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정교랑이 진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의 출처는 명나라 문장가 풍몽룡(馮夢龍)이 쓴 <古今笑(고금소)>입니다.
-<교랑의경> 11권에 계속
교랑의경 11권
차례
가는 길
이리 와
재회
정평
-가는 길-
서사근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그의 외침에 어리둥절했다.
“이 말들의 그, 그, 뭐라더라? 아, 편자가 있으면 우리 말들이 손상을 많이 입지 않는대.”
“말굽이 상하지 않으면, 더 많은 준비를 할 수 있고.”
“지금은 귀순한 번인의 군사를 합해도 기마병은 채 오천이 되지 않지만, 나중엔 분명 만 명이 될 수 있을 거야.”
“일만 기마병! 무려 일만 기마병이라고! 전우들, 우리가 드디어 오랑캐의 씨를 말릴 수 있게 됐어! 누란(樓蘭)을 격파하지 않으면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
“길 위에 버리고 온 죽은 말 두 필이 있다고? 그럼 쓰나. 당연히 가져와야지. 얼마나 귀한 말인데. 나중엔 오랑캐들이 우리를 따라 할 수도 있다지만, 하루라도 그들을 앞서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는 길일세.”
“아 맞네, 맞아. 어서 도감 대인, 감찰사 대인, 병마 부지휘 대인께 아뢰어야지.”
주 노대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을 한 서사근은 이리저리 치이다가 결국 바닥에 넘어졌다. 옆에 서 있던 서무수 형제들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른 채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고작 이 말 몇 필로 서북 군영을 강하게 만들 영웅이 된 거라고?”
서봉추가 중얼거리자 다른 형제들도 덧붙였다.
“목숨을 걸고 죽기 살기로 싸워도 호걸에 불과한데. 말 몇 필에 영웅이 됐다고?”
“우리가 적을 죽이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 하나의 열매를 얻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말들은 달라. 이 말들은 백 명, 천 명, 만 명을 도울 수 있지.”
서무수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고, 한가로이 건초를 씹고 있는 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한 명을 위한 의원은 그저 한 사람을 치료할 뿐이지만, 만 명을 위한 의원은 그야말로 나라를 구할 수 있지.”
서무수가 말을 마치고는 하늘의 동쪽을 올려다보았다.
“누이의 세 선물이 너무나 크구나.”
같은 시각, 주육낭도 동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육낭, 그 사내들과 얼마나 친한 사이길래 그래? 어떻게 그 귀한 기회를 그들에게 넘겨?”
주 당숙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육낭에게 묻자, 주육낭이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놈들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그놈들이 뭐라고 저와 아는 사이겠습니까.”
주육낭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을 덧붙였다.
“전 그저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주 당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사실이래도, 기회와 자리를 잘 봐가면서 말해야지.
주육낭은 다시 고개를 들어 동쪽 하늘을 내다보았다.
머나먼 동쪽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비가 오려나 보네! 저 여인은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천둥소리가 하늘을 가르자, 마차 안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못 가, 못 가. 천둥 번개에 사람이 맞아 죽을 지경인데, 계속 가겠다고? 조금만 더 있으면 비까지 내리겠어!”
앞선 마차 행렬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저희 아씨께서 비는 절대로 오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천둥 번개는 금방 지나간다고요.”
누군가가 시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희 아씨가, 저희 아씨가! 에라이, 가는 내내 저 여인네의 말만 듣고 있잖아!
왕십칠이 마차를 멈추라고 소리친 뒤,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공자님!”
깜짝 놀란 노복이 왕십칠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왕십칠은 이미 앞쪽의 마차 행렬에 도착해 있었다.
“정교랑! 정말 말 안 들을 거야? 내가…….”
마차 옆에 선 왕십칠이 우악스럽게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한 왕십칠이 뭐라 따지는 듯했지만, 귀가 찢어질 듯 울리는 천둥소리에 그 목소리는 가뿐히 묻혀버렸다.
눈앞의 소년이 아무런 소리 없이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을 보고 반근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또 한 번의 천둥소리가 지나가자 왕십칠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쩌고 싶은데요?”
마차 안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여인의 목소리에 더 이상은 쉰 소리가 섞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썩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정교랑, 내가 널 집으로 데려가는 거지, 네가 나를 압송하는 게 아니야. 이 사람들은 도대체 내 말을 듣는 거냐, 네 말을 듣는 거냐?”
왕십칠은 눈을 부릅뜨며 마차 안을 노려보았다.
마차 안의 여인은 미동도 없이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검은색 치맛자락이 주위에 흩어져 내려와 마치 만개한 꽃처럼 보였다. 그녀는 금색 수가 놓인 넓은 소매 사이로 내민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책 한 권을 쥐고 있었다.
정교랑은 천천히 눈을 책에서 떼고 왕십칠을 쳐다보았다.
“공자의 말을 듣는 거죠.”
왕십칠이 마차 옆에 서서 흠칫했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미인이란 바로 이런 거겠지. 어떤 상황이 와도 고인 물처럼 미동도 없는 모습. 근데 왜 보면 볼수록 혼이 나가는 것 같을까?
“공자님.”
노복이 옆으로 와 왕십칠을 불렀다. 왕십칠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미인은 미인이지만, 교만해서는 안 되지. 설령 교만한 미인이더라도, 내가 허락할 때만 교만할 수 있는 거지. 자기가 교만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굴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내 말을 듣는다고? 경성 밖으로 나오고 나서부터 내 말 한마디라도 들은 적 있어?”
왕십칠이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집에 가는 거잖아요.”
정교랑이 말하자 왕십칠은 말문이 턱 막혔다. 요란한 천둥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딴 건 됐고. 지금 당장 잠시 쉬어갈 곳을 알아봐. 가는 길에 비를 맞았다가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왕십칠이 소리치자 정교랑이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비 안 맞을 거예요. 난 지금 공자의 말을 듣고 있잖아요. 쉴 곳을 찾아보라고요?”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왕십칠은 한쪽으로 밀쳐졌다.
“도련님, 마차에 오르시지요.”
노복이 조용히 말하자 왕십칠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쉴 곳을 찾아? 이게 지금 내 말을 듣는 거야? 말로만 내 말을 듣는다고 하지, 이게 어딜 봐서 내 말을 듣는 거냐고!”
왕십칠이 앞으로 나아가는 마차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비를 안 맞아? 참나, 꼭 하느님이랑 친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끊임없이 천둥소리가 들려왔지만, 끝끝내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해가 질 때 즈음이 되니 맞은편에서 말 두 필이 달려왔다. 노복이 고개를 내밀어 앞쪽을 쳐다보았다.
마차 행렬의 가장 앞쪽에 있던 집사가 말을 타고 왔던 사람과 몇 마디를 나누고, 말머리를 돌려 정교랑의 마차로 향하고 있었다.
“아씨, 날씨가 좋지 않아 앞쪽 역참(驛站)에 사람이 꽉 찼다고 합니다. 방도 다 나갔고, 바닥에 까는 잠자리도 모두 찼고요.”
조 집사의 말이 끝나자 마차의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어차피 자리가 없으니, 가던 길을 계속 가게.”
조 집사는 즉시 알겠다고 답하고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명령을 하달했다.
지금까지 항상 이랬어.
앞쪽에 있는 조 집사를 보던 노복은 정교랑의 마차로 시선을 옮겼다.
항상 이랬잖아. 모든 일은 다 저 낭자가 결정하는 것이야.
이번에 경성을 떠나는 일만 해도 그랬다. 정교랑을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도 되는지 물어보기 위해 주씨 가문에 갔을 때, 사실 노복은 슬쩍 말을 꺼내며 분위기를 살펴보려 했다.
주씨 가문에서 바보를 잡아두고 놓으려 하지 않거나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기세로 바보를 내치는 것을 예상했지만, 결과는 모든 예상을 엇나갔다. 정교랑이 떠나든, 떠나지 않든 주씨 가문에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노복은 갑자기 옥대교 저택 안에서 들려오던 사내의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저택 안에 있던 사내는 주 노야 하나였다.
주 노야가, 이렇게 어린 낭자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다고?
노복은 이런 황당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한담?
길을 나선 후부터, 주씨 가문의 집사와 시종들이 정교랑을 어떻게 대하는지만 보아도 주씨 가문이 정교랑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정교랑을 아끼거나, 그녀와 친밀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는 정확히 경외감이었다.
조카를 아끼고 따뜻하게 보듬는 것까진 말이 되지만, 조카에게 경외감을 느낀다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말이 되지?
배웅을 나온 공주부의 진씨 가문도, 그날 천가에 꽃등을 보러 나와 정 낭자를 에워쌌던 사람들도. 그 모든 것들이 주씨 가문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반대로 저 여인 덕분에 주씨 가문이 천가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저 여인 덕분에!
노복은 정답을 찾은 듯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설마, 저 여인이?
노복은 다짜고짜 가까이에 있는 주씨 가문의 시종을 붙잡고 말했다.
“너희 아씨…….”
노복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왕십칠의 외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뭐라고?”
앞으로 계속 이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왕십칠이 눈을 부라리며 마차의 휘장을 젖혔다.
“계속 간다고? 역참에 도착했다고 하지 않았어?”
“왕 공자님, 앞쪽 역참은 방이 다 나가서 묵을 수 없다네요.”
주씨 가문의 시종이 왕십칠을 업신여기듯 불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시종은 이 소년 공자가 가는 길 내내 시끄럽게 재잘대며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보았다. 조금 빨리 가면 너무 흔들린다고 뭐라고 하고, 조금 천천히 가면 한뎃잠을 자기 싫다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시종은 자기 집 아씨가 사내대장부 같고, 이 보잘것없는 왕씨 공자가 까탈스러운 꼬마 아씨 같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시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십칠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빽 질렀다.
“묵을 수 없다고? 왜 못 묵는데? 돈이 있는데도 역참에 못 묵는다는 게 말이 돼? 아주 궁상을 떨어요! 돈주머니 하나만 던져줘도 방에서 튀어나올 사람들이 널렸는데. 이 몸이 그 정도의 돈은 있어! 이 몸이 돈으로 편안함을 사겠다 이거야! 네놈들한테 돈을 내라고 한 것도 아닌데, 네놈들이 궁상을 떨 게 뭐가 있어!”
왕십칠이 손으로 마차를 마구 두들기며 노복을 불러댔다.
“돈 가져와, 돈 가져오라고! 가서 저 역참을 통째로 빌려와!”
노복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좋게 좋게…….”
“뭘 어쩌라고? 말할 게 더 있긴 해?”
소리소리 지르던 왕십칠은 마차에서 몸을 바깥으로 내밀고는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거기 멈춰! 멈추라고!”
마차 행렬은 왕십칠을 쳐다보면서도, 멈추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교랑이 탄 마차의 마부는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귀를 닫고 들리지 않는 척을 했다.
“소란스럽네.”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세워 봐.”
반근이 곧바로 휘장을 들어 올리고 앞쪽에 앉은 마부에게 말하자, 마차가 멈추어 섰다.
“왕 공자님, 또 왜 그러세요?”
반근이 마차에서 내려와 물었다.
“저 앞에 있는 역참에 머무를 거야. 날씨도 안 좋고, 해도 지는데 계속 간다 한들 묵을 곳이나 있겠어?”
왕십칠이 말하자 정교랑이 그를 보며 웃었다.
“비 안 와요. 야외에서 자면 되죠.”
야외에서 자겠다고?
“너 미쳤어? 잘 곳이 있는데 뭣 하러 야외에서 자! 누가 바보 아니랄까 봐. 난 야외에서 자다가 늑대 먹잇감 되기 싫다고!”
“굳이 가서 입 아프게 말할 필요 있나요. 그리고 어떤 때에는 늑대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걸요.”
누가 여인네 아니랄까 봐! 괜히 일 만드는 거 싫어서는!
왕십칠이 침을 뱉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내 말대로 해! 난 역참에서 잘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싫으면 너 혼자 가든가.”
이 여인을 데리고 오는 게 이렇게나 성가신 일일 줄 알았으면, 애초에 데려오지도 않았지!
왕십칠의 말을 들은 노복은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행히도 눈앞의 여인은 마차를 움직이지 않았다.
“같이 가기로 했으면서, 어쩜 그렇게 말에 신용이 없어요?”
얼씨구, 지금 애원하려는 거지? 인지상정을 들이밀면서 압박하려고?
널 데려가겠다고 큰소리쳐 놓고, 왜 이제 와서 버리고 가냐는 거지?
하여간 그림 같은 미인은 이런 게 마음에 안 들어. 애원하려면 좀 그럴싸하게 해야지, 이렇게 무뚝뚝하게 애원해서 어디 쓰겠냐고. 눈물도 좀 글썽이면서 매달려야 될 거 아냐.
“이번은 특별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네가 또 이렇게 말썽을 피우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마!”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들던 왕십칠은 조 집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쳐다보긴 뭘 쳐다봐?”
왕십칠이 언짢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쳐다보긴 뭘 쳐다봐! 눈빛은 또 왜 저렇게 이상해?
조 집사는 말없이 왕십칠을 향해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아녀자가 마차 행렬의 맨 앞에 있으면 쓰나. 가는 길 내내 고집이나 부리고 말이야. 넌 뒤로 가. 내가 앞에서 갈 테니까.”
말을 끝낸 왕십칠은 자신의 마차를 앞쪽으로 이동하라고 마부에게 명령하고는 곧장 정교랑의 마차를 추월해 갔다.
반근이 마차 밖에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무슨 큰일이라고.”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고는 반근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 반근이 웃으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노복은 어색하고 당황한 기색으로 왕씨 집안의 시종들을 이끌고 왕십칠의 마차 뒤를 쫓아갔다.
“앞에 있다고 한들, 아무나 길을 이끌 수 있나.”
노복은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저 모자란 놈이 웃기긴 하네.”
“아씨께서 저놈을 너무 봐주시는 거 아냐?”
노복은 묵묵히 조롱을 듣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뒤에 있던 시종을 노려보았다. 그의 분노 가득한 눈빛에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시종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노복을 똑같이 흘겨보았다.
마차 행렬은 대열을 재정비하고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노복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호송할 사람들을 좀 구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길 위에 버려져도 두렵지 않지.”
노복의 혼잣말을 옆에서 들은 시종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노복을 쳐다보았다.
“어르신, 누가 누구한테 버림받는다고요?”
노복은 시종의 놀란 얼굴을 흘깃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씨, 너무 친절하신 거 아닙니까. 저라면 저런 놈을…….”
입을 삐쭉이면서 투덜거리던 조 집사는 순간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무리 그래도 저놈은 아씨께서 직접 동의한 혼사의 정혼자인데, 그런 사람을 놈이라고 지칭하는 건 도리어 아씨를 욕보이는 것 아닌가?
조 집사가 당황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참, 기억력도 나쁘지. 이 낭자 앞에서는 적게 말하고 많이 듣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뭣 하러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거야!
“아니, 저런 작은 역참이라면 말 꺼내기도 쉽겠네요. 제가 먼저 가서 분위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그는 정교랑이 마차 안에서 짧게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채찍을 휘둘러 마차 행렬을 앞질러 갔다.
“아씨, 요즘 성격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반근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팔걸이에 기대어 반근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엔 안 좋았어?”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아씨는 정씨 가문이나 주씨 가문이 아씨를 어떻게 대하든, 주육낭이 무슨 난리를 피우든, 항상 담담하게 대처하셨네. 예전 일을 생각해 보고 다시 지금의 왕 공자를 보니, 저건 별일 축에도 못 낄 것 같아.
반근이 무안한 듯 히죽 웃었다.
아씨를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없었기 때문에, 왕 공자가 아씨를 대하는 태도가 익숙하지 않은 건가.
“네가 저 사람이 밉고 화가 나는 건, 저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야. 저 사람이 어떤 건 해도 되고, 어떤 건 하면 안 된다는 기대를 품고 있는 거지.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너에게 선의만 가지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반근이 정교랑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난 왕십칠이 아씨를 좀 더 잘 대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긴 해.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아씨께 좋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왕 공자는 아씨와 아무 연고도 없고, 확정되지 않은 혼약만 하나 있을 뿐이잖아. 주씨 가문이나 정씨 가문에 비하면, 딱히 아씨께 빚진 것도 없고.
“실상은 정반대야. 세상은 타인에게 악의를 품는 게 일반적이지. 그러니까 남이 널 어떻게 대해 줬으면 하는 마음은 가지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해.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든 막 대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말을 끝낸 정교랑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해를 끼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반근이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께서는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네요.”
정교랑은 책을 손에 쥔 채 잠시 머뭇거렸다.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은, 아마 피눈물로 바꿔온 거겠지.”
정교랑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자신이 뭘 겪었었는지는 기억해낼 수 없지만,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정교랑은 추측했다.
꿈에서 봤던, 피눈물을 흘리던 시신…….
- 잊어라, 그게 좋아.
“아씨, 물 좀 드셔요.”
물잔을 건네는 반근 때문에 회상이 끊겼다. 정교랑은 물잔을 건네받고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얼마 가지 않아 마차 행렬은 어느 역참에 도착했다.
아주 작은 역참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소리가 끊이지 않는 탓에 비가 올 것을 염려하여 몰려든 사람이 많다 보니 역참 안은 인산인해였다. 몸을 누일 잠자리는커녕, 당장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우리가 돈 줄 테니까, 저 사람들한테 나오라고 해.”
왕십칠이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외치자 주위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노복은 다급하게 왕십칠을 저지하고는 역승(驛丞: 역참을 관장하는 관직)을 찾아 뛰어다녔다.
이 역참에서 돈이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제일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가장 유용한 것은 바로 관고(官誥: 관리의 사령장)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관고가 있으면 돈이 없어도 방을 얻을 수 있지만, 돈만 있고 관고가 없으면 때에 따라 단칸방조차도 구하기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복이 고개를 숙인 채 돌아왔다.
“마룻바닥 자리는 몇 개 얻을 수 있지 싶습니다.”
마룻바닥? 왕씨 가문 말단 하인들도 거기서는 안 잔다!
왕십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 외에는 없습니다. 그 자리도 돈을 많이 써서 열댓 명 정도 내보낸 겁니다.”
이쪽에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는 사이, 정교랑은 이미 사람을 시켜 야영용 천막을 치게 했다. 그 모습을 본 왕십칠은 영 체면이 서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시켜서 마룻바닥 자리를 청소하게 하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천막 그만 쳐도 돼. 방 있어.”
마차 안에 앉은 정교랑은 화로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반근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지 모를 맛있는 냄새가 주위에 퍼졌다.
“그런 방은 불편해요.”
정교랑이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성질을 부려!
왕십칠이 눈을 흘겼다.
“방이 불편하니까 야외에 천막을 치고 자겠다고?”
“그럼요. 내 천막이 얼마나 좋은데요.”
정교랑의 말에 왕십칠은 짐을 실은 마차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시종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물건을 내리고 있던 마차는 정교랑이 경성에서 가져온 특산품으로 가득 채운 짐차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야영 용품이었다.
깔개, 팔걸이 책상, 발 받침대, 향로, 등불. 낮은 침상 하나, 천막 하나, 밥상 하나…….
더욱 놀라운 건, 시종들이 마지막으로 병풍까지 내렸다는 것이다.
병풍!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온 집안의 가구를 다 챙겨 온 거야? 애초부터 야외에 천막을 칠 생각이었어?”
왕십칠이 눈을 부릅뜨면서 외쳤다.
“그럴 리가요. 습관일 뿐이에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이건 정교랑의 오랜 습관일 뿐이다.
지금은 차치하고, 정교랑과 반근 두 사람이 돈 한 푼 없이 병주 도관에서 떠나왔을 때부터 정교랑은 단 한 번도 먹고 자는 일에 아쉬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대충 때워야 했던 때는 정교랑도 잘 참아냈지만, 여건이 된다면 결코 타협하는 법이 없었다.
“아씨, 간식 좀 드세요.”
반근이 네모난 접시를 들고 왔다. 새하얀 백자 접시 위에 올려진 노란색 경단이 매우 먹음직스러웠다. 접시를 건네받은 정교랑이 왕십칠에게 양해를 구했다.
“힘들어서 뭐 좀 먹어야겠어요. 양해 부탁드려요, 공자.”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었다.
먹을 걸 달라는 말을 이렇게 가식 떨면서 해야 해?
“기다려. 밥을 준비하라고 할게.”
왕십칠이 몸을 돌리고는 원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러니 여인네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게 성가시다고 하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왕십칠의 뒷모습을 본 조 집사는 속으로 왕십칠을 바보라고 욕했다.
“아씨, 왕 공자의 분부를 기다려야 할지요? 아니면…….”
조 집사가 정교랑에게 공손히 물었다.
“여기 숙수는 요리하기 힘들 걸세.”
정교랑의 대답에 조 집사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그럼 소인이 부엌에 가서 고기와 채소를 사 오겠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 집사는 시종들을 시켜 땅을 파서 불을 피우고 솥을 준비하게 하고, 몇 명에게는 돈을 쥐여 주며 부엌에 가서 식재료를 사 오게 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왕십칠은 곧바로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곳은 밥상 앞에서 밥을 먹을 수 있기는커녕, 서 있기조차도 비좁아 보이는 공간이었다.
특히나 길을 서두르는 평민 백성이 많은 탓에, 노약자와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빽빽하게 꾸부려 앉아 있어서 주위에 불쾌한 냄새까지 풍겼다.
왕십칠은 하는 수 없이 코를 막은 채 대청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도련님, 숙수들이 찐빵과 채소 절임 외에 다른 요리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노복이 왕십칠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설상가상인 상황에 왕십칠은 성질을 부리며 땅바닥을 발로 세게 찼다.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니. 저 여인이 얼마나 비웃겠어!
“돈을 줘! 돈을 주면…….”
왕십칠이 말을 채 끝내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공자님.”
왕십칠과 노복이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네다섯 명의 남자들이 그들 뒤에 서 있었다. 나이가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부드러운 인상이었고, 다른 네 명의 사내들은 병졸 차림에 경성 말씨를 쓰고 있었다. 먼 길을 온 듯한 고생이 묻어 나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오?”
왕십칠이 묻자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듣자니 마룻바닥 자리를 얻었다지요?”
“돈 줘도 안 팔아!”
왕십칠은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무슨 말이지? 지금 나를 돈 구경도 못 해 본 거지 취급하는 건가?
왕십칠의 반응에 남자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에겐 관고가 있습니다.”
관고?
왕십칠에게는 그게 무엇이든 중요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옆에 있던 노복이 황급히 왕십칠을 붙잡은 덕에 왕십칠이 그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는 불상사는 면했다는 점이었다.
“나리, 관고가 있다면 더 좋은 방도 얻으실 수 있을 테지요. 모두 바깥에서 고생하는 처지인데, 굳이 서로 곤란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노복이 돈주머니 하나를 남자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남자는 웃으면서 돈주머니를 거절했다.
“공자님이 무언가 오해하셨나 봅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인데?
왕십칠이 미간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공자님도 숙식에 불편함을 느끼시는 것 같은데, 같이 협업 한번 하는 건 어떻습니까?”
협업? 뭘 어떻게 협업하자는 거야?
“저희 대인께서 경성에서부터 여기까지 쉬지도 않고 달려오고 계십니다. 피로가 잔뜩 쌓이셨을 텐데 하필이면 이 자그마한 역참이 꽉 찼지 뭡니까. 저희가 강제로 이 사람들을 내쫓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차마 마음이…….”
남자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차마 못 할 게 뭐 있나? 여기는 역참이지 객잔이 아니지 않소. 빨리 안 내쫓고 뭐 해? 저 사람들을 내쫓는다면, 내 자네들에게 돈을 주고 상등 방 두 개를 사겠소.”
왕십칠이 남자의 말을 끊고 재촉하자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공자님,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노약자와 아이들이 있는데, 너무 불쌍하잖아요.”
“불쌍하다고? 그럼 자네들은 밖에서 가서 자든가!”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기에는 저희 대인께서 불편하시지요.”
“그럼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데?”
“말하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저희는 관고가 있지만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 관고로 방을 얻을 테니, 공자님은 쫓겨난 사람들에게 돈을 쥐여 주세요. 그럼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고, 서로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남자의 말에 왕십칠은 눈빛을 반짝였고, 노복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 괜찮은 방법이네. 합리적이고,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고.
“그럼 상등 방 두 개를 나한테 내주게. 동행한 규수가 있으니.”
남자가 아, 하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원칙적으로 상등 방은 관리 어른들에게만 내어주게 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대신 일반 방 두 개는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군. 적어도 마룻바닥에서 자는 건 아니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왕십칠이 노복에게 기쁘게 손짓했다.
“좋아. 아범, 가서 저 사람들이랑 일 봐.”
노복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웃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외람되지만, 혹시 어느 관청에서 일하시는지요?”
“부끄럽소. 태창로(太倉路) 전운사(戰運司) 아래의 하급 관리일 뿐이오.”
남자가 겸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운사라고?
노복은 남자의 소속을 듣고 흠칫 놀랐다. 전운사는 한 지역의 자금과 곡식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조정의 명맥과 직결된 곳이었다. 그렇기에 정무 능력이 출중한 관원들이 임직했다. 전운사에서 서리(胥吏)를 하고 있다는 건, 당연히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노복은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강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 인맥을 쌓다니. 수로를 통해 장사하는 왕씨 가문이 자금과 곡식을 관리하는 곳과 연이 트이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대인, 너무 겸손하십니다.”
노복은 남자를 일부러 더 치켜세웠지만, 남자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 돈 좀 써 주시길 부탁하겠소.”
남자가 뒤에 있던 병졸 한 명에게 눈짓하고 지시했다.
“저 어르신을 모시고 일을 보러 가거라. 대인께서 곧 도착하시니, 서둘러.”
병졸들이 이구동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노복과 함께 자리를 떴다.
왕십칠은 싱글벙글하며 바깥으로 뛰어나가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향해 외쳤다.
“아, 그리고 숙수한테 주안상을 준비해 달라고 전해 주시오.”
남자는 대꾸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십칠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역참 밖 길가에서는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 천막을 다 치고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몇몇 시종들은 부엌에서 사 온 고기와 채소, 그리고 술 두 단지를 들고 왔다.
“이런 조그만 역참에 이렇게 좋은 술이 감춰져 있었네요.”
조 집사가 정교랑에게 말했다.
“많이 마시지는 말게. 밤의 한기를 내쫓을 정도면 충분해.”
정교랑의 말에 조 집사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 멀리서 거만하게 흔들거리며 걸어오던 왕십칠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외쳤다.
“저 봐, 저 봐. 야외에 있으면 술도 마음껏 못 마시잖아.”
“집을 떠나 먼 길을 나서야 하니, 뭐든 마음껏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조 집사가 왕십칠의 말에 대꾸했다.
저 아랫것은 왜 저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
“어느 안전이라고 자네가 끼어들어?”
왕십칠은 조 집사에게 성질을 부리고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됐고, 방을 얻었으니까 얼른 짐 챙겨서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너희는…….”
왕십칠이 조 집사를 포함한 다른 시종들을 쓱 둘러보았다.
“흥, 마룻바닥에 자리가 모자라니 너희는 그냥 여기서 자라. 천막 친 것도 아까울 텐데.”
“어디서 방을 얻었어요?”
두봉을 걸치고 커다란 두모를 쓰고 앉아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왕십칠은 더욱 의기양양하여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흠흠, 이 몸한테 다 방법이 있지.”
왕십칠과 정교랑이 대화하는 사이, 역참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꺼져, 썩 꺼지라고! 귀먹었어?”
병졸 두 명이 손에 쥔 채찍을 매섭게 내리쳤다.
아이를 안고 있던 노인 하나는 병졸들의 채찍질을 피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자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뒤돌아서서 등으로 채찍 두 대를 버텨냈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여인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안 그래도 복잡했던 대청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나리, 이곳은 이 사람들의 자리인데요.”
역승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병졸들을 제지했다.
“자리 좋아하네. 썩 꺼지거라! 여긴 이 몸들이 차지해야겠다.”
다시 채찍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든 병졸들이 한쪽을 쳐다보았다.
“자네들, 어서 저 사람들한테 돈 줘. 냉큼 꺼지고 다른 곳 찾아보라고 해.”
노복과 노복을 따라온 시종 몇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노복 일행을 노려보았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아니, 아니, 이러려던 게 아닌데…….”
노복의 이마에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가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외쳤다.
일이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군.
사람들은 아무도 노복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돈 같은 거 필요 없소! 우리도 여기 묵을 거란 말이오!”
채찍질에 떠밀려 바깥으로 내쫓긴 한 사내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이 앞장서서 목청을 높이자, 다른 이들도 소리치기 시작했다.
“맞아. 우린 돈 필요 없어.”
“누가 그깟 돈 필요하대?”
“권력이 있다고 백성을 업신여기면 되나! 이 나라엔 국법도 없냐고!”
주위 사람들이 봇물 터트리듯 한꺼번에 외치자, 병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손에 쥔 채찍을 바닥에 힘껏 휘갈겼다.
“지금 뭣들 하는 거냐? 반란이라도 일으키려고? 내 똑똑히 말하지. 우리 대인께서 어명을 받들어 태창으로 오고 계시다. 썩 꺼지지들 못해? 대인의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여기 있는 누군가가 책임질 테냐?”
조정일을 하는 관리라고?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주춤했다. 불공평한 상황이 한탄스럽지만,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라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분노를 삼켰다.
복잡한 표정의 역승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들을 내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죄다 노약자와 아이들, 그리고 여인네들뿐인데, 이 한밤중에 어디 갈 곳이 있다고요.”
병졸이 언짢은 표정으로 노복 일행을 노려보았다.
“내가 보상도 없이 이러는 것도 아니지 않나. 어서 사람들에게 돈을 주라니까!”
노복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거, 눈 질끈 감고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여기, 돈을 좀 준비했는데, 가져가서 다른 곳을 찾아보심이…….”
노복이 돈주머니를 내밀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지만, 그 돈주머니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노복을 향해 침을 뱉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부축하고, 여인들은 아이를 들어 품에 안은 채 제각기 대청 밖으로 걸어갔다. 질서 없이 우르르 몰려나갔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뒷마당에서는 몇 사람이 쫓기다시피 떠밀려 나오면서 거친 욕을 내뱉었다.
“이건 권력 남용이오!”
“어떤 개 같은 관리 새끼가…….”
역참 앞에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채찍을 휘두르던 병졸과 옷차림이 비슷한 병졸들이 마차 한 대를 호위하면서 역참 앞에 멈춰 섰다.
“풍(馮)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역참 안에 있던 병졸들이 크게 외치고는, 사람들을 향해 더 거세게 채찍을 휘둘러 길을 비키게 했다.
“풍 대인께서 쉬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썩 나가거라!”
채찍 때문에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내몰리면서 대청 안팎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이제 막 울음을 그쳤던 아이는 다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던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방을 얻은 건 아니죠?”
“그냥 쫓아내는 게 아니라, 돈을 줬잖아.”
왕십칠은 시끄러워진 역참을 보고 잠깐 놀란 듯했으나, 금세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돈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다 내쫓을 수 있다니!
“흠, 나는 너희 같은 소인배가 아니다. 이왕 같이 길을 떠나게 된 거, 너희도 안에 들어가서 자거라.”
왕십칠이 턱을 치켜들고 조 집사와 시종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양 말했다. 정교랑이 왕십칠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마당에 있는 병졸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아, 같은 편이야 같은 편. 우리를 도와준…….”
왕십칠이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지만, 정교랑은 뒷말을 다 듣지도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어이, 어이. 뭐 하게?”
왕십칠이 정교랑을 향해 의아한 얼굴로 외쳤지만, 정교랑은 그를 무시한 채 역참 대문 앞 길가로 가서 섰다.
“여봐라.”
정교랑이 말하자 조 집사가 즉시 대답했다. 조 집사는 정교랑이 무서워 바로 옆에 서 있지는 못하면서도, 항상 근처에서 정교랑의 명을 기다렸다.
“겁도 없이 백성에게 행패를 부리는 저놈들을 매우 쳐라!”
정교랑이 마당 안을 가리키며 외쳤다.
조 집사가 바로 분부를 내리자,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제각각 곤봉을 손에 쥐고 역참 안으로 돌진했다.
“감히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다니, 맞아도 싸지!”
조 집사의 호통과 함께 채찍을 쥐고 있던 병졸들은 주씨 가문의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먼지 나게 얻어맞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병졸들은 어리둥절했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주 노야가 세심히 고른 자들이라 모두 무예에 능했다. 시종들은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병졸들을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노복의 젊은 시종들 또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순간 넋이 나갔다.
“꼴 좋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릴 즈음,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잘했다며 하나둘 호응하기 시작했다.
왕십칠은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너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
왕십칠이 펄쩍 뛰면서 정교랑에게 외쳤다. 정교랑은 여전히 왕십칠을 무시하고 역참의 대문 가까이로 걸어갔다.
대문 앞에 멈추어 있던 마차에서 한 남자가 내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는 눈앞의 난리 통에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두모를 벗고 마당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냐?”
풍 대인을 마중 나온 태창로 전운사의 서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곤봉으로 있는 힘껏 병졸들을 내리치고 있는 주씨 가문의 시종들을 보면서, 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한발 먼저 풍 대인을 마중 나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겠지.
저건 누구야? 역참을 오가는 이는 대부분이 관리인데, 설마 어떤 거물의 성질을 긁었나?
거물은 무서운 존재였지만 서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대인,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사람들이 일부러 난리를 피우는 것 같습니다.”
서리가 옆에 있던 호위에게 명했다.
“뭐하고 섰어! 어서 저 겁 없는 자들을 잡아들이지 않고!”
서리의 명령에 호위들은 곧바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잠시만, 잠시만. 무슨 일인지부터 먼저 묻고…….”
수척한 얼굴의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서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대인, 물어볼 게 뭐 있습니까. 말도 없이 주먹질부터 쓰는 자들인데, 분명 강도들일 겁니다!”
말을 끝낸 서리가 다시 고개를 돌려 병졸들을 재촉했다. 이때 그의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없이 주먹부터 쓰는 병졸들이야말로 강도들이지요!”
서리와 풍 대인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진 하늘 아래, 두봉을 걸치고 커다란 두모를 쓴 여인이 대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 누구야?”
서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고함을 쳤다.
“불의에 맞서는 행인이요.”
불의에 맞서는 행인이라고? 미친 건가?
불의에 맞서긴 개뿔! 지금 무슨 연극놀이 해? 쓸데없이 무슨 오지랖이야?
왕십칠이 눈을 부라리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여인은 정말로 바보천치로구나!
왕십칠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역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 집사와 시종들이 병졸 네 명을 끌고 와서 대문 밖에 내팽개쳤다. 왕씨 집안의 시종 세 명도 그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감히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다니,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
조 집사가 병졸들을 향해 호통을 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조 집사와 시종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맞아도 싸다! 잘 때렸소!”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모반이라도 하려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이러는 게야?”
서리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눈앞에서 병졸들이 얻어맞는 걸 본 서리는 그저 놀라기만 했을 뿐, 두려운 표정을 보이진 않았다. 서리는 호통을 치고 눈알을 굴리면서 동시에 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저 여인의 말투는 북쪽의 말투야. 시종은 전부 경성 사람 같아 보이는데, 기세를 보아하니 경성 관리 집안의 딸이겠군.
입은 옷을 봐서는 별다를 게 없어. 타고 온 마차도 평범해 보이고…….
서리는 길가에 마련된 천막을 확인하고, 정교랑이 경성 관리 집안이긴 하나 고위직 관료 가문 출신은 아닐 거라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인의 몸으로 야외에서 한뎃잠을 자진 않을 테니까.
“감히 삼사원(三司院) 풍 대인의 행차에 훼방을 놓다니!”
혹여나 듣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봐 서리는 다시 한번 큰소리로 외쳤다.
“경성 삼사원의 풍 대인이시다! 어명을 받들어 조정의 일을 하러 나온 풍 대인이시란 말이다!”
서리의 외침 소리에 수척한 남자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정교랑은 서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의 백성을 둘러보았다.
“자기 한 몸 편하려고, 먼저 도착한 여러분을 밤중에 쫓아냈어요. 대답해 보세요. 여기서 누가 나쁜 사람입니까? 맞아도 싼 사람이 누구죠?”
“저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에요! 저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라고요!”
“맞아도 싸다! 맞아도 싸!”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목청을 높여 삿대질을 해 가며 외쳤다. 사실 조 집사 일행의 목청이 제일 컸지만,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덕분에 딱히 티가 나진 않았다.
여럿이 갑자기 외쳐대는 통에 서리와 병졸들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쫓아낸 건 아니고, 돈을 받고 자기 발로 나간 건데…….”
황급히 변명하던 서리가 풍 대인을 보면서 사정했다.
“풍 대인, 대인께서 밤길을 재촉하며 달려오셨다기에, 저들은 대인을 위해서…….”
“돈? 돈은 중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사람이 굶어 죽어갈 때는 돈이 아니라 당장 먹을 수 있는 밥이 필요한 법이죠. 하룻밤 몸 누일 곳을 찾아 들어온 온 건데, 그깟 돈을 쥐여 준다고 해서 저 사람들의 잠자리가 해결되나요? 대체 이 한밤중에 노인들과 아이들을 어디로 내쫓겠다는 말입니까?”
정교랑이 서리의 말을 끊고 호통쳤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또다시 물었다.
“지금 돈이 필요해요?”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
“맞아, 맞아. 정말 도리에 안 맞는 짓이야.”
“돈이 있고 관직이 있는 사람이면, 이렇게 아무나 괴롭혀도 되는 거요?”
“그리고 사람도 다쳤어.”
이번에는 조 집사 일행이 목청을 높일 필요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혀를 차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서리는 결코 질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발 나서서 외쳤다.
“우리 대인께서는 어명을…….”
서리가 입을 열자마자 정교랑이 또 그의 말을 끊었다.
“어명? 어명을 받드는 사람이 가엾은 백성들을 이리 괴롭힌다고요?”
정교랑은 서리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풍 대인에게 시선을 돌려 외쳤다.
“대인, 이런 자들이 바로 대인께서 거느리는 수하들이란 말입니까? 백성들을 이리 함부로 대하는 자들이 대인의 수하라고요?”
일렁이는 등불 그림자에 비추어진 남자의 수척한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했다. 말을 마친 정교랑은 잠자코 풍 대인을 바라보았다.
풍 대인과 정교랑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으스스한 고요함을 느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있는 곳은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영문도 모른 채 흠씬 두들겨 맞은 병졸들의 신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런 썩을 놈!”
철썩 따귀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고함이 들리자, 사람들이 그제야 조용해졌다. 모여든 사람들은 소리가 난 곳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좀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서리가 뺨을 어루만지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서리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수척한 얼굴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감히 백성들을 괴롭히다니! 게다가 헛소리까지 지껄여?”
남자가 눈썹을 치켜뜨고 꾸짖었다. 분을 참을 수 없는 듯 몸까지 미세하게 떨렸다.
“대인 어른, 이게 다 대인을 위한 게 아닙니까.”
서리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나를 위해서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나를 위해서 천자의 덕망을 욕보였다고? 이 몸은 황송해서 그리할 수 없네!”
수척한 얼굴의 남자가 서리에게 삿대질을 했다. 일렁이는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 주위의 백성들은 의분을 참지 못하는 풍 대인의 모습에 한시름 놓았다.
저 대인께서는 그래도 청백리인가 보네. 제 식구만 싸고도는 탐관오리가 아니야.
“너희들 잘못이긴 하나, 나 또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수척한 남자가 한숨을 내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공수의 예를 표하며 읍을 올렸다.
“백성을 놀라게 한 죄는 본관에게 있소이다.”
“아니 뭐, 대인 탓은 아니죠.”
“대인도 몰랐다고 하시니.”
“그러니까 염라대왕을 만나보는 것보다 변변찮은 잡귀를 상대하는 게 더 어렵다고들 하잖아.”
풍 대인의 진심 어린 사과에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서리 또한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어, 그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정교랑을 노려보았다.
다 저 여인의 오지랖 때문이야! 두고 보라고!
서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짙은 밤하늘보다 더 새까만 정교랑의 두 눈동자를 본 서리는 흠칫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대인, 죄가 있다면 벌을 내리셔야지요.”
여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심지어 백성 중 몇 명은 다치기까지 했습니다.”
뭐라고? 지금 저 여인,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건가?
서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휙 들었다.
저 둘, 혹시 원한이 있나?
수척한 남자 또한 정교랑의 말을 듣고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물었다
“다친 사람은 어디에 있소?”
방금 전 정교랑의 말을 듣자마자, 조 집사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다친 사람을 찾아냈다.
사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 틈에 껴서 싸움을 구경하다가 조 집사에게 밀쳐져 바닥에 주저앉은 것뿐이었다.
“다친 사람은 여기 있습니다.”
조 집사가 큰 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노인은 엉덩방아를 찧은 게 아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말 많이 다쳤군.
“어르신.”
수척한 남자가 서둘러 노인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노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눈물이라도 떨굴 듯한 표정으로 비통하게 말했다.
“다 본관의 불찰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풍 대인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역시 좋은 관리셨어.
“따지고 보면 대인이 잘못하신 것도 아니잖아.”
사람들이 풍 대인의 편을 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니오, 아닙니다. 다 본관의 잘못이오.”
수척한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잘못이 있다면, 대인께선 현명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의 뒤에서 정교랑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척한 남자가 정교랑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내리지 못한다면, 후에 반드시 이로 인해 어지러워질 겁니다. 자식을 가르치지 않는 건 부모의 과오요, 가르침이 엄하지 않음은 스승의 나태함이라지요(子不敎父之過, 敎不嚴師之惰).”
정교랑의 말을 들은 남자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엄숙한 표정으로 호통쳤다.
“여봐라. 당장 저 다섯 놈을 체포해라. 저들을 병적에서 제명하고 태창부로 보내 단죄토록 하라.”
뭐라고? 병적에서 제명한다고?
바닥에서 신음하던 병졸들과 서리는 아연실색했다.
일이 너무 커졌잖아!
지금 이 신분을 얻기까지 이들은 수많은 공을 들였다. 게다가 신분 덕에 적잖은 이득을 보며 사는 처지다 보니 그 신분을 잃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야말로 죽으란 소리가 아닌가.
“대인, 대인. 용서해주십시오.”
“대인, 대인.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수척한 남자는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뒷짐을 지고 서서 굳은 표정으로 서리와 병졸들을 한 번씩 훑었다.
“잘못인 것을 알았다면, 애초에 그러지 말았어야지!”
너무 다급했던 나머지 서리는 애원하는 대신 소리를 빽 질렀다.
“대인, 저희를 벌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태창로 전운사 사람입니다.”
병졸 네 명도 서리의 말을 듣고는 그를 따라 소리쳤다.
“대인께서는 저희도 벌하실 수 없습니다! 저희는 천자를 호위하는 병사들이고 삼반원(三班院) 소속이란 말입니다!”
이들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삼사원의 관리는 고된 일을 도맡아 바깥으로 나돌기 일쑤였다. 일 년이 가도록 용안조차 몇 번 뵐 일 없는 관리 처지인지라 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백성들 앞에서까지 이런 무시를 당하니, 수척한 남자의 얼굴색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딱히 도리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까 누가 아주 옳은 말을 하더군. 염라대왕을 만나보기는 쉬워도, 변변찮은 잡귀를 상대하는 건 아주 어렵다고.
“대인께서 벌하실 수 없다면, 백성들도 저들을 벌할 수 없단 건가요?”
여인의 침착한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무엄하다!”
남자가 다섯 사내를 향해 호통쳤다.
“네놈들이 아직 신분을 잊진 않은 모양이구나! 그런데도 백성을 괴롭히고 천자의 덕망을 욕보이려 한 것이더냐! 본관에게는 죄를 물을 수 있는 직책이 없으니, 백성들의 뜻을 따르겠다!”
수척한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러분, 저자들을 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그가 도리어 질문을 해 오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큰 소리로 답했다.
“벌해야 합니다! 벌해 마땅합니다!”
“벌해야 하오?”
남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이 합세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벌해야 합니다! 벌해야 합니다!”
수십 명의 대답 소리가 어두컴컴한 밤하늘 아래에 울려 퍼졌다.
“벌하실 수 있소이까?”
“할 수 있습니다! 벌할 수 있습니다!”
수척한 남자와 군중의 목소리가 합을 맞춰 갔다.
“여러분들, 본관을 위해 연명장을 써 주실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써 드릴 수 있습니다!”
점점 더 커지는 대답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메아리를 이루었다.
“좋소이다.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 관직은, 내놓아도 그만이오!”
남자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가 흥분한 얼굴로 손을 높이 올려 외쳤다.
“백성을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큰 함성이 다시 한번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이들의 함성은 마치 파도처럼 역참 전체에 휘몰아쳤다.
백성들의 맹렬한 기세를 보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병졸들과 서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채찍을 휘두르며 이들을 쫓아낼 때까지만 해도, 백성들이 이런 우렁찬 함성을 외쳐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 번, 또 한 번의 함성이 울릴 때마다 서리와 병졸들은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 들었다.
끝이야, 다 끝장났어. 어떻게 이게 민심이 되어 버린 거야? 도대체 어떻게?
민심은 거대한 산과 같은 법이었다. 감히 민심을 건드리려는 자는 세상에 없었다. 황제조차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게 민심이었다.
서리는 이 거대한 산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에 민심이라는 산을 빌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관리 여럿을 박살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이 민심이라는 산에 깔려 죽는 날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끝났네, 다 끝났어.
할 말을 잃은 서리는 식은땀만 비처럼 흘렸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서리와 병졸들을 보며, 연이어 울려 퍼지는 백성들의 함성을 들으니, 남자는 경성을 나온 후 처음으로 꼿꼿이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갑한 기분이 풀린 것도 처음이었다.
관리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백성들과 함께 소리치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갑작스레 찾아온 행복감에 풍 대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애초에 이 일이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왕씨 가문의 노복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일이 이렇게 흘러가지 않았어. 누군가가 고작 서너 마디 말로 상황을 반전시킨 거지! 누군가가 저 관리를 칼같이 몰아붙여서 이런 결정을 하게끔 만든 거야!
노복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그 누군가가 짙은 밤하늘 아래서 시끄러운 소리와 수많은 그림자 사이를 유유히 지나 자신의 천막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노복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저 여인,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사람의 앞길을 끊어 버렸어!
주위의 불빛이 여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밤바람이 그녀의 두봉 자락을 거세게 휘날렸다. 바닥에 그려진 여인의 그림자는 마치 무장이 창과 도끼를 휘두르는 듯 변화무쌍했다.
풍 대인의 다른 호위들이 다섯 사람을 체포해 압송했다. 역승이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풍 대인을 역참 안으로 모시려 했지만, 풍 대인은 쫓겨났던 사람들을 우선으로 챙겨 안으로 들여보냈다.
민중을 우선시하는 풍 대인의 모습에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다.
“가세, 어서 들어가세. 연명장을 써서 그 사람들을 고발해 버리자고.”
진중해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모으며 소리쳤다. 사람들이 역참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자, 역참 문 앞이 조용해졌다.
왕십칠이 몸을 돌려보니 정교랑은 이미 모닥불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좀 전에 왕십칠이 방이 생겼다고 득의양양하게 자랑하러 갔던 그때 모습 그대로 바르게 앉아 있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여기 몇 명은 가노들이니 주인이 벌하게 둡시다.”
조 집사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왕십칠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왕십칠은 정신을 차리고 조 집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호위 몇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호위들은 조 집사의 말을 듣고는 그 말에 동의하며 하인들의 처리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정교랑, 너, 너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왕십칠이 정교랑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반근은 사람들이 한데 섞여서 욕하고 때리고 목숨만은 살려달라 애원했던 좀 전의 소란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는 듯 조용히 저녁 밥상을 차려놓았다. 길 위에서 먹기 간편하고, 추운 몸에 열을 올려주는 음식에는 과로신선만 한 게 없었다. 방석 위에 앉은 반근이 갓 익은 고기와 채소를 정교랑에게 건네고 있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왕십칠의 말에 대답했다.
“밥 먹어요.”
밥을 먹는다고?
왕십칠은 화가 하늘까지 치솟는 느낌이었다.
“언제 내가 너더러 먹으랬어?”
왕십칠이 정교랑 앞에 있던 탁자를 발로 차서 뒤집어엎었다. 반근이 비명을 질렀다.
다행스럽게도 뜨거운 솥은 반근 옆에 있었고, 정교랑 앞의 탁자에는 접시만 놓여있었다. 젓가락과 그릇은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었던 터라, 탁자가 엎어졌어도 바닥에는 접시만 나뒹굴었다. 그렇기에 뜨거운 국물이 사방에 쏟아지면서 주위 사람이 화상을 입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네 이놈! 지금 뭐 하는 거야?”
가장 먼저 달려온 조 집사가 왕십칠의 멱살을 잡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조 집사의 따귀에 왕십칠은 잠시 멍해졌다.
난생처음으로 따귀를 맞았다. 아니, 살면서 처음으로 남한테 맞았다. 그것도 한낱 하인 나부랭이한테!
“여봐라, 여봐라!”
정신을 차린 왕십칠이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는 손을 뻗어 조 집사를 때리려고 했으나, 조 집사를 상대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왕십칠의 팔을 꽉 안았다.
“공자님, 공자님. 할 말이 있으면 좋게 좋게 하시지요.”
노복의 외침을 들은 왕십칠이 눈을 크게 떴다. 왕십칠은 부아가 치밀어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좋게 좋게? 좋게 좋게 나갔는데 저 인간이 먼저 손을 썼잖아. 맞은 건 나라고! 퉤! 나더러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좋게 좋게 얘기하라는 거야?
왕십칠이 또 뭐라 외치려는 찰나에 노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씨, 아씨. 이번 일은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왕십칠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노복을 노려보았다. 주변에 있던 왕씨 가문의 시종들 역시 모두 주씨 가문 시종들의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휴, 고작 조금 얻어터진 거 가지고 주씨 가문 사람들한테 저렇게 벌벌 기어?
“앉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조 집사가 왕십칠의 어깨를 잡고 힘을 주어 땅바닥에 앉혔다. 엉덩방아를 찧은 왕십칠은 아파서 악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도 노복은 서둘러 정교랑에게 예를 올리며 연신 감사하다고 허리를 숙여댔다.
“감사드립니다, 아씨. 감사드립니다, 아씨.”
왕십칠은 그런 노복의 모습에 화가 나고 답답했다.
“자네도 머리가 어떻게 됐어? 윗전인 내가 맞고 있는데, 감사하다는 소리가 나와?”
아, 그렇네. 그런데 어쩐지 직감상 저 여인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노복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복은 때로는 자신의 직감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공자님, 좀 전의 일은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노복이 고개를 숙이고 왕십칠에게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 이 몸이 맞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정교랑, 너 똑똑히 들어. 이 혼사는 없던 일로 해!”
왕십칠은 화를 내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조 집사에 의해 꽉 눌린 어깨 때문에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노복이 대화에 끼어들려는데 누군가가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씨, 풍 대인이십니다.”
조 집사가 말하자 사람들이 걸어오는 사람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좀 전의 그 수척한 남자였다. 아직 씻지도 쉬지도 않고, 여전히 두봉을 걸치고 두모를 쓴 채였다. 풍 대인은 역승과의 대화를 끝내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어. 네가 저지른 일을 봐. 사람들 앞에서 남의 명성에 먹칠이나 하고 말이야.”
왕십칠이 냉소를 보이며 말하자,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남의 명성에 먹칠하는 건 어떻게 알아봤어요? 바보는 아닌가 보네.”
왕십칠이 눈을 부릅뜨자 정교랑이 뒷말을 덧붙였다.
“저 사람이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러 온다는 건 알고 있나요?”
목숨을 구해 준 은혜? 이 여인은 바보가 아니라, 그냥 미친 거로구나!
왕십칠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고 싶었지만, 조 집사가 누르고 있는 통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풍 대인이 정교랑을 향해 읍을 했다.
“소생 풍림(馮林), 목숨을 구해 주신 낭자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왕십칠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갔다.
정말이잖아.
정교랑이 몸을 일으켜 풍 대인에게 답례했다.
“풍 대인,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제 하인이 말썽을 피운 탓에 제가 직접 나서서 훈계한 것뿐입니다.”
풍 대인이 노복에게 시선을 옮겼다.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겁도 없이 멋대로 행동했다가, 하마터면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노복이 서둘러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이마를 대며 큰절을 올렸다.
이 무슨?
그런 노복을 보는 왕십칠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이 인간들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풍 대인이 두모를 벗자 왜소한 체구만큼이나 수척한 얼굴이 드러났다.
“낭자의 하인은 좋은 뜻으로 한 일이겠지만, 제 수하는 좋은 뜻이 아니었던 듯합니다.”
풍 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 나쁜 일이 되기도 하죠. 꼭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고의로 저지른 일인지, 의도치 않게 벌어진 일인지는 확인해 봐야겠죠.”
풍림이 말했다. 풍림은 눈빛을 반짝이며 정교랑을 쳐다보았지만, 정교랑은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밤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풍림은 더는 대꾸하지 않는 정교랑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낭자가 때마침 제지하지 않았다면, 소생이 큰 골칫거리에 휘말릴 뻔했습니다.”
“집안의 하인을 꾸짖은 일일 뿐이니, 대인께서 너무 마음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낭자는 경성에서 오셨습니까?”
풍림이 물었다.
풍림은 이미 세 번이나 먼저 화두를 던졌다. 그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풍림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은 자리를 권할 의사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정교랑은 고개만 끄덕이고 짤막한 대꾸로 답했다.
정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대답이네.
풍림은 호기심 섞인 말투로 더 물었다.
“어느 가문이신지요? 저도 경성에서 왔습니다.”
“보잘것없는 평범한 집안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풍림은 개의치 않고 웃기만 했다.
“역승이 방 하나를 청소해서 내주었는데, 그리로 가서 쉬는 게 어떠신지요? 밤이 되기도 했고 여인의 몸이기도 하시니.”
풍림이 진심을 담아 정교랑에게 권했다.
“대인께 감사드립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정교랑의 말을 들은 풍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지어진 천막과 맛있는 냄새,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솥을 본 풍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럼, 낭자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풍림이 공수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정교랑의 답례를 받은 뒤 역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참 안에서는 이미 풍림을 위해 상등 방을 정리해 두었다. 풍림은 길 위의 노곤함을 목욕으로 씻어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피곤함이 가득 남아 있었다.
“대인, 차 한잔 드시고 식사하시지요.”
수하가 풍림에게 찻잔을 건네면서 말했다. 풍림은 탁자에 놓인 찬반들을 스윽 보고는 입맛이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찻잔을 건네받았다.
“뭐라고 하던가?”
풍림의 질문에 수하는 고개를 저었다.
“대인을 공경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의도가 없었답니다. 무엇보다도 배후에서 이 일을 시킨 사람은 없다고 단호하게 잡아뗐습니다.”
풍림이 냉소를 터트리고는 찻잔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공경? 정녕 본관이 바보라 그 속셈을 눈치채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 하마터면 내가 그들의 속셈을 큰 소리로 외칠 뻔했어!”
일순간 화가 솟구친 풍림은 몸을 일으키고 방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야밤에 백성들을 쫓아내는 게 나를 향한 공경이라고? 아예 본관을 불 위에 올려놓고 구우라지!
만약 이 일이 그들의 바람대로 이루어졌어 봐. 날 노리던 관원들이 날이 새기도 전에 벌떼같이 경성으로 들이닥쳐 상소를 올렸을 걸세! 본관이 태창로에 들어서기도 전에 어사대에서 본관을 경성으로 압송했을 거라고!
저 말단 병사와 서리 나부랭이는 무작정 잡아떼면 몇 마디 훈계로 끝났겠지만, 모든 책임은 다 저놈들의 상관인 내가 졌을 거란 말일세!”
말하다 보니 풍림은 점점 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본관이 이런 얄팍한 수작을 한두 번 본 줄 아나? 당초에 요해봉(廖海峰)이 어명을 받들어 염세 조사를 위해 소주(蘇州)로 갔어. 서주에 막 도착했을 때 눈이 많이 오고 있었지. 요해봉은 고작 밥 한 끼를 먹었을 뿐인데, 현지 관원들이 백성을 괴롭힌다고 탄핵하여 서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경성으로 압송되어 돌아왔어. 염세를 조사하기는커녕, 본인만 실컷 조사와 심문을 당하다 결국 어사대가 그를 악주(岳州)로 보내 버렸네. 왜 그런 줄 아는가?
요해봉이 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거든. 설경은 예쁘지만 눈앞의 초가집이 약간 거슬린다고.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말을 핑계로 그 집 식구를 모조리 쫓아내고, 초가집을 허물어 버렸어! 그게 공경인가? 그건 남의 칼로 살인을 하는 거나 다름없지! 요해봉이 잘난 척을 좀 하고 궁상맞은 구석이 있는 문인이다만 그 외엔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사람이라고!”
요해봉의 일을 되새기자, 풍림은 냉소가 절로 나왔다.
“하! 어쩐지 태창로 전운사에서 갑자기 친절하게 사람을 보내 마중 오는 게 이상하다 했네. 아주 제대로 수작을 부리는군! 신병영(神兵營)의 사람까지 끌어들이셨겠다?”
수하가 풍림 곁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작은 소리로 그에게 노여움을 가라앉히라 말했다.
“대인, 이번 일은 여간 다루기 어려운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어쩐지 다른 분들께서 한사코 거절하신다 했더니.”
수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운사는 자금과 곡식을 총괄하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관리들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이 많았다. 이번 전운사 감사로 손해를 볼 것 같은 사람들이 모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풍림은 예상했다.
풍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몸을 사릴 수야 없지. 고작 이따위 수작으로 본관을 겁주려고 해? 이번 일로 다시 한번 일깨워 주니 본관은 감사할 따름이야!”
수하는 수차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낭자가 불의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인께서 정말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풍림 또한 좀 전 일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만약 정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풍림이 당도한 뒤 일을 제지하려 한들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대놓고 그를 함정에 빠트리는 일이었지만, 정작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판이었다.
풍림은 자신을 도와줬던 낭자를 떠올리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정말 단순히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않은 걸까? 요즘 세상에도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여인이?”
풍림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곁에 있던 수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서서 말하는 사람보다는 말없이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의 신분이 더 귀한 법이지.
“대인, 낭자 옆에 있던 공자의 생각은 아닐지…….”
풍림은 수하의 말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 사람은 뭣도 아니야. 딱 봐도 정신머리 없게 생겼더구먼.”
풍림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도리어 그 낭자가 얼핏 멍해 보이지만, 눈빛이 살아 있었어. 말하는 것도 조리 있고 빈틈없고.”
수하는 그것까지는 생각지 못했는지 잠시 멈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낭자는 집안의 하인이 이 일에 엮여있는지라 몸소 나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이 정말 잘못되었다면 대인께서 곤란해지시는 건 당연지사고, 그 하인들도 휘말렸을 테니까요. 그 낭자가 경성 어느 가문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인들이 이 일에 휘말리면 어쨌든 가문에서도 번거로워질 테고요. 그 낭자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일을 줄이는 게,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풍림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웃음을 보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이야. 외딴 길에서 만난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나를 위해 나설 리는 없지.”
한가득 쌓였던 화를 내뱉고 나니, 이번 위험을 무사하게 넘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다.
“대인, 어서 식사하고 일찍 쉬시지요.”
수하가 눈치 빠르게 풍림에게 휴식을 권하자, 풍림은 알겠다며 옷깃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 낭자가 무얼 먹는지 궁금해지는군. 냄새가 꽤 향긋하더라고.”
풍림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미소 지었다.
탁자를 다시 세워 놓고, 반근은 새로 조리한 음식을 정교랑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조 집사와 시종들은 벌써 다른 곳에 모여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릇을 든 정교랑이 왕십칠을 쳐다보았다.
“이왕 같이 가기로 한 거, 되도록 내 말 들어요. 내 원칙은 삼세번을 넘기지 않는 거예요.”
내내 안색이 어둡던 왕십칠은 정교랑의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네 말을 들어? 네 원칙? 정교랑, 지금 내 앞에서 원칙을 운운해?”
왕십칠은 곧이어 조 집사를 향해 삿대질했다.
“잘 들어. 날 때렸던 저놈의 다리를 분지르지 않는 이상, 우리 왕씨 가문은 문턱도 넘기 힘들 줄 알아!”
왕십칠은 말을 끝내자마자 옷소매를 세게 뿌리치고 자리를 떴다.
“공자님, 공자님.”
노복이 다급하게 왕십칠을 불렀지만, 왕십칠은 노복을 무시한 채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노복은 몇 걸음 따라가다 말고, 눈짓으로 다른 시종들을 시켜 왕십칠을 따라가게 했다. 제자리에서 잠시 생각하던 노복은 몸을 돌려 정교랑 앞으로 갔다.
“아씨.”
노복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부디 저희 공자님을 관대히 여겨 주십시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분이신지라 집안에서 잘 보살피라고 저를 붙여주었는데, 이번 일은 정말로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저희 공자님 탓이 아니고, 소인의 불찰입니다. 남의 꾐에 빠지는 바람에 아씨께 폐를 끼쳤습니다.”
노복이 이마를 바닥에 대며 큰절을 올렸다.
“감사는 됐네. 그리 큰일도 아니고. 만에 하나 정말 무슨 일이 났다고 해도 자네들은 주위 사람한테 피해를 준 죄로 훈계를 듣고 벌금이나 냈을 뿐이지, 별일 없이 지나갔을걸세.”
그건 그렇지.
설령 무슨 일이 났다 하더라도, 운이 나빴던 저 관리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 낭자의 말마따나 기껏해야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는 이유로 벌금 좀 내고, 하인 몇 명을 보내 곤장 몇 대만 맞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노복은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간단할 리가 있나요. 낭자를 귀찮게 했습니다.”
노복은 다시 큰절을 올렸다.
“아닐세. 난 단지 성가신 일이 싫을 뿐이야. 특히 내 일정을 지체시키는 거라면 더욱 싫고.”
그래서 일이 나기도 전에, 직접 해치워 버린 건가?
노복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만, 만에 하나 저 대인께서 이 일을 감사히 여기지 않으셨다면요?”
만약 그 대인이 아랫사람들과 똑같이 무례하고 난폭했다면?
“그랬다면 오늘 밤의 연명장으로 고발당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었겠지.”
정교랑이 노복을 쳐다보면서 이어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이번 일은 자네들 같은 아둔한 하인들 때문에 나선 거라고.”
그럼,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해서가 아니네.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상관없고.
그 관리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서리와 병사들을 감쌌다면, 패가망신하게 될 사람은 바로 그 관리였을 것이다. 서리와 병사들이 의도한 대로 일이 흘러갔다면, 우리 왕씨 가문은 도움을 줬다는 명목으로 별 탈 없이 화를 면했을 테고.
반대로, 만약 그 관리가 똑똑하고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라면, 정 낭자가 몰아준 기세를 타고 바른 판단을 했을 것이며 그의 앞길도 지켜냈을 것이다. 그럼 정 낭자의 힘을 빌린 것이니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왕씨 가문 하인들한테 불똥이 튀게 하진 않았겠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노복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서리가 우리를 골라 쓰진 않았겠지.
그들이 우리한테 공자님도 숙식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같이 협업 한번 해보자는 말 따위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들의 뜻대로 일이 성사됐을 것이다.
참으로 인생무상하구나. 말 한마디가 이렇게 판이한 결과를 낳다니.
말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재앙을 불러온다는 말이 정말이었구나. 언제나 심사숙고하여 말을 삼가야 할지니.
“자네는 뭣 하러 돌아왔어?”
방석 위에 앉아 있던 왕십칠은 마룻바닥 자리로 들어오는 노복을 보자 화가 잔뜩 나서 소리쳤다.
“아예 성씨를 정씨로 바꾸지 그래? 어차피 윗전도 못 알아보면서!”
노복은 정색하고 왕십칠을 꾸짖었다.
“공자님,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억지 부릴 일이 아니에요.”
노복의 말을 듣던 왕십칠이 방석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억지? 자네도 저 여인 말을 믿는 게야? 저게 나한테 뭐라고 한지나 알아? 자기 말을 듣고, 자기 원칙을 따르란다! 칵, 퉤!”
왕십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노복을 노려보았다. 노복은 움찔했다.
저 여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분명히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보통 사람이었어 봐.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겠다 싶으면 피해 가려고 안간힘을 썼을 텐데, 저 여인은 아예 말썽인 사람을 뿌리째 뽑아 버렸어. 그것도 골칫거리가 제대로 눈에 보이기도 전에, 이제 막 싹이 보이려던 때에!
고작 열댓 살밖에 되지 않은 저 소녀, 똑똑하고 영민한 데다 거침없는 판단력까지 갖췄다. 어쩐지 주 노야 같은 연배 있는 무장이 저렇게 어린 소녀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저 정씨 집안 낭자가 어딜 봐서 바보라는 거야. 소리만 듣고도 현(絃)을 알아맞히던 채문희(蔡文姬)와 다름없는데. 그렇다면, 이 혼사는 정말로 금덩어리를 주운 거나 마찬가지야.
“웃긴 뭘 웃어!”
아무런 대답이 없자 고개를 들어 노복을 쳐다보던 왕십칠은 노복이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모습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이것들이 다 내가 우스운 모양이네?
바보한테 조롱당한 것도 모자라서, 그 바보의 하인한테까지 얻어맞고, 이제는 내 하인조차도 나를 우습게 여겨?
“그래. 자넨 여기 남아 저 여인이나 따라다녀. 난 당장 떠날 테니.”
또 툭 하면 나오는 가출한다는 이야기군.
노복은 익숙하다는 듯이 시종들에게 눈짓했다. 노복의 의중을 읽은 시종들이 재빠르게 왕십칠에게 몰려가 그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시종들이 한참을 울먹이며 애원하고 나서야 왕십칠은 겨우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간신히 왕십칠을 어르고 달랜 시종들은 그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지만, 왕십칠은 마룻바닥 자리가 더럽고 냄새난다며 잠자리에 들기를 거부했다.
노복과 시종들이 온갖 방법들을 생각해 가며 왕십칠을 재우려던 찰나,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니 주씨 가문의 시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네놈이 여길 왜 와?”
왕십칠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쳤다.
“저희 아씨께서 오시랍니다.”
주씨 가문의 시종이 거만한 태도로 왕십칠에게 말했다.
오라고? 인제 와서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려는 거야? 이제야 좀 두려워졌나 보지? 이미 늦었어!
왕십칠은 침을 뱉으며 주씨 가문의 시종을 내쫓았다.
“꺼져.”
주씨 가문의 시종은 욕을 듣자마자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노복이 억지로 그를 잡아 세웠다.
“이보게, 아씨께서 무슨 분부하실 말씀이라도?”
노복이 공손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아씨께서는 여기 묵는 게 위험할 거라고 하셨소. 아 물론, 여기 있든 말든 그건 당신들 자유라고도 하셨지만.”
주씨 가문의 시종이 느긋하게 말했다.
위험하다고?
노복이 몸을 살짝 떨었다.
“하! 어이구, 어이구. 대단한 선견지명 납셨네. 아까 전엔 비가 안 내릴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비아냥거리던 왕십칠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비가 안 왔잖아? 에이, 몰라. 우연이겠지.
“이젠 위험하다 그래? 자기가 뭔데?”
왕십칠이 뭐라 더 말하려는데, 노복이 곧바로 몸을 돌려서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짐을 싸서 정 낭자 쪽으로 가자.”
시종들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도대체 네놈들 윗전은 누구더냐?”
고요하지만 마냥 잠잠하지는 않은 역참에 왕십칠의 내지르는 고함이 울려 퍼졌다.
“저 머저리 풍가 놈이 이렇게 기민할 줄은 몰랐네. 이걸 빠져나가다니. 이번엔 성안으로 들이는 수밖에 없겠어.”
“성안으로 들인다고? 풍 머저리가 감사를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하는데. 그놈이 성에 들어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라고!”
역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을 하나가 있었다. 마을의 변두리에 있는 한 저택의 방 안에서는 아직 훤하게 켜져 있는 불이 창가에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비추었다. 한 명은 자리에 앉아 있고, 다른 한 명은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다.
풍림 덕분에 흠씬 두드려 맞았던 서리가 이 방에 같이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 좀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중 하나는 태창로 전운사의 서판(書瓣)이고, 다른 한 명은 세리(稅吏)였다.
어두운 표정의 세리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걸어 다녔지만, 서판은 한껏 여유 있는 표정으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시간도, 다른 조건들도 딱 들어맞았는데. 왜 실패했지? 혹시 유중(劉中) 그자가 괜히 머리를 굴리다 일을 망친 게 아닐까?”
세리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어금니를 세게 깨물고 대꾸했다.
“아마 그건 아닐 걸세. 좀 전에 온 사람 말로는, 불의를 못 참는 행인이란 자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고 했어. 쳇, 어디서 굴러온 놈들일지는 몰라도, 이 태창 바닥을 얌전히 지나가지 않는다니. 내 기필코 쓴맛을 보여 줘야겠군!”
서판이 느긋하고 편안한 말투로 말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나섰던 자가 있다니, 유중이 일을 제대로 하긴 했네. 되도록 일을 아주 시끄럽고 크게 만들라고 시켰으니 말이야. 백성들이 화가 나서 아우성칠 정도면 충분하지. 그나저나, 그 풍 머저리는 듣던 것만큼 멍청하지는 않은가 보군. 우리의 판단이 틀렸어.”
느긋한 것도 모자라 눈웃음까지 지으면서 여유를 부리는 서판의 모습에 세리는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 앉았다.
“장부 검사도 확실히 하는 데다가 머저리도 아니라니, 상대하기 더 어렵지 않겠나? 만에 하나 그자가 정말 성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태창로의 관직 자리가 죄다 텅텅 비게 생겼어!”
서판이 천천히 찻잔을 어루만지며 감탄했다.
“끔찍하겠군.”
관리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한 명씩 관복을 벗으며 감옥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남의 일인 양 감탄까지 하고 앉아 있는 서판을 보면서 세리가 다급하게 물었다.
“빨리 어떻게 해야 할지나 말해 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다고.”
“어떻게 하긴.”
서판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한 사람만 비참해지는 게, 여럿이 비참해지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서판이라는 자는 겉으로 보기에 고상하고 예의 바른 문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운사에서 삼십 년씩이나 서판 자리를 꿰차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이러한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세리는 잘 알았다.
세리도 조심스럽게 서판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조용히 물었다.
“그럼 자네의 말은?”
서판이 갑자기 세리의 목을 손으로 슥 베는 시늉을 했다.
가을 중순의 밤공기가 서늘했다. 목을 스치는 서판의 가느다랗고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손이 세리에게는 진짜 칼날처럼 느껴졌다.
놀란 세리는 몸이 굳어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윽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몸을 살짝 떨고는 서둘러 자세를 고쳐앉았다.
자신 때문에 깜짝 놀란 세리의 모습에 서판은 웃음을 터트렸고, 세리는 어쩐지 무안해졌다. 남에게 놀림을 당한 것도 민망했거니와 남 앞에서 두려움을 내비친 것도 민망했다.
“뭐 하는 거야!”
세리가 기분이 나쁘다는 듯 소리쳤다.
“내 말대로 하자니까.”
서판이 웃으면서 말했다. 목을 만지던 세리가 멈칫했다. 그는 그제야 서판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서판을 쳐다보았다.
“어명을 받고 오는 조정의 관리를 죽이겠다고?”
세리가 목소리를 키우자 서판이 그를 흘겨보았다. 세리는 서둘러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는 다시 조용히 속삭였다.
“자네 미쳤나? 그건 연루된 모든 사람이 줄줄이 목숨을 잃는 대죄야!”
“그래도 남이 죽는 게, 내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서판이 느긋하게 말했다. 세리는 인상을 쓴 채로 목을 만지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서판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별로 큰일도 아닐세. 사람이 꼭 누구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죽는 건 아니잖나? 의외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거지. 예전에 오주(吳州)의 관고(官庫)에 큰불이 났던 것처럼 말일세. 뭐, 우리도 태창의 관고에 불을 지를 수야 있겠지만, 그럼 우리가 수작을 부렸다는 게 너무 표가 나게 되니 풍 머저리 손에 우리 약점을 쥐여 주는 거나 다름없잖나. 그러니까 차라리…….”
“차라리 역참에 불을 지르자고?”
세리가 저도 모르게 말을 툭 뱉었다.
“왕대(王大), 이래서 자네가 똑똑하다는 거야. 아주 좋은 방법이로군.”
서판이 웃음을 보이며 세리의 면전에 대고 엄지를 척 세워 칭찬했다. 세리가 서판의 손을 탁 쳐내고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좋기는 개뿔. 조팔(曹八), 나한테 떠넘기지 마. 이 방법을 누가 먼저 생각해 냈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잖나.”
“걱정하지 말게. 일이 잘 풀리면, 아무도 죄를 추궁하지 않을 걸세. 날씨도 건조하고, 몇 년 동안 수리도 제대로 안 한 그 조그마한 역참에 불이 붙었다 한들 누가 이상하다고 여기겠나?”
서판이 웃으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세리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더군다나, 위쪽에서도 이번 화재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을 걸세. 신병영 쪽 사람들은 조정의 누군가한테 미리 귀띔을 받았던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자들이 우리 말만 듣고 여기까지 왔겠나? 풍 머저리가 평소에 이리저리 오지랖을 부려대서, 불만을 품었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야.”
서판의 말을 다 듣자, 세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서판은 미소를 머금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역참에서 끝내 버리는 게 가장 깔끔해.”
서판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전운사 대인께서도 같은 생각이라네.”
전운사 대인!
세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틀어막았다.
“한데 역참에 발이 묶인 사람들이 많다지 않았나? 그리고 정말 역참에 불이 붙게 되면, 불이 거세져서 쉽게 꺼지지 않을 텐데.”
세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일이 더 커지니까 좋은 거지. 그렇지 않아도 그 역참을 수리해야 한다고 계속 말이 나왔는데, 상부에서는 돈도 안 주고 각 지방에서 알아서 해결하라 하지 않았던가. 지방에 남는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 역참을 더 수리하지 않으면, 일이 생길 거라고 상부에 누차 보고했는데, 다 무시했잖아. 이번에 정말 일이 터지면 필히 어사대로 상소가 올라갈 거야. 상소까지 올라왔는데 상부에서 돈을 안 풀어줄 리가 없겠지.”
서판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서판과 자신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생각에 세리는 씁쓰레한 입맛을 다셨다.
“서둘러야 해. 이 새벽 시간대가 가장 졸릴 때 아니던가. 밤바람에 불이 붙기도 좋을 테니, 동이 트기 전에 서둘러 다녀와.”
서판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세리를 재촉했다. 세리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이를 악물며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치고는 벌떡 일어섰다.
“알겠어. 그리하도록 하지. 우리와 직접 척을 진 건 아니지만, 누가 그자더러 재수가 없으랬나. 다 제 운명을 탓해야지. 또 일을 그르칠 순 없으니,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하겠네.”
서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세리를 불러 세웠다.
“역참에 묵고 있는 사람 중에 다른 중요한 사람이 없는 건 확인했지?”
“없어, 다 확인했어. 평범한 백성이 대부분이고, 고작해야 하급 관리 몇 명뿐이야. 염려 말라고.”
그 말에 서판은 고개를 다시 끄덕이고 방을 나서는 세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곧이어 여러 사람의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짙은 밤 속으로 사라져갔다.
소란스럽던 역참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역참 밖, 정교랑 일행이 있는 천막도 왕십칠이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에야 잠잠해졌다.
눈을 감고 침상 위에 잠들어 있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며 반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근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바닥에 깔아둔 털 깔개 위에 몸을 뉘었다. 그러고는 침상 옆의 탁자 위에 올려진 정교랑의 활과 화살을 쳐다보았다.
길 위에 있다 하더라도 아씨의 습관들은 여전하네. 글씨 연습이며, 책 읽기며, 활쏘기 연습까지.
반근은 미소를 짓고는 눈을 감았다.
역참의 뒷마당에서는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땔나무를 쌓아두는 창고 안은 밤새 켜둔 불빛으로 환했다. 조그마한 창 너머로, 꽁꽁 묶인 채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다섯 사내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창고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두 보초는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보초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교대가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어디서 퍼질러 자고 있겠지.”
반대편에서 나른하게 벽에 기대어 있던 다른 보초가 말했다. 그가 갑자기 몸을 곧게 세운다 싶더니 벽에 기댄 채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불평하던 보초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정도로 졸리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보초의 귓가에 무언가에 푹 찔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목을 부여잡았지만, 이미 손 틈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침입자가…….”
그는 마지막 한 마디를 끝맺지 못하고 바닥에 푹 고꾸라졌다.
-이리 와-
창고 문 앞에서 털썩 소리가 들려오자, 창고 안에 있던 다섯 사람이 화들짝 놀라면서 깨어났다. 놀란 그들이 문틈 아래를 내다보니, 두 보초가 바닥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창고의 문이 열렸다.
“왕대!”
서리가 크게 기뻐하며 소리치자, 세리가 그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죽고 싶어?”
세리가 눈을 부릅뜨면서 서리에게 낮게 호통쳤다. 세리의 뒤로 두어 사람이 더 들어와 다섯 명의 몸에 묶여 있던 밧줄을 끊어냈다.
“왕대, 자네는 나를 내팽개치지 않을 줄 알았어.”
서리는 몹시 기뻐하며 눈물을 보였다. 세리는 침을 칵 뱉고는 턱으로 밖을 가리켰다.
“못난 놈. 걸을 수는 있지? 어서 가.”
다섯 명은 흠씬 얻어맞은 통에 삭신이 쑤셨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칠 정도의 힘은 아직 남아 있었기에 서둘러 서로를 부축하며 창고를 나섰다.
“왕대, 이렇게 끝내려고? 우리는 이렇게 도망친다고 한들, 이미 앞길이 영영 끊겼어.”
서리가 제자리에서 멈칫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다. 목숨만 부지해도 감지덕지라고 할 땐 언제고, 목숨을 건지자마자 자신의 돈줄부터 챙기려는 꼴이라니.
“흥, 염려 붙들어 매.”
세리가 옷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은은한 등불 아래 비치는 물건의 정체를 알아본 서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약 심지잖아!”
서리는 최대한 나지막이 소리치고는 옆의 다른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호리병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과 가까이 서 있던 탓에, 호리병 속에 들어 있는 알싸한 기름 냄새가 느껴졌다. 서리는 이가 떨려왔다.
“이건, 이건!”
세리가 호리병을 보며 눈빛을 반짝이는 서리를 흘겨보고는 그를 재촉했다.
“빨리 가. 같이 순장되고 싶어?”
정신을 차린 서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리가 호리병을 찬 두 사람에게 손짓하자, 그들은 조용히 역참 가장 뒤쪽에 있던 안채 벽을 따라 호리병 안에 든 기름을 부었다.
세리 일행은 역참 안에 켜져 있던 모든 등불을 돌로 깨부순 후였다. 그 덕에 세리를 포함한 여섯 명의 사내가 역참 밖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칠흑 같은 어둠에 가려졌다. 이들이 역참 대문을 나서는 순간, 역참에 붙은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이야!”
역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역참 밖에 있던 천막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외침 소리에 이제 막 역참을 나오던 여섯 명은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역참 반대편, 모닥불이 피워진 곳에서 야간 보초를 서던 네 사람이 벌떡 일어서는 걸 보았다.
바깥에서 불이 났다고 외치는 통에 역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잠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은 불이 붙은 역참을 보고 울며불며 난리를 쳤다. 불길은 거센 밤바람을 타고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잠에서 깨어난 조 집사와 다른 시종들도 불이 붙은 역참을 보면서 경악했다.
“어서 불을 꺼야 해!”
사람들이 하나같이 서두르며 역참 쪽으로 내달리려는 모습에 조 집사가 명령했다.
“열 명만 가고, 나머지는 여기를 지키도록 해라.”
명령을 들은 열 명의 시종들은 아직 치우기 전인 솥과 그릇을 닥치는 대로 쥐고 역참으로 뛰어갔다.
역참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불을 내자는 세리의 생각이 무서워서 처음엔 벌벌 떨던 서리는, 막상 역참이 눈앞에서 활활 타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감히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을 노리다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서리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역참을 내다보았다. 더욱 거세지는 불길 탓에 주위가 밝아지자, 그들이 서 있는 모습이 조금씩 비쳤다.
“일단 어디 가서 숨어 있어.”
세리가 조용히 말하고는 발걸음을 떼려고 하던 찰나,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 빌어먹을 년 때문에 일을 망치고, 우리가 이렇게 얻어맞게 된 거잖아!”
서리는 분을 못 이기겠는 눈치였다.
세리도 서리가 쳐다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천막에 있던 사람들 몇 명이 불을 끄려고 달려가는 모습과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호위 몇 명이 역참을 가리키면서 의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한 천막에서 여인 두 명이 걸어 나왔다.
“저 사람들이, 그 불의를 지나치지 못했다던 행인들이야?”
세리가 묻자 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신병영 병사들을 저 지경으로 때려놨어.”
서리가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쳐다보자, 병사들도 억울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대, 나한테도 화약 심지 하나만 줘.”
서리가 갑자기 세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에 쓰게? 일단 여기가 다 타기 전까지만이라도 숨어 있어.”
“저놈들부터 뜨끈하게 해 줘야겠어.”
세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리는 재차 말했다.
저 세상 물정 모르는 것들한테 쓴맛을 보여 줘야지.
세리가 잠시 생각하고는, 화약 심지와 허리춤에 묶어 두었던 호리병을 서리에게 건넸다.
역참 안팎으로 사람들이 마구 뛰어다니고 있던 터라, 서리는 굳이 몸을 숨기지 않고 한 손에는 화약 심지를, 다른 한 손에는 호리병을 쥔 채 천막을 향해 달려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멀쩡하던 역참에 왜 불이 붙고 난리야!”
산발한 모습의 왕십칠이 두봉을 겨우 걸친 채로 역참을 향해 외쳐댔다.
시종들은 왕십칠의 말에 대꾸할 틈이 없었다. 역참에서 바깥으로 몰려나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사람들을 천막 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 동시에 다른 쪽으로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십칠의 옆에는 노복이, 정교랑의 옆에는 반근이 자리를 지키며 윗전과 함께 역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왕십칠과는 달리, 노복은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그는 불이 붙은 역참을 보다가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로 위험했네. 정말로 신묘하기 짝이 없는 예지력이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우연인가?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던 노복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두봉을 두르고 커다란 두모를 쓰고 있던 소녀가 갑자기 옷 소매를 걷고는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저건 활이잖아! 저걸로 뭘 하려고?
정교랑이 활시위를 당기며 쳐다보고 있는 곳을 따라 노복이 고개를 돌리던 찰나, 활시위를 떠난 긴 화살이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이와 동시에,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섞인 서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화약 심지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 손으로 기름이 든 호리병을 던지려는 동작을 취했다.
죽어 버려!
이때, 긴 화살 하나가 매서운 기세로 날아와 서리의 목을 관통했다.
순식간이었다. 서리는 목에 무슨 느낌이 들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다. 서리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화약 심지와 기름으로 가득 찬 호리병을 몸으로 깔아뭉갰다.
화르륵 소리와 함께 밖으로 뛰어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길이 일었다. 앞으로 내달리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불이 난 건 역참 쪽인데, 어떻게 역참 바깥에서 누군가가 타 죽었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세리와 병졸 네 명은 불에 활활 타고 있는 서리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수로 화약 심지와 기름통을 손에서 놓친 건가?
세리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왜 발버둥을 안 치지? 실수로 떨군 거라면 분명히 비명을 지르고 바둥거리며 불을 끄려고 할 텐데, 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거야?
큰일이다! 불이 붙기도 전에 이미 숨이 멎은 거야!
세리가 정신을 차리고는 천막 쪽을 내다보았다. 뜨거운 불빛에 일렁이는 거리의 몇 장 밖에서는 이미 화살 하나가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리 와!”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세리의 귓가를 스쳤다.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주위 사람들은 일제히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왕십칠 또한 눈을 크게 뜨고 여인을 쳐다보았다.
저 여인이 지금 활로 뭘 하는 거야? 불을 끄는 건가? 누구더러 오라는 거지?
사람들은 활시위가 향하는 쪽을 쳐다보았다.
불길로 새빨갛게 물들여진 하늘 아래, 역참 앞의 한구석에 다섯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내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안 듣네.”
정교랑은 말을 끝내자마자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세리의 시야에는 주위의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화살촉에 비친 불빛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화살촉 너머로 보이는 여인의 두봉이 바람에 날리며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내, 흡사 날개를 활짝 펴는 박쥐처럼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것이 세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날아온 화살은 세리의 턱 아래를 관통하고 그대로 목에 꽂혔다. 그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넘어지고는 두어 번 꿈틀대다가 숨을 거뒀다.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을 본 병졸들은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여인의 목소리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이 죽었다! 살인이야!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주위 사람들은 더욱 비명을 내지르며 혼란에 빠졌다.
살인이다! 살인이라고!
일렁이는 불빛을 빌려 화살에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왕십칠은, 사람이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죽는지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생전 처음으로 살인을 목격하다니! 심지어 여인이 살인하는 것을! 게다가 그 여인이 하필이면 내 정혼자!
왕십칠은 굳어 버린 고개를 천천히 돌려 자신의 정혼자를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손에는 아직 활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걸려 있던 화살통에서 또 한 발의 화살을 꺼내 들어,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병졸을 향해 겨눴다.
“이리 와!”
정교랑은 아까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저 멀리 소란 속에 파묻혀 있는 병졸에게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물론 왕십칠은 정교랑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리 와! 말을 안 듣네? 그럼 죽어야지!
말을 안 들으면…… 죽는다고…….
왕십칠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살인이야!”
왕십칠은 비명을 내지르고 기절해 버렸다. 그는 소란스러움 대신 어두운 고요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복은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얼이 빠져 버렸다.
“이게 어딜 봐서 채문희야. 누가 보아도 순관(荀灌)인 것을.”
정교랑은 병졸을 겨누긴 했지만, 끝내 그를 향해 화살을 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조 집사와 시종 몇 명이 병졸들을 향해 즉시 돌진했다.
병졸들은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고, 이전에 맞았던 것 때문에 온몸이 쑤시도록 아팠다. 게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 둘이 죽은 것을 보고는 두려움에 심장이 벌렁댔다. 이미 혼이 빠진 병졸들은 저항할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직 이쪽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했다.
사람들은 잎이 달린 나뭇가지로 온몸에 불이 붙었던 사람의 몸을 마구 때려서 불을 꺼뜨렸다. 그 사람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 버렸지만, 주씨 가문의 시종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병졸들에게 백성들을 쫓아내라고 지시했던 사람입니다. 여기 기름통도 있고요.”
시종이 나지막이 고하자, 조 집사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씨, 설마 이자가 우리 쪽에도 불을 지르려 했던 겁니까?”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정교랑이 대답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활을 조 집사에게 쥐여 주면서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