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 초, 늦여름의 밤공기는 아직 후덥지근했다. 불이 켜진 덕승루는 무릉도원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시끌벅적한 잡담 소리와 휘황찬란한 불빛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바깥쪽으로 트인 회랑 다리에는 각양각색의 미녀들이 미모를 뽐내며 서 있었고, 그 아래로는 기분 좋게 웃고 떠드는 사내들이 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주 낭자가 왔어!”
대청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왕십칠이 그 말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인파 속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뒤처진 정사낭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 왕십칠을 따라가려 했지만, 인파가 워낙 붐비다 보니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치였다.
회랑 다리 위에는 여종 둘이 소녀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아래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아래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아름다운 여인이 금세 회랑 다리를 지나 자취를 감추자, 아래에 있던 사내들은 못내 아쉬운 듯 한참이나 위를 올려다보다 겨우 흩어졌다.
왕십칠은 자신의 신발 한 짝을 찾느라 아직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사낭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무렇게나 짓밟힌 왕십칠의 신발을 집어 던졌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숙부님과 숙모님은 너 이러는 줄 알고 보내신 거야?”
왕십칠이 자리에 앉아서 신발을 신었다.
“그러게 먼저 가라니까 왜 안 가고 여기서 오지랖이야. 우리 부모님은 내가 뭘 하든 다 괜찮으시다는데, 왜 네가 나서서 이래? 고모님과 고모부님께 일러바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시겠다? 정사낭은 왕십칠 옆에 앉아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챙기겠어? 누, 누이를 데리러 온 거 아니야?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좀 봐!”
“안 잊었거든!”
왕십칠이 주전자를 들어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주 낭자의 얼굴만 보면 바로 갈 거야.”
정사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네가 이런 식인데, 앞으로 누이한테 잘해 줄 수 있겠어?”
“당연하지.”
왕십칠이 눈을 흘기며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잔소리 좀 그만하고, 얼른 돈이나 좀 꿔 줘.”
“돈을 벌써 다 썼다고?”
정사낭이 놀라서 소리쳤다. 큰 소리에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쳐다봤다.
“이봐.”
취기가 잔뜩 올라 헤실거리는 사내가 흐느적거리며 술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여긴 돈 쓰러 오는 기생집이야. 여기서 돈은 더 이상 돈이 아니지. 돈을 다 쓴 게 신기한 게 아니라, 못다 쓴 게 신기한 곳이라고.”
사내의 옆에는 분칠을 진하게 한 남창(男娼)이 붙어있었다. 남창은 교태를 부리며 사내에게 과일을 한입 먹여 주고는 정사낭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정사낭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재빨리 왕십칠 쪽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미쳤어? 어디에 다 썼는데?”
정사낭이 목소리를 낮추고 왕십칠을 꾸짖었다.
“별거 없어. 주 낭자한테 선물하려고 진귀해 보이는 것들 좀 샀는데, 경성 물가가 좀 비싸야 말이지.”
왕십칠이 다시 정사낭을 재촉했다.
“빨리 돈 좀 꿔 줘. 집에서 돈 부쳐 주려면 아직 멀었단 말이야.”
“그딴 식으로 쓰라고 줄 돈은 나한테 없어.”
정사낭의 말은 왕십칠은 자신의 턱을 쓸며 말했다.
“하긴. 주 낭자는 경성 사람이니 온갖 진귀한 것들도 벌써 다 봤겠지. 관리 집안의 출신이기도 하고, 악기면 악기, 바둑이면 바둑, 서화면 서화,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뛰어나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왕십칠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정사낭의 어깨를 툭 쳤다.
“네가 시를 그렇게 잘 짓잖아. 어서 시 하나만 지어 주라. 네 시가 주 낭자의 마음에 들면, 내가 덕분에 주 낭자 얼굴 한번 볼 수 있잖아.”
“시는 정을 표현하는 건데, 어떻게 이런 용도로 써?”
정사낭이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시를 쓰는 건 관두고, 이런 기루에 드나들었다는 사실만 집안에 알려져도 다리 몽둥이가 분질러질 것이다. 물론 이번은 왕십칠을 감시하러 온 것이니 예외로 쳐야겠지만.
“쓸데없는 소리. 주 낭자를 향한 동경의 마음도 정이야. 얼른, 얼른.”
정사낭은 고민에 빠졌다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정말 얼굴만 보고 바로 갈 거지?”
“그럼 아예 여기 살게? 주 낭자가 무슨 창기(娼妓)냐?”
관기는 잠자리 시중을 들지 않는 규칙이 있기 했지만 그저 세간에 떠도는 말일 뿐이다. 밤을 보낸다 하더라도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관기가 같이 밤을 보낼 정도의 자격이 되는 사람인지가 관건이었다.
그 정도는 왕십칠도 잘 알았다. 정사낭이 아, 하고는 재차 강조했다.
“그럼, 내 누이한테도 꼭 잘해 줘야 해.”
왕십칠이 웃음을 터트렸다.
“미처 몰랐네. 바보 누이를 이렇게나 아끼고 있었다니.”
“가엾이 여기는 것일 뿐이야. 누이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저 평안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지.”
왕십칠이 그 말에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걱정 마. 내가 잘해 줄 테니까. 네가 주 낭자를 만나게 해 준다면 말이야.”
시끌벅적하던 덕승루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덕승루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규방에서는 주 낭자가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주 낭자는 원래 화장을 짙게 하는 편이 아니었다. 진주 비녀를 풀고 볼의 연지를 가볍게 닦아 내자, 물기를 머금은 연꽃처럼 청초한 소녀의 미모가 거울 속에 나타났다.
문이 열리더니 몸종이 크고 작은 상자들과 두루마리를 가득 안고 들어왔다.
“아씨께 드리는 선물이 또 이렇게나 많이 들어왔어?”
춘령이 서둘러 몸종을 도와 들어주면서 말했다.
“그러게, 이 사람들 정말 귀찮아 죽겠어.”
몸종이 어깨를 주무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주 낭자의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침상 하나, 탁자 하나, 화장대 하나만 해도 방 안이 꽉 찰 정도였다.
몸종 둘은 크고 작은 상자들을 창가 쪽에 가득 쌓여 있던 선물더미 사이로 밀어 넣었다. 금은보화나 명인의 그림이든, 비싼 악기나 바둑이든 구분할 것 없이 아무렇게나 쌓아둔 모습을 보면 선물의 주인은 이런 선물들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몸종 둘이 선물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잡담을 나누었다.
“춘령, 이 사람이 보낸 옥패가 너무 예뻐.”
“당연히 그래야지. 주 언니한텐 세상 최고의 옥패가 어울리잖아.”
“춘령 언니는 항상 말을 예쁘게 해서 아씨의 환심을 사.”
“아씨의 환심을 굳이 살 필요 있어? 아씨는 모든 사람의 환심을 얻으셔도 부족하지.”
몸종들의 잡담을 들으며 주 낭자도 설핏 웃음을 지었다.
“춘령, 내일 다회(茶會)에 가져갈 것들은 다 챙겼어?”
주 낭자의 물음에 춘령이 몸을 돌려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챙겨 두었어요.”
춘령은 덕승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주 낭자가 다니는 다회와 연회를 따라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교방사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똑똑하고 영민하여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주 낭자를 살뜰히 챙긴 덕분에 주 낭자의 시중을 들어주는 몸종 중 가장 늦게 들어왔으면서도 가장 아끼는 시종이 되었다.
주 낭자가 거울을 보며 눈썹을 지웠다.
“춘령, 이것 좀 봐. 누가 달랑 종이 한 장만 보냈어.”
몸종이 속삭이며 웃자 춘령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돈 쓰는 데 인색한 서생이 쓴 거겠지.”
춘령은 글씨를 모르다 보니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지만 몸종은 교방사 교육을 받은지라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몸종은 종이를 펼치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글솜씨가 제법이네. 음? 춘령, 네 고향 사람인가 봐.”
사자 머리가 조각된 짐승상을 들여다보고 있던 춘령이 몸종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고향 사람?
“……강주, 정…….”
몸종이 천천히 읊고 있는데 방 안에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춘령이 손에 들고 있던 짐승상을 바닥에 떨군 것이다. 몸종은 화들짝 놀랐고 주 낭자도 춘령을 쳐다봤다.
눈빛을 반짝이던 춘령은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강주야? 강주 맞아? 나 글씨 모른다고 속이지 말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어찌 잊을까. 주 낭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니까. 내가 널 속여서 뭐해.”
몸종이 종이를 건네며 글씨가 쓰인 곳을 가리켰다.
“여기에 강주, 정문유(程文兪)라고 쓰여 있어.”
춘령은 눈을 크게 뜨고 몸종이 가리키는 글씨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몸종이 가리킨 글씨를 천천히 만졌다.
강주, 정…….
강주, 정…….
정!
“정 낭자! 이렇게 일찍 외출하려고요?”
진십삼이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시녀도 진 공자를 보며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자님께서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셨잖아요.”
진십삼이 시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너무 기뻐서 그런지 평소다울 수 없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구나.”
시녀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마당 쪽으로 걸어 나오며 진 공자를 쳐다봤다.
“여긴 어쩐 일로?”
“아, 어떻게 된 거냐면.”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내 다리로 즐겁게 자축하러 다녀도 되나, 아직은 조심조심 요양해야 하나 몰라서요. 어쩐지 불안해서 낭자한테 물어봐야 안심이 될 거 같아요.”
“평상심을 유지하면 돼요.”
정교랑의 말에 진 공자가 웃음을 지었다.
“알겠어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오르는 정교랑을 보며 진 공자가 물었다.
“낭자는 어디 가는 길이에요?”
정교랑이 말없이 진 공자를 쳐다봤다.
“공자님, 또 다른 용무가 있으세요?”
시녀가 물었다.
“아니, 이젠 없어.”
진 공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예를 표했다.
“낭자를 귀찮게 했네요.”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저택의 대문이 닫혔다.
진십삼도 잠시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유유히 떠났다.
진십삼이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선 사실을 알게 된 진 부인은 아들을 놀리려고 일부러 대문 앞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진십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얘가 어딜 간 거라니?”
진 부인의 질문에 여종들이 재빨리 수소문했다.
“주씨 저택에 갔다고 합니다.”
그 시각, 진십삼은 주씨 집안의 대문 앞에 막혀 못 들어가고 있었다.
“집에 없다고?”
진 공자에게 말을 전하러 온 주씨 집안의 사환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예. 육공자께선 출, 출타하셨습니다.”
진 공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사환을 지나 대문 안으로 발을 옮겼다.
“공자님.”
사환이 당황해하면서 외쳤다.
“너도 네 윗전한테 거짓말을 배웠느냐?”
진 공자는 사환을 무시한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문 앞에서부터 주육낭의 거처까지 가는 길은 진 공자에게 익숙하면서 낯설었다. 몇 년 동안 숱하게 지나다닌 길이기에 익숙했고, 그 길을 자신의 두 발로 걷는 건 처음이기에 낯설었다.
주육낭은 마당이 아니라 연무장에 있었다.
웃통을 벗은 주육낭의 상체는 땀으로 흥건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창술은 신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주육낭을 상대하고 있는 군졸 두 명은 주육낭의 창을 간신히 받아냈다.
주육낭이 군졸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졸들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서북에서 온 병사라 말하기도 민망하지 않나?”
주육낭이 창을 멈추지 않고 외쳤다.
“탈영병이겠지!”
주육낭의 비아냥에 군졸들은 당황하여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군졸들은 각자 좌우로 흩어지더니 손에 쥐고 있던 창의 방향을 휙 틀어 맹렬한 기세로 주육낭의 다리를 향해 돌진했다.
탕 소리와 함께 창 두 자루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군졸 둘은 얼얼한 손을 쥐며 힘에 부쳐 몇 걸음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감정을 못 다스리니, 그냥 푹 쉬라고 경성으로 보냈겠지.”
주육낭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군졸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창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진십삼을 향해 걸어왔다.
“한 번 겨뤄 볼래?”
주육낭이 진십삼을 보며 묻자 진십삼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불공평하지. 내가 십 년이나 늦게 시작하는 셈인데, 자네를 어떻게 따라잡으라고.”
주육낭은 시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진십삼을 보며 웃었다.
“왜 웃는 건데?”
진십삼이 물었다.
“자네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역시…….”
주육낭은 말끝을 흐리고 시녀가 건넨 겉옷을 걸쳤다. 진십삼이 주육낭의 마지막 말을 이어받았다.
“역시,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거지? 전엔 정말 내 일이었으니 농담도 못 했지만 이젠 다리가 멀쩡해졌으니 능청 떠는 말도 서슴없이 하는 거잖아.”
주육낭이 미소지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나? 그리고 내가 말을 하든 안 하든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자네들이 나보다 훨씬 잘 아는데.”
진십삼이 주육낭을 향해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지팡이가 없으니 자네를 때리는 게 힘들어졌네.”
그러고는 주육낭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이며 말을 덧붙였다.
“어때, 이 말은 좀 더 마음이 쓰리지?”
주육낭은 진십삼을 흘겨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십삼이 웃는 얼굴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사람이야. 사람에게는 오욕칠정이 있는 법이지. 차이가 있다면, 그 감정을 숨기고 절제할 수 있는지 여부야. 나는 숨기고 절제하는 편이고, 자네는 굳이 숨기지 않는 사람인 거지. 이건 그냥 차이일 뿐이지, 옳고 그름이나 뭐가 더 낫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천성일 수도 있고,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나 같은 경우엔 어쩔 수 없이 터득하게 된 거지.”
진십삼이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사환의 부축 없이 걸으려 했지만 아직 안정감 있게 걸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그래야만 했던 건 아닐세. 그렇게 살면 꽤 좋거든. 적어도 주위 사람들을 걱정시키지 않고 기쁘게 해 줄 수는 있잖아. 그럼 내 존재가 덜 가여워지고, 나 스스로도 웃으면서 지낼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고 해도, 난 나를 포함한 내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며 살았을 거야. 그렇게 사는 게 틀린 건 아니잖아? 지금도 나는 예전의 나를 기특하고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네.”
주육낭은 고개를 숙여 말없이 허리끈을 천천히 조였다. 진십삼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운명이란 게 어디 예측이 가능한 건가. 아니,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운이 따른다고 볼 수도 있겠지.”
진십삼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주육낭을 쳐다봤다.
“자네 같은 친구를 두고, 정 낭자라는 사람도 알게 되니 전혀 다른 삶을 얻게 됐어. 보통 사람과 같은 삶을 말이야.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기쁠 수밖에. 아니, 기쁘다 못해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야. 어쩌면 한평생 동안 못 해 봤을 말들을, 잘난 체하고 뻐기며 괜히 푸념하듯 하는 말들을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어. 육낭, 난 지난날의 내가 치욕스럽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난 정말 기쁘고 즐거워. 거칠고 저속하게 추태를 부리고 싶을 만큼 기쁘다고.”
주육낭은 잠자코 들으며 한쪽에 앉았다. 진십삼이 주육낭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생각에 내가 변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자네가 변한 거야. 바로 자네의 심경이 변했다고.”
주육낭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진십삼은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뭐, 자네가 그러는 것도 정상이지. 꼭 예전의 나처럼 말이야. 내가 자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정상인 행세를 했지만, 그래 봤자 나는……. 이젠 난 정상인이 됐는데, 자네는…….”
진십삼이 주육낭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자네는 날 정상인으로 본 적이 없으니, 지금의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그러고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어때? 항상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갑자기 내가 자네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
주육낭이 풉 웃음을 터트리고는 옆에 있던 창을 진십삼에게 던지며 외쳤다.
“잘난 척은.”
진십삼이 소매를 털며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어. 나같이 풍류를 즐기는 사람 옆을 졸졸 따라다니게 되면, 자네가 그저 병풍이 될까 봐 그러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오늘부로 나와 연을 끊겠다고 해도, 다 이해하겠네.”
“네놈의 주둥이는 내 앞에서나 나불거리지. 분통 터져 죽을 때는 언제고!”
주육낭이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어허, 욕을 하더라도 약점은 들추지 말게나.”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이 바로 대꾸했다.
“그럼 욕할 때도 체면은 지켜 줘야지. 잘난 척은 거기까지 하고, 이제 걸을 수 있게 된 거 알겠으니까 앉아서 좀 쉬어. 괜히 누구처럼 과하게 기뻐하다가 한 방에 가지 말고.”
진십삼이 웃으면서 주육낭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자네 집에는 뭐 볼 것도 없는데, 나가서 좀 걸으세.”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진십삼을 흘겨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해.”
“자네 사촌 누이나 보러 갈까?”
진십삼이 웃으며 물었다.
“감사의 말을 전할 생각이면 혼자 가.”
“그건 벌써 갔다 왔지. 자네 사과하는 거 같이 가 주겠다고.”
주육낭이 진공자를 노려봤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사과할 게 뭐 있어?”
진십삼이 그를 보며 웃음 지었다.
“역시 내 말이 맞았네. 자네가 변한 게 맞아.”
주육낭이 침을 뱉으며 몸을 일으키자 진십삼도 따라 일어났다.
“그래도 자네가 좋아지니, 나는 좋아.”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술이라도 마실 수 있으니까 말이야. 자네 지금 술 마실 수 있나? 못 마시면 차라도 마시러 가고.”
“술을 마실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마침 자네 누이한테 물어볼 겸…… 갈까?”
진십삼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누가 떠난다고?”
주육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역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군. 자네 다리가 좋아지더니 머리가 예전만 하지 못해졌어. 당연히 내가 떠나는 거지.”
진십삼은 그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고작 이 일 때문에? 주육, 자네 정말 변했어.”
“변하기는. 원래 떠나기로 돼 있었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아버지께서 음보로 관직 한자리를 마련해 주셨어. 친족이었던 이십칠 형님이 서북에서 병사하셨거든. 그 자리를 메꿔야 해서 내가 가는 거야.”
주씨 가문은 무장 가문이다. 가업이 여태 이어질 수 있는 건 주 노야가 경성에서 관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씨 가문 자제들이 서북에 있는 군영에서 전공을 세우고 있는 덕분이다.
주육낭이 떠나는 건 주씨 가문에서 내정되어 있던 일이기도 하고, 주육낭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진십삼은 주육낭을 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가서 한번 물어볼게. 술을 마셔도 된다고 하면, 우리끼리 한 번쯤은 거하게 취해 봐야지. 뭐, 굳이 술이 아니어도 돼. 차를 마시고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어.”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시각 덕승루에서는 두 젊은이가 먼지 나게 구르며 기다시피 쫓겨났다.
“썩 꺼지거라.”
그들을 끌고 나온 네다섯 명의 건장한 사내가 젊은이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손가락질했다.
“돈도 없는 주제에 감히 덕승루 음식을 공으로 먹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금세 구경꾼들이 거리에 몰려들자 정사낭은 창피함을 숨기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가 공으로 먹었다고 그러시오? 잠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뿐이지.”
왕십칠은 분한 듯이 대꾸한 것도 모자라 한마디를 더 덧붙이려 했으나, 정사낭이 손을 뻗어 간신히 제지했다.
“창피하니까 그만해. 어서 가자!”
왕십칠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손을 뿌리쳤지만, 결국 정사낭의 손에 이끌려 덕승루 앞을 벗어났다.
“퉤, 남쪽에서 온 촌뜨기들까지 서생들처럼 공으로 먹으려 드네!”
덕승루 대문 뒤에 숨어 있던 몸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애티가 나는 몸종의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게 복잡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몸종은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두 젊은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품에 있던 보따리를 꼭 안아 보고는 고개를 숙인 채 잽싸게 그들의 뒤를 밟았다.
“넌 어서 집에나 가. 창피한 짓거리 좀 그만하고.”
“창피한 게 누군데? 집에서 어떻게 자랐기에 고모님이 그런 푼돈을 쥐여 보낸 거야? 첩의 자식만도 못하네.”
“왕십칠, 지금 누굴 욕하는 거야?”
“공자님, 공자님.”
티격태격 말씨름을 하며 걷고 있던 두 젊은이의 뒤에서 익숙한 고향 말씨가 들려왔다. 정사낭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몸종이 두려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꼬마 낭자, 날 부른 것이냐?”
정사낭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공자께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강주 분이신지요?”
몸종은 흥분과 불안이 섞인 표정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물었다. 기대에 가득 찬 몸종의 커다란 눈이 반짝거렸다.
고향 말씨를 쓰는 꼬마 낭자의 기대에 가득 찬 모습을 본 정사낭은 곧바로 사정을 눈치채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너도?”
정사낭도 고향 말씨로 꼬마 낭자의 말에 대답했다.
“네.”
몸종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디서 본 계집 같은데.”
왕십칠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몸종을 위아래로 훑었다.
“설마 주 낭자 옆에서 칠현금을 들어주던 몸종?”
춘령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안한 기색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 소인은 여기로 팔려 왔어요. 공자님의 말씀을 듣고 잠시 실례했습니다.”
춘령은 자신의 처지가 창피한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이렇게 먼 곳까지 팔려오다니. 게다가 그런 곳으로. 정말 딱하네.
“우리가 도와줄…….”
흥분한 왕십칠이 정사낭을 밀쳐내면서 정사낭의 말을 끊었다.
“네가 정말 주 낭자의 몸종이라고? 거참 잘됐구나. 주 낭자를 잠깐 보게 도와준다면, 내가 당장 너를 사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말발굽 소리가 다그닥 울리며 마차가 멈춰 섰다. 급작스러운 정차에 반근의 몸이 흔들렸다.
“앞에 또 무슨 일 났어요?”
반근이 마차 휘장을 올리며 물었다.
“덕승루에서 공짜 밥을 먹은 놈들이 쫓겨났다네요.”
마부가 흥분한 얼굴로 대답하면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서생 같아 보이는데요? 하여간 서생들은 돈도 없으면서 꼭 저런 꼴을 자처한다니까요.”
별일 아니라는 마부의 말에 시녀가 그를 재촉했다.
“할 일이 있으니, 그만 보고 가요.”
시녀의 말에 마부가 재빨리 자세를 고쳐앉고는 사람들 사이로 마차를 몰았다. 마차의 휘장을 내리자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차단됐다.
물론 마차가 두 서생 앞을 지날 때, 마부는 잊지 않고 고개를 돌려 웃으며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생긴 건 나쁘지 않은데…….”
마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두 젊은이를 향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도 덕승루의 아가씨들한테는 얼굴이 다가 아니지.”
마부의 말을 들었는지 젊은이 하나가 마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부가 일개 서생을 두려워할 리가.
“시골 촌뜨기들!”
마부는 콧방귀를 뀌며 큰 소리로 외치고는 말을 향해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그는 일부러 마차를 두 청년 바로 옆으로 몰면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경성 사람들은 참으로 무례하구나!”
왕십칠이 마차를 향해 침을 뱉고는 고개를 돌려 몸종을 쳐다봤다.
“내가 널 사서 강주로 데려간다니까, 어때?”
왕십칠의 말은 이미 떠나간 마차의 안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의 소리에 묻혔다.
“이 마부는 이제 못 쓰겠어요.”
시녀가 조용히 정교랑에게 말했다.
“아씨, 우리도 이제 마차를 사야 되지 않을까요? 금가아도 다 컸으니까, 그냥 놀게 놔두지 말고 뭘 좀 가르쳐야겠어요. 말 길들이기 고수인 넷째 도련님에게 한 번 부탁해 볼까요? 금가아한테 말 다루는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요.”
“넷째 도련님께서 말을 훈련시킬 줄 안다고?”
반근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시녀에게 묻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응, 처음엔 나도 잘 몰랐는데 태평거에 유독 마차와 말이 많았던 날이 있었어. 말 몇 마리가 서로 뒤엉켜 물어뜯고 싸우는 통에 마부랑 사환들이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었거든. 그때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넷째 도련님이 달려와 두어 바퀴 돌며 말들을 향해 몇 번 소리치셨더니 말들이 다 순한 양처럼 얌전해지더라니까.”
반근이 시녀의 이야기를 듣고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야?”
“진짜라니까?”
시녀가 정교랑을 살짝 흔들며 재촉했다.
“아씨, 아씨께서도 보셨죠?”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뒤로 넷째 도련님이 말을 끄는 걸 유심히 지켜봤어. 넷째 도련님께서 말을 데려올 때는 단 한 번도 말고삐를 쥔 적이 없더라고. 말들이 제 발로 넷째 도련님을 따라온 거야. 전에 노야께서 해 주신 말씀을 들었었는데, 서북의 기병 부대에는 유능한 목감(牧監)이 있어서 말들을 제대로 길들일 수 있대. 평범한 말도 그들 손에 들어가면 하서 지역의 명마로 변하지.”
반근이 시녀의 말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넷째 도련님이 엄청 대단하신 거구나.”
“모든 일엔 경지가 있는 법이야. 뭐든 얕잡아 보면 안 돼.”
시녀가 반근을 향해 말했다. 시녀와 반근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마차는 저잣거리를 지나 신선거 앞에 멈춰 섰다.
“누이, 순찰 나온 거야?”
마중을 나온 서봉추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정교랑이 서봉추를 향해 진지하게 예를 올렸다.
“누이는 꼭 이걸로 날 놀려먹더라.”
서봉추가 꽁무니를 쓱 빼며 도망갔다. 서봉추가 가장 겁내는 게 이런 예법이었다.
“약포에 갔었어?”
서무수가 미소지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의원 두 분을 모셨어요.”
이춘당에 진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넘쳐났지만, 정교랑이 진료를 보는 일은 없었다. 단지 약포의 관리인에게 정성을 다해 약포를 관리하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좋은 약재를 써야 하고, 좋은 의원을 둬야 한다고. 물론 처우도 당연히 좋은 편이었다.
“죽을 정도의 병이 흔하지는 않죠. 이 기세가 그리 오래 갈 것도 아니고요. 치술(治術)과 의술(醫術)을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의술이 더 중하죠. 큰 걸 중심으로 하고 작은 건 보조로 둬야 해요.”
“누이는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잘 아네.”
서무수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실은, 돈이 모자라지 않아서죠.”
서무수가 잠시 멈칫하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웃고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복도는 조용했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복도 끝자락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연꽃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라 복도 전체에 은은한 향이 스며들었다.
신선거는 과로신선만 팔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뜸했다. 하지만 신선거 요리에 쓰이는 식재료는 특등급이었다. 고기는 모두 당일 도살한 것만 쓰고, 채소도 당일 사 온 것만 사용했다.
신선거에서는 하루 안에 다 쓰지 못한 채소와 고기를 과감하게 버렸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밤에 거리로 나와 신선거 앞에서 버려지는 채소와 고기를 주워가려고 기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신선거의 영업시간이 길어지면서 버려지는 채소와 고기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정갈한 요리와 금은으로 정교하게 만든 식기, 그리고 기품 있게 꾸며진 별실이 있으니, 신선거의 손님들이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비싼 게 무슨 대수냐며, 도리어 값이 싼 것을 싫어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었다.
신선이 달리 신선인가. 모두가 누릴 수 있으면 신선이 아니지.
“지출이 너무 컸습니다. 일 년은 지나야 흑자가 나겠어요.”
오 관리인이 장부를 가져오며 말했다.
“흑자든 아니든 뭔 상관이에요. 그냥 두고 노는 거죠, 뭐.”
정교랑의 말에 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고로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만 돈을 벌 수 있다. 금덩어리는 줘야 백은으로 바꿀 수 있지, 돈에 있어서는 어떤 꼼수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관리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주인어른이 돈 한 푼 들이지 않으면서 큰돈을 벌고 싶어 하는 것과 끽해야 한 푼을 쓰고는 곧바로 두 푼을 내놓으라 하는 것이다.
정교랑처럼 돈이 있지만 돈을 욕심내지 않는 사람만이 옥돌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질 기회가 있고, 가늘고 길게 갈 수 있다.
이런 주인어른을 만나는 일은 장인에게 최상급 옥돌과 손에 딱 맞는 도구를 쥐여주고 충분한 시간을 준 것과 같다. 온 정성을 들여 옥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대대손손 전해질 명품을 만들 기회가 온 것과 다름없었다.
정교랑이 창밖을 내다보자 뒷마당에 세워진 과녁이 보였다.
“누이가 활쏘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우리도 심심풀이용으로 쓰려고 하나 만들었어.”
서무수가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보고는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누이는 너무 허약해. 열심히 수련해 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번엔 오라버니의 활을 쓸래요.”
뒷마당에서 시녀가 정교랑의 소매를 동여매는 동안 정교랑이 말했다.
“아이고, 누이의 그 가녀린 팔뚝과 몸으로 우리가 쓰는 활을 어떻게 들어.”
서봉추가 옆에서 하하 웃었다.
“봉추 오라버니는 처음부터 삼석궁(三石弓: 활시위를 당기는 데 450근의 힘을 써야 하는 활)을 썼어요?”
서봉추가 멋쩍게 웃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서무수가 자신의 활을 가져와 정교랑에게 건넸다.
“삼석궁은 생각도 하지 마. 나도 이제야 겨우 활시위를 당기는 정도야. 누이는 지금 팔두궁(八斗弓)만 당길 수 있어도 대단한 거야.”
정교랑은 몸을 올곧게 펴고 활시위를 당기려고 했지만 역시나 지금 수준에서는 무리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서봉추가 고소하다는 듯 낄낄 웃어댔다.
정교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서 심호흡을 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힘에 부쳐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활을 내려놓았다.
“이게 다 셋째 형님 때문이오. 자기가 쓸 것만 가져다 놓고 애들이 쓸 만한 건 준비를 안 했으니.”
서봉추가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서무수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서봉추를 노려본 다음 정교랑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쪽에 힘을 주고.”
서무수가 직접 손을 뻗어 활을 꽉 잡고 다시 말했다.
“자, 이제 활시위를 당겨봐.”
정교랑이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기자, 팽팽하던 명주실에 드디어 곡선이 그려졌다. 정교랑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곧바로 힘이 빠져서 활을 놓칠 뻔했다. 서무수가 재빨리 정교랑의 손을 잡고 화살을 끼워 더욱 세게 활시위를 당겼다.
텅 소리와 함께 깃털 달린 화살이 날아가 과녁을 맞혔다.
“역시 아직은 안 되네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서무수에게 말했다.
햇살 아래 비친 소녀의 맑은 얼굴은 솜털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서무수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놓고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당황하여 어찌나 서둘렀는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실례했네, 실례.”
서무수가 다급하게 말하자 정교랑이 싱긋 웃었다.
“내가 실례한 거죠.”
정교랑의 가벼운 말에 서무수도 그제야 미소지었다.
“천천히 하면 돼. 누이가 벌써 오두(五斗,) 육두(六斗)짜리 활을 들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과 시녀는 신선거에서 식사를 마친 뒤, 오 관리인과 서무수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손님들도 떠날 시간이라 다들 밖으로 나가는데 누군가가 신선거 안으로 허겁지겁 걸어 들어왔다.
급히 들어온 젊은 여인은 몸종 하나와 고개를 푹 숙인 채 졸래졸래 따라오는 사환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서무수와 오 관리인이 재빨리 옆으로 길을 비켜 줬지만, 그들 앞까지 오기도 전에 어느 별실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젊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시치미를 왜 떼요? 무슨 돈이 있다고 당신이 여기 와서 밥을 먹어요?”
여인은 사내를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뜨고 바락거리며 화를 냈다.
“나, 나도 이렇게 비싼 곳일 줄은 몰랐지.”
사내가 풀이 죽은 듯 조용히 말했다.
“남한테 부탁하는 자리이니 체면 좀 차리려던 건데…….”
“당신 체면만 체면이에요? 이제 나는 무슨 낯짝으로 아버지를 뵙겠어요. 당신 돈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겁도 없이 써요?”
부아가 치민 여인이 언성을 높이자 사내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사내는 한쪽에 서 있는 서무수와 오 관리인을 흘깃 쳐다보고는 더욱 곤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소리치지 말고,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사내가 조용히 여인을 타이르듯 말하자 여인도 그제야 서무수 쪽을 쓱 보고는 별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무수와 오 관리인이 다시 대문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별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서 오라버니?”
긴가민가하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서무수는 일순간 몸이 얼어버린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무수 오라버니 맞죠?”
여인이 별실 밖으로 한 걸음 나오며 재차 물었다. 사내가 여인의 뒤를 따라 나오면서 언짢은 표정으로 여인을 제지했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마시오. 잘못 본 거겠지.”
사내가 서무수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랬구나.
정교랑이 서무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은 서무수가 좀 전에 고개를 살짝 돌리며 무심코 입을 틀어막으려는 듯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댄 것을 눈치챘다.
서무수는 몸을 돌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젊은 부부를 바라보았다.
“향(向) 아우, 너희였구나.”
-과거-
“서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였네요!”
사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인 쪽에서 흥분한 표정으로 거의 뛰다시피 서무수 쪽으로 다가왔다.
“언제 경성에 왔어요? 왜 날 찾지 않고?”
여인이 연달아 묻는 통에 오 관리인은 헛기침을 하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시녀도 웃는 얼굴로 서무수와 여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제 막 왔어, 이제 막.”
서무수가 대답하면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별실 앞에 서 있는 사내를 흘깃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만나네. 안 그래도 두 사람을 찾으려고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정말 서 형님이 맞았군요.”
사내도 놀란 듯 이제야 웃음을 보이며 잰걸음으로 다가와 서무수의 팔을 잡았다.
“형님이 경성엔 어쩐 일입니까? 집으로 찾아오지 그랬어요.”
사내가 가볍게 탓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게요, 그러게요.”
여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전히 반짝이는 눈빛으로 서무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인의 얼굴이 점점 더 상기되더니 갑자기 멈칫했다.
“서 오라버니, 예전보다 많이 야윈 것 같아요. 서북 생활이 너무 고되어서 그런 거죠? 그럼 가지 말고, 경성에서 지내요.”
시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려고 하자 반근이 시녀를 손으로 쿡 찔렀다. 서무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색해했다.
“뭐, 그렇지.”
서무수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너희, 너희는 여기 밥 먹으러 왔어?”
서무수의 말을 들은 사내가 웃었다.
“그럼 여길 밥 먹으러 오지, 뭐하러 오겠어요?”
사내의 표정이 금방 머쓱하게 변했다.
“아, 꼭 그렇지만은 않겠군요.”
사내는 서무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무수는 조금 전 정교랑과 활을 쏘느라 평범한 천으로 만든 옷으로 갈아입고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 신선거에서는 손님을 응대하는 이도 값비싼 옷을 입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서무수의 모습은 뒷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으로 보였다.
“여기서 일을 구한 겁니까?”
사내의 물음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형님 혼자예요? 강림 형님이랑 다른 형제들은요?”
사내가 다시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다들 경성에 있긴 한데 여기에는 없어.”
서무수가 대답했다.
“그런 건 나중에 물어봐요.”
여인은 사내가 시답잖은 말이나 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내를 휙 밀쳐내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서무수를 빤히 바라봤다.
“할 말 있으면 우리 집에 가서 해요. 아버지도 오라버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같이 집으로 가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서무수는 더욱 난감해했다.
“그래, 좋지. 바쁜 게 좀 정리되면 꼭 갈게.”
옆으로 밀쳐진 사내가 서무수를 보며 비아냥 섞인 말투로 말했다.
“형님이 바쁠 게 뭐 있습니까? 이런 잡일은 하나 마나지요. 일단 집으로 가는 게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버님께 부탁해서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오 관리인이 그 말을 듣다 못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젊은 부부는 그제야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들 눈에 오 관리인은 경성에서 흔히 보이는 돈 많은 노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선 정교랑을 본 부부는 흠칫 놀랐다.
열 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소녀가 바닥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없었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소녀였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조용히 제자리에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본 부부는 이 소녀가 명문가 출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화려하고 진귀한 옷감 때문일 수도 있고, 일부러 꾸미려 하지 않아도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고귀함 때문일 수도 있었다.
신선거에 식사하러 온 손님이겠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서무수를 쳐다보던 부부는 더욱 확신이 들었다.
손님도 못 하는 점원 처지인가 보네. 그럼 저 건장한 몸은 귀한 손님들이 마차에 오를 때 계단으로나 쓰이겠군.
“어서 가서 손님 모셔다드리고 와요. 우린 여기 있을게요.”
미안한 척하는 사내의 말투에는 어쩐지 우쭐함이 묻어났다.
서무수는 드디어 살았다는 마음으로 얼른 알겠다 답하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여인이 또다시 서무수를 불러세웠다.
“서 오라버니, 오라버니 같은 사내대장부가 어찌…….”
여인이 속상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오 관리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는 이런 잡일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는 오 관리인에게 돈주머니를 쥐여주며 말을 이었다.
“어르신,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오 관리인이 여인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서무수는 오 관리인의 말을 듣고는 더욱 난색을 내비쳤다.
“동 낭자, 이럴 필요 없어요.”
서무수는 오 관리인을 밖으로 떠밀면서 조용히 읊조렸다.
“괜히 장단 맞춰 주지 마시오.”
오 관리인은 웃음을 참으면서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교랑도 시녀를 데리고 오 관리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대문 문턱을 넘고서야 서무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 관리인은 그런 서무수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굳히고 명령조로 말했다.
“이 녀석아, 돈을 몇 푼 더 줄 테니, 어서 아씨를 마차에 태워 드려라.”
오 관리인의 장난에 서무수는 관리인을 노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뒤에 서 있던 시녀도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옛날 고향 집에서 알고 지내던 형제야.”
서무수가 정교랑과 오 관리인을 보며 설명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알고 지내던 낭자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마차에 올라탄 시녀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순간 서무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서무수가 곁눈질로 오 관리인을 쳐다봤더니 오 관리인도 웃고 있었다.
“제 생각에도 알고 지내던 낭자 같습니다만…….”
서무수의 시선을 느낀 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만 일하러 가시오. 이번 달 봉급은 필요 없다는 소리요?”
서무수가 얼굴을 굳히고 말하자 오 관리인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주인어른, 제 봉급은 월 단위로 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 관리인이 서무수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옆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옛사람을 보니 마음이 심란해져서 잊으셨나 봅니다.”
오 관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문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옛날에 알고 지내던 낭자…… 아니, 형제가 왔네요.”
다시 고개를 돌린 오 관리인은 웃으며 서무수를 향해 조용히 말하고는, 서무수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몇 걸음 비켜서며 자리를 떴다.
이보시게, 하며 관리인을 붙잡으려 걸음을 떼던 서무수는 곧이어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 오라버니.”
서무수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인과 사내가 보였다.
“가요. 우리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에요.”
여인이 서무수를 보며 말했다.
“나,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말이야. 다음에 갈게.”
서무수의 대답에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사내가 말했다.
“무슨 일이길래요. 셋째 형님. 우리끼리 서먹하게 이러지 맙시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향칠!”
문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서봉추가 문 안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이 자식!”
서봉추는 사내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는 씩씩대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서무수가 얼른 서봉추 앞으로 다가가 서봉추의 허리를 꽉 둘러 붙잡았다.
“옛날 일 꺼내 봤자 골칫거리만 생겨.”
서무수가 조용히 서봉추에게 읊조렸다.
요사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골칫거리라는 네 글자는 서봉추의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서봉추는 격렬한 기침을 해대고는 사내에게 하려던 말들을 간신히 삼켰다.
“봉추 아우, 아우도 여기 있었네?”
여인이 기뻐하면서 서봉추를 향해 외쳤다. 격렬한 기침을 해대던 서봉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여인을 향해 손짓했다.
“너무 잘됐다. 강림 오라버니랑 다른 형제들도 다 경성에 있댔지? 불러와서 다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
여인이 뒤에 있던 사내를 흘겨보고는 나무랐다.
“멍하니 서서 뭐해요? 얼른 가서 마차를 불러오지 않고.”
“아니야. 우리가 지금 다들 바빠서, 다음에 시간 날 때 보러 갈게.”
서봉추가 쉰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말했다. 여인은 서무수 형제와 사내를 번갈아 보고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서 오라버니는 아직도 우리랑 서먹한 거죠?”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돌렸다.
“오라버니 형제를 보고는 너무 기뻐서 그만…… 실례했다면 부디,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동 낭자, 그런 게 아니야. 혹시 낭자한테 폐를 끼칠까 봐 그런 거지.”
서무수의 말에 여인은 다시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몸을 돌려 서무수 쪽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폐를 끼치긴요. 역시 서 오라버니가 날 서먹하게 대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서무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곁눈질로 뒤에 서 있는 사내를 흘깃 쳐다보았다. 사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조용히 서 있었다.
“미쳤어? 그 집에 가서 뭐 하려고?”
범강림이 눈을 크게 뜨면서 소리쳤다.
태평거에 점심 손님들이 빠지고 식구들끼리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방 안에는 서무수와 일곱 형제가 둥글게 모여 앉아서 술과 요리를 먹고 있었다. 서무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밥그릇을 들고 묵묵히 밥만 먹었다.
“미친 거 아닙니다.”
서봉추가 젓가락으로 채소를 집으며 한스러운 듯 덧붙였다.
“그리워했던 여인을 소중히 여기는 것뿐이죠.”
서무수가 밥그릇을 탁 내려놓으면서 서봉추를 노려봤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가르쳐 준 건 기억도 못 하면서.”
다른 형제들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 그만해.”
범강림이 손을 내젓자 형제들이 다시 웃음을 참으며 밥을 먹었다.
“동 노야와 동 낭자는 모두 좋은 사람이지. 문제는 향칠인데…….”
범강림의 말에 서봉추가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형님. 형님들은 그때 못 보셨죠? 향칠이 녀석, 눈빛으로 아주 셋째 형님을 잡아먹을 기세였다니까요.”
형제 중 하나가 젓가락을 높이 치켜들고는 웃으며 동조했다.
“동 낭자도 눈빛으로 셋째 형님을 잡아먹을 수 있을 텐데.”
방 안은 다시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그만들 해.”
서무수가 호통치자 형제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
“나도 다 알아.”
서무수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천천히 말했다.
“알면서 간다고 했어?”
범강림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무수를 나무랐다.
“셋째, 넌 사람이 참 좋아. 우리 중에서도 사리 분별도 제일 잘하고, 배운 것도 많고. 근데 그게 너무 과해도 별로야. 너무 체면을 차린단 말이지.”
“당초에 동 노야께서 우리를 잘 대해 주셨잖소.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모르신다면 굳이 찾아가지 않겠지만, 이제 알게 된 이상 한 번은 꼭 찾아뵈어야죠. 그게 도리지 않습니까.”
범강림이 서무수의 말을 듣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이 없었으면 자네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벌써 찾아뵈었을 거야. 근데 이제 와서 가 봐. 향칠 그놈은 그릇도 작은데, 괜히 부부지간이 서먹해지면 우리만 동 노야께 면목이 없어지잖아.”
서무수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한 번은 찾아뵙고, 동 노야께 사실대로 잘 설명드려야지요. 노야께서는 우리를 이해해 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숨을 수도 없고. 경성이 크다면 크고 좁다면 좁은 곳인데, 어디로 숨겠어요? 괜히 숨었다가 오해만 늘어나면 더 큰일입니다. 차라리 직접 가서 까놓고 이야기하는 게 낫지.”
나머지 형제들도 서무수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잘 풀린다면 별일 아니게 되니까.”
서무수가 이어 말하며 다시 밥그릇을 들었다.
“어서 밥이나 먹읍시다.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마음에 담아 둘 것 없어요.”
서무수의 말에 형제들도 맞장구치며 말했다.
“맞는 말이야. 무슨 큰일이라고. 우리가 먼저 동 노야를 알고 지냈잖아. 향칠보다도 훨씬 더 일찍부터. 우리가 뭣 하러 그놈 눈치를 보느라 동 노야를 뵙지도 못해?”
방 안 분위기가 다시 활기차졌다.
“선물도 준비해 갑시다.”
“제일 좋은 거로요!”
“그래야지! 향칠이 우리를 쫓아내려고 눈치껏 쥐여준 돈보다 더 비싼 걸로 말이야.”
범강림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젓가락을 쥐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터놓고 말하면, 별일 아니겠지?
신선거를 떠난 마차 안에서 시녀는 계속 웃음을 참지 못했다.
“셋째 도련님같이 답답하신 분에게도 옛 정인이 있었다니.”
젊은 여인이 서무수를 대하는 모습은, 바보가 보더라도 예사로운 사이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정도였다.
“셋째 도련님은 그 정도로 답답하신 분이 아니야. 셋째 도련님은 아주, 아주…….”
반근은 일순간 서무수를 형용할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군자라고?”
시녀의 물음에 반근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그리 못 잊은 거겠지. 셋째 도련님 정도라면 그럴 만도 해.”
시녀의 말에 반근이 웃음기를 거두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그 낭자는 벌써 시집을 간 모양인데, 어쩜 그렇게 조심성 없이 행동했을까. 뒤에 서 있던 남편 얼굴이 아주 흙빛이었어.”
시녀도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셋째 도련님을 미워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게. 반근은 복잡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반근과 시녀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마차가 저택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정교랑을 부축했다.
“아씨 생각은 어떠세요?”
반근이 물었다.
“뭐가?”
“셋째 도련님이요.”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지.”
시녀와 반근은 쿡 하고 웃었다. 아씨와 대화할 땐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나 싶단 말이지.
“그 부부는…….”
시녀가 또 물어보려는데 정교랑이 말을 끊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 부부가, 또 뭐?”
반근도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시녀가 반근의 팔을 잡아끌며 말렸다.
“아무것도 아냐.”
시녀가 정교랑을 부축하며 물었다.
“아씨,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까요?”
갑자기 먹는 얘길 한다고? 반근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반근은 고민을 깊이 파고드는 성격이 아닌지라, 이해되지 않는 문제들은 금세 잊고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냉면 어때?”
정교랑이 대답했다. 세 사람이 막 대문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가 정교랑을 불렀다.
“정 낭자.”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다리 끝에서 진십삼이 저택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십삼은 여름용 비단으로 지은 도포를 입고 유유히 걸어왔다. 느긋한 걸음걸이 덕분에 다리가 불편한 것이 어느 정도 숨겨지며 한껏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에 준수한 용모까지 더해지자, 호리호리한 미소년이 따로 없었다. 거리의 뭇 여인들이 부채 사이로 진십삼을 몰래 훔쳐볼 정도였다.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또 낭자를 귀찮게 하러 왔습니다.”
진십삼도 예를 올리며 웃었다.
“그래요.”
문 앞에 멈춰 선 세 사람과 대문을 열고 있던 금가아까지, 다들 진십삼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안으로 들이려는 이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진십삼이 이런 식으로 옥대교 저택을 방문하는 것은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갔지만, 오늘따라 이런 식의 방문이 낯설게 느껴졌다.
진십삼이 혼자 웃음 짓고는 정교랑에게 물었다.
“내가 술을 마셔도 될까요?”
“아니요.”
“거참 아쉽네요.”
진십삼이 웃으며 대답했다.
“먹고 마시는 것에는 금기가 있어요. 그건 이미 모친께 다 말씀드렸으니, 어머니께 여쭤봐요.”
대답을 마친 정교랑은 곧바로 예를 표하고 걸음을 옮겼다. 진십삼이 재빨리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이어 물었다.
“그럼 내가 낭자께 술 한번 사는 건 어떻습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봤다.
“좋아요.”
이렇게 쉽게? 정교랑의 망설임 없는 흔쾌한 대답에 진십삼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왜 모든 게 다 변한 것 같죠? 다리가 나아 똑바로 설 수 있게 되다 보니, 내 시야도 달라진 걸까요?”
“병이 나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다 그래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더는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내일 낮에 연회로 대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 공자가 몸을 숙여 예를 올리자 정교랑도 다시 예를 표하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 점포들이 영업을 마치고 문을 닫을 때쯤, 덕승루의 등불은 환히 밝혀져 있었다. 감미로운 현악기 소리를 타고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대청 중앙으로 흘러들었다.
뜨락을 둘러싸고 쭉 이어진 외랑(外廊: 집채의 바깥쪽에 달린 복도)에는 족히 백 명은 넘어 보이는 여인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나비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여, 보는 이의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물론 이런 나비 떼에 익숙한 사람들은 헷갈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나비를 정확하게 찾아내곤 했다.
“저기 좀 봐, 저 두 사람 지금 어딜 가는 거야?”
한 사내가 고개를 쳐들고 손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외쳤다.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사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반대편 회랑 다리를 건너는 두 젊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주 낭자의 거처가 있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두 젊은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시끌벅적해졌다.
주 낭자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푸는 일에 몰두하느라 손님 접대를 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 반감을 갖거나 불만을 터뜨리기는커녕, 도리어 그녀를 존경하고 치켜세웠다.
이전의 주 낭자는 사실 재색을 겸비한 명기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억울한 누명을 벗은 데다 관료 집안의 여식이라는 높은 신분임이 밝혀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낭자 스스로 자신을 불결하다 여기며 기적에서 이름을 빼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더할 나위 없이 고결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주 낭자가 다시 접대를 받는 시기는 내년으로 미뤄졌다고 들었는데, 저 둘은 어떻게 주 낭자를 만나러 가는 거지? 누굴까? 누가 저렇게 운이 좋길래 주 낭자가 직접 불러들인 거야?
대청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계속해서 두 청년을 좇았다. 이때 두 젊은이 중 하나가 아래를 향해 손짓했다.
“헤헤. 이야,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덕승루가 더없이 아름답구나. 꼭 신선계에 오른 것 같네.”
그 젊은이는 웃으며 더욱 목청을 높였다.
“당신들 같은 일개 속물들은 오르지도 못할 곳이니, 이 몸이 먼저 신선이 되어 올라가 보겠소.”
정사낭은 가뜩이나 이런 자리가 거북하고 불편했다. 그러던 차에 왕십칠이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자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물 한 방울을 떨어트린 듯 아우성을 쳤다. 그 모습을 본 정사낭은 당장이라도 덕승루를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꾹꾹 눌렀다.
“뭐 하는 거야!”
정사낭이 왕십칠에게 소리치며 다리 안쪽으로 끌고 들어왔다.
“장난 좀 치는 건데 뭐.”
왕십칠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풉 웃었다.
“저것 좀 보라고. 아래에 있는 놈들은 질투로 배알이 꼴려 죽을 지경이야! 하하하. 이 몸이…….”
아직 성에 차지 않았는지 왕십칠이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리자 정사낭은 급히 팔을 꽉 쥐며 말을 막았다.
“그만해. 살아서 나가기 싫어서 이래?”
정사낭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몸종도 고개를 돌려서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공자님. 저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가는, 진짜 주먹질 싸움이 난다니까요? 사람이 죽어 나간다 한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저지른 것이니, 관아에서도 달리 도리가 없죠.”
왕십칠은 몸종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사낭 옆으로 바짝 붙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고맙다. 주 낭자를 만날 수 있다니까 내가 너무 기뻐서 그랬어.”
주 낭자가 본격적으로 독자 행보를 걷게 된 후로, 몸종은 이런 사람들을 익히 봐왔던 터라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대화를 나누며 회랑 다리를 건넌 이들은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언니, 왕 공자와 정 공자께서 오셨어요.”
몸종의 말에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안으로 모시거라.”
왕십칠은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벌써 몸이 녹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정사낭이 서둘러 팔을 붙잡아 주며 부축했다.
방문이 열리자 춘령이 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왕십칠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디디자, 정사낭도 어쩔 수 없이 뒤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화장기가 거의 없는 청초한 모습의 여인이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교방사의 관기가 평상시에 입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에 앞가슴이 훤히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속돼 보이지 않았다.
“소녀 주형(朱衡)이 공자님들을 뵙겠습니다.”
소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예를 올렸다.
“주 낭자의 이름이 형이었군요.”
왕십칠은 녹아내리듯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공자님이 보기엔 이 이름이 어떤가요?”
주 낭자가 고개를 들어 놀란 듯도 하고 기쁜 듯도 한 표정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눈빛에는 대답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가슴이 어찌나 쿵쾅대는지 머리까지 어질어질해진 왕십칠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왕십칠의 정신이 맑았더라도 이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찾긴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아첨의 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미인 앞에서 실례를 범할 수 없는 법. 왕십칠은 재빨리 옆에 있던 정사낭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어떤 것 같아?”
왕십칠의 얄팍한 수는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주 낭자는 정사낭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미소를 지었다.
“소녀, 농을 던져 봤을 뿐이에요. 비웃지 마셔요.”
정사낭은 귀까지 새빨개졌다.
“아닙니다, 어찌 감히요. 이름에 ‘저울대 형(衡)’자를 쓴 것은 그만큼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덕담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 시는…….”
“언니, 이쪽이 정 공자예요.”
춘령이 옆에서 말했다.
“정 공자께서 지으신 시군요.”
주 낭자는 웃으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들고는 정사낭을 향해 감탄과 공경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공자께서는 시를 정말 잘 쓰시네요.”
정사낭은 순간 온몸에 가시가 돋은 듯 좌불안석이었다. 정사낭은 칭찬 한번 들은 적 없는 사람도, 이런 칭찬에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는 가난한 집안 출신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절세미인이 자신의 시를 보며 공경의 눈빛을 보내자, 수백 마리 고양이가 정사낭의 마음을 마구 긁으며 간지럼을 태우는 느낌이었다.
“아닙니다, 당치 않습니다.”
정사낭은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주 낭자가 다시 시선을 왕십칠에게 옮기자 춘령이 서둘러 소개했다.
“이쪽은 왕 공자세요.”
여태 넋을 놓고 미인을 감상하고 있던 왕십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네, 맞습니다.”
주 낭자의 뒤에 앉아 있던 몸종 둘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주 낭자는 진지한 얼굴로 왕십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춘령한테 듣자니 절 보고 싶다고 하신 분이 공자님이고, 이 시도 공자님이 정 공자께 부탁해서 쓴 거라지요? 소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이 시에 공자님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정 공자의 이름을 남기셨어요?”
주 낭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았다.
“하하. 본래 내 것이 아닌 것을, 굳이 내 것인 척할 필요 있겠습니까? 이런 일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내가 차지하고 싶다고 해서 차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시를 빌미로 낭자를 볼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낭자의 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인 것을, 남인 척할 필요가 있나요.”
왕십칠이 말을 끝내고 호탕하게 웃었다.
“공자께서는 정말 사내대장부시군요!”
주 낭자가 왕십칠을 보며 감탄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눈빛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존경의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왕십칠은 무릉도원에 온 듯 황홀해져 몸이 붕 뜨고 사리 분별이 불가능해졌다.
두 몸종이 술상을 내오려고 밖으로 나갔다. 방문을 닫으며 몸종 하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저 촌뜨기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거야? 창피한 줄도 모르네. 인사치레로 하는 말에 저리 넋 놓고 헤실거리다니. 언니도 참, 뭐하러 저런 이들한테도 아첨을 하시는지.“
“언니는 저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선의로 그러시는 거야.”
다른 몸종이 고개를 돌려 방문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게 다 춘령을 위해서지. 고향 사람 때문에 춘령이 울었다 웃었다 하면서 언니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니, 언니도 춘령을 기쁘게 해 주고 싶으신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쓸데없이 저런 이들을 왜 만나 주시겠어.”
앞서 입을 열었던 몸종이 감탄했다.
“언니도 정말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시는구나. 춘령도 운이 참 좋네. 언니를 도왔고, 언니 또한 그걸 잊지 않고 보답하시니 말이야.”
“우리도 운이 좋지.”
두 몸종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들 뒤로 비파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즐거워지는 가볍고 경쾌한 곡조가 딩딩동동 울려 퍼졌다.
날이 막 밝아지기 시작할 때 즈음, 남쪽 성문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서서 대기 중이었다. 사람들뿐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로 울고 있는 가축들도 있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아침인데도 공기가 썩 상쾌하진 않았다.
“향칠!”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문의 감문관(監門官: 문을 지키는 관리)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성문 옆에서 몇 사람과 잡담을 나누던 젊은 사내가 감문관을 맞이하러 달려왔다.
“정 대인, 오셨습니까.”
사내가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말을 타고 있던 호리호리해 보이는 남자가 눈썹을 치켜들고 채찍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이쪽은 왜 아직도 청소를 안 한 게야?”
향칠은 뭐라 변명도 없이 즉시 예, 하고 답하고는 몸을 돌려 근처에 있던 다른 이를 불렀다.
“네가 직접 치우면 될 것 아니냐. 성문이 크지도 않은데, 굳이 저자들을 불러야 하겠어?”
정 문관이 향칠을 향해 호통을 치고는 곧바로 향칠이 손짓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세금을 걷으러 다닐 때는 그렇게 부지런히들 뛰어다니더니, 성문에 할 일이 쌓여 있는 건 어째 하나같이 못 본 척하는 게야? 아주 한가해 죽겠지?”
그들은 잠자코 꾸중을 들은 후 허둥지둥 성문 위로 올라갔다.
말을 타고 있던 남자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향칠을 노려봤다. 향칠은 벌써 빗자루를 손에 들고 청소 중이었다.
“이런 게으름뱅이들 같으니라고!”
남자가 큰 소리로 외치고는 채찍을 휙 휘둘러 자리를 떴다. 성문 위로 올라갔던 이들은 남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는 부랴부랴 다시 내려왔다.
“왜 또 저렇게 심기가 뒤틀린 거야?”
“또 기생집 아가씨한테 쫓겨났나 보지.”
그들이 흉을 보며 분풀이를 하는 동안에도 향칠은 한쪽에서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았다.
“향칠, 그만 쓸어. 어차피 이따가 또 똥이며 오줌이며 할 것 없이 사방에 널릴 텐데, 언제 그걸 다 치우고 있어.”
모여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향칠을 향해 외쳤지만, 향칠은 못 들은 척 묵묵히 비질을 했다.
“향칠도 참, 뭐하러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해.”
“그러게. 장인어른한테 부탁해서 다른 곳에 뒷돈을 좀 찔러주면, 어느 성문을 가도 가축 천지인 이 남문보다는 나을 텐데.”
“맞아. 그런 장인어른을 두고 왜 이런 말단 관리를 하겠다고. 집에서 복이나 실컷 누리지.”
“무슨 장인어른이야, 아버지라잖아.”
“그럼 더 좋은 거 아냐? 장인어른보다도 가까운 사인데.”
사람들이 향칠을 주제로 잡담을 해대는데도, 향칠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비질에 열중했다. 다만 빗자루에 들어가는 힘이 점점 커지면서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성문 앞이 순식간에 뿌연 먼지로 자욱해지자 성 밖으로 나가고자 기다리던 백성들이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벼슬아치들의 눈에 이런 말단 관리는 개만도 못한 존재였다. 백성들의 눈에도 사람 취급을 받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입을 막으며 뒤로 비켜설 뿐, 향칠에게 불평을 털어놓는 이는 없었다. 향칠의 거센 비질이 몇 번씩이나 백성들의 몸에 닿았지만, 다들 찍소리도 못 내고 화를 삭였다.
얼마 안 가 성문이 열렸다. 성문 안팎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성문을 통과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온갖 가축들이었다.
향칠은 계속해서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비질만 했다. 가축들이 우르르 지나가자 땅바닥은 또다시 똥오줌 천지가 됐다. 행인들이 가축을 피해 지나가려다가 돼지나 양들을 놀라게 하는 바람에 가축들은 더욱 제멋대로 날뛰었다. 이 난리 통에 향칠도 분뇨를 밟게 됐고, 오물이 튀어 옷에도 얼룩이 남았다.
“에라이! 사람한테 모욕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짐승한테도 모욕을 당해야 해?”
향칠이 드디어 소리를 빽 질렀다. 향칠은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를 땅에 내동댕이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향칠은 대문 앞에 도착했다. 하인들은 그를 보고도 예를 올리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아예 못 본 척을 했다. 향칠은 그런 태도가 익숙한 듯,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나막신을 바닥에 벗어던지며 안으로 들어갔다.
“왜 이제야 와요?”
안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이맘때 오지 않았소?”
향칠은 순간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해졌다.
“내가 그리도 보고 싶…….”
“오늘이 평소랑 같아요? 서 오라버니 형제들이 오기로 한 날이잖아요.”
내실에 있던 여인이 말을 탁 자르며 나왔다. 여인은 새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다. 생기 있게 연지를 바르고 버들잎같이 가늘게 눈썹을 그린 여인은 한 손으로 진주 귀걸이를 막 귓불에 꽂고 있던 참이었다. 눈가에는 웃음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향칠을 보자 웃음기를 싹 걷어냈다.
“왜 또 이렇게 지저분하고 냄새나게 하고 있어요. 누가 그런 꼴로 안에 들어오래요? 당장 나가서 좀 씻어요!”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당신이 몰라서 그러시오? 나더러 남문으로 가라고 한 게 누군데?”
향칠은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대꾸를 하면서도 차마 언성을 높이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얼른 씻고 서 오라버니 맞이하러 나갔다 와요. 괜히 길 헤매지 않게.”
여인이 뒤에서 소리치자 향칠은 고개를 돌려 여인을 노려보았다. 항칠의 낯빛은 붉으락푸르락했고,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물론 여인은 거울을 보느라 향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향칠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같은 시각, 벌써 출발한 서무수 형제는 경성에 있는 어느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다리 아래에서 도련님, 하고 외치면서 웃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철인지라 강 위에는 놀잇배가 많이 떠다녔다. 사내와 놀러 나온 기녀들도 있었고, 더위를 피하러 나온 여인들도 많았다.
서무수 등은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아래를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씨, 보세요. 정말 도련님들이었어요.”
시녀가 무지개다리 위쪽을 향해 손짓하며 외쳤다.
“누이구나.”
서무수 형제들이 다리 난간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서는 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작은 나무배 위에 서 있는 세 여인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이는 어디 가는 길이야?”
서무수가 질문과 함께 배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소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십삼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서무수 일행에게 공수의 예를 표했다.
“선상 연회에 가는 길이에요.”
시녀가 대신 대답했다. 그러고는 서무수 등을 유심히 훑어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도련님들 모두 새 옷을 꺼내 입으셨네요. 저희처럼 연회에 가시는 거예요?”
시녀의 말에 사내들이 쭈뼛거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게 내가 새 옷까지 꺼내 입지는 말자고 했잖아. 우리가 무슨 선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서봉추가 낮게 읊조렸다.
유유히 흘러가는 물결 위에서 정교랑이 그들을 향해 웃으며 예를 표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무배는 빠르게 무지개다리를 지나갔다.
“도련님이 옛 연인을 만나러 가시는 게 틀림없어요.”
시녀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리 위에서 돌아선 서무수 등은 정교랑 일행을 한참 동안 눈으로 배웅했다.
“이 물길에는 총 다섯 개의 무지개다리가 있습니다. 제일 큰 건 성 밖에 있고요.”
진십삼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배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기에, 사환이 옆에서 진십삼을 부축해 줬다.
“낭자는 항상 마차를 타고 외출했지요. 오늘 배를 탄 김에 물 위의 풍경도 한 번 감상해 보십시오.”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했다.
“또 다른 매력이 있네요.”
정교랑은 머리 위로 지나가는 무지개다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부터 낭자와 함께 놀러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 다리를 이렇게 빨리 고쳐 줄 줄은 몰랐지 뭡니까. 낭자한테 잘 보일 기회를 만들기도 전에요.”
그 말에 정교랑이 진십삼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공자가 열심히 호응해 줘서 가능한 일이었죠.”
진십삼이 잠시 멈칫하다가 곧 큰 웃음을 터트렸다.
강변의 길가에서는 웬 마차 행렬 때문에 행인들이 길을 터주느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멈춰라.”
마차 안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훈련을 받은 말들은 곧장 멈춰 섰고, 앞뒤와 좌우로 붙은 호위들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와 노점상들의 호객 소리가 섞여 있었다. 호위들이 행인들을 쫓아낸 탓에 강가 쪽에는 더 이상 사람이 없었다.
마차 휘장이 올려지자, 마차 안에 있던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안 군왕은 강가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작은 나무배를 내다보았다. 나무배가 가까워질수록, 진안 군왕의 시야는 더욱 또렷해졌다. 나무배 위의 소년과 소녀가 서로 마주 보며 웃는 모습이 보였고, 그들이 탄 나무배는 강물을 따라 금세 앞쪽으로 멀어져 갔다.
고개를 돌린 진안 군왕의 시선이 나무배를 쭉 따라갔다.
“군왕?”
마차 옆에 서 있던 시위가 조용히 진안 군왕을 불렀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차와 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주렴 사이로 소년의 옆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선상 연회는 당연히 배 위에서 열렸다. 솔솔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고 감미로운 현악기 소리가 들려오니 그 음색이 더욱 아름답게 들렸다.
“어떻습니까?”
진십삼이 젓가락을 내려놓는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나쁘지 않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십삼은 비워지지 않은 정교랑의 술잔을 보고 물었다.
“낭자도 아직 회복 중이라 술을 들지 않는 건가요?”
“아니요.”
정교랑은 손 옆에 놓여 있던 술잔을 바라보았다. 술잔 안에 담긴 맑은 술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이 술은 맛이 없어요.”
한쪽에서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던 기녀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 여기서 파는 술은 경성에서 아주 유명한 술입니다. 술이 낭자 입에 안 맞는 거겠지요.”
진십삼이 언짢은 표정으로 기녀를 흘겨보자, 기녀가 얼른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러면서도 옆에 있던 다른 기녀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도 못 하게 하다니, 이 공자가 저 여인을 무척 아끼나 보네.
“네, 정말 입에 안 맞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여긴 가무도 볼 만합니다. 아직 시간도 이른데, 한번 보고 가시지요.”
진십삼이 서둘러 정교랑을 붙잡았지만, 정교랑은 이미 일어서서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건 다음번에요. 이번엔 술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진십삼도 정교랑을 따라 몸을 일으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육낭이 곧 떠납니다.”
진십삼이 불쑥 말을 꺼냈지만, 정교랑은 담담하게 네, 하고 대꾸했다.
놀잇배의 복도가 워낙 좁은지라, 정교랑과 진십삼은 앞뒤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진십삼을 옆에서 부축할 수 있는 공간도 모자라 사환은 조용히 진십삼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정교랑의 걸음걸이가 느린 편이라 진십삼이 넘어질 일은 없어 보였다.
“서북으로 간다더군요.”
정교랑이 다시 네, 하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놀잇배의 선실에서 걸어 나왔다. 좀 전에 타고 왔던 나무배가 한쪽에서 대기 중이었던 터라, 시녀가 바로 정교랑을 부축하며 나무배에 옮겨 타려고 했다.
“정 낭자.”
진십삼이 뒤에서 외치자 이미 나무배로 발을 옮긴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주육이 낭자한테 술을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진십삼의 물음에 정교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죠. 난 그 사람이 아닌걸요.”
진십삼은 정교랑을 보며 실소를 짓더니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나무배가 노를 저으며 천천히 움직이자, 여인이 저쪽에서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진십삼도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멀어지는 나무배를 눈으로 배웅했다.
마차가 저택에 다다르자, 진십삼은 사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손을 내저으며 계속해서 부축해 주려는 사환을 물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십삼.”
익숙한 목소리에 잠시 넋을 놓은 채 걷고 있던 진십삼이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안뜰까지 걸어와 있었다. 부채를 살살 흔들고 있던 진 부인의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이게 무슨 우연이람. 네가 돌아오는 것도 마주치고. 어디 가서 놀다 왔니?”
진 부인이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머니, 이런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은 언제쯤 지겨워지실는지요?”
진십삼은 진 부인을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잘 놀았는지 궁금하신 거죠?”
진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깔깔 웃으면서 옆에 있던 여종에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똑똑한 십삼이 또 다 알아챘나 보네.”
“그럼요, 부인. 우둔한 저희도 알아차릴 정도인데, 도련님은 오죽하시겠어요.”
여종이 웃자, 진 부인은 더욱 크게 웃었다. 진십삼은 그런 진 부인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더욱 시원스러워졌다는 거야. 그래, 변했어, 다 변했지.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그 낭자와는 잘 놀다 온 게야?”
진 부인이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럼요.”
진십삼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진십삼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오늘 오찬 연회는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간 것 같지?
오찬을 마친 후, 서무수 형제는 겨우 대문 밖으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 노야께서 예의를 너무 차리셨어. 이게 배웅이야? 몸싸움이지.”
서봉추가 말하면서 이리저리 잡아당기는 바람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했다.
“동 노야께선 우릴 정말 살뜰히 대해 주시네.”
범강림이 감탄했다.
“특히 셋째 형님을요. 간다니까 셋째 형님 손을 꼭 붙잡고 안 놔주시던데요.”
한 형제의 말에 다른 형제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서무수가 굳어진 얼굴로 노려봤다.
“헛소리하지 마. 그런 농담은 이제 조심해야 해.”
형제 몇이 입을 삐쭉였다.
“셋째 형님은 너무 고리타분하다니까.”
“고리타분한 게 아니라, 그, 그 뭐라고 해야 하나. 눈에 차지 않는다?”
“눈에 차지 않는다는 말은 글을 모르는 나도 할 줄 알아.”
“셋째 형님은 원대한 포부를 가졌으니,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 덕 보고 살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내가 보기에 셋째 형님은 동 낭자가 눈에 차지 않은 거야. 셋째 형님의 책에서 튀어나온 듯 백옥 같은 얼굴을 가진 여인은 아니잖아…….”
서무수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농담은 더욱 짓궂어졌다. 서무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형제들에게 외쳤다.
“허튼소리 그만하라니까!”
서무수가 놀림을 당하는 사이에 그들은 벌써 큰길가 쪽으로 들어섰다.
“참, 근데 가장 중요한 얘길 우리가 하고 나왔나?”
갑자기 범강림이 걸음을 멈추고는 물었다. 다른 형제들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췄다.
“제일 중요한 일이 뭔데 그러시오?”
서봉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범강림이 대답했다.
“앞으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거 말이다.”
서무수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차마 입을 못 뗐습니다.”
정겹고 따뜻하게 맞이하던 동 노야와 자리를 함께해 준 향칠 부부 앞에서 앞으로는 서로 왕래하지 않고 지내자라고 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제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강림 형님.”
범강림을 부르는 소리에 형제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향칠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쫓아왔다.
“아버님께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이 돈을 꼭 가져다주라고 하셨습니다.”
향칠이 비전 한 장을 꺼내며 말하자 범강림은 뒷걸음질까지 치며 거절했다.
“말했잖아, 우리도 돈 있다니까.”
향칠이 웃었다.
“형님들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아버님께선 걱정하실 겁니다. 그리고 객잔에서 소일거리나 하는 처지에 벌어 봐야 얼마나 번다고요. 집으로 들어와 점포 일을 돕는 게 내키지 않는다니, 아버님께서는 도저히 마음이 안 놓이신답니다. 그러니 이 돈은 가져가십시오. 경성에서 돈은 아무리 많아도 많은 게 아니에요.”
거기까지 말한 향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
“이건 아버님께서 주시는 돈입니다. 제가 그때 드린 몇 푼 안 되는 돈이 아니니 가져가세요. 제가 달리 도울 건 없고, 이 돈을 받아두라는 말씀밖엔 못 드리겠네요. 지난번 일을 꺼내지 않은 것도 고맙고…….”
향칠의 얼굴에는 자책과 창피함이 뒤섞여 있었다.
“강림 형님, 그리고 형님들, 절 원망하시죠?”
“아니야. 도리어 고맙지.”
서무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당초에 향칠이 넓은 아량으로 서무수 형제들을 받아주었더라면, 그날 밤 길을 잃은 금가아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며, 금가아도 정교랑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무수 형제가 경성으로 온 이유는 정교랑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큰 경성 바닥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적잖이 힘을 들여야 했다. 그런데 일이 수월하게 풀린 덕에 경성에 오자마자 정교랑을 만났고, 엉겁결에 돕기까지 했다.
사소한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은인이었던 정교랑은 어마어마한 보답을 안겨 주며 조금의 의심도 없이 이들을 믿고 의지했다.
그리 대단한 여인에게 ‘의지’라는 단어를 쓰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여인이 정말로 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요즘의 나날은 꼭 꿈을 꾸는 것만 같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서무수를 흔들었다.
“형님, 셋째 형님?”
퍼뜩 정신을 차린 서무수가 앞을 보자, 향칠을 포함한 다른 형제들이 다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 뭘 그리 바보처럼 웃고 있소?”
서봉추의 물음에 서무수는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향칠이 고개를 푹 숙이고 스스로를 비웃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셋째 형님, 저를 원망하고 계시죠?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형님이…….”
“향 아우.”
서무수는 향칠의 말을 끊고 점잖은 표정을 지었다.
“원망한 적 없어. 지금 난 너무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날 한 말은 지금도 변함없어.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난 똑같이 거절했을 거야.”
향칠이 서무수를 보며 웃자 서무수가 어깨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돈은 정말 필요 없어. 우리도 이젠, 정말 돈 안 모자라거든.”
범강림과 다른 형제들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우린 이만 가봐야겠어. 아, 그리고 우리가 바빠서 자주 오진 못할 거야. 동 노야께 잘 좀 말씀드려 줘.”
서무수가 말했다. 큰길로 멀어져 가는 서무수 형제를 보며 웃음기 어린 향칠의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말은 참 잘해. 자주 못 온다고? 그러면 아예 경성에서 썩 꺼져버리지 왜! 왜 아직도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건데! 왜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놈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꼴을 봐야 하는 거냐고!
지난번에 남몰래 찾아왔을 땐 옛일이 신경 쓰여 동 노야를 안 뵙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안전한 길로 가며 대어를 낚으려던 거였네.
하긴, 제 발로 찾아오는 것보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더욱 감동적이긴 하지. 시커먼 속내와 달리 한사코 거절까지 하면서 말이야!
저 거지 같은 군졸 놈들이 서북에 가서 다른 건 못 배워 오고, 얍삽한 여우짓만 잔뜩 배워 왔네. 군영에 있는 계집들이랑 뒤섞여 놀면서 이런 못된 술수만 배워 온 거야?
향칠은 고개를 숙여 비전을 들여다보다가 손으로 비전을 천천히 구겼다.
“이 정도 돈이야 눈에 차지도 않겠지. 이깟 돈이 얼마나 된다고.”
향칠이 중얼거렸다.
날이 점점 밝아질 즈음, 신선거의 뒷마당에는 사람 여럿이 모여 있었다. 돈을 한 움큼 퍼다가 상자 안으로 옮겨 담자, 상자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건 진주원(進奏院: 중앙과 지방의 연락소 역할을 하던 관청)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서무수가 물었다.
“좋습니다.”
오 관리인이 장부를 꼼꼼하게 정리하면서 대답했다. 다른 형제들이 뒷마당에 놓아둔, 돈을 가득 담은 상자들의 뚜껑을 덮고 안전하게 잠갔다.
“이쪽은 태평거에서 벌어들인 돈이고, 이쪽은 태평 두부를 판 돈입니다.”
오 관리인이 상자를 하나씩 가리키며 말했다.
“신선거에서 벌어들인 돈은 아직…… 그래도 연말쯤이면 얼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사내들이 관리인의 말을 듣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어서 가 봐.”
범강림이 말했다.
마차에 가득 실었던 돈은 가벼운 비전이 되어 돌아왔다. 서무수가 비전을 나눴다.
“이건 관리인 거고, 이건 우리 형제들 거. 이건 누이 거, 그리고 이건 한 공자 거.”
오 관리인은 겸손 떨지 않고 자신의 비전을 탁 건네받으면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봉추와 형제들도 기대에 잔뜩 부푼 눈빛으로 비전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도 돈이 생겼어.”
서봉추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양손을 몸에 슥슥 닦고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형제들의 비전을 대표로 받아온 범강림이 서봉추에게 비전을 건네려다가 도로 가져갔다.
“아무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어. 너희한테 이 돈을 줬다가 홀라당 다 써 버릴지 누가 알아.”
방 안에 있던 형제들이 불평을 쏟아내며 범강림에게 달려들어 뺏는 시늉을 했다.
오 관리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마당으로 걸어 나온 오 관리인은 회랑 아래에 홀로 앉아 손으로 호두를 굴리고 있는 이대작 옆으로 다가섰다.
“어느덧 반년이나 지났어. 시간이 참 빠르네.”
“그러게요. 그래도 큰 수확을 얻었으니 다행입니다.”
이대작이 대꾸했다.
“자네 얘기를 하는 건가, 남의 얘기를 하는 건가?”
오 관리인는 이대작 옆에 앉았다. 이대작은 대답을 하는 대신 헤헤 웃음을 지었다.
“후회하지는 않나?”
오 관리인이 묻자 이대작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오 관리인이 손에 쥔 비전을 이대작의 눈앞에서 흔들며 장난스럽게 눈짓했다.
“원래 자네의 것인데, 지금은 한 공자 것이 되었잖나.”
늦여름의 기운이 가득한 마당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잔인했던 지난겨울이 스쳐 갔다. 수리를 앞둔 식당 안에서, 산적처럼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 계약서 한 장을 내밀던 때가.
“그래도 이렇게 헛일을 하게 둘 순 없지. 먹고 지내는 데 필요한 것 외에, 따로 지분을 배당해 주겠네.”
오 관리인의 말에 이대작은 그저 웃으며 오 관리인이 들고 있던 비전에서 눈을 뗐다.
“아닙니다. 그건 어차피 제 것이 아니었어요.”
이대작이 옆에 놓인 작은 칼을 집고는 왼손으로 허공에다 꽃을 하나 그렸다.
“이게 제 것이죠.”
오 관리인이 허허 웃으면서 이대작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제가 아니었으면, 형님 같은 늙은이는 죽지도 않고 집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밥을 축내고 있었을 겁니다. 형님, 그 돈으로 저한테 제대로 한턱내셔야 해요.”
“아이고, 이 죽지도 않을 늙은이의 관 짤 돈까지 노리는 건가. 인심 한번 고약하네!”
두 사람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덕승루에서 걸어 나오던 정사낭이 한숨을 푹 쉬고는 뒤를 힐끔 돌아봤다. 왕십칠이 잔뜩 부은 두 눈을 비비며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거봐, 너도 아쉽지? 걱정 마. 우리 집에서 돈을 보내오면, 내가 또 데려올게.”
정사낭이 기분 나쁜 기색으로 왕십칠을 흘겨봤다.
“됐고, 넌 얼른 누이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나 해!”
두 사람은 몇 걸음 못 가서 자신들을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발음을 멈췄다.
“춘령.”
정사낭이 잰걸음으로 쫓아오는 몸종을 보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도련님들은 어디서 묵고 계세요?”
춘령의 물음에 정사낭이 묵고 있는 객잔을 알려주었다.
“춘령, 정말 저기서 나오도록 도와주지 않아도 돼? 가족이 없어서 그러는 거면, 우리 집으로 가도 된다. 어쨌거나…… 여기서 지내는 것보다는…….”
어쨌든 덕승루는 남들 눈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사낭은 벌써 이곳에서 여드레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왕십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다지만, 주 낭자와 시를 읊고 칠현금을 같이 연주한 것도 사실이고, 그녀를 보며 마음이 두근거린 것 또한…….
본인도 이곳에서 함께 즐겨 놓고, 여긴 좋은 곳이 아니라는 듯 고고한 자세를 취하는 게 다소 민망했던 정사낭은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요.”
춘령이 고개를 저으면서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정사낭을 바라봤다.
“주 언니가 절 얼마나 잘 대해 주시는데요. 전 언니를 한평생 모시기로 했어요. 그리고 제가 떠나면, 두 분이 주 낭자를 만나기 힘들어지잖아요.”
왕십칠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네, 좋아. 아주 훌륭한 아이구나. 그럼 나도 평생 너를 홀대하지 않으마.”
춘령이 웃음 짓고는 다시 정사낭을 쳐다봤다.
“도련님은 경성에 오래 계실 거예요? 가실 때 꼭 저한테 얘기해 주세요.”
춘령이 아쉬운 듯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자, 정사낭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 배울 게 있어서 조금 오래 머물 것 같아. 십칠은 내 누이를 보면 바로 떠날 거고.”
춘령의 눈빛이 일순간 반짝였다.
“도련님의 누이도 여기 경성에 계세요? 강주 분 아니에요? 누이께서도 같이 글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춘령이 놀라면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보자 왕십칠이 갑자기 정사낭을 옆으로 밀치고는 대신 대답했다.
“아니, 아니. 사낭의 누이는 외가에서 지내고 있어.”
“정말 좋겠네요. 저는 갈 곳도 없는데.”
춘령이 고개를 푹 숙이고 가여운 모습을 했다. 왕십칠이 춘령을 보고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좋긴 뭐가 좋아. 걘 바보야. 집에서 쫓겨나 외가로 간 거지, 부러워할 일이 아니야.”
바보!
춘령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바보! 하! 하! 바보!
정씨 성을 가진 바보!
해가 황궁을 환히 비출 때가 되어서야 황자들의 아침 수업이 끝났다. 한참 전부터 수업을 견디기 힘들었던 진안 군왕이 가장 먼저 문을 나섰다.
“형님, 나도 같이 가요.”
이황자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책을 손에 쥐고 있던 대황자가 언짢은 표정을 드러내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공부에 집중했다.
“형님, 어디 가려고요?”
이황자가 외치는 소리에 진안 군왕이 몸을 돌려 쉿 하는 손짓을 했다.
“전하, 예를 지키셔야지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한 손으로 가슴팍을 쓸었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먼저 쉬러 가야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황자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면서 옆에 있던 내시를 쳐다보았다.
“너, 너희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이황자가 으름장을 놓는 표정을 지었다. 내시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고 했지만, 이황자의 말대로 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황자가 진안 군왕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내시 두 명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전하, 황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시들이 조곤조곤 말했다. 이황자는 짜증이 난 듯 내시들을 피해 다시 앞으로 가려고 애를 썼다. 진안 군왕이 하하 웃으면서 이황자를 타일렀다.
“전하, 어서 가 보세요. 저는 조금 쉬면 금방 낫습니다.”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향해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냈다. 이황자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내시들이 이황자를 가볍게 안아 올리더니 어르고 달래며 자리를 떴다.
“전하, 뭐 하시는 겁니까?”
주위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자, 진안 군왕의 내시가 가까이 다가가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멀쩡하신데, 왜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는 겁니까?”
내시가 두려움이 섞인 말투로 묻자 진안 군왕은 다시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정말 몸이 안 좋아. 목이 아프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진안 군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진안 군왕이 처소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나 태후가 사람을 보내왔다. 이어서 태의도 함께 들어왔다.
태의가 꼼꼼하게 문진을 하고는 진안 군왕에게 환약 몇 알을 처방했다.
“큰 병은 아니고 체내의 조열 때문입니다.”
태후의 내시는 태의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는 걱정 어린 말투로 진안 군왕에게 말했다.
“마마께서는 전하께서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셔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며칠 동안은 수업을 안 들어도 되고 문안도 올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양에 전념하시라고요.”
진안 군왕이 태후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태후의 내시는 걱정 어린 말투로 진안 군왕에게 몇 마디 당부를 덧붙이고는 물러났다.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았다.
밖으로 나온 태후의 내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내시는 저 아이가 처음으로 몸이 안 좋았을 때를 기억했다. 아이는 부모의 곁을 떠나 궁에서 생활했고, 회임한 귀인들은 하루가 멀다고 진안 군왕을 불러 곁에 두려 난리를 쳤다. 어린아이다 보니, 병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귀인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아이를 피했다. 혹시나 자신들에게 병이 옮을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회임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태후 또한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만일을 대비해 그 어린아이를 편전에 가두라고 명했다. 아이가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시종들이 잘 모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뭘 알겠는가. 부모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갑자기 자신을 가둬 두겠다니, 어린아이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태후의 내시는 당시 편전의 문을 닫을 때, 아이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울부짖던 모습을, 아이의 손이 문에 찧어서 벌겋게 부어오르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내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나중이 되어서는 진안 군왕도 익숙해졌는지, 차츰 덜 울더니 철이 든 것처럼 얌전하게 있었다. 가벼운 병세가 있을 때면 스스로 편전 안으로 숨어 들어가 몸이 다 나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으며 몸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몸이 좋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병에 걸릴 일도 줄어들어 편전에 가둬지는 일도 드물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자랐구나. 아플까 봐 두려움에 떨던 그때의 그 어린애가 아니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궁 밖으로 나가 봉지(封地)에서 지내겠지.
태후의 내시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편전 안. 무릎을 꿇어앉은 내시는 차 우릴 준비를 하는 진안 군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됐다. 너도 그만 물러가거라.”
진안 군왕이 미소지으며 내시에게 손짓했다.
“이 환약들은…….”
내시가 이 태의가 처방해준 환약들을 가리키자 진안 군왕은 망설임 없이 환약들을 화로에 몽땅 부어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내시를 향해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럼 몸이 좋지 않다고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아니야. 정말 몸이 안 좋아.”
진안 군왕의 대답에 내시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는 긴장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소인이 당장 가서 이 태의를 모셔 오겠습니다.”
궁에서 진안 군왕이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약이 바로 이 태의가 처방한 약이었다.
“괜찮다.”
진안 군왕이 동그란 다병(茶餠) 하나를 꺼내면서 내시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다.
“난 이게 있거든.”
이거? 내시가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자세히 보았지만, 평범한 다병과 다름없어 보였다.
“전하.”
내시는 진안 군왕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머뭇거렸다.
“걱정 마. 이것만 있으면 충분해. 이것만 있으면, 걱정할 거 없어.”
병이 난 것을 남이 알아보는 것도, 병이 나는 것도, 홀로 외롭게 갇히는 것도 두려울 게 없다.
신선의 약이 있는데, 두려울 게 뭐 있어? 이것만 있으면 내가 신선이 되는데.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문가에 다다른 내시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다병을 조금 떼어내서 틀 위에 올려 데우고 있었다.
차를 우리는 게 뭐가 저리 재미있을꼬?
내시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진안 군왕을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군왕은 병에 걸리면 몰래 묻어 버린다고 겁을 주던 태감의 말에 두려워 벌벌 떨던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진안 군왕은 소식에 밝은 내시를 곁에 뒀으며, 믿을 수 있는 태의가 있고, 십 년 동안 몇 번씩이나 걸러낸 훌륭한 시위가 지키고 있었다. 눈에 띄지도 않고 얼핏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로 그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해 나갈 것이다.
진안 군왕의 목표는 아주 간단했다. 바로 아무 일 없이 잘 살아남는 것. 그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절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절반인 이 황궁의 험난한 생활을 잘 마치고, 무탈하게 살아남아 자신의 봉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다만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멀리까지 내다보며 살 필요는 없으니까.
내시는 문을 조용히 닫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안 나가겠다고?”
진십삼이 주육낭을 보며 물었다. 주육낭은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몇 번 털고는 탁자 앞에 앉았다.
“병서를 더 읽어야 해.”
주육낭의 대답에 진십삼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주육, 이러면 재미있나?”
주육낭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대답했다.
“내가 뭐? 예전에는 공부를 게을리했으니, 지금이라도 벼락치기를 하겠다는 게 뭐 잘못됐어?”
진십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나갔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주육낭은 손에 쥔 책을 가만히 보기만 하고 펼치지 않았다. 손에 점점 힘을 주며 책을 구기더니 팍 소리와 함께 탁자에 책을 내던졌다.
“그런 기분 영 별로지?”
진십삼의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리나 싶더니 밖에서 몸을 불쑥 내밀었다. 놀란 주육낭이 자리에서 튀어 오르다시피 일어났다.
“진십삼! 자네 이러는 게 재미있어?”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진십삼을 쳐다보자, 진십삼은 미소 띤 얼굴로 여유롭게 다시 들어왔다.
“꽤 재미있지. 역시 다리가 나으니까 훨씬 재미있네. 그렇지 않으면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장난 같은 건 평생 못 해 볼 뻔했어. 이리 재미난 장난을 말이야.”
주육낭이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진십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됐네, 그만두게나. 이미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아. 이번에 가면 삼 년에서 오 년은 있게 될 텐데, 돌아오면 더욱 많은 게 변해 있겠지. 어차피 변화란 막을 수 없는 거야. 그러니 차라리 지금을 즐기는 게 어떻겠나?”
주육낭이 문밖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른 건 아니고, 그래도 싸우면서 든 정이 있잖아. 떠나기 전에 같이 술이라도 한잔해야지.”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잠자코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몸을 돌리지도 않았다.
“내가 그 여인을 만나고 왔어. 내가 자네 대신 초대도 했지.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
그 여인이 뭐라 말했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주육낭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러더라고. 자긴 그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이 자길 보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알겠냐고 했어.’”
진십삼이 주육낭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로 그를 툭툭 쳤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 그래야 내가 말을 전하지.”
자길 보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다고? 그렇게 여우 같으면서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누군 보고 싶은 줄 알아?
“나도 내 입이 있고 발이 있으니, 굳이 자네가 나설 필요 없어.”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흘겨보며 말했다.
“자네가 무서워서 못 갈까 봐 그러지. 내가 같이 가 준다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하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무서울 게 뭐 있나? 내가 자네처럼 분통 터져 죽을 사람도 아니고.”
이번엔 진십삼이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다리를 고치긴 했는데, 평생 갈 오점도 하나 남기게 됐군.”
두 사람이 서로를 조롱하며 웃고 있는데 사환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왔다.
“공자님, 공자님.”
사환을 보자 주육낭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자네가 데리고 있는 사환인가?”
진십삼이 주육낭에게 묻고는 사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 낭자한테 무슨 일 있나? 이젠 낭자가 오더라도 자네 부모님이 내쫓을 일은 없는데, 설마 자네를 보려고 직접 찾아온 건가?”
“그 여인이 그럴 사람이야?”
주육낭이 묻었다. 일순간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럴 사람은 아니지.”
그 말에 주육낭이 진십삼을 노려봤다. 두 사람이 웃고 있는 사이, 뛰어오던 사환이 회랑 아래에 도착했다.
“공자님, 밖에 누가 왔습니다.”
사환이 문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온 게냐?”
진십삼이 미소지으며 먼저 끼어들었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주먹을 불끈 쥐려던 주육낭은 고개를 끄덕이는 사환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사환은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씨께서 오신 게 아니라, 강주 교랑 아씨 댁에서 사람이 왔다고 합니다. 그 사람 말로는, 자기가 교랑 아씨의 정혼자라고 하던데요.”
정혼자!
진십삼과 주육낭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혼자? 주 부인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왔다고?”
주 부인이 다시 한번 물었다.
“한 명은 정씨 가문의 넷째 정사낭이고, 한 명은 아씨의 정혼자라고…….”
여종이 주 부인에게 다시 대답해 주었다.
주 부인은 자리에 앉은 채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정말로 정혼자라고?
“그런 여인을 원하는 자가 있다더냐?”
전에는 바보였고, 지금은 사람 잡는 불운 덩어리인데 그런 애를 집에 들여 뭐에 쓰려고?
“그런 애를 집에 들여 뭐에 쓰려고?”
“흥, 그야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게지. 우리 교교가 어떤 사람인데!”
주 노야가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어떤 사람이냐고? 자신의 길을 막거나 심기를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그자의 목숨을 빼앗고 집안을 멸문시키는 사람이지…….
낳을 때부터 바보천치였던 아이가 혼자 경성까지 온 것도 모자라서, 그 짧은 시간 안에 한 손에는 경성에서 내로라하는 점포 세 개나 쥐었고, 다른 한 손에는 일곱, 여덟 명의 사람 목숨을 틀어쥐고 있지 않은가.
금강저(金剛杵)를 손에 쥔 듯 가차 없지만, 남들의 눈에는 세상을 구제하러 온 보살이나 다를 바 없지. 악인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무자비하다는 것은 딱히 신기할 일이 아니지만, 그런 무자비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보살과 같다는 명성을 얻은 걸 보면 보통 수완이 아니야.
너무 무서워. 주 부인이 가슴팍을 쓸며 중얼거렸다.
“부귀영화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인 줄 아시오? 누구든 가죽을 벗겨 놓으면 무서운 건 매한가지요. 당신은 어째 갈수록 더 어리석어지는 것이야!”
주 노야가 주 부인을 노려보고는 여종을 쳐다보았다.
“그 둘뿐이더냐?”
“네, 그 둘만 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주 노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노야, 정말이에요?”
주 부인이 주 노야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물었다.
“사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에 정씨 가문에서 혼담 하나를 꺼내긴 했소. 그 혼담에 대해 소상히 알아보려던 차에 부인의 서찰을 받아 서둘러 돌아온 거요.”
소상히 알아봐? 주 부인은 주 노야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그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단숨에 알아챘다.
“정씨 놈들이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하다니, 이 외숙부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 아니오?”
주 노야가 씩씩대자 주 부인이 대답했다.
“그럼 딱 자르고, 쫓아내죠. 괜히 우리 교교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요.”
기분이 상해 정씨 가문을 원망하는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혹여 우리 집으로 불똥이 튀면…… 끝장이야.
“아버지.”
주육낭이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당당하게 집까지 찾아올 정도면,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겁니다. 이대로 내쫓았다가 괜히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면 누이에게 안 좋습니다.”
“그래 봤자 그건 정씨네 사람들 잘못이지.”
주 부인이 툭 내뱉었다. 주육낭은 무릎을 꿇고 바르게 앉아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정씨 가문 사람들이 누이한테 잘못하는 게 있더라도, 정씨는 친혈육이지 않습니까.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따질 수 없는 법인데, 누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 부인이 실소를 터트렸다.
“뭘 어떻게 하기는? 수완이 아주 대단하잖아. 우리가 걱정할 게 뭐 있겠어.”
주 노야가 자세를 고쳐 앉고 주 부인의 말을 끊었다.
“들라 하라.”
“노야!”
주 부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 아이는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있잖소. 이런 일은 자식 된 도리로 직접 나서서 말할 수가 없으니, 우리가 나서야 하오.”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해결할까.”
주 부인이 작게 읊조리자 주 노야가 주 부인을 보며 눈을 부릅뜨고 대꾸했다.
“그러니 더 나서야지.”
가만히 있어도 해결될 일이니, 더더욱 앞장서서 교교를 위하는 척 체면을 챙겨야지. 거저먹을 수 있는 일을 왜 마다해? 이래서 여인들은 아둔하다니까!
아, 물론 아둔하지 않은 여인이 있기도 하지. 이를테면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내지 않는 조카라던가.
“안으로 들게!”
주 노야가 손을 높이 들며 말했다. 왕십칠이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집은 꽤 괜찮게 꾸며 놨네. 돈이 없어 보이진 않는데, 고작 혼수 몇 개 가지고 그 난리를 치셨나?”
길을 안내하던 사환들이 고개를 돌리며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냈다. 정사낭도 일순간 얼굴이 붉어져서는 왕십칠을 흘겨보았다.
“허튼소리 집어치워.”
정사낭이 낮게 읊조렸다. 별안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 그는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옆쪽 작은 길에 두 소년이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한 명은 옥과 같은 온화함을 지녔고, 다른 한 명은 탄탄한 신체에 용맹함이 드러났다.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두 소년에게 눈길을 주었고, 두 소년 또한 정사낭을 빤히 바라봤다.
주씨 가문의 아들들이겠지? 정사낭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두 소년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정혼자라는 거야?”
진십삼이 시선을 거두며 물었지만, 주육낭은 고개만 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주씨 가문에 가본 적은 있으나, 그 집 아들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으니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누가 됐든, 무슨 상관이야.”
주육낭이 말했다.
누가 친오라비든, 누가 정혼자든, 그걸 물어서 뭐해. 정혼자라고 우긴들, 그게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더군다나, 둘 다 못생겼어!
말이 끝나자마자 주육낭이 걸음을 옮겼다. 진십삼이 그의 뒤를 따르려는데, 주육낭이 문 앞에 멈춰 서더니 진십삼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왜? 주육, 정 낭자를 만날 구실을 찾아줬더니, 이젠 나를 버리고 가겠다 이건가?”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하자 주육낭이 그를 쳐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건, 우리 집안 일이니까.”
주육낭은 ‘우리 집안’이라는 단어에 무게를 실어 말했다. 그러더니 진십삼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말에 올라타 채찍을 휘둘렀다.
대청으로 들어간 정사낭과 왕십칠은 어른에 대한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정사낭이 먼저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어르신, 저는 정씨 가문의 넷째고, 정 이노야는 저의 숙부님이십니다.”
“외숙부님, 저는 왕씨 가문의 열일곱째입니다. 정 이노야는 제 장인어른이시고요.”
풉 소리와 함께 주 노야가 마시고 있던 차를 내뿜었다.
“일단은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그런 호칭을 함부로 불러서 쓰나.”
주 노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앞에 있는 소년을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뒷말을 덧붙였다.
“누구 마음대로 외숙부래?”
왕십칠이 웃었다.
“외숙부님, 외숙부님도 절 아시잖습니까. 외숙부님께서 강주를 떠나시기 전에 이미 동의하신 혼사고요. 제가 바로 정 대부인의 친정 조카입니다.”
“내가 언제 동의했다고 그러느냐?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일단 돌아왔을 뿐이지. 그때 이 혼사를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미루었거늘, 누구 마음대로 정해졌다는 게야? 정해진 바는 하나도 없으니, 이 혼사는 애초부터 없던 일이다.”
주 노야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왕십칠이 헤헤 웃었다.
“외숙부님, 장인어른께 듣자니 저희 집안에서 교랑의 혼수를 탐낸다고 생각하신다면서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혼수에 관심 없고, 혼수는 필요 없습니다. 사람만 제가 가지되 혼수는 외숙부님께서 가지세요. 어떻습니까? 이제 만족하시지요?”
“교교의 혼수는 우리도 가질 생각 없어.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가지라고 해.”
주 부인이 겁먹은 얼굴로 서둘러 말했다.
왕십칠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어머니와 고모님께서는 주씨 가문이 돈에 눈이 멀어 오로지 혼수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혼수들은 값어치가 꽤 될 텐데요?”
그게 아무리 값어치가 나간들 목숨보다 귀하겠느냐, 이 멍청한 놈아!
주 부인과 주 노야가 왕십칠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씨 가문은 어디서 저런 멍청한 놈을 데려온 거야?
같은 시각, 옥대교 저택에 도착한 주육낭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대문을 두드렸다. 문틈 사이로 사환이 밖을 내다보았다.
“또 오셨네!”
“여긴 왜 왔어요?”
마당에서 사환과 시녀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회랑 아래에 단정한 자세로 앉은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문 쪽을 쳐다보았다. 모든 게 예전과 같았다.
“정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
주육낭이 말했다.
“누가요?”
시녀가 놀라서 물었다.
“하나는 네 오라비고, 또 하나는…….”
주육낭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네 정혼자.”
차를 올리려고 쟁반을 들고 오던 반근은 하마터면 쟁반을 놓칠 뻔했다.
“정혼자요?”
시녀가 소리를 지르며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요? 어디 한번 보게 데려와 봐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멈칫했다.
“뭐? 그자를 만나 보겠다고?”
주육낭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걸음 내디디며 물었다.
“내 정혼자라는데, 당연히 한번 봐야죠.”
정교랑이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마치 주육낭이 이상한 질문을 한다는 듯.
주육낭이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로? 이것마저 네가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그럴 필요가 없잖아. 우리 집에서 내쫓아도 될 일이다. 네가 그자를 봐서 뭘 하려고? 정씨 집안에서 넣은 혼담이 좋아 봤자 얼마나 좋겠어.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좋은 집안을 고를 수 없는 것도 아니잖아. 정 안 된다면, 진십삼도 문제없고.
혹여나 네가 진십삼과 혼인하고 싶다는데 진십삼이 싫다고 하면, 내가 십삼을 가만두지 않겠어. 물론 진십삼이 널 원하지 않을 리는 없지. 아마 그쪽이 더 바라고 있을 텐데.
도대체가 넌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왜 아무 말도 안 하냐고. 네가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알아!
주육낭은 끓어오르는 감정 때문에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두 주먹을 꽉 쥔 채 짧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몸을 휙 돌려 대문을 나갔다.
“그래.”
네가 그걸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주육낭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주 노야는 정사낭과 왕십칠을 가두려 하고 있었다.
“주 노야, 뭐하시는 겁니까?”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천천히 주위를 에워싸는 험악한 인상의 가노들을 쳐다보며 왕십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느 무관 집안과 마찬가지로, 주씨 가문에서도 한때 호위병이었던 자들을 아랫사람으로 부렸기에 평범한 집안의 가노에 비하면 훨씬 사나워 보였다.
주 노야가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왜 계속 외숙부라고 부르지 않고? 조카뻘 되는 친척이 머나먼 경성까지 왔는데, 당연히 후하게 대접해 줘야지.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어르신, 저는 공부를 하러 경성에 온 겁니다. 이 댁에 머무를 수 없어요.”
정사낭이 당황해하면서 소리쳤다.
“공부는 무슨. 공부는 우리 집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여기서 얌전히 지내도록 해라.”
주 노야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감히 우리 가문 여식의 결백에 오점을 남기다니, 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야! 그리고 괜한 걱정은 하지 말게나. 자네 가문 사람들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집으로 찾아갈 것이야. 지금 당장!”
“전 오명을 씌운 적이 없습니다. 집안에서 내린 결정이고, 이미 혼서도 썼다고요! 오히려 노야께서 절 모욕하시는 겁니다!”
왕십칠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주 노야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듣기 싫다. 그만 끌고 가거라.”
강주에서 온 어린 조카 둘쯤이야. 둘을 묶어 둔다고 해도, 아니, 흠씬 패 버린다고 한들 누가 감히 뭐라 할까? 이치에 통달한 서생도 주먹 앞에선 도리가 없다는 옛말이 딱 지금 같은 상황이로구나!
험악하게 생긴 가노가 왕십칠을 향해 돌진해 오자, 왕십칠은 즉시 머리를 싸매고 웅크려 앉았다.
“주씨 가문은 듣던 대로 제정신이 아니구나! 사낭, 역시 네 말이 맞았어!”
시종들은 왕십칠을 먼저 손보려다가 그 말에 즉시 방향을 틀더니 온순하기 짝이 없는 정사낭을 바닥에 가볍게 제압했다. 감히 그런 불손한 말을 내뱉다니!
“너 이 자식, 내가 언제 그런 말을…….”
정사낭이 억울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가노들이 정사낭의 입을 틀어막고는 손을 뒤로 가게 해 꽁꽁 묶어 버렸다. 정사낭의 머리카락은 이미 산발이 되었고, 모자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주육낭이 대문을 지나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주육낭은 궁지에 몰린 두 사람을 흘깃 보기만 할 뿐, 그들을 거칠게 다루는 가노들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주 노야에게 가까이 다가간 주육낭이 귓속말로 조용히 몇 마디 속삭였다.
“정말로 보겠다더냐? 지금?”
주 노야가 놀란 듯이 되묻자 주육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나 빨리? 주 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뒤엉켜서 싸우고 나서야 정교랑이 직접 나설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우선 정씨 집안과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정교랑은 지금 당장 이 정혼자를 보겠다고 한다.
그럼 그렇게 해야지. 난 이미 내 입장을 밝혔으니, 나머지는 조카가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하지, 뭐.
“내 누이가 여기에 산다고 했소?”
정사낭이 마차의 휘장을 걷으며 물었다.
“저자의 말을 믿지 마. 분명히 우리를 데리고 나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 하는 거라고.”
왕십칠이 소리쳤다. 주육낭은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대문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공자님, 또 오셨네요.”
금가아가 대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금가아?”
금가아는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차 옆에 서 있던 작고 왜소한 체구의 사환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육구아?”
금가아가 눈을 비비며 긴가민가한 얼굴로 외쳤다.
“이야, 정말 금가아네. 너 아직 안 죽었구나?”
마차 옆의 사환이 금가아를 향해 달려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금가아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너나 죽어!”
“너희 어머니랑 누나가 집에서 맨날 울었단 말이야.”
“울긴 왜 울어? 멀쩡히 잘만 지내는데. 넌 여기 어쩐 일이야?”
“난 사공자를 모시고 경성에 왔어.”
사환이 손으로 뒤에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정사낭은 놀라움 반, 기쁨 반으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내 누이가 정말 여기 살고 있었구나.”
주육낭이 활짝 열린 대문을 통해 마당 안으로 걸어갔다. 곱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넷째 도련님께서 오셨군요.”
시녀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정사낭에게 예를 표했다.
정사낭은 왁자지껄한 인파 속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던 시녀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여기에 있었군.
“내 누이는 잘 지냈느냐?”
정사낭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물었다.
“아씨께서는 강녕하세요. 넷째 도련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녀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정사낭을 환대했다. 정사낭이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정사낭은 그제야 혼자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다시 몸을 돌려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왜 또! 어서 내려, 안 그럼 나 혼자 보고 올 테니까.”
정사낭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안 봐! 경성에 온 게 저 여인을 보기 위해서인데.”
왕십칠이 휘장에 작은 틈을 만들어서 그 사이로 대답했다.
내 누이를 보기 위해서 경성에 온 것은 기억하고 있었군! 덕승루에서 그리 시간을 허비할 땐 언제고! 정사낭이 왕십칠을 흘겨보았다.
“얼른 내려!”
왕십칠은 마차에서 내리기는커녕 더욱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가서 빗이랑 세수할 것 좀 가져와.”
“갑자기 또 무슨 꿍꿍이야?”
정사낭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꾸짖었다.
“외숙부가 날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놨는데, 이대로 어떻게 미인을 만나러 가?”
왕십칠도 목소리를 낮게 깔며 대꾸했다.
정사낭은 그런 왕십칠을 보며 이를 부득 갈았지만, 이미 이놈으로 정해진 거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기왕이면 깔끔하게 단장하고 만나야 누이가 좀 더 좋아하지 않겠는가.
주육낭이 마당에 한참을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마차로 마중을 나갔던 시녀가 미소를 지으며 마당으로 돌아왔다.
“뭘 달라더냐?”
주육낭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씨께서 놀라실까 봐 용모를 단장하고 뵙겠다고 하셔서요.”
“못생긴 것도 모자라서 까탈스럽기까지 해?”
주육낭이 성난 얼굴로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괜찮아요. 이상할 것도 없죠.”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시녀와 반근은 정교랑의 뜻을 이해하고, 곧바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빗과 함께 마차 안으로 건넸다.
다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왕십칠과 정사낭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넷째 도련님, 이쪽으로 오세요.”
시녀가 말했다. 정사낭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턱을 넘어섰다.
회랑 아래에 곧은 자세로 서 있던 여인이 손을 들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연꽃 연못 위의 바위에서 눈을 내리깔고 정사낭을 힐끗 쳐다보았던, 바로 그 미인이었다.
정교랑이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잠시 넋이 나갔던 정사낭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답례를 하려고 했지만, 뒤에 있던 왕십칠이 그를 밀치는 바람에 엉거주춤 비틀거렸다.
“소생 왕십칠이 낭자를 처음 뵙겠습니다.”
왕십칠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공수의 예를 올렸다. 익숙한 동작이었지만 다소 과장되어 귓가에 꽂아둔 꽃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왕십칠이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역시 미인이네. 움직이지 않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미인이야.”
왕십칠이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상 모든 여인의 아름다움은 가지각색이다. 생기발랄하고 화려한 미인들이 있는 반면, 어떤 미인은 아무런 표정 없이, 말하지도, 웃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화폭 속에 조용히 서 있는 천고 미인과 같다는 뜻으로 그림 같은 미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던가.
정사낭이 왕십칠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누이, 이쪽은 내 외숙부님 댁의 십칠낭이야.”
정사낭이 어색하게 왕십칠을 소개했다.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어서 오세요.”
정교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왕십칠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거슬려?”
왕십칠의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 아쉽네.”
왕십칠이 아쉬움이 담긴 표정으로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정교랑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뭐, 상관없지. 그림 같은 미인은 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낭자는 앞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시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왕십칠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 사람, 설마 바보인가?”
한쪽에 서 있던 반근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주육낭은 도리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정교랑을 쳐다봤다. 저 여인의 입이 얼마나 악독한데.
“그 입 다물지 못해!”
정사낭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왕십칠에게 소리치고 불안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누이, 저, 저놈이 장난을 친 거야.”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좋다고? 뭐가 좋아?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어리둥절했다. 왕십칠만 빼고.
“나쁘지 않네. 아주 좋아. 말만 잘 들으면 됐지. 앞으로 낭자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내가 편안하게 살게 해 줄게.”
정교랑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층계를 내려와 왕십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왕십칠을 위아래, 좌우로 꼼꼼히 훑어보았다.
저 못생긴 놈한테 뭐 볼 게 있다고! 주육낭도 굳은 얼굴로 함께 왕십칠을 쳐다봤다.
열여섯 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에, 키도 나보다 작고 몸이 호리호리한 걸 보아서는 영 튼실하지도 못하겠군. 눈도 코도 조그마해서 나만큼 영리해 보이지도 않아. 얼굴은 꼭 귀신같이 허옇게 칠해서는! 연지분까지 처바르다니!
경성의 귀공자들이 이 정도 화장을 하는 것을 익히 보아 왔던 주육낭이지만, 하필 왕십칠이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영 메스꺼워 보였다.
저 면상에 볼 게 뭐 있다고, 몇 번 더 봤다가는 토 나올 지경이야!
왕십칠에게는 여인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고, 내심 즐기는 일이기도 했다. 왕십칠은 내친 김에 두 팔을 활짝 벌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어떻습니까?”
왕십칠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물었다. 주육낭은 속으로 침을 뱉고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나쁘지 않네요. 다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봐, 이제 시작이야. 주육낭이 꼴 좋다는 눈빛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실컷 욕먹고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낭자,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왕십칠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올해 몇 살이죠? 어디 사람이고요? 집엔 누가 있어요? 가업은요?”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어리둥절했다. 창피해하던 정사낭조차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지금 진지하게 집안을 알아보는 건가?
왕십칠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 우리 앉아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 장인어른께서는 다 알고 계시는 일들이지만, 낭자가 알고 싶다니 내 친히 말해 줄게.”
왕십칠이 손을 뻗어 안쪽으로 가자는 손짓을 하며 정교랑을 향해 눈썹을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 집안의 일인데, 낭자가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당연히 알려 줘야지.”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가벼운 예를 표하고 몸을 돌려 안쪽을 가리켰다.
“공자, 안쪽으로 드세요.”
두 사람이 정말로 대청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더욱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이지? 지금, 진심으로 저러는 건가? 시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근을 보며 물었다.
“아씨께서는 정말 이 혼사를 수락하려고 저러시는 거야?”
시녀의 말을 들은 반근은 잠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난 차를 우리러 가야겠어.”
반근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차를 우린다고…….
“그럼 내가 찻잎을 볶을게.”
시녀가 반근의 뒤를 따라갔다.
정사낭이 뒤늦게 왕십칠을 따라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는 주육낭만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됐다. 주육낭은 대청 안에 세 사람이 나란히 자리한 것을 보았다.
저 생기다 만 놈이 저리 무례하고 노골적으로 쳐다보는데, 저 여인은 왜 아직도 똑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거지? 어서 욕이라도 해! 비웃으라고! 얼른 벽에 걸린 활을 들어서 저놈에게 겨누라고!
“공자, 차 한잔해요.”
그래, 차! 차를 마시라고 해! 그리고 분통 터트려서 죽이라고!
흥분한 얼굴의 주육낭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대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방 안의 웃음소리가 마당을 지나 대문 밖까지 전해졌다. 대문 앞에 도착한 진십삼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택 앞에 세워진 마차는 주씨 집안의 것이었지만,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주 노야나 주육낭의 것이 아니었다.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아하니 남자 손님이 온 게 분명했다.
진십삼은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거리에서 본 사람이 너랑 되게 닮았다고 생각했어. 내가 헛것을 본 줄로만 알았는데 네가 맞았구나.”
“경성에 온 지 그리 오래됐는데, 왜 이제야 아씨를 보러 온 거야?”
대문 앞에 걸터앉은 두 사환이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으로 처음 보는 사환 두 명도 함께 앉아 있었다.
사환들은 강주 말씨를 썼고, 말하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호기심이 많아 각지 사투리를 두루 익힌 진십삼은 사환들의 대화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이 좋네. 주씨 가문에서 아씨께 주신 거야?”
“이 집은 아씨 거야.”
“아씨 거라고?”
사환이 더 물으려는데, 금가아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진 공자님.”
금가아가 서둘러 진십삼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사환들도 얼른 몸을 일으켜서 진십삼을 쳐다봤다.
“다 있나 봐?”
진십삼이 안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금가아는 진십삼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를 알고 물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삼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대청 안에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두 사람이 여긴 왜 온 거야?”
진십삼이 놀란 얼굴로 묻자 주육낭이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교랑이 불렀어.”
주육낭이 인상을 팍 쓰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네까지 어쩐 일이야?”
“지나가는 길이야. 지나는 길에 낭자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세상에서 거짓말을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은 절대 거짓말을 안 한다고 믿는지.”
주육낭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도 못 믿는데 어떻게 남을 믿게 하겠나?”
마당에 소년이 하나 더 늘어나자, 대청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았다. 정사낭이 주씨 저택에서 봤던 소년이었다.
주씨 집안의 아들들이군. 보아하니 주씨 집안에서도 바보 누이를 그냥 내버려 두거나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닌가 보네. 우리 집에 있었을 때처럼 거처를 따로 두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저택은 도관보다는 훨씬 나아. 가구들도 주씨 집안에서 쓰는 것만큼 좋아 보이고.
“내가 궁금했던 것들은 다 해결됐어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사낭이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을 거두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오라버니는 날 보려고 일부러 온 거예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사낭이 서둘러 고개를 내젓고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니야. 난 장강주 선생의 서원에서 공부하러 왔어.”
“나는 낭자를 보려고 일부러 왔지.”
왕십칠이 말했다. 정교랑이 싱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정사낭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옷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누이는 뭐 필요한 거 없어? 많지는 않지만, 이거 가져가서 써.”
얼마 되지 않는 액수에 손이 부끄러웠는지 정사낭의 얼굴이 붉어졌다.
“며칠만 더 지나면 집에서 다시 돈을 부쳐 주니까, 그때 더 보태 줄게.”
왕십칠이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 집에 남아도는 게 돈이니까. 낭자를 우리 집에 데리고 가기만 하면, 돈은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쓸 수 있어.”
역시 둘 다 바보였어. 문 옆에 앉아 있던 시녀와 반근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반근.”
정교랑이 부르자 시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정교랑의 말뜻을 이해한 시녀는 정사낭에게서 돈주머니를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정사낭을 보고 미소 지으며 나긋이 말했다.
“도련님은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내가 복이 많다고? 오라비가 누이를 챙겨 주면 누이가 복이 많은 거 아닌가? 정사낭은 이해가 되지 않는 눈길로, 돈주머니를 받아 물러가는 시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럼 오라버니의 글공부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요.”
“방해는 무슨, 아니야.”
왕십칠이 웃으면서 정사낭을 대신해 대답하자, 정사낭이 그를 흘겨보고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난 성 밖에 있는 서원에서 묵고 있어. 장강주 선생의 서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어딘지 알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