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75)

  • 작가의 말

1) 턱을 잘라 붙였다는 이야기는 홍매(洪邁)가 엮은 설화집 <이견지 (夷堅志)>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민간에 퍼진 기이한 사건과 괴담을 모 았다 보니 황당하긴 합니다.

2)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마음이 움직인다(仁者心動)는 진 공자의 말은 육조 혜능대사가 법성 사에 들어갈 때의 고사를 인용했습니다.

-행운-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통에 나무의 나뭇잎까지 시들면서, 마당의 그늘도 있으나 마나 했다. 무더위 속에서도 매미는 쉼 없이 울어댔다.

“빨리, 빨리!”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목소리를 죽여 호통을 쳤다. 사환들이 장대를 들고 달려와 나무에 붙은 매미를 치자, 마당이 비로소 고요해졌다.

“이 아둔한 놈!”

서재에서 흘러나오는 유 교리의 호통 소리는 고요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이마를 부여잡은 두칠의 몸은 이미 찻물로 범벅이었고, 바닥에는 찻잔이 나뒹굴고 있었다.

“할아버님. 저, 저는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려던 건데…….”

두칠은 억울한 눈치였다.

탁자 뒤에 앉은 유 교리는 집에서 입는 낡은 장포 차림이었다. 수십 년을 한결같이 입었던 옷으로, 수척한 유 교리의 얼굴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인자하고 온화한 얼굴의 유 교리는 가까운 이든 존경하는 이든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미소로 대했다.

고학 끝에 과거에 급제한 유 교리는 비서성의 구품 교서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검은코뿔소 허리띠에 녹포를 입고, 은어대(銀魚袋: 5품 이상이 관복에 패용하여 위계를 나타내는 물고기 모양의 장식물)를 차는 비각 교리까지 올라갔다. 관직을 기다리는 자들의 임명권을 쥔 자리이자 어전에서 황제와 독대할 수 있는 자리였다.

당초 돈이 없어 재물을 대고 이력을 만들 수 없는 처지였기에 평생 제대로 된 일 하나 못 맡을 거라며 무시하던 동창들도 지금은 경외감 어린 눈빛으로 유 교리를 우러러보거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유 교리는 시종일관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대했고, 문제를 일으킨 적 또한 없었다. 자신을 비웃고 무시했던 자에게도 똑같이 대했다. 물론 그들은 그 뒤로 운이 안 좋아졌지만.

후배의 눈엔 살가운 선배였고, 상관의 눈엔 믿음직한 수하였다. 박학다식하고 글씨도 훌륭했으며 수십 년간 유능한 관료였다. 아무리 번잡한 공무도 그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었다. 남들이 못 찾는 문서도 대번에 찾았고, 남들이 잘 모르는 법령도 줄줄 읊었다. 승진할 때면 늘 맨 뒤에 섰고, 그 누구와도 얼굴을 붉힌 일이 없었다.

먼저 가세요, 먼저. 전 이게 편하고 좋습니다. 늘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성실하고 욕심 없는 이를 그 어느 상관이 아끼고 중용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를 아끼지 않고 중용하지 않는 상관도 있었다. 뒷배 덕에 벼락출세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벼락출세한 인물이 경성 관료로 수십 년을 버틴 노회한 유 교리의 상대가 될 리는 만무했다. 번잡한 공무엔 허점이 있기 마련이었고, 결국 그들은 불운 속에 서서히 사라져 갔다.

삼십 년이라는 시간은 힘없고 보잘것없으며 아무 기반도 없던 작은 묘목을 구석구석 뿌리를 뻗고 있는, 가지 많고 잎이 무성한 나무로 키워 놓았다.

유 교리 자신도 무엇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는지 곱씹어 봤지만, 다른 건 없었다. 오직 마음뿐. 마음을 다해 일하고, 마음을 다해 기억했으며, 마음을 다해 처세하고, 마음을 다해 신중을 기했다.

집안에는 수많은 재산이 있고 논밭만 해도 고향 땅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풍족한 형편이었지만, 경성 사람들 앞에선 늘 삼십 년 전 막 상경한 풋내기 서생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검소하고 일을 할 때든 사람을 대할 때든 삼가고 조심했다.

일 년을, 십 년을, 삼십 년을 그렇게 지냈다. 유 교리 본인조차도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그런 본인의 처세에 놀랄 정도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밤중일 때에 불과했다. 겹겹의 장막 뒤에 홀로 앉아 있을 때는 자신의 손으로 내쫓고 가로챈 남의 집 가산과 처자식들을 손으로 꼽아 보며 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소리는 내지 않았다.

아무리 밤의 어둠이 엄호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본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나 겸손한 몸뚱이 아래로 숨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 참아야 했다.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 믿으면서.

그런데 일개 무관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다. 더구나 자신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랬다니, 유 교리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인간에게는 따끔한 교훈을 줘야 했다. 분수도 모르고 제가 잘난 줄 알던 이들을 상대할 때처럼.

주씨 가문에서는 여인들에게도 무예를 가르친다니, 다른 집 규방 여인들을 가지고 놀 때와는 그 맛이 다를 테지. 그래도 지금껏 늘 그랬듯, 차근차근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우선 주가 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분위기를 살필 생각이었다. 발 벗고 나서서 돕는 이가 있는지 확인한 후, 서서히 도모하면 되니까. 그런데 무능한 양손자 놈이 그새를 못 참고 분풀이를 하다니!

이건 자신을 드러내는 일과 다름없지 않은가! 조심성 없는 놈 같으니라고!

“혼쭐 같은 소리 한다! 일을 돕기는커녕 망쳐 놓았어!”

길길이 날뛰던 유 교리가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저쪽엔 신의가 있어. 손도 붙였다지 않느냐. 네가 그따위로 굴면 경계하라고 겁주는 꼴이지 무슨 도움이 돼!”

두칠이 얼른 일어나 차를 따랐다.

“그 신의란 자는 죽을병이 아니면 안 고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이대작은 손이 잘렸을 뿐 죽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고쳐 줬죠. 이대작과 보통 관계가 아닐 뿐더러 태평거는 주씨 가문의 재산이 확실하다는 증거 아닙니까.”

두칠은 헤헤 웃었다.

뭐가 좋으냐고? 붙이면 뭐? 한번 잘렸던 손이다. 초주검이 될 정도로 놀랐고 아파 끙끙 앓았을 테니, 태평거 사람들도 무서운 게 뭔지 똑똑히 알았겠지. 인생은 결국 자존심이니까.

두칠의 생각을 꿰뚫어 본 유 교리는 역겨운 마음에 시선을 돌렸다. 이놈을 계속 옆에 두어선 안 되겠군. 이대로 뒀다간 나까지 망칠 놈이야.

유 교리는 다시 옅은 웃음을 지었다.

“호랑이부터 처리해야지. 아직 원숭이를 건드릴 때가 아닌데, 뭘 그리 성급하게 굴어?”

“할아버님, 저들은 이미 걸려들었습니다. 할아버님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유 교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고기가 내 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결코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유 교리는 서두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말했다.

“할아버님은 저들을 너무 띄워주십니다. 그깟 주씨 가문이 무슨 대수라고요. 과거 문 상공은 전공이 혁혁한 무장도 근거를 들어 참해 버렸습니다. 나서서 편드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결국 죽여 버렸죠. 십 년을 전장에서 바친 무관도 어사화 꽂은 진사한테는 못 당하는 법 아닙니까.”

“주씨 가문은 별거 아니다만, 그 신의란 자가…….”

유 교리는 생각에 잠겨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강주 바보요?”

두칠이 픽 웃었다.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이가 누군지 드디어 알게 된 두칠은 주씨 가문의 아랫것들을 수소문해 정보를 파악했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두칠은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와 웃음을 지었다.

“그 바보가 진짜 바보였는데, 기인을 만나 병이 나았답니다. 그 기인한테서 비술도 얻었고요.”

“그러니 수십 년 넘게 의원 노릇을 해야 터득하는 의술을, 열댓 살 먹은 낭자가 그토록 잘 아는 거겠지.”

유 교리는 담담한 말투였다.

비술이라, 주씨 가문엔 비술이 많기도 하군. 죽은 사람을 살리고 두부까지 만들어 내다니, 다음엔 또 뭐가 있으려나? 이참에 주씨 가문을 철저히 짓밟고 그 비술을 전부 내 손에 넣으면, 난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이 되겠지.

그런 생각이 스치자, 유 교리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바보든 아니든, 이제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닌 이다. 주씨 가문을 막다른 길로 내몰았다가, 급한 마음에 무슨 조건이라도 내걸어 누군가를 움직이는 날엔 우리한테 불리해져.”

유 교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더욱 짙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낮췄다.

“어느 정도 숨을 쉴 공간은 만들어 줘야 서로에게 좋지. 궁지에 몰린 적은 쫓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젠 주 노야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봐야지. 일단 돌아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

그자가 돌아오면 갖은 수로 괴롭혀 줘야지. 사실 유 교리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꼴을 몹시도 거슬려 했다.

말을 마친 유 교리가 두칠을 쳐다봤다. 요 며칠 기분이 좋아진 두칠은 다시 분칠을 하고 꽃을 꽂은 터라 향내가 진하게 났다.

“넌 조용히 있어라. 또 문제를 일으켜 내 일을 망쳤다간, 너부터 가만두지 않겠다.”

유 교리가 천천히 말했다. 이 더운 여름날, 선하게 생긴 노인은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였지만 두칠은 오싹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두칠은 웃으며 연신 알았다고 했다.

아침 해가 환히 밝았을 무렵, 누가 정교랑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또 왔어요?”

금가아가 밖에 있는 주육낭을 보며 소리쳤다. 마당에 있던 서무수가 고개를 돌리자, 금가아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오던 주육낭도 서무수를 쳐다봤다.

“주 공자.”

서무수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지만, 주육낭은 서무수를 상대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서 대형.”

온화한 사내의 목소리도 들렸다. 서무수는 주육낭을 뒤따라 들어온 진 공자를 보며 다시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삼입니다. 십삼이라 부르면 돼요.”

진 공자가 자기소개를 했다. 서무수는 대꾸하지 않고 주육낭을 쳐다봤다.

“공자, 누이가 연일 고단하여 아직 쉬고 있습니다. 일이 있거든 다음에 오십시오.”

서봉추와 범삼축도 대청에서 나와 못마땅한 눈길로 주육낭을 보며 걸어왔다.

누이라…….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걸음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여봐란듯이 회랑 쪽으로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충돌할 듯한 양측의 분위기에 진 공자가 얼른 소리쳤다.

“서 대형, 우린 도우러 온 겁니다. 이 일은 한 사람이라도 더 돕는 게 좋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락사락 옷자락 소리가 나더니 회랑 왼쪽에 있던 여인이 몸을 돌렸다. 여인은 땅까지 끌리는 짙푸른 옷에 긴 흑발을 뒤로 묶고, 손에 부채를 든 채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도와주면, 내가 다리를 고쳐 줄 것 같아요? 차라리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 애원하는 게, 더 쉬울 텐데요.”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인의 말에 흥분한 주육낭은 또다시 얼굴이 시뻘게졌다.

저 여인이 하는 말은, 왜 늘 이렇게 사람을 열 받게 하는지! 기껏해야 절대 안 고쳐 준다고 말할 줄 알았더니, 무릎을 꿇고 고쳐 달라 빌라고?

주육낭은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다가섰다.

“그냥 돕겠다는 겁니다. 이걸로 낭자를 협박할 생각은 없어요.”

진 공자는 웃으며 사환의 부축을 받아 간단하게 예를 표했다.

“낭자한테 잘 보이고 싶을 뿐이죠.”

그 재치 있고 솔직한 말에 시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교랑 역시 진 공자를 힐끔 보고 돌연 훗 미소를 지었다.

“말해요, 들어 볼게요.”

정교랑이 부채질을 살살 했다.

“도움을 준다면, 다리를 고쳐 주죠.”

주육낭은 깜짝 놀랐고, 진 공자 역시 흠칫 놀랐다.

“뭐라고?”

주육낭이 소리치며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도움이 돼서 아씨의 기분이 좋으면, 다리를 고쳐 주시겠다고요.”

시녀가 못마땅한 투로 내뱉었다.

그간의 일로 봤을 때, 거짓말할 여인은 아니다. 항상 원칙을 정하고, 그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도움을 주면 다리를 고쳐 주겠다니……. 학수고대하던 일이 돌연 현실로 이루어지자 두 사람은 민첩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멍한 채로 있었다.

“도울 수 없으면, 관두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안 돼!

“도울 수 있어!”

주육낭이 소리치자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봤다.

“그 집도 망하기 직전 같은데, 날 돕겠다고요? 폐를 끼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주육낭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폐를 끼치는 건데! 애초에 네가 아니었으면 일이 이렇게 됐을 것 같아?

“네가 진작 말했으면, 우리도 대비했을 거 아냐!”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작심한 게 있으면서 이제야 알게 하다니. 그래 놓고 그때는 전혀 관심 없는 척 굴었지.

“그 과로신선은 본디 네 것인데 두씨한테 빼앗겼잖아. 그래도 괜찮냐고.”

“내 것도 아닌데 안 괜찮을 게 뭐 있죠?”

결과는 어땠지? 신선거의 옛터에 갑자기 태평거가 나타났다. 주점이며 가정집이며 여기저기서 다들 만들어 먹는 낙득자재도 저 애의 작품이고.

“그렇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만든 건, 정말 형편없었어요. 음식이 아까워서, 가르쳐 준 거예요. 사람들과 함께 즐겨야, 진짜 맛있잖아요.”

사람들과 함께 즐긴다고? 하, 그게 이 뜻이었군. 말장난에 도가 텄을 뿐더러 사람을 갖고 노는 재주가 있어! 사기꾼 같으니라고!

가만있자. 지금 저 말, 믿어도 되는 건가?

도움을 준다면, 다리를 고쳐 주죠. 주육낭은 정교랑의 말을 속으로 다시 곱씹으며 빈틈이나 허점은 없는지 한 자 한 자 되새겼다.

주육낭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넋을 놓고 있자, 정교랑과 진 공자는 주육낭을 내버려 둔 채 사환의 부축을 받아 대청으로 들어갔다.

“낭자, 정말 유혹적인 말씀입니다. 곧 죽을 사람에게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라 해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칼을 들 겁니다.”

정교랑이 자리에 앉으며 진 공자를 쳐다봤다.

“그래서, 할 수 있단 거예요?”

정교랑이 물었다.

“그럼요.”

진 공자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더 아끼는 법이죠.”

진 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소생은 낭자와 함께하고자 합니다.”

진 공자는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아 높이 들어 경의를 표한 후 단숨에 들이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유가 놈한테 바로 손을 쓰죠.”

“그럼 두칠은?”

주육낭이 문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패 죽이면 그만이지.”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주육낭은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그런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이미 손에 여러 사람의 피를 묻힌 저 여인은 그렇다 치고, 이젠 십삼까지 난리네!

주육낭은 진 공자를 쳐다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온화한 얼굴에 봄바람처럼 따스한 미소였지만, 자세히 보니 자신을 쳐다보는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다. 은은한 불꽃이 그 안에 불타오르듯이.

방금 말한 게 그런 뜻인가? 곧 죽을 사람에게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하면, 돕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라 해도 거리낌 없이 칼을 들겠지. 말로는 나더러 내려놓으라더니, 결국 자신이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어.

진십삼이 내려놓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저 여인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둔, 본인조차 잊고 있었던 본성을 건드리며 도발한 것일까. 사람을 죽인다니…….

“이렇게 된 이상, 그런 조무래기는 신경 쓸 것 없어.”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말했다.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옆에 가만히 꿇어앉았다.

“아버지는 열흘 정도 더 있어야 돌아오실 거야. 아직 계획을 세울 시간이 있어.”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아요.”

뭐라고? 주육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부랑배 몇 놈을 죽이는 것처럼 간단한 일 같아? 지금이 감정을 앞세울 때냐고! 그래, 아버지께서 전엔 널 무시하고 매정하게 대하셨어. 그건…… 널 주씨 가문의 혈육으로 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좋아. 듣기 거북하고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렇잖아. 넌 이제 쓸모가 있고, 바보가 아니야. 당연히 우리 주씨 가문의 혈육이지. 아버지께서 수수방관하실 리 없어. 몇 마디 나무라시긴 하겠지만, 절대 널 버리거나 외면하시진 않을 거야.”

주육낭이 말을 마친 후 실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이 그랬다. 전에는 폐인이어서 주씨 가문에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러니 버려둔 채 외면하고 가엾이 여기지 않았지만, 지금은 쓸모가 있다. 그러니 주씨 가문에서 살뜰히 보살펴 줄 것이다. 듣기 거북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여인이 속으로 훤히 알고 있는 진실을 기어이 입으로 내뱉었을 뿐이다.

“감정을 앞세워요? 괜한 생각이에요.”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리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 일에서, 그쪽 아버지는 나한테 도움이 안 돼요.”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은 깜짝 놀라 곧 얼굴이 시뻘게졌다. 뭐라는 거야.

“돌아오기 전이 최적의 기회예요.”

정교랑은 진 공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유 교리는 지금 모든 걸 주 노야가 사주한 것으로 알아요. 겁을 줬으니 주 노야가 돌아오기 전까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우리로서는 지금이 가장 안전하고 움직이기 편할 때죠.”

진 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유 교리는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선 기회예요.”

정교랑의 말에 진 공자가 씩 웃었다.

“우리, 라는 말이 마음에 드네요.”

“그래서 어쩌려고?”

주육낭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오만방자하게 나가야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뭐라고? 오만방자?

점심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거리는 찌는 듯이 더웠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주점으로 몰려들었다. 신선거의 대청에도 요 며칠은 손님이 많았다. 여름이라 과로신선을 주문하는 이가 적다 보니, 다른 주점처럼 볶음 요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두칠은 거울을 보며 새 꽃을 단정하게 꽂았다. 창문을 통해 대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지? 재수 없는 기운이 사라지니 장사도 잘되네.”

장부를 맡은 관리인은 아직 그렇지 않다는 걸 훤히 알았지만, 주인장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네, 그럼요. 일이 다 해결됐으니, 이제 장사는 잘될 일만 남았죠.”

관리인은 웃으며 두칠의 말을 거들었다. 두칠은 모자를 만지며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에 비친 대청의 모습을 보며 말을 이어 가던 두칠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거울 속 대청에서 소란이 일었고, 곧이어 귓가에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두칠이 거울로 얼굴을 바짝 갖다 대자, 몽둥이를 든 사내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부숴라, 전부 부숴 버려!”

몽둥이를 사정없이 내려치는가 싶더니 탁자가 날아가고 음식들이 이리저리 쏟아졌다.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대청은 아수라장이 됐다. 손님들은 서둘러 나가기에 바빴다.

“뉘시오?”

점원들은 거칠고 우악스러운 사내들을 보고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두칠 나오라고 해!”

사내들은 점원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몽둥이를 들고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점원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뭐 하는 놈들이냐? 이게 무슨 짓이야!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서둘러 나온 두칠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손을 내저었다.

“뭐 하는 놈이냐고? 네가 두칠이냐? 제기랄, 토끼 새끼처럼 치장하고 있는 꼴 하고는.”

서봉추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 우리 태평거에 똥오줌을 지려 놓은 그 망할 놈이냐? 그러고도 우리가 누군지 몰라?”

서봉추가 손에 든 몽둥이를 앞으로 훅 찌르자, 두칠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어깨를 맞고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서봉추는 바닥을 뒹구는 두칠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퉤, 넌 남의 손을 욕심냈으니, 난 네 팔을 가져가야겠다. 그래야 공평하지!”

“대인,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주인어른께선 그놈들 손에 벌써 관아로 끌려가셨습니다.”

관리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관리인 앞에 있는 사내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방금 한 말을 전혀 못 들었다는 듯이.

“유 대인…….”

관리인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유 교리가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자, 관리인은 움찔하여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태평거 사람이 두칠을 때렸다고?”

유 교리가 물었다.

“네, 방금 여럿이 쳐들어와서는 벌건 대낮에 우리 신선거를 뒤집어엎은 것도 모자라 주인어른까지 때렸습니다. 관부에서 나와 상처를 살폈는데 팔이 부러졌답니다.”

관리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뭐라고 하더냐?”

유 교리가 천천히 물었다.

“그러니까, 태평거가 무뢰배한테 당했다며…….”

관리인이 입을 열자 유 교리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너더러 말하라는 게 아니다.”

유 교리는 옆에 서 있던 시종을 보며 말했다.

“관아에 갔던 황씨는 돌아왔느냐?”

시종은 곧장 밖으로 나가 알아보더니 누군가를 데려왔다.

“두칠이 부상을 입었는데, 의원 말로는 팔을 못 쓰게 됐답니다.”

관리인은 그 말에 절규했다.

“대인, 주인어른의 팔입니다!”

“팔이 뭐?”

유 교리는 호통을 치며 관리인의 말을 끊었다.

“숙수도 아니고, 팔로 밥벌이를 하며 사는 것도 아닌데 웬 호들갑이야. 목숨이 붙어 있는데, 그깟 팔이 대수더냐!”

아, 그런가? 관리인은 더 이상 울지 못하고 울상만 지은 채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놈들은 소리소리 지르며 태평거에서 소란을 피우고 이대작의 손을 자른 게 두 대인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복수를 한 거라면서요.”

시종이 말을 이었다.

“경조부(京兆府)에서 증인이나 증거가 있냐고 하자, 저들은 증거와 증인을 대지 못하면서도 두칠의 소행이라고 잡아뗐습니다. 결국 경조부윤이 형장으로 다스린 후 하옥시켰고요. 대인, 사적으로 복수하려고 한 게 틀림없습니다.”

“대인, 잘됐습니다. 옥에 가뒀다니 거기서 옥사하게 만드십시오!”

관리인까지 나서서 소리치자 유 교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때에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건, 개죽음을 당하겠단 소리나 다름없다. 아무 증거도 없이 복수하겠다며 사람들 앞에서 가게를 뒤집어엎다니, 저 스스로 칼을 내주는 꼴 아닌가.

내가 나서기도 전에 경조부에서 곧장 하옥시켰다고 했다. 옥에 들어간 건 목숨을 내놓은 일이나 마찬가진데, 너무 아둔한 처사 아닌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유 교리는 신중한 사람이었고, 세상사의 어두운 면을 잘 알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항상 최악의 경우부터 생각했고,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늘 가장 나쁜 쪽부터 헤아려 봤다. 세상인심이라는 게 그랬으니까.

겉으로만 공경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은밀히 다른 사람과 손잡고 유 교리를 계략에 빠뜨려 희생양으로 삼고자 한 이들이 있었다. 물론 겉으로만 공경하고 친절했던 그들은 결국 유 교리의 희생양이자 디딤돌이 되곤 했다.

세상엔 좋은 사람도, 친구도 없는 법이다. 오직 이용뿐.

태평거 사람들이 여봐란듯이 찾아와 두칠을 팼다. 저들이 말하는 대로 그저 복수하려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음모가 있을까? 주씨 가문이 나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또다시 사환이 뛰어 들어왔다.

“대인, 진 상공 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사환이 명첩을 올리며 말했다.

거봐, 동작 한번 빠르군. 굳어 있던 유 교리의 표정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주 노야를 처벌한 일은 어차피 조만간 알려질 터였다. 신중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작심하고 알아본다면 금방 알아낼 것이다. 애초에 영원히 비밀에 부칠 생각도 없었다. 원숭이 보라고 닭을 죽여 일벌백계로 삼은 게 아닌가. 닭을 죽여 원숭이를 놀라게 했는데, 실상 그 원숭이의 주인을 모른다면 괜히 헛수고만 한 셈이니까.

유 교리는 머릿속으로 사건을 다시 한번 쭉 정리해 봤다. 처벌의 이유가 합당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황제를 알현한다 해도 무사히 넘어갈 텐데 일개 진 상공쯤이야. 지위는 나보다 높다지만, 그렇다고 겁낼 게 뭔가. 이 관료 사회에서 굴러먹는 사람 치고, 먼지 하나 안 묻은 사람이 있느냐 말이다.

진씨 가문만 해도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남의 논밭을 빼앗은 일이 적지 않고, 동 내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더러운 일에 얽힌 게 한두 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들이 내게 압력이라도 가한다면 도리어 좋은 일이다.

유 교리의 얼굴에 다시 예의 그 미소가 번졌다.

“어서 들라 해라.”

마차가 신선거 앞에 멈춰 섰다. 신선거는 이미 휴업에 들어간 터라 문만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뭘 말해야 하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 알지?”

진십삼이 주육낭을 잡아당기며 묻자,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고 진십삼을 노려봤다.

“자네는 그 인간들 목숨이나 잘 챙겨. 감히 그런 짓을 벌이다니. 경조부 감옥은 보통 무시무시한 곳이 아니야. 눈 깜짝할 새에 생사가 갈린다고.”

“걱정 마. 그 형제들의 목숨일 뿐만 아니라 내 목숨이기도 하니까.”

진십삼이 말했다. 주육낭은 잠자코 진십삼을 보다가 몸을 돌려 마차에서 내렸다. 정교랑도 시녀의 부축을 받아 옆의 마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친 후, 별다른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탁자와 의자를 정리 중이던 점원 셋과 늙은 관리인은 이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손을 멈췄다.

“오늘은 영업을 안 하는데요.”

늙은 관리인이 웃으며 말하자 주육낭이 힐끔 쳐다봤다. 선하게 생긴 얼굴에 부드러운 말투였다. 옷차림도 점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밥 먹으러 온 게 아니오.”

“주 공자, 외람되지만 이 늙은이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무 증거도 없이 쳐들어와 소란을 피워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습니다. 아무리 동종 업계 종사자는 원수라고 한다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면 양쪽 모두한테 안 좋아요. 지켜보는 사람들이나 좋아하지요.”

주육낭이 콧방귀만 뀔 뿐 대꾸하지 않자, 뒤에 있던 정교랑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예를 표했다.

“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 대인.”

유 대인? 주육낭은 흠칫 놀라며 노인을 다시 살폈다.

유 교리는 바깥출입을 자제하며 오랫동안 경성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왔다. 더구나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있다 보니 주육낭처럼 한참 어린 후배는 주의 깊게 본 적도 없었다.

이리 초라하게 생겼었군, 그러니 눈에 안 띄지. 무는 개는 짖지 않고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어.

노인 역시 미소를 지으며 정교랑을 훑어봤다. 풋풋한 십대 소녀인데 허약해 보이는군. 연약하지만 온화하고 기품이 있으며 용모 또한 곱구나. 눈이 보통 사람과 달라 특이하게 보이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해. 이게 바로 그 강주 바보란 말인가.

귀신을 믿지 않는 유 교리도 세상사의 무상함은 확신했다. 어쨌거나 매사 조심하고 방심해선 안 된다. 바보였던 아이가 병이 나았다면, 기이한 인연을 만난 건 틀림없으니까.

유 교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을 다 하시오. 당치 않소이다.”

유 교리는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한편 진 노태야는 생각에 잠겼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갑자기 유씨와 얽히다니?”

진소가 한숨을 쉬었다.

“귀덕낭장이 좌천됐고, 태평거의 숙수는 폭도들에게 기습을 당했습니다. 신선거는 대낮에 발칵 뒤집어졌고요.”

아주 엉망진창이군. 진 노태야는 손을 뻗어 이마를 꾹꾹 눌렀다.

“결국 지난번 그 일 때문이구나. 유 교리가 점점 욕심이 늘고 있어.”

“아버지께서는 그 일을 유 교리가 사주했다고 보십니까?”

진소가 물었다.

“지난번 일은 몰라도 이번 일은 틀림없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 교리가 너무 오래 순탄하게 지냈는지 간이 점점 커지는구나.”

“정 낭자가 어떻게 나갈까요?”

진소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설마, 죽이진 않겠죠?”

거기까지 말한 진소가 실소를 터뜨렸다. 상대는 비각 교리가 아닌가. 사대부는 황제도 함부로 못 죽이거늘. 그러나 진 노태야는 웃지 않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 낭자는 말이다, 정말 보통이 아니야. 늘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지. 식당을 하나 열었을 뿐인데, 성가신 일이 좀 많이 생겼더냐?”

“세상살이는 본디 힘든 법이죠. 순풍에 돛 단 듯 사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진소가 웃었다.

“사람은 때로 피할 수 없는 일을 만나는 법이지. 그건 똑바로 직시할 수밖에 없어.”

“정말 유 교리한테 손을 쓸 거란 말씀입니까?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진소가 놀라 물었다.

상대는 관료란 말이다! 그것도 경성 관료! 수십 년간 경험을 쌓은 노회한 경성 관료!

“뭘 하려는 생각인진 나도 모른다. 그 여인은 절도 있게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아무 규칙이 없어.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단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 교리는 이번에 이빨이 뽑힐 게야.”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하죠? 유 교리를 만날 수 있도록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달라고만 했을 뿐, 다른 얘기는 전혀 없었는데요.”

“그 낭자가 알아서 할 테니 먼저 움직일 필요 없다. 말해야 할 때가 오면 저쪽에서 말할 거야. 아무 말 없을 땐 너도 잠자코 있어라. 낭자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날엔…….”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공연한 걱정을 하는 걸지도 모르죠. 유 교리와 화해를 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 역시 자신을 지키는 일이니까요.”

과연 그럴까? 진 노태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자코 있었다.

다른 이였다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중재해 줄 사람을 찾아 화해를 시도했을 것이다. 다른 이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멀찌감치 물러서거나 작은 희생을 감수했겠지만, 이 낭자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보통이 아니었다.

지난번 무뢰배 사건만 해도 그랬다. 숨지 않고, 피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지 않았는가. 자신을 협박하는 이를 깔끔하게 죽여 없애 버렸다. 이번엔 자신을 무는 이가 나타났는데, 과연 그냥 놔줄까?

별실 안. 자리에 앉은 유 교리는 정교랑과 주육낭이 예를 표하길 기다렸다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 낭자의 명성은 익히 들었건만 만날 인연이 없었는데, 진 상공의 주선으로 이리 만나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오.”

주육낭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정교랑을 쳐다보며 호통을 쳤다.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 어서 말씀드려!”

도리어 놀란 것은 유 교리였다.

“유 대인, 사실이에요.”

정교랑은 유 교리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태평거는 제 것이고, 외숙부님 일가는 전혀 모르셨어요.”

뭐라고? 유 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 대인.”

몸을 엎드린 정교랑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저도 미처 몰랐어요. 군졸 출신 사내들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입니다. 졸개로 쓸까 하고 은혜를 베풀었죠. 이 대작이 두 대인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기에 저 역시 두 대인한테 겁 좀 줄까 했던 건데, 그자들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유 교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잠자코 수염만 쓰다듬었다. 잘못을 인정하며 화해를 청하는 건가? 감히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대담하면서 일을 계속 끌고 갈 담력은 없다고?

“유 대인, 외숙부님께서 곧 돌아오세요. 제가 이런 일을 벌인 걸 아시면, 절 강주로 돌려보내실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유 대인, 경성에서 어렵사리 입지를 굳히게 됐는데, 이대로 모든 걸 잃을 순 없습니다.”

주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다? 모든 걸 이 강주 바보 혼자 꾸민 짓이다? 너무 억지스러운데?

“제 잘못도 있습니다. 당초 제가 이 아이를 신선거로 데려갔던 건데, 과로신선 때문에 두 대인과 틈이 생겼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주육낭은 다시 정교랑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은밀히 태평거를 열 계획을 꾸미다니! 아주 잘하는 짓이다!”

유 교리가 껄껄 웃었다.

“정 낭자가 그만큼 유능한 것이니, 이를 탓할 수야 없지. 다른 이였다면 그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두칠 그 못난 놈을 봐라. 조상이 닦아 준 기반에 좋은 운까지 만났지만, 신선거의 신선을 못 붙잡지 않았더냐.”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인자한 노인이 싸우는 소년과 소녀를 타이르며 화해시키는 줄 알았을 것이다.

“재주가 있으면 나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이죠.”

주육낭은 유 교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대인, 실은 아직 부모님께 이 일을 말씀 못 드렸습니다.”

“그건 두 사람이 잘못한 게야.”

유 교리는 자애로운 웃어른이라도 된 듯 온화한 말투로 타일렀다.

“부모는 부모인 법인데, 어찌 부모를 속이나? 일이 있으면 솔직히 말씀드리고 함께 대책을 세워야지.”

“그분들이 절 위해 대책을 세운다면, 절 어떻게 할 것 같으세요?”

“입 다물어! 이 판국에도 네 생각만 하는 것이냐?”

정교랑의 말에 주육낭이 호통을 치자 유 교리가 나섰다.

“싸우지들 마라, 싸우지들 마.”

유 교리는 웃어른으로서 심히 근심스러운 듯 일어나 손까지 내밀며 타일렀다.

“좋게 말로 풀어야지.”

정교랑이 유 교리를 보며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유 대인, 과로신선은 제가 가르쳐 줬습니다. 점포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건, 본디 그자의 잘못인데, 뒤에서 제게 칼을 꽂았죠. 유 대인, 그자가 대인의 양손자라 해도, 솔직히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그런 양손자는 대인의 체면만 깎을 뿐인 걸요.”

유 교리가 껄껄 웃었다.

“괜찮소, 괜찮아. 잘못을 저질렀다면 나라도 혼냈을 거요. 다만 밖에서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린 증거로 말해야 하지 않겠소?”

“증거는 사람의 마음에 있죠.”

“진 대인을 통해 이 늙은이의 본심을 떠보려는 거요?”

유 교리는 웃으며 ‘진 대인’이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실어 말했다. 소년과 소녀는 망설여지는 듯 잠시 침묵했다.

“저희는 유 대인께 잘못을 빌러 왔습니다. 이 일이 원만히 마무리될 수 있도록,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주육낭의 말에 유 교리가 껄껄 웃었다.

“정말 어리구나.”

유 교리의 말은 간곡하면서도 의미심장했다.

“부모님의 꾸중이 겁난다면 우선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우선이다. 잘못을 깨닫고 고칠 줄 알면 그보다 대단한 일은 없는 법이지. 겁내지 마라. 소란을 피우고 관부로 잡혀간 이들이 걱정되는 거라면, 관부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경조부윤 대인에게 일을 매듭짓게 하면 될 일이야. 어쨌거나 이 일은 시정잡배들이 저지른 소란이다. 일을 끝내고 싶거든 원고를 찾아가야지. 원고가 추궁하지 않겠다고 하면 자연히 끝날 일이 아니냐.”

“그럼 어떻게 해야 원고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을까요?”

유 교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원고한테 가서 물어봐야지.”

온화한 표정으로 말하던 유 교리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했다.

“아, 참. 정 낭자는 도조 이 진인께 사사했다고 들었소. 죽은 사람도 살리고 끊어진 사지도 다시 붙인다니, 가서 녀석의 팔을 고쳐 주면 얘기가 쉬워지지 않겠소?”

주육낭이 혀를 찼다.

“도조 진인의 제자는 무슨!”

정교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품에서 꽃으로 수를 놓은 향낭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도조 진인까지는 아닌데, 귀인을 만나긴 했죠. 그분께선 제 병을 고쳐 주시고, 이 비술을 남기셨어요.”

유 교리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려. 정 낭자가 정말 운이 좋았소.”

유 교리는 웃으며 조금도 미련이 없는 듯 향낭에서 시선을 뗐다.

“이걸 대인께 드릴 테니 의원을 구해 오세요. 여기 적힌 방법대로 하면 두칠의 팔을 고칠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 이걸, 왜 나한테?”

유 교리는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당사자들의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풀어야지.”

“제가 사람을 시켜 폭력을 휘두른 다음 또 제가 가서 치료해 주다니요. 대인, 그건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에요. 하지만 대인은 다르시죠. 대인은 두칠의 가족이니, 대인께서 고쳐 주시면, 대인께 더욱 고마워할 거예요. 그때 저희를 불러 화해를 주선해 주시는 게, 가장 좋아요.”

유 교리는 그래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해를 주선하는 건 말로 하는 일이니, 그냥 내가 하면 될 일이오. 낭자, 이럴 필요 없소.”

“말로만 하면 성의가 없죠. 저는 제 힘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만큼, 이 일로 태평거를 망치고 싶지 않아요. 외숙부님께서 이 일을 알고, 강주로 돌려보내시는 것도 싫고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장 편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절 도와줄 분은, 유 대인밖에 없어요.”

말을 마친 정교랑은 다시 엎드려 향낭을 내밀었다.

“부디 제 가련한 신세를 가엾이 여겨 주세요. 모친을 일찍 여의고 아버지에게 내쳐지고 친척에게 박대당하는 처지입니다.”

옆에 있던 주육낭은 표정이 일그러지면서도 가까스로 참으며 말을 삼켰다. 유 교리는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최종적으로 향낭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럼 내가 한번 해 보지.”

이번에는 정교랑과 주육낭이 함께 예를 표하며 감사를 전했다.

“대인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 다 아직 어려서 하는 말인데, 일이 생겼을 때 충동적으로 굴거나 부모를 속이려 들면 못써. 이 일은 일단 내가 덮어 주겠지만, 그래도 귀덕낭장이 돌아오면 직접 올리도록 해. 부모인데 무서워할 게 뭐 있어? 화를 내고 꾸중을 하더라고, 결국은 너희를 지켜 주실 분들이다.”

유 교리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정교랑과 주육낭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유 교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인, 믿어도 될까요?”

측근이 안에서 나오며 물었다.

“말뿐인데 믿고 말고 할 게 뭐 있느냐. 저들이 말하면 우리가 듣고, 우리가 말하면 저들도 들었을 뿐이지.”

“강주 바보가 감히 여길 찾아왔네요. 꽤 오만해 보이는 태도였습니다.”

유 교리가 웃음을 지었다.

“아직 어리지 않으냐. 오만한 게 정상이지. 가서 알아봐라.”

측근은 바로 말뜻을 알아듣고 대답한 후 서둘러 나갔다.

유 교리는 고개를 숙인 채 아직 자리에 놓여 있는 향낭을 쳐다봤다. 강주 바보라……. 그 여인 말대로 태평거가 그 여인의 것이라면, 지난번에 부랑배를 쏴 죽인 일 또한 그 여인이 사주했다는 말인데?

대단한 강주 바보로다……. 생각할수록 아쉽군. 과로신선이 저 여인의 것인 줄 진작 알았다면, 두칠이 경성에 입성한 후 몸을 바짝 낮추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면, 지금 보수사의 중놈들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 중 상당액이 내 수중으로 들어왔을 텐데.

이미 원한을 산 이상, 유 교리의 원칙대로라면 늘 그랬듯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 후환을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저 여인은 남겨 뒀다가 자신을 위해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아쉬울 것도 없다. 사람은 없애고 비술만 남겨 두면 되니까.

유 교리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입을 열었다.

“여봐라.”

문밖에서 사환이 즉시 들어왔다.

“그걸 가져오거라.”

사환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몸을 굽혀 향낭을 주워들었다.

“열어 봐라.”

유 교리가 사환을 뚫어져라 보며 말하자 사환은 네 하고 대답한 후 향낭을 열었다.

“대인, 종이 한 장만 들어 있습니다.”

사환은 손에 든 종이를 펼치며 말했다. 거기에는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사환은 글을 알아볼 수 없었기에 고개를 들고 유 교리의 지시를 기다렸다. 사환을 빤히 쳐다보던 유 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챙겨라.”

유 교리가 일어나 걸음을 내디뎠다.

“이춘당(怡春堂)에 가서 첨(詹) 의원을 불러오너라.”

마차가 옥대교로 들어섰다. 정교랑이 마차에서 내리자 주육낭이 따라왔다.

“그자가 믿을까?”

주육낭은 결국 궁금증을 못 참고 입을 열었다. 벌써 회랑 아래까지 걸어온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믿죠. 난 거짓말을 안 하거든요.”

안에서는 두칠이 목놓아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할아버님, 죽여 버리세요. 지금 당장 죽이시라고요.”

두칠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팔을 건드렸는지 또다시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고, 내 팔.”

“됐다. 일단 그 녀석들한테 신경 꺼라. 네 팔부터 치료하는 게 우선이다.”

유 교리가 말했다. 안에 있던 여인들은 그 말에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할아버님.”

“제 팔은 이제 못쓰게 됐습니다. 팔을 못쓰게 됐어요.”

두칠은 여전히 눈물을 보이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있는데 못쓰게 되긴!”

유 교리는 언짢은 목소리로 일갈하고 울부짖는 두칠을 내버려 둔 채 뒤돌아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 중년의 사내가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사내는 몹시 감격했는지 거의 뚫고 들어갈 기세로 종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첨 의원, 어떤가?”

유 교리가 물었다.

“묘수입니다, 묘수예요.”

첨 의원은 감격하며 조심스레 종이를 바쳤다.

“이런 방법이 있었다니, 이런 방법이. 난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말을 똑바로 해야지. 그래서 쓸 수 있다는 게야?”

첨 의원이 정신을 차렸다.

“이 비술에 쓰인 약재를 이런 식으로 쓰는 건 처음입니다. 치료 효과에 대해서는 일단 시도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럼 어서 해 보게. 그거 해 보라고 부른 걸세.”

첨 의원은 얼른 알았다고 했다.

“여봐라. 가서 약을…….”

소리치던 첨 의원의 말이 끊겼다. 유 교리가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남에게 시켜?”

유 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치자, 첨 의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죄했다.

“대인, 염려 마십시오.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절대 발설치 않을 것입니다.”

첨 의원은 소리를 죽여 말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쭈뼛쭈뼛 건넸다.

“대인, 잘 간수하십시오.”

유 교리는 첨 의원이 건네는 종이를 쳐다보기만 할 뿐 받지 않았다.

“이거, 문제없는 거지?”

유 교리가 불쑥 물었다.

이거? 첨 의원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종이를 쳐다봤다. 문제? 무슨 문제?

“냄새를 맡아 보니 향이 나는 것 같은데.”

유 교리 말을 들은 첨 의원은 그제야 이해했다. 서찰에 술수를 부리는 사람이 있긴 했다. 원수에게 서책을 보내면서 먹에 독을 타서 원수가 책을 읽고 난 후 중독으로 사망한 일도 있었다. 첨 의원은 손에 든 종이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대인, 문제없습니다. 소생이 의술은 특출나지 않지만 약방 출신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독약도 소생의 눈을 피할 순 없지요.”

첨 의원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시 종이의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그윽한 향이 났다.

“이 냄새는 향낭 때문인 듯합니다. 묵송(墨松)향 같기도 하고요.”

“그 향낭은 이미 버렸네.”

“역시 신중하십니다.”

신중한 게 좋지. 유 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두고, 속히 나가서 치료를 준비하게.”

유 교리는 여전히 손으로 받지 않았다. 악한 사람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첨 의원은 속으로 경멸하며 얼른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의원이 나가자 곧이어 다른 이가 들어왔다.

“대인, 알아봤습니다.”

유 교리가 옷자락을 정리한 후 자리에 앉았다.

“말해라.”

정교랑과 주육낭은 확실히 신선거에 갔으며, 과로신선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또 정교랑이 주씨 가문과 불화한 것도 사실이었다. 당초 진 노태야를 고친 후에도 주씨 저택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따로 저택을 사들였다.

주육낭이 진씨 저택의 앞으로 찾아가 마차를 납치해 가자, 진씨 가문은 이를 괘씸하게 여겼으며 그 일로 두 집안의 왕래가 끊겼다. 진씨 가문은 정 낭자에 한해서만 살갑게 대했다.

정교랑은 주씨 저택에서 까탈스럽게 굴며 주 부인을 몇 번이나 골탕 먹였다. 좋은 소리는 홀로 독차지하면서 일이 생기면 주씨 가문에 떠넘기는 통에 주씨 가문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결국 주 부인에게 쫓겨났는데…….

옆방에서 들리는 두칠의 저주 섞인 비명과 함께 유 교리는 측근의 보고를 차분히 들었다. 거기까지 들은 유 교리가 저도 모르게 말을 끊었다.

“쫓겨났다고? 언제 일이더냐? 무슨 일로?”

“태평거를 막 세우던 때의 일입니다.”

측근이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정 낭자가 주육낭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조했다고…….”

유 교리가 껄껄 웃었다.

“소년한테 정이 많아 보이더니.”

그날 소년은 굳은 표정에 말도 많이 안 했지만, 여인을 바라보는 눈에 정이 담겨 있었다. 아마 본인도 잘 몰랐겠지만, 노회한 유 교리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두 젊은이가 사사로이 벌인 일이란 말인가? 언행으로 짐작하건대 소년은 확실히 거칠고 충동적이며 고집이 세 보였다. 주 노야가 돌아와 자기 집의 두 아이가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걸 알면, 기가 막혀 뒤로 넘어가진 않으려나?

“유 대인, 외숙부님께서 곧 돌아오세요. 제가 이런 일을 벌인 걸 아시면, 절 강주로 돌려보내실 거예요. 경성에서 어렵사리 입지를 굳히게 됐는데, 이대로 모든 걸 잃을 순 없습니다.”

유 교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보도 바보가 아니었어. 그런데 고집이 너무 세 보이더군. 부탁하러 왔으면서도 납작 엎드리기는커녕 의기양양한 모습이었지. 아직 젊으니 그럴 게야. 제대로 다듬어 줘야 해.

“대인.”

측근은 한 발 앞으로 나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했다.

“진씨 가문에서 정교랑이 어떤 귀인을 만났는지 수소문 중이었는데, 이미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

유 교리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구체적인 건 모르겠습니다. 진씨 가문에서 철저하게 기밀을 유지하고 있어서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기밀 유지에 신경을 쓴다는 건 정교랑이 가진 비술의 중요성을 증명할 뿐이니까. 이젠 그 비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가짜라면 어린애 둘과 주씨 가문이 시간을 끌기 위해 벌인 짓거리가 틀림없다. 유 교리는 이미 대응책을 준비해 놓은 상태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진짜라면 더 좋고. 죽음을 앞두고 벌벌 떨며 멀리 유배를 가거나, 기방으로 팔려 가서 겪는 고통을 겪는 일이 없도록 호탕하게 용서할 것이다. 세상물정을 아는 젊은이라면 기꺼이 살피고 보살펴 줘야지.

정교랑은 다친 이대작의 오른손을 붙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몸이 아프고 시큰거리기라도 한 듯 헙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시선을 피했다.

“아파요?”

정교랑이 물었다. 이대작은 눈이 벌게진 채 목멘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픕니다.”

며칠간 하도 울어 이미 눈물이 말라 버린 송씨댁이 옆에서 또다시 눈물을 훔쳤다. 아프면 됐다, 아프면 됐어.

“사흘 후에 약을 갈죠. 아파도, 손을 움직여야 해요.”

정교랑이 일어서자 이대작과 송씨댁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어른들께선…….”

고개를 든 이대작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일어난 사달입니다. 그때 주인어른들께 숨기지 않았다면…….”

“자책할 필요 없어요. 화와 복은 함께 오는 법이죠.”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씨, 두칠의 뒤엔 유 교리가 있습니다. 주인어른들께서 그런 일을 벌이셨으니, 두칠이 가만있을 리 없죠. 듣자니 경조부 감옥에 들어가면 죽음뿐이랍니다. 아씨,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맞아요, 아씨. 저희는 염려 마시고, 주인어른들을 구할 방법부터 생각하셔요.”

송씨댁도 울며 흐느꼈다.

“감옥은, 나도 도리가 없어요. 못 도와요.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이를테면 치료 같은 거요.”

못 돕는다? 어찌 이리 딱 잘라 말씀하시지? 이대작과 송씨댁은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정교랑은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역시 혈육이 아니다 보니…….”

송씨댁이 중얼거렸다. 결국은 관료 가문에서 자란 규방 여인이구나. 일을 저질러 놓고 막다른 길에 몰리자 몇 사람을 희생양 삼아 내주려는 거겠지.

“세상살이라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야.”

이대작도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이 모든 게 지독한 악몽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깨고 나면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이 보이기를.

밤이 지나고 해가 뜨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유 교리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오는 첨 의원을 초조한 얼굴로 바라봤다.

“어떻던가?”

유 교리가 물었다.

“대인, 대인. 신묘합니다, 신묘해요.”

첨 의원은 실핏줄이 벌겋게 선 눈으로 흥분하여 말했다.

“고쳤어?”

유 교리가 물었다. 기쁨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가짜를 가져왔을 리 없다고 짐작은 했지만, 언제나처럼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다.

“네, 밤까지 애를 먹다가 아침에 붙였습니다.”

옆에 있던 측근이 말했다.

“정말 붙였다고?”

유 교리가 첨 의원을 보며 다시 묻자, 첨 의원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벌써 감각이 돌아왔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가려면 시일이 필요하겠지만, 팔은 건졌습니다.”

첨 의원의 목소리에는 감격이 묻어났다. 첨 의원의 의술은 유 교리도 인정할 정도였다.

“그 비술이 진짜였군.”

“네, 맞습니다.”

첨 의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탁자 위로 향했다. 비술이 쓰인 종이는 여전히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이 비술이 정말 죽은 사람도 살릴까요?”

첨 의원은 부러운 눈길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그야 시험해 보면 알겠지.”

그 말에 첨 의원은 고개를 들어 유 교리를 쳐다봤다.

“대인, 감방에서 아무나 하나 데려다 시험해 보시죠. 시험을 끝내고 죽여 버리면,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유 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자네부터 수고해 주게.”

첨 의원은 기뻐하며 얼른 대답하고는 비술이 쓰인 종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자네부터 수고해 달라는 게 무슨 뜻이지? 유 교리도 직접 해 보려고 그러나?

“대인…….”

첨 의원이 유 교리에게 물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바짝 다가서는가 싶더니 목이 서늘해졌다. 첨 의원은 순간 눈을 부릅뜨고 손을 뻗어 목을 부여잡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측근이 손을 풀자 첨 의원은 뒤로 넘어갔다. 피는 순식간에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 교리는 낡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몸을 굽혀 떨어진 종이를 주운 후, 여전히 경련으로 몸을 움찔거리는 첨 의원을 쳐다봤다.

“자네도 알겠지만 죽은 사람만이 비밀을 지킬 수 있거든.”

유 교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고마운 줄 알게. 이런 비술을 지니고 염라대왕을 뵈러 가면, 아마 저승에서도 떼돈을 벌 수 있을 게야. 그거면 됐지.”

첨 의원은 마지막으로 두 번 움찔거리더니, 두 눈을 부릅뜬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멀쩡히 잘 살다가 강도의 손에 살해당하다니, 가엾어라.”

유 교리는 손을 뻗어 첨 의원의 두 눈을 감겨 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의 기둥인데, 이리 떠나면 남겨진 처자식은 어찌 사누? 어쨌든 우리 약포의 의원이니 남들한테 무시 안 당하게 잘 도와주도록 해라. 친척들이 처자식의 가산을 넘보지 않도록 적당히 으름장도 놓고.”

측근은 알았다고 했다. 일어선 유 교리는 손에 든 종이를 툭툭 턴 다음 품속에 넣고, 여느 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정교랑은 붓을 들어 종이에 커다랗게 ‘이(二)’라는 글자를 쓴 후 붓을 거뒀다.

“오늘 서 대형의 형제가 장형 이십 대를 맞았습니다.”

진 공자의 말에 옆에 있던 시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자님, 셋째 도련님은 큰병을 앓고 나은 지 일 년도 안 되셨어요. 더 고생하면 몸이 못 버틸 거예요.”

진 공자의 시선은 벽에 걸려 있었다. 그곳에 걸린 종이에 곧은 글씨로 ‘일(一)’이라고 쓰여 있었다. 시녀는 새로 쓴 종이를 툭툭 턴 후, 옆에 걸었다.

일, 이……. 이틀이 흘렀다.

“유 교리는 신중한 사람이라 티 나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괜히 저쪽에서 눈치채면 큰일이거든요. 몸은 좀 고생하겠지만, 목숨엔 지장 없을 겁니다.”

“이틀 버텼으면 충분해요.”

정교랑이 말했다. 누가 중간에서 손을 쓰지 않았다면, 무원산 형제들은 이틀 사이에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유 교리가 낭자를 믿는단 말입니까?”

진 공자가 물었다. 정교랑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은 날 믿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믿는 거죠.”

주육낭이 마당에서 대나무 통을 쳐다보고 있는데, 사락사락 옷자락 소리와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정 교랑과 진 공자가 서재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일은, 부탁할게요.”

정교랑이 살짝 예를 표하자 진 공자가 정중하게 답례했다.

“소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팡이 소리와 함께 진 공자가 걸어왔다. 정교랑을 힐끔 보던 주육낭은 자신과 대화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역시 휙 돌아섰다.

마차 한 대와 말 한 마리가 나란히 거리를 지나갔다. 진 공자는 웃고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평소였다면 한창 신이 나서 떠들었을 텐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주육낭은 다시 진 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진 공자는 손으로 머리를 괴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이, 뭘 하려는 건데?”

주육낭의 물음에 진 공자는 정신을 차리고 주육낭을 보며 씩 웃었다.

“낭자가 말한 대로.”

난 서재로 초대도 안 됐는데,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어떻게 알겠냐고.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하라고 했는데?”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면서도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그러니까…….”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씩 웃었다.

“자네한테 말하지 말래.”

주육낭은 낯빛이 싹 변하여 진 공자를 보며 말고삐를 휙 챘다. 말이 놀라 히이잉 소리를 내며 내달렸다. 진 공자가 멀어져 가는 주육낭을 보며 어이, 어이 하고 소리쳤다.

“농담이라고.”

진 공자가 실소를 터뜨렸다.

“예전에도 저랬나. 성격이 왜 저리 급해졌어?”

진 공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고개를 돌려 온 길을 돌아봤다.

“그러게 뭐랬어. 가엾네, 가엾어. 뭐하러 그랬냐고, 뭐하러.”

곧장 집으로 달려온 주육낭은 사환에게 말고삐를 내던지듯 넘기고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육낭!”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리자 주육낭이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보니 자신의 거처 마당 입구에 모친이 분노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도 하나같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 못난 놈 같으니라고!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

주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자 주육낭은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십삼하고 일이 있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 부인이 호통을 치며 말을 잘랐다.

“이 불효막심한 놈을 어서 쳐라!”

옆에 시립해 있던 사환들이 몽둥이를 들고 쭈뼛거리며 걸어왔다. 주육낭은 꼼짝도 않고 선 채 말없이 있었다.

“공자님, 죄송합니다.”

사환들이 몽둥이를 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사환 둘이 좌우 양쪽에서 주육낭의 등을 후려쳤다.

“밥들 안 먹었느냐!”

주 부인의 호통에 놀란 사환들은 손에 든 몽둥이에 힘을 실었고, 주육낭은 이를 악문 채 버텼다.

“집안에 어려움이 닥쳤고 네 부친은 아직 돌아오시기 전이다.”

사환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춰 주 부인이 꾸중했다.

“네 형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누이들은 매일같이 불경을 외며 부처님께 빌고 있는데, 넌? 뭘 하고 다니는 게야?”

주 부인은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지 여종과 몸종을 밀치고 직접 몽둥이를 빼앗아 주육낭을 매섭게 후려쳤다.

“그 계집을 보러 가? 허구한 날 거기 가 있어? 그러고도 거짓말로 어미를 속여? 이런 불효막심한 놈! 네 아버지가 널 얼마나 아끼셨는데…….”

주 부인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눈물을 흘렸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매를 맞던 주육낭이 주 부인을 쳐다봤다. 모친의 슬픈 얼굴이 보이자 주육낭은 갑자기 털썩 꿇어앉아 주 부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어머니, 다 소자의 잘못입니다!”

그렇다. 모두 주육낭의 잘못이었다. 의기양양하게 정씨 저택을 찾아가 무심히 보고 별 뜻 없이 물었던 질문이 이렇게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줄이야.

대청에서 눈을 들어 자신을 보던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정말 우습구나, 우스워. 그때 눈여겨봤더라면…….

“오라버니.”

그 회랑 아래에서 웃으며 ‘오라버니’ 소리를 들을 사람은 서 대형인지 뭔지 하는 무리가 아니라 나였겠지.

“말하자면, 좀 억지스럽지만 낭자는 그런 사람이야. 물 한 방울의 은혜에도 넘치는 샘물로 갚지. 그런 연민이 있는 사람이니 감상적인 거고.”

전부 내 잘못이다. 전에 그러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다면…….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은 나서서 돕고, 어엿한 사촌 오라비인 난 바보처럼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안 왔을 것이다.

전부 내 잘못이다. 전에 그러지 않았다면 온 집안이 화기애애했겠지. 병을 고치든 식당을 열든, 함께 상의하고 함께 경계하고 함께 대비했을 것이다. 부친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원수가 될 일도 없었을 테지. 원수 취급을 받는 건 별일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정면으로 맞설 수 있지 않은가. 아무 대비도 않고 있는 사이 갑작스러운 일격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모두 내 잘못이야!

“어머니, 때리십시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주육낭이 소리쳤다. 몽둥이로 주육낭을 매섭게 후려친 주 부인은 힘이 쪽 빠지기도 하고 그런 아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아프기도 해서 결국 몽둥이를 내던지고 얼굴을 가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나머지 형제자매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여자들은 흐느껴 울고 남자들 역시 침통한 표정이었다. 삽시간에 집 안이 울음바다가 되자 여종들과 몸종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노야께 일이 생긴 건 이미 숨길 수 없는 일이 됐지만, 집안 윗전들은 별일 아니라며 인맥을 통해 수습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울음바다가 됐다. 그냥 좌천 정도가 아니었나? 더 심각한 일이라도 벌어진 건가?

주육낭과 형제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울음을 그치게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육낭, 이번엔 네가 지나쳤다.”

형들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몸종들은 뜨거운 물수건을 올려 주씨 가문 자매들이 얼굴을 닦도록 했다.

“맞아요. 그 여자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지금 이 판국에도 그 애를 챙기다니!”

주 낭자가 물수건을 내던지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몸종들은 얼른 물수건을 챙겨 줄줄이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들어올 때보다는 마음이 한결 편해진 터였다. 알고 보니 주 노야가 아니라 주육낭의 일 때문이었고, 더구나 여인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윗전들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아랫것들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육공자가 매일 정 낭자의 집으로 달려가는 건 윗사람들만 몰랐을 뿐 아랫사람들은 훤히 아는 사실이었다. 몸종들이 나가자 형들도 주 낭자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낭, 누이가 너보다 더 철이 들었구나. 우리가 있으니 너까지 나설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속을 썩이진 말아야지.”

주육낭은 들어온 이후 내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육낭, 넌 아직 어리잖아.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그런 애한테 마음을 빼앗겨!”

주 부인은 또다시 눈물을 닦으려 했다.

“그 애한테 마음을 빼앗긴 거 아닙니다.”

주육낭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그럼 매일같이 거기로 달려가는 이유가 뭐야?”

주 부인이 따져 물었다. 안에 있던 형제자매들의 시선이 주육낭에게 쏠렸다. 고개를 든 주육낭이 입술을 달싹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뭐라고?”

가까이 앉은 자매들은 그 말에 더욱 씩씩거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걸 말이라고! 그 바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우리한테 생길 일도 없었어! 그런데도 그 애를 찾아가다니, 대체 얼마나 더 재수가 없으려고 그래?”

“그 애는 바보가 아니에요.”

주육낭이 말했다.

바보가 아니다 뿐인가. 모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는 사람인데.

“어머니, 오라버니 좀 보세요.”

누이들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됐다, 그 일은 그만 얘기하자. 지금은 네 부친의 일이 우선이야!”

“네.”

형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위에서도 처음 시작할 때처럼 강하게 압박하진 않는 모양입니다. 말투도 많이 누그러졌고요. 얘기도 못 꺼내게 하던 처음과는 다릅니다.”

그 여인이 그랬지. 지금이 가장 경계가 느슨할 때라고. 주육낭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래도 은밀히 손을 쓸지 모르니 대비를 해야 해.”

주육낭은 형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 자식이 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생각이 없어졌지? 정말 여자한테 정신이 팔려 저러나?

“육낭, 웃긴 뭘 웃어?”

형들이 불쾌해하는데도 주육낭은 또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뭐라고?”

형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은밀히 손을 쓰든 뭐하든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하나만 하면 충분하거든요.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치워 버리는 겁니다. 깔끔하게 제거해야죠. 그 일을 할 사람이 모두가 바보라고 하는 그 여인이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육낭은 고개를 숙였다.

어둠이 내릴 무렵, 진 공자는 부친의 서재에 앉아 벌써 한참이나 책을 보고 있었다. 다른 쪽에 앉은 중년의 사내도 책을 보고 있었다. 등불 아래로 비치는 얼굴은 준수했고 기품이 묻어났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남다른 분위기가 묻어났다.

중년의 사내는 진십삼의 부친인 승의랑 진안(秦安)이었다. 공주인 모친 덕에 음보의 혜택을 입어 관직에 진출한 후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과거를 통해 진사에 급제하여 실력을 증명했다. 지금은 천자를 보필하며 천장각(天章閣)으로 파견되어 시강과 기거주(起居注:황제의 언행을 기록하는 관리)를 겸직하고 있었다.

진 시강이 서책을 내려놓고 시큰한 눈을 꾹꾹 누르며 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 며칠 무슨 일로 그리 바쁜 것이냐? 며칠 전엔 사관(史館)으로 날 찾아왔다며? 무슨 일 있느냐?”

부친의 질문에 진 공자가 책을 내려놓고 씩 웃었다.

“딱히 갈 데가 없어서 아버지께서 계신 곳엔 뭐 재미있는 일 없나 가 봤습니다.”

“내가 있는 곳의 일 말이냐? 아니면 정사당(政事堂)의 일 말이냐?”

“역시 아버지의 눈은 못 피하겠네요. 주육의 부친한테 요즘 일이 생겨서 알아보러 갔습니다.”

아들이 주육낭과 친한 건 진 시강도 잘 알았다. 자식들의 일이다 보니 굳이 나서서 알아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 일은 나도 안다. 박주(亳州)에 있을 때 군비와 군수품 사건에 대한 처리가 부당했다는 이유로 좌천되어 조사를 기다리고 있지. 그 사건은 나도 살펴봤는데 확실히 부당한 면이 있었어.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거다.”

진 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압니다.”

진 공자가 지팡이를 들며 일어섰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들은 늘 이랬다. 언제나 사리에 밝았고, 말하지 않아야 할 일은 말하지 않았다.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처벌이 무겁진 않을 것이다. 서쪽 변방의 오랑캐가 불안하고 연일 패퇴 중이라 폐하께서 진노하셨어.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게야.”

진 공자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부친에게 감사를 표했다.

“참, 아버지.”

문가까지 걸어갔던 진 공자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돌렸다.

“이부시랑이 새로 임명되죠?”

진 시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 시강이 있는 사관은 중서문하성, 정사당과 가까웠기에 정사당의 관료 외에는 사관의 하급 관리들이 가장 소식에 정통했다. 아들은 그곳에서 하급 관리들이 떠드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진소가 정사당 좌우복야(左右僕射)로 영전하면 이부시랑은 공석이 되니 아마 그렇겠지. 아직 미정이다.”

진 시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고생스러운 자리죠.”

진 공자 역시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말한 후 바로 문을 나섰다. 진 공자가 나가자 곧 진 부인이 들어왔다.

“십삼이 도와달라고 사정해요?”

직설적인 진 부인의 질문에 진 시강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 아들이 당신만큼 직접적이진 않잖소.”

진 부인 역시 웃음을 지었다.

“잔꾀를 부리는 거예요. 내버려 두세요. 어쨌든 가깝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아이니, 주씨 가문의 일을 주의 깊게 보는 건 좋죠. 나설 수 있으면 나서서 편도 들고요.”

“지금은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오. 말해 봤자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지. 어사대 쪽에서 칼을 갈며 벼르고 있소. 따지고 보면 운도 없지. 하필 이런 때에 옛날 일이 튀어나오다니.”

“일이 더 커지진 않겠죠?”

일이 이렇게 심각할 줄 예상 못 한 진 부인이 놀라 물었다.

“운에 달렸소.”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니. 미소를 머금고 있던 진 부인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그래서 십삼이 요 며칠 이리저리 뛰어다녔군요. 그런 곳은 통 안 가던 애인데.”

그런 곳? 어디? 진 시강이 물었다.

“나도 구체적으로 묻진 않았는데 경조부 같은 곳까지 가는 것 가더라고요.”

진 부인이 말했다. 여기저기 청탁을 넣으려나 보군. 진 시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늘 분수를 알고 영민한 아들이니 걱정할 건 없었다. 두 부부는 이 일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날이 밝을 무렵, 유 교리는 손을 들어 두칠의 팔을 힘껏 내리쳤다. 두칠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유 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듯 웃고는 손을 거두고 몸을 곧추세웠다.

“아프단 말은 괜찮단 뜻이다.”

“할아버님, 괜찮긴요. 제 꼴을 좀 보십시오.”

두칠은 억울한 듯 이를 갈았다.

“그놈들은 감방에서 아직도 안 죽었습니까?”

관리인이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어제 흠씬 두들겨 팼는데 워낙 튼튼한 놈들이라 버텨 냈습니다.”

“사람 잡는 경조부 감옥의 몽둥이에도 살아남았단 말이냐?”

유 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놈들은 군졸 출신이라 몸을 무예로 탄탄하게 다졌어요. 태평거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도 날마다 몸을 단련했으니 일반인과 비교할 수야 없지요. 그래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쨌든 앓아누웠거든요. 눕긴 쉬워도 일어나긴 힘든 법이죠.”

유 교리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며칠 더 사는 겁니다.”

관리인은 기쁜 표정으로 두칠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리 빨리 죽이기엔 아깝지.”

유 교리가 말을 끊자 두칠과 관리인이 멈칫했다.

“할아버님, 저들을 남겨 두시려고요?”

두칠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소리쳤다.

“그 자식들을 남겨 둬서 뭐하시게요? 죽여 버리는 게 낫죠.”

“어차피 조만간 죽을 건데 서두를 게 뭐 있느냐.”

유 교리가 말을 끊었다.

“그저 잠깐 속시원한 것만 생각하지. 속시원한 거 말고 남는 게 뭐야?”

속시원한 거 말고 남는 게 뭐냐고? 두칠은 어리둥절한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실익을 남겨야지, 이 아둔한 것아.

유 교리가 관청에 들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가장 일찍 왔다. 수십 년 동안 지켜온 한결같은 습관이었다. 날이 밝자 나머지 관료들과 하급 관리들도 속속 도착했다.

이부주사(吏部主事)는 공무로 바쁜 관직이 아니었지만 유 교리는 다른 관료들처럼 잔꾀를 부리지 않고, 어제 처리한 공무를 진지하게 검토한 후 오늘 할 일을 점검했다. 오전 내 바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잠시 쉴 틈이 생겼다.

유 교리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관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맛있는 음식을 사 먹지 않고, 집에서 챙겨온 작은 찬합을 꺼냈다. 밥과 나물들을 꺼낸 후 관청에서 제공하는 차를 한 잔 곁들이자 점심이 해결됐다.

밥을 거의 다 먹어 가던 무렵, 밖에서 소곤대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갔던 하급 관리들이 시시콜콜 수다를 떠는 소리였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걸 보니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식을 전하는 게 틀림없었다. 중서문하성 정사당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한담을 나누는 일에 동참한 적 없는 유 교리는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 갔다. 그 말이 귓가로 들리기 전까지는.

“진 상공의 일이 확정됐다고 하오. 중서문하성 평장사(平章事)라더군. 그럼 이부시랑은 공석이 될 텐데, 누가 갈 것 같소?”

“이력으로 가장 뛰어난 분은 유 교리지요.”

이부시랑!

다들 진소가 이부에 오래 있지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다. 황제의 몸이 안 좋은 데다 태자의 자리가 미정이다 보니 황제의 심중도 헤아리기 힘들었다.

어쨌든 저 말이 사실이라면 기쁜 일이었다. 남에게 좋은 일은 내게도 좋은 일이지. 한 발 한 발 걸어오다 보니, 어느덧 목표와 점점 가까워지는군.

유 교리는 순간 속에서 거대하고 맹렬한 기세가 치솟으며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흡도 거의 멈춘 것 같았다. 유 교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대인?”

옆에 있던 수하 관리가 얼른 다가서며 살폈다. 쿵쾅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유 교리는 천천히 숨을 토하고 수하 관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긴 정사당과 가까운 곳 아닌가. 함부로 떠드는 모습을 상공들께 보였다간 좋을 게 없어.”

유 교리의 말투는 온화했다. 언제나 신중하고 성실하며 말썽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기에 그런 말을 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관료는 웃으며 네 하고 물러갔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바깥의 소리는 곧 잠잠해졌고,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유 교리는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마저 먹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속에서는 맹렬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이 또한 유 교리의 습관이었다. 희로애락을 속으로 꾹꾹 누르며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오랜 습관이었기에 유 교리는 자부심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어쩐지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

하급 관리들의 잡담만 해도 그랬다. 정사당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는 하루에 백 개도 넘으니 전부 진짜일 순 없었다. 더군다나 유 교리가 누구던가. 언제나 신중하고 분수를 아는 사람이 아니던가. 어째서 그 한마디에 이토록 마음이 어수선한 걸까?

유 교리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정말 이부시랑 자리가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나? 희소식이로다. 이부시랑으로 가면 분수령을 넘게 된다. 앞으로 중서문하성에 유씨 성을 가진 관료가 하나 더 늘겠지? 유 교리는 젓가락을 쥔 채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문발을 드는 소리와 함께 수하 관리가 들어왔다. 유 교리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뛰던 가슴은 평온을 되찾았고 코에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음, 향이 좋군.”

유 교리는 찻잔을 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새로 바꾼 남주(南州)의 차입니다. 교리 대인의 입맛에 맞으세요?”

관료가 웃으며 물었다. 차향이었군. 유 교리는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차로군, 좋은 차야.”

유 교리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시녀가 잘 마른 종이를 탁탁 털어 걸었다.

“사(四).”

시녀는 글씨를 읽은 후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벌써 문밖에 서 있었다. 잎이 무성한 벚나무 가지가 여름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다.

유 교리를 만난 지 사흘이 지났고, 도련님들이 하옥된 후 나흘이 흘렀다. 진 공자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초조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시녀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마당으로 들어선 주육낭의 눈에 회랑 아래에서 손을 꼽아 보며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교랑의 모습이 들어왔다.

“길흉도 점칠 줄 아나?”

“길흉을 뭐하러 점쳐요? 시간을 셈해 본 거예요.”

“무슨 시간을?”

주육낭의 물음에 정교랑은 주육낭을 보며 빙긋 웃었다.

“좋은 소식이 올 시간이요.”

정교랑이 손을 내렸다. 주육낭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 믿을 만한 게 있나?

“난 거짓말을 안 한다고 했잖아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그래?”

정교랑의 미소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이죠. 내 말을, 남들이 뭐라고 여기든, 나와는 상관없지만요.”

정교랑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주육낭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정 낭자, 신선거의 두 대인이 뵙고자 하십니다.”

신선거는 다시 문을 열었다. 문을 안 열었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말이다. 정교랑과 주육낭이 소식을 듣고 왔을 무렵, 두칠 역시 신선거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원산 형제들이 나름대로 절제한 덕에 팔만 부러졌을 뿐 다른 곳은 멀쩡했고, 지금은 팔도 붙인 상태였다. 아직 칭칭 싸매고 있긴 했지만 거동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할아버님, 이대로 저들을 봐주잔 말씀입니까? 이대로 풀어 주자고요?”

두칠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봐주긴? 조건을 걸지 않았느냐.”

유 교리는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다.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다. 평소에도 숙면을 취한 건 아니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하고 귓가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소식을 들은 후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그렇겠지.

떠도는 말이라고는 하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고, 진소의 영전은 기정사실이었다. 정사당에서 나온 소식이고 듣기로는 천자를 지척에서 모시는 진 시강도 들었다고 했다. 진 시강은 황제와 보통 관계가 아니었다.

사실 갑작스러운 소식도 아니고, 예상 못 한 바도 아니었다. 진소가 상경할 때부터 다들 짐작했던 일이고, 다만 시기가 문제였다. 유 교리 역시 소문만으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날만을 기다리며, 십수 년을 일해 왔으니까.

“할아버님, 뭐하러 조건을 걸고 저들을 풀어 줍니까. 조건은 죽이고 나서도 걸 수 있잖아요.”

유 교리는 두칠이 외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유 교리는 인상을 쓰며 코앞에 대고 부채질을 하면서 분칠한 두칠을 쳐다봤다.

“멀찌감치 떨어져라. 향이 독해서 숨이 막히는구나. 넌 그저 죽이는 것밖에 모르지. 죽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인데 급할 게 뭐 있어! 생각이 그리 짧아서야, 원!”

“그렇다면 안심이고요. 전 또 할아버님께서 마음이 약해지신 줄 알았죠.”

두칠이 헤헤 웃자 유 교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마음이 약해져? 그게 뭔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관리인이 문을 열었다.

“대인, 주인어른, 주 공자와 정 낭자가 왔습니다.”

소년과 소녀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두칠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봤던 인상은 이미 흐릿해진 상태였지만, 다시 마주하고 보니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뒤따르는 시녀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변했다. 겨울에서 여름이 됐고, 손님과 주인에서 주인과 주인으로 바뀌었다. 돈을 물어내고, 수하를 잃고, 팔이 부러지게 됐다!

저 소년과 소녀가 이렇게 성가신 일을 벌일 줄 알았다면 그때 바로 없앴을 텐데! 역시 이 세상에 선인과 악인 따위는 없다. 영리한 사람과 아둔한 사람만이 있을 뿐.

유 교리는 며칠간 조사를 통해 확인을 마쳤다. 주씨 가문에서는 태평거의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주 노야의 좌천이 누구 때문인지도 몰랐다. 원인을 모르다 보니 결과도 모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다들 허둥대기만 할 뿐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달랐다.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았고 누구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훤히 알았기에 찾아온 것이다. 집안에는 절대 알리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게 두 애송이들이 벌인 일이라니. 자신이 새파랗게 어린 것들에게 우롱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두칠은 열 받아 미칠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어!”

두칠이 먼저 소리를 지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래요,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

정교랑 역시 입을 열었다.

“돈을 벌 수 있는 비법을 괜히 알려 줬어요. 내 것을 빼앗으려 하다니, 정말 인심 야박하네요.”

“네가 날 해치려고…….”

두칠이 소리칠 때였다.

“입 다물어라, 입 다물어.”

유 교리는 싸우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원한은 맺지 말고 풀라고 했다. 앉아라, 다들 앉아. 좋게 말로 풀어야지, 싸워 봤자 좋을 게 없어.”

정교랑이 자리에 앉자 주육낭도 따라 앉았다. 두칠은 씩씩거리며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옷자락을 털고 자리에 앉았다.

“얘야, 네 손은 정 낭자의 비술 덕분에 고친…….”

두칠은 유 교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벌떡 일어섰다.

“할아버님, 제 손을 부러뜨린 것도 저 여잡니다!”

“먼저 남의 손을 부러뜨리지 않았다면, 그쪽 팔을 왜 부러뜨리겠어요.”

정교랑도 바로 응수했다.

“모함하지 마. 이대작의 손을 내가 잘랐다는 증거라도 있어?”

정교랑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부러뜨린 게 아니라 자른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네요. 증거가 더 필요해요?”

“내가 알아봤으면 알 수도 있지. 그럼 이대작의 손이 잘린 걸 아는 사람은 전부 폭도란 말이냐?”

두칠이 냉소했다. 정말 유치하고 가소롭네! 새파랗게 어려서 그런지 무식해! 저 잘난 줄만 알지!

전에는 적을 가벼이 보고 경계하지 않아 패했다지만, 이젠 눈앞에 누가 있는지 명백히 안다. 그런데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으라고?

“그만해라!”

유 교리가 언성을 높이자 실내가 조용해졌다.

“이렇게 된 마당에 뭘 더 싸우느냐. 원수져서 좋을 것 없으니 서로 한 발씩 양보해야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게야? 정 낭자와 주 공자가 날 찾아오고 날 믿어 줬으니, 어른으로서 내가 일을 매듭짓고자 하는데, 그래도 되겠느냐?”

“저야 당연히 할아버님의 뜻을 따라야죠.”

두칠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육낭과 정교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람이 맞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법…….”

유 교리는 두칠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 낭자 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증거가 명백하오. 증거가 없다고 하면 그건 억지지.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하고.”

정교랑은 잠자코 있었지만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네, 저희가 벌을 받아야죠.”

주육낭이 정교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유 교리는 연장자로서 주육낭의 태도를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을 알고 고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 아직 어려 충동적이었던 걸 감안하고 두칠의 팔을 성심껏 치료해 준 점을 생각하면, 두칠도 용서를 안 할 순 없을 터.”

“그럼 어떻게 벌하시게요?”

두칠이 유 교리의 말을 받아 물었다. 유 교리는 정교랑과 주육낭을 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고,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게 식당으로 인해 벌어진 화입니다. 태평거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주육낭의 말에 두칠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계속 너희 것일 줄 알았냐?

“그게 좋겠군. 그럼 관부에도 할 말이 있겠어. 사적으로 합의를 봤으니 원고가 더는 추궁하지 않겠다고 하면 벌금을 내는 선에서 훈방될 게야.”

유 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두칠이 씩씩거렸다.

“대인, 부디 잘 살펴 주세요. 그들 중 하나는 전에 크게 앓았는데, 나은 지 얼마 안 됐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관부에 가서 사정을 말하면 풀어 줄 거요.”

유 교리의 말투는 온화했다.

“낭자, 염려 마시오.”

정교랑과 주육낭은 감사를 전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깐.”

유 교리의 부름에 정교랑과 주육낭이 걸음을 멈추고 유 교리를 쳐다봤다.

“이건 정 낭자가 가져가시구려.”

유 교리가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정교랑이 건넸던 그 비술이 적힌 종이였다. 주육낭은 놀란 눈치였다.

“그건 유 대인께 드린 것이니 유 대인 겁니다.”

유 교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맡긴 게 아니냐. 상처를 치료했으니 물건은 돌려줘야지.”

유 교리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비술을 본 사람이 있긴 한데 너무 염려 마시오, 정 낭자. 우리 약포 사람이고 믿을 만한 자니까. 절대 외부로 발설치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소.”

순간 주육낭은 마음이 약해져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저리 소탈하고 올곧은 어르신이라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더 소탈하고 거짓말은 절대 안 하는 올곧은 사람한테 당하는 거니까.

주육낭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대인,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게 오해였지 않느냐. 두 집안의 오해가 풀렸으면 됐어.”

유 교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 아버지의 일은…….”

주육낭이 못 참고 물었다. 어린 자들은 성격이 급해 일을 못 숨기지. 유 교리는 주육낭을 향해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춘부장의 일은 나도 들은 게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유 교리의 말투는 온화했다.

“폐하께선 자비로운 분이니 화가 누그러지시면 잘 풀릴 게야.”

물론, 화가 안 풀리면 어쩔 수 없고. 유 교리는 감격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소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려서 그런지 정과 의를 중시하고 패기가 있었다. 피가 끓어오르다 보니 한 가지 일에만 몰두했다. 일 하나를 하려 해도 이리 고민하고 저리 고민하느라 움직이지 않는 노회한 자들과는 달랐다.

“그래, 그럼 어서 가 봐. 집안사람들한테 사정 설명 잘 하고. 겁낼 것 없어. 꾸중하고 매를 드는 것도 다 잘되라고…….”

유 교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유 대인께 약포가 있다고 하니, 그럼 제 비술로 대인과 함께 일하면 어떨까요. 저는 늘 조용히 의술을 행하길 바라 왔어요.”

“얼씨구, 아주 꿈도 야무지네. 태평거를 물어내게 됐으니 약포가 탐나나 봐? 어디서 감히 입을 놀려!”

두칠이 소리쳤다.

유 교리는 두칠을 노려보며 제지하고, 정교랑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소. 내 점포가 워낙 작아서…….”

“이 비술은 돌려받을 수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유 교리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마주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거참, 이럴 필요 없대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 교리는 도리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낭자가 의술을 행하고 싶으면, 우리 약포로 오시구려. 병을 고치고 받는 돈은 낭자가 갖고, 약 짓고 문진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우리가 갖는 거로 합시다. 정 낭자가 오면 우리 약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테니, 내게도 큰 이득이 남을 거요. 어떻소?”

당연히 좋겠지. 돈도 벌고 든든한 뒷배까지 두게 됐으니, 그깟 식당보다 훨씬 좋을 거야. 치료비로 무려 1만 관을 달라는 여인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유 교리가 밑지는 장사다.

“아닙니다. 대인의 점포에서 신세를 지는 일인걸요. 원칙대로 제가 가져갈 돈만 가져가겠습니다.”

“거참…….”

유 교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하세요, 할아버님. 소손이 크게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두칠이 옆에서 거들자 유 교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정 낭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안 받으면 화해하겠다는 성의가 안 보이겠지.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유 교리가 손뼉을 탁 치자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유 교리 역시 껄껄 웃었다.

“그렇구려, 정말 좋은 소식이오.”

좋은 소식이라……. 주육낭은 쿵쾅대는 가슴을 안고,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둘 다 웃고 있구나. 끝까지 웃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어차피 둘 다 사기꾼이잖아! 좋은 인간은 절대 아니라고! 주육낭은 일어나 옷소매를 털었다.

떠나는 소년과 소녀를 보며 두칠은 분노로 씩씩거렸다.

“할아버님, 저 계집이 너무 뻔뻔합니다. 감히 할아버님한테 제안을 하다니요!”

내가 지분 배당 문서를 바치겠다며 울고불고 매달릴 때랑 태도가 다르잖아. 방금 뭐랬어? 난들 가족의 정이 부족해 양조부로 모신 줄 알아? 뒷배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아니지, 아니지. 나랑 비교해 봤자 나도 뻔뻔한 사람이란 얘기밖에 안 되지. 두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아버님, 저 계집은 할아버님의 권세에 기대 재기하려는 겁니다. 저 계집한테 잘해 주시면 안 돼요!”

유 교리는 정교랑이 약포로 들어간 후에 가져가겠다며 두고 간, 비술이 쓰인 종이를 조심스레 들어 잘 챙긴 후 수염을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외로운 여인이 가엾구나. 어미를 잃고 아비에게 버려졌어. 그렇다고 외숙과 가까운 것도 아니고 정인이 있다 한들 걸림돌만 될 뿐이니. 저 여인도 말하지 않았느냐. 경성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고. 조만간 귀덕낭장도 이 일을 알게 될 텐데, 알면 어찌 나오겠어?”

유 교리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봐도 훤하니, 저 애들이 살길을 찾으려는 게지.”

그런가……. 두칠은 코를 어루만지며 눈을 껌뻑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저 여인이 자발적으로 비술을 들고 약포로 찾아오도록 꾀려고 할아버님께서 일부러 그리 말씀하신 겁니까?”

두칠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이 자신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건 본성인데, 꾀었다고 할 수야 없지.”

유 교리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여인은 보통 사람보다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어.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지.”

두칠은 다시 코를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진 상공과 동 내한의 힘을 빌려 태평거를 운영하고, 이제는 할아버님의 힘을 빌려 약포를 운영하려는 겁니다. 치밀한 계략이죠!”

“계략이 아무리 뛰어나도 좋은 운엔 못 당하지.”

유 교리는 후련한 마음으로 웃었다. 태평거가 대수인가. 그래 봤자 식당인데 누구나 할 수 있잖아. 그는 처음부터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비술을 원했다.

뭐라고? 비술을 이미 손에 넣지 않았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손안에 들어왔다고 그걸 덥석 받아? 정말 받을 생각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떳떳하게 밝히며 받아야 한단 뜻이다.

이를테면 그 여인이 자신의 약포로 와서 의술을 펼친다든가. 물론 그 약포가 실은 자신의 것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 없겠지. 어마어마한 명성을 날리게 될 때쯤 천재지변이 닥칠 것이다. 불이 난다거나 강도가 든다거나. 미인박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가고 없지만 다행히 생전에 거둔 제자가 있으니 그 비술은 전승되겠지.

그때부터 그 비술은 더 이상 정씨의 것이 아니다. 유씨 성을 가진 이의 손으로 전해지겠지.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술을 쥐고 있는데 그 어느 벼슬아치가 내게 밉보일 수 있을까.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겠지!

유 교리는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별실에서 울려 퍼진 맑은 웃음소리가 대청까지 들리자, 대청에 있던 점원들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누가 저렇게 웃는 거야?

유 교리가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웃은, 건가? 이럴 수가!

유 교리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없었고, 이는 이미 습관이자 본능이 됐다. 습관과 본능까지 바꿀 정도라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요즘 신중하지 못했던 것 같군.

“경하드립니다, 할아버님. 소원을 푸셨습니다.”

옆에 있던 두칠은 유 교리가 귀신이라도 본 듯 갑자기 멍해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유 교리가 왜 웃음을 터뜨렸는지는 잘 알았기에 얼른 따라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경하는 개뿔.”

유 교리는 두칠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벽에 건 글씨가 일곱 칠(七)까지 가도록 서무수 형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게 순조로우며 먹고 입는 것만 조금 불편할 뿐 더 이상의 형장은 없을 거라는 진 공자의 말이 커져 가는 시녀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그 외의 나머지 일은 진행이 빨랐다. 태평거는 관부에 고해 수속 중이었고, 이춘당에서도 관리인이 찾아와 정 낭자를 초빙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정 낭자가 성격이 급하네.”

두칠은 빨간 인장이 큼지막하게 찍힌 계약서를 쳐다봤다. 계약서에 쓰인 자신의 이름을 보자 속이 후련해졌다.

흥, 원래 우리 집 가산이었잖아.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게지. 더 비싼 값으로.

두칠은 자신에게 그런 봉변을 안긴 여인을 바라봤다. 이 여인의 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우쭐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비꼰 것이었다.

“천하장사라도 감옥에서는 얼마 못 버티죠. 그 사람들은 내 은인이에요.”

정교랑의 말에 두칠은 혀를 찼다. 말은 그럴싸하네!

“사실 낭자도 귀덕낭장이 돌아오기 전에 믿을 만한 뒷배를 찾는 게 좋겠지.”

두칠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씀도 맞고요.”

정교랑이 두칠을 보며 말했다.

“아씨, 그만 가세요. 이대작의 상처를 살피러 가셔야죠.”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두칠을 힐끔 보며 시녀가 말했다.

“그래, 빨리 나아야지. 내가 이래 봬도 뒤끝은 없는 사람이야. 숙수랑 점원들은 해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해.”

두칠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대작 일가는 어제 집으로 돌아왔지만 송씨댁은 몹시 불안해했다.

“뭘 그리 불안해하시오?”

이대작은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한숨을 내쉬는 아내를 보며 물었다.

“돌아가라고 했다는 건 별일 없다는 뜻이고 안전하다는 거요. 좋은 일인데 마음 푹 놓아야지.”

송씨댁은 자리에 앉아 이대작이 손을 움직이도록 도와주며 한숨을 쉬었다.

“실은 오늘 태평거에 짐을 가지러 갔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송씨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뭐라 했든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아씨께서 심사숙고하여 결정하시겠지.”

이대작의 말에 송씨댁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심사숙고 끝에 포기를 택하셨을 수도 있죠.”

송씨댁이 중얼거렸다. 이대작은 손을 움찔하며 송씨댁에게서 손을 뺐다. 힘을 주자 극심한 통증이 엄습해 얼굴이 일그러졌다.

“포기라니? 아씨께서 한 은공을 위해 세우신 점포인데!”

이대작의 말에 송씨댁은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낭, 상황이 그렇잖아요. 자신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이대작이 낙담하며 물었다.

“누구한테 넘기는데?”

잠시 침묵하던 송씨댁이 입을 열었다.

“누구겠어요, 두칠이죠.”

벌떡 일어선 이대작은 씩씩거리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오른손은 여전히 천으로 칭칭 감겨 있었지만, 피로 얼룩졌던 손이, 잘린 그 손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대작은 손을 높이 들었다가 옆에 있던 탁자 위로 쾅 내리쳤다. 다행히 눈치 빠른 송씨댁이 서둘러 손을 뻗어 막는 바람에 끔찍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낭, 미쳤어요!”

송씨댁이 소리쳤다.

“이걸 둬 봤자 뭐해? 남겨 둬서 뭐 하냐고!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이대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아니죠, 아니에요. 손이 있으면 다른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다른 집으로 가요. 다른 집으로 가서…….”

송씨댁이 흐느꼈다.

“다른 집으로 가라고?”

이대작이 실소를 터뜨렸다.

“다른 집으로 가라고? 다른 집으로 안 간다고 해서 손이 잘렸는데, 어딜 갈 수 있단 말이오?”

송씨댁은 멈칫했고, 곧 두 부부는 끌어안고 통곡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맑고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리자 두 부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밖에서 고개를 들이민 시녀의 얼굴이 보였다.

“기억이 틀렸나 했네요. 언니, 저 기억하시죠?”

시녀가 생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이 저번과 같다고 볼 수 있나?

“손이 아파서 그래요?”

시녀가 물었다. 이대작 부부는 얼른 일어나며 눈물을 닦고 맞이했다. 시녀 뒤로 정교랑의 모습도 보였다.

“아씨, 반근 낭자, 어쩐 일이십니까?”

“약 갈아야죠.”

정교랑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두 분도 잊은 거예요?”

시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대작과 송씨댁은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랬다. 두 사람도 잊고 있었던 걸 아씨는 기억하고 계셨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까지 신경 쓰시다니.

“아씨.”

이대작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태평거를 버리실 겁니까?”

“아니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렇게 호탕하게 대답하다니. 둘러대는 말이거나 위로의 말이겠지.

“아씨, 저희를 속이지 마십시오.”

이대작이 고개를 숙인 채 쓴웃음을 짓자 정교랑이 웃었다.

“난 위로하는 말 안 해요. 듣는 사람이, 위로하는 말로 여길 뿐이죠.”

-경하-

날이 훤히 밝자, 누군가가 주 부인의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침상을 물리던 여종들이 황급히 비켜섰다.

“어머니, 큰일 났습니다.”

사내 두세 명이 대청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식사를 마친 후 몸종이 올린 약을 먹던 주 부인은 약이 목에 걸려 기침을 했다. 주 부인은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가리키며 얼굴이 벌게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오라버니들, 무슨 짓이에요. 어머니 놀라셨잖아요!”

안에서 주 부인과 함께 있던 여동생들이 소리쳤다. 주 부인은 한참 만에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너희 부친의 일이더냐?”

주 부인은 몸종이 올린 물을 받을 새도 없이 물었다.

“아니요.”

주씨 가문 공자들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게, 그 바보가…….”

주 부인은 성을 벌컥 내며 찻잔을 들어 내던졌다.

“그 바보가 뭐? 너희도 바보가 됐느냐! 그런 일로 뛰어 들어오게!”

“어머니, 그 바보가 이춘당에서 진료를 시작한답니다!”

공자들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뭐가 어째? 주 부인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네, 맞습니다. 저희가 방금 거리에 갔다가 봤어요. 폭죽을 마구 터뜨리며 이춘당이라는 간판도 크게 해 달았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의 낭자가 왔다며 구경하는 사람이 거리를 꽉 채웠더라고요. 얼마나 북적북적한지 모릅니다.”

공자들이 대답했다. 주 부인은 깃발이 나부끼고 폭죽이 팡팡 터지는 가운데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 계집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하필 이런 때에! 집안에 어려움이 닥친 이런 때에! 모두가 근심에 잠겨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이런 때에! 그 계집은…….

“뻔뻔한 계집! 우리 주씨 가문이 망하게 생긴 걸 보고, 서둘러 제 살길 찾아간 게야!”

욕을 해대던 주 부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육낭은? 그 애는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구경하러 나간 게야?”

주 부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다그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육공자께선 요 며칠 출타하지 않고 집에 계셨어요.”

“뭐 하고 있는데?”

주 부인이 물었다.

주육낭이 붓을 거두자 옆에 있던 몸종이 목을 빼고 들여다봤다.

“구(九).”

글씨를 읽은 여종은 무언가 떠오른 듯 빙긋 웃었다.

“‘구구귀일(九九歸一: 돌고 돌아 원점으로 되돌아가다)’의 뜻이에요? 노야께선 내일 저녁쯤이면 경성에 당도하시겠네요.”

주육낭은 잠자코 고개만 가로저었다.

“뭘 하시려고요?”

책상을 정리하던 몸종은 창가 앞에 선 소년을 보며 급히 물었다. 주육낭은 금족령이 내려 집에 갇혀 있었다. 책도 읽고 글씨도 썼으니 이제 연무장에 가려나? 소년은 몸종을 등진 채 천천히 내뱉었다.

“기다린다.”

같은 시각 오전 공무를 마친 유 교리는 붓을 내려놓고 시큰한 눈을 꾹꾹 누르며 숨을 내쉬었다. 수하 관리가 차를 올리며 별다른 뜻 없이 물었다.

“대인, 오늘은 어째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유 교리는 고개를 들어 수하 관리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졌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유 교리는 반문을 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예의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억지스러워 보였다. 수하 관리가 웃음을 지었다.

“너무 고생이 많으십니다, 대인. 남이 해도 될 일은 남한테 시키세요. 대인께서는 대인이 되실 분 아닙니까.”

대인은 대인이 될 사람이다……. 그 대인은 상공 대인을 말할 테지. 상공 대인이야말로 이부 사람들 눈에 진정한 대인이니까.

유 교리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직일세, 아직이야. 직첩을 받기 전까지는 진짜라 할 수 없지. 찻잔을 쥔 유 교리의 손에 툭 핏줄이 섰다가 한참 만에 들어갔다. 뭘 말하기엔 이미 늦은 때였다. 수하 관리는 이미 나간 후였기 때문이다.

유 교리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책상에 기대 숨을 토했다. 가슴이 쿵쾅댔다. 밖에서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정사당과 중서문하성이 가까운 이곳은 오가는 관리가 많아 늘 시끄러웠다.

유 교리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예상대로 진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소의 영전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부시랑의 자리가 공석이 되는 것도 확정됐을 테지…….

“유 교리가 틀림없어.”

그런 말이 귓가에 들리는데도 유 교리는 전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은밀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단순한 풍문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준비해 온 일이니 망상일 수 없었다. 이제 좋은 소식이 들릴 일만 남았다.

인맥이면 인맥, 자질이면 자질, 인품이면 인품,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는데 이보다 적임자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밟으려는 자가 있다면 장담컨대 말로가 좋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무슨 일로든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될 테지.

유 교리는 이를 악물다가 통증에 정신을 차린 후 다시 차를 마셨다. 벌써 차가 식었는데도 웃고 떠드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유 교리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정사당 쪽으로 향하는 통로는 바람이 잘 통하고 서늘해서 여름이면 더위를 피하려는 이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유 교리가 나오는 모습이 보이자 다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교리 대인,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오늘은 뭘 드세요? 그러지 말고 저희와 함께 나가시죠. 만날 장아찌만 드시지 말고요.”

“안 갚으셔도 됩니다. 거저 얻어먹는 거 아니에요.”

유 교리는 언제나 상냥했고 아랫사람과도 농담을 잘했기에 놀리는 말도 웃어넘겼다. 그런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나무 막대 소리가 들리더니 사관 쪽에서 지팡이를 짚은 소년이 사환의 부축을 받아 나왔다.

준수한 외모에 기품이 느껴지는 소년이었지만, 손에 든 지팡이는 수려한 산수화에 떨어뜨린 먹물 한 방울처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진씨 가문 절름발이가 요즘 자주 보이네.”

“귀덕낭장의 일을 수소문하려는 거겠지.”

“그 ‘아둔 주씨’ 가문의 공자와 친하다던데.”

그랬군. 그럴 만도 하지. 유 교리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씨 가문의 아들과 진씨 가문의 아들이 가까운 사이인 건 유 교리도 알고 있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던 당시 예상했던 일이므로 놀랄 것도 없었다.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알아본들 어쩔 텐가? 합당한 근거가 있고 마침 폐하께서 격노하신 상태인데. 필사적으로 두둔해야 할 친 부자지간이 아닌 이상 선뜻 나서서 도울 이는 없었다.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는 일에 누가 감히 나서겠는가.

물론,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조사를 시작한 이가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이다. 당시 관련자 중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일을 매듭지으면 된다. 근데 과연 그렇게 될까? 아무튼 난 그럴 생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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