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당나라 황궁의 태감 기구는 내시성(內寺省)이라고 불렸습니다. 품계로는 도지(都知), 부도지(副都知), 압반(押班) 등이 있습니다.
-배웅-
아침 햇살이 밝아오자, 삼중으로 겹겹이 세워진 육중한 성문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공자님, 공자님. 그만 일어나세요.”
노복이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며 불렀다. 왕십칠은 눈을 감은 채 마차 안에 아무렇게나 퍼질러져 있었다.
“공자님, 성문 밖으로 배웅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노복이 귀찮다는 듯, 왕십칠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찍 길을 나서느라 졸려 죽겠어. 주씨 가문 사람들도 따라 나오질 않는데, 배웅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건 또 그렇네.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저기 나온 수많은 사람은 정 낭자를 배웅하러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연한 생각을 하는 거겠지?
머뭇거리던 노복은 결국 휘장을 내리고 마부 옆에 앉아 앞쪽을 쳐다보았다.
열댓 명 되는 주씨 가문의 호위들이 말에 올라 마차의 행렬을 이끌었고, 그 뒤로는 정 낭자의 마차, 그 뒤로는 왕십칠의 마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갖가지 짐을 실은 마차 두 대가 일렬로 가고 있었다.
앞선 호위와 마차를 보면서 노복은 뭔가 아리송한 듯 생각에 빠졌다.
본디 경성을 떠나는 일은 우리 쪽에서 책임져야 할 일이었는데, 여인이 입을 열자마자 주씨 가문에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지.
흠, 주씨 가문은 왜 그 낭자가 입을 열고 나서야 준비를 시작한 걸까?
노복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마부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복은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성을 드나드는 행인과 마차들이 많다 보니, 이른 시간에도 성문 앞은 붐벼 막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노복의 예상과는 달리, 성문 앞까지 가는 길이 뻥 뚫려있었다. 양옆으로 갈라진 행인들과 마차들이 마치 정 낭자의 마차 행렬을 위해 길을 가른 것만 같았다.
정 낭자만을 위해 갈라낸 길이라……. 내가 또 너무 앞서가는 거겠지?
“앞에 배웅하러 온 사람들이 있어 주씨 가문 사람들이 먼저 갔습니다.”
시종 하나가 뛰어와 노복에게 알렸다.
정말 배웅하러 온 사람들이었어?
“누구기에?”
노복의 물음에 시종이 대답했다.
“주 부인이라고 하던데요.”
주 부인? 주 노야가 아침에 분명히 부인의 병이 다 낫지 않아 나오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외숙모가 조카를 이렇게나 챙긴단 말이야? 아픈 몸을 이끌고 나올 정도로?
주씨 가문 사람들이 온 거라면, 왕십칠이 나가 맞이해야 했다.
“공자님, 공자님. 어서 일어나세요. 주 부인이 배웅하러 나오셨답니다.”
왕십칠이 투덜거렸다.
“날 배웅하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왕십칠의 불평이 노복에게 통할 리 없었다. 노복이 억지로 왕십칠을 마차에서 끌어 내리고 앞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마차 앞에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서 있는, 화려한 옷차림의 아리따운 미모를 가진 여인이 보였다. 누가 무슨 재미있는 말이라도 했는지, 여인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기까지 했다.
저게 어딜 봐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야!
“음? 주 부인이 어디 계신데?”
왕십칠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노복이 흠칫 놀라고는 고개를 돌려 왕십칠을 쳐다보았다.
“저기에 있는…….”
노복이 마차 앞에 서 있는 여인을 가리키자, 왕십칠은 도리어 되물었다.
“어디에 있다는 거야?”
“저기 저분이요! 아, 저기 대전이 인사드리러 가네요.”
노복은 다시 한번 여인을 가리켰다. 마침 왕씨 가문 시종 하나가 웃으며 여인 쪽으로 인사하러 가고 있었다.
“부인께서 병중인데도 일부러 나오시고…….”
왕씨 가문의 젊은 시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태도가 불손하여 맞았다지만, 이번에는…….
여종 하나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시종이 놀라서 여종을 쳐다보는 찰나, 맑은 따귀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본 노복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끔 감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왜 또 맞은 거지?
“네 이놈! 부인께 무슨 말버릇이더냐!”
여종이 눈썹을 치켜뜨며 호통치고는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젊은 시종을 때려 내쫓으라고 명령했다. 노복은 아차 싶어 빠른 걸음으로 젊은 시종에게 걸어갔다.
“멀쩡한 사람을 병자 만들다니,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인 게야!”
여종은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듯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멀쩡한 사람을 병자로 만들어?
노복이 다급하게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그리고 즉시 왕씨 가문 사람을 시켜서 젊은 시종을 데리고 가게 했다.
진 부인은 아랫것들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정교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진 부인이 뭐라 말한 건지, 주위에 있던 시녀와 여종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정교랑만 빼고.
“이것도 재미가 없어? 일부러 배웅까지 하러 나왔는데, 좀 웃어줘요.”
진 부인이 정교랑의 어깨를 잡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교랑이 진 부인을 잠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유령(劉伶)이라는 자는 술을 절제하지 않고 마시며 제멋대로 굴고, 집에서는 옷을 벗은 채 알몸으로 있곤 했죠. 누가 그 집에 놀러와 유령의 모습을 비웃자, 유령은 이렇게 대꾸했죠. ‘나는 하늘과 땅을 내 집이라 여기고, 이 방을 내 바지라 여긴다네. 그런데 자네는 왜 내 바지 속에 들어와 있나?’”
갑작스러운 정교랑의 이야기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넋을 놓았다. 가장 먼저 이야기에 반응한 사람은 진 부인이었다. 진 부인이 박장대소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정교랑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못 말리는 아이구나, 정말!”
진 부인은 배를 부여잡고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웃었다. 허리도 펴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옆에 있는 여종들을 붙잡으며 계속해서 못 말린다는 말을 내뱉었다. 정교랑은 그저 말없이 싱긋 웃고는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펴서 예를 올렸다.
다른 한쪽에서는 노복이 젊은 시종을 꾸짖고 있었다.
“저 진짜 별말 안 했습니다. 주 부인께 인사를 올렸을 뿐인데.”
시종이 뺨을 부여잡고 말했다. 솔직히 이번에 맞은 건 그리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시종은 억울해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내가 입만 열면 맞는 거야? 억울해 죽겠다고!
“사람을 잘못 알아본 거야. 맞을 짓을 했네. 저분은 주 부인이 아니야.”
왕십칠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주 부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왕십칠은 인사를 하러 가지 않은 것이다.
역시 아니구먼. 그럼 저 여인은 누구지? 뿜어져 나오는 기품과 시종들의 숫자를 봐서는 보통 가문이 아닌 것 같은데.
노복이 옆에 있던 주씨 가문의 사환을 붙잡고 묻자, 사환은 콧구멍이 다 보일 정도로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설마 저분도 모르는 거요?”
사환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한마디가 있었다.
어쩜 이리 식견이 없을까!
“저희가 경성에 머무른 시간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저분이 어떤 분이신지요?”
깔보는 태도에도 노복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저 마차를 보시라고.”
주씨 가문의 사환이 턱으로 마차 쪽을 가리켰다. 왕씨 가문 사람들은 일제히 진 부인이 타고 온 마차를 쳐다보았다.
좋은 마차네.
“저 연꽃 문양은 공주부의 표식이고, 저분은 진 부인이십니다!”
시골 촌뜨기들이 마차만 보며 감탄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함을 참지 못한 사환이 알려 주었다.
공주부, 진씨 가문!
비록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왕씨 가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씨 가문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진씨 가문에서 저리 잘 보이려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설마…….
“저, 진 부인이 설마 정, 정 낭자를 배웅하러 오신 거요?”
노복이 말까지 더듬으면서 묻자, 주씨 가문의 사환은 풉 웃음을 터트리고 노복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럼, 댁들을 배웅하러 나오셨겠소?”
마차 행렬이 점점 멀어져 까만 점이 될 때까지, 진 부인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배웅했다.
“부인, 십 리 밖까지 나가서 배웅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세요.”
여종이 웃으면서 진 부인에게 말하자 진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한 낭자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퍽 재미있기도 해. 그러니 내 바보 아들이 저리 아쉬워하는 거겠지.”
진 부인은 몸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 성문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여종들이 진 부인의 시선을 따라가자, 성문의 꼭대기에 있는 소년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가? 왜 한 치의 아쉬움도 없는 거야? 그래도 하루 이틀 안 사이가 아닌데.
함께 잔도 들지 않을 정도로 무시하다가, 정면에서 대놓고 비웃다가, 음으로 양으로 힘을 합치기까지……. 그녀의 눈에는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십삼은 작은 한숨을 토했다.
가문이나 인품은 별 차이가 없지, 다 똑같다고 했다. 왜 차이가 없다는 거지?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사람과 사람이…….
진십삼은 돌연 성벽을 짚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설마 그 사람이라는 게,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말하는 건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는지.
- 내 세 번째 원칙을 미리 알았더라도, 내가 공자의 다리를 고치게 해 줬을 건가요?
진십삼의 눈앞에 정교랑의 미소가 떠올랐다. 진십삼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다를 게 뭐 있나? 나조차도 남들과 똑같은데!
사실 정 낭자는 다른 이에게 독한 말을 내뱉는 매정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독한 말을 퍼붓는 사람이었다.
진십삼은 뒤돌아 성문을 내려가려 하다가,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고 끝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마귀 몇 마리가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지붕 위를 날아갔다.
“이거 놔, 손 떼라고.”
뒤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자, 내시들의 살뜰한 부축을 받으며 이쪽으로 오는 이황자가 보였다. 이곳 전각은 이미 버려진 지 오래라, 오가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잡초도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아이고, 전하. 어찌 거기에 올라가신 겁니까. 당장 내려오세요. 떨어지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내시들이 진안 군왕을 알아보고는 당장 내려오라고 아우성쳤다. 진안 군왕은 그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난간 사이로 다리를 빼고 여유롭게 다리를 흔들거렸다. 딱히 대꾸하지도, 내려오지도 않았다.
“형님, 여긴 왜 왔어요?”
내시들의 손길을 뿌리친 이황자가 장포를 들어 올리고 환하게 웃으면서 쪼르르 달려왔다. 진안 군왕은 놀라 소리치는 내시들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뻗어 이황자를 데려다 자신의 옆에 앉혔다.
“우와, 여기서는 아주 멀리까지 보이네요!”
이황자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듯, 신이 나서 양손을 휘휘 저으며 외쳤다.
“맞아요. 여기는 황궁에서 가장 멀리 내다볼 수 있는 곳이에요. 어렸을 때도 자주 오고 싶었는데, 같이 와 줄 사람도 없었고, 여길 오라고 허락해 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이젠 다 컸으니까 혼자 올 수 있게 됐지요.”
진안 군왕이 먼 곳을 내다보며 말했다.
“형님은 뭘 보려고 여기에 오는 거예요?”
“나요? 친구를 배웅하러 왔죠.”
이황자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친구를 배웅하러 왔다고? 황량하고 외진 곳이라 까마귀 말고는 살아 있는 것이 없어 보이는데?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내시들은 섬뜩함에 몸을 살짝 떨었다.
“전하, 전하. 어서 내려오세요.”
내시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어떻게든 이황자를 데려가려고 했다. 진안 군왕은 그런 내시들의 모습을 보고는 이황자를 양손으로 훅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내시들은 경악하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명을 질러댔다.
진안 군왕은 내시들의 비명을 들으며 난간에서 여유롭게 폴짝 뛰어내린 뒤, 이황자를 땅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다.
“형님, 형님. 한 번만 더요!”
이황자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한 번 더 날래요!”
다급하게 뛰어온 내시들이 이황자를 진안 군왕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고는 진안 군왕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시들의 무례함에도 진안 군왕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하하 웃으면서 걸음을 뗐다.
“가자, 가.”
“정말로 갔다고?”
같은 시각, 진(陳)씨 가문에서는 일상복을 입은 진소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사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럼 가짜로 가게? 그 낭자는 체면 차리고 가식 떠는 게 뭔지도 모를걸? 있는 그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거지.”
진 노태야가 진소를 흘겨보며 나무라자, 진소가 멋쩍은 듯 웃었다.
“정 낭자를 데려왔을 때도 딱 이맘때였는데, 벌써 이렇게 일 년이 지났네요.”
웃으며 이야기하던 진소는 정교랑이 경성에 온 지 이제야 겨우 일 년이 되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왜 이렇게 오래 있었던 것 같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 낭자가 경성에 들어온 뒤로 조용했던 날이 하루도 없었네.
정교랑 때문에 진소가 놀랐던 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진소는 고개를 돌려 진 노태야의 뒤에 세워진 병풍을 쳐다보았다. 병풍 위에 남아 있는 동그라미 몇 개의 흔적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사람 목숨. 저게 다 그 여인의 손에 죽은 사람들의 목숨이라지. 정 낭자는 이제 겨우 만 열다섯일 텐데.
확실히 불길한 사람이었기에, 진소는 진씨 가문의 절름발이가 했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꺼리는 게 있었는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게 사실이었다.
돌아가시게나. 가서 좋은 사람한테 시집가고, 지아비를 섬기며 아이들을 가르쳐야지. 그게 보통 여인네들의 삶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진소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낭자 하나 때문에 그토록 근심했다니. 신중하고 조심성이 있다고 해야 할지, 겁이 많다고 해야 할지.
“내가 아직 담량이 부족하군.”
진소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구월 중순인데도 서북에는 벌써 한기가 엄습했다.
반나절이 다 되어 가도록 서무수는 언덕에 엎드려 있었다. 다리가 저릴 때 즈음, 누군가가 엎드린 자세로 천천히 기어왔다.
“어떻습니까?”
서무수가 속삭이듯 그에게 물었다.
“불구덩이에 아직 열기가 남아 있어.”
범강림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조리 떠나다니, 이유가 뭐지?”
낮게 읊조리던 서무수가 고개를 조금 들어 앞쪽의 산골짜기를 내다보았다.
산골짜기의 나무는 몇 그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베어버렸다. 적들의 기습에 대비하고, 수비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멀리서 보니, 천막과 짐들은 그대로였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는 채로 적막하기만 했다. 오직 새들의 메아리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무언가 떠오른 듯, 서무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용곡성(龍谷城)이 그리 멀지 않은데.”
“그게 왜?”
범강림이 물었다.
“용곡성을 기습하기엔 퍽 좋은 위치 아닙니까.”
서무수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말하자 범강림이 눈을 부릅떴다.
“기습? 복강부(伏江部)의 우두머리가 용곡성에 있어. 그자가 미쳤다고 배반을 해?”
“다른 사람이 미쳤다면요?”
서무수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범강림을 손짓으로 제지했다.
“일단 돌아가서 대인들께 말씀을 올려 봅시다. 그분들이 결정해야죠.”
두 사람은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와 한쪽에 세워 두었던 말을 타고 자리를 떴다.
오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지는 한결 가벼운 분위기였다. 서북까지 가는 길에 큰 어려움이나 고난은 없었지만, 먼 길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을 여간 지치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목적지까지 수십 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장병들은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밥을 먹을 상상에 기뻐했다.
“뭐라고? 용곡성이 위험하다고?”
한 지휘관이 눈앞의 두 사내를 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지휘관은 행군의 관례에 따라 항상 앞쪽으로 정찰을 보내고 뒤쪽으로 보초를 두었지만, 이는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다. 조정의 무장 깃발을 휘날리며 행군하고 있는데, 어느 눈먼 놈이 감히 소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조금만 더 가면 드디어 요새에 도착하는데, 정찰을 보냈던 두 명이 요새가 위험하다고 하니 지휘관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용곡성은 서북 전선의 가장 큰 요새인지라, 늘 병력을 많이 두고 완벽하게 수비해 온 덕에 서쪽 오랑캐들도 함부로 넘보지 못했다.
“용곡성의 병력이 비어 있다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보입니다만.”
서무수의 말에 지휘관은 즉시 호통을 치며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네놈이 알긴 뭘 안다고. 썩 꺼지거라.”
“대인, 저희는 용곡성에서 지낸 적이 있어 압니다. 용곡성에 그런 기습 공격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닙니다.”
범강림이 말을 덧붙였다. 주위에 있던 군관들이 논쟁을 듣고는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뭔데 그래?”
서무수가 고개를 돌리자, 가까이 다가온 사람 중에 주육낭이 보였다. 하지만 주육낭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지휘관이 서무수와 범강림의 말을 옮겼다.
“그럴 리가? 귀순한 번부(藩部:복속한 지방이나 지역을 일컫는 말)의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기습이라 단정하기는 어렵지. 사냥하러 나간 걸 수도 있잖소.”
서무수와 범강림은 자신들이 공연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간에 그들이 서북을 떠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서무수와 범강림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일단 가서 확인해 보죠.”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서무수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육낭이었다. 그는 여전히 서무수와 범강림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두 대인께서 모두 계시니,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주육낭은 두 대인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가 말한 대인들은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암암리에 기 싸움을 벌이느라 행군이 진행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했다. 혹여나 누군가가 이 일을 두 대인에게 보고하게 된다면, 분명 별일 아니었던 일도 커지게 될 터였다.
군관들은 재빨리 논의를 마치고 서무수에게 사람을 데리고 용곡성에 먼저 가 보라고 명했다.
“난 동의할 수 없네!”
유규가 서무수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대인, 이건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쓸데없는 짓?
군관 몇 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정말 기습을 하러 간 거라면, 이미 멀리 간 지 오래일 겁니다. 우리의 기마부대로 그자들을 따라잡기엔 턱도 없습니다.”
유규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장거리 이동은 말들의 말굽에 큰 손상을 입혔다. 이제 막 행군을 시작할 때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르기 직전인 지금으로서는 말들이 빠르게 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냥 쫓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되돌아와서 상황을 보고하기까지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면 이 일은 확실히 쓸데없는 짓에 불과했다. 군관들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네놈들은 도망칠 기회만 엿보는구나!”
유규가 눈을 부릅뜨고 외치자 서봉추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저희의 말이라면 가능합니다.”
누군가가 불쑥 외쳤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서무수 형제 중 하나가 보였다. 서사근은 흥분한 듯 상기된 얼굴로 앞으로 한발 내디디고는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저희의 말이라면 가능합니다.”
유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들의 말이라고 뭐 다를 게 있느냐? 더구나 말이 두 필씩 있는 것도 아니고.”
경성에서 출발할 때, 병사들 모두는 각각 말을 한 필씩 배정받았다. 서무수 등 일곱 명은 이전에 정교랑이 선물한 말들이 있어 말을 두 필씩 갖게 됐지만, 군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배정했던 말들을 도로 회수했다.
“다릅니다.”
원체 말수가 적은 서사근은 흥분한 탓에 더욱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희의 말은 다릅니다. 저희 말의 말굽은 전부 멀쩡합니다.”
서사근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행군이 늦어진 데에는 두 대인이 기 싸움을 벌인 이유도 있지만, 목적지의 절반쯤 도달했을 무렵부터 말들의 말굽이 상하여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춰야만 했던 이유도 있었다.
다른 이들의 말발굽은 모두 망가졌는데, 왜 저들의 것은 멀쩡한 거지? 설마 저들의 말은 천리마인가?
“이건 우리 누이가 준 말들이오! 우리 누이가 준 말이니, 대단할 수밖에!”
서봉추가 목청을 높였다.
그 여인이었군!
주육낭이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빛을 번뜩였다.
그렇게 된 거였어. 그 여인이 한밤중에 쫓아와서 주고 간 말이니, 평범한 말일 리 없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겉보기에는 평범한 말들이었는데.
말들을 가까이 끌고 온 서사근이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말굽을 가리켰다.
“말굽을 한번 보십시오. 여기까지 오는데도 전혀 손상이 없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서 서사근이 데려온 말들을 살펴보았다. 예전에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았지만, 그가 가리키는 대로 말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말굽마다 새까만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이게 뭐지?”
한 군관이 손으로 새까만 물체를 만지며 물었다.
이건 철로 만든 건데.
“이건…….”
서사근은 입술만 움찔대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이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어. 이, 이건 말굽에 붙어있는 거고, 철로 만든 거기도 하니까…….
“이건 편자입니다! 말굽이 마모되어 상하지 않게 보호해 줄 수 있지요.”
“고작 이 쇠붙이 몇 개로?”
누군가가 놀란 듯 되묻고는 몸을 숙여 말굽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쇠붙이 몇 개일 뿐인데. 발바닥에 아예 쇠붙이를 지져 놓은 건가? 그 외에는 별다를 게 없는데.
“네, 이 쇠붙이 몇 개로요. 그리고 제가 오는 길에 세심하게 돌보았더니, 오는 내내 말굽 손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전혀 손상되지 않은 말굽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됐고. 지체할 상황이 아니니 이 얘긴 다음에 하지. 자네 말들의 말굽이 멀쩡하고, 말들도 빠르게 달리는 데 무리가 없다고 하니, 서둘러 가 보게.”
주육낭이 말했다.
“주육낭, 사실 좀 터무니없긴 해. 번부에 사람이 좀 안 보인다고 해서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지레짐작하다니,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군관 중 한 명이 주육낭에게 물었다. 조정은 변방의 안정을 위하여 귀순한 번인(蕃人: 이민족)을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만에 하나, 누군가에게 변방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죄목이 씌워진다면, 결코 예삿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서무수 등이 일제히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내가 책임지겠소.”
주육낭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했다.
“난 믿으니까.”
말을 덧붙인 주육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믿는다고?
주위의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서무수 형제들을 쳐다보았다.
아는, 사이인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나. 우릴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어. 따지고 보면 내가 형님뻘이라고.”
서봉추가 눈치 없이 헤죽거리며 말했다.
형님?
주위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서무수가 서봉추를 흘겨보았다.
“우릴 믿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 여인을 믿는다는 뜻이다.”
서봉추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요?”
“당연히 누이지 누구겠어. 어서 가자.”
서무수가 서봉추를 다시 한번 흘겨보고는 말 위로 몸을 날렸다. 서봉추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멋쩍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에 올라탔다.
다른 형제들도 각자 창과 활을 챙겨 말에 올랐다. 서사근도 그들을 따라 말에 올라타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를 확 밀쳤다.
“이보시오, 뭐 하는 거요?”
서사근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를 밀쳤던 사람은 벌써 말을 타고 저만치 앞으로 달려갔다.
“내가 네놈들을 지켜볼 테다! 도망치려거든, 이 몸 손에 죽을 줄 알아!”
말 위에서 고개를 돌린 유규는 서사근의 삼석궁을 치켜들면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됐다, 그만해라. 넷째야, 넌 여기 남아 있어.”
서무수가 유규를 끌어내릴 기세의 형제들을 향해 외치고는 말을 재촉하며 떠났다.
“더 중한 일부터 해야지.”
매서운 밤바람이 불어오자, 군기가 세차게 펄럭였다. 바람 때문에 성벽 위의 횃불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대인, 대인! 형제들이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온몸에 혈흔이 낭자한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는데, 성벽에 서 있던 노장이 그를 단숨에 걷어찼다.
구레나룻이 하얗게 센 노장은 나이가 예순 정도 되어 보였고 새까만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무거운 갑옷을 몸에 두르고 있었지만, 이는 그의 발길질에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내 장병들이 언제 못 버틴 적이 있더냐? 감히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하다니, 참해라!”
노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옆에 있던 수하가 칼을 뽑아 들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병사의 머리는 댕강 잘려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일순간 성벽 위에 적막이 흘렀다.
“모두 깃발을 높게 들고, 횃불에 전부 불을 붙이거라! 잡부를 포함해 하나도 빠짐없이 성벽으로 올라오너라!”
노장이 손가락으로 성벽 아래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성벽 위에서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힘찬 함성이 울려 퍼졌고,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용곡성 성벽 위에는 사내들이 빽빽하게 늘어섰다.
하지만 실상 용곡성에는 삼천 명 남짓한 병사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해가 지기 전부터 싸운지라 병사들의 기력은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부상자도 백 명 가까이 됐다.
전투용 활을 쏘기 위해서는 많은 힘이 필요했지만, 이미 손끝이 저려 오던 터라 병사들이 쏜 화살들은 힘없이 날아갔다. 적군이 또다시 진격해 온다면, 이들이 쏜 화살은 적군의 갑옷에 맞고 맥없이 튕겨 나가는 소리밖에 낼 수 없을 것이다. 힘이 빠진 궁수들의 존재는 적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수하의 만류를 무릅쓰고, 노장은 성벽 위에 우뚝 섰다. 그는 어두컴컴한 밤하늘과 같은 황야를 응시했다.
황야에는 몇 안 되는 등불이 흔들거릴 뿐이었지만, 노장의 흐린 시야에는 어둠에 가려진 서쪽 오랑캐가 만여 명 가까이 보이는 듯했다. 서쪽 오랑캐들은 훌륭한 말과 두꺼운 갑옷, 양손에 쥔 활과 철로 만든 날카로운 무기를 앞세워 용곡성을 무너뜨리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대인, 소식을 전하러 간 지 벌써 오래인데, 도감(都監) 대인은 왜 아직도 군을 이끌고 돌아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수하가 조급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발이 묶인 게 틀림없다.”
노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대인, 원군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정말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노장은 수하를 쳐다보지 않았고, 좀 전처럼 목을 베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성안을 내려다보았다.
집집마다 켜 둔 등불 때문에 성안은 무척이나 환했다. 거리를 거니는 백성은 없었지만, 노장은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버티지 못해도 버텨야 한다! 우리가 모조리 죽기 전에는, 성안의 백성들이 다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야.”
용곡성이 뚫릴 경우, 서북 전선 전체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이는 병력과 재물의 손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타격 또한 막대할 것을 뜻했다. 노장은 뒷말을 삼켰다.
노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야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서쪽 오랑캐들이 또 성을 공격해 오는 소리군.
노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막 호령을 내리려던 찰나, 성안에서도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뒤쪽에서 희뿌연 낭연(狼煙: 전쟁 때 신호로 쓰던 봉화의 별칭)이 피어올랐다.
이를 본 성벽 위 병사들의 얼굴은 일순간 굳어 버렸다.
후방을 급습하다니!
노장은 서둘러 성벽의 반대쪽으로 달려가 뒤쪽을 내다보았다.
“대인, 어떡합니까?”
당황한 수하들이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노장에게 외쳤다.
“두려울 게 뭐 있더냐! 하나가 와도 막고, 둘이 와도 막으면 된다. 적군이 일천이든, 일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막아라!”
노장이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외치고 나니, 적군이 앞뒤로 들이닥치는 불안감이 잠시 가셨다.
노장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무거운 갑옷을 한 손으로 벗어던지며 차가운 바람을 맞서고 웃통을 드러냈다. 나이가 예순이 넘은 노장은 살집이 없고, 수십 년간 수련을 통해 만든 다부진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전고(戰鼓)를 울려라!”
둥둥! 둥둥! 둥둥!
북소리가 하늘까지 진동했다. 동시에 칼과 방패, 활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승! 필승! 필승!
성벽에서는 점점 더 커지는 구호 소리가 바람에 실려 멀리 퍼져나갔다. 병사들은 굴복은 생각지도 않고 굳건한 기세로 전쟁에 임했다.
바로 이 소리야, 바로 이 소리라고! 꿈에서 무수히 들려오던 그 소리!
드디어 들리는구나! 드디어 들려!
포복 자세로 땅에 엎드려 있던 서무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점점 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그는 손톱으로 땅을 긁었다.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유규가 조용히 말했다.
서무수 일행은 그의 말을 듣고 앞쪽을 내다보았다. 짙은 밤하늘 아래, 길 양쪽에 낮은 자세로 숨어 있던 이들이 귀신처럼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미 노출된 상황인지라, 오랑캐들은 더 이상 발걸음 소리를 숨기지 않고 횃불에 불을 붙였다. 불붙은 횃불들은 용곡성의 후문으로 순식간에 파도처럼 몰아쳤다.
“저 새끼들이…….”
서봉추가 땅에서 튀어 오르려는 것을 유규가 단숨에 제압했다.
“미쳤어?”
“저게 안 보이냐고!”
유규가 낮게 호통치자, 서봉추도 똑같이 되받아치고는 유규의 팔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누가 할 소리! 우린 여섯밖에 없잖아! 복강부의 번인은 수백 명이란 말이다!”
유규가 서봉추의 얼굴에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그럼 성이 함락당하는 걸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서봉추도 유규의 얼굴에 뜨거운 입김을 가득 내뿜으며 대꾸했다. 유규는 서봉추를 밀쳐내고 한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들의 말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니, 죄다 허풍인 게지? 후방의 대군은 왜 아직이더냐?”
더욱 세차게 불어오는 밤바람 탓에 앞쪽의 고함과 비명이 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용곡성에 병력이 부족한 게 분명하오. 그러니 기습 공격을 당하지. 그나마 남아 있는 병력은 성 앞쪽에서 반나절 동안 대치하고 있었을 테니, 뒤에서 급습해 오는 오랑캐를 막을 병력은 얼마 없을 텐데.”
서무수가 수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한 말을!”
유규는 서무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고개를 돌려 눈가가 찢어질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불이 붙은 후문을 노려보았다.
“횃불에 불을 붙여야 하오. 주변에 나뭇가지들 싹 다 모아서 불을 붙여요.”
서무수가 일어서며 말하자 범강림 등이 즉시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뭇가지를 찾으러 뛰어갔다.
“네놈들, 제정신이 아니구나. 위장이라고 해 봤자, 고작 여섯 명이서 누굴 겁줄 수 있겠느냐? 몇 명이나 놀라겠어?”
서무수가 말에서 활을 가져와 앞쪽을 응시했다.
“몇 명이 됐든 상관없소. 할 수 있는 만큼 겁을 주려는 거요.”
격앙된 북소리가 쉼 없이 울렸다.
“죽여라!”
“지켜야 할 가족과 백성들이 전부 성안에 있다. 형제들이여! 저 오랑캐들이 안으로 쳐들어가게 둬선 안 된다!”
성벽 위에 있던 이삼십 명의 병사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성으로 쳐들어오려는 오랑캐 백여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병사들과 깃발들이 쓰러지면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안 되는 건가. 이러다가는 정말로, 계속 버틸 수가…….
“지휘관님, 저길 보십시오!”
누군가가 갑자기 외쳤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들 사이에서 그 외침은 꽤나 귀에 거슬렸다.
이 난장판에 어딜 쳐다볼 겨를이 어디 있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병사들은 일제히 흠칫 놀랐다. 흠칫한 대가로 누군가는 오랑캐가 쏘아 올린 화살에 어깨를 맞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 병사는 어깨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기만 했다. 심지어 성벽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먼 곳에서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희미하게 반짝였다. 얼핏 보면 족히 수십 명은 되는 사람이 구불구불 줄지어 오고 있는 듯했다.
“원군이 오고 있습니다! 원군이 오고 있어요!”
먼 곳을 응시하던 이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은 채로 미친 듯이 외쳐댔다. 그의 외침이 들리기라도 하는 듯,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요란스러운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선두에 있는 기마병일 거야!
“에라이, 빌어먹을. 내 평생 이런 망신은 또 처음이네!”
유규가 말을 걷어차며 외쳤다. 그는 말꼬리에 마른 나뭇가지를 한 묶음 묶어 질질 끌면서 달렸다. 바닥에 끌리는 나뭇가지 끝에는 불이 붙어있어서 지나가는 곳마다 불길을 남겼다.
“망신?”
앞쪽에서 달리고 있던 서무수가 유규의 말을 듣고는 외쳤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적을 죽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진짜 망신이지요!”
서무수가 화살을 뽑아 들어 앞쪽을 향해 힘껏 활시위를 당기며 말했다. 그는 쉬지 않고 적군을 향해 한 발 한 발 화살을 날렸다.
불빛에 비친 서무수의 활을 쏘는 모습은 번개처럼 빨랐다. 매서운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만약 누가 서무수의 반대편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면, 마치 화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 폭포와 같은 화살들은 모두 서무수 혼자서 쏘아낸 것들이었다.
일당십(一當十)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서무수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대단한 놈이로구나. 활 쏘는 실력이 대단해!”
유규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는 자신도 질 수 없다는 듯이 화살을 뽑아 들었다.
후방에서 기습한 오랑캐 부대가 입고 있던 갑옷은 견고하지 않았다. 서무수 일행이 각자 손에 쥐고 있던 삼석궁으로 쏜 화살들은 오랑캐들의 몸을 가볍게 관통했다. 그들이 쏜 화살은 한 발 한 발이 가히 치명적이었기에, 뒤쪽에 있던 오랑캐들은 겁에 질려 허둥지둥 흩어지기 시작했다. 갈 곳을 잃은 오랑캐들은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급습을 당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급습하려던 자들이 되레 급습에 당하면 더욱 공황상태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맹렬한 기세로 성을 공격하던 오랑캐들이 갑자기 어찌할 바 몰라 하자, 성벽 위의 병사들은 사기충천하여 있는 힘을 다해 오랑캐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후문 앞에 있던 오랑캐 삼백 명은 뒤쪽 진영이 무너진 상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불빛까지 점점 가까워지자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소식은 노장이 있는 앞쪽 성벽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원군이 왔습니다! 후문은 막아냈답니다! 후문은 막아냈어요!”
전령병이 있는 힘껏 이 소식을 외치면서 모든 사람에게 전했다.
원군이 왔다고?
가을바람에 상반신을 드러낸 노장은 소식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가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노장은 손에 쥐고 있던 전고를 더욱 세게 두드렸다.
기쁜 소식과 사기를 돋우는 전고 소리가 합쳐지자, 전의를 상실했던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성벽 위에서 대열을 재정비했다. 그들은 손에 움켜쥔 칼과 창으로 성벽을 오르려는 오랑캐들을 거침없이 베어냈다. 손이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던 후문 위의 궁수들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활시위를 당기며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다.
성벽을 올랐던 오랑캐들은 하나둘씩 성벽 아래로 떨어졌고, 성벽 아래의 오랑캐들도 용곡성의 마지막 수비선을 끝끝내 뚫지 못하면서 공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노장의 팔뚝에는 점점 감각이 사라져 갔다.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앞쪽을 향해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후문 쪽에 가 있었다.
원군은? 원군이 왔다며? 왜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거지?
아니, 사실은, 애초에 원군이 없었던 거 아닐까. 이번에는 정말로, 성문이 뚫리겠구나.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로 노장의 얼굴이 반짝였다. 주변에 쓰러져가는 병사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전쟁 깃발을 쥐고 있던 잡부들까지 맨몸으로 맞서 싸웠다.
필승! 필승!
노장은 머나먼 하늘 끝자락에서 희미한 구령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번에는 구령뿐만 아니라 정말로, 수만 마리 말들의 말굽 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원군이 왔습니다! 원군이 왔어요!”
전령병이 좀 전과 다르게 흥분한 얼굴로 외치면서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뒤쪽은 무수히 많은 횃불의 불빛이 밤하늘의 반쪽을 덮고 있었다.
필승! 필승!
뒤에서부터 성벽까지 전해오는 구령 소리와 전고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성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적군은 드디어 퇴각 명령을 알리는 호각을 불었고, 성벽에 붙어있던 서쪽 오랑캐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물러났다.
퇴각했어, 퇴각! 지켜냈어, 지켜냈다고!
사십 년간 종군했던 나 주사(朱四)가 또 한 번, 욕되지 않게 사명을 완수했구나!
노장은 일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전고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천만다행이로구나! 천만다행!
여기저기 꺼지지 않은 불씨와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시체들을 본 주육낭은 용곡성 성문 앞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 아래 열일곱 소년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지옥 같은 처참함과 공기 중에 떠다니는 피비린내. 연무장에서의 주육낭이라면 평생 경험하지 못할 광경이었다.
이런 게 바로 전선이고, 전장이다. 이게 바로 목숨을 건 싸움이고, 하늘이 정해준 무장의 운명일 터!
주육낭은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포효했다. 그러고는 활을 뽑아 들어 하늘을 향해 화살 여러 발을 쏘아 올렸다.
“우리를 구해 준 이가 누굽니까?”
성문이 열리자 감격스러워하는 장병과 백성들은 노장의 외침과 함께 행렬을 맞이했다. 소년은 잠시 주춤했다.
저들을 구한 자는 누구인가?
그야 물론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달려온 우리 장병들이지. 맹렬한 기세로 전고를 울리고 횃불을 흔들며 달려온 우리 백 명의 장병들이 말이야. 그런데 그 장병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원래대로라면, 이 장병들은 수십 리 밖에서 모닥불 앞에 한가롭게 앉아 술을 마시고 농담이나 하면서 다음 날 행군을 준비했을 것이다.
성 하나를 구해내다니.
사실 이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장거리를 질주할 수 있었던 말 일곱 필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말 일곱 필. 아니지, 지금은 다섯 필밖에 남지 않았어. 한 마리는 소식을 전하러 돌아오는 도중에 쓰러졌고, 다른 한 마리는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만약 그 말들이 없었더라면…….
만약 그 말들이 배반한 번인을 쫓아가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소식을 전하러 되돌아올 수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은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말이 여러분을 구했소.”
주육낭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워낙 시끌벅적한 분위기였기에 주육낭의 중얼거림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머나먼 동쪽 하늘을 내다보았다.
말 일곱 필로, 성 하나를 구해 내다니. 그 여인은,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말을 선물한 것이었을까?
하늘이 맑게 갰다. 전투의 잔해가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성 안팎은 얼추 정리가 다 되어 갔다.
어젯밤 성에 들어온 서무수 등의 소속 부대 외에 서쪽 오랑캐의 계략에 넘어가 병사를 이끌고 용곡성을 떠났던 대군도 성으로 복귀했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장병들은 포로로 잡아들인 오랑캐들을 일일이 확인했고, 군관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번 전투에 대해 논의했다.
새벽녘에는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서북 감찰사와 병마 부총관이 용곡성에 도착했다. 더 이상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시점이었기에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상급 장수들의 몫이었다.
한창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서무수 형제 등은 병영으로 보내져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잡부 두 명이 나무로 만든 큰 목욕통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천막 안으로 들고 왔다.
“여기 따뜻한 물을 받아두었으니, 편하게 씻으십시오.”
두 잡부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돈주머니 하나를 그들에게 휙 던져주었다. 두 사람은 흥분한 얼굴로 돈주머니를 받들고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올렸다.
어젯밤 이 호걸들은 고작 몇 명이서 활을 들고 족히 수백 명은 되는 적군의 진영에 돌진하여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 주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서쪽 오랑캐들을 겁에 질리게 했던 이 사내들이야말로 진정한 호걸로 보였다.
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이 사내들이 돈까지 많다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서봉추의 외침이 들렸다.
“뜨거운 물 더 있소? 뜨거운 물?”
잡부 두 명이 앞다투어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다른 잡부 두 명보다 한발 늦었다.
“거, 상도덕 좀 지킵시다. 이쪽은 우리 형제가 맡는 곳이오.”
좀 전의 잡부 둘이 성난 목소리로 다른 둘을 노려보며 외쳤다. 서봉추 가까이 서 있던 두 잡부 역시 눈앞에 놓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땅에 침을 퉤 뱉었다.
“뭐라고? 정작 할 일이 있을 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니만!”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인 네 사람을 보고 서봉추는 귀찮다는 듯 돈주머니를 던지면서 재촉했다.
“에라이, 시끄럽게 뭐 하는 거야? 지금 나 기다리는 거 안 보여?”
네 사람은 서봉추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는, 우선 이 사내의 시중부터 들고 보자는 생각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정말 신기하네. 딱 보아도 돈 한 푼 없는 졸병같이 생겨서는 돈이 저렇게나 많다니.”
“돈이 저렇게나 많은데 뭣 하러 군에 들어갔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들이야.”
네 사람은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고는 빠르게 천막 안으로 나무통을 옮겼다. 이들이 뜨거운 물을 긷는 동안, 서봉추는 천막 밖에서 다른 장병들의 부러움 섞인 눈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인네도 아닌데 목욕은 뭣 하려고 해.”
누군가가 시기 섞인 말투로 말하자 서봉추는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집에서 항상 씻어 버릇하다 보니까, 바깥에 나왔다고 해도 버릇이 바로 고쳐지질 않네.”
이때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병졸 하나가 갑자기 서봉추를 보면서 외쳤다.
“엇, 자네 혹시 개석보(介石堡)의 서봉추 아닌가?”
서봉추가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정말로 아는 얼굴이 보였다.
“봉추, 자네들은 그때 도망가지 않았나?”
익숙한 얼굴이 하필 서봉추가 제일 싫어하는 도망이라는 단어를 써 가며 물었다.
“도망은 무슨. 우리는 그 누명을 벗으려고 경성까지 갔다 왔어. 조정에서 사건을 재조사한 뒤에 우리가 누명을 쓴 거라는 조서도 내렸다고.”
서봉추를 알아봤던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놀란 얼굴로 서봉추 가까이 다가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좀 전에 누가 여기 돈 많은 군졸 나리가 있다고 하더니만, 그게 자네들이었어? 봉추, 자네들 돈벼락을 맞은 거야?”
서봉추가 득의양양하게 어깨에 힘을 주고 대답하려던 찰나, 그의 뒤에서 풍덩 소리가 들려왔다. 서봉추가 깜짝 놀라서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그의 목욕통에 유규가 알몸으로 들어가 편하다는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저, 저 뻔뻔한 놈이! 거기서 당장 나오지 못해!”
관청 안.
양쪽의 관리와 장수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고, 논공행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논의를 마쳤다. 승전보를 알리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소식을 전하는 병사들은 몇 개의 조로 나뉘어 재빨리 관청을 뛰쳐나와 승전보를 손에 쥐고 사방팔방에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갔다.
관청의 마당에는 대청 안에 들어갈 수 없는 하급 무관들이 명을 기다리면서 서 있었다. 주육낭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배짱 있는 녀석이로구나. 도착하자마자 최전방에 나서서 싸우려고 하다니, 역시 우리 주씨 가문의 후예야.”
꽤 연배가 있어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무장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주육낭의 어깨를 탁탁 쳤다.
“과찬이십니다, 당숙. 저희가 도착하자마자 적군이 물러났으니, 저는 별로 도운 것도 없는걸요.”
“에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네가 아주 용감하다는 뜻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뒤에서 주봉상 대인을 보필하며 천천히 왔겠지.”
주 당숙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우리는 네가 경성에서 순한 양으로 자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호랑이 새끼였어.”
주 당숙 옆에 있던 다른 손윗사람도 한마디씩 거들면서 주육낭을 칭찬했다.
큰 전투를 치르고 나니, 생존과 승리에 대한 희열이 주육낭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는 주육낭이 경성이나 연무장, 그리고 꿈에서도 느껴보지 못할 잔혹하지만 짜릿한 감정이었다. 주육낭은 이가 보일 정도로 씩 웃었다.
이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덕담을 주고받던 도중, 대청에서 고위 관원과 장군들이 걸어 나왔다. 마당에 서 있던 무관들은 서둘러 바른 자세로 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주 대인.”
걸어 나온 사람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주 당숙을 반갑게 불렀다.
“저분은 용곡성의 곽희봉 도감(都監)이시다.”
주 당숙이 조용히 주육낭에게 말하고는 점잖게 공수의 예를 표하며 외쳤다.
“곽 도감!”
곽 도감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이자가 바로 어젯밤 삼백 호걸 중 하나인 거요?”
이어서 그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직 어린애인데? 자네 주씨 가문도 참 급해. 이렇게 어린아이를 서북으로 보냈다고?”
주육낭이 가슴을 펴고 큰 소리로 말했다.
“도감께 아룁니다. 제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적을 죽여 나라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작지 않습니다.”
곽 도감이 시원하게 웃어 보이고는 손바닥으로 주육낭의 가슴팍을 탁 쳤다.
“훌륭한 녀석일세. 아주 소처럼 힘이 불끈불끈하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도감을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로는 어제 정찰병을 보낼 때, 주 공자가 먼저 말을 꺼낸 거라며?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면서.”
누군가가 물었다. 사실이 그러했지만 그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주육낭도 잘 알았다. 주 당숙이 주육낭에게 눈짓을 보내려는 찰나에 주육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주봉상 대인과 강문원 대인께서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뒷감당을 자처하며 윤허해 주셨기에, 저희가 모험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주 당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웃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주육낭을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주씨 가문은 군에 친족이 많았고, 다들 전쟁에서 세운 공이 혁혁한 무장들이었다. 주육낭이 주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주씨 가문의 체면을 챙겨주려고 일부러 어젯밤 일을 여러 차례 꺼내어 주봉상과 강문원의 전술과 전략을 칭찬하고, 삼백 장병들의 용맹함을 칭찬했다.
곽 도감은 어젯밤에 어쩌다가 목숨을 걸고 지원하러 왔는지 다시 한번 그 경위를 말해 보라고 주육낭에게 명했다.
물론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미 그 이야기를 한 번 이상 들어본 터였다. 지금 그가 주육낭에게 다시금 말하게 하는 것은, 모두가 그를 기억할 수 있게끔 주육낭에게 직접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주육낭의 표정에 주저하는 빛이 언뜻 스쳤다.
“괜찮아. 편하게 이야기해도 된다. 네가 뭘 했는지만 이야기하면 돼.”
주육낭이 말실수로 상관의 성질을 긁을까 봐 걱정하는 줄 알았던 주 당숙은 따뜻한 말을 건넸다.
이건 모두가 주육낭에게 일부러 판을 깔아 준 것이니 당연히 자신의 공을 위주로 이야기해야 했다. 이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다른 무장들의 눈빛에는 주육낭을 향한 시기와 질투가 서려 있었다.
주육낭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모두 운이었습니다. 만약 앞서 보냈던 정찰병들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만약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말이 몇 필 없었더라면…….”
운? 대인들의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력을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 사람의 용맹함을 언급해야지, 말 얘기가 왜 나와?
이런 식의 이야기는 또 처음 듣는지라, 형식적으로 이야기를 시켰던 사람들은 호기심이 일어 그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육낭을 포함한 관원과 장수들이 병영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서무수 외 몇 사람들은 밤새 전투에 임했던 피곤함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그들은 좀 전에 서봉추를 알아봤던 사람과 대화하고 있었다.
“서 형님, 정말 많이 변했네요.”
그 사람은 서무수 외 몇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평소 아무리 재촉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잡부들이 한껏 신이 나서 목욕통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작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돈 씀씀이가 큰 사내들이 여기에 있다는 소문은 모든 병영의 잡부들에게 발 빠르게 전해졌다.
군관들에게 잡부가 배정되는 것은 조정의 율법이었다. 하지만 일개 병졸들은 특별히 배정되는 잡부가 없어,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잡부를 부려야 했다. 그러니 돈이 있는 서무수 형제들이 앞으로 군 생활을 편히 할 수 있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정말로 경성에서 떼돈을 번 거요? 그런데 왜 다시 목숨 거는 전장으로 돌아왔소?”
서무수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아닐세, 아닐세.”
서무수가 더 말하려는 찰나, 문 앞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다섯 명이서 적군 백 명을 상대했다던 그 호걸들은 어디에 있나? 나와서 얼굴 한 번 비춰보게나!”
우두머리로 보이는 군관이 외쳤다.
“부지사(副指使) 어른이셔.”
한곳에 모여 있던 병졸들이 말하면서 서둘러 길을 비켰다.
서무수 외 몇 사람은 뜸 들이지 않고 즉시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나섰다. 간신히 유규를 쫓아내고 이제야 씻기 시작했던 서봉추도 소식을 듣자마자 몸도 제대로 닦지 못한 채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는 앞으로 뛰쳐나왔다.
용곡성 도감 대인의 참모가 앞으로 나온 몇 사람을 하나씩 훑어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좋아, 훌륭해. 자네들이 바로 우리 서북 군영의 사내대장부야!”
서북 군영의 사내대장부! 우리가 서북 군영의 사내대장부라니!
서북에서 도망친 겁쟁이 탈영병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탈영병이 아니야!
서무수 형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일제히 외쳤다.
“나라를 위해 적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 참, 자네들의 말은 어디 있나? 듣기로는 천 리 길을 걸어도 질주할 수 있다던데?”
인사를 마친 뒤, 참모 대인은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서무수가 사람들을 데리고 말을 보러 오니, 언제나 그랬듯 서사근이 마구간에 있었다. 그런데 침울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유규가 말을 빼앗아 탄 탓에 서사근은 원군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고, 주봉상 대인 행렬과 함께 날이 밝은 뒤에야 성에 도착했다.
“대인,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두 필 말을 꼭 데려오고 싶습니다. 아니면 그 근처에 묻기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서사근이 마구간을 관리하는 젊은 장수에게 애원했다.
“자네가 말을 끔찍하게 아끼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죽은 말의 시체를 끌고 오려고 수레를 수십 리나 끌고 가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막말로, 사람이 전장에서 죽더라도 불에 타 한 줌 재밖에 더 되지 않을 것을. 자네는 사람보다 말이 더 귀한가?”
젊은 장수는 성가신 듯 안 된다고 대꾸했다.
“귀합니다. 귀하고말고요. 그 말들은 제 누이가…….”
서사근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면서 말했지만, 젊은 장수는 갑자기 몰려온 대인들을 보고는 서둘러 그를 밀쳐내고 대인들을 마중했다. 대인들이 오게 된 이유를 들은 젊은 장수는 곧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렴 이번 전장에서 이 말들의 공로가 크다고 하더라도, 도감 대인의 참모가 직접 마구간까지 행차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 말들이 그 정도로 귀한가?
“정말로 이 말들이 경성에서부터 왔다고?”
참모 대인이 몸을 숙여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지쳐 있던 말들은 하룻밤을 쉬고 나니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심지어 참모 대인이 들여다보던 말은 말굽을 들어 올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성을 내며 콧김을 푸르릉 내뿜었다.
조수 대인은 말들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서사근에게 경성에서부터 오게 된 경로와 행군의 하루치 거리가 얼마나 됐는지를 자세히 물었다.
서사근이 하나하나 소상히 답변을 올리자, 참모 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었다.
“정말로 말굽이 마모되는 정도가 달라. 고작 이 쇠붙이 몇 개로?”
참모 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륜이 느껴지는 갈라진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도 보겠네!”
길을 비켜선 주위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사람을 보며 헉 소리를 냈다.
“주(朱) 노대인!”
걸어오는 이는 바로 용곡성을 오랑캐의 기습으로부터 지켜낸 노장 주사(朱四)였다. 전날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한 탓에, 도감의 명에 따라 누워서 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수하의 부축을 받으며 마구간까지 온 것이었다.
참모 대인은 주사보다 직위가 높았지만, 공손한 태도로 노장에게 예를 표하며 직접 그를 부축하러 가까이 다가갔다.
“노대인,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주 노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말 앞으로 다가가, 부축하는 사람을 밀쳐내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굽을 노려보았다.
“역시, 역시, 과연, 과연…….”
그는 말굽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주 노대인의 몸이 점점 떨려오더니 지탱하지 못하고 거의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서둘러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푹 고꾸라졌다.
“하늘에서 내린 신의 병기구나. 하늘에서 내린 신의 병기야. 이제 우리 기마병 말들이 빨리 죽어난다는 걱정을 더 하지 않아도 되겠어!”
바닥에 엎드린 주 노대인은 목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울음에 일순간 넋이 나갔다. 갑자기 주 노대인이 몸을 일으키고는 고함쳤다.
“누구요? 누구야?”
그의 울음 섞인 발음이 모호하게 들렸지만, 사람들은 그가 누구를 찾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좀 전에 뒤쪽으로 밀려났던 서사근이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앞으로 나왔다.
“자네!”
주 노대인이 비틀거리며 서사근의 앞으로 돌진하고는 있는 힘껏 그의 어깨를 꽉 그러쥐었다. 사십여 년간을 전장에서 보내온 늙은 노장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개가 느껴졌다.
그보다 한참 젊은 서사근은 노장의 위압감에 압도되어 차마 그의 두 눈을 직시하지 못했다.
“자네는 장차 우리 서북 대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 영웅일세!”
주 노대인이 서사근의 어깨를 앞뒤로 흔들면서 외쳤다.
서북 대군을 강하게 만들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