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75)

“정교랑, 말썽은 그만 피우거라!”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경고하자, 정교랑이 정 대노야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당신 집이 아닌데, 내가 여기 있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당신 집이라면 내쫓을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선, 어디 한번 내쫓아 보시든가요.”

내쫓아 보라고? 내가 못 할 줄 알아?

정 대노야는 분을 참지 못하고 정교랑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저것을 묶어라!”

하인들이 곧장 네 하고 대답하고는 정교랑을 향해 몰려갔다.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일찌감치 가재도구를 내려놓고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 대노야의 말 한마디와 함께 그들은 주저 없이 정교랑 앞으로 나서며 방어진을 쳤다.

이때 갑자기 그들 뒤에서 여인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면서 집 안으로 활을 옮기고 있던 시종의 손에서 화살과 활을 뺏어 들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화살을 뽑아 활시위를 당겼다.

현이 떨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빛을 띤 화살이 가장 앞에 서 있던 정씨 가문 하인의 어깨를 스쳤다. 하인은 비명을 악 내지르며 어깨를 잡은 채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땅에서 뒹굴고 있는 시종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북정 저택에서 화살을 쏠 때와 같은 장면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종의 손바닥 사이로 새빨간 피가 새어 나왔다.

“아직도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요?”

정교랑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동시에 정교랑은 화살 하나를 또 꺼내 들어 활시위에 걸치고 정 대노야를 향해 조준했다.

시끄럽던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어깨를 잡은 채 비명을 내지르는 시종의 목소리가 더욱 처절하게 들려왔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정교랑의 화살 끝에 달려있던 날카로운 촉에서 푸른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대로 얼어 버렸다.

“너, 너, 너 지금 뭐 하는 게냐!”

정 대노야는 말을 더듬으며 자신을 향하는 화살을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당신을 쏘지 않았다고 해서, 이번에도 쏘지 않을 줄 알아요?”

“정교랑, 네, 네가 감히! 질녀가 백부에게 무기를 들이대다니, 이건 악역(惡逆: 도리를 어기는 열 가지 죄 중 하나. 부모나 기타 친족 어른을 때리거나 모살한 죄를 뜻함)이야!”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조 집사도 침을 꿀꺽 삼켰다.

천으로 두른 화살도 아니고, 날카로운 촉이 달린 진짜 화살로 대노야를 조준하다니, 정말 무시무시한데.

손아랫사람이 친족 어른을 때리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열 가지 죄목 중 하나로, 그 자리에서 목을 벤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형을 집행하는 계절인 가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고, 대사면에서도 제외되는 무거운 죄였다.

설마 진짜로 쏘는 건 아니겠지?

“대노야, 잊지 마세요. 난 바보예요. 바보가 활로 장난을 치다가 실수를 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 아닌가요?”

자신의 화살에 맞은 사람이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정교랑은 흥분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은 채 평온한 표정으로 말하며 활시위를 당겼다.

바보 때문에 다치면,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잖아!

정 대노야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저 교활한 것이!

“당신의 바람대로 북정을 떠났으니, 내가 어디에서 묵든 그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정교랑은 정 대노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죠. 당신, 내 일에, 상관하지 마.”

아씨는 단정하고 예의 바른 분이시니, 이런 상황에서도 험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실 테지.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욕지거리 정도는 해 줘야 통쾌하지 않겠어!

나는 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니, 예법에 어긋나거나 버릇이 없는 행동을 해도 저들이 관여할 수 없어.

“썩 꺼져!”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 집사가 정 대노야를 향해 소리 질렀다.

저, 저 간덩이 부은 놈이!

정 대노야가 남에게 꺼지라는 욕을 들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심지어 손아랫사람의 하인에게!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정 대노야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얼굴이 익을 듯이 새빨개진 그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정 대노야가 화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자, 활시위 떨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긴 화살 하나가 바로 그의 발치 앞에 내리꽂혔다.

신발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화살이 땅에 박혔다. 화살 끝에서 흔들리는 깃털은 마치 한겨울에 만개한 꽃 같았다.

“노야, 노야.”

하인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 대노야를 부르면서 그를 에워쌌다.

하인들의 존재가 빛을 발할 때가 바로 이런 때다. 윗전은 망신을 당하고 잘못을 시인할 수 없지만, 하인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하인들은 가지 않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해대는 정 대노야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어깨를 다친 시종을 부축하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비명을 지르던 시종이 사라지자, 주위에는 가축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적막감만 맴돌았다.

정교랑이 활을 내려놓고 조 집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돈을 가지고 있게.”

반근이 손에 쥐고 있던 비전 증서를 얼른 조 집사에게 건넸다. 조 집사가 망설임 없이 비전 증서를 받았다.

정교랑이 노인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일단, 사람을 데리고 터를 골라서 집 지을 준비를 하세요. 돈은 저 사람한테 받고요.”

정교랑이 조 집사를 가리켰다. 한참 동안 넋이 나가 있던 노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니······.”

노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교랑이 노인의 말을 끊었다.

“가라면 빨리 가요. 아직도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 이 여인이 저 말을 뱉었을 때, 화살 한 발과 함께 사람 하나가 쓰러졌어. 저 여인, 바보라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건가?

노인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곧장 문을 나섰다.

“어서 가세, 어서!”

노인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주위 사람들을 재촉하자, 사람들이 노인의 뒤를 따라 자리에서 흩어졌다.

그러나 노인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넋을 놓고 서 있던 손자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노인은 정교랑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보이는 것을 잊지 않고, 손자를 챙겨 재빨리 마당에서 벗어났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멍한 눈으로 정교랑과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활을 쳐다보았다. 노인의 손에 이끌려 한참을 걸어 모퉁이를 돌 때까지도 아이는 정교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짜 멋있다.”

중얼거리던 아이가 갑자기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외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도 활쏘기 배울래요. 나도 활쏘기 배우고 싶어요!”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돈 없다.”

세상에 공짜로 배울 수 있는 기예가 어디 있겠나. 기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돈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활쏘기와 같은 정교한 기예라면 더욱 그랬다. 나뭇가지나 대나무로 투박한 활을 만들어 쓸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활쏘기를 배우려면 비싸고 좋은 활이 필요했다. 평범한 사냥 활만 해도 이십 문이 넘는데, 말갈기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활줄이 달린 강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육예(六藝)는 배곯을 걱정이 없을 때나 배울 수 있는 거야. 일단 배를 곯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꾸나.”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일 무렵, 남정 골목 안에 있던 조그마한 저택은 정리가 끝났다.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노인의 집 근처에 있는 다른 집 두 채를 빌려 자신들의 거처로 삼았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는데, 원래 여기서 지내던 사람들이 어디서 떨고 있진 않겠죠?”

반근이 조 집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렇진 않아. 그들이 옮겨간 곳을 직접 확인했는데, 버려진 집이긴 해도 손을 좀 보니까 여기와 비슷하더구나. 집도 짓고 돈도 벌 수 있다니까, 동참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앞다퉈 찾아오더라고. 내가 정계(程計) 그자에게 잘 일러뒀다. 돈 아낄 생각 말고 숯을 많이 사 오라고. 잘 지내던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고 추위에 떨게 하면, 아씨의 심기가 불편하실 테니.”

정계는 노인의 이름이었고, 노인은 이번 집짓기의 총괄을 맡게 되었다.

“그 사람, 괜찮겠죠?”

반근이 물었다.

“지난번에 정평을 찾으라며 준 수고비를 한 푼도 안 남기고 사람들한테 공평하게 나눠 줬대. 물론, 그것만 보고 단언할 수는 없지. 푼돈 앞에서는 욕심이 없을 수 있겠지만, 큰돈 앞에서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일단 그자 곁에 사람을 붙여 두기도 했고, 금가아가 따라다니고 있으니, 두고 보면 알 거다.”

조 집사가 웃음을 지었다.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 집사에게 새로 사야 할 가구와 수리해야 할 것들을 알려 주었다.

“우리 쪽에도 돈은 충분히 가져왔으니 걱정할 것 없어. 전부 제일 좋은 것으로 바꿀게.”

조 집사가 반근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대답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아씨께서는 좋은 곳에서도,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내실 수 있거든요. 어디서든지 편하게 지내시는 편이세요.”

반근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노인이 문가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추 이야기가 다 되어서 아씨의 의견을 여쭤보러 왔습니다.”

노인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반근은 노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낮잠을 자고 일어난 정교랑이 책을 읽고 있었다. 노인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정교랑은 노인을 안으로 들이게 했다.

안으로 들어선 정계는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이 집은 내가 직접 지어서 십몇 년을 살았던 곳이라, 눈을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고작 반나절 떠났다고 이렇게 낯설어질 수가.

방은 기껏해야 이 장 정도 되는 넓이였다. 원래 방 안에 있었던 침상 하나와 서랍 몇 개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사용감이 있는 깔개 하나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 위로는 낮은 침상 하나와 휘장이 있었고, 옆으로는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병풍 앞에는 팔걸이 의자와 탁자, 향로, 등불이 차례로 놓여 있었고, 벽에는 활이 걸려 있었다.

다소 비좁긴 해도, 아늑하고 따뜻해 보이는 방이었다.

병풍 앞, 짙은 색상의 치마를 입은 정교랑이 손에 책 한 권을 든 채 팔걸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기에, 흰색 버선을 신은 한쪽 발이 치맛자락 밖으로 삐져나왔다.

정계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지만,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었으며,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짐승 머리 모양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뿐이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불 연기가 방 안을 단향으로 가득 메웠다.

내 방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날이 오다니. 이 장식들 때문일까, 아니면 이 여인 때문일까?

“무슨 일이죠?”

정교랑이 책을 내려놓고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하며 물었다. 정계가 서둘러 예를 올렸다.

“저, 그러니까, 집 지을 자리를 봐 두었습니다.”

정계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집을 어떻게 지으면 좋을지. 장인을 부를까 합니다. 불러도 될까요?”

“불러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아씨. 사실,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정계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정 대노야와 정교랑이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난 이후로, 정계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정교랑이 집을 지어 주겠다는 이유에 대해 논의했다.

아무래도 이 어린 소녀가 정 대노야와 사이가 좋지 않아,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밖에서 지내기로 한 것 같다는 게 사람들의 결론이었다. 아예 남정으로 넘어와서 자신의 집을 지어 정 대노야가 간여할 수 없게끔 하려고 말이다.

“당신은 내가 아니니, 당신 생각으로 내 행동을 추측하려 들지 말아요.”

정교랑이 정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계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빈말 따위 하지 않아요.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지, 가식을 떨거나 예의를 차리려는 말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말하죠. 다시는 나한테 물어보러 오지 말아요.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거든요.”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시다니······.

문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반근이 흠칫 놀라며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희로애락이 일절 없었던 정교랑의 입에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에 놀랐고, 정교랑의 기분이 무엇 때문에 좋지 않은지 몰라 걱정이었다.

정씨 가문이 아씨를 함부로 대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정씨 가문은 항상 이런 식으로 아씨를 대해 왔잖아. 아씨께서 갑자기 이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실 리는 없는데.

정교랑이 정계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첫째, 난 당신 집을 잠시 빌려 지내는 거예요. 둘째, 내 돈으로 당신들의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은 단순히 이 이유 때문이고요. 알아들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알아듣긴 알아들었는데, 그래도.

“그렇지만요. 아씨, 무려 집을 짓는 일입니다! 다 아씨의 돈을 쓰는 거잖습니까.”

정계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집을 지어 주는 게 싫어요?”

“당연히 좋죠, 싫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갑자기 집이 거저 생기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정계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거저 생기는 게 아니에요. 나와 내 사람들이 당신들의 집을 빌려 살고 있잖아요.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머리가 이상한 사람과 대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네.

정계가 손을 한 번 비비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씨, 그 돈, 혹시, 혹시 정씨 가문의 돈입니까?”

“그 사람들이 내게 돈을 줄 것처럼 보여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당연히 아니지.

“이건 다 내 돈이에요. 마음 놓고 써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렇게 어린 소녀가 어디서 그런 큰돈이 났담?

정계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아씨, 정말로 홧김에 이러시는 건 아니고요?”

정계가 이를 악물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정계를 흘깃 쳐다보고는 책을 펼쳤다.

“난 절대로 홧김에 일을 저지르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아요.”

“하지만, 그 돈, 그 돈은 아씨께서 잘 보관해 두셨다가 다른 곳에 쓰시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러시면 그 돈을 허투루 낭비하게 되는 꼴인데요.”

그 말을 들은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돈은 펑펑 쓰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돈을 뒀다 뭐 하죠?”

정계는 정교랑의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만 물어봐요. 난 정말 진지하게 한 말이니까, 어서 가서 집이나 지어요. 어떻게 짓고, 누구에게 집을 나눠줄지는 당신들끼리 알아서 하고요.”

정교랑이 잠시 멈칫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참,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정평을 불러서 풍수를 봐 달라고 하면 더 좋겠네요.”

정평? 설마 이 모든 게 그 정평이라는 자와 상관이 있는 건가? 정평 때문에 저 낭자가······.

정교랑을 쳐다본 정계의 머릿속에 이 같은 생각이 스쳤다.

아휴, 됐다. 그만 생각하자.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대로 받지 뭐. 저 낭자가 나중에 딴소리를 하더라도, 우리는 원래 살던 곳에서 살면 그만이니 손해 볼 것도 없어. 기껏해야 몸이나 좀 굴리는 것뿐이지. 놀고 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데려다가 몸에 열도 좀 내면 좋지 뭐.

어디 한번 해 보자!

“좋습니다. 그럼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정계가 심호흡을 깊게 한 뒤,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아씨께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목례를 했다.

정계가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몰려들었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누군가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다른 이들은 잔뜩 긴장해서 말을 하지도 못했다. 혹여나 눈이라도 깜빡이면 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까 봐 두려워,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정계를 쳐다보았다.

설령 이 모든 게 꿈이라 해도, 이런 꿈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꾸는 게 낫지.

“진짜일세.”

정계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감탄도 뱉지 못하며 서로의 귀를 의심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본 정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신도 정교랑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민망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진짜라니까!”

정계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목청을 높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진짜야!”

정계가 연달아 진짜라고 외치자,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뛸 듯이 기뻐하며 환호했다. 몇몇은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다.

“다들 힘을 내서, 새해가 되기 전에 새집으로 들어갑시다!”

정계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며 외쳤다.

“거리에 나가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죄다 불러 모읍시다!”

“어르신,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시켜만 주십시오!”

“일단 장부 관리할 사람을 두 명 구해야 해. 자, 계획부터 짜야 하니, 앉아서 제대로 이야기하세. 분담해야 할 일들도 정리하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조 집사와 반근은 시선을 거두었다. 아씨가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는 건 봤어도, 이번처럼 거침없이 돈을 뿌리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낭자는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이상한 사람이야.

조 집사가 혀를 차며 생각했다.

하지만 저 낭자한테 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겠지. 저 낭자가 손에 쥔 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진귀한 보물이야.

막대한 재물, 부귀와 영화, 뛰어난 재능, 원대한 이상. 이 모든 건 결국 하나뿐인 목숨에 기대어 있기 마련이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우당탕 소리가 마당까지 울려 퍼졌다. 마당의 여종과 몸종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여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안을 살펴보니, 대청에 있던 탁자와 병풍, 꽃병 등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바보인 척을 하면서 나를 죽이려고 들어?”

정 대노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밖으로 삐져나왔고, 입고 있던 일상복의 옷매무새도 흐트러진 채였다.

“내가 저를 못 죽일 줄 알아? 바보니까 멋대로 굴어도 상관없을 줄 아는 게지? 애초에 요강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인 걸 잊으면 쓰나!”

정 대노야가 넓은 소매를 휘적거렸다.

“바보 시늉을 하며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나라고 그 앨 못 죽일 것 같아?”

소식을 들은 정 대부인은 새로 지은 경당(經堂)에서 거처로 곧장 돌아갔다. 눈앞의 어지러운 광경을 본 정 대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정 대부인은 여종과 몸종을 불러 안을 치우라 명하고는 정 대노야의 팔을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씩씩대던 정 대노야가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치민 화가 사그라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걔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정 대노야가 손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인들을 데리고 남정으로 갔소. 다 쓰러져가는 남의 집을 주워다가 거기서 살겠다나! 게다가 남정 사람들에게 집까지 지어 주겠다지 뭐요! 내가 두어 마디 뭐라고 했더니 어쨌는지 알아? 내 하인한테 화살을 쏴 다치게 하더니, 나한테도 화살로 겨눴어!”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의 팔을 잡으면서 말을 끊었다.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쪽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고 했다고요?”

“맞소. 그렇게 말했다니까. 남정 사람들은 기뻐 어쩔 줄 모르더군. 걔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그 사람들도 참 생각이 없지. 어떻게 바보의 말을 믿느냐고!”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비아냥댔다. 정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집을 짓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어요. 그 애한테 집을 지을 만한 돈이 어딨다고.”

“돈이 있다 해도 남한테 집을 지어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의 어깨를 토닥이며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넸다.

“노야, 일단 화부터 삭이세요. 바보한테 무슨 화를 내요.”

정 대노야가 고개를 돌려 정 대부인을 쳐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화가 나지 않소?”

“진인께서 보우해 주시니, 심신이 안정되어 괜찮네요. 화낼 게 뭐 있어요.”

정 대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인이네 어쩌네 하는 게 다 뭐라고.”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대자 정 대부인이 얼른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정 대부인은 합장을 한 채 사죄의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고, 손 관주와의 일을 정 대노야에게 전하며 침상 옆에 놓인 낮은 탁자를 가리켰다.

“경서는 저 위에 올려 두었으니까, 당신도 마음의 평온을 찾아봐요.”

“쯧, 이러니 여인네들이 어리석다고 하지!”

정 대노야가 혀를 차면서 정 대부인의 손을 내쳤다. 정 대노야의 말에도 정 대부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무튼 나는 안심이 돼요. 그 애도 내쫓았고.”

“이게 어딜 봐서 내쫓은 거요?”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우리 집에 있는 것만 아니면 됐죠.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하세요.”

“난 이 망신을 못 견디겠다고!”

정 대노야가 고함을 쳤다. 하지만 정 대부인은 그를 쳐다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노야, 그 아이가 태어났던 그 순간부터, 이미 온갖 망신은 다 당하지 않았나요?”

하긴, 그렇지.

정 대노야가 소매를 홱 내치고는 다른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부인, 오늘은 얼굴색도, 기운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여종이 정 대부인 옆에서 아첨을 떨었다. 정 대부인이 웃으면서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이번에는 내가 탁자를 엎고 찻잔을 던지면서 화를 내지 않았다는 뜻이지?”

여종은 차마 그렇다고 대꾸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저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예전과는 달라.”

정 대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진인이 보우하사,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내 심신은 평온할 것이다. 그러니 그 바보가 무얼 하든 더는 상관이 없어.”

새로운 하루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녘 안개가 걷히자, 정씨 가문의 저택 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문지기 두 명은 팔짱을 낀 채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며 빗자루를 들고 대문 앞을 청소하는 사환들을 구경했다.

어제의 소란은 밤과 함께 사라지고, 정씨 저택은 예전과 같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평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때문이었다.

양손 가득 짐을 든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수레를 끌며 웃고 떠들면서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정씨 저택 앞 거리는 묘회(廟會: 절 앞에 모여 물건을 사고팔던 임시 시장)가 열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북적거렸다.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정씨 저택에는 은혜를 베풀라는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정씨 저택 앞 거리에서 함부로 떠들거나 큰 소리를 내는 이는 없었다.

오늘 무슨 일이 났나?

“가서 한번 물어봐라. 막일하는 잡부들이 왜 다 이쪽으로 온 거지?”

문지기 사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외쳤다.

곧바로 사환 두 명이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잡아서 물어보았다. 얼마 후, 사환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 앞으로 되돌아왔다.

“집 지으러 왔다는데요?”

집을 지으러 와?

사환의 말을 들은 문지기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교랑과 정 대노야가 남정에서 난리를 피웠던 일은 이미 정씨 저택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헛소리겠거니 했는데, 그 바보가 남정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준다는 게 헛소리가 아니었어?

“부인, 부인.”

낮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정 대부인은 태평경을 중얼중얼 읊고 있었다. 정 대부인은 밖에서 들려오는 여종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여종이 정 대부인을 부르며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여종을 막으면서 조용히 나무랐다.

정 대부인은 평온한 마음으로 태평경의 한 구절을 다 읽은 뒤, 조심스럽게 경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대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또 호들갑을 떨어?”

정 대부인이 의자에 앉아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부인, 부인. 저쪽에 정말로 집을 짓는다 합니다. 일만 관! 그 바보 아씨가 일만 관을 내서 집을 짓는대요!”

여종이 다급하게 외쳤다.

일만 관!

정 대부인이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무슨 헛소리냐!”

정 대부인이 외쳤다.

“아니, 아닙니다.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예요. 남정에서 분명히 일만 관이라고 했어요!”

여종의 표정에는 아직도 일만 관이라는 액수를 처음 들었을 때의 놀라움이 남아 있었다.

일만 관!

“걔가 돈이 어딨다고!”

정 대부인이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주씨 가문에서 준 걸까요?”

여종이 추측했다.

누가 준 돈이든 간에, 그 바보가 쥐고 있는 돈이라면 우리 돈이나 마찬가지지! 무려 일만 관이라니!

“큰일 났네. 그 바보에게 남정 비렁뱅이들이 공갈을 친 게야. 노야는? 냉큼 뛰어가서 노야께 알리거라.”

너무 급하게 몸을 일으킨 나머지, 정 대부인이 탁자에 무릎을 세게 박았다. 뼈가 저릿하게 아픈 고통에 울화가 치민 정 대부인은 탁자를 걷어차 뒤엎어 버렸다.

“저건 부숴서 태워 버려라!”

정 대부인이 소리치고는, 여종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대청을 나섰다.

여종들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바닥에 엎어진 탁자를 밖으로 옮기려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 하나가 침상 옆에 놓인 경서를 흘깃 쳐다보면서 소곤거렸다.

“아무리 진인이라도 바보한테는 소용이 없나 보네.”

대청 안에 있던 여종 둘은 저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종들은 재빨리 웃음기를 거두고, 서로 장난스러운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탁자를 밖으로 옮겼다.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를 찾으러 대청에서 나올 무렵, 정 이부인은 이미 정씨 저택 밖으로 나온 후였다.

정 이부인이 남정 골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정교랑이 묵고 있다던 집으로 향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와 울퉁불퉁한 골목길도 그녀의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교랑의 거처 앞에 서 있던 주씨 가문의 시종들 때문에, 정 이부인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교랑, 교랑. 나야.”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외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네가 억울한 일을 당한 걸 알고 왔단다. 내, 내가 꼭 너를 위해 방법을 생각해 볼게.”

여유롭게 문에 기대어 있던 조 집사는 정 이부인의 모습을 심드렁하게 지켜보았다.

“부인, 저희 아씨께서는 그쪽 집안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 아씨?

정 이부인이 조 집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이번 일에 대해 대노야와 의견이 다르고, 교랑의 아버지인 이노야와 의견을 같이하네. 자네는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됐는지 알고 있는가? 이노야와 내가 교랑을 위해 더 좋은 혼담을 넣으려 하니까, 별안간 대노야 내외가 화를 내서 이렇게 된 것이야.”

정 이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 집사를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네 주씨 집안과 우리가 같은 의견이라는 말일세.”

정 이부인이 ‘주씨 집안’이라는 네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정 이부인의 말에 조 집사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혼사는 또 뭐고, 주씨 가문 이야기는 왜 나와? 어쨌든 아씨가 보지 않겠다는 사람이니 딱히 상대할 필요는 없지.

조 집사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부인, 됐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아씨께서 보지 않겠다고 하면, 못 보는 겁니다.”

근처에 있던 시종들이 손에 쥐고 있던 곤봉을 손바닥에 두어 번 쳤다. 정 이부인과 그녀를 모시던 여종들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듣기로는, 정 대노야가 억지로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 바람에 시종 하나가 화살에 맞은 거라던데.

“교랑, 홧김에 이러지 말거라. 네 아버지와 내가 널 꼭 도와줄게.”

정 이부인은 하는 수 없이 문밖에서 안을 향해 소리쳤다.

“그 돈은 다 네 것이니 잘 남겨 둬. 시집갈 때 혼수로 쓰면 되니까 홧김에 괜한 일 벌이지 말고. 거처는 걱정할 것 없어. 저들이 저택에서 지내지 못하게 하면, 우리가 밖에 집을 구해서 지낼 곳을 마련해 줄게.”

정 이부인이 목을 빼고 소리치고 있을 때, 장인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문 앞에 도착했다.

“집사 어른, 저쪽 장인들과도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한번 가서 보시겠습니까?”

장인들이 조 집사에게 공손히 물었다. 조 집사가 아직 뭐라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정 이부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끝내긴 뭘 끝내? 허튼짓 좀 하지 말게! 어린아이야 철이 없어 장난을 친다지만, 어른들까지 이래서 되겠는가!”

순간 모두가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장인들도 불안함과 망설임이 섞인 눈빛으로 조 집사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남정 사람들은 죄다 비렁뱅이 아닌가. 갑자기 그렇게 많은 집을 무슨 돈으로 짓는다고.

“꺼지시오!”

조 집사가 눈썹을 치켜뜨고 정 이부인을 향해 호통쳤다. 정 이부인과 여종들은 또 한 차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곤봉을 허공에 휘두르면서 그녀들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정 이부인과 여종들은 비명을 지르며 냅다 뛰기 시작했다.

길이 평평하지 못한 탓에, 여종 몇 명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만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넘어진 여종들은 주씨 가문 시종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된통 얻어맞고는 울부짖으며 도망쳤다.

집을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정교랑의 거처를 찾아오던 정 대노야 부부가 때마침 정 이부인의 여종들이 얻어맞는 장면을 목격했다.

“고약한 것, 아주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놀란 정 대노야가 호통을 치면서 앞으로 사람을 보내려는 찰나,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채 여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망치던 정 이부인은 갑자기 눈이 뒤집혔다.

일만 관! 저 바보한테 일만 관이 있었다니! 다 저 사람 때문이야, 지금 저 사람 때문에 일만 관을 잃게 생겼어!

“우리 교랑을 해친 사람이 바로 당신이야! 교랑이 집을 나가게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정 이부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두 팔을 뻗고 정 대노야를 향해 덤벼들었다. 정 이부인의 여종들과 정 대노야의 하인들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을 닫고 집 안에서 싸우는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바깥에서 윗전들끼리 싸우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씨 가문의 체면과 직결된 문제인지라 정 이부인의 여종들은 온 힘을 다해 정 이부인을 끌어안고 막아섰다.

그러나 아무리 막는다 한들, 주위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몰려온 구경꾼들이 정씨 가문의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정 대노야 부부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돌아갑시다. 일단 돌아가서 얘기해요!”

정 대부인이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난 정 대노야를 토닥이며 말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지!

“너, 너도 꺼지거라!”

정 대노야가 정 이부인을 가리키며 소리치고는 옷소매를 힘껏 털고 왔던 길로 성큼성큼 되돌아갔다. 정 대부인은 여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울부짖고 있는 정 이부인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는 정 대노야를 뒤쫓아 갔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나더러 꺼지라고 하면, 내가 그래야 해? 퉤! 당신이 그렇게 대단해? 합당한 이유도 없이 날 쫓아내면, 바로 관아로 가서 당신들을 고발할 거야! 우리 팽씨 가문에는 사람 없는 줄 알아?”

정 이부인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부인, 부인. 자중하세요. 여긴 밖입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여종들이 서둘러 정 이부인을 제지했다.

“밖? 밖이니까 말하는 게야. 세상 사람들도 다 알아야 해! 저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우리 교랑을 내쫓는 것도 모자라서, 나까지 내쫓아?”

정 이부인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말이 통하지 않자 여종들은 아예 정 이부인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남정 골목을 벗어났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 조 집사가 입을 벌리고 넋을 놓은 채 서 있던 장인들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아직도 내가 가서 봐야겠소?”

조 집사가 물었다. 장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쭈뼛쭈뼛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정씨 가문 부인도 때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니. 집을 짓는 일은 확실히 이 사람들이 주관하는 일이로군. 돈을 내는 사람이 누군지 확실해졌으니, 이제 돈 버는 일만 남았어! 벌 수 있는 돈을 안 버는 사람이 바보지.

장인들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문밖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남정 사람들도 뛸 듯이 기뻐하며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진짜야. 하늘에서 집이 떨어진다는 게 사실이었어!

조 집사는 시종들에게 문을 잘 지키라는 당부를 한 뒤,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과 방안은 조금 전 바깥에서 벌어졌던 소란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반근은 회랑 아래서 무릎을 꿇은 채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정교랑이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씨, 사람들은 다 내쫓았습니다.”

조 집사가 회랑 아래에 서서 공손하게 말했다. 정교랑이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거기 앉게.”

조 집사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앉으라는 정교랑의 말에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답례를 올렸다. 그는 회랑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감격스러운 얼굴로 정교랑의 분부를 기다렸다.

“자네는, 이름이 뭐지?”

정교랑이 물었다. 자신의 이름을 묻는 말에 조 집사는 잠시 멈칫했다.

하긴, 주 노야께서 일개 하인의 이름을 아씨께 알려줬을 리 없지.

조 집사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던 찰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스쳤다.

내 충심을 보여드리기 위해 아씨께 이름을 하사해 달라고 하는 것도 괜찮겠군. 출발하기 전, 주 노야께서도 앞으로 아씨를 내 유일한 윗전이라 여기고 모시라고 분부하신 바 있으니.

“소인의 이름이 여간 촌스러운 게 아닙니다. 아씨께서 이름을 하나 지어 주시는 건 어떠실지요.”

조 집사가 웃으며 물었다. 정교랑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회랑 아래서 걸레질을 하던 반근이 헛기침을 했다.

이제 반근은 알았다. 아씨는 자신의 주변을 오가는 사람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들의 이름 또한 궁금해하거나 기억하려고 하는 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얼마나 오고 가든 간에, 아씨에게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씨께서 이름을 궁금해하는 자들은 오직 본인이 생각하기에 물어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거나, 보은해야 할 사람이거나, 인정해 줄 만한 사람이었다. 여태껏 아씨께서 먼저 이름을 물어본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적었다.

아씨께서 노비 신분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묻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노비 신분인 자의 이름을 묻는다는 건······.

“아씨, 아씨.”

반근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방문 앞까지 가까이 갔다. 반근이 웃으면서 안에 있던 정교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더 많아지면 구분하기도 어렵고, 남자가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좀······.”

무슨 말이지? 뭘 구분하기 어렵다는 거야?

의아한 얼굴로 반근을 쳐다보던 조 집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반근! 그 많던 반근은 다 이런 식으로 붙여진 거였구나!

조반근······.

조 집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아씨, 아씨. 소인은 조(曹)씨 성을 가졌고 이름은 귀(貴)입니다. 집안에서 넷째라 편하게들 ‘조사’라고도 하지요. 촌스러운 이름이라 부끄럽습니다.”

조 집사가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 정교랑이 진땀을 빼는 조 집사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조귀.”

조 집사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고 대답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전혀 촌스럽지 않다고 느꼈다.

“자네가 일을 잘하네.”

조 집사가 쑥스러운 듯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심부름꾼 일을 했던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주인의 칭찬 한마디에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그때로.

“아씨,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제가 또 뭘 하면 되겠습니까?”

조 집사가 물었다.

“내 어머니께서 남긴 혼수가 쭉 정씨 가문의 손에 있다지?”

정교랑의 물음에 조 집사가 눈을 번뜩였다.

혼수!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조 집사는 정교랑이 정씨 저택을 나가고, 밖에서 소동을 벌이고, 남정에 집을 짓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씨 가문의 체면을 바닥으로 끌어내려 교훈을 주려는 것인 줄 알았는데.

  • 저깟 아랫것들과 싸워 봤자 무슨 재미가 있나. 뼈를 다치거나 근육을 상하는 것도 아니고.

조 집사는 정교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렇게 끝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진짜는 지금부터야. 아예 손대지 않으면 몰라, 기왕 손을 댈 거면 급소에 일곱 치 깊이의 치명상 정도는 입혀 줘야지.

이거야! 이게 바로 저 낭자의 본모습이지!

“여보, 여보.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요.”

저택으로 돌아온 정 이부인이 눈물을 삼키며 분개했다.

“주씨 가문이 그토록 진심으로 교랑을 대할 줄이야.”

침묵으로 일관하던 정 이노야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일만 관! 내 몇 년 치 녹봉과 맞먹는 돈을! 주씨 가문은 아주 돈이 차고 넘치나 보지, 그런 큰돈을 바보한테 내다 버리다니.

“정말로 그 사람들한테 집을 지어 준다고 하오?”

정 이노야가 물었다.

“그 사람들한테 줄지 안 줄지는 잘 모르겠는데, 집은 정말 짓는 것 같아요.”

대답하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이를 악물며 외쳤다.

“집을 짓긴 무슨 집을 지어! 남는 게 집인데, 그 돈으로 점포 하나 정도는 샀어야지!”

일만 관! 무려 일만 관이야!

“안 되겠어요. 아직 짓기 전이니까, 당신이 빨리 가서 그 애를 말려요. 어르고 달래서 여기로 다시 데려오라고요.”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되지도 않는 소리 그만하시오. 칠랑을 시켜 그 짓거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나까지 나서라고? 난 그 애 아버지란 말이오!”

정 이노야가 단칼에 거절했다.

“잘 생각해 봐요. 그 애를 달래는 건 곧 주씨 가문을 달래는 것과 같아요. 잘 달래서 좋은 집안이랑 혼례를 올리면······.”

말을 늘어놓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외쳤다.

“세상에. 진씨 가문에서 왔다던 여인한테 답을 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빨리, 빨리 가야겠네. 그쪽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가 버리면 어떡해!”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몰라, 몰라.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절대로 교랑을 왕씨 가문에 시집보낼 수 없어요! 난 지금 당장 진씨 가문 사람을 만나러 갈게요.”

정 이노야가 머뭇거리며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그, 그럼 지금 진씨 가문과 혼례를 올리겠다는 말이오?”

“안 될 게 뭐 있어요! 당신 딸이잖아요, 당신이 결정할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들을 필요 없다고요.”

정 이부인은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서둘러 단장을 하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문을 나서면서도 그녀는 잊지 않고 정 이노야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도 빨리 교랑한테 가서 잘 얘기해 봐요!”

일만 관.

정 이노야가 헛웃음을 지었다.

“일만 관이 문제가 아니에요. 여보, 멀리 봐야 해요, 멀리!”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던 정 이노야의 표정이 차츰 바뀌어 갔다.

“고작 일만 관일 뿐이야!”

또 다른 탁자가 정 대노야의 거처 바닥에 엎어졌다. 정 대노야가 씩씩대며 탁자를 엎는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부엌에 쓸 땔감이 부족할 일은 없겠네.”

마당에 있던 여종 두 명이 속삭였다. 그 속삭임을 들은 다른 여종이 헛기침을 하며 경고하듯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두 여종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주씨 가문에서 그 돈을 어떻게 내다 버리든, 우리가 속 쓰릴 게 뭐 있어!”

정 대노야가 말했다.

무려 일만 관인데.

정 대부인은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고 읊조렸다.

속이 쓰리긴 하네.

“됐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요. 우리 같은 어른이 그런 철없는 애랑 똑같이 굴어서 되겠어요? 어차피 다음 달에 시집갈 테니, 기껏해야 며칠 저러고 말겠죠. 돈을 써 봤자, 그 짧은 기간에 얼마나 쓰겠어요.”

다 쓴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지. 고작해야 일만 관이잖아. 게다가 우리가 준 돈도 아니니까, 마음이 좀 쓰리긴 해도 아까울 건 없어. 돈과 관련된 일이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그리고 돈이 있다고 해도 우리 뜻대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 물론 돈이 없다면 이런 고민도 의미가 없는 거겠지만.

같은 시각, 돈 때문에 속이 쓰린 사람이 또 있었다. 귀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고 통사를 보며 물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요? 고작 태창로 전운사일 뿐이잖습니까.”

손난로를 손에 쥐고 커다란 두봉을 두른 귀비가 고 통사와 함께 태후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근래 몇 년간 우리 집안에서 곡물상에 공을 들인 게 다 얼만데요. 이번에는 정말 손실이 막대합니다.”

고 통사가 미간을 좁힌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풍림이 그렇게 대단한 자였나요? 그럼 그 사람한테 언질이라도 하지 그랬습니까.”

귀비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태창로 쪽에 알아서 방법을 생각하라고 했더니, 생각해 냈다는 게 살인과 방화였지 뭡니까. 뭐,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는 거야 큰 문제는 아니죠. 그런데 불만 지르고 사람을 못 죽여 도리어 일만 키웠으니 문제가 되는 거고요. 지금 풍림은 누구 하나 크게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릴 겁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앞으로 나설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풍림의 충의와 청렴을 본 백성들은 그를 청백리라며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태창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황궁에서 그에 상응한 포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얼마나 난리를 치겠습니까? 이런 시국에 제가 가서 뭐라고 한들, 풍림에게 약점을 잡히는 꼴밖에 더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정말 손해 막심이겠네요.”

귀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년에 크게 돈을 버실 생각으로, 조부께서 가산의 반을 내어 곡식을 사 두셨다면서요. 겨울쯤에 태창로에서 곡식 가격을 올리면, 백성들이 조정에 항의하게끔 해서 국고를 풀게 하려고 벼르셨을 텐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귀비의 말에 고 통사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습니까. 몸을 사리고 기회를 기다려야죠. 지금 태창로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는 눈들이 많습니다. 뭐 하나라도 건지겠다는 심보겠지요. 게다가 우리 가문이 여러 사람의 눈엣가시이지 않습니까. 진소 같은 자들은 분명 잠도 안 자며 제가 나서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 괜히 나서지 마세요. 이번 일에 휘말리면 분명 난리가 날 거예요. 돈을 잃는 건 괜찮아도, 대황자한테 불똥이 튀어선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요즘 폐하께서 이황자를 점점 더 총애하시는데, 우리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고 통사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황자가 중요하다는 건 물론 알지만, 고 통사에게는 돈도 중요했다.

겨울에 태창로의 곡식이 다 떨어지면, 내년 봄이나 여름쯤에는 큰돈을 만질 수 있었는데. 족히 세 배는 불려 바꿔 올 수 있었는데! 다 헛수고가 되어 버렸군.

소식을 들은 조부께서는 이미 화병으로 앓아누우신 터였다.

“운도 지지리 없지. 도대체 누가 그런 쓸모없는 놈들한테 돌덩이를 쥐여 준 거야! 불의를 참지 못하는 행인은 무슨! 그런 우연이 세상에 어디 있나!”

고 통사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태후궁 앞에 도착했다. 태후궁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황자가 맨 앞에서 걷고, 그 뒤로 진안 군왕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대황자가 굳은 얼굴로 둘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형님, 나랑 같이 갈래요?”

이황자가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에게 물었다.

“다 전하 때문입니다. 어제 갑자기 폐하께 제 공부를 확인하게 하셨잖습니까. 당장 폐하 앞에서 암송할 책부터 외워야 하니 지금은 못 가죠.”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이황자가 헤헤 웃으면서 진안 군왕의 팔을 토닥였다.

“무서워할 거 없어요, 형님.”

“난 그 책은 벌써 외웠는데. 누가 그렇게 게으름 피우랬나.”

대황자가 끼어들었다.

“전하는 외우는 게 빠르잖습니까. 감히 전하에 비할 수는 없지요. 전하가 하루면 외우는 것을, 저는 사흘씩이나 걸리니까요.”

진안 군왕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머쓱한 듯 코끝을 만졌다. 진안 군왕의 말에 대황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마, 고 대인.”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을 보고 예를 올렸다. 대황자와 이황자도 진안 군왕을 따라 멈춰 섰다.

“육가아, 어디 가니?”

귀비가 웃으면서 물었다.

“어마마마께 겨울 매화를 따다 드리려고요. 마마께도 따다 드릴까요?”

이황자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귀비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고는 이황자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육가아는 참 효심도 지극하지. 항시 황후마마를 생각하다니 말이야. 내게도 따다 준다면 정말 고맙겠구나.”

이황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난 걸음으로 다시 앞장서서 걸어갔다. 진안 군왕도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이황자의 뒤를 따라갔다.

대황자도 예를 올리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귀비가 그를 불러세웠다.

“넌 어디 가느냐?”

귀비가 얼굴에 있던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대황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겁에 질린 대황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저, 저는 공부를 하러······.”

귀비가 곧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공부는 무슨 공부! 넌 할 줄 아는 게 공부 말고는 없지?”

귀비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치자, 대황자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고 통사가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전하, 오늘 날씨가 이리 좋은데, 이황자와 함께 꽃을 따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폐하께도 좀 가져다드리고요.”

고 통사가 웃음 띤 얼굴로 대황자에게 눈치를 주자, 대황자는 두려움이 서린 얼굴로 귀비를 올려다보았다.

“어서 가지 않고 뭐해!”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손가락으로 대황자의 이마를 찌르면서 말했다.

“눈치가 어린아이만도 못해서는. 멍청한 것,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당황한 대황자는 울고 싶었지만 귀비가 무서워 울지도 못하고 서둘러 이황자의 뒤를 쫓아갔다.

귀비가 한숨을 푹 쉬면서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하시지요. 아직 어리니 천천히 가르치면 됩니다. 다 우리 대황자가 착하고 올곧아 그런 거잖습니까.”

고 통사가 말했다.

귀비는 콧방귀를 뀌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태후궁에서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을 보고 말을 아꼈다. 두 사람은 궁녀들과 함께 태후궁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멈춰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안 군왕이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전하, 오늘은 나가실 겁니까? 폐하 앞에서 그 부분을 외워 심기를 풀어 드린 다음, 저희도 나가서 바람을 좀 쐬는 건 어떨까요?”

내시가 웃으면서 물었다.

“나가면 뭐 해. 재미도 없는데.”

진안 군왕은 별 감흥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전하, 정 낭자가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출궁하지 않으셨습니다.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답답하기는 무슨. 딱 좋은데 뭘.”

내시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 소리를 내었다.

“웃긴 뭘 웃어.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진안 군왕이 내시를 흘겨보고는 뒷짐을 지고 말했다.

“그래, 맞아. 그 사람을 알지 못했던 시절에는 궁에 있는 게 답답해서 항상 바깥으로 나돌았지. 그 사람을 알고 나서는 더욱 궁 밖으로 나가고 싶었고. 그런데 그 사람이 떠난 뒤로는 어딜 가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궁 안에 있든 궁 밖에 있든 나한테는 매한가지인 게야.”

내시는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도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내시를 한 번 더 흘겨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넌 모른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아 늘 변함이 없지. 그 사람을 볼 수 있든 볼 수 없든, 내 마음은 항상 같아. 그러니 나가든 안 나가든 나에겐 똑같은 거야.”

진안 군왕은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가며 내시를 따돌렸다. 뒤에 있던 내시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저 말씀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지?”

내시가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낭자는 요즘 어떻게 지내려나 모르겠군. 전하와 같은 마음이려나?”

“아씨, 이건 혼수 목록이고, 이건 점포와 농토 문서입니다.”

조 집사가 문서 몇 개를 정교랑 앞으로 내밀었다.

“노야께서 이것들이 쓰임새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셔서, 여기 올 때 한꺼번에 가져왔습니다.”

정교랑은 고개만 끄덕이고 문서들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 내가 시집을 가게 될 테니, 다 거둬들이게.”

정교랑이 말했다.

역시, 대놓고 깔끔하게 빼앗아 오시려는 거였어. 아씨께서 이렇게 빨리 혼수에 손을 뻗으실 줄은 몰랐네. 아씨의 지난 행보를 보면, 돈에 연연하시는 분도 아닌 것 같은데. 정씨 가문이 아씨의 화를 돋워서 그런 건가.

반근 말로는 아씨의 기분이 좋지 않다던데, 왜 안 좋으신 거지?

조 집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여인의 마음이란 본디 알기 힘든 것인데, 아씨의 마음은 오죽할까. 정씨 가문은 하필 아씨가 기분이 안 좋으실 때 그 난리를 피우다니, 아주 제대로 당하겠군.

찾아가서 대놓고 달라고 한들 곱게 내어 줄 리는 없겠지. 뭐, 크게 걱정되지는 않아. 아씨가 무기를 쥐어 드셨으니, 절대 빈손으로 물러나진 않을 터.

“예, 알겠습니다.”

조 집사가 몸을 낮춰 예를 표했다.

-빼앗다-

임구(林九)가 강주성 사계춘(四季春) 포목점의 주인장이 된 것은 올해로 오 년째였다. 사계춘은 강주성에서 제일가는 포목점이었기에, 주인장인 임구의 신분도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임구는 작년에 새로 사들인 저택에서 첩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은 뒤 사환이 끌고 온 말을 타고 집을 나섰다.

임구는 점포 상황을 제 손금을 보듯이 꿰뚫고 있는지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점포에 나갔다. 실상 그가 점포에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장부를 훑어보거나, 원단을 대충 만져 보고, 점포에 상주하는 집사와 차를 한 잔 마시는 정도였다. 사계춘의 주인장이기에 누릴 수 있는 여유로운 생활이었다.

오늘은 임구가 일주일에 한 번 점포를 나가는 바로 그날이었다. 집에서 점포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지만, 본인의 신분에 자부심이 대단한 임구는 걷는 대신 늘 말을 타고 점포로 갔다.

워낙 짧은 거리인지라 얼마 가지 않았는데도 벌써 사계춘 포목점이 임구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사계춘 건물 밖으로 화려한 색의 휘장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언제나 오색찬란한 사계춘 점포의 모습은 한겨울에도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점포를 드나드는 손님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 고급 원단을 많이 들여왔다고 하지 않았나?”

임구가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리자 말을 끌던 사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왕씨 가문에서 바닷길로 수입한 원단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널리 알렸습니다. 지금쯤이면 사람들이 앞다퉈 원단을 고르고 있어야 할 텐데······.”

지금 이게 어딜 봐서 앞다퉈 원단을 고르는 모습이야?

말을 탄 임구는 인상을 찌푸리고 점포 앞에 멈춰 섰다. 임구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한산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점포 문을 열지도 않은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두운색으로 칠해진 여섯 개의 문 중 네 개만 열려 있었고, 호객하는 점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나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문은 왜 안 연 거야? 장사를 그르치는 건 둘째 치고, 남들이 망한 줄 알면 어쩌려고 이래!

임구가 화가 난 얼굴로 말에서 내려 점포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임구는 멈칫했다.

예상과는 달리, 대청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한 남자가 낮은 손님용 침상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키가 크고 건장해 보이는 사내 넷이 그 주위로 서 있고, 사계춘의 점원과 집사는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구석에 서 있었다.

소란을 피우러 온 건가? 누가 감히 사계춘에 소란을 피우러 와? 여기가 누구네 점포인지 몰라서 저러는 건가?

“댁이 주인장이오?”

앉아 있던 남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물었다.

타향 말씨로군! 내 그럴 줄 알았지.

임구가 입꼬리를 올렸다.

“소인이 이곳의 주인장입니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손님?”

“난 손님이 아니라, 자네의 상관일세.”

조 집사가 침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앉은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러더니 임구를 보며 피식 웃고 말했다.

“자네는 이제 나올 필요 없네. 사계춘은 오늘부로 주인장이 바뀔 테니.”

상관? 사계춘 주인장이 바뀌어?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몹시 놀라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 집사가 구석에 서 있던 사람들을 쓱 둘러보고는, 그중 한 명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이, 자네. 자네가 여기 집사라고 했지?”

조 집사가 가리킨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예. 소인이 여기 집사입니다만.”

조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지금부터 자네는 집사가 아니라 주인장일세.”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랐다.

어디서 저런 미치광이가 들어와서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는 거야?

“손님, 여기서 나가서 앞으로 쭉 가시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운주루(雲酒樓)가 나옵니다.”

임구가 웃으면서 바깥을 가리켰다.

“그래서?”

조 집사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다가 물었다.

“전기수(傳奇叟: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 주던 사람)가 아니십니까. 손님이 가셔야 할 곳은 거기라고요.”

임구가 능청맞게 말했다. 임구의 말이 웃겼는지,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덩달아 소리 내어 껄껄 웃던 조 집사가 문서 몇 개를 탁자 위에 쾅 내려놓았다.

“나는 정 이노야의 사돈인 주씨 가문의 사람일세. 그리고 정 이노야의 장녀의 명을 받들어 혼수 점포들을 거두러 왔지. 아직도 내가 잘못 온 것이라 생각하나?”

주씨 가문의 사람! 정 이노야의 장녀!

사람들이 경악했다.

저 사람은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니야!

임구의 등골이 저릿해지면서 땀 한 줄기가 등으로 흘러내렸다. 임구는 사계춘 점포가 어떤 점포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작년부터 이 점포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점포를 사이에 두고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기 싸움을 벌이는 동시에, 정씨 집안 내부에서도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이 점포가 세상을 뜬 여인의 혼수이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혼수는 오롯이 여인 본인의 소유이며, 본인을 제외한다면 오직 그녀의 자식들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임구가 등골이 서늘해진 이유는 바로 ‘정 이노야의 장녀’라는 말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이 점포는 혼수이기에, 그 여인의 자녀라면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구는 말 한마디에 점포를 순순히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특히 정 이노야의 장녀라면 바보가 아니던가.

“대, 대노야의 허락도 없이 네놈들이 감히!”

임구가 소리쳤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 집사가 한 손으로 침상을 짚고 일어서더니 임구를 향해 매서운 발차기를 날렸다. 무방비 상태로 걷어차인 임구는 반대편 계산대에 부딪혀서 악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는 무슨!”

조 집사가 허리를 펴고 옷매무새를 매만진 뒤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단 하루 만에,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점포 두 개와 농토 두 개의 주인장을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사람 중 아무나 하나를 골라 새로운 주인장으로 만들었다.

조 집사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농토의 주인장이 울면서 정씨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정 대노야가 화가 날 대로 나서 노발대발하고 있던 때였다.

“그 입 닥쳐라! 울지도 말고!”

이제 막 대청 안으로 울며 뛰어 들어온 농토의 주인장을 향해 정 대노야가 삿대질을 했다.

큰 소리로 울부짖으려 입을 막 벌렸던 주인장은 서둘러 울음을 삼켰다. 대청 안을 쳐다보니, 퉁퉁 붓고 붉어진 눈을 한 주인장 세 명이 보였다. 이들의 울음 때문에 정 대노야의 심기가 이미 불편했던 것 같았다.

농토의 주인장은 두어 번 훌쩍이고는 정 대노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나머지 주인장들과 재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사람이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농토 주인장은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지.”

정 대노야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대청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고작 타지인 몇 명한테 얻어맞고 쫓겨나? 네놈들이 그놈들보다 팔이 모자라더냐, 다리가 모자라더냐? 이 지역 토박이는 네놈들 아니냐!”

딴은 맞는 말이지만.

“노야, 그들은 주씨 가문의 사람들 아닙니까. 게다가 시집갈 때 가져갈 혼수라고 하면서, 문서까지 들고 왔습니다.”

사계춘의 주인장이었던 임구가 말했다. 정 대노야가 눈을 크게 뜨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 바보가 감히!

이번 일을 계기로, 정 대노야는 일련의 사건들 모두가 주씨 가문의 계략이라고 확신했다.

일부러 바보를 사람들 앞에 화려하게 등장시키고, 경성 여러 가문의 사주단자를 들고 와서 우리 집안을 이간질한 다음 혼수를 빼앗으려고 했던 게야!

“그게 뭐! 그 애는 우리 정씨 가문의 딸이다. 정씨 가문의 뜻을 따라 혼사를 치를 것이고, 혼수 또한 정씨 가문에서 관리할 것이야. 어디 감히 손아랫사람이 제멋대로 난리를 피우려 들어? 혼수를 돌려받고 싶다면, 내게 직접 와서 말을 할 것이지. 그리고 아무리 제 모친 것이라 해도,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경영한 것은 바로 우리이거늘! 대뜸 이렇게 튀어나와서 빼앗으려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흠씬 얻어맞아야 할 건 도리어 저들이라고!”

정 대노야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주인장들은 고개를 숙이고 정 대노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대노야께서 하시는 말도 맞네. 도리에 어긋난 건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야! 괜히 우리만 바보가 됐잖아.

“여기 남아서 뭣들 하느냐! 얼른 사람을 불러 내쫓아라! 주씨 집안의 하인 주제에, 감히 우리 가문의 딸을 앞세워 난리를 피워? 마냥 당하고만 있던 네놈들도 바보가 아니냐!”

정 대노야가 문득 주인장들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그래도 주씨 가문에서 잘한 게 하나 있긴 하네. 네놈들을 치워 버렸으니 말이다. 애초에 네놈들을 믿고 주인장 자리를 주는 게 아니었어. 주인장 자리를 감당하지도 못할 놈들한테!”

꿇어앉아 있던 네 사람은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맞아. 이번에는 너무 당황하기도 했고, 그들의 기세에 겁을 먹었던 거야.

이전에도 혼수 때문에 다툼이 여러 번 있긴 했지만, 전부 정씨 저택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대낮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이 점포까지 찾아와 난리를 피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하는 게야? 내가 직접 나서서 그 하인 놈들과 싸워야겠느냐!”

네 사람은 정 대노야의 호통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노야, 지켜봐 주십시오!”

네 명 중 한 사람은 잊지 않고 고개를 돌려 큰소리를 치며 떠났다.

정 대노야는 침을 퉤 뱉고 소매를 털며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흉통을 느낄 정도로 화가 치민 그는 옆에 있던 탁자를 들어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

남정 골목. 조 집사가 정교랑에게 오늘 일을 소상히 전했다.

“소문은 제대로 났을 거고, 그들에게도 제대로 한 방 먹인 셈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무나 지목하여 주인장을 시켜주겠다고 이야기했으니, 분명 그들도 주인장 자리에 욕심이 일었을 겁니다. 기회만 있다면, 높은 곳을 오르려 하는 게 사람의 본능이니까요.”

조 집사가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이제는 뭘 하면 됩니까?”

조 집사가 물었다.

오늘 조 집사가 한 일은 갑작스러운 선전포고에 불과했다. 이런 식으로 손쉽게 혼수를 빼앗아 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쟁탈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조 집사는 정씨 가문이 급히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때렸다고 했으니, 관청에 가서 그 죄에 대해 자수하게.”

정교랑이 말했다.

뭐라고? 관청으로 가서 자수하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야?

조 집사가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반근도 놀란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이 난리를 쳤어도, 지금까지는 가문 간의 일에 불과했다. 가문 간의 일은 가법에 따라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이 일을 관청까지 끌고 간다면 그건 더 이상 집안일에 그치지 않는다.

정교랑이 바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조 집사는 확신했다.

사람을 때린 죗값으로 감옥살이를 하라는 게 아닐 거야. 정녕 이런 일로 감옥살이를 하라고 시킬 사람이라면, 사람을 죽인 아씨는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났겠지.

“아씨, 일을 키우시려는 겁니까?”

망설이던 조 집사가 물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일을 키우는 걸 두려워한 적이 없어.”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이 대화를 꼭 어디선가 들었던 것만 같았다.

지난번, 언제였더라?

  • 그럼, 누이의 말은 아예 일을 키우자는 거야?

  •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공개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조 집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감옥살이가 무슨 대수라고. 태평거의 그 사내들을 생각해 봐. 잡혀 들어갔는데도 사지 멀쩡하게 다시 나왔잖아. 아씨께서 자수하라고 시키실 때는 더더욱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아씨는 단순히 옥살이나 하라고 나를 감옥에 보내실 분이 아니야.

“예, 아씨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정교랑의 방에서 나온 조 집사는 곧장 관청으로 가지 않고,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았던 시종들에게 정교랑의 안위를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점포에 데리고 갔던 시종 넷을 데리고 남정 사람들이 집을 짓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집을 짓고 있는 곳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자들은 힘쓰는 일을 하고 있었고, 여인들은 한쪽에서 새참을 만들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조 집사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본 정계가 서둘러 다가가 맞이했다.

“집사 어른, 따로 분부하실 일이라도?”

정계가 물었다.

“분부는 아니고.”

조 집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정계는 이런 모습의 조 집사가 무척이나 낯설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부탁을 하나 드리러 왔소.”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조 집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탁?

사람들은 부탁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부탁을? 우리 같은 사람이 저리 귀한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나?

“집사 어른,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요.”

정계가 말했다. 조 집사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조 집사의 한숨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더욱 그의 말에 집중했다.

“우리 아씨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도 대충 알고 있을 거요.”

정씨 가문에서 태어난 바보의 일이라면, 물론 모르는 사람이 없지.

“상세한 것은 굳이 내 입으로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겠소. 흔한 이야기지. 여러분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소. 우리 아씨는 집에서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번에 아예 쫓겨나셨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 집을 짓는 것도 그 낭자가 홧김에 벌인 일인가? 그럼, 아예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건가?

“그래서 아씨께서는 자신의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셨지. 또 이리저리 내쫓기지 않도록.”

조 집사가 주위의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아씨의 성은 정씨인데, 또 어딜 가시겠소? 정씨 가문에서 버림을 받은 아씨께서 여기 말고 가실 곳이 어디 있겠나? 적어도 이곳에는, 아씨와 같은 선조를 섬기는 여러분이 있지 않소.”

정계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미 없는 아이가 이래서 불쌍하다는 거야.”

“아씨는 바보도 아니잖아, 지금은 다 나았다던데.”

“다 나으면 뭐해. 어렸을 때부터 도관에 보내져서 자랐는데, 정씨 가문이 아씨를 제 자식 대하듯 대하겠어?”

주위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러니 다들 안심하시구려. 집을 짓는 돈은 아씨의 외조모 댁에서 나온 돈이오. 아씨는 그 돈으로 여기에 집을 지어 여러분과 이웃으로 지내는 게, 정처 없이 떠도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고 계시오.”

주씨 가문에서 준 돈이었구나.

불안했던 마음이 풀어지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주 노야가 정씨 가문을 찾아와 난리를 피웠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미 강주에는 주씨 가문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강주 사람들은 주씨 가문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을 뿐더러, 돈이 많은 집안이라는 인상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교랑의 모친이 시집을 왔던 해에는, 그 혼수로 벌어들인 돈이 강주를 세 바퀴나 돌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주씨 가문이 난폭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정교랑 모친의 상을 치를 때, 주씨 가문 사람들이 정씨 가문 사람들의 쫓아다니면서 매질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게 그 난폭하고 돈 많은 주씨 가문의 소행이었구나.

“간략하게 말하자면, 지금 내가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여러분께 신세를 좀 져야겠소.”

조 집사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집사 어른, 신세라니요, 아닙니다.”

정계가 서둘러 말했다.

“맞아요, 맞아. 신세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집사 어른이 우리를 좋게 보신 덕에 우리도 도울 수 있는 거죠.”

주위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조 집사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끼어들 수 있을 정도의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정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기도 하고, 곧 있으면 아씨는 시집을 가실 거요. 그래서 모친께서 남겨두신 혼수를 다시 거둬 오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도리에 어긋나기는 무슨! 그보다 더 합당한 요구가 어디 있다고 그래!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 집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이 일 때문에 정씨 가문과 또 한 번 충돌이 있었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내 그만 그자들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사람을 때리는 건 죄로 다스리는 게 맞아. 아씨께서도 관청으로 가서 자수하라 하셨고. 하지만 이대로 가자니 아씨가 너무 걱정되어 이곳에 잠시 들른 것이오. 아씨는 정씨 가문으로 돌아가시려는 마음이 없지만, 만에 하나 그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힘없는 아씨를 밧줄로 묶어다 데려가기라도 하면 도리가 없잖소. 그러니 이렇게 여러분께 부탁을 드리러 온 것이오. 여러분만 괜찮다면, 우리 아씨를 돕고 지켜 주시오. 이 조귀가 아씨의 모친과 주 노부인을 대신하여 여러분께 미리 감사 인사를 올리겠소.”

조 집사는 이 많은 말을 한꺼번에 뱉은 뒤, 사람들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예를 마친 조 집사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좀 전까지만 해도 천천히 말하며 뜸까지 들이던 조 집사가 갑자기 이렇게 많은 말을 쉬지도 않고 뱉고 가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멍해졌다. 사람들은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조 집사가 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조 집사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뒤였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서둘러 조 집사의 뒤를 쫓아갔고,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을 붙잡고 뜻을 묻느라 바빴다.

말이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다 보니, 양념이 가미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과장이 됐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집사 어른, 어찌 그리 고지식하십니까. 정말로 자수하러 가시려고요?”

몇 사람과 함께 뛰어온 정계가 조 집사를 붙잡았다. 조 집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씨를 잘 부탁드리겠소.”

조 집사가 공수의 예를 표하고는 말을 아끼며 시종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다급하게 조 집사를 쫓아갔던 정계와 몇몇 사람은 아무런 수확 없이 집을 짓고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한껏 들떠서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를 좀 해 보세.”

정계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분주하게 일하던 장인들도 손을 멈췄다. 주위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장인들은 사실 정씨 가문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듣다 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관심사는 오직 집을 지을 건지 말 건지, 돈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에 있었다.

“집사 어른이 우리를 좋게 봐서 부탁한 것이니, 우리가 그 부탁을 들어줍시다.”

누군가가 먼저 입을 뗐다. 그러자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그 말에 동의했다.

“좋소. 우리가 무서울 게 뭐 있나? 도리에 어긋난 일도 아닌데.”

“맞아, 불쌍하잖아.”

“아씨는 돈 많은 집안에 태어났긴 했어도, 우리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계셨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한쪽에서 장인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금가아가 갑자기 나무막대기 하나를 쥐고는 뛰어가기 시작했다.

“금가아, 어디 가려고?”

정계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씨를 지키러 가야죠! 아무도 우리 아씨를 괴롭힐 수 없어요!”

금가아가 큰 소리로 외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교랑의 거처로 뛰어갔다.

금가아의 말 한마디는 마치 펄펄 끓는 뜨거운 기름에 물을 부은 것과 다름없었다. 금가아의 말을 들은 남정 사람들은 일순간 정신을 차렸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맞아. 우리가 지켜 드려야 해!”

“어린 몸종 하나가 시중을 다 들고 있던데, 설거지나 청소를 혼자서 다 할 수 있으려나? 아씨만 괜찮다면, 우리도 가서 도와드립시다.”

한 명, 두 명, 세 명······.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합세하여 정교랑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둘러 금가아의 뒤를 쫓아갔다.

정교랑의 거처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사내들 한 무리가 험악한 기세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씨 가문 놈들아! 당장 나오지 못할까! 어디 감히 강주 바닥에서 난동을 부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소란을 피우러 오는 사람이 있었어!

남자의 목소리는 남정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꼴이나 다름없었다. 남정 사람들은 줄을 지어 정교랑의 마당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짓들이오?”

우르르 몰려온 남정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외쳤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와 길을 막으니, 도리어 험상궂은 사내들 무리가 깜짝 놀랐다.

“당신들이야말로 뭐 하는 짓들인데?”

임구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북정 가문의 큰 점포를 책임지는 사람이니, 당연히 남정의 사정도 잘 알고 있었다. 임구는 남정 사람들을 무시했다.

“비켜, 비켜. 남의 일에 오지랖 부리지 말고.”

임구가 말했다.

“뭐 하는 짓들이냐고!”

정교랑의 마당을 막아선 남정 사람들이 더욱 목청을 높여 외쳤다.

“내가 찾으려는 사람은 주씨 가문의 사람들이지, 댁들과는 상관없어. 썩 꺼지라고!”

임구가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가뜩이나 주씨 가문의 사람한테 맞은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정 사람들까지 상대해야 해?

“당신이나 꺼지시오!”

“여긴 우리 땅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정 사람들이 소리쳤다. 임구와 그가 이끌고 온 사람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이것들이 미쳤나.

“뭐 하는 거야! 당신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래!”

임구가 고함을 빽 질렀다.

“아씨의 집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게 왜 우리와 상관이 없어! 꺼져, 꺼지라고!”

남정 사람 중 한 명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임구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은 이미 자수하러 관청으로 갔는데, 뭘 또 따지려고 그러는 거요! 시시비비는 당신들이 아니라 관청에서 판단할 일이오!”

관청? 관청이라니!

임구 일행은 놀라서 흠칫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설마 진짜로 자수하러 관청에 간 거야?

미쳤나? 진짜야, 가짜야?

임구가 급한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말로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없어? 그럼 다른 일을 하면 되겠군.

“여러분들, 주씨 가문 사람은 둘째 치고, 우리는 정 아씨를 모셔 가려고 온 겁니다. 그러니 길을 비켜주시지요.”

임구 뒤에 서 있던 정씨 가문의 집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남정 사람들은 비켜주기는커녕 앞으로 한 발 더 내디디며 말했다.

“아씨가 직접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실 때 모셔 가시오. 지금은 아씨가 가기 싫다고 하시니, 그만 돌아들 가시라고.”

남정 사람 하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침착했던 정씨 가문의 집사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정 사람들이 단체로 미친 건가? 지금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이러는 게야?

사실 남정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정계만이 사람들 사이에 서서 복잡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 집사가 보통내기가 아니네. 선제공격을 해놓고, 곧바로 자세를 낮춰서 자수하다니. 재밌군, 재밌어. 게다가 고작 말 몇 마디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까지.

너무나도 분하지만 죄를 지었으니 어쩔 수 없이 자수하러 가는 모습을 보이고, 바짝 엎드려 사람들의 동정심을 샀다.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을 했지. 맞아, 도움을 받을 때보단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사람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만들지.

게다가 돈과 집 같은 물질적인 유혹뿐 아니라, 마음을 건드리고 인정에 호소하며 이 일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상황임을 강조했어. 누가 봐도 주씨 가문은 만만치 않은 강자로군.

강자는 끝까지 강자인 법. 잠시 자세를 낮춘다고 해서 그 지위가 바뀌지는 않는다. 도리어 사람들은 이 틈을 타서 강자를 도울 기회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강자를 돕는 일은 비단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이 보장된,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유혹이기 때문이었다.

정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 하늘에서 복이 거저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하는 거지. 누구든 얻고자 하는 게 있다면, 그만한 공을 들여야만 해. 다만, 공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자신이 알아서 잘 판단해야겠지.

정계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정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해 보지 뭐!

“여러분, 여러분.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정계가 사람들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어제의 충격으로 인해 정 대부인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로 지은 경당에서 밤새도록 태평경을 읽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정 대부인은 직접 현묘관에 가서 향불을 올렸지만, 아쉽게도 손 관주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정 대부인은 속이 한결 편해진 것을 느꼈다.

정 대부인이 저택으로 돌아온 시간은 이미 점심때가 지나고 나서였다.

“밥은 차리지 말고, 탕약이나 좀 데워 오거라. 탕약을 마시고 낮잠이나 좀 자야겠다. 밥은 이따 저녁에 먹으마.”

정 대부인이 거처로 걸어가면서 여종에게 말했다.

정 대부인과 여종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두 여종이 대청에서 탁자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어젯밤에 새로 가져다 놓은 탁자인데?

정 대부인이 놀라서 물었다.

“왜 또?”

“노야께서 이게 별로라며, 창고에서 다른 탁자로 바꿔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종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정 대부인은 여종이 말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며 가 보라고 손짓했다.

정 대부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는 대노야의 모습이 보였다. 깔개 위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찻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제 일은 열이 받아. 도관으로 가라는 말도 안 듣고 집을 나가더니, 남정으로 가서는 돈을 들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질 않나, 대노야를 향해 화살을 겨누질 않나. 거기다가 이부인까지 합세해서.

정말 가문의 불행이야, 가문의 불행!

정 대부인이 근심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진인께서 보우해 주신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네.

“노야, 그만하세요. 그 애 때문에 괜히 열 올리지 마시고요. 난리 치고 싶은 만큼 치라고 해요. 돈도 쓰고 싶은 대로 쓰라 그러고, 집도 짓고 싶은 대로 지으라고 하죠.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걔가 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어요. 다음 달에 서둘러 시집보내고 그만 치워 버리자고요. 그럼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걔한테 야박하게 굴지 않는다는 걸 알 테고, 유언비어도 잦아들 거예요.”

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냐고?

정 대부인의 말이 정 대노야의 정곡을 찔렀다. 이제야 좀 진정된다 싶었던 정 대노야의 속이 다시 뒤집혔다.

“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냐고? 당신은 걔를 너무 얕보고 있는 게야!”

정 대노야는 소리를 지르며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입을 닫았다.

“노야, 노야.”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정 대부인은 깜짝 놀랐다.

점포의 주인장들이 갑자기 이 시간에 웬일로?

“부인.”

몇 사람이 멈춰 서서 예를 올렸다. 정 대부인이 그중 두 사람을 흘겨보며 냉소를 지었다.

“자네 둘은 무슨 일로 여길 왔는가? 이부인에게 장부를 보여주느라 바쁠 텐데?”

농토 주인장 두 명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부인, 크, 큰일 났습니다.”

두 사람이 말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큰일이 나?”

정 대부인이 그들의 말을 듣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큰일이 나면 우리를 찾아오고, 별일 없을 때는 다른 사람한테 가서 아부를 떠나?”

“그만하시오! 아무리 그래도 다 같은 식구잖소. 지금 모든 게 다 남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소.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오!”

갑작스러운 정 대노야의 호통에 정 대부인은 화들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됐어? 묶어서 데려왔느냐? 그럼 그 계집을 반 죽을 지경까지 때려서 경성으로 돌려보내거라!”

정 대노야가 정 대부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주인장들에게 물었다. 임구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아, 아니요.”

일순간 정 대노야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 네놈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몇인데, 타지인 몇 놈 앞에서 설설 기는 거냐! 내가 이 쓸모없는 놈들한테 기대를 걸었다니. 썩 비켜라, 내가 직접 가겠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정 대노야를 막아섰다.

“노야, 그자들이 관청으로 갔다고 합니다.”

임구가 말했다.

관청?

“잘못을 저질러 놓고, 먼저 관청으로 가서 고자질하는 놈이 어디 있느냐?”

정 대노야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자들이 먼저 죄를 인정하고 자수하러 갔다고 합니다.”

임구는 정 대노야에게 이 일을 알리면서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죄를 인정하고 자수하러 갔다고?

놀란 정 대노야의 눈이 커졌다.

무슨 죄? 무슨 자수?

같은 시각. 강주부의 절도추관(節度推官)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수하러 왔다고?”

추관이 탁자 위에 놓인 명첩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 하급 관리 하나가 명첩을 들고 와 고소장을 올리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알렸다. 작년에 새로 부임한 절도추관은 명첩에 쓰인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라는 글씨를 보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하려고 했다.

무관이라고는 하나 경성 관리가 아닌가. 경성에 있는 관리가 강주까지 와서 고소장을 올리려 하다니, 설마 강주부에서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추관 옆에 앉아 있던 늙은 관리가 그를 제지했다.

“대인,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강주에서는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 그리 낯선 이들도 아닙니다. 사고를 당한 건 아니고, 일이 있다 해도 기껏해야 집안 간의 싸움일 겁니다.”

늙은 관리가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 사이의 일들을 절도추관에게 말해 주었다.

“주씨 가문에서 시집온 부인의 상을 치를 때,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서로 멱살 잡고 싸우느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두 가문 모두 관청으로 찾아와서 나서 달라고 청하긴 했었지만, 관청에서 사사로운 집안일에 개입할 수야 없잖습니까. 그저 눈 감고 못 본 척할 수밖에요.”

추관이 늙은 관리의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번에도 집안 간의 다툼 때문에 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인께서도 그자들을 보면 웃으며 몇 마디 대꾸해 주고 돌려보내십시오.”

하지만 추관과 늙은 관리의 예상과는 달리, 주씨 가문의 사람들은 관청에서 나서 달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삿대질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죄를 지어 자수하러 왔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인정에 호소하러 온 건가?

추관과 늙은 관리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무릇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묻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설령 부모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자식은 부모와 말싸움을 해서는 안 되고, 폭력을 써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번에 아씨의 혼수 문제로 정씨 가문과 다툼이 좀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을 잘 타이르거나, 관청의 대인들을 찾아와 중재를 요청해야 했는데, 그만 충동적으로 사람을 때려 다치게 하고 말았습니다.”

조 집사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경성 관리 집안의 건방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 집사가 겸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인인 제 행실이 곧 아씨의 뜻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제 불찰로 아씨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뿐, 모든 잘못은 제게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인께 벌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추관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늙은 관리는 조 집사의 말에서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확실치가 않았다.

“자네들이 잘못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고, 따지고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집안일이니, 본관은 자네를 벌하지 않겠네. 두 가문끼리 알아서 잘 해결하시게나.”

추관이 말했다. 그러자 조 집사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했으니 벌을 청할 뿐입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도리에 맞는 일이 있다면 그 도리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야겠지요. 이 일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두 가문 사이의 집안일이 아닙니다. 저희는 받을 벌이 있다면 마땅히 받고, 청을 드릴 것에 대해서는 청을 드리려 합니다.”

“무슨 청을 올리겠다는 말인가?”

추관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대인, 저희 아씨께서는 관청에서 모친의 혼수에 대한 판결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조 집사가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놀란 추관이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늙은 관리는 좀 전에 자신이 느꼈던 의혹이 단번에 해결됨을 느꼈다.

그 낭자의 혼수 때문이구먼! 단순한 말싸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혼수 문제를 관청으로 들고 왔어.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묻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씨께서는 집안의 어른을 관청에 고발하시려 합니다. 이것 자체가 도리를 어기는 중죄로 여겨짐을 잘 알고 있지만, 저희 아씨께서는 더는 방법을 찾지 못해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청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조 집사가 다시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대인, 부디 아씨의 무례를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올린 조 집사가 종이 한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추관과 늙은 관리는 그 종이가 무엇인지 보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들은 조 집사가 건넨 종이가 비전 증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자녀가 집안의 어른을 고발하면, 보통은 관청에서 절대로 수리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고발한 자녀를 그 자리에서 즉시 매질하여 쫓아내도, 관청에서 가볍게 대응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가산이나 재물이 연관된 내용이라면, 협상의 여지가 조금은 있었다.

다만, 그 여지가 얼마나 있을지는 관청 관리의 손에 달린 것이었다.

추관은 꿇어앉아 예를 올리는 사내와 그가 내민 비전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추관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에 대해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쳤다.

자수는 개뿔. 돈을 써서 고발하러 온 거겠지!

하지만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쨌든 정씨 가문은 강주에서 명망이 높잖아. 정씨 가문의 정 대노야는 돈이 많기로 유명하고, 정 이노야는 관직에 있는 사람인데.

주씨 가문은 경성 관리고 그 지위 또한 정씨 가문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거리다 보니 주씨 가문의 힘이 강주까지 뻗칠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가산에 관한 일이었다.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조정에서는 부모 자식도 못 알아보게 되는 가산 다툼을 제일 꺼리는데.

“곧 있으면 저희 아씨께서 시집을 가십니다. 모친을 일찍 여의신 탓에 아씨께서는 어머니 없이 홀로 혼사를 치르게 될 테니, 모친께서 남기신 혼수를 통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모친께 어미 노릇도 못 했다는 오명을 씌우고 싶지 않으신 거지요. 하지만 가문의 웃어른께서 아씨의 혼수를 빼앗고 돌려주려 하지 않으시니, 아씨의 속상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결국 다 돈 얘기.

추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늙은 관리도 조 집사를 쳐다볼 뿐 말을 아꼈다.

“돈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아씨의 모친을 위해 정당한 도리를 따지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조 집사의 말을 듣자, 머뭇거리던 추관과 늙은 관리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조 집사는 시종일관 고개를 들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꿇어앉아 있었다. 마지막 말을 마친 조 집사가 종이 몇 장을 꺼내어 추관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이 주씨 가문의 혼수 목록과 문서들입니다. 부디 대인께서 명확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노야, 노야.”

정씨 가문의 집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왔다. 황급히 뛰어오느라 삐뚤어진 모자를 고쳐 쓸 새도 없는 듯 보였다.

“어떤가? 전부 알아봤는가?”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키고 다급하게 물었다. 낮은 탁자 앞에 꿇어앉아 태평경을 읊고 있던 정 대부인도 소리를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예, 진짜로 자수하러 관청으로 갔다고 합니다. 게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집사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정 대노야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미친 건가?”

정 대노야의 진지한 물음에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야, 미친 게 아닙니다. 저들이 우리를 고소했습니다! 감옥 관리가 은밀히 알려 줬는데, 주씨 가문 사람들이 아씨의 명을 받들어 고소장을 올렸다 합니다. 우리가 그 모친의 혼수를 빼앗았으니, 관청에서 현명한 판결을 내려 달라고요!”

뭐가 어째? 고소장을 올려? 관청에서 현명한 판결을 내려 달라고 했다고?

정 대노야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 대부인도 몸을 일으키고 손에 쥐고 있던 경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경서가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자, 마음이 몹시 심란해졌다.

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나 싶었는데, 이제는 혼수에까지 손을 뻗어? 이 일에 비하면, 가출이나 일만 관을 허공에 뿌리는 일 따위는 난리 축에도 못 끼지!

정말 진인 신선도 그 바보를 감당하지 못 하는 건가?

밤이 가까워질 무렵, 정씨 가문의 집사가 평소 가깝게 지내던 강주부 관청 소속의 관리 한 명을 데리고 와 정 대노야에게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전했다. 이로써 정교랑이 고소장을 올렸다는 사실이 정 대노야에게 확실하게 전해졌다.

“고소장은 수리되었고, 저도 제 눈으로 그 고소장을 확인했습니다. 정교랑 이름 세 글자가 분명히 쓰여 있었는데, 정씨 가문의 딸이 맞지요?”

관리가 물었다.

교랑, 당연하지.

“주씨 가문에서 지어준 이름이에요.”

정 대부인이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 교교. 그때는 바보한테 무슨 이름을 지어주냐고 비웃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애는 주씨 가문의 사람이 맞았네. 그 어미가 죽던 해, 주씨 가문이 난리를 치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하잖아. 지금쯤 주씨 가문 사람들은 꼴좋다며 우리를 비웃고 있겠지.

관청에다 고소장을 올려? 혼수에 대한 명확한 판결을 내려 달라고 했다고?

정씨 가문의 사람들은 ‘관청에서 명확한 판결을 내려 달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이는 근 몇 년간 주씨 가문과 다툴 때마다 몇 번씩이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정 대노야와 주 노야, 모두 각각 한 번 이상은 꺼냈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양쪽 모두 그냥 하는 말이었을 뿐, 아무도 이 일을 관청까지 가져가려 하지는 않았다. 가산 문제로 관청을 들락거리는 건 체면이 상할 뿐 아니라 도리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괴팍한 주씨 가문도 큰소리만 치고 말았는데, 그 바보는 말 한마디 없이 곧장 관청으로 달려갔네. 감히 우리를 관청에 고소해? 이 빌어먹을 것이!

정 대노야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강주부는 그 바보가 올린 고소장을 가만히 앉아 수리했다는 거요?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손아랫사람이 친족 어른을 고발하는 건 곤장으로 때려서 내쫓아야 할 일 아니오!”

집사가 데려온 하급 관리가 고개를 저으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절도추관(節度推官)이 수리를 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생각으로? 딱 보면 모르겠소? 단지 고소장만 받은 게 아니니 그렇겠지.”

정 대노야는 관청 관리들이 암암리에 행하는 수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뒷돈을 받고 곤란한 일을 처리해 주는 것을 썩 나쁜 일이라고 볼 순 없지. 하지만 그 돈을 받아도 되는지, 처리해도 될 일인지는 살펴 가면서 해야 할 거 아니야!

“지부(知府)는 가만히 있는 거요? 내 직접 가서 따져봐야겠소.”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지부 대인께서는 요즘 몸이 허하여 관청에 나오지 않으십니다. 자잘한 일들은 수하에게 처리를 맡기고, 집에서 요양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하급 관리가 말하면서 정 대노야 가까이로 다가가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대노야, 지부 대인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날도 저물었는데, 내일 아침에 가시지요. 대인께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모르고 계셔야,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부 대인이 화가 나면 날수록, 자기 멋대로 혼수 건을 수리한 절추(節推: 절도추관의 약칭)가 더욱 곤란해지겠지.

다시 자리에 앉은 정 대노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대노야가 집사에게 눈짓을 하자, 집사가 소매에서 예단 하나를 꺼내어 하급 관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차나 한잔하십시오. 종일 뛰어다니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관리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가식적인 말 몇 마디를 하고는 봉투를 건네받았다. 정 대노야가 준 돈이라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닐 터였다. 곁눈질로 예단을 훑어보던 관리는 위에 적힌 액수를 확인하고 내심 뛸 듯이 기뻐했다.

정씨 가문에 돈이 많긴 많나 보네.

“대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아랫사람이 버릇없이 소란을 피우니, 괜한 자들까지 덩달아 헛짓거리를 하는 겁니다. 헛짓거리가 괜히 헛짓거리겠습니까. 크게 번질 일이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지요.”

관리가 웃으면서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정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를 시켜 관리를 배웅하게 했다.

“노야, 부인, 시장하시지 않으세요?”

여종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올린 지 한참이 지난 음식들이 밥상 위에서 차게 식어 가고 있었다.

정 대노야는 손을 휘휘 저었고, 정 대부인도 입맛이 없어 보였다. 불경이든 도경이든, 지금의 대부인에게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은 내일 당장 왕씨 가문에 가서 혼서를 받아오고, 날짜도 정해 오시오. 그 애를 하루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내보내야겠어. 누굴 해치려거든 이 집에서 나간 후에 하라고 해!”

정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리쳤다.

“해치고 싶은 대로 해치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왜 우리 친정이 그 꼴을 봐야 하는데요?”

“그럼 남의 집으로 보내든가. 안 그래도 이방 내외가 기다리고 있잖소.”

정 대노야의 대꾸에 정 대부인은 화가 나서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지금 뭘 위해서 이러는 건데요. 내 편은 하나도 없지!”

정 대부인이 울음을 터트리자, 정 대노야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본디 부인에게 화풀이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툭 건드리기만 해도 화르르 타오르는 마음속의 분노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병까지 났는데, 하루도 쉬지 못하고 안팎으로 뛰어다니고 있어요. 밥도 제대로 못 삼키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예요? 어머님의 눈 밖에 나고, 동서가 날 싫어하는 건 다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 어떻게 당신까지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정 대부인은 말을 하면 할수록 속에 있던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그녀는 탁자에 엎어져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정 대노야도 부인에게 화풀이한 것이 잘못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로서 여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 잘못이라고 한 건 아니잖소. 울긴 왜 울어.”

“말만 안 했다 뿐이죠. 차라리 까놓고 말해요. 이러는 게 훨씬 더 상처예요.”

정 대부인이 울면서 말했다.

이거 봐, 이거 봐. 말이 안 통할 때는 상종하지를 말아야지.

“일단 그 바보부터 집에 데려오고 다시 얘기합시다.”

정 대노야는 대충 얼버무리고 재빨리 문을 나서면서 집사를 불렀다. 이제 막 관리를 대문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던 집사가 정 대노야의 부름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다.

“관청에 오가느라 그 아일 데려오는 것은 잊었나? 날 어두워졌으니 지금 어서 데려오게.”

정 대노야의 말에 집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노야, 실은 잊은 게 아니라 데려오려고 했는데, 못 데려왔습니다.”

“뭐? 그 많은 사람이 갔는데 못 데려왔다고? 주씨 가문 시종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는 거 아니었어? 아무리 그 바보가 활을 잘 쏜다지만, 그 애랑 시녀 하나만 잡아 오면 끝나는 일인데. 이 정도로 쓸모없는 놈들일 줄은!”

정 대노야가 성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의 수하가 이리도 아둔하게 여겨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장사하고, 살림을 꾸리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강주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유능한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쓸모없는 놈들이 되었는지.

“그게 아니라요. 주씨 가문의 시종들 대신 이제는 남정 사람들이 그 집 앞을 빽빽하게 가로막고 있어서, 아예 들어가질 못합니다.”

남정 사람들?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우리 집 애한테 공갈친 것도 아직 따지지 못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감금 납치를 해?”

정 대노야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다들 정신이 나갔나?

“이리들 모이거라!”

정 대노야가 목청을 높여서 외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감히 내 앞을 막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집사가 서둘러 정 대노야의 앞을 막아섰다.

“노야, 노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시면 안 됩니다. 남정 사람들은 정 아씨가 가지 않겠다고 했고, 아씨의 명으로 이러는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때라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아씨를 데려올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정 아씨가 관청에 우리를 고소했지 않습니까. 지금 난리를 피우면 훗날 제대로 설명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사람들 입단속도 어렵고요.”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는 왜 없어! 내가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앨 무서워할까 봐?”

정 대노야가 눈을 크게 뜨고 집사를 다그쳤지만, 결국 발걸음을 멈췄다.

“노야, 노야의 덕행이야 당연히 흠잡을 곳 하나 없지요. 하지만 근자에 집안이 시끄럽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아둔하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길 즐깁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집사가 주절주절 늘어놓자 정 대노야는 집사를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지금은 어째 또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그 주둥이는 날 설득할 때만 쓰이는 게야? 주씨 가문 앞에서는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집사가 머쓱한 듯 웃었다.

같을 수가 없지요. 그쪽은 활이며 곤봉을 손에 들고 있는데요.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감히 이렇게 입을 놀리겠습니까.

“노야께서는 이치에 밝으신 분이고, 주씨 가문 사람들과 그 낭자는 도리와 이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집사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아부를 떨면서 정 대노야 가까이로 다가갔다.

“노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낭자가 소동을 벌이려 한들, 우리 쪽에서 맞장구를 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아직 어려 철이 없는 것뿐인데, 우리까지 철없이 굴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디 한번 세상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해 보라고 하지요. 시집가는 것도 밖에서 갈 수 있을지 어디 지켜보자고요.”

시집!

정 대노야는 퍼뜩 정신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큰일이구나. 이 일이 관청에까지 갔으니, 이방 내외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움직일 텐데!

“내가 가면 안 좋은 거 아니오?”

어두운 밤, 정씨 가문의 쪽문이 열리고 등롱을 든 여종 두 명이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여종들의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좋을 게 뭐 있어요.”

정 이부인이 손으로 정 이노야의 등을 떠밀면서 걸어 나왔다.

“당신은 그 애 아버지잖아요. 아버지가 딸을 보러 가는 건데, 얼마나 좋아요.”

정 이노야와 정 이부인의 앞뒤로 여종이 두 사람씩 붙어 불을 밝히며 남정으로 향했다. 불빛이 환하게 켜진 남정에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저쪽이 집 짓는 곳이에요.”

정 이부인이 손으로 가리키며 정 이노야에게 말했다.

“어쩜 저렇게 밤낮으로 일을 해대는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빼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죠.”

정 이노야는 정 이부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마지못해 가지만, 그 아이와 말을 섞을 생각은 없소. 내가 그 애랑 할 얘기가 뭐 있다고.”

정 이노야가 말했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입장을 밝히는 거예요.”

정 이부인이 기쁘게 말하고는 정 이노야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짱을 꼈다.

“역시 당신만큼 나를 아끼는 사람은 없어요.”

밤이었지만, 부인의 남사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란 정 이노야는 정 이부인의 품에 있던 자신의 팔을 빼냈다. 정 이부인은 해맑게 웃고는 조용히 정 이노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좁은 골목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리를 들은 주위의 가축들이 시끄럽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부인, 곧 도착합니다.”

앞서 길을 안내하던 여종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런데 여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정 이부인 일행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뭐 하는 이들이오?”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 이노야의 몸 뒤에 숨어 있던 정 이부인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다 감옥에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나?

“나다. 너희는 누구냐.”

정 이노야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여종들이 용기를 내서 손을 뻗어 등불을 비췄다. 그들의 눈앞에는 야윈 소년 두 명이 서 있었다. 소년들은 한겨울인데도 손목이 훤히 드러나는 얇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이 어두운 밤과 한데 섞여 더욱 새까매 보였다.

저건 남정의 거지새끼들이잖아!

여종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꺼지거라, 썩 꺼져!”

여종들이 아이들을 쫓아내자, 아이들은 별말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 사람이 왔는데, 여종도 네 명 있었어요. 무기는 없어 보였고요.”

“남자는 한 명이에요.”

두 소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남정 골목에 울려 퍼졌다. 정 이노야 일행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저게 뭐야? 정찰하는 거야?

소년들의 목소리와 함께 낮고 까만 집들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골목 끝에 있던 정교랑의 거처에도 사람들 무리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뭐 하는 사람들이오?”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물었다.

지금 우리를 도둑놈 취급하는 거야, 뭐야!

정 이노야가 소매를 홱 내치고 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붙잡아 세웠다.

“우리예요.”

정 이부인이 말했다. 정 이부인의 목소리를 확인한 사람들은 그제야 정 이노야 내외를 알아보았다.

“썩 꺼지지 못할까!”

정 이노야가 수군대는 사람들을 향해 고함을 쳤지만, 사람들은 꿈쩍하지 않고 길을 막아섰다.

“이노야, 아씨를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까? 아씨께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와도 안 가신다고요.”

무리 중 한 사람이 외쳤다. 정 이부인이 다시 고함을 치려던 정 이노야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니, 아니. 데려가려는 거 아니에요. 교랑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사는 게 뭐 어때서요. 우린 교랑과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왔어요.”

정 이부인은 자신이 이들 앞에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아부 섞인 웃음까지 지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웃는 얼굴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날이 어두워서 그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이는 없었다.

정교랑의 집 앞을 막아선 사람들은 조용히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는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정 이노야가 화를 내려던 찰나, 남정 사람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씨께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그가 거처 안으로 들어가자, 정 이노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버지가 먼저 딸을 만나러 오는 것도 여간 체면 구기는 일이 아닌데, 딸의 의사까지 물어봐야 한다니!

정 이부인이 서둘러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혼수, 앞길.”

정 이부인이 작은 소리로 정 이노야에게 속삭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기회만 제대로 잡는다면 집안의 모든 혼수를 장악할 수 있으며, 평생 닿을 수도 없을 법한 이들과 사돈을 맺을 것이다. 비단 정 이노야 내외에게만 좋은 관계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도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될 게 틀림없었다.

“당신은 우리 희가아(熙哥兒)까지 남 눈치나 보고, 비위 맞추면서 살게 하고 싶어요?”

정 이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희가아는 정 이노야가 제일 아끼는 아들이기에, 정 이노야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저 바보, 아니, 저 아이 눈치를 보고 살 건 아니잖소.”

정 이노야의 말에 정 이부인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 정교랑의 집 앞을 지키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노야, 부인, 아씨께서 안으로 들라고 하십니다.”

“이거 봐요. 친딸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은 안 보더라도 당신은 보네요.”

정 이부인이 낮게 속삭이고는 앞장서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친딸이 아니었더라면, 이 많은 일도 없었겠지.

정 이노야는 걸음을 옮기기 전, 새까만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언뜻 여인의 얼굴 하나가 스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정말 재수 없어. 애초에 그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정 이노야는 한숨을 푹 쉬고는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마당에는 등롱 두 개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등롱이 흔들거릴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했던 정 이부인이 등롱을 자세히 쳐다보니, 등롱 아래에 달린 풍경이 보였다.

어둠이 내렸는데도 비좁고 허름한 집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회랑 아래에 있던 반근이 예를 올리고 문을 열자, 정 이부인이 얼른 시선을 거두고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울먹였다.

“우리 아가,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다니.”

정 이부인이 걸음을 옮기자, 정 이노야도 굳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비좁은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서 있을 만한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여기서 지내지 말고, 돌아가서 지내거라. 이게 다 무슨 꼴이더냐.”

정 이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정 이노야는 흠칫 놀랐다.

은은한 등불 아래 깃털 실로 짠 병풍 앞으로 품이 넓은 비단옷을 걸친 소녀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이 방 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저, 저게 그 바보라고?

정교랑의 자태에 정 이노야는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 경성의 그 수많은 집안에서 혼담을 넣으러 온 거였군!

“이 얘기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교랑의 목소리에 정 이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귀찮음이 한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인지라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친딸? 세상 어느 친딸이 아버지한테 이따위로 얘기해?

정 이노야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이 재빨리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널 아껴서 그래. 교랑, 이런 곳에서 지내기에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정교랑이 정 이부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공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초장에 분위기를 띄우려 안부 인사 정도는 나누는 게 예의거늘, 이게 지금 무슨 태도야!

정 이노야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집안을 고발해? 어찌 감히!”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손님 배웅하거라. 난 좀 쉬어야겠어.”

정 이노야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정 이부인이 꽉 붙잡아 눌렀다.

“교랑, 교랑. 우리는 너한테 따지러 온 게 아니란다. 이번 일은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게 지금 잘하는 짓이라고?

정 이노야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할 건 없잖아! 저 아이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뻔히 알면서!

저 애가 고발한 사람은 정씨 가문의 손윗사람이야. 무려 나의 친형님인데, 이걸 잘했다고 하는 건 내 따귀를 때리는 것과 다름없잖아!

“당신······.”

정 이노야가 부인을 향해 벌컥 화를 내려던 그때, 정 이부인이 먼저 그의 팔을 탁 치며 말했다.

“가족끼리 못 할 말이 뭐 있어요. 교랑, 힘들면 먼저 쉬렴.”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에게 눈짓했다.

이미 정교랑의 하인들에게 곤봉으로 얻어맞을 뻔한 적이 있는 정 이부인이었다. 정 이부인은 한시라도 빨리 태도를 밝히지 않으면, 저 바보가 사람들을 시켜 자신들을 내쫓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 이부인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바라는 건 올바른 판결일 뿐이에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정 이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정 이노야의 소매를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올바른 판결을 얻어내야지.”

“제가 시집갈 때, 혼수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거에 동의하셨었죠?”

정교랑이 물었다.

“그, 그건 다 그 사람들 마음대로 정한 거야. 집안에서는 네 아버지의 말이 먹히지 않아.”

정 이부인이 서둘러 변명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관청에서 증언해 주실 수 있어요?”

뭐라고? 증언?

정 이노야와 정 이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대한 판결을 내고자 해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비좁은 실내에 울려 퍼졌다.

“내가 혼수도 없이 시집가는 데다가, 그 혼수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남긴 혼수라는 것에 대해서요. 그러니 공당(公堂)에서 증언해 주실 수 있나요?”

증언이라고?

정 이부인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순간 자신이 이 야밤에 뭘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씨 가문 사람들이 점포와 농토들을 빼앗아 가려 한다는 말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뺏고 싶다고 해서, 정말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정 이부인은 그 후에 들은 소식에 훨씬 놀랐다. 주씨 가문에서 혼수 건으로 정 대노야를 관청에 고발하기까지 했다는 소식이었다.

주씨 가문이 혼수를 요구하는 것은 정 이부인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드는 이유가 뭐겠어, 다 돈 때문이지. 솔직히 주씨 가문에서 혼수를 달라고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정 이부인은 일찌감치 결정을 내렸다. 대방에서 주는 국물이나 얻어먹을 바에는, 주씨 가문과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게 낫다고.

따지고 보면, 정교랑의 혼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교랑의 부모인 이노야와 자신뿐이라고 정 이부인은 생각했다. 정 대노야 내외와 대판 싸울 배짱만 있다면, 그들 내외 쪽에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노야 내외와 어떻게 싸워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던 찰나, 정교랑이 대노야를 관청에 고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다면, 이방 내외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도요새와 조개의 싸움을 본 어부가 될 수 있었다. 혼수와 정 대노야에 관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위해 그들 내외가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 바로 정교랑을 어르고 달래서 자신들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 이노야 내외가 오늘 정교랑을 찾아온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교랑이 내쫓긴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분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정교랑을 위해 좋은 혼처를 알아보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대방 쪽에서 오가는 혼담은 신경 쓸 것 없으니 마음껏 일을 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직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못 한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목적 중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는데, 저 아이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말문이 막혀 버리다니! 우리에게 칼자루를 건네며 대노야 내외를 찌르라고 하다니!

일을 벌이는 사람이 어쩌다가 우리가 됐지? 이, 이게 아닌데.

정 이부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교, 교랑, 이 일은 다시 진중히 논의해 보고······.”

정 이부인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정말로 이 일을 공당까지 가져갈 셈이냐!”

정교랑의 말뜻을 알아들은 정 이노야가 버럭 화를 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여인네가 혼수 때문에 공당까지 가겠다고? 집안 망신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우리한테 증언까지 해 달라고? 내 너를······.”

“두 분 뜻 잘 알겠으니, 돌아가세요.”

정교랑이 단호하게 정 이노야의 말을 끊고 예를 표했다.

저것이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정 이노야는 소매를 홱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정 이부인이 서둘러 옷자락을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

“교랑, 네 아버지는 너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런 거란다. 오늘 우리가 온 건 다른 일 때문인데······.”

다급해진 정 이부인이 오늘 온 목적에 대해 말하려 했다.

“혼수 판결이 끝난 뒤에 다시 얘기하죠.”

정교랑이 다시 한번 느긋하게 예를 표하고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서 쉬세요.”

외통장군이로군!

정 이노야 내외는 정교랑의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저, 저기 좋은 혼사가 있는데······.”

정 이부인이 다급한 마음에 소리쳤지만, 정교랑은 그녀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혼수가 없으면, 혼사도 없어요. 이만 쉬러 갈게요.”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자, 회랑 아래 있던 반근이 곧바로 밖을 향해 이노야 내외가 나가신다고 소리쳤다. 조 집사를 따라가지 않았던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어느 틈에 우르르 몰려와 정 이노야 내외를 끌어내려 했다.

“뭐 하는 게야! 이 미천한 것들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정 이노야의 분노 가득한 호통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밀지 말거라! 누군들 여기 있고 싶은 줄 아느냐! 비켜라!”

“교랑, 정말 좋은 혼사인데, 일단 내 말 좀 들어 봐.”

정교랑은 이노야 내외를 쳐다보지도 않고 병풍 앞에서 몸을 돌렸다.

여종들이 에워싼 덕에, 정 이부인이 주씨 가문 시종들과 몸씨름을 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정 이부인은 여종과 시종들의 어깨 사이로, 병풍 앞에 서 있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았다. 은은한 등불 아래, 정교랑이 입은 비단옷이 잔잔한 물결처럼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탁자 위에 놓인, 날이 시퍼런 화살촉보다도 차가워 보였다.

지금이라도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모든 게 다 주씨 가문의 것이 되어 버릴 거야!

“증언할게, 우리가 증언할게!”

정 이부인이 소리쳤다. 정 이부인의 말을 들은 정 이노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부인을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의 말과 함께 방 안이 조용해졌다. 호랑이처럼 매섭게 밀쳐대던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갑자기 순한 양이 된 듯 말없이 물러났다.

병풍 앞에 서 있던 정교랑이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앉으시지요.”

정교랑이 정 이노야 내외에게 손을 내밀며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반근에게 말했다.

“차를 준비해.”

날이 밝을 무렵, 정 대노야가 마차를 타고 관청으로 왔다. 강주부의 지부 대인 송현(宋賢)은 관청 바로 뒤에 있는 저택에 거처를 마련해 살고 있었다.

강주 지부로 부임한 지 3년을 넘긴 송현은 강주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강주의 명문가인 정씨 가문과도 자연스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 대노야가 도착했다는 명첩을 받은 송 지부는 사환을 대문 앞으로 보내 맞이하게 했다.

은잠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장포를 입은 송현이 서재 앞에서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정 대노야를 맞이했다.

“중문, 때마침 잘 오셨소. 오늘 좋은 차를 우려 마셔 볼 참이었는데.”

송현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 대노야도 따라 웃었다.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탕약 냄새가 아니라 좋은 향이 난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 안의 낮은 탁자에는 송현의 말대로 다구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한참 동안 안부를 물었다.

“중문, 어쩐 일로 오셨소?”

송 지부가 차를 따르면서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오랫동안 관직을 지키고 있는 송 지부는 정 대노야가 단순히 차나 마시려고 여기까지 왔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정 대노야는 바로 입을 열지 않고 한숨을 쉰 뒤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에 담기에도 민망합니다. 우리 가문의 불행이지요.”

정 대노야는 정교랑이 자신을 고발하게 된 자초지종을 송 지부에게 들려주었다.

“그런 일이 있다고?”

정 대노야의 말에 깜짝 놀란 송 지부는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차 주전자를 놓칠 뻔했다.

어제 정씨 가문을 다녀간 하급 관리의 노력 덕에, 송 지부는 관청으로부터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 돈에 눈이 멀어서인지 보고하는 것을 깜빡해서인지, 고소장을 수리했던 절추가 송 지부에게 말 한마디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느 관리와 마찬가지로 송현 또한 자신의 수하가 자신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수하는 오직 자신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일해야 했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니, 대인께서는 아직 모르셨습니까?”

정 대노야는 짐짓 놀란 시늉을 하며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제가 괜히 대인을 오해했군요. 전 또 대인께서 제게 뭔가 섭섭한 게 있으신가 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주씨 가문의 압력에 못 이겨······.”

송 지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자, 정 대노야가 말끝을 흐렸다.

경성 귀덕낭장 주씨 가문. 관리라고는 하나 그게 대수야? 일개 경성 무장이 감히 내 구역에서, 내 수하를 꾀어내 일을 벌여?

내 임기가 곧 끝난다고 사람을 무시하나? 아무리 떠나면 그만이라지만, 나 아직 안 떠났다고!

송 지부는 생각하면 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송 지부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이오? 몸이 좀 안 좋긴 했다만, 내 아직 멀쩡히 살아 있거늘!”

송 지부가 몸을 일으키면서 소리쳤다.

“중문,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당장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겠소.”

정 대노야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그는 송 지부가 잿빛이 된 안색으로 성큼성큼 서재를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는, 소매를 가볍게 털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여유롭게 주전자를 가져와 차를 따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주가 놈아! 바보를 바보가 아닌 것처럼 꾸미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 아이를 칼자루로 쓰다니. 이러니 젊은이가 철이 없고, 사리 분별을 못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야. 그 애가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해서, 누굴 겁줄 수나 있을 것 같아?

아예 통하지 않는 방법은 아니다만, 최소한 강주의 지부 대인에게는 귀띔했어야지. 고작 절도추관 하나 매수해서 해결될 줄 알고? 호랑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원숭이가 산림의 왕이 되겠어?

뭐, 그 아이가 처음부터 지부 대인을 찾아갔어도 상황은 다를 바 없었겠지만. 지부 대인은 나와 친분이 있으니, 손아랫사람이 가산 문제로 집안의 어른을 고발한다는 말을 들었으면 당장 밧줄로 묶어다가 우리 집으로 보내 버렸을 것이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절추 같은 놈들이나 자네 주씨 가문의 꼬드김에 넘어가는 거라고.

정 대노야가 고개를 저으면서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찻잔에 뜨거운 차를 따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지부 대인의 차도 나쁘지는 않은데, 내가 마시던 차보다는 질이 떨어지는군.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아끼는 찻잎을 조금 나눠 줘야겠어. 진정으로 좋은 차 맛이 어떤 건지 맛보라고 말이야.

반근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활을 거두고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금가아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과녁에 꽂힌 화살을 세고 있었다.

“아씨.”

반근이 한쪽에 놓여 있던 두봉을 정교랑에게 걸쳐 주며 말했다.

“거리에 있는 아이들 말로는 대노야가 지부 대인을 뵈러 갔대요.”

정교랑은 응, 하고 대꾸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노야와 지부 대인의 관계가 꽤 좋다고 들었어요.”

반근이 덧붙였다.

“관계? 관계보다는 원칙이 더 미덥지.”

방 안으로 들어선 정교랑이 두봉을 벗으며 말했다. 그래도 반근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씨, 우리도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좀 전에 진씨 가문의 여인들이 절 찾아와서 아씨를 뵐 수 있냐고 물어보던데요. 어젯밤 이부인의 말이 진짜인가 봐요. 진(秦) 부인께서 아씨를 위해 여러 곳에 혼담을 넣으신 것 같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돼. 어제 조귀 일행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다른 방도를 찾았어야 했지만, 감옥에 갇혔으니 별일 없을 거야.”

별일이 없을 거라고?

정교랑은 머리를 풀며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관계나 인정(人情)은 원칙보다 미덥지 못해. 인정이 없는 게 제일 믿을 만하지.”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반근을 향해 싱긋 웃었다.

“어제 한 일로 봤을 때, 그 절추는 믿을 만한 자야.”

그 절추가 믿을 만하다고?

반근은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지만, 세상만사에 대해서 굳이 세세히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따라야 할 사람만 잘 알면 그만이라는 게 반근의 생각이었다.

길을 가리키는 자가 있다면, 그 길을 가는 자가 있어야 하는 법.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아씨, 소인이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게요.”

“뭐라고? 왜 내쫓지 못한다는 게야?”

수하에게서 보고를 들은 송 지부는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이(李) 절추, 많이 컸군. 대놓고 내 명령을 무시해?

“대인, 절추 대인께서는 그자들을 내쫓을 수 없을뿐더러 공당에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수하가 말했다.

“윤리에 어긋나는 이런 사건을 공당으로 가져가겠다고? 목수 놈이 경성 무장이라는 말에 겁이라도 먹은 게야? 여기는 강주지, 경성이 아니라고!”

절추는 목수 집안 출신으로, 그 부친도 목수였다. 그래서 관청 내에서는 암암리에 이 절추를 ‘목수 놈’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무시하고 비웃었다. 절추와 대립하는 사람이거나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이 호칭을 입에 올리곤 했다.

이 절추를 ‘목수 놈’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송 지부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군.

“대인, 이 절추의 말로는 정 낭자의 혼수 사건 고소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심판할 사안은 그 사건이 아니라 정 낭자의 아랫사람들이 싸움을 벌여 사람을 다치게 한 건이랍니다. 주범이 먼저 관청으로 와서 자수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피해자를 소환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이건 괜찮은 건가?

송 지부가 미간을 찌푸리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참으로 교활하구나. 그런 식으로 고소장을 받아 판결을 내릴 생각을 하다니. 괜히 목수 놈이라는 게 아니야. 보통 손재주가 아니잖아. 그럼 어디 한번 두고 봐야겠다. 무식한 주씨 가문 놈들. 목수 놈이야 매수할 수 있다지만, 나도 그 목수 놈과 같을 줄 알아?”

비록 부부싸움을 하고 난 후였지만, 정 대부인은 정 대노야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 나와 맞이했다.

“어떻게 됐어요?”

정 대부인이 물었다. 정 대노야는 홀가분한 듯 보였다.

사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는 확연히 다른 정 대노야의 표정에서 대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정 대부인은 그래도 꼭 그의 입으로 확답을 듣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정 대노야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내일 재판이 열릴 거요.”

정 대노야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정 대부인은 숨이 턱 막혀 혼절할 뻔했다.

“재판이라뇨!”

정 대부인이 소리쳤다.

그 바보가 올린 고소장이 정말로 수리되었다는 말이야? 세상에!

정 대부인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가슴을 쳤다.

“괜찮소, 정말이오. 그 애가 이 절추 외에 모든 강주부 관리의 심기를 건드렸어. 재판을 연다고 해서 우리가 겁먹은 얼굴로 잘못했다고 빌 줄 알았다면 엄청난 오산이지. 그 애가 고생을 사서 하는 일이니!”

정 대노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대부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머뭇거리면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에요?”

그 바보는 우리가 자신만만하게 여겼던 상황들을 몇 번이고 뒤엎었는데.

“도조 진인과 손 도사도 감당하지 못한 아이인데, 관청의 관리들로 가능할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정 대노야가 눈을 크게 뜨고 정 대부인을 향해 호통쳤다.

“협박받는 걸 좋아하는 관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소? 이번에는 우리가 아니라 관리들을 화나게 했으니, 어디 한번 두고 보시오. 곤봉에 얻어맞으며 공당에서 내쫓겨질 거요. 올바른 판결을 원한댔지? 흠씬 얻어맞고 내쫓기는 게 올바른 판결이야! 세상 사람들 다 와서 보라고 하지! 이게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지!”

정 대부인은 짧게 아, 대꾸하고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정 대부인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는지, 정 대노야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진인이니 도사니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마시오. 그 여인네가 바보를 어찌 감당하겠소? 도사라는 그 여인이 바보한테 큰절까지 올리던 걸 내 눈으로 봤단 말이오.”

정 대부인이 놀란 눈으로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손 도사가 걔한테 큰절을 올렸다고요?”

정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못가에서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렇소. 지난번 우리 집에 왔을 때의 일이오.”

그때?

“왜요?”

정 대부인이 물었다.

손 도사가 왜 그 바보한테 큰절을 올린 거지?

정 대노야도 멈칫했다.

그러게, 손 도사가 왜 그랬을까? 도를 닦았다고 사람들 앞에서 그리 깨끗한 척을 하던 사람이 말이야. 절대로 속세에 휘둘리지 않을 것처럼 굴던 손 도사가, 왜 그 바보한테 큰절을 올린 거지?

일 년이 넘도록 정씨 저택에 발도 안 들이던 손 도사가, 왜 그 바보가 돌아오자마자 들렀을까?

정 대노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당신, 일전에 현묘관에 갔었을 때, 손 도사를 만났소?”

정 대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백 관어치 향불을 올리긴 했는데요. 손 관주를 보겠다고 하니까 여도사들 말로는 도사님이 문객을 일절 받지 않는다고······.”

내가 일백 관을 쓰고, 손 도사를 보고 싶다고 무릎을 꿇었을 때도 못 봤어. 그런데 그 바보가 손 도사의 무릎을 꿇렸다니.

도대체 왜?

정 대부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 바보한테 붙은 악귀의 힘이 그렇게 센가? 혹시 손 관주가 바보의 기를 누르지 못하고 악귀의 힘에 굴복한 게 아닐까요?”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정 대부인의 말에 정 대노야가 호통을 쳤다.

“그럼 정신이 말짱한 당신이 이 상황을 설명해 보든가요!”

정 대부인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외쳤다.

방 안은 일순간 침묵에 휩싸였고, 정 대노야 부부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 참, 둘째 내외는 어젯밤에 정말 거길 갔다고 하오?”

잠시 후, 정 대노야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정 대부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드디어 정상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에 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뭐라고 했다고 하오?”

정 대노야가 물었다.

“남들 모르게 방 안에 숨어서 이야기를 나눴다는데, 무슨 괴상한 얘기를 했을지 누가 알아요. 분명 우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겠죠.”

정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했든 상관없어. 이참에 둘째 내외도 혼쭐을 내줘야겠군.”

정 대노야가 말했다.

보통 이런 단순한 구타 사건은 재판이 바로 열리기 어려웠다. 열흘, 보름을 늦춘다고 해도 아무도 재촉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 대노야의 제안 하에, 조 집사의 사건은 그가 자수한 이튿날 바로 재판이 열렸다.

탕탕탕.

수화곤(水火棍: 옛날 관청에서 사용하는 긴 몽둥이)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공당 내에 울려 퍼졌다. 공당 안에 두 줄로 나란히 선 관졸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원고와 피고는 안으로 들라!”

관졸들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도, 속으로 이번 재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건을 고발한 사람이 바로 사람을 때렸던 주범이고, 소환당한 사람이 주범에게 맞아서 다친 피해자이기 때문이었다.

공당에 선 조 집사와 시종 넷은 악의 가득한 얼굴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임구 등 네 명의 주인장을 쳐다보았다. 조 집사가 그들을 쳐다보면서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바보거나 정신이 나간 놈들이겠지.

주인장들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혀를 끌끌 차며 시선을 거두었다.

이런 자잘한 구타 사건은 굳이 지부 대인까지 나와 재판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재판장 자리에는 통판(通判)과 절추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지부 대인은 공당 측문에 설치된 후당(後堂) 별실에 자리했다.

정 대노야는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고려하여 공당 안에 앉지 않았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지부 대인과 함께 자리하지 않고, 공당 문가에 있는 곁방에 자리했다. 공당과 조금 거리가 있긴 해도, 판결 내용을 듣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곳이었다.

공당에 나온 이들은 각자 예를 올리고, 신분을 확인했다. 절추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통판이 굳은 표정으로 경당목(驚堂木)을 세게 내리쳤다.

“조귀, 경성 귀덕낭장 주씨 가문의 하인이 어찌 강주에서 평민 백성을 때려 다치게 한 것이냐! 네 죄를 알렷다!”

통판이 ‘귀덕낭장’ 네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는 주씨 가문이 겁도 없이 권력만 믿고 남의 땅에서 횡포를 부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자리에 있던 관원들과 하급 관리들 모두가 언짢은 기색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 절추는 통판의 의중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후당에 앉아 있던 송 지부는 찻잔을 들고 후후 입김을 불며 차를 식혔다.

“이런 작은 사건을 듣는 것도 오랜만인데, 재미있었으면 좋겠군.”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옆에 앉아 있던 식객이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대인, 증인이 한둘이 아닙니다. 저쪽 방에는 일고여덟 명의 증인이 기다리고 있다던데요? 남정, 북정 사람들이 다 왔다고 합니다.”

증인들까지 온 걸 보면, 당연히 단순한 구타 사건으로 끝날 건이 아니로군. 구타 사건 뒤에 숨은 혼수 사건을 끌어내야 볼 재미가 있어.

“차라리 일찍 끝났으면 좋겠군. 점심때를 놓치지 않게.”

송 지부가 식객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송 지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속으로 생각했다.

혼수 사건을 끌어들여? 꿈도 꾸지 말라지. 통판의 말 몇 마디면 끝날 판결이야. 곧 있으면 저들은 모조리 곤봉으로 내쫓겨질 사람들이라고!

감옥에 갇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들이라지? 그럼 직성이 풀릴 때까지 가둬 놓으면 되겠네!

잡역부 하나가 다급하게 후당으로 들어와서 조용히 말했다.

“대인, 방청을 원하는 이가 있습니다.”

정씨 가문의 위신을 고려하여 백성의 참관을 막았지만, 소문이 새어 나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집도 안 간 딸이 자신의 혼수를 내놓으라고 집안 어른을 고소하는 일은 강주부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사건을 방청하고 싶어 하는 이가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쫓아내거라!”

송 지부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잡역부는 송 지부의 명령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대인, 그게 말입니다, 천장각(天章閣) 시강이자 기거주(起居注)를 겸하고 있는 승의랑 진(秦)씨 가문의······.”

잡역부가 손에 쥔 명첩을 다 읽기도 전에, 송 지부가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누구라고?”

송 지부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송 지부의 놀란 목소리가 공당 안까지 전해졌다. 공당에서 재판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놀라, 하던 말을 멈추고 소리가 전해져 오는 측문을 흘깃 쳐다보았다.

잡역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는 통판과 절추를 향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임구, 조금 전에 조귀 등이 자네의 점포에 쳐들어가 막무가내로 사람을 때렸다고 했나?”

통판이 공당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 대인. 저놈들이 저한테 점포를 닫으라고 협박한 것도 모자라서 저를 때려서 다치게 했습니다. 여기 제 상처 좀 보십시오.”

임구가 울분에 찬 얼굴로 옷을 들어 올렸다.

통판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절추가 임구에게 물었다.

“임구, 무엇 때문에 자네와 조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것인가?”

통판은 냉소를 지으며 절추를 흘겨보았다.

저놈 급한 것 좀 보게. 뒷돈을 얼마나 받았길래 아직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혼수 얘기로 넘어가려고 해?

통판이 헛기침을 하고는 명했다.

“여봐라, 상처를 확인해 보거라.”

통판이 절추를 쳐다보면서 미소 띤 얼굴로 비아냥댔다.

“이 대인, 일단 상처부터 확인합시다. 급할 거 없잖소.”

“지당하신 말씀이오.”

이 절추도 웃으면서 통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조롱이 가득한 통판의 얼굴을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지부 대인은 공당에서 오가는 얘기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명첩을 앞뒤로 세 번을 읽었지만,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 시강이 어떻게 강, 강주까지 왔지? 게다가 이 사건을 방청하러?”

송 지부가 물었다.

“진 시강이 직접 온 건 아니고, 여인 몇 명이 왔습니다.”

명첩을 처음 받았을 때, 가짜 명첩이 아닌가 의심했던 잡역부는 송 지부의 반응을 본 뒤에야 이 명첩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의 명첩을 들고 올 수 있는 아랫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니겠지.

송 지부가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 자, 자네가 보기에는 진씨 가문이 뭣 때문에 온 것 같나?”

송 지부가 식객에게 물었다. 식객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알기론 진 시강은 강주 땅과 아무런 연고도 없습니다. 혹 주씨 가문 때문은 아닐까요?”

송 지부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내가 이 안건을 너무 얕본 건가?

“대인, 방청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잡역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송 지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온 목적을 모른다면 일단 움직임을 지켜봐야지. 방청이 끝나고 누굴 찾아가는지 보면 여기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게야.”

“그럼 이 사건은 예정대로 진행합니까?”

식객이 조용히 물었다.

예정대로라면 이 사건은 단순 구타 사건으로 판결을 끝낼 것이다. 혼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전에 끝나버릴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갑작스럽게 변수가 생겼으니······.

송 지부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대로 진행해야지. 나머지는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결정하면 될 일일세.”

식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잡역부에게 명첩을 돌려주었다.

이런 귀한 집의 명첩은 아무나 보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명첩을 확인한 뒤에는 이를 가져온 사람에게 꼭 다시 돌려줘야 했다.

곁방에서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던 정 대노야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공당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 서너 명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심지어 잡역부 한 명이 그 여인들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기까지 했다.

여인들이 관청을 드나드는 건, 지부 대인의 딸을 만나기 위함일 터. 지부 대인의 딸들은 다 뒤쪽 저택에 있을 텐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여인들은 잡역부의 안내를 받으며 다른 쪽 곁방으로 들어갔다.

방청하는 자들이라고?

정 대노야는 몸을 일으켜 문가에 기댄 채 밖을 내다보았다.

왜 우리 집안의 사건을 방청하려는 거지? 그리고 지부 대인은 왜 저 사람들을 안으로 들인 거야?

정 대노야는 갑자기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 대노야는 손 관주가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리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 그 바보에게 붙은 악귀의 힘이 그렇게 센가? 혹시 손 관주가 바보의 기를 누르지 못하고 악귀의 힘에 굴복한 게 아닐까요?

정 대부인의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정 대노야는 몸을 살짝 떨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환각과 환청을 떨쳐냈다.

이와 동시에 공당 내에서 경당목이 탁자에 부딪히는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조귀, 변명하지 말거라! 주 낭자가 정씨 가문으로 시집온 이상, 그 혼수 역시 정씨 가문의 것이다. 그러니 네 놈은 벌건 대낮에 남의 점포에 쳐들어가 강도질을 한 것이야! 여봐라! 저자를······.”

“잠시만요, 대인. 조귀가 임구 외 몇 사람을 구타한 건 사실이나, 윗전의 부당함에 맞서 싸운 거잖소. 이는 가히 충효라고 할 만한 행동이지. 게다가 관청으로 와서 먼저 자수를 한 것은 하인의 충의와 도리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어딜 봐서 강도질이라는 거요?”

공당 안에서는 드디어 통판 대인과 절추 대인이 논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 대노야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공당의 재판에 귀를 기울였다.

두 대인의 의견 대립으로 공당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 대인, 그럼 대인은 저들이 남의 가산을 빼앗는 게 의로운 일이라는 거요?”

통판이 공당 아래에 있는 원고와 피고 대신 이 절추를 보며 말했다. 누가 들어도 그 말에 날이 서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저 목수 놈이 원체 재물을 탐한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어. 그래도 뼛속까지 목수의 천성이 남아 있어 매사 원리원칙을 중시해 다행이었지. 근데 오늘은 아주 얼굴에 철판을 까고 편들고 나서네?

주씨 가문이 도대체 뭘 줬길래 저러는 거지? 자칫하면 자신의 벼슬길이 끊길 수도 있는 사건인데, 왜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돕느냔 말이야!

“통판께서 오해하셨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강탈하는 게 빼앗는 것이지, 원래 자신의 것을 되돌려 받는 것은 빼앗는 것이 아니오.”

이 절추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뛰어난 혜안을 가지셨습니다, 대인! 소인은 본래 아씨의 것인 혼수를 빼앗겨, 정말 어쩔 수 없이 다투게 된 겁니다.”

조귀가 곧바로 외쳤다.

“증인이 있는가?”

이 절추가 물었다. 통판이 경당목을 들어 탁자에 세게 부딪혔다. 그 소리가 조귀의 대답을 덮어 버렸다.

“자식이 부모의 잘못을 따지는 것도 모자라서, 재산 문제로 부모를 고소하다니. 참으로 악역무도한 일이다! 여봐라!”

통판 대인이 경당목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장 스무 대를 쳐서 내쫓거라!”

두 줄로 서 있던 관졸들이 수화곤을 들고 험상궂은 얼굴로 일제히 조귀에게 다가갔다. 임구 외 몇 사람은 맞아도 싸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귀와 시종들을 비웃었다.

곁방에서 판결을 듣고 있던 정 대노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당 내부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양심도 없는 절추가 주씨 가문을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을 상상을 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절추 놈은 평생 돈을 만져본 적도 없었나?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멈춰라.”

공당 내에 절추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인, 부모의 잘못을 따지는 것도 모자라서, 재산 문제로 부모를 고소하는 것이 악역무도하다 하셨소? 그게 사실이 아니면요?”

절추의 말을 들은 통판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통판은 속으로 어리석은 목수 놈을 끊임없이 외쳐댔다.

“어찌하여 아니라는 거요!”

통판이 호통쳤다. 통판이 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송 지부와 통판은 동시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인, 아씨께서는 부모의 잘못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재산 문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씨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은 재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위해서입니다.”

관졸들에 의해 바닥에 짓눌린 조귀가 다급하게 외쳤다.

“제가 증인을 데려왔습니다! 증인!”

“증인을 들라 하라!”

이 절추가 재빨리 손을 뻗어 경당목을 세게 내리치며 명령했다. 통판 대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빼앗긴 경당목을 쳐다보았다.

저 목수 놈이 미쳐도 제대로 미쳤구나!

네놈이 뭐라고 하든 간에, 어차피 한집 식구들끼리 벌이는 싸움이니, 결국에는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고 덮어씌우면 그만이야! 두고 보라고!

통판이 이 절추를 흘겨보고는 소매를 홱 털었다.

증인? 재산 싸움이 아니라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또 뭐야.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정 대노야가 인상을 쓴 채 곁방 밖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관졸이 방에서 여인 한 명을 부르더니 공당 안으로 데려갔다. 여인의 얼굴을 본 정 대노야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곧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대인을 뵈옵니다.”

여인이 공당에서 무릎을 꿇은 채 큰절을 올리고 말했다.

“소인은 정 이부인의 노비로, 이노야와 이부인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

관직에 있는 정 이노야는 당연히 공당에 오지 않을 것이고, 이노야 없이 이부인 혼자서 오진 못하니 자연스레 이부인의 여종이 증인 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무엇에 대해 증언하겠느냐?”

이 절추는 속으로 한숨을 돌리며 물었다.

천만다행이군. 정말로 증인이 있었어!

“아씨는 자신의 부친인 이노야를 고소하려는 게 아닙니다. 실은 그 누구도 고소할 생각이 없으시죠.”

여종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집에서 수차례 연습했지만, 공당에 증인으로 서는 것은 처음인지라 온몸이 경직되고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긴장한 여종이 말을 더듬긴 했지만, 다행히도 증언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혼, 혼수 때문인데요.”

“혼수가 왜?”

이 절추가 물었다.

“대노야께서 아씨를 혼수도 없이 시집 보내시겠다고 해서······.”

여종이 대답했다. 공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혼수도 없이 자식을 시집보내겠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노야의 여종이 대노야를 지목해서 증언한 사실이었다.

곁방에서 증언을 듣고 있던 정 대노야는 화를 못 이겨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는 게 느껴졌다.

평소 이방 내외가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장으로서 남의 시기를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드는 가장 노릇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가족 간의 균형을 맞추고 가문의 영광을 이어 나가는 게 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아우가 더 이상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 대노야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리사욕이 고개를 드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에, 정 대노야는 변해 버린 아우의 모습을 나무라는 대신 이해하려 노력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너를 이해해 주었는데, 너는 왜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냐!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정녕 네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실성을 한 게야?

얼굴에 핏기가 가신 정 대노야는 문틀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고 싶기도 하고 대성통곡을 하고 싶기도 했다.

정 이노야가 정교랑을 찾아간 사실도 알고 있었고, 거기서 좋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뒷담화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뼈를 부러뜨린다 해도 근육은 이어져 있을 테니, 험담을 나눈다고 한들 자신과 아우의 사이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한 뒷담화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칼을 휘두를 줄이야.

아우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 대노야는 공당에서 오가는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소리만 귓가에 울릴 뿐이었다. 정 대노야는 제 힘으로 서 있기도 힘에 부쳐 문틀에 기대어야만 했다.

주씨 가문이 도대체 뭘 했길래, 얼마나 잘 해줬길래, 이방 내외가 나한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지? 미쳤구나, 다 미쳤어!

정 대노야는 주먹을 꽉 쥐고 문틀을 세게 쳤다. 핏기 없이 창백했던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좀 전의 환각이 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번에는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리는 손 관주의 옆에 두 사람이 더 늘어났다. 바로 정 이노야와 정 이부인이었다.

악귀가 사람을 홀리나? 그 바보가.

정 대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사람처럼 무지한 여인네들이나 하는 생각이거늘! 내가 왜 이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게야!

공당 안에서 진행되는 문답 소리가 차차 정 대노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혼수를 안 준다고? 그 혼수는 정 낭자의 모친이 남겨둔 거고?”

“예, 그렇습니다. 그건 정 아씨의 모친께서 남겨 주신 혼수입니다.”

“대인,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저희 아씨는 재산 때문이 아니라 모친의 명예 때문에 나서신 겁니다. 이대로 혼수도 없이 시집을 가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모친 없는 저희 아씨를 얼마나 비웃고 조롱하겠습니까.”

공당 안은 좀 전과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통판 대인은 아예 입을 다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방관하고 있었다. 구타 사건의 피해자로 왔던 임구 등도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그저 가만히 서서 이 절추와 조귀, 그리고 여종의 문답을 듣고만 있었다.

결국 혼수 얘기가 나왔군.

공당의 상황을 듣고 있던 송 지부도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 절추의 결심을 얕잡아봤어. 내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통판도 저리 비아냥댔는데, 고군분투하여 결국 목적을 달성해 내다니.

저 목수 놈, 제대로 미쳤군!

“모친을 위해 혼수를 달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혼수를 주지 않는 것도 그 아이의 모친을 위해서라면 어떻소?”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공당 안에 울려 퍼졌다.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정 대노야가 결국 공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송 지부도 자세를 고쳐앉고 몸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공당 안으로 들어서는 정 대노야를 본 이 절추가 굳은 표정으로 마른기침을 한 번 했다.

“누구시오.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공당에······.”

“이 대인! 적당히 좀 하시오!”

이 절추의 모습을 보다 못한 통판이 소리쳤다.

“원리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이 절추가 정중하게 말했다. 통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다시 뭐라고 하려던 찰나, 정 대노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인께 아뢰옵니다.”

정 대노야가 공수의 예를 표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생 정남(程楠), 선조의 은덕으로 희평(熙平) 8년에 봉작을 받았습니다.”

통판이 이 절추를 흘겨보고는 정 대노야를 향해 손을 내밀며 예를 표했다.

“정 노야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거라.”

통판의 행동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절추도 말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통판과 정 대노야의 언짢은 눈빛을 못 본 척 했다.

정 대노야는 관졸이 가지고 온 낮은 의자에 앉았다. 공당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이부인의 여종은 고개를 떨구고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오늘처럼 형제지간의 싸움을 공당까지 끌고 온 건, 정씨 가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 대노야는 바닥에 얼어 있는 여종을 쳐다보지 않았고, 공당에 서 있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우리 교랑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도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바보였고, 사리 분별도 하지 못했소. 그런 아이가 시집을 갈 수 있겠소?”

당연히 못 가지. 바보를 원하는 신랑이 어디 있겠나.

“정 노야, 아씨께서는 다 나으셨습니다.”

조귀가 말했다.

“다 나았다고?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바보라는 병이 나을 수 있는 병인지는 일단 차치합시다. 여기, 예전에 바보였던 사람과 혼례를 올리고 싶은 사람이 있소이까? 여러분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껏 생각해 보시오.”

정 대노야가 공당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물었다.

당연히 없겠지. 비웃음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중에 아이까지 바보를 낳으면 어쩌려고.

“대노야, 그런 식으로 물어보시면 너무······.”

통판 대인이 경당목을 두드리면서 조귀의 말을 끊었다.

“공당에서는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하느니라!”

통판 대인이 이 절추를 흘겨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원리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이 절추는 말없이 통판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통판의 눈에는 그의 표정이 몹시 어색해 보였다.

꼴 좋다!

통판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정 대노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 노야, 계속 이야기하시지요. 혼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통판이 물었다. 정 대노야는 말을 잇는 대신, 옷소매 속에서 문서 하나를 꺼냈다.

“대인, 이걸 한 번 보시지요.”

저게 뭐야?

관졸 하나가 정 대노야의 손에 있던 문서를 받아와 통판에게 전달했다. 문서를 펼치자마자 통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흥분한 것 같기도,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바로 교랑의 모친이 남긴 혼수 목록입니다. 대인 두 분께서 살펴 주십시오.”

이어서 정 대노야는 사람들에게도 손짓했다.

“모두 한 번 돌려보시구려.”

모두 돌려보라고?

공당에 있던 이들은 문서의 내용을 궁금해하면서도, 서로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정씨 가문이 부자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주씨 가문 낭자가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도 만만치 않았다고 소문이 난 터였다. 하지만 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닌 이상, 주씨 가문 낭자가 가지고 왔던 혼수 목록에 대해서는 아무도 열람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빼며 문서를 구경하고자 했다.

통판 대인은 문서를 눈에 넣을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이 절추가 문서를 빼앗다시피 하여 가져왔다. 하지만 통판 대인의 반응과는 달리, 이 절추는 문서를 대충 훑어보고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옆에 있던 관리에게 문서를 건넸다.

저 목수 놈, 놀란 척도 안 하네? 연기 한번 끝내주는군!

통판 대인이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문서를 돌려 보던 사람들은 이 절추만큼 연기가 매끄럽지 못했다. 문서가 다음 사람의 손으로 전해질수록, 엄숙했던 공당은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놀라서 감탄하는 이도 있었고 조용히 웅성대는 이들도 있었다. 문서를 보고 감탄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의 표정에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번쩍이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엔 금은보화로 만든 거대한 산을 봤을 때처럼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 이는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탐욕이었다.

사람들의 모든 반응을 눈에 담은 정 대노야는 무표정한 채로 묵묵히 서 있었다.

후당에서 몸을 일으켜 문가에 서 있던 송 지부는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공당에서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청나다. 돈이 진짜 많아.”

“게다가 저건 몇 년 전이니까, 지금 시세로 농토와 점포를 환산해 봐.”

“일 년에 최소 오만 관은 족히 벌겠지?”

일 년! 오만 관!

송 지부의 눈도 번쩍 뜨였다.

역시 엄청난 부자였어!

정 대노야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정도 혼수라면, 바보와 혼례를 올릴 의향이 있소이까?”

정 대노야는 손을 들면서 좀 전과 같은 질문을 했다.

문서를 들고 있던 관졸이 아쉬워하면서 혼수 목록 문서를 정 대노야에게 다시 돌려줬다.

공당 안 분위기는 정 대노야가 좀 전에 같은 질문을 할 때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저 혼수들만 있다면, 바보는 무슨, 죽은 사람이랑도 혼례를 올릴 수 있지!

물론 저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정 대노야는 사람들의 속이 훤히 보이지만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정 대노야가 문서를 다시 소매 안으로 넣으면서 말했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지. 이 정도 혼수가 있는데도 우리 교랑이 시집갈 곳 하나 없겠소? 전혀 그렇지 않소.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소? 바로 이 돈 아니겠소이까!”

정 대노야가 갑자기 목청을 높이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정 대노야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돈을 위해서 우리 가문의 여식과 혼례를 올릴 수도 있단 말이오. 요즘은 혼수가 많을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우리 가문의 여식은 다른 여인들과 다르잖소.”

정 대노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우리 가문의 여식은 바보요. 병이 있어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혼자서는 생활도 할 수 없소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혼수만 보고 혼례를 올리려는 집안에 마음 편히 보낼 수 있겠소이까? 그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진심으로 대하겠느냔 말이외다!”

공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정 대노야의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 대노야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된 건 우리 정씨 가문의 몫이오. 도망칠 수도 없고, 떨쳐낼 수도 없는 운명이지. 하지만 다른 이들은?”

정 대노야가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다른 이라면 어떻겠소이까? 혼수만 보고 교랑을 데려가면?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란 말도 있소이다. 얼마간은 우리가 시집간 저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평생을 보호해 줄 순 없는 노릇이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시구려. 이런데도 내가 혼수를 공개할 수 있겠소? 이런데도 그 아이가 시집갈 때 이 혼수들을 줄 수 있겠소이까? 그건 그 아이에게 해가 될 뿐이오. 죽으라는 게지! 내가 뭐 때문에 이러겠소? 이게 다 혼수를 노리지 않고, 우리 가문의 여식을 오직 진심으로 대해 줄 집안을 찾기 위함이오!”

정 대노야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이것도 잘못이라 할 수 있소이까?”

정 대노야는 목소리를 더 크게 해서 외쳤다.

“이게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 이게, 무슨 잘못이야!”

공당에 있던 사람들은 귀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맞아, 저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래. 잘못한 게 없는데.

어린아이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잘못이 없다지만, 돈을 한 아름 품고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도록 둔다면 그건 부모의 잘못이지!

정 대노야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조귀와 시종들의 당황한 표정을 차례로 보았다. 그러고는 드디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나와 싸우겠다고? 내가 괜히 네놈들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아는 것이냐? 먹은 소금도, 밥도 네놈들보다 훨씬 많아! 이 애송이들아, 정신 차려라!

하지만 정 대노야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서는 이긴 것도 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공당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부터, 이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었다.

그 대단한 정씨 가문의 가장이 손아랫사람인 조카 때문에 공당에 선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운데, 혼수 목록까지 공개하게 됐으니, 이는 가히 가문의 망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재물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천고의 진리거늘. 내가 내 입으로 가산을 만천하에 떠벌린 셈이 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재물을 탐낼는지!

정 대노야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게 다 그 바보 때문이야! 그리고 둘째 녀석! 집으로 돌아가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다!

정 대노야는 악에 받친 눈빛으로 공당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인! 소생에게 죄가 있습니까?”

통판과 절추가 정신을 차리고 정 대노야를 내려다보았다.

“없습니다.”

통판이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없지.”

통판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다시 한번 자신의 말을 되뇌었다. 통판이 퇴정을 알리기 위해 경당목을 내리치고자 손을 높이 들었다.

“잠시만요!”

조귀가 외쳤다.

조귀의 목소리에 공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숨이 턱 막혔고, 이 절추는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쫓거라!”

통판은 조귀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아예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통판이 눈썹을 치켜뜨고 손에 쥔 경당목을 내리쳤다.

“퇴······.”

이때, 이 절추가 필사적으로 경당목 아래로 손을 뻗어 경당목이 울리지 않도록 막았다. 통판이 내리친 경당목에 손등이 찍힌 이 절추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 와중에도 다급하게 조귀를 향해 물었다.

“불복하는 게 있는가?”

찍힌 손등이 너무 아팠던 나머지, 이 절추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퇴정을 알리려는 통판의 목소리를 덮었다.

이 절추의 일그러진 표정과 목소리만 봐서는, 조귀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절추가 무슨 의도로 조귀에게 질문했는지 알고 있었다.

“대인, 지금은 구타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게 아닙니까?”

조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우리가 구타 사건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있나? 한데 당신들이 진정으로 원한 건 혼수 사건에 대한 판결이잖아?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통판과 정 대노야가 냉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판결을 질질 끌겠다는 게지?

“지금은 혼수에 대해 말하고 있네. 그러니 조귀, 자네가 한 말은 의미가 없어. 더 할 말이 남았는가?”

이 절추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조귀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그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대인, 그렇다면 판결을 내리기엔 아직 이릅니다.”

통판이 경당목을 세게 내리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조귀, 네놈이 그래도 불복한다는 게냐!”

“대인, 혼수 사건에 대해서는 소인이 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구타 사건은 소인이 주범이니, 대인께서 무슨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혼수 사건은 소인이 고소한 게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저희 아씨께서 고소장을 올린 것이지요. 사건의 원고가 아직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어찌 피고의 말만 듣고 판결을 내시겠다는 겁니까?”

조귀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엉? 이게 무슨 말이야?

“대인, 만약 혼수 사건에 대해 판결하시려는 거라면, 저희 아씨를 모셔오겠습니다.”

조귀가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 대노야를 비롯한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조귀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 여인이 정말로 여길 왔다고? 더 이상 재판을 진행해서는 안 돼!

무언가 결심한 통판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혼수는 가산이니, 가문 내에서 알아서 결정해야 할 일일세! 이 사건은 이대로 마무리 짓고, 다시는 혼수에 대해 언급하지 말게!”

통판이 경당목을 향해 손을 뻗던 찰나에, 통판보다 한발 빨랐던 이 절추가 경당목을 쥐고 세게 내리쳤다.

탁!

“여봐라! 원고 정씨를 들이거라!”

이 절추가 통판에게 뒤지지 않는 기세로 눈썹을 치켜세우며 외쳤다.

드디어 때가 왔어!

공당 옆쪽에 앉아 있던 반근이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근은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공당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부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는 정교랑의 당부를 떠올리며 간신히 참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반근 낭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되니까, 겁먹지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하면 돼요.”

반근과 함께 관청으로 온 남정 여인들이 자신들도 겪어 본 일이라는 투로 반근을 다독였다. 하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며 건네는 그녀들의 말은 반근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남정 사람들에게 관리를 대면하는 일은 엄청난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자식이 가장을 고소하는 악역무도한 사건이었다.

반근이 여인들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네, 알겠어요.”

반근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나이가 어려서 걱정했는데, 반근 낭자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네.”

“주씨 가문의 사람이라잖아. 주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데, 무서울 게 뭐 있어?”

여인들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반근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 할 수 있겠니?

  • 아씨, 소인은 아씨가 죽으라고 명하셔도 기꺼이 따를 거예요.

하지만 아씨는 절대로 자신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아. 아씨의 사람이라면 뭐든 뜻대로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아씨는, 오직 아씨를 죽이려는 사람들만 죽음으로 내몰 뿐이야.

“노비 반근, 대인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어린 몸종을 보자 안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긴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작 열댓 살짜리 어린애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저런 아이라면 늙은 여우 같은 정 대노야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지. 나더러 저 주둥이를 막으래도 막을 수 있겠는걸.

통판은 자세를 바로 했고, 이 절추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정 낭자의 측근이 나이 지긋한 여종이 아니라 저렇게 어린 몸종이었어? 저 영리한 조귀처럼, 정 낭자의 시중을 드는 어멈들도 꽤 쓸 만했을 텐데. 어쩌다가 저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를 보낸 거야?

정 대노야는 반근을 보고도 미동조차 없었다.

저런 몸종을 보내다니. 주씨 가문이 아무리 잘 가르친다 한들, 그저 어린 계집일 뿐이야.

정 대노야는 더 이상 입을 열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통판 선에서 어렵지 않게 해결될 일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너희 아씨가 집안의 어른을 고소하여 혼수를 찾으려는 것이 사실이더냐?”

이 절추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사람들은 힘이 빠진 이 절추의 목소리에서 좀 전과는 다르게 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

반근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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