이야…….

“어디 봅시다.”

정평이 옷자락을 떨며 등받이가 없는 낮은 의자에 앉아 싱글벙글 웃었다.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다 보니 지나가던 행인들도 관심을 보이며 구경하러 다가왔다.

고개를 숙이고 점괘를 확인하던 정평의 얼굴에 순간 웃음이 싹 걷혔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든 정평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낭자, 어떻게 목숨이 없을 수가 있지요?”

정평이 놀라 소리쳤다. 그 표정에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놀랐다.

“목숨이 없는 사람이라니요?”

두 아낙이 얼른 물었다.

“죽은 사람이라고요!”

정교랑을 쳐다보는 정평의 눈빛에선 놀라움이 감춰지지 않았다.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겁니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목숨이 없는 사람이라니! 곧 죽을 거라니! 이 무슨 해괴한 언사란 말인가!

늙은 서생은 분을 참지 못하며 달려들어 정평의 따귀를 후려쳤다.

점쟁이들이 과장된 말로 겁을 주면서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재난을 피할 방법이니 뭐니 운운하는 건 익히 안다만, 겁을 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 이건 겁을 주는 게 아니라 저주를 퍼붓는 거잖아!

“망할 점쟁이 같으니라고. 어쩐지 장사가 오지게 안 된다 했네. 애초에 장사할 줄을 모르는 놈이었어.”

“끝났네, 끝났어. 초주검이 되도록 맞게 생겼구먼.”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군거렸다.

다행히 주먹이 오가는 소란은 없었다. 두 사람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단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평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고, 정교랑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말이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길흉은요?”

정교랑이 물었다.

“목숨이 없는데, 운명을 어떻게 봅니까?”

정평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평은 눈앞의 여인을 처음으로 꼼꼼히 뜯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전에 본 적 있어요!”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니, 단정히 앉아 있던 낭자가 벌떡 일어난 모습이 보였다. 그 충격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소리가 난 듯했다.

사람이 죽었다고 했을 때도 저리 놀라진 않았는데, 전에 본 적 있다는 말 한마디에 저리 놀란다고?

정평은 놀랍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한 듯 혀를 찼다.

“아, 아니, 낭자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요. 예, 예전에 정씨 저택 문 앞에서 봤단 말입니다. 아주 으리으리한 행렬을 이끌고 그 집 대문을 넘어선 아씨가 아니십니까?”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알았죠?”

정교랑이 불쑥 묻자, 정평은 억지로 허허 웃었다.

“그, 그게 딱 보면 알죠. 낭자가 보는 건 내가 아닐 테니까요. 나를 통해 보는 다른 사람이죠.”

으응?

주변 사람들은 또다시 멈칫했다.

우린 왜 눈치를 못 챘지? 좀 이상하다는 것 외에는…….

정교랑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눈이 더욱 반짝여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찡한 웃음이었다.

“그래요. 정말 똑똑하시네요.”

똑똑하다고? 어떻게 알아본 거지?

모두가 정평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바람에 쓰러질 정도로 왜소한 몸에 비렁뱅이와 다를 바 없는 남루한 행색이었다. 비쩍 말라서 그런지 잘생긴 눈매도 어쩐지 교활해 보였다.

정평이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그럼요, 그럼요.”

정교랑이 정평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무슨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요.”

정교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슬프면서도 절망적인 듯한 표정이라,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정평이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도 망설이는 법 없이 점괘 풀이를 줄줄 읊어대는 그였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입이 안 떨어질 것 같았다.

“일백 문을 모아서, 뭘 하려는 거예요?”

정교랑이 정평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 질문이었구나.

정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쭐한 얼굴로 웃었다.

“그거요? 그야 먹고사는 생계도 해결되고, 경서 해석 연구도 할 수 있잖아요.”

눈썹을 꿈틀이며 말하던 정평이 눈앞에 있는 어린 낭자를 보며 말했다.

“내가 연구하려는 경서는…….”

거기까지 말한 정평이 돌연 말을 멈췄다. 눈앞에 있는 낭자가 결국 눈물을 떨궜기 때문이었다. 한 방울 툭 떨어지던 것이 두 줄로 흐르더니, 급기야는 펑펑 쏟는 게 아닌가.

“노자죠.”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자, 정평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던 정평은 곧 무언가 떠오른 듯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내가 일백 문을 모으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정교랑이 정평을 보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남들이 말하는 거, 매일 들었거든요.”

정교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라고? 어릴 때 남들이 말하는 걸 들어? 뭐라고 했기에? 내가 일백 문을 모으는 게 경서 해석을 위해서라고?

멍하니 있던 정평이 다시 물어보려는데 정교랑이 홱 돌아서더니 곧장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요!”

정평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정교랑이 발치에 나뒹굴고 있던 등받이 낮은 의자에 걸려 비틀거렸다. 두 아낙이 얼른 다가가 부축한 덕에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신세를 간신히 면했다.

“아씨, 다리 부딪친 곳은 괜찮으세요?”

“어서 앉으세요.”

하지만 정교랑은 손을 뻗어 아낙들을 밀어냈다.

“앉아 있어요. 난 혼자서 좀 걸을게요.”

정교랑은 아낙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더러 앉으라고? 우리가 여길 왜 앉아?

두 아낙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정교랑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으며 급히 걸어가다가 행인들과 부딪치면서 길가에 작은 소란이 일기도 했다.

“아씨!”

다들 정신을 차리고 급히 뒤쫓아 갔다.

“어서 도망쳐!”

늙은 서생이 정평을 향해 손짓했다. 정평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섰지만, 이미 한발 늦은 상태였다. 저쪽에 있던 시종 몇 명이 잽싸게 정평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아아, 얼굴은 때리지 마요, 얼굴은!”

정평은 비명 소리와 함께 꽁꽁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몇 명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쌤통이네. 그러게 사기를 작작 쳤어야지.”

“저거 봐, 사기당한 낭자가 엉엉 울고 있잖아.”

늙은 서생도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늙은 서생은 얼른 서화를 챙기고 노점을 걷어 달아났다. 이러다 일이 커지면 괜한 불똥이 튈 터였다.

“아씨, 아씨.”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 보세요.”

두 아낙이 급히 달려가 정교랑을 좌우에서 따라가며 물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이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난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그냥 혼자 걷고 싶어요. 좀 걸으려는 거예요.”

정교랑이 멍한 채로 말했다. 얼굴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지각이 있는 상태라고 보긴 힘들었다. 인파를 헤치며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딪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시종들은 하는 수 없이 앞장서 걸으며 길을 열었다.

화려하고 귀티 나는 옷차림의 어린 낭자가 앞뒤와 좌우로 시종들을 거느리고 눈물을 쏟으며 걸어가고 있으니, 자연스레 행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도 있고 이해가 안 간다는 시선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험상궂은 시종들이 없었다면 진작 낭자를 에워싸고 구경을 했을 터였다.

“아, 아니, 대체 무슨 일이시지?”

두 아낙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조한 마음 때문인지 정교랑의 눈물에 전염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종들 역시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씨가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기에, 시종들은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손짓 하나로 사람도 죽이는 아씨지만, 결국은 어린 낭자였구나. 힘없는 여인처럼 저리 우시다니.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울분이 쌓였으니 좀 풀어내야 해요.”

정평이 소리쳤다. 정평은 이미 시종들에게 옷을 밧줄 삼아 팔을 꽁꽁 묶인 채 끌려가던 중이었다.

“걸어간다고 하면 가게 두세요. 울려고 하면 울게 두고.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야 해요.”

시종들이 고개를 돌려 정평을 노려봤다.

정평은 속세에 초연한 도사의 모습으로 허리를 곧추세웠지만, 허리를 제대로 펴기도 전에 시종이 머리를 후려쳤다. 그 바람에 정평의 머리는 산발이 되다시피 했다.

“이 망할 자식! 네놈이 아씨께서 목숨이 없네, 곧 죽네 하며 입을 나불거렸잖아!”

“아씨께서 혼란스러워하다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정평을 때려도 보고 욕도 해 봤지만, 정교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웃고 떠들며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정교랑이 옆을 지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그런데도 정교랑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가! 어서 가라고!”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눈앞에 나타난 젊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혈흔이 낭자한 탓에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이었다.

장창 하나가 용처럼 춤을 추었다.

“동산(東山) 오라버니!”

정교랑이 소리쳤다.

“가…….”

절규와도 같은 비명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에서 밧줄이 날아와 젊은 남자의 손발을 꽁꽁 묶었다.

“가!”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남자는 눈앞에서 산 채로 사지가 찢어졌고, 남자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을 흥건히 적셨다.

정교랑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가, 가라고, 어서 가…….

난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칠 수도 있고, 끊어진 사지를 다시 이을 수도 있어. 하지만 아무 소용 없어. 죽었잖아, 죽었다고.

아버지,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죠? 어떻게 이래요?

“아방(阿昉: 정방의 별칭), 못 간다. 문이 봉쇄됐어! 못 들어가!”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갈 수 있어. 어서 가야 해, 어서.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 거센 불길이 보였다. 온 하늘을 물들일 만큼 붉은 기운과 함께 통곡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가! 어서!

어서 불을 꺼야 해. 정씨 가문의 대저택은 아주 정교하게 지어져서 도처에 함정이 있어. 공격과 수비에 모두 능하지. 불은 아무것도 아니야. 정씨 가문의 대저택이 불 따위를 겁낼 리가. 정씨 가문 사람들은 불을 무서워하지 않아!

어머니, 숙모님들, 동생들. 집에 여인들만 남는다 해도, 기관을 열고 불을 끄는 건 충분히 가능해!

아무리 천재지변이 무자비하다지만, 무엇보다 흉악한 건 인재(人災)였다. 붉게 물든 깃발과 칼, 화살, 쇠뇌(쇠로 된 화살장치가 달린 활)는 화염 속에서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늙은이도 어린애도, 윗전도 아랫것도, 개도 고양이도 전부…….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어서 가, 어서.

나는 함정을 잘 다루고 집을 지을 줄 알지만, 소용없어. 아무 소용없다고. 전부 죽었잖아, 전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성 밖 대로변에 쌓인 눈은 치우는 이가 없었다.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에 반은 녹았지만, 반은 밟히고 또 밟힌 끝에 단단한 얼음이 되어 있었다.

어이쿠,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정평이 나자빠지자 시종들이 발길질을 해댔다.

“냉큼 일어나.”

정평은 땅바닥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아니, 정말로 못 걷겠단 말입니다.”

정평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시종들은 몇 번 더 발길질을 해 보았지만, 정평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래 걸은 건 사실이었다. 처음엔 보조를 맞춰 급히 걷던 아낙들도 이제는 뒤에서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지?

시종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오의 태양은 어느덧 서편에 걸려 있었다.

아이고, 세상에…….

“아씨, 아씨.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삼랑이 결국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제발요. 괴로우면 그냥 우세요. 이렇게 걷지 마시고요.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정교랑의 얼굴에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걷기만 할 뿐이었다.

“난 괜찮아요, 괜찮아.”

정교랑은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난 좀 걷고 싶을 뿐이에요. 좀 걸을게요.”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세랑과 삼랑은 더 이상 못 걷겠는 듯 비틀거리던 걸음을 멈추고, 여인이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진흙과 눈이 덕지덕지 붙은 옷자락을 힘겹게 끌며 걸어가고 있었다. 가뜩이나 마르고 여린 체구라 더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날이. 제사를 지낼 시간이 됐어. 봐, 아버지께서 제단에 서 계시잖아.

정교랑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고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제단에 오르셨네. 아버지뿐 아니라 백부님들과 숙부님들도 오시고 형제들도 왔어. 다들 제단 위에 일렬로 서 있네.

사람 키 높이의 거센 불길이 용의 혀처럼 이들을 핥고 있었다.

어서 도망쳐, 어서!

저들의 손과 발, 몸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어. 인신공희의 제물이 된 거야. 저 옆에서 끓고 있는 구리 솥은 성대한 연회를 기다리고 있고.

어서 도망쳐!

정교랑은 허리를 숙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너무 아파, 너무!

빨리 가! 빨리!

나는 천문을 알고 관상을 볼 줄 알아. 난 미래와 과거를 알지. 하지만 아무 소용 없어. 아무 소용 없다고. 다 죽었잖아, 전부 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시종 몇 명이 인상을 쓴 채 중얼거렸다.

“기절시켜요.”

땅바닥에 있던 정평이 힘없이 말했다.

기절을 시키라고?

시종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인이 푹 쓰러졌다.

“아씨!”

모두들 놀라 소리치며 달려갔다.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정교랑은 차디찬 땅바닥에서 고개를 돌려 하늘과 땅을 쳐다보았다. 금빛으로 물든 석양 너머로 귓가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달려오던 걸음 소리가 느려지나 싶더니 또다시 멀어졌다.

어서 가, 어서.

끝없는 밤, 하늘의 반을 덮은 맹렬한 불길.

그녀는 나갈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나갈 수 없었다.

주변의 숲에는 쇠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화살비가 쏟아질 터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궁전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쇠뇌인가.

정교랑은 손을 뻗어 땅을 만져 보았다. 활은? 화살은?

밤의 어둠을 뚫고 남자가 한 발 한 발 걸어왔다.

와, 어서 오라고. 이리 와서 똑똑히 보여 줘.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하늘을 뒤덮은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며 거대한 그물인 양 그녀를 덮쳤다.

정교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활을 쏠 줄 알고, 칼을 다룰 줄 알지만 아무 소용 없어. 소용없다고. 죽었잖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사람의 손에 죽었지.

잊어라, 그게 좋아.

기억할 필요 있느냐. 뭐 좋은 일이라고.

아방, 잊어라.

양산(揚汕)!

내가 어떻게 잊겠어! 어떻게! 하루하루 고통에 몸부림칠지라도, 매일 밤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을지라도, 절대 못 잊지!

내 일족의, 정씨 가문의 원수!

정교랑은 땅을 움켜쥐며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끝없이 이어졌다.

달려오던 시종들과 아낙들마저 그 소리에 경악했다.

“소리를 질렀으면 됐어요, 질렀으면 됐어. 소리 지르게 내버려 둬요.”

바닥에 드러누운 정평이 소리쳤다.

정평의 목소리는 정교랑에게까지 들렸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운 발걸음 너머로 저쪽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내가 보였다.

사실 그녀는 진작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의 정방이 아니라는 것을, 이곳은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전에 그랬지. 요행을 바라는 건 인정하기 싫어서일 뿐이라고.

그런데, 죽었잖아. 이미 죽었다고. 죽으면 죽은 거 아냐? 아름답게 죽었든 비참하게 죽었든 죽었으면 그뿐이지. 아무것도 없고, 다 지나간 거잖아. 왜 여기로 온 거야.

“이건 나와 무관한 일입니다. 보면 모르겠어요? 저 낭자 본인의 문제라고! 괜히 나한테 뒤집어씌우지 마십시오!”

정평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정교랑은 간신히 몸을 지탱해 일어서려다가 도로 쓰러졌다. 그러더니 결국 기어가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기어오자 흐릿한 시야로 남자가 보였다.

알려 주세요. 알려 주실 수 있잖아요. 그렇죠? 조상님…….

조상님!

이 후손에게 말씀해 주세요! 제발요!

전 왜 이곳으로 온 거죠? 조상님!

“강주 정씨는 촉주(蜀州) 출신이다. 위로는 검문(劍門), 아래로는 횡강(橫江)에 이르렀으며, 선조는 사람들이 저속하다 여기는 점괘 보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점을 칠 때 사악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물어오면, 가새풀과 거북점에 기대 그 이해관계를 말해 주었다. 하루에 겨우 몇 명의 점을 봐 주고, 백 냥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면 곧 문을 닫고 발을 친 다음 <노자>를 익혔다.”

학문이 깊은 사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사내가 두 손으로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방, 기억하고 있지? 우리 정씨 가문의 조상님 중에 아주 대단하신 분이 계셨어.”

“아버지, 그 조상님의 존함이 뭐예요?”

“이름은 평(平), 자는 준(遵)이셨다.”

정평, 조상님.

정교랑은 사내를 보며 기어갔지만, 아무리 기어도 그 앞에 닿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목덜미를 육중하게 가격했다. 정교랑은 눈앞이 아득해지며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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