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75)

  • 작가의 말: 사람이 사물에 동화되면, 천리는 소멸하고, 인욕을 끝까지 추구하게 된다(人化物也者,滅天理而窮人慾者也). 이에 천리를 거역하고 거짓된 마음이 생겨나니, 문란하고 난잡한 일을 벌이게 된다(於是有悖逆詐偽之心,有淫泆作亂之事).

<예기> 중 <악기(樂記)>에 나오는 말입니다. 외부 사물의 유혹으로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면, 사람은 사물이나 다름없게 되어 선한 본성을 잃고 무한한 사욕을 추구하게 된다는 뜻이죠.

-각자 다른-

진안 군왕이 대전에 있던 대인들의 빗길 안전 문제를 염려하고 있던 무렵, 다른 이들은 대전 안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두 시진에 걸친 조회가 파하고 나서야 진 노태야는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은 사환의 손에서 서찰을 건네받았다. 헉헉 숨을 몰아쉬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환의 모습에서 급히 달려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서찰의 글씨에서도 급히 휘갈겨 쓴 티가 역력했다.

  • 병사는 무기와도 같으니 그리 써서는 안 되오. 남아도는 병사는 재편하고 실력이 출중한 자는 발탁해서 써야 하지. 단번에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소? 천천히 도모해야 하는 법이오. 한 번 패배에 모든 병사에게 그 죄를 물으면, 사기가 떨어지고 기반이 무너질 거요.

어지럽게 흘려 쓴 글씨는 내용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진 노태야는 조금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황궁의 조당 안에서 오가는 말을 딱히 비밀스럽다고 할 순 없지만, 천자와 대신들 사이에서 오간 말이 이렇게 빨리 전해지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 노태야는 서찰의 내용에 더 관심이 갔다.

장강주가 나섰단 말이지? 장강주가 나서서 말을 해? 한꺼번에 두 명을 탄핵하다니!

본디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두 가지 결과밖에 없었는데, 세 번째 결과가 생겼다.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것! 오랫동안 대치 국면이었던 정세가 바뀌게 됐다. 하지만 이 변화는 양측 모두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원치 않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갑자기 왜 나선 거야?

강주, 서원, 정교랑.

진 노태야의 손이 떨려 왔다. 진 노태야 자신도 그 생각에 놀란 눈치였다.

알 수 없는 일이로군. 그 어린 낭자가 무슨 일을 한 거지? 그러고 보니 둘 다 강주 출신이었어.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부류인데.

한 사람은 강주 선생이라는 칭호를 받는 대유학자였다.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에도 ‘강주’라는 이름이 들어가긴 했다. 뒤에 두 글자가 더 붙었지만. 강주 바보.

강주 선생을 생각하는데 왜 갑자기 강주 바보가 떠오르지? 강주 바보가 강주 선생의 서원에 찾아갔던 일로, 강주 선생이 조당의 일에 개입하게 된 건가? 웃기지도 않은 소리지.

대로변에 있는 찻집 안.

엄숙한 표정의 주 노야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말단 관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초나라 왕이 허리 가는 미인을 좋아하자, 궁중 여인들이 굶기를 반복하다 죽기도 했다지요. 폐하의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일이 지속되면, 변방 관리들도 불안에 떨고 변방도 안녕할 날이 없을 겁니다.”

굳어 있던 주 노야의 얼굴이 차츰 펴지는가 싶더니 미소까지 번졌다.

“그렇지, 그렇지!”

주 노야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맞은 편에 있던 말단 관리가 놀라 얼른 손으로 탁 치며 쉿 소리를 냈다. 주 노야는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유 교리 하나가 풍질에 얻은 건 놀라울 일도 아니지. 두 명, 세 명은 돼야 얘깃거리가 돼. 그 바보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군. 매번 놀라움을 안겨 주니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주 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 놀라운 일이 나한테서 벌어지는 건 절대 안 되겠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다른 찻집 안.

동 노야도 말단 관리와 마주 앉아 있었지만, 앞의 몇 명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동 노야는 다른 이들과 다른 행동을 하나 더 했다. 상대에게 비전을 찔러주는 일이었다. 말단 관리는 비전을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군사 상황과 전장의 형세는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오. 그러니 전장에 나간 장수는 군주의 명에 불복해도 용서한단 말이 있는 법이지. 그대들은 멀리 조당에 있으면서 변방의 전황에 대해 이래라저래라하고 있군. 군사 상황도 모르고 군영의 고통도 모르고 있소. 그러면서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고 묻는 꼴이니…….”

“다들 말로는 천하를 위해 기강을 바로 세우고, 죄지은 자를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떠들지만, 군의 폐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그저 정쟁을 위한 정쟁과 싸움을 위한 싸움, 벌을 위한 벌만 중시하며 사건 하나를 물고 늘어지는 일밖에 할 줄 모르지. 대체 군을 위해 이러는 거요? 아니면 서북의 군권을 잡아 그 공로를 인정받으려는 거요?”

평생 가도 조정 대신들의 언쟁을 직접 볼 일은 없을 말단 관리였지만, 전해들은 말만으로도 어떤 장면이 펼쳐졌을지 가히 짐작이 갔다. 따라서 저도 모르게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고, 현장에서 얘기를 듣고 그 말을 외우기라도 한 듯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똥지게로 가업을 이룬 동 노야로서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동 노야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그런 얘기는 됐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먼. 이것만 말해 주게. 그 탈영병들은 죽인다던가, 안 죽인다던가?”

동 노야가 물었다.

“대인들께서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소이까!”

말단 관리는 눈을 부라리며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이젠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는 누구한테 맡겨야 하는지, 서북 전선에 있는 장병을 남겨 둘 것인지 불러들일 것인지, 그 자릴 대체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논하고 있소이다.”

“그런 일은 내게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난 그 탈영병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알고 싶을 뿐일세.”

말단 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금 제정신이오? 그런 거나 알아내자고 이 큰돈을 쓰게?”

“내 돈 내가 쓰겠다는데 어디에다 쓰든 뭔 상관이야!”

동 노야도 눈을 부라리며 받아쳤다.

똥내를 하도 맡아 정신이 나갔나……. 말단 관리는 어처구니가 없는 눈치였다.

“아마 죽진 않을 거요.”

동 노야는 눈빛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여 재차 확인했다.

“정말 죽지는 않는 거지?”

“폐하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는진 아직 모르겠으나, 왕보당의 죄는 명백하니 그 일은 다신 거론치 않는 것으로 중론이 모아졌소. 또 왕보당의 측근들을 해임하고, 진 상공이 천거한 강문원이 어명을 받은 감찰사로 나가게 됐지. 강문원이 서북으로 가서 군사 상황을 살펴보고, 문제와 폐단을 엄히 조사할 거요.”

“아니, 그래서 그 탈영병은 어찌 되는데?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동 노야가 또다시 소리쳤다.

“이 늙은이가 정말 똥내에 정신이 나갔나! 각자 한발씩 양보했잖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다가 간신히 마무리되어 각자 대응책을 마련하기 바쁜 상황에, 그깟 탈영병 일에 누가 신경이나 쓰나? 애초부터 아무도 신경 안 썼어. 그자들이 죽든 말든 대인들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그냥 좋은 구실이었을 뿐이지.”

말단 관리도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인들이 마당을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크고 작은 짐들을 챙겨 마차에 싣느라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아버지, 왜 이리 서둘러 떠나는 거예요?”

동 낭자가 물었다.

“서두르기는? 지금이 딱 좋은 때야.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때지.”

동 노야는 어서 짐을 마차에 실으라며 하인들에게 손짓을 했다.

“서 오라버니 형제들이 아직 석방된 것도 아니잖아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요. 만에 하나라도 사형으로 판결이 나거나 처형은 안 되더라도 감방 신세를 지게 될지 몰라요. 그럼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성을 빠져나가게 둘 리 없다고요.”

“만에 하나 같은 건 없다.”

동 노야는 확신에 찬 어투였다.

“대인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어. 그 낭자로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여지인데 무슨 문제가 생긴단 말이냐. 그러니 당장 떠나야 한다. 그 낭자는 우릴 내버려 둘 거야.”

“아버지.”

동 낭자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 그럼 서 오라버니가 나오면 얼굴이라도 보고 가요.”

“보긴 뭘 봐!”

동 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이게 다 너희가 다시 만나 벌어진 화인데 뭘 더 보겠다는 거냐! 보기는 뭘 봐, 뭘! 저들이 그동안 벌어진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다가, 분풀이하러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일은 향칠이 저지른 거지 우리와는 상관없잖아요. 서 오라버니는 우릴 탓하지 않을 거예요!”

동 낭자의 말에 동 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사람이 못된 마음을 먹은 게 죄가 된다면, 넌 그 못된 마음이 생기게 부추긴 장본인이야. 향칠이 주범이라면 넌 공범이지. 주범이든 공범이든 죄를 지은 건 매한가지니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법이다! 이번에 서무수가 아무 일 없이 풀려나더라도, 긴긴 세상인데 한평생 아무 일도 없으리라 누가 장담해? 아무 탈 없이 지내면 괜찮겠지만, 일이 생기면 또다시 이번 사건이 떠오를 테고 우리한테 불똥이 튈 수밖에 없어.”

“아버지, 억지 좀 부리지 마세요. 앞으로 일어날 일인데 왜 우리한테 불똥이 튄단 거예요!”

동 낭자가 인상을 썼다. 이번 일로 아버지께서 너무 크게 놀라셨나?

“불똥이 안 튀긴?”

동 노야는 콧방귀를 뀌며 딸을 노려보았다.

“네 진흙 인형, 아직 기억하지?”

동 낭자가 멈칫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제 인형을 내던져 깨뜨렸잖아요.”

동 노야가 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을 이었다.

“망가지지 않았으면 또 사러 갈 일도 없었겠죠. 또 사러 가지 않았다면 비 맞을 일도 없었을 테고요. 비를 맞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병이 나지 않으셨겠죠. 병이 나지 않았다면 돌아가지도 않으셨을 테고. 그럼…….”

“그만하세요, 아버지.”

동 낭자가 동 노야의 말을 끊었다. 동 노야가 빤히 쳐다보자 동 낭자는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넷째야,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핑곗거리를 찾고 싶어 하는 법이다. 핑곗거리를 찾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믿으려 하고, 이건 운명이라고 여기려 하지.”

“아버지.”

동 낭자는 목이 멘 듯했다.

“그만하자꾸나.”

동 노야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딸을 쳐다보았다.

“그만 마음 접어라. 단념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을 해치고 남을 해치게 되는 법이야. 네 것이 아니면, 네 것이 아닌 게야. 다 운명이다.”

동 낭자는 눈물이 떨어지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만 가자. 다 잊어라.”

동 노야는 뒤돌아 앞장서서 걸어갔다.

다 운명이라고? 동 낭자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춤에 드리운 장식을 살폈다. 금도, 은도, 옥도 아닌 돌을 갈아 만든 것이었다. 동 낭자는 장식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서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선물한, 유일한 물건이었다. 아니, 선물했다고 할 순 없지. 강제로 빼앗은 거니까.

동 낭자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와 부딪치며 넘어졌다. 동 낭자의 손에 들려 있던 돌 장식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두 동강이 났다.

“이 녀석들!”

동 낭자가 인상을 쓰며 옆을 쳐다보았다. 어린 두 아들이 겁에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머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아이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을 쳐다보던 동 낭자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아니다.”

동 낭자는 손을 뻗어 아이들을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어서 마차 타러 가자. 할아버지께서 우리 데리고 놀러 가신대.”

모친이 화를 내기는커녕 놀러 가겠다고 하자 두 아이는 기뻐 환호하고, 동 낭자의 손을 잡은 채 폴짝폴짝 뛰며 밖으로 나갔다.

분주하게 마당을 오가는 인파 속에서 바닥에 떨어진 돌 장식은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똥지게꾼 일가가 도망쳤어. 쫓아가서 붙잡아 올까? 아니면 거기서 해치워 버려?”

주육낭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알아서 해요.”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일인데 왜 내가 알아서 해?”

정교랑이 손에 든 붓을 내려놓자 시녀가 종이를 펼쳐 그늘진 곳에서 말렸다.

“내 일이라면서, 뭘 그렇게 캐물어요?”

“좀 좋게 말할 순 없어?”

주육낭이 노려보며 대꾸했다.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 좋은 말을 건네지 않는 건 그쪽이죠.”

또 생트집이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럼 진십삼은 너한테 좋은 말 해주냐?”

주육낭이 뒤에서 물었지만,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서재를 나왔다. 시녀는 오늘 쓴 글씨를 잘 걸어 둔 후 그 뒤를 따랐다.

정교랑의 오랜 습관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글씨를 쓰고 활을 쏘며 낮잠을 자는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이런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풍진 세상사를 다 겪은 노인뿐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본인 말마따나 마음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그저 할 일을 할 뿐 누군가를 위한 일이 아니니, 아무 감정도 없는 거겠지.

“진십삼이…… 너희 또 은밀히 무슨 짓을 꾸민 거야?”

주육낭이 따라오며 물었다.

“우린 그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대화?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조정의 일이 뒤바뀐단 말이냐?”

“정말 우습네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힐끔 보며 말했다.

저 눈빛! 그래, 저거야! 당초 정씨 저택에 앉아 있던 바보도 저런 눈빛으로 날 봤었어!

주육낭은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떴다.

“마차를 준비해.”

정교랑의 말에 금가아는 네, 하고 마차를 빌리러 나갔다.

“어디 가려고?”

“대장간에요.”

주육낭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대장간? 그런 곳엔 뭐 하러?

“넌 그 탈영병들의 일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아? 그 사람들 아직 나오지도 않았잖아. 그렇게 자신만만하단 거야?”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쪽 아버지가 해결해 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 믿는 거예요. 우리 외숙부님이 곧 해결하실 테니까.

주육낭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뭐랬어요. 나한테 좋게 말하라니까요.”

정교랑은 한마디 툭 내뱉고는 뒤돌아 가 버렸다.

결국 쓸데없는 말밖에 안 하는군. 아무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는 말. 저 강주 바보가!

주육낭은 이를 갈며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이, 진십삼이랑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주육낭이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같은 시각, 진 시강은 막 문을 나서려던 진십삼을 불러 세웠다.

“십삼,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민 것이냐?”

진 시강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니요?”

진십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관청에 몇 번이나 가지 않았느냐.”

진 시강은 아들이 시치미를 떼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또 주씨 가문의 일 때문이더냐?”

진십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태평거가 주씨 가문과 관련이 있거든요. 그 탈영병들은 문서상 태평거와 신선거의 주인이잖습니까. 혹여라도 일이 생기면, 주씨 가문도 연루될 수밖에 없죠. 딱히 다른 일을 한 건 아니고, 조정 대인들의 소식을 좀 알아봤을 뿐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진십삼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 누를 끼친 건 아니죠?”

진 시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들을 쳐다봤다.

“누를 끼친 건 없다. 다만…….”

“다만 무엇입니까? 말씀하십시오, 아버지.”

진십삼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진시강은 아들을 빤히 쳐다보며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뜸을 들였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진 시강이 불쑥 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진십삼은 멈칫하여 물었다.

“무얼 어떻게 했느냔 말씀입니까?”

영문을 모르는 듯한 아들의 모습에도 진 시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명 승부가 날 일이었는데, 왜 갑자기 장강주 선생이 개입하여 승부가 안 나게 만든 거지?”

진십삼이 부친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게 물으시는 겁니까?”

진십삼은 눈을 껌뻑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제 생각엔 모든 게 폐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진 시강은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말 이상하구나. 지난번엔 네가 주씨 가문의 일로 관청에 몇 번 드나들더니, 유 교리가 갑자기 풍질을 얻었지. 이번에도 주씨 가문의 일로 네가 관청을 몇 번 드나들더니, 진소와 고능준이 오랫동안 별러 왔던 일이 갑자기 뜻밖의 방향으로 결론이 났으니…….”

진 시강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진십삼도 따라 웃었다.

“아버지, 우연일 뿐입니다. 매일 관청을 드나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게 따지면 그런 능력이 있는 이가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진 시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이 안 되는 소리지.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는.

“주씨 가문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진 시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다고 하기엔 번번이 사건이 일어났고, 운이 나쁘다고 하기엔 매번 아슬아슬한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런 생각을 하던 진 시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따지면 넌 주씨 가문엔 행운을 가져다주고, 조정 대신들에겐 불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로구나. 이러다간 관청 사람들이 너더러 오지 말라고…….”

진 시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십삼은 표정을 바꾸며 말을 잘랐다.

“아버지!”

진 시강도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내 아들이 조정 대신들에게 불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라니.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아들의 벼슬길이 평생 막힐 터인데! 조정 대신은 귀신에 관한 일을 금기시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벼슬길이라……. 아들의 벼슬길.

진 시강은 진십삼을 바라보았다. 다리가 나아서인지 키도 훌쩍 큰 것 같고, 똑바로 서면 꽤 늠름한 모습이기도 했다.

“십삼, 네가 올해 몇이지?”

진 시강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십삼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소자 팔월이 지나면 열일곱이 됩니다.”

“열일곱이라, 과거를 치를 때가 됐구나.”

진 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한 내용을 가져와 보거라.”

전에는 진십삼이 불구인 탓에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여겨, 과거를 대비한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진 시강의 아들은 준수한 외모에 영민하고 가세도 번듯하니 앞길은 탄탄대로일 터였다.

진십삼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네, 아버지.”

진 시강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십삼.”

진 시강이 다시 아들을 불러 세우자, 진십삼이 돌아봤다.

“정말 네가 한 거 아니지?”

진 시강의 물음에 진십삼은 억울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소자한테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없겠지. 아들은 관두고 나한테도 없는 능력인데. 진 시강은 또다시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아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사흘 후, 주 노야는 탈영병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알아 왔다.

“사건을 대조 확인했다. 범강림 형제가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게 맞더구나. 그자는 싸우다가 저 혼자 발을 헛디뎌 죽은 거래. 기껏해야 과실 치사 정도지.”

주 노야가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죄는 씻게 됐다.”

“그럼 탈영한 죄는요?”

정교랑이 물었다.

“살인죄의 누명을 벗은 마당에 탈영병이든 아니든 알 게 뭐냐.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병사가 아니니, 탈영병이고 할 수도 없지.”

주 노야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망할 유규 놈. 사리 판단을 못 하고, 감히…….”

“유규요? 그 사람이 또 어쨌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다, 교교. 그 일은 신경 쓰지 마라. 윗선에서 덮는다는데, 일개 대장 나부랭이가 뭘 어쩌겠느냐. 내 따끔하게 혼쭐을 내줄 것이야!”

비록 외조카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는 건 못 한다지만, 일개 순성갑기 대장 하나를 혼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탈영죄를 시인했는데, 서북으로 돌려보내진 않나요?”

정교랑이 물었다. 주 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정교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치고 나갔다.

“그 사람 말이 맞아요. 도망친 건 엄연한 사실이죠. 그럼 서북 군영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죠.”

주 노야가 멈칫했다.

“그럴 필요 없다, 교교. 이건 아무 일도 아니야. 얼마든지 빼낼 수 있어.”

이 외조카가 날 너무 깔보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서북 군영으로 돌려보내요.”

정교랑의 단호한 말에 주 노야는 다시 멈칫했다. 서북 군영으로 돌려보내려면 경성을 떠나야 할 터. 그들을 내쫓으려던 거였군. 주 노야는 퍼뜩 깨달았다.

하긴, 이런 사고를 쳤는데 여기 붙잡아 두면 뭘 하나. 그들을 구한 일로 체면을 지키고 도의도 다한 셈이니, 안 보고 사는 게 속 편하지. 아주 먼 곳으로 썩 쫓아내는 게 나아.

“그래, 교교.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

주 노야는 무슨 심정인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같은 시각, 진 노태야도 이 일에 대해 묻고 있었다.

“탈영병은?”

진소는 피곤한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끌어왔던 일의 결과가 나왔건만, 그 결과는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이 얘길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부친의 질문엔 대답을 하는 게 도리였다.

“제가 그간 병부에 일러 각별히 살펴 주라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진 않았을 거예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고능준 쪽 사람도 제가 저들을 두둔하도록 유도하려고 기필코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진 않겠죠. 다들 서북에서 저지른 죄의 증거를 없애는 일로 바쁘기도 하고요. 위에서 따져 묻지 않으면, 별일 아닌 채로 넘어갈 겁니다. 머지않아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빼내겠죠.”

진 노태야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그 탈영병 일에 왜 그리 관심을 보이십니까?”

진소가 물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여러 사람에게 확인을 받고 싶구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요? 무엇이 말씀입니까?”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진 노태야는 피식 웃었다.

“장강주가 갑자기 튀어나와 너희 둘을 탄핵한 것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야.”

“아버지, 그 일이 이해 가지 않을 게 뭐 있습니까.”

진소가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분명 승부가 날 일이었는데, 갑자기 끼어들어 일을 망쳐 놨다. 수양이 뛰어난 진소였지만 다시는 장강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너도 그자를 보고 싶지 않고, 고 대인도 그자를 보고 싶지 않을 거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아마 보고 싶어 하시겠지.”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는 잠자코 있었다. 관료 사회에서 오래 있었던 터라 황제의 의중은 잘 알았다. 천자가 신하들끼리 견제하도록 두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였다.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일이니, 그런 유학자가 빠질 수 없었겠지요!”

진소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랫동안 공들여 가꾼 끝에 마침내 결실을 맺을 순간이 왔는데, 누군가와 그 열매를 나눠 갖게 됐다. 그것도 날 밟고 빼앗아 간 것이렷다. 입장 바꿔 그 누구라 해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정이란 원래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를 밟지 않고는 위로 올라갈 수 없는 법, 그 점은 진소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이것도 나쁘지 않아.”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버지, 이번 일은 중용의 도에도 어긋납니다!”

진소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제 결정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이었어요.”

“좋은 일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은 법이지. 이번에 네 뜻대로 고씨 가문의 세력을 서북에서 말끔히 뽑아 버리게 됐다고 치자. 오랫동안 뿌리내린 세력을 뽑아낸다는 게 좀 어려운 일이냐. 그리되면 서북 지역이 흔들릴 테니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순 없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입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죠.”

진소가 말했다.

“서북 지역이 흔들리면 오랑캐들이 그 틈을 노릴 거다. 너희가 그곳의 병권을 인수받는다 한들, 병사와 장수가 서먹한 사이니 제대로 명을 따르지 않겠지. 또 고씨의 세력도 절치부심할 거다. 원한이 사무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오랑캐가 쳐들어온 틈을 타 반격이라도 하면 전투에서 패할 테고, 그 죄를 너희에게 돌리며 물고 늘어질 게야.”

진 노태야가 말했다.

“소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나도 네가 죽는 게 두렵지 않아. 다만 그리 죽는 게 무슨 가치가 있어? 네가 죽으면 고씨 가문에서 다시 서북의 병권을 쥘 텐데, 그럼 지금껏 행한 모든 일이 아무 의미도 없지 않느냐.”

진소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한발 물러서게 됐으니 고씨 가문에서도 한숨 돌릴 거다. 아직 기반이 남아 있으니 눈이 벌게져서 너한테 달려들 일도 없고, 너도 한숨 돌릴 수 있어. 어쨌거나 네 사람이 발탁됐으니 앞으로 천천히 시간을 갖고 일을 도모하면 될 일이다. 그럼 서북 지역도 안정될 테고 기강도 바로잡을 수 있어. 한 걸음 물러나는 게, 오히려 한 걸음 나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것 같구나. 장강주 선생도 아마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다시 진소를 쳐다봤다.

“이 생각은, 폐하의 생각이기도 하다. 너희도 알았을 게야.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진소는 한숨을 내쉰 후 부친께 예를 표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친히 차를 우려 주었다.

“너도 피곤할 텐데 한숨 돌리도록 해라.”

두 부자는 마주 앉아 잠시 차를 마셨다.

“장강주 선생이 갑자기 나선 일이, 그 탈영병과 관계된 것 같진 않으냐?”

진 노태야가 불쑥 물었다. 진소는 그 말에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아버지, 장강주 선생이 나서게 만든 사람이 정 낭자란 말씀입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진소의 목소리가 커졌다.

“말도 안 됩니다!”

장강주 선생이 어떤 사람인데! 이런 조정의 대사에, 어린 낭자의 말을 귀담아들을 리가!

“정 낭자가 장강주를 압니까?”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복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난 오라비를 보러 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진 노태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소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말도 안 됩니다!”

진소가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장강주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남의 부탁 때문에 움직일 사람은 절대 아니에요.”

“그 낭자의 말이 장강주의 신념과 딱 맞아떨어졌다면?”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린 낭자의 눈에도 똑똑히 보이고 세상 사람 모두가 똑똑히 보는 걸 너희만 못 보고 있었다면, 실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진 노태야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장강주 선생으로서는 조정이 그런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겠지.”

그런가? 진소는 놀라면서도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서북의 군사에 관한 일을 두고 반년 가까이 양측으로 갈려 싸우던 일이, 여인 하나의 개입으로 승부도 못 가르고 끝났다? 그 여인이 탈영병 몇 명을 구하기 위해? 그 낭자가 장강주 선생을 찾아가 몇 마디 한 일로?

웃기지도 않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그럴 리 없지!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진소는 단호한 말투였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노태야를 설득하려는 건지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낭자의 운이 좋았을 뿐이죠.”

운? 진 노태야는 멈칫했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다. 운이지.”

진 노태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이제 보니 정 낭자가 장강주 선생을 알고 있었군. 참으로 뜻밖이야.”

이 낭자는 경성에 딱히 아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장강주 선생이 튀어나왔다. 경성에 온 지 꽤 됐지만 지금껏 이에 관한 얘기는 전혀 들은 바 없었고, 평소에도 왕래가 없었던 터였다.

정 낭자는 번번이 예상을 벗어나는군. 또 어떤 예상 밖의 인물을 알고 지내는지 모를 일이야.

기병 무리가 쏜살같이 달려 지나가자 연무장에 뽀얀 먼지가 일었다. 시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너울을 쓴 정교랑은 미동도 않은 채로 서 있었다.

“이제 충분히 봤어?”

“아직이요.”

주육낭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더 보든가.”

주육낭은 못마땅하다는 투였다.

쨍쨍 내리쬐는 가을 햇볕 아래, 먼지가 뽀얗게 일고 말똥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여인이 한나절 넘게 미동도 않고 서 있으니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여인을 의식했다.

“뭐 하는 거지?”

“낭군을 찾나?”

저속한 농담들이 오갔지만, 어린 낭자 옆에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소년 때문에 감히 큰 소리로 떠들진 못했다. 어린 낭자가 옆에 있는 소년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는가 싶더니, 소년이 자신들 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어이, 거기 몇 명, 이리 와!”

주육낭이 소리치자 말을 타고 있던 기병들은 깜짝 놀랐다.

“정말 자네가 마음에 든 거 아니야?”

병사들이 농담을 주고받자 옆에서 상관이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다가가자 여인은 사람을 보는 대신 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어린 낭자가 설마 말을 좋아하는 건가?

“이래 봬도 천금은 나가는 준마입니다.”

병사들이 웃으며 말을 건네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옆에 있는 자신의 말을 가리키며 턱짓을 했다. 눈길을 돌리던 병사들은 진정한 준마란 무엇인지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장 가문에서 키우는 말이니 여느 말과는 비교도 안 될 수밖에.

“뭐 어쩌라고. 여기 낭자는 우리 게 좋다는데.”

병사 하나가 투덜댔다. 그 말을 들은 주육낭이 병사를 죽일 듯 노려봤다.

“여기 말들, 다 이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말을 쳐다보던 이들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이러지 않으면, 뭐가 어때야 하는데요?”

병사 하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정교랑이 몸을 구부리고 말발굽을 가리켰다.

“발굽의 상처가 심각해 보여서요.”

“이 정도는 심각한 축에도 못 끼죠.”

병사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경성 같은 곳에서는 달릴 일도 별로 없잖습니까. 변방에 가서 기병들의 말을 한번 보십시오. 특히 척후병의 말은 천 리도 넘게 달리다 보니, 발굽이 아주 썩어 문드러졌어요.”

정교랑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여기 있는 말이 다 이렇단 거죠?”

정교랑이 물었다.

“이러지 않은 곳도 있습니까?”

누군가가 되물었다.

“내 기억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교랑이 말했다.

“그럼 어떤데요?”

누군가가 또 물었다.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병사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뒤돌아 자리를 떴다.

주육낭은 상관에게 작별을 고한 후 서둘러 정교랑을 뒤따라갔다. 두 사람의 뒤에서 병사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여기서 이틀이나 봤잖아. 대체 뭘 본 거야?”

주육낭이 물었다.

“말을 봤죠. 보면 몰라요?”

정교랑의 대꾸에 주육낭은 눈을 부라렸다.

“봐도 모르겠다! 진작 알았으면 내가 여기서 너랑 같이 이러고 있었겠냐! 다음부턴 이런 시시한 일로 나 찾지 마!”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주육낭은 그 눈빛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보긴 뭘 봐!”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나랑 같이 나와서, 엄청 기뻐하는 것 같던데.”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 아니, 너, 너,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내, 내가 뭘 기뻐해!

주육낭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아무 대꾸도 못 했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정교랑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시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주육낭을 힐끔 보고는 정교랑을 따라갔다. 그 웃음이 주육낭을 더욱 궁색하게 만들었다.

“차, 차, 착각하지 마!”

주육낭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대꾸했다.

그래도 주육낭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정교랑 마차의 뒤를 따랐다. 성문으로 막 들어왔을 즈음, 집안 사환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환이 이쪽을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부친을 모시는 사환인데…….

“넌…….”

주육낭이 막 입을 열려는데, 사환이 정교랑의 마차 옆에 멈춰 서는 모습이 보였다.

“아씨, 아씨.”

사환이 밝은 목소리로 불렀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말을 달려 앞으로 갔다.

“노야께서 아씨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범 공자 형제들께서 오늘 석방되신대요.”

시녀가 기뻐하며 휘장을 들어 올리고는 돈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자, 가져가서 사탕 사 먹어.”

사환이 기뻐하며 받았다. 얼마나 묵직한지 제대로 받기도 힘들었다. 세상에, 사촌 아씨께선 통도 크시네! 다른 이들은 푼돈이나 주는 정도인데, 사촌 아씨는 아예 주머니를 통째로 주시잖아! 통째로!

“감사합니다, 아씨!”

사환은 기뻐 소리치고는 곧장 말을 타고 달려갔다. 달려가던 사환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더니 말 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공자님, 분부가 있으신지요.”

사환은 굳은 얼굴로 옆에 있던 주육낭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꺼져라.”

주육낭이 소리치자 사환은 얼른 네, 하고 말을 달려 달아났다.

주육낭은 말을 재촉해 서둘러 앞으로 갔지만 정교랑의 마차는 집 방향으로 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느릿느릿 움직였다. 방향도 집 쪽이 아닌 듯했다.

“어이, 너 또 어디 가려고?”

결국 주육낭이 다시 달려와 물었다.

“대장간에요.”

정교랑이 차창을 통해 말했다.

대장간에 간다고?

“며칠 전에 가지 않았어? 화살은 대장간에서 만드는 거 아니야. 진짜 좋은 화살은 관에서 만들지. 필요하면 무기 점포에 가 봐.”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화살 만들러 가는 거 아니에요. 다른 일이에요.”

정교랑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차는 앞쪽으로 멀어져갔고, 주육낭은 그 자리에 선 채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일이라고? 그 사내들의 석방보다 더 중요한 일이 대체 뭐길래? 요 며칠 이 일로 바쁘게 돌아다녔잖아. 드디어 바라던 대로 됐는데 이젠 별 관심도 없어 보이네. 하여간 허세 부리는 덴 도가 텄다니까!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거리로 나와 선 서무수 등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거리를 오가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자 햇살이 눈을 찔렀고, 귓가에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모든 게 생생히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꿈은 아니지요? 정말 나온 거 맞지?”

서봉추가 뒤에서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다섯째 형님, 날 왜 꼬집소?”

“꿈인지 아닌지 알려 주려고.”

옥신각신 떠드는 형제의 말에 범강림이 웃으며 서무수를 쳐다봤다.

“자네도 꿈 같나?

“아니요.”

서무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이는 해야 할 일을 꼭 해내고야 말죠. 절대 꿈일 리 없어요.”

누이 얘기가 나오자 범강림은 잠시 침묵했다. 감옥 밖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들을 마중 나온 이는 없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지? 곧장 군영으로 가?”

나지막이 묻는 범강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들이 고개를 돌리자 노기등등한 유규의 모습이 보였다.

“도망칠 작정이냐?”

서무수 등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말단 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 시랑 대인께서 특별히 비준하셨습니다. 군영에는 내일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어째서? 탈영병들한테도 특별 대우를 해 주란 말이냐! 한 번 탈영했던 자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번번이 탈영하려 들 거다. 내일? 내일이면 이미 도망치고 없을 텐데?”

“제기랄 놈.”

서봉추가 더는 못 듣겠는지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가 무슨 도망을 쳐? 모함을 받은 게 아니었으면 우리가 도망쳤겠냐?”

유규는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모함? 그거야 너희 주장이고. 아주 수완이 대단하더구나. 뒷배도 든든하고. 그래, 뭐든 너희 말이 다 맞다!”

유규가 비꼬며 소리쳤다. 불같은 성격의 서봉추는 당장이라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들 태세였다.

“너희 같은 자식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된 거다. 그런데도 뭘 나불거려!”

서무수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형제 두 명이 서봉추를 말렸다.

“저자가 우릴 해치려 한 게 아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리 된 거야. 우리가 깨끗했다면 그 누구도 우릴 못 건드렸을 거다.”

서무수가 유규를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대인, 저희는 내일 반드시 군영으로 갈 겁니다.”

유규는 콧방귀를 뀌며 형제들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네놈들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도망칠 생각은 어림도 없어!”

유규가 떠난 후 걸음을 옮기던 서무수 형제는 곧 다시 걸음을 멈췄다.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던 경성이 불과 며칠 만에 더 낯선 곳이 되어 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형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요?”

형제 하나가 물었다.

“집으로 가야지.”

서무수가 대꾸했다.

집으로 간다고? 형제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집으로 가도…… 될까요? 마중 나온 이도 없는데…….”

누군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슨 낯으로 거길 가나.

서무수가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자기 집에 가는 건데, 누가 마중을 나와! 가자.”

자기 집에 갈 땐, 마중 나올 이가 필요 없긴 하지. 형제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래, 집으로 가자. 자기 집으로 가는 건데 걱정할 게 뭐 있어!”

범강림도 동조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형제들도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다가 따라나섰다.

그럼 집으로 가자.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했지만, 옥대교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형제들의 발걸음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다리 어귀에서는 마차와 말을 빌리는 이들이 흥정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변함없었다. 정말 모든 게 변함없을까?

“도련님들 오셨네요!”

소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서무수 형제의 귀에 꽂혔다. 서무수 형제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트렸다.

금가아와 반근이 달려와 반갑게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한참 기다렸잖아요.”

“마중을 나가려니 집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요.”

“서둘러, 금가아. 화로 갖다 놓고 보수사에서 가져온 향도 피워.”

두 사람은 조잘조잘 쉬지도 않고 떠들었다. 형제들은 대답할 틈을 못 찾은 채 허허 웃으며 반근과 금가아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형제들은 나뭇가지로 몸을 털고 화로를 넘은 후에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산석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고, 가을날의 대숲은 한층 짙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대청의 문이 열려 있어 그 안에 있는 병풍과 탁자가 보였다. 탁자에는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게 변함없었다. 다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만 빼고.

서무수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서무수도 그녀를 보는 게 두려웠다.

“아씨는 출타하셨어요. 금방 오실 거예요.”

반근의 말에 서무수는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 데워 놨어요. 도련님들 우선 씻으세요. 옷도 준비해 놨어요.”

금가아가 소리쳤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면도한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마당에는 두 명이 늘어 있었다.

“주인어른.”

이대작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일어섰지만, 오 관리인은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미소만 지었다.

“어째 체격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매일 먹을 거며 입을 거 갖다 바치고, 누워 있거나 앉아 있기만 했으니 살이 안 찌는 게 더 이상할 거요.”

서봉추가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큰일이군. 며칠 안 움직였더니 근육이 다 굳은 것 같소.”

그러면서 옆에 있던 형제들에게 소리쳤다.

“자, 자. 어서 단련하러 갑시다. 몸을 움직여야지.”

형제들도 웃으며 뒷마당으로 갔다. 얼마 안 가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사람이 많은 게 시끌벅적하고 좋습니다.”

오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성가신 일도 많고.”

범강림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성가신 일이요? 뒤죽박죽 뒤얽혀 사는 게 사람 사는 인생인데, 성가신 일이 없을 수야 없지요. 하루 푹 쉬고 어서 점포로 가 보십시오.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범강림과 서무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네, 맞습니다.”

이대작도 거들고 나섰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신선거 장사가 하루가 다르게 잘됩니다. 아주 바빠 죽겠어요. 주인어른들까지 안 계시니 관리인이 사람 수를 제한해서 받을 정도라니까요.”

오 관리인이 껄껄 웃었다.

“사람 수를 제한하는 건 바쁜 것과 상관없는 일일세.”

오 관리인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종의 장사 수완이지. 귀한 것일수록 값은 올라가는 법…….”

“돈을 더 벌 수 있는데 왜 안 번다는 겁니까? 매일 오십 탁자만 받으니 너무 아깝잖습니까. 겨울이 되면 못 먹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먹고 싶으면 일찍 와서 자리를 맡아야지.”

두 사람이 장사에 대해 떠드는 동안 범강림과 서무수는 웃으며 듣기만 했다.

“주인어른, 안 그렇습니까?”

오 관리인이 이들을 보며 물었다.

“관리인이 좋다면 좋은 거겠지.”

범강림이 말했다.

“주인어른, 참 속 편하게도 말씀하십니다. 주인어른의 식당이 아닙니까.”

오 관리인이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범강림과 서무수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오 관리인, 우리는…….”

서무수가 막 입을 열 때였다. 대문 쪽에서 금가아가 아씨께서 돌아오셨다고 외치자, 다들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문이 열리고 마차가 멈춰 서더니, 시녀와 너울을 벗은 정교랑이 모습을 보였다. 꽃을 수놓은 무채색 치마에 푸른 비단옷을 입은 정교랑의 얼굴은 백옥처럼 고왔다.

“오라버니들, 돌아왔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지만, 뒷마당에 있던 형제들은 부르는 소리에 쭈뼛쭈뼛 앞으로 나왔다.

정교랑과 서무수, 오 관리인 등은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사는 댁에서 하시겠습니까? 점포에서 드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집에서 드시는 게 좋겠지요? 음식 준비할 것 없이 점포에서 가져다 드십시오.”

오 관리인이 말했다.

“내가 할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오라버니들이 고초를 겪고 돌아왔는데, 누이로서 이 정도는 해야죠.”

“아, 아냐. 누이가 밖에서 고초가 많았지. 고생스럽게 그러지 마.”

“고생스럽지 않아요. 마침 오늘 다들 모였잖아요.”

정교랑은 오 관리인과 이대작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작별 연회인 셈 치죠.”

작별? 오 관리인과 이대작이 흠칫 놀랐다.

서무수 형제들이 오늘 석방된 것은 여인의 공이 분명했다. 군영으로 돌아가라는 명이 떨어진 사실을 여인이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형제들보다 더 먼저 알았으리라.

서무수 등은 잠자코 있었다.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실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아니, 떠나시다니요?”

이대작이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우린 탈영병이오. 목이 잘릴 대죄를 지었는데 목숨을 건진 것만도 행운이지. 억울함을 풀고 누명을 벗어 이젠 그냥 병사가 됐소. 병사라면 돌아가야겠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이대작과 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니요. 원랜 안 돌아갈 수도 있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 말에 안에 있던 이들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오라버니들을 위해 큰 선물을 세 개 준비했어요. 이게 첫 번째 선물이에요.”

다시 군졸 노릇이나 하라고 군영으로 돌려보내는 게 큰 선물이다?

“그래. 정말 고마워, 누이.”

서무수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서무수에 이어 다른 형제들도 감사를 전했다. 감사 인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어떤 의구심도 없었다.

“왜 그랬냐고 묻지도 않아요?”

도리어 정교랑이 물었다.

“누이가 우릴 위해 하는 일은 다 옳아. 우린 누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서무수가 대답했다.

“오라버니들한테 묻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어요. 오라버니들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오 관리인과 이대작은 저도 모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경성에서 풍족하게 사는 대신 변방으로 가 말단 군졸 노릇을 하게 생겼는데, 마음에 들 수가 있나?

“아씨, 밖에 누가 물건을 가져왔답니다.”

마당에서 금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선물이 왔네요.”

시녀가 웃으며 일어났다.

“어서 들여보내.”

“아씨께서 좋은 물건들로 준비하셨으니, 한번 보십시오.”

오 관리인과 이대작도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어디 가 보자.”

서무수도 웃었다. 다들 우르르 밖으로 나가 회랑 아래에 섰다. 점포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일꾼 네다섯 명을 인솔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활이네!”

점원들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형제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경주(慶州)의 활이야!”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주인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목이 훌륭하십니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린 후,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점원들이 들고 오는 장궁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내가 득의만면한 얼굴로 자랑했다.

“저희 점포의 활은 경주의 관(官)에서 만든 겁니다. 여기 이 화살들은 각각 양석궁과 삼석궁으로…….”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나갔다.

“삼석궁은 내 겁니다!”

서봉추가 괴성을 지르며 활을 향해 달려들었다.

“삼석궁은 내 거요. 다른 것들 쓰시구려.”

그 말에 형제들도 아우성을 치며 달려갔다.

“봉추 네가 삼석궁을 당길 수나 있어? 아서라, 그러다 허리 나가.”

마당이 시끌벅적해졌고, 형제들은 서로 뺏고 빼앗으며 장난을 쳤다. 마음에 쏙 드는 활을 손에 넣은 서봉추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

서봉추는 늘 지니고 다니던 구리반지를 끼고 활시위를 힘껏 당겨 보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하, 끝내주는 활이네. 진짜 좋구먼, 힘이 단단히 들어가.”

별 힘도 안 들이고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주인도 깜짝 놀랐다.

“세상에, 호걸이십니다. 힘이 장사예요!”

주인이 서봉추를 치켜세웠다.

“이 삼석궁은 군에 있는 나리들도 제대로 못 다뤄요.”

서봉추는 더욱 우쭐하여 본격적으로 활을 쏘기 위해 뒷마당으로 가려 했다.

“우쭐할 것 없어. 경성에나 없지, 우리 형제 중 이거 하나 못 다루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다른 형제들이 서봉추를 진정시켰다. 마당은 웃고 떠드는 소리로 분위기가 한층 달아올랐다.

“셋째 오라버니는 안 골라요?”

정교랑이 물었다. 한쪽 옆에 서서 형제들을 보고 있던 서무수가 미소를 지었다.

“안 골라도 돼. 활이기만 하면 다 쓸 수 있으니까.”

“실력만 출중하면, 좋은 활이든 나쁜 활이든, 다 쓸 만할 테니까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는 웃음을 터트렸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활을 나눠 주고 확인을 마친 주인은 돈을 받고 싱글벙글하며 예를 올린 후 작별을 고했다.

“저 물건이 그리 비싸다니!”

오 관리인이 옆에서 혀를 내둘렀다.

활 하나가 자그마치 이십 관이었다. 거기에 쇠뿔로 만든 반지까지 합치면, 화살 일곱 개 값이 웬만한 집에서 일 년 동안 먹고살 돈과 맞먹었다.

“이보시오, 어르신.”

주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 경주산 활은 구하기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아무나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 관리인은 잘 모르는 분야기도 했거니와, 돈을 얼마를 쓰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아씨는 돈을 중시하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에게 돈은 장난감과 같은 것이었다. 오 관리인은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주인 사내가 돌아간 후에도 형제들은 소란스러웠다.

“누이가 돈을 많이 썼네. 군에서도 활을 나눠 줄 텐데.”

범강림이 말했다. 정교랑은 잠자코 있는데 옆에 있던 서봉추가 입을 열었다.

“군에서 주는 활은 너무 형편없잖소. 어째 매년 날이 갈수록 후진 걸 주니 말입니다. 그런 거 들곤 싸우기도 힘들어요.”

서무수가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고 누이 돈을 쓸 건 없잖아.”

서봉추가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내가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소. 그냥 한 말인데 셋째 형님은 왜 군대 편을 들고 그러시오?”

“돈 별로 안 썼어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들은 이제 돈이 많잖아요. 이십 관짜리 활이 아니라 삼십 관, 사십 관짜리라 해도 별거 아닐걸요.”

“맞아, 맞아.”

서봉추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범강림이 눈을 부라렸다.

“다만, 활의 가치는 돈에 있는 게 아니에요. 오라버니들은 왜 관에서 만든 좋은 활을 안 사고, 나뭇가지와 노끈으로 직접 만들었죠?”

시끄럽던 마당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돈이 아까워서 그랬던 건 아니야. 우린…….”

누군가가 입을 열었지만,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라버니들 스스로도 이유를 모를 거예요. 하지만 난 알아요. 내가 말해 줄게요.”

천천히 층계를 내려온 정교랑은 기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활을 들고 있는 형제들을 죽 둘러봤다.

“오라버니들은, 늘 반지를 지니고 다니죠.”

정교랑이 앞에 있는 한 형제의 엄지손가락에 있는 구리 반지를 보며 말했다. 이미 누렇게 마모되어 반들거리는 반지였다.

“나, 난 습관이 돼서…….”

형제가 쑥스러워하며 쭈뼛쭈뼛 말했다.

“네, 습관이 됐겠죠.”

정교랑이 형제들의 앞을 쭉 걸었다.

“오라버니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단련하는 데 습관이 됐어요. 무기를 손에 들고 언제든 싸울 태세를 취하는 게 습관이 됐죠. 춤과 노래가 있는 곳에 누워 있어도, 공격을 알리는 징과 북소리가 들리진 않는지,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는 데 습관이 됐어요.”

그 말에 서무수 형제는 물론이고 오 관리인과 이대작도 호흡이 거칠어져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뼛속 깊이 흐르는 혈기야말로 가장 없애기 힘든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는, 군영의 소집 명령도 없고, 동포들이 싸우고 맞서며 내지르는 비명도 없는 곳이에요. 적군이 쳐들어올 때 나는 말발굽 소리도 안 들리죠.”

정교랑은 서봉추 앞에 서서, 그가 꼭 쥐고 있는 장궁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여기에서 활은 벽에 걸어 두는 장식품일 뿐이고, 누이인 나와 함께 갖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에요.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활을 손에 넣었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죠.”

정교랑이 손을 풀고 돌아서서 천천히 돌아왔다.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 맹수고, 용은 깊은 못에 있어야 영물인 법이죠. 오라버니들의 활은, 전장에 있어야 해요. 전장에서 적의 가슴을 쏴야, 천금의 가치가 있는 활이 되죠. 그래서 오라버니들은 값비싼 활을 사러 가지 않았던 거예요. 그 활을 여기 걸어 두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호랑이는 산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우리 속에서 배불리 먹는 걸 원치 않아요. 그래서 오라버니들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금산에 앉아 한평생 태평하게 사느니, 가서 공훈을 세우고 치욕을 씻어요. 오라버니들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거기서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 버려요.”

정교랑은 층계 앞에 똑바로 서서 서무수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 오라버니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이게 선물이었구나. 이게 선물이었어.

형제들은 정교랑의 말에 심취해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여인의 갈라지고 거친 음성이 계속해서 귓가에 메아리쳤다.

탈영병.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도망쳤다고는 하나, 도망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도망치는 길에 싸우다 다쳐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에도, 겁이 난다기보다는 꺼림칙한 마음이 컸다. 병사라면 전장에서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하게 지낼 땐 그렇게까지 마음에 걸리진 않았다. 언젠가는 가난을 벗어나리라는 생각에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돈이 풍족해지자, 밤에 자다 깨기라도 하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어느새 도망자 신세가 됐다.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이. 도망치기 시작한 그날, 형제들의 혼은 반쯤 서북에 두고 왔는지도 몰랐다.

  • 호랑이는 산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우리 속에서 배불리 먹는 걸 원치 않아요.

  • 그래서 오라버니들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 금산에 앉아 한평생 태평하게 사느니, 가서 공훈을 세우고 치욕을 씻어요.

  • 오라버니들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거기서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 버려요.

실패한 곳에서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자.

마당 안은 고요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전부 새로 시작하는 거야! 죄를 씻고, 다시 시작하자!

본디 도망친 것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돈도 권력도 의지할 곳도 없는 일개 병정이 어디 가서 억울함을 푼단 말인가. 이제 억울함을 풀고 누명도 벗었다. 다시 군영으로 돌아가게 됐다.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 게 아닌가.

이번엔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죽기는커녕 소원을 이루게 됐다. 인생에 어찌 이리 놀랍고 기쁜 일이 많은지.

서무수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어쩌다가, 이렇게 운이 좋아진 걸까? 우리 따위가 뭐라고, 하늘이 이리 어여삐 여기시는지.

“선물 두 개가, 다들 마음에 들어요?”

정교랑이 재차 물었다.

“마음에 들어.”

서무수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정교랑은 제대로 못 들었다는 듯 서무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요?”

“좋다고.”

서무수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뭐라고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서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무수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따라 웃었다.

“좋아!”

“좋아!”

“좋아!”

마당에 웃고 떠드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이대작은 코끝이 찡한지 코를 비볐다.

“주인어른들께서 정말 떠나시네요. 이거 섭섭해서 어쩝니까.”

이대작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울긴 뭘 울어. 못난 사람 같으니.”

옆에서 오 관리인이 대꾸했다.

“이건 큰 경사야. 주인어른들께서 무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게 생겼잖아.”

이대작이 네, 네, 하며 끄덕이고, 고개를 들어 오 관리인을 쳐다봤다.

“형님, 뭐 하는 겁니까? 왜 고개를 그리 들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닐세. 하늘을 보는 거야.”

오 관리인은 뒤로 돌아서더니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참 좋네…….”

날이 어둑해지자, 마당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권하던 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점심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탓에, 주량이 뛰어난 형제들도 거의 만취해 곯아떨어졌다.

“술이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거야.”

취기가 오른 오 관리인은 알딸딸한 채로 중얼거리며 이대작, 금가아와 함께 곯아떨어진 형제들을 방 안으로 옮겼다. 이들은 형제들의 얼굴을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혀 준 다음에야 밖으로 나왔다.

정교랑이 회랑 아래에 서서 배웅했다.

“고생이 많아요, 관리인.”

“고생은요. 아닙니다. 고생할 수 있는 것도 복이죠.”

오 관리인이 껄껄 웃었다. 방금 전 형제들을 방으로 옮긴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앞으로 식당을 운영할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 말이 통한 듯했다.

이대작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아니지, 고생도 아니야. 이런 걸 고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진짜 복이지.

정교랑 저택의 연회가 파할 무렵, 주씨 저택의 연회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주육낭의 짐은 벌써 서북으로 떠난 후였다. 주육낭은 서북으로 새로 부임할 이들과 함께 사흘 후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내일은 주육낭이 군영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어린 아들과 떨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모친과 달리 주씨 가문 사내들은 딱히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주씨 가문에선 이런 작별이 대대로 이어졌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젠가는 겪을 운명이었고, 이날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 가면 숙부님과 백부님 말씀 잘 듣고.”

“전장은 연무장과 달라. 많이 보고 익히도록 해라.”

부친과 사촌들이 경험을 나눠 주었다.

“이거 내가 비싸게 주고 산 병서입니다. 천금을 줘도 못 구한다고요.”

“오라버니, 이거 오라버니를 위해 구한 호신용 부적이에요.”

형제자매들이 작별 선물을 건넸다.

푸짐하게 차린 연회 음식에 술과 노래가 곁들어지면서 주씨 저택의 대청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고, 연회는 야심한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씻고 나자 취기가 어느 정도 가신 주육낭은 쉬러 가는 대신 대청에 앉았다.

“공자님, 늦었습니다. 일찍 쉬세요.”

시녀들이 말했다.

주육낭은 대청에 놓인 선물들을 죽 훑었다. 형제자매가 준 것도 있고, 친구들이 준 것도 있었다. 대부분 평안과 축복을 비는 뜻을 담은 것이어서 굳이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 있는 게 전부냐?”

주육낭이 물었다. 시녀들은 영문을 모르겠는 듯 대답했다.

“네, 공자님. 요 며칠 받은 건 전부 여기 있어요. 가져가시려고요?”

주육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시녀들은 더 묻지 않고 예를 표한 후 물러났다.

잠시 홀로 앉아 있던 주육낭은 탁자 앞으로 와서 크고 작은 선물들을 하나씩 뜯어 보았다.

없군, 없네, 없어.

저번에 가장 마음에 드는 화살을 고르라 하지 않았다고, 토라져서 이젠 왕래도 안 하겠단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주육낭이 손을 멈췄다. 그건 아니겠지.

더는 왕래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한 건 자신이었다. 그 똑똑한 사람이,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주육낭은 팔베개를 하며 천장을 보고 누웠다. 회랑 아래에 있던 시녀가 고개를 들이밀고 쳐다보며 근심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공자님께서 많이 취하셨나? 왜 여기서 주무시지…….”

“일단 좀 기다리자.”

다른 시녀가 말했다. 하지만 대청에 있던 소년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앉더니 계속해서 선물들을 열었다. 두 시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으며 눈짓을 주고받고는 회랑 아래에 앉았다.

주육낭의 손이 멈췄다. 있을 리가 없잖아. 그 여인은 내가 떠나는 것도 모르는데. 안다 해도, 모르는 것처럼 굴겠지.

주육낭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벌러덩 누웠다. 발을 휘둘러 탁자와 선물들을 차 버리고는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안에 있는 소년이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자 시녀들은 가볍게 불러 보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시녀들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누운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깨울 수도 없고 옮길 수도 없어 시녀들은 이불을 가져다 덮어 주고, 안에 있는 불을 전부 끈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실내에서 눈을 뜬 소년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깊은 밤, 만물은 고요하기만 했다.

한편 정교랑의 대청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안에서 시녀가 소곤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약 냄새도 났다. 얼마 안 가 종이 문이 열리더니, 시녀와 반근이 각자 바구니를 끼고 정교랑을 따라 나왔다.

통로를 지나 뒷마당으로 가자 산석처럼 우뚝 서 있던 사람이 발걸음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셋째 도련님, 깨셨어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깜빡 잠들었네.”

서무수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멋쩍게 웃다가 곧 흠칫 놀라며 물었다.

“아니, 누이는 왜 안 자고?”

“차를 말리려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녀와 반근이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서무수에게 보여 주었다.

“아씨께서 직접 하신 거예요.”

“진 공자께서 가져다주신 차나무에서 마침 잎을 딸 때가 됐거든요.”

시녀와 반근의 말에 서무수는 고개를 숙여 바구니에 있는 찻잎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래. 누이는 정말 대단해.”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앞으로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이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마음 푹 놓고 가서 자요. 이 누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서무수가 따라 웃으며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데.”

정교랑은 잠자코 있는데, 서무수가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사실 걱정 안 해도 되는 거 알아.”

서무수가 말했다.

그래서 걱정을 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몇 걸음 뒤에 있던 시녀와 반근이 눈을 마주치며 입을 삐죽거리고 웃었다.

“저기, 앞으론 밖에 자주 놀러 나가. 갑갑하게 혼자 집에만 있지 말고.”

“난 외롭지 않아요.”

정교랑이 돌아보며 씩 웃었다.

“걱정 마요, 오라버니.”

서무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금가아가 깔아 놓은 대나무 자리 앞에 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서무수가 손을 뻗자 시녀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건넸다.

“남들 눈엔, 내가 가엾어 보이겠죠.”

정교랑은 소매를 걷고 서무수가 건넨 바구니에서 차를 꺼내 널며 말했다.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무서울 수도 있고요. 그건 그 사람들 생각일 뿐, 내 삶이 아니에요.”

그래. 그건 남들 생각이지. 이 여인은 스스로가 가엾지도, 무섭지도 않으리라.

서무수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틀에 박힌 사람이라 그래.”

“그러니까 걱정 마요, 오라버니. 잊지 마요. 오라버니들을 만나기 전에도, 난 늘 이렇게 지냈어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들이 떠나도 변함없이 이렇게 지낼 것이다. 어쩌면, 오라버니들이 없는 삶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지.

너무나도 솔직한 말이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솔직한 말. 그 사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변함없는 사실이리라.

오라버니들을 만난 것도 기껏해야 일 년밖에 안 되지 않았는가. 일 년은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일 년 동안 그녀에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지만, 서무수 형제들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서무수는 말이 없었고 정교랑 역시 말이 없었다. 한 사람은 차를 널고, 한 사람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두 바구니에 있던 찻잎을 금세 다 널었다.

“그래. 앞으로의 일은, 누이 혼자 해. 이 오라비는 못 도울 것 같아.”

서무수가 손을 털며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어서 가서 자. 요 며칠 많이 고단했겠네.”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시녀와 반근도 예를 올린 후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등롱을 들고 밝아졌다 흐려졌다 하며 멀어지는 여인의 모습을, 서무수는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 올 무렵, 문을 열던 시녀는 깜짝 놀랐다.

“공자님은?”

시녀가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공자님 못 봤어?”

나머지 시녀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대청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이불은 한쪽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연무장에 가셨나?”

“왜 못 들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계셨는데.”

“오늘 군영으로 들어가시는데도 연무장에 가시다니, 정말 열심이시네.”

같은 시각 주육낭은 옥대교 저택의 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공자님, 새벽부터 웬일이세요?”

금가아가 졸린 눈으로 문을 붙잡고 말했다.

“새벽은 무슨. 대문 앞이나 쓸지, 아직도 자빠져 자냐!”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금가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빗자루를 손에 쥐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육낭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한참을 서성일 때처럼, 주육낭은 마당에서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데요? 다들 일어나지도 않으셨다고요.”

금가아가 따라와 기분 나쁜 투로 물었다. 주육낭은 한숨을 내쉬고 조용한 마당을 둘러본 후, 뒤돌아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너희 아씨한테, 나 떠난다고 해라.”

주육낭은 걸어가며 금가아에게 말했다.

“앞으론…….”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주육낭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앞으로 뭐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심호흡을 하고 돌아섰던 주육낭은 여인이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머리도 빗지 않은 채 문 앞에 선 모습을 보고 얼른 다시 돌아섰다.

“앞으로, 앞으론 말썽 그만 피워.”

뒤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육낭이 발을 들어 두 걸음쯤 옮겼을 때였다.

“아, 나한테 작별 인사를 하러 왔군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너 좋을 대로 생각해라.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경성은 만만치 않은 곳이야. 조심하는 게 좋아.”

웃는 듯 아닌 듯한 여인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반근, 간식 좀 가져와.”

정교랑이 말했다.

망할 여인 같으니라고! 주육낭은 홱 돌아서서 정교랑을 노려봤다.

대청 안은 어두웠고, 밝아오는 새벽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소녀는 짙은 무채색 옷차림에, 머리는 칠흑처럼 새카맸다. 소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주육낭은 자신이 거기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대로변에 서 있었고, 손에는 간식이 든 함이 들려 있었다.

주육낭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서 빨리 함에 든 간식을 길가의 거지들에게 던져 주거나 냇물에 처박아 버려야 했다.

벌써 성문이 열린 후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수레를 미는 사람, 말을 끄는 사람, 말을 탄 사람 등등이 분주하게 오갔다.

주육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은 함을 품속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이야.”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뭘 그렇게 주섬주섬 챙겼어?”

당황하던 주육낭은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고개를 들어보니 훤칠한 공자가 말을 탄 채 휙 지나가고 있었다.

“어이.”

주육낭이 저도 모르게 소리치자 진십삼이 고개를 돌렸다.

“왜?”

진십삼이 놀란 듯 물었다. 주육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십삼을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일 보러 나가.”

진십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간다.”

말하면서도 진십삼은 말고삐를 당기지 않았다. 말을 마쳤을 때 진십삼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고, 고개를 돌리며 말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주육낭은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먼저…… 간다니…….

진십삼과 말은 인파 속을 헤치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저 자식이, 저 망할 자식!”

주육낭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고는, 미친 듯이 달려갔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인지라 진십삼의 말은 빠르게 내달릴 수 없었기에,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육낭에게 따라잡혔다.

“아니, 뭐가 그리 바빠? 빨리도 뛰었네.”

진십삼이 말 위에서 웃으며 물었다. 주육낭은 진십삼 옆에 멈춰 서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시치미 작작 떼고, 냉큼 내려와.”

주육낭이 노려보며 말하자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욕을 하고 이래?”

“욕이 대수냐? 팰 수도 있어!”

주육낭은 진십삼을 움켜잡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사람을 팬다고?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그래, 그래. 내가 알아서 내려갈게. 어휴, 이 창피한 인간.”

두 소년이 싸우기는커녕 어깨를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고, 거리의 행인들은 실망스러운 듯 흩어졌다.

“나 진짜 바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바쁜 사람이 꼭두새벽부터 날 미행해?”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얼씨구, 꿈도 야무지네. 내가 자네를 미행해서 뭐 하려고?”

진십삼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만해. 난 거짓말 못 하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본인이 잘난 줄 아나 본데, 전엔 내가 비위 맞춰 줬던 것뿐이야.”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내게 네 마차랑 부딪쳤을 때 웃으며 괜찮다고 하면서도 너 속으론 나 엄청 욕했잖아. 그게 안 보일 줄 알아?”

진십삼이 하하 웃었다.

“아, 진짜 그게 보였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약조대로 한 거야?”

“일개 절름발이를 내가 무서워하기라도 할까?”

“절름발이라. 전엔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었는데.”

“널 속인 거였어. 그걸 믿냐?”

그러더니 주육낭이 손을 내밀었다.

“얼른 내놔. 나 바빠, 빨리.”

“무슨 소리야? 내놓으라니 뭘?”

진십삼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주육낭은 퉤 하고 침을 뱉은 후 손을 훅 뻗어 진십삼의 허리춤에 있는 비수를 낚아채려 했다. 진십삼이 얼른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내 거야, 내 거.”

다리가 다 낫긴 했지만 걸음마를 떼자마자 무예 단련을 시작한 주육낭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진십삼은 금세 비수를 빼앗겼다.

눈에 띄는 비수는 아니었다. 칼집도 수수하고 보석이나 금은을 박아 둔 것도 아니었다. 주육낭이 비수를 뽑아 보더니 혀를 찼다.

“위주(涠洲) 단(段)씨의 칼이네.”

주육낭은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었다.

“쓸만하군. 선물에 성의도 있고.”

옆에 있던 진십삼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 건?”

주육낭은 비수를 잘 집어넣고 진십삼을 힐끔 쳐다봤다.

“내가 선물 받아주는 게 자네한텐 최고의 선물 아닌가?”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주먹을 뻗어 주육낭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누이를 닮아 점점 영악해지네!”

“잘 나가다가 그 애 얘긴 왜 꺼내? 단념하는 게 좋아. 종일 그 애 생각만 해 봤자, 소용없다고.”

진십삼은 웃으며 대꾸하지 않고 배를 두드렸다.

“급하게 나오느라 밥도 못 먹고 나왔어.”

진십삼이 주육낭을 보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런데 자네는 간식까지 싸 왔군. 좋아, 좋아. 어서 꺼내 봐.”

진십삼이 손을 뻗었지만 주육낭이 한발 먼저 몸을 피한 후였다.

“먹긴 뭘 먹어.”

“그 낭자가 준 건 별로라며? 눈에 거슬려서 심란하기만 할 텐데, 내가 대신 처리해 줄게.”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다시 피했다.

“나 가면, 그 애 잘 보살펴.”

주육낭의 말에 진십삼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살필 필요나 있나. 난 은혜를 갚을 수도 없는 사람인데.”

주육낭이 걸음을 내디뎠다. 진십삼이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진십삼은 아직 주육낭처럼 말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몰랐다.

“다른 사람은 믿을 수도 없고 믿음도 안 가. 자네밖에 없어.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맡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지.”

진십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치켜세우는 거야? 깔보는 거야?”

진십삼이 주육낭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주육낭이 팔을 들어 막고, 다시 진십삼에게 주먹을 날렸다.

“부실한 몸이나 좀 단련해. 나중에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쯤엔 내 주먹을 막을 수 있나 봐야겠다.”

“걱정 붙들어 매. 난 자네보다 십 년 늦었을 뿐이야. 자네가 돌아왔을 때 누가 누구한테 맞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주육낭이 입을 삐죽거렸다. 어느덧 길 어귀에 다다르자 진십삼이 걸음을 멈췄다.

“그럼 이만 갈게.”

주육낭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일이 있는 거야?”

“응, 아버지께서 선생을 소개해 주셨어. 근데 이 선생을 모시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말이지. 매일 아침 일찍 가서 문 앞에서 대기해야 해.”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자네를 배웅 나온 것도 사실이고.”

진십삼은 웃으며 주육낭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진십삼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급제하길 기도할게.”

“기도까진 필요 없어.”

진십삼이 웃음을 지었다. 아침 햇살 속에서 소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주육낭을 향해 공수했다.

“적진을 휩쓸며 하루빨리 전공을 세우길 기도할게.”

“뭘 기도씩이나. 당연한 일인데.”

주육낭이 턱을 치켜들며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몸을 훌쩍 날려 말 위에 올라탄 진십삼은 서쪽으로 향했고, 주육낭은 동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말을 타고 시끌벅적한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날이 잔뜩 흐려지자 경성 군영에 있던 몇 사람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비가 오면 출발이 지체될 텐데.”

“며칠 지체되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근심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 멀리서 환호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영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군졸들이 한곳에 모여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훌륭한 궁술이군!”

“전장에 나가면 혼자서 열 명은 죽이겠어.”

여기저기서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오자 서봉추는 득의양양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정도 실력이야 뭐. 당초 이 궁술로 군공을 세웠는데, 그 망할 자식이 공을 가로채려 했지 뭔가. 열 받아서 활을 쐈더니 그놈이 지레 겁먹고 놀라 자빠져 죽었지…….”

서봉추가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데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이 무슨 짓이냐!”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노기등등한 유규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 탈영병을 잡은 공을 세운 유 대장이라지만, 집안에서도 조정에서도 성가신 존재였다. 결국 유 대장은 바람대로 다시 서북으로 가게 됐다.

일개 대장에 불과했지만 엄연히 관청 소속이라 평범한 군졸들보다는 신분이 높았다. 모두가 유규에게 예를 표하며 뒤로 물러났다.

“여긴 경성 군영이다!”

유규는 특히 서봉추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묘기를 보이려거든 거리에 나가서 해!”

서봉추는 콧방귀를 뀌고 활을 거둔 후, 다른 군졸들과 함께 자리를 뜨려고 했다.

“서라. 활은 두고 가야지.”

유규의 말에 서봉추는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렀다.

“뭐요?”

“군에서 활을 나눠 주지 않았느냐? 누가 그걸 쓰라 했지? 사사로이 무기를 소지하면 군의 기강이 어지러워진다. 냉큼 내놔라.”

이제 서봉추에게 삼석궁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잘 때도 끌어안고 잘 정도였으니까. 좀 거칠긴 해도 바보는 아닌지라 서봉추는 유규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며칠 굶었다가 살찐 양을 만난 늑대처럼 눈을 반짝이는 유규의 모습을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퉤. 좋은 무기를 소지하지 말란 말은 못 들었소이다. 군의 돈을 아낄 수 있는 좋은 일을 왜 막으려 하는지 모르겠소.”

“좋은 무기? 좋은 무기도 너희 손에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놓으라면 내놔.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겠단 거냐? 이리 안하무인인 자를 누가 써? 노역도 못 시켜 먹겠다!”

안하무인인 자를 누가 쓰냐고?

서봉추 같은 일개 병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어제 경성 군영으로 들어온 후, 서무수는 형제들에게 강조했다. 다시 군영으로 돌아온 건 치욕을 씻고 공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공을 세우려면 전장에 나가야 한다. 군에서는 전장에 나가서든 후방을 지킬 때든 상관의 명에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안하무인으로 굴며 명에 불복한다는 소문이 나면, 아무도 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봉추는 자리에 선 채 눈을 부릅떴고, 유규는 우쭐한 표정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당장이라도 활을 낚아챌 자세를 취했다.

볼 필요도 없이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경주의 장궁, 그것도 삼석궁이었다. 만들어진 그 순간부터 피에 굶주린 듯 기운을 풍기는 활이었다. 우리에 갇힌 맹수 같은 활.

이렇게 훌륭한 무기는 그의 집에도 물론 있었다. 다룰 자격은 없었지만.

나도 감히 못 다루는 활을, 이 쓸모없는 탈영병들은 뭔데 죄다 하나씩 갖고 있는 거야! 이리 내라. 진정한 주인의 손으로 와야지.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자기가 살 돈이 없다고 남의 걸 빼앗으면 쓰나.”

누군가가 옆에서 말했다.

“남의 무기까지 빼앗을 정도면, 무엇인들 못 빼앗을까? 이런 사람을 누가 쓰나?”

유규는 무엇에 찔리기라도 한 듯 발을 탁 구르며 돌아섰다.

“어떤 새끼가 입을 나불…….”

고함을 지르던 유규는 말이 목에 턱 걸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 위에 있는 대여섯 명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유규보다 어렸지만 엄연히 전전사(殿前司) 소속의 군관들이었다.

“유 대장, 위세가 대단하군.”

주육낭이 말 위에서 유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유규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일단 예를 표했다.

“당치 않습니다.”

유규가 홱 뒤돌아 자리를 떴다.

“훌륭한 활이구나. 네 궁술도 훌륭하고.”

옆에 있던 군관들이 서봉추를 보며 말했다. 칭찬을 들은 서봉추는 기분이 좋아 입이 헤 벌어졌다.

“활은 훌륭하다만, 여기서 자랑하라고 준 건 아니지.”

주육낭이 냉랭한 얼굴로 말하자 서봉추의 얼굴도 굳어졌다.

“여기서 열 명한테 잘한단 소리를 듣느니, 적진에서 적군 한 놈을 죽이는 게 나아. 전장에 안 나가 본 나도 아는 이치인데, 무슨 낯으로 병사 노릇을 하는지 모르겠군.”

말을 마친 주육낭은 말을 몰아 자리를 떴다.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웃더니 서봉추를 힐끔 쳐다본 후 뒤따라 자리를 떴다. 서봉추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거 성질은.”

서봉추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거렸다.

“따지고 보면 나한테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봉추!”

멀리서 서무수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서봉추는 움찔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유규가 막아섰다.

“왜 이러시오?”

서봉추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유규는 서봉추의 손에 들린 활을 뚫어져라 보더니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시선을 거뒀다.

“내가 네놈들 똑똑히 지켜볼 거다!”

유규가 이를 갈며 말했다. 서봉추는 퉤 하고 침을 뱉은 후 유규를 밀치고 달아났다.

서봉추는 서무수 등에게 따끔하게 혼났다. 범강림은 활을 압수하며 서북에 도착하면 돌려주겠다고 했다. 서봉추는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내일이면 출발이다. 가는 길에 아무도 말썽 피우면 안 돼. 누가 비웃고 시비를 걸든 우리가 할 일만 생각해야 한다.”

서무수가 말했다.

“그래. 누이는 우리가 길에 오르게 해 주었어. 앞으로 어떻게 걸어갈지는 우리한테 달렸지. 이제 망신을 당하면, 우리 체면만 깎이는 게 아니야. 누이의 체면도 깎인다고!”

범강림이 서봉추를 노려보며 말했다.

“날 왜 노려보시오? 난 망신당할 짓 안 합니다.”

서봉추가 대꾸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누이가 선물을 세 개 준비했다지 않았소? 두 개밖에 안 줬는데, 하나는 뭐지?”

서봉추가 화제를 돌리자 나머지 형제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잘났다. 딴소리하는 건 아주 도사야.”

서무수도 실소를 터트렸다.

“그건 또 잘도 기억했네.”

“누이 손으로 직접 술상을 차려 줬잖아. 그것도 선물이지.”

누군가가 해명했다. 서무수도 선물이 몇 개인지 따지려던 게 아니라 그저 화제를 돌리려던 것뿐인지라 웃어넘겼다. 서무수는 고개를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 경성 방향을 힐끔 쳐다보았다.

“가자고.”

범강림이 서무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거뒀다.

시끌벅적한 경성 군영과 달리, 경성에 있는 한 객잔의 오후는 한가로웠다. 계산대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점원은 낮고 어지러운 걸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비단옷을 입은 공자가 발소리를 죽여 대청을 살금살금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왕 공자님.”

점원이 입을 열자 소년 공자가 돈주머니를 훅 던졌다.

“입 다물어.”

소년은 목소리를 낮춘 채 으름장을 놓았다. 점원은 졸음이 쏟아져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도 돈을 안정적으로 받아들고, 문을 나서는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난 그냥 인사하려던 거다. 누가 잡아가라고 소리치기라도 한댔나.”

점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혼잣말을 하고는 손에 든 돈주머니의 무게를 헤아려 보며 흡족해했다.

“재미있는 녀석이네. 며칠 더 묵으면 좋으련만.”

한달음에 객잔을 빠져나온 왕십칠은 좌우를 두리번거린 후, 한 방향으로 뛰었다.

“왕 공자님.”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자 왕십칠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뒤따라 달려오던 어린 몸종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왕 공자님, 객잔 문 앞에 있었는데, 못 보고 바로 달려가시더라고요.”

왕십칠이 웃음을 터트렸다.

“놀라서 그랬지. 춘령, 어쩐 일로 왔어? 주 낭자가 날 보고 싶다더냐?”

겨우 한 번 본 걸 가지고. 주 낭자는 네가 누군지도 잊었을 거다. 춘령이 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얼간이네. 얼간이일수록 좋긴 하지만……. 춘령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아니요. 한동안 안 보이시기에 보러 왔죠. 전 또 떠나신 줄 알았네요.”

“아니야. 집안사람들한테 감시를 받았어. 날 데려가려고 하지 뭐냐.”

왕십칠은 분한 듯 씩씩거렸다.

“경성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지. 주 낭자와 술도 한잔해야 하고 말이다.”

“며칠 후면 8월 15일이라 경성에서 꽃등 놀이가 열려요. 저희 덕승루 사람들은 다 구경 갈 거예요. 꽃등 구경도 하고, 꽃등을 띄우기도 하겠죠. 공자님도 같이 놀러 오세요.”

다들 구경을 간다면, 간판 기녀인 주 낭자도 가겠지. 순간 눈빛을 반짝이던 왕십칠은 곧 고민에 잠겼다.

“저놈들이 안 보내줄 텐데.”

“공자님, 정혼자가 경성에 있으시다면서요?”

춘령이 눈을 찡긋거렸다.

“정혼자와 함께 경성 구경을 하시는 게 어때요? 황제 폐하와 대신들도 다 구경 간대요.”

정혼자! 아, 맞다. 정혼자가 있었지!

왕십칠은 몹시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그는 정 낭자와 정혼한 사이였다.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나 상대가 정혼자라면 명절을 맞이하여 함께 놀러 나가는 것 정도는 가능한 세상이었다. 정말이지 더없이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래, 그래. 잘됐다. 내가 말해 봐야겠다.”

왕십칠은 신이 나서 자리를 떴다.

춘령은 급히 걸어가는 소년 공자를 보며 얼굴에 있던 웃음을 싹 걷었다. 입가에 남은 건 냉소뿐이었다. 춘령이 휙 뒤돌아 총총 걸어갔다.

잔뜩 흐린 하늘이었지만 비가 내리진 않았다. 밤이 지나자 날이 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금가아는 손에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았다.

“주 공자는 떠난 거 아니었나? 누가 또 아침부터 문을 두드려?”

금가아는 투덜대며 문틈으로 밖을 쳐다봤다.

“금가아, 너희 낭자 안에 계시냐?”

진십삼이 웃으며 물었다.

시녀는 차를 올리고, 반근은 간식을 한 접시 내왔다.

“이젠 대우가 정말 좋네요.”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전에도 좋았어요.”

정교랑이 대꾸했다.

“네, 네. 낭자는 늘 좋았죠. 제 마음이 문제입니다.”

진십삼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낭자한테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내가 요즘 선생을 새로 청해 글공부를 배우느라 집을 비울 때가 많습니다. 날 찾을 일이 생기거든 우리 집 문간으로 와서 전하면 돼요. 내가 당부해 두었습니다.”

정교랑은 진십삼을 보기만 할 뿐 잠자코 있었다.

“물론, 낭자는 내 도움이 필요 없겠지만요. 그래도 말은 해 놔야죠.”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론 모르겠지만, 지금은 도움을 청할 일이 하나 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은 멈칫했다.

“정말 있어요?”

진십삼은 웃음기를 거두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낭자, 말해 봐요. 이번엔 누굴 해치우려고요?”

옆에 있던 시녀는 하마터면 눈을 흘길 뻔했다.

옥처럼 고운 소년이 얌전하고 단정한 낭자 앞에 앉아 다과를 즐기고 있지 않았던가. 하늘도 맑고 공기도 상쾌한 가을날, 이 좋은 때에 좋은 생각 좀 하면 안 되나? 아씨께서 무슨 입만 열었다 하면 남의 목숨을 빼앗는 산적이나 토비, 살인마라도 돼?

어둠이 짙어지자, 발 빠른 전령병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영내에 소식을 전했다. 온종일 말과 함께 길을 재촉하던 사람들은 막사를 치고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다지 멀리 온 것도 아니었다. 황제에게 작별을 고하고 성은에 감사드리는 의식을 치르고, 점심때가 지나서야 출발했기 때문이다.

백 명이 채 안 되는 행군 부대였지만, 그들의 주요 임무는 서북 참전이 아니라 서북에 새로 부임하는 조정 관리들을 안전하게 호송하는 것이었기에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경략사와 새로 부임한 무장들은 기존 주둔 지역에서 곧장 서북으로 이동했다. 경성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북의 군무를 조사하러 가는 감찰관이었다.

물론 주육낭, 서무수와 같이 서북 전선을 보충하기 위한 병력이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조정의 고위급 관리나 무장들 앞에서 그들의 존재는 한 톨 먼지에 불과했다.

행군이 지체되는 이유도 천천히 가려는 관리와 서두르려는 관리들끼리 은연중에 기싸움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반나절이 지나도록 행렬은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밖에 당도하지 못했다.

“에라이, 대체 오늘은 뭣 하러 야영하겠다는 거야? 사나흘을 꼬박 달려서 온 것도 아닌데, 쉴 게 뭐 있다고.”

모닥불 옆에 앉아 있던 서봉추가 투덜거렸다.

“토 달지 말고 입 다물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서무수가 서봉추를 노려봤다.

“마음이 급하니 그렇잖소.”

서봉추는 기가 죽은 듯 한마디 대꾸하고는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큰형님, 큰형님. 형님 혼자 활을 세 개나 들고 다니긴 힘드니까, 내가…….”

“힘들긴 힘들구나. 그럼 군에서 나눠 준 활은 네가 메고 다녀라.”

범강림의 말에 서봉추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다른 형제들은 그런 서봉추의 모습에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들의 활도 서봉추에게 건네려 했다.

“넷째 형님, 내 말 좀 봐 주시오.”

서봉추가 고개를 돌리며 서사근을 찾았지만, 그는 모닥불 근처에 없었다.

“넷째 형님은 벌써 말들을 돌보러 갔어. 형님이 말발굽을 수리하는 솜씨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까, 사람들이 죄다 형님을 찾아와서는 말발굽을 수리해달라잖아.”

형제들이 잡담을 나누던 중, 갑자기 서무수가 미간을 찌푸린 채 벌떡 일어나더니 한곳을 응시했다.

“누가 왔어.”

범강림이 재빨리 곁에 두고 있던 활을 집어 들고 일어서자, 다른 형제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부대의 앞뒤에서 정찰과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소식을 전했다.

“괜찮습니다. 우리 사람입니다.”

전령병이 뛰어다니면서 외치자, 자리에 서서 경계하고 있던 병사들이 중앙의 막사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군관 몇 명이 이미 막사 밖으로 나와 있었다.

별로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경성에서 그리 떨어져 있는 곳도 아니고, 관로로 행군하고 있던 데다 깃발만 보아도 조정의 군대임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이런 관로에서 누군가가 소란을 피운다면 경성에 있는 수많은 관리가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던 군관이 전령병의 문서를 쓱 훑어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옆에 있던 다른 군관에게 건넸다. 전령병의 문서를 죽 돌려 본 군관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지었다.

“황당한 노릇이군.”

군관 중 한 명이 불만스러운 듯 투덜대고는 소매를 휙 내치며 자리를 떴다. 문서를 본 다른 무관들도 고개를 가로젓거나 말없이 각자의 막사로 돌아갔다. 팽팽했던 긴장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자, 일어섰던 병사들도 경계를 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구래?”

“여기 와서 뭘 한다는 거지?”

다들 경성을 떠나온 방향을 내다보며 목소리를 낮추고 수군거렸다. 야외의 밤은 경성의 밤보다 훨씬 어두워서, 아무리 목을 빼고 쳐다보아도 새까만 하늘 아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듣자니 배웅하러 온 거라던데?”

이 말을 듣자마자, 서무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한쪽 옆에서 새 소식을 공유하던 병졸들에게 물었다.

“누굴 배웅한단 말이오?”

“이 야밤에 쫓아오는 것도 모자라서 관청의 전령병을 길잡이로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보통내기는 아닐 거요. 그러니 댁이나 나 같은 사람을 배웅하러 온 건 당연히 아니겠지.”

대답하던 병졸은 군관들의 막사를 향해 눈짓하고는 입을 삐죽였다.

“이번 행군에 젊은이들이 많잖소. 다 관가의 자식들이니, 집안에서 얼마나 응석받이로 키웠겠어? 가족들이 아쉬워서 그냥은 못 보내겠지.”

그런 말을 나누는 사이, 새까맣던 하늘 아래에 횃불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배웅하러 온 사람들이 꽤 많은가 보네. 영지에 있던 병졸들은 다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일어서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내다보았다.

멀리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영지 가까이 다가오자, 바람에 일렁이는 횃불이 말을 타고 오던 열댓 명의 사람과 마차 한 대를 비췄다. 열댓 명의 호위 뒤로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도 몇 필 보였다.

“어느 가문이길래 호위한테도 말을 두 필이나 붙여주는 게야?”

병졸들은 놀란 얼굴로 감탄했다.

장거리 이동에서 제일 크게 상하는 게 말이었다. 이동에 가장 좋은 방법은 말 두세 마리를 번갈아 가면서 타고 가는 것인데, 말이 귀한 중원 지역에서는 이런 사치스러운 일이 극히 드물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서북 군영이라고 해도,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말 두세 마리를 동시에 배정받을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능력이 뛰어난 척후병에게만 주어졌다.

미리 전령병이 소식을 전한 덕에, 행렬은 병사들의 제지를 받지 않고 영지 밖에 말을 세웠다. 마차의 휘장이 들리더니, 여인 한 명이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 영지에 있던 병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거 보시오. 내가 뭐랬소? 어느 집 여인이 가족을 배웅하러 오는 거라니까.”

병졸 하나가 서무수에게 으스대며 말했지만, 서무수는 대꾸 없이 놀란 눈으로 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병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무수 옆에 있던 형제들을 쳐다보자, 형제들도 눈알이 떨어질 모양새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놀랄 게 뭐 있다고 저러는 거야?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내들이네!

병졸이 서무수 일행을 비웃으려는 찰나, 서무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다름 아닌 배웅 온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자네를 찾으러 온 것도 아닐 텐데, 괜히 가까이 구경 가서 얻어맞지 말게나!”

병졸이 서무수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봉추가 외마디 함성을 지르고는 서무수와 같은 방향으로 뛰어갔다. 이어서 다른 형제들도 서봉추의 뒤를 따랐다.

떠들던 병졸은 깜짝 놀랐고, 다른 사람들도 서무수 일행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배웅을 나온 사람들의 호위가 서무수 일행을 때리거나 제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놀랐고, 서무수 일행이 마차 앞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내렸던 여인이 그들을 향해 예를 올렸다는 점에서 두 번 놀랐다.

예를 올리다니! 구경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 비렁뱅이 병졸들을 배웅 온 건 아니겠지?”

방금 전의 병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반근이 휘장을 들어 올리자,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누이,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생겼어?”

일곱 형제는 걱정스럽고 다급한 마음에 중구난방으로 물었다.

“배웅 왔죠.”

정교랑이 가볍게 대답하자, 일곱 형제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정말로 세 번째 선물이 있는 거야?”

서봉추가 소리쳤다.

“당연하죠.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나요?”

정교랑이 손으로 한쪽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예요.”

정교랑이 가리키는 곳에는 말 일곱 필이 콧김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말을 선물하러 왔던 거구나.

“콧등이 하얀 건 내 거야!”

서봉추가 제일 먼저 외치면서 말을 향해 뛰어갔다. 다른 형제들도 웃으며 서봉추의 뒤를 따라갔다.

“정말 이럴 필요 없어. 급히 행군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기마병도 아니니, 서북에 도착하면 써먹지도 못해. 왜 이 야밤에 달려온 거야? 혼자 왔어?”

서무수가 미간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 호위들, 주씨 가문 사람들이었나?

서무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커다란 두봉을 걸친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낭자와 함께 왔습니다.”

말에서 내린 사람이 두모를 걷자, 횃불 아래로 소년의 준수한 용모가 드러났다.

수하 한 명이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공자님, 공자님!”

이 막사는 네 명이 묵는 곳이지만, 다른 세 명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러 갔기에 지금은 주육낭 혼자만 막사에 남아 있었다.

“웬 호들갑이야!”

횃불 아래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주육낭이 호통을 쳤다.

“공자님, 공자님. 정 낭자께서 오셨어요!”

수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주육낭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

“정 낭자요. 정 낭자께서 배웅하러 오셨어요!”

수하가 연이어 외쳤다.

배웅을? 배웅을 왔다니!

주육낭은 온몸에 가시가 돋아 바닥에서 한껏 뒹굴어야 직성이 풀릴 듯한 심정이었다.

이게,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주육낭은 시뻘게진 얼굴로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하가 주육낭의 등에 대고 한마디 더 외쳤다.

“아, 진 공자님도 오셨어요.”

눈빛을 반짝이며 막사를 뛰쳐나온 주육낭은 저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여럿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횃불도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지만, 주육낭은 커다란 두봉으로 몸을 싸맨 채 마차 옆에 서 있는 정교랑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어서 두모를 벗어 손에 쥐고 누군가와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는 듯한 진십삼의 모습도 주육낭의 눈에 들어왔다.

저 인간들이!

“정말로 저들을 배웅하러 온 거래?”

“뭘 선물로 줬다고? 말 일곱 필?”

“얼마나 좋은 말이길래 이 밤중에 쫓아왔대?”

막사 사이를 가로질러 지나가는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육낭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나 싶더니 결국 멈추어 섰다.

“듣기로는 누이랑 매부가 배웅 온 거라던데?”

누이랑 매부는 무슨! 주육낭이 고개를 홱 돌려 떠들던 병졸들을 노려보다가 병졸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리 구경하는 게 규율에 어긋나긴 하지. 그래서 저 어린 군관이 언짢은가 보네. 더 있다간 눈에서 불이 나오겠어.

병졸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주육낭은 그 자리에 서서 정교랑이 있는 곳을 내다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무언가가 잡히는 느낌이 들어 손을 내려다보니, 조금 전 막사 안에서 읽고 있던 책이 여전히 손에 쥐어진 채였다.

“누이, 인제 그만 돌아가.”

말하고 보니 밤길에 돌아가는 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서무수가 잠시 후 다시 말했다.

“아니면 마차에서 하룻밤만 쉬고 가는 건 어때? 괜히 밤길 서두르지 말고.”

범강림도 형제들에게 지시했다.

“모닥불 피워.”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말을 선물하러 온 거예요. 이제 돌아가야죠.”

“앞으로는 이렇게 무모하게 굴지 마. 누이가 이렇게까지 해 주면, 우리가 뭐가 돼.”

서무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정교랑에게 말했다. 정교랑이 몸을 낮춰 사과했다.

“원래는 더 일찍 주려고 했는데, 계속 완성이 안 돼서, 시간이 지체됐어요. 오라버니들한테 걱정을 끼쳤네요.”

옆에 있던 진십삼이 미소를 짓고는 서무수에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있잖습니까. 정 낭자가 그리 경솔하고 위험을 무릅쓰는 성격도 아니고요.”

서무수와 범강림이 진십삼을 향해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보였다.

“그럼 공자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영광이지요.”

진십삼이 서무수와 범강림에게 가볍게 답례했다.

쳇, 정말 누이와 매부 같잖아. 주육낭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으스러트릴 기세로 꽉 쥐었다.

누이와 매부라고 해도, 정작 피 섞인 오라버니는 여기 있는데!

“넷째 오라버니.”

정교랑이 갑자기 서사근을 부르자, 서사근이 서둘러 정교랑 가까이로 다가왔다.

“사실 이 세 번째 선물은 오라버니를 위한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서사근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 둘 바를 몰랐다.

“나 말이야?”

서사근이 물었다.

“넷째 오라버니, 이 말들을 잘 돌봐 줘요. 시간이 지나면, 이 말들의 능력이 눈에 보일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말? 능력? 서사근은 정교랑이 데려온 일곱 필의 말을 쳐다보았다. 좀 전에도 말들을 훑어봤지만 사실 그다지 좋은 말이라 할 순 없었다. 적어도 누이가 야밤에 쫓아와 선물할 정도로 특출나게 좋은 말은 아니었다.

물론 가격으로 따졌을 땐 값지다고 할 만한 선물이 아니었지만, 누이의 성의가 듬뿍 담겨 있는 선물인 건 분명했다.

그런데 이 말들에 다른 능력이 있다고?

“그게 뭔데?”

서사근이 물었다.

“말들을 얼마나 잘 돌보느냐가 관건이에요. 넷째 오라버니가 가는 길에 잘 보살펴 준다면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말은, 필요 없어요. 설명할 수도 없고요.”

정교랑이 싱긋 웃고는 서무수 형제에게 예를 올리며 작별을 고했다.

“군영이라 여인이 있기 불편하니, 이 누이는 이만 갈게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 가지 마.”

서무수 형제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재차 만류했다.

“걱정 마십시오. 호위도 많이 데려왔고, 경성으로 가는 관로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진 공자께 잘 부탁드립니다.”

서무수 형제들이 진십삼에게 예를 표했다.

이쪽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말 머리를 돌리는 것을 본 주육낭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저 두 인간이!

“여러 장병 여러분, 부디 가는 길 순조로우시길 바라며, 가는 곳마다 성공이 따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진십삼이 양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진십삼의 호령에 따라 열댓 명의 호위들도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를 배웅하든 축복의 말은 언제나 사람을 즐겁게 한다. 영지에 있던 장병들이 모두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누군가가 말을 길게 늘어뜨리면서 진십삼의 축복에 화답하자, 더 많은 사람이 좋다고 외치며 영지 안이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진십삼은 공수의 예를 표하고 말 머리를 돌려 천천히 멀어져 갔다.

정교랑 일행이 떠나자 영지 안은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많은 이들이 서무수 형제에게 몰려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보고 있었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주육낭은 멀어져 가는 행렬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쉿.”

누군가가 외쳤다.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던 사람들이 순간 멈칫했다.

“들어 봐!”

소리쳤던 이가 다시 한번 말했다.

뭘 들으라는 거야? 영지의 소란스러움이 차츰 잦아들자, 밤공기를 타고 흘러오던 목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제후에 봉해져야지(丈夫出世兮, 當封侯)…….”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여인의 쉰 목소리가 북소리와 함께 전해져 왔다.

“……사내라면 이 한 몸 바쳐 공을 세워야지(男兒立命兮, 有功業)…….”

서무수가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고는 행렬이 멀어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저 노래,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데.

익숙한 건 비슷한 광경을 어디선가 보아서였기 때문이고, 낯선 건 여인의 호흡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져 노랫소리가 길고 멀리까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누이가 우릴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어!”

서봉추가 큰 소리로 외치자, 주위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손동작을 했다.

“거, 시끄럽게 하지 마시오. 안 들리잖소!”

서봉추는 머쓱했는지 허허 웃고는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 누이가 우릴 위해 부르는 노래야.”

서봉추도 다른 이들을 따라 목을 길게 빼고는 간간이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밤하늘 아래 보이던 횃불들이 점점 더 멀어져갔다.

“나라의 명을 받아 계문으로 달려오니, 군사로 동원되어 머무를 수 없구나(召募赴薊門, 軍動不可留).”

“천금으로 말 채찍을 꾸미고, 백금으로 칼자루를 장식하네(千金裝馬鞭, 白金裝刀頭).”

“만인의 마음 하나 되니, 하나의 원수는 모두의 적이 되리(萬人一心兮, 子同仇).”

“충성과 의리는 무소의 뿔처럼 하늘을 찌르니(忠與義氣沖斗牛).”

“일당천으로, 필사의 각오로 적군에 맞서리라(一个擬當千, 視死亦如眠).”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를지니, 적을 죽이고 봉작을 받으리(報國救黔首, 殺賊覓封侯).”

처음에는 여인의 목소리만 들려오다가, 조금 지나자 사내의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분명히 여인 하나, 사내 하나, 북 하나의 소리일 뿐인데,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기세였다. 북 치는 소리는 고조에 달했지만, 여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들렸다. 하지만 노래를 듣는 이들의 마음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쪽 영지 안에 있던 장병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천지를 진동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병장들의 노랫소리는 오래도록 영지 안에 울려 퍼졌다. 노랫소리를 듣던 주육낭은 씩 웃고는 책으로 가슴을 팍 치고 막사 안으로 돌아갔다.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를지니, 적을 죽이고 봉작을 받으리…….

영지 내의 소란이 차츰 잦아들자, 밤빛을 닮은 고요함이 영지를 뒤덮었다.

중앙 막사 안에서, 자색 장포를 두른 무관이 오랫동안 영지를 맴돌던 가사를 나지막이 읊었다. 이 사람이 바로 이번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북으로 향하는 감찰사, 주봉상(周鳳祥)이었다.

“그 탈영병들을 배웅 왔던 거라고?”

주봉상의 질문에 수하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같은 시각, 주봉상이 말한 탈영병들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밤새 그간의 내력에 관한 질문 세례와 함께 부러움의 눈빛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주 대인은 이런 일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가서 좀 알아보거라.”

주 대인이 명했다. 수하는 막사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했다.

“말 일곱 필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주 대인이 저들의 내력을 묻지 않는 이유는, 주 대인과 수하가 저 탈영병들의 내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태평거의 주인이자, 순성갑기 대장 유규가 잡아들인, 숨어 지내던 탈영병들이다. 탈영병은 천지에 널렸지만 주 대인이 기억하는 탈영병들은 저 일곱 사내가 유일했다.

저 탈영병들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유명무실한 감찰사 따위를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경략사까진 아니더라도 병마 부총관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주 대인은 생각했다.

이번 일로 승급이 지체되는 바람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공과 노력을 쏟아야 할지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일을 전부 저 탈영병들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저들을 너무 치켜세우고 자신을 낮추는 것 같았다. 갑자기 끼어든 장순 때문에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믿는 수밖에.

주봉상이 한숨을 내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몸에 지니고 다니던 활은 경주의 중궁(重弓)이던데, 저 태평거 주인장들이 이번에는 또 얼마나 값진 말을 타려나?”

“대인, 그저 군목감(群牧監)의 평범한 군마라고 합니다.”

수하가 대답하자 주봉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범한 거라고?”

“예, 소인이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주봉상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몇 번 두드렸다.

“천금으로 말과 채찍을 사 줬군. 값비싸진 않아도, 성의를 듬뿍 담아 선물하겠다는 뜻이야.”

주봉상이 성가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부산스러워 죽겠군. 저런 식으로는 서북에 가서 봉작을 받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거다.”

“대인, 가서 더 알아볼까요?”

수하의 물음에 주봉상이 고개를 내저으며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됐다. 저들한테서 멀찍이 떨어져 상종하지도 마라. 괜히 재수 없는 기운 옮겨붙을라.”

수하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막사 안에 있는 또 한 명의 자색 장포를 두른 관리, 강문원(姜文元)도 바깥의 일을 묻고 있었다. 원래 왕보당의 자리를 이어받아 경략사가 될 예정이었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경략사가 아닌 병마 부총관이 된 경우라 강문원은 주봉상보다 더욱 험상궂은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들에게 알리거라. 여기는 태평거가 아니라 군대라고! 알아서 얌전히 기어야 할 곳이라고!”

연배가 있어 보이는 강문원은 혐오감을 전혀 숨기지 않고 외쳤다.

강문원이 이토록 저들을 혐오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덕으로 관직을 얻었고, 관리가 된 후로는 관운이 제대로 트여 탄탄대로로 전전사를 거쳐 유주(維州) 자사(刺史)까지 올라갔다. 게다가 동향인 고능준의 지지로 서북경략사에 발령이 나려던 참이었다. 무탈하게 경략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면, 사서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장 출신의 관리로서 일생일대의 염원을 다 이루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내 앞길을 망친 자들은 장순과 진소지만, 저 재수 없는 탈영병들도 한몫했지. 저들이 경성에서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여기서 함부로 나대다가는 모조리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야.”

강문원이 어금니를 악물며 내뱉고는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귀한 말들이 아니라고? 귀한 말들이면 당장 징발하거라. 병졸들 따위가 어딜 감히! 무기와 말을 직접 마련하겠다고 나대다니, 조정의 체면에 따귀를 때리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

“대인, 귀한 말이 아니고 평범한 말이 확실합니다.”

수하의 대답에 강문원은 탁자를 쾅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아주 배가 불렀구나! 그러면 군에서 배정한 말들을 회수해 오거라. 직접 가져온 말이 있다니 그거나 타라고 해.”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던 수하가 잠시 주저하더니 조용히 물었다.

“그럼, 주 대인께도 말씀을 올릴까요?”

“내 병마의 일인데, 그자에게 말해서 뭐 해?”

강문원이 눈을 부릅뜨면서 대꾸했다. 수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알겠다고 한 뒤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강문원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됐다, 관둬라. 고작 말 몇 필인데, 가지고 있으라고 해. 알아서들 하라지. 가는 길에 말썽이나 안 피우면 다행이다. 일단 서북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생각하자.”

수하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교랑은 자신이 선물한 말들 때문에 두 대인이 화가 났다는 것을 몰랐다. 물론 알았다 하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겠지만.

노랫소리는 멈춘 지 오래였지만, 진십삼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북을 장난스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북소리에 놀란 새들이 수시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낭자는 또 무엇을 할 줄 압니까?”

진십삼이 물었다.

“몰라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북을 칠 줄 알 줄이야. 그럼 칠현금이나 피리는요? 이럴 줄 알았으면 칠현금도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진십삼이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북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공자님, 그만 두드리세요. 야밤에 행인들이 놀라겠어요.”

진십삼의 북소리를 참지 못한 시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진십삼이 웃으며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앞쪽을 내다보며 물었다.

“낭자, 곧바로 성으로 갈까요? 아니면 어디 들러서 하룻밤 쉬고 갈까요?”

“편할 대로 해요. 난 마차를 타고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앉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으니 언제 어디서든 잘 수 있다는 말이로군.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럼 야경 운치도 좋고 하니, 길을 서두르죠.”

시녀는 진십삼의 말에 내심 놀랐다. 진십삼이 쉬자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야밤에 쉬지도 않고 오가다니, 고단하지도 않나?

“낭자, 그 노래는 전해져 부르는 겁니까, 아니면 즉석에서 만든 겁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에게 물었다. 설마 저렇게 아씨와 밤새 대화하려는 건 아니겠지? 시녀는 입술을 삐죽이고 자세를 바로 앉았다.

“전해져 불리는 곡일 거예요.”

정교랑이 말하고는, 잠시 뒤 확신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져 불리는 곡이에요.”

정교랑의 머릿속에 좀 전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제후에 봉해져야지. 사내라면 이 한 몸 바쳐 공을 세워야지…….

정교랑의 머릿속을 맴도는 노랫말에 호응하듯, 북소리가 동동 울려 퍼졌다. 정교랑이 휘장을 들어 올리자, 마차와 나란히 가고 있던 진십삼이 손에 든 북을 가볍게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좋네요.”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래요.”

정교랑도 대답했다. 거센 밤바람에 흔들리는 횃불 아래에 비친 소년의 환한 미소는 더없이 눈부셨다.

일행은 동이 틀 즈음 성문 앞에 도착했다. 성문은 이미 열려 있어서, 진십삼이 특별히 구해 온 통행패를 쓰지 않아도 됐다.

“고생했어요.”

마차에 있던 정교랑이 진십삼에게 예를 표했다. 진십삼이 두모를 벗었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해 얼굴에 피곤한 기색과 야밤의 한기가 남아 있었지만, 두 눈만큼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럼, 이번엔 내게 신세를 진 겁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물었다.

“맞아요. 내가 신세를 졌죠. 원하는 게 있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십삼이 감탄을 뱉었다.

“하! 정말 놀랍고 기쁜 일이네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게요.”

정교랑이 미소를 짓고는 휘장을 내렸다. 마차는 천천히 옥대교 저택 앞으로 움직였다.

“생각이 났습니다.”

진십삼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정교랑을 향해 말했다. 마차에서 내린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8월 15일에, 같이 꽃등 보러 갈래요?”

진십삼의 제안은 신세를 갚는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고 가벼운 제안이었다. 정교랑은 진십삼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선약이 있어요.”

진십삼은 잠시 놀라나 싶더니 이내 미소지으며 물었다.

“선약이요? 진(陳)씨요, 주씨요?”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니에요. 정혼자와의 선약이에요.”

정혼자! 진십삼은 잠시 넋이 나갔다. 이렇게나 낯선 단어를 저 여인의 입에서 듣게 되다니.

“진짜로요?”

진십삼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정교랑은 이미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진십삼의 말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가짜일 게 뭐 있죠?”

가짜일 리가 뭐 있겠나. 젊은 남녀라면 누구나 혼례를 올려서 남편과 아내를 가지게 될 텐데. 다 생기기 마련이지.

진십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간 후 대문이 닫히는 걸 바라보았다.

정혼자라……. 당연히 진짜지. 그 왕씨 가문 공자. 내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있으니까, 가짜일 리가 없지.

진십삼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만인의 마음 하나 되니, 하나의 원수는 모두의 적이 되리. 충성과 의리는 무소의 뿔처럼 하늘을 찔러.”

진십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에 탄 진십삼의 몸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말 머리를 틀고 큰길가를 따라 말을 내달렸다.

-꽃등놀이-

시간은 빠르게 지나 어느덧 중추절이 되었다.

8월 15일, 경성의 경치는 정월 대보름 꽃등 축제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가가호호 각양각색의 꽃등을 준비하고 중추절이 되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진단랑이 마당의 꽃등 사이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유모도 진단랑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라갔다.

“어머니, 어머니.”

진소 부인은 대청에서 여종들과 함께 새로 만든 옷을 살펴보고 있었다. 뛰어오는 진단랑을 본 여종 하나가 서둘러 옷을 한쪽으로 치워 두었다.

진단랑이 진소 부인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잘 다녀왔니? 배는 안 고프고?”

진소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진단랑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 정 언니는 우리 집에서 중추절을 같이 안 보내요?”

진단랑이 다급하게 묻자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중추절을 어떻게 우리 집에서 보내겠니. 정 낭자도 가족이 있는데.”

“정말 그런 거예요?”

진단랑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정 언니가 우리 집이랑 사이가 안 좋아져서 오지 않는 게 아니고요?”

진소 부인은 웃음기를 싹 걷고 문 앞에 꿇어앉은 유모와 몸종들을 쳐다보았다. 진단랑은 그런 진소 부인의 모습을 보고는 모친의 소매를 늘어지게 잡으면서 흔들었다.

“어머니, 유모가 알려준 게 아니에요. 십팔랑 언니도 정 언니를 보러 가지 않고, 정 언니도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잖아요. 제가 정 언니를 보러 간다고 하면 십팔랑 언니랑 할아버지가 다 못 가게 막는단 말이에요. 셋째 언니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들었고요. 정 언니도 셋째 언니처럼 다시는 우리 집에 안 오는 거예요?”

진단랑의 입에서 셋째 딸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소 부인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야. 괜한 생각 말거라. 정 낭자가 요즘 바빠서 그래. 우리가 귀찮게 하면 안 되잖니.”

진소 부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미가 잘 봐뒀다가 정 낭자가 좀 한가해진다 싶으면 너를 데리고 보러 가마. 저기 정 낭자에게 줄 새 옷도 지어 놨어. 조금 이따가 사람을 시켜 보내려던 참이란다.”

진소 부인이 한쪽에 치워진 옷가지를 가리키자 진단랑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진소 부인은 화제를 돌리며 진단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단랑이 방을 나가자, 진소 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진소 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15일에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가 천가(天街)의 어디에 위치한다더냐?”

진소 부인이 묻자 여종이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대답했다.

“부인, 주씨 가문의 천막은 천가에 세울 자격이 못 됩니다.”

천가는 다름 아닌 어가(御街: 대궐로 통하는 길)였다. 중추절에는 황제와 백성이 함께 기쁨을 나누며 선덕문(宣德門)에 오르는 문화가 있었다. 조회에 참석하는 고위급 관료인 승조관(昇朝官) 이상의 가문들만 천가에서 천자를 뵐 자격이 있었다.

진소 부인도 아차 싶었는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천막을 하나 더 놓는다 한들, 크게 다를 바 없겠지. 바깥쪽에 자리 하나를 더 마련하는 게 어려울지 노야한테 물어봐야겠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진소 부인은 좋은 생각이라는 마음이 들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야를 찾으러 갔다.

같은 시각 진(秦)씨 가문.

진 부인도 진십삼을 붙잡고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를 묻고 있었다.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로 물으세요?”

진십삼이 물었다. 진 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혼사 얘기를 해야지. 나더러 혼담을 넣으러 가라고 했잖니. 왜? 필요 없어졌어?”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혼담을 넣을 만큼 알맞은 사람이 있으면요.”

진 부인이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아니면 네가 먼저 가서 말해 봐. 내가 고른 사람이 적당할지, 정 낭자를 한번 떠보는 건 어떠니?”

진십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정씨 가문에서 적당하다고 여긴 이라면, 정 낭자도 괜찮다고 했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정 낭자에 대해서 잘 알게 됐대? 다 얘기가 된 거야?”

진 부인이 문득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진십삼에게 물었다.

“그날 밤엔 어딜 갔었어?”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상의하고 말 것도 없죠.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를 뿐인걸요. 그날 일은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주육낭을 배웅하러 갔다고요.”

진 부인은 이미 진십삼의 사환에게서 똑같은 대답을 들었지만, 사환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진십삼에게 다시 한번 물어본 것이었다.

이 아들내미가 정말.

진십삼은 모친에게 알리고 싶은 것만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알리지 않고 싶은 건 사환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해두곤 했다.

요즘 진십삼이 공부에 매진하느라 정교랑을 볼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진 부인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알겠다.”

진 부인이 여종을 향해 말했다.

“가서 노야께 말씀드리거라. 이번 꽃등 행사 때, 주씨 가문의 천막을 우리 천막 옆으로 배치해 달라고.”

여종이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야기하기도 편하겠지.”

진 부인이 천천히 부채질을 하며 진십삼을 향해 웃었다. 진십삼도 진 부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께서 좋으시면 소자도 좋습니다.”

두 진씨 가문 덕분에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는 하루 사이에 결정됐다. 남의 일에 선심 쓰듯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주씨 가문은 금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신의 천막 자리를 알게 된 주 노야는 깜짝 놀라 집사가 수리한 등산(燈山: 산 모양의 대형 등롱)을 보러 가는 것도 미뤄 두었다.

“자리가 어가에 있다고? 그럴 리가!”

주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정말이야. 진(陳) 상공 가문과 진(秦)씨 가문에서 그리 시킨 거라더군.”

주 노야는 대청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진(陳) 상공 가문 하나로도 기뻐 죽겠는데, 진(秦)씨 가문까지 합세했다니, 진정 겹경사로구나.

주 부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뭘 하려는 걸까요?”

주 노야가 쯧 소리를 내면서 대꾸했다.

“뭘 하기는. 다 우리 교교의 은혜를 입어서 그런 게지. 난 또 저들이 은혜를 다 잊은 줄로만 알았네. 암,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지.”

교교 얘기가 나오자 주 부인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 애는 15일에 정말 우리 집에 안 온대요? 우리랑 불화가 있다고 일부러 티 내려는 건 아니겠죠?”

“무슨 불화? 갑자기 불화는? 왕씨 가문 사람들이 와서 직접 말했소. 교교를 데리고 꽃등을 보러 간다고.”

“정말로 꽃등을 보러 가자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바보라서 간덩이가 부었나.”

주 노야는 주 부인의 마지막 말이 듣기에 거북했다.

“안 될 건 또 뭐요? 바보라서 간덩이가 부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바보든, 간덩이가 부었든, 정교랑 곁을 지키는 사람이 내 아들만 아니면 돼. 주 부인은 웃으며 다른 화제로 대화를 돌렸다.

“아니, 내 말은 왕씨 가문 공자가 참 다정다감하다고요. 그러니 교교가 좋아하겠죠.”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주 노야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교교가 혼례를 올리고 나서도 경성에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주 노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인네는 혼례만 올리면 남의 집 사람이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태평거, 신선거, 태평 두부가 떠올랐다. 마음먹은 대로 남을 쥐락펴락하는 수완이며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의술까지. 그 모든 게 남의 집 것이 된다니.

주 노야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듯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꾹 눌렀다. 정말 배 아파 죽겠군.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전령병이 이리저리 먼지가 나도록 뛰어다니며 야영 소식을 전했다.

“또 야영한다고? 겨우 며칠 걸었다고!”

서봉추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대인들께서 수성부(遂城府)에서 중추절을 보내시겠다는군.”

병졸 한 명이 나지막이 대꾸하자, 서봉추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집을 나선 마당에 중추절은 무슨 중추절이야.”

“급할 게 뭐 있나? 쉴 수 있으니까 더 좋은 것 아니오.”

병졸이 웃으며 말했다.

“쉴 시간이 어딨다고 그래? 이 몸은 하루빨리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워야 한다고.”

서봉추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불평은 불평이고, 서봉추와 병졸들은 야영을 준비하기 위해 막사를 치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모두 현지의 관원들에게 성 안으로 초대되었지만, 병영의 병사들은 모두 규율대로 성 밖 영지에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넷째 형님은?”

천막을 다 치고 난 서봉추 형제들은 문득 사람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아챘다.

“어디 있겠어. 또 말들 돌보고 있겠지.”

범강림이 말했다. 서봉추와 다른 형제들이 의아한 얼굴로 근처에 있는 말 울타리를 내다보자, 역시나 서사근이 말들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넷째 형님은 저러다 저 말들을 받들고 살겠어.”

서봉추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누이가 정말로 천금짜리 귀한 말을 선물해 준 건가?”

서무수가 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던 서사근의 옆으로 갔다.

“어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서사근이 말에게 시선을 고정해둔 채 대답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말굽을 보고 있었다. 정교랑이 선물해 준 말 일곱 필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시선을 낮춰 말굽을 보면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로가 평평하기도 하고, 매일 행군하는 거리도 짧다 보니 아직은 다른 말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사근이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흥분한 얼굴로 눈빛을 반짝이고는 목소리까지 떨면서 외쳤다.

“그래도 말입니다, 형님!”

서사근이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서무수의 팔을 움켜잡았다.

“서북에 도착하면 차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서사근은 두서없이 떠들어대며 서무수의 팔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형님, 형님. 볼 수 있을 거란 말이오! 다른 점을! 아주 다릅니다! 형님, 이건 정말로 큰 선물이오. 누이가 준 엄청난 선물이라고!”

서무수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서사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나도 알아. 누이가 우리에게 평범한 선물을 줬을 리가 없지.”

“큰 선물입니다. 너무 큰 선물이에요. 정말, 정말로.”

서사근은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는 정교랑이 배웅 왔던 다음 날 아침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다들 모릅니다. 모른다고. 말들이 얼마나 아픈데. 내 마음도 얼마나 아프다고. 그렇게 많은 말들이, 그 좋은 말들이 죽을 일도 아닌 일로 버려져 죽어간다는 게……. 만약, 만약 이게 정말로 효험이 있다면!”

서사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굽을 바라보았다.

서무수는 머쓱하게 웃다가 누군가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중추절을 보내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가려던 관리와 군관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서무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서무수가 쳐다보는 모습이 보이자 주육낭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몇 필 말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조상님 떠받들다시피 하고 있어. 못난 놈들!

마지막 노을빛이 사라지자, 어둠이 대지를 덮었다. 주육낭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뜨고 있는 둥그런 달을 올려다보았다.

“경성의 중추절은 볼거리가 많은데, 이쪽은 어떨지 모르겠소.”

관리와 군관들이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경성의 중추가 시끌벅적하긴 하지. 그 여인도 꽃등 구경을 나가겠지?

아, 아닐 수도 있겠군. 그 여인은 성격이 괴팍하여 사람이 북적거리는 걸 싫어했었잖아. 명절날인데, 뭘 하고 있으려나?

우리 집에는 오기 싫어할 텐데, 혼자 집에 가만히 있으려나?

“육낭, 가자.”

옆에서 누군가가 주육낭을 부르자, 주육낭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 뒤 말을 재촉해 뒤따라갔다. 밝아오는 달빛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달빛이 훤히 비추는 경성은 마치 인간 세상의 선경과도 같았다.

거리는 온통 꽃등으로 가득해 눈이 어지러웠다. 권문세가나 부잣집에서는 위상을 뽐낼 수 있는 거대한 등산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선덕문 위에 서서 보니, 화려한 경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등불로 반짝이는 경성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아름다웠다.

“형님, 형님.”

성루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진안 군왕을 이황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전하, 천천히 가세요.”

내시들은 행여나 이황자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외쳤다.

성루에는 황제 이외에도 후궁의 비빈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황실과 가깝게 지내는 정통 황족들과 조정 중신들, 시녀며 태감들까지 모두 성루에 모여 있어서인지 성루는 다소 비좁아 보였다.

진안 군왕은 멈추어 서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황자가 진안 군왕의 손을 잡고 가까이에 섰다.

“형님, 예쁘지요?”

알록달록한 어가의 꽃등과 멀리서 보이는 경성의 화려한 등불들을 보며, 이황자가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전부터 형님한테 오라고 했는데, 한 번도 안 오고 방에서 잠만 잤잖아요. 이제 좀 후회되죠?”

진안 군왕은 이황자를 향해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시 성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황자는 진안 군왕이 꽃등 놀이를 구경하는 것 같다가도, 등을 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님, 뭐 찾아요?”

이황자가 물었다.

어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천막은 얼추 삼사십 개 정도였다. 가까이에 있는 천막 자리는 잘 보이지만, 멀리 있는 천막은 불빛이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주씨 가문의 천막은 아마 제일 멀리 있겠지?

“우리도 아래로 내려가 꽃등 놀이를 할 수 있습니까?”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 질문에 태후가 직접 나서기도 전에 내시들이 극구 반대했다. 내시들은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하, 장난치시면 아니되옵니다!”

예상했던 바였는지 진안 군왕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자, 우리는 여기서 보죠.”

진안 군왕이 이황자의 손을 잡고 성루의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높이 서 있어도 진안 군왕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가에 있는 몇몇 사람은 이미 성루 아래로 가까이 와 있었지만, 진안 군왕이 찾는 건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정 낭자가 안 왔다고요?”

진소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그러게요.”

주 부인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 자리를 여기 잡아 준 데는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겠지. 아무렴 어때? 난 누릴 수 있는 걸 누리는 것뿐인데.

“그럼…….”

진소 부인이 또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찰나에 천막 밖에서 잠시 소란이 일더니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이 집 꽃등 정말 예쁘다. 들어가서 한번 볼까?”

진소 부인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천막 안으로 들어온 진(秦) 부인을 보며 미소지었다.

“어? 언니도 있었네요?”

진 부인은 진소 부인을 보자마자 부채를 흔들면서 웃었다. 진소 부인은 미소 띤 얼굴로 진 부인의 뒤에 서 있던 진십삼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크지 않은 천막에 갑자기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일순간 공간이 협소해졌다. 조그마한 천막에 진소 부인과 진 부인이 모두 모여 있자 그 모습을 본 다른 집 여인들도 다가와 기웃거렸다.

주씨 가문의 딸들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피해 천막 밖으로 나갔다. 주 부인은 이 성가신 상황을 불만스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정 낭자는요?”

진 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없대.”

주 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진소 부인이 먼저 웃으면서 말했다.

“어딜 갔대? 밖에서 꽃등 놀이를 하고 있나? 난 왜 못 봤지?”

진 부인이 뒤에 있던 진십삼을 살짝 밀치면서 말했다.

“가서 좀 불러오렴.”

이번엔 주 부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기 안 왔어요.”

진 부인과 진소 부인 모두 놀란 눈으로 진십삼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안 왔다고? 그럼 집에 있다는 게야?”

“아니요. 오늘 선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십삼이 여유롭게 말했다.

“누구랑?”

두 부인이 또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정혼자요.”

진십삼이 대답했다.

정혼자! 두 부인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진 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십삼!”

진십삼은 진 부인을 놀리는 것에 성공했다는 듯 눈썹을 꿈틀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이나 입을 열려 했지만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주 부인은 한쪽에서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조용히 들었다.

그냥 부인들에게 차나 우려 주는 게 나을 것 같네. 어차피 조카의 일은 나보다 남들이 더 잘 아니까.

“진작 알았으면서 왜 말을 안 했어?”

노여운 얼굴의 진 부인이 부채로 진십삼을 툭툭 치면서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어찌 어머니의 흥을 깰 수 있겠습니까.”

진십삼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흘겨보았다.

“며칠 동안 말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대? 이 어미의 흥을 깨려고 그렇게 벼르고 있었단 말이야?”

진십삼이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자가 억울합니다.”

진씨 모자는 주씨 가문의 천막을 나와 어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크고 작은 꽃등과 등산들이 한데 모여 화려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등불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진십삼은 짙은 남색 장포를 입고 허리춤에 옥대를 묶어두었다. 깔끔하게 묶어 올린 올림머리에 금색 장식을 한 진십삼은 반짝이는 등롱 사이에서 더욱 환하게 빛났다. 진십삼이 진 부인과 담소를 나누면서 싱긋 웃자, 더욱 준수해 보이는 그의 용모에 뭇 여인들이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으이구, 널 상대하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구나. 저리 가서 혼자 놀려무나.”

진 부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발 앞서 나가 걷고 있던 진소 부인을 따라갔다.

진십삼은 제자리에 서서 진 부인이 진소 부인에게 가까이 간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어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십삼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차츰 사라져 갔다. 진십삼은 어가의 끝자락에서 고개를 들어 저잣거리를 내다보았다.

저잣거리의 꽃등은 어가의 등롱만큼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꽃등이 잔뜩 모여 있다 보니 분위기는 더욱 흥겨웠다.

저 화려한 저잣거리는 미인과 함께 꽃등 놀이를 즐기기에 퍽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 그 여인도 저기서 꽃등 놀이를 하고 있겠지?

높은 곳에서 저잣거리를 내려다보면 은하수와 같은 아름다움을 구경할 수 있겠지만, 은하수 안에 섞여 즐기면 그 나름대로 또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밤하늘에선 수시로 불꽃이 팡팡 터졌다. 반근과 금가아는 불꽃이 터질 때마다 고개를 치켜들고 다른 이들과 어울려 연신 감탄을 해댔다.

“아무 데나 뛰어다니지 말고. 길 좀 봐. 앞에 사람도 잘 보고.”

시녀는 계속 잔소리를 하며 금방이라도 앞으로 돌진할 것 같은 금가아를 붙잡았다.

“매년 이맘때면 인신매매 장수가 사람을 납치해 가. 너 또 그러다 잡혀가지 말고!”

금가아가 얼굴을 붉히고 외쳤다.

“난 잡혀간 적 없어! 길을 잃은 거지!”

시녀와 반근이 웃음을 터트렸다.

“야. 좀 빨리빨리 와.”

앞서 걷고 있던 소년 공자가 고개를 돌리고 귀찮다는 듯이 외쳤다.

“서두르긴 뭘 서둘러요? 구경 나온 거 맞아요? 그냥 걸으러 온 건가?”

시녀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저 계집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네! 왕십칠의 주위에 있던 시종들은 눈을 크게 뜨고 시녀를 눈여겨보았다.

“여기 볼 게 뭐 있다고!”

왕십칠이 말하자 시녀가 즉시 반박했다.

“그럼 우리 아씨를 왜 여기로 데려오신 건데요?”

저 계집이! 왕십칠이 눈을 부릅떴다. 내 나중에 넌 필히 손봐 주마.

왕십칠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시녀와 정교랑 일행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앞쪽에 예쁜 게 많아. 곧 강물에 꽃등을 둥둥 떠내려 보내니까, 우리도 서둘러 가자고.”

왕십칠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왕씨 가문의 시종들은 저잣거리에 잔뜩 몰려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면서 간신히 길을 터 가며 앞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 양쪽으로는 거대한 등산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금빛 찬란한 것도 있고 알록달록한 것들도 있어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어 등산과 꽃등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시종이 왕십칠에게 정교랑 일행이 또 뒤처졌다고 알리자, 왕십칠은 화가 솟구쳤다.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왕십칠이 정교랑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홱 낚아챘다.

“빨리 가자고.”

고개를 들고 불꽃놀이에 붉게 물든 하늘을 감상하고 있던 정교랑은 왕십칠이 갑자기 팔을 세게 당기는 바람에 비틀거리다 걸음을 헛디딜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시녀는 화가 나서 고함을 빽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시녀가 정교랑을 잡고 있던 왕십칠의 손을 마구 때렸다.

“그러는 넌 뭘 하는 거냐!”

왕씨 가문의 시종이 시녀를 확 밀치고는 깔보는 태도로 호통을 쳤다.

“몹쓸 년! 감히 우리 도련님의 몸에 손을 대다니!”

반근과 금가아도 서둘러 정교랑을 에워쌌지만, 대여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인파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만 멈춰 서 있자 주위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내가 빨리 걸을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화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왕십칠은 정교랑의 팔에서 손을 떼고 으름장을 놓았다.

“너 내가 특별히 데리고 나와서 구경시켜 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 나 아니었으면,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네가 어디 볼 수나 있겠어?”

정교랑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맞아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올 생각도 없었을 거예요.”

“알면 됐어. 내 말 잘 듣고 내 성질 긁지 마.”

콧방귀를 뀌며 말하던 왕십칠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말을 덧붙였다.

“참. 그리고 말도 하지 마. 넌 가만히 있으면 예쁜데, 입만 열면 깨.”

정교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왕십칠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사 줄게.”

귀걸이 외에 아무런 장식도 하고 있지 않은 정교랑을 본 왕십칠은 선심 쓰듯이 말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정교랑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왕십칠의 뒤를 따랐다.

“서둘러.”

왕씨 가문의 시종들이 나지막이 소리치면서 정교랑의 시중을 드는 세 사람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흘겨보았다.

우리 왕씨 가문에 시집오길 원하는 여인네들이 얼마나 많은데, 네 바보 윗전은 오죽하겠냐. 너희가 윗전을 따라 우리 가문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면, 닭이나 개가 승천하는 것과 다름없지. 벼락출세라고.

“이 사람들이!”

금가아와 반근이 울분에 찬 얼굴로 시종들을 노려보았지만, 시녀가 둘을 말리며 시종들을 쓱 훑어보았다.

“됐어. 제 발등 제가 찍는 거야. 죽고 싶으면 뭔 짓인들 못 할까.”

시녀가 금가아와 반근의 등을 떠밀며 걸음을 옮겼다.

“누가 죽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저런 것들이 우리 가문에 들어오잖아? 사흘도 못 버티고 쫓겨날걸?”

시종이 혀를 차면서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 가자. 도련님만 기쁘게 해드리면, 우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다른 시종은 남을 흉보는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인파 사이를 빠르게 비집어 가며 서쪽으로 향했다.

높은 하늘에 수놓아지는 불꽃과 곳곳에 세워진 등산,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연등들이 모여 천상천하의 절경을 만들어 냈다.

등을 구경하기에 제일 좋은 자리는 바로 강가 근처였다. 강가 근처는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기도 해서, 이미 부잣집이나 권문세가의 천막들로 길 양쪽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강가 양쪽에 자리를 잡은 찻집과 주점들은 좋은 입지 덕에 많은 손님을 끌어들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단연 덕승루였다.

“어때, 이쪽에서 보는 게 더 예쁘지?”

인파 속에 간신히 자리를 잡은 왕십칠이 덕승루 앞의 등산을 득의양양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등산에는 온갖 주마등과 유리 같은 것들이 가득 걸려 있어서 언뜻 보아도 거금을 들인 티가 났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등산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드디어 원하는 곳에 오게 된 왕십칠은 한껏 기분이 좋아져 이것저것 가리키면서 정교랑에게 알려 주었다.

“이게 다가 아니야. 덕승루 안에서 보면 더 예뻐. 그쪽은 강가 바로 옆이니까, 강가에 떠다니는 연등을 볼 수 있어.”

왕십칠이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예약도 해 놨어. 이맘때에 덕승루를 예약하는 건 보통 힘든 게 아니야.”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왕십칠이 정교랑과 함께 덕승루에 들어서서 막 층계를 오르려던 찰나, 갑자기 주위가 시끌벅적해졌다.

“화괴(花魁) 주 낭자가 나왔어!”

“화괴 주 낭자가 나왔어!”

층계를 오르고 있던 모든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한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화괴가 뭐야?”

금가아가 물었다.

“교방사의 관기야. 주점마다 기생을 둬서 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데에 쓰거든. 화괴는 교방사 관기 중에서도 최고의 명기라는 뜻이야.”

대답해 주던 시녀가 잠시 멈칫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 낭자라, 왠지 귀에 익은데.”

시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반대편의 회랑 다리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장 앞서 걸어오고 있던 여인은 주홍색 치마를 두르고, 진주 보석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면서 여인의 걸음에 따라 흔들리자, 살랑대는 비단잉어의 꼬리처럼 보였다. 하늘과 땅의 경계 없이 눈부시게 번진 등불 사이로 천천히 걸어오는 여인의 모습은 선녀보다 아름다웠다.

“진짜 예쁘다.”

반근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금가아는 벌써 넋이 나간 채로 서 있었다. 시끌벅적하게 움직이던 사람들도 일제히 제자리에 멈춰 서서 회랑 다리를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낼 때, 오직 화괴만이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고, 화괴를 따라다니는 시종만이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비파를 품에 안은 춘령은 주 낭자의 뒤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고 있었다. 부러움과 흠모가 가득 담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춘령은 이유와는 상관없이 지금 자신도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춘령은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각양각색의 등롱으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덕승루 내부에 눈이 부셨지만, 춘령은 눈을 찌푸리기는커녕 더욱 크게 뜨며 인파 속에서 누군가를 찾으려 애썼다.

밀려 들어오는 인파에서 시선을 거두고 반대편을 쳐다보던 춘령은 일순간 온몸이 굳은 듯 숨이 멎었다.

반대편 층계에도 남녀노소가 뒤섞여 가득 몰려 있었다. 하지만 춘령은 자신이 찾고 있던 사람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소년 공자가 흥분한 얼굴로 춘령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춘령은 저 공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 공자 또한 자신이 찾던 사람은 아니었다.

춘령의 시선이 향한 곳은 왕십칠의 어깨 뒤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군계일학과도 같은 모습으로 고고하게 서 있는 소녀였다.

가녀리고 마른 체형의 소녀는 검붉은 빛의 치마를 입고 있어서 화려한 등불 사이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 층계 위에 단정한 자세로 선 그녀는 회랑 다리를 향해 살짝 몸을 돌려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내로 들어온 탓에 머리에 쓴 너울의 가리개를 양쪽으로 들어 올려 소녀의 용모가 드러났다.

역시 저 얼굴이었어. 역시 아직도 저 얼굴이야.

  • 아씨, 아씨. 저희가 잘못한 게 있다면 벌을 주시고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저희를 내쫓지 마세요.

나무 그늘 밑의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아이는 쉼 없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제발 내쫓지만 말아 달라고 빌었지만, 여인은 개미를 대하듯 손을 슬쩍 올리고 그들을 짓눌러 버렸다.

  • 언니, 나 죽기 싫어.

  • 묘령, 정신 차려. 내가 의원을 불러올게.

  • 언니, 나 죽을 거 같아. 언니, 앞으로 혼자여도 무서워하지 마.

산속의 낡은 묘당 안에 한 아이가 왜소한 몸을 덜덜 떨며 누워 있었다. 큰 소나기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 아이였다.

  • 언니, 앞으로 혼자여도 무서워하지 마. 난 어머니랑 아버지 만나러 먼저 갈게.

이제 세상에 묘춘, 묘령 두 자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춘령만이 있었다. 춘령 한 사람만이.

“춘령.”

시끌벅적한 주위의 소란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춘령은 화들짝 놀랐다.

“겁먹지 마. 아씨 뒤를 잘 따라가기만 하면 돼.”

춘령의 뒤에 있던 시녀가 조용히 말했다.

“작년 이맘때에는 지금보다 더 사람이 많았어. 차차 적응될 거야.”

시녀의 걱정 어린 말에 춘령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응, 하고 대답했다. 춘령은 뭐라 말을 덧붙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던 주 낭자는 이미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몸종 몇 명이 주 낭자의 긴 치맛자락을 한쪽씩 들고 천천히 내려가자, 층계 위로 오색찬란한 구름이 떠다니는 듯했다.

“주 낭자가 꽃배를 타러 간다!”

주 낭자의 동선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외침을 듣자마자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바깥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춘령은 반대편 층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춘령은 그 여인의 곁에 서 있던 왕십칠이 얼마나 열광하고 얼마나 환호하면서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왕십칠뿐만 아니라 층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앞다투어 밖으로 몰려나간지라 층계에는 정교랑과 그녀의 하인들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정혼자가 다른 여인을 보면서 열광하고, 이 좋은 중추절에 너만 버려두고 간 심정이 어떤지 맛 좀 봐. 이건, 시작에 불과해.

춘령은 계속 비파로 얼굴을 가린 채 주 낭자를 따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비파를 슬며시 아래로 내리자, 웃음이 만개한 춘령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밖으로 몰려나간 탓에 덕승루는 한결 조용해졌다. 층계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정교랑 일행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깨닫지 못한 듯했다.

감히 우리를 버리고 가? 초대받아 온 사람을 여기에 내팽개치고 달려갔단 말이야?

왕십칠이 밖으로 나가면 그의 시종들은 당연히 윗전을 따라야 했기에 정교랑과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정말 해도 너무하네!”

시녀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화를 냈다.

“아님 우리 먼저 방에 들어가 있자.”

반근이 말했다.

많은 사람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가긴 했지만, 그래도 덕승루 안에는 사람들이 꽤 남아 있었다. 하지만 층계 위에 멀뚱히 서 있는 사람은 정교랑 일행뿐이었기에 그들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시녀는 성이 난 얼굴로 점원 하나를 불렀다.

“왕씨 가문 공자님이 예약한 방이요?”

점원이 정교랑 일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인 혼자서 덕승루를 찾게 된다면, 직접 방을 예약했거나 남이 방을 잡아 주었을 텐데. 직접 예약했다면 굳이 이렇게 물어볼 리 없을 테고, 남이 예약한 거라면 누군가가 마중을 나와야지.

이런 식으로 이름만 대고 방을 몰라 점원을 붙잡고 물어보는 모양새를 보니 영 골칫거리를 만들려는 여인네처럼 보인단 말이야.

“화괴 구경하러 죄다 밖으로 나갔으니 우리는 방에서 기다려야겠다고요!”

점원의 생각을 읽었는지, 시녀가 더욱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 점원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은 시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아씨, 죄송하지만 왕십칠 공자님 이름으로 예약된 방은 없습니다.”

점원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없다고? 이 썩을 놈이! 아씨를 데리고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시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없으면 됐어. 나가서 봐도 똑같아.”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는 몹시 분했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점원 몇 명이 정교랑 일행을 쳐다보면서 이상하다는 듯 속닥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시녀는 얼굴이 터질 듯이 창피하고 화가 났다.

내 이런 수모는 태어나서 처음 당해 봐! 저 무례한 놈, 아니 저 쓸모없는 놈한테 이렇게 당하다니!

그런 시녀의 모습과는 다르게, 정교랑은 차분한 표정으로 층계를 천천히 내려갔다. 몇 계단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엇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낭자도 여기 왔네요?”

누군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걸음을 멈춘 정교랑이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사환을 데려온 진십삼이 덕승루 안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십삼은 정교랑을 보자 더욱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고 가볍게 예를 표했다.

“벌써 돌아가려고요?”

예기치 못한 만남에 놀란 진십삼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천가를 벗어난 뒤, 늘 함께 어울려 다니던 주육낭도 없자 진십삼은 조용한 곳을 찾아 여유나 즐길까 하고 덕승루에 온 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교랑과 마주칠 줄이야.

진십삼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이런 게 바로 인연인가?

“아니요. 나가서 보려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나가서 본다고?

“왕 공자는요?”

진십삼은 정교랑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고는 물었다.

“갔어요.”

정교랑이 짧게 대답했다.

갔다고?

진십삼은 살짝 놀랐다. 정교랑은 항상 같은 표정이라, 그녀의 얼굴에서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대신 그녀 옆에 있던 시녀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갔어? 제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 감히! 이 여인을 보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줄을 섰는데, 선약을 잡아 놓고도 감히 여기에 내팽개치고 갔단 말이야?

진십삼은 이걸 행운이라고 말해야 할지, 불운이라고 말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약속하고 만나는 것보다, 우연히 만나는 것이 더 기쁘네요. 나도 여긴 처음입니다. 덕승루가 물 위의 연등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곳이라고 하더군요. 낭자, 나와 같이 꽃등 놀이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진십삼이 미소지으면서 물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굳이 이리저리 둘러대며 체면 차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말하는구나.

-<교랑의경> 10권에 계속

교랑의경 10권

차례

웃긴

깨어나지 않는

나느

쉬워

배웅

-웃긴-

이 여인은 언제나 그랬다. 왕 공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면, 분명 한 치의 숨김 없이 말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괜히 기분만 상하게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이 기쁨을 만끽하련다.

“낭자, 날 따라와요.”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화려한 불꽃이 하늘 곳곳에서 터지고, 알록달록한 꽃등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여름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를 연상케 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물가의 안개 덕분에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말 아름답네. 역시 달라.”

진십삼이 감탄했다.

“뭐가 다른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십삼은 창밖의 은하수를 내다보며 대답했다.

“예전에 했던 꽃등 놀이도 즐거웠어요. 내가 남들과 같은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진십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병이 낫고 보니 또 다르네요. 보통 사람의 기쁨은 이런 거구나 싶어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진십삼은 물가에 자욱한 물안개처럼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교랑이 진십삼을 진지하게 빤히 쳐다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정교랑이 진십삼의 다리를 고쳐줄 때였다. 하지만 당시 진십삼은 마음이 불안하여 정교랑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는지 알아챌 겨를이 없었다.

덕승루는 바깥의 등불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실내의 등불을 몇 개 꺼 두었다. 이따금 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어두컴컴한 실내를 잠시나마 환하게 비췄다.

어두운 등불 아래서 보니, 저 여인의 무뚝뚝한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이네. 보통 사람이라면, 환골탈태하여 운명이 크게 바뀐 것에 대해 감개무량하겠지.

“아니요. 당신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여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낭자는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아직도 진정한 사내가 아니에요.”

진십삼이 흠칫 놀랐다. 전에도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있었다. 정교랑이 자신을 분통 터트려 죽이려 할 때였다.

“과거를 돌이키며 감상에 젖어 허세를 부리고 있잖아요. 지나갔으면 지나간 거지, 감개무량할 게 뭐 있어요? 감당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다는 태도는, 사내대장부답지 않죠.”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진십삼은 잠시 놀라나 싶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네. 맞아요. 낭자 말이 맞습니다. 낭자를 알게 된 후로 시시각각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네요.”

진십삼이 허리를 곧게 펴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건 내 덕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 덕분이에요. 내가 할 모든 말들은, 전부 당신이 먼저 하는 말에 달렸으니까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와 대화를 나누는 게 책을 십 년 읽는 것보다 유익하네요.”

“그럼, 속수(束修: 옛날에 선생과 제자가 처음 만날 때, 제자가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서 선생께 바치는 육포 묶음)는 어디 있죠?”

안팎으로 드리우는 불빛이 소녀의 진지한 얼굴을 비추었다. 진십삼은 멈칫했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정교랑의 말이 웃겼는지, 아예 창틀에 손을 짚으며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고개를 돌린 시녀는 반근과 금가아를 쳐다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웃겨?”

반근과 금가아도 진십삼을 따라 웃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시녀의 질문을 듣자 맹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됐다. 안 물어본 거로 치자.”

시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감미로운 피리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이쪽을 향해 천천히 돌아오는 화려한 꽃배의 움직임에 꽃등으로 가득한 은하가 넘실거렸다.

“꽃배가 어딜 가는 거지? 왜 다시 돌아가는 거요?”

사람들 틈에 껴 있던 왕십칠은 돌아가는 꽃배를 보며 한탄하듯 외쳤다.

이제야 다리 위에 좋은 자리를 잡았다 싶어서, 꽃배가 내 쪽으로 오기만을 기다렸거늘. 손만 흔들면, 주 낭자가 볼 수 있는 자리에까지 왔는데!

물론 이 수많은 사람이 죄다 주 낭자를 불러대는 통에 주 낭자가 쉽사리 날 찾지는 못하겠지만, 내 편인 춘령이 그 계집애가 낭자 옆에서 나를 가리키기만 한다면 낭자는 바로 날 볼 수 있을 거야.

잠시 뒤의 광경을 상상하던 왕십칠은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기대에 찼다.

근데 왜 배가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돌아간 거지?

“타지 사람이라 잘 모르나 본데, 꽃배는 어쨌든 덕승루의 것이니 당연히 손님을 모으기 위한 용도 아니겠소. 주 낭자가 뭐하러 굳이 꽃배로 경성 바닥을 한 바퀴 도나? 꽃배로 손님을 좀 모은 다음에, 덕승루 앞으로 돌아가 가무를 선보이지.”

가무? 왕십칠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주 낭자의 가무라니!

“그건 부잣집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거요. 덕승루의 방을 예약한 사람들은 창가 앞에서 주 낭자의 가무를 감상할 수 있지. 댁과 나처럼 돈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즐길 수 있는 거에 감사해야 해.”

옆 사람의 장광설을 듣던 왕십칠이 악 소리를 내질렀다.

“예약한 방에서 볼 수 있었단 말이오?”

왕십칠이 그 사람의 팔을 꽉 움켜쥐며 외쳤다.

“당연하잖소. 무려 예약인데.”

옆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왕십칠은 분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일찍 좀 말해주지 그랬소! 이럴 줄 알았으면 바보같이 뛰어나오지도 않았을 텐데!”

왕십칠은 주위 사람을 밀치면서 서둘러 다리를 내려갔다. 그는 빽빽한 사람들 사이를 거꾸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연신 욕을 해댔다.

“퉤. 누가 들으면 예약해 둔 방이 있는 줄 알겠네.”

다리 위에 있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침을 뱉으며 욕했다.

주 낭자가 탄 꽃배가 덕승루 앞에 멈춰 섰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차츰 잦아들고, 곧이어 잔잔한 수면 위에 옥구슬을 떨구듯,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파 연주곡이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 한 곡이 끝나자 주위에서 열띤 환호를 보내왔다.

미소를 머금고 뱃머리에 앉아 있던 춘령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덕승루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덕승루의 이 층, 삼 층 예약 방들의 창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창가에 장식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들과 창문 너머로 방마다 가득한 사람들이 보였다.

무수히 많은 시선 아래서, 춘령은 돌연 하던 동작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창문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춘령이 쳐다보고 있던 곳에는, 다른 이들처럼 주 낭자의 가무를 즐기고 있는 사람 몇 명이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 사람이 여기에!

춘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고 눈을 힘주어 껌뻑였다.

등불과 불꽃 때문에 방 안은 밝아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했지만, 춘령은 틀림없이 그 여인을 봤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잖아! 저 사람이 어떻게 예약 방에 들어갔지?

춘령은 왕십칠에게 방을 예약했다고 했지만 실은 거짓이었다.

일개 몸종이 어떻게 방을 예약할 수 있겠어? 아무리 내가 아씨의 몸종이라지만, 그건 아씨께서 직접 나서 주시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씨께 가서 방을 달라고 말씀드릴 순 없잖아?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아씨의 의심을 사는 짓을 했다가는 내 앞길이 끝장나 버릴 거야. 복수도 당연히 물 건너가겠지.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어떻게 방을 예약한 거야? 왕십칠이 그렇게 대단해?

춘령은 창가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춘령.”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춘령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주 낭자가 춘령에게 비파를 건네고 있었다. 넋이 나간 춘령 대신 다른 시녀가 비파를 받아 준 덕에 민망한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춘령이 당황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처음이라 긴장될 거야.”

주 낭자가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춘령을 다독였다. 춘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북소리가 울리자, 좀 전과는 다르게 꽃배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배 위의 모든 빛이 중앙으로 모일 수 있도록 구리거울을 비스듬하게 세워 만든 무대는 대낮보다도 훨씬 더 밝아 보였다.

그새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주 낭자가 가벼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매와 치맛자락이 강바람에 살랑이자 주 낭자의 모습은 마치 월궁의 선녀 같았다.

“춤을 잘 추네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부단한 노력이 있었겠어요.”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낭자의 춤은 어떻습니까?”

춤?

“아씨께서 춤을 추실 줄 아시나?”

반근이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진 공자님이 갑자기 춤에 관해서 물으신다고?

“문외한은 구경만 하지만, 전문가는 기술을 본다잖아. 단번에 주 낭자가 부단한 노력을 했다고 하시는 걸 보니, 아씨께선 전문가가 맞는 것 같은데?”

시녀가 조용히 대답하고는 반근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근데 아씨께서 춤을 출 줄 아신다는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하긴 그렇지. 반근은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춤이라……. 정교랑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춤을 추며 빠르게 사라졌다.

“모르겠어요.”

정교랑이 눈을 뜨고 대답했다.

춤을 출 줄 모른다는 건가? 혹은 자신의 춤이 뛰어난지 모르겠다는 건가?

정교랑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진십삼은 그녀가 일순간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챘다.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요.”

진십삼이 강가에서 시선을 떼고 다소 불안한 듯 말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에요.”

“그럼, 내가 도울 수 있는 겁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때,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진십삼의 말을 삼켰다.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고 불꽃놀이를 올려다보았다. 찬란한 불꽃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춘령은 다시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뎌 좀 전의 그 창문을 노려보았다. 창가에 있던 소년의 준수한 얼굴이 불꽃에 반짝 빛나다가, 사그라지는 불꽃을 따라 희미해졌다.

하지만 춘령은 그 소년이 어떤 눈빛과 웃음으로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저건 왕십칠이 아니잖아! 그럼 누구지? 저 여자를 보며 왜 저토록 애틋하게 웃는 거야?

저 여자, 왕십칠한테 버림받은 창피함을 느끼긴커녕, 다른 사내가 와서 비위 맞추는 걸 받아주고 있어. 심지어 딱 봐도 왕십칠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소년 공자가!

춘령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주 낭자를 따른 이후 처음으로 후회란 것을 느꼈다. 그 후회란, 주 낭자와 함께 꽃배를 타고 있느라 지금 당장 아무나 붙잡고 저 공자가 누구냐고 물어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후회였다.

내가 저 바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적었어!

등불이 또 한 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던 차에, 창가에 서 있던 소년이 춘령 쪽을 가리켰다. 춘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춘령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쿵쾅거렸다.

날 발견한 건가? 날, 날 알아본 거야?

“저기 좀 봐요.”

진십삼이 꽃배 위의 주 낭자를 가리켰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제자리에서 빠르게 돌고 있는 주 낭자의 모습은 흩날리는 눈꽃처럼 아름다웠다.

“우리의 인연을 말하다 보니 생각이 난 건데, 낭자는 저 여인의 은인입니다.”

정교랑은 진십삼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경쾌한 피리와 북소리에 맞춰, 주 낭자는 힘든 기색도 없이 계속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며 화려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저 사람이 바로 주 낭자예요. 혹시 들어본 적 있어요?”

진십삼이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예전에 유 교리가 한 관원의 집안을 모함한 적이 있어. 그 관리는 남주로 귀양을 가게 됐는데, 가던 길에 숨을 거뒀지. 그 관리의 아내는 겁…… 큼큼, 목숨을 끊었고, 여덟 살 먹은 어린 딸아이는 교방사로 팔려갔어. 그런데 관리의 부인이 혀를 깨물고 자결하기 전, 억울함을 호소한 혈서를 아이의 품에 증거로 남겨줬다더구나. 유 교리가 방심한 탓에 화근을 남긴 게야. 그 아이는 그동안 복수만을 다짐하며 칼을 갈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오자 북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

말하는 속도는 느렸지만, 정교랑은 한 번도 더듬거리지 않고 이 많은 말들을 단숨에 뱉어냈다. 정교랑이 말을 마치자, 진십삼을 포함한 방 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맞아요. 그 사람이 바로 주 낭자예요.”

정신을 차린 진십삼이 말하다가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근데, 겁큼큼은 무슨 뜻이에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녀는 차를 마시며 입을 축이려던 찰나, 진십삼의 물음을 듣고 입에 머금었던 차를 풉 하고 내뿜었다.

유 교리가 숨겨 두었던 재산이 적발된 직후, 이춘당의 계약서를 들고 온 주 노야가 정교랑에게 흥미진진하게 말해 주었던 뒷이야기를 정교랑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주 노야의 기침 소리까지도.

시녀는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십삼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했다.

“몰라요. 그건 외숙한테 물어보지 못했네요.”

“그건…….”

진십삼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겁큼큼?

시녀는 두 사람이 겁탈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는 듯 더욱 거세게 기침을 했다.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치는가 싶더니 진십삼은 실소를 터트리며 재빨리 손으로 웃음을 가렸다.

“그게 뭔데요?”

정교랑이 진십삼을 향해 물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여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동자가 다소 멍해 보이긴 했지만, 이런 점이 바로 그녀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이었다.

정교랑이 말없이 진십삼을 주시하자, 진십삼은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나른해졌다. 동시에 애써 숨기던 웃음을 더는 못 참겠는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정교랑은 더 묻지 않고 가만히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나 좀 그만 봐요.”

진십삼이 웃으며 말했다. 진십삼은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웃음소리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진십삼이 다시 몸을 돌리자, 정교랑은 그제야 진십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분명히 악랄하고 매정한 사람인데, 어쩜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하는 거지?

웃음을 멈추지 못한 진십삼은 아예 창가에 손을 올려 몸을 지탱하며 웃었다.

오늘 밤은 벌써 두 번씩이나 이렇게 망가질 정도로 웃고 있구나. 참으로 통쾌하도다!

“진 공자님, 그만 좀 웃으세요. 이게 다 공자님 때문이잖아요!”

보다 못한 시녀가 나서자,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돌아갈래요.”

진십삼이 서둘러 웃음을 삼키고 바른 자세로 고쳐 섰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만 웃을게요. 겁큼큼은 다른 게 아니라, 단어가 워낙 흉하다 보니 주 노야가 마른기침으로 숨기셨나 봅니다. 낭자한테 예의가 아닐까 봐서요.”

설명 안 하느니 못한 말을, 왜 또 설명하고 앉아 있대 정말! 시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진십삼을 쏘아보았다. 정교랑은 진십삼을 흘끔 쳐다보고는 짧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진짜 화났어요? 낭자, 내가 잘못했습니다.”

진십삼이 서둘러 정교랑의 뒤를 따라가면서 사죄했다.

“화날 게 뭐 있나요. 난 단지 볼 걸 다 봤기에 돌아가려는 것뿐이에요.”

정교랑이 걸음을 멈춰 서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저기 터지는 불꽃들과 생동감 넘치는 북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한껏 즐거워 보였다.

왕십칠은 결국 주 낭자의 가무를 보지 못했다. 그가 간신히 덕승루까지 비집고 들어왔을 무렵 주 낭자는 이미 배에서 내려 덕승루 안에 있는 귀족들을 접대하러 간 뒤였다. 덕승루는 여전히 사람들이 넘쳐나 시끌벅적했지만, 화괴를 한 번 더 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없었다.

“도련님, 예약해둔 방이 없다는데요? 누구한테 시키셨습니까?”

왕씨 가문의 시종이 왕십칠 가까이에 다가와 말했다.

“여기 있는 아이한테 시켰어.”

왕십칠은 지친 표정으로 말하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없으면 없는 거지. 어차피 못 보니까 그냥 가자.”

풀이 죽은 왕십칠이 천천히 덕승루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뒤에 있던 시종이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왕십칠은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왕십칠이 버럭 화를 냈다.

“도련님, 정 낭자는요?”

시종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묻자, 왕십칠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자신의 허벅지를 탁 치면서 정신을 차렸다.

다른 시종들도 아차 싶은 마음에 사방으로 흩어져서 다급하게 정교랑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여인 하나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 낭자라고요? 여기 오는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어떻게 이름을 다 기억하겠습니까?”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점원이 시종에게 말했다.

“예쁘장하게 생겼고, 말은 별로 안 하오. 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시녀 둘에 사환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데.”

시종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빠르게 정교랑에 대해 묘사했다. 왕십칠이 돈주머니 하나를 던져 주자, 점원 중 하나가 그제야 무언가 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혹시 공자님이 왕십칠 공자십니까?”

왕십칠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낭자가 공자님께 자신은 먼저 간다고 전해 달라 했어요.”

대답을 마친 점원은 헤헤 웃고 옷소매를 쥐며 중얼거렸다.

“오늘 밤은 벌이가 쏠쏠하네. 말 한마디 전해 주고 돈주머니 두 개나 얻다니.”

갔다고? 내팽개쳐지니까 화가 나서 갔을 수도 있어. 누구한테 납치된 게 아니라, 제 발로 돌아간 거면 괜찮겠지.

잠깐, 명절 때는 경성에 인신매매범이 많아서, 부유한 집안의 아녀자들을 잡아간다던데. 그 여인은 바보니까 더욱 잡혀가기 쉽지 않을까?

“정말 말을 안 듣네.”

왕십칠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정교랑이 괘씸해서 화가 났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면 어디 덧나나? 나중에 꽃등 놀이 못 한 걸 내 탓이라고 하기만 해 봐!”

왕십칠의 말을 들은 점원이 웃었다.

“공자님, 듣기로는 천가로 꽃등 놀이를 즐기러 간다고 하던데요? 거긴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천가? 왕십칠 일행은 깜짝 놀랐다.

어가에서 꽃등 놀이를 한다고? 그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천가로 갔다고?”

왕십칠이 확인 차 다시 물었다.

“그럼요. 소인이 낭자와 함께 있던 공자님께 들은 말입니다.”

공자님? 왕십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행하는 공자가 있었다고? 혼자가 아니었어?”

왕십칠의 물음에 점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던데요? 낭자는 공자님 한 분과 같이 나가셨어요.”

공자님 한 분과 같이 나가셨다? 입이 떡 벌어진 왕십칠 일행은 귀를 의심했다.

“이 정조도 지킬 줄 모르는 년이!”

왕십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감히 나를 두고 다른 남자랑 놀아났다고?

“어서 쫓아가거라! 이 방탕하기 짝이 없는 연놈들의 다리를 분질러버릴 테다!”

밤이 깊어지자, 선덕문에 있던 황제는 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병약한 탓에 대신들의 걱정 어린 청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그는 대황자에게 백성들과 마저 시간을 보내라 말했지만, 태후는 밤을 새우기엔 대황자가 아직 어린 나이라고 완곡하게 말했다.

“제가 남겠습니다.”

선덕문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이미 두봉을 걸친 이황자도 진안 군왕을 따라 외쳤다.

“아바마마, 소자도 이곳을 지킬 수 있습니다.”

대황자가 질 수 없다는 듯이 황제에게 말했다. 이들의 모습을 본 황제와 태후는 웃음을 터트렸다.

“위낭이 여기 남아 있거라. 너희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짐과 함께 돌아가자꾸나.”

황제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형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이황자가 포기하지 않고 외쳤다.

“하루도 빠짐없이 위낭 옆에 딱 붙어 있으면서, 잠깐 헤어지는 게 그리도 아쉽더냐.”

태후가 못 말린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이황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어서 이리 오렴. 오늘 하루 종일 위낭 옆에 계속 붙어 있었잖니. 위낭에게도 조용히 꽃등 놀이를 할 시간을 주려무나.”

“인제 그만 황후마마께 가시지요. 마마께서는 바깥으로 나오실 수 없으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드리세요.”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번쩍 들어 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이황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시가 서둘러 이황자를 데려갔다.

황제는 신하들의 절을 받은 뒤 환궁했다. 황제가 떠나자 곁을 지키고 있던 대신들도 물러나서 북적거리던 선덕문이 고요해졌다. 이와 반대로, 선덕문 아래의 어가와 저잣거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이 반짝이나 싶더니, 입꼬리에 걸려 있던 웃음이 서서히 얼굴 전체로 번졌다.

드디어 왔네.

환한 불꽃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위병들을 지나치며 천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길 보세요!”

시종 한 명이 외쳤다.

뛰다시피 덕승루에서 다리 위까지 갔다가, 다시 다리 위에서 덕승루까지, 그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 천가까지 뛰어온 왕십칠은 오늘 오간 거리가 자신이 평생 걸은 거리와 맞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무릎에 손을 올리고 허리도 펴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시종의 말을 들은 왕십칠은 힘겹게 허리를 세우고 시종이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았다.

왕십칠 일행은 어가 입구까지 쫓아왔다. 이쪽은 확실히 저잣거리보다 사람이 적어서, 앞쪽에 있는 사람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던 한 소년 공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 좀 더 밝은 구간을 지나고 있었던지라, 밝은 불빛에 정교랑의 얼굴이 환하게 비쳤다.

“저년이!”

왕십칠이 외치자마자, 정교랑 뒤에 있던 소년이 몸을 옆으로 돌려 자신의 앞에 있던 등산을 올려다보았다.

아, 저 사람이었어? 왕십칠은 진십삼을 보더니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네. 한집 식구잖아.”

시종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아시는 분입니까?”

“알고말고. 저 사람, 주씨 가문의 공자야.”

왕십칠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쩐지. 내가 정혼자를 도둑맞을 정도로 운이 나쁜 편은 아니긴 하지.

시종들도 왕십칠을 따라 긴장을 풀었다.

도둑맞은 것도 아니고, 납치당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가족을 만난 거구나.

“그런데 도련님, 주씨 가문은 품계가 낮은 무장 가문인데, 어떻게 천가에 자리를 얻었을까요?”

연륜이 있어 보이는 시종이 무언가 생각난 듯 왕십칠에게 말했다.

그러게. 내가 아무리 타지 사람이긴 해도, 천가가 어떤 곳인지 정도는 알고 있지. 주씨 가문이 천가에서 꽃등 놀이를 즐길 수 있다고? 정씨 가문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평범한 무장 가문일까?

왕십칠은 눈을 크게 뜨고 앞쪽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사방에서 몰려온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인들의 나이대는 다양했지만, 하나같이 정교랑을 살갑게 반기는 모습들이었다.

“저 바보가 어찌 저렇게 사람을 많이 알지?”

왕십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위병 한 명이 그를 향해 고함치며 앞을 막아섰다.

황실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중추절 어가의 수비는 무장한 군부 병사들이 맡았다. 위병의 무시무시한 고함에서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으니, 감히 이곳에서 말썽을 피우는 자가 있다면 현장에서 즉살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화들짝 놀란 왕십칠은 자세를 낮추어 사람을 찾으러 왔다며 위병에게 공손히 주씨 가문을 언급했다.

“가서 물어볼 테니, 잠시 기다리시오.”

위병들이 사나운 기세로 왕십칠 일행 앞을 막아서면서 뒤로 가라고 손짓했다.

“좀 더 뒤로 물러나시오.”

왕십칠과 시종들은 허겁지겁 몇 걸음 물러난 뒤에 어가에 서 있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몰려든 사람들과 여전히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언니, 언니. 난 언니가 안 오는 줄 알았잖아요.”

진단랑은 정교랑의 옷소매를 끌어안은 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서 놀았어요? 누구와의 약속이길래?”

진십팔랑이 웃음기 가득하게 말하면서 일부러 진십삼을 향해 눈짓했지만, 진십삼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 정혼자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혼자! 진십팔랑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던 다른 여인들도 깜짝 놀랐다.

이거 봐. 이 여인은 항상 이렇다니까. 숨기는 것 없이 언제나 당당한 모습이지.

정혼자라……. 이 단어가 이렇게 아름답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진십삼은 시선을 떨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가 진십삼을 살짝 밀치면서 무리에 끼어들었다.

“정 낭자.”

진(秦) 부인이 미소지으면서 손에 있던 부채를 흔들었다.

“드디어 왔네요. 어서 이리 와요. 우리 둘이 이야기 좀 해요.”

“안 돼요, 안 돼요! 정 언니는 우리랑 같이 갈 거예요.”

진단랑이 정교랑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지면서 외쳤다.

“아니면 진 백모님도 저희 쪽으로 오심이 어떠신지요?”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다른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이 꼬마 아가씨들이 내 사람을 뺏겠다 이거지?”

진 부인이 입꼬리를 올리고 부채로 진십팔랑을 가리키면서 발걸음을 뗐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내가 너희와 다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야.”

진 부인이 정말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자, 진십팔랑과 진단랑은 꺅 소리를 지르면서 정교랑을 끌고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갔다.

여인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여인들이 웃고 떠들며 진(陳)씨 가문의 천막으로 향하는 것을 본 주 부인은 손을 툭툭 털었다.

난 그냥 꽃등 놀이나 구경해야겠다. 내 조카는 남들이 더 잘 돌봐 주고 있을 테니.

“주 대인, 어떤 사람이 대인 가문의 사람이라며 어가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합니다.”

아들들과 모여 앉아 잔뜩 흥이 오른 채로 술을 마시고 있던 주 노야는 위병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가문의 사람이라고?”

주 노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우리 집 사람들은 다 여기 있는데? 여기 없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일 터.

“왕가 성을 가진 자입니다.”

위병이 주 노야의 표정을 읽고 말을 덧붙였다.

왕씨라고? 그제야 주 노야는 누구인지 알겠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모르는 자일세. 썩 꺼지라고 하게나.”

위병은 바로 알겠다고 답하고 천막을 나갔다.

“여기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나.”

주 노야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에 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 나서 다시 웃는 얼굴로 아들들과 술자리를 즐겼다.

“자, 자. 어서 술을 따라 보거라.”

왕십칠 일행은 어가를 지키는 위병들에게 멀리멀리 내쫓긴 뒤에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허튼수작을 부리다가는, 네놈들을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리겠다!”

위병들이 삿대질을 하며 매섭게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왕십칠은 분통이 터져 길길이 날뛰려 했지만, 주위의 시종들이 그를 뜯어말렸다.

“도련님, 여기는 무려 경성입니다. 선덕문 앞에서 난리를 피웠다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요.”

시종들이 왕십칠을 붙잡고 달랬다. 왕십칠은 분이 가시지 않은 듯 바닥을 발로 세게 구르고 외쳤다.

“주씨 놈들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가자!”

왕십칠이 소매를 휙 털고 몸을 돌리자, 시종들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시종 두 명이 몇 걸음 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어가를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가만 보면, 주씨 가문에서 저 정씨 바보를 아예 내팽개치고 사는 것 같진 않아. 저 바보도 사람들과 아주 잘 지내는 것 같고.”

어렸을 때부터 바보가 됐다는 것 외에, 우리가 저 바보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나 보네.

천가에 위치한 진(陳)씨 가문의 천막 안에는 진 노태야와 진소도 앉아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꽃등 놀이를 만끽하는 여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조용하게 여유를 즐기는 편이었다.

정교랑이 천막 안으로 들어설 때는 진 부자가 바둑판을 앞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천막 안은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간을 두 개로 갈라놓아서, 한쪽에서 여인들이 이야기를 하면 그 소리가 반대편으로 새어 들어갔다.

“상청노(常靑奴)가 ‘우아한 말 한 필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과의(果毅)는 아주 기뻐했어. 어제까지만 해도 틀린 대답을 했던 상청노가 하루 사이에 옳은 답을 해냈으니까. 과의가 신기해하며 누가 가르침을 준 것이냐고 물었지. 상청노는 전날 밤 형수가 해 준 당부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형수가 시킨 대로 형님이 알려줬다고 대답했어. 그러자 과의가 형님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상청노는 집에 있다고 답했지. 과의가 다시 형님은 집에서 뭐 하냐고 물었더니, 상청노가 ‘집에서 아들 낳느라 아직 침상에 누워 있어요’라고 대꾸했다지 뭐야.”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진 노태야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휘장 너머의 여인들도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의 팔을 끌어안은 진단랑은 눈물이 날 지경으로 웃고 있었고, 진십팔랑 외 다른 여인들도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었다.

“이건 또 어디서 배워온 농담이래?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어른스러운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네!”

진소 부인이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진 부인을 가리키면서 웃었다.

밖에 있던 시녀와 몸종들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농담을 전해 듣고는 밖에 나가서 들은 농담을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그러자 천막 밖에서도 아랫것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배를 잡고 쓰러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교랑은 아무런 미동 없이 멀뚱히 앉아 있었다.

“정 낭자, 안 웃겨요?”

진 부인이 입꼬리를 올린 채 정교랑에게 물었다.

“네, 안 웃겨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진 부인은 흠칫 놀라나 싶더니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이렇게 웃긴 이야기도 안 웃길 수가 있다고? 그럼 낭자가 한 번 웃긴 이야기 좀 해봐요.”

“전 할 줄 몰라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정 낭자, 낭자는 다 좋은데 이거 하나가 좀 그래. 어린 나이인데도 잘 안 웃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진소 부인이 마른기침하고는 진 부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리 조금 친해졌다지만, 말을 너무 여과 없이 하는 거 아니야?”

정 낭자는 매일같이 너를 싸고도는 평범한 여인들과는 달라. 네가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그걸 영광인 줄 아는 여인들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다 나중에 정 낭자가 네 체면이고 뭐고 봐주지 않는 날이 오게 되면, 은혜는커녕 원수를 지게 된다고.

“악의 담긴 말이 아니니까 정 낭자가 기분 나빠하진 않을 거예요.”

진소 부인이 노파심에 한 말임을 알고, 진 부인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그녀가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가 낭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더 해 줄게요. 이번엔 분명히 웃길걸요?”

“어머니, 그만하세요.”

옆에서 참다 못한 진십삼이 진 부인을 말렸다.

여인들의 시선이 진십삼에게로 쏠렸다. 두 집안의 자녀들은 모두 친한 사이인지라, 진십삼도 자연스럽게 천막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일부러 더 웃어주는 걸 수도 있지요. 누구는 일부러 웃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어요.”

말하던 진십삼은 정교랑이 덕승루에서 말실수를 한 게 생각나서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뒤쪽에 앉아 있던 시녀는 진십삼이 왜 웃음을 터트렸는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챘다. 시녀도 참지 못하고 쿡 하고 웃었다가 서둘러 웃음기를 거두고 진십삼을 노려보았다.

천막 안의 여인들은 이 두 사람이 왜 웃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정말인가 봐요. 십삼공자는 아직 이야기를 시작도 안 했으면서 자기 자신을 웃겼네요.”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말하자 천막 안은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진 부인도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의 시선은 진십삼에게 머물렀다가 정교랑에게로 갔다. 젊은 남녀를 번갈아 보던 진 부인의 눈가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정 낭자, 잠시 이리 와 앉으시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휘장 반대쪽에서 진 노태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태야, 여인들끼리 한창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꼭 와서 흥을 깨셔야겠습니까.”

진 부인이 진 노태야를 가볍게 탓했다

“정 낭자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니, 여인들끼리 나누는 농담에는 관심이 없을 게요. 차라리 나와 바둑 한판을 두는 게 더 재미있겠지.”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진십삼은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가 봐요. 좀 이따 내가 낭자를 데려다줄게요.”

진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그런 게 어딨어. 우리 집에서도 정 낭자를 데려다줄 마차를 준비해 둔걸?”

진소 부인이 진 부인을 향해 말했다.

“언니만 보은하라는 법 있어요? 우리한테도 은혜에 보답할 기회 좀 줘요.”

진 부인이 조르다시피 말하고는 몸을 일으켜서 자신이 데려온 시녀에게 지시했다.

“넌 여기 남아 정 낭자의 시중을 들거라.”

시녀는 웃으며 공손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천막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을 배웅했다.

진십삼이 가장 먼저 천막 밖으로 나왔다.

“또 뭐 하려고 이래? 괜히 헛수고야.”

진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해 보지도 않고 헛수고인 줄 어떻게 알아요? 내 이야기를 듣고도 웃지 않은 사람은 정 낭자가 처음이라 그래요. 두고 봐요, 내가 정 낭자를 기필코 웃기고 말겠어요.”

진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진소 부인은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진 부인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치고는 자리를 떴다.

두 집안의 딸들은 천막을 나온 김에 천가를 구경하러 흩어졌다. 천막 안은 그제야 고요를 되찾았다.

정교랑이 휘장 반대편으로 들어올 때도, 진 노태야와 진소는 여전히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였다.

“바둑 구경 좀 하다 가시오. 조용하니 좋잖소. 적어도 웃긴 이야기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진 노태야가 웃음 지으며 정교랑에게 말했다.

“각자의 즐거움이 있는 거지요.”

정교랑이 말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정 낭자는 한 번도 원한을 품은 적이 없어 보입니다.”

“원한을 품을 만한 게 없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항상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렸기도 하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어쩜 저리도 솔직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냐는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 여인의 말이 맞긴 하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남에게 원한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저 말은 지금 날 두고 하는 말인가?

처음에는 다들 정 낭자가 더는 우리 집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걱정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 낭자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정 낭자는 나에게 도움을 거절당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않았던가. 저 여인은 위로를 필요로 하는 가엾은 패자가 아니라, 경이로운 승리자인걸.

수많은 생각이 찰나에 스치는 바람에 진소의 손이 살짝 떨리면서, 바둑판에 내려놓던 흰 돌의 위치가 조금 틀어졌다.

정교랑의 대답에 진 노태야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잠깐 말없이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좀 전에 정교랑이 천막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둑판 위의 상황은 이미 교착 상태에 이르렀기에, 진 부자는 한 수씩 둘 때마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검은 돌을 손에 쥔 진 노태야는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내젓고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 바둑 두는 법은 생각이 났소? 낭자가 보기에 내가 아직 승산이 있소이까?”

바둑판 위를 잠시 쳐다보던 정교랑은 검은 돌 하나를 집어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자리에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이겼어요.”

정교랑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진 노태야와 진소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정교랑의 둔 신의 한 수는 지금까지의 판국을 뒤엎었다. 그녀의 한 수로 승자는 패자가 되고, 패자는 승자가 되었다.

진소가 바둑판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낭자, 다음번에 수를 둘 때는 미리 귀띔 좀 해주면 안 되겠소?”

진소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덧붙였다.

“내가 반나절 동안 노력했던 게 싹 다 무용지물이 되었잖습니까.”

“그건, 제 탓이 아니죠.”

정교랑은 진소의 말뜻을 알아챘는지 똑같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진 노태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만하면 됐다. 진 거면 진 거지. 자기 자신을 탓하지 못할망정, 남 탓을 하면 쓰나.”

진 노태야가 시녀들에게 손짓하여 차를 올리라고 했다.

“자자, 차나 마십시다.”

시녀들이 바둑판을 치우고 향긋한 차를 우려왔다.

“자, 한번 마셔 보시구려.”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차를 권했다. 정교랑은 감사하다고 말한 뒤, 차를 한입 머금더니 멈칫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어차(御茶)라오.”

진 노태야가 말했다.

“폐하요? 황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교랑이 진 노태야를 향해 물었다.

“맞습니다. 황궁에 새로 들어온 향차지요. 내가 남겨둔 게 좀 있으니, 마음에 든다면 좀 가져가시구려.”

진소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 차를 자주 마시지 않거든요.”

이어 정교랑은 찻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머금은 채 정교랑을 눈으로 배웅했다. 몸을 일으켜 천막을 나가려는 정교랑을 진소가 불러 세웠다.

“정 낭자.”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진소를 쳐다보았다.

“선행을 많이 베풀고, 정도(正道)에 어긋난 일을 하지 마십시오.”

진소가 말했다.

“선행이요? 정도요?”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대인께서 조정에 계신 이유가 그 때문인지요? 어쩐지 대인의 운이 썩 좋진 않다고 생각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낭자가 정도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낭자가 그 반대의 편을 들었다면, 결과가 어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진 대인, 자신이 뭘 하는지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시는 건가요?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 이게 바로 진 대인께서 아셔야 할 정도입니다.”

정교랑의 말을 들은 진소는 정교랑이 천막을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저 여인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말하는 건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같은 당파끼리는 한 편이 되고, 다른 당파는 배척하라고?

그건 고씨 패거리들이나 하는 짓이잖아. 아무나 걸리는 대로 물어뜯고, 일부러 모함에 빠트리고, 자신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조정의 사람들을 해치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짓거리들.

저 여인이 감히 그런 짓들을 정도라고 말하다니!

“어찌 저럴 수가 있습니까!”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외치자 뒤에 서 있던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정 낭자는 항상 저렇지 않았느냐.”

힘을 빌려 무뢰배를 활로 쏴 죽이고, 위협을 받으면 조정의 관리를 해치우고. 남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몸 사리기에 바쁠 일들을 그녀는 단 한 가지의 방법으로 해결했다.

그녀의 방법은 방어도 아니었고, 인내도 아니었다. 정교랑이 택한 방법은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진격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정교랑은 진소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이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녀는 상대방이 어떤 이유로 도움을 거절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용감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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