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관리들이 폐기할 문서를 폐지 삼아 팔았다는 이야기는 <송사(宋史>에 나옵니다. 소식이 진주원에 임직할 당시 진주원의 폐지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작은 건물을 짓고 기녀를 불러 술을 마셨다가 어사에게 탄핵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10여 명이 축출됐죠. 이들이 사사로이 건물을 지어 먹고 마신 일이 어사의 눈에 거슬렸던 게 아닙니다. 소식이 범중엄의 신정(新政)을 지지하면서 수구파의 원한을 사 벌어진 일이지요.
-절명-
정교랑은 동 낭자를 상대하지 않고 동 노야를 보며 물었다. 동 낭자는 외면을 당한 채로 서 있었다. 가슴속에 커다란 돌이 얹힌 듯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 여인이! 향칠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갑자기 이걸 왜 묻지? 대체 뭘 추측하는 거야? 멍한 표정의 어린 낭자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점점 더 거세게 옥죄는데…….
“나요.”
향칠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우리 형제는 오랫동안 못 만났지만, 마음은 변함없소. 형님들이 이런 화를 입었는데, 내가 수수방관할 순 없잖소.”
정교랑이 향칠을 쳐다봤다.
“당신이었군요.”
가벼운 한마디였지만 향칠에게는 천 근이나 되는 거석이 내리누르는 듯 들렸다. 향칠은 순간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뭘 겁내! 뭘! 아무 근거도 없잖아. 관부에서도 일곱 명의 죄명을 확정한 마당에, 나한테 화살을 돌릴 순 없지.
향칠은 다시 똑바로 서서 정교랑과 팽팽한 시선으로 맞섰다. 정교랑이 다시 동 노야를 쳐다봤다.
“날 무슨 일로 찾아왔죠?”
이 여인이 머리가 어떻게 됐나? 왜 자꾸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난리야?
괜히 간 떨어질 뻔했네. 향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우리가 다른 뜻이 있어 온 것은 아니오. 어떻게든 범강림 형제의 목숨이라도 살려 보고 싶어 왔소. 다른 건 내 도울 힘이 없지만,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소.”
동 노야가 말했다. 정교랑이 동 노야를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교랑의 대답에도 동 노야의 얼굴에는 조금도 기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가볍고 시원스레 대답하는 걸 보니 성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이 여인의 눈에 서무수나 범강림 형제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어쨌든 여기 와서 서무수 형제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아니고, 그들을 지켜 줄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렸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야.
동 노야가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정교랑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존함도 여쭙지 않았네요.”
이 여인이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나! 사람을 갖고 노는 거야, 뭐야! 향칠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슴이 터질 듯 두방망이질했다.
동 노야는 이름을 말하고 다시 한번 예를 표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들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정교랑도 옥대교로 돌아갔다.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 서자 주육낭이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휙 내던지고 담벼락 쪽에서 걸어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반근, 간식 좀 가져와.”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이 씩씩거리며 노려봤다.
“정교랑, 적당히 해!”
정교랑은 주육낭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주육낭은 순간 노기가 사라지며 지난번 일이 떠올랐다.
- 방금 마신 그런 차죠.
이 여인이!
“무슨 일인지 네가 말하기 싫으면 나도 안 물을게. 이거만 대답해. 도움이 필요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육낭은 곧장 뒤돌아 걸어갔고, 반근과 금가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몇 걸음 걸어가던 소년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뻣뻣하게 몸을 돌렸다.
“뭔지 확실히 말해. 이 몸도 바쁜 몸이야.”
주육낭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자리를 뜬 후, 시녀가 초조한 표정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장 노태야는 댁에 안 계세요. 언제 돌아오시는지도 모른대요. 서찰이라도 보낼까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은 됐어.”
“그래도 노야는 계세요. 무슨 일인지도 물으셨고요.”
시녀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노야께선 남의 일에 관심을 보인 일이 없으시거든요. 노태야께서 떠나기 전에 당부하셨나 봐요. 노야께서 좀 융통성 없는 성격이시긴 해도, 노태야께서 당부하셨으면 틀림없이 도와주실 거예요.”
“알았어.”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근이 건넨 물을 받았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단정히 앉아 물을 마시는 대신 잠시 멍하니 있었다. 시녀와 반근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씨, 정말 일이 힘들어진 거예요?”
시녀가 물었다. 반근은 아무 말 없었지만 표정까지 숨길 순 없었다. 아침에 나갈 때보다 훨씬 무기력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정교랑이 시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밤길을 오래 다니다 보면, 운이 나빠 귀신을 마주칠 때도 있는 법이지. 그래도 날은 밝기 마련이야.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해결할 수 있어.”
말을 마친 정교랑은 물잔을 들어 물을 천천히 마셨다.
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날이 밝았다. 성문 앞에 선 향칠은 어쩐 일인지 마음이 불안했다.
감문관한테 불려가 문서를 쓴 일 때문인가? 평소엔 나한테 시키는 일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왜 갑자기 날 불러 시킨 거지? 더구나 감문관이 쳐다보는 눈빛도 심히 불편했는데.
이미 확정된 일 아니었나? 투서에 대해 아직도 조사 중인가?
향칠의 눈앞에 어제 본 어린 낭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름답긴 아름다운데, 장터나 거리에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전형적인 미인과는 달랐다. 차갑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랭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한 일인 걸 알아본 건가? 알아봤으면 뭐? 증거도 없는데 제가 어쩔 거야?
향칠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향칠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자신이 글공부를 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았지만, 오른손과 왼손 모두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래, 난 이렇게 머리가 좋다고. 학문도 서무수에 못지않고, 무예도 마찬가지야. 얼굴도 서무수에 결코 뒤지지 않지. 단지 시기의 문제였어. 당초 나 혼자 단기필마로 동씨 가문을 구해야 했는데, 하필 서무수가 따라붙는 바람에!
당초 놀라 날뛰는 마차에서 동씨 가문 넷째 낭자를 구한 게 자신이었다면, 자신이 서무수를 건드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도와준 게 뭐 그리 대수야?
여덟 형제들은 전부 서무수만 보고 향칠은 보지 않았다. 적과 싸울 때도 다들 서무수만 보고 향칠은 보지 않았다.
무원산을 떠나면서 갈라진 후 오 년 동안 동씨 가문에서 함께 지냈지만, 동씨 가문 사람들의 눈엔 여전히 향칠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향칠은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바뀌리라.
그런데 뜻밖에도 서무수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도 형제의 의리로 이들을 발고하는 대신 돈을 쥐여주며 살길을 열어 주고자 했지만, 세상인심은 야박하기만 했다.
당초 서무수는 전공을 세워 관직에 나갈 거라며 데릴사위 노릇에 만족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관직에 나갈 길이 요원해졌으니 지난 일이 떠올랐겠지. 왜 이 세상 좋은 일은 다 그놈 독차지인 거야!
이제 됐다. 마침내 하늘이 그놈을 거두게 됐어. 사람은 죽어야만 영원히 잊혀지는 법이지.
향칠은 주먹을 부르쥐었다.
“향칠.”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향칠은 놀라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자 동료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하고 섰어? 아주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네.”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향칠은 억지로 따라 웃으며 비질을 멈추고 초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은 향칠은 차를 마시며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한편 성문을 드나드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길 좀 물읍시다.”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가 이들의 말을 끊었다.
경성을 드나드는 외지 사람은 매일 수도 없이 많았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남루한 행색에 수척해 보이는 노인이 깃발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점쟁이가 갈 만한 곳은 뻔했다.
“철마교(鐵馬橋)는 서쪽으로 가면 되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알려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한 노인은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이들을 보며 물었다.
“나리들, 점 한번 쳐 보시지요. 이 또한 인연이니 복채는 안 받겠습니다.”
관리들은 같잖다는 든 웃으며 노인을 훑어봤다. 여느 때였다면 향칠도 강호를 떠도는 사기꾼을 내쫓아 버렸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어수선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럼 내 운세 한번 봐 주시구려.”
향칠이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에게 해명했다.
“요새 영 운이 안 좋아서 말이야. 언제 좀 괜찮아질지 모르겠네.”
운이라는 말에 동료들은 다들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노인에게 점을 봐 달라고 했다.
노인은 한 사람 한 사람 관상을 봐 주며 진짜인지 가짜일지 모를 풀이를 늘어놓았는데, 전부 좋은 말이었다. 노인 혼자 말하고 다들 듣기만 하니, 금세 향칠의 순서가 됐다.
줄곧 미소를 잃지 않던 노인은 향칠을 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젊은이는 운이 안 좋구려.”
“응? 한동안 계속 운이 안 좋을 거란 말이오?”
옆에 있던 이가 웃으며 물었다. 향칠도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안 좋습니다요, 안 좋아. 미간이 검은 걸 보니 재액이 다칠 겁니다.”
노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뜩이나 근심이 있던 향칠은 그 말에 기분이 확 상해 노인을 쫓아냈다.
“썩 꺼져라. 재수 없이.”
나머지 사람들도 웃으며 노인을 쫓아냈다.
“젊은이, 난 사실대로 말하는 거요. 허튼소리 지껄이는 거 아니니, 가벼이 들으면 안 돼요.”
노인은 주절주절 떠들며 한 손을 내밀었다.
“이 늙은이가 재액을 막아 줄 터이니 십 전만 주시구려. 안 그럼 큰일 납니다.”
거 보자 보자 하니까!
“냉큼 꺼져라. 썩 꺼지지 않으면 관아로 끌고 가겠다.”
향칠이 몸을 일으키며 눈을 부라리자 노인은 그제야 깃발을 껴안고 허둥지둥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멀찌감치 떨어져 이쪽을 보는 걸 잊지 않았다.
“제기랄, 재수 없이.”
향칠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누가 붙잡으래? 저런 사기꾼들은 아주 도가 텄다니까. 누굴 물고 늘어져야 할지 귀신같이 알아본다고.”
동료들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 요즘 무슨 근심이라도 있나?”
향칠은 노인을 향해 속으로 욕을 몇 마디 더 내뱉고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심이야 있지. 나 자체가 근심 덩어리인데.”
향칠이 쓴웃음을 지었다.
데릴사위 노릇이나 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할 수야 없지. 다들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향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괜스레 입을 놀렸군. 재수 없는 소리를 들었더니 기분만 잡쳐서 안 되겠어. 노름이라도 한판 해서 재수 없는 기운을 날려 버려야지.”
동료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따라 웃고는 자리를 뜨는 향칠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료들이 멀어지자 향칠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점쟁이 노인이 아직도 저 멀리서 자신 쪽을 향해 눈을 찡긋거리는 게 보이자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저 망할 늙은이가…….”
향칠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걸음을 옮기자, 노인은 사태 파악을 하고 잽싸게 도망쳤다. 쫓아가던 향칠은 걸음을 멈추고 욕설을 내뱉으며 인상을 쓴 채 발길을 돌렸다.
아침부터 계속 재수 없는 일만 생겼단 말이지. 좀 피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아무래도 그게 좋겠군!
향칠의 걸음걸이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향칠의 어깨를 탁 쳤다.
“향칠, 같이 좀 가야겠다.”
사내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향칠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리자 낯선 사내가 보였다. 사내 옆으로도 장정 두세 명이 있었는데,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향칠을 노려보고 있었다.
“뉘시오? 왜들 이러는 거요?”
향칠은 놀라 소리쳤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들의 손아귀에 잡혀 다짜고짜 마차에 실리는 신세가 됐다.
향칠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끝났구나, 끝났어. 그 노인네가 사기꾼이 아니었구나. 정말 재액이 닥칠 운수였어.
“벌건 대낮에 뭣들 하는 짓이오! 사람 살려…….”
향칠의 고함 소리와 함께 마차는 시끄러운 거리를 내달렸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마차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놀란 향칠이 거의 정신줄을 놓을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떠밀리다시피 내린 향칠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황량한 들판이거나 버려진 폐가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저자의 한 골목이었다. 게다가 향칠이 전에 와 본 곳이기도 했다.
“손님, 이쪽으로 드세요.”
입구에 있던 점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마침 식사 시간이었다.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는 아니었지만 손님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신선거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들어가자.”
사내가 뒤에서 향칠을 밀며 말했다. 향칠은 시선을 거두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왜들 이러시오? 대로변에서 사람을 잡아가다니, 댁들은 국법도 없소?”
소리치던 향칠은 어느 별실로 떠밀려 들어갔다. 별실 안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향칠은 그중 한 여인을 대번에 알아봤다.
“당신이었군!”
향칠이 소리쳤다.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자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겁낼 게 뭐 있어? 다들 수군거렸잖아. 태평거가 이번엔 빠져나가기 힘들 거라고.
“이보시오, 낭자. 이게 무슨 짓이오?”
향칠이 분기탱천하여 소리치자 정교랑이 향칠을 빤히 쳐다봤다.
“당신이 한 짓이었군요.”
“내가 뭘 했단 거요?”
향칠은 버럭 소리를 지으며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태평거를 노린 음모인가 싶어 저 어린 계집이 날 떠보는 것이렷다? 날 잡아 온 것도 일단 저지르고 보잔 생각이었겠지.
“이보시오, 낭자.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이제 향칠은 분노가 치밀기보단 성가시단 생각이 들었다.
“말 안 하면 방법이 없을 줄 알아요?”
정교랑이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시선을 돌리자 그 위에 놓인 종이가 향칠의 눈에 들어왔다.
“이것들은 내가 관부에서 가져온 익명의 투서예요. 이건 당신이 오늘 아침에 쓴 문서고.”
정교랑이 탁자에 놓인 종이를 앞으로 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죠?”
향칠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가소롭군! 이런 게 무슨 주인장이라고! 태평거와 신선거의 주인장은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이렇게 어린 계집을 내세워 뭘 어쩌자는 건지! 이제 보니 태평거 뒤에 있는 진짜 주인이 정말 며칠 못 버틸 거 같군.
“낭자, 난 정말 모르는 일이요.”
향칠은 탁자 위를 쳐다보며 웃음까지 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낭자. 가각고(架閣庫: 문서를 보존, 관리하던 관청)의 송 대인이 안 계셨나 본데, 그 밑에 있는 말단 관리들은 아주 영악하기 그지없어요. 그 사람들한테 속아 뭘 잘못 가져온 거 아니오?”
“이제 보니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군요.”
정교랑이 불쑥 말했다.
뭐라고? 그걸 어찌 알았지? 웃고 있던 향칠의 표정이 움찔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겁이 없구나.”
정교랑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손에 쥐었다. 조용한 별실 안에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따라 향칠의 마음도 쭈글쭈글 구겨졌다.
이건 속임수야! 증거가 없는데 겁낼 게 뭐 있어!
“낭자,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뭡니까?”
향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 고집 한번 세구나!”
지금껏 옆에서 잠자코 앉아 있던 소년이 버럭 호통을 쳤다.
“네놈의 입을 못 열 성싶으냐?”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마음은 약한 자로군. 시정잡배나 쓰는 공갈 협박이라니, 큰일을 할 놈은 아니야.
향칠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집이 센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진짜 몰라서 그럽니다.”
“범강림 형제가 경성에 와서 맨 먼저 만난 게 당신이죠? 그 사람들이 탈영병인 건 당신만 알고 있고요.”
“낭자, 또 넘겨짚는 겁니까? 강림 형님네한테 물어보긴 했고요?”
향칠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지며 냉소까지 지었다.
“그래요. 병부에서 그들을 데려갔으니, 아무도 만날 수 없단 사실도 알고 있군요.”
향칠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시답잖은 소리. 어린 계집이 으름장을 놓는다고 겁낼 줄 알고? 내가 말단 관리라고는 하나 말단 관리들 사이에도 나름의 연줄이 있는 법이야.
“아주 똑똑히 알고 있네요.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고요. 그러면서 내가 뭘 묻는지 모르겠단 거예요?”
향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당신을 부른 건, 뭘 묻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인정하라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뭘 알고 있는지, 알려 주려는 것뿐이죠. 잘 들어요. 당신이 범강림 형제의 일을 밀고한 걸, 내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말뿐이고 증거는 없단 소리잖아. 당황스러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걷혔다.
“낭자, 사람 좀 잡지 마시오.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림 형님네가 왜 잡혀갔는지는 나한테 물을 필요 없이 거리에 나가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알 거요.”
향칠이 손을 내저었다.
“당신네 태평거가 누굴 잘못 건드려 보복을 당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소. 왜 굳이 날 잡고 늘어지는 거요? 이러면 뭐 좋은 거라도 있소?”
정교랑은 향칠을 빤히 보며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하던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은 범강림 형제와 의형제를 맺었어요. 당신은 동씨 가문의 낭자를 좋아했지만, 그 여인은 서무수를 마음에 뒀죠. 서무수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걸 거절하는 바람에 동씨 가문에서 당신을 데릴사위로 들인 거고요.”
향칠이 무어라 반박하려고 입을 움찔거렸지만, 정교랑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동씨 가문은 계속해서 서무수를 대우했고, 동 낭자 역시 옛정을 잊지 못했죠. 일 년 전, 경성으로 온 서무수 형제는 당신을 찾아갔고, 탈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도움을 청하러 갔던 건데, 물론 당신은 거절했죠. 관아에 발고하는 대신, 서둘러 떠나라고 했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경성에서 재회했죠. 동씨 가문에서 귀빈으로 대접하니, 울분이 차올랐겠죠. 그래서 익명의 투서를 썼고요. 당신이 그들 형제를 해친 거예요. 이게 내가 말하려던 거고요.”
향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낭자의 말일 뿐이죠. 그렇게 우기겠다면, 나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요. 이게 내가 하려던 말이에요. 당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난 신경 안 써요. 난 내가 확신하는 일만 신경 쓰죠.”
“그렇다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군요. 이만 가도 되겠소이까?”
항칠은 냉랭하게 쏘아붙이고는 곧장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문가에 다다랐을 즈음, 정교랑의 말이 향칠을 불러세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했죠?”
향칠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난 조용히 사는 말단 관리입니다. 낭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래도 난 말해 주고 싶네요.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의가 작년에 경성으로 온 일은 알고 있죠? 진 노태야를 살리고, 금석을 먹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동 내한도 구한 사람이요. 다들 도교 이 진인의 제자라고 하죠.”
갑작스러운 말에 향칠은 멈칫했다.
그 놀라운 일은 경성 바닥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과장도 적잖이 섞였겠지만, 성문을 지키는 향칠도 일찌감치 소문을 들은 터였다.
근데 그 얘길 왜 꺼내는 거지? 향칠은 잠자코 정교랑을 쳐다봤다.
“내가 그 신의예요.”
정교랑이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도교 이 진인이 직접 사사한 제자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죠. 염라전에 가서 사람 목숨을 구해 올 수도 있고요.”
옆에 있던 주육낭과 반근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교랑이 신선에게 비술을 전수받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본인은 시종일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놀랄 수밖에.
그럼,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였다고?
향칠도 낯빛이 변했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 그래서 뭐요?”
“당연히 당신 목숨도 가져갈 수 있죠.”
“아, 아니, 내 목숨을 가져가서 뭐하려고! 뭔데 당신 맘대로 추측이야?”
“맞아요. 내 맘대로 추측한 거예요. 당신이 그 사람들을 해쳤고, 우리 태평거를 노렸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내 원수죠. 내가 원수를, 은인 대하듯 떠받들기라도 할까요?”
추측이라면, 증거가 없단 거잖아. 이 여인의 공갈에 걸려들면 안 돼!
“난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 모함하지 마시오!”
“그래도 억지를 부리네. 저런 자와 무슨 말을 더 섞어!”
주육낭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대체 뭐하자는 거야?”
향칠이 두려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 소년이 오늘 아침 감문관 내실에 앉아 있었단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문서를 작성하러 불려갔을 때, 차를 들여가는 사이 잠깐 들어 올린 문발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던 소년이었다.
감문관을 움직일 정도라면 감문관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겠지.
“뭘 어쩌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말해 주려는 거죠. 당신 명줄은 오늘까지라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겠다니!”
향칠은 소리를 지르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지만, 밖에 있던 사람에게 막혔다.
“난 돈이 있어요. 병을 치료하고 받는 거금의 치료비 외에 태평거도 있죠. 태평 두부도 있고 신선거도 있고요. 내가 가진 돈은 당신이 평생 가도, 아니 동씨 가문이 평생 가도 못 벌 액수죠.”
향칠이 문에 기대섰다.
“난 권세도 있어요.”
정교랑은 주육낭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내 외숙 댁의 오라버니예요.”
오라버니……. 이 여인이 주육낭을 오라버니라고 부른 건 거의 처음이었다. 주육낭은 온몸에 가시가 돋친 듯 좌불안석이었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은, 당신도 알 거예요. 권세가 대단한 건 아니지만, 당신 같은 말단 관리나 분뇨를 치우며 가업을 이룬 동씨 가문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죠. 날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진소 상공 댁이나, 동 내한의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뿐인가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내 비술로, 목숨을 구하고 싶은 사람도 많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내 눈에, 개미 새끼 한 마리만도 못해요. 아무것도 아니죠.”
귀에 담을 일도 거의 없었던 거물급 인물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향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경실색한 표정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당신 같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죽이는 일에, 신경 쓰고 말고 할 게 있을까요? 내가 지금 이 신선거 대청으로 나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당신을 때려죽인다 해도, 누가 날 어찌할 수 있을까요?”
향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문에 기대 주저앉다시피 했다.
“나 같은 사람이 당신이 이 일을 인정하든 안 하든, 따질 필요 있겠어요?”
정교랑은 들어올 때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사내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 목숨은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어요.”
“낭자, 낭자. 나도 강요에 못 이겨 한 일입니다.”
향칠은 별안간 눈물 콧물을 쏟으며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나섰다.
역시 저놈 짓이었군!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놈은 그릇이 작아 도둑이 제 발 저린 거라지만, 언제나 말수가 적던 저 여인이 신랄한 말로 다그치는 모습은 실로 놀라울 뿐이었다.
“누가 시켰느냐? 냉큼 말해!”
“모릅니다. 소인도 몰라요. 소인도 직접 본 건 아닙니다. 단, 단지…….”
향칠은 고개를 숙인 채 울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서찰을 한 통 받았는데, 그렇게 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안 그럼, 안 그럼 소인 일가를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억지를 부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냐!”
주육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소년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다가오자 향칠은 혼비백산했다.
“그만해요.”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자 주육낭이 걸음을 멈췄다.
“당신이 말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말했다시피, 난 그저 당신한테 알려 주려던 거예요. 당신이 범강림 형제를 밀고한 일을, 내가 알고 있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요. 당신 따위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냥 알려 주는 것일 뿐,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에요.”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
자신감에 찼다가 공포에 질렸다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 기복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향칠은 물론이거니와 주육낭까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만 가요.”
정교랑의 말에 향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뜻이지?
“가라고요. 당신 같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의 명줄은 오늘까지니까요. 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죠.”
저 여인이 실성을 했나? 뭔데 내 목숨이 오늘까지래? 웃기지도 않아!
내 뒤에 있는 인물이 두려워서인가? 뒤에 누가 있다고 꾸며대길 잘했네! 어쨌든 지금 안 가면 언제 가랴!
향칠은 잽싸게 일어나 문으로 돌진했다. 이번엔 문이 바로 열렸다.
“내 말이 우스운 것 같아요?”
여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내가 누군지 잊지 마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면, 목숨을 빼앗는 일인들 못하겠어요?”
벌써 한 발을 문밖으로 내디디던 향칠이 순간 움찔하며 다리를 후들거렸다.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달려나가며 구르다시피 도망쳤다.
향칠은 자신이 신선거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에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비틀비틀 걸었다.
무섭구나, 너무 무서워.
하늘도 무심하시지. 서무수 형제가 태평거와 관계된 줄 알았다면, 때려죽인다 해도 투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태평거의 일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거리에 나가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소상히 아는 일이었으니까.
무뢰배 다섯 놈이 뒷배인 주오를 믿고 태평거를 건드렸다가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주오 역시 배후에서 사주한 인물의 강요에 못 이겨 자결했다. 신선거는 태평거를 건드렸다가 본전도 못 찾고 도리어 점포가 통째로 넘어가 버렸고.
역시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관리라고는 하나 경성에서 자신의 목숨은 그 무뢰한이나 부랑배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향칠은 잘 알았다.
이런 제기랄!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야! 제대로 알아보고 결정했어야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앞뒤 재지 않고 경솔하게 움직였던 것이 이리 엄청난 화를 불러올 줄이야!
까딱하면 내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당신의 명줄은 오늘까지니까요.
안 좋습니다요, 안 좋아. 미간이 검은 걸 보니 재액이 다칠 겁니다.
향칠의 귓가에 두 사람의 말이 울렸다.
이런 우연이? 둘 다 그런 말을 한 거야? 진짜 화가 닥치려나?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호흡이 점점 가빠지며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향칠은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누르기라도 하려는 듯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거리를 비틀비틀 걸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귓가로 들어왔지만, 어째서인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향칠!”
앞쪽에서 누군가가 버럭 고함을 쳤다. 향칠이 벌벌 떨며 앞쪽을 보자 정면에서 달려오는 사내들이 보였다.
“저기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사내가 향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사내의 손에는 곤봉이 들려 있었다. 아니, 사내뿐 아니라 향칠을 향해 달려드는 나머지 사내들도 전부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결국 날 죽이겠다는 건가? 역시 그냥 말뿐이었어!
향칠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이 대로변에서 날 죽인다? 아무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어도 그럴 순 없을 터!
“향칠, 아주 대단한 일을 했더구나!”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번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향칠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무리 속에서 동 노야가 보였다. 동 노야는 굳은 얼굴이었다. 나이가 꽤 들었는데도 걸음걸이는 주변 사내들에게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아주 대단한 일을 했더구나!
알았구나! 동 노야도 알았어!
향칠의 얼굴은 순간 잿빛이 됐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장인어른, 아, 아니지, 아버지지. 데릴사위가 됐으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맞아.
아버지는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똥지게꾼 노릇을 하며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고 더욱이 손이 깨끗한 사람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어. 차선책으로 날 택한 건 그저 대를 잇기 위함이었지. 이제 아들을 둘이나 낳아 주었으니 난 더 이상 동씨 가문에 필요 없을 터.
진작부터 날 죽일 생각이었나? 더구나 이젠 서무수까지 돌아오지 않았는가. 서무수가 찾아왔던 날, 저 망할 영감탱이가 아주 좋아 죽으려 들던데. 서무수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겠지!
이제 저 망할 영감탱이도 내가 저지른 짓인 걸 알았으니, 날 없애 버릴 핑곗거리까지 생긴 셈이다. 나 같은 데릴사위는 본디 개만도 못한 존재였으니, 때려죽인다 한들 누가 신경 쓸까!
날 때려죽이려 하고 있다! 날 패 죽이려 하고 있어!
향칠은 괴성을 지르며 뒤돌아 달아났다.
“도망을 쳐? 어딜 도망치려고!”
뒤에서 동 노야의 호통이 들려 왔다. 향칠은 더욱 걸음을 재촉했지만 어딜 디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틀거리던 향칠은 거리 한쪽에 있는 점포의 벽돌 층계를 밟았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반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틀어막으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았다. 거리에 자빠진 향칠의 머리에서 피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신선거의 문 앞 거리는 넘쳐나는 인파에 물샐 틈도 없었다. 그 사이에서 욕하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앞으로 비집고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까치발을 들고 앞쪽을 살피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을 뿐이었다.
“어느 집 영감이 몽둥이를 들고 데릴사위의 뒤를 쫓다가 데릴사위가 자빠져 죽었대요.”
“아니오, 그게 아니야. 그 집 데릴사위가 노름빚을 지고 쫓기는 신세라, 영감이 구해 주러 갔던 거요. 근데 데릴사위가 자길 패러 오는 줄 알고 놀라 도망치다가, 자빠져 죽은 게지.”
“아니 멀쩡하던 사람이 자빠져 죽어요?”
“그래서 그 영감이 점포 주인을 관아로 끌고 간다더구먼. 도로를 점령하고 층계를 높이 만든 바람에 사람이 자빠져 죽었다나.”
“그게 가능하겠소?”
“그 영감이 바로 동대향이오. 분뇨도 보물 떠받들 듯 누구보다 먼저 낚아채는 양반인데, 데릴사위가 자빠져 죽는 일을 당하고 가만있겠소?”
거리는 이런저런 소문으로 시끌시끌했다. 시끌벅적한 소란에 곧 관부 사람들이 들이닥쳤고, 실랑이 끝에 동 노야의 일행과 우거지상을 쓰고 있는 점포 주인이 관부로 가게 됐다. 시신도 함께 실려 갔음은 물론이었다. 몰려들었던 사람 중 대다수는 궁금증을 못 이기고 관부로 구경하러 갔고, 거리에 남은 사람들은 그제야 뿔뿔이 흩어졌다.
거리와 맞닿은 이 층 별실에 있던 주육낭은 창문의 휘장을 내리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여인은 시종일관 탁자 앞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한 거야?”
주육낭이 못 참고 물었다.
“뭘 어떻게 해요?”
정교랑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저자가 정말 혼자 자빠져 죽었다고?”
주육낭은 아예 정교랑 앞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자빠져 죽은 게 아니면 어떻게 죽었는데요? 난 창가에 서서 지켜보지 않았으니, 모르죠.”
또 바보 시늉을 하며 넘어가시겠다? 주육낭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넌 일부러 이 별실을 골랐어. 그자가 어떻게 죽는지 지켜보기 쉽게 하려고 그랬겠지.”
“여긴 신선거에서 제일 좋은 방이에요. 내가 왔으면 당연히 여길 써야죠.”
그런 말은 바보나 믿지!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들어와서 차도 안 마시고 간식도 안 먹었다. 입으로 들어간 건 전혀 없는데, 그럼 혹시 냄새? 주육낭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이곳은 신선거 살구꽃 별실로, 장식도 전부 살구꽃이고 향도 살구꽃 향이었다. 다만 그게 살구꽃 향기가 맞는지 아닌지는 주육낭 같은 사내가 판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은은했다.
“대체 뭘 한 거야? 독인가?”
“세상에 특정인한테만 통하고 나머지 사람은 무사한 독도 있어요? 그런 게 가능하다면, 정말 신선이 되겠는데요?”
“넌 신선 아니었어?”
주육낭이 빈정거렸다.
“내가 신선이면, 그런 자와 말을 섞을 필요 있었을까요?”
정교랑은 그릇에 있는 밥을 천천히 고르며 말했다.
“그럼 그자가 오늘 죽을 줄 어떻게 알았는데?”
주육낭이 물었다.
“내가 오늘 밤에 때려죽일 생각이었거든요.”
정교랑은 주육낭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운이 안 좋더군요. 그자가 먼저 자빠져 죽다니.”
때려죽여? 운이 안 좋아?
“그럼 저자가 지금 죽은 건 네 예상 밖이다?”
주육낭이 못 믿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 말도 안 되지!
다른 때였다면 몰라도 하필이면 이 여인을 만난 직후였다. 그것도 놀라 혼비백산한 채로…….
그래, 놀랐어!
“너 때문에 놀라서 죽은 거네!”
주육낭의 말투는 단호했다.
그래. 유 교리를 치켜세워 풍질에 걸리게 하고, 진십삼을 분통 터져 죽게 만든 여인이라면 향칠이 놀라 숨이 넘어가게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생각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나더러 남문에 가서 저자를 불러다 문서를 작성하게 하고, 점쟁이 늙은이를 시켜 겁을 준 게 다 지금을 위해서였어.”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정교랑이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뭘 위해서인데? 그냥 겁주려고?”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요. 겁을 줘서, 분풀이를 하려고 했어요. 그뿐이죠.”
정교랑은 주육낭을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정교랑을 노려봤다.
“네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주육낭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정교랑은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주육낭은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향해 소리쳤다. 정교랑이 시선을 내리깔며 주육낭을 쳐다봤다.
“너 지금 화났지?”
놀란 표정으로 묻던 주육낭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이제 보니, 너도 화를 낼 줄 아는구나.”
눈앞의 소녀는 단정하게 서 있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흘겨보는 듯한 눈빛에는 한결 생동감 넘쳤다.
떠받들 때도, 냉대하고 모욕할 때도, 놀라지 않고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던 여인에게 생기가 돈다? 이렇게 생기 넘칠 때도 있네.
“화난 거지?”
주육낭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물었다.
“개똥만도 못한 놈이 개인적 원한 때문에 벌이려던 복수인데, 일이 꼬이다 보니 너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큰일이 된 거야. 열 받아 죽겠지? 그런 놈 때문에 궁지로 몰리다니…….”
주육낭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기러기 사냥을 하다가 기러기 부리에 쪼이는 법도 있다고.”
정교랑은 시선을 거두고 치맛자락을 들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근이 얼른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따랐다.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며 주먹을 꽉 쥔 채 벌떡 일어나 뒤따라갔다.
“야, 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해서 이상하다 싶었어.”
뒤따라온 주육낭은 반근을 옆으로 밀친 후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이번엔 누굴 속이려고 수완을 부린 게 아니라 진짜 화가 났던 거구나. 분풀이를 하려고 으름장을 놓은 거야.”
정교랑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오후의 신선거에는 손님이 없었고, 기나긴 복도는 더없이 적막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초가을의 햇살은 옷자락에 부딪혀 흩어졌다.
“너도 아무 말이나 지껄일 때가 있구나. 그런 말을 하다니. 어린애들이 싸우며 으스대는 거랑 똑같잖아. 우리 아버지는 누구며, 나는 누구고, 난 뭘 할 줄 알고, 난 얼마나 대단하고…….”
주육낭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이 새어 나가면, 정말 낭패지!”
자신은 신선의 제자라고 했고, 자신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녔으며, 자신은 남의 목숨을 끊어 놓을 수도 있다고 했다. 밖에서 남들이 수군거릴 땐 상관없지만, 이런 말을 본인이 직접 내뱉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디까지나 도술을 부리는 사특한 무리일 뿐이니, 조정에서 용납할 리 없었다.
“아, 그래. 그놈은 오늘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네. 네가 내뱉는 그런 말을 듣고도, 살아나긴 힘들지.”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과정은 내 예상과 달랐지만, 결과는 똑같아요. 이런 일, 직접 해 보고 싶지 않아요?”
주육낭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날 협박하는 거야? 난 양심이 부끄러운 짓 안 했어. 놀라 죽을 일 없다고.”
주육낭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런 생각, 안 해 봤어요? 난 원래 죽은 사람이었어요. 내 병이 낫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정교랑은 이미 없었겠죠.”
주육낭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다른 사람의 무시는 별 의미 없다지만, 혈육의 무시는 살인을 방조하는 일이죠. 내 원수면서, 뭐가 그리 기쁘고 자신만만한지 모르겠네요.”
당초 정 이노야는 임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바보를 도관에 버려두고 갔다. 주 노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주 노야 역시 깜빡 잊은 척 도관으로 보내는 돈을 끊었다.
정씨 가문에서 정교랑과 반근에게 어떻게 돌아왔느냐고 물었을 때, 반근은 노부인이 큰돈을 남겼다고 했다. 당시엔 모두가 그 말을 믿었지만, 훗날 반근은 애초에 그런 일은 없었노라고, 둘러댄 말이었노라고 번복했다.
부모를 잃은 바보 소녀와 힘없는 아랫것이 만리타향에 버려졌다면,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주육낭의 낯빛이 창백해지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인의 말이 맞았다. 위기에 닥쳤을 때 지나가는 행인이나 남이라면 못 본 척 무시해도 상관없다. 혈육도 아닐 뿐더러 양육과 보호의 책임도 없으니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혈육이 위기를 보고도 외면했다면, 더구나 직계 혈족이라면 그건 살인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적어도 이 여인의 마음속에선 분명 살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녀의 가족이었고, 그래서 원수기도 했다.
이런 여인이잖아! 향칠이 이 여인 때문에 놀라 죽은 게 아니란 말을 어찌 믿어!
주육낭은 고개를 번쩍 들고, 마차에 올라 유유히 떠나는 정교랑을 쳐다봐다.
“여자가 화나면 정말 무섭다니까.”
주육낭이 중얼거렸다.
정교랑의 마차는 곧장 옥대교로 돌아가지 않고 거리를 지나며 속도를 늦췄다.
마차의 휘장 너머로 바라보자 청석으로 지은 관아가 맞은편에 있었다. 편액은 걸리지 않았고 드나드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초가을 오후라 그런지 스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병부 소속의 작은 감옥이었다.
“아씨, 정말 들어갈 방법이 없는 거예요?”
반근이 나지막이 물었다.
“없어.”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 노야도 들어갈 도리가 없는 곳이니 정교랑 일행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반근이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네요. 벌써 사흘째인데…….”
반근이 중얼거렸다.
“오래 있진 않을 거야.”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몹시 기뻐했다. 정교랑은 반색을 하는 반근을 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휘장을 내렸다.
아씨는 여전히 기분이 안 좋으시네. 반근은 웃음기를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주육낭은 오늘 있었던 일을 주 노야에게 소상히 전달했다. 주육낭의 말을 들은 주 노야는 놀라며 탄식했다.
“그런 말단 관리 나부랭이 혼자 저지른 일이다?”
주 노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은밀히 지시한 게 아니고?”
주육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아닙니다.”
주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정말 운이 안 좋은 거였다니…….”
하지만 향칠이 거리에서 자빠져 죽은 일에 관한 주 노야의 반응은 주육낭과 같았다. 정교랑이 죽인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런 쓸모없는 놈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누군지 알아냈으면 바로 죽여버려야지.”
그러면서도 주 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육을 일삼는군. 이렇게 된 마당에 죽여서 뭘 어쩌려고?”
“뭘 어쩌려는 게 아닙니다. 분풀이죠.”
주육낭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허튼소리. 그런 분풀이를 해서 뭐해? 이렇게 된 마당에 그런 쓸모없는 놈 하나를 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무슨 일을 할 때 꼭 소용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죠. 분풀이를 해서 속이 시원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소용을 다한 거고요.”
주육낭이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여인의 마음은 별로 좋아진 것 같지 않았지만…….
향칠을 죽였지만 일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이 어디로 흘러갈지 갈피도 못 잡는 듯했다. 이번엔 보통 성가신 일을 만난 게 아니다.
웃음을 거둔 주육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를 어쩐다?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문밖에서 사환이 들어왔다.
“공자님, 진십삼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주육낭이 일어섰다.
“낌새를 맡고 왔군.”
주육낭이 일어서며 씩 웃었다. 역시 똑똑한 놈이란 말이야. 이번에도 좋은 생각이 있을지 몰라.
“육낭.”
주 노야가 주육낭을 불러세웠다.
“이번 일은 우리 추측일 뿐이니, 진십삼한테 너무 자세히 얘기하진 마라.”
주육낭은 멈칫하여 고개를 돌리고 부친을 쳐다봤다. 주 노야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 애는 더 이상 진(秦)씨 가문의 절름발이가 아니다. 정상으로 돌아왔고, 영민한 아이니 곧 벼슬길로 나가겠지. 육낭,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린 이번 탈영병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고씨 가문의 왕보당 편에 설지 진 상공 편에 설지, 아직 몰라.”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 주육낭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진 공자의 가문은 황실의 인척이다. 태후 편에 설지 다른 이의 편에 설지 모르는 일이지. 어쨌든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어. 그러니 살짝 귀띔만 하고, 너무 깊이 얘기하진 마라.”
어떤 일은 살짝 귀띔만 하고, 너무 깊이 얘기해선 안 된다. 주육낭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뒤돌아 나갔다.
평소와 달리 주육낭의 걸음은 느렸다. 거처로 돌아왔을 무렵, 기다림에 따분해진 진십삼은 시녀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꽃잎을 따고 있었다.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진십삼은 마당에 있는 화초로 차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한 번도 입에 댄 적은 없지만.
아니, 예전과 달랐다. 예전엔 시녀들을 시켜 꽃잎을 따게 했지만, 지금은 본인이 직접 따고 있다.
밝은 햇빛 아래에 선 소년의 옆얼굴은 백옥으로 조각해 놓은 듯했고, 똑바로 선 몸은 훤칠했다. 한 손으로 커다란 소매를 잡고 한 손으로 꽃잎을 따며 코에 대며 냄새를 맡아 보고 있었다.
다른 소년이 그랬다면 여성적인 분위기가 느껴졌겠지만, 진십삼은 소탈해 보이기만 했다. 주육낭은 걸음을 멈추고 선 채, 마당에서 시녀와 웃고 떠들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 애는 더 이상 진씨 가문의 절름발이가 아니다.
부친의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진씨 가문……. 그래, 진씨 가문의 사람이었지. 황실의 친척인 진씨 가문.
진십삼을 안 후로 늘 십삼이라 불렀고, 기분이 안 좋을 땐 진상자라 불렀다. ‘진’은 그저 글자에 불과했기에 잊고 있었다. 사실 그 성씨는 이름난 명문가의 성씨였다.
“육낭, 뭘 보고 있어?”
진십삼이 고개를 들어 소리치며 손에 들고 있던 꽃을 시녀 쪽으로 던졌다. 주육낭이 걸음을 옮겨 성큼성큼 걸어왔다.
“자네는 뭘 하는데? 이런 꽃을 꼭 심어야겠어? 심어 봤자 짓밟히기나 하지.”
“뭘 안다고. 꽃이 피어야 떨어져 짓밟히기도 하는 거지. 뭐든 그 쓰임을 다했다면 그게 최고야.”
진십삼이 손을 뻗어 주육낭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 내가 새로 고안한 방법으로 우린 차 맛 좀 봐.”
“자네 차는 뒀다가 돼지한테나 먹여.”
주육낭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진십삼은 손을 들어 주육낭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주 잘났다. 돌려 까는 재주가 제법이야! 누이한테 허구한 날 욕먹은 보람이 있네.”
“재주가 는 건 자네지! 감히 날 때려?”
주육낭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쳐들었다. 진십삼은 벌써 달음질친 뒤였다.
“어허, 어허, 못 때려. 나도 이젠 도망칠 수 있다고.”
주육낭은 실소를 터트리며 층계를 올랐다.
“어이, 태평거 일은 뭐 들은 거 있어?”
진십삼이 옆쪽 회랑으로 가며 물었다.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가서 보기도 했고. 내가 도와주기도 했지.”
진십삼은 놀라면서도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
“혼자만 가고 난 안 불렀네.”
“자네가 가서 뭐 하게? 이건 우리 집안의 일이야.”
주육낭이 옷자락을 털고 자리에 앉았다. 진십삼도 맞은편에 앉아 시녀가 건네는 절굿공이와 단지를 받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쿵쿵 꽃잎 빻는 소리와 함께 주육낭이 오늘의 일을 죽 늘어놓았다.
“그 점쟁이 늙은이도 자네가 데려간 거야?”
진십삼이 이따금 끼어들어 질문을 던졌다.
“향칠을 잡아간 후, 그 가족한테 알린 것도 자네의 사람이겠네.”
“맞아.”
고개를 끄덕인 주육낭이 입을 삐죽였다.
“향칠이 거리에서 납치됐다고 동씨 가문에 알렸지. 아무런 지위도 없는 데릴사위고 집안에선 함부로 대한다지만, 그래도 제 식구인데 남이 데려다 괴롭히면 동씨 가문 체면이 뭐가 돼? 그 노인네가 아주 기세등등하게 달려왔더라고.”
뜻밖에도 너무 기세등등하게 달려온 탓에 놀란 사위가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도망치다 자빠져 죽고 말았지만.
“그 많은 일이 줄줄이 일어났는데도 정교랑은 향칠이 거리에서 자빠져 죽은 게 자신과 무관한 일이래. 점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한다니까.”
주육낭의 말에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우연일지도 모르지. 낭자의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운이 좋았다면 별 볼 일 없는 놈 때문에 이 어마어마한 구렁텅이 속으로 끌려 들어갈 일도 없었겠지. 주육낭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도로 삼켰다.
“누가 알겠나. 진실을 말하는 법이 없으니.”
주육낭이 모호하게 둘러대자, 진십삼이 주육낭을 힐끔 보고 물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난 거기까지만 도왔어. 도울 일 끝난 후엔 돌아왔고.”
주육낭이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았다.
“지금쯤 은근히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분풀이도 했고, 내 아버지께 도움도 청했잖아. 내일 아버지께서 힘 좀 써 주시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갈 거야.”
말을 마친 주육낭은 차를 마셨고, 진십삼은 고개를 숙인 채 꽃잎을 빻았다.
“모르는 일이지.”
툭 내뱉은 진십삼은 주육낭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시녀에게 말했다.
“식초를 가져오너라.”
주육낭은 차를 입에 털어 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얘긴 그만하자고. 떠날 때 활을 몇 개 못 가져갈 텐데, 갖고 싶은 거 있나 가 볼래?”
“뭘 고르란 거야? 다 나 주고 가는 거 아니었어?”
진십삼이 고개를 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꿈도 야무지네.”
주육낭이 손을 뻗어 진십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서 가자고.”
진십삼은 웃으며 절굿공이를 내려놓고 일어나 따라갔다. 소년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 노야가 대청으로 들어섰다. 분노와 슬픔이 겹쳐진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의뭉스러운 표정이 번졌다.
“아버지?”
밖에서 동 낭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밝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치마를 갈아입을 새도 없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 망할 인간이 죽었다고요?”
화려한 옷차림으로 들어온 딸이 그런 말을 내뱉자 울컥 부아가 치민 동 노야는 딸의 따귀를 후려쳤다. 동 낭자는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 왜 이러시는 거예요!”
동 낭자가 뺨을 부여잡은 채 따져 묻자, 동 노야는 딸에게 삿대질을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너 때문이다! 네가 해친 거야!”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란 데다 성격도 보통이 아닌 동 낭자는 열이 받자 발을 구르며 지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내가 그 인간을 해칠 생각이었으면 지금까지 기다렸겠어요?”
“차라리 진작 죽이지 그랬느냐. 그랬으면 여러 사람 다칠 일도 없었지.”
동 노야가 침통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버지, 내가 누굴 해쳤단 거예요!”
동 낭자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넌 서무수를 해치고, 향칠을 해쳤어. 이제 다음 차례는 우리 일가 전체겠지!”
서무수라는 말에 동 낭자는 이성을 되찾았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손을 휘 내저으며 자리에 앉은 동 노야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인데요? 향칠이 정말 죽은 거예요?”
“정말 죽었다.”
“갑자기 죽다니요?”
동 노야는 고개를 들어 딸을 쳐다봤다. 자신의 남편이 정말 죽었다는데도 슬픔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도리어 무거운 부담을 덜어 홀가분해 보였다.
동 노야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해친 게 아니다. 내가 해친 거지.”
동 낭자는 점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
“애초에 오기를 부려 향칠을 집안으로 들이는 게 아니었어.”
동 노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기로 내린 결정 때문에 내가 결국 그 죄를 받게 되는구나.”
거기까지 말한 동 노야는 무언가를 더 물으려는 동 낭자를 보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넷째야, 잘못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두려워할 건 만회할 기회가 없는 일이지. 까딱하다간 우리 동씨 가문의 생사가 걸리게 됐다.”
생사가 걸렸다고? 동 낭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향칠을 패 죽이신 거예요?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요? 왜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하셨어요?”
데릴사위의 신분이 천하다고는 하나 국법이 지엄한데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사사로이 가법에 따라 처벌하는 건 상관없었다. 관부에 고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하지만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죽였다면 얘기가 달랐다.
“내가 패 죽인 게 아니다. 죽임을 당한 거야.”
동 노야가 말했다.
“네? 누가 그리 겁도 없이요? 내가 가만 안 둬! 당장 상복 입고 애들이랑 그 집 앞으로 가서 곡부터 해야겠어요. 경성 바닥에서 못 살게 만들어 놔야지!”
동 노야는 피식 웃으며 혀를 찼다.
“가만 안 둔다고? 그 여인이 우리 집안을 가만 안 둘 거다! 부랑배들을 죽이고, 주오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두칠이 놀라 경성에서 줄행랑을 치게 만든 자다. 태평거에서 시작해 신선거와 이춘당까지……. 이춘당이 본디 누구 것인지는 너도 알지?”
동 낭자는 죽고 죽인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경악했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멍하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서문하성 유 교리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같은 장사치가 모르겠느냐? 유 교리는 구석구석 은밀한 곳까지 손을 뻗쳤어. 그런데 그 재산을 가로채다니…….”
동 노야가 돌연 말을 멈췄다.
“아, 그래, 이제 보니……. 그렇구나, 틀림없어. 분명해. 유 교리의 병이 수상쩍구나.”
동 노야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또 왜 이러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동 낭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위 하나 죽었다고 아버지가 슬픔을 못 이겨 이성을 잃으셨나? 왜 저리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으시는 게야.
“아니다, 난 멀쩡해. 그 여인을 건드리는 자에겐, 죽음뿐이다.”
동 노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 제대로 걸려들었구나.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향칠이 죽은 걸 보니 확신이 선다. 서무수를 밀고한 사람은 향칠이야.”
동 낭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엔 무슨 말인지 똑똑히 알아들은 동 낭자가 벌떡 일어섰다.
“그 망할 인간이 그럴 줄 알았어요.”
“밀고한 건 향칠이지만, 이 모든 사달은 너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 말 똑바로 듣지 않으면, 다음에 죽을 사람은 네가 될 게야!”
동 낭자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놀란 눈으로 부친을 쳐다봤다.
“악연이로다.”
동 노야는 긴 한숨을 토한 후 말을 이었다.
“네가 서무수한테 연정을 깊이 품지 않았다면 향칠도 분한 마음에 이성을 잃고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게야. 분풀이나 하려고 장난을 쳤나 본데 뜻하지 않게 일이 커져 버렸다. 그러니 태평거 쪽에서도 향칠한테 독한 수를 썼겠지.”
동 낭자는 안개 속에 있는 듯 뭐가 뭔지 이해가 안 됐다.
말이 돼? 사람 하나를 죽이고 싶다고 그냥 죽여?
“사람 하나?”
동 노야는 냉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펴고 위아래로 뒤집었다.
“태평거의 손에 죽은 건 한 사람만이 아니다!”
동 낭자는 그제야 동 노야가 읊어댄 죽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버지, 그러니까, 그 어린 낭자가 향칠을 죽였다고요? 향칠은 자빠져 죽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어린 낭자가? 어린 나이인 데다 여리고 여려 훅 불면 쓰러질 것 같은 그 미인이? 사람을 죽여?
“정말 그 여인이 그랬는지,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알아보지도 않을 거야. 내가 알아야 할 건, 그 여인의 눈에 우리가 죽여 마땅한 사람인가 여부다.”
동 노야가 말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는데요? 가서, 가서 빌까요?”
동 낭자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때였다면 누가 자신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에 아버지가 술주정을 하시나 보다 했겠지만, 향칠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금은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 그럼 더 빨리 죽지!”
“그럼 어떡해요?”
동 낭자의 물음에 동 노야는 잠시 침묵했다.
“당장 옷부터 갈아입고, 애들 데리고 향칠한테 가서 울어라.”
동 낭자가 멈칫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지?
“아버지, 울긴 뭘 울어요! 그 인간 때문에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향칠을 위해 울라는 소리가 아니야. 우릴 위해서지.”
동 노야는 딸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우선 장씨네 점포 앞으로 가서 울어라. 향칠이 그 집 앞에서 자빠져 죽었으니 그 사람들이 사람을 죽인 원수인 거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다 들었겠다 싶으면 관아로 가서 울고…….”
“아버지, 지금이 돈 뜯어낼 때는 아니잖아요?”
동 낭자가 동 노야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이 어리석은 것아. 그저 돈밖에 안 보이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향칠의 죽음이 사고사였다고 딱 잡아떼는 일이다. 그 낭자한테 우리가 이 일의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알려야 해. 우리한텐 이 모든 게 갑작스러운 사고일 뿐이다!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말뜻을 알아들은 동 낭자는 냉큼 대답하며 일어섰다. 급히 밖으로 나가던 동 낭자가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그리 대단한 여인이면 서 오라버니는 무사하겠죠?”
동 노야는 동 낭자를 보며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사하길 바라야지. 안 그랬다간, 우리 동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입어 시신도 못 건질 게다.”
동 낭자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엾은 우리 서방님!”
여인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옥대교, 정교랑의 저택.
담벼락에서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시녀는 짜증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
“거참, 성가셔 죽겠네!”
소년이 담벼락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낭자, 낭자, 감사 인사 하러 왔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낭자가 준 약차를 먹었더니 며칠 만에 병이 싹 나았지 뭡니까.”
“그래서, 치료비를 주려고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 사이에 무슨 돈 얘기를 해요.”
누가 너랑 친군데? 시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신 이걸 가져왔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우쭐한 표정으로 작은 도자기 단지를 건넸다. 금가아가 올라가 조심스럽게 받아 정교랑에게 바쳤다. 시녀가 뚜껑을 열자 옅은 향기가 났다.
뭐야, 겨우 차잖아. 아씨는 밖에서 가져온 차를 드시지도 않는데…….
“목향(木香)이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담벼락 위의 소년을 보며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목향이 뭐기에? 시녀는 알쏭달쏭했다.
“향이 좋죠? 목서화(계화꽃을 이르는 말)로 만든 차예요.”
화차라고? 이걸 어떻게 마셔? 꽃향기가 차 맛을 빼앗을 텐데? 시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단지 안을 살폈다.
“간식 솜씨를 보니 입맛이 까다로울 것 같았어요. 좋은 물건이라 마음에 들 거예요.”
“고마워요.”
정교랑이 소년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요?”
소년이 담벼락에 기대 물었다.
“요 며칠, 잘 못 지냈어요.”
진안 군왕이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또 꼬치꼬치 캐물으려나 보네. 아씨께선 또 일일이 알려 주실 건가?
시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저 소년의 내력이…….
소년은 전처럼 밝게 웃는 대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라 입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말로는 친구라면서, 아무것도 못 도울 것 같아요. 그러니 큰소리를 칠 수도 없네요.”
얼씨구. 시녀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봤다. 도와주지 않겠다는 말을 하면서 도리어 제가 불쌍하고 난감한 척하는 인사는 또 처음일세. 이걸 뭐라고 해야 좋을지.
“입을 열어 물어봤잖아요. 나도 대답했고요. 무슨 입을 더 열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잘 못 지냈어요.
이 얘기 말인가? 시녀는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단지를 들고 대청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못 알아들은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내 할 일이나 해야지.
“해결 방법은 찾았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아직이요.”
“일단 해 봐요. 정 안 되면 나도 있고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 나도 목숨으로 갚아야죠.”
시녀가 시선을 거두고 반근을 쳐다봤다.
“겉만 그럴듯하지 속은 텅 빈 놈이야. 평소엔 아씨한테 번지르르한 말을 잘도 늘어놓더니, 진짜 일이 생기니까 듣기 좋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네.”
“언니, 목숨까지 잃을 뻔한 사람이잖아. 더구나 마음먹은 대로 도울 수 있는 이라면, 대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와 아씨를 뵙는 일도 못할 리가 있어?”
반근이 속삭였다.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대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자신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아씨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 염려해서라고. 누가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사람이 섣불리 돕겠다고 나섰다가는, 돕기는커녕 도리어 성가신 일만 늘 테지.
시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담벼락 위에 있는 소년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졌고, 대신 정중한 표정이 번졌다.
“사실 마지막 말만으로도 무게감이 있긴 하지.”
목숨으로 갚겠다고 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궁으로 돌아온 진안 군왕은 태후의 보자궁부터 들렀다가, 멀리서 작은 형체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걸 발견했다.
“형님, 병은 나았어요?”
이황자가 밝게 웃으며 묻자 진안 군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를 뵈러 간 거예요?”
이황자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가려고요. 폐하께서 공부한 내용을 하문하신다니, 그것부터 준비해야죠.”
공부 내용을 확인하는 괴로움은 이황자도 잘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병이 나서 며칠이나 허비했으니, 부황께서도 엄히 나무라진 않으실 거예요. 너무 걱정 마요.”
이황자는 손을 뻗고 어른 흉내를 내며 진안 군왕을 토닥여 주려고 했지만, 키가 너무 작아 진안 군왕의 다리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진안 군왕이 하하 웃으며 몸을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답을 제대로 못 할까 걱정되어 준비하는 게 아니라, 답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답할까 걱정되어 준비하는 것이었다.
“오늘 고 통사가 마마를 뵈러 오면서 챙겨 온 게 엄청 많아요. 내가 형님 것도 좀 챙겼어요.”
이황자는 헤헤 웃으며 말했지만, 진안 군왕의 미소는 살짝 굳어졌다.
“고 대인이 왔었다고?”
이 질문은 이황자 뒤에 있는 내시를 향한 것이었다.
“네. 태후마마와 함께 점심을 드셨습니다. 대황자와 이황자께서도 동석하셨고요. 군왕에 대해 묻기도 하셨지요.”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뭘 줬는데요? 먹을 것도 있어요?”
진안 군왕이 이황자의 손을 잡아끌며 물었다.
“아뇨, 아뇨. 갖고 노는 것밖에 없어요.”
이황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같이 보러 가요.”
진안 군왕은 이황자의 손을 잡고 이황자의 침궁으로 향했다.
이황자는 생모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난 탓에 송(宋) 황후의 손에 컸고, 지금은 먹고 자는 걸 모두 황후궁에서 해결했다.
병약한 황후는 이황자와 진안 군왕이 돌아왔을 무렵 이미 쉬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밖에서 예만 표한 후 물러났다.
“위(瑋) 군왕의 병은 다 나았고?”
휘장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았어요.”
궁녀가 휘장을 걷어 올리고 들어와 대답했다.
“나았다니 다행이구나. 육가아(六哥兒: 이황자를 가리킴)는 몸이 약하지. 궁에 아이들이 적다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송 황후가 침상 위에서 말했다. 궁녀는 그 말을 받는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약그릇만 올렸다.
저녁 무렵의 실내는 어두웠다. 마흔이 다 된 송 황후의 나이 든 몸 위로 어둠이 덮쳤다.
송 황후는 황제의 두 번째 황후였다. 한미한 가문의 출신인지라 그동안 궁에서 버텨 온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남은 수십 년은 아마 더욱 녹록지 않을 터였다.
그녀 소생이 아닌 황장자와 어린 황자의 생모인 귀비, 편애가 대단한 태후와 병약한 황제까지…….
“육가아 곁에 사람을 몇 더 붙여주거라.”
궁녀가 네 하고 대답했다.
“앞으로는 어디서 가져온 음식이든 못 먹게 하고.”
송 황후가 또다시 당부하자, 궁녀는 이번에도 네 하고 대답했다.
“위 군왕도 마마처럼 마음을 많이 쓰세요.”
약을 먹은 송 황후가 고개를 들어 궁녀를 쳐다보았다.
“방금 가 봤더니 두 분이 안에 계시는데, 위 군왕이 이황자께서 가져온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보시더라고요.”
궁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여도 세심한 구석이 있는 아이라니까.”
송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그러세요. 이황자께서 뭘 드시고 뭘 보시는지, 살뜰히 챙기시죠.”
궁녀의 말에 송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침상에 기댔다.
“울고 떼쓰지 못하게 궁에서 어르고 달래면서 쉬쉬하며 키운 아이가 벌써 그리 컸구나. 그 아이 부왕이 그 애를 데려가겠다고 한 후부터, 그 애는 궁에 있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았어. 특히 궁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연달아 죽은 후부턴 더욱 그랬지.”
“그런데 대황자께는 별로 마음을 안 쓰세요. 나이 차도 네다섯 살밖에 안 되니 어울려 노실 법도 한데요.”
“처음엔 어울려 놀고 싶었겠지. 한데 여러 사람이 매일 졸졸 따라다니니 싫었을 게야.”
송 황후는 고개를 가로젓고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유비(劉妃)가 육가아를 낳았어. 막 태어났을 땐 꼭 고양이 같아서 얼마 못 살 줄 알았지. 유비까지 죽고 나자 신경 쓰는 사람은 더욱 줄었어. 위 군왕이 이때다 싶었는지 매일 보러 가더구나. 그렇게 지내다 보니 정도 쌓였고.”
“가장 무시 못 할 게 정이죠. 궁에 아이들이 적으니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훨씬 덜 외로울 거예요.”
송 황후는 응 하고 대꾸한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궁녀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황후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 준 다음 물러났다.
어둠이 궁궐 전체를 감쌌다.
가을 안개가 걷힐 무렵, 금가아는 하품을 하며 빗자루를 끌어안고 대문을 열다가 문밖에 선 사람 때문에 놀라 기겁을 했다.
“진, 진 공자님?”
금가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며 말까지 더듬었다. 가을인데도 진십삼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곁에 사환 셋만 있을 뿐 마차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걸어온 듯했다.
“금, 금가아.”
진십삼은 웃으며 일부러 금가아를 따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구나.”
“네…….”
금가아가 어리둥절한 채로 대답했다.
“너희 아씨는 안에 계시고?”
진십삼이 웃으며 물었다.
“지나는 길인데 걷다 보니 힘들어서 간식 좀 얻어먹을까 한다.”
안내를 받아 후원으로 온 진십삼의 눈에 소녀가 새벽 햇살을 받으며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긴 머리를 뒤로 늘어뜨리고 검은 옷을 입은 채 오색 끈으로 소매를 동여맨 모습이 눈에 확 띄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긴 화살이 과녁을 명중했다. 과녁 정중앙에선 약간 빗나갔지만 과녁을 아예 못 맞히던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솜씨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화살을 가져올 걸 그랬네요.”
진십삼이 말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힐끔 보더니 손을 내리고 활을 거뒀다.
“활을 가져오면, 내가 같이 놀아 준대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웃음을 지었다.
“하긴, 난 이제 병도 없는걸요.”
정교랑이 활을 시녀에게 건넨 후 뒤돌아 걸음을 옮기자 진십삼이 따라갔다.
“몸이 성치 않을 때가 좀 그리울 때도 있어요.”
“진짜요?”
정교랑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힐끔 보며 물었다.
“병을 치료하는 건 어렵지만, 병이 나게 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에요.”
진십삼이 웃었다.
“가짜죠. 절대 진짜라고 생각 마요. 다음에 또 놀랬다간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뒤따르던 시녀와 반근은 입을 오므리고 웃음을 지었다.
뜨거운 김이 나는 차와 간식이 나왔다. 진십삼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간식을 한입 먹은 후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
“이 간식만 해도 병에 걸렸을 때와 병이 나은 후에 먹는 맛이 달라요.”
거기까지 말한 진십삼은 또다시 한숨을 쉬며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말 모든 게 변했죠.”
“변했으면 변한 거지, 그게 뭐 어때서요.”
정교랑이 끈을 풀며 소매를 내렸다.
“아쉬워서요. 전에는 주육낭이 한 번도 날 속인 적 없었는데, 지금은 낭자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물어도 날 속이더라고요.”
진십삼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그 자리에서 까발리지 못했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웃으며 지팡이로 쿡 찌르고 내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냐고, 누굴 속이려 드냐고 욕했을 텐데 말이죠.”
진십삼은 그 장면이 눈앞에 선한 듯 보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그래요, 변했죠. 내 손에 지팡이를 들지 않고도 그 애 앞에 설 수 있게 됐는데, 예전 같은 당당함은 없어졌어요. 정말 이상한 기분이네요.”
정교랑은 물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용건 남았어요? 일 없으면, 그만 가요.”
“정 낭자, 하소연 좀 들어줘요.”
진십삼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고통스럽단 얘기를, 내가 왜 들어야 하죠? 고통스럽든 괴롭든, 기쁘든 어떻든, 그건 당신 일이에요. 내가 들어서 뭐 해요? 내 기분도 아닌데. 당신이 그랬잖아요. 난 감정도 없다고. 그럼, 나한테 말하는 게, 나무에 대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죠?”
진십삼이 정교랑을 빤히 쳐다봤다.
“정 낭자, 이러면 남들이 어떻게 좋아해 주겠어요?”
정교랑이 말없이 진십삼을 쳐다보자, 진십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죽은 사람도 살리는 재주가 있으니, 남들이 좋아해 줄 필요도 없겠죠. 다만 사람이 왕래하려면 말이 오가야 하잖아요. 말에는 온정이 담겨야 하고요.”
“그런 걸 어디에 쓰려고요?”
“인정사정없는 규칙 앞에서 때로는 인정이 필요하거든요. 예를 들면, 서북 군영의 탈영병 범강림, 범석두, 서무수, 서사근,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 말입니다.”
진십삼의 청량한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이름을 하나하나 또렷이 호명하자, 옆에 있던 시녀와 반근, 금가아도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고, 증거도 명확합니다. 국법에 따르면 참형에 처하고 관청 앞에 시신을 내걸어 일벌백계로 삼아야 해요.”
그 말에 시녀와 반근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참형이라니!
밖은 새벽빛으로 훤했지만 감옥 안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둡고 음침하며 썩어가는 고약한 냄새가 뒤섞인 감방은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이런 걸 먹으라고?”
감방 문 안으로 들어온 밥통을 보며 서봉추가 소리쳤다. 거무튀튀한 것이 무엇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옥졸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 서봉추는 분통을 터트리며 자신의 밥그릇을 챙겼다.
“먹을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지.”
옆에 있는 감방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좋은 밥이 나오면, 그날이 목숨 날아가는 날이오.”
서봉추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처박은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퉤, 맛대가리 없어.”
“전엔 이것보다 맛없는 것도 잘만 먹었잖아!”
범강림이 나지막이 나무랐다.
“그래도 요즘엔 맛있는 것만 먹었잖소.”
서봉추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범강림의 눈빛에 목을 움츠리고 밥그릇을 높이 들며 말했다.
“며칠 더 먹으면 익숙해지겠죠.”
옆쪽 감방에서 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며칠 더 먹으면 이제 아마 못 먹을 거요. 여긴 다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들뿐이지. 판결이 나면 풀려나서 계속 맛있는 밥 먹는 거고, 유배형을 받아 노역하러 가면 이만한 밥도 못 먹지 않겠소? 그도 아니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하게 한 상 먹을 테고. 이후론 맛있는 밥이든 쉰밥이든 구경도 못할 거요.”
서봉추 외에 다른 이들도 전부 밥그릇을 가져가 밥을 퍼먹었다. 바닥에 앉기도 하고 쪼그려 앉기도 하면서 고개를 박은 채 묵묵히 먹기만 했다.
옆쪽 감방에 있던 사람의 말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댁들은 대체 뭐 하던 사람들이오? 엄청난 일로 엮여 들어왔지? 여기까지 들어온 신세인데 때리고 고문하기는커녕 욕 한번 하지 않으니, 원…….”
“댁들이 말 안 해도 알겠소이다. 댁들 같은 사람이 제일 위험하지. 아무 일 없거나 정말 큰일을 저지른 거거든.”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쳤다.
“어이, 거기. 그거 먹지 마라.”
옥졸이 또 다른 나무통 하나를 내려놓았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일제히 고개를 돌리자 양고기로 가득 찬 통이 보였다.
서봉추가 와, 하는 탄성을 내뱉고는 달려들어 커다란 갈빗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이, 어이. 일단 먹지 마시오. 그, 그거 목 잘리기 전 마지막 밥 아니오?”
옆쪽 감방에 있는 이가 소리쳤다. 그 말에 우르르 모여들던 다른 형제들도 멈칫했다. 하지만 옥졸은 별다른 말 없이 곧장 뒤돌아 나갔다.
“아닐 거요. 그렇다면 말을 했겠지.”
옆쪽 감방에 있던 이가 또다시 서봉추 쪽을 보며 말했다. 어두컴컴한 감방인 데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땟국물까지 줄줄 흘러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다들 놀랐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이, 댁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오? 뭔데 이런 특별 대우를 받아?”
서봉추 등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요, 특별 대우 고맙소. 기왕이면 맛좋은 술도 한잔 주시구려.”
서봉추가 서둘러 자리를 뜨는 옥졸을 향해 두려움을 떨치며 소리쳤다. 다른 형제들도 따라 웃었다.
“그래요. 기왕이면 술도 한잔 주시오.”
형제들이 양고기를 들어 우걱우걱 먹었다. 범강림은 갈빗대 두 개를 들더니 벽 쪽으로 가져와 서무수에게 내밀었다.
“자.”
범강림이 옆에 앉아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서무수는 받기만 하고 먹지 않았다.
“왜 그래? 한 번 죽다 살아났으면서도 겁나?”
범강림이 웃으며 물었다.
“겁나는 거 아닙니다.”
서무수는 한숨을 토하고 손에 든 양고기를 흔들었다.
“어차피 곧 결론이 날 텐데 겁날 게 뭐 있습니까. 다만 밖에서 많이 걱정하고 초조해할 누이가 걸립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 자존심 강한 성격에 평생 상처로 남을 텐데.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꽉 막힌 것 같소. 누이한테 이런 폐를 끼치다니…….”
범강림은 고기를 먹으며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한숨을 토했다.
“다 운명이지.”
진 노태야는 벌써 마당을 몇 번이나 돌았다. 얇은 옷을 입은 등은 벌써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노태야, 좀 쉬었다 하세요.”
뒤따르던 노복이 말했다. 진 노태야는 걸음을 멈추고 지팡이를 건넨 다음 한숨을 내쉬었다.
“노야는 돌아왔느냐?”
노복이 옆에 있던 사환에게 묻자 사환이 얼른 뛰어갔다가 곧 돌아왔다.
“돌아오셨습니다.”
진 노태야는 별다른 표정 없이 가만히 서서 손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노야를 모셔 올까요?”
노복이 물었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젓고 잠자코 있었다.
“노태야, 노태야.”
또 다른 사환이 달려왔다.
“교랑 아씨께서 오셨습니다.”
진 노태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결국 왔구나.”
진 노태야가 혼잣말을 했다.
한편 서재에 있는 진소도 속으로 같은 말을 했다. 거기에 부친보다 한마디 더 덧붙이면서.
빨리도 왔군!
오늘 아침에 결론이 난 일을 벌써 알았다고? 진소는 이 정보를 아는 자가 열 명이 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전부 보통 신분이 아닌데, 저 여인은 어디서 이리 빨리 정보를 알아낸 걸까?
진(秦)씨 가문? 오늘 진 시강은 비번이었는데…….
동 내한? 동 내한은 죽었다 살아난 뒤로 금석을 끊는 대신 도가에 더욱 심취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살린 건 도교 이 진인이 직접 사사한 제자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신선과 인연이 있다는 뜻이었다.
동 내한은 건강을 회복한 후에도 병가를 취소하지 않고 계속 집에 머물렀다. 요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양을 위해서.
주씨 가문은 고려할 필요도 없다. 중서문하성에도 못 들어오는 처지인데 하물며 황궁 내전은 어림도 없지.
저 여인이 경성에서 또 다른 거물을 알고 있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괜한 생각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사실 저 여인은 그저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일 수도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사소한 일이라 여겨 주씨 가문에 부탁했지만, 오늘이 되도록 해결이 안 되고 있으니 날 찾아온 것이리라.
차를 올린 시녀가 물러간 후, 서재에는 두 사람만 마주 앉아 있었다.
“송구하게도 불쑥 찾아왔습니다. 오라버니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서요. 대인께서 살펴 주세요.”
정교랑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역시 내가 괜한 생각을 한 거였어. 진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조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들었소.”
진소는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 믿었기에, 일이 터진 후에도 날 찾아오지 않았겠지. 나도 도와주려고 했소이다. 다만 조정의 군사에 관한 일이고, 국법이 지엄하잖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탈영병에 관한 일은, 얽힌 사람이 많죠. 제 오라비들을 처형하는 게 빠르고 깔끔할 거예요. 서둘러 군에 관한 일을 조사해야 하니, 지금 대인께서도 많이 초조하실 테고요.”
진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곧 쓴웃음을 지었다.
“조정의 논쟁에 대해 낭자도 소식을 들은 거요?”
정교랑은 진소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반문했다.
“그럼 패배를 인정하시겠어요?”
“패배를 인정해? 그럴 순 없지. 탈영병은 국법에 따라 처형하는 게 마땅하오. 관리 소홀 역시 엄히 조사해야 하지. 군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탈영병이 나온 게 아니겠소. 조사하지 않으면 후환을 대비할 수 없소.”
진소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왕보당 일파는 군주를 기만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국사를 내팽개친 채 알력 다툼을 벌였으니 죽여 마땅하오. 이번 서북 전선의 패배는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 때문인데, 여전히 왕보당을 두둔하며 재기를 도우려는 자가 있소. 기자(箕子)는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쓰는 걸 보고 은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았지. 왕보당 등은 군주를 기만하며 제멋대로 날뛰었소. 서북 전선에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며 군수품을 착복하고, 패배를 숨긴 채 승리라 고하며 오랫동안 조정을 속여 왔지. 그런 이들을 두둔하고 죄를 눈감아주는 것은 나라를 버려두는 일과 다름없소! 천자께서 그런 자들에게 속으시는 걸 지켜볼 순 없소이다. 그런 사특한 자는 기필코 제거해야 하오!”
점점 말투에 힘이 들어가더니, 방금 전 어전에서 맞서 싸울 때와 같은 목소리로 돌아갔다.
고 통사는 염치가 없었다. 막무가내로 생트집을 잡으며, 말로 이길 수 없으면 이것저것 붙잡고 늘어지면서 왕보당이 군주를 기만했다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이든 노신임을 내세우거나 외척의 신분임을 내세워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황제 앞에서 주청할 자격이 안 되는 이들을 수하로 데리고 있다 보니, 커다란 조당에서 홀로 맞서 싸우는 일이 많았다.
진소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린 낭자를 바라봤다. 자신이 추태를 보였음을 깨달은 진소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 일은, 낭자처럼 어린 사람이 나설 일이 아니오.”
진소의 말에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대인의 진심은 잘 알겠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다만 오랜 폐단이 쌓인 일이라면, 몇 사람을 죽인다 한들 도움이 될 게 없죠. 목숨을 살려 뒀다가,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하면 어떨까요?
진소가 가볍게 기침을 했다.
“군법을 어겼으니 죽여 마땅한 죄요. 낭자, 율법을 마음대로 어쩔 순 없소이다.”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사정이 있잖아요. 한 번만 너그러이 용서하고,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정 낭자.”
진소는 가볍게 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하늘의 뜻이 지엄하니, 더 말할 것도 없소. 서북 전선의 패배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오. 나 역시 좌시할 수 없소이다. 폐하께서 윤허하시면, 조정의 중신이 가서 소상히 조사하고, 사특한 무리의 죄를 물을 거요. 그럼 억울한 이들은 누명을 벗을 수 있겠지.”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不在其位, 不謀其政)고 했죠. 다만 이해가 안 가네요. 그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꼭 사람을 죽여야 하나요?”
진소는 잠시 침묵하며 정교랑을 바라봤다.
“정 낭자, 무릇 천지는 만물이 와서 머물다 가는 곳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와 같으니, 덧없는 인생은 꿈과 같다는 시(이백의 ‘춘야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도 있잖소.”
진소는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굳은 얼굴로 탄식했다.
“누가 됐든 이 덧없는 인생을 살며 바라는 바를 구할 수 있다면, 헛된 삶은 아니라 하겠지.”
“영명하세요, 대인.”
정교랑이 진소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그럼, 대인의 뜻은, 꼭 죽여야 한다는 건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교랑의 질문은 하나였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는지.
실내에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한참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소.”
진소가 단호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실내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가을바람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어디에선가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아득하면서도 처량한 소리였지만, 마음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풋내기라 손에 익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피리 소리가 뚝 그쳤다.
“십팔랑, 왜 이래?”
진씨 저택의 작은 화원에서 피리를 빼앗긴 어린 낭자가 불쾌한 듯 소리쳤다.
“여기서 불지 말고 다른 데 가서 불어.”
진십팔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 다른 데서도 불지 마. 오늘 말고 다음에 불어.”
“왜? 맨날 불던 건데 오늘은 왜 안 된다는 거야?”
어린 낭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진십팔랑을 노려봤다.
“왜 며칠째 외출도 안 하고 교랑 언니네 가서 글씨 쓰는 것도 안 해?”
진십팔랑은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조부님이 집에서 경서 필사를 도와달라고 하셨어.”
“피리 이리 줘.”
어린 낭자는 진십팔랑의 뒤를 따랐고, 그렇게 둘은 자리를 떴다.
서재에 있던 진소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 낭자, 낭자가 사리에 밝은 사람인 건 잘 알고 있소. 알다시피 이 일은 인정보다 국법을 따라야 하는 일이오.”
“국법이 그러해도, 관용이라는 게 있죠.”
정교랑이 말했다.
“관용은 사소한 문제일 때 가능한 일이지.”
진소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벌할 이는 벌하겠지만, 연좌는 없을 거요. 낭자가 연루될 일은 없으니, 그 점은 안심하시오.”
“대인,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시네요. 사형에 처할 정도는 아니잖아요.”
진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하게 몰아붙인다는 말을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었지만 귀에 거슬리는 말인 건 분명했다.
몰아붙이긴? 심하다고? 국가의 대사인데, 어찌 못 본 척 눈감아준단 말인가.
“심하게 몰아붙인다? 그자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면서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고, 서북 전선의 패배를 초래하여 백성이 집을 잃고 떠돌게 됐소. 그런데 누가 누굴 몰아붙인다는 거요? 그런 도적놈들에게, 관용은 당치도 않소이다!”
진소의 말이 끝나자 서재는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낭자, 이 일은 조정의 대사요. 묻지도 말고 관여하지도 마시오.”
진소가 더는 못 참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낭자는 최선을 다했소. 저들이 죄를 짓고 숨겼던 게 먼저고, 낭자와는 무관한 일이오. 이렇게 된 건, 저들의 자업자득이지.”
그나마 부친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었기에 존중하여 한 말이었다. 정교랑 또래의 다른 낭자가 조정 일에 대해 왈가왈부했다면, 진즉 호통을 쳐 내쫓았을 것이다.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진소도 붙잡지 않았다. 정교랑이 일어나 치맛자락을 들고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후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문 앞으로 간 정교랑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아, 참.”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대인, 저는 병을 고쳐 드리고 돈을 받았어요. 진씨 가문은 제게 빚진 게 없습니다.”
멈칫했던 진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토라져서 저러나? 하지만 낭자가 실망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지 모르는 상황이니, 진소 역시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천자의 안색을 살피지 않은들 어떻고, 황족과 귀족의 이익을 건드린들 어떤가. 국가를 위해 한 몸 바쳐 천자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사대부의 도리 아니겠는가.
진소는 탁자 위에 있던 서책을 펼치면서, 여인이 시녀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린 몸종 하나가 담벼락에서 고개를 움츠리고는 뒤돌아 내원으로 뛰어갔다.
진 노태야는 회랑 아래에 있고 손녀들은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어린 몸종이 달려와 진십팔랑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소곤거리자 진십팔랑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진십팔랑은 곧장 뒤돌아 대청 쪽으로 갔다.
“십팔랑이 왜 저러지?”
“누가 알아. 요 며칠 이상하다니까. 아까는 내 피리까지 빼앗았어.”
자매들이 수군거렸다.
“조부님,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진십팔랑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버지와 정 낭자의 정견이 갈린 거예요?”
진 노태야는 실소를 터트렸다.
“정 낭자는 벼슬아치도 아니고 정 낭자의 외숙도 무장일 뿐인데, 네 아버지와 무슨 정견을 논한단 말이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 노태야가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부친의 정견과 정 낭자의 바람이 일치하지 않은 거지.”
“그럼 정 낭자도 이제 셋째 언니처럼 우리와 왕래 안 하는 거예요?”
진십팔랑이 물었다.
진소의 셋째 딸은 진씨 가문과 맞먹는 관리의 가문으로 시집갔지만, 몇 년 전 두 가문 사이에 정견이 갈리며 멀어지게 됐다. 셋째 딸의 남편은 친정과 왕래를 끊을 것을 종용했고, 진소 부부 역시 딸이 시가에서 편히 살게 하기 위해 독한 마음을 먹고 딸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셋째 손녀 얘기가 나오자 진 노태야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닐 게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네 부친의 잘못이 아니야. 정 낭자가 네 부친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것도 아니지 않으냐.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고 해서 네 부친을 탓할 순 없지.”
“하지만 도울 수 있는데도 돕지 않으면, 그 일로 원한을 사기도 하잖아요.”
“정 낭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진 노태야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더 이상 왕래하지 않는 게 맞지.”
진십팔랑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부님, 이치는 저도 알아요. 그래도 좀 괴로워서요.”
“마음이 들끓어도 예로 억눌러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어쩔 수 없지. 인생이라는 게 그래. 기쁨과 슬픔, 근심과 걱정은 쉬이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모든 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진십팔랑의 말에 진 노태야가 껄껄 웃었다.
“흘러가는 것은 냇물과 같아서 밤낮을 쉬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 <논어> 자한편) 했느니라. 공자께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마차가 거리를 지나갔다. 정교랑이 마차에서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 쓰인 글씨는 우아하면서도 필치에 힘이 있었다.
“내가 아는 게 제한적입니다. 풍문을 듣는 건 쉽지만 낭자를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군요.”
소년이 손을 뻗어 소매를 잡았다. 표정도 목소리만큼 밝았다.
“사정을 안 후 시간이 얼마 없기도 했고, 조정의 대사인 데다 얽힌 범위가 워낙 광범위하여 우리 같은 애송이들이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내 말을 듣지도 않으시겠지만, 조정에서도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낭자, 내게 종이와 붓을 주십시오. 내가 당시 어전에서 대립한 양측의 이름과 관직, 각자 얽힌 관계와 내력 등은 알아다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별게 아닙니다. 서북 군영의 사무를 철저히 조사하는 거죠. 서북 군영의 일을 맡을 관리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싹 바꾸기 위해서요. 탈영병 사건은 더없이 좋은 구실이죠.”
“폐하께서는 마음을 못 정하신 듯합니다.”
“서북에서 대패한 일로 왕보당이 벌을 받았는데도 폐하는 여전히 노기가 가라앉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진 대인 쪽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겠죠.”
“고 통사 쪽에서도 물러설 수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왕보당이 무너지긴 했으나 그 기반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왕보당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쉬운 일이고요. 그 기반을 뿌리째 뽑아 버린다면 이는 부모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눈에 핏발이 설 수밖에 없죠.”
“그래서 지금 한쪽에서는 탈영병을 죽여 이 일을 매듭지으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탈영병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입니다. 죽이든 안 죽이든 조사는 하자는 거죠. 상황이 이러하니 진 대인은 절대 탈영병의 편을 들지 않을 겁니다. 목숨을 구해 주는 건 더욱 말할 것도 없죠. 상대에게 자신을 공격할 빌미를 주는 셈이니까요.”
진십삼이 붓을 내려놓고 정교랑을 쳐다봤다.
“지난번엔 유 교리가 암암리에 수를 썼기에 우리도 암암리에 수를 쓰는 식으로 대응했지만, 이번엔 양측이 각자 속으로는 무슨 꿍궁이를 갖고 있든 표면적으로는 정정당당하게 국법과 도의를 논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불구의 몸이었고, 지금은 병이 나았다고는 하나 아직 어리고 능력이 부족합니다. 주육낭이 이 일을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탓할 것도 없죠. 애초에 상의할 수도 없으니까요.”
마차가 급정거를 하자 정교랑의 몸이 기우뚱했다. 바깥쪽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더 시끄러워졌다.
“장씨 가문 저택에 거의 다 왔어요.”
시녀가 나지막이 고했다.
장씨 가문 저택은 시끄러운 장터의 외진 골목에 있었다. 이곳 장터는 신선거가 위치한 곳의 장터와는 달랐다. 그쪽은 화려한 주점이 즐비한 장터라면 이쪽은 가난한 백성이 주로 이용하는 장터였다. 이렇다 할 점포도 없이 바구니에 물건을 가져와 팔곤 했다. 오가는 이들의 행색도 남루했고, 연지분을 덕지덕지 바르고 나와 있는 창기도 있었다.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뭉쳐 시녀에게 던졌다. 종이를 받은 시녀는 휴대하고 다니던 부싯돌을 꺼내 마차에 있는 작은 화로를 당겨 불을 붙였다. 부싯돌에서 불꽃이 일었다. 마차가 멈췄을 무렵 작은 화로에는 재만 한 움큼 남아 있었다.
장씨 저택의 문은 쉽게 열렸지만 시녀를 본 노복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다만 시녀는 몹시 초조했던 탓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노야는 계세요?”
시녀가 다급히 물으며 대문 안으로 걸음을 내디디려 하자 노복이 문을 막아섰다.
“소심…… 아니, 반근.”
노복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노야는 안 계셔.”
시녀가 멈칫했다.
“제가 어제 노야를 뵙고 오늘 오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시녀의 말에 노복은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지금 식언을 했다고 노야를 나무라는 거야?
“노야는 서원에 가셨다. 내일 다시 오는 게 어떠냐.”
“내일 와도 뵐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시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예의를 벗어던진 말투였다. 노복은 한숨을 내쉰 후 옆에 있는 마차를 힐끔 쳐다봤다.
“소심. 무슨 큰일이 생긴 게야?”
노복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큰일 같은 거 없어요!”
시녀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홱 돌아섰다.
“갈게요.”
노복은 어이, 어이 하고 몇 번 소리치다가 굳이 붙잡지 않고, 떠나는 시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차 옆에 선 시녀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서운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다.
“노야께선, 서원에 가셨대요.”
시녀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그럼 서원으로 가자.”
휘장을 들어 올린 정교랑은 억울하단 표정의 시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남을 돕는 건,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야. 도우면 은혜인 거고, 돕지 않아도 인지상정이지. 부탁할 땐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인데, 억울해할 게 뭐 있어.”
마차는 방향을 바꿔 성 밖으로 내달렸다.
“노야는 이런 식이에요.”
마차에 탄 시녀는 억울하고 분하다는 투로 말했다.
“보통 고집이 아니시죠. 의견이 다르면 체면이고 뭐고 없으세요. 예의 있고 기품 있고 더없이 좋은 분인데, 때로는 정말이지……. 염주(廉州)에서 수업하실 때도 말이며 행동이 얼마나 거침없으셨는지 몰라요. 현지의 대유학자가 죽여버리겠다고 자객을 보낸 일까지 있었다니까요. 그때 현지 관료 덕에 목숨을 건지지 않았으면, 지금 황궁을 드나드실 수나 있겠어요?”
“틀렸어. 그렇게 살았으니, 지금 황궁을 드나들 수도 있는 거야.”
정교랑이 말했다.
뒤에서 옛 주인의 험담을 늘어놓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화가 나서 투덜거리며 구시렁대던 시녀는 정교랑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아씨는 이 상황에도 노야를 칭찬하세요?”
“그럴 만한 분이야.”
조용히 달린 마차는 어느덧 성 밖의 서원에 도착했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장순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푸른 옷을 입은 사환이 길을 안내했는데, 보아하니 시녀와 잘 아는 눈치였다. 반색을 하며 누나라고 불러 주는 덕에, 시녀는 장씨 저택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며 깎인 체면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게 됐다.
“어제 갑자기 일이 생겼어. 중요한 경서를 골라 쓰셔야 한다며 조용한 서원으로 오셨지.”
사환이 웃으며 스스럼없이 떠들어대자 굳어 있던 시녀의 얼굴이 마침내 펴졌다.
수업을 마친 시각인지라 학생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육예를 익히거나 다른 학생들과 교류했다. 한 학생이 시를 읊으면 주변에서 잘한다며 환호하기도 했다. 그사이에 껴 있던 정사낭은 갑자기 멈칫하며 손을 들어 주위를 조용히 시키더니, 엇,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덕 형, 왜 그래?”
옆에 있던 이가 물었다.
“누이를 본 것 같아서.”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이쪽으로 몇 걸음 걸어오며 중얼거렸다.
누이? 여인들 중에도 글을 익히고 책을 읽는 이가 많은 시대였지만, 대부분 선생을 집으로 모시지 서원에 가는 경우는 없었고, 가족을 면회 오는 일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사낭의 말에 학생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대나무 숲으로 난 오솔길로 꼬마가 두 여인을 인도해 가고 있었다. 거리도 꽤 되고 옆모습만 보이는지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다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대나무 숲, 무채색의 옷, 느린 걸음걸이가 마치 한 폭의 ‘미인산행도’ 같았다. 일행은 곧 대나무 숲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명덕 형, 저 장강주 선생의 사환이 선생의 정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 같은데, 자네 누이가 선생을 뵈러 가는 건가?”
다들 놀란 표정으로 떠들어대며 정사낭을 쳐다봤다.
학생들은 서로의 출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신분이며 배경, 가족과 출생지 등을 알고 있었는데, 정사낭 정도는 대단한 축에 들지도 않았다. 자질도 평범한 걸 보면 장강주 선생의 동향이라는 인연에 기대 들어왔겠지 했다.
이곳에 온 후로도 수업 시간 외에는 장강주 선생을 만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정사낭도 못 뵙는 분을 그 누이가 뵙는다고?
“내가 잘못 봤나?”
정사낭이 겸연쩍어하며 웃음을 보였다. 그럼 그렇지. 다들 이해하는 눈치였다.
“자네 누이는 강주에 있지 않아? 이 먼 곳까지 무슨 일로?”
“집에서 떨어져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 건 처음이지? 집 생각이 많이 나나 보네.”
“누이랑 돈독한 사이였나 보군.”
다들 농담을 던지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시를 읊기 시작했다. 정사낭만 집중을 못 했다. 누이는 분명 경성에 있었고, 장씨 가문과 연이 있는 건 확실했으니까.
누이의 시녀는 장씨 가문의 시녀가 아니었던가. 정말 온 건가?
정사낭은 고개를 돌려 대나무 숲을 바라봤다. 놀란 눈빛을 숨길 수 없었다.
왜 왔지? 날 보러 왔나? 그렇다고 장강주 선생을 먼저 뵐 필요는 없잖아?
시녀는 서원에 몇 번 와 본 일이 있었다. 잘 아는 곳은 아니었지만, 사환이 곁채에서 기다리게 하지 않고 곧장 장강주 선생의 서재 쪽으로 안내하는 모습을 보며 시녀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생, 정씨 가문의 낭자께서 오셨습니다.”
사환이 회랑 아래에서 말했다.
가을 햇살 속에서 문이 열리자 실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크고 건장한 체구에 커다란 옷을 입은 중년의 문객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꼿꼿하고 단정한 풍모였다.
정교랑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들어오시오.”
장순이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감사 인사를 먼저 올린 후 안으로 들어가 장순 앞에 있는 첫 번째 방석에 꿇어앉았다. 사환이 차를 올린 후 물러났다.
“제 아버님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장순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며 큰절을 올렸다.
“별일도 아닌걸요. 과일 절임 하나였을 뿐인데, 이런 큰절을 올리시다니요.”
정교랑이 답례를 올렸다.
“아버님께서 떠나시기 전 특별히 당부하셨소. 낭자에게 어려움이 있거든, 꼭 도와드리라고 말이오.”
장순은 정교랑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낭자가 처한 문제는 예에 어긋나고 국법을 어긴 일이니, 아버님의 뜻을 따를 수 없소이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입을 열지 말아 주시오.”
문밖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있던 시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 안쪽을 쳐다보았다.
노야께서는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계시는구나. 탈영을 한 건 엄연한 사실이고 국법에 따르면 참형에 처해야 하니, 도와주실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신 거야. 저러실 줄 알았다니까!
장순이 말을 마치자 실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선생을 난처하게 하진 않겠습니다. 그저 제 사정을 들려 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얘기는 편히 하시오. 공손히 들으리다.”
장순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선생께서 터놓고 말씀해 주시니, 소녀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제가 여기 온 건, 제 오라비들의 죄를 면해 달라는 청을 드리기 위함이 아니에요.”
죄를 면해 달라는 게 아니다? 시녀는 어리둥절한 눈빛이었지만 장순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말할 테면 해라, 난 꿈쩍도 안 할 테니.
“제 오라버니들이 억울한 모함을 받아 부득이하게 도망쳤다고는 하나, 탈영죄는 엄연한 사실이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요.”
정교랑의 말에 장순은 음, 하는 소리로 대꾸했다.
“맞는 말이오. 부득이했다 한들, 뭘 어쩌겠소.”
“뭘 어쩔 순 없죠. 부득이한 사정이 탈영의 이유가 될 순 없으니까요.”
장순은 잠자코 들었다.
“다만 전, 사람이 가치 있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라버니들이 전에 어떻게 살았는진 모르겠어요. 다만 절 만난 후로는, 태평거에서든 신선거에서든, 아무리 일이 고되고 힘들어도, 하루도 무예 단련을 거르지 않았어요. 강궁을 쏘고 돌과 쇠로 몸을 단련했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었어요. 태평거와 신선거는 그 사람들이 반은 주인이에요. 거기서 얻은 이윤만으로도 남은 평생 먹고살기엔 부족함이 없죠. 경성에서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요.
유규가 체포하러 왔을 때, 그들 실력이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어요. 제가 전에도 당부했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옥에 잡혀 들어가는 건 절대 피해야 한다고. 밖에 있기만 하면, 사람을 죽여도 내가 구해 줄 수 있다고 했죠.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어요. 유규의 말 몇 마디에, 저항을 포기했죠.
죽는 게 두려워서였을까요? 그 사람들은 탈영죄가 뭔지 똑똑히 알았어요. 죽는 게 두려웠다면, 그리 순순히 투항했을까요? 그 사람들은 도리를 알고 의리를 알았던 거예요. 군자는 옳고 그름을 알고, 선악을 알며, 명예나 영달을 구하는 대신 가치 있게 죽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제 오라비들은, 적을 죽여 나라에 보답할 뜻을 품고 있어요. 전장에서 피 흘려 싸우다 죽는다면, 죽더라도 가치 있는 죽음이겠죠. 제 오라비들을 군자라 할 순 없지만, 그들도 진충보국은 옳고, 도망은 그르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적을 죽이는 건 선이지만, 동족을 죽이는 건 악이죠. 탈영죄로 체포되는 것이기에, 기꺼이 응했던 겁니다. 도망치다 죽으면, 그 죽음은 가치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옳은 말이오. 그래서 어쩌겠단 거요?”
장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었어요.”
정교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제 얘기를 들어주려는 이는 선생뿐이세요. 다른 이들은 원치도 않고, 얘기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죠. 그들에게는 도망친 이가 병사든, 한 마리의 개든, 똑같을 거예요. 그들이 원하는 건 ‘탈영’이라는 글자지, ‘병(兵)’이라는 글자가 아니었거든요. 사형에 처한다 한들, 과하다고 할 순 없죠. 국법이 지엄하니까요.
다만, 죽으려면 가치 있게 죽어야죠. 탈영병을 참하는 건, 나머지 병사들이 경계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경성에서 형을 집행하고, 천 리 밖에 있는 장병들에게 알린다 한들, 문서 한 장에 벌벌 떨 이가 있을까요?
탈영병은 죽여 마땅하지만, 세상에 탈영병이 얼마나 많은지, 대인들도 잘 아실 거예요. 전부 잡아다 죽이면, 변방은 누가 지키죠? 소녀의 오라비들은, 경성에 있다가 당쟁에 휘말렸고, 높은 분들의 일에 누를 끼치게 됐어요. 보잘것없는 걸림돌일 뿐이니, 차 버리면 그만이겠죠. 고작 목숨 몇 개에 불과하니까요.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게 하고, 경계하게 한다고요? 말이야 좋죠. 하지만 이렇게 죽으면, 억울하기만 할 뿐, 무슨 가치를 논하겠어요.”
“세상엔 본디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 많소.”
장순이 말했다.
“그러니 도학의 논쟁이 있고 이치를 놓고 다투는 거겠죠. 세상 사람들이 도의를 깨닫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알게 하려고요.”
“그러니까 결국, 그들의 죄를 벗겨 달라는 말 아니오?”
“탈영병을 참하는 건 군의 기강을 세우고, 나라의 근심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사사로운 이익 다툼에 쓰이기 위해서가 아니죠.”
“사사로운 이익 다툼이라 했소? 지금 낭자도 자신의 이익 때문에 이러면서, 어찌 그리 당당히 말하는 게요?”
장순의 목소리는 이름처럼 온화했다. 반면 정교랑의 갈라진 목소리는 듣기 거슬렸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사람 다 말이 느리다는 것이었다. 다만 문밖에 앉아 있는 시녀의 귀엔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비파를 연주하는 듯 들렸다.
“사람이 사물에 동화되면, 천리(天理)는 소멸하고, 인욕을 끝까지 추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제 욕심은, 나라에 아무런 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저들의 욕심은, 탈영병을 죽이거나 죽이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죽이려는 이면에 진짜 목적이…….”
“무지한 어린애로구나!”
장순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가뜩이나 바짝 긴장하고 있던 시녀는 놀라 몸을 떨었다.
탁자 앞에 앉은 문객의 단정했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부친께서 호의를 보이시기에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여인일 줄 알았는데, 결국 이 정도였군.
장순이 호통을 쳤다.
“조정의 대사에 대해, 어린애가 뭘 안다고 왈가왈부하느냐? 군에 관한 일엔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 마련이다. 집에 들어앉아 태평성대를 누리는 이가 인간사의 질곡을 어찌 안다고, 군사 일에 이래라저래라하느냐?”
장순이 가장 반감을 보이는 부류가 이런 이들이었다. 책 몇 권 읽고 진위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소문 좀 몇 개 들었다고, 국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이들.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소녀가 잘못했습니다. 선생의 가르침이 맞아요.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고 묻는 꼴(何不食肉糜: 부자가 가난한 이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물음)이니 우스울 따름이지요.”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녀가 드리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예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물러갈게요.”
이대로 간다고? 저리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면 견디기 힘들 텐데. 더구나 누군가를 돕기 위해 왔던 일로…….
시녀가 복잡한 심경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교랑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녀는 정교랑의 뒤를 따르면서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서재에 있는 장순은 만류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듯 단정히 앉아 있었다.
노야께서 이러실 줄 알았다니까!
“아씨, 아씨.”
시녀가 바짝 뒤따라갔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녀는 서원 밖으로 나와서야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시녀는 놀라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불쑥 튀어나온 이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맞았구나. 누이, 여긴 어쩐 일이야?”
정사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일이 있어서요.”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무슨 일?”
정사낭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별일 아니에요.”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기에 정사낭은 대충 눈치를 챘다. 말하기 싫다면 굳이 캐묻지 않아야겠지.
입으로는 누이라 하지만, 사실 누이를 본 일은 다 합쳐도 서너 번밖에 안 됐다.
정사낭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정사낭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몸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얼마 안 되는데, 누이가 가져가서 써.”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돈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정사낭이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딱히 할 말이 없다 보니 더는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정교랑의 말에 정사낭은 얼른 길을 열어 주고, 정교랑의 마차까지 직접 데려다주었다.
“왕십칠이 찾아가서 귀찮게 한 건 아니지?”
정사낭이 물었다.
“아니에요.”
“그 녀석 집에서 사람이 왔어. 보아하니 데려간 모양이야. 귀찮게 할 일 없을 테니 안심해.”
정사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본인도 긴가민가하고 있었던 눈치였다. 정교랑은 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계속 앞으로 걸었다.
“혹여, 혹여 왕십칠이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나한테 얘기해.”
따라 걷던 정사낭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말하면 어쩔 건데? 죽일 수라도 있어? 시녀가 곁눈질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우리 아씨는 하실 수 있어.
정교랑은 미소로 감사 인사를 전한 후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고 한참 후에 고개를 돌렸는데도, 정사낭은 서원 입구에 그대로 있었다. 정사낭은 차츰 작아져 까만 점이 될 때까지 서 있었다.
휘장을 내린 시녀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든 돈주머니를 쳐다보았다.
“필요 없는 건 주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정작 필요한 건 돕겠다는 사람이 없네요.”
시녀가 중얼거렸다.
“각자 자기 능력에 따라 움직이는 거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할 순 없어.”
정교랑이 말했다. 물론 시녀도 이치는 잘 알았다. 시녀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께서 말씀하신 이치는 저도 알아요. 다만…….
“아씨, 아씨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시녀가 불쑥 물었다.
“뭘 어떻게 해?”
정교랑이 되물었다.
“전엔 노태야도 그러시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말해서, 저 스스로도 제가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세상 이치를 잘 아는 줄 알았죠. 무슨 일이든 훤히 알고, 어떤 어려움에 처하든 똑같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냥 착각이었어요. 괜히 우쭐했던 거죠.”
시녀가 말했다.
“전엔 이런 일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잖아.”
정교랑이 대꾸했다.
“아씨도 이런 일을 경험하신 건 아니잖아요. 태평거의 일이며 혼사에 관한 일, 그리고 지금은 또…….”
그중 어느 하나만 해도 평범한 이들에겐 크나큰 난관이었을 것이다. 초조해 어쩔 줄 모르며 좌불안석이겠지. 더구나 열댓 살밖에 안 된 어린 낭자라면 더더욱.
“아씨께선 대체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전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어요. 가슴도 두근두근하고 좌불안석인데, 아씨께서는 당황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으시잖아요. 아씨를 오래 모셨지만, 여전히 배울 수가 없네요.”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이런 건 안 배워도 돼. 딱히 좋은 일도 아니고.”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씨, 이게 어떻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이렇게 침착하고 대범한 건, 평생을 들여 수양해도 이를 수 없는 경지인데…….”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난 아니야. 내가 이러는 건, 내게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
시녀가 멈칫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시네.
“난 그저 내 일을 할 뿐이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야.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건, 그들을 위해서라기보단, 날 위해서라고 하는 게 맞아.”
그들은 그녀가 구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오라버니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잡혀가 목숨을 잃는다면, 자업자득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떠올릴 때마다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
사실 대부분의 일이 그랬다. 남들이 도움을 청할 때 인정과 도의를 위해 그들을 돕는다 해도, 그 안에는 자신의 체면과 우쭐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담기기 마련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일이 뜻대로 안 됐을 때는, 체면이 깎인 것 같고 망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인정하고 싶지 않아진다. 부처님은 향불 덕에, 사람은 체면 덕에 사는 법이다.
시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씨, 뭐하러 자기 비하를 하세요. 다들 그러려니 하는 일인데, 그리 딱 잘라 말씀하실 것까진 없죠.”
“나 스스로 똑똑히 기억하려는 거야. 내가 이 일을 하는 건,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 누가 내게 빚을 진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랬다. 남이 그녀를 박대할 때에도 그녀는 딱히 원망하거나 실망하고 슬퍼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손을 들어 가슴에 가져다 댔다.
이 세상에,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이는, 그녀가 바라고 원하는 사람뿐이리라.
시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아씨가 의지할 사람은 없단 말이구나.
“그럼 이제 어쩌죠? 또 누굴 찾아가야 해요?”
시녀가 물었다.
“다 찾아갔잖아. 더 찾아갈 필요 없어.”
정교랑이 대답했다.
“하지만 노야께선 아무 응낙도 안 하셨잖아요.”
“내가 장 선생을 찾아온 건, 무슨 대답을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야. 내 말을 들어달란 거지. 진 대인은 내 말을 조금도 안 들으려고 했어. 내 말을 들으려 하는 사람은 장 선생뿐이었지. 봐, 들어주셨잖아. 충분해.”
충분하다고? 시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그럼 이제 뭘 하죠?”
“이젠, 운에 맡겨야지.”
정교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결국 운에 달린 거구나.
시녀는 멍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아씨의 웃음이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표정이 단조롭던 정교랑이었다. 무뚝뚝한 표정을 짓거나, 살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웃음은, 뭐라고 해야 하나. 냉소?
서재 안. 장순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다시 내려놓았다.
“사람이 사물에 동화되면, 천리는 소멸하고, 인욕을 끝까지 추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제 욕심은, 나라에 아무런 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저들의 욕심은, 탈영병을 죽이거나 죽이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죽이려는 이면에 진짜 목적이 있죠.”
여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오만한 것 같으니라고! 장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붓을 들었다.
“군에 관한 일엔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 마련이다. 집에 들어앉아 태평성대를 누리는 이가 인간사의 질곡을 어찌 안다고, 군사 일에 이래라저래라해?”
“소녀가 잘못했습니다. 선생의 가르침이 맞아요.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고 묻는 꼴이니 우스울 따름이지요.”
장순은 결국 손에 든 붓을 무겁게 내려놓았다.
“이 강주 바보가!”
장순이 무겁게 말했다.
“다시 찾아오진 않았고?”
진 노태야의 물음에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탈영병의 처벌에 관해선 결론이 났느냐?”
진 노태야의 물음에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작 결론이 났습니다. 양측 모두 이견이 없고요.”
이견을 보이는 부분은 탈영병을 죽인 후의 일이었다.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여인이, 또 다른 이를 찾아가진 않았고?”
노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그러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장강주 선생의 서원에…… 다녀오긴 했습니다.”
장순? 그래, 그러고 보니 둘 다 강주 사람이었군. 설마 아는 사이였나?
장순이 나선다면……. 하지만 그 꼬장꼬장한 유학자 선생이 죄를 지은 게 분명한 탈영병을 편들고 나설 리가?
“듣자니 넷째 오라비가 그 서원에서 공부한답니다. 남매가 이야기를 나눴고, 오라비가 누이에게 돈을 챙겨 주기도 했대요.”
이어진 노복의 말에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찾아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겠지.
경성에 명성을 떨친 여인이라고는 하나, 치료 조건이 워낙 까다롭고 매정하게 거절하는 통에 부잣집 권세가들과 연을 맺을 기회가 없었다. 최근에는 기적 같은 치료 성과로 경성을 뒤흔든 일도 없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경성에서 지금 정교랑의 명성은 반년 전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의술을 빌려 연을 맺고자 한다면, 그 결과는 더 안 좋겠지.
영민하고 지혜로운 여인이니 그 점은 똑똑히 알고 있을 터였다.
“사실 정 아씨께선 그 일곱 명한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 일이 정 아씨께 불똥이 튈 일도 없을 뿐더러 아무 영향도 없을 테니, 정 아씨도 그만 포기하시겠지요.”
노복의 말에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않을 게다.”
영민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자존심도 대단한 여인 아닌가. 자존심이 센 사람은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지.
“경성에 새로운 소식은 없고?”
진 노태야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거 누가 자빠져 죽었다나 뭐라나 하던 건?”
“아, 신선거 앞 거리에서 사내 하나가 도망을 치다가 자빠져 죽었대요.”
경성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루하루 수없이 많았다. 그나마 진 노태야가 정 낭자와 관련된 사람과 점포를 예의주시하라고 명한 덕에 알게 된 정보였다.
거리에서 사람이 자빠져 죽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 일이 마침 신선거 앞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면, 노복은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진 노태야한테 말을 전한 후, 노복 본인도 잊고 있던 일이었다.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빠져 죽었다는 사람이 그 여인과 관련된 건 아니겠지?
“성문을 지키는 말단 관리였는데 노름에 빠져 지냈답니다. 데릴사위로 들어간 자인데, 제 장인한테 놀라 달아나다가 발을 헛디뎌 자빠져 죽었대요.”
노복이 부연 설명을 했다. 진 노태야는 노복의 말을 듣고 자조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서 선입견이 무섭다니까. 이러다 경성에서 사람만 죽었다 하면 그 여인부터 떠올리겠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여인의 성격은 진 노태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돌려 병풍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 해 두었던 표시는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여전히 눈에 띄었다.
“사실 그 탈영병들을 죽이지 않아도, 노야께는 별 영향이 없지 않습니까.”
노복이 나지막이 말하자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영향이 없지.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느냐.”
진 노태야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저들은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어쩔 수 없지. 인간사가 그런 법이야. 장수를 지키려면 병졸을 버릴 수밖에 없는 이치지. 그러니 다들 병졸이 아니라 장수가 되고 싶어 싸우는 거고.”
노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경성에서 사는 건 쉽지 않아. 인간사도 뜻대로 이루어지지만은 않지.”
진 노태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젊은 사람이니 이번 기회에 단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야.”
진 노태야가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노복이 얼른 뒤를 따랐다.
“노야는 입궐했느냐?”
진 노태야의 물음에 노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사흘이니, 승부가 갈릴 때가 됐군.”
진 노태야는 회랑 아래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차정사에나 다녀와야겠다. 예불도 드리고 선사의 말씀도 들어야지.”
승부가 어떻게 나든 쉽진 않을 것이다.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했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은 믿고 의지할 곳을 찾기 마련이었다.
노복이 네, 하고 대답한 후 마차를 준비하러 갔다.
같은 시각, 성 안에서 가장 영험하기로 소문난 보수사의 낭랑전(娘娘殿)에서는 짙은 연기가 피어났다.
“아버지, 향을 이렇게 많은 피울 필요는 없잖아요?”
동 낭자는 기침을 해대며 손을 휘휘 저어 연기를 쫓았다. 동 노야는 굵은 향 다발을 향로에 꽂으며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어서 절부터 올리지 않고!”
동 노야가 호통을 치자 동 낭자는 마지못해 다가왔다. 동 노야는 유모들도 어린 손자들을 데리고 절을 올리게 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어린애들인지라 손주들은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 듯 웃으며 절을 올리다가 동 노야한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아버지, 애들이 뭘 안다고요. 절을 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동 낭자는 기분 나빠하며 아이들을 감쌌다.
“알든 모르든 절은 올려야 해. 우리 집안 전체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동 노야는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치며 눈을 부라렸다.
“어서 꿇어라. 서무수 형제가 무탈하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란 말이다!”
물론 그 기도는 동 낭자가 진심으로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동 노야의 일가가 낭랑전을 차지하고 있으니, 예불을 올리러 온 다른 이들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황궁, 중화문.
내시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며 손짓을 했다. 잠시 후 진안 군왕이 한쪽 옆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궁문을 지나던 중 대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 가십니까?”
진안 군왕은 앞으로 다가가 먼저 예를 올리고 웃으며 물었다.
이른 아침? 대황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너처럼 할 일 없는 사람한테나 아직도 이른 아침이겠지.
“부황께서 조회에 참석하라고 하셔서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대황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하며 우쭐대고 싶은 마음에 대답해 주었다. 올해 열한 살인 대황자로서는 오늘 처음으로 조회에 참석하는 것도 아니었다.
“재미있습니까? 듣자니 대신들은 수시로 싸운다던데요. 그것도 엄청 치열하게.”
진안 군왕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에게 조회는 무료하고 재미없는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평생 가도 그런 무료함을 경험할 기회가 없는 이를 생각하면, 그 무료함도 즐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네. 어제는 진 상공이 어전에서 고 통사를 한 시진이나 욕했어요. 난 듣기만 해도 피곤하던데, 다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나 모르겠습니다.”
대황자가 말했다.
“그렇게 오래요? 정말 고생이 많네요.
진안 군왕이 놀란 투로 대꾸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숭정전 근처에 당도했다.
“전 출궁하는 길입니다. 어서 가 보세요, 전하.”
진안 군왕이 동정 어린 눈길로 대황자를 보며 말했다. 대황자는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실컷 놀아라, 쓸모없는 것.
진안 군왕은 공경을 표하기 위해 대황자가 숭정전 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정사당에는 대신들이 전부 당도해 있었다. 어사중승 같은 고위직 관료까지 전부 온 터였다. 사흘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이 왔군.
무거운 표정으로 점점 빠르게 걷던 진안 군왕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앞쪽을 쳐다봤다.
키가 크고 건장한 관료 하나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에서는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났지만, 관료의 걸음걸이에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이라면 누구나 확신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세찬 비가 퍼붓더라도, 저 관료는 결코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으리라.
“교서(校書) 대인이 왔군.”
진안 군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마침내 변화가 생기는 건가. 오늘 조회에서는 전하께서 더 시끄럽고 치열하게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시겠어.”
장순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안 군왕은 시선을 거뒀다. 마침내 천둥에 이어 번개까지 내리치기 시작하더니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비가 내렸다.
대전 밖의 천둥소리가 잦아들고, 쏴 하고 내리던 비도 가랑비로 바뀌었다.
반 시진이면 끝나겠지? 더 걸리려나? 대황자는 물시계를 확인하려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앉아 있는 한 사람과 서 있는 두 사람 때문에 시선이 가려졌다.
대전에는 열댓 명의 대신이 있었다. 여기서 앉을 수 있는 이는 저 높은 보좌 위에 있는 황제와 황자인 자신, 그리고 어사 대인뿐이었다. 올해 쉰이 넘은 어사 대인은 굳은 표정이었다. 품계가 낮은 어사 두 명은 서 있었다.
저리 꼿꼿하게 앉아 있다니, 피곤하지도 않나? 대황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뒤에 있던 내시가 낮게 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힘들어 죽겠네. 공부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 천둥소리가 잠잠해질수록 대전에서 싸워대는 소리는 더 커졌다.
“병사들이 무예 연마는 하지 않고, 급료만 축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오.”
“그러니 훈련을 강화하고, 늙고 허약한 자는 제외하여 쓸 만한 자들만 남겨야지요. 강문원(姜文元)이 유능하고 병법에 능하여 위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으니, 그자를 발탁해야 하오.”
“강유원이 위주로 부임했을 당시 수하가 싸우다가 사람을 죽게 한 일이 있었는데, 수하를 두둔하며 무죄 판결을 내린 일도 있었소. 그런데도 강유원은 수하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지. 그런 자를 중용하는 것은 부당하외다.”
“류 대인, 대인의 고향에서 그 댁 하인들이 행인을 패 죽인 일에 대해선 뭐라 하시겠소? 그때도 법과 제도를 이용해 빠져나갔잖소.”
“폐하, 노신의 명예를 더럽힌 저자를 탄핵하고, 사직을 청하겠나이다!”
아직 어린 대황자는 결국 하품을 했다. 어차피 다들 싸우는 데 열을 올리다 보니 황자에게 신경을 쓰는 이도 없었다.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싸우는지 모르겠네. 부황께선 매일 조회에 나와 저런 얘길 듣고 계시는 거야? 너무 따분하잖아. 저렇게 입씨름만 하느니, 차라리 멱살 잡고 싸움을 한판 벌이는 게 낫지. 이기는 사람 뜻대로 하면 되겠네.
좋은 생각인데? 대황자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나는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삿대질을 하며 침을 튀기는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대신들이 멱살을 잡고 드잡이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풉 웃음이 나왔다.
“진 참정께 묻겠소이다. 강문원이 적합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적합하단 말이오?”
“계주(溪州) 병마부 총관 종승포(鍾承布)요.”
“종승포는 이제 겨우 스물여덟이오. 부친의 힘에 기대 음보로 관직에 나온 이를 그리 중용할 순 없소이다!”
“종씨 가문은 일가 전체가 힘을 합쳐 적에 대항하다가 장정 열셋이 전사하고, 사내라곤 승포 하나만 남았소. 어려서부터 명민하고 문무를 겸하여, 어린 나이에 군을 이끌고 적진으로 쳐들어갔다가 개선한 일도 있지. 실로 곽거병(霍去病: 서한 시대의 무장)과 같은 재주를 지닌 자요.”
“진 참정, 곽거병과 같은 재주만 있고, 곽거병처럼 명이 짧아서는 안 될 텐데 말이외다. 어린 나이에 뜻을 펼치며 중임을 맡으니, 그 명이 길지 않을까 걱정이오. 요절을 조심해야 하느니…….”
진소는 격노했다. 싸우고 다투다 보면 헛소리도 나오고 이 말 저 말 다 끌어다 하게 된다지만, 그래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 진소가 막 따지고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한발 먼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주청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목소리에 대전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누구인지 확인한 대신들은 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전에 있는 열댓 명의 대신은 양측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진소와 고 통사가 주로 언쟁을 벌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따르는 이에게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태고자 기회만 엿보고 있던 터였다.
아무 말 없이 꼼짝도 않고 있는 이들도 몇 있었다. 그저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어사와 태자 중윤(中允: 동궁의 정오품 벼슬), 새로 진급한 비각 교서인 대학사 장순 등이었다.
학문에 심취한 장순은 과거와 관련된 일 외에는 조정의 논쟁에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열 번 중 일곱 번은 조회에 불참했고, 나오더라도 말을 삼갔다. 그런데 갑자기 입을 여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용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황제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봤다.
“윤허하겠소.”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사 인사를 올린 장순이 돌아섰다.
“아주 가지가지들 하는구려!”
장순은 엄숙한 얼굴로 호통을 쳤다. 흠칫 놀란 대신들은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눈치였다. 말도 안 하고 있던 이가, 갑자기 입을 열자마자 욕부터 해대다니! 뭐가 그리 아니꼽고 성미가 뒤틀리기에!
진소 등이 이에 맞서 입을 열기도 전에, 어사가 먼저 나섰다.
“장순은 동료에게 언행으로 모욕을 주고 어전에서 결례를 범했으니, 그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오!”
서 있던 두 어사가 언성을 높였다.
“대인들도 쓸모없긴 매한가지요!”
장순은 즉시 돌아서서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언행으로 동료를 모욕하고 어전에서 결례를 범했다? 대인들도 똑똑히 봤잖소. 여기 이 물건들은 말로써 천자를 협박하고, 군주 앞에서 안하무인으로 굴고 있소! 다들 눈이 먼 게요?”
장순의 호통에 대신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쓸모없다니! 물건이라니! 눈이 멀었다니!
조정에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듣기 거북한 말이 한두 번 오간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코앞에서 정면으로 욕지거리를 해대는 일은 실로 드물었다.
장순도 명색이 대유학자인데, 말은 어찌 저리 거침없는 건지. 유학의 도통(道統) 논쟁 때 저자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낸 이가 있다더니. 쳐다보는 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몇 번은 죽이겠어.
장순이 욕을 해대는 건, 사실 군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며칠째 이어진 시끄러운 논쟁에 신물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황제로서 대놓고 욕할 수는 없던 차에 마침 대신 나서서 욕하는 이가 있으니 실로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지만, 황제로서 감정을 드러낼 순 없었기에 황제는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예리한 대신들의 눈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대신들은 속으로 욕을 해댔다.
망할 유학자 선생 같으니라고. 황제한테 알랑거리는 데 도가 텄군!
유학의 도통 논쟁은 본디 체면을 내던지고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도통 논쟁에 참여한 장순은 이미 뻔뻔할 대로 뻔뻔해진 상태였으니, 제아무리 파렴치한 말을 늘어놓는다 한들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대신들로서도 욕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몇몇 노신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까지 보이려고 했다.
“신은 노망이 나서 쓸모가 없습니다. 조당을 욕보일 수 없으니 내쳐 주시옵소서.”
노신들이 소리쳤다. 진소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앞으로 한발 나서며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순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고능준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멋대로 권세를 쥐고 휘두르며, 서북 군영의 일을 그르쳤습니다. 이에 신은 고능준을 탄핵하고자 합니다.”
장순이 언성을 높였다. 진소는 걸음을 멈춰 섰다. 마음속에 기쁨이 번졌다.
이제 보니 장 교서가 저쪽 편에 선 게 아니었군. 좋아, 중립적인 인물이 나섰으니 폐하의 용단도 내 쪽으로 기울어지겠어.
“또 진소는 조당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천자의 성은에 보답하기는커녕 공을 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국가의 대사를 그르쳤습니다. 이에 신은 진소도 탄핵하고자 합니다.”
뭐라고? 진소가 놀란 얼굴로 장순을 쳐다봤다.
저자는 대체 누굴 돕는 거지?
누굴 돕느냐고? 조당에 나온 이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도울 뿐 아니던가!
진소의 표정이 굳어졌다. 옆모습만 봐도 살기등등한 결기가 느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대전에 있는 대신들의 표정만 미묘하게 변한 게 아니었다. 대황자의 안색도 하얗게 질렸다.
망했네, 망했어. 이건 뭐, 한 시진이 아니라 두 시진이 지나도 안 끝나겠네.
이들이 무엇 때문에 떠드는진 알 수 없었지만, 싸움에 끼어든 사람이 늘어나면 그만큼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 정도는 대황자도 잘 알았다. 뒤에 있던 내시가 연신 기침을 해대며 주의를 주었지만, 이제부터 이어질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없던 대황자는 아예 몸에 힘을 쭉 빼고 의자에 기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난 아직 어린애라고…….
낮고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회랑에 울려 퍼졌다. 그 사이로 일어난 바람은 가랑비 속으로 사라졌다. 어린 내시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진안 군왕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이기는 것도 쉽지 않고, 지는 것도 쉽지 않소이다. 이기는 걸 쉬이 여기면 지고, 지는 걸 불안해하면 더욱 크게 참패하는 법이오. 이겨도 교만하지 않고 져도 초조해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일도 없지. 벌할 사람은 벌하면 될 뿐, 사소한 실패가 두렵다고 해야 할 일을 회피하면 쓰겠소?”
내시가 바짝 다가와 대전에서 들은 말을 소상히 옮겼다. 내시가 전하는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의 얼굴에 점점 더 짙은 웃음이 번졌다.
“대인들,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얕은 층계에서 발이 접질려 목숨을 잃기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