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중 하나가 사실대로 대답하려던 찰나에 영리해 보이는 다른 사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없어요. 저희는 아무도 찾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길을 잘못 든 겁니다요!”
사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 똑똑한 놈일세. 아씨께서 애매하게 물은 질문을 잘도 알아듣고 대답했어!
사내의 영리함에 조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쪽이, 날 오해한 거예요.”
오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좀 전에 저 낭자가 거기 서라고 한 건, 우리가 아니라 그 사기꾼을 향한 거였나?
저 낭자가 그 사기꾼을 도와주려고 나서는 거라고 오해하지 않았더라면, 한 대 얻어맞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 사기꾼 놈이었겠지.
“그럼 똑바로 말했어야지!”
한 사내가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소리를 질렀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교랑의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
“네 놈이 감히 누구한테 소리치는 것이냐!”
사내는 깜짝 놀라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저런 무식한 시종을 데리고 다니니까 제대로 된 대화가 안 되지. 오해를 사지 않는 게 더 이상하잖아!
“그 남자는 누구죠?”
정교랑이 다시 물었다.
“이쪽 남정 사람입니다.”
사내는 정교랑이 원하는 대답을 명료하게 내뱉고는 남정 골목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정평이라는 자고요.”
정교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 대답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정평?”
정교랑은 사내가 말한 이름을 되물었다.
사내는 아름답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가진 이 여인의 되묻는 말이 어쩐지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하다고 느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대답에 대답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정평입니다.”
사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평!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 안을 향해 들어갔다. 갑자기 휙 가버린 정교랑을 보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우왕좌왕했다.
“어서 따라가거라.”
조 집사가 서둘러 시종들을 향해 지시하고는 자신도 골목 안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소매를 팔뚝 위로 깔끔하게 걷어 올렸다.
잡아야 할 사람을 아직 못 잡은 거로군.
시종들은 조 집사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여섯 명의 사내들이 서로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는 어떡하지?”
“도망쳐야지.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밥이라도 사 줄 사람들처럼 보이디?”
사내들은 그제야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구경거리는 사라졌지만, 구경꾼들은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사람들 앞을 단단히 막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쪽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정 대부인이 여종들과 함께 강가에 도착했을 때는 정교랑과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물었다. 구경꾼들이 서로 손짓을 해가며 웅성대는 모습에 정 대부인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종 하나가 가까이 다가가서 조용히 고했다.
“부인, 듣기로는 한 사내 때문이라고.”
사내 때문이라니!
대부인이 갈비뼈 주위를 다시 꾹 짚었다. 귓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차라리 내가 저 강에 빠져 죽는 게 낫겠어!
나무토막과 낡은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초가집이 늘어선 이곳은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이런 곳에 갑자기 화려하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자, 골목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밖으로 나와 구경했다. 어떤 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 일행을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조심스럽게 힐끗거리기만 했다.
정교랑이 갑작스럽게 뛰어갈 때, 그녀가 누군가와 싸움을 벌일 거라고 생각했던 정씨 가문 여종들은 당황한 나머지 이리저리 흩어지며 몸을 숨겼다. 그래서 여종들은 정교랑 일행이 남정의 골목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그들 일행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씨 가문 여종을 대동하지 않은 정교랑과 우람한 체구의 주씨 시종들은 남정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낯선 존재들이었다.
고급스러운 옷감, 커다란 두모 아래로 반만 보이는 얼굴만 보아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소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미모의 시녀와 우람한 시종들. 타향 말씨.
저런 사람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사람을 하나 찾습니다.”
조 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굴 찾으시오?”
연로한 노인 하나가 구경꾼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더니 긴장한 기색으로 예의를 갖춰 물었다.
“정평이라는 자입니다.”
조 집사가 대답했다.
정평?
주위의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정평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처럼.
“정평? 이쪽에는 그런 사람이 살지 않소.”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고는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면, 북정으로 가서 알아보는 게 어떠시오?”
대충 보아도 돈깨나 있는 사람들 같아 보이니, 찾는 사람도 그러하겠지. 다 같은 정씨라고는 하나 남정에는 돈 있는 사람이 없어.
“사기꾼.”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욕을 하는 건가?
“사기꾼을 찾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 사기꾼 놈을 찾는 거로구먼!”
“그놈 이름이 정평이었어?”
“사기꾼이 또 사고를 쳤나 보네. 글쎄, 내가 그때 걜 여기 남겨 두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정교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찾을 수 있겠네.
“그 사람은 어디에 살죠?”
정교랑이 물었다.
“아, 그놈이요? 아마 소 낭자 댁 헛간에 살았던 것 같은데.”
노인이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며칠 전 큰바람이 부는 통에 소 낭자네 헛간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땔감으로 가져다 썼대요. 그놈은 아직 묵을 곳을 못 찾아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재워 줄 집을 찾는 것 같던데요.”
구경꾼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아가씨. 혹시 그놈이 돈 떼먹었어요? 그놈 성씨도 정씨이긴 하지만, 우리랑 다 같은 식구는 아니에요.”
누군가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정교랑이 가볍게 손짓했다.
“찾아.”
정교랑의 말뜻을 이해한 조 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현상금을 걸겠습니다. 그 사람을 찾아오면, 이 돈을 드리겠소.”
조 집사가 허리춤에 달려있던 돈주머니를 풀어 높게 들고 흔들었다. 금테가 수놓아진 돈주머니는 내리쬐는 햇볕 아래 더없이 빛났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골목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등을 떠밀며 골목 안으로 뛰어갔고, 노인들도 뒤처질 수 없다는 듯 지팡이를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빗자루며, 옷이며, 손에 쥐고 있던 물건들을 냅다 던지고는 사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교랑 일행이 들어간 골목을 찾아낸 여종들은 갑작스럽게 몰려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였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여종들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남정 사람들이 정씨 부인들의 최측근인 여종들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멀리서라도 여종들이 보이면 근처로 쏜살같이 달려와 아부를 떨던 사람들인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단 한 명도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여종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앞만 보고 내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수라장이던 골목 안은 조용해졌고, 그곳에는 오직 정교랑 일행만이 남아 있었다.
“아씨,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조 집사가 뉘 집에서 땔감으로 쓰려고 마련해 둔 건지 모를 나무 그루터기를 옮겨와 자리를 마련했다. 정교랑이 치마를 모아 자리에 앉았다.
뭘 기다리는 거야? 설마 진짜 그 남자를 기다리는 건가?
정씨 여종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여종 중 한 명이 정교랑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씨, 부인께서 찾으세요. 일단 돌아가시죠.”
“아직 할 일이 있어. 일이 끝나면 뵈러 가겠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어디서 감히!
여종들은 경악했다.
정씨 가문의 여식일 경우, 말귀를 알아듣는 아이라면 몇 마디 더 재촉하여 집으로 데려가고 말귀를 못 알아듣고 떼를 쓰는 아이라면 아예 양쪽 팔을 붙잡고 힘으로 끌고 가야 했다. 지금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지만, 그녀 주위에서 삼엄하게 호위를 하는 주씨 가문의 시종들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여종들은 확신했다. 자신들이 저 아씨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이 시종들이 분명히 자신들을 산 채로 잡아먹으리라.
여종들은 제자리에 서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물론 정교랑 일행은 여종들의 걱정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정평이라는 자를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골목 사이에서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석양이 질 무렵까지 정평이라는 자를 찾아낸 자는 없었다.
“낭자, 그놈은 분명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쫓기는 게 익숙한 놈이라 숨는 데에는 아주 도가 텄을 테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지요. 저희가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맞아요, 아씨. 일단 돌아가시지요.”
이때다 싶은 여종들이 거들었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그럼, 그 사람을 계속 찾아주세요.”
정교랑은 이 말을 남긴 채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조 집사가 손에 있던 돈주머니를 노인에게 던져 주었다. 해가 떨어진 시간이라 사위가 어두웠지만, 노인은 양손으로 정확하고 잽싸게 돈주머니를 받아냈다.
“만약 찾게 된다면, 돈을 더 드리겠소. 이건 수고비요!”
조 집사가 말했다.
이 주머니만 해도 족히 일 관은 되겠지? 이렇게 많은 돈을 수고비로 쓰다니! 손이 엄청 크시네!
골목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컴컴해진 저녁이 되어서야, 커다란 두봉을 두른 소녀는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큼성큼 골목을 벗어났다.
“저 사람은 누구요?”
노인이 물었다.
“대부인과 이부인의 여종들이 깍듯이 모시는 걸 보니, 분명 중요한 귀빈 아닐까요?”
누군가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정평이라는 자를 찾는 데에 혈안을 올리느라 뒤늦게 도착한 여종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설령 여종들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고 한들,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 새도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진정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소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여종들을 알아봤다.
“생각났어! 이틀 전에 돌아온 정씨 가문의 바보야! 분명히 저 옷을 입고 있었어!”
누군가가 외치자, 이틀 전의 광경을 떠올린 다른 사람들도 그 바보의 모습을 생각해 냈다.
“맞아, 맞아. 나도 기억하네. 저 시종들!”
“그렇네. 그 낭자가 확실해! 그때 내가 선녀 같다고 생각했던 그 여인!”
“어딜 봐서 바보라는 거야? 북정 사람들 눈이 삔 거 아니야?”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남정의 밤도 꽤 소란스럽겠지만, 북정의 밤 또한 남정 못지않게 시끄러웠다.
“도대체 누구래?”
집으로 돌아온 정 대부인은 앉을 힘도 나지 않아서 줄곧 침상에 앓아눕고 밥도 삼키지 못했다.
뒤늦게 정교랑 일행을 따라 돌아온 여종들을 향해 정 대부인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더냐?”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찾고 있는 남자는 작년에 강주로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종이 대답했다.
“작년?”
정 대부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화를 냈다.
“그럼 우리 정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게야? 그런데 어떻게 여기 살고 있어? 냉큼 내쫓아 버려라!”
“소인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듣기로는 촉주(蜀州)에서 온 사람이라는데, 노야께서 그 사람이 여기 사는 걸 허락하셨대요. 허구한 날 하는 일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기 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고, 이집 저집 헛간을 전전하며 지내는 사람인지라 남정 쪽에서도 성가신 존재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 코 묻은 돈까지 떼먹는다고.”
여종이 말했다.
그런 놈을?
정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교랑한테도 사기를 친 게야?”
“아니요, 부인. 아씨는 이곳으로 온 지 이제 사흘밖에 되지 않았고, 오늘이 첫 출타신걸요.”
여종이 단호하게 부인했다.
하긴, 그렇지.
정 대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생김새는 어떻디?”
여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꼭, 꼭 정교랑이 무슨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물어보시잖아?
“부인, 그런 놈의 생김새가 어떻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여종이 실소를 터트리면서 대답했다.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놈이면 뭐 어때? 바보인데. 지금 아무리 나아졌다고 한들, 바보는 바보야. 보통 사람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테니, 깊이 생각하지 못하겠지. 겉보기에만 좋으면 좋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잘 지켜보거라. 또 밖에 나가서 우리 가문의 이름에 먹칠할 일 없도록.”
정 대부인이 말했다.
지켜보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게 문제인데.
여종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 대부인이 손짓하자, 여종들은 서둘러 물러났다.
휘장을 내리고 등불을 끈 실내는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정 대부인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며칠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끊임없이 뇌리에 스치자, 정 대부인은 짜증이 솟구쳤다. 그녀는 피곤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뱉고는 등을 돌렸다.
이제 막 대문을 넘어서던 정 이부인도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정 대부인과는 다르게, 정 이부인은 정교랑의 이야기를 들어도 시종일관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사람을 찾는대? 그럼 찾으라고 해. 우리 교랑이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찾아야지.”
여종들이 웃었다.
“부인, 부인께서는 오늘 진씨 가문에서 온 여인들을 찾으셨나 보네요.”
정 이부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아니 뭐, 근처 점포에 새로 들어온 옷감이 있나 보러 간 건데, 그 사람들이 날 붙잡고 반나절 동안 이야기를 하지 뭐야.”
정 이부인은 어쩔 수 없었다는 투로 말했지만, 얼굴에 핀 웃음꽃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정 이부인을 따라가지 않고 집에 남아 있었던 여종이 물었다. 정 이부인이 풉 하고 웃었다.
“나 같은 여인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 그 사람들이 한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는걸. 노야께서 돌아오시면 얘기해 봐야지. 어쨌든 노야의 맏딸 혼사잖아. 난 끼어들지 않는 게 더 나아.”
정 이부인은 ‘노야의 맏딸’이라는 다섯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여종들은 정 이부인의 말뜻을 눈치채고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미리 축하드려요, 부인.”
여종들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어허, 헛소리하지들 말거라. 저리 가, 가거라.”
정 이부인은 일부러 언짢다는 듯한 손짓을 하고,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야. 주씨 가문이 이렇게 손이 클 줄이야! 어쩐지 혼수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 않는다 싶었어. 그들은 인맥을 더 중요하게 여긴 거야!
내 평생 구경도 못 할, 그런 지체 높은 집안과 맺어져 봐. 그런 인맥만 생긴다면 우리 집안도 급이 달라지는 거야. 그깟 돈 몇 푼이 얼마나 한다고. 이 어마어마한 인맥만 잘 맺어 둘 수 있다면, 아무도 교랑의 혼수를 노리지 못하겠지!
내 손에 들어오는 건 혼수뿐만이 아니야. 내 자식의 혼삿길도 훨씬 나아지겠지! 공주부 진씨 가문이 나으려나? 아니면 그 무슨 봉례랑(奉禮郎: 나라의 큰 의식이 있을 때, 이를 관장하던 집사관) 가문이 더 나으려나? 아니지. 관찰 판관 댁은 어떨까?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비녀를 빼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정 이부인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상황에 잠이 올 수가 있나! 얼른 내일이 와서, 되도록 빨리 노야가 이 일을 결정하셨으면!
밤잠을 설치는 사람은 정씨 가문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먼 길을 달려 집에 도착한 왕 부인은 온몸이 쑤시도록 피곤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자신을 반기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왕 부인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역시 어머니께서는 절 위해서 뭐든 해 주실 줄 알았어요.”
왕십칠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뭐 그리 큰일도 아닌데.”
왕 부인이 미소를 쥐어짰다.
“그러니까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왕십칠이 왕 부인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며 물었다.
“아이고, 어머니.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왕 부인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기는 처음인지라 분명 빈틈투성이일 텐데, 이대로 사실이 탄로 나기라도 한다면.
“요 며칠 제 일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분주하게 다니시느라 힘드신 거죠? 어머니, 어서 좀 쉬세요.”
왕십칠이 속상함 가득한 얼굴로 무릎을 꿇어앉아 왕 부인에게 예를 올렸다. 왕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더욱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도 어서 가서 쉬거라.”
왕 부인의 말에 왕십칠이 곧바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소자도 쉬러 가겠습니다. 제대로 된 잠을 못 잔 지 한참 됐거든요.”
왕십칠은 날개라도 달린 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펄쩍펄쩍 뛰면서 밖으로 나갔다.
“푹 자야겠다. 아주 단잠을 자겠어.”
왕십칠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안에 있던 왕 부인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
옆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왕 노야가 안으로 들어왔다.
“십칠한테 언제까지 숨길 셈이오?”
왕 노야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숨기지 않으면 어쩌려고요. 우리 십칠이 기뻐서 날뛰는 것 좀 봐요. 사실을 알기라도 한다면, 저 애는 진짜 미쳐 버릴 거예요.”
왕 부인이 한숨을 내쉬면서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래도 바로 다음 달이면 혼례를 올릴 텐데, 신랑이 이 사실을 아는 건 시간문제 아니오. 싫다고 해도 밧줄에 꽁꽁 묶어다가 신방에 밀어 넣으면 그만일 새색시도 아니고.”
“숨길 수 있을 때까지는 숨겨요.”
왕 부인이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저 놀란 것일 뿐이니, 며칠만 지나면 다 잊겠지. 때가 되면 어르고 달래서 혼사를 성사시키면 그만이야.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혼례를 올리고 아내를 맞이하라는 것뿐이잖소.”
왕 노야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발 그러길 바라요.
왕 부인은 아예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쓰게 웃었다.
“이게 다 당신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 거잖소. 생각 그만하고 쉬시오. 당신도 피곤할 텐데.”
왕 노야가 먼저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에 잠이 와?
왕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꼬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왕 부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고 만물이 고요해졌다. 연못 주위에는 석가산과 산석이 많은 탓에, 다른 곳과 다른 바람 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바람 소리가 창가를 스치자, 반근의 눈이 떠졌다.
연못가에 있는 이곳은 겨울을 나기에 썩 좋지 않은 곳이야. 아씨께서 오래 계실 예정이라면, 다른 거처를 알아봐야겠어.
겉옷을 걸친 반근은 등불을 켜고 휘장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시선이 침상에 닿자, 반근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시간쯤이면 언제나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채 잠들었을 정교랑이 옆으로 돌아누운 채 반근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반근이 들고 있던 등불로 정교랑 쪽을 비추자, 정교랑의 두 눈은 별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아씨, 아직도 안 주무셨어요?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반근이 서둘러 등불을 든 채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잠이 안 와서.”
정교랑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잠이 안 온다고?
반근은 깜짝 놀랐다. 정교랑이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유 교리가 협박해 올 때도, 도련님들이 죽기 직전의 위기를 맞았을 때도 아씨의 잠자리는 늘 평온했는데.
그 사람 때문인가?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
반근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아씨. 혹시 그 사람, 아시는 분이에요?”
반근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창틀을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온 밤바람에 등불과 휘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등불을 본 정교랑이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인지 보지도 못했는걸. 단지 난 그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야.”
이름을 안다고?
반근은 놀랐다. 정교랑이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맞아, 그 이름을 알아. 내 기억으로는, 두 번째로 생각해 낸 이름이야.
첫 번째 이름은 정방, 그건 내 이름.
“그럼 그 이름은 누구 건데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이 말없이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목이 마르네.”
정교랑이 말했다.
설마 아씨께서 긴장하시는 건가?
더욱 놀란 반근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을 한 그릇 따라 왔다.
정교랑은 물그릇을 쥐고 천천히 물을 마셨다. 반근은 방석 위에 꿇어앉아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씨, 책 읽으실래요?”
반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글자가 몇 개 없어서 아씨께 책을 읽어드리지도 못하네요.”
반근이 한숨을 쉬면서 말을 덧붙였다.
“반근 언니가 여기 있었다면, 읽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풀이 죽은 듯한 반근을 보며 정교랑이 웃었다.
“밤에는 못 읽게 하지.”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잠시 생각하더니, 기쁜 듯 손뼉을 한 번 쳤다.
“아, 맞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어요. 아씨, 제가 반근, 아니 청매의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러 다녀올까요?”
반근이 물었다.
“청매가 누구야?”
정교랑이 물었다. 반근이 멈칫하더니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아씨, 정말로 저희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름은 이름일 뿐, 중요한 건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야.”
정교랑이 말했다.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 중요한 건 사람이야.
이름은 알겠는데,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어떤 사람일까?
돌연 정교랑이 말을 멈췄다.
그게 만약 진짜라면, 진짜라면!
꼿꼿하게 허리 세워 앉아 있던 정교랑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손이 덜덜 떨리는 탓에, 손에 쥔 물그릇도 함께 흔들려 물 몇 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씨, 아씨.”
반근이 다급하게 정교랑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한 반근은 속으로 자책하느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제를 돌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왜 또 이름 얘기를 꺼냈을까. 난 정말 바보 멍청이야. 다른 반근이었다면, 분명 나처럼 아둔하지 않았겠지.
반근이 힘을 주어 물그릇을 간신히 정교랑의 손에서 빼냈다.
반근은 끝내 참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반근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정교랑의 어깨와 등을 하염없이 토닥이며 쓸어내렸다.
해가 밝아오자, 강주부의 거리가 한껏 분주해졌다.
“없어. 여기는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이 아닌데?”
나지막한 목소리에 놀란 닭이 울자, 골목 전체에 닭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지금 뭐 하는 거야?”
집에서 뛰쳐나온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해진 옷을 입고 닭장 옆에 서 있던 어린아이 두 명은 여인을 보자마자 잽싸게 도망쳤다.
“아침 댓바람부터 닭을 훔치러 와?”
여인이 빗자루를 들고 몇 걸음 쫓아갔지만, 아이들은 벌써 모퉁이를 꺾어 사라져 버린 후였다. 여인은 하는 수 없이 씩씩대며 집으로 돌아왔고, 난장판이 된 닭장 사이에서 닭의 수를 세어 보고는 도둑맞은 닭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여인은 집에 있던 남편을 시켜 닭들을 다시 잡아다 닭장 안에 넣도록 하고, 자신은 건초 더미에 손을 뻗어 건초를 한 줌 집으려 했다.
그런데 건초를 집기도 전에 웬 사내의 하품 소리가 건초 더미 속에서 들려왔다.
“에구머니나!”
화들짝 놀란 여인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내 하나가 건초 더미 속에서 기어 나왔다.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댁의 건초 더미에서 편안히 잘 쉬었습니다.”
젊은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을 향해 정중하게 읍을 하자, 그의 머리에서 건초가 우수수 떨어졌다.
“도둑이야!”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아주머니, 무슨 그런 심한 농담을 하세요. 제가 어딜 봐서 도둑입니까? 누가 봐도 불쌍하기 짝이 없는,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놈인걸요.”
젊은 사내가 놀란 얼굴로 앞으로 한발 나아가면서 말했다.
“아주머니, 이것도 인연인데,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아주머니 얼굴이 시커먼 것이, 꼭 피를 보는 불운이 닥칠 것 같습니다. 자, 제가 점괘를 한 번 봐서 이 화를 어떻게 피할지 알려드릴 테니, 돈 일 문만 주…….”
사내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여인이 그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저놈 잡아라!”
여인이 손을 뻗자마자, 사내는 잽싸게 몸을 수그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몽둥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거, 할 말이 있으면 좋게 좋게 하면 되지. 사람을 때려서야 쓰나.”
사내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소년 셋을 보며 말했다. 소년들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빗자루며, 의자며,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저 도둑놈 잡아라!”
여인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근처의 이웃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러 몰려왔다.
“아, 저는 도둑이 아니라니까요. 진짜로요. 왜 사람 말을 안 믿습니까.”
소년들이 휘두르는 의자와 빗자루를 이리저리 피하던 사내가 잽싸게 구경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도망쳤다.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마!”
집 안에 있던 여인의 남편이 몽둥이를 매섭게 휘두르고는 사내의 뒷모습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저런 도둑놈 자식, 잡아 죽였어야 하는데! 감히 우리 집 닭을 훔치려 들어? 그리고 뭐? 나한테 피를 보는 불운이 닥친다고? 도둑질에 거짓말까지 해? 저 천하에 몹쓸 놈.”
남편의 뒤를 따라온 여인이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그런데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이 갑자기 몸을 홱 돌리는 바람에 그의 손에 있던 몽둥이가 여인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여인은 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졌다.
“저 천벌을 받을 놈!”
닭장 주위의 분위기가 더욱 떠들썩해졌다. 여인에게 다가가 부축해 주는 이들도 있었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로 피를 보는 불운이 닥쳤네.”
구경꾼 중 하나가 여인의 코피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건초 더미에서 기어 나왔던 사내는 도망친 이후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능숙하게 모퉁이를 꺾어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도망치는 동안, 사내는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건초를 털어내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올려 묶고, 누구 집에서 꺾은 건지 모를 얇은 나뭇가지 하나를 옆머리에 꽂았다. 마른세수를 두어 번 한 뒤, 사내는 완전히 깔끔해진 모습으로 거리에 나왔다.
사내는 두 팔을 벌려 손목을 털고는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자, 이제 일을 해볼까.”
그가 소매에서 깃발을 꺼내어 높이 들려다가, 다시 소매 속으로 깃발을 넣고 모퉁이 뒤로 재빨리 숨었다.
젊은 남자 둘이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다.
“그놈이 이 거리에서 사기 치는 걸 자주 봤는데.”
“잘 찾아봐. 그놈 잡아서 현상금이나 두둑이 챙기자고.”
두 남자가 대화하며 사내가 숨어있던 모퉁이 앞을 지나갔다.
사내는 고개를 내밀지도 않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한 집의 지붕 아래에 몸을 숨겼다. 사내가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앞으로 지나가던 남자 둘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두리번거렸다.
“가자. 여긴 없는 것 같아.”
“자세히 좀 찾아봐. 그놈한테 걸린 돈이 얼만데.”
두 남자가 지나가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지붕 아래에 숨어 있던 사내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는 턱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첫째.”
사내가 거리를 향해 검지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사기를 치지 않아. 점괘를 봐주고 화를 면하게 도와주는 거지.”
그는 검지에 이어 중지를 올리고 말했다.
“둘째, 고작 일 문밖에 안 한다고.”
사내가 손을 휘휘 젓고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일 문 가지고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어야 해?”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생각을 하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이, 한동안은 가서 좀 숨어 있어야겠네.”
해가 중천에 뜨자, 정 대노야의 마차가 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정 대노야가 마차에서 내리던 때, 마차 뒤로 또 한 대의 마차가 멈춰 섰다. 얼굴 가득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정 이노야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뒤이어 도착한 마차에서 내렸다.
“너는 왜 돌아왔어?”
정 대노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내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요.”
정 이노야의 대답에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병이 있다면 의원을 불러 약을 지으면 되지, 집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뭐하러 돌아와? 네가 의원도 아니고, 돌아와서 뭘 어쩌게? 백성을 위해 일하는 관리가 어찌 한 여인의 일 때문에 제멋대로 자리를 비우느냐? 이건 네 직무를 애들 장난으로 여기는 꼴 아니냐!”
정 대노야의 꾸중에 정 이노야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공손히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네, 형님의 가르침은 가슴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정 대노야가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거라. 너도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정 이노야는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예를 올리고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동서가 아프다는데, 당신은 왜 가 보지도 않았소?”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린 채 대청 안으로 발을 들이며 마중 나온 대부인을 향해 말했다.
“밖에 있던 둘째까지 밤길을 달려 돌아오게 만들지 않나. 남이 들으면 많이 안 좋은 줄 알겠소.”
영문도 모른 채 정 대노야에게 꾸중을 들은 정 대부인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자신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삼키지 못할 지경이라 탕약을 지어다 먹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자는 돌아오자마자 남의 부인 때문에 다짜고짜 자신을 꾸짖다니.
“동서가 병이 났다고요? 동서가 아니라 내가 죽을 지경이에요!”
정 대부인은 건네받은 정 대노야의 두봉을 도로 내팽개치면서 홱 돌아섰다.
부인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정 대노야는 일순간 화가 솟구쳤다. 대청 안의 분위기가 살얼음판이 되자, 여종과 몸종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노야, 소인이 부인을 대신하여 억울함을 호소해도 되겠습니까.”
대부인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여종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부인께서 병이 나셨다고 하신 적은 없지만, 집안에 의원을 들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의원이 병을 본 사람은 이부인이 아니라 바로 대부인이세요. 이부인이 병이 났다는 것을 대부인께서 모르셨던 이유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부인께서 출타하여 새 옷감을 잔뜩 사 오셨기 때문이고요.”
정 대노야는 여종이 깔아준 멍석을 빌려 대부인의 편을 들어주듯이 말했다.
“그럼 당신이 훈계라도 좀 하지 그랬소. 젊은 새댁도 아닌데, 이부인은 여기가 어디라고 그따위 성질을 부려.”
정 대노야를 등지고 앉아 있던 정 대부인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정 대노야가 마른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걸었다.
“의원은 뭐라고 했소?”
<교랑의경> 12권에 계속
교랑의경 12권
차례
작은 의혹
원한
빼앗다
동행
-작은 의혹-
눈치 빠른 여종이 뒤로 손짓하자, 대청 안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이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닫힌 문 사이로 정 대부인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여종들은 문에서 몇 걸음 더 떨어져 자리를 비켰다.
“한동안 둘이 잘 지내고 있던 거 아니었소? 왜 또 그러는 거요?”
정 대노야가 부인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정 대부인은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쳤다.
“잘 지내긴요. 둘째 내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잘 지냈던 적이 있긴 해요? 그 두 내외가 우릴 감시하고 있는데요? 꼭 우리가 그들 혈육을 잡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굴잖아요. 지금은 그 바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을 빌미로 무슨 소동을 벌일지 상상조차 안 된다고요!”
정 대부인이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또 그 바보 때문이군.
정 대노야도 정교랑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별일 아닐 거라고 여겼다.
“바보가 돌아왔다고 해서, 그 둘이 무슨 소란을 피울 수 있다고 그러시오. 괜한 생각으로 속 썩이지 마시구려. 혼사도 이미 정했다고 하지 않았소? 빨리 치르고 집 밖으로 내보냅시다.”
바보 얘기가 나오자, 정 대부인은 서둘러 울음을 그쳤다.
“노야,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어제 경성에서 사람이 와서는 그 애한테 혼담을 넣으러 왔다지 뭐예요. 그것도 여러 가문의 사주단자를 한꺼번에 다 들고 왔어요.”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주씨 가문이 허튼수작을 부리는 거겠지. 그 집 사람들이 고르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을 골랐겠소.”
정 대노야가 헛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공주부 진씨 가문의 사람이 왔던걸요.”
대부인이 말했다.
공주부 진씨 가문!
정 대노야는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뿜어냈다.
보통 대단한 가문이 아니잖아!
비록 강주가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긴 하지만, 정 대노야는 경성의 권문세가와 명망 있는 가문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韓)씨 가문의 자제들이라 하면, 양주(襄州)에서 대대로 번영을 누리는 명문 한씨를 가리켰고, 소(蘇)씨 가문의 자제들이라 하면 글재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분주(汾州) 소씨를 말했다.
진(秦)씨 가문, 특히나 공주부 진씨 가문을 떠올렸을 때 바로 생각나는 것은 단연 천중(川中) 진씨였다.
공주와 혼례를 올렸기 때문에 진씨 가문이 명망 있는 가문으로 거듭났던 것이 아니다. 천중 진씨 가문이었기 때문에 공주가 그 집안으로 시집을 간 것이었다.
정 대노야는 평생 단 한 번도, 감히 천중 진씨와 연이 닿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 대부인이 입에 있던 차를 내뿜고 찻잔을 쥔 채 넋이 나간 정 대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 대노야는 자신의 옷에 묻은 차를 닦아 낼 정신도 없어 보였다.
“진씨 가문이긴 해도, 다 같은 진씨가 아니잖아요.”
정씨 가문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남정 사람들도 강주 정씨이고, 북정 사람들도 강주 정씨이다. 하지만 두 정씨가 같다고는 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 생각으로는 진씨 가문이 주씨 가문과 연이 있는 것 같소? 아니면 그 바보와 연이 있는 것 같소?”
정신을 차린 정 대노야가 찻잔을 내려놓고 옷을 닦았다.
“다 주씨 가문이 짜 놓은 계략이겠죠. 진씨 가문을 어떻게 꼬드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경성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끼리 서로 짜고 치는 거겠죠.”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나 원, 그렇게까지 해서 혼수 말고 좋을 게 뭐 있다고.”
정 대노야가 대꾸했다.
실상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가문이어도 혼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경성의 관리 두 명이 한 과부의 혼수 십만 관을 가지고 싸우는 통에 황제까지 나서서 중재했던 사건도 있을 정도였다.
정교랑의 모친이 남긴 혼수는 십만 관의 값어치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점포들을 잘 운영해 온 덕에 줄잡아 오만 관 정도의 가치는 됐다.
오만 관. 듣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드는 액수가 아닌가.
정 대부인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정에서는 바로 다음 달에 혼례를 올리고 싶어 해요.”
“그럼 그렇게 하시오. 너무 조촐하게 올리진 말고, 적어도 집안 체면은 챙길 수 있을 정도로 합시다. 주씨 가문이 괜히 트집 잡지 못하도록 말이오.”
정 대노야 부부가 혼사를 논하는 동안, 정 이노야 내외도 정교랑의 혼사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오? 진씨 가문이라니!”
정 이노야가 놀란 얼굴로 외치자 정 이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확실히 알아본 거예요.”
흥분한 정 이부인은 숨이 차는 듯 손을 가슴에 얹고 말을 이었다.
“누가 혼담을 넣었게요?”
“누군데?”
정 이노야가 물었다.
그런 대단한 집안인데, 설마 정실의 적자까지는 아니겠지? 진씨의 먼 친척 정도만 되어도 횡재지, 횡재.
“정실부인이 낳은 일곱째 적자, 가문 내 열셋째 아들이에요.”
정 이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 이노야가 부인을 흘겨보면서 물었다.
“바보래?”
정 이부인이 그를 밀치면서 성을 냈다.
“바보든 미치광이든 알 게 뭐예요. 진씨 가문이라고요! 무려 진씨 가문!”
정 이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이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외에 다른 가문들도 몇 개 있는데, 다 꽤 괜찮은 가문들이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칠랑의 혼사까지 결정해 버리는 건 어때요?”
“겉만 봐서는 안 돼. 주씨 가문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잖소. 우리 칠랑을 아무한테나 시집 보낼 수는 없지.”
정 이노야가 말했다. 정 이부인은 이노야의 어깨에 기대어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문 중에 적당한 곳 하나 골라서 교랑을 시집보내려고요. 주씨 가문에서 혼수를 나눠 달라고 하면 조금 나눠 주죠, 뭐.”
정 이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관대해졌소?”
정 이노야가 껄껄 웃으며 물었다.
“때로는, 돈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니에요. 주씨 가문도 썩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 우리도 지금보다는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부인의 거처 쪽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저쪽은 매일같이 고기를 실컷 먹는데, 우리는 국물도 없잖아요. 왜 우리만 이런 설움을 당해야 해요? 교랑이 이번에 시집을 가면, 어쨌거나 우린 그 사람들과 사돈을 맺게 돼요. 그럼 왕래할 기회도 생기니, 장차 우리 칠랑한테 더 좋은 혼처를 마련해 줄 수 있지 않겠어요? 당신도 앞날이 더 창창해질 기회가 생기고요.”
정 이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저런 바보를 시집보내는 건데, 그쪽 집안과 왕래하기엔 우리가 너무 수치스럽지 않겠소?”
“바보는 무슨. 당신이 아직 그 앨 못 봐서 그래요. 지금은 바보처럼 보이지도 않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꽤 호감이 간다니까요? 주씨 가문도 참 능력이 좋아. 어쩜 저런 애를 싹 바꿔 놨담.”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려 문밖에 있는 여종을 불렀다.
“이노야께서 돌아오셨으니, 교랑을 불러오거라.”
“보기 싫소.”
정 이노야가 언짢다는 듯 말했지만, 여종은 이미 문밖을 나간 뒤였다.
정 이부인은 다른 여종에게 아들을 안아 오라고 시켰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정 이노야는 직접 아들을 품에 안아 들고 장난을 쳤다. 세 식구가 화기애애하게 있던 와중에, 정교랑을 부르러 갔던 여종이 홀로 돌아왔다.
“대노야를 뵈러 갔다고 합니다.”
여종이 고했다. 정 이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정 이노야를 밀쳤다.
“봐요, 이것 봐요. 당신이 보기 싫다고 할 때, 저쪽은 벌써 만났잖아요. 어서 가요! 당신 딸인데, 그 사람들이 뭐라고 우리 것을 빼앗아!”
정 이부인의 예상과는 달리, 정 대노야가 먼저 정교랑을 보겠다고 했던 게 아니라 정교랑이 먼저 그를 보러 온 것이었다. 정교랑이 그를 보러 왔다고 하자, 정 대노야는 흠칫 놀랐다.
“날 보겠다고? 날 봐서 뭐해?”
정 대노야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 이 집에 온 첫날부터 당신을 찾던데요?”
정 대부인이 말했다.
“보지 않겠다고 전하거라!”
정 대노야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정 대부인이 다급하게 그를 막아섰다.
“그래도 한 번 봐요. 지금으로서는 그 아이를 보는 건 주씨 가문을 만나는 것과 같아요. 대체 주씨 가문이 그 애한테 뭘 시켰는지는 들어봐야죠.”
“그럼 한번 들어나 보지. 뭘 원하든, 주씨 그자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야.”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었다.
정 대부인이 여종을 향해 손짓하자, 문밖으로 나간 여종이 금세 정교랑을 안으로 들여왔다.
“저 애 좀 보세요.”
정 대부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정 대노야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을 힐끗 보고 말려던 정 대노야는 그녀를 보는 순간 시선을 옮길 수가 없었다.
백옥 같은 용모와 짙은 색의 옷, 단정한 자세의 여인이 여유롭고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엄청난 미인이군!
“저 애는 옛날에 주 노부인이 붙여준 아랫것이에요. 지난번에 주 공자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갔다 싶었는데, 이번에 또 저 아이를 따라왔어요.”
정 대부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정 대노야는 여전히 방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저 애? 어느 애를 말하는 거야?
저렇게 우아한 여인을 두고 다른 곳을 볼 수 있겠나! 저 정도로 아리따운 미인이라면, 천중 진씨 가문에서 혼담을 넣을 만도 하지.
정 대노야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백부님을 뵙겠습니다.”
눈앞의 여인이 무릎을 꿇고 단정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정 대노야는 정교랑에게 답례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어서…….”
정 대노야는 말을 하려다가, 넋이 나간 자신의 모습을 눈치채고 자세를 고쳐 앉은 뒤 마른기침을 한 번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앉거라.”
정교랑은 가볍게 예를 한 번 더 표하고 난 뒤에야 허리를 펴고 앉았다. 정 대노야는 마음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집안의 딸들에게 일부러 스승을 모셔와서 예의범절을 가르쳤지만, 아무도 저 여인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내는 사람은 없었어.
기껏 스승을 모셔와서 가르친 게, 저 바보만도 못하다는 건가?
겨우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주씨 가문이 저런 경지에 이르도록 가르쳤다는 거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길래? 다듬을 수 있는 것은 썩은 나무가 아니라는 속담도 있는데, 설마 저 바보가, 정말 바보가 아니었나?
어떻게 그런 일이?
“교랑, 네 백부께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정 대부인이 먼저 화두를 던졌다. 정 대노야가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입을 열기 전, 먼저 정 대부인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했다.
“족보를 보고 싶습니다.”
정 대노야 부부는 깜짝 놀랐다. 이 여인이 주씨 가문을 대신하여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온갖 상상을 해 봤지만, 정작 여인의 입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그걸 봐서 뭐에 쓰게?”
정 대부인이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정교랑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정 대노야가 먼저 물었다.
“경성에서 혼담을 넣으러 온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너도 알고 있었던 것이냐?”
정 대부인은 남편의 질문에 또 한 번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그걸 지금 묻는담?
정 대노야는 자신이 묻고도 놀란 눈치였다.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정말 혼담을 넣으러 왔나요?”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정 대부인은 정교랑의 대답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저 애는 당연히 주씨 가문과 사전에 이야기를 다 끝냈겠지.
하지만 정 대노야는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정 대노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교랑, 그럼 네 외숙은 무슨 뜻인 게지? 네 외숙의 뜻을 따를 것이냐, 우리 가문의 뜻을 따를 것이냐?”
정 대부인이 물었다. 그러더니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몸종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몸종은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주 단단히 가르쳐 놨나 보군. 걱정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네.
정 대부인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저는 제 뜻을 따릅니다. 그러니 백부님, 가문의 족보를 보고 싶어요. 제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 대부인은 정교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정 대노야의 눈은 번쩍 뜨였다.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하다니. 저 아이는 자신이 정씨 가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어! 정씨 가문의 자식이 왜 주씨 가문의 말을 따르겠나!
“그 뜻이 있으면 됐다.”
정 대노야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향해 외쳤다.
“육문(六門).”
잠시 뒤, 나이 든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분부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노야.”
남자가 예를 올리며 물었다.
“데려가서 족보를 보여 주거라.”
정 대노야는 여인이 글자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마디 덧붙였다.
“저 아이에게 읽어 주어라.”
남자는 알겠다고 한 뒤, 정교랑을 힐끗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가 대기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노야,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족보를 보고 어쩔 줄 알고? 그걸 왜 보여 준다고 해요?”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를 향해 짜증을 냈다.
“주씨 가문의 말을 듣지 않고, 정씨 가문의 사람이 되겠다잖소.”
정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 대부인은 한쪽 눈썹을 올린 채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걔가 그랬다고요? 언제 그랬는데요? 나만 못 들었나?”
정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멈칫했다.
“그, 그러니까 족보를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고 하잖소.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정 대노야가 말을 조금 더듬었다. 화가 확 솟구친 정 대부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걔가 한 말이라고요? 아니, 당신이 한 말이겠지! 지금 정신이 어디 가 있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맞아,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고작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나는 왜 거기까지 생각을 했지?
하지만 저 여인의 말을 들었을 때는, 꼭 그런 뜻인 것처럼 들렸는데. 그게 아니면, 그저 내 상상이었나? 그럼 난 왜 그리 넘겨짚었지?
저 여인은 첫 마디부터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았어.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러웠단 말이지.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손아랫사람이 단번에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게다가 저 바보가 어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정 대노야는 이마를 짚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곧 흠칫했다.
족보라. 근래에 족보를 보겠다는 말을 들은 게 벌써 두 번째야. 그 두 번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닐까?
정 대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떨쳐냈다.
있긴 뭐가 있어!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네.
지난번은 경성의 관리였잖아! 그 바보랑 무슨 연관이 있겠어?
아, 참. 지난번 경성 관리는 도대체 무슨 일로 족보를 보러 왔던 거지? 진짜 가장(家狀: 집안 조상과 형제의 행정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왔던 걸까? 변변치 않은 지방 관리의 가장을 확인하려고 경성에서 사람까지 보냈다고?
같은 시각. 이 일이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정 대노야만이 아니었다.
경성, 태후궁.
여러 사람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 참, 전하.”
관복을 입은 고능준이 한쪽에서 이황자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던 진안 군왕을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호부 소속의 곽전(郭全)이라는 자를 아시는지요?”
고능준이 웃으며 묻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판관이라지요? 누구한테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쪽 옆에 단정히 앉아 있던 대황자를 보며 물었다.
“아, 전하께 그 얘기를 들었던 것 같네요. 조회에서 무슨 일을 언급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황자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귀비가 먼저 호호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가 무슨 나랏일을 안다고 그래요. 뒤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조회를 참관하는 대황자가 다른 사람과 조정의 일을 멋대로 논하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눈치 빠른 고능준은 별말 하지 않고 곧바로 웃으면서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대황자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되는 주제라면, 당연히 말을 돌릴 수밖에.
진안 군왕은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이황자와 바둑을 두었다.
“그 사람이 왜?”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태후가 물었다.
“아, 별것은 아니옵니다. 전해 듣기로는,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사람을 시켜 한 지방 관리의 가장을 조사하게 했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고능준이 웃으면서 태후에게 대답했다.
“그게 뭐 이상하다고. 아무나 가장 조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호부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 아니더냐. 폐하를 대신하여 사람을 잘 관리하는 것 말이야.”
태후가 웃으며 말하자, 주위 사람들도 태후를 따라 웃었다.
“마마, 호부에서 그 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능준이 가볍게 말했다.
“음, 그거 하나라도 잘 해내면 다행이지.”
태후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후궁에서 조정의 일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태후는 곧 화제를 돌려 주위 사람들과 환담을 즐겼다.
잠시 뒤, 태후의 휴식을 위해 사람들이 예를 올리고 밖으로 물러났다.
“전하, 뛰지 마시고 천천히 가세요.”
태후궁의 문을 나온 뒤, 이황자는 곧바로 진안 군왕을 잡아끌고 뛰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라 보폭이 좁다 보니, 내시들은 이황자를 금방 따라잡았다.
“빨리요, 빨리. 부황을 뵈러 가야 한다고요.”
이황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황께서는 아직 조정의 일로 바쁘시니, 괜히 성가시게 굴지 말아라.”
대황자가 말했다. 이황자가 고개를 돌려 대황자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부황께서 오라고 하셨어요.”
“폐하를 너무 보채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오라고 하신 건 아니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이황자가 잡은 팔을 살짝 당겨 이황자의 걸음을 늦췄다. 진안 군왕이 자신의 말을 거들자, 대황자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이만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대황자가 고개를 돌려 귀비와 고능준을 쳐다보자, 귀비가 대황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래. 가 보거라.”
“역시 전하께서는 성실하시군요.”
고능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황자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몸을 돌려서 걸음을 옮겼다.
황자들이 자리를 뜨자, 귀비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귀비가 멀어져가는 이황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육가아가 영리하니, 폐하의 사랑이 날로 커지네요.”
귀비가 천천히 말했다.
태후궁을 나온 귀비는 황궁 밖으로 나가려는 고능준과 잠시 걸었다. 내시들은 두 사람이 대화하기 편하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갔다.
귀비의 말을 들은 고 통사(通使)가 웃음을 지었다.
“막내아들이다 보니, 더 귀여움을 받는 것이겠지요.”
고 통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지금 궁에 있는 건 대황자와 이황자뿐이었다.
현비가 황자를 한 명 낳을 것으로 알았지만, 낳고 보니 딸아이였다. 하지만 손이 귀한 황제에게는 딸아이도 몹시 귀했다.
귀비가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천천히 걸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이황자가 황후마마의 간병을 지극히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어린 이황자가 조그마한 의자를 밟고 황후마마께 약을 먹여 드리기도 하고, 책도 열심히 읽어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해 드린다지요.”
고 통사의 말에 귀비의 입꼬리가 점점 더 내려갔다.
“소식이 빠르긴 하네요. 내가 보기에는 황후의 몸이 쉬이 나을 것 같진 않던데. 어떻게든 미리 이황자의 기를 세워 주려는 거겠죠.”
“귀비께서도 대황자에게 가르침을 주심이 어떠신지요? 너무 공부만 하지 말라고요. 어린 나이에도 자신에게 엄격한 건 좋지만, 실상 황실의 자제들은 과거 시험을 볼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황자들은 많이 아는 게 관건이 아닙니다.”
고 통사가 말했다.
“애초에 공부하라고 시킨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거예요?”
귀비가 불쾌한 티를 내자 고 통사가 쯧쯧 혀를 찼다.
“급할 게 뭐 있습니까. 아직 어린아이들인데.”
고 통사가 이황자와 진안 군왕이 간 방향을 내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다만, 저놈이 어린아이가 아니니.”
“어차피 내년이면 출궁해서 봉지로 가잖습니까. 한량처럼 왕야로 살다가 죽을 운명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귀비가 고 통사의 말을 끊었다.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믿는 것보다, 차라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태후와 폐하께서 저놈이 아쉬워 출궁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보기와는 다르게 만만한 놈이 아닌 것 같아요. 알고 지내는 사람도 워낙 많고요.”
고 통사가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말했다.
“경성에서 지낸 게 얼만데, 아는 이가 많은 게 당연하죠.”
귀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느덧 두 사람은 갈림길에 다다랐다.
“다른 사람은 됐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우리 대황자예요.”
귀비가 말하자, 고 통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소신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궁으로 돌아온 귀비의 귀에 책을 읽는 대황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는 이 소리가 너무도 즐거웠지만,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마마, 마마.”
귀비가 돌아온 소리를 들은 대황자가 책을 품에 안고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귀비에게 달려갔다.
“소자가 이틀 만에 이 책을 다 외웠습니다. 제가 마마께 암송해 드릴게요.”
대황자가 손에 쥔 책을 귀비에게 내밀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귀비는 손으로 탁 하고 책을 내쳤다.
“그놈의 책을 외웠다, 책을 외웠다! 허구한 날 한다는 게 책 외우는 것밖에 없느냐? 네가 또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귀비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안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서둘러 밖으로 물러났다.
대황자는 어쩔 줄을 몰라 맹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귀비는 맹한 대황자의 얼굴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이 멍청한 꼴을 좀 보거라! 육가아보다도 못한 놈! 너는 그 애처럼 부황의 환심을 사는 게 그리도 어렵더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온 대황자는 금방이라도 소리 내어 울 태세로 입을 쭈욱 벌렸다.
“뭘 잘했다고 울어!”
귀비가 소리쳤다. 대황자는 귀비가 무서워 차마 울음을 터트리지는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음을 꾹꾹 참았다.
“너는 왜 네 부황께 가지 않느냐?”
귀비가 물었다.
“부, 부황께서 오라고 하지 않으셔서요.”
대황자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그럼 육가아는 왜 오라고 했을까?”
화가 잔뜩 난 귀비가 이를 깨물고 대황자에게 표독하게 말했다.
“이 아둔한 것아! 조금만 더 있으면, 네 부황이 육가아만 싸고돌 게야. 그럼 너는 진안과 함께 봉지로 쫓겨나 평생 궁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겠지!”
대황자는 결국 울음을 삼키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듣기 싫다. 울지 말고 저기 가서 서 있거라!”
울음을 터트리는 대황자를 본 귀비는 더더욱 화가 나서 구석을 가리키며 외쳤다. 대황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 구석에 가서 흐느꼈다.
귀비궁 밖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있었다.
-원한-
강주 정씨 가문의 사당에는 적막감만 맴돌았다. 종복은 놀란 얼굴로 한쪽에 가만히 서서 무릎을 꿇고 앉아 족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종복은 저 여인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정씨 가문에서 낳은, 태생이 바보인, 어렸을 때부터 집 밖으로 쫓겨나 도관에서 자란 여인. 바보가 어떻게 생겼는지 일찍이 본 일이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앉은 여인처럼 생긴 바보는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며칠 전에 저택 밖에서 정씨 가문의 바보가 실은 바보가 아니었다는 말을 흘려들은 적이 있지만, 종복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정 대노야의 최측근 시종인 만큼, 종복은 그 바보의 생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저 바보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저 여인이 바보라고 믿기 어려웠다.
좀 전에 대노야에게 저 여인에게 족보를 읽어 주라는 당부를 들은 게 무색할 정도로, 저 여인은 분명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보라면 글을 몰라야지. 글을 읽을 줄 아는데, 어떻게 바보라고 할 수 있겠나?
“이게 다인가?”
바닥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갑자기 물었다. 종복이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여기 있는 게 다입니다.”
말을 끝낸 종복이 여인을 쳐다보자, 평온해 보이던 여인의 얼굴에 서서히 막막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런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종복은 저도 모르게 슬퍼지면서 왠지 모르게 좀 전에 했던 말을 후회하게 되었다.
정교랑이 마른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없네. 하나도 없어, 하나도.”
사실 정사낭을 시켜 족보를 쓰게 했을 때,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했었다. 그런데도 족보를 직접 보고자 한 이유는 정사낭이 기억해 낸 것이 가까운 직계 조상과 형제자매들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처럼 사방으로 뻗은 방대한 정씨 가문의 족보 전체를 보다 보면,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그녀에게 있었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혹시'라는 희망을 품는 건,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씨.”
몇 걸음 가까이 다가온 반근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을 불렀다. 종복의 귀에는 이 부드럽고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처량하게 들렸다.
“아씨, 뭘 찾으시는 건지요?”
종복이 물었다. 정교랑은 별다른 대꾸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족보를 천천히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다 봤으니, 가져가게.”
종복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사당을 나가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목이 가득한 사당은 저택 안의 다른 거처보다 훨씬 서늘하고 어두웠다. 그런 고목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여인의 여윈 뒷모습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아씨, 어디로 가시려고요?”
사당을 나온 뒤로 쭉 말을 하지 않던 반근은 정교랑이 정 대노야의 거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리자 정교랑을 불렀다.
“그 사람 찾으러.”
정교랑이 말했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해. 오직 그 이름만이 내 기억에 남아 있고, 실제로도 존재하는 사람이야.
반근은 알겠다 대답하고 정교랑을 따라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 대노야 부부는 여전히 대청 안에서 정교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족보를 찾아보는 거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야.”
정 대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 대노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계속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정 대부인의 말을 듣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꿍꿍이를 꾸밀 수 있는 사람이 바보겠소?”
정 대노야의 물음에 정 대부인은 멈칫했다.
그렇네. 바보가 무슨 꿍꿍이가 있겠어. 멍하니 앉아 있거나 듣기만 할 텐데.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잘못 알고 있었을 수도 있소. 아주 심한 바보는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오.”
“당신은 저 아이가 어렸을 때 어땠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여섯 살 때도 걸음을 못 뗐던 아이인데, 뭘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정 대부인이 기가 찬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바보인 건 틀림없어. 다른 사람들은 모를지언정,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제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아니면, 차차 나아진 거일지도 모르지.”
정 대노야가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정 대부인이 무슨 말을 더 하려던 찰나, 정 이노야 부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정 대부인이 턱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노야한테 한 번 물어봐요. 병주에 있을 때 그 바보가 어땠는지.”
“병주에서요?”
정 이노야가 자리에 앉아 정 대노야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회상했다.
“뭐, 다를 바가 있었겠습니까.”
“도관에 가본 적은 있고?”
정 대노야가 물었다.
당연히 안 갔지. 그걸 말이라고.
정 이노야는 정 대노야의 말이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보러 갈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병이 나았으면, 진작 집으로 찾아왔겠죠.”
정 이노야는 쓸데없는 말이라는 듯 대꾸했다. 정 대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리 봐도 바보 같지 않던데, 정말로 나은 게 아닐까? 가만, 태생부터 바보인 사람도 나아질 수 있나?
“제 생각에는 다 나은 것 같아요.”
정 이부인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때에 비하면 많이 자라기도 했고, 주씨 가문이 데려다가 아주 잘 가르친 것 같던데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정 대부인이 냉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래서?”
고개를 든 정 이부인이 지지 않겠다는 듯 정 대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교랑은 다 나아서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러니 그 아이의 혼사는, 저희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드디어 가식 떨던 모습을 버리고 본모습을 드러내는군.
정 대부인은 속으로 비아냥거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방 안에는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문밖 회랑 아래 꿇어앉아 있던 시녀와 여종들도 방 안의 긴장감에 숨쉬기 힘들 정도로 압도되었다.
“신중히? 차라리 그냥 혼사를 다시 결정하고 싶다고 하지 그래?”
“역시 형님께서는 고명하시네요. 저희의 뜻이 바로 그거예요.”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에 쿵 하고 울렸다.
정 대부인의 거처에 있던 여종과 몸종들은 찻잔이 떨어지는 소리에 서둘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여종들만 마당에 남아 입을 꾹 다문 채로 문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깔개 위로 떨어진 찻잔을 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사는 이미 결정이 난 일이오. 뱉은 말에 신용이 없어서 쓰나.”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사실상, 가마가 대문을 넘기 전까지는 결정된 혼사라고 볼 수는 없죠.”
정 이부인이 정 대노야를 보며 싱긋 웃었다.
“대노야, 우리 교랑이 좋은 집에 시집가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말은 천금의 가치를 지닌다 했거늘. 이대로 무르자는 거요? 좋은 집안이 나타났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게 가당키나 하오?”
정 대노야가 언짢은 표정으로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아우야, 이건 네 결정이냐?”
정 이노야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말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니 아무래도 신중해야…….”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 대노야가 옆에 있던 팔걸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 대노야는 자단목으로 만든 흑색 탁자를 단번에 엎어버렸다.
대청 안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말에는 신뢰가 있어야 하는 법이고, 행동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찌 그런 옹졸한 소인배 같은 마음을 먹을 수가 있는 게냐!”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정동,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건지 알긴 하는 게야!”
정 이노야가 성인이 된 이후로, 정 대노야가 이토록 성을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 이노야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곧바로 몸을 숙여 대노야에게 사죄하려고 했지만, 정 이부인이 한발 앞서 그를 제지했다.
“아주버님, 이이도 자신이 지금 뭘 하려는 건지는 잘 알고 있어요.”
단호한 표정의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 대신 대답했다.
“바깥일도 아니고 집안일이잖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 딸을 위해서 이런 결단을 내린 거예요. 자기 자식을 위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정 이노야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저는 교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런 이노야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 대부인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딸을 위해서라고?”
정 대부인은 웃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실실 웃다가 돌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정말 딸을 위해서였다면, 뭐하러 오늘까지 기다렸죠? 뭘 위해서인지는 이노야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다른 사람 눈에도 훤히 보이네요.”
“형님,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대로 말씀하세요!”
그러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는 우는 목소리로 외쳤다.
“계모 주제에 제가 어찌 감히요!”
정 이부인은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 늘어뜨리면서 더욱 서럽게 울었다.
“여보, 교랑의 혼사는 내가 결정할 게 못 되네요. 나 같은 제삼자가 어디 끼어들 자리나 있겠어요.”
정 이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훌쩍였다.
“어찌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오. 당신은 교랑의 계모잖소. 어머니란 말이오.”
정 이노야가 부인을 위로하고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형님, 우리 교랑이 좋은 집안에 시집가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 어떻게 잘못됐다는 겁니까?”
“좋은 집안에 시집가길 바란다니? 그럼 우리 왕씨 가문은 좋은 집안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정 대부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공주부 진씨 가문과 비교하면, 당연히 좋은 집안이라 하기 힘들지요.”
정 이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고는 손수건으로 천천히 눈물을 훔쳤다.
역시! 어제 나간 건 옷감을 사러 나간 게 아니라, 딸을 팔러 나간 거였어!
정 대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정 이부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록 진씨 가문에 못 미치긴 하지만, 우리 왕씨 가문 또한 아무나 넘볼 수 있는 집안이 아닐세. 이미 혼약은 끝났으니, 그 잘난 진씨 가문이 어떻게 이 혼사를 망치는지 두고 봐야겠군!”
정 대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정 이부인을 노려보더니 정 이노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진씨 가문이라는 말만 듣고 이성을 잃은 것이냐? 진씨 가문이 좋은 집안인 걸 잘 알고들 있나 본데, 그리 좋은 집안이 굳이 왜 우리와 연을 맺겠느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냐? 여인네들이 꼬드기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는, 어찌 이리도 경거망동하는 것이야!”
정 대노야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정 대노야의 호통에 정 이노야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게,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네.
“형님 생각도 그렇…….”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 이부인이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이렇게는 못 살겠네. 맞아요, 제가 꼬드겼어요! 여보! 날 버려요! 날 내치라고요!”
정 이부인이 울부짖으며 가슴을 연거푸 내리쳤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난리를 피우는 것을 난생처음 본 정씨 형제와 정 대부인은 당황하여 입이 떡 벌어졌다.
“지, 지금 뭐 하는 것이야!”
정 대부인이 소리쳤다.
“체통을 지켜야지, 체통을!”
정 대노야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소매를 홱 털고 호통쳤다.
“이러고도 학자 집안 출신이라고 할 수 있소? 이게 당최 무슨 꼴이오!”
정 이부인은 추태를 멈추기는커녕, 아예 아이처럼 바닥에 누워 뒹굴기까지 했다.
“꼬드기는 말이나 전하는 말이나 천하의 요부 취급을 하고선, 학자 집안 출신이라니 당치도 않죠. 여보, 날 내쳐요. 날 버리라고! 수치스러워서 더는 여기서 못 살겠으니까!”
정 이부인이 목놓아 울었다.
“아니지. 이런 수모를 당하고선 내가 어디로 돌아가겠어. 차라리, 차라리!”
바닥에서 뒹굴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땅을 짚고 일어나더니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차라리 죽고 말지! 정씨 가문에 흠이 되지 않게 차라리 죽어 버릴게요!”
정 이부인이 소리를 지르며 문가 기둥을 향해 달려갔다. 근처에 있던 정 대부인이 기둥을 향해 달리던 정 이부인을 재빠르게 안았다.
화가 난 정 대부인이 다급한 마음에 정 이부인에게 호통을 쳤다.
“자네, 지금 이 무슨 미친 짓인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 대부인이 정 이부인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후려치는 소리 때문에 대청 안은 일순간 다시 조용해졌다.
옷차림이 흐트러지고, 머리가 산발이 된 정 이부인은 손으로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정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따귀를 후려친 정 대부인도 자신의 손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동서의 따귀를 통쾌하게 후려치는 건 꿈에서 수십 번도 더 해 본 일이었지만, 실제로 동서의 뺨을 때리는 날이 오다니.
“이, 이 꼴을 좀 봐!”
정 대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애써 멀쩡한 척하며 외쳤다.
그 바보의 혼사를 망치는 것은 우리 내외의 미래를 망하게 하는 것이고, 칠랑의 혼삿길을 막는 것이야! 우리 칠랑의 혼삿길을 망치려 드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가 됐든 내 기필코 죽기 살기로 싸울 테다!
맞아. 그러고 보니, 그게 바로 이 여인이야. 온화하고 착한 맏며느리인 척은 다 하면서, 노야와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가고 당연하다는 듯 우리에게 공경을 요구했어.
정작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건 자기 기분 좋을 때 적선하듯 나누어 준 것들뿐이지. 그마저도 잔뜩 생색을 내고, 우리는 과한 것을 받았다는 듯이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만 하잖아! 그렇지 않으면 세상 도리도 모르고 버르장머리만 없는 사람이 되니까!
이런 숨 막히는 생활을 평생 해야 해! 한평생을 남에게 빌붙어서!
왜? 내가 대체 왜 이런 설움을 당해야 하는데!
“왕십랑, 네가 뭐라고 날 때려!”
정 이부인이 악을 쓰며 대부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정 대부인이 재빨리 피하는 바람에, 정 이부인은 대부인의 머리카락만 세게 내리친 꼴이 됐다. 정 대부인의 머리카락에 꽂혀 있던 비녀와 장신구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청 안에서 비명이 들려오자, 문밖에 서 있던 여종과 몸종들은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안으로 우르르 뛰어 들어가 머리채를 잡고 몸싸움을 벌이려는 부인들을 말렸다.
눈앞의 광경에 정씨 형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청 안의 모든 것들이 엉망이었다. 탁자는 발길질로 인해 뒤집혀 있었고, 찻잔은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대청 안은 온통 울고불고하는 여인들의 소리로 뒤덮였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정 노부인의 방에서 걸어 나오던 부 어멈이 마당에서 몰래 귓속말을 주고받는 여종들을 보았다. 부 어멈이 큰 소리로 마른기침을 하자, 여종 몇이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뭔데 그리들 속닥거리는 게야.”
부 어멈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여종들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부 어멈.”
여종 하나가 먼저 운을 뗐지만, 쉽사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말해라.”
부 어멈이 미간을 찌푸리고 다그쳤다.
“대부인과 이부인 사이에 싸움이 난 것 같습니다.”
여종이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싸움이 났다고?
부 어멈은 귀를 의심했다.
농담인가?
“정말이에요. 지금 저쪽이 난리도 아니래요. 노부인께 귀띔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여종이 말했다. 부 어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뒤에서 말했다.
“무슨 귀띔?”
깜짝 놀란 여종들이 노부인의 방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모를 노부인이 그릇 하나를 쥔 채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노부인의 나이는 벌써 예순이 넘었다. 백발로 뒤덮인 머리에 검붉은 옷을 입고 있는 노부인의 얼굴은 매우 수척했다.
노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손에 쥐고 있던 탕을 조금 마셨다.
부 어멈과 여종들이 잰걸음으로 노부인 앞으로 걸어갔다.
“별일 아닙…….”
부 어멈이 입을 열자마자 노부인이 말을 끊었다.
“말해라!”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호통쳤다.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싸움이 나셨다고.”
부 어멈이 곧바로 이실직고했다.
“그 무슨…….”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던 노부인이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노부인은 양손으로 뒷목을 잡고, 눈을 크게 뜨면서 입을 벌린 채 신음을 내며 뒤로 쓰러졌다.
“노부인!"
“빨리! 빨리 의원을 불러오거라!”
“노부인, 노부인!”
정 대노야의 거처에 이어, 노부인의 마당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예의를 지키던 정씨 가문이 혼란에 빠졌을 때, 항상 시끌벅적했던 남정 동네에는 전무후무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허름한 초가집 앞 나무 그루터기를 자리 삼아 앉은 소녀를 향해 한 노인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아씨, 정말 죄송합니다. 아직 그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인이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돌아오지 않은 건가요?”
정교랑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골목과 거리라고는 죄다 찾아보았는데, 어디로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요. 며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죠.”
주위 사람 중 하나가 거들자 정교랑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맞아요, 맞아. 그 사기꾼, 아니 정평이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요. 사고를 쳐 놓고 한동안 숨어있다가, 다시 여기로 돌아왔습죠.”
다른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원래는 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서요.”
정교랑이 물었다.
“정씨 가문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그자는 일 년 전쯤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인가, 할아버지인가가 강주 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서요. 또 자신은 한곳에 정착해 잘 살고 있었는데, 향수병이 너무 심해서 강주로 돌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자가 정 대노야께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대노야께서 별 의심 없이 믿어주시며 이곳에 살도록 남겨 두셨지요.”
노인이 말했다.
“그 사람은 어디서 온 사람이죠?”
정교랑이 물었다.
남정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같은 성씨를 가진 이 여인에 대해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정평이라는 자의 내력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어제 이 여인이 내건 거액의 현상금 탓에 노인은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해 두었다.
“촉주(蜀州)입니다.”
노인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정교랑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대꾸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입을 열지 않자, 주위의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골목 안이 조용해졌다.
“알겠어요.”
한참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한 시간이 흐른 뒤 정교랑이 대답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럼…….”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럼 계속 찾아주세요. 천천히 기다릴게요.”
정교랑이 그의 말을 이어서 대답했다. 정교랑이 말을 마치자, 조 집사는 곧바로 앞으로 한 걸음 나가 허리춤에서 돈주머니를 빼냈다.
“이건 수고비요.”
또, 또 돈을 주다니.
노인의 손이 떨려왔지만, 차마 돈주머니를 받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사람을 찾아낸 뒤에 받겠습니다.”
조 집사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조 집사는 더는 강하게 권하지 않고 돈주머니를 도로 챙겼다.
“좋소이다. 소식이 있으면 그때 같이 드리겠소.”
노인은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정교랑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씨, 혹시 더 분부하실…….”
노인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좀 앉아 있다 가려는데, 방해가 되진 않겠죠?”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노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노인은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속으로 외쳤다.
앉는 게 대수입니까, 아예 여기서 사셔도 됩니다.
주위의 구경꾼들이 서서히 흩어졌다. 잠시 고민하던 조 집사는 시종들에게 손짓하여 그들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게 했다. 누추하고 비좁은 골목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를 자리 삼아 앉아 있는 정교랑을 위해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아씨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궁금함을 참다 못한 누군가가 조 집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조 집사는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서 앉아 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좀 전에 몸종이 씌워 준 두모를 쓰고 있었다. 나무 그루터기가 낮아 어두운색의 두봉이 바닥까지 끌렸다. 따스한 햇볕이 드는 시간이었지만, 소녀의 몸에 드리운 햇살에서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저렇게 앉아 있겠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저렇게.
괜찮냐고? 괜찮은 게 이상한 거지!
조 집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바다만큼 깊은 속을 가진 저 소녀의 생각을 어떻게 헤아리겠나. 아씨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게 두어야 해.
조 집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서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조 집사의 예상과는 달리, 정교랑은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만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저 아씨, 정평한테 크게 당했나 봐.”
“아니, 얼마나 사리 분별을 못 하길래 정평한테 사기를 당해. 바보 아냐?”
소녀가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골목을 떠나자, 긴장이 풀린 남정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씨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서, 정교랑은 바쁘게 뛰어가던 두어 명의 여종들과 부딪힐 뻔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서둘러 예를 표하고 다급하게 지나가는 여종을 본 반근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든 반근의 눈에, 온 저택 안의 여종들이 한껏 긴장된 얼굴로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정교랑은 그 광경이 눈에 보이지 않는 듯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맞다. 이 집안사람들이 뭘 하든 우리 아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반근은 홀가분한 듯 싱긋 웃고, 정교랑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씨, 오늘 저녁은 뭐로 하시겠어요? 아까 부엌에서 보내온 생선이 꽤 신선해 보이던데, 어탕을 끓일까요?”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쪽잠을 자고 일어난 왕 부인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정씨 가문의 여종 때문에 깜짝 놀랐다.
“노부인께서 어떻다고?”
왕 부인이 소리쳤다. 이제야 좀 좋아지나 싶었던 왕 부인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부인께서 요 며칠간은 정신이 없을 테니 혼서를 쓰는 것을 좀 미루시자고…….”
여종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왕 부인은 사색이 되어 여종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여종이 눈을 크게 뜨고 서둘러 입을 다물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왕 부인이 좌우를 살폈다. 주위의 여종들이 모두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왕 부인이 여종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노부인께서는 무슨 병이시더냐? 심각한 건 아니고?”
왕 부인이 노부인에 관해 상세히 묻자, 여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큰 병은 아니시고요. 대추를 드시다가 목에 걸리셨어요.”
사레가 들렸다고?
연세가 많긴 하지만 꽤나 정정해 보이시던데, 어떻게 대추를 먹다가 목에 걸린담? 설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나?
“어쩌다가?”
왕 부인이 놀라서 물었다. 여종은 더욱 표정이 일그러져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냥, 잘못 삼키셔서요.”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 사이에 싸움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쓰러지신 거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지.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노야들 눈앞에서 몸싸움을 벌이다니. 이토록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은 정씨 가문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어제 대노야께서 몇 번씩이나 함구령을 내리셨으니, 만에 하나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사정을 아는 여종들은 모조리 쫓겨나거나 팔려갈 거야.
여종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난색을 표하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본 왕 부인은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설마, 정 노부인의 병세가 그 정도로 심각한가? 얼마 살지도 못할 정도로?
만약 노부인께서 고비를 넘기지 못하시고 상을 치르게 된다면, 정씨 가문은 적어도 일 년간은 혼사를 올리지 못할 터.
“정말 잘 됐구나!”
왕 부인은 머릿속에 스친 말을 그만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잘 됐다고?
정씨 가문 여종이 고개를 들고 놀란 표정으로 왕 부인을 쳐다보았다.
“아,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라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잘 계셨는데 말이야. 내가 한번 뵈러 가야겠구나.”
왕 부인이 어색하게 둘러댔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신답니다. 부인께서 하시기로 한 것들은 미리 준비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때가 되면 며칠 내로 다 진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요.”
왕 부인이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노부인께서는 정말 괜찮으신 거냐? 아니면 혼사를 좀 미루는 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부인께서 그런 생각을 하실까 봐 저를 보내신 거예요. 노부인께서는 정말 괜찮으시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모든 건 예정대로 진행할 겁니다.”
왕 부인이 실망한 기색으로 짧게 응, 하고 대꾸했다.
정말로 노부인께서 몸이 편찮으신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혼사는 정해졌어도, 혼례를 올리는 건 나중의 일이 될 테니. 한두 해 정도 미루다 보면, 십칠도 이번 일을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신랑이 되겠다고 할지도…….
“어머니, 어머니!”
마당 안에서 왕십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눈앞에 서 있던 정씨 가문의 여종에게 다급하게 손짓했다.
“빨리! 냉큼 어디로든 숨어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여종은 눈을 크게 뜨고 왕 부인을 쳐다보았다.
숨으라고? 이건 또 무슨 경우야? 그만 물러나라는 걸 잘못 말씀하신 건가?
여종이 멈칫하는 사이, 비단옷을 입고 허리춤에 옥대를 맨 왕십칠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입도 뻥끗하지 말거라.”
왕 부인이 여종을 향해 짤막한 경고를 날리고는 미소를 쥐어짜며 왕십칠을 맞이했다.
“십칠, 옷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왕십칠이 환하게 웃으며 턱을 치켜들고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어머니. 다 이 아들이 잘생긴 덕이죠.”
왕 부인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아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왕 부인이 십칠에게 밥은 먹었는지, 얼마나 먹었는지 따위를 물었다.
대답하려던 왕십칠이 한쪽에 서 있던 정씨 가문의 여종을 발견했다.
“너는 고모님 댁 여종이 아니더냐?”
왕십칠은 갑자기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 펄쩍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여기에는 왜 온 것이냐! 그 여자가 널 보내디?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왕십칠의 다그침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왕 부인이 서둘러 왕십칠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아니다. 네가 괜찮은지 보려고 네 고모가 일부러 사람을 보낸 거야.”
왕 부인이 여종에게 눈치를 주면서 말을 이어갔다.
“네가 많이 놀랐다는 말에, 고모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그래서 사람을 보낸 거란다. 그 여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야.”
여종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왕 부인의 말대로 허리를 숙여 맞장구를 쳤다.
“예, 맞습니다. 부인께서 십칠공자가 너무 걱정된다며 이렇게 저를 보내신 거예요.”
“됐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너희 부인께 괜찮다고 전하거라.”
왕 부인이 손짓하자, 여종은 서둘러 예를 올린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시는 정씨 가문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막아요! 아무도 못 오게!”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왕십칠의 목소리가 여종에게까지 들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여종은 영문을 모르겠는 듯 고개를 돌려 시끌벅적한 대청을 쳐다보았다.
십칠공자는 늘 대부인을 친근하게 대했고 대부인께서도 공자를 참 아끼셨는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대부인께서 들으시면 섭섭하시겠네.
여종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고는 씁쓸하게 걸음을 옮겼다.
정씨 가문의 여종이 씁쓸함을 느끼든 말든, 왕 부인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간신히 왕십칠을 어르고 달래서 자리에 앉힌 왕 부인은 불안에 떠는 왕십칠을 보며 마음이 아파 왔다.
“십칠, 십칠.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는 건 어떠니? 기분 전환도 할 겸.”
왕 부인이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왕 부인과 왕십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기분 전환할 겸 십칠을 밖으로 내보낸다면, 한 달 동안 십칠한테 들킬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혼사를 준비할 수 있겠어.
왕 부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기분 전환도 할 겸 밖으로 나가야겠다. 그 여자가 찾아와 날 붙잡고 늘어지면 어떡해.
왕십칠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두 모자는 기뻐하며 자리를 떴다.
이어 왕십칠은 오후가 되기도 전에 가장 아끼는 시녀 몇 명을 데리고 마차에 올라 왕씨 저택을 떠났다.
아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왕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 부인은 홀가분한 심정으로 여종들을 거느리면서 혼사 준비를 시작했다.
왕씨 가문에 다녀온 여종이 정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정 대부인의 마당은 고요했다.
“다들 노부인 쪽에 계셔.”
문을 지키고 있던 여종이 노부인의 거처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여종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노부인의 거처로 달려갔다. 많은 수의 여종과 몸종들이 노부인의 마당에 서 있었지만, 누구 하나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전부 무릎을 꿇고 있어.”
문가에 있던 여종이 왕씨 집안에 다녀온 여종의 팔을 잡아끌면서 지금은 들어가지 말라고 속삭였다. 여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노부인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싸워? 왜, 아예 칼을 들고 찌르지 그랬느냐?”
노부인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은 며느리들을 쳐다보았다.
“그래야 속이 시원하지. 주먹다짐으로 성이 차겠어?”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부인들은 훌쩍이면서 노부인에게 연신 사죄를 했다.
“죽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들 죽어! 난 며칠 더 살고 싶으니까, 내 근처에 얼씬도 말거라! 나는 너희 때문에 분통 터져서 죽기는 싫다!”
노부인이 냉소를 보이며 비꼬았다. 정 대노야가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몇 걸음 기어가더니,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사죄했다.
“어머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건강 생각부터 하셔야죠. 어서 자리에 누우세요.”
정 대노야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정 이노야도 그의 뒤에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훌쩍였다.
“너희 형제 둘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씨 가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구나. 그쪽에서 혼사를 미끼로 던지니, 눈이 새빨개져서는 정신을 못 차리고 개처럼 서로를 물어뜯어? 몇 대를 거치며 쌓아 온 정씨 가문의 체면을, 너희들이 다 갉아먹었구나!”
노부인이 탁자를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어머니께서 개에 빗대어 나무라시다니, 화가 정말 단단히 나셨구나.
노야 둘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부인 둘은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혼례? 그 바보가 무슨 혼례를 올린다고! 그 애 어미의 혼수를 우리 정씨 가문에 남겨 두겠다는 게 뭐가 어때서! 누가 감히 손가락질을 한단 말이냐! 주씨 가문이 어떻게 뺏는지,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그 바보를 지금까지 키워준 것만 해도 우린 도리를 다한 거다. 시집을 안 보낸다고 해서 누가 트집을 잡아? 그 바보를 시집보내는 게 오히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 너희도 바보가 됐느냐? 그 애를 시집보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은 대체 누가 먼저 한 게야! 우리 집안의 일을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이래라저래라해!”
정 대노야와 정 이노야는 내내 머리를 조아리며 노부인이 한 말이 다 옳다고 외쳤다.
“하지만, 어머니. 교랑은 이제 바보가…….”
망설이던 정 이노야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지만, 정 대노야가 그를 노려보며 말을 끊었다.
“어머니, 어머니. 부디 고정하십시오.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정 대노야가 서둘러 말했다.
“어서 그 애를 내쫓아 버리거라! 지금, 당장!”
노부인이 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난 진작부터 그 애가 불운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우리 정씨 가문의 재앙이야. 너희 아버지도 그 애 때문에 돌아가시고, 그 애 어미도 딸 때문에 죽었어. 이젠 나까지 그 애 때문에 죽게 생겼구나. 너희도 머지않아 이 꼴이 날 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서늘한 겨울 날씨에 수척한 노부인이 표독한 얼굴로 저주와도 같은 말을 내뱉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소름이 돋았다.
“예, 예. 소자가 즉시 내보내겠습니다.”
정 대노야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 대노야는 노부인에게 직접 약을 올린 뒤, 노부인이 침상에 눕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우 내외, 부인과 함께 물러났다.
마당을 벗어나자, 정 대부인과 정 이부인은 곧바로 갈라져 선 채 서로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자.”
정 대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정 이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 어머니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어머니의 뜻? 예전처럼 형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는군.
정 대노야는 속으로 냉소를 짓고는 정 이노야를 쳐다보았다. 정 이노야는 시선을 회피한 채 가볍게 목례하고 부인과 함께 자리를 떴다. 둘은 정 대노야의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지다가 모퉁이를 꺾으며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냉소를 보이던 정 대노야는 문득 마음 한편이 먹먹해졌다.
정 이노야보다 나이가 많은 정 대노야에게 동복형제라고는 이노야뿐이었다. 정 대노야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 머리가 없어, 가업을 이어받아 이노야의 뒷바라지를 해 왔다. 그래서 이노야는 대노야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믿고 따랐다.
형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형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자신을 존경하고 따르며, 머리를 조아리고 순종하던 아우는 이제 변했다. 지금의 아우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형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다 변하는 건가?
아니지, 절대 아니야. 그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 형제는 결코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것이야. 2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형제와 부인들은 참 화목하게 지냈지.
이 모든 게 그 바보가 집으로 돌아온 후로 생긴 일이야!
정 대노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봐라. 당장 그 아이를 도관으로 보내 버려라!”
문밖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낮에는 문을 잠그지 않는 탓에, 여종들은 곧장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랑 아래서 옷을 다리고 있던 반근이 고개를 들자, 네다섯 명의 여종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반근과 눈이 마주친 여종들은 걸음을 멈췄다.
“마침 잘 왔어요. 그러잖아도 여기서 지내기에는 좀 그래서, 아씨께서 지낼 만한 다른 곳을 마련해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거든요.”
반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맨 앞에 서 있던 여종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 마침 노야의 명을 받들어 아씨의 거처를 옮겨 드리러 온 참이다.”
여종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반근이 다리미를 내려놓았다.
“어디로 옮기는데요?”
반근이 물었다.
“어디긴 어디겠느냐, 현묘관이지.”
여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현묘관?
“지금 아씨를 내쫓겠다는 거예요?”
반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내쫓다니. 모시는 거지.”
여종의 말에 반근이 벌떡 일어났다.
“됐으니까 어서 짐을 챙겨라. 바로 출발할 터이니.”
여종이 웃으면서 손짓하자, 다른 여종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이 사람들이!”
반근이 문 앞을 가로막고 외쳤다. 이때 누군가가 뒤에서 반근을 살짝 밀쳤다.
“날, 내쫓겠다고?”
정교랑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반근은 서둘러 자리를 비켜섰다.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정교랑은 소매를 올려 묶은 채 활을 쥐고 있었다.
정씨 저택에는 활쏘기 연습을 할 만한 장소가 없었지만, 정교랑의 습관은 여전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야외 대신에 실내에서 활쏘기 연습을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정교랑의 활에는 화살이 끼워져 있었다.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난 정교랑을 보고 마당에 있던 여종들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내쫓는 게 아니라 잠시 피해 계시라는 거지요. 알고 계시던 곳이기도 하고, 아씨께서도 전에 지낸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익숙하시잖아요.”
맨 앞에 서 있던 여종이 미소 띤 얼굴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여종은 미소를 머금고 걸음을 옮겼다. 막 발을 떼려던 찰나, 눈앞에 여인이 손을 들어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는 모습이 보였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여종은 무거운 물건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몸이 뒤로 휘청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었다.
무슨 일이지?
여종들은 멈칫했고, 곧이어 맨 앞에 서 있던 여종이 비명을 질렀다.
“살인이야!”
여종의 비명과 함께 마당이 어지러워졌다. 울고불고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밀치느라 문짝은 벌써 반쯤 내려앉았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나머지 반쪽의 문짝에는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이건 살인이 아니야.”
정교랑이 활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활쏘기지."
울고불고해대며 구르고 기면서 달려온 여종들은 정 대부인의 마당까지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살인?”
여종의 말을 들은 정 대노야가 놀란 눈으로 호통쳤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냐!”
눈앞의 여종은 머리를 산발한 채로,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노야, 정말입니다. 화살이 제 머리 위로 지나갔다니까요. 빗나가지 않았더라면, 소인은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여종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울먹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정 대부인이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걸어 나왔다. 정 이부인과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통에 얼굴에 손톱자국이 길게 난 정 대부인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바보가 아니라 미치광이가 된 게야? 게다가 흉기까지 다루는 미치광이? 활은 어디서 났고?”
여종의 몰골을 보고 놀란 정 대부인이 물었다.
“어디서 나긴, 주씨 가문이겠지. 딴 건 몰라도 칼, 창, 봉, 활은 주씨 가문에 넘쳐나잖소.”
정 대노야가 대꾸했다.
“도대체 주씨 가문은 무슨 생각이래요! 바보의 손을 빌려서 우리 일가족을 몰살하려는 거 아니에요? 당장 가서 꽁꽁 묶으라고 하세요!”
정 대노야는 대꾸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정 대부인이 정 대노야의 말을 끊었다.
“생각이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에요. 빨리 그 흉기부터 빼앗아야죠. 그 바보가 정말로 사람이라도 죽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마음이 다급해진 정 대부인은 정 대노야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하인들을 불러 저쪽으로 보냈다.
반근은 문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눈빛을 반짝이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아씨. 이번에는 열 명이 왔어요!”
반근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처마 아래에 선 정교랑이 어깨에 활을 걸치고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집이 하도 좁아서 과녁 하나 놓을 자리도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몸 좀 풀겠네.”
정교랑이 말했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이 정교랑의 거처로 조금씩 접근했다. 반쯤 열린 대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던 하인들은 소녀 하나가 나와 선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씨, 아씨. 저희는 노야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어서 그 활을 내려놓으시지요. 그런 거 함부로 가지고 노시면 안 돼요.”
하인 중 우두머리가 말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조금 더 가까이.”
더 가까이?
하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지만, 정교랑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정교랑이 시키는 대로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됐어.”
정교랑이 말했다.
뭐가 됐다는 거야?
하인들은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텅 하는 소리가 울리자,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사내가 악 소리를 내지르며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뒤로 모자 하나가 화살에 꽂힌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내들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도 못 했을 때, 화살이 진동하는 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사내 바로 옆에 있던 사내의 모자도 날아가 버렸다.
사내들은 헉 소리를 내뱉으며 더럭 겁을 내기 시작했다.
정말 활을 쏘다니! 사람을 쏘고 있어! 화살이 빗나가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씨, 아씨. 장난치면 안 됩니다!”
좀 전에 말을 건네던 사내가 외치면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그는 다시 멈춰 섰다. 문가에 서 있던 여인의 화살이 그를 겨눴기 때문이었다.
푸른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네 차례야. 넌 조금 더 가까이에 있으니까, 음, 어깨로 하지.”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번째 진동 소리가 울렸다. 사내의 눈앞에 빛이 번쩍이나 싶더니, 곧이어 어깨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사내는 커다란 힘에 밀린 것처럼 푹 고꾸라졌다.
정말로 사람을 쏴 죽였어!
주위에 있던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때 또 다른 사내 열댓 명이 몽둥이를 들고 사나운 기세로 이쪽을 향해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다. 우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야!
도망치던 하인들이 기뻐하는 찰나, 지원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내들이 갑자기 손에 든 몽둥이로 그들을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멀리서 연못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던 정 대노야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 저자들은 누구냐?”
정 대노야가 외쳤다.
언제 저런 악인들이 집안까지 쳐들어온 게야!
정 대노야의 옆으로 도망 온 하인들은 그 곁에 꼭 붙어 섰다. 하인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굶주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온 듯 매질을 해대는 사내들과 그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자신의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입니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이 대답했다.
주씨 가문의 사람이었군!
정 대노야는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하인들이 서둘러 그의 앞을 막아섰다.
“노야, 화살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위험합니다.”
“틀렸다. 내가 보기에는, 저 아이가 쏜 화살에는 전부 눈이 달렸어.”
정 대노야가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눈이 달렸다고? 그럼 더 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인들이 서둘러 정 대노야의 뒤를 쫓아갔다.
“멈춰라!”
정 대노야가 가까이 다가오며 호통을 쳤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이미 바닥에 때려 눕혀져 있던 터라,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대노야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조 집사가 시종들을 이끌고 정교랑의 마당 앞에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그들이 들고 있던 몽둥이가 일제히 정 대노야 일행을 향했다.
정 대노야는 확신했다. 만일 자신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움직인다면, 저 인간들은 자신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올 거라고.
“감히 내 집에서 폭력을 쓰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외치자 조 집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대노야, 처음 겪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 대노야의 얼굴색이 파랗게 질렸다.
맞아, 처음이 아니지. 저 바보의 어미가 죽었을 때가 처음이었지, 아마. 그때 주씨 가문에서 들이닥친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어. 손에 쥔 무기도 지금보다 훨씬 더 흉악했고, 사람을 해하는 방법도 지금보다 훨씬 더 악랄했지!
주씨 가문!
정 대노야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주씨 집안 놈들 때문에 우리 정씨 가문의 체면이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아우 내외는 어째서 그런 주씨 가문과 가깝게 지내려고 드는 것이야! 내가 죽고 나서야 그러라지!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어깨를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며 신음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정 대노야의 생각을 방해했다. 정 대노야는 곁으로 다가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정교랑의 화살에 어깨를 맞은 사내를 확인한 정 대노야는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죽기는 뭘 죽어! 피도 한 방울 안 났는데!”
정 대노야는 엄살을 부리는 사내가 괘씸하여 발로 걷어찼다.
“썩 꺼지거라.”
사내가 정 대노야의 발길질에 악 소리를 내지르더니,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펴 보고는 놀라서 넋을 놓았다.
정말 피 한 방울 안 흘렸잖아.
“빗나갔구나!”
사내가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정 대노야가 재차 사내를 걷어찬 탓에 사내는 또다시 바닥에 나자빠졌다.
“빗나간 것이 아니다.”
정 대노야가 바닥에서 화살 하나를 주웠다. 쇠로 된 화살촉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천으로 칭칭 감아 두었으니, 화살보다는 나뭇가지라는 표현이 오히려 정확했다.
정 대노야는 젊었을 적 종종 활쏘기를 즐겼기에, 이런 화살은 투호 놀이를 하거나 초보자가 활쏘기를 처음 배울 때 쓰는 화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절대 흉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 아이가 정말!
정 대노야가 고개를 들어 문가를 내다보았다. 정교랑은 화살을 손에 쥐고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게냐!”
정 대노야가 외쳤다.
“활쏘기요.”
정교랑은 화살 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화살을 꺼내어 활시위에 올려 두고 정 대노야를 조준했다.
주위에 있던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허겁지겁 ‘아씨,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며 대노야의 주위를 둘러쌌다.
어차피 촉이 없는 화살이니, 기껏해야 조금 아프고 말겠지.
정 대노야는 성가시다는 듯 하인들을 밀치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교랑, 이야기 좀 하자.”
불안한 기색으로 대청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정 대부인이 명첩 하나를 받아 들었다.
“현묘관의 손 관주가 왔다고?”
정 대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기하기도 하지. 대단하신 도사님께서 어떻게 우리 집까지 친히 행차하셨대?”
정씨 가문의 시주로 겨우 운영했던 조그마한 도관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유명해졌다. 도관이 유명해진 뒤로는 손 관주가 더 이상 정씨 가문에 인사하러 오는 일도 없었다.
“손 도사가 자신은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라,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속세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여종이 말했다.
쳇, 속세를 벗어났네 어쩌네, 도인들이 허구한 날 입에 달고 사는 말이지.
정 대부인은 손에 쥐고 있던 명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부인, 소인이 생각하기에는 손 도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집안이 화목하지 않았습니까. 요 며칠 벌어진 소란을 생각해 보세요. 부정이 탄 게 틀림없는데, 때마침 이때 도사님이 오셨습니다.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인 걸 알기에 오신 걸 수도 있어요.”
머뭇거리던 여종이 말했다. 정 대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중이니, 점쟁이니 하는 사람들은 일반인이 볼 수 없는 악운이나 나쁜 기운을 볼 수 있다던데, 설마 손 관주도 정말로 우리 집안에 뭐가 꼈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건가?
정 대부인은 넋이 나간 채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만 얼굴에 난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상처의 쓰라림에 정 대부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확실히 이 집안에는 악운이 꼈어!
“안으로 들여라.”
정 대부인이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종이 손 관주를 방으로 데려왔다. 고개를 들어 손 관주를 쳐다본 정 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졌네.
깨끗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도복을 입고, 점잖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걸어 들어오는 여도사는 일 년 전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아첨 섞인 웃음을 보이던 여도사와는 전혀 딴사람인 듯 보였다.
이 여도사가 정말 그때의 손 관주와 동일한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환골탈태.
정 대부인은 허리를 펴고 손 관주에 대한 소문을 떠올려 봤다. 듣기로는 소현묘관에 번개가 내리치던 날, 도교 이 진인이 현현하여 손 도사에게 영험한 힘을 주었고 했다.
어쩌면 그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조그마한 도관이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겠어.
“부인을 뵙겠습니다.”
손 관주가 총채를 한 번 휘두른 뒤 예를 올렸다.
아주 짧은 시간임에도, 정 대부인은 손 관주가 보였던 행동에 대한 원한이 싹 가셨다. 정 대부인은 서둘러 손 관주에게 답례까지 했다.
자리에 앉은 손 관주는 고개를 들어 정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정 대부인의 얼굴에 드리운 고충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손 관주는 그녀를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낭자가 그런 말을 했지. 물건은 희소성이 있어야 귀한 법이라고. 같은 맥락으로, 말은 적게 할수록 존중받는 법이야.
말이 거의 없던 그 낭자의 앞에서 손 관주는 늘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낭자의 모든 말들은 절묘했고, 손 관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낭자의 언행을 따라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낭자가 했던 모든 말이 진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손 관주는 깨달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사람은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니까.
“부인, 이건 제가 직접 필사한 태평경입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쓰세요.”
손 관주가 대뜸 본론을 꺼내며 책 하나를 건넸다. 손 관주의 말 한마디에 정 대부인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역시, 역시! 악운에 휩싸인 게 맞았어. 도사님께서 단번에 알아채시는구나!
눈시울이 붉어진 정 대부인은 손수건으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도사님,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정 대부인이 감정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손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하시지요.”
손 관주는 담담하고 자애로운 눈빛으로 정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세상의 모든 고난과 재난들을 꿰뚫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여도사를 보고 있자니, 정 대부인의 마음은 점점 더 평온해졌다.
“그 아이가 또 돌아왔어요. 다시 도관으로 보내서, 도사님께 그 아이를 부탁드리려고요.”
정 대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손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 일로 온 겁니다. 부인, 제가 먼저 그분을 뵈러 가도 되겠습니까.”
손 관주가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거봐, 이 일 때문에 왔어! 역시 그 바보가 악운덩어리였어!
정 대부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세요, 어서요. 지금 거의 살인이 날 판이에요.”
정 대부인의 말을 듣고도 손 관주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살인이 아니라 밥을 먹었다는 유의 말을 들은 것처럼.
집에 있는 여자가 정신이 나가 살인을 저지를 판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사내라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여인의 몸으로 이런 말을 듣고도 저리 담담하다니.
정 대부인은 마음이 놓였다.
역시 영험한 힘을 얻은 도사님이로구나.
“그럼, 저는 이만 그분을 뵈러 가보겠습니다.”
손 관주는 길게 말하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살인이 그리 신기한 것도 아니지. 아씨께서 사람을 죽이는 게 처음도 아니고.
당초 벼락을 맞은 소현묘관의 잔해를 치우고 건물을 새롭게 수리할 때, 손 관주는 매의 눈으로 건물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때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딱 한 가지 물품이 소현묘관 관주의 방에서 나왔다.
바로 쇠막대기였다.
그때 손 관주는 번개를 모으는 방법이 도가의 경서에 쓰여 있던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물론 그 방법이 통한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지만.
방법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행할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가 관건이었다.
“전 따로 가 보지 않겠습니다.”
정 대부인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하자, 손 관주가 웃음을 머금고 예를 표했다.
“부인께서는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혼자 가면 돼요.”
말을 마친 손 관주는 길을 안내해주는 여종을 따라 문을 나섰다.
멀어져가는 손 관주의 뒷모습을 보며, 정 대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 관주가 준 태평경을 재빨리 품에 안았다. 태평경이 품 안에 있는 것이 느껴지자, 정 대부인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도사님이네.”
정 대부인은 태평경을 슬쩍 쳐다보고는, 조금 더 일찍 가서 향불을 올릴 걸 하며 후회했다.
“어서 가서 현묘관에 오백 관을 내고 향불을 올리거라.”
정 대부인이 여종에게 명했다.
아직 멀쩡한 한쪽 문은 활짝 열리고, 화살이 꽂힌 채 떨어진 반쪽 문은 마당 한쪽 구석으로 치워졌다.
문밖에 선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험상궂은 표정을 한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 그리고 마당 안으로 홀로 들어가는 정 대노야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하인들에게는 그 광경이 무척이나 비장하고 장엄하게 느껴졌다.
정 대노야는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주씨 가문의 시종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지나갔다.
무기도 없이 홀로 적진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직접 전장에 나갔던 적은 없었지만, 정 대노야는 책에서 읽었던 장수들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다가 곧 속으로 침을 퉤 뱉었다.
적진은 무슨! 여긴 내 집이야! 이 집에서는, 내가 왕이라고!
마당에 멈추어 선 정 대노야가 회랑 아래에 앉아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활을 내려놓고 반근이 건넨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 대노야는 회랑 아래로 다가가 앉았다.
아름다운 미모에 뛰어난 말솜씨, 게다가 노련한 궁술까지. 이 중 한 가지 덕목만 갖췄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정말로 다 나은 게냐?”
정 대노야가 정교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나한테 묻는 건가요? 아니면, 자기 자신한테 묻는 건가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 대노야는 멈칫했다.
역시, 아직 제정신은 아닌 건가?
“나한테 묻는 거라면, 내가 나았다는 건 나야 당연히 알죠. 그런데 내가 나았다는 걸 그쪽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요.”
무슨 말이 저래? 알쏭달쏭하니 말장난 같기도 하고, 숨은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낫긴 나았다만 제대로 낫진 않은 모양이군.
정 대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씨 가문에서 네 병을 치료해 준 것이냐?”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옆에 놓여 있던 활을 집어 들었다. 정교랑의 움직임에 문밖에 서 있던 하인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아무리 촉이 없는 화살이라고는 하나, 윗전이 손아랫사람에게 얻어맞는 일은 체면이 안 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날 내쫓으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내쫓다니.”
정 대노야는 마른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거처를 옮겨 지내라는 거지.”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지만 아직은 옮기고 싶지 않아요.”
정 대노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옮기고 싶지 않다고? 네가 옮기고 싶지 않다면 그만이야?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 줄 알고!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겠죠.”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으로 활시위를 천천히 닦자 활에서 낮은 마찰음이 울렸다.
“하지만, 아직은 옮길 생각이 없다고요.”
이 무슨!
“아니요. 거처를 옮겨야 해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한 반근이 끼어들었다.
저 계집이 감히.
정 대노야는 반근을 쳐다봤다가 다시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몸종 주제에 감히 윗전들이 대화하는 데 끼어드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모시는 윗전의 의견과 배치되는 말까지 내뱉다니. 저 바보는 왜 언짢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게야?
순간 정 대노야의 뇌리에 부인이 했던 말이 스쳤다.
주씨 가문에서 붙여 주었다던 그 몸종인가?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종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
“지금 묵고 있는 곳은 너무 어둡고 추워요. 따뜻한 곳으로 옮기긴 해야 해요.”
반근이 말했다.
“아, 출타하기 편하시도록 거리와 가까운 쪽이었으면 합니다. 독채면 더욱 좋겠군요. 저희가 시중들기도 편할 테니.”
조 집사도 입을 열었다.
시중들기 편하다고? 아무 때나 와서 싸움판을 벌이려는 수작이겠지!
정 대노야는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을 훑어보며 냉소를 지었다.
“병도 다 나았고, 족보도 확인했으니, 이제 네가 누구인지는 알겠구나?”
정 대노야가 정교랑에게 물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지?”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정교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나 자신의 뜻이죠.”
정 대노야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정교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가야 할 때가 되면 내 발로 알아서 나갈 테니.”
정교랑은 미소 띤 얼굴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이 집에 거저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말이었다. 정 대노야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 정교랑이냐?”
정 대노야가 대뜸 물었다. 정교랑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당신은, 정말로 이 집 주인인가요?”
정교랑이 반문했다. 노골적인 비아냥에 정 대노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내가 이 집 주인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게 해 주마.”
정 대노야가 몸을 일으키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서 지내든 다 똑같으니, 오늘 당장 도관으로 옮기거라. 이 집에서 네가 지낼 거처가 정리되면 그때 널 다시 데려오마.”
정교랑이 정 대노야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로요?”
정 대노야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려 걸음을 옮겼다.
조 집사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바짝 긴장한 상태로 정교랑의 신호를 기다렸다. 정교랑의 눈짓 하나만 주어진다면, 금방이라도 정 대노야를 바닥에 때려눕힐 태세였다.
하지만 그가 문턱을 넘어설 때까지도 정교랑은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씨 가문의 하인들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문밖까지 걸어오는 내내, 정 대노야는 등골이 서늘했다. 끝내 문턱을 넘어선 정 대노야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등 뒤에 대고 활을 쏘지 않은 것을 보니 정말 미친 건 아닌가 보군.
병이 나아 얼마나 다행이야. 적어도 장유유서를 알긴 하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나를 쐈을지도 모르지.
정 대노야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은 여전히 회랑 아래에서 손수건으로 활을 닦고 있었다.
“대노야.”
발걸음 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정 대노야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자, 웬 여도사 하나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 대노야는 잠시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눈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부인께서 가 보라고 하셔서요.”
손 관주가 말했다.
너무 빨리 온 거 아닌가? 아니야, 아무렴 어떠랴.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시오.”
데려가라고?
손 관주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설마 이 집 사람들은 또 저 살아있는 신선을 내쫓으려는 건가? 거 잘됐네! 난 밤낮으로 모셔 오고 싶어 애가 닳았는데!
손 관주는 정 대노야를 향해 가볍게 예를 올리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노야, 저자들이 안 가겠다고 난리를 피우면 어떡하지요?”
정 대노야 옆에 있던 하인이 조용히 물었다.
“난리?”
정 대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화를 벌컥 냈다.
“여기가 누구 집인데? 저놈들이 그런다고 해서 내가 겁낼 줄 알고? 감히 어딜 덤벼!”
하인은 재빨리 눈을 내리깔고 정 대노야의 말에 조용히 맞장구를 쳤다. 잠시 고민하던 정 대노야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모아 두거라.”
노야께서도 역시 겁이 나신 게로군.
하인은 속으로 중얼거리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는구나!
한숨을 쉬고 다시 고개를 돌린 정 대노야의 눈에, 회랑 아래에 앉은 여인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손 관주의 모습이 보였다. 정 대노야는 깜짝 놀랐다.
큰절을 올려? 저런 큰절은 나한테도 올린 일이 없었는데?
“아씨, 돌아오셨군요.”
손 관주가 바닥에 엎드린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의 여인과 함께 지낸 시간은 기껏해야 한두 달에 불과했지만, 손 관주의 마음속에서 이 여인은 한평생을 같이 지낸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현묘관의 명성은 이제 강주 바깥으로도 널리 퍼지고 있다. 현란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도사들과 달리, 손 관주는 도가의 경전을 설파하는 데 능했다.
그런데도 손 관주는 정교랑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였다. 그건 집에 홀로 남겨져 있던 아이가 대문으로 들어서는 가족을 봤을 때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정교랑의 거처로 향하는 내내, 손 관주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다 정말 정교랑을 눈앞에서 보게 되자, 쌓였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손 관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쏟았다.
현묘관의 신도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아마 다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
반근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손 관주를 쳐다보았다.
반근은 손 관주와 정교랑이 인연을 맺기 전에 정씨 가문을 떠났기에, 손 관주를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그나마 청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덕에 손 관주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다.
번개가 내리쳐서 소현묘관에 불이 났던 그 순간, 가장 먼저 올라와서 불을 진압했던 게 바로 손 관주였다고 했다. 그런 걸 보면 손 관주는 마음이 정말 선량한 사람이었다.
아씨께 잘해 드리는 사람이라면, 나는 다 좋아.
반근은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가 따뜻한 수건 하나와 차를 내왔다.
“고마워요, 낭자.”
손 관주가 눈물을 훔치며 반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반근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씨, 정말 많이 나아지셨군요.”
눈물을 닦은 손 관주가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모든 건 다 좋아지게 되어 있어요.”
정교랑이 손 관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사님이 그렇듯이요.”
손 관주는 간신히 추스른 눈물이 또다시 왈칵 쏟아지려 했다.
정말 신기하지. 나이로 따지면 내가 아씨의 할머니뻘은 족히 될 텐데, 이 소녀 앞에 있을 때면 왜 이렇게 자꾸 주책을 부리는 걸까. 의지할 곳이 필요한 아이가 된 느낌이야. 할머니의 따뜻한 칭찬을 들은 손녀처럼.
“다 아씨 덕분이지요.”
손 관주가 예를 올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건 다 도사님 스스로 얻은 것이고, 나와는 무관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씨께서 도와주고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현묘관은 없었을 겁니다.”
손 관주가 서둘러 말했다.
“돕고 가르치는 것까지는 내 일이지만, 가르침을 깨우치고 그 기회를 잡는 것은 도사님의 몫이지요.”
정교랑이 앞에 놓인 찻잔을 손 관주에게 밀어 주며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도사님이 자력으로 얻은 거예요. 누가 하사한 것이 아니니, 도사님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어요.”
정교랑의 말을 들은 손 관주가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지었다.
“네, 아씨. 저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습니다. 아씨를 만나게 된 천운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손 관주에게 차를 권하자, 손 관주는 목례를 하고 차와 다과를 먹었다.
“아씨, 저들이 또 아씨를 내쫓으려는 겁니까? 지내실 곳은 염려치 마세요. 매일 청소하고 아궁이에 불도 지펴 놓아서 따뜻하고 습하지 않을 거예요.”
손 관주가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쪽으로 가진 않으려고요.”
정교랑의 말에 손 관주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시간이 되실 때, 한번 보러 오세요.”
“좋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씨 저택을 떠난 손 관주가 현묘관에 도착했다. 제자 여럿이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 사부님. 정 아씨를 뵈었나요?”
“사부님, 정 아씨께서 여기서 묵겠다고 하시던가요?”
손 관주에게 우르르 몰려든 제자들이 중구난방으로 정교랑에 관해 물었다. 손 관주가 담담한 미소를 보이며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그 집에서 아씨를 이곳으로 내쫓으려 하긴 했지만, 아씨께서 오지 않겠다고 하셨다.”
“엥, 진짜요? 만약 그 사람들이 아씨를 강제로 내쫓으려고 하면 어쩌죠?”
제자 하나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자, 손 관주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손 관주가 총채를 가볍게 휙 휘두르고 말을 이었다.
“여기 이 소현묘관처럼, 이름을 바꿔버리면 되지.”
소현묘관처럼? 이름을 바꾼다고? 무슨 이름으로?
제자들은 손 관주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부님, 사람들에게 경전 설법을 하실 때도 어렵고 아리송한 말들만 하시더니, 이젠 저희한테도 그러시는 거예요?”
도동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투덜댔다. 손 관주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총채로 도동의 머리를 톡 쳤다.
“으이그, 인제 그만 공부하러 가거라.”
손 관주가 웃음기를 걷어내고 엄숙한 표정으로 제자들에게 말했다.
“남이 가진 것보단 내가 가지는 게 낫지. 하늘에 의지하고 땅에 기댄다 해도,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 두 발로 땅을 딛고 굳건히 서 있고 싶다면 더욱 열심히 수련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하늘이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 해도 그 기회를 잡을 능력조차 없을 것이다.”
제자들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현묘관에서 수련을 시작할 무렵, 정씨 저택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조 집사가 문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아씨, 이곳은 이미 포위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일당십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싸울까요?”
“금가아, 금가아. 가지 마라, 가면 안 돼.”
금가아의 모친이 금가아를 꽉 붙잡은 채 소리쳤다.
“어머니, 가야 해요! 아씨께서 싸우겠다고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안 갈 수가 있냐고요!”
금가아가 모친의 팔을 홱 뿌리치며 외쳤다.
“그래도, 그래도 네가 이러면 노야께서 화를 내실 텐데.”
금가아의 모친이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이 재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아씨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금가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만하시구려. 그냥 가게 두자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남편의 말에 금가아의 모친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여인네잖아요! 시집가면 결국 시댁에 매여 살 사람이에요. 하지만 금가아가 노야의 노여움을 사기라도 해 봐요. 앞으로 어찌 살라고요! 고작 일백 관에 아들을 내다 팔려는 거예요?”
금가아의 부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소. 금가아를 내다 팔았다 치면 될 일이야! 금가아, 어서 가 보거라.”
금가아가 활짝 웃었다.
“아버지, 수지맞는 결단을 내리신 거예요.”
금가아가 모친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내달렸다. 나가면서도 빗장을 챙기는 일은 잊지 않았다. 금가아를 따라가던 모친도 결국 걸음을 멈춰 섰다.
정교랑이 문밖을 내다보자, 정씨 가문의 하인들과 건장한 여종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럴 필요 없네. 저깟 아랫것들과 싸워 봤자 무슨 재미가 있나. 뼈를 다치거나 근육을 상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품위만 떨어지지.”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가세.”
정말 이대로 간다고?
조 집사는 잠시 주춤했다가,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간대?”
대청 안에 있던 정 대노야가 되물었다. 정교랑을 내쫓는 일에 대해 애써 담담한 척을 하던 정 대노야는 여종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예, 벌써 마차에 짐을 싣고 있습니다.”
여종이 기쁜 기색으로 덧붙였다.
“저희 집안 물건은 하나도 안 건드리고, 가져왔던 것만 그대로 가져간답니다.”
그러게 집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리겠다고!
정 대노야는 콧방귀를 뀌고 반나절 내내 들고 있었지만 한 줄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던 책을 내던진 다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누가 그깟 물건이 아깝다더냐? 그 애한테 줘야 할 게 있다면 기꺼이 줘야지. 우린 그 애한테 야박하게 굴지 않아.”
정 대노야의 말에 여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났다.
정 대노야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기대 탁자 위에 있던 금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단 저 바보부터 해치우면, 아우 내외도 손보기 쉬워질 거야. 다음 달에 혼사를 치르고 나면, 아우 내외가 꼬투리를 잡을 구실도 없어지겠지. 새해가 되기 전에 기필코 시집을 보내야겠어. 이 재수 없는 운을 다음 해까지 끌고 갈 수야 없지.
정 대노야는 금잔을 내려놓고 조금 전 정교랑이 화살 열 발을 연달아 쏘던 장면을 떠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아름답고 괜찮은 규수인데 말이야. 정말 다 나아 보이던데, 참 아쉽게 됐네.
정 대노야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주씨 가문이 병을 고쳐 줬다는 게 참으로 아쉬워. 주씨 가문에서 고쳐 주었으니, 당연히 주씨 가문과 가깝게 지내겠지. 물론 주씨 가문은 저 아이에게 나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일러두었을 테고.
하긴, 주씨 가문에서 가르쳤으니, 저 아이가 저리 괴기한 거겠지.
됐다. 어차피 익사 당할 뻔했을 때부터 저 아이는 이미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게야. 저만큼 키워주고 시집까지 보내주는 것만 해도 우리로서는 도리를 다한 거지.
시녀가 금잔에 차를 더 채우자, 정 대노야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정 대노야가 금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려던 찰나, 사환 두 명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노야, 노야. 저들이 또 안 가겠답니다.”
“뭐라고?”
정 대노야의 손에 있던 금잔이 흔들리면서, 차 몇 방울이 옷에 튀었다. 정 대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잘 모르겠습니다. 대문을 나서면 저희가 도관까지 호송하려고 했는데, 대문으로 나가질 않고 남쪽으로 갔어요.”
사환이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쪽?
“남정 말이더냐?”
정 대노야의 물음에 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길 뭐하러?
정교랑 일행이 남정으로 갔다는 소식은 금세 온 동네로 퍼졌다. 정교랑과 대화를 했던 노인이 남정 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하여 가장 먼저 정교랑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씨, 저희가 아직 찾는 중입니다. 정평 그자가······.”
노인이 서둘러 앞으로 나서며 송구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정교랑이 노인의 말을 끊었다.
“정평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에?
노인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놀란 눈으로 짐을 싸서 나온 듯한 정교랑 일행을 쳐다보았다.
“이쪽을 좀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죠?”
정교랑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잠시 앉았다가 가겠다더니, 이번에는 구경을 하겠다네. 그럼 다음번에는 여기서 살려나?
노인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유, 그럼요, 그럼요. 아씨께서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바닥이 어질러져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노인이 앞장서서 정교랑에게 길을 안내했다. 정교랑 일행은 노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쪽은 땅이 넓네요.”
정교랑의 말에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원래 남정과 북정은 한 집안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조상 대대로 살던 집도 이쪽이었지요.”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한탄했다.
그들은 골목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갔다. 저잣거리와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기에 더욱 외지고 황량한 곳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 사이로 곳곳에 폐허가 보였다. 그 외에는 사람이 사는 듯하나 단출하고 허름해 보이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 일행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물을 길어서 강을 만들 때, 이쪽 집들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풍수를 보는 선생을 불러왔었는데, 이미 이쪽은 원기가 다 상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예 저쪽으로 옮겨 간 거고요.”
노인의 설명에 정교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떼던 그녀는 잡초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웠다.
정교랑이 주운 것은 부서진 와당(瓦當: 기와의 마구리)이었다.
“아씨, 우리 정씨, 아니, 정씨 가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무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노인이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연꽃 절지 무늬(꽃까지를 꺾어 놓은 모습을 문양으로 표현한 것)요.”
정교랑이 손에 든 와당을 보며 대답했다. 노인은 정교랑의 대답에 흠칫 놀랐다.
연꽃 절지 무늬는 정씨 선조의 고택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무늬고, 지금의 북정 사람들은 특별히 선호하는 무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같이 몇 안 남은 늙은이들만 알고 있는 사실을, 저 낭자는 어찌 단번에 맞혔지?
저 낭자가 바보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집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정 대노야께 여쭤도 대답하지 못하실 질문을 저 낭자가 저렇게 단번에 맞히다니.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노인을 향해 손에 쥔 와당을 흔들어 보였다.
노인은 정교랑이 흔드는 와당을 쳐다보았다. 이미 오래전에 파손된 것이지만, 아름다운 연꽃 절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연꽃 절지 무늬. 그래서 대답할 수 있었던 거로군.
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똑똑한 낭자일세.
정교랑은 와당을 한쪽으로 던진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노인도 웃음을 지으며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앞으로 걸어가던 그들은 그나마 좀 정돈되어 보이는 집 앞에 멈춰 섰다. 북정의 저택에 견줄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담벼락과 마당이 있는 저택이었다.
“이 늙은이가 사는 곳입니다. 아씨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차 한잔 대접해도 될지요?”
노인이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곧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조금 전부터 정교랑 일행을 구경하러 하나둘씩 집 밖으로 나와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아이들은 정교랑이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한데 모여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정교랑을 위해 자리를 비켜섰다.
노인이 살고 있다던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마당에는 늙고 구부정한 매화나무가 서 있었고, 담벼락의 구석에는 푸른 이끼가 얇게 서려 있었다.
노인의 집에서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 나오더니 노인의 뒤로 숨었다.
“집에는 두 사람밖에 없소?”
조 집사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저택은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듯 깔끔해 보이긴 했지만, 살림하는 여인의 손길이 닿은 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예.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떴고, 아들 내외는 역병이 돌던 해에 모두 죽었습니다.”
노인이 웃고는 자신의 뒤에 숨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 외동 손자 하나만 남았지요.”
부인에 자식까지 잃은 슬픔을 상상조차 할 수 있으랴.
하지만 노인의 얼굴에서는 비통함 대신 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도 이 아이를 무탈하게 키워냈으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지경인데도 감사하다고?
반근은 어쩐지 마음 한쪽이 쓰라렸다.
가진 게 많은 자일수록 만족을 모르고, 가진 게 없는 자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구나.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노인이 탁자 하나를 꺼내자, 어린아이는 무언가 생각난 듯 방으로 뛰어 들어가 주전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가 할게, 내가 할게. 데지 않게 조심해야 해.”
깜짝 놀란 반근이 재빨리 주전자를 건네받았다. 어린아이는 반근을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손을 놓고 다시 노인의 뒤로 숨었다.
“저, 좋은 차는 딱히 없지만.”
노인이 말을 하다 말고 투박한 그릇 하나를 꺼내어 물에 한참을 씻은 뒤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노인은 차를 끓이려고 주전자를 들었지만, 반근이 제지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희 아씨는 차를 드시지 않아요.”
반근은 주전자를 건네받아 그릇에 물을 따랐다.
하긴, 귀한 댁 출신의 낭자니 먹고 마시는 것도 귀하겠지. 이런 것을 드실 리가 있나.
노인은 제자리에 서서 멋쩍은 듯 웃기만 했다. 정교랑은 마당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를 며칠 빌려서 묵어도 될까요?”
정교랑은 노인에게 말하며 조 집사를 흘깃 쳐다보았다. 조 집사가 정교랑의 의중을 파악하고 서둘러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노인에게 건넸다.
“아이고, 아이고,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얼마든 여기서 지내셔도 됩니다. 돈은 넣어두세요. 이건 사람을 찾아드리는 일과는 별개입니다.”
조 집사가 아무리 노인에게 돈주머니를 쥐여주려고 해도 노인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정교랑이 그만하라는 손짓을 하자, 조 집사는 다시 돈주머니를 넣어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집에서 그냥 지낼 순 없어요. 정 돈을 받지 않겠다면, 사람을 써서 집을 하나 새로 지어 줄게요.”
집을 하나 새로 지어 주겠다고?
구경하던 사람들과 노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반근.”
정교랑이 반근을 부르자, 반근이 얼른 정교랑 가까이로 다가갔다.
“수중에 돈이 얼마나 남았지?”
정교랑이 물었다.
“여기 올 땐 일만 관만 가지고 왔어요. 반근 언니가 연말에 돈을 더 부쳐 준다고 했고요.”
반근의 대답을 들은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겠네.”
정교랑이 노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인부를 구하고, 자재를 사서 집을 지어요. 돈은 내가 낼 테니.”
일만 관! 저 낭자에게 일만 관이나 있다니!
노인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일만 관! 지금 강주성 시세로는 중급 농토 세 묘를 사도 이십 관밖에 하지 않는데, 무려 일만 관이라니!
강주성 좋은 위치에 있는 저택 세 채는 사고도 남을 돈이잖아!
그만한 돈이 있는데도 왜 굳이 이런 누추한 집에서 지내겠다는 거지? 심지어 집을 지어 주면서까지?
지금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아씨, 아씨. 농담하지 마세······.”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정교랑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농담이라뇨. 저 넓은 땅이 다 놀고 있는 땅이라면, 제대로 손을 보는 게 낫죠.”
정교랑이 주위에 있는 구경꾼들을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힘을 보태겠다는 사람들이 있거든, 한 채씩 나눠 주고요.”
정교랑의 말에 화들짝 놀란 구경꾼들이 일순간 시끌벅적해졌다.
저 살아 있는 보살님이 방금 뭐라고 하신 거야? 노인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집을 지어 주겠다고?
남의 돈으로 내 집을 짓는 꼴이잖아! 하늘에서 복이 떨어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건가?
“할게요! 저 할게요!”
구경꾼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노인은 그 사람을 향해 다급하게 양팔을 휘휘 젓고는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농담하지 마십시오.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은 다 당신들 건가요?”
정교랑이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네, 네. 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제대로 가꿀 능력이 없어서요.”
문밖에 있던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노인이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노려보며 손짓했다.
“괜히 끼어들어 소란 피우지 마시게!”
노인이 호통을 치자 와글와글 소란스럽던 구경꾼들이 잠잠해졌다.
그럼, 집을 짓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게다가 돈도 아주 많이 들 텐데, 애들 장난처럼 이리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저 낭자가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보네.
그런데 옆에 있는 시종들은 왜 저 낭자를 말리지 않는 거지? 되레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잖아?
“어서 가 보자! 그 정씨 낭자가 또 왔대!”
정교랑 일행이 왔다는 소식이 남정 동네 여기저기에 퍼졌다. 집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무슨 일인지 살폈다.
“왜? 왜? 그 낭자가 또 돈을 준대?”
“이번엔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집을 준대!”
집을 줘?
깜짝 놀란 사람들이 노인의 집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안 그래도 비좁던 골목은 더욱 좁아져서 뒤늦게 정교랑을 뒤따라 왔던 정 대노야 일행은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들어와야 했다.
“비켜! 비켜!”
손에 몽둥이를 쥔 하인 일고여덟 명이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밀치면서 길을 텄다. 하인들을 거느린 정 대노야가 노인의 집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조 집사와 주씨 가문 시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편 집 안에 있던 노인의 짐과 가재도구들은 밖으로 옮겨져 문 앞에 쌓여 있었다. 남정의 어린아이들 몇 명이 그 사이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정교랑, 뭐 하는 짓이냐!”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외쳤다. 마당에 서 있던 정교랑이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정리요. 앞으로 여기서 살려고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가 너더러 여기서 살라고 했느냐!”
화가 잔뜩 난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여기, 당신 집이에요?”
정교랑이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