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75)

“나머지는 조 집사가 알아서 처리하게.”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조 집사는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쥐어진 활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사람을 죽이다니. 사람 하나는 죽어도 괜찮으니, 일체의 가능성을 배제하겠다는 건가? 그래도 이건 무려 사람을 죽이는 일인데!

하긴, 아씨한테 살인은 그리 희귀한 일도 아니지.

불이 붙은 것을 일찍 알아차리기도 했고,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경성에서 크고 작은 화재를 경험한지라 금방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역참은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데다, 오랜 시간 동안 수리도 못 한 채 운영한 탓에 불길은 빠르고 크게 번졌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상등 방이 있는 뒷마당 쪽에서 불길이 시작된 덕에 다행히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다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서로 밀치고 뛰어다니느라 여기저기 타박상을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불길에 화상을 입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화재의 시발점에 있었던 풍림도 간신히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풍림은 저녁에 있었던 일 때문에 마음이 갑갑해서 깊이 잠들지 못했다. 세리 일행이 풍림이 있던 곳을 표적으로 하여 불을 붙였으니, 당연히 상등 방 쪽에서 시작된 불길이 가장 거셌고 역참의 피해는 심각했다.

풍림은 불길에 눈을 뜨자마자 힘겹게 발버둥 치면서 방문 앞까지 기어갔고, 그를 충심으로 보필하던 측근이 풍림을 등에 업고 불길을 가르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불에 타서 무너진 나무 기둥에 어깨를 다치고 메케한 연기로 목이 따끔하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날이 밝으면서 역참의 불길도 사그라들었다. 불에 타는 모든 것들이 새까만 재가 된 듯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화재 때문에 놀라기도 했고, 불을 끄느라 밤을 꼬박 새운 탓에 죄다 역참 앞에 지쳐 널브러져 있었다.

불길이 한창일 때는 오로지 살아남으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막상 목숨을 부지하니 불에 타 버린 재산과 물건들이 생각났는지 역참 앞에서는 이따금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잿더미 너머에서 풍림이 두 수하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왔다. 옷과 얼굴은 불에 타서 새까맣게 그을린 채였다. 풍림은 다친 어깨 때문에 남은 옷소매로 대충 팔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 두었다.

구사일생한 역승은 힘겹게 비틀거리면서 한 걸음씩 다가오는 남자를 보더니, 조상님이 살아 돌아온 듯 눈물을 쏟으며 풍림을 맞이했다.

“대인!”

걸어오는 풍림의 모습은 백성들에게도 보였다. 무슨 관직의 관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젯밤 그가 보여줬던 정의롭고 백성을 위하는 모습은 모두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터였다. 큰 재난을 겪어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풍림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한결 평안해졌다.

“대인!”

“대인!”

풍림을 발견한 백성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풍림은 죽었더냐?”

마을 어귀에 있는 저택 안.

서판은 좀 전의 온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 두 사내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서판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살아 있다고? 도리어 왕대와 유중이 죽다니. 이제 끝장났군, 끝장났다고!”

서판의 입에서 끝장이라는 두 글자가 나오자, 두 사내의 심장은 얼어붙은 듯 서늘해졌다. 좀 전 역참 앞에서 동료들이 타서 죽고 활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강렬한 공포였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불길이 워낙 거세기도 했고, 저희는 빨리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돌아온 것이니 가서 확인해 봐야 합니다. 아마 죽지 않았을까요? 저희가 사방에 불을 붙였으니 빠져나오지는 못했을 겁니다.”

두 사람이 서둘러서 서판에게 말을 덧붙였지만, 서판은 더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듯 고개만 저어댔다.

“그놈이 죽든 말든, 다 끝장이야, 다 끝장났다고. 왕대와 유중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병졸들도 생포됐어. 그것만 해도 말 다 한 거야. 이미 끝장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어떻게 도리어 죽임을 당해?”

두 사내는 온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방화 살인을 저지르고 다닐 때는 두려움 따위 없었지만, 정작 본인들이 피해자가 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목을 조여왔다.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내가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이들은 뒤쪽에서 불을 지른 뒤 사람들의 틈에 섞여서 역참 밖으로 달려나가던 중 서리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불타 죽는 것을 보았고, 곧이어 세리가 화살 한 방에 목숨을 잃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역참의 반대편 천막 쪽에는 사람이 여럿 서 있었는데,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상태였기에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려 줄행랑을 쳤다.

“인제 와서 그걸 알아본다 한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서판이 창백한 얼굴로 탁자에 팔을 올려 몸을 지탱했다.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한들, 뭘 어쩔 수 있겠나? 가서 그 사람들을 죽일 수야 있겠어?

“대인, 이제 어떡합니까?”

두 사내가 벌벌 떨면서 물었다.

어떡하냐고?

“도망쳐!”

서판이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쳐! 어서 도망쳐야 해!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 두 가지 결과 외에 세 번째 선택지란 없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서판은 항상 만에 하나를 대비해 대안을 준비해 두었다. 그는 이미 가족과 친척들을 멀리 보내 두었고, 일정 기간을 혼자서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자금도 마련해 두었다.

가을의 새벽 안개가 서판의 몸을 감싸자 옷소매 사이로 짙은 냉기가 스며들었다. 서판은 말을 타고 오솔길을 따라 빠르게 떠나갔다.

이른 아침의 들판에는 일찍 일어난 농부의 모습과 이따금 컹컹 짖어대는 시골 개 소리만 있을 뿐, 더없이 평온하고 고요했다. 서판은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병졸들이 없음을 수시로 확인하면서도, 불안함을 떨치지 못한 채 절망에 휩싸였다.

이번에 도망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돼.

이 세상에 조 서판이라는 사람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거고, 태창부에서 삼대째 관직을 이어가던 조씨 가문도 사라지는 것이야.

이번 일로 급작스러운 폭풍우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할 태창부의 대인들과 비하면 서판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지만, 그래도 비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실패했지? 왜 원하던 바람대로 되지 않았던 거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정도로 분하구나.

동이 틀 무렵, 서판은 혼자서 말을 타고 황야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의 씁쓸한 뒷모습은 상갓집 개처럼 처량하기만 했다.

“본관을 불태워 죽이려던 것이냐?”

풍림이 자신의 눈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네 병졸을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그러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저희도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터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네 사람은 끊임없이 이마를 땅바닥에 찧었다.

어차피 이런 졸개들은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이 아무리 커져도 그들 뒤를 봐줄 대인과 관리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윗사람들끼리 싸움이 붙게 되면 개미 같은 존재인 졸개들에게 죄를 추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졸개들은 곤장 몇 대 맞고 끝날 일이다.

누군가 고의로 불을 질러 이번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더욱 분개했다.

“태워 죽여 버려요!”

어떤 사람이 먼저 외치기 시작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더 많은 목소리가 합세하여 외쳐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돌멩이와 나무막대기를 병졸들에게 던지기도 했다.

“태창로의 유중이 저희한테 시킨 겁니다. 이 일이 성사되면 저희한테 큰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병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조 집사가 그를 세게 걷어찼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자그마한 태창로 전운사의 서리 따위가 어떻게 너희 같은 신병영 병졸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냐!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

병졸들은 하나같이 아니라며 우는소리를 해댔다.

“유중은?”

풍림이 묻자 조 집사가 손짓했다.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 버린 시신 한 구와 다른 시신 한 구가 들것에 실려 왔다.

끔찍할 정도로 타 버린 시체 때문에 사방에 썩은 내가 진동했다.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궁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눈을 감거나 코와 입을 막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웅성거렸다.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불타기 시작했어요.”

“에이, 그게 아니라 기름통이 있었던 걸 보니 저걸로 불이 붙은 거지.”

“꼴 좋다!”

풍림은 수하의 부축을 받으면서 시신 앞으로 다가섰다.

풍림은 문관이지만, 한때 형벌과 옥사 업무를 맡아 시신 부검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눈앞의 시신들을 보아도 속이 역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심지어 허리를 숙여서 불에 탄 시신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시신의 목 부위를 살짝 벌려보니, 안에 박혀있던 화살촉이 드러났다.

역시…….

풍림은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조 집사를 쳐다보았다. 조 집사는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온몸이 근육질로 탄탄해 보였다.

풍림은 조 집사의 무예가 출중하리라 추측했으며, 그의 손에 쥐어진 활을 발견하고는 감탄했다.

“궁술이 뛰어나시구려.”

조 집사가 웃으면서 공수의 예를 표했다.

“대인의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주위에 서 있던 시종 두 명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조 집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날이 밝자, 멀리서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근처 관청의 관리들이 태청로(太靑路)의 병사들과 함께 왔습니다.”

말을 타고 달려온 호위가 말에서 내리면서 외쳤다.

그들의 뒤로 어림잡아 몇백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역참에 불이 붙어 어명을 받들고 온 조정의 관리와 수많은 백성이 타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자, 근처 지방의 관청 관리들이 모조리 모인 것이다. 게다가 역참으로 오던 길에 살기등등한 관군들까지 마주치니 관리들은 더욱 놀랐다.

관리들은 역참 앞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기민하게 눈치챘다. 이번 일은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다!

역참 앞에 도착한 모든 이들은 눈앞의 참혹한 광경에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곧이어 관리들은 정말로 비통한 건지, 비통한 척을 하는 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슬퍼하고 가슴 아파했다.

“이자가 불을 저지른 범인이오. 가까이 와서 한번 보시구려. 혹시 이자를 아는 사람이 있소?”

풍림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관리들은 서로 앞에 나서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뒤로 내뺐다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 시신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는 사람을 알아본 관리들은 저도 모르게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는 자요?”

풍림이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모, 모르는 자입니다.”

앞으로 나온 세 명의 관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풍림은 땅에 침을 뱉었다.

“대인, 이곳은 위험하니 오래 계시기에 좋지 않을 듯합니다. 일단 저희 태청 병영으로 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한 장수가 말에서 내려 풍림에게 말을 건넨 뒤, 후배로서 예를 올렸다.

“풍 숙부님, 전 장청(長靑)의 동문입니다.”

풍림이 장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네가 바로 종경(鐘慶), 종자점(鐘子漸)이로구나.”

장수가 다시 한번 정중하게 예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장청과 네 얘길 하긴 했지.”

풍림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정청 형님도 제게 서신을 보내주었습니다. 숙부님께서 벌써 이곳에 당도하신 줄 몰라 숙부님을 지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하마터면…….”

장수가 자신을 질책하면서 부끄러워하자 풍림은 냉소를 지었다.

“이건 네 불찰이 아니다. 간덩이가 부은 이들의 잘못이지.”

장수는 풍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병영으로 가자고 다시 한번 권했다.

“아니, 난 가지 않겠다. 바로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와서 보기를, 폐하께서 와서 보시기를 기다려야지.”

풍림은 자신을 부축하던 수하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역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인, 조심하십시오.”

관리들과 수하들이 풍림을 걱정했다.

풍림은 폐허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산발인 채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엉망이 된 옷을 입고 있었다. 퀭한 몰골의 풍림이 다치지 않은 다른 한 손을 치켜들고는 주위를 가리켰다.

“만백성이 와서 보라 하라!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만백성이 와서 보라 하라! 그 빌어먹을 탐관오리 놈들이 얼마나 양심도 없이 미쳐 날뛰는지!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야. 이 몸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 태창로 사람들을 시켜서 장부를 모조리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명해라! 본관은 꿈쩍 않고 이 폐허 위에 앉아 있겠노라. 그리고 너희는 가서 관을 하나 짜오거라. 본관은 여기서 이 폐허를 지키고, 관을 옆에 둔 채로 태창로의 장부를 봐야겠다!”

풍림의 갈라진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말은 사람들의 귓가에 찢어질 듯이 울렸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새벽빛 아래, 폐허 위에 서 있는 초라한 한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폐허를 배경으로 한 그의 모습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도리어 거대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났다.

주위 사람들이 거듭 만류하는데도, 역참을 떠나지 않겠다는 풍림의 뜻은 확고했다. 관리들은 하는 수 없이 풍림의 곁을 지키려 했다.

“당신들이 여기 남는 이유가 나 때문이어서는 아니되오.”

풍림이 관리들에게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관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화재의 발생 원인을 조사하러 뛰어가거나, 다친 백성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이번 화재로 죽은 사람은 열 명, 다친 사람은 서른세 명이었다. 그중 열 명은 연기를 과도하게 마셔서 기관지에 손상을 입은 이들이었고, 나머지 스물세 명은 역참 바깥으로 뛰쳐나오다 밀치고 넘어지는 바람에 다친 이들이었다.

묶여 있지 않던 소, 말, 당나귀들은 난리 통에 몇 마리 없어졌고, 화재로 인한 재물의 손해는 아직 조사 중이었다.

사망한 자들의 시체는 운구되었고, 다친 사람들은 관리들의 안내에 따라 그들이 데려온 의원에게 차례로 진료를 받았다. 다치지 않은 사람 중 일부는 길을 재촉하느라 먼저 떠났고, 일부는 관청에서 화재 보상금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역참 밖을 가득 메우자, 화재로 인해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한결 나아졌다. 인간은 늘 그렇듯이, 연약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강인하게 살아 나가는 존재였다.

풍림은 옷을 갈아입은 뒤, 간단히 세수하고 불에 탄 머리카락을 두모로 가렸다. 의원이 그에게 붕대를 새로 감아주었다.

풍림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어젯밤 역참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짙은 문인의 분위기만을 풍겼던 풍림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자 하룻밤 사이에 서릿발 같은 기개가 더해졌다.

풍림이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출발 채비를 마친 마차 행렬이 보였다. 그는 놀란 눈을 하고 서둘러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은인, 은인, 잠시 기다려 주시오.”

풍림이 손을 뻗으며 외치자, 조 집사는 말을 멈춰 세우고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가시려는 게요?”

풍림이 마차를 보며 물었다. 아직 내려지지 않은 휘장 사이로, 마차 안에 단정하게 앉아있던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엔 주위가 어두컴컴하여 여인의 용모를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지금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니 생각했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이제 막 열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에, 큰 키로 인해 더 호리호리해 보이는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까맣고 큰 두 눈은 눈빛이 살아 있었다.

이 여인은 어젯밤의 화재가 썩 놀랍지 않은 듯 보였다.

하긴, 기민하고 무예가 뛰어난 호위를 곁에 두고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겠군.

“아, 대인. 어제 잡아둔 병졸들은 저쪽에 계신 관리와 장군께 넘겼습니다. 어젯밤의 일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하여 기록하게 했고, 저희가 서명도 했습니다. 혹시 다른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조 집사의 말에 풍림은 고개를 저었다.

“감히 분부라니 당치도 않지.”

그러더니 풍림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마차를 향해 읍을 올렸다.

“이 풍림이 다시 한번 낭자께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또 말씀이 과하시네요, 대인. 물불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 제 목숨을 부지하려 했을 뿐입니다.”

정교랑이 마차 안에서 답례를 하며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하다만, 왜 이상한 느낌이 들지?

어젯밤 내가 마차에서 내렸던 그 순간, 그래. 그때부터 무언가가 이상했어. 어디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설명할 순 없지만, 굳이 답하자면 아마도 운이 유별나게 좋았다고 해야겠지.

서리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작심하고 일을 벌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불의에 맞서고자 나선 행인, 혹은 자신의 하인이 연루되어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된 행인 덕분에 나는 멀쩡하게 살아남았고, 그 서리는 자기가 던진 돌에 자기가 맞은 셈이 되어 버렸지.

저 여인이 데리고 있는 건장한 시종들 덕분에 불을 빨리 끌 수 있었던 점도 이번 화재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진짜 핵심은 저 사람들이 불을 지른 범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는 것. 비록 중요한 인물 두 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긴 했으나, 아마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죽느니만 못했을 것이다.

범인들을 잡지 못하고 내 목숨만 부지했더라면, 이번 화재에 대한 일은 흐지부지 끝났을 터. 이 화재가 아무리 많은 사람과 재물을 불태웠다 하더라도, 증거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더러 배후에서 이 일을 지시한 사람에게 아무 위협도 안 됐을 것이야. 도리어 다음번엔 더 확실하게 나를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불을 지른 범인들도 다 잡아들였으니, 아무 말 하지 않고 저자들의 시신을 보여 주기만 하면 충분해!

살면서 죽는 것을 두려워한 적은 없지만, 죽더라도 명분 있게 죽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불에 타죽었다면, 너무나도 허무한 죽음이지 않았겠는가.

풍림은 정교랑을 향해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읍을 올렸다.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낭자. 저 풍림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인이셔야 마땅합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정 그렇게 말하고 싶으시다면, 대인의 목숨을 구한 것도, 고마워해야 할 사람도 제가 아니에요.”

그럼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획했다는 것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의 풍림이 흥분한 채로 고개를 들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럼 누굽니까?”

풍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겠어요. 대인 자신이지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마차 휘장을 내렸다.

나 자신?

풍림은 넋이 나갔다.

이게 무슨 뜻이지?

조 집사가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외쳤다.

“가자!”

조 집사의 외침과 함께 말과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낭자,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풍림이 마차를 몇 걸음 따라가면서 소리쳤지만,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말을 탄 사람 중 아무도 뒤돌아보는 이는 없었고 마차 행렬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큰길에서 옆으로 꺾어지는 지점이 되자, 조 집사는 고개를 돌려 역참을 바라보았다. 풍림은 여전히 역참 앞에서 마차 행렬을 눈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저 풍림이라는 자에 대해 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 삼사(三司) 중 하나인 탁지사(度支司)의 판관이지. 물론 삼사에 들어가 판관을 맡은 자이니 당연히 유능한 사람일 거야. 하지만 삼사 소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질병을 앓고 있는데, 그건 바로 융통성 없이 앞뒤가 꽉 막혔다는 거지.”

조 집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더니 씩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참 운도 좋은 사람이야. 이번에 우리 아씨를 마주치지 못했다면, 경성에 계신 주 노야께서 조문을 한 번 더 가셨겠네.”

주위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한마디 했다.

“우리 노야께서 저 판관 대인과 알고 지내실 리는 없죠.”

하긴 그래. 문관과 무관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품계도 다르니, 평소에 왕래가 없긴 하지.

조 집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헤헤 웃었다.

“아 참, 왜 풍 대인께 활을 쏜 사람이 아씨가 아니라 본인이라고 하셨습니까?”

가까이에 있던 시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 집사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시종은 뒤에 있는 마차를 슬쩍 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씨의 공로를 빼앗으시다니요.”

조 집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시종에게 말했다.

“너희가 뭘 알겠느냐. 너희가 나만큼 아씨를 잘 알까? 이런 일은 아씨께 아무것도 아니야. 별것도 아닌 일에 공로는 무슨.”

조 집사는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아꼈다. 주위에 있던 사람이 조 집사에게 부러움의 눈빛을 보내왔다.

“맞네, 맞네. 강주에서 아씨를 모셔 왔던 것도 집사 어른이었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집사 어른께서 아씨를 제일 잘 아시겠네요.”

“이번에 아씨를 강주로 다시 모셔다드리는 사람 중에 가장 제격이시죠.”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쩐지 주 노야께서 아씨를 모셔다드릴 사람을 고를 때, 가장 먼저 집사 어른부터 고르셨다더니.”

주위의 시종들이 조용히 웃으면서 잡담을 나누었다. 조 집사는 겉으로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너희가 알긴 뭘 알아! 강주에서 아씨를 데려올 때, 내가 알게 된 게 뭔지 알아? 그때 아주 단단히 혼쭐이 났어!

아씨를 모시기에 내가 제격이라고? 쥐뿔도 모르는 놈들! 아씨를 모셔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난 집에서 대성통곡을 했어!

내가 아씨를 잘 알기 때문에 저 사람을 내가 죽였다고 했다고? 나 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아씨가 나한테 활을 쥐여 준 걸 못 봤어?

그건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그런 뜻도 못 읽어내니 난 집사 노릇을 하고, 너희는 시종이나 하는 거다.

“근데 아씨께서는 왜 자기가 한 일이라고 알리고 싶지 않으신 거지? 이야, 생각해 보니까 우리 아씨께서는 사람을 죽을병이 걸린 사람을 살리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술까지 엄청나시구먼.”

시종이 말하다가 턱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주씨 가문의 혈통이셔.”

역시 우리 주씨 가문의 혈통이셔?

시종의 말을 들은 조 집사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주씨 가문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존재였던 저 소녀가, 언제부터 주씨 가문의 영광이 된 거지?

앞쪽에서 조 집사와 시종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차를 몰고 있을 무렵, 뒤쪽에서 날카로운 사내의 비명이 들려왔다. 시종들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소리의 근원지는 마차 행렬의 가장 뒤쪽에 있는 왕씨 가문의 마차였다.

“왕 낭자가 또 왜 저러실까?”

누군가가 웃으면서 농담을 던지자, 주위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조 집사도 순간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금세 진지한 얼굴을 하고 호통쳤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조 집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호통을 쳤다.

저 사람은 어찌 됐든 왕씨 가문의 공자이기도 하고, 아씨가 고른 정혼자이기도 하니. 아무리 속으로 그를 무시한다고 해도 겉으로는 티를 내서는 안 됐다. 이건 아씨의 체면을 위해서였다.

조 집사는 입꼬리를 올리고 턱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왜 다른 사람에게 아씨께서 하신 일인 걸 숨기냐고? 왕 낭자, 아 퉤! 저 봐. 왕 공자가 보자마자 놀라 까무러쳤다가 간신히 일어나더니 저렇게 신경질만 내잖나.”

시종들은 좀 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저 사람의 간덩이가 콩알만 해서 그렇죠.”

시종들의 말에 조 집사는 혼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왕 공자의 간덩이가 작은 것도 있긴 하지만, 아씨께서는 여인의 몸이시지 않나.”

조 집사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살인을 저지른 여인이라면, 누구나 꺼리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니.

“싫어, 싫어. 나 쟤랑 같이 안 갈래. 나 쟤 다시는 보기 싫다고!”

왕십칠은 이불을 끌어안은 채 소리를 질러댔다. 깨어난 이후부터 끊임없이 같은 말만 반복했다.

노복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왕십칠을 어르고 달랬지만, 여인들처럼 잘 달래는 방법을 모르는지라 도리가 없었다. 데굴데굴 구르며 떼를 쓰는 왕십칠을 보고 있자니, 노복의 머리는 터질 듯이 지끈거렸다.

노복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공자님, 계속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시면, 정 낭자가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말을 안 들어?

정 낭자가! 화를 내?

왕십칠의 눈앞에 목에 화살이 꽂힌 채 뒤로 넘어가는 사람이 보이는 듯했고, 그 사람이 쓰러지자마자 다른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아이고, 엄마야!”

왕십칠은 비명을 지르고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마차 안이 조용해지자, 노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탄식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편이라니. 이 혼사를 어찌하면 좋을꼬?

시간이 흘러 어느새 늦가을인 10월이 됐다.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 흔들거렸다.

나막신 한 켤레가 일부러 낙엽을 밟고 지나가자, 마당 안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그러시면 안 돼요.”

여종이 소리 나는 곳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진단랑은 치맛자락을 들고는 달각달각 나막신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진 노태야와 진소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단향목으로 만들어진 쌍육 말판이 있었다.

“일이 그렇게 심각했단 말이냐? 태창로 전운사가 그 정도로 간덩이가 부었다니.”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조정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꽤 지났지만, 진소의 얼굴에는 아직 노여움이 남아 있었다.

“이게 다 고씨 가문이 뒤에서 받치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요. 감히 전운사까지 손을 뻗다니, 욕심에 눈이 멀어 체면을 내팽개쳤습니다. 참, 풍림은 관을 옆에 두고 역참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듣기로는 왼쪽 팔을 못 쓰게 될 거라고 합니다.”

진 노태야는 진소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풍 머저리도 참 재수가 없었네.”

“아닙니다. 어쩌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죠. 큰 재난에도 죽지 않고, 결정적인 증거까지 확보했으니까요. 그러지 못했다면, 그거야말로 재수 없는 일이었겠죠.”

“지나가던 행인이 불의를 보고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지?”

“네.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라, 사람들이 역참에 많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태창로 그 나쁜 놈들한테 운이 없기도 했지요. 역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맞섰다고 하니.”

진 노태야는 짧게 아, 하고 대꾸를 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크게 진노하셔서 어사대를 시켜 사람을 잡아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태창로에 주군하고 있던 장병들에게 풍림의 호위를 도우라고도 하셨고요. 이번엔 고씨 가문에서 또 얼마나 주도면밀할지…… 감히 못 나설까 걱정이기도 한데…… 나선다면야…….”

진소는 혼자 말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진 노태야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쌍육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듣기로는 행인 덕분에 불길을 잡을 수 있었고, 불을 질렀던 두 명의 태창로 서리들을 행인이 화살로 쏘아 죽였다지. 태창로 놈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목에 힘을 주고 으스대며 도망치지는 않았을 터. 필경 남몰래 빠져나가려 했을 텐데, 그 난리 통 속에서 두 놈을 정확히 명중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자로구나.

행인이라…….

행인?

진 노태야가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말하고 있던 진소가 깜짝 놀랐다. 진 노태야가 눈을 크게 뜨고 진소에게 물었다.

“정 낭자가 떠난 지 얼마나 됐지?”

진 노태야가 정교랑을 언급하자, 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여종들이 곤충 낚시를 하며 노는 것을 구경하던 진단랑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

“할아버지, 정 언니가 떠난 지는 한 달쯤 됐어요.”

진단랑이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진 노태야는 진단랑을 향해 미소 짓고는, 책상 한쪽에 끼워져 있던 족자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펼쳤다. 황궁에서 복제해 왔기에 천금의 값을 지니는 매우 귀중한 지도였다.

진소가 서둘러 진 노태야 옆으로 다가가 지도를 펼치는 것을 도왔다. 진단랑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 노태야가 지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럼 열흘 전에 정 낭자가 지나갔을 지점이 바로…….”

진 노태야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따라 천천히 동선을 그리다가 한 곳에서 손가락을 멈추고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 노태야가 움직임을 멈추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진소는 고개를 숙이고 진 노태야가 손가락으로 짚은 위치를 보았다. 진소도 진 노태야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태창로.

태창로!

“아버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진소가 좀 전보다 목청을 높여 말했다. 진 노태야가 웃으며 지도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도 네가 생각하는 걸 생각하고 있다.”

진 노태야가 비꼬는 투에 진소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는 정 언니를 생각해요!”

진단랑은 이때가 끼어들 틈이라고 생각했는지 천진난만한 말투로 말했다. 진단랑의 말을 들은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소는 별다른 말 없이 물러나겠다고 예를 올린 뒤, 서재에 돌아가 손에 책을 한 권 쥐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읽지 못하고 책을 내려놓았다.

풍림이 친필로 작성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도움을 주었던 일행은 약 이십 명이고, 경성에서부터 한 여인을 호송해 오고 있었다.’

여인!

현장에서 두 명을 화살로 쏴 죽였다? 설마 정말로 그 강주 바보는 아니겠지?

황궁 안. 두 내시가 지도를 펼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가리켰다.

“걸어서 가는 속도로 계산하면, 오늘은 이쯤 갔겠군.”

진안 군왕은 미소 지으면서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천천히요, 천천히.”

뒤이어 진안 군왕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외치는 듯한 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황자가 그의 뒤를 향해 덮쳐올 때까지, 진안 군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도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 뭘 보고 있어요?”

이황자가 진안 군왕의 팔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진안 군왕은 안은 이황자의 팔을 당겨 이황자를 지도 앞에 세웠다.

“지도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지도가 뭐예요? 그림이에요?”

이황자가 눈앞의 커다란 두루마리 그림을 보면서 물었다. 어린 이황자의 눈에는 수많은 곡선과 점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이 딱히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음, 지도가 뭐냐면, 천하예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가리켰다.

“봐요. 여기가 경성이에요.”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보기 위해 이황자는 지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경성? 내 손가락보다 작은데요?”

이황자가 단풍잎 같은 통통한 손가락으로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함께 짚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황자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

“이건 축소한 거니까요. 이러지 않으면 이 넓은 천하를 어떻게 종이 하나에 다 담겠습니까? 나중에 좀 더 자라 사부님께 천문과 지리를 배울 때쯤이면 알게 될 겁니다.”

이황자는 알겠다는 듯이 탄성을 뱉고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면서 여긴 어디고 저긴 어디냐고 끊임없이 물어댔다. 진안 군왕은 웃으면서 이황자의 질문에 다정하게 하나씩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한참 놀고 난 뒤, 진안 군왕은 이황자에게 황후한테 가 보라고 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자꾸 저한테 숙제하라고 하시잖아요.”

이황자는 가기 싫다는 듯 몸을 배배 꼬면서 진안 군왕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황후마마께서는 전하를 걱정하셔서 그러는 겁니다. 비록 황후께서 전하를 낳아 주신 건 아니지만, 전하를 키워 주셨잖습니까. 그러니 이토록 전하를 아끼시지요.”

진안 군왕은 이황자를 타이르며 그의 눈높이에 맞도록 자세를 낮추어 앉았다.

“애정이 있는 만큼, 가르침이 있는 법이지요. 제가 전하처럼 애정을 받으려면…….”

진안 군왕은 순간 아차 싶어 재빨리 말을 고쳤다.

“아니, 전하처럼 애정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이황자는 군왕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가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들도 똑같이 전하의 마음을 느낄 겁니다. 그러니 진심을 다해 남을 잘 대해 줘야 해요.”

진안 군왕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어 두어 번 치면서 말했다.

“압니다. 형님이 저를 진심으로 잘 대해 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이황자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황자의 해맑은 모습을 본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리고 손으로 이황자의 통통한 볼을 꼬집으며 다시 한번 타일렀다.

“그럼 어서 가세요.”

이황자를 보낸 뒤, 진안 군왕은 내시들에게 지도를 거두라 명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전하, 약을 드실 시간이옵니다.”

내시 하나가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왔다.

“벌써 약 먹을 시기가 됐나?”

진안 군왕이 물었다.

“예, 벌써 늦가을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군.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잊고 있을 뻔했어. 어쩐지 요즘 통증이 다시 도진다 싶었는데.”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이 약, 몇 년을 더 먹어야 한다고?”

진안 군왕은 탕약을 받아와 단숨에 들이켜고는 물었다. 내시가 옆에서 손가락으로 숫자를 꼽아보고 대답했다.

“약을 드신 지 오 년째이니, 앞으로 삼 년만 더 드시면 됩니다.”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벌써 오 년이구나.”

그는 감탄하듯이 말하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의 회상 속 과거는 썩 즐거운 시기는 아니었다.

“시간이 빠르긴 하네. 역시 뭐든 지나가긴 하는구나.”

진안 군왕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예, 전하. 모든 고난은 다 지나갑니다.”

내시가 울컥한 듯 이를 깨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음, 대꾸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가만히 펼쳤다. 반쯤 채워 둔 서신이었다.

내시는 목례를 하고 몸을 일으켜 안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단정한 자세로 편전에 앉아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벌써 오 년이 지났구나.

내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씨 가문의 연회에서 돌아왔던 날, 저 아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을 듯이 구토하던 모습을.

이 태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 소년은 이미 백골 시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겨우 목숨을 구해내긴 했지만, 몸 안에 남은 독을 깨끗이 비워낼 방법이 없어 매년 늦가을이면 약을 먹여야 했다.

그때부터였지, 아마. 어떤 일들은 태감이나 궁녀들이 단순히 겁을 주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저 어린아이가 깨닫게 된 게. 자기 자신이 후궁들에겐 복덩어리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눈엣가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게.

“그리고 우리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우리를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진안 군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붓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니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갈 겁니다. 고난도, 기쁨도 전부 다요. 이런 게 인생무상이겠지요.”

그럼 어느 날에는, 지금 이 순간 또한 지나간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멈칫하며 붓을 멈추었다.

지금의 그리움과 기쁨, 익숙한 듯 낯선 친구도…….

붓을 쥔 진안 군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일지도. 부왕, 어머니, 형제자매. 폐하, 마마들. 황자…….

진안 군왕은 눈앞의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집어던졌다. 그래도 속이 시원하지 않은지 다시 종이를 주워 좌우를 살피고는 향로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종이를 버렸다.

불씨가 붙어 있던 향로에서 금세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운 연기에 진안 군왕은 기침을 몇 번 하고는 향로 뚜껑을 다시 닫았다.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본 그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돌려 책상을 바라보더니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서신은 결국 쓰지 못했네.”

진안 군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몸을 일으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떠날 때 작별인사도 못 했는데, 서신 한 통도 보내지 않는다면 정말로 친구답지 못하겠지.”

늦가을 안개가 잔뜩 낀 탓에, 후궁의 비빈들이 갈 수 있는 곳이 부쩍 적어졌다. 귀비가 나서서 이를 태후에게 호소하여 궁 내의 노대(露臺)를 새로이 단장하게 되었다.

수리된 노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단풍 숲을 볼 수 있어 수려한 경치를 즐기기에 좋았다. 새빨갛게 물들여진 늦가을의 단풍 숲이 보이는 노대는 근래 후궁의 비빈들이 가장 선호하고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귀비가 노대에 도착할 즈음, 태후는 다른 비빈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인들 사이에 있던 대황자가 시를 한 소절 짓자, 비빈들이 입을 모아 대황자의 재능을 칭찬했다.

“육가아가 안 보이네요?”

귀비가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비빈들에게 예는 됐다고 손짓하고, 태후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날씨도 좋은데 나와서 바람 좀 쐬지 않고.”

귀비가 말했다.

“또 공부하느라 바쁜 거 아닐까요?”

비빈 중 하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황후께서 너무 엄격하세요. 육가아는 아직 어린데.”

귀비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태후가 웃었다.

“아니야. 좀 전에 부르러 갔더니, 황제한테 갔다더구나.”

폐하께? 다른 이한테 갔다면 몰라도.

귀비의 웃는 얼굴이 조금 어색하게 굳었다. 귀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제가 가서 불러올게요.”

귀비가 비빈들을 향해 미소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오는 김에 폐하도 이쪽으로 모셔오겠네.”

귀비의 말에 비빈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어서 가 보라고 재촉했다. 귀비가 태후를 쳐다보자, 태후도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가 보라고 손짓했다. 귀비는 가볍게 예를 올린 뒤 물러났다.

“전하께선 복녕전(福寧殿)에 계십니다.”

내시가 길을 안내하며 알렸다. 귀비가 걸어오는 것을 본 복녕전의 내시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귀비를 맞이했다.

“마마, 잠시 기다리시면 소인이 바로 연통하고 오겠습니다.”

내시의 말에 귀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시가 복녕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복녕전의 열린 문틈 사이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육가아, 황후께 약을 올리고 온 것이냐?”

“네, 아바마마께만 알려드리는 거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시면 안 돼요. 마마께서는 약 드시는 것을 싫어하세요. 쓰다고요. 그래서 옆에서 보고 있지 않으면, 마마께서는 약을 제대로 안 드세요.”

황제의 웃음소리가 복녕전에 울려 퍼졌다. 유쾌함이 가득 묻어나는 웃음소리였다.

귀비는 피식 웃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뚱보 꼬맹이가 말은 잘하네. 진심 어린 효도를 폐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건 또 어찌 알고.

“아바마마, 아바마마. 저는 여기가 아바마마의 천하인 걸 알고 있어요.”

“오, 육가아, 천하가 무엇인지도 안다는 말이냐?”

“당연하죠. 아바마마의 천하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어요. 아바마마, 여기 보세요. 여기가 경성이고, 이쪽이 태산, 여기는 황하예요.”

복녕전에서 다시 한번 황제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육가아가 정말 똑똑하구나. 네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 자, 부황이 너를 안고 천하를 보여 주마.”

그 말에 복녕전 밖에서 듣고 있던 귀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 안쪽을 쳐다보았다.

복녕전 안에서는 수척한 사내가 어린아이를 들어 품에 안고 한쪽 벽면에 걸린 비단 지도를 함께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각자 한 손을 내밀어 지도를 가리키며 강산을 짚고 있었다.

귀비는 꽃이 수놓아진 비단 손수건을 손에 꽉 쥐었다.

“폐하, 귀비마마께서 알현을 청하시옵니다.”

“들라 하라.”

귀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복녕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을이 슬슬 지나갈 무렵, 황야 위에 노랗게 펼쳐졌던 융단이 걷히고 황토색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농민들은 그 위에서 겨울 파종으로 분주했다.

“아씨, 아씨. 여기 기억나세요?”

거리에서 시선을 거두고, 멀리 보일 듯 말 듯한 성문을 본 반근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태창로를 지나고부터 정교랑 일행이 지나가는 길은 모두 예전에 병주에서 정씨 가문으로 돌아가던 길과 같았다.

“기억나지.”

정씨 가문에서 경성으로 가던 길도 당연히 이 길이었다.

“아니요. 제 말은 우리가 같이 있었을 때요.”

반근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미소지었다.

“네가 간 뒤에야 내 기억력이 좋아졌는걸.”

아, 그러면 그때는 당연히 기억 못 하시겠구나.

반근이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가 동강현이에요.”

“한 공자.”

정교랑이 말하자 반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을 지난 마차는 조 집사가 사전에 사람을 시켜 알아봐 둔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 앞에 사람들을 내린 뒤, 마차와 말들은 모두 뒷마당에 세워 두었다. 정교랑이 멱리를 쓰고 마차에서 내릴 때도 왕십칠의 마차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노복이 어색하게 마차 앞에 서서 조용히 타이르듯이 말했다.

“공자님, 어서 내리세요.”

“안 내려, 나 여기서 안 묵는다고. 난 계속 갈래.”

마차 안에서 왕십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야영을 해야 합니다. 늑대 떼를 마주칠 수도 있어요. 무섭지 않으세요?”

노복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깔고 나지막이 말했다.

“안 무서워. 사람이 늑대보다 훨씬 무섭거든?”

왕십칠이 곧바로 대답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말인데. 정 낭자가 했던 말이잖아?

노복은 난감한 듯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과 반근은 이미 객잔 안으로 들어갔고, 주씨 가문의 시종들도 마차와 말을 끌고 뒷마당으로 간 후였다.

객잔의 문 앞에는 왕십칠의 마차 두 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객잔의 점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같은 일행이 아니신지요?”

“일행 맞네, 맞아.”

노복이 재빨리 대답하고는 마차의 휘장을 향해 말했다.

“공자님, 정말로 안 내리시다가는 화가 난 정 낭자가 직접 공자님을 데리러 올 겁니다.”

노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장이 확 걷혔다.

점원들은 마차에서 누가 내렸는지 볼 새도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이 서럽다고 우는 소리를 내며 객잔 안으로 바람처럼 빠르게 뛰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서러워서 살겠나.”

객잔의 창문은 난간처럼 세로로 틀이 나누어져 있는 직창(直窓)이었다. 반근은 창가 옆에서 창틀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씨, 아씨. 저 기억났어요. 저쪽이 제가 자주 장을 보러 가던 곳이에요.”

반근이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향해 말했다.

“벙어리네 집 어린 아들이 병을 앓는다는 이야기를 저기서 들었어요. 그때 우리가 번 돈이 오백 전이었죠.”

정교랑은 별다른 반응 없이 응 하고 대꾸했고, 계속해서 손에 쥔 책을 읽었다.

반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보니 거리의 인파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에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냈고, 여기저기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보니 반근에게는 꽤 익숙한 곳이었다.

그때 묵었던 곳이…….

반근은 까치발을 하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씨, 아씨.”

반근이 고개를 돌려서 정교랑을 부르자, 정교랑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반근을 쳐다보았다.

“아씨, 우리 나가서 좀 걸어요.”

반근이 정교랑 앞에 꿇어앉아 정교랑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정교랑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난 이곳에 대한 기억도 없는데, 나가서 뭐 할 게 있다고.”

반근은 웃으면서 정교랑의 옷소매를 좌우로 흔들며 졸라댔다.

“아씨, 같이 나가요, 네? 종일 안에만 콕 박혀 있으려니 너무 심심해요.”

정교랑이 조금 놀란 눈치로 반근을 쳐다보다가 씩 웃었다.

“점점 간이 커지는구나.”

“가요, 가요. 아씨. 병주에서 정씨 저택으로, 정씨 저택에서 또 경성으로 갔다가, 지금은 경성에서 다시 정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경성에서 지내실 때도 아씨는 늘 집에만 계셨지 밖에 잘 안 나가셨잖아요. 아씨께서는 경치를 즐기거나 놀러 다니는 일이 통 없으셨어요.”

정교랑이 못 이기겠다는 듯 책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문가로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반근은 멈칫했다가 곧 기뻐하며 싱글벙글한 얼굴로 정교랑을 따라나섰다.

“아씨, 정말로 나가시게요? 전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요.”

“네 말을 들으니 내가 너무 가엾어서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마음이 아파.”

“아씨, 지금 농담하시는 거예요?”

“아마 아닐걸. 웃지도 않았으면서.”

“하하, 하하.”

나막신이 강가의 돌길에 부딪히며 달각달각 소리를 냈다. 나막신 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는 여자아이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날아오른다, 날아올랐어요!”

열 몇 살쯤 되어 보이는 몸종 두 명이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몸종 중 한 명은 금색 나비가 수놓아진 붉은 치마를 입은 대여섯 살쯤 된 여자아이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는 몸종들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사환 두 명이 각자 손에 실을 쥔 채 열심히 뛰고 있었다. 사환들의 손에 쥐어진 실은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나비 모양의 종이 연에 이어져 있었다.

담벼락 쪽에서는 여종 네다섯 명이 미소를 머금고 연 날리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할래, 나도.”

여자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었다. 나막신을 신고 돌을 밟은 터라 다소 위태로워 보였다. 몸종들은 사환에게 어서 연줄을 가져오라고 했다.

사환은 조심스럽게 뛰어와 한쪽 무릎을 꿇고 여자아이에게 연줄을 쥐여 준 다음, 앞에서 여자아이를 인도하며 뛰어갔다. 여자아이는 신이 나서 좀 전에 사환이 뛰었던 모습을 흉내 내며 연줄을 쥔 손을 높이 들고 우다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연을 날릴 줄 몰랐고, 뛰는 속도도 느렸다. 앞서서 달리던 사환은 감히 연줄을 낚아챌 수 없어 힘없이 떨어지는 연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연은 좌우로 흔들리며 천천히 내려오다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던 누군가의 몸 위로 떨어졌다.

“어머나!”

강가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서 일제히 헉 소리를 냈다. 여자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연줄을 놓고 입을 틀어막았다. 담벼락 쪽에 서 있던 여종들도 웃음기를 거두고 서둘러 잰걸음으로 걸어왔다.

반근은 자신의 몸에 떨어진 연을 손으로 잡았다.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여종이 다가와 연신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반근은 말없이 미소짓고는 가뜩이나 긴장한 얼굴로 몸종 뒤에 숨어 버린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반근은 허공에다 가볍게 퉤, 퉤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악운은 오지 마라, 악운은 붙지 마라.”

그러고는 손에 쥔 나비 연을 보면서 감탄했다.

“우와, 정말 예쁘다.”

종이 연이 사람이나 지붕 위에 떨어지면 악운이나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속설이 있었다.

여종들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 이곳은 자신들이 속한 장씨 가문 저택 앞이고,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도 없었으며, 아이가 다칠까 봐 염려되어 강가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탓이었다.

여종들은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눈앞의 이 시녀가 화내기는커녕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는 데다, 뒤쪽으로 보이는 멱리를 쓴 아씨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뒤에 있는 시종들에게도 딱히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반근은 웃으며 여종들에게 답례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굴 찾아오신 거예요?”

여종 중 하나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이 거리에는 다른 집이 없었고, 시녀의 말씨 또한 이곳 말씨가 아니었다.

“아니요. 저 앞에 집 좀 보려고 왔어요.”

반근이 손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반근이 가리키는 강가 쪽에는 방 몇 개짜리 저택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아, 집을 빌리시려고요?”

여종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말하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 집은 이제 빌릴 수 없어요.”

“이제 못 빌린다고요?”

“네, 주인이 있거든요.”

“벌써 팔렸어요?”

반근은 놀랍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한 듯 앞쪽의 저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택 앞은 빗자루로 쓸어낸 듯이 깨끗했다. 벽을 타고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도 없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누군가가 신경 써서 집을 가꾸는 듯했다.

“네, 제 생명의 은인 거예요.”

여자아이가 끼어들었다.

생명의 은인?

반근은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이 아이는…….

“만약 집을 빌리시는 거라면, 동쪽 거리로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친절한 여종은 반근에게 동쪽 거리의 어디에서 물어봐야 하는지까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아씨, 아씨. 여기 좀 보세요!”

반근은 여종의 말을 듣다 말고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부르며 여자아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뭘 보라는 거지?

여종들이 반근의 시선을 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우리 집 아씨께서 워낙 예쁘시긴 하지. 남들도 다 크면 클수록 예쁘다고 하는데.

주위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자, 여자아이는 몸종의 뒤로 얼굴을 숨겼다.

“절 기억하세요?”

반근이 기뻐하며 물어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당시 여자아이가 들것에 실려 왔을 때는 혼절한 상태였고, 설령 혼절해 있던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고작 서너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자신을 기억하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반근은 혼자 싱긋 웃고는 물으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벌써 키가 이만큼 크셨네요.”

벌써 키가 이만큼 크셨네요?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

몸종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여자아이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반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여종들도 이 상황이 아리송하긴 마찬가지였다.

정교랑이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여자아이 앞에 멈추어 서서 멱리를 들어 올렸다. 여자아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정교랑의 뒤에 서 있었던 여종들은 정교랑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 여자아이의 놀란 얼굴만 볼 수 있었다.

“이거 먹으렴.”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여자아이에게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주머니 안에 든 것은 정교랑이 배고플까 봐 반근이 싸 놓은 간식이었다. 주머니는 태평거에서 특별히 주문하여 제작한 것이었는데, 들고 다니기가 편하여 반근이 몇 개 챙겨둔 터였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로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그 모습을 본 여종들은 깜짝 놀랐다. 아직 어린 나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범절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는데 낯선 사람이 준 것을 좋다고 이리 덥석 받아 버리다니?

여종들이 엇, 하면서 여자아이를 제지하려고 다가가는 찰나 장씨 가문의 쪽문이 열렸다.

“원아(瑗兒) 아씨, 어서 오세요. 부인께서 부르십니다.”

쪽문에서 나온 두 여종이 여자아이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강가에 있던 여종들은 서둘러 여자아이의 손을 잡으며 건네받은 주머니를 받으려고 했다.

정교랑은 이미 뒤돌아 걸음을 옮긴 후였다.

“저기요, 이건 저희가 받을 수 없어요.”

여종들이 정교랑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반근이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로 여종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받아주세요. 간식일 뿐이에요. 다시 만나게 된 기념으로 드리는 선물로 치죠.”

다시 만난 기념으로 드리는 선물?

여종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설마 정말로 아는 사이인가?

“아씨, 저분을 아세요?”

여종들이 여자아이를 향해 물었지만, 여자아이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엄청 예쁜 언니네.”

여종들은 여자아이의 모습에 풉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이제 와서 간식 주머니를 빼앗기도 그렇고, 주머니를 건넨 낭자가 이미 멀리 가기도 한 후였다. 게다가 쪽문에서 나온 여종들이 재촉하는 바람에 주머니는 결국 여자아이의 손에 남게 됐다.

“어머니, 어머니.”

여자아이가 나막신을 벗고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앉아서 장부를 보고 있던 미모의 여인이 손에 쥔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여인은 따뜻한 미소로 여자아이의 손을 잡으며 반겼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여인의 물음에 여자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빛을 반짝이면서 대답했다.

“어머니, 엄청 예쁜 언니를 만났는데, 아버지의 서재에 걸린 그림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여인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여자아이의 말을 따라 했다.

“정말 그렇게 예쁜 미인이 있었어?”

이때 대청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미인이기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문 쪽을 쳐다보니, 청색 장포를 입은 젊은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원조 오라버니.”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면서 외쳤다. 한원조가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 미모의 여인이 웃으며 물었다.

“술은 깼고?”

한원조는 창피한 듯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게 다 고모부님이 술을 너무 잘 마셔서 그래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 그렇지.”

미모의 여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다.

손아랫사람으로서 고모의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던 한원조는 그저 어색한 듯 코를 긁적이고는 여자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원아, 어떤 미인을 만났다고?”

한원조가 화제를 바꾸었다.

“연을 날리고 있었는데, 누구 몸에 떨어졌어요. 진짜 예쁜 미인이더라고요, 그림처럼 예뻤어요.”

여자아이가 앞뒤 순서도 없이 말했다. 한원조는 여자아이의 말을 들으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놀리듯 말했다.

“난 못 믿겠다. 우리 원아보다 더 예쁜 미인이 어디 있다고 그래.”

“진짜 있어요. 오라버니가 본 적이 없어서 그렇죠. 그 미인이 나한테 준 게 있다고요. 엇, 어디 갔지?”

옆에 있던 여종이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부인, 이게 그 낭자가 아씨께 드린 선물이에요.”

정말로 미인이 있었다고?

미모의 여인과 한원조는 동시에 놀랐다. 미모의 여인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한원조가 먼저 주머니를 낚아챘다.

주머니는 꽤나 섬세한 손길을 거쳐 정교하게 만들어진 듯했다. 한원조는 주머니의 한쪽에 수놓아진 작은 글자를 보았다.

“태평거.”

한원조는 조용히 글자를 읽어보고는 멈칫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한원조가 멈칫하는 것을 본 미모의 여인이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원조는 생각을 떨치고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아이가 한원조의 손에서 주머니를 빼앗아 조그마한 간식 몇 개를 꺼냈다.

“어머니, 저 이거 먹어도 돼요?”

여자아이가 기쁜 얼굴로 물었지만, 여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버릇없이 굴지 말아라. 여인이 이렇게 먹을 것을 밝히면 쓰나. 어찌 외부의 음식을 함부로 먹으려 해?”

여인이 혼내듯이 말하자 여자아이는 풀이 죽어 간식을 내려놓았다.

“저희가 제지하려고 했는데, 그 낭자가 너무 빨리 가 버리는 바람에 불러세우지 못했습니다.”

여종들이 황급히 몸을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여인의 질책이 여자아이가 아닌 자신들을 향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이더냐?”

미모의 여인이 물었다.

“타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집을 빌리려는 것 같던데, 여기까지 와서 묻더라고요.”

여종이 대답했다. 미모의 여인은 그러냐고 대꾸한 뒤, 훈계를 몇 마디 덧붙이고는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가지고 물러나거라.”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네요. 고모님, 이거 저 주세요.”

여인의 말에 한원조가 냉큼 주머니를 집으며 말했다. 미모의 여인이 한원조를 흘겨보았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식탐이 많았다고. 너도 그만 돌아가거라. 집을 나온 지 이틀이나 됐으니 돌아가서 밀린 공부도 해야지. 네 아버지가 모처럼 집으로 돌아오셨으니, 얼른 가 보거라.”

한원조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예를 올리며 물러났다.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간 여종들은 한원조가 말을 타고 사환과 떠나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여종들이 문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별안간 여종 중 하나가 발걸음을 멈추고 강가에 있던 저택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다른 여종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좀 전의 그 시종, 왠지 낯이 익어.”

여종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아니야?”

다른 여종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여종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시종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 내려 애썼다.

도대체 어디서 봤더라?

숙주(肅州)는 동강현 바로 옆에 있는 성으로, 동강현의 경계를 넘으면 바로 숙주 지역이었다. 다그닥 소리를 내며 종일 내달린 말이 숙주성에 도착했다.

“십구공자님이 돌아오셨네요.”

한원조가 마당에 들어서자 여종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이제 막 등불이 밝아진 것을 보아하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여종과 몸종들은 전부 마당으로 나와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원조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물었다.

“아직 저녁을 드시진 않으셨고, 이야기 중이세요.”

여종이 조용히 대답했다.

“아, 그럼 난 잠시 후에 다시 오겠다.”

한원조가 곧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대청의 문이 열렸다.

“십구 왔니? 어서 들어오거라.”

안에서 부인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원조는 예, 하고 대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에는 한원조의 부모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세히 보니 어머니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아버지의 안색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네 고모는 몸 상태가 괜찮더냐?”

한원조의 부친이 물었다.

“아주 좋으시던데요. 고모님은 아버지께서 그렇게 여쭈실 줄 알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병이 나은 후로는 감기 한번 걸린 적 없다고요. 얼마 전에는 의원을 불러 맥을 짚었었는데, 회임인 것 같더래요. 다만, 아직 석 달이 안 됐으니 좀 더 지켜보고 좋은 소식을 알리겠다 하셨습니다.”

한원조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들은 한원조의 부모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정말 잘 됐구나.”

부모의 표정이 밝아지자, 한원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들이 잠시 잡담을 나누는 사이, 여종이 문밖에서 집사가 도착했다고 알렸다. 한원조의 부모는 일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집사가 장부 두루마리를 한가득 품에 안고 들어왔다.

“집안 돈을 쓰려는 거면, 나도 안 된다고는 안 할게요. 그래도 숙부님들한테 말씀은 하셔야 해요.”

한원조의 모친이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야지 뭐 어쩌겠소. 갚지 않을 것도 아닌데. 전운사에서 돈을 내려주면, 그때 갚으면 될 거요.”

한원조의 부친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운사의 돈이 언제 그렇게 빨리 내려왔다고요. 갚기는요. 이번에 갚으면 다음번은 또 어쩌고요.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어요. 구덩이나 다름없으니 뛰어들면 안 된다고 그리 말렸는데 기어이 뛰어들었잖아요. 이 일을 이제 어쩌면 좋아요.”

한원조의 모친이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한원조는 잠시 말을 삼키다 입을 열었다.

“아버지, 혹시 도랑을 보수하는 일 말씀입니까?”

한원조의 부친은 반강현(盤江縣)의 현령이었다. 몇 년 내내 홍수에 시달린 반강현은 도랑을 보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도랑을 보수하는 것은 여간 큰 공사가 아니었다. 동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동의하는 이들은 이 일이 백성을 위한 백년대계라고 생각했지만, 반대하는 이들은 백성을 혹사하고 물자를 낭비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도랑 보수를 결정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난 지금, 공사의 진전은 더뎌지고 급기야 인력난과 금전난까지 심각해졌다.

“아버지께서 옳은 결정을 하셨습니다. 도랑 보수는 해야 마땅하지요.”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수해야 하는 걸 누가 모르나요. 다른 사람들은 안 하는 걸 왜 당신이 하냐는 말이에요. 그만큼 어려우니까 아무도 안 하는 거 아니겠어요?”

한원조의 모친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모두가 쉬운 일만 하려 들며 어려운 일을 기피하면, 누가 나랏일을 하겠소.”

한원조의 부친은 부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사에게 앉으라고 한 뒤, 집사가 가져온 장부 두루마리를 건네받으며 말을 이었다.

“도랑을 보수하는 걸 더는 지체할 수 없소. 내년 우기가 오기 전까지 공사를 끝내지 못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거요.”

“인부를 좀 더 징용할 수는 없습니까?”

한원조가 묻자 그의 부친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사람을 모을수록 식량이 많이 필요해져. 전운사에서는 그만한 돈을 내려주지 않을 거다.”

한원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친의 말에 동의했다.

“식량이 돈보다 중요하죠. 그럼 돈을 더 써야겠네요.”

아들의 동의를 얻으니, 부친의 결심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는 곧바로 집안 돈을 빌리는 일에 대해 집사와 함께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원조는 자리를 피해 주려고 예를 올린 뒤 방에서 나왔다.

“집안 돈이 당신 돈이에요? 당신이 원한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그런 돈이냐고요. 숙부님들한테는 뭐라고 말할 거고, 아버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릴 건데요.”

“집안 돈은 쓰지 않을 거요.”

“그럼 내 혼수를 쓰겠다는 거예요? 내 혼수는 우리 가족들 먹여 살리기도 벅차요. 내년이면 우리 십구 혼례도 올려야 할 텐데, 그럼 또 돈이 많이 나가잖아요.”

“그럼 일단 내 명의로 된 땅부터 팔아야겠소.”

“땅을 팔다니요! 땅을 팔아서 도랑을 보수하겠다고요? 당신이 이런다고 해서 청렴하단 소리를 들을 줄 알아요? 이건 다른 관리들의 뺨을 후려치는 일이나 다름없어요. 이건 세속에 영합해 명성을 얻는 짓이에요. 내일 그런 일을 하면 모레쯤엔 어사들이 당신을 탄핵할걸요!”

한원조는 한숨을 푹 쉬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부모가 계신 쪽을 쳐다보았다. 이어 마당에서 조용히 눈치를 보며 목각처럼 쥐죽은 듯 서 있는 여종들을 둘러보았다.

어머니 말씀이 맞긴 하지. 아버지께서 좋은 마음으로 이 일을 하시려는 건 알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이는 정도(正道)가 아닐 수 있다. 조정의 관리로서 성실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잘하는 건 더 중요하다. 좋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더라도,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만약 지금 같은 시기에 아버지께서 상관의 질책이라도 받는다면, 도랑 보수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일 년 가까이 쏟아부었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결국, 돈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집안 돈은 차마 건드릴 수 없고, 어머니의 혼수도 건드릴 수 없다. 아버지의 땅은 더더욱 건드릴 수 없고. 한씨 가문의 가산은 상당한 규모였지만, 당장 현금을 융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한테 돈이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한원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돈은 혼례를 올린 뒤에야 생기겠지. 아, 내 돈이라기보다는 아내의 돈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

미래의 아내 생각에 한원조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여 허리춤에 매달아 둔 향낭을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 아주 영험한 사찰에서 구한 부적이 있다고 했어. 모든 일이 생각하는 대로 풀린다고.”

한원조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미소지었다. 그는 향낭을 손에서 몇 번 흔들어 보았다. 은은한 불빛 아래 오색빛깔로 빛나는 향낭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럼 하늘에서 돈이나 뚝 떨어지게 해 줬으면.”

한원조는 혼잣말을 하고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공자님?”

앞쪽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환이 한원조 쪽으로 돌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한원조는 향낭을 내려놓고 소매를 툭툭 털며 말했다. 아무래도 얼른 돌아가 등불 켜고 공부하여 하루라도 빨리 과거에 급제하는 게 훨씬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원조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걸려 있을 무렵이었다. 어제 종일 말을 타고 오느라 피곤한 몸으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한 탓이었다.

그는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서재에 걸려 있던 활을 꺼내 마당으로 나가 활쏘기 연습을 했다. 한참 동안 활을 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고 몸의 근육들이 깨어나는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땀에 젖은 몸을 깨끗이 씻은 한원조가 밥을 먹기 위해 활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사환 하나가 마당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 밖에서 누가 공자님을 찾아오셨답니다.”

“나를? 누가?”

한원조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었다.

“원조, 나야.”

사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밖에서 누군가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젊은 사내 하나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사내는 비단 장포를 두르고 허리춤에 옥대를 메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기름칠을 하여 반질반질했고 얼굴에는 허옇게 분칠을 한 채였다. 곧 눈보라가 칠 것 같은 날씨인데도 젊은 사내의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다.

젊은 사내를 보자마자 한원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곽씨 성을 가진 젊은 사내의 이름은 후(厚), 자는 자균(子均)이었다. 그의 집안도 한원조의 가문처럼 숙주에서 명망이 있는 명문가였다.

그는 한원조와 나이도 비슷했고, 이름도 서로 연관이 있었다. 한원조는 이름이 균이고, 곽후는 자가 균이었다. 같은 성에 같은 이름, 같은 자를 쓰는 사람도 많다지만, 한 성안에 있는 두 명문가 자제들의 이름이 겹치는 건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이름 때문에 곽 부인이 한씨 가문까지 와서는 한원조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주라고 부탁했지만, 한 부인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이 일로 두 부인 간에 서로 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사소한 일이기도 하고, 고작해야 여인네 사이의 기 싸움이라고 생각한 두 가문의 남자들은 금세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두 가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전처럼 사이가 좋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두 가문의 아들들이 자라면서 키, 외모, 학업, 혼사 등을 은근히 비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한원조가 곽후보다 다소 우월한 편이었다.

한원조는 굳이 남과 비교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곽후는 그와 반대로 비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일상에서 서로 마주치는 일이 생길 때면 곽후는 꼭 한원조와 입씨름을 하여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반면 서로 비교하는 것을 싫어하던 한원조는 뭘 해도 트집을 잡는 곽후가 불편하여 피할 수 있다면 그를 최대한 피하려 했다.

하지만 곽후가 집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한원조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곽 공자였군.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한원조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곽 공자는 웃으면서 한원조의 어깨를 탁탁 쳤다.

“원조도 참 건망증이 심하네. 당연히 지난번의 일 때문이지.”

한원조는 활을 내려놓는 빌미로 곽 공자의 손을 피했다.

“지난번 일?”

“강주 선생께서 쓰신 논어 해설서 말이야. 어때, 한번 생각해 봤나?”

곽 공자가 다급히 물었다.

지난봄, 과거에 낙방한 한원조가 경성에서 돌아오자 과거를 보러 가지 않았던 곽후는 기뻐서 춤을 출 지경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장강주 선생이 친필로 주석을 달아 놓은 논어책을 한원조가 얻어 왔다는 소문이 퍼졌고, 온 성의 서생들은 한 번이라도 그 보물 같은 책을 보고 싶다고 입을 모아 말하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곽 공자는 몹시 배가 아파서 한원조의 논어책을 사겠다고 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은 책 한 권 팔겠다고 궁상떠는 가난한 집안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한원조는 그의 제안을 가볍게 무시했다.

오늘 다시 찾아와 그 이야기를 꺼내는 곽 공자를 보며 한원조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고민할 필요가 있겠나? 당연히 안 되지.”

“일천 관이면 어떤가?”

곽 공자가 손가락 하나를 내밀며 가격을 제시했다.

일천 관!

한원조는 재물에 쉽게 동요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곽 공자가 제시한 가격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원조, 내 말 좀 들어봐. 이 책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베껴 쓰면 되잖나. 강주 선생의 주석이니 자네도 잃고 싶지 않고, 학업에 지장을 주고 싶지도 않겠지. 나는 단지 강주 선생의 친필 서적을 갖고 싶을 뿐이야. 이러면 서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니, 나쁘지 않은 거래 아닌가.”

곽 공자가 다시 팔을 들어 한원조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외에 내가 돈도 따로 빌려줄게.”

한원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돈을 빌려줘? 내가 왜 자네의 돈을 빌려야 하는데?”

“자네는 필요 없겠지만, 자네 부친께서는 돈이 필요하지 않나?”

곽 공자가 웃으면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랑을 보수하는 것은 큰 공사인지라, 성안에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한원조는 멈칫하고 고민에 빠졌다. 한원조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곽 공자가 덧붙였다.

“내가 큰돈을 빌려주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은 도와줄 수 있지 않겠나. 일단 이번 달은 버티고 보는 거지.”

늦어도 올해 겨울에는 전운사에서 돈이 내려올 것이다. 하지만 곧 있으면 겨울이 되니, 보수 공사를 진행하려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갈 텐데. 만약 급전을 미리 마련해 둘 수 있다면.

물건은 본디 제 가치를 충분히 발휘해야 좋은 것이니, 이 논어책을…….

“아닐세. 이 책은 친구가 선물해 준 것이라 팔 수 없어.”

한원조가 미소지으며 말하고는 어깨에 걸쳐진 곽 공자의 손을 치워냈다.

저 책벌레 놈이!

곽 공자는 속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

“오백을 더 내지!”

“난 돈 필요 없네.”

한원조가 재차 웃으면서 말했다.

“돈이 필요 없다고? 웃기시네.”

곽 공자가 콧방귀를 뀌면서 한원조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대화하던 중 사환 하나가 또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 누군가가 공자님을 찾습니다.”

또 날 찾아?

한원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많이 찾네.

“어느 분이시더냐?”

한 공자의 물음에 사환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분입니다. 경성에서 왔다고 하시던데요.”

경성? 경성에서 친구들 몇을 만들긴 했다만, 그들도 각지에서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성에 올라온 사람들이라 경성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런데 경성에서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고?

한원조는 의구심을 가진 채 손님을 맞이할 의복으로 갈아입은 뒤 바깥 대청으로 들어갔다.

곽 공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원조를 따라 들어왔다.

바깥 대청에는 얇은 털옷을 입고 두모를 쓴 중년의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먼 길을 떠나온 고생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누구신지?”

한원조가 물었다. 두 남자는 한원조의 목소리를 듣고 서둘러 문가로 가서 그를 맞이하며 허리를 숙이고 큰절을 올렸다.

“주인어른, 돈을 드리러 왔습니다.”

두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주인어른?

한원조는 깜짝 놀랐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십구, 원조라는 호칭으로만 불렸다. 물론 아주 옛날 젖먹이 시절 때는 어머니가 ‘우리 보배’와 같은 호칭으로 부른 적도 있었지만. 또 싫어하는 호칭이긴 하지만 이름과 성을 붙인 한균도 있고 자식이나 녀석 등등 다양한 호칭이 있긴 했다.

하지만 ‘주인어른’이라는 호칭은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리고 뭘 주러 왔다고?

“돈이요. 주인어른의 배당금 말씀입니다.”

두 남자는 어리둥절한 한원조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나요?”

한원조는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되물었다. 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쪽 소매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공손한 자세로 한원조에게 건넸다.

“사람을 잘못 알아보신 건 아니오?”

한원조는 봉투를 받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두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있나요. 소인이 다른 일은 잘 못 한다지만, 주인어른까지 몰라뵌다면 정말 쓸모없는 놈이지 않겠습니까. 주인어른께서는 숙주 한씨이며 이름은 균, 자는 원조, 한씨 가문의 십구공자 아니십니까.”

내 이름은 비밀이 아니니, 이 정도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누가 일부러 무슨 짓을 꾸미는 건가?

“댁들은 누구요? 내가 어떻게 댁들의 주인어른일 수가 있소?”

한원조는 여전히 봉투를 건네받지 않은 채 물었다.

“저희는 태평거의 사람입니다. 저희도 태평거에 뒤늦게 들어가 주인어른께서 어떻게 저희의 주인어른이 되셨는지는 자세히 모릅니다. 하지만 문서에 주인어른의 존함이 명백히 쓰여 있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주인어른의 손에 계약서가 있지 않으신지요.”

태평거!

한원조는 이 세 글자를 듣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곽 공자는 이 상황이 놀랍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마음에 두 남자가 건넨 봉투를 직접 받아왔다.

“배당금이 얼마나 되는지나 한번 보세. 머나먼 경성에서 온 거라고? 이게 진짜야 가짜야?”

곽 공자가 말하면서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던 비전을 꺼냈다. 그는 비전 위에 쓰인 숫자를 보고는 하마터면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일만 관!”

곽 공자는 고개를 돌려 한원조를 쳐다보았다.

이 자식은 정말로 돈이 필요 없구나. 일만 관!

한원조도 곽 공자가 외친 숫자를 듣고는 그 자리에 얼어 버렸다.

무슨 농담을 하고 있는 거야!

“이게 내 것이라 했소?”

한원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맞습니다, 주인어른.”

두 남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만 관!

한원조는 곽 공자가 쥐고 있던 비전을 낚아챘다.

맞아. 정말이잖아. 숙주의 진주원에서 발행한 비전이고, 기명 비전이야. 이 위에 똑똑히 한균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일만 관! 정말로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졌네!

“누가 직접 찾아와서 십구낭에게 일만 관을 주고 갔다고?”

소식은 금세 안쪽 대청까지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듣고는 경악한 한씨 부부가 입을 모아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노야,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집사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핵심은, 그 사람들이 십구공자를 주인어른이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배당금이라고 했고요.”

주인어른! 배당금! 지금까지! 그건 앞으로 더 많은 배당금이 끊임없이 들어온다는 뜻이잖아!

한씨 부부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가만히 있었다.

“십, 십구낭이 언제부터 남의 주인어른이 된 거야? 어디의 주인어른인 거고?”

같은 시각. 주인어른인 한원조는 서재에서 온갖 서랍을 다 뒤지며 무언가를 다급하게 찾아댔다. 사환도 한원조를 따라서 손이 닿는 모든 곳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깔끔하고 깨끗했던 서재는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도 없어.”

한원조는 책을 한 권씩 빠르게 펼쳐 보고 바닥이나 책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 때문에 책상 위에 놓여있던 태평거 세 글자가 새겨진 간식 주머니는 그 책더미 아래에 깔려 버렸다.

“공자님, 도대체 어느 책에 껴두신 겁니까?”

사환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뒤적거리다 한원조에게 물었다.

“작년에 경성에 들고 갔던 책더미인데.”

한원조가 기억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어디 한두 권입니까. 다녀오신 뒤로 그 책더미를 어디에 뒀는지도 모릅니다. 혹 남에게 빌려주신 건 아니신지요.”

빌려줬나?

한원조가 멈칫했다. 제자리에서 서서 경성에서 돌아왔을 때를 열심히 회상해 봤지만, 그 문서를 책 안에 꽂아뒀던 것만 기억할 뿐, 정확히 어느 책에 꽂아 넣은 건지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진짜 잃어버린 거라면…….

“진짜 잃어버렸다고, 설마 저 사람들이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하진 않겠죠?”

사환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무려 일만 관이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액수일 수도 있어.

한씨 가문이 일만 관 정도의 돈을 전혀 만져 보지 못한 집안은 아니지만, 무려 일만 관이나 되는 돈이다. 심지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문서를 못 찾으면, 내가 직접 그 돈을 돌려줘야지.”

한원조가 말했다.

설령 문서를 찾더라도, 이 돈을 정말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고.

“십구낭, 어떻게 된 일이냐?”

한씨 부부가 엉망진창이 된 서재를 보고는 굳이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고 문 앞에서 물었다.

“네가 어떻게 무슨 점포의 주인어른이 된 거야? 과거 시험을 보러 경성에 갔을 때의 일이더냐?”

한원조가 한숨을 쉬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하자면 깁니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 장난 같기도 한데.”

한원조가 말하던 중에 그의 뒤에 있던 사환이 악 소리를 내질렀다.

“공자님! 이거 맞죠?”

한원조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사환이 책에서 빼낸 문서를 쳐다보았다.

“맞다! 바로 그거야!”

한원조가 외쳤다. 그는 바닥에 잔뜩 깔린 책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사환의 손에 들린 문서를 받아왔다.

한원조는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종이 한 장을 책상에 펼쳤다. 종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관청의 새빨간 행정용 인장이었다.

  • 지금 당장 품삯을 줄 수 없는 상황이라, 일단 이 지분을 내주었습니다. 전 공자님께 은혜를 갚고자 지분의 명의를 공자 앞으로 돌렸고요.

  • 은인이세요.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제 집안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는커녕, 저는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한원조는 자신의 앞에서 황공한 모습으로 연신 이마를 찧으며 절을 해대던 사내가 떠올랐다. 사실 그는 그 사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사내가 네게 은혜를 갚으려 이 배당금을 준 거라고?”

한원조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한씨 부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원조를 쳐다보았다.

“일 년도 채 안 됐는데, 지분 하나당 벌써 일만 관씩이나 배당금이 생겼다고?”

무슨 점포가 그래! 이건 거의 돈벼락을 맞은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장부도 가져왔어요.”

한원조가 책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는 책상 위로 시선을 옮기고 나서야 책상이 책더미로 뒤덮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한원조는 책상 앞으로 가서 가득 쌓인 책들을 밀어내고 두꺼운 장부 두 권을 꺼내 부친에게 건넸다.

한원조가 몸을 돌리는 동시에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여 보니 바닥에 떨어진 건 다름 아닌 간식 주머니였다.

태평거.

태평거!

한원조는 서둘러 간식 주머니를 주워들고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설마 이 태평거가 그 태평거인가?

“이건 정식 장부다. 가짜가 아니야. 허투루 쓴 것 같지도 않고. 여기 관청 행정용 인장이 찍힌 것 좀 봐.”

한원조의 부친이 말하자 한씨 부인이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가 그리 잘 된 편도 아닌 것 같은데. 나간 돈이 너무 많아요. 처음에 품삯도 주지 못한 이유가 있네요.”

한씨 부부는 아들이 말한 점포의 위치를 떠올려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점포는 외곽의 길가에서 조촐하게 장사하는 정도의 규모라고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그 정도 규모의 점포라면 일 년 내내 벌어도 일만 관을 벌기 힘들 텐데.

두 사람은 장부를 한 장씩 넘기더니 할 말을 잃고 눈이 점점 커졌다.

“왜 이렇게 갑자기 장사가 잘됐지?”

한씨 부인이 말했다.

한원조의 부친은 대답할 새도 없이 장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았다. 물론 세세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이 장부가 얼마나 명료하고 정확하게 작성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유명하지 않아서 장사가 잘 안 됐는데, 어떠한 계기가 있어 갑자기 이름을 알린 후로 장사가 잘됐나 보오.”

한원조의 부친이 고개를 들어 한원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유명해졌을까?”

한원조는 넋을 놓은 채 제자리에 서서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부친이 두어 번 부르고 나서야 한원조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건 무엇이냐?”

한씨 부인이 한원조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보면서 물었다.

한원조가 몸에 지니거나 입고 있는 것들은 모두 한씨 집안의 것들이었다. 정혼자가 선물해 준 향낭 외에, 한원조는 절대로 외부인의 물건을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저런 자수품의 경우에는 더더욱.

한씨 부인은 아들의 어머니이자 여인의 직감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아, 이건 고모님네서 얻어온 거예요.”

한원조가 웃으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한씨 부인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아, 하고는 주머니를 가져와서 간식 하나를 꺼냈다. 간식은 좀 전에 책더미에 눌려서 납작해지고 으스러져 있었다. 한씨 부인이 간식을 손바닥에 놓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입에 살짝 넣어 맛을 음미했다.

“음, 맛있네.”

한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이게 설마 그 태평거에서 만든 게냐?”

한원조의 부친이 물었다.

“아버지, 경성에서 여기까지면 족히 한 달은 걸립니다. 간식인데 그렇게 오래 둘 리는 없지요.”

한원조가 웃으며 대답했다. 한원조의 부친도 물어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세 식구가 서재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주위에는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책들이 쌓여 있었다.

세 사람은 이렇게 앉아 있는 모습이 어째 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의 일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우스운 면이 있었다.

한씨 부인이 장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장부를 보면, 다음번에 보내올 배당금은 고작 일만 관 정도가 아니야.”

배당금이 너무 많아. 일 년도 안 되는 시간에 벌써 내가 혼수로 해 온 논밭 두 개를 살 정도라니. 그럼 이후에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한원조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말했다.

“그때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외곽 길가에 있는 작은 점포니까 일 년도 채 못 채우고 문을 닫을 수도 있겠다고 여겼고요. 그 시기를 넘긴다고 한들, 얼마나 잘 되려나 싶었죠. 고작 지분 하나가 얼마나 하겠냐고 생각했습니다.”

한원조는 고개를 숙여 눈앞에 놓인 비전 증서, 장부와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이렇게 큰돈이 될 줄 알았다면, 그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지분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지. 지금이라도 알게 됐으니 늦지 않았어.

“이 돈은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한원조의 말에 한씨 부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숙수가 은혜를 갚는 마음은 받되, 이 돈은 받으면 안 된다.”

바깥 대청에서 기다리면서 한씨 가족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우리 아씨께서 하신 말씀이 딱 맞네요. 한씨 주인어른께서는 석사(石奢)와 같은 분이셔서 만약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면 발 벗고 나설 테지만, 돈을 드리면 절대로 받으실 분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아씨?

한원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차에 앉아 환하게 미소짓던 시녀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다.

설마.

“이 태평거의 주인이 그 여인이오?”

한원조는 저도 모르게 두 남자에게 물었다.

그 여인의 집안? 누굴 말하는 거지?

한씨 부부는 의아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좀 전에 아들이 설명을 하긴 했지만, 아직 말을 못 다한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두 남자는 한원조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주인어른 중 한 분이지요.”

역시 그 여인이었어! 진 상공 댁인가?

그럼 이 돈은…….

두 남자 중 하나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주인어른, 그 돈은 받아두십시오. 저희 아씨께서 주인어른이 그 돈을 받으실 때까지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주인어른, 저희는 잡일이나 하며 식구들 먹여 살리기도 퍽 힘든 놈들입니다. 진정 불의를 보고도 지나치지 못하시는 호걸이시라면 부디 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하실 말씀이 있다면 주인어른들끼리 나누시고요.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인다 한들, 말을 전하는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지요.”

한씨 가족이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소. 그럼 이 돈은 우리가 받아 두지.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일인 거고, 자네들의 주인어른과 해결해야 할 일이니, 자네들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리다.”

한원조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두 남자가 공손하게 예를 표하며 그를 칭찬했다.

“감사드립니다. 역시 주인어른께서는 의협심이 강하십니다.”

“오는 동안 고생이 많았네. 여봐라.”

한원조의 부친이 웃으면서 사환 둘을 불러왔다.

“일단 가서 편하게 쉬게나. 경성만큼 볼 것이 많은 곳은 아니지만, 숙주에도 경치가 좋은 곳이 몇 군데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고.”

한원조의 부친이 말하자 두 남자는 흔쾌하게 알겠다고 한 뒤, 감사의 예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대청에는 다시 한씨 가문의 세 식구만 남았다.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돈은 우선 아버지께서 쓰십시오.”

한원조가 비전을 부친에게 쥐여 주었다.

“땅을 팔지도, 어머니의 혼수를 팔지도 마세요.”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한원조의 부친이 머뭇거렸다.

“그럼요. 좀 전에 곽자균이 여기서…….”

한원조가 말하던 도중에 한씨 부인이 기분 나쁘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곽후라고 불러라. 자균은 무슨.”

한원조는 아차 싶은 마음에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전에 곽후가 제가 돈을 받은 것을 보고 갔습니다. 며칠만 지나면, 곧 숙주성 전체에 제가 경성에 점포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러니 이 돈은 아버지께서 쓰시는 게 가장 바람직합니다. 이 돈은 저희 한씨 가문의 돈과 무관할뿐더러 가산을 팔아서 마련한 돈도 아니니까요. 외부인이 이걸 가지고 트집 잡을 수도 없을 겁니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너무 술술 풀리니, 한원조의 부친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네가 경성에 한 번 다녀온 일로 이렇게 운 좋은 일이 생기다니. 아 참, 그 아씨라는 이는 누구더냐?”

한씨 부인이 웃으면서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한원조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확실치가 않아서요. 제가 직접 그 숙수를 도왔다기보다는, 제가 그 숙수를 도울 수 있게 다른 사람이 절 도와줬어요.”

한원조는 심호흡을 하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 생각에, 그 사람은…….”

한원조는 뜸을 들였다.

“그 사람은 뭐?”

한씨 부인이 진지한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추궁했다.

“진소 상공 댁의 사람입니다.”

진소!

한씨 부부는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이는 일만 관의 배당금보다도 훨씬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지방의 현령으로 십수 년을 지낸 한원조의 부친조차도 폐하를 알현할 수 있는 지체 높은 관리를 본 적 없는데, 과거 시험을 치르러 경성에 한 번 갔다 온 그의 아들이 무려 상공 어른댁의 사람을 알아 오다니!

“누군지 생각났어!”

한편 동강현의 장씨 가문에서는 여종 하나가 다리고 있던 옷을 내팽개치고 소리를 지르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방 안에서 옷을 다리고 있던 다른 여종들이 화들짝 놀라 바닥에 내팽개쳐진 옷가지를 주웠다. 여종들은 혹여나 옷이 망가지지는 않았을까 조심히 만져보고는 뛰쳐나간 여종을 몇 번 불러봤지만, 그 여종은 벌써 저만치 뛰어가 버린 뒤였다.

“부인, 부인.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요!”

여종이 무릎을 꿇어앉은 채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본 한운랑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옆에 앉아 있던 장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듯 말했다.

“버릇없는 것. 운랑, 아랫것들을 너무 풀어 줘서는 안 된다.”

한운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네, 어머님. 염려 마세요. 이 며느리가 알아서 할게요.”

한운랑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장 노부인의 기세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장 노부인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장 노부인은 눈앞의 며느리를 질책할 수 없었다. 그때처럼 죽은 며느리를 다시 살려낼 정 낭자가 없으니, 한 번이라도 더 며느리를 분통 터트려 죽였다가는 정말로 큰일이 날 것이다.

“노부인, 부인. 그 시녀요. 그 시녀가 바로 예전에 부인의 병을 고쳐줬던 그 시녀예요! 어제 그 사람이 바로 그 시녀였어요! 어쩐지, 원아 아씨의 키가 컸다고 하더라고요. 아씨를 아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한 거였네요!”

여종이 다급하게 외쳤다.

뭐라고?

장 노부인과 한운랑은 여종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그 정 낭자 말이냐?”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네, 네. 왜 그 집을 보러 가나 했는데, 집을 빌리려는 게 아니라 전에 머물렀던 집을 둘러보러 가는 거였어요. 아이고, 아이고. 그 낭자가 아씨께 간식도 한 주머니 줬는데. 아이고, 아이고. 그 시녀가 분명히 아씨를 아는 눈치였는데 제가 그 자리에서 알아보질 못했네요! 아이고, 이를 어째.”

여종은 계속 떠들어 댔지만, 장 노부인과 한운랑에게는 여종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 어머니, 그 낭자는 그림에 있던 미인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한운랑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정말로 그 여인인가? 정말로 그 여인이었던 건가?

“빨리, 빨리 가서 찾아!”

한운랑이 외쳤다. 곧이어 한운랑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아예 자신도 문을 나섰다.

“어서 찾아라!”

장 노부인도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신의를 찾으면, 이번에는 비방이라도 얻어와야지. 다음에 또 며느리가 죽네 사네 하면 그걸로 막게.

동강현은 그다지 큰 고을이 아니었지만, 이름도 모르고 외모도 모르는 외지인을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사흘이 지난 뒤에야 정교랑 일행이 묵었던 객잔을 알아냈지만, 일행은 이미 동강현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아마 경성에서 왔을걸요. 시종들의 말투를 들어보니 전부 경성 사람 같더라고요. 근데 어디로 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나흘 전, 동이 트기도 전에 떠났어요.”

객잔의 점원이 말했다.

또 이렇게 됐네. 아니지, 적어도 지난번보다는 나아. 적어도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는 알게 됐으니까.

도대체가 이걸 인연이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볼 수 있는 것 같다가도 왜 자꾸 못 보는 건지!

한운랑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곧 눈이 내릴 듯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눈이 내릴 것이야. 다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이세나. 십 리만 더 가면 강주 경계에 도착하네.”

한참을 달린 끝에 마침내 목적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모두 큰 소리로 기합을 외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모두가 환호하는 이 순간에도 오직 한 사람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공자님, 왜 또 그러십니까?”

마차에 올라탄 노복이 두봉을 두른 채로 마차의 구석에서 미동도 없는 왕십칠을 보고 난감해하면서 말했다.

“곧 집에 도착합니다.”

왕십칠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내가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야.”

왕십칠이 쉰 목소리를 쥐어짜고는 울먹이며 말했다. 노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퉤 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멀쩡하신데 죽는 날이라니요.”

“아범, 나 저 여자랑 혼례 안 올릴래!”

왕십칠이 노복의 팔을 덥석 잡고는 소리쳤다. 반쯤 말하던 왕십칠은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싶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이 나머지 말을 뱉었다.

노복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새까만 먹구름이 강주의 하늘을 뒤덮었다. 서늘한 초겨울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지나다니는 행인들은 옷깃을 여미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강가에서 방망이를 들고 빨래를 하던 여인은 찬물에 꽁꽁 언 손을 입가에 대고 호호 불며 손을 녹였다. 여인이 고개를 들자 여종들 무리가 다리 위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 북쪽에 손님이 왔나?”

여인이 옆에 있던 다른 여인에게 물었다.

“응,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더구먼. 손님들 대접하느라 매일 연회를 연대.”

다른 여인이 부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럼 이따가 우리도 거기 한 번 가 볼까? 도울 게 좀 있나 보고 말이야.”

입김으로 손을 녹이던 여인이 말했다.

북정(北程)에는 하인들이 넘쳐났기에 실상 이들이 가서 도울 것은 없었다. 북정 가문이라고 해야 기껏해야 두 형제의 식구가 다였고, 아이들을 합친다 해도 열댓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연회를 열어도 먹는 입이 몇 되지 않으니, 연회에 사용된 음식이 상에 올려진 그대로 내려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숙수나 부엌 어멈들과 친하게 지낸다면 남는 연회 음식들을 조금 얻어 올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얻어 온 음식들은 온 가족이 족히 이틀은 먹을 양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여인들은 손에 쥐고 있던 방망이를 내려놓고 서둘러 빨래를 정리하여 강가를 따라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쪽문을 지나면 넓은 길이 나왔다. 하늘에서 이곳을 내려다본다면, 강가 일대는 이 큰길을 중심으로 정확히 남과 북,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북쪽에는 새까만 기왓장으로 쌓인 큰 저택이 있고, 구역이 여러 개로 나뉜 저택 내부를 구불구불 긴 회랑이 이어주었다. 구역 사이사이에 만들어진 인공 정원에는 석가산과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누각이 세워져 있어 운치가 있었다.

반면, 길의 남쪽에는 낮고 조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대칭이나 정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집들 사이에는 아무렇게나 쌓아 둔 볏짚이나 창고가 있어 더욱 조잡하고 비좁아 보였다.

두 여인은 잡담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큰길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쪽에는 쪽문이나 정문의 개념이 없었다. 좁고 울퉁불퉁한 길가를 따라 안쪽으로 걷다 보면 코흘리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고,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지도 모를 대화 소리와 닭이 우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 등이 들렸다.

두 여인은 앞도 안 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피하기 위해 골목 한쪽에 잠시 멈춰 섰다. 이때 갑자기 아이고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내 발 떨어져 나가네.”

두 여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스물을 갓 넘긴 듯 보이는 사내가 울부짖고 있었다.

사내는 초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얇은 면으로 만든 청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얇은 옷 때문에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체형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청초해 보이는 사내의 얼굴에 일순간 호감이 들려는 찰나, 그의 어깨 뒤로 휘날리는 화려한 깃발을 보고 두 여인은 서둘러 손짓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사내는 한쪽 어깨에 깃발을 짊어지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연신 얼굴을 때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웠다.

사내는 힘겹게 깃발을 돌돌 말아서 정리했다.

“빌어먹을 사기꾼 놈이! 여기 숨어서 뭐 하는 거야!”

두 여인이 소리쳤다.

“거참, 욕까지 하실 건 또 뭐요. 아주머니들이 먼저 제 발을 밟아 놓으시고선.”

사내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했다. 두 여인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땅에 침을 퉤, 뱉고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아, 아 잠시만요. 아주머니들, 제가 지은 초가집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는데, 혹시 그쪽 헛간에 신세를 좀 져도 되겠습니까?”

사내가 아첨하는 미소를 보이며 부탁했다.

“퉤. 꺼져라, 꺼져. 네 놈이 거기서 살면, 우리 집 집기들은 다 어디에다 두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여인은 사내 앞을 홱 지나갔다.

사내는 두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쯧쯧. 정말 보는 눈이 없네. 그깟 집기 따위보다 훨씬 값비싼 몸인데, 그걸 못 알아보다니. 내 언젠가는 필히 성공하여 밥 한 끼의 은혜를 몇 배로 갚아줄 날이 올 거요. 이건 그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꼴입니다요.”

사내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여유롭게 건들거리며 골목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두 여인은 아이들의 빨래를 넌 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북정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북정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연회를 치우던 중이었다. 두 여인은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반나절 내내 설거지와 청소를 도왔다.

부엌의 작은 의자에 앉아 종일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들기만 하던 집사 부인이 몸을 일으켰다.

“도와줘서 고맙네.”

집사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고는 몸종을 향해 손짓했다. 몸종이 옹기 두 개를 들고 와서 두 여인에게 건넸다. 두 여인은 내심 무척이나 기쁘면서도 겉으로는 손사래를 치며 예의를 차렸다.

“이걸 어떻게 받아요. 다 이 댁 것인데.”

“다 한 식구인데, 못 받을 게 뭐 있어. 안 가져가면 다 상할 게 뻔한데. 괜찮으니까 어서 가져가게.”

집사 부인의 말투에서 귀찮음이 묻어났다.

한 식구라고? 정말 한 식구라면 우리를 이렇게 대할 리가 있나.

두 여인은 집사 부인이 은근히 괘씸했지만, 웃는 표정으로 재차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옹기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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