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낭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행동한다. 나 또한 원하는 게 있긴 하지만.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어린 낭자가 지금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건지…….”
진소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병을 치료할 줄 알고, 살인도 할 줄 안다는 것 외에, 진소는 정교랑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전하.”
선덕문 위로 다가간 내시가 커다란 모피 두봉을 건넸다.
“두툼한 두봉으로 갈아입으시지요.”
진안 군왕은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조용히 선덕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밤새도록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괜찮다. 이제 곧 끝나.”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덕문 아래에서 내시 몇 명이 긴 채찍을 들고 나왔다. 곧이어 맑고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은 채찍 소리를 듣자 선덕문을 향해 예를 올리고 어가 밖으로 물러났다.
밝고 화려한 등롱들도 하나둘씩 꺼졌다. 밤은 마치 하늘에 도사리고 있는 한 마리의 거대한 괴물처럼, 거리의 불빛을 한 입 한 입 집어삼켰다. 꽃등 놀이로 환했던 경성은 점차 짙은 어둠에 덮였다.
“전하.”
내시가 나지막이 불렀다.
선덕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고, 오직 거리를 청소하는 잡부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가자.”
진안 군왕이 두봉을 여미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문에서 쾅 소리가 나자 연못가에서 물고기에게 밥을 주고 있던 금가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 열어!”
밖에서 왕십칠의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도련님들도 안 계시고 불안해 죽겠어요.”
시녀가 회랑 아래에 서서 근심했다. 도련님들도 떠나고, 짜증 나게 굴던 주육낭까지 떠나 아씨는 또다시 혼자가 되셨다.
“아씨, 우리 차라리 다시 주씨 저택으로 들어가 살아요.”
시녀가 고개를 돌려 대청 안을 보며 말했다.
“필요 없어.”
정교랑은 손에 든 서책을 내려놓았다.
“신선거에 가서, 오 관리인한테 뭐 필요한 거 없나 보고 와.”
또 그 심부름이네. 시녀는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들이 떠난 건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네,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대문에서는 아직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교랑이 금가아를 부르자 금가아가 얼른 대답하고 대문을 열었다. 왕십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넌 문 안 열고 뭐하는 거야!”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고, 다들 쳐다보기만 했다. 다른 때였다면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어제 천가에서 여인이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본지라 왕십칠의 시종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씨, 저희 도련님께서 아씨를 걱정하셨어요. 어젯밤에 혼자 가 버리셔서…….”
시종의 말이 왕십칠을 자극했다. 어젯밤 받은 수모가 떠오르자 대문을 왜 냉큼 열지 않았는지 따질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혼자 어디 갔던 거야?”
“왕 공자님, 혼자 먼저 간 게 누군데 이러세요?”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따졌다.
“난 일이 있었고.”
왕십칠이 언짢은 투로 대꾸했다.
“화괴를 보러 가는 것도 일인가 보죠?”
시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왕십칠한테는 미인을 보러 가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뭐야? 질투라도 하는 건가?
“내가 일이라고 하면 일인 거지, 네가 어쩔 건데?”
그러자 잠자코 있던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어서 네 일이나 하러 가.”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왕십칠을 째려본 다음 걸음을 옮겼다.
“어젠 바빠 보여서, 방해하지 않았어요. 마침 아는 사람을 만나서, 먼저 나왔고요.”
정교랑이 왕십칠을 보며 말을 이었다.
“덕승루 점원한테 말도 하고 나왔어요. 돌아왔을 때 내가 안 보이면, 걱정하고 물어볼까 봐요.”
어쨌든 말은 잘 듣는단 말이지. 윽박을 질러도 울지도 않고, 화를 내거나 토라지지도 않아. 차분히 말하는 것만 봐도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며 미안하다고 하거나 울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던 여인들과는 다르단 말이지. 이런 느낌도…… 나쁘진 않군.
“알면 됐어!”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고 회랑 아래에 앉았다.
“내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거기서 기다렸어야지.”
정교랑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다음부턴 명심해. 혼자 도망쳤다간, 다신 너 안 볼 줄 알아.”
왕십칠의 경고에 정교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외숙부는 또 왜 그래? 어제 거기까지 찾아갔더니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왕십칠은 분을 못 참고 씩씩거렸다.
“해도 너무하잖아!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앞으로 그 집이랑 왕래하지 마!”
옆에 있던 나이 든 시종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씨, 외숙부님 댁에서 천가에 자리를 잡으셨던데요? 거긴 조정의 고위급 관료만 갈 수 있는 곳 아닙니까.”
시종이 웃으며 떠보듯 말을 걸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천가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 아니었나?”
정교랑이 말했다.
하긴 물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주씨 저택에 살지도 않는데, 그 집안 사정을 알 리가 있나. 아니, 근데 주씨 저택에 살지도 않는데 어젯밤엔 왜 그리 여러 사람한테 둘러싸여 있던 거야?
“경성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경성 사람들과는 꽤 가까워 보이시던데요?”
시종이 또 떠보듯 물었다.
“그 몇 가문만 아는 거야. 가깝다고 할 수도 없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종은 무언가를 더 물으려 했지만, 왕십칠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가깝든 말든 알 게 뭐야. 우리 집은 남쪽에서 사업하니까, 외숙이란 자는 필요 없어. 그 사람한테 수모당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 외숙네 집안이랑 멀리해.”
왕십칠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얼굴만 그림처럼 예쁜 줄 알았더니, 정말 그림인가 화도 안 내네.
“관두자. 좌우지간 분위기 깨는 덴 뭐 있어.”
왕십칠이 일어섰다.
“나 간다.”
“왕 공자님.”
정교랑이 왕십칠을 불러세웠다.
“우리, 언제 돌아가요?”
그 말에 반근과 금가아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돌아가?
어쩐지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던 왕십칠의 시종만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낭자가 경성에 별게 없나 보군. 여기서 잘 지냈다면 따라가고 싶지 않을 텐데. 어젯밤에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주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그런 거겠지. 천가에 천막을 치고 꽃등을 구경할 정도면, 주씨 가문도 듣던 바와 달리 대단한 모양이야. 좀 더 알아봤다가 돌아가면 노야께 말씀드려야겠어.
“곧 돌아가야죠. 정씨 가문에서는 아무도 안 왔습니까?”
시종이 나서서 대답하며 물어보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씨 가문에서는 별 신경을 안 쓰네.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나 보군.
“그럼 우리랑 같이 가면 되겠다.”
왕십칠은 또 불러세울까 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때가 되면 부를게.”
왕십칠은 정교랑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대문을 나섰다.
“공자님.”
시종이 얼른 따라와 왕십칠 앞을 막아섰다.
“때가 되길 기다릴 게 아니라, 바로 출발하시죠.”
나이 든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고 아범, 급할 게 뭐 있어. 난 아직…….”
“공자님, 아무튼 이제 가셔야 해요. 안 그럼 노야와 부인께서 직접 오실 겁니다.”
고 아범이라고 불린 시종은 웃으며 왕십칠을 달랬다.
“그럼 더 좋겠네. 아버지랑 어머니도 경성 구경 좀 하시고.”
왕십칠의 말에 고 아범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공자님, 뭐라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시간을 많이 끌었어요. 구경도 실컷 하고 놀기도 실컷 노셨잖습니까.”
고 아범이 고개를 돌려 다른 시종에게 명했다.
“말과 마차를 준비해라.”
시종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하고 달려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왕십칠을 에워싸고 압송하다시피 객잔으로 데려갔다.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왕십칠은 알았다고 하고, 시종들을 시켜 돌아갈 준비를 하게 한 후 객잔에 홀로 남았다.
“왕 공자님.”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춘령!”
왕십칠은 안으로 들어오는 어린 몸종을 보고 반색을 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왕 공자님, 어젯밤엔 왜 안 오셨어요? 주 낭자가 묻기까지 한걸요.”
춘령이 말했다.
“갔었어. 예약된 방이 없다고 하던데, 너 혹시…….”
“그럴 리가요. 분명 잡아 놨어요. 제 이름을 대면 들어가게 해 주기로 했는데…….”
춘령 역시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인간들이 제 말을 무시한 거예요? 당장 가서 주 낭자한테 일러야겠어요.”
춘령은 씩씩거리며 뒤돌아 나가려 했다.
그랬구나. 의혹이 풀린 왕십칠은 서둘러 춘령을 불러 세웠다.
“그럼 내가 말을 제대로 못 전한 것 같구나. 괜찮아. 어차피 별일 아니야.”
왕십칠은 싱글벙글 웃으며 춘령을 쳐다봤다.
“주 낭자가 정말 나에 대해 물었어?”
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자님께서 정혼자랑 꽃등을 구경하러 오셨다고 말씀드렸더니, 정혼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낭자인지 보고 싶다고도 하신걸요.”
그 말에 왕십칠이 하,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춘령은 멈칫하여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교랑이 예쁜 걸 주 낭자가 어떻게 알았지?”
왕십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교랑? 이름이 교랑이었구나, 정교랑.
춘령은 입술을 달싹이며 나지막이 읊조려 봤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의외의 수확이네. 정교랑이라…….
“이름도 교랑이라니, 정말 아름다운 낭자인가 봐요.”
춘령이 웃으며 말했다.
“말도 마. 걔만 아니었으면, 어제 주 낭자를 보는 건데.”
왕십칠이 손을 내저었다.
“왜요? 덕승루에 가는 걸 싫어하세요?”
춘령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내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다른 놈이랑 도망쳤지 뭐야. 걔 찾으러 다니느라 저녁내 시간만 낭비했다.”
다른 놈이랑 도망을 쳤다고…….
“도망을요? 납치된 거 아니에요?”
춘령은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늉을 했다.
“저, 저도 예전에 납치돼서 팔려갔거든요. 요즘 인신매매범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그분은 괜찮으실까요?”
춘령이 놀라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자 왕십칠이 헤헤 웃었다.
“아냐, 아냐. 오해였어. 외숙부 댁의 사촌 오라비였거든.”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거슬리는 놈이야.”
외숙부, 사촌 오라비. 춘령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담 다행이네요. 깜짝 놀랐어요. 공자님의 정혼자한테 경성에 외숙이 있으셨군요. 대단한 분이겠죠?”
“대단하긴 뭐. 그냥 무관이야. 뭐라더라…….”
왕십칠은 입을 삐죽거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귀덕낭이라나. 아, 그래.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 춘령은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혼인을 한 후에도 친척집에 들르려면 경성에 자주 오시겠어요.”
춘령은 밝게 웃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또 볼 수 있겠죠?”
“친척집에 들르든 말든, 난 와야지. 주 낭자한테 전해라. 내년에도 꼭 보러 오겠다고.”
“곧 떠나세요?”
춘령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응. 정혼자가 난리를 쳐서 집에 가야 해.”
왕십칠은 일부러 도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당한 사내로서 시종들한테 납치되다시피 돌아간다는 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낭자와 함께 백년해로하시길 바랄게요.”
춘령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 경성에서 잘 지내고 있거라. 나중에 꼭 보러 올게.”
달콤한 말로 달래 놓아야, 주 낭자 앞에서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해 주겠지.
예상대로 춘령은 기쁘고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왕십칠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을 나온 춘령은 왕십칠이 상으로 준 돈과 서찰을 보낼 주소 쪽지를 힐끔 쳐다봤다. 얼굴에 있던 밝은 웃음은 걷힌 지 오래였고, 가소롭다는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디 백년해로해라!
“언니, 언니. 우리 오늘 정 언니네 놀러 가면 안 돼?”
진십팔랑을 쫄랑쫄랑 따라온 진단랑이 팔을 잡아끌며 물었다. 진십팔랑은 진단랑을 붙잡고 앞쪽 대청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제도 봤잖아. 할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보자.”
진단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자매가 손을 잡고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진소의 사환이 보였다.
“아버지께서 조부님이랑 같이 계셔?”
진십팔랑의 물음에 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중이신 거야?”
“네, 병주로 갔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병주? 진십팔랑은 멈칫했다.
“언니, 병주가 어디야?”
진단랑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병주라면…… 정교랑이 오랫동안 지낸 도관이 있는 곳인데…….
진십팔랑은 대청을 보며 잠시 넋을 놓았다. 거기서 정교랑과 관련된 소식이라도 온 건가?
진소가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진 노태야는 서찰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사람을 찾았을 땐, 이미 병이 깊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답니다. 며칠을 지켰지만 호전될 기미가 안 보였고요. 경성으로 데려올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다더냐? 아무 말도 안 남겼어?”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일관 말이 없어서 다들 사람을 잘못 찾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 서찰을 내밀더랍니다.”
진소는 서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정 낭자한테 주라고 했다는 걸 보면 정 낭자를 아는 듯싶습니다. 그 후 숨을 거뒀고요.”
진 노태야는 서찰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체 어떤 내력이 있는 자지? 세상 사람들 말처럼 고인이라면 왜 그리 허망하게 떠난 거야?
서찰엔, 뭘 쓴 거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더 많이 적어 놓았나? 죽기 전 마지막 가르침을 써 두었나? 아니면 사문(師門)의 내력이나 비밀?
손을 뻗던 진 노태야는 봉투를 만지던 손을 돌연 멈췄다.
“정 낭자한테 보내거라.”
진 노태야가 손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앉았다.
왕십칠이 떠난 후, 정교랑의 저택은 고요를 되찾았다. 금가아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었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반근은 차를 들고 대청으로 들어왔다.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아씨.”
반근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 돌아가는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에서 지낸 시간이 오래돼서요?”
반근의 물음에 정교랑은 반근을 보며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역시 웃음을 지었다. 반근이 앞으로 다가가 차를 올리자 정교랑이 찻잔을 받았다.
가을바람이 대청으로 들어오자 창가에 걸어둔 점풍탁(占風鐸: 바람이 부는 것을 알기 위해 쓰던 방울)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그럼 아씨, 정말 왕 공자와 혼인하시려고요?”
반근이 주저하다가 또 물었다.
“반근, 지금 나한테 가장 부족한 게 무엇인 것 같니?”
정교랑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질문하시는 건가? 난 생각하는 걸 제일 못하는데…….
반근은 긴장한 채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도련님들께서 떠나셨고, 짜증 나고 성가시게 굴지만 가끔은 우릴 지켜 주던 주육낭도 떠났다. 주 노야 일가와는 예를 지키되 가까이 지내지는 않고…….
“사람이 없죠.”
반근이 떠보는 투로 대답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없지. 집이 없어.”
정교랑이 손을 펴서 내밀었다. 혈육이 있으나 가깝지 않으니, 집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반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왕 공자가 정말 아씨한테 집을 줄 수 있을까?
정교랑이 웃었다.
“내가 원하는 집은, 깨부수고 나서, 내 뜻대로 다시 합칠 수 있는 집이야.”
정교랑이 펼쳤던 손을 꽉 쥐었다.
“그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야.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한 가족이 필요해. 날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가족 말이야. 그 사람이 적당해.”
반근은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했지만, 아씨께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일이 아니라 이득을 보고자 결정한 일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놓였다.
“아씨께서 계시는 곳이 소인의 집이에요.”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미소만 짓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책을 들었다. 반근은 조용히 찻잔을 정리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소 부부가 방문한 것은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전에는 진십팔랑과 진단랑처럼 동년배끼리만 왕래했기에 진소 부부가 정교랑의 저택을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녀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금가아에게 진소 부부를 맞이하도록 하고, 정교랑에게 고하러 갔다.
진소 부인은 대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진단랑의 손을 잡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단랑한테 들으니 여기 활을 쏘는 곳이 있다던데, 구경해도 될까?”
자리를 비켜 주려는 건가? 시녀는 얼른 일어섰다.
“절 따라오세요, 부인.”
시녀는 반근에게 차를 올리게 하고, 진소 부인과 진단랑을 뒷마당으로 안내했다.
대청에는 진소와 정교랑만 남았다. 반근은 차를 올린 후 문가로 물러나 꿇어앉았다.
“실은 낭자를 경성으로 청해 올 무렵, 우리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낭자의 이력을 알아봤습니다.”
진소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이해해 주십시오, 낭자.”
“당연한 일이에요. 저 역시 기회가 됐다면 알아봤을 거예요.”
정교랑이 진소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알아낸 게 있나요?”
진소가 서찰을 한 통 꺼내 내밀었다.
“낭자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남긴 서찰입니다.”
진씨 가문은 누군가가 정교랑의 병을 고쳐 주고, 의술을 가르쳤다고 여겨 왔다. 정교랑은 그 점을 알면서도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의 비술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은 자신조차도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쭉 자신을 따랐던 반근조차도 그에 관한 기억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소가 사람을 찾아내 서찰까지 받아 왔으니 놀랄 수밖에.
정교랑에게는 병이 낫기 전의 기억이 없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했던 걸까? 정말 그 사람이 병을 고쳐 준 걸까? 머릿속에 있는 이 어지러운 기억들도 그 사람이 넣어 준 걸까?
반근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인데요?”
반근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마흔 남짓한 서생입니다. 도관 근처에 머물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더군요. 의술을 좀 알아서 병을 고치고 약도 지어 줬고요.”
진소의 말에 정교랑이 반근을 쳐다봤다.
“네, 그런 사람이 있긴 했어요. 다들 노(路) 수재라고 불렀죠.”
반근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 듯했다.
“아, 참. 유모가 아플 때도 그 사람이 약을 지어 줬어요.”
노 수재? 정교랑의 기억 속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이 내 병을 고쳐 준 거야?”
정교랑이 물었다. 진소도 반근을 쳐다봤다.
“아니에요. 원래 거기 사람도 아닌걸요. 유모가 병을 얻은 후에야 오기도 했고요.”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도관엔 한두 번 정도 왔던 것 같아요. 유모의 병을 고쳐 주러 왔던 건데, 나중에 유모의 병이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안 왔어요. 유모가 세상을 뜬 후로는 본 적도 없고요. 그 기간이 한 일 년 남짓 됐던 것 같은데, 아씨의 병을 고쳐 준 일은 없어요.”
없다고? 저 애는 가장 가까이에서 정 낭자의 시중을 들었는데, 접촉한 일이 없다고 하다니.
진소가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님, 제가 잘 모를 수도 있고요.”
반근이 얼른 덧붙였다.
“유모의 병을 치료해 줄 때, 아씨도 옆에 같이 계셨거든요. 그 사람이 아씨를 보고, 유모에게 약을 처방해 주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반근은 자신을 자책했다.
“그때만 해도 유모가 아씨를 보살폈거든요. 먹고 입는 부분에선 소인이 딱히 한 일이 없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자코 있던 정교랑이 손을 뻗어 서찰을 들었다. 서찰을 빤히 보면서도 왠지 주저하는 듯했다.
이 안에, 잃어버린 기억이 있으려나?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이다. 앞으로는 낭자의 일에 대해 알아보는 일이 없을 테니,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진소가 일어나며 작별을 고하자 정교랑이 답례했다.
진소 부부의 배웅을 마친 시녀가 돌아왔다. 정교랑은 서찰을 손에 든 채로 여전히 대청에 앉아 있었다.
“저게 뭐야?”
자리에 없었던지라 자초지종을 모르는 시녀가 반근에게 물었다.
“진 대인 말씀으로는 아씨의 스승님이 남긴 서찰이래.”
반근의 대답에 시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씨의 스승님?”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누가 진 대인을 통해 아씨한테 전한 거래.”
시녀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시녀와 반근은 대청을 쳐다봤다. 대청에 있던 정교랑이 서찰을 열었다.
종이에 쓰인 건 단 한 문장이었다.
‘넌 누구지.’
난 누구지? 난 누구야?
서찰을 읽은 정교랑은 물이 고여 있던 머리가 펑 하고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씨, 차를 더 올릴까요?”
안으로 들어온 시녀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서찰을 들여다보고 있는 정교랑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새로 만든 간식을 드셔 보시겠어요?”
반근도 물었다.
“어떤 새로운 간식을 만들었는데?”
시녀가 궁금한 듯 물었다.
“또 이상해서 못 먹는 건 아니지?”
“언니, 무슨! 어디가 이상해?”
반근이 따지자 시녀는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아씨, 얘가 지난번에 만든 그 간식 이상했죠?”
시녀가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반근과 시녀를 쳐다봤다.
“난 누구지?”
정교랑의 말에 시녀와 반근은 멈칫했다.
“네?”
두 사람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난 누구야?”
정교랑이 다시 물었다.
난 누구지?
시녀와 반근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이지?
시녀와 반근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였다. 여인의 두 눈이 뒤집히더니 여인이 그대로 쓰러졌다.
대청에서 흘러나온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마당의 하늘을 갈랐다.
“어떻게 된 일이래요?”
주 부인이 밖으로 나가는 주 노야를 보며 다급한 투로 물었다.
“병으로 쓰러졌다는군.”
주 노야가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대꾸했다.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쓰러져요? 자기가 신의인데, 어떻게 갑자기 쓰러지죠?”
“진 상공이 다녀간 후, 의식을 잃었다고 했소.”
“진 상공이요?”
주 부인이 소리를 빽 지르며 일어섰다.
“원수를 갚은 건 아니겠죠?”
“원수는 무슨 원수!”
주 노야가 인상을 쓰며 호통을 쳤다.
“무슨 원수냐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린 똑똑히 알잖아요! 당신, 그 애랑 둘이서 뭐 하느라 바삐 돌아다녔어요? 탈영병들 일 때문이었죠? 듣자니 진 대인이 탈영병을 문제 삼아 서북 군무의 죄상을 지적하려 했는데, 탈영병이 석방됐다면서요. 다들 진 대인이 이번에 크게 낭패를 봤다고 하던데요.”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어안이 벙벙했다. 부인이 알아서 안 될 일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얘기를 꺼낸 적 없었는데 부인은 나름대로 정보를 수소문해 다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더해지거나 빠진 이야기가 있고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사실과 일치했다.
이 일이 최종적인 결과가 어쩌다 그렇게 나온 건지는 주 노야 자신도 몰랐지만, 탈영병이 석방된 것만 봐도 외조카가 중간에서 뭔가 손을 썼다는 사실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진 상공이 크게 낭패를 보긴 했지. 그래서 단죄하러 왔던 건가?
주 노야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렇다면, 교교가 진 상공을 해치울 승산은 얼마나 되지? 순간 오싹 소름이 끼친 주 노야는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후려쳤다.
이런 우라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일단 상태가 어떤지부터 가서 봐야지.”
주 노야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진안 군왕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탁자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
“의식을 잃어 못 깨어난다고?”
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의원이 여럿 다녀갔지만 무슨 병인지도 진단을 못 하고 있습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고하자 진안 군왕은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전하.”
내시가 막아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췄다.
“요 며칠 너무 자주 나가셨습니다. 태후마마와 폐하께서도 전하께서 어디를 가시는지 하문하셨고요. 적당히 둘러대긴 했지만 지금 또 나가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더는 속이기 힘들어요. 마마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정 낭자한테도 안 좋습니다.”
진안 군왕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밖에는 그래도 빛이 남아 있었지만 실내는 햇빛이 거의 사라진 후라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어둑해지는 빛을 바라보는 소년의 어두운 얼굴에 내시 역시 기분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황족 신분은 더없이 존귀하면서도 아무 자유가 없는 몸이었고, 황궁은 더없이 존귀하면서도 아무 자유가 없는 곳이었다.
“전하께서 지금 가셔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소인이 지켜보다가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전하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말없이 서책을 들고 다시 서책에 고개를 박았다. 내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발소리를 죽여 물러났다.
“소인이 직접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내시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다시 한번 말했다. 진안 군왕은 책에 몰두한 채 대꾸하지 않았다.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글자를 한 자 한 자 전부 머릿속에 각인시키려는 듯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떴다.
아침 해가 뜨고 날이 훤히 밝을 무렵, 정교랑 저택의 대문이 열리더니 주 부인이 급히 나왔다.
“약 잘 먹여라. 난 노야와 상의해서 의원을 더 찾아볼게.”
주 부인은 반근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여종의 부축을 받아 허둥지둥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반근은 대문간에 서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새빨간 두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자 시녀가 침상 위에 누운 아씨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한 손으로 주전자의 약을 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약은 대부분 입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녀는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계속해서 약을 먹였다.
반근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주 부인은 가셨어.”
반근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갔다는 표현보다는 도망쳤다고 하는 게 맞겠지……. 최대한 피하고 싶다는 표정이 감춰지지 않았으니까.
“갈 테면 가라지.”
시녀가 반근을 보며 소리쳤다.
“울긴 뭘 울어. 그 사람들 없어도 우리가 있잖아. 아씨께선 무탈하실 거야. 어서 와서 아씨나 부축해.”
반근은 얼른 눈물을 닦고 달려와 꿇어앉았다.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린 주 부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주 노야는 부인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왜 돌아왔소? 교교가 깨어난 거요? 좀 어때? 별일 없지?”
주 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보기엔 좋아지긴 글렀어요.”
“뭐라고? 죽을 것 같소?”
주 노야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반응이 전혀 없어요. 약을 먹여도 넘기질 못하고요. 의원이 여럿 다녀갔는데 다들 몸은 아무 문제 없다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대요. 의식이 없으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라나. 산송장이 뭐겠어요? 또 어릴 때처럼 지각이 없는 바보로 돌아갔단 거잖아요”
또 바보가 됐다고? 주 노야는 경악했다.
“이 망할 진씨 놈들! 우리 교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주 노야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내 당장 가서 따져야겠소!”
“거기 서요!”
주 부인이 얼른 일어나 다급하게 붙잡았다.
“미쳤어요, 거길 가게? 거기 가서 뭐 하려고요? 말 몇 마디 하고 서찰 한 통 건넨 일로 애가 죽게 생겼다고 하게요? 말이라도 새어 나가 봐요. 그 말을 누가 믿어요?”
하긴, 누가 믿겠나. 유 교리가 여인의 말 몇 마디에 풍질을 얻어 초주검이 됐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주 노야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진 상공은 여전히 진 상공이에요. 그 애는 이제 바보가 됐고요.”
주 부인이 천천히 말했다.
바보 시늉을 하는 사람은 두렵지만, 진짜 바보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주 노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여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아무리 큰일을 벌이겠다 한들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서 훌륭한 의원이나 더 찾아보시오.”
주 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하고는 몇 걸음 서성이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오 관리인이 대청을 나오자 시녀가 뒤에서 배웅했다.
“외숙부님은 왔다 가셨고?”
오 관리인의 물음에 시녀는 냉소를 지었다.
“오는 게 더 이상하죠. 의원을 청하러 갔다고 전갈이 오긴 했는데, 어디 가서 의원을 청해 오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니 말이죠.”
“서두를 것 없어. 내가 아는 의원이 하나 있는데, 특히 난치병에 용하거든. 내가 가서 모셔 오지.”
오 관리인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 좀 해 주세요.”
“아씨를 돕는 게 곧 나 자신을 돕는 거야. 수고라니 당치도 않아.”
다른 이들은 아씨가 없어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겠지만,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허둥지둥 문을 나서는 오 관리인의 모습을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대청으로 들어갔다.
-깨어나지 않는-
“아직도 안 깨어났다고?”
진안 군왕이 물었다. 앞에 꿇어앉은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네 하고 대답했다.
“의원이 여럿 다녀갔지만 다들 몸엔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그러면서도 왜 깨어나지 못하는 건진 모르겠대요.”
내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예전의 그 병이 도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의 그 병?”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전하, 정 낭자가 전에, 바보였잖습니까.”
내시가 나지막이 고했다.
“의원들 말로는…… 다시 지각을 잃은 거라고 했습니다.”
지각을 잃었다?
아씨인가, 아니면 마님이신가? 보아하니 아씨인가 본데, 왜, 노부인 같지?
괜찮아요. 내가 병을 오래 앓아서 그래요. 세상인심은 알 수 없고 야박한 법이죠. 오욕칠정을 다 겪은 병자에게 나이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진안 군왕은 서책을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허튼소리! 지각을 잃을 리 없다.”
절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란스럽게 울부짖는 소리와 뜨거운 불길이 주위를 감쌌다.
불이야, 불이야!
정교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캄캄한 밤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뒤로 어지러이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오래도록 여기 있었던 것 같았다.
정교랑은 그 사람들이 누군지 보고 싶은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치에서 무언가가 밟혔다. 부드러운 것이었다. 고개를 숙여 보니 치솟는 불길 아래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남자, 여자, 늙은이, 어린애, 온전한 것, 온전치 못한 것. 사방이 시체였다.
눈앞에 보이는 건 붉게 타오르는 화염이 아니었다. 검붉은 피인 것 같았다.
죽었구나, 다 죽었어. 누군가가 절규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다 죽었어!
정교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무 통증도 없는 것 같았다.
불길이 점차 사그라드나 싶더니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형체는 어둠과 하나가 됐지만 남자라는 것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전에 아버지의 목소리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언뜻 떠오를 때가 있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남자가 의술을 가르쳐 주던 기억이 떠오른 적도 있었다. 그럼 이 사람은, 또 누구지?
“누구세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도, 좋아.”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무겁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처럼 중압감을 주었다.
“이게, 좋군.”
뭐가 좋다는 거지?
“누구세요?”
정교랑은 소리치며 눈을 크게 뜨려고 애썼다. 똑바로 보고 싶은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시야가 흐릿해졌다. 갑자기 손 하나가 튀어나와 그녀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질식할 것 같았다. 정교랑은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오롯이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이렇게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이 스치는 찰나, 손 하나가 그녀의 눈을 쓸어 주며 눈물을 닦았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면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이었다. 밤처럼 칠흑 같은 두 눈.
“잊어라. 그게 좋아.”
정교랑이 두 눈을 번쩍 떴다. 통증이 느껴졌다. 마음의 통증이!
정교랑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쳐다봤다. 이상하게 생긴 비수가 가슴에 꽂혀 있었다. 벌어진 틈새로 피가 불빛처럼 번지는가 싶더니 팔딱팔딱 뛰는 선홍색 심장이 파내졌다.
이게, 내 마음인가?
정교랑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시선이 닿는 곳에 있는 건 점점 멀어져 가는 남자뿐이었다.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름을 부르는 듯한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이름인가? 뭐지?
난 누구지? 난 누구야?
금가아는 문가에 서서 반근이 정교랑의 입가에 귀를 바짝 대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초조하고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반근 누나, 어때? 아씨께서 말씀을 하시는 거야?”
금가아가 초조하게 물었다.
“뭐라셔? 정신이 드신 거야?”
대문을 들어서던 시녀는 그 말에 반색을 하며 달려와 금가아를 밀치고 안을 쳐다봤다.
“아씨가 깨셨어?”
하지만 침상 위의 여인은 조용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시녀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씨께서 방금 말씀을 하신 것 같아.”
반근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뭐라고 하셨는데?”
시녀가 다시 기뻐하며 물었다.
“‘난 누구지?’라고 하신 것 같은데.”
반근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난 누구지?
시녀는 멈칫했다.
“아씨께서 쓰러지기 전에도 그 질문을 하셨잖아.”
“진 대인이 가져온 서찰을 본 후 이 질문을 하시더니……. 지금껏 계속 이 생각을 하셨나 보네. 이게 무슨 뜻이지?”
진 대인이 가져온 서찰. 모든 건 진(陳)씨 가문에서 서찰을 보낸 후에 생긴 일이었다. 서찰의 내용도 기괴했다. ‘넌 누구지’라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아씨께서 쓰러지신 건 진씨 가문의 방문 때문이었다. 이 일을 주 노야한테 전했지만, 주 노야가 나서길 바라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신들은 진씨 가문이 무서울지 몰라도, 난 무섭지 않아!”
시녀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내가 따지러 갈 거야!”
같은 시각 진 상공의 저택. 진십삼은 뛰다시피 들어갔다.
“공자님, 공자님. 노야께선 손님과 함께 계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문간방에 있던 사환이 급히 막으며 외쳤다.
“손님? 기다려?”
진십삼은 코웃음을 쳤다.
“황제 폐하께서 왕림하신 게 아닌 한, 오늘은 그 누구라 해도 이 몸한테 양보해야 할 것이다!”
문간방 사환은 경악했다. 뭐라고?
“진소, 이 일에 대해, 해명을 들어야겠다!”
진십삼이 문간방 사환을 밀치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대청으로 급히 뛰어 들어온 진(秦)씨 가문 여종들이 몸종과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던 진 부인의 말을 끊었다.
“뭐? 십삼이 돌아왔다고?”
진 부인은 반가우면서도 못마땅한 눈치였다.
“무슨 선생이 그래. 애를 집에 가둬 두고 공부만 시켜 대다니…….”
진 부인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가 보자. 얼마나 초췌해졌나 봐야지.”
몸종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부인. 십삼공자께서는 집으로 돌아오신 게 아니라 진 상공 댁으로 가셨어요.”
여종의 말에 진 부인은 멈칫했다.
“진 상공 댁엔 왜? 걔가 언제부터 진 상공 댁이랑 그리 가까웠지?”
“부인, 가까운 게 아니라 소란을 피우러 가신 거예요.”
여종은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방금 사환이 달려와 보고했으니, 지금쯤 진 상공 댁에 당도하셨을 거예요. 어서 가 보세요, 부인.”
소란을 피우러? 진 부인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옆에 있던 몸종을 쳐다봤다.
“십삼이 남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울 줄도 알아?”
진 부인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지만 여종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부인, 이러지 마세요.”
“알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무튼 우리 십삼의 잘못은 아닐 거야.”
진 부인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 투로 웃으며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고요. 정 낭자가 병을 얻었는데, 그게 진 상공 댁과 관계된 것 같았어요. 공자님은 따지러 가신 거고요.”
여종들의 말에 진 부인은 흠칫 놀랐다.
“정 낭자가 병이 났어?”
여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이 난 지 이틀이나 됐는데, 의식을 못 찾는다고 들었어요.”
“아이고, 세상에. 난 까맣게 몰랐네. 그러니 십삼이 그리 초조해하지.”
진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일어섰다.
“가자, 가자. 어서 가 보자.”
여종들이 서둘러 진 부인의 뒤를 따랐다.
“부인, 노야께 말씀을 올리고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노야께서도 같이 가시는 게…….”
“이런 일에 노야께서 가셔서 뭐 해? 여인이 병으로 누워 있는데 사내가 어떻게 들어가?”
여인? 진 부인의 말에 여종들은 멈칫했다.
“부인, 진 상공 댁으로 가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진 상공 댁엘 뭐하러 가? 거긴 십삼이 갔잖아. 우린 정 낭자를 보러 가야지.”
진 부인은 오히려 여종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종들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정 낭자한테 간다고?
“부, 부인. 그럼 진, 진 상공 댁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진 상공 댁도 중요하지. 여종들이 진 부인을 쳐다봤다.
“어쨌든 십삼 혼자 갔고, 그 앤 아직 나이도 어려. 노야한테 가서 전해라. 십삼으로 부족하거든, 아버지로서 힘을 보태시라고.”
이게 뭔 소리야! 여종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으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십삼공자 혼자 난리를 피우는 것도 모자라 노야까지 힘을 보태시라고? 정 낭자 하나를 위해?
“당연히 정 낭자의 일로 왔죠.”
진씨 저택, 진소의 서재. 진십삼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 대인,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진소는 놀란 표정이었다. 우선은 정교랑한테 병이 났고, 특히 자신이 서찰을 보낸 후에 병이 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주씨 가문에서 따지러 온 게 아니라 이 소년이 따지러 왔다는 점도 놀라웠다.
하긴, 놀랄 것도 없지. 언제나 이 소년이 있었지, 아마.
유 교리의 일에서부터 이번 탈영병 사건까지, 우연처럼 보이지만 매번 이 소년이 등장했다.
“병은 어떻더냐? 의원은 모셔 왔고?”
진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를 준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부인께 말씀드려라. 속히 가 봐야겠다.”
“고양이 쥐 생각하는 척 위선 떨지 마시죠.”
진십삼이 진소의 말을 끊었다.
“십삼낭, 그게 무슨 말이냐?”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서찰을, 정 낭자한테 일부러 주셨지요?”
진십삼이 냉소하며 물었다.
“그 서찰은 내가 준 게 아니다. 낭자의 옛 지인이 전한 건데, 안 주는 게 잘못 아니냐.”
진소가 대꾸했다.
“친구요? 그게 대인의 지인인지, 남의 지인인지 누가 압니까? 바보였던 병은 나았어도 마음이 온전치 못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굳이 옛 지인을 찾아내다니요. 진 대인, 몽유병에 대해 아시지요?”
진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몽유 증세가 나타났을 때는 절대 소리나 비명을 지르지 말고 피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뜻대로 하도록 따라 주어야 하지요. 소리를 지르거나 놀라게 하여 몽유 상태에서 깨어나도록 하면, 갑자기 깨어나다가 놀라 정신 착란 증세를 보입니다.”
진십삼은 진소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정 낭자는 몽유를 앓는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과거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던 와중에 갑자기 튀어나와 큰 소리로 넌 누구냐고 외친 겁니다. 이는 사람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려친 것과 마찬가지인데 정 낭자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진소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토했다.
“십삼낭, 옛 지인은 진짜였다. 그 서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우리도 몰랐고. 그저 정 낭자의 옛 지인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지. 낭자의 스승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기뻤기에 낭자도 기뻐할 줄만 알았는데, 우리의 불찰이구나.”
진소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리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어.”
“무심코 저지른 실수였지만, 결과는 꽤 만족스러우시죠?”
진십삼의 말투는 냉랭했다.
“십삼낭, 한참 어린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진소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 진소의 됨됨이에 대해서는 양심에 대고 맹세컨대 떳떳해. 네가 멋대로 억측을 부린다 한들 두렵지 않다.”
“그럼 진 대인, 제가 대인에 대해 어떤 억측을 하는지 아십니까?”
진십삼의 표정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진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 낭자는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쳤으면서도 이 댁에 의탁하지 않고, 빠르게 경성에 자리를 잡았죠. 낭자의 재산을 노리던 이들은 죽거나 불구가 됐습니다. 무뢰배에서부터 유 교리에 이르기까지, 대인을 놀라게 한 일이 여러 번이었죠. 대인은 놀라는 동시에 내심 염려가 됐을 겁니다. 저렇게 감쪽같이 살인을 행하는 여인이라면, 경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셨겠죠. 먼 훗날, 언젠가는, 대인의 차례가 올지도 모르니까요.”
진십삼은 진소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소년 특유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진십삼의 말을 따라 지난 일들이 진소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대인과 고 통사가 오랫동안 싸워 온 일이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날 거라고 말입니다. 다 이겼다고 득의양양했는데 영문도 모르고 내키지 않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 모든 건, 그 어린 낭자가 이 일에서 제삼자였던 장강주 선생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후 만들어 낸 결과였고요. 여러 사람이 그 오랫동안 공들여 계획한 일을 말 한마디로 망칠 수 있는 사람이죠. 그 여인 때문에 목숨을 잃고 앞길을 망칠 사람이 앞으로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여인이라면, 두려울 수밖에요.”
진십삼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병을 얻어 의식을 잃었다면, 대인께서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시지 않았을까요?”
서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로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있던 사환들이 놀라 얼른 자리를 피했다.
“소인배의 심보군!”
진소가 노기 띤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나 진소는 올곧고 떳떳하게 행동했다. 너 같은 어린애의 억측을 무서워할 성싶으냐?”
진십삼은 잠자코 공수의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듣고 보니, 그 일은, 정말 너희가 은밀히 꾸민 짓이었구나.”
뒤에서 진소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십삼은 고개를 멈추고 돌아봤다.
“은밀히 하는 일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정 낭자가 나으면 곧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게 어떤 일들을 하는지요.”
말을 마친 진십삼은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서재에 남은 진소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이!”
진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마차를 준비해라.”
문밖에 시립해 있던 사환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얼른 뛰어갔다. 진소 역시 지체하지 않고 서재를 나와 안채로 향했다.
한편 진 상공 댁으로 따지러 달려왔던 시녀는 안에서 나오는 진십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그 서찰이냐?”
진십삼이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서찰을 쳐다보며 놀라 물었다. 진십삼은 서찰을 홱 낚아채 펼쳐 보았다.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일이 생기면 내 사환을 찾아가라고 했는데, 왜 안 갔어?”
소년은 여느 때처럼 따스하고 온화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시녀는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일이 생기거든 주씨 가문으로 찾아가도 된다. 주육낭이 떠날 때 두고 간 사환도 문간에 있어. 그 애한테 말해도 돼. 그 애가 나한테 소식을 전할 거다.”
진십삼은 시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서찰을 도로 쥐여준 다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하며 진 상공 댁의 대문과 진십삼을 번갈아 쳐다봤다.
“가서 네 아씨의 시중을 들거나 점포나 잘 살펴라. 나머지 일은 나한테 맡기고.”
진십삼은 뒤도 안 돌아보고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더니, 시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말을 몰아 자리를 떴다. 시녀는 어, 어, 하며 붙잡으려 했지만, 소년은 이미 멀어진 후였다.
- 낭자한테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내가 요즘 선생을 새로 청해 글공부를 배우느라 집을 비울 때가 많습니다. 날 찾을 일이 생기거든 우리 집 문간으로 와서 전하면 돼요. 내가 당부해 두었습니다.
소년의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별 뜻 없이 지나가는 투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진짜였구나. 시녀는 한숨을 내쉬며 진 상공 댁의 대문을 올려다본 다음, 콧방귀를 뀌고 홱 뒤돌아 자리를 떴다.
왕십칠의 시종들이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가뜩이나 심기가 편치 않던 왕십칠은 더욱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큰일은 내가 났다. 다 죽게 생겼어!”
“공자님, 공자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게 아니라 정씨 가문 낭자가 죽게 생겼어요.”
뭐라고? 왕십칠은 허리를 곧추세웠고, 다른 시종들도 자세를 똑바로 하여 섰다.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멀쩡하던 사람이 죽긴 뭘 죽어?”
“네, 앞으로 떠날 일에 대해 상의하려고 방금 찾아갔는데, 밖에서 막더라고요. 사람이 여럿 왔는데 병이 났다고 했습니다. 무슨 병인지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전 못 들어가게 했고요. 보통 큰 병이 아닌 듯싶습니다.”
병이 나? 그럼 안 돌아가는 건가? 왕십칠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래, 어서 가 봐야겠다.”
“공자님, 가시면 안 됩니다. 병자와의 접촉은 금기시하는 법입니다.”
나이 든 시종이 엄숙한 얼굴로 왕십칠을 막으며 다른 시종에게 명했다.
“넌 어서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라. 무슨 병인지 확실히 물어봐.”
지목을 받은 시종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잘 살펴라. 진짜 병이 난 거면 우리가 기다려야지. 아픈 사람을 데리고 출발할 순 없잖아.”
왕십칠의 당부에 시종은 다시 한번 네 하고 대답했다.
고 아범은 한쪽 옆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왕십칠의 생각을 훤히 아는 그였다. 대충 눈감아주며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일도 있다.
정씨 가문 낭자가 정말 병이 났다면, 당연히 절대 데려갈 수 없다. 함께 길을 오르는 건 고사하고 혼사 역시 없던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차피 공자를 달래고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추진했을 뿐 진지하게 여긴 혼사는 아니었다. 병이 나서 쓰러졌다면 공자도 마음을 접을 테니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좀 어떻던가?”
방에서 나오는 의원을 보며 대청에 있던 진(秦) 부인이 다급히 물었다.
“부인, 저로서는 역부족입니다.”
백발의 의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부족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진 부인이 물었다.
“몸에는 이상이 없고, 의식만 못 찾을 뿐입니다. 마음의 병이지요. 마음의 병엔 마음의 병을 치료할 약과 의원이 필요합니다.”
백발의 의원이 손을 내저었다.
“마음의 병이라니? 병이 났으면 무슨 병인지 말을 해야지, 왜 죄다 마음이니 정신이니 하는 소릴 늘어놓는 게야.”
진 부인이 부채를 탁 치며 말했다. 이 늙은 의원도 경성에서는 이름깨나 날리는 명의였기에, 진 부인의 말을 듣고는 예의를 벗어던지고 딱 잘라 말했다.
“부인, 어쨌든 전 못 고칩니다. 다른 고명한 의원을 찾아보시지요.”
의원은 약상자를 챙기며 인사를 올렸다. 몸종과 여종이 어, 어, 하며 붙잡으려 했다.
“관둬라. 가게 둬.”
진 부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휘장 뒤에서 여인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리자, 진 부인이 얼른 들어갔다. 진십삼은 한쪽 옆에 꿇어앉아 침상 위의 정교랑을 보고 있었다.
“좀 어떠냐? 정신이 들었어?”
진 부인이 물었다. 정교랑 옆에 있던 반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중얼거리기만 하세요.”
반근의 눈가는 눈물로 촉촉했다.
진 부인이 다가가 침상 옆에 꿇어앉았다. 침상 위 여인의 낯빛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반듯이 누워 눈을 꼭 감고 있으니 전처럼 무뚝뚝해 보이지는 않았다. 가끔 입술을 달싹였다. 반근의 말대로 ‘넌 누구지’, ‘난 누구지’ 하는 소리인 듯했다.
넌 누구냐는 말 한마디에 사람이 쓰러져 이 지경이 될 수도 있는 건가?
“자기가 누군지 궁금하고 자기가 누군지 물으려 했다면, 마음이 있단 뜻이구나.”
진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마음이 있다면 구할 수 있어. 내가 다른 의원을 찾아보마.”
반근이 엎드려 절을 올렸다.
“부인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반근은 울며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부인의 은혜에 감사드려요.”
“은혜라고 할 것도 없지. 받은 걸 갚는 거야. 너희 아씨나 잘 모셔.”
진 부인은 침상 위에 누운 정교랑을 힐끔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기다가 진십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진 부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진십삼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발 먼저 밖으로 나갔다.
“넌 공부하러 가거라. 학업을 그르쳐선 안 돼.”
진 부인이 따라 나오며 말하자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학업에 방해될 일은 없을 겁니다.”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래야 관직에 나갈 테고, 그래야 남들과 경쟁할 수 있고, 그래야 저 대단해 보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여인을 지켜 줄 수 있으니까.
두 모자가 대문을 나서는데 대문 앞에서 젊은 시종 하나가 금가아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남세스러운 병이기에?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냐?”
“우리 아씨는 남세스러운 병이 아니라, 그냥 병이 나신 겁니다. 성가시게 굴지 마요.”
“이 조그만 자식이, 내가 누군지는 아냐?”
“네가 누군데?”
진십삼이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돌리자 여종과 몸종에 둘러싸여 나오는 부인과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생각하던 시종은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주씨 가문 부인이시죠?”
시종은 소년의 몸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저는 아씨의 정혼자인 왕씨 가문 사람입니다. 아씨께서 병이 나셨다기에 특별히 문병을 왔지요.”
소년의 준수한 외모는 한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였다. 그날 천가에서 정씨 가문 낭자와 함께 있던 사내가 바로 이 소년이었다.
공자님께서 정 낭자의 사촌 오라비라 했으니, 주씨 가문의 도령이리라. 정 낭자가 병을 얻었으면 외숙 댁에서 살피러 오는 게 지당한 일이니, 이쪽 부인은 주 부인이겠지.
정말 정혼자가 있었어? 진 부인이 놀란 표정으로 시종을 훑어봤다.
“병이 났단다. 와 줘서 고맙구나. 들어가 보진 않는 게 좋겠다.”
시종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외람되오나 부인, 정 낭자는 무슨 병입니까?”
“별거 아니다. 며칠 쉬면 나을 거야.”
진 부인은 짧게 대꾸하고는 더 상대하기 귀찮은 듯 걸음을 옮겼다. 시종이 진 부인의 앞을 막아섰다.
“부인, 무슨 병인지 저희를 속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몹쓸 병에 걸렸는데 숨기는 것도 칠거지악을 범하는 일이니까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 부인이 화를 벌컥 냈다.
“따귀를 쳐라.”
옆에 있던 여종이 즉시 달려들어 따귀를 두 대 후려쳤다. 시종은 미처 방어도 못 한 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 부인, 왜 이러십니까? 저는 왕씨 가문의…….”
“뭐 하는 놈이기에 감히 우리 부인의 길을 막는 게냐!”
여종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썩 꺼져라!”
욕을 먹은 시종은 다시 한번 뒷걸음질을 쳤다. 부인은 여종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고, 소년은 시종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오만방자한 주씨 가문이로다! 시종은 열이 받아 부들부들 떨었다.
정씨 가문 사람들의 말대로 거칠고 무례하기 그지없군! 시종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숨고 피하며 보이지 않겠다 이거지? 남세스러운 병이 틀림없어!
시종이 걸음을 옮기려는데 몇 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또다시 마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쪽으로 달려오는 마차가 보였다.
“비켜라, 비켜!”
마부는 채찍을 휘두르고 소리치며 시종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갔다. 뒤로 물러선 시종의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경성 사람들은 왜 죄다 이렇게 시건방지고 무례한 거야!
“눈깔 똑바로 뜨고 다녀, 죽고 싶어?”
시종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부가 고개를 돌려 험상궂은 얼굴로 욕을 해댔다.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추자 귀부인 하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귀부인은 여종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시종이 따귀를 맞는 사이 재빨리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던 사환이 이번에는 부르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와 맞이했다.
저자는 또 누구기에? 시종은 어리둥절했다.
“이 태의, 이 태의, 서둘러요.”
부인이 고개를 돌리고는 재촉했다.
태의라고! 시종은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과연 마차에서 관복을 입은 노인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아이 하나가 약상자를 들고 따라 내렸는데, 약상자에는 태의국의 표식이 있었다.
태의를 청해 오다니!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폐하의 총애를 받는 가문이 아니랬는데? 병이 났다고 태의까지 모셔 올 정도라니!
가만있자, 저 부인은 누구지?
“아, 뭐 하는 겁니까?”
따라오는 시종을 본 금가아가 손을 뻗어 막으며 소리쳤다.
“나가요, 나가.”
“내가 왜 나가야 하는데? 이봐, 난 왕씨 가문 사람이라고. 아씨께서 병이 나셨으면 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뭘 숨기는 거야! 무슨 남세스러운 병이기에? 이렇게 꼭꼭 숨긴다고 우리 가문으로 시집올 수 있을 것 같아? 분명히 말하지만, 안 보여 주면 혼사 얘기는 없던 거야!”
아씨께서 응낙하신 혼사인데 저쪽에서 혼사로 협박을 하니 금가아는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넌 누구냐?”
진소 부인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시종은 기회를 틈타 마당으로 들어갔다.
“부인께 아뢰옵니다. 소인은 정 낭자의 정혼자인 왕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시종은 예를 올리고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 병이 나셨다기에 저희 공자님의 명을 받들어 특별히 문병을 왔습니다.”
진소 부인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시종을 살폈다.
말이 좋아 문병이지, 실은 병세를 살펴보고 혼사를 추진해도 될지 판단하려는 것이렷다. 왕씨 집안이 한다하는 가문은 아니라지만 진십팔랑에게 들으니 정교랑의 입으로 정혼자라 인정했고, 꽤 좋아하는 듯 보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 낭자가 원하는 혼사겠지.
그런데 이 이 시종의 말본새를 보니 진짜 병이 난 거면 혼사를 무를 것 같네. 사실 그리 말한다 해서 탓할 것도 없지. 혼담이 오가는 와중에 병이 나는 건 양쪽 모두 꺼릴 일이니까.
“여인 홀로 거하고 있는 집에 네가 들어가면 불편할 게다. 그러지 말고 주씨 가문으로 가서 병세가 어떤지 물어봐라. 구체적인 건 그쪽에서 알려 줄 게야.”
진소 부인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부인은 방금 전 주씨 가문 부인보다 훨씬 상냥하네.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마 주씨 가문의 친척이겠지? 주씨 가문에 잘 보이려고 병문안을 온 건가? 아니면 주씨 가문의 부탁을 받아 보살피러 왔으려나?
어느 쪽이든 주씨 가문보다는 못한 가문일 터…….
“귀찮게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마침 의원이 여기 왔으니 진단을 마치면 듣고 가지요.”
시종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말이라는 게 전해지다 보면 어떤 식으로 바뀔지 모르는 법이잖습니까.”
시종의 모습에 진소 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혼자의 가문이라고는 하나 아직 혼인 전이다. 여인이 홀로 거하는 곳에 웃어른의 허락도 없이 당당하게 내실로 들어가려 하다니, 체통을 지켜야지!”
진소 부인이 말했다.
“이 혼사는 정씨 가문과 우리 가문에서 정한 겁니다. 우린 정 낭자를 강주로 데려가야 하고요. 여기서 웃어른의 허락 얘기가 왜 나옵니까? 자꾸 이렇게 막는 걸 보니 정말 뭘 숨기는 거 아닙니까? 댁들이야말로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시종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따귀를 쳐라!”
시종이 멈칫하여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마당에서는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종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 또 맞은 거야?
“당장 내쫓아라! 감히 내게 그따위 말을 하고 이 문을 또 넘었다가는, 당장 경조부로 끌고 가겠다!”
호통 소리와 함께 시종은 거칠고 우악스러운 여종들에게 떠밀려 대문 밖으로 밀려났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닫혔다.
갑작스럽게 따귀를 맞아 어질어질했던 시종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뭘 했기에? 왜 다짜고짜 두 번이나 따귀를 맞은 거야! 내가 그렇게 못 할 말을 했어? 그래 봤자 경성의 하급 무장 가문 아니야? 그 정도 품계는 경성에서 발에 챌 정도인데, 뭐가 잘나서 저리 횡포를 부리냐고!
“해도 너무하잖아!”
시종은 악을 쓰며 퉁퉁 부은 얼굴을 부여잡고 굳게 닫힌 대문을 노려봤다.
“못 들어가게 한다 이거지? 이런 식이면 나중에 와 달라고 빌어도 안 와!”
시종은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객잔 안.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며 돌아온 시종의 모습에 왕씨 가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감히 사람을 때리다니!”
다른 시종들도 분을 못 참고 소리쳤다. 이들은 전부 집안에서 나름대로 위신이 있는 하인들이었다. 윗전이라 해도 나이가 어린 세대는 이들에게 체면을 세워 줄 정도인데, 주씨 가문에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건 단순히 아랫것의 따귀를 때린 문제가 아니었다. 왕씨 가문의 따귀를 때린 것이었다.
“당장 쫓아가죠!”
“노야께 서찰을 씁시다!”
“당장 돌아가서 이 혼사 없던 거로 해요!”
다들 입을 모아 아우성을 쳤다. 왕십칠은 여전히 겁이 나는 한편 은근히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고 아범, 자네가 날 보내지 않아 다행이야. 주씨 가문이 이렇게 무시무시하다니까. 자네는 모르겠지만, 자네들이 오기 전에 내가 정사낭이랑 주씨 가문에 찾아갔거든.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밧줄로 꽁꽁 묶일 뻔했어.”
시종들은 더욱 경악했다.
“주씨 가문이 해도 너무합니다. 당장 집으로 서찰을 보내시죠. 아니, 지금 당장 가서…….”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노복은 시종일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노복이 가벼운 기침을 했다. 모두가 말을 멈추고 노복을 쳐다봤다.
“지금은 갈 수 없다.”
노복의 말을 들은 시종들은 멈칫했지만, 왕십칠은 기뻐했다.
“네 말도 그렇고, 주씨 가문에서도 이렇게 감추고 피하는 걸 보면, 정씨 가문 낭자의 병은 가벼운 병이 아닐 게야.”
“그럼 더더욱 빨리 돌아가서 노야께 알리고, 혼사를 물러야죠.”
한 시종이 대꾸했다.
“그건 급하지 않다. 병은 어차피 숨길 수 없어. 혼례를 올렸다 해도 무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 걱정할 게 없지.”
노복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다만, 좀 이상하지 않으냐.”
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할 게 뭐 있습니까. 정씨 가문 낭자는 본디 어릴 때부터 바보라 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신히 혼담이 오가는 와중에 병을 얻으니 혼사가 틀어질까 봐 이리저리 숨기며 알리지 않는 거지요.”
한 시종의 대답에 노복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이상할 게 없어.”
노복은 매를 맞고 돌아온 시종을 보며 말했다.
“정 낭자가 병이 났는데, 문병을 온 사람이 왜 그리 많았을까? 게다가 태의까지 모셔 왔다? 좀, 이상하지 않느냐?”
이상한가? 다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노복을 쳐다봤다.
“바보로 태어나 아무도 원치 않는 아이였다. 정씨 가문에서는 익사시킬 생각까지 했지. 집으로 들이지도 않고 도관에 버려뒀었어. 주씨 가문에서도 혼수만 탐낼 뿐 사람한텐 신경도 안 썼지. 병이 난들 대수겠느냐.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에서 바라는 바일 테지. 주씨 가문으로서는 정 낭자가 죽으면 혼수를 더 쉽게 가져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근데 지금 상황을 들어보면 문병 오는 사람도 많고 의원을 데려오며 정성을 쏟는다지 않으냐. 집안에서 내치기까지 했던 바보한테, 그런 대우를 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시종들은 무슨 말인지 퍼뜩 깨닫고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긴 이상하네. 정말 이상해.
“주씨 가문에서 천가에서 꽃등을 구경한 것만 해도 그래. 정씨 가문 노야한테 들은 주씨 가문의 신분과는 전혀 맞지 않아.”
노복이 말했다.
“주씨 가문의 신분이 뭔지 알 게 뭡니까. 병든 바보를 우리 왕씨 가문에 밀어 넣을 생각이면 어림도 없죠.”
한 시종이 말했다.
“저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 왕씨 가문과는 교류가 없었으니 겁낼 것도 없어요.”
아무렴, 그렇지. 하나는 남쪽에 있고 하나는 북쪽에 있으며, 하나는 문관 가문이고 하나는 무관 가문이며, 애초에 교류도 없지 않았던가.
“그건 겁날 게 없지.”
노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지피지기란 말이 있으니,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보단 나아. 그러니 지금 당장 떠날 게 아니라 상황을 지켜보며 알아보자꾸나. 주씨 가문은 어떤 가문인지, 정 낭자의 병은 또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알아보고 집으로 서신을 보내야 해.”
이번 여정에서는 노복이 우두머리였다. 노복이 결정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공자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노복이 고개를 돌려 왕십칠에게 물었다. 왕십칠은 애초에 노복과 시종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지만 서둘러 돌아가지 않는다는 결론은 퍽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병이 없으면 혼인하고, 병이 났으면 그만이지 뭐. 이게 뭐 대수라고.”
왕십칠은 손을 내저었다. 미인이야 어딘들 없을까.
특히 경성에 도착한 후, 미인은 널리고 널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림 같은 미인도 생각했던 것만큼 좋진 않았고. 근데 그렇다고 버리자니…….
왕십칠은 혀를 차며 생각에 잠겼다.
-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어.
여인은 눈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며 조용히 자신을 바라봤다.
예쁘기도 하고 말도 잘 들었어. 그냥 관성적으로 말을 잘 듣던 여인들과는 달랐지. 뭐랄까……. 뭐라 표현할 순 없지만, 아무튼 이대로 버리자니 좀 아쉽네.
“우리도 의원 하나를 데리고 찾아가 보자.”
왕십칠이 말했다.
시녀가 돌아왔을 무렵, 진소 부인은 이 태의와 함께 떠난 후였다.
“뭐래?”
시녀가 금가아에게 물었다.
“딱히 뭐라고 확실히 말하진 않았어. 마음이 홀린 거라나, 심신이 통하지 않은 거라나. 내가 보기엔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 같아. 그러니 말만 실컷 늘어놓고 약도 안 지어 주지.”
금가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이 태의가 돌아가서 의서를 더 찾아보겠대.”
시녀는 한숨을 내쉬고 금가아에게 말했다.
“대문 잘 지켜.”
금가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빗장을 꽉 잡았다.
시녀가 대청으로 들어왔다. 대청 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지만, 늘 그곳에 앉아 조용히 책을 보던 아씨는 보이지 않았다. 휘장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자, 반근이 정교랑의 자세를 바꿔 주고 있었다.
“아씨, 글씨 쓸 시간이에요. 제가 먹을 갈게요. 어서 일어나셔야죠.”
반근이 중얼거렸다. 시녀는 콧등이 찡해져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글씨를 못 쓰겠으면, 제가 책을 읽어 드릴게요.”
시녀가 말했다.
“언니, 아직 책 읽을 시간은 안 됐잖아. 언니는 가서 일 봐. 세 점포 모두 살펴야 하잖아.”
반근은 고개를 들고 시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난 말도 잘 못하고 머리도 안 돌아가. 바깥일은 언니만 믿을게. 아씨의 시중은 나한테 맡겨.”
시녀는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점포 일은 내가 맡을게. 넌 걱정 말고 아씨를 보살펴.”
밖으로 나온 시녀는 세수를 하고 단장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금가아, 대문 잘 지켜.”
시녀의 말에 금가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심호흡을 하고, 대문을 나섰다.
태의국 서재. 이 태의는 벌써 한나절째 책을 들춰 보고 있었다. 서재 안은 펼쳐 봤던 책들로 어지러웠다.
“사부님, 이거 어떠세요?”
아이는 쌓아 놓은 책 무더기를 밟고 까치발로 올라서서 서가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고는 기뻐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 태의는 책더미의 가운데에 앉아 책에 고개를 처박은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읽어 봐라.”
“이진(李振)의 <잡병론>…….”
“이리 던져라.”
아이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손을 흔들어 책을 던졌다. 책은 이 태의의 발치에 있는 서책 더미 사이로 떨어졌다. 아이는 계속해서 까치발을 들고 책을 찾았다.
하늘빛이 차츰 어두워지더니 실내도 어두컴컴해졌다. 이 태의는 그제야 서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서가에 기대 침을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이번엔 못 고칠 듯싶다.”
중얼거리던 이 태의는 무의식적으로 좌우를 살폈다. 행여 누가 들을까 봐 겁이라도 난다는 듯이. 이 태의는 자신의 반응에 콧방귀가 나왔다.
정 낭자가 나타난 후로 얼마나 많은 이가 이 태의를 찾아왔던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못 고친다는 확진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이 태의는 아무리 위중한 병 앞에서도 그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게 됐다. 누가 그 말을 들었다면 기뻐하며 병자를 들쳐업고 정 낭자한테로 달려갔을 테니까.
그런데 이번엔, 들쳐업혀 갈 사람이 바로 정 낭자였으니……. 이래서 세상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그리 오만방자하게 굴더니!
이 태의는 한숨을 토했다.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른 이를 못 고쳤을 땐 그녀를 찾아가게 하면 됐지만, 그녀를 못 고치게 됐으니 누굴 찾아가라 한단 말인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이 태의, 이 태의.”
문밖에서 맑은 목소리와 함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 태의가 일어서기도 전에 옆에서 쿵 소리가 났다.
“사부님, 때리지 마세요!”
아이가 소리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잠에서 깨다가 저 스스로 머리를 박고는 놀라 소리친 것이었다.
이 태의는 기가 막히면서도 우스워 얼른 방을 정리하라고 소리치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내시들에게 둘러싸인 진안 군왕이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이 태의는 질문과 함께 콧방귀를 뀌었다.
“귀한 보물을 얻었으니 이제 제 약은 필요 없으시다면서요?”
진안 군왕은 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손을 뻗어 이 태의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태의도 참. 꼭 병이 나야 이 태의를 보러 온단 말입니까? 보고 싶어서 오면 안 돼요?”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었다.
진안 군왕과 이 태의가 대청에 앉자 내시들은 문밖으로 물러났다.
“정 낭자의 병은 어떻습니까?”
진안 군왕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 태의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군왕도 아셨습니까? 정 낭자의 명성이 그리 어마어마하던가요?”
이 태의가 물었다.
“이 태의처럼 내 목숨을 구했거든요.”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태의는 더욱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언제 일입니까? 전 왜 몰랐습니까?”
군왕이 대체 언제 죽을 지경까지 갔던 거지? 그리 엄청난 일을 숨겼단 말이야?
“여기서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작년에 부왕의 장례를 치르러 다녀올 때였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문밖에 있는 이들은 모두 진안 군왕의 사람이었다. 말이 새어 나갈 염려가 없으니 진안 군왕은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했다. 이 태의는 어두운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고가 놈의 짓이군요. 그리 대담한 짓을 벌이다니!”
이 태의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주 교묘한 수였어요. 그자가 매수됐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렴 뭐 어떻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대단해도 운은 못 이기는 법인걸요.”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던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아 그 여인을 만났지. 그런데 그 여인이 지금…….
진안 군왕은 입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들어 이 태의를 쳐다봤다.
“오늘 정 낭자를 보러 갔다던데, 병세가 어떻습니까?”
진안 군왕의 질문에 이 태의가 한숨을 쉬었다.
“저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태의의 입을 통해 확인을 받으니 진안 군왕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부족이라니요? 대체 무슨 병인데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기괴한 병입니다.”
이 태의는 시큰한 눈을 비비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병인데, 젊을 때 사부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방금 의서를 찾아보다가 조금 알아낸 것도 있고요.”
“뭡니까?”
진안 군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물었다.
“실심병(失心病)이죠.”
이 태의가 대답했다.
실심이라면 마음을 잃었다고?
“자극을 받아 정신이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황당무계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마음의 병이 가장 고치기 힘듭니다. 약도 효험이 없고요. 자고로 마음의 병에는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원이 따로 있다고 하죠. 계속해서 자신이 누군지 묻고 있습니다. 마음과 정신이 묶여 있는 겁니다. 사람이 방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요. 아직 인지 능력은 있지만 거기서 나오지 못하면, 결국…….”
거기까지 말한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을 보며 손짓을 했다.
“죽습니다.”
죽는다…….
진안 군왕은 말이 없었다. 실내에는 오래도록 침묵이 감돌았다. 밤이라 어두컴컴했지만 두 사람은 등불도 켜지 않았다.
“전하.”
밖에서 누군가가 나지막이 불렀다.
“전하,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태의는 탁자 위에 있던 등불에 불을 붙이고, 자기로 된 병을 하나 꺼내 건넸다. 태의를 찾아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진안 군왕은 병을 받고 뒤돌아 나갔다.
가을밤 공기엔 벌써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웅장한 전각들이 늘어선 길은 더욱 적막해 보였다.
자극을 받아 정신이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황당무계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마음의 병이 가장 고치기 힘듭니다. 약도 효험이 없지요.
계속해서 자신이 누군지 묻고 있습니다. 마음과 정신이 묶여 있는 겁니다. 사람이 방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요. 아직 인지 능력은 있지만 거기서 나오지 못하면, 결국…….
진안 군왕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앞뒤에서 걷던 내시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따라서 걸음을 멈췄다.
“뭔지 알겠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무얼 안다는 말씀입니까?”
내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진안 군왕은 대꾸하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알겠다, 알겠어.”
진안 군왕은 흥분하여 손을 꽉 쥐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알겠다.”
알겠다, 알겠어.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겠다고!
진안 군왕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서 종내에는 아예 뛰어가게 됐다. 밤하늘 아래 바람처럼 휘리릭 달려가는 군왕의 모습은 날개를 펼친 커다란 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성에서 옥대교에 사는 정 낭자에게 병이 난 일은 흐르는 강물에 돌멩이 하나를 던진 것처럼 아무런 파급 효과도 없는 일이었다.
태평거 안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보수사로 향하는 태평 두부도 막 수레에 실려 나갔다.
“아씨께서 선견지명이 있어서 점포 일에 손대지 않으신 거네요. 자주 오지도 않으시고 여기 머무신 일도 없으니, 이렇게 안 계셔도 아무 일이 없잖아요.”
시녀가 말했다.
“반근 낭자, 걱정 마. 체계가 딱딱 잡혀 있으니까, 점포는 잘 돌아갈 거야. 내가 여기 없어도 이대작이 있잖아. 새로 데려온 관리인도 믿을 만한 사람이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태평거의 새 관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번 달 장부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관리인은 공손하게 웃으며 장부를 건넸다.
“그래, 가서 일 보게.”
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관리인이 예를 표하고 나갔다.
“반근 낭자, 확인해 보시구려.”
오 관리인이 시녀에게 장부를 건넸다. 시녀는 눈앞에 있는 장부를 쳐다보았다. 전에 노태야를 따라 보던 책은 전부 시(詩)나 사(詞) 같은 작품이 담긴 책이었다. 장부 같은 물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반근 낭자, 내가 가르쳐 주리다.”
오 관리인이 말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부를 집어 들었다.
그냥 배우는 거잖아, 겁낼 게 뭐 있어. 예전엔 글도 몰랐는걸? 차근차근 배우다 보면 알 거야.
“오늘은 좀 어떻소?”
대청으로 들어오던 주 노야가 차를 마시고 있는 주 부인을 보며 물었다.
“얘길 들어보니 여전히 똑같대요.”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얘길 들어? 당신은 또 안 간 거요?”
주 노야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시녀가 차를 올렸다.
“어차피 똑같다잖아요. 내가 간들 무슨 소용이에요.”
주 부인은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다. 주 노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어떻게 된 게 무슨 병인지 제대로 아는 의원조차 없어?”
“이상할 것도 없죠. 원래 타고나길 바보로 태어났잖아요. 낫는다고 나을 병이 아니었던 거죠.”
주 부인은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 말은, 또 바보가 됐단 거요?”
찻잔을 들던 주 노야는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닌지 도로 내려놓았다.
“지금으로서는요. 진소 상공 댁 부인이 이 태의를 모셔 왔는데도 못 구한다고 했대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바보로 태어나 우리까지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는데, 갑자기 병이 나아 그 많은 일을 벌여 놨소. 간신히 한시름 놓나 했더니 이젠 또 바보가 되다니!”
주 노야는 허벅지를 치며 탄식했다.
“하늘이 우리 주씨 가문을 가만두지 않으시는군!”
“내가 진작부터 불길한 애라고 했잖아요.”
주 부인은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 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교랑한테 병이 났으니, 당신은 신선거랑 태평거, 의관을 단단히 지켜요.”
신선거와 태평거, 그리고 의관! 그렇지. 벌여 놓은 사업이 많았잖아! 수입이 어마어마했는데!
주 노야는 허둥지둥 일어나느라 앞에 있던 찻잔까지 떨어뜨렸다. 시녀가 얼른 닦아 주자, 주 노야는 옷깃을 털었다.
“그래, 그렇지. 그게 다 그 애 재산이었어. 병만 걱정하느라 그걸 깜빡하고 제대로 감시도 못 했군. 점포에 있는 놈들이 돈이라도 들고 튀면 큰일이야! 내가 가 봐야겠소!”
주 노야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옷이요, 옷.”
주 부인이 뒤에서 소리쳤다. 주 노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돌아섰다. 주 부인은 직접 옷을 갈아입혀 주고 문밖까지 나가 배웅했다.
장부를 손에 든 시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이나 쳐다봤다.
“또 모르겠어?”
반근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붓을 들어 옆에 표시를 몇 개 해 두었다.
“아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 관리인한테 좀 더 배워야겠어.”
시녀는 미소를 지으며 침상을 쳐다봤다.
“아씨께서는 장부를 볼 줄 아시려나?”
침상 위의 여인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옷은 반근이 방금 갈아입혀 준 것이었다. 반근이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주었다.
“분명 아실 거야.”
반근이 우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아씨께서 그러셨잖아. 시 짓는 것 외엔 다 할 줄 아신다고.”
시녀는 정교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셔도, 배울 수 있어.”
시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밝게 웃었다.
“아, 반근. 아씨께서 깨어나셔도 내가 장부 볼 줄 안다는 건 일단 비밀로 해.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 드릴 거야.”
반근은 풉 웃음을 터트리며 정교랑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아씨를 놀라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세상에서 아씨를 놀라게 할 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언제나 한결같은 정교랑의 그 무뚝뚝한 모습이 두 사람의 눈앞에 떠올랐다. 아마 하늘이 무너져도 아, 하는 소리를 내는 정도에서 그칠 것 같네.
두 사람은 침상 위에 누운 정교랑을 쳐다봤다. 눈을 감고 있으니 도리어 온화해 보였다.
시녀는 장부를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반근은 시녀가 눈물을 닦으러 나가는 걸 알았다. 반근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툭 떨어뜨리고는 심호흡을 하고 계속해서 머리를 빗겼다.
마당에서 금가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 누나, 반근 누나. 오 관리인이 빨리 좀 와 보래. 누가 점포에서 소란을 피운대.”
둘 다 반근이었지만, 반근은 지금 금가아가 찾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회랑 아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옆방에서 시녀가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으며 단장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녀는 서두르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은 채 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금가아, 집 잘 보고 있어.”
잠시 후, 시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금가아의 대답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는 멀어져 갔다.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빗을 내려놓은 다음, 정교랑의 몸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이 태의가 당부하고 간 덕분이었다. 병상에 누운 사람은 욕창이 생기기 쉽다며 때맞춰 자세를 바꾸고 주물러 줘야 한다고 했다.
반근은 다른 일을 할 줄 몰랐다. 할 줄 아는 건 아씨의 시중을 드는 일뿐이었으니, 기필코 잘 해내야 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느냐? 어디서 시치미를 떼!”
늘 조용하던 신선거에 갑자기 시끄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별실 안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정도면, 안에서는 얼마나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갔다.
“주 노야.”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는 분기탱천한 주 노야를 쳐다봤다.
“그래, 마침 잘 왔다. 네가 말 좀 해 봐라. 내가 누구더냐”
주 노야는 오 관리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누군지 알면, 냉큼 꺼져야 할 거다.”
“주 노야, 여긴 뭐하러 오셨어요?”
시녀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점포를 지키러 왔지.”
주 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허벅지를 쳤다.
“냉큼 장부부터 가져오너라. 교교가 며칠째 병석에 누워 있으니, 점포가 제대로 돌아가나 확인해야겠다.”
주 노야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장부를 꼼꼼히 살피게.”
노인은 네 하고 대답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 노야, 여기 장부는 보실 수 없어요.”
시녀가 말했다.
“내가 왜 못 본다는 게야?”
주 노야가 시녀를 보며 물었다.
“이건 우리 아씨 거니까요.”
시녀가 대답했다. 주 노야는 초조해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아씨 거지. 그럼 너희 아씨가 누구네 사람인지도 알지?”
시녀는 표정이 싹 변한 채 말없이 있었다. 주 노야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우리 가문 사람이다!”
주 노야는 시녀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우리 집 여식이 병을 얻었는데, 우리 집 여식의 재산을 나한테도 안 보여 주고, 아랫것인 너희들끼리 독차지하려고? 대체 저의가 뭐냐? 못된 것들이 윗전의 재산을 노려? 아주 겁대가리가 없구나!”
그래, 옳은 말이지.
시녀의 낯빛은 창백해졌고, 한쪽 옆에 있는 오 관리인 역시 뾰족한 수가 없다는 듯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하긴, 세상 이치가 그러한데 별수 있나. 아씨는 엄연히 주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아씨가 없으면, 아씨의 재산을 관리할 자격이 친척에게 주어지는 건 당연했다.
아씨가 병으로 쓰러진 후 어려운 일이 많이 닥치리라 예상은 했지만, 가장 먼저 닥친 일이 주씨 가문에서 재산을 빼앗으려 드는 일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빼앗으면서도 저리 당당하니 할 말이 없네. 아씨의 것을, 아씨께서 심혈을 기울여 이뤄 놓은 사업을, 내가 아씨를 대신해 지킬 방법은 없을까? 아씨께서 안 계시면, 난 아무것도 아닌 거야?
시녀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는 주 노야를 빤히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하고 예를 표했다.
시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노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주 노야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아씨는 정씨 성을 가지셨어요. 주씨가 아니고요. 장부를 봐야겠다면, 소인으로서는 정씨 가문에 보여 드리는 수밖에 없어요.”
이 계집이! 정씨 가문에서 데려온 애 아니랄까 봐!
욱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주 노야는 곧 노기를 거두고 미소를 지었다.
“정씨 가문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느냐. 일단 내가 확인하고, 나중에 그 사람들이 오거든 다시 얘기하자.”
주 노야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장부를 내놓아라.”
시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야, 정씨 가문 사람은 멀리 있지 않아요.”
멀리 있지 않다고? 멈칫했던 주 노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정씨 가문의 사공자께서 경성에 계시거든요.”
시녀도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어린애 아니냐. 그 애가 뭘 안다고!”
주 노야가 인상을 썼다.
“노야, 저희 아씨도 아직 어리신걸요. 이런 걸 남한테 맡길 순 없죠.”
“그건 교랑의 것이다!”
주 노야는 분을 참지 못했다.
“사공자는 아씨의 오라버니고, 똑같이 정씨 성을 가지셨어요. 그러니 차이가 별로 안 나실 거예요.”
시녀의 말투는 단호했다.
똑같이 정씨 성을 가졌으니 차이가 별로 안 난다고?! 저리 뻔뻔한 소리를 늘어놓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야?
주 노야가 눈을 부릅떴다.
서원 안.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던 학생들의 목소리가 뚝 끊기더니, 하나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쭈뼛쭈뼛 들어왔다.
수업 시간에 매우 엄격한 장강주 선생은 수업의 맥이 끊기는 걸 가장 싫어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보는 장강주 선생의 표정엔 이미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안에 있던 학생들도 덩달아 긴장한 채로, 선생이 분노를 쏟아내길 가만히 기다렸다. 아이는 눈 딱 감고 앞으로 가서 장강주 선생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서원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정문유.”
장강주 선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다 멈칫했다.
정문유? 아이를 혼내는 게 아니었어?
맨 뒤에 앉아 있던 정사낭도 어리둥절했다.
“강주 정문유.”
장강주 선생은 목청을 높여 다시 한번 호명했다. 정사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네.”
정사낭이 영문도 모르는 채로 대답했다.
“가 봐.”
장강주 선생의 말에 정사낭은 깜짝 놀랐다.
“스승님, 스승님. 제, 제가 뭘 잘못했기에 내쫓으시는지…….”
정사낭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사낭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혼란스러워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장강주 선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널 찾는단다. 냉큼 꺼지라고!”
장강주 선생이 마침내 모두의 기대 속에 노기를 분출했다. 허둥지둥 튀어 나간 정사낭은 밖으로 나오자 머리까지 어질어질했다.
누가 날 찾아왔다고?
“공자님, 공자님.”
시녀가 한쪽 옆에서 손짓을 하며 불렀다. 정사낭은 시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애였구나. 그럼 그렇지. 장강주 선생의 분노를 겁내지도 않고 사람을 불러내다니. 게다가 장강주 선생 역시 화를 안 내시다니.
정사낭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누이가 온 것이냐?”
정사낭이 좌우를 살피며 물었다.
아씨는 못 오세요……. 시녀는 마음이 시큰해졌지만,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아니요. 아씨는 못 오세요.”
여인의 몸이니 외출이 쉽지 않을 터. 딱히 이상할 게 없는 시녀의 대답에 정사낭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시녀가 말했다.
“부탁은 무슨. 무슨 일인지 말해 봐라.”
정사낭은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지 얼른 전대를 풀었다.
“돈은 여기…….”
시녀는 손을 들어 정사낭을 막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님, 돈은 부족하지 않아요. 저희는 지금 사람이 부족해요.”
사람이 부족하다?
정사낭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차는 질풍처럼 달려 태평거 앞에 멈춰 섰다.
“반근 낭자, 여긴 왜 데려온 거야?”
정사낭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태평거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침 식사 시간인지라 드나드는 마차도 많았고, 점원들은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느라 분주했다.
“공자님, 여길 아세요?”
시녀의 물음에 정사낭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창들한테 들었어. 여기에 보물이 세 개나 있다며 경성에 명성이 자자하잖아.”
정사낭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난 아직 못 와 봤지만.”
우선은 시간이 없어서였고, 두 번째로는 집을 떠나 외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돈이 아쉬워서였다.
“공자님, 절 따라오세요.”
시녀가 말했다.
지금 여기서 밥을 먹자고 데려온 건가? 정사낭은 주저하면서도 발을 들어 걸음을 옮겼다.
“이게 그 무명씨의 글씨로구나.”
문가 앞에 다다른 정사낭은 고개를 들어 현판을 쳐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사한 글씨는 봤다만, 역시 진품이 훨씬 훌륭하네.”
고개를 돌린 시녀는 정사낭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어서 들어오세요. 글씨는 앞으로 얼마든지 보실 수 있어요.”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누가 쓴 건지 알아낸 것이냐?”
정사낭이 물었지만, 시녀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사낭은 급히 시녀의 뒤를 따랐다.
시녀는 별실로 들어가지도, 탁자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정사낭을 데리고 식당 안을 한 바퀴 쭉 돌았다. 지나는 길에 마주친 점원들은 시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고, 시녀는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답례를 대신했다.
“반근 낭자, 어찌…….”
정사낭이 못 참고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 이곳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시녀가 대답했다.
보여 드리려고? 정사낭은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시녀는 정사낭이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마차가 흔들흔들 경성 거리를 지나갔다.
“여긴……?”
마차에서 내린 정사낭이 눈앞에 있는 점포를 보며 물었다.
이춘당. 평범해 보이는 약포지만 오가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시녀는 또다시 걸음을 옮겼고, 정사낭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뒤따라 들어갔다.
“정 낭자의 약은 아직도 없어요?”
“없으면 할 수 없죠. 그럼 여기 의원한테 진료를 받을게요. 약 좀 지어 줘요.”
“정 낭자의 약포잖소. 정 낭자가 직접 진료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집보단 낫겠지.”
약포에 있는 일고여덟 명 정도의 손님들이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그들은 의원에게 차례로 진료를 받았다.
“반근 낭자.”
약을 짓고 있던 점원이 시녀에게 인사하자,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실내를 둘러봤다.
“약은 아직 다 있지?”
시녀의 물음에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약을 지으려는 건가? 정사낭은 여전히 영문을 몰랐지만, 시녀는 한 바퀴 쭉 둘러본 후 또 밖으로 나갔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정사낭은 고개를 내저으며 하는 수 없이 시녀를 뒤따라 나왔다.
마차가 신선거 앞에 멈춰 섰다. 이제 정사낭은 묻는 것도 입이 아픈지 잠자코 시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녀가 한 바퀴 쭉 둘러본 후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별실로 들어갔다.
정사낭은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공자님, 여기 어떠세요?”
시녀가 물었다.
“좋네. 전에 얘길 들어 본 적 있어. 여기가 그렇게 비싸다던데, 보니까 비쌀 만하네.”
정사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반근 낭자, 자주 오는 곳이야?”
정사낭이 물었다.
보아하니 꽤 익숙한 곳 같네. 눈 감고도 척척 걸어 다닐 것 같아. 주씨 가문에서 누이를 이런 데 자주 데려오나? 이리 비싼 곳을…….
하지만 세상엔 비싸다는 것으로 신분과 정성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있다. 신선거가 문을 닫기는커녕 점점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주씨 가문에서 누이를 그리 잘 대우했나?
시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장부 세 권을 든 노인 하나가 들어왔다.
“오 관리인, 이분이 사공자세요.”
시녀가 말했다. 오 관리인은 웃으며 꿇어앉아 정사낭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공자님을 뵈옵니다.”
정사낭은 얼른 답례를 올리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분은 오 관리인이세요. 태평거와 신선거, 이춘당의 총관리인이죠.”
시녀의 말에 정사낭은 흠칫 놀랐다.
“공자님, 세 점포의 장부입니다.”
오 관리인이 장부 세 권을 내밀었다. 정사낭은 멈칫하며 고개를 숙여 장부를 쳐다봤다.
무슨 뜻이지?
“공자님, 오 관리인은 세 점포의 총관리인이고, 저희 아씨는 세 점포의 주인이세요.”
시녀가 말했다.
누가? 정사낭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시녀를 쳐다봤다.
“누가?”
정사낭이 소리쳤다.
“저희 아씨요. 공자님의 누이, 교랑 아씨가, 이 세 점포의, 주인이세요.”
시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사낭은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날 데리고 세 곳을 차례로 돌았구나. 그래서 거기 사람들이랑 잘 아는 사이였구나. 이들 것이었어! 이들 것이었다니!
도, 돈을 긁어모으는, 이 유명한 점포가, 누이 것이었다니…….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전대를 쳐다봤다.
그래서 아까 시녀가 돈은 부족하지 않다고 했구나. 그래서 누이에게 돈을 주어도 시큰둥한 표정이었구나. 몇 푼 안 되는 내 돈은 누이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쨌든 이 세 점포는 아씨 거예요.”
시녀는 정사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공자님께 맡기려고 해요.”
정사낭은 또다시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정사낭이 물었다.
“네. 저희 아씨께서 병이 나셨어요. 공자님은 아씨의 오라버니이시니, 수고스럽겠지만 이 점포를 맡아 주세요.”
시녀는 손을 뻗어 정사낭 앞으로 다시 장부를 밀었다. 정중하면서도 긴장되는 표정이었다.
정사낭이 벌떡 일어났다.
“누이한테 병이 났다고?”
정사낭은 방금 전보다 훨씬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그저 놀라기만 한 게 아니라 두렵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무슨 병이더냐? 왜 병이 났어? 언제 병이 난 것이냐? 너도 참, 진작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왜 이리저리 사람을 끌고 다녀? 이딴 건 또 뭐고? 지금 이런 걸 따질 때더냐!”
정사낭은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장부가 발에 차이자 그대로 걷어차 버리고는 황급히 달려나갔다.
시녀는 발에 차여 저쪽으로 날아간 장부를 보며, 맥이 탁 풀린 듯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세상살이가 힘겹고 야박하다지만, 아직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어.
갑자기 병이 나다니? 무슨 병이기에 갑자기 이렇게 돼?
정사낭은 침실 앞에 꿇어앉아 침상 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벌써 한나절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정사낭이 불쑥 입을 열었다. 깊이 잠든 듯 보이는 여인은 가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시녀는 고개를 숙였다.
“아씨께서는 충격을 받아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세요.”
“그럼 왕십칠 때문에…….”
정사낭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십칠이 어떤 인사인지는 정사낭 자신이 똑똑히 알았다. 설마 그 자식 때문에 화병으로 앓아누운 건가?
“아니에요.”
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일이에요. 그건 묻지 마세요.”
정사낭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럼 의원을 더 찾아봐야겠다. 의식이 있으니 구할 수 있을 거야.”
정사낭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찾아봐야죠. 여러 분들이 도와주고 계세요.”
정사낭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나, 나는 서원에서 알아볼게. 명의를 아는 이가 있는지 수소문해 봐야지.”
정사낭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공자님, 공자님께서 지금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에요.”
시녀가 정사낭을 불러 세웠다. 걸음을 멈춘 정사낭은 불안한 표정으로 시녀를 쳐다봤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정사낭이 물었다.
너무 유약한 성격이야. 좋으면서 좋지 않기도 해.
시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님, 아씨의 점포를 지킬 사람이 필요해요.”
시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점포. 아, 그렇지. 점포가 세 개 있었지. 점포를 떠올린 정사낭은 순간 가슴이 쿵쾅댔다.
그 유명한 점포가, 자신에게 주는 상으로 한번 다녀왔다며 동창들이 떠들어대던 그 점포가, 놀랍게도 누이의 것이었다니! 그걸, 어떻게 이룬 거지?
“공자님.”
시녀가 다시 한번 정사낭을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정사낭은 상기된 얼굴로 시녀를 어색하게 쳐다봤다.
“나더러 뭘 해 달라는 건데?”
정사낭이 물었다.
정사낭은 다시 신선거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 방문했을 때의 호기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앞에 있는 네 사람을 보며 정사낭은 긴장도 되고 어색하기도 해서 경직된 모습이었다.
“여러분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정사낭 옆에 꿇어앉은 시녀가 입을 열었다.
“아씨께서 병이 나셨어요.”
오 관리인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태평거와 이춘당의 관리인과 태평 두부를 맡고 있는 손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럼 괜찮으신 겁니까?”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다만 점포의 일은 당분간 여기 계신 사공자께서 맡아 주실 거예요.”
시녀가 정사낭을 보며 말했다.
“넷째 도련님을 뵈옵니다.”
새로 데려온 두 관리인은 세상 물정에 밝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시녀의 소개에 얼른 큰절부터 올렸다. 손재도 뒤질세라 얼른 절을 올렸다.
“별, 별말씀을.”
정사낭은 더욱 경직된 모습으로 말까지 더듬었다. 오 관리인은 고개를 숙이고 장부 몇 권을 내밀었다.
“세 점포의 장부입니다. 공자님께서 확인해 보시지요.”
정사낭은 또다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집에 계신 부친이 떠올랐다. 집안에 있는 집사와 바깥 점포를 맡은 관리인들은 매달 한 번씩 모여 부친 앞에서 장부를 보고하곤 했다. 그때 본 부친의 얼굴엔 위엄이 서려 있었고, 흐뭇해 보이기도 했다. 거대한 산처럼 정씨 일가를 든든히 지키는 모습이었다.
그런 부친에 대해 존경의 마음은 있었지만 부럽다는 생각을 가진 일은 없었다. 정씨 가문의 법도에 따르면 넷째인 자신이 장부를 만져 볼 일은 평생 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오다니!
정사낭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장부 하나를 들고 펼쳐 보았다. 정사낭의 눈이 곧 휘둥그레졌다.
어마어마한 액수다!
정사낭은 또다시 반사적으로 장부를 덮었다. 너무 놀라 더 보고 있기 힘들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야!
정사낭이 관리인들 앞에서 놀라고 겁먹은 표정을 티 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사낭은 관리인들이 물러가고 시녀만 남자,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옷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난 이런 거, 볼 줄 모르는데.”
정사낭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듯 부끄럽고 미안한 표정이었다. 시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소인이 볼 줄 알아요.”
정사낭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곧 어리둥절한 채로 물었다.
“그럼, 난 뭘 도우면 되지?”
정사낭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난 할 줄 아는 게 공부뿐이라……. 사실 공부도 썩 잘하는 건 아니지만.”
시녀는 정사낭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공자님, 공자님은 아씨를 대신해 세 점포를 잘 지켜 주시기만 하면 돼요. 다른 사람이 못 빼앗게요. 공자님, 이 점포들은 아씨께서 심혈을 기울여 이루신 거예요. 아씨께서 병이 나아 의식을 되찾으셨을 때, 아무것도 없는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시녀는 목멘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하며 엎드려 절을 올렸다.
“어서 일어나, 어서. 그야 당연하지.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 걱정 마라. 내가 누이를 대신해 잘 보고 있을게. 누이가 깨어날 때까지.”
그 말에 두 사람은 멈칫했다.
만에 하나, 깨어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스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아냐.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어.
“그러다 안 깨어나면? 또 바보가 되면?”
주 노야는 콧방귀를 뀌며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마시지도 않고 도로 내려놓았다.
“그 천것이 감히 정씨 가문 사람을 끌어들여 막다니. 정씨 가문 사람 치고 좋은 물건이 있기나 해?”
“그러니까요. 우리 집 혼수를 가져가 놓고 교랑이 굶어 죽도록 내팽개쳐 둔 게 누군데요. 그 재산은 절대 그 사람들한테 못 넘겨요!”
주 부인은 더욱 씩씩거렸다.
“그 천것은 정씨 가문 사람이니 당연히 정씨 가문 편이겠죠. 내가 당장 가서 내쫓아야겠어요.”
주 부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서두를 것 없소.”
주 노야가 손을 들어 주 부인을 제지했다.
“지금 이 판국에 안 서두르게 생겼어요?”
주 부인은 초조한 모습이었다.
“그래 봤자 어린애들 둘인데, 겁낼 게 뭐 있어?”
주 노야는 콧방귀를 뀌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이 경성 바닥에서 제깟 것들이 감히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실컷 놀도록 내버려 두시오.”
“그래도 빨리 우리 손에 넣어야 마음이 편하죠. 정씨 가문의 그 고양이 같은 것들이 비린내라도 맡고 달려오는 날엔 일이 성가셔져요.”
“올 테면 오라지, 겁날 게 뭐 있소? 여기가 강주도 아니고.”
주 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가 놈이 오거든, 내가 통곡하며 돌아가게 만들어 주지!”
주 노야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차를 벌컥벌컥 마시다가, 뜨거운 차 때문에 손을 놓치며 차를 엎는 바람에 대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같은 시각, 강주.
대청에 앉아 시녀의 칠현금 연주를 듣고 있던 정 대노야는 재채기를 연거푸 해댔다. 그 바람에 우아하고 아름답던 칠현금 소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경성의 주가 놈이 내 얘기를 하나 보군.”
정 대노야가 손을 내젓자 시녀는 칠현금을 안고 일어나 자리에서 물러났다.
“잘하던데 왜 안 들으시려고요?”
대부인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
“좀 이상하지 않소?”
정 대노야는 다시 탁자에 기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다니 뭐가요?”
정 대부인이 차를 마시며 물었다.
“주 노야는 왜 안 돌아오지?”
차를 마시던 정 대부인은 주 노야의 말에 사레가 들렸다.
“무슨 말이에요? 보고 싶기라도 해요?”
정 대부인이 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놈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정 대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하잖소. 그 망할 놈이 왜 간 이후로 전혀 소식이 없지? 당신의 외조카도 경성으로 갔다지 않았소. 혼사에 대해 소식을 들었을 텐데, 왜 전혀 반응이 없느냔 말이오.”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한 결과 상대방은 잔뜩 위축됐다. 이상적인 결과긴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답답했다.
“반응은 무슨 반응이요? 더없는 경사죠. 그쪽에서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어요?”
“그 바보의 일은 더 말할 필요 없겠지만, 혼수는 다르잖소. 왜 소란을 피우러 달려오지 않지?”
정 대노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 있던 집사가 모자를 손으로 누르며 달려왔다.
“노야, 노야. 왔습니다, 사람이 왔어요.”
집사가 달려오며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말 왔다고? 정 대노야와 정 대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 대노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엔 주가 놈이 몇이나 왔던가?”
집사는 멈칫했다.
“주가 놈이요?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는 누굴 말하는 건데? 주씨 가문 사람이 온 게 아니었어?”
정 대노야도 멈칫하며 반문했다.
“아닙니다. 조(曹) 별가(別駕: 지방 관직. 자사의 보좌관) 대인이 오셨습니다.”
정 대노야는 옷을 갈아입고 객청으로 들어갔다. 자리에는 이미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정 대노야와 잘 아는 조 별가 대인이었다.
“아이고, 조 대인.”
정 대노야가 웃으며 예를 표했다. 지역의 유지로서 정 대노야는 어느 정도 신분과 지위가 있었기에 조 별가 역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노야께 특별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조 별가가 본론을 꺼내자 정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대인.”
“정씨 가문의 족보를 봐야겠습니다.”
조 별가가 말했다.
족보를?
정 대노야는 다소 놀랐지만 군정과 민정을 관리하는 주부 관원이 족보를 확인하는 일이 안 될 건 없었다. 다만 조금 기이할 뿐이었다.
“확인할 게 있어서요.”
조 별가 역시 자신의 요구가 다소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이노야 일가의 것을 보려고 합니다.”
조 별가가 정 대노야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자, 정 대노야는 뛸 듯이 기뻐했다.
둘째네 집안을 조사하는 거였어? 둘째의 벼슬길에 희망이 생긴 건가?
가만있자, 승진 때문이라면 족보를 볼 필요는 없을 텐데. 이력 같은 건 이미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니……. 어쨌든 세상에 정해진 건 없으니, 볼 테면 보라지.
정 대노야는 기뻐하며 족보를 꺼내와 조 별가에게 공손히 건넸다. 조 별가는 족보를 펼쳐 보는 대신 옆에 있던 사내에게 공손히 건넸다.
시종일관 말도 없고, 조 별가가 딱히 소개하지도 않은 사내였다. 조 별가보다 상석에 앉아 있는 걸 보면 시종은 아닐 터. 누구지?
정 대노야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사내를 살폈다. 하지만 조 별가는 사내를 소개하는 대신 찻잔만 골똘히 바라보았다. 찻잔 안에서 꽃이라도 피어나는 듯이.
“이노야한테 자녀가 몇 있소?”
사내가 불쑥 물었다.
“둘입니다.”
정 대노야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둘이라고?”
사내가 족보를 손으로 짚으며 되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 셋이오?”
셋이라고?
정 대노야가 어리둥절해하며 일어나 족보를 살폈다. 이노야의 이름 아래에 있는 자녀는 분명 셋이었다. 이름을 들여다보던 정 대노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부친께서는 둘째 아들에게 아이가 생기자 몹시도 기뻐하셨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일찌감치 족보에 올리셨다.
그리 서두르지 않았다면, 아이가 바보라는 걸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그 이름이 족보에 올라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아, 셋입니다. 셋이에요.”
정 대노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큰애는 몸이 안 좋아서 쭉 밖에서 키웠지요.”
몸이 어떻게 안 좋은지에 대해서는 강주 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고 해명할 심정도 아니었다. 사내 역시 더는 묻지 않고 가만히 족보만 들여다본 다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정 노야, 그럼 바쁠 텐데 일 보십시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 별가가 즉시 일어나며 말했다.
난 바쁠 것도 없는데. 정 대노야는 놀라며 조 별가를 붙잡았다.
“아, 대인…….”
하지만 조 별가는 이미 일어난 후였고, 앞장서서 나간 사내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 대노야는 하는 수 없이 둘을 배웅했다.
“조 대인, 대체 무슨 일로…….”
정 대노야는 몇 걸음 뒤에서 걷는 조 별가를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냥 확인하려는 겁니다. 이노야에 관해서요.”
조 별가는 앞서 걸어가는 사내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경성 분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정 대노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경성 사람이 일을 맡겼다는 말인즉 경성 사람이 정 이노야에 대해 알아본다는 뜻이었다. 경성 사람 중 누가 정 이노야를 떠올리고 알아보려나?
조 별가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 이노야가 사람을 보내 왔다.
“누가 찾아와 가장(家狀: 집안 조상과 형제의 행정에 관한 기록)을 조사했는데, 좀 이상하다고 하셨습니다.”
사환이 정 이노야의 말을 전했다. 정 노야의 가장은 과거를 응시할 당시 이미 제출했으므로, 호부에서 이를 열람할 수 있었다.
그 많은 가장 중에 왜 정 이노야의 가장을 확인할 생각을 했을까? 승진 외에 무슨 이유가 또 있겠는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던 정 대노야는 곧 흠칫 놀라며 생각에 잠겼다.
가장에 대한 조사는 늘 엄격했다. 얼마나 많은 학생이 가장 문제로 과거 응시 자격을 잃으며 비극을 만들어 냈던가.
“이노야의 가장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더냐?”
정 대노야가 황급히 물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대조해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사환의 대답에 정 대노야는 퍼뜩 깨달았다. 조 별가와 함께 온 사람이 확인한 게 이거였군.
“그래, 알았다.”
정 대노야는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말했다.
“내가 주부에 가서 더 알아봐야겠다. 가장 문제로 앞길을 망칠 수야 없지.”
이 갑작스러운 일로 정씨 가문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 며칠을 보냈다. 정 대노야는 인맥과 자금력을 총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딱히 알아낸 건 없었다. 그저 별일 아니라며 그냥 확인해 봤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알아보려 해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으니 정 이노야 역시 불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좋은 결과도, 나쁜 결과도 이렇다 하게 나온 게 없으니, 그 일은 없었던 일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누군가는 정씨 가문에 대해 알아봤지만, 같은 시각 누군가는 주씨 가문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춘령, 그런 걸 알아서 뭐 하려고?”
덕승루 안에서 점원 하나가 해바라기 씨를 까며 물었다.
경성에서 누군가에 대해 알아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경성은 워낙 큰 곳이니까. 경성에서 누군가에 대해 알아보는 건 아주 쉬운 일이기도 했다. 사람도 많고 떠도는 소문도 많으니까. 특히 식당이나 찻집, 유곽은 더더욱 그랬다.
“전 주 낭자와 함께 바깥을 돌아다닐 때가 많잖아요. 많이 알아 두는 게 좋죠. 오라버니, 얼른 알려 줘요.”
“너희 아씨한테 물어봐. 우리보다 훨씬 잘 알 거야.”
다른 점원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을 어떻게 아씨한테 가르쳐 달라고 하겠어요. 혼자 배워야죠.”
춘령이 진지하게 말했다.
“춘령은 기특하기도 하지.”
점원들이 웃으며 칭찬했다.
“아씨께서 제게 잘해 주시니 저도 더 잘해 드리고, 돕고 싶어요. 최소한 누를 끼치진 말아야죠.”
춘령은 고개를 숙인 채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래, 그래. 경성에서 유명한 권세가들에 대해 알려 줄게. 우선 황실과 황족부터 시작해야겠다.”
점원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하자 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오라버니들이 하나씩 알려 주세요. 열심히 기억할게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야지. 내가 원하는 걸 알아내면서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들키지 않아야 하니까.
춘령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직 어리고, 시간은 많았으니까.
이것저것 따지며 조심스레 움직이는 춘령과 달리, 왕씨 가문 사람이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은 아주 명쾌했다.
“주씨 가문에 대해서는 딱히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요. 섬주 출신에 돈 많은 귀덕낭장 가문 말씀이잖습니까.”
사내는 손에 든 돈의 무게를 가늠해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고 아범은 주저하지 않고 또 다른 돈 꾸러미 하나를 던져 주었다.
“얘기를 늘어놓자면, 얘깃거리가 많기는 하죠.”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얼른 말을 바꾸고, 돈 꾸러미를 챙겼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은 보통 집안이 아니에요.”
“보통이 아니라니? 그 정도 품계의 무관은 경성에 차고 넘칠 터인데.”
시종 하나가 물었다.
“게다가 벌써 몇 년째 승급도 못 하고, 섬주의 밑천으로 사는 처지에 뭐가 보통이 아니란 말이냐?”
“그건 예전 일이죠.”
사내는 허허 웃으며 우쭐한 표정으로 이들을 둘러봤다. 이 멍청한 타향 놈들 같으니라고. 뭐, 그래도 돈은 많으니까.
“지금의 귀덕낭장 가문은 운수가 제대로 트였어요.”
사내가 신비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자 고 아범은 미간을 찌푸렸다.
운수가 트여? 그래서 천가에 천막을 치고 꽃등을 구경하게 된 건가?
“그 집에 신선이 있거든요.”
사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자 고 아범은 흠칫 놀랐다.
잠시 후 찻집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짓말 아닙니다, 거짓말 아니라고요.”
시종들에게 제압당한 사내가 목청을 높였다.
“얼굴 때리지 마시오!”
얼굴을 때리진 않았지만, 이들은 대신 얼굴에 침을 뱉었다.
“우리가 멍청해서 네놈에게 돈을 준 줄 아느냐? 힘 안 들이고 가자는 건데, 분수를 모르고 헛소리를 늘어놔?”
고 아범은 냉소를 지었다.
“집에 신선이 있다니. 아예 일가 전체가 속세로 내려온 신선 가문이라고 하지 그랬느냐?”
“아이고,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사내가 소리쳤다.
“주 노야 댁에 신선 낭자가 있어요. 도교 이 진인의 제자인데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가졌습니다. 죽을 날짜를 받아 놓고 있던 진 상공 댁의 노태야와 동 내한을 고치고, 공주부의 절름발이 진 공자 다리도 고쳤다고요. 얼마나 신묘한지 모릅니다. 경성 사람이 다 아는 일이에요!”
고 아범 등은 흠칫 놀랐다.
뭐라고? 신의 낭자? 도교 이 진인의 제자? 게다가 그리 유명한 인사들을 고쳤다니. 진 상공, 동 내한, 공주부!
타향 사람이긴 해도 상공이나 내한, 공주 같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았다.
세상에나!
“어쩐지, 그래서 주씨 가문이 천가에 갈 수 있었군.”
고 아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한 가문만 고쳤다 해도 천가에서 꽃등을 구경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무려 세 가문의 사람을 고치다니.
주씨 가문에 신의가 있었단 말이지? 운수가 제대로 트였군.
“그렇다니까요. 속인 게 아니란 말입니다. 어서 풀어 줘요.”
고 아범은 고개를 숙여 사내를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다른 시종들에게 손을 풀라는 지시를 내리기는커녕 더욱 힘주어 누르도록 했다. 사내는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우릴 속인 게 아니다?”
고 아범은 냉소를 지었다.
“그건 경성 사람이 다 아는 소식이라며? 그래 놓고 돈을 받는단 말이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말해야지!”
제압당한 사내는 몸이 눌리며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고, 잘못 걸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네. 그건 무효입니다. 그건 공짜로 알려 드린 셈 치고, 진짜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죽기 전에 냉큼 말해!”
고 아범은 냉소를 지으며 호통을 쳤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은 승급이 문제가 아니라, 떼돈을 벌게 됐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하나 마나 한 소리!”
고 아범은 또다시 혀를 차며 호통을 쳤다.
“신의가 집에 있는데, 떼돈을 못 버는 게 이상하지!”
“아니, 그게 아니고요.”
사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신의가 딱히 떼돈을 벌어들이진 않습니다. 돈을 버는 건 다른 일이에요.”
신의인데 돈을 못 벌어들인다고? 고 아범은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의 태평거에 대해 아시지요?”
공포에 질린 사내는 고 아범과 시종들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태평거는 다들 알고 있었다. 경성으로 와 보니, 객잔에 묵을 돈도 없이 지내던 왕십칠은 이들을 보자 물 만난 고기처럼 굴었다. 이들이 기루에 드나드는 일을 막자, 왕십칠은 경성에서 이름난 주점과 식당을 찾아다녔다. 태평거는 그중 하나였고, 경성에서 유명한 태평 두부도 자연스레 맛을 보게 됐다.
태평 두부가 떠오르자 고 아범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훌륭했지, 훌륭했어.
두부가 상하지 않게 제대로 보관해 먼 거리를 이동할 방법만 있다면, 분명 노야와 부인께도 맛을 보여 드렸을 것이다.
“신선거도 아시지요?”
사내가 이어 물었다.
알다마다. 과로신선을 파는 곳이잖아. 겨울에 먹으니 별미더군. 그건 가져갈 수 있겠어. 거리에 낙득자재를 파는 점포가 많은데, 듣자니 과로신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집에 가서도 해 먹을 수 있겠지.
“또…….”
이어 질문하려던 사내는 고 아범의 발길질에 처참한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시답잖은 소리 집어치우고 똑바로 말해라.”
고 아범은 매섭게 호통을 쳤다.
“그 두 점포가 주씨 가문 겁니다.”
사내가 소리쳤다.
뭐라고? 주씨 가문의 것이라고?
“주 노야.”
문을 열자 그 안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주 노야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주저하던 정사낭은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 관리인과 시녀를 보며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여긴 제 누이의 점포입니다. 이곳 장부를 노야께서 보시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정사낭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 유약한 꼴 좀 보게나. 정씨 성을 가진 것들은 죄다 거기서 거기야.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군.
찻잔을 손에 든 주 노야는 거참 성가시다는 투로 정사낭을 힐끔 쳐다보았다.
용기를 내어 내뱉은 말에 아무 반응이 없자, 정사낭은 더욱 불안해졌다. 주 노야는 자리에 앉는 정사낭을 보며 차를 후후 불었다.
“경성엔 언제 왔느냐?”
주 노야의 물음에 정사낭은 멈칫했다.
“석 달 전인데…….”
정사낭이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이 점포들을 언제 열었는지는 아느냐?”
주 노야가 또 물었다.
언제 열었냐고? 시녀가 말해 주긴 했는데, 가만있자, 언제였더라?
정사낭이 멈칫하며 저도 모르게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는 정사낭의 난처한 처지를 모르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런 때에 아랫것이 나서서 입을 여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입을 연다면 윗전의 재산을 가로채려 하는 못된 노비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주 노야는 서두르지 않고 찻잔을 든 채 천천히 차를 마셨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정사낭이 마침내 기억해냈다.
“태평거는 새해 전에 열었고, 신선거는 새해에 열었습니다. 이춘당도 새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었고요.”
정사낭이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최소 다섯 달은 되었지.”
주 노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정사낭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누이는 그 짧은 시간에 점포를 세 개나 열었는데, 까맣게 모르고 있었구나. 보살핌이 필요한 바보인 줄 알고 있었으니…….
찻잔을 쾅 내려놓는 소리에 정사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 노야는 찻잔을 무겁게 내려놓았다. 얼굴에 있던 여유와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최소 다섯 달은 운영한 점포들인데, 경성에 온 지 불과 석 달밖에 안 된 네가 뭘 알아? 이 점포들을 혼자서 열었겠느냐?”
주 노야는 호통을 쳤다.
“무지한 네놈과 악랄한 아랫것이 짜고 무슨 짓을 꾸미려고? 냉큼 장부부터 내놓지 못하겠느냐! 또다시 내 앞에서 허튼소리를 했다간, 네놈들을 관부로 데려가겠다!”
정사낭은 놀라 가슴이 마구 쿵쾅댔다. 귀가 웅웅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그렇지. 이 점포들을 정말 누이 혼자 힘으로 열 수 있었을까? 경성이잖아, 여긴 무려 경성이라고. 주 노야의 일가가 있던 곳 아닌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터.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줘야 하나? 누이의 점포를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주씨 가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누이한테 불똥이 튀면…….
“너희 정씨 일가는 참으로 속이 시꺼멓구나. 우리 가문의 혼수를 가져가 놓고, 우리 교교를 내팽개친 채 돌보지도 않았어. 그래 놓고 이제 교교가 앓아눕자 병을 고칠 생각은커녕 재산을 가로채러 달려오다니.”
주 노야는 냉소를 지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사낭이 고개를 들었다.
“누이의 재산을 빼앗을 생각 없습니다. 저, 저는 점포를 잘 지킬 겁니다. 누이의 심혈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은 없게 해야죠.”
정사낭의 얼굴은 진지했고 눈빛은 결연했다.
“누이를 대신해 지킬 겁니다. 누이의 돈은 한 푼도 안 건드려요. 나중에 누이가 깨어나면 돌려줄 겁니다. 누이가 깨어나기 전까진, 그, 그 누구도 못 가져갑니다.”
이런 망할 놈을 보았나! 말을 못 알아먹는군!
주 노야는 열이 받아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만에 하나 못 깨어나면?”
만에 하나 못 깨어나면? 모두가 마음속으로 한 번쯤은 해 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아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주 노야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정 사낭과 시녀, 오 관리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정말, 못 깨어나면?
“부인,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여종이 나지막이 고했다.
저녁 무렵이 가까워진 시간이었고, 정교랑의 침실도 차츰 어두워졌다. 침상 위의 여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덮쳤다.
그나마 숨이라도 쉬고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꼭……. 아무튼 이 상태로는 얼마 못 버틸 것 같은데.
진(秦) 부인은 한숨을 쉬며, 입술을 달싹이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어 한쪽 옆에서 향을 피우는 반근의 모습도 바라보았다.
진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앞으로 가더니 물잔을 들고 한 손으로 여인을 부축하며 물을 먹여 주려고 했다.
여종이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부인.”
침상에 누운 병자는 아무리 정성껏 간호해도 더럽고 지저분하기 마련인데…….
부인께서 직접 먹여 주시다니! 반근도 깜짝 놀라 향로 뚜껑을 떨어뜨렸다.
“부인, 제가 할게요.”
반근이 얼른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내가 부축할 테니 네가 물을 먹여 보렴.”
진 부인은 손을 풀지 않은 채로 물잔만 내려놓았다.
“부인께 이런 일을 시킬 순 없어요.”
반근이 목멘 목소리로 머리를 조아렸다. 진 부인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정교랑을 반근의 품에 맡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시녀는 밖으로 나오던 진 부인과 마주쳤다. 진 부인을 본 시녀는 큰절을 올렸다.
“어려운 일 있으면, 잊지 말고 말하거라.”
진 부인이 피곤하고 초췌해 보이는 시녀를 보며 말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고, 어려운 일은 말할 수 없으니…….
“부인의 은혜에 감사드려요.”
시녀가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했다.
대문 앞에 선 시녀는 진 부인의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오전에 진 노태야께서 다녀가셨어.”
안으로 들어오자 반근이 오늘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단랑 아씨와 십팔랑 아씨도 오셨고. 아씨의 새 옷을 가져오셔서 내가 이렇게 갈아입혀 드렸어. 참, 이 태의도 다녀가셨구나. 진맥을 해 보더니 몸이 허약하다며 밥을 더 먹이라고 하셨어.”
시녀는 반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인 다음, 침상 위의 정교랑을 보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언니, 밖에서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었어?”
반근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물어보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아, 아니. 사공자께서 계시니 명분이 서잖아. 문제없을 거야.”
반근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언니랑 공자님께서 고생이 많네.”
시녀는 잠자코 웃기만 했다. 며칠 전에 비하면 훨씬 억지스러워진 웃음이었다.
고생스럽긴 하지. 주 노야를 상대하는 건 여간 초조하고 힘 빠지는 일이 아니었다.
아씨는 힘든 일들을 하나하나 헤쳐나가면서도, 어쩜 그렇게 태연해 보이셨는지. 마음이 없으면,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마음이 없지?
반근과 시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시녀가 대문 앞에 선 여종과 몸종 네다섯 명을 보며 물었다. 시녀는 이들이 누군지 알았다. 전부 주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낭자, 우린 아씨의 시중을 들러 왔어.”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종이 말했다. 그러더니 시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뒤에 있는 이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들어가서 집부터 정리해라. 깨끗이 치워야 한다. 서둘러라.”
“여긴 우리 집이에요. 누가 들어오래요?”
시녀가 허리를 손에 대고 소리쳤다. 시녀의 모습을 본 금가아도 빗장을 들고 앞으로 나서며 이들을 막았다.
“우리 집?”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종은 실소를 금치 못하며 같잖다는 눈빛으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넌 정씨 가문 사람이지. 지금 아씨는 우리 주씨 가문 사람이니, 우리 주씨 가문 사람들이 살펴야 해. 쪼그만 게, 냉큼 꺼져.”
이들이 막아설 것은 집에 있는 주 부인도 예상한 터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종이 다른 여종들을 보며 말했다.
“정씨 가문 몸종은 우리가 단속할 필요도 없고, 단속할 수도 없다. 여봐라, 냉큼 이 계집을 정씨 가문으로 돌려보내라. 저들보고 단속하라고 해!”
거칠고 우악스러운 여종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들었다. 금가아는 빗장을 높이 쳐들었지만, 이 건장한 여종들 앞에선 힘없고 왜소한 사마귀와 다름없어 보였다.
“난 정씨 가문 몸종이 아니에요.”
대문 앞에 선 시녀 역시 이들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달려들 태세를 취하던 여종들이 멈칫했다.
정씨 가문 몸종이 아니라고?
“난 장씨 가문 몸종이에요.”
시녀는 턱을 살짝 쳐들고 도도하고 오만한 태도로 이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서 그 댁 노야한테 전해요. 나는 장순 대인 댁의 몸종이라고. 장 노태야께서 교랑 아씨께 친히 보낸 몸종이죠. 날 돌려보내려거든, 우선 장씨 가문에 가서 물어보라고 하세요. 나한테 잘못이 있고 죄가 있다면, 기꺼이 벌을 받을 테니까.”
장순? 장순이 누구지?
여종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장순?”
주 노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하며 놀라 소리쳤다.
“네, 자기는 장순 대인 댁의 사람이랍니다. 장 노태야께서 교랑 아씨께 친히 보내셨대요.”
여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장순이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시녀의 태도가 워낙 당당한 데다 그동안 정교랑에게 일어난 기이한 일들이 많다 보니 지레 겁을 먹고 일단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일개 몸종한테 놀라 일 처리 하나 제대로 못 했다며 주 노야 내외에게 꾸중을 듣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장씨 가문?”
주 부인도 안색이 창백해진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뇌었다.
“장순? 그 장순이요?”
“당신도 바보가 됐소? 그럼 누구겠어? 장순, 장강주지!”
주 노야가 소리쳤다. 여종들은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장강주였구나!
장순은 경성에서 유명 인사였지만 다들 습관적으로 강주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불러 왔다. 그러다 보니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바로 돌아온 게 다행이었네!
퍼뜩 깨달은 주 부인 역시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오만하고 도도한 계집이 장강주 집안의 사람이었단 말이야?
“그것도 장 노태야께서 친히 보내셨다니…….”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래서였군. 탈영병 사건 때 장강주 선생이 나선 게 그래서였어. 그 애였구나. 역시 그 애였어.”
그 애는 대체 남모르는 비밀을 얼마나 많이 숨기고 있는 거지? 앞으로는 또 얼마나 사람을 놀라게 할 작정이야?
“그럼 어떡하죠? 정말 이대로 정씨 집안에 고스란히 넘겨야 해요?”
주씨 집안 대청은 등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다. 주 부인은 대청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는 주 노야의 모습을 초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애는 못 깨어나요. 여러 의원이 말했잖아요. 길어야 서너 달이면 잘 버티는 거라고. 노야, 정씨 가문 넷째는 별 볼 일 없을지 몰라도, 정씨 가문 사람들이 다 달려오면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잖아요.”
주 노야는 부들부들 떨었다.
“정씨 집안한테 넘겨? 어림도 없지!”
주 노야는 콧방귀를 뀌며 걸음을 멈추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많은 재산을 떠올리며 주 노야는 이를 악물었다.
“강주 선생이라 해도 우리 집안일엔 관여하지 못하지! 그 계집이 장씨 가문 노비였다면 더더욱 겁낼 게 없어! 장씨 가문에서 노비를 사주해 남의 집 재산을 가로채려고?”
“그래요. 이건 우리 집안의 일이에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어떻게 개입해요?”
주 부인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그 바보만 잘 지키면 돼요. 누가 우리더러 뭐라고 하겠어요?”
암, 그렇고말고.
이들은 뻔뻔한 정씨 가문과 달랐다. 정교랑을 잘 보살피지 않았는가. 병이 나면 정성껏 간호하고, 죽으면 장례를 후히 치러줄 것이다. 결코 박대하는 일은 없어! 양심에 대고 떳떳하다고! 광명정대하단 말이다!
주 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그 누가 나오더라도 겁낼 것 없다.
주 노야는 엄연히 정교랑의 외숙이었다. 다른 사람은, 그게 설령 황제라 해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개입할 수 없다.
주 노야가 재산을 인수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인수는 관두고 개입만 해도 남의 재산을 강탈하려 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의를 보여야겠네요. 아랫것들을 보내 간호하게 할 게 아니라, 교교를 이리로 데려와야겠어요. 내가 직접 간호할게요!”
병에 걸린 외조카를 간호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막아?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만 잘 보살피면, 우리더러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거요.”
주 부인도 웃음을 지었다.
“내가 내일 직접 가서 데려올게요.”
어둠이 자욱하게 내리자, 아직 등불도 켜지 않은 마당은 컴컴하기만 했다.
“반근 누나, 이젠 다시 안 올 것 같아.”
금가아는 빗장을 높이 든 채로 몸이 굳은 듯했다.
“역시 누나는 대단해.”
금가아가 신이 나서 말하자 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대단한 게 아니야. 내가 빌린 힘이 대단한 거지.”
“누가 대단하든 일이 해결됐으니 됐지, 뭐.”
금가아의 말에 시녀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힘이 아니라 남의 힘을 빌린 거잖아. 그건 오래 갈 수 없어.”
시녀는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보며 말을 이었다.
“더구나 이 일은 어디까지나 집안일이야. 남은 간섭할 수 없지.”
금가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럼 어쩌지?”
시녀는 고개를 돌려 실내를 쳐다봤다. 반근이 벌써 등불을 켠 터라 실내의 불빛은 따뜻하고 환해 보였다.
“모르겠어.”
시녀는 중얼거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참아왔던 눈물이 결국 터져 나왔다.
“모르겠어.”
아씨, 말씀해 주세요.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아씨, 아씨께서 안 계시니 소인은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요.
밤바람이 불어오자 회랑 아래에 걸어 둔 점풍탁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금가아, 가서 쉬어. 최소한 오늘 밤은 별일 없을 거야.”
시녀는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우리, 하루하루 어떻게든 버텨 보자.”
빗장을 들고 멍하니 섰던 금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또다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의 표정이 확 변했다.
“와, 진짜 뻔뻔한 인간들이네. 이젠 나도 이판사판이야!”
시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금가아, 문 열어!”
금가아가 문을 열자, 대문 앞에 걸어 둔 등롱이 밤바람에 흔들거렸다. 대문 앞에는 여러 명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딱 한 사람만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문 앞에 서 있던 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안으로 들어왔다.
“패 버려.”
시녀가 소리치자 금가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빗장을 들고 달려들었다. 누군가가 손을 들어 빗장을 잡는 동시에 금가아에게 무거운 주먹을 날렸다.
그때 누군가가 ‘어허’ 하는 소리를 냈다. 금가아를 향해 날아가던 매서운 주먹은 금가아의 얼굴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금가아는 주먹이 일으킨 바람에 눈도 제대로 못 뜰 지경이었다. 이 주먹이 그대로 얼굴을 강타했다면 시퍼런 멍이 들었으리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사내가 두봉을 걸친 채 시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뻗어 두모를 걷자 얼굴이 드러났다.
그 사람이네! 시녀는 놀란 표정이었다.
탈영병 사건 이후로 다시는 안 나타났던 소년이었다. 놀라 도망쳐서 다신 안 나타날 줄 알았는데, 또 나타났다. 그것도 담벼락이 아니라 대문을 통해 걸어 들어왔다. 게다가 이 늦은 시각에…….
“여긴, 왜 왔어요?”
시녀가 멈칫하며 물었다.
“낭자를 보러 왔다.”
진안 군왕은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쉿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넌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해. 너랑 긴말할 시간 없다. 비켜서라.”
시녀의 옆을 지나친 진안 군왕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난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자기는 시간이 없다고? 정신을 차린 시녀가 홱 뒤돌아섰다.
저 인간이! 시녀가 얼른 뒤따라 들어갔다.
진안 군왕은 벌써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 여인의 대청에 들어선 것은 처음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안타깝게도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아씨는 이쪽에 계세요.”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바깥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는 반근의 귀에도 들렸다. 하지만 반근은 시종일관 조용히 침상 곁을 지키고 있었다. 몸의 자세를 바꿔 주고, 물을 먹이고, 조잘조잘 말을 걸며 늘 하던 일을 반복했다.
소년이 들어오자 반근은 일어나 예를 표했다.
“공자님, 앉으세요. 차를 우려 올게요.”
반근은 정교랑에게 병이 나기 전과 똑같이 행동했다.
“됐다.”
진안 군왕이 두봉도 벗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난 금방 갈 거야.”
반근이 고개를 숙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금방 가야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래도 낭자를 보러 왔으니, 충분하지.
“정교랑.”
진안 군왕은 걸음을 몇 걸음 옮기더니 이름을 불렀다. 침상 위의 여인은 속옷 차림이었고, 머리를 푼 채 조용히 잠든 듯했다.
“아씨는 못 들으세요.”
시녀가 말했다.
“들을 수 있다.”
진안 군왕은 옷을 털고 자리에 앉으며 다시 불렀다.
“정교랑, 내가 왔습니다.”
침상 위의 여인이 입술을 움직였다.
“봐라, 듣고 있잖아!”
소년은 기뻐하며 몸을 살짝 기울였다.
“아니에요. 아씨는 계속 이렇게 혼잣말을 하세요. 공자님의 질문에 대답한 게 아니에요.”
“정교랑, 정교랑.”
진안 군왕은 반근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하여간 말이 안 통하는 인사라니까. 시녀는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뭐라고요? 잘 못 들었어요.”
뒤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시녀는 고개를 돌렸다. 진안 군왕은 몸을 더 기울였다. 아씨가 뭐라고 말하나 들으려는 듯 아씨의 얼굴로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너무 가깝잖아.
촛불에 비친 소년의 옆얼굴은 준수해 보였다. 두봉을 걸치고 있어 훨씬 크고 건장해 보이는 그림자가 정교랑의 몸을 덮쳤다.
좀 무례하네. 엄연히 남녀가 유별한 법인데.
시녀가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크게 말해 봐요. 잘 안 들려요.”
소년의 맑은 목소리에 시녀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씨께선 ‘난 누구지’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반근이 옆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안 군왕이 반근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걸 물었단 말이냐?”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은 다시 몸을 기울여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워낙 조용하다 보니 여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난 누구지……. 난 누구지…….
역시 이거였어.
“이름이 뭐예요?”
“모르겠어요.”
진안 군왕은 자세를 바로 앉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난 압니다.”
안다고? 뭘 알아?
시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또 그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늘어놓으려는 건가?
“난 당신이 누군지 안다고요.”
진안 군왕은 웃으며 다시 몸을 숙였다.
“당신은, 정방(程昉)이에요.”
뭐라고?
시녀와 반근 모두 멈칫했다.
정방, 그게 뭐지?
침상 위에 있는 여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난 누구지…….
“당신은 정방입니다.”
“공자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시녀가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지금 뭐 구경하러 온 거야?
시녀는 잽싸게 달려와 똑바로 선 채 침상 위에 누운 여인을 내려다봤다. 이미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은 진안 군왕은 손을 들어 여인의 얼굴로 쏟아지는 불빛을 막아 주었다.
따스한 등불 아래 여인이 눈을 떴다.
눈을 떴다……. 눈을 떴다고!
시녀는 비명이 터져 나오자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녀의 비명 소리에 침상 쪽을 쳐다보던 반근도 순간 놀라 소리를 질렀다.
진안 군왕은 눈을 뜬 여인을 보며 활짝 웃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외쳤다.
정방!
난 정방이야!
여인은 눈을 굴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등불 아래의 두 눈은 별처럼 총총히 빛났다.
나는, 정방이다!
-나는-
하늘이 훤히 밝았을 무렵, 주 노야의 마차가 신선거 앞에 멈춰 섰다.
아직 영업시간이 되지 않아 신선거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주 노야의 시종들은 사나운 기세로 문을 두드려 기어코 신선거의 문을 열어 버렸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너도 좋은 뜻에서 이러는 거겠지. 좋은 뜻에서 이러는 거라면, 뜻대로 하게 해 주는 게 맞아.”
주 노야가 담담하게 말했다.
식당일 때문에 지난 며칠을 하루도 마음 편히 보내지 못한 정사낭은 놀란 얼굴로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식당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우리도 매한가지니까, 서로서로 도우면서 지내자꾸나. 가게 장사가 이렇게 잘 되는데, 우리끼리 이럴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네가 관리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으니, 네가 관리하거라.”
하루아침에 바뀐 주 노야의 태도를 보자, 정사낭의 기분은 갑작스러운 폭풍우가 지나가고 화창하게 갠 날씨와 같아졌다. 돌변한 주 노야의 모습이 당황스러웠지만, 정사낭은 딱 한 가지만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이의 것들이 남에게 넘어가서는 안 돼.
말주변이 없는 정사낭은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기만 했다.
“네가 아직 잘 모르기도 하고 해야 할 공부도 있으니, 노련하고 경험 많은 사람 하나를 옆에 두는 게 좋겠지.”
주 노야가 뒤에 있는 노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우리 집 장부를 담당하는 이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정사낭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주 노야와 끝까지 맞서 소란을 피운다 한들, 딱히 좋을 게 없겠지. 이렇게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아.
어린 서생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보고 주 노야는 내심 우쭐해졌다.
장강주 선생이 있다고 해도 딱히 무서울 건 없지. 어찌 됐든 이건 남의 집안일이니까. 우리 주씨 가문의 일이란 말이다. 남의 집 재산의 귀속 문제에 장강주 선생이 무턱대고 나설 리는 없지 않은가. 남의 집 재산을 빼돌리려고 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장강주 선생 같은 대유학자에게는 체면이 곧 생명이지. 물론 때로는 어떤 일 앞에서 인정사정없을 때도 간혹 있긴 하지만.
고작 서생 하나에 시종 몇 명이 이 많은 재산을 관리하겠다고? 너무 쉽게들 생각했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반년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시간이 더 길어지면?
둘 다 정씨 핏줄이긴 하다만, 이런 일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같은 시각, 옥대교 저택 앞.
열댓 명의 여종과 건장한 시종들이 주 부인과 함께 우르르 마차에서 내렸다. 지난번 방문 이후로 벌써 열흘이 지난 때였다.
“그 시녀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야. 그 아이 때문에 일을 망쳐서 또 망신을 당할까 봐 너희 모두를 데려온 것이다.”
집사 부인이 주위에 있는 여종들에게 신신당부하며 각자 해야 할 것들을 지시했다.
“너희들은 가서 문을 두드려라. 너희는 문 앞에 있는 사환을 잘 붙들고 있고. 그리고 너희는 시녀를 제압해 버려. 꼼짝도 못 하게. 너희는 곧장 들어가서 낭자를 들것에 옮기고…….”
이미 한 차례 내렸던 지시지만, 집사 부인은 몹시 중요한 일이라는 듯 여종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저 안에 있는 시종 둘과 사환을 다 합쳐도 여기 있는 여종 하나 몸집만 못하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여종 중 하나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긴 뭘 웃어! 고작 세 사람만 있다고 방심하면 안 돼, 조심해야 한다고. 저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말거라.”
집사 부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교 이 진인이 직접 사사한 제자이자 염라대왕과 술잔을 함께 들 수 있는 자가 아니던가. 그나마 저 낭자가 앓아누워 오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저 낭자가 깨어있을 때 성질을 긁었다면 말 한마디에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여종들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 부인은 마차에서 내려 옥대교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어서 가 봐. 꼭 빨리빨리 움직이고!”
마지막 당부를 마친 집사 부인이 짧게 손뼉을 쳤다. 여종 네 명이 대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문 열…….”
여종의 손이 문에 닿자마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몸에 잔뜩 힘을 실어서 거의 문을 밀다시피 했던 여종들은 한꺼번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집 큰 여종들이 서로를 깔아뭉개게 되자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뒤에서 그 광경을 본 다른 여종들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대문 앞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지나가던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소리는 왜 질러!”
주 부인이 화를 내면서 호통쳤다.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왜 너희들끼리 난리야!
여종들은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고, 넘어졌던 여종들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회랑 아래에 서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대문 쪽을 쳐다보는 금가아를 그제야 발견했다. 사환을 제압하기로 했던 여종들은 우왕좌왕했다.
집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순순히 문까지 열어줬는데, 제압을 해, 말아?
“비켜라.”
주 부인이 소리치자 여종들이 길을 터주었다. 주 부인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회랑 아래에 있던 금가아가 손을 올렸다.
금가아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여종들은 바짝 긴장하며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하지만 금가아는 별생각이 없는 듯 손을 들어 코를 비비기만 하고는 다른 쪽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맨 앞줄의 여종들은 금가아의 행동에 당황하여 급작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 뒤에 있던 여종들이 앞줄의 여종들과 서로 부딪히면서 또 한 번 작은 소란이 일었다.
“부인, 오셨어요?”
시녀가 대청 밖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주 부인은 짧게 응, 대꾸하고 시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장씨 가문의 시녀였고만! 어쩐지 건방지게 날뛴다 했어!
예전에 건방졌던 건 그러려니 하겠지만, 지금은 윗전이 아파서 누워 있는데도 저리 건방진 건 윗전을 위하는 게 아니라 업신여기는 거야!
주 부인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시녀의 인사를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낮추어 길을 비켰다.
길을 비켜주다니? 시녀를 제압하기로 했던 여종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예상했던 상황과 어쩜 이렇게 다르지?
“어서 이리 들어와 짐을 챙기거라. 교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주 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부인, 저희 아씨를 집으로 데려가시려고요?”
시녀가 물었다.
“왜? 그러면 안 돼?”
주 부인이 시녀를 보면서 언짢은 듯이 물었다.
“아니요, 그건 아랫것이 말할 바가 아니지요.”
시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소매를 접으며 방 안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던 여종들은 다시 한번 주춤했다.
알면 됐어. 주 부인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시녀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저희 아씨께 직접 여쭤보시는 건 어떠세요?”
시녀의 물음에 주 부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내가 가서 물어보마.”
주 부인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혹여라도 악취가 날까 봐 손을 들어 코를 막을 태세를 취했다.
보통 이렇게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한테는 역한 냄새가…….
여종들이 재빨리 휘장을 양쪽으로 치우자, 주 부인이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교교, 오늘 몸은 좀 어때?”
주 부인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외숙모랑 집에 가서 요양하자꾸나. 밖에 혼자 있으면 불편하잖니.”
주 부인은 말을 마치고는 혼자 피식 웃었다.
“외숙모께서 저를 내치지 않아 감사해요.”
주 부인은 혼잣말로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내 목소리가 원래 이랬나?
“외숙모께서 저를 내치지 않아 감사해요.”
주 부인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래, 이 목소리가 내 목소리지. 그럼 아까 그 목소리는…….
“그럼요. 외숙모께서 저를 내치지 않아 감사하지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일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주 부인은 딱딱하게 굳어 버린 고개를 들어 침상을 쳐다보았다.
침상도 그대로고, 침상 위에 있던 사람도 그대로였다.
검은색 비단 겉옷은 바닥에 끌린 채로 있고, 묶지 않고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폭포수처럼 옷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지탱하고, 다른 한 손은 편안하게 몸 위에 놓은 채 옆으로 누운 여인이 침상 위에서 주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어. 나를 보고 있다고!
주 부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문 앞에 잔뜩 몰려 있던 여종들과 마구 부딪히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남의 집이라 익숙하지 않았는지, 주 부인은 문틀에 이마를 찧고는 발을 헛디디며 자신의 치마를 밟아 층계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눈앞이 새까매지나 싶더니 주 부인은 이내 의식을 잃었다. 여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 부인에게로 달려갔다. 여종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이 조그마한 마당을 순식간에 꽉 채웠다.
회랑 아래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금가아와 시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씨께서 뭘 하신 거지?”
금가아가 놀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셨어. 말 한마디만 하셨을 뿐이야.”
시녀도 똑같이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말 한마디라니. 고작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주 부인 스스로 자지러지게 놀라 기절까지 하다니.
시녀는 웃음을 터트렸고, 그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손을 들어 입을 가렸지만, 웃느라 눈물까지 나왔다.
아씨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돼. 계시기만 하면, 잘 계시기만 하면 충분해.
“이리 와, 금가아. 너도 말 한마디 하러 가.”
시녀가 웃으면서 금가아에게 손짓했다.
“아씨께서 하신 말만큼 엄청난 거야?”
금가아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묻자 시녀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가아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금가아는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알겠다고 한 뒤, 우왕좌왕하는 주씨 여종들 사이를 잽싸게 뚫고 지나갔다. 금가아는 정교랑이 쓰러진 뒤 단 한순간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빗장까지 내팽개치고 문도 잠그지 않은 채 후다닥 뛰쳐나갔다.
이젠 괜찮아, 두려워할 거 없어, 아씨께서 계시니까, 아무것도 무서워할 게 없어.
금가아가 신선거에 도착할 즈음, 주 노야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장부는 예전처럼 너희가 관리하거라. 이 노복은 관리인 밑에서 거들기만 할 테니.”
주 노야가 천천히 말했다.
거들기만 하는 거라면, 더욱이 괜찮지.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들기만 한다니까, 순진하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뭐든 한 걸음씩 단계적으로 가는 것이거늘. 명분도 없는 노비 주제에, 명분이 있다 한들 얼간이 서생 주제에 감히 내 것을 뺏으려고 들어? 퉤!
주 노야가 웃음을 머금은 입가에 다시 찻잔을 가져갔다.
“공자님!”
문이 열리는 동시에 금가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께서 깨어나셨어요!”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멈칫하여 싱글벙글한 얼굴로 막 뛰어 들어온 금가아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씨께서, 깨어나셨어요. 아씨께서! 깨어나셨다고요!
실내는 일순간 공기까지 멈춰버린 듯 고요했고, 곧이어 쾅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사낭이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금가아를 밀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쾅 소리는 정사낭이 허둥지둥 나가느라 문에 몸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오 관리인도 재빨리 일어나려고 했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단번에 일어서지를 못했다. 그는 간신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뛰어갔다.
정사낭에게 밀쳐졌던 금가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안을 둘러보자, 신선거에는 주 노야와 주씨 집안의 노복만이 남아 있었다.
“저희 아씨께서 깨어나셨어요!”
금가아는 주 노야를 빤히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주 노야의 찻잔은 아직 입가에 멈추어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던 주 노야는 금가아의 외침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갑자기 헛것이 보이듯 주 노야의 눈앞으로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에 화살이 꽂혀 눈도 못 감고 죽은 무뢰배, 풍질에 걸려 입이 삐뚤어지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유 교리,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던 조정의 대신들.
주 노야는 자신이 그 사람들이 된 듯한 느낌에 숨도 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주 노야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노야, 노야!”
이상함을 눈치챈 노복은 황급히 손을 뻗어 주 노야를 부축했다.
주 노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장 기침을 하고 싶었지만, 기침이 나오지 않자 주 노야는 양손으로 목을 잡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서 사람을 불러라! 음식이 목에 걸렸다!”
노복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주 노야의 등을 필사적으로 마구 쳤다.
“아이고, 세상에. 마시던 차가 목에 걸리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금가아는 숨이 막혀 죽을 듯한 모습의 주 노야를 보면서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말 한마디면 사람을 자지러지게 놀릴 수 있다니까.
금가아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윗전만큼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陳)씨 가문.
여종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진십팔랑이 평소와 다르게 양손으로 치마를 들고 진 노태야의 대청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 낭자가 깨어났대요!”
진 노태야는 몹시 기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로 깨어났다더냐?”
진십팔랑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 이 태의를 모시고 먼저 가셨어요. 할아버지, 저도 단랑과 함께 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걸어 나오던 진 노태야가 멈추어 섰다.
“아니다, 너희들끼리 가 보거라.”
정 낭자가 다 나았다면, 굳이 가볼 필요는 없지. 진 노태야는 걸음을 서두르는 진십팔랑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깨어났으면 된 거야, 깨어났으면 됐어.
옥대교 저택 앞.
주씨 가문 사람들은 일찌감치 떠나가고 없었다. 하지만 저택 대문 앞은 다른 집안의 마차와 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거리의 행인들이 옥대교 저택 앞을 보며 호기심 담긴 얼굴로 한 마디씩 던졌다.
“오늘은 찾아오는 손님이 많네.”
“집안에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봐.”
대문 밖은 붐벼 보이지만, 대문 너머의 저택 안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숨을 죽인 채 주인 자리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주인 자리지만, 지금은 여느 때처럼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새까만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폭이 넓은 소매의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은 전과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전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팔걸이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고 이 태의가 맥을 짚을 수 있도록 한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검은 비단옷의 넓은 소매가 손목 언저리에서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구어졌다.
딱히 특별한 점도 없어 보이고, 누구나 다 해낼 수 있는 동작과 자태였다. 하지만 안에 앉은 사람들의 눈에는 잠시 착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이 더없이 우아하고 기품 있게 보였고, 구름과 같이 가벼운 동시에 자유로워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참지 못한 정사낭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집안 가득 앉아 있는 낯선 여인들 때문에 정사낭은 놀라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지만, 바보인 누이가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점포 세 곳의 주인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았을 때 워낙 놀랐던 터라 이번에는 표정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었다.
오 관리인과 진 상공 가문 사람들 모두가 불안한 기색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손을 거둔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이 태의가 갑자기 정교랑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정말 깨어난 거요? 괜찮소?”
이 태의가 정교랑에게 묻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태의께서는 병을 진단할 줄은 모르고, 불치병인지 아닌지만 판별하실 수 있는 거예요?”
진십팔랑의 말에 이 태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소 부인이 나무라는 듯 진십팔랑을 흘겨보았다.
“교랑.”
진소 부인이 걱정 가득한 말투로 정교랑을 불렀다.
“정말 다 나은 거예요? 왜 앉아 있죠? 그냥 누워 있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진소 부인이 옥대교 저택에 들어섰을 때부터 정교랑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 보였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헷갈렸다. 원래 이 모습이지 않았나? 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일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것만 같았다.
정교랑이 눈을 떴다. 그러자 아무 표정 없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아니, 원래 이 모습이 아니었어.
진소 부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속으로 외쳤다.
저 눈! 눈이 달라졌어!
여인의 두 눈은 크고 생기가 돌았다. 흰자위가 더 많이 보여 사백안처럼 보이던 동공이 지금은 밤하늘처럼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눈빛은 보석같이 빛났다.
그녀의 시선이 방 안의 사람들을 훑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을 참았다.
“정말 깨어났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사낭과 오 관리인, 진 상공 가문의 여인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도 대청 안은 비어 있지 않았다. 좀 전처럼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고, 딱 한 사람만이 정교랑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대청 안에서는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선생이 머리를 흔들면서 심취한 모습으로 책을 읊기 시작했죠. ‘옛날에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대학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니…….’
선생이 정말 책을 읊기 시작하는 걸 보고는, 염라대왕이 요괴를 시켜서 선생을 자신의 앞으로 잡아 오라고 명했어요. 그러고는 말했죠. ‘네가 그렇게 책을 좋아한다고 하니, 내 친히 너를 돼지로 만들어주마.’ 선생은 알겠다면서 염라대왕에게 청을 하나 올렸어요. ‘돼지가 되라고 하신다면, 돼지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남쪽에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 청을 기이하게 여긴 염라대왕은 선생에게 이유를 물었지요.
그랬더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쪽의 돼지가 북쪽의 돼지보다 세다고…….’”
진(秦)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청 안에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녀는 배를 잡으며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음을 터트렸다.
진 부인은 웃지 않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안 웃겨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웃겨요.”
진 부인이 토라진 표정을 하고는 한탄했다.
“왜 안 웃기지?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데. 일부러 강주 말씨까지 써가면서 이야기했거늘, 왜 웃지를 않는담?”
진 부인은 아직도 웃음을 멈추지 못한 시녀를 보며 말했다.
“저 애 좀 봐요. 저게 정상이지, 낭자는 정상이 아니야.”
정교랑이 진 부인을 보며 빙긋 미소 짓자 진 부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웃음은 재미없어요. 낭자는 이만 푹 쉬어요. 나는 돌아가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봐야겠네. 내 낭자를 기필코 웃기고 말 거예요.”
진 부인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도 진 부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제지했다.
“나오지 않아도 돼요. 깨어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오래 누워 있었으니 몸이 아직 허할 거예요. 그 몸으로 또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몸 관리를 잘해야 해요. 내가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서 다시 올게요. 낭자가 또 쓰러지면, 내가 아무리 낭자를 웃기고 싶어도 못 웃기잖아.”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진 부인을 목례로 배웅했다. 정교랑 뒤에 있던 시녀와 반근은 바닥에 엎드려 진 부인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진 부인이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랑 아래에 꿇어 앉아 있던 여종들은 서둘러 진 부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진 부인이 막 마당을 나서는데 진십삼의 말이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진십삼은 말이 제대로 서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려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 진 부인을 본 진십삼이 우뚝 멈춰 섰다.
“어머니.”
“조심 좀 해. 뭘 그리 서둘러.”
진 부인이 입을 삐죽이며 호호 웃자 진십삼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갈 때 즈음 오면 어떡하니. 으이구, 내가 다시 같이 들어가 주마.”
진 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진십삼은 그런 진 부인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어머니, 이번에는 소자가 졌습니다. 어렵사리 선생의 눈을 피해 몰래 나왔으니, 한 번만 저를 가엾게 여겨 주시지요.”
진십삼이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와, 정말 너무하네. 지금 네 어미를 내쫓는 거야? 키워 준 것도 다 소용없네.”
진 부인은 슬픔에 젖은 얼굴을 하며 여종들에게 한탄했다. 하지만 여종들은 당황하기는커녕 웃음을 지었다.
“이게 다 부인께서 말솜씨가 좋고 웃긴 이야기를 많이 할 줄 아셔서 그런 거예요. 정 낭자는 가뜩이나 목석처럼 굴며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데, 부인께서 같이 계시면 비교가 되니 더욱 입을 열지 않겠지요. 그럼 공자님께서는 헛걸음하시는 게 아닙니까.”
진 부인이 부채를 흔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정 낭자 때문이지, 나 때문은 아니지 않나. 십삼, 가 보아라.”
진 부인이 부채로 진십삼의 어깨를 툭 쳤다. 진십삼은 웃으면서 예를 표하고 서둘러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방에서 나와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진십삼이 미소를 머금고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구나. 여느 때와 다름없어. 여느 때와 다름없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다니.
“난 누구죠?”
진십삼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모른다고요?”
진십삼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공자의 존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소생은 진씨 성을 가졌고, 이름은 호(弧), 자는 지락(之樂)입니다. 집안에선 열셋째지요.”
진십삼이 표정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몸을 낮춰 예를 올렸다.
“진 공자시군요.”
진호(秦狐)? 지락, 십삼공자?
“근데 왜 육공자께서는 공자님을 상자(桑子: 뽕나무)라고 부르죠?”
반근이 갑자기 진십삼에게 물었다. 그러자 정교랑이 진십삼을 빤히 바라보며 대신 대답했다.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잡초로 화살을 엮어 천지를 향해 쏘면, 사내의 원대한 의지가 천지 사방 어디에나 뻗어 나갈 수 있다는 의미가 있거든.”
진십삼이 정교랑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다 나았군요. 아니, 놀라울 정도로 더 좋아졌어요.”
진십삼은 정교랑의 탁자 위에 올려진 책 한 권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심지어 정사에 오르지도 못한 야사(野史)를 엮은 책이었다.
반근의 말에 따르면, 경성으로 오기 전의 정교랑은 뭐든 금세 잊어버렸기 때문에 책 한 권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성으로 오고 나서도 정교랑의 탁자 위에 놓인 책은 시종일관 이 한 권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교랑은 그 이름의 유래를 막힘없이 읊었다. 딱 봐도 정교랑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그 서찰의 주인이 정말 정교랑의 스승이었을까? 낭자의 바보 병을 고쳐주고, 신선의 비방을 알려준 장본인.
정말 그 서찰 한 통으로 정 낭자를 깨운 걸까? 예전의 나처럼, 분통을 터트려 죽이지 않는 한 고칠 수 없는 병처럼, 부수지 않으면 나아지지 못하는 것처럼?
진십삼이 정교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아씨를 쓰러트린 그 질문!
고작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반근과 시녀에게는 한평생의 고생을 다 한 듯 힘든 시간이었다. 반근과 시녀로서는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그들은 일순간 표정이 어두워져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정교랑은 그 질문을 듣고도 미소를 지으며 회랑 아래에 멀쩡히 서 있었다.
“난 강주 정씨의 딸이고, 이름은 방(昉)이에요.”
해가 막 뜨기 시작하던 시간에 낳은 아이에게 지어주는 이름으로, 태양과 함께 빛나라는 뜻이었다.
너는 우리 정씨 집안에서 가장 밝은 딸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아래서 듬직하고 점잖아 보이는 남자가 환영처럼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옥대교 저택을 떠난 뒤, 마음이 심란해진 이 태의는 진소 부인의 초대를 마다했다.
“정 낭자가 나아졌는지, 나아지지 않았는지는 부인께서도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굳이 제가 진 노태야께 가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진소 부인은 멋쩍어하며 알겠다고 하고 이 태의를 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깨어난 거야? 도대체 어떻게?
내가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진단을 내릴 때마다, 그 낭자는 번번이 거짓말처럼 환자를 고쳐냈어. 이번에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 진단했더니, 그 낭자가 무려 스스로 자신을 고쳐내기까지 했다고!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어찌 이리 기묘한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야! 분명 그 낭자의 맥이 끊길 것이라 단언했는데,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싹 나아서 깨어날 수가 있지?
설마 저 낭자가 정말 소문대로 신선을 만난 건가.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마음의 병을 어떻게 고친 거야?”
이 태의의 중얼거림을 들은 누군가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신을 차리자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는 소년이 이 태의의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제가 어쩌다 전하의 궁까지 들어왔지요?”
“난들 압니까. 가만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태의께서 무작정 들어와서는 좌선을 하시지 뭡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하자 이 태의는 그제야 생각난 듯 아, 하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은 겁니까?”
진안 군왕은 이 태의를 보면서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다 이 태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태의께서 고칠 수 없다고 진단을 내리셨으니, 분명 나을 병인 거지요.”
진안 군왕은 자신의 손으로 허벅지를 때려 가며 더 크게 웃었다.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도대체 그 낭자는 어떤 내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정말 소문대로 도교 이 진인의 제자인가? 그 낭자가 다 죽어갈 때 즈음, 이 진인이 직접 와서 명줄을 이어준 건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낭자 때문에 정신이 나가 있다 보니, 이런 별 황당한 생각까지 다 하는군!
“이 대인, 이 대인.”
진안 군왕이 하하 웃으면서 손을 뻗어 이 태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실 병을 치료한 건 정 낭자 본인이 아니라…….”
이 태의가 의아한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납니다.”
이 태의가 놀란 눈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내가 정 낭자를 깨웠다고요.”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득의양양한 눈빛이었다.
“전하? 전하께서 어떻게요?”
이 태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간단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려주기만 하면 되죠.”
진안 군왕의 대답을 들은 이 태의가 멈칫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려준다고요? 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고요? 이 태의, 정말 의원 맞습니까? 환자가 병환이 뭔지도 몰라요? 정 낭자의 병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거잖습니까. 그럼 그 여인이 왜 그렇게 묻는지는 알고 있어요?”
진안 군왕이 묻자, 이 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진안 군왕은 일어서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낭자는 바보로 태어나 병을 앓았어요. 병이 나은 뒤로는, 예전의 기억이 전혀 없었죠.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만큼 말입니다. 자고로 사람은 태어난 지 석 달이 지나면 이름을 얻고, 이름을 얻은 뒤에야 영혼이 모여 사람으로 깨어날 수 있게 됩니다. 낭자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니, 당연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 수도 없었겠죠.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막막하기만 할 뿐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거고요.”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정교랑이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또 무슨 이름이 있다고요?”
“교랑은 외조모가 부르던 아명일 뿐이지, 정씨 가문에서 준 이름이 아닙니다.”
진안 군왕이 말하자 이 태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씨 집안에서는 바보로 태어난 아이를 익사시키려는 데에 혈안이 올랐을 텐데, 정식 이름을 지어 족보에 올렸겠습니까!”
“아니요. 정씨 집안에서는 낭자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단호한 진안 군왕의 말에 이 태의는 할 말을 잃었다.
“정 노태야는, 정 낭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기대에 부풀어 미리 이름을 지어 놓았습니다. 딸아이가 태어나긴 했지만 정 노태야는 매우 기뻐했지요. 아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아이가 한 살이 지난 뒤였으니, 석 달이 되었을 때 지어준 이름은 그대로 있을 수밖에요.”
진안 군왕은 천천히 편전 안을 거닐며 말을 이어갔다.
“주씨 집안에서도 정 낭자를 교랑이라 부르는 걸 보아하니, 정식 이름을 모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부(吏部)로 가서 낭자 부친의 신상을 알아보았지요.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문서라 그런지,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더군요. 정씨 집안을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사람을 시켜 정씨 집안의 족보를 알아 오라고 시켰죠. 그랬더니 역시…….”
“역시 뭐요?”
이 태의가 물었다.
“낭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그래서요?”
이 태의가 또 물었다.
“그래서, 낭자에게 이름을 알려 줬더니 깨어난 거죠.”
진안 군왕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자,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을 흘겨보면서 소리쳤다.
“지금 무슨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쉬울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쉬운 걸 어떡합니까?”
진안 군왕도 똑같이 눈을 부릅뜨고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태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밀어붙였다.
어디 그런 병이 있다고! 이름을 알려 줬더니 고쳐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진안 군왕이 하얀 이를 보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제가 이름을 외쳤더니, 바로 깨어나지 않았습니까?”
진안 군왕이 손바닥을 펼치면서 말했다.
“뭘 어쩔 수 있겠어요, 일이 본디 그리 이상한 것을.”
이 태의만 이 병을 이상하다고 여긴 게 아니었다. 당시 진안 군왕 본인도 정교랑이 눈을 뜬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 내가 정방이라고요?
여인은 눈을 떴을 뿐 아니라, 분명 입술을 움직여서 말을 했었다.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진안 군왕은 그녀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 네, 낭자의 이름은 정방이에요.
등불 아래 비친 정교랑의 눈빛은 별처럼 총총히 빛났다. 죽기 직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병세를 너무 과장해서 말한 건가? 내가 이 여인의 이름을 불러서 깨어난 건가? 아니면 혹시, 이 여인을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건가?
이 생각이 스치자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말이 되는 생각을 해야지! 내 목소리가 그렇게 좋을 리가 있나. 아니 뭐, 사실 못 들어줄 정도까지는 아니지.
문밖에 있던 내시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환한 실내에서는 백발의 노인이 머리를 긁으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 있던 소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하께서 저리 웃으시는 건 오랜만이네.
내시도 진안 군왕을 따라 조용히 미소지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던 옥대교 저택의 마당은 드디어 고요를 되찾았다. 반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 힘들어 죽겠어.”
반근이 회랑 아래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고작 하루야. 진소 부인과 진 부인께서는 차도 한잔 안 드셨는데, 힘들긴 뭐가 힘들어. 어서 일어나, 아씨께 차 한잔 우려 드려야지.”
시녀가 웃으면서 반근을 살짝 밀었다.
“안 해. 정말 힘들어 죽겠다니까. 나도 좀 쉬어야겠어. 아씨께는…… 드시지 말라고 해.”
반근이 아예 난간에 몸을 기대며 대꾸했다. 시녀는 그런 반근의 모습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말 대담해졌네? 무려 아씨까지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겠다 이거지?”
“몰라, 상관 안 해. 난 다시는 상관하고 싶지 않아.”
반근이 울음을 터트렸다. 시녀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녀는 반근을 툭 치면서 뭐라 말을 붙이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 괜찮아졌잖아.”
시녀가 끝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반근의 옆에 앉았다. 반근이 울며 시녀를 돌아보았다.
“왜 앉아? 방에 사람이 없으면 안 되잖아. 아씨께서 뭐 필요하신 거 없나…….”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챙기시겠지.”
시녀는 울먹거리는 반근의 말을 자르고 반근을 따라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힘들어 죽겠네. 그래도 이젠 하늘이 무너져도 막아 줄 사람이 생겼으니, 나도 같이 좀 쉬어야겠어.”
반근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밤하늘의 색이 더욱 짙어지자, 반근은 등불을 하나하나 끄고 방 안으로 들어와 침상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옆으로 누운 채 반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씨, 아직 안 주무셨어요? 혹시 목이 마르세요?”
반근이 얼른 가까이 꿇어앉으면서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내젓고는 일어나 앉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반근은 이 광경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번개가 내리친 뒤 폐허가 된 도관에서 정교랑이 깨어났을 때, 그때도 정교랑은 같은 얼굴로 반근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씨, 기억이 좀 나세요?”
반근이 주춤하다가 먼저 물어보았다.
“조금 생각나.”
“노마님이랑 유모는 기억나세요? 제가 어렸을 때 사탕을 먹여드린 기억은요?”
반근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정교랑은 반근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강주 정씨라는 게 기억나.”
반근이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굳이 기억해야만 생각이 나는 건가?
“강주 정씨는 촉주(蜀州) 출신이다. 위로는 검문(劍門), 아래로는 횡강(橫江)에 이르렀으며, 선조는 사람들이 저속하다 여기는 점괘 보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점을 칠 때 사악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물어오면, 가새풀과 거북점에 기대 대답하되, 그 이해관계가…….”
이어진 정교랑의 말에 반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하시는 거지.
반근이 눈을 크게 뜨며 끔뻑거리는 것을 본 정교랑이 미소 지었다.
“가서 자.”
반근은 네, 대답하고는 자신이 혹시 좋지 않은 질문을 했나 싶어 불안해했다.
바보로 지냈던 과거에, 좋은 일이 있었을 리가 있나.
“아씨,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반근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반근의 말이 끝나자마자, 희미한 등불 아래 보이는 정교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잊어라, 그게 좋아.
떠오른 기억은 극히 일부였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집안인지, 조상이 누군지 떠올랐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텅 빈 공간에 덩그러니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떠오른 것은 오직 무미건조한 이름 두 글자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일 뿐, 희로애락이나 이전에 겪은 고통과 같은 것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반근, 거울을 가져와.”
정교랑이 말하자 반근이 침상 옆에서 구리거울을 가져왔다.
거울 속에는 등불에 희미하게 비추어진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낯선 여인의 모습이.
정교랑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똑같은 강주 정씨에 똑같은 정방인데, 왜 또 다른 것 같지? 이 정씨 가문과 나의 정씨 가문은 무슨 관계인 거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혹시 그 남자 때문인가? 내 마음을 가져간 남자.
눈을 떴지만, 마음은 여전히 없어. 그러니 난 완전하지 못한 거야.
그 남자는 누구일까? 그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그는 누구지? 왜 하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거지?
“아씨, 아씨.”
반근이 정교랑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밤에 거울을 보면 영혼이 비추어진다고 했어.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거울을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아씨께서는 이제 막 깨어나셨는데…….
정교랑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뜨고 반근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 어서 가서 쉬어.”
정교랑이 반근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반근은 여전히 정교랑이 걱정되었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정말로 공자께서 아씨의 이름을 불러서 깨어나신 거예요?”
반근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기묘했던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반근은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와 닿지 않았다.
정교랑이 깨어난 것을 보자마자 반근과 시녀는 기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반근과 시녀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 정교랑의 이름을 알려 주었던 그 소년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야밤에 갑작스럽게 와서는 말도 없이 떠나고, 말 한마디로 아씨를 깨우다니. 혹시 신선인가?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반근이 물었다.
“왜냐면, 이름(名)은 운명에서 왔거든. 운명(命)이란 글자엔 구(口)와 석(夕)이 들어가지. 저녁(夕)은 어둡잖아. 어두우면 서로를 알아볼 수 없으니, 사람들은 입(口)으로 자기 이름을 알린 거야.”
이름은 곧 운명이다. 이름을 입으로 불러내야만 운명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그 이름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하늘의 뜻일까, 사람의 계산일까?
정교랑은 고개를 숙여 탁상 위에 놓여있던 서찰을 가져왔다.
넌 누구지?
“넌 누구지?”
정교랑은 서신 위의 글자를 조용히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