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말의 봄빛이 만연한 경성에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니, 날씨가 더없이 화창했다.
주씨 가문, 주 부인의 거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주씨 집안의 여식들이 옹기종기 모여 새로 지을 여름옷을 위한 치수를 재고 있었다.
딸들에게 둘러싸인 주 부인은 춘곤증이 조금은 가신 듯 팔걸이 책상에 기대어 재잘거리는 딸들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
“노야께서는 지금쯤 강주에 도착하셨겠지?”
주 부인이 옆에 있던 여종에게 말을 걸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얼추 시간이 맞습니다. 다만, 돌아오시는 일정은 장담을 못 하겠네요.”
돈 달라는 일인데, 그쪽에서도 호락호락하지 않겠지.
“어디 한번 해 보라지. 우리 주씨 가문의 혼수인데, 어디 정씨가 남겨 먹으려고.”
“다만 부인, 어찌 됐든 정 아씨는 저쪽 집안의 딸이니 혼사를 치르고 말고는 저쪽에서 결정할 일이에요. 노야께서도 한바탕 입씨름을 하셔야 할 거예요.”
여종이 조심스럽게 알렸다.
“저쪽에서 혼사를 결정한다고? 그럼 저 사람들이 우리 교교를 아무 데로나 시집보내도 가만히 있어야 해? 친어미의 외가 사람들이 멀쩡하게 눈뜨고 살아 있는데, 그렇게는 못 하지.”
주 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렸다. 진흙탕 싸움이 되더라도 거저먹을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진씨 가문이랑 혼례를 올렸으면 딱인데. 진씨네 사주단자를 들고 찾아가면 찍소리도 못 낼걸!”
진씨 가문과의 일을 생각하니 주 부인은 화가 나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종이 서둘러 주 부인을 달래며 웃었다.
“부인, 진씨가 아니어도 다른 좋은 집안이 많잖아요. 교랑 아씨께선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술을 지니셨으니, 부인께서 말씀을 꺼내시면 설마 혼처 하나 못 구하겠어요?”
“죽은 사람을 살려? 흥, 그 재주가 다했을지 누가 알아.”
정교랑이 이사 나간 날짜를 세어보니, 족히 두 달이 넘었다. 그동안 정교랑은 병을 핑계로 진료를 받지 않으며 지금껏 조용히 있었다.
“재주가 다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진 노태야와 동 내한을 교랑 아씨께서 치료하신 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걸요.”
여종이 웃으면서 주 부인을 달랬다. 하긴, 저 두 집안과의 관계가 있으니, 이미 많은 사람이 혼담을 고려하는 거겠지.
주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조카가 보통 이상한 게 아니니, 솔직히 이제 나도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주 부인이 짧게 한숨을 토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신경을 안 쓰면 누가 신경 쓰겠어? 방법이 없지. 피는 물보다 진하단 말이 괜히 나왔나? 됐다, 됐어. 내가 전생에 그 애한테 진 빚을 갚는다 치고 살아야지.”
“부인께서는 정말 자애로우세요.”
여종이 웃는 얼굴로 알랑거렸다.
경성에서 시집보내기 좋은 집안이 누가 있나 생각해 보려는데, 치수를 다 잰 딸들이 우르르 주 부인에게 몰려왔다.
“어머니, 우리 보수사에 향 피우러 언제 가요?”
딸들 중 하나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묻자 주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부처님을 보러 가고 싶은 게야, 절에서 주는 밥을 먹으러 가고 싶은 게야?”
“어머니, 예불도 올리고 밥도 먹고 겸사겸사죠.”
딸들이 재잘대며 주 부인을 둘러쌌다.
“급할 거 없어. 네 오라비에게 보수사에서 양두부를 몇 근 사 오라고 했으니, 오늘은 집에서 먹자꾸나.”
주 부인의 말에 소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경성에도 두부를 만드는 집이 몇 생기긴 했는데, 다 보수사만 못해요.”
“보수사 것이 좋은 게 아니라 태평 두부가 좋은 거야.”
“이렇게 맛있는 두부를 보수사랑 태평거에서만 팔다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들어가거나 길이 너무 멀어서 못 간다는데, 왜 다른 곳에는 안 팔지? 정말 답답하네.”
“애초부터 태평거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고 한 거니까, 당연히 다른 집한테는 안 팔지.”
“태평거도 너무 멍청하네.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안 벌겠단 건지.”
“아휴, 태평거 말이 나와서 그런데. 육낭 말로는 그 바보가 연 거라고…….”
방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마지막 말을 한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말을 뱉은 당사자도 깜짝 놀랐다.
“뭐라고? 태평거가, 그 강주 바보 거라고?”
자매들이 물었다. 정교랑 거라고? 주 부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딸들을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니?”
말을 했던 딸은 불안해졌다.
“저, 저도 육낭이 말하는 걸 얼핏 들었을 뿐, 진짜인지는 잘 몰라요.”
안에 있던 자매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럴 리가?
“육낭은?”
주 부인이 물었다.
“부인, 잊으셨는지요. 진 공자와 함께 보수사에 가셨습니다.”
여종이 주 부인에게 나지막이 고했다.
따로 향을 피우지 않아도 별실에는 은은한 단향목의 향이 공기 중에 스며들어 있었다.
진 공자가 숟가락으로 양두부를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두부가 입으로 들어가자 진 공자는 곧 감탄을 쏟아냈다.
“이 태평 두부만의 요리 비법이 있는 게 확실해. 이제 두부를 만드는 집도 경성에 한둘이 아닌데, 여전히 떫기만 하고 이런 부드러운 맛이 안 난단 말이지. 이걸로 보수사가 또 차정사를 이겼네.”
차정사는 몇 대째 번영을 누리며 늘 승록사(僧錄司: 불교 사무를 맡기 위해 설치한 관서) 명부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유서 깊은 대사찰이었다. 보수사 역시 황실 사원이긴 하지만, 역사가 짧아 명해선사가 독창적인 선다법을 선보인 후에야 차정사의 명성을 넘어서게 됐다.
그러다 연말에는 이름 모를 이가 차정사의 벽에 훌륭한 글씨를 남겨, 수많은 사람이 글씨를 감상하러 몰려든 덕에 차정사의 인기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이번엔 보수사에서 또 두부라는 새로운 맛으로 절밥을 제공하여 불과 달포 만에 보수사의 예불 올리는 가격이 급등했다.
진십삼의 반대편에 앉은 주육낭은 수저도 들지 않고 눈앞의 두부만 보고 있었다.
“태평거가 정말 그 애 거라고?”
“그럼, 태평거의 주인장도 만났었잖아.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야?”
진 공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태평거가 날이 갈수록 유명해지자 주육낭과 진 공자도 호기심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하게 서무수 형제들을 보았다.
주점이나 식당, 찻집은 주인장이 직접 나서지 않고 관리인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게에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여럿 있어, 누가 진짜 주인인지 알아내기 힘들 때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그냥 거기서 숙식하면서 밥벌이만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주육낭이 인정하기 싫은 듯 퉁명스레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는 그런 식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그날 본 서무수 형제들은 뒷마당에서 여유롭게 걸어 다닐 뿐이었다. 주육낭이 무심코 창문을 통해 보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서무수를 한눈에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건장한 체격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스물 몇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뒷마당에 서서 점원 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대화 같았지만, 두 점원은 그를 몹시 깍듯하게 대했고, 서무수의 행동거지에서도 가게의 주인과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요즈음 정 낭자가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이유가 여기 있었네. 여인 혼자서 해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어딜 봐서 혼자야? 그 애한텐 혈육이 있다고, 혈육이. 주육낭이 쥐고 있던 나무젓가락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낭자는 누구를 써야 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잘 아는 걸세.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것도 정이 없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자네 집안 사람들도 아무렇게나 추측하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게나.”
진 공자가 탁자를 똑똑 두드리며 주의를 주자, 주육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의기소침해졌다.
“천 리 길을 혼자서 돌아왔는데, 조그마한 식당 하나 차리는 건 어려울 일도 아니지.”
진 공자가 다시 웃어 보였다.
“경성에서는 어려운 일이야.”
주육낭이 잠시 침묵하다가 곧 말을 이었다.
“마음씨를 매섭고 독하게 쓰는 사람이 한둘인가. 차리는 건 쉽지만, 지키는 게 어렵단 말일세.”
진 공자가 진지한 주육낭을 보며 미소지었다.
“태평거가 어려워질 때쯤 자네 주씨 집안에서 눈길을 주면 되지. 순조로울 때는 굳이 나서지 말게나.”
이 여인은 허구한 날 골칫거리만 만들어내는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재주를 가지고도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면 고치지 않겠다고 하질 않나. 이제는 태평거를 차려서 태평 두부를 만들질 않나. 또 무슨 골칫거리를 만들어 낼지 누가 알아.
“부디 우리가 평생 태평거 쪽을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
주육낭이 퉁명스레 말했다.
봄이 가고 초여름이 되자, 서서히 여름의 열기가 느껴졌다. 마차에 달린 무거운 방한 휘장도 대나무 발로 바뀌었다. 마차가 달릴 때마다 대나무 발 사이로 바람이 솔솔 들어와 마차 안이 더욱 시원해졌다.
태평거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문 앞에 즐비한 마차와 말들이 보였다. 걷어 올린 식당 창문의 대나무 발 사이로 식당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보였다. 위층은 별실로 이루어졌는데, 어떤 창문의 휘장은 열려 있고 어떤 창문의 휘장은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문 앞에 길게 늘어진 줄을 보아서는 위층 역시 만석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가게가 만석이라 다른 곳을 찾아보셔야겠습니다. 그래도 기다리시겠습니까? 반 시진은 되어야 들어가실 수 있는데요.”
마차가 앞을 지나가자, 점원들이 새로 오는 손님들에게 웃는 얼굴로 사과하는 것이 들려왔다.
“여기서 기다리신다면 저희가 차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밥을 먹으러 온 손님들 외에, 식당 한편에서도 사람들이 바삐 오가며 움직였다. 마차는 식당의 옆쪽을 통해 뒤쪽으로 들어갔다.
식당의 좌우에는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벽돌과 목재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큰길 쪽에서 마차 두 대가 뒷마당을 향해 달려오자, 구매를 담당하는 사내들 몇이 걸어 나와 물건을 살폈다.
식당의 앞뒤로 사람이 넘쳐났지만 어수선하지 않았고, 소란스럽지만 시끄럽지는 않았다. 뒷마당은 어느새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쪽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이 썼고, 다른 한쪽은 손재의 두부방이었다.
식당 앞쪽에 비하면, 뒷마당은 조용한 편이었다. 두부의 비법을 지키기 위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방을 몇 개만 더 지으면 새로 들어온 점원들도 여기서 살 수 있겠어. 창고도 더 여유롭게 쓸 수 있고. 그리고 마구간도 한번 손을 봐야 할 텐데. 좁은 곳에 마차와 말이 너무 많아지면 말들이 서로 발길질할 수도 있으니까.”
서무수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정교랑을 쳐다봤다.
정교랑은 반쯤 묶은 머리에 작은 은빗을 꽂고,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긴 소매를 조여 맨 정교랑이 손끝의 활시위를 놓았다. 활시위에서 텅 하며 튕기는 소리가 나더니, 긴 화살 한 발이 날아가 열 몇 보 떨어진 곳에 있는 과녁을 스쳐 땅에 떨어졌다. 주위에는 이미 화살 네다섯 발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두부방 안에서 손재가 밖을 내다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에 숨어 있는 게 제일 안전해.
“오라버니가 알아서 해요.”
정교랑이 손을 내밀자 서무수가 옆에서 화살 하나를 들고 정교랑에게 다가가 건넸다. 그리고 정교랑이 다시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교랑의 진지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꽉 조여 맨 소매 사이로 보이는 양손의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정교랑은 과녁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몸을 올곧게 폈다.
다시 한번 텅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날아간 긴 화살이 과녁의 가장자리를 맞혔다.
“와! 아씨, 대단해요!”
시녀가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마음 같아서는 춤이라도 추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교랑은 미소를 살짝 지어 보이고 활을 잡고 있던 손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주인어른의 누이는 단정하게 생겨서는 왜 저런 걸 좋아한담.”
손재의 조수가 두부방 안에서 까치발로 밖을 내다보면서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수사에서 제공하는 두부는 점점 더 유명해졌고, 태평거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서무수 형제들만으로는 끊이지 않고 밀려 들어오는 손님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현재 태평거는 새로운 점원을 구했고, 손재의 두부방에도 조수를 세 명이나 두었다. 두부방에서는 주야를 교대하며 쉬지 않고 두부를 만들어냈다. 두부를 만드는 집은 경성에 여럿 생겼지만, 떫은맛 없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두부를 만들어내는 곳은 오직 태평거뿐이었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조수를 썼지만,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는 항상 손재가 직접 나섰다. 단언컨대, 염라대왕이 와서 두부의 비법을 물어도 손재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비법을 알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손재가 옆에 있던 조수를 노려보며 호통쳤다.
“어디 감히 주인어른의 누이를 훔쳐보고 있어. 얼른 가서 콩이나 갈아.”
사부님과 사형들에게 온갖 착취와 구박을 받았던 나 손재가, 이제는 앉아서 남에게 호통을 칠 수 있는 사람이 되다니. 비법을 손에 쥐고 있으니 몸도 편하고 마음도 날아갈 듯 가볍네. 게다가 돈까지 이리 많이 벌 수 있다니. 며칠만 더 있으면 내 쓰러져가는 초가집도 새집으로 바꿀 수 있겠어. 집이 다 지어지기만 하면, 혼담을 넣으러 오는 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오겠지…….
손재가 혼자 히죽거렸다. 조수는 혀를 내두르고 서둘러 일하러 갔다. 수시로 이렇게 히죽거리는 사부가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손재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의 어여쁜 시녀가 초록색 손수건으로 윗전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시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얇은 봄옷 소매가 살짝 흘러내려 하얗고 가녀린 손목이 드러났다. 손재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창가로 바짝 다가섰다.
주인어른의 누이는 감히 넘볼 수 없지만, 시녀는 몇 번 봐도 괜찮잖아.
정교랑이 활을 서무수에게 건네자, 서무수가 화살을 능숙하게 집어 들었다. 서무수는 바른 자세로 서서 여유 있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활시위를 당겼다.
활시위를 놓는 진동 소리가 나더니, 긴 화살은 조금 전 정교랑의 화살과 달리 매섭고 정확하게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군자는 육예에 능하죠. 오라버니의 궁술은 글을 배울 때 다진 실력이군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는 멋쩍게 웃었다.
“철없던 어릴 땐 군자가 되고 싶어서 뭐든 배우려고 했지. 하지만 천성이 게을러 뭐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어.”
서무수가 잠깐 생각하더니 정교랑에게 말했다.
“누이는 기본기가 좋아 보이니 힘을 조금 더 길러. 더 연습하면 분명 좋은 궁술을 익힐 수 있을 거야.”
남아로 태어난다면, 책을 읽고 말을 타며 활을 쏘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이것들을 잘하는 게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인들은 보통 칠현금을 타고 바둑을 두며,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하는 편이지, 이렇게 기마와 활쏘기를 배운 이들은 몇 없었다.
누이가 기본기를 어디서 배웠지?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과녁을 쳐다보았다. 햇빛이 과녁을 비추자 빨간 원심 안에 꽂힌 화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하지만 그저 눈이 부실 뿐이었다. 처음 경성으로 와 차정사의 담벼락에 글씨를 남길 때와 눈을 맞았을 때 외에, 오랜 기간 옛 기억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몸도 좋아졌고 말하는 것도 많이 호전됐지만, 마음은 여전히 못 찾았다.
서무수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정교랑이 생각을 멈추고 다시 서무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름이 다 되어가니 새 옷을 입을 때가 됐어.”
서무수가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시녀에게 건넸다.
“우리 옷을 좀 부탁할게.”
서무수는 정교랑에게 처음 새 옷을 받았을 때처럼 황송해하지 않고, 심지어는 먼저 입을 열어 새 옷을 해 달라고 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장자와 같은 모습으로 편히 돈을 건넸다.
“이 돈은 가져가서 살림에 보태.”
서무수가 일부러 오라버니 노릇을 하는 걸 보고 시녀가 쿡 웃었다.
이게 바로 참된 오라버니의 모습이지. 아씨께서 화살을 보고 넋을 놓으니 이걸로 위로하시는 거겠지?
“네, 도련님. 감사합니다.”
시녀가 예를 표하고 돈을 받았다. 시녀는 옷감과 모양을 서무수에게 설명하면서 원하는 바를 소상히 물었다.
“오라버니들이 바쁘니, 그만 가 볼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서무수가 정교랑과 시녀를 문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자주 오지 않아도 돼. 긴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내가 저택으로 가마. 시킬 일이 있으면 사람을 시켜 날 불러도 좋고.”
서무수가 걱정되는 투로 말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안간 서무수가 인상을 찌푸리고 한 곳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시선도 그를 따랐다.
한 여인이 허둥대며 식당 뒷문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 뒤로 사내 하나와 여인 하나가 따라가고 있었다.
“아씨, 기억나세요? 저 사람, 이대작의 부인이에요.”
시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기 송씨댁, 다시 좀 생각해 봐.”
뒤따르던 여인이 송씨의 소매를 붙잡았다.
“일단 내 얘기부터 좀 듣고…….”
이대작의 아내는 송씨였다. 처녀 시절에는 송 낭자라고 불렸고, 시집을 간 후로는 송씨댁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 송씨 할멈이 될 터였다.
겁을 먹은 얼굴의 송씨댁은 잡힌 손을 얼른 빼냈다.
“대, 댁들이랑 할 얘기 없어요. 어, 어서 가세요.”
“무슨 일 있소?”
서무수가 성큼성큼 걸어와 물었다. 송씨댁은 서무수를 보자 더욱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주인어른. 남, 남편한테 뭐 좀 갖다 주는 길이에요.”
서무수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송씨댁은 서둘러 자리를 피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서무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따르던 사내와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송씨댁이 난처해 보여 도와주려고 나선 건데 송씨댁은 도리어 더욱 당황한 기색이었다. 오히려 놀라야 할 두 사람은 전혀 겁먹지 않고 태연하게 서서 거만한 표정으로 서무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은 채 서로 눈빛만 주고받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서무수는 두 사람의 눈에서 원망과 독기를 봤다. 난 저 둘을 본 적도 없는데, 왜들 저렇게 원망과 독기가 가득한 눈빛이지?
“셋째 도련님.”
시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서무수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볼게요.”
시녀는 서무수가 끄덕이는 것을 보고 휘장을 내렸다. 마차는 천천히 태평거를 떠났다.
이대작이 언짢은 표정으로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
“한창 바쁠 땐데 여긴 왜 왔소?”
송씨댁은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두씨네 사람들이 또 찾아왔어요.”
송씨댁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는 것을 보고 이대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 그 사람들한테 단호하게 말하면 그만이지.”
“딱 잘라서 말한 게 벌써 몇 번째인데요.”
송씨댁이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폈다. 부엌으로 이어지는 뒤쪽 통로로 점원 여럿이 분주하게 오갔다. 몇몇은 이대작 부부가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
송씨댁은 사람이 많이 오가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이대작을 더욱 가까이로 잡아당겼다.
“당신 지금 벌벌 떨면서 뭐하는 거야.”
이대작은 성가신 눈치였다.
“이번엔 우리 땅을 되돌려주러 왔다니까요.”
이대작이 병상에 앓아누웠을 때, 돈이 부족해 가지고 있던 기름진 땅 두 필을 팔았었다. 문서 정리까지 끝내 되사고 싶어도 되살 수 없게 된 땅이었다. 놀란 이대작이 부인에게 물었다.
“뭐, 그 땅을 다시 받겠다고?”
송씨댁은 이대작을 보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한 공자 같은 은공께서도 나서서 도와주시고, 지금의 주인어른께도 태산과 같은 은혜를 입었는데, 어떻게 신의를 저버리고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이대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우리도 돈이 모일 테니, 그때 더 좋은 땅을 많이 삽시다.”
송씨댁이 다시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일을 주인어른께 귀띔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대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집안일인데, 괜히 귀찮게 말씀드려서 뭐에 쓰려고.”
“요즘 두씨네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잖아요. 사람들이 괜히 헛소문을 퍼트려서, 주인어른께서 오해하시는 일이 생기라도 하면…….”
“음, 지금 주인어른께 말씀드리는 것도 또 다른 오해를 사지 않겠어?”
처음 온 날, 이대작은 일을 시작한 지 반년 뒤부터 품삯을 받기로 약속했다. 그 때문에 태평거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이대작은 땡전 한 푼 받지 않은 채 일하고 있었다. 따로 품삯을 받지 않아도 서무수 형제의 보살핌 덕에 이대작 일가가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고, 선다회 일로 조금이나마 명성까지 얻게 됐다. 지금 시점에 주인어른한테 두씨네 사람들이 자신을 원한다는 말을 하는 건, 거드름을 피우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
송씨댁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대작이 덧붙였다.
“그만 가시오. 두씨네 사람들은 무시하면 돼. 우리가 절대로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는 걸 알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사부님.”
부엌 쪽에서 어린 점원이 고개를 내밀고 이대작에게 외쳤다.
“생선 두 마리를 구우셔야 합니다.”
부엌에 새로 들어온 숙수들은 재료 손질이나 잡일만 하고, 정식 요리는 모두 이대작이 직접 조리했다. 이대작이 금방 가겠다고 대꾸했다.
“당신도 그만 가 보시오.”
부부는 각자 일을 보러 갔다.
서무수와 범강림이 이층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갖다 줄 물건이 있다고 했는데, 꺼낸 건 없군.”
서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들한테 말 못 할 급한 집안 사정일지도 모르지.”
서무수가 범강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요즘 장사도 잘되는데, 품삯을 좀 미리 주는 건 어떻겠나?”
범강림이 물었다.
“누이가 약속과 규칙을 지키라고 했소. 당초 문서로 박아 놓은 내용이니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요.”
장사가 안 될 때도 누이의 말대로 일가를 잘 보살펴 주었으니, 잘 될 때도 규칙을 따르는 게 옳았다.
범강림이 알았다고 하며 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창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비켜, 비켜.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이나 먹을 것이지, 무슨 글씨를 그렇게들 쳐다봐!”
무례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내 몇 명이 거들먹거리면서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점원들의 인사도 무시하고 곧장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다.
앉아서 차를 마시고 글씨를 감상하며 기다리던 손님들이 화들짝 놀랐다. 한눈에 보아도 무뢰한처럼 생긴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손님들은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섰다.
“손님, 안쪽에는 벌써 자리가 다 차서요.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점원 하나가 미소를 짜내며 거친 사내들의 앞을 막아섰다. 사내 중 하나가 한 손으로 점원을 밀치고는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 찼다고? 내 눈으로 봐야겠다.”
뒤따르던 사내들도 가게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식당 안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입구 쪽으로 몰렸다. 미간을 찌푸려 언짢은 티를 내는 손님도 있었고, 지레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의 손님도 있었다.
식당이나 주점을 운영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모르는 이에게 협박을 받거나, 싸움을 벌이게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그래도 태평거는 경성 밖에 있으니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술맛이 좋으면 골목 끝자리에 있어도 찾아오는 이가 있다던 옛말이 틀리지 않는군.
이런 일이 생기면, 가만히 앉아 있던 손님에게도 불똥이 튀기 마련이다.
“다 먹었나? 시간이 몇 시인데 여태 먹고 있는 거야?”
앞장선 사내가 입구 쪽의 손님들을 향해 외치자, 근처에 앉아 있던 복스럽게 생긴 손님들 몇이 서둘러 일어났다.
“다 먹었소, 다 먹었어.”
사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손님들은 입구 밖으로 몸을 내뺐다.
“저기 손님, 아직 계산 안 하셨는데요!”
점원 하나가 손님을 쫓아가려 입구로 뛰어가자, 사내들은 문을 막아서고 점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빨리 자리나 치워. 여기 귀한 몸이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식당 안에 있던 손님들이 쭈뼛거리며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손님들도 상황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말과 마차를 빨리 내어 달라 아우성쳤다.
오 관리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손님들,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럼 여기 변 보러 왔게?”
사내가 거칠게 대답하자, 손님 몇은 그의 말에 역겨워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흘겼다. 거친 사내들은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요리 좀 내와 봐.”
“뭐가 있나? 뭐야 이게? 이걸 사람 먹으라고 내오는 거야?”
오 관리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이렇게 하다가는 오늘 장사를 다 말아먹겠네. 모양새를 보니 오늘 하루만 올 건 아닌 거 같은데, 앞으로 장사하기는 글렀군.
“손님들, 다 고향 사람이고 아는 처지인데, 할 말 있으면 좋게 이야기합시다.”
사내 중 한 명이 손을 치켜들더니 한 대 칠 기세로 일어섰다.
“썩을 노친네가 입만 살아서는. 누가 고향 사람이야? 얻다 대고 친한 척이냐고!”
사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사내가 정말 주먹을 휘두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힘없는 노인이 저 우락부락한 사내의 힘을 어찌 당해내겠는가.
오 관리인은 피하기엔 늦었다 판단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감쌌다. 몸은 다쳐도 치료하면 그만이지만, 이 나이에 머리를 다치면 끝장이다.
손바닥으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헉 소리를 냈다. 이어 육중한 무언가가 땅에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사내의 외마디 비명이 울리고 탁자가 밀려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오 관리인은 예상했던 통증이 없자,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머리를 감쌌던 손을 내려놓았다. 좀 전까지 눈앞에 있던 거구의 사내가 탁자 하나에 깔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음식과 접시들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뜨거운 탕과 음식들이 사내의 몸에 쏟아져 있었다.
식당 안에 욕설이 울려 퍼졌다. 손님들은 더욱 불안한 얼굴로 식당 구석을 비집고 들어가 숨어버렸다. 무뢰배들이 입구를 막아 당장 도망칠 수 없는 게 한이었다.
“주인어른.”
오 관리인이 어느새 옆에 와 있는 서무수를 쳐다봤다. 서무수는 주먹을 거두고 몸을 풀면서 굳은 얼굴로 앞에 선 사내들을 노려봤다.
“여기까지 왕림하여 소란을 피우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시오?”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내는 코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항상 먼저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방에게 앞으로 어쩔 셈이냐 물어보는 게 사내들의 일이었는데, 오늘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쓰러져있던 사내가 목소리를 쥐어짜며 외쳤다.
“어서 쳐!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저 촌뜨기를 때려눕히라고!”
씩씩거리며 서 있던 사내 셋이 한꺼번에 서무수에게 달려들었다.
식당 구석에 숨어 있던 손님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머리를 감쌌다. 귓가에는 둔탁한 주먹질 소리와 몸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처참한 비명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식당은 곧 조용해졌다.
하긴, 세 명이 한 사람을 상대하는 건 금방이겠지. 싸움 소리가 멈추자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뜻밖에도 눈에 들어온 건 멀쩡하게 서 있는 한 사내와 바닥을 구르며 연신 신음을 내는 네 사내였다.
코피를 흘리던 사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력이 대단한 놈이야! 그리고 독해! 우리도 싸움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데, 저놈이 저렇게 강할 줄이야. 간단해 보이는 초식이지만 아주 사납고 악독해. 주먹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너 죽고 나 죽기로 달려드네.
고작 몸싸움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달려들 일이야?
이때 소식을 들은 건장한 사내 서너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더니 곧바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아주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서무수가 손을 들어 사내들을 제지했다.
“내쫓아 버려.”
짤막한 우당탕 소리가 지나간 후, 흉악하기 짝이 없던 사내들이 태평거 밖으로 내던져졌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손님들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혀를 찼다.
우두머리인 사내가 피를 토하며 문 앞에 서 있는 다섯 사내를 쳐다보았다. 계산을 잘못했구나. 이 코딱지만 한 식당에 이렇게 많은 무림고수가 숨어 있었다니!
“우리 아직 안 끝났어! 당신들,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대장부라면 대책 없이 덤비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법. 사내는 서무수를 향해 외치고는 다른 사내들과 함께 우르르 말에 올라타 급하게 도망쳤다.
무뢰배들이 없어지자 태평거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즐겁고 여유롭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식당 안과 밖의 손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남아서 밥을 먹고 간다 해도, 이대로 그냥 간다 해도, 이미 흥이 깨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손님 여러분, 별일 아닙니다.”
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손님들을 향해 연신 공수의 예를 표했다.
“식당을 연 지가 꽤 됐는데, 소란을 피우는 이들이 없어 사실 가게가 잘 안 되는 줄 알고 괜히 불안했습니다. 근데 오늘 일을 보니 걱정거리가 싹 사라지는군요.”
사람들이 관리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장사 잘되는 식당 중에 협박 한 번 안 받아본 곳이 있나? 큰 식당은 관부 관리들이 뒤를 봐주니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지만, 조그마한 식당은 거리의 무뢰배들에게 관리비를 주면서 지내는 게 일상이지. 아무런 소란이 없는 가게들도 있다만, 거긴 뜯어낼 돈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시원치 않으니 안 건드리는 것 아니겠어.
“아까 그 몇 분께서 가게를 치켜세우러 오셨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 관리인이 웃으면서 문밖을 향해서도 공수의 예를 올렸다. 식당 안에는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졌고 어색한 분위기는 일순간 사그라졌다.
“오늘 많이 놀라셨지요? 놀란 마음 진정시키시라고, 오늘 드시는 술과 요리들은 모두 무료로 제공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밖에 서 있던 사람들도 웃으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점원이 일사불란하게 바닥을 쓸고 탁자를 닦아 제자리에 두었다.
“주인장, 저런 무뢰배들은 전부 소인배요. 군자가 원수를 갚는 건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지만, 저런 무뢰배들은 당장 복수하겠다고 뻔질나게 찾아올 것 같구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소.”
손님 중 하나가 걱정되는 말투로 말하자 오 관리인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트집이나 잡는 부랑배인걸요. 관아는 뭐 괜히 있습니까? 감히 또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간 국법대로 처벌해야죠.”
관리인이 무서울 것 없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정말 관아에서 무뢰배들을 잡아간다면, 거리에 무뢰배가 왜 돌아다니겠나. 사람들은 관리인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보수사의 선택을 받아 두부를 단독으로 제공하고, 편액에는 이름 모를 고수가 남긴 글씨까지 있는데, 여기가 어디 보통 식당과 같을까.
“자, 어서들 들어오시죠.”
오 관리인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금세 걱정을 떨쳐내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무뢰한들이 들이닥치기 전만 못했지만, 그래도 영업은 꽤 순조로웠다.
손님들과 점원들을 안심시킨 후, 뒷마당으로 들어선 오 관리인과 서무수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는 그들의 눈빛에 서린 근심은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신선거의 관리인이 종종걸음으로 두칠의 저택에 들어갔다. 사내 한 명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태평거까지 송씨댁을 쫓아갔던 사내였다.
두칠의 저택은 본디 두씨 집성촌에 있었는데, 경성으로 신선거를 옮긴 후로 두칠은 경성 부근에 큰 저택을 마련해 첩실 두 명과 함께 거주했다.
두칠은 기다리다 못해 짜증이 나려던 차였다. 그때 마침 관리인과 그를 뒤따르던 사내가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됐어?”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내젓고 두칠에게 땅문서를 건넸다.
“퉤, 제 분수도 모르는 것이 감히.”
두칠이 욕을 하고 사내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물러가라고 했다. 사내가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시녀도 차를 올리고 물러나자, 대청에는 두칠과 관리인만 남았다.
“그놈이 워낙 고집불통이지 않습니까. 전에는 노태야만 보고 쭉 따랐지만, 지금은 그 집 주인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죽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더군요.”
두칠이 다시 바닥에 침을 뱉었다.
“뻔뻔한 놈.”
문밖에서 사환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회랑 아래에 꿇어앉은 사환은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도련님, 주오가 그러는데 왕대 일행이 그 집에서 한껏 두들겨 맞고 내쫓겼답니다.”
두칠과 관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대 말로는 태평거에 싸움꾼들이 숨어 있어서, 자기들은 적수가 안 된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두칠이 자기 성에 못 이겨 눈앞에 있던 탁자를 뒤엎어 버렸다. 사환은 그런 두칠에 놀라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리고 뭐!”
두칠이 눈을 크게 뜨고 호통쳤다.
“그리고 일을 사주한 사람이 이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서 자기들이 크게 다친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자기네들 약값을 대주지 않으면, 다 떠벌릴 거라고…….”
사환은 고개를 숙인 채 숨도 쉬지 않고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사환의 말이 끝나자 예상대로 두칠은 엎어졌던 탁자를 주워 마당으로 세게 내던졌다.
“썩 꺼져!”
두칠이 욕을 하자 사환은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관리인에게 붙잡혔다.
“주인어른, 그 무뢰배들 입단속을 단단히 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겁니다.”
관리인이 두칠을 달래자, 두칠이 씩씩거리며 대청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싸움꾼을 숨겨 둬? 고작 타지인 몇 명이고, 기댈 친족들도 없어 보이는데 그 자식들을 뭐하러 겁내?”
두칠이 손으로 사환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돈을 두둑하게 챙겨가서 주오한테 전해라. 그 무뢰배들이 허풍치고 다닐 땐 언제고, 체면을 구기니까 이제 와서 싸움꾼이 있네 없네 핑계를 대느냐고! 딱 보니까 죄다 겁쟁이들이로구나!”
관리인이 잠시 주춤했다.
“일을 크게 벌이시려고요? 아직 태평거의 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르잖습니까. 다른 건 모르지만 문 앞에 내건 편액의 글씨만 해도 아주 대단한 사람이 쓴 거라던데요.”
두칠이 냉소를 지었다.
“붓질이나 좀 하는 문인이겠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 설령 태평거에 뒷배가 있다 한들, 무뢰배들이 심심해서 벌인 일 따위가 무슨 큰일이 되겠어?”
관리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큰일이 아니라면, 왜 굳이 일을 벌이는 거지?
“일이 커져서 태평거 사람들도 관아에 끌려가면, 놈들도 따끔한 교훈을 얻겠지. 놈들한테 뒤에 연줄이 있거나 놈들의 목숨이 질기다면 고생 좀 하는 거로 끝나는 거고. 이참에 그 연줄이 누군지 알아내면 좋잖아. 만에 하나 연줄이 없다면…….”
두칠이 음흉하게 웃어 보이고 말을 이어갔다.
“나두채(癩頭蔡) 손에 넘겨버려야지.”
나두채는 경성에서 악랄하기로 유명한 감옥 관리였다. 그의 손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겠다고 죄수들이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사람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게끔 고문하여 죽이는 방법을 백 가지도 넘게 알고 있다고 했다.
기회를 봐서 눈에 거슬리는 그 타지 놈들을 감옥으로 들여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거기서 살아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두칠의 손에 달린 일이 될 터였다. 이 정도는 뒤를 봐주는 의조부의 도움 없이도 두칠 혼자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우리 두씨 가문이 일궈낸 자리에서 돈 버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두칠이 콧방귀를 뀌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의 태평거도 도로 내 손에 들어오겠네. 두칠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콧김이 뜨거워졌다.
주육낭은 진십삼과 보수사에서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막 대문을 들어서던 주육낭은 바로 주 부인에게 불려갔다.
대청 안에서는 먼 길을 돌아온 듯한 행색의 여종 두 명과 주 부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는 길에 노야를 뵈었습니다. 노야께서 부인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강주로 데려간 사람들이었나? 왜 벌써 돌아왔지? 주육낭도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다.
주 부인은 주육낭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주 노야의 안부를 물었다. 부인은 주 노야가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랑 아씨의 이야기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 왔습니다.”
이제 막 입을 열려던 주육낭은 그 말에 멈칫했다. 정교랑의 일?
“뭐라더냐?”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정교랑이 집을 나간 후로는 집안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고 일상의 평온을 되찾은 터라, 주 부인도 전처럼 정교랑의 이야기만 나오면 긴장하진 않았다.
“부인께서 말씀하셨던 대로입니다. 그 집에서도 집안에 난리가 나서 내쫓았다지 뭡니까.”
여종이 웃으면서 대답하자 주 부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주 부인은 손을 뻗으며 더 말하려는 여종을 제지했다.
“그 아이 얘기는 더 궁금하지도 않구나. 모처럼 마음이 좀 여유로운데 복잡한 생각은 더 하고 싶지도 않아.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서 가서 쉬게나.”
여종이 예를 올리고 서둘러 물러났다. 주육낭이 여종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 부인에게 물었다.
“어머니, 저를 찾으셨다고요.”
“칠랑이 그러던데, 태평거가 교교 거라고 했다면서?”
“전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주육낭이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누이가 잘못 들은 거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머뭇거리던 주육낭이 고개를 숙였다.
“그 애를 태평거에 데려가 두부 맛이나 보여 줄까 하고…….”
아들이 남사스러운 꼴로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주 부인은 또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어디 그러기만 해봐라!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작살내 버릴 것이야!”
주육낭은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됐다, 가 봐라.”
주 부인은 성가시다는 듯 주육낭에게 손을 내저었다. 태평거가 누구 건지 물어볼 기분도 아니었다.
주 부인의 거처에서 물러난 주육낭은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주육낭의 대청에서는 진십삼이 시녀 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진십삼은 주육낭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도 바둑 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여종 둘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자, 그제야 진 공자도 주육낭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말해라.”
주육낭이 말하자 여종이 입을 열었다.
“그럼 소인, 어디서부터 말씀드리면 될까요. 교랑 아씨께서 오셨던 첫날부터요?”
진십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여종 둘을 쳐다봤다.
“그날 초저녁 즈음에 교랑 아씨께서 북정의 다리를 건너셨지요.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던 이들이 아씨를 봤다는데, 걸음걸이가 아주 느리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대요.”
주육낭은 여종이 묘사하는 대로 당시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하늘색이 짙어질 무렵에 여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 정씨 가문의 대문 앞에 멈춰 서고, 고개를 들어 편액에 쓰인 글자를 쳐다봤다. 드디어 집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 정씨 집안의 이노야 내외께서 대노야의 거처에서부터 싸움을 벌이셨어요. 입단속을 하긴 했지만 들은 사람이 여럿이었죠. 소인이 대부인의 시중을 드는 어멈한테 다섯 푼을 주고 들은 정보예요.”
진십삼과 바둑을 두고 있던 시녀가 이야기를 듣다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집은 정말 가난한가 보네요. 윗전이 가난하니 아랫것도 가난해서 겨우 돈 다섯 푼에 다 말해 주다니요.”
여종도 따라서 웃었다.
“그렇다고 돈을 밝히는 건 아니었고, 일부러 밖에 말을 흘리는 거였어요. 정씨 가문 동서지간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바둑을 두던 시녀가 아예 몸을 돌리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요? 북정은 사이가 좋아서 분가도 안 했잖아요. 집안을 맡은 동서끼리 사이가 안 좋다니요?”
“이것도 말하자면 교랑 아씨와 관련됐죠.”
여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슨 헛소리야. 바보가 어떻게 웃어른의 동서지간까지 간섭할 수 있어. 정씨네 사람들도 참 쓸모없군. 그런 헛소리나 만들어내고.”
주육낭이 언짢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
“교랑 아씨께서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 집안에서 좋은 것을 먹이면서 몸보신을 시켰다고 해요. 그때부터 정씨네 자식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오면서…….”
여종 둘은 방 안에 바른 자세로 앉아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진십삼도 서서히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생각에 빠졌다.
사실 정교랑이 정씨 저택에 있던 시간은 길지 않으니, 여종들이 이야기할 것도 별로 없었다. 그 후에는 주육낭이 직접 정씨 저택으로 찾아갔던 시점이라 여종들의 이야기는 금세 끝났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육낭과 진십삼은 이야기를 들으며 넋이 나간 듯했다. 여종 둘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자신들이 말한 것들은 고작해야 시녀와 몸종이 정교랑에게 뭘 해먹인 자잘한 이야기밖에 없는데, 공자들이 이렇게 깊이 생각에 빠질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니. 역시 육공자께서 정교랑을 마음에 두고 있다던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육공자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지.
“됐다, 그만 가 봐라.”
여종이 서둘러 물러나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찬합 하나를 주육낭 앞으로 내밀었다.
“강주에서 유명한 간식입니다. 특별히 사 온 것이니 공자님도 한번 맛보셔요.”
주육낭이 손을 뻗어 건네받았다. 작은 상자 위에는 ‘현묘관’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현묘관?”
주육낭이 작은 소리로 읊조리자 여종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네, 맞아요. 강주에서 제일 영험하고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관이에요. 간식도 어쩜 그렇게 잘 만들어내는지…….”
여종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진십삼이 불쑥 끼어들었다.
“정 낭자가 묵었다던 그 현묘관?”
“아, 교랑 아씨께서 계셨던 곳은 소현묘관이에요. 거기가 정씨 가문의 가산이었는데 벼락을 맞아 다 타 버렸죠. 그래서 산 아래에 있던 대현묘관이 그곳까지 도맡아 관리하고 있어요. 소현묘관이 없어졌으니 대현묘관과 합쳐서 지금 그냥 현묘관이라고만 부르고요.”
잠시 침묵하던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그만 가 봐라.”
주육낭의 말에 여종 둘과 시녀까지 다 물러났다. 주육낭이 눈앞의 작은 찬합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진십삼도 눈길을 줬다.
“현묘, 태평이라.”
“자네 말은 이것도 정교랑이 지은 이름이라고?”
주육낭이 진십삼에게 불쑥 물었다.
“아마도? 나도 모르지.”
진십삼은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자네 집 누이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주육낭이 그를 쳐다보자 진십삼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 보였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어도 둘은 돼. 정 낭자 때문에 팔려간 두 여종과 몸종의 가족 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있다면, 그 수는 더 많아지겠지.”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 걔가 목숨이니 뭐니 할 사람으로 보여? 벼락 맞았다잖아! 천재지변! 잘 지내다 말고 남의 목숨을 빼앗아 뭐하게!”
진십삼은 말없이 주육낭을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내가 요즘 터무니없는 생각을 점점 많이 해. 내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봐.”
진십삼이 찬합을 끌어오며 말했다.
“어디 현묘한 맛이나 좀 볼까.”
달빛이 드리워질 때쯤, 서무수, 범강림과 서봉추는 옥대교 저택 안에 앉아 있었다.
“무뢰배들이 어딜 감히!”
이야기를 들은 시녀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씨, 제가 지금 당장 가서 노태야께 말씀 올릴게요.”
그런 시녀의 모습을 보고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무뢰배 따위로 장 노태야를 귀찮게 해선 안 되지.”
시녀는 이전에도 같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주육낭이 강제로 정교랑의 마차를 빼돌려 주씨 가문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다. 그때도 시녀는 장 노태야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했지만, 정교랑이 거절했다.
“필요 없어. 아직은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잖아.”
정교랑은 또 이렇게 말했었다.
“난 희망을, 남에게 거는 게, 내키지 않아. 그뿐이야.”
“더구나, 지금은 모든 게, 내 뜻대로 되고 있고.”
설마, 지금의 모든 것도 아씨의 뜻대로인 건가?
서무수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별일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그 인간들을 봐서는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아.”
범강림도 서무수의 말에 동의했다.
“잡배들이 구걸하러 온 거면 모르겠는데, 배후에 있는 자가 작심하고 꾸민 짓이라면 곤란하지.”
옆에 있던 서봉추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말이 착하면 탈것이 되고, 사람이 착하면 괴롭힘을 당하오. 아까 무뢰배들이 소란 피웠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때려죽였어야지! 내가 거기 있었으면 벌써 이 주먹으로 싹 다 죽여 버렸을 거요. 지금도 늦지 않았소. 우리가 그 몹쓸 놈들을 찾아내 혼쭐을 내주자고.”
서봉추는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다. 무뢰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다른 형제 한 명과 함께 장을 보러 갔었다. 태평거로 돌아온 뒤에야 이야기를 들은 서봉추는 제 손으로 그 몹쓸 것들을 패 죽이지 못했다며 분한 듯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헛소리하지 마라.”
서무수가 서봉추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이렇게 사리 분별을 못 해? 여기는 경성이다. 사람을 죽이면 관아로 끌려간다고. 가게를 망치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났어?”
서무수가 이번에 굳이 서봉추를 데려온 것도 그래서였다. 혹시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뢰배들이 찾아왔다가 서봉추와 마주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맞아요, 관아에 끌려가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치자 서봉추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씩씩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일곱째 오라버니가 한 말도 맞아요.”
서봉추가 고개를 번쩍 들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며 목청을 높였다.
“그렇지, 누이? 내가 한 말이 맞지? 그런 몹쓸 것들은 때려죽여야 해.”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때려죽여야죠.”
서봉추가 흥분해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풀이 죽은 모습을 했다.
“누이, 위로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어디 사람을 마음처럼 때려죽일 수 있겠나.”
정교랑이 그런 서봉추를 보며 웃었다.
“오라버니, 그럴 용기는 없나 봐요?”
사내대장부의 자존심이 걸린 질문에 서봉추가 고개를 번쩍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용기가 없긴 누가! 나 서봉추가 죽인 나쁜 놈들만 해도 여덟은 되는데, 고작 무뢰배 따위가 뭐라고!”
“그럼 죽여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하자, 서봉추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이, 진담이야?”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서봉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무수와 범강림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누이가 서봉추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나? 어쩌려고?
“일을 관아로 끌고 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죠.”
관아로 이 일을 끌고 가게 된다면, 다들 관부로 잡혀들어갈 것이다. 관부가 어떤 곳이고, 감옥은 또 어떤 곳인가? 그곳이라면 관리들 마음대로 일을 키울 수도 덮을 수도 있다.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허비하는 곳인데, 서무수 형제들은 그럴 시간도, 돈도 없었다.
하지만 일을 관아로 끌고 가지 않기 위해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이 좀 앞뒤가 안 맞는데?
서무수는 자신의 머리가 좀 모자란다고 생각했고, 범강림과 서봉추는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럼, 누이의 말은 아예 일을 키우자는 거야?”
서무수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살인은 동네 패싸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다.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공개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이잖아.
서무수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앞의 열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여인, 아니 소녀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단정한 자태, 조곤조곤한 투로 말하고 있는 정교랑의 행동과 표정에서는 한 치의 무례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입으로는 살인을 말하고 있다. 날씨가 어떤지 묻는 게 아니라! 살인!
서무수는 순간 자신이 처음으로 이 소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병상에서 깨어나 고맙다고 인사했던 때가 아니라, 다 죽어가던 어두운 밤이었다. 남들 눈에는 의식을 잃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이고 잘 들렸다. 어쩌면 죽기 직전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서무수는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칠흑처럼 새카만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통증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게 운명일 테지.
단지 병일 뿐,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닌데, 못 고치긴요.
죽어가는 그의 앞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던 여인의 쉰 목소리가 일순간 새카만 밤하늘을 가르는 듯했다.
서무수가 고개를 들자, 어두운 밤 등불에 비친 맑고 부드러운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한번 이야기해 봐, 누이.”
서무수는 회상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튿날 오후. 옥대교 저택의 마당은 조용했다. 정교랑은 여전히 낮에 잠시 눈을 붙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회랑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반근에게도 졸음이 몰려왔다.
반근이 하품을 하며 옆에 앉아 있는 시녀를 쳐다보았다. 시녀는 손에 바늘과 실을 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반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녀를 부르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똑똑 소리에 시녀는 화들짝 놀랐다.
“누구세요?”
시녀는 손에 있던 바늘과 실을 바닥에 떨구고, 문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나야, 반근.”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당 한쪽에서 뛰어나온 금가아는 이제 헷갈려 하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반근이 세 명 있고, 둘은 이 저택에, 하나는 다른 집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아씨께서는 주무셔?”
몸종이 회랑 아래에 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찬합을 두 사람에게 건넸다.
“간식 몇 개를 만들어서, 아씨께 가져다드리려고.”
이런 건 여기서도 만들 수 있는데. 반근이 웃으며 찬합을 건네받았다.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며칠 있다가 노태야를 따라서 먼 길을 나서거든. 그래서 핑곗김에 아씨 뵈러 왔어.”
몸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시녀가 갑자기 퍼뜩 고개를 들고 몸종에게 물었다.
“노태야께서 떠나신다고?”
시녀의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어디로? 며칠 뒤에 바로 떠나? 며칠 동안 가는 거야?”
몸종과 반근이 시녀를 쳐다봤다.
“응. 근데 언니, 무슨 일 있어?”
시녀가 침착한 척 다시 자세를 고쳐앉았다.
“아니야.”
시녀가 무언가를 숨기는 듯 대답하자 몸종과 반근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씨께선 아직 주무시는 것 같은데, 우리끼리 먼저 간식 좀 먹을까?”
몸종이 화제를 돌리려고 웃으면서 찬합을 열었다. 그새 반근이 차를 끓여와, 반근 세 명이 나란히 회랑 아래에 앉았다. 금가아도 함께 불러 넷이서 오붓하게 간식을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 왜 그래?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아직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듯한 시녀에게 몸종이 대놓고 물었다.
장 노태야께서 경성을 잠시 떠나있는 사이에, 아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어 저러는 건가? 노태야 외에는 기댈 곳이 없어서?
시녀가 주춤하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너희, 사람 죽이는 거, 본 적 있어?”
반근과 몸종이 시녀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반근이 고개를 가로젓고 이어 몸종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멈칫했다. 얼굴에 공포감이 서렸다.
사람을 죽인다니……. 마른하늘에 갑자기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몸종은 순간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하늘에서 벼락이 한 번 내리치자, 몸종의 눈앞에 있던 두 사람이 불덩이가 되어 고통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몸종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악 내지르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갑자기 내지른 비명에 반근과 시녀까지 덩달아 비명을 지르면서 회랑 아래서 꽁꽁 부둥켜안았다.
“무슨 일이야?”
천둥소리가 지나가고, 정교랑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반근 셋이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자, 머리도 묶지 않은 채 겉옷만 대충 걸친 차림의 정교랑이 태연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천둥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마당도 다시 조용해져서 대나무 통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놀라서 바닥에 자빠져있던 금가아가 몸을 일으키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는 바닥에 나뒹구는 간식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슨 천둥소리에 그렇게들 놀라!”
소년은 비명 소리에 놀라 자빠진 자신의 모습이 창피해서 더욱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먹구름이 몰려와 초저녁쯤이면 비가 올 것 같았다.
“밤은 되어야 비가 올 거야.”
정교랑이 돌아가려는 몸종에게 말했다.
“아씨, 놀라셨죠. 죄송해요.”
몸종이 자책하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시녀도 겸연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반근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니까. 천둥 번개 같은 건 무서운 것도 아니지.”
반근이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괜찮아, 이미 깨어 있었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인사를 올렸다.
“제가 배웅하러 갔다 올게요.”
시녀가 먼저 말하자 반근은 멈칫했다. 문 앞까지 배웅하는 일은 원래 내가 하는 일인데. 반근은 층계를 내려가는 시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씨, 제가 서재를 정리해 두었어요. 글씨 쓰러 가시겠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몸종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언니, 그만 나와. 어서 들어가 봐.”
몸종이 웃으면서 말하자, 시녀가 몸종의 손을 잡으며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며칠씩이나 경성을 비우는 거야?”
또 같은 질문이네. 몸종은 의아한 듯 시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니,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시녀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라니까.”
시녀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노태야께서 경성에 계시면 아씨도 기댈 곳이 있으니 좋잖아. 가업은 점점 더 커져 가는데, 아씨의 친족들은 썩 믿을 만한 사람들이 못 되니까.”
시녀의 말에 몸종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친족이 못 미더우면 또 어때? 도관에서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한들 또 어떻고?
“겁내지 마.”
몸종이 시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씨의 말만 잘 들으면 돼. 그럼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어.”
시녀가 몸종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언니, 사람 죽이는 거 본 적 있지?”
몸종이 어린아이도 아닌데, 천둥소리 따위에 그리 새파랗게 질릴 리가. 반근의 말처럼,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는 법이다.
“죄를 지은 사람을 하늘이 벌하는 건 본 적 있어.”
몸종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옳고 그름-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사내 한 명이 비를 뚫고 저택 안으로 급히 들어와 삿갓과 도롱이를 벗었다.
“주오.”
안에 있던 사내 네다섯 명이 성난 말투로 못마땅하다는 투로 소리쳤다.
“빨리 돈 안 갖다 주면, 우리 형제들이 죽어 나가게 생겼소.”
주오라고 불린 사내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묵직한 돈주머니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들어보니 액수가 꽤 되는 듯했다. 사내들의 표정이 그제야 좀 풀렸다.
“거기에 그런 호걸들이 있었을 줄이야. 내 미처 살피지 못해 의도치 않게 자네들을 놀라게 했군. 이 돈으로 놀란 마음이나 좀 진정시키게나.”
주오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공손한 말투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퉤. 호걸은 무슨. 우리가 순간 방심했던 거지.”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침을 뱉었다. 흰 천으로 얼굴을 칭칭 감고 코까지 가리고 있어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말하느라 상처가 벌어져 고통스러운지,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가슴속에서 더욱 열불이 솟구쳤다.
“내 하늘에 맹세코 그 녀석들을 이 경성 바닥에서 뼈도 못 추리게끔 할 테다. 그까짓 일도 못 해낸다면, 내가 경성을 떠야지.”
“왕대, 그렇게까지 해서 손해 보는 건 자네들이야. 괜히 무리하지 말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모욕적인 말이었다. 사내 몇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어서려고 했다. 왕대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주오, 자네가 그렇게 비꼬지 않아도 돼. 내가 잃어버린 체면이니 내가 찾아오겠다는 것뿐이야. 이 돈을 받고 말고는 상관없이.”
돈을 안 받았다면 과연 네놈들이 움직이겠어? 체면? 무뢰배 주제에 언제부터 체면을 챙겼다고, 웃기는 소리 하고들 있군.
주오는 속으로 그들을 실컷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체했다.
“왕대, 자네가 오해했네. 내가 왜 그런 뜻으로 말했겠어. 내 말은, 체면을 되찾는 데 꼭 주먹을 써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왕대가 갸우뚱하면서 주오를 쳐다봤다.
“그럼 어떻게?”
“관부가 있지 않나.”
왕대가 멈칫하더니 짚이는 게 있는지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주오를 보내고 난 뒤, 사내들은 주오가 던져주고 간 돈주머니부터 서둘러 쏟아보았다. 바닥에 가득 쌓인 돈을 보는 사내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태평거가 눈엣가시이긴 한가 보군. 이렇게 돈을 많이 써서 손을 보다니.”
“내가 보기엔 그냥 손보는 정도가 아니야.”
왕대가 흰 천에 감긴 코를 만지면서 섬뜩하게 웃었다.
“아예 집어삼키겠다는 거지.”
작은 소란을 관부까지 가야 할 정도로 키워서 누구 하나는 옥살이를 시킬 작정인가 보군. 그런 곳은 들어가긴 쉬워도 나오긴 어려우니까.
“됐다. 챙길 거 챙기고, 애들 몇 명 더 불러라. 복수하러 가자!”
왕대가 땅에 쌓인 돈더미를 허공에 뿌리자, 사내들이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돈을 향해 달려들었다.
왕대 일행은 큰비가 지나간 후 질퍽거리는 땅을 밟으며 점심시간에 맞춰 태평거 앞에 도착했다.
“이상하네, 왜 아무도 없어?”
사람이 북적거려야 할 식사시간인데, 태평거 앞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이 흘렀다.
왕대도 말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전에 기녀가 불렀던 노래가 뭐였더라? 문 앞은 쓸쓸하고 마차와 말도 없어 찾는 이가 없네, 였던가.
인기척을 들었는지 태평거 위층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손님분들, 오늘은 사정이 있어 문을 열지 않습니다. 다른 식당으로 가시지요.”
사정이 생겨서 문을 안 열어? 왕대가 고개를 들어 위층을 쳐다봤다. 위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점원도 왕대를 빤히 쳐다보더니, 전에 왔던 무뢰배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내며 숨었다.
점원의 헉 소리는 선전포고의 신호가 되었다. 적들이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니, 지금 당장 기세를 몰아 싸워야 한다.
이 짓을 하루 이틀 한 게 아니었기에, 굳이 우두머리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무뢰배들은 손발을 착착 맞추어 움직였다. 왕대 일행은 순식간에 태평거를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문 열어!”
“사람을 때려놓고 숨으면 그만이냐?”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해놓고 무사할 줄 알아?”
태평거 대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큰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감히 무슨 일이냐고 물으러 오는 이는 없었다.
흰 천에 감긴 커다란 돼지머리 같은 얼굴의 왕대가 열려 있는 위층 창문을 노려봤다.
“사람을 때려놓고 숨기만 하면 되나, 이 몸이 다친 건 어쩔 건데? 당장 주인장 불러와!”
위층 창문에서 누군가가 목을 빼꼼 내밀어 밖을 살피더니, 분위기가 더 험악해진 것을 확인하고 후다닥 숨었다. 그 후로는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려도 더 이상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다.
“형님, 저놈들이 숨기만 하고 우리랑 부딪치는 걸 피하니까,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관부 쪽 사람이 온다 해도 도리가 없소이다.”
사내 중 하나가 왕대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왕대는 태평거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땅에 퉤 침을 뱉었다.
“문을 부숴라! 쳐들어가야겠다!”
무뢰배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도구를 들고 대문, 측문, 후문을 향해 덤벼들자 둔탁한 마찰 소리와 문이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절대 패 죽이지는 말고 손이나 발만 부러뜨려. 알아서 눈치껏 바닥에 눕는 것도 잊지 말고…….”
왕대가 사내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형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오늘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사내의 대답과 함께 대문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무뢰배 무리는 욕설을 퍼부으며 동시에 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 망할 것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참한 비명이 들렸다. 앞서 들어갔던 세 명이 문밖으로 튕겨 나와 뒤따르던 무뢰배들을 깔아뭉개자 문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욕하는 이도, 소리를 지르는 이도, 웃는 이도 있었다.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죽었다고?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문 쪽을 향해 걸어가던 왕대가 우뚝 멈춰 섰다.
“제길, 그러게 좀 살살하라고 했잖아…….”
왕대는 욕을 해대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걸어간 그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수하들이 천천히 비켜서자, 문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더욱 또렷이 보였다.
무뢰배 세 명이 눈도 감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그들의 목에는 긴 화살이 각각 하나씩 꽂혀 있었으니, 대충 보아도 즉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문 안에서 세 사내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들은 손에 활을 하나씩 들고, 예리하게 갈지 않아 다소 투박해 보이는 화살촉으로 왕대를 겨눴다.
왕대가 중간에 서 있는 자를 알아보았다. 바로 그날, 자신의 코뼈를 부러뜨렸던 사내였다. 여전히 낡은 청색 장포를 두른 사내는 침착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너, 너희들 뭐하는 거야?”
머릿속이 새하얘진 왕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들에게 다급히 외쳤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을 죽이진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는데, 왜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애들이 화살에 맞아 죽은 거야?
“이 벌건 대낮에 감히 사람을 죽여!”
왕대 옆에 서 있던 한 무뢰한이 큰소리로 외쳤다. 서무수가 그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면, 안 되나?”
서무수는 말이 끝나자마자 손에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투박하게 만들어진 사냥용 활에서 나간 긴 화살은 무뢰한의 몸을 관통했다. 그 뒤에 있던 자는 무뢰한의 살과 피가 섞인 화살촉이 등을 뚫고 나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했다. 무뢰한은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쳤다.
왕대는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악몽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매일 하던 일이라 이번에도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거지? 고작 쌈박질에 살인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이 시골 촌뜨기들이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먼!
“사람을 죽이다니, 너희가 감히 살인을…… 감히 살인을…….”
흰 천 사이로 빨갛게 충혈된 왕대의 눈이 보였다.
“너희 같은 도둑놈도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서무수가 호통을 치고 화살 하나를 다시 활시위에 올렸다. 그는 정확히 왕대를 조준하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말해라. 누가 너를 보내서…… 우리 가게의 비법을 훔치라고 했는지!”
조용히 말하던 서무수는 누가 보냈느냐고 물을 때부터 목청을 높였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에 왕대 외 몇 사람은 귀가 먹먹해져 뒷말을 똑똑히 듣지도 못했다.
왕대 일행은 눈앞의 세 사내를 쳐다보았다. 급하게 만들었는지 투박하기 짝이 없는 사냥용 활을 쥐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심지어 화살촉도 달려 있지 않은 화살로 그를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모양새의 활에 사람들이 죽어 눈앞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확신했다. 저들은 얇은 나뭇가지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단지 무예만 뛰어난 게 아니라, 아주 흉악무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럴 줄 알았다면, 그깟 돈 몇 푼 벌겠다고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 무뢰배들의 혼비백산한 모습에 서무수가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말해. 누가 보냈지?”
서무수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주오, 주오입니다!”
왕대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무수가 활시위를 놓았다. 근거리에서 쏜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왕대의 목을 관통했다.
왕대는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허공을 휘젓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왜 배후를 말했는데도 죽임을 당했지?
또 한 사람이 쓰러졌다. 고꾸라진 몸뚱이에 아직 경련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였다.
“다섯.”
서무수가 눈앞의 시체들을 보며 말했다.
기세등등하게 왔던 열댓 명의 무뢰배들은 어느새 다섯이나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몇 명은 겁에 질려서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 서 있는 세 사내의 위압감에 압도되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연신 절을 하면서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큰길가에 있던 행인들이 하나둘씩 태평거의 일을 알아보고는 시끌벅적해졌다. 범강림과 서봉추가 서무수의 옆으로 다가왔다.
“형님, 아직 성이 덜 풀렸습니다. 난 고작 한 발밖에 못 쐈다고요.”
서봉추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눈빛을 빛냈다. 그러더니 손에 있던 활시위를 잡아당겨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무뢰배들을 조준했다.
“아예 이놈들까지…….”
“그만.”
서무수가 말을 잘랐다. 목숨 다섯이다. 이미 작은 사건이 아니야.
고개를 들어 보니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관졸 일고여덟 명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누이 말대로 일을 한껏 키웠어.
큰길에 갑자기 사람들이 이리저리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주육낭이 물었다.
“무슨 일 났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마차를 끄는 사람들도 모두 한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자네도 참 오지랖이야.”
진십삼이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주육낭에게 핀잔을 주었다.
“내가 밥 한 끼 사겠다는데, 뭐가 어때서?”
주육낭은 휘장 너머를 내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사람들이 뛰어가는 방향이 어째…….
“밥을 사? 태평거는 오늘 휴업이라던데, 거기서 뭘 먹겠다고.”
“내가 언제 태평거 가서 먹겠다고 했나? 쉴 만한 사정이 있겠지,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해.”
진십삼이 웃으면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내 누이인데,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고작 하루 문 닫은 건데, 자네는 장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안 거야?”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태평을 원하거든.”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사람들 무리에 더욱 가까워졌다. 허겁지겁 뛰어다니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들 그러는데?”
“어서 가 봅시다. 태평거에서 살인이 났대요!”
태평거? 살인!
주육낭과 진십삼은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걔는 매번 골칫거리만 만들어낸다니까!
주육낭이 채찍을 휘두르자 마차는 인파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같은 시각 보수사. 두 승려가 명해선사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태평거에서 온 이가 뭐라고 하던가?”
명해선사가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듣기로는 누군가가 태평거의 두부 비법을 훔치려고 하다가 충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승려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명해선사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그건 피치 못할 일이지.”
실내에 침묵이 흘렀다.
“가 보거라. 우리는 속세를 떠났으니 속세의 예법을 따를 필요 없지만, 속세의 일에 얽혀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지.”
나서겠단 뜻이었다. 두 승려가 명해선사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물러났다.
“진만당, 이 사람아. 자네가 또 부처님께 빚을 지는군. 언젠가는 꼭 갚아야 할 것이야.”
노승의 웃음 섞인 혼잣말이 끝나자 실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경성의 관아에 소속되어 있는 관아 관졸들은 벌써 경성 바닥을 십수 년째 구르는지라 노련했다. 별별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대충 눈치껏 영민하게 처세해 왔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은 그간 그들이 봐 왔던 사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관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태평거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모인 군중이 사방에 빽빽했고, 바닥에 누워있는 몇 구의 시체들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로 사람들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앞장서 있던 관졸이 외쳤다.
“나리, 좀 전에 이 도둑놈들이 우리 태평거의 비법을 훔치려고 쳐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손에 쥔 것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서무수가 관졸들의 앞으로 다가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헛소리, 저건 더 헛소리야. 관졸이 속으로 외치며 자신 앞에 서 있는 우람한 사내를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들이 와서 훔칠 게 뭐가 있다고.”
관졸이 저도 모르게 서무수의 말을 받아쳤다. 그 말에 서무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보고 있던 주육낭과 진 공자 역시 짚이는 게 있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현장을 살펴보지도 않고 대뜸 질문부터 던지는 모습을 보니, 관졸도 이 사건에 대해서 이미 아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누이 말이 맞았어. 감히 식당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자들이라면, 분명 배후가 있었을 터. 무뢰배를 시켜서 단순히 소란을 피우려던 게 아니라, 필시 우리를 관아로 끌고 가 옥살이를 시키려고 했던 게 틀림없어. 일단 감옥에 들어가면…….
귀신같이 시간을 맞춰 온 관졸을 보니 배후가 있다는 게 더욱 확실해졌다.
아무리 큰일이어도 남들 앞에서 공명정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의 뒤에 숨어 떳떳하게 설명할 수 없는 자만이 이 상황을 두려워할 것이다.
“나리,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서무수의 물음에 관졸은 험상궂은 얼굴로 대답했다.
“식당 아니더냐.”
본디 동네에서 종종 일어나는 패싸움처럼 가벼운 사안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살인 사건으로 바뀌었다. 예상했던 상황과 너무 달라진 나머지, 관졸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적어도 누구 하나를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으니, 돈만 받고 일을 제대로 못 했다는 소리는 안 틀을 터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식당 옆에 작은 공방이 있습니다. 태평 두부방이죠.”
공방!
공방이라 함은 진귀한 예술 공예나 대대손손 내려오는 비법을 지키고 계승해가는 곳이다. 공방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비법을 훔치거나 몰래 엿보는 것이다. 경성에서는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와도 공방에는 절대 들이지 않는 공공연한 원칙이 있다. 행여나 한밤중에 몰래 공방에 들어가려는 이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죽여도 된다는 게 관례였다.
관졸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모두가 아시겠지만, 태평거에서 만들어내는 태평 두부는 다른 두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특별합니다.”
주위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맞아, 맞아. 나도 안다고. 이 집에서 만든 두부는 남다르지.”
3월 20일의 선다회에서 이대작이 두부를 조각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접하기 어려울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보수사에서 양두부를 절밥으로 제공하기 시작하자 태평 두부는 금세 유명해졌다. 경성 안에서는 너도나도 두부를 팔기 시작해 두부를 만드는 집들이 순식간에 많아졌지만, 태평 두부만큼 맛있는 두부는 없었기에 태평거의 경쟁자가 되기는커녕 그 명성만 높여 줄 뿐이었다.
서무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했다. 그리 훌륭한 비법인데, 훔치려는 사람들이 많긴 하겠지.
“정말 못됐군. 대낮에 와서 훔치려고 하다니, 국법이 지엄한데!”
구경꾼 중 한 명이 목청을 높였다.
“그러게, 정말 몹쓸 놈들이군.”
“이 무뢰배들은 얼마 전에도 행패를 부리러 왔었다네. 역시 못된 심보를 가지고 있었어!”
아직 관졸들이 나서서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서너 마디로 벌써 죄가 판명 났다. 관졸들은 당황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쳤다. 사람이 너무 많아 구경꾼 중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찾아내기 힘들었다.
주육낭이 진십삼을 쳐다보자 진십삼은 눈을 찡긋하며 웃고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도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네 이놈! 허튼소리 마라. 설령 이들이 훔치려고 했다 한들, 누가 이 벌건 대낮에 오겠느냐!”
관졸은 서무수에게 호통을 치는 한편 다른 관졸들에게 사람들을 쫓아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동료를 더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항상 밥 먹듯이 해 오던 간단한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이야!
이 흉악한 놈들이 정말로 사람을 죽이다니! 무려 살인을, 감히 어떻게!
서무수는 냉소를 보이고 관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리, 소생이 어찌 감히 낮과 밤도 구분할 줄 모르고 헛소리를 지껄이겠습니까. 이는 도둑들에게 직접 물어 확인한 것입니다.”
서무수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한쪽 구석에 모여 벌벌 떨고 있는 무뢰배 몇을 지목했다.
“못 믿겠다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서봉추가 무뢰배 중 하나를 발로 차면서 호통쳤다.
“네놈에게 묻잖아!”
겁에 질려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듯한 무뢰배는 좀 전에 자신의 눈앞에서 형제들이 차례로 화살에 맞아 죽는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을 발로 찬 사내가 아직 사람을 덜 죽였다는 듯이 자신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던 모습이 생생했다.
무뢰배는 허둥지둥 바닥을 기면서 서봉추를 향해 살려달라고 절하려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말해, 주오가 시킨 거 맞지!”
서무수가 외쳤다. 주오라는 이름이 나오자, 관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로 말해버린 거야? 그럴 리가!
“너희 우두머리한테 누가 훔치라고 시켰는지 물어보니, 분명히 그 입으로 주오라고 말했다. 네놈들도 똑똑히 듣지 않았느냐!”
서무수가 다시 고함을 치면서 물었다. 바닥에서 기고 있던 무뢰배들은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듣지 않았냐고? 듣지 않았냐고?
함께 어울려 다니던 세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뒤이어 왕대의 오른팔도 말 한마디 했다고 죽임을 당했다. 이어 활을 든 세 사내가 한 발 한 발 다가오며 그들을 압박했다.
“말해. 누가 보냈지?”
“주오, 주오입니다!”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살은 왕대의 목구멍을 뚫어버렸다. 오랜 세월 경성 일대에서 행패를 부리며 걱정 없이 살던 무뢰배의 우두머리가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눈을 뜬 채 죽어버린 것이다.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다섯 사람에게 서무수가 한 걸음 더 다가서서 눈을 치켜떴다.
“말해라. 도대체 누가 너희를 시켜 우리 비법을 훔치라고 했는지!”
“입을 열어라! 누구냐고!”
무뢰배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있는 힘껏 외쳤다.
“주, 주오입니다! 주오가 시켰어요!”
무뢰배들이 외치는 소리에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야유했다. 얼굴색이 잿빛이 된 관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벌건 대낮에 발생한 사건이다. 심지어 두 눈 부릅뜨고 현장을 둘러싼 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서무수의 질문에는 어떠한 협박이나 회유도 없었고, 대답을 한 사람은 왕대가 직접 데리고 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 주오라고 외치는 순간, 의심할 여지 없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셈이다.
이런 빌어먹을! 옥에 가두어야 할 사람들은 멀쩡하고, 도리어 저들은 반이나 죽은 데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실토까지 하다니?
서무수가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에 힘을 풀었다. 양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됐어, 해냈어!
무뢰배 몇 명쯤이 무슨 대수라고요. 그럼 때려죽이죠.
서무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 말을 뱉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무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뢰배 몇 명쯤이 무슨 대수라고, 때려죽이면 그만이지.
“할아버님, 할아버님.”
두칠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엎드리다 못해 기다시피 하며 유 교리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할아버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두칠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 교리는 성가시다는 듯 두칠에게 잡힌 소매를 휙 내뺐다.
“어찌하냐고? 네놈도 모른단 말이냐?”
굳은 표정의 유 교리가 비아냥대는 말투로 말했다.
“너 아주 유능한 거 아니었어?”
두칠이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아주 잘났더구나! 돈 써서 무뢰배들한테 사주하는 건 언제 배웠더냐? 네 놈은 아직도 경성 밖에서 구멍가게 장사하는 줄 알고 있는 게냐! 철딱서니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구나! 이 소문이 경성에 퍼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웃다가 아주 배꼽이 다 빠지겠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머리는 왜 달고 사느냐?”
유 교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더욱 치솟아 호통을 쳤다.
“할아버님, 할아버님. 도저히 울분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두칠이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으면서 호소했다.
“거긴 우리 집안의 땅이고 제가 일궈낸 곳이라고요. 이대작도 우리 집에서 배운 요리 비법을 태평거로 가져가서 명성을 날리는 겁니다! 태펑거는 제 덕에 거저 누리고 있다고요!”
유 교리가 두칠을 벌레 보듯 보면서 침을 뱉었다. 유 교리가 처음 두칠의 뒤를 봐주기 시작했던 것은, 두칠이 영리하고 자신에게 아부를 잘 떨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두칠이 운영하는 식당이 잘 되니, 자신에게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도 꽤 두둑하다는 점이 중요했다.
“네놈이 아주 돈에 눈이 멀었구나! 그게 어떻게 네 것이야? 그런 소인배의 심보를 가지고 있으니 일이 이 지경이 되지!”
분을 칠한 두칠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한 줄 한 줄 그어졌다.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엎어져서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은 퍽 우스꽝스러웠다.
“할아버님, 전 그래도 이 울분을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못 참겠어도 참아! 이 멍청한 것아, 생각을 좀 해 봐라. 경성에서 가게를 열 배짱이 있고, 명해선사가 직접 나서기까지 하는데, 어디 보통 사람들이겠더냐! 뒤를 봐주는 이가 없었다면 네가 나서기도 전에 탐욕스러운 대머리 땡중들이 벌써 태평거를 손안에 넣었겠지! 너 따위가 무뢰배들에게 이런 짓거릴 시킬 차례도 안 왔을 거다!”
눈물을 닦던 두칠은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겁이 더럭 났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다 알아봤는걸요. 관부 기록으로는 연고도 없는 타지인 몇 명이 태평거 주인장이라고만…….”
“그렇게 치면, 네가 나한테 주는 배당금은 기록으로 안 남겼으니, 앞으로 인정 안 할 셈이냐?”
유 교리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두칠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며 감히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네놈도 그럴진대, 그 타지인이라고 다르겠어? 이 멍청한 것아. 기록으로 박아 둔 게 무슨 대수냐. 글로 남기지 않은 게 핵심이지!”
두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두칠 역시 속으로는 배후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그게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려고 한 번 찔러본 것이었는데, 상대가 이 정도로 지독할 줄은 몰랐다. 그저 툭툭 쳐본 것일 뿐인데, 상대방은 단번에 팔을 물어뜯은 것도 모자라 아예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할아버님, 그럼, 그럼 이제 어쩌죠?”
두칠이 망연자실하여 물었다. 유 교리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허구한 날 말썽만 일으키지! 경성에서 관리로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데, 내가 네놈 뒤치닥거리나 하려고 사방에서 호시탐탐 지켜보는 눈을 피해 버텨온 줄 알아? 네놈이 벌린 일이니 나한테 묻지도 마라!”
“할아버님, 소손은 기댈 곳이 없습니다.”
두칠은 다시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부짖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먹었으니 다행이다. 욕도 일종의 관심이니, 아예 무시하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두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후, 유 교리가 사람을 불렀다.
“지금 그자들은 어디에 있나?”
“반 시진 전에 모두 관아로 끌려갔습니다.”
하인이 대답했다.
“관아라…….”
유 교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왕 들어간 거라면…….”
“대인, 보수사 쪽 사람들도 같이 갔습니다.”
하인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속세를 벗어나 사찰에 틀어박혀 풀만 먹고 사는 승려들이라지만, 절 밖으로 나오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큰 사찰은 워낙 명성이 대단하다 보니, 여기저기 엮여 있는 복잡한 관계 또한 많을 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가진 땅이 더욱 많아지고, 들이는 범수(梵嫂: 중의 아내)가 그리 많아질 리가.
유 교리는 언짢은 듯 두칠을 노려보고 호통을 쳤다.
“이 멍청한 것아! 들었느냐?”
두칠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못했다.
“판관이 대질했지만, 왕대가 자기 입으로 주오의 사주를 받아 태평거의 두부 비법을 훔치러 갔다고 태평거 사람들이 말했답니다. 왕대가 데려온 수하들이 증언까지 했고요.”
하인이 이어서 설명했다.
“왕대가 인정할 리가 있나! 그리고 주오는 그런 일을 사주한 일 없어!”
두칠이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인정을 하고 말고는 중요치 않다! 왕대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하필 살아 있는 자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 않더냐. 주오가 왕대에게 큰돈을 준 것도 사실이고.”
유 교리는 말을 하다 보니 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기왕 사주를 할 거면 좀 제대로 된 사람들을 찾아 시켜야지. 조금만 겁을 줘도 천지 분간 못하고, 제 발등이나 찍을 줄 아는 무식한 무뢰배들을 시킬 생각을 해?
유 교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지금은 단칼에 잘라내는 수밖에.”
두칠과 하인이 고개를 들어 유 교리를 쳐다보았다.
“주오한테 본인 선에서 끝내라고 해라.”
유 교리가 말하자 두칠은 깜짝 놀랐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의 말씀은 그럼…….”
두칠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태평거 사람들을 혼내주려고 벌였던 일이, 어떻게 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되어 버린 거야?
“할아버님, 정녕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이미 관아까지 넘어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두칠이 무릎을 꿇고 앞으로 기어갔다.
“다른 방법?”
유 교리가 고개를 돌려 두칠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네가 생각해 보든가.”
고작 시정아치 때문에 직접 나서야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로 싸우라고? 이놈이 장난하나!
“주오 선에서 자르면, 모든 책임을 그놈에게 떠넘기고 관부에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게 해줄 수는 있다.”
두칠은 아직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 처음으로 가서 난리를 피울 때부터 오늘까지, 그쪽은 내내 흠 잡힐 곳 없이 행동하고 있어.”
유 교리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일이 일어난 지 벌써 세 시진이 넘어가고 있다. 네가 망설이는 동안 그들이 주오를 잡아낸다면, 얘야…….”
유 교리가 조용히 두칠을 부르자 두칠은 소름이 끼쳐 순간 몸을 떨었다.
“그때가 되면, 주오가 아니라 네가 힘들어질 게다.”
유 교리가 말을 마치자, 두칠이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예, 할아버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놈들을 한 번 짓밟아보려다가 내 팔이 잘려나가다니. 이번 일은 손해가 막심하다.
두칠이 이를 꽉 깨물었다.
태평거!
하늘색이 짙어질 때쯤, 진 공자는 방 안에서 좌불안석이었다. 평소와 다른 진 공자의 모습에 같이 있던 시녀가 그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도련님, 저랑 바둑 두실래요? 저 요즘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시녀가 웃는 얼굴로 진 공자의 소매를 잡았다. 진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마음이 없구나, 마음이.”
“그럼 도련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데요?”
곱상하게 생긴 시녀 둘이서 쿡 웃었다.
“어느 아씨한테 가 있는 거죠?”
진 공자가 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맞혔네, 어느 낭자에게 가 있다.”
두 시녀는 놀라서 서로 눈짓을 했다. 진짜로?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진 공자는 얼른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켜 마중했다. 주육낭이 한 손으로 두봉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시녀들이 주육낭의 두봉을 받아들며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어떻게 됐어?”
흥분한 목소리의 진 공자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주육낭은 자리에 앉아 소매를 걷어 올리고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주오가 한 시진 전에 성 남쪽 돌 골목에 있던 첩실 저택에서 멍석에 말려서 들려 나왔어.”
주육낭의 말을 듣은 진 공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훌륭하군.”
진 공자가 다시 반복해서 말했다.
“훌륭해.”
“그 사내들도 꽤 쓸모가 있어. 아주 독하고, 배짱도 있고.”
“그 사내들…….”
진 공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주육낭의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따라 하자 주육낭이 노려봤다.
“괴상하게 뭐하는 거야?”
진 공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 알면서 묻기는.”
주육낭이 고개를 돌리고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 사내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긴 한 것 같네. 시키는 대로 할 배짱이 있으니, 쓸모가 있는 게 맞지.”
진 공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무려 살인이야, 대낮에 살인을 한 거라고. 아무리 확실한 빌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일에는 만일이라는 변수가 있는 법인데.
만일 왕대의 수하가 겁을 먹고 증언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보수사의 사람이 나서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무뢰배들을 사주했던 사람이 죽기 살기로 나왔더라면…….
어떤 상황이 됐든, 그때 가서 뒤늦게 수습하려고 해도 직접 살인을 한 그 사내들은 죗값을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 여인을 얼마나 신뢰하기에 생사조차 따지지 않고 덤빈다는 말인가. 그 여인의 말 한마디에 바로 움직이는 자들이라니.
실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무언가 생각난 듯 진 공자가 침묵을 깼다.
“육낭, 저번부터 자네가 계속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이런 게 바로 진심이야.”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무슨 진심! 자네는 계속 괴상한 말만 늘어놓는군. 이만 가겠네!”
주육낭이 소매를 매섭게 내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진 공자는 웃음기 담긴 얼굴로 주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웅했다. 그러더니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탁자에 놓인 붓을 들어 먹물을 찍고 옆에 있던 병풍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넣었다.
“또 하나…….”
진 공자는 붓을 쥔 채로 천천히 말하며 병풍을 바라보았다.
병풍의 한구석에 세로로 동그라미 세 줄이 그려졌다. 첫 행에는 동그라미 두 개, 둘째 행에는 다섯 개, 마지막 행에는 먹이 무겁게 찍힌 동그라미 하나가 있었다.
어둠 속 흔들리는 등불에 비친 동그라미들은 괴이한 아름다움을 빛냈다.
날이 환히 밝았을 무렵, 시녀는 마당을 벌써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반근 누나, 뭐 기다리는 거 있어?”
금가아가 물었다.
“반근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시녀가 되물었다. 두 질문에 같은 이름이 등장했지만 금가아는 더 이상 헷갈리지 않았다.
“반근 누나는 방금 나갔잖아. 반 시진은 있어야 돌아오지.”
“왜 일찍 나가지 않고.”
금가아의 대답에 시녀는 주먹을 쥐고 서성거리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반근 누나는 늘 이 시간에 나갔잖아. 왜 일찍 나가야 하는데?”
깨엿을 입에 문 금가아가 웅얼거렸다.
“지금은…….”
시녀는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을 삼켰다. 그래, 지금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왜 내가 먼저 당황해서 이 난리야?
도련님들은 그날 밤 어둠을 틈타 한 번 다녀간 후로 다시 오지 않았고,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지도 않았다. 아씨도 금가아에게 태평거로 가 상황을 살펴보라는 말씀은 없으셨고, 반근은 여느 때처럼 장을 보러 나갔다.
식구들은 다들 평온한데 왜 나 혼자 이리 허둥대는 거야. 저 반근은 요리 솜씨가 날로 발전하고 있고, 이 반근은 거리거리 골목골목을 누비며 온갖 풍문과 뒷말을 수집해 오는데, 나 반근은 어째 진보는커녕 퇴보만 하는 것 같네.
명색이 아씨와 함께 늑대 떼와 싸워 살아남은 사람인데, 이만한 일로 정신이 나가 허둥대다니. 아니지. 어쩌면 사람이, 늑대보다 더 무서울지 몰라.
“반근 누나, 왜 그래?”
시녀가 말을 하다 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자 금가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반근이 금가아를 보며 웃었다.
“아씨 활쏘기 연습 하실 건데, 너도 같이 가서 할래?”
시녀가 물었다. 정교랑이 활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서무수는 집 안에 과녁을 걸어 주었다. 매일 오전, 글씨 연습을 마치고 난 정교랑은 서무수가 준 작은 활과 화살로 다시 반 시진씩 활쏘기 연습을 했다.
사내아이에게 칼이나 활 같은 무기는 언제나 흥미를 끄는 대상이었다. 금가아는 조악한 솜씨로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어 정교랑을 따라 놀았다.
“도련님이 한가해지면 저도 하나 만들어 주신대요.”
금가아가 정교랑의 활과 화살을 부러운 듯 쳐다보며 말했다.
주육낭은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연무장에서 무예 연습을 끝낸 후에도 웃통을 벗은 채 수통 옆에 한참을 서 있었다. 시녀들이 보다 못해 주의를 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주육낭은 시녀들이 땀을 닦아 주도록 몸을 맡긴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주육낭이 결국 문을 나섰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울긋불긋 꽃이 만발한 가운데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사실, 무뢰배 몇 명이 죽었을 뿐이다. 그것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무뢰배. 살아 있을 때는 여염집 백성보다 자유롭게 활개 치며 살았다지만, 죽고 나면 거리에서 얼어 죽은 비렁뱅이나 다를 게 없었다.
온 경성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 벌벌 떨기라도 할까 봐? 주육낭은 거리에 서서 실소를 터뜨렸다.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낯익은 계집이 바구니를 들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반근 누나, 왔구나.”
금가아가 손에 작은 활과 화살을 든 채 문을 열었다. 금가아가 반근을 보며 미처 웃기도 전에, 반근 옆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문을 홱 열어젖혔다. 금가아와 반근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주육낭은 벌써 이들 옆을 비집고 들어선 후였다.
작은 마당은 소박하면서도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푸른 대나무와 아름다운 꽃은 물론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까지 있었다.
산석 옆에 있던 여인이 몸을 돌렸다. 수수한 옷차림에 소매를 동여맨 여인은 반짝이는 눈과 하얀 이를 가진 미인이었다. 여인이 손에 든 화살과 활로 주육낭을 겨눴다.
주육낭이 걸음을 멈춘 채 여인을 쳐다봤다. 투박하고 볼품없는 나무 활이었다. 현은 실을 꼬아 만든 듯했고, 윤이 나도록 다듬은 화살촉만 햇빛에 반짝였다. 화살은 금방이라도 활시위를 떠날 태세였다.
아무리 볼품없는 화살도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그 무뢰배들이 그리됐듯이.
시녀와 금가아는 숨을 죽인 채, 마주 보고 서 있는 소년과 소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정말로 쏘진 않겠지…….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리며 손의 힘을 풀었다. 텅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몇 장 밖에 있는 과녁의 정중앙에 안정적으로 꽂혔다. 마당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씨, 정말 대단하세요.”
시녀가 웃으며 환호했다. 정교랑이 손을 거두고 몇 걸음 걸어갔다.
“금가아, 네 차례야.”
시녀가 웃으며 금가아를 불렀다. 여전히 문 옆에서 넋을 놓고 있던 금가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대답하고 신이 나서 달려왔다.
개구쟁이와 시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반근은 한쪽에 서 있는 주육낭과 다른 쪽에 서 있는 정교랑을 차례로 쳐다본 다음 고개를 숙인 채 채소 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금가아의 화살은 계속 과녁을 빗나갔다. 시녀는 몸을 젖혀가며 박장대소했다.
“넌 저리 가서 아씨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봐.”
정교랑이 다시 활과 화살을 들었다. 정교랑의 동작은 신중했다. 옷소매를 위로 올려 동여맨 탓에 팔이 드러났다. 살은 없지만 결코 허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주육낭이 선 쪽에서는 정교랑의 옆얼굴이 보였다. 햇빛을 받은 소녀의 오뚝한 코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텅 소리와 함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아씨, 또 명중하셨어요.”
시녀가 환호했다.
“금가아, 금가아, 너 다시 한번 해 봐.”
주육낭이 뒤돌아 가 버렸다. 시종일관 말 한마디 없었고, 말을 건네는 이도 없었다. 애초에 주육낭이 안으로 들어온 적도 없다는 듯이.
“아씨, 저 사람 또 왜 저런대요?”
시녀는 수건을 들고 정교랑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면서 그제야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저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정교랑은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시녀에게 건넨 다음 손을 털고 옷소매를 내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반근, 오늘 거리에선 어떤 새로운 일이 있었는지 들려줘.”
물 한 잔과 정교하게 만든 찹쌀 정과 한 접시를 내려놓았다. 씻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정교랑이 정과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남쪽 거리에 있는 무뢰배들이 사고를 쳤나 봐요. 남의 기밀을 훔치려고 협박을 하다가 도리어 맞아 죽었대요. 관부에서 같은 패거리를 조사 중이고요.”
대청에 꿇어앉은 반근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늘 성문에서는 검문이 강화됐어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붐비다 보니 관부가 아무 쓸모도 없다며 원성이 자자했죠.”
정교랑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옆에 있는 시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죽인 거야? 그, 태평거에서…….
“오늘 시장에 싱싱한 생선이 들어왔는데, 제가 한발 늦어서 못 샀어요.”
반근은 아쉬운 목소리였다.
“성 밖에 있는 그 태평거에서 다 사 갔대요.”
거기까지 말한 반근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했다.
“아, 맞다. 그리고 보수사는 오늘 성 밖에서 태평 두부를 한 수레나 들여왔어요. 오늘 보수사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다들 두부 맛을 보겠네요.”
시녀는 자리에 앉았다. 멍한 표정이던 시녀가 문득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아씨. 그래서 부처님은 성심을 본다고 하셨군요.”
시녀가 중얼거렸다.
음식 공양이라고 했을 때 가장 처음 떠올린 것은 이름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떼돈을 벌게 됐다. 돈을 버는 일이려니 했더니 뜻밖에도 뒷배까지 얻게 됐다. 이다음엔, 또 뭐가 있으려나?
그깟 무뢰배 몇 놈들인데, 노태야까지 나서실 필요는 없지. 하긴, 그냥 무뢰배들인걸. 진작 그물을 펼쳐 놓고 기다리는데, 기세등등해서 횡포를 부리러 왔다가 도리어 황천길을 재촉하게 된 꼴이지. 별일도 아니야, 신경 쓸 것 없어.
경성 밖에서 하루 밤낮 사이에 일어난 이 일에 대해 백성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여드레쯤 지난 후에야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남쪽 거리의 시정잡배 주오가 태평 두부의 비법을 눈독 들이고 무뢰배들을 돈으로 사 보냈다가 도리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유일하게 퍼진, 정확하면서도 확실한 진상이었다.
“관두자고. 점점 더 맛이 떨어지네. 먹을 것도 이게 전부고. 재미없어, 그만 가세.”
대청의 탁자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앞에 놓인 과로신선을 보며 떠들어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과로신선은 겨울철에 먹을 때처럼 별미가 아니었고 도리어 열이 올랐다.
“더워 죽겠네.”
다른 손님도 손을 내저었다.
“우리 차라리 태평거로 가세나. 거기 요리가 아주 끝내준다던데.”
“태평거? 며칠 전에 사람이 죽어 나간 태평거 말인가?”
나머지 손님들은 주저하는 눈치였다. 사람이 죽은 곳에서 밥을 먹는다는 건 왠지 께름칙했다.
“사람이 죽었으면 뭐? 감히 태평거에 와서 행패를 부리려 하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게지. 거긴 부처님께서 지켜 주시는 곳이라고.”
“맞아. 그때 여러 사람이 봤다더군. 그 무뢰배들은 부처님의 빛을 받은 화살에 맞아 죽었대.”
“그래? 그럼 어서 가세. 어디 한번 가 보자고.”
이 손님들마저 계산을 마치고 자리를 뜨자 대청에는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문발 뒤에 선 두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주오가 죽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실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앞으로도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부리기 위해 두칠은 최대한 슬픈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면서 거금을 들여 주오의 부모와 처자식이 앞으로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약조를 지켰다.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두칠은 음으로 양으로 적잖은 돈을 썼다. 당초 이 사건을 일으킨 것도 자신인데 부랴부랴 매듭지은 것 또한 자신이었다.
안팎으로 들어간 돈을 셈해 보니 불과 며칠 만에 1만 관에 가까운 돈이 나갔다. 그 결과 식당에서 쓸 현금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지만 건물이나 땅을 파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누가 눈치라도 채면 큰일이었다. 결국 유 교리에게 고리로 빚을 얻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역시 뼈를 깎는 돈이었음은 물론이다.
금전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가산도 절반은 잃었다. 이게 누구 때문이지?
태평거!
마음이 불안하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식당도 점점 파리만 날리고 있다. 이게 누구 때문이지?
태평거!
자신은 피를 토하며 돈까지 쓰고 있는데, 태평거는 부처님이 지켜 주시는 곳이라는 명성을 얻지 않았는가!
그놈의 태평거!
두칠은 두 눈이 새빨개진 채 쥘부채로 벽을 쾅 쳤다. 이 원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갚으리라.
“정 언니!”
잔꽃으로 수놓은 치마를 입은 진단랑이 웃으며 층계를 뛰어 내려왔다.
“아씨, 천천히요.”
시녀가 웃으며 무릎을 구부리고 붙잡아 주려 했다. 진단랑은 벌써 정교랑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정 언니, 정말 우리한테 식사 대접할 거예요?”
진단랑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우리한테 대접하는 게 아니라, 조부님한테 한다고.”
곧이어 걸어 나온 진십팔랑이 말했다. 자연스레 정교랑에게 팔짱을 끼던 진십팔랑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정교랑을 훑어봤다.
“엇, 전에는 나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며칠 못 본 사이에 나보다 더 큰 것 같네요?”
“정 언니가 언니보다 더 커.”
진단랑이 말했다.
진 노태야의 마당에는 초목이 무성했다. 초여름 햇빛은 소녀와 여자아이의 몸에 얼룩을 만들었고, 그 밝은 웃음은 눈부시게 빛났다.
진 노태야는 눈앞에 펼쳐진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경을 미소로 감상했다. 세 사람은 나막신을 벗고 버선만 신은 채 대청으로 들어왔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이 늙은이의 병이 나은 후로 정 낭자가 이리 찾아온 건 실로 오랜만이구려.”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미소로 받았다.
“꺼리는 건 아니어도 제가 피하는 게 옳죠.”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녀 또래의 소녀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매사 나아가고 물러섬에 이치가 분명했고,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으며 원망도 공포도 없는 듯했다.
아무리 떠들썩하고 시끌벅적한 자리에 앉아 있어도 소녀는 시종일관 홀로 고립된 모습이었다. 일찍이 의지할 곳 없이 살았으니 지금도 의지하지 않고 살려는 거겠지.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이렇게 특별히 찾아왔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팔랑과 진단랑이 영문을 모르겠는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우리 어머니가 보내 주신 옷 때문에요?”
진단랑이 묻자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노려봤다. 그건 노태야께 고마워할 일이 아니잖아. 그럼 뭐 때문이지?
진십팔랑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많았다. 모든 일에 왜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꼬치꼬치 캐묻는 건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를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십팔랑은 조부를 쳐다봤다. 진 노태야의 담담한 표정에는 미소가 살짝 어려 있었다. 이 낭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는 게 분명했다.
감사라고? 은혜를 베푼 사람과 은혜를 입은 사람은 훤히 아는 일이건만,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만은 영문을 몰랐다.
그간 정 낭자와 조부님은 재진을 받을 때 한 번 본 게 전부인데, 혹시 그때 조부님한테 뭘 부탁드렸나? 요즘 정교랑과 관련된 일은 딱히 없었는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일 리도 없고. 그럼 이렇게 미리 와서 감사를 표할 리 없으니.
“정 낭자, 별말을 다 하시오. 낭자는 내 생명의 은인 아니오.”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했다.
“생명의 은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의원의 도를 행했을 뿐이죠. 더구나 노태야께서는 치료비를 주셨으니, 서로 빚진 것도 없고요.”
“그리 말하자면, 나 역시 이번에 딱히 도와준 게 없잖소. 낭자 스스로 자신을 구했을 뿐이지.”
진 노태야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도 미소를 지었다.
“세상살이란 건 힘드니까요. 누군가는 굳이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하지 않아도, 그저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 더없이 큰 도움이 돼요.”
진 노태야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경탄이 섞인 웃음이었다.
사실 진 노태야 역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적당히 말을 흘려 명성을 얻게 해 주었을 뿐인데, 눈 깜짝할 새에 태평거에서 사람까지 죽어 나가다니.
더구나 이 소식은 보수사의 늙은 승려가 직접 말해 준 것이었고, 겸사겸사 좋은 차까지 대접받았다. 사건이 벌어진 후 이미 닷새가 흐른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놀라 식은땀을 흘렸지만 내심 다행스럽고 기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다회에서 늙은 승려에게 이야기를 꺼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찾아갔다면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이 부족했을 터였다.
살인은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했다지만, 어쨌거나 진짜 주인은 정교랑이었다. 무려 살인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본인도 놀라지 않았으려나?
진 노태야는 눈앞에 있는 어린 낭자를 바라봤다. 무뚝뚝한 표정에서는 놀란 기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설마, 사람이 죽어 나갈 줄 알고 있었던 건가? 어쩌면, 이 낭자의 명으로 죽였을지도 모르지. 문제를 단번에 풀 수 있을 뿐더러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 충분하니까.
살인이라! 진 노태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쪽에서는 진단랑이 정교랑에게 무언가를 떠들고 있었다. 정교랑의 팔을 먼저 잡고 웃으며 재잘댔다. 정교랑 역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몸을 살짝 틀어 진십팔랑이 속삭이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해가 바뀌는 동안 저 소녀가 많이 컸구나. 여전히 여윈 모습이지만 백옥처럼 희기만 하던 피부에도 혈색이 돌아왔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 더없이 맑고 고와. 초롱초롱한 두 눈도 여느 소녀들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진 노태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애야. 딱히 의지할 곳도 없는 어린애.
“언니, 우리 밥 사 주러 어디로 데려갈 거예요?”
질문을 던진 진단랑은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대답했다.
“난 태평 두부를 먹고 싶어요.”
“너한테 대접한다는 것도 아니잖아.”
진십팔랑이 웃으며 말했다.
“노태야는 조용히 요양하셔야 해.”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대접하려면 성의를 보여야지. 내가 직접 노태야께 탕을 만들어 올릴 거야.”
그 말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언니가 직접 만든다고요? 반근한테 시키지 않고요?”
전에 먹었던 간식도 정교랑이 만든 것이라고 하긴 했다. 몸종과 시녀는 주인의 것이므로 몸종과 시녀가 만든 음식은 곧 주인이 만든 음식을 뜻했다. 그러니 정교랑 본인도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쭉 바보로…… 지냈다고 하지 않았나? 먹고 마시는 것도 누가 시중을 들어야 한댔는데?
문가에 조용히 꿇어앉아 있던 반근이 나서며 예를 올렸다.
“소인의 음식은 전부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반근이 웃으며 말하자 진 노태야는 퍼뜩 옛일을 떠올렸다.
“언니, 정말 맛있어요. 이거 이름이 뭐예요?”
“팥 춘권이야.”
“어린 낭자가 솜씨도 좋구려.”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아, 역시…….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오호, 그럼 기쁘게 받겠소이다.”
진소가 문을 나설 때였다. 몸종 몇 명이 웃고 떠들며 달려가는 모습에 진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곁에 있던 시종이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무슨 짓이냐? 버릇없이.”
겁을 먹은 몸종들이 쭈뼛쭈뼛 예를 표했다.
“노야께 아뢰옵니다. 정 낭자께서 직접 요리를 하신다기에, 저, 저희도 구경하러 가고 싶어서요.”
정 낭자? 진소 얼굴에서 불쾌한 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오늘 정 낭자가 왔느냐?”
과연 정 낭자라는 한마디에 진소는 화를 풀었다. 진씨 가문은 자녀의 법도에 엄격했지만 정 낭자는 진씨 가문에서 진씨 가문의 자식들과 같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법도를 엄격히 지키지 않아도 됐다.
세 몸종은 으쓱해져서 고개를 숙인 채 혀를 날름거렸다.
“네, 노태야를 뵈러 특별히 오셨대요. 지금은 노태야를 위해 요리하고 계시고요.”
몸종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직접 부엌에 들어갔다고? 이 낭자가…….
“알았다.”
진소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눈빛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몸종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숙인 채 쿡쿡 웃다가 까치발을 들고 달아났다.
대청 안. 진 부인이 남편의 옷을 받아 정리하며 웃었다.
“스스럼없이 구네요. 정중하게 답례를 전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소?”
진소가 웃으며 묻자 진부인이 웃으며 눈을 흘겼다.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진소가 자리에 앉아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아 천천히 마셨다.
“처음엔 많이 이상했어요. 좀 서먹하기도 했죠. 근데 오래 보다 보니까 오히려 좋더라고요.”
진 부인도 자리에 앉아 감상에 젖어 말했다.
“조용하고 쓸데없는 일을 안 하면서도 예절을 알고 도리에 밝아요.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워요. 그래서 단랑이 그리도 좋아하고 따르나 봐요. 좋은 사람은 아이들이 제일 잘 알아보잖아요.”
“그렇소. 사람의 좋은 점이 보이면 좋게 느껴지지.”
같은 시각 강주의 정씨 저택에는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봄에 새로 수리한 연못은 경치가 수려하여 사람이 살기 좋았다. 집안 낭자들은 다시 연못 근처로 거처를 옮겨 왔다. 비가 오자 자매들은 한데 모여 바둑을 두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 딸각딸각 나막신 소리가 들리더니 도롱이를 입은 정칠랑이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층계를 올라 회랑 아래로 온 정칠랑은 나막신을 벗어 던졌다. 회랑 아래에 앉아 있던 몸종들이 얼른 일어나 도롱이를 벗겨 주고 정칠랑을 안으로 안내했다.
“칠랑, 내 돗자리 젖잖아! 아버지가 남양에서 사다 주신 귀한 돗자리란 말이야!”
정육랑이 소리쳤다. 정칠랑은 콧방귀를 뀌며 비켜서기는커녕 돗자리에 두 번이나 힘껏 발을 굴렀다. 두 자매가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를 취하자 몸종들과 여종들이 얼른 말렸다.
“이게 중요한 게 아냐. 엄청난 소식이 있어.”
정칠랑이 눈을 반짝이며 자매들 앞에 앉았다.
“엄청난 소식을 네가 어떻게 알아.”
정육랑이 같잖다는 듯 턱을 들어 올리며 대꾸하자 정오랑과 정사랑이 중재에 나섰다.
“칠랑이 왜 안 보이나 했더니, 엄청난 소식을 듣고 왔구나.”
정칠랑이 손을 내저었다.
“진짜라니까.”
정칠랑이 앞으로 나서며 세 언니를 쳐다봤다.
“그 바보가, 혼인을 한대!”
정칠랑이 상상했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세 자매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누가 또 정칠랑의 심기를 건드려 바보라고 불리는 거지? 집안 자매? 아니면 자주 만나는 낭자들?
“어느 바보?”
정오랑이 물었다.
“어느 바보겠어? 집안에 바보가 하나밖에 더 있어?”
기분이 상한 정칠랑은 소리치며 입을 삐죽였다.
“다들 따라서 바보가 된 거야? 말도 못 알아듣고…….”
세 사람은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아, 그, 네 적장녀 언니!”
정육랑이 손짓을 하자 정칠랑이 발끈해서 일어섰다.
“그, 그건 네 언니지! 전에 백모님이 키우기로 하셨잖아! 가깝기로 따져도 너랑 제일 가깝고!”
진짜 어린애라니까. 지금이 말꼬리 잡고 늘어질 때야? 정육랑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고 질문했다.
“걔가 어떻게 혼인을 해? 바보와 혼인하겠단 사람이 있어?”
정칠랑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진짜야. 방금 아버지랑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거 들었어.”
정칠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주씨 가문에서 바보를 시집보낼 거라며 사주단자를 달라고 했다는데, 그럴 거면 우리가 아무한테나 시집보내버리면 되잖아.”
주씨 가문. 그 말에 정육랑 등은 사정을 대충 눈치챘다.
주씨 가문의 사람이 온 지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딸들인지라 직접 가서 방문 이유를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조그마한 집안에서 소식을 숨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곧 시녀와 몸종을 통해 말이 전해졌다.
주씨 가문에서는 그 바보의 사주단자를 가지러 왔으며, 모친의 혼수도 가져간다고 했다. 정씨 가문에서 이 일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딱 잘라 거절하자 양쪽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외지로 부임한 정 이노야도 휴가를 청하고 불려왔다.
“주씨 가문에서는 그 바보를 시집보내려는 게 아니야. 혼수를 가져가려고 핑계 대는 거지.”
정육랑은 뭔지 알겠다는 투로 말했다.
“주씨 가문엔,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
주씨 가문엔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그러니 바보가 태어났겠지. 이는 정씨 가문 전체가 굳게 믿는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주씨 가문에서는 정씨 가문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서 자기네 딸이 바보를 낳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런 생각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머릿속 깊이 각인된 것이어서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누가 바보랑 혼인하겠어?”
정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과 불쾌함이 서린 표정이었다.
“혹시 상대도, 바보인가?”
정오랑의 말에 정칠랑이 까르르 웃었다.
“웃기지 좀 마.”
정칠랑이 깔깔대며 웃자 머리에 꽂은 황금 장식이 흔들거렸다. 정오랑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참 나, 바보가 혼인을 하긴. 주씨 가문에서 그 바보를 키우기 싫으니까 핑곗거리를 찾은 거야.”
정육랑이 정칠랑을 보며 말했다.
“숙부님도 참, 어떻게 그 말을 곧이들으신대? 숙부님이 그 바보의 혼처를 찾아준다고 하면 아마 주씨 가문에서 당장 그 바보를 데려올걸? 숙모님도 그래. 숙모님 눈엔 그저 돈만 보이시겠지. 그 바보가 돌아오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안 하시고.”
정사랑과 정오랑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이부인은 이들의 적모(嫡母)였지만 대부인은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서녀 처지인지라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못 들은 척했다.
아직 어린 정칠랑이지만 말귀는 잘 알아들었다. 정칠랑은 콧방귀를 뀌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받아쳤다.
“우리 어머니는 아니야. 눈에 돈만 보이는 건 백모님이지. 자기가 돈 끌어모으려고 우리더러 아끼라고 하시잖아.”
“살림을 안 맡아 봤으니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도 모르겠지!”
정육랑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에 돈만 보이는 게 아니고서야 어쩜 그리 생각이 짧아?”
몇 살 어린 정칠랑은 말문이 막히자 열이 받아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울보야. 할 말 없으면 울기나 하지. 집에서는 부모님이며 조모님이 오냐오냐 받아주시지만, 나중에 시집가면 남편이랑 시부모님이 응석 안 받아줄걸!”
밖에 있던 몸종과 여종이 얼른 들어와 달랬다.
“우리 쟤랑 놀지 말자, 쟤랑 놀지 마.”
정칠랑은 울며 몸종과 여종에게 정사랑과 정오랑을 잡아끌게 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나가던 여종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잘 지내던 아씨들이 왜 또 싸우시지?”
“주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잖아.”
“그게 아씨들이 싸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 바보 얘기가 나왔잖아.”
“아, 그렇지. 그 바보랑 얽히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
이부인은 손님과 함께 대청에 앉아 있었다. 손님은 서른 남짓으로 보이는 여인으로 얼굴이 희고 살집이 있었다. 여인은 이부인 앞에서 겸손한 웃음을 짓고, 정칠랑을 달래는 이부인을 보며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칠랑, 울지 말고. 이 여덟째 외숙모가 갖고 놀 거 줄게.”
여인은 손에서 금반지를 빼 정칠랑에게 주었다. 꽤 오래 낀 것으로 보이는 데다 딱히 눈에 띄지도 않는 실반지가 정칠랑의 눈에 들 리 없었다. 정칠랑은 대꾸도 하지 않고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순금으로 된 꽃무늬 팔찌를 밖으로 보이게 한 후 통통거리며 뛰어나갔다.
머쓱해진 여인은 반지를 도로 챙기며 방석을 끌어당겨 엉거주춤 앉았다.
“칠랑은 참 말을 잘 듣네요. 달래니까 울음을 뚝 그치고.”
여인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말을 돌렸다. 이부인은 성가신 눈치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요. 보다시피 이 집안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요.”
이부인이 재촉하자 여인은 더욱 무안해했다.
“둘째는 원래 백부를 따라 입학하려 했는데 연말에 병을 얻어 크게 앓았어요. 애 아버지도 생계가 막막하고요. 농사도 잘 안 돼서 간신히 봄을 났죠. 성 동쪽에 있는 양어장에서 물고기를 길러 볼까 하는데…….”
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더욱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요즘 살기 힘든 거로 따지면 누군들 안 힘들겠어요. 나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니에요. 집안 살림이 내 손에 없으니 춥고 배곯지 않을 정도로 버티는 것뿐이죠.”
이부인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여인이 창피한 듯 웃으며 맞장구를 치자 이부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칠랑과 아들이 아직 어리다지만 애들을 위해 준비는 해 둬야죠. 나이가 찬 딸도 둘이나 있고요. 아, 그 큰애는 마침 혼담이 나오고 있어요. 내가 계모라지만 그래도 남한테 얕보일 순 없잖아요. 어떻게든 제대로 해서 보내야지…….”
듣고 있던 여인이 놀라 입을 열었다.
“그 큰애요? 그 애도 혼담이 오가요?”
당초 대방의 노처녀 십구랑이 남의 집에 재취로 들어가게 됐는데, 전처 소생의 바보가 하나 있다는 말은 온 집안사람이 다 알았다.
“혼담이 오가지 않으면, 평생 집에 두란 말이에요?”
이부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 또 울화통이 치밀어 돈이나 뜯어낼까 하고 온 친정 여인을 상대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올케도 그만 가 봐요. 나중에 다시 부를게요. 집에 손님이 계셔서요.”
여인은 쫓겨나다시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 배웅하는 여종들도 마지못해 따라 나왔다. 바깥마당으로 나오자 사내들이 싸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여종들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대노야와 이노야께서 또 주씨 가문 사람과 싸우시나 보네. 이게 벌써 며칠째야, 끝도 없이.”
“그 바보의 혼수가 여간 많은 게 아니니 쉽게 끝낼 수가 없지. 주씨 가문에서 그걸 다 가져가려면 정씨 가문의 재산을 절반은 내줘야 할 텐데. 노야와 부인께서 동의하실 수가 없잖아. 안 싸우는 게 이상하지.”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여인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혼수? 정씨 가문 재산의 절반?
“어멈들, 그 주씨 가문이라는 게 누굴 말하는 게야?”
여인이 물었다. 두 여종은 같잖다는 듯 힐끔 쳐다봤다. 이부인의 친정에서 돈을 뜯어내러 온 가난한 곁가지임을 잘 아는 터였다.
“우리 이방 선부인의 친정이요. 우리 이방의 사돈이기도 하고요.”
여종은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조강지처는 죽어서도 정실이었다. 후처인 팽씨가 살아 있고 팽씨를 중심으로 왕래하며 정을 나눈다 해도 도리상 정씨 가문 이방의 정통 사돈은 영원히 주씨 가문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인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정씨 가문이 누굴 중시하든 덕을 보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여인의 머릿속에는 혼수와 정씨 가문 재산의 절반이라는 말만 계속 떠올랐다.
“그 바보가, 큰딸이죠? 주씨 가문에서 왜 그 혼수를 가져간단 거예요?”
여인이 웃으며 물었다.
“큰따님이 혼인을 하려면 당연히 혼수를 가져가야죠.”
여종은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씨의 혼수는 무려…….”
옆에 있던 여종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시간이 늦었네요. 살펴 가세요. 저희도 얼른 들어가 봐야 해서 이만.”
여종이 다른 여종을 잡아끌며 들어갔다. 여인은 들어가는 여종들의 모습을 아쉬운 듯 보다가 대문 근처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 바보의 혼수가 정녕 그리도 많단 말이지?
저택의 다른 쪽 서재에 있던 정사낭이 서책을 내려놓았다. 옆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몸종 춘란이 얼른 다가가 물었다.
“또 싸우나 보네요.”
정사낭이 귀를 기울였다.
“책 읽는 데 방해가 되세요?”
춘란이 걱정하며 묻자 정사낭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건 방해가 되지 않아. 꽤 읽었으니 좀 쉬어야겠다.”
춘란이 안도하며 웃었다.
“그럼 차를 내올게요. 현묘관의 다과도 드디어 샀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탁자 앞으로 간 정사낭은 무늬 없는 명주로 덮어 놓은 종이를 쳐다봤다.
“현묘관 간식은 날개 돋친 듯 팔리는구나.”
정사낭이 감탄했다.
“아무리 날개 돋친 듯 팔려도 사려고 마음만 먹으면 살 수는 있죠. 근데 이상하게도 매번 우리 집에서 사러 가면 똑 떨어졌더라고요.”
쟁반을 들고 다가온 춘란이 탁자를 내려다보는 정사낭을 쳐다봤다.
“공자님, 그림을 그리시려고요?”
“붓질 몇 번만 더 하면 완성이야.”
정사낭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이 그림을 오래 그리셨는데 드디어 다 그리셨나 봐요. 소인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춘란이 웃으며 몇 걸음 다가섰다.
“안 된다. 절반밖에 안 그려서 아직 제대로 안 보여. 나중에 전체적으로 봐야 잘 보이지.”
정사낭이 웃으며 말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몸종이 들어와 예를 표했다.
“공자님, 대부인께서 부르세요.”
정사낭이 나간 후 춘란이 다과를 정리하려는데 누가 문발을 들고 들어왔다.
“엇? 사낭은 없네?”
춘란이 몸을 돌리자 남색의 긴 소매가 달린 비단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보였다. 정사낭과 비슷한 연배로 용모도 준수했다. 다만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얼굴이 갸름해 다소 경박해 보였다.
사내를 본 춘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부채로 춘란의 얼굴을 톡톡 쳤다.
“이런 미인만 방에 홀로 남겨 두고?”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춘란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십칠공자.”
춘란은 예를 표하며 몸을 비켰다.
“공자님께선 대부인의 부름으로 방금 나가셨어요.”
십칠공자는 대부인의 친정 조카로, 학업 때문에 최근 정씨 저택에 기거하고 있었다. 말이 학업이지 실은 집에서 사고를 치고 피해 온 것이었다.
“아, 그럼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십칠공자는 춘란을 향해 눈썹을 찡긋거렸다.
“춘란, 차를 가져오너라.”
춘란은 못마땅했지만 차를 따르는 수밖에 딱히 도리가 없었다. 방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십칠공자의 모습이 보였다.
“십칠공자, 드세요.”
십칠공자가 잔을 받았다. 잽싸게 피하려 했지만 춘란은 어느 틈에 십칠공자에게 꽉 잡혔다. 분한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다. 찻잔을 들고 안을 서성이던 십칠공자가 탁자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게 뭐지?”
십칠공자가 물으며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세요. 저희 공자님의 그림인데 아직 못다 그리셨어요. 건드리시면 안 돼요.”
춘란은 다급히 외치면서 희롱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서서 막았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은 때였다. 십칠공자가 명주를 걷어치웠다.
“무슨 좋은 물건이기에 못 보게 해?”
명주를 걷자 탁자 위에 있던 그림이 눈앞에 드러났다. 십칠공자와 급히 달려들던 춘란 모두 멈칫했다. 마차에 앉아 휘장을 걷고 이쪽을 쳐다보는 미인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검은 눈썹에 길게 늘어뜨린 흑발, 하얀 피부의 여인은 아무 감정도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단한…… 미인이네…….”
십칠공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누구지?”
춘란은 짓궂은 십칠공자와 바짝 붙어 서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옷깃을 꽉 쥐며 눈앞에 있는 그림을 쳐다봤다. 그림은 전에 본 적 있는 한 사람의 모습과 겹쳐졌다.
산속 작은 도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손에 서책을 든 여인이 이쪽을 쳐다봤다. 늘 너울로 가리고 다니더니, 저리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을 줄이야.
“이노야 댁의 그 바보 낭자예요.”
춘란도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넋이 나가 있던 십칠공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춘란이 중얼거리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뭐라고? 이런 사람이 정말 있단 말이냐? 게다가 너희 집 낭자라고?”
정신을 차린 춘란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피했다.
“소인이 잘못 봤어요.”
춘란이 말을 얼버무렸다. 십칠공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부채로 춘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누굴 바보로 아느냐! 어서 누군지 똑바로 말해! 안 그랬다간 고모님께 일러 널 팔아 버리겠다!”
십칠공자가 표독스레 말했다. 춘란은 순간 초조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대부인은 이 친정 조카를 아껴 늘 오냐오냐했고, 십칠공자는 매사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십칠공자가 작심하고 덤비기라도 하면, 눈 밖에 난 이에게 기필코 복수하고 마는 성격상 설령 팔려가진 않더라도 사공자의 시중을 드는 일은 관둬야 할 게 뻔했다. 힘없는 몸종인 춘란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소인은 정말 기억이 안 나요. 그저 보는 순간 이노야의 큰따님이 떠올랐을 뿐이에요.”
춘란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이방의 자매들은 내가 다 봤다. 이만한 미인은 없었어.”
십칠공자는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더니, 자신의 옷깃을 잡으며 눈동자를 굴리고춘란을 쳐다보며 낄낄거렸다.
“냉큼 말하지 않았다간, 네가 날 유혹했다고 고모님께 이르겠다!”
춘란은 놀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십칠공자가 옷깃을 풀어헤치며 목을 드러내자 춘란은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고로 몸종이나 시녀 스스로 뭘 어쨌다는 일로 으름장을 놓는 건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몸종이나 시녀가 다른 사람을 어쨌다는 건 처음 보는 경우였다. 피해자는 달랐지만 시녀가 느끼는 효과는 같았다. 아니, 오히려 후자가 더 강력했다.
“이방의 큰따님이요. 바보라 어릴 적부터 밖에서 지내시다가 작년에야 돌아오셨어요. 지금은 다시 외가에서 데려가셨고요. 그러니 십칠공자께선 뵌 일이 없으시죠.”
춘란이 울며 말했다. 십칠공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정씨 가문 이방에 바보가 태어난 일은 십칠공자도 풍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바보?”
십칠공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그림을 쳐다봤다. 그림 속 미인 역시 선녀 같기도 하고 환영 같기도 한 모습으로 십칠공자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십칠공자가 막 입을 열려는데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정사낭이 들어왔다. 춘란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고, 십칠공자는 탁자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정사낭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십칠 왔구나, 어서 앉아.”
정사낭이 불쾌감을 감추고 말했다. 십칠공자는 정사낭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손을 뻗었다.
“형, 형의 그림은 둘째 숙부님 댁 바보와 하나도 안 닮았어.”
십칠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안 닮아. 이렇게 생겼는데.”
정사낭이 무심코 대꾸하자 십칠공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심 어이쿠, 끝장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정사낭이 걸려들고 만 것이다.
“아, 아니야. 그 애를 그린 게 아니라고.”
정사낭이 얼른 부인했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십칠공자는 정사낭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그림 앞으로 가 놀란 표정으로 미인도를 들여다봤다.
“바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십칠공자가 눈빛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진 노태야의 부엌 밖. 여종과 몸종 여러 명이 안을 들여다보느라 서로를 밀고 잡아당기며 밟고 밟혔다.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기도 했다.
창살 너머로 안에 앉은 여인이 보였다. 머리를 천으로 덮고 커다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정성을 다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옆에 있는 두 몸종은 쟁반 세 개를 들고 있고, 그 위로 냉채와 요리, 밥이 놓여 있었다. 정교랑이 차를 곱게 갈아 불에 구우면 반근이 그 가루를 음식 위에 솔솔 뿌렸다.
“다 됐어.”
정교랑이 차를 다 뿌린 후 일어서며 말했다. 몸종 둘은 얼른 예를 표하고 정교랑과 시녀가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가 쟁반을 들고 따라 나갔다.
“정말 정교하게도 만들었네.”
“저게 무슨 생선이야.”
“과일을 제대로 튀겼네.”
“딱히 향은 별로 안 나는데, 먹으면 어떨지 모르겠네.”
문밖에 있던 이들은 몸종들이 음식을 들고 진 노태야의 거처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소곤거렸다.
같은 시각 이미 식사를 마친 진소와 진 부인은 자리에 앉아 아까 하던 얘기를 이어 하고 있었다.
“십팔랑이랑 비슷한 나이인데, 십팔랑보다 훨씬 철이 든 것 같아요.”
진 부인의 말에 진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을 수가 없지. 십팔랑이 어떻게 컸고 정 낭자가 어떻게 컸는데.”
진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저리 큰 걸 보면, 정말 잘된 일이죠. 정말 신선이 지켜 주시나 봐요.”
조용하고 온화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강하다. 조용하고 말수도 적고 움직임도 적지만 모든 일을 손아귀에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듯했다.
주씨 가문의 짓궂은 공자가 억지를 부려 강제로 데려간 일만 해도 결과가 어땠는가. 주씨 가문만 망신을 당하고 여인은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가게 됐다. 모든 게 여인의 계획 아래에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을 뿐.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버려진 채 의지할 곳도 없이 자라 독립적인 것일까?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는 세상에 많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총기를 타고난 이는 많지만 바보로 태어났다가 똑똑해졌다니. 하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진소는 초조해한 듯 자세를 바로 앉았다.
“소식이나 빨리 왔으면 좋겠구려.”
진 부인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무슨 소식이요?”
“병주로 간 사람 말이오.”
집안에서 정 낭자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낸 일은 진 부인도 알고 있었다. 알아봐야 마땅한 일이었다.
진소 내외는 이야기를 나누며 진 노태야의 거처로 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단랑의 말소리가 들렸다.
“더 없어? 한 그릇 더 먹을래.”
없다는 여종의 대답에 토라진 진단랑은 그릇과 젓가락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버릇이 없구나.”
진소가 호통을 치자 진단랑은 잘못을 깨닫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정 낭자가 이미 갔다는 소식에 진소 내외는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 언니가 우리한테 밥을 대접한다더니, 대접만 하고 바로 갔어요.”
진소가 웃었다.
“그래? 손님의 평가도 안 듣고?”
“성의를 충분히 보이지 않았느냐. 그리고…….”
진 노태야는 앞에 있는 두 손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들을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으니까.”
아직 어린 진단랑은 더 먹고 싶다는 간절한 눈빛으로 텅 빈 접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살 더 먹은 진십팔랑 역시 못내 아쉬운 듯 접시에 남은 부드러운 생선의 마지막 한 점을 천천히 먹었다.
“솜씨가 그리 훌륭합니까?”
진소의 물음에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우리 아씨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웃으며 대답하던 몸종의 표정과 말이 또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그래, 그렇구나. 전에는 윗전을 치켜세우기 위해 거짓으로 한 말이거나 아첨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 낭자 같은 이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한 말이라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그건 진담이니까.
정교랑이 타는 마차는 이번에도 다리 어귀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정교랑과 시녀를 본 여종들이 우르르 배웅을 나왔다. 진씨 저택의 문간방에서 차를 한 잔 얻어 마시며 한참을 전전긍긍 기다리던 마부가 잽싸게 뛰어나왔다. 마차를 몰아 거리로 나와서야 마부는 물 밖에 있다 물속으로 들어간 고기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옥대교 저택에 살며 딱히 눈에 띌 게 없어 보이는 이 낭자와 시녀는 외출할 때면 늘 마차를 빌렸다. 그런데 이제 보니 놀랍게도 진 상공 댁의 귀빈이었다.
“경성의 다른 마차들보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우리 집 마차는 전부 깨끗합니다요. 한번 나왔다 들어가면 늘 깨끗이 닦거든요.”
마부가 말했다. 마차 앞에 앉은 시녀가 웃음을 지었다.
“알아요. 그러니 매일 이 집 마차를 이용하죠.”
마부는 위안이 되는 듯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마차를 한 대 사지 그러세요?”
마부가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진 상공 댁에 드나들 정도면 왜 마차 한 대 못 부릴 이유가 없을 텐데.
“그러려면 마부도 사야 하잖아요. 우린 여기서 얼마나 지낼지 몰라요. 자주 출타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필요 없죠.”
아씨는 남에게 행적을 들키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특별한 표식이 달린 마차를 싫어하기도 하고.
문 앞에서 값을 치르자 마부는 기뻐하며 자리를 떴다. 마차 소리를 들은 금가아가 문을 열고 신이 나서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옆쪽에서 누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옆으로 밀쳐지고 말았다.
“또 왔군요!”
눈앞의 소년을 본 시녀가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공자님, 대체 왜 이러세요! 따끔한 교훈으로도 부족하세요? 다른 친구는 없어요?”
사람을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남을 욕해도 아픈 곳은 찌르지 말라고 했는데, 그 주인에 그 노비 아니랄까 봐 똑같네. 하나는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어서, 하나는 하도 말주변이 똑 부러져서 밉상이었다.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손에 든 함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죠?”
주육낭이 건넨 함은 시녀가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손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시녀가 고개를 숙여 쳐다봤다. 조용히 정교랑 곁을 지키던 금가아와 반근도 쳐다봤다. 간식이 든 함 위에 도장으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태평거에서 만들어 파는 다과와 비슷하긴 한데, 위에 쓰인 글자가…….
“현묘관.”
글자를 읽은 시녀가 냉소를 지었다.
“이게 뭐라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금가아가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현묘관이라니! 현묘관이라니!”
금가아는 무슨 대단한 물건이라도 본 양 소리를 지르며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아씨, 현묘관이래요!”
반근이 떠날 때만 해도 강주에는 두 개의 현묘관이 있었다. 시녀가 온 후 현묘관은 차츰 명성을 얻었지만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기도 전에 시녀는 강주 땅을 떠났다. 말하자면 현묘관 간식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금가아였다. 금가아가 소리치자 시녀도 정신을 차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강주에 있는 거기요?”
시녀는 눈앞에 있는 소년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고향을 그리는 아씨의 마음을 달래 주려고 특별히 강주 특산물을 구해 왔다? 시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난 너와 혼인할 것이다…….
그 말이 귓가에 웅웅 울리자 시녀는 퍼뜩 눈치를 챘다.
주육낭은 휙 뒤돌아 나가더니 말에 올라 뒤도 안 돌아본 채 거리 속으로 멀어져 갔다. 시녀는 함을 든 채 뒤돌아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이건…….”
“요즘은 어떻게 만드나 모르겠네?”
정교랑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스쳤다.
아씨는 현묘관에서 지내셨잖아. 그때 자주 드셔서 반가우신가 보네. 주육낭도 참. 모처럼 그나마 사람다운 일 하나 했구나. 시녀는 웃으며 함을 들고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우리 먹어 봐요. 집에 있을 때 소문은 들었는데 먹어 본 적은 없거든요.”
모두가 안으로 들어갔다. 금가아는 대문을 닫은 후 빗장을 걸고, 반근은 물을 준비하러 갔다. 정교랑이 막 층계를 오르려는데 왼쪽 마당 담벼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서 손 하나가 천천히 올라왔다. 가늘고 긴 손이 햇빛을 받아 유달리 반짝였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 손으로 향했다.
“귀신이야!”
금가아가 가장 먼저 소리치며 머리를 감싸 쥐고 쪼그려 앉았다. 그 소리에 멍하니 있던 반근과 시녀도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손 역시 남녀의 비명 소리에 놀랐는지 움찔하며 담벼락 꼭대기를 간신히 붙잡았다. 이어 또 다른 손 하나가 올라오더니, 마지막으로 사람의 머리가 쑥 올라왔다.
검은 눈썹에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 높고 오뚝한 코와 얇은 입술, 백옥처럼 흰 피부의 소년이 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깜짝이야! 떨어질 뻔했네! 귀신이 어디 있어?”
소년은 눈썹을 꿈틀이며 정교랑을 빤히 쳐다봤다. 입가에 웃음기가 번지는가 싶더니 불평이 터져 나왔다.
“낭자 때문에, 또 놀랐잖소!”
- <교랑의경> 7권에 계속
교랑의경 7권
차례
무심결에
엄선
보라고
행운
경하
-무심결에-
정교랑의 저택은 번화가에 있어 위치가 아주 좋았다. 과거 모 재상의 소유였던 곳인데 재상이 실각하면서 조각조각 나뉘어 팔리게 됐다. 진씨 가문도 그때 한 자리 얻었고, 나머지 집들도 다른 관료들이 은밀히 사들인 터였다.
다들 임대로 생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집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예비용으로 남겨 두었다. 따라서 지금 정교랑의 저택 좌우 양쪽으로 딱히 이웃이라 할 사람은 없고, 집을 지키는 이들의 가족만 머무르는 상황이었다.
평소에 왕래도 없던 차에 갑자기 담벼락 위에서 얼굴을 내밀고 질문을 던지니, 안 놀라고 배겨?
“또 당신이군요!”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또 너구나!”
진안 군왕도 말했다.
“천것 같으니라고. 내 너희 아씨와 얘기 좀 하겠다는데, 넌 웬 말이 그리 많으냐?”
“얘기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경우도 있어요?”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벼락 위쪽에 매달려 있던 소년은 비틀거리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마당에 있던 사환과 시녀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진안 군왕은 손으로 담벼락을 붙잡아 다행히 떨어지진 않았다.
“잘 붙잡아라.”
소년은 아래를 보며 명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정교랑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담을 너무 높게 지었잖아요.”
정교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
시녀는 콧방귀를 뀌며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부축했다.
“아씨, 우리 들어가요.”
“이 천것이, 내 너희 아씨와 할 얘기가 있다는 말 못 들었느냐? 내 좋게 이야기하려고 특별히 이런 방법까지 쓴 건데.”
좋게 이야기한다는 게 이런 거야? 시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말문이 막혔다.
시녀는 똑소리 나는 말주변으로 각종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해 왔고, 늑대 떼의 기습을 받았을 때도 놀라 몸이 마비될 지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단 두 가지 상황만은 예외였다. 하나는 살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고, 다른 하나는 이 기괴한 소년과 마주쳤을 때였다.
사람이 맹수보다 더 무섭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소년이 준 느낌도 그런 것이었나? 시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려 담벼락 위의 소년을 쳐다봤다.
햇빛을 받은 소년의 얼굴은 백옥처럼 희고 고왔으며, 여인에게 없는 준수함도 느껴졌다. 소년의 얼굴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깊고 그윽한 두 눈은 웃음기로 인해 더욱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 소년을 누가 죽이려 든다면 몰라도, 이런 소년에게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좀 이상한데?
시녀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한테 무슨 얘길 하려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팔을 담벼락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여길 샀어요. 우린 이제 이웃입니다.”
이런 뻔뻔한 호색한 같으니라고! 정신을 차린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군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은 다시 웃음을 짓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아래를 쳐다봤다.
“기다려요.”
진안 군왕이 손 하나를 아래로 뻗으며 말했다.
“가져오너라.”
손 하나만 담벼락에 걸쳐 둔 상태라 진안 군왕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마당에서 쳐다보고 있던 시녀와 금가아까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반근은 정교랑이 소년의 말에 대답했을 때 이미 자기 일을 하러 떠난 후였다.
“확 떨어지면 쌤통이겠네!”
시녀가 중얼거렸다. 애석하게도 시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진안 군왕은 다시 중심을 잡고 섰다. 손에 작은 함까지 들고 있었다.
“낭자에게 줄 간식이에요.”
진안 군왕이 손에 든 함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어야죠.”
진안 군왕은 멍하니 서 있는 금가아를 손짓해 불렀다.
“너 꼬맹이, 이리 와.”
금가아는 갑자기 부르자 멈칫하여 머뭇거리며 정교랑을 쳐다봤다.
“가 봐.”
정교랑의 말에 금가아는 네 하고 대답한 후 그제야 담벼락 옆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진안 군왕이 머뭇거렸다.
“너 괜찮겠냐? 받을 수 있겠어?”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리고 손짓을 하며 거리를 가늠해 봤다.
“밧줄로 묶어서 내려주는 게 낫겠다.”
그 말은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내린 분부였다. 곧 밧줄이 건네졌다. 법석을 떨고 있는 사이 정교랑은 이미 회랑 아래로 가 앉은 상태였고, 시녀 역시 아예 입을 다물었다.
“됐다.”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과 시녀가 고개를 돌렸다. 진안 군왕이 밧줄로 삐뚤빼뚤 묶은 함을 내려주었다. 밧줄이 짧다 보니 금가아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지만 진안 군왕은 그대로 손을 놓아 버렸다.
함은 금가아의 품으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양측 모두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기라도 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식이 맛있더군요.”
진안 군왕이 회랑 아래의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내 것도 먹어 봐요.”
금가아가 들고 와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는 주육낭이 가져온 함을 일부러 꺼내 왔다.
“두 개나 되네요. 아씨, 어느 걸 먼저 드시겠어요?”
정교랑이 눈을 들어 시녀를 쳐다봤다.
“이 두 갠 달라. 하나는 먹으란 거고, 하나는 말을 전하는 거야.”
시녀가 멈칫하며 손에 든 두 함을 쳐다봤다. 다르다고?
“누가 강주에 갔었어.”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가 퍼뜩 깨닫고 고개를 숙여 현묘관이라고 쓰인 함을 쳐다봤다.
“그 사람들이 강주엔 왜 갔을까요?”
“혼사 때문이겠지.”
정교랑의 대답에 시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렇지. 진(秦)씨 가문의 일은 유야무야됐지만, 그 일은 주씨 가문에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씨를 원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라고. 진씨 가문이 아니어도 경성엔 아씨를 원하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고. 주씨 가문에 유리하고 흡족할 만한 상대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고.
정교랑과 시녀가 저희들끼리 소곤거리자 진안 군왕은 일부러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말을 끊었다.
“난 이만 갑니다.”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시녀가 눈을 흘겼다. 그쪽 붙잡는 사람 없네요. 시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보며 살짝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진안 군왕이 손을 내저었다. 너무 오래 서 있어선지 자신이 사다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진안 군왕은 손을 내젓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하더니 부랴부랴 담벼락을 잡았다. 시녀는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쳐다봤고 정교랑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높아요.”
진안 군왕도 따라 웃었다.
“못 믿겠으면 올라와 봐요. 제대로 서기도 힘드니까.”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난 이만 갑니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담벼락을 붙잡다가 또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아, 참.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햇볕이 쨍쨍하던 여름 날씨가 순식간에 바뀌는 듯했다. 담벼락에 서서 어깨만 간신히 보이는 소년이 해를 가리기라도 한 듯 엄청난 먹구름이 마당에 드리워졌다.
맑고 화창했던 여름날이 순식간에 스산한 가을날로 바뀐 듯했다. 옆으로 내려뜨렸던 시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산골짜기에서 맞은 새벽이 떠올랐다. 아씨와 소년은 가까이에서 나지막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때 소년이 짓던 표정이 아마 지금 자신의 표정과 비슷했으리라.
공포 그 자체였다.
시녀는 지금껏 아씨에게 뭘 말했는지 묻지 않았다. 속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해 봤지만 통 짚이는 게 없었다. 우연히 스친 인연이고 각자 갈 길 가면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건만 경성에서 재회하다니.
그때 아씨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구나. 그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한 것이었다니…….
역시 무서운 건 맹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소년의 일행이 노숙을 하는데 뒤에서 늑대 떼가 공격해 왔다면 이는 사람의 목숨을 노린 게 분명했다. 누가, 무슨 원한을 샀기에?
어쩐지, 어쩐지. 어쩐지 저 소년이 위험해 보인다 했어.
저 소년은 갖은 수를 써 가며 아씨에게 접근하고, 은밀히 염탐했다. 아씨를 의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얘길 들어 보니 저 소년은 그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듯했다. 하지만 아씨는 알았다.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당사자도 모르는 일을 알고 있으니 의심이 갈 수밖에.
시녀는 걱정되고 초조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씨, 뭐라고 말해야 하죠?
시녀는 문밖에서 나는 무거운 숨소리를 들었다. 담벼락 밑에서도 칼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갑자기 이들 앞에 나타난 이웃은 내력이 불분명하고 행적을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경성에서 사람 하나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할 방법은 많았다. 더구나 저택에 세 여인과 힘없는 사환 하나만 살고 있다면 더더욱.
불을 지른다거나 화살을 비처럼 퍼붓는다거나. 일이 일어난 후에 조사를 한들 어쩔 것이며 범인을 잡은들 어쩔 텐가.
아무리 주씨 가문의 외조카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지녔다고 해도 아씨는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아씨께서 늘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시는 것도 그래서겠지.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말도 이런 뜻이겠지.
순간 시녀의 마음속엔 엄청난 파도가 덮치는 듯했지만, 정교랑의 표정은 여전했다.
“책에서 봤는데, 늑대 떼는 야밤에 큰길에서 먹이를 찾지 않는대요. 사람이나 마차를 기습하는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말했다.
책에서 봤다고?
시녀는 저도 모르게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가 늑대 떼의 기습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지만, 정말 책에서 그런 내용을 보셨나? 사실이 그렇다고 한들 그 말을 누가 믿냐고!
아씨도 참 짓궂으셔. 사실을 간파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냐고. 스치는 인연에 딱히 알던 사이도 아닌데 죽거나 말거나 뭔 상관이라고. 괜한 말로 남의 비밀을 건드리다니.
어쩌면, 아씨가 너무 선량해서일 수도 있다.
시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오래 못 살던데.
“아, 참.”
담벼락 위의 소년이 기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쁨? 시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거긴 길이 나 있었고, 영리한 늑대 떼도 먹이를 구할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길에 오래 머물 린 없었어요. 타고난 천성이 후천적인 관성을 덮지 않는 한.”
소년은 의기양양했고 점점 생기가 넘쳤다. 아직 담벼락 위에 있다는 사실을 또 잊은 듯했다. 소년이 손 하나를 뻗어 손짓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피였어요. 그놈들이 뒤에서 말의 피로 유인했더라고요. 우린 밤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어둠에 덮여 눈치채지 못했지만요.”
시녀는 아연실색했다. 무슨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못 들은 것 같기도 한 채로 담벼락 위의 소년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소년은 여전히 담벼락에 걸친 상태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난 <밀림재사록(密林齋事錄)>을 봤는데, 낭자는 무슨 책에서 봤어요?”
소년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책이냐고? 무슨 책을 봤냐고 묻는 거야? 시녀는 귓가가 웅웅 울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한 것 같았다.
“<대주번성록>이요.”
“아, 그런 책도 있어요? 돌아가서 찾아볼게요. 낭자도 <밀림재사록> 읽어 봐요. 재미있고 흥미로운데…….”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묻고 답하는 말이 들렸다. 질문도, 대답도 분명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데, 어째서인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진짜 같기도 하고 환영 같기도 했다.
“반근 언니.”
누군가가 시녀를 부르며 손으로 살짝 밀자 시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맑은 여름날, 마당에는 대나무 통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고, 담벼락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정교랑은 안에 앉아 있고 반근은 뜨거운 물을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냉면 만들어 먹을까요?”
두 사람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반근 누나, 멍하니 뭐하고 섰어?”
금가아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묻다가 입을 벌리고 씩 웃었다.
“누나가 멍하니 있는 거 처음 봐.”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 사람은?”
시녀가 고개를 들어 담벼락을 쳐다보며 물었다. 꿈을 꾼 건가?
“갔지.”
금가아는 한 손에 활과 화살을 든 채 대꾸하고는 담 모퉁이를 향해 핑 화살을 쐈다. 대나무 화살은 삐뚤빼뚤 날아가 대나무 숲에 떨어졌다.
“놀지만 말고, 뒷마당에 장작 팰 것도 있잖아.”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훈계했다. 금가아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삐죽거리더니 활과 화살을 들고 뛰어갔다. 시녀는 그제야 돌아서서 대청을 쳐다본 다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다시 담벼락을 쳐다봤다.
이게, 끝이라고? 이걸, 믿으라고?
말도 안 돼. 장난해?
책에서 봤다니, 그 말을 누가 믿어!
분명, 분명 다른 속셈이 있을 거야! 틀림없어!
이건 너무 위험해. 어떻게든 피해야 해.
시녀는 층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씨는 똑똑하신 분이잖아. 내가 일깨워 드릴 필요까지 있을까?
시녀는 강주에 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노태야께서 정씨 가문으로 가라 명하셨을 때, 누군가가 은밀히 말해 주었다. 그 사람은 바보라고. 강주 거리로 나가 수소문해 보니 돈 많고 권세 있는 정씨 가문에 바보가 태어났다는 일은 삼척동자도 알 정도였다.
그 반근이라는 몸종도 본 적이 있는데, 몸종은 아씨께서 바보가 아니라고 했다.
대체 바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남들이 말하는 것만으론 모르겠어. 내가 직접 봐야 알지.
따져 보니 아씨를 안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가 모시는 이 강주 바보는 바보가 아니었다. 굳이 바보라고 한다면 그건 대지약우(大智若愚)라는 말처럼 지혜가 너무 커서 어리석어 보이는 것일지도.
누군가가 시녀의 팔을 툭툭 쳤다.
“걱정 마. 아씨의 말씀만 들으면, 겁낼 것 없어.”
시녀가 고개를 돌리자 똑같이 반근이라 불리며, 지금은 장 노태야의 시중을 드는 몸종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래. 아씨를 따르며 아씨의 말씀만 들으면 돼. 그럼 겁낼 것 없어. 사람도 죽이는데 뭐. 죽이기까지 했는데, 뭐가 더 있겠어.
아씨는 마음이 착한 분이지만, 절대로, 마음이 여린 분은 아니다.
시녀는 치마를 살짝 들고 대청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에 메추라기 있지 않아? 지난번 메추라기탕 어땠어?”
시녀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너무 느끼했어. 차라리 지져 먹을까?”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이번 일은 기밀 유지에 만전을 기해 다행입니다. 전하, 다시는 이리 무모하게 굴지 마세요.”
뒤따르던 내시가 땀을 닦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난 답례를 한 것뿐이야. 겁낼 게 뭐 있어? 내가 매일 그 저택에 가 있겠다는 것도 아니고.”
진안 군왕이 웃었다.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시면 다행이고요. 내년에 궁을 떠나게 되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진안 군왕이 자리에 앉았다.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히고,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대신했다.
“어쩌면, 내가 그때까지 못 살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실내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전하, 지난번 같은 실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괜찮다. 지난번 같은 실수를 또 한다 해도, 난 멀쩡히 살아 있을 테니까.”
똑바로 앉아 아래턱을 살짝 들며 말하는 진안 군왕의 목소리에는 오만함과 싸늘함이 묻어 있었다. 사람들 앞에 있을 때의 따스하고 명랑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난, 저들보다 운이 좋거든. 봐라. 그리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하늘에서 사람 하나가 뚝 떨어져 빈틈을 메워 줬잖아.”
진안 군왕은 그 여인을 떠올렸다. 대담하게도 손짓하여 자신을 부르더니 그리 가까이 서서 낯선 자신에게 말했다.
“어젯밤, 늑대 떼는, 누군가가, 유인한 거예요.”
진안 군왕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면서 싸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전하, 그 낭자의 말을 믿으십니까?”
옆에 있던 내시가 나지막이 물었다.
“믿지.”
진안 군왕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째서? 책을 봐서? 책에 쓰여 있어서? 그리 간단한 일인가?
“전하, 소인이 <대주번성록>을 찾아오겠나이다.”
“필요 없다. 그 낭자는 날 속이지 않아.”
어찌 이리 단언하십니까? 내시가 진안 군왕을 보며 속으로 물었다.
“남을 속일 때보다 남을 구할 때 더 통쾌하거든.”
진안 군왕은 재차 웃었지만 내시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게 뭔 상관이야.
“아, 참. 그 낭자는 어떤 사람이라더냐?”
진안 군왕의 물음에 내시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출신을 조사하기는 했다. 하지만 군왕은 이들의 보고를 듣기도 전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가서 보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도 다 말해 버렸다.
이리 경솔하셔서야, 원. 본인이 바보 노릇을 하겠다는 건지 상대를 바보로 여기는 건지 모르겠네. 근데, 바보가 맞긴 했다.
“전하, 그 낭자는 강주 출신의 바보로…….”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은밀히 사방을 지키는 이들이 있으므로 안에서 나누는 말을 누가 듣지 않게 하려면 조심해야 했다.
강주 바보의 이야기는 딱히 할 것도 없었다. 14년 동안 존재감 없이 살아왔기에 내시의 얘기는 몇 마디 말로 끝나 버렸다.
“딱히 곡절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이 사람들 앞에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죠. 거리와 골목에서 나누는 한담거리 수준으로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병이 나은 게 좀 기괴하긴 합니다. 사람도 좀 기괴하고요. 진 상공 댁에 물어보니 누군가를 만나긴 한 모양입니다. 신선이 아니라 은거하는 고인이라는데, 진씨 가문에서도 수소문해 본 듯했습니다. 지금 그자를 찾고 있다는데, 전하께서도 찾아보시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넋을 놓고 있기에 내시는 다시 한번 물어야 했다.
“진씨 가문에서 찾는다는데 우리까지 뭐하러 나서. 힘들이지 않고 알면 더 좋지.”
진안 군왕은 손을 내저은 후 팔걸이 책상에 기대 손에 머리를 괴고 생각에 잠겼다.
“진짜 병이 있었네.”
진안 군왕은 다시 웃었다.
“봐라. 그 낭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니까.”
내시는 입을 삐죽거렸다.
거짓말을 안 한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전하도 참. 정 낭자 얘기만 나오면 이상하게 변하시네. 그런 생각이 스쳐 깜짝 놀라는 사이, 대자전에서 본 그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궁에 차고 넘치는 게 미인이라지만 그 미인은 다른 미인과 달랐다. 어디가 다른지 설명할 순 없지만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다가가고 싶고 탐구하고 싶게 하면서도 감히 무례하게 대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불과 열댓 살 먹은 어린 낭자가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장신구 하나 착용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토록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전하는 이제 열여섯이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이 정도 나이면 진작 혼담이 오가거나 혼례 준비에 들어갔을 터였다.
“이름은 뭐라더냐?”
진안 군왕이 불쑥 묻자 내시가 멈칫했다.
“그건 사주단자를 교환해야 알지요.”
진안 군왕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내시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여인의 이름은 가족만이 아는 터라 섣불리 알아보기 힘들어서요.”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답지 않은 내시의 모습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건 나도 안다. 그래도 뭔가 호칭이 있을 거 아냐.”
“있습니다, 있죠.”
내시는 정신이 번쩍 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랑’이라 합니다. 외조모께서 지어 주신 아명이고, ‘교교’라고도 부른답니다.”
강주, 정씨 저택.
여종들과 몸종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허둥대며 안팎을 오갔다. 약그릇을 들고 급히 회랑 아래로 걸어가던 두 몸종은 모퉁이를 돌다 큰 몸종과 부딪쳤다.
“똑바로 보고 다녀, 덜렁대긴.”
큰 몸종은 호통을 치며 몸종에게서 약그릇을 받아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반쯤 열리자 안쪽에서 대부인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게 뭔데? 십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말해 보렴. 이 고모가 구해 줄게.”
“교교 그림을 갖고 싶어요!”
십칠공자는 침상에서 고약을 바른 채 누워 소리치며 일부러 기운이 없는 척 기침까지 해댔다.
“고모님, 그게 없으면 제 병은 안 나을 겁니다.”
대부인이 침상 옆에 꿇어앉았다.
“십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부인은 십칠공자의 얼굴에 바른 고약을 문질러 주며 걱정스레 묻고는 이어 여종에게 물었다.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병이 나? 의원은 뭐라고 하고?”
여종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우물쭈물했다. 옆에 있던 정육랑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의원이 그러는데 십칠 오라버니는 상사병을 얻은 거래요!”
정육랑은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 침상에 누운 십칠공자를 쳐다봤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연못에서 뭘 본 건 아니죠?”
그 말을 듣자 안에 있던 여종과 몸종의 안색이 싹 변했다.
당초 정사낭이 별다른 이유 없이 병을 얻었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나은 일은 지금껏 미궁으로 남았다. 의원이 이런저런 말로 병증에 대한 해석을 내놓긴 했지만 집안 여인들 사이에서는 귀신을 만나 혼을 빼앗겼다는 게 최종 결론이었다.
보고 혼을 빼앗겼다가, 놀라 혼이 돌아왔다.
순간 여름철인데도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나 연못 옆에서 안 살래!”
정칠랑이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 치마를 들고 뛰쳐나갔다. 정육랑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육랑!”
대부인의 호통에 정육랑은 얼른 웃음을 거두었다. 대부인이 주변을 쓱 둘러봤다. 여종과 몸종의 표정이 이상했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대부인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 바보를 내쫓았는데도 그 바보로 인한 불운과 재난은 여전히 집안에 남아 있었다. 한 번 재수 없으면 삼 년이 간다더니!
“모두 물러가라!”
대부인이 소리쳤다. 여종과 몸종이 모두 물러가고, 십칠공자의 시중을 드는 몸종과 여종만이 남아 약시중을 들었다.
“고모님, 저 이런 약 필요 없습니다. 제 약은 이게 아니에요.”
십칠공자는 약을 먹여 주려는 몸종을 물리며 말했다. 대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십칠공자를 달랬다.
“우리 십칠, 약부터 먹자. 약 먹고 나면 이 고모가 다른 약 찾아줄게.”
“그럼 제 약부터 먼저 가져오세요.”
“그 약이란 게 뭔데?”
대부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림이요.”
십칠공자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교교의 그림이에요.”
“교교라니?”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고모님, 사낭이 그린 건데 이노야의 큰딸인 교랑의 초상화래요.”
대부인은 경악했다. 뭐라고?
“뭐라고?”
대부인은 바로 허리를 곧추세우며 다그쳤다.
교랑의 초상이라니! 그 교랑의 초상이라니!
정사낭의 서재에서는 두 사람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안 되겠다, 안 되겠어. 여기 숨기는 건 안 돼.”
정사낭이 그림 족자를 꺼내 들고 초조한 안색으로 말했다.
“공자님, 태워 버리세요.”
춘란이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태우는 게 제일 안전하지. 누가 뭐라든 증거가 없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정사낭은 고개를 숙여 손안에 든 족자를 쳐다봤다.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린 것만으로도 불경인데, 어찌 태운단 말이냐. 이는 저주나 다름없어.”
정사낭은 족자를 손에 꽉 쥐며 고개를 들었다. 춘란이 발을 동동 굴렀다.
“공자님,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에요.”
일개 바보잖아요.
정사낭은 족자를 꽉 쥔 채 말없이 있다가 춘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네가 장명한테 가져가거라. 나 대신 간수해 달라고 해. 절대 보지 말라고 하고. 봤다간 절교한다고 해라.”
“어서 가래도.”
춘란이 머뭇거리자 정사낭이 재촉했다. 춘란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족자를 끌어안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정사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막 몸을 돌리는데, 춘란이 도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치던 정사낭은 문 쪽을 보고 말을 멈췄다. 집사 부인 둘이 들어오더니, 새하얗게 질린 춘란의 품에서 족자를 빼앗았다.
“이거 맞지?”
집사 부인은 대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사낭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부인께서 부르십니다.”
여종 둘이 그림 족자를 잡아당기며 천천히 펼치자 대부인의 눈앞에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여인이었다.
또다시 그날 밤 일이 떠올랐다. 정 이노야를 따라 대문 밖으로 달려나가자, 등불 아래에 선 여인이 너울의 가리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흔들거리는 등불 아래에 선 여인의 안색은 창백했고, 멍한 눈빛이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인상이었다.
순간 대부인은 시선을 옮겼다. 더는 여인의 모습에 눈길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대부인은 이 여인을 잘 알았다. 이 여인이 처음 울음 터뜨린 것도 대부인의 손에서 이루어졌고, 그 여인을 맨 먼저 안은 것 역시 대부인이었다. 귓가에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그 처량한 듯한 비명 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오랑, 오랑. 좀 더 힘을 줘, 힘을. 금방 나올 거야.”
그녀는 침상에 누운 여인의 손을 꽉 쥐고 초조해하며 말했다. 침상 위의 새댁은 안색이 창백했다. 물에서 방금 건져 올리기라도 한 듯 흠뻑 젖어 있었다.
“형님, 전 안 될 것 같아요.”
새댁은 힘없는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리석은 소리는! 자네 이름이 갈랑인 걸 잊었어? 무기를 이름으로 지었으면 이름값을 해야지! 어서 힘을 줘!”
그녀는 새댁의 손을 꽉 쥐고 소리쳤다.
“나왔다!”
그 말과 함께 새댁은 힘이 쪽 빠진 듯 그대로 혼절했다.
“부인, 부인. 아기씨가 안 울어요.”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혼절한 새댁의 시중을 드는 한편 아이를 에워싸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그녀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직 깨끗이 씻기기 전이라 얼룩과 혈흔으로 지저분한 아이가 쪼글쪼글한 모습으로 강보에 싸여 있었다.
“부인, 때리세요.”
산파가 소리쳤다. 그녀는 손을 떨며 아이의 다리를 잡아 거꾸로 들고는 다른 손으로 세게 때렸다. 방 안에 고양이 울음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 깜작할 사이에 실내는 조용하고 따스해졌다. 이제 막 해산한 터라 휘장을 내리고 문과 창을 꼭꼭 닫아둔 탓에 방 안은 어두웠다.
“형님, 얼굴 좀 보여 주세요.”
침상 위에 누운 새댁은 힘없는 표정이었지만 웃음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서며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아 보여 주었다.
“아주 순해.”
그녀는 웃으며 꿇어앉아 강보를 침상 옆에 내려놓았다. 두 여인이 고개를 숙여 쳐다봤다.
“너무 못생겼어요.”
새댁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못생기긴 어디가 못생겨!”
그녀는 기분이 나쁜 듯 대꾸하고는 쿡 웃으며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예쁘기만 한데.”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는 피부가 고왔다. 그녀는 쌔근쌔근 잠든 아이를 흡족한 표정으로 들여다봤다.
“걱정할 것 없어. 딸을 얻었는데 아들이라고 못 얻겠어?”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 이름을 지어 주겠다며 벌써 며칠째 서재에 계셔.”
새댁은 기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한 듯 생긋 웃었다.
실내에는 향이 타고 있었다. 휘장 밖에서 이따금 여종과 몸종이 지나다녔고, 두 동서는 고개를 바짝 대고 소곤거렸으며, 아이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모든 게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그때까지는…….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쳐다봤다.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대부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앞에 있던 두 여종은 순간 놀라 벌벌 떨었고, 손에 들고 있던 족자가 좌르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고모님, 왜 그러세요?”
사내의 목소리였다. 대부인은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과 창은 활짝 열려 있었고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양옆에는 여종과 몸종이 꿇어앉아 있고, 두 소년이 좌우 양쪽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복잡한 표정이었다.
“부인, 이 그림은…….”
여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부인은 손을 뻗어 그림을 탁 쳤다. 이 화근덩어리가, 왜 하필 정씨 집안에 들러붙어서!
“고모님!”
“어머니!”
놀라 소리친 건 두 사람이었지만, 달려든 건 한 사람뿐이었다.
“고모님! 함부로 망가뜨리지 마세요!”
십칠공자가 여종의 손에서 그림을 낚아채며 외쳤다.
이런 일은 아무래도 서자 출신의 조카가 하는 게 나았다. 정사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똑바로 꿇어앉았다. 어쨌거나 그림은 지켰으니 됐다.
“무슨 짓이야! 당장 찢어 버려!”
대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지만 십칠공자는 전혀 겁먹지 않고 도리어 웃음을 터뜨렸다. 병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고모님, 멀쩡한 그림을 찢으면 아깝잖아요. 이 조카가 갖겠습니다. 이건 제 거니까, 이제 고모님은 나서지 마세요.”
대부인은 씩씩거리며 노려보고는 여종들에게 빼앗으라 명했다. 여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다가가 빼앗으려 했지만 십칠공자는 이미 그림을 품에 고이 넣어 둔 후였다.
“난 너 못 데리고 있겠다. 네 어미더러 데려가라고 해야지.”
대부인의 말에 십칠공자는 아이고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앉았다.
“저 아파요. 머리가 어질어질하다고요.”
대부인은 깜짝 놀라 다가가서 확인하고는 아랫것들에게 방으로 옮기라 명했다. 십칠공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림을 끌어안고 부축을 받아 옮겨졌다.
대부인은 문가에 서서 십칠공자가 가는 모습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봤다.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대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정사낭이 얼른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넌 내년이면 과거를 봐야 한다.”
대부인이 고개를 살짝 돌려 정사낭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 부친더러 좋은 서원을 찾아 달라고 할 터이니, 가서 열심히 학문에 힘쓰도록 해라.”
정사낭은 고개를 숙인 채 알았다고 대답했다. 마당에 서 있던 춘란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뭘 우느냐.”
정사낭이 말했다. 서재로 돌아온 정사낭은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이었다. 정사낭은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우는 춘란을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며칠밖에 안 남았구나. 어서 가져갈 물건을 챙겨라.”
“공자님…….”
춘란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그냥 그림이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정사낭이 웃었다.
“그림엔 심혈이 담겨 있다. 태어나서 지금껏 키워진 사람들도 심혈로 이루어져 있고. 심혈이라면 잘 대하는 게 맞아.”
그 바보도, 심혈로 이루어졌을까?
춘란은 쓸쓸한 표정이었다.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그 바보를 떠올리니 금아가는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어머니께서 고의로 날 못살게 굴진 않으실 게다. 밖에서 서원을 찾으려면 장강주 선생만 한 분이 없지. 숙부님이 추천서를 써 주시면 난 경성으로 갈 거야.”
정사낭이 춘란을 보며 씩 웃었다.
“걱정 마라. 그림은 잃었지만, 진짜 사람을 만날지도 몰라.”
어쩌면 동생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환히 웃던 춘란은 곧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외지로 나가 공부하려면 집에서처럼 지낼 수 없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행장도 간소해야 하니 사환이나 데려갈 뿐 시녀는 데려갈 수 없었다.
“공자님, 밖에 나가 계시더라도 건강 잘 챙기세요.”
춘란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대부인은 대청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말하러 간 이는 왜 아직인 게야?”
대부인이 밖에 대고 소리쳤다.
“일이 생겼으니 대노야와 이노야더러 잠깐 오시라고 해라. 주씨 가문 사람이랑 다투는 건 관두시라고 해. 우리 집안일부터 챙기셔야지.”
네 하고 대답한 후 재촉하러 갔던 여종이 곧 허둥지둥 돌아왔다.
“부인, 부인, 이노야와 이부인께서 혼사를 정하신대요!”
여종이 꿇어앉아 다급한 목소리로 고하자 대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주씨 가문이 정한 혼사에 동의한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 둘이 그럴 린 없어.”
대부인은 같잖다는 투였다.
“그게 아니고요.”
여종은 무릎걸음으로 한 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이노야께서 그 바보…… 아니, 큰따님의 혼사를 정하신대요!”
뭐라고? 이노야가 그 바보 교랑의 혼사를 정해?
대부인은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요 며칠 정씨 가문은 교랑의 혼사를 두고 주씨 가문과 싸웠다. 바보 교랑의 혼사를 누가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주씨 가문에서는 현재 정교랑을 데리고 있으니 자신들이 혼사를 주관하는 게 맞는다고 우겼다. 혼사를 주관하는 쪽이 혼수를 관리하는 건 당연한 이치니 정씨 가문으로서도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양측의 대치가 계속되던 와중에 뜻밖에도 정 이노야가 바보 교랑의 혼사를 정한 것이다.
혼인은 인륜지대사이니 부모의 명을 따라야 한다. 정 이노야는 이와 같은 이치를 들어 주씨 가문의 논리를 반박했다. 그런데…….
대부인은 다시 천천히 편한 자세로 앉았다.
“이렇게 빨리? 아무 말도 없었잖아. 아무나 데려오면 더 곤란해질 텐데.”
주씨 가문에서 혼수를 가져가는 일을 막기 위해 장님이나 절름발이, 비렁뱅이, 무뢰한, 부랑배 중 아무나 하나 데려다가 혼사를 치르기라도 하려고? 그게 가능했다면 주씨 가문에서 막 사람이 왔을 때 이미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주씨 가문만 더 기가 살 터였다. 바보의 혼처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나가 아닙니다. 글 읽는 서생이래요.”
글 읽는 서생?
“어느 집인데?”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교랑의 혼사는 나도 숙고 중이었소. 교랑이 집으로 돌아온 그 순간부터.”
정 이노야가 엄숙한 얼굴로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대청에 있던 정 대노야와 주 노야 모두 표정이 기괴해졌다. 요 며칠 싸우면서 상대방과 자신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 정도의 수준이라는 건 익히 파악했지만, 오늘만큼은 특히 정 이노야가 으뜸이었다.
“교랑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어쨌든 병을 앓은 아이요. 고관대작은 나도 감히 바랄 수 없지. 설령 혼인을 하더라도 질시와 냉대를 받을 테고.”
정 이노야는 한숨을 쉬며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딸 앞에 펼쳐질 인생 역경이 몹시 근심되는 얼굴이었다.
“내 평생 다른 건 바라지 않소. 그저 그 애가 무사평온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지. 부귀영화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요.”
주 노야는 입을 삐죽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우리 교교야 당연히 무사평온하게 살아가야지요. 부귀영화는 남이 가져다줄 필요 없소이다. 제 모친이 남긴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우리 교교에게 기대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이가 있을까 걱정이지.”
“그래서, 고르고 또 골랐소이다. 가문의 인품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그냥 말씀하시오. 그렇게 고른 게 누구요?”
주 노야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사돈만 좋다고 하는 상대일지 모르니.”
“남이 아니라 속속들이 아는 집안입니다. 팽씨 가문의 사람이지요.”
팽씨 가문? 정 대노야의 눈썹이 움찔했다. 뭔지 알겠다는 눈빛과 조소 섞인 웃음이 언뜻 스쳤다.
팽씨 가문이라, 거참…….
주 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느 팽씨 가문 말입니까?”
찻잔을 내려놓자 물방울이 조금 튀었다. 옆에 있던 몸종이 얼른 닦았다.
“팽씨 가문이라니.”
대부인은 비웃음 섞인 냉소를 지었다.
“아주 머리를 잘도 굴렸구나. 감히 그런 말을 해!”
다른 쪽 대청에서는 이부인이 어느 여인과 앉아 있었다.
“못 할 말도 아니죠. 오직 그 애를 위한 일인걸.”
이부인은 냉담한 투로 말하며 손에 든 부채를 흔들었다.
“그럼요, 그럼요.”
여인이 비위를 맞추며 웃어 주었다.
“우리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노야들께서 다른 뜻을 품으실까 걱정이죠.”
이부인이 피식 웃었다.
“가난하긴 하지만, 가난한 거 말고는 부족한 게 없잖아요. 둘째는 글공부도 했고, 출신도 걸릴 게 없어요. 우리 집안 역시 학자 집안이고, 동평주에서도 꽤 명성이 있죠.”
“그럼요, 둘째가 공부를 꽤 잘했어요. 병을 앓느라 좀 지체됐을 뿐이죠. 대백부님 말씀으로는 틀림없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할 거래요.”
여인이 얼른 거들었다.
“그 애는 벼슬을 하든 말든 신경 안 쓸 거예요. 그저 그 애한테 잘해 주기만 하면 되죠.”
이부인은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여인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여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린 남이 아니라 친정이잖아요. 우리가 잘 대해 주지 않으면 아가씨의 체면을 깎는 일인걸요! 남들 일엔 관심 없지만, 아가씨가 누군지는 잘 알죠.”
이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며 부채질하는 손놀림이 경쾌해졌다.
“나도 아가씨 생각 많이 해요.”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계모 노릇이 좀 어렵나요. 그런 애는 그냥 집에 두는 게 제일 좋은데 혈육들이 그러기 싫다니 시집을 보낼 수밖에 없죠. 주씨 가문이 혼사를 정하게 해 봐요. 좋은 데로 가면 그만이지만, 나쁜 데로 가면 부모들만 오명을 뒤집어쓰는걸요. 이노야는 아버지고 사내니까 좀 소홀했다 치고 넘어가겠지만, 아가씨는 계모잖아요. 친딸이 아니라 소홀했다고 괜히 아가씨만 안 좋은 소릴 듣죠.”
이부인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딱히 방법이 없잖아요. 내 팔자인걸.”
“내가 다른 건 못 도와도 그 아이 돌보는 건 어렵지 않게 도울 수 있어요. 남의 집으로 보내 봤자 결국 남의 집이에요. 처음엔 잘해 주겠지만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 누가 알아요? 나중에 태도가 바뀌어도 아가씨가 나서긴 힘들고요. 하지만 우리 집은 다르죠. 아가씨의 친정이니까,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잖아요.”
이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요. 우리가 가난하니 그 낭자의 혼수를 노린 게 아니냐는 말들이 나올 수 있죠.”
여인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의 선의를 증명하기 위해 그 낭자의 혼수는 아가씨 내외가 대신 관리하게 하면 어떨까 싶어요.”
이게 바로 핵심이지. 이부인은 점점 마음이 놓이는 듯 미소를 지었다.
대어를 못 낚으면 어떤가. 사람이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을 알아야지. 욕심을 냈다가는 아무것도 못 건지는 수가 있다. 정씨 가문 재산의 절반이라면 조금 새어 나간다 해도 이방 일가가 먹고살기엔 충분했다.
여인도 싱글벙글하며 웃었다.
“퉤.”
대부인은 침을 뱉으며 언성을 높였다.
“돈에 눈이 멀어 대를 끊으려고! 바보를 얻어다가 또 바보를 낳으려고 저래?”
“대가 끊어지긴요.”
옆에 있던 여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인, 돈을 얻었는데 첩실 몇 들이는 게 어렵겠어요? 교랑 아씨만 잘 먹이고 입히면 돈이 나오는데, 돼지 새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낫죠.”
안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대부인도 따라 웃었다가 곧 정색을 하고 부채질을 했다.
“따지고 보면, 그 바보랑 혼인하는 게 남는 장사긴 해. 체면이 깎이는 게 문제지.”
“뻔뻔한 사람들이야 차고 넘치죠. 그런대로 무난하기도 하고요.”
바보와 혼인하는 비웃음을 감당할 수 있으면서도 학자 집안이라니, 이부인이 혼처를 제대로 고른 셈이었다.
“부인, 정말 그리되면 혼수가 이부인의 손에 넘어갈 텐데요.”
여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부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부채를 쥔 채 잠자코 있었다.
“우리 교랑은 다른 사람과 다르니, 혼사에 각별히 신중을 기해야 해. 가서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라.”
대부인은 ‘제대로’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실었다. 여종들은 기민하게 눈치채고 대답했다.
여종들이 물러가자 곧 정 대노야가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주씨 가문에선 뭐래요?”
대부인이 급히 물었다.
“알아보겠다고 하더군.”
정 대노야가 대답했다. 부인이 이 일을 아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현재 온 집안의 관심사가 온통 이 일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만 해도 온 집안사람이 다 알게 되니,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 혼수 때문이죠, 뭐. 신선을 골라 온대도 주씨 가문에서 순순히 물러서진 않을걸요.”
대부인이 웃었다.
“바로 물러서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평생 고집부릴 순 없지 않겠소.”
정 대노야는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냉소했다.
“잊지 마시오. 교랑은 정씨야.”
-엄선-
마당은 매미 소리로 시끄러웠다. 날이 추울 땐 따스한 봄날만 기다렸건만, 따스해진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여름이 왔다.
주 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매미가 왜 이렇게 극성이야!”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있던 여종과 몸종이 그 말에 얼른 뛰어나갔다. 마당의 매미는 더욱 요란하게 울어대다 이내 잠잠해졌다.
주 부인은 부채를 내려놓고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서찰을 쳐다봤다.
“퉤, 어디서 감히! 자기네 친정 사람을 찾다니, 그 의도가 뭔지는 바보도 알겠다!”
“부인, 지금은 화내실 때가 아니에요. 노야께 뭐라 회신을 보내지요?”
여종이 옆에서 타일렀다.
“뭐라고 하긴?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해야지! 우리 주씨 가문 아직 안 망했어. 재취 주제에 감히 우리 가문 낭자를 망치려 들다니! 노야는 옛날 성미 어디 가신 게야? 그 뻔뻔하고 천박한 부부를 그 자리에서 흠씬 두들겨 패시지 않고! 알아보긴 뭘 알아봐!”
주 부인이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마차를 준비해라. 내 강주로 가야겠다.”
여종들이 다급히 말렸다.
“부인, 이번에 거절하더라도 다음번에는요? 그냥 혼담일 뿐입니다. 두 다리 달린 사내를 찾는 게 어려울 건 없잖아요. 한 번 거절하고, 두 번 거절하고, 세 번 거절하면, 정씨 가문에서 우리를 의심할 거예요. 어쨌거나 교랑 아씨는 정씨잖아요.”
그 점은 주 부인 역시 똑똑히 알았다. 부채질하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부인,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다른 여종이 웃으며 나섰다.
“정씨 가문에서 교랑 아씨의 혼처를 찾았다면, 우리라고 못 할 건 없죠. 누가 고른 혼처가 더 나은지 비교해 보면 되잖아요.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정한걸요.”
주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한텐 내 체면을 구기려 드는 친정이 없어서 말이다. 가난해서 정신이 나간 친척도 없고.”
“부인, 사실 교랑 아씨가 그리 안 좋은 상대는 아니에요.”
여종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